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대와 함께 춤을
무도회가 시작되고 여러 귀족들이 입장했다. 황제 렉스는 단상에 놓인 황금빛 옥좌에 앉아 들어오는 귀족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의 바로 곁에 케일론과 다른 궁정 마법사가 시립하고 호위를 맡은 기사단장 엘로드와 시종들이 서 있었다. 지루한 표정으로 귀족들의 인사를 받던 렉스가 케일론에게 말을 걸었다.
“에일린이 춤을 출 수 있는지 혹 알고 있나?”
“한 가지 춤만 급히 익혔습니다.”
“어떤 거?”
“[타우루스 춤곡]에 맞춘 춤입니다.”
케일론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
렉스가 살짝 미소를 짓더니 옆에 있던 시종을 불렀다.
“리히트 경. 악단장에게 말해서 오늘은 타우루스 춤곡 비중을 대폭 늘리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폐하.”
아젤란 제국 귀족들의 입장이 마무리되고 어느새 공녀들이 들어서는 순서가 왔다. 에일린은 공녀 신분은 아니지만 제국 귀족도 아니고 초대 명단에 제일 늦게 등재된 이유로 공녀들의 입장이 끝난 후 맨 마지막에 들어오는 걸로 되어 있었다. 무도회이므로 남자 파트너를 대동해야 했다. 대부분의 공녀들은 자국에서 따라온 호위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케일론은 에일린을 에스코트하는 명령을 받았던 터라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가 막 무도회장 입구에 왔을 때 한 공녀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걸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굽이치는 백금발 머리가 마법석이 박힌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은은한 달빛처럼 흔들렸다. 파란 하늘빛을 담은 눈동자가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좌중의 입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커다란 탄식이 흘러나왔다.
“와아아!”
황궁 행사를 주관하는 의정관이 낭랑한 목소리로 그녀의 신분을 알렸다.
“아칸 왕국의 제 1왕녀님이신 ‘엘시아 아나이스 미케일라 엘 베르니스님’ 듭시오.”
그녀가 자국 호위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아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마치 마법처럼 일대에 침묵이 내렸다. 모두가 홀린 듯 그 빼어난 미모를 바라보았다. 매혹적인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머물렀다. 모든 이들의 시선을 즐기며 제국 황제를 향해 나아갔다. 렉스도 엷은 웃음을 담은 걸 보니 그도 틀림없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탄복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기사단장을 위시해 황제의 곁에 있던 남자들의 얼굴에도 찬탄의 표정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황제도 분명…….
“제국의 주인이신 레오나드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여신 ‘아벨라’의 찬란한 빛이 늘 함께하시기를. 아칸 왕국의 제 1왕녀 엘시아, 이렇게 멋진 자리에 참석하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양손에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살짝 굽히는 우아한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시오. 엘시아 왕녀. 이 자리를 마음껏 즐겨주시길 바라오.”
“감사합니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분명히 혼을 빼앗긴 듯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진한 흥미로움이 담긴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것뿐. 다른 것을 읽어낼 수 없었다. 제국의 황제답게 어마어마한 위세가 느껴졌다. 냉혹하게 보이는 이지적인 푸른 눈동자. 똑바로 마주하기 두려웠다. 도발적으로 응시하던 시선을 급히 거뒀다. 도리어 그녀의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한 수 위였다. 그녀가 표범이라면 그는 사자였던 것이다. 조금 꺾인 기세로 조심스럽게 주어진 자리로 가서 시립했다. 뒤이어 다른 공녀들의 입장이 이어졌다.
***
케일론은 계속 에일린을 찾았다. 다른 이들의 관심이 모두 엘시아 왕녀에게 집중돼 있는 사이 분주하게 그녀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혹여 뒤늦게 주눅이 들어 휴게실을 나오지 못하는 걸까? 아니, 그 정도로 소심한 여자는 아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는 걸 얼마나 고대해 왔던가? 없는 돈을 들여 춤까지 배워가며…….
순간이동 마법을 이용해 휴게실로 가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의 모습에 대기 중이던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수선을 피워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하고 안을 돌아다니며 샅샅이 뒤졌지만 거기에도 없었다. 케일론은 미간을 찌푸렸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지팡이를 꺼내 마법 주문을 읊었다. 지팡이에서 하얗게 빛나는 마나의 사슬로 목이 묶인 정령이 흘러나왔다. 검은 흙으로 된 우락부락한 몸을 가진 대지의 정령이었다. 크기는 어린아이 몸집만 했다. 케일론은 그만의 허스키한 낮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아제르! 내 성에서 접했던 여자 에일린을 기억하겠지? 그녀를 찾아라!”
대지의 정령이 못마땅한지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케일론의 쉰 목소리보다 더 걸걸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한눈에 봐도 마지못해 대답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마나의 사슬에 사로잡혀 있는 이상 내키지 않더라도 명령받은 일을 해야만 했다. 바닥에 몸을 잔뜩 웅크리며 에일린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생명체들은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마법을 쓸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몸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저마다 고유한 자연 에너지인 마나를 품고 있는 것이다. 대지의 정령은 그 에너지를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나 누군가를 추적할 때 진가를 발휘했다. 그는 신경을 곤두세워 휴게실에 희미하게 남은 에일린의 마나를 감지했다. 즉시 걸음을 옮겨 후미진 복도로 이동하더니 어느 지점에 이르자 움직임을 멈췄다. 뒤를 따르던 케일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미하게 결계의 흔적이 느껴졌다. 이내 바닥에 흩어진 유난히 날카로워 보이는 무수한 얼음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더불어 예리한 도구에 잘린 긴 머리카락 뭉텅이도.
“에일린 클라우디아 데 루쿨루스님 듭시오.”
황실 의정관이 목청을 높여 제일 마지막 입장객을 호명했다. 계속 따분한 얼굴로 앉아있던 렉스가 자세를 곧게 가다듬었다. 살짝 졸음이 내려앉았던 눈이 다시 형형해졌다.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에일린이 나타나길 기다리는데 어째선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조금 긴장한 황실 의정관이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에일린 클라우디아 데 루쿨루스님!”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다 모습까지 보이지 않다니. 도대체 누구인 걸까? 저마다 이런저런 억측을 해대며 수군거렸다. 특히 공녀들의 반응이 좀 수상했다. 렉스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데 옥좌 뒤에서 케일론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폐하.”
렉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을 향한 채 눈으로만 힐끗 쳐다봤다.
“어찌 된 일인가? 에일린은?”
케일론이 유난히 경직된 표정에 매우 낮고 쉰 음성으로 대꾸했다.
“휴게실에 있는 동안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당한 것 같습니다.”
