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7. 두 군주의 방문 (8/24)

7. 두 군주의 방문

며칠 동안 계속된 겨울 폭풍으로 인해 에일린은 거의 성에 갇혀 지내다시피 했다. 물론 그동안 케일론에게서 글을 배웠기에 심심하지는 않았다. 눈 폭풍이 멎은 날, 마침 케일론이 쉬는 날이기도 해서 함께 식당에서 공부를 했다. 열심히 문자를 쓰고 익혔다. 이제 기본 문자는 다 파악했고 단어를 익힐 차례였다. 이곳에선 양피지가 무척 비싸고 종이는 아예 없기에 검은 돌로 된 얇은 석판과 점토로 만든 석필로 필기구를 대신해야 했다. 그럭저럭 쓸 만하긴 했다. 이마저도 브레이의 것을 빌린 거였다.

“종이가 있으면 좋을 텐데.”

“종이가 뭐죠?”

“그런 게 있어요. 그, 제가 꿈에서 읽는다던 책에 보면 나와요. 거기 사는 사람들은 일찍부터 식물 섬유를 물에 불려서 판에 대고 굳힌 제품을 양피지 대신 써왔거든요. 여긴 왜 그런 게 없을까요?”

케일론은 에일린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처음엔 경계하듯 조심스럽게 하던 꿈 이야기를 이젠 대놓고 했다. 그런데 듣고 보면 하나같이 내용이 치밀하고 그럴 듯했다. 눈빛이나 표정도 꾸밈새가 없었고. 거기다 지금 글을 익히는 태도만 봐도 좀 남달랐다. 처음 글을 배우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문자와 글의 체계나 학습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습득 능력도 빨랐다. 게다가 익혀야 하는 글자 밑에 낯선 기호로 주석 같은 걸 달기도 했다. 뭐냐고 물으니 꿈에서 본 문자라고 대답했다.

“케일론님. 여기도 그런 책은 있겠죠?”

“무슨 책 말이죠?”

“학습서나 참고서요. 사전이나 단어집 같은 건 없나요? 철자를 익히려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있긴 하죠. 하지만 내 성의 서고엔 없어요. 그런 수준 낮은 책을 구비할 리가 없죠.”

“그렇구나. 그럼 일일이 적어서 익혀야 하나. 양피지는 없으니 손수건에다 써서 익혀야 할까, 아니 그보다는 나무판자가 나을까……. 뭐가 더 싸게 칠까.”

에일린이 혼자 중얼거렸다.

“나무판자가 더 싸겠죠. 사전과 단어집은 내가 황궁 서고에 가서 빌려다 줄 수 있을 겁니다.”

에일린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어, 정말요? 그럼 좀 부탁드릴게요. 원하신다면 수고비도 치를게요.”

“…….”

케일론이 기분이 좀 상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

“됐어요. 그냥 해줄 테니까. 앞으로 내가 따로 말하지 않으면 비용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예? 왜요?”

“그냥 그러고 싶어요. 그대에게 뭔가를 해주고 돈을 받고 싶지는 않아요.”

에일린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이건 또 소설이랑 내용이 달라진 것 아닌가? 소설책에서 케일론은 지독한 구두쇠로 나와서 무슨 일이건 비용을 따지고 자신이 손해 보는 짓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심지어 황제의 명으로 뭔가를 하고 나서도 따로 대가를 요구하는 캐릭터였는데. 단지 단 한 사람, 사랑하는 엘시아 황녀를 위해서만 이해손실을 따지지 않고 움직였었다. 케일론마저 원작이랑 달라지는 걸까? 어쩌면 그날 무도회에서 엘시아랑 춤을 추지 못하는 바람에 그녀를 사랑할 기회를 놓치게 된 거 아닐까?

에일린은 새삼 케일론을 찬찬히 훑어봤다. 원작과 달라져 이 마법사가 자신을 좋아하게 된 거 아닐까? 만약 그런 거라면……. 자신도 처음과 다르게 그에게 거부감이 줄어들긴 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괜찮은 면이 꽤 있는 사람이었다. 일단 인간이고 유능한 편이고 알뜰하고……. 이 정도면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서브 남주인 히에무스처럼, 케일론과 엮이는 건 의외로 괜찮은 건지도 모른다. 서브 남주는 소설의 큰 줄기를 흔들 정도의 영향력은 없을 테니까. 에일린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떠보기로 했다. 김칫국물을 마시고 싶지는 않으니까.

“케일론님.”

“뭡니까?”

“혹시 저를 좋아하세요?”

“딸꾹!”

그냥 반은 장난삼아 해 본 질문에 케일론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딸꾹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그, 그럴 일이 없잖습니까!”

마법 주문을 외워 딸꾹질을 멈춘 후 내뱉듯이 말했다. 화가 난 듯 보였다.

“어, 죄송해요. 농담이었어요. 그럴 리 없다는 거, 저도 알아요.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역시 이 마법사는 자신에게 다른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주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생각했던 그대로라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케일론은 엘시아 왕녀를 사랑하게 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도 아닌 모양이라고 에일린은 추측했다.

“황제 폐하께서 그대에게 신경을 쓰시니까, 그러니까 나도…….”

케일론은 벌게진 얼굴로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맑은 연초록 눈동자와 촉촉해 보이는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의 키스가 떠오르면서 가슴 속이 쿵쿵거리며 울렸다. 거짓말이다. 황제 폐하랑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폐하의 명령이 내려진 것도 아닌데. 그저 자신의 마음이 그러고 싶었던 것뿐. 이상한 여자다. 귀찮고 성가시고 손해 보는 일을 자꾸만 하고 싶게 만든다. 그리고 또 계속…… 보고 싶게 만든다.

갑자기 아무 말 없이 케일론이 그녀를 뚫어질 듯 쳐다보자 에일린은 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자신이 했던 불순한 생각을 들킨 것 같았다. 그때 마침 제퓌가 다가와 속삭였다.

“에일린님. 왕께서 오셨어요. 방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웬일인지 며칠 동안 찾아오지 않던 히에무스가 온 모양이었다. 내심 기다렸던 터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케일론님. 오늘 수업은 이제 다 하신 거죠? 나머진 저 혼자 익혀도 될 것 같아요.”

“그러도록 하세요.”

주섬주섬 석판과 석필을 챙겨 들고 그에게 머리를 꾸벅 숙이며 최대한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수업료를 내지 않으니 인사라도 정성스럽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서둘러 계단을 뛰듯이 올라가 4층에 위치한 그녀의 방으로 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

“히에무스!”

“에일린.”

청량한 겨울 숲의 향기와 서늘한 공기가 훅 밀려들었다. 언제나처럼 차가운 은빛과 푸른빛이 섞인 긴 머리카락을 드리운 채 찬란한 빛 무리를 두른 그가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의 존재가 그늘져 어두운 방 안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에일린은 새삼 그 이질적인 신성함이 낯설게 느껴져 순간 내딛던 걸음을 멈칫했다. 그의 은청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잘 있었느냐? 에일린.”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가 바람처럼 휙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동안 왜 안 오셨어요? 혹시…….”

해독약을 복용한 걸까?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된 걸까? 에일린은 조금 긴장한 자세로 물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해독약을 먹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먹지 않기를 바라는 두 모순되는 마음이 공존했다.

“이야기한대로 조금 바빴단다. 그리고…….”

히에무스는 이제 습관처럼 매일 나누던 그런 키스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갈증이 난다 하더라도 죽지는 않으니 참기로 했다. 그녀가 진정한 마음에서 해주는 키스가 아니라면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그녀에게 부담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가을의 왕에게서 들은 말도 있어 일부러 며칠 동안 찾지 않은 거였다.

“가을의 왕이 충고를 하더구나.”

“무슨 충고를요?”

몹시 목이 타서 금단 증상이 이는 듯 괴로웠지만 그럭저럭 참아냈다.

“너무 뻔질나게 찾아가면 네가 일찍 싫증을 낼 거라고. 그러니 좀 자제하는 게 좋을 거라는 말을 해주더구나.”

