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비열한 짓
황제와 헤어진 후 엘시아는 엘로드와 함께 정원에 남아 산책을 이어갔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게 무슨 뜻이죠?”
엘로드가 난처한 듯 얼굴을 붉히며 싱긋 웃었다.
“그게 아직은 답해드리기가 곤란합니다만.”
“그럼 후작님은 알고 계신 거잖아요? 말씀해주세요. 저와 관련된 일이라면 저도 알아야하지 않을까요?”
엘시아의 재촉에 그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녀도 어차피 알게 될 일이고 그렇다면 미리 언질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폐하께선 우리 두 사람이 맺어지길 바라고 계십니다. 물론 저도 그렇고요.”
“뭐라고요?!”
엘시아는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 말은, 폐하께서 당신과 내가 결혼하길 원하신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어느 한쪽이…… 원하지 않는다 해도?”
“아마도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누구 맘대로? 충격과 노여움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이 어둡고 딱딱하게 변하자 엘로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는 원합니다, 공주님. 당신을 처음 뵀을 때부터 제 마음엔 오직 당신밖에 없었지요. 제가 많이 부족한 걸 알고 있지만 좋은 남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엘로드가 잔뜩 굳은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살짝 쥐었다.
“당신도 제게 마음을 여시지 않겠습니까?”
엘시아가 그의 손을 휙 뿌리쳤다.
“후작님, 나머진 다음에 얘기하도록 하죠. 지금은 제가 좀 피곤하군요.”
“아, 저런. 실례했습니다. 그럼 아르겐 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뇨, 바쁘신데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냥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겠어요.”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지요.”
엘로드는 초조함과 함께 서운한 마음이 밀려들었지만 억지로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엘시아가 경직된 낯빛 그대로 고개를 까닥이며 짧게 인사했다.
“그럼 안녕히.”
“안녕히 가십시오, 공주님. 잘 지내시고요.”
엘시아는 빠른 걸음으로 아르겐 궁으로 향하며 뒤따르는 안드레아스에게 말했다. 그에게 말을 걸었다기보다 거의 그녀 자신의 푸념에 가까웠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아젤란의 황제! 자기 맘대로 날 아무에게나 보내버리겠다는 건가? 내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안드레아스 역시 충격을 받았는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눈살을 찌푸리며 공주의 하소연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너무 하는군요.”
따지고 보면 왕족이나 귀족으로 태어나면 정략결혼이야 거의 운명처럼 따라붙는 거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엘시아 왕녀와 캐드릭스 후작이라니, 말도 안 되는 조합이었다. 왕녀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여인이라면 적어도 좀 더 나은 사람, 하다못해 작은 나라의 왕족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제국에서 떠오르는 신흥귀족이라 해도 그런 자가 유서 깊은 아칸 왕국의 후계자인 엘시아의 상대로 낙점되다니. 제국 내에서 아칸 왕국의 위치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 당장 대신관 로드미오를 만나야겠어요. 자리를 마련해 봐요.”
“알겠습니다. 마법을 이용해 데려오죠.”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대신관 로드미오는 사랑의 묘약에 중독된 이후 타는 듯한 갈증과 그리움에 시달리고 있으니까. 엘시아 왕녀를 만나는 시간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애타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내일 저녁에 데려오겠습니다.”
엘시아가 잠자코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었다. 눈동자가 유난히 불안하게 움직이는 걸 보니 충격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내일은 조금 바쁠 것이다. 저녁에 엘시아와 대신관 로드미오를 만나게 해줘야 하고 그리고 또……. 봄의 여왕 베르누아를 만나 약속했던 일도 남아 있었다.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더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비슷한 시각 황제 렉스는 자신의 집무실로 막 들어서는 중이었다. 케일론과 다른 궁정 마법사인 헬무트 경을 거느린 채였다. 두 사람과 긴히 의논할 일이 있었다. 집무실 입구에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이디오마 신관이 깊이 허리를 숙이며 절을 해왔다.
“폐하. 강녕하셨습니까?”
“어서 오시오, 이디오마 신관.”
케일론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 신관은 왜 또 와 있는 건가?’
그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신관과 마법사인 자신들을 한 자리에 부르다니, 그럴 일이 뭐가 있지? 저 신관은 얼마 전부터 황제 주변에 얼쩡거리는데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신관의 안목으로 황후감을 물색하는 일을 돕는 건가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나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
언제나 푹 눌러쓴 하얀 두건도, 잘 드러나지 않는 얼굴 표정과 장황하고 예스러운 말투까지, 그 무엇 하나 맘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마법사와 신관들은 원래 그다지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다. 둘 다 일반인과 구별되는 경이로운 능력을 구사하지만 엄연히 성질이 다르고 활동 영역이나 사람들 간의 인식에도 차이가 났다. 은연중에 서로 견제하는 입장이었다.
“모두 들어오시오.”
“예.”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황제의 명에 따라 일제히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이 든 시종장이 미리 준비해 놓은 듯 다과상이 마련돼 있었다. 황제가 먼저 자리에 앉으며 세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모두 앉으시오.”
“황송합니다.”
시종장이 다가와 즉시 모두의 잔에 차를 따라 주자 황제가 먼저 잔을 들며 말했다.
“날씨가 추우니 다들 차 한 잔씩 들고 얘기 나누도록 합시다.”
“예.”
케일론은 순순히 찻잔을 기울이면서도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황제의 행동을 생각해 볼 때 이렇게 차나 술을 나누며 꺼내 놓는 안건은 속된 말로 좀 구린 경우가 많았다. 수많은 나라를 정복하는 일에 언제나 정정당당한 싸움만 있지는 않았으니까.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찻잔을 비웠다. 헬무트 경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차를 들이켜며 눈치만 살폈다. 한동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거의 차 한 잔을 다 비울 때쯤 마침내 황제가 말문을 열었다.
“두 마법사에게 사적인 일을 하나 맡기고 싶소.”
“무슨 일이신지요?”
케일론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가 무슨 일을 명하든 거절할 일은 없었다. 그 자신이 오래전부터 충성을 맹세하고 받들어온 주군이니까. 찜찜한 일이든, 더러운 일이든, 비열한 일이든 가리지 않고 뭐든 기꺼이 할 용의가 있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다. 언제나.
“그게…….”
황제가 첫마디 말끝을 조금 흐리더니 그 후론 물 흐르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 길지 않았지만 케일론은 끝까지 듣고 있기가 괴로웠다. 계속 얼굴빛을 바꾸고 입술을 깨물고 눈썹을 움찔거려야 했다. 황제의 말이 모두 끝났을 때 그는 온갖 인상을 다 쓰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하란 말씀이십니까?”
케일론이 거친 목소리로 항의하듯 물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로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부탁하오. 두 마법사의 협조가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니.”
“그런 비열한 짓을…….”
케일론의 목구멍에서 혐오로 잔뜩 짓눌린 말이 새어 나오다 멈췄다. 차가운 푸른 눈을 빛내며 지켜보던 황제가 더없이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못 하겠소? 예전엔 이보다 더한 짓도 아무렇지 않게 하지 않았던가?”
냉엄한 눈빛이 미묘하게 다른 빛으로 바뀌더니 질문을 이었다.
“하지 못할 이유가 있다면 빠져도 좋소. 지극히 내 개인적인 일이니 강요하지 않을 것이오.”
“…….”
케일론은 말문이 막혔다. 하지 못할 이유가 있던가? 아니, 그저 하고 싶지 않은 것일 뿐이다. 사실 황제의 말마따나 그동안 몇 배나 더한 짓도 마다하지 않고 해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따지고 보면 그 자신의 의도에도 크게 위배 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그가 우려했던 것들도 해소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알겠습니다. 참여하겠습니다. 하지만 직접 움직이는 건 헬무트 경이 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상대니까.”
조금이라도 덜 비열한 쪽을 맡고 싶었다. 다른 궁정 마법사인 헬무트가 별문제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럼 그걸 빌려주실 겁니까?”
케일론이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그러겠소.”
“그러시다면 괜찮습니다. 어떤 일을 맡든.”
흐린 미소로 응시하던 황제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흥미로운 눈길로 케일론을 훑었다. 그 눈초리가 마치 자신의 치부라도 들춰보는 듯 따갑게 느껴졌다. 케일론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제가 직접 나서면 되레 일을 그르칠지도 모릅니다.”
“그렇겠군. 이해하오.”
케일론은 문득 손안에 쥐여 있던 찻잔에 시선을 고정했다. 차는 미지근하게 식어 버렸지만 그의 얼굴엔 열이 잔뜩 올라 있었다.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
다음날 제국의 휴일이었다. 에일린은 분주하게 하루를 열었다. 일찍 일어나 식사와 집안일을 해치우고 외출준비를 했다. 고아원에 봉사활동을 갈 생각이었다. 브레이가 자신도 일이 있다며 시가지까지 말을 태워주겠다고 제의했다.
“돌아올 때도 제가 데리러 갈게요.”
“어, 고마워요.”
사실 정령들에게 부탁하면 훨씬 수월하게 다녀올 수 있었지만 브레이가 모처럼 제안한 거라 그러기로 했다. 케일론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말도 없이 어디론가 외출한 터라 보이지 않았다. 휴일이면 보통 집에서 빈둥거리며 보내기 일쑤였는데……. 망토를 걸치고 밖으로 나오니 브레이가 말을 끌고 나왔다.
“제 뒤에 타세요. 혼자 올라탈 수 있겠어요?”
“예, 괜찮아요.”
에일린도 지난번에 유니콘인 루카스의 집에 가서 승마하는 법을 배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은 서툰 데다 말 타는 법을 어떻게 배웠는지 해명하는 것도 곤란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 에일린이 정령들과 곧잘 시간을 보낸다는 걸 공공연하게 알리긴 했지만 될 수 있으면 그런 사실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에일린 님, 그냥 저희가 모셔다 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맞아요. 추운 날씨에 길을 나서다 감기라도 들면 어떡해요?”
“옷이라도 좀 더 두껍게 입으시면 좋을 텐데요.”
세 정령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씩 건넸다. 에일린은 정령들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밝게 웃어주었다. 새삼스럽게 요즘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가족도, 친척도, 별다른 친구도 없는 이곳에서 그들의 존재가 큰 위안이 되었다. 처음과 다르게 그들 또한 에일린에게 살갑게 대했다. 에일린 역시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물음에 무심코 대답해 주었다.
“괜찮아요.”
뜬금없이 나온 에일린의 말에 브레이는 잠깐 의아한 얼굴이었지만 곧 상황을 이해하곤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출발할게요. 꽉 잡으세요.”
“예.”