다른 이에겐 보이지 않도록 소매로 가린 채 에일린의 잘려진 머리채를 보여주자 렉스는 곧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라면?”
“글쎄요. 아마도 공녀들이겠지요.”
“그녀는…… 어떻게 됐지?”
“사라졌습니다. 이 건물 안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옥좌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렉스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케일론의, 그날따라 더 음산하게 들리는 거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일단 제가 지금 그녀가 갈만한 곳을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
거기 와 있는 것은 케일론의 본체가 아니었다. 마법으로 만든 그의 분신이었다. 얼핏 보면 똑같지만 표정이 마치 밀랍인형처럼 하얗게 굳어 있었다.
“폐하께서 사람을 풀어 황궁과 수도 안을 수색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공녀들을 추궁해 보시면 뭔가 쓸 만한 답이 나오겠지요.”
케일론의 분신이 유리알 같은 자줏빛 눈으로 공녀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분신인데도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렉스가 미간의 주름을 펴지 않은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정령들이 에일린을 데려간 곳은 겨울의 궁전이었다. 사실 그 순간 몸을 피할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제 안전한 곳에 왔다는 자각이 들자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랜만에 와본 겨울의 궁전은 여전히 영롱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곳에도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다. 여기저기 무리지어 돋아난 크리스털 모양의 얼음 덩어리들이 환한 빛을 내며 내부를 밝혀줬다. 휙휙 거리는 바람 소리와 함께 수많은 겨울의 정령들이 그녀 주위로 모여들었다.
“여긴 또 어쩐 일이죠? 인간 여인.”
“다시 이곳에서 지내려고 온 건가요?”
“그럼 눈의 여왕이 싫어하실 텐데.”
멍한 표정으로 차갑고도 어여쁜 그들을 바라봤다.
“미, 미안. 곧…… 갈게요.”
몸이 떨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에일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히에무스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 이시여.”
그가 에일린의 짧게 잘린 머리와 붉게 변한 뺨과 여전히 눈물로 가득한 두 눈을 바라보았다. 바람처럼 휙 다가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처음엔 은청색 눈이 크게 떠졌다. 곧 얼굴이 푸르게 변하더니 두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찌 된 일인 거냐?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지?”
섬뜩하게 느껴질 만큼 낮고 진중한 음성이었다.
“그건…….”
“말하라! 감히 누가 네게 이런 짓을 한 거냐?”
눈에 가득 찼던 눈물이 넘쳐흘렀다. 그녀 대신 화를 내주는 그가 너무 고마워서.
“어서 말하라니까! 내가 그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혼을 내주겠어!”
에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책에 따르면 계약을 맺지 않은 정령이 인간의 일에 관여하는 건 금기였다. 계약을 맺는 건 마법사만큼 충분한 마나를 갖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고. 앙갚음을 한다 해도 히에무스의 손을 빌려서는 안 될 일이다. 그에게 더 이상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 말아요. 나는 이제 괜찮으니까. 그리고…….”
한 번은 용서해줄 것이다. 이번 한 번은.
“이게 괜찮은 거냐? 어서 말하라니까!”
그녀는 바로 얼마 전까진 자신의 스타이며 우상이었으니까.
“나는 정말 괜찮아요.”
많은 날이었다. 그녀에게서 정말 많은 날을 위로받았었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용서해줄 거야. 그리고 어쩌면…… 그녀 말대로 잘못은 자신에게 있었는지도 몰랐다. 소설 속 여주인공의 운명을 조금이지만 탐하는 마음을 가진 것 때문인지도.
“제퓌! 아두스! 프리기!”
겨울의 왕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에일린의 시종들을 불러들였다.
“예! 왕이시여!”
급히 날아든 세 정령이 머리를 숙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어서 보고해라!”
“옛! 그게, 그러니까…….”
“히에무스!”
아두스가 막 설명하려는데 에일린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그냥, 그냥 나 좀 안아줄래요?”
“에일린…….”
그가 다가왔다. 언제나처럼 차디찬 겨울의 한기와 청량한 겨울 숲의 향기와 함께. 그리고 두 팔을 내밀어 더없이 상냥한 움직임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에일린은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서늘한 옷자락을 꽉 붙들었다. 깊이깊이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포근한 온기를 가진 자의 품 안에.
“히에무스.”
“그래, 에일린.”
그녀의 작은 몸이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조금만 더 따뜻한 몸이었으면 좋을 텐데. 어떻게 해주면 되는 걸까? 어떻게 해야 자꾸만 흐르는 저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손을 들어 그녀의 잘린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줬다. 마치 그의 심장 한쪽이 잘려나간 것처럼 날카로운 아픔이 느껴졌다.
“내 머리…… 보기 흉하죠?”
“그렇지 않아.”
그 머리에 입을 맞추며 부정했다.
“언제나 예뻐. 세상에서 제일…….”
마침내 그녀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왜 그런 걸까. 저렇게 환하게 미소 띤 얼굴로 저렇게 방울진 눈물을 계속 쏟는다. 자신이 뭔가 실수라도 한 것일까? 샘솟듯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하고 싶어 그녀의 눈동자 위에 입술을 가져갔다. 순간적으로 감은 그녀의 눈 위에 입을 맞추자 흠칫 놀라는 행동을 했다.
너무 차가웠던 걸까? 오늘따라 자신이 겨울의 정령이라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정령이 아니었다면……. 아니, 적어도 겨울의 정령이 아닌 다른 정령이었다면 이렇게 차가운 몸이 아니었을 텐데. 그랬다면 그녀도 좀 더 자신을 사랑해 줬을지도 모르는데…….
냉기로 인해 그녀를 더 놀라게 할까 봐 더 이상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가 눈을 떠 그의 눈을 응시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여린 초록 눈동자의 눈빛이 봄비처럼 마음까지 흠뻑 적시는 것 같았다. 마주 보는 둘의 얼굴이 왠지 붉어졌다. 망설이던 그녀의 입술이 서서히 다가와 그의 입술 위에 포개졌다. 언제나처럼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본능처럼 히에무스도 눈을 감았다. 처음엔 그의 입술 겉 표면만 살살 더듬더니 노크하듯 기웃거리며 그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어딘가 서툴고 조금은 다급하게 느껴지는 몸짓. 지금은 오히려 그녀가 더 큰 갈증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히에무스는 저도 모르게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것은 그의 심장을 모두 녹일 것처럼 뜨거운, 달뜬 열기와 정체 모를 열망이 가득 차오르는……. 그런, 그런 키스였다.
***
“눈꽃은 들으라.”
“예, 왕이시여. 하명하십시오.”
겨울의 왕이 권속인 중급 정령 ‘눈꽃’을 불렀다. 눈의 여왕의 능력이 더 강하긴 했지만 지금 그녀는 어디론가 나가 있는 상태였고 이런 일에 부르긴 꺼려져 눈꽃을 택했다.
