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내야지 (9/24)

8.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내야지

그날 밤, 정령의 숲에 돌아온 히에무스는 잠이 오지 않아 방안을 서성였다. 원래 정령들은 잠을 잘 자지 않는데다 특히 겨울엔 거의 뜬 눈으로 보내는 게 태반이지만 어쨌든 도무지 안정을 취할 수 없었다. 계속 마음이 술렁거렸다. 황제에게 드는 괘씸한 마음과 그에 비해 초라한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이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무엇보다 에일린의 입장을 곤란하게 했다는 자책감마저 들어 괴로웠다. 겨울의 궁전에 있는 그의 침실에 누워 있다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가을의 왕의 궁전이었다.

그날 밤 가을의 왕은 또 파티를 여는 중이었다. 5일이나 계속되던 겨울 폭풍이 끝난 걸 기념하는 파티라 했다. 흥청망청 놀기 좋아하는 가을의 왕은 오늘도 흥겨운 유흥으로 밤을 지새울 모양이었다.

“어, 어서 오십시오. 겨울의 왕이시여, 요즘 자주 오시는군요.”

문지기를 맡은 중급 정령이 아는 체를 했다. 그의 안내로 안으로 들어서니 몇몇 정령들이 저번처럼 모여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도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서빙을 하는 하급 정령을 불렀다. 좀처럼 입에 대지 않던 술을 한 잔 청했다. 새콤달콤한 포도주를 쭉 들이켰다. 한 잔으로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도 나아지지 않고. 정령의 몸으로 취하려면 도대체 몇 잔을 마셔야 하는 걸까? 한 잔 더 요구해 술잔을 기울이는데 가을의 왕이 어느새 곁에 와 있었다.

“별일이군. 그대가 술을 마시러 여기까지 오다니.”

미소 짓는 그를 힐끗 올려다봤다.

“내 궁전엔 술 같은 게 없으니 온 것뿐이야.”

가을의 왕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뭔가 속상한 일이라도 있는가? 히에무스여.”

“별로. 정령왕이 속상할 일이 뭐가 있겠나?”

“왜, 인간과 연애하다 보면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정령의 몸으로 인간을 상대하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닐 테니까.”

“……!”

가을의 왕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빛내며 히에무스를 부추겼다.

“뭔지 모르겠지만 내게 한 번 털어놔 보는 게 어떻겠나? 혼자 고민하는 것보단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면 훨씬 쉽게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을 텐데.”

히에무스는 솔깃했지만 선뜻 그러마 하기도 뭣해 잠자코 있었다.

“이래 봬도 나는 경험이 많다네. 가을에 인간들이 추수를 하니까 늘 인간들 속에 묻혀서 지내거든. 이런저런 인간들 생태나 사정에 대해서도 잘 알지. 고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 정도면 자네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다지 상담 따위를 할 생각은 없어. 저번에 말해준 조언도 사실 별 쓸모없었고.”

히에무스가 여전히 철벽같은 태도를 취하자 가을의 왕이 큰 결심을 한 듯 털어놓았다.

“그러지 말고 말해 보라니까? 음, 사실 나는 가끔 인간으로 변신해 인간계에 가서 지내다 오곤 한다네. 그대에게만 하는 말이지만 키프리스에게 여러 가지 마법약이 있거든.”

“……!”

그가 몸을 바짝 들이밀며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키프리스가 좋아하는 포도주를 대가로 주고 그 마법약을 얻어오지. 그걸 먹고 잠시 인간이 되어 인간들 속에 있다가 온다고. 인간 아가씨도 몇 명인가 사귀어봤지.”

“그게 정말인가?”

“정말이지, 그럼. 이런 일을 거짓으로 말할 만큼 내가 형편없지는 않아.”

히에무스는 좀 더 망설이다 마법 공간에 넣어둔 빨간 액체가 든 마법약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 약이…… 이것인가?”

가을의 왕의 금갈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엷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머물렀다.

“그렇다네. 자네도 이미 얻었군?”

히에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해독약 대신 가져왔지. 아직 제대로 써보지는 못했지만.”

가을의 왕의 입꼬리가 좀 더 위로 향했다.

“알만하군. 그래, 그 약도 있는데 어떤 문제가 있지? 인간 행세만으로는 잘 풀리지 않을 고민이겠지?”

히에무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낮에…….”

낮에 겪은 일에 대해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미소 띤 얼굴로 주의 깊게 듣던 가을의 왕이 이야기가 끝나자 소리까지 내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가을의 왕이 목젖까지 보이며 웃어대자 히에무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뭐가 그리 우습단 말인가? 브로미오스.”

“아하하, 아니, 아니. 그냥 그 상황이 그려지니 너무나 재밌어서 말일세.”

히에무스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쏘아봤다. 한참 더 웃다가 마침내 가을의 왕 브로미오스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어느새 진지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대, 히에무스여. 조금 위험한 짓을 저질렀군. 무려 정령왕의 몸으로 계약도 하지 않은 인간을 위해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대자연 어머니가 아신다면 큰 문책이 있을지도 모르네.”

“이미 저지른 일이니 할 수 없지 않겠나.”

히에무스가 미간을 잔뜩 좁혔다.

“뭐, 그렇긴 하지. 어쨌든 자네의 고민이 인간 황제가 해주는 일을 그대가 해주지 못하는 거라면 해결책은 단순하지 않겠나?”

히에무스는 여전히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되물었다.

“단순하다니?”

브로미오스가 그의 손에 아까부터 들려 있던 크리스털 잔을 기울여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인간이 되면 되지. 그런 걸 해줄 수 있는 인간이.”

“뭐라고?”

히에무스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낯빛으로 노려봤다.

“인간 흉내를 철저히 내란 말이야.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내야지. 몸만 인간이 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흉내를 철저히 내라고?”

브로미오스가 살짝 취한 듯 붉어진 얼굴로 바싹 몸을 붙여왔다. 은밀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 목소리까지 낮췄다.

“그래. 인간 노릇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신분과 지위가 필요해.”

“신분과 지위?”

가을의 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고 돈도 필요하지.”

“그런 걸…… 어디서 얻는단 말인가?”

“내가 알고 있네. 그 모든 걸 한꺼번에 해결해줄 만한 존재를.”

“……!”

브로미오스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약간 곤란한 듯한 기색이기도 했다.

“한데, 그러려면 조금 악당이 되어야 한다네.”

“악당이라니?”

금갈색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몹시 기꺼운 일을 앞둔 자의 얼굴이었다.

“협박을 좀 해야 하거든.”

***

다음 날 아침. 에일린은 간밤에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황제의 간호를 맡느라 쉬지 못한데다 긴장한 채 계속 버틴 탓에 어느 순간 갑자기 피로가 몰려들었다. 한참 곤하게 자다가 동이 터올 무렵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어렴풋이 눈을 뜨다 뭔가 평소와 다른 포근한 기분에 다시 눈을 감았다. 마치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는 듯 안온한 감각에 안쪽으로 꼼지락거리며 파고들었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길이 다가와 힘주어 안아주는 것 같은 낯선 느낌이 들었다.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이런 꿈 정말 오랜만이다. 마치 현실처럼 생생해. 현실처럼……? 뒤늦은 자각과 함께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낯선, 아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살짝 졸음에 겨운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황제 렉스였다.

“으아악!”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어젯밤 무슨 일이 생겼던 거지?

“잘 잤느냐?”

다정한 목소리로 황제가 아침 인사를 해왔다.

“어, 저……. 그, 그렇기는 한데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제가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죠? 어제 분명…….”

‘어제 분명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침대 맡에 있는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지. 그리고…….’ 아무 기억이 없다. 설마 비몽사몽 간에 그대로 침대 위로 올라가 잠들었던 걸까? 졸음에 점령당해 그런 황당하고 무례한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황급히 그녀의 옷차림을 점검했다. 다행히 어제 입은 옷 그대로였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걱정하지 마라. 아무 일 없었으니.”

렉스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말했다. 하지만 에일린의 얼굴은 아까보다도 더 새빨갛게 변해 버렸다.

“어제 너무 곤하게 잠든 듯해 그냥 내 옆에 재운 것뿐이야. 거의 빈사 상태로 잠든 여인을 상대로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예……. 그, 그러시겠지요. 하여튼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폐하.”

에일린은 좀 억울한 기분이 들어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그냥 깨워줬으면 좋았을걸. 왜 굳이 옆에 재운단 말인가? 여전히 황당하고 얼굴이 화끈거려 엉거주춤 침대 밖으로 나와 섰다. 민망한 기분에 갈 곳 잃은 시선을 굴리는데 탁자 위에 앉아있던 겨울의 정령들과 마주쳤다. 그들이 짧은 묵례를 해왔다.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서둘러 인사를 꾸벅하고 밖으로 나왔다. 겨울의 정령들도 따라 나왔다. 문밖으로 나오니 시위를 서던 두 명의 기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어제보다 더 깍듯해진 느낌이 들었다. 대기 중이던 나이 든 시종도 깊이 허리를 굽힌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잠만 잤을 뿐인데 왜들 이런담.’

걸음을 빨리해서 재빨리 4층에 위치한 그녀의 방으로 가기 위해 계단으로 향했다. 마침 케일론이 그의 침실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일찍 일어나 준비했는지 벌써 말쑥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그와 마주치는 것도 왠지 쑥스럽게 느껴졌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해왔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평소처럼 말을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케일론님.”

그는 그저 딱딱한 표정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평상시보다 더 냉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에일린은 왠지 분위기가 어색한 것 같아 변명조로 말을 늘어놓았다.

“저, 그게 어쩌다 보니 폐하의 간호를 하다 침대 맡에 앉은 채 잠들었지 뭐예요. 그래서…… 지금 나오는 길이예요.”

여전히 차게 굳은 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십니까.”

아, 케일론마저 왜 이러는 것인가? 왜 평소처럼 대하지 않고…….

“그럼, 가볼게요.”

어색하고 민망해 재빨리 계단을 뛰듯이 올라가며 제퓌에게 물었다.

“제퓌,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저, 아무 일 없었던 거죠?”

“음, 그게 에일린님이 잠드시자 사악한 마법사가 들어왔어요. 그가 깨우려 했는데 인간 우두머리가 그러지 못하게 하고 자기 옆에 눕히라고 한 거죠.”

제퓌가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위로 치켜뜨고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아두스가 냉큼 그다음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냥 잠만 잤을 뿐 평소와 별다른 건 없었어요. 평상시처럼 에일린님은 이도 갈고, 코도 고셨죠! 그럴 때마다 인간 우두머리가 깜짝 놀라서 지켜보곤 했지만요.”

“뭐?”

그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정령답게 은방울이 구르는 듯 상큼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늘 그랬던 것처럼 자다가 이불을 차내기도 했고요. 한쪽 발을 인간 우두머리의 다리 위에 올리기도 하시고.”

“뭐, 뭐라고?”

그다지 말이 없던 프리기가 모처럼 끼어들며 한마디 보탰다.

“그것도 있잖아. 입 벌리고 자다가 베개에 침 흘리는 거. 많이 피곤하면 에일린님, 그러시잖아. 어제는 다행히 베개가 젖지 않고 인간 우두머리의 가슴팍이 젖었지만.”

“으아아…….”

에일린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프리기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인간 우두머리가 계속 싱긋 웃더군요. 그리고 응…… 이마에 입맞춤을 두어 번인가 했어요. 근데, 자고 있는데 그건 왜 하는 건가요?”

“……!”

말없이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퓌가 잠깐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저는 이만 겨울의 궁전에 좀 다녀올게요. 에일린님.”

“거, 거긴…… 왜요?”

화끈거리는 얼굴로 말까지 더듬거리며 겨우 물었다.

“어젯밤 일에 대해 왕께 말씀드리려고요. 에일린님이 어떻게 지내는지 늘 궁금해하셔서 매일 알려드리거든요.”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막 주문을 외고 사라지려는 제퓌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안 돼! 가지 말아요! 제퓌!”

***

오후가 되자 황제 일행이 환궁하기 위한 채비로 성내가 북적거렸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중정에 황제 일행이 두 진영으로 나눠 대기했다. 케일론의 마법 치료와 아벨라 신전에서 나온 신관의 축복 치유 덕에 렉스는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다. 하루 정도 황궁을 비워 시간 낭비를 한 터라 환궁할 때는 두 마법사의 순간이동 마법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럼 다가올 휴일에 황궁에서 보도록 하자, 에일린.”

렉스가 풋풋하게 웃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다정함이 담긴 모습이었다. 어젯밤 일도 떠오르고 그의 눈빛도 왠지 못 견딜 정도로 간지러워 에일린은 얼굴을 붉혔다.

“예……, 그럼 안녕히 가세요. 폐하.”

다소곳한 자세로 고개 숙여 인사하려는데 그가 다가와 뺨에 가벼운 키스를 해왔다.

“그래. 너도 잘 지내거라.”

“마법 주문을 외울 테니 이만 준비해주십시오, 폐하.”

일행의 가운데 서 있던 케일론이 재촉했다.

“알겠소.”

케일론과 헬무트 경이 조금 긴 순간이동 마법 주문을 영창 하자 늘 나타났던 푸른 마법진이 보였다.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성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공손한 자세를 유지한 채 서 있었다. 황제 일행의 흔적이 완전히 희미해지자 애플턴 자작 부인이 에일린의 곁으로 왔다.

“에일린님. 평상복으로 입으실만한 옷을 몇 벌 지어야 하니 지금 가서 치수를 재도록 하시지요.”

“예.”

이제부터 정말 귀족 출신의 황궁 시녀가 시중을 들어주는 모양이다.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좀 갑갑하기도 했다. 벌써 자유가 많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방으로 오니 하녀 두 명이 달려들어 옷을 벗기고 줄자를 갖다 대 몸 이곳저곳의 치수를 쟀다. 그 일이 끝나자 애플턴 부인이 깜빡 잊었다는 듯 두 하녀를 소개했다.

“이쪽은 ‘베키’라고 하는데 주로 바느질과 의상 제작을 맡을 하녀입니다. 그리고 저쪽은 ‘도리스’. 빨래나 기타 자질구레한 시중을 들 하녀고요.”

두 하녀가 무릎을 살짝 굽히는 인사를 했다. 베키는 25살이라고 했다. 갈색 곱슬머리에 주근깨가 살짝 있는 귀여운 인상이었다. 도리스는 22살이고 양 갈래로 곱게 땋은 긴 금발 머리를 늘어뜨린, 큰 키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아가씨였다. 모두 서글서글한 눈매 때문에 인상이 선해 보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에일린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애플턴 부인이 깃털 펜과 양피지까지 꺼내 들며 여러 가지 사항들을 점검하고 챙기기 시작했다.

“나름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을 준비해왔지만 부족한 게 많네요. 없는 것들을 파악해서 마련해야겠습니다.”

“예에…….”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귀찮았다. 케일론도 무척 성가실 것 같았다. 조용하던 그의 성이 이렇게 북적이고 소란스러워졌으니……. 기분 나쁘고 화가 나지 않을까? 더 큰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이런 생활이 계속되어야 한다면 그녀가 황궁이나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궁에 가고 싶지는 않지만 성주인 케일론을 생각하면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애플턴 부인이 문득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저, 혹시 글은 익히셨나요?”

“예? 아, 그냥 며칠 전부터 조금 배우기 시작했어요. 기본 문자는 다 외웠는데 철자 공부는 아직 시도하지 못했어요.”

“그러시군요. 그럼 단어집과 사전을 구입해서 공부를 하도록 하시지요. 매일 제가 두 시간 정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시간은 언제가 좋겠습니까?”

“아무 때나 괜찮아요.”

“그럼 오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후엔 산책과 예절 교육, 댄스 교육 등을 받으시고요.”

“예…….”

모두 다 배우고 싶었던 것이긴 했지만 이렇게 반강제적으로 잡혀 익혀야 한다니.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도 자작 부인이 에일린의 일과를 챙기는 일이 계속 이어졌다. 곁에 앉아 하품을 하던 제퓌가 물었다. 애플턴 부인이 뭔가를 기록하느라 잠시 말이 끊어진 틈을 노린 거였다.

“에일린님, 저랑 함께 겨울의 궁전에 다녀오기로 하셨잖아요. 언제 나가실 건가요?”

에일린이 눈치를 슬쩍 보다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방 밖으로 나왔다. 세 정령이 일제히 따라나섰다.

