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황제의 전략 (11/24)

10. 황제의 전략

며칠 후, 어김없이 돌아온 제국의 휴일. 에일린이 산책 친구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날이었다. 세 번 남아 있으니 오늘을 넘기면 이제 두 번만 더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 케일론의 성에 와 있는 사용인도 물리고 훨씬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다. 남들 보기에 제아무리 좋아도 스스로의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법이다.

“와아, 인간계의 휴일날이다! 난 이날이 제일 좋더라.”

제퓌가 아침부터 들뜬 얼굴로 종알댔다.

“왜?”

“황궁엔 구경거리가 많잖아. 인간들도 많고. 다른 날보다 훨씬 재미있다고.”

제퓌가 재잘거리자 아두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긴, 나도 이날이 제일 좋아. 인간계에 온 보람이 있는 날이랄까? 황궁 안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이 일을 그만두면 세 정령이 실망할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플턴 부인과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단장을 끝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기다리던 케일론이 말을 꺼냈다.

“실내가 아닌 뜰에서 마법을 시전해야 합니다.”

“왜요?”

“오늘은 나도 온종일 황제 폐하를 수행할 예정입니다. 말을 데려가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알겠어요.”

황궁에 당도해 보니 렉스가 직접 마중을 나와 있었다. 평소보다 좀 더 신경을 기울인 듯 화려해 보이는 차림새였다. 잘 쓰지 않던 황금 보관까지 착용했다. 어깨 위까지 내려온 까만 고수머리가 더욱 보기 좋게 반짝거렸다. 약간 각진 얼굴선이 살아나 왠지 더 늠름하고 잘생겨 보였다. 소설 속에서의 그 매력적인 모습이 떠올라 에일린은 얼굴을 붉혔다.

‘과연,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야.’

언제나처럼, 아니 어느 때보다 더 황제로서의 풍모와 위엄이 돋보였지만 그만큼 한층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은 어디 다른 곳에 가려는 걸까?’

그의 뒤쪽에 휘황찬란한 황금빛 조각이 곁들여진 검은 육두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주변에 모인 수행인들의 규모도 남달랐다. 근위대 기사단장인 엘로드가 갑옷을 입고 투구까지 쓴 채 서 있고, 그의 부장(副將) 두 명과 정식 무장을 갖춘 수십 명의 기사단까지 각자의 말 위에 올라타 대기한 상태였다. 엘로드가 에일린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했다. 불만스럽고 가소로워하는 듯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 외에도 궁정 마법사인 헬무트 경과 시종들 여럿이 모여 있었다. 케일론도 귀가하지 않고 자신이 데리고 온 말과 함께 남아있었다. 도대체 어딜 가기에 이런 거창한 행렬을 준비한 걸까?

“어서 오너라, 에일린.”

“예.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폐하.”

“그래. 그대도 잘 지냈느냐?”

“예. 덕분에.”

“오늘은 좀 다른 곳에 다녀오도록 하자. 마차를 준비했으니 함께 타도록 하지.”

그가 눈짓하자 즉시 리히트 시종장이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렉스가 손을 내밀어 에일린이 마차에 타도록 유도했다. 에일린은 조금 머뭇거리다 그의 손을 잡고 올라타 아무데나 걸터앉았다. 뒤이어 렉스가 타더니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곧 시종장이 마차 문을 닫아주었다.

탁!

마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황제 전용 마차니 크기가 상당히 컸지만 그래도 사방이 막힌 제한된 공간에 단둘이 남겨진다는 사실이 좀 신경 쓰였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마차를 타보는 건 처음이었다. 에일린은 내부를 휘 둘러봤다. 라피스 궁에 있는 방을 하나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와아.”

물론 훨씬 작은 공간이었지만 자줏빛 비단으로 감싼 폭신한 의자며 스툴, 커튼, 황금과 보석 등을 활용해 꾸민 벽과 세부장식 등이 무척 화려하고 멋졌다. 렉스는 두리번거리는 그녀를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다 말문을 열었다.

“마차를 타본 적이 있느냐?”

에일린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향한 채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없겠지. 그가 지난번 케일론의 성에 보내준 마차조차 운행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없으니 아마 지금이 처음일 것이다.

“아뇨. 비슷한 건 많이 타봤지만요.”

“비슷한 걸 많이 타봤다고?”

“예. 이것보다 훨씬 빠르고 편리한…….”

에일린은 무심코 말하다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니 의아한 표정이었다.

“어디서 타봤다는 거냐?”

“어, 저 그게…… 직접 타본 건 아니고요. 꿈속에서요.”

“그래?”

가끔 이상한 꿈을 꾼다고 했던가? 예지몽이라 했던가? 케일론의 말로는 기이한 경험을 하는 꿈을 꿀 때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요즘도 예지몽을 꾸느냐? 앞날을 예견해주는 그런?”

“아뇨……. 최근엔 별로 꾸지 않아요. 그래서 미래도 알지 못하고요.”

소설책 내용과 달라져 버렸으니 에일린도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 치도 예견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인생도 첫 번째 인생과 마찬가지로 그 무엇도 알지 못한 채 매순간 혼자 부딪히며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

렉스는 조금 흥미가 담긴 눈빛으로 에일린을 응시했다. 여전히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케일론의 보고에서도 그렇고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는 낌새는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엔 뭔가 쓸 만한 능력을 갖춘 게 아닌가 하는 기대도 해 봤다. 정령들의 가호를 받는다니 더 눈여겨봤지만 별다른 건 없었다.

‘뭐, 상관없어. 에일린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으니 나머진 아무래도 괜찮아.’

물론 다른 가치까지 지녔다면 더 나았겠지만. 누구든 활용할만한 재주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꿈에서나마 경험했던 탓인지 황제의 눈에 에일린은 마차를 처음 타본다면서 별로 신기해하거나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황궁 내에서 산책하던 때보다는 나은 듯 했다. 열심히 마차 밖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이 훨씬 생기 있어 보였으니까. 이디오마 신관의 조언이 그럭저럭 쓸모가 있는 것일까? 렉스는 며칠 전 이디오마를 처음 만났을 때 나눴던 대화를 상기해 봤다.

- ‘그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지금까지 폐하께선 어떤 방법을 시도해 보셨습니까?’

- ‘일단 그녀에게 친절을 베풀고 황제로서 가진 재력과 위엄을 최대한 보여주려고 해 봤소.’

- ‘그렇다면 차라리 그 부분을 더욱 강조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오직 황제 폐하이시기에 가능한 것들을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겁니다. 웬만한 여인의 맘은 한순간에 사로잡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런가?’

- ‘물론입니다. 차별화를 잘하시는 게 중요합니다.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압도적으로요.’

- ‘그게 잘 듣지 않으면 어떡해야겠소?’

- ‘그러면 다른 전략을 짜야 합니다.’

- ‘전략이라고?’

- ‘폐하께서는 아실 것입니다. 이 광활한 안드로스 대륙의 통일을 달성하신 분이시니. 다른 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어떤 일을 시행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 ‘공략할 나라의 사정을 먼저 읽어내려고 노력했소. 여러 계층의 첩자를 활용해 그 나라가 처한 현실, 특히 약점을 찾아내는 데 주력했지.’

- ‘그 다음엔요?’

- ‘그 약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물밑 작업을 시도했소. 부패한 귀족이나 불만 세력에게 접근해서 내부에서 흔들리게 한 다음 무력으로 외부를 공격하는 거지.’

- ‘사람의 마음, 여인의 마음을 얻는 것도 똑같습니다. 한 나라를 무너뜨리는 과정과 놀랍도록 비슷하지요. 그러니 전쟁을 치르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접근해 보십시오.’

- ‘전쟁을 치르는 것과 똑같은 방식이라…….’

- ‘그렇습니다. 일단은 지금까지 해오시던 방법을 좀 더 적용해 보시지요. 극대화해서요. 그게 먹히지 않는 여인이라면 다른 전략을 짜 접근하시는 겁니다.’

- ‘알겠소. 그리해 보겠소.’

- ‘혹, 또 뭔가 근심이 있으신지요?’

- ‘어떤 것이 황제의 힘과 권력을 최대한 보여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고민이오.’

- ‘신에게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시면 어떻겠습니까?’

- ‘신에게 가장 가까운 모습이라고?’

- ‘예. 보통 인간은 흉내 낼 수조차 없는 것으로요. 오직 아벨라 여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으신 황제 폐하께서만 가능한 것을요.’

신관과의 대화를 떠올리는 렉스의 입가가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올라갔다.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은 전략으로 여인을 공략한다 생각하니 묘한 설렘이 느껴졌다. 미소 띤 표정으로 에일린의 얼굴을 뚫어지듯 주시했다. 차창 밖을 구경하던 그녀가 그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렉스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묘한 설렘……. 그 실체가 뭔지 곧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최근엔 별로 느낄 수 없었지만 오랜 친구처럼 늘 가까이했던 감정, 그건 바로 ‘투지’였다.

오래지 않아 조금 색다르게 생긴 장소에 마차가 멈췄다. 단순한 담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 두터운 성벽이나 해자 등 외부 방어 시설은 보이지 않았다. 황궁보다 더 오래된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처럼 보였다. 여러 개의 아치형 기둥으로 이뤄진 전면이 눈에 들어왔다. 크고 작은 건물을 겹겹이 쌓아올린 구조가 특이해 보였다. 제일 높은 윗부분에 커다란 돔 형태의 지붕이 떡하니 자리 잡은 모습이었다. 건물 전체가 햇살에 반사돼 새하얗게 빛났다. 마치 저 홀로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눈부시게.

“이곳이 어딘가요?”

“아벨라 3 신전이다. 카르디아에 위치한 열 두 개의 신전 중 세 번째 위치를 점하는 곳이지.”

“아!”

신전이구나. 소설 속에서도 신전이 나오긴 했다. 결말 부분에 엘시아와 렉스의 결혼식 장면이었지. 그때는 신전 외관에 대한 묘사는 없고 혼례 의식을 치르는 내부만 표현돼 있었다. 거긴 1 신전이었다. 그러니 이곳은 정말 처음 접하는 곳인데, 왜 온 것일까? 렉스가 마차에서 내리며 설명했다.

“네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 데려왔다. 아마 마음에 들 거야.”

그가 에일린이 내리도록 손을 잡아주었다. 에일린은 그의 손에 의지한 채 시종이 대령한 받침대를 밟고 천천히 마차 밖으로 나왔다. 넓은 마당 한가운데 정갈한 백색 로브를 차려입은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옷에 달린 두건을 푹 눌러쓴 모습이었는데 수도원의 수사들과 비슷하다는 느낌이었다.

‘신관들인가?’

그들 가운데 있던 누군가가 두 명의 신관을 거느리며 다가왔다. 입고 있는 하얀 로브의 소맷자락에 금빛 자수가 박히고 금사를 꼬아 만든 허리띠를 맨 걸 보니 상당히 고위급인 것처럼 보였다. 얼핏 보니 쉰 살 남짓 돼 보이는 중년이었다. 이곳의 책임자일까?

“어서 오소서. 위대하신 제국의 태양이시여. 아벨라 여신의 찬란한 광휘가 함께 하시길. 폐하께서 친히 예까지 왕림해주시다니 참으로 광영입니다. 저는 이곳 신전의 신관장을 맡고 있는 아벨라 여신의 미천한 종 ‘블란디오’라고 합니다.”

“반갑소. 블란디오 신관장. 이곳 신전에 참배를 드리고 봉납물도 올릴 겸 찾아와봤소. 간만에 그곳도 보고 싶고.”

“잘 오셨습니다. 먼저 신전으로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그곳을 먼저……?”

신관장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물었다.

“그곳을 먼저 보고 싶소.”

“그러시군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바싹 뒤따라온 두 명의 신관 중 한 사람을 돌아보며 당부했다. 은빛 수가 놓인 로브를 착용한 훨씬 젊어 보이는 남자였다. 서른 중반쯤 됐을까? 두건 속에 숨어 있던 회색 눈동자가 제법 예리하게 번득였다.

