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함께 하고 싶은 일 (16/24)

15. 함께 하고 싶은 일

무거운 기분으로 황궁으로 돌아온 렉스는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를 줄곧 수행하던 이디오마 신관이 허리를 깊이 숙인 채 뒤따랐다. 렉스는 그에게 단 한 순간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뚜벅뚜벅 복도를 걸었다. 눈치를 보던 신관이 바짝 따라붙었다.

“이디오마 신관.”

차갑게 식은 음성이 잔뜩 경직된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예, 말씀하소서.”

“빨리 좋은 수를 생각해 내시오.”

“…….”

“그대의 조언이 신통찮으면 큰 벌을 내릴 거라는 말 잊지 않았겠지?”

“그, 그러하옵니다.”

신관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렉스는 빠르게 걷는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말을 계속했다.

“그러니 속히 쓸 만한 생각을 내놓으란 말이오.”

“예, 옛. 그렇지 않아도 궁리해둔 수가 하나 있사옵니다.”

렉스가 걸음을 멈췄다. 비로소 신관을 돌아보며 시선을 맞춰왔다.

“뭐지?”

“흠, 흠.”

신관이 몇 번 헛기침을 했다. 긴장되기도 하고 나름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었다.

“그 전에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혹 그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렉스의 얼굴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듯 실룩거렸다. 예전에 열린 황궁 무도회에서 라케르타 공작과 에일린이 함께 춤을 추던 광경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도 그때는 다른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남자의 미모에 혹했던 것뿐일 테다. 이후 그자와 깊이 사귄다거나 친분을 쌓는 것 같은 행동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 공작이 에일린에게 보석 세트를 빌려준 적이 있다고는 하나 그건 딱히 수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거야 귀족들 사이에 흔한 일이니까. 그 뒤 공작이 연 파티에 참석한 적이 한 번 있을 뿐 편지 한 장 왕래한 적이 없다고 들었다.

“그렇지 않소. 그건 보장할 수 있소.”

이디오마 신관이 한결 마음이 놓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 말씀드릴 방법이 꽤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무슨 방법이오?”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황제에게 생각했던 바를 고했다. 렉스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좀 치사한 것 같기도 하고 그다지 맘에 들지 않지만 한번 시도해 볼만은 했다. 전쟁을 치를 때도 온갖 쩨쩨한 간계가 다 동원되지 않던가? 이기면 그만인 것이다. 승자는 언제나 옳은 법이니까.

***

에일린은 제퓌와 아두스와 함께 히에무스가 지내는 하레나 성으로 갔다. 이제 낮 시간 동안 성에 남아 있는 이가 브레이밖에 없으니 몰래 빠져나오는 게 수월해졌다. 그래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저번처럼 프리기를 감시역으로 남겨두었다. 순식간에 하레나 성의 정문 앞에 도착했다. 하급정령들은 다른 인간을 숨길 수 있을 만큼 마법 능력이 강한 건 아니기에 성 안으로 직접 들어가지는 않았다. 아두스가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제가 가서 왕을 모시고 올게요.”

“예, 부탁드려요.”

아두스가 사라지자 제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냥 집에 계시면 저녁쯤 왕께서 보러 오실 텐데요. 에일린 님.”

“지금 당장 보고 싶어서요.”

“그러시구나.”

제퓌는 잘 이해되지 않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다는 건 어떤 마음인 걸까? 오랜 세월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만 그런 감정을 지녀본 적이 없기에 가늠이 되지 않았다. 왕께서 느끼신다는 그 마음의 갈증과 비슷한 것일까? 제퓌는 새삼 에일린을 바라보았다. 조금 붉게 상기된 뺨. 초조해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기뻐 보이기도 하고 도무지 짐작하지 못할 낯빛이었다. 인간들은 참 복잡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듯했다. 어쩌면 정령들이 영원을 통해서 경험할 것들을 그 짧은 생에 다 겪기 때문에 그런 건지도.

“에일린!”

제퓌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조금 방정맞은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그들의 왕 대신 유니콘인 루카스가 생글거리며 나와 있었다. 에일린이 얼른 인사했다.

“잘 지냈어요? 루카스.”

“응, 넌 어쩐 일인 거야?”

“저…… 히에무스를 보러왔는데 안에 없나요?”

그의 곁에 함께 나타난 아두스가 대답했다.

“왕께선 겨울의 궁전에 가셨대요. 저녁 무렵에나 오실 거라던데요?”

“그래요? 그럼…….”

어떡해야 하지?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나와 함께 가보지 않을래? 에일린.”

루카스가 환한 얼굴로 좀 더 가까이 다가서며 물었다.

“함께 가보자고요?”

“그래. 루쿨루스 숲에 같이 가자고. 나도 집에 들를 때도 됐고, 나랑 가서 놀다 오면 어때?”

루카스가 얼른 다음 제안을 건넸다.

“그러다 잠깐 짬 내서 히에무스 님을 만나러 가면 되잖아. 히에무스 님, 요즘 굉장히 바쁘신 것 같았어. 겨울의 궁전에도 일이 밀렸을 거야.”

에일린은 잠깐 망설이다 그러기로 했다. 가끔은 그녀가 직접 히에무스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오늘은 정말 그랬다.

다 함께 루쿨루스 숲으로 왔다. 일단 겨울의 궁전 앞에 서 있는데 제퓌가 물었다.

“에일린 님. 지금 바로 우리 왕께 가서 에일린 님이 오셨다고 전할까요?”

“아뇨, 괜찮아요.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릴래요.”

그가 보고 싶어 왔지만 바쁜 그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건 아니어도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여기 있으면 춥고 심심하잖아? 에일린, 우선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갈래?”

“루카스 집에 가자고요?”

“응. 꽤 볼 만할 거야. 정령왕의 궁전만큼 멋지지는 않지만 훨씬 넓고 재미있는 게 많아.”

연한 햇살 속에 우뚝 세워져 영롱하게 빛나는 겨울의 궁전을 쳐다보며 루카스가 말했다. 아두스가 코웃음을 쳤다.