“저기, 지금 가고 싶긴 한데 보시다시피 시녀들 때문에 좀 조심스러워서요.”

“그럼 그냥 저 혼자 다녀올까요?”

“아니, 그건…….”

에일린도 히에무스를 만나보고 싶었다. 어제 그렇게 헤어진 게 못내 마음에 걸렸으니까. 하지만 온종일 시녀가 옆에 있으니 눈치가 보여 적당한 때를 잡기 힘들었다. 역시 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아두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제안했다.

“인간 시종들이 신경 쓰이신 거라면 저들을 잠들게 해드릴까요?”

에일린이 깜짝 놀라 바라봤다.

“어, 그런 것도 할 줄 아세요?”

“물론이죠. 하급이긴 해도 인간 한두 명 정도 잠들게 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 서너 시간은 거뜬히 재울 수 있어요.”

“부작용 같은 건 없나요?”

“없어요. 그냥 잠드는 것과 똑같으니까. 오히려 한숨 자고 나면 몸이 개운해질 거예요. 정말 꿀잠을 자게 될 테니까.”

에일린이 환하게 웃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정령님들.”

***

에일린은 제퓌와 아두스와 함께 루쿨루스 숲으로 왔다. 프리기는 케일론의 성에 남아 잠을 재운 시녀들의 상태나 성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역할을 맡기로 했다. 겨울의 궁전 앞으로 순간이동을 해서 도착했지만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눈의 여왕이나 북풍 같은 이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대신 아두스에게 그들의 왕을 밖으로 불러내 달라고 부탁했다. 아두스가 궁전 안으로 사라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모습을 보였다.

“에일린님. 왕께서 지금 안에 계시지 않아요. 동료들 말로는 어젯밤 어디론가 출타하셨는데 그 후로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해요.”

“예? 어디 가셨는지도 모르고요?”

아두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눈의 여왕과 북풍님도 찾고 계시더라고요. 말도 없이 이렇게 오랫동안 사라진 건 처음이라 다들 걱정하고 있었어요.”

에일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히에무스가 어제 겪은 일로 기분이 많이 상한 모양이다. 정령왕이 그의 궁전을 내버려 두고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속상하고 상심한 마음에 어이없는 일이라도 저지르는 건 아니겠지?’

순간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생각을 달리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정령왕이었다. 인간처럼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를 존재가 아니었다. 그냥 어딘가에서 쉬면서 기분을 달래고 있을 것이다.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저 좀 가을의 왕의 궁전에 데려다줄래요?”

두 정령이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

간밤에 길을 떠난 가을의 왕 브로미오스와 겨울의 왕 히에무스는 악당 노릇을 하러 가기 전에 우선 루쿨루스 숲에 있는 어떤 정령왕의 거처로 향했다. 그곳은 커다란 수직 동굴 안에 위치한 대지의 궁전이었다. 검은빛 토굴로 만들어진 궁전에 당도해 대지의 정령왕 ‘텔루스’를 만났다.

“두 정령왕이 땅속 깊은 곳에 있는 내 궁전까지 무슨 일인가?”

밝은 갈색 피부에 레게머리 같은 금빛과 갈색이 섞인 머리를 길게 기른 텔루스가 의아한 낯빛으로 물었다. 가을의 왕은 그래도 가끔씩 보던 얼굴이었지만 히에무스를 만난 건 정말 처음이다시피 했다. 정령의 재판이나 대자연 어머니의 소집령이 있을 때 빛의 궁전에서 마주치긴 했지만 이렇게 개인적으로 그를 찾아온 건 몇 천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뭔가 내키지 않은 용무인지 잔뜩 굳은 그를 대신해 브로미오스가 입을 열었다.

“텔루스여, 그대의 궁전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돌멩이들을 좀 나뉘었으면 하고 왔네.”

텔루스가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그도 젊고 잘생긴 얼굴이긴 했지만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듯한 머리, 칙칙한 옷차림 때문에 그 둘에 비해 돋보이는 미모는 아니었다. 물론 여타 정령들처럼 빛 무리도 둘렀고 토파즈 같은 갈색 눈동자도 그윽하게 빛나 눈길을 끌긴 했다.

“돌멩이라니? 황금덩이와 보석을 말하는 것인가?”

브로미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대 궁전엔 지천에 널렸지 않나? 괜찮다면 좀 얻어가고 싶은데.”

텔루스는 약간 망설였다. 물론 그의 궁전엔 그런 것들이 넘쳐날 만큼 많고 쓸데도 크게 없었지만 무작정 달라고 하니 황당했다. 동시에 진한 호기심이 밀려들었다.

“어디에 쓸 거지?”

“그런 것까지 말해줄 이유는 없어.”

히에무스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텔루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겨울의 왕이 차갑고 오만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뭔가를 얻으러 와서도 고자세를 취하니 가소롭고 얄미워졌다. 그도 불쾌해져 다소 딱딱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

“부탁하는 입장에서 그런 태도는 도움이 안 될 텐데? 겨울의 왕. 그대의 필요에 의해 찾아온 것이면 거기에 맞는 적당한 행동거지를 익히는 게 좋을 거야.”

히에무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사실 말하기 싫은 것보다도 말하기 곤란한 거였다. 브로미오스가 둘의 눈치를 보다 부드러운 웃음으로 달랬다.

“자세한 건 묻지 말고 좀 주지 않겠는가? 그대도 들어 알고 있겠지? 요즘 이 친구가 사랑에 빠져있다는 소문 말이야. 그 때문에 필요해서 그러네.”

“……!”

히에무스의 얼굴이 더욱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른 변명거리가 떠오르면 좋겠지만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인간과 연애 중이라는 소문은 이미 정령의 숲 곳곳에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다.

“호오, 쓸데없는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진짜였단 말인가?”

텔루스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대지의 정령왕인 그는 온종일 토굴로 된 궁전에 머무는 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대지의 권속들을 통솔하고 정령들에게 필요한 마도구나 장식품들을 세공하는 일을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태생부터 맡은 일이니 잘 해내기는 했지만 가끔은 정말이지 지겹고 무료했다. 그래서 그는 남다른 취미가 하나 있었다.

“아 참, 저번에 내가 구해준 책들은 다 읽었는가?”

브로미오스가 의미심장한 낯빛으로 질문했다.

“그럼, 읽은 지가 언젠데.”

그 취미는 인간들이 지은 책을 구해 읽는 거였다. 그중에는 연애소설도 제법 끼어 있었다. 다른 책보다도 그게 제일 재미있었다. 읽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빠져들었다. 혹, 완결이 나지 않은 책을 읽기라도 하면 그 뒷얘기가 궁금해 다음 권을 구할 때까지 안달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보다 보니 그도 ‘사랑’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다. 도대체 그 감정이 어떤 것이기에 이런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 때로는 놀랍도록 맹목적이고, 어떨 땐 당황스러울 정도로 가슴 아프고, 또 어느 순간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그런 일들을. 물론 그는 정령의 몸이기에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다. 정령이기에 눈물 같은 것도 애초에 흘리지 않는 몸이고. 원래 영원을 사는 이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법이다. 어쨌든 그 책을 구해주는 이가 바로 가을의 왕 브로미오스였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텔루스가 히에무스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랑이란 걸 해 보니 어떻던가? 겨울의 왕이여.”

갑작스러운 질문에 히에무스는 말문이 막혔다. 한참 말없이 서 있다가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벌게진 뺨에 살짝 떨리는 목소리였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 그저 한없이 신비롭다고 할 수밖에 없겠군. 매 순간 새로움을 느끼게 해준다고 할까. 그래, 그렇군. 매 순간이 새로워. 때로는 기쁘고 한편으론 슬프고, 어떨 땐 즐겁고 어느 순간 당혹스럽고. 아무튼 그렇지. 언제나 새로움을 가져다준다네.”

텔루스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단 말인가? 책에서 봤던 그대로란 말인가?

“묘약 때문에 시작된 거라 들었는데 그런 가짜 사랑도 진짜랑 똑같단 말인가?”

순간 히에무스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똑같은 마음, 똑같은 각오인데 다를 건 뭐란 말인가?”

말끝마다 고드름이라도 매단 듯 시리게 대꾸했다. 텔루스의 질문이 맘에 들지 않았다. 자신을 비웃는 것일까?

“하긴……. 키프리스도 가끔 인간에게 묘약을 쓴다고 들었어. 정령이 하는 짓이니 인간들에겐 자연적으로 생겨난 마음이랑 다를 것도 없겠지. 뭐, 그건 정령이라 해도 마찬가지겠지.”

“뭔가, 날 우롱할 셈으로 계속 잡아두는 건 아니겠지? 주기 싫다면 더 이상 시간 끌 것도 없어. 이대로 안 된다고 잘라 말하면 그냥 갈 테니까.”

히에무스는 약간의 자격지심과 불쾌감이 섞여 거칠게 덧붙였다. 평소의 그였다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겠지만 간절한 목적이 있기에 꾹 참았다.

“맘이 상했다면 사과하지. 그저 궁금해서 물었을 뿐 감히 비난하거나 조롱할 뜻은 없었어. 기꺼이 원하는 걸 내주겠네. 그리고…….”

텔루스는 인내심을 발하는 히에무스를 보며 내심 감탄했다. 사랑이 아니라면 저 오만한 겨울의 왕이 이런 상황을 감내하지 못했을 테지. 그의 대답대로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진짜 사랑이든 가짜 사랑이든.

“무례한 질문을 사과하는 뜻으로 장신구 몇 개를 덤으로 주겠네. 그대가 사랑한다는 인간 여인에게 갖다 주면 좋아할 거야.”

“고, 고맙네.”

히에무스는 저도 모르게 인사말을 했다. 얼굴을 붉히며 싱긋 미소까지 머금었다. 기뻐할 에일린의 얼굴을 떠올리니 절로 기꺼운 표정이 어렸다. 지켜보던 텔루스와 브로미오스가 되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자신들이 알던 이가 아닌 것 같아서.

“우무스.”

“예, 왕이시여.”

지척에 있던 텔루스의 시종이 즉시 응답했다.

“이분들을 창고로 모셔가도록 해라. 원하는 만큼 금덩이와 보석들을 내어드리도록. 그리고 내 공방에 가서 얼마 전 세공을 끝낸 패물도 포장해서 가져오라.”

“알겠습니다.”

히에무스와 브로미오스는 시종이 가져온 것들을 마법 공간 안에 꾸렸다. 양도 꽤 많은데다 무엇보다 덤으로 받은 세공품 수준이 훌륭해 흡족했다.

“이만하면 당분간은 충분히 쓰겠군. 감사하네, 텔루스.”

브로미오스가 사례하자 히에무스도 머뭇거리며 인사했다.

“감사하오.”

텔루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는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또 오게.”

히에무스가 멈칫거리자 그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필요해지면 다시 가지러 와도 좋아. 그대의 사랑 이야기를 조금 들려주면 언제든 원하는 만큼 내줄 테니.”

“…….”

히에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사랑을 흥밋거리라도 되는 양 이리저리 떠벌리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없었다. 다시 와야 할지도 모르니까. 별 대꾸 없이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브로미오스가 대신 답했다.

“그러지. 좋은 제안이군.”

“그렇게 기분 나쁜 표정 짓지 말게.”

“미리 말해두지만 난 내 이야기를 소문내고 다니고 싶지 않아.”

“나도 알아. 하지만 텔루스에게서 원하는 걸 얻으려면 어쩔 수 없지 않나? 그 많은 것들을 얻는데 이야기만 좀 해주면 되니 얼마나 이익인가?”

“…….”

히에무스가 여전히 구겨진 얼굴을 펴지 않자 브로미오스가 달랬다.

“우리 정령들에게야 금은보화가 별 쓸모없지만, 인간들에겐 정말 값지고 유용한 것이라네. 인간과 연애하려면 어쩔 수 없어. 조금 맘에 안 들어도 참아야 하네.”

“알겠네.”

히에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일린과 제대로 사귀기 위해서라니 할 수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건가?”

“드라코니아 왕국으로 갈 거야.”

“드라코니아 왕국?”

“그래. 용족이 세워 통치하는 나라지. 자네도 들어봤지?”

히에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코니아 왕국’. 정령은 아니지만 가공할 만한 힘과 지혜, 수명을 가진 용의 족속. 모든 마물들 중 가장 우위에 서 있으며 인간들에겐 거의 신처럼 여겨지는 존재였다. 그 종족의 누군가가 무료한 삶을 견디기 위해 나라를 세워 다스린다는데 아마 그곳일 것이다.

“들어보긴 했지만…… 거기 가서 뭐 하려고?”

“말했잖아. 협박할 거라고. 그곳 왕을 윽박질러 필요한 부분을 얻어낼 생각이네.”

“뭐라고 위협할 건가?”

브로미오스의 두 눈이 크게 휘었다.

“가서 보면 알 걸세.”

***

“도대체 왜들 이러십니까?”

드라코니아 왕국의 왕 ‘퀴리오스’는 입술을 깨물며 항의했다. 퀴리오스는 자신의 왕궁 안에 있는 침실에서 한창 곤하게 자던 중이었다. 누군가가 흔들어 깨워 급히 일어났다. 수백 년간 인간들 틈에 끼어 지내는 동안 무뎌진 몸이라 해도 그의 정체는 용이었다. 인간, 아니 거의 모든 생명체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나타난 건 두 정령이었다. 그것도 무려 ‘정령왕’이니 이렇게 가까이 접근해도 눈치 못 채는 게 당연했다. 그들이 시종이나 출입문을 거치지 않고 바로 그의 앞에 출현했다. 그대로 잠든 그를 깨워선 다짜고짜 황당한 요구를 들이밀었다.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좀 들어줬으면 좋겠어.”

퀴리오스는 멀뚱해진 얼굴로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여기 계신 분을 귀족으로 만들어 달라고요?”

두 정령왕이 동시에 머리를 주억거리더니 브로미오스가 이어 대답했다.

“그래. 그냥 시시한 귀족 말고 좀 대단한 귀족으로 만들어 주게나. 음, 대공이나 공작 같은 왕족이 좋겠지, 이왕이면.”

조금 뜸을 두다 연이어 요구했다.

“집도 준비해주게. 커다란 성 같은, 쓸 만한 걸로 말이야. 시종도 마련해주고. 아무튼 그럴듯한 인간 귀족으로 살 수 있게끔 필요한 것들을 갖춰주게.”

히에무스도 자기 일인지라 적극적인 태도로 청했다.

“그냥 해달라는 건 아냐. 대가를 지불하겠다. 여기 금덩어리와 보석들이 제법 있으니 이걸 받고 해주게.”

퀴리오스는 그들이 꺼내놓은 금은보화를 힐끗 바라봤다. 가공을 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상당한 양인지라 금방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래 용들은 번쩍번쩍 빛나는 보물 앞에선 마음이 약해지는 법이다. 한층 꺾인 기세로 말했다.

“하급 귀족 정도야 언제든 가능합니다만 왕족 같은 대귀족은 무립니다. 없던 왕족을 갑자기 내놓는다면 다들 의심할 테니까요.”

“뭐가 무리인가? 마법을 써서 기억을 조작하면 되지.”

브로미오스가 무심한 말투로 제안했다. 퀴리오스는 조금 발끈해져 항의하듯 되물었다.

“그런 거대하고 광범위한 마법을 시전하라고요?”

“못할 것 뭐 있어. 그대같이 오래 산 용에게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텐데?”

“드라코니아 백성들뿐 아니라 안드로스 대륙 전체에 암시를 걸어야 합니다. 잘못하면 아벨라 여신에게 들킬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 모두 벌을 받게 될 텐데요?”

“음, 그건 곤란하군.”

브로미오스는 퀴리오스의 침대 앞에 버티고 서서 팔짱을 꼈다. 이내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히에무스는 인간 사회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지라 그를 지켜보며 잠자코 서 있었다.

“그럼 하급 귀족으로 만든 다음 공을 세우게 해서 작위를 올려주면 어떨까? 공을 세워 올라가는 건 어디까지 가능한가?”

“후작 정도는 될 겁니다.”

“후작은 좀 약한데. 공작이나 대공은 역시 안 되나?”

“말씀드렸듯이 왕족은 무립니다.”

퀴리오스는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버텼다. 브로미오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옆에 자리한 히에무스에게 질문했다.

“어쩔 텐가? 후작 정도면 되겠나?”

“나야 인간들 신분 계급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일단은 괜찮을 것 같네. 사악한 마법사가 백작이니 그자보다는 높잖은가?”

