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저주를 무효화 하는 방법
스킬라가 그의 차가운 위협에도 별로 주눅 들지 않은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그런 짓을 했다가 곤란해지는 건 당신일걸요? 앞으로도 인간 세상에서 제대로 된 인간 귀족 노릇을 하시려면 저와 우리 드라코니아 왕국의 힘이 필요할 텐데, 그렇지 않나요?”
“당연히 그 무엇도 필요 없어. 에일린을 다치게 한다면!”
“……!”
스킬라의 붉은 눈이 흔들렸다.
“설마…… 인간 노릇을 하는 것도 그 여자 때문인가요?”
“그래. 그러니 어서 저주를 해제해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스킬라가 두 눈을 있는 대로 치뜨고 그들을 바라봤다. 히에무스의 분노에 찬 냉정한 푸른 눈을 응시하다 그의 두 팔에 안겨있는 에일린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수 초간 둘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입술을 위로 비틀며 중얼거렸다.
“그냥은 안 돼요.”
“뭐라고?”
“그냥은 안 되겠어요.”
히에무스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그럼 뭘 원한다는 거냐?”
“제게 한 가지 약속해주면 저주를 해제해줄게요. 그럼 이후 다시는 그녀를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무슨 약속을 하라는 거냐?”
기묘하게 비틀린 미소가 더욱 커졌다.
“그녀를 버리고 내 연인이 되겠다고 약속해줘요.”
“거절한다.”
히에무스가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정말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
“불가능한 요구다. 에일린 외엔 그 누구도 내 연인이 될 수 없어.”
그녀가 몇 걸음 그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공주님!”
시녀 알리샤가 경악한 얼굴로 다가가 행동을 저지하려 하자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그를 똑바로 응시한 채 애원하듯 말했다.
“어차피 저 여잔 인간이에요, 히에무스 님.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이라고요. 그나마 저런 젊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더러운 뭔가를 바라보듯 경멸하는 시선으로 에일린을 향했다.
“곧 늙어서 주름이 쭈글쭈글한 노파로 변해버릴 거예요. 눈 깜짝할 새 그렇게 돼버릴 거라고요. 인간 같은 존재는 당신과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함께할 수도 없어요!”
귓가에 속삭이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득했다.
“저라면 오랜 세월 변함없는 모습으로 당신 곁에 있어 드릴 수 있어요. 변함없는 모습과 변함없는 마음을 지닌 채로.”
“…….”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당신도 겪어보셨을 텐데요? 변덕스러운 인간들 생태를.”
히에무스가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상관없다.”
스킬라가 입을 벌린 채 발간 눈을 부릅뜨고 따졌다.
“어째서 상관없다는 건가요? 곧 늙어 죽어버리고 말 텐데! 거기다 항상 변덕을 부리며 힘들게 할 거예요.”
순간 에일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항상 고민해왔던 문제인데 그걸 거론하고 있다. 느슨하게 잡았던 히에무스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왠지 손에 땀이 차는 것 같았다. 담담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그의 음성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정령왕인 내가 그런 걸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 모든 것도 아무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나?”
“100년도 함께 하지 못할 텐데 그걸로 만족하겠다는 건가요? 그중 반은 추한 모습일 텐데! 경박하기 짝이 없는 변덕스러움은 또 어쩔 거죠?”
스킬라가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그 100년을 1000년처럼 여기며 살 것이다. 하루하루를 영원처럼 소중히 기억하면서.”
히에무스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인간의 변덕 또한 마찬가지야. 인간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유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니 변덕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지. 당연히 이해할 수 있어.”
“뭐라고요?”
“이해할 수밖에 없지. 인간을 사랑한다면 그 고유한 속성도 사랑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어서 저주나 거둬들여라!”
“그런……!”
에일린은 아까보다 더 크게 심장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번엔 고통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그의 대답에 감동해 버렸다. 하지만 그 느낌에 빠져 있을 새도 없이 흑룡 공주의 입에서 무심한 응답이 들려왔다.
“싫어요.”
“뭐?”
“싫다고요.”
“너!”
“호호호…….”
스킬라가 콧잔등을 찡그린 채 입을 크게 벌리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어쩌면 웃는 게 아니라 울고 있거나 절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정확하게는 창밖에 보이는 밤하늘 쪽을 향해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고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녀가 다시 다급하게 외쳤다.
“공주님!”
“용의 성좌에 맹세하건대.”
“……!”
“히에무스 님이 나 스킬라의 연인이 되기 전엔 절대로 저 여자에게 내린 저주를 거두지 않겠다!”
분노로 얼어붙은 히에무스의 눈동자에서 은푸른 불꽃이 튀어 올랐다.
“감히!”
그가 날카로운 한마디 말과 함께 천천히 에일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스킬라를 향해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손을 휘둘렀다.
“꺄아악!”
그녀와 시녀인 알리샤가 동시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회오리바람이 생겨나더니 순식간에 스킬라를 휘감기 시작했다.
“공주님!”
눈 깜작할 새 머리를 제외한 그녀의 몸이 새하얀 얼음 속에 갇혀버렸다.
***
“도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렌투스가 새파래진 얼굴을 한 채 루카스와 함께 뛰어 들어왔다. 그가 스킬라 공주를 바라보다 이어 히에무스의 눈치를 살폈다. 얼음에 갇혀버린 스킬라 공주와 그 옆에서 경악한 얼굴로 허둥대는 여동생 알리샤의 모습을 확인하곤 눈에 당혹감과 함께 분노의 빛을 담았다.
“무슨 상황인 겁니까? 히에무스 님! 왜 그녀를 공격한 겁니까?”
“저 흑룡 여자가 먼저 시작했다.”
“예?”
“에일린의 눈에 용의 저주를 내렸단 말이다!”
“……!”
그제야 에일린에게 눈길을 주어 확인했다.
“에일린! 괜찮아요? 에일린?”
루카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눈 쪽을 매만졌다.
“앞이 보이지 않아요…….”
“예에?”
렌투스의 표정에 비쳤던 분노의 빛이 즉시 순수한 당혹감과 염려의 빛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저주를 거두게 하시면 됐을 터…….”
“저 여자가 용의 성좌에 대고 맹세했다!”
“옛! 뭐라고요?”
“내가 그녀의 연인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저주를 풀지 않겠다고.”
“설마, 그런.”
그가 즉시 스킬라와 알리샤를 돌아봤다. 스킬라는 몸이 얼음 속에 갇히긴 했지만 머리 부분은 아직 무사했다. 하지만 입을 꾹 다문 채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시녀인 여동생이 붉게 변한 얼굴로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알리샤,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이런…….”
잠자코 듣고 있던 에일린이 히에무스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지금 상황이 너무나 두렵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히에무스. 저는 어떻게 된 거죠?”
설마 이대로 영영 앞을 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에일린.”
“말을, 말을 해줘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부들부들 온몸이 다시 떨려왔다.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었지만 낙관할만한 상황이 아닌 건 분명했다. 그가 다시 그녀를 끌어당겨 꽉 안아주었다.
“걱정하지 마라, 에일린. 방법이 있으니까.”
상냥한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썼다.
“히에무스…….”
“푸훗!”
스킬라가 그제야 짧은 비웃음 소리를 냈다.
“그래, 방법이 있긴 있지. 히에무스 님이 내 연인이 되면 그만이니까.”
“닥쳐라!”
히에무스가 스킬라에게 서슬 퍼런 목소리로 경고했다.
“더 이상 도발한다면 정말 참지 않을 것이다. 그 머리까지 얼어붙고 싶지 않으면 입을 다물어라!”
“…….”
그의 뒤쪽에서 갑자기 앙칼진 목소리가 울렸다.
“에일린을 보여줘요.”
루카스가 어느새 일각수로 변신해 긴 외뿔을 들이댔다. 히에무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짓이냐? 애송이.”
“내 뿔엔 높은 치유력과 정화 능력이 깃들어 있어요. 제가 에일린을 낫게 할 수 있을 거예요!”
“어, 정말이에요? 루카스!”
에일린이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렌투스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소용없을 겁니다, 루카스.”
루카스가 화난 표정으로 쏘아봤다.
“아시겠지만 마법이나 저주는 그 주문을 건 당사자가 아니면 거의 해제할 수 없습니다. 상대의 위력이 크면 클수록 불가능에 가깝죠. 우리 용들은 자연계에서 정령 다음으로 강한 힘을 가진 존재입니다. 거기에…….”
렌투스의 낮은 음성이 더욱 잦아들었다.
“용의 성좌에 대고 맹세를 했다면…… 제가 아는 한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히에무스 님이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시지 않는 한.”
“……!”
루카스가 거칠게 투레질을 하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길고 새하얀 갈기가 이리저리 물결쳤다.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야!”
그리고 그의 보석처럼 빛나는 기다란 뿔을 에일린의 눈에 닿을 듯 가까이 내밀었다. 그의 뿔에서 비롯된 오색찬란한 빛이 그녀의 눈꺼풀 위로 전해졌다. 한동안 그 과정을 진행하다 빛이 차차 흐려지자 숙였던 머리를 느리게 곧추세웠다.
“어……때? 에일린.”