“지금 곧 아젤란 제국의 수도에만 눈을 잔뜩 뿌려라. 내일 아침까지 쉬지 말고 퍼붓도록.”
“알겠습니다.”
눈꽃은 삐죽 삐친 새하얀 머리에 짧고 얇은 흰 튜닉을 입은 모습이 발랄해 보였다. 중급 정령치고는 조금 커서 인간으로 따지면 청소년쯤의 나이로 보였다.
“힘을 나눠줄 테니 즉시 가서 임무를 수행하도록.”
“예, 맡겨 주십시오.”
눈꽃이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께서 자신에게 단독으로 일을 맡긴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막 길을 나서려는 순간 그가 한마디 더 당부했다.
“특히 인간 황제의 궁전에 집중적으로 뿌려라. 북풍과 ‘한기’가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을 테니 그들과 함께 행동하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눈꽃이 왕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가벼운 몸놀림으로 궁전 밖을 나섰다. 히에무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에일린을 예전에 지내던 방에서 쉬게 하고 아두스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들었다. 인간들의 작태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그 자신이 직접 가서 거기 있는 사람들을 몽땅 얼려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에일린이 어떤 처벌도 원하지 않았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냥 참기에는 너무 화가 나 눈이라도 잔뜩 내리게 해서 좀 혼내주기로 했다. 그녀가 당한 일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약한 보복이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히에무스.”
에일린이 방 밖으로 나와 그를 찾았다.
“좀 더 쉬지 않고 왜 벌써 나왔느냐?”
“잠이 오지 않아서요.”
냉기를 최대한 제거했지만 방이 너무 썰렁했다. 전에 겨울의 궁전에서 지낼 때는 그럭저럭 잘 지낸 것 같은데 며칠 케일론의 성에 살다 오니 영 춥게 느껴졌다. 그리고 배가 너무 고파 잠이 오지 않았다. 이제 그만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 이제 그만 가볼게요.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조금만 더 있다 가지 그러느냐?”
히에무스가 눈에 띄게 시무룩한 낯빛으로 말했다.
아니, 아예 가지 말고 여기서 지내면 좋겠는데. 예전처럼, 그렇게……. 그럼 누구든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텐데.
“배도 고프고……. 케일론, 그러니까 제가 지내는 성의 마법사도 걱정할 것 같아서요. 그만 가볼게요.”
추위가 가시지 않는지 그녀가 몸을 살짝 떠는 게 보였다. 그런가, 배도 고프고 추운 것인가. 그럼 먹을 것도 있고 따뜻한 장소로 데려가면 될 것 같았다. 그는 아직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곁으로 바짝 다가가 제안했다.
“에일린, 그러지 말고 나와 함께 어디 좀 가지 않겠느냐?”
***
히에무스가 에일린을 데리고 간 곳은 가을의 왕의 궁전이었다. 그의 순간이동 마법은 케일론에 비해 훨씬 안정적인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럽거나 속이 울렁거리는 거북함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커다란 나무 밑동에 궁전 입구가 뚫려있었다. 성인 한 명이 머리를 숙여서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옹이처럼 생긴 구멍이었다. 히에무스가 다가가 손을 대자 나무로 된 문이 나타났다. 안에서 화관을 쓰고 꽃목걸이를 목에 건 어린아이만 한 정령이 걸어 나왔다. 그가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하곤 짐짓 놀란 기색으로 아는 체를 했다.
“어라, 겨울의 왕 아니십니까. 어쩐 일이신지요? 설마, 축제에 참석하려고 오신 건가요?”
“그래. 어서 안내해라.”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히에무스와 에일린을 번갈아 훑었다.
“이리 오십시오.”
말이 끝나자 입구가 갑자기 넓어졌다. 에일린은 히에무스의 손을 잡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순간이동을 할 때부터 계속 그의 손을 잡은 채였다. 그의 서늘한 체온 탓에 손이 조금 뻣뻣해졌다.
안으로 들어서니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대낮같이 밝은 드넓은 공간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과일나무가 자라나 있었다. 향긋한 과일 향이 진하게 풍겨와 코를 자극했다. 바닥에 카펫처럼 돋은 초록색 밀 순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크고 작은 수많은 정령들이 여기저기 모여 앉아 음료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폭신한 밀짚 위에 드러누워 쉬는 광경이 보였다. 안쪽에 위치한 높은 바위 위에 정령들 몇몇이 앉아 하프를 켰다. 잔잔하고 신비로운 음악이 은은하게 들려왔다. 투명한 날개를 단 하급 정령들이 자기 몸집보다도 더 큰 항아리 병을 들고 날아다니며 분주하게 서빙을 했다. 쾌적한 산들바람이 가볍게 불어오는 어느 따뜻한 가을 날씨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모두 하나같이 화관을 쓰고 꽃목걸이를 걸고 있어선지 꽃향기도 짙게 풍겼다. 안내를 맡은 정령이 소리쳤다.
“모두 여기 누가 오셨는지 좀 보십시오!”
정령들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로 향했다. 둘은 눈 깜짝할 새에 수많은 정령들에게 에워싸였다.
“아니, 이게 누구야, 그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냉정하고 차갑다는 겨울의 왕 아니신가?”
“이야, 이런 자리에서 보는 건 처음인걸?”
“같이 있는 인간은 누구지?”
“누구긴 누구야, 소문의 그 아가씨인 거겠지.”
많은 이들의 시선을 한꺼번에 받게 돼 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키 큰 정령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어서 오게, 히에무스. 내 초대에 응해주다니 정말 고맙군.”
가을의 왕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빛과 붉은색이 섞인 고수머리에 다른 이들처럼 들꽃으로 된 화관을 쓴 모습이었다. 밝은 금갈색 눈동자에 조각 같은 얼굴, 당당한 풍채에 붉은 튜닉과 금빛 망토를 두른 자태가 멋졌다. 그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에일린을 주시했다.
“당신이 그 인간 여인이군요? 이름이……”
“아, 안녕하세요? 에일린이라고 해요.”
“환영하오, 에일린. 나는 가을의 왕이라오.”
그가 허리를 굽히며 에일린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히에무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무슨 짓이냐?”
“무슨 짓이긴, 인간 아가씨니까 인간들이 하는 방식대로 인사한 것뿐이야.”
그에게서 새콤달콤한 포도 향기가 진하게 풍겼다. 그가 빙그레 웃더니 아까 안내를 맡았던 시종에게 지시했다.
“축제에 참여하려면 화관을 써야지. 두 분께 화관과 꽃목걸이를 갖다 드려라.”
