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황제의 처벌
“이건 그야말로 신비한 마법약이예요. 정령의 몸을 일정 시간 인간의 몸으로 만들어주는 약이거든요.”
히에무스의 손이 멈췄다.
“뭐…… 라고?”
“당신 같은 겨울의 정령도 일시적으로 따뜻한 인간의 몸을 갖게 해주는 마법약이라고요.”
“……!”
키프리스의 눈이 호선을 그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한껏 위로 치켜 올라갔다.
“둘 중에 어떤 걸 가질 건가요?”
그녀의 장난질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남겨진 에일린은 계속 훌쩍이는 중이었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한참 꺽꺽거리며 흐느끼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과 콧물을 슥 닦아냈다. 내내 옆에 서서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가을의 왕에게 말했다.
“저, 왕이시여. 술을 좀 더 마셔도 될까요?”
“으응? 물론이지.”
그가 들고 있던 크리스털 술잔을 내밀었다. 그녀가 냉큼 받아 꿀꺽꿀꺽 삼키더니 금세 한 잔을 다 비웠다.
“더 주세요.”
아예 한쪽 구석에 있는 양탄자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을의 왕이 옆에 앉으며 서빙을 담당하는 하급 정령을 부르자 물의 정령도 냉큼 걸어와 에일린의 곁을 차지했다. 그가 직접 그녀의 잔에 술을 따라줬다.
“술을 먹지 않기로 했다고 하지 않았나?”
“오늘은 마셔야겠어요. 좀 힘들어서요.”
마음이 힘들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너무 힘들었다.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을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마시고 또 마셨다. 가라앉은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한데 아무리 마셔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고 잔뜩 취하기만 했다. 결국 쿠션에 기대 슬며시 눈을 감았다. 함께 대작하던 가을의 왕과 물의 정령은 춤을 추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혼자 남아 누워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여기 있었군, 인간 여인.”
억지로 눈을 뜨니 화려한 꿀빛 금발에 핑크빛 드레스를 입은 정령왕의 모습이 보였다. 한껏 미소 띤 얼굴이 몽롱한 의식 중에도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의 여왕이었다. 그 옆에 마법사로 보이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처음 보는데도 왠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내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인가?
“무슨…… 일이세요?”
“잠깐 같이 가줘야겠어. 인간 여인.”
“어디를요?”
“좋은 곳이야, 함께 갈래?”
좋은 곳이라고? 어디일까. 술김에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자꾸 우울했는데 잘됐다. 어떤 곳인지 잘 모르겠지만, 좋은 곳에 가면 기분전환이 될 거야. 술에 취한 탓인지 다리가 휘청거렸다. 봄의 여왕 옆을 지키던 마법사가 에일린을 재빨리 붙잡아줬다. 부축을 받은 채 걸음을 옮기려는데 마법사가 말을 붙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에일린은 술에 취한 탓인지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왠지 전세의 기억만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취한 모양이군요.”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취했어요. 26년 만에 한번 취해 봤어요.”
“26년?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데?”
“후후후…… 그래요? 고마워요. 나 이래 봬도 올해 만 49세인데, 헤헤헤.”
“49세라고요?”
“예! 여전히 40대예요. 아직 만 50세가 안 됐으니까요.”
가을의 궁전 밖을 나오니 차가운 겨울 공기가 피부 위로 느껴졌다. 취기를 이기지 못해 에일린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몸을 지탱하지 못하자 안드레아스가 서둘러 위로 안아 들었다.
“많이 취했군요. 좋지 않아요. 매번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이라니.”
“우리, 예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요?”
“아마도요.”
에일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언제 만난 거죠?”
에일린이 손을 뻗어 그의 얼굴에 가져갔다. 순간 안드레아스가 움찔거렸다. 이 행위는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허락 없이 자신의 몸에 손대는 행동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걸 알 리 없는 에일린이 말없이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후드에 마법이라도 걸려있는지 아무리 그 속을 들여다봐도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 생김새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저 반짝이는 두 금빛 눈동자만 보였다. 안드레아스가 조금 불쾌해진 기분으로 쏘아보는데 너무나 투명한 연초록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괜찮으세요?”
“예?”
“힘들어 보여서요.”
“무슨…….”
“뭔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거 아닌가 해서요.”
“……!”
에일린의 손이 안드레아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 눈빛만큼이나 순수한 따스하고 상냥한 손.
“힘내요, 다 잘 될 거야.”
“…….”
뭐야, 이 여자……. 정말 별종이지 않은가? 술에 취했다곤 하지만 정말이지 특이한 여자군. 에일린의 손이 다시 안드레아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안드레아스는 그 손길에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굳었던 기분이 다소 좋아지는 듯했다. 취기로 그녀가 잠에 빠져들며 어루만지던 손이 함께 내려갔다. 어쩐지 허전한 느낌마저 들었다. 안드레아스 자신마저도 지금 이 느낌이 낯설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편 그즈음 아젤란 제국의 황도인 ‘카르디아’에는 저녁 무렵부터 폭설이 쏟아졌다. 유례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눈이 내리는데다 한파까지 몰아쳤다. 낮까지 떠들썩했던 도시 일대가 깊은 침묵 속으로 잦아들었다. 팔라틴 황궁의 본궁인 라피스궁 내에 있는 대연회장에선 예정대로 무도회가 한창 열리는 중이었다. 음악 소리도 나고 춤을 추는 귀족 남녀들도 보였지만 왠지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황제가 있어야 할 옥좌가 텅 빈 모습이었다. 재상직을 맡은 귀족이 그를 대신해 무도회 일정을 지휘했다. 황제 렉스는 무도회가 열리는 대연회장 옆에 위치한 커다란 방에 자리한 상태였다. 그곳에서는 황제가 직접 초대한 어떤 여인이 사라진 일로 공녀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휴게실 한쪽 소파에 시종들과 마법사, 호위 기사를 대동한 렉스가 앉고 바로 옆에 케일론이 서 있었다. 그 앞에 몇몇 공녀와 수행인의 모습이 보였다. 제국에 온 공녀들의 수는 모두 25명이었다. 규모가 큰 나라에선 두 명 이상 온 곳도 있기에 그 수가 좀 많았다. 준비된 휴게실은 5개였는데 그중 에일린이 머물던 방에 대기했던 공녀들이 남아 간단한 취조를 받는 상황이었다. 엘시아 왕녀와 레나테 왕녀, 아담한 금발 머리 공녀와 통통한 흑발의 공녀가 그들이었다. 질문은 대부분 케일론이 담당했다. 아니, 은밀하게 말하면 진짜 케일론이 아니라 케일론의 분신이……. 하지만 그가 분신인 것을 알 리 없는 공녀들과 시녀들은 유난히 굳은 표정과 어둡고 딱딱한 분위기에 기겁을 하며 주눅이 들었다. 원래 그의 본체도 온화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무생물이 가진 특유의 무표정과 기괴한 분위기까지 더해져 보는 이에게 절로 공포감을 갖게 만들었다.
레나테 공주가 먼저 질문을 받았다.
“에일린이라는 여인이 이 휴게실에 있었습니다. 보셨는지요?”
케일론의 분신이 잔뜩 쉰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레나테 공주의 갈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모, 모릅니다. 저는 보지 못했어요.”
케일론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질 듯 주시하더니 허리를 숙여 렉스에게만 들릴 정도의 낮은 음성으로 일렀다.
“거짓입니다.”
“그렇군.”
렉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연이어 다른 공녀들에게도 비슷한 질문이 이어졌다. 모두가 하나같이 에일린에 대한 걸 부정하며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다. 케일론은 전부 거짓이라 판단했고 마침내 엘시아 왕녀의 차례였다. 황제의 뒤에 시립한 엘로드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아까부터 계속 그는 그녀의 자태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하던 참이었다.
