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소설 속 여주인공 (4/24)

3. 소설 속 여주인공

“제퓌는 알고 있을 테고 이쪽은 ‘아두스’, 그리고 ‘프리기’라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뒤 일을 하고 있는 에일린에게 북풍이 찾아왔다. 북풍이 작은 겨울의 정령 셋을 데려와 에일린에게 소개했다. 이전에 만난 적이 있는 제퓌를 빼고는 모두 처음 보는 정령들이었다. 셋 모두 길고 하얀 머리칼에 투명한 백색 옷을 차려입어 비슷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생김새와 차림새가 차이가 나서 서로 구분이 가능하긴 했다.

“이들을 시종으로 삼으라고요?”

“시종 겸 감시역이죠.”

“네?”

북풍이 무표정한 얼굴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사실 정말로 시종 겸 감시인이었다. 세 정령을 보내면서 히에무스는 에일린의 시중을 들라는 명령을 내렸고, 눈의 여왕과 북풍은 감시하라는 당부를 했다.

“감시역이라면…….”

“전에 경고했다시피 우리 왕의 이름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죠. 당신이 우릴 배신하는 순간 이들이 즉시 당신을 얼려 죽일 거예요.”

북풍은 전혀 감정이 담기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에일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부르르 몸이 떨렸다.

“그냥 감시역인 거군요.”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요. 이제부터 계속 당신 옆에 있을 거니까. 감시역이지만 당신에게 위기가 닥치면 보호도 해줄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뭐요?”

에일린이 부루퉁해져 되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장소로 순간이동 마법을 시행해줄 수 있어요. 정령의 숲이든 어디든. 그건 꽤 유용할걸요?”

에일린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북풍의 말 한마디에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아, 그럼 나 혼자 시장도 다녀오고 정령의 숲에 있는 온천에도 다녀올 수 있겠네요?”

북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다른 인간들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언제든 가능하죠.”

그건 정말 반가웠다. 정령의 숲을 떠나온 뒤 다른 것보다도 동굴 속에 있던 온천이 참 그리웠다. 그렇지 않아도 씻어야 할 때가 되었으니 오늘 당장에라도 다녀오고 싶었다. 케일론의 성에서 목욕을 아직 하지 않았지만 더운물을 쓸 때마다 장작을 지피는 일이 무척 번거로웠다.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려면 장작을 어마어마하게 지펴서 물을 끓여야 할 게 뻔했다.

“음, 그런데 케일론의 눈에 띄면 안 될 텐데……. 괜찮을까요?”

“인간들은 특별한 마법약을 눈꺼풀에 발라야 정령을 볼 수 있으니 괜찮아요. 서로 최대한 조심해야겠죠. 너희들, 이분을 잘 모셔라. 왕께서 좋아하시는 인간이니.”

“알겠습니다! 북풍님.”

북풍의 마지막 말이 왠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작은 세 정령이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인간 여인.”

그녀도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저도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근데 이제 서로 자주 볼 텐데 내 이름을 불러 줄래요? 전 에일린이라고 해요.”

작은 세 정령이 서로의 얼굴과 북풍의 표정을 살피며 눈치를 봤다. 인간이 시키는 대로 해도 되는지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북풍이 끄덕이자 제퓌가 얼른 앞으로 나섰다.

“그럴게요. 에일린님.”

‘님’까지 붙이다니. 어쩐지 황송한 기분이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앞으로 잘 지내도록 해요. 제퓌, 아두스, 프리기님.”

“우리에겐 따로 경칭을 붙이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이름만 불러주세요.”

제퓌가 담담한 표정으로 요청했다.

“그럴게요.”

감시역이든 뭐든 정령 셋을 항상 끼고 살 수 있다니 기분이 좋았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 자신이 소설 속 여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았다.

“에일린!”

그때 멀리서 브레이가 찾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점심식사 준비 때문일 것이다. 에일린은 북풍과 작별하고 서둘러 부엌으로 뛰어갔다. 작은 세 정령은 결계가 쳐진 집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기에 마당에 있는 커다란 떡갈나무 위에 머물기로 했다. 마침 에일린의 방에 있는 창문과도 가까워 감시하기에 딱 안성맞춤이었다.

***

같은 날, 아젤란 제국의 황궁인 ‘팔라틴 황궁’. 황제가 머무는 본궁인 ‘라피스궁’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별궁이 세워져 있다. 황궁의 서쪽에는 높은 성벽에 둘러싸인 ‘아르겐궁’이 위치했다. 그곳에 여러 나라에서 온 공주들이 머물렀다. 모두 아젤란 제국이 10년에 걸친 정복 전쟁 끝에 복속시킨 나라에서 온 공녀들이었다. 명분상으로는 각국 공주들이 대국의 문화와 풍속을 익혀 견문과 수양을 넓히기 위해 모여들었다. 나아가 아젤란 제국과 각 속국의 결속과 유대를 강화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그 실상은 ‘볼모’를 모아 감시하는 것이다. 아울러 정책적으로 아젤란 제국의 귀족과 공녀들이 혼인 관계를 맺게 해 정복지를 지배하고 제국에 동화시키는 데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었다. 그들 중에 ‘아칸 왕국’에서 온 공녀 ‘엘시아 왕녀’가 섞여 있었다.

겨울치고는 온화한 날씨였다. 엘시아는 제국에 당도한 후 계속 두문불출하다가 오래간만에 산책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공인된 인질의 처지였지만 성 내에서의 운신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엘시아가 잘 다듬어진 상록수로 꾸며진 후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 좋은 적당한 키에 구불거리며 내려오는 백금발 머리채가 탐스러웠다. 사파이어를 박아놓은 듯 투명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와 오뚝한 콧날, 진주 같은 둥근 이마에 꼭 다문 다홍빛 입술이 아름다웠다. 길고 가는 팔다리와 풍만한 가슴이 푸른 비단 드레스와 금빛 망토, 화려한 보석 장신구들에 감싸여 더욱 눈부셨다. 안드로스 대륙에 널리 알려진 그 미모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상쾌한 날씨로구나.”

그 미모만큼이나 맑고 고운 목소리였다.

“요즘 겨울의 정령왕이 기분이 좋은 모양입니다. 계속 좋은 날씨가 이어지는 걸 보니.”

수행한 두 시녀 중 하나가 말했다. 여자치고는 좀 큰 키에 중성적으로 느껴지는 매력적인 음성이었다. 엉덩이 밑까지 늘어뜨린 풍성한 붉은 머리에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섬세한 턱선에 유난히 새빨간 입술,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그윽한 금빛 눈동자가 눈길을 끌었다. 엘시아와는 다른 느낌을 가진, 보기 드물게 아름답고 화려한 미모였다. 두툼한 망토로 온몸을 감싸고 있어 몸의 굴곡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호리호리하고 단단한 몸매임을 짐작하게 했다.

“정령의 모습이 보이시는 거예요? 마법사님.”

다른 시녀 한 명이 무심코 말을 건네다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키가 큰 붉은 머리의 시녀와 엘시아 왕녀가 동시에 그녀를 노려보았다.

“비안나, 지금은 우리끼리니까 상관없지만 이제부터 단단히 주의해야 해. 마법사가 수행인 중에 있다는 걸 들켜선 안 돼.”

“예, 예. 주의하겠습니다. 공주님.”

“차라리 ‘세뇌술법’을 걸어드릴까요? 비안나양?”

붉은 머리의 시녀가 금빛 눈동자를 차갑게 빛내며 쏘아붙였다.

“아, 아니에요. 그러시지 않아도 명심할게요. 저 잘 해낼 수 있어요. 안드라님.”

그 말에 비안나라는 이름의 시녀가 놀라서 두 손을 황급히 저었다. 겁을 먹은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제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 알아두세요.”

“예……. 물론이죠.”

비안나가 바짝 주눅 든 표정으로 대답했다.

“비안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이들에게도 안 들킬 자신 있겠죠? 안드라.”

엘시아가 시녀로 위장한 마법사를 향해 물었다. 살짝 의혹이 담긴 낯빛이었다.

“당연히 자신 있습니다. 공주님. 이 마법 도구를 차고 있으면 마나의 흐름을 숨길 수 있습니다. 대마법사라 불리는 케일론 조차도 눈치 못 챌 겁니다. 이건 정령의 솜씨로 만든 물건이니까요. 정령 중에서도 상급 이상이 아니면 알지 못합니다.”

안드라가 자신의 손목에 감긴 금빛 팔찌를 내려다보며 설명했다. 엘시아가 흐뭇한 눈빛을 담으며 위아래로 안드라를 훑었다.

“마법사란 건 그걸로 숨기면 되겠고 다른 건…… 걱정 안 해도 되겠죠?”

안드라가 미묘한 미소를 띠며 엘시아를 바라보았다.

“어떨 것 같습니까? 들킬 것 같은가요?”

엘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한쪽 손을 뻗어 안드라의 얼굴에 갖다 댔다.

“아니, 전혀. 이렇게 예쁜 얼굴인데 누가 남자라고 의심하겠어요?”

그가 슬그머니 엘시아의 손을 치우며 다소 차가운 말투로 대꾸했다.

“어쨌든 저에 대한 걱정은 더 이상 안 하셔도 됩니다. 그보다도 공주님께선 어떠신지요? 그를 유혹할 자신 있습니까?”

엘시아가 코웃음을 쳤다.

“하, 자신 있느냐고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내 미모를 한 번이라도 본 사내는 전부 내 노예가 되는 것 몰라요? 아젤란의 황제도 결국은 사내. 당연히 자신 있지요.”

“글쎄요. 공주님의 미모는 진정 우리 아칸 제국의 귀한 보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왕녀가 이마에 살짝 주름을 잡으며 마법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만은 금물이지요.”

안드라가 예의 그 중성적인 묘한 목소리로 조언했다.

“아젤란 제국은 대국입니다. 제국의 황제는 어릴 때부터 세계 각국의 어지간한 미인은 다 접해봤겠지요. 그래서 의외로 미인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자일 수도 있습니다. 여느 남자들과 다르게 말입니다. 아직 황후도, 그 흔한 후궁도 한 명 없는 걸 보면.”

“혹시 어쩌면 남자를 좋아하는 거…… 아닐까요?”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런 소문은 없었으니까요. 첩자들이 보내온 정보를 봐도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냥 별로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쪽이겠지요.”

“그 말씀은, 아젤란 제국의 황제가 목석이란 건가요?”

“아마도요.”

그래서였나? 이곳에 처음 와 인사를 하러 갔을 때 그와 대면했지만 반응이 좀 미적지근했다. 엘시아는 황제의 태도가 웬만한 사내들의 것과 달라 신선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알현실에 있던 다른 남자들은 전부 그녀의 미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찬사를 보내는 표정이었는데.

“제가 이미 말했지요? 황제도 결국 사내라고. 남자 취향이 아니라면 난 언제든 자신 있어요. 머지않아 내게 무릎을 꿇고 열렬한 사랑 고백을 해올걸요?”

엘시아는 의욕에 불탄 얼굴로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꼭 그렇게 되길 빌겠습니다. 공주님. 뭐, 원수나 다름없는 황제를 사로잡아야 한다는 게 달갑지 않겠지만 그것이 우리 아칸 제국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니까요. 부디 참고 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에요. 그러기 위해서 여기 온 거나 다름없는 걸요. 반드시 성사시킬 거예요. 제가 꼭 이 아젤란 제국의 황후가 되고 말 거에요. 두고 보세요!”