“쳇, 일각수들이 사는 곳에 뭔 재미가 있다고 그래요? 뿔 달린 초식남들만 우글거리는데.”

루카스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그래도 처음 가보면 신기할 거야. 아, 그래. 내가 승마하는 법을 가르쳐줄게.”

“승마라고요?”

“응, 우리 집에 가면 익힐 수 있어. 배워두면 좋을 거야.”

별다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알아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 예전에 말을 타지 못해 케일론이 투덜거리던 일도 생각났다.

“좋아요.”

다시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해 루카스가 사는 유니콘 궁전에 다다랐다. 거대한 바위 절벽에 커다란 동굴 입구가 보였다. 온통 까만 어둠으로 덮여 있어 도무지 안을 확인할 수 없었다. 루카스가 뭔가 주문을 외치자 안쪽에서 복잡한 문양이 가득 새겨진 커다란 나무문이 나타났다. 그가 손을 대니 육중한 문이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자, 들어가자. 에일린.”

루카스가 다소 들뜨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그를 따라 안으로 진입했다.

“와!”

안은 별천지였다. 얼핏 보면 가을의 궁전과 비슷했지만 다시 보니 전혀 달랐다. 가을의 궁전이 곡식이 익어가는 들판과 과수원이 넓게 펼쳐진 모습이었다면 이곳은 야생의 초원 같았다. 몇몇 유니콘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뛰어노는 광경이 보였다. 가운데 위치한 광대한 초지 주위로 거대한 바위 절벽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곳에 뚫린 크고 작은 동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저곳에 사나요?”

“응. 저 동굴이 우리 일각수들이 사는 집이야. 제일 큰 절벽에 있는 커다란 동굴이 내가 사는 궁전이야.”

아두스가 냉큼 한마디 보탰다.

“궁전이라기보단 보금자리라고 해야 하지 않나요? 둥지라는 말도 적절하고.”

루카스가 아두스를 잠깐 쏘아보다 곧 무시하고 멀찍이 보이는 거대한 바위벽을 가리켰다.

“저기, 저 하얀 절벽.”

“그렇구나.”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루카스 님!”

갑자기 유니콘 수십 마리가 다가와 그들을 에워쌌다. 초지 위에 있던 자들 같았다. 인간 모습을 한 자가 예닐곱쯤 되고 나머지는 유니콘 모습이었다. 인간 모습의 남자 하나가 앞으로 나서더니 루카스를 향해 물었다.

“오랜만이군요. 그간 어디 있다 오신 겁니까? 세르모스 님께선 그냥 어디 수행을 가셨다고만 하셨는데.”

이내 에일린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저, 저 아가씬 또 누구신지요?”

“새로 사귄 내 친구야. 아빤 궁에 계셔?”

“세르모스 님께선 순찰을 나가셨습니다. 서너 시간 후에 돌아오실 겁니다.”

“그래? 그럼 그냥 좀 놀다 가야겠군. 잠깐 들린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다들 볼일이나 봐.”

“알겠습니다. 그럼.”

몇몇은 몸을 돌려 아까 있던 자리로 돌아갔으나 나머진 여전히 발길을 돌리지 않고 남아 있었다.

“왜 그러고 있는 거야?”

“그게…… 모처럼 젊은 아가씨께서 오셨는데 뭔가 대접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다들 썩 꺼져!”

루카스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그제야 꾸물거리며 물러났다. 다들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해 보였다. 어기적거리며 물러나는 그들을 보며 에일린이 문득 궁금해져 질문했다.

“유니콘들은 모두 남자밖에 없나요?”

루카스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아냐, 여자도 있어. 그 수가 정말 드물어서 그렇지. 그렇지 않다면 다음 세대가 어떻게 태어나겠어?”

“그렇구나.”

“하지만 여자 일각수들은 콧대가 너무 세서 좀처럼 우릴 상대해주지 않아. 하나하나가 다들 공주님이나 여왕님처럼 군다고.”

“그래요?”

순간 에일린은 여자 유니콘이 좀 부러워졌다. 남자 유니콘들, 다들 젊고 준수해 보였는데. 순진하기까지 하고. 왠지 무안해진 루카스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궁으로 가서 뭐 좀 먹을래? 에일린. 아니면 승마하는 법, 지금 가르쳐줄까?”

“배는 고프지 않아요. 승마 먼저 배울래요.”

“그럼 그렇게 해.”

에일린은 다시 주변을 쓱 훑어보며 물었다.

“근데 여기 탈 만한 말이 있어요?”

루카스가 정색하며 답했다.

“당연하지. 너도 알잖아.”

“예?”

“여기 있잖아, 바로.”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루카스가 주문을 외며 일각수로 변신했다. 오묘한 빛을 휘감은 외뿔을 달고 새하얀 갈기를 눈부시게 휘날리며. 유니콘으로 변해도 말하는 건 가능했다.

“나 말이야.”

에일린은 조금 난감해져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소설책에서 엘시아 왕녀가 유니콘을 타고 다니던 장면을 떠올렸다. 거기선 무척 자연스러웠으니 그냥 탈까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다른 말은 없어요?”

결국 루카스가 아닌 일각수를 타기로 했다. 100살쯤 된 어린 유니콘인데 인간 세계의 웬만한 말 정도로 컸다. 에일린은 미안해했지만 어린 유니콘은 오히려 더 좋아하는 눈치였다. 시간이 지나자 에일린 혼자서도 어느 정도 탈 수 있게 되었다. 속도를 내지는 못하지만.

“잘했어, 에일린. 이제 슬슬 조금 멀리 있는 초원으로 나가볼래? 유니콘 궁전까지 가보는 건 어때? 가서 뭐 좀 먹자고.”

“예, 그렇게 해요.”

에일린이 순순히 그러겠다고 하자 루카스가 신나게 길을 안내했다. 그 역시 유니콘으로 변한 상태였기에 에일린이 탄 유니콘과 보폭을 나란히 맞추며 걸을 수 있었다. 함께 초원을 거니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에일린!”

히에무스의 목소리! 급히 뒤돌아봤다. 그가 곧장 날아와 팔을 뻗어왔다.