에일린이 풋풋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하, 그랬던 거예요? 해독약을 드셔서 안 오신 건가 했는데.”

지금 에일린의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자신의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인지 실감했다. 그녀가 웃는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이런 얼굴을 자주 대하지 않을 생각을 했다니.

“지금 생각하니 바보 같은 시도였던 것 같구나.”

히에무스의 두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그녀를 응시하자 에일린은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에일린.”

낮고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이내 손을 들어 그녀의 발그레한 뺨을 살살 어루만졌다. 에일린은 그 손길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렜지만 또 한편 부담스럽기도 해 얼른 주의를 돌렸다.

“저, 히에무스. 저번에 말씀하셨던 거 얘기해주세요. 해독약 대신 더 좋은 걸 가져왔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그건…….”

그가 막 이야기를 하려는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브레이가 문을 노크했다.

“에일린! 들어가도 되나요?”

“어, 예!”

히에무스에게 눈짓을 보내고 서둘러 방문을 열었다. 브레이가 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에일린, 지금 바로 나와 함께 내려가요. 황제 폐하께서 오신다고 합니다!”

“예? 뭐라고요?”

에일린은 순간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렉스가 여기까지 웬일이란 말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굳어 있자 브레이가 재촉했다.

“어서요! 폐하를 기다리게 하면 안 돼요.”

“아, 알겠어요.”

에일린은 히에무스에게 다시 눈짓했다. 그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가득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일린이 급히 방을 나가자 그도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방문 밖에 있던 하급 겨울의 정령들도 그들의 왕을 따라나섰다.

***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케일론이 그 새 검은 로브로 갈아입고 대기 중이었다. 서둘러 브레이와 에일린을 성 내벽 안에 위치한 공터로 데려가더니 마법의 힘을 이용해 내벽에 있는 성문을 열었다. 그다음 외벽에 설치된 육중한 나무 성문과 쇠로 된 내리닫이 창살문을 차례대로 개방했다. 에일린은 몇 주 동안 이 성에서 살았지만 성문이 열리는 광경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성을 드나들 땐 항상 순간이동 마법을 이용했으니까.

끼이익!

뻑뻑한 소리를 내며 묵직한 도개교가 내려져 해자 위에 걸쳐졌다. 천천히 그 위를 건너오는 황제 일행이 보였다. 그는 늘 타는 흑마를 몰고 기사단장인 엘로드를 위시한 십여 명의 기사단과 중년의 궁정 마법사, 그리고 시종들을 거느린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뒤쪽에 검은 사두마차 한 대와 힘센 말 두 마리가 끄는 짐마차 한 대가 따랐다. 외벽 성문을 지나 내벽 성문을 통과해 중정에 다다르자 행렬이 멈췄다. 이내 황제를 필두로 모두가 말에서 내려섰다. 행렬의 끝부분을 장식했던 검은 마차에서도 수행인 몇 명이 더 내렸다. 시녀처럼 보이는 여인 세 명과 마부석을 지키던 마부와 젊은 남자 한 명이었다. 케일론이 황급히 다가가 허리를 숙이며 맞이했다.

“폐하, 예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렉스가 두툼한 망토에 달린 후드를 벗으며 웃음 띤 얼굴을 보여주었다.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까만 고수머리가 햇살을 받아 보기 좋게 반짝거렸다. 새파란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욱 맑고 상큼해 보였다. 적당히 선이 굵으면서도 섬세한 얼굴 생김새가 언제 봐도 눈길을 끌었다.

“하하, 노골적으로 눈치를 주는 건가? 예고 없이 찾아왔다고 탓하는 거겠지.”

“아, 아닙니다. 이런 비루한 신의 집까지 찾아주시다니 너무나 황공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케일론은 입에 발린 인사말을 기계적으로 늘어놓았다. 누가 들어도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쉰 목소리였다.

“짐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어찌 사는지 궁금해 한 번 와 본 것이오. 뭐, 다른 이유도 몇 가지 있지만.”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에일린에게 인사했다.

“잘 지냈느냐?”

“예……. 폐, 폐하께서도 안녕하셨어요?”

에일린은 얼떨떨한 얼굴로 머리를 꾸벅 숙이자 렉스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에일린의 인사법이 독특해서 볼 때마다 웃음이 지어졌다. 이곳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인사와 달랐으나 그녀에게는 일상인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여 더 특이해 보였다. 예법에 어긋났지만 렉스는 그 모습도 귀여워 보였다.

“그래. 그대도 건강해 보이는구나.”

“…….”

“이리, 안으로 드십시오, 폐하. 누추합니다만 날씨가 차니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케일론이 정중한 몸짓으로 황제 일행을 성 안으로 안내했다.

‘내가 사는 모습이 궁금하다는 건 그냥 하는 말일 테고 에일린을 보러 온 것일 테지.’

남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렉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기자 수십 명의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에일린 역시 그들을 뒤따르며 조금 불안한 기색으로 주변을 살폈다. 히에무스도 작은 겨울의 정령들을 거느린 채 그들을 따라왔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들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어쩐지 신경 쓰였다. 렉스와 케일론을 노려보는 그의 눈빛이 유난히 차갑고 날카롭게 보여 더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

기사단과 마차를 몰던 마부들은 1층 홀에서 대기하게 했다. 렉스는 엘로드와 시종들 외에 마법사와 시녀들만 대동한 채 접견실로 이동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케일론의 안내를 받아 홀에서 연결된 통로를 따라 가보니 제법 호화롭게 꾸며진 커다란 방이 나왔다. 에일린도 처음 와보는 케일론의 접견실이었다. 내부에 들어서니 그의 성에 있는 방치고는 비교적 공들여서 꾸민 기색이 역력했다. 마법석이 달린 커다란 샹들리에가 네댓 개 달려 있고 벽도 하얀 회벽으로 마감한 모습이었다. 화려한 태피스트리도 몇 장 걸렸고 고급스러운 카펫도 깔렸다. 포근하고 편안해 보이는 소파와 멋들어진 호두나무 탁자까지 적재적소에 갖춰줬다. 하지만 난방이 안 된 상태라 무척 썰렁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케일론이 즉시 마법 주문을 외워 훈훈한 온기가 돌도록 만들었다. 히에무스는 그와 상반되는 더운 공기를 접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케일론이 화려한 팔걸이 의자를 황제에게 권했다.

“앉으시지요, 폐하.”

“음.”

렉스가 자리에 앉고 그의 지시에 따라 케일론과 엘로드, 다른 궁정 마법사가 곁에 있는 소파에 착석했다. 아까부터 긴장한 표정의 브레이가 급히 다과상을 마련하려 부엌으로 달려갔다. 에일린이 그를 돕기 위해 자리를 뜨려 하자 렉스가 말했다.

“에일린, 그대도 여기 내 옆자리로 와서 앉도록 해라.”

옆에 서 있던 히에무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예? 하지만 저는 브레이를 도와줘야 하는데요?”

케일론이 재빨리 조언했다.

“폐하의 명대로 하세요. 브레이 혼자서도 괜찮을 테니.”

“예에…….”

에일린이 난처한 얼굴로 엉거주춤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 히에무스가 그녀의 뒤로 와서 팔짱을 꼈다.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이어 렉스가 뒤에 시립한 시종에게 분부했다.

“리히트 경. 애플턴 자작 부인과 하녀들을 데려가 이곳 하인을 돕도록 하시오.”

“예. 황제 폐하.”

명을 받은 시종이 방 한쪽에 다소곳한 자세로 있던 여인들을 이끌고 방을 나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렉스가 입을 열었다.

“정말 이 넓은 성 안에 하인이 한 사람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뭐, 별로 불편한 건 없습니다만.”

케일론이 뭐가 문제냐는 듯 덤덤하게 대꾸했다. 렉스가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살짝 나무라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대야 그렇겠지. 하지만 레이디 입장에선 아쉬운 게 많을 걸세.”

