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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마음의 갈증 (10/24)

9. 마음의 갈증

저번에 텔루스에게서 받은 장신구 세트였다.

“와아!”

에일린은 절로 감탄이 나왔다. 에메랄드인지 페리도트인지 아무튼 신비로운 초록빛으로 빛나는 보석이 박혀 있었다. 목걸이와 귀걸이, 팔찌, 그리고 공주님들이나 쓸 것 같은 작은 티아라였다.

“이걸…… 진짜 저 주시려는 거예요? 히에무스.”

“그래. 네게 잘 어울릴 거야.”

우연이지만 그녀의 눈동자와 참으로 잘 어울렸다. 저번 인간 군주가 줬던 것들에 비하면 미미하겠지만 그래도 그녀를 위해 뭔가 해주고 싶었다.

“고, 고마워요. 히에무스, 정말…….”

에일린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렉스에게 여러 가지를 받았을 땐 그저 얼떨떨하고 부담스러운 마음이 컸는데 지금은 순수하게 기쁘고 감사했다. 그리고 행복했다. 그에게 선물을 받아서 그런 게 아니라 그의 마음이 너무나 고맙고 크게 느껴졌기에.

“고마워요. 저…… 하지만 이렇게 큰 선물은 받을 수 없어요.”

“어째서?”

“히에무스. 전 누구에게든 빚지고 살고 싶지 않아요. 남에게 떳떳하려면 빚을 져선 안 돼요. 당신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으로 있고 싶어요. 이해해주세요.”

“그대가 받지 않는다면 이런 건 내게 무용지물이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받아주면 안 될까?”

“마음만 받을게요.”

히에무스의 잘생긴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녀가 기뻐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저번에 인간 군주가 준 것은 받지 않았더냐.”

“그래서 그 뒤로 제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

에일린도 그의 마음을 알기에 이런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저, 그럼 가끔 빌려주실래요? 히에무스. 당신이 가지고 계시다가 가끔 빌려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그런 걸 원하는 거냐?”

에일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낸 의견이지만 참 마음에 들었다. 실속도 얻고 명분도 얻고. 음, 일석이조구나. 그제야 굳었던 히에무스의 얼굴이 눈 녹듯이 환하게 풀어졌다.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은청색 두 눈에 한없이 부드럽고 영롱한 빛이 머물렀다. 그 방법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에일린이 사용해 주는 건 똑같을 테니까.

***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두어 번 렉스의 산책 친구 일을 해야 하는 순번이 돌아왔다. 히에무스가 6일간 이어지는 겨울 폭풍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중 한 번은 건너뛰었다. 일을 하지 않아도 렉스가 수고비는 지급한다 했지만 에일린은 극구 사양했다. 알바라면 당연 일한 만큼만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살면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게 누군가 공짜로 뭔가를 해주는 것이다. 처음에 공짜로 보였던 것들이 나중엔 엄청난 이자가 더해진 빚이 되어 사람을 옥죄는 법이다. 에일린은 매 순간 스스로에게 그렇게 일러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에일린님, 어째서 또 직접 빨래를 하신 거죠? 도리스가 알아서 할 텐데요?”

애플턴 부인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 그게 힘든 일도 아니고 시간도 있어서요. 제 빨래는 그냥 제가 하고 싶은데요?”

그게 마음이 편하니까. 물론 섬세한 취급을 필요로 하는 드레스는 손대지 않았다. 그런 드레스들은 현대 사회의 가치로 따지자면 몇백에서 몇천 만원은 거뜬히 넘는 것들이었다. 자칫 잘못하다 망가뜨리면 큰일이니 황궁에 갈 때만 조심해서 입고 다른 날엔 귀한 보물을 모시듯 잘 보관해 놨다. 애플턴 부인의 얘기론 그런 옷들은 모아놨다가 빨래 전문 마법사에게 부탁해 세탁한다고 했다.

“그렇더라 하더라도 다시는 하지 마세요. 이건 도리스의 일입니다. 에일린님이 일을 빼앗으면 그녀가 곤란할 겁니다.”

“아, 그런가요?”

키 큰 도리스가 난처한 표정을 지은 채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구나. 그것까진 생각하지 못했네…….

“이제부터 그런 잡일은 놔두시고 그럴 여유가 있으시면 다른 공부에 좀 더 전념해주세요.”

“예, 알겠어요.”

순순히 대답했지만 씁쓸하고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계속 렉스의 호의를 받는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나중에 어떤 이자를 붙여 들이댈 빚인지 모른다. 어서 이런 생활을 벗어나고 싶었다. 돌아오는 휴일에 다시 한번 더 렉스에게 자신의 뜻을 말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먹을 꽉 쥐며 다짐했다.

***

6일 동안 계속되던 폭풍이 마침내 잦아든 어느 날이었다. 렉스는 라피스 궁에 있는 그의 알현실에서 한 왕국의 사신을 맞이했다.

“제국의 태양 레오나드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여신 아벨라의 찬란한 빛이 늘 함께하시길. 저는 드라코니아에서 온 콜루베르 후작입니다.”

하얀 머리에 밝은 하늘색 눈동자를 지닌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화려한 의상과 갖은 장신구로 치장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드라코니아에서 온 이들은 꾸밈새가 호화로운 이들이 유독 많았다. 부유함으로 이름 높은 나라여서 과시욕이 심한 걸까?

“어서 오시오. 콜루베르 후작.”

“드라코니아의 왕이신 퀴리오스 전하께서 보내신 친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한 번 보시지요.”

콜루베르 후작이 직접 품에서 봉인이 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들었다. 시종인 리히트가 받아 들어 렉스에게 공손히 전달했다. 그가 천천히 펼쳐 읽었다. 단상 밑에 도열한 케일론과 엘로드를 비롯한 렉스의 신하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지켜봤다. 렉스의 이지적인 파란 눈에 이채가 어렸다.

“호오, 공녀를 바꾸고 싶다고?”

렉스의 물음에 드라코니아의 사신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기존에 보냈던 재상의 따님 대신 퀴리오스 전하의 무남독녀인 스킬라 공주님을 보내실 예정입니다.”

늘어선 대신들의 얼굴에 호기심과 의아한 표정이 가득 담겼다.

“저번에 듣기론 적통 공주의 몸이 약해 다른 공녀를 보낸 거라 하지 않았소? 근데 왜 갑자기 입장을 바꾼 것이오?”

“그동안 공주님의 몸이 많이 좋아지셨고 공주님 본인께서 아젤란 제국에 가시길 희망하십니다. 오래전부터 제국의 풍물과 사교계를 흠모하셨거든요.”

“호오, 그렇소?”

렉스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별로 납득이 가지 않는 대답이었다. 뭐, 하지만 손해될 건 없었다. 인질로서의 가치가 더 큰 사람이 와 준다면 진정 환영할 일이니까. 친서에 언급된 다음 항목에 대해 확인했다.

“그리고 라케르타 공작도 카르디아에 들어와 살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라케르타 공작이 누구인 것이오? 처음 듣는 이름인데. 성을 보니 드라코니아의 왕족인 것 같군.”

콜루베르 후작의 얼굴에 야릇한 표정이 어렸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찡그린 것 같기도 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퀴리오스 전하께서 정식으로 들이신 양자이십니다. 히에무스 칼릭스 클라인 레 라케르타 공작이십니다.”

“뭐!”

케일론이 화들짝 어깨를 들썩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선뜻 떠오르지 않자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곧 그 이름을 가진 자를 생각해냈다. 예스럽고 흔치 않은 이름이니 어쩌면 그가 알고 있던 그자인지도 모른다. 에일린이 조금은 사랑하고 있다는 사람. 저도 모르게 케일론은 입술을 깨물었다. 날카로운 렉스의 눈동자가 모처럼 동요를 보이는 대마법사의 기색을 놓치지 않고 읽어냈다. 내색하지 않고 사신에게 다음 질문을 계속했다.

“퀴리오스 왕이 어떤 연유로 그 나이에 양자를 들인 것이오? 설마…… 후계로 생각한 건 아닐 테고?”

안드로스 대륙에선 흔치 않지만 남자 승계자가 없을 경우 공주를 후계로 세우는 일도 종종 있었다. 특히 드라코니아 왕국은 예전부터 여왕이 많던 걸로 알고 있는데?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열렸던 드라코니아의 사냥대회에서 우리 스킬라 공주님께서 갑자기 나타난 용에게 잡혀가실 뻔하셨지요. 그때 공주님을 구한 용사가 바로 그분이십니다.”

“얼핏 소문은 들었소.”

렉스도 듣긴 했다. 순식간에 안드로스 대륙 전체에 퍼진 멋진 무용담이니까.

“그자는 마법사라고 들었는데……. 그럼?”

“그렇습니다. 라케르타 공작님은 마법사이십니다. 아주 뛰어난 마법사지요.”

역시! 케일론은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알고 있던 그 자인 게 분명했다. 드라코니아인이었군.

“흠, 흥미로운 자군. 하지만 타국의 마법사는 별로 환영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렉스가 예리한 안광을 빛내며 콜루베르 후작을 주시했다. 후작이 황제의 위세에도 별로 주눅 들지 않은 낯빛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신으로 온 자답게 남다른 배포를 갖췄다.

“그러니 우리 왕께서 직접 요청하신 겁니다. 그분뿐만 아니라 그의 외사촌이신 파인스 백작님도 마법사이신데 함께 머물길 바라시지요.”

“……!”

렉스는 잠시 도발적인 태도로 서 있는 그를 꿰뚫듯이 쳐다봤다. 사신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여유 만만한 기색으로 응대했다. 그 사신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유려한 태도로 그걸 상기시켜 주었다.

“우리 드라코니아의 충성심에 대해선 의심할 여지가 없으실 겁니다. 누구보다도 빠르게 황제 폐하께 무릎을 꿇었지요. 그리고 앞장서 폐하의 정책을 지지하며 따르고 있다는 걸 헤아려주십시오.”

“물론 잘 알고 있소.”

“해마다 분기별로 내는 통일자금도 타국에 비해 우리 드라코니아가 월등히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렉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동시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니 그 대가로 특혜를 요구하는 건가?”

“약간의 편의를 봐달라는 거지요. 금지옥엽이신 공주님을 보내시는데 든든한 오라버니가 함께한다면 퀴리오스 전하의 근심이 한결 줄어들 것입니다.”

“…….”

렉스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퀴리오스의 진짜 속내가 궁금했다. 표면적으로는 철없는 공주가 아젤란의 풍물을 동경해 막무가내로 오고 싶어 하는데 호위 차원에서 마법사 양자를 같이 딸려 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마법사를 보내 아젤란의 약점을 찾아내는 게 원래 목적이고 공주를 보내는 건 그걸 위장하기 위한 장치라면? 렉스는 케일론을 힐끔 쳐다봤다. 평소대로라면 즉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눈짓을 해올 텐데 지금의 그는 뭔가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알겠소. 처음 있는 일이니만큼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일이오. 선례를 남길 테니 말이오.”

“물론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친서의 마지막 구절을 잘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폐하.”

마지막 구절은 막대한 자금을 보내겠다는 대목이었다. 그 마법사들을 머물게 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액수였다.