“저도 물론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정말 걱정되네요. 아마도 우리들이 당도하기 전에 무슨 일을 당한 모양인데……. 별일이 없길 기원하겠어요.”
너무나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태도에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모습만큼이나 매혹적인 그 목소리엔 진한 안타까움마저 묻어났다. 거짓이 분명했지만 거짓이라고 생각할 만한 부분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렉스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꽤 강적이군.”
흥미가 동한 표정으로 렉스는 그녀를 훑었다. 흥미롭긴 했다. 에일린에게 느꼈던 흥미로움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지만. 이 왕녀에게선 뭔가 자신과 비슷한 동류의 어떤 부분이 느껴졌다. 같은 맹수의 느낌이랄까. 소리 없이 사냥감을 노리고 잡은 먹이를 적당히 갖고 놀다 죽이는 그런 영리한 짐승 말이다. 케일론이 경직된 허리를 숙이며 황제에게 주청했다.
“공녀들의 시녀 한 명을 지적해 집중적으로 추궁하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자백 마법을 쓰겠습니다. 가장 취약한 나라의 시녀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렉스가 금발의 공녀 쪽을 힐끗 쳐다보며 허락했다.
“그게 좋겠군.”
렉스가 금발의 공녀를 향해 말을 건넸다.
“에밀리아 공주. 그대의 시녀에게 좀 더 추가적인 질문을 하고 싶소.”
공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혹시 절…… 의심하시는 건가요?”
렉스가 산뜻한 미소를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그녀는 순간 호흡을 삼켰다.
“그럴 리가.”
그가 그녀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며 시선을 고정했다.
“단지 몇 가지 사소한 사실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오. 개인적으로 아름다운 그대에 대한 것도 알고 싶고, 겸사겸사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것일 뿐. 허락해 주시겠소?”
“무, 물론입니다. 폐하. 언제든지…….”
“고맙소.”
그녀의 시녀가 난처한 낯빛을 했지만 정작 주군인 공주의 얼굴은 묘한 기대감과 설렘으로 붉게 변한 상태였다.
“나머지 분들은 나가봐도 좋소. 가서 무도회를 즐겨 주시오.”
긴장한 표정의 공녀 일행들이 황제에게 우아한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엘시아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에밀리아 공녀와 그의 시녀를 쏘아보다 다른 이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엘로드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떠올랐다.
모두 사라지고 에밀리아 공주의 시녀만 남았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의 키가 큰 여자였는데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몸을 떨었다. 렉스가 케일론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름이 뭡니까?”
“예? 멜리사라고 합니다.”
“멜리사. 내 눈을 보고 질문에 답해주십시오.”
멜리사는 흠칫 놀라며 케일론의 눈에 시선을 맞췄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각한 보랏빛 눈동자가 기괴해 보였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읊으며 손을 들어 그녀의 눈을 살짝 덮었다. 검은색 마나의 빛이 그 손을 감싸듯 새어 나왔다. 손을 떼자 멜리사의 두 눈동자가 힘없이 풀려 있었다. 케일론이 더없이 낮고 냉정한 음성으로 명령하듯 요청했다.
“아까 휴게실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두 말해주십시오.”
“예……. 그러니까 저희가 들어왔을 때 한 여자가 있었어요. 이름이 에일린이라고 했어요.”
시녀는 몽롱한 표정으로 그때 목격했던 일에 대해 남김없이 술술 불기 시작했다. 드레스에 포도주를 부은 일이며 흑발의 공녀가 뺨을 때린 이야기며 모두 다. 마지막으로 엘시아 왕녀가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 사실까지 얘기하자 듣고 있던 이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특히 엘로드의 얼굴엔 염려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멜리사가 모든 이야기를 끝낼 즈음 케일론의 분신이 문득 움직임을 멈추더니 곧 황제를 향했다.
“제 본체가 에일린을 찾은 것 같습니다, 폐하.”
렉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무사한가?”
“그런 것 같습니다. 확인하는 중입니다.”
렉스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담겼다. 가짜로 웃는 웃음이 아닌 진짜로 짓는 미소가.
“어떤가? 별일 없는 거겠지?”
“예.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밀랍인형 같은 케일론의 분신이 고장 난 기계처럼 갑자기 모든 동작을 멈췄다. 유리알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열렸다. 입술까지 멍하니 벌어지더니 한마디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엇!”
그 말을 뱉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졌다. 놀란 렉스가 뒤에 서 있던 다른 궁정 마법사를 돌아보며 외쳤다.
“어찌 된 일인가?”
중년의 마법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응답했다.
“뭔가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분신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만…….”
렉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별일 없이 의식도 되찾았다고 했는데 그새 누군가의 공격이라도 받은 걸까? 케일론처럼 뛰어난 마법사가 분신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다니. 렉스는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아까부터 거세지기 시작한 겨울 칼바람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높은 첨탑 사이를 가로지르며 윙윙 울리는 소리가 마치 누군가가 내지르는 호통 소리 같았다.
***
“이쯤이면 될까?”
궁전 밖 숲속 어느 한 장소에 다다르자 봄의 여왕이 안드레아스에게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어쩔 셈이지?”
“목숨을 빼앗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제 주군의 명령이 있으니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지요.”
“어떤 조치?”
안드레아스도 아직 구체적인 건 생각하지 못했다.
“글쎄요.”
역시 마법을 걸어 벙어리로 만들거나 혼을 나가게 하는 방법을 써야 할 것이다. 안드레아스는 에일린을 천천히 바닥에 눕히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벙어리로 만드는 마법은 사실 완전한 대비책이라 하기도 힘드니 반쯤 혼이 나가게 하는 마법을 쓰는 게 더 효과적이리라. 그렇게 결정하고 나서도 안드레아스는 한참 동안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정말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주군을 모시는 신하 된 입장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이 여자를 해치지 않으면 엘시아 왕녀가 곤란해질 터였다. 콧등을 찡그리며 에일린의 얼굴을 잠시 응시하다 마침내 결심한 듯 무거운 목소리로 마법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피이잉!
순간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를 향해 바람의 공이 날아들었다.
파아앗!
정령 베르누아가 즉시 막아주며 외쳤다.
“조심해!”
안드레아스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어 자세를 취하며 주변을 확인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케일론이 서 있었다. 붉은 로브를 걸치고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긴 은빛 머리를 휘날리며.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가 분노와 살기로 매섭게 번들거렸다. 그냥 서 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마법 주문을 읊으며 당장이라도 다음 공격을 퍼부을 태세를 갖춘 채였다. 안드레아스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그가 바람의 공을 다시 만들어 던졌다.
“……!”
안드레아스는 옆으로 구르다시피 하며 케일론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했다.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다. 케일론이 연달아 공격을 가했다. 이번엔 화염 공격이었다. 좀 전의 것은 아마도 에일린의 곁에서 그를 몰아내기 위해 한 공격일 터였다. 비교적 조그만 바람의 공이었으니. 이어진 불의 공은 정말이지 위력이 강했다. 이렇게 커다란 불의 공을 만들려면 마나 소모가 만만치 않을 텐데. 그 공격도 간신히 모면했다. 연거푸 피하는 동작만 취하다 안드레아스는 겨우 방어 마법 주문을 완성했다. 케일론이 쉬지 않고 이번엔 번개를 형성해 쐈다.
‘어쩜 이렇게 빠르지? 대마법사란 칭호가 헛된 게 아니었군. 계속 위력이 큰 공격을 이만큼이나 빠른 시간 내에 가할 수 있다니.’