한 시간쯤 말을 타고 달려 신전에 당도했다. 브레이는 그녀를 내려준 뒤 자신의 일을 보기 위해 사라졌다. 에일린이 고아원 건물로 다가가 보니 전처럼 봉사활동을 하러 온 다른 이들의 모습을 접할 수 있었다. 예전에 봤던 낯익은 이도 있고, 처음 보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톤이 높은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어머나, 아가씨! 또 만나는군요.”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보니 지난번 만났던 초로의 부인과 중년 여인이었다. 아마도 하급기사 부인과 시장 상인의 부인이었을 것이다.
“정말 약속대로 다시 와주었군요.”
“안녕하세요?”
“잘 왔어요. 안 그래도 가끔 아가씨 생각이 났는데.”
“저도 다시 봬서 반가워요. 오늘도 잘 부탁드릴게요.”
“호호, 부탁은요. 지난번처럼 그렇게 열심히 하면 되는 건데요.”
서로가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중년 여인 옆에 함께 있던 젊은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저, 저도 소개해주면 안 될까요?”
중년 부인이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조금 수선스러운 말투로 젊은 여인을 소개했다.
“이쪽은 제 조카예요. 이제 스무 살이니 아가씨랑 비슷한 또래겠군요. 오늘 처음 나와서 낯설고 모르는 게 많을 텐데 아가씨가 옆에서 알려주면 어때요?”
에일린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오래간만에 비슷한 또래 아가씨를 만나니 기뻤다.
“전 ‘헬가’라고 해요.”
“저는 에일린이에요.”
평민끼리니 그냥 이름만 말해도 되니 좋았다. 진한 금발 머리에 주근깨가 살짝 있는 얼굴이 예전에 하녀로 일하던 베키를 닮아 보였다. 서글서글한 인상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헬가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런 데 오면 뭐부터 해야 할까요? 아이들을 좋아해서 나오긴 했는데 정작 와보니 막막하네요.”
“걱정할 거 없어요. 그냥 집에서 가족들을 위해 하던 일을 하면 되니까요.”
“가족들을 위해 하던 일이라고요?”
에일린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혹시 동생이 있나요?”
“있죠. 제가 장녀라서 여섯 명이나 있는걸요. 사실 평소대로라면 동생들 돌보느라 이런 데 올 여유가 전혀 없었을 거예요.”
“오늘은 용케 시간이 났나 봐요?”
에일린의 질문에 헬가가 중년 부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열흘 전에 ‘마리’ 숙모님 댁에 와 있거든요. 전 좀 더 시골에 살고 있어요.”
“그래요? 친척 집에 방문한 거군요.”
“예. 봄이 되면 시집을 갈 거거든요. 혼수품도 장만하고 결혼 전에 황도 구경도 할 겸 겸사겸사 와본 거예요.”
헬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어머나, 결혼을 앞두고 계셨구나. 축하해요.”
“고마워요.”
에일린은 기분이 좋았다. 비슷한 또래 아가씨와 이런 평범한 일상 대화를 나누는 게 정말 즐거웠다.
“두 사람! 그만 노닥거리고 일하러 가야죠!”
헬가의 숙모인 마리가 앞서가며 소리쳤다.
“이제 가 볼까요?”
“그래요. 가면서 이야기해요.”
“신랑 될 분은 어떤 사람이에요?”
“그냥 평범해요. 제 눈엔 세상에서 가장 멋지지만요.”
“정말 좋아하나 봐요.”
“다, 당연하죠. 그래서 택한 걸요.”
둘은 금방 의기투합해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고아원 기숙사를 향해 나란히 걸어갔다.
“에일린 님, 오늘 정말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
에일린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날던 제퓌가 말했다.
“응, 평소보다 훨씬 신난 것처럼 보여.”
프리기가 눈을 활처럼 휘면서 말하자 아두스 역시 빙긋 웃었다.
“보기 좋네, 뭐.”
***
그즈음 히에무스는 다소 무거운 발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루쿨루스 숲이었다. 늘 들르는 곳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다른 장소에 가야 했다. 먼저 겨울의 궁으로 가서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내키지 않는 낯빛으로 그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피처럼 붉은 장미꽃 넝쿨로 뒤덮인 높은 바위 절벽 앞이었다. 장미향이 너무 진해 비릿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가운데쯤 위치한 동굴 입구에 검은 하트 문양이 새겨진 나무문이 보였다. 히에무스는 이맛살을 살짝 찡그리며 접근해 문을 두들겼다.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틈으로 낯익은 중급 정령이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이크, 또 겨울의 왕이시군요. 요즘 정말 자주 뵙는 것 같습니다만?”
“널 보러 온 게 아니다. 네 주군을 만나러 온 거지. 안에 계시나?”
“운이 좋으시군요. 오늘은 마침 계십니다. 주무시지도 않고요. 들어오십시오.”
히에무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그를 따라 바위굴 안으로 들어갔다.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 여전한 광경이 펼쳐졌다. 장미꽃으로 휘감긴 여러 개의 유백색 기둥으로 이어진 넓고 화려한 공간. 유니콘들이 사는 곳도 동굴이니 이와 비슷할 테지만 거기 비해 훨씬 궁궐다웠다. 그가 들어서자 투명한 날개를 단 하급 정령들이 놀라 파닥거리며 피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문지기 정령이 안내한 알현실에 당도해 보니 은빛 옥좌 위에 키프리스가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히에무스.”
빨간 드레스에 붉은 기가 감도는 금발을 휘날리며 키프리스가 옥좌에 앉은 그대로 반겨주었다. 만면에 농염한 미소를 머금고서.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다.”
히에무스는 곧바로 자신이 이곳에 발을 들인 이유를 설명했다. 키프리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무슨 부탁이 있는 걸까요?”
사실 뭔지 충분히 짐작됐지만 곤란해하는 그의 반응을 좀 더 즐기고 싶었다.
“일전에 내게 줬던 붉은 약이 필요해. 좀 줄 수 없겠는가?”
“그 약이 또 필요하다고요?”
“그래. 부탁한다.”
키프리스가 빙긋 웃더니 옥좌의 팔걸이에 한쪽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채 바라봤다.
“저번에 그것도 아껴 쓰면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양이었는데 그새 다 썼단 말인가요? 아예 인간계에 눌러앉은 건 아니겠죠?”
“…….”
“설마 빈손으로 얻어갈 생각인가요?”
히에무스의 눈썹이 조금 아래로 쳐졌다. 지금까지 고민해 봤지만 혼자서는 무슨 대가를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뭘 줄 수 있는데요?”
“내가 줄 수 있는 거면 무엇이든.”
“조금 비쌀 거예요.”
“상관없다.”
“음, 뭐가 좋을까?”
키프리스가 미소 띤 얼굴로 그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 슬그머니 눈꺼풀을 열었다.
“세 가지 일을 해주세요.”
“좋다. 말해라.”
“첫 번째는 남쪽 바다에서 나는 진주를 구해주세요. 목걸이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을 만큼이오.”
남쪽 바다까지 다녀오려면 못 해도 한나절은 걸릴 것이다.
“알겠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일은 진주를 받은 후에 말씀드릴게요.”
히에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라.”
어차피 각오하고 왔었다. 키프리스가 순순히 그 약을 내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으니까. 적어도 하루 정도는 이런저런 일에 그를 부려 먹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시간이 많이 들뿐 불가능하거나 곤란한 일이 아니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히에무스는 키프리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서둘러 길을 떠났다.
***
에일린은 몇 시간 동안 고아원 아이들과 어울리며 놀아주고 씻겨주고 청소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다. 헬가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일을 하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즐거웠다. 이렇게 지내보니 스스로도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 이런 대화와 생활에 목말라 있었다는 것을. 헤어질 때가 다가오니 너무나 아쉬웠다. 그날 처음 만난 사인데도 마치 오랜 친구처럼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오후 일과가 대충 마무리되자 봉사를 나온 부녀자들도 하나둘 귀가를 서둘렀다. 에일린도 브레이가 오길 기다리는데 어째선지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돌아가고 에일린과 헬가 일행만 남았다. 날도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에일린, 그냥 저희랑 마차를 타고 가는 게 어때요? 사는 곳까지 바래다줄게요.”
헬가가 그녀의 숙모인 마리와 함께 다가와 제의했다.
“그래요. 우리랑 함께 가요. 여기 문지기한테 먼저 간다고 말해놓으면 그분이 뒤늦게 와도 당황하지 않을 거예요.”
“어, 감사하긴 하지만······.”
사실 브레이가 오지 않으면 그냥 정령들과 함께 돌아가는 게 나았다. 헬가가 그녀 역시 헤어지는 게 무척 서운한 듯 다시 권해왔다.
“같이 가요.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랬죠? 그냥 말을 타고 가면 날이 어두워져서 추울 거예요. 자칫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 마차 안에서 수다도 떨고 가면 좋잖아요?”
더 이상 사양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에일린 역시 헬가와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와! 잘됐다. 우리 신나게 수다 떨어요!”
헬가가 진심으로 기쁜지 함박웃음을 지었다. 에일린 역시 흐뭇한 표정으로 대답해주었다.
“예, 그러도록 해요.”
마차를 대기시켜둔 장소로 와 보니 마부로 보이는 초로의 남자가 이두 마차 앞에 서 있다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리가 그에게 에일린을 소개하며 목적지를 말해주었다.
“대마법사님이 살고 계시는 성을 알고 있는가?”
“대략 알고 있습죠. 이 지역에서 오래 사셨으니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알죠.”
“거기 먼저 들러주게.”
“그럽지요.”
그가 문을 열어주며 여인들이 마차 안으로 탈 수 있게 손을 잡아주었다. 세 여인이 자리를 잡자 마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마차도 좁은 편인 데다가 말 두 마리가 끄는 이두 마차라 그런지 덜컹거림이 좀 심하게 느껴졌다. 관찰력이 뛰어난 아두스가 언제나처럼 품평을 시작했다.
“역시. 기대하진 않았지만 평민들이 타는 마차는 소박하기 그지없군.”
제퓌가 구석구석 둘러보며 말문을 열었다.
“뭐 이 정도면 양호하잖아? 크기도 작고 장식도 별로 없지만 깔끔하고 튼튼해 보여.”
“저번에 인간 우두머리가 준 마차를 그냥 뒀으면 좋았을 텐데.”
프리기가 섭섭하다는 얼굴로 한마디 하자 아두스가 꾸짖듯 말했다.
“멍청하긴, 그런 걸 갖고 있으면 계속 인간 우두머리가 이것저것 간섭해댈 게 분명한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자유만큼 좋은 게 어디 있다고.”