“그렇긴 하지.”

“그럼 됐어. 그 정도로 하겠네.”

“하지만 작위가 그자보다 높다 해도 제국 귀족이 훨씬 더 존귀한 취급을 받을 걸세. 왕족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꿀리지 않을걸.”

히에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속상한 마음에 퀴리오스를 나무라는 말투가 흘러나왔다.

“드라코니아 왕국은 왕족 모두 순수한 용족인 걸로 알고 있는데, 어쩌다 아젤란 제국에 복속한 건가?”

퀴리오스가 입술을 실룩거리며 대꾸했다.

“그야 너무 강하면 의심을 살 테니 일부러 져준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드라코니아 왕국의 왕은 인간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신경 쓰여서요.”

“그래?”

퀴리오스가 잘난 체하듯 턱을 추어올렸다.

“인간 행세를 하며 살아가려면 그럴듯해야 한다고요. 너무 강해도 안 되고 적당히 약한 모습을 보여야 하죠. 때에 따라 늙어가는 모습도 연출해야 하고 죽는 연기도 필요하죠. 신경 쓸 게 정말 많습니다요.”

히에무스가 명심하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인간들 비위도 잘 맞춰야 합죠. 게다가 아벨라 여신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여러 규칙도 지켜야 하구요. 지나친 마법 능력을 써도 안 되고 다른 나라의 정치사에 개입해도 안 되고……. 이런저런 골치 아픈 일이 한 가득입지요.”

“힘들다면서 왜 계속 이런 생활을 하고 있나? 수백 년 동안이나.”

브로미오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야 이렇게 살면 무료하지는 않으니까요. 제 가족들도 좋아하고요.”

용이란 존재는 모든 마물 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고귀한 존재였다. 영원은 아닐지라도 참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간다. 그 긴 세월을 다른 용들은 대부분 잠이 든 채 평생에 걸쳐 모은 금은보화를 지키며 보내지만 퀴리오스는 달랐다. 가족을 데리고 인간으로 변신해 그들과 함께 얽혀 복잡한 세월을 살아내기로 한 것이다. 그가 히에무스를 찬찬히 살폈다.

“당신께선 어째서 인간 노릇을 원하시는 겁니까? 우리 같이 육체에 매인 존재도 아닌데…….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것도 ‘겨울의 왕’이면서. 그도 히에무스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냉혹하고 차가운, 그저 무감각한 존재로 아는데 뜬금없이 인간 노릇을 하겠다고?

“내 사정 같은 건 몰라도 돼. 그대는 그저 우리가 해달라는 것만 해주면 그만이야.”

호기심과 함께 서운한 감정을 느낀 퀴리오스가 항의했다.

“사정을 말해줄 수 없는 수상한 일이라면 저도 협조 못 하겠습니다.”

히에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늘한 기운이 금방 주위를 휘감았다. 브로미오스가 냉큼 준비해둔 얘기를 꺼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생각해 뒀다.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드라코니아의 왕. 그렇지 않으면…….”

퀴리오스가 비웃듯 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쩌실 건데요?”

“드라코니아는 올가을에 추수를 못 할 거야.”

“뭐라고요?”

가을의 정령왕이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퀴리오스의 얼굴 가까이 허리를 숙였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일렀다.

“드라코니아에만 겨울이 일찍 오도록 할 거라고.”

“그런……!”

“어쩔 텐가?”

퀴리오스가 몹시 놀랐지만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런 협박이 통할 거라 보십니까? 아벨라 여신께서 아시면 가만 계시지 않을 겁니다.”

“그땐 그때고.”

“예?”

“어머니께서 겨울의 왕의 일은 알아서 하라고 하셨거든.”

“……!”

브로미오스가 허리를 곧추세우며 히에무스에게 눈길을 보냈다.

“얼마 전 만났을 때 그러라고 하셨다며?”

그가 가볍게 수긍했다.

“그랬지.”

브로미오스가 한마디 더 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한 100년은 그냥 두고 보실 거야. 두 계절의 정령왕이 합의해서 하는 일인데 뭐라 할 자는 없겠지.”

“으…….”

퀴리오스가 쥐어짜는 듯한 신음을 냈다.

***

히에무스와 브로미오스가 밤새 황당한 일들을 벌이고 다닌 다음 날, 루쿨루스 숲을 찾았던 에일린은 제퓌와 아두스와 함께 가을의 궁전 안으로 들어섰다. 따스한 가을날의 분위기가 느껴져 에일린은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쪽으로 오세요.”

문지기 정령이 이끈 곳으로 가 보니 커다란 물푸레나무 밑에 몇몇 무리가 앉아 쉬고 있었다.

“어! 인간 여인, 또 보네?”

물의 정령이 익숙한 목소리로 반겼다.

“아, 안녕하세요?”

친숙한 얼굴을 대하자 반갑고 안심이 됐다. 그녀가 벌떡 일어나 에일린을 잡아끌더니 일행에게 데려갔다.

“다들 저번 만월 축제 때 봤지? 히에무스님의 인간 연인이야.”

“아니, 연인이라 하기엔 좀…….”

에일린이 말끝을 흐리자 물의 정령이 냉큼 질문했다.

“연인이 아니면 뭐야?”

글쎄, 뭘까……. 그런 존재가 연인이면 좋겠지만 그는 인간도 아니고……. 또 그의 사랑도 진짜가 아닌걸. 그가 좋지만 그래도 연인이라 말하긴 힘들 것 같았다.

“히에무스의 여사친인 ‘에일린’이라고 합니다.”

“여사친?”

앉아있던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되물었다.

에일린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그들보다도 자신에게 단단히 일러주기 위한 말 같았다.

“‘여자 사람 친구’예요. 맞아요, 지금은 그게 제일 정확한 말일 거예요.”

그러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일반적인 여사친이면 키스 같은 걸 하지는 않겠지? 그럼 연인이 맞는 걸까. 모르겠다. 스스로에게 그가 어떤 존재인지 특정하기 힘들었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으려니 누군가 자리를 권했다. 엉거주춤 앉으니 일행들을 소개해줬다. 물의 정령이 자신의 이름부터 말했다.

“내 이름 아직 모르지? 난 ‘엘레스트라’라고 해. 상급 물의 정령이지. 이쪽은 일각수인 ‘루카스’, 그리고 가을의 왕의 권속인 서풍, 여긴 나무의 정령 ‘아그로스’야.”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는데 ‘루카스’란 자가 날카롭게 외쳤다.

“너, 내 옆에서 멀리 떨어져 앉도록 해! 어쩐지 불쾌하니까.”

“예?”

당황한 얼굴로 바라봤다. 새하얀 피부에 유난히 풍성하고 긴, 눈 부신 은백색 머리칼이 탐스러워 보였다. 매섭게 추어올라간 파란 눈동자, 이마 한가운데 보석처럼 박힌 동전만 한 타원형 돌기가 눈에 띄었다. 쭉 뻗은 늘씬한 체구를 한 막 소년티를 벗은 듯한 미청년이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 찌푸린 표정으로 에일린을 째려봤다. 물의 정령 엘레스트라가 놀라 물었다.

“왜 그래? 갑자기.”

“이 인간 여자, 좀 이상하단 말이야. 왠지 거북한 느낌이 드는 게…… 처녀가 아닌 것 같아!”

에일린은 순간 불쾌함과 수치심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얜 뭐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람. 기분이 상해 도끼눈을 한 채 쏘아보니 그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내가 잘못 봤나? 다시 보니 처녀가 맞는 것 같아. 아까 잠깐 아줌마로 느껴졌는데.”

에일린이 발끈해져 따졌다.

“참 나, 이봐요. 왜 자꾸 이상한 말을 하는 거예요? 정말 실례되잖아요. 새파랗게 젊어 보이는데 그런 민망한 소릴 입에 담고 그래요? 진짜 큰일 낼 사람이네.”

“미, 미안해. 나는 그런…… 체질이라서.”

“뭔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에요? 그런 체질이라니?”

고개를 푹 숙인 루카스를 대신해 엘레스트라가 설명했다.

“이해해 줘, 인간 여인. 이쪽은 일각수의 화신이라서 그래. 순결하지 않은 여자와 가까이하면 탈이 나거든. 아직 어려서 뭘 착각했나 봐.”

“일각수라면…….”

유니콘을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소설책에도 나왔었다. 엘시아 황녀가 타고 다녔던 신수(神獸). 겨울의 왕을 만난 후 엘시아 황녀가 몇몇 정령들과 친분을 쌓고 정령사로서 이름을 알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후 어느 나라가 배신해 마물들과 연합한 뒤 아젤란 제국을 침입해오자 엘시아 황녀는 렉스를 따라 참전하게 된다. 그곳에서 전령사로 활약하고 전사로서의 능력도 한껏 발휘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엘시아 황녀는 전쟁 통에 잃은 말 대신 자신한테 홀딱 반한 유니콘을 대신 타고 다녔다. 엘시아가 제국의 황후가 되는 그 날까지. 늘 함께하다 결혼식이 끝난 후 홀연히 사라지는 아련한 역할이었는데.

“당신이 그 유니콘인가요?”

“그 유니콘이라니…….”

루카스가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거렸다. 엘시아는 그에게 ‘유니우스’라는 이름을 붙였었다. 에일린은 소설 내용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유니우스가 아니라 ‘루카스’라는 이름이었구나.”

유니콘이라면 이해된다. 그녀의 몸에 깃든 영혼의 색을 꿰뚫어 봤는지도 모르지. 에일린은 아마도 순결한 몸이겠지만 안에 든 영혼은 애 둘을 낳은 만 49세 아줌마니까.

“그는 이 숲을 지키는 유니콘 왕의 아들이지. 이제 막 200살이 됐으니 아직 어린애라오.”

나무의 정령이라는 아그로스가 점잖게 말했다. 연두색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녹색 눈동자에 초록색 옷을 걸친 모습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초록빛인 터라 칙칙하고 센스도 별로 없어 보였다. 사실 나이도 좀 많아 보이긴 했다. 인간으로 따지면 마흔 네댓 살쯤?

“200살이면 이제 당당한 성년인데 어린애라뇨!”

루카스가 벌컥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모습이 왠지 전세에서의 아이들 모습이 연상돼 에일린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화 풀어요. 내가 봐도 정말 늠름한 청년 같으니까. 아까 실수한 건 용서해줄게요. 담부턴 그러지 말아요. 진짜 아줌마를 만나더라도 그런 말을 듣는다면 곤란하고 황당할 거예요. 실례되는 말이고.”

그의 얼굴은 물론 귓불까지 홍조로 뒤덮였다. 제대로 대답도 못 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소설 내용도 생각나고 아들 모습도 연상돼 흐뭇한 기색으로 지켜보자 더 빨개진 모습으로 몇 마디 우물거렸다.

“고, 고마워. 다음부턴 주의할게…….”

“그래요. 이렇게 멋진 청년에게서 그런 저질스러운 말이 나오면 실망스럽잖아요.”

“그런가…….”

에일린은 소설 삽화 속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렸다. 엘시아가 긴 백금발 머리를 늘어뜨리고 은백색 갈기를 휘날리는 유니콘 등에 앉아 전장을 누비던 장면이었다. 참으로 아름다웠는데.

“유니콘으로 변한 모습도 참 근사하겠죠? 언젠가 한번 보고 싶네요.”

뭐, 그럴 기회가 없겠지만. 엘시아의 진면목을 봤으니 그녀와 다시 엮일 일은 없을 것이다.

“지, 지금 보여줄까?”

루카스가 새빨개진 얼굴로 말까지 더듬거리며 물었다. 힐끔 힐끔 계속 에일린을 곁눈질하며.

“어, 그래 줄 수 있나요?”

“원한다면 보여줄게.”

“예. 한번 보고 싶어요.”

에일린이 환하게 웃으며 청하자 그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수줍은 듯 몸을 휙 돌리더니 짧은 주문을 외웠다. 순식간에 이마 위 돌기에서 눈 부신 빛이 생겨나며 그의 몸이 변했다. 우아하게 뻗은 미끈한 다리와 몸통, 전체를 덮은 새하얀 털과 풍성한 은백색 갈기와 꼬리가 드러났다. 무엇보다 두 눈 위에 자리한 영롱한 빛깔의 크고 뾰족한 외뿔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에일린은 탄성을 내질렀다.

“와아아! 정말 멋져!”

황홀해진 눈빛으로 그를 쭉 훑었다. 루카스는 쑥스러운 듯, 그러면서도 기쁘고 뿌듯해졌는지 푸르릉거리며 에일린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엘레스트라가 에일린에게 뭔가 마실 거리를 내밀었다. 술은 아닌 듯했다. 달콤하고 꽃향기가 나는 음료였다. 부드럽고 가벼워 술술 넘어갔다.

“이봐, 인간 여인. 아니, 나도 이제 이름을 부를게. 에일린. 저번에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된 거야? 히에무스님이 해독약을 드시진 않은 것 같던데.”

에일린은 계속 우쭐대며 주변을 서성이는 루카스를 응시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냥…… 같은 상태예요. 히에무스도 나도.”

“그럼 서로 좋아하는 거 아냐? 그런데 왜 연인이라고 하지 않은 거야?”

에일린은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서요. 그는 인간이 아닌데……. 그리고 진짜 사랑도 아닌데 연인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 골치 아프게 뭘 그리 재는 건가? 고작 100년도 못 사는 인간 처지에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되는 거지.”

듣고 있던 나무의 정령 아그로스가 같은 음료를 들이키며 한 마디 툭 던졌다. 에일린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짧은 생이니까 더 용기를 내지 못하는 거예요. 한 번 잘못된 선택을 하면 되돌릴 기회가 잘 없으니까요. 신중할 수밖에요.”

“흐음, 어쨌든 그분에게 마음은 있는 거지?”

물의 요정의 질문에 열기가 확 올라왔다.

“비, 비밀이에요.”

부끄러워져 얼른 시선을 다시 루카스에게로 향했다.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겸연쩍은 마음에 손에 든 음료만 홀짝였다. 왠지 몸이 나른해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뒤늦은 자각에 엘레스트라에게 물었다.

“이거, 술인가요?”

“응? 벌꿀주야. 포도주만큼 독하진 않지만 술이지.”

“이런……, 나 또 술에 취한 것 같아요.”

겉잡을 수없이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어제 겪은 일로 피로가 몰려 있어선지 더 빨리 취한 것 같았다. 몽롱해진 눈으로 겨우 부탁했다.

“저 조금만 자다 일어날게요. 히에무스가 오면 깨워 줄래요?”

“그럴게. 걱정 말고 푹 쉬어.”

“예…….”

쓰러지듯 눕는 에일린을 발견하곤 루카스가 급히 뛰어왔다. 다소 머뭇거리다 몸을 낮춰 앉으며 그녀의 몸을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따뜻한 털의 감촉이 보드랍게 감겨왔다. 까무룩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넌 뭐냐? 애송이.”

어느새 브로미오스와 함께 돌아온 히에무스가 루카스를 노려봤다. 다른 이들은 어디론가 흩어지고 없었다. 루카스가 변신을 풀고 인간형이 된 채 혼자 잠든 에일린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무릎 위에 에일린의 머리를 올려둔 채로. 루카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히에무스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애송이라고 하지 마세요. 200살이나 먹은 몸이니까요.”

“잔말 말고 저리 비켜.”

“싫은데요? 제가 왜 그래야 하나요?”

당돌한 눈빛으로 루카스가 쏘아보자 히에무스는 부아가 치밀었다.

“그 여자는 내 연인이야. 소문도 못 들어봤나?”

루카스가 코웃음을 쳤다.

“풋! 연인은 무슨. 이 여자가 당신은 연인이 아니라 그냥 친구라고 했어요. 나도 아까 통성명하고 인사해서 친구가 됐어요.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조건인데, 뭘.”

히에무스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에일린이…… 정말 그렇게 말했느냐?”

“그래요. 당신이 인간도 아니고 당신 사랑도 진짜가 아니니 연인이라 하긴 힘들댔어요.”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어 히에무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계속 인지하던 사실이지 않나? 서운하지만 그 때문에 확신하지 못하는 그녀를 잡고 싶어 이렇게 뛰어다니는 거고. 다시 눈을 부릅뜨며 루카스에게 명령했다.

“비켜라. 친구라 해도 너 같은 놈보단 내가 더 가깝고 오래된 사이다.”

