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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긴 밤색머리의 정령사 (20/24)

19. 긴 밤색머리의 정령사

몇 번의 휴일이 지났다. 겨울도 막바지에 접어든 어느 날 밤. 아르겐 궁의 첨탑이 흐린 달빛에 반사돼 은백색으로 희번덕거리는 광경이 유난히 이채로워 보였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인가?”

인적이 드문 정원 한 귀퉁이에서 안드레아스가 마법사 로브를 걸친 채 우뚝 솟은 궁전 건물을 우러러보며 중얼거렸다. 머무는 동안 그다지 좋은 기억 하나 없던 곳이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아쉬움이 남는 듯 했다.

“안드레아스. 이제 준비가 다 끝났으니 마법을 시행하도록 해요.”

어느새 엘시아가 그녀의 시녀들과 호위기사 등을 모두 거느린 채 결계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모이니 열 명 남짓 되었다. 아젤란의 마법사와 병사들의 눈을 피해 이 정도 인원을 수용할 만큼 커다란 결계를 펼치고 몰래 모이는 게 힘들었다. 다행히 스킬라 공주의 시녀가 도움을 줘서 해결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시녀 역시 마법사였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지요. 스킬라 공주께서 잠시 들린다고 하셨습니다.”

엘시아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긴장이 되는지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 오늘 밤 거사를 치르기 전 몸을 피하기로 한 거였다. 물론 스킬라에게 약속했던 일을 끝마치기 전까진 이 나라를 떠나지 않기로 했지만 일단 황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신 마법을 건 상태로 스킬라 공주가 마법사이자 시녀인 알리샤와 함께 걸어오는 장면이 보였다.

“날 배웅하러 오신 건가요? 스킬라 님.”

“그래요. 당부드릴 말도 있고 해서요.”

스킬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엘시아의 뒤에 자리한 이들을 바라봤다.

“수행인 모두 신전에 데려가실 건가요?”

엘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제 1신전에서 몸을 숨기고 지낼 예정이었다.

“로드미오 대신관이 괜찮다고 하셨어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더군요.”

“그렇군요. 여하튼 잘 됐어요. 대신관과 친분이 깊으니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군요.”

“그렇긴 하죠.”

엘시아는 선선히 대답하면서도 뭔가 성에 차지 않은 듯 입술을 실룩거렸다. 로드미오 대신관이 조금만 더 젊고 잘생긴 사람이었다면 좋을 텐데. 스킬라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을 건넸다.

“이제 바로 내일이에요. 엘시아 님.”

“예, 내일이군요.”

내일, 아니 사실 몇 시간도 남지 않은 새벽이면 한 걸음 내딛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아칸 제국의 황제가 되는 대장정의 길에.

“약속했던 일, 잊지 않았겠죠?”

스킬라가 오렌지빛 눈에 힘을 주며 엘시아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두 손을 더욱 꽉 쥐어 보이면서. 엘시아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잠깐 짓다 즉시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이에요. 잊지 않았어요. 그깟 평민 여자 하나 처리하는 게 뭔 대수라고. 판만 잘 벌여주면 금방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요. 엘시아 님만 믿을게요.”

“당신도 제게 약속한 것 잊지 않았겠죠?”

“당연하죠. 엘시아 님을 당당한 아칸 제국의 황제로 만들어 드리죠. 아젤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훨훨 날아오르게 할 거예요. 믿어주세요. 반드시 그럴 테니까.”

엘시아가 침을 꿀꺽 삼키며 싱긋 웃어주었다. 스킬라의 손을 잡으면 늘 용기와 희망이 샘솟았다. 스킬라가 마법사이자 시녀인 알리샤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녀가 즉시 턱짓으로 응답했다.

“엘시아 님. 배웅의 의미로 순간 이동 마법을 시행해 드릴게요.”

“어머나, 감사해요. 하지만 안드레아스의 실력으로도 충분한데.”

“내 성의니까요.”

“고마워요.”

백룡의 화신인 시녀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리며 마법 주문을 외자 커다란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럼 건투를 빌게요. 엘시아 님.”

“당신도요.”

순식간에 그들 모두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푸른 잔상만 엷게 남아 반짝거렸다. 가만히 지켜보던 스킬라가 순간 바르르 몸을 떨었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히에무스가 그녀의 몸에 남긴 차가운 흔적. 폐부를 찌르는 한기에 괴롭긴 했지만 억지로 미소 지었다.

“히에무스.”

온몸을 뒤흔드는 이 고통 때문에라도 그를 잊을 수가 없었다. 매 순간순간 떠올리게 되고 마니까. 2500년의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이토록이나 그녀의 몸과 마음을 꼼짝 못 하게 사로잡은 존재가 있었던가? 그러니 반드시 그를 손안에 넣을 것이다. 반드시! 집요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

어느덧 밤이 깊어가며 새벽을 향해가는 시간이었다. 안드로스 대륙 북부의 스파니아 왕국과 아칸 왕국 사이 위치한 성벽 도시 ‘루아칸’. 아젤란의 통일이 완성된 후 거의 1년 넘게, 아니 아칸 왕국이 일찌감치 아젤란에 복속시킨 지 거의 3년이 되는 동안 소소한 평민들의 소동을 제외하곤 별다른 군사적 충돌 없이 유지되던 지역이었다. 그 소동마저도 아젤란의 제국군과 행정관이 파견돼 정리한 이후론 조용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롭기만 했다.

작은 마을을 감싸듯이 길게 이어진 성벽 중간에 돌탑 형태로 높이 솟은 망루가 서 있었다.

“계속 서 있기만 하니 허리가 아프군.”

좁은 망루 위에서 보초를 서던 중년의 병사가 투덜거렸다. 옆에 있던 다른 병사가 싱긋 웃었다. 둘 다 아칸 왕국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아젤란 제국군이었다.

“가만히 서 있지 말고 나처럼 자꾸 움직이라고. 앉았다가 일어서거나 뜀박질도 하고 벽에 기대기도 하면서 말이지.”

“윗분들께 그런 모습을 보였다가 어쩌려고? 근무태도가 불량하다며 한소리 들을 거라고.”

“이렇게 춥고 어두운데 그런 분들이 나와보기나 하겠어?”

“하긴 그렇겠지. 으, 밤 근무는 정말 싫어. 보이는 게 없으니 더 지루한 것 같아.”

“좀만 참아. 곧 교대시간이니까.”

“음.”

대화를 접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병사 두 명이 아래로 통하는 계단 쪽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어이, 별일 없지?”

“그렇지 뭐. 늘 똑같잖아. 별일이 일어날 게 뭐 있겠나?”

늦게 온 병사 중의 하나가 손에 들고 온 꾸러미를 위로 쳐들며 말했다.

“내가 간식거리를 좀 가져왔네. 같이 좀 먹겠나?”

보나 마나 술일 것이다. 허리가 아프다던 병사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경계근무 중에 뭘 먹는 건 금지사항이지 않나? 난 됐어.”

“쳇, 빡빡하기는. 그럼 우리끼리 먹자고.”

“그려.”

세 사람이 망루 한쪽에 자리를 잡고 꾸러미를 펼쳤다. 역시나 두어 병의 술과 약간의 고기 안주가 들어있었다. 그들은 허겁지겁 술을 나눠 마시고 게걸스럽게 고기를 뜯어 씹었다. 지켜보던 중년 병사가 한숨을 쉬며 나무랐다.

“그러다 윗분들께 들키면 어쩌려고 그러나? 뭔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 감당하려고.”

셋은 콧방귀를 끼며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듯 더 급하게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허리 아픈 병사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다 포기한 듯 망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 으스름하게 동이 트기 시작했다. 흐릿한 무채색 배경 위로 까만 언덕이 겹겹이 포개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보다 더 어두운 검은빛으로 뭉쳐진 공간이 왠지 튀어 보이길래 무심히 응시했다.

“응? 숲이잖아?”

