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굳게 잡은 두 손
엘시아는 다과회 참석을 위해 스킬라 공주의 처소로 향했다. 공주로서의 위엄을 보여주고자 그녀의 시녀를 모두 거느리고 값비싼 꽃과 선물까지 조금 무리해서 마련해 갔다.
“어서 오세요. 엘시아 공주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스킬라 공주님.”
스킬라가 얼마 전에 봤던 것과 다르게 눈에 띄게 건강하고 화사해 보이는 얼굴로 맞이해 주었다.
“저야말로 감사드려요. 이렇게 제 초대에 응해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안색이 좋아지셨는데 이제 몸은 괜찮으신가요?”
형식적인 안부 인사에 스킬라가 야릇한 미소로 대꾸했다.
“물론이에요. 완전히 건강해졌답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예요.”
“다행이군요. 걱정했는데.”
방 안에 들어서 보니 부유함으로 이름 높은 드라코니아 공주의 거처답게 온갖 진귀한 장식과 물품들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엘시아는 잠시 그 방의 압도적인 호화로움에 주눅 들어 멍한 표정으로 둘러보다가 겨우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저기,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데 어찌 된 거죠? 약속 시간이 다 된 것 같은데.”
스킬라의 오렌지 빛 눈동자가 밝아지며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후후, 다른 이들은 없답니다. 오늘은 오직 엘시아 공주님만 초대했으니까요.”
“예? 저만 초대했다고요?”
스킬라가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고 다과상이 차려진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래요. 공주님과 단둘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며 우정을 쌓고 싶어서요. 혹시 부담스러우신가요?”
의아한 표정을 짓던 엘시아가 즉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천만에요. 잘됐네요. 저도 스킬라 공주님과 많이 친해지고 싶었는데.”
“어머, 그래요? 우리 둘의 뜻이 서로 통한 모양이군요.”
“그러게요.”
스킬라가 권한 의자에 앉으며 엘시아도 준비해온 선물을 내밀었다. 화려한 장미꽃다발과 오렌지 빛이 도는 호박석이 박힌 브로치였다.
“약소하지만 제 성의예요. 받아주시면 좋겠어요.”
“어머나, 정말 멋지군요. 고마워요. 하지만 다음에 오실 땐 부담 없이 그냥 오도록 하세요.”
“그럴게요. 오늘은 나름 첫 방문이라 신경을 써본 거랍니다. 공주님의 오렌지 빛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골라본 거예요.”
“정말 세심하기도 하셔라. 마음에 들어요. 참으로 안목이 뛰어나시군요.”
스킬라가 진정 감동한 듯 연신 찬탄을 내지르며 감사 인사를 퍼부었다. 이어지는 다과회에서도 변방 소국의 공주인 엘시아가 여태 접해보지 못했던 진귀한 차와 과자, 과일 등이 황금 접시에 놓인 채 끊임없이 나왔다. 지금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다과회를 경험해 보지 못한 터라 속으로 시샘 어린 감탄을 계속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스킬라는 엘시아를 전혀 무시하거나 우쭐대지 않고 계속 그녀의 미모와 안목 등을 칭찬하기에 바빴다. 헤어질 때는 그녀 역시 선물을 들려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언제든 또 놀러 오세요. 엘시아 공주님. 오늘 함께한 시간이 얼마나 유익하고 즐거웠는지 모르겠네요. 공주님은 어떠셨나요?”
“저도 참 좋은 시간이었어요. 또 놀러 올게요.”
“그래요. 아, 괜찮으시다면 내일 함께 식사하시겠어요? 저는 드라코니아인 요리사를 데려와서 가끔 드라코니아식 식사를 한답니다. 공주님께도 한 번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어떠세요?”
“그럴게요.”
엘시아는 스킬라에게 상당한 흥미를 느꼈다. 흥겨운 기분으로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 그녀가 준 선물 상자를 열어보았다. 진귀한 과자나 차 종류가 들어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사파이어로 된 보석 세트였다. 매우 섬세한 세공이 돋보이는 드라코니아산 보석 세트. 유려한 글씨체로 써진 메모가 함께 놓여있었다.
-엘시아 공주님의 그윽한 바다 빛 눈동자와 너무나 잘 어울릴 것 같아 준비해 보았답니다. 우리의 우정이 더욱 깊어지길 바라면서요.-
스킬라 공주에 대한 흥미가 단번에 호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
며칠 후 라피스 궁에 있는 알현실에서 조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늘 열리는 조회에 황제가 한동안 참석하지 않았다. 그 날에야 겨우 모습을 드러낸 탓에 처리해야 하는 업무와 보고, 알현 대기자들이 넘쳐났다.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눈에 띄게 경직된 표정으로 일을 처리하던 황제가 직접 안건을 하나 내놓았다.
“탈렌 경.”
“예, 폐하.”
“앞으로 3년 동안 제 3신전에 보내는 지원금을 반으로 줄이도록 하시오. 그리고 그 신전에 속해 있는 1등 신관 이디오마를 2등 신관으로 강등하도록 조처하고.”
재무대신 일을 맡고 있는 쉰 살 정도로 보이는 탈렌 후작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무슨 연유이신지요? 갑자기 그런 조처를 취한다면 신전 측에서 반발이 클 것입니다.”
렉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1등 신관 이디오마를 개인 자문역으로 기용했다가 낭패만 당했소. 자격이 의심스럽더군. 그런 자를 1등 신관으로 두고 있는 제 3신전 역시 기준미달일 게 뻔할 것이오.”
“황송하오나 폐하. 개인적인 감정으로 처리하실 일이 아닌 듯 싶습니다. 좀 더 냉정하게 심사를 진행하신 후 단행하심이…….”
“그럼 심사를 진행하시오. 신전에 대해선 감사를 단행하면 되겠군. 누군가의 제보가 있어 진행하는 거라 하면 되겠지. 바로 짐말이오. 집요하게, 아주 철저하게 이중 삼중으로 털 수 있는 먼지를 죄다 털어 낱낱이, 남김없이 조사하시오.”
칼날이 선 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사흘! 아니 이틀을 주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력을 동원해서 일을 신속하게 마무리 짓도록.”
“알겠습니다.”
“그만 나가서 즉시 이 일부터 시행하시오.”
잔뜩 얼어붙은 재무대신이 얼른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황제의 분노가 심상치 않았다. 여간해선 평정심을 잃지 않는 성정인데 요 며칠 온몸에 가시가 돋은 듯 뾰족하게 굴고 있었다. 누구든 조금이라도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것처럼 심기가 좋지 않아 보였다. 그 신관이 아주 큰 죄를 지은 게 틀림없었다. 재무대신은 한숨을 쉬며 지시받은 일을 하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물러가는 재무 대신을 노려보던 렉스가 다음 일을 처리하기 위해 궁정 서기장을 바라봤다. 노련해 보이는 중년의 관료가 매우 공손한 태도로 즉시 다음 안건을 내밀었다.
“제 1신전에서 신관이 나오셨습니다.”
신관이라는 말에 렉스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신관? 저번에 엘시아 왕녀의 머리카락을 자라나게 했던 일에 대한 해명을 하러 온 건가?”
“그런 것 같긴 합니다만. 며칠째 알현을 요청했는데 폐하께서 경황이 없으셨던 터라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래? 무슨 말을 하는 지 한 번 들어 봐야겠군. 들라 하시오.”
“그런데 그 신관이…….”
“뭐가 문젠가?”
“대신관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뭐?”
대리인을 보내 설명하면 될 일을 직접 왔다고? 그것도 며칠째 헛걸음을 해 가면서? 아주 중차대한 일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없었다. 무슨 폭탄선언을 하려고 그러는 걸까? 렉스는 물론이고 그 자리에 모인 신하들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모시도록 하라.”
“예.”
넓은, 광활한 느낌마저 들만큼 드넓게 펼쳐진 공간에 무거운 침묵과 긴장감이 짙게 감돌았다. 이어 옷자락이 펄럭이며 스치는 소리와 함께 대신관이 걸어 들어왔다.
텅. 텅. 텅.
눈부신 빛으로 감싸인 긴 금빛 지팡이를 앞세울 때마다 나는 소리가 묘한 장단을 만들었다. 금빛과 은빛의 자수, 자잘한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새하얀 로브를 걸친 채 열두 명에 이르는 신관을 뒤에 거느리며 다가오는 대신관의 모습이 어느 왕국 군주의 행차 못지않게 장엄해 보였다. 홀 양쪽에 시립해 있던 신하들이 저마다 다소곳하게 허리를 숙이며 나름의 경의를 보냈다. 황제 다음으로 존귀하다고 일컬어지는 존재였기에. 아니, 과거 어느 한때에는 황제보다도 더 높은 존재로 인식되기도 했었다. 이자야말로 신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으니까.
“제국의 태양, 레오나드 황제께 인사 올리나이다. 아벨라 여신의 자애로운 광휘가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맑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묵직하게 흘러나오자 렉스는 저도 모르게 그 기세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최대한 담담한 음성으로 응대했다.
“어서 오시오. 대신관. 어인 일로 이렇게 아침부터 오셨소?”
“제가 폐하께서 계신 황궁으로 직접 올 때에는 한 가지 일밖에 없지 않습니까?”
스무고개라도 하자는 걸까?
“한 가지 일밖에 없다니? 그게 뭔지 잘 모르겠소만.”
렉스가 진정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제가 이렇게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여러 번 걸음 할 때는 오직 한 가지 일뿐입니다. 바로 폐하와 우리 아젤란 제국, 나아가서는 이 안드로스 대륙의 안위에 영향을 끼치는 중대한 일말입니다.”
“제국과 대륙의 안위에 관련된 중대한 일이라……. 그래, 그게 뭐란 말이오?”
“위대한 여신의 미천한 종인 저의 일은 오직 하나. 신의 말씀을 전해드리는 일이지요.”
또 이런 케케묵은 방식을 꺼내 드는 건가? 언제나 저 말을 꺼내며 이런저런 간섭을 해대는 게 일이지. 하지만 어림없다. 그런 낡은 방식에 휘둘릴 자신이 아니다.
“이런, 내 예상이 틀렸구려. 난 또 대신관께서 얼마 전에 엘시아 왕녀의 머리카락을 자라게 한 일을 해명하러 온 줄 알았는데. 그건 얼렁뚱땅 넘어가실 작정이시오?”
다소 비아냥거리는 말이었지만 대신관은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오늘 말씀드릴 신탁도 그분의 일과 무관하지 않으니 폐하의 예상이 모두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렉스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건 또 무슨 수법인가?
“호, 그렇소? 무슨 신탁이기에 그런 것이오?”