“벌꿀주를 먹어서 아직 깨어나지 못할 거예요. 당신은 몸이 차가워서 인간에겐 해롭다고요.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요.”

어린 유니콘이 여전히 되바라진 말투로 주장했다. 히에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루카스의 몸을 밀어내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더 이상 정령왕을 자극하지 마라, 애송이 일각수.”

온몸의 털이 곤두설 것 같은 차가운 시선에 루카스가 그제야 부르르 몸을 떨며 멀찍이 물러났다. 히에무스가 잠깐 더 흘겨보다 커다란 물푸레나무에 마법을 걸었다. 나뭇가지가 커튼처럼 내려와 그들 주위에 치렁치렁 늘어졌다. 에일린의 곁에 바싹 다가앉아 그녀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마법 공간에 넣어둔 빨간 약병을 꺼내 한 방울 입에 털어 넣었다. 즉시 그를 감싸던 정령의 광휘가 사라졌다. 스스로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더운 기운이 몸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고요히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로 올리고 흐트러진 밤색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응…….”

뒤척이는 그녀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어렸다.

“에일린.”

여린 그녀의 뺨을 상냥하게 쓸었다.

“으응, 히……에무스?”

깨울 생각은 없었는데 그녀가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미안, 내가 잠을 깨웠느냐?”

“음, 아뇨. 괜찮아요. 당신을…… 만나려고 온 걸요.”

졸음을 떨치기 힘든 듯 느릿하게 잦아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할 말이 있거든요. 당신에게.”

“무슨 말?”

여전히 눈꺼풀이 무거운 듯 다시 눈을 감으며 얘기했다.

“어제…… 고마웠다고요. 정말 고마웠어요.”

히에무스는 쓰다듬던 손을 멈칫거렸다.

“고마웠다고? 화가 나지 않았느냐?”

에일린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화가 왜 나요. 당신이 날 화나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어. 늘…….”

그녀의 손이 올라오더니 그의 손을 꼭 붙들었다.

“늘 행복하게 해 주는걸.”

히에무스는 가슴 속에 뜨거운 뭔가가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에일린, 그럼 날 조금은 사랑하는 거지?”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그런 것 같아요.”

인간처럼 두 뺨에 붉은 열기가 피어올랐다.

“정말이지?”

인간처럼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응. 정말이에요.”

“에일린, 그럼…….”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이젠 친구가 아니라 연인인 거지?”

꿈결 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음…….”

확언하듯 그녀가 속삭였다.

“연인이에요.”

뜨겁게 올라오던 가슴 속의 뭔가가 확 터뜨려지며 온몸을 뒤덮었다.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벅찬 환희에 히에무스는 되레 표정을 살짝 찌푸렸다. 인간처럼 호흡이 가빠오고 턱이 덜덜 떨려왔다.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에일린의 얼굴 위로 허리를 낮췄다. 이내 더없이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연신 홧홧한 숨결을 토해내며 그녀의 것을 부드럽게 머금고 녹여냈다. 마치 인간처럼.

***

에일린은 한참 곤하게 자다 서늘한 느낌이 들어 깨어났다. 히에무스의 품속이었다. 그의 한쪽 팔을 베고 누운 채 다른 팔에 휘감겨 안겨 있었다. 그의 몸에 감도는 한기 때문인지 한 차례 부르르 몸이 떨렸다. 언제 온 걸까?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낮은 체온 때문에 깊이 잠들지 못했을 테니까.

“깼느냐?”

히에무스가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언제 오셨어요? 히에무스.”

“서너 시간 전쯤?”

“예엣! 그렇게나 지났다고요?”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가 따라 몸을 일으켰다.

“깊이 잠들어서 깨우지 않았다.”

“으……, 술 때문에 그래요. 아니면 이렇게까지 오래 잠들지 않았을 거예요.”

히에무스의 품이 무척 추웠을 텐데 서너 시간이나 눈치 못 채고 잤다니. 정말 푹 잠들었던 모양이다. 꿈도 꾼 것 같은데. 히에무스에게 고백하고 또…….

“아까 잠깐 깼었는데 기억나지 않느냐?”

“그게 꿈이 아니라 진짜였다고요?”

히에무스가 엷은 미소를 피웠다.

“그래. 날 사랑한다며 이제 우리가 연인이라고 했잖느냐.”

“아!”

에일린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몽롱하긴 했지만 전부 생각났다. 그가 조금 염려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연인, 맞는……거지? 에일린.”

“어, 그게…….”

술김에 말하긴 했지만 번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인정하기도 뭣했다. 그는 여전히 인간이 아니고 그의 사랑도 묘약 때문에 지속되는 것이니. 그녀의 불안을 읽었는지 히에무스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해독약을 절대로 먹지 않겠다, 에일린.”

“예?”

멍한 눈으로 히에무스를 바라봤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이었다.

“결코, 먹지 않을 거야. 정령의 약속이니 믿어도 돼. 정령이 하는 말은 오직 진실뿐이니.”

“히에무스, 난…….”

“그러니 그냥 나를 믿고 따라와 주면 안 되겠느냐?”

에일린은 눈을 꼭 감았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당신이 좋아요. 히에무스.”

그의 입가에 좀 더 진한 미소가 맺혔다. 에일린은 그 표정을 애써 외면한 채 읊조렸다.

“그런데 전 인간이에요. 언젠가 반드시 늙고 병들어 죽어버리는 인간. 음식도 먹어야 하고, 화장실도 가야 하고, 집도 필요하고, 일을 해서 돈도 벌어야 해요.”

“그건 나도 알아. 에일린. 그래서 내가…….”

“그러니까!”

그녀가 조금 소리 높여 그의 말을 끊었다. 줄곧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였다. 그에게 해주는 말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일러주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안 돼요. 나는 그런 추접스러운 인간이니까 당신에게 안 된다고요. 나한테는 그냥 나랑 똑같은 인간이 어울려요. 같이 뒹굴면서 늙어가고 함께 돈 벌고 밥도 끓여 먹을 인간이.”

“……!”

“난, 그런 인간하고 살고 싶어요. 그런 사람을 찾고 싶어요. 절 사랑해줘서 감사하지만 이제…… 그만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나중에 버림받아 가슴 아픈 것보단 지금 끊어내는 게 낫다. 자신은 알고 있었다. 전세에서는 부모님과 자신의 죽음을 겪어봤고, 이 세계에서는 병들어 버림까지 받아봤다. 늙어보기도 했고. 그 모든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실패하는 인생은 한 번이면 족해. 이번 생은 반드시 행복해질 것이다. 반드시! 그러니 정령과 꽁냥하느라 낭비할 겨를 따윈 없어. 눈 깜짝할 새 노화가 찾아올 것이다. 시간은 절대 기다려주지 않아!

“하나만 말해 다오, 에일린.”

줄곧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히에무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날 사랑하는 것 맞지? 그건 부정하지 않는 거지?”

에일린은 잠시 침묵했다. 조금…… 사랑하긴 하지. 그래, 조금은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인간이 아닌 자를, 그것도 묘약에 취한 존재를 사랑해봤자 무슨 희망이 있단 말인가?

“모르겠어요.”

가슴 속에 찌르르 저릿한 전율이 일었다. 그 아릿한 느낌 때문에 한 번 더 되뇌었다.

“정말 모르겠어요.”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줘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이 정령왕도 그녀를 포기하고 제 갈 길을 갈 테니까. 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았다. 아직까진 그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이어가고 싶었다. 목이 메는 것 같았다. 얼굴을 들어 히에무스를 응시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조금만이야. 조금만 더 욕심내고 싶어. 그가 강렬한 은청색 눈을 그윽하게 빛내며 가까이 걸어왔다.

“지금 그대가 하는 말은 믿지 않을 거야, 에일린. 분명 아까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나는 그대가 아까 했던 그 말을 믿을 거야.”

“히에무스…….”

“그러니까 포기할 수 없어. 날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내가 인간이 돼 그대 곁에 있게 되면 진실을 말해주겠지.”

“네? 뭐라고요?”

그의 얼굴이 바싹 다가와 귓가에 서늘하고 상큼한 숨결이 닿았다.

“내가 인간이 돼 그대 곁에 머물 거라고.”

“……!”

***

에일린을 케일론의 성까지 데려다준 후 히에무스는 자신의 궁전으로 돌아왔다. 눈의 여왕과 북풍을 비롯한 권속들이 몰려나와 평소처럼 반겼다.

“이제 오십니까? 왕이시여. 어디 갔다 오셨는지요? 한참 찾았습니다.”

나무라는 듯한 눈의 여왕을 무시한 채 이런저런 밀린 일들을 찾아 챙겼다. 대부분 힘을 소진한 정령들에게 능력을 나눠주는 역할이었다. 이어 정령들이 사용하는 책력을 참고해 이후 일정을 점검하고 가늠했다. 앞으로 매우 바빠질 것 같았다. 에일린도 만나야 하고 드라코니아 왕국에도 자주 들러야 하니까. 자질구레한 일들은 한가한 브로미오스가 도맡아 해주겠다고 했지만 당분간 자리를 비워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겨울 폭풍이 없는 기간이 그나마 한가한 편이니 잘 활용해야 하리라. 밤을 지새워 가며 대충 일을 마무리 짓고 날이 밝자 서둘러 궁전 밖으로 나섰다.

“또 어딜 가십니까? 왕이시여!”

눈의 여왕이 불렀지만 못들은 체했다. 브로미오스의 궁전에 들러 그와 함께 다시 길을 떠났다.

그 무렵 드라코니아 왕국의 궁전. 퀴리오스 왕은 화려한 식탁에서 가족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용족답게 대식가로 이름 높은 그였지만 오늘 아침은 영 입맛이 없는지 포크로 접시를 헤집으며 깨작거리기만 했다. 옆에 있던 왕후 ‘케레시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남편과 다르게 그녀는 벌써 네 접시째 음식을 비워내고 있었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에 오렌지색 눈을 한 적룡의 화신이었다. 보물을 좋아하는 용답게 온몸을 번쩍거리는 보석으로 치장한 모습이었다. 그건 퀴리오스도 마찬가지였지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여보. 통 드시질 못하다니.”

퀴리오스가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조금…… 골치 아픈 일이 있어서.”

“무슨 일이세요? 아바마마.”

다른 옆쪽에 자리한 공주 ‘스킬라’가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퀴리오스도 즉시 자신의 딸을 바라봤다. 흑룡인 자신을 닮아 밤처럼 새카만 머리에 어머니 케레시아를 닮은 오렌지색 눈동자를 지닌 참으로 어여쁜 딸이었다. 엄마 못지않게 여러 보석 장신구로 화려하게 꾸민 모습이 눈부셨다. 그녀도 용족답게 벌써 여러 그릇 해치웠다. 시무룩하던 퀴리오스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돌았다.

“별일 아니니 아무 걱정 마렴, 우리 공주는.”

“그러지 말고 말씀해보세요. 제게 털어놓으시면 한결 편안해하시잖아요?

퀴리오스의 황금빛 두 눈이 흐뭇하게 반원을 그렸다. 예쁘고 귀여운데다 똑똑하기까지 한 자신의 딸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퀴리오스는 주변에 늘어선 인간 시종들이 신경 쓰였는지 바로 말하지 않고 계속 뜸을 들였다. 궁금한 걸 참지 못한 스킬라가 냉큼 시종들에게 마법을 시전해 잠깐 동안 혼을 빼놓았다.

“어서요, 아빠! 빨리 말씀해주세요. 제가 이래 봬도 아빠의 각종 고민거리를 해결해주는 해결사잖아요?”

“하하, 그렇긴 하지. 하지만 스킬라. 가급적 이런 갑작스러운 마법은 자제하렴. 습관이 되면 곤란하니까. 인간으로 계속 살려면 조심해야 하잖느냐?”

“알겠어요. 담부터 유의할게요. 어쨌든 어서 말씀해 보세요. 뭐가 아빠를 근심스럽게 하는지.”

왕후 케레시아도 덩달아 재촉했다.

“그래요, 여보. 용인 당신을 고민하게 하는 일이 도대체 뭔가요? 어서 얘기해 봐요.”

“그게…….”

퀴리오스는 조금 머뭇거리다 저번 밤에 겪었던 황당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 이야기가 끝나자 급한 성격의 적룡인 케레시아 왕후가 불같이 화를 냈다.

“뭐 그런 것들이 다 있어? 정령왕이면 단가? 그런 무례하고 불쾌한 요구는 그냥 무시해 버려요,”

“이미 들어주기로 약속했소. 대가도 받았고. 또 들어주지 않으면 드라코니아에 불이익을 준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않소.”

“그럼 아빠가 고민하시는 게 뭐예요?”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까 해서 말이야. 이런 일은 처음이라 감이 잘 잡히지 않는구나.”

스킬라가 턱을 손으로 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일단 적당한 영지를 골라 마법을 거셔야죠. 드라코니아 전체는 안 되겠지만 구석 지방에 위치한 영지 하나에 암시를 거는 건 괜찮잖아요. 변경에 영지를 가진 백작 정도로 설정하세요.”

“음, 그러면 되겠구나. 그다음엔?”

“그다음엔 아빠가 사냥대회를 열어서 그자를 데려가세요. 그리고 마물에게 당하는 척하다 그자가 아빠의 목숨을 구하도록 하면 어떨까요? 그럼 신하들이 먼저 작위를 높여주라고 주청할 거예요.”

퀴리오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되겠구나. 후작 정도로 내주면 되겠지?”

“그렇게 하기로 하셨다면서요? 그런 자에게 사실 너무 과분하긴 한데 어쩔 수 없죠. 그렇게 약속하셨다니.”

“하하, 역시 우리 딸이구나. 금방 이렇게 좋은 생각도 내놓고.”

“아이참, 아빠가 너무 생각이 없는 거예요. 엄마도 그렇고. 둘 다 성격이 급하기만 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길 싫어하시잖아요?”

스킬라가 아름다운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푸념했다. 퀴리오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했다.

“가끔은 인간 노릇을 하는 게 너무 귀찮거든. 자질구레하고 골치 아픈 일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몰라. 어떨 땐 그냥 다 놔두고 다른 용들처럼 깊은 동굴에 들어가 늘어지게 잠이나 자고 싶구나.”

왕후 케레시아도 한숨을 내쉬며 동의했다.

“맞아, 나도 그래요. 덜 심심해서 좋긴 한데 너무 성가신 일들이 많아 어떨 땐 막 짜증이 나요.”

적룡인 케레시아는 성질이 급하고 단순한 편이라 사실 인간 노릇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식과 남편이 원하는 터라 할 수 없이 이런 생활을 이어오는 터였다.

“그래서 웬만한 일들은 제가 해결해 드리고 있잖아요? 전 인간 생활이 마음에 들어요. 그 칙칙한 동굴 속에 들어가 보물이나 지키며 살고 싶지 않다고요.”

새가 지저귀는 듯 종알대는 딸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퀴리오스는 싱긋 미소를 떠올렸다.

“그래, 알았다. 우리 귀염둥이가 원하는 만큼 인간 노릇을 할 테니 걱정 마렴. 대신 앞으로도 지금처럼 골치 아픈 일은 우리 대신 해결해주는 거다?”

상냥한 퀴리오스의 제안에 스킬라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예, 그럴게요! 아빠.”

케레시아가 성에 차지 않은 듯 투덜거렸다.

“하아, 인간처럼 사는 게 뭐 좋다고.”

스킬라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핀잔하듯 말했다.

“그렇게 맘에 안 들면 엄마는 동굴 속에 들어가서 사시면 되잖아요. 왕비가 병으로 죽었다고 연기하면 되니까.”

케레시아가 즉시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 가는 건 싫어. 그리고 다른 여자를 왕후로 세우면 어떡해.”

“그러지 않을 건데…….”

퀴리오스가 즉시 덧붙이자 케레시아가 눈을 흘기며 앙칼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당신은 그럼 나더러 혼자 산속 동굴에 들어가 살라는 거예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두 부부 용이 티격태격 말다툼하는 걸 지켜보던 스킬라는 미소를 머금었다. 음식을 두어 접시 더 가져오게 하려고 시종들에게 건 마법을 풀려는 찰나였다. 식당 한편에 갑자기 영롱한 빛 무리가 생겨났다. 곧이어 낯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일 먼저 발견한 스킬라가 잔뜩 경계하며 외쳤다.

“누구냐!”

“우리다. 퀴리오스.”