빽빽한 나무와 덤불이 우거진 거대한 숲인 것 같았다. 저쪽에 숲이 있던가? 그는 눈가를 찡그리며 더 자세히 보려고 애를 썼다. 이상했다. 마치 숲 전체에 발이라도 달린 듯 움직이는 게 아닌가? 주위가 조금만 더 밝으면 좋을 텐데.

“이보게들, 저기 이상한 게 보여.”

“뭐가?”

“숲이 움직여.”

“뭐?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중년 병사가 곱은 손을 눈으로 가져가 비볐다. 그래. 숲이 움직이다니 그럴 리가 없지. 자신이 말해놓고도 황당하게 느껴져 다시 한번 망루 너머로 눈길을 보냈다. 분명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거대한 검은 숲이 접근하고 있었다. 마침내 서서히 지평선 자락 위에 붉은 기운이 퍼져 나왔다. 좀 더 밝은 시야가 확보되자 그 움직이는 검은 숲이 무언지 확연히 파악할 수 있었다.

“저건!”

병사는 눈을 있는 대로 치뜨며 앞을 주시했다. 무심코 뻗어 나와 가리키는 손이 덜덜 떨렸다. 술과 고기를 나눠 먹던 세 병사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핀잔을 줬다.

“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술을 마신 건 우린데 자네가 취한 거야?”

“하하, 맞아. 그런 것 같군.”

“저거, 저거…….”

“아, 뭔데?”

“……물이다.”

“응? 뭐라고?”

망루 밖을 응시하던 중년 병사가 간신히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마물이야! 마물 떼라고!”

“뭐?!”

때맞춰 불이 붙은 듯 시뻘건 해가 땅 위로 불쑥 솟았다. 여명의 빛에 피처럼 붉게 물든 병사의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듯 사색을 띠고 있었다. 웅크리고 있던 세 병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허겁지겁 망루 난간으로 가서 살폈다. 붉은 핏빛으로 변한 언덕 위에 까만 몸체의 수상한 무리가 숲을 이룬 채 다가왔다.

“……!”

인간보다 조금 작은 키에 새카만 털로 뒤덮인 몸, 돼지를 닮은 검푸른 얼굴과 튀어나온 송곳니. 마치 무성한 덤불처럼 보였지만 그건 분명 ‘오크(Orc)’였다. 그들 사이에 거대한 초록 나무처럼 보이는 형상이 적지 않게 섞여 있었다. 막강한 완력을 자랑하는 흉측한 마물인 ‘오거(Ogre)’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에 비해 월등히 수가 적은 인간 병사들도 드문드문 끼어 있었다. 아칸 왕국의 군대처럼 보였다. 망루 위에 있던 병사 넷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만에 그 중의 누군가가 한숨을 토해내는 것처럼 입술을 우물거렸다.

“맙소사.”

***

아침 식사 시간이 지난 후 히에무스는 학원 설립 문제로 입궁하기 위해 서둘러 준비를 끝마쳤다. 에일린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러가자 그녀가 쭈뼛거리며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저기, 히에무스. 이것 받으세요.”

“이게 뭐지?”

“그게…… 하숙비예요.”

“하숙비?”

히에무스는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에일린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제가 여기 온 지 오늘로 꼭 한 달째더라고요. 그럼 신세진 값을 내야 할 것 같아서요. 많이 넣지는 못했어요.”

대충 고시원 비용 정도로 계산해서 넣었다. 물론 시설이며 먹는 거며 하녀들 시중까지 받으니 이걸로는 터무니없다는 걸 알지만 그냥 그녀 자신의 성의랄까 의지 같은 걸 표현하고 싶었다. 히에무스의 얼굴에 금방 짙은 먹구름이 끼었다.

“에일린. 이런 걸 내가 받으리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부담 느끼지 말고 그냥 마음 편히 지내면 안 되겠느냐?”

당연히 히에무스가 이렇게 나오리라 예상했다. 에일린이 뒷짐을 쥔 채 그를 올려다봤다.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하지만 받아주시면 제 마음이 훨씬 편해질 거예요.”

“어째서 말이냐?”

“음, 이걸 받아주셔야 제가 당신 앞에서 더 떳떳하고 당당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으니까요.”

“…….”

“알아요. 당신에게 이런 게 의미가 없다는 것. 하지만 제겐 무엇보다 중요하니 그냥 받아주세요.”

히에무스가 눈을 크게 뜨며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눈가에 희미한 호선을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래야 네 마음이 편하다면…… 일단은 받아두마. 하지만 조금이라도 형편이 어려워지면 고민하지 말고 내게 말해줘.”

“그럴게요.”

에일린이 환하게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뿌듯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히에무스는 그 마음을 모두 헤아리긴 힘들었으나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사악한 마법사의 성에서 살 때 황제의 물량공세로 인해 느낀 압박감이 그만큼 컸던 것이겠지.

“저, 그리고 이거…….”

에일린이 반듯하게 접은 하얀 손수건을 내밀었다. 귀퉁이에 꽃과 함께 히에무스의 이름 첫 자가 수 놓여 있었다.

“응?”

“제가 직접 만든 손수건이에요. 별거 아니지만 뭔가 드리고 싶어서요.”

순간 히에무스의 뺨이 발갛게 상기되더니 눈매와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상쾌한 겨울 숲의 향기가 사방에 날리는 듯 고아하고 황홀한 미소였다.

“고마워.”

그의 촉촉하고 달콤한 입술이 에일린의 수줍은 볼에 살며시 와 닿았다. 둘은 동시에 같은 문구를 떠올렸다. 이런 게 바로 행복이구나 하고.

***

히에무스가 보좌를 맡은 백룡 렌투스와 함께 조회시간에 늦지 않게 라피스 궁에 도착했다. 사전에 통보해 오늘 알현을 허락받은 상태였다. 절차대로 시종의 안내를 받아 알현실 밖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다른 몇몇 귀족들도 대기한 모습이 보였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속속 호명을 받아 용무를 끝마치고 나오는데. 거의 두어 시간 훌쩍 넘게 문밖에 선 채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렌투스가 시종에게 항의하려 하자 히에무스가 말렸다.

“그냥 둬. 언제까지 세워두려는 건지 한 번 두고 보자.”

분명 황제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뜻이었다. 당연한 일이긴 할 것이다. 에일린이 그를 사랑한다고 선언해 버렸으니 곱게 보일 리가 없겠지. 히에무스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똑바로 서 있었다.

“공작 저하보다 더 늦게 알현을 신청한 자들이 훨씬 빨리 들어갔다 나오지 않습니까? 이건 명백히 저하를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렌투스가 오히려 더 얼굴을 붉히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건 곧 드라코니아 왕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뜻과 마찬가지고요.”

“확대해석할 필요 없다.”

“…….”

마침내 다른 이들의 알현이 모두 끝나고 히에무스만 남았다. 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언제 붉은 마법약의 효과가 사라질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는 조금 머뭇거리다 다른 이들이 눈치 못 채게 돌아서서 붉은 마법약을 꺼내 입에 한 방울 털어 넣었다. 바로 그때 알현실 밖으로 나오는 리히트 시종장과 딱 마주쳤다. 히에무스는 급히 붉은 마법약의 뚜껑을 닫고 품속에 넣었다. 시종장이 잠깐 그의 동작을 눈여겨 지켜보는 듯 했지만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고 알렸다.

“라케르타 공작 저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들어가시지요.”

“알겠소.”

시종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여느 때처럼 가식적인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황제가 입술을 비틀린 채 오만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눈빛 하나로 그를 당장이라도 찔러 죽일 듯한 기세였다.

“학교 설립 일로 짐을 만나러 왔다던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시오? 라케르타 공작.”

“학교를 열 적당한 건물을 찾지 못해 아무래도 새 건물을 지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히에무스가 담백한 어투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여러 차례 토지 매입과 건축 승인 등의 절차를 통과시켜주길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타국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지체되기만 해서 폐하께 직접 말씀드리러 온 것입니다.”