***
에일린은 침을 꿀꺽 삼킨 후 눈을 깜빡거렸다. 조금 기대했지만 역시 렌투스의 말대로 아무 변화 없이 통증만 줄어들어 시원해진 느낌뿐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젓자 루카스가 울상을 지었다. 말을 닮은 일각수의 모습이었지만 표정을 가늠할 수 있었다. 히에무스가 입을 꾹 다문 채 에일린을 아까처럼 위로 안아 들었다. 그리고 렌투스에게 명령했다.
“내 방에 가 있을 테니 이곳에 온 정령왕들을 불러다오.”
“알겠습니다.”
렌투스가 여전히 난처함과 당혹감이 가득한 눈으로 스킬라를 힐끔 바라봤다. 짧은 한숨을 내쉬곤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어 히에무스가 그녀를 향해 차갑게 한마디 내뱉었다.
“흑룡. 네 이후 처분은 에일린을 낫게 한 뒤 다시 생각해 보겠다.”
스킬라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제 이름은 ‘스킬라’예요, 히에무스 님.”
머리를 제외한 몸 전체가 얼어붙은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스킬라라고요!”
히에무스의 얼어붙은 호수처럼 번득이는 은청색 눈동자엔 조금의 온기도,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한없이 무심하고 차가울 뿐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단 한 번도 제 이름을 불러주시지 않는 거죠? 그 인간 여자에게 지어줬던 그런 미소도 보여주시지 않고.”
떨리던 목소리가 조금 젖은 채 높아졌다. 그녀 딴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리라.
“당신……, 당신에겐 전 그저 흑룡일 뿐인가요?”
“그래. 그 외에 뭐란 말인가? 아니, 그냥 흑룡은 아니군. 정신 나간 황당한 흑룡이지.”
“그런…….”
경멸 외에 그 어떤 것도 담지 않은 서늘하고 메마른 어조로 그가 말을 계속했다.
“약속한 역할 외에 내게 다른 감정이나 다른 역할을 원한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아. 아니, 아예 서로 마주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겠군.”
“…….”
“또다시 에일린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땐 정말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어리석은 흑룡 여자.”
히에무스가 문밖으로 나가기 위해 그대로 몸을 돌렸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를 향해 스킬라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리석은 건 당신이야! 인간 따위를 사겨 뭘 어쩔 거죠? 거기 서요! 용족 공주인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후회할 거야!”
그가 몇 걸음 걷다 그대로 순간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으아, 저도 같이 가요!”
루카스가 허겁지겁 남아있는 마법진의 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두스도 축 늘어진 그의 동료들을 데리고 뒤를 따랐다. 그가 남긴 빛의 잔상에 대고 스킬라가 외쳤다.
“후회할 거라고!”
“…….”
“후회하게 해줄 거야!”
***
한편 파티가 열리는 하레나 성의 연회장에선 파티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웬일인지 이 파티를 연 성주인 라케르타 공작은 자리에 없었다. 대신 다른 주최자인 파인스 백작이 분위기를 잘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백작은 이런 행사를 여는 게 익숙한지 손님을 맞이하거나 행사를 진행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능숙한 기량을 뽐내는 중이었다. 아르겐 궁에서 나온 공녀들을 포함한 아젤란측 손님들은 물론 루쿨루스 숲에서 온 정령들까지 다들 흡족해하며 파티 분위기를 즐겼다. 흥겨운 무도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춤을 추는 남녀 귀족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홀 가장자리에 유난히 많이 준비된 소파와 테이블 위에 먹음직스러운 각종 음료와 다과가 차려져 있었다. 파트너 없이 온 이들도 많은데다 수행한 시녀들도 그곳에 대기하도록 한 터라 그 공간도 활기가 넘쳤다.
“이 술, 뭐죠? 이런 건 처음 마셔보는데.”
레나테 공주가 함께 있던 에밀리아 공주에게 물었다.
“저도 이렇게 질 좋은 술은 처음이에요. 어쩜 이리 맛이 좋을까요? 하루 종일이라도 마실 수 있겠어요.”
“그죠? 드라코니아 특산품인가 봐요.”
그들 외에도 아젤란 측에서 참석한 손님들은 처음 접해 보는 술맛과 겨울에 접하기 힘든 각종 신선한 과일, 꽃장식 등에 모두 찬사해마지 않았다. 파티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지금껏 참석했던 그 어떤 파티보다도 훌륭한 수준에 만족스러워했다. 레나테 공주가 에밀리아 공주와 함께 엘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오늘따라 우울한 얼굴로 구석 소파에 앉아 포도주만 들이키는 광경을 보고 좀 골려줄 생각이었다.
“어머, 오늘은 주위가 한산하네요? 엘시아 공주님. 그 많던 추종자들이 다 어디 간 거죠?”
엘시아가 흘깃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파트너를 대동하지 않는 파티잖아요? 게다가 오늘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다가온 공자님들을 거절했어요.”
“호호, 그래요? 난 또 이제 안드로스 제일 미녀의 위세도 한물갔다고 여겼지 뭐에요.”
“설마요, 대륙 ‘제일’이라는 순위가 쉽게 바뀌지는 않죠.”
엘시아가 상체를 단단히 펴며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 둘을 압도하는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나자 둘은 금방 주눅이 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엘시아에게 말을 건넸다.
“공주님! 여기서 뵙게 되다니.”
고개를 들어보니 늙은 바니스터 공작이었다. 그가 얇게 주름진 입을 벌리며 웃었다. 듬성듬성 빠진 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엘시아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느릿느릿 일어나 예를 갖췄다.
“바니스터 공작님.”
“일전에 약속하신 춤을 지금 추시면 어떻겠습니까?”
“…….”
엘시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 억지 미소를 연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한두 곡 정도 상대하고 떼어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옆에서 잘난체하는 두 공녀를 상대하는 일도 짜증 나니까.
“그러죠.”
두 사람이 홀 중앙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레나테와 에밀리아 공주가 쑥덕거렸다.
“대륙 제일의 미녀도 결국은 늙은이 상대밖에 못 하는군요.”
“대륙 제일 미녀지만 대륙 제일의 가난뱅이 나라 공주잖아요. 별수 있나요?”
“호호호……, 하긴 저 드레스며 보석이며 너무 눈에 익어서 제가 다 싫증 날 지경이에요.”
아직 그들과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엘시아의 귀에 대화 내용이 다 전해졌다. 분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자, 우린 저쪽에 있는 드라코니아 귀족에게 가 봐요. 가서 춤도 추고 이야기도 나누자고요. 드라코니아 귀족들은 어쩜 저렇게 하나같이 멋지고 아름다울까요?”
“그죠? 행색도 얼마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지 몰라요. 다른 나라 귀족들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느낌이랄까요?”
“가서 우리도 친해지자고요.”
“그래요. 뭐, 모르잖아요? 아젤란의 황후가 못될 바엔 차라리 드라코니아 귀족의 아내가 되는 것도 고려해 봐야죠.”
“어쩌면 그게 나을 수도 있어요.”
“호호, 맞아요. 꾸물거리다간 늙은 귀족에게 시집가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두 공녀가 서둘러 드라코니아 귀족들이 모인 곳으로 향하던 순간이었다.
“어라?”
갑자기 무슨 급한 일이 생겼는지 그들이 어디론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한발 늦어버렸다. “드라코니아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그러게요. 거물처럼 보이는 귀족들만 한꺼번에 빠져나가다니.”
눈에 차지 않는 다른 공자들을 상대하느니 그냥 포도주나 마시며 그들이 다시 오길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레나테가 한쪽에 위치한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냥 저기 앉아서 마시던 술이나 마저 들까요?”
“그래요. 그게 좋겠네요.”
***
렌투스의 기별을 받고 브로미오스와 대지의 왕인 텔루스, 그리고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가 서둘러 히에무스의 방이 있는 이층 계단을 올라갔다. 물의 정령인 엘레스트라와 나무의 정령인 아그로스도 뒤를 따르는 중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자 문밖에 있던 루카스가 급히 방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겨울의 궁전 안에 있는 히에무스의 방과 비슷한 느낌으로 꾸민 단정한 방 풍경이 나타났다. 얇은 비단 휘장이 처진 침대 위에 에일린이 앉아 있고 그 앞에 히에무스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나란히 자리한 상태였다.
“무슨 일이지? 히에무스.”
브로미오스가 틈을 주지 않고 정색한 얼굴로 물었다. 둘의 굳은 표정을 보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일이 생겼어.”
“일이라니?”
히에무스가 자초지종을 재빠르게 설명했다. 모든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방 안의 정적이 꽤 오래 지속되니 에일린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다시금 몸이 떨려왔다. 이렇게 많은 정령왕들이 모여 있는데도 방법이 없는 것일까? 그냥 이대로 장님이 되고 마는 건가?
“어렵군.”
한참 만에 에스타스의 입에서 짧은 한 문장이 나왔다.
“용의 성좌에 대고 맹세한 건 용들의 맹세 중 가장 크고 무거운 약속이지. 그 맹세를 지키지 않으면 죽어서 별로 남지 못하게 되는 거니 그만큼 구속력도 강해.”