“예, 왕이시여.”
곧이어 둘을 자리로 안내했다.
“마음껏 즐겨주시오. 원한다면 나무에 열린 과일을 따 먹어도 좋소. 벌꿀주와 포도주도 있으니 한번 드셔 보시오. 인간들 입맛에도 맞을 테니.”
“감사합니다.”
두툼한 밀짚 더미 위에 포근해 보이는 양탄자가 깔려있었다. 그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큼직한 쿠션에 등을 기댔다. 히에무스가 여러 종류의 과일을 몇 개 따서 에일린에게 가져다줬다. 아삭아삭한 식감과 달콤한 맛이 일품이었다. 두 개 정도 먹고 나니 배고픔이 가시는 것 같았다. 맞은편 양탄자 위에 미소 띤 얼굴로 앉아 있던 가을의 왕이 술이 담긴 크리스털 잔을 내밀었다. 에일린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감사하지만 술은 됐어요.”
“아니, 어째서?”
“그게…… 예전부터 술을 안 먹겠다고 결심했거든요.”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 거라고? 음, 후회할 텐데. 이 술은 대자연 어머니께서도 찾으실 만큼 맛이 좋다오. 내 축제에 와서 내 술을 마시지 않고 가는 건 내 축제에 참여하지 않은 것과 똑같소.”
“대자연 어머니도 드신다고요?”
히에무스가 못마땅한 눈으로 가을의 왕을 쏘아봤다.
“안 마시겠다면 그만이지 왜 자꾸 권하는 건가?”
“이런 기회가 흔치 않으니 그렇지. 인간이 정령의 술을 마실 기회가 많은 게 아니니까.”
에일린은 좀 망설였다. 예전에 운아였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술을 마셨던 그 날의 기억을. 그녀의 남편이 된 선배가 줬던 술을 먹고 필름이 끊겼던 날, 그 이후 그녀의 운명이 바뀌어버렸다. 되돌리기 힘들 정도로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 뒤로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26년간 단 한 모금도. 하지만 여긴 정령들뿐이니 괜찮지 않을까?
“그럼, 딱 한 잔만 마실게요.”
오!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에 착 감겨들었다. 가을의 왕에게서 나는 향기가 바로 이 술의 향이구나! 술이 한없이 부드럽고 상큼하게 목 안을 적셔온다. 과연 여신도 찾을만한 술이다. 한 잔만 마시려고 했던 게 두 잔이 되고 석 잔이 되더니 기분 좋은 취기가 올라왔다.
“괜찮은 거냐? 에일린. 그렇게 많이 마시면…….”
히에무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헤헤…….”
에일린이 더없이 밝은 웃음을 지었다. 취기로 복숭앗빛으로 물든 볼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순간 히에무스가 참지 못하고 달큰해 보이는 그 뺨을 입술에 살포시 머금었다. 가을의 왕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우와, 정말이잖아! 겨울의 왕이 사랑에 빠졌다는 말이 진짜였어.”
어느새 또 그들을 구경하러 온 여러 정령에게 둘러싸였는데 그중에 전에 만났던 물의 정령도 있었다. 그녀가 아는 체를 하며 냉큼 에일린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오랜만이야, 인간 여인. 여전히 둘 사이가 좋구나. 한동안 안 보여서 궁금했었어.”
“어, 안녕하세요?”
오늘은 그녀도 수초로 된 화관 대신 들꽃으로 된 화관을 썼다. 에일린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 찾는 이라도 있는 거야?”
“예. 여름의 여왕님은 안 오셨나 해서요.”
“그분은 겨울엔 항상 잠에 빠져 계셔. 웬만하면 일어나지 않으시지. 추운 걸 싫어하시거든.”
“그래요?”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좀 듣고 싶은데.”
호기심 많은 그녀의 재촉에 그간 있었던 일을 대충 말해줬다. 오늘 일은 자세한 상황은 빼고 그냥 초대장을 잃어버려서 황궁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했다고만 얘기했다.
“그래? 그럼 황궁 무도회에 결국 못 가고 여기 온 거라고? 아쉽겠네,”
“춤을 못 춰서 서운하긴 해요. 열심히 배웠는데 제대로 한 곡도 추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여기 오게 돼서 정말 기뻐요. 인간인 제가 언제 이런 곳에 와보겠어요?”
조용히 그 이야기를 듣던 가을의 왕이 입을 열었다.
“춤이라면…… 이곳에서 춰도 되지 않겠는가?”
“예?”
“음악을 담당하는 정령들도 있으니 그대가 우리에게 인간들의 춤을 가르쳐주면 어떨까? 정령들은 한 번만 알려줘도 대부분 쉽게 익힐 테니까.”
“정말 그래도 돼요?”
에일린이 그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며 약간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안 될 게 뭐 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늘 뭔가 새로운 행사 내용이 없냐고 푸념하는 정령들이 많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지.”
“와아! 그거 재미있겠어! 나도 배워볼래.”
물의 정령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상기된 얼굴을 했다. 여기저기 수많은 정령이 모여들며 웅성거렸다.
“그래, 가르쳐 줘! 인간 여인.”
“이참에 인간들의 춤을 익혀두면 두고두고 활용할 수 있겠지.”
“좋은 생각이야. 축제 내용이 맨날 똑같아서 지겹던 참이었는데.”
에일린은 얼떨떨하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했다. 히에무스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곧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뭐든 괜찮아.”
“그럼, 당신도 배울래요? 익혀서 저랑 같이 춤춰요! 히에무스.”
그가 조금 난처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환한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에일린. 나도 배울게. 나도 그대와 함께 춤을 추고 싶어.”
그러면 이제 다른 인간 남자들과 춤을 추지 않아도 되겠지. 춤을 추고 싶을 때마다 자기를 찾아오면 될 것이다.
“와아! 정말이죠?”
에일린은 벌떡 일어나 히에무스의 손을 덥석 잡고 넓은 홀로 뛰듯이 걸어갔다. 더없이 밝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설렘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로 드높이 외쳤다.
“모두 이리로 오세요! 춤을 배우실 분들! 빨리빨리 모이세요!”
“와아아! 좋아, 좋아!”
여러 정령이 그녀의 경쾌한 분위기에 이끌린 듯 앞 다퉈 모여들었다. 마치 어느 맑은 가을날의 오후 같았다. 황금빛 색채로 가득한 가을의 궁전에서 그녀의 댄스 교습이 시작되었다. 눈부신 광채를 몸에 두른 정령들이 그녀의 학생이었다. 빙글빙글 움직이는 그들이 한꺼번에 내뿜는 빛의 잔상이 그 커다란 공간을 아찔한 광휘로 뒤덮었다.
“와하하하.”