“이미 짐은 공정하게 공작이 요청한 사항을 처리하라 지시했소. 이 외에 뭘 더 바라는 건지 모르겠소만. 설마 그깟 시설 하나 짓는다는 핑계로 과분한 특혜를 요구하는 것이오?”

히에무스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아젤란 제국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생각한 제 의도가 흐려지는 것 같아 알려드리는 것뿐입니다. 지금 추세로 봐선 영원히 학교 설립이 진행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당한 절차와 행정을 무시할 수 없소.”

앞으로도 그가 하는 일을 방해하겠다는 의미. 옆에 서 있던 백룡 렌투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히에무스는 잠깐 혐오의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다 곧 느긋한 표정을 되찾았다.

“알겠습니다. 그리 알고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러시오.”

황제 역시 경멸이 가득 담긴 얼굴로 그에게 어서 퇴장하라는 손짓을 했다. 히에무스 일행이 막 돌아서서 나오려는데 알현장 밖에 대기하던 시종장이 긴장한 얼굴로 뛰듯이 들어왔다.

“폐하!”

“무슨 일인가?”

평소였다면 노련한 리히트 시종장이 이렇게 허둥대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초조한 낯빛으로 히에무스 일행이 어서 자리를 비우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히에무스는 호기심이 일긴 했으나 잠자코 발을 움직여 홀 밖으로 이동했다. 육중한 문이 닫히고 그들은 나란히 문밖에 가만히 서 있었다. 히에무스는 물론 렌투스도 무척 궁금했다. 이내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가벼운 마법을 써서 문 안에서 벌어지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문밖을 지키는 시위나 시종들은 그들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웠기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못했다. 마법에 실린 채 시종장과 황제 사이에 오가는 다급한 대화가 들려왔다.

- “큰일 났습니다, 폐하. 방금 아칸 왕국에서 아젤란 제국군이 지키던 군영이 모조리 기습당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 “뭐라고? 하나도 남김없이 말인가?”

- “지금 파악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 “피해 규모는 어떻지? 설마 전멸한 건 아니겠지?”

그 말을 덧붙이는 황제의 목소리엔 그래도 아직 여유가 묻어났다.

- “소식을 전한 이도 중간에 진영을 벗어났기에 거기까지는 모르지만 전혀 낙관할만한 상항이 아니라고 합니다.”

- “뭐?”

순간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싸한 침묵이 현장을 뒤덮은 것 같았다. 잠시 후 황제의 무겁게 깔린 목소리가 적막을 뚫고 나왔다.

- “습격한 적의 정체는 파악했나? 아칸 왕국 군대인가? 아니면 아칸 왕국 백성들인가? 그것도 아니면 어느 귀족의 사병?”

- “그게, 아칸 왕국의 기마대가 끼어있긴 했지만 대부분 오크나 오거 등 마물로 조직된 군대라고 했습니다.”

- “!”

홀 안 여기저기에서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황제와 신하들이 내는 신음과 탄식이었다.

- “가까스로 살아남아 상황을 전해온 전령 두 사람이 황궁 밖에 대기 중입니다. 그들이 이곳으로 오는 도중 다른 군영에도 몇 군데 들렀지만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들을 불러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 “그러지. 당장 불러들이시오. 그리고 어서 사람을 보내 아칸 왕국에서 온 엘시아 왕녀를 처소에 연금하고 감시를 강화하도록 하시오.”

- “저, 그것이…… 폐하. 문제가 생겼습니다.”

- “문제라니?”

- “엘시아 왕녀 일행이 자취를 감춰버렸다고 합니다.”

- “뭐라고?”

- “오늘 아침 식사 시간에 시녀 하나를 보내 몸이 불편해서 참석하지 못한다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 후 아무도 보이지 않아 급히 거처에 찾아가 봤을 때는 이미 모두가 사라져 버린 후였다고…….”

뭔가가 날아와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롭고 새된 소리가 났다. 분을 이기지 못한 황제가 무엇인가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진 게 분명했다. 히에무스와 렌투스는 더 이상 문밖에 머무르면 곤란해질 것 같아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안드로스 대륙에 거대한 파란이 퍼져나가고 있음을.

***

급히 알현장으로 불려온 전령은 중년의 한 병사와 젊은 마법사였다. 둘 다 사지에서 빠져 나왔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처참한 몰골이었다. 특히 아칸 왕국에서부터 중년 병사까지 대동한 채 순간이동 마법을 시전한 걸로 보이는 젊은 마법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한 낯빛으로 비틀거렸다. 온몸의 마나를 바닥까지 긁어 쓴 게 분명했다.

“……!”

케일론은 보자마자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평소 안면이 있던 자였다. 안드로스 대륙 여기저기 설치된 아젤란 군영에 파견된 마법사 중의 하나. 이름이 뭐였더라? ‘에릭 바로스’인가 ‘데릭 바로스’인가 그랬는데. 저자 역시 평민 출신이지만 마법 실력이 꽤 괜찮아 성(姓)도 갖고 기사에 준하는 대접을 받는 자였지, 아마.

“전령들은 일어나 소속을 말하라.”

병무대신의 물음에 허리를 숙이고 있던 두 사람은 천천히 상체를 바로 세우며 말문을 열었다.

“저는…… ‘트래비스 백작’이 이끄는 루아칸 지역 군영 소속 마법사 ‘데릭 바로스’라 하고, 이자는…… 같은 군영 소속 1등 병사인 ‘처비’라고 합……니다.”

“어서 상황을 전하라.”

황제가 준엄한 음성으로 재촉했다. 병무대신이 두 사람에게 서두르라는 눈짓을 보냈다.

“예……, 폐하.”

마법사가 힘겹게 대답하며 다시 입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황제는 눈살을 한번 찡그린 후 케일론을 돌아봤다. 이어 그 옆에 서 있던 중년 병사에게 눈길을 보냈다. 병무대신이 그에게 말을 계속하라고 명했다. 그 사이 황제 곁에 붙어 있던 케일론은 재빨리 단상을 내려가 쓰러진 마법사를 살폈다. 중년 병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때가 한밤중, 아니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었습지요. 저는 동료와 함께 망루에 올라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평소 없던 검은 숲이 형성된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요.”

“검은 숲이라고?”

“예. 거대한 검은 숲이 움직이지 뭡니까? 한데 알고 보니 숲이 아니라 마물들이 몰려있던 거였습니다. 오크와 오거 같은 마물 말이지요. 어찌나 그 수가 많은지 마치 숲처럼 보였던 겁니다. 온 세상을 까맣게 뒤덮고 있었죠. 그놈들이……. 아, 말을 탄 인간 무리도 약간이지만 섞여 있긴 했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황제의 목소리가 잠시 끼어들었다.

“대충 그 수가 어느 정도였나?”

“못 해도 3만 이상은 될 것 같았습니다. 성에 있던 제국군은 3000 정도인데 말입니다요. 딱 열 배는 더 돼 보였죠.”

“……!”

두 전령을 사이에 둔 채 양쪽으로 시립한 신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소란스러움을 즉시 멈추게 하는 황제의 냉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간 무리의 정체는 파악했나?”

“아칸 왕국 기마대였습니다요.”

“확실한가?”

“분명합니다. 저, 그게 있었으니까요.”

“그거라니?”

1등 병사 처비가 무심결에 한 손을 뒤로 내밀어 아픈 허리를 매만졌다. 그러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황제의 눈빛에 화들짝 놀라 급히 손을 거둬들였다.

“깃발이 나부끼고 있어서 알았습니다.”

“깃발?”

“아칸 왕국, 아니 아칸 제국을 상징하는 흑표범이 수놓인 금빛 깃발이 나부끼는 걸 제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요.”

“제국을 상징하는 금빛 깃발이라고!”

누군가가 비명처럼 내지른 한마디와 함께 다시 홀 안에 신하들이 술렁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아칸 왕국이 전쟁을 일으킨 것인가? 선전포고도 없이?”

“마물들을 어떻게 동원한 것일까요? 그들이 인간과 결탁할 리가 없을 텐데?”

