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외전 - 키프리스의 변명 (6/24)

5. 외전 - 키프리스의 변명

남북으로 뻗은 거대한 안드로스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한 험준한 산맥.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거기 존재하는 한 장소. 대자연 어머니가 거하는 곳, 빛의 궁전이라 일컬어지는 그곳에 세상에 흩어져 있던 무수한 정령들이 속속 모여드는 중이었다. 찬란하게 반짝이는 빛의 존재들이 한꺼번에 운집하자 그곳 하늘 일대가 온통 무지갯빛 채운과 빛 안개, 반딧불같이 어른거리는 빛 뭉치들로 가득 채워졌다. 정말 멋지고 근사한 풍경이었다. 워낙 험준한 산악지대였기에 지켜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어서 오세요, 불의 왕이시여, 물의 여왕이시여.”

“이쪽으로 오십시오. 바람의 왕과 대지의 왕이시여.”

엉킨 나뭇가지로 된 문이 갈라지며 키가 큰 정령왕들이 속속 궁전 안으로 들어섰다. 나비같이 투명한 날개를 단 작은 빛의 정령들이 길쭉한 나무들 틈새를 분주히 날아오르며 맞아주었다.

“여름의 여왕이시여. 오랜만에 뵙습니다.”

“환영합니다, 가을의 왕이시여.”

두 계절의 왕도 걸음을 재촉해 빛의 정령들의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더 안쪽으로 이동했다.

“음, 반갑구나, 모두들.”

빛의 정령들에게 인사한 후 가을의 왕이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는 여름이 끝난 후 곧장 잠들지 않았던가? 이번 일로 다시 깨게 된 건가?”

에스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런 일이 우리 계절의 정령 사이에서 일어났다니 정말 놀라워. 재판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받고 바로 깨어나 달려오던 참이야.”

“봄의 여왕이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늘 나른한 표정으로 들떠 있지 않았나.”

“그렇긴 하지. 부드러운 성정에 우리 중 가장 인간들에게 호감을 가지기도 했고.”

“하하, 인간들에 대한 호감이라면 나도 지지 않는데 말이지.”

“당신은 그저 흥미를 가진 것뿐이지 않나? 그대의 무료함을 덜어줄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고. 베르누아는 그보다도 더 깊은 호기심과 호감을 갖고 있었던 거겠지. 그런 일까지 벌일 정도였으니.”

“더 깊은 호기심과 호감이라……. 어렵군. 그런 마음의 구분은.”

그는 빙긋 웃으며 주위를 휙 둘러봤다.

“겨울의 왕은 아직 오지 않았나?”

에스타스가 살짝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럴 리가. 그 철두철미한 자가 우리보다 더 늦게 당도할 리 없지. 누구보다도 먼저 와 재판장 한쪽을 차지하고 있을걸?”

“그렇겠군.”

두 정령왕은 엷은 미소를 띤 채 빛의 정령들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한 방으로 향했다. 대자연 어머니가 항상 머무는 곳이었다. 어떨 땐 알현실이 되고 가끔 회의실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지금처럼 재판장이 되기도 하는 공간이었다. 북쪽 밤하늘에 드리워진 색색의 오로라처럼 하늘거리는 빛의 장막이 입구를 가리고 있었다. 두 정령왕이 접근하자 문지기를 서던 열댓 명의 정령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양쪽으로 걷어주었다. 언제나 변함없는 풍경이 나왔다. 푸른빛을 품은 얕고 잔잔한 호수로 이루어진 공간. 그 안쪽에 금빛 넝쿨로 휘감긴 은빛 몸체에 금빛 이파리를 넘치도록 매단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자라나 있었다. 아찔한 키의 나무 위는 온통 영롱한 오색 안개로 뒤덮여 끝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 나무의 뿌리로 된 옥좌 위에 대자연 어머니가 당당한 자태로 자리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그녀의 앞 양쪽으로 여러 개의 의자가 높이 솟아난 광경이 보였다. 그 위에 눈에 익은 정령왕들이 여럿 앉아있었다. 여기 온 모든 정령이 저 의자에 앉아있는 건 아니었다. 저 의자는 대자연 어머니께서 뽑아놓은 열두 명의 배심원 역할을 맡은 정령을 위한 자리였다. 나머지는 관객 자격으로 호숫가 가장자리에 적당히 붙어 지켜봐야 했다. 계절의 왕이 관련된 사안이니만큼 그들은 당연히 배심원으로 선택된 터였다. 둘은 서둘러 날아올라 빛의 나무 곁으로 다가갔다.

