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정령사가 별건가?
“아, 어떡하냐고! 저 마법사가 옆에 붙어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하잖아!”
루카스가 시장에 갈 준비를 한다면서 서둘러 방으로 돌아와 세 정령에게 쏘아붙였다.
“진정하세요! 루카스. 궁리해 보면 수가 생길 거예요.”
아두스가 엄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그는 뭔가 사명감에 불타는 중이었다. 왕께서 세 하급 정령에게 루카스가 에일린 대역을 잘 해내도록 도와주라고 맡기셨다. 그의 책임이 막중했다. 이 덜떨어진 어린 일각수와 상대적으로 덜(?) 현명한 두 동료의 책임자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이다. 팔짱을 낀 채 한참 생각에 잠기던 그가 마침내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좋은 수를 생각해냈어요. 사악한 마법사가 의심을 품지 않게 하면서도 루카스도 맘에 들 만한 방법을요.”
루카스와 두 정령이 동시에 기대감에 찬 낯빛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래? 어떤 방법인데?”
“일단 브레이나 다른 남자 하인들에게 가서 옷을 하나 빌리세요.”
루카스가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 브레이에게 옷을 빌리려 하자 애플턴 부인이 기겁하며 말렸다.
“영애! 남장을 하시겠다는 건가요? 그런 흉물스러운 일은 절대로 안 됩니다. 동의할 수 없어요.”
루카스가 여유롭게 웃으며 설득했다. 물론 그의 옆에서 아두스가 일러주는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거였지만.
“생각해 보세요, 부인. 오히려 남장을 하고 저잣거리에 나가면 아무도 저라는 걸 알아채지 못할 것 아니에요? 뭔가 실수를 해도 황제 폐하나 부인에겐 아무 원망이 안 갈 거라고요. 호위하기도 쉬울 테고요.”
“그건 그렇지만…….”
애플턴 부인이 생각하기에도 그런 것 같았다. 결국 루카스가 덧붙인 말을 듣고 순순히 허락해 주고 말았다.
“머리도 짧으니 남장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워서 남들 눈에도 잘 안 띌 거예요.”
“그럼 브레이보다는 좀 더 키가 작고 체형이 비슷한 이의 옷이 좋겠습니다. 제가 마부인 ‘한스’에게 베키를 보내 빌려오도록 할게요.”
“예, 고마워요. 부인.”
베키가 구해온 브레(braies-중세시대 바지)와 튜닉 등의 남자 옷으로 갈아입으니 루카스는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야, 이제 좀 살 것 같다.”
“뭡니까? 그 모습은.”
에일린으로 변신한 루카스가 후드가 달린 두터운 망토까지 남자 옷으로 갖추고 나오니 케일론은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이러면 돌아다니기 훨씬 편할 것 같아서요.”
그는 평소보다 화려한 로브와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항상 입는 검은색이 아니라 붉은색에 은빛 자수가 놓인, 특별한 행사 때나 입던 옷이었다. 그가 불만스러운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더는 별 말없이 순간이동 마법을 시행했다.
시장에 도착했다. 시장 풍경은 여전했다. 북적이고 소란스럽고 활기찼다. 하지만 루카스는 생전 처음 온 터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손뼉을 치며 폴짝폴짝 뛰었다. 케일론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유심히 그를 지켜보던 아두스가 즉시 한 소리했다.
“좀 진정해요, 루카스. 에일린 님은 그런 격한 반응은 안 보인단 말이에요. 그냥 조금 기뻐하는 정도라고요.”
“아, 응.”
그가 재빨리 눈을 힐끔거리며 행동을 가다듬자 케일론이 말을 건넸다.
“그렇게 좋습니까?”
“무, 물론이죠. 지금까지 너무 갑갑하게 지냈단 말이에요.”
“그랬군요.”
케일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을 것이다. 황제의 산책 친구 일로 느긋하게 보낸 휴일이 거의 없었지. 매일 각종 교육을 받는 통에 신경 쓰이고 긴장되는 일도 많았을 테고.
“마법사. 아니, 케일론 님은 여기 무슨 볼 일이 있으신 거죠?”
“몇 가지 도구와 약물을 사러 마법상에 들를 예정이긴 하지만 그 외 별다른 용무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래요?”
루카스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공중에서 대화를 듣던 프리기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별일이네. 기껏 마법상에 가면서 무슨 옷을 저렇게 차려입은 거야?”
제퓌가 조심스럽게 평소 짐작했던 의견을 내놓았다.
“혹시 에일린 님과 외출한다는 생각에 꾸민 것 아닐까? 남몰래 에이린 님을 좋아하고 있던 차에 시장에 단둘이 교제하러 간다고 여겨 들뜬 마음에…….”
아두스가 냉큼 끼어들어 정정했다.
“멍청하긴, 저 사악하고 깐깐한 마법사가 무슨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했겠어?”
“그럼 왜 그런 건데?”
“그냥 좋은 옷을 옷장에 항상 처박아두고만 있으니 아까웠던 게지. 그리고 시장 같은데 갈 땐 원래 행색이 좀 좋아야 큰소리도 치고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걸 노린 거라고.”
“하긴 은근 구두쇠에 살림꾼이니 그런 계산도 당연히 했을 거야.”
두 정령과 루카스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퓌가 아두스에게 마저 물었다.
“아까 말한 계획은 언제쯤 시행하면 되는 거야?”
“아직은 일러. 마법상에 먼저 들린 후에 점심식사 할 곳을 고를 거야. 그때를 노리는 게 좋아.”
느긋하게 시장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익숙한 광경이 세 정령의 눈에 들어왔다.
“어, 저건 예전에 에일린 님이 갖고 싶어 하시던 물건이야.”
루카스가 다가가니 각종 빗을 팔고 있는 가판대였다.
“뭐야? 빗이잖아.”
“예. 저기 있는 은으로 된 빗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셨다고요. 비싸다고 안 사셨지만.”
섬세한 조각에 자수정이 박힌 멋스러운 빗이었다. 에일린이 원한 거라니 사주고 싶은 마음에 집어 들고 상인에게 가격을 물었다.
“이거 얼마죠?”
“8실버요.”
루카스도 인간들의 화폐 가치에 대해선 하레나 성에서 교육받았었다.
“으, 안 되겠네. 지금 5실버밖에 없으니까.”
아쉽지만 손을 털고 일어섰다. 가벼운 외출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많은 돈을 챙겨오지 않았다. 사실 이것도 에일린이 모아둔 돈을 가져온 것이니 마구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걸 갖고 싶은 겁니까?”
케일론이 쉰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아니, 뭐 괜찮아요. 다음에 사면 되니까.”
“사드리죠.”
“예?”
케일론이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상인에게 값을 치렀다.
“어, 대마법사님 아니십니까?”
케일론을 알아보는 이가 꽤 많았다. 오랜 세월 동안 황도에 있는 시장을 드나들었으니 말이다. 오늘처럼 화려한 마법사 복장을 하고 있으니 더욱 눈에 띄었다. 장사꾼이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마법사가 웬 예쁘장한 어린 소년에게 고가의 빗을 선물하니 참 이상해 보였다. 어쨌건 자투리 천으로 포장해 그에게 건네자 케일론이 에일린으로 변신한 루카스에게 선뜻 내밀었다. 루카스가 얼떨떨한 얼굴로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지켜보던 세 정령들이 입을 벌리며 쑥덕거렸다.
“별일이네, 저 구두쇠 마법사가 웬일이지?”
아두스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단언했다.
“음, 저건 필시 뇌물이야. 인간 우두머리와 에일린이 친하게 지내니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저러는 거라고.”
“그렇구나.”
***
마법상에 들러 몇 가지 물품을 구입하고 나니 어느새 점심때가 다가왔다.
“케일론 님, 이제 식사하러 가요.”
“배가 고픈 겁니까?”
“당연하죠! 지금 뱃가죽이 등에 딱 들러붙을 지경이라고요.”
루카스의 험한 대답에 아두스가 당장 날아가 주의를 줬다.
“아, 좀! 루카스. 말 좀 가려서 해요. 에일린 님은 그런 말을 남들 앞에선 절대 안 쓴단 말이에요.”
당황한 루카스가 즉시 입을 다물며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제퓌가 중얼거리며 부연 설명을 했다.
“하지만 에일린 님도 혼잣말을 할 땐 험한 말을 쓰시기도 하니까 그렇게 주눅들 필요는 없어요.”
프리기도 동의하며 몇 마디 더했다.
“맞아. 혼자 계실 땐 제기랄, 젠장 같은 말을 하시기도 하지.”
“그야 그렇지만 남들 앞에선 조심해야지.”
의외로 케일론이 엷게 미소를 머금으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내가 가는 단골 주점이 있으니 가도록 하죠.”
“예.”
그와 함께 들어간 주점은 제법 커다란 건물에 내부도 깔끔하고 조용한 편이었다. 케일론을 알아본 주점 주인이 황급히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어, 어서 오십쇼, 대마법사님. 무척 오랜만이십니다요.”
“그래. 늘 가는 자리로 안내해주게.”
“예, 이쪽으로 오십쇼.”
주인이 그의 옆에 서 있는 루카스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가게 한 쪽으로 먼저 향하며 두 사람을 연신 힐끔거렸다.
“가끔 데려오던 브레이라는 제자가 아니로군요. 상당히 곱상하네요. 새로 들인 제자인가요?”
“알 것 없어. 쓸데없는 관심은 접어둬.”