“말도 안 돼. 마물과는 의사소통도 제대로 안 되는데 무슨 수로 연합을 한단 말이오?”

황제 렉스는 서리가 내린 듯 하얗게 굳은 표정으로 좌중을 쏘아보았다. 벌겋게 열이 오른 얼굴로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가 다시 1등 병사를 내려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놈들이 바로 진격해왔나?”

“예. 조금도 틈을 두지 않고 그대로 공격해왔습지요. 제일 처음 날아든 건 시뻘건 불덩이였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불덩어리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지요. 그 위세가 어찌나 대단한지 순식간에 성안이 불바다로 변해버렸습니다요.”

“불덩이라니? 불화살을 쏴 보낸 건가?”

중년 병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건 용의 마법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 붉은 용 한 마리가 나타나 불덩이를 토해냈습지요.”

“뭐?!”

그 말에 몸을 낮춰 바닥에 쓰러진 마법사를 보살피던 케일론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몹시 놀란 얼굴이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성안에 있던 마법사와 기사들이 서둘러 반격에 나섰지만 불덩이 때문에 입은 피해가 워낙에 막심했으니까요. 마법사님들이 마법으로 불을 끄기 위해 애쓰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물론 그동안에도 놈들의 여러 공격이 계속됐습죠. 하늘에선 불덩이가 빗발치는데 오크들은 모두 방어마법을 두른 듯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떼로 달려왔습니다. 커다란 나무와 바위를 가져와 눈 깜짝할 새 해자를 메우더라고요. 이어 투석기와 공성 망치를 앞세워 성벽을 깨부수고 성문을 산산이 아작냈지요. 그다음엔 개미 떼처럼 밀려 들어와 성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도륙해 버렸습죠. 마치 미친 백정이 우리에 몰아넣은 가축을 되는대로 붙잡아 멱을 따듯이…….”

숨 쉴 틈도 없이 상황설명을 하던 중년 병사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으흐엉…… 그렇게, 모조리 죽임을 당했습니다요.”

***

상황이 암울했다. 처음 당도한 전령 이후로 다른 군영에서 보낸 전령들도 속속 도착해 소식을 전해왔다. 그 사이 렉스의 개인 정보원들도 비슷한 소식을 가져왔다. 하나같이 용과 마물이 아칸 왕국 편에 개입해 아젤란 제국군을 거의 궤멸시켰다는 내용뿐이었다.

“병무 대신. 언제쯤 출정할 수 있겠소?”

오전에 조회를 연 이후 계속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대책 마련에 고심하던 황제 렉스가 조금 지친 얼굴로 물었다.

“10만 정도의 병력은 선발로 지금 당장 출발할 수 있습니다. 신관들의 합류가 끝나는 대로 길을 떠날 예정입니다.”

“그렇군. 외무대신은 속히 각국에 연락을 취해 정세 파악에 주력하고 병력과 물자 지원을 요청하시오. 그리고 황도에 머무는 공녀들과 타국인들의 행동 변화를 주시하고 그들이 이탈하지 못하도록 엄중히 감시하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두 대신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렉스가 그의 곁에 서 있던 케일론을 힘주어 불렀다.

“대마법사.”

전쟁 중에 그를 부르는 칭호였다.

“예. 폐하.”

케일론 역시 얼른 허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그대는 용과 마물들의 정체를 파헤치는 일을 맡도록. 그들이 누구의 사주를 받고 움직이는지, 목적이 뭔지.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둔 세력인지. 그리고…….”

렉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잠시 말을 끊었다. 정말 중요하고도 쉽지 않은 임무를 맡겨야 했기에.

“그들을 공략하려면 어떤 수를 써야 하는지 등. 아무래도 마법사들이 잘 알지 않겠소?”

“그게…….”

케일론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마법사지만 사실 마물들에 대한 지식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옛날 사라진 엘프들이라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많이 알 텐데. 엘프들이 이 땅을 떠나면서 마물들에 대한 지식과 정보도 함께 소멸하고 말았다.

‘하프 엘프라도 찾아서 물어봐야겠군.’

그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경직된 표정으로 약간 틈을 둔 후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해 알아보겠습니다.”

“음. 부탁하겠소. 아울러 마법청 소속 마법사는 물론 안드로스 대륙 곳곳의 동원 가능한 마법사 전력을 낱낱이 파악하도록.”

“알겠습니다.”

이내 신하들을 둘러보며 다음 명령을 차례로 내렸다.

“각 부문 대신들은 남아서 마저 대책을 구하시오. 제국은 물론 안드로스 대륙 전체에 총동원령을 내릴 테니 병무대신은 황도와 아젤란 제국의 방어선 구축과 파병 계획을 세우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 주오. 재무대신은 물자와 군량 확보에 힘 써도록 하고.”

“옛!”

“적들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소. 모두, 서둘러 주시오.”

“알겠습니다!”

양쪽으로 나눠 선 신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다들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어있었지만 저마다 각오를 다지는 모습이었다. 누가 뭐래도 1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광대한 안드로스 대륙의 통일을 달성한 제국의 일원들이었으니까. 그동안 전력이 많이 축난 건 사실이지만 그 저력은 여전히 굳건했다. 다만 한 가지, 예측하기 힘든 중요한 변수가 도사리긴 했지만.

“우린 용이나 마물을 상대해 본 경험이 거의 없소.”

“…….”

“하지만 누가 뭐래도 우리 아젤란 제국은 안드로스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요. 모두 힘을 합친다면 이 위기를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을 터. 다들 분발할 것으로 믿겠소.”

“물론입니다. 폐하.”

모여 선 이들이 저마다 손을 불끈 쥐며 전의를 불태웠다. 언제나처럼 모두가 힘을 합치면 어떤 적이라도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힘을 합친다면! 렉스는 제국의 황제답게 자신만만한 눈빛을 빛내며 대신들을 훑어보았다. 섬광처럼 스치는 한 생각에 표정을 일그러뜨렸지만 그리 큰 걱정을 하진 않았다. 그들도 나라에 닥친 위기를 외면하진 않을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그들 역시 아젤란 제국의 백성이지 않은가? 이왕 닥친 위기라면 그 상황을 잘 이용해서 최대한 이익을 끌어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뻣뻣해진 그들의 자세를 낮추도록 만들 수도 있으리라.

‘이런 긴박한 시기마저 자신들의 권리만 주장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겠지.’

‘그들’이란 당연히 신관들이었다. 렉스는 잠시 고개를 움직여 대신관이 있는 제 1신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추운 날씨였기에 그곳으로 향한 창은 꽉 닫혀 있었다. 왠지 불안한 기분이 엄습했지만 억지로 그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로 그때 또다시 리히트 시종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또 무슨 일인가?”

“그게, 다수의 공녀들이…….”

“뭔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뭐라고?! 모두 말이오?”

“드라코니아 왕국의 공녀를 비롯해 다섯 나라의 공녀만 남았습니다.”

“그런…….”

정말 큰일이었다. 인질인 공녀들이 사라진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다른 나라의 지원과 협력을 약속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기는커녕 그들이 적의 세력에 가담하는 걸 막기도 힘들 것이다. 리히트 시종장이 난감해진 얼굴로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아직 보고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곤란한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무엇이오?”

“제국의 모든 신관이 출정을 거부했습니다.”

“……!”

***

결국 신관을 데려가지 않고 출정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신관이 없다면 부상자의 치료와 아군의 사기 진작에 큰 차질을 빚게 될 것이다. 마물의 공격에 대한 방어에도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황제가 사자를 보내 여러 차례 참여를 독려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차선책으로 마법사들을 좀 더 보충해 데려가는 방법을 택했다. 공격 임무를 담당해야 할 마법사들의 부담이 더욱 늘어나는 거니 좋은 방법이 아니지만 할 수 없었다. 위급한 상황이라 마법사들은 빠른 이동을 위한 마법까지 실시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마나 소모가 엄청날 테지만 회복약을 마시며 버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렉스는 친히 선발대의 출정식을 진행하며 떠나는 병사들을 배웅한 뒤 잠시 휴식을 취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 같아 케일론을 불러 치유마법을 받았다.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나? 공녀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다니. 그 철저한 감시를 뚫고 그런 일이 가능한 건가? 그들이 머무는 아르겐 궁엔 매우 강한 결계까지 쳐두지 않았나?”