자잘한 웃음소리가 맑은 종소리처럼 흩어졌다. 가을의 왕의 말대로 정령들은 금방 춤사위를 익혔다. 하프를 연주하는 정령들도 능숙하게 알맞은 곡조를 연주해냈다. 처음엔 뻣뻣했던 히에무스도 곧 익숙한 솜씨로 우아한 동작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모든 정령들이 춤을 익히고 본격적으로 춤을 추기 위해 대열을 가다듬었다. 정령들의 얼굴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히에무스도 약간 쑥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내내 웃음 띤 얼굴로 에일린과 마주 보며 함께 춤을 추었다. 너무나 멋진 시간이었다.
정령들과 함께, 겨울의 왕과 함께 춤을 추다니! 마치 꿈만 같아!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서늘한 목소리가 히에무스를 불렀다.
“왕이시여!”
그가 움직임을 멈추고 목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눈의 여왕이 누군가와 나란히 서 있었다. 긴 금빛 머리를 늘어뜨리고 붉은 옷을 입고 있는 여인, 사랑의 여왕 ‘키프리스’와 함께.
***
안드라가 순간이동 마법을 시행해서 도착한 곳은 ‘루쿨루스’ 숲이었다. 특별한 장소를 지정하지 않을 경우 정령들은 자신들의 본거지로 이동하는 습성을 지녔다. 에일린은 겨울의 왕의 궁전으로 피했을 것이다.
‘가능하면 이곳에서 ‘처리’해야 해. 케일론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케일론을 상대하는 건 정령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성가실지도 모른다.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인간들에게 냉담했다. 설령 자신들이 비호하는 인간일지라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정도로 위중한 일이 아니라면 대부분 방관자 같은 입장을 취했다. 그러니 대마법사라는 명성을 얻은 자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정령을 상대하는 게……. 일단은 겨울의 궁전을 찾아야 한다.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안 될 것이니 도움이 될 만한 정령을 소환하는 게 좋겠지.
‘바람의 정령이 적당할까? 아니, 겨울의 궁전을 찾아가야 하는 거니 소환이 가능한 정령 중 가장 강한 존재를 불러들이는 게 나을 거야. 어쩌면…….’
겨울의 정령왕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에일린을 수호한 정령은 조그만 하급 정령 셋이었다. 그래도 정령왕까지 그녀에게 호의를 품은 상태일지 모르니까.
‘아니, 그럴 염려는 없나?’
겨울의 왕이 인간에게 호의를 품을 일이 세상천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 명백한 일에 이상하게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안드라는 한참 망설이다가 결심을 굳힌 듯 마법 공간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가장 강한 정령을 소환하기로 한 것이다.
허공을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며 주문을 외웠다. 지팡이에서 나온 하얀 마나의 빛이 어두워진 하늘에 찬란한 마법 문자를 그렸다. 동시에 그가 소환을 위한 주문을 읊었다.
“계절의 처음을 여는 이여! 만물의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 고결한 봄의 여왕이신 ‘베르누아’여, 여기 당신과 계약한 자 앞에 그 모습을 보이소서!”
마나로 그려진 마법 문자가 한데 합쳐지며 하얗게 빛나는 어떤 형상으로 바뀌었다. 빛이 엷어지더니 향긋한 꽃향기를 풍기며 한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니 블론드를 풍성하게 늘어뜨리고 하늘하늘한 핑크빛 드레스를 걸친 여인이었다. 얼어붙었던 주위 공기가 금세 온화하게 변했다.
“오랜만이구나, 안드레아스.”
봄의 여왕 베르누아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의 본명을 불러주면서.
‘안드레아스’.
앞으로도 계속 이 안드로스 대륙에 몸담고 살겠다는 의미로 스스로가 명명한 이름이었다. 수십 년 전 엘프들이 더 이상 인간들과 함께 살기를 거부하고 이 대륙을 떠나 다른 차원계로 이주해버렸다. 원한다면 그도 따라갈 수 있었을 터였다. 정령을 볼 수 있는 ‘하프’니까. 하지만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인간이었던 어머니를 차마 혼자 둘 수 없어 이곳에 함께 남았다.
“격조했습니다. 베르누아님.”
공손한 자세로 한쪽 손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베르누아가 가까이 다가와 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여전히 예쁜 얼굴이야. 언제 봐도 내 마음에 꼭 들어. 근데, 왜 여자 같은 차림새지?”
“사정이 좀 있어…… 부득이하게 여장을 했습니다.”
가끔 엘프들을 따라 자신도 이 땅을 떠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어머니를 외면하고 그냥 엘프인 아버지를 따라갔더라면. 그랬다면 지금 이런 일들을 하지 않아도 됐겠지.
“그렇군. 뭐, 상관없어. 이 모습도 좋아, 색다른 맛이 느껴지니까.”
베르누아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까 얼음 조각에 스쳐 생겼던 상처가 흔적도 없이 아물었다. 이내 베르누아가 키스를 해왔다. 도취된 듯 눈을 감고 황홀한 표정으로 한동안 그 행위에 몰두했다. 안드라, 아니 안드레아스도 눈을 감긴 했지만 좀 굳어 있었다. 마지못해 응하는 느낌이랄까. 농밀한 꽃향기가 코를 찔러오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사랑해, 안드레아스. 그대도 그런 거지? 응?”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존재에게 냉담했다. 하지만 가끔 기이할 정도로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고 집착을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여기 이 봄의 여왕처럼.
사랑한다고? 뭣 때문에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인가. 마음에 든다는 이 얼굴 때문인가?
“물론입니다, 베르누아님.”
사랑하긴 하지, 당신이 가진 힘을. 사랑이란 게 뭔지 이제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엘시아 왕녀에게 가졌던 마음이 사랑이었을까?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욕망이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기대가 무너지면 어느 한순간 쉽게 무너져 내리는 욕망. 그게 언제였던가? 엘시아 왕녀에 대한 기대가 사라졌던 것은……. 아아, 아마도 그때부터일 것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그녀가 사실은 냉담하고 잔인한 성정이란 걸 알게 된 그때부터. 알고 나서도 여전히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이런 것도 사랑인 걸까?
“그대는 늘 너무 냉정해. 어떨 때 보면 마치 겨울의 왕 같단 말이야. 나는 그대로 인해 정령왕의 지위를 100년간 박탈당하는 벌까지 받았는데……. 그대는 항상 그런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는구나.”
그런가, 유감이군. 하지만 그런 사정 따윈 알 바가 아니다. 베르누아 스스로 자초한 것일 뿐 자신이 부추긴 적도 없으니까.
“그럼 지금은 정령왕의 힘까지 잃은 상태인 겁니까? 도움이 필요해서 불렀습니다만.”