안드레아스는 마법사로서 순수하게 케일론에게 경외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두터운 방어 마법 덕분에 번개로부터 큰 상해를 입진 않았지만 충격이 상당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이어지는 타격에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안드레아스도 겨우 불의 공을 만들어 케일론을 향해 투척했다. 하지만 그는 지팡이를 한 번 휘두르는 너무나 간단한 동작으로 그 공격을 무력화해버렸다.
예전에 아칸 제국이 아젤란 제국군의 침공을 받았을 때, 그 당시에도 서로 대적한 적이 있었다. 그땐 양 진영 모두 다른 마법사들도 함께 공격에 임했기에 지금처럼 일 대 일 대결을 하진 않았다. 물론 어김없이 패하고 말아 결국 아젤란 제국에 복속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지만.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 거였나. 그래서였구나. 이런 어이없는 차이 때문에 아칸 제국이 그렇게 맥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로군.’
언제까지 상대 실력에 감탄만 늘어놓을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에일린에게 상해를 입히는 건 고사하고 그 자신의 탈출까지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안드레아스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에도 케일론의 무시무시한 마법 공격이 계속되는 중이었다. 그럭저럭 피하고 있지만 별다른 공격 한 번 펼치기 힘든 상황이었다. 안드레아스는 허공에 자리한 베르누아를 향해 정령어로 외쳤다. 정령어니까 어지간한 마법사는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하프 엘프니까 구사하는 언어였다.
[베르누아님! 도와주십시오! 저 여자를 확보해주십시오.]
베르누아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휘익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내려섰다. 에일린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찰나 케일론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프뤼나스, 막아!”
중급 겨울의 정령이 쏜살같이 달려와 에일린을 안아 들었다. 베르누아의 금빛 눈동자에 노여움이 담겼다.
“중급 주제에! 이리 내놔!”
서슬 퍼른 기세에 프뤼나스의 눈이 흔들렸다. 홀린 듯 에일린을 건네주려는 순간 케일론이 외쳤다.
“안 돼! 부탁한다! 프뤼나스!”
정신이 번쩍 든 중급 정령이 다시 에일린을 품에 안자 베르누아가 그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때 케일론이 던진 바람의 공이 베르누아를 덮쳤다. 동시에 프뤼나스도 베르누아에게 얼음 공을 내던졌다.
“악!”
베르누아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중급 정령과 인간의 공격이긴 했지만 둘이 한꺼번에 덤비니 위력이 상당했다. 게다가 그녀는 정령왕의 힘을 대부분 봉인 당한 터라 지금 가진 힘은 상급 정령 정도에 불과했다.
“베르누아님!”
안드레아스가 외쳤다. 낭패였다. 베르누아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대꾸했다.
[나는…… 이만 가봐야겠어. 더는 싸우기 싫어. 그대도 그만 몸을 피하는 게 나을 거야. 저 마법사는 정말 강해.]
[베르누아님, 그러면 제 주군의 입장이…….]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지. 이런 싸움질은 사실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야. 나는 이대로 사라지겠다.]
[베르누아!]
안드레아스의 만류에도 그녀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젠장!”
사역이 아닌 느슨한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니 별도리가 없었다. 변덕스러운 그들에게 인간과 같은 열의를 가지고 싸움에 임해주길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 와중에도 케일론의 마법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그도 몸을 피하고 다른 기회를 노려야 할 것이다. 잘못하다간 이 자리를 벗어나기도 힘들어질 테니. 그는 케일론의 공격을 피해가며 간신히 마법 주문을 영창했다. 겨우 발동시킨 푸른 마법진과 함께 그의 몸이 사라졌다.
케일론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거친 호흡으로 인해 온몸이 크게 들썩였다. 땀이 나서 이마가 번들거렸다. 손까지 덜덜 떨릴 정도로 마나의 소모가 엄청났다. 후들거리는 몸을 지팡이로 지탱했다. 그 자신도 놀랄 정도로 사정없이 공격을 가했다. 아젤란 제국이 정복 전쟁을 벌이는 전투 현장에서도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운 적은 없었는데. 그 마법사는 공격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방어 마법이 유독 강한 자였다. 순수한 마나의 양은 오히려 자신보다 많을지도. 상급으로 보이는 정령까지 부리고 있어 더욱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오늘 밤엔 진정 혼신의 힘을 다해 그자와 대적했다. 상대를 붙잡지 못한 게 유감이었지만 에일린을 무사히 구해낼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여전히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괜찮은가? 마법사.”
프뤼나스가 그의 곁으로 날아와 물었다. 이렇게 지친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케일론이 힐끗 정령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에일린의 곁으로 다가가며 인사를 건넸다.
“고마웠다. 프뤼나스.”
“……!”
프뤼나스가 휘둥그레 뜬 눈으로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케일론이 에일린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프뤼나스에게 다시 한번 눈길을 보냈다.
“이제 그만 네 갈 길을 가도록 해. 약속대로 풀어줄 테니.”
하늘에 떠 있던 중급 겨울의 정령이 머리를 주억거리며 자세를 틀었다. 그대로 어디론가 날아가려다 멈추더니 케일론을 내려다보며 한마디 던졌다.
“그거 알아? 마법사.”
“뭘 말인가?”
“당신이 내게 고맙다고 말한 건 오늘이 처음이야. 3년 만에 처음 말했다고.”
언제나 딱딱한 표정의 마법사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가? 정말 고마운 건 오늘밖에 없었나 보지.”
프뤼나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몸을 돌려 겨울의 궁전 쪽으로 날아갔다.
반짝이는 빛과 함께 사라져가는 정령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케일론은 고개를 돌려 에일린을 살폈다. 술 냄새가 진하게 나는 걸 보니 취해서 자는 것일 뿐 몸이 상한 데는 없어 보였다. 짧게 잘린 머리카락 쪽에 손을 갖다 댔다. 머리카락이야 생명과는 상관도 없는 부위인데다 놔두면 또 자랄 테지만 왠지 잘린 부분이 신경 쓰였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참으로 고약한 취미를 가진 자가 아닌가.
“그나저나 정말 태평스럽군. 누구는 몸을 쥐어짜 싸우느라 녹초가 됐는데 술에 취해 느긋하게 자는 모습이라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에일린의 팔을 흔들어 깨웠다. 의식이 있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슬슬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바깥에 오래 누워 있는 것도 좋지 않았다.
“일어나요! 이제 그만 일어나 봐요.”
“으응…….”
술을 과하게 마셨는지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자 케일론은 심술이 났다.
‘뭔가, 이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내가 안거나 업고 가야 하지 않는가? 정말 사람 귀찮게 하는 여자군. 도대체 얼마나 더 성가시게 해야…….’
팔을 잡고 좀 더 세게 흔들었다.
“응, 왜 자꾸 흔들고 그래요?”
마침내 에일린이 깨어났다. 여전히 졸린 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상태지만.
“어? 당신이었군요.”
“이제 그만 일어나 보세요.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겁니까? 슬슬 돌아가야 합니다.”
정신이 든 에일린을 보니 반가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무뚝뚝한 말투로 재촉했다. 에일린이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일어나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 케일론이 입을 삐죽거리며 상체를 부축해 앉도록 했다.
“오늘은…… 화가 많이 난 거예요? 늘 다정하더니.”
“예? 내가 언제…….”
에일린이 손을 뻗으며 그의 긴 은빛 머리카락을 한 줌 움켜쥐었다. 당황한 케일론이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으며 말했다.
“무슨 짓입니까?”
“히에무스.”
“……!”
그를 보는 에일린의 연초록 눈동자가 한껏 젖어 들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이 그의 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다 곧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정없이 곤두박질쳤다. 떨리는 쉰 목소리로 가까스로 웅얼거렸다.
“누, 누군가와 착각한 거…….”
“나도 당신이 좋아요.”
“……!”