그녀가 안타까운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지간한 힘으론 어찌할 수 없어. 설령 정령왕의 힘이라 해도 깨기 어려워.”
“정말…… 방법이 없나요?”
에일린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멀찍이 듣고 있던 루카스가 불쑥 참견하듯 말했다.
“왜 방법이 없어요? 그냥 히에무스 님이 그 흑룡 여자의 연인이 되면 되잖아요?”
“그건 안 돼!”
히에무스가 낮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맞받아쳤다.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해. 다들 뭔가 생각나는 게 없는가?”
“으음…….”
둔탁한 신음소리가 한쪽에서 들려왔다. 텔루스가 이마를 잔뜩 일그러뜨린 채 자신의 턱을 살살 문질렀다.
“뭔가 의견이 있는가? 텔루스여.”
브로미오스가 예리한 시선을 빛내며 그의 의중을 살폈다. 텔루스는 여기 있는 정령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정령이었다. 대자연 어머니께서 제일 먼저 낳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해.”
“정말인가?”
히에무스가 얼굴을 바짝 들고 물었다. 텔루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금갈색 레게머리가 나무에 매달린 가지처럼 주렁주렁 춤을 추듯 흔들렸다.
“그게 뭔가? 어서 말해 보게!”
히에무스가 벌떡 일어나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고 다급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텔루스가 오묘하게 빛나는 토파즈 같은 눈빛으로 둘러싼 이들을 휙 훑었다.
“생각해 봐라. 저주를 해제하는 여러 방법을. 세 가지가 있지. 첫 번째는 용의 맹세대로 이행하는 것이다. 히에무스가 그 흑룡의 연인이 되는 방법이지.”
“그건 안 된다고 했잖아!”
“그럼 두 가지가 남는다. 두 번째는 저주를 건 당사자를 죽이는 방법. 즉 그 용을 죽이면 저주도 풀리게 된다. 진짜 정령왕의 힘을 쓰면 못할 것도 없겠지.”
“…….”
“물론 상당한 후유증을 감내해야 할 테지만.”
에일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얼른 말했다.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히에무스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용을 죽일 순 있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온갖 골치 아픈 일들이 뒤따를 것이다. 대자연 어머니께 몇백 년, 혹은 몇천 년을 갇혀 지내게 되는 벌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용들의 보복이나 반발도 무시 못 할 테고. 그건 에일린과 함께 살고자 하는 그의 계획에도 차질을 줄 뿐이다. 텔루스가 속히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럼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그 저주의 힘을 원천적으로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원천적으로 무효화시키는 거라면…….”
“용의 성좌에 대고 한 맹세를 무효화하는 건 그 별의 힘을 다루는 존재만 가능하지. 바로 대자연 어머니 말이야.”
“뭐?”
“대자연 어머니께 가서 저주를 무효화 해달라고 부탁해 보는 거야.”
“대자연 어머니께 부탁한다니, 그럼 에일린이 빛의 궁전에 가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지.”
“거기까지 어떻게 가란 말인가? 그분이 소환하지 않는 이상 스스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는데?”
“가게 된다면 당연히 정령왕이 시행하는 순간이동 마법을 이용해야 하겠지.”
여전히 텔루스의 어깨를 잡고 있던 히에무스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화가 난 듯 거친 몸짓이었다.
“그걸 마법사도 아닌 보통 인간의 몸으로 견디란 말인가? 그 먼 거리를 순간이동 마법으로 이동하려면 상당한 무리가 갈 거야.”
“천천히 행하는 수밖에. 우린 반나절이면 충분하겠지만 인간을 데려가려면 며칠 걸릴 각오를 해야겠지.”
에스타스가 천천히 팔짱을 꼈다.
“내가 생각해도 그 방법밖엔 없을 것 같군. 다소 힘들긴 하겠지만.”
브로미오스 역시 동의하는 듯 고개를 한 번 까딱거리더니 에일린을 바라보았다. 히에무스 혼자 그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인상을 썼다. 에일린이 주먹을 한 번 꼭 쥔 채 입을 열었다.
“갈게요.”
방 안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제가 대자연 어머니를 찾아가 볼게요.”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
야심한 시각까지 지속되던 파티가 끝났다. 파티장에 있던 손님들이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각자가 떠나왔던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모두의 얼굴에 하나같이 만족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엘시아를 비롯한 공녀들도 돌아가고 마지막으로 남은 건 에일린이 타고 온 마차였다. 애플턴 부인이 조금 벌게진 얼굴로 마차 앞에서 서성이는 중이었다. 라케르타 성의 하인이 에일린은 좀 있다 나올 테니 먼저 가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터였다. 애플턴 부인도 오늘 파티에서 제공된 술을 마신데다 거기 참석한 다른 귀족들과 담소도 나누고 춤도 추는 등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 정말 좋은 시간이었어.”
한껏 고조된 기분에 젖어 다른 때보다도 느긋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마침내 저 멀리 에일린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보다 걸음걸이가 좀 거침없어 보였다. 숙녀의 몸가짐을 깜빡 잊은 것인가? 가까이 다가와 자신을 보자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어서 오세요, 루쿨루스 영애. 늦으셨네요.”
“공작 저하와 얘기를 나누느라 좀 늦었어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어서 마차에 오르세요.”
마부가 문을 열어주자 에일린이 양손으로 마차 벽을 잡고 혼자 힘으로 슥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애플턴 부인이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영애도 좀 취하셨나 보군요. 예절을 지키지 않다니 주의해야죠.”
그녀 자신도 취했으니 크게 나무랄 순 없었다. 에일린에게서 별 대답이 없자 애플턴 부인도 서둘러 마차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부가 문을 닫아주자마자 금방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어찌 된 일인지 요즘은 마차만 타면 졸리는 것 같았다. 자신도 이제 늙은 것일까.
“아함……, 왜 이렇게 졸리지.”
아마도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겠지. 정말 달콤하고 부드러운 포도주였어. 그걸 마시니 몸이 두둥실 떠다니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지. 황실에서도 그런 술은 구경한 적이 없는데 드라코니아는 술마저도 참 특별한 모양이야.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더 이상 감겨오는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하자 아두스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이참, 루카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마차를 타실 땐 꼭 수행인의 도움을 받아서 오르내리셔야 한다고요.”
에일린으로 변신한 루카스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팔짱을 꼈다.
“쳇, 이깟 마차 하나 오르는데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거냐?”
“물론이죠. 인간들은 그래야 한다고요. 쓸데없는 걸 지키지 않으면 혼난다고요. 그리고 에일린 님이 아닌 걸 들킬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아두스에 이어 제퓌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충고했다.
“맞아요. 특히 사악한 마법사는 더 조심해야 해요. 눈치도 빠르고 다른 인간들처럼 잠에 빠져들게 하기도 힘들거든요.”
에일린으로 변신한 루카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조심할게.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지켜야 할 일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줘. 최선을 다해 볼 테니.”
에일린이 간곡하게 부탁했으니 잘 들어주고 싶었다. 그녀가 없는 동안 모든 노력을 다해 그녀 역할을 대신할 생각이었다. 대지의 정령왕의 마법으로 변신한데다 마나의 흐름을 숨길 수 있는 팔찌로 된 마도구까지 찼다. 자신만 주의해서 행동한다면 당분간은 들킬 염려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에일린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아두스가 분주히 머리를 굴리며 이것저것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가 놓친 게 있으면 제퓌와 프리기가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 마법사만 조심한다면 다른 건 잘 넘어갈 수 있을 거예요. 여차하면 잠에 빠져들게 하거나 기억을 희미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응.”
루카스가 주의 깊게 경청했다. 이런 일은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하레나 성에서 지내는 게 싫증 나던 차였는데 잘됐다. 인간 세상에 나오니 정말 재미있는 일이 많은 것 같았다. 그가 태어나 자란 200년간 있었던 일보다 요즘 겪게 되는 새로운 일들이 더 많은 듯했다. 불끈 의욕이 샘솟았다.
***
에일린은 그녀로 변신한 루카스에게 옷이랑 신발 등, 자신이 지녔던 것들을 넘겨주고 자신은 렌투스가 준비해준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에게 몇 가지 당부할 사항을 알려주는 등 분주한 시간을 보내다 배웅했다. 여러모로 걱정스럽고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인간처럼 되게 해주는 마법약의 효과가 떨어지자 정령들의 몸에 다시 빛이 스며들었다. 백룡인 렌투스가 에일린에게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과 음식을 챙겨줬다. 그 후 일행들은 루쿨루스 숲에 잠시 들러 서둘러 각자의 일들을 처리한 후 곧바로 에일린을 데리고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함께 가는 이는 히에무스와 에스타스, 그리고 대지의 정령왕 텔루스였다. 가을의 왕 브로미오스는 하레나 성에 남아 인간 귀족으로서의 일을 수행하기로 했다.
“에일린, 몸은 좀 어떠냐?”
순간 이동 마법을 두어 차례 시행한 뒤 히에무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에일린은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정령왕들이 본격적으로 행하는 순간 이동 마법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속도감이나 몸에 전해지는 충격이 상당했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거기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더 갑갑하고 어지러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꾹 참고 대답했다. 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이 느껴지면 즉시 말해 다오.”