“예? 누구……. 레이디라뇨?”

케일론과 에일린은 동시에 의아하고 어리둥절한 낯빛을 지었다. 그들이 모르는 귀족 아가씨가 이 성에 사는 건가? 아까 그 자작 부인을 말하는 걸까? 성에 살고 있는 둘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렉스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에일린 클라우디아 데 루쿨루스 양 말일세.”

“윽…….”

에일린은 민망함에 뺨을 붉혔다. 그녀 맞은편에 자리한 엘로드의 얼굴에도 황당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케일론도 당황스러웠지만, 굳이 내색은 하지 않았다. 황제 폐하가 ‘레이디’라 칭하면 ‘레이디’인 것이다. 사실 자신도 원래는 평민이었으나 황제가 수여한 백작 작위 때문에 귀족이 된 거니까. 렉스가 짓궂게 웃으며 그들을 응시했다.

“그래서 내가 좀 준비해 왔네.”

“준비……라니요?”

황제가 말문을 떼려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의 뒤를 따라 은쟁반을 받쳐 든 브레이가 들어왔다. 쟁반 위에 은으로 된 음료 잔과 과일주가 담긴 크리스털 병이 놓여 있었다. 그 뒤로 아까 봤던 애플턴 자작 부인과 하녀 두 명도 찻잔 세트와 다과가 준비된 은쟁반을 가지고 따라 들었다.

“마침 잘됐군. 이리 와서 인사를 드리시오, 자작 부인.”

“예, 폐하.”

온화한 분위기를 지닌 30대 중반 정도의 부인이 대답했다. 머리 전체를 하얀 베일로 감싸 늘어뜨린 차림새가 정숙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풍겼다.

“라피스 궁에서 시녀로 일하는 애플턴 자작 부인이네. 오늘부터 루쿨루스 양을 모시게 될 것이오.”

“예?”

에일린과 케일론이 동시에 외쳤다. 히에무스도 놀란 표정이었다. 자작 부인이 무릎을 살짝 굽혔다 일어서는 우아한 인사를 해왔다.

“로레인 이디스 데 애플턴이라 합니다.”

“오랜 황궁 생활로 궁중 예법이나 귀족 여인들의 전반적인 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오. 아울러 바느질과 다른 잡일을 담당할 평민 출신 하녀 두 사람을 붙여줄 테니 밑에 두고 일하게 하시오.”

“……!”

황제의 시종이 다가와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에일린과 케일론 두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렉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요리사 한 명과 마부 한 명, 호위를 담당할 기사 두 명과 말 네 마리, 마차 한 대, 그 외에 레이디에게 필요한 의복과 옷감 따위의 물품들도 좀 장만해왔네.”

놀라서 낯빛이 벌게진 케일론이 말까지 더듬거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화, 황송합니다만 폐하, 갑자기 이들을 맡기에는 제가…….”

“걱정 말게. 이들의 녹봉이나 급료, 체재 비용은 전부 황궁에서 댈 거니까. 그리고…….”

그가 역시 멍하니 앉아 있는 에일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대에게는 매달 10골드를 지급할 생각이다. 아, 물론 그냥 주는 게 아니라 일을 하나 맡길 생각이다만.”

“예? 일…… 이라뇨?”

렉스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에일린의 성격상 그냥 돈을 준다면 받지 않을 것 같아 생각해낸 거였다.

“그건 있다 말해줄 테니 우선 이 성의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느냐? 여기까지 왔으니 백작의 성을 둘러보고 싶은데.”

“저도 아직 잘 모르는데요…….”

그가 깊고 푸른 눈빛으로 그윽하게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아는 곳만 안내해줘도 괜찮아.”

“그러시다면…….”

에일린이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 목소리로 겨우 응답했다.

“그럼 이왕이면 내가 준비해 온 옷으로 갈아입고 오지 않겠느냐? 한번 보고 싶은데.”

“예? 아, 하지만 폐하. 제가 이유 없이 그런 걸 받을 수는…….”

렉스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 그대로 턱을 살짝 치켜든 채 조금 거만한 태도로 받아쳤다.

“으응? 또 짐의 호의를 거절하겠다는 건가?”

히에무스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렉스를 노려봤다. 그의 태도와 말투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아, 아닙니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그녀가 어기적거리며 일어나자 그가 시녀에게 지시했다.

“애플턴 부인. 하녀들과 가서 돕도록 하시오.”

“예, 폐하.”

에일린이 자작 부인들과 함께 접견실 밖을 나가자 히에무스도 따라 나오려 했다. 에일린이 히에무스에게 급히 오지 말라는 눈짓을 보냈다. 순간 그가 실망을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옆을 따르던 작은 정령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 에일린을 따라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왕이시여.”

밖으로 나오자 자작 부인이 홀에 대기하던 마부에게 일러 짐마차에 실었던 물건들을 내리도록 했다. 마부 두 사람과 요리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나서서 4층에 있는 에일린의 방까지 짐을 옮겼다. 4층 계단을 함께 오르는데 애플턴 부인이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인사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루쿨루스 영애.”

“예? 아, 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너무나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루쿨루스 영애’라니. 갑자기 성씨가 생겨난 것도 모자라 ‘영애’ 대접에다 황궁 시녀의 시중까지, 도무지 적응이 안 됐다. 어떻게 처신하면 좋을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황제와 더 이상 인연을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이렇게 다가온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정말 운이 좋으신 거예요.”

“예?”

애플턴 부인이 품위 있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금껏 폐하께서 이렇게 관심을 보이시는 분은 처음이랍니다. 23살, 한창때의 나이이신데도 불구하고 여태 어떤 여인에게도 눈길 한 번 주셨던 적이 없으니까요.”

“예…….”

그건 에일린도 알고 있었다. 소설에서 렉스는 엘시아 황녀를 만나기 전까지 그 어떤 여인도 가까이하지 않고 지내왔다. 선황 때부터 이어진 정복 전쟁을 완성하느라 여유가 없었던 게 세간에 알려진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어릴 때부터 봐온 선황의 무분별한 여성 편력에 대한 혐오와 그의 가엾은 모후에 대한 기억이 더 큰 원인이라고 했다. 딱 한 단락으로 설명되어 있던 부분이 떠올랐다.

‘그의 부친인 선대 황제는 황후도 여러 명 갈아치웠고 후궁도 셀 수 없이 많았다지. 여색을 탐해 전쟁터까지 여인을 끼고 갈 정도였고.’

“조금, 그분과 닮으신 것 같아요.”

자작 부인이 고요한 눈빛으로 에일린을 찬찬히 훑었다.

“그분…… 이라면?”

“엘레노아 선황후 폐하. 그분도 드물게 선명한 연초록빛 눈이셨거든요.”

“엘레노아 선황후 폐하라고요?”

“현 황제 폐하의 모후이신 분이세요. 안타깝게도 10년 전 붕어하셨지요.”

“아…….”

그래서였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인 이유가. 그녀의 모습이 그의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던 걸까.

‘10년 전이라면 열세 살 때인 거네.’

열세 살……. 가슴이 아릿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운아였을 때 아이를 키운 경험이 있었기에 열세 살짜리가 얼마나 어린 나이인지를 알고 있었다. 문득 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솟아났다. 동시에 이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할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 겹쳐졌다. 에일린으로 살다 보니 자꾸 그림자처럼 흐려져 가는 전세에서의 기억들이 그 순간 선명한 색채를 띠며 그려지는 것 같았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아이들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황제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목이 메여왔다.