“그런가?”
“두말하면 잔소리지. 우리도 여기 나와 사니 얼마나 좋아? 왕과 상급 정령님들 눈치를 안 보니까 정말 살맛나잖아.”
아두스의 구체적인 설명에 프리기와 제퓌가 얼른 동조하며 대답했다.
“그렇긴 해.”
정령들이 저들끼리 조곤조곤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에일린은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이두 마차가 신전의 영역을 벗어나 호젓한 숲길로 들어섰다. 헬가와 에일린, 그리고 마리까지 중간에 끼어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한창 피워댔다. 헬가의 신랑 이야기, 혼수품 이야기, 오늘 고아원에서 일어났던 일 등. 세 여인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다급한 말 울음소리와 함께 덜컹거리며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무슨 일이람?”
마리가 미간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글쎄요?”
에일린과 헬가도 잠시 말을 끊고 서로 멀뚱히 바라봤다. 곧이어 마차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초로의 마부가 외치는 목소리였다.
-“모두 마차에서 내려!”
거칠고 걸걸한 낯선 목소리였다.
-“어서!”
날카로운 다른 목소리까지 가세했다.
-“으윽!”
마부가 내지르는 신음이 뒤를 이었다. 마차 안에 있던 세 여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응? 무슨 일이지? 저희가 나가서 보고 올게요, 에일린 님.”
아두스의 말에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산적이나 강도떼를 만난 게 아닐까 싶었다.
“뭐, 뭐지? 설마 도적을 만난 걸까?”
마리와 헬가가 바짝 언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에일린 역시 긴장됐지만 일단 마차 문을 잠갔다. 이내 창문을 가렸던 커튼 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창문 틈으로 보이는 풍경으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세 정령이 상황을 살피기 위해 즉시 문밖으로 날아갔다. 결계가 없다면 어디든 통과할 수 있었다. 사실 세 정령은 머리에 마도구를 하나씩 착용하고 있으니 결계가 있다 해도 대부분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빨리 다들 밖으로 나오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마차 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어, 어떡하지?”
“일단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에일린이 두 사람에게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밖의 상황을 잘 알 수 없었지만 다른 선택 사항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정 상황이 어려우면 정령들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이다. 마리와 헬가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린이 조심스럽게 마차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밖으로 나갔다. 헬가와 마리가 그녀의 뒤를 따라 주섬주섬 따라 나왔다.
“뭘 꾸물거린 거야?!”
“……!”
밖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 에일린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마차 밖에서는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쥔 낯선 남자들이 에일린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부가 쓰러져 있고 그 주위로 여덟 명 정도의 복면을 쓴 낯선 남자들이 보였다. 서너 명은 말을 탄 채 단단한 가죽 갑옷을 걸치고 잘 벼린 장검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마법사인지 후드가 달린 검은 로브를 걸치고 지팡이를 든 모습이었다. 떠돌이 도적인 게 분명했다. 비교적 치안이 안정된 황도에선 보기 드물긴 하지만 안드로스 대륙 곳곳에 이런 도적떼가 만연했다.
“가진 거 모두 내놔!”
“으흐흑……, 어떡해.”
헬가가 눈물을 주룩 흘리며 중얼거렸다. 어찌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녀의 숙모인 마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가, 가진 걸 모두 드릴 테니 목숨만 살려주세요!”
“잔말 말고 재물이나 토해 내!”
세 여인은 서둘러 지니고 있던 패물이며 돈을 꺼내 내밀었다. 한 남자가 자루를 가져와 쓸어 담았다. 두어 명의 남자가 그들 앞에 서서 칼을 들이대며 위협을 가했다. 아두스가 얼른 에일린의 한쪽 어깨 근처로 날아와 물었다.
“에일린 님! 저희가 마법으로 저자들을 퇴치할게요.”
에일린이 작은 목소리로 일렀다.
“재물만 가져가고 우릴 곱게 놔주면 그냥 두세요. 그렇지 않을 경우엔 부탁할게요.”
가능하면 정령의 힘을 쓰고 싶지 않았다. 에일린 앞에 있던 도적이 소리를 질렀다.
“너! 혼자 무슨 소릴 중얼거리는 거야? 조용히 하지 못해?!”
에일린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두어 명의 남자가 마차 안을 들여다보며 뭔가 더 가져갈 게 없는지 살폈다. 그중의 한 사내가 마부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차와 말을 가져갈 셈인 것 같았다. 마리가 그 와중에도 걱정이 되는지 웅얼거렸다.
“우리 집에 마차라곤 저거 하나뿐인데······.”
그녀를 위협하던 자가 거친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걱정 마, 너희도 함께 데려갈 테니. 아줌마야 별 값어치가 안 나가겠지만 두 아가씨는 제법 값을 받겠군.”
“뭐라고요? 사람도 데려가서 팔겠다는 거예요?!”
에일린이 놀라 황급히 되물었다.
“물론, 팔 수 있는 건 몽땅 다 가져가서 처분해야지.”
“으흑,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헬가의 울먹이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시끄러워! 거기 여자, 닥치지 못해?”
헬가가 흠칫 놀라며 즉시 에일린에게 바싹 다가와 몸을 붙였다. 심한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어쩔 수 없었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에일린이 세 정령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도적떼를 공격하기 위해 날아갔다.
“어딜!”
순간 예리한 음성과 함께 마법사가 팔을 높이 들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섬광이 번득이더니 빛의 그물이 세 정령을 덮쳤다.
“으악!”
빛으로 된 그물에 사로잡힌 세 정령이 동시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에일린이 소리쳤다.
“안 돼!”
마법사가 재빨리 주문을 외자 그물 모양의 빛이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세 정령이 몇 번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만둬요!”
에일린이 급히 마법사를 향해 튀어나가려 했다. 앞에 버티고 섰던 사내가 막아서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으아악!”
“제퓌!”
그들을 옥죄던 빛의 그물이 한곳으로 뭉쳐지더니 한순간에 빛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부서졌다. 순간 에일린은 눈이 부셔 고개를 돌렸다. 빛이 잦아들자 다시 그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세 정령이 축 늘어진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
검은 후드를 깊이 눌러쓴 마법사가 중얼거렸다.
“조그만 하급 정령을 제압하는 거야 식은 죽 먹기지.”
에일린은 눈을 크게 뜨며 세 정령의 이름을 외쳤다.
“제퓌! 아두스! 프리기!”
헬가와 마리가 의아한 얼굴로 에일린을 바라봤다.
“일어나 봐요, 제퓌!”
그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마법사와 에일린 두 사람만 바닥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 귀찮은 정령을 없앴으니까 서둘러! 어서 여자들을 태우라고.”
마법사가 도적 무리에게 말하자 누군가가 일러주었다.
“여자들에게도 마법을 걸어줘. 잠시 정신을 잃게 하면 데려가기 편할 것 아냐?”
“아, 그렇지.”
그가 다시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가 주문을 읊는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푸른 빛 덩어리가 날아들어 그를 공격했다. 마법사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다른 도적들이 무척 놀라며 공격이 날아온 쪽을 바라봤다.
“누구냐!”
말을 탄 세 사람이 가까이 와 있었다. 다른 이들이 마법사가 정령을 제압하는 모습에 정신이 팔려있는 새에 접근한 것 같았다. 모두 후드를 쓴 데다 주위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탓에 자세한 모습을 한눈에 알기 어려웠다.
‘누구?’
그림자처럼 새카만 형체만 보였지만 손에 들린 검에서 내뿜는 푸른빛만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좀 전의 빛 덩어리를 날린 것도 마법이 아니라 저 검이 발한 위력인 것 같았다. 소위 말하는 ‘검기’라는 것일까? 소드 마스터들이 검에 마나를 실어 공격하는 기법 말이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외쳤다.
“뭐냐? 네놈들은!”
에일린이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너무 경황이 없어선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도적 떼 중의 누군가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 것 없어. 그냥 못 본 척 얌전히 지나가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정의의 사도인 척 설치다가 큰 코 다칠 거라고, 여긴 실력 있는 마법사도 있단 말이다!”
“이쪽도 마찬가지야.”
“뭐? 에잇! 저쪽부터 쳐!”
한 도적이 외치자마자 일제히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상대방도 즉시 반격에 나섰다. 도적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그들 모두 말을 탄 데다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아 그리 불리한 것 같지 않았다. 특히 그들 한 가운데서 푸른 검기를 뿜어내는 검술을 구사하는 자의 솜씨가 눈부셨다. 그를 향해 달려드는 서너 명의 남자를 그 자리에서 바로 굴복시켰다. 몇 번 검을 휘둘러 치명적인 자상을 입히지 않고도 모두 무릎을 꿇게 한 것이다. 그들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마법사였는지 도적떼에 있는 마법사와 맞붙었다. 화려하고 무시무시해 보이는 불꽃과 빛 구슬을 서로 쏘아 보내며 대적했다. 하지만 얼핏 보기에도 도적떼에 속한 마법사보다 실력이 월등해 보였다.
“와아, 저 사람들 정말 멋져요!”
겁에 질린 얼굴로 에일린 옆에 딱 붙어 있던 헬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크게 감탄했다. 안도하는 맘이 더해져서인지 목소리 톤이 유난히 높아졌다. 숙모인 마리 역시 이제 안정이 됐는지 혜성처럼 등장해 싸워주는 기사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러게. 너무 멋있네요! 대체 누굴까요? 혹시 에일린이 아는 사람이에요?”
“글쎄요.”
에일린도 조금 맘이 놓였으나 여전히 쓰러져 있는 정령들의 안위가 궁금해 제대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괜찮겠지? 그래, 괜찮을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걱정으로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도적떼가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상대는 분명 고도의 훈련으로 단련된 기사와 마법사가 분명했으니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에잇, 젠장!”
그때까지 여자들을 위협하느라 싸움에 가담하지 않던 한 도적이 욕설을 내뱉으며 곧장 싸움에 가담하러 튀어 나갔다. 그녀들을 위협하던 사람이 사라지자 에일린은 즉시 정령들에게 달려갔다.
“에일린! 위험해요!”
헬가와 마리가 만류하듯 불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퓌! 아두스, 프리기!”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살폈다. 다들 창백한 얼굴에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등줄기에 싸한 전율이 지나갔다. 몸을 숙여 얼굴에 귀를 대보니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는 것 같았다.
‘확실한 건 아냐. 너무나 작은 몸이라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도. 그래, 그럴 거야.’
덜덜거리는 두 손으로 일단 그들의 작고 차가운 몸을 치마폭으로 옮겼다.