은빛 미스릴 갑옷을 걸친 채로 렉스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저도 내내 맘에 걸렸습니다. 어지간한 마법 능력이 아니고선 불가능할 테니까요.”

케일론의 손에서 비롯된 푸른빛이 렉스의 몸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갔다. 마법사의 치유행위는 직접적인 치료 효과를 내기보다는 치유를 돕는 보조 역할을 했다. 신관들이 치유행위를 할 때엔 붉은빛을 내뿜었다. 좀 더 근본적인 생명력에 작용하는 마나의 빛 말이다. 그것만 놓고 봐도 둘의 성질이 다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공녀 중의 누군가가 뛰어난 마법사를 몰래 대동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공녀들이 흔적 하나 없이 아르겐 궁을 벗어나려면 자신보다 뛰어난, 아니면 최소한 비등한 실력자의 마법사가 시도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케일론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인간의 몸으로 그런 실력자는 많지 않을 텐데.

“그게 아니라면 뭔가?”

“일찍부터 이곳 황궁에도 용이나 정령 같은 마물이 숨어들어 농간을 부린 거겠지요.”

“뭐?”

정령도 마물과 비슷한 존재 아니겠는가? 케일론은 라케르타 공작의 잘난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니, 그를 의심하기엔 문제가 있군. 드라코니아의 공녀가 남아 있으니 적어도 그들은 용의 선상에서 지워야 하는 건가? 아니, 또 어쩌면 눈속임을 위해 남은 건지도 모르지. 케일론도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해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속으로 삼켰다.

‘뭐부터 해야 하나?’

이내 찌푸려진 미간을 더욱 좁히며 렉스의 안색을 살폈다. 두통이 가시는지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설핏 잠이 든 것 같았다. 케일론은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황제의 집무실을 벗어났다. 서늘한 겨울바람이 훅 스쳐와 그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휘감겨 들었다. 신경질적으로 떼어내며 앞을 바라보니 벌써 꽤 어두워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둔한 발걸음으로 마법청 건물로 향하는 회랑을 걸었다.

‘가장 시급한 일부터. 일단은…… 동원 가능한 마법사를 파악해 보충하고 그 다음엔 그래, 용과 마물에 대한 전력 분석을 해야겠구나.’

아마도 그게 이번 전쟁의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용까지 개입한 마물 세력을 과연 물리칠 수 있을까? 가슴 속이 꽉 막혀오는 것 같았다. 케일론은 입술을 악다물며 더욱 걷는 속도를 높였다. 얼어붙은 대리석 바닥을 내디딜 때마다 텅텅 울리는 소리가 그렇지 않아도 휑한 공간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텅 비었군.’

생각할 일이 많기만 한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언젠가 함께 이 회랑을 걸었던 누군가의 모습만 생각날 뿐. 에일린이 그의 집을 나가고 난 후부턴 왠지 항상 그런 기분을 느꼈다.

“텅텅 비어 허전하기만 해.”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푸념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나 들어줄 테지만.

***

그즈음 하레나 성의 식당에는 성의 사람이 모두 모여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소식이 전해진 건 오래였지만 전쟁의 여파가 이곳 황도까지 닿은 건 아니어서 아직은 일상생활의 리듬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얼마나 더 지속될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에일린은 노릇하게 구운 스테이크를 한입 씹다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별로 먹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일어서려고?”

식탁 중앙, 성주의 자리에 위치한 히에무스가 걱정이 되는지 눈을 크게 뜨며 말을 건넸다.

“입맛이 없어서요.”

맞은편에 앉아있던 브로미오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쟁 때문에 신경 쓰이는 모양이구나.”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는 전쟁이란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하고 비참한 사건이었다. 소식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성에 사는 하인들 모두가 같은 심정인지 성내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저 인간이 아닌 존재들만 태평할 뿐.

“걱정하지 마, 에일린.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대만큼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보호할 테니까.”

히에무스가 시선을 고정하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니콘인 루카스도 그에 질세라 큰소리를 쳤다.

“맞아. 혹시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이 생기면 나도 일각수로 변신해서 즉시 널 태워 도망칠 수 있어. 걱정 마, 에일린.”

에일린은 엷게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지만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렉스…… 아니, 황제 폐하께서 심려가 많으시겠죠?”

“그렇긴 하겠지.”

“제가 뭐 도울 일은 없을까요?”

“그런 인간을 뭐 하러 걱정해 주느냐? 신경 쓸 필요 없어. 늘 하던 대로 그자가 잘 알아서 하겠지.”

“하지만 그냥 적도 아니고 용과 마물이 섞여서 공격한다는데, 그건 보통의 전쟁이 아닌 거잖아요?”

에일린의 시선이 무심코 용의 화신인 렌투스와 디아누스 집사에게로 옮겨졌다. 뭔가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둘 다 어깨를 움찔거렸다. 에일린은 소설책 내용을 떠올렸다. 이제는 소설책의 전개와는 다르게 진행될 거라 생각했는데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니 무척 놀라웠다. 마물과 용이 낀 전쟁. 소설책대로 흑룡이, 어쩌면 스킬라 공주가 개입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은 어떡해야 하지?

“먼저 일어설게요.”

에일린은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히에무스가 곧장 따라왔다.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원으로 나갔다. 짙은 청색 하늘에 창백한 은백색 달이 겹겹이 뭉쳐진 솜구름 사이로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에일린, 그자를 진정 돕고 싶은 거냐?”

“예. 그러고 싶어요.”

에일린은 렉스와 자신은 여전히 친구 사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책에선 엘시아 황녀가 큰 역할을 했기에 그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녀 대신 자신이 뭐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당신은…… 내키지 않나요? 히에무스.”

“아니. 어떤 거든 그대가 원하는 게 바로 내가 원하는 일이야.”

그가 다정한 미소를 머금으며 따뜻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에일린은 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가만히 겹쳐 잡았다. 지나가는 세찬 늦겨울 바람에 부들부들 떠는 앙상한 나무들의 그림자가 비쳐 보였다. 불안하긴 했지만 따스한 손의 온기 때문인지 그 어느 때보다도 포근한 밤처럼 느껴졌다.

***

며칠 지나지 않아 아칸 왕국에서 자신들의 거병 이유를 밝혀왔다.

“-야만적이고 가혹한 아젤란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다시 찬란한 과거 아칸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자 한다. 이에 동조하는 여러 세력의 지지를 기반 삼아 결연히 일어난 것이다- 라는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아울러 10만 선발대마저 처참하게 당해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 힘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적들은 이제 아칸 왕국을 벗어나 스파니아 왕국까지 진입했다. 스파니아 왕국 다음은 드라코니아 왕국, 그 다음이 아젤란 제국이었다. 이번에도 선발대에 동행해서 겨우 살아남아 돌아온 마법사 데릭 바로스가 퀭한 눈빛을 한 채 황제에게 보고를 올렸다. 알현장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그저 진 정도가 아니라 허망하게 무너진 수준이라니 정말 큰 일이 아니겠습니까? 안드로스 대륙 최강의 전력을 가진 우리 아젤란 제국군이 그렇게 처참하게 당하다니요?”

“마물, 특히 용 같은 걸 어찌 인간의 능력으로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부딪히기만 해선 답이 없습니다. 속히 다른 방법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이란 걸 모르니 답답한 것 아니겠습니까?”

찌푸린 표정으로 지켜보던 황제 렉스가 데릭 바로스에게 질문했다.

“적의 수는 어느 정도인가?”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는 터라 정확한 집계는 힘듭니다만 합쳐보니 대략 오, 육십만은 넘는 것 같았습니다.”

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육십만이라고?!”

