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뼈아픈 실연 (19/24)

18. 뼈아픈 실연

순간 갈리온이 겁에 질린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히에무스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다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입가에 조금 흘러나온 피를 손으로 슬쩍 훔쳤다.

“에잇, 젠장!”

그러고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데굴데굴 구르며 고래고래 외쳤다.

“으악! 나 죽네, 누구 제발 나 좀 살려줘요! 마법사 귀족 나리가 날 쳐 죽이려 해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무심히 지나쳐 버리자 더욱 악을 쓰며 소리쳤다.

“이 사람들 도망 못 가게 잡아줘요. 사람을 쳤다고요!”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추운 날씨만큼이나 사람들 인심도 싸늘하고 흉흉하기만 했다. 그 누구의 반응도 없자 갈리온이 벌떡 일어나 에일린 앞으로 다가와 하소연했다.

“미안, 미안해. 에일린. 네가 너무 잘나가는 것 같아 부러워서 그랬어. 그래서 말인데 날 불쌍히 여겨서 돈이라도 좀 주면 안 될까? 여기 경비대까지 안내도 해줬잖아. 같은 고향 사람으로 살아온 정을 봐서라도…….”

“…….”

“맞아. 난 부양해야 할 가족들도 아직 남아 있어. 내 동생들 알지? ‘디나’와 ‘테오’말야. 그 어린 것들이 며칠째 굶고 있어. 넌 항상 걔들을 좋아했잖아. 아, 기억이 안 난다고 했나? 아무튼 좀 도와주면 안 될까?”

히에무스가 기어이 눈살을 구겼다.

“그만 가자. 에일린.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부탁이야, 에일린. 한마을에서 살던 정을 생각해서라도…….”

갈리온이 눈썹을 있는 대로 늘어뜨리며 에일린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애원했다. 에일린도 속이 상하고 화가 났지만 억지로 분을 삭였다. 손에 쥐고 있던 주머니 속을 뒤적여 금화를 두 개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냉큼 받아 챙기며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에일린. 나, 그럼 이만 가볼게.”

주섬주섬 일어나더니 바로 옆으로 나 있는 골목길 속으로 파고들 듯이 달려가 사라졌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에일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밑바닥까지 떨어진 채 있는 대로 비굴해지고 추악해진 인간의 단면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어째서 저런 자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냐? 에일린. 내 보기에 그런 자격이 없어 보였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어쩌면 저도 저런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응?”

진짜 에일린이 아젤란 제국 쪽으로 가지 않고 이곳 왕도로 와 머물렀다면 저런 상태로 살게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신이 그런 에일린의 몸에 깃들게 됐을지도. 그런 생각에 쉽게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골목길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자꾸만 부르르 몸이 떨려왔다.

***

히에무스와 함께 경비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고발하기 위해 별수 없이 신분을 밝혀야 했다. 히에무스가 드라코니아의 공작이라고 밝히자 한결 대접이 나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날 겪었던 일들을 말하며 고발절차를 끝마치자 그곳 책임자인 듯 보이는 기사가 말을 건넸다. 아젤란 귀족이라고 했다.

“큰 고초를 겪으셨군요. 공작 저하. 속히 조사해서 일을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만난 그 고향 친구라는 사람도 사기꾼일 겁니다.”

“뭐라고?”

“그런 자가 한둘이 아니거든요. 아마 식당에서 두 분 대화를 듣고 정보를 넘겨준 패거리가 있을 겁니다. 외지인에게 접근해서 그런 식으로 등쳐먹는 거죠.”

“알만하군.”

히에무스가 팔짱을 끼고 비웃듯이 대꾸했다. 에일린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그 기사를 바라봤다. 그가 난처한 듯 흐린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많이 놀라셨나 보군요. 그런 일들이 이곳에선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중 삼중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농락하지요.”

“그가 했던 말이 전부 거짓이란 말인가요? 경비대와 상인들의 유착이며 상인들의 만행들이 모두 꾸며낸 거라고요?”

“그런 일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순 없겠지만 부풀려진 측면이 많습니다. 오히려 아칸 왕국 백성들 간에 생기는 부조리한 일들이 더 심각한 수준이죠. 물론 그들도 오랜 폭정으로 그렇게 된 측면이 크지만.”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에일린이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물었다.

“아젤란 제국군이 당도하기 전에 아칸 왕국은 이미 내부에서 무너져가던 상태였습니다. 백성들에 대한 수탈도 유독 심하고 왕실이며 지방 영주들이며 어디 하나 썩지 않은 데가 없는 지경이었죠.”

“……!”

“예전부터 폭정에 항거하는 민란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한데 우습게도 아젤란 제국군에게 복속한 후 아젤란에 항거하는 시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것만 봐도 알만하지 않겠습니까?”

“아…….”

“살아남기 위해 동족끼리 서로 물고 뜯는 생활이 일상이 된 거겠죠.”

에일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친절하게 설명을 끝낸 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당부했다.

“그럼 조사를 진행해야 하니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혹 협조를 구할 일이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두 분은 오늘 어디서 묵으실 예정이신지요?”

“아직 정하지 못했소.”

“그러시다면 제가 추천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히에무스는 딱히 생각해둔 곳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오.”

***

같은 날 하레나 성에 누군가가 방문했다. 바로 케일론이었다. 저번처럼 하인이자 제자인 브레이와 함께 말 위에 짐을 잔뜩 실어 와 들여보내 달라고 청했다. 히에무스가 여행으로 자리를 비운 상태라 가을의 왕인 브로미오스가 대신 맞아주었다. 마침 백룡 렌투스와 디아누스 집사도 외출 중이어서 서풍과 유니콘인 루카스를 대동했다.

“안녕하십니까? 파인스 백작님.”

“대마법사가 아니십니까? 무슨 일로 오셨는지? 유감스럽게도 성주인 라케르타 공작께선 부재중이오만.”

“그렇습니까? 괜찮습니다. 저는 에일린, 아니 루쿨루스 양을 만나러 왔으니까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등 뒤에 서 있던 루카스가 투덜거렸다.

“아, 왜 자꾸 에일린을 찾아오고 난리야?”

브로미오스가 그의 말에 엷게 미소를 지어준 뒤 다시 케일론을 향했다.

“저런. 영애도 지금 이곳에 없습니다.”

줄곧 평온한 표정이던 케일론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내려앉았다 사라졌다.

“흠, 두 사람이 함께 어디 외출이라도 한 모양이군요.”

“그렇지요. 괜히 헛걸음 하셨군요. 바쁘신 분이.”

“아니, 뭐 서운하긴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그냥 루쿨루스 양이 저의 성에 남기고 간 물건을 가져다주려고 온 거니까요.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아 아쉽고 불편할 것 같아서요.”

“오, 참 사려 깊으시군요. 그런 것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 나중에 영애가 돌아오면 무척 좋아할 겁니다.”

“그러길 바랍니다.”

케일론이 옆에 같이 서 있던 브레이에게 눈짓하자 그가 얼른 지고 있던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왕 가져왔으니 두고 가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영애가 돌아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브로미오스가 시종인 서풍에게 짐을 가져다 놓으라고 명한 후 케일론에게 권유했다.

“오신 김에 저와 차라도 한잔 하시겠습니까?”

“좋지요.”

브로미오스가 안내한 널찍하고 호화로운 접견실에 들어온 후 케일론은 연거푸 차를 들이켰다.

“음. 차향이 무척 향기롭군요. 드라코니아 특산품인가요?”

“하하하. 아니오. 내가 다스리는 영지에서 딴 건데 마음에 드십니까?”

“좋군요. 지금까지 마시던 것과는 좀 다른 것이…….”

“마음에 드신다면 가실 때 좀 챙겨드리지요.”

“감사합니다.”