착각한 거였다. 다른 누군가와 자신을 혼동해서 오인한 거였다. 하지만 흠뻑 젖은 두 눈동자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하게 속삭여 주었다.
“정말 좋아해, 좋아할 수밖에 없는걸.”
케일론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숨이 막혀오는 듯했다.
“사실은 나…….”
마법석 같았다.
“사실은 좀 더 오래 당신과 함께하고 싶었어.”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담은 연초록빛의.
“아마도 조금은…….”
그 눈동자가 사정없이 그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조금은 사랑하고 있었을 거야.”
그의 영혼까지도.
“엇!”
이내 그의 떨리는 입술에 그녀의 입술이 포개졌다.
처음엔 에일린이 먼저 그의 입술을 눌러왔다. 몇 번인가 입술을 사부작거리며 문질렀다. 촉촉하고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감촉에 케일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새콤달콤한 포도 향이 진하게 풍겼다. 그 향기에 그의 모든 감각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아아, 너무나 아찔한 느낌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느낌인 걸까?
마치 취하는 것 같다. 흠뻑 취하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나 생소하게 휘몰아치는 강렬한 자극에 그는 그만 정신이 아뜩해지고 말았다.
“으응, 숨 막혀. 이제 그만…….”
에일린이 응석 부리듯 밀어내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가까스로 입술을 떼어냈다. 거의 숨도 쉬지 않고 심취했던 탓에 호흡이 가빠왔다.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얼굴이 홧홧거리며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한 번 더 시도해보고 싶은 기분이 들어 다시 그녀의 입술 위에 그의 것을 가져다 댔다.
“퍽!”
“윽……!”
뭔가가 날아와 케일론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다행히 딱딱한 것은 아니었지만 순간 너무 놀라 황급히 뒤를 돌아다봤다. 누군가가 달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큰 키에 긴 은빛 머리를 늘어뜨린 남자였다. 수려한 용모가 같은 남자가 봐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달빛을 받아 차가운 은청색으로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케일론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마법사!”
마법사인 걸 바로 알아보다니, 이자 역시 마법사인가? 저 긴 머리도 그렇고.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시오?”
이런 야심한 시각에 정령의 숲에 와 있다니 무척 수상한 자였다. 은빛 망토를 두르긴 했지만 지나치게 얇은 옷을 입은 것도 좀 이상해 보였다. 저 모습도 그렇고……. 정령인가? 그 아름다운 남자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차갑게 내뱉었다.
“내가 누군지 네놈 따위에게 일일이 말할 이유는 없다. 긴말 할 필요 없어. 어서 그 여자를 이리 내놔!”
자세히 보니 정령은 아닌 것 같았다. 정령 같은 생김새지만 정령이라면 응당 둘러야 할 빛 무리가 보이지 않았다. 몸에 흐르는 마나의 양을 볼 때도 인간 같았다. 정령이라면 거의 온몸이 넘치는 마나 덩어리로 되어 있어야 할 테지만 이 자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또 인간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양의 마나가 흐르는 걸 보니 혹, 하프 엘프인 걸까?
“당신이 누구인 줄 알고 넘긴단 말이오? 나는 지금 이 여자를 보호하고 있는 사람이오. 당신이야말로 긴말 할 것 없이 물러가시오.”
뜬금없이 나타나 사람을 넘기라 하다니, 미친놈이 아닌가? 혹시 아까 싸웠던 마법사의 잔당인가? 케일론은 에일린을 슬며시 내려놓고 서둘러 내팽개쳤던 지팡이를 챙겨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마나를 회복시켜주는 마법약을 먹어둘걸. 아끼려고 먹지 않았던 게 후회됐다. 낭패였다. 저렇게 풍부한 마나를 가진 자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머리털이 쭈뼛 섰다. 생소한 공포심을 느끼며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니 그 남자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좀 전에 비해 한층 기세가 꺾인 모습이었다.
“나는,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응……·, 어라! 히에무스!”
어느새 깨어난 에일린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일린!”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케일론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들어본 이름이었다. 좀 전에 에일린이 그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키스를 해왔지 않은가. 이 남자였던 건가? 그녀가 조금은 사랑한다는 사람이.
그자의 부축을 받으며 에일린이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이내 두 사람이 어디론가 가려고 걸음을 내디뎠다. 케일론은 잠시 굳어있던 자세를 가다듬고 재빨리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도대체 어딜 가려는 거죠? 정신 차리세요! 에일린!”
그녀는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아 몽롱한 표정이었고 히에무스라는 남자가 대신 대답했다.
“내 집에 데려갈 것이다. 비켜라! 마법사. 이 여자는 내가 보호할 테니 그대는 그대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도록 해.”
남자의 말투에 묘한 위엄이 서린 것 같았다. 마치 태생부터 존귀한 신분이라도 되는 양. 케일론은 짐짓 약이 오른 목소리로 외쳤다.
“뭘 믿고 보낸단 말인가? 당신이야말로 비키시오! 지금 이 여자의 보호자는 나니까.”
그자의 입술 끝이 살짝 뒤틀리며 위로 올라갔다. 한껏 비웃는 표정이었다.
“보호자라고? 그럼 이 지경이 되도록 뭘 한 거지?”
방금 얼음이라도 씹어 먹은 듯 지독히도 차갑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서늘한 은청색 눈동자에 얕잡아보는 듯한 표정이 어렸다.
“너희들을 믿을 수 없어. 그러니 이제부터 내가 데려가 보호하겠다.”
“그런…….”
“히에무스.”
에일린이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두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를 향했다.
“그냥 저 마법사의 집으로 갈게요. 오늘 고마웠어요. 당신도 이제 그만 가 보세요.”
“에일린…….”
“저, 좀 피곤해요. 그만 가서 쉬고 싶어요.”
좀 전까지 싸늘한 냉기를 뿜어내던 남자의 분위기가 금세 온화하게 바뀌었다. 표정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따뜻해 보였다.
“괜찮겠느냐? 에일린.”
목소리조차 같은 사람이 내는 거라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나긋나긋하고 상냥해졌다. 에일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에일린의 뺨을 어루만지자 케일론은 왠지 발끈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대가 원한다면 할 수 없지. 오늘은 그냥 보내 줄게. 하지만 언제라도 내가 필요하면 불러줘. 즉시 달려갈 테니까.”
에일린이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어엇, 오늘 당신 좀 이상해. 왜 이렇게 따뜻하게 느껴지지?”
히에무스가 싱긋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이듯 일러 주었다.
“나중에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마. 지금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에일린이 배시시 웃더니 바싹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응, 그래요. 사악한 마법사는 피해야 하니까.”
“그래. 사악할 뿐만 아니라 음흉하기까지 하니 더욱 조심해야 한다, 에일린. 내일 내가 찾아갈 테니 오늘은 그만 가서 쉬도록 해라.”
그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히에무스가 케일론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다시 냉혹하기 그지없는 낯빛으로 말을 뱉어냈다.
“에일린을 데려가라, 마법사! 보호자라면 좀 더 똑바로 처신하도록 해. 아까처럼 엉뚱한 짓도 하지 말고! 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나서지 말도록.”
케일론은 황당했다. 낯선 이에게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한단 말인가? 기분이 정말 더러웠지만 또 뭐라고 반박할 만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오늘 에일린이 큰 위기를 겪은 건 사실이니까. 게다가 남자의 말투에 묘하게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배어 나와 대하는 게 조심스러웠다. 어느 한 나라의 군주 같은 기상이랄까, 분위기 같은 것이. 그를 감싼 공기마저도 왠지 서늘하게 느껴져 케일론은 자꾸만 주눅이 들었다. 빨리 그자의 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거칠게 한마디 던지며 에일린의 팔을 슬그머니 잡아 자신의 곁으로 오게 했다.