“이디오마 형제, 폐하를 인도하는 소임을 맡아주시오. 나는 본당에서 참배와 봉납 의식 준비를 할 터이니.”

“맡겨주십시오.”

에일린은 렉스가 성스러운 신전에서 보여주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

“저는 아벨라 여신의 미천한 종 ‘이디오마’라고 하옵니다. 망극하게도 영광스러운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음. 잘 부탁드리오.”

렉스와 이디오마, 두 사람은 서로 초면인 듯이 대했다. 누가 그러자고 미리 약속해둔 것도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그렇게 행동했다. 말을 마친 이디오마는 살짝 고개를 들어 에일린의 모습을 재빠르게 훑었다. 황제가 깊이 빠져든 여인이라기에 내심 기대를 잔뜩 했는데 생각보다 뛰어난 미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님을 오랜 신관 생활을 통해 잘 터득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렇게 좀 평범하게 보이는 여인들이 의외로 큰 매력을 숨기고 있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이 여인도 아마 그런 부류일 테지. 저 냉혹하고 완벽한, 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존귀하신 분을 안달하게 만드는 존재니까.

“이쪽으로 오소서.”

에일린은 좀 신기한 시선으로 그를 지켜봤다. 신관이라 그런지 말투나 행동거지가 일반 사람들과 상당히 달라 보였다. 절도 있고 진중해 보인다고 할까. 얼마간 걸어 유리로 된 커다란 구조물 앞에 도착했다.

“이곳이옵니다.”

렉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에일린을 향해 말을 건넸다. 반짝거리는 눈빛 속에 약간 우쭐거리는 기색이 묻어났다.

“혹, 이곳이 어딘 줄 알겠느냐?”

소설 속에 나온 적은 없지만 딱 봐도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전세에서 몇 번 비슷한 곳에 가본 경험이 있었다.

“어! 여긴 온실…… 같은데요?”

그래, 온실! 제주도에 신혼여행을 갔을 때도 방문해 봤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 방학 숙제를 하기 위해 데려갔던 적도 있었지. 어지간한 식물원이나 허브 농장에 가면 다 설치돼 있는 흔하디흔한 시설인데. 이곳에서 볼 줄은 몰랐지만.

“맞……다. 의외로구나. 이런 곳을 알고 있다니.”

렉스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정말 의외였다. 궁벽한 변방 출신의 평민 소녀가 온실을 알고 있다니! 안드로스 대륙의 웬만한 귀족, 아니 심지어 왕족조차도 별로 접해 보지 않았을 장소일 텐데. 그래, 뭐 온실의 존재에 대해선 소문 같은 걸 듣고 어찌어찌 알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안에 들어가 펼쳐지는 광경을 본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진풍경은 생전 처음 접할 테니.

“안으로 드시지요.”

이디오마가 대기한 하급 신관에게 눈짓을 하며 온실 문을 개방하도록 했다. 렉스는 에일린과 함께 신관들 몇 명을 따라 안으로 발을 들였다. 수행인 중에서 온실까지 들어온 것은 엘로드와 케일론, 헬무트 경뿐이었다.

“어!”

꽤 넓은 공간 안에 갖가지 나무와 꽃들이 잔뜩 피어나 있었다. 싱그러운 향취와 현란한 색채가 곳곳에 넘쳐났다. 바깥은 하얀 눈이 쌓여 있고 여전히 칼바람이 몰아치는 차가운 겨울인데 이곳에만 완연한 봄이 온 것 같았다. 따스하고 나른한, 겨울의 한가운데서 봄을 느끼다니, 웬만한 사람들에겐 마치 기적처럼 여겨지리라. 렉스는 재빨리 곁눈질하며 에일린의 반응을 살폈다. 신관 이디오마도 긴장한 얼굴로 황제가 데려온 여인의 얼굴을 확인했다. 에일린은 주위를 슥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온실이네! 놀라워라, 이곳에도 이런 곳이 존재하다니.”

좋아하고 놀라는 것 같긴 한데……. 뭔가 좀 미적지근했다. 렉스나 이디오마가 기대한 반응이 결코 아니었다. 경이로운 눈으로 감탄하기는커녕 그저 늘 다니던 익숙한 장소를 다시 방문한 듯했다.

“에일린,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아, 아뇨. 폐하. 멋진 곳이네요.”

에일린이 엷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도 이런 온실을 좋아하긴 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종종 가을의 궁전에 드나드는 터라 상대적으로 감동이 그리 크진 않았다. 따지고 보면 가을의 궁전이야말로 이곳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온실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 봄 풍경은 아니지만 충분히 따뜻하고 꽃과 나무도 싱그럽게 넘실대는 곳이었다. 오히려 전세의 경험만 있었다면 정말 경이로운 눈으로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을의 궁전을 드나드는 이에게 이건 좀 약했다. 에일린의 반응에 렉스는 조금 실망했지만 곧 다음 장소로 그녀를 데려갔다. 준비한 게 더 있었다.

“이쪽으로 거닐도록 하자.”

“예.”

두 사람이 느리게 걸어 향한 곳은 양쪽으로 장미 넝쿨이 자라난 길이었다. 여린 초록 잎과 장미 봉오리가 나오긴 했지만 꽃이 피지는 않았다. 렉스가 이디오마에게 신호를 줬다. 그가 다른 신관 네댓 명과 함께 양쪽 길 사이사이에 나눠 섰다. 이어서 손을 장미 넝쿨에 가져다 대며 뭔가 주문을 외웠다.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는 걸까?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는데 신관들의 몸 전체에서 뿜어져 나온 초록빛 광채가 장미 넝쿨을 감싸기 시작했다.

파아앗!

그들의 몸에서 나온 빛이 닿자 봉오리 진 상태였던 장미꽃이 일제히 피어났다. 불꽃이 일듯 한꺼번에 만개하는 붉은 꽃송이의 모습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달콤하고 향긋한 장미향이 사방에 퍼져나갔다.

“와아! 정말 멋지다.”

에일린도 이것만큼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손뼉까지 치며 즐거워했다. 비로소 렉스와 이디오마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어김없이 따라와 분주히 주변을 살펴보던 정령들이 한마디씩 품평을 내놓았다. 아두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인간들도 제법이잖아.”

“일반 마법으로 이런 건 못할 텐데……. 이건 정령들의 능력과 비슷하잖아?”

프리기의 의견에 아두스가 설명했다.

“신성력이란 거야. 마법과는 달라. 마법사들은 자연에 존재하는 마나의 힘을 끌어모아 구사하는 거지만 신성력은 오직 인간 스스로가 가진 기를 짜내서 쓰는 거라더군.”

제퓌가 신관들을 둘러보며 질문했다.

“그러니까 저들이 정령들과 좀 닮은 인간 무리란 건가?”

아두스가 즉시 정정해줬다.

“정령과 닮았다기보다는 정령과 다소 비슷한 마나를 가진 부류라고 보는 게 맞아. 인간들은 저들이 대자연 어머니의 축복을 받은 특별한 자라고 여기는 것 같지만.”

“그래?”

“하지만 저런 건 인간의 생명을 갉아먹는 짓이야.”

“……!”

그 말에 에일린은 벌어진 입을 즉시 다물었다. 생명을 소진하며 행하는 일이라고? 좀 전까지 아름답게 보였던 장면들이 무시무시한 악몽처럼 느껴졌다.

“저, 이제 그만…… 그만하셨으면 좋겠어요.”

렉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느냐? 에일린. 마음에 들지 않는 거냐?”

에일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때문에 이런 일을 하시는 거면 이제 그만 두셨으면 좋겠어요. 부탁드립니다. 폐하.”

에일린이 치맛자락 끝을 살짝 잡고 무릎을 구부리며 간청했다. 정말…… 그만뒀으면 싶었다. 간절한 눈으로 렉스에게 청했다. 황제와 이디오마는 동시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진정 쉽지 않은 여인이었다.

***

그렇다고 해서 준비한 게 모두 끝난 건 아니었다. 렉스는 에일린이 더욱더 감동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나 계획해 놨다.

‘그래, 이거라면 에일린도 정말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어. 여자라면, 지금의 에일린이라면 결코 원하지 않을 리가 없다.’

렉스 일행은 신관들이 꽃을 피우게 하던 일을 중지하고 온실을 나왔다. 그리고 향한 곳은 신전 본채 안에 있는 본당 기도실이었다. 커다랗고 육중한 금빛 출입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니 온통 황금빛으로 빛나는 별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하얀 벽과 천장, 기둥에 더해진 황금빛 장식과 천장에 펼쳐진 화려한 프레스코화가 마치 천상의 세계를 구현해 놓은 듯 신비롭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전세에서 봤던, 비록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유럽의 유명한 천주교 사원이 연상되는 곳이었다. 크게 다른 게 있다면 안쪽 중앙에 모신 신의 존재가 다르다고 할까? 나무뿌리로 된 옥좌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이 금빛 조각으로 형상을 갖춰 안치돼 있었다. 아마도 대자연 어머니라 일컬어지는 대지모신 ‘아벨라’일 것이다. 제퓌가 감탄하며 소리쳤다.

“우와! 정말 인간들 솜씨가 제법이잖아! 꽤 비슷하게 묘사해놨어.”

아두스 역시 탄성을 내지르며 조각상 앞으로 다가가 빙글빙글 날아다녔다.

“세부가 좀 다르긴 한데, 이 정도면 상당히 비슷하군. 인간 중에 어머니의 모습을 직접 본 자라도 있었던 걸까?”

프리기가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꿈에라도 현신하신 게 아닐까? 이걸 조각한 인간에게 좀 더 제대로 일하라고 말이야. 처음엔 엉망으로 만들었을지도 몰라.”

“음, 그럴지도.”

아두스와 제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꽤 흡족한 듯했다. 본당에 대기 중이던 신관장과 몇몇 신관 무리가 허리를 굽히며 황제 일행을 맞이했다. 그들의 인도에 따라 잠시 기도 시간을 갖고 봉납물을 바치는 의식을 치렀다. 그럭저럭 그 과정들이 마무리되자 렉스가 에일린에게 빙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에일린, 이곳에서 네게 줄 선물을 하나 마련해놨다.”

“선물……이라고요?”

“그래. 네 마음에 들 거다.”

에일린은 기쁘다기보다는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 주는 선물이라면 왠지 지금까지 받은 선물 중에서도 가장 부담되는 선물일 게 뻔했다.

“어떤 선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

“정말 거절하는 거냐?”

신전 본당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조금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렉스가 다시 한번 에일린의 의향을 확인했다.

“예.”

렉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뒤에 바싹 붙어 따르던 이디오마 신관 역시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렉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어째서지? 네 머리카락을 자라게 해주려고 했는데, 왜 싫다는 거냐? 설마 그 짧은 머리가 더 좋다는 건가?”

신관들의 축복 의식으로 에일린의 머리카락을 자라나게 해줄 생각이었다. 그건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신관들의 능력을 쓰는 일은 철저히 관리되고 제한을 두었기에 보통은 그런 사소한 일에 허락되지 않았다. 오직 황제의 요청과 승인이 있기에 가능한 거였다. 하지만 또 에일린이 거절하는 바람에 렉스 일행은 모든 의식을 중지하고 귀가하기로 결정했다.

“예, 전 괜찮아요. 짧은 머리도 장점이 얼마나 많은데요.”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쯤 되니 렉스는 부아가 치밀었다. 왜 자꾸 거절하는 걸까? 그냥 다른 여인들처럼 넙죽 받아주면 안 되나? 저번에 머리카락이 잘린 다른 공녀들에게는 일부러 신관의 축복 의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직 에일린에게만 해주려 했는데……. 삐진 얼굴로 뿌루퉁해져서 냉정하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일린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의 마음은 잘 알 것 같았다. 그녀를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헤아릴 수 있었다. 이렇게 멋진 소설 속 주인공이 자신을 위해 마음 써주는 점이 참 고맙고 감사했다. 하지만 에일린은 그가 계속 소설 속의 멋진 주인공으로 남아줬으면 싶었다. 그만은 계속, 한결같은 모습으로.

