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눈꽃이 피는 날 (12/24)

11. 눈꽃이 피는 날

그날 밤, 에일린은 귀가하고 나서도 바로 잠들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뒤척였다. 무도회의 여운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참으로 늠름하고 멋졌던 히에무스의 모습과 그와 춤을 추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좀처럼 믿지 못했는데 정말 히에무스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것도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완벽한 귀족의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너무나 놀랍고 마음이 설렜다.

‘그가 정말 인간이 된 것일까?’

아니, 마법약 때문에 일시적으로 인간 모습으로 보이는 것뿐이란 걸 안다. 하지만 앞으로 지금처럼 계속 살아갈 수 있다면 그냥 그대로 좋을 것 같았다.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황홀한 상념에 젖어 있는데 마음 깊숙한 곳에서 또 하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신 차려! 그건 진짜가 아니야. 그의 사랑도, 인간인 그의 모습도!’

“알고 있어. 모두…… 진짜가 아니라는 걸.”

물론 알고 있다. 그의 사랑이 묘약으로 비롯된 거라는 것도. 그런데도 그가 보여주는 행동들에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다. 그런 현실적인 것들을 무시해버린 채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질끈 눈을 감고 도리질을 쳤다.

“정신 차리자. 어떻게 살게 된 새 인생인데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사랑을 찾아야지.”

그래, 이번만큼은 정말 멋진 사랑을 할 거야. 가짜가 아닌 진짜 사랑, 환상이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사랑, 제대로 된 사랑을 할 거라고. 그러니까……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해. 몸이 열아홉 살이 됐다고 마음까지 열아홉 살처럼 행동하면 안 되잖아?

‘눈을 똑바로 뜨자. 그를 위해서라도 그의 사랑을 덥석 받아들여서는 안 돼. 난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돼.’

그런 생각의 소용돌이에 빠져 단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다음 날 오후. 황제가 머무는 본궁인 라피스 궁을 향해 분주히 걸어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리히트 시종장이고, 다른 한 명은 이디오마 신관이었다. 긴 회랑을 통과한 후 삼엄한 경비를 지나쳐 어느 방 앞에 이르렀다. 리히트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들어간 후 고했다.

“폐하, 신관께서 오셨습니다.”

“음, 어서 오시오. 이디오마 신관.”

이디오마 신관이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따라 들어가 깊이 허리를 굽혔다. 지난번에 와봤던 알현실만큼은 아니지만, 여기도 충분히 넓고 호화롭게 꾸며진 방이었다. 황제가 금빛 조각으로 마감된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개인 집무실인 것 같았는데 시종 외에 다른 신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제 폐하. 강녕하셨습니까?”

예전이라면 으레 읊조렸을 긴 찬양사는 늘어놓지 않았다. 황제가 정식 알현장이 아닌 개인 장소에서 만날 때는 그런 인사를 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덕분에 잘 지냈소. 오늘 또 그대의 조언이 듣고 싶어 불렀소.”

“하문하소서.”

렉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용건을 꺼냈다. 잠시 얼굴을 들어 눈길을 보냈지만 깃털 펜을 들고 서류를 검토하던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였다. 이디오마에게 크게 대수롭지 않은 문제처럼 보이고 싶은지도.

“저번에 그대가 해준 조언대로 이것저것 그 여인에게 시도해 봤소. 그대도 봤겠지만 별로 통하진 않았지. 다른 걸 시도해 봐야 할 것 같은데 뭔가 제안해줄 사항이 있나 해서 부른 거요.”

이디오마 신관이 공손히 손을 모아 쥔 자세로 서서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동안 그도 이 문제에 대해 고심했다. 몇 가지 다른 방법도 생각해뒀다. 그중 하나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한 번밖에 지켜보지 않았지만 그 여인에 대해 나름 파악한 바가 있습니다. 그 여인은 남다른 자비심을 지닌 것 같더군요.”

“잘 봤소. 기본적으로 선한 마음을 가졌다고 할까? 물욕도 별로 없고, 탐욕적이지도 않고. 그런 처지에 놓인 자들이 좀처럼 갖기 힘든 성향이지.”

“처한 환경과 상관없이 그런 인성을 갖춘 자들이 가끔 있지요. 그 여인의 그런 부분을 자극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분주히 움직이던 깃털 펜이 멈췄다. 새파랗게 번득이는 눈동자가 신관을 향했다. 황제가 앉아있고 자신이 서 있는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황제의 시선이 사정없이 내리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물리적인 위치와는 상관없는 것인가? 신분상으로 최정점에 위치한 분이니 아무리 낮은 자세를 취한다 해도 한없이 높을 뿐이겠지.

“그런 부분을 자극하라고?”

“그렇습니다.”

“어떻게 말이오?”

다시 느릿하게 깃털 펜이 움직였다. 이디오마도 조금 느린 어조로 말을 이었다.

“고아원이나 자선 시설을 활용해 보십시오.”

“고아원이나 자선 시설이라니?”

깃털 펜이 멈칫거렸다. 황제가 고개를 들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카르디아에 있는 열두 개의 아벨라 신전 중 제 7신전부터 12신전까진 민간인 대상으로 각종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진료소나 고아원을 운영하거나 빈민 대상으로 자선 사업을 벌이기도 하고요.”

“알고 있소.”

“그중 한 곳을 방문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하십시오.”

“봉사할 기회라니? 그런 곳에 데려가 일을 시키란 말이오?”

이제 렉스는 깃털 펜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양손에 손깍지를 끼며 진중하지만 의아한 눈빛을 보내왔다.

“예.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별로 관심이 없고 명리에 치우치지 않는 이에겐 오히려 그런 방법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진정 그럴까? 그런 곳을 좋아하는 여인이 있을까?”

“물론입니다. 인간의 다른 부분, 즉 동정심이나 자비심을 자극해 마음을 채워줄 수 있으니까요.”

“흠…….”

렉스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스스로가 누군가의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일단 한번 시도해 보십시오. 혹시라도 그 여인이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성과를 얻게 되실 겁니다.”

“무슨 성과 말이오?”

“취약 계층이 모인 그런 곳이야말로 한 인간의 그릇을 파악하는 데 가장 적절한 장소니까요.”

렉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군. 그만한 게 없겠군. 그렇다면 이참에 다른 공녀들의 그릇도 확인해 보면 어떨까?