대신관 로드미오가 중대한 발표를 하려는 듯 몸을 곧추세웠다. 그렇지 않아도 키가 큰 그가 몸을 쭉 펴니 산처럼 우뚝해 보였다. 늘어서 있던 신하들 몇은 짐짓 주눅 든 표정을 지었다. 또 더러는 대신관이 뿜어내는 특별한 위엄과 신성함에 감탄하는 얼굴이었다. 개개인의 기색이 어떻든 모두의 시선이 한 치의 예외도 없이 기대감을 안은 채 대신관을 향해 모여들었다. 그가 준엄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지난 7일간 저는 우리 아젤란 제국의 평화와 폐하의 안위를 기원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마지막 날 신께서 내리신 신탁을 받게 되었지요.”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좌중의 시선을 휘 둘러보며 분위기를 살폈다. 이내 남은 말을 쏟아냈다.
“아벨라 여신께오서 아직도 혼자 된 몸으로 외롭게 지존의 자리를 지키고 계신 폐하를 위해 직접 반려를 정해 주셨습니다.”
“……!”
침묵으로 가라앉아 있던 알현실의 공기가 금방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렉스는 대신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 황당하게 느껴져 순간 놀랐지만 곧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호오, 그렇소? 그래, 신께서 정하신 내 반려가 도대체 누구랍니까?”
다시 일대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번들거리는 시선이 한데 모였다. 대신관 로드미오가 쥐고 있던 금빛 지팡이를 한 번 치켜 올렸다가 바닥을 향해 찧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넓은 알현실에 금빛 찬란한 광채로 이루어진 파동이 크게 퍼져 나갔다. 신성력을 담은 움직임이었다. 그 신비로운 광경에 렉스는 몸을 움찔거렸다.
“그분은 바로 유서 깊은 아칸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이신 엘시아 왕녀이십니다.”
“뭐라고?!”
“반드시 그분을 황후로 맞이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 아젤란 제국, 나아가서는 이 안드로스 대륙 전체의 평화와 번영이 보장될 것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제 뜻이 아닙니다. 여신께서 그리 정하신 일입니다. 폐하께선 신의 뜻에 따르셔야 할 것입니다.”
“헛소리! 그런 신탁이 내려질 리 있겠소?”
“신의 말씀을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제 능력을 의심하시는 것인지요? 명심하소서. 신성한 신의 뜻을 거역하신다면 우리 아젤란 제국과 폐하의 미래엔 오직 비참한 파국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
알현실을 나온 렉스는 눈에 띄게 바쁜 걸음으로 저벅저벅 내실로 향했다.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마다 노기를 띠고 있었다. 엘로드를 비롯한 그를 따르는 수행인들이 보폭을 맞추느라 잰걸음으로 애를 써야 할 지경이었다.
“대신관이 노망이라도 든 것 아닌가?”
렉스가 유일하게 그의 속도를 따라붙은 엘로드에게 시선을 보내며 푸념을 토로했다. 엘로드 역시 오늘 중앙 홀에서 들은 대신관의 선언에 상당한 충격을 받아 반쯤 혼이 나간 상태였다. 당혹스러움과 절망감, 밀려드는 걱정으로 인해 평정을 찾기 힘들었다.
“하, 하지만 여신의 뜻이라고 하잖습니까?”
젠장, 말까지 더듬거리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자신의 결혼은 어떻게 되는 걸까?
“걱정할 것 없어. 엘로드 경. 짐이 엘시아 왕녀와 혼인하는 일 같은 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폐하…….”
“어림도 없지. 이 내가 그따위 늙은이의 뜻에 따라 좌지우지될 것 같은가? 얼토당토않은 신의 뜻을 앞세워 내 기세를 누를 속셈이겠지만 가만히 당하고 있을 내가 아냐.”
내뱉는 말 한마디마다 시퍼런 분노와 고집스러운 다짐이 담겨 있었다. 명백한 도발이다. 신전 세력이 황권에 정면 도전을 해온 것이다. 대륙의 통일 전쟁을 할 때에 얌전히 엎드리고 있다 이제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인가? 신전 세력의 협조 없이 이 광대한 대륙의 질서를 정립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니,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안드로스 대륙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구심점 역할을 신전이 앞장서서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너무 일러.”
제 몫을 주장하기엔 너무 이르다. 이제 시작인데 분열을 꾀하겠다는 건가?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신전의 입장에선 매우 좋은 기회일 수도 있겠지. 제 잇속만 계산한다면.
‘너구리같은 놈들!’
신전이란 토굴 속에 모여 사는 몰염치한 존재들. 우두머리격인 대신관 로드미오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음흉하고 치사한 작자다. 렉스가 어렸을 때 심한 열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의 모후가 신전에 치유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었다. 황제의 총애를 잃고 유폐되다시피 한 황후의 요청 따위는 그 약삭빠른 늙은이에겐 고려할만한 일말의 가치도 없는 일에 속했을 것이다.
‘그때 거의 죽을 뻔했지.’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우며 그의 어머니가 간호했지만 병세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참다못한 어머니가 마법사 케일론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사정했었다. 그자는 기꺼이 그를 고쳐주었다. 물론 막대한 재물을 대가로 받아가긴 했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재물 앞에서도 움직이지 않았었다.
‘케일론 덕분에 살아남은 것인가?’
문득 든 생각에 렉스는 걸음을 멈추고 조금 떨어진 채 따르는 리히트 경을 돌아봤다.
“케일론, 마법사는 아직 입궁하지 않았나?”
젊은 시종장이 재빨리 대꾸했다.
“헬무트 경은 오셨습니다만 대마법사께선 며칠 휴무를 요청하셨습니다.”
“…….”
렉스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에일린을 찾으러 간 것일 테지. 벌써 며칠째 그러고 있으니까. 자신 역시 어제까진 함께 수색에 동참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가 입궁하는 대로 에일린을 찾으러 가라는 지시를 내릴 생각이었는데.
‘그 새를 참지 못하고 간 것인가? 에일린이 그의 성에서 지내는 동안 꽤 깊이 정이 든 모양이군.’
뭐, 남자를 좋아하는 취향이라고 했으니 남녀 간에 생기는 정은 아닐 테지만 나름 유대가 강했던 것 같다. 그가 지금까지 지켜봤던 케일론의 모습과는 전혀 달라 신선한 느낌마저 들었다. 여태 누군가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하하, 지금의 나 역시 마찬가진가?”
무심코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황제의 몸으로 평민 여자 하나 찾겠다고 며칠씩이나 자리를 비우며 돌아다니지 않았던가.
“폐하?”
엘로드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어 리히트 시종장도 조심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이제 어떡하실 것인지요? 폐하. 오늘도 수색을 나갈 예정이신지요? 채비할까요?”
“…….”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었다. 그도 직접 에일린을 찾으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 일에만 매달릴 수는 없겠지. 자신은 이 아젤란 제국의 황제니까. 조금의 틈만 보여도 달려들어 물어뜯으려는 온갖 야수 같은 무리가 사방에 포진하고 있었다. 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아니, 밀린 업무를 보겠다. 집무실로 가자.”
“예.”
다시 발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이제 에일린을 찾는 일은 케일론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자만큼 적임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이 컸다.
“하아.”
절로 힘이 빠지고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에일린, 도대체 어딜 간 것이냐?’
***
케일론은 순간이동 마법을 이용해 한 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궁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반짝이는 외관만큼은 절대 그에 뒤지지 않을 만큼 멋들어진 풍광을 자랑하는 곳, 하레나 성이었다.
“우와, 정말 근사합니다. 역시 케일론 님의 성과는 비교도 안 되는군요.”
동행한 브레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그가 별 생각 없이 한 말에 케일론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비교도 되지 않는단 말이냐? 겉만 번지르르할 뿐이지 별로 크지도 않은데? 속은 구릴지도 모르지.”
“그렇긴 합니다만 외관이 이 정도로 견고하고 훌륭하면 보나 마나 내부도 알찰 게 분명하겠지요. 솔직히 케일론 님의 성은 외부든 내부든 볼품이라고는 없지 않습니까? 당최 돈 들여서 꾸미는 법이 없으니까요.”
브레이가 눈치 없이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댔다.
“낡은 곳이 생기면 어찌어찌 보수만 할 뿐이잖아요.”
케일론이 지팡이로 그의 뒤통수를 딱 때리며 쏘아붙였다.
“아얏!”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어서 성문이나 열어달라고 해라.”
“예, 알겠습니다.”
브레이가 잠깐 억울한 듯 그를 바라보다 곧바로 성문 앞에 가서 소리쳤다.
“이보시오! 누구 없소!”
“누구냐!”
해자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성문 위 망루에서 보초를 서던 두 명의 하급기사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 분은 아젤란 제국의 궁정 마법사이신 케일론 아리스타 데 아스카니아 백작님이시오.”
“무슨 일이시오?”
“이 성의 주인이신 라케르타 공작님을 만나 뵈러 오셨소이다. 안에 계시면 좀 전해주시오.”
“잠깐 기다리시오.”
목청 좋은 한 하급기사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브레이가 다시 성의 외관을 죽 훑으며 말을 건넸다.
“어째서 이곳에 오신 겁니까? 에일린을 찾으러 가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혹 여기 와 있을 거라 생각하신 겁니까?”
케일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좀 더 일찍 들러야 했다. 이 나라에서 에일린과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는 자의 집을 먼저 찾아봤어야 했다. 라케르타 공작은 마지막으로 에일린이 만나고 싶어 하던 사람이기도 하고. 머리로는 그런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다.
‘이곳만큼은 오고 싶지 않았는데.’
에일린이 이 공작에게만큼은 오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케일론이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자였다. 그의 앞에 서면 언제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항상 껄끄러웠다. 게다가 그날 에일린이 사라질 때 목격했던 이상한 장면마저 마음에 걸렸다.
‘설마, 아닐 거야.’
케일론은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추측이었다.
‘그저 우연히 닮은 것뿐이겠지.’
겨울의 정령왕과 라케르타 공작이.
“들어오십시오!”
케일론이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하급기사의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그와 함께 둔중한 기계음이 울리더니 도개교가 서서히 내려왔다. 여전히 인상을 쓴 채 케일론이 몸을 움직였다. 정말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케일론이 브레이와 함께 성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커다란 덩치의 집사가 미리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정중한 태도로 안내하는 그를 따라 저택 안 접견실로 이동했다. 작은 왕국의 궁전에 갖춰진 알현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넓고 호화로운 공간이었다.
“이야, 와…….”