“앗!”

그가 그대로 에일린을 말에서 낚아채 안아 들었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겨 하늘로 날아올랐다.

“히에무스!”

에일린을 태웠던 어린 유니콘과 옆에 함께 걷던 루카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들 따윈 안중에도 없는 히에무스가 에일린에게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내가 보고 싶어서 이곳까지 왔다면서 왜 여기 있는 거냐? 에일린.”

“아…….”

에일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의 옆을 보니 제퓌가 싱글거리며 날고 있었다. 그가 히에무스를 데려온 모양이다.

“그, 그냥 조금…… 보고 싶었거든요. 많이는 말고 조금이오.”

“괜찮아, 조금이라도.”

만면에 겨울 햇살처럼 눈부신 미소를 담은 채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정말 기뻐.”

***

모두들 루카스의 집으로 향했다. 바위굴 안은 보기보다 훨씬 크고 쾌적했다. 널찍한 알현실과 접견실, 식당과 부엌, 그 외 여러 개의 침실이 갖춰져 있었다. 절묘하게 뚫린 바위 구멍에서 쏟아지는 햇빛 덕분에 내부도 충분히 밝았다. 몇 개 없는 탁자나 의자 등의 가구는 전부 바위나 나무를 별다른 가공 없이 깎아 만든 것들이었다. 아두스 말처럼 ‘궁전’이라 지칭하기엔 좀 투박하고 소박해 보였지만 나름 운치가 있었다. 어쨌든 왕이 사는 곳이니 궁전이 맞긴 했다.

“우린 주로 인간형 모습보다 일각수 모습인 채로 지낼 때가 많거든.”

루카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멋져요.”

에일린이 이곳저곳 둘러보며 칭찬하자 그가 금방 환한 표정을 되찾았다.

“그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예. 동화 속에 나오는 집처럼 느껴져서 좋은데요.”

덩치 큰 유니콘들이 사는 공간인 만큼 모든 게 큼직큼직해서 아기자기한 맛은 없었지만 말이다. 옆에 있던 히에무스가 무심한 눈길로 휘 둘러보더니 말했다.

“하레나 성에 있는 마구간과 비슷해 보이는군.”

궁 안에 있던 시종들이 인간형으로 변신해 이런저런 시중을 들어주었다. 그들은 식당으로 보이는 방으로 데려가 먹을 것을 내왔다. 주로 꿀물과 과일주, 호밀 빵이나 샐러드, 나무 열매 종류였다. 에일린 입맛에는 좀 거칠고 밍밍하게 느껴졌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돌 탁자를 앞에 두고 나무 의자에 앉아 먹고 있는데 히에무스가 한쪽 손을 턱에 괸 채 식탁에 올려두고 에일린을 응시했다. 바로 옆자리였다. 예전처럼 그녀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감상이라도 하듯 유심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에일린은 왠지 민망했다.

“히에무스, 요즘 많이 바쁘시다면서요?”

“응? 겨울이니 조금 일이 많긴 하지만 괜찮아.”

“하레나 성에서도 할 일이 많으세요?”

별 생각 없이 한 질문에 히에무스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일을 하나 계획 중인 게 있어서 좀 바쁘구나.”

“무슨 일인데요?”

그가 에일린을 향해 더욱 그윽해진 눈빛을 보내며 싱긋 웃었다.

“예전에 그대에게 했던 이야기 생각나지?”

“무슨 이야기요?”

“고아가 된 인간 아이들을 위해 교육기관을 세우고 싶다고 했잖아?”

“그건…….”

“인간 황제가 아니라 나와 함께 그 일을 하자고 약속했지 않느냐? 그걸 실천해 볼 생각이다.”

“예?!”

이렇게 빨리? 에일린은 깜짝 놀라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언젠가 그와 함께 그런 일들을 해 볼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갖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히에무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에일린의 입술 주위에 잔뜩 묻은 빵가루를 조심스럽게 털어내 주었다.

“렌투스와 함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지. 아젤란 제국의 백성들을 위해 여러 활동을 하는 게 인간 귀족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데도 도움이 될 거라더군.”

“아!”

“다른 종류의 일이 많았지만 너와 했던 약속이 떠올라 그 일을 먼저 추진하기로 한 거다. 곧 인간 황제를 만나 제안할 생각이지.”

“와아, 정말 잘됐어요!”

에일린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손뼉까지 쳤다. 히에무스 역시 만족스러운 듯 흐뭇한 미소로 응답했다. 그래, 잘됐지. 조금씩, 조금씩 인간 황제가 그녀에게 하려던 일을 자신이 대신해줄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인간 황제의 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에일린의 연초록 눈동자가 싱그러워 보였다.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의 푸릇한 눈빛에서 나는 풀 향기에 한껏 취하는 것 같았다. 히에무스는 황홀해진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빵가루가 없어진 지 오래됐지만 상냥한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에일린 역시 그의 깊은 눈빛과 서늘한 손의 감촉에 빠져든 듯 가만히 앉아 서로를 응시했다. 그에게 맡긴 한쪽 뺨 외에 얼굴 전체가 수줍은 복숭아 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때, 앞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아, 좀!”

얼른 고개를 들어보니 맞은편에서 루카스가 인상을 찌푸린 채 둘을 쏘아보고 있었다. 부루퉁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런 행동은 남들 앞에선 좀 하지 말아요. 특히 우리 일각수들이 사는 곳에서는 더욱!”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정령왕이 하는 일에 감히 토를 달 셈인가?”

히에무스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에일린이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고 바로 히에무스의 손을 살며시 뿌리쳤다. 수많은 유니콘이 인간형으로 변신한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궁전 시종들이었다. 다들 얼굴에 호기심과 부러움이 가득해 보였다. 에일린은 쑥스러움이 밀려와 뒤늦게 얼굴이 홧홧했다. 히에무스가 기분이 상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마디 내뱉었다.

“에일린과 난 그만 가보겠다.”

“옛?”

루카스가 황당한 기색으로 바라보는 사이 히에무스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에일린.”