“고려해 볼 테니 일단 물러가서 대기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드라코니아의 노련한 사신이 정중한 몸짓으로 인사하고 사라졌다. 문이 닫히자 렉스가 대신들을 향해 질문했다. 마지막 항목에 대해 언급하면서.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재무성 대신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허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폐하. 그 정도 금액이면 국고를 불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실 통일 전쟁을 완성하고 난 후로 이리저리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백성들 생활도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지만 오랜 전쟁을 치른 후라 그렇게 여유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세금을 대폭 늘리는 것도 어려워 아젤란은 세원과 자금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앞다퉈 마법사를 보내면 어떡하실 겁니까? 황도와 제국의 방위에 좋지 않을 것입니다.”

병무성 대신의 의견에 다시 재무성 대신이 주장했다.

“금액을 좀 더 요구해 웬만한 나라는 엄두도 못 내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유일한 적통 공주가 황궁 내에 인질로 있는 만큼 다른 위험은 별로 없지 않겠습니까?”

렉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사실 마법사라는 걸 밝히지 않은 채 위장해서 들어올 수도 있었는데 떳떳하게 요구하는 걸 보니 차라리 안심이 되었다. 거절하기엔 아쉬운 일이었다. 렉스는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케일론을 돌아다봤다. 그는 여전히 멍한 채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아스카니아 백작.”

“예? 아, 예! 폐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거요? 경의 생각은 어떻소? 마법사 입장에서 혹 다른 의견이 있다면 들어보고 싶소.”

“아, 저는…….”

케일론은 조금 망설이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신경은 쓰이겠지만 차라리 그놈, 아니 그자들을 곁에 두고 지켜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참에 드라코니아 마법사들의 수준도 가늠해 볼 수 있을 테고요.”

요즘 에일린이 자신이 없는 틈을 타 종종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케일론은 은근히 신경 쓰였다. 그자를 만나고 오는 게 아닐까 해서.

“그렇군. 그럼, 허용하는 것으로 결정하겠소. 대신 다른 나라에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섣불리 따라 하지 못하도록 세부 항목을 점검하고 추가해주시오.”

렉스가 외교 업무를 맡은 대신을 향해 일렀다.

“알겠습니다, 폐하.”

황제의 결정이 즉시 드라코니아의 사신에게 전달됐다. 물론 큰돈이 들어가는 조건이 더해진 채로 말이다. 끝까지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무척 곤란했을 텐데 다행히 자연스럽게 마무리됐다. 렌투스의 아비인 콜루베르 후작의 눈이 커다란 반원을 그렸다. 이럴 줄 알고 그의 아들이 벌써 여러 일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라케르타 공작 일행이 살 집을 미리 물색해둔 것이다. 용의 솜씨로 단장을 마치고 사용인들까지 들여놨으니 이제 몸만 들어가 살기만 하면 됐다. 이만하면 이번 단막극도 성공한 셈이었다.

***

“공주님, 오늘도 편지와 선물들이 쌓였는데 어떡할까요?”

엘시아의 시녀인 비안나가 주군인 왕녀를 향해 물었다. 거울 앞에서 다른 시녀의 도움을 받아 단장 중이던 왕녀가 그녀를 힐끔 바라봤다.

“혹 폐하에게서 온 건 없느냐?”

“예, 없습니다. 바니스터 공작님과 캐드릭스 후작님, 그리고 몇몇 귀족분들 것입니다.”

다시 거울을 보며 짧은 머리를 이리저리 매만지던 그녀가 낮게 신음 소리를 냈다. 정말 짜증 났다. 머리 길이가 짧아져서인지 예전에 비해 미모가 덜 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구애하는 편지도 제대로 된 귀족은 늙은 바니스터 공작과 캐드릭스 후작밖에 없었다. 나머진 별 볼 것도 없는 한미한 가문의 수장이나 후계자들뿐.

‘어째서 내겐 파리만 들끓는 거야?’

쌓인 선물더미를 힐끗 쳐다봤다. 되돌려줄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았다. 콧대 높게 모두 거절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본국에서 가져온 자금도 얼마 없는데 앞으로 보내질 봉록과 지원금도 그다지 많이 기대할 수 없기에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건 확보해둬야 했다. 공녀 생활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따라온 수행인들의 봉급도 챙겨야 하고 그 자신의 사치품이나 사교 비용도 감당해야 하니까. 재력을 가진 귀족들 중 호감을 보이는 자가 있다면 그 모두에게 적당히 대응을 해주며 관심을 계속 끄는 게 득이 됐다. 구질구질하게 아양을 떨어야 하는 상황에 여러모로 짜증이 올라왔다. 오늘따라 시녀가 해주는 머리 모양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짧은 머리라 시도할 수 있는 머리 스타일이 거의 없었다. 가발을 이어 붙여 땋은 머리를 연출하거나 베일을 쓰는 게 다였다. 엘시아는 시녀가 연결 중이던 가발을 낚아채 휙 내동댕이쳤다.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잖아!”

“헉! 송구합니다, 공주님.”

머리를 손질하던 시녀가 즉시 바닥에 엎드리며 사죄했다. 엘시아는 애꿎은 시녀만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이래서는 안 될 것이다. 아젤란 제국에 온 지 한 달이 훌쩍 넘었는데 황후 자리에 근접하기는커녕 황제의 미움만 사게 된 것 같았다.

‘이게 다 그 망할 평민 여자 때문이야.’

뭔가 수를 찾아야 했다. 아젤란 제국이 정복한 지역을 두고 대대적인 지역 개편을 단행할 거라는 정보가 돌고 있었다. 광대해진 영토와 행정구역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선 당연히 시행돼야 할 절차이리라. 그럼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나라도 생겨날 것이다. 아칸 왕국은 사라져버리는 나라로 단연 1순위였다. 오래전 비어버린 국고에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하층민들의 폭동, 몇 년째 지속된 기근과 전염병 등 문젯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금 현재도 총독은 아니지만 아젤란에서 파견한 행정관이 상주하며 국정을 간섭하는 형편이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그저 암울하기만 했다.

‘황후가 되어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대로 가다간 자신의 신분도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몇 년 전에 황녀였는데 지금은 왕녀가 됐다. 이제 왕국마저 잃으면 별 볼 일 없는 공녀가 될 터였다.

‘그건 싫어.’

도대체 어떡해야 하는 걸까? 황제를 유혹할 수 없는데 어떻게 황후가 될 수 있을까? 그녀의 옆에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던 비안나에게 명령했다.

“안드라를 모시고 와.”

“예, 공주님.”

불려온 안드레아스가 절도 있는 몸짓으로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공주님.”

엘시아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다 자리를 권했다.

“그래요. 일단 앉아요.”

그가 자리를 잡고 앉자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수를 좀 생각해 봐요.”

“수……라니요?”

“지금이야말로 내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줄 때가 된 거예요.”

“무슨 말씀이신지?”

“내 미모로 황제를 유혹하는 덴 실패한 것 같으니 다른 수를 써야 하지 않겠어요?”

“다른 수라면……?”

엘시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일일이 말해줘야 아는 건가? 안드레아스는 보기보다 행동이 굼뜨고 눈치가 없는 게 흠이었다. 좀 우유부단하기도 하고.

“황제를 유혹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겠어요? 마법이나 미약이나, 뭐 그런 걸 동원해서요. 당신이 알고 있는 방법, 뭐 없나요?”

“…….”

“잘 궁리해 봐요. 이대로라면 아젤란 황후 자리는 다른 이가 꿰차게 생겼으니까.”

“설마 그 평민 여자를 경계하시는 겁니까?”

“풋! 무슨…….”

엘시아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깟 평민 나부랭이를 신경 쓸 줄 알아요? 황제가 아무리 그 여자를 사랑한다 해도 황후 자리는 턱도 없지. 기껏해야 정식으로 입적도 못 하는 비공인 후궁 취급이나 받을 테죠.”

“그렇긴 하겠지요.”

“다른 공녀에 비해 내가 월등하게 나았던 건 미모였어요. 하지만 황제가 그런 건 신경조차 쓰지 않으니 다른 좋은 조건을 가진 공녀가 황후가 될 가능성이 커졌겠죠.”

안드레아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자존심 강한 엘시아가 저런 말을 하기도 쉽지 않았으리라.

“말해 봐요. 뭔가 쓸 만한 방도를 찾아내 봐요.”

쓸 만한 방도라……. 안드레아스는 선이 고운 얼굴을 구기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게 뭐가 있을까? 마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건 효과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최음제 같은 미약도 큰 기대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제 정도의 마나를 가진 자에게는 잘 통하지도 않는 데다 그런 자잘한 유혹에 대비할 수 있는 방어 마법을 측근들이 진즉에 구축해뒀을 것이다. 대마법사라 불리는 자가 곁에 있는데 절대 소홀하지 않겠지.

“상대를 반하게 하는 미약을 한 번 구해 봐요.”

엘시아가 은근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이 조제한 것들은 별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 정령의 약을 얻어 와요. 저번처럼.”

“예?”

“당신이 끼고 있는 팔찌, 정령들의 마도구잖아요? 내게 준 보검 ‘루눌라’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마도구를 구할 수 있다면 마법약도 가능하지 않나요? 정령 중에선 사랑의 여왕이라 불리는 이도 있다던데.”

안드레아스의 찌푸린 표정이 한층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엘시아가 허리를 조금 기울이며 그에게 시선을 맞췄다. 꿀이라도 머금은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령의 약이면 인간들이 만든 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효과가 좋겠죠? 그러니까 한 번 구해보도록 해요.”

안드레아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힘들 겁니다. 전에 그 마도구들을 구해준 정령도 그 때문에 큰 벌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또다시 뭔가 더 구해달라고 부탁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 말은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노력해 봐요, 안드레아스. 아칸 왕국 제일의 마법사님.”

“…….”

엘시아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마법사의 뒤쪽으로 다가가 섰다. 이어 한 손을 내밀어 길게 흘러내리는 그의 붉은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고 매만졌다. 안드레아스는 순간 움찔거리며 눈을 잘끈 감았다.

“해줄 거죠?”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확연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에게 기대하지 않은지 오래됐는데 이렇게 행동할 때면 안드레아스는 어김없이 몸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요. 부탁할게요.”

알고 있었다. 그녀가 또 자신을 갖고 노는 중이란 걸. 그런데도 안드레아스의 입은 바보 같은 대답을 내보냈다.

“맡겨주십시오.”

진한 향기를 머금은 화려한 꽃처럼 그녀의 미소가 활짝 피어올랐다. 보는 이의 눈이 그대로 멀 것처럼 아찔하고 매혹적이었다. 봄의 여왕의 사랑을 비웃던 그였지만 그 역시 엘시아의 끈적거리는 손아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

“카르디아에 두 분이 지내실 저택은 마련해두었습니다.”

렌투스가 가을의 궁전에 와서 직접 설명했다. 히에무스와 브로미오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곳인가?”

히에무스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살 집이 마련되면 에일린을 데려와 함께 지내기로 한 터라 무척 기대가 컸다.

“아젤란의 옛 황족이 살았던 성인데 규모도 크고 위치도 좋습니다. 당신께서 원하던 조건에 딱 부합된 곳이니 가 보시면 마음에 들 겁니다.”

“음, 수고했네.”

겨울의 왕이 모처럼 환한 미소까지 지으며 치하하자 렌투스도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뭔가?”

“성에서 허드렛일을 할 사용인들은 아젤란 사람들로 고용해 준비해 뒀지만 측근들은 어떡하실 예정인지요?”

“측근이라니?”