“예, 그럴게요.”
에스타스가 다가와 뭔가를 내밀었다.
“이걸 좀 마셔라, 에일린.”
“뭐죠? 물인가요?”
“그래. 안색이 창백하구나. 잠시 쉬다 가는 게 좋겠어.”
“아니에요. 괜찮으니까 이것만 마시고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시야가 차단되니 초조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어서 이 막막한 느낌에서 헤어 나오고 싶었다. 에스타스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래. 조금만 더 쉬고 가도록 하자. 혹 몸이 불편하면 즉시 알려야 한다. 정령들의 순간 이동 마법을 오래 견디는 게 많이 버거울 거야. 힘들면 치유 마법을 시행해줄 테니 바로 알려다오.”
“감사합니다.”
서늘한 한기를 품은 손이 다가오더니 그녀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말하지 않아도 히에무스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다정하게 건네는 말과 조심스러운 행동에서 그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정말 괜찮은 거냐? 에일린. 좀 더 쉬는 게 좋지 않을까?”
에일린이 다소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견딜 수 있는 한 조금이라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할 수 없이 그가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두어 차례 긴 구간을 재빠르게 이동했다.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걸 넘어 깨질 것처럼 지끈지끈 아파왔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통증이 생기고 속도 울렁거려 토할 것만 같았다.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혼절하고 말았다. 그래도 끝까지 이동을 멈추라는 말만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상쾌한 손길이 이마에 살며시 와 닿는 감촉이 느껴져 깨어났다. 저도 모르게 목구멍에서 메마른 신음소리가 올라왔다.
“으음…….”
“에일린, 정신이 드느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래봤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왠지 서러움이 밀려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누군가의 손이 다가와 부드럽게 닦아주는 행동이 느껴졌다.
“히에무스.”
“그래, 에일린. 많이…… 힘들었구나.”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평소처럼 담담한 어조였지만 조금 떨리는 낮은 음성이 들렸다.
“미안하다, 에일린. 네가 혼절할 정도로 힘든 걸 알아차리지 못했구나. 네게 이런 고초를 겪게 하다니. 모든 게 내 탓이로구나.”
“아니에요, 히에무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의 탓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저런 기막힌 일이야 늘 일어나는 법이니 그의 탓이 아니다. 아니, 그가 너무나 아름답고 잘난 탓인가? 그가 너무 뛰어나 탐내는 이들이 많은 탓에. 아니, 아니야.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다. 굳이 잘못한 이를 따지려면 그 흑룡 공주 탓이지. 그녀의 잘못된 사랑 탓에.
“에일린, 몸에 무리가 가면 지체 없이 알리라고 했는데 왜 말하지 않은 거냐?”
에스타스가 날카로운 어조로 책망했다.
“죄송해요.”
히에무스가 그녀에게 주의를 줬다.
“에일린을 나무라지 마라. 다급한 마음에, 딴에는 일행들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어서 한 행동이니까.”
에스타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에일린.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런 때일수록 냉철하고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단다. 인간의 육체가 견딜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가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어.”
“아…….”
“마나를 지니지 않으면 더욱 버티기 힘들어. 마법이 시행되는 동안 마나 대신 네 생명력을 갉아먹게 될 거야. 한꺼번에 소진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어.”
“……!”
“우리 정령들은 인간의 몸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너 스스로 알려줘야 해.”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녀 스스로에게도 위험한 행동이지만 정령들에게도 쓸데없는 부담감을 안겨준 것 같아 미안했다.
“알겠어요. 주의할게요. 이제부턴 조금이라도 몸이 이상해지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그래. 꼭 그래야 해.”
에스타스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예.”
“오늘은 이만 이동을 멈추고 이곳에서 쉬고 가기로 했단다.”
에일린은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누운 채로 주위를 한번 훑었다. 아늑한 분위기에 공기도 온화한 것이 야외인 것 같지 않았다.
“여긴 어디죠?”
에스타스 대신 히에무스가 대답했다. 그녀의 바로 위에서 음성이 들리는 걸 보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운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얼굴에 홍조가 짙게 번졌다.
“텔루스가 솜씨를 부려 흙으로 된 집을 한 채 지었단다. 정령들은 집이 없어도 상관없지만 네게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지.”
“아, 그렇구나.”
금방 집을 한 채 뚝딱 짓다니 참 편리한 힘이구나.
“내가 온기를 불어넣어 줄 테니 일단 한숨 푹 자도록 해. 음식도 여기 놔둘게. 히에무스의 성에 있던 렌투스란 백룡이 챙겨준 음식을 잔뜩 가져왔으니까. 네가 좋아하는 따뜻한 국물 요리도 있단다.”
에스타스가 지난번 에일린이 요리하던 일을 떠올리곤 웃음을 살짝 머금으며 말했다.
“어, 감사합니다.”
그녀가 히에무스에게 물었다.
“어찌할까? 히에무스. 내가 에일린 곁에 붙어서 간호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대는 인간을 제대로 돌보지 못할 텐데? 체온도 너무 낮고 말이야.”
“무슨 소리. 내가 알아서 잘할 수 있어. 체온은…… 마법약을 먹으면 상관없어. 그만 참견하고 넌 나가보도록 해.”
“흠, 맘대로 해라.”
후끈한 열기와 함께 그녀의 기척이 사라졌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별다른 가구 없이 휑한 방 안에 히에무스와 에일린, 단둘만 남겨졌다. 방 안에도 적당한 온기가 유지되게 한 모양인지 방 온도는 충분히 따스한 상태였다. 바닥이 딱딱하진 않았다. 밑에서 느껴지는 감촉으로 추정해 보니 마른 풀을 두껍게 깔아놓은 것 같았다. 풀 더미 위에 모포를 덮어서 만든 침대랄까. 히에무스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마도 인간의 몸 상태와 비슷하게 만들어주는 마법약을 삼키는 것 같았다. 즉시 그의 몸에 감돌던 찬 기운이 사라졌다.
“뭘 좀 먹지 않겠느냐? 에일린.”
“조금만 더 쉬다 먹을래요.”
“졸린 거냐?”
“조금요.”
“그래. 일단 한숨 자고 일어나도록 하자.”
뭘까? 꼭 함께 잔다는 뜻처럼 들린다. 하긴 이런 곳에서 홀로 누워있긴 싫었다.
“그럴게요.”
그녀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 위치를 옮겼다. 한쪽 팔을 벤 채 그의 품에 안기듯 누운 모양새였다. 그가 상냥하게 이불을 끌어다 꽁꽁 여며주었다. 에일린은 부끄러움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내 그 품이 주는 안락하고 평온한 느낌이 좋아 얌전히 안긴 채 눈을 감았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바로 맞닿은 그의 가슴에서 쿵쿵거리는 힘찬 심장 박동이 들렸다. 커다란 북이 기세 좋게 울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콩. 콩. 콩.
곧이어 작은 북이 뒤따라 장단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녀 자신에게서 나는 심장 고동 소리였다. 듣고 있으니 깊은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저 멀리 어느 바닷가에서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더없이 편안하고 황홀한 화음에 취하듯이 빠져들었다. 참 이상했다. 이제는 그와 함께 있는 게 세상에서 가장 편한 기분이 든다. 이 차갑고 냉정하고 무심한, 그녀와는 한없이 멀고도 이질적인 존재인 정령왕이 말이다. 지금 자신이 처한 암담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늘 밤이 왠지 가장 행복한 날인 것만 같았다. 이 기이한 책 속 세상에 들어와서 아니, 전세의 삶을 모두 합해서 가늠해도 오늘이 가장 행복한 시간 같았다. 그녀가 잠들자 그가 이마에 상냥하게 입을 맞췄다. 에일린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머물렀다.
한참 자고 일어나니 가까이 밀착한 그의 몸에서 한기가 올라왔다. 그새 마법약의 효과가 떨어진 것이다. 네 시간 넘게 수면을 취한 것 같았다. 그녀가 깨어나자 히에무스도 금방 일어나 물었다.
“깼느냐? 음식을 좀 먹겠느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바로 움직였다. 그녀를 부축해 앉게 한 후 어디선가 가져온 따뜻한 수프를 떠먹여 주기 시작했다. 에일린은 왠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저 혼자 먹을 수 있어요. 눈이 안 보일 뿐이지 손은 멀쩡하니까요.”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하게 해줘.”
“히에무스.”
“하게 해줘. 그래야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니까 그래.”
“…….”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로 아기 새 마냥 입을 벌리며 그가 주는 음식을 넙죽 받아먹는 수밖에 없었다. 쑥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에일린과 달리 히에무스는 난생처음 하는 간호에 신이 나 있었다.
***
계속 휴식과 이동을 반복했다. 에일린의 체력이 그리 강하지 못했기에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별로 길지 않았다. 비교적 부담을 덜 수 있도록 이동 거리를 짧게 해서 진행하고 틈날 때마다 히에무스나 에스타스가 치유 마법을 시행해 회복하게 해주었다. 그런데도 에일린이 지닌 마나의 양이 거의 없어 체력이 쉽게 바닥났다. 당연히 휴식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젤란을 떠나온 지 만 이틀 정도 지났을 때쯤 어느 숲에서 잠시 머물기로 했다. 꽤 많이 떨어진 곳인지 날씨가 바뀐 게 느껴졌다. 겨울이 아닌 듯했다.