“건투를 빕니다. 공주님.”

안드라의 말에 엘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의를 불태웠다.

“이번에 열리는 무도회에서 승부를 걸 거예요.”

길고 하얀 두 손을 다시 한번 꼭 쥐며 다짐했다. 그녀는 반드시 아젤란 제국의 황후 자리를 얻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칸 제국은 이대로 사라져 버릴지도 몰랐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줄 큰 원동력을 얻는 게 지금 그녀의 지상 목표였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이 대제국의 황후가 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는 존재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그 어떤 것이든,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깨끗하고 완벽하게 제거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에 파란 불꽃이 튀었다.

마법사 안드라는 공주의 모습을 지켜보며 계속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독히도 아름다운 어떤 맹수를 닮은 것 같다고. 강하고 우아하며 때론 표독스럽고 또 때로는 미치도록 게걸스러운…… 그런 고고한 한 마리의 맹수를.

***

며칠 뒤. 케일론은 붉은 봉인이 찍힌 양피지 문서 한 장을 에일린에게 내밀었다.

“폐하께서 그대에게 전하라고 하시더군요.”

“이게 뭐죠?”

에일린은 읽을 수 없는 룬 문자가 잔뜩 쓰여 있었다.

“무도회 초대장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겐 진즉에 전달되었지만 그대는 폐하께서 추가로 초대하시는 거니까. 지정된 날짜에 맞춰 내 에스코트를 받아서 참석하라는 명령입니다.”

“와아! 저 그럼 정말 황궁 무도회에 갈 수 있는 거예요?”

“폐하의 명령이니 반드시 참석해야 해요.”

케일론이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도회도 번거롭고 여자를 에스코트하는 일도 성가셨다. 지금껏 해 본 적도 없었다. 마법사가 무도회에 여자를 에스코트해서 갈 일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렇다고 같은 집에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도 없었다. 황제의 호위를 위해서도 그 자리에 나가긴 해야 하니까.

“무도회에 가려면 무슨 준비를 해야 할까요?”

“글쎄요. 대충 드레스나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에일린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남자인 자신이 뭘 알겠는가? 드레스나 걸치고 좀 깔끔한 모습으로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이런 대답이나 하고 있다니. 이 여자를 맡고 나선 왠지 성가시고 귀찮은 일투성이였다. 뭔가 정령들과 통하는 사이인가 싶어 며칠 동안 눈여겨 지켜봤지만 아직 이렇다 할 단서는 찾지 못했다. 조금 의심스러운 상황이 없지는 않았지만 정령을 보는 약을 바르지 않은 상태여서 확인한 건 없었다. 그렇다고 마법약을 항상 바르고 있을 수도 없고. 한 병밖에 없는 귀중한 마법약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춤 같은 거…… 추지 않나요? 무도회니까?”

“추긴 하겠지요. 무도회니까.”

그냥 자백을 시키는 흑마법이라도 걸어볼까 하는 유혹이 번번이 일었다. 그런 결심을 거의 실행할 뻔했지만 그럴 때마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째서인지 그런 방법은…… 아직 쓰고 싶지 않았다.

“저, 혹시 제게 춤을 좀 가르쳐주시면 안 될까요?”

“춤이라고요?”

“예. 아시다시피 제가 평민이라서 춤추는 방법을 몰라서요.”

춤이라. 무도회에서 춤을 춰 본 적이 있었던가?

“혹 모르세요? 마법사니까 춤을 출 일이 없으신가요?”

아마 케일론도 춤추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에일린은 소설책에서 읽었던 정보를 떠올렸다. 소설책에서도 이 무도회 설정이 등장했다. 황제와 엘시아 황녀가 첫인사를 나누고 난 후 서로에게 계속 호감을 품는 상황이 이어졌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는 게 바로 이 황궁 무도회 장면이었다. 무도회에서 함께 춤을 추면서 상대에게 다시금 반하는 모습이 나왔다. 케일론도 엘시아와 딱 한 번 춤을 추는 기회를 가지는데 그때 황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당하게 된다. 즉, 이 무도회 장면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이 자기 마음의 방향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

‘아아, 그 현장을 직접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아.’

에일린은 소설의 중요 장면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게다가 안도감도 들었다. 에일린이 줄곧 걱정하던 부분도 이 무도회 장면만 제대로 진행된다면 나머지 전개는 별 무리 없을 것이다. 엘시아 왕녀가 정령들과 친해져 그 힘을 쓰는 일을 못 하게 됐지만 그건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정령을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엘시아 왕녀의 조력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에일린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 소설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 그 정도의 역할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어쨌든 이번 무도회에서 엘시아 왕녀의 사랑이 완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엘시아 왕녀가 렉스와 케일론과 이어질 다른 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고 소설 전개도 더 이상 에일린이 알고 있던 대로 흘러가지 못할 것이다.

‘가능하면 소설이 원작과 가까운 모습으로 흘러가야 해.’

이름도 없던 자신이 이름을 가지는 바람에 내용이 자꾸 달라지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소설 내용이 너무 많이 바뀌는 걸 원치 않았다. 자신은 그저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멋진 사랑과 행복을 얻고 싶은 것일 뿐 소설 주인공들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소설에서 비중이 아주 희미한 엑스트라로서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을 뿐이었다.

어쨌든 이왕 그런 장소에 참석하는 거라면, 에일린은 좀 더 제대로 준비하고 싶었다. 최소한 한 곡 정도는 춤을 춰보고 싶었다. 그 상대가 엘로드라면 정말 멋질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춤을 배워야 하겠지. 언젠가 영화에서 본 중세 시대의 춤은 느리고 스텝이 그리 복잡하지 않아 보였다. 며칠 바짝 배우면 되지 않을까?

“물론 알고는 있습니다. 일단은 나도 백작 작위를 가진 귀족이니까.”

춤이라. 그는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춰본 적이 한 번도 없었을 뿐. 마법사들이란 모름지기 온갖 지식에 통달한 자가 아니던가? 귀족이 지녀야 할 필수 교양도 예전에 작위를 받을 때 익혀뒀다. 그러나 직접 춰본 게 아닌데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을까?

“아아, 그랬죠! 백작님이셨죠?”

에일린이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키가 큰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력을 담은 돌처럼 연녹색의 두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는 조금 망설였다. 귀찮기도 하고 그런 일에 시간 낭비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내가 가르쳐 줄 의무는 없죠. 그런 일을 한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럴 줄 알았다. 에일린도 공짜로 배울 마음은 없었다.

“가르쳐주시면 비용을 치를게요.”

“비용을 치른다고요? 얼마나?”

“두 시간 동안 가르쳐주시면 1실버 드릴게요.”

1실버가 한국 돈으로 약 4만 원 정도니 그 가격이면 적당할 것 같아 제안했다. 케일론이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

“시간당 1실버.”

에일린은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한 시간에 1실버 드릴게요.”

“좋아요. 가르쳐 드리지요. 까짓것, 뭐.”

“부탁드려요. 케일론님.”

“마침 내일이 쉬는 날이니 그때 하기로 하죠.”

“예.”

큰 지출을 하게 됐지만 기분은 좋았다. 황궁의 무도회에 가는데 그 정도 투자는 할 가치가 있겠지. 혹시 또 모르지 않은가? 그곳에서 근사한 운명의 상대라도 만나게 될지. 에일린은 이제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찾아보기로 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거니까 기회가 있을 때 좀 더 신경 써서 행동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

“어, 이 저택에 이런 곳도 있었네요.”

다음 날, 에일린은 춤 연습을 하기 위해 케일론이 데려간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높은 천정에 굵은 기둥이 죽 늘어서 있는 널찍한 홀이 나타났다. 중앙에 사람들이 입장할 수 있는 계단이 설치돼 있고 맞은편에 악단이 연주할 수 있는 발코니 형식의 공간도 마련된 곳이었다. 촛대를 꽂아 불을 밝힐 수 있는 멋들어진 샹들리에도 여러 개 매달려 있었다. 그 외의 별다른 장식은 보이지 않았다.

“무도회장입니다. 여기도 일단은 성이니까 기본적인 시설은 갖춰진 상태지요.”

“음……. 하지만 그런 걸 한 번도 열지는 않았던 거죠?”

“그렇죠. 마법사가 무도회를 열 일이 뭐가 있단 말입니까?”

“그렇군요.”

이렇게 넓고 좋은 공간을 그냥 내버려 두다니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그 홀에서 에일린은 거의 반나절 동안 그에게서 춤을 배웠다. 생각했던 대로 스텝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중세 시대의 춤은 단순한 스텝을 파트너를 바꿔가며 반복해서 추는 형태였다. 기본 동작 몇 가지만 익히면 그리 어렵지 않게 금방 따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음악에 따라 몇 가지 다른 춤 유형이 있었지만 에일린은 제일 인기 있는 한 가지 형식만 집중적으로 연습하기로 했다. 배울 시간도, 비용도 얼마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음악 없이 연습을 해서 실전에서 제대로 출 수 있을지 좀 걱정이 되긴 했다.

“브레이!”

케일론이 갑자기 브레이를 불렀다.

“예, 케일론님.”

브레이가 만돌린을 닮은 악기를 들고 나타났다. 기턴(Gitten)이라는 악기였다.

“타우루스 춤곡 몇 개만 연주해주게.”

“알겠습니다.”

그가 나무로 된 의자를 가져와 자리를 잡고 앉더니 깃대를 잡고 기턴을 켜기 시작했다. 음악 연주까지 하다니, 브레이는 정말 만능 재주꾼인 모양이었다. 단조로우면서 느린 곡조의 음이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언젠가 봤던 영화에서 들었던 것 같은 좀 구슬픈 느낌의 음률이었다. 그 가락에 이끌렸는지 작은 겨울의 정령 셋이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의 문턱에 올망졸망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 이 곡에 맞춰서 한 번 춰보죠.”

케일론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함께 스텝을 맞춰보는 건 처음이었다. 에일린이 그의 손을 잡았다. 순간 케일론은 몸을 조금 움찔거렸다. 손을 잡는 순간 찌릿한 전율 같은 느낌이 스쳤기에.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손을 뺐다. 그 바람에 에일린의 몸이 휘청거렸다.

“앗!”

무게 중심을 잃고 그의 가슴 쪽으로 그녀의 상체가 기울어졌다. 순간적으로 그의 품에 안기듯 쓰러졌다. 케일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다.

“어, 죄송해요. 갑자기 손을 빼셔서 제가…….”

에일린은 즉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깐깐한 마법사가 신경질이라도 낼까 두려웠다.

“흠, 흠. 뭐, 괜찮아요. 내 잘못이니까.”

그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에일린이 조금 눈치를 보다 손을 붙잡자 다시 빼지 않고 리드하기 시작했다. 열중해서 스텝을 밟아나갔다. 느리고 단순한 춤이라고 생각했지만 음악에 맞춰, 또 파트너와 맞춰 추는 게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몇 번이고 발이 엉키고 박자를 놓치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어야 했다. 그가 짜증을 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계속하며 눈치를 살폈지만 의외로 별 말없이 인내심을 갖고 대해주었다. 케일론을 다시 볼 정도였다. 이런 자상한 면도 있구나 싶어서. 하긴 어쩌면 돈이 되는 일이니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도 예전에 학원 강사 일을 할 때 때로는 참기 힘든 학생들도 있었지만 꾹 참고 대할 때도 많았으니까. 한참 춰보니 어느새 능숙한 움직임이 되었다. 단조로운 동작을 반복했다. 조금 지루했는지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지금까지 춤을 춰본 적이 없었나요?”