브로미오스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귀족 행세를 하시는 거니 수족처럼 부릴 아랫사람들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성을 관리할 집사도 필요하고 지척에서 시중을 들 시종도 있어야 하죠. 그런 사람들은 갑자기 고용한 자들로 충당하긴 좀 그렇지요.”

히에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그리 갖출 게 많은가? 대충 마법으로 암시나 세뇌를 시켜 부리면 되지 않겠나?”

“그런 것도 한계가 있으니 적어도 몇 명은 믿을만한 이들을 데려다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음…….”

렌투스가 덧붙여 얘기했다.

“물론 저도 그 성에 상주하며 두 분의 일을 계속 도울 예정입니다. 그래도 저와의 소통 문제도 그렇고 이런저런 역할을 해줄 인물이 필요합니다.”

듣고 있던 브로미오스가 싱긋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뭐, 별 어려운 문제도 아니네. 넘쳐나는 게 아랫것들이니.”

“예?”

가을의 왕이 넓게 펼쳐진 그의 궁전을 둘러보며 입을 뗐다.

“서풍!”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일어나며 엷은 금발을 늘어뜨린 한 청년이 나타났다.

“예, 왕이시여!”

히에무스와 렌투스가 두 눈을 끔뻑거리며 응시했다. 브로미오스가 둘을 돌아보며 다시 웃었다.

“상급 정령에게 마법약을 먹이고 데려가서 부리면 되겠지. 정말 내 수족이기도 하고 말이야.”

렌투스가 이마를 찌푸리며 서풍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 아무래도 좀 미심쩍었다.

“글쎄, 괜찮을지. 인간 노릇 하기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걱정 말게. 이래 봬도 서풍은 늘 인간 세계를 떠도는 게 일이라 인간들 생태를 훤히 꿰고 있다네. 나보다도 아는 게 많으니 잘 해낼 거야.”

히에무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하긴, 내 궁전에서도 북풍이 인간들에 대해 제일 잘 파악하고 있긴 하지.”

하지만 그는 북풍을 데려와 쓸 수 없었다. 겨울의 궁전 권속들에게는 가급적 비밀로 해두고 싶었다. 그리고 한창 겨울이라 북풍은 서풍만큼 한가하지도 않았다. 렌투스는 여전히 긴가민가했지만 달리 대안도 없는 터라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성의 집사는 드라코니아의 용족 하나를 데려다 쓰고 서풍은 브로미오스님의 시종으로 삼도록 하죠. 서풍님도 하실 생각이…… 있는지요?”

서풍의 금빛 두 눈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있다마다. 늘 심심했는데 정말 잘됐지 않은가? 색다른 경험을 해 볼 테니.”

자신만만한 표정에 렌투스도 안심이 되는지 비로소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이어 히에무스를 바라보며 그의 의향을 가늠했다.

“당신께서는 어떡하실 겁니까?”

“시종이 곡 있어야 하는가?”

“귀족이라면 응당 필요하겠지요. 뭐 마법사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긴 합니다만 한두 명 두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겁니다.”

“…….”

“뭣하면 내 권속들 중 하나를 데려다 쓰게.”

브로미오스가 선심 쓰듯 권하자 히에무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겨울의 궁전에서 데려와 쓸 만한 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을의 왕에게서 빌리는 것도 싫었다. 같은 계절의 왕으로서의 체면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다 한 얼굴이 떠올랐다.

“좀 어려도 상관없지?”

“물론입니다. 일부러 소년을 시종이나 종자로 거느리는 경우도 허다하니까요.”

히에무스가 턱을 매만지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 애송이에게 한번 권해봐야겠군.”

***

아젤란 제국의 황도 카르디아에 위치한 어느 성이었다. 딸린 영지는 없지만 광대한 정원과 방어 시설을 보유한, 지금은 사라진 어느 황족이 살았던 성이라 알려진 곳이었다. 현 황제인 레오나드 3세의 배다른 형제였던가, 그 선대 황제의 배다른 형제였던가, 아무튼 황위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사라진 비운의 어느 황족이 살았다고 한다. 그 전 주인의 최후가 그리 좋지 않았던 탓인지, 아니면 너무 비싼 시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오랫동안 비워진 채 방치된 곳이었다. 그걸 드라코니아의 한 귀족이 사들여 이번에 새로 수리하고 단장까지 마쳤다. 저택을 관리할 사용인들도 여러 명 고용되었다.

오늘은 드라코니아에서 온 그 귀족이 처음으로 성에 나타나는 날이었다. 이름이 히에무스 칼릭스 클라인 레 라케르타 공작이라 했다.

고용된 하녀 중의 하나인 ‘제니’는 분주히 움직이며 계단 난간을 닦고 있었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지닌 약간 통통한 몸매에 키 작은 여자였다. 시골에서 살다 얼마 전 황도 카르디아에 하녀 일을 하기 위해 상경했다. 이 성에 고용되어 무척 운이 좋다고 내심 생각하던 차였다. 보수도 좋고 대우도 괜찮은데다 주인까지 이름 높은 귀족이라니 정말 마음에 들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레질을 하다 문득 옆에 있던 ‘샤샤’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와 함께 같은 고향에서 올라온 친구였다.

“주인님 말이야. 흉포한 백룡에게서 드라코니아의 공주님을 구해낸 용사라고 했지?”

샤샤가 잠시 손을 멈추며 대꾸했다.

“응, 마법을 쓰는 마법 기사래. 그렇게 늠름하고 잘 생겼을 수가 없다며? 한 번 보면 그대로 반해버리고 말 정도라더라.”

“와아, 그래? 어서 만나보고 싶다.”

“그지? 나도 그래서 이 성에 기를 쓰고 취직한 거야. 소문이 진짜인지 궁금하잖아?”

저마다 얼마 전 안드로스 대륙에 혜성처럼 등장한 성의 주인에 대해 궁금증을 안고 있었다. 다들 그 이야기에 매료돼 그와의 만남을 손꼽아 기다리던 터였다. 마침내 오늘 그를 보는 것이다. 제니와 샤샤뿐만이 아니었다. 주로 아젤란 제국 사람으로 구성된 다른 사용인들 역시 한껏 들뜨고 설렌 표정으로 기다리는 눈치였다. 성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꾸미는 손길에 경쾌한 기대감이 묻어났다.

“자자, 오늘이 주인님을 처음 뵙는 자리니 모두 한 치의 소홀함도 없도록 애써주게나.”

“예. 염려 마십시오. 디아누스님.”

드라코니아인 집사인 디아누스가 연신 그들을 독려하며 감독하는 중이었다. 30대 후반 정도 나이에 덩치가 엄청 크고 유난히 까만 머리를 지녔다. 집사라는 신분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보석 장신구를 많이 걸친 화려한 차림이 좀 독특해 보였다. 디아누스의 지휘 아래 금방 성내 청소와 단장이 마무리됐다.

새로 꾸민 성의 외관과 내관이 매우 미려하고 호화로웠다. 성 외벽은 견고하게 보수를 마치고 새하얀 회벽과 프레스코 채색을 곁들여 마감했다. 성의 안쪽은 더욱 신경 써서 각종 값비싼 장식재와 용품으로 채워진 상태였다. 안팎으로 잘 꾸며진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어느 왕국의 궁궐이라 해도 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예전 주인도 황족이었고 새로 살게 될 주인도 왕자님 신분이니, 궁궐이라 칭해도 과하지 않을 터였다.

“저기 오십니다! 주인님 일행분들께서 들어오십니다!”

남자 하인 하나가 상기된 얼굴로 뛰어와 외쳤다. 집사인 디아누스가 속히 성의 고용인들을 향해 일렀다.

“자, 다들 아까 정해줬던 자리로 가서 서도록 하게. 어떻게 맞이하고 인사해야 하는지 잘 익혀뒀겠지?”

“예! 잘 알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집사님.”

사용인들이 입을 모아 일제히 응답했다. 제니와 샤샤는 그 누구보다도 큰 소리로 대답했다. 드높아진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긴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냉큼 성 본채 바깥으로 미끄러지듯 걸어 나갔다.

***

기대 이상이었다. 그건 그냥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였다. 주인님은 소문처럼 그저 ‘잘 생기고 늠름한 정도’가 아니었다. 제니는 지금까지 살면서 여태 저렇게 생긴 이를 본 적이 없었다. 한 번이라도 보면 평생 절대 잊을 수 없는 모습이라는 말만 그를 제대로 표현한 것 같았다. 새하얀 준마 위에 곧은 자세로 앉아 있는 라케르타 공작은 살아 움직이는 게 신기할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20대 초반 정도 됐을까. 커다랗고 당당하게, 또 우아하게 뻗은 체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달빛을 뽑아 만든 실처럼 반짝거리는 긴 은빛 머리에 드문드문 푸른빛의 광택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섬세한 선으로 빚어진 하얀 이마와 적당히 날렵한 콧날, 차갑고 냉정한 빛을 뿜어내는 은푸른 눈동자, 꾹 다문 도톰한 입술 등 모든 것들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무나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유독 서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얼어붙은 겨울 호수 같아…….”

제니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눈이 부셔 똑바로 보기 힘들다는 듯 몽롱해진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제니와 샤샤, 아니 거기 도열했던 사용인들은 남자고 여자고 상관없이 모두 일순간 말을 잃어버렸다. 공작 본인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온 다른 이들의 미모 역시 하나같이 남달랐다. 바로 옆에서 말을 타고 들어온 파인스 백작은 물론이고 그 두 사람을 수행한 시종들의 자태도 황홀했다. 한 사람은 호리호리한 몸매에 엷은 금발을 길게 늘어뜨렸고, 다른 한 사람은 아직 소년티가 남아있는 사내였다. 호기심이 가득 어린 초롱초롱한 푸른 눈동자가 상큼해 보였다. 새하얀 빛에 가까운 은백색 머리도 눈길을 끌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가 라케르타 공작을 향해 물었다.

“이제 이 성에서 사는 건가요? 그럭저럭 쓸 만해 보이긴 하네요.”

시종답지 않게 조금 당돌하게 느껴지는 말투였다. 아마도 고귀한 가문 출신인 모양이었다. 라케르타 공작은 별 대답 없이 간략하게 턱짓을 한 번 해주었다. 모두가 홀린 듯 멍하니 그들을 응시하는 사이 라케르타 공작을 위시한 이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려섰다. 디아누스 집사가 급히 다가가 환영의 말을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라케르타 공작 저하. 파인스 백작님. 저는 앞으로 이곳 ‘하레나 성’의 집사를 맡게 된 디아누스라고 합니다.”

“그렇군. 렌투스에게 들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다.”

목소리도 참으로 근사했다. 차갑고 딱딱한 어투였지만 자꾸만 듣고 싶게 만드는 묘한 음색.

“예. 성심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공작의 뒤쪽에 자리한 렌투스와 눈짓을 교환하며 디아누스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제야 정신이 든 다른 고용인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준비해둔 환영의 말을 다 함께 외쳤다.

“어서 오십시오. 라케르타 공작 저하, 그리고 파인스 백작님.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래……. 모두 잘 부탁하겠다.”

그가 약간 어색한듯하면서도 묘하게 익숙해 보이는 태도로 좌중의 인사에 답했다. 과묵하고 담백한 성격인지 말을 마친 후 서둘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니는 꿈꾸듯 아련한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 속닥였다.

“저기, 샤샤. 나 그냥 돈 한 푼 못 받아도 좋을 것 같아.”

“응?”

