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12. 기묘한 집들이 파티 (13/24)

12. 기묘한 집들이 파티

“제가…… 말입니까?”

“그래. 내가 줄곧 지켜보니 그대의 안목이 꽤 특별한 듯했다. 그냥 규중의 여인으로 있기엔 아까울 정도로 말이지.”

“…….”

“내 곁에서 그런 네 뜻과 역량을 펼치면서 살면 좋지 않겠느냐? 아젤란을 위해서도, 아니 무엇보다 그대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폐하.”

“그렇게 살면 안 될까? 에일린, 나와 함께 아젤란을 더 나은 나라로 만들자꾸나.”

에일린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가슴이 쿵쿵 뛰는 것 같았다. 찰나의 순간, 전율이 일만큼 놀라고 말았다.

“저는…….”

당황한 마음에 말끝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좀 전에 렉스가 제안한 내용은 원래 엘시아 왕녀에게 해야 할 것들이었다. 평민들 권익을 향상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엘시아. 그런 왕녀를 지켜보던 황제가 사랑을 고백하며 했던 여러 말들 중의 하나였다.

“그, 그런 건…….”

어째서일까? 왜 자꾸 주인공에게 돌아가야 할 것들이 자신에게로 오는 것일까?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살아가라고 누군가가 자꾸 떠미는 것 같았다. 언제나 동경했던 그 아름다운 장미의 기사의 삶을 대신 살아가라고!

“지금 당장 답하라는 게 아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라는 거지.”

에일린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동요하는 반응을 보이자 렉스가 얼른 덧붙였다. 서두르면 안 될 것 같았다. 저번처럼 서두는 바람에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냉정해질 것이다. 더 주도면밀하고 치밀하게.

“그대가 원하는 게 뭐든 나는 이뤄줄 수 있어. 능력도 되고 마음도 준비돼 있지. 그러니 그 모든 것들을 다 염두에 두고 그대가 선택해주길 바라는 거다.”

“…….”

“무슨 뜻인지 알겠지? 에일린.”

“예…….”

물론이다. 충분히 알고 있다. 소설에서도 황제 렉스는 항상 그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고 그 어떤 난관이나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늘 꿋꿋하게 그의 뜻과 사랑을 지키며 똑바로 나아가던 사람이었다. 그의 곁에 있는 사람도 실망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에일린은 문득 그녀의 보폭에 맞춰 느릿느릿 걸어가는 그를 응시했다. 당당한 몸과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것 같은 잘생긴 얼굴, 부드럽게 구불거리며 내려오는 까만 머리칼과 앞을 똑바로 주시하는 푸른 눈동자, 꾹 다문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더할 나위 없이 굳건한 모습. 이 사람이라면 절대 허무하게 스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언제나 꿈꿔왔던 소설 속 주인공의 삶도 거뜬히 실체로 만들어줄 것이다. 겨울에 피는 눈꽃처럼 허무하게 사그라지는 일은 결코 없겠지. 그와 함께 하는 꿈은 마치 단단한 바위로 깎아낸 꽃처럼 영원히 피어 있을 것이다. 사정없이 방망이질 쳐대던 가슴이 꽉 막혀왔다. 몸이 떨렸다. 뭔가 잘못 먹어 얹힌 것처럼 속이 불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에일린…….”

서늘하지만 눈처럼 사각거리는 음성이 울렸다. 줄곧 말없이 걸어오던 겨울의 왕이 부르는 목소리였다.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항상 냉엄하게 보이던 은청색 눈동자에 눈에 띄게 불안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답답했던 가슴에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에일린은 지금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었다.

“날이 차구나. 이제 그만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렉스가 자신감 넘치는 새파란 눈을 둥글리며 말했다.

“예.”

에일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

모든 일과를 그럭저럭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이었다. 아까 올 때처럼 에일린의 앞에 앉은 애플턴 부인은 꾸벅꾸벅 조는 중이다. 옆에 자리한 히에무스가 계속 그녀의 심기를 살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더 이상 못 참겠던지 그가 말문을 열었다.

“에일린. 아까 그 인간 군주의 제안에 혹 마음이 가는 것이냐?”

“예? 아, 그게…….”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대답을 얼버무리자 그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떠올랐다.

“에일린. 그자가 제의했던 일들은 나도 얼마든지 이뤄줄 수 있는 일이야. 원한다면 나와 함께 그런 일들을 하며 살아가면 돼.”

“히에무스.”

에일린은 조금 난처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내내 외면하듯 눈을 마주치지 않다가 이제야 겨우 눈길을 줬다. 간절한 빛을 품은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에게 다소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벌써 그자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한 건 아니지? 내게 약속하지 않았더냐? 좀 더 나를 지켜본 후 결정하기로.”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것 때문에 렉스의 마음을 받아들이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그렇지?”

“예.”

조금 흔들리긴 했다. 가슴이 뛰기도 하고. 하지만 그건 렉스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순수하게 그가 줄 수 있는 수많은 것들에 잠시 마음이 동했을 뿐.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히에무스가 만면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에일린도 멋쩍은 얼굴로 따라 웃었지만 왠지 그 미소에 쓸쓸함이 묻어났다. 히에무스가 인간이었다면 좋을 텐데. 진짜 인간이었다면. 아니, 문제가 단지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의 사랑도 진짜가 아니잖아?’

그와의 사이엔 계속 변하지 않는 걸림돌이 가로놓여 있다. 자신이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표정이 자꾸 굳는 것 같아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뭐가 옳은 것인지,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지켜보던 히에무스가 서늘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두 손을 가만히 잡아 끌어당겼다.

“에일린. 불안해하지 마.”

예전의 그라면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감정이다. 정령왕으로 살아오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불안함’이란 감정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소중한 뭔가를 뺏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없다면 불안함 같은 건 느낄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에일린을 사랑하게 되니 알 것 같았다. 그 역시 소중한 것을 잃고 싶지 않았다. 손을 뻗어 흐트러진 그녀의 머릿결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넘겨주었다.

“나를 믿어, 에일린. 조금만 더 참고 지켜봐 줘. 그대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야. 약속한 대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란 듯이 살아낼 테니 믿고 기다려다오.”

살아낼 것이다. 에일린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내고 싶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하고 씩씩한 목소리.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방긋 웃어주었다. 에일린의 미소에 그의 입매도 부드럽게 올라갔다. 얼음처럼 차가운 빛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상냥한 빛을 띠는 은청색 눈동자가 참 아름다웠다. 좀 전의 갈등이 무색하게도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히에무스.”

“응?”

“당신은 제가 왜 좋아요? 그저 키프리스의 묘약 때문에…… 좋은 건가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본능처럼?”

“그, 그렇지 않아!”

그가 다소 당황한 듯 말을 살짝 더듬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곧 정색한 얼굴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냥…… 그대의 모든 게 좋아. 그대의 예쁜 연초록 눈도 마음에 들고, 환한 미소도 좋고, 부드러운 목소리도 좋아. 다 좋아. 그대의 모든 것이.”

화를 내도 좋고 울고 있을 때도 좋아. 언제나 좋아. 그대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그러니까 묘약의 효과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고요?”

에일린은 긴장한 어투로 질문했다. 늘 의문을 가졌던 건데 왜 여태 물어보지 않았을까. 진작 확인했으면 좋았을걸.

“그렇지 않다! 물론 시작은 키프리스의 묘약 때문에 막무가내로 빠져들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달라.”

“어떻게요?”

“그대를 만나고 나서 달라진 나 자신이 마음에 들어. 아니 달라진 세상이 마음에 든다고 해야 할까? 예전엔 그저 존재했을 뿐이었다면 그대를 만나고 나서부턴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

에일린은 탄식을 흘렸다. 알아, 그 느낌. 그녀 자신도 이곳에 와서 히에무스를 만나고 나서 느꼈던 감정이니까. 그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순간순간 살아있다는 느낌. 살아서 참 좋다는 느낌.

“내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그대가 좋아. 기쁨이든, 슬픔이든, 아름다운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그대가 보여주는 모든 것들이 좋아. 그대가 있어서…… 나는 살아있는 거야.”

그래. 그저 무심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돼.

“그대만이 얼어붙은 내 심장을 뛰게 만들어. 심장이 뛰는 동안이 살아있는 거라고 한다면, 나는 그대를 만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가 됐어.”

확신에 차서 쏟아내던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왔다. 듣던 에일린의 몸도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대가 내게 삶을 주었다.”

“……!”

그의 은푸른 눈동자에 다시 이글거리는 열기가 감돌았다.

“이제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그대가 내 곁에 없는 삶을 생각할 수가 없어. 묘약이니 뭐니 그런 것 따윈 몰라. 그저 나는 그대가 소중해. 소중하고 또 소중해. 그러니 에일린.”

거침없이 밀려오는 고백에 숨이 막혀 오는 듯했다.

“나를 밀어내지 말아다오. 이대로 계속 그대 곁에 있게 해줘. 부탁이다.”

“히에무스…….”

뭐라고 대답할 순 없었다. 하지만 벅찬 환희가 몰아치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울려댔다. 그의 얼굴에 초조함과 긴장감이 머물고 있었다. 사춘기 소년처럼 풋풋한 정염이 깃든 것 같기도 했다. 가만히 다가가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한없이 고맙고 아름답고 그리고 사랑스러운 그에게. 입술에 하진 않았다. 입술은…… 연인들의 것이니까.