“저, 폐하.”

“뭐냐?”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뭘?”

“당신이 모든 이들의 군주라는 걸 늘 잊지 말아 주시면 좋겠어요.”

“모든 이들의 군주라는 걸 잊지 말라고?”

“예. 신관들도 폐하의 백성이잖아요. 그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에요. 그들의 힘을 쓸 때도 항상 그 점을 명심하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절실하게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그들의 힘을 쓰지 않으셨으면 해요.”

“…….”

렉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이 왜 이 소녀에게 빠져들었는지 새삼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둘의 대화를 듣던 이디오마의 눈빛에도 섬광처럼 탄복하는 빛이 지나갔다. 고즈넉한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이 여자는 어딘가 좀 다른 것 같군.’

***

황궁 무도회가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이었다. 에일린은 방에서 애플턴 부인과 함께 무도회 예절을 점검하던 중이었는데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하녀인 베키와 도리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 다 양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붉은 장미 꽃다발과 커다란 옷상자였다. 힘에 부친 듯 두 사람의 얼굴에 붉은 열이 올라 있었다. 베키가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진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에일린 님! 폐하께서 선물을 보내오셨어요. 이렇게 귀한 꽃다발과 드레스를 보내오셨네요!”

“어엇…… 그래요?”

에일린은 난처한 기분이 들어 눈썹을 내렸다. 애플턴 부인이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드레스라고? 폐하께서 새 드레스를 보내오셨단 말이냐?”

“예. 밖에 아직 궁에서 보낸 시종과 의상 제작 장인이 와 계시는데 불러올까요?”

“잠깐 대기하라고 전해다오. 에일린 님이 착용하신 후에 나눌 말이 있을 테니까. 이번 무도회에 입고 갈 드레스를 잊지 않고 보내신 거군. 역시 폐하셔. 이렇게 단기간에 새 드레스를 제작해서 보내시다니.”

베키가 여전히 벙글거리며 덧붙였다.

“그만큼 에일린 님을 많이 생각하고 계시다는 뜻이겠죠. 폐하께서 특별히 명령을 내리시지 않았다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일 테니 말이에요.”

애플턴 부인도 한껏 들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지. 수많은 장인이 밤낮으로 총동원되지 않으면 불가능할 일이야. 이번 무도회에 참석하는 모든 영애 중 오직 에일린 님만 새 드레스일걸?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어느 누구보다 큰 총애를 받고 계신 분이지.”

“그럼요. 당연하죠! 각국에서 모인 공녀들보다도 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계실걸요? 이제 곧 폐하의 공식 애인으로 선포되실지도 몰라요.”

“그럴지도 모르지.”

잠자코 웃음 짓던 도리스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이번 무도회에서 선언하시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렇게 장미 꽃다발과 의상을 보내신 건 아닌지…….”

“그렇지는 않을 거다. 황후 폐하가 정해지기 전엔 아무래도 어렵겠지. 공식 직함이나 선언을 얻는 건 모두 국혼이 끝나야 가능할 거다. 좀 아쉽긴 하…….”

애플턴 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일린이 외치듯 끼어들었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문 앞에 있던 세 사람이 의아한 눈길로 돌아봤다. 에일린은 민망함에 발갛게 익은 낯빛으로 두 손을 꽉 쥐었다.

“그런 사이 아니에요. 폐하와 전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부탁인데 세 사람 다 괜한 오해는 자제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좀 불편하네요.”

“불편하다니요? 에일린 님. 정말 기쁜 일이 아닌지요? 아젤란 제국을 이끄는 황제 폐하의 정인이 되는 일입니다. 참으로 은혜롭고 경사스러운 일이지요. 제국의 모든 여인이 바라마지않는 영광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전 아니에요. 저는 그런 거, 정말 원하지 않아요.”

“…….”

그냥 친구로 남을 수는 없는 걸까? 렉스와의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선 꼭 그런 찜찜한 위치밖에 없는 걸까?

“거절하면 안 될까요? 지금까지 받은 선물도 이미 너무나 많은데 더 받고 싶지 않아요. 그냥 정중하게 돌려보내면 어떨까요?”

세 사람의 얼굴에 일제히 당황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애플턴 부인이 코끝을 약간 찌푸리며 낮게 대답했다.

“그건 안 됩니다, 루쿨루스 영애.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선물을 거절하는 건 매우 무례한 일일 뿐 아니라 나아가 다른 의도를 지녔다는 의심까지 살 수 있는 행위입니다.”

“다른 의도라니요?”

“반역 말입니다.”

“예? 전, 전혀 그런 생각은…….”

애플턴 부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계속했다.

“황제 폐하와의 관계를 일반인들이 맺는 것과 똑같이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명심하세요. 당신을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예…….”

고개를 끄덕였지만 완전히 납득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드레스를 입어보고 궁정에서 나온 의상 제작 장인과 의견을 조율하는 일 등을 끝마쳤다. 그리고 서툴지만 감사하다는 인사를 담은 편지도 써서 황제에게 보냈다. 그 후 애플턴 부인이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후 에일린과 마주 앉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루쿨루스 영애.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요. 황궁에서 파견된 시녀로서가 아니라 그저 영애보다 더 오래 살아온 인생 선배로서 함께 대화를 나눠봤으면 좋겠군요.”

“예.”

무슨 말을 할지 대충 감이 오긴 했다. 황제의 호의를 왜 자꾸 거절하려 하는지, 황제에 대한 마음이 어떤지 등을 물어보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충고할 셈이겠지. 대부분의 기성세대가 하는 생각이야 빤할 테니까.

“에일린 님. 혹시…… 황제 폐하를 싫어하시나요?”

귀족 신분의 시녀답게 위엄이 서린 목소리였다. 빙빙 돌려 말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너무 직설적인 물음에 잠시 당황하다 에일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남자로서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없어요. 그냥 친구……, 좋은 친구를 대할 때의 마음이랄까요.”

긴장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애플턴 부인의 얼굴이 다소 편안해졌다.

“그것도 좋은 방향입니다, 영애. 친구처럼 느끼며 시작하는 사랑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폐하와 사랑으로 이어지길 바라지 않아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친구로 남고 싶어요.”

에일린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자 애플턴 부인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가장 좋은 친구는 남편이랍니다. 황제 폐하께서 남편이 된다면 그 얼마나 든든하고 자랑스럽겠습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그분의 마음을 받아들이시는 게 어떠세요?”

“…….”

“그리하면 앞날에 대한 걱정 없이 평생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실 수 있어요.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없을 텐데, 왜 주저하시는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군요.”

“애플턴 부인.”

“네?”

“제가 폐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해도 폐하께선 다른 여인을 황후로 맞으시겠죠?”

“그렇……겠지요.”

“그럼 전 폐하의 정부에 지나지 않겠죠?”

“그, 그렇긴 하겠지만 그 누구보다 깊은 총애를 받으실 겁니다. 그 어떤 여인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사실 거예요.”

에일린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씁쓸하게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부인께선 오랜 시간 황궁 생활을 하셨으니 잘 아시겠지요. 선대에 계셨던 황제 폐하의 수많은 여인들에 대해서도 익히 봐오셨을 테고요.”

“물론입니다.”

애플턴 부인이 턱을 조금 치켜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럼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그 여인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

순간 애플턴 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황급히 지난 기억을 더듬어 황제의 여인들이 살았던 삶을 되새겨 봤다. 그리 행복해 보이던 여자는 없었다. 고독하거나 비참하거나 나아가 처참했던 여자들은 많았지만.

“현 황제께서는 선제와 다르십니다. 여색을 밝히시지도 않고…….”

“저는 서로에게 단 한 사람이 되길 원해요.”

“영애…….”

“한 남자의 그늘에 숨어 그가 주는 걸 다른 이와 나누며 연명하는 삶, 제가 찾는 행복은 그런 모습이 아니에요.”

에일린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애플턴 부인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살다 보면 부귀영화, 사실 별거 아니에요. 재물은 소소하게 살아갈 정도만 있으면 충분해요. 죽을 때가 되면 ‘아, 좀 더 호강했다면 좋았을 걸…….’ 하는 바람은 별로 들지 않거든요. 단지…….”

에일린은 말을 끝맺지 않고 질문했다.

“부인, 부인도 진실한 사랑을 해 보신 적이 있나요?”

“진실한 사랑……이라고요?”

“예. 서로에게 하나뿐인 유일한 사랑이오.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기꺼이 할 수 있고 또 뭐든 버릴 수도 있는 그런 사랑이오. 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애플턴 부인은 무거운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주 짧은 순간 그녀 자신의 지난 인생을 떠올렸다. 그저 그런 귀족 가문의 여식으로 태어나 그저 그런 자작 가문의 후계자와 정략결혼을 했다. 몇 년 데면데면 살다가 남편은 전쟁터에서 죽고 자신은 과부 신세가 된 후 황궁 시녀로 줄곧 살아온 터였다.

“없군요,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은…… 없을 겁니다.”

“죽을 때가 되면 그런 게 한으로 남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찾아볼 거예요. 오직 나만 사랑해주고 나도 그 사람만 사랑하는, 서로에게 유일하고도 진실한 그런 사랑을요.”

“서로에게 유일하고도 진실한 사랑…….”

에일린을 따라 그 말을 되뇌자 왠지 가슴 속이 저릿해지는 것 같았다.

“대다수 사람의 인생은 단 한 번뿐이잖아요. 어떻게 운이 좋아 다시 산다고 해도 그 삶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아무도 몰라요. 그 끝이 오늘이 될 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른 봄의 빛을 품은 듯한 연초록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에일린이 계속 얘기했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열심히 찾아보고 싶어요. 내 의지로, 내 힘으로 내 사랑과 행복을 찾아볼 거라고요.”

에일린의 얼굴이 무척이나 환하게 보였다. 찰나의 순간 마치 후광이라도 비치는 것 같았다. 애플턴 부인은 처음의 기세를 모두 잃은 채 조금 감탄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부러운 마음이 들어 한마디 중얼거렸다.

“멋진…… 꿈이로군요.”

아아, 그래. 멋진 꿈이다.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지녀봤을 아련한 꿈. 하지만 영원히 꿈으로만 남아 실체를 확인할 수 없던 그런 것. 왠지 목이 멨다. 이 어린 아가씨가 마치 자신보다도 더 오래 살아온 듯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풀어내는데도 그다지 어색하거나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굳건해 보이는 눈빛이었기에. 오히려 애플턴 부인은 자신의 비루한 인생 경험과 안목을 들킨 것 같아 쑥스러운 기분마저 밀려왔다. 혼란스럽기는 했다. 자신의 임무는 에일린을 옆에서 보좌하며 지켜보는 동시에 황제에게 마음이 기울 수 있도록 유도하는 거였으니까. 오늘은 그만 자신의 본분을 잠시 잃고 말았다. 애플턴 부인은 지금 상황이 조금 기가 막히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능한 황궁 시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닌 듯했다. 멍한 얼굴로 앉아있는 애플턴 부인에게 에일린이 불쑥 말을 걸었다.

“저, 드레스는 폐하께서 보내신 걸 입더라도 장신구는 제 마음대로 걸쳐도 괜찮겠죠?”

“그렇게 하세요.”

애플턴 부인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에일린이 가진 보석들은 모두 황제가 보내준 것밖에 없으니 뭘 걸치든 상관없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거죠?”

에일린이 밝은 웃음을 지었다.

“물론이죠.”

그게 뭐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싶었지만 무도회를 앞둔 어린 아가씨의 설렘이 느껴져 함께 웃어주었다. 그래, 장신구 정도는 이제 마음대로 선택해도 될 것이다. 어느 것 하나 값지지 않은 것이 없으니까. 한순간 아주 원숙하고 속 깊은 태도를 취한 듯했지만 지금 보니 영락없이 그 나이대의 철부지 아가씨였다. 별수 없을 것이다. 이런 화려한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새 그 생활에 익숙해져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안달하지 않아도 황제 폐하의 손아귀로 스스로 걸어갈 날이 머지않았으리라. 조금 전에 가졌던 낯선 생각들이 무색해지기만 했다. 애플턴 부인이 방밖으로 나가자 에일린은 즉시 제퓌에게 청했다.