“예? 아, 이런 춤은 처음이에요.”

“그럼 다른 춤은 춰 본 모양이죠?”

“하하……. 그냥 막춤 같은 걸 추기는 했죠. 노래방에 가서 대충 흔들고 놀 때.”

“노래방?”

“아, 그게…….”

또다, 또! 에일린은 또 말문이 막혔다. 어딘가에 몰두하다 보니 자꾸 지금 그녀의 위치를 잊어버렸다. 한숨을 쉬었다. 또 그 변명으로 밀고 나가야지 별수 없었다.

“꿈에서 보는 책에 나오는 장소예요.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공간을 거기선 그렇게 불러요. 다른 장소도 있지만 거기가 제일 부담 없고 만만한 곳이라서…….”

케일론은 미심쩍은 얼굴로 그녀의 눈을 주시했다. 놀랍게도 진실을 말할 때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가 보랏빛 눈을 가늘게 뜬 채 바라보는데 맑고…… 어딘가 아련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꿈속의 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있어요. 나와 닮은 영혼을 가진 어떤 여자가. 그 여자는 괴롭고 우울할 때면 혼자 그곳에 찾아가요.”

강력한 마력을 품은 마법의 돌처럼 그녀의 눈동자가 촉촉한 빛을 머금으며 일렁거렸다.

“그리고 혼자 노래를 불러요. 최고로 슬픈 노래만 몇 개 골라서 목이 터져라 부르는 거예요. 혼자 미친 듯 춤을 추기도 하고요. 그 여자는…….”

어른거리던 연초록 눈동자가 담뿍 젖어 들었다.

“그렇게 살았거든요. 그 세계에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금방이라도 뭔가가 넘쳐흐를 것 같던 눈동자가 이내 황급히 물기를 삼켰다.

“딸꾹!”

케일론이 갑작스럽게 딸꾹질을 했다. 그는 이런 눈빛을 알고 있었다. 가장 순수한 진실을 말할 때 짓는 눈빛. 이것 때문인 걸까? 고귀하신 황제 폐하께서 이 보잘것없는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가. 이 눈빛을 보고 지금의 자신처럼 순간적으로 숨 쉬는 법을 잊었던 걸까. 좋지 않았다. 이런 건…… 정말이지 좋지 않았다.

“이제 그만하도록 하죠. 제법 능숙해진 것 같으니.”

잠깐 추억에 잦아들었던 에일린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한동안 전세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 예. 오늘 정말 감사드려요. 케일론님.”

“세 시간 가르쳐줬으니까 3실버를 내도록 하세요.”

“알겠어요.”

머리를 긁적이며 그에게 겸연쩍게 웃었다.

“딸꾹!”

케일론은 차갑게 굳은 낯빛으로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서일까? 뭔가 화난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이 황당하고 실없는 소리를 해서 불쾌해진 걸까? 뭐, 할 수 없었다. 최대한 그럴듯하게 보이려 애를 쓰지만 자신은 원래 이런 사람이니 별수 없지 않은가? 완전한 에일린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운아도 아니고……. 어정쩡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정신 나간 여자라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일린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저녁 식사 준비할 시간이에요. 오늘은 좀 늦었어요.”

브레이가 창밖을 통해 시간을 가늠하더니 재촉했다.

“예. 죄송해요.”

그와 함께 부엌으로 내려갔다. 전세의 일을 떠올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왠지 마음이 가라앉았다.

무도회장 창문턱에 앉아 지켜보던 세 정령들이 소곤거렸다.

“이런 일도 보고해야 하는 걸까?”

얼음의 정령 ‘프리기’가 말문을 열었다.

“뭐든지 알리라고 했으니 당연히 말씀드려야지.”

눈의 정령인 ‘아두스’가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내가 얼른 가서 전하고 올게.”

겨울바람의 정령인 ‘제퓌’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앙증맞은 두 손을 모아 쥐고 짧은 주문을 중얼거리자 금방 그의 몸이 반짝이는 푸른빛과 함께 사라졌다. 남은 두 정령이 몇 마디 더 주고받았다.

“집 안에 들어갈 수 없으니 감시하는 게 어려워. 결계를 몰래 뚫을 방법이 없을까?”

“눈의 여왕께서 뭔가 조치를 취해주신다고 하셨어. 조금 기다려 보자고.”

아두스의 설명에 프리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

다음 날이었다. 케일론도 일찍 황궁으로 출근하고 브레이도 생필품 몇 가지를 마련해야 한다며 시장에 가고 없었다. 에일린 혼자 성에 남아 끝내지 못한 부엌일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일을 다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쉬고 있으려니 좀 심심했다. 방을 둘러보며 무도회에 갈 때 뭔가 빠뜨린 게 없는지 점검해봤다. 저번에 장에 갔을 때 이런저런 물건들을 사 왔지만 여전히 부족한 것들이 많았다.

“빗이랑 거울이 있으면 좋을 텐데.”

케일론의 성에는 욕실에도 거울이 달려 있지 않았다. 중세 시대엔 거울이 상당히 비싼 물건에 속하니 낭비하지 않으려는 것일 터였다. 거울은 그녀의 형편에서 다소 무리라고 해도 머리빗만큼은 장만해야 할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대충 빗는 것도 한계였다. 무도회가 열리는 날에는 꼭 빗으로 머리를 정돈하고 싶었다. 이를 줄 알았으면 브레이에게 부탁하는 건데. 에일린은 조금 고민하다 세 정령들에게 부탁했다.

“정령님들, 저 오늘 시장에 좀 데려다주시겠어요?”

“시장이라고요?”

제퓌가 되물었다. 다른 두 정령도 눈을 반짝거리며 속히 다가왔다.

“그럴게요! 모셔다드릴게요. 시장엔 재미있는 것도 넘치고 구경거리도 잔뜩 있잖아요? 인간도 많고 물건도 가득하고. 어서 가요, 에일린님!”

아두스가 무척 설레는지 춤을 추듯 이리저리 휙휙 날아다니며 말했다. 그들도 내내 성에 틀어박혀 지내는 생활이 무척 지겹던 참이었다. 에일린의 청이 정말 반갑게 느껴졌다. 서둘러 지난번 구입했던 양모로 된 망토를 둘러 입는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히에무스 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얼른 다가가 열어보니 역시나 그였다. 곧 외출할 거였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저, 히에무스.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어딜 좀 가야 해서요.”

“어딜…… 가려는 거지?”

“시장에 볼일이 있어요.”

머리빗도 사고 오래간만에 시장 구경을 해 볼 참이었다. 외진 성에 살고 있으니 사람 구경을 하는 것도 힘들고 생활이 좀 무료하고 단조로웠다. 이왕 간 김에 맛있는 것도 사 먹고, 물건 구경도 하고, 아무튼 실컷 놀다 들어올 작정이었다. 케일론도 그렇지만 브레이도 한 번 나가면 해질녘에야 귀가할 테니까.

“시장이라고?”

히에무스는 얼마 전 일이 떠올라 인상을 찌푸렸다. 그곳에 가면 또 그 인간 군주 같은 자를 만나게 될지 모르잖은가? 모처럼 시간 내서 에일린을 보러 왔는데 이대로 헤어지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았다.

“나도 가겠다.”

“예?”

***

시장 풍경은 여전했다. 며칠 계속되던 한파가 물러난 후여서 그런지 정말 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모두 며칠 동안 거처에 갇히듯이 생활하느라 식량과 생필품이 떨어졌을 것이다. 좌판과 행상인이 죽 늘어선 모습이 겨울답지 않게 활기가 넘쳐 보였다. 그 풍경을 내려다보던 히에무스가 에일린에게 물었다.

“어디 갈 곳을 정해놓았는가?”

“음, 옷가게부터 갈게요. 이전에 갔던 옷가게요.”

에일린은 즉시 기억을 더듬어 얼마 전 들렀던 그 옷가게를 찾아갔다. 그 가게 주변에 여자들에게 필요한 액세서리나 소품들을 파는 좌판이 모여 있던 게 생각났다. 에일린은 주위를 구경하며 천천히 걸어가고 그녀 주변에 작은 세 정령과 히에무스가 허공에 뜬 자세로 따라왔다. 에일린은 세 정령과 히에무스가 좀 신경 쓰였다. 물론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겠지만, 에일린의 눈에는 너무나 선명했다. 그 모습이 뭐랄까……. 좋게 말해 신비로워 보인다고 해야 할까, 이질적으로 보인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기분이 야릇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그가 인간이 아닌 정령이라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옆에 서서 함께 걸어가자고 하기도 뭣했다. 사람들이 운집해 서로 부딪힐 것 같은 순간들이 많이 생겼다. 그는 정령의 몸이기 때문에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가 있는 자리를 그대로 관통했다. 에일린의 눈에 그 모습이 마치 유령처럼 보였다.

“힉!”

그 장면을 처음 목격했을 때 에일린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소리를 질렀다. 영문을 모른 채 에일린 곁을 지나간 인간들은 이상한 감촉과 한기를 느꼈다. 그건 히에무스 자신에게도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에일린에게도 마찬가지였고. 두어 번 그런 일이 반복되자 히에무스는 그녀와 나란히 걷는 걸 포기하고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자세를 택했다. 혼잡한 곳에선 어쩔 수 없었다.

마침내 지난번 그 가게 앞까지 당도했다. 예상한 대로 가까이에 머리빗이나 머리끈, 헤어밴드 등 자잘한 것들을 놓고 파는 행상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중 한 곳에 다가가 물건을 살피며 가격을 물었다.

“그냥 밋밋한 나무 빗은 25코퍼, 조각이랑 채색을 더한 건 50코퍼라오. 청동 재질에 은도금한 건 2실버, 여기 은으로 된 건 8실버요.”

한눈에 보기에도 8실버짜리가 눈에 확 들어왔지만 빗 하나에 그런 큰돈을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제일 싼 걸로 골랐다. 머리만 빗는 용도로 쓸 건데 굳이 비싼 걸 살 필요 있나 싶었다.

“이걸로 주세요.”

에일린이 제일 소박한 물건을 고르자 제퓌가 의아한 듯 말했다.

“에일린님, 왜 제일 미운 걸 고르세요? 저기 예쁜 것도 많이 있는데요?”

“그런 건 비싸니까 난 그냥 이거면 돼.”

무심코 그의 질문에 답해주는데 장사치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차 싶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말하는 정신 나간 여자로 보일 것이다.

“그래, 에일린. 내가 보기에도 저쪽 게 훨씬 더 나아 보이는데 저걸 고르지 그러느냐.”

“…….”

히에무스까지 거들며 말을 건네자 그냥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에일린?”

“…….”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를 비롯한 정령들 사이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무시당했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들 틈에 있을 땐 조심하는 게 나았다. 남들 평가야 그리 신경 쓸 게 못 되지만 그래도 남다른 시선을 받기는 싫었다. 돈을 치르고 그 장소를 벗어나자 비로소 그들에게 일러주었다.