***

히에무스는 에일린과 헤어지고 난 후 잠시 어디로 갈지 고민했다. 루쿨루스 숲에 가서 정령왕으로서의 일을 처리할까 하다 마음을 고쳐먹고 하레나 성으로 갔다. 좀 더 인간 귀족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 같았다. 성에 당도하니 브로미오스와 렌투스, 디아누스 집사 등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인간 모습으로 변신해 있던 브로미오스가 내실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대의 시종을 좀 달래줘야 할 것 같네.”

“무슨 일이지?”

“또 자신을 데려가지 않고 외출했다며 화가 단단히 났네. 매번 집에 둘 거면 도대체 왜 데려왔냐고 따지더군. 아까부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아.”

“흠, 알겠다.”

“아직 어려서 참을성도 부족하고 호기심도 많으니 잘 달래보도록 하게.”

히에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숲에서 데리고 나왔으니 책임을 져야 하겠으나 조금 성가시게 느껴졌다. 시종이란 게 별로 필요한 것 같지도 않은데 옆에 두려니 귀찮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린애를 달래는 일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냥 숲으로 돌려보낼까? 그다지 쓸모도 없는 것 같은데.”

렌투스가 즉시 반대 의견을 말했다.

“안 됩니다. 투덜거리기는 하지만 요즘 교육도 곧잘 따라오고 나름대로 적응도 잘해나가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가서 적당히 좋은 말로 달래주면 될 일을요. 뭣하면 저와 함께 가시죠.”

“…….”

그와 함께 루카스가 지내는 방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아무 응답이 없었다.

“루카스! 히에무스 님이 오셨습니다.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렌투스가 방문에 대고 말하자 안에서 잔뜩 볼멘소리가 울렸다.

“약속도 지키지 않는 자와 만나고 싶지 않아!”

“누가 약속도 지키지 않는 자라는 거지? 설마 나를 말하는 건가?”

히에무스가 묻자 이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뭐?”

렌투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루카스.”

방으로 들어가 보니 커다란 침대 위에 루카스가 부루퉁한 얼굴로 누워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동안 방 꾸미는 데 심취한 모양인지 방 내부가 무척 호화롭게 장식돼 있었다. 히에무스가 팔짱을 낀 채 그의 앞에 가서 섰다.

“말해 봐라, 일각수.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건가?”

루카스가 눈을 치켜뜨며 외쳤다.

“왜 재미있는 곳에 데려가지 않는 건데요? 인간 세상에 가면 재미있고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하게 될 거라고 했잖아요? 에일린도 자주 볼 수 있다고 했으면서 여기 와서 난 한 번도 못 만나 봤다고요!”

“자주 볼 수 있다고 하지는 않았어. 그냥 에일린도 볼 수 있을 거라 했지.”

“그게 그거잖아요!”

“달라.”

“아, 어쨌든 약속을 지키세요!”

렌투스가 미소 띤 얼굴로 상냥하게 말을 꺼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싫어요! 지금 당장, 당장이오!”

렌투스가 더욱더 부드러운 어투로 달랬다.

“루카스, 지금 당장은 무립니다. 며칠만 기다려 주시면 자리를 마련해 볼게요.”

“자리를 마련한다고요?”

“예. 집들이를 겸한 파티를 열도록 하죠. 정식으로 에일린 님을 비롯해 친구들을 초대하는 겁니다.”

***

“그건 뭡니까?”

이틀 뒤 황궁에서 돌아온 케일론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에일린의 손에 초대장처럼 보이는 양피지가 들려 있었던 것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기뻐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무슨 일인 걸까?

“초대장이에요. 라케르타 공작께서 절 파티에 초대하셨어요.”

“라케르타 공작의 파티라고요?”

케일론이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내밀었다.

“좀 봐도 되겠습니까?”

에일린이 별말 없이 양피지를 내밀었다. 라케르타 공작이 저번 무도회에서 친분을 쌓은 몇몇 귀족들과 자신의 지인들을 초대해 간소한 규모의 파티를 연다는 내용이었다. 날짜는 7일 후였다. 춤을 출 수도 있겠지만 파트너가 없어도 되는 형태로 진행한다고 명시돼 있었다. 그럼 파트너가 있어도 상관없는 것 아니겠는가?

“함께 가도 될까요?”

“예?”

“파트너로 말입니다.”

“어, 그게…….”

에일린이 곤란한 듯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이번엔 파트너가 없어도 된다고 하니 그냥 저 혼자 가도록 할게요.”

“알겠습니다.”

케일론도 더 이상 요구하지 않고 선선히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찡그렸던 얼굴이 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다 계단을 다 올라와 자신의 방 앞에 왔을 때쯤 설핏 떠오른 생각에 엷게 미소 지었다. 그냥 따라가면 될 것이다. 몸을 숨기는 마법을 시전해 몰래 가서 지켜보면 그만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즉시 편안한 안색을 되찾았다.

***

히에무스의 파티에 가기 전 산책 친구 소임이 한 번 더 남아 있었다. 렉스와 채우기로 약속한 마지막 횟수였다. 그가 먼저 에일린에게 지난번 방문했던 고아원에 다시 가보자는 편지를 보내왔다. 에일린도 내심 원했던 터라 그렇게 하겠다는 답장을 바로 보냈다. 케일론과 함께 순간 이동 마법으로 황궁에 갔다. 렉스가 행렬을 지난번 보다 훨씬 간소하게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지난번에 봤던 화려한 마차 대신 다소 소박한 사두마차가 준비돼 있고 호위 인력이나 수행인 수도 대폭 줄어든 상태였다. 그의 차림새도 많이 수수해 보였다.

‘평복을 하고 나가는 것일까?’

오늘은 되레 에일린의 옷차림이 더 호화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그녀도 고아원에 방문하는 거였기에 최대한 간편한 옷을 골랐지만 말이다. 어쩐지 평소에 보던 화려하기 그지없는 황제를 대할 때보다 지금이 더 친근해 보여 마음에 들었다.

“오늘 또 고아원에 가자고 해서 혹 실망한 것 아니냐?”

“아닙니다. 오히려 더 좋습니다, 폐하.”

“더 좋다니? 가서 일을 하는 게 낫다고?”

“예. 왠지 보람되거든요.”

“보람되다고? 그럼 예전에 나와 황궁 뜰을 산책하던 건 무의미했다는 건가?”

그가 조금 마음이 상한 듯 웃음기 없는 얼굴로 물었다.

“그건 아니에요. 단지 저는 몸을 분주히 움직이면 마음이 충만해지는 편이어서요.”

“그래?”

사실 눈치채고 있었다. 그와 단둘이 산책할 때보다 고아원을 방문해 일에 몰두했을 때가 한결 행복해하는 얼굴이었으니까. 한눈에 봐도 그 차이가 명백해 보였다. 태생이 평민이기에 그런 장소가 더 맘이 편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아니면 그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만.

“오늘 나는 남작 신분으로 위장할 것이니 너도 그리 알고 있도록 해라.”

“남작님으로 위장한다고요?”

“응. ‘클라우스’ 남작이라 칭하기로 했다. 너도 클라우스 남작이라 부르든지 아니면 그냥 ‘렉스’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어, 그래도 될까요?”

에일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 표정이 귀여워 보여 렉스는 눈매를 늘어뜨리며 싱긋 웃었다.

“그래, 괜찮아.”

에일린이니까 괜찮았다. 원래 그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너무 스스럼없이 구는 건 딱 질색이었다. 황제에게 바치는 가식적인 찬미를 싫어하긴 하지만 그걸 완전히 금지하고 싶지도 않았다. 인간들이란 조금만 격의 없이 대하면 금방 본분을 잊고 위로 기어오르는 경향이 있는 법이다. 그런 자들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엄격한 법도와 차별은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에일린은 괜찮아.’

오히려 좀 더 친밀하게 대해줬으면 싶었다.

‘진작 이렇게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줄 걸 그랬어. 뭐 지금부터라도 시도하면 될 테지만.’

그러고 보니 이디오마 신관의 조언이 꽤 쓸모가 있는 듯했다. 고아원 일도 그렇고 오늘 평복을 하고 신분을 위장해 소탈하고 친근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일도 그의 조언에 따른 거였다. 화려함이 통하지 않는 여인이라면 그 반대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게 효과적일 거라며. 그의 말대로 에일린과 많이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예전의 산책 때보다 기뻐하는 표정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꽤 쓸 만하지 않은가?”

렉스가 무심코 머릿속의 생각을 입 밖에 냈다.

“예?”

에일린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봤다.

“아니다, 아무것도.”

***

“에일린!”

“잘 있었어? 발디 군.”

붉은 머리 남자아이가 한달음에 달려와 에일린 품에 안겼다. 뒤를 이어 익숙한 얼굴의 다른 아이들도 여럿 모여들며 에일린을 반겨 주었다.

“또 안 올 줄 알았는데 다시 와서 정말 좋아요.”

“맞아, 맞아. 원래 그런 귀한 분들은 생색내려고 한 번씩 거쳐 갈 뿐이지 다시 오는 사람은 없다고.”

“그건 그래.”

나이는 어리지만 눈치가 빠삭한 아이들이 한마디씩 말했다. 다시 방문한 에일린에게 고마워하며 환영해주는 분위기였다. 에일린은 짠한 마음이 밀려왔다. 고아들의 외로운 마음이 느껴져 애잔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잘들 지냈어? 모두들?”

“예! 잘 지냈어요.”