“아니, 잠깐. 히에무스…….”

말을 이을 새도 없이 그가 에일린의 손을 붙잡고 순간이동 마법을 발동시켰다. 루카스가 상황을 파악하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 둘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루카스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아, 나는 어쩌고 그냥 가버리냐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려니 그를 구원해줄 존재가 나타나 말을 건넸다.

“그러니 왜 주제넘게 끼어들었어요? 루카스.”

아두스와 제퓌였다. 유니콘은 숲을 나갈 때는 순간이동 능력이 없었다. 반대로 보금자리로 들어올 때는 가능했지만.

“그치만 부럽단 말이야, 그런 장면을 보면. 질투도 나고.”

루카스가 변명하듯 말했다.

“우리가 데려다 줄 테니 걱정 말아요.”

“고마워.”

정말 고마웠다. 찔끔 눈물이 날 정도로.

***

히에무스는 일단 에일린을 가을의 궁전 앞으로 데려왔다. 이대로 케일론의 성에 보내주긴 싫었다. 짧은 겨울 해였기에 머지않아 저물 것 같았지만.

“에일린,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느냐? 마법사의 성에 돌아가는 것 말고.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그래, 시장이나 아니면 하레나 성에 있는 자신의 방이나. 뭐 좋은 곳이 없을까? 에일린이 가서 보면 기뻐할 만한 장소.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가을의 왕에게라도 물어볼걸. 겨울의 왕인 자신은 가진 것만 없는 게 아니라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듯했다. 스스로가 좀 답답하고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히에무스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에일린이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음, 그냥 저랑 여기 이 숲을 거닐면 어때요? 히에무스.”

“숲을 거닐자고?”

“예. 함께 이 숲을 걸어 다니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그러고 보니 둘이 함께 루쿨루스 숲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지난번에 겨울 폭풍을 멈추는 사건이 있던 날 함께 하늘을 날아본 게 전부였다. 히에무스는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 그러도록 하자.”

그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와 함께 설렘이 잔뜩 묻어났다. 에일린의 입술 끝이 슬며시 올라가자 서둘러 팔을 내밀었다. 그녀가 인간 군주와 산책하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 봤던 행동을 따라 했다.

“에스코트…… 해줄게.”

“어, 고마워요.”

익숙하지 않은 행동이라 조금 어색하게 느껴져 얼굴이 벌게졌다. 뭔가 마음이 두둥실 떠다니는 것 같았다. 하늘을 나는 것도 아닌데 발이 땅에 닿는 것 같지 않았다. 자꾸만 입가에 실없는 미소가 맺혔다. 에일린 역시 새삼 쑥스러운 듯 조금 상기된 얼굴로 그의 팔짱을 꼈다.

“자, 이쪽으로.”

“예.”

둘은 천천히 한쪽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직 늦은 시각은 아니지만 겨울인 탓에 흐려진 햇살 사이로 뼈대만 남은 나뭇가지가 뒤엉켜 사방을 둘러싼 모습이 보였다.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까만색과 하얀색으로 그려진 듯한 굵기도 제각각인 나뭇가지, 투명한 얼음 꽃과 눈송이들이 이파리 대신 매달려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어라, 겨울의 왕이시잖아!”

나무와 공기의 정령 몇몇이 히에무스를 발견하자 재빨리 어디론가 숨는 모습이 보였다. 정령왕이 가는 길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더러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지만.

“옆의 여잔 누구지?”

“그 왜 있잖아? 소문 속의 인간 여자.”

“아하!”

새하얀 눈으로 감싸인 숲길을 걸을 때마다 올라오는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정겨웠다. 간혹 보이는 짐승의 발자국 외에는 그 누구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 고즈넉한 산책길이었다. 조금 쌀쌀했지만 그가 주변에 있던 겨울의 정령들이 물러가도록 명령을 내린 탓에 큰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에일린. 앞으로 내가 보고 싶을 때면 번거롭게 이리저리 찾아다닐 게 아니라 그냥 내 이름을 불러 소환하면 돼.”

“아, 그건…….”

“이름을 잊은 건 아니겠지?”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잊은 건 아니지만 왠지 조심스러워서 그 방법을 쓰지 않았다. 앞으로도 쓸 생각이 없었다. 이름을 알게 된 날 북풍이 했던 무시무시한 위협이 생각나 감히 그런 방법을 쓸 수 없던 것이다.

“조심스러워서요. 당신에겐 더없이 소중한 이름인데 혹시 모르잖아요. 무심코 말하다 누군가에게 빌미로 남게 될지.”

“그러냐.”

히에무스는 그녀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왠지 조금 서운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도 맞고 강요할 문제도 아니기에 더 권하지 않았다.

“그럼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되면 그땐 꼭 불러다오. 저번에 흑룡에게 해코지 당할 때처럼 그런 상황이 닥치면 꼭 불러다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너무 두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남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아주 작은 목소리로 불러도 똑같은 효과가 나니까.”

“알겠어요. 명심할게요.”

둘은 미소 띤 얼굴로 서로를 응시하며 한동안 걸었다.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고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풍경이었지만 함께 걷는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기쁜 시간이었다. 무척 평화롭고 나른한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에일린은 물론이고 히에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그녀와 함께 하는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엣취!

시간이 지나자 그의 팔짱을 끼고 있던 에일린이 재채기를 했다.

“이런, 그만 돌아가도록 하자. 에일린.”

히에무스가 미안한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이럴 때 빨간 마법약을 한 방울 마시면 좋겠지만 이제 정말 남아있는 양이 많지 않아 그러지 못했다. 조만간 키프리스를 보러 가야 할 것 같았다.

“예.”

에일린이 손수건을 꺼내 콧물을 훔치며 순순히 대답했다. 때마침 해도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이었다.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그녀보다도 먼저 케일론이 귀가했다. 집에 돌아왔는데 에일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당황한 얼굴로 온 집안을 쑤시고 찾아다녔다. 브레이마저 자신의 방에서 잠든 상태인 걸 확인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거칠게 그를 흔들어 깨웠다.