“어, 예. 송구합니다요.”
제국의 대마법사에 대한 특권인지 그가 안내해준 자리는 안쪽에 따로 위치한 내실이었다. 깨끗하고 나름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꾸며진 공간이었다. 자리에 앉으니 주인이 얼른 물었다.
“식사는 뭐로 내올까요? 뭐, 늘 드시는 제일 저렴한 요리면 되겠습니까요?”
케일론이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를 조금 높였다.
“아니, 차림표를 보여주게.”
주인이 헤헤거리는 얼굴로 즉시 양피지로 된 차림표를 가져왔다.
“아이고, 오늘은 어쩐 일이십니까? 대마법사님께서 저희 가게에 오시는 동안 처음 있는 일입니다요.”
“그 입 좀 다물게.”
“예, 예.”
차림표를 보고 대충 주문을 하는데 루카스가 쭈뼛거리며 부탁했다.
“저기, 제 맘대로 주문해도 돼요? 돈은 제가 낼 테니까요.”
“물론. 계산은 내가 할 테니 가격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뭐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시키세요.”
“어, 정말이죠?”
“그래요.”
루카스가 얼른 주인에게 외쳤다.
“이봐요! 여기 포도주 좀 두 병 가져다 줘요.”
“……!”
케일론이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변명하듯 말했다.
“한 번쯤 실컷 먹어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언제나 눈치 보느라 제대로 맛도 못 봤다고요.”
“하지만 그건…….”
케일론이 짐짓 엄한 얼굴로 바라보자 루카스가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눈망울을 커다랗게 드러내 초롱거리며 빤히 쳐다봤던 것이다.
“한 병만…… 먹도록 하죠.”
“예!”
그 순간 루카스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듯 커다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의 한쪽 팔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두 병이 세 병이 되었다. 루카스가 자신도 연신 마시고 케일론에게도 자꾸만 권했던 것이다. 평소였다면 이 철두철미하고 깐깐한 마법사가 그런 어설픈 수법에 넘어갈 리 없었겠지만 그도 그동안 쌓인 게 많았다. 그리고 에일린과 이렇게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지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오늘만큼은 그녀의 뜻대로 해주자고 마음먹은 거였다. 꽤 여러 병의 술을 마신 것 같은데 마법사가 별로 취한 것 같지 않았다. 그를 잔뜩 취하게 한 후 정령들이 잠에 빠지게 할 생각이었는데 주량이 제법 센 것 같았다.
“왜 아직도 멀쩡한 거야?”
“기다려 봐. 제아무리 세다 해도 일각수의 주량을 이길 수는 없지.”
“하긴, 해독이라면 마물들 중에서 일각수가 최고잖아.”
“그러니까.”
정령들이 소곤대는 사이 마침내 케일론이 식탁에 두 팔을 올리더니 한쪽 손으로 턱을 괴었다. 이내 에일린으로 변한 루카스를 향해 고즈넉한 보랏빛 눈빛을 보냈다.
“뭡니까······. 이렇게 날 취하게 하다니. 뭔가 내게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맨정신으로는 하지 못할…… 그런 말.”
낮고 탁한 목소리가 평소보다 느릿느릿하게 흘러나왔다. 루카스가 싱긋 웃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얼마나 취했는지 확인해 볼 심산이었다.
“아뇨, 할 말이 뭐 있겠어요? 같은 집에 살면서 늘 마주치는데.”
“그래요? 나는…… 있는데. 할 말.”
“무슨 말이요?”
이만하면 상당히 취한 것 같았다. 루카스가 더욱 접근하며 속삭이듯 물었다. 이제 잠에 빠져들게 하면 될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불현듯 손을 내밀어 루카스의 한쪽 손을 꽉 잡아 끌어당겼다. 강한 힘이었다.
“……!”
그대로 그 손 위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며 입을 맞췄다.
“좋아해…….”
“뭐?”
“그대를 좋아 한다고. 나는…….”
“엥?”
그리고 다시 한번 더 루카스의 손에 길게 키스를 퍼부었다. 촉촉하게 젖어든 자수정 빛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며 이름을 되뇌었다.
“……린, 에……일.”
“자, 이때야. 애들아.”
“응.”
세 정령이 재빨리 그에게 마법을 걸어 잠에 빠져들게 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맺지 못한 채 케일론의 얼굴이 식탁 위로 무너졌다. 루카스가 여전히 그에게 손을 잡힌 채 뻣뻣한 자세로 앉아있는데 뒤에서 짧은 탄식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주점 주인이 놀란 얼굴로 서 있는 게 보였다. 뭔가 굉장한 장면이라도 목격한 듯 얼이 빠진 채 중얼거렸다.
“으음, 대마법사님은 역시…… 남자를 좋아하셨던 건가?”
***
빛의 궁전 전체를 울리는 분주한 소리에 잔잔했던 호수 표면에 잔물결이 파르르 일었다. 조그만 갈대배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에일린은 넘어지지 않으려 다리에 힘을 가하며 주먹을 꽉 쥔 채 서 있었다. 얼굴엔 결연한 의지로 가득했다. 투명한 유리구슬이 부딪히는 듯한 영롱한 웃음 자락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사라락, 사락.
치맛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갈대배 위에 오르는지 바닥이 살짝 둥실거렸다. 무게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봄에 맡을 수 있는 향긋한 초목 냄새와 함께 가을 햇살이 비치는 것 같은 따스한 기운이 훅 밀려들었다.
“인간 여인이여. 그대에게 걸려있는 용의 저주를 없애주겠다. 아울러 ‘루눌라’에 베인 채 더 이상 자라지 않게 된 머리카락도 자라게 해주지.”
“더 이상 자라지 않을 머리였다고요?”
“그래. 루눌라는 달의 힘을 머금은 마도구. 보통의 경우 한 번 베인 상처는 영원히 회복되지 않는다.”
에일린은 깜짝 놀랐다. 엘시아가 가졌던 그 칼이 그렇게 위험한 거였다니.
“그렇다면 인간의 손에서 그 검을 거두셔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인간에게 넘어간 것은 어쩔 수 없어. 다시 다른 누군가의 손으로 회수되지 않는 한 굳이 나서서 개입할 생각은 없다.”
“그 검의 힘을 악용하는 자가 생겨날 텐데요? 현재 지닌 이의 됨됨이도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그냥 두면 세상에 큰 혼란이 생겨날지도 몰라요.”
“인간들 스스로가 야기한 것이라면 그게 그들의 운명인 게지. 스스로가 직접 해결하는 수밖에. 그렇게 걱정되면 그대가 한 번 나서보든가.”
“그건…….”
에일린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앞에 서 있는 존재는 이곳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여신. 그녀에게 뭐라고 감히 이의를 제기하거나 참견할 수 없었다. 신에게는 나름의 규칙과 의지가 있을 테니까.
“잡담은 그만. 나는 내 할 일을 할 테니 그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도록 해라.”
“……예.”
소맷자락을 휘두르는 듯한 소리가 나는 동시에 강한 빛의 기운이 감지됐다. 뜨거운 감촉뿐만 아니라 황금빛으로 부서지는 눈부신 색채의 감각까지 느껴졌다. 며칠 동안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있다 갑자기 들이닥친 빛의 홍수에 놀라 에일린은 급히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사방을 집어삼킬 듯 가득 찼던 빛이 사라진 후에도 에일린은 굳은 듯 잠시 서 있었다.
“에일린.”
귀에 익은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서늘한 체온이 와 닿았다. 조심스레 다가온 손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히에무스?”
“그래.”
그제야 서서히 팔을 내리고 잔뜩 숙였던 얼굴을 쳐들었다. 용기를 내 꼭 감았던 두 눈을 뜨고 몇 번 깜빡거렸다.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조각상 같은 하얀 얼굴에 겨울 호수처럼 투명한 은청색 눈동자가.
“아……!”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조금 긴장한 듯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떠냐? 에일린. 이제…… 눈이 괜찮은 거냐?”
에일린은 대답 대신 환하게 웃어 보이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정말인 거지?”
그녀보다도 더 기쁘고 반가운 표정과 목소리.
“예! 잘 보여요. 히에무스. 당신 얼굴도, 주변 풍경도!”
응? 그런데 주변 풍경이…….
“아아, 이제 잘 보이는 거구나! 에일린!”
“어엇!”
히에무스가 별안간 에일린의 몸을 번쩍 들어 감싸 안은 채 빙글빙글 몇 바퀴 돌았다. 넘쳐나는 환희에 본능처럼 취하는 행동이었다. 그가 흩뿌리는 새하얀 빛의 입자가 움직임과 함께 회오리쳤다.
“하하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히에무스…….”
그의 품에 안긴 채 회전을 계속하다 호되게 나무라는 목소리에 그가 행동을 멈췄다.
“그만해, 히에무스. 에일린이 놀라겠어. 머리가 어지러울 거라고.”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였다. 바로 옆에 대지의 왕인 텔루스와 함께 서 있었다. 엄한 말투였지만 그녀 역시 미소 띤 얼굴이었다. 히에무스가 조심스럽게 에일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미안, 너무 기뻐서 그만, 어지러운 거냐? 에일린.”
“아뇨, 괜찮아요.”
바닥에 내려서긴 했지만 그가 계속 에일린의 두 손을 꼭 쥔 상태였다. 그녀도 별로 싫지 않았다. 그에게 손을 맡긴 채 천천히 주변 풍경을 돌아봤다. 익숙한 광경이다. 좀 전까지 있었던 여신 아벨라가 거하는 빛의 궁전이 아닌 것 같았다.