“설령 급료 한 푼 못 받고 일하더라도 신이 나서 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샤샤 역시 반달이 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완전 최고다.”

물론 급료도 어김없이 나올 터였다. 둘의 입꼬리가 귀에 걸려 한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느릿느릿 일터로 향했다.

***

다음날, 다시 돌아온 제국의 휴일 날. 에일린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하루를 열었다. 나무 덧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히에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히에무스. 오늘은 안 바쁘세요?”

“그래. 오늘이 아젤란 제국의 휴일이라고 들었다. 또 그대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것 같아 와봤어.”

“예. 그래서 제가 좀 바쁠 것 같아요. 이따 만나면 어떨까요?”

“함께 가겠다.”

“예?”

“오늘은 나도 함께 갈 거라고.”

히에무스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정색한 얼굴로 선언했다. 에일린은 조금 망설였다. 그와 함께 어딜 가면 꼭 작은 소동을 일으키는 게 신경 쓰였다.

“안 되겠느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저번처럼 소동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괜찮아요.”

“약속하지. 공기처럼 고요히 있겠다.”

여느 때처럼 케일론의 도움을 받아 애플턴 부인과 함께 황궁에 당도했다. 도착해 보니 렉스가 직접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서 와라, 에일린.”

“폐하. 안녕하셨어요?”

에일린은 서둘러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히는 인사를 올렸다.

“그래. 그대도 별일 없었느냐?”

“예.”

주변에 별로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히에무스도 바닥에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한 손을 허리춤에 올린 자세로 냉정한 시선으로 렉스를 주시했다.

“바로 산책을 시작할까? 오늘은 내가 좀 바쁘구나.”

에일린은 깊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가 언제나처럼 팔을 내밀며 에스코트해줬다. 히에무스의 도끼같이 뾰족한 시선이 등 뒤로 느껴져 마음이 다소 불편해졌다. 다음번엔 동행하는 걸 허락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천천히 걸어 잘 가꿔진 대정원으로 들어섰다. 구름이 낀 날씨 탓인지 음습하고 쌀쌀한 분위기였다. 금방 뺨이 얼어붙고 몸이 굳었다. 히에무스가 심술이라도 부리는 걸까? 힐끗 쳐다보며 그의 눈치를 살폈지만 딱히 별다른 낌새는 없었다. 그저 한결같이 차갑고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볼 뿐. 어쨌든 오늘 꼭 하려고 마음먹었던 말을 꺼내기로 했다.

“저, 폐하. 거듭 요청드린 겁니다만 오늘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디 들어 주세요.”

렉스가 안 그래도 느리게 내딛던 발걸음을 멈췄다.

“또 이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할 셈이냐?”

“예. 이런 식으로 계속 폐하를 만나야 한다는 게 좀 부담스럽습니다. 사람들 시선도 신경 쓰이고요.”

“…….”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야 별로 신경 쓸 게 못 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녀를 마치 황제의 후궁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하는 게 싫었다. 이왕 꺼낸 말이니 용기를 내 하고 싶던 말을 마저 다 했다.

“그리고 성에 보내셨던 인력도 거둬주셨으면 합니다.”

“에일린, 그대 정말…….”

렉스가 맘에 들지 않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정말 감사하지만…… 이런 부담감 때문에 오히려 폐하를 제대로 대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부디 헤아려주세요.”

“오히려 제대로 대할 수 없다고?”

“예.”

렉스는 잔뜩 치켜 올라간 눈썹에 더욱 힘을 주며 에일린을 응시했다. 단순한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걸까?! 변경의 조그만 나라 출신 평민 여자의 마음 하나 얻기가 이다지도 힘들단 말인가. 황제의 재력이나 위엄, 혹은 약간의 친절함을 보여주면 금방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에게 이성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부족한 것인가? 아니, 지금껏 그가 별로 눈길을 주지 않아서 그렇지 그의 관심과 사랑을 받길 원하는 여자들은 넘쳐나도록 많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황궁에 와 있는 무수한 공녀들이 그의 눈길을 받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그가 관심을 갖는 에일린 혼자만 그 자신을 자꾸만 밀어내려 하다니. 의아하고 불쾌한 기분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초조하기도 하고. 사실 그도 알고 있긴 했다. 그 자신이 사랑에 서툴다는 걸. 지금껏 품고 싶은 여인이 없으니 여인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써본 적도 없고 제대로 된 방법도 몰랐다. 그저 그가 알고 있는 보편적인 상식들을 동원해 본 건데 에일린에겐 통하지 않는 걸까? 하지만 그도 자존심이 있었다. 금방 철회하고 싶지 않았다. 좀 더 밀어붙여 볼 셈이었다. 그 자신의 방식을.

“한 달이다.”

한참 후에 그가 딱딱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예?”

“한 달은 채워주길 바란다. 에일린. 제국의 휴일이 한 달에 일곱 번이 있으니……, 그래. 앞으로 세 번은 더 이 소임을 맡아다오.”

“세 번이라고요?”

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냉엄한 푸른 눈동자에 묘한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세 번 더 채우고도 입장이 변함없다면 그땐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나도 그대가 꺼리는 걸 계속 강요하고 싶진 않으니까.”

“그러……겠습니다.”

에일린도 선선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그가 비로소 엷은 미소를 품었다.

“자, 그럼 계속 정원을 거닐까?”

“예.”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나이든 시종이 황급히 다가왔다.

“폐하. 드라코니아의 스킬라 공주님께서 방금 황궁에 당도하셨습니다. 알현을 청하시는데 어찌할까요?”

“내일 다시 오라 전하시오.”

“알겠습니다.”

그 소식에 히에무스가 에일린에게 다가와 속닥거렸다.

“흑룡도 이곳에 도착한 모양이구나.”

“흑룡이라고요?”

그녀가 렉스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히에무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날 정말 귀찮게 하는 별난 용이지.”

“당신을 귀찮게 한다고요?”

“그래, 엄청.”

에일린은 조금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

다음 날, 히에무스는 루쿨루스 숲에 위치한 겨울의 궁전에서 그동안 밀린 일들을 처리하던 중이었다. 브로미오스가 보낸 서풍이 급히 달려와 알렸다.

“렌투스가 지금 즉시 하레나 성으로 오라고 하십니다. 급히 하셔야 하는 일이 있다더군요.”

히에무스가 그의 궁전 내부를 휘 돌아보며 상황을 살폈다. 눈의 여왕과 북풍이 저만치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둘에게 얼른 명령을 내렸다.

“눈의 여왕은 안드로스 대륙 북쪽 끝으로 가서 사흘간 눈을 뿌리도록 하시오. 북풍과 함께 가도록.”

두 권속이 머리를 조아리며 응답했다.

“알겠습니다. 왕이시여!”

서늘한 빛을 남기며 둘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도 일어나 서풍과 함께 자리를 떴다.

“오늘 인간 군주를 알현해야 합니다.”

하레나 성에 도착한 히에무스를 보자마자 렌투스가 설명했다.

“오늘 말인가?”

“제가 바빠 깜박 잊었습니다. 스킬라 공주님께서 오늘 황제를 알현하러 가시는데 두 분도 함께 가셔야 합니다. 알현하는 법을 가르쳐드릴 테니 준비해주십시오.”

렌투스의 옆에 있던 브로미오스가 한마디 덧붙였다. 엄청 호화로운 복장을 갖춘 채였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게. 황궁에 갈 땐 좀 더 화려한 차림을 해야 한다는군. 자네도 어서 바꿔 입게.”

히에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여러 종류의 옷이랑 인간 생활에 필요한 각종 물건들을 한꺼번에 마련해 뒀었다. 처음에 한 번만 렌투스의 옷을 빌려 입었을 뿐 그 후엔 각자의 것들을 잔뜩 준비해서 활용하는 중이었다. 재물이 있으니 단시간에 그 많은 것들을 구비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인간 세상에선 텔루스가 준 보석이나 황금 덩이가 정말로 유용했다.

“저도 가는 거죠?”

유니콘 루카스가 기대감에 가득 찬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렌투스가 좀 심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대는…… 좀 더 공부를 한 후에 밖에 나서는 게 좋겠네. 오늘 가는 곳은 다른 곳과 달라.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곤란해서 말이지.”

루카스가 금방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쳇, 군주를 알현하는 법 같은 건 나도 안단 말이에요. 우리 아빠가 일각수들의 왕인데 그런 걸 모를 것 같나요?”

“그렇긴 하겠지만 인간들의 예법은 또 달라서 말이지. 그러니 게으름 부리지 말고 틈날 때마다 서풍과 함께 디아누스 집사의 가르침을 잘 받도록 하게나.”

“알겠어요.”

부루퉁한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을 나서는 히에무스를 향해 질문했다.

“저, 에일린은 언제 만나게 해주실 건가요? 당신을 따라가면 자주 볼 수 있을 거라 하셨잖아요?”

히에무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와 어찌해 볼 생각이라면 지금 즉시 너희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 네가 그러지 않았나? 에일린보다도 인간 세상이 어떨지 더 궁금하다고.”

“물론 그렇긴 하지만 에일린과도 자주 보고 싶단 말이에요.”

“그녀의 연인은 나야.”

루카스의 입술이 댓 발은 더 튀어나왔다.

“아, 알겠다고요! 한 번만 더 말하면 100번은 채우겠네. 귀에 딱지 앉겠어요.”

루카스의 마지못한 대답을 뒷등으로 들으며 히에무스는 방을 나섰다.

***

속전속결로 알현 예절을 숙지한 히에무스 일행은 서둘러 황궁으로 향했다. 스킬라 공주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공녀들의 거처인 아르겐 궁으로 먼저 갔다.

“오라버니!”

스킬라가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히에무스에게 뛰듯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히에무스의 두 눈썹이 불쾌함으로 씰룩거렸다. 막 밀어내려는데 다급하게 마법에 실린 렌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으십시오!

“…….”

만족스러운 기색이 스킬라의 오렌지빛 눈동자에 어렸다. 그리고 잠시 그 서늘한 품속의 감촉을 즐겼다. 아아, 정말 황홀했다. 이래서 그를 드라코니아 왕가의 양자로 들인 것이다. 가족의 친밀함을 가장한 애정표현을 마음껏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자꾸 이렇게 접촉하다 보면 그의 마음도 어느새 그녀에게로 기울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 것이다. 반드시.

“이제 그만 떨어지도록 해.”

조금 참아주다 히에무스가 스킬라를 밀어 떼어냈다. 그녀의 얼굴에 서운함이 스쳐 지나갔지만 곧 화사한 낯빛을 되찾았다.

“지내시는 성은 어떠세요? 히에무스 오라버니. 불편하진 않으세요?”

“……괜찮다.”

“다행이에요.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낯선 곳에서 오라버니가 힘들어하실까 봐. 이 스킬라, 어젠 한숨도 못 잤지 뭐에요.”

“힘들 것 없어. 네가 걱정할 것도 없고.”

“아이참, 오라버니. 여기서 유일한 가족인 제가 오라버닐 걱정하지 않으면 누가 신경 쓰겠어요? 혹 뭐든 아쉬운 게 있으면 제게 말씀해주세요. 뭐든 해결해 드릴 테니까요.”

말을 마친 그녀가 냉큼 히에무스의 한쪽 팔을 두 팔로 휘감았다. 히에무스는 엉겨 붙는 그녀가 성가셔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겨울의 궁전에서 누가 이렇게 옆에서 귀찮게 했다면 당장 얼어붙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렌투스의 눈치도 신경 쓰이고 상황도 상황인지라 꾹 참았다. 이 흑룡은 왜 이렇게 귀찮고 부산스러운가.