“적당한 장소를 추천해주시오.”

“제 9신전이 어떻겠는지요? 여 신관들이 머물며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위치나 규모 면에서 제일 적당할 것 같사옵니다.”

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던 렉스의 미소가 좀 더 진한 색을 띠었다. 이디오마가 이번에 내놓은 조언도 꽤 만족스러웠다.

“좋소. 거기로 정하겠소.”

노련한 신관의 입가에도 엷은 웃음이 머물렀다. 깊이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대꾸했다.

“제가 9신전에 연락해 놓겠습니다.”

“그러시오.”

그날 바로 공녀들의 처소에 황제가 보낸 서신이 전달되었다. 다가오는 제국의 휴일에 황제가 고아원을 방문할 예정인데 함께 가기를 원하는 공녀들이 있다면 자율적으로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스킬라나 레나테 공주는 물론 엘시아 공주도 같은 서신을 받아들었다.

“아젤란의 황제 폐하께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걸까요? 고아원 방문이라니. 뭐, 자율 참석이라고 하니 굳이 가지 않으셔도 되겠지만요.”

엘시아의 시녀인 비안나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한참 동안 서신을 손에 쥐고 응시하던 엘시아가 말했다.

“의도가 뭔지 알 것 같은데…….”

“예?”

엘시아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건 자비심 시험이야.”

“자비심 시험이라고요?”

“황제가 이제 본격적으로 행동을 시작할 셈인가 보군.”

“본격적인 행동이라면……?”

“황후감 물색 말이야.”

“예? 황후감 물색이라고요?”

“그래. 그러니 자율로 참석하라지만 황후 자리에 뜻이 있다면 나가봐야 하는 거라고.”

“그럼, 엘로드 님과의 약속은 어쩌시고요? 같은 날짜인데요?”

“당연 취소해야지.”

비록 저번 무도회에서 거절의 말을 듣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남아 있다면 뭐든 시도해 볼 예정이었다. 자비심 연출. 그건 그녀의 전문 분야였다. 아칸 왕국에서부터 그쪽 방면으론 일가견이 있었다.

비슷한 내용의 서신이 에일린에게도 전해졌다. 그녀에게는 자율로 참석하라는 문구는 빠진 채였다. 대신 이번 휴일 산책 친구 일을 신전에 딸린 고아원에서 함께해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아직 글자를 읽는 게 서툰 에일린을 대신해 애플턴 부인이 서신을 읽어줬다.

“사흘 후 돌아올 휴일에 함께 고아원을 방문할 예정…….”

그녀가 의문이 가득한 낯빛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고아원이라니. 교제 장소로 고아원을 택하셨단 말인가? 젊은 시절부터 선황후를 모시며 오랜 시간 곁에서 렉스를 지켜봐 왔는데도 불구하고 가끔은 정말이지 그의 속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도 고아원이 있나요?”

에일린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애플턴 자작 부인에게 물었다. 그녀가 석연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있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많으니까요.”

“주로 신전에서 운영하나 보군요?”

“예. 황도 카르디아에 있는 12개의 아벨라 신전 중 제 1신전부터 제 6신전까진 주로 국가 행사를 치르거나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업무를 수행합니다. 거의 대부분 남자 신관들이죠.”

변경 왕국에서 온 에일린을 배려해 애플턴 부인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나머지 제 7신전부터 제 12신전은 주로 여자 신관들이 머물면서 평민들을 대상으로 각종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산하에 고아원과 진료소도 운영하고요.”

“그렇군요.”

“괜찮으시겠어요? 영애?”

“뭐가요?”

“이런 장소를 방문하시기 꺼려지시지 않을까 해서요. 거칠고 어수선한 환경일 텐데.”

애플턴 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괜찮아요. 오히려 잘 된 걸요?”

“잘됐다고요?”

“예.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던 곳이에요. 언젠가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잘 됐네요.”

“…….”

황제뿐만 아니라 에일린의 마음도 여전히 읽어내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아가씨들은 그런 장소를 궁금하게 여기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헤헤, 그럼 이제부터 준비를 좀 해야겠네요.”

에일린이 신이 나는 듯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내며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준비……라니요?”

화려한 무도회에 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근사한 장소에 가는 것도 아니데 무슨 준비가 필요하단 말인가?

“아이들에게 줄 만한 걸 가져가면 좋잖아요? 과자라든가 장난감이라든가 아니면 옷가지나 뭐 그런 것들이요. 조금이라도 마련해 가고 싶어요.”

“그럴…… 필요 있을까요?”

“당연하죠! 전 부엌에 가서 과자라도 구워야겠어요. 시장도 다녀오고요.”

애플턴 부인은 곤혹스러운 기색으로 에일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에일린이 들뜬 얼굴로 신나게 방 밖을 나갔다. 무도회 때에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즐거움과 기대감이 가득해 보였다. 지금껏 휴일에 산책 소임을 하러 갈 때는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애플턴 부인은 그제야 황제의 의도를 좀 알 것 같았다. 에일린이 사라진 방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역시 폐하시군.”

세 정령들도 에일린과 함께 방 밖으로 나갔다. 프리기가 조금 멀찍이 에일린 뒤를 따라 날며 아두스에게 질문했다.

“고아원이 뭐 하는 곳이야? 거기도 저번에 가본 곳처럼 재미있고 으리으리한 곳인가?”

“아닐걸? 고아원이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모아서 돌보는 데라고. 별로 화려하거나 멋지지 않아.”

제퓌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래? 이번엔 무척 특이한 장소로군, 그래.”

“인간 우두머리가 저번부터 자꾸 색다른 장소를 보여주는 것 같아. 덕분에 늘 같은 곳만 산책하는 것보다 흥미롭긴 해.”

아두스의 말에 제퓌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에일린 님 마음에 들려고 나름 연구를 많이 하나봐. 얘들아, 난 이만 왕께 오늘 일 보고하러 갔다 올게.”

“그래라. 이번 휴일엔 에일린 님이 고아원에 가신다는 말도 전해드려.”

아두스가 진지한 얼굴로 한마디 더했다.

“우리 왕께서도 좀 더 분발하셔야 할 것 같으니 말야.”

“응, 알겠어.”