“어떻게 해야 하지? 우선 히에무스에게 보여야겠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럴 때 똑똑한 아두스라면 뭔가 좋은 방법을 말해줬을 텐데.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게 울컥 올라오는 것 같아 황급히 삼켰다. 울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들을 구할 방법을 생각해야 해. 눈을 질끈 감았다. 계속 몸이 떨렸다. 상냥한 제퓌라면 다정한 말로 위로해 줬을 텐데. 프리기도 침착하게 뭐라고 조언해 줬을 테고…….
“아냐, 잘못될 리가 없어.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라고.”
“거기, 혹시…… 에일린? 에일린이냐?”
귀에 선명하게 꽂히는 낯익은 목소리에 에일린은 화들짝 놀랐다.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한 손으로 새카만 고수머리를 쓸어 넘기며 렉스가 서 있었다. 케일론과 엘로드를 거느린 채.
“……!”
***
히에무스는 그날 한나절 정도를 남쪽 바다에 다녀오는 일로 보냈다. 도착한 즉시 그곳 바다의 정령들에게 진주를 한 움큼 모아 달라고 사정했다. 일 자체는 힘들 것 없었지만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데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정령 무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했다. 썩 내키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에일린을 생각해서 꾹 참고 완수해 냈다.
“호오, 정말 가져왔군요? 게다가 내 생각보다 훨씬 일찍 왔네요.”
“이왕 할 일, 빨리 해치우는 게 낫잖은가?”
“호호, 그렇긴 하죠.”
키프리스가 정말 즐거운 듯 반달눈을 만들며 말했다.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저 도도한 겨울의 왕이 목걸이를 만들 진주 좀 달라고 굽실거렸을 걸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다.
“두 번째 조건은 뭐지? 어서 말해라.”
“음, 생각해 봤는데 먼 북쪽 하늘에 드리워지는 빛의 장막을 가져다주세요.”
“빛의 장막이라고?”
키프리스가 옥좌에 등을 느슨하게 기댔다.
“그래요. 대자연 어머니의 알현실을 가리는 차가운 빛의 장막. 그건 당신이 드린 거라면서요? 나도 그런 걸 가지고 싶어요.”
정령왕이 처음 세상에 태어나면 대자연 어머니에게 자신의 능력으로 형성된 선물을 한 가지씩 하곤 했다. 히에무스가 드린 선물이 바로 그 차가운 빛의 장막인 것이다. 히에무스는 조금 생각에 잠겼다. 그걸 가져오려면 밤이 되어야 가능할 터였다. 북쪽은 이곳보다 더 일찍 해가 지니 지금 가면 될 것 같았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비교적 단시간 안에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알겠다. 바로 다녀오겠다.”
짧은 대답과 함께 히에무스가 사라졌다. 느긋하게 앉아 지켜보던 키프리스가 농염한 미소를 흘렸다. 저 오만한 자를 부려먹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사실 다른 이가 그 약을 원했다면 이렇게까지 많은 대가를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브로미오스에겐 그저 포도주 한 병과 바꿔주었을 정도니까. 하지만 겨울의 왕에겐 그렇게 쉽게 내주기 싫었다. 하긴 히에무스 자신도 그걸 알기에 군말 없이 응하는 것일 테지.
“호호, 재밌어, 정말.”
혼자 소리 내 웃으며 몸을 다시 옥좌에 깊숙이 파묻었다. 손깍지를 끼며 곰곰이 세 번째로 내걸 조건에 대해 궁리하기 시작했다.
***
“폐……하?”
“그래. 네가 이곳에 있다니. 괜찮은 것이냐?”
렉스가 어째서 여기 와 있는 걸까? 도적과 싸운 기사 무리가 황제 일행이었단 말인가? 이런 우연도 다 있나? 아니,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에일린이 굳은 듯 앉아 바라보기만 하자 렉스가 직접 허리를 숙여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뭐라고?! 폐하시라고? 황제 폐하?”
도적 떼를 만났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 놀란 것 같은 헬가와 마리가 황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고생들 했구나. 이제 안심해도 된다. 일어나도록.”
“망극합니다.”
주변이 조용해진 걸 보니 그사이 도적 떼를 일망타진한 모양이었다. 렉스가 에일린의 흐트러진 머리를 넘겨주며 물었다.
“안색이 나빠.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것이냐?”
“예…….”
“다행이다. 마침 내가 이곳을 지나가던 중이었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구나.”
“예에.”
“간만에 미복잠행 중이었거든.”
“…….”
“에일린?”
황제의 말에 계속 건성으로 대답하던 에일린이 중얼거렸다.
“근데, 정령들이. 어, 어떡하지?”
정령들의 몸을 감싸던 빛이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정령들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안 돼!”
에일린이 외마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 마법사 케일론이 엘로드와 함께 제압한 도적떼를 묶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앞에 서있는 렉스를 밀치듯이 지나쳐 거침없이 그를 향해 내달렸다.
“케일론 님!”
케일론이 의아한 눈으로 돌아봤다. 에일린이 곧바로 다가가 사정했다.
“지금 당장 절 루쿨루스 숲에 데려다주세요! 부탁이에요.”
“지금 말인가요?”
“예! 한시가 급해요. 정령들이 많이 다친 것 같아요! 아니면 혹시 당신이 치료해주실 수 있나요?”
케일론이 에일린의 치마폭 속으로 눈길을 보내며 난처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시 뒤 고개를 가로저으며 낮게 대답했다.
“아니. 정령을 치료하진 못해요.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절 어서 숲에 보내주세요. 제발! 그게 아니면 라케르타 공작님이 사시는 성에 데려다주세요.”
“라케르타 공작의 성이라고요? 거긴 왜요?”
케일론이 다소 불쾌해진 듯 눈썹을 움찔거리며 되물었다. 그 이름이 거론되자 렉스 역시 미간을 찡그렸다.
“공작님은…… 정령들에 대해 잘 아시니까요.”
거듭된 그녀의 요청에 케일론이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에일린. 네가 많이 놀란 상태 같은데 우선 쉬는 게 좋겠다. 따뜻한 곳에 가서 몸을 녹이며 쉬다가 괜찮아지면 가도록 해라.”
어느새 다가온 렉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 톤은 평탄했지만 차갑게 경직된 얼굴에 서운함과 실망감이 스미어 있었다. 에일린 곁에 와서 상황을 지켜보던 헬가가 부추겼다.
“그래요, 에일린. 폐하의 말씀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몸이 꽁꽁 얼었잖아요.”
“난 괜찮으니까 빨리 공작님께 데려다줘요!”
에일린이 황제와 헬가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계속 케일론에게 매달렸다. 렉스는 섭섭한 감정을 넘어 점점 골이 나기 시작했다. 케일론과 라케르타 공작 두 사람에 대한 질투심도 고개를 내밀었다.
“안 돼. 그러다 몸이 크게 상할 수 있어. 케일론, 일단 황궁으로 이동하도록 하자. 물론 에일린도 함께다.”
“알겠습니다.”
“싫어요!”
에일린은 그대로 몸을 돌려 비포장 길옆으로 형성된 수풀 쪽으로 달려 나갔다.
“에일린!”
놀란 렉스와 케일론이 뒤따랐으나 에일린은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정령들을 감싸던 빛이 계속 약해지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다른 걸 생각할 수 없었다.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 마음먹었던 그 방법 외에는. 달리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그저 속삭이듯 입술만 움직였을 뿐이니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히에무스 글라키에스!”
***
히에무스는 안드로스 대륙 북쪽 끝으로 가서 암흑이 내리길 기다렸다. 마침내 일대가 어두워지자 하늘가에 오색찬란한 빛의 커튼이 넘실거렸다. 한 자락을 마법으로 떼어내 갈무리한 다음 지체하지 않고 바로 키프리스에게 가져갔다.
“자, 여기 약속한 걸 마련해왔다. 나머지 조건이 뭔지 얘기해 봐.”
마법으로 묶어 놓은 빛의 장막을 내밀자 키프리스가 싱긋 웃으며 받아들었다.
“뭘 그렇게 서두르는 거죠? 숨넘어가겠네. 당신도 종일 움직여 피곤할 테니 거기 좀 앉아서 쉬세요.”
그녀가 홀 한쪽에 있는 의자를 권하자 히에무스가 고개를 저었다.
“됐다. 어서 세 번째 조건이나 말해.”
“맘대로 해요. 좋아요, 세 번째 조건을 말씀드리죠. 세 번째는 당신의 사과를 받고 싶어요.”
히에무스가 순간 움찔거렸다.
“사과라고?”
“그래요. 당신의 사과를 원해요. 예전에 봄의 여왕인 베르누아의 재판이 있던 날, 내게 심하게 모욕을 준 걸 기억하고 있겠죠?”
“그건…….”
“설마 모른다고 할 건가요?”
“아니, 기억하고 있다.”
키프리스가 자세를 가다듬으며 붉은빛 옥좌에 반듯하게 자리잡았다. 그때까지 그녀의 얼굴에 어려 있던 장난기가 사라지자 한 궁전을 통솔하는 정령왕다운 위엄과 기백이 느껴졌다.
“내가 사랑 같은 하찮고 저급한 영역을 다루는 정령이라며 말도 섞기 싫다고 했었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나요?”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제는.”
“그럼 어떻다는 건가요? 사과할 건가요?”
“그래. 사과하지.”
키프리스의 입술이 조금 뒤틀리듯 위로 올라갔다.
“그게 단가요?”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때의 내 행동과 말을 반성하고 있다. 너무나 경솔하고 무책임한 발언이었지. 사랑을 단 한 번도 경험 해보지 못했으면서 모든 걸 안다는 듯 잘난 체했었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나요?”
“물론. 이제 다시는 그대에게 그런 무례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미안했다. 그리고……·.”
“그리고?”
“고맙다.”
뜻밖의 한마디에 키프리스는 순간 모든 행동을 멈췄다.
“뭐가 말인가요?”
“에일린을 만나게 해줘서. 그녀를 사랑하게 해줘서.”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키프리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왠지 민망하기도 하고 겸연쩍은 기분이 들었다.
“진심이다. 진심으로 미안했고 고맙게 생각한다, 키프리스여.”
히에무스가 불이라도 켠 듯 강렬한 은청색 눈빛으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키프리스는 즉시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으, 됐어요. 잘 알겠으니까.”
키프리스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즉시 자신의 마법 공간에 넣어놨던 붉은 마법약을 꺼내 들었다. 한 병이 아니라 세 병이었다. 허공에 띄운 채로 히에무스에게 전달했다.
“자, 가져가세요.”
“이 세 병을 다 주는 건가?”