“그래, 고맙다.”

딱딱한 목소리로 억지로 그럴듯한 대답을 해주었다. 인간들 틈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곤란한 일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서 제대로 인간 노릇을 하고 싶었다. 이 흑룡의 수선스러운 태도에도 적응해야 하리라.

용족 공주를 상대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라피스 궁에 위치한 황제의 알현실에 다다랐다. 대기하고 있던 젊은 시종장이 나타나 맞이해주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열 지어 우뚝 선 하얀 대리석 기둥과 높게 위치한 천장, 색유리를 끼운 채광창에서 쏟아지는 영롱한 빛들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신비로운 채색화와 이국적인 장식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생기는 묘한 공기의 공명. 인간과 인간이 서로 대면하는 곳이었지만 격이 다른 인간이 머무는 장소란 걸 모든 사물들이 앞다퉈 알려주는 듯했다. 붉은 양탄자로 이어진 길 위의 끝에 하얀 단상이 높다랗게 설치돼 있었다. 그 가운데 자리한 커다란 황금빛 옥좌가 모든 이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문득 히에무스는 저번에 대자연 어머니를 뵈러 갔을 때의 그 알현실이 떠올랐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광휘를 모아놓은 듯했던 그곳과 기이하게 닮았다는 착각이 잠시 일었다.

“폐하. 드라코니아 왕국에서 오신 스킬라 공주님과 라케르타 공작, 그리고 파인스 백작이 드셨습니다.”

“어서 오시오.”

셋은 가까이 걸어가 인간 군주와 마주했다. 히에무스와 렉스의 두 푸른 눈동자가 여과 없이 맞부딪혔다.

***

“제국의 태양, 레오나드 황제 페하께 인사 올립니다. 아벨라의 찬란한 빛이 늘 함께하시기를.”

스킬라 공주가 먼저 몸을 낮추며 정식 인사말을 읊었다. 검은 머리에 제법 예쁜 얼굴, 단단한 체구와 당당한 태도. 이 공주도 만만치 않은 느낌이었다. 역시 아젤란의 황후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일까? 퀴리오스 왕이 그런 계산을 하고 보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렉스는 다시 한번 공주의 모습을 낱낱이 뜯어보았다.

‘아름답긴 하군.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녀가 가진 배경이나 영향력 등을 고려해봤을 때 저 정도면 황후감으로 적당할 것 같았다. 지금 와 있는 공녀들 중에선 스킬라가 그가 생각해 둔 조건에 가장 많이 부합됐다. 용모도 저만하면 어딜 가든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렉스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어 라케르타 공작이 약간 머뭇거리는 듯하다 이내 입을 열어 비슷한 인사말을 늘어놓았다. 파인스 백작이 차례를 이어 읊조리자 긴 인사 시간이 끝났다. 렉스도 적절한 문구로 화답해주었다.

“세 분 손님에게도 여신 아벨라의 온유한 자애의 빛이 머물기를. 모두 일어나 고개를 드시오.”

“망극합니다.”

렉스는 예리한 파란 눈을 빛내며 드라코니아에서 온 세 명의 귀족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다들 빼어난 용모에 뿜어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특히 지난번 흉포한 용을 물리쳤다는 라케르타 공작의 풍모가 남달라 보였다. 직접 보니 그 소문이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우락부락한 이미지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와는 상반되게 매우 우아하고 미려한 모습이었다. 그의 평생에 봐온 그 어떤 이보다도 단정하고 준수해 보였다. 묘하게 서린 차가운 품위와 위엄이 느껴졌다. 학습해서 얻어진 분위기가 아니라 태생부터 지닌 것 같은 특별함이 묻어났다. 보자마자 왜 퀴리오스가 그 나이에 양자를 들였는지 이해가 됐다. 이유가 뭐든 저런 남자라면 누구든 붙들어두고 싶을 것이다.

“소문대로 정말 뛰어난 인재인 것 같구려, 라케르타 공작. 만나서 반갑소.”

“저야말로 기쁩니다. 마침내 이렇게 실체를 갖춰 만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아젤란의 황제 폐하.”

히에무스가 도발적인 눈으로 그를 주시하며 말했다. 아까 렌투스와 연습했던 대사와는 조금 다르게 얘기했다. 다분히 에일린을 의식해 한 말이었다.

“하하하, 그렇소? 실체를 갖춰 만났다……라, 특이한 표현이오.”

“특이할 것 없습니다. 지금껏 서로 다른 곳에 살다 보니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는 뜻이니까.”

“알겠소. 나 역시 그렇게 이해하던 참이오. 어쨌든 모두 환영하오. 아젤란에 머무는 시간 내내 즐겁고 편안하길 바라겠소.”

“황송합니다.”

셋은 일제히 허리를 숙여 대답했다. 히에무스도 이제 이 정도 연기는 할 줄 알았다. 처음엔 거북하고 어색하게 느껴져 도무지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에일린을 생각해서 꾹 참고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그럭저럭 잘 해내게 되었다. 뭐든 하다 보면 느는 법이다. 진짜가 아니라 연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거부감을 가질 필요도 별로 없었다.

“모두를 환영하는 무도회를 열도록 하겠소. 열흘 후 정도가 될 것이니 그리 알고 준비해주시오. 아젤란 사교계에 그대들을 소개하겠소.”

드라코니아의 공녀 일행들이 예법에 맞는 정중한 인사를 올리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렉스는 잠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리히트 시종장이 다가와 보고했다.

“폐하. 아벨라 신전에 요청하신 신관께서 오셨습니다. 지금 만나보시겠습니까?”

“그러도록 하지.”

시종장과 함께 신관들이 입는 하얀 로브를 입은 한 남자가 들어왔다. 옷에 달린 두건을 푹 눌러쓴 상태여서 얼굴 생김새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가 들어와 조금 과장되게 느껴질 정도로 깊이 허리를 숙이며 예의 그 인사말을 굵직한 목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오오, 제국의 주인이며 태양인 레오나드 황제 페하시여. 광명한 당신의 빛 아래 미천한 신의 종이 무릎을 꿇습니다. 아벨라의 찬란한 광휘가 영원토록 머물길 기원합니다. 제 3신전에 속한 일등신관 ‘이디오마’, 인사 올립니다.”

렉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따분했다. 황제니까 늘 받는 인사이긴 하지만 사실 그리 맘에 드는 절차는 아니었다. 참 가식적이기도 하지. 하지만 뭐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 태반이 꾸며낸 것투성이니 이것만 뭐라 할 것도 없겠지.

“와줘서 감사하오. 이디오마 신관. 아벨라 신전에서 고민 상담가로 이름이 높다 들었는데 맞소?”

“황송합니다. 신자들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미력한 힘이나마 항상 분발해 임하다 보니 어느새 그런 평을 받고 있습니다.”

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존귀하신 황제 폐하께서 뭔가 근심이 있으신지요?”

“그렇소. 그대가 아벨라 신전에서 주로…… 연애 상담을 해주고 있다고 들었소.”

“그렇습니다. 부끄럽지만 그쪽 방면으로 꽤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사랑의 현자’라는 별칭으로 더러 불리곤 합니다.”

렉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한 여자의 마음을 얻고 싶은데 방법을 잘 모르겠소. 그대가 내게 쓸 만한 조언을 좀 해주었으면 좋겠소.”

“후훗, 그러시군요. 그런 일이라면 정말 절 잘 부르신 겁니다. 이래 봬도 제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연인들을 굳게 맺어주었으니까요.”

“잘됐군. 좋은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소.”

“걱정 마십시오, 폐하.”

“일이 만족스럽게 진행되면 그대 개인에게는 물론 그대가 속한 신전에도 큰 상을 내려 보답하겠소.”

“망극합니다. 폐하.”

“반대로 일이 제대로 성사되지 않으면…….”

“……?”

“큰 벌을 내릴 거요. 그대 자신과 그대가 몸담은 신전에.”

“……!”

렉스가 냉혹한 푸른 눈으로 신관을 꿰뚫듯 바라보았다. 입가에만 엷은 미소가 걸린 채였다. 이디오마는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니 신중하게 조언을 해주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자, 루쿨루스 영애. 좀 더 스텝을 경쾌하게 밟으셔야 합니다. 제자리에서 두 번씩 발을 굴린 후 앞쪽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 이렇……게요?”

“예. 시선은 정면에 서 있는 파트너를 향하세요.”

며칠 후 에일린은 애플턴 부인에게서 댄스 교습을 받았다. 조금 빠른 춤곡에 맞춘 거라 무거운 드레스를 입고 스텝을 밟는 게 어려웠다. 중세 시대 춤은 단순해 보이면서 은근히 까다로웠다. 파트너를 겸한 보조 선생에 전문 악사가 서너 명 와서 반주까지 해주는 터라 예전보다 익히는 여건은 좋았다. 두어 시간 열심히 배웠지만, 에일린의 춤이 애플턴 부인의 눈에는 영 만족스럽지 않은 듯했다. 순서도 다 외웠는데 뭐가 문제인 걸까? 어느새 해가 지는 중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지요. 내일 다시 점검해 드리겠습니다.”

“예.”

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이런 날은 정령의 숲에 있는 온천에 푹 담그다 오면 좋은데. 에일린은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잠시 재우고 정령의 숲에 다녀올까 하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곧 케일론이 퇴근할 시간이었다. 그는 퇴근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 시대에는 야근이나 특근도 없고 회식 같은 것도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귀가하는 성주를 맞이하기 위해 1층 홀에서 대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마법진과 함께 케일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일린은 여느 때처럼 고개 숙여 반겨주었다.

“잘 다녀오셨어요?”

그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내밀었다. 양피지로 된 두루마리 문서. 언젠가 받아본 기억이 있는 익숙한 것이었다. 에일린은 아직 완전하게 읽을 수 없었지만 익숙한 단어가 몇 개 눈에 띄었다.

“뭐죠? 초대장 같은데…….”

“맞습니다. 황궁 무도회 초대장입니다.”

“황궁 무도회라고요?”

“드라코니아에서 온 공녀가 이번에 교체됐는데, 그녀를 환영하기 위한 무도회를 개최하신다는군요. 함께 온 일행들도 꽤 거물급이라 더불어 아젤란 사교계에 소개한다고 하십니다.”

“어, 그래요?”

에일린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히에무스가 정말 인간 귀족으로 모두의 앞에 나서게 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애플턴 부인이 환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잘됐네요. 지금까지 익힌 춤 솜씨를 뽐낼 좋은 기회가 되겠어요. 언제 열리는지요?”

“7일 후입니다.”

부인이 잘 명심하겠다는 듯 턱을 한 차례 까닥였다.

“7일이면 좀 촉박하군요. 새 드레스를 제작할 여유는 없겠어요. 기존 드레스 중에서 골라야 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났지만 에일린은 별로 섭섭하지 않았다. 갖고 있던 드레스도 다 새것인데다 한두 번 정도밖에 입지 않았다. 모두 무도회 드레스로 입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고급스럽고 멋지니 그중에서 하나 고르면 될 것이다. 지난번 황궁 무도회를 제대로 즐기지 못해 아쉬웠는데 또다시 경험할 수 있다 생각하니 무척 반갑고 설렜다. 이번엔 히에무스의 본격적인 인간 데뷔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그를 귀찮게 한다는 그 공주도 어떤 인물일지 궁금했다.