***

어느덧 예고한 날이 되었다. 무도회에 참석하느라 산책 친구 소임을 한 번 건너뛰었던 탓에 그 일은 오늘 외에도 한 번 더 남아 있었다. 에일린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가져갈 짐이 제법 많아 이번에도 마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애플턴 부인과 함께 마차에 오르려는데 케일론 역시 말을 탄 채 대기한 모습이 보였다.

“어? 오늘은 함께 안 가셔도 되잖아요?”

그가 말 위에 올라탄 자세 그대로 힐끗 눈길만 주며 대답했다.

“폐하를 호위하기 위해 가는 겁니다.”

“그래요? 헬무트 경이 따라가시면 될 텐데…….”

“헬무트 경이 바쁘신 것 같더군요.”

“그렇구나.”

케일론은 언제나처럼 무심한 쉰 목소리로 답한 뒤 에일린이 마차에 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번처럼 시간이 걸린다고 투덜거리지도 않았다. 그녀와 함께 어디론가 향하는 걸음이, 그 여정이 싫지 않았다.

‘나란히 걷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아.’

사실 좀 전에 했던 말은 거짓이었다. 그의 휴일이면 으레 다른 궁정 마법사인 헬무트 경이 근무를 했고, 마법청엔 대신할 다른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굳이 이날 근무하겠다고 헬무트 경에게 고집을 부렸다.

‘차라리 함께 휴일을 보내는 게 나아.’

그렇지 않으면 에일린이 산책 친구 일을 하러 나간 날마다 이상한 조바심과 초조함이 밀려와 견디기 힘들었다. 떨어져 있어도 하루 종일 그녀만 생각하고 그녀가 집으로 돌아올 시간만 기다리곤 했다. 황제의 여인이 되어가는 것 같은 그녀를 보는 게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보지 않으면 더 괴로웠다. 스스로도 이런 자신이 낯설게 느껴져 짐짓 자신의 마음을 부정해 보기도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에일린을 좋아하는 것이다. 평생 내색하지 못하겠지만…….

“출발하라!”

모든 준비가 끝나자 케일론은 황급히 출발 지시를 내렸다. 겨울답지 않게 무척 따스한 햇살이 내리비쳤다.

궁전에 당도해 보니 그 어느 때보다도 방대한 규모의 행차 준비가 갖춰져 있었다. 황제의 마차뿐만 아니라 공녀들이 타고 갈 마차까지 준비된 탓에 넓은 황궁 뜰이 가득 들어찬 느낌이 들었다. 엘시아와 레나테 등 눈에 익은 공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스킬라 공주까지 있는 걸 보니 공녀들 대부분이 참여하는 듯했다. 다들 표정이 심드렁해 보이는 게 억지로 나온 것 같았다. 모두 차림새만큼은 무도회 참석 때 못지않게 휘황찬란했다. 에일린을 보자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놓고 입을 삐죽거리는 이도 있었다.

“어서 오너라, 에일린.”

“폐하.”

밝은 표정의 렉스가 살짝 눈썹을 늘어뜨리며 설명했다.

“보다시피 오늘 고아원 봉사는 다른 공녀들도 함께 가기로 했다. 사람이 많으면 더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해 미안하다.”

“아닙니다, 폐하. 전 괜찮아요.”

에일린이 웃으며 대답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서 오늘은 그대도 마차를 따로 타고 가야 할 것 같구나. 신하들이 형평성 문제를 거론해서 말이지.”

그가 그의 뒤에 시립한 몇 명의 신하들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엘로드도 굳은 표정으로 끼어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폐하, 전 진짜 괜찮습니다.”

정말이다. 오히려 더 좋았다.

“그래, 이해해줘서 고맙구나. 자, 그럼 출발해 볼까?”

에일린은 다시 예법에 맞는 자세로 절을 하고 애플턴 부인과 함께 타고 왔던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아……!”

“에일린!”

마차 안에 정령 모습인 히에무스가 앉아 있었다. 하마터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잠깐 행동을 멈춘 채 멍하니 있자 바로 뒤에 있던 애플턴 부인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왜 그러시죠? 영애.”

“아, 아니에요.”

아무렇지 않은 듯 황급히 히에무스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이어 애플턴 부인이 맞은편에 자리를 잡자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히에무스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바로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 내밀어 애플턴 부인의 이마에 살짝 댔다. 즉시 부인의 눈꺼풀이 내려오더니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이러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

“무슨 일이세요? 히에무스, 여기까지 오다니.”

에일린이 애플턴 부인의 머릿밑에 조심스럽게 쿠션을 밀어 넣으며 물었다. 무도회 이후 처음 보는 거라 반가웠지만 갑자기 나타나니 당황스러웠다.

“오늘 나도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온 거다. 그대가 괜찮다고 한다면.”

그가 걱정스러운 듯 에일린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그도 에일린이 산책 친구 일을 할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전 괜찮긴 한데 당신이 심심할지도 몰라요. 함께 얘기 나누거나 시간을 보낼 겨를이 없을 테니까요.”

즉시 히에무스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넘쳤다.

“상관없어. 그대를 곁에서 볼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에일린도 기뻤지만 부러 내색하지 않았다.

***

제 9신전의 모습은 지난번 방문했던 제 3신전과 비슷했다. 역시 저번에 본 신관들과 흡사한 분위기를 지닌 간소한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이 죽 늘어서서 맞이해주었다. 두건 대신 정갈한 흰색 베일을 쓴 채 다들 엄숙하고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화려한 옷을 걸친 중년 여 신관이 한 걸음 앞에 나서더니 허리를 깊이 수그렸다.

“어서 오소서, 제국의 주인이시며 아벨라의 광명한 축복을 받으신 이여. 진정 환영합니다. 저는 이곳 신관장을 맡은 아벨라 여신의 미천한 종 ‘에이다’라고 합니다.”

“반갑소. 에이다 신관장.”

렉스가 위엄 있는 태도로 인사에 답했다. 곧이어 함께 온 공녀들을 소개했다.

“안드로스 대륙 곳곳에서 오신 귀빈들이시오. 고아원 봉사에 관심을 가지고 기꺼이 참여하러 와주셨으니 잘 대해주면 고맙겠소.”

호리호리한 몸매에 조금 신경질적인 인상의 신관장이 딱딱한 미소를 짓더니 공녀들을 향해서도 고개를 숙였다.

“그러시군요. 모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겠군요.”