“나도 양심은 있어요. 세 가지 일을 들어줬으니 세 병 모두 줄게요. 한동안은 걱정 없이 쓸 수 있겠죠.”
“고맙군.”
“가보세요. 좀 피곤하네요.”
“알겠다. 그럼 이만 가보겠다.”
히에무스가 몸을 돌리며 자리를 뜨려 하자 키프리스가 그의 등 뒤에 대고 말을 던졌다.
“당신이 고맙다고 했으니까 앞으로도 나는 당신에게 절대로 사과 같은 걸 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다시 몸을 틀어 키프리스를 마주하며 물었다.
“무슨 말이지?”
“당신을 억지로 사랑에 빠지게 한 것 말이에요. 사과하지 않을 거라고요.”
“당연하다. 내가 오히려 고맙다고 하지 않았는가?”
“항상 달콤하고 좋을 수는 없을 거예요. 괴롭고 고통스러울지도 몰라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지도 모르고요.”
“……?”
“사랑이란 건…… 그런 거니까. 이후에라도 날 원망하지 말아요.”
“그럴 일 없어.”
잠깐 동안 키프리스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길 바라요. 잘 가세요, 히에무스.”
히에무스는 더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궁전 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호기심으로 가득해 보이는 문지기 정령의 배웅을 받으며 바위 동굴 밖으로 막 걸음을 떼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그의 몸이 눈부신 황금빛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
누군가가 그를 소환한 거였다. 찬란한 황금빛 속박과 함께 찰나의 순간 그를 소환한 자 앞으로 이동해야 했다. 히에무스는 당도하자마자 눈을 크게 열어 그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연초록 눈동자와 휘날리는 긴 밤색 머리카락을 가진 가냘픈 인간 여인과 마주쳤다.
“에일린!”
***
같은 날 공녀들의 거처인 아르겐 궁. 엘시아는 날이 어두워지자 안드레아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는 왕녀의 시녀와 호위를 비롯한 다른 이들을 모두 내보낸 후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해서 먼저 간 곳은 제 1신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신관 로드미오를 데리고 다시 아르겐 궁에 있는 엘시아의 방으로 왔다. 그는 인간을 소환하는 마법은 사용하지 못했다. 그건 좀 더 고도의 마법 능력과 풍부한 마나를 필요로 하는 수법이었다. 그가 아는 마법사 중엔 그걸 시전 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예전에 순수 엘프들이나 시도하는 정도였지. 대마법사라 일컬어지는 케일론이라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셔왔습니다.”
“엘시아 님!”
“로드미오 님.”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내 사랑, 내 아름다운 공주님!”
대신관 로드미오가 엘시아를 보자마자 속히 달려가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정말 감격스러운 듯 눈물까지 글썽이는 모습이었다. 엘시아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에게 안긴 채로 잠시 있었다. 불쾌한지 눈가를 찌푸린 채.
“어째서 이제야 불러준 겁니까? 그대를 만나는 순간만 계속 기다렸는데. 목이 타서, 이 메마른 가슴에 불이 붙어 그대로 죽어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셨군요. 죄송해요.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제 신세가 그리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잖아요. 이해해주세요.”
엘시아가 그의 몸을 밀어내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드미오가 아쉬운 얼굴로 떨어지며 입을 열었다.
“알고 있지요, 왜 모르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얼마나 속상하고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랬군요. 저도 당신만은 제 처지를 이해해주실 거라 생각했어요.”
“당연하지요. 그대의 괴로움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어찌 그대를 사랑한다 할 수 있겠습니까? 조국을 위해 고달픈 인질 신세를 기꺼이 감내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엘시아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요.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자유롭지 못한 처지랍니다. 온갖 핍박과 멸시까지 받고 말이에요. 하지만 쓰러져 가는 제 조국을 위해 견디고 있어요.”
“오, 정말 의연하고 훌륭하군요. 하지만 저는 가슴이 아프군요.”
로드미오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엘시아를 응시했다. 그녀가 천천히 그의 손을 잡더니 긴 소파 쪽으로 이동해 앉게 했다. 이내 옆에 나란히 착석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로드미오 님.”
“로드미오라고 불러요, 공주님.”
“그래요, 로드미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뭐든 말씀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테니까요.”
로드미오의 회색 눈동자가 주름진 미간 사이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허기진 사람처럼 번득이는 눈빛 같다고 할까. 엘시아가 가련한 여주인공이라도 된 듯 애수가 깃든 표정으로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문을 열었다.
“전 아젤란 제국의 황후가 되어야 해요. 그래야만 제 조국 아칸 왕국을 구할 수 있어요. 그러니 당신이 힘을 좀 써주세요. 황제가 절 황후로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순간 로드미오의 몸이 감전이라도 된 듯 파들거렸다. 눈빛은 큰 상처라도 입은 듯 그늘이 졌다. 세로 주름이 군데군데 새겨진 그의 얇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음성도 가늘게 흔들렸다.
“그건 제게 너무 가혹한 요구입니다. 엘시아 님. 저는 그대를 사랑하는데 그런…….”
“알아요. 당신이 절 사랑하고 있다는 걸. 저도 당신이 좋아요. 하지만 저는 아칸 왕국의 공주인 몸. 저 자신의 안위만 챙길 수 없는 입장이잖아요.”
“엘시아.”
“부탁해요, 로드미오. 절 사랑한다면 제 뜻대로 해주세요.”
그는 잠시 침묵하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황후가 되시면 절 버리실 겁니까?”
엘시아는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어떻게 당신을 버리겠어요. 말했잖아요. 저는 당신이 좋아요. 그래요, 사랑해요. 사랑하고 있어요. 황제를 사랑해서 황후가 되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저 조국을 위해서 황후자리를 원할 뿐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뿐이에요!”
“진심이신 거죠?”
엘시아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스스로 그의 목에 팔을 휘감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럼요! 진심이고말고요. 내 진짜 사랑은 로드미오, 오직 당신뿐이에요.”
“오오, 엘시아.”
그가 그녀의 몸을 힘주어 끌어안으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리고 느릿하게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시선을 마주쳐왔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내 모든 힘을 쏟아 당신을 아젤란의 황후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로드미오, 고마워요.”
그의 입술이 서서히 내려와 그녀의 입술에 겹쳐졌다. 엘시아는 저절로 이맛살을 일그러뜨렸지만 억지로 참고 응했다. 길고 긴 시간 진한 키스가 이어지자 그녀는 무던히도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
히에무스는 잠시 에일린의 얼굴을 바라보다 그녀가 황급히 내미는 치마폭 속으로 눈길을 보냈다. 그 속에 빛을 잃어가는 세 정령이 쓰러져 있고 바로 뒤로 사악한 마법사와 인간 황제가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갑작스레 휘몰아친 눈부신 빛과 차가운 냉기에 놀라 주춤거리다 겨우 몸을 추스르는 중이었다. 히에무스는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에일린이 차마 그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한 채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구했다. 추위와 걱정으로 새파랗게 얼어붙은 표정, 심하게 떠는 몸을 보니 가슴이 저릿해져 왔다.
“괜찮아, 에일린. 걱정하지 마.”
안심시키는 말과 함께 은빛 망토로 그녀의 몸을 휘감으며 감싸 안았다. 이내 즉시 순간이동 마법을 시전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소환으로 인해 발생했던 황금빛 빛의 소용돌이가 미처 다 소멸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에일린!”
남아서 지켜보던 인간 황제와 마법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둘 다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에일린이 왜 사라졌지? 좀 전의 그 빛은 뭔가?”
렉스가 연이은 질문을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마법 현상이 분명해 보였지만 지금껏 그가 경험해 본 어떤 것과도 달라 보였다. 마법사인 케일론 역시 얼떨떨한 상태였다. 황제보다는 이런 상황이 덜 경악스러웠을 테지만 좀 전에 목격한 장면이 너무나 기가 막혔다. 마치 못 볼 걸 본 듯 얼이 빠진 얼굴로 멍하니 굳어 있었다.
“케일론? 뭐라고 말 좀 해 보게! 에일린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가?”
“정령이 데려간 것 같습니다.”
“뭐?”
“그런데 그 정령이…….”
케일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강한 빛 때문에 자세히 보지 못했으나 얼핏 본 정령의 형상이 매우 낯익은 모습이었다.
“설마,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잖은가?”
“케일론?”
“그냥…… 닮은 거겠지.”
신비로운 황금빛 빛의 잔상이 없어진 지 오래였지만 케일론은 어둡기만 한 허공을 내내 노려보며 뇌까렸다.
“닮은 걸 거야.”
***
히에무스가 에일린을 데리고 다시 나타난 곳은 바로 자신의 궁전이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수많은 겨울의 권속들이 모여들어 반겼다. 그중에는 눈의 여왕과 북풍도 끼어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왕이시여. 어디 갔다 오신 겁니까? 한참 찾았습니다.”
반색하며 달려온 눈의 여왕이 히에무스의 망토 속에 숨어 있던 에일린을 발견하곤 바로 낯빛을 일그러뜨렸다.
“그 인간 여인은 왜 데려오신 겁니까?”
히에무스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에일린과 함께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왕이시여!”
그의 방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히자 눈의 여왕은 미간을 찡그렸다. 조금 떨어져 있던 북풍이 옆으로 날아오자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정말 요즘 왕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군. 아무 말씀도 없이 온종일 나가 계시질 않나, 궁에 돌아오셔도 잠시 머물다 나가 버리기 일쑤고.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계시는 거지?”
서늘한 눈빛으로 계속 방문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설마 저 인간 여인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자주 궁을 비우시는 건가? 함께 살고 계신 건 아니겠지?”
북풍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불안한 눈빛으로 굳게 닫힌 방문을 주시했다.
“글쎄요. 알 수는 없지만 계속 저희 둘을 따돌리며 뭔가를 하고 계시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눈의 여왕이 북풍의 얼굴을 힐끗 훑으며 말했다.
“이대론 안 되겠어. 최소한 왕께서 무슨 일로 궁을 비우시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긴 하지요.”
“우리 능력으로 왕을 미행하다간 바로 탄로 날 테니 대신 저 인간 여자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게 좋겠어. 감시로 붙여놨던 하급 정령들도 요즘은 왕의 명령만 듣고 우리에겐 아무 보고도 올리지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다른 감시를 붙이도록 하지요.”
“그대가 직접 나서면?”
북풍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시다시피 왕께서 제게 늘 임무를 주셔서 짬이 나질 않습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습니까?”
눈의 여왕이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명을 거역해서라도 짬을 내봐야겠군.”
“그 수밖엔 없겠지요.”
“에취!”