그 후 별 내용 없는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 케일론이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후 다시 인사드리지요.”

“살펴 가십시오.”

서풍이 그새 준비해온 차 꾸러미를 내밀자 브레이가 냉큼 받아들었다. 접견실 밖을 나와 입구로 향하는 복도를 걷던 중이었다. 케일론이 배웅을 위해 따라나선 루카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보게. 시종. 손을 좀 씻고 싶은데 잠깐 안내해주게.”

“갑자기 손은 왜요?”

“차를 많이 마셔서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이다.”

“쳇, 알겠어요. 그냥 첨부터 그렇게 말씀하시지.”

“…….”

좀 어려 보이는 시종의 언행이 무례하게 느껴졌지만 케일론은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넘겼다. 그의 안내를 받아 손님들을 위해 마련된 욕실로 갔다. 브레이와 루카스를 밖에서 기다리게 한 후 다급한 듯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하고 잘 꾸며진 대저택답게 화장실도 사방이 번쩍거렸다. 케일론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흠, 누구를 남기는 게 좋을까?’

겨우 결정을 내리고 마법 공간에서 지팡이를 꺼내 휘둘렀다. 이내 낮은 소리로 마법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욕실이라 그런지 벽에 부딪힌 마법 주문에 낮고 기묘한 메아리가 생겨났다. 누군가 지켜봤다면 그 기이한 분위기에 잔뜩 얼어붙었을 것이다. 주문이 끝나자 지팡이에서 하얀 마나의 빛이 둥근 공처럼 형성돼 흘러나왔다. 그 공 형체가 점점 크기를 키우더니 금세 케일론의 몸만큼이나 훌쩍 자라났다. 성장이 멈추자 백색 빛이 사라지며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케일론의 분신이었다.

‘아무래도 본체보다는 분신 쪽을 남기는 게 좋겠지. 상황이 곤란해질 경우 즉시 사라지면 그만이니까.’

자신의 분신을 향해 명령했다.

“네가 남아서 여길 염탐해 보는 게 좋겠다. 나는 이만 가 보겠어.”

무표정한 분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숨어 있다가 주변이 조용해지면 몰래 나가서 행동을 개시하도록 해.”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다. 나는 너 자신이니까. 네 생각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분신이 아무 표정 변화 없이 입술만 달싹거리며 대꾸했다.

“그렇지. 어쨌든 수고해라.”

“그런 인사 또한 할 필요 없다. 너 자신에게 인사하는 것과 똑같지 않은가.”

“그렇군.”

케일론은 자신의 앞에 우뚝 서 있는 존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왠지 자신보다 더 냉철해 보이는 게 꽤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러다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결국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거 아닌가? 조금 머쓱해져 한 번 더 눈길을 준 후 욕실 밖으로 나갔다. 그를 보자마자 예절이라고는 배워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어린 시종이 한마디 했다.

“시원하시겠네요. 엄청 많이 참았나 봐요. 그거 자꾸 참으면 병 되는데. 사실은 큰 거였죠?”

“…….”

성 밖 도개교까지 터덜터덜 따라 나온 어린 시종이 마침내 배웅 인사를 했다.

“그럼 가세요.”

세련된 말투는 못 배웠지만 그래도 인사 자세만큼은 제대로 익힌 모양인지 허리를 깊이 숙여 예를 표했다. 몸을 돌려 도개교를 천천히 걸어 나오는데 브레이가 부루퉁한 얼굴로 물었다.

“케일론 님. 어째서 에일린 짐을 챙겨서 갖다 준 겁니까? 케일론 님은 그녀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게 싫으세요?”

“그럴 리가. 나도 에일린이 내 성으로 다시 오길 원해. 그 누구보다도 원하지.”

“아, 그럼 왜 짐을 가져다 주셨어요? 짐을 보내지 않았다면 그것 때문에라도 좀 더 일찍 돌아올지도 모르잖아요.”

브레이가 못내 아쉬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쩔 수 없었다. 저 성에 방문할 핑계거리가 있어야 했으니까.”

“예?”

케일론이 잠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레나 성을 되돌아봤다.

“그러니 잘 해내야 할 거야.”

“예? 누가 말입니까?”

“그냥 나 자신에게 한 말이다.”

오늘따라 돌로 된 하레나 성의 성벽이 유난히 높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하늘 끝에라도 닿을 듯 아찔하게 솟은 첨탑이 왠지 위태로워 보였다.

***

경비대 대장이 소개해준 숙박업소는 한눈에 보기에도 규모가 크고 깨끗한 곳이어서 히에무스와 에일린은 마음에 들었다. 알고 보니 아젤란 인이 경영하는데, 다른 곳에 비해 치안도 안정되고 숙박료나 운영 방식 등이 합리적인 편이라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남아있는 방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에일린은 속으로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소설책이나 드라마 같은 걸 봐도 방이 두 개 남아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니까.

“상관없다. 원래 하나만 필요했으니까.”

히에무스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에일린 얼굴만 붉게 익어버렸다.

“하하, 그러십니까?”

객잔 주인이 은근하고 야릇한 눈빛을 담은 채 유쾌한 얼굴로 대꾸했다. 안내된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에일린이 히에무스에게 당부했다.

“저기, 히에무스. 다음부터는 어디 여행하게 될 때 여자 일행이 있으면 방을 꼭 따로 잡으셔야 해요.”

“왜지? 예전에 빛의 궁전에 갈 때도 같은 방에서 함께 잤잖느냐?”

에일린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타올랐다.

“아니, 저 그때는 정령들과 함께한 여행이었기에 괜찮았지만 지금은 인간계를 여행하는 거잖아요. 늘 말씀드리듯이 인간들 사회에선 지켜야 할 규칙이 좀 있거든요. 방을 따로 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필요한 거라서요.”

“그런가? 그럼 언제나 그렇게 해야 하는 거냐?”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결혼해서 부부가 된 남녀끼리는 괜찮지만 나머지 경우엔 꼭 지켜야 할 사항이에요.”

“그렇구나. 명심하도록 할게.”

히에무스는 사실 명확하게 이해되진 않았지만 원래 인간들에겐 쓸데없는 규칙들이 많으니 그런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방에서 쉬고 있으려니 경비대 대장이 보낸 기사가 와서 알렸다.

“공작 저하. 저희 대장께서 조사가 일찍 마무리됐다며 한번 와서 확인해 달라고 하십니다.”

“알겠다. 곧 나가마.”

히에무스가 품 안을 뒤적여 빨간 마법약을 꺼내 한 방울 삼켰다. 그새 마법약의 효과가 다한 것이다.

“에일린. 나 혼자 다녀올 테니 그대는 쉬는 게 어떻겠느냐? 시종으로 삼을 만한 정령을 불러줄 테니.”

“아뇨. 저랑 함께 가봐요.”

그가 휙 다가와 에일린의 안색을 이리저리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피곤하지 않느냐?”

“괜찮아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테니 용서해 주십쇼!”

히에무스와 에일린을 보자마자 식당 주인이 바짝 엎드리며 빌었다.

“귀하신 분인 줄도 모르고 그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요. 부디 이번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요.”

히에무스가 싸늘한 눈초리로 쏘아보며 그 눈빛 못지않게 차가운 목소리로 낮게 일렀다.

“인간, 잘못을 저질렀으면 그냥 거기 상응하는 벌을 받도록 해라.”

“…….”

그 말투가 너무나 위엄 있고 냉정하게 느껴져 남자는 모든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경비대 대장이 다가와 은화를 내밀며 몇 가지 설명을 더해 주었다.

“여기 피해당한 돈을 회수했으니 돌려드리겠습니다. 이 식당은 1년 동안 영업을 정지하고 벌금을 물릴 예정입니다.”

에일린이 은화를 받아들며 질문했다.