떨떠름한 표정의 공녀들이 일제히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을 취했다. 에일린도 황급히 같은 동작을 따라 했다. 에이다 신관장이 그녀 뒤에 서 있던 몇몇 신관들을 향해 일렀다.

“자매분들, 여신도들을 인도하세요.”

“알겠습니다.”

무심한 얼굴의 신관들이 동시에 대답하며 각자 맡은 일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중 은빛 수가 놓인 드레스를 입은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통통한 몸매의 신관이 에일린과 스킬라 공주, 엘시아와 레나테 공주를 한곳으로 불러 모았다.

“저는 1등 신관 ‘제니아’라 합니다. 오늘 신도분들께서 봉사 활동을 하실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공녀들을 따라온 여러 명의 시녀도 뒤를 이었다. 그새 잠에서 깨어난 애플턴 부인도 가져온 짐을 에일린과 나눠 들고 느릿하게 걸어갔다. 바로 뒤쪽에 있던 스킬라 공주는 계속 에일린을 노려보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녀의 눈에 에일린과 나란히 걷는 히에무스와 작은 세 정령이 선명하게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히에무스가 저번 무도회에서처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윽한 푸른 눈동자에 단 한시도 다른 것을 담지 않은 채 오직 에일린만을 품었다.

***

제니아 신관이 안내한 곳은 유아기를 지난 조금 큰 아이들이 지내는 공간이었다. 예닐곱 살에서 열 살 무렵 아동들이 머무는 기숙사였다. 한쪽 벽에 십여 개씩, 다른 층에 있는 방까지 합해 도합 스무 개가 넘는 방이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여신관 두 명과 함께 좁은 복도에 모두 나와 길게 서 있었다. 남녀가 섞인 채 족히 백 명은 넘을 듯했다. 삐뚤빼뚤 줄을 서긴 했지만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연신 서로를 토닥거리고 건들거렸다. 공녀들과 에일린이 복도로 들어서자 잠깐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한데 모아졌다. 특히 여자아이들의 눈에 놀라움과 황홀함이 잔뜩 어렸다. 공녀들의 차림새와 아름다운 용모에 감동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운 분위기로 되돌아갔다. 지켜보던 대부분의 방문객이 인상을 찡그렸다.

짝짝!

제니아 신관이 박수를 치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자아, 여기! 모두 주목하세요!”

웅성거리던 소음이 잠깐 줄어들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니아 신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오신 분들은 안드로스 대륙 곳곳에 있는 왕국에서 오신 공주님들이세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오셨으니까 잘 지내도록 하세요.”

제니아 신관이 예리한 눈빛으로 원생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잘 알겠지요? 여러분!”

“예에!”

백 명은 넘을 것 같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질렀다. 고막을 찢을 듯 우렁찬 외침에 공녀들은 다시 한번 눈살을 찌푸렸다. 오래된 건물 특유의 퀴퀴한 냄새와 아이들에게서 나는 땀 냄새와 발 고린내가 코를 자극했다. 전세에 운아일 때 아이를 키워본 에일린과 용족의 화신인 스킬라 공주 일행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엘시아 공주와 레나테 공주는 속이 울렁거리는 걸 간신히 참았다. 아이들은 목청껏 대답을 하자마자 다시 떠들어대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유지되던 대열이 흔적도 없이 흐트러졌다. 제니아 신관이 코끝에 주름을 잡으며 잠시 지켜보다 공녀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신도님들. 저희는 이만…….”

레나테 공주가 돌아서려는 그녀를 황급히 붙잡았다.

“아니, 잘 부탁한다니, 도대체 뭘 하라는 거죠?”

“뭘 하다니요? 봉사 활동을 하러 오신 게 아닙니까? 그럼 거기에 맞게 적절하게 알아서 행동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

“다른 신도분들이 오실 때도 저희 신관들은 자리를 비웠습니다. 평소 고된 노동과 업무에 지쳐있는 신관들의 일을 신도분들이 대신해주시는 거지요.”

엘시아가 황당하다는 낯빛으로 질문했다.

“그럼 평소 신관들이 하던 일이 뭐죠?”

“주로 아이들 목욕이나 청소, 식사나 간식 챙겨주기, 교리 교육이나 놀아주기 등이지요. 물론 일꾼들도 있지만 오늘은 휴일이라 대부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니 나머지 구체적인 사항들은 원생들에게 물어가며 하시길.”

신관이 당황한 표정의 공녀들을 잠시 살펴본 후 말을 이었다.

“저희 신관들은 이제 기도 시간이라 가봐야 합니다.”

“…….”

제니아 신관이 이제 제 할 일은 다 끝났다는 듯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던 다른 신관 두 명을 거느린 채 바쁜 걸음으로 사라졌다. 레나테 공주가 노골적으로 불만이 가득한 새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 참. 기가 막혀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시녀와 함께 서 있으려니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꺅! 뭐야!”

여자아이들이 엘시아 공주 주변에 모여들어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잡아당겼다.

“안녕하세요? 정말 공주님들이에요?”

“에이, 거짓말! 공주님이 왜 여기 와?”

“와아, 정말 예쁘다! 옷도 예쁘고, 얼굴도 고와. 정말 공주님인가 봐.”

“공주 아냐! 머리가 짧잖아!”

“맞아! 가난한 사람들이나 머리가 짧지. 돈 받고 팔아먹었을 테니까.”

엘시아의 시녀인 비안나가 즉시 달려드는 아이들의 손을 거칠게 떼어냈다. 그 바람에 한 여자아이의 몸이 복도 바닥에 나뒹굴었다.

“으아앙!”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다른 여자아이 두어 명도 따라 울먹거리더니 곧 악을 쓰며 울어댔다. 지켜보던 조금 큰 남자아이들이 소리쳤다.

“으악! 공주님이 애들을 다치게 했어!”

“무섭다! 어서 신관님께 이르자!”

그를 시작으로 십여 명의 아이들이 복도 끝으로 우르르 내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변이 온통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레나테와 엘시아가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스킬라가 일그러진 얼굴로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아이 울음소리와 각종 소음에 귀가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법을 써서 주변을 정리할까 마음먹던 순간이었다. 아이들 목소리를 단번에 압도하는 요란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깡, 깡, 깡!

“모두 주목해! 선착순이야!”