히에무스의 망토 속에 있던 에일린이 냉기 때문에 재채기를 하자 그가 얼른 망토를 걷어주었다.
“이런, 괜찮으냐? 에일린.”
“예. 전 괜찮으니까 어서 정령들을 봐주세요.”
“그래.”
히에무스가 손을 한 번 휘둘러 에일린의 치마폭에 있던 세 정령을 공중으로 띄웠다. 그의 손에서 비롯된 눈부신 은청색 빛이 그들에게 흘러 들어갔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축 늘어졌던 세 정령의 몸이 반듯해지더니 이내 움찔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가운 마음에 에일린이 소리쳐 불렀다.
“제퓌!”
“으…… 에일린 님.”
가는 신음과 함께 정령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렸다. 이름을 불러주어서인지 제퓌가 제일 먼저 자리에서 눈을 뜨고 아두스와 프리기가 곧 뒤를 이었다. 에일린이 그제야 얼굴을 펴고 다가가 그들을 감싼 빛 속으로 손을 내밀었다. 매우 서늘한 감촉에 깜짝 놀라 손을 거둬들였다.
“괜찮으세요? 다들!”
“예, 에일린 님.”
세 정령이 조금 몽롱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히에무스가 이제 됐다고 판단했는지 손을 내리자 정령들에게 끊임없이 흘러가던 빛의 물결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제 모두 나아졌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그가 에일린의 눈에 초점을 맞추며 상냥한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그들이 활기찬 모습으로 빙빙 날아다니자 에일린은 비로소 미소를 머금었다. 왠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 정말 다행이에요.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긴장이 풀린 탓인지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에일린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에일린!”
히에무스가 재빨리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에일린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더니 얼른 닦아주었다.
“괜찮아요. 그냥 안심이 돼서 그런 거니까. 정말 다행이에요.”
“에일린 님. 저희 걱정을 많이 하셨나 보군요.”
세 정령이 에일린 주위로 날아와 바닥에 섰다. 다들 감격스러운 표정이었다. 눈치 빠른 제퓌가 얼른 한마디 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씩씩하고 명랑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이제 정말 괜찮아졌으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잠시 마법사에게 제압당해 능력을 빼앗겼던 것뿐이니까요.”
에일린이 손을 내밀어 제퓌를 태운 뒤 얼굴 가까이 끌어당겨 뺨을 비볐다.
“다행이에요, 제퓌.”
“에일린 님…….”
제퓌는 조금 당황한 듯 했지만 곧 에일린의 볼에 그의 얼굴을 문질렀다. 히에무스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에일린, 정령들은 인간과 달리 금방 회복되니까 더는 염려할 것 없어. 안심해라.”
에일린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활짝 웃었다.
“예.”
하지만 계속 몸이 떨렸다. 좀 전까진 걱정과 두려움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떨리는 걸 보니 이제는 다른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챈 히에무스가 에일린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평소보다도 훨씬 뜨거운 것 같았다.
“에일린, 몸이 안 좋은 것 아니냐?”
“예? 그냥 좀 피곤하긴 해요.”
“피곤한 게 아니라 아픈 것 같은데?”
“아니, 그 정도는…….”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에일린의 몸을 휙 안아 들었다.
“앗! 히에무스!”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그의 침대에 에일린을 눕혔다.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며 아까 정령들에게 해줬던 것처럼 빛을 흘려보냈다. 좀 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빛이었다. 자주색에 가까운 빛깔. 여태 히에무스가 보여줬던 차가운 빛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 에일린은 아마도 그가 치유력을 행사하고 있는 거라고 짐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무거웠던 몸이 즉시 개운해지는 게 느껴졌다.
“치유력을 행한 건가요?”
“그래. 나는 겨울의 정령이라 다른 정령에 비해 효력이 다소 약하긴 하지만. 붉은 빛이 강할수록 더 강한 치유력을 나타내지. 내가 낼 수 있는 건 이 정도구나.”
그래도 정령왕이니 예전에 에일린과 처음 만났을 때 열병에 걸려 죽어가던 그녀를 구할 정도의 능력은 됐다. 즉 어지간한 인간의 병을 고칠 능력은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히에무스는 속상했다. 자신은 정말 부족한 것투성이라고 여겨졌기에. 그의 미간에 패였던 주름이 좀 더 깊어졌다.
“멋있어요.”
“응?”
에일린이 좀 전까지 신비로운 자주색 빛을 뿜어내던 그의 손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커다란 연초록 눈동자에 순수한 찬탄의 빛과 함께 수줍은 여인의 설렘이 어려 있었다.
“정말 멋있다고요, 당신.”
순간 히에무스의 얼굴에 더운 열기가 확 끼쳤다.
“멋있다고? 내가 말이냐?”
“예.”
그 짧은 한마디가 마치 마법처럼 그의 온몸을 이리저리 희롱하며 간질이는 것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리며 울렸다. 붉은 마법 약을 한 방울도 먹지 않았는데도 몸이 발간 열기에 사로잡힌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가 너무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에일린은 작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멋질 뿐만 아니라 귀엽기까지 했다.
“에일린.”
히에무스가 손을 내리며 조금 떨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예?”
겨울 호수처럼 맑고 깊은 은푸른 눈동자가 바싹 다가왔다. 지나치게 가까이. 바람에 이는 호수처럼 서늘한 눈빛이 잘게 일렁거렸다. 에일린은 침대에 누운 채 그의 두 팔 사이에 갇혔다. 얇고 하늘하늘한, 비교적 노출이 많은 정령의 옷을 입고 있어 단단해 보이는 어깨와 가슴, 팔의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다. 왠지 무척 관능적으로 보였다.
“키스해도…… 될까?”
그는 혹시 에일린이 거절하면 어쩔까 저어하며 무척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에일린은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눈빛을 보내오는데 어찌 마다해? 그가 싱긋 웃었다.
“잠깐만.”
그가 곧바로 시도하지 않고 부스럭거렸다. 에일린이 의아해진 얼굴로 바라보니 어디선가 꺼낸 붉은 마법 약을 한 방울 삼키고 있었다.
“이왕이면 제대로 하자꾸나.”
“……?”
히에무스의 몸을 감싸던 정령의 찬란한 광휘가 사라지자 그의 얼굴에 피어올랐던 홍조가 더 짙게 나타났다. 체온이 올라 몸이 더워진 탓인지 청량한 겨울 숲의 향기가 훨씬 농염하게 풍겨오는 듯 했다. 먼저 다가온 건 따스한 그의 손이었다. 적당하게 데워진 곧고 긴 손가락이 에일린의 머리카락과 두 뺨을 매만졌다. 곧 그의 넓은 상체가 그녀의 위로 기울여졌다. 이어 소리 없이 내리는 눈송이처럼 그의 입술이 에일린의 입술 위로 설핏 와닿았다.
촉!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처음엔 봄날의 여린 햇살이 내린 것 같았다.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폭신한 느낌이 촉촉한 표피 위로 그대로 녹아들었다. 그러다 점점 움직임의 강도가 더해졌다. 이내 강렬한 여름날의 태양 빛처럼 이글거리는 열기 덩어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밀려들었다. 뜨거웠다. 너무나 뜨거웠다.
“아!”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숨 가쁜 탄식을 토해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덧 그녀의 숨결 역시 벌겋게 달궈진 채 새어 나왔지만 허공에 도달하진 못했다. 히에무스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삼켰으므로. 오랜 갈망에 시달린 듯 짐짓 다급하고 간절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에일린.”
히에무스가 조금 쉰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사랑해.”
에일린의 가슴속에 울컥하며 지독히도 뜨거운 뭔가가 올라왔다. 왠지 난생처음 경험하는 키스처럼 느껴졌다. 20년 만이 아니라 두 번의 생애를 통틀어 처음.
“사랑한다, 에일린.”
처음인 것 같았다.
***
렉스는 난감한 얼굴로 주위를 빙 둘러봤다. 엘로드와 케일론이 묶어놓은 도적 떼가 한쪽에 몰려있었다. 지척에 그들이 타고 온 말과 자신들이 타고 온 말, 그리고 좀 전까지 에일린이 타고 내렸던 소박한 마차와 그 일행들이 보였다. 고아원 봉사에서 에일린과 만났던 헬가와 그녀의 숙모인 마리, 그리고 늙은 마부 말이다.
“젠장.”
존귀한 황제의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말이 뒤틀린 입술을 뚫고 튀어나왔다.
“죄다 엉망이군. 이게 무슨 꼴인가?”
“폐하.”
한껏 경직된 표정으로 엘로드와 케일론이 곁으로 걸어왔다. 두 사람 다 감히 황제에게 내색하진 못했지만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엘로드가 평소처럼 충직한 태도로 물었다.
“이제 어떡하면 되겠는지요?”
렉스는 찡그린 얼굴로 그를 힐끗 쳐다본 후 턱짓으로 헬가 일행을 가리켰다.
“우선 저들을 보내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엘로드가 그들에게 다가가 품속에서 묵직한 자루를 꺼내 내밀었다.
“자, 이걸 갖고 그만 가보도록 해라. 오늘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고.”
헬가의 숙모인 마리가 연신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절대 입 밖에 내지 않겠습니다.”
엘로드가 좀 더 강경한 어조로 주의를 줬다.
“명심해라. 이후 단 한마디라도 오늘 일이 새어 나간다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 가족들까지. 무슨 말인지 알겠지?”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마리가 새파래진 얼굴로 거듭 다짐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케일론이 유난히 음산하게 들리는 쉰 목소리로 일렀다.
“엘로드 공. 그렇게 여러 번 당부할 것 없습니다. 오늘 일을 입 밖에 내는 즉시 목이 터져 죽는 마법을 미리 걸어뒀으니까요.”
“히익!”
마리와 헬가, 마부 세 사람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가라. 그만하면 대가는 충분할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세 사람은 얼굴이 땅에 닿도록 절을 한 후 서둘러 마차에 올라타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렉스가 다시 케일론에게 신호를 보냈다. 별다른 행동도 딱히 없었지만 그가 쉽게 황제의 뜻을 헤아렸다. 한 곳에 묶여있는 도적 무리를 향해 다가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마법주문을 읊었다. 그들을 속박했던 밧줄이 느슨해지며 밑으로 툭 떨어졌다. 케일론이 쉰 목소리로 무겁게 말했다.
“상황이 종료됐소.”