“오늘도 우리들이랑 재미있게 놀아주실 거죠?”

“물론이지! 그러려고 온걸? 오늘은 더 재미있게 놀자!”

“야호, 신난다!”

휴일 고아원 분위기는 여전했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다른 공녀들이 합류하지 않은 덕분인지 아이들 상태가 좀 더 차분해 보였다. 자원봉사를 하러 온 부녀자들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열댓 명 정도 됐는데 대부분 상인이나 하급 기사 가문의 여인들 같았다. 나이대도 젊은 층부터 중노년층까지 다양했다. 다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거라 일도 묵묵히 잘 해내고 분위기도 훨씬 협조적이고 화기애애했다. 에일린도 그들과 함께 어울려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렉스도 다른 기사들과 함께 아이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거나 말을 태워주며 놀아주는 일을 도맡았다.

타닥! 탁!

“좋아, 꼬마야. 너 제법 몸놀림이 괜찮구나. 소질이 있어!”

“저 꼬마 아니에요! ‘발디’라는 이름이 있다고요. 지난번엔 에일린이 ‘최고의 반장’까지 시켜줬는걸요.”

“하하하, 그래? 미안하다. 발디 군.”

렉스가 아이들에게 목검을 쥐여 주고 검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처음에 몇 가지 기초 검법을 강의한 후 원하는 아이에 한해 일대일 대결을 하는 순서를 가졌는데 발디가 나섰다. 아이였지만 몸놀림이 가벼운 게 제법 재능이 있어 보였다.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병사가 될 수 있겠어.”

“정말요? 그럼 저도 기사가 될 수 있나요?”

“물론, 처음엔 하급 병사로 시작해서 전쟁터에 나가 공을 쌓으면 기사도 될 수 있지.”

“와아, 저 꼭 그렇게 되고 싶어요!”

“그래. 열심히 해 보렴. 훌륭한 기사가 돼서 아젤란을 위해 싸우는 거야.”

“예!”

붉은 머리 소년이 더욱 의욕에 차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렉스는 내내 미소 띤 얼굴로 상대해주었다.

***

“저분, 남작님이라고 하셨죠? 어쩜 저렇게 멋있을까요?”

“맞아요. 아까부터 눈여겨봤는데 정말 잘생기신 데다 상냥하시더군요.”

“그죠? 아이들에게도 다정하고 예의도 어찌나 바르시던지.”

아이들 방을 청소한 후 마무리 정리를 하던 부인들이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초로의 한 부인이 운을 떼자 너도나도 입을 모아 얘기하기 시작했다.

“저분과 아가씨는 무슨 사이세요? 혹 약혼한 사인가요?”

중년 여인이 불쑥 에일린을 향해 질문했다.

“아, 아니에요. 저분은 그냥…….”

선뜻 뭐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는데 십여 명의 부인들 시선이 일제히 에일린에게 고정되었다. 진한 호기심이 철철 넘치는 얼굴들이었다. 또 뭐라고 그럴듯한 설정을 빨리 생각해내야 했다.

“제 고용주세요.”

“고용주라고요?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그게…… 귀족분들은 무료하실 때가 많으니까 말벗을 고용하시기도 하거든요. 제가 그 말벗이에요. 산책도 하고 차도 같이 마시고 가끔은 색다른 장소에 함께 가보기도 하고요.”

에일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중년 부인이 말했다.

“으응? 그건 꼭 사귀는 것 같은데.”

“그러게, 사귀는 거잖아!”

에일린은 당황해서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렇지 않아요! 정식으로 보수를 받으며 하는 일인걸요!”

“그래요? 그럼 아가씬…… 귀족이 아닌가요?”

“아니에요.”

부인들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중년 부인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아가씨는 저분을 사모하시나요?”

“……아니요.”

에일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아가씨. 이 일을 너무 오래 하는 건 좋지 않겠어요. 아가씨를 위해서도 그렇고 저 남작님을 위해서도요. 오지랖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명심했으면 좋겠네요.”

“그래요. 안 그러면 나중에 힘든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

중년 부인의 말이 끝나자 초로의 부인이 맞장구를 쳤다. 다른 이들도 수긍하는 낯빛이었다. 그들은 귀족 신분이 아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자유로운 분위기의 아젤란 제국이라 하더라도 신분의 벽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같은 귀족이 아니라면 정식 혼인이 어렵다는 걸 인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식 혼인이 아닌 사이에 일어나는 남녀관계가 그리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도.

“예, 저도 알아요.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에요.”

“그렇군요. 잘 생각했어요.”

중년 부인이 에일린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아귀 가득 전해졌다.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 외의 다른 이들 모두가.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곳 봉사 활동은 계속하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중년 부인이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괜찮고말고요! 아이들을 위해 봉사할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환영이랍니다. 앞으로도 꼭 와주세요. 우리 모두 기다릴 테니까.”

다른 부인네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웅성거렸다.

“그럼, 그럼. 누구든 좋지요. 특히 아가씨처럼 성실하고 손이 야무진 사람은 언제나 환영이지. 꼭 다시 와줘요.”

“그럴게요.”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하자 모두들 더 크고 친절한 미소를 보였다.

“자, 자, 잡담들은 그만하고 마저 일이나 합시다!”

“예에, 그럽시다.”

***

어느덧 일과를 끝마칠 시간이 되었다. 에일린과 헤어지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얼굴 가득 아쉬움을 드러냈다. 심지어 우는 아이까지 있었다.

“울지 말고. 또 올 테니까.”

“정말요? 정말 또 올 거예요?”

울먹이는 아이들을 대하니 가슴이 아파왔다. 홀로 된 이들은 잠깐의 이별마저 유난히 힘들어한다.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저마다 어떤 이유로든 버림받아 이곳에 오게 된 아이들이니 나름의 깊은 상처가 있을 것이다. 울컥 목이 멨지만 애써 씩씩한 목소리로 일렀다.

“그럼, 정말이고말고. 휴일마다 반드시 온다는 약속은 하지 못하겠지만 자주 오도록 노력할게.”

“꼭 그래 주셔야 해요! 꼭이요.”

“그래. 약속할게.”

아이들 입가에 금방 해사한 웃음이 번졌다. 하나하나 안아주며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인사를 해주었다. 아이들의 작은 몸을 안으면 왜 이렇게 하나같이 애처로운 느낌이 드는지 모를 일이다. 서운한 기색을 뒤로하고 몸을 일으켰다.

“에일린.”

돌아보니 렉스가 고요한 미소를 품은 채 멀찍이 서 있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햇살을 배경으로 붉게 물든 그의 형상이 무척 크고 선명해 보였다. ‘아벨라의 광명한 빛이 영원히 머물기를 바란다.’는 그를 찬양하는 장황한 문구에 등장하는 문장이 절로 떠오르는 정경이었다.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그 빛의 축복을 한 몸에 받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끝이 살짝 올라간 그의 입매에서 매력적인 중저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예, 남작님.”

***

따각, 따각, 따각.

경쾌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사두마차가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대 말이 옳았어.”

“네? 뭐가요?”

“활발하게 신체 활동을 하면 더 보람찬 느낌이 든다고 했잖아? 정말 그렇군. 나도 간만에 분주히 몸을 움직였더니 무척 뿌듯한 기분이 들었어.”

에일린이 노을빛에 발갛게 된 뺨에 미소를 올렸다.

“그렇죠? 뭔가 시간을 알차게 보낸 것 같지 않아요?”

“그래, 그렇더군.”

창에서 흘러들어온 황혼의 빛에 그의 얼굴 역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약간 피곤한 듯 보이지만 기분 좋은 미소가 가득 어린 눈빛이 보기 좋았다.

“저, 폐하.”

“응?”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전에 약속드린 대로 오늘로 산책 친구 소임 일을 모두 마쳤습니다. 그러니 이제 이 일을 그만두겠습니다.”

“……!”

“그리고 케일론 님의 성에 보내신 인력도 거둬주시고요.”

“정말 그러고 싶은가?”

“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에일린. 지난번 그대가 제의한 것 말이다.”

“예?”

“고아들을 위한, 아니 평민들을 위한 학교가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 말이다.”

산책 소임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에 그가 별다른 답을 하지 않은 채 다른 용건을 내밀었다.

“그걸 직접 실행에 옮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 정말입니까?”

“음. 우선 신전 고아원 원생들을 위한 교육 기관을 마련해서 시험 삼아 운영해 보면 어떨까 해. 그대 말대로 아이들이 무척 무료해 하는 것 같았어.”

그가 생각에 잠긴 듯 한쪽 손을 턱에 가져다 대고 쓸며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재능 있는 아이들도 많은 것 같은데 그걸 발견하고 키워줄 만한 기회는 적은 것 같았지. 교육 기관을 운영하면 그런 점들을 보완할 수 있겠지.”

“예. 분명 그럴 거예요. 영리한 아이들이 많은데 그런 아이들의 재능을 발휘할 곳이 없는 것 같았거든요.”

잠시 대화 내용의 초점이 비껴갔지만 반가운 말이기에 진심 기뻤다.

“일단 시범으로 제 9신전에 먼저 설치해 볼까 한다. 오늘 만나본 아이들 연령도 뭔가 배움을 시작하기에 적절한 나이고.”

“그렇죠. 딱 좋은 나이죠.”

“그대는 그 교육 기관에 대한 착상을 어디에서 한 건가? 그대가 스스로 생각해냈나? 아니면 어딘가에서 접한 본보기가 있었던 거냐?”