“여긴…….”
아무리 봐도 루쿨루스 숲 같은데? 히에무스가 즉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루쿨루스 숲이다. 대자연 어머니께서 이곳으로 보내주신 거야.”
“아, 역시…….”
그랬구나. 신이 머무는 공간을 인간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으셨던 걸까? 순식간에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준 건 고마웠지만 왠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한 번 보고 싶었는데. 빛으로 가득한 궁전의 모습도, 그곳에 거하는 여신의 모습도. 히에무스가 손을 내밀어 에일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더니 살짝 손안에 쥐었다.
“머리카락도 다시 자라났구나, 에일린. 어머니께서 해주신 건가?”
“아!”
에일린이 잠깐 멀뚱히 있다 얼른 자신의 머리채로 시선을 가져갔다. 매끄러운 광택이 흐르는 구불구불한 밤색 머리가 허리 밑까지 길게 자라나 있었다.
“어라, 정말이네! 머리도 다시 길어졌어.”
“참으로 잘됐다, 에일린!”
히에무스가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잘 된…… 건가요?”
에일린은 얼떨떨한 기분에 중얼거렸다. 자신의 머리카락이 분명했으나 하루아침에 길어지니 난감하고 황당했다.
“잘됐고말고. 더더욱 예뻐지지 않았느냐? 볼 때마다 늘 안타까웠는데.”
히에무스가 황홀한 듯 가늘게 눈을 뜨며 바라봤다. 예전에 다른 인간들의 수작으로 머리카락이 잘렸을 때 얼마나 안타깝고 분했는지 모른다. 그녀가 잠든 틈을 타 머리카락을 자라나게 해주려 시도했지만 정령왕인 그의 힘으로도 자라나게 할 수 없었다. 사실 히에무스 자신은 겨울의 정령이기에 재생의 힘이 좀 약한 편이긴 했다. 재생이나 치유보다는 파괴와 죽음의 힘이 더 강했다. 겨울의 속성이 원래 그런 것이니까. 다른 정령왕에게 부탁하긴 좀 꺼려져 미뤄뒀지만 사실 늘 신경 쓰였다.
“그래요? 하지만 좀 이상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에게 뭐라고 설명하죠? 그냥 예전처럼 자르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건 안 돼!”
히에무스가 정색한 얼굴로 말렸다.
“하지만…….”
에일린 자신도 좀 아깝긴 했지만 차라리 그편이 좋을 것 같았다. 괜한 억측과 소문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솔직하게 정령이 다시 자라나게 해줬다고 그래.”
“예?”
“어차피 인간들 사이에 그대가 정령들의 가호를 받는다고 알려져 있잖아?”
히에무스는 그동안 에일린과 함께 지내며 알게 된 정보를 되짚었다. 인간 노릇을 해 보니 저절로 깨닫는 게 있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배경이나 권력 같은 데 유달리 집착하고 그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조금이라도 자신보다 약한 존재라고 생각되면 금방 업신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 차라리 이참에 에일린이 정령들의 가호를 받는다는 점을 확실하게 부각시키는 게 어떨까. 그녀의 뒤에 정령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면 인간들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뿐만이 아니다. 용족이나 마족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 자신이 인간 귀족이 되어 그녀를 보호하고 지켜주겠지만 그가 바로 곁에 없을 때에도 힘이 돼줄 수 있을 테니까.
“예? 아예 공공연하게 밝히고 다니라고요?”
“응. 차라리 그게 낫지 않을까?”
“글쎄, 제 생각엔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에일린이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짓자 히에무스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대지의 왕 텔루스가 간만에 입을 열었다.
“히에무스가 한 생각치고는 꽤 괜찮은 것 같은데?”
“예? 무슨 말씀이세요?”
텔루스가 팔짱을 끼더니 곧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예전에 정령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간들이 있었지. 주로 순수 엘프나 하프엘프들이 지녔던 직업인데 그런 직업을 가진 이들을 인간들이 두려워했었지.”
그가 즐겨 읽던 소설에도 그런 내용이 곧잘 나왔었다. 엄청 멋지게 묘사됐었지. 그 정령사라는 직업이.
“진짜 정령사는 아니지만 정령의 가호를 받는 인간이란 걸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그대를 대하는 눈이 달라질 테니까.”
“대하는 눈이 달라질 거라고요?”
텔루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살짝 허공을 응시했다. 그가 읽었던 책 내용을 다시 떠올리는 중이었다. 소설책을 보면 무수한 연인들이 그들을 둘러싼 군더더기 조건 때문에 헤어지는 일이 다반사로 나왔다.
“인간들이란 한 존재를 순수하게 평가하지 않고 그가 가진 것들로 판단하지 않더냐? 재산이니, 신분이니, 권력이니 뭐니 그런 것들로.”
“음, 전 잘 모르겠어요.”
에일린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그녀 자신이 인간이니 누구보다도 인간들 행태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령들의 가호를 받는 존재라는 게 긍정적인 요소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되레 기이하고 이상한 걸로 인식되는 게 아닐까? 인상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까지 한마디 거들었다.
“내 생각에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에일린. 어차피 그렇게 알려져 있다면 이제 와서 숨기고 굳이 자라난 머리채를 다시 자르고,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런……가요?”
“텔루스 말처럼 힘이 돼줄 수도 있고 말이야.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에게도 경각심을 갖게 하겠지.”
“…….”
에일린은 여전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장미의 기사 엘시아』라는 소설책에서 엘시아 황녀가 정령사로 활약하는 모습이 나오긴 했지만.
“정령의 가호를 받는다고 제가 정령사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정령사가 별건가.”
“예?”
“정령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그 힘을 쓸 수 있으면 정령사인 거지.”
에일린은 멍한 얼굴로 에스타스를 향했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도 우리의 힘을 쓸 수 있지 않느냐? 일단 히에무스의 겨울의 힘을 쓸 수 있을 테고 나 또한 언제든 불의 힘을 빌려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렇긴 하지만…….”
“어떤 방식이든 정령을 불러 그 힘을 쓸 수 있으면 정령사인 거지.”
“아!”
그런 건가? 자신이 정령사인 거야? 그녀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돼버린 건가? 막연히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소설 속 여주인공인 엘시아의 역할을 자신이 대신하는 상황이 오는 건 아닐까 하고. 그저 짐작하는 것과 기정사실로 인지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연신 눈을 깜빡이며 에일린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에스타스가 좀 더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자, 어서 결정해라, 에일린. 머리를 자르고 갈지, 아니면 그대로 당당히 이 숲을 나갈지.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할 거야. 곧 해가 질 것 같으니까.”
히에무스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에스타스를 곁눈질하며 쏘아붙였다.
“천천히 생각해도 될 문제니 재촉하지 마.”
잠시 조용히 있던 대지의 왕 텔루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아니, 조금 서두르는 게 좋겠다.”
“왜지?”
“에일린 대역을 시킨 애송이 일각수가 이 숲에 와 있는 것 같아. 뭔가 문제가 생긴 것 아닐까?”
“뭐라고요?”
에일린이 깜짝 놀라 물었다. 대지의 움직임과 생명체의 마나를 감지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텔루스가 눈을 감고 뭔가에 집중하며 말을 이었다.
“가을의 궁전 쪽이다. 일각수의 몸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 같아. 어차피 우리도 그곳으로 가야 하지 않나. 이만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히에무스와 에스타스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에일린도 얼른 대답했다.
“예, 어서 가보도록 해요.”
***
“에일린!”
가을의 궁전 입구에 당도하니 루카스가 유니콘으로 변신한 채 달려왔다.
“어라, 왕이시여!”
함께 있던 세 정령도 놀란 표정으로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오셨습니까? 왕이시여.”
히에무스가 건성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자 세 정령이 얼른 에일린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에일린 님, 어서 오세요. 이제 눈이 괜찮아지신 거예요?”
“예, 괜찮아요.”
“정말 다행이에요!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고마워요. 별일 없었나요? 저 때문에 고생 많았죠? 루카스도…….”
에일린이 인간형으로 변신하는 루카스를 향해 물었다.
“응, 나 정말 힘들었어. 온갖 험한 일을 다 겪었다고. 진짜 참기 힘들 정도였어, 에일린.”
많이 힘들었는지 울상인 얼굴이 핼쑥해 보였다. 에일린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의 한쪽 팔을 잡고 다정한 어조로 위로했다.
“그랬어요? 미안해요, 나 때문에.”
“으응, 나 지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야.”
그 말과 함께 에일린의 품속으로 머리를 기대려 하자 히에무스가 냉큼 잡아채 바로 세웠다.
“무슨 짓이냐? 네놈.”
“당신이야말로 무슨 짓이에요! 지쳐서 녹초가 된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히에무스가 그의 팔을 놓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녹초가 되긴, 마나가 이렇게 넘쳐나는데 거짓말하지 마.”
아두스가 곧장 히에무스에게 보고했다.
“맞습니다. 루카스는 별로 힘든 일도 없었는데 계속 게으름에 엄살을 부렸어요. 오늘도 갑갑하다며 시장에 나와서 내내 시간을 보냈어요. 돌아갈 시간이 되니 더 이상 에일린 님 역할을 못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지 뭐예요.”
제퓌도 가세해 설명을 더했다.