“저기, 갈리온이라는 사람의 정체도 알아내셨나요?”

경비대 대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감스럽게도 하나같이 모른다고 발뺌하더군요.”

“혹시……, 정말로 제 고향 사람인 것 아닐까요? 제가 기억을 잃긴 했지만 왠지 좀 친근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글쎄요. 전 여전히 사기꾼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경우가 전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겠지요.”

에일린은 손안에 쥔 은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여기에도 빈민들을 위한 자선 단체 같은 게 있나요?”

“신전에서 그런 역할을 하긴 합니다만.”

에일린이 자신의 돈주머니를 꺼내 손에 쥔 은화와 함께 통째로 내밀었다.

“이 돈을 맡길 테니 저 대신 기부해 주시겠어요? 적은 금액이지만…… 부탁드릴게요.”

“그러죠.”

***

날이 어두워졌다. 케일론의 분신은 그때까지 움직이지 않은 채 욕실 안에 숨어 있다 슬그머니 행동을 개시했다. 먼저 스스로에게 은신 마법을 걸었다. 본체에게서 전해 받은 마나의 양이 상당했기에 이 정도 마법은 거뜬하게 쓸 수 있었다. 물론 이 마법을 쓰면 분신의 형체를 유지하는 시간이 짧아지겠지만 훨씬 안정된 상태로 활동할 수 있을 테니 쓰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욕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걸어 성에 사는 주요 인물들의 방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2층으로 향했다. 두어 명의 하녀와 하인 하나가 바로 옆을 지나쳐 갔지만 당연하게도 그의 존재를 알아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층 계단을 다 올라와 보니 결계가 펼쳐진 게 느껴졌다.

“……!”

꽤 강력한 형태라 잠시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망연히 서 있었다. 그냥 포기해야 할까 생각하다 조금 기다려 보기로 했다. 운이 좋으면 안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순간을 이용해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케일론의 분신은 인내심을 갖고 꽤 긴 시간을 계단 난간에 붙어선 채 기다렸다. 분신이니 이럴 때 참 유리했다. 한곳에 오래 있더라도 지루함이나 피로함 같은 걸 거의 느끼지 않으니 말이다. 그의 본체가 분신을 남기고 가기로 한 건 참 탁월한 선택이었다.

벌컥!

갑자기 제일 앞쪽에 있는 방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아까 본 적이 있는 무례하기 짝이 없던 어린 시종이었다. 케일론의 분신이 냉철한 눈빛을 빛내며 기회를 포착해 냈다. 꾸물거리지 않고 그 시종이 결계를 통과해 밖으로 나오는 순간 즉시 반대편으로 발을 들였다.

휙.

“으응?”

어린 시종이 잠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챈 것일까?

“잘못 봤나? 방금 누군가 지나간 것 같았는데.”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계단 밑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카스 님. 뭐 하세요? 어서 저녁 식사하러 가셔야죠.”

“응. 알았어. 지금 가.”

더 생각할 거리도 안 된다는 듯 그가 재빨리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 사라졌다. 케일론의 분신은 살짝 입술을 씰룩거렸다. 본체였다면 안도의 한숨이라도 내쉬겠지만 분신인지라 더 이상의 표정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분신인데도 예전보다 좀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의 본체가 이전과 다소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뭔지는 확실히 단언하기 힘들었다.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조금 전 어린 시종이 나온 방을 택해 안으로 들어갔다. 번쩍거리는 온갖 장식품이 밀집해 있는, 참으로 천박한 취향이 묻어나는 방이었다.

“알 만하군. 그 애송이의 방인가? 생전 방을 꾸며본 적도 없는 자가 마구잡이로 꾸민 것처럼 난잡하기 그지없군.”

저벅저벅 걸어 방을 한 바퀴 둘러봤지만 별다른 건 없었다. 단지 탁자 위에 놓인 바구니에 문득 눈길이 갔다. 여러 종류의 신선한 과일이며 당근, 각설탕, 이름을 알 수 없는 풀 따위가 가득 들어 있었다.

“허브 잎인가?”

방 꾸밈에 비해 간식 취향은 참 소박한 것 같았다. 아니, 이런 추운 계절에 저런 과일을 맘껏 먹을 정도면 어지간히 사치스러운 취향이라 해야 할까. 이내 그 방을 나와 다른 방으로 접근했다.

휘잉.

“뭔가, 이건.”

문을 열자마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마나로 형성된 긴 은빛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곳도 좀 기이했다. 좀 전에 둘러본 시종의 방과는 다르게 침대만 하나 덩그러니 있을 뿐 거의 장식이 없이 휑했다. 그런데 창을 있는 대로 모두 열어놓은 게 특이했다. 해서 끊임없이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럼 겨울이니 당연히 꽁꽁 얼 정도로 한기가 느껴져야 정상일 텐데 이곳의 바람은 꽤 온화하고 쾌적하게 느껴졌다. 어느 가을날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의 느낌이랄까.

“이상하군. 마법으로 일으킨 바람인가? 누군가 마법을 쓰는 자의 방인 것 같군.”

하긴, 파인스 백작이나 라케르타 공작 두 사람이 마법사라고 했으니 크게 의아하게 여길 건 아니지만.

“이 정도의 마법을 시전자 없이도 계속 유지할 정도니 상당한 실력자겠군.”

뭐, 자신의 본체도 좀 무리하면 이 정도는 가능했다. 지금 현재도 그의 분신이 돌아다니는 고도의 마법을 행하는 중이지 않던가? 약간 주눅이 들 뻔했으나 다시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그 외엔 별 특징이 없어 보여 이내 다른 방을 찾아 나섰다. 세 번째로 찾아간 방 역시 아무도 없었다. 저녁 식사 때문인지 대부분 방을 비워둔 채 나간 것 같았다. 케일론의 분신은 잠시 스스로를 칭찬했다.

“탁월한 시간대를 잘 선택한 것 같군.”

그 방은 앞서 봤던 바람이 불어오는 방보다 더 기이했다. 침대며 탁자며 의자나 책장 같은 가구 외에도 눈을 휘둥그레 뜨게 만드는 물체가 보였다. 제법 커다란 나무 하나가 침대 옆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이다. 커다란 화분인가 하고 살펴봤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마치 바닥에서 바로 자라난 것처럼 보였다.

“……!”

거기다 양탄자가 깔려 있다고 생각했던 바닥도 자세히 보니 잔디 같은 풀이 촘촘히 나 있었다. 들꽃처럼 보이는 꽃도 한 무리 피어난 상태였다.

“이건 또 무슨 마법인가?”

인간 마법사가 이런 마법을 부리는 걸 본 적이 있던가? 보통의 마법사들이 행하는 마법은 아니다. 이런 건…… 그래. 마법사가 아닌 신관들이 행하는 것이지. 식물을 자라나게 하거나 꽃을 피우기도 하는 그런 능력은 신관들이나 자연계에 존재하는 정령들의 힘이 아니던가?

“설마…… 정령?”

케일론의 분신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분신인데도 너무나 놀랐기에. 그러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령이 아니라 정령을 부리는 능력자겠지. 에일린처럼 정령의 가호를 받아 행한 일이겠지. 인간이 직접 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제법 오랜 시간을 그 방을 살펴보는 일로 소비했다. 그러다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붉은 마법약이 든 병에 눈길이 머물렀다.

“이건 또 뭔가? 본 적이 없는 약인데.”

뿜어져 나오는 붉은빛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조금 망설이다 집어서 품속에 챙겨 넣었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될 것 같아 속히 다음 방으로 향했다.

“……!”