제퓌와 아두스, 프리기가 에일린의 뒤를 따라 그녀의 방에 들어섰다. 뒤따라온 남자들이 짐 꾸러미를 내려놓고 사라지자 하녀 두 명이 분주하게 포장을 풀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옷상자 안에 든 내용물들을 꺼내 들었다. 갖가지 색채의 호화로운 비단 블리오와 쉥즈가 여러 벌 나왔다. 온갖 반짝이는 색실로 수가 놓이고 진주, 보석 등으로 장식된 값진 거였다. 다른 상자 속에는 각종 보석 장신구와 액세서리가 들어 있었다. 진주가 박힌 헤어밴드, 금은보석으로 장식된 브로치, 팔찌, 귀걸이, 목걸이……. 예쁜 비단신과 가죽신 두어 켤레도 있었다. 거기다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장식품인 허리띠와 그 허리띠에 묶는 조그만 주머니인 앨모너도 보석과 각종 자수로 빼곡하게 꾸며져 있었다. 모두 화려해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와아아……, 정말 예쁘다!”

제퓌가 눈을 가늘게 뜨며 감탄사를 내질렀다.

“인간들 물건이 이렇게나 멋졌던 거야? 이런 거 처음 봐! 정말 근사하다.”

프리기도 고개를 끄덕이며 물건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뜯어봤다.

“이게 모두 에일린님 거예요?”

“그, 글쎄…….”

프리기의 물음에 에일린이 무심코 답하다 서둘러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자작 부인과 하녀들은 별다른 기색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바빴다.

“인간들에겐 이렇게나 많은 물건이 필요한 거예요? 이걸 다 인간 우두머리가 준 건가요?”

제퓌와 프리기가 그녀에게 자꾸 묻자 아두스가 냉큼 주의를 주었다.

“에일린님은 지금 다른 인간과 함께 계시니까 귀찮게 하면 안 돼. 좀 조용히 있자고.”

두 정령이 주눅 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인간들 솜씨도 제법이군.”

하지만 아두스 역시 연신 중얼거리며 물건 사이를 돌아다니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들에게 오늘은 인간 사회에 온 이후 최고로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많은 날인 듯했다. 아니, 첫 번째는 역시 황궁 무도회가 열렸던 날이고 지금은 두 번째쯤 될 것 같았다. 소박하기만 하던 에일린의 방이 온갖 반짝이는 물건들로 넘쳐나자 겨울의 정령들도 덩달아 기분이 들떠 올랐다.

“이 드레스로 하시겠습니까?”

애플턴 부인이 붉은 드레스를 펼쳐 들며 물었다. 에일린은 여전히 지금 상황이 어색해서 말끝을 흐렸다.

“글쎄요, 너무 화려한 거 같은데…….”

“이거 예뻐요! 입어 보세요, 에일린님.”

제퓌가 냉큼 다가가 에일린에게 권했다.

“맞아요, 이 옷 정말 괜찮은 것 같아요! 한 번 걸쳐 보세요.”

프리기와 아두스도 그녀의 주위를 빙빙 돌며 제퓌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럼…… 그럴까? 이걸로 할게요.”

작은 겨울의 정령들이 휙휙 날아오르며 종알종알 떠드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오늘은 시종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한 모양인지 연신 이런저런 물건들을 권하며 품평을 해주었다. 그들 덕분에 부담스러운 마음에 경직됐던 에일린의 마음이 한결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조언에 귀 기울이며 이런저런 의상과 액세서리를 착용하다 보니 금방 즐겁고 신나는 기분으로 변했다.

***

히에무스는 계속 팔짱을 낀 채 렉스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저 인간 황제가 아무래도 눈에 거슬렸다. 저번에 봤을 때도 에일린의 뺨을 쓰다듬고 드레스를 사주더니 오늘은 더한 것들을 마구 준비해온 모양이었다. 틀림없이 에일린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리라. 드레스 정도는 그도 마련해서 갖다 줄 수 있지만 인간 시녀 같은 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라 왠지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것들로 에일린의 환심을 사려 하다니, 네놈은 정말 치사하고 약삭빠른 자로군.”

마뜩잖은 마음에 인간에게는 들릴 리 없겠지만 불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렉스에게 퍼부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까 나갔던 에일린과 시녀 일행이 돌아온 것 같았다. 렉스의 얼굴에 계속 머물던 희미한 미소가 크게 번졌다.

“들라.”

그의 명령과 함께 방문이 열리며 그녀가 모습을 보이자 순간 히에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에 있던 다른 남자들도 거의 비슷한 반응이었다.

마치 어느 나라의 공주님처럼 보이는 어여쁜 아가씨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작은 진주로 장식된 크림 빛 쉥즈 위에 은빛 수가 놓인 붉은 비단 블리오를 차려입고. 역시 화려한 크림빛 망토 밑으로 그녀의 날씬한 몸매가 어김없이 드러났다. 좀 전에 봤던 그 수수한 여인과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화사하고 예뻤다. 갸름한 얼굴선과 보석 같은 두 눈동자가 마치 새벽하늘에 떠오른 영롱한 별빛처럼 반짝였다. 고운 피부에 수줍은 미소가 엷게 떠오른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윤기 나는 부드러운 밤색 머리에 진주가 촘촘히 박힌 헤어밴드를 둘렀더니 짧아진 머리가 오히려 장점인 것처럼 우아하고 귀엽게 느껴졌다.

히에무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한동안 미동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짧은 찰나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하고 넋이라도 나간 듯했다. 지금까지 언제나 그녀는 그에게 최고로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할 말을 잃게 말들 정도로 어여뻤다. 그의 심장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세차게 두근거렸다. 원래도 아름다웠는데 더 아름다워지다니! 그런데 그 일을 그가 아닌 인간 군주가 대신해주었다. 이를 자각한 히에무스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져 갔다. 인간의 군주가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에일린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찬사를 늘어놓았다.

“오! 정말 예쁘다, 에일린! 참으로 잘 어울린다.”

칭찬을 해주는 것도 인간 군주가 먼저였다.

“가, 감사합니다.”

수줍은 얼굴로 에일린이 인사하며 히에무스를 찾아 그의 반응을 확인했다. 조금은 그가 황홀한 표정을 할 거라 기대했는데 웬일인지 차갑고 딱딱해 보였다. 미간에 주름까지 잔뜩 진 걸 보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고 화가 난 상태 같았다.

‘내 모습이 이상한 것일까? 인간들 차림새가 히에무스의 마음엔 들지 않는 걸까?’

그의 눈에는 거북해 보이거나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정령들에게 이렇듯 과도하게 화려한 차림새는 낯설고 어색해 보일 수도. 하지만 유난히 무뚝뚝해 보이는 그의 태도가 좀 서운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늘 냉소적이고 무심한 태도였던 케일론조차 저렇게 얼굴을 붉혀가며 놀란 반응을 보여주는데. 정작 그녀가 잘 보이고 싶은 히에무스의 반응이 영 별로인 것 같아 민망하고 실망스러웠다.

렉스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럼 준비가 다 된 것 같으니 루쿨루스양, 지금 당장 성 안내를 해 주겠소?”

“예……. 폐하.”

조금 망설이다가 그의 팔을 잡고 문밖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러 수행인들이 따라나서려 하자 렉스가 재빨리 지시했다.

“강력한 결계가 쳐진 마법사의 성이니 굳이 따라 나올 필요 없다.”

“안 됩니다! 폐하.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나이든 시종과 엘로드가 경색했다. 렉스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케일론과 엘로드, 두 사람만 따르라.”

명령을 받은 두 남자가 대답 대신 깊이 허리를 굽혔다. 히에무스가 그들 뒤를 묵묵히 따라나섰다. 작은 세 정령도 그들의 왕을 조심스럽게 수행했다.

***

에일린은 렉스의 왼쪽 팔짱을 낀 채 천천히 걸으며 성 곳곳을 안내했다, 식당과 부엌도 보여주고 회의실과 장서관도 소개했다. 그리고 저번에 케일론과 함께 춤 연습을 했던 높은 천정이 인상적이었던 커다란 홀로 인도했다.

“여기가 이 성의 연회장이라고 합니다. 저도 이곳에 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다른 곳은 잘 몰라요. 케일론님이 결계를 걸어 출입을 막아놓은 곳도 많고요.”

“그렇구나. 좀 썰렁하긴 하지만 잘만 꾸민다면 꽤 훌륭해 보일 것 같군.”