“……!”

두 정령왕이 또 시종이나 출입문을 통하지 않고 바로 퀴리오스 앞에 나타났다. 그들, 아니 히에무스를 보는 순간 스킬라는 휘둥그레 뜬 눈으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아름다운, 정말 너무나 아름다운 존재가 거기 서 있었다. 은빛과 푸른빛이 섞인 서늘한 머리칼을 휘날리며 겨울 호수 같은 은청색 눈동자를 지닌 정령왕이. 채광창을 통해 쏟아지는 이른 아침 햇살을 받으며 그보다 더 찬연하게 빛나는 자태가 할 말을 잃게 했다. 잠시 숨 쉬는 법까지 잊고 응시하던 용족 공주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

며칠 뒤 제국의 휴일 날. 황제 렉스가 에일린에게 ‘산책 친구’ 일을 하라고 지정한 날짜였다. 으스름한 새벽빛이 밝아오자 에일린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억지로 일어났다. 피곤했다. 요즘 계속 애플턴 자작 부인에게 이런저런 교육을 받느라 정말 빡빡하고 힘든 스케줄을 소화하는 터였다. 자작 부인은 곧 황궁에 갈 에일린이 걱정되는 마음에 집중해서 예절 수업과 교양 수업을 받게 했다. 예법에 맞는 인사법과 화술, 바른 걸음걸이와 식사 예절, 다도 예절 등등, 참으로 강훈련이었다. 연일 이어지는 힘든 일과에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예전에 그냥 허드렛일이나 하고 지내던 때가 그리웠다. 차라리 그때가 마음이 편했다.

“하아…….”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금 자신이 뭐 하는 중일까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삶의 목표가 렉스의 후궁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자신의 삶의 목표는…… 행복해지는 것이다. 전세에서 누리지 못한 것들을 원 없이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다. 소설처럼 멋진 사랑을 찾아 그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란 말이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는 이는 히에무스였다. 비록 묘약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지만.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자신 때문에 인간 노릇까지 하겠다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런 각오와 노력까지 보여주다니……. 에일린은 자신도 마음을 열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용기를 내 히에무스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그러고 싶긴 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령이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건 《장미의 기사 엘시아》 소설 속에서도, 아니면 다른 이야기 속에서도 접해본 적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그리스 신화에서 남신들이 인간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잠깐 변신하는 정도가 있을 뿐이지. 그래, 그 이야기를 봐도 유혹만 하고 끝까지 책임을 지는 신들은 별로 없었다. 역시 아직은 히에무스를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이런 자신이 싫지만 다시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실제 에일린의 나이였다면 덥석 믿었겠지만, 에일린의 속은 산전수전을 겪은 중년이었다. 게다가 어떻게 살게 된 두 번째 인생인가. 신중해야 했다. 자신은 철없는 사랑에 모든 걸 내맡기는 철부지가 아니었다. 이번 인생만큼은 정말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똑똑.

창에 달린 나무 덧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급히 열어보니 히에무스였다. 언제 나갔는지 세 정령도 그의 주위에 맴돌고 있었다. 얼른 들어오도록 했다.

“미안, 에일린. 오늘은 내가 급히 가야 할 곳이 있구나. 잠깐 얼굴이나 보려고 들린 거야.”

“그래요? 어디 가세요?”

“저번에 말한 곳에 다녀와야 해. 오늘 퀴리오스가 연극 무대란 걸 마련했다더군.”

저번에 얘기했던 거라면……. 거긴가? 드라코니아 왕국의 왕이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뭔가 조치해줄 거라 했었지.

“연극 무대라고요?”

“응, 나도 잘 모르겠지만 가서 무슨 연기를 해야 신분을 얻을 수 있다는구나.”

조금 서운했지만 할 수 없었다.

“알겠어요. 잘하고 오세요.”

“그럴게. 오늘이 아젤란 제국의 휴일이라 했지?”

“예.”

히에무스의 얼굴에 염려의 빛이 스쳤다.

“괜찮겠느냐? 그 무례한 인간 군주와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서?”

“예,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별일 없을 거예요.”

“안 가면…… 안 될까?”

불안한 듯 살짝 찌푸린 표정이었다. 에일린도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황제의 명이니 이후 기회를 봐서 거절하더라도 어쨌든 오늘은 가야 했다. 마법사 케일론과 시녀들의 눈이 있으니 아픈 척하며 핑계 댈 수도 없었다.

“저도 내키지 않지만 여기서 살아가려면 할 수 없어요. 황제의 명을 거역하면 안 되거든요. 왜, 당신도 겨울의 권속들에게 뭔가 명령을 내리면 다들 군말 않고 해야 하잖아요. 개인 사정 같은 거 봐주지 않잖아요?”

그가 좀 더 미간을 좁혔다.

“음, 그렇긴 하지.”

“그냥 아르바이트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르바이트?”

처음 듣는 단어에 히에무스가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정식 직업은 아니지만 단기간 일해서 돈 버는 걸 말해요.”

“돈을 번다고?”

“인간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거든요. 가서 산책 좀 해주고 달에 10골드나 받으니 이만큼 좋은 게 어디 있어요? 완전 개꿀 알바지.”

물론 에일린은 적당한 기회에 렉스에게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렉스와도 가능하면 엮이지 않을 생각이니 계속 그와 접점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전엔 아르바이트를 좀 해둔다고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어찌 됐든 그녀가 뭔가 활동을 해서 돈을 버는 거니까 저번처럼 이유 없이 각종 물품과 혜택을 받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일을 그만둘 때 지금 성에 와 있는 사용인들도 물려달라고 청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저축을 좀 해두는 것도 좋으리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으니 뭐든 최대한 대비하고 활용해 두고 싶었다.

“돈이라면 내가 구해줄 수 있다, 에일린.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보석이나 황금덩이 같은 거라면…….”

에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자기 자신 정도는 어떻게든 책임질 수 있었다. 사지 멀쩡하고 젊은데 뭔들 못하겠는가? 예전에 신세 진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그런 거지.

“감사하지만…… 그건 사양할게요. 히에무스.”

히에무스는 금방 시무룩해졌다.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해서 훨씬 표정이 풍부해진 그가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 에일린은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알겠다. 이다음에라도 필요해지면 꼭 얘기해다오.”

“예, 그렇게 할게요.”

히에무스가 세 정령에게 당부했다.

“너희들, 오늘 에일린님을 잘 모시도록 해라.”

“예. 왕이시여, 걱정 마십시오.”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지며 각자의 하루를 시작했다.

***

애플턴 부인과 함께 외출 준비를 마치고 1층 홀로 내려갔다. 언제나처럼 세 정령도 바싹 따라붙었다. 케일론이 매우 정중하게, 마치 귀족 영애를 대할 때처럼 허리 숙여 절했다. 에일린도 엉겁결에 인사를 받아주었다. 저번에 렉스가 다녀간 후로 케일론이 좀 이상해졌다. 한집에 살면서도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어쩌다 보게 돼도 굳은 얼굴로 말없이 고개만 숙일 뿐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원래도 살가운 사람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냉정하진 않았는데……. 요즘 그에게선 찬바람이 쌩쌩 일었다.

‘아마도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테지.’

갑자기 불어난 사람들이 성에 대거 포진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에일린은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듯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가 딱딱한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황제 폐하를 기다리시게 해선 안 됩니다. 다음부턴 좀 더 서두르세요.”

“예, 죄송해요.”

“그럼 다들 준비됐지요? 마법을 시행하겠습니다.”

그의 마법 주문과 함께 푸르게 빛나는 마법진이 나타났다. 케일론과 에일린, 그리고 애플턴 부인과 호위기사 두 명이 황궁으로 옮겨졌다. 언제나처럼 마법청 앞이었다. 미리 지정해 둔 장소로 이동하면 마나 소모를 줄일 수 있다 한다. 그래서 황궁으로 이동할 때면 대부분 이 장소였다.

“어서 오십시오. 루쿨루스 영애.”

리히트 경이 마중을 나왔다.

“아, 안녕하세요? 시종장님.”

에일린의 인사에 그가 묵례로 답하며 안내를 자청했다. 뒤에 있던 케일론이 툭 내뱉었다.

“난 이만 가보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헬무트 경이 알아서 보내줄 겁니다.”

“예……. 감사했어요.”

왠지 화난 듯 보이는 그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마법진 속에서 고개를 까딱 숙였다. 푸른빛과 함께 삽시간에 그 모습이 사라졌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리히트 시종장이 손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멋들어진 조각과 잘 다듬어진 상록수로 조성된 정원이었다.

“폐하께선 처리하실 일이 있어 잠시 후에 나오실 겁니다. 오늘 날씨가 온화한 편이니 대정원을 구경하며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실내로 모셔도 괜찮고요.”

“정원에서 기다릴게요.”

산책 친구니 정원이 근무처겠지. 젊은 시종장이 짧게 고개 숙여 답하며 앞장서 걸었다. 느릿한 걸음으로 주변 풍경을 살피며 따르는데 반대쪽에서 걸어온 한 무리와 마주쳤다.

“이게 누구죠?”

무척 의외라는 목소리. 엘시아와 안드라, 그리고 레나테 공주 일행이었다. 에일린은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제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이렇게 빨리 만나다니. 제멋대로 떨리는 주먹을 꼭 쥐었다.

“히익! 저번에 그 사악한 인간 여자와 마법사잖아!”

엘시아와 안드레아스를 알아본 세 정령이 바싹 경계하는 태세를 취했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단단히 대비하자고!”

“응!”

그들을 바라보던 안드레아스가 눈을 가늘게 뜨는 모습이 보였다. 에일린은 당황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옆에 다른 이들도 많고 정령들도 있으니 별일 없을 것이다. 말없이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애플턴 부인이 가르쳐준 예법대로. 물론 예법대로라면 인사말도 건네야 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안드레아스와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서로가 곧 외면했다.

“여긴 또 어쩐 일로 온 거죠?”

엘시아 왕녀는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짧아진 머리 때문인지 티아라 밑에 하얀 베일을 늘어뜨린 차림이었다. 레나테 공주도 마찬가지였고. 둘 다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노골적인 눈빛으로 에일린의 행색을 살폈다. 자신들 못지않게 호화롭게 꾸민 에일린의 차림새를 보니 의아한 마음과 함께 부아가 치밀었다.

“이건 또 뭐죠? 그새 신분 상승이라도 한 건가요? 평민이 그런 차림으로 황궁에 무슨 볼일인 거죠?”

“…….”

에일린이 침묵하자 애플턴 부인이 대신 답했다.

“폐하께서 루쿨루스 영애에게 산책 친구 소임을 맡기셨습니다.”

“뭐라고요?”

입술을 실룩거리던 레나테 공주가 화난 얼굴로 외쳤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평민에게 그런 막중한 일을 맡기다니! 아젤란 제국은 제대로 된 신분질서도 잡히지 않은 건가요?”

엘시아가 비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군요. 보아하니 귀족 출신 시녀 같은데 평민 아가씨를 상전으로 모시다니, 각국에서 온 공녀들에게 참 좋은 구경을 시켜주는군요. 자국에선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

애플턴 자작 부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공주님…….”

안드레아스가 고운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자신이 모시는 왕녀를 나무라듯 바라봤다.

“우리 스파니아 왕국에선 신분별로 착용하는 의상과 물품도 철저하게 규정돼 있지요. 어기는 자들은 호된 벌을 받게 되고요. 근데 여기선 그런 기본적인 질서조차 정립되지 않았나 봐요.”

레나테 공주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쏘아붙였다. 엘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런 것 같군요. 아젤란 제국이 안드로스 대륙 제일의 선진대국이라 들었는데 정말 실망스럽네요. 이래서야 우리가 뭘 배워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애플턴 부인이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보였다. 듣고 있던 에일린이 한마디 했다.

“아, 그러니까 선진대국인 거지, 생각해 보면 몰라요?”

“뭐라고요?”

“케케묵은 신분제도나 사회질서에 연연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는 거니까 훨씬 발전한 곳이 맞잖아요.”

엘시아의 아미가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일린은 계속 이야기했다.

“자신들 나라 사정이 어떤지 잘 살펴보세요. 기근과 내란과 폭동을 피해 이탈하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잖아요. 그들이 다 어디로 가는데요? 모두 아젤란 제국으로 몰려들잖아요?”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죠?”

“왜 이곳으로 오겠어요? 그들을 포용할 만한 분위기와 기반이 마련됐으니 그런 거죠. 경제도 윤택하고 사회 분위기도 안정되고 일자리도 많기 때문이잖아요. 신분제도가 훨씬 유연하니 귀족들의 수탈과 압제도 상대적으로 덜 할 거고요.”

“……!”

“조금만 둘러봐도 배울 게 천지구만, 뭘.”

“이봐요!”

“풋-!”

짧게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다들 고개를 돌렸다. 황제 렉스였다. 언제 왔는지 지척에서 지켜본 모양이었다.

“하하하…….”

그가 소리 높여 웃었다.

“폐하.”

모두 당황한 얼굴로 서둘러 예를 갖췄다. 에일린도 배운 대로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살짝 움켜쥐고 무릎을 굽히는 인사를 했다. 공녀들의 입에서 장황한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엘시아가 먼저 시작했다.

“제국의 주인이신 레오나드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여신 ‘아벨라’의 찬란한 빛이 늘 함께하시기를.”

“제국의 태양, 천지를 비추는 광명하신 황제 폐하께 고개 숙입니다. 영원한 복락을 누리소서.”

레나테 왕녀가 연이어 읊조리고 에일린 차례였다. 에일린도 며칠간 계속된 애플턴 부인의 강훈련으로 몇 가지 인사말을 외웠지만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너무 가식적이고 거북스럽게 느껴졌다. 왠지 연극 무대에 선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또 어찌 보면 TV에서 본 그런 것과 닮아 보이기도 했다. ‘위대하신 수령 동지…….’ 같은. 뭐, 둘 다 무소불위의 권력자를 찬양하는 행위이니 비슷하긴 할 것이다. 그래서 그냥 간단하게 인사했다. 애플턴 부인이 아쉬워할 테지만. 렉스 역시 조금 기대감이 담긴 눈빛으로 응시했다.

“안녕하십니까? 폐하.”

그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더 크게 번지며 파란 두 눈이 활처럼 휘었다. ‘역시!’라는 반응이랄까? 곧 그도 예법에 따른 위엄 있는 인사로 응답했다.

“그대들에게도 아벨라의 자비로운 축복이 머물길. 모두 일어나시오.”

“황송합니다.”

그가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두 분 공녀는 여기 있는 평민 아가씨의 조언대로 좀 더 주변을 잘 돌아보는 게 좋겠소. 그럼 꽤 많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오.”

“…….”

엘시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레나테 공주도 굳은 얼굴로 이리저리 눈만 굴렸다. 렉스가 다시 웃음을 머금고 에일린을 향했다.

“많이 기다렸느냐?”

“아뇨.”

“자, 그럼 산책을 시작해 볼까? 두 분 공녀분들도 각자 가던 길을 마저 가시오.”

렉스가 저번처럼 팔을 내밀자 에일린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에스코트가 다소 부담스러웠다. 잠시 머뭇거리다 손을 내밀어 잡았다. 두 공녀가 무섭게 쏘아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같은 날, 에일린과 헤어진 히에무스는 서둘러 가을의 궁전으로 가 브로미오스와 합류했다. 그와 함께 드라코니아 왕국으로 이동했다.

“저긴 것 같군.”

용의 마나로 가득 찬 방을 찾아 언제나처럼 불쑥 들어갔다. 역시나 퀴리오스가 있었다. 다른 용 두어 마리, 아니 두어 명과 함께. 모두 인간형으로 변신한 상태니 인간 대접을 해줘야 할 것이다.

“오셨군요. 기다렸습니다.”

“음.”

퀴리오스가 그의 곁에 있던 용족 둘을 소개했다. 한 명은 지난번에 잠깐 봤던 퀴리오스의 딸이었다. 커다란 키에 검은 머리, 오렌지색 눈을 가진 젊은 여자의 모습이었다.

“인사드립니다. 퀴리오스의 딸인 스킬라입니다. 두 분 정령왕이시여.”

“오, 그렇군. 나는 가을의 왕 브로미오스이고 이쪽은 겨울의 왕 히에무스다.”

브로미오스가 친절한 미소로 일러주었다. 용족 공주가 유난히 붉어 보이는 뺨을 한 채 히에무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히, 히에무스……님이셨군요.”