“어서 오너라, 나의 아들과 딸아.”

“부르셨습니까? 어머니시여.”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음성이 울렸다. 물소리나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대지의 속삭임과 노랫소리 같기도 한 신비로운 소리.

“그래,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저쪽 자리로 가렴.”

“감사합니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향하니 물속에서 은빛 나무뿌리가 휙 솟아올라 얽히더니 금세 의자 두 개가 만들어졌다. 둘은 적당히 가 자리 잡았다.

“늦었군.”

얼음처럼 서걱거리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옆에 미리 와 있던 겨울의 왕이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은청색 눈동자에 곧게 흘러내린 은빛 머리, 냉혹한 표정의 하얀 얼굴을 하고서 반듯하고 꼿꼿한 자세로 앉아 그를 바라봤다.

“아직 오지 않은 자들도 있으니 늦었다고 할 순 없어. 보라고. 피고를 변호할 정령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잖아?”

가을의 왕이 눈짓으로 가리킨 곳에 금빛 나무 넝쿨로 된,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새장 같은 감옥이 높이 솟아나 있었다. 빛의 나무와 양옆으로 늘어선 의자들 사이 중간쯤에 위치한 수면 위였다. 그 안에 겁에 질린 듯한 호박색 눈동자에 파도치는 허니 블론드를 늘어뜨린 봄의 여왕 베르누아가 갇혀있었다. 그 바로 옆엔 그녀를 변호할 자가 자리할 넝쿨 받침대가 역시 물 위로 불쑥 튀어나와 형성된 모습이었다. 사랑의 여왕 키프리스가 머물 자리였다. 겨울의 왕이 매끄럽고 투명한 눈빛으로 노려보더니 고저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낮게 입을 열었다.

“한심한 자가 한심한 자를 위해 변명을 해줄 예정인가. 아주 적절한 조합이군 그래.”

조금의 온기도 없이, 아니 조금의 배려나 예의도 없이 내뱉는 그의 말에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무례한 표현이군. 히에무스. 죄를 지은 자는 어쩔 수 없다 해도 키프리스에게까지 그러는 건 너무 심하지 않나?”

“뭐가 심하다는 건가? 쓸데없는 감정을 다루며 매번 분란이나 일으키는 정령인데. 왜 저런 정령이 아직까지 소멸되지 않고 있나 궁금할 따름이야. 다른 감정의 정령들은 별 할 일이 없다 보니 일찍이 다 사라지지 않았던가?”

“사랑이란 감정을, 아니 그걸 다루는 사랑의 정령을 숭배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으니까 소멸하지 않았겠지. 그만큼 인간들에게 소중한 것이지 않겠나?”

에스타스가 찌푸린 눈가를 풀지 않은 채 설명했다. 말을 하면서도 쓸데없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는 무감각하고 냉정하기만 한 자. 누가 겨울의 왕 아니랄까 봐 그저 옆에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마도 저자는 심장까지 딱딱하게 결빙된 상태일 것이다. 차갑게 굳어 전혀 뛰지 않겠지. 저자의 가슴 가까이 얼굴을 묻고 들어봐도 미세한 고동 소리 하나 들리지 않으리라.