“제퓌, 히에무스에게 가서 저번에 보여줬던 장신구들을 좀 빌려달라고 해줄래요? 그렇게 말하면 아마 알아서 내줄 거예요.”

“그럴게요, 에일린 님. 저희도 알고 있어요.”

제퓌가 냉큼 대답했다. 그들의 왕이 참 기뻐하실만한 이야기였다. 세 정령들도 들뜬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그 보석을 착용하시면 정말 잘 어울리실 거예요! 에일린 님.”

“맞아요! 정령의 솜씨, 그것도 대지의 왕께서 직접 세공하신 거잖아요? 아마 에일린 님이 무도회에서 제일 돋보이실 거예요.”

“그렇고말고요.”

세 정령들도 이번 무도회는 제대로 잘 구경해 볼 참이었다. 정말 근사할 것이다. 정령의 왕께서도 참석해 춤을 추실 거니까. 생각만 해도 흥분돼 절로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정령들이 한참 동안 에일린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재잘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

마침내 무도회 날이 밝았다. 무도회는 일몰 후에 시작했지만 에일린은 오전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이건 못 보던 것들인데 어디서…… 난 것이죠?”

히에무스에게 받아온 장신구들을 보더니 애플턴 부인과 두 하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제가 아는 귀족 친구가 있어요. 그분께 빌렸어요.”

“귀족 친구분이 계시다고요?”

“예전에 알게 된 드라코니아 귀족이신데……. 언제든 빌려준다고 하셔서 이번에 부탁드렸어요. 오늘 드레스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무도회에 입고 갈 드레스는 빨간색과 황금색이 어우러진 비단에 황금색과 초록색 자수가 섬세하게 장식된 거였다. 다른 보석도 있지만 애플턴 부인이 보기에도 이쪽이 훨씬 더 멋지고 잘 어울려 보였다.

“그렇군요……. 정말 값지고 귀중해 보이네요. 이런 걸 선뜻 빌려줄 귀족 친구가 계신 줄은 몰랐네요. 그분 존함을 알 수 있을까요?”

그녀는 에일린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황제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라케르타’ 공작…… 이라는 분이세요.”

“라케르타 공작? 설마 이번에 드라코니아의 공주님과 함께 오셨다던 그분 말인가요?”

“예.”

“……!”

라케르타 공작이라면 오늘 무도회의 주역일 텐데?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게…… 그분께서 우연히 고난에 처한 저를 도와주신 적이 있어요. 그때 알게 됐어요.”

뭔가 숨기는 듯 얼버무리는 게 거슬렸지만 애플턴 부인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앞으로 천천히 알아보면 될 일이다.

에일린의 이번 무도회 파트너는 또 케일론이었다. 황제의 명이라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 하긴 케일론 외에 그런 걸 부탁할만한 사람도 없었다. 히에무스 역시 대외적인 이유 탓에 드라코니아의 왕녀를 파트너로 정한다고 했다. 오늘은 가져갈 짐도 제법 많고 시녀들과 호위 기사도 함께 갈 예정이었다. 무도회에 공식적으로 참석하는 것이기에 마차를 이용해 황궁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순간이동 마법보다 사두마차를 타고 등장하는 게 더 그럴듯해 보일 테니까.

“잠깐이면 갈 거리를 귀찮게 한 시간이나 들여서 가다니.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군.”

케일론이 투덜거렸다. 마차에 오르던 에일린이 즉시 그를 돌아보며 일렀다.

“대신 마나를 아낄 수 있으시잖아요.”

“…….”

사실 그도 에일린과 함께 마차를 타고 갔다면 오히려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차엔 애플턴 부인과 하녀들도 탈 예정이라 그사이에 낄 수 없었다. 그는 다른 호위 기사들과 같이 추운 겨울 날씨를 뚫고 말을 타고 가야 했다.

“케일론 님은 마법을 이용해서 먼저 가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됐습니다.”

그럴 수는 없었다. 황제가 특별 대우하는 이 여인을 호위해야 하니까. 자신이 파트너니 함께 가는 게 당연하고. 사실 그리 맘이 상한 건 아니었다. 황제의 명으로 에일린을 에스코트하는 일을 억지로 맡게 됐지만 은근히 설렜다. 파트너니까 적어도 한두 곡 정도는 함께 춤도 출 것이다.

‘왜 이렇게 거북하고 껄끄럽게 느껴지지?’

조금 빠르게 말을 모는 동안 생각해 보니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자 때문이다. 오늘 무도회의 주역으로 등장할 그 남자, 에일린이 조금은 사랑한다던 그 사내 말이다. 두 사람을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웬일인지 자꾸만 미간이 찌푸려졌다. 차가운 바깥 온도에도 불구하고 말고삐를 쥔 손에 땀이 찼다. 그의 푸념이 무색하게도 어느새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황궁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법을 쓰지 않고 이동했는데도 왠지 순식간에 당도한 느낌이었다.

***

지난번처럼 아젤란 귀족들이 제일 먼저 입장한다고 했다. 그다음엔 다른 나라에서 온 왕족과 귀족들이 들어오고 주빈 역할인 드라코니아의 참석자들은 제일 끝 순서였다. 에일린은 아젤란 귀족들 사이에 들어가는 것으로 차례가 정해졌다. 이번엔 휴게실도 따로 배정해주었다.

“폐하께서 정말 신경을 많이 써주셨네요. 이렇게 단독으로 휴게실을 이용하는 건 원래 황후나 황녀 등 황족만 가능한 일이거든요.”

애플턴 부인이 흥분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사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줄곧 신경이 쓰였다. 귀족 출신 황궁 시녀의 신분으로 모시는 아가씨가 평민이라는 사실이. 예전에 엘시아를 비롯한 몇몇 공녀와 시녀들에게 놀림을 당한 적도 있기에 오늘 그들과 다시 부딪힐 일이 스트레스였다. 시녀들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자존심 대결이랄까 힘겨루기 같은 게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렇듯 황제께서 세심하게 에일린을 대접해주고 챙겨주니 힘이 막 솟는 기분이었다.

“참으로 망극하고 황송한 일입니다. 폐하께서 영애를 생각하시는 마음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잘 알 것 같지 않습니까?”

“예, 정말 감사하네요.”

렉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게 느껴져 에일린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의 물량 공세가 요즘 더 대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과한 배려가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뿌우우.

무도회 입장을 준비하라는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렸다. 애플턴 부인이 재촉했다.

“자, 어서 나가시지요.”

***

문밖에 나와 보니 언제 왔는지 케일론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사이 방한용으로 입었던 털가죽 망토를 벗고 좀 더 가볍고 화려한 예복용 망토로 갈아입었다. 의상도 마법사 전용 로브 대신 다른 여느 귀족들처럼 화려한 남성용 블리오를 걸친 모습이었다. 그가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하며 파트너에 대한 예를 갖췄다. 에일린도 애플턴 부인에게 교육받은 대로 맞절을 하고 그가 내민 손을 잡고 걸었다. 예전에 와봤던 대연회장 입구에서 멈춘 채 입장 순서에 맞춰 대기하려니 수많은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눈길 하나하나에 호기심이 넘쳐나는 듯했다. 대놓고 그 자리에서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집요하게 찔러오는 시선이 느껴졌다.

“케일론 님.”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엘로드가 엘시아 왕녀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오늘은 두 사람이 파트너인가 보다. 엘시아는 아젤란 귀족인 엘로드와 함께 일찍 입장할 생각인 것 같았다.

“엘로드 공.”

케일론이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엘시아를 향해서도 정중한 묵례를 잊지 않았다. 엘로드와 엘시아 왕녀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에일린을 슥 바라보다가 둘의 눈이 동시에 커다래졌다. “!”

그녀의 모습이 생각보다 훨씬 아름답고 화려했기 때문이다. 유난히 고급스러운 의상과 화려한 장신구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둘은 잠시 홀린 듯 멍하니 에일린을 바라보다 흠칫거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엘시아의 입꼬리가 한쪽만 비틀리듯 올라갔다. 분하고 가소로웠다. 오늘 행색만큼은 일국의 왕녀인 자신보다도 에일린이 훨씬 더 휘황찬란해 보였다. 저따위 보잘것없는 평민이 말이다.

“정말 노고가 많으시군요, 케일론 님. 폐하의 명으로 대마법사께서 이런 일까지 하셔야 하다니.”

“노고랄 게 뭐 있겠습니까? 이런 임무는 저도 좋습니다.”

케일론이 다소 쉰 딱딱한 말투로 대꾸했다. 엘로드가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싱긋거렸다.

“그러십니까? 그럼 다행이군요. 줄곧 경을 걱정했는데. 저뿐만 아니라 엘시아 왕녀께서도 염려가 많으셨지요.”

“두 분 다 괜한 걱정을 하셨군요.”

“…….”

에일린은 기분이 상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엘로드 체이스 데 캐드릭스 후작님과 엘시아 아나이스 미케일라 엘 베르니스 님!”

엘로드와 엘시아 두 사람을 호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로드가 묵례를 하며 엘시아와 함께 에일린을 스쳐 지나갔다. 케일론이 에일린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며 한마디 건넸다.

“뭐, 폐하의 명이 없더라도 그대가 청했다면 기꺼이 응했을 겁니다.‘

“예? 뭐라 하셨어요?”

너무 낮은 목소리였기에 잘 알아듣지 못해 되물었다.

“아닙니다.”

“……?”

“케일론 아리스타 데 아스카니아 백작님과 에일린 클라우디아 데 루쿨루스 님 드십니다.”

때마침 궁정 의정관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가죠.”

케일론이 그녀를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며 이끌었다. 대연회장 안으로 들어서니 높은 단상에 렉스가 의연한 자세로 자리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심지어 저번에 열렸던 더 큰 규모의 무도회보다도 훨씬 더 호화롭게 단장한 모습이었다. 렉스는 에일린과 마주하자 빙그레 미소를 보내주었다. 에일린은 배운 예법대로 인사하고 정해진 위치로 가서 섰다. 이어 일사불란하게 이어진 아젤란 귀족들의 입장이 마무리되었다. 곧 다른 나라 귀족들 입장까지 별일 없이 진행되었다. 드디어 오늘 주역인 드라코니아의 귀족들이 등장할 순서가 다가왔다. 바로 히에무스가 들어올 차례였다. 에일린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긴장돼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드라코니아의 왕녀이신 ‘스킬라 칼리아 에리스 레 라케르타’ 님과 ‘히에무스 칼릭스 클라인 레 라케르타’ 공작님 듭시오.”

“우와아아!”

대연회장에 모여 있던 수많은 사람이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탄성을 내질렀다.

***

히에무스가 낯선 공주님과 함께 대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훤칠한 키에 은빛 찬란한 달빛을 휘감은 듯 반짝이는 긴 머리가 가장 먼저 시선을 붙들었다. 정령일 때와 다르게 반쯤 묶어 늘어뜨린 형태였다. 날렵한 얼굴선이 더욱 돋보였다. 그림 같이 수려하게 자리 잡은 콧날과 적당히 크고 도톰한 입술, 차갑게 빛나는 깊고 투명한 두 눈동자가 한 번에 드러나 보였다. 푸른빛과 은빛, 자줏빛이 잘 조화된 화려한 블리오를 걸치고 왕족임을 상징하는 자줏빛 망토를 두른 자태가 그지없이 눈부셔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 정도였다. 마법 약을 먹어 인간이 됐지만 그를 둘러싼 광휘만 사라졌을 뿐 근접하기 힘든 아우라가 여전히 그를 감쌌다.

“와아!”

에일린도 다른 이들처럼 황홀한 눈으로 감탄사를 쏟아냈다. 그가 인간으로 변한 모습을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정령일 때도 신비롭고 매혹적이지만 지금은 다른 느낌의 요요함을 온몸으로 뿜어냈다. 그가 에스코트하는 공주의 미모도 남다른 수준이었지만 그 순간 대연회장에 모인 이들의 눈길과 관심은 오직 히에무스에게만 집중됐다.