그 외침을 시작으로 다시 홀 안에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시끌벅적해졌다. 렉스가 어금니를 깨물며 그의 지척에 서 있던 케일론을 불렀다.

“대마법사. 그동안 뭔가 알아낸 사실이 없소?”

케일론이 난감해진 얼굴로 급히 고개를 숙였다.

“황공합니다만 아직…….”

렉스가 굳은 표정으로 잠시 그를 노려보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다른 신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외무대신, 각국에 요청했던 지원 상황은 어떻소?”

“공녀들이 이탈한 나라에선 응답조차 없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되레 공녀들의 실종에 대한 책임을 지라며 큰소리를 치는 상황입니다.”

그 정도는 예측했던 거였다.

“공녀가 남아 있는 다섯 나라의 답변은?”

“협조한다고 밝히긴 했으나 준비에 시간이 걸린다는 등의 이유로 행동을 미루는 눈치입니다. 끌어모은다 해도 사, 오만 정도일 것입니다. 다만 드라코니아 왕국만 즉시 파병하겠다는 응답이 왔습니다.”

“얼마나 보내겠다는 거요?”

“마법사 100명과 5만 병력을 3일 내로 전장에 보내고 각종 무기와 군량 등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마법사 100명과 5만 병력이라…….”

주변 국가에서 보내는 수준으론 나쁘지 않지만 성에 차지도 않았다. 하긴 그동안 속국에서 군대를 키우지 못하도록 조처했으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스파니아 왕국은 아예 적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방법을 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지역에 주둔한 아젤란 제국군만 그들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초로의 외무대신이 빠른 말투로 다음 보고를 이어갔다.

“한데 조건을 하나 내걸었습니다.”

“조건이라니?”

“보내는 병력 중 상당수가 라케르타 공작과 파인스 남작이 보유한 영지의 군대라고 합니다. 하여 지휘관은 라케르타 공작으로 삼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 왔습니다.”

“그래? 잘됐군.”

렉스는 희미한 미소까지 지으며 대꾸했다. 눈에 거슬리는 그 잘난 공작을 멀고 험한 전선으로 보내 버리면 여러모로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뛰어난 마법사라고 했으니 그 누구보다 전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거기 더해 에일린과도 떨어뜨릴 수 있을 테고. 그러다 전사라도 하게 되면 더욱 좋겠지. 급박한 전쟁 중에 해서는 안 될 생각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계산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누구에게 들킬세라 얼른 입가에 스민 미소를 지우고 병무대신에게 눈길을 보냈다.

“본진은 언제 출정이 가능하겠소?”

아젤란 제국의 총 병력은 100만 정도였다. 그중 절반 정도인 50만 정도의 병력이 정복한 안드로스 대륙 각지에 주둔해 있었다. 나머지 50만 정도가 황도와 아젤란 제국의 방위를 담당했다. 그중 10만이 선발대로 나가 전멸한 상태니 제국에 남은 군대는 40만 정도였다.

“20만 병력은 당장이라도 보낼 수 있으나 적의 수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복속한 다른 나라에서 군대를 보내오지 않으니 각 나라에 흩어져 있는 제국 병력 중 일부만 남기고 모두 동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 병력도 저번 아칸 왕국을 위시한 북쪽 변방을 지키던 병력 중 5만 정도가 궤멸한 상태였다. 그 병력을 거뒀다가는 다른 나라들이 반란을 일으킬 여지를 주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여유를 부릴 입장도 아니었다. 60만 정도의 적을 상대하려면 그 수를 능가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비슷하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본국엔 10만 병력만 남기고 나머지 30만 병력을 동원하시오. 3일 후 파병할 드라코니아 지원군과 합류하면 35만은 되겠지.”

“예.”

“그리고 각 변경을 지키는 군대 중 최소 30만 병력만 남기고 나머지 15만 군대를 불러들이고. 드라코니아 외의 네 나라를 압박해 군을 모으면 5만을 더할 수 있을 테니…… 그럼 모두 55만이군. 비슷한 전력은 되는 셈이지.”

“그렇긴 합니다만…….”

“짐이 직접 친정을 나가겠소.”

“……!”

여러 신하가 당황한 목소리로 만류하기 시작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폐하. 물론 폐하의 실력과 역량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용이나 마물 같은 걸 상대해야 하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하겠습니까?”

“거의 모든 전력을 투입하는 것이니 짐 역시 후방에 앉아있을 수만은 없소. 친정하면 아군의 사기진작 면에서도 좋을 것이오.”

“폐하…….”

모두 맞는 말이긴 했다. 그때 여전히 알현장 한가운데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있던 마법사 데릭 바로스가 입을 열었다.

“폐하. 감히 주청 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그게, 신관들을 파견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이 없으니 부상자 치료가 거의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들이 있다면 방어마법을 펼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물들은 마법사들의 결계보다 신관들의 결계를 더 두려워하니까요.”

“…….”

모르는 바는 아니다. 지금 알려진 것 중 마물의 공격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굴속에 깊이 박힌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들을 무슨 수로 끌어낸단 말인가? 계속 설득했으나 신전에선 아예 황제가 보낸 사자조차 들여 보내주지 않았다.

‘대신관이 미치기라도 한 것 아닐까?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

황제가 직접 나서 대신관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라도 조아리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리라. 그럴 수는 없었다. 렉스는 데릭 바로스의 주청을 무시한 채 병무대신을 비롯한 신하들에게 명했다.

“최대한 앞당겨 출정할 수 있도록 서둘러 주시오. 적이 더 이상 남하하게 둬선 안 될 것이오. 최소한 스파니아나 드라코니아 땅에서 전쟁을 끝내야 하오. 아울러 라케르타 공작에게도 참전 명령을 전하도록.”

“예! 폐하.”

몇몇 신하들이 재빨리 자리를 떴다. 렉스도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였다. 자신도 출정 전에 준비해 둘 사항을 점검하기 위해 집무실로 향할 생각이었다. 걸음을 재게 놀리며 케일론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대마법사. 좀 더 빨리 마물, 특히 용을 상대할 방법을 알아봐 주시오. 출정 전까지 내 호위는 다른 마법사에게 맡길 테니 헬무트 경과 함께 전념하도록.”

케일론이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생각을 거듭해 봐도 떠오르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폐하. 라케르타 공작에게 한 가지 명을 더해 전하도록 하십시오.”

“뭘 말이오?”

아무래도 그 공작밖에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마법사 중 최근에 용을 상대해서 이긴 유일한 사람은.

‘아마도 진짜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진짜 사람이 아니기에 사람이 아닌 자를 상대하기엔 더욱 최적일지도.

“라케르타 공작과 파인스 백작에게 용을 제거하라는 특별 명령을 내리십시오. 그래야만 이번 싸움에 승산이 있을 것입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히에무스가 머무는 하레나 성에 황제의 사자가 다녀갔다. 히에무스는 모두가 식사를 위해 모인 식탁에서 말을 꺼냈다.

“퀴리오스가 이번 전쟁에 나와 브로미오스에게 출정해서 드라코니아 군을 지휘하라는군. 아젤란 제국의 황제도 같은 명령을 내렸고.”

히에무스가 양피지로 된 명령서를 훑어보며 설명했다.

“거기다 다른 군대보다 앞서 출발해 용을 죽이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라는 조건이 더해졌다.”

식탁에 앉아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에일린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참전해서 군을 지휘하고 용을 죽여야 한다고요?”

“응. 그렇게 적혀 있구나.”

브로미오스가 조금 곤란해진 듯 눈매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어라, 어떡해야 하는 거지? 정령의 몸으로 인간들 전쟁에 끼어들어도 괜찮을까?”

백룡 렌투스가 잔뜩 굳은 얼굴로 히에무스에게서 명령서를 받아 들어 다시 읽어내렸다.

“난감하군요. 드라코니아에서 이런 명령을 내릴 줄은 몰랐는데.”