별 새로울 것 없는 곳일 텐데 렉스는 유심히 둘러보며 이런저런 품평을 해주었다.

“성 안은 이 정도면 됐고 성 밖을 안내해 주지 않겠느냐? 오늘은 제법 따뜻한 날씨니 바깥 공기를 쐬고 싶구나.”

“예.”

에일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성 밖으로 향했다. 은근슬쩍 황제의 팔에서 손을 빼려고 시도했다. 그녀의 손이 빠지려는 순간 그가 팔에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꽉 죄었다.

“……!”

강한 힘에 붙잡혀 손을 뺄 수가 없었다. 문득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새파란 두 눈이 활처럼 휘어져 있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도 아까보다 한층 진해 보였다.

“자, 계속 안내를 부탁한다. 에일린.”

“예…….”

꼼짝없이 그의 팔에 계속 한 손이 갇힌 채 걸어야 했다.

밖으로 나왔다. 며칠 동안 쉼 없이 내린 눈으로 인해 하얗게 변한 성내 공터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나무는 별로 많지 않아 약간 썰렁한 분위기였지만 겨울치고는 햇살도 충분히 내리쬐는 온화한 날씨여서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마구간과 병사들이 상주할 때 묵는 막사, 성내 대장간, 몇 개의 망루 따위를 대충 소개하고 나니 더 둘러볼 것도 없었다.

“이제 제가 아는 곳은 거의 다 안내해 드렸습니다. 폐하.”

“그렇구나.”

“저, 그럼 이제 안으로 드시는 게 어떠세요?”

“에일린. 그대는 궁금하지 않느냐?”

“예?”

“아까 내가 그대에게 맡기고 싶은 일에 대한 것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다. 뭔가 일을 맡기고 한 달에 10골드를 지급할 거라고 했는데.

“궁금…… 합니다.”

렉스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장난기와 함께 어떤 기대감이 깃든 표정이었다.

“5일에 한 번 있는 제국의 휴일, 황궁에 와서 지금처럼 나와 함께 산책을 해 다오.”

“예? 산책이라고요?”

“그래. 황제의 ‘산책 친구’로 일하도록 해라. 그 대가로 10골드를 매달 지급하도록 하마.”

히에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제의 뒤를 따르던 케일론과 엘로드의 표정에도 동요가 일었다.

“어떠냐?”

“저는…….”

에일린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거절해야 할 것이다. 황제와 더 이상 접점을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황송한 말씀이오나 저는 거절하겠습…….”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불허한다.”

엄숙한 말투였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향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깊고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다. 에일린 클라우디아 데 루쿨루스. 그대에게 아젤란 제국의 황제로서 명한다. 짐의 산책 친구로 일하도록 하라. 5일 후 있는 휴일부터다. 거절은 허락하지 않겠다.”

렉스가 멀찍이 서 있는 케일론을 불렀다.

“아스카니아 백작.”

“예, 폐하.”

케일론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꾸했다.

“제국의 휴일에 경이 책임지고 루쿨루스양을 황궁으로 보내주시오. 경에게는 그에 따른 수고비를 따로 지급하겠소. 마법을 쓰기 곤란할 때는 마차를 이용해서 오도록 조치해주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케일론은 내키지 않지만 억지로 대답을 올렸다.

“…….”

에일린은 히에무스의 시선도 신경 쓰이고 렉스도 부담스러워 다시 한번 그의 팔에 잡힌 손을 빼려고 시도했다. 잠깐 팔이 느슨해진 것 같아 거의 손을 다 빼는 순간 그가 한 손으로 손을 잡아챘다. 아까보다도 훨씬 강한 힘이었다. 동시에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진 채 흘러나왔다.

“도망치지 마라, 에일린.”

“……!”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꽉 붙들었다. 멍한 눈으로 마치 온몸이 묶인 듯 굳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도망치지 마, 내게서.”

“폐하…….”

“뭘 두려워하는 거지? 그게 무엇이든 내가 지켜주고 막아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믿어라.”

타오를 듯 이글거리는 눈빛이었다. 영혼까지 사로잡힐 듯 강렬한 빛을 내뿜는.

“제가 꾸는 예지몽에서…….”

에일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새어 나왔다.

“폐하께선 제 인연이 아니세요. 그러니까 저는…….”

“그런 꿈 따위가 두려운 것인가?”

“…….”

“그럼 묻겠다. 그대가 일전에 말하지 않았더냐. 그대가 꾸는 그 예지몽이 항상 정확한 건 아니라고. 내 말이 맞겠지?”

속삭이듯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묻는 물음에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 꿈이 아니라도 제게는…… 작은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소망인가?”

그녀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되고 떨리지만 분명하게 말해야 했다.

“저는 앞으로 평생 저 하나만 바라보고 사랑해줄 사람을 원합니다. 그런 사람을 찾고 있어요. 폐하께선…… 안 되잖아요, 그런 사랑은.”

“왜 안 된다는 거지?”

“예?”

“물론, 나는 황후를 맞이하긴 해야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대 하나만 바라보고 사랑해주지 못할 이유는 없어. 황후란 건 뭐랄까, 사랑하는 대상이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그저 재상이나 경비대장 같은 지위를 세우는 것처럼 상징적인 빈자리를 채우는 그런 역할인 거지.”

“그런 건 저는 싫어요.”

에일린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상징적인 빈자리를 채우는 역할. 그게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는 그녀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운아로 살았던 세월, 더 이상 여자가 아닌 대접을 받으며 한 남자의 빈껍데기 아내 역할만 하는 그런 자리를 지겹도록 경험했다. 그게 그녀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라 해도, 설령 그게 그 악랄한 엘시아라 해도 그런 사람이 또다시 생겨나는 건 바라지 않았다.

“저는 싫어요.”

렉스의 얼굴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싫다고 하다니. 이 대제국의 황제인 자신이 그녀 하나만 사랑해주겠다고 약속해주는데 싫다고?

렉스의 손에 잡힌 에일린의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푹 숙인 얼굴에 손을 가져가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대는…… 내게 전혀 마음이 없는 것인가?”

글쎄, 그것조차도 지금은 알 수가 없었다. 싫지는 않았다. 분명 싫지는 않았다. 이렇게 잘생기고 멋진 사람을 싫어하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거라 보기도 힘들었다. 그녀 자신도 아직 그녀의 마음을 다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황제는 자신의 인연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에일린은 다른 건 몰라도 메인 주인공들의 인연만큼은 깨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진…… 않습니다.”

렉스의 깊고 준엄했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 분노의 빛이 어렸다. 어두운 심연에서 새어 나온 것 같은 냉랭한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상관없어. 이 정도로 물러날 내가 아니지.”

별안간 렉스의 한 손이 에일린의 어깨를 잡았다. 키스를 시도하려는 듯 그의 입술이 곧장 다가왔다. 깜짝 놀란 그녀가 뒷걸음질을 쳤지만 그의 완강한 팔에 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입술이 다가오려는 순간 에일린은 재빨리 옆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차갑게 굳은 입술 촉감이 성급하게 뺨에 와 닿았다. 왠지 섬뜩한 느낌이었다.

“!”

렉스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의 키스를 거부한 그녀에 대한 노여움이 일어났다. 아니, 그것보다 자신의 구애를 거절한 데 대한 실망과 서운함인 걸까. 에일린은 밀착한 그의 몸을 밀어내려 했다. 바위처럼 단단한 상체가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벗어나려는 순간 그의 입술이 재차 밀려들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려는 듯 그의 한 손이 그녀의 뒷머리를 헤집더니 단단히 붙잡았다.

렉스의 입술과 에일린의 것이 겹쳐지려는 순간, 지켜보던 히에무스의 두 눈이 시퍼렇게 얼어붙었다.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질투심과 도무지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대고 호흡마저 가빠왔다. 에일린이 도움을 청하기 전까지 인간에게 손을 대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한데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히에무스는 에일린과 했던 약속을 어기고 손을 들었다. 그 순간 다른 건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오직 저 괘씸한 자를 없애버려야겠다는 생각만 들 뿐. 히에무스는 인간 군주를 향해 차가운 바람의 공을 만들어 냅다 던졌다.