다음 방은 이상함을 넘어 경악스러운 장소였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밀려드는 차가운 한기에 그대로 온몸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마나로 이루어진 분신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크게 재채기를 했으리라. 최소한의 가구만 갖춘 썰렁한 공간 곳곳에 얼음으로 만들어진 크리스털 기둥 모양의 꽃이 삐죽삐죽 무리 지어 솟아 있었다. 바닥 역시 겨울 호수처럼 얼어붙은 빙판 형태였다.

“뭔가? 이건. 사람이 사는 방이 아닌 것 같은데.”

보통 인간이라면 이렇게 추운 방에서 살 수 없을 것이다. 분신인데도 한기가 느껴져 마나가 심하게 소진되는데 실제 인간의 몸이라면 견디기 힘들 것이다. 입에서 무심코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겨울의…… 정령이 사는 곳인가?”

그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바닥이 미끄러워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마나를 더 낭비하기 싫었으나 마법 공간에 넣어둔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거기 의지해 한발 한발 나아가 한쪽에 딸린 부속실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수많은 옷이 가지런히 걸려있는 걸 보니 방 주인의 의상실인 것 같았다. 다행히 이곳만큼은 한기가 덜 느껴졌다. 지팡이에 불을 밝혀 인내심을 갖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고급스럽고 멋진 데다 모두 새것처럼 보였다.

“이건…….”

익숙해 보이는 의상을 하나 찾아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옷이었다. 너무나 눈에 띄었기에 기억에 분명히 각인돼 있던 것이다.

“지난번 황궁 무도회에서 라케르타 공작이 입었던 옷이 아닌가?”

서둘러 다른 옷을 뒤적였다. 눈에 익은 몇몇 옷을 골라냈다. 모두 라케르타 공작의 것이었다.

“설마……!”

아니, ‘역시’인가? 모든 정황이 말해주고 있었다. 역시 라케르타 공작이 겨울의 정령인 것이다. 그것도 무려 겨울의 정령왕 말이다.

***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금방 눈이라도 내릴 듯 잔뜩 먹구름이 낀 시린 날씨였다. 겨울 특유의 침울한 분위기 때문인지 눈부시게 새하얀 제 1신전마저도 왠지 무겁고 우중충하게 보였다. 추운 날씨인데도 마차를 타지 않고 말을 이용해 당도한 한 신관이 서둘러 신전 정문 앞으로 나아갔다. 문지기를 서고 있던 성기사 소속 기사가 방문객의 신분을 물었다.

“누구시오?”

“나는 제 3신전에 속한 1등 신관…… 아니, 2등 신관 ‘이디오마’니라. 대신관님을 뵈러 왔으니 어서 기별해 다오.”

“아, 어서 오십시오. 대신관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디오마는 추위에 굳은 입술 끝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이내 문이 열리고 곧장 대신관이 있는 접견실로 이동했다.

“어서 오게. 이디오마.”

“인사 올립니다, 대신관 성하(聖下).”

“성하라니, 그냥 편하게 대하도록 하게. 우리 둘은 진짜 형제이지 않은가? 듣기론 요즘 고충이 심하다고 하던데 얼굴이 많이 상한 것 같구나.”

로드미오 대신관이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 얼어붙은 손 위로 따스한 두 손이 닿자 순간 이디오마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로드미오 대신관과 그는 친형제지간이었다. 세간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대신관이 그대로 그의 손을 이끌어 편안한 소파에 앉게 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도 친히 따라 주며 말을 붙였다.

“그래. 어쩌다 2등 신관으로 강등된 건가? 게다가 제 3신전이 호된 감사까지 받는 바람에 쑥대밭이 됐다는 말도 들었네. 신전 지원금도 반으로 줄었다지.”

뜨거운 차를 후후 불며 몇 모금 삼키자 굳어서 잘 벌어지지 않던 입술이 좀 풀어지는 듯 했다. 이디오마가 그동안 그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 하소연했다.

“너무나 억울합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꼭 의도대로 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런데도 폐하께선 전혀 아량을 베푸시지 않고 그런 가혹한 처벌을 내리셨습니다. 정말 기가 막힙니다.”

대신관이 얼굴 근육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리며 거칠게 한마디 내뱉었다.

“부당한 데다 독선적이기 짝이 없는 처사로군.”

“분하고 원통해서 요즘 제대로 잠을 못 잘 지경이랍니다. 2등 신관이라 오늘 여기까지 오는 동안 개인 마차를 이용하지도 못했습니다.”

말을 타고 오는 동안 칼바람 속에서 고생한 기억이 떠올라 이디오마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신관의 등급을 매기는 것도 대신관께서 다루셔야 하는 고유한 영역이 아닙니까? 몇 세대 전 황제에게 일부 권한이 넘어간 것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사항 아니겠습니까?”

로드미오 대신관이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긴 하지. 그땐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대신관의 세력이 컸었지. 나도 이번에 느낀 게 많다네.”

“요즘 황제의 독선이 도를 지나치는 것 같습니다. 형님께서 폐하의 반려를 정하는 신탁을 받아 권했는데도 요지부동이라면서요?”

로드미오의 눈썹이 경련이라도 일으킨 듯 꿈틀거렸다.

“그래. 나뿐만 아니라 다른 열두 개 신전의 장들이 모두 탄원서를 올렸는데도 전혀 반응이 없어.”

“아니, 어떻게 신탁까지 무시한단 말입니까? 도대체 신성한 신의 말씀과 신전의 힘을 뭘로 보고…….”

“줄다리기가 시작된 거지.”

“예?”

“신탁을 받아들이면 다른 것까지 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 예상이 틀린 건 아니지만 나도 타협하거나 양보할 생각은 없어.”

“그러시다면…….”

로드미오 신관이 엷게 미소를 지으며 그때까지 비어있던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랐다.

“걱정하지 마. 신관들을 도와서 함께 줄을 당겨줄 사람들이 있으니까.”

“함께 줄을 당겨줄 사람들이라고요?”

“그래. 황궁 신하들과 일부 고위 귀족 중에도 불만을 가진 자들이 제법 되거든. 그들이 우리 측에 힘을 실어줄 거야. 적절하게 황제를 압박해 주겠지.”

“그렇군요.”

“그럼 나의 아름다운 엘시아 님께서 그토록 고대하던 황후가 되시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예?”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가 언급되자 이디오마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로드미오 대신관의 회색 눈이 형형한 빛을 띠다가 꿈꾸듯 몽롱한 상태로 바뀌었다. 그와 함께 비웃음 같은 흐린 미소를 담고 있던 입술 끝도 눈에 띄게 위로 말려 올라갔다. 꼭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릴 때 짓는 낯빛처럼.

‘그냥 뭐, 착각이겠지.’

어린 나이에 신관이 돼 지금까지 독신으로 살아온 로드미오가 이제 와서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빠져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디오마가 잠시 멍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대신관이 덧붙이는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덤으로 신전과 내 힘도 커지겠지. 그럼 이디오마, 네 문제도 속히 해결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

다음 날 오전 라피스 궁에 있는 알현장에서 한창 설전이 오가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열리는 조회였지만 격한 논쟁이 이어지는 바람에 꽤 오랜 시간 지체되는 중이었다. 높은 단상에 놓인 황금빛 옥좌에 자리한 황제 렉스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딱딱하게 경직된 채 어두운 빛을 띠었다.

“폐하. 어째서 대신관께서 말씀하신 신탁 내용을 이행하지 않으려 하십니까? 신성한 신의 뜻을 거역하시려는 것인지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관리였다. 그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다른 신하도 다소 흥분한 표정으로 자신의 의견을 내비쳤다.

“인간 된 자로서 신의 뜻을 무시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황제 폐하이실 지라도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명심하시고 신의 말씀에 순종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의 뜻을 받드십시오. 그렇게 해야 우리 아젤란 제국이 더욱 번성하고 강성해질 것입니다.”