“히에무스, 다른 사람들과 제가 같이 있을 땐 당신을 모른 체할 수밖에 없어요. 수상한 눈으로 볼 테니까요. 이해해주세요.”

그제야 히에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구나. 미안하다. 미리 헤아리지 못해서.”

“아니에요.”

천천히 걸으며 좀 더 시장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꽤 걸어 다니다 보니 어느새 점심때가 다가왔다. 에일린은 식당처럼 보이는, 소설책 삽화에 묘사돼 있던 한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소설책에선 한 화면 안에 들어있는 무수한 가게들 중의 하나라 정확히 업종을 구분하기 힘들었지만 음식 냄새가 나는 걸로 봐선 식당인 것 같았다. 나무 간판이 출입문 위쪽에 삐죽 튀어나온 채 걸려 있었지만 에일린은 글자를 읽을 수 없기에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식당이 아니면 다시 나오면 그만일 테니.

“어서 옵쇼!”

걸걸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서 보니 여러 개의 탁자가 놓여 있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뭔가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식당이 맞는 것 같긴 한데 그냥 식당이라기보단 주점에 더 가까워 보였다. 하긴, 중세 시대에는 주점, 식당, 여관 등의 업종이 그리 세분화돼 있지는 않았으니까. 소설책에서도 그런 설명이 있었다. 그래도 분위기가 다소 어둡고 거칠게 보였다. 에일린은 다른 곳으로 갈까 하는 갈등을 잠시 했다.

“이쪽으로 앉으십쇼. 아가씨!”

그녀의 망설임을 읽었는지 눈치 빠른 종업원이 재빨리 한 자리를 권했다. 친절히 의자까지 빼주는데 그대로 돌아서긴 뭐 했다. 뭐 괜찮겠지 싶어 그 자리로 가서 앉았다. 무엇보다 조금 늦은 시각이라 배가 무척 고팠다. 빨리 요기를 하고 싶었다. 히에무스와 세 정령들이 주변을 슥 훑어보다 호위하듯 그녀의 옆으로 가서 섰다.

“뭘 드릴까요?”

“저, 식사가 될 만한 적당한 걸로 부탁드릴게요. 음, 40코퍼를 넘지 않는 걸로요.”

“알겠습니다. 훈제 염소 고기 채소볶음이랑 빵, 수프로 구성된 메뉴가 있는데 그걸로 드릴까요? 30코퍼짜린데요.”

“예. 좋아요.”

음식은 금방 나왔다. 맛도 괜찮고 양도 푸짐해서 마음에 들었다. 몇 입 먹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이봐, 아가씨. 혼자 온 거야?”

곧장 다가온 남자 세 명이 그녀가 앉은 탁자 주위를 에워쌌다. 지저분한 얼굴에 때 묻은 옷차림이 떠돌이 잡상인이나 시장통에 붙어사는 날품팔이꾼처럼 보였다. 대낮부터 술에 취했는지 벌게진 얼굴에 알코올 냄새가 역하게 풍겨왔다.

“상관 말고 당신들 일이나 보세요.”

“에이, 그러지 말고 우리랑 같이 어울리면 어때? 맛있는 거 사줄게.”

검게 탄 얼굴에 듬성듬성 난 턱수염을 기른 남자가 에일린이 앉은 나무 의자의 등받이에 손을 올렸다. 바로 옆에 있던 히에무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다른 두 남자도 맡아놓은 것인 양 그녀의 앞자리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됐어요. 필요 없으니까 그냥 가세요.”

“비싸게 굴긴. 재미있게 해줄게, 아가씨. 우리 이상한 사람들 아냐. 아가씨가 혼자 심심할까 봐 그러는 거야.”

“심심하지 않으니 당장 가주세요.”

조금 목소리를 높여 거절했다. 이런 양아치들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세상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어? 왜 소릴 지르고 그래? 우리가 뭐 어쨌다고. 그냥 잘 지내자고 말한 것뿐인데.”

“…….”

도저히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남은 음식이 아깝긴 했지만 그냥 그 자리를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이게 사람 무시하는 거야?”

의자 등받이를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이 휙 다가와 에일린의 팔을 움켜잡았다.

우당탕!

순간 그의 몸이 무언가의 힘에 떠밀려 힘껏 내동댕이쳐졌다.

“윽! 뭐, 뭐지?”

바닥에 널브러졌던 남자가 머리를 휘저으며 에일린을 쳐다봤다. 다른 두 남자도 당황한 눈으로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바라보았다.

“……!”

에일린은 즉시 히에무스를 찾았다. 부릅뜬 그의 두 눈에 차가운 얼음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다. 그자들도, 히에무스도. 세 명의 남자가 한꺼번에 일어나 에일린 주위로 몰려들었다. 주점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며 모여들었다. 에일린은 오도 가도 못 한 채 그들 가운데 에워싸인 모습이 되었다. 수염 난 남자가 바싹 접근하며 몰아붙였다.

“너, 좀 전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도대체 뭐냐고?”

“뭘요? 제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저 혼자 나가떨어진 거잖아요!”

시치미를 뗐다. 이런 자들 앞에선 강한 모습을 보이는 게 상책이다.

“뭐라고? 사람을 밀쳐놓고 오리발 내미는 거야?”

주점 주인이 종업원들을 데리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더 이상 소동을 벌이지 않고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당도하기도 전이었다. 히에무스가 다시 손을 휘둘렀다. “……!”

그 행동을 말릴 새도 없었다. 그대로 생겨난 날카로운 바람과 함께 주점 안에 있던 사람들 위로 서늘한 얼음 장막이 펼쳐졌다. 사람들 모두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밀랍인형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에일린이 다급하게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만, 안 돼요!”

이미 늦었지만.

***

에일린은 주점을 나와 정신없이 걸었다. 방금 전 겪은 일로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히에무스가 공중에 날지 않고 따라 걸어오며 말을 붙였다.

“화가 난 거냐? 에일린.”

“아뇨, 그게 아니라…… 놀라서요. 그 사람들 괜찮은 건가요?”

“괜찮을 것이다. 힘을 많이 쓴 건 아니니까. 한두 시간 지나면 다들 별일 없이 깨어날 거다.”

“그…… 래요?”

그를 보지 않고 앞만 주시한 채 발을 옮기며 대꾸했다.

“다행…… 이네요.”

다행이다. 비록 괘씸하고 동정할 것 하나 없는 무리들이지만 해치지 않아서.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계속 손이 떨렸다. 좀 더 보폭을 빨리해서 걸었다.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히에무스도 뭔가 잘못됐다 생각했는지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에일린……. 내가 잘못한 거냐? 하지만 그대를 괴롭히는데 두고만 보고 있을 순 없지 않겠느냐?”

“…….”

“에일린?”

“감사하긴 해요. 하지만 히에무스, 그러면 안 돼요. 사람을 해치면 안 된다고요!”

“그런 놈들이라 해도 말인가?”

“그래요, 그런 놈들이라 해도.”

“…….”

에일린은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향했다.

“약속해주세요, 다시는 인간을 해치지 않겠다고. 도움이 필요하면 제가 따로 요청 드릴 테니까 그 전엔 맘대로 그러지 마세요.”

히에무스는 조금 생각에 잠기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다. 약속하겠다.”

“예. 부탁드릴게요.”

“그래.”

오늘은 이만 그와 헤어지기로 하고 세 정령들과 함께 케일론의 성으로 돌아왔다. 예기치 못한 일 때문에 계획보다 일찍 귀가했다. 망토를 풀고 정리하는데 세 정령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입을 연 건 제퓌였다.

“후아, 아까 그거 좀 위험했어. 그지?”

아두스와 프리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아두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정령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진 것도 아닌데 인간을 해치면 큰일 난다고. 대자연 어머니께서 아시면 벌을 내리실 거야.”

“그나마 약한 힘을 쓰신 거니까 괜찮은 것 아냐?”

“잘 모르지만 뭐, 주변에 고발할 자가 없었으니 별일 없으시겠지. 크게 다친 인간도 없고.”

“그렇겠지? 겨우내 동상으로 고생은 좀 하겠지만…….”

“아마도.”

그들의 대화가 끝나자 에일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꾸만 가슴이 벌렁거렸다.

***

며칠 후 화창한 어느 날이었다. 정령들의 숲 ‘루쿨루스’에도 따뜻한 햇빛이 들이쳤다. 키 큰 은빛 나무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거리며 눈부신 빛 무리를 만들어냈다. 계곡물도 햇빛을 받아 따뜻하게 반짝였다.

겨울의 정령왕 히에무스는 이날 무척 한가했다. 원래대로라면 폭풍을 일으키기 위해 정령들에게 힘을 나눠주는 일을 해야 했지만 다음 날로 미룬 상태였다. 에일린이 황궁에서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라며 날씨가 좋게 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히에무스는 모처럼 오전 중에 그녀를 만나려고 나서려던 참이었다. 요즘 매일 갔지만 대부분 오후 늦게 찾아가서 잠깐 동안 보고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느긋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눈의 여왕이 들뜬 히에무스를 불러 세웠다.

“왕이시여.”

“무슨 일인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라.”

“가을의 왕께서 오늘 밤 만월기념 축제를 여신다고 합니다. 참석여부를 묻는데 어찌할까요?”

그 말에 히에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을의 정령왕은 허구한 날 각종 행사를 벌여댔다. 자신이 맡은 계절이 아닌 시기에도 잠을 자지 않고 버텼다. 딱히 할 일이 없으니 걸핏하면 이런저런 행사를 열었다. 만월이라고 축제를 벌이거나 별이 아름답다며 파티를 열고 겨울 폭풍이 멎은 이유 따위로 모임을 만들었다. 정말 그런 이유 때문에 축제를 벌이는 것인지 축제를 벌이고 싶어 이유를 찾아 붙이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음식을 먹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들이지만 그는 항상 흥청망청 마시고 취해 있었다. 그가 벌이는 각종 모임과 축제는 정령들 사이에서 은근히 인기가 많았다. 특히 지금 같은 겨울에 더 무료해진 정령들이 그의 축제에 동참하는 걸 즐겼다.

“그자를 이해할 수가 없군. 그런 쓸데없는 행사를 왜 자꾸 여는지 모르겠다.”

찌푸린 미간을 펴지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런 건 일일이 내게 물을 필요 없다. 당연히 가지 않을 거니까. 내가 언제 그런 자리에 참석하는 걸 본 적이 있던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한번 가 보시는 게 어떨까요?”

눈의 여왕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 말에 겨울의 왕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충실한 권속답게 자신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눈의 여왕이 자신한테 축제에 가보는 게 좋다는 소리를 하다니.

“어째서?”

“사랑의 여왕과 봄의 여왕이 참석할지도 모릅니다. 그분들은 그 축제에 가는 걸 무척 즐기신다고 하니까요.”

“그런가…….”

그랬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그 두 정령왕을 만나기 위해 시도했지만 번번이 헛걸음을 해야 했다. 두 정령왕이 겨울의 왕을 피하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처음엔 적극적으로 그들을 찾아갔던 겨울의 왕도 요즘은 만날 시도조차 전혀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눈의 여왕 혼자 조바심을 내는 형편일 뿐.

“왕이시여. 잊지 않으셨겠지요? 어서 해독약을 드셔야 합니다. 그런 상태를 오래 끄시면 여러모로 좋지 않습니다.”

“…….”