퍼억!

“으윽!”

렉스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무너지듯 한쪽 무릎을 꿇는 자세로 쓰러졌다.

“꺄악!”

“폐하!”

케일론이 사색이 되어 뛰어왔다. 엘로드 역시 검을 뽑아 들어 주위를 경계하는 자세를 취하며 다가왔다. 잠시 굳어있던 에일린이 다급하게 몸을 낮춰 그를 살폈다. 통증이 심한지 잔뜩 찡그린 채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폐……하.”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의 팔을 잡으려 했다.

타앗!

누군가가 거칠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저리 비키시오!”

엘로드였다. 그의 어두운 회청색 눈에 노여움과 경멸의 표정이 잔뜩 서린 모습이었다. 서슬 퍼런 기세에 그녀의 몸이 한껏 움츠러들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폐하!”

케일론 역시 당황했지만 황제의 용태를 확인하고 서둘러 치유 마법 주문을 외웠다. 그의 몸에 손을 대고 평소보다도 긴 마법 주문을 읊었다. 이내 눈 부신 푸른빛이 그의 손에서 흘러나와 황제의 몸을 전부 감싸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 거의 10여 분 동안 이어진 케일론의 처치가 끝나자 렉스의 안색이 다소 나아졌다. 찡그려졌던 표정이 풀어지고 호흡도 안정되었다. 엘로드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겁에 질린 얼굴로 돌이 된 듯 서 있는 에일린을 바라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폐……하.”

에일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엘로드가 근심 어린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다고 하지 않았는가? 호들갑 떨지 말게, 캐드릭스 후작.”

“…….”

연신 괜찮다는 말을 했지만 여전히 그의 안색이 창백했다. 엘로드가 허리에 찬 칼집에 손을 가져갔다. 언제라도 다시 검을 뽑아 휘두를 태세였다.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당연하게도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없었다. 결국 렉스의 곁에 있던 에일린을 예리하게 쏘아보며 다그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 겁니까? 갑자기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죠?”

“예? 그건…….”

엘로드는 지금껏 에일린을 대할 때 기사의 의무로 예의를 다해 대해왔지만 이제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저 근본도 모를 비천한 여인 때문에 발생한 황당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여자에게 별 관심도 없던 황제가 빠져서 벌인 일이 이미 여럿이었다. 무도회도 망치고, 그가 숭배하는 엘시아 왕녀의 입장도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 게다가 고귀한 왕녀가 그 아름답던 긴 머리채마저 이런 미천한 여자 때문에 잘라야만 했던, 가히 경악할 만한 사건까지 벌어졌다. 이제는 황제 폐하께서 불시의 습격까지 받다니! 도대체 이 여인의 정체가 뭐란 말인가? 좀 전의 뜬금없는 공격은 누구의 소행이고?

“어서 말해 보시오! 당신과 관계된 뭔가가 있는 것 아니오?”

틀림없을 것이다. 분명 그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기습이 일어나다니! 이 여인이 마녀이거나 아니면 그날 숲에서 나올 때 사악한 정령과 이미 한통속이 됐던지도 모른다. 그러니 계속 알 수 없는 이런 요망한 사태가 일어나는 것일 테지!

“저는…….”

에일린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히에무스가 벌인 일이 분명하니 그녀와 관계된 일이 맞긴 했다. 렉스도 조금 의문이 드는지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녀를 비호하는 정령이 한 짓입니다.”

케일론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엘로드와 렉스는 물론 에일린과 히에무스까지 그에게 시선을 맞췄다. 사뭇 창백한 얼굴로 엘로드의 부축을 받아 섰던 렉스의 얼굴에 호기심이 스쳤다.

“무슨 소린가? 정령이라니?”

케일론이 에일린을 힐끗 쳐다봤다. 새파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이내 낮고 쉰 목소리로 침착하게 설명했다.

“폐하께서도 아실 겁니다. 가끔 정령에게서 호감을 사서 그들의 가호를 받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요. 에일린이 그런 경우입니다. 루쿨루스 숲에 사는 동안 몇몇 정령들의 호감을 사게 된 것 같습니다. 그들이…….”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황제를 응시했다.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질책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나름의 판단을 한 것입니다. 폐하께서 그녀를 해치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렉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해치다니, 그런…….”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가늘게 몸을 떠는 에일린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곧 눈길을 외면했다. 렉스는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 실망스러운 기분에, 그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만회하고자 그만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고 말았다. 누구보다 소중하게 대해주고 싶었는데 그런 난폭한 짓을 저지르다니. 수치심에 얼굴이 홧홧거렸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여전히 서운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자신을 거절한데에 대한 분노와 섭섭한 감정이 고개를 내민 채였다. 싸늘하게 식은 공기를 가르며 케일론이 말을 이었다.

“일단 성 안으로 들어가 몸을 누이십시오, 폐하. 다행히 치명적일 정도의 공격은 아닙니다만 내상을 입으셨으니 적어도 하루 정도는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누추합니다만 소신의 집에 머물러주십시오. 헬무트 경을 황궁과 신전으로 보내 전의와 신관을 불러오겠습니다.”

“그냥 이대로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나?”

렉스의 물음에 케일론이 고개를 저었다.

“하루 이틀 정도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순간이동 마법이나 마차로 이동하는 것도 옥체에 무리가 갈 것입니다. 제집에 머무르시면서 저의 마법 치료와 신관의 축복 치유를 받으십시오. 그 후에 움직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렉스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다녀가려고 했던 계획이 졸지에 케일론의 성에서 하루 묵어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염려로 가득한 표정의 엘로드가 부축하려 하자 렉스가 거절했다.

“부축이 필요할 정도는 아…… 아니, 조금 불편하긴 하군.”

그가 에일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부탁했다.

“루쿨루스 양. 그대가 좀 부축해줄 텐가?”

“예? 제가요?”

놀란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을 들어 보이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부탁하지.”

“예……, 기꺼이.”

머뭇거리며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렉스가 팔을 내밀었다. 말이 부축이지 아까 그녀를 에스코트할 때의 자세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뭔가 부축과는 달라 어색했지만 말없이 그와 함께 걸어갔다. 히에무스가 그녀의 곁으로 다급하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괜찮겠느냐? 에일린.”

에일린이 재빨리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보일 듯 말 듯 흐린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내가 그대를 더 난처하게 한 것이냐? 나는 그저…… 저자의 행동이 너무 난폭한 듯해서, 그대가 힘들고 곤란한 듯 보여 참을 수 없었다.”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옆에 수많은 사람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모든 걸 알고 있지만 히에무스는 그녀의 침묵이 견디기 힘들었다. 마치 그를 원망하는 것 같아서. 하긴, 설사 그녀가 나무라고 책망한다 해도 그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또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고 해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똑같은 행동을 취할 거였다. 누구라도 그녀를 괴롭히는 자가 있다면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게 누구라 해도.

“이쪽으로 오십시오, 폐하.”

케일론이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황제를 성 안에 있는 손님방으로 인도했다. 조용하던 그의 성이 오늘은 문턱이 닳아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북적이고 떠들썩해졌다.

다행히 황제 폐하의 옥체가 심하게 상한 게 아니어서 한시름 놓았다. 자신의 집에서 더 큰 변고를 당했다면 정말 입장이 난처했을 것이다. 정령의 공격이 그리 크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내상까지 입을 정도였으니 작은 공격이라 할 수도 없었다. 평범한 인간이 그 공격을 맞았다면 자칫 목숨까지 위험했을 것이다. 단지 황제는 일반인에 비해 풍부한 마나를 지니고 어릴 때부터 꾸준히 단련해온 몸이기에 이 정도에서 그칠 수 있었다. 케일론도 정말 아찔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정령의 그 갑작스러운 행동이 내심 마음에 들었다. 감히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령 못지않게 그도 황제를 좀 때려주고 싶었으니까.