이어 그들 외에 단상 아래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저마다 황제를 올려다보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신께서 정해주신 엘시아 왕녀를 아젤란의 황후로 맞이하십시오. 그래야 아젤란의 백성들은 물론 안드로스 대륙 전체 신민들의 지지를 하나로 이끌어 내실 겁니다.”

“신의 뜻을 외면하고 어찌 진정한 통일 제국을 완성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의 뜻 아래 우리 안드로스 대륙 전체가 굳건하게 뭉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두 지방에서 올라온 아젤란의 유력 귀족들이었다. 더러는 황도에 근거지를 둔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수장도 끼어 있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늘어난 자손들 때문에 줄어든 영지와 수입으로 인해 여러모로 입지가 좁아진 자들이었다. 그들의 면모를 하나하나 살피며 잠자코 듣고 있던 렉스가 냉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호오, 누가 보면 경들 모두가 이번에 한꺼번에 신관이 된 게 아닐까 착각하겠소. 아니면 신관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오?”

“폐하!”

나이든 신하 한 사람이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의 충직한 마음을 모르시는 건지요? 저희는 그저 우리 아젤란 제국의 안정과 발전을 원할 뿐 다른 마음을 품은 적은 결코 없습니다.”

“맞습니다. 저희의 순수한 충정을 곡해하지 마십시오.”

렉스의 입가가 좀 더 양쪽 귀에 바싹 붙었다.

“정말 다른 마음을 품은 적이 없단 말이오?”

그의 입과 함께 양 눈매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절대 웃는 표정이 아니었다.

“무슨 뜻인지요?”

“짐이 경들의 속내를 읽지 못해 가만히 듣고 있는 줄 아시오?”

“저희의 속내라니요?”

열띤 표정을 짓던 나이든 신하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경계하듯 몸을 움찔거리며 황제에게 되물었다.

“신탁대로 혼인하라고 주청하는 이들이 하나같이 영지와 사병을 늘리길 바라는 귀족 수장들이지 않소? 정복지를 그대들에게 영지로 나눠주지 않고 짐의 직할령으로 삼아 관료를 보내는 데 반대했던 사람들이군.”

“…….”

“짐의 직할령을 대폭 늘리는 사안을 막지 못했으니 석연찮은 대신관의 신탁에 편승해 나를 옭아매려는 수작이 아니던가?”

“폐하! 지나친 억측이십니다.”

“글쎄. 지나친 억측은 경들이 하는 것 아닌가?”

“억측이라니요?”

“신의 말씀을 들먹여 나를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 억측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런……! 폐하. 저희는 털끝만큼도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 아젤란의 미래와 존귀하신 황제 폐하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올린 의견입니다. 부디 잘 헤아려 현명한 선택을 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조금만 더 넓은 시각을 가지고 살펴보십시오. 신전과 신의 뜻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이 광대한 안드로스 대륙을 하나로 묶을 수 있겠습니까?”

젊은 귀족 가문의 수장들이 동조하며 연달아 의견을 내놓았다.

“물론 짐 또한 신의 뜻을 헤아리며 모든 정책을 펼쳐나갈 것이오. 하지만 이번 신탁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소.”

“폐하! 잘못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번 신탁만큼은 받아들이셔야 하는 겁니다.”

“어째서?”

그중 유난히 혈기 왕성해 보이는 붉은 머리의 젊은 귀족 하나가 목소리를 크게 냈다.

“아칸 왕국을 비롯해 취약한 입장에 처한 나라들은 지금 불안에 떨고 있을 겁니다. 자신들의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상황에서 폐하의 이번 선택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겠지요. 이미 안드로스 대륙 전체에 이 상황이 알려졌으니까요.”

그가 입이 마르는지 잠시 말을 쉬며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에게 황제 폐하께서 적어도 신의 뜻에 따르는 현명한 군주라는 인상을 심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약소국의 왕녀를 황후로 삼음으로써 그런 나라를 절대 무시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보여줄 필요도 있을 테고요.”

“누굴 바보로 아는가? 변변치 못한 나라의 황후를 맞아들여 내 권한을 더욱 약화시키려는 목적이겠지. 너무 강한 황후가 버티고 있으면 그대들에게 여러모로 껄끄러울 테니 말이오.”

“…….”

“그만하시오. 뭐라 그래도 짐은 엘시아 왕녀를 황후로 맞을 생각이 전혀 없소. 신께서 내게 직접 강림해 그런 말씀을 전한다 하더라도 따르지 않을 것이오.”

“폐하! 그런 불경한 말씀을!”

나이든 신하와 젊은 귀족 가문의 수장이 새파래진 얼굴로 동시에 외쳤다.

“됐소. 그 이야기는 이제 꺼내지 마시오. 짐의 반려는 짐이 스스로 택할 것이니.”

“그러실 순 없습니다. 폐하. 황후란 게 일반 여염집의 부인을 들이는 것과 같다고 여기시면 아니 되십니다.”

“그렇게 여기지 않으니 더 신중하게 택할 거란 말이오. 짐이 심사숙고해서.”

“폐하!”

“그만! 더 이상 신탁을 들먹이며 엘시아 왕녀를 황후로 삼으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소. 아니, 더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그 말씀은…….”

“말 그대로요. 이 시간 이후 내게 또다시 그 사안을 꺼내 드는 자가 있다면 불경한 생각을 가진 자로 생각하고 엄벌할 것이오.”

렉스가 그의 발밑에 도열한 이들을 싸늘하게 훑으며 마저 말했다.

“바로 반역죄로 말이오.”

“그런!”

“이만 조회를 끝마치겠소.”

렉스가 커다란 황금빛 옥좌에서 일어나자 단상 아래에 있던 신하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렉스는 잠시 더 그들을 노려본 후 저벅저벅 걸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좀 전까지 희미하게 올라가 있던 입술이 일자를 그리며 무겁게 내려앉았다. 미간에 잡힌 주름도 한층 깊게 파인 모습이었다. 그를 수행하기 위해 엘로드와 케일론이 즉시 뒤를 따랐다. 렉스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들에게 말을 건넸다.

“엘로드. 그대와 엘시아 왕녀와의 혼인령을 좀 앞당겨 내려야겠다.”

“예, 폐하.”

이어 바로 옆에 있는 마법사를 불렀다.

“케일론.”

“예.”

“왠지 에일린을 만나고 싶군. 너무 오랫동안 보지 못했어.”

“……예.”

“자리를 마련해 보시오.”

“자리라고 하시면?”

“내가 직접 찾아가 벌였던 일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소. 그런 뜻을 전달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

“스킬라 님!”

“어서 오세요. 엘시아 님. 많이 상심하셨나 봐요. 얼굴이 수척해지셨네요.”

엘시아가 파리한 안색으로 급히 스킬라를 찾아왔다. 전날 렉스가 내린 혼인령으로 인해 안절부절못하다 방을 박차고 나온 것이다. 스킬라가 반가워하며 그녀를 내실로 안내했다.

“당신도 들으셨죠? 스킬라 님. 글쎄 폐하께서 나와 캐드릭스 후작의 혼인령을 내리셨어요. 다음 달 바로 시행하라고…….”

“물론 나도 들었어요. 오늘 아침엔 그 결정에 항의하는 귀족과 신관들을 모두 붙잡아 감옥에 쳐넣었다던데.”

“그런……!”

엘시아가 입술을 깨물며 힘없이 몸을 의자 등에 기댔다.

“으…….”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요즘 계속 이 문제와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운 탓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짓까지 해가며 대신관을 유혹해서 벌인 일조차 아무런 성과가 없단 말인가? 이대로 망국의 공주 신세가 되어 엘로드의 아내로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요.”

“무슨 말씀이죠?”

“스킬라 님. 난 그냥 시시한 후작 부인으로 남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다고요.”