“송구합니다만 요즘 정령들 사이에 왕께서 인간 여자에게 푹 빠져 지낸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정령들이 모이기만 하면 겨울의 왕에 대한 소문을 화제에 올릴 정도랍니다. 정말 화나시지 않습니까?”

“글쎄. 뭐, 별로.”

“왕이시여!”

히에무스는 눈의 여왕이 성가셨다. 사사건건 그의 행동을 걸고넘어지니 요즘은 얼굴을 마주치는 것도 꺼려질 정도였다. 지금도 에일린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그녀가 방해를 하고 있었다.

“왕이시여. 설마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한 채 계실 겁니까? 그런 고약한 약에 중독돼 있는 상태가 불편하고 불쾌하지 않으신지요? 분하지도 않으십니까? 감히 당신께 그런 장난을 쳐놓고도 사과 한마디 없이 만나주지도 않는 이런 상황이? 어찌 이렇게 속 편하게 가만히 계실 수 있단 말입니까.”

눈의 여왕은 억울하고 기가 막히는 듯 열변을 토했다.

“겨울의 왕의 권속으로서 저는 요즘 너무나 속상하고 화가 납니다. 다른 겨울의 정령들도 제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왕이시여, 모든 숲의 정령들이 웃음거리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그럼, 그 웃는 자들이 누군지 말하라. 내가 직접 가서 만나볼 테니.”

히에무스가 싸늘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의 여왕을 바라보는 눈빛도 시리게 차가웠다.

“내 얼굴을 직접 마주하고서도 비웃는지 어디 한 번 두고 보겠다.”

“왕…… 이시여.”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대는 더 관여치 말라. 해독약도 내가 알아서 먹을 것이다. 필요하면 내가 직접 구해서 먹을 것이니 그대는 그대가 해야 할 일만 챙겨서 하면 될 터.”

“하지만 왕이시여!”

“그만!”

히에무스가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눈의 여왕, 계속 참견한다면 용서치 않겠다. 몇 날 며칠 얼어붙은 채로 있고 싶지는 않겠지?”

“무, 물론입니다.”

눈의 여왕이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잠시 매서운 시선을 보내다 그대로 몸을 돌려 궁전 문을 나섰다. 반짝이는 빛과 냉기로 가득한 은빛 망토를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마주치는 겨울의 권속들이 숨죽이며 몸을 낮추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도 알고 있었다. 눈의 여왕의 말이 사실 모두 옳은 소리임을. 겨울의 왕이 사랑이라니, 그것도 인간 여자를……. 당연히 모든 정령이 조롱하고 비웃을 것이다. 예전에 그 누구보다도 그런 것들을 하찮게 여기고 멸시하고 비난하던 자가 바로 자신이 아니던가. 겨울의 왕은 에일린을 떠올렸다. 순간 그 모든 것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그까짓 손가락질 좀 받는 게 뭐 어떻단 말인가?’

상관없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과 촉촉하고 따뜻한 입술과 부드러운 목소리를 그런 알량한 평판과 자존심 때문에 잃고 싶지 않았다. 이 황홀하고 달콤한 느낌과 짜릿한 심장의 두근거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도 이런 신비로운 것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이대로 항상, 언제까지나…….

***

에일린은 하루 종일 무도회 준비로 바빴다. 오전 내내 드레스 다림질을 하고 신발을 손질했다. 점심식사를 마치자마자 온천에 가서 목욕을 하고 왔다. 서둘러 중세 시대 아가씨처럼 귀밑머리를 땋아 뒤에서 묶어 내리는 머리 모양을 하고 드레스를 챙겨 입었다. 히에무스가 전에 선물했던 소매가 넓은 하늘색 드레스였다. 이런 드레스를 ‘블리오(bliaud)’라고 하는데 주로 중류 계급 이상의 신분이 착용하는 거라고 했다. 브레이가 그 안에 ‘쉥즈(chainse)’라는 속옷을 받쳐 입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마침 지난번 시장에 갔을 때 사 온 게 있었다. 아무런 장식이 없어 좀 밋밋했지만 그냥 그걸 받쳐 입었다. 훨씬 따뜻하고 옷 모양도 사는 것 같아 좋았다.

히에무스는 아침 일찍부터 와 있었으나 에일린이 바빠서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조금 여유가 생기자 비로소 떡갈나무 아래에 기다리던 그를 불러 방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좀 우스꽝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이 방법이 편했다. 다행히 인간들의 결계 정도는 흔적 없이 통과하도록 해주는 마도구를 착용한 터라 케일론에게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것은 온통 은빛과 푸른빛에 감싸인 겨울의 왕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 황금빛 팔찌 형태였다.

“히에무스, 저 어때요? 잘 어울리나요? 이상하지는 않나요?”

에일린이 히에무스의 앞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아 보였다. 에일린의 움직임을 따라 드레스 치맛자락이 동그랗게 펼쳐졌다.

“예쁘구나, 에일린! 정말 아름다워.”

그가 은청색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에도 예뻤지만 오늘은 그가 지금까지 봐왔던 것 중에 최고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살짝 탄 얼굴에 밝은 연초록 눈동자가 별빛처럼 반짝였다. 적당히 솟은 콧날에 도톰한 핑크빛 입술, 풍성한 밤색 머리가 사랑스러웠다. 빛나는 은빛 수가 놓인 하늘색 드레스가 날씬한 그녀의 몸을 보기 좋게 감싼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의 심장이 사정없이 두근거렸다. 에일린은 얼굴을 붉혔다. 사랑의 묘약 때문인 줄 알고 있지만 잘생긴 남자가 저런 표정으로 칭찬해주니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저, 그럼 다녀올게요. 히에무스. 내일 봬요.”

“그래. 내일 보자꾸나.”

저렇게 예쁜 모습으로 다른 인간 남자들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모처럼 시간을 내서 왔건만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이 부족해 아쉬웠다. 뒤돌아 급히 가려던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아, 참.”

다시 몸을 돌려 가까이 다가와 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쪽.”

빠르게 입술을 누르는 짧은 입맞춤이었다. 오늘치 입맞춤인 건가. 차가워서인지 그녀는 요즘 얕고 가벼운 키스만 해주었다. 섭섭했지만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었다. 아직 그의 마음만큼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 테니. 그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인 걸까? 아쉬운 마음에 손을 내밀어 뺨을 만지려 하자 그녀가 움찔거리며 한걸음 물러났다. 한기에 놀란 것일까. 겸연쩍었는지 곧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초록의 두 눈이 활처럼 휘며 뿜어내는 빛 화살이 그의 심장을 사정없이 꿰뚫는 것 같았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몸을 돌려 거침없이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는 제법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늘한 냉기를 자아내는 그의 손을 들여다보면서.

“왕이시여.”

떡갈나무 위에서 지켜보던 작은 정령들이 그의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저희도 에일린님을 따라갈까요?”

히에무스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다녀오너라. 그녀에게 곤란한 일이라도 생기면 즉시 알리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세 정령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 뒤 각자의 품속에서 금빛 서클릿을 꺼내 머리에 썼다. 눈의 여왕이 얼마 전 구해준 거였다. 왕이 착용한 팔찌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마력을 담아 인간들이 쳐놓은 결계쯤은 그대로 통과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마도구였다. 이제 케일론의 성이든 황궁이든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을 것이다. 준비를 마치자 서둘러 에일린의 뒤를 쫓았다.

***

“이제야 내려오는 겁니까? 한참 기다렸잖아요.”

1층에 위치한 저택 로비로 내려가니 케일론이 투덜거렸다. 그도 평소보다 고급스럽고 화려한 차림새였다. 여전히 마법사 전용의 로브를 걸쳤지만 상시 입는 검은색이 아니라 붉은색에 은빛 자수까지 놓여있었다. 긴 은빛 머리에 자수정이 박힌 서클릿까지 착용한 모습이 무척이나 멋져 보였다.

“어, 무도회는 6시부터라고 하지 않았나요? 제가 늦은 건가요?”

케일론도 그녀를 위아래로 쓱 훑었다. 여전히 뭔가 빠진 듯 단출한 옷차림이었지만 나쁘지 않아 보였다. 방한과 성장(盛粧)을 위해 덧입은 망토가 좀 투박한 게 흠이었지만. 어쨌든 저렇게 차려입으니 여느 귀족 아가씨 못지않게 예뻐 보였다. 저도 모르게 붉어진 얼굴이 어색해져 얼른 시선을 돌렸다.

“무도회는 늦게 시작되겠지만 나는 폐하의 호위를 위해 좀 더 일찍 황궁에 가봐야 합니다. 함께 가야 하니 서두르세요.”

“예, 죄송해요.”

케일론이 순간이동을 위한 마법 주문을 외웠다. 어느새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의 푸른빛과 함께 둘은 빠르게 어디론가 전이되었다. 그녀를 따라온 세 정령도 마법 주문을 외웠다. 모두 순식간에 낯선 장소에 도착했다. 항상 동반되는 거북한 증상 때문에 에일린은 조금 휘청거렸다. 케일론이 부축해주려는 순간 다른 누군가의 손이 재빠르게 다가왔다.

“괜찮으냐?”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보니 뜻밖에도 황제인 렉스였다.

“폐하.”

케일론이 급히 허리를 굽히며 황제에 대한 예를 올렸다. 에일린도 선선히 머리를 숙였다. 황제의 뒤로 엘로드와 마법사처럼 보이는 다른 나이든 남자와 시종들, 그리고 서너 명의 기사들이 서 있었다.

“예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날씨가 좋아 산책을 나온 것뿐이오.”

두툼한 검은 망토를 걸친 모습만 봤는데 오늘은 그도 매우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의상을 입고 있었다. 남성용 자주색 블리오에 화려한 금빛 망토를 걸치고 온갖 보석 장신구를 갖췄다. 머리에 작은 금관까지 쓴 모습에서 그야말로 대제국의 군주다운 위엄과 풍모가 느껴졌다. 큰 키에 조각 같은 이목구비까지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이 잘 생기고 멋진 모습. 에일린은 연신 감탄하며 그의 준수한 외모를 감상했다. 히에무스 덕분에 어지간한 남자의 미모는 눈에도 차지 않게 됐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렉스의 위용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뒤에 있는 엘로드의 산뜻한 자태도 눈을 즐겁게 했다. 엘로드는 평소보다 가볍고 장식이 많은 은빛 예장용 갑옷과 붉은 망토를 착용했다. 모두 무도회 때문에 한껏 성장한 자태에 눈이 부셨다.

“그러십니까.”

케일론이 눈으로 주위를 휙 살피며 대꾸했다. 그들이 당도한 곳은 나무도 별로 없는 작은 중정(中庭)이었다. 마법사들이 근무하는 마법청 건물에 딸린 장소로 황제가 산책하러 나올만한 곳이 아니었다. 케일론은 에일린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마도 이 여자를 기다린 것이리라. 참, 별일이군. 정말 마음에 드신 건가. 평소의 황제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긴, 그는 요즘 계속 평소와 다른 행보를 보여주고 있긴 했다.

렉스도 에일린의 모습을 속속들이 뜯어봤다. 그가 사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 흐뭇해졌다. 받쳐 입은 다른 의상들이 너무 소박한 게 유감이었지만 무척 예뻤다.

“케일론에게 맡긴 게 잘못이었던가?”

“예?”

에일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았다. 케일론도 멀뚱한 얼굴로 눈치를 살폈다.