“우리가 억지로 데려가려 하니 일각수로 변해버리더라고요. 그러면 에일린 님으로 변신한 마법이 풀리는데. 할 수 없이 가을의 왕께 다시 마법을 걸어달라고 찾아온 거예요.”
히에무스가 눈을 부라리며 루카스를 노려봤다.
“호오, 알 만하군.”
루카스가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댔다.
“에잇, 쳇! 하, 하지만 나 정말 힘들었단 말이에요. 이상한 일도 당하고.”
눈썹을 한껏 늘어뜨리며 에일린을 바라봤다.
“에일린, 난 최선을 다했는데 더는 참기 힘들어서…….”
“예, 알겠어요. 루카스. 고생 많았어요. 감사하고요. 덕분에 제 일도 잘 해결됐어요.”
에일린이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인사했다. 정말 고마웠다. 안쓰럽기도 하고. 인간으로 따지면 막 사춘기를 벗어난 어린 청년인데 불편한 역할을 감수하느라 많이 부대꼈을 것이다. 이만큼이라도 참고 일해준 게 대견스러웠다.
“에일린…….”
진심 어린 감사 인사에 루카스가 눈물을 글썽이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에일린은 잠시 루카스를 위로해주다 내친김에 다른 정령왕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꺼냈다.
“텔루스 님과 에스타스 님. 이번에 저를 위해 애써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잊지 않을게요.”
두 정령왕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래. 알겠으니 더 이상 인사하지 않아도 된다.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 둘 다 원해서 한 일이고 나름 즐거웠으니 그걸로 충분해. 부담 갖지 말아라.”
에스타스의 응답에 텔루스도 입매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에일린 님이 오셨으니까 가을의 궁에 가지 않아도 되는 거지요?”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프리기가 일행을 돌아보며 말문을 열었다. 에일린이 그를 돌아보며 답했다.
“예. 늦었으니까 바로 케일론 님의 성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응? 에일린 님. 머리카락이 자라났는데 어찌 된 거예요? 대자연 어머니께서 해주신 일인가요?”
프리기의 물음에 다른 두 정령이 얼른 에일린 주위를 휙휙 돌며 살폈다.
“정말이네. 에일린 님 머리가 다시 길어졌네요!”
“아, 네.”
에일린이 어색한 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잘됐네요. 훨씬 예뻐지셨어요.”
“맞아, 정말 잘됐다. 길면 땋을 수도 있고 묶어도 되고. 이제 대걸레처럼 엉기는 것도 덜하겠어.”
“하지만 머리 감는 건 좀 불편하실 거야. 물이랑 비누도 배로 소비할 테고. 낭비한다고 사악한 마법사가 싫어할지도 몰라.”
“말리는 것도 귀찮아질 테지. 수건도 여러 개 필요하잖아.”
“말리는 건 우리가 마법으로 해드리면 되지 않을까?”
“그렇네. 청결하게 해주는 마법을 이참에 배워볼까? 인간 마법사들은 그런 마법도 곧잘 쓰는 것 같던데. 찾아보면 정령 중에도 아는 이가 있을 거야.”
“온천에 가서 씻으면 더운 물은 절약되겠지.”
세 정령이 그들도 신기한 듯 에일린의 머리를 이리저리 매만지며 재잘거렸다. 에일린이 여전히 그 머리를 자를지 말지 고민 중이라는 걸 알지 못한 채로. 에스타스가 진지한 얼굴로 에일린을 향했다.
“어서 결정해야 할 것 같구나. 에일린.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지내던 성으로 돌아가려면 말이지.”
“예.”
루카스가 여전히 그녀를 대신하는 중이라면 다소 느긋하게 결정할 수도 있었겠지만 상황이 바뀌니 할 수 없었다. 단순히 머리채를 자르는 문제가 아니니 좀처럼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에일린이 이마에 주름까지 잡으며 생각에 잠기자 루카스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며 질문했다. 세 정령도 궁금한지 눈을 빛내며 바라봤다.
“뭘 결정해야 하는데?”
“예? 아, 실은…….”
에일린이 간략하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두스가 한마디 내뱉었다.
“그냥 두세요. 에일린 님. 사실 그동안 말씀 못 드렸는데 머리가 짧아지니까 가끔 사내처럼 보일 때도 있었거든요.”
“예?”
루카스도 얼른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맞아. 오늘도 시장에 나갔더니 모두 남자아이로 알더라고. 물론 남장을 하고 나갔지만 단 한 사람도 여자라고 생각하진 않더라니까.”
“……!”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었다. 머리를 자르지 않기로 결정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야 상관없지만 히에무스에겐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미모 차이가 너무 심한데 말이다. 물론 그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기꺼이 감수하기로 맘먹었다.
***
정령들과 헤어진 에일린은 루카스가 입고 있던 남자 옷으로 다시 바꿔 입었다. 이내 세 정령과 함께 케일론이 있다는 주점으로 갔다. 히에무스는 에일린의 귀가까지 지켜보고 싶어해 동행했다. 순간이동 마법을 이용해서 가보니 마법사는 여전히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어두워진 내실 탁자 위에 쓰러진 채로.
“케일론 님. 케일론 님!”
강하게 어깨를 흔들었지만 세 정령이 걸어둔 마법 때문인지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다. 주점 주인도 어쩌지 못하고 그냥 내버려 둔 모양이었다.
“내가 마법으로 깨워줄까? 에일린.”
“예. 부탁드려요.”
히에무스가 손가락을 내밀어 케일론의 이마를 튕겼다. 딱 소리가 나는 게 지난번 애플턴 자작부인에게 마법을 걸 때보다도 훨씬 거친 손길이었다.
“아얏!”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케일론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한동안 상황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듯 멀뚱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뭐, 뭐지?”
그러다 앞에 있는 에일린과 눈이 마주치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아, 그대였군. 우리가 계속 여기 있었던 겁니까?”
“예.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그동안 바람 좀 쐬고 왔어요.”
“혼자서 말인가요? 시장을 둘러보고 왔나요?”
“아뇨, 그게…….”
에일린은 말끝을 흐렸다. 미리 생각해둔 얘기였지만 막상 하려니 찜찜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황당한 상황을 설명하려면 준비해둔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 사실이니 딱히 켕길 이유는 없다. 물론 조금 윤색이나 각색을 해야겠지만.
“저는 정령의 숲에 다녀왔어요.”
케일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머리가 아픈 건지 아니면 여전히 졸린 건지 한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정령의 숲이라니. 정령들이 데려다줬나요?”
“예.”
“그곳에서 뭘 하고 왔습니까?”
“그게…… 정령들이랑 좀 놀아줬거든요. 춤도 가르쳐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주고. 그랬더니 그들이 보답으로 제 머리를 자라게 해줬어요.”
“뭐라고요?”
주변이 어두운 탓에 서로의 모습을 분간할 수 없었다. 케일론이 쉰 목소리로 뭔가 주문을 외자 탁자 위에 있던 촛불에 불이 붙으며 순식간에 방 안이 환해졌다. 비로소 둘의 모습이 드러나 보였다. 에일린을 살피던 케일론의 두 눈이 한껏 벌어졌다. 그의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길게 자라나 폭포수처럼 굽이치는 짙은 머리채가 눈에 들어왔다. 케일론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런, 세상에……!”
믿기 힘든지 멍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에일린 역시 왠지 민망해져 머쓱해진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때 입구 쪽에서 누군가가 놀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쿠! 정령들이 이상한 장난을 친 모양이구먼요.”
주점 주인이었다. 놀란 눈을 한 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령들도 참 희한하군요. 사내자식 머리는 뭐 하러 자라게 했을까요?”
“으…….”
에일린은 좀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시선은 정말 상관없었으니까.
***
에일린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걸 확인한 후 히에무스는 서둘러 어딘가로 향했다. 한동안 자리를 비운 탓에 겨울의 궁전도 가봐야 하고 하레나 성에도 들러야 했으나 그 모든 것에 앞서 처리해야 할 게 있었다. 반드시 정령왕의 모습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해 당도한 곳은 아젤란 제국의 황도에 위치한 팔라틴 황궁이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공녀들이 머무는 장소인 아르겐 궁. 정확한 목적지를 즉시 확인할 수 있었다.
“저곳이군.”
다른 곳과 구분되는 마나로 넘쳐나는 곳이니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잠시 그 주변에 머무르며 어둠이 좀 더 짙게 깔리길 기다렸다. 달도 뜨지 않아 사방이 온통 까만 암흑과 무거운 침묵으로 뒤덮이자 거침없이 몸을 움직였다. 호화롭게 장식된 커다란 방안이었다. 한쪽에 놓인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높다란 침대 위에 누군가가 잠들어 있었다. 바로 곁으로 접근해 우뚝 서서 내려다보았다.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깨어나라, 흑룡.”
“……!”
막 잠자리에 들었던 스킬라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히에…….’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히에무스가 벌써 몸을 속박하는 마법을 건 것이다. 그가 서늘한 눈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잊지 않았겠지. 에일린의 눈을 낫게 한 후에 네게 벌을 주겠다고 한 것 말이다.”
“…….”
스킬라는 자의든 타의든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그저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냉혹하게 얼어붙은 두 눈동자를 대하니 덜컥 겁이 났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자신을 죽이려는 건가?
“죽이지는 않아.”
그녀의 소리 없는 물음에 응답하듯 그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럴 가치도 없어. 널 죽여 봤자 얻는 이익이 거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용서할 수 없다. 그녀를 다치게 했으니까.”