“정말 우아하고 멋지다.”

“진짜 잘 생겼어.”

“아름다워…….”

귀족 여인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 새어 나왔다. 에일린은 히에무스가 반갑고 자랑스럽고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성큼성큼 걸어오던 그가 시선을 옮기다 그녀를 찾아냈다. 차게 굳었던 그의 입가에 눈 꽃송이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심장을 자극하는 아찔한 미소! 순간 에일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런데 그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우와, 어쩜 좋아, 나를 보고 웃어주셨어!”

“아니야! 내게 보여준 거라고!”

“무슨 소리, 분명 내 쪽을 향했는데.”

주변 여인들 모두가 얼굴을 붉힌 채 서로 자신을 향한 미소라고 주장하는 소리로 일대가 소란스러웠다. 그중에는 레나테 공주를 비롯한 공녀들도 서넛 끼어 있었다. 엘시아 왕녀까지 히에무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작은 세 정령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떠들어댔다.

“어라, 왕께서 우리에게 아는 체를 해주시네.”

프리기가 감격스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아두스가 냉큼 반박했다.

“멍청하긴, 에일린 님 때문에 웃어주신 거지. 우릴 보고 그러시겠냐?”

“그런가…….”

조금 시무룩해진 얼굴로 프리기가 중얼거리자 제퓌가 말했다.

“어쨌든 무척 반갑지 않아? 이런 곳에서 왕을 뵙게 되니.”

“글쎄. 반갑긴 한데 마냥 좋아할 일인가? 오늘 밤 내내 눈치를 봐야 할 텐데.”

아두스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환했던 셋의 얼굴이 금방 어두워졌다.

***

에일린은 어쩐지 쑥스러워 사정없이 벌어지는 입가를 급히 다물었다. 하지만 자꾸만 얼굴에 열이 홧홧하게 오르고 입술이 귓가에 걸렸다. 괜히 손가락과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에일린의 옆을 지키던 케일론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의 상기된 볼과 요란한 심장의 파동이 그에게도 낱낱이 감지됐다. 선명한 보랏빛 눈을 치켜뜨고 에일린이 조금은 사랑한다는 그 사내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에무스는 잠시 더 솜사탕 같은 미소를 담은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오라버니, 어서…….”

스킬라 공주가 재촉하자 마지못해 가던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흑발 공주의 오렌지빛 눈이 에일린을 비롯한 주위 여자들을 날카롭게 훑었다. 그러다 눈에 띄는 장신구와 옷차림새를 갖춘 에일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에일린은 미처 그 눈길을 의식하지 못했지만 한순간 선득한 냉기가 그대로 꽂히는 걸 느꼈다. 스쳐 지나는 공주의 두 눈썹이 매섭게 위로 치솟았다. 이윽고 둘은 황제 가까이 나아가 다들 하듯이 장황한 인사말을 읊조렸다. 렉스 역시 습관처럼 입에 발린 축복의 말을 되돌려 주며 특별한 이국의 손님들을 맞이했다. 이어 그날의 마지막 참석자들이 호명되었다.

“드라코니아에서 오신 브로미오스 아델리오 레 파인스 백작님과 엘레스트라 샤이나 레 브로케 님!”

“……!”

‘엘레스트라’라고? 설마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물의 정령이란 말인가? 의정관이 잠깐 사이를 두더니 마저 불렀다.

“그리고 렌투스 로이드 레 콜루베르 자작님과 알리샤 로디아 레 콜루베르 님!”

에일린은 다소 놀란 눈으로 대연회장 입구를 주시했다. 익숙한 두 사람이 다가왔다. 브로미오스가 참석할 거라는 건 미리 들었지만 엘레스트라에 대해선 몰랐다. 항상 루쿨루스 숲에 있던 정령이 여기까지 오다니!

“와!”

좀 전보다는 반응이 약했지만 여전히 찬탄이 흘러나왔다. 에일린도 대연회장 입구에 나타난 사람을 기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들어선 그녀의 모습이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다. 인간이 되게 해주는 마법 약 외에도 다른 마법을 더한 것 같았다. 지느러미 같았던 귀 모양이 보통 인간들처럼 자연스러워졌고 머리카락도 푸른빛 대신 갈색으로 바뀌었다. 누가 보더라도 20대 초반의 젊은 인간 귀족 영애처럼 보였다. 그녀도 지금 자신의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드는 듯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굴리며 열심히 주변을 살폈다.

“어!”

엘레스트라는 에일린과 눈이 마주치자 즉시 윙크를 해 보였다. 브로미오스 역시 비슷한 나이대의 멋진 귀족 청년처럼 꾸몄는데 생각 이상으로 잘 어울렸다. 뒤를 이어 들어오는 이들은 에일린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연달아 들어서는 여섯 명의 드라코니아 귀족들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달아오른 열기와 설렘이 사방에 넘실거렸다.

뿌우우!

좌중의 소란스러움을 단번에 진정시키는 장중한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렉스가 위엄 있는 태도로 옥좌에서 일어나 우뚝 섰다.

“오늘 참석해준 모든 분들에게 환영과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소. 특히 얼마 전에 아젤란 제국에 온 드라코니아의 스킬라 공주와 라케르타 공작 일행에겐 더욱 각별한 환영의 뜻을 전하오.”

잠시 말을 끊었다가 모인 이들의 열띤 시선을 즐긴 뒤 계속했다.

“이제 안드로스 대륙은 아젤란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되었소. 오늘 밤의 이 행사가 이를 기념하는 자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모두 마음껏 마시고 춤추며 흥겨운 제국의 무도회를 즐겨주시오. 자아, 이제 시작하라!”

“와아아!”

경쾌한 환호성이 광대한 대연회장 안을 가득 메웠다.

***

무도회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춤이다. 분위기를 띄우고 사교의 폭을 넓히는 데 그만한 게 없었다. 참석자 모두가 홀 중앙으로 나와 줄지어 섰다. 파트너를 바꿔가며 추는 춤을 시작으로 무도회의 막을 열 셈이었다.

“이쪽으로.”

“예.”

에일린도 케일론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적당한 위치로 가서 섰다. 대열의 맨 처음에 황제 렉스와 파트너인 황족 여인이 그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히에무스와 스킬라 공주가 자리한 모습도 보였다. 에일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히에무스가 정말 인간의 모습, 그것도 당당하고 의연한, 그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을 멋진 모습으로 나타난 게 꿈만 같았다. 구름 위를 나는 듯 마음이 둥실거렸다. 좀 진정시키려 일부러 굳은 표정을 지어보려 했지만 별 소용 없어 계속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계속 그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에일린, 어딜 자꾸 보는 겁니까?”

케일론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 죄송해요.”

퍼뜩 정신이 들어 파트너인 케일론을 향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눈길이 히에무스 쪽으로 갔다.

“…….”

물론 에일린뿐만 아니라 거기 모인 대부분 여인들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히에무스를 비롯한 드라코니아 귀족들을 바라보며 미소 짓기 바빴다. 그녀들의 앞에 선 남자 파트너들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구기며 쓴웃음을 지었다.

“타우루스 춤!”

궁정 의정관이 목청껏 외쳤다. 홀 가장자리 발코니에 대기 중이던 악사들이 즉시 장중한 음을 연주했다. 단조로우면서도 애수가 깃든 춤곡이 흘러나오자 일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젤란의 귀족도, 다른 나라에서 온 귀족도, 심지어 루쿨루스 숲에서 온 정령들까지 일사불란한 몸짓으로 우아한 춤사위를 만들어냈다. 색색의 화려한 비단옷을 차려입고 빙글빙글 돌며 이런저런 춤 동작을 연결하는 광경이 참으로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다. 마치 수많은 꽃송이가 한꺼번에 만개하는 것처럼 장엄해 보였다. 휘황찬란한 마법석 샹들리에에서 쏟아져 내린 빛줄기가 눈이 아릴 정도로 현란한 광채를 더해주었다.

“와아아! 좋다! 정말 근사하다.”

“우리 왕께서도 제법 잘 추시는데? 표정이 좀 얼었지만.”

“그러게. 가을의 왕께서도 저 정도면 자세가 괜찮아. 시선 처리도 좋네.”

“엘레스트라 님도 약간 느린 게 아쉽지만 그럭저럭 봐 줄 만해.”

“사실 대충 춰도 정령들이 더 돋보이긴 하지.”

“그렇지. 이런 데선 생긴 게 반은 먹고 들어가거든.”

“뭐, 인간들도 다들 멋져. 저렇게 꾸몄는데 멋지지 않기도 힘들지만.”

세 정령들이 서늘한 발코니 위에 조르륵 앉아 연회장을 내려다보며 저들끼리 평가를 내렸다. 에일린이 댄스 수업을 할 때마다 지켜봤던 터라 그들도 댄스에 꽤 일가견이 있었다. 인간계에 들어오면서 지식이 나날이 늘어갔다. 아두스가 만족한 표정으로 유심히 아래를 구경했다. 오늘 일을 잘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겨울의 궁전에 가서 실컷 자랑할 심산이었다.

“와, 파트너가 바뀐다!”

“원래 그런 춤이라고. 저번에 정령들 축제에서 출 때도 파트너가 바뀌었잖아? 연습할 땐 여건이 안 되니까 그러지 못한 거야”

제퓌의 말에 아두스가 즉시 아는 체를 했다. 나머지 두 정령이 이제 생각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똑같이 배워도 익히는 정도는 차이가 나는 법이다.

“이제 우리 왕과 에일린 님이 만나셨어!”

프리기가 외치는 소리에 우쭐한 기분에 빠져 있던 아두스가 즉시 현장을 내려다봤다. 그들의 왕과 에일린이 마주 보며 서로 맞절을 하는 장면이 보였다. 에일린은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잡은 채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히에무스는 한 손을 가슴에 올린 채 허리를 숙이는 동작이었다. 아두스가 흐뭇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오, 두 분 제법 잘 어울려…….”

“에일린!”

바람 소리처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히에무스가 겨울 햇살처럼 반짝이는 미소를 머금은 채 에일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히에무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애정 어린 목소리에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에일린이 손을 내밀자 즉시 그의 커다란 손아귀가 다가와 꼭 감아쥐었다. 부드러우면서 단단한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아……!”

에일린은 아까보다도 더 심장이 벌렁거렸다. 인간이 된 따스한 히에무스의 손이었다.

***

“잘 지냈느냐? 며칠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가 보지도 못했다.”

그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걸어왔다.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니 정령일 때와 다르게 더운 숨결과 체온, 상큼한 체취가 그대로 전해졌다. 늘 그를 감싸던 밝은 빛이 사라지니 왠지 평소보다 친근하고 남성적인 느낌이 더 강하게 와닿았다.

“예, 잘 지냈어요. 당신도 괜찮으세요?”

“내 걱정은 하지 마라. 늘 좋으니까.”

에일린은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낯설어 잠시 만지작거렸다. 히에무스가 순간 흠칫 놀라는 듯하다 곧 얼굴을 붉혔다.

“오늘…… 참 예쁘구나. 에일린.”

히에무스가 홍조가 오른 뺨에 황홀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와중에 춤동작을 계속 취했다. 서로 손을 교차시키며 맞대는 동작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고, 고마워요. 당신도 정말, 정말 멋져요.”

정말이다. 이런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함께 춤을 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단정한 얼굴에 발간 미소가 번졌다.

“그, 그러냐? 내 모습이 그대의 마음에 드느냐?”

그 역시 수줍은 듯 홍조가 진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마음에 안 들 리가 있겠는가? 사실 히에무스의 모습이 싫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 취향이어서 탈이지. 지나치게 아름답기에 되레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알기 어려운 면도 있었다. 그것 때문에라도 도저히 포기가 안 되는 것 같았으니까. 물론 지금은 외모뿐만이 아닌 다른 부분 때문에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졌지만.

“예. 늘 멋지지만 오늘은 훨씬 더 멋있어요.”

“그대도 오늘 최고로 예뻐. 볼 때마다 아름다워져.”