“마법사들은 세속적인 일에 둔하고 무관심하긴 하지.”

하긴, 그래서 케일론에게 맡긴 것이지만.

“지금 좀 한가하니 그대에게 궁전 안내를 해주고 싶은데 어떠냐?”

“예? 저 말입니까?”

“그래.”

에일린은 좀 망설였다.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에 황제의 호의를 거절했다가 큰일을 치를 뻔한 것이 떠올랐다. 지금도 황제의 제안이니 웬만하면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한쪽 팔을 구부린 채 내밀었다. 에일린은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몰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에스코트해주겠다.”

“예? 화, 황송합니다.”

빨개진 얼굴로 겨우 대답했다. 두 뺨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머뭇거리며 렉스의 팔에 손을 올렸다. 설레기도 하고 또 조금 두려운 마음도 들어 손이 가늘게 떨렸다. 렉스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에일린을 지켜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케일론은 입을 꾹 다문 채 그들을 따랐다. 미간이 찌푸려져 있는 걸 그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저기 보이는 곳이 짐이 머무는 본궁인 ‘라피스’ 궁이다. 오늘 무도회도 저곳에 있는 대연회장에서 열릴 예정이지.”

렉스가 에일린에게 직접 황궁 이곳저곳을 안내해주었다.

“정말 웅장하고 멋지네요.”

가까이에서 본 라피스궁은 그 규모나 꾸밈새가 황제의 본궁답게 웅대하고 호화로웠다. 외벽까지 하얀 회벽으로 마무리하고 푸른 안료와 금빛 칠 도금으로 구석구석 채색된 모습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여러 개의 첨탑 지붕이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였다. 그 모든 것들이 마치 태양처럼 빛나는 강대한 제국의 위력을 한눈에 보여주는 듯했다. 에일린은 연신 감탄하며 궁전 곳곳을 눈에 담았다. 그녀의 반응을 흡족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렉스가 다정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추울 텐데 안으로 들어가지.”

그녀의 손이 계속 떨리는 게 느껴졌다. 자신이 두려운 걸까? 아니면 싸늘한 날씨 때문인 걸까?

“와아아!”

저절로 찬사가 흘러나왔다. 황제의 안내로 들어서게 된 무도회장의 면면이 눈이 시릴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보는 이를 단번에 압도하는 그 장대한 크기는 물론이거니와 그 안을 채운 장식들의 수준과 규모가 상상을 초월했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쌓아 올려진 두터운 벽채와 아치형 통로를 떠받치는 기둥이 줄지어 서서 위용을 뽐냈다. 높다란 천정에 온갖 색채로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눈길을 끌었다. 그 아래 뚫린 색유리가 끼워진 채광창에서 현란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움푹 들어간 궁륭형 천정엔 빛나는 마법석이 꽂힌 금빛 샹들리에를, 프레스코화로 꾸며진 벽면엔 이국적인 태피스트리를 빈틈없이 걸어 꾸민 모습이었다. 푸른 톤의 모자이크로 된 바닥 양쪽에 붉은 양탄자가 깔려있었다. 군데군데 놓인 황금빛 조각품들과 꽃이 가득 담긴 화병이 그 모든 장소에 생기와 광채를 더해줬다. 무도회 준비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조차 아름다운 장식처럼 느껴졌다. 실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마음에 드나 보지?”

렉스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한 것을 묻는다. 이런 광경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에일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것만으론 부족한 듯해서 그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어주었다. 고마움을 한껏 담은 미소와 함께 연초록의 눈동자에 아이처럼 순수하게 반짝이는 환희의 빛이 어렸다. 그의 눈도 연한 호선을 그렸다. 곧 커다란 한쪽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허리를 낮추며 그대로 그녀의 입술에 그의 것을 겹쳤다.

“……!”

아, 따뜻한 입술! 정말 따스하구나! 사람의 입술은…….

에일린은 갑작스러운 입맞춤보다도 그 포근한 체온에 놀라고 말았다. 황홀함이나 다른 무엇도 아닌 그저 그 온기 때문에 눈을 감았다. 좀 더 훈훈함을 느껴보고 싶어서. 다사로운 체온에 몸이 부드럽게 녹는다 싶더니 불현 듯 겨울의 왕과의 차가운 입맞춤이 떠올라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순간 왜 그가 생각나는 걸까? 렉스는 살짝 지분거리다 곧 입술을 떼어냈다. 짧은 입맞춤이었다. 혹 그녀를 당혹스럽게 하거나 더 두렵게 한 건 아닌지 걱정됐다. 눈치를 살폈다. 심취한 듯 감은 눈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빙긋 미소가 떠올랐다. 너무나 귀여운 모습이다.

“아…….”

뒤늦게 놀란 에일린이 눈을 크게 뜬 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빨갛게 변한 앙증맞은 귓불이 시야에 들어왔다. 렉스는 잠시, 한 번 더 키스를 해볼까 하는 고민을 했다. 좀 아쉽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서로에게 여운을 두는 게 좋겠지.’

보는 눈이 제법 많기도 하고. 특히 아까부터 누군가가 아주 강렬한 눈빛을 계속 쏘아 보내고 있었다. 케일론이었다.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줄곧 부루퉁한 얼굴에 도끼눈을 한 채였다. 하긴, 저자는 처음부터 에일린을 못마땅하게 여기긴 했지. 엘로드처럼 황제가 상대하기엔 너무 비천한 여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자중하라는 의미로 저러는 거겠군.’

하지만 좀 불경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무슨 큰 실수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마법사들이란 원래 완고하고 무감각한 자들이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저 목석같은 자가 뭘 알겠는가?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끌리는 감정이나 설렘 같은 걸 전혀 모르고 사는 족속들인 것을. 렉스는 케일론에게서 신경을 끄고 에일린을 쳐다봤다.

“에일린.”

렉스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의상이 좀 소박한데 새로 갈아입겠느냐? 원한다면 곧 준비시키겠다.”

“이…… 상한가요?”

에일린은 좀 의아해져 물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화려하고 괜찮은 것 같은데. 히에무스도 예쁘다고 말해줬는데. 렉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잘 어울린다. 예뻐. 그냥 조금 수수하다는 거지.”

“그럼 이대로 있고 싶어요. 저는…….”

에일린이 여전히 화끈거리는 얼굴로 대답했다. 부끄러워서 렉스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엘로드와 케일론도 왠지 신경 쓰여 더 이상 시선을 끄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방금 입을 맞췄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쑥스러웠다.

“그런가. 뭐, 뜻대로 하도록.”

호의를 무시한 듯해서 렉스는 기분이 상했지만 수줍어하는 그녀를 보고는 다시 미소 지었다.

“나는 할 일이 좀 남아 있으니 나중에 보도록 하지. 그대는 공녀들의 휴게실에 가서 쉬도록 해라.”

“예. 감사합니다, 폐하.”

렉스가 뒤에 있던 두 명의 시종 중 젊어 보이는 한 남자에게 명령했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귀족이었다.

“리히트 경. 이 영애를 휴게실로 안내해 드리게.”

“알겠습니다. 폐하.”

‘영애’라니. 무려 영애라고 불러주다니. 황송한 마음에 에일린은 서둘러 황제에게 인사하고 시종의 뒤를 따라갔다. 엘로드와 케일론 또한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 당황스러워했다. 귀족의 딸도 아닌데 ‘영애’라 칭하다니 너무 과한 대접이었다. 하긴, 따지고 보면 이 자리에 초대받아 온 것 자체가 저 여자에겐 분에 넘치는 대우이긴 했지만. 설마 정말 후궁으로라도 삼으시려는 건가. 엘로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비천한 여자가 황제 폐하께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오히려 방해물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케일론 역시 미간을 잔뜩 구겼다.

‘주변에 온갖 미인이 넘쳐날 텐데 하필 꼭 에일린을 취하실 생각인 건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세 남자가 각각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

“후아아! 좀 전에 그거, 괜찮은 거야?”

제퓌가 먼발치에서 에일린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뭐가?”

아두스가 멍한 표정으로 그의 곁으로 날아들었다.

“아니, 좀 전에 인간의 우두머리와 에일린님이 입을 맞춘 것 말이야. 그건 우리 왕과만 해야 하는 것 아냐?”

“그건 그냥 인간들끼리 흔히 하는 인사야. 인간들을 지켜보다 보면 가끔 그러고 인사해.”

아두스가 조금 잘난 체하며 설명했다.

“그런가?”

“그럼 우리 왕과 입을 맞춘 것도 인사를 나눈 거란 말야?”

뒤쪽을 날던 프리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두스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일러주었다.

“멍청하긴, 우리 왕께선 그냥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런 것뿐이라고 눈의 여왕이 가르쳐 주셨잖아. 사랑의 묘약에 중독되면 그렇게 목이 탄대.”

여전히 좀 납득이 가지 않은지 제퓌가 덧붙여 물었다.

“그래? 그럼 좀 전의 그런 건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도 되는 거겠지?”

“당연하지. 인사하는 것까지 말씀드릴 필요 뭐 있겠어?”

자신에 찬 아두스의 말에 두 정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게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상당히 넓은 방에 긴 스툴과 편안해 보이는 소파가 여러 개 보였다. 한쪽에 간식거리가 놓인 탁자가 마련돼 있고 벽난로에 불도 지펴진 상태라 공기가 훈훈했다. 옆에 화장실과 파우더 룸도 구비된 것 같았다.

“이곳에서 쉬시다 무도회 입장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리면 나와 주십시오. 시중들 시녀나 하녀는…… 없으신지요?”

황제의 시종인 리히트의 물음에 조금 겸연쩍어 에일린은 작은 목소리로 재빨리 대답했다.

“예. 이제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안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좀 있다 다른 공녀들도 올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네.”

그가 정중한 자세로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에일린은 음료가 마련돼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물을 조금 따라 마셨다. 긴장했던 모양인지 목이 무척 말랐다. 벽난로 앞에서 손을 녹이다 소파로 가 앉았다. 정령들은 더운 공기가 불쾌하다며 들어오지 않았다. 혼자 멀뚱히 앉아 있자니 좀 전의 입맞춤이 생각났다. 입술에 손을 갖다 댔다. 겨울의 정령인 히에무스와 달리 렉스의 입술은 무척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진짜 사람이랑 키스해 본 지도 20년 만에 처음이었다. 히에무스와의 키스와는 또 다르게 느껴졌다. 체온 때문인지 왠지 좀 더…… 진짜 키스 같았다. 환상이 아니라.

렉스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까? 책대로라면 지금쯤 엘시아 황녀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거라면 좀 전의 키스는 무슨 뜻인 걸까? 설마 소설책과 전개가 또 다르게 되는 건가? 자신 때문에?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오늘 무도회 장면이 지나가고 나면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그냥 가만히 있기도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춤 연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차라리 몸을 움직이며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춤동작을 연습했다. 며칠 연습을 안 해서 그런지 순서가 좀 헷갈렸다.

“어, 이게 아닌데…….”

“거기선 파트너의 손을 맞대는 동작을 취해야 해요.”

청량한 목소리가 방문 쪽에서 들렸다. 급히 돌아보니 우아한 진녹색 의상을 입은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한눈에 누군지 알아봤다. 불타는 붉은 머리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화려한 미인.

“안…… 드라?”

“……!”

안드라가 가까이 다가왔다.

“나를 아나요?”