브레이가 연신 성 내부 모습의 미려함에 감탄을 퍼붓다 라케르타 공작의 모습을 보고는 그 탄성마저도 지르지 못했다. 그저 입만 벌리고 지켜볼 뿐이었다. 케일론이 눈총을 줬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는 마치 어느 소국의 왕처럼 정중앙 단상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있었다. 좌우에 하얀 머리를 지닌 두 남자가 서 있었다. 한쪽은 눈에 익은 공작의 보좌관이고, 다른 한쪽은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앳된 남자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년 시종이 자신을 쳐다보는 표정이 띠꺼워 보였다. 라케르타 공작이 케일론을 보자마자 물었다.
“무슨 일인가? 마법사.”
형식적인 인사마저도 할 겨를이 없게 만드는 응대였다. 퉁명스럽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행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위엄과 품위가 느껴지니 참 야릇한 노릇이었다. 케일론은 투덜거릴 틈도 없이 방문 목적을 말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의 집에서 지내던 에일린이라는 아가씨가 사라져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성에 있지 않습니까?”
케일론은 넘겨짚은 말을 던졌다. 저렇게 직설적으로 나오니 그도 군더더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공작의 서늘한 눈동자가 치켜 올라가더니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올라왔다. 지독하게 차갑기만 한, 저런 것도 미소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웃음 짓는 표정을 보니 알 것 같았다.
“이곳에 있는 거군요.”
“그렇다.”
케일론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에일린이 정말 이곳에 왔단 말인가? 가장 막막할 때 찾아올 곳이 여기였단 말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이자의 곁이……. 갑자기 이 방 안에 있던 공기가 희박해진 듯 가슴이 턱 막혔다.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안부도 묻고 조금 얘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공작이 즉답하지 않고 잠시 케일론의 얼굴을 바라봤다. 좀 전까지 그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냉소 대신 조금 번민하는 기색이 스쳤다.
“좋다.”
하얀 머리의 두 남자 중 시종인 듯 보이는 어린 남자에게 눈짓하자 그가 얼른 몸을 움직였다. 케일론은 새삼스럽게 라케르타 공작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에일린이 갑자기 나타난 신비한 빛 속으로 사라졌던 날 보았던 그 정령왕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분명 지금 눈앞에 있는 공작은 정령이 아니었다. 정령 특유의 빛도 없었고, 마나의 양도 일반 사람들보다는 많은 편이지만 정령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나 닮았다. 찰나의 순간 목격한 거였지만 그 모습이 뇌리에 깊이 박혔기에 잘못 기억할 리는 없었다.
“에일린이 힘을 소진한 하급정령을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그랬다만.”
“그들을 소생시켜주셨습니까?”
“그래. 그들의 왕에게 데려가서 살렸지.”
“정령왕에게 데려갔다니, 설마 그를 소환하는 능력이라도 지니고 계신 겁니까?”
케일론은 담담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으나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소 취조당하는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글쎄. 정령과 조금 통하는 사이라고 할까.”
“정령과 통하는 사이라. 그게 뭔지 참 궁금하군요. 순수하게 마법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이로군요.”
“그 호기심을 내가 직접 풀어줄 이유는 없다.”
“물론 그렇겠지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눈을 냉정하게 노려봤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좀 전에 자리를 떴던 어린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일린을 데려왔어요.”
케일론은 라케르타 공작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거둬 황급히 입구 쪽을 향했다. 정말 에일린이 서 있었다. 변함없는 모습을 한 채 그를 보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케일론 님.”
“어, 에일린! 정말 에일린이잖아?”
케일론의 옆에 있던 브레이가 눈에 띄게 반가워했다. 한동안 케일론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가만히 선 채 그녀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러다 멍한 표정을 지은 상태로 곧바로 그녀에게 휘적휘적 걸어갔다.
“에일린.”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우뚝 멈춰 서며 이름을 불렀다. 어딘가의 좁은 틈새에 꾹꾹 눌러 담아 놓은 것을 억지로 꺼낸 것 마냥 탁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반가움에 심장이 쿵쿵 울렸다. 그녀가 사라진 며칠 동안 타들어 갈 듯 마음을 바짝 졸였었다. 한번 꺼내고 나니 봇물 터지듯 뿜어져 나왔다. 그리움이란 감정이.
“에일린.”
그녀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에일린이 당혹스러워하다 곧 그의 몸을 천천히 밀어냈다. 그 역시 자신답지 않은 행동에 놀랐는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순순히 밀려났다.
“몸은 괜찮은 겁니까?”
“예.”
뭔가 그녀의 행동이 부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미묘하게 무언가가 변했다.
“라케르타 공작님께 여쭤보니 정령들도 회복됐다고 하던데 어째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겁니까?”
“그곳이 제집이던가요?”
집이라면 적어도 함께 사는 가족을 믿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의든 타의든 그렇게 파렴치한 행동에 동참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기 싫었다. 그런 사람들을 가족으로 여길 수가 없었다.
“그럼, 아니란 말입니까?”
“이젠 아닌 것 같아요.”
“갑자기 왜 그러는 거죠? 에일린.”
“우연히 저번에 제가 겪은 일의 전말을 듣게 됐거든요.”
“……!”
케일론은 순간 그의 등줄기에 뱀이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싸한 감각을 느꼈다. 알아버린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어떻게? 문득 접견장 끝 단상 위에 왕처럼 앉아있는 라케르타 공작을 힐끔 바라봤다. 서로 눈빛이 부딪혔다. 케일론을 향해 보내오는 서늘한 냉소와 함께 경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구나. 그날 자신의 성에 와서 상황을 살펴본 거구나.’
저자 정도의 실력자라면 자신의 집에 펼쳐진 결계 정도는 쉽게 뚫고 들어와 살펴볼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이대로 그녀를 보내주긴 싫었다. 그녀를 설득하고자 이어 내보낸 말이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지질했다.
“황제 폐하께서 지정해주신 곳이잖습니까? 폐하의 다른 명령이 없는 한 제 성이 그대의 집입니다.”
케일론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따위 말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전 이제부터 여기 머물 거예요. 황제폐하께도 그렇게 말씀드려 주세요. 제가 간절하게 원한다고요.”
“하지만 에일린!”
“부탁드릴게요.”
“…….”
케일론은 말문이 막혔다. 티 없이 맑은 마법석 같은 눈빛이 그를 향해 똑바로 꽂혀왔다. 뭐라고 계속 권유할 말이 없었다. 더 이상 말했다간 그녀가 또 어디로 사라져 버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알겠습니다. 폐하께 그리 보고하죠.”
차라리 행방이라도 파악하고 있는 편이 나았다. 어디 있는지 몰라 가슴 애태우는 나날을 보내기보다는.
“고맙습니다.”
에일린이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그만 나가달라는 뜻인가? 더는 얼굴을 대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일까?
“그럼 얘기가 다 끝난 것 같으니 이만 가 보도록. 마법사.”
라케르타 공작이 낮고 싸늘한 음성으로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케일론은 순간 콧잔등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반응 없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한마디 말이 튀어나왔다.
“에일린을 잘 보살펴 주십시오. 공작 저하.”
“물론. 하지만 이제 그대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가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에일린 쪽을 힐끗 쳐다본 후 그대로 몸을 돌려 접견실을 나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분명히 아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길을 잃은 듯 했다. 막막했다. 저자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시도해 봐야 할 것이다. 저자도 약점을 갖고 있을 테니.
“찾아올 거야.”
에일린을 다시 찾아올 것이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그의 모든 경험과 감이 일러주고 있었다. 어쩌면 저자는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분명해.”
여러모로 미심쩍은 자의 곁에 에일린을 계속 놔둘 수는 없었다.
***
“뭐라고? 라케르타 공작의 성에 있다고?”
황제 렉스가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있다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당장 데리고 왔어야지 어째서 그냥 두고 온 것인가?”
책상 맞은편에 서 있던 케일론에게 질책한 뒤 황급히 뒤쪽에 있던 시종에게 지시했다.
“리히트 경. 지금 곧 라케르타 공작의 성에 가 볼 것이니 채비해주시오.”
“예, 폐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막 발걸음을 떼는 시종을 돌아보며 케일론이 황급히 말렸다.
“그러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폐하.”
시종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렉스의 눈치를 살폈다.
“어째서지?”
“에일린이 알아버렸습니다.”
“알아버리다니, 뭘 말이오?”
케일론이 주저하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날 일 말입니다.”
“……!”
렉스의 얼굴에 험악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의심스러운지 케일론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질문했다.
“어떻게 알게 됐다는 거요? 설마, 경이 말해 준 건 아닐 테고?”
“그날 라케르타 공작과 함께 은신 마법을 쓴 채 집에 돌아왔다가 알게 된 것 같습니다. 헬무트 경과 그날 일에 대해 의견을 나눈 적이 있으니까요. 아마 그때 들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런, 제기랄.”
욕설을 내뱉은 렉스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올라왔다. 수치스러움 탓이리라. 입술을 깨물며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알게 됐다 하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절실해서 일으킨 소동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겠소?”
당혹스러운 마음을 애써 덮으며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다음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서 말이지.”
“에일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습니다. 지금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게 놔두는게 좋을 겁니다. 자꾸 밀어붙이면 되레 반발심을 갖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
이맛살을 있는 대로 찌푸린 채 렉스가 케일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주 본 두 사람이 마치 격한 언쟁이라도 치른 듯 긴 시간을 침묵으로 일관했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상태랄까? 황제와 케일론 사이에 어중간한 자세로 서 있던 시종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은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폐하. 행차 준비는 어찌할까요?”
“됐소. 없던 것으로 하시오.”
“예.”
책상에 기댄 채 집게손가락으로 턱을 문지르던 렉스가 한참 만에 케일론을 돌아보며 말을 꺼냈다.
“일단은 그냥 두는 것이 나을까?”
케일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말이오?”
“화가 풀릴 때까지지요.”
“음, 할 수 없지. 그러도록 하겠소.”
당분간이다. 절대로 계속 두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자의 곁에 있다간 마음을 빼앗겨버리는 건 순식간일 테니까.
“저, 폐하.”
집무실 구석에 돌기둥처럼 시립해 있던 나이든 시종장이 앞으로 나서며 불렀다.
“무슨 일이오?”
“카르디아에 있는 열두 개의 신전에서 보내온 독려 편지가 쌓였는데 보시겠습니까?”
“독려 편지라니?”
“그게 대신관님의 신탁에 따라야 한다는 내용의 호소문을 각 신전의 신관장들이 보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풋!”
렉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넓은 집무실 한쪽 벽에 자리 잡은 커다란 벽난로를 턱으로 가리켰다.