“내가 알아서 할 것이오. 에일린, 어서 돌아갑시다. 폐하께서도 기다리고 계시니까.”
“예.”
남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케일론은 서둘러 순간이동을 위한 마법 주문을 외웠다. 칼날처럼 예리하게 꽂히는 시선 때문에 숨이 턱 막혀왔다. 정말 기이한 분위기를 지닌 자였다. 푸른 마법진이 생겨나 서로의 모습이 희미해지자 케일론은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
팔라틴 황궁 내에 위치한 마법청 건물 앞에 푸른 마법진이 나타났다. 케일론과 에일린이 당도한 거였다. 술에 취한데다 겨울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에일린은 하마터면 바닥에 나뒹굴 뻔했다. 케일론이 거의 끌어안는 자세로 붙들어 주며 얼른 주변 공기를 안정시키는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들 주위에 즉시 훈훈한 온기로 가득한 엷은 보호막이 형성되었다.
“걸을 수 있겠지요?”
“예, 문제없어요.”
에일린이 휘청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걷다가 눈길에 미끄러지려 하자 케일론이 다시 부축해주었다. 조금 망설이다 선심 쓰듯 말을 건넸다.
“힘들면 내 몸을 붙잡아도 괜찮아요.”
“어, 고마워요.”
에일린이 조심스럽게 그의 한쪽 팔에 매달렸다. 한결 걷기가 수월해진 느낌이었다. 라피스 궁과 연결된 회랑으로 이동해 걸어가는데 케일론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
“좀 전의 그 남자는 누구죠?”
“응, 히에무스 말인가요? 그 사람은…….”
에일린이 여전히 취기가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친구예요.”
“친구라고요? 뭘 하는 사람입니까?”
“그냥, 그 사람도 마법을 쓰는 일을 하고 살아요.”
그렇군. 역시 마법사였나? 같은 마법사면서 그 오만한 태도는 뭐란 말인가? 정말 웃긴 놈이로군. 하다못해 작은 나라의 왕자 정도는 되나 했더니. 그자 앞에서 잔뜩 주눅 들었던 모습을 떠올리니 부아가 치밀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추궁하듯 질문했다.
“어쩌다 만난 사입니까?”
“예전에 여기 처음 왔을 때 죽어가던 절 구해준 사람이에요.”
“……!”
“그리고 오늘도 그 사람 덕분에 무사한 거나 마찬가지고요.”
그래서였나? 그래서 그토록 당당한 태도를 보였던 건가? 순간 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누가 그대를 위협한 거죠?”
에일린이 걸음을 멈췄다. 멍한 표정으로 저만치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라피스 궁을 바라보았다.
“그건…….”
“황제 폐하께서도 물어보실 겁니다. 대충 상황파악은 하고 계시지만 최종적으로 그대가 증언해야 처벌이 가능하겠지요.”
“어떤 처벌이 주어지나요? 만약…… 어느 나라의 왕녀가 벌인 일이라면?”
“글쎄요. 황제 폐하의 마음에 달린 거겠지요. 하지만 범인이 왕녀라면 조금 골치 아프긴 하겠죠. 복속한 나라라고 해도 그 나라와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을 테니까.”
사실 원칙대로라면 그리 큰 벌은 내리지 못할 것이다. 왕족이 집도 성씨도 없는 평민 하나에게 위해를 가했다 한들 그게 큰 과오에 해당되지는 않으니까. 황제 개인의 감정으로 처리한다 해도 아직 이 여자에게 가진 호감이 그리 크진 않을 테니 별로 큰 기대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겠죠.”
에일린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소설에 이런 일에 대한 묘사가 있었다. 중세 시대에 평민이 가지는 권리나 지위가 형편없이 낮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가 등장하곤 했었다. 그들을 보호하는 법 같은 것도 제대로 없었다. 거의 전적으로 상류계층 사람들의 자비심이나 양심에 내맡기는 수준이었다. 소설책에서 엘시아 황녀가 이런 현실에 분노하며 그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그려졌었다. 그 모습에 감동한 황제가 그녀에게 더욱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되고 나중엔 평민들을 위해 함께 힘을 쏟는 장면이 나왔다.
“아하하…….”
에일린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어디든 똑같았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소설 속의 세계든 소설 밖의 세계든.
“있잖아요, 케일론님.”
“뭡니까.”
“역시 그런 건 없는 걸까요? 꿈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그런 곳은 어디든 존재하지 않는 걸까요?”
“…….”
“보잘것없어도 존중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 건 실재하지 않는 걸까요? 이야기 속에서조차 없는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그런 건.”
케일론은 단호하게 없을 거라 말하려다 모르겠다는 말로 대신했다. 사실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술에 취한 자의 넋두리일 뿐. 그런 물음은 지나가는 바람처럼 아무 의미 없는 말임을 그도 알고 있었다. 에일린은 아까보다 더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 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어두운 허공 속을 응시했다. 무거운 눈송이들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춤을 추듯 쏟아져 내렸다. 아직 약 기운이 남은 케일론의 눈에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하얀 겨울 정령과 북풍의 모습이 보였다. 에일린 역시 그들의 모습이 보이기라도 한 듯 시선을 맞췄다.
“그 사람, 오늘 좀 이상했지.”
들릴 듯 말 듯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따뜻했어.”
***
“에일린!”
렉스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케일론이 재빨리 허리를 굽히며 황제에 대한 예를 올리자 에일린도 고개를 숙였다. 머리를 드는 순간 황제의 두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괜찮은 거냐? 다친 데는 없는 것인가?”
푸른 두 눈에 염려와 안도의 빛이 가득했다.
“어, 네. 괜찮습니다.”
하지만 에일린은 저절로 몸이 경직되었다. 따지고 보면 오늘 일을 당한 원인이 황제의 관심 때문이지 않은가? 소설 속 메인 남주는 역시 여주인공과 맺어져야 하는 거겠지.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일 것이다. 더 이상은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으리라. 자신은 다른 인연을 찾아보는 게 나을 거였다. 되도록 소설 속 남주들말고 그녀와 엮여도 소설 전개에 별 영향 없을 다른 인물들로. 잘 찾아보면 있을 것이다.
어색한 낯빛으로 황제의 몸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그 누구보다도 메인 남주인 이 황제만큼은 피해야 했다. 그의 곁에서는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렉스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에일린의 표정과 반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화난 기분이 들어 날카롭게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많이 놀란 듯 여전히 가늘게 떨리는 가냘픈 어깨가 보였다. 제멋대로 잘린 머리카락이 애처로워 보였다. 연초록 눈동자에 체념과 공포의 빛이 가득 서린 모습이었다. 잠깐 굳었던 그의 마음이 즉시 풀어져 다시 그녀의 몸을 안았다.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꽉 힘을 줘서.
“고생이 많았구나.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
에일린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왜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인가? ‘사자왕’이라면서. 사자의 마음처럼 잔인하고 냉혹해야 할 사람이 어쩜 이렇게 다정한 걸까? 에일린이 좀 진정한 듯 보이자 황제가 팔을 느슨하게 풀고 그녀를 응시했다. 손을 들어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이내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엘시아 왕녀의 짓이냐?”
에일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잠시 안정을 찾았던 몸이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부담스러운 렉스의 시선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리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렉스가 케일론의 반응을 곁눈질로 확인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굳이 그의 의견까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이 순진한 여자의 반응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으니.
“알았다. 오늘은 피곤할 테니 이만 쉬러 가는 게 좋겠구나.”
렉스는 뒤에 시립한 시종에게 명령했다.
“리히트 경, 시녀장에게 말해서 루쿨루스 양이 쉴 수 있도록 방을 준비하라 이르게. 라피스 궁에 마련하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에일린과 케일론이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외치듯이 말했다.