스킬라는 몸이 조금 떨렸으나 곧 여유를 되찾았다. 죽이지 않는다면 별로 두려울 것도 없었다. 자신은 지상 최강의 종족인 용이니까. 어떤 벌을 줄 거란 말인가?
“얼게 해주지.”
몸을 얼음 속에 가두는 벌은 저번에도 주지 않았던가? 며칠 고생하긴 했지만 치명적인 타격을 입진 않았다. 스킬라는 이제 희미한 미소까지 머금었다.
“지난번엔 내가 인간과 비슷한 몸 상태였으니 큰 힘을 발휘할 순 없었지. 이번엔 진짜 정령왕의 힘을 써서 얼게 할 작정이다.”
“……!”
“용의 몸이라 해도 제법 고생해야 할 거다.”
그녀의 입가에 어렸던 미소가 자취를 감췄다. 대신 아까보다 더 큰 공포감을 담은 눈빛으로 바뀌었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며 겨울의 정령왕이 그의 손을 쳐들었다. 싸늘한 은빛과 푸른빛으로 형성된 빛의 화살이 그녀를 향해 곧장 날아들었다. 낮게 깔린 저주의 한마디와 함께.
“영원히 고통 받아라, 흑룡.”
***
며칠 동안 혹독한 겨울 폭풍이 몰아쳤다. 다른 때보다도 유난히 길게 지속되다 멈추자 잔뜩 움츠려 있던 황도 카르디아의 주민들이 한꺼번에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시장이며 거리며 어디 한군데 인파가 넘쳐나지 않는 데가 없었다. 황궁마저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며칠간 조회나 각종 업무 상황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은 상태라 매우 혼잡스러웠다. 황제 렉스는 이른 아침부터 밀린 일정을 소화하느라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늦은 오후가 돼서야 겨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집무실 한편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며 긴장을 푸는 티타임을 가졌다. 함께 자리한 티타임 상대는 기사 단장이자 친구인 엘로드였다.
“요즘 잘 진행되고 있는 건가?”
황제의 뜬금없는 질문에 엘로드는 막 찻잔을 들어 올리던 행동을 멈췄다.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엘시아 왕녀와의 사이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묻는 거야.”
엘로드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나름 노력하는 중입니다만 왕녀님께 제가 많이 부족한 듯합니다.”
“그래? 뭔가 생각대로 되지 않는 건가?”
“황공합니다. 폐하께서 많이 배려해 주셨는데 제 역량이 부족한 탓인지 아직 별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군.”
렉스가 묵묵히 차를 홀짝였다. 예전 같으면 그런 엘로드를 놀리는 말을 했을 것이다. 기사 단장처럼 출중한 자가 그깟 여인 하나 사로잡지 못하는 거냐고. 하지만 지금은 그 역시 한 여인의 마음을 얻으려 고군분투하는 처지라 감히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벌써 포기한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좀 더 열심히 노력해 볼 작정입니다.”
렉스가 흐린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뭐, 적당히 하게. 왕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다 해도 큰 상관은 없어. 전에 약속한 대로 엘시아 왕녀는 그대에게 줄 테니까.”
“예? 그 말씀은…….”
“봄이 오면 혼인 명령을 내릴 거야. 그대와 엘시아 왕녀의.”
“……!”
“알고 있겠지만 정복지에서 일어났던 충돌이나 폭동도 거의 다 진압이 된 상태니 이제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고 내정을 손볼 단계지.”
엘로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식은 차를 한 모금 삼키며 말했다.
“예.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아무래도 아칸 왕국은 없애버려야 할 것 같아. 북쪽에 위치한 몇몇 소국을 합병해서 황제 직할령으로 만들어 관리하는 편이 낫겠지. 영주 대신 중앙에서 임명한 관료를 파견할 생각이다.”
“관료를 보내신다고요?”
“일종의 ‘총독’이지. 먼 지역을 통치하는 데는 그 편이 유리할 거야.”
“예. 현명하신 의견입니다.”
“그대가 엘시아 왕녀와 혼인해서 그곳 총독으로 부임하면 어떨까?”
“제가 말입니까?”
“그래. 누구보다도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내야 할 테니까.”
황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커다란 군사력까지 지녀야 하는 세력이니 그 누구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야 했다.
“어떤가? 그대 뜻은?”
“참으로 황송하신 말씀입니다.”
엘로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크게 번지는 미소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렉스가 짐짓 당황한 얼굴로 다시 앉도록 권했다.
“정식 결정이 난 것도 아니니 미리 감사 인사를 할 필요는 없어. 지금은 그저 친구로서의 의견을 물어본 것뿐이니까. 어떤가? 할 마음이 있는 거겠지?”
“있다 뿐이겠습니까? 그런 막중한 소임을 맡겨 주신다면 폐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이 엘로드, 모든 힘과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음, 그래. 그 정도 각오면 충분해.”
렉스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이 찻잔을 비울 때쯤 리히트 시종장이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다가와 보고했다.
“폐하, 대마법사 케일론 님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들라 하시오.”
“예.”
엘로드는 조금 의아했다. 거의 매일 얼굴을 보는데다 오늘 오전에도 쭉 같이 있었는데 그와 새삼스레 무슨 말을 나누시려는 걸까? 호기심이 일었지만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치를 살폈다. 어쩌면 계속 머물게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며.
“캐드릭스 후작. 경은 이만 나가보도록 하시오.”
황제가 신뢰하는 벗의 위치에서 다시 충성스러운 신하의 위치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예,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엘로드가 나가자마자 검은 마법사 로브를 걸치고 지팡이를 든 케일론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전 중에도 계속 황제와 마주했던 터라 정식 인사는 하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티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황제를 향해 짧은 묵례를 올렸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케일론, 조금 궁금한 사항이 있어 보자 했다.”
“말씀하십시오.”
렉스는 곧바로 말을 꺼내지 않고 문득 그를 올려다보았다. 반듯하게 세운 몸과 젊고 잘생긴 얼굴, 날카롭고 고집스러운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렉스가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도 이런 모습이었다. 늘 변함없는 모습으로 옆에 있었기에 세월이 흐르고 서로의 위치가 달라졌어도 항상 같은 태도로 대하게 되는 자였다. 친구 같기도 하고, 스승 같기도 하고, 가끔은 친근한 삼촌 같기도 한 자. 그런 그가 요즘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래, 아마도 에일린을 맡고나서부터인 것 같다. 그녀가 뭔가 색다른 영향을 끼친 것일까? 황당한 소문까지 들려오는 걸 보니.
“황도에 재미있는 소문이 돌고 있다 들었어.”
“소문이라니요?”
마법사의 얼굴은 빈틈이 없어 보였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완고하고 굳어 보일 뿐 별다른 동요가 느껴지진 않았다.
“두 가지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더군. 하나는 에일린에 관한 거야.”
에일린의 이름을 거론하는 순간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렉스가 말을 이었다.
“그녀가 정령들과 친해져 가호를 받는 걸 넘어 뭔가 큰 축복을 받았다고 하던데.”
“아, 그 이야기 말씀입니까?”
케일론이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정령들과 좀 어울렸더니 머리카락을 다시 자라나게 해줬다더군요.”
“정말 머리가 다시 길어졌단 말인가?”
“예. 사실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만큼 길어졌습니다. 정령들 눈에도 긴 머리가 훨씬 나아 보였던 게지요.”
“하하, 잘됐군. 아무렴. 여인이라면 긴 머리가 훨씬 좋지. 내가 직접 보러 가야겠군. 그래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렉스가 눈웃음을 지은 채 입술 끝을 올렸다.
“내 듣기론 그녀가 이제 정령들의 힘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는 둥, 정령사가 되었다는 둥 하는 소문이 돈다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건가?”
“그 부분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확인한 사실은 그저 정령이 그녀의 머리채를 자라게 해줬다는 것뿐이니까요.”
“그래?”
렉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다시 케일론에게 시선을 맞췄다.
“냉정한 정령들이 그런 호의를 베풀었다는 건 상당한 친밀감을 표한 거라 봐도 되겠지. 정령의 힘을 사용하게 됐다는 말도 완전 헛말은 아닐 거야.”
“글쎄요.”
“뭐, 좀 더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
“그럴 겁니다. 저도 유심히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걸 떠나 케일론은 순수하게 마법사로서 호기심이 일었다. 지금껏 그가 알던 정령들의 행태와 너무 달랐으니까. 게다가 그런 일을 벌인 게 겨울의 정령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정령 중에도 가장 무감각하고 무심한 존재라고 알려져 있는데.
“부탁하지.”
“예. 물어보실 말씀이 한 가지 더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폐하.”
“아, 그게…….”
그건 좀 꺼려졌다. 대마법사가 웬 소년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소문. 여태 몰랐던 케일론의 취향을 알게 돼 무척 당황스러웠다. 안타까운 마음에 위로라도 해줘야 하나 아니면 그냥 모른 체하는 게 나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그의 얼굴을 보니 그냥 덮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본인도 내색하지 않는데 굳이 상기시켜줄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건 됐어.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러십니까? 저도 사실 폐하께 용무가 있습니다.”
“뭔가?”
케일론이 두루마리 편지를 하나 꺼내 공손한 몸짓으로 건넸다.
“에일린이 폐하께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렉스의 표정이 금방 풀어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하, 에일린이? 이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가?”
“제법 능숙해졌습니다. 물론 여전히 서툰 부분도 있습니다만 간단한 편지글 정도는 도움 없이 읽고 쓰더군요.”
“잘됐군.”