“훗, 우습군. 숭배라니. 사랑이란 건 그저 유한한 존재가 세대를 이어가기 위해 잠시 품는 밑바닥 감정에 지나지 않아. 그따위에 무슨 그런 거창한 의미를 두는 건가? 이해할 수가 없군.”

그래도 비웃음은 지을 줄 알았던가? 저자가 지을 수 있는 유일한 미소이긴 할 테지.

“하아, 관두지. 겨울의 정령왕인 당신과 무슨 말을 나누겠는가?”

에스타스 자신도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본 적은 없었다. 여기 모인 거의 모든 정령들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게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을 간혹 느꼈다. 여름날 물가를 거니는 인간 연인들의 행동과 표정에서, 혹은 숲에서 나누는 다정한 밀회를 엿보면서. 세대를 이어갈 열망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그 무엇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겨울의 왕은 그런 것들을 본 적이 전혀 없었던 걸까? 아니면 뼛속까지 꽁꽁 얼어붙은 상태라 그 어떤 걸 봐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건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타오르는 듯한 구릿빛 금발과 붉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한 정령이 급히 들어섰다. 달짝지근하고 농밀한 장미 향이 훅 끼쳐왔다. 사랑의 정령왕 키프리스였다.

“송구합니다. 어머니. 제가 늦었습니다.”

“어서 오렴, 딸아. 늦은 걸 탓하진 않을 테니 속히 자리하도록 해라. 모두가 아까부터 와서 기다렸단다.”

“예, 감사합니다.”

대자연 어머니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주변을 정리하듯 한번 휘 둘러보았다. 소란스러웠던 일대가 즉시 침묵으로 잦아들었다.

“이제 다 온 것 같구나.”

그녀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신비로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자아, 지금부터 정령의 규율을 어긴 베르누아를 처벌하기 위한 재판을 시작하겠다. 피고와 변호를 맡은 정령, 그리고 죄의 유무와 경중을 가릴 배심원들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도록 하라.”

“예! 어머니시여.”

***

“그대, 베르누아. 봄의 궁전의 주인이며 모든 봄의 권속들의 여왕인 자. 그대는 스스로의 본분을 잊고 인간에게 빠져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 여기 모인 정령들에게 그대가 범한 짓을 다시 한번 들려주도록 하라.”

언제나 잔잔한 물소리와 바람 소리 같았던 대자연 어머니의 음성이 그 순간 조금 다른 음색을 띠었다. 거친 파도 소리 같기도 하고 매서운 폭풍 소리 같기도 한 어둡고 위협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고요한 평정을 잃지 않은 채였다.

“단 하나도 더하거나 빼지 말고.”

베르누아는 한껏 움츠리며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한 아름다운 인간에게 빠져 그에게 정령의 마도구 두 개를 넘겼습니다. 정령의 힘이 깃든 물건을 다른 존재에게 넘기면 안 된다는 금기를 어겼습니다.”

“그래. 마나의 흐름을 감추게 해주는 팔찌 하나와 달의 힘을 머금은 보검 ‘루눌라’를 넘겼지. 인간이 가져선 안 되는 물건이다. 특히 루눌라는 한 번 베이면 회복이 힘든 상처를 남기는 위험한 것이다.”

배심원을 맡은 열두 정령들은 물론 호숫가에 모여 구경하던 정령들까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란스러움과 엄정하게 꽂히는 대자연 어머니의 목소리에 주눅 들어 베르누아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송구합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대의 정령왕 지위를 100년 정도는 박탈할 수 있을 만큼 큰 죄에 속한다. 혹 뭔가 변명할 말이라도 있느냐?”

“요, 용서하십시오, 어머니. 그 인간 남자를 사랑해서 그랬습니다. 그가 너무나 간곡하게 원하기에 마음이 약해져서……. 한 번만, 이번 한번만 용서해주신다면 다시는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대자연 어머니가 평온한 얼굴로 베르누아의 옆에 위치한 키프리스에게 말을 건넸다.