소설 《장미의 기사 엘시아》에서는 ‘스킬라’라는 이름의 흑룡 공주가 등장하지는 않았다. 그저 어떤 왕국의 왕이 아젤란 제국의 지배에 불만을 가지고 마물의 힘을 빌려 침공한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 마물들 중 하나에 가공할 힘을 가진 흑룡이 끼어있긴 했다. 그것과는 상관없을 것이다. 드라코니아의 왕녀는 오히려 히에무스를 도와주는 인물이니 악당일 리가 없었다. 어떤 공주인 걸까? 귀엽고 애교 많은 공주님일까?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어서 만나보고 싶었다.

***

그날 저녁 정령의 숲 루쿨루스 어귀에 파리한 빛과 함께 한 마법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붉은 머리를 폭포수처럼 길게 늘어뜨리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예리한 눈매를 빛내며……. 호리호리한 몸매에 중성적인 미를 가진 남자, 안드레아스였다. 여자 옷을 입으면 서늘하고 고혹적인 여인으로 보이고, 남자 옷을 입으면 우아하고 섬세한 조각상같이 보이는 묘한 매력이 돋보였다. 그가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후우…….”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 난 후 살짝 찌푸린 얼굴로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나뭇가지 모양의 지팡이에서 섬광처럼 반짝이는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검푸른 허공에 마법 문자를 새겨 넣으며 동시에 입 밖으로 봄의 여왕을 소환하는 주문을 내보냈다. 영창이 끝나자 흐려진 백색 빛과 함께 핑크빛 드레스를 휘감은 정령의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콤하고 향긋한 꽃향기가 코를 찌르며 차가운 공기가 나른하게 잦아들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여린 봄비처럼 흘러내렸다.

“안드레아스.”

“잘 지내셨습니까? 베르누아님.”

“음, 잘 지냈지. 근데 왜 그렇게 오랜만에 날 불러낸 거지? 그대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건가?”

“당연…… 보고 싶었습니다. 허나 아시다시피 요즘 밤낮으로 제 주군을 보좌하느라 무척 바빠서요.”

그는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에게 정령이란 존재는 함께 사랑을 나눌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그 힘이 필요할 때 떠올리는 편리한 존재일 뿐. 비유하자면 인간과 전혀 다른 생명체를 향한 마음 같은 거였다. 동물을 대하는 마음과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동물을 대하더라도 그게 같은 동족인 인간을 향한 마음과는 같지 않을 테니까. 애초에 정령의 여왕이 그에게 먼저 반해 추근댔다. 이후 계약까지 하고 계속 교류를 맺어왔지만 별다른 마음이 생겨나진 않았다. 오히려 약간 성가신 존재랄까. 그래서 그가 원할 때만 만나겠다는 계약조항을 넣었었다. 마음도 가지 않는 이질적인 대상에게 만남의 주도권을 넘길 생각 따윈 결코 없었다. 세간의 눈으로 보자면 자못 이기적이고 비정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런 조건을 기꺼이 감내한 것이 저 봄의 여왕이었다. 그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정령들의 사랑이란 원래 그렇게 애처로운 것인지도.

“그랬구나. 난 늘 그대가 불러주길 기다렸는데…….”

“그러셨습니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번에 막무가내로 사라지셔서 이제 저와 만나는 걸 원치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

베르누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난번 그가 다른 마법사와 싸울 때 도망치듯 급히 피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땐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아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사실 그런 식으로 싸우는 걸 몹시 싫어하기도 하고.

“미, 미안했다. 그때 그대에게 실망을 안겨준 모양이구나.”

“좀 그랬습니다. 당신께 무척 의지했는데.”

“미안, 안드레아스. 다시는 그러지 않으마.”

안드레아스의 조금 얇은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그 말을 못 믿겠다는 듯 약간 비웃음을 머금은 표정 같았다.

“그 말을 믿어도 될지요? 당신께 부담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습니다만.”

“부담이라니, 그런 말 하지 마.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나도 그 후 많이 후회하고 반성했어.”

“흐응, 그러셨군요.”

그가 여전히 냉소를 풀지 않자 베르누아는 조금 초조해졌다. 조심스러운 듯 느린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한 손을 뻗어 그의 뺨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 그가 그녀의 손목을 휙 잡고 떼어냈다.

“……!”

“언제나 말을 내뱉는 건 쉽지요, 정령이든 인간이든.”

“그럼 어떡하면 내 진심을 믿어줄까?”

“직접 보여주셔야죠. 당신의 사랑이 여전하다는 것을요.”

“어떻게?”

베르누아의 한쪽 손을 잡은 채 그가 그녀의 눈을 그윽하게 응시했다. 누가 본다면 사랑하는 연인을 향한 시선이라고 착각했으리라.

“구해주셨으면 하는 물건이 있습니다. 간절하게 필요한데 저는 구할 능력이 안 되는군요.”

그녀는 강렬하게 스며드는 황금색 눈빛을 황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뭐지? 뭐든 가져다줄게. 그대가 원하는 거라면.”

“사랑의 여왕이라 불리는 정령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있지.”

“그녀가 만든 사랑의 묘약이 필요합니다. 먹는 순간 누구나 반하게 만드는 신비한 약이라고 들었는데.”

“뭐?”

화들짝 놀란 그녀가 황급히 손을 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가 꼭 쥔 채 놓아주지 않더니 천천히 그 손등을 자신의 입술 위로 가져갔다.

촉!

가벼운 키스와 함께 남자치곤 조금 높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구해주실 거죠? 베르누아 님.”

“안드레아스, 그건 좀…….”

그가 좀 더 과감한 몸짓으로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베르누아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멀어지지 않은 그에게서 더운 숨결이 새어 나와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이 인간 남자는 어쩜 이리도 아름답고 뇌쇄적일까?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정령인 그녀의 안에 깊이깊이 잠들어있는 정염을 일깨워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구해주십시오, 부디.”

“…….”

둥근 상앗빛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그녀가 괴로운 듯 웅얼거렸다.

“그, 그러고 싶지만 그건 정령의 금기에 해당해. 지난번에 마도구를 구해준 것보다도 더 큰 죄를 짓는 거에 속한다고. 미안하지만 안 돼. 그것만큼은 안 되겠어…….”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압니다. 그러기에 부탁드린 건데 할 수 없다니 섭섭하군요. 뭐, 알겠습니다. 포기하고 물러나지요.”

“안드레아스, 그것 말고 다른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됐습니다. 다른 건 필요 없으니까요. 뭐, 우리의 인연도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이참에 계약도 해지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가 잡았던 손을 놓으며 즉시 저만치 떨어졌다.

“안드레아스, 나는…….”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었다. 이렇게 매번 자신을 애태우는 저 금빛 눈동자를.

“저는 인간입니다.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뭐든 쉽게 잊어버리지요. 굳이 계약을 해지할 필요도 없긴 하지만 번거롭고 성가신 것 또한 싫어서요. 쓸 수 없는 건 그냥 버려야죠.”

그의 입가가 다시 조금 올라갔다. 눈동자에 이채로운 빛이 번득였다. 저런 걸 뭐라고 하는 걸까? 인간들에겐 저 표정을 이르는 말이 따로 있는 것일까?

“이번에 약속하셨다면 항상 당신께서 원하셨던 부분도 해드릴 생각이었는데 유감입니다.”

떨리는 목소리가 베르누아의 촉촉한 입술 끝에 맺혔다.

“내가, 항상 원했던 부분이라고? 무슨…….”

“원하지 않으셨던가요? 밤의 약속을요.”

“……!”

“제게 호감을 품은 여인들은 다들 원하던데 당신은 아닌가요? 고결하신 정령의 여왕이시니?”

“나는…….”

그가 얼른 허리를 깊이 숙였다.

“착각했던 거라면 송구합니다. 사과드리지요.”

살짝 치켜든 그의 얼굴에 스며든 미소가 짙어졌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아 봄의 여왕은 몸을 휘청거렸다.

“차, 착각한 게 아냐…….”

“그러면?”

“원……해.”

“뭐라고요? 잘 들리지 않습니다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봄의 여왕이 안달하듯 메마른 목소리로 되뇌었다.

“나도 원해, 그 밤의…… 약속.”

안드레아스는 베르누아가 도저히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표정을 만면에 띤 채 다시 바짝 몸을 붙여왔다. 사랑의 여왕 키프리스라면 알까? 저 영혼을 옥죄는 듯한 농밀함을 뭐라 이르는 것인지. 이내 그녀의 귓가에 조금 차가워진 입술을 스치듯 문지르며 소곤거렸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베르누아 님.”

***

‘더러워.’

안드레아스는 기분이 너저분했다. 마법약을 건네받기 전이라 아직 베르누아와 밤을 보낸 것도 아니지만 왠지 스스로가 이미 오염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잣거리에 맴도는 값싼 매춘부들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아니, 그들은 질긴 목숨 줄을 이어가야 한다는 절박한 이유라도 있겠지. 자신은 그냥…….

‘더러울 뿐이군.’

어금니를 깨물었다. 싹 씻어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이 찜찜함을 떨쳐버릴 수 있을까? 몸이라도 닦으면 좀 나아질지 모른다. 마침 적당한 목욕 장소도 알고 있었다. 정령의 숲에 오래된 온천이 있었지. 엘프인 그의 아버지가 예전에 가르쳐줬던 곳. 엘프들이 이 대륙에 살 때 곧잘 들리던 곳이었다.

‘간만에 가볼까?’

정령의 숲에 있으니 왠지 다른 목욕 장소보다 더 깨끗할 것 같았다. 안드레아스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던 발길을 돌려 그 온천으로 향했다. 다시 차오르기 시작한 달빛 덕분에 수월하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부지런히 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바로 안으로 들어가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다급하게 옷을 벗어던졌다. 마법사들이 입는 로브를 떼어내고 남녀 공용으로 입는 속옷인 긴 쉥즈까지 탈의하고 물속으로 첨벙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어갔다.

그때였다.

“거기, 누구죠? 혹시 엘레스트라?”

“……!”

달빛이 밝긴 했지만 어두운데다 동굴 안에 하얀 솜처럼 깔린 짙은 수증기 때문에 먼저 온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안쪽에서 조금 긴장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음성이었다.

“누구냐고요?!”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맑은 연초록 눈동자를 지닌 그녀였다.

“시, 실례했군요. 나는 안드라입니다.”

“옛?!”

에일린은 소스라치게 놀란 듯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먼저 와 계신 줄 몰랐습니다. 그저 목욕을 하려고 들렸을 뿐이니…… 놀라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

오늘은 틀렸다. 그냥 돌아가야겠군. 정말 그녀를 당혹스럽게 하거나 다른 실례되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난 그만 가 볼 테니 안심하십시오.”

하지만 중간에 나가기가 참 난감한 상태였다. 이대로 물 밖으로 나가면 남자라는 걸 들키고 말 것이다.

“저기, 잠깐만요, 그냥 계세요.”

“예?”

옷자락이 사르륵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에일린이 커튼처럼 드리워진 뿌연 수증기를 헤치고 속옷 차림으로 나타났다. 막 목욕을 끝내고 옷을 챙겨 입던 참인 것 같았다. 그녀의 팔 위에 겉옷으로 보이는 드레스가 걸쳐져 있었다. 안드레아스는 화들짝 놀라 급히 손으로 가슴 쪽을 가리며 물속으로 깊이 몸을 숨겼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목욕하러 온 거면 그냥 하고 가세요.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아깝잖아요? 다른 짓은 하지 않을 거잖아요?”