“몽땅 불쏘시개로 쓰면 될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
같은 날 오후, 아르겐 궁에 있는 스킬라 공주의 방이었다. 황도 카르디아에서 가장 유명한 포목점에서 나온 상인과 의상 제작 장인이 여러 가지 견본 목록을 선보이고 있었다. 온갖 고급 옷감들과 최신 유행하는 의상 디자인이 수록된 도감을 펼쳐 보이며 이런저런 의견과 조언이 오갔다. 그 자리엔 요즘 부쩍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은 엘시아 왕녀도 자리하고 있었다.
“와, 정말 멋진 드레스군요. 이렇게 질 좋은 천에 저런 값비싼 장식을 더한다니. 완성되면 진정 감탄이 나올 만큼 근사한 드레스가 나오겠군요.”
엘시아가 부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스킬라가 고른 드레스의 가격이 상상을 초월했다. 가장 저렴한 것도 1000골드에 달했다. 엘시아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호사스러운 수준이라 연신 감탄사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드레스를 한 벌도 아니고 서너 벌이나 한꺼번에 주문하는 중이었다.
‘역시 드라코니아 왕실이야.’
엘시아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함께 어울리는 동안 드라코니아 왕실의 부를 계속 실감하고 있었다. 그 나라의 공주인 스킬라가 참으로 부러웠다. 스킬라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엘시아 님도 몇 벌 선택하도록 하세요.”
엘시아도 그녀 말대로 하고 싶었으나 빠듯한 그녀의 재정 상태로선 참아야 했다. 그녀의 추종자들이 보낸 선물과 로드미오 대신관이 바친 자금이 약간 있었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비축해둬야 했다.
“저는…… 됐어요. 새 드레스가 급하지 않으니까요.”
“그러지 말고 골라 보세요. 제가 선물로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스킬라가 눈에 띄게 상냥해 보이는 웃음을 머금은 채 권했다. 엘시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선물로 주신다고요?”
“그래요. 새로 사귄 제 소중한 친구에게 그 정도 선물은 하고 싶거든요. 부디 사양 말고 받아주면 좋겠어요.”
“정말 친절하신 말씀이지만…….”
엘시아는 여전히 동그랗게 확장된 눈으로 일단 거절하는 시늉을 취해 보였다. 하지만 속으론 너무 기뻐서 심장이 벌렁거릴 지경이었다. 스킬라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엘시아의 두 손을 그러쥐며 사정하듯 말했다.
“부탁이에요. 부디 제 성의를 외면하지 말아 줘요. 친구에게 이 정도의 성의는 꼭 보여주고 싶으니까요. 그게 제 기쁨이랍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스킬라 님. 아시다시피 저는 이런 친절에 보답할 형편이 되지 않아서요.”
스킬라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선물에 보답이라니, 당치 않아요. 아니, 엘시아 님은 이미 제게 깊은 우정을 보여 주셨잖아요? 그걸로 충분해요. 이렇게 드레스를 함께 고르는 친구를 갖는 게 오랜 꿈이었어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더 거절하지 못하겠군요.”
엘시아가 환하게 웃으며 스킬라의 오렌지 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둘은 마주 보며 진정 만족스러운 눈빛을 교환했다. 잠시 후 스킬라 공주가 원한 대로 서로 드레스를 고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의상을 고르는 일이 완료되고 상인과 장인들을 돌려보낸 후 둘은 다시 호화스러운 티타임을 가졌다. 여전히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훌륭한 상차림에 엘시아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스킬라 공주와 함께 어울리는 요 며칠간이 정말 흡족했다.
“엘시아 님.”
어느새 둘 사이에 부르는 호칭도 단순해져 있었다. 스킬라가 그윽한 차향을 음미하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그녀를 불렀다. 왠지 은근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요즘 엘시아 님이 레오나드 황제 폐하의 반려로 점지 됐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데 사실인가요?”
“그건…….”
***
엘시아는 은 포크로 꿀에 절인 딸기를 한 알 찍어 입안에 넣던 참이었다. 제철에 딴 과일처럼 상큼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걸 다 씹어 삼킬 때까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로드미오 대신관 님이 그런 신탁을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의외로군요. 여태 황제의 반려에 대한 신탁 같은 건 없지 않았나요? 신탁이라면 주로 나라에 큰 위기가 왔을 때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려지는 게 다반사일 텐데요. 이번 건 무척 특이하군요.”
“글쎄요. 나라의 위기가 꼭 아젤란 제국에만 닥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 아칸 왕국 입장에선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위태로운 지경이라 할 수 있어요.”
스킬라가 들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뭐, 그렇죠. 어디 아칸 왕국뿐이겠어요? 아젤란에 복속한 다른 왕국들의 상황이 다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물론 드라코니아 왕국도 예외는 아니고요.”
엘시아가 살짝 눈가를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칸 왕국은 그보다도 더 좋지 않은 상황이랍니다.”
“더 좋지 않다니요?”
엘시아가 은 포크로 붉은 딸기 알을 무심히 굴리며 말했다.
“봄이 오면 아젤란의 황제께서 정복한 나라에 대해 대대적인 행정개편을 단행할 거라는 건 스킬라 님도 알고 계시죠?”
“알아요. 다들 예상하던 일이니까요. 구체적인 소문도 돌고 있고.”
“소문을 들으셨다니 아시겠지만 몇몇 소국들은 나라 자체를 아예 없애고 아젤란 황제의 직할령으로 바꿀 거라더군요.”
“저도 들었어요.”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없어질 소국 중의 하나가 바로 아칸 왕국이에요. 인정하긴 싫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죠. 황제에게서 거의 확답이나 다름없는 말도 들었고요.”
“확답이라니? 도대체 어떤 말을 들었기에?”
“…….”
엘시아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분하고 불쾌했던 그때 일이 떠올라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눈치 빠른 스킬라가 즉시 그녀의 시녀인 백룡에게 일렀다.
“알리샤, 불필요한 이들을 물리고 드라코니아 왕실의 특제 와인을 좀 내와 줄래요?”
“예, 공주님.”
다른 수행인을 물린 후 엘시아가 가장 신뢰하는 안드레아스만 남았다. 스킬라는 알리샤가 가져온 와인을 직접 크리스털 잔에 따라 내밀었다.
“자, 한 잔 들어요. 엘시아 님.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무척 속상한 내용이었나 보군요.”
“고마워요.”
엘시아가 짧게 감사 인사를 한 후 말문을 열었다.
“봄이 오면 폐하께서 제게 혼인령을 내릴 거라더군요.”
“혼인령을? 누구랑요?”
“캐드릭스 후작이오. 아칸 왕국을 황제 직할령으로 삼은 뒤 그를 총독으로 보낼 생각인 거겠죠. 나와의 결혼을 통해 아칸 왕국 백성들의 반발을 무마시킬 목적이겠지요.”
“캐드릭스 후작이라니. 황족도 아닌 고작 그런 자와의 혼인을 진행하려 하다니. 아칸 왕국을 철저히 무시하는 거군요.”
“그렇죠. 황위 계승권과 전혀 상관없는 자와의 혼인이니 아칸 왕국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하지요.”
“저런, 정말 속상하겠어요. 자신의 조국이 사라질 거라니. 기가 막히는 일이겠군요.”
스킬라는 진정 안타깝다는 얼굴로 엘시아를 바라봤다. 그녀 자신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아칸 왕국처럼 부실한 왕국이 이번 행정개편에서 살아남을 리가 없었다. 후작과의 결혼을 통해 왕국 백성들의 반발을 없앨 거라고 했지만 과연 반발을 가진 백성이 남아있기나 한지도 의문이었다.
‘그저 몇몇 왕실과 귀족 일원들이나 아쉬워할 테지.’
수십 년 전부터 아칸 왕국엔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의 반란과 폭동이 도처에 발생하고 유민들이 늘어났었다. 왕실은 국내 정황을 안정시키는데 신경 쓰기보단 세금을 늘리고 백성들을 쥐어짜는 데만 더 급급했었다. 결국 걷잡을 수 없이 국력이 쇠하게 되고 아젤란 제국군의 침입까지 받게 돼 복속하고 만 것이다.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나라 상태를 겨우 안정시키고 바로잡은 게 아젤란 제국군이었다. 그 과정 중에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작은 저항 활동 하나 없었다. 거의 모든 백성이 외면한 왕실. 아칸 왕국은 그저 명맥만 남은 왕국이었다.
“그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자와 결혼해서 그저 그런 신분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다. 대제국의 황후가 되거나 하다못해 드라코니아처럼 번듯한 어느 왕국의 왕후나, 공작부인. 그것도 아니면 왕녀의 신분을 유지해서 추앙받는 위치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군요. 정말 분하고 답답하시겠어요.”
“다행히 로드미오 대신관 님이 아벨라 여신께서 내리신 신탁을 전해 주셨으니 아직 희망은 있는 거겠죠. 아젤란의 황후가 된다면 아칸 왕국도 건재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스킬라가 눈매를 늘어뜨리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엘시아는 조금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스킬라 님은 제 생각이 잘못됐다고 여기시는 건가요?”
스킬라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아젤란 황제께서 그 신탁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요. 엘시아 님께서 실망하게 되실까봐.”
“무시하고 있다고요?”
“그래요. 대신관 외에 다른 신전의 신관장들까지 신탁을 받들라는 주청을 올리고 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
엘시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붉은 액체가 든 크리스털 잔을 무심코 응시하며 생각했다. 그렇게 온갖 노력을 기울여서 시도한 일이 잘되지 않는다고?
“스킬라 님은 그런 정보를 어디서 듣게 되셨죠?”
문득 든 의문에 엘시아가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물었다. 스킬라가 손을 가져가 입을 가리며 호호 소리 내 웃었다.
“물론 제 정보원을 통해 알게 된 거랍니다. 재물을 쓰면 이 세상 어디든 내 사람을 심어놓을 수 있으니까요. 생각보다 재물로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거든요.”
“그렇군요. 재물이 있으면…….”
그래, 가능한 일이 많긴 하지. 알고 보면 이 세상일은 뭐든 그걸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 자신이 황후 후보에서 멀어지게 된 가장 큰 원인도 가난한 나라 출신 왕녀라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아칸 왕국이 그렇게 무너지게 된 요인도 그 망할 놈의 돈이 없어서 그런 거고.
‘돈이 없으니 뭐든 제대로 되겠어?’
군대도 엉망이 되고 행정체계도 망가지고 백성들의 이탈도 막을 수 없는데다 왕실의 위엄을 세우는 일도 전혀 할 수 없었다. 돈이 없으니 자신은 이렇게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있어도 어딜 가나 푸대접이나 받는 신세고. 뭐든 그 돈이 문제였다.
“당신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바꾸시면 어떨까요?”
엘시아가 오만 인상을 찌푸린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데 스킬라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뭐라고요?”
그때까지 노려보던 크리스털 잔에서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살짝 들어 스킬라 공주를 향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바꾸라고요?”