렉스가 살짝 기대감이 담긴 얼굴로 편지를 펼쳐 들었다. 그러다 곧 딱딱한 표정으로 변했다.
“무슨······ 내용이기에?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폐하.”
“그대의 성에 보냈던 사용인들을 내일 모두 돌려보내겠다고 하는군. 그리고…….”
그가 더 인상을 구기며 덧붙였다.
“내가 제안했던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 역시 거절하겠다는 내용이야.”
짙은 실망감이 밴 퉁명스러운 어조였다. 불만이 섞인 소리가 참았던 날숨처럼 튀어나왔다.
“제길.”
고아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세우는 데 일조하라는 제안까지 거절할 줄은 몰랐다. 그것만큼은 뿌리치기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에일린에 대해서만큼은 도무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제기랄.”
알 수가 없었다.
***
다음 날은 또다시 찾아온 제국의 휴일이었다.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어제만큼이나 맑게 갠 날이라 외부활동을 하기엔 적당했다. 에일린은 애플턴 부인과 두 하녀, 그 외 성을 떠나는 여러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현관 앞으로 나왔다.
“그동안 진짜 고생 많으셨어요, 부인.”
“영애…….”
“정말 감사드려요.”
에일린은 깊이 허리를 숙이며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애플턴 자작부인은 당혹감이 가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황제 폐하가 허락한 일이라 해도 이래도 되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동안 에일린과 지내며 나름 정도 들었던 터라 개인적으로도 무척 허전하고 서운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에일린의 결심을 존중해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 어떤 이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지내고 싶어 하는 기분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어찌되었든 에일린의 뜻이 너무 확고하기에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다. 그녀는 깊은 숨을 한차례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영애도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익숙하지 않은 공부를 따라오느라 많이 힘들었을 텐데.”
에일린은 그냥 웃어주었다.
“안녕히 가세요, 부인. 건강하게 잘 지내시고요.”
“영애도 잘 지내세요. 종종 안부 전할게요.”
“예. 저도요.”
이어서 부인의 뒤쪽에 자리한 두 하녀에게도 작별인사를 했다.
“두 사람도 고마웠어요. 안녕히 가세요.”
베키와 도리스도 눈물을 글썽이며 아쉬운 얼굴을 한 채 고개를 숙였다. 나머지 사람들과도 하나하나 인사를 나누었다. 이후 모두 말과 마차에 나눠 타고 성 밖으로 길을 나섰다. 케일론과 브레이 그리고 에일린, 세 사람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한때 성에 함께 살았던 일행들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셋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케일론이 에일린을 힐끗 바라봤다. 후회하지 않을까? 저들을 보내면 곤란한 일이 많을 텐데. 황제가 보냈던 각종 값비싼 물품도 옷가지 몇 벌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반납했다. 하긴 그런 걸 갖고 있다 해도 시녀나 하녀가 없으면 제대로 활용하기도 힘들겠지.
“괜찮겠습니까? 저들을 보내도.”
케일론이 불쑥 물어오자 에일린은 잠깐 멍하니 있다 곧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예, 그럼요.”
당연히 괜찮았다. 오히려 계속 원하던 일이다. 그녀가 원했던 삶은 겉만 화려한 귀족의 삶이 아니다.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어 자유롭게 사는 삶을 원한 것이지. 그리고 진실한 사랑을 찾아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번에 히에무스와 함께 빛의 궁전을 다녀오며 깨달은 게 있었다. 히에무스가 보여주는 순수하고 깊은 사랑을 가슴 깊이 느꼈다. 진짜 사랑이 아닌 걸 알지만 진실한 사랑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좀 더 그를 알고 싶었다. 자신도 조금은 더 진솔한 모습으로, 용기 있게 그를 향해 다가가고 싶었다. 아직도 망설임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일단 렉스와 연결된 것들을 모두 끊어낼 필요성이 있었다. 더는 그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추운데 안으로 들어가죠,”
케일론과 브레이를 향해 씩씩한 목소리로 말하자 두 남자가 순순히 따랐다. 그때 조금 떨어진 성의 망루 위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상당히 수준 높은 은신 마법을 썼기에 케일론조차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다.
***
“저 마법사도 안 되겠다고요?”
안드레아스가 초조한 낯빛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앞에 서 있던 키프리스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둘은 사랑의 묘약을 쓸 상대를 물색하러 다니던 중이었다. 며칠 동안 고심한 끝에 마법사 케일론으로 정하고 사전 답사를 온 참이었다.
“어째서입니까? 설마 저자도…….”
“그래. 저 마법사도 누군가에게 깊이 빠져든 상태야. 한창 강한 사랑을 느끼는 중이지. 저런 자에게는 사랑의 묘약조차 별로 효과가 없어. 그러니 다른 상대를 택하는 게 좋아.”
얼마 전 케일론이 한 소년에게 반해 사랑 고백을 했다가 차였다는 소문을 듣긴 했다. 저잣거리에 떠도는 헛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진짜였단 말인가? 저자도 안 된다면 누굴 골라야 하는 걸까? 다른 궁정 마법사인 중년의 사내? 한 수 위인 케일론이 건재하니 그리 큰 쓸모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시종들이나 고위 관리, 유력한 귀족 세력 등을 떠올려 봤지만 선뜻 결정할 만한 이는 없었다.
“뭔가? 생각나는 이가 없는가? 너무 오래 끌지 말았으면 해. 내가 계속 이 일에 열의를 보여줄 거라고 기대하지 마.”
“생각해둔 자가 하나 더 있긴 합니다만.”
“누구지?”
안드레아스는 잠시 더 고심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케일론 못지않게 적당한 상대였지만 엘시아의 마음에 별로 들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엘시아는 이왕이면 매혹적으로 보이는 상대를 원했다. 하다못해 적어도 젊은 남자이길 바랐다. 하지만 키프리스의 말대로 언제까지나 대상을 물색하는 데만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제1신전에 있는 대신관입니다.”
“대신관?”
“예. 모든 신관을 이끄는 우두머리 말입니다.”
“어째서 그를 택한 건가?”
“그건…….”
안드레아스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정령의 여왕에게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정령이란 존재는 그저 약속한 일만 제대로 해주면 그만인 것이다. 그의 의도를 읽은 키프리스가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뭐 됐어. 나 역시 인간들 사정 따위 알고 싶지 않아. 어쨌든 그자를 보러 가지. 적당하다고 생각된다면 이제 그냥 정하도록 해. 내 인내심도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그자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겠다.”
정령의 여왕이 손을 휘두르자 둘의 몸이 금방 어디론가 옮겨졌다. 순식간에 황도 카르디아의 중심부에 위치한 아벨라 제1신전에 도착했다. 은신 마법도 유지한 채였다. 당연한 거였지만 안드레아스는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정령, 그것도 정령왕이 행하는 마법은 인간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자각이 새삼 들었다. 서둘러 대신관을 찾아 나섰다. 마나의 양을 기준으로 살펴보니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마침 아벨라 여신에 대한 기도 시간인 듯 신전 본당에서 의식을 집전하는 중이었다. 다른 신관들과 차별을 둔 것인지 금빛과 은빛의 자수로 무척 호화롭게 장식된 하얀 로브를 걸치고 두건을 쓴 모습이었다. 가까이 접근하자 얼굴 생김새도 눈에 들어왔다.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 바니스터 공작에 비하면 훨씬 젊고 준수한 편이긴 했지만 적어도 중년을 훌쩍 넘긴 노인이란 건 분명했다. 엘시아 왕녀의 눈엔 차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어떻습니까? 저자는 가능하겠는지요?”
“어디 보자.”
키프리스가 눈웃음을 지으며 그자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으흥.”
야릇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만족한 어조로 대답했다.
“적당해. 정말이지 딱 적당한 자군.”
적당하면 적당한 거지 딱 적당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안드레아스가 의아한 표정을 담아 보이자 사랑의 여왕이 한층 진한 미소를 품었다.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사랑을 하지 않은 자거든. 이런 자가 사랑에 빠지면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사랑을 하게 되지.”
“깊은…… 사랑이라고요?”
“그래. 그 어떤 이보다도 순도가 높은 사랑을 한달까.”
지나가는 바람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누구처럼.”
“……?”
대상이 정해지자 더 이상 미적댈 이유가 없었다. 정령의 여왕과 일단 헤어진 안드레아스는 그길로 엘시아를 찾아가 보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불같이 화를 내며 불만을 표했다.
“그런 늙은이는 싫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 나이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이에요. 그런 다 늙어빠진 자와 연애하라는 건가요?”
아무리 필요에 의한 일이라 해도 싫었다. 바니스터 공작이 추근댈 때마다 속에서 신물이 올라올 지경인데 그런 노인을 또 상대하라는 건가? 그 보잘것없는 평민 여자는 꽃같이 생긴 젊은 미남들에 둘러싸여 지내는데 왕녀 신분에 대륙 최고 미녀라 일컬어지는 자신은 도대체 왜 이렇단 말인가?
“사귀라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저 적당히 상대해주면…….”
“키스를 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게…….”
사랑의 묘약을 쓴 상대와 키스 정도는 나눠야 그 관계를 안정적으로 지속시킬 수 있을 거라는 주의사항을 들었다. 그 외 한두 가지 더 있지만 가장 기본으로 지켜야 하는 사항이 키스를 통한 관계 유지였다. 안드레아스 자신도 왕녀 못지않게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공주님, 더 이상 상대를 물색할 여유가 없습니다. 사랑의 정령왕이 더는 기다려주기 어렵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제 생각에 그자만큼 적당한 상대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칸 왕국과 공주님의 미래를 생각해 보십시오.”