“무, 물론 그렇긴 하지만…….”

“하고 가세요. 여기가 제 소유도 아니고 전 다 마쳤는걸요. 머리만 좀 더 말리면 돼요.”

“그, 그래요?”

안드레아스의 눈에 에일린을 여기까지 데려다줬을 게 분명한 정령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간 걸까? 늘 붙어 있었는데……. 주변을 휙 둘러보니 금방 의문이 풀렸다. 정령들은 한쪽 구석 바위 위에 올라앉은 자세로 꾸벅꾸벅 조는 중이었다. 하급 겨울 정령이라 더운 기운에 맥을 못 추는 것이리라.

“계속 그러고 있지 말고 편하게 씻으세요.”

거역하기 힘든 묘한 박력과 기개가 묻어나는 말투였다. 그는 엉거주춤 뒤돌아서서 어깨에 물을 끼얹었다.

“거기 너무 깊지 않아요? 여기 좀 얕은 곳이 씻기 좋을 텐데.”

“괜찮습니다. 그저 몸을 녹이고 싶어서니까.”

“그래요?”

그녀가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자신의 몸을 훑는 시선이 느껴져 얼굴에 열이 화끈 올라왔다. 어둠과 수증기 때문에 서로 분명한 모습을 확인하기는 힘들었지만 안드레아스는 부끄럽고 민망했다.

“뭐 힘든 일이라도 있었나 봐요.”

“예?”

“지쳐 보여서요.”

지쳐 보인다고? 지쳐 보인다라……. 그 평범한 말이 너무나 생소하고 특별하게 다가왔다. 어째서? 아아, 그래. 그러고 보니 누구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그의 주군인 엘시아 왕녀는 말할 것도 없고 주위 모든 사람들을 다 통 털어 봐도…….

아니, 한 사람이 있었다, 단 한 사람만은 그렇게 말해줬지.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의 어머니가. ‘지쳐 보이는구나, 안드레아스. 조금 쉬는 게 어떻겠니?’하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그 말.

“조금 쉬시는 게 어떠세요? 정말 피곤해 보이는데.”

“아…….”

순간 안드레아스는 목이 메어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오늘…… 내키지 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해서 좀 괴로웠습니다.”

마음속의 말을 털어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왠지 가슴 속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아니 뜨거워지는 걸까.

“어머, 저런. 그랬군요.”

그저 해주는 상투적인 말일 텐데 너무나 편안하게 느껴졌다. 좀 더 말하고 싶었다.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아, 그런 기분 알 것 같아요. 저도 곧잘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요?”

“예. 살다 보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잖아요. 사람이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가? 사람이면 어쩔 수 없는 건가? 다른 이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 자신조차 순수한 인간으로 스스로를 대한 적이 별로 없었다. 언제나 인간보다 더 완벽한 존재인 엘프와 더 가깝다고 여겨왔다.

“그런가요?”

“그럼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 인간이니까 불안한 거구나. 인간이니까 약하기도 하고 번민도 생기는 걸 거다.

“힘든 하루였겠네요. 저도 그런 날은 참 괴롭더라고요.”

안드레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오늘 참 힘들었지.

“잠시라도 복잡한 생각은 접어두고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푹 쉬다 가세요. 피로 회복엔 그만이더라고요.”

“그래요?”

“예. 여기서 목욕하면 기분이 참 개운해져요. 그럼 뭘 하든 한결 힘이 나서 씩씩하게 할 수 있어요. 복잡한 고민거리도 단번에 해결하실 수 있을 거예요.”

“나도…… 그럴까요?”

“물론이죠. 힘내세요, 파이팅!”

에일린이 기이한 추임새와 함께 작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안드레아스도 따라 웃었다. 얼마 만에 이런 웃음을 짓는 것일까? 정말 기묘한 분위기를 지닌 여자였다. 같이 있으면 왠지 마음이 푸근하고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막 열여덟, 열아홉 정도로밖에 되지 않았을 텐데 그 나이답지 않게 뭔가 달관한 듯한 태도를 종종 비췄다. 그는 돌아선 자세로 한동안 가만히 있다 힐끗 눈길을 보냈다. 엷은 수증기 너머로 그녀가 고요히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빗으로 빗어 내리는 일련의 동작을 응시했다. 정갈한 행동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자니 그의 호흡이 한결 잦아들며 규칙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이내 눈꺼풀이 내려오며 살짝 졸음이 몰려왔다. 따뜻한 온천물 때문인 걸까? 아니면 저 여자 때문인 걸까? 온몸이 나른해지고 긴장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바스락거리며 겉옷을 마저 챙겨 입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모든 단장을 마쳤는지 그녀가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 전 이만 가 볼게요. 안드라님도 목욕 잘하시고 가세요.”

“그러죠……. 조심히 돌아가세요. 루……쿨루스 양.”

“예.”

에일린이 잠든 정령들을 깨워 밖으로 데려가는 모습이 은은한 색채로 그려졌다. 자신이 마법사인데다 그녀를 해치려고 한 사람인데도 그다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모든 행동에 거침이 없어 보였다. 물에 젖어 굽실거리는 머리카락과 달빛에 반짝거리는 청아한 얼굴, 여리여리한 몸매가 사뭇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후 그의 뇌리에 이따금씩 떠오를 정도로.

에일린이 동굴 바깥으로 나오자 세 정령들이 앞다투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저 사악한 마법사가 이곳까지 오다니, 별일 없으세요? 에일린 님.”

“괜찮아요. 저 사람 지금은 제게 해를 끼치지 않아요.”

“그래도 항상 조심하셔야 해요. 다음엔 우릴 먼저 깨워주세요.”

“그럴게요.”

프리기가 문득 생각난 듯 아두스에게 말을 걸었다.

“저자도 ‘사악한 마법사’라고 부르니 성에 사는 마법사랑 똑같아서 헷갈리지 않아? 좀 다르게 부르는 게 어떨까?”

아두스가 잠깐 궁리하다 곧 대답했다.

“여자니까 사악한 마녀라 부르면 되지 않을까?”

제퓌가 연이어 의견을 내놓았다.

“예쁘긴 한데 난 아무리 봐도 남자 같아. 그냥 ‘어중간한 마법사’는 어때?”

아두스와 프리기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그거 괜찮네. 사실 가끔이지만 남자처럼 보이기도 해. ‘어중간한 마법사’라 부르자.”

“응!”

에일린은 살짝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가슴 때문에 그럴 거야. 저런 완벽한 미인에게도 치명적인 콤플렉스가 있는 거지. 가슴이 완전 절벽이라 좀 쑥스러웠나 봐. 제대로 씻질 못할 정도니. 이럴 땐 일찍 자리를 피해주는 게 상책이지.”

***

다음날, 하레나 성 안에 위치한 회의실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백룡 렌투스는 그의 정령 학생들을 모아놓고 여러 가지 교육을 실시했다. 황궁 무도회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가르쳐야 하는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왕 교육을 실시하는 김에 서풍과 루카스도 데려다 놓았다. 뭐든 되는대로 가르쳐 이 어중간한 자들을 어서 인간 귀족같이 보이게 만드는 일이 시급했다.

“무도회니까 춤을 추셔야 합니다. 당연히 춤추는 법도 모르시겠지요?”

“무슨 소리! 다른 건 몰라도 인간들의 춤만큼은 잘 출 수 있다네.”

렌투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춤을 추실 수 있다고요?”

정말 의외다. 인간 생활에 대해 모르는 것투성이인 자들이 어떻게 춤추는 법을 알고 있다는 건가? 히에무스가 턱을 살짝 치켜들며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지난번에 내 연인이 가르쳐줬다네. 그녀가 예전에 황궁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익힌 춤을 정령들 모두에게 가르쳐줬지.”

브로미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 춤은 더 배울 필요 없어. 다른 거나 알려주게. 가르쳐야 할 게 많이 밀렸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하죠. 여성을 에스코트하는 법, 식사 예절, 다도 예절, 방문 예절, 접대, 각종 화술 등을 익히셔야 합니다. 거기다 인간 사회의 경제나 법률, 정치 상황 등도 대략 알아두셔야 하고요. 시사 상식도 있군요.”

렌투스가 양피지에 꼼꼼하게 적어둔 교육 계획서를 확인하며 읊어주었다. 정말 가르쳐야 할 게 많았다. 기간이 6일 남짓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나마도 제대로 다 활용할 수 없었다. 특히 히에무스는 중간에 겨울의 정령왕으로서의 일도 하러 가야 했고 인간 연인도 만나러 가야 했다.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바빴다. 정령의 몸이라 잠자는 시간, 먹는 시간 등을 소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거기다 춤이라도 배워두었다니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럼 춤 교육은 빼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유니콘 루카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 난 춤 추는 법을 모르는데 그것도 다시 가르쳐주면 안 돼요?”

히에무스가 힐난하듯 말했다.

“넌 시종이니까 무도회에서 춤출 필요 없어. 일부러 익히지 않아도 아무 지장 없다고. 정 아쉬우면 서풍이나 디아누스 집사에게 가르쳐 달라고 해.”

“쳇, 알겠어요.”

루카스가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인간 세상에 와보니 뭐든 히에무스와 브로미오스 위주로 돌아가는 게 좀 서운했다. 그렇다고 해도 정령의 숲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온통 생소하고 신기한 것 투성이라 정령의 숲에서 살 때보다 모든 게 훨씬 재미있고 흥미로우니까.

“걱정 마. 내가 잘 가르쳐줄게.”

같은 시종 역할을 맡은 서풍이 웃으며 루카스를 달래주었다.

“예. 부탁할게요.”

히에무스가 다른 이들의 눈치를 슬쩍 보다 렌투스에게 물었다.

“이제 내 연인을 여기 데려와도 되지 않을까? 그녀가 지금 있는 곳을 좀 불편해하는데.”

렌투스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안 됩니다.”

히에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째서지?”

목소리는 으르렁거리듯 낮게 가라앉았고,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순간 느껴진 한기에 렌투스는 어깨를 흠칫 들썩였다.

“고정하십시오. 제가 알아보니 그 여인이 그냥 평범한 평민이 아니더군요. 아젤란의 황제가 한창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니 맘대로 주거지를 옮기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지금 지내는 곳도 황제가 정해준 거처라고 하셨지요?”

히에무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렌투스에게는 에일린의 상황에 대해 대충 이야기해 둔 상태였다. 용의 성좌에 대고 맹세했으니 믿고 말한 것이다. 그가 이어 설명했다.

“그런 경우엔 거주지를 임의로 옮길 수 없습니다. 황제의 명을 거역한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아가씨에게 불이익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상관없어. 내가 보호해주면 되니까.”

“히에무스 님. 그 아가씨는 인간이잖습니까?”

“그래,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히에무스가 렌투스에게 몇 걸음 다가가 따지듯 질문했다. 한 손을 허리에 올려둔 채였다. 렌투스도 이제는 어느 정도 그에게 적응했는지라 냉랭한 눈빛을 그대로 맞받아치며 말했다.

“평생 겨울의 궁전에 가둬서 보호할 생각입니까? 아니면 도망자로 살게 하고 싶으신 건지요? 그녀가 그런 생활을 감내할 거라 하던가요?”