“이곳은 겨울이 아닌가요?”
“그래. 여긴 계절의 정령왕들이 다스리는 곳이 아니다. 대자연 어머니께서 직접 관리하시는 영역이지.”
히에무스가 에일린에게 음식을 챙겨주며 말했다.
“그럼 이제 빛의 궁전이 멀지 않은 건가요?”
“음. 이 속도로 이동한다면 내일 저녁쯤엔 당도하겠지.”
곧 대자연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됐다. 소설 속에서도 그녀에 대한 묘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안드로스 대륙의 유일한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아벨라’라는 이름만 언급돼 있을 뿐. 애초에 ‘장미의 기사 엘시아’란 소설 속에서 히에무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 않으니 그 주변에 대한 것도 몇몇 정령들에 대한 것 위주였다. 진한 호기심이 일었다.
“어떤 분이세요? 대자연 어머니는.”
“어떤 분이냐고?”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듯 히에무스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쎄, 공정한 분이라고 해야 할까. 한없이 인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없이 냉정하기도 한 분이지.”
“무서운 분인가요?”
자신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실까? 혹 싫어하면 어떡하지? 그래서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에일린.”
히에무스의 커다란 손이 다가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뒤로 쓸어 주었다.
“걱정하지 마. 그분을 상대하는 건 내가 할 테니까 그대는 그냥 맘 편히 있으면 돼.”
“걱정하는 거 아니에요.”
신을 만나다고 생각하니 좀 긴장되고 두렵긴 하지만 생각 보다 떨리거나 염려되는 건 아니었다. 누구든 진실한 자세로 대하면 되는 것이다. 황제를 대하든 아니면 다른 고귀한 그 누구를 대하든지 간에. 그런 면이 통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히려 신이라면 진심이 전해지지 않을까?
“히에무스, 집을 지었으니 그만 들어가도 좋아.”
조금 중후하게 느껴지는 텔루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일린,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오늘은 그만 이동할 거야.”
히에무스가 에일린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데려갔다. 어제 머물렀던 것처럼 마른 풀로 만든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에일린을 앉힌 뒤 그녀의 앞에 마주 보고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뭔가 필요한 게 없느냐? 에일린.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다오.”
“괜찮아요.”
엷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자리를 잡으니 피로가 몰려왔다. 그냥 이대로 누워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다시 텔루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히에무스여, 에스타스가 잠깐 할 말이 있다고 하니 가보도록 하게.”
“알겠다.”
별로 내키지 않는 듯 그가 꾸물거리며 일어났다.
“곧 다녀올 테니 쉬도록 해라. 에일린.”
“예. 다녀오세요.”
소리 없이 그가 사라졌다. 그의 서늘한 한기가 없어지는 걸로 파악할 수 있었다. 눈을 감고 누워 있는데 아직 가지 않은 것인지 텔루스가 말을 건넸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는가? 인간 여인.”
“아, 없습니다.”
에일린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누워 있어도 괜찮아. 그대의 휴식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아니에요.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습니다.”
대지의 정령이 뭔가 자신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파티에서 인사만 나누고 별로 대화를 나누거나 친해질 기회가 없었는데 무슨 일인 걸까?
“저, 정말 감사드려요. 이렇게 동행해주시고 집도 만들어 주시고. 여러모로 감사드려요.”
“그래. 뭐 별로 생색내고 싶지는 않다만 인사는 받도록 하지.”
“히에무스 님과 친하신가 봐요?”
“뭐? 내가?”
“예. 아닌가요?”
“그와 친해서 나선 게 아니야. 정령들 중 겨울의 왕과 친한 이라면 기껏해야 계절의 정령왕 정도지. 그것도 그리 친하다고 볼 수는 없어. 그는 언제나 단독으로 행동하던 자였으니.”
“그……래요?”
히에무스가 정령들 사이에 별로 인기가 없는 건가? 소설책에 차갑고 냉혹한 존재라는 설명이 있긴 했다. 지금의 그를 생각하면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 모습이지만. 대지의 정령왕이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 그저 궁금해서 따라와 본 거야.”
“궁금하다니요? 뭐가 말이죠?”
“정령이 사랑에 빠지면, 아니 겨울의 정령왕이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고 싶었던 거다.”
별로 환영할만한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솔직하게 얘기해준 점은 마음에 들었다.
“그게 왜 궁금하세요?”
“음, 그건…….”
별안간 그가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대답하기 곤란한 이유라도 있는 듯했다. 계속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내가 종종 인간들이 쓴 연애 소설을 읽곤 하는데……. 거기 나온 연인들의 행동이 참 기이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맹목적이고 황당한, 그러면서도 용기 있는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인상적이었지.”
“소설을 읽으신다고요?”
에일린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가 겸연쩍은 듯 머리를 더 세차게 긁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 그게 정말 재미있잖아? 정령이라 해도 무료함이나 적적한 기분을 느끼니 말이야. 물론 보석이나 마도구도 만들고 정령왕으로서의 여러 역할도 해내지만 가끔은 그런 오락거리도 필요하다고.”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다시 중얼거렸다.
“정령왕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 생각하겠지만.”
“아니, 뭐 어때서 그래요?”
“응?”
“좋잖아요. 취미 생활을 하시는 거. 책을 읽는 것만큼 좋은 활동이 어디 있어요? 저도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래? 그대도 책 읽기를 즐기느냐?”
에일린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책 이야기가 나오니 신이 났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누군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예! 저도 제일 좋아하는 책이 연애 소설이에요. 멋있잖아요? 제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멋진 사랑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겪을 수 있잖아요.”
“그래, 맞아. 읽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되지.”
“그렇죠! 저도 그래요. 잘 쓴 책을 읽다 보면 제가 막 그 책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잖아요? 진짜 멋진 사람도 만나고, 근사한 장소도 가보고, 정말 신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요.”
“그렇지. 참 생생하게 느껴져.”
바로 지금은 그런 느낌을 넘어 그 책 속에 들어와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에일린은 신나게 떠들던 입을 다물고 잠깐 감회에 젖었다. 지금 현재 책 속에 들어와 책 속의 인물들과 만나 이렇게 이야기하고 이렇게 부딪히며 그리고…… 사랑하며 살고 있다.
“왜 그러느냐?”
“예?”
잠시 멍하니 있자 텔루스가 조용히 물었다.
“조금…… 슬픈 표정을 짓는 것 같구나.”
에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슬프지 않아요. 오히려 기쁜걸요.”
“그런가?”
“기쁜 것인가? 그대도.”
“예?”
“겨울의 왕도 그대와 함께 있을 때 내내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대처럼 슬퍼 보이는 듯 기쁜, 그런 오묘한 표정 말이다.”
“아…….”
“따라온 보람은 충분히 있었어. 겨울의 왕이 저만큼이나 바뀐 모습을 목격하다니 잘 따라왔다고 생각된다.”
“그가 그렇게 많이 변했나요?”
“물론. 저 차가운 자의 얼굴이 그렇게 부드럽게 녹은 모습도 처음 봤고 말투도 내가 여태 알던 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나긋나긋해졌지.”
에일린의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무엇보다 저렇게 다른 존재를 배려하고 보살피는 모습을 접하게 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야.”
그가 뚫어질 듯 강렬한 눈빛으로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인지도. 이런 평범한 여자에게 그렇게 깊이 빠져들었다는 게 이상하게 생각되는 건 아닐까.
“난 그만 가볼 테니 쉬도록 해라, 인간 여인.”
“예. 텔루스 님.”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를 배려한 것인지 그가 부스럭대는 소리를 크게 내며 일어섰다. 에일린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뒤돌아서는 그에게 일렀다.
“저어, 직접…… 만들어 보시면 어떨까요?”
“만들다니, 뭘 말인가?”
“소설책이요. 텔루스 님이 직접 써보시면 어떨까요?”
“뭐? 내가?”
“예. 왠지 근사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데.”
그래, 정령이 쓰는 소설은 또 얼마나 훌륭할까? 인간이 모르는 온갖 오래되고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을 테니까. 황홀한 기억이 무수히 담겨있을 것이다.
“남다른 관찰력과 호기심을 지니신 것 같아서요.”
“하하……. 재미있는 생각을 하는구나. 정령에게 소설을 써보라고 권하다니.”
“못할 것도 없잖아요? 읽는 것도 좋지만 쓰는 것도 참 즐거울 거예요. 만약 그렇게 되면 제게도 꼭 보여주세요.”
그는 아마도 황당한 얼굴로 입을 벌린 채 바라보고 있는 중이리라. 자신이 너무 스스럼없이 말한 걸까. 하지만 곧 상냥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지. 쓰게 된다면…… 꼭 그대에게도 보여주마.”
“예. 감사드려요.”
멀어져가는 그에게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혼잣말로 웅얼거리는 소리가 뒤따랐다.
“사랑의 묘약 때문에 빠져든 상대라지만 꽤 흥미롭고 매력적인 아가씨지 않은가?”