스킬라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떡하실 거죠?”

“당신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싶어요.”

흑룡의 화신인 공주가 붉게 타오르는 오렌지빛 눈동자를 빛냈다.

“결심이 선 건가요?”

“그래요. 한번 해 보고 싶어요.”

스킬라가 손을 내밀어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엘시아의 손을 꼭 감싸 잡았다. 순간 선득하리만큼 차가운 감촉이 느껴져 엘시아는 몸을 움찔거렸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었다. 금방 빼내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그 계획을 실행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죠? 혼인은 바로 다음 달인데 군대도 양성하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려면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단 빠를 거예요.”

“예? 어떻게?”

“전에도 얘기했듯이 마물을 잘 다루는 능력자가 드라코니아에 있어요. 마물들은 언제 어디서든 금방 활용할 수 있는 전투 인력이랍니다. 나머지 문제도 온 힘을 다해 준비하면 빠르게 거사를 일으킬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엘시아는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으나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계속 그러쥐고 있었더니 차갑기만 했던 그녀의 손에서 온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번처럼 가슴 한구석에 열기가 끓어오르며 용기가 샘솟았다.

“우리 같이 힘써 봐요. 엘시아 님. 내가 전력을 다해 도울게요.”

스킬라의 다정하고도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를 듣자 금세 마음이 안정되며 투지가 생겨났다.

“예. 고마워요. 그럼 스킬라 님을 믿고 나도 행동을 시작할게요. 본국에도 알리고요.”

“그래요. 맡겨줘요.”

***

그날 밤 스킬라는 모든 이들이 잠에 빠져든 시각을 틈타 드라코니아 왕국으로 향했다. 자신의 아비인 퀴리오스 왕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가는 동안 시녀인 백룡 알리샤의 순간 이동 마법을 이용했다. 저번에 히에무스의 마법에 당한 후 시도 때도 없이 몸을 침범해오는 한기와 줄곧 싸워야 했다. 다른 용이 남긴 드래곤 하트까지 구해서 지닌 터라 일상생활 정도는 인간형을 유지한 채로 거뜬히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마법을 쓰면 마나가 금방 바닥나 기력이 쇠해졌다. 다른 생물의 정신을 지배하는 마법은 마나 소비가 더 많기에 별 수 없이 시녀에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빠.”

미리 기별을 받은 퀴리오스 왕과 케레시아 왕후가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불도 밝히지 않은 어두운 방이었다. 모두 용의 몸이기에 암흑 속이라 해도 행동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오, 스킬라, 우리 공주! 어서 오너라. 이 아비가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단다.”

퀴리오스가 스킬라를 보자마자 와락 감싸 안으며 감격에 겨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느껴지는 딸의 차가운 체온에 얼어붙은 듯 행동을 멈췄다.

“이게 어찌 된 거냐? 스킬라. 네 몸이 왜 이렇게 차가운 거냐?”

“아빠, 그게…….”

스킬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서 말해라. 스킬라. 어쩌다가 이리된 거냐? 드래곤 하트를 원한 것도 이 때문이냐?”

스킬라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제 눈에 거슬리는 인간 여자가 하나 있어 좀 혼내줬더니 히에무스 님께서 제게 벌을 내리셨어요. 알고 보니 그분께서 아끼는 인간이었더군요.”

“뭐라고?”

그의 곁에 있던 케레시아 왕후가 황급히 딸의 몸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살펴봤다. 그리고 남편 못지않게 분노가 실린 목소리를 거칠게 내뱉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우리가 도운 게 얼마나 많은데 고작 그런 일로 이렇게 만든단 말이냐?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구나.”

으드득.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만큼 무시무시한 마찰음이 어두운 방안에 나직이 깔렸다. 퀴리오스가 어금니를 갈며 내는 소리였다.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다. 아무리 정령왕이라 해도 이런 짓까지 저지르고 무사할 줄 알았단 말인가? 용서하지 않겠다. 감히 이 퀴리오스의 딸을 건드리다니!”

케레시아 왕후도 딸과 똑같은 오렌지빛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묵혀둔 불만을 털어놓았다.

“난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았어요. 그 잘난 체하는 태도며 눈초리, 말투가 정말 싫었다고요. 발 벗고 도움을 준 우리 딸에게 이런 식으로 보답하다니, 너무 괘씸해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 당장 그놈을 찾아가 따질 테다.”

퀴리오스가 그때까지 붙들고 있던 스킬라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으스러지는 게 아닐까 염려가 될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내 몸을 돌려 순간이동 마법을 시전하려 하는데 스킬라가 급히 달려와 붙잡았다.

“잠깐만요. 아빠!”

“왜 그러느냐? 너도 함께 갈 테냐?”

스킬라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니에요. 아빠. 그냥 가서 따지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어쨌든 그분은 정령왕이잖아요. 정면으로 맞부딪혀서 좋을 게 없어요.”

“그럼 이대로 참고 있으란 말이냐? 안 돼. 그럴 순 없다! 직접 맞부딪히는 게 안 된다면 대자연 어머니께 고발해서라도 혼쭐을 내주고 말테다.”

“물론이죠. 참는 건 말이 안 되죠.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어요.”

“더 좋은 방법이라니?”

스킬라가 그의 손을 잡고 한쪽으로 이끌었다. 그곳은 퀴리오스 왕의 침실이었기에 거대한 침대가 안쪽 벽에 놓여 있었다. 그 앞으로 다가가 두 사람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전히 꼭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스킬라가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아빠. 아빠가 말씀하신 방법은 제가 생각해둔 방법을 먼저 시도한 후에 해 보는 게 좋겠어요.”

“그게 뭐냐?”

“히에무스 님을 제일 괴롭게 하는 방법은 바로 그 인간 여자를 혼내주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스킬라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말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꺼냈다.

“히에무스 님이 그 인간 여자를 사랑하신대요.”

“뭐?”

“인간 노릇을 하는 것도 그 여자와 함께 있기 위해서라더군요.”

“무슨 그런…….”

퀴리오스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입을 벌린 채 중얼거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그런 무심하고 냉혹한 존재가 누군가를, 그것도 인간 여자를 사랑한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전 히에무스 님을 좋아해요. 그분께 고백했지만 그 여자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제가 화가 나서 그 여자를 혼내 주려다 이런 벌을 받게 된 거고요.”

“스킬라…….”

“물론 제 잘못도 있는 것 알아요. 하지만 제가 이런 취급을 당할 만큼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보잘것없는 인간 하나를 혼내줬다고 절 이렇게 만들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그래, 그렇지. 약한 존재가 강한 존재에게 당하는 것이 자연계의 당연한 이치. 그걸 누가 탓할 수 있단 말이냐?”

“하지만 히에무스 님은 그런 건 상관하지 않고 오직 그 여자의 안위만 생각해서 절 벌준 거예요. 그만큼 그 여자를 좋아한다는 거겠죠. 그러니까 히에무스 님을 괴롭게 만들기 위해선 그 여자에게 손대는 방법이 훨씬 효과적이라고요.”

퀴리오스가 딸의 말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턱에 뭉쳐있는 수염을 몇 번 쓸었다.

“음. 그렇겠구나.”

“그 인간 여자에게 제가 직접 손을 쓰고 싶지는 않아요. 전 히에무스 님께 미움받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러니 다른 간접적인 수단을 써서 혼내주려고 해요.”

“간접적인 수단이라니?”

“군주가 될 만한 다른 인간을 움직여서 괴롭히면 어떨까 해요. 생각해둔 자가 있어요. 아칸 왕국의 왕녀인데 그녀를 이용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요.”

“뭐?”

그녀가 퀴리오스의 한쪽 팔을 다정하게 휘감으며 머리를 기댔다.

“아빠.”