히에무스와 브로미오스의 정체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퀴리오스 왕이 왜 이런 난처한 명령을 내린 것일까? 렌투스 자신도 모르는 꿍꿍이가 있는 것인가? 마물과 용이 개입한 것만 봐도 뭔가 석연찮았다. 제발 그가 알고 있는 이들이 얽힌 게 아니어야 할 텐데.

“렌투스. 이번 전쟁에 개입한 용에 대해 뭔가 아는 바가 있나?”

히에무스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그를 꿰뚫듯이 바라봤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드라코니아 왕국과도 상관없을 겁니다. 퀴리오스 왕께선 몇 백 년 동안 그 누구보다 조용하게 지내왔는데 이제 와서 이런 소동을 일으킬 리가 없잖습니까?”

“호오, 그렇다면 퀴리오스와는 무관한 일이란 말인가?”

“아마도…… 그럴 겁니다.”

브로미오스가 손깍지를 끼며 물었다.

“우리가 어떡해야 하겠나? 이 명령서대로 출정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적당한 변명을 들어 회피하는 게 좋을까?”

렌투스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일단은 명령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서 진짜 싸우진 않더라도 싸우는 시늉은 하셔야겠지요. 드라코니아 귀족으로서 지켜야 할 체면과 의무가 있으니 말입니다.”

히에무스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팔짱을 끼더니 에일린을 바라봤다.

“난 싫군. 가지 않겠다.”

“예? 어째서 말입니까?”

“에일린을 두고 가고 싶지 않아. 그런 위험한 곳에 에일린을 데려갈 수도 없지 않겠는가?”

“그건 안 될 말입니다. 히에무스 님. 인간 귀족 노릇을 계속하시려면 출정하셔야 합니다.”

“싫다고 하지 않았는가?”

“히에무스 님!”

그때까지 다른 이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에일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히에무스.”

“응?”

“저도 함께 갈게요.”

“뭐라고?”

에일린이 히에무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분명한 목소리로 일렀다.

“저도 당신을 따라 출정할 거라고요.”

“……!”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저도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쭉 생각해 봤는데 부상자들을 도울 수 있는 의무대와 참전하면 어떨까 해요.”

“의무대……라고?”

“예. 들어보니 신관들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 곤란하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그들이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전담했다면서요? 그들 대신 제가 의무대를 조직해서 도움을 주고 싶어요. 물론…….”

에일린은 잠시 말을 끊고 자신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이들을 응시했다.

“정령들과 루카스의 협조가 필요해요.”

구석에 있던 유니콘의 화신이 귀를 쫑긋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왔다.

“정령들과 루카스의 도움을 받아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하는 거예요.”

***

“남녀 상관없이 누구든 지원해 주세요. 이번 전쟁에 참여해서 부상자들을 치료할 의무대를 모집하고 있어요.”

이른 아침부터 에일린은 하레나 성의 하녀들 몇을 데리고 시장에 나와 외쳐대는 중이었다. 의무대에 지원할 사람을 모집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하레나 성에서 그녀의 시중을 드는 하녀 제니와 샤샤가 제일 먼저 나서 함께 하기로 했다. 하인들 몇 명도 자청해 도와주었다.

“출정은 사흘 후입니다! 험난한 전쟁터에 가는 만큼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진 분들이 지원해 주시면 좋겠어요. 의사나 간호사분은 더욱 환영합니다.”

에일린은 공고도 붙이고 목청껏 소리쳐서 제법 많은 사람을 불러모았지만 좀처럼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정령이 자라나게 해준 긴 밤색 머리를 가진 정령사가 의무대를 모집한다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나돌았다. 구름처럼 운집한 사람 중의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큰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정말 정령사인 거야? 그게 확실하다면 아가씨를 믿고 따라가 보고 싶어.”

“그래, 그래. 뭔가 정령사다운 재주를 한번 부려보라고. 뭐라도 확인시켜주면 금방 사람들이 늘 텐데.”

“예? 그게…….”

그럴듯한 쇼라도 해야 하는 건가? 에일린은 겸연쩍은 표정을 짓다 옆에 있던 정령들에게 속삭였다.

“제퓌. 사람들에게 뭘 좀 보여줄 수 있겠어요?”

제퓌가 싱긋 웃으며 앙증맞은 두 손을 허리에 올리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죠, 까짓것 뭐. 눈이라도 내리게 하면 어떨까요? 얼음꽃을 피울 수도 있고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는데 어떤 게 좋을까요?”

옆에 있던 아두스가 냉큼 제안했다.

“얼음꽃은 좀 위험하니 눈과 회오리바람을 동시에 보여주면 좋지 않을까요?”

“예. 그게 적당하겠어요. 그럼 제가 팔을 휘두르면서 신호를 보낼 테니 그때 행동해주세요.”

이왕 할 거 적당한 몸짓까지 곁들여 보여주면 더 그럴싸할 것이다.

“그럴게요.”

에일린은 마치 마법사가 주문이라도 외듯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두 팔을 위로 번쩍 쳐들었다. 기다리던 세 정령이 눈을 뿌리며 동시에 제법 커다란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저마다 입을 다물지 못하며 놀라움을 표했다.

“우와! 신기하다.”

“정말 정령의 힘을 쓸 수 있나 봐!”

줄곧 에일린 옆에서 일을 거들던 제니와 샤샤도 감탄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봤다. 그러다 에일린에게 한마디 했다.

“에일린 님. 그냥 공작님께 도와달라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뭘 말이야?”

“공작님께서 그 멋진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모집하면 금방 인원이 찰 텐데요.”

제니의 말에 샤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남자든 여자든 단시간에 양떼처럼 몰려들었을 거예요.”

“그런 건 안 돼. 전쟁에 나가는 일인데 그런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지원하는 사람을 데려갈 순 없어.”

“하긴 그렇긴 하겠네요.”

셋이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몇몇 사람들이 씩씩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나 지원할게. 아가씨. 내 아들도 이번에 출정하는데 나도 뭔가 돕고 싶어.”

한 중년 부인이 지원서에 이름을 올리자 금방 사람들이 불어났다.

“나도, 나도 가겠어. 좀 두렵긴 하지만 아가씨 같은 정령사가 앞에 나선다면 믿고 갈 거야.”

“여기도! 내 이름도 올려주시오.”

수많은 사람이 지원했다. 에일린은 그들 중에도 아무나 데려가지 않고 자질을 고려해 선정했다. 너무 몸이 허약해 보이거나 분위기에 휩쓸려 한때의 호기심이나 호기로 나선 이들은 제외했다. 특히 누군가를 돌보거나 간호한 경험이 있는 사람을 우선해서 명단에 올렸다. 의지력과 체력적인 부분도 놓치지 않고 살펴봤다. 정령이 마나의 빛과 양을 읽어내 알려줬기 때문에 그런 부분도 수월하게 알 수 있었다.

“루쿨루스 영애.”

한참 일에 몰두해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애플턴 부인과 예전에 시중을 들던 베키와 도리스, 그리고 낯선 부인들 수십 명이 그녀를 둘러싼 채 서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애플턴 부인. 여긴 어쩐 일이세요?”

에일린이 반가운 얼굴로 인사하자 그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영애가 저잣거리에서 의무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왔어요. 저도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을 몇 명 모아 왔으니 괜찮다면 끼워주세요.”

“괜찮고말고요. 정말 환영합니다, 여러분.”

에일린은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그들을 맞아 주었다. 애플턴 부인은 사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참여한 거였다. 에일린에 대한 소문이 황궁까지 퍼지자 황제가 그녀에게 넌지시 참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원하지 않으면 거절해도 좋다고 말했으나 애플턴 부인도 기꺼이 참여하기로 했다. 나라를 위한 일이고 또한 그녀 스스로에게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겼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황궁에서 나온 귀족 부인들까지 대거 참여하자 지원자가 더욱 늘기 시작하더니 금방 200여 명을 채웠다. 짧은 시간 동안 시도한 걸 고려하면 정말 대단한 성과였다.

에일린은 의무대 모집을 끝내고 조금 지친 몸을 이끌고 하레나 성으로 귀가했다. 히에무스가 황급히 그녀가 탄 마차를 향해 달려왔다.