“그게…….”

조금 망설이다 대꾸했다. 자꾸 꿈을 들먹이면 실없는 인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그런 인간으로 설정돼 있으니 별 상관없을 것이다.

“제가 가끔 꾸는 이상한 꿈속에 그런 곳이 존재해요.”

그가 놀란 듯 눈꺼풀을 크게 열었다. 이내 잘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도 알고 있느냐?”

“대충은요.”

“그렇다면 그대가 자문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

“예?”

“이곳에도 귀족들을 위한 아카데미가 있지만 거기 교육 체계를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겠지. 물론 참고는 하겠지만 네 신기한 경험과 안목도 도움이 될 것 같아 하는 말이다.”

“저는…….”

에일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당장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떠냐? 설마 케일론의 성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겠지? 너를 위해서도 고아들을 위해서도 뜻깊은 일을 하며 지내는 게 낫지 않을까?”

“폐하…….”

“원하는 대로 산책 일은 그만둬도 좋다. 사용인도 불편하다면 물려주겠다. 하지만 그대가 학교 설립 일을 하려면 앞으로도 계속 그런 인력들이 필요할 것이다.”

“…….”

에일린이 당황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멍하니 있자 그가 말을 계속했다.

“지금 바로 결정하지 마라. 찰나의 직관에 따른 결정은 가끔 옳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릇될 때가 많으니까. 며칠 동안 천천히 생각해 보고 답을 다오.”

“알겠……습니다.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도록 할게요.”

“그래. 부디 긍정적인 답을 주면 좋겠구나. 그리고…….”

그가 자세를 조금 바꾸며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오늘 단 한 번도 나를 ‘렉스’라고 부르지 않더군. 오늘 한 번쯤은 들어보고 싶었는데.”

웃음기가 배어 있지만 짐짓 섭섭한 표정에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였다.

“예? 그게, 저…….”

“지금이라도 불러주면 어떨까.”

“…….”

옆집 개도 아니고 대제국 황제의 이름을 막 부르기란 사실 쉽지 않았다. 물론 예전에 소설 속 인물로만 알았을 땐 항상 부르던 거였지만.

“응? 에일린.”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에 안달하듯 조르는 말투로 바뀌었다. 에일린은 망설이다 입을 움찔거렸다.

“……렉스.”

“그래, 에일린.”

그의 얼굴에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참 보람된 하루구나.”

***

“오늘 어떠셨습니까?”

라피스 궁에 있는 접견실에서 황제를 기다리던 이디오마 신관이 그를 보자마자 물었다.

“음, 그대 말대로 했소. 그녀의 요구대로 하겠다고 약속했지. 산책친구 일도 그만둬도 되고, 원한다면 성에 있는 사용인도 물려주겠다고 말이오.”

“잘하셨습니다.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렉스가 폭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그런가?”

“예. 그런 여인들은 뭐든 스스로가 선택했다는 걸 중요하게 여기지요. 하나하나 그녀가 결정한 듯 보이게 해서 종국엔 폐하의 품으로 걸어오도록 유도하면 되옵니다.”

“풋!”

렉스가 짧게 소리 내 웃더니 팔짱을 꼈다.

“그렇군. 자신이 원해서 내린 결정이라 생각하겠지만 결국은 내 계산대로 움직이게 된다는 건가?”

이디오마 신관이 확신하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깊게 눌러 쓴 두건 탓에 얼굴 표정이 잘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렇지요. 후속으로 폐하를 위해 일하는 기회를 준다고 제안하셨겠지요?”

“그랬소. 그녀에겐 아주 유혹적인 제안이었겠지.”

“잘하셨습니다. 절대 서두르지 마시고 인내심을 갖고 대하십시오. 그리하다 보면 분명 머지않아 폐하의 목적을 이루시게 될 것입니다.”

“알겠소. 그대의 조언을 충실히 따를 테니 계속 수고해주시오.”

“맡겨주십시오.”

“아, 이따 시종장을 만나고 가시오. 중간 사례금을 챙겨드리라 지시해 뒀으니.”

“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무심하고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신관이었지만 사례금이라는 소리에 말끝에 기쁜 기색이 잔뜩 맺혀 있었다.

***

이틀 후 집들이 파티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아르겐 궁에서도 몇몇 공녀들이 파티 참석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번 황궁 무도회에서 춤을 출 때 잠깐이라도 히에무스의 파트너가 됐던 여인들, 엘시아와 레나테, 그리고 스킬라 공주였다. 그들 모두 다른 공녀들의 부러움을 한껏 사는 중이었다. 지난번 황궁 무도회에서 봤던 라케르타 공작의 미모에 탄복하며 동경하게 된 여인이 한둘이 아니었다. 황후가 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공녀들은 다음 목표로 라케르타 공작의 비가 되길 원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조금 여력이 있는 나라 출신의 공주들은 초대받기 위해 물밑 접촉을 시도할 정도였다. 그게 통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소수의 공녀들이 더 초대받을 수 있었다.

“공주님. 이 목걸이로 할까요?”

엘시아의 시녀인 비안나가 보석함을 열어 보이며 엘시아의 의향을 물었다.

“그건 안 돼. 지난 무도회에서 걸었던 거잖아. 다른 걸 가져와.”

시녀가 난처한 기색으로 즉시 다른 상자를 보여주었지만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부분 이런저런 파티나 모임에서 착용한 것들이었다. 그녀에게 반한 귀족들이 보내온 보석들을 제외하고는 최근에 새로 마련한 게 없었다.

“할 수 없지. 거기 있는 사파이어 세트로 하겠어.”

“예.”

근심으로 주름졌던 비안나의 얼굴이 겨우 펴졌다. 엘시아는 목걸이를 착용하며 거울에 비친 모습을 이리저리 확인했다. 뒤쪽에 서 있던 안드레아스의 모습이 말간 거울 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정말 그 파티에 사랑의 정령이 온다고 했나요?”

안드레아스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도 파티에 걸맞은 옷차림이었다. 오늘 그가 왕녀를 수행할 예정이었다.

“확인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묘약을 누구에게 쓸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고요.”

“적당한 사람이라면 오늘 밤 바로 실행에 옮겨줄 거라 했죠?”

“그럴 거라 했습니다. 한데 공주님, 다시 여쭙겠습니다.”

“뭐죠?”

“정말 라케르타 공작에게 묘약을 쓰실 생각입니까?”

“그래요. 그 드라코니아의 공작에게 쓰고 싶어요.”

안드레아스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어째서입니까? 왜 갑자기 그자에게 관심을 두는 것인지요?”

엘시아가 여전히 자세 변화 없이 거울만 응시했다.

“아젤란의 황제는 절대로 안 된다면서요.”

“예. 하지만 대신 다른 인간을 물색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황제에게 큰 영향을 미칠만한 인물을 찾아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찾아보면 있을 것이다. 황제와 긴밀한 관계로 연결돼 그의 결정과 행동에 영향을 끼칠만한 사람이.

“그게 바로 라케르타 공작이에요.”

“어째서입니까? 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런 자가 무슨 이익이 된단 말입니까?”

왜 그자란 말인가? 그자보다는 차라리 황제의 시종장으로 있는 사내가 더 나을 것이다.

‘지척에 있는 자가 의외로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걸 모른단 말인가?’

그도 아니면 아벨라 신전의 대신관도 괜찮을 것이다. 안드로스 대륙에서 가장 높은 신관 관직에 있는 자라면 그 영향력이나 힘이 굉장할 것이다. 신탁 같은 걸 조작할 수도 있고 신성력 같은 힘을 여러모로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을 텐데. 엘시아가 거울을 노려보며 점검하던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자가 용에게서 스킬라 공주를 구해냈다고 했었죠?”

“그렇게 소문이 나긴 했지요.”

“용을 제압할 정도라면 비범한 마법 실력을 갖춘 것 아닌가요?”

“물론,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렇겠죠. 적어도…….”

안드레아스는 입술을 씹으며 낮게 대답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소문이 사실이라면 자신을 능가하는 실력일 것이다.

“저보다는 훨씬 뛰어나겠지요. 용은 마물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 인간에겐 거의 신과 같이 여겨지지요. 그런 걸 제압할 정도라면…….”

“그러니까 그런 우수한 마법사를 내 편으로 만들 생각이에요. 내 포로 같은 존재로. 정령들은 황제에게 마법을 쓰지 못하지만 인간이 행하는 건 되잖아요?”

“그렇긴……합니다.”

“그가 황제에게 마법을 쓰게 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소문을 들어보니 재산도 엄청나다고 하더군요. 그런 자를 내 사람으로 만든다면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지 않겠어요?”

게다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기까지 하고. 외모만 따진다면 렉스보다도 그 남자를 남편이나 연인으로 삼고 싶을 정도다. 지난 무도회에서 자신과 파트너가 됐을 때 그가 유난히 차갑고 퉁명스럽게 대하던 게 생각나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그 높은 콧대를 꺾어버리겠어.’

게다가 나중에 지켜본 바론 그자 역시 에일린이라는 평민 여자에게 남다른 관심을 지닌 것 같았다. 자신처럼 완벽한 미인을 놔두고 그따위 보잘것없는 여자에게 눈길을 주다니,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용납되지 않았다. 황제도 그렇고 그 공작도 그렇고 도대체 왜들 그러는 것인가? 그렇게도 여자를 보는 안목이 없단 말인가?

“다들 왜 그런 거야?”

“예?”