황제의 부상 소식이 전해지자 성에 남아있던 수행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렉스는 별일 아닌데 쓸데없이 큰 소란을 일으킨다며 시종들을 나무랐다. 들것을 대령하려 하던 시종을 물리치고 에일린의 부축만 받으며 2층에 위치한 손님방으로 향했다. 고개를 숙인 채 줄곧 말없이 계단을 오르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에일린.”

렉스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예?”

“정말 괜찮으니 자책하지 마라.”

“예…….”

“하지만 여기 있는 동안 그대가 간호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안 되겠느냐?”

“예? 아, 당연히 제가 하겠습니다.”

그가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중얼거리는 혼잣말인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제 탓인걸요. 그가 한 일이니까.”

“……그?”

에일린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 같았다. 짧은 순간 그녀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수줍어할 때 떠올리는 낯빛과 비슷해 보였다. 황제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를 쳐다보듯이 그녀의 눈길이 2층 복도 어느 한곳에 잠시 머물렀다. 렉스는 그 순간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보이지 않는 그 존재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그 존재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꿈꾸는 듯 황홀해 보이는, 조금은 행복한 그 무엇이었으므로.

***

히에무스는 계속 마음이 불안했다. 황제의 간호를 맡은 에일린은 도무지 짬을 낼 수 없어 그와 함께할 시간이 없었다. 그대로 그의 궁전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닌 듯해 떡갈나무 밑에 앉아 기다렸다. 작은 세 정령이 다가와 곁에 조심스럽게 내려섰다. 그들의 왕이 아까부터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있는 통에 그들도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그것도 한두 시간이지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아무런 미동 없이 앉아 있자 슬슬 좀이 쑤셔왔다. 아두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왕이시여. 이제 그만 환궁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에일린님은 오늘 무척 바쁘신 것 같은데 내일 다시 오시는 게…….”

“좀 더 기다려 볼 것이다.”

“예에…….”

세 정령이 눈동자를 굴리며 서 있었다. 문득 생각난 듯 히에무스가 물었다.

“아까 에일린의 방에 따라갔을 때 인간 군주가 보내온 선물이 뭐가 있더냐?”

세 정령의 눈빛이 금세 반짝거리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 다투어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와아, 그게 정말 굉장했습니다. 저는 인간들의 물건이 그렇게 화려하고 훌륭할 줄 몰랐어요. 종류도 그렇게 많더라고요. 인간들에게 필요한 게 참 많은 것 같았어요.”

“맞아요! 그 색색의 드레스며 빛나는 보석이며……. 보석이 장식된 예쁜 주머니에다 허리띠랑 신발도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어요! 옷에 놓인 자수가 얼마나 섬세하고 곱던지!”

“아까 그 옷 말고도 멋지고 근사한 옷이랑 장신구들이 그득했어요. 에일린님이 진짜 좋아하시던걸요!”

히에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

그는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무룩해진 얼굴로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인간 군주에 비하니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초라하고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영원과도 같은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격지심이란 감정이었다.

“나는…… 그만 가보겠다. 너희들은 즉시 에일린 곁에 가서 그녀를 보좌하도록 해라.”

“예, 왕이시여.”

세 정령은 공손한 자세로 머리를 숙이며 그들의 왕을 배웅했다. 제퓌는 조금 얼굴을 들어 순식간에 사라지는 왕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다. 웬일인지 그의 어깨가 처져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자취가 사라지자 무심코 말했다.

“어쩐지 오늘은 왕께서 힘들어 보여.”

제퓌의 말에 아두스가 코웃음을 쳤다.

“왕께서 힘들 일이 뭐가 있다고.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이시잖아. 차갑고 냉정하고 냉혹한 겨울의 왕이시지. 몇 천 년 동안 항상 똑같은 모습이시잖아.”

“그런가?”

제퓌는 머리를 긁적였다. 언제나 그들의 왕은 냉혹하고 냉정하고 차가운 분이셨지만 이번 겨울은 좀 다른 것 같았다. 평소의 그분이라면 그런 한숨 같은 걸 짓지 않으셨을 것이다. 한숨을 쉬는 겨울의 왕이라니. 수많은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 낯선 분위기가 자꾸 마음에 걸려 제퓌는 한동안 왕이 사라진 방향을 지켜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황공합니다, 폐하. 치료 과정이 끝날 때까지 이런 유동식을 드셔야 합니다.”

“음…….”

렉스는 그의 앞에 놓인 은 접시를 불만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황제를 위해 준비된 저녁 식사 메뉴가 야채수프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종인 리히트가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식사 시중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케일론이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내상으로 마나의 흐름이 불안정한 상태이므로 조금이라도 몸속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니 참아주십시오.”

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방 한쪽 구석에 애플턴 부인과 함께 서 있던 에일린에게 시선을 향하더니 조금 풀어진 얼굴로 말을 건넸다.

“에일린, 그대가 좀 떠먹여 주지 않겠느냐?”

“예? 예…….”

에일린이 꾸물거리다 걸어왔다. 렉스가 주위에 시립한 이들을 둘러보며 명령을 내렸다.

“식사 시간이 끝날 때까지 모두 밖으로 나가 있으시오.”

“안 됩니다, 폐하! 저런 수상한 여자와 단둘이 계시면 안 됩니다!”

엘로드가 다급하게 말렸다. 그 말에 에일린의 표정이 굳어버리자 렉스가 준엄한 말투로 주의를 주었다.

“캐드릭스 후작, 경이 짐을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아까부터 언사가 좀 지나친 것 같소.”

“……황공합니다.”

“긴말하지 않을 테니 모두 물러가시오.”

“예.”

대기하던 수많은 사람이 나가자 비로소 그리 넓지 않은 방 안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닫히는 방문을 보면서 에일린은 황제노릇도 참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저런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지내야 한다니, 가끔이야 좋겠지만 얼마나 갑갑하겠는가? 익숙해지면 괜찮은 것일까?

“자, 그럼 부탁한다. 에일린.”

렉스가 싱긋 웃었다.

“어, 예.”

그녀가 보니 황제의 상태가 숟가락질을 못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몸이 아플 때 남자들이 얼마나 엄살이 심해지는지 익히 잘 아는 터라 잠자코 이해해주기로 했다. 능숙하게 냅킨을 펼쳐 그의 목에 둘러주었다. 이어 가까이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그의 앞에 앉아 수프가 담긴 접시를 손에 들었다. 입으로 불어 적당히 식힌 후 그의 입에 한 숟가락 넣어주었다. 렉스는 약간 장난기 어린 눈을 빛내며 말없이 그녀가 하는 행동에 따라주었다. 거의 한 접시를 다 비우고 향기로운 차를 몇 모금 마시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능숙하구나. 많이 해 본 솜씨 같은데…… 누군가에게 이렇게 해준 적이 있느냐?”

“예.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니 저, 동생들이 있었거든요. 그 애들이 어렸을 때 늘 하던 일이어서요.”

“그렇구나.”

이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동생들 이야기라고 우겨야 하는 건가. 이러다 만능 거짓말쟁이가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에무스와 있을 땐 무엇 하나 어색하게 꾸며내지 않아도 됐는데 인간들과 함께 사니 꾸며내고 변명해야 할 것투성이였다. 히에무스는…… 그랬다. 그는 오직 현재의 그녀 자신에게만 집중했다. 그녀의 과거가 어떻든, 신분이 어떻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 밖에서 기다리는 거 아닐까?’

에일린은 문득 그가 생각나 아까 마주쳤던 2층 복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방 안까지 따라오더라도 인간들 눈에 보일 리 없을 텐데 여기까지 들어오지는 않았다. 뭔가 상심하거나 실망했던 걸까, 혹시 그녀가 그를 원망한다고 오해한 건 아닐까.