“브레이! 일어나라, 어서!”

“으응……. 케일론 님. 오셨습니까?”

“그래. 에일린은 어디 간 거냐? 보이지 않는데.”

“집에 있을 텐데요? 아까 분명 같이······.”

그가 아직도 졸린 듯 눈을 비비며 멍한 얼굴로 웅얼거렸다. 케일론의 뺨이 움찔거렸다. 브레이가 이렇게 낮잠에 깊이 빠져들 리가 없을 텐데 수상했다. 아무래도 마법의 힘으로 잠든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일었다. 혼자 남아 상황을 지켜보던 프리기는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하레나 성에 찾아가볼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 순간 에일린이 자신의 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히에무스와 함께였다. 너무 반가워 크게 외치며 다가갔다.

“에일린 님! 이제 오세요?”

“예, 프리기. 별일 없었나요?”

프리기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악한 마법사가 벌써 집에 들어왔어요. 어떡하죠?”

“어머, 그래요?”

에일린도 조금 당황했지만 곧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 말아요. 적당히 둘러대면 되니까.”

“예. 지금 브레이를 다그치고 있으니 얼른 가보세요.”

“그럴게요.”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에일린!”

케일론이 에일린을 보자마자 가까이 다가왔다. 잔뜩 인상을 쓴 얼굴이었지만 보랏빛 눈에 걱정하는 빛이 가득했다.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죠?”

“예? 저, 그게…….”

에일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시장에 다녀왔다고 할까? 아니, 그건 너무 어설픈 변명이다. 케일론 같이 예리한 사람에겐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땐 차라리 진실을 말하는 게 낫다. 어차피 밑밥은 깔아놓은 거니까.

“또 정령들이 사는 곳에 다녀왔어요.”

그의 눈꺼풀이 크게 열렸다. 이어 목구멍에서 쥐어짜듯 나오는 쉰 목소리로 되물었다.

“루쿨루스 숲 말입니까?”

“예.”

“…….”

케일론은 좀 전보다도 더 심하게 찌푸린 표정으로 노려보기만 했다. 한참 침묵을 이어가며 그녀를 응시하기만 하자 에일린은 거북해졌다.

“별로 좋지 않습니다.”

“예? 뭐가요?”

“정령과 자꾸 엮이는 것 말입니다. 그들과 인간은 서로 다른 존재입니다.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부류죠. 피하는 게 좋아요.”

잔뜩 쉰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다른 존재와 어울리다 다칠 수도 있습니다. 정령이란 것들은 심심풀이로 인간과 어울릴 뿐 인간과 같은 마음을 지니지 못한 존재들입니다. 그저 아무렇게나 갖고 놀다 싫증나면 버리겠죠.”

“그렇지 않아요!”

에일린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내가 만나본 정령들은 그 누구보다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어요. 그들이 날 다치게 할 리가 없어요.”

“아직까진 그렇겠죠. 싫증이 안 났을 테니까.”

“그렇지 않다니까요!”

“됐습니다.”

케일론이 잘라내듯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오늘은 이만하죠. 하지만 그대를 위해 한 말이니 한 번 되새겨 보길.”

“…….”

“그만 가서 쉬세요.”

조금 마음이 상한 에일린은 대꾸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줄곧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히에무스가 냉혹한 눈빛으로 케일론을 쏘아보다 에일린을 따라갔다. 사악한 마법사의 말 따위 생각할 가치도 없지만 왠지 한 구절이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다른 존재와 어울리다 다칠 수도 있다는 말. 지난번 흑룡 때문에 에일린이 큰 고초를 겪지 않았던가. 계단을 올라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할 것이다. 다시는.’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같은 말을 되뇌었다.

***

다음 날 아침, 렉스는 라피스 궁에서 열린 조회에 참석하는 중이었다. 주요 안건을 처리하고 난 후 나이든 시종한테 보고를 하나 받았다.

“그게 정말인가?”

렉스의 물음에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신관께서 엘시아 왕녀의 머리카락을 자라나게 해주는 축복을 내렸다 합니다.”

“그런 행위를 금지시켰는데도 말인가?”

렉스가 푸른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앉은 단상 밑에 서 있던 케일론과 엘로드를 비롯한 신하들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중 한 신하가 분개한 어투로 말했다.

“감히 폐하의 명을 어기다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불경한 다른 맘이라도 먹은 게 아닐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껏 신전에서 폐하의 뜻에 잘 따랐는데 이제 와서 자율권을 확대하고자 하는 건 아닐는지요?”

다른 신하가 즉시 반박하는 의견을 내보였다.

“왕녀의 머리를 자라게 했을 뿐, 아직 다른 일을 시도하지 않았으니 섣부른 판단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하지만 경계를 늦춰서도 안 될 일이지요.”

대신들의 의견을 듣던 렉스가 흐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됐소. 좀 더 지켜보면 알 수 있을 터. 대신관도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르진 않았겠지. 해명을 들어보고 싶으니 일단 연통을 보내시오.”

“알겠습니다.”

얼핏 보면 작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절대 소홀히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신전이 일반 백성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했다. 그 신전을 대표하는 수장인 대신관의 사소한 일탈 하나라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아직은 성급했다. 렉스는 몹시 신경 쓰였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태도로 신하들을 돌아봤다.

“그 외 들어온 다른 안건은 없는가?”

시종장이 머리를 조아리며 알렸다.

“드라코니아의 라케르타 공작이 추진하고 싶은 사업이 있다며 알현을 요청했습니다.”

“그래? 지금 와 있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렉스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은 이곳에서 만날지 아니면 이후 다른 장소에서 단출하게 보는 게 나을지. 뭐, 아직까지 그자에게 거리낄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황제인 그가 걸릴 게 뭐가 있단 말인가?

풋!

잠깐 동안 머리를 스친 생각이 어이없어 렉스는 엷게 한 번 웃었다.

“지금 들라 하시오.”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인 시종이 물러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라케르타 공작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반 묶음 한 은빛 머리를 늘어뜨린 커다란 키의 사내가 언제나처럼 감탄할 수밖에 없는 미모를 선보이며 걸어왔다.