“그, 그래. 스킬라. 내 딸아.”

“제 뜻대로 해주세요. 전 꼭 그 방법을 쓰고 싶어요. 그러려면 아빠가 도와주셔야 해요.”

퀴리오스가 굳은 표정으로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예? 부탁이에요. 아빠. 절 도와주세요.”

“…….”

조금 멀찍이 떨어져 서 있던 케레시아 왕후가 가까이 다가와 앞에 서서 말했다.

“뭘 망설이는 건가요? 여보. 까짓것 저질러 버려요. 하나밖에 없는 우리 딸이 원하잖아요?”

퀴리오스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으음…….”

용들은 시간이 참 많았다. 결과만 확실하다면 시간은 얼마가 들든 상관없었다.

“하긴, 전쟁만큼 흥미로운 것도 없지.”

어차피 인간 노릇을 하는 것도 심심해서 하는 것 아닌가? 인간들이 혼란에 휩싸여 허둥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이다. 한참 만에 퀴리오스가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좋다, 스킬라. 그리해 보자.”

“정말이죠? 아빠.”

“그래. 사실 네 말대로 간접적인 방법이 여러모로 낫긴 하지. 용이 직접 인간사에 개입하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또 네 기분이 그런 식으로 풀릴 수 있다면 이 아비는 언제든지 네 뜻대로 움직일 것이야.”

스킬라가 아비의 목에 팔을 휘감으며 와락 안겨들었다.

“고마워요. 아빠.”

퀴리오스가 부드러운 손길로 딸의 등을 토닥거려 주며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스킬라. 그런 방법을 쓰면 네 기분은 풀릴 수 있다지만 네 몸은 어찌하면 되는 것이냐? 계속 이대로 살 수는 없지 않겠느냐?”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당분간 좀 힘들겠지만 참고 견디면 이것도 해결될 테니까요.”

“어떻게 말이냐?”

“그 인간 여자를 제거하고 나면 히에무스 님도 절 바라보게 되실 거예요. 그때 그분께 마법을 거둬달라고 부탁하면 될 테니까요.”

“그렇구나. 하긴 마법에 당한 병은 그 시전자가 마법을 거두는 방법밖에는 없겠지.”

찌푸린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케레시아 왕후가 스킬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자신 있는 거냐? 스킬라. 겨울의 정령왕의 마음을 차지하는 거.”

스킬라가 그녀를 바라보며 힘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이죠. 그 여자만 없다면 분명 제게 승산이 있어요.”

“그래. 이 엄마도 널 응원하마. 그 정령왕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 딸이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거니까.”

“감사드려요. 엄마, 아빠.”

스킬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케레시아 왕후에게 달려가 안겼다. 퀴리오스도 벌떡 일어나 얼싸안은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가 둘의 몸을 쓰다듬었다.

“그래. 하나밖에 없는 우리 딸이 원한 거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해주마. 설령 정령왕과 싸워야 하는 일이 생긴다 해도 기꺼이 나서줄 거야.”

“그렇고말고요. 이후에 혹 그자가 스킬라를 거절한다면 그땐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아무리 정령왕이라 해도 우리 용들을 무시하다간 큰 코 다칠 거라고요.”

퀴리오스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맞장구쳤다.

“그럼. 우리 용들은 육체를 가진 존재 중에서 가장 강한 위치이지 않던가? 바보같이 당하고 있을 순 없지.”

세 용이 미소 띤 낯빛으로 서로 손을 맞잡고 바라봤다. 참 든든했다.

***

간만에 라피스 궁 앞뜰에 분주한 움직임이 가득했다. 황제의 행차 준비를 위해 수행인들이 행렬을 정비하고 있었던 참이다. 대규모라 할 수는 없었지만 기사단과 마법사들이 수십 명이 됐다. 오늘은 특히 그 어느 때보다도 마법사 무리가 눈에 띄게 많았다. 거의 10여 명이나 각자 탈 말과 함께 대기한 모습이었다. 그 무리를 이끄는 자는 물론 대마법사 케일론이었다. 아직 황제가 나오지 않은 탓에 출발이 지연되는 중이었다. 맨 앞에 선 헬무트 경이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연신 하품을 해대는데 케일론이 불쑥 말을 건넸다.

“헬무트 경.”

“합! 예, 옛! 케일론 님.”

설마 하품하는 걸로 뭐라 지적하려는 건 아니겠지? 중년 마법사가 머쓱해진 얼굴로 돌아봤다. 케일론이 품속을 뒤적이며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혹시 이런 걸 보신 적이 있습니까?”

크리스털 재질로 된 작은 약병이었다. 안에 채워진 붉은 빛의 액체가 살아있는 듯 어른거리는 게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헬무트가 눈을 크게 뜨며 손에 받아들었다.

“글쎄요. 마법약인 것 같은데…… 특이하군요. 저도 이런 건 본 적이 없습니다.”

“역시 모르시는군요.”

헬무트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병을 이리저리 굴리는데 케일론의 손이 휙 뻗어오더니 도로 가져가 버렸다. 왠지 아쉬운 기분이 들어 따지듯 물었다.

“어디서 난 것인지요? 마치 불이라도 붙은 듯 꿈틀거리는 빛이 위협적으로 보이는데. 독약인 것 같기도 하고요.”

“출처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마법상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물어봐도 아는 이가 없더군요.”

케일론이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약병을 다시 품 안에 깊숙이 넣어버렸다. 더는 물어보지 말라는 신호일 것이다. 헬무트는 무척 궁금했으나 호기심을 누르며 말을 붙였다.

“오늘 행차는 라케르타 공작의 성으로 향할 거라던데 무슨 일로 마법사를 이렇게 많이 동원한 것일까요?”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폐하의 명에 따라 준비했을 뿐이니까.”

말도 안 되는 대답이다. 대마법사 케일론조차 모른다면 도대체 누가 안단 말인가? 헬무트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별수 없이 낮게 말했다.

“그러시군요.”

케일론이 잠시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 다시 품속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냈다. 헬무트에게도 익숙한 물건. 정령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마법약이었다. 이제 정말 바닥이 보일 만큼 얼마 남지 않았는데 케일론이 뚜껑을 열어 눈꺼풀에 바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웬일로 아끼시는 그 약을 바르시는 겁니까? 루쿨루스 숲에 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

이번에도 아무 말이 없다. 헬무트는 겸연쩍은 기분에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흠, 흠.”

잠시 눈알을 굴리며 따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마침내 황제가 엘로드와 시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오는 광경이 보였다. 도열한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맞이했다.

“폐하. 조금 서두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음.”

케일론의 재촉에 렉스가 짧게 답하며 자신의 애마인 흑마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탔다. 말 위에 앉아 문득 함께 갈 수행인들의 면모를 확인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조금 벌게진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마법사와 함께 데려갈 예정이었던 신관이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황도 카르디아에 있는 열두 개 신전에서 나름의 압박을 계속 해오는 중이었다. 황제가 고집을 버리고 신탁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들도 행동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 행동이란 게 고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지만 일단 렉스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데는 성공한 듯 보였다.

“출발하라.”

렉스의 한마디에 수많은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라케르타 공작이 머무는 하레나 성이었다.

***

“공작 저하. 황제 폐하의 행차가 곧 당도할 것 같습니다. 슬슬 나가 보시지요.”

디아누스 집사가 회의실로 들어와 용의 화신답게 평소와 같은 차분한 목소리로 알렸다. 히에무스를 위시해 식솔 대부분이 모처럼 한데 모여 있던 참이었다. 다만 웬일인지 에일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알겠소. 곧 가도록 하겠소.”

히에무스가 딱딱한 어투로 응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저택 앞까지 천천히 다가온 황제 일행이 말에서 내려서자 히에무스와 브로미오스가 속히 예를 올렸다.