에일린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주물 주전자를 한 손에 쥔 채 막대기로 힘껏 두드리며 외쳤다. 아이들 방에 있는 걸 가져온 것 같았다. 그녀 앞에 집에서 준비해왔던 짐 꾸러미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애들아! 여기 과자 오십 봉지랑 장난감 삼십 개가 있어. 와서 받아가도록 해. 다 주지는 못하니까 빨리 오렴. 예쁜 자세로 서 있는 예쁜 애들에게만 줄 거야. 자, 어서 와서 줄을 서!”

“와아아!”

좀 전까지 울던 아이들도 벌떡 일어나 에일린 앞으로 다가와 줄을 서기 시작했다. 엎치락뒤치락 뛰어와 나름 반듯한 자세를 취하려 노력했다. 정신없이 소란스럽던 실내가 금방 차분해졌다. 에일린이 진지한 얼굴로 발뒤꿈치까지 들어가며 슥 둘러봤다.

“어, 오른쪽 끝줄은 별로 안 예쁘잖아?”

“아니에요! 다시 설게요.”

당황한 표정의 아이들이 재빨리 줄을 가다듬었다. 몇몇 큰 애들이 나와 스스로 줄 모양과 아이들 자세를 바로잡아주기 시작했다. 에일린이 즉시 그 아이들에게 말했다.

“오, 너희 네 명, 정말 훌륭하다. 너희들, 반장 한번 해 볼래?”

얼굴에 주근깨가 잔뜩 박힌 붉은 머리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반장이 뭔데요?”

“한 무리를 대표하는 사람을 말해. 한 나라에 임금님이 계시듯 조그만 무리에도 이끄는 사람이 필요하거든. 어때, 해 볼 거야?”

“예! 해 볼게요.”

에일린이 손짓하자 네 명의 아이들이 냉큼 다가왔다. 에일린이 나머지 아이들을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두 명 더 있으면 좋겠는데 한번 해 볼 사람! 여자애들 중에 없을까?”

조금 키가 큰 여자아이 하나와 작지만 영리해 보이는 여자아이가 나섰다.

“우리 둘이 해 볼게요.”

“좋았어. 반장들 모두 이리 와. 반장들에게 알려줄 내용이 있어.”

모두 경쾌한 발걸음으로 모여들었다.

“뭘 해야 하는데요?”

“맹세와 선서부터 해야 해.”

에일린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맹세와 선서요? 그게 뭔데요?”

한 아이가 묻자 붉은 머리 소년이 냉큼 대답했다.

“나 알아. 그건 신에게 자기 의지를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거야.”

“그래, 잘 알고 있네. 한 무리를 대표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거든. 맹세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거야. 지금이라도 자신 없는 사람은 포기하도록 해.”

“무슨 맹세를 해야 하는데요?”

“몸이 약한 다른 아이들을 잘 돌보고, 이끌어 주고, 질서도 잘 지키고, 모범이 되도록 노력할 거라는 다짐을 해야 하는데……. 어때? 좀 어렵긴 할 텐데?”

아이들이 저마다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그 정도 맹세라면 할 수 있어요.”

“좋아. 시원시원한 게 너 참 마음에 든다. 난 에일린이라고 해. 반장님 이름은 뭐지?”

붉은 머리 소년이 조금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전 ‘발디’라고 해요.”

“반갑다, 발디 군. 네가 내 첫 번째 반장이야.”

에일린이 손을 내밀었다. 발디가 멀뚱거리며 바라보자 에일린이 즉시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가볍게 흔들었다.

“이건 악수라는 거야. 네가 내 친구이자 동료가 됐다는 뜻이지.”

“친구는 알겠는데 동료는 뭐예요?”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소중한 친구라는 의미야.”

“같은 일을 하는 소중한 친구라고요?”

“그래. 그러니 오늘 잘 부탁해. 믿음직한 발디 군.”

“예!”

수줍으면서도 자랑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어린 소년이 가슴을 펴고 활짝 웃었다. 에일린도 빙긋 웃으며 다음 행동을 계속했다.

“자, 오늘 나의 동료가 된 반장들. 맹세를 하자.”

에일린이 오른손을 들고 엄숙하게 선창을 했다.

“나는 오늘 반장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그 임무를 열심히 수행할 것을 성스러운 아벨라 여신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맑고 앳된 아이들의 맹세가 끝나자 곧이어 그들에게 첫 임무가 떨어졌다.

“자, 반장들! 먼저 아이들에게 여기 있는 과자와 장난감을 나눠주도록 해. 수량이 많지 않으니 배분을 잘해야 해. 그거 무척 중요한 일이거든.”

에일린이 옆에 있는 붉은 머리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발디 군! 어떡하면 좋을지 의견을 말해줄래?”

소년이 한 손으로 턱을 감싸쥔 채 생각에 잠기더니 곧 얼굴을 들었다.

“제 생각엔 어린아이들부터 나눠주면 어떨까 해요. 우린 컸으니까 참을 수 있거든요.”

에일린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 정말 멋지고 좋은 생각이다! 과연 반장님다워!”

“다른 친구들 의견은 어때?”

“좋아요! 그렇게 하세요.”

큰 아이들이 연이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조했다. 얼굴 한편에 아쉬운 기색이 엿보였지만 다들 밝은 얼굴로 수긍해주는 분위기였다. 에일린은 반장 아이들이 물품을 나눠주는 모습을 지켜보다 엘시아와 레나테 등 공녀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멍한 표정으로 굳어있었다. 살짝 기가 눌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기, 공주님들도 가져온 선물이 있으시다면 지금 나눠주시면 어떨까요?”

엘시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어요! 혼자 너무 잘난 체하지 말아요!”

그러고는 옆에 있는 시녀를 다그쳤다.

“뭐 하는 거야? 빨리 꾸러미를 풀어!”

“예, 공주님…….”

레나테 공주 역시 일그러진 얼굴로 한마디 쏘아붙였다. 그녀는 아예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아 빈손이었다.

“보잘것없는 물건 몇 개 가져와서 생색내기는. 하긴 똑같이 근본 없는 평민이니 밑바닥 인간들 사정은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겠지.”

듣고 있던 애플턴 부인이 항의했다.

“말이 너무 지나치시군요, 공주님.”

레나테 공주의 시녀가 맞받아쳤다.

“뭐가 지나쳐요? 사실을 말한 건데.”

“뭐예요!”