“아니에요.”

황제를 손아귀에 넣을 수 없다면 그 공작이라도 가지고 싶었다. 모두가 동경하는 자를 자신의 손아귀에 가둬 쥐고 흔들고 싶었다.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묘약을 쓸 상대로 그가 가장 적절한 상대였다.

“소문대로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뛰어난 마법사가 여태 이름을 날리지 않았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필시 부풀려진 얘기일 겁니다.”

안드레아스가 간곡한 표정으로 왕녀를 설득하려 했다. 분명 과장된 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그자의 명성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실력자라면 지금껏 알려지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적어도 마법사인 자신은 알고 있어야 정상이다.

“됐어요. 난 어쨌든 그자로 할 테니까 당신도 그리 알고 대비하세요.”

“공주님…….”

더 이상 어떤 말도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난감하고 어이없어진 안드레아스는 미간을 잔뜩 좁혔다.

***

히에무스가 인간 노릇을 할 때 머무는 저택인 ‘하레나 성’에 전에 없이 생기가 넘쳐흘렀다. 하녀 제니와 샤샤는 며칠 전부터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곳 하레나 성에 온 뒤 처음으로 열리는 파티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초대 인원이 그리 많지 않아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참 많았다. 청소며 집 장식이며 온갖 허드렛일 등 평소보다 일이 훨씬 늘었으나 눈 한 번 찡그리지 않고 해냈다. 하레나 성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도 처음이니만큼 기대되는 행사였기에 모두들 들뜨고 설렌 기분으로 일과를 처리했다. 마침내 오늘이 그 파티가 열리는 날. 그녀들 못지않게 상기된 얼굴의 루카스가 아침부터 수선을 피우며 저택 이곳저곳을 쑤시고 돌아다녔다.

“이것 봐, 제니! 손님 맞을 준비가 다 됐어? 빠진 건 없지?”

“예, 그럼요! 루카스 님. 모든 게 다 잘 준비됐으니 안심하세요.”

“악단은, 악단은 도착했어?”

“예. 아까 와서 자리를 잡았어요.”

“꽃장식도 했겠지?”

“예. 서풍 님께서 가져다주신 꽃으로 꾸며 뒀어요.”

파인스 백작의 시종인 ‘파울루스’를 드라코니아인 귀족들이 ‘서풍’이라고 부르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 보니 밑에서 일하는 사용인들도 이름보다 그 별칭을 따라 불렀다. 제니와 샤샤가 번갈아 가며 루카스의 폭풍처럼 몰아치는 질문에 대답했다. 사실 이런 사항들은 디아누스 집사와 렌투스가 챙겨야 하는 일이지만 이번 파티에선 루카스가 남다른 열의를 보이며 선두에서 활약하는 중이었다. 그는 기혼 하녀들과 남자 하인을 꺼리는 경향이 있어 하녀장조차 멀리했다. 비교적 어린 축에 드는 하녀들과만 친하게 지냈다. 정신 차려보니 자연스럽게 제니와 샤샤 같은 젊은 하녀들이 그와 다른 사용인들 사이의 중재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런 역할 하는 것도 꽤 괜찮지 않아?”

제니가 분주히 움직이는 와중에 흐뭇한 표정으로 샤샤에게 소곤거렸다. 성주인 라케르타 공작은 자주 성을 비우는 데다 성에 머물 때도 좀처럼 사용인들 앞에 나서는 일이 없어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루카스는 항상 성에서 지내며 일하는 사람들과도 친하고 자주 접촉하는 편이었다.

“맞아. 루카스 님, 붙임성도 좋고 친절하게 대해주시잖아.”

샤샤가 제니의 의견에 동조하며 역시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다고 루카스가 흑심을 품은 것 같은 행동을 한 적도 없었다. 나이 어린 청년답게 가끔 당돌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풋풋하고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그래. 다른 건 더 점검할 게 없나? 술은 충분히 준비했지? 내 친구들도 몇 명 초대했단 말이야.”

“그럼요. 술도, 과자도, 루카스 님이 좋아하시는 과일도 잔뜩 있습니다. 친구분들도 만족하실 거예요.”

제니가 웃음 띤 얼굴로 답한 후 냉큼 질문했다.

“루카스 님 친구분들도 모두 드라코니아 귀족이신가요?”

“어? 그게, 그래. 그렇다고 해야겠지. 다들 드라코니아 귀족이야.”

사전에 그렇게 설정하기로 약속돼 있지만 괜히 껄끄러운 마음에 낮게 웅얼거렸다.

“……아닌 이도 있고.”

에일린은 다른 경우지. 아젤란 귀족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듣기로는 정식 귀족이 아니라 했다. 뭐, 아무려면 어때? 유니콘인 그에겐 어느 나라 사람인지, 신분이 뭔지 그런 것 따윈 하나도 관심 없었다. 그저 그 영혼이 얼마나 순수하고 깨끗한지가 중요할 뿐이지.

날이 어두워졌다. 파티 시작 시각이 가까워지자 초대받은 손님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제니와 샤샤는 저택 입구에 다른 사용인들과 양쪽으로 죽 늘어서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부분의 아젤란 귀족들은 모두들 마차나 말을 현관 앞까지 타고 와서 내린 후 입장하니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그저 귀족 남녀의 치장과 용모 등이 곱고 화려해서 정신이 팔리는 정도였다. 그런데 드라코니아 귀족들이 입장할 때는 왠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저기 샤샤,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뭐가?”

“드라코니아에서 오신 분들 말이야. 다들 하나같이 저택 현관 앞에 불쑥 나타나는 거 같은데?”

제니가 의아한 얼굴로 웅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좀 특이하네. 모두 말이나 마차를 타고 오는 것 같지 않은 게…….”

다른 참석자들 사이에 등장하는 거니 그다지 부자연스럽지도 않고 신경 쓰지 않으면 눈치 못 챌 수도 있겠지만 몇 번 그런 일이 반복되니 정말 뭔가 좀 기이하게 느껴졌다. 별안간 어둠 속에서 휙 나타나는 것이 꼭 순간 이동 마법을 이용한 것처럼 보였다.

“마법의 힘을 쓴 것 아닐까? 공작님과 백작님도 마법사니까 마법사 친구 분들이 많을 거야.”

“그런가보다.”

샤샤의 추리에 제니도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또 한 커플이 마법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어서 오세요! 엘레스트라 님과 아그로스 님.”

“오, 오랜만이군. 루카스, 서풍도.”

의도한 것인지 초록빛 의상을 사이좋게 맞춰 입은 두 남녀가 나타났다. 그중 40대 중년으로 보이는, 큰 키에 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남자가 다가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것 참, 나도 이런 데 와도 되는지 모르겠군.”

“괜찮습니다. 아그로스 님. 안에 브로미오스 님과 히에무스 님도 계시는걸요.”

그와 함께 온 제법 예쁘장한 갈색 머리 여인이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비밀만 잘 지키면 상관없다고 했어요.”

“허허, 그렇다면 괜찮겠지. 이왕 온 김에 실컷 놀다 가야겠군. 언제 또 이런 데 와 보겠나?”

너털웃음을 지으며 파티장 안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당도한 이들은 그들보다도 더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유난히 큰 체구를 가진 남자와 여자였다. 남자는 조금 짙은 피부에 금빛과 갈색이 섞인 머리를 가늘게 수십 가닥으로 땋아 내린 특이한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붉은빛으로 된 화려한 귀족 예복을 갖춰 입었지만 앞서 당도한 이들처럼 뭔가 어색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그 뒤를 따르듯 걸어오는 여인 역시 뭔가 기묘한 느낌이었다. 별 장식 없이 올려 묶어 늘어뜨린 금발에 붉게 빛나는 눈동자, 풍만한 몸매에 나무랄 데 없는 미모였다. 서풍이 얼른 두 사람에게 다가가 매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얼핏 보면 남자는 피부색도 검고 손도 거칠어 보이고, 여자는 남의 옷을 빌려 입고 온 듯한 행색이었다.

“오, 이곳에서 뵙게 되다니, 어서 오십시오. 텔루스 님. 에스타스 님.”

텔루스라는 남자가 토파즈처럼 오묘한 금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여기 초대해달라고 떼를 썼지. 히에무스에게 보석을 잔뜩 안겨주며 부탁했다네. 혹시 우리가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가?”

“이상해 보이다니요?”

“너무 급히 준비해서 어떻게 꾸며야 할지 모르겠더군. 의상 제작공방 정령이 무척 의아해했어. 여럿이서 인간들 옷을 갑자기 주문해대니 당황스러웠겠지. 어떤가? 나 괜찮게 보이는가?”

“하하하. 그런 것치곤 제대로 된 듯합니다. 자연스러워 보이니 걱정 마십시오.”

“다행이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제니와 샤샤는 또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의상 제작공방의 정령이라니, 그게 뭘까?”

“글쎄. 드라코니아에 있는 이름난 의상실을 말하는 거 아닐까?”

“그런가봐.”

그러고 보니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좀 달라 보였다. 천도 무척 부드럽고 고급스러워 보이고 장식도 비싸 보였다. 특히 그가 걸친 각종 보석 장신구가 눈에 띄게 정교하고 호화로웠다. 소문난 드라코니아의 부를 한눈에 목격한 기분이었다. 그들 역시 안으로 들어가고 이어 검은 사두마차 한 대가 가까이 와 멈춰 섰다. 안에서 내린 여인을 보자마자 루카스가 소리치며 달려나갔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에일린!”