“제국의 태양 레오나드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아벨라의 찬란한 광휘가 늘 함께 하시기를.”

“그대들에게도 아벨라의 자비로운 축복이 머물기를.”

틀에 박힌 인사를 주고받자 히에무스가 허리를 바로 세웠다.

“제 성까지 와 주시다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한데 어인 일이신지요?”

“미리 보낸 서신에서도 언급했듯이 루쿨루스 영애의 몸이 좋지 않다고 해서 와본 것이오. 늘 건강했는데 그대의 성에 온 후로 나빠졌다고 하니 걱정되지 않겠소? 이곳에서 제대로 보살핌을 못 받는 게 아닌지 염려가 돼서 말이오.”

렉스가 입꼬리를 비틀리듯 끌어올렸다. 히에무스 역시 엷은 미소 비슷한 표정을 띤 채 말을 이었다.

“그러시군요. 뭐, 염려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

“제 성에 오기 전에 얻은 상처로 인한 것이니까요. 그 상처를 입힌 사람이라면 당연히 신경 쓰이겠지요.”

“……!”

둘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시퍼렇게 얼어붙은 채 서로를 쏘아보는 기세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서늘했다. 지켜보던 브로미오스가 싱긋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추운 날씨에 계속 밖에 서 계시면 옥체가 상할 겁니다. 안으로 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폐하.”

렉스가 고개를 휙 돌리며 히에무스를 무시하듯 지나치며 안으로 성큼성큼 발을 들였다. 왠지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 좀 전의 눈싸움에서 순간이지만 히에무스의 시선에 주눅이 들어 움찔거렸다. 애써 그 느낌을 무시하고 더욱 발걸음을 서둘렀다. 호화로운 접견실에서 차를 한잔 대접받자마자 렉스가 재촉했다.

“그만 에일린을 보고 싶소.”

맞은편 자리에 앉아 함께 찻잔을 기울이던 히에무스의 눈가에 짧은 경련이 일었다.

“사람을 시켜 불러오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소. 몸이 불편하다고 하니 짐이 직접 가는 게 옳겠지. 치유마법을 행할 우수한 마법사들도 데려왔으니 함께 가 보도록 하겠소.”

“불필요한 일을 하셨군요, 폐하. 치유마법은 이미 충분히 행했습니다. 제가 바로 마법사니까요.”

“글쎄. 세간에 요란하게 떠도는 소문을 듣긴 했으나 공의 솜씨를 짐이 직접 본 게 아니지 않소? 하니 마냥 신뢰하긴 무리겠지.”

“우수한 마법사라…….”

히에무스가 고개를 들어 한쪽에 서 있는 케일론과 헬무트를 바라보며 가소롭다는 듯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풋, 그러십니까? 뜻대로 하십시오.”

케일론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기분이 정말 더러웠다.

***

렉스가 히에무스의 안내를 받으며 두 마법사를 대동하고 3층에 있는 에일린의 방으로 갔다. 노크한 후 안으로 들어서자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서 있는 에일린이 눈에 들어왔다.

“에일린.”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부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며 목이 꽉 멨다. 역시 그의 심장을 이런 식으로 뛰게 하는 이는 그녀뿐이었다. 아마도 ‘애틋함’이나 ‘그리움’이라 일컫는 감정이리라. 그래, 에일린밖에는 없어. 이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은.

“폐하.”

에일린이 경직된 자세로 치맛자락을 붙들고 무릎을 굽히는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렉스는 즉시 다가가 그녀의 팔을 가볍게 잡아 일으켜 세웠다.

“몸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어떠냐? 많이 아픈 것이냐?”

렉스는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능청스럽게 물었다. 껄끄러운 순간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기에.

“내가 궁정 마법사 외에 치유마법에 일가견이 있는 뛰어난 마법사들을 많이 데려왔단다. 그들의 처치를 받는다면 한결 회복에 도움이 될 거야. 에일린.”

평소 그는 집요하리만큼 작은 실수나 사소한 잘못도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에일린과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있으면 그러고 싶었다. 굳이 그의 지난 잘못을 되짚으며 치부를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원래 몸이 아픈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럼 마음이 아팠다는 것인가? 그냥은 지나가지 않겠다는 거겠지. 렉스는 마음이 무거웠지만 억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구나. 화가 풀리지 않은 것이군. 내 사과를 들으면 좀 나아질까?”

“그건…….”

렉스가 얼른 자신을 따라온 이들을 향해 일렀다.

“모두 자리를 좀 비켜주시오. 루쿨루스 양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히에무스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억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케일론이 유심히 그를 살폈다. 그가 한 손을 작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곁에 조그만 하급정령 셋이 모습을 드러냈다. 항상 에일린 주위에 있던 겨울의 정령이 분명했다. 그들이 휙 날아올라 에일린을 호위하듯 접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케일론은 저도 모르게 크게 떠지는 눈꺼풀을 숨기기 위해 급히 고개를 숙인 채 문밖으로 나갔다. 이로써 증거 하나를 더 모은 셈이다. 라케르타 공작이 겨울의 정령왕인 게 아닐까 하는 증거. 소환을 위한 마법 주문 하나 외지 않고 정령을 부르다니 보통 인간 마법사라면 불가능할 터. 다만 한 가지, 정령이라면 어째서 인간과 똑같은 육체 조건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풀지는 못했지만.

‘정령들만의 특별한 마법이라도 쓴 거 아닐까?’

이런저런 추측에 케일론은 머리가 복잡해져 이맛살에 힘을 줬다. 다들 물러가고 방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자 렉스가 담아뒀던 용건을 꺼냈다.

“에일린. 그 일은…… 도적들을 동원했던 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구나. 하지만 그대를 사랑하는 맘이 너무나 컸기에 벌인 일이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

에일린은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그녀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미묘하게 예전보다 멀어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네 화가 풀릴까?”

황제로서 정말 하기 힘든 말을 입 밖에 내기로 마음먹었다.

“용서해다오, 에일린.”

마침내 에일린이 그를 바라봤다. 꽉 닫힌 조가비처럼 열릴 것 같지 않던 입술이 벌어졌다.

“폐하. 그 세 정령은 제게 정말 소중한 존재였어요. 마치 가족과도 같은 이들이었다고요. 그런데 제 환심을 사겠다고 그들을 죽이려고 하셨다니.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그래. 미안했다. 그대의 마음을 몰라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 하지만 나도 그때 일을 반성하고 있으니 부디 용서해주지 않겠느냐? 더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마.”

잠시 뜸을 들이다 한마디 덧붙였다.

“약속할게. 다시는 네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

“…….”

“에일린, 제발.”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재차 애원하듯 말했다. 에일린이 계속 굳은 얼굴로 또다시 입을 꼭 닫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왠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떻게 하면 용서를 해줄까? 내가 어떻게 하면…….”

마침내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눈을 응시했다.

“알겠어요. 이미 지난 일이고 정령들도 무사하니 저도 더는 거론하지 않겠어요.”

“정말이냐?”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렉스가 커다란 웃음을 머금었다. 넘쳐나는 기쁨에 에일린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에일린이 잡힌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슬그머니 빼냈다.

“예. 하지만 한 가지 청을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폐하.”

“그래. 어서 말해 봐라. 뭐든 들어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그럼 앞으로 제가 계속 이 성에서 사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여기서…… 살고 싶다고?”

“예.”

렉스의 두근거리던 심장이 쿵쿵거리며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왜지?”

“앞으로 공작님과 함께 살고 싶어서예요.”

요동치던 심장이 사정없이 그의 가슴 깊숙한 곳을 푹 찔렀다.

“뭐라고?”

“그분을 사랑하게 됐어요.”

“……!”

뼛속까지 후벼 파인 듯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을 찌르르 관통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