“키프리스, 사랑의 정령왕. 너는 자청해서 베르누아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배심원을 맡은 정령들이 심판을 내리기에 앞서 뭔가 그녀를 위해 해줄 만한 말이 있다면 지금 하도록 해라.”

그녀를 변호하기로 예정된 사랑의 여왕 키프리스가 마침내 나섰다. 곧추선 자세로 좌중을 한번 둘러본 뒤 다시 대자연 어머니가 앉아있는 나무뿌리 옥좌를 향했다.

“어머니시여, 그리고 여기 모인 정령왕들이여. 저 역시 그녀가 저지른 죄가 막중하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조금만 물러서서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그녀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저지른 애처로운 그 상황을요. 사랑을 해본 적이 없기에 어떻게 해야 사랑을 얻을 수 있을지 몰랐던 겁니다.”

“어떻게 사랑하는지 몰라 저지른 일이라고?”

대자연 어머니가 되묻자 키프리스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사랑에 빠지면 정상적인 명료한 사고를 하기 힘듭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자의 사정을 감안해줘야 하는 게 아닌지요? 게다가 그녀는 지금까지 몇천 년 동안이나 정령의 규율을 어기지 않고 성실하게 임무를 완수해왔습니다.”

잠시 말을 끊고 대중의 반응을 살폈다. 더러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간의 바른 행실을 고려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녀가 사랑에 빠져 마도구를 넘겨받은 상대는 마법사입니다. 그것도 하프 엘프인 마법사. 여느 보통의 인간들과 똑같이 여기시면 안 됩니다.”

“어째서?”

“지금은 순수 엘프들이 모두 다른 차원으로 떠나버렸지만, 그들이 이 안드로스 대륙에 남아 있을 때 그 어떤 종족보다도 우리 정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왔다는 걸 아실 것입니다. 엘프에게 정령의 마도구를 넘기는 건 금기사항도 아니고요.”

여기저기 그녀의 말에 동조하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정령들의 모습이 간혹 보였다. 금빛 나무 넝쿨로 엮어진 감옥 안에서 베르누아는 주변을 곁눈질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아까보다 더 많은 정령의 얼굴에 그녀를 동정하는 빛이 스쳐 가는 걸 놓치지 않고 읽어냈다. 키프리스는 높고 맑은 목소리에 더욱 힘을 실어 밖으로 내보냈다. 조금만 더 애쓰면 무죄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대자연 어머니조차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 듯했다. 그걸 증명이나 하듯 봄바람처럼 하늘거리는 나긋나긋한 한마디가 공기 중에 실려 왔다.

“음, 계속해라.”

키프리스는 고개를 정중하게 한번 숙인 후 주장을 연달아 펼쳤다.

“그녀의 죄가 가볍다는 건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이 처음이고 또 앞으로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 다짐하니 부디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완전한 용서가 어렵다면 바라건대, 벌의 무게를 덜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여기저기 그녀를 두둔하는 말이 새어 나왔다.

“맞아. 100년 동안 정령왕 자격 박탈은 너무 심한 것 같아.”

“그래, 인간에게 넘긴 것도 아니고 하프 엘프라잖아. 그럼 고려해 줘야지.”

“게다가 처음 해 보는 미숙한 사랑에 굴복했기 때문이잖아? 어찌 생각하면 안됐다고. 사랑에 빠지면 정말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어렵댔어.”

“응. 조금 존경스럽기도 해. 용기 있는 행동이기도 하니까.”

키프리스는 하마터면 입을 벌려 크게 웃을 뻔했다. 웃는 건 아직 시기상조였다. 좀 더 이 분위기를 정착시킬 수 있도록 쐐기를 박아 놓아야 했다. 찬찬히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며 뒤이어 호소했다. 이 정도 분위기면 안심해도 될 것 같긴 했지만.