베르누아의 얼굴에 조금 곤혹스러운 기색이 번졌다.
“무슨 일이지? 내 지금 정령왕의 능력을 봉인 당하긴 했지만 그대를 도울 정도의 힘은 충분할 것이다.”
“다행이군요. 누군가를 찾고 있습니다. 정령의 가호를 받는 인간이 이곳으로 피한 것 같은데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런 자라면 여기 있겠군. 어떤 정령의 가호를 받는 자지? 내가 구속해서 데려다주겠다.”
“아마도 겨울의 정령의 가호를 받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지금쯤 겨울의 궁전에 있겠지요.”
“……!”
베르누아의 호박색 눈동자가 커졌다.
“오호, 혹시 그 여자인가?”
***
그로부터 얼마 후, 케일론도 루쿨루스숲에 모습을 드러냈다. 중간에 자신의 성에 들러 정령을 보게 해주는 마법약을 챙겨 와 눈꺼풀에 발랐다. 항상 휴대하면 낭비할까봐 일부러 집에 놔두고 아껴가며 사용하던 것. 이제 한 병밖에 남지 않았다. 이마저도 저번에 기사단을 대동하면서 한꺼번에 꽤 많은 양을 쓴 탓에 눈에 띄게 준 상태였다. 제조법을 알지 못하기에 다시 만들 수도 없었다.
“곤란하군.”
케일론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원래 이 약은 엘프들이 그들의 피가 섞인 하프 엘프들을 위해 만든 약이었다. 대부분의 하프 엘프들은 정령을 볼 수 있지만 간혹 인간 쪽의 피가 진해서 정령을 보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자손들을 위해 엘프들이 제조해서 건네주던 것이다. 케일론이 지닌 이 약도 하프 엘프였던 그의 어머니가 준 거였다.
“할 수 없지.”
그는 그러니까 ‘쿼터’였다. 그의 어머니는 엘프들이 이 대륙을 벗어나 다른 차원으로 갈 때 자신과 그의 인간 아버지를 남겨둔 채 떠나가 버렸다. 어린 아들을 버리고 떠나는 죄책감 때문인지 이 약을 여러 병 주고 갔다. 떠돌이 하급 마법사였던 아비와 함께 살아오는 동안 대부분 써버리고 이제 이것 한 병만 남았다. 그가 대마법사라는 호칭을 얻게 해주는 데 큰 역할을 해준 약이다. 물론 그의 마법 능력이 특출 난 덕분이었지만 정령을 잡아다 사역하는데 이 약의 도움이 컸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조만간 모두 써버리게 될 것이다. 그럼 더 이상 정령을 사역하는 일도 못하겠지.
‘뭐, 큰 상관은 없어. 어차피 하프 엘프들이 거의 사라진 지금 정령을 부릴 수 있는 마법사는 별로 없을 테니까.’
정령의 힘을 쓰지 않더라도 4대 원소를 기반으로 한 마법을 쓸 수 있긴 했다. 마나의 소모가 엄청난데다 마법 유지 시간이 짧고 위력 또한 약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제국의 통일도 완성되었으니 이제는 괜찮을 것이다. 물론 대륙 정세를 안정시키려면 계속 큰 힘이 필요하겠지만 그 정도는 자신이 가진 순수한 마법의 힘으로도 감당할 수 있으리라.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뜬 은빛 달이 시야를 밝혀주었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여기저기 얽혀 기괴한 실루엣을 만들어냈다. 케일론은 담담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일린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좀 난감했다.
황궁 복도에 있던 얼음 조각과 예전에 그녀의 방에서 감지했던 기운을 생각했다. 모두 분명히 겨울의 정령 것이었다. 그녀가 정령의 가호를 받는 자라면 아마도 겨울의 궁전에 피신했을 거라 추측했다.
‘그 경우는 괜찮아.’
그가 신경 쓰는 건 ‘피신’한 경우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납치’당한 경우였다. 순간이동 마법으로 이동했을 땐 대지의 정령을 동원해도 찾기 힘들었다. 아까 느꼈던 결계의 흔적을 떠올렸다. 에일린을 괴롭힌 것이 어느 나라의 공녀라면 공녀들 중의 누군가가 마법사를 대동한 것이리라. 자신이 쳐둔 황궁의 결계를 건드리지 않고 또 다른 결계를 펼칠 수 있는 자라면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일 것이다. 누구일까? 그 정도 실력을 가진 자라면 나름 명성을 얻는 자일 텐데 짐작 가는 이는 없었다. 아무튼 에일린이 ‘피신’한 것이어야 할 텐데……. 빨리 뭔가 행동을 취해야 했다.
“귀찮아.”
잔뜩 찌푸린 얼굴로 한마디 내뱉었다. 에일린을 맡은 뒤로 왜 이렇게 성가신 일투성인지 모를 일이었다. 지팡이를 꺼내 휘두르며 조금 긴 마법 주문을 외웠다. 하얀 마나의 밧줄에 묶인 또 다른 정령이 지팡이에서 흘러나왔다. 흰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백색 옷을 걸친, 어린아이만 한 크기의 중급 겨울의 정령이었다.
“프뤼나스! 지금 나를 겨울의 궁전으로 안내해라. 거기 에일린이 있는지 찾아봐야 해. 에일린…… 이 누군지는 알고 있겠지?”
케일론 못지않게 찌푸린 표정의 정령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고 있어. 하지만 목에 이런 밧줄을 매단 채로 겨울의 궁전에 들어갈 수는 없어. 같은 정령왕이 아닌 이상 허락을 받지 않은 자는 정령왕의 궁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이 밧줄에 묶인 동안은 나 역시 당신에게 속한 자. 궁전에 들 수 없어.”
케일론도 익히 아는 내용이었다. 정령왕의 거처는 강력한 결계로 보호되고 있어 허락받지 않은 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설령 어떻게 들어간다 해도 많은 정령들이 모여 있는 만큼 위험한 장소였다. 대마법사라 불리는 그라 할지라도 그곳만큼은 피해 가는 게 좋을 거였다. 여전히 미간에 주름을 잡은 얼굴로 제안했다.
“에일린을 찾아 준다면…… 너를 풀어주겠다.”
중급 겨울 정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인가?”
“그래. 지금 당장 마나의 밧줄을 끊을 테니 약속해다오. 이대로 도망가지 않고 에일린을 찾아준다고.”
“좋아! 이 속박을 끊어준다면 나도 그냥 사라지지 않고 약속을 지키겠다. 오늘 밤은 그녀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어. 정령으로서의 긍지를 걸고 맹세하겠다.”