“에일린. 잘 다녀왔느냐?”

그가 직접 문을 열어 마차에서 내리는 에일린의 손을 잡아 주며 물었다.

“예. 당신도 출정 준비 잘 끝냈어요?”

히에무스도 한동안 이곳을 떠나야 했기에 루쿨루스 숲에 있는 겨울의 궁전에 가서 일을 처리하고 다른 출정 준비도 하며 분주한 하루를 보낸 참이다.

“그래. 아까 나와 함께 갔던 브로미오스가 쓸 만한 이들을 몇 명 데려왔단다. 그들이 기다리니 어서 가서 만나보도록 하자.”

“예.”

의무 부대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할 정령들을 모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데려온 모양이다. 그의 손에 이끌려 빠른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향했다.

“어서 와! 에일린.”

1층에 있는 접견실로 들어가자마자 누군가가 격한 환영의 말을 건넸다.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어머나, 에스타스 님! 텔루스 님도!”

여름의 정령왕인 에스타스와 대지의 왕 텔루스였다. 물의 정령인 엘레스트라와 나무의 정령 아그로스도 아는 체를 했다.

“나도 왔어. 에일린.”

“흠, 오랜만이로구나. 인간 여인.”

에일린이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정령님들. 다들 이렇게 와 주시다니, 정말 기뻐요.”

에스타스가 다가와 에일린의 몸을 일으켜 주며 상냥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래. 우리 도움이 필요하다길래 한가한 정령들 위주로 데려왔단다.”

대지의 왕 텔루스가 살짝 인상을 쓰며 즉시 반박했다.

“아니, 말해 두지만 나는 절대 한가하지 않다. 늘 바쁜 몸이라고. 특별히 짬을 내서 온 거란 걸 알아두길 바란다.”

“아, 그러시군요. 감사합니다. 바쁜데도 이렇게 와 주시다니.”

“정령이 인간들을 해치는 일을 하는 건 금기지만 돕는 일에 대해선 딱히 제재 항목이 없어. 그래서 다들 홀가분한 마음으로, 재미있는 경험이란 생각으로 나선 것이다.”

“예. 정말 고맙습니다.”

그때 그들의 기에 눌려 조금 주눅 든 채로 서 있던 루카스가 은백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잽싸게 튀어나왔다.

“에일린! 나도, 나도 아빠에게 말씀드려서 일각수들을 데려왔다고.”

지난번 유니콘 궁전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일각수 몇 명이 그와 함께 서 있었다. 에일린은 그들에게도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 외에 브로미오스가 데려온 서풍과 몇몇 권속들까지 더하니 넓은 접견실 안이 꽉 차 보였다. 흐뭇한 얼굴로 그들 모두를 죽 훑어보니 한없이 든든하고 충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신관들의 빈자리를 상당수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에일린은 그들을 향해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되풀이했다. 모여든 이들 역시 뿌듯한지 내내 입가를 끌어올린 채 따스한 눈빛을 보내주었다.

***

뿌우우.

환하게 밝아오는 아침햇살 속에 아젤란 제국군의 출정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에일린도 황제인 렉스가 이끄는 부대를 따라갈 예정이었다. 급히 조직했지만 그런대로 기강이 잡힌 의무대를 이끌고 한쪽에 대기했다. 행군이 익숙하지 않은 부녀자들이 상당수 끼어있었기에 마차를 많이 동원한 터라 넓은 광장이 더욱 비좁아 보였다. 에일린은 그동안 각종 위생용품과 의약품, 방한용품과 식량 등을 마련하느라 그야말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히에무스의 재력과 행동력이 뒷받침됐기에 짧은 시간에 상당량을 구비하는 게 가능했다. 모자란 물건들은 다른 나라에까지 가서 조달했다. 히에무스는 브로미오스와 함께 이틀 전 먼저 출발한 상태였다. 황제가 속히 길을 떠나 용을 제거하는 일에 힘쓰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에일린과 헤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할 수 없었다. 다행히 다른 정령들이 곁에 많이 머물렀기에 그녀의 안전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해서 비교적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났다.

“에일린!”

은빛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렉스가 흑마에 올라탄 채 에일린을 향해 다가왔다.

“폐하.”

에일린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리자 황제가 급히 말에서 내려와 섰다.

“오랜만이구나, 에일린. 대견한 일을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이었구나.”

에일린이 조금 수줍은 듯, 그러면서도 자랑스러운 듯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작은 힘이지만 아젤란을 지키는 데 저도 뭔가를 하고 싶었습니다. 같은 뜻을 가진 많은 이들을 만나게 돼 이렇게 참여할 수 있었어요.”

“그래, 정말 고맙다. 여인으로서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용기를 내줬구나. 덕분에 큰 힘이 될 것 같구나.”

렉스는 감탄의 빛을 숨기지 않은 채 눈을 가늘게 뜨며 에일린을 바라봤다. 총기로 반짝이는 연초록 눈동자와 의연한 행동. 마치 온몸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가 여태 봐왔던 그 어떤 이름난 미인보다도 훨씬 더 아름답고 고귀하게 느껴졌다. 이 여인은 정말 보통의 다른 아가씨들과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소문엔 그대가 정령사가 돼 그들의 힘을 치료에 쓸 거라던데 사실인 거냐?”

에일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어색하고 꺼려졌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런 인식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예. 고맙게도 저와 친해진 정령들이 협조한다고 하셨어요.”

“잘됐구나. 군의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되겠구나.”

“예.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에일린이 활짝 웃으며 바라보자 렉스는 저도 모르게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져 무심코 그녀의 한쪽 뺨을 어루만지려 손을 뻗다가 흠칫 움츠리는 모습에 황급히 거둬들였다. 순간 서운한 마음에 씁쓸한 미소가 흘러나왔으나 황제답게 재빨리 준엄한 표정을 되찾았다.

“리히트 경.”

황제가 부르자 젊은 시종장이 나타나 두루마리로 된 문서와 은으로 된 작은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에일린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렉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나의 부대를 조직해 짐의 군대를 따라 출정하는 거니 적절한 지위가 있어야 하겠지. 그대를 아젤란 제국군의 민간 의무대 대장으로 정식 임명한다는 조서와 반지 인장이다.”

“아…….”

어느새 그녀의 곁에 와 있던 애플턴 부인이 눈치를 줬다.

“영애, 몸을 낮춰 어서 받으셔야지요.”

“황, 황송합니다.”

에일린이 얼떨떨한 낯빛으로 렉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내밀었다. 그가 기품과 위엄이 한껏 서린 얼굴로 그녀에게 두루마리 임명서와 인장을 수여했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에일린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행동이었다. 렉스의 마음이 느껴져 에일린은 속삭이듯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렉스는 부드러운 호선을 한 번 더 그려 보인 후 몸을 돌려 자신의 말 등에 올라타 곧게 허리를 폈다. 이내 낮고 우렁찬 목소리로 명했다.

“출정하라.”

“옛!”

늦겨울 추위가 가시지 않은 차가운 날씨에 수많은 사람이 굼뜬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가 에일린에게 다가와 제의했다.

“에일린. 다들 좀 추워 보이는데 내가 따뜻하게 해줄까?”

“어, 예! 부탁드려요.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에스타스가 손을 휘두르자 훈훈한 기운이 그 넓은 공간을 안온하게 감싸주었다. 그에 더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한순간 에일린 주위에 신비로운 오색 빛이 반짝이도록 만들었다.

“이야!”

놀라움과 환희에 찬 격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지켜보던 대지의 왕 텔루스가 덩달아 신기한 마법을 발동시켰다.

“좋아, 그럼 나도 조금 재주를 보태도록 하지. 병사들의 짐을 가볍게 만들어주마. 그리고 땅에 마법을 걸어 이동 속도를 높여주도록 하겠다.”

“우와아!”

덕분에 전쟁터로 향하는 출정길인데도 마치 축제 행렬이라도 되는 듯 설레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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