“어머나, 루카스!”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귀엽고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고급스러운 크림색 쉥즈에 무척 예쁜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우아하고 화사해 보였다. 정말 반가웠는지 루카스가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와락 껴안으려 팔을 벌렸다. 하지만 때를 놓치지 않고 즉시 끼어든 다른 팔에 가로막혔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애송이!”

깜짝 놀랄 만큼 날카로운 목소리, 언제 왔는지 라케르타 공작이 다가와 루카스의 몸을 밀어냈다.

“쳇, 내가 뭐 어쨌다고 그래요?”

루카스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흘겨봤다. 하지만 라케르타 공작이 그를 더 매섭고 강렬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히에무스.”

여인이 스스럼없이 라케르타 공작의 이름을 불렀다. 제니를 비롯한 주변 하인들 모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곧이어 좀 더 경악할만한 장면을 목격했다. 라케르타 공작의 입꼬리가 양쪽으로 올라가 호선을 그렸던 것이다. 다들 처음 보는 공작의 미소였다. 그렇지 않아도 눈부셨던 미모가 한층 빛이 나 제대로 쳐다보기 힘들 정도였다.

“와아······.”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가는 탄성을 내질렀다.

“어서 오너라, 에일린. 정말 환영한다.”

“예, 고마워요. 히에무…… 아니, 라케르타 공작님.”

에일린은 급히 호칭을 달리했다. 이런 곳에선 아무래도 남들 시선을 신경 쓰는 게 나을 것이다. 히에무스가 약간 서운한 표정을 짓더니 그도 곧 알았다는 듯 말투와 호칭을 바꿨다. 인간들은 다른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것 같았다.

“어서 안으로 드시죠, 루쿨루스 영애.”

“예, 감사합니다.”

그가 에일린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밀다가 별안간 행동을 멈췄다.

“저건…….”

히에무스가 에일린의 어깨너머 펼쳐진 어둠 속을 뚫어지듯 쏘아봤다.

“루카스, 에일린을 안으로 모셔라.”

갑작스러운 히에무스의 명령에 루카스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어서.”

“어, 예! 알겠습니다.”

평소엔 잘 모르겠는데 히에무스가 가끔씩 내보이는 서늘한 기운을 접하면 그가 겨울의 정령왕이라는 사실이 어김없이 실감되었다. 자신과는 격이 다른 존재에게 절로 주눅이 들었다.

“가요, 에일린.”

에일린은 잠깐 주저했다. 저택 너머 짙은 암흑에 꽂힌 그의 시선을 눈치채곤 잠자코 루카스를 따라갔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에게 방해될 것 같았기에. 에일린이 동행한 애플턴 부인과 함께 건물 안으로 사라지자 히에무스가 가볍게 몸을 움직여 어두운 뜰로 내달렸다. 어떤 불쾌한 존재를 감지했다. 쥐새끼처럼 몰래 숨어든 놈을. 그대로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헉!”

케일론이 보랏빛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쳐다봤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히에무스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마법사. 염탐이라도 할 셈인가? 은신 마법까지 써서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거냐?”

잠깐 동안 케일론은 말문이 막혔다. 멱살을 잡힌 그대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은신 마법을 알아채다니! 자신보다 더 뛰어난 마법 능력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은 아젤란의 황제와 다른 마법사들이 부여한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다. 말 그대로 아젤란, 아니 이제는 아젤란을 넘어 안드로스 대륙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단 한 명의 마법사가 지니는 칭호였다.

‘설마 나를 능가하는 실력자란 말인가? 이렇게 젊은 청년이?’

케일론 자신은 사실 보기보다 나이가 꽤 많았다. 엘프의 피를 물려받은 탓에 보통 인간들보다 노화가 느린 편이었다. 거기에 보유한 마나가 적지 않아 매우 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 정도 위치에 오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이자도 보기보단 나이가 많은 것인가? 그럴 리 없을 텐데?’

마력으로 젊음을 유지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럼 혹 이자 역시 엘프의 피를 물려받은 것일까?

“호오, 의외로군. 내 은신 마법을 간파했단 말인가?”

케일론은 짐짓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꺼냈지만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터무니없이 갈라지고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놈 수준의 마법을 파악하는 거야 식은 죽 먹기지. 알량하기 짝이 없으니.”

라케르타 공작이 여유로운 미소를 흘렸다. 이어 취조라도 하듯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말해 봐라, 마법사. 쥐새끼처럼 내 집에 숨어들어 뭘 하려고 했던 거냐?”

순간 케일론의 등에 소름이 오도독 돋았다. 그의 오랜 경험과 통찰력으로 짐작컨대 이 공작은 실력뿐만 아니라 뭔가 다른 배경까지 지니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마 보이는 것보다 나이도 훨씬 많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듯한 냉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역시 노련한 마법사였기에 침착하게 대꾸했다.

“숨어들어왔으니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보기보다 입이 험악하군, 라케르타 공작. 당연히 에일린을 지키기 위해 따라왔다. 내가 보호 중인 아가씨가 수상한 이국 귀족의 파티에 간다고 하니 걱정이 돼서 말이야.”

잠시 말을 끊고 그의 반응을 살피다 다시 말했다. 공작의 딱딱하게 얼어붙은 얼굴에서 다른 걸 읽어낼 순 없었다.

“따라오기 잘한 것 같군. 이렇게 강한 마법사의 저택에 머무는 동안 경호를 담당할 자가 당연히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황제 폐하께서 각별히 아끼시는 여인이니 더욱 신경 써야겠지.”

황제를 들먹이자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러니 그냥 이대로 안에 들여보내 주면 안 되겠나? 그저 에일린을 호위하기 위해 왔으니까”

“그런 목적이라면 그대는 더더욱 여기 있을 필요 없다. 에일린을 호위하는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맹세할 수도 있어. 그녀가 어떤 위험에도 처하지 않도록 내 모든 힘을 다해 지켜줄 것이다.”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였다. 눈빛 또한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 선명하게 빛났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라, 마법사.”

“그럴 순 없…….”

케일론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눈 깜작할 사이에 라케르타 공작이 발동시킨 마법에 의해 강제로 어디론가 보내졌기 때문에. 마법 주문을 읊은 것 같지도 않은데 삽시간에 순간 이동 마법에 휩쓸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집에 도착해 있었다. 황망한 얼굴로 케일론은 한동안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상황을 인지하고 나자 온몸에 전율이 일어 휘청거렸다. 지금껏 그가 경험한 순간이동 마법 중 가장 강하고 안정된 형태를 지금 막 경험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 젊어 보이는 라케르타 공작의 마법 실력은 정말로 그를 능가했다. 공작이 용을 제압했다는 소문, 그건 아마도 진짜일 것이다.

***

엘시아는 평소 늘 대동했던 시녀 비안나 대신 이번엔 안드레아스와 함께 마차 안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안드레아스는 사실 남자인데다 정식 시녀도 아닌지라 여러모로 불편했지만 오늘은 그와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맞은편 좌석을 힐끗 쳐다봤다. 비어 있는 듯 보이지만 지금 그 자리에 두 정령의 여왕이 앉아 있었다. 봄의 여왕과 사랑의 여왕이라고 했다. 그들이 파티장까지 따라와 사랑의 묘약을 쓸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할 예정이었다. 적당한 상대라고 판단되면 오늘 그 파티에서 계획을 실행할 작정으로. 엘시아의 눈에앞 좌석에 뭔가 다른 존재가 있다는 묘한 느낌은 감지되었다. 그들이 가끔씩 안드레아스에게 뭐라고 말을 걸고 그가 대답하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인간의 언어가 아닌 정령의 언어라고 했다. 왠지 소외되는 것 같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어느덧 파티장인 하레나 성에 당도했다. 엘시아는 뒤따라온 호위 기사가 내민 손을 잡고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안드레아스와 함께 막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뜰에 있던 라케르타 공작이 서둘러 저택 안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응? 라케르타 공작이잖아?”

안드레아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낮은 목소리로 재빠르게 두 정령왕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이어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무슨 일이죠?”

“좀 전에 안으로 사라진 자가 묘약을 쓰기로 한 라케르타 공작이냐고 물으시는군요.”

“그래서요?”

“맞다 했더니 그럼 그에겐 사랑의 묘약을 쓸 수 없다고 하십니다.”

“뭐라고? 이유가 뭐죠!”

“……이유는 말해줄 수 없답니다.”

엘시아의 아름다운 아몬드형 눈매의 끝이 매섭게 위로 치켜 올라갔다. 푸른 두 눈동자엔 무시무시한 기세로 활활 타는 불꽃이라도 이는 것 같았다. 분노의 불꽃 말이다.

“무슨, 그런!”

안드레아스가 곤란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마지못해 입술을 달싹거렸다.

“다른 자를 물색하라고 하십니다.”

“……!”

“이 약을 눈꺼풀에 바르십시오. 공주님.”

그가 품 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권했다. 힐끗 쳐다본 후 마뜩찮은 얼굴로 대답했다.

“뭐죠? 이런 걸 바르면 애써 한 화장이 지워질 텐데.”

“잠시 정령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마법약입니다. 사랑의 여왕께서 하실 말씀이 있답니다.”

엘시아는 사정을 듣고도 화난 얼굴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화장이 지워진 채 파티에 참석하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비안나를 데리고 오지 않아 고치지도 못한다.

“그냥 당신이 계속 말을 전해주면 되잖아요?”