시력을 쓰지 못하니 쓸데없이 청력만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수마에게 사로잡힌 것처럼 무거운 졸음이 밀려왔다.
***
에스타스와 잠깐 대화를 하고 난 후 히에무스는 에일린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벌써 잠에 빠진 듯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바로 가까이 가지 않고 붉은 액체가 담긴 마법약을 꺼내 한 방울 마셨다. 정령의 빛이 사그라지자 비로소 에일린 곁으로 가서 누웠다.
“히에무스?”
“그래, 어서 자도록 해라. 에일린. 내가 옆에 있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네…….”
에일린이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몸을 돌려 밀착해왔다. 품 안에 들어오는 작은 머리와 어깨를 두 팔로 휘감아서 꼭 안아주었다. 봄 햇살처럼 따스한 체온과 체향이 느껴졌다. 조그만 창으로 스며든 파리한 달빛에 그녀의 모든 자태가 드러나 보였다. 둥근 이마와 앙증맞은 코와 촉촉한 입술, 물이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몸의 굴곡까지. 그대로 그 입술과 하얀 목덜미를 한 입 베어 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애써 그 욕망을 억누르며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허기진 그의 입술을 깊이 파묻었다. 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르자 문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요란한 심장 소리에 에일린이 놀라 깨어나면 어쩌지 하고. 결국 그녀가 한숨 자고 일어날 때까지 내내 달뜬 정염과 분주히 싸우면서 보내야만 했다.
다음 날 동이 틀 무렵 일행들은 다시 이동을 재개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날씨가 눈에 띄게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한참 뒤엔 따뜻한 정도를 넘어 더운 기운이 훅 끼쳤다. 에일린은 아젤란에서부터 줄곧 걸치고 온 망토를 훌렁 벗어 던졌다. 시간도 상당히 지났는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대자연 어머니가 거하는 빛의 궁전이 멀지 않은 것 같았다. 일행들은 한 강가에서 멈췄다. 사방에서 훈훈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조금만 가면 되는 거죠?”
에일린의 물음에 히에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죽 주머니에 든 물을 가져다줬다.
“음. 지금 여기서 쉬고 난 후 한 번만 이동하면 당도할 것 같구나.”
“그렇군요.”
조금 초조해지고 기대감도 들었다. 앞이 안 보이니 너무 갑갑해서 얼른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에일린이 빵과 수프로 배를 채우고 나자 에스타스가 치유 마법을 행해주었다. 묵묵히 일련의 행동을 취하는 그녀가 새삼 고마워 에일린은 머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드려요. 에스타스 님. 절 위해 이렇게 애써 주셔서.”
“그래. 하지만 나도 꼭 그대만을 위해 이러는 건 아냐.”
“예?”
“물론 그대가 마음에 들어서 나선 게 제일 큰 이유지만 그보다는 히에무스의 변화된 행동을 보고 싶어서란 게 더 큰 이유일 거야.”
“그런가요?”
아무래도 히에무스의 예전 모습이 어지간히 별로였나 보다. 마음을 읽은 듯 그녀가 즉시 입을 열었다.
“그의 예전 모습이 나쁘다는 게 아냐. 단지 너무나 많이 변화된 모습에 놀라 나도 모르게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나 할까?”
대충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에일린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자연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주의할 게 있어, 에일린.”
“뭐죠?”
“절대로 그분께 진실을 숨겨선 안 돼. 하지만 히에무스가 사랑의 묘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말해서도 안 된다. 명심하도록 해라.”
***
“어서 오세요, 대지의 왕이시여.”
“여름의 여왕과 겨울의 왕이시여, 환영합니다.”
에일린은 주위를 감싼 낯선 분위기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굳은 채 서 있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참 적당한 온도에 적절한 습도가 유지되는 공간이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나뭇잎이 바스락대며 부딪히는 소리, 휙 불어오는 바람 소리, 팔랑거리는 뭔가의 날갯짓 소리, 소곤대는 목소리 같은 게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상쾌하고 향긋한 초목 냄새와 물 내음이 코를 감쌌다. 바닥 전체에 여린 풀이 나 있는지 긴 파일이 박힌 양탄자 위를 걷는 듯 발에 닿는 느낌도 둥실거렸다. 분명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답고 멋진 공간일 텐데 앞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대자연 어머니를 뵈러 왔다. 안내해다오.”
히에무스가 가까이 있는 빛의 정령을 향해 지체 없이 요구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께서 세 정령께서 방문하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도하면 바로 알현실로 모시라는 명을 내리셨어요.”
“그래? 이미 알고 계셨단 말인가?”
히에무스가 에일린의 어깨를 잡고 걸음을 옮기려 하자 빛의 정령 하나가 다가와 즉시 일렀다.
“송구합니다만 인간 여인은 함께 가실 수 없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히에무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째서지? 이 여인의 일로 온 것인데 함께 뵐 수 없다는 거냐?”
“나중에 따로 만나실 거라 하셨습니다.”
“뭐?”
히에무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에일린이 그의 한쪽 팔을 붙들고 있던 터라 바로 알 수 있었다. 즉시 그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나는 괜찮으니까 가보세요, 히에무스. 여기서 기다릴게요.”
“에일린…….”
마음에 들지 않은 처사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 그럼 빨리 뵙고 나올 테니 잠시만 여기 있도록 해라.”
“예, 걱정 마세요.”
에일린도 사실 좀 불안했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빛의 정령들에게 당부했다.
“이분께 정중하게 대하도록 해라. 앞이 보이지 않으니 신경 써다오.”
“염려 마십시오, 겨울의 왕이시여. 저희들이 잘 모시겠습니다.”
히에무스가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후 에일린의 손을 꼭 잡았다.
“다녀오마.”
“예.”
히에무스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빛의 정령들 뒤를 따라가며 오도카니 서 있는 에일린을 자꾸만 뒤돌아봤다. 에스타스가 작은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걱정하지 마. 여기처럼 안전한 장소도 없으니.”
“알고 있어.”
“그보다 어제 내가 한 당부, 잊지 않았겠지?”
“물론. 사랑의 묘약을 마셨다는 건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하지 않았나?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어머니께선 모든 걸 알고 계실 테지만 그래도 사실을 말하면서도 사실을 숨기는 기술을 써가며 상대하는 게 좋아.”
“…….”
그녀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묘약을 먹은 게 밝혀진다면 그대는 아마 오늘 당장 해독약을 먹어야 할 거야. 그리되면…… 그대의 사랑도 끝이 나겠지. 물론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내가 따라온 거지만.”
에스타스는 해독약을 먹게 돼 히에무스가 더 이상 에일린을 사랑하지 않게 될 경우 그녀를 위로하고 무사히 인간계까지 데려다줄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런 일은 절대 생기지 않아.”
히에무스가 결연하게 한마디 내뱉은 후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 알현을 잘 넘겨야 했다. 대자연 어머니에게 사실을 말하면서도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랑의 묘약을 먹어서 에일린을 사랑하게 됐다는 걸 알게 되면 분명 그녀에게 내린 용의 저주를 없애주겠지만 그의 사랑도 그만두게 할 것이다. 이치에 어긋난 사랑이니 아마도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다시 한번 어금니를 악물며 주먹을 굳게 쥐었다.
“어서 오너라. 나의 두 아들과 딸아.”
오묘한 빛으로 가득한 알현실 안에 변함없이 아름다운 노랫소리 같은 음성이 은은하게 메아리쳤다. 히에무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삼라만상을 꿰뚫어 보는 듯 깊고 투명한 초록빛 눈동자와 똑바로 마주쳤다.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인사보다도 자신의 불안한 눈빛을 감추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머니시여.”
“안녕하셨습니까?”
히에무스에 이어 에스타스와 텔루스도 황급히 안부를 전하며 허리를 굽혔다.
“그래. 다들 좀 더 가까이 오렴.”
셋은 사뿐히 날아올라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초록빛 나뭇잎 관을 쓴 금빛 머리카락을 반짝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습처럼 온화하고 고운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별일이구나. 셋이 한꺼번에 나를 찾아오다니. 무슨 일들이냐?”
히에무스가 자세를 가다듬고 앞으로 성큼 나섰다.
“부탁이 있어 이렇게 찾아뵙습니다. 어머니시여, 부디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부탁이라니? 뭐지?”
“저로 인해 한 인간 여인이 까다로운 용의 저주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바라건대 부디 그 저주를 무효화시켜 주시기를 청합니다.”
“용의 저주라, 용의 성좌에 대고 저주를 내렸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흥미롭구나. 여간해선 한낱 인간에게 그런 무거운 저주는 내리지 않을 텐데 도대체 무슨 이유란 말인가?”
대자연 어머니가 엷은 미소를 품은 채 그윽한 눈길을 보냈다. 히에무스는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실 터이다. 그런데도 모른 체 물어보시는 건가.
“혼자 제게 반한 용족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가…… 제가 다른 인간 여인에게 마음을 줬다고 생각해 질투심에 행한 일입니다. 그 인간 여인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후훗, 의외로구나. 냉혹하기 그지없는 내 아들이 한갓 인간 여자를 위해 이런 번거로운 부탁을 하러 오다니? 정말 놀랍구나. 그 여인은 너와 무슨 사이지?”