“그렇습니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저항할 수 없는 감정에 굴복했을 뿐입니다. 저는 사랑의 정령이기에 그 감정의 위력이 얼마나 강하고 큰지 잘 알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아무런 힘도 없는 미미한 것처럼 보이겠지요. 하지만 그 실상을 겪게 되면 누구라도 그 위력 앞에 감히 저항하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말 것입니다. 저 가엾은 베르누아처럼요.”

이번에는 죽 늘어서 있는 정령들을 둘러보며 깊게 허리를 숙였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부디 자비롭고 현명한 심판을 내려주시길 모두에게 부탁드립니다.”

줄곧 경청하던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는 그 순간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령들 사이에서 모처럼 들어본 열변이었다. 조금 감명을 받기까지 했다. 사랑의 여왕이 이야기하는 사랑의 실체나 힘이 놀라웠다. 또한, 사랑의 여왕이 자신과 친분이 있는 베르누아를 위해 발 벗고 나선, 정령으로서는 참 보기 드문 우정도 감탄스러웠다. 에스타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을의 왕을 비롯해 주변에 있는 다른 배심원들의 얼굴을 훑어보니 그들도 자신과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마 베르누아는 처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매우 가벼운 벌만 받고 끝나거나. 그때 칼날이 스치듯 날카로운 음성이 약한 열기로 뭉쳐진 공간을 가차 없이 갈랐다.

“형편없는 궤변이로군.”

“……!”

모두가 의아하고 놀란 낯빛으로 조금 전 입을 연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시선을 모았다. 역시나 겨울의 왕이었다. 투명하고 딱딱한 얼음 조각처럼 차게 굳은 얼굴이었다. 마치 하얀 돌로 된 조각상처럼 미동 하나 없이 반듯한 자세로 앉은 채 키프리스의 눈동자를 찌르듯 쏘아보고 있었다. 키프리스는 이마에 주름을 살짝 잡으며 되물었다.

“형편없는 궤변이라고요?”

“그래. 앞뒤가 전혀 맞지도 않고 그럴듯한 이유나 논거 하나 없는 쓰레기 같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아.”

“어떤 부분이 그렇다는 거죠?”

키프리스는 순간 당황했지만 금방 평정을 가다듬고 히에무스에게 따졌다. 모든 게 얼어붙은 모습인 그답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도 역시 낮고 평탄한, 그러면서도 지독히 차게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첫째, 사랑에 빠져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게 불가능한 상태니 벌을 덜어주자고 하는 게 잘못됐다. 그런 얼빠진 정신 상태를 가진 자에게 정령왕의 지위를 계속 맡게 한다는 건가.”

“······.”

“인간의 상황을 왜 정령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사랑 같은 하찮은 감정에 빠져 제 소임이 뭔지도 잊었다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듣고 있던 키프리스는 부아가 치밀었다. 특히 그가 묘사한 단어가 눈에 거슬렸다.

“사랑 같은 하찮은 감정이라고? 당신, 그건 너무 무례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전혀. 하찮은 걸 하찮다고 말한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히에무스!”

분노에 차 쏘아붙이는 키프리스의 앙칼진 부름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연달아 의견을 피력했다.

“그건 유한한 존재가 세대를 이어가기 위해 품는 일시적인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아. 그런 저급한 감정에 정령의 마음이 휘둘렸다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지. 결코 일어나선 안 될 현상이야.”

키프리스의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대기 시작했다. 낯빛도 붉게 달아올랐다.

“그만하지 못해요? 그렇게 계속 ‘사랑’에 대해 모욕할 셈인가요? 지금 그런 태도는 이 나를 모욕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 알고 있겠죠?”

“모욕하고 말 것도 없어. 저급한 영역을 다루는 정령왕과 더 이상 대화를 섞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하던 말은 계속해야겠지.”