안드레아스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다 옆에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눈치를 살폈다. 들리지 않는 답을 한 듯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좋을 대로 하시랍니다.”

“그래, 할 말이 뭐죠?”

가시가 돋은 듯 뾰족한 목소리로 그의 옆 공간에 대고 물었다. 조금 간격을 두고 안드레아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저자의 경우 외에도 사랑의 묘약을 쓸 수 없는 경우가 있답니다. 그 경우에 해당된다면 요청을 들어주실 수 없다고 합니다.”

“황제에게 쓰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 외에도 더 있단 말인가요?”

“……그렇답니다.”

“어떤 경우죠?”

“이미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에겐 사용할 수 없답니다. 약을 먹여봤자 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군요. 그럴 경우 다른 이를 찾아보는 게 좋을 거랍니다.”

“그런…….”

엘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라케르타 공작도 결국 그 경우에 해당된단 말인가? 그자가 그 평민 여자를 사랑하고 있어서? 분노와 불쾌함과 패배감이 가슴 밑바닥에서 거세게 휘몰아쳤다.

***

“오, 어서 와라. 에일린, 여기서 보니 더욱 반갑구나.”

“안녕하세요? 브로미오스 님!”

환하게 웃으며 성큼 다가온 브로미오스를 향해 에일린이 드레스 자락을 붙들고 절을 했다.

“나도 있어, 에일린!”

“예! 반가워요. 엘레스트라, 아그로스 님도.”

이어 백룡 렌투스에게도 눈도장을 찍고 그들 모두에게 이런저런 근황을 물었다. 브로미오스가 에일린의 뒤쪽에 슥 눈길을 주더니 싱글거렸다.

“저기, 그대를 무척 만나고 싶어 하는 이가 있기에 내가 초대했는데 인사 나누도록 해라.”

“예? 저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요?”

“사람은…… 아니다.”

그녀의 바로 뒤에 있던 무척 키가 큰 남녀가 앞으로 다가왔다. 한 명은 누군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어, 에스타스 님! 에스타스 님 맞으시죠?”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가 태양처럼 환한 미소를 담뿍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에일린. 나다.”

에일린이 즉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정말 놀랐어요. 에스타스 님을 이곳에서 뵙게 되다니.”

“그대가 좀처럼 불러주지 않기에 궁금해서 와 본 거야. 브로미오스가 초대해주었지.”

지난번에 에일린을 만나고 난 후 에스타스는 루쿨루스 숲을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며 에일린과 히에무스에 대한 소문을 확인했다. 복잡하게 얽힌 사정을 전해 듣자 인간인 그녀가 어찌 됐을지 걱정이 됐다. 한번 만나러 가볼까 맘먹고 있던 차에 브로미오스에게서 이 파티에 대해 듣게 된 것이다. 다행히 밝고 건강해 보여 안심이 되었다.

다른 한 명은 에일린도 처음 보는 남자였다. 특이하게 갈색 피부에 금갈색 레게머리, 토파즈처럼 오묘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눈길을 끌었다. 그도, 에스타스도 다른 이들처럼 잠시 인간으로 변하게 해주는 약을 마신 모양이었다. 에일린은 상대가 지닌 마나를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정령의 광휘가 사라진 걸 보고 알 수 있었다.

‘이분은 누구지? 정령인가?’

***

“그대가 히에무스의 연인인가? 나는 ‘텔루스’라고 한다. 대지의 정령왕이지.”

주위 시선을 신경 쓴 듯 매우 낮은 목소리로 스스로를 소개했다.

“어, 그러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에일린은 얼떨결에 전세에서 늘 하던 대로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대지의 정령왕이 이곳에 웬일일까? 게다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했다니 좀 의아했다. 그가 히에무스의 재정 부분을 책임지는 존재라는 건 몰랐다. 히에무스는 그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신세를 지긴 하지만 왠지 껄끄러운 존재였기에. 텔루스가 잠시 그녀를 훑어보더니 입가에 엷은 미소를 담았다.

“그 장신구들, 잘 어울리는구나. 이 몸이 세공한 것이다.”

“어머나, 정말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활용하고 있어요. 참 멋진 솜씨를 지니셨네요!”

에일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찬사와 감사 인사를 늘어놓았다. 텔루스가 조금 상기된 얼굴로 코를 실룩거렸다.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니야. 사실 그보다 더 나은 것도 많이 있어. 그건 그냥 평범한 수준이지.”

“우와, 그래요? 전 이게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이어진 그녀의 칭찬에 그의 얼굴이 더욱 발갛게 물들었다. 쑥스러운지 연신 콧잔등을 긁적거리며 시선을 굴렸다. 그리 말주변이 있는 편이 아니기에 대화를 잇지 못하다 그녀의 주위에 떠 있는 세 정령을 보고 말을 건넸다.

“시종으로 부리는 권속까지 보낸 건가? 겨울의 왕이 정말 그대에게 신경을 많이 쓰나 보구나.”

“호오, 그래도 히에무스가 이런 걸 챙길 주변머리는 있나 보군.”

에스타스도 좀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 자리에 히에무스가 있었다면 비꼬는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번엔 에일린의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 너무 부끄러웠다.

“어, 그게…….”

제퓌가 얼른 앞으로 나서며 그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대지의 왕과 여름의 여왕께 인사 올립니다.”

“인사 올립니다!”

선수를 뺏긴 아두스와 프리기가 연달아 외쳤다.

“음, 그래. 이곳에서 모두 수고가 많구나.”

에스타스가 건넨 말에 이번엔 아두스가 냉큼 대답했다.

“수고는요, 저희 모두 신기한 경험도 많이 하고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하하, 그래? 인간 세상에 그렇게 재미있는 일이 많은 것인가?”

“물론입니다, 적어도 정령계보단 낫습니다요.”

아두스의 당돌한 대답에 텔루스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하하.”

그럴 것이다. 그가 취미로 읽는 소설을 봐도 인간들 세상은 정령들 세상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일이 많았다. 겨울의 정령왕과 저 브로미오스를 봐도 그런 것 같다. 이런 생활을 하는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어느 정도 인사가 마무리되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렌투스와 디아누스 집사가 다가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뵙게 돼 영광입니다.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곳 하레나 성에서 히에무스 님과 브로미오스 님의 보좌 일을 맡은 ‘렌투스’라고 합니다.”

“저는 집사인 ‘디아누스’입니다.”

“그렇군. 다들 고생이 많겠군. 안 봐도 뻔해. 히에무스 같이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자를 상대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닐 텐데.”

에스타스가 그간의 상황을 지켜보기라도 한 듯 조금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게요. 젊은 용들이 참 애쓰는군요.”

물의 정령 엘레스트라가 맞장구를 쳤다.

“하하, 아닙니다.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두 분 다 저희가 요청 드리는 일도 잘 따라주시고 다른 일도 잘 해내고 계십니다.”

“그런가? 의외로군.”

“자, 저쪽에 마실 거리를 마련해 놨습니다. 이동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다른 인간 귀족들과 인사도 나누시고요. 나름 재미있으실 겁니다.”

“하하, 그래? 그럼 가보도록 할까?”

텔루스가 눈을 빛내며 흥미가 동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들 그의 인도를 받아 이동하는데 누군가가 에일린을 불렀다.

“루쿨루스 양.”

돌아보니 렌투스의 여동생인 알리샤가 서 있었다. 흑룡인 스킬라 공주의 시녀로 있는 여자였다.

“예? 무슨 일이죠?”

“잠깐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저희 공주님께서 얘기를 나누자고 하십니다.”

“저랑 말인가요?”

“그래요.”

렌투스를 꼭 닮은 하얀 머리에 엷고 푸른 눈동자가 차갑고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루카스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며 경계하듯 질문했다.

“용 공주가 무슨 일로 부르는 거야? 할 말 있으면 직접 와서 할 것이지 지가 뭔데 가라마라 명령하는 거야?”

알리샤가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무시하고 에일린을 재촉했다.

“가시죠.”

“……예.”

“쳇, 뭐야! 내 말은 들은 체도 안 하는 건가?”

그가 항의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고귀한 용족에게 일각수 정도는 그다지 고려할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특히 어린 일각수니 더할 것이다. 루카스는 분통을 터뜨렸지만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했다. 분하지만 그녀가 내뿜는 용의 위세에 눌리고 말았다.

시녀가 안내한 곳은 파티가 열리는 홀 바로 옆 복도 안쪽에 위치한 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스킬라 공주가 등을 보인 채 창가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데려왔습니다, 공주님.”

에일린은 일단 상대가 공주 신분이기에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일어서는 인사를 했다.

“무슨 일로 절 보자 하셨는지요?”

스킬라가 그제야 천천히 에일린을 향해 돌아섰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 유난히 붉게 보이는 오렌지색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다. 뭔가 잔뜩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에일린 자신이 공주에게 저지른 잘못이 없는데 당황스러웠다. 에일린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스킬라는 좀 전에 히에무스가 에일린을 맞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듣는 상대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용족 특유의 냉정하고 새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묻겠다. 넌 히에무스 님과 무슨 사이지?”

“예?”

“히에무스, 내 하나밖에 없는 오라버니와 도대체 무슨 사이냐고?!”

“그건 왜 물으시죠?”

피가 연결되지 않았다 해도 히에무스와 스킬라 공주는 호적상으로 남매가 된 사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해오다니, 금방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듯 매서운 눈빛으로 말이다. 혹시 이 공주님도 그를 좋아하는 것일까? 남매의 정이 아니라 여자의 정으로.