벌게진 얼굴로 애플턴 부인이 따지려 하자 에일린이 제지했다.

“됐어요, 부인. 쓸데없는 데 힘쓰지 말고 다음 할 일이나 하자고요.”

“다음 할 일이라면……?”

“많아요. 청소도 해야 하고 애들도 좀 씻겨야 할 것 같고.”

애플턴 부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시녀인 자기 자신의 일이 될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귀족가 영애로 자란 터라 그런 노동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레나테 공주와 스킬라 공주, 엘시아 공주는 데리고 온 시녀들에게 명령했다.

“가서 청소 좀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귀족 출신 시녀들이 벌레라도 씹은 표정으로 우물쭈물 움직였다. 다른 이들이 눈치를 채지 않게 애플턴 부인도 한숨을 쉬며 문이 열려진 한 방으로 느릿하게 걸어갔다. 그때 에일린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부인, 저랑 함께해요. 그리고 아이들도 같이할 거예요.”

“예?”

에일린이 다시 반장들을 향해 말했다.

“자, 반장들! 제일 나이 많은 언니, 오빠들이라면 청소 정도는 우리와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반장들 의견은 어때?”

여섯 명의 반장들이 저들끼리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씩씩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평소에도 곧잘 하던 일인걸요. 다 함께해요!”

“좋았어! 시작하자. 깨끗하게 잘 끝낸 반장에겐 내가 직접 만든 손수건이랑 ‘최고의 반장’ 칭호를 줄게.”

“야호, 신난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말해주었다.

“모두 힘들겠지만 서로 도와서 각자가 지내는 공간을 깨끗하게 만들어보자. 얼른 끝내고 신나게 놀자고.”

“예!”

조금 서툰 손길이지만 일사불란하게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주히 걸레질을 하고 있는 에일린에게 히에무스가 다가왔다.

“에일린, 힘들지 않으냐? 이런 일…….”

“괜찮아요. 평소 늘 하던 일인걸요. 그리고 저 지금 꽤 즐거워요. 아이들이랑 지내는 거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그래? 원한다면 마법으로 일을 좀 덜어줄 수도 있는데.”

먼지 같은 걸 없애는 마법이나 공기 정화 같은 마법을 부린다면 별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일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런 곳에서 요령을 피우고 싶지 않아요. 매일 하는 것도 아니고 봉사하는 건데 그런 것만큼은 진심을 다해서 해야 하거든요.”

“그러냐?”

에일린이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잘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표정이 평소보다 밝은 것 같아 히에무스도 엷게 웃어주었다. 히에무스가 에일린이 일에 몰두해 돌아다니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고 있는데 스킬라가 옆으로 왔다.

“히에무스 오라버니.”

물론 다른 인간들은 듣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마법에 실어 보낸 소리였으니까. 그가 무심한 얼굴로 돌아봤다,

“뭔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잔뜩 굳은 흑룡의 얼굴이 보였다.

“저 인간 여자와는 무슨 관계죠? 도대체 뭐기에 저번부터 그렇게 친밀하게 대하시는 건가요?”

지난번 무도회 이후 에일린에 대해 알아봤지만 인간 군주가 최근 신경 쓰는 여인이라는 것 외에 다른 건 알아내지 못했다.

“알 것 없다.”

히에무스가 차갑게 한마디 내뱉고 다시 에일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무시당한 것 같아 스킬라는 순간 욱한 마음이 들었다.

“히에무스 님!”

표독스러운 목소리에 히에무스가 다시 싸늘한 눈길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보다 더 서늘한 목소리로 낮게 경고했다.

“내게 신경 꺼라, 젊은 흑룡이여. 잠시 그대 용들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내가 너희 같은 대상에게 호락호락할 존재가 아니다.”

“…….”

스킬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서서 애꿎은 에일린만 죽일 듯이 노려봤다.

마침내 청소가 끝났다. 아이들 식사 시간도 무사히 지나갔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노는 시간이야!”

“야호! 근데 뭐 하고 놀 거예요?”

아이들이 기대감이 가득 담긴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에일린 주위에 모여들었다.

“밖에 나가서 눈싸움을 하자!”

“눈싸움이라고요?”

“그래! 편을 갈라서 상대를 제압하는 거지. 어때? 재미있겠지?”

“음……. 춥지 않을까요?”

몇몇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웅얼거렸다.

“원하는 사람만 참여하면 돼. 그리고 겨울이라도 조금씩은 신선한 바람도 쐬고 운동을 해줘야 건강해진다고.”

“그래요?”

“그럼, 물론이지! 자, 원하는 사람! 여기 와서 줄서기!”

“와아, 나갈래요!”

“나도!”

쉰 명 정도의 아이들을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다른 공녀들은 따라 나오지 않고 애플턴 부인만 함께 나왔다. 그런데 안에서 볼 땐 잘 몰랐는데 밖에 나와 확인해 보니 눈싸움을 하기 적절하지 않았다. 눈이 온 지 꽤 오래돼 대부분 얼어붙어 뭉치기가 쉽지 않았다.

“에일린! 이걸로는 놀기 힘들겠어요!”

에일린이 아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네. 그럼 눈썰매를 타면 돼.”

“눈썰매요? 그건 또 어떤 건데요?”

아이들이 다시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에일린을 바라봤다. 오늘 온 이 공주님은 정말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알고 있는 듯했다.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모두 평소에도 하던 것들인데 에일린과 함께하니 묘하게 훨씬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에일린에게는 귀찮게 생각하던 일마저도 막 의욕이 샘솟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길쭉한 나무판자랑 끈이 필요한데……. 있어?”

“있어요!”

뚝딱뚝딱 만든 썰매로 신나게 눈썰매를 탔다. 하지만 아이들이 많아 순서가 돌아오려면 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다. 조금 난처해진 마음에 에일린이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순간은 그녀의 옆에 있던 이가 누구인지 잠깐 잊었다.

“응, 눈이 내리면 좋을 텐데.”

히에무스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래? 진작 말하지 그랬느냐?”

“어, 잠깐, 히에…….”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하늘을 향해 손을 한번 휘둘렀다. 영롱한 빛이 그 손의 궤적을 따라 넓게 퍼져 나갔다. 햇살이 가득했던 한쪽 하늘이 금방 흐려지더니 곧 커다란 함박눈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솜 뭉텅이가 흩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와아!”