“아, 아니에요! 폐하. 저, 그냥 케일론님의 성에 가서 쉴게요!!”
“거긴 불편할 것이다. 듣자 하니 변변한 하녀 하나 없는 것 같던데 이제부터 황궁에 머물도록 해라.”
“불편하지 않아요, 이제 내 집처럼 편한 곳인걸요! 그냥 거기 가서 쉬고 싶습니다.”
황제에 대한 마음을 접기로 했으니 가까이 있어서 좋은 일이 없겠지. 가급적 서로 마주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황제도 자신에 대한 관심을 지우겠지. 에일린이 한사코 거절하자 렉스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조금 말투가 딱딱해졌지만 친절한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정 그렇다면 그대 뜻대로 해라. 하지만 언제라도 불편하면 황궁에 들어와서 지내도록.”
“예,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폐하.”
에일린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황제와 마주치는 것도 원치 않았지만 그보다는 엘시아 왕녀 일행과 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보는 건 여러모로 힘든 일이 될 터였다. 더 이상은 여주인공의 삶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에일린은 슬그머니 케일론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 케일론님.”
“어, 그게…….”
케일론은 아까부터 무척 기뻤다. 에일린이 자신의 집에서 지내는 게 ‘내 집처럼 편한 곳’이라 말해줬을 때부터. 무슨 대단한 일을 해서 칭찬을 들은 것처럼 기분이 설레고 좋았다. 렉스가 살짝 찌푸린 표정으로 케일론에게 명했다.
“그만 에일린을 데리고 돌아가도록 하게. 내일은 그대도 입궁하지 않고 쉬어도 좋다.”
“황송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렉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에일린에게 다가왔다.
“에일린.”
또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어 멀뚱히 쳐다봤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그녀의 이마에 슬며시 입을 맞췄다.
“푹 쉬도록 해라.”
“가, 감사합니다.”
케일론이 조금 서두르듯 마법 주문을 외자 곧 푸른 마법진과 함께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잠시 지켜보던 렉스가 시종을 불렀다.
“리히트 경.”
“예, 폐하.”
“지금 즉시 궁정 서기를 집무실로 부르고 발 빠른 전령 네 명을 물색해서 대기시켜주게.”
“알겠습니다.”
리히트가 공손한 자세로 인사하고 자리를 뜨자 나이 든 다른 시종과 수행인들을 거느리고 집무실로 향했다. 호위를 위해 줄곧 곁에 머물던 엘로드가 황제의 심기를 살폈다. 얼굴에 묘한 기색이 떠올랐는데 엘로드에게도 익숙한 거였다. 전쟁터에서 전투를 치르러 가기 전에 짓던 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한없이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뭔가 즐거운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폐하.”
렉스가 엘로드의 얼굴을 힐끗 훑었다.
“글쎄, 즐거운 일이라고 해야 할까, 곤란한 일이라고 해야 할까.”
희미한 미소가 조각같이 잘생긴 그의 얼굴을 더욱 환하게 꾸며주었다.
“캐드릭스 후작.”
엘로드는 짐짓 놀라는 태도였다. ‘캐드릭스 후작’은 그의 정식 작위 명이었다.
“예, 황제 폐하.”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데도 정식 작위 명으로 부를 때는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그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뭔가를 하겠다는 신호. 친구가 아닌 철저하게 군주로서 행동하겠다는 뜻.
“어쩌면 경에게 조금 미안한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소. 부디 이해해주기를 바라겠소.”
지엄하신 황제의 엄숙한 목소리였다. 엘로드는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옵니다. 폐하. 이해라니, 당치 않으십니다. 무엇이든 뜻대로 하소서.”
그도 충성스러운 신하의 얼굴로 대답했다.
“고맙소.”
렉스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지자 엘로드는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
짝!
엘시아가 있는 힘껏 안드레아스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의 한쪽 뺨이 발갛게 부어올랐다. 아름다운 왕녀의 얼굴이 불같은 노여움으로 일그러졌다.
“그따위 일도 깔끔하게 처리 못 하고 무슨 낯짝으로 기어들어 온 거죠?”
“……송구합니다.”
엘시아는 안드레아스를 서늘한 눈빛으로 계속 노려보다 한숨을 쉬고는 체념한 듯 옆에 있는 안락의자로 가 앉았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성과 하나 없는 무도회를 마치고 처소인 아르겐 궁으로 돌아올 때 잔뜩 쌓인 눈 때문에 하마터면 미끄러져 다칠 뻔했다. 온 신경을 곤두세워 걸어오느라 진이 다 빠졌다. 미간을 찌푸린 채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말문을 열었다. 평소처럼 침착한 목소리로.
“뭐, 됐어요. 내 입장이 좀 우습게 되긴 했지만 평민 여자 하나 좀 골려줬다고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
“황제가 따지고 들면 그 여자에게 금화 몇 닢 던져줘서 위로해주면 충분하겠죠.”
단지 그 여자를 향한 황제의 관심을 끊어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이번 무도회에서 그를 유혹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셈이었는데 무엇 하나 시도해 보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 여자만 더 유리해졌겠지. 황제의 동정심을 좀 더 자극했을 테니.
“실망이군요, 안드라. 아칸 왕국 제일의 마법사가 이 정도 역량밖에 못 보여주다니.”
“황공합니다. 어찌해도 변명밖에 되지 않겠지만…… 그자의 실력이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엘시아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나는 누구든 내 앞에서 그런 자신감 없는 소리 하는 거 딱 질색이니까. 그냥 상황이 나빴을 뿐이에요. 하프엘프에 날 때부터 귀족인 당신이 그런 자보다 못할 리가 없잖아요.”
“…….”
안드레아스는 말문이 막혔다. 언제나 빛나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당당하고 아름다운 왕녀. 한때는 그녀의 이런 모습에 정신없이 빠져든 적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점점 부담스러워졌지만.
“공주님.”
시녀 비안나가 신중한 태도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황제 폐하께서 서신을 보내오셨습니다.”
“서신? 이 밤에?”
의아한 낯빛으로 시녀의 손에 들린 문서를 낚아채듯 잡아 펼쳐 들었다. 안드레아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초대장이에요.”
“초대장이라고요?”
엘시아가 의혹이 가득한 기색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라피스 궁에서 열리는 오찬에 참석하라는군요. 급히 소개해줄 사람이 있다고.”
***
“오오, 듣던 대로 정말 아름다우신 분이시군요. 저는 ‘바니스터’ 공작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엘시아 공주님.”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공작님.”
다음 날 오찬장에서 엘시아는 6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늙은 공작과 인사를 나눴다. 벗겨진 머리에 등도 살짝 굽은 자였다. 그녀 외에 그 날 같은 휴게실에 있던 다른 공녀 세 명도 모두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젤란 귀족을 소개받았다. 두 명은 60대 초반 정도로 보였고 다른 한 명은 5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나이가 든 건 둘째 치고라도 다들 하나같이 보기 드문 추남이었다. 황제 렉스가 기품 있는 태도로 오찬을 진행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우리 아젤란 제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수장들이시오. 내 요즘 일이 바빠 대접이 소홀한 듯해 특별히 부른 것이니 부디 사양치 말고 오찬을 즐겨주시오.”
“황송합니다, 폐하. 저희 같은 늙은이들까지 이리 세심히 챙겨주시다니.”
“당연히 잘 챙겨야 하지 않겠소. 게다가 모두들 아내를 잃고 혼자 된 몸으로 지내고 계시다고 들었소. 얼마나 적적하시겠소? 다들 재혼을 하셔야 할 텐데.”
“……!”