키프리스는 이제 몸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두 주먹을 꽉 쥐고 입술까지 잘근잘근 깨무는 지경이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정령들의 웅성거림이 더해져 무척 떠들썩하고 어수선했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히에무스는 분명한 어조로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을 꺼냈다.

“둘째, 마도구를 넘긴 게 하프 엘프니 그냥 인간과 다르다는 견해 또한 황당한 말 속임에 지나지 않아. 하프 엘프니 엘프와 가깝다고? 그렇다면 반대로 엘프보단 인간에 더 가깝다고도 할 수 있지 않나.”

몇몇 정령들이 그의 의견에 동조하듯 머리를 흔드는 모습이 군데군데 보였다.

“하프 엘프라는 용어 대신 ‘반 인간’이라는 용어가 더 잘 쓰이기도 했지. 예전에 이 대륙에 살았던 순수 엘프들이 그들을 지칭할 때 흔히 쓰던 말이었다. 그러니 엘프보단 인간에 더 가까운 거라 할 수 있겠지.”

“…….”

그의 말도 일리가 있기에 어느 누구도 대놓고 반박하지 못했다. 키프리스조차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그의 태도에 분하고 화가 났지만 말이다. 무겁고 싸늘한 침묵이 일대를 휘감았다. 나무 넝쿨로 된 감옥 안에 갇혀 모든 걸 지켜보던 베르누아가 울상을 지었다. 왠지 불안한 기분이 엄습해왔으므로. 겨울을 맡은 정령은 히에무스 하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잠시 동안은 그곳 주위가 차가운 한기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제법 오랜 시간 이어진 침묵을 깬 건 역시 대자연 어머니의 엄정한 목소리였다.

“그 외에 다른 의견을 가진 배심원들은 없는가?”

그녀의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한 초록빛 눈동자가 매의 눈처럼 모든 정령의 눈빛과 표정을 한 번에 훑어 내렸다. 늘 입가에 머물던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럼 이제 심판을 내릴 시간이 된 것 같군. 알다시피 정령의 재판은 열두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의견을 내놓지 않으면 무죄가 될 수 없다. 이를 명심하고 각자 의견을 말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배심원 역할을 맡은 열두 정령왕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대자연 어머니의 명에 답했다. 베르누아는 아직 판결을 듣기 전이었지만 벌써 얼굴에 수심과 당혹감이 가득했다. 히에무스가 끼어 있으니 판결을 모두 들을 필요도 없었다. 물론 최종 결정을 내리는 건 대자연 어머니였지만 배심원들의 의견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할 테니까. 대자연 어머니의 나무뿌리 옥좌에 가장 가까이 앉아있던 대지의 정령왕이 제일 먼저 의견을 말했다.

“겨울의 왕의 의견도 분명 일리가 있지만 무죄를 내려주시길 청합니다. 저는 사랑의 불가항력적인 힘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충분히 고려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옆에 자리했던 불의 정령왕도 나름의 의견을 정리해 풀어놓았다.

“대지의 정령왕과 같은 뜻에서 저도 무죄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죄입니다.”

연이어 나오는 의견들이 모두 베르누아를 동정하는 입장에서 무죄를 선언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르누아와 키프리스는 기뻐할 수 없었다. 히에무스가 버티는 한 다른 의견들이 아무리 우호적이라 해도 말짱 헛일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마침내 히에무스 차례가 다가오자 예상했던 대답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유죄입니다. 이유는 좀 전에 제가 말씀드린 것 때문입니다. 호되게 벌을 내려주셔야 할 것입니다. 다른 정령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역시 틀렸다. 베르누아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키프리스는 이를 악문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자연 어머니의 조용하지만 우레처럼 두려운 목소리가 빛의 궁전 전체에 나직이 울렸다.

“최종 판결을 내리겠다. 봄의 정령왕 베르누아. 그대는 정령왕으로서 행하지 말아야 할 금기를 저질렀으므로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리도록 하겠다. 이의 있느냐?”