다른 하늘에 머물던 연한 햇무리에 반사돼 수많은 눈송이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눈송이가 일대에 마치 하얀 솜이불처럼 포근히 쌓였다.

까르르.

경쾌하게 웃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고즈넉한 겨울 하늘 가득 울려 퍼졌다. 저마다 눈 뭉치를 만들어 눈싸움도 하고 눈 속에 파묻혀 뒹굴거나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다. 에일린도 아이들과 함께 눈덩이를 던지거나 눈밭을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를 하기도 했다. 세 겨울의 정령도 활기차게 공중을 휙휙 날아오르며 즐겼다. 모처럼 그들에게 딱 맞는 날씨여서 그런지 무척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들도 저마다의 능력을 쓰며 눈을 뿌렸다. 사실 이 정도 지역에 눈을 내리게 하는 일은 그들 힘만으로도 충분했다. 에일린은 아이들과 부대끼며 놀다 미끄러져 그만 눈 위에 드러눕고 말았다. 세 정령이 휙 날아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으세요? 에일린 님!”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하하.”

에일린은 포슬포슬한 눈 위에 누운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문득 앙상한 나뭇가지마다 크리스털처럼 피어난 투명한 눈꽃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메마르고 청량한 겨울바람이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파사사.

바람에 날린 눈꽃들이 잘게 부서져 내려 황홀한 빛의 너울처럼 사방에 일렁거렸다. 불쑥 다가온 겨울의 정령왕이 눈부신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내려다봤다. 긴 은빛 머리칼과 은빛 옷자락, 겨울 하늘을 그대로 담은 두 눈동자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온통 그가 만들어낸 빛이 소나기처럼 대지에 쏟아지는 듯했다. 시리도록 빛나는 그 황홀한 모습에 에일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좋다.”

다시 살아나니 겨울이 좋았다. 어째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더욱 눈을 꼭 감았다. 혼자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나직한 한마디를 되뇌었다.

“정말…… 좋다.”

***

“즐거워 보이는군.”

신전 본당 건물에 위치한 한 방, 신전에 딸린 귀빈 접견실이었다. 고급스럽고 멋스러운 탁자 위에 은으로 된 커다란 대야가 놓여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열심히 그 안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렉스와 케일론, 그리고 조언자인 이디오마 신관이었다. 그들이 유심히 지켜보는 대야에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물 위에 영상이 선명하게 비췄다. 에일린이 뒤뜰에서 아이들과 신나게 노는 장면이었다. 은으로 된 커다란 대야는 수마경(水魔鏡)이었다.

“정말 흥겨운 것 같지 않나?”

렉스가 흐뭇한 미소를 띤 채 중얼거리자 이디오마 신관이 얼른 맞장구쳤다.

“참으로 그래 보입니다, 폐하. 무척 재미있는 모양입니다.”

“갑자기 눈이 오다니, 어찌 된 일이지? 왠지 조금 이상한데.”

렉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케일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녀와 소통하는 겨울 정령들이 한 짓일 겁니다. 항상 주변에 머무는 것 같았습니다.”

렉스가 궁금함이 넘쳐나는 표정으로 케일론을 힐끗 쳐다봤다.

“그래? 여전히 관심을 쏟는다는 건가? 무슨 이유에서일까?”

“정령들은 한번 마음에 드는 건 끝까지 좋아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영원히 사는 존재들이니 인간처럼 변덕스럽지 않겠지요.”

“하하, 그런가? 흥미롭군. 그녀 곁에 있는 정령을 잡아다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없을까?”

무심한 렉스의 말에 케일론은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지만 알아채는 이는 없었다.

“저번에 봤는데 모두 하급 정령이었습니다. 작아서 잡아봤자 쓸모도 없습니다. 가진 힘이 얼마 없어 며칠 쓰고 나면 금방 소진되고 마니까요. 저런 것들은 그들의 왕 곁에서 계속 힘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지요.”

“그래? 유감이군.”

렉스가 뚫어질 듯 계속 에일린만 지켜보자 케일론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이제 다른 공녀들 모습을 비출까요? 다른 이들에게도 마법이 발동될 수 있도록 미리 주문을 걸어뒀습니다만.”

그런데 어째서 에일린만 살펴보는 것인가? 공녀들의 됨됨이를 가늠해 보고 싶다 하지 않았던가?

“조금만 더 보겠다.”

“……예.”

묵묵히 있던 이디오마 신관장이 렉스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쉬운 여인이군요.”

렉스가 대야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되물었다.

“아쉽다니? 뭐가 말이오?”

“출신 신분 말입니다. 저 여인, 꽤나 자질이 뛰어나지 않습니까?”

“자질이 뛰어나다고?”

“예. 제가 보기에 성정도 자비롭고 긍정적인 편에 사람을 대하는 통솔력이나 친화력도 괜찮아 보입니다. 귀족 신분이었다면 폐하의 배필 후보로도 손색이 없었겠지요.”

“……!”

케일론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관을 노려봤다. 렉스 역시 신관을 향하며 낮게 웃었다.

“하하하, 그런가? 사실 나도 그 부분이 유감스럽긴 하오.”

그 말을 마친 후 다시 수마경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뭐, 어린 애들 상대니 다 파악했다 할 수는 없겠지만.”

“아이든 어른이든 인간 무리를 다루는 요령과 방법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이들 대상일 때 그 사람이 가진 본질과 역량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편입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정말 아쉽긴 하오.”

하급 귀족 정도만 됐어도 좋을 텐데. 그럼 번거롭게 다른 여인을 황후로 물색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녀 또한 망설임 없이 그의 마음을 받아들였을 테고.

케일론이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재차 권했다.

“폐하, 이제 에일린은 충분히 보신 것 같으니 다른 공녀들의 상황을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음, 그러지. 보여주게.”

“예.”

마법사가 즉시 고개를 한 번 숙인 후 물 위에 지팡이를 가져다 댔다. 그의 얇은 입술 틈새로 엄숙한 마법 주문이 흘러나왔다. 주문이 완성되자마자 수마경의 물이 푸른빛과 함께 찰랑찰랑 흔들리다 잔잔하게 잦아들었다. 이내 곧 다른 형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응시하던 황제의 자세가 느슨해졌다. 살짝 졸음이 밀려오는 듯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봤다. 몹시 따분한 듯 팔짱을 끼며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

“에일린, 괜찮은 거냐? 다치진 않았고?”