공녀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허허……, 우리 같은 노인들을 신경 쓰실 게 아니라 혈기 왕성하신 황제 폐하께서 더 서두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렉스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짐은 알아서 할 터이니 경들도 신경 써주시오. 마침 제국에 온 공녀들 중 재색을 겸비하신 분들이 많으니 잘 살펴보시오. 옆에 계신 공주님들은 어떠시오?”
“허허허. 저희에겐 너무나 과분하신 분들이지요.”
네 명의 귀족이 빠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저마다의 곁에 자리한 공녀들을 기름이 잔뜩 낀 퇴색된 눈으로 훑어 내렸다. 세 명의 공녀들이 울상을 지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엘시아의 얼굴도 흙빛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아젤란 귀족들만 즐겼던 오찬이 끝나자 렉스는 그들을 먼저 물러가게 한 뒤 공녀들만 따로 남게 했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눈치만 보고 있는 그들에게 통보하듯 엄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좀 전의 그분들은 모두 신분상으로 고귀한 공주님들의 신랑감으로 전혀 손색없는 분들이오. 짐은 그분들의 반려 감으로 여기 모여 계신 왕녀님들을 생각하는 중이오.”
“예엣! 그런…….”
모두들 경악스러운 표정을 금치 못했다. 엘시아도 마찬가지. 당혹감과 두려움으로 그녀의 심장이 사정없이 방망이질 쳐댔다. 푸른 두 눈을 빛낸 채 여전히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는 황제의 얼굴을 노려보는데 그의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 결혼을 피하고 싶은 분들도 있을 테니 방법을 알려주겠소.”
걱정과 두려움으로 구겨졌던 공녀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오르는 순간, 렉스가 그의 곁에 서 있던 시종에게 눈짓을 보냈다. 렉스의 명령을 받은 시종이 신호를 보내자 몇 명의 시녀들이 손에 은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쟁반 위에 가위가 놓여 있었다. 모두 의아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머리채를 짧게 자르고 가시오. 그럼 이 결혼을 거절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소.”
엘시아는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입술을 깨물었다. 떨리는 음성을 짓누르며 간신히 황제를 향해 말했다.
“고작…… 그런 평민 하나 놀렸다고 이러시는 건가요?”
렉스의 파란 눈에 날카로운 광채가 번득였다.
“그냥 평민 하나가 아니오.”
그의 얼굴에 계속 머물던 미소가 싹 사라졌다.
“짐의 마음에 든 평민이지.”
***
“앞으로 5일 동안 겨울 폭풍을 일으켜야 해. 당분간 바빠서 오래 머물 수 없을 것 같구나. 폭풍을 일으키는 동안은 궁전에 대기해야 하니까.”
“예에…….”
무도회 다음 날 아침, 히에무스가 여느 때처럼 에일린을 보러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저, 히에무스. 해독약은…… 안 드신 건가요?”
그가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에일린, 한 가지만 물을 테니 대답해 다오.”
“예?”
한없이 잔잔하고 깊어 보이는 은청색 눈동자가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처럼.
“만약 내가 인간의 몸이라면…… 그대는 나를 사랑해줄 것이냐?”
“예? 인간이 아니시잖아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만약에 말이야.”
“그건…….”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문제지만 그의 사랑이 진짜가 아니라는 점이 더 큰 문제였다. 하지만 곧 헤어질 입장에서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령이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에일린은 대답했다.
“당연히 사랑했을 거예요.”
히에무스가 싱긋 웃었다.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하고 싶어서 해독약 먹는 걸 미뤘나? 하긴, 에일린도 그날 그렇게 헤어진 게 너무나 아쉽긴 했다. 서로의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겠지. 이 아름답고 고마운 존재에게 되도록 좋은 느낌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럼 됐다.”
“이제…… 해독약을 드실 건가요?”
“해독약은 먹지 않아, 그보다 더 좋은 약을 가지고 왔으니까.”
“예?”
“에일린, 나는 묘약 때문에 시작된 사랑이라 해도 해독약을 먹지 않는다면 보통의 사랑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그대와 끝내고 싶지 않아.”
“하지만, 히에무스…….”
그가 한층 더 그윽해진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세한 이야긴 폭풍이 끝나는 날 와서 하도록 하지. 난 이만 가볼 테니 잘 지내거라, 에일린.”
그녀가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그가 입술을 눌러왔다. 습관처럼 눈을 감았다 떠보니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잠깐 멍한 얼굴로 서 있으려니 떡갈나무 위에 있던 세 정령이 날아 들어와 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에일린님.”
“예. 어제는 모두 정말 고마웠어요.”
“아니에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그래도 고마워요, 잊지 않을게요.”
에일린이 머리까지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하자 세 정령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은 게 왠지 황송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태어난 이래 줄곧 명령받은 일을 수행하며 살아왔다. 왕이나 다른 상급자들에게서 어떤 형태로든 치하를 받은 적이 별로 없었다. 쑥스러워하는 정령들의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에일린은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대충 매만졌다. 들쑥날쑥 짧게 잘린 머리카락이 신경 쓰였다. 어깨에 살짝 닿는 길이 정도는 될 것 같았지만.
브레이가 부엌에서 이미 분주하게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죠?”
“괜찮아요. 어제 일로 피곤했을 텐데요. 좀 더 쉬다 와도 상관없어요.”
배려해주는 그가 정말 고마웠다. 그래도 미안해서 다시 쉬러 가지는 않았다. 에일린은 브레이를 도와 식사 준비를 하며 말을 건넸다.
“저, 브레이.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무슨 일이죠?”
“시간 나시면 제게 글자를 좀 가르쳐줄 수 있을까요?”
브레이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죠. 시간이 많이 나진 않겠지만 틈이 나면 가르쳐 드릴게요.”
“고마워요. 저, 가르쳐주시면 수업료를 낼게요. 많이 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그런 걸 받으면 나도 부담스러우니까 그냥 가르쳐 줄게요.”
“어……. 고마워요, 정말.”
브레이가 눈웃음을 지었다. 아울러 머리 손질을 부탁하자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에일린은 새삼스럽게 그를 다시 훑어봤다. 주변에 잘난 사람들이 많아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그도 꽤 괜찮은 훈남이었다. 키도 크고 듬직한 체격에 제법 단정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다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능력도 좋은 편이고 성격도 담백하고.
‘음, 어쩌면 이런 사람이 신랑감으로 딱일지도 몰라.’
지금 그녀가 처한 형편이나 신분을 생각해도 그렇고. 나머지 남자들은 사실 소설 속 여주인공을 사랑하는 남자들일 테니 차라리 브레이 같은 사람을 사귀는 게 현실적일 지도.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당장 그에게 물어보았다.
“저, 브레이. 혹시 사귀는 아가씨가 있나요?”
그의 얼굴이 빨갛게 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열심히 마법을 익혀서 주인님처럼 뛰어난 마법사가 되는 게 꿈이니까……. 당분간 다른 건 생각하지 않으려 해요.”
“그렇구나.”
대견한 청년이네. 잠시라도 흑심을 품은 게 미안할 정도였다.
어느덧 식사 준비가 다 돼서 식탁을 차렸다. 실내복으로 입는 푸른 튜닉 차림으로 어슬렁거리며 케일론이 내려왔다. 에일린이 묵례로 아침 인사를 하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려는데 그가 불러 세웠다.
“에일린.”
“예?”
“오늘부터 그대도 나와 함께 이 식탁에서 식사를 하도록 하세요.”
뜻밖의 제안에 에일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그냥 뭐, 이제 폐하께서도 당신에 대해 신경 쓰시니까 오늘부터 손님 대접을 해줄 생각입니다. 그러니 나와 함께 식탁에서 식사하고…… 허드렛일도 더 이상 안 해도 돼요.”