“그 여인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 거짓을 말해선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얽힌 내막을 모두 알게 해서도 안 되고. 그가 곧바로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다시 한번 질문했다.
“네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따라 내 행동이 달라질 것이다. 네게 소중한 의미가 있는 이냐? 그럼 기꺼이 저주를 없애주지. 그렇지 않다면 어쩔 수 없다. 그 여인의 나쁜 운명 탓이라 여기고 그냥 둘 수밖에.”
“…….”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거냐? 히에무스, 나의 아들아.”
“그녀는…… 제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여인입니다.”
“후후후. 특별하게 생각하는 여인이라. 그게 도대체 어떤 건지 모르겠구나. 가령 지독하게 증오하는 이라도 다른 이들과는 다르니 특별하다 할 수 있겠지. 아니면 무척 성가신 존재라도 마찬가지일 테고.”
여전히 상냥하고 나긋나긋하지만 동시에 사뭇 날카로운 여운이 남는 어조.
“어떻게 네게 특별하다는 것인가?”
“제가 요즘 흥미롭게 지켜보는 여인입니다.”
“흥미롭게 지켜보는 여인이라고? 네가 인간을 흥미 때문에 지켜본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다른 정령들처럼 저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 것뿐입니다.”
순간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에 기묘한 빛이 서렸다.
“그저 남다른 관심을 가진 여인을 위해 여기까지 데려왔단 말이냐? 겨울의 왕인 네가 언제 그렇게 자비로워진 거냐?”
그는 또 말문이 막혔다.
“만약 내가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넌 어쩔 생각이지? 이대로 모른 체 할 것이냐? 이만하면 네 성의는 충분히 보여줬을 테니까?”
히에무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당신께서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전 그 용을 죽일 것입니다.”
에스타스가 인상을 쓰며 낮게 소리쳤다.
“히에무스!”
“후후후……. 재미있구나. 흥미롭게 생각하는 인간 하나를 위해서 용을 죽이겠다고? 그로 인해 큰 벌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데 진정 그리 할 것이냐?”
“그럴 것입니다.”
그 용족 여자의 연인이 되느니 차라리 그게 낫다.
“네 뜻은 알겠다. 그럼 그 인간 여인을 만나본 후에 결정하마.”
“……!”
“너희 셋은 나가 보도록 해라.”
히에무스가 납득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째서 바로 해주시지 않겠다는 겁니까? 그 여인은 정말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저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된 건데 그 여인을 만나서 결정하시겠다니요?”
“그녀가 갑자기 닥친 운명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갖고 있는지 보기 위해서니라. 내 자비를 받을만하다고 판단되면 기꺼이 저주를 없애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입가에 머물던 희미한 미소가 한순간 사라졌다.
“그 인간 여인은 자신의 운명을 그냥 감내해야 하겠지. 행운이든 불행이든.”
“……!”
히에무스가 그녀의 앞으로 휙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어머니시여! 부탁드립니다. 그냥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대신 제가 뭐든 하겠습니다. 저주를 없애주신다면 뭐든 어머니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만, 아들아. 너답지 않구나. 그만 떼쓰고 나가 보거라.”
“그 여자는…… 제가 사랑하는 여인입니다.”
“히에무스!”
에스타스가 아까보다도 더 구겨진 표정으로 외쳤다. 당혹스러움과 함께 난처함으로 물든 기색이었다.
“이런…….”
텔루스 역시 눈썹을 늘어뜨리며 낮은음을 흘렸다.
“네가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그렇습니다.”
다시 입가에 흐린 미소를 담으며 대자연 어머니가 동시에 그를 싸늘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정말 차가운 얼굴이었다. 겨울의 왕인 자신보다도 더 서늘하게 얼어붙은 분위기.
“호오, 어떻게 사랑하게 된 것일까? 겨울의 왕인 네게 보통 방법으로 그런 일이 생기지는 않을 텐데?”
히에무스는 그 눈빛을 전혀 피하지 않은 채 정면으로 마주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요? 운명인 거지요. 다른 모든 이들이 그런 것처럼 저 또한 그리됐을 뿐입니다.”
“그래? 그냥 운명인 거라고? 확실한 거냐?”
“그렇습니다. 제가 그리 생각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그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 에일린을 만나게 된 건, 아니 사랑하게 된 건 운명이야. 그와 에일린의 운명이 서로 얽힌 것이다. 시작이 누군가의 장난이었다 해도 지금 그가 사랑하고 있으니 상관없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 용족 여자의 장난이 그대로 그 인간 여자의 운명이 될 수도 있듯이 저도 그냥 운명의 장난으로 그 인간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에스타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 틀렸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대자연 어머니가 물끄러미 그를 주시했다. 하지만 좀 전의 흐린 미소가 좀 더 짙어진 것처럼 보였다. 싸늘했던 초록빛 눈동자도 어느새 유려한 호선을 그린 채 따스한 색채로 물들었다.
***
찰랑거리는 맑은소리가 나무들 사이에 울리기 시작했다. 간만에 퐁퐁 물방울이 터지는 경쾌한 기척이 고요한 호수 표면을 뒤덮었다.
“응, 이건 무슨 소리죠?”
등나무 의자에 앉아 쉬고 있던 에일린이 가까운 빛의 정령에게 물었다. 누군가가 작지만 선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빛의 나무들이 웃는 소리랍니다.”
“나무가 웃는다고요?”
“저희들은 그렇게 말하지요.”
다른 정령이 뭔가 마실 거리를 가져다주며 설명을 더 했다.
“어머니께서 기분이 좋으실 때 나는 소리예요.”
“그래요?”
긴장감에 손에 쥐어진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이거, 꿀물인가요? 꽃향기가 진한 게 정말 맛있네요.”
“마음에 드시면 더 드릴까요? 피로 해소에 도움이 되실 거예요.”
“예. 고마워요.”
꿀물을 한 잔 더 부탁해 마시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알렸다.
“인간 여인, 대자연 어머니께서 부르세요. 저희와 함께 가세요. 안내해 드릴게요.”
“아, 예.”
등나무로 된 탁자 위에 컵을 내려놓고 허둥지둥 일어났다. 빛의 정령이 여럿 달려들어 그녀의 팔을 잡고 어딘가로 이끌었다.
“이 위로 오르세요.”
에일린은 작은 정령들이 이끄는 대로 발을 내디뎠다. 발밑에 단단하긴 하지만 딱딱하지는 않은 울퉁불퉁 묘한 촉감이 와 닿았다. 그녀가 올라가자마자 몸이 앞으로 주르륵 미끄러지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앗!”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나지막이 출렁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촉촉한 물 향기가 올라오는 걸 보니 강이나 호수 위 같았다. 자신은 뭔가를 타고 그 위를 떠다니는 중이다. 나무가 아니라 갈대 따위로 엮인 뗏목이나 나룻배인 듯했다. 거침없이 한 방향을 향하던 배가 어느 순간 멈춰 섰다. 청명한 악기소리 같기도 하고 청량한 물소리를 닮은 듯도 한 음성이 위쪽에서 울렸다.
“어서 오너라. 인간 여인.”
기묘한 공명이 동반된 신비로운 목소리, 의심할 여지없이 대자연 어머니일 것이다. 절로 느껴지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에일린은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대자연 어머니.”
“그래. 그대는 인간이니 ‘아벨라’라고 칭하도록 해라.”
‘대자연 어머니’란 명칭은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만 허락된 것일까?
“예, 아벨라 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에일린’이라고 합니다.”
“다른 이름이 있지 않은가?”
“예?!”
설마, 전세의 자신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 지금 자신의 영혼을 꿰뚫어본 것인지도 모른다. 원래 몸 주인이 아닌 다른 이가 들어와 살고 있다는 것을. 신이니까 단번에 파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가 누군지…… 제 진짜 모습을 아십니까?”
“대충은 알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곳에 와서 자신의 본모습을 알아보는 이를 만나게 될 줄이야. 떨리는 목소리가 다급하게 새어나왔다.
“혹, 당신이 저를 이 세계에 부르신 건가요?”
“지금 그걸 알아보기 위해 온 것이 아닐 텐데?”
“그렇긴 합니다만.”
하지만 정말 궁금하다. 자신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게 혹 그녀 덕분인지.
“용의 저주에 걸려 시력을 잃은 것이 아니던가? 눈을 회복하기 위해 온 것일 테고.”
“예, 하지만…….”
“한 가지 목적에만 집중하도록 해라. 인간 여인, 어떤 목적을 택할 것이냐?”
“눈을…… 회복하는 거예요.”
“그렇군. 그럼 묻겠다. 인간 여인이여.”
다시 가슴이 쿵쿵거렸다. 신이란 존재가 뿜어내는 위용이 상당했다. 목소리 하나하나, 주변 공기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이 정도인데 직접 본다면 얼마나 대단할까? 아니,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두렵게 여기지는 것인지도.
“내가 용의 저주를 없애주지 않는다면 그대는 어찌할 것이냐?”
“예?”
“눈이 먼 채로 히에무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겠느냐? 아니면 그가 용을 죽이거나 용의 연인이 되어 저주가 풀리기를 기다리겠느냐?”