그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강렬한 눈빛으로 에일린을 눈 안에 담았다. 각자 등지며 천천히 스쳐 지나가는 춤사위를 취하며 마치 현혹이라도 된 듯 상대를 응시했다. 붉게 상기된 얼굴에 타는 듯 선명한 시선만이 둘 사이를 채웠다. 순간 그 자리에 오직 그 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물론 실제로 그런 건 아니었으니……. 두 사람의 맞은편에 서서 춤추던 두 남녀가 전혀 다른 매서운 시선을 쏘아 보냈다. 하나는 용족 공주의 오렌지빛 눈동자였고, 또 하나는 케일론의 보랏빛 눈동자였다. 그리고 또 하나.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그에 못지않게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내는 자가 있었다.

“······!”

아젤란의 황제, 렉스의 새파란 눈동자였다. 미간에 깊은 그늘이 질 정도로 찌푸린 표정으로 입술을 굳게 다문 모습이었다. 의혹과 당혹감, 질투심이 가득 담긴 것 같았다. 장중하고 느린 타우루스 춤의 마지막은 파트너가 된 상대 여성의 손에 남자가 키스하는 시늉을 하는 거였다. 히에무스는 여태껏 다른 이들에겐 흉내만으로 끝냈던 동작을 실제로 행했다. 깊게 허리 숙여 에일린의 손등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것이다. 꽤 오래 하는 바람에 둘은 박자를 놓치고 말았다.

***

“당신이 바로 히에무스 님의 연인이군요?”

렌투스가 에일린과 춤을 추는 차례였다.

“예? 당신은…….”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렌투스라고 합니다. 히에무스 님의 일을 돕고 있는 드라코니아의 귀족입니다.”

유난히 커다란 덩치에 짧게 깎은 새하얀 머리가 눈에 띄었다. 맑은 연하늘색 눈동자가 서글서글해 인상이 좋아 보였다.

“아, 그러시군요. 저는 에일린이라고 해요.”

“알고 있습니다. 히에무스 님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무슨 이야기를 했다는 것일까? 왠지 쑥스럽고 민망한 기분이 밀려왔다.

“잘…… 부탁드릴게요.”

“하하, 히에무스 님 말씀이시죠? 걱정 마십시오. 최선을 다해 보필할 테니.”

“예, 고마워요.”

손을 내밀어 맞대고 서로 다가오고 멀어지는 동작을 취했다. 맑고 높은음을 자아내는 관악기와 현란한 기턴의 음이 어우러져 널찍한 홀을 휘감았다.

“같이 입장하신 파트너분은 친척인가요?”

“제 여동생입니다. 스킬라 공주님의 시녀로 따라온 아이인데 제가 파트너를 부탁했지요.”

“그렇군요. 닮아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느새 손등에 키스하는 시늉을 하는 마지막 순서였다. 그의 입술이 닿을 듯 말듯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럼, 이만……. 또 뵙지요.”

다음은 브로미오스 차례였다. 시종 유쾌한 듯 얼굴이 기쁨으로 젖어 있었다.

“잘 지내는 것 같구나.”

“안녕하세요?”

“그래, 덕분에. 정말 네 덕분에 요즘 잘 지내고 있단다.”

에일린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덕분이라뇨?”

“네가 아니었다면 이런 경험을 할 수 없었을 것 아니냐? 그러니 그대 덕분이지.”

“…….”

“가르쳐준 춤도 이렇게 잘 활용하고 말이지.”

에일린은 문득 생각나 엘레스트라에 대해 물었다.

“엘레스트라 님은 어떻게 되신 거예요?”

다소 멀리 떨어진 그녀를 바라보며 가을의 왕이 대답했다.

“갑자기 무도회 파트너를 구하려니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더군. 급한 대로 그녀에게 부탁했더니 흔쾌히 수락하더구나. 입이 좀 가벼운 게 흠이지만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으니 괜찮을 것이다.”

에일린도 상급 물의 정령 엘레스트라를 넌지시 바라봤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신이 난 얼굴로 나비처럼 사뿐사뿐 스텝을 밟고 있었다. 브로미오스와도 맨 끝 동작을 취하고 인사하고 나니 불쑥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싸늘하게 굳은 표정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입만큼은 웃는 모양을 유지한 채였다.

“오늘 네 의외의 모습을 많이 보는 것 같구나.”

“폐하.”

황제 렉스였다.

***

그즈음 히에무스도 다른 귀족 영애와 파트너가 되어 동작을 맞추고 있었다.

“저, 저는 레나테라고 해요. 스파니아 왕국의 3왕녀랍니다, 라케르타 공작님.”

레나테 공주가 홍당무처럼 빨갛게 익은 얼굴로 목소리까지 더듬거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히에무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짧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영광이에요, 공작님. 이렇게 뵙게 돼서…….”

아, 참으로 영광이었다. 그저 소문으로만 들었던 빼어난 마법 기사가 정말로 존재했다. 이렇게나 멋지고 아름다운 남자였다니. 잠깐이지만 함께 춤을 춘다는 사실이 무척 황홀하게 느껴졌다. 흥분으로 들뜬 그녀와는 달리 공작은 태도가 좀 딱딱하고 차갑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커다란 매력으로 느껴졌다. 유감스럽게도 파트너로 함께 할 시간이 짧아 곧 다른 여인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지만. 레나테 공주가 아쉬운 얼굴로 옆을 보니 다음 파트너는 엘시아 공주였다. 안드로스 대륙 최고의 미녀로 소문난 그녀……. 레나테는 순간 주눅이 들었으나 곧 엷은 미소를 되찾았다. 라케르타 공작은 대륙 최고 미인을 대할 때나 자신을 대할 때나 태도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엘시아는 자신과 비슷했지만.

렉스가 다른 이들처럼 우아한 첫 동작을 소화하고 난 뒤 에일린에게 말을 건넸다.

“인맥이 꽤 넓어 보이더구나. 특히 라케르타 공작과 아주 친한 것 같던데 어떻게 알게 된 사이지?”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에일린은 별생각 없이 얘기해줬다.

“예전에 제가 고난에 처했을 때 그분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요.”

“도움을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어떤?”

“음……, 제가 아칸 왕국에서 이곳으로 오다가 병에 걸린 적이 있었거든요. 함께 길을 떠났던 숙부님이 절 감당하지 못해 숲에 버리고 가셨고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린을 처음 만난 날 그렇게 얘기했던 게 기억났다. 에일린은 예전에 했던 설정에 맞춰 상황을 지어내느라 머리가 복잡해졌다. 히에무스가 정령이라는 걸 밝히지 않은 채 설명하려니 걸리는 게 많았다.

“숲에 있는 동굴에서 혼자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공작님이 저를 치료해주고 가셨어요.”

“치료만 달랑 해주고 그 위험한 겨울 숲에 너를 혼자 내버려 두고 떠났다는 거냐?”

렉스가 다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질문을 계속했다. 그렇게 말하니 히에무스가 참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치료는 해주지만 고난에 처한 이를 더 이상 돌보지 않고 떠난 박정한 자가 돼버린 건가?

“그분은 데려가려고 하셨지만 제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숙부님이 다시 돌아오실지 몰라서.”

렉스의 얼굴에 여전히 의문 표시가 가득했다. 에일린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거길 떠나면 유일한 친척인 숙부님과 헤어져 다시는 못 만나게 될 것 같아서요.”

“그래? 그렇게 매정한 친척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단 건가?”

새파란 두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득였다. 에일린은 속으로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땐…… 그랬어요. 다시 절 찾으러 오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렉스는 그제야 수긍한 듯 몇 번 머리를 주억거렸다.

“혹 네 숙부를 만나길 원한다면 내가 알아보겠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제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아요. 절 버리고 가셨으니 더는 찾고 싶지 않아요.”

사실 찾을 수도 없었다. 이름도 모르는 숙부를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오히려 만나게 되면 곤란한 일이 많아질 것이다. 에일린의 몸 안에 든 영혼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들킬 수도 있을 테니.

“그래? 이후라도 생각이 바뀌면 말해다오. 이 안드로스 대륙 어디든 내 눈과 귀가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찾을 수 있다.”

“예, 감사합니다.”

“도움을 받은 것 외에 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둘의 다정했던 모습을 보건대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물론……입니다.”

에일린이 조금 주저하다 느릿하게 대꾸했다.

“그런가?”

그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어느새 마지막 춤사위인 손등 키스 장면이었다. 렉스가 에일린의 손 위에 히에무스 못지않게 긴 시간을 들여 입을 맞췄다. 허리를 곧추세운 그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싱긋 미소를 지었다.

“같은 춤만 반복하니 지루하지 않느냐? 이제 다른 춤을 추자꾸나.”

“예? 아, 예. 폐하.”

그가 한 손을 치켜들자 즉시 타우루스 춤곡이 멎었다. 시계추처럼 움직이던 대열 역시 그 자리에 고정되었다. 렉스가 에일린의 손을 잡은 채로 천천히 홀 중앙으로 이동했다. 그때까지 유지되던 대열이 크게 벌어지더니 모두가 가장자리로 둥글게 서는 형태를 취했다. 텅 빈 둥근 원의 한가운데 렉스와 에일린, 둘만 자리 잡고 다음 춤을 추기 위해 대기했다. 곧 궁정 의정관의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푸스 춤!”

얼마 전 애플턴 부인이 심혈을 기울여 가르쳐줬던 조금 빠른 춤곡이었다. 배울 때 어려워했던 기억이 나 에일린은 살짝 긴장했으나 치맛자락을 잡고 춤출 준비를 했다. 높고 가는 현악기와 백파이프 음이 타악기 반주와 함께 흘러나왔다. 렉스와 서로 마주 보며 제자리에서 발을 굴리며 상대를 향해 나아가는 춤사위를 시작했다.

“와아!”

커다란 원을 만들어 에워쌌던 참석자들이 경쾌한 환호성을 질렀다. 엘시아를 비롯한 공녀들은 질투와 분노로 얼룩진 눈으로 에일린을 쏘아봤다. 루쿨루스 숲에서 온 세 정령의 낯빛엔 뜻 모를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히에무스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뭔가? 둘이서만 추다니. 그리고…… 저런 춤도 있었나?”

싸한 느낌이 지나갔다. 아무래도 춤을 덜 배운 것 같았다.

***

“역시 인간들은 복잡하군. 춤도 한 가지 형태가 아니라 여러 가지인 모양이야.”

히에무스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푸념하자 바로 옆에 있던 렌투스가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그러니까 세 분 다 ‘타우루스 춤’ 말고는 출 수 있는 게 없단 말입니까?”

“그렇다. 우리가 배운 건 한 가지 형태뿐이거든.”

어느새 브로미오스도 물의 정령인 엘레스트라와 함께 곁에 왔다. 렌투스는 황당한 눈빛으로 정령들을 훑으며 말했다.

“낭패로군요. 저번에 춤에 대해선 잘 알고 계시다고 하기에 가르쳐드리지 않은 건데. 하, 난감하네요.”

“…….”

다들 할 말이 없었다. 자신들의 실수니 뭐라 원망할 데도 없었다. 히에무스는 조금 침묵하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이야기했다.

“뭐, 곤란할 것 없어. 지금 다른 인간들이 추는 걸 보고 익히면 되니까. 알다시피 정령들은 뭐든 금방 배운다.”

“그렇긴 하지.”

“그럼요. 별 어려운 동작도 아닌데요, 뭐.”

브로미오스와 엘레스트라가 연이어 맞장구를 쳤다. 렌투스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리며 제안했다.

“할 수 없지요. 지금 바로 현장에서 실전을 보며 익힐 수밖에요. 아니면 잠깐 휴게실로 이동해 연습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니, 그냥 이 자리에서 보고 배우도록 하겠네. 음악도 있으니 여기서 깨우치는 게 나아.”

히에무스는 에일린이 있는 현장을 벗어나기 싫었다. 게다가 그녀가 여전히 인간 군주와 단둘이서 춤추는 광경을 내버려 둔 채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스킬라 공주가 조금 늦게 그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왔다.