“예? 아, 그냥 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조금 신경질적으로 느껴지는 중성적인 톤의 목소리였다. 에일린은 약간 더 바짝 웅크린 자세를 취했다. 안드라의 키는 180센티미터 정도로 여자치곤 정말 크게 느껴졌다.

“소, 소문을 들었어요. 매우…… 아름다운 분이라는 말을 들어서.”

에일린은 안드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갸름한 턱선에 긴 속눈썹, 신비롭게 반짝이는 고양이 같이 치켜 올라간 금빛 눈동자. 유난히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이 고혹적으로 느껴졌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를 엉덩이까지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당당한 여신처럼 보였다. 같은 여자가 봐도 반할 것만 같은 미모, 책에서 묘사된 대로 ‘뇌쇄적인 용모’였다. 엘시아 황녀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던 아름답고도 고매한 아칸 제국의 여마법사. 기분을 상쾌하게 하는 향긋한 향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 향기가…….

그렇구나, 이건 마법사의 향이다. 케일론에게서도 풍겼던 향기. 마법사니까 당연한 건가?

“소문이라니? 누구에게서 들은 거죠? 이 나라에 도착한 게 불과 한 달 전인데?”

아, 그렇지. 또 소설 속 인물을 만난 게 너무 반가워 분별없이 행동했구나.

“아, 저는 아칸 제국 사람이거든요. 현재 케일론님의 성에서 일하고 있어서 그분이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할 수 없지. 케일론의 이름을 팔아야지 별수 없었다.

“케일론?”

안드라가 경계의 빛을 품었다. 소설책에서 초반에 서로 견제하고 꺼려하는 관계로 나오니 당연한 반응일 터. 공녀 일행에 마법사를 대동하는 건 금지된 탓에 시녀로 위장했기 때문이었다. 케일론에게 정체를 발각되지 않으려 주의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왔었다. 에일린도 안드라의 비밀을 모르는 체해야 할 것이다.

‘조심해야겠다.’

“그랬군요.”

안드라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 남아 있긴 했지만 대충 수긍하는 듯했다.

“그럼 정식 소개를 하죠. 내 이름은 안드라 루이스 엘 캐스카트입니다. 당신은 어느 가문 영애신가요?”

“어, 저는, 그러니까 에일린이라고 해요.”

“성(姓)이?”

“그냥 에일린이예요. 평민…… 이에요.”

붉어진 얼굴로 에일린이 대답했다.

“……!”

안드라는 눈을 크게 떴다. 평민이 이 자리에 무슨 일인 거지? 아니, 애초에 평민이 황궁에 발을 들여놓은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누군가의 하녀인 건가? 하녀라면 모시는 왕녀나 시녀가 함께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한 가지 경우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안드라의 금빛 눈동자가 예리하게 그녀를 훑었다.

“그렇군요. 당신은…….”

황제의 여자인가? 황제의 취향이 이런 부류였던 건가? 이런 수수하고 순진해 보이는 타입.

“뭐, 알겠습니다. 어쨌든 반갑군요. 아칸 왕국 사람이라니, 더더욱.”

“예! 저도 안드라님을 뵙게 돼서 좋아요.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모르실 거예요.”

안드라는 엘시아와 엘로드 다음으로 좋아하던 캐릭터였다. 정말 멋진 여성이었다. 여자로서 드물게 아칸 제국 제일의 마법사라는 칭호를 얻은 사람이었다. 마법뿐만 아니라 검술까지 수준급으로 익혀 엘시아의 대련 상대가 되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스승 노릇까지 했다. 엘시아의 사랑과 꿈을 쟁취하는데 누구보다도 큰 역할을 했던 캐릭터. 늘 이런 여자가 되고 싶었다. 시원시원한 성격과 빼어난 미모까지 동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일린이 마치 꿈꾸듯 황홀해진 눈빛으로 계속 응시하자 안드라는 좀 멋쩍어졌다.

“그런데…… 아까 뭘 하던 중이었죠? 춤 연습 중인 것 같던데.”

“예에. 순서가 잠시 헷갈려서요.”

“괜찮다면 내가 좀 봐줄까요?”

“정말요?”

에일린이 맑게 웃었다. 연초록의 눈동자가 영롱해 보였다.

순도 높은 마법석처럼 깨끗한 색이구나. 절로 경계심을 무너뜨리게 하는, 그런 얼굴이다. 무해한 사람이라는 느낌.

안드라가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로 손을 내밀어 남자가 춤을 출 때 취하는 포지션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에일린은 매혹적인 그 마법사에게 홀린 듯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함께 춤을 추었다. 파트너가 있으니 막히지 않았다. 마치 어디선가 음악이라도 들리는 듯 유려한 몸짓으로 두 사람은 한동안 몸을 움직였다. 춤이 계속될수록 에일린의 환한 미소가 더욱 크게 번지고 마주한 안드라의 얼굴에도 편안한 웃음이 머물렀다. 그것은 안드라가 여기 이 제국에 와서 처음으로 가져보는, 온전하게 평온한 시간이었다.

뒤늦게 방 안으로 들어와 지켜보던 세 정령이 속닥거렸다.

“또 춤을 추네. 왕께서 다른 인간과 춤을 추면 알리라고 하셨는데 저것도 보고해야 하는 거겠지?”

제퓌의 말에 아두스가 핀잔하듯 응답했다.

“저런 여자끼리 추는 춤이야 말할 필요 없지 않을까? 왕께선 인간 남자랑 추면 알리라고 하셨잖아.”

“뭐? 여자끼리 추고 있다고? 내가 보기에 저 인간은 남자처럼 보이는데?”

“멍청하긴, 저게 어딜 봐서 남자라는 거야? 키랑 덩치가 좀 커서 그렇지 여자라고.”

“그, 그런가? 하지만 내 눈엔 분명…….”

“내가 보기에도 여자 같은데? 인간치곤 무척 예쁘잖아. 옷도 여자 옷이야. 머리도 길고.”

프리기가 아두스의 의견에 동의하며 끼어들었다.

“사악한 마법사도 남자지만 머리가 길잖아?”

제퓌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야 마법사니까 그렇지. 마법사들은 전통적으로 머리를 기른다고. 조금이라도 몸에 마나를 많이 담아야 하니까. 하지만 저 인간은 마법사가 아냐. 마나의 흐름이 별로 느껴지지 않잖아.”

아두스가 턱을 치켜들며 길게 설명했다.

“그러면 보고할 필요 없는 건가?”

제퓌가 여전히 혼란스러운 기색을 보이자 아두스가 딱 잘라 말했다.

“당연하지. 여자끼린데, 뭘.”

“으응……, 알겠어.”

제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웅얼거렸다.

“이상하다. 난 아무리 봐도 남자 같은데.”

이런 상황이니 세 정령이 내내 지켜봐도 왕에게 보고할 일 같은 건 하나도 생기지 않았다.

***

안드라와 춤 연습에 몰두해 있는데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휴게실 문이 벌컥 열렸다.

“어, 벌써 와 있는 분이 계셨군요.”

서너 명의 공녀들이 각자 몇 명의 시녀를 대동한 채 안으로 들어왔다. 에일린은 즉시 행동을 멈추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서들 들어오세요. 추울 텐데 여기 안쪽으로 오세요.”

미소 띤 얼굴로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모두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차림새에 공들여 꾸민 모습이 눈부셨다. 다들 어느 나라의 공주님인지 크고 작은 티아라를 쓰고 금빛 자수가 놓인 자주색 망토를 걸쳤다. 그중 긴 갈색 머리에 온갖 장신구로 치장한 예쁘장한 여인이 형식적인 미소를 건넸다.

“고마워요. 나는 ‘스파니아 왕국’의 3왕녀 ‘레나테’라고 해요. 당신들은 누구죠?”

“레나테 공주님이시군요. 저는 아칸 왕국의 엘시아 공주를 모시는 시녀 안드라입니다. 곧 우리 공주님께서도 오실 겁니다.”

안드라가 정중한 인사를 하자 그들 사이에 무언의 동요가 일었다. 소문난 안드로스 대륙 제일의 미녀를 모시는 사람답게 시녀인데도 불구하고 그 미모와 위엄이 그들을 압도할 정도였다. 순식간에 그 자리에 묘한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아담한 금발 머리의 공녀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에일린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렇군요. 그럼 당신도 엘시아 공주의 시녀인가요?”

“예? 아뇨, 저는 에일린이라고 해요. 아칸 왕국 사람이지만 그분의 시녀는 아니고요.”

“시녀가 아니라면 당신도 공녀인가요? 어느 가문 사람이죠?”

공녀라기엔 너무 소박한 에일린의 차림새를 의아한 눈빛으로 살폈다. 아칸 왕국에선 엘시아 왕녀가 공녀로 온 걸 다 아는데 또 다른 가문의 영애를 불러들였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설마, 당연히 아니에요. 귀족도 아니고…….”

“세상에, 귀족도 아닌 거야?”

금방 말투가 반 토막이 났다.

“아닌데…….”

에일린도 말끝을 얼버무렸다. 새파랗게 어린 여자가 반말을 쓰는데 구태여 높여줄 이유는 없었다.

“당신 도대체 뭐지? 그런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은 또 뭐고? 귀족도 아닌데 어떻게 이 자리에 와 있는 거야?”

레나테 공주와 금발 머리 공녀가 흥분한 얼굴로 다그쳤다. 흑발에 좀 통통한 몸매의 다른 공녀도 합세해서 에일린을 에워쌌다. 그들을 모시는 시녀들까지 더해져 십여 명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이 되었다. 에일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애들이 지금 뭐 하는 거람.

“아, 당연히 초대를 받았으니 왔겠죠. 아니면 왜 여기 있겠어요.”

마음 같아선 똑같이 반말로 응대해 주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상황을 생각해서 적당히 대했다.

“초대라니? 누가 당신 같은 여자를 초대했다는 거야? 귀족도 아닌 평민을 무슨 이유로 초대해? 혹시 거짓말 아냐?”

잔뜩 찡그린 흑발의 공녀가 신경질적인 말투로 물었다.

“그야 황제 폐하께서 초대하셨으니 온 거죠.”

에일린도 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이런 상황……, 정말 싫었다. 소설책을 보면 꼭 이런 장면이 하나씩은 나왔다.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여자 무리들. 참 나, 자신이 겪게 될 줄이야. 여주인공도 아닌데.

“뭐라고? 황제 폐하께서?!”

약속이라도 한 듯 십여 명의 여자들이 동시에 외쳤다.

“그럴 리가 없어! 초대장을 보여줘.”

레나테 공주가 거친 몸짓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의혹과 분노의 감정이 잔뜩 어려 있었다. 다른 두 공녀의 얼굴도 비슷했다. 이해는 갔다. 책에서 읽은 내용대로라면 각국에서 온 공녀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들 황후 자리를 넘보는 중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황제의 늠름하고 잘생긴 모습에 반해 동경하며 서로 그를 차지하려 혈안이 된 상태였다. 갓 사춘기를 넘긴 어린 아가씨들이니 더욱 애가 닳고 안달하는 것일 터. 그런 황제에게 개인적으로 초대받아온 여자가 곱게 보일 리는 없겠지. 에일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소맷자락을 뒤졌다.

그리 의심스럽다면 보여줘야지, 뭐. 별수 있나.

“어라, 어디 갔지?”