“그건…….”
에일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아벨라 여신의 질문이었지만 사실 이곳에 오는 동안 줄곧 생각하고 있던 의문이기도 했다.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해왔던 것이다.
“그에게 부담을 주는 이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정해진 답은 없다. 그저 솔직한 심정을 밝히는 수밖에.
“그럼 후자를 택한다는 뜻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그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를 사랑합니다.”
그래, 자신은 분명 그를 사랑하고 있다. 그가 정령이고 그의 사랑도 묘약 때문에 시작된 것이지만.
“사랑하기에 그에게 어떤 부담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괴로워하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럼 그를 위해 눈이 먼 채로 평생을 살아갈 생각이냐?”
에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엔 제가 너무 억울합니다. 제 잘못으로 이리된 것도 아닌데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요.”
“받아들이지 않을 거면 어쩔 생각이지?”
“싸워야지요. 당신께 호소하고 호소할 겁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실 때까지.”
“뭐라고?”
“신의 실체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면 그냥 순응했을지도 모르지요. 예전의 삶에선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신을 만나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데 부당한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 살고 싶지 않아요.”
빈손으로 이 세계에 왔다. 자신이 내보일 수 있는 건 진실함뿐이다.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약간 알고 있다 해도 결국은 모두 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맨몸이 보일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진실. 다른 이에겐 몰라도 영혼을 꿰뚫어보는 신에겐 통하리라.
“후후후. 재미있구나. 그럼 만약 네 저주를 풀어주는 대가로 겨울의 왕을 떠나라고 한다면 어쩔 셈이지?”
조금 답답해져 왔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야기된 상황이 아닌데도 왜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질문에 답해야 하는 걸까?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강요로 그러는 건 더욱 싫었다.
문득 전세에서 봤던 드라마 속 장면들이 떠올랐다. 재벌 남주와 사귀는 가난한 여주인공에게 남자의 어머니가 거액을 던져주며 헤어지라고 강요하는 흔한 일화가.
“그냥 저희들에게 맡겨주시면 안 될까요?”
“뭐?”
“그냥 따스한 눈으로 지켜보시며 선택을 맡겨주시면 좋겠어요.”
“…….”
“저는 그를 좀 더 알고 싶어요. 아직 서로에 대해 잘 모르니까요. 좀 더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해요. 부탁드립니다. 아벨라 님.”
잠깐 침묵이 끼어들었다. 에일린은 그제야 침을 꿀꺽 삼켰다. 좀 전까지 거침없이 말하느라 떨리는 줄도 몰랐는데 온몸이 덜덜 떨리는 중이었다. 용기를 쥐어짜내 입을 열었다.
“그도 원할 겁니다. 그러니 자애로운 어머니의 시선으로 그냥 지켜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머니의 시선이라고?”
“예. 저를 만난 후 그가 조금씩 변하고 있어요. 저는 그가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누구든 한 번이라도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그 이전과 같을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녀 자신이 그에게 조금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성장이 아니라 퇴행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거기에 더해 파멸을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책임질 것이지?”
그것 역시 줄곧 고민해오던 문제이고 대답도 늘 생각해뒀었다.
“저는 가진 것이 없는 인간이기에 보상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이후에…… 제가 그를 불행하게 하고 제 존재가 걸림돌이 될 뿐이라고 판단된다면 그땐 가차 없이 그의 곁을 떠나겠습니다.”
“약속할 수 있느냐?”
“예. 약속드리겠습니다.”
“좋다. 그 말을 믿고 바라는 바를 이뤄주겠다. 부디 그 약속을 잊지 말거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찰랑찰랑.
물거품이 터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유리로 된 종이 울리는 소리 같기도 한 청아한 음이 공기 중에 흩날렸다. 후훗거리는 맑은 웃음소리와 뒤섞인 채로.
***
다음 날 아침, 케일론의 성이었다. 에일린으로 변신한 루카스는 뚱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빈둥거리고 있었다. 제퓌가 가까이 날아와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에일린 님이라면 벌써 일어나 씻고 단장까지 다 하셨을 거예요. 뭐에요. 이렇게 늦게까지 흐트러진 모습이라니.”
프리기도 다가와 참견했다.
“이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요? 어제도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오후 내내 방 안에서 뒹굴었잖아요.”
루카스가 휙 돌아누우며 대꾸했다.
“아, 몰라! 그냥 인간 노릇도 성가셔 죽겠는데 여자 노릇은 더 힘들단 말이야.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도 입기 싫고 이것저것 이상한 예절교육 받는 것도 귀찮아. 음식도 입에 안 맞고.”
“제퓌가 찌푸린 얼굴로 그의 머리맡에 내려앉으며 말했다.
“참으셔야죠. 음식은 채소 위주로 대충 골라 드시면 되잖아요.”
“맞아. 순전히 게으른 탓이면서.”
프리기마저 힐책하자 루카스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니라고! 하레나 성에서는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지냈는데. 정말 여자 역할이 힘들어서 그렇다고. 드레스 입는 게 너무너무 싫어.”
억울한 마음에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여자 역할이 이렇게나 인내심이 필요한 일인 줄 몰랐다. 치렁치렁한 소매에 상체가 꼭 끼는 드레스를 걸치고 허리와 머리에도 무거운 장식을 한 채 하루 종일 있다 보면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았다. 거기다 애플턴 부인이 온종일 옆에 붙어서 잡다한 예절교육 등을 시켜대는 통에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하레나 성에서 받던 시종교육은 여기 비하면 거저먹기였다. 너무나 갑갑해서 소리 지르고 뛰쳐나가고 싶은 걸 참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에잇, 몰라! 더 이상은 못하겠어. 적어도 오늘 하루는 그냥 방에서 쉴 거야.”
다시 침대에 누우며 머리끝까지 이불을 휙 끌어당겨 덮었다. 제퓌와 프리기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떡해. 오늘은 사악한 마법사가 휴일이라 집에 있는 날인데. 마법사에겐 아프다는 엄살도 통하지 않을 거라고.”
좀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아두스가 한마디 던졌다.
“오늘은 다른 교육을 쉬고 시장에 가보고 싶다고 하면 어떨까요? 거기서 온종일 놀다 오는 거죠. 인간 시종들은 마차에서 잠자게 하면 될 것 같은데, 어떠세요?”
더불어 자신들도 간만에 시장 구경을 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루카스가 금방 이불 속에서 얼굴을 내밀며 활짝 웃었다.
“완전 좋은 생각이야!”
***
“시장에 가신다고요?”
식당에서 에일린으로 변신한 루카스가 말을 꺼내자 애플턴 부인이 되물었다. 애플턴 부인이 온 이후부턴 케일론과 에일린, 애플턴 부인 이렇게 셋이서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예. 필요한 물건도 사고 간만에 바람도 쐬고 싶어요. 그동안 황제 폐하의 산책 친구 일을 하느라 휴일에도 제대로 쉬지 못했잖아요.”
애플턴 부인이 잠시 생각에 잠기다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도록 하세요. 가끔 기분 전환도 필요하겠지요.”
요 며칠 에일린 행동이 좀 이상했었다. 아마도 쌓인 게 많은 듯했다. 에일린 맞은편 자리에서 조용히 스테이크를 쓸던 케일론이 입을 열었다.
“그럼 함께 가죠. 나도 오늘 한가한 데다…… 시장에 볼 일도 있으니.”
“예에? 아, 하지만…….”
낭패다. 마법사를 달고 가면 편한 기분으로 놀려고 했던 계획이 차질을 빚을 텐데.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잔뜩 구겼다. 그런 루카스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케일론이 마저 말했다.
“자작 부인께서도 홀가분하게 하녀들과 함께 쉬도록 하십시오. 다른 기사들이나 마부들도 휴식하도록 하고. 오늘은 내가 루쿨루스 양의 호위를 전적으로 책임질 테니까.”
“어머, 그러실 필요까진…….”
애플턴 부인이 웃음 띤 얼굴로 사양했다. 하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잠시 황제 이외의 남자에게 단독으로 에일린을 맡긴다는 게 꺼려졌지만 곧 생각을 고쳤다. 이자는 제국의 대마법사 케일론이었다. 황제 폐하의 절친한 친구와 다름없는 충직한 신하. 남자가 아니라 그냥 마법사일 뿐이었다. 사실 자신보다도 나이가 많은 이 마법사가 선황 때부터 그 오랜 시간동안 황궁에 드나들면서도 어떤 사소한 추문 하나 남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세상의 이름난 미인이 모두 모인 황궁에서 말이다. 그에겐 여자니 남자니 하는 것들은 의미가 없어 보이니 믿고 맡길 수 있으리라. 누구보다도 든든한 호위기사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케일론 님.”
그녀도 하루 정도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푹 쉬고 싶었다. 에일린의 시중을 든 후부터 그녀 역시 제대로 휴식한 날이 없었다. 오늘은 그동안 미뤄뒀던 개인적인 일들을 처리하며 맘 편히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입니다.”
“아니, 난 싫은데!”
루카스가 뒤늦게 불만이 섞인 말을 내뱉었지만 별수 없었다. 오늘 외출은 ‘사악한 마법사’와 함께였다.
“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