“제가 주변에 마법을 걸어 드릴까요, 히에무스 오라버니? 모두가 얼이 빠져 있는 동안 춤을 연습하시면 될 거예요.”

렌투스가 즉시 만류했다.

“그건 안 됩니다, 공주님. 황제에게 마법을 거는 건 금기 사항이니까요. 게다가 뛰어난 마법사들도 많으니 발각당할 위험이 큽니다.”

그녀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쳇, 귀찮네. 인간 군주가 있는 곳은.”

마법으로 여기 모인 이들의 혼을 빼놓고 자신이 파트너가 돼서 가르치면 참 좋을 텐데 무척 아쉬웠다. 히에무스가 다른 춤을 모르니 그녀 역시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물론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지만 눈으로 춤을 익히려면 자신에게 조금도 신경 쓰지 못할 것이다. 지금 현재도 그는 그녀에게 단 일 초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황제가 춤을 추는 광경을 뚫어질 듯 관찰하는 중이었다. 아니, 사실은 황제의 파트너를 보는 것 아닐까? 저 여인의 정체가 도대체 뭐지? 아까부터 히에무스의 시선이 그곳만 향하는 게 수상했다.

설마 그가 좋아하는 여인인가? 그럴 리가!

스킬라는 자신이 추리했으면서도 믿을 수 없어 스스로 부인했다. 얼마간 히에무스를 지켜본 결과 그는 어떤 여인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관심은커녕 증오나 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였다. 어쨌든 저 여인을 경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괜히 렌투스에게 부아가 치밀었다.

“이런 사항도 점검하지 않고 뭘 한 거지? 무도회에 참석하는 거면 춤은 가장 기본이잖아?”

스킬라가 앙칼진 목소리로 힐책하자 렌투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송구합니다. 공주님.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를 책망할 필요 없어. 잘못은 우리에게 있으니까.”

히에무스가 여전히 황제 커플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스킬라는 즉시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오라버니. 저 춤을 다 익히시면 제일 먼저 저와 춰요. 아니, 꼭 그러셔야 해요. 제가 파트너니까 둘이서 처음 추는 춤은 저랑 추는 게 맞아요.”

히에무스는 조금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 삼아 흑룡과 먼저 추고 그다음 에일린에게 춤을 신청하면 될 것이다.

“알겠다. 그렇게 하지.”

“와아, 약속했어요! 오라버니.”

스킬라가 히에무스의 팔을 와락 끌어안으며 체중을 실어왔다. 히에무스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팔을 뿌리치려다 렌투스의 눈에 서린 무언의 조언에 멈칫거렸다. 렌투스도 그녀가 히에무스에게 집착하고 매달리는 모습을 보는 게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스킬라를 사랑하니까. 하지만 이런 공식 석상에서 예의와 품위를 잃지 않는 행동을 유지해야 하기에 히에무스의 행동을 막은 거였다. 히에무스는 억지로 참았지만 계속 떨어지지 않은 채 바짝 붙어 있는 그녀가 신경 쓰여 낮게 일렀다.

“이렇게 내 몸에 붙는 행동을 하지 말아라. 나는 이런 접촉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게 모두 다 당신을 위해 그러는 거예요, 히에무스 님.”

“나를 위하는 거라니?”

“제가 이렇게 붙어 있지 않으면 다른 여자들에게 금방 파묻힐 거잖아요. 그건 더 귀찮고 싫지 않으세요?”

“…….”

실제로 수많은 여인이 히에무스를 노리듯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흑룡 공주가 은근히 내뿜는 강한 기에 짓눌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저와 오라버니의 돈독한 우애를 과시하는 게 좋아요. 빨리 인간 귀족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싶다면서요. 인간들 세계는 권력에 따라 그 대우가 달라지니 저와 친한 게 여러모로 도움이 되실걸요?”

히에무스가 찌푸린 미간을 풀지 않은 채 그녀의 팔을 가볍게 뿌리쳤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밀착할 필요는 없겠지.”

스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침내 황제 커플의 첫 춤이 끝나자 다른 커플들이 이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스킬라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얼른 그에게 물었다.

“다 익히신 거죠? 히에무스 오라버니.”

“그럭저럭.”

“그럼 저와 함께 춤을 춰요.”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연습을 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아 스킬라의 손을 이끌고 홀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와 마주 본 채 발을 구르며 상대에게 나아가는 춤동작을 시작했다. 두 아름다운 선남선녀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좌중에서 찬탄이 쏟아졌다.

***

에일린도 그 소리에 이끌려 시선을 옮겼다. 히에무스가 파트너인 흑룡 공주와 함께 멋들어진 모습으로 춤을 추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영롱한 마법석 빛 아래에서 물 흐르듯 움직이는 둘의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려 보였다. 흑룡 공주의 얼굴이 기쁨과 기대감으로 한껏 상기돼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순간 에일린은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거의 느껴보지 못했던 낯설고 좀 불쾌한 감정이 밀려왔다.

“폐하.”

누군가가 다가와 렉스에게 허리를 굽혔다.

“무슨 일인가? 엘로드 경.”

엘로드가 그의 파트너인 엘시아와 함께 와서 서 있었다.

“제가 루쿨루스 영애께 춤을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에일린은 깜짝 놀랐다. 엘로드가 자신을 싫어하는 걸 아는데 춤을 추자고 하니 이상했다. 이어진 말을 듣고 바로 이해가 됐지만.

“서로의 파트너를 바꿔 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엘시아 왕녀의 요청이었을 것이다. 렉스는 그 둘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엷은 웃음을 떠올렸다.

“좋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렉스가 엘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에 햇살처럼 찬란한 미소가 담겼다. 수줍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약간 틈을 두다 엘로드가 뻣뻣한 태도로 에일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에일린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소설 속 캐릭터 중 가장 그녀의 마음에 드는 ‘최애캐’였는데, 어쩌다 이리된 걸까? 뭐 그래도 그와 함께 춤추는 걸 기대했던 때도 있었으니 크게 나쁜 경험은 아닐 것 같았다. 홀 중앙으로 나아가면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원작에서 렉스와 엘시아가 무도회에서 춤을 추고 서로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번에 혹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 것 아닐까? 아니면 이젠 소설 원작대로 흘러가는 건 하나도 없게 된 걸까? 평소엔 거의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한 번씩 그런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이 소설 세계는 어떻게 유지되는 걸까 하고. 원작과 다르게 전개돼도 괜찮은 것일까? 한 번 마음속에 질문을 시작하자 의문점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것 같았다.

“혹 내게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오? 왕녀.”

렉스가 음악에 맞춰 춤동작을 취하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전 언제나 폐하께 궁금한 게 많았으니까요.”

“궁금한 거라니?”

“폐하께서 최근 좋아하시는 화초 취향에 대해 여쭤보고 싶었어요.”

“화초 취향?”

“예. 보아하니 폐하께선 화원에 있는 화려한 꽃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시더군요. 길가에 피어난 들꽃에 눈길을 주시는 것 같은데 어떤 연유로 그런 걸까 해서요.”

렉스가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흠, 글쎄, 이유가 뭘까? 더 신선하고 아련한 향기를 지녔기 때문이라 해야 할까? 음, 그래. 옛 기억을 불러오는 향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소.”

“호, 그러시군요. 하지만 그런 꽃은 라피스 궁의 중앙 홀을 장식하는 화병에 어울리지 않을 텐데요? 잡초니까요.”

“라피스 궁의 중앙 홀에 있는 화병에 꽂을 순 없어도 짐의 침실에 두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지.”

“…….”

“의문이 다 풀렸소?”

“아니오. 그럼 중앙 홀의 화병은 계속 비워두실 건가요?”

엘시아는 그녀 특유의 도발적인 시선으로 렉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가 최대한 그녀의 얼굴을 잘 볼 수 있도록 계산한 자세였다. 렉스가 아닌 다른 이에게는 대부분 통했다.

“설마, 곧 적당한 꽃으로 채워놓을 생각이오. 하지만 독성이 있는 꽃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별로 생각이 없소.”

“……!”

“음, 그새 음악이 끝났군. 그럼 이만 서로의 본래 파트너에게 가보도록 합시다.”

사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에일린은 렉스의 파트너가 아니었다. 늘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행동하는 그였지만 아직 이런 대외적인 행사에서 공식 파트너로 에일린을 삼을 수는 없었다. 작위라든가 칭호 같은 걸 아직 내리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런 건 황후를 맞이한 후에나 시도할 수 있었다. 예법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에일린도 엘로드와 묵묵히 기계처럼 췄던 춤을 방금 끝냈다. 대화는 일절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와는 말을 나눌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춤을 추는 중에도 그가 계속 마뜩잖은 눈빛을 보내는 통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파트너에 대한 의례상의 인사를 하고 몸을 일으켰다. 언제 왔는지 히에무스가 다가와 있었다. 그가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 다음은 저와 춤추시겠습니까?”

너무 반가웠다. 맑게 웃는 그를 보니 무겁고 답답했던 속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계속 그를 기다려온 것 같았다. 그녀 역시 활짝 웃어주었다.

“예, 기꺼이!”

거침없는 대답과 함께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서둘러 함께 홀로 미끄러져 갔다. 시리게 빛나는 은청색 눈동자가 그녀의 맘속에 깊숙이 들어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까처럼 오직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이 밀려들었다. 렉스는 홀 중앙으로 걸어가는 에일린과 히에무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발 늦게 온, 원래 그녀의 파트너인 케일론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두 남녀의 뒷모습이 너무나 친근하고 다정해 보였기에. 도저히 다른 이가 낄 틈이 없을 정도로.

“저 여자는…… 도대체 뭐야?”

스킬라가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 듯한 시선으로 쏘아보며 렌투스에게 물었다. 히에무스가 믿을 수 없을 만큼 황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까 그 여자와 춤을 추고 있었다. 자신에겐 절대 보여주지 않던 표정이었다.

“아칸 왕국 출신의 평민 아가씨라고 들었습니다.”

“평민이 이 자리에 어떻게 와 있는 거야? 히에무스 님과는 또 무슨 사이고?”

“글쎄요. 저는 잘 모릅니다.”

렌투스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얼버무렸다. 스킬라가 시녀인 그의 누이동생에게 일렀다.

“알리샤, 한 번 알아보도록 해.”

렌투스를 꼭 닮은 백룡 영애가 냉큼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그녀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렉스가 자신처럼 홀로 남아 무시무시한 눈으로 지켜보는 스킬라 공주를 발견했다. 그다지 내키진 않았지만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자신이 정한 유력한 황후 후보이니 한 번 상대해 볼까 하는 마음을 먹은 것이다.

“스킬라 공주.”

노골적으로 뚱한 시선을 보내온다.

“무슨 일이신지요? 폐하.”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게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렉스는 불쾌했지만 이왕 나선 김에 참고 말을 건넸다.

“둘 다 파트너를 잠시 뺏긴 것 같은데 어떻소? 나와 함께 춤을 추겠소?”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제가 지금 몸이 좋지 않아서요, 폐하. 다음 기회로 미뤄도 되겠습니까?”

원래 인간 같은 건 그녀가 조금이라도 상대하거나 신경 쓸 대상이 아니었다. 인간은 나약하기만 하고, 귀찮고, 성가신 존재일 뿐. 그게 황제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지금 그녀의 관심은 온통 히에무스로 가득 차 있으니 황제 따위는 전혀 안중에 없었다.

“저런, 유감이군. 그럼 방해하지 않을 테니 쉬도록 하시오.”

렉스는 당돌하고 무례한 공주의 태도에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억지로 친절한 목소리를 냈다.

“황송합니다, 폐하.”

스킬라가 한마디 툭 내던지고 다시 히에무스와 에일린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

렉스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그녀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남매로 맺어진 사이지만 남자로 보는 것인가? 하긴 무리도 아니겠지. 저런 외모와 분위기를 가진 남자가 곁에 있는데 어찌 눈길이 가지 않겠는가? 어떤 여자라도 반해버리고 말 것이다. 그 누구라도 말이다. 렉스가 굳은 표정으로 에일린을 쏘아봤다. 그녀가 지금껏 봐왔던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렉스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

뜨겁게 달아오르던 무도회의 열기도 어느덧 잦아들고 참석한 이들이 귀가를 서둘렀다. 엘시아도 엘로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자신이 머무는 처소인 아르겐 궁으로 향했다.