“뭐, 어떤 사이든 상관없어.”

스킬라가 몸을 쭉 곧추세웠다. 그렇지 않아도 큰 키가 더욱 부각돼 주변 공기를 순식간에 압도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부유하고 강건한 드라코니아의 단 하나뿐인 적통 공주, 그것도 용의 화신이니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 따윈 아무것도 없었다.

“경고하겠어.”

2500년 동안 살면서 바라는 모든 걸 가졌고 소망하는 모든 일을 이루며 살아왔다. 그녀가 하는 행동에 거리낌이나 망설임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원하는 걸 가질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그녀를 막지 못할 것이다. 이런 보잘것없는 여자는 작은 방해물조차 되지 못했다.

“히에무스 님에게서 떨어지도록 해.”

“예?”

“내가 그의 여자가 될 거야. 적어도 나 정도는 되어야 그분에게 어울려. 너도 그 정도는 파악하고 있겠지?”

“…….”

외적으로 어울리는 걸 따진다면 그녀의 말이 옳겠지. 자신이 그와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줄곧 망설이는 문제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협박이나 강요에 의해 결정을 내리긴 싫었다. 에일린은 오기가 생겼다. 화가 나기도 했다. 신분이 조금이라도 높은 이들은 걸핏하면 그녀를 업신여기고 깔보며 막무가내 행동을 취한다. 이젠 그녀도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건 나와 히에무스가 결정할 일이지 당신이 참견할 문제가 아니에요.”

딱딱한 어투로 분명하게 대답했다.

“풋!”

가소롭다는 듯 스킬라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만만하네. 무슨 이상한 수법으로 그의 마음을 홀렸는지 모르겠지만 너 따위가 감당할 자리가 아니야. 좋은 말로 할 때 듣는 게 나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미끄러지듯 에일린 곁으로 다가왔다. 그 몸놀림이 인간의 것과 달랐기에 찰나의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바싹 접근한 그녀가 에일린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큰코다칠 거라고.”

“앗!”

그녀의 오렌지빛 눈동자에서 뜨거운 기가 빠져나와 그대로 에일린의 눈빛을 파고들었다. 칼날에 찔린 듯 눈에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스킬라의 눈빛이 만들어낸 송곳이 그녀의 눈 속을 사정없이 휘젓고 쑤셔대는 것 같았다.

“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에일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저히 참기 힘든 고통이 계속되었다.

“그만, 그만 하세요!”

두 손으로 눈을 감싸 안은 채 자신도 모르게 애원하며 소리쳤다.

“제발 부탁이에요! 제발…….”

“에일린 님!”

파팟!

놀란 세 정령들이 스킬라 공주를 향해 고드름을 만들어 날렸다. 공주에게 닿기 전에 시녀인 알리샤가 재빨리 마법으로 녹여버렸다. 공격이 먹히진 않았으나 스킬라의 마안(魔眼) 공격을 잠시 멈추게 했다. 제퓌가 그녀의 얼굴 가까이 날아올랐다.

“이게 무슨 짓이야? 흑룡 여자! 이분은 겨울의 왕의 연인이시란 말이야. 이런 짓을 하면 왕께서 가만두시지 않을 거야!”

“뭐?”

“그래! 우리 왕께서 정말 아끼는 분이셔. 각오해 둬! 네가 한 짓 다 일러바칠 거야!”

평소 차분한 편이던 프리기까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악을 쓰듯 외쳤다.

“헛소리! 그럴 리가 없어! 저따위 천한 인간이 어떻게 정령왕의 연인이란 말이냐? 알아보니 신분까지 미천한 버러지 같은 여잔데!”

“믿든 안 믿든 사실이야. 우리 왕께서 사랑하시는 분이니까.”

“뭐, 사랑? ……감히!”

그녀가 제 분을 이기지 못해 손에 마법의 힘을 담아 정령들을 향해 휘둘렀다.

“으악!”

제퓌와 프리기가 비명을 지르며 힘없이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제퓌! 프리기!”

“……!”

에일린은 여전히 고통이 가시지 않아 눈을 꼭 감은 채 두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정신이라도 잃었는지 아무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한 손을 내밀어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더듬었다. 스킬라가 즉시 그 손을 거칠게 밟아 짓이겼다.

“아악!”

그녀가 고통으로 무너지는 에일린의 머리채를 붙잡아 자신을 향하도록 했다. 통증을 견디지 못해 에일린이 애원했다.

“으윽, 놔, 놔줘요. 제발 놔줘…….”

“맹세하면 놔주지.”

“무슨, 무슨 맹세를…….”

“포기하겠다고 맹세해. 히에무스 님을 포기하겠다고. 인간이면 주제에 맞게 인간 남자나 찾아보라고! 그분은 내 거야.”

“그런…….”

“어서!”

“싫……어.”

이런 건 싫어. 그를 포기한다 해도 그건 스스로의 의지로 정할 것이다, 이런 강요가 아니라! 눈과 손에 극심한 통증이 밀려들었지만 에일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힘겹게 웅얼거렸다. 스킬라의 입술이 일그러지듯 위로 벌어졌다.

“그래, 계속 고집을 피우겠다 이거지? 인간 주제에 어차피 가망 없는 과분한 자리를 탐내면서 말이야. 좋아, 내 직접 알려주지.”

눈을 감싼 에일린의 손을 거칠게 떼어내며 낮게 덧붙였다.

“네 가련한 위치를.”

연이어 빨갛게 타는 듯한 눈을 크게 열어 에일린의 눈을 쏘아봤다. 그녀의 입에서 음산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아까보다 더 끔찍한 작열감이 섬광처럼 두 눈을 찔렀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마법의 힘 때문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퍽!

순간 뭔가가 스킬라를 향해 날아들어 가슴 부분을 강타했다.

“악!”

비명과 함께 흑룡 공주가 몸을 웅크리며 비틀거렸다. 그와 동시에 에일린의 몸도 휘청거렸다. 바닥에 쓰러지려는 찰나 누군가의 팔이 다가와 단단히 받쳐주었다. 힘없이 그 팔에 안겼다. 이어 무시무시한 분노를 담은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짓이냐?!”

겨울의 정령왕 히에무스, 아니 지금은 마법약을 삼켜 인간 노릇을 하고 있는 라케르타 공작이었다.

***

“에일린! 괜찮으냐?”

히에무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재빨리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에일린은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입술을 악물고 고통을 견디는 중이었다.

“으…….”

“에일린!”

“아파, 히에무스. 나, 눈이 너무 아파요…….”

“……!”

“눈 속이 타는 것 같아!”

에일린이 힘겹게 중얼거리며 그의 품 안에 무너지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히에무스가 떨리는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외관상으론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그의 인상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서둘러 눈꺼풀 위에 손을 대고 치유력을 행했다. 지금은 인간과 비슷한 몸을 가진 상태라 순수한 정령일 때보다는 치유력이 약한 편이지만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손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 나와 즉시 타는 듯한 통증을 가라앉혀 주었다. 그제야 에일린은 악물었던 입술을 벌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리고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

시야가 온통 까맸다. 싸늘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지나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오직 암흑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아까보다 더 크게 온몸이 떨려왔다.

“뭐지? 앞이, 앞이 보이지 않아!”

어떡해야 할지 몰랐다. 당혹감에 눈을 깜빡이고 손을 앞으로 내밀어 이리저리 휘저으며 외쳤다.

“아무것도 안 보여! 어떡해. 나, 나는!”

두려움에 심장이 쿵쿵 울리고 몸의 흔들림도 강도를 더했다.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지? 좀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떡하지? 어쩌면 좋아.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그때 따뜻한 히에무스의 팔이 다가와 와락 끌어안더니 곧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 에일린. 곧 나아질 테니.”

그가 그녀의 얼굴을 단단히 감싸 안아 그의 가슴에 꼭 밀착시켰다. 끊임없이 머리와 등을 쓰다듬으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히에……무스.”

사정없이 떨리던 몸이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위로 안아 올렸다. 이어 또랑또랑한 아두스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으아, 어떡해! 에일린 님. 정말 앞이 안 보이시는 건가요?”

“아두스…….”

그가 히에무스에게 에일린이 처한 상황을 알린 것이다. 세 정령들 중 가장 냉정한 편이던 그의 얼굴도 사색이 되었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두 동료의 모습과 눈을 다쳐 고통스러워하는 에일린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에일린의 상태가 다소 진정되자 히에무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스킬라를 향했다. 그녀도 좀 전에 히에무스가 던진 얼음공에 가슴을 맞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시녀인 알리샤가 부축하려 하자 거칠게 뿌리치며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타격을 입긴 했지만 흑룡의 몸이니 그리 큰 부상을 입진 않았다. 히에무스에게서 음절 하나하나가 얼음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지독히도 싸늘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 에일린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어서 말해라.”

“…….”

“어서 말하라고!”

“용의 저주를 내렸어요.”

“뭐?”

“용의 저주를 내렸다고요. 그녀가 영원히 당신 모습을 볼 수 없게요.”

“뭐라고?”

에일린은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저 용 공주가 뭐라고 한 건가? 영원히 시력을 잃게 된다는 말인가? 거짓말! 자신이 저 여자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지? 그녀에게 뭐라고 따지려는 순간 히에무스의 냉혹한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어서 해제해라, 흑룡 여자! 내 손에 죽고 싶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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