“…….”

“이 안드로스 대륙에서 황제가 가진 권력은 절대적입니다. 아벨라 여신께서 정령들에게 미치는 영향력보다도 오히려 더 강력할지 모릅니다. 황제를 거역하고 인간으로 살아가긴 힘듭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영원히 데려올 수 없단 말인가?”

“인간의 관습과 법에 어긋나지 않는 방법을 잘 생각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섣불리 움직일 게 아니라.”

“그냥 마법으로 황제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면 간단하지 않나?”

“황제는 일반인과 다릅니다. 당신께선 이런 일을 겪지 않아 잘 모르시겠지만 그런 짓을 황제에게 행할 수 없습니다.”

“왜지?”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일국의 군주에게 마법을 거는 행위를 아벨라 여신께서 철저히 금하셨습니다. 그건 수많은 인간의 운명에 관여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니까요.”

“……!”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브로미오스가 조언했다.

“너무 서둘지 않는 게 좋겠네, 히에무스. 그건 나도 알고 있는 사항이야. 그것만큼은 대자연어머니께서 절대 용납하시지 않을 걸세. 지난번 일도 있으니 더 조심해야 하지 않겠나.”

지난번 일이라면 예전에 히에무스가 인간 군주에게 바람구를 날려서 상처를 입힌 일일 것이다.

“자비를 베푸셔서 한 번 정도는 봐주실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은 안 될 거라고. 잘못하다간 우리의 일탈까지 걸릴지 몰라.”

“…….”

실망스럽긴 했지만 히에무스도 뭐라 대꾸하지 못한 채 다시 제자리에 가서 앉았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별수 없었다. 렌투스가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는 듯 부드럽게 잦아든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궁리해 보면 방법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신중하셔야 합니다. 가능하면 마법을 쓸 일이 없도록 하셔야지요. 아벨라 여신께서 모든 걸 지켜보고 계시니까요.”

“알겠다.”

히에무스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 귀족이 되어도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여전히 인간 군주에 비해 부족하기만 했다.

***

그날, 히에무스는 오전엔 인간 노릇 수업을 받고 오후엔 정령왕으로서의 일을 해내느라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다. 밤이 꽤 깊어졌을 때야 겨우 여유가 생겼다. 이 시간이면 에일린은 자고 있을 테지만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케일론의 성으로 갔다. 그녀의 방 창문을 두드리니 제퓌가 열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왕이시여. 에일린 님께선 지금 주무시는데요. 깨울……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냥 얼굴만 보고 가겠다.”

언제나처럼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아두스와 프리기가 공손한 자세로 그들의 왕을 맞이했다. 작은 등잔 하나 켜지 않았지만 창에서 쏟아지는 달빛과 세 정령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덕분에 충분히 밝았다. 거기다 히에무스에게서 뿜어져 나온 광채까지 더해지자 방 안이 갑자기 대낮처럼 환해졌다. 방 한쪽 구석에 붙어 있는 침대 위에 에일린이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곧장 다가가 머리맡에 몸을 숙여 이마 위에 한차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응…….”

한기에 놀라게 해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아 히에무스는 얼른 몸을 떨어뜨렸다. 잠깐 동안 빨간 마법약을 한 방울 먹을까 고민하다 관두기로 했다. 한 방울 삼키면 서너 시간 정도는 인간으로 변하는 효과가 나지만 벌써 약이 많이 줄었다. 앞으로 인간 노릇을 빈번히 해야 하는데 될 수 있으면 아껴야 할 것이다. 다시 키프리스에게 얻을 때 그녀가 어떤 조건을 내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히에무스는 브로미오스처럼 그녀가 좋아하는 포도주 같은 것도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겨울의 정령왕인 자신은 참 가진 것이 없는 듯했다.

히에무스는 침대 아래에 털썩 주저앉아 한쪽 팔을 침대 위에 걸쳐준 채로 에일린을 바라봤다. 이불에 덮인 날씬한 몸매에 가는 팔이 드러나 있었다. 규칙적인 숨을 내쉬며 고요히 잠든 모습이 무척이나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가지런하게 내려온 짙은 속눈썹이 살짝 움찔거렸다. 분주히 눈동자를 굴리는 걸 보니 깊은 꿈이라도 꾸는 것일까. 저 귀여운 눈꺼풀이 열려 이른 봄날의 풀잎 같은 눈동자를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자그만 입술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비를 머금은 듯 촉촉한 입술이 봉오리 진 꽃송이처럼 함빡 닫혀 있어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제퓌가 방 한쪽을 가리키며 권했다.

“왕이시여. 저 쪽 의자에 앉으시면 어떠신지요?”

“됐다, 이대로도.”

“예.”

세 정령도 다소곳한 자세로 그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왕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하면 안 된다는 나름의 룰이 있었기에 그냥 그들도 카펫 위에 나란히 서 있기로 했다. 한참을 꼼짝 않고 있으니 슬슬 좀이 쑤셔왔다. 힐끔거리며 계속 히에무스의 눈치를 보던 아두스가 용기를 낸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왕이시여.”

“뭔가?”

“저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도 되겠는지요?”

“그래, 말해 봐라.”

히에무스는 여전히 에일린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두스는 잠시 더 머뭇거리다 침을 꿀꺽 삼켰다. 줄곧 궁금하게 여기던 게 있었는데 혼자 궁리하니 답이 나오지 않아 갑갑했던 차였다. 혹시 왕에게 여쭈다 핀잔이나 호통을 듣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각오하기로 했다.

“저, 이제는 예전처럼 갈증이 안 나시는 겁니까? 매일 습관처럼 입술에 입을 맞추셨는데 요즘엔 그러시지 않는 듯해서요.”

“……!”

그제야 히에무스는 고개를 돌려 아두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처럼 그렇게 타는 듯한 목마름은 느껴지지 않는구나. 대신…… 다른 갈증이 생겼지만.”

“다른 갈증이라고요?”

“그래. 마음의 갈증……이라 해야 할까?”

“마음에도 갈증이 생길 수 있는 겁니까?”

아두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갈증’이란 건 원래 몸에 생기는 현상이지 않는가? 실체를 가진 존재의 몸에. 히에무스의 눈길이 다시 에일린에게로 향했다. 조금 쉰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자꾸만 원하게 돼. 더, 더 바라게 돼. 아무리 가져도 부족한 것처럼 느껴져. 애가 탈 정도로.”

그런 것을 갈증이 아니면 뭐라 하겠는가?

“뭘 원하시게 되는데요?”

히에무스가 별 말 없이 그의 질문에 답해주자 아두스는 점점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에일린의 마음이지.”

그의 서늘한 은청색 눈동자에 새파란 불꽃이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붉은색 불꽃보다 오히려 더 뜨거워 보였다. 이 마음의 갈증은 몸에 생긴 갈증보다도 훨씬 견디기 힘든 것처럼 느껴졌다. 도저히 채워지지 않았다. 계속 그립고 그리워 어떨 땐 심장까지 죄어오듯 아프기까지 했다. 심지어 이렇게 함께 있는 순간조차 견디기 힘든 갈망이 밀려왔다.

‘채워지지 않아.’

아직 완전히 그녀의 사랑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뭐든 할 수 있어.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인간 노릇, 아니 그보다 더 한 짓이라도 할 수 있다. 불티가 튀듯 강렬한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아니면 정령들만 들을 수 있는 대화에 반응했는지 에일린이 뒤척거렸다.

“어……, 히에무스?”

“에일린.”

그녀가 일어나려 하자 히에무스가 황급히 만류했다.

“그냥 누워있어라. 미안하구나. 또 이렇게 잠을 깨우다니.”

에일린이 졸린 듯 눈을 비비며 배시시 웃었다.

“잠을 깨운 것만 미안한가요? 이렇게 무단으로 들어온 거는요?”

“그것도…… 미안해. 허락 없이 들어와서 면목이 없구나.”

에일린은 옆으로 누운 채로 히에무스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인간 남자가 이렇게 잠자는 중에 들어왔다면 경을 칠 노릇이겠지만 그는 정령이니 인간과는 달랐다. 정령은 결코 이유 없이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니까. 특히 히에무스는 더 그럴 것이다. 나무라는 투로 얘기했지만 사실 별로 불쾌하거나 하진 않았다.

“다음부턴 조심해주세요. 인간들 사이에서는 그러면 안 되거든요. 심각한 범죄 행위라고요.”

히에무스가 난처한 듯 눈썹을 살짝 늘어뜨렸다.

“알겠다. 다음엔 절대 그러지 않겠다. 오늘은 네가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인간들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안 되거든요.”

“그렇구나.”

인간들은 그렇구나. 참 복잡하고 어렵구나. 온통 생각해야할 것, 고려해야할 것, 지켜야할 것투성이. 지금까지 그 모든 걸 감내하며 살아왔던 것인가. 이런 가냘픈 몸으로.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히에무스.”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하지?”

“뭔가…… 힘들어 보여서요.”

순간 히에무스는 가슴 속이 아릿해졌다.

“힘들긴……, 그대가 더 힘들겠지. 다만 내가 마련한 성으로 그대를 일찍 데려오고 싶었는데,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아 좀 실망했을 뿐이다.”

“어, 왜요?”

“인간 군주의 허락 없이 거주지를 옮기면 안 된다더군. 하지만 방법을 곧 찾아볼 것이니 염려하지 마라.”

“무리하지 마세요, 히에무스.”

“응?”

“난 괜찮으니까 당신도 너무 애쓰지 마세요. 저 때문에 당신이 힘들어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힘들지 않아. 내가 기뻐서,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

“그럼 다행이고요.”

히에무스는 그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휴식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인간에게는 잠과 휴식이 매우 중요하다고 들었다. 그의 마음 같아선 좀 더 있다 가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난 그만 가보겠다. 쉬도록 해라.”

“예. 안녕히 가세요.”

막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에일린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무심코 돌아봤다. 곧장 그녀의 입술이 그의 뺨에 와 닿았다.

촉!

입술에 한 것도 아니고 찰나의 순간에 불과한 입맞춤이었지만 어딘가 깊이 새겨지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한동안 그녀가 먼저 키스를 해온 적이 없었다. 뭔가 경계하듯, 꺼려하듯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 그 때문에 히에무스의 마음이 더 애가 탔는지도 몰랐다. 몸의 갈증이든, 마음의 갈증이든 그걸 풀어줄 수 있는 이는 오직 에일린밖에 없었다. 히에무스의 눈꺼풀이 크게 벌어졌다. 그의 심장소리는 그보다 더 크게 벌렁거렸다.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낯선 설렘이 밀려왔다. 절로 입매가 귀에 걸렸다. 타는 듯했던 마음의 갈증이 일순간 해소되는 것 같았다. 그가 귓불까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돌아보자 그녀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급히 웅얼거렸다.

“그냥 힘내라는 뜻이에요. 다른 의미는 없어요. 인간들은 친구들 사이에서 단순히 인사로 이런…… 입맞춤을 하거든요.”

그녀가 여전히 뭔가 저어하듯, 변명하듯 말했다. 그 키스에 의미를 두지 말라고 간곡히 주장하는 것 같았다.

“알겠다. 또 보도록 하자, 에일린.”

그녀에게 어떤 의미든 그에게는 소중한 키스였다. 히에무스는 잠시 그윽한 눈빛을 보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사라졌다. 에일린은 그대로 한참동안 창문 밖을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 역시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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