히에무스가 여전히 눈 위에 누워 있는 에일린에게 다가와 바로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괜찮아요.”

“그렇게 있으면 차가워서 몸에 좋지 않을 거야.”

“여기 누워서 보는 풍경이 너무 예뻐서 그래요. 조금만 더 감상하고 싶어요.”

“그래? 어디…….”

히에무스도 그녀의 옆에 벌렁 드러누웠다. 정말이다. 이렇게 누워서 바라보니 세상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아니, 에일린 옆에 누워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늘 지겹게 보던 눈송이들도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자잘한 보석처럼 빛나 보였다. 재빠른 날갯짓으로 날아가는 겨울새의 자태도 참 귀엽고 예뻤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여윈 나뭇가지들마저 섬세하게 얽힌 모양새가 진귀해 보였다. 세상이 온통 새롭고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아름답구나.”

“그렇죠? 참 멋지죠?”

“응. 멋지구나.”

뒤늦게 애플턴 부인과 다른 아이들이 걸어왔다.

“다치셨나요? 영애.”

“아니, 괜찮아요.”

에일린이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히에무스도 아쉬운 표정으로 따라 일어섰다. 올망졸망 모여든 아이들을 향해 일렀다.

“자, 모두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

“에이, 싫어요! 좀 더 놀고 싶어요.”

“겨울엔 적당히 놀아야 해. 다들 안으로 들어가서 따뜻한 우유랑 과자를 먹도록 하자.”

“예!”

간식을 들먹이니 보채던 아이들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조금 어린아이들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에일린!”

렉스였다. 렉스가 저번에 봤던 신관과 케일론, 엘로드, 그리고 에이다 신관장을 대동하고 나와 있었다. 즉시 무릎을 숙이며 인사를 했다.

“폐하.”

렉스가 흐린 미소를 짓더니 애플턴 부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부인이 냉큼 에일린 손에 있던 아이를 떼어내 챙겼다.

“아이들은 제가 데려다주겠습니다, 영애.”

“어, 예.”

“잠시 함께 걷겠느냐?”

“예……. 그럴게요.”

계속 흐뭇한 표정이던 히에무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 인간 군주는 잊을만하면 항상 에일린 주변에 나타나 알짱거린다. 일국의 군주이기에 마법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존재. 참 껄끄럽고 성가셨다.

***

제 9신전 건물 뒤쪽으로 넓은 뜰이 펼쳐져 있었다. 황궁에 있는 정원만큼 잘 조성된 건 아니지만 키 큰 활엽수와 침엽수가 많이 자라나 제법 운치가 있었다. 평생을 신전에 갇혀 살다시피 하는 신관들이 산책하는 데 주로 이용하는 장소였다.

“아이들 돌보는 일이 만만치 않을 텐데 힘들지 않으냐?”

“이 정도는 거뜬합니다.”

“그렇구나. 꽤 즐긴 듯이 보여 나도 좀 놀랐단다.”

잠시 말없이 여윈 나무 밑을 거닐었다. 간간이 날리는 눈송이가 흩날리는 꽃처럼 분위기를 더했다.

“오늘 어땠느냐? 아젤란의 고아들을 돌보며 혹 느낀 점이라도 있느냐? 개선할 점이라든가 미흡한 사항이 있다면 말해주면 좋겠다.”

“음, 글쎄요. 오늘 하루 보냈을 뿐인 터라 제가 그리 지적할 건 못됩니다만…….”

“뭐든 좋으니 편하게 말해봐라.”

에일린이 렉스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아이들이 좀 무료해 보였습니다.”

“무료해 보였다고?”

“예. 혹시 이곳에도 고아들을 위한 학교 같은 건 없나요?”

“학교? 교육기관 말이냐? 그런 건 귀족들을 위한 것이지 않느냐? 고아가 아닌 평민이라 해도 학교에 다니는 건 대부분 매우 힘든 일이지.”

“귀족들만 다닌다고요?”

“그래. 그것도 어렸을 때는 주로 집에서 가정교사들에게 교육받고 성인이 되면 소수의 인재들이 황도에 있는 아카데미에 진학한단다.”

에일린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요. 평민들에게도 기본 교육 정도는 받을 수 있는 교육기관이 마련되면 좋을 텐데…….”

“평민을 위한 교육기관이라…….”

렉스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에일린을 그윽하게 응시했다. 이 여인은 정말 뭔가 다른 것 같았다. 지금까지 만나본 어떤 여인, 아니 남자도 포함해서 그 어떤 사람도 이런 의견을 말한 자는 없었다. 뭔가를 생각하기 위해 애쓰는 듯 에일린이 말을 멈추고 하늘로 시선을 보냈다.

“특히 고아들은 외롭고 불안한 존재들이잖아요. 그들이 조금이라도 자신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기관을 설립해 운영한다면 참 좋을 것 같아요.”

“흠, 그들을 먹이고 보호하는 일 외에 다른 걸 더 해주자는 건가?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물론입니다. 그런 취약계층을 바른길로 잘 인도해서 한 사람 몫을 해내도록 키워낼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한 나라를 굳건하게 지탱하는 일이 될 테니까요. 종국엔 나라 발전에 큰 보탬이 될 겁니다.”

“하하, 그런가?”

렉스가 상큼하게 웃으며 잠시 에일린을 뜯어봤다. 정말 아쉬운 일이지 않은가. 이만한 지혜를 가진 여인이라면 황후로 맞이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에일린은 그저 궁벽한 변경 지역에서 살다 온 미천한 평민 같지 않았다.

“아쉽네요. 그런 걸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니.”

에일린이 안타까운 속내를 숨기지 않고 연신 탄식을 내뱉었다. 렉스가 천천히 걷던 발길을 잠시 멈췄다.

“그럼 그대가 직접 추진해 보면 어떻겠느냐?”

“예?”

에일린이 멀뚱거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가 한층 깊고 푸른 눈빛을 빛내며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내 여인이 되어 내 곁에서 그런 일들을 하며 살아다오. 대제국의 황제인 내가 적극 밀어줄 터이니.”

“……!”

에일린의 연초록 눈동자가 커졌다.

“어떠냐? 에일린.”

<겨울의 왕과 불의 키스를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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