케일론이 살짝 미심쩍은 기색을 비췄지만 곧 짧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향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프뤼나스의 목에 걸린 마나의 밧줄과 연결된 지팡이에서 동시에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강약을 반복하던 빛이 마법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프뤼나스는 그의 목을 어루만졌다. 무려 3년 동안 그를 속박했던 마나의 사슬이 사라진 것이다. 환희를 참지 못한 듯 그는 순간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며 빙글빙글 주위를 돌았다. 이 거칠 것 없는 자유로움!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이리저리 차가운 허공을 휘젓다가 문득 마음을 다잡았는지 급히 케일론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겨울의 궁전으로 가겠어. 당신도 함께 갈 텐가?”
케일론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궁전 안까지 들어갈 수는 없겠지만 건물 앞까지는 데려갈 수 있을 거야.”
프뤼나스가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해 겨울의 궁전 앞마당으로 케일론을 데려왔다. 투명한 얼음과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겨울의 궁전이 은은한 달빛을 받아 은청색으로 빛났다. 케일론은 잠깐 동안 찬탄의 눈으로 궁전 외관을 훑었다.
“나는 그럼 그녀가 안에 있는지 보고 오겠어.”
“프뤼나스!”
케일론의 부름에 프뤼나스가 멈칫하며 뒤돌아봤다.
“부탁한다. 부디 잘 좀…… 찾아봐다오.”
프뤼나스는 눈을 크게 뜨고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사역당하는 3년 동안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이라 조금 놀라웠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고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지켜보던 마법사가 미간을 더욱 찡그린 채 투덜거렸다.
“젠장, 이만저만 손해 보는 게 아냐.”
***
프뤼나스가 겨울의 궁전에 가기 전, 봄의 여왕인 베르누아가 먼저 그곳을 다녀갔다. 거기 있던 정령들을 통해 에일린과 겨울의 왕이 함께 가을의 궁전에 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베르누아는 곧 안드레아스에게 알렸다.
“가을의 왕의 궁전이라고요? 그럼 그곳에 가서 그녀를 붙잡아올 수 있으신지요?”
안드레아스는 어느새 여장을 벗고 마법사들이 입는 검은색 로브를 착용하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모습이었다. 마법 공간에 넣어둔 옷을 꺼내 입은 거였다. 그의 요청에 베르누아는 조금 미간을 찡그렸다.
“음……. 겨울의 왕이 함께 있다면 쉽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시도해볼게. 그대도 따라올 텐가? 조용히 행동하겠다고 약속한다면 데려가 줄 수 있어.”
“그러도록 하지요.”
“오늘만큼은 통과하는데 별문제 없을 거야. 정령들의 축제니까. 하지만 명심해줘. 그 여자를 잡는 건 내가 기회를 봐서 할 테니 그대는 절대 나서지 마. 마법을 써도 안 돼.”
“알겠습니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일론과 프뤼나스가 같은 장소에 도착했다. 그들 역시 똑같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프뤼나스가 알아 온 내용을 접하자 케일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일린이 ‘피신’을 해서 일단 신변이 안전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잘됐지? 기다리면 알아서 당신의 성으로 갈 테니까 이만 돌아가는 게 어때? 마법사.”
프뤼나스의 말에 케일론은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데리고 함께 돌아가는 게 좋겠지. 축제가 열리는 장소로 가서 찾아봐 주지 않겠나?”
“…….”
프뤼나스는 잠깐 동안 고민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그와 약속했던 일을 다 한 것 같긴 했지만 에일린의 모습을 직접 확인한 게 아니니 찜찜하긴 했다. 이왕 오늘 밤만큼은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으니 좀 더 일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좋아, 그럼 함께 가을의 궁전에 가자고. 그대가 스스로에게 은신 마법을 걸고 조용히 날 따라온다면 가을의 궁전에 들어가서 찾아볼 수 있을 거야. 원래 불가능한 일이지만 축제 때문에 그리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지는 않을 테니까. 내 말대로 할 텐가?”
케일론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
“오랜만이군요, 히에무스.”
구릿빛이 도는 금발 머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드레스를 떨쳐입은 사랑의 여왕 키프리스가 화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마주친 게 영 겸연쩍고 어색해서 짓는 억지웃음이었다.
“…….”
히에무스는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역시 그녀를 만난 게 좀 당황스러웠다. 아직은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되는 걸 원치 않았었다. 피하고 있던 건 오히려 그 자신인지도.
“아…….”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낮게 탄식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이야. 아직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는데. 오늘로써 마지막인 걸까? 겨울의 왕이 해독약을 먹는 게 바로 오늘인 걸까? 심장이 마구 요동치고 가늘게 몸이 떨려왔다. 각오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닥치니 당혹스러웠다. 며칠만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는데……. 단지 며칠만이라도.
“그대도 오랜만이구나, 인간 여인.”
“안녕하세요?”
에일린이 그녀의 눈치를 보며 인사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조금 의외인 듯 키프리스가 흥미로운 눈빛을 보내자 에일린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어줬다. 눈의 여왕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제가 일찍부터 여기 와서 사랑의 여왕께서 오시길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만나게 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요. 오늘 해독약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가.”
히에무스는 여전히 별다른 반응 없이 담담한 모습이었다. 키프리스가 어색한 분위기를 만회하고 싶은지 조금 수선스럽게 말했다.
“물론 당연히 해독약을 드려야죠. 언제든 당신이 요청해오면 줄 생각이었어요. 어쩌다 보니 기회가 어긋나 이렇게 됐지만…….”
그녀가 눈을 힐끔거리며 히에무스와 에일린의 기색을 살폈다. 아까부터 묘하게 가라앉은 태도를 보이는 히에무스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담았다.
“하지만 뭐, 당신을 보니 그리 불쾌한 경험은 아니었던 것 같군요. 그렇지 않나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히에무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아니, 뭐 의도가 달리 있던 건 아니었어요. 해독약을 줄 생각이긴 한데 지금 내 수중에 없어요. 내 궁전에 가서 가져와야 해요. 그러니…….”
“제가 가서 받아오겠습니다. 지금 당장.”
눈의 여왕이 재빨리 끼어들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히에무스. 난 당신에게 직접 전해주고 싶어요. 해독약을 원한다면 지금 나와 함께 내 궁전에 가도록 해요.”
“…….”
히에무스는 입을 꾹 다문 채 팔짱을 끼고 키프리스를 노려봤다. 눈의 여왕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무나 가서 받아오면 될 일이지 왜 꼭 왕께서 직접 가셔야 한다는 거죠? 또 뭔가 흉계를 꾸미려는 것 아닙니까?”
“어머! 흉계라니. 너무 무례하군, 눈의 여왕. 상급 정령 주제에 정령왕인 날 모욕할 셈인가?”
키프리스가 불쾌하다는 듯 입을 삐죽거리며 다음 말을 이었다.