엘시아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 아닐까 싶어 다시 한번 되물었다.
“그래요.”
“그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예요. 황제니 대신관이니, 그런 남자들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기지 말고 스스로가 직접 움직여서 자신의 미래를 만들고 행복을 쟁취하란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스킬라의 눈매가 부드러운 활처럼 크게 휘었다. 한동안 그다음 말을 하지 않고 포도주를 홀짝홀짝 들이켰다. 엘시아는 그녀가 술 한 잔을 다 비울 때까지 당혹감과 궁금증을 안은 채 지켜봐야 했다.
“제가 듣기론 엘시아 님은 여느 남자들 못지않은 배포와 실력을 갖춘 분이라고 알고 있어요. 아름다운 용모뿐만 아니라 승마며, 검술이며 못하는 게 없으시다죠?”
엘시아가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스킬라의 다음 말에 흠칫 놀라 다시 찌푸렸다.
“직접 사람을 죽이는 일도 거리낌 없이 할 정도라던데.”
“그건 어떻게 아시죠? 타국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말했잖아요. 돈만 있으면 뭐든 알아낼 수 있다고요.”
엘시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 이 드라코니아의 공주는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자신이 심심풀이로 가끔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있다는 건 아는 이가 거의 없을 텐데.
“그냥, 사냥이랑 비슷한 거예요. 사냥할 때 좀 더 재미있게 하고자 죄수들을 풀어놓고 즐기는 거죠.”
“알아요. 어차피 사형시킬 죄수들을 이용한다는 것도요.”
“…….”
“당신을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면을 칭찬하고 싶은걸요. 아무나 가지기 힘든 성향이니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물론이에요. 남자 못지않게 용감하고 능력이 있다는 거잖아요.”
그제야 엘시아가 잔뜩 굳은 낯빛을 누그러뜨렸다. 스킬라가 포도주를 권하는 터라 마지못한 척 한 모금 입안에 머금었다. 혀끝에 감도는 부드러운 향이 마치 천상의 것인 듯 착 달라붙었다.
“백성들이 한때 제게 ‘장미의 기사’라는 별칭을 지어 부르기도 했죠. 맞아요, 난 여자로 태어났지만 웬만한 남자들 못지않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칸 왕국의 차기 왕이 되더라도 선대의 어느 왕 못지않게 나라를 이끌어나갈 능력도 있다고 자신했지요.”
엘시아가 다시 입술을 짓씹으며 한숨 섞인 말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런 바람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요? 이제 아칸 왕국은 그 존립조차 불분명해졌는데?”
“그럼 엘시아 님이 아칸 왕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면 되잖아요?”
“예?”
스킬라가 자신의 입가에 댔던 포도주잔을 서서히 밑으로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공주님이 주축이 되어 힘을 모아보실 수 있지 않겠어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죠?”
엘시아는 아까부터 스킬라가 계속 건네는 말들이 선뜻 이해하기 힘들어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했다. 집중하느라 절로 이맛살이 접혔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예사말이 아닌 것 같은데 그 진의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힘을 길러보세요. 엘시아 님.”
“힘이라니…….”
“군대 말이에요.”
“저 역시 아젤란 제국의 지배를 받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나라를 등지고 이렇게 타국에 인질로 와 있는 신세도 비참하고요.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그렇긴 하죠.”
“얼떨결에 아젤란의 침입을 받아 복속하는 처지가 됐지만 우리가 뭉쳐 다시 일어난다면 아젤란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엘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몰아치는 이야기들이 너무 어마어마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어때요? 엘시아 님. 우리 모두 힘을 합쳐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다른 나라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 나라들을 찾아 힘을 모아 보는 거에요. 일단 저희 드라코니아는 언제든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엘시아는 쏘아보듯 스킬라의 눈을 향했다. 놀랍게도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제가 뭐든 엘시아 님께 지원할게요.”
“지원이라니. 뭘 말이죠?”
“뭐든지요. 당신의 힘이 될 수 있는 건 뭐든지요. 재물이든, 정보든 혹은 병력이든. 그래요. 나는 쓸 만한 마물도 동원할 수 있어요. 그런 것들을 움직일 수 있는 뛰어난 마법사를 알고 있으니까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엘시아를 향해 스킬라가 몸을 당겨 앉더니 손을 불쑥 내밀었다. 이내 그녀의 두 손을 굳게 잡았다. 엘시아는 그 순간 가슴 속에 뜨거운 뭔가가 흘러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왠지 마음이 든든해지고 온몸에 활력이 돋는 참 신비로운 감각이었다.
“그런 것들도 잘 활용하면 큰 힘이 될 거예요. 당신에게 뭐든지 지원할 용의가 있거든요.”
“어째서…….”
엘시아는 가늘게 떨려오는 두 손을 그녀에게 내맡긴 채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어째서죠? 스킬라 님. 당신은 어째서 이렇게 날 도우려는 건가요?”
“물론 당연히 저도 원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뭐죠?”
스킬라가 잠시 말을 잇지 않고 엘시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 대신 한 인간을 없애주세요.”
“한 인간을 없애달라고요?”
드라코니아의 왕녀가 그 많은 재물과 권력을 가지고도 없애기 힘든 존재라면 그녀에게도 어려운 일이지 않겠는가? 엘시아는 조금 미심쩍은 기분이 들어 머뭇거리며 질문했다.
“그게 누구죠? 엄청난 거물이겠죠?”
스킬라가 고개를 저었다. 희미한 미소를 짓는 얼굴에 좀 가소롭다는 표정이 담겨 있었다.
“글쎄요. 황제의 관심을 받고 있는 평민이긴 한데 그런 자를 과연 거물이라 할 수 있을는지.”
“……!”
엘시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래도 그녀도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혹시 그게 여인인 건 아니겠죠?”
“여인이에요.”
“에일린이라는 평민 여자 말인가요?”
목이 잠겨 다소 거친 목소리로 엘시아가 입을 열자 스킬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아칸 왕국 출신의 평민 여자. 그 여자와 나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어요. 그 여자를 없애고 싶은데 나는 사정이 있어 직접 움직일 수가 없거든요.”
“어떤 사정인지 말해줄 수 없나요?”
스킬라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 엘시아를 잡은 양손에 더욱 힘을 꽉 주며 말했다.
“내 정인을 빼앗겼다고 해두죠. 너무나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하지만 내가 직접 나섰다간 그분이 절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아!”
“전 그분과 다시 잘되고 싶어요. 원수처럼 여겨지긴 싫거든요. 그러니 나를 대신해 그 여자를 처리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엘시아는 지난날 에일린과 얽혔던 일에 대해 떠올리곤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알만하군요. 그 당돌한 여자가 주제도 모르고 여기저기 꼬리치고 다녔나 봐요. 감히 스킬라 공주님의 정인에게까지 손대다니. 평소 그 여자 행실을 생각하니 바로 이해가 가요.”
그렇다고 해도 평민 여자 하나 처리해달라는 요구에 비해 너무 과분한 대가를 치르는 것 아닌가?
“정말 그 여인만 처리해주면 만족할 건가요?”
스킬라가 힘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요. 당신에게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걸로 알고 있는데?”
“예. 저와도 악연이 깊죠. 하지만 공주님 정도의 능력이면 능히 그런 여자 하난 없앨 수 있지 않나요?”
“아까도 말했듯 나는 정말 그분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아요. 그 여자를 없앨 수 있고 없고를 떠나 순수하게 내가 아닌 자의 손이 필요한 거예요. 그렇다면 원한 관계를 갖고 있는 데다 같은 아칸 왕국 출신인 엘시아 공주님이 적격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리고.”
그녀가 엘시아의 바로 뒤에 서 있는 안드레아스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다른 사람과 달리 당신에겐 유능한 마법사가 있잖아요?”
“……!”
엘시아와 안드레아스 둘 다 동시에 어깨를 움찔거렸다. 엘시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여전히 스킬라에게 잡혀있는 손을 빼내려 하자 그녀가 더욱 꽉 붙들었다.
“걱정 말아요. 절대로 발설하지 않을 테니.”
잔뜩 눈살을 찌푸린 안드레아스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제가 마법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진정하세요. 말했다시피 나는 정보원이 많다고 했잖아요? 아젤란 황제의 행보를 파악하고 있을 정도로요. 물론 당신이 마법사라는 건 그 정령들의 팔찌를 알아봤기 때문이지만.”
안드레아스가 급히 자신의 한쪽 팔에 감긴 황금빛 팔찌를 다른 손으로 숨기듯 감쌌다. 어떻게 이 물건을 알아본단 말인가? 저런 젊은 아가씨가? 마법사인 자신도 하프 엘프가 아니었다면 이런 정령의 마도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당혹감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주저하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놀라운 안목이시군요. 이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내가 보기보다 견문이 넓은 편이거든요.”
“…….”
“엘시아 님.”
스킬라가 다시 엘시아에게로 눈길을 돌리며 은근한 목소리로 불렀다.
“생각보다 그 여자가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닐 거예요. 정령들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걸 혹시 알고 계시나요?”
“얼핏 소문을 들었어요.”
“항상 정령들이 곁에 있어 손을 쓰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에요. 정말 성가시죠.”
“……!”
“평화로운 시기에 그 여자에게 손을 쓰기 힘들다는 것도 알아요. 당신이 결심을 굳힌다면 지원을 먼저 해드릴게요. 전쟁 중의 혼란한 틈을 타서 시도하는 게 좋을 거예요.”
“좋은 제안이긴 한데 선뜻 결정하기는 힘들군요.”
스킬라가 다시 힘 있게 엘시아의 손을 마주 잡았다.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요.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 저도 알아요. 신중하게 고려해 보세요.”
“그러죠.”
스킬라의 손에서 유난히 뜨거운 감촉이 느껴졌다. 엘시아는 왠지 그녀의 몸과 마음이 더욱 충만하고 훈훈하게 달궈지는 느낌이 들었다.
***
엘시아는 안드레아스와 함께 스킬라의 방을 나와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사냥대회에 참가했을 때 발견한 사냥감을 잡기 위해 전속력으로 숲을 내달렸을 때처럼 얼굴에 열기가 올라왔다. 거처로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안드레아스가 말문을 열었다.
“공주님. 설마 스킬라 공주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은 아니시겠죠?”
엘시아가 그를 힐끗 곁눈질하며 대답했다.
“왜요? 당신 생각엔 터무니없는 제안으로 들렸나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직접 힘을 길러 아젤란을 공격하라니 너무 무모하고 황당한 말 아닙니까?”
“흠, 난 꽤 괜찮게 들렸는데요?”
엘시아가 평소 즐겨 앉는 의자에 앉으며 편안히 몸을 기댔다.