케일론이 언제나처럼 크게 선심 쓰는 표정을 지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냥 전 브레이와 함께 먹을게요. 허드렛일도 계속하고요. 할 일이 많은 것도 아니고 제가 안 도와주면 브레이 혼자 너무 힘들잖아요.”
에일린은 별생각 없이 말했다. 케일론 같이 부담스러운 사람과 함께 밥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신세 지는 입장에서 아무 일도 안 하고 지내는 것도 싫고. 케일론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그동안 브레이와 많이 친해진 모양이군요.”
“뭐, 그렇죠. 늘 함께 일하니까 서로가 많이 익숙해진 것 같아요.”
케일론이 옆에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한 브레이를 날카롭게 쏘아봤다. 그 눈초리에 브레이는 움찔거렸다. 자신이 뭔가 주인님의 심기를 거스른 듯한데 뭘 잘못했는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케일론이 식사하는 내내 마뜩잖은 눈빛을 보내는 통에 식은땀이 났다. 식사 시간이 끝났는데도 케일론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식당에 머물러 있었다. 부엌 쪽에 잔뜩 신경을 쓰는 중이었다. 그도 오늘은 입궁하지 않아도 돼 시간이 여유로운데다 왠지 혼자 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부엌 쪽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만 놔두고 무슨 대화를 저리 나누는 것일까? 아무도 없는 주변을 쓱 둘러본 후 낮은 목소리로 마법 주문을 외웠다. 멀리 있는 소리를 듣게 해주는 마법이었다.
- “브레이, 이제 여기 일은 끝났으니까 같이 갈래요? 방에서 하는 것보단 욕실이 낫겠죠?”
- “그게 좋겠지요. 더러워질 수도 있으니 욕실이 낫겠네요.”
- “수건이나 보자기 같은 거 있으세요? 몸을 감싸려면 커다란 게 있어야 할 텐데.”
- “있어요. 제가 챙겨 갈게요. 끝나고 씻을 때도 필요할 테니 몇 장 가져갈게요.”
- “당신 솜씨는 믿을 만하겠죠?”
- “하하, 뭐. 실망시킬 정도는 아닐 거예요. 능숙하진 않아도 가끔은 하던 일이니까.”
- “그래요, 믿을게요. 그리고 아까 약속했던 것도 해주실 건가요?”
- “그럴게요. 오늘은 시간이 많으니까 기초부터 천천히,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줄게요. 처음엔 서두르지 않는 게 좋거든요.”
- “헤헤, 기대된다. 브레이, 오늘은 완전 저를 위해 봉사해주는 거네요.”
- “하하……. 그런 셈인가요?”
둘의 대화를 엿듣던 케일론의 보랏빛 눈동자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랗게 벌어졌다.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 쪽으로 다가가니 브레이가 커다란 수건을 챙겨 들고 에일린과 함께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브레이!”
브레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성의 주인이자 그의 스승인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예.”
퍽!
케일론이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브레이의 건장한 몸이 옆으로 휘청거렸다. 놀란 에일린이 소리쳤다.
“꺅! 무슨 짓이에요!”
케일론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의 집사이자 하인이자 제자인 브레이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그렇지 않아도 쉰 목소리가 더 거칠고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너 이 미친 자식!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를 생각이냐?!”
너무나 뜬금없는 공격에 반은 넋이 나간 얼굴로 브레이가 힘겹게 되물었다.
“무슨 짓…… 이라뇨?”
“내가 다 들었다! 둘이서 욕실에 가서 그런 부끄럽고 더러운 짓을 저지르려고 했던 것 말이다!”
“예?”
여전히 멍한 얼굴로 바라보는 브레이를 보다 못해 에일린이 소리쳤다.
“그냥 욕실에서 제 머리를 손질해주려던 것뿐인데 그게 뭐 어떻다고 그러세요?”
“뭐?”
케일론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브레이의 멱살을 잡아 올리다 에일린의 한 손에 들린 가위를 쳐다봤다.
“머리 손질…… 이라고?”
“그래요! 머리 손질! 이대로 둘 수 없잖아요. 좀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아 제가 부탁했어요. 그러려면 욕실에 가서 하는 게 좋잖아요. 방 안엔 카펫도 깔려 있고 끝나면 바로 씻어야 하니까.”
그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바로 잘못을 인정하긴 힘들었다. 조금 꺾인 기세로 마저 따졌다.
“그럼…… 기초부터 천천히 가르쳐주겠다는 일은 뭐지?”
에일린은 어처구니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이 깐깐한 마법사가 도대체 무슨 민망한 오해를 한 것인가?
“제가 브레이에게 글을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어요. 오늘 좀 한가하다 하기에.”
드디어 케일론이 움켜잡았던 브레이의 멱살을 슬그머니 놓아주었다.
“그랬군. 흠흠, 뭐 별일 아니라면 됐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브레이가 물었다. 맞은 곳이 욱신거리는지 한쪽 뺨을 손으로 감싼 채였다.
“원거리 소리를 듣는 마법을…… 쓰신 겁니까? 케일론님.”
“엑, 뭐예요! 그런 짓을 저지른 거예요?”
에일린이 불쾌하다는 듯 그를 흘겨보자 케일론은 순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브레이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대고 마법 주문을 외웠다. 통증이 사라졌는지 브레이의 안색이 한결 나아졌다.
“내 집에서 그런 마법을 쓸 일이 뭐가 있단 말입니까? 내 귀가 워낙 밝아서 다 들린 것뿐입니다. 원래 엘프 혈통의 마법사들은 귀가 밝은 법이니까.”
되지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자 브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케일론은 곧 위엄 있는 성주의 얼굴로 돌아가 서둘러 그의 유일한 하인에게 지시했다.
“브레이! 오늘 말들에게 빗질 좀 해주거라. 그리고 편자도 갈아야 할 것 같더군.”
“예? 며칠 더 있다 해도 될…….”
케일론이 송곳 같은 눈빛으로 브레이를 째려봤다.
“즉시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겨울 폭풍이 이는 동안 연장 손질 같은 걸 해두면 좋겠지. 장작도 좀 더 패두고. 점심 메뉴로 오리 통구이를 해 먹으면 좋을 것 같다. 후식으로 파이도 좀 굽고.”
“예…….”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서고에 있는 장서도 가지런히 정리해 두도록.”
“알겠습니다.”
브레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아침부터 뭔가 자신이 주인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 게 분명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었지만 깐깐한 주인이 대놓고 지적하지는 못하고 에둘러서 표현하는 것일 터였다. 일단 에일린의 머리 손질이 끝나면 시킨 일을 하면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저, 에일린. 글은 다음에 가르쳐 줄게요.”
“예? 아, 그러세요.”
귀가 밝은 케일론이 멀리 떨어진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식사 시간이 끝난 지가 언젠데 왜 자꾸 저기 앉아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글은 내가 가르쳐줄 테니까 일단 머리 손질이나 하고 오세요.”
“어, 정말이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됐어요. 그냥 기다렸다가 브레이에게 배울게요.”
“왜죠? 그보다 내가 더 못 가르쳐줄 것 같은가요?”
케일론이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
“아뇨. 브레이는 공짜로 가르쳐 주기로 했거든요. 케일론님은 돈을 받으실 거잖아요.”
“…….”
“그럼, 이만.”
에일린이 자리를 뜨려 하자 케일론이 다급한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에일린!”
멀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해줄게요.”
“예?”
“나도 공짜로 가르쳐 준다고요, 공짜로!”
한껏 붉어진 얼굴로 성의 주인이자 제국의 대마법사로 불리는 ‘케일론 아리스타 데 아스카니아 백작’이 말했다.
<겨울의 왕과 불의 키스를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