“이야, 여전하군.”

누군가가 무심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케일론은 지난 집들이 파티 이후에 그를 처음 보는 거라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날 밤 문전박대당한 불쾌한 기억이 떠올라 이를 악물었다. 저 공작의 정체가 왠지 신경 쓰였다. 에일린 일을 빼놓고라도 어쩐지 수상한 구석이 많았다. 갑자기 등장한, 자신보다도 더 강한 마법사인 고위 귀족.

‘저런 자가 왜 이제야 세상에 나타난 걸까? 의심 안 하려 해도 안 할 수가 없단 말이지.’

그는 보좌를 맡은 백색 머리의 젊은 귀족과 동행했다. 둘은 지정된 위치에 다다르자 정중하고 단정한 몸짓으로 예를 올렸다.

“제국의 태양, 레오나드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아벨라 여신의 찬란한 광휘가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그대들에게도 아벨라의 자비의 빛이 머물기를. 어서 오시오. 라케르타 공작.”

렉스의 응답과 함께 허리를 숙인 후 둘은 몸을 곧추세웠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소. 지난번 무도회 이후 보지 못했으니. 어떠시오? 이곳 아젤란 제국에 와서 지내는 게 좀 익숙해졌는지. 불편하거나 힘들지는 않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모두 폐하 덕분입니다.”

“다행이군. 그래, 무슨 일로 보자고 했소? 제안할 사업이 있다고?”

히에무스가 짧게 고개를 까딱거린 후 담담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이곳 카르디아에 와서 지내보니 제국의 발전된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도 그 은혜를 입고 있는 드라코니아 왕족의 한 사람으로서 뭔가 기여할 만한 게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호오, 그렇소? 훌륭한 마음이오.”

“황공합니다. 기여에도 여러 분야가 있겠지만 저는 고아들에 대해 관심이 좀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싶습니다만.”

“……!”

줄곧 황제답게 여유로운 미소를 짓던 렉스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고아들을 위한 교육기관이라고?”

“예. 한번 힘써서 운영해 보고 싶으니 윤허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라케르타 공작의 무심하면서도 자신감에 넘치는 유려한 말이 이어졌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서 고아들의 생활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자립을 위해서도 교육기관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하고 많은 일 중에 왜 하필 그 일인가? 렉스가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어 그를 노려보듯 바라보는데 대신들이 칭찬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려왔다.

“오, 정말 좋은 제안이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그런 드러나지 않은 분야까지 신경 쓰다니 참 세심한 분이 아니오?”

이어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주청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라케르타 공작의 제안이 무척 사려 깊지 않습니까? 폐하. 적극 검토 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그렇습니다. 공작 같은 분이 타국의 자선 사업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다른 귀족들에게도 좋은 자극제가 될 것입니다.”

“그렇고말고요. 사실 제국에서 신경 쓸 일이 워낙 많아 그런 일들엔 미흡했는데 대신해 준다니 정말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렉스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리 썩 달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딱히 반대할 만한 명분도 없었다. 아니, 하나 있긴 하다.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황제 입장에서 그런 이유를 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맙고 좋은 제안이오. 적극 검토하도록 하겠소.”

“황송합니다. 덧붙여 한 가지 조건을 내걸어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시오.”

“그곳에서 일할 자를 제가 추천하는 이로 채워도 되겠습니까?”

“물론, 그대가 설립하는 곳이니. 다만 교육내용과 운영방식을 제국에서 정한 것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나머진 상관하지 않을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

히에무스는 알현실을 나온 후 라피스 궁 밖으로 나왔다. 하얀 대리석 기둥이 이어진 회랑을 걷고 있는데 그때까지 조용하던 렌투스가 말을 걸었다.

“저, 이곳까지 오셨는데 스킬라 공주님을 뵙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나고 싶지 않다.”

“내키지 않으신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모른 체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명색이 그분의 오라버니가 아닙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지?”

렌투스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대답했다.

“왕족이나 귀족으로 생활하려면 남의 이목을 많이 신경 쓰셔야 하는 겁니다. 호적상의 남매일지라도 서로 돈독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합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히에무스의 눈치를 살폈다.

“어차피 연기이지 않습니까? 당신께서 드라코니아의 왕족으로서 건재하는 모습을 보여주셔야 이곳 생활이 원활하게 돌아갈 겁니다.”

“…….”

“며칠 동안 공주님께서 몸이 좋지 않아 두문불출하셨다더군요. 문병을 가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용족 공주의 몸이 좋지 않은 이유는 당연히 짐작할 수 있었다. 히에무스는 드러내지 않고 백룡 청년의 기색을 읽었다. 염려가 가득해 보였다.

“그대가 가보고 싶은 것 아닌가? 사모하는 여인이 아프다니 한 번 들여다보고 싶었던 거겠지. 내 핑계를 대서라도.”

렌투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렇긴 하지만 히에무스 님께서 직접 방문하시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 말씀드린 겁니다.”

“그대의 뜻은 알겠어. 하지만 난 가지 않겠다. 그대는 다녀와도 괜찮아. 귀족들은 직접 문병을 하지 않고 시종을 대신 보내는 일도 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를 대신해 그대가 가면 될 일이다.”

렌투스도 더 이상 권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좋을 대로 해.”

렌투스가 막 발길을 돌리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행동을 멈췄다.

“히에무스 오라버니!”

스킬라 공주가 시녀를 거느리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평소보다 안색이 좀 좋지 않아 보였지만 엷은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히에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공주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나 천연덕스럽지 않은가?

“오래간만이에요, 오라버니.”

뛰어오듯 걸어온 그녀가 곧바로 히에무스에게 안겼다. 히에무스가 바닥에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짓이지? 흑룡. 너와 내가 이럴 사이는 이제 아니지 않은가?”

스킬라가 조그만 웃음소리를 내며 응답했다.

“전 아직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거든요. 제게 그런 짓을 하셨지만 그래도 전 여전히 당신이 좋아요. 인간들과 다르게 제 맘은 한결같거든요.”