“난 그저 확실한 게 좋아서 약을 마신 당사자에게 직접 전하고 싶을 뿐이에요. 내키지 않으면 그만둬요. 나야 답답할 것 없으니까.”
지켜보던 에일린이 히에무스의 팔을 살짝 흔들었다. 그가 그녀를 돌아봤다.
“저, 다녀오세요. 히에무스.”
“에일린.”
히에무스를 잡은 에일린의 손이 떨리고 커다란 연초록 눈동자도 눈에 띄게 흔들렸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단호했다.
“다녀오세요. 가서 해독약을 받아 오세요.”
“에일린…….”
알고 있었던 거냐? 자신이 사랑의 묘약에 중독된 탓에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임을. 그래서였나? 자신을 계속 거부했던 이유가. 그의 사랑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인가.
그 순간 히에무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전율이 일어 숨이 막혔다.
“에일린, 나는…….”
그녀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그 눈빛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호흡이 가빠와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 흘렸다.
“필요 없어.”
모두의 놀란 시선이 그를 향했다.
“해독약 따위, 필요 없어.”
필요 없다. 정말로 필요 없었다. 영원히 해독약 따위 먹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그러면 그의 사랑을 가짜라고 생각할 일도 없을 것이다. 가짜일 리가 없다, 이 마음이 진짜가 아닐 리가 없어.
“나는, 나는 필요해요.”
에일린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히에무스를 위시한 모두가 의외의 눈빛을 보냈다. 그녀만큼은 그가 해독약을 먹는 걸 반대할 것 같았는데.
“나는 이제 당신이 해독약을 드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에일린.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게 그렇게 부담스러운 것이었더냐?”
그건 아니다. 정말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 일어날 일이고 그것이 순리에 맞는 일이라면 차라리 빨리 일어나는 게 나았다. 그녀의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어차피 인간과 정령의 사랑이 맺어질 리는 없지 않겠는가? 그를 위해서도, 그녀 자신을 위해서도 기회가 온 지금 그만두는 게 좋으리라. 가짜 사랑은 전세에 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진짜 사랑을 하고 싶었다. 진짜 행복을 원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서도 그편이 나을 것이다. 그는 애초에 사랑 같은 걸 하지 않아도 완전한 상태로 존재했던 이니까. 오히려 그녀와의 관계가 짐이 되고 해가 될 것이다.
“진심인 거냐?”
히에무스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에일린이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에요.”
히에무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나를……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냐?”
“…….”
노여움을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억눌렀던 냉기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주변에 얼음이 얼 듯한 한기가 휘몰아쳤다. 그의 머리와 가슴을 장식했던 화관과 꽃목걸이가 하얗게 얼어붙으며 흔적도 없이 바스러졌다. 에일린과 주위의 정령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앞장서라, 키프리스.”
날 선 음성으로 한마디 내뱉고는 몸을 돌려 궁전 입구로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눈의 여왕이 따라나섰다. 키프리스는 잠깐 에일린을 살피다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는 둘의 반응이 퍽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계속 히에무스의 시선을 외면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일린은 그들이 떠나자 얼굴을 들었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름다운, 차갑고도 아름다운 은빛 실루엣이 흐릿해졌다. 어느새 눈가가 젖어 들었다. 물의 정령이 안타까운 낯빛으로 말을 건넸다.
“이봐, 인간 여인. 괜찮겠어? 왜 그런 거야? 둘 사이, 꽤 좋지 않았어?”
“좋…… 았어요. 하지만, 아닌 건 아니잖아요.”
“응? 뭐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에일린이 중얼거렸다.
“묘약에 취해서 시작된 사랑, 술에 취해서 시작된 사랑, 아니잖아요.”
“……?”
“그건…… 아닌 거예요.”
결국 눈물이 흘러넘쳤다.
***
키프리스의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진 궁전 앞에 세 정령이 나타났다. 붉은 장미 넝쿨로 뒤덮인 바위 동굴에서 코를 찌르는 달콤한 장미 향이 진하게 풍겼다. 순간 숨이 막힐듯해 히에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키프리스가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로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눈의 여왕이 따라가려 하자 비웃듯 한마디 던졌다.
“호오, 겨울의 왕께서는 어딜 가나 항상 보모가 필요한 모양이지?”
히에무스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대는 들어올 필요 없어. 이제 그만 됐으니 환궁하도록.”
그 역시 눈의 여왕이 계속 불편하고 꺼려졌던 터라 딱딱한 어조로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눈의 여왕은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자, 들어오세요.”
키프리스가 앞장서자 검은색 하트 문양이 새겨진 나무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스르르 열렸다. 그녀를 따라 히에무스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 세월을 함께 이 숲에서 살아온 사이였지만 사랑의 여왕의 궁전에 발을 들이는 건 처음이었다.
안쪽은 널찍한 바위 동굴이었다. 유백색 벽과 천장, 높다란 기둥마다 장미 넝쿨이 자라 뒤덮인 모습이었다. 그녀가 들어서자 수많은 정령이 나와 맞이해 주었다. 그녀를 따라온 겨울의 정령왕을 보고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짓더니 다들 황급히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사랑의 궁전에서 그의 악명이 얼마나 높은지를 짐작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곧장 어느 한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출입문이 있는 한 면을 제외한 세 군데의 벽에 설치된 높은 선반이 보였다. 각 층마다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색채의 약병들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모두가 이런저런 효능을 가진 마법약이었다. 히에무스는 잠깐 동안 좀처럼 보기 힘든 기이한 방 풍경을 둘러봤다. 키프리스가 멈춰선 채 뭔가를 생각하더니 한쪽 선반으로 다가가 푸른색 약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이내 싱긋 미소를 짓더니 다른 쪽으로 가 빨간색 약병도 한 개 집어 들었다. 그 두 약병을 히에무스 앞에 놓인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자아, 여기 이게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마법약이에요.”
왜 약병이 두 개인 걸까? 히에무스는 조금 의아한 눈빛으로 질문했다.
“뭐지? 이 두 개의 약을 모두 마셔야 해독 효과가 나는 것인가?”
키프리스가 유난히 밝은 낯빛으로 그를 흘겨봤다. 양팔을 벌려 탁자를 잡은 채 바로 앞에 서 있는 키 큰 그를 주시했다.
“해독약은 파란색이에요.”
그가 말없이 파란색 약병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데 그녀의 유려한 말이 이어졌다.
“빨간색 약병은…….”
유난히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말투. 더불어 그녀의 붉은 두 눈동자가 기이한 빛을 발했다.
“그야말로 신비한 마법약이예요. 정령의 몸을 일정 시간 인간의 몸으로 만들어주는 약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