그 말이 떨어지자 잔뜩 웅크렸던 여덟 명의 도적들이 고개를 처 들었다. 케일론이 그들을 향해 주문을 외자 지팡이에 초록색 빛이 반짝였다. 그걸 휘두르니 도적들의 얼굴이 금방 익숙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같은 궁정 마법사인 헬무트 경도 끼어 있었고 최근 황제 주변을 맴도는 이디오마 신관도 보였다. 나머지 여섯 명도 모두 기사단에 속한 자들이라 낯익은 이들이었다. 다들 일이 명쾌하게 끝나지 못한 걸 깨달았는지 어둡고 겸연쩍은 표정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이디오마 신관의 낯빛이 가장 곤혹스러워 보였다.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
렉스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는 그의 앞으로 와 우뚝 섰다.
“이디오마 신관. 보다시피 이번 계획은 영 신통찮은 것 같소. 에일린을 위기에 처하게 한 후 용감하게 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라고 했었지.”
“소, 송구합니다.”
“그럼 내 늠름한 모습에 마음을 열게 될 거라더니 이게 뭔가? 꼴만 우스워진 것 같은데.”
“…….”
신관은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시도한 것 모두 별 볼 일 없었군. 하나도 성과가 없지 않았나?”
“아, 아마도 그 여인은 이미 다른 이를 맘에 품고 있는 게 아닐런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신관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렉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신관의 대답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을 놔두고 다른 이에게 마음을 줬다고? 그럴 리가 있겠는가?
“됐소. 어쭙잖은 변명은 그만두시오. 그대의 바보 같은 말만 믿고 그대로 행한 나 자신이 한심할 따름이오. 이제 전부 관두겠소.”
“폐……하.”
이디오마 신관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번 짐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겠지? 결과가 신통찮으면 문책을 하겠다는 것 말이오.”
“잊지…… 않았습니다.”
렉스가 비웃듯 피식 짧은 미소를 지었다.
“잘됐군. 그대는 이만 돌아가서 그 처벌이나 기다리는 게 낫겠지. 짐과 더는 볼일이 없을 것이오.”
“마, 망극하옵니다.”
이디오마 신관은 코가 땅에 닿을 듯 엎드리며 황제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당혹스러움과 걱정으로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렉스가 잠시 더 그를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쏘아본 뒤 몸을 돌렸다.
“케일론! 에일린을 찾아보도록 하자. 이대로 정령의 숲으로 이동하도록.”
케일론 역시 마뜩잖은 눈빛으로 신관을 쏘아본 뒤 황제에게 허리를 숙여 답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기사들과 헬무트 경도 다른 복장으로 갈아입고 말과 무기 등의 소지품을 챙기며 분주하게 대열을 정비했다. 모든 준비가 얼추 끝나자 다들 마법사가 시전한 술법을 이용해 신속히 그 자리를 떠났다. 계속 바닥에 고개를 묻은 채 떨고 있는 이디오마 신관만 덩그러니 남겨둔 채.
***
“응…….”
에일린은 한참 잠에 빠져 있다 몸을 파고드는 냉기 때문에 눈을 떴다. 눈앞에 신비로운 은빛과 푸른빛이 가득한 걸 보니 여전히 겨울의 궁전 안에 있는 히에무스의 침실 같았다. 아까 키스를 나누다 히에무스의 품속에서 그대로 잠든 것이다. 그가 두 팔로 휘감듯이 에일린을 안고 있었다. 붉은 마법 약을 삼킨 탓인지 방을 나서지 않고 줄곧 그녀 곁에 누운 채로 시간을 보낸 듯 했다.
“깨어났구나, 에일린.”
그가 팔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며 물었다.
“몸은 괜찮으냐?”
“예. 좋아요, 정말 개운해졌어요.”
몸 상태가 최고였다. 정령왕이 치유력을 행사해줬으니 당연한 일일 테지만.
“다행이구나.”
히에무스가 나른해진 음성으로 말하며 다시 에일린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목선이 깊게 파인 튜닉 사이로 드러난 그의 맨 가슴팍에 그녀의 뺨이 밀착했다. 에일린은 부끄럽기도 하고 다소 숨이 막히는 기분도 들어 슬며시 밀어냈다. 그가 조금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내온다.
“이제 일어나야 해요.”
엷게 상기된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다. 외박을 할 수는 없으니 그만 돌아가야 하겠지. 아까 너무 경황없이 헤어져 렉스와 케일론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구나.”
아쉬움이 진하게 밴 목소리로 대꾸하며 히에무스도 몸을 일으켰다. 사실 그도 이제 움직여야 했다. 서너 시간이나 방 안에만 머문 상태였으니까. 겨울의 궁전이든 하레나 성이든 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히에무스가 에일린과 함께 침실 밖을 나오자 아두스와 제퓌, 프리기가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옆으로 날아들었다.
“일어나셨어요? 에일린 님.”
“예. 많이 기다렸어요?”
제퓌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이 숲에 인간 우두머리와 사악한 마법사가 와 있어서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 두 분이 나오시길 기다렸어요.”
“황제 폐하와 케일론 님이 와 있다고요?”
세 정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두스가 이어 설명했다.
“저희도 좀 전에 알게 됐어요. 궁전 밖에 있던 정령들이 들어와 일러주더라고요. 저희가 나가서 지켜보니 아무래도 에일린 님을 찾는 중인 모양이에요.”
“저를요?”
“그런 것 같아요. 대지의 정령까지 동원했더라고요.”
프리기까지 가세해 상황 설명을 하자 히에무스가 날카로운 어투로 물었다.
“대지의 정령까지 동원했다고? 확실한 거냐?”
“예. 사악한 마법사가 사역하는 정령 같았어요. 에일린 님을 찾으려고 겨울의 궁전을 찾는 듯 했습니다. 겨울의 정령이 있는지 유심히 관찰했거든요.”
조금 멀찍이 있던 눈의 여왕이 다가와 끼어들었다.
“제가 일단 밖에 있던 정령들을 모두 궁으로 불러들이고 결계를 강화했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에일린에게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어서 이 궁전에서 나가라고 등을 떠미는 건가. 다소 마음이 불편해진 에일린은 히에무스의 한쪽 팔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저, 그만 가봐야겠어요. 그분들과 함께 돌아갈게요.”
“잠깐 기다려라, 에일린. 우선 나와 함께 가서 분위기를 살피도록 하자. 내가 좀 확인하고 싶은 게 있구나.”
“분위기를 살피자고요?”
“그래.”
“아두스, 따라오너라.”
“예. 왕이시여.”
아두스가 냉큼 왕의 곁으로 가서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자신만 왕을 수행하게 된 게 무척 자랑스러운지 뿌듯한 표정이었다. 히에무스는 에일린의 손을 잡은 후 은신술을 행했다. 그와 동시에 순간이동 마법을 발동시켜 아두스가 이끄는 장소로 이동했다.
***
“그만 환궁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폐하.”
엘로드가 그의 바로 옆에서 말을 모는 황제의 눈치를 보며 권유했다.
“꽤 야심한 시각입니다. 추운 날씨에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됩니다. 벌써 몇 시간째 찾아보시지 않았습니까?”
렉스는 살짝 찡그린 표정을 유지한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에일린을 찾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별 시답잖은 방법을 시도하려다 에일린을 놀라게 하고 지금은 이렇게 행방까지 놓치다니.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미칠 지경이었다.
“일단 환궁하셨다가 날이 밝은 후 다시 찾아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주변도 어둡고 날씨도 차가워 다들 지친 듯합니다만.”
황제를 사이에 두고 옆을 지키던 궁정 마법사인 헬무트 경도 한마디 거들었다.
“황송합니다만 캐드릭스 후작님의 의견대로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폐하.”
그도 몇 시간째 어두운 숲길을 비추느라 지팡이에 불을 밝혔던 터라 몹시 피로한 모습이었다.
“…….”
렉스는 계속 침묵했다.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에일린이 행방불명된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 탓이지 않은가? 어째서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시도하는 일들은 하나같이 엉망이 되는 걸까?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대로 수색을 계속하는 것도 무모한 일일 것이다. 다른 일행들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던 마법사를 불렀다.
“케일론!”
그는 지팡이에서 나온 하얀 빛에 목이 묶인 대지의 정령을 앞세워 숲길을 훑던 중이었다. 뒤돌아보는 그의 보랏빛 눈매가 매섭게 치켜 올라가 있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내일 다시 수색을 재개하도록 하자.”
“…….”
“케일론?”
“그럼 폐하께서는 이만 환궁하도록 하십시오. 저는 좀 더 찾아보겠습니다.”
렉스는 잠시 마법사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또 저런 눈빛을 보내는 건가?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불경해 보이기까지 하는 눈빛. 뭐 지금은 저런 눈빛을 보내온다 해도 당연하긴 하지만, 자신은 황제가 아니던가? 제국에서 가장 존엄한 존재. 무슨 일을 하든 떳떳한 게 황제인 것이다. 설사 그게 파렴치한 일이라 해도 황제가 하면 ‘가장 고귀한 파렴치한 일’이지. 신이 하는 일이 뭐든 옳듯이 황제가 하는 일도 어지간하면 다 옳은 법이다.
“반 시각만 더 찾아보도록 하지.”
케일론은 대답 대신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엎드린 채 느릿하게 움직이는 대지의 정령을 재촉했다.
“아제르, 좀 더 서둘러라.”
중급 대지의 정령이 불만이 가득한 흙빛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쳇, 재촉하지 마라. 이게 내 최대 능력이니.”
“부탁이다. 좀 더 분발해다오.”
부탁이라는 말에 대지의 정령은 잠시 멍한 눈으로 마법사를 바라보다 다시 땅 위로 고개를 박으며 응답했다.
“노력해 보지.”
그들이 한참 수색에 몰두하는 장면을 히에무스와 에일린이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히에무스가 헬무트 경을 가리키며 아두스에게 물었다.
“아두스, 저 마법사를 잘 살펴봐라.”
“예.”
아두스가 미간에 힘을 주며 확인했다.
“어떠냐? 저 마법사의 마나가 아까 에일린을 습격했다던 마법사의 것과 일치하지 않느냐?”
아두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맞장구쳤다.
“예. 그러고 보니 맞습니다. 똑같은 빛깔에 똑같은 양이었습니다. 평소의 저 마법사랑요.”
에일린이 깜짝 놀란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에일린은 좀 전에 들은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멍한 낯빛으로 히에무스를 바라봤다. 히에무스가 살짝 눈썹을 늘어뜨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에일린에게 충격을 주고 싶진 않았지만 그냥 넘어갈 사항이 아닌 것 같아 입을 뗐다.
“에일린. 정령들은 모든 생명체가 지닌 마나의 양과 빛을 볼 수 있단다. 대지의 정령만큼 그 능력이 특출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다 가능하지. 하급 정령들도 할 수 있는 일이야.”
“예.”
에일린은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찜찜한 예감이 밀려들었다.