엘시아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부릅떴다.
“그자만 잘 요리한다면 많은 걸 얻어낼 수 있습니다. 모든 신관의 우두머리니까요. 신관들의 강력한 힘을 손에 쥘 수 있을 겁니다.”
안드레아스가 엘시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계속했다.
“황제에 대한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신을 모시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데다 신의 신탁을 받고 풀이하는 자니까요. 그의 말 한마디가 가져오는 파급력이 엄청날 게 분명합니다.”
“…….”
“잘만 이용한다면 황후 자리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엘시아가 뭐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내키지 않은 데다 억울하게까지 느껴졌지만 그의 말이 옳았다.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마법사를 노려보다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알겠어요. 그자로…… 해요.”
“예. 그리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안드레아스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루쿨루스 숲으로 가서 정령의 여왕을 소환했다.
***
며칠 후 엘시아는 안드레아스와 함께 마차를 타고 제1신전으로 향했다. 그동안 황제에게 제1신전에 기도하러 가고 싶다는 청을 넣었다. 아울러 대신관을 만나 뵙고 직접 가르침을 원한다는 뜻을 전하는 등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였다.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겨우 허락이 떨어져 마침내 길을 떠나는 중이었다. 엘시아의 얼굴은 잔뜩 굳은 상태였다. 안드레아스도 내내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전 모습이 보이자 안드레아스가 느리게 말문을 열었다.
“공주님께선 그냥 자연스럽게 행동하시면 됩니다. 나머지 일들은 저와 정령의 여왕께서 알아서 할 테니까요.”
엘시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에 당도하니 여러 신관이 나와 맞아주었다. 하지만 대신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신관들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자니 나름 콧대가 셀 것이다. 웬만한 나라의 왕보다도 더 고귀한 위치였다. 꽤 오랜 시간을 다른 신관들에게 둘러싸인 채 기도를 드렸다. 인내심을 발하며 기다린 끝에 비로소 대신관이 모습을 잠깐 드러냈다. 형식적인 축복의 말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만나기 힘들겠지만 엘시아 왕녀가 아칸 왕국의 후계자 신분이란 걸 강조했다. 거기에 제법 많은 봉납물과 기부금을 내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걸 마련하기 위해 그녀는 수중에 있는 돈과 재물을 있는 대로 다 긁어모아야 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그 늙은이를 만나야 하는 거냐고?!’
‘고정하십시오, 공주님. 일단 그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그까짓 재물은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이후부턴 자금 때문에 곤란해지실 일도 없어질 겁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기울인 노력을 떠올리며 엘시아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숙였던 머리를 쳐들고 그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두건 사이로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조금 보였다. 길고 새하얀 수염에 형형한 회색 눈동자. 늙긴 했지만 큰 키에 곧은 몸을 가진 자였다. 대신관답게 엄숙한 위엄이 느껴졌다. 바니스터 공작에 비하면 준수하다고도 할 만한 용모였지만 노인인 건 어쩔 수 없었다. 엘시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게다가 그는 수많은 신관을 수행한 채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계획했던 일을 제대로 행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정령의 여왕이 곁에 있다 해도 말이다. 곧 그 우려가 쓸데없는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대신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엘시아 왕녀님?”
중후한 목소리였다. 왠지 느껴지는 압박감에 엘시아는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대신관님.”
“오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시라니……!”
“……!”
조금 전까지 예리하게 빛나던 대신관의 눈동자가 꿈꾸듯 몽롱하게 변해 있었다. 뭔가에 홀린 듯 걸어온 그가 황급히 엘시아의 손을 잡았다. 몹시 긴장되는지 두 손을 덜덜 떨며 황홀해진 얼굴로 응시했다. 엘시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잠깐 경직된 채 서 있었다. 바로 알 수 있었다. 정말 자연스럽게 그들의 계획이 진행 중이란 것을. 대신관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그녀의 두 손에 뜨겁게 입을 맞췄다.
“엘시아……, 엘시아 님.”
목이 마른 듯 애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엘시아는 당황스러웠지만 조금 미소를 지어주었다.
“당신의 이름은 뭐죠?”
“로드미오, 로드미오입니다. 아름다운 이여.”
“로드미오.”
속삭이듯 불러주니 그가 감격한 듯 눈물까지 글썽였다. 마법으로 모습을 숨긴 안드레아스가 그녀의 곁에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키스하십시오. 그래야 각인이 될 것입니다. 결계를 펼쳐놓은 상태니 다른 이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엘시아는 눈을 딱 감고 대신관의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사랑의 마법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오후가 되었다. 아르겐 궁의 한 방에서 고통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으으……. 추워, 너무 추워.”
드라코니아의 왕녀 스킬라 공주였다. 방마다 설치된 벽난로마다 불을 지피고 화로까지 군데군데 갖다 놓았다. 거기다 마법으로 방 안에 훈훈한 온기까지 더해 둔 상태였지만 스킬라는 몸에 드는 한기 때문에 고통에 시달렸다. 털가죽으로 된 망토, 두툼한 양모 이불까지 겹겹이 두른 채 부들부들 떨었다. 시녀인 백룡 알리샤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괜찮으세요? 공주님. 계속 이렇게 한기가 들다니…….”
“으…….”
스킬라가 인상을 쓰며 신음 소리를 냈다. 용의 몸으로 이런 추위를 느끼게 될 줄이야. 역시 겨울의 정령왕이었다. 그를 생각하자 날카로운 기억이 함께 떠올랐다. 자신을 벌레처럼 바라보던 그 냉혹한 눈빛이. 너무 분했다. 슬프고 괴로웠다. 괘씸하고 용서가 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행동도 떳떳하지 못했지만 한갓 인간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런 취급을 당하다니. 2500년의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수모였다.
‘두고 봐. 내가 순순히 당하고만 있진 않을 테니. 따끔하게 혼내줄 거야.’
몸이 얼어붙는 벌을 받은 이후 몇 번이고 되뇌던 말이었다. 어떤 수를 써야 할까?
“인간이니 같은 인간을 통해 괴롭혀 줘야지.”
입 밖으로 말을 꺼내자 눈치 빠른 시녀 알리샤가 얼른 다가왔다.
“뭔가 좋은 생각이 있으세요? 공주님.”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적당한 방법을.”
알리샤가 잠깐 침묵하다 말했다.
“제가 그 평민 여자를 조사하면서 알아낸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지?”
스킬라의 물음에 백룡인 시녀 알리샤가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예전에 엘시아 공녀를 비롯해 공녀들 몇몇과 그 평민 여자 사이에 한바탕 소동이 생긴 적이 있다 합니다.”
“무슨 일?”
알리샤가 황궁 무도회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말해주었다. 묵묵히 얘기를 듣던 스킬라 공주가 물었다.
“그럼 공녀들의 머리가 짧아진 게 그 평민 여자 때문이란 말이냐?”
“예. 그들 모두 그 여자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겁니다. 특히 엘시아 왕녀는 그 일의 주모자로 지목돼 황제에게 신뢰를 잃었다고 하니 더하겠지요.”
“흐음…….”
“그들을 이용해서 그 여자를 손봐줄 수 있지 않을까요?”
스킬라는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인간을 괴롭히려면 인간의 손을 빌려 행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궁리해 보면 뭔가 적당한 수가 나올 것 같았다.
“한번 생각해 보자.”
“예.”
공손하게 대답한 알리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공주의 안색을 살폈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공주님. 몸이 너무 안 좋아지셨는데 드라코니아로 돌아가서 요양하시는 게 어떨지요?”
스킬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참을 수 있어. 참아야 해. 그 여자에게 화풀이하기 전엔 절대 여길 떠나지 않을 거야.”
“공주님…….”
“그 여자를 히에무스 님에게서 떼어낼 거야. 난 아직 그분을 단념하지 않았다고.”
단념하다니, 말도 안 돼. 몸이 이렇게 된 게 억울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어. 너무나 원망스럽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았다. 직접 손을 쓰지 않으려는 것도 사실 한 가닥 희망 때문이었다. 교묘한 수법으로 그 여자를 제거하고 나서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희망. 죽일 필요도 없다. 인간들을 이용하면 죽이지 않고도 치워버릴 수 있는 좋은 수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분은 내 거야. 이 스킬라 거라고!’
다시 몸속 깊이 스며드는 한기 때문에 이가 딱딱 부딪히기 시작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절대로, 절대로 안 떠나.”
***
다음 날, 에일린은 간만에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느긋한 맘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물론 성의 주인인 케일론도 있고 브레이의 일도 도와야 하지만 그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부분이었다.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공부를 했다. 애플턴 부인은 없지만 그럭저럭 독학으로 해나가는 중이었다. 모르는 대목이 있으면 케일론이나 브레이에게 물으면 되니 혼자서도 할만 했다.
“후아암…….”
옆에 있던 아두스가 지루한지 하품을 했다. 프리기와 제퓌도 졸린 눈으로 지켜보다 소곤거렸다.
“매일 정신없이 보내다 이렇게 한가해지니 참 심심하지 않아?”
“맞아. 이제 별 구경거리도 없고. 에일린 님은 한번 책을 펼치면 두어 시간은 저러고 앉아 계시니 정말 따분해.”
“애플턴 부인도 없는데 나 같으면 그냥 신나게 놀았을 거야. 에일린 님은 공부가 좋으신 걸까?”