“뜬금없이 에일린이라는 아가씨를 죽여 달라는 요구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평민 여자가 도대체 뭐라고. 필시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겁니다.”
“물론 좀 황당하긴 하지만 우리 입장에선 그렇게 나쁘게 볼 건 아니에요.”
그녀가 눈짓하자 그가 냉큼 다가와 옆에 있던 스툴을 앞으로 가져다주었다. 엘시아는 천천히 그 위로 다리를 걸치며 말을 계속했다.
“대신관의 신탁대로 일이 잘되지 않는다면 난 그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거예요.”
“공주님…….”
안드레아스가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깟 여자 하나 없애주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데 그보다 더 좋은 제안이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생각해 봐요. 스킬라 공주의 말대로 아젤란의 지배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어디 나 하나뿐이겠어요? 찾아보면 한둘이 아닐 거예요.”
엘시아가 다시 그에게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가 서둘러 와인 병을 가져와 한잔 따라 내밀었다. 엘시아가 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돈만 많다면 불가능할 일이 어디 있겠어요? 돈과 정보, 그 두 가지를 마음껏 휘두를 수 있다면 아주 많은 일이 가능할 거라고요.”
“너무 무모합니다. 위험한 시도일 게 뻔합니다.”
“안드레아스.”
엘시아가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무심히 그의 진짜 이름을 불렀다.
“……!”
그의 진명을 불러준 게 너무나 오랜만이었기에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응답했다.
“예. 공주님.”
“뭐든지 하겠다고 맹세했잖아요? 당신, 아칸 왕국의 존립을 위해서라면 불길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그랬습니다.”
“그 마음이 이제 변한 건가요?”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 뜻은 여전히 변함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함께 힘써 봐요. 아칸 왕국이 영원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자고요. 필요하다면 어떤 세력과도 손잡을 수 있는 게 아닌가요?”
“공주님.”
“나는 왠지 해 보고 싶어졌어요. 스킬라 공주의 말대로 나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싶어졌다고요. 더 이상 남자들 손에 내 미래를 맡기고 싶지 않아요.”
힘없고 가난한 나라의 왕녀 노릇 따위 지긋지긋했다. 이대로 황후가 된다면 괜찮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모험을 한번 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거사를 일으키는 데 가장 중요한 게 자금이다. 그게 해결된다는데 못할 게 뭐 있단 말인가?
“안드레아스”
엘시아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똑바로 그의 얼굴을 마주하더니 손을 들어 그의 두 뺨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함께 노력해줄 거죠?”
“엘시아.”
그녀의 예쁜 붉은 입술이 다가와 그의 뺨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방금 포도주를 마신 탓인지 차고 축축하면서 다소 끈적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마치 촘촘한 거미줄에 걸린 것 같았다.
***
“으…….”
엘시아와 헤어진 후 스킬라는 급히 벽난로 앞으로 다가가 몸을 녹였다. 앞서 드라코니아에서 구해온 드래곤하트를 지니고 있던 터라 예전보다 한결 몸이 나아졌다. 하지만 마나를 한꺼번에 소진하고 나면 어김없이 다시 몸속 곳곳에 스며드는 한기로 고생해야 했다. 물론 전보다 한기를 느끼는 강도가 약해지긴 했으나 평생 이런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괜찮으세요? 공주님.”
시녀인 백룡 알리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엘시아 왕녀를 상대하면서 용의 기를 내뿜지 않으려 노력하는 일에도 마나 소모가 만만치 않은 터였다. 이번엔 그에 더해 다른 마법까지 살짝 부리느라 좀 무리했다. 정신계를 지배하는 마법은 다른 마법보다도 마나 소모가 심했다.
“괜찮아. 조금 있으면 다시 마나가 차오를 테니까.”
“공주님. 그냥 드라코니아로 돌아가 당분간 요양에 힘쓰시는 게 어떨까요? 인간 모습으론 회복이 더디지 않습니까?”
“아니,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 전에 말했듯이 억울해서라도 그냥은 못 돌아가.”
히에무스와 그 인간 여자가 헤어지는 모습을 보기 전까진 절대로 곁을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알리샤가 곤란한 표정으로 공주를 지켜보다 아까부터 궁금하게 여기던 일을 꺼냈다.
“저, 공주님.”
“뭐지?”
“어째서 엘시아 공주님을 부추기신 건지요? ‘망상’을 심어주는 마법을 발동시키면서까지. 그녀가 아젤란 제국에 대항하도록 해서 어떤 이익을 얻으시려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익 따위를 원하는 게 아냐. 그저 그 인간 여자와 히에무스 님을 헤어지게 하고 싶은 거지. 어떤 형태로든 내가 직접 손을 쓰게 되면 이번엔 정말 위험해지게 될 거야. 그렇지 않아?”
알리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왕이 그렇게 경고했는데 그걸 무시하고 일을 벌이는 건 바보 같은 행동일 것이다.
“내 손을 쓰지 않고 그들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려면 그 주변 인간들을 공략해야 하지 않겠어? 그 평화로운 삶을 마구 휘저어 혼란스럽게 만들어 줄 거야.”
“그렇다면…….”
“그래. 전쟁만큼 인간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도 없지. 전쟁 중엔 무슨 일을 벌여도 괜찮아. 그 둘을 떼어내는 일도 수월하게 할 수 있어.”
“어떻게 말입니까?”
“안드로스 대륙 곳곳에 분쟁을 일으키면 히에무스 님도 언제까지나 그 인간 여자 곁에만 있을 수 없겠지. 계속 인간 노릇을 하려면 인간 귀족으로서의 의무도 이행해야 할 테고.”
알리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하긴 그렇겠네요. 멀리 있는 지역으로 참전 명령을 내려서 떨어뜨릴 수 있겠군요.”
“그래. 그리고 혼란한 틈을 타 마물들을 동원해서 그 여자를 해치는 방법도 있겠지. 엘시아 왕녀에게 마법사가 있으니 하급정령 정도는 손쉽게 제거할 수 있을 거야.”
“예. 그 정도는 인간 마법사도 거뜬하겠지요.”
“우린 그저 구경만 하면 돼. 사실 인간 세상에서 제일 재미난 구경거리는 전쟁이지.”
스킬라가 알리샤에게 벽난로에 장작을 좀 더 넣으라고 지시하자 그녀가 냉큼 몸을 움직였다. 붉은 불꽃이 현란한 춤을 추듯 이리저리 날름거리는 모습을 꼼짝 않고 지켜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인간 군주에게 직접 손을 쓸 수 없다면 군주가 될 자에게 쓰면 되는 거야. 그 허영심 많은 공주를 대신 움직이게 하면 되니까 나는 떳떳할 수 있어. 히에무스 님 앞에서조차.”
딱!
검붉게 변한 장작이 타다 한 번에 쪼개지면서 무너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스킬라는 역동적인 불길의 움직임이 황홀하게 느껴져 계속 눈길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내 손만 더럽히지 않으면 그만이지.”
***
며칠 후. 히에무스는 밤새 겨울의 궁전으로 가 밀린 일을 처리하고 하레나 성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빨간 마법약을 한 방울 삼킨 후 에일린을 보기 위해 3층으로 향했다. 그녀의 방 문 앞에 하녀인 제니와 샤샤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요즘 에일린의 시중을 드는 이들이었다. 히에무스를 보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인사를 했다.
“아! 공작 저하.”
“에일린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나?”
“예. 깨울까요?”
“아니, 그냥 둬. 이따 보면 되니까.”
“예.”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가려다 발길을 돌려 식당으로 걸어갔다. 식사하는 행위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제대로 된 인간 노릇을 위해 ‘식사하는 척’하려는 거였다. 뭔가를 먹어도 그걸 삼키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이지만. 아무리 마법약을 먹는다 해도 진짜 인간이 되는 건 아니니까.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넓은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여러 식구들이 내려와 자리 잡고 있었다. 가을의 왕 브로미오스와 그의 시종역을 맡은 서풍, 유니콘인 루카스와 백룡인 렌투스까지.
“어서 오게.”
브로미오스가 싱글거리는 얼굴로 맞아주었다. 루카스가 새파란 눈을 굴리며 물었다.
“에일린은요? 오늘도 늦잠을 자는 건가요?”
히에무스가 별 대답 없이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한번 까딱였다. 루카스가 갸웃거리며 말했다.
“응, 에일린이 요즘 통 기운이 없어 보여요. 식사도 제때 하지 않고 늦잠 자기 일쑤고 말수도 부쩍 준 것 같고.”
“…….”
히에무스 역시 신경 쓰였던 일이라 그의 말을 듣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 에일린이 자신의 성으로 온 후 영 우울해 보이는 게 확연히 눈에 띄었다. 믿었던 이들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감 때문이지 하레나 성으로 옮긴 탓이 아니란 걸 알고 있으나 왠지 마음에 걸렸다.
렌투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제의했다.
“두 분이 함께 여행이라도 하며 기분전환이라도 하시면 어떨까요?”
“여행을 해 보라고?”
“예. 아마 몹시 마음이 심란하고 답답하실 거예요. 갑자기 지난 인간관계가 모두 틀어져 버렸으니까요. 생활도 바뀌고 여러모로 상심이 클 겁니다. 그럴 땐 잠시 떠나보는 것도 좋지요.”
“그래, 그게 좋겠군. 예전에 내가 사귄 아가씨들도 어디 새로운 장소에 데려가면 정말 좋아했었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렌투스의 말에 브로미오스가 부지런히 음식을 입에 가져가며 한마디 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곧 사라질 음식인데도 참 열심히 먹는 게 신기했다. 모든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어떨 때 보면 그는 정말 인간이 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히에무스는 평소 그의 의견이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이번만큼은 귀가 솔깃했다.
“그래? 어디 괜찮은 곳이 있다면 좀 알려주게.”
“음, 여자들은 넓은 백사장이 펼쳐진 바닷가나 북쪽 밤하늘의 은하수나 오로라. 그런 것들을 맘에 들어 했어. 꽃이 만발한 곳도 좋고 번화한 도시도 괜찮지. 갈만한 곳은 널려있다네.”
히에무스가 귀를 활짝 열고 하나하나 새겨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렌투스와 루카스, 서풍도 저마다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평소보다도 오래 식당에 머물러야 했다.
“여행이라고요?”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에일린이 내내 문 앞에 기다리던 히에무스를 불러 마주했다. 그냥 깨우거나 나중에 보러 와도 됐을 텐데. 에일린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억지로 명랑한 표정을 보이며 되물었다.
“그래. 요즘 네가 좀 힘들어 보이는 것 같아서. 성안에서만 지내는 것도 갑갑할 텐데 이 기회에 나와 함께 여행을 가 보면 어떻겠느냐?”