사실은 이미 몇 번이고 들어 알고 있던 이름이지만 처음 듣는 것처럼 되뇌었다. 잠겨 들 듯 나른한 목소리에 몽롱한 눈빛으로, 반쯤 넋이라도 나간 듯.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보던 다른 용족 청년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저는 백룡 코르누스의 아들 ‘렌투스’입니다.”

그는 짧게 자른 새하얀 머리에 눈은 하늘색이었다. 용족답게 훤칠한 키에 덩치도 크고 단단해 보였다. 퀴리오스가 이어 설명했다.

“오늘 해야 할 일에 이 둘이 함께 참여할 예정이지요. 미리 모여 상황을 숙지하고 연습해야 할 것 같아 일찍 오시라 부탁드린 겁니다.”

“연습이라니? 그런 번거로운 절차 없이 그냥 하면 안 되는 건가?”

“실수라도 하면 곤란하잖습니까? 물론 정 수습이 어려울 경우엔 마법을 사용하겠지만 되도록 그런 상황을 줄이고 싶은 겁니다.”

퀴리오스가 긴장한 표정으로 두 정령왕을 주시했다.

“음.”

“말씀드렸듯 인간 노릇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요즘 인간들은 몇 천 년 전에 비해 훨씬 현명해지고 눈치도 빨라졌단 말입니다. 협조를 잘하겠다 약조해주십시오.”

브로미오스가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도 인간 귀족 노릇을 할 예정이었다.

“알겠네. 시키는 대로 잘하겠네. 약속하지.”

퀴리오스 왕이 히에무스에게도 응답을 구하는 눈짓을 했다. 그도 선선히 동의했다.

“그렇게 하겠다. 원하는 걸 말해봐라. 뭐든 최선을 다할 테니.”

퀴리오스가 자리를 권했다. 원탁으로 된 탁자로 가서 모두 둘러앉았다. 스킬라 공주가 바로 앉지 않고 눈치를 보더니 히에무스가 앉자 냉큼 그 옆으로 가 착석했다. 이내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히에무스를 응시했다. 꿈꾸듯 황홀한 표정으로. 렌투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 장면을 쏘아봤다. 퀴리오스 왕이 그에게 주의를 주며 일렀다.

“뭐하는가? 어서 시작하게.”

“아, 예.”

그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잔뜩 굳은 얼굴이었다. 터덜터덜 한쪽 구석으로 걸어가 멋들어진 서랍장에서 양피지 뭉치를 몇 부 꺼내 탁자 위로 죽 돌렸다. 여러 장으로 된 게 제법 묵직했다.

“한 번 읽어 보십시오.”

히에무스가 의아한 낯빛으로 물었다.

“이게 뭔가?”

“대본입니다.”

“대본?”

렌투스가 퉁명스럽게 얘기했다.

“인간으로 살려면 때맞춰 연기를 해야 하지요. 우리 드라코니아 왕국에서 뭔가 꾸며낼 일이 있으면 이렇게 대본을 만들어 연습해 왔습니다.”

“매번 말인가?”

“몇백 년 동안 반복해서 익숙해진 일은 이제 그냥 실시합니다. 때에 따라 늙고 병들어 죽는 건 연습 없이도 잘 해내니까요. 하지만 이번에 당신들께서 요청하신 일은 몹시 생소한 일이어서요.”

히에무스가 양피지 뭉치를 훑어보며 말했다.

“그래, 대충 어떤 연기를 하면 되는가?”

“용에게 잡혀가는 공주를 구출해내는 기사 역할입니다.”

“용에게 잡혀가는 공주를 구출하라고?”

렌투스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킬라가 눈을 빛내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저번에 듣기론 퀴리오스, 그대를 구하는 거라 하지 않았나?”

히에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퀴리오스가 냉큼 변명했다.

“저를 구하는 것보다 공주를 구하는 게 더 극적으로 보이니까요. 사실 용이 늙은 왕을 잡아가서 어디 쓰겠습니까? 다른 마물들에게 당하는 연기를 한다고 쳐도 주변에 있는 애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도 있고요.”

“그런가…….”

히에무스가 별로 내키지 않은 듯 스킬라를 힐끔 쳐다봤다. 그녀가 홍조 띤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담아 보였다. 히에무스는 즉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 공주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번에 봤을 때부터 자꾸 노골적인 시선으로 뜯어보는 것 같아 좀 불쾌하게 느껴졌다. 렌투스가 그런 두 사람을 못마땅한 눈으로 지켜보다 다음 얘기를 꺼냈다.

“퀴리오스 왕께서 이따 사냥대회를 여실 겁니다. 그때 당신들을 여러 중앙 귀족들에게 소개하실 예정이지요. 미리 몇몇 귀족들에게 암시를 걸어놨으니 자연스럽게 등장하실 수 있을 겁니다.”

“호오.”

브로미오스가 입을 벌린 채 감탄을 내뱉었다. 너무나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렌투스가 계속 설명했다.

“겨울의 왕께선 아젤란 제국 국경과 맞닿아 있는 영지를 맡은 백작 역할입니다. 표지에 적힌 이름과 작위 등을 잘 외워 두십시오. 안쪽에 영지 위치와 숙지해야 할 항목 등을 적어 놨습니다.”

히에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피지 겉표지에 맡을 역할이 표기돼 있었다.

- 테라티오 지역의 영주 ‘히에무스 칼릭스 레 클라인 백작’.

“가을의 왕께서는 클라인 백작의 친척 역할이고요.”

브로미오스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브로미오스 아델리오 레 파인스 남작이군. 하하, 마음에 들어.”

옆에 앉은 히에무스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내가 지금까지 종종 인간 노릇을 해 봤지만 이렇게 귀족 역할을 하는 건 처음이라네. 이거 은근 설레는군.”

히에무스가 렌투스를 재촉했다.

“어서, 다음 절차를 얘기해 보게.”

“그러죠. 사냥대회에 스킬라 공주님께서 다른 귀족 영애들과 함께 참가하실 예정입니다. 모두가 한창 짐승몰이에 몰두해 있는 사이 갑자기 거대한 용이 나타나 공주님을 납치해 날아오를 겁니다.”

“그 용이 설마 자네인가?”

브로미오스가 질문하자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제가 갑자기 나타난 백룡 역할이지요. 제가 공주님을 낚아채 날아가면 사람들이 흥분해 절 추격해올 겁니다. 당신들도 망설이지 말고 쫓아 오셔야 해요.”

“어떻게 쫓아가라는 건가? 뛰어가라는 건가? 아니면 날아오르라는 건가?”

히에무스가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렌투스와 퀴리오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잠깐 침묵이 감돌다 렌투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확인했다.

“설마, 두 분…… 말을 탈 줄 모르십니까?”

두 정령왕이 동시에 답했다.

“당연히 모르지.”

***

결국 마법을 쓰기로 했다. 말에게 암시를 걸어 두 정령왕의 명에 잘 따르도록 한 것이다. 정령이니 동물들이 기본적으로 복종하기는 했다. 그래도 자연스럽게 타는 모습을 연출할 필요성이 있었다. 렌투스가 그들을 인적이 드문 승마장으로 데려가 연습을 시켰다. 다행히 몇 번 반복하자 그럭저럭 말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기마술은 일단 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다행히 빨리 익히시는군요.”

“그럼. 우리 정령들은 뭐든 빨리 배우고 익힌다네. 가르치는 보람이 있을 거야.”

가을의 왕의 말에 렌투스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미소는 짓지 않았다. 빨리 익히긴 했지만 가르쳐야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어쨌든 기마술 습득이 대충 마무리되자 렌투스가 뭔가 생각난 듯 급히 물었다.

“두 분…… 검술이나 궁술, 창술도 모르시지요?”

“당연하지. 정령들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잖은가?”

새하얀 말 위에 앉아있던 히에무스가 답했다. 렌투스가 찡그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골치가 아파왔다. 인간 생활에 대해 완전 백짓장 같은 자들을 인간처럼, 그것도 귀족처럼 보이게 하려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참 멀 것 같았다.

“하아…….”

성가시고 귀찮은 일들이 가득했다. 이 일을 자신이 맡아야 한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스킬라 공주까지 저 겨울의 왕에게 홀린 것 같아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끈질긴 구애와 노력에도 좀처럼 마음을 내주지 않았다. 이 일도 스킬라 공주가 부탁해서 맡기로 한 것이다. 한데 그녀가 여기 이 정령왕에게 호감을 보이는 상황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런 바보 같은 일에 협조하는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다 그만두고 다른 이에게 떠넘길까 하는 맘이 밀려들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두 분은…… 그냥 평범한 귀족으로 설정하면 안 되겠군요. 너무 모르시는 부분이 많아 실수도 잦고 사람들에게 기이하게 보일 염려도 많겠고요. 이것 참.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군요.”

히에무스는 그의 지적에 조금 속이 상했지만 꾹 참고 말했다.

“배우면 돼. 뭐든지 가르쳐 주는 대로 열심히 따를 테니 잘…… 부탁하네.”

렌투스가 머리를 긁적이던 손을 멈추고 히에무스를 응시했다. 의외였다. 저 냉정하고 오만해 보이는 자가 저런 말을 하다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어째서 인간 노릇, 그것도 귀족 노릇을 하고 싶어 하십니까? 정령왕께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위인데.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으십니까?”

“…….”

히에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굳게 닫힌 입에선 어떤 말도 새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의도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야 저희도 제대로 협력하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유희의 목적으로 원하시는 것 같진 않은데.”

“유희 따위가 아냐.”

분명한 어조였다. 백마 위에 꼿꼿이 앉은 자세로 땅 위에 서서 올려다보는 렌투스에게 시선을 맞췄다.

“내 간절한 소망이다.”

“……!”

한줄기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와 정령왕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인간이 되게 해주는 마법약을 먹어 몸을 감싸던 빛이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눈이 부셨다. 렌투스가 실눈을 뜨며 주시하자 히에무스의 낮은 음성이 냉엄하게 울렸다.

“다른 이들에게 밝히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말해주겠다. 내가 왜 이러는지.”

“맹세……하지요. 용의 성좌에 대고.”

가공할 마법 능력을 지니고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용족들이지만 그들 또한 영원의 존재는 아니었다. 육체를 지닌 존재이기에 언젠가는 죽어야 했다. 용들이 죽으면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밤하늘에 박힌 별이 된다. 용의 성좌에 대고 맹세한다는 건 가장 무겁고 성스러운 용들의 약속. 맑고 깊은 은푸른 눈을 빛내며 겨울의 정령왕이 한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 인간 여자를 사랑하고 있어.”

“예?”

“그 여자를 위해 인간이 되고 싶은 거야. 아니, 나 스스로를 위해 그런 거라 해야 하나? 그녀의 사랑을 얻어 함께 살아가고 싶은 거니까.”

렌투스가 눈과 입을 크게 벌린 채 그를 향했다.

“그녀가 정령이 될 수 없으니 내가 인간이 되려는 거다.”

제법 긴 정적이 감돌았다.

“이 정도 이유면 안 되겠는가? 젊은 백룡이여.”

“충분……합니다.”

충분했다. 그가 발 벗고 도와줄 이유로 부족함이 없었다. 저 정도 각오라면 스킬라의 마음이 그에게 갈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으리라.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니.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고맙다.”

렌투스가 조금 감동한 채 브로미오스에게 마저 물었다.

“당신도 같은 경우이신지요?”

가을의 왕이 조금 곤란한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음, 미안하군. 나는 사실 유희로 하는 거네. 물론 히에무스를 돕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재밌을 것 같아서 하는 거야.”

솔직한 그의 말에 렌투스도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어쨌든 이유를 알았으니 저도 진지하게 임하도록 하지요.”

“부탁하네.”

“제 생각인데 당신들은 그냥 일반 귀족이 아니라 마법사 출신 귀족으로 설정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마법사 귀족?”

렌투스의 옆에 있던 말이 푸르릉거렸다. 그가 상냥한 손길로 말갈기를 쓰다듬었다.

“어차피 지금처럼 어설픈 모습으로 대중에게 나선다면 이상한 시선을 받게 될 겁니다. 마법을 쓰는 걸 숨기지도 못하는 상황이 빈번할 거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처음부터 마법사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브로미오스가 맞장구를 쳤다.

“인간으로 변신해도 마법을 쓰실 수 있으시지요? 마나의 양은 충분해 보이는데.”

“가능하네. 정령왕의 힘을 쓰지 못할 뿐 어지간한 건 다 할 수 있어.”

“그럼 그런 설정으로 고치겠습니다.”

미소 띤 얼굴로 두 정령왕을 훑어봤다. 그제야 속이 비칠 듯 얇고 하늘하늘한 튜닉이 눈에 들어왔다. 렌투스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두 분, 갈아입을 인간의 옷은…… 있습니까?”

두 정령왕이 마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동시에 입을 열었다.

“당연히 없지.”

***

“……일린. 에일린!”

“아, 예! 폐하.”

멍하니 있던 에일린이 급히 렉스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거냐?”

“송구……합니다.”

에일린은 민망해서 살짝 얼굴을 붉혔다. 렉스와 산책하는 도중이었는데 자꾸 히에무스를 떠올렸다. 인간으로 살기 위해 뭔가 준비를 하러 간다고 했는데 잘하고 있을지 걱정됐다. 렉스가 다소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 몸이 안 좋은 것이냐? 아니면 무슨 걱정거리라도?”

“아, 아닙니다. 폐하.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예고 없이 올라온 한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더니 그대로 그를 향하게 했다. 선명한 파란 눈을 똑바로 부딪쳐왔다.

“곤란하군. 나와 함께 있을 때 다른 생각을 하다니, 서운하구나, 에일린.”

“소, 송구합니다.”

황급히 손을 들어 그의 것을 내리려 시도했다. 떡 버틴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부드럽지만 낮고 단호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나와 함께 있을 땐 집중해주지 않겠느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바로 그의 입술이 닿으려 했다. 이러면 곤란한데! 즉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멈춰진 행동과 함께 그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다시 좀 더 힘을 주자 그가 자세를 곧추세웠다.

“아직…… 저번 일로 마음이 상해있는 것이냐?”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완전히 떨쳐버렸다고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이유가 더 컸다. 키스라는 게 가볍게 생각하면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건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나 그런 거고 마음이 담긴 상태라면 결코 가벼울 수가 없는 행위니까.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했다. 좋은 아르바이트라 생각해서 되도록 한 달 정도는 채우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게다가 상대는 제국의 황제. 그것도 ‘사자왕’이라는 별명을 단 사람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에일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뭐든 얘기해 봐라.”

여전히 황제의 팔에 얹혀있던 한 손을 빼서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모아 쥐었다.

“황공합니다만 이 일을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걱정과 약간의 분노가 섞인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약간 쉰 듯 거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유가 뭐지? 내가 납득할만한 사정인가?”

“그건…….”

누구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유긴 하지.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말하기도 어려웠다. 에일린은 잠시 갈등했다. 대충 다른 변명을 할 것인지 아니면 사실 그대로를 말해야 할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설픈 이유로는 황제를 단념시킬 수 없을 것이다.

“도저히 폐하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요.”

렉스가 조금 찌푸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전에도 얘기하지 않았느냐? 에일린. 비록 정식 결혼은 아니더라도 널 아내로 맞아서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여전히 유일한 아내가 아니면 싫다고 말하는 거냐?”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마주 잡은 손을 꽉 쥐었다.

“노력해도 전혀…… 폐하에 대한 마음이 생겨나질 않습니다.”

“……!”

***

드라코니아 왕국의 왕도 주위에 위치한 광활한 숲. 빽빽하게 밀집한 산림 덕에 ‘그림자 숲’이라는 별칭을 가진 ‘움브리아 숲’. 온갖 짐승들과 마물들이 사는 장소였다. 물론 그들은 한층 깊숙이 숨어 있겠지만 간혹 숲 외곽이나 민가에도 출몰해 피해를 끼치곤 했다. 특히 혹독한 기후가 이어지는 겨울에 그런 일이 더 자주 발생했다. 드라코니아 왕실에선 피해를 예방한다는 취지에서 그들을 잡는 사냥대회를 분기별로 개최하곤 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모처럼 수많은 인파가 숲 어귀로 몰려들었다. 숙영을 하는 군대 막사처럼 크고 작은 천막들이 세워졌다. 사냥에 참가하는 기사들의 말과 개들, 종자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거기다가 관람이나 응원 목적으로 온 귀족 여인들과 그들의 시중인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무척 번잡하고 활기찬 분위기였다. 날씨도 겨울답지 않게 화창하고 따스해 축제다운 흥겨운 열기로 가득 찼다. 그 한쪽에서는 나이든 귀족 한 무리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오, 정말 훌륭하군요. 사냥대회를 열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날을 찾기 힘들 정도로.”