그 말에 에일린이 빙긋 웃었다. 공부하는 건 그리 싫지 않았다. 황제가 고아들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에 협력하라는 제안을 거절한 것도 사실 자신의 실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렉스에게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 위한 것이지만. 그 외에도 자신은 아직 누군가를 가르칠 입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상이 아이들이라 해도 말이다.
‘직접적인 교사 노릇을 하라는 뜻만은 아니겠지만…….’
고아들을 위해서는 틈나는 대로 봉사활동을 하며 지낼 예정이었다. 다가오는 휴일에도 가 볼 셈이다. 이제 시간 여유가 많아졌으니 전보다 자주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히에무스가 자신과 함께 그런 일들을 하자고 말해주었지.’
그러고 싶었다. 이왕이면 그와 함께 그런 일들을 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그를 떠올리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령들이 다시 떠들었다.
“에일린 님도 그리 좋아하시는 것 같진 않아. 자꾸 딴 생각을 하시잖아. 저렇게 혼자 웃으시는 걸 보면.”
“당연하지. 공부가 재미있을 리가 없잖아? 엉뚱한 상상이나 하는 게 더 낫지.”
에일린은 괜히 얼굴이 화끈거려 즉시 웃음을 거뒀다.
똑똑.
“에일린, 들어가도 되죠?”
“예. 그러세요.”
대답이 끝나자마자 브레이가 난감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밖에 나가보셔야겠어요. 또 황제 폐하께서 행차하셨거든요.”
“네? 휴일도 아닌데요?”
브레이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요. 이번엔 좀 단출한 규모지만요. 어서 나가봐요.”
“알겠어요.”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나······. 지난번처럼 하녀가 입던 초라한 작업복을 걸친 건 아니지만 다소 간소한 평상복 차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에일린은 그냥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황궁도 아니고 황제 역시 갑자기 온 것이니 이해해줄 것이다. 옷을 바꿔 입느라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브레이를 따라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니 벌써 1층 홀에 황제 일행이 들어서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수행 인원이 훨씬 줄어든 모습이었다. 케일론이 직접 순간이동 마법을 시행해서 이동해온 듯했다. 그와 다른 마법사인 헬무트 경, 기사단장인 엘로드와 이디오마라는 신관만 대동한 채였다. 그녀를 보자마자 렉스가 반갑게 외쳤다.
“에일린!”
“폐하, 안녕하셨어요?”
“그래. 정말 오랜만이구나.”
렉스가 파란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쭉 훑었다. 길게 흘러내리는 풍성한 머리채에 바로 눈길이 머물렀다. 그가 손을 내밀어 가볍게 한 움큼 쥐며 쓰다듬었다. 순간 에일린은 흠칫 놀라 움찔거렸다.
“정말이구나. 정령의 축복을 받았다는 게.”
“어, 예……. 그렇게 됐습니다.”
이걸 확인하려고 온 것일까? 휴일도 아닌데 이렇게 찾아오다니 많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예쁘구나.”
유난히 낮고 은근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마음에 들어, 무척.”
에일린은 어색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조심스럽게 렉스의 손아귀에 잡힌 머리채를 잡아당기자 그가 순순히 놓아줬다. 엷게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흐음, 정말 놀랍군요.”
음산할 정도로 낮게 깔린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디오마 신관이었다.
“요즘 정말 보기 드문 모습이로군요. 정령의 가호와 축복을 받는 자라니. 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기 힘들었을 겁니다.”
연신 감탄하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에일린을 뚫어지듯 응시했다. 함께 온 중년의 마법사도 한껏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너무 노골적으로 관찰당하는 듯해 불쾌해졌다. 렉스가 에일린에게 다시 싹싹한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지내느냐? 시중들 시녀 하나 없이.”
“잘 지냈습니다.”
“불편하지 않느냐? 아쉽지도 않고?”
“예. 괜찮습니다.”
“흠, 그래?”
렉스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렸는데 노여움이 담긴 것 같기도 하고 서운함이 어린 것 같기도 했다. 잠시 침묵하다 뒤에 서 있는 케일론을 불렀다.
“아스카니아 백작.”
“예, 폐하.”
“에일린과 차를 마시며 잠깐 얘기를 나누고 싶소. 자리를 좀 마련해주겠소?”
“……알겠습니다.”
케일론이 잠깐 뜸을 들이다 브레이에게 일렀다.
“브레이, 차를 준비해 내오너라.”
“예. 케일론 님.”
케일론은 이내 침묵을 지킨 채 앞장서며 일전에 황제를 영접했던 접견실로 안내했다. 에일린과 함께 방 안에 들어서자 렉스가 다른 이들에게 당부했다.
“모두 나가 있으시오.”
엘로드가 뺨을 실룩거리며 반대 의견을 내놓으려 하자 렉스가 짧게 덧붙였다.
“잠깐일 뿐이오, 캐드릭스 후작.”
그가 단념하듯 고개를 숙이더니 물러났다.
“에일린, 앞에 좀 앉지.”
“예.”
에일린이 렉스의 맞은편에 엉거주춤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브레이가 들어와 공손한 자세로 차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커다란 방 안에 에일린과 렉스, 단둘만 남았다. 엄밀히 말한다면 세 정령이 함께했지만 에일린은 왠지 외롭고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렉스와 함께 있으면 늘 이런 느낌이 밀려오는 듯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좀 의외였다. 에일린.”
“예?”
“고아들을 위한 학교를 여는 일에 협력해줄 줄 알았는데.”
“아, 그건…….”
“뭐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거지?”
렉스가 차를 한 번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부담을 느낀 것이냐?”
“그게, 전 아직 이곳 실정을 잘 모르는 데다 누굴 가르치거나 이끌 만한 실력이 못 돼서요.”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설픈 재주로 임하다 되레 폐하께 누를 끼칠 것 같아서요.”
“그렇군.”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찻잔을 기울이던 렉스가 입을 열었다.
“에일린. 나에 대한 마음은 여전히 변함없는 것이냐?”
“폐하…….”
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에일린을 향해 쏘아보듯이 시선을 고정했다.
“말해줬으면 좋겠다. 내 어느 부분이 맘에 차지 않는지.”
에일린은 너무 직설적인 질문에 당황해 얼굴을 붉혔다.
“그,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제 마음이 가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네 마음에 들 수 있는 거냐? 계속 그 이유 때문이라 할 거냐? 유일한 아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그것만큼은 렉스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걸 제외하고 다른 거라면 얼마든지 노력해서 바꿀 수 있었다. 짐짓 간절해진 눈빛으로 에일린에게 되물었다.
“그 이유 때문에?”
“죄송합니다, 폐하.”
에일린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사실 그보다도 히에무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게 더 컸지만 렉스에 대한 입장도 변함없었다.
“다른 좋은 분을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아젤란의 황후에 어울리는 그런 분을 곧…….”
“그만!”
짧은 한마디가 카랑카랑하게 울렸다. 화가 난 듯 흔들리는 새파란 눈동자를 하고서 렉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에일린은 깜짝 놀라 굳은 채 모든 행동을 멈췄다. 그가 벌떡 일어섰다. 저벅저벅 걸어 맞은편에 앉은 그녀에게로 바싹 다가와 한 팔을 의자 등받이에 올렸다. 내쉬는 숨이 맞닿을 듯 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렉스에게서 조금 쉰 목소리가 나지막이 새어나왔다.
“말했잖아, 에일린. 황후는 그냥 황후일 뿐이라고.”
그냥 적통 후계자를 낳아줄 존재. 그래, 그것뿐이다. 그 외엔 어떤 의미도 없는데 그런 것 따윌 신경 쓴단 말인가? 렉스가 조금 움직였다. 에일린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대로 그의 입술을 정수리 위로 가져가 한차례 입을 맞췄다. 에일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째서 이렇게 힘든 것이냐? 그대는.”
왜 자신의 마음과 같지 않은 것인가? 어째서 그런 건가? 도대체 왜? 느릿하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바라보았다. 자꾸만 애타게 하는 그대. 그냥 힘으로 가질 수도 있었겠지. 몇 번이고 그런 욕망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래선 아무 의미가 없기에 이렇게 계속 인내하며 지켜봤던 건데.
“네게는 이런 내 행동이 아무런 의미가 없단 말이냐?”
렉스는 그의 아버지와는 다른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저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그런 인간과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소중하게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그런 사랑을 꿈꿨다.
“폐……하.”
커다란 연초록 눈에 어리는 두려운 빛이 보였다. 렉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뗐다. 잠시 그녀에게 흔들리는 눈길을 보내다 이내 몸을 일으켰다.
“가보겠다.”
포기한 건 아니다. 끝까지 해 볼 것이다. 전쟁도, 사랑도 끝날 때까진 모르는 것이지. 렉스는 에일린을 뒤로 한 채 접견실을 나갔다.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크게 메아리쳤다. 남겨진 에일린은 주먹을 꼭 쥐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계속 곁을 지키던 세 정령이 날아와 말을 건넸다.
“괜찮으세요? 에일린 님.”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몸을 가늘게 떨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잠시 동안은 그대로 앉아있어야 했다. 스산한 느낌과 함께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눈을 감으며 한껏 잦아든 목소리로 말했다.
“제퓌.”
“예, 에일린 님.”
작은 정령이 즉시 응답했다.
“나…… 그가 보고 싶어요.”
“예? 누구를요?”
“히에무스요.”
정말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