“어디로요?”
예전의 그녀였다면 금방 기대감으로 들떠 신나 했을 텐데 요즘은 만사가 귀찮았다. 도무지 뭔가를 하고 싶은 맘이 들지 않았다. 번아웃 증후군인가 싶기도 하고 우울증이 온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그 무엇도 시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가슴 졸이며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이는 히에무스를 보니 얼른 기운을 찾아야겠다는 맘이 들었다.
“그럴게요. 어디든 함께 가봐요.”
“그래. 혹 평소에 가고 싶었던 장소라도 있느냐?”
히에무스는 다른 이들이 추천했던 여러 장소를 염두에 두며 싱긋 웃음을 머금었다.
“글쎄요. 그냥…….”
에일린은 ‘아무데나’라고 말하려다 잠깐 말을 멈췄다.
“한군데…… 가봤으면 하는 곳이 있긴 해요.”
“어디지?”
가보고 싶다기보다는 궁금했던 장소. 지금껏 정신없이 이 세계에 적응하는 데만 몰두했던 탓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지내왔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아칸 왕국에 가 보고 싶어요.”
“아칸 왕국?”
목적지가 정해지자 꾸물거리며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바로 짐을 꾸려 길을 떠나기로 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두 분만 가셔도.”
백룡인 렌투스와 흑룡인 디아누스 집사가 못 미더운지 둘을 훑어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인간계의 지식에 서툰 히에무스와 아칸 왕국 사람이라지만 시골 출신인 에일린, 이 둘만 보내기엔 다소 우려됐다. 들리는 소문으론 현재 아칸 왕국의 치안 상태가 좋지 못한 듯했기에.
“당연히 괜찮다. 정령왕인 날 어떻게 보고 그러나? 그동안 인간들에 대한 지식도 많이 배웠고 오랜 세월 존재해오며 익히게 된 것들도 적지 않아.”
“쳇, 또 나는 빼놓고 가는 건가요?”
유니콘인 루카스가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을 토했다.
“미안, 다음에 꼭 함께 가도록 해요. 루카스.”
이번엔 세 정령도 데려가지 않고 히에무스와 단둘이서만 다녀올 예정이었다. 가능한 사람들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았던 터라 둘 다 너무 화려한 복장은 피했다. 짐도 최대한 간소하게 꾸린 후 집을 나섰다.
***
“이곳인가요?”
“응. 여기가 바로 아칸 왕국의 왕도 ‘이노피아’다.”
히에무스의 마법을 이용하니 정말 순식간에 도착했다. 에일린은 아젤란 제국의 황도인 ‘카르디아’ 외엔 가본 적이 없어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카르디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바로 옆에 시장이랑 커다란 광장이 있는 걸 보니 가장 번화한 장소인 것 같았으나 무척 썰렁했다. 아젤란 제국보다 훨씬 북쪽이어서 날씨가 추운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도시 전체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듯 보였다.
“뭔가 어수선하고 우중충하구나.”
히에무스가 광장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감상을 말했다. 에일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주변을 바라봤다. 한때 제국의 수도였던 곳의 광장이니만큼 넓은 규모였지만 바닥에 깔린 판석이나 다른 시설들이 깨지거나 사라진 곳이 허다했다. 요소마다 설치된 분수대는 오래전에 말라붙은 듯 쓰레기가 가득 채워져 방치된 채였다. 위대한 업적을 세운 선대 군주를 조각한 듯한 대리석 동상 역시 손상돼 그 잔해가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어디부터 갈까? 에일린. 혹 생각해둔 장소가 있느냐?”
“음, 일단 시장으로 가봐요.”
“그러자.”
시장 쪽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갔다. 좀 전에 봤던 광장보다는 좀 더 행인이 많았지만 아젤란의 황도 카르디아에 있는 시장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다. 문을 연 가게도 활기가 없어 보이고 벌여놓은 좌판도 별로 없었다. 시장의 규모나 시설 역시 퇴락하고 초라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 또한 하나같이 경직된 채 날카로운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 뺨을 찌르듯 싸늘한 바람만 한차례 쓸고 지나갔다. 에일린은 망토의 후드를 끌어당겨 깊숙이 눌러썼다. 추위보다도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좀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물론 자신보다는 히에무스의 눈에 띄는 용모를 향한 거였다. 그 역시 두터운 후드로 가렸지만 그 빛나는 미모를 숨길 수가 없었다. 다들 찬탄과 함께 낯선 이를 견제하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날이 좀 차구나. 어디 들어가서 몸을 좀 녹이겠느냐?”
“그럴까요?”
열어놓은 주점을 찾아 들어갔다. 주점 안은 바깥보다 훨씬 따뜻하고 사람들도 몰려 북적거렸다. 잠시 멍한 얼굴로 서 있으려니 종업원이 얼른 다가와 적당한 자리로 안내했다.
“뭘 드릴까요?”
히에무스가 살짝 곤란한 낯빛을 지었다. 이런 장소도 낯설었고 어떤 음식을 주문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식사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아 잘 모르는 데다 성에서 접했던 요리와도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를 대신해 에일린이 차림표를 보고 시켰다.
“갈색 빵 한 덩이랑 양파 수프 두 접시, 돼지고기볶음 두 접시 주세요. 뜨거운 차도 두 잔 먼저 내주세요.”
“알겠습니다요. 금방 내옵죠.”
금방 나온 뜨거운 차를 홀짝이니 잔뜩 움츠려 들었던 속이 좀 풀어지는 듯 했다. 히에무스는 뜨거운 음료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구경만 했다.
“에일린. 이곳과 그대의 고향이 가까운 것이냐?”
“아, 그게…….”
아마도 히에무스는 에일린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모습이 그리워 이곳까지 찾아온 거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말문이 막혀 한동안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뜨거운 차를 호호 불어가며 두어 번 들이키다 입을 열었다. 그에게는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저, 히에무스. 사실 나는 이곳에서 지낸 일을 기억하지 못해요.”
“기억을 못 한다고?”
“예. 사정이 좀 있어서요.”
“무슨 사정인지 물어봐도 될까?”
“다음에 말해줄게요. 지금은 말고요.”
“알겠다. 언제든 내킬 때 말해다오.”
“예.”
입안에 머금은 찻물에서 쓴맛이 올라왔다. 그리 질 좋은 차는 아닌 모양이다. 에일린은 다시 주점 안을 슬쩍 둘러보며 말했다. 여전히 집요하게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냥 한번 와보고 싶었어요.”
그녀의 영혼이 눌러앉게 된 몸의 주인이 살았던 곳을. 정말 아무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책 같은 걸 보면 빙의를 했을 때 원래 몸의 주인이 가졌던 기억도 곧잘 생각나는 것 같았는데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이곳 언어만 무리 없이 구사할 수 있을 뿐.
“늘…… 궁금했거든요.”
진짜 에일린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그랬구나.”
계속 의기소침한 나날을 보내다 보니 문득 진짜 에일린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 아무 의미 없는 무기력한 날들을 보내는 것 같아서. 그녀가 살았던 세상을 보고 나면 새로운 의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안고 온 것이다.
“두 분은 이곳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습니까요?”
어느새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한 음식을 가져다주며 물었다.
“알 것 없어.”
“카르디아에서 왔어요.”
히에무스 대신 에일린이 대답했다. 굳이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멀리서 오셨구먼요. 맛있게 드십쇼.”
왠지 비굴해 보이는 미소를 잠깐 보이며 종업원이 사라지자 에일린은 나무 숟가락으로 수프를 떠먹었다. 맛은 별로였지만 역시 언 몸을 녹이기에 적당했다. 히에무스는 한두 숟갈 뜨는 시늉을 하다 그만두고 에일린이 먹는 모습만 미소 띤 얼굴로 바라봤다. 식사를 끝내고 나니 에일린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다시 밖으로 나가 주변을 살펴볼 생각으로 계산을 하려고 아까 봤던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 값을 치르겠다.”
“예, 갑니다요.”
히에무스는 다가온 종업원에게 차림표에 적혀 있던 음식 가격인 80코퍼보다 조금 많은 1실버를 내밀었다. 거스름돈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돈을 받아든 종업원이 낯빛을 굳혔다.
“손님. 한참 모자라게 주셨는데요?”
“모자라다니? 아까 본 차림표엔 분명 80코퍼라고 적혀 있었는데?”
“아, 그건 현지인들만 내는 가격이고요, 외지인들은 더 주셔야 합죠.”
“뭐라고?”
“열 배 더 내십쇼. 800코퍼. 그러니까 8실버 되겠습니다요.”
옆에서 듣고 있던 에일린이 황당한 표정으로 따졌다.
“아니, 이것 봐요. 그런 법이 어딨어요? 똑같은 음식인데 어째서 그런 구분을 두는 거예요? 말도 안 되잖아요?”
“여기선 다 그렇게 합니다요. 그게 불만이면 처음부터 먹질 말았어야지.”
“그쪽이 먼저 말해주지 않았잖아요?”
“다들 아는 사실을 굳이 말해줄 필요 있나? 혹시 그만한 돈도 없는데 식사를 한 거요? 그럼 다른 방법으로라도 값을 치러야지.”
“다른 방법이라뇨?”
당연히 돈은 충분했지만 그 남자가 뭐라고 대답하는지 들어보려고 되물었다. 그가 음흉한 시선으로 둘을 훑으며 말했다.
“많지. 설거지 같은 노동을 하거나 아님 그보다 좀 더 손쉬운 일을 하든가. 둘 다 반반하니 몸이라도 잠깐 팔면 되겠지. 특히 남자 쪽은 마음만 먹으면 크게 한 건 잡을 수도…….”
순간 히에무스가 팔을 뻗어 종업원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컥!”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네놈!”
“진정해요. 히에무스.”
에일린은 예전에 그와 외출했을 때 일어났던 소동이 떠올라 바짝 긴장했다. 가능하면 그가 인간에게 직접 손을 쓰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리고 히에무스에게 인간들이 일을 해결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인간 노릇을 하려면 익혀둬야 할 테니까. 에일린이 그의 팔을 살짝 잡자 그는 잔뜩 움켜쥐었던 손을 좀 느슨하게 풀었다.
“주인을 불러줘요. 직접 따져야겠으니.”
“커억, 내, 내가 주인이오.”
남자가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리며 힘겹게 말했다. 생각보다 히에무스의 힘이 강해 좀 놀란 것 같았다.
“뭐라고요?”
에일린이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그들 패거리로 보이는 사람들이 험악한 얼굴로 여럿 다가와 둘러싸고 있었다. 식당에 있던 다른 손님들 대부분은 외면한 채였지만 더러는 히죽거리며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지켜보는 중이었다.