무리 중의 한 남자가 말문을 열었다.

“올해는 마물들 출몰 소식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사냥대회를 개최하는군요.”

이어 다른 이들도 연달아 화제를 올렸다.

“이번엔 짐승들 사냥에 더 주력하랍디다. 잡은 고기를 빈민들에게 나눠준다고요.”

“음, 그래서인지 가벼운 무장을 한 사람들도 꽤 보이는구려.”

“그렇군요. 특히 저기 두 사람은 정말 별 무장을 하지 않았는데……. 누구지요?”

한 귀족이 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인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훤칠하고 준수한 모습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의 옆에 있던 자가 실눈을 뜨고 살펴보더니 곧 커다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여러분들은 모르시겠군요. 항상 변경에 계시던 분들이니. ‘클라인’ 백작과 그의 외사촌 ‘파인스’ 남작이잖소.”

“클라인 백작과 파인스 남작?”

“그렇소. 아젤란 제국 국경 가까이 위치한 ‘테라티오’ 지방의 영주라오. 들어보신 적 없소? 퀴리오스 전하께서 각별히 아끼시는 젊은 인재들이라고 들었는데.”

그 말을 들은 주변 인물들이 겸연쩍은 얼굴로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한 사람이 손뼉을 가볍게 치더니 말을 꺼냈다.

“아마…… 유서 깊은 마법사 귀족 가문이라고 한 것 같은데.”

“아아, 그러고 보니 나도 언젠가 들은 것 같군. 나이가 드니 뭘 자꾸 잊어버려서 잠시 헷갈렸나 보오. 알지요. 클라인…… 백작과 파인스 남작.”

“만나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하나같이 인물이 훤하구려.”

“그러게요.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군.”

“음, 정말 그러네요. 마치 후광이 비치는 것 같소.”

“이야, 인기가 장난 아닙니다그려, 벌써 수많은 귀족 아가씨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모양이오.”

“당연한 것 아니오? 나라도 반할 것 같구려.”

나이 든 그들마저 매료된 듯 두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저는 카우덱스 후작가 장녀인 ‘벨리타’예요.”

“호호, 저는 차녀 ‘세실리아’입니다.”

“남작님! 저는 알로스 백작가 여식 ‘실비아’라고 해요.”

“전 나비드 남작가 삼녀 ‘안젤리나’랍니다. 꼭 기억해주세요.”

“백작님, 저는…….”

눈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벌써 몇 명째 소개받고 인사를 나누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히에무스는 갑자기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까지 앞다퉈 두 사람 앞으로 운집했다.

“오랜만입니다, 클라인 백작님. 저 기억하시겠지요?”

“격조했소. 클라인 백작, 파인스 남작.”

그들 뒤쪽에 서 있던 렌투스가 인사하는 시범을 보여주며 사람들의 신분을 알려주었다. 마법을 통해 보내는 작은 소리여서 인간들 대부분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정령인 그들에겐 문제 될 것 없었다.

“저자는 라시스 백작입니다.”

히에무스와 브로미오스는 렌투스가 일러주는 대로 얼른 응대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라시스 백작.”

“파르마크 공작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다니, 반갑습니다. 파르마크 공작님.”

얼떨떨한 얼굴에 조금은 멍한 상태의 히에무스와 달리 브로미오스는 한껏 과장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들과 어울렸다. 렌투스와 브로미오스가 히에무스에게 눈치를 주자 그도 마지못해 대충 응답하는 시늉을 했다. 뭐든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브로미오스는 귀족 아가씨들 손등에 입까지 맞추며 대했다. 하지만 히에무스는 그러지 않았다. 에일린 이외엔 그런 입맞춤조차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별 상관없는 듯했다. 렌투스가 소곤거리며 넌지시 말해줬다.

“대부분 지금처럼 묵례만 해도 괜찮지만 당신들보다 좀 더 높은 신분에 속하는 여성이 직접 손을 내밀 경우엔 입을 맞추셔야 합니다.”

“그러고 싶지 않다. 에일린 이외엔 키스하고 싶지 않아.”

히에무스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냥 입술을 대는 시늉만 해도 됩니다. 그 정도는 하셔야지요.”

“……알겠다.”

내키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이런 것 정도는 자연스럽게 해내야 하지 않겠는가? 여전히 성에 차지 않았으나 생각을 고쳐먹고 적극적으로 임하기로 다짐했다. 때마침 파르마크 공작의 부인이 손등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명백히 히에무스를 향한 손이었다.

“호호호, 처음 뵙는군요. 클라인 백작과 파인스 남작.”

히에무스는 잠깐 머뭇거리다 곧 그 손을 가볍게 잡고 입맞춤하는 시늉을 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파르마크 공작 부인.”

그가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자 렌투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빰빠라 빰-

왕족 일행의 당도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의정관의 우렁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드라코니아의 위대하신 대왕 ‘퀴리오스 15세’ 전하 납시오.”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대열을 정돈해 적당한 자리로 가서 도열했다. 누런 잔디 위로 길게 난 공간을 가르며 퀴리오스와 왕후인 케레시아, 공주 스킬라가 위풍당당하게 나타났다. 모두 세 마리 준마 위에 의젓하게 올라탄 상태였다. 다들 아까보다도 휘황찬란하게 꾸몄다. 태양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그들의 외양만으로도 가히 장관이라 할 만했다. 퀴리오스는 사냥대회답게 미스릴로 만든 사슬 갑옷과 보검을 갖췄다. 투구는 쓰지 않고 묵직한 황금 보관으로 대신했다. 스킬라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신경 써서 꾸민 모습이었다. 오렌지색 블리오에 은여우 털을 덧댄 황금색 망토, 양 갈래로 땋아 내린 긴 머리 위로 하얀 베일과 호화로운 티아라를 눌러썼다. 그녀가 두리번거리며 히에무스를 찾았다. 곧바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습관처럼 찬탄을 내질렀다.

“아아…….”

히에무스도 드라코니아 귀족들이 입는 의상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저번에 정령의 옷을 입었을 때도 정말 눈이 부셨지만 지금도 그에 못지않게 너무나 아름다웠다. 은빛 자수로 장식된 푸른 남성용 블리오에 크림색 망토를 늘어뜨린 모습이 참으로 멋져 보였다. 곧게 솟은 새하얀 콧대와 날렵한 턱선, 서늘한 은청색 눈동자가 가슴을 떨리게 만들었다. 당당한 몸과 커다란 키, 그를 감싼 신비로운 냉기까지 어느 것 하나 황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쩜 저렇게 아름다운 이가 다 있을까? 수 천 년의 세월을 살아오며 숱한 남자들을 봐왔지만 진정 히에무스만큼 매혹적인 존재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문득 스킬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주위에 몰려든 귀족 영애들 때문이었다.

“뭐야, 저것들!”

어여쁜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거라 믿기 힘들만큼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죽일 듯 노려봤다. 그녀의 안광에서 나온 무시무시한 기에 눌려 여인들이 슬금슬금 히에무스 주변에서 멀어졌다. 썰렁할 정도로 히에무스의 곁이 비자 비로소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다 히에무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화사한 미소를 한껏 지어 보였다. 순간 위기감을 느낀 렌투스가 히에무스의 반응을 살폈다. 공주의 저 매력적인 표정을 본다면 그도 반하게 되는 것 아닐까 해서. 브로미오스 옆에 서서 히에무스가 낮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저 흑룡은. 또 저런 괴상한 눈빛으로 쏘아보다니.”

“괴상하다니? 엄청난 미녀 같은데?”

“미녀는 무슨, 에일린 발끝에도 못 미치는데. 어쨌든 불쾌하군, 볼 때마다 저런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하다니, 참 별난 용이 아닌가.”

“쿡!”

렌투스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괜한 걱정이었다.

***

“노력을 해도…… 말인가?”

한동안 말이 없던 렉스가 낮고 스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에일린은 마주잡은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날카롭게 꽂히는 그의 시선이 머릿속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그렇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더 이상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메마른 대기를 훑고 한줄기 겨울바람이 몰아쳤다. 문득 고개 들어보니 북풍 휘하에 있는 바람 정령들이 슥 지나가고 있었다. 다들 에일린을 알아봤는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주변을 맴돌았다. 그 바람에 에일린과 렉스의 옷자락이랑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나부꼈다. 제퓌가 냉큼 소리쳤다.

“아, 뭣들 구경하는 거야! 빨리 지나가 버리라고, 왕께서 아시면 혼내실 거야.”

그들 중의 하나가 말을 건넸다.

“너희들 좋겠다. 인간 여자 옆에 있으면 재미있는 일도 참 많겠지?”

아두스가 우쭐대며 얼른 대답했다.

“뭐, 매일 똑같은 일만 하는 것보다 낫기는 하지. 알다시피 인간들은 참 이상하거든.”

“맞아, 시도 때도 없이 이상한 인사를 하고, 막무가내로 화도 내고, 별난 일도 많고 종잡을 수가 없지. 그럭저럭 재밌기는 해.”

프리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제퓌가 조금 소리 높여 일렀다.

“어서 가보도록 해. 너희들 땜에 에일린님이 감기라도 들면 어떡해. 차가운 우리들 기운이 이렇게 몰려 있으면 인간에게 해롭단 말이야.”

“쳇, 알았어.”

조금 미련이 남는 듯 아쉬운 표정을 지은 겨울 정령들이 멀찍이 날아갔다. 멍하니 그들을 응시하는데 렉스의 느릿한 한 마디가 들렸다.

“또 내게 집중하지 않는구나, 에일린.”

“아, 송구합니다. 폐하.”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하아…….”

한숨소리였다. 힐끗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자신의 까만 고수머리를 흩트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당장 날 사랑하게 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시일이 좀 걸릴 수도 있겠지.”

“예?”

“뭔가 결론을 내리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은가?”

“…….”

렉스가 머리에서 손을 내리며 팔짱을 꼈다.

“에일린. 혹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거냐?”

“그건…… 아닙니다.”

느릿하게 머리를 저었다.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보다는 버거웠기 때문이다. 자신에 비해 너무 넘치는 그의 마음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렉스의 곁에서 후궁으로 사는 건 그녀가 정말 바라는 삶이 아니었다. 그녀의 뜻은 변함없었다. 한 남자의 유일한 사랑이 되어 행복하게 사는 걸 원했다. 입을 다문 렉스가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에일린도 잠자코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부르르 몸이 떨려왔다. 온화한 날씨라 해도 겨울이었으니까.

“에일린.”

낮고 조금 거칠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내게 기회를 다오.”

“예?”

“저번에 널 실망시킨 것은 안다.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도 많이 반성하고 있으니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않겠느냐?”

“폐하…….”

“약속하마. 다시는 널 실망시키거나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반드시 행복하게 해줄 테니 좀 더 나를 지켜봐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페하. 저는 말씀드렸다시피…….”

“황제의 명이다.”

“……!”

“짐이 명령하기 전까진 일을 그만두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향했다.

“너도 아직 날 제대로 모르지 않느냐? 몇 번 더 나를 만나보며 마음을 정해도 되지 않을까? 부탁이다.”

에일린도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푸른 두 눈동자가 바람이 이는 강물처럼 일렁였다. 아니, 불꽃이 일어나는 것 같다 해야 할까. 너무나 차갑고 동시에 타오르는 듯 뜨겁게 느껴졌다.

“나는 그대에게 해줄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많아. 그러니 좀 더 지켜봐 다오. 나도…… 너무 서두르지 않을 테니까.”

속삭이듯 간절한 목소리가 더해졌다.

“그래줄 수 있지?”

“…….”

렉스의 얼굴에 다시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그녀의 침묵을 긍정의 대답으로 해석한 것 같았다.

“이제 그만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라피스 궁의 수석 요리장에게 일러 오찬을 준비시켰다. 네 맘에도 들 거야.”

“망극……합니다.”

오늘은 틀렸다. 황제를 납득시키려면 좀 더 준비가 필요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라고 한다면 되는 걸까? 히에무스가 완전한 인간의 조건을 갖춘 후에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 주장하면 믿어줄까? 에일린은 렉스를 따라가며 먼 하늘을 우러러봤다. 그쪽 방향에 드라코니아 왕국이 있다고 들었다. 그는 잘하고 있을까? 정말 인간이 될 수 있는 걸까? 자신 때문에 무리하는 거면 어쩌지? 그를 믿고 있지만 어쩔 수없이 걱정이 됐다. 뒤에서 따르는 정령들의 잡담이 신경 쓰였다.

먼저 입을 연 건 제퓌였다.

“에일린님, 저번에 우리 왕을 사랑한다고 하시지 않았어? 왜 아니라고 하는 거야?”

아두스가 이어 말했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그러셨어.”

“그래? 난 두분이 연인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닌 건가?”

“글쎄…….”

늘 자신만만하던 아두스가 말끝을 흐렸다. 말없이 날던 프리기가 대뜸 물었다.

“연인이 되면 지금이랑 뭐가 달라지는데?”

아두스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음, 인간들을 지켜보면 연인들은 대체로 매일 붙어있더라고. 그러다 혼인해서 한집에 살고, 또 아기도 낳고…….”

프리기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에일린님과 우리 왕께서도 연인이 되면 혼인을 하는 거야? 아기도 낳고, 그런 거야?”

“그, 그건…….”

아두스는 말문이 막혔다. 오늘 동료들의 질문은 대답하기 어려운 것투성이였다.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궁리해 봤지만 적당한 답을 찾기 힘들었다. 인간 연인들을 종종 지켜본 경험은 있지만 정령끼리의 연인은 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 정령과 인간의 연인이라면……. 알고 있는 경우는 한 가지뿐이었다. 얼마 전 봄의 여왕이 한 인간 남자에게 빠져 지내다 금기를 어겨 벌을 받은 일. 무려 백 년간이나 정령왕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벌이었다. 그 생각에 이르자 아두스는 문득 싸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서늘해진 눈으로 앞서 가는 에일린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에일린 혼자 얼굴을 붉혔다.

***

“꺄악!”

“마물이다! 용이 나타났어!”

갑자기 하늘에 거대한 날개를 퍼덕거리며 하얀 용 한 마리가 나타났다, 돌풍 같은 기세로 하강하더니 그대로 사냥대회가 벌어지는 현장을 덮쳤다. 이어 임시로 마련된 단상 위에 앉아 있던 스킬라 공주를 채서 날아올랐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활을 쏘고 마법 공격을 날렸을 때는 이미 저만치 멀어진 후였다.

“쫓아라! 모두 어서 저 흉포한 용을 따라가 공주를 구해라!”

“알겠습니다!”

사냥을 위해 대기하던 귀족 남자들과 마법사, 왕족 호위를 맡은 기사단까지 모두 나섰다. 퀴리오스 왕이 단상 밑으로 내려와 우왕좌왕 돌아다니며 외쳤다.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였다.

“누구든 공주를 구해오는 자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소! 부탁드리겠소, 부디 소중한 내 딸을 구해 주시오!”

“염려 마십시오! 전하!”

저마다 씩씩한 대답과 함께 분주히 용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재촉하는 퀴리오스의 눈짓에 따라 브로미오스와 히에무스도 말에게 박차를 가하며 달려 나갔다. 그 누구보다도 빠르고 거침없는 질주였다. 다른 이들도 저마다 노력하는 중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들만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일부 기사들은 허둥대다 말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는 자도 있었다. 더러는 말이 엉뚱한 곳으로 빠져버렸다. 히에무스와 브로미오스, 그러니까 클라인 백작과 파인스 남작만 백룡을 제대로 쫓아 그림자 숲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몇몇 기사들과 귀족들이 그들 뒤에서 따라오기는 했다. 목격자, 즉 관객도 필요하니 말이다. 제법 달린 끝에 발가락으로 공주를 움켜쥐고 있는 백룡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지금입니다. 마법 공격을 하세요.”

렌투스가 마법으로 실어 보낸 목소리로 신호를 주었다. 히에무스가 즉시 그를 향해 바람의 공을 날렸다.

“캬오오!”