“아까 너를 공격했던 마법사의 마나와 지금 저 숲길을 걷고 있는 궁정 마법사의 마나가 동일하단 말이다. 그 말은…….”
아두스가 냉큼 끼어들어 아는 체를 했다.
“아까 그 악당 마법사가 저 궁정 마법사란 것이죠.”
에일린은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었다.
“뭐라고요?”
히에무스가 조금 염려스러운 표정을 짓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가 당했던 일을 들어보니 어쩐지 매우 익숙한 느낌이 들었어. 내가 인간의 신분을 얻기 위해 드라코니아에 갔을 때 행했던 그 부자연스러운 일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군.”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면?”
“마치 누군가가 꾸민 연극 같다는 느낌이었다.”
“연극이오?”
에일린의 목소리가 무척 딱딱하게 새어 나왔다. 자신의 목청에서 나온 말인데도 마치 다른 이가 말하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렉스랑 케일론 님이 일부러 그런 일을 꾸몄다는 건가요?”
“아마도.”
히에무스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때문에 그런 짓을 했다는 거죠?”
“당연히 그대의 환심을 사고 싶었던 거겠지.”
순간 에일린은 다리에 힘이 빠져 몸을 휘청거렸다.
“에일린!”
히에무스의 손을 잡은 상태였지만 거의 주저앉을 뻔했다. 그가 얼른 단단히 붙잡아주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자신의 마음을 얻어 보겠다고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세 정령을 위험에 빠뜨리고 자신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 상황으로 내모는 그런 짓을?
“거짓말…….”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게 멋지고 훌륭한 렉스가 그런 일을 계획했을 거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케일론 역시 깐깐하긴 하지만 그런 일에 동참할 만큼 형편없는 사람이 아닌데.
“거짓말이야.”
아닐 것이다. 정령은, 히에무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을 말한다면 그건 바로 인간 쪽일 확률이 높겠지.
“아두스.”
“예. 에일린 님.”
창백한 얼굴로 에일린이 힘겹게 부르자 작은 겨울의 정령이 재빨리 응답했다.
“정말 같은 사람인가요? 맹세할 수 있나요?”
아두스가 조금 찡그린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맹세하죠. 정령으로서의 긍지를 걸고. 틀림없이 같은 인간이에요.”
말투에서 결연한 의지마저 느껴졌다.
“그런…….”
에일린은 망연한 표정으로 한동안 그 자리에 묶인 듯 서 있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별 성과를 얻지 못한 황제 일행이 환궁을 서두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케일론은 마지막까지 철수하는 걸 망설이다 이내 포기했는지 주문을 외워 대지의 정령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일행들을 위해 순간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그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도 에일린은 뚫어질 듯 그들이 있던 자리에 시선을 보내며 서 있었다.
“에일린? 괜찮은 것이냐?”
너무 큰 충격을 준 것일까? 히에무스는 그의 옆에 꼼짝 않고 서 있는 에일린을 바라보며 잠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나았을까? 사실 그 자신도 인간 군주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지체 없이 밝힌 측면이 있었다.
“히에무스.”
“응?”
에일린이 한참 만에 조용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좀 더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 보고 싶어요.”
“그래.”
“괜찮으시다면 은신술을 유지한 채 상황을 살펴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물론이다.”
***
케일론은 황궁까지 황제 일행을 배웅한 후 훨씬 늦은 시각에 자신의 성으로 귀가했다. 뜰에 그가 나타나자마자 언제나처럼 기다리고 있던 브레이가 달려 나와 맞이했다.
“케일론 님! 이제 오십니까?”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렇지 않아도 조바심 나 속이 타들어 가던 브레이가 황급히 따라붙으며 말을 걸었다.
“오늘 어떻게 된 겁니까? 에일린은 왜 안 보이는 거고요?”
케일론이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이마에 주름을 잡은 채 계단만 올라가자 브레이는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전 케일론 님이 시키신 대로 오늘 에일린을 고아원까지 데려다 줬다고요. 그리고 귀가할 때 또 들리겠다는 약속도 하고.”
잠시 말을 끊더니 조금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이 돼도 고아원으로 다시 가지 않고 그냥 저 혼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케일론 님이 시키신 그대로요. 근데 왜 아직도 오지 않은 겁니까? 당신과 함께 돌아오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자신의 방 앞에 이르자 케일론이 발걸음을 멈췄다.
“어디까지 따라올 셈이냐?”
마치 가시라도 박힌 듯 잔뜩 날이 선 목소리였다. 거침없이 따라오던 브레이가 기세가 꺾여 웅얼거렸다.
“가보겠습니다. 저,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생각 없다.”
쾅!
거칠게 문을 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혼자 문밖에 남은 브레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에일린은 어찌 된 거냐고?”
대충 묶은 붉은 머리를 벅벅 긁적이며 다시 계단을 내려오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저택 1층 홀에 푸른빛과 함께 둥근 마법진이 나타났다. 궁정 마법사인 헬무트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더니 브레이를 보자마자 소리쳐 물었다.
“이것 봐! 하인. 케일론 님 계시는가?”
브레이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좀 전에 오셨습니다. 불러드릴까요?”
“그래. 부탁하네.”
브레이가 또다시 계단을 오르기 위해 움직이려는 순간 케일론이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헬무트 경.”
중년의 마법사가 품속을 더듬으며 천천히 설명했다.
“경황이 없어 이걸 미처 돌려드리지 못해 가지고 왔습니다. 무척 귀중한 것일 텐데…….”
그가 내민 손 안에 익숙한 형태의 약병이 쥐여 있었다. 정령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마법약이었다. 그에게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소중한 마법약. 케일론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뚜벅뚜벅 걸어가 건네받았다.
“일부러 가지고 와주시다니. 고맙습니다.”
정중한 말투와 다르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느린 움직임으로 전해주면서 헬무트가 무심히 말을 꺼냈다.
“허, 참. 오늘 벌인 일들, 정말 황당하지 않습니까? 저희 같은 인재들에게 시정잡배 같은 악당 노릇을 하라는 게 말이 됩니까? 황제 폐하의 의중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
“근데 그 조그만 하급 정령들은 어찌 됐을까요? 죽었을까요?”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그렇겠죠. 정령이니 죽었다고 하면 안 되고 소멸했다고 해야겠지만.”
케일론이 약병을 만지작거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정정해 주었다. 헬무트가 눈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짓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신하 된 자의 처지니 마땅히 따라야지요.”
“흠흠, 그렇긴 하지요.”
그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케일론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전혀 폐하답지 않은 처사라 무척 놀랍지 않습니까? 기사단에게도 도적 노릇을 하라고 시키시고 말입니다. 적진을 교란하거나 섬멸하는 일도 아닌데 그런 정예요원들을 동원하시다니.”
“…….”
“보아하니 그 아녀자들도 다 매수한 모양이더군요. 허, 참! 폐하께서 여인 하나에게 잘 보이고자 그런 계책을 쓰시다니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헬무트 경. 우린 신하 된 자의 입장이니 그런 의문을 가질 필요 없습니다. 그저 명령받은 대로 제대로 이행하면 그만일 뿐.”
유난히 차갑고 딱딱한 어투에 헬무트는 흠칫 어깨를 들썩였다. 대마법사에게 자신이 너무 스스럼없이 대한 모양이었다. 무안한 마음에 한결 잦아든 목소리로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어, 무, 물론이지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영민하신 황제 폐하께서 깊이 헤아리신 바가 있어 하신 일이겠지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여겨졌는지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게 아니라면 그 신관이 이상한 주청을 올린 거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자를 가까이하신 이후부터 황제 폐하의 행동이 좀 달라지신 것 같지 않습니까?”
아니, 더 이전이던가? 그래. 그러고 보니 이번 겨울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것 같습니다. 왠지 예전보다 가볍고 들뜬 모습이랄까.”
잘 판단이 서지 않아 헬무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 그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던 케일론이 다소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다른 용건이 없다면 이만 인사드리겠습니다. 헬무트 경.”
“이런, 실례했군요. 피곤하실 텐데. 그럼 푹 쉬십시오. 내일 황궁에서 뵙도록 하지요.”
“살펴 가십시오.”
중년의 마법사가 다시 푸른 마법진의 빛 속으로 사라지자 케일론도 발걸음을 돌렸다. 처음엔 느리게 오르다 점점 빠르게 숨 막히듯 달려서 계단을 올라갔다. 그의 방이 위치한 2층을 지나 성의 꼭대기인 4층까지. 단숨에 맨 끝 쪽에 있는 방 앞으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텅 비어 있었다.
“당연한 건가.”
분명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케일론의 얼굴에 실망감이 짙게 배어났다. 주인이 사라진 방에 감돌던 냉기가 툭 튀어나와 덮치는 바람에 케일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일어 문틀에 머리를 기댔다. 추운 날씨에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마나를 소비하며 수색작업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이 묘한 죄책감과 그리움 때문인 걸까? 입술을 깨물며 그 방의 주인을 불렀다.
“에일린.”
몹시 탁하고 음울한 음성이었다.
***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에일린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걸 사실로 확인하고 나니 상당히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모든 걸 정말 렉스가 꾸민 일이었다. 세 정령을 죽이려고까지 했다니. 호흡이 거칠어졌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렉스의 다급했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용서가 되지 않았다.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었다. 렉스에게도, 케일론에게도, 브레이에게도.
“하아.”
꾹꾹 틀어막았던 실망감이 긴 한숨과 함께 밖으로 흘러 나왔다.
“에일린?”
히에무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불렀다.
“이만 가요. 히에무스. 궁금한 부분을 알아냈으니까.”
“어디로…… 가면 되겠느냐?”
에일린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 대답했다.
“어디든지요. 더 이상은 여기 있고 싶지 않아요.”
어디든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저 이곳을, 더 정확하게는 이곳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어디든 괜찮은 것이냐? 겨울의 궁전이나 하레나 성도?”
그냥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하레나 성으로 가도록 하자. 그대가 지내기에 더 나은 곳일 테니.”
“예.”
“가져갈 짐 같은 건 없느냐?”
에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 세계에 올 때도 빈손이었다. 저 방에 있는 물건들이라고 해도 애초에 순수하게 그녀 소유인 건 없었다. 그러다 히에무스에게서 받은 드레스와 지금껏 모아놨던 돈이 생각났지만 지금 뭔가 꺼내오는 건 적절치 않아 보였다. 케일론이 계속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다음에 다시 챙기는 게 좋겠어요. 지금은 그저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요.”
“그래.”
히에무스가 그녀의 뜻을 헤아린 듯 속히 순간이동 마법을 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