“……없습니다.”

“좀 더 가벼운 벌을 내릴 수도 있었겠지만 겨울의 정령왕 히에무스의 의견이 이치에 맞고 합당하므로 정당한 벌을 그대로 내리기로 하겠다.”

“예…….”

어쩔 수 없었다. 대자연 어머니가 내리시는 벌을 어찌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에누리 없이 받아야 할 테지만 히에무스에 대한 원망이 생기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베르누아는 넝쿨 감옥의 창살을 붙잡고 눈을 꼭 감았다. 무시무시한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앞으로 100년간 봄의 정령왕으로서의 지위를 박탈한다. 그동안 그 역할은 봄의 궁전 권속인 꽃의 여왕이 대신할 것이다.”

그녀의 진중한 선언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손에 지녔던 황금빛 나무로 된 왕홀을 앞으로 내밀었다. 거기서 쏟아져 나온 눈부신 붉은 빛이 베르누아가 갇힌 감옥을 휘감았다. 그 순간 베르누아는 정령왕의 힘이 몸 안에서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고통스럽진 않았지만 힘이 빠져 몸을 휘청거렸다. 감옥 창살을 꼭 쥐고 버텨야 했다. 허탈감과 모욕감, 억울함과 당혹감과 분노 등 여러 잡다하고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어 왔다. 그중에는 히에무스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건 키프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모든 정령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을 능멸한 걸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었다. 저 오만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자에게 좌절과 후회를 안겨주고 싶었다. 저자가 형편없는 자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모습을, 그래서 바보처럼 속수무책으로 파멸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가 그렇게 천시하는 ‘사랑’에 빠지게 하고 싶었다. 결국은 그녀에게 도와 달라 청하고 오늘 그가 한 행동에 대해 깊이 후회하고 반성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녀 자신이 사랑의 정령왕이니 못할 것도 없었다. 조금 비열한 방법을 써야 할 테지만, 보여줄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자신의 능력과 위력을, 반드시!

모든 재판 절차가 마무리되고 운집했던 정령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히에무스가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똑바로 고개를 든 채 키프리스의 앞을 지나갔다. 키프리스는 그의 뒤에 대고 속삭이듯 경고했다.

“당신, 후회할 거예요. 오늘 내게 한 말들을.”

그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코웃음을 쳤다.

“그럴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아. 그런 저속한 감정과 엮일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아니, 설령 그런 감정이 내게 찾아온다 해도 베르누아처럼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하아, 그래요? 어디 한번 두고 보죠!”

“두고 보는 거야 말리지 않겠지만 헛일이라 충고하고 싶군. 그대는 어째서 쓸데없는 짓만 찾아다니는 건가? 이해할 수 없군. 할 일이 그렇게나 없는 것인가?”

“히에무스!”

입만 아파왔다. 이자에겐 그저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황당한 자를 사랑하게 만들겠어. 하프 엘프같이 양호한 상대는 꿈도 꾸지 마. 그래, 우락부락한 남자를 사랑하게 만들면 어떨까? 흉측한 마물을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니면 다 늙어빠진 인간 노파나 뻔뻔하고 푹 퍼진 중년 아줌마도 괜찮겠지. 어쨌든 가장 지저분하고 볼품없는 존재를 찾아 붙여주는 거야. 어디 한번 당해보라고!

찰랑찰랑.

순간 나지막한 종소리 같은 음이 울려 키프리스는 화들짝 놀랐다. 빛의 나뭇잎들이 뭔가를 경고하듯 일제히 바스락대고 있었다. 급히 금빛 뿌리 옥좌를 들여다보니 대자연 어머니가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지켜보는 모습이 보였다. 다 보고 계셨던 걸까? 겸연쩍은 얼굴로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래, 뭐. 보잘것없는 인간 아가씨 정도로 해주지. 그것도 저자에겐 기막힐 노릇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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