제대로 적중했는지 백룡이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내더니 약간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브로미오스도 마법공격을 보냈다.

“캬악!”

연기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새된 신음을 내지르며 그가 발가락으로 쥐고 있던 공주의 몸을 떨어뜨렸다.

“공주님 몸을 받아주세요!”

스킬라 공주의 공포로 뒤덮인 외침이 새어 나왔다.

“꺄아악!”

히에무스가 재빨리 마법 주문을 외워 그녀의 몸을 받아들었다. 흐트러진 긴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아름다운 공주의 몸이 백마 위에 앉아 있는 마법기사의 팔에 가뿐하게 안겨 들었다. 조금 둔한 충격에 그 기사의 은빛머리카락이 함께 하늘로 흩날렸다.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둘의 모습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세상의 음유시인들이 봤다면 앞다퉈 노래할 만큼 멋지고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휘청거리는 몸으로 날아가던 렌투스가 아래를 내려다보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만하면 이번 연극도 대성공인 것 같았다.

“와아아!”

지켜보던 관객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환호성을 토해냈다. 저마다 뭐에 홀린 듯 꿈결처럼 황홀한 표정이었다. 바야흐로 용에게서 공주를 구한 용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안드로스 대륙 전체에 오래도록 회자될, 그런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전설 속 주인공이.

***

“오오! 정말 장하도다. 드라코니아의 공주를 구해오다니!”

렌투스가 히에무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퀴리오스의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꿇어앉아 있던 히에무스와 브로미오스가 황급히 대답했다.

“황송합니다, 전하.”

대본에 적힌 대로 대사를 치긴 했지만 마뜩잖은 마음에 입술을 씰룩거렸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용 따위에게 무릎을 꿇고 이런 같잖은 인사를 한다는 게 썩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인간 노릇을 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늠름하고 훌륭한 젊은이들에게 큰 상을 내려야겠소. 아니 그렇소?”

퀴리오스가 도열해 있는 신하들을 향해 물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전하. 그 흉포한 용에게서 무사히 공주님을 구해오셨는데 당연 큰 보답을 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뭐가 좋겠소? 일단 경들의 생각을 듣고 싶소.”

“작위를 한 단계 높여주심이 어떨지요?”

누군가가 즉시 주청했다. 퀴리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의견이긴 한데 그것만으론 좀 부족하지 않겠소? 내 하나뿐인 공주의 목숨을 구해준 이들인데.”

뜻밖의 말에 히에무스와 브로미오스가 고개를 살짝 들어 퀴리오스를 바라보았다. 눈가에 잔주름이 진 채 미소를 품고 있었다. 깜짝 선물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의 곁에 있던 왕후 케레시아가 해사한 얼굴로 한 마디 거들었다.

“당연히 그보다 더 큰 상을 내리셔야지요. 그 어떤 보답을 하더라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래요, 아바마마. 제일 큰 상을 내려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왕후 옆에 있던 스킬라 공주가 초롱초롱해진 눈망울로 간청했다.

“음…….”

퀴리오스가 그의 턱을 덮은 짧은 수염을 몇 번 매만졌다. 뭔가 심사숙고한다는 걸 보여주려는 행위 같았다. 잠시 후 손을 내리며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러면 어떨까 싶소. 가장 큰 공을 세운 클라인 백작을 내 양자로 삼으면?”

“뭐?”

히에무스는 저도 모르게 짧게 되물었다. 급히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이 용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걸까? 퀴리오스의 위엄 있는 말이 계속되었다.

“내 아들로 삼고 공작 작위를 내리도록 하겠소. 아울러 함께 공을 세운 파인스 남작에겐 백작 작위와 영지를 내리도록 하면 좋을 듯한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시오?”

“와아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하십시오! 전하.”

“좋은 생각이십니다!”

“아무렴요, 참으로 현명하신 결정이십니다.”

모여 있던 대신들과 귀족 무리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한꺼번에 뭔가에 현혹된 듯한 모양새였다. 퀴리오스가 히에무스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감격에 겨운 듯 살짝 눈물까지 맺혔다.

“히에무스 칼릭스 레 클라인 백작! 그대를 과인의 양아들로 삼겠다. 그리고 공작위를 내릴 터이니 그리 알고 대기하도록 하라. 곧 정식 입적과 수여절차를 밟을 것이로다.”

“망극……합니다. 전하.”

어쨌든 대본에 있던 대로 말했다.

“으하하! 이제 아바마마라고 해야지!”

히에무스는 일순간 말문이 막혀 황당한 눈빛으로 퀴리오스를 쏘아봤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스킬라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간드러진 한마디를 마법에 실어 보내왔다.

“제 선물이에요, 히에무스님.”

어느새 해질 무렵이었다. 에일린은 산책 친구 일을 마치고 케일론의 성으로 가기 위해 마법청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길목에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체를 알아 본 에일린은 흠칫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안드라였다. 그가 천천히 걸어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세 정령이 다시 경계 태세를 취했다.

“무슨 일이시죠? 당신은 엘시아 왕녀를 모시는 분 같은데.”

애플턴 부인이 점잖은 말투로 확인했다.

“예, 안드라 루이스 엘 캐스카트라 합니다. 잠시 그쪽 영애 분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무슨 일이신지? 왕녀의 분부로 온 건가요?”

“아닙니다. 제 개인적으로 조금 드릴 말씀이…….”

에일린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그게…….”

안드라가 주변인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듯 눈치를 살폈다. 에일린은 조금 두렵긴 했지만 수행인들에게 부탁했다.

“조금 물러나 주시겠어요?”

정령들이 곁에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뭔가 수를 쓰려 했다면 이렇게 대놓고 나타나진 않았을 테니까. 사람들이 떨어지자 다시 안드라를 향했다.

“이제 말씀해 보세요.”

안드라가 다소 긴장한 듯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염치없는 줄 알지만 저번에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감사라니요?”

“마법사란 걸 밝히지 않으신 점.”

“…….”

그날 이후 안드레아스는 줄곧 궁금했었다. 어째서 자신이 마법사라는 걸 황제나 케일론에게 밝히지 않은 걸까 하고. 에일린의 얼굴을 살폈다. 조금 복잡한 표정이 어려 있는 듯했다. 하지만 변함없이 맑고 순수해 보이는 연초록 눈동자를 보니 그의 마음이 되레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조용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한 번 용서해 드리기로 한 거예요.”

“어째서죠?”

“말씀드렸잖아요. 당신을 줄곧 동경했다고요.”

“……?”

“당신은 모르겠지만 전 한때 당신과 엘시아 왕녀에게서 정말 많은 위로를 받았거든요. 당신들 덕분에 살아가는 힘을 얻은 적이 있을 정도로.”

그랬다. 당신들이 펼쳐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계속 살아가자고 마음먹은 날도 있었다. 당신들만이 내 심장을 뛰게 하고 기쁘게 해주는 날도 있었으니까. 담담하게 말하려 했는데 조금 울음 섞인 목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아…….”

누군가가 한 대 친 듯 안드레아스의 가슴에 묘한 충격이 일었다.

“이젠 그러지 않을 거예요.”

“예?”

“용서해주는 건 더 이상 없을 거라고요.”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럼…….”

에일린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드라, 아니 안드레아스도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그녀가 그대로 그를 지나쳐 갈 때까지 한동안 몸을 세우지 않았다. 붉게 변한 얼굴을 도저히 들 수가 없었으므로. 수치심과 미안함과 이름붙이지 못할 낯선 감정들이 그의 마음속을 사납게 휘저어댔다.

***

케일론의 성이었다. 3층에 위치한 한 방에서 하인이자 제자인 브레이에게 마법 수업을 해주는 중이었다. 브레이가 열심히 주문을 외며 조그만 불의 구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와아, 보십시오! 케일론님. 저, 해냈습니다.”

“…….”

케일론은 아까부터 창문 밖을 멍하니 응시한 채였다. 브레이가 다시 한번 불렀다.

“케일론님!”

“으응?”

그제야 그가 돌아보며 뒤늦은 반응을 보였다.

“그래, 해냈군. 그렇게 하면 된다. 지금은 작은 것밖에 못할 테지만 마나의 양이 늘고 자꾸 연습하다보면 좀 더 크기를 늘릴 수 있을 거다.”

“예.”

그 말이 끝나자 다시 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뭔가 걱정거리라도 있습니까?”

브레이가 약간 찌푸린 표정으로 물었다. 요즘 자신의 주인이자 스승인 케일론이 이상해졌다. 자꾸만 멍해지는가 하면 필요 이상으로 투덜거리거나 화를 내기도 했다. 특히 에일린에게 뭔가 서운한 일이라도 있는지 눈에 띄게 피하고 퉁명스럽게 대하는 것 같았다. 브레이는 이참에 주인님의 심기를 잘 살펴 둘의 사이를 좀 유연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런 게 뭐 있겠어.”

“저, 그럼 혹시 에일린에게 뭔가 화나신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케일론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했다.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에일린에게 뭔가 걸리는 일이 있는 것이다.

“그녀에게 화날 일이 뭐 있겠나? 넘겨짚지 말거라. 그리고…….”

그가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며 주의를 줬다.

“이제 그냥 에일린이라고 이름만 부르면 안 돼. 황제 폐하의 여인이 됐으니까. 성(姓)까지 받아 귀족이 된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다.”

“예? 아, 하지만 그녀가 제게 계속 이름만으로 불러달라고 했는데요?”

“황제 폐하께서 귀족 대접을 해주시는데 네놈이 친구처럼 대하겠다는 거냐?”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브레이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왠지 예전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성에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그의 일이 다소 편해지고 시간도 넉넉해졌지만 에일린과 자신과 주인님, 단 세 사람만 살던 때가 훨씬 분위기가 좋았다. 그때는 왠지 모르게 주인님이 많이 부드러워졌는데……. 지금은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쌀쌀해진 느낌이 들었다.

아래층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문밖으로 들렸다.

“어, 에일린, 아니 에일린님이 오셨나 봅니다.”

케일론이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에 띄게 밝아진 표정이었다. 즉시 달려가 그대로 문손잡이를 잡더니 멈칫거렸다.

“케일론님?”

브레이가 다가가 문을 열며 말했다.

“안 나가 보실 겁니까?”

“백작이자 성주인 내가 먼저 나가 반겨줄 필요 있나? 직접 잘 다녀왔다 인사하러 오는 게 맞지.”

왠지 골이 나는 듯 뾰족한 목소리였다. 브레이는 그 주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평소에도 좀 별난 사람이니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그렇긴 하지요. 케일론님께서 더 높은 신분이시니.”

“…….”

“그럼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오늘 황궁에 갔던 일도 무척 궁금하니, 가서 이것저것 물어봐야겠습니다.”

머리를 꾸벅 숙이고 브레이 혼자 방밖으로 나갔다. 이상하게도 뒤통수가 따가웠다.

***

케일론은 굳어 버린 듯 꼿꼿이 서 있다 마법 주문을 외웠다. 예전에 썼던 원거리 소리를 듣는 마법이었다. 조금 마음이 켕겼지만 뭐, 비밀 이야기를 듣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지 않을까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물러갔는지 에일린과 브레이의 기척만 들렸다.

- “에일린……님. 잘 다녀오셨어요?”

- “예. 근데 브레이. 왜 갑자기 그렇게 부르세요? 어색하게.”

- “케일론님께서 이제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하셔서요.”

- “왜요?”

- “저, 그게…….”

- “뭔가요? 어서 말해 봐요.”

- “이제 황제 폐하의 여인이 되셨다고…….”

- “엑! 무슨 그런 소리를 한대요? 폐하와 전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 “전에 폐하께서 오셨을 때 그…… 함께 밤을 보내셨잖아요. 그러니까…….”

- “참 나, 그땐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에요. 왜들 그렇게 넘겨짚고 그러나 몰라. 불쾌하게.”

- “그, 그래도 폐하께서 이름을 내리셨으니 귀족 영애가 되신 것 아닌가요?”

- “글쎄, 모르겠어요. 정식으로 작위나 지위 같은 걸 받은 것도 아니잖아요. 어색하니까 하던 대로 그냥 이름만 불러주세요. 부탁할게요.”

- “하하, 그러죠.”

- “케일론님은 바쁘세요?”

- “아뇨, 근데 별로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아요. 이럴 땐 아예 피하는 게 상책이에요. 제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그냥 가서 쉬세요.”

- “예, 고마워요.”

“저 빌어먹을 놈이…….”

혼잣말로 브레이에게 욕을 했다. 하지만 얼굴에 슬그머니 웃음이 피어올랐다. 왠지 뺨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황제 폐하와 아무 사이도 아니고 그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 이리도 기쁘게 들리다니. 왜 그런지 모르겠다. 마음이 자꾸 어디론가 통통 튀는 것 같았다. 종일 시무룩해 있다 갑자기 미친놈처럼 실실거리다니. 이렇게 대책 없이 들뜰 때는 뭔가 다른 일에 몰두해서 가라앉히는 게 상책이다.

‘그래, 간만에 장부 정리나 해 볼까? 그것만큼 마음을 안정시키고 집중하게 해주는 것도 없지.’

서둘러 장부를 보관해둔 방으로 향했다. 구름이라도 밟는 것처럼 발걸음이 가벼웠다. 같은 층에 위치한 제일 끝 방이었다. 마법 주문을 읊어 방문에 걸린 자물쇠를 풀었다. 미끄러지듯 경쾌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크고 작은 여러 궤짝과 장부가 꽂힌 책장으로 꽉 들어찬 모습. 그가 평생에 걸쳐 모은 금은보화가 안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문을 닫고 재빨리 장부를 하나 꺼내들고 휙휙 펼쳤다.

펄럭 펄럭.

계속, 계속 뒤적이기만 했다. 숫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에일린의 얼굴만 떠올랐다. 붉어진 얼굴로 한동안 그 행동을 반복하다 어느 순간 장부 사이로 얼굴을 푹 파묻었다.

“하아, 정말 왜 이러는 건가…….”

심장이 제멋대로 춤을 췄다.

***

에일린은 저녁 식사를 끝낸 후 방으로 들어왔다. 시녀들에겐 피곤하니 혼자 휴식을 취하겠다고 말해뒀다. 파김치처럼 몸이 축 늘어졌다. 내내 긴장한 상태로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스트레칭을 좀 해준 후 침대에 누웠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데 창문 밖에서 낮은 울림이 들렸다.

“에일린.”

히에무스의 목소리였다. 벌떡 일어나 덧문을 열었다.

“히……!”

하마터면 큰 소리를 낼 뻔했다. 손으로 얼른 입을 막자 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자고 있었나?”

“아뇨, 괜찮아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가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자 세 정령도 따르려 했다.

“너희들은 밖에 대기해라”

“예.”

그가 들어와서 직접 나무 덧문을 닫았다. 에일린이 얼른 그의 손을 끌어 침대 위에 걸터앉게 했다.

“오늘, 가셨던 일 어떻게 됐어요? 잘 된 건가요?”

그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드라코니아 왕국의 공작이 됐어. 곧 이곳으로 와서 살게 될 거야.”

“예? 이곳에서 살다니요?”

“알아보니 다른 왕국의 왕족들이 아젤란의 황도로 들어와 사는 걸 환영하는 분위기더구나. 나도 이쪽에서 살고 싶다고 퀴리오스에게 말해두었다.”

“퀴리오스라면……?”

“드라코니아의 왕이지. 7000살쯤 먹은 흑룡의 화신이야.”

히에무스가 에일린에게 그간 있었던 일과 오늘 겪었던 일들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럼 당신이 드라코니아의 왕자가 된 건가요?”

“그런 셈이지. 우습긴 하지만.”

별 기대가 없었는데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마법이 개입돼 벌어진 일이니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곧 이곳 카르디아에 지낼 곳도 마련할 테니 그땐 그대도 여기 마법사의 성에서 벗어나 나와 함께 지내도록 하자.”

“어, 정말요?”

에일린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눈을 빛냈다. 그렇게 되면 참 좋을 것 같았다. 히에무스와 함께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이번에는 그에게 당당히 집세를 내고 살 예정이다.

“와, 좋을 것 같아요. 빨리 그날이 오면 좋겠어요.”

“최대한 빨리 마련하도록 할게.”

“예! 엄청 기대돼요.”

에일린이 기뻐하자 그도 흐뭇해져 활짝 웃어주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아, 참. 잊을 뻔했구나.”

그가 마법 공간을 뒤적여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