에일린은 여전히 그의 거침없는 행동이 우려스럽긴 했다. 맹목적이고 막무가내라고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 행동 때문에 아벨라 여신에게 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뒤따랐다. 하지만 고마웠다. 언제나 그녀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주는 그가. 누가 뭐라 해도 만 49년 인생에 그처럼 그녀를 생각해주는 이는 처음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참 많은 것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예전에…… 아주 오래전에.”

렉스의 매력적인 중저음이 그녀의 주의를 환기했다.

“내가 여덟 살 때쯤, 열병에 걸린 적이 있었지.”

먼 기억을 더듬는 그의 깊고 푸른 눈이 그윽하고 잔잔한 빛을 머금었다.

“그때 어마마마께서 몇 날 며칠 밤을 새워가며 간호해주신 적이 있었어. 이런 식으로 밥을 떠먹여 주셨고, 밤에도 주무시지 않고 계속 내 곁을 지켜주셨지.”

“그러셨군요.”

렉스는 그녀의 맑은 연초록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에일린의 이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면 언제나 사무치도록 그리운 얼굴이 생각났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해주고 염려해주었던 그 아름답던 연초록 눈동자가.

“에일린.”

같은 사람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예, 폐하.”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이 눈빛이 모든 걸 담아내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대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폐……하.”

날카로운 아픔과 달콤한 사랑과 덧없는 갈망과 기다림 같은 그런 인생의 수수께끼를 이 눈은 모두 품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의 눈빛처럼. 이 눈빛과 함께라면 다시금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유난히 푸릇한 빛으로 기억되던 이른 봄날의 그 행복한 나날들을.

“부탁이다. 그대도 다시 한번 생각해 다오.”

그러니까 끌렸다.

“저는…….”

그래서 포기할 수 없던 거였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테니까. 이런 눈빛을 가진 여자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테니까.

“나는 정말 자신 있어. 그대를 유일한 아내로 삼지는 못하겠지만 유일한 사랑으로 대할 자신이 있다.”

반드시 붙잡아야 했다. 아이처럼 떼를 쓰고 억지를 부려서라도.

“…….”

황제의 새파란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 불꽃이 내뿜는 강렬한 열기가 그녀의 심장을 뜨겁게 파고드는 듯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자의 진심이란 그런 것이었다. 감히 거역하기 어려운 어떤 힘을 지니고 있었다. 에일린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것도 대답할 수가 없었기에.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들게 해 눈을 마주쳐왔다. 푸른 불꽃이 춤추던 눈동자가 스르르 감겼다. 이내 그의 입술이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하게 그녀 위로 드리워졌다. 아까의 무례한 시도에 대한 사과라도 되는 듯 한없이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몸짓. 마치 어느 봄날 흩어지는 꽃잎이 바람결에 실려 온 듯 알싸한 차 향기가 입술 위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

어느새 밤이 깊었다. 케일론은 황제가 침수에 들기 전 한 차례 더 마법 치료를 행할 목적으로 조용히 그가 머무는 손님방 문을 두드렸다. 문 앞에 대기하던 시종 리히트와 시위를 서는 두 기사가 묵례를 했다. 계속 다른 수행인을 물린 상태였으므로 방 안엔 에일린만 남아 시중을 드는 중이었다.

“들라.”

유독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렉스가 베개와 쿠션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고 에일린은 의자에 앉은 그대로 침대 맡에 엎드려 잠든 모습이 보였다.

“이런, 황공합니다. 즉시 깨우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냥 놔두게. 이대로 치료를 행하도록 하시오.”

“…… 알겠습니다.”

케일론이 조심스럽게 황제의 곁으로 가 몸에 손을 대고 마법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푸른빛이 나와 몸을 감싸는 처치가 한동안 진행되었다. 이윽고 모든 과정이 끝나고 물러가야 할 때가 다가왔다. 잠깐 머뭇거리다 곤하게 자는 에일린에게 눈길을 주었다.

“깨워서 방으로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혼자서 계속 버티기는 힘들 것입니다. 방에 보내 쉬게 하고 시종과 시녀를 불러 교대하는 것이…….”

“딱히 시중인은 필요 없네. 아까보다 훨씬 몸이 개운해졌으니까.”

“아, 그러시다면 이만 깨워서…….”

“이렇게 곤히 잠들었는데 깨우면 미안하지.”

렉스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그녀의 얼굴을 고요하게 응시했다. 이내 침대 안쪽으로 몸을 움직이더니 입을 열었다.

“여기, 이 위로 좀 옮겨주겠나?”

“예?”

케일론이 경악한 낯빛으로 렉스를 쳐다보았다. 그가 좀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이쪽, 내 옆에 눕히란 말일세. 케일론.”

케일론은 잠시 동안 멍한 상태로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겨우, 간신히 제정신을 찾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의 명이었다. 안드로스 대륙 유일의 대제국인 아젤란의 황제가 내린 명령. 인간의 탈을 쓰고 그의 명을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케일론은 조금 떨리는 발걸음으로 에일린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으응…….”

응석을 부리듯 졸음에 겨운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짧은 시간 그의 품에 안겼던 그녀는 몹시 피곤했던지 잠에서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침대 위 황제 옆에 천천히 내려놓으니 렉스가 베개 위치를 바로잡아주고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줬다. 그때까지 머리를 장식했던 진주가 박힌 헤어밴드도 빼서 한곳으로 치워두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황제답게, 케일론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도 그녀의 곁에 몸을 뉘었다. 한쪽 팔로 팔베개를 한 채 옆으로 누워 에일린의 잠든 얼굴을 감상하듯 바라봤다. 남은 한 손으로 그녀의 뺨과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살짝 상기돼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한없이 사랑스럽다는 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방에 불을 좀 꺼주겠나?”

“예? 아, 예.”

케일론은 주문을 외워 마법석이 박힌 샹들리에의 빛을 사라지게 했다. 순식간에 방 안이 어두워지고 탁자 위에 놓인 작은 마법석이 꽂힌 촛대만 동그마니 빛났다.

“오늘 여러모로 고마웠네, 케일론 경. 환궁하면 상을 내리도록 하겠소.”

“망극합니다.”

“경도 이제 그만 나가보게.”

“예, 좋은 밤 보내시길. 부디 편히 쉬십시오.”

마음에도 없는 거짓된 인사말을 연달아 올리고 깊이 허리 숙여 절한 후 문밖으로 나왔다. 가슴이 쿵쿵거리며 울렸다. 붉어졌던 얼굴에 더욱 열이 올라 더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원래 향했어야 할 그의 방을 지나쳐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차가운 밤바람이라도 쐬지 않으면 이 갑갑한 가슴을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 케일론님!”

계단 밑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초점 없는 눈으로 쳐다봤다. 다른 궁정 마법사인 ‘헬무트 경’이었다. 밤 산책을 나갔다가 막 들어오던 참인 듯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중년의 나이에 원래 귀족 가문 태생이라 작위나 직급이 비슷했지만 언제나 그에게 ‘케일론님’이라 부르며 깍듯하게 대해주는 이였다. 그의 위대한 마법 능력에 경의와 찬사를 보내는 뜻에서 그런다고 했다.

“폐하께 마법 치료를 행하고 나오시는 길입니까?”

“그렇습니다.”

중년의 마법사가 감탄하며 칭찬의 말을 늘어놓았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벌써 네 번째 마법 치료를 하신 거지요? 마나 소모가 엄청나실 텐데 이렇듯 거뜬하시다니. 역시 우리 아젤란 제국의 위대하신 대마법사답습니다.”

케일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가…… 대단하단 말입니까?”

“예?”

잔뜩 쉰 목소리가 거칠게 튀어나왔다.

“참으로 시시한 것 같은데.”

“케일론님?”

중년의 궁정 마법사가 가늘게 눈을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국의 대마법사 케일론의 얼굴이 어쩐지 화가 난 듯 보였다. 한편으론 뭔가 상심한 듯 보이기도 했다.

“시시하기 짝이 없어, 대마법사 따위…….”

허스키한 목소리로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헬무트 경의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가 왠지 조금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시시해.”

그의 목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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