“이봐요! 이렇게 부당한 방식으로 식당을 운영하다니 정말 잘못됐잖아요?”
“다들 그러는데 왜 나만 갖고 난리요? 싫으면 안 먹으면 그만이지! 어쨌든 먹었으니 돈을 내놓으셔!”
히에무스가 싸늘하게 얼어붙은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깟 돈 몇 푼은 던져 줄 수 있어. 적선이라도 한 셈 치지. 하지만 좀 전에 네놈이 지껄인 말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구나.”
“도, 돈을 낸다면 사과하겠소.”
그냥 두면 그가 또 뭔가 마법의 힘을 행사할 것 같았다. 에일린이 즉시 돈주머니를 풀어 은화 8개를 꺼내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 8 실버 냈으니까 아까 그 말, 사과나 해요!”
“죄, 죄송합니다요! 용서해주십쇼. 그러게 진작 돈을 내시지.”
“이놈!”
히에무스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아 그를 향해 눈을 부릅뜨자 에일린이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됐어요. 히에무스. 그냥 나가요. 내게 방법이 있어요.”
“…….”
다시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저잣거리로 나섰다. 아까보다 행인이 줄어든데다 날씨도 별로 좋지 않아 분위기가 더 썰렁했다.
“화났어요? 히에무스.”
한동안 입을 꾹 다문 채 터덜터덜 걷는 그를 향해 에일린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좀 전에 그 인간 때문에 여전히 화가 나는구나. 조금 혼이라도 내줬으면 좋았을 텐데, 왜 막은 거냐? 에일린.”
“저도 화가 나지만 그런 자리에서 소동을 벌여봤자 좋을 것 없잖아요? 일단 거길 나와서 관청이나 치안대 같은 곳을 찾아가 고발이라도 하는 게 나아요.”
“네 뜻이 그렇다면 알겠다. 그만 화를 풀도록 하마.”
“예.”
에일린의 기분전환을 해주기 위해 나선 길이니 뭐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치안대를 찾기 위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대부분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고 얼버무리며 지나가기 일쑤였다. 아무리 인심이 흉흉한 곳이라지만 낯선 이를 배척하는 정도가 유난히 심해 보였다.
“차라리 이곳 대지의 정령이나 공기의 정령에게 묻는 게 낫겠구나.”
가능하면 여느 인간들처럼 행동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자꾸 지체되니 어쩔 수 없었다. 에일린이 여전히 내키지 않아 잠시 황망한 얼굴로 서 있는데 뒤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에일린?”
돌아보니 비쩍 마른 몸에 파리한 얼굴의 젊은 청년 하나가 에일린을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시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나야, 나! ‘갈리온’.”
“갈리온……이라고요?”
“나 모르겠어? 에일린, 너랑 한마을에 살았었잖아.”
“……!”
***
“여기가 이 구역 경비를 책임지는 군대가 상주하는 곳이야. 아젤란 제국군으로 구성된 경비대지.”
“고마워요.”
“별것도 아닌데, 뭘.”
“그래도…….”
“자꾸 어색하게 그러지 마. 에일린. 열병을 앓은 뒤 기억을 잃었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편하게 대해줬으면 좋겠어.”
퀭한 눈빛에 빛바랜 금발 머리의 갈리온이라는 이름의 청년이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위치한 한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진짜 에일린과 한마을에 살던 사이라고 했다. 지난 가을 지독한 흉작으로 온 마을 주민들이 병마와 기근에 시달리다 대규모로 이주를 단행했다 한다. 에일린은 그들 가족과 함께 아젤란 제국으로 떠났고 갈리온네 가족은 왕국 수도인 이곳으로 와 살길을 모색하게 된 거라나.
“그, 그럴게.”
에일린은 처음 보는 그가 정말 낯설고 어색했지만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경비대를 찾으니 안내는 해줬지만 그런 일로 고발해 봤자 별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어째서?”
“아젤란 제국군이 계도를 하긴 하겠지만 그저 시늉에 그칠 뿐일 테니까. 대부분 뇌물을 받고 그런 부당한 일들을 눈감아주는 추세라고. 뭐, 윗분들이야 옳은 지침을 내린다지만 아랫사람들이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고.”
“그냥 참고 넘길 순 없어. 가서 따져보기라도 해야지.”
“그래. 하지만 조심해. 네가 고발했다는 걸 알면 그 식당 주인 패거리가 앙심을 품고 밤에 묵고 있는 곳에 들이닥쳐 보복할지도 모르니까.”
갈리온이 그렇지 않아도 비쩍 마른 얼굴에 자리한 커다란 눈을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왠지 훨씬 눈이 부각돼 더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지금도 미행하려고 똘마니를 하나 붙여뒀을 거야.”
“뭐?”
“아니면 경비대에서 슬쩍 너희 행적을 알려주기라도 할걸? 다들 한통속이니까. 고발했다가 되레 쥐도 새도 모르게 앙갚음당해 다치거나 죽는 이들이 한 둘이 아냐. 타국에서 온 사람들이나 우리같이 상경한 시골 사람들은 거의 그런 일들을 당했으니까.”
“부당한 일들을 당하고도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는 거야?”
“분하지만 어쩔 수 없어. 에일린. 기억을 잃어서 모르는 모양인데 우린 늘 그렇게 살아왔잖아. 그러니까…….”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에일린과 히에무스의 행색을 감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너 굉장히 부유해 보이는데 어지간하면 그냥 참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면 누구 높으신 분이라도 알고 있어? 아젤란 제국민이면 더 좋고, 마법사면 더욱 좋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높은 분을 알고 있으면 사정이 달라지지. 경비대에서 엄청 신경 써 주겠지. 당연한 것 아냐?”
“…….”
그때까지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듣기만 하던 히에무스가 입을 열었다.
“아젤란 사람은 아니지만 내가 마법사다. 귀족이기도 하고. 그럼 어떤 해결책이 있겠느냐?”
갈리온이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퀭한 갈색 눈에 힘을 주었다.
“예? 귀족이자 마법사라고요?”
“그래.”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시 목이 멘 듯 침을 꿀꺽 삼키더니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내뱉기 시작했다.
“아, 그럼 왜 참고 나오셨어요? 그런 놈들 깡그리 쓸어버리시지. 마법 주문을 외워 돌로 만들든지 목을 비틀어 죽이든지!”
당황한 에일린이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갈리온.”
하지만 들리지 않는 듯 그가 히에무스를 향해 다가와 옷자락을 쥐고 우러러보듯 바라봤다.
“그래요, 다 죽여버려요. 갈기갈기 찢어 죽이시면 어때요? 저런 놈들 때문에 불쌍하게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오히려 아젤란 제국군들보다 더 악랄한 놈들이라고요! 상인 놈들, 죄다 쳐 죽일 놈들!”
“…….”
오랫동안 가슴 속에 담아놨던 말들을 한번 토해내기 시작하자 그칠 줄을 몰랐다.
“그놈들이 말이죠, 저들끼리 똘똘 뭉쳐서 사람들을 얼마나 괴롭히고 쥐어짰는지 모를 거예요! 곡식 한 자루, 빵 한 덩이 가격을 몇 십 배나 후려쳤다고요! 그 비싼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다들 굶어 죽었어요!”
히에무스는 별 반응 없이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냉정한 그 눈빛에 퍼뜩 정신이 드는 듯 조금 잦아든 목소리로 덧붙였다.
“살겠다고 이곳까지 온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어이없이 죽었다고요.”
에일린이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처음 만나 낯선 이였지만 진짜 에일린의 오래된 지인이었다고 하니 친근한 느낌도 들고 안타까운 기분도 더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놈들 좀 혼내주면 안 돼요? 그 식당 주인 말고도 저 시장에 있던 상인들 몽땅! 모두 하나같이 파렴치한 놈들이니까.”
갈리온의 거듭된 부탁에 히에무스가 담담한 어투로 대꾸했다.
“혼내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나와 상관없는 이에게 손댈 이유는 없다. 굳이 손을 쓴다면 그 식당 주인 하나만이지.”
그의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지 갈리온이 에일린을 돌아보며 사정했다.
“아, 에일린! 부탁할게. 하다못해 빵집 주인만이라도 좀 죽여주면 안 될까?”
“그건…….”
사정이 딱하긴 했으나 에일린 생각에도 함부로 누구를 죽인다거나 식당 주인 외의 사람에게까지 임의로 보복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에일린, 아니 운아는 현대 사회에 살던 사람이었기에 기본적으로 어떤 일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는 가능하면 법의 힘을 빌려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일단은 고발부터 하고 추이를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개선될지도 모르잖아.”
“개선은 무슨, 내가 말했잖아. 아젤란 제국군이나 상인들이나 다 마찬가지라고. 그들에게 뭔가 기대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란 말이야.”
“네 말뜻은 알겠어. 하지만 갈등이 생길 때마다 사적인 힘을 이용하는 건 아닌 것 같아. 한두 번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더 큰 혼란만 생겨나게 될 거야.”
갈리온이 한층 심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거칠게 쏘아붙였다.
“에잇, 더럽게 비싸게 구네! 이제 성공했다 이거지? 좀 살만해졌다고 고향 사람도 그냥 다 개차반으로 보이는 거냐?”
너무 막무가내로 몰아치는 모습이 황당해 에일린도 얼굴을 굳혔다.
“그런 게 아니라 일단 제대로 사실 확인을 한 후에 처벌해야 하는 게 아닐까? 여기 경비대의 능력이 의심스럽다면 다른 상위 관청을 찾아가서 호소해 보는 방법도 있잖아.”
조금 말을 끊었다 다시 이어갔다.
“그런 노력을 모두 기울인 후에도 변화가 없다면 그때 가서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게 순서 아닐까? 정말 고통만을 안겨주는 사람들이라면 피해를 당한 이들끼리 힘을 모아 대항한다든가 하는 방법도 있을 테고.”
“아, 됐어. 잘난 척하긴. 마법사 귀족 나리에게 붙어살다 보니 네가 귀족이라도 된 줄 아나 보지? 누굴 가르치려 들어? 고향에선 우리 집보다 못한 가난뱅이였던 주제에.”
“뭐?”
“참 재주도 좋지. 비결이 뭐야? 네 주제에 이런 잘난 남자를 꾄 비결…….”
퍽!
“으윽!”
히에무스가 주먹으로 갈리온의 얼굴을 한 대 후려쳤다. 그가 힘없이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놀란 얼굴로 올려다보자 히에무스가 차가운 시선으로 낮게 일렀다.
“에일린을 모욕하지 마라, 인간!”
“……!”
<겨울의 왕과 불의 키스를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