히에무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밀어내려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재빠르게 속삭였다.

“인간 귀족 노릇을 그만하고 싶으신 건 아니겠죠?”

“……!”

“제대로 드라코니아 왕족 노릇을 하려면 연기를 잘하셔야죠, 히에무스 님.”

“뭐?”

“당신이 제게 한 짓을 드라코니아의 왕인 아버지에겐 알리지 않았어요. 그분이 아셨다면 가만 계시지 않으셨겠죠.”

“네가 한 짓은 기억나지 않는 건가?”

“물론 나죠. 그래서 얌전히 입 닫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도 앞으로 인간 귀족 노릇을 잘해 나가려면 절 너무 홀대해선 안 될 거예요.”

“마음 하나 없는 거짓된 행동일 뿐인데도 말인가?”

스킬라가 여전히 휘어진 입매를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지금 전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거든요.”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연기로 시작한 오누이 관계니까. 거짓이라 해도 외면만 받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히에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간들 행동도 납득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는데 용족 역시 참으로 이상한 면이 많은 듯했다. 그는 허리에 진득하게 감긴 그녀의 팔을 풀어냈다.

“한동안 몸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공주님.”

렌투스가 염려가 가득 담긴 얼굴로 스킬라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스킬라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조금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히에무스가 그녀를 예리하게 쏘아봤다. 겨울의 정령도 아닌데 아무렇지 않다고? 지상최강의 종족이라는 용의 몸을 가졌다 해도 그럴 리는 없다. 모르긴 해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면서 허세를 부리는 것일 테지. 어쨌든 그에게는 흑룡의 몸 상태 같은 건 더 이상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괜찮다고 하니 다행이군. 난 이만 가보겠다.”

스킬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권했다.

“저랑 산책이라도 하시면 어때요? 오라버니. 아니면 차라도 한잔……·.”

히에무스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무심한 목소리로 일렀다.

“나는 바쁘니 렌투스, 그대가 나 대신 보필하도록 해.”

“예? 아, 예. 그러겠습니다.”

렌투스가 얼떨떨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잠깐만요, 오라버니!”

히에무스는 그대로 방향을 틀어 궁 문 쪽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오라버니!

마법에 실린 용족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상관하지 않고 걸음을 빨리했다. 멀리서 시종역을 맡은 루카스가 말을 끌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멍한 눈으로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스킬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으…….”

그러다 신음을 내며 몸을 휘청거렸다. 렌투스와 공주의 시녀인 알리샤가 깜짝 놀라 외쳤다.

“공주님!”

동시에 렌투스가 재빨리 다가와 그녀의 몸을 부축했다. 그의 손에 닿은 스킬라의 몸이 너무나 차가워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시나무처럼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요?”

스킬라가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알 것 없어! 별일 아니니까. 그냥 오한이 든 것뿐이야.”

“그런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용이 오한을 느낀다는데 별일 아니라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죠!”

“됐다고! 넌 그만 가 봐.”

“스킬라!”

렌투스가 서운함과 안타까움이 담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드라코니아 왕국을 건국하기 전에는 그들 사이에 신분의 차이 같은 건 없었다. 같은 용족이니까 사실은 동등한 셈이다. 그러니 이름만으로 부른다 해도 잘못된 건 아니다. 하지만 스킬라는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렸는지 험악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이곳은 인간계의 황궁이야, 렌투스. 언행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좋아.”

“왜 그렇게 됐는지 말해. 난 이유를 들어야겠어.”

렌투스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재차 다그쳤다.

“말해줄 이유 없어. 그만 돌아가.”

스킬라는 더 상대하지 않고 시녀 알리샤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예, 공주님.”

둘은 곧장 공녀들의 거처인 아르겐 궁으로 향했다. 덩그러니 남겨진 렌투스는 주먹을 꽉 쥔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직접 듣지 못해도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겨울의 왕에게 벌을 받은 게 분명할 터였다. 딱하고 안쓰럽고 난감하기만 했다. 모든 정황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히에무스를 향한 원망과 분노의 맘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스킬라 공주를 사랑하니 어쩔 수 없었다.

거침없이 몸 곳곳을 침범하는 한기에 스킬라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걸었다. 아까 히에무스 앞에선 마나를 끌어 모아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으으…….”

이가 딱딱 맞닿아 부닥쳤다.

“괜찮으세요? 공주님.”

“아니, 이대론 못 버텨. 그건 어떻게 됐지?”

시녀이자 백룡인 알리샤가 주변을 한 번 휘 둘러본 후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마법을 실어 이야기하는 거니 딱히 주의할 필요는 없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케레시아 왕후께 말씀드렸으니 곧 연락을 주실 겁니다.”

스킬라가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있어야 해. ‘드래곤 하트’. 그것만 있으면 견딜 수 있을 거야.”

물론 그녀 자신의 심장은 아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다른 용의 심장을 말한 것이다. 알리샤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예. 마나의 힘을 배 이상 늘려줄 테니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케레시아 님께서 얼른 보내주셔야 할 텐데요.”

-“오늘 밤 가서 재촉해 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시녀가 백룡 특유의 엷은 옥색 눈을 빛내며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한기를 체감하며 아르겐 궁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앞쪽에서 걸어오는 한 무리 사람들과 마주쳤다.

“오, 안녕하세요? 스킬라 공주님.”

상아빛 피부에 파란 눈동자, 유난히 풍성하고 아름다운 백금발 머리카락을 탐스럽게 늘어뜨린 여인, 엘시아 왕녀였다. 얼마 전에 봤을 때만 해도 짧은 머리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길게 자라나 있었다. 순간 스킬라 공주는 자신의 몸 상태도 잠시 잊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엘시아 공주님, 오랜만이시군요.”

긴 머리 때문인지 예전에 봤을 때보다 더욱 미모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 역시 자신감이 넘쳐 그 어느 때보다도 당당하고 활기차 보였다.

“그러게요. 몸이 불편하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가요? 식사 시간에도 보이지 않아 걱정했답니다.”