“오늘 밤, 멋진 시간을 함께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공주님.”

엘로드가 파트너로서의 예를 다하기 위해 깊이 허리를 숙이고 엘시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저야말로 후작님 덕분에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감사드려요.”

“돌아오는 휴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겠습니까?”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요?”

“예. 같이 승마를 하시거나 아니면 저희 집에서 오찬이나 다과를 즐기셔도 좋고요.”

엘로드가 조심스럽게 엘시아의 의향을 물었다. 그녀는 조금 망설였다. 렉스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하는 이상 차선책으로 다른 귀족과 결혼하는 것도 고려해 봐야 했다.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연극 공연을 보러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캐드릭스 후작과 결혼하는 건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가장 손쉬운 선택이겠지만 별로 내키지는 않았다. 후작 따위와 결혼하고 싶진 않았다. 그다지 빠지지 않는 조건을 갖춘 자긴 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생각해 보지요. 나중에 서신을 보낼게요.”

“기다리겠습니다.”

엘로드가 환하게 웃으며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녀 역시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가 멀어질 때까지 그 표정을 유지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즉시 투덜거렸다.

“뭐래? 왕족도 아닌 귀족 나부랭이 주제에.”

불쾌했다. 그에 대해 알아보니 선황제 시절 남작 가문에 불과하다 현 황제 대에 큰 전공을 세우면서 후작으로 봉작된 자였다. 예전이라면 저따위 신분으론 자신에게 말 한마디 붙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국의 황녀에서 왕국의 왕녀, 그것도 인질로 와 있는 공녀의 신분이니 만만하게 여겨지는 거란 생각에 불쾌함이 밀려들었다. 조금 거친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엘시아 공주님!”

돌아보니 구부정하게 굽은 자세로 서 있는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벗겨진 머리에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주름진 얼굴, 바니스터 공작이었다.

“공작님.”

번쩍거리는 금사와 은사로 빼곡히 수가 놓인 자주색 비단 의상을 걸치고 여러 개의 보석 장신구를 더한 모습이었다. 무척 신경을 쓴 듯한 차림새였다.

“무슨 일이시지요? 바니스터 공작님.”

억지로 웃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가까이 걸어왔다.

“오늘 무척 서운했습니다, 공주님. 함께 얘기하고 춤을 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제게는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더군요. 저번에 보낸 선물과 편지를 잘 받아주시고 답장도 해주시기에 여러모로 기대했는데 말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혹시 절 피하신 겁니까?”

바니스터 공작이 나무라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재차 질문했다.

“그럴 리가요. 어쩌다 보니 그리됐을 뿐이에요. 다음번에 꼭 함께했으면 좋겠군요.”

늙은 귀족이 냉큼 제안했다.

“막연하게 다음번이라 하지 말고 구체적인 약속을 해주시지요. 이번 다가오는 휴일 제게 시간을 할애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오, 저런. 그땐 이미 선약이 있어서 안 될 것 같아요, 공작님.”

“…….”

바니스터 공작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엘시아를 쏘아봤다. 몇 번에 걸쳐 값비싼 보석이며 옷감 따위를 선물로 보냈는데 대놓고 홀대하다니. 뭐, 할 수 없는 것인가? 대륙 최고의 미인이니 그만큼 콧대도 높겠지. 자신은 재력이나 신분으로나 무엇 하나 꿀릴 게 없었지만 나이가 많다는 치명적인 흠이 있었다. 어지간한 정성으론 이 미인의 관심을 얻기 힘들 것이다. 아는데도 도저히 포기가 되지 않아 집요하게 질문했다.

“그럼 언제가 좋겠는지요?”

“글쎄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번에 열릴 무도회에서 함께 춤을 춘다는 약속을 드리면 어떨까요?”

“다음번에 열릴 무도회라고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약속하셨습니다. 그럼 그땐 제 파트너가 돼주시는 겁니다.”

노인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엘시아는 순간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호호호, 공작님. 너무 성급하시군요. 아직 열리지도 않은 무도회의 파트너를 약속드릴 순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꼭 공작님과 춤을 추겠습니다.”

“…….”

바니스터 공작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이의 몸이니 감수해야 하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 알고 가보겠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십시오, 공주님.”

공작이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엘시아는 애써 미소를 담은 얼굴로 손을 내주었다. 늙은 공작의 입술이 즉시 내려와 비벼졌다. 축축하고 찜찜한 감촉에 엘시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공작과 헤어지자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오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엘모너를 내던지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빌어먹을 늙은이!”

분노가 치밀었다. 이번 무도회도 저번이랑 마찬가지로 건진 성과가 하나도 없었다. 황제가 자신을 전혀 황후 후보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자리에 앉지도 않고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아까 무도회에서 겪었던 일들을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에겐 별 같잖은 귀족들만 잔뜩 붙어 알짱대는데, 에일린에게는 황제는 물론이고 그 빼어난 드라코니아의 공작까지 분명한 호의를 품고 접근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도대체 그 평민 여자가 무슨 매력을 지녔다고 그러는 거야?’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자신처럼 신분과 미모를 모두 갖춘 이를 놔두고 다들 왜 그러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고 화만 치밀어 올랐다. 엘시아는 주군의 안절부절못한 모습에 잔뜩 주눅 들어 눈치만 보던 시녀들을 돌아봤다. 안드레아스도 그사이 끼어 있었다.

“안드라, 잠깐 나 좀 봐요.”

엘시아가 다른 시녀들을 물린 후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에 부탁했던 것 어떻게 됐죠?”

“마법약을 구하게 되면 정령을 보내 알려준다고 했습니다. 잠시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안드레아스가 선 자세로 탁자 앞에 앉아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엘시아가 탁자 위에 놓인 크리스털 잔을 집어 들었다. 그가 얼른 다가가 포도주병을 잡고 따라주자 그녀가 천천히 잔을 기울였다.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죠? 내일까지 소식이 없으면 직접 가서 재촉해 봐요.”

“……알겠습니다.”

“나만 좋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란 것 알고 있죠? 내가 아젤란의 황후가 돼야 우리 아칸 왕국이 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예.”

안드레아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말 아칸 왕국이 건재하기를 바랐다. 엘프들이 떠나 엘프의 나라가 사라진 것처럼 아칸 왕국이 사라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의 나라였고, 그가 태어난 나라였다. 인간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후 스스로 택한 그의 조국이었다. 아무쪼록 영원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 염원과 엘시아에 대한 마음, 그 두 가지가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

루쿨루스 숲 한편에 붉은 장미 넝쿨로 뒤덮인 바위 절벽이 있었다. 그날 밤 그 아래 커다랗게 뚫린 동굴에 누군가가 찾아와 아치형 나무문을 두드렸다. 물결치는 긴 허니 블론드에 핑크빛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인, 바로 봄의 여왕 베르누아였다.

끼익.

둔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어린아이만 한 중급 정령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어, 봄의 여왕께서 이런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이신지요?”

“키프리스 님을 뵙고 싶은데 안에 계시냐?”

문지기 정령이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계시긴 합니다만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요? 지금은 정령들도 한창 잠에 빠져들 시간이 아닙니까? 특히 겨울의 정령이 아닌 봄의 정령들은 더 깊은 잠에 취해 있을 시기인데요?”

베르누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문지기 정령들은 왜 하나같이 쓸데없는 말이 많은지 모르겠다.

“너희 여왕님께 직접 얘기해야 하니 안내나 해줬으면 좋겠군.”

“이쪽으로 오십시오.”

문지기 정령이 부루퉁한 얼굴로 앞장섰다. 유백색 기둥이 줄지어 널어선 공간을 지나 아늑해 보이는 방으로 데려갔다. 키프리스의 접견실이었다. 정령이 권한 자리로 가서 앉아 있으려니 곧 키프리스가 들어왔다.

“오, 어서 와요! 베루누아, 오랜만이로군요.”

“늦은 시간에 와서 미안해요, 키프리스. 제가 잠을 깨운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괜찮아요. 근데 무슨 일이죠?”

키프리스가 미소 띤 얼굴로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자리하며 말을 건넸다.

“그게…….”

베르누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몇 날 며칠 고민하다 어렵게 나섰지만 여기까지 와서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난번에 히에무스에게 사랑의 묘약을 썼던 건 키프리스 자신이 먼저 제안한 일이니 거리낌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계속 주저하다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부탁이 있어 찾아왔어요.”

“부탁이라니? 무슨 부탁이죠?”

우물쭈물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자 키프리스가 상냥한 미소를 담은 얼굴로 베르누아의 손을 맞잡았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뭐든 편하게 말해 봐요. 우리 사이에 이렇게 어려워하다니 당신답지 않군요.”

베르누아도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수 초간 더 망설이다 마침내 본격적인 용건을 꺼냈다.

“당신의 마법약을 좀 얻을 수 있을까요?”

“마법약이라니, 어떤 마법약을 말하는 거죠?”

“사랑의 묘약 말이에요.”

“……!”

키프리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가 번득였다.

“사랑의 묘약이라니……. 누구에게 쓰려고 그러는 거죠? 설마 인간은 아니겠죠?”

“……인간에게 쓸 거예요.”

키프리스는 쥐고 있던 베르누아의 손을 황급히 놓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나무라는 기색이 묻어났다.

“또 무슨 일이죠? 베르누아, 저번에 그 하프 엘프가 요구한 건가요? 그럼 그만두는 게 좋아요. 더 이상 그런 인간들에게 휘둘리지 말아요.”

“알아요. 하지만 이번 한 번만 더 들어주고 싶어요. 부탁이에요, 키프리스.”

베르누아가 간절한 눈빛으로 거듭 요청했다. 키프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되는 것 알잖아요? 베르누아, 인간에게 그런 걸 넘길 수 없어요. 마법약도 마도구와 마찬가지예요. 인간들 손에 들어가게 해선 안 돼요.”

“그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주지 않으면 그는 더 이상 나를 만나주지 않을 거라 했어요.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베르누아, 그런 비정하고 염치없는 인간은 그만 잊어버리세요. 당신에게 해만 끼칠 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자예요.”

베르누아 역시 고개를 저었다.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버린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요? 나는 그를 사랑해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가 그를 버릴 일은 없어요. 내가 선택한 사랑이니까.”

“…….”

“부탁이에요, 키프리스. 나를 좀 도와줘요.”

키프리스는 찡그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사랑의 정령이니 사랑을 멈추게 하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랑에 관한 일이라면 가능한 도와주고 협력해 주는 게 태생부터 그녀에게 주어진 일이기도 했다.

“인간에게 직접 약을 넘겨주는 일은 할 수 없어요. 하지만 다른 방식을 쓰는 건 가능하죠.”

“다른 방식이라면?”

“내가 직접 쓰는 건 괜찮아요. 그 하프 엘프에게 물어서 약을 쓰고 싶은 대상이 누구인지 묻도록 해요. 그럼 그자를 찾아가 내가 직접 손을 쓸 테니까.”

“그래 줄 수 있어요?”

“그래요. 당신이니까 해줄게요. 정령들 중 당신 같은 이도 없으니 협력하도록 하죠. 당신의 사랑이 어디까지 갈지 사실 나도 궁금해요. 응원해주고 싶기도 하고.”

“고마워요! 키프리스.”

베르누아가 환하게 웃으며 키프리스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키프리스가 흐뭇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 한마디 덧붙였다.

“한 가지, 명심할 게 있어요.”

“뭐죠?”

“모든 인간에게 사랑의 묘약을 쓰지는 못해요. 인간의 군주에겐 금지된 일이죠. 알아 두도록 해요. 만약 그 대상이 인간 군주라면 난 돕지 않을 거예요.”

베르누아도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고 있어요. 그렇게 전할게요.”

“그래요. 잊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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