공녀들은 아르겐 궁에 함께 살며 식사 시간만큼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중앙 식당에 모였다. 스킬라 공주는 싱긋 웃어주었다. 언제 들어도 인간들의 인사는 참 가식적이란 말이지. 그래서 재미있었다. 언제나 연극놀이를 하는 것 같아서.

“염려해주셔서 고마워요. 그동안 심한 감기에 걸려 바깥출입을 못 했답니다.”

“오, 저런. 이제 좀 괜찮으신가요?”

“예, 가끔 오한이 들긴 하지만 괜찮아요.”

“그럼 아직 다 나은 건 아니로군요. 오라버니인 라케르타 공작님이 마법사라 들었는데, 여동생에게 치유 마법도 걸어주지 않았나요?”

얼핏 들으면 염려하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비아냥대는 질문이었다. 스킬라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당연히 걸어주셨죠. 그러니 이만큼이라도 운신할 수 있는 거예요. 무척 심했었거든요.”

엘시아가 화사하게 웃어주며 말했다.

“그렇군요. 두 분 사이가 돈독하신가 봐요. 혹시라도 그렇지 않다면 추천해줄 분이 있었는데.”

“추천해줄 분? 누구 말인가요?”

“아니, 뭐. 스킬라 공주님껜 든든한 오라버니가 계시니 굳이 제가 아는 분을 소개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혹시라도 오라버니와 다투시게 되면 그때 다시 말씀해주세요.”

엘시아가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얼굴에 오만한 미소와 함께 묘하게 우쭐거리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스킬라는 가소로웠지만 동시에 호기심이 생겼다. 저 궁벽한 나라 출신의 왕녀가 어디선가 굉장한 뒷배라도 얻은 걸까? 어차피 엘시아와는 좀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하던 차라 얼른 말을 꺼냈다.

“인맥이란 넓을수록 좋은 거죠. 특히 공주님처럼 고귀하신 분이 아시는 분이라면 더욱 더. 혹시 그분이 머리를 자라게 해주셨나요?”

“감이 좋으시군요. 맞아요. 그분이 이렇게 해주셨어요.”

“그럼 신관이겠군요?”

“호호, 글쎄요.”

엘시아가 모호한 대답을 하고선 무릎을 살짝 굽혔다 일어섰다.

“이만 가봐야겠어요. 몸조리 잘하세요. 스킬라 공주님.”

“잠깐만요, 엘시아 공주님.”

스킬라가 돌아서는 그녀를 황급히 불러 세웠다. 엘시아가 슬쩍 되돌아보자 불쑥 떠오른 말을 건넸다.

“제가 사흘 후 다과회를 열 예정인데 오시겠어요?”

“다과회라고요?”

스킬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더했다.

“친해지고 싶은 공주님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요.”

엘시아가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답했다.

“그러죠. 초대장을 보내주세요.”

“그럴게요.”

“그럼.”

왕족답게 서로 정중한 인사를 한 후 헤어졌다. 스킬라가 다시 자신의 방으로 향하며 시녀에게 지시했다.

“아까 부탁했던 일 외에 좀 전에 말한 다과회 준비도 좀 맡아줘.”

“알겠습니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 허겁지겁 벽난로 앞으로 가 주저앉았다. 엘시아 왕녀를 상대하느라 다시 마나를 끌어 모아 버티는 바람에 모든 기력이 쇠하고 말았다.

“공주님.”

알리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와 그녀의 몸 위로 두툼한 이불을 덮어주었다. 스킬라는 사정없이 떨리는 몸으로 중얼거렸다.

“어서 그걸 가져와야겠어. 좀 서둘러 줘, 알리샤.”

시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예, 맡겨 주세요.”

***

엘시아가 한껏 고조된 얼굴로 정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동안 방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지만 요 며칠간은 살맛이 났다. 머리카락이 길어져서인지 전처럼 미모도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후후후.”

괜스레 자신감도 높아져 다시 황후가 되겠다는 의욕을 불태웠다. 조회가 끝나고 나면 황제가 잠시 산책 시간을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같은 시간대에 산책하다 보면 우연처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을 자꾸 접하게 되면 황제의 인식이 바뀔지도 몰랐다. 마침 그 평민 여자가 했던 산책 소임 일도 이젠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하니 좋은 기회였다. 대신 자신이 그 일에 도전해 볼 셈이었다.

“어머나, 폐하.”

아니나 다를까 황제가 엘로드와 케일론을 비롯한 신하 몇을 거느린 채 정원을 거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엘시아 왕녀.”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잡고 무릎을 굽히는 행동을 취하며 언제나처럼 장황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황제가 옆으로 눈을 가늘게 늘어뜨리며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매우 놀랍소, 왕녀. 정말 대신관의 축복을 아낌없이 받았나 보군. 대신관께서 설마 그대의 미모에 큰 감명이라도 받으신 건가.”

“호호, 그저 아칸 왕국의 왕녀로서 보여주는 의연한 모습에 탄복하시고 격려 차원에서 호의를 보여주신 것뿐입니다.”

오늘따라 엘시아의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하고 아리따워 보였다. 황제는 왕녀의 저 미모만큼은 따를 자가 없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대신관이 정말 저 미모에 반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 해명을 요구했으니 곧 답변을 보내오겠지만. 그의 옆에 있던 엘로드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발그레 물드는 게 보였다. 변화하는 남자들의 시선을 즐기며 엘시아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바쁘시지 않다면 저와…… 잠시 정원 산책을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폐하.”

“이런.”

황제가 입꼬리를 바짝 위로 끌어당기며 살짝 턱을 치켜들었다.

“좀 전에 바쁜 일이 딱 떠올랐소. 미안하지만 그 요청은 들어줄 수 없겠소.”

“그, 그러십니까? 그럼 다음 기회에…….”

“아니.”

짧은 한마디와 함께 황제가 엘로드에게 말했다.

“캐드릭스 후작. 그대가 왕녀와 더불어 산책을 하도록 하시오.”

“……!”

엘로드가 매우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황제를 향했다.

“나보다는 두 사람이 서로 친해져야 할 테니까.”

순간 엘시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글쎄. 곧 알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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