이상하다. 분명히 챙겼었는데……. 아까 춤추다 어디 떨어뜨렸나? 급히 휴게실 바닥을 둘러봤다. 보이지 않았다. 에일린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여기저기 살펴보기 시작하자 곧 공녀들의 얼굴에 묘한 비웃음이 번졌다.

“뭐야, 역시 자격도 없는 평민 나부랭이 아냐?”

“아니에요. 분명 가져 왔었다고요.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의 시녀가 비치된 포도주병을 가져와서 에일린의 드레스에 쏟아부었다. 하늘색 드레스가 마치 피가 배인 듯 붉게 얼룩졌다.

“으아!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긴. 그럼, 자격 없는 침입자를 그냥 곱게 둘 줄 알았어? 주제도 모르고 이런 곳에 숨어들다니.”

레나테 공주가 입술을 비틀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난 황제페하의 초대를 받아 왔어! 못 믿겠다면 페하께 직접 여쭤봐…….”

“짜악!”

흑발의 공녀가 두툼한 손으로 에일린의 따귀를 후려쳤다.

“천한 것이 어디서 입을 놀려! 너 따위가 감히 폐하를 운운하다니 기가 막히는군.”

“틀림없이 저 드레스도 어딘가에서 훔쳐 입고 온 거겠지. 정말 웃기지도 않아, 훔치려면 쉥즈랑 망토도 같이 훔쳐 입고 올 것이지 드레스만 훔쳤나 봐.”

“와하하하하…….”

십여 명의 여자들이 동시에 웃어대기 시작했다. 에일린은 순간 너무 질려 말이 안 나왔다. 명색이 일국의 공주란 것들이 이런 폭력적인 모습이라니. 동네 뒷골목 양아치도 아니고. 어린 여자애들 상대로 똑같이 굴기도 뭣해 일단 그녀를 노려봤다.

“어디서 그런 불경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이게 또 한 대 맞고 싶…… 악!”

흑발의 공주가 또다시 손을 휘두르려는 찰나 누군가 그 손목을 붙잡았다. 안드라였다.

“그만하시지요. 공주님.”

“이것 놔요! 왜 방해하는 거죠?”

손을 빼려고 꼼지락거렸지만 단단히 잡힌 손이 빠지지 않았다.

“이런 건 고귀하신 공주님들께서 하실 행동으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 뭔 상관이에요! 시녀 주제에!”

그녀가 눈에 핏발까지 세운 채 소리를 빽 질렀다. 그때 입구 쪽에서 차갑게 위엄이 서린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란들이죠?”

‘군계일학’이란 표현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리라. 눈부시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가 나타났다. 달빛을 녹여낸 듯 굽이치는 백금발을 늘어뜨리고 푸르른 하늘빛을 머금은 두 눈동자를 빛내는, 엘시아! 엘시아 왕녀가 거기 서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다가왔다. 두 명의 시녀가 분주히 뒤따랐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넘실거리는 바다 빛을 담은 푸른 드레스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고귀한 왕족의 신분을 나타내는 자줏빛 망토가 기세 좋게 펄럭거렸다. 사파이어가 박힌 금빛 티아라가 섬세한 이목구비를 더욱 환하게 빛내주었다. 그 모든 것들이 진정한 왕녀의 기상과 품격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녀의 등장만으로 휴게실에 있던 십여 명의 여자들의 기세가 단번에 꺾였다.

“공주님.”

안드라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엘시아를 맞이했다. 가까이 걸어온 그녀가 모여든 이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에일린과 잠깐 눈이 마주쳤다. 에일린은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마침내 엘시아 왕녀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아아, 정말 경이로운 순간이다. 에일린에게 있어 엘시아의 존재는 일종의 ‘스타’였다. 동경과 찬미와 위안의 대상이었다. 그런 존재를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다니. 상상한 대로의 그 모습 그대로……. 에일린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처한 상황이 참 난감한데도 불구하고 감격스러운 미소가 새어 나올 정도로 기뻤다. 엘시아가 침착한 표정으로 안드라에게 물었다.

“안드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부드럽지만 엄숙한 목소리였다. 안드라에게서 전후 사정을 듣고 난 후 엘시아는 에일린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랬군요. 공주님들의 기분도 이해되지만 방금 행동들은 너무 심한 것 같군요. 왕족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이에요.”

그녀의 조용한 일침에 다른 공녀들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레나테 공주가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화나지 않나요? 황제 폐하께서 이런 여자에게 마음을 쓴다는데…….”

엘시아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실로 드러난 일도 아닌데 일일이 신경 쓸 필요 없겠지요.”

그녀가 에일린을 향해 엷은 미소를 담은 얼굴로 제안했다.

“내가 좀 전에 지나왔던 복도에 뭔가 떨어진 게 있는 것 같았어요. 당신이 잃어버린 물건인지도 모르겠군요. 함께 가볼래요?”

“예? 아, 그래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 가도 괜찮아요.”

“같이 가 봐요. 내 나라 아칸 왕국의 백성이 의심받는 건 싫으니 같이 찾아봐 줄게요.”

“예! 감사합니다. 왕녀님.”

역시 엘시아 왕녀였다. 언제나 정의롭고 자비로웠던 장미의 기사! 항상 백성들의 아픔을 먼저 생각하는 제국의 꽃이었던 공주님! 그녀의 고결한 행동과 용기를 칭송하기 위해 아칸 왕국의 백성들이 지어 올렸던 그녀의 별명이 바로 장미의 기사였다. 실제 만나보니 정말 잘 어울리는 별명 같았다. 엘시아가 먼저 앞장서 방을 나가자 안드라와 다른 두 시녀가 그 뒤를 따랐다. 에일린도 서둘러 그들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조금 후미진 장소에 다다르자 엘시아가 발을 멈췄다. 에일린도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쯤인가요? 왕녀님.”

“뭔가요? 우습지도 않은 장난을 계속할 셈인가요?”

엘시아가 여전히 부드럽지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엘시아가 두 시녀와 안드라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들이 냉큼 에일린에게 달려들어 두 팔을 각각 잡아챘다. 안드라도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마법 주문을 외웠다. 금방 주위에 결계가 쳐졌다.

“무, 무슨 짓이에요? 이건…….”

“아칸 왕국 사람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면서 내게 망신을 줄 셈인가 보죠? 분명 어떤 나라의 왕녀에게서 사주받아 한 짓이겠지. 내 평판을 떨어뜨려 황후 자리에서 멀어지게 할 셈으로.”

“그렇지 않아요! 전 분명 아칸 왕국 사람이고, 황제 폐하의 초대를 받아 왔어요!”

왕녀의 붉은 입술이 매혹적인 반원을 그었다.

“그게 사실이면 더 웃기는 일이고.”

그녀가 안드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눌라]를 이리 줘요.”

안드라가 머뭇거리자 한 번 더 재촉했다.

“어서.”

안드라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마법 공간에서 황금빛 단검을 꺼내 내밀었다. 에일린의 동공이 커졌다.

“왕…… 녀님?”

“공주님!”

그녀의 행동을 만류하려는 듯 안드라가 불렀지만 평소 검술로 단련된 엘시아의 몸짓이 더 재빨랐다.

“사각!”

“꺅!”

에일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피했다. 하지만 그녀의 긴 머리채가 삭둑 잘린 채 바닥에 툭 떨어졌다. 짧아진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우수수 흩어졌다. 너무나 순식간에 당한 일에 순간 에일린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었다. 멍한 얼굴로 잘려서 바닥에 뒹구는 머리채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들어 엘시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공…… 주님.”

안드라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그녀를 노려봤다. 여전히 황금빛 단검을 움켜쥐고 여전사처럼 당당하고 우아한 자태였다. 푸른 보석을 박은 듯 새파랗게 빛나는 두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이제 막 사냥을 시작하려는 맹수의 두 눈동자처럼.

“폐하가 관심을 가지는 여자라면 그 관심이 없어지도록 망가뜨리면 그만인 거지.”

왕녀의 위엄이 서린 사뭇 상냥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잠깐 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에일린은 그제야 지금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녀가 그렇게 동경하던 ‘스타’의 진짜 모습이었다. 아주 긴 시간이었다. 두꺼운, 한 권에 15000원짜리 책 세 권의 책장이 닳아서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그녀와 함께했다. 그 시간 동안 온 마음을 다해 그녀를 응원하고 행복을 기원하고 사랑했다. 그리고 또 위로받았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머리카락이 잘린 것보다도 마주한 엘시아의 참모습이 기가 막혀 흐르는 눈물이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간신히 새어 나왔다.

“내가 아는 당신은…….”

“……?”

“누구보다 정의롭고, 자비롭고…… 또 누구보다도 참된 용기를 지닌 그런 사람이었는데…….”

“뭐라는 거야? 그런 사람이 존재할 리가 없잖아? 다 자기 이익대로 사는 거지.”

“당신은 내 우상이었어. 나의 스타였다고! 정말로…… 좋아했는데.”

“그래요? 그럼 나도 유감이군요. 어쩔 수 없어. 착각하는 건 자유겠지만 난 원래 이런 여자니까.”

“이런…… 여자였다고요?”

“그래요. 이런 여자. 원래 한 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나면 평생 그럴듯한 모습을 연출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우매한 백성들을 속이긴 쉽죠. 몇 가지 어질고 자비로운 모습을 꾸며서 보여주면 금방 신처럼 찬양하며 떠받들어 주니까.”

그녀의 입꼬리에 비웃는 듯한, 그러면서도 대단히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장미의 기사니 뭐니……, 부탁하지 않아도 자진해서 추앙하는 추종자들이 생겨나죠. 당신도 뭐 그런 무리 중의 하나겠죠? 조금 아쉽긴 하군요. 나도 되도록 끝까지 그런 환상을 지켜주고 싶지만 이번엔 당신이 운이 나빴던 거예요.”

“운이 나빴다고요?”

엘시아가 새파란 눈을 번득이며 배시시 웃었다. 가는 눈썹이 유감이라는 듯 살짝 내려왔다.

“하필 제국 황제의 눈에 들게 뭐람. 나를 제치고 당신 같은 자를 먼저 품는 건 정말 참을 수 없거든요. 뭐, 잔소리는 이제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손을 써볼까?”

그녀가 정교한 세공으로 장식된 단검을 들어 검신을 눈으로 훑으며 차갑게 내뱉었다.

“무슨, 무슨 짓을?”

“걱정 마. 목숨은 살려줄게요. 내 추종자 중의 하나라니 특별히 목숨은 살려줘야지. 그 면상에 흠집만 조금 낼 거예요.”

“뭐라고요?”

에일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외치자 안드라가 단검을 든 엘시아의 손목을 살짝 붙잡았다.

“그만두시지요. 공주님. 저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엘시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충분하지 않아요. 황제가 저따위 여자에게 진심인 것 같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안드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그녀가 앨모너(almoner, 중세 시대 여성들이 가지고 다니던 주머니) 속을 뒤적여 문서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잃어버렸던 초대장이었다. 에일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안드라가 그걸 펼쳐서 읽자 엘시아가 덧붙여 설명했다.

“이런 여자에게 성(姓)과 이름을 내렸더군요. 에일린 클라우디아 데 루쿨루스?”

“뭐?”

에일린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녀는 이곳 글자를 읽지 못했고 케일론은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냥 무도회 참석을 위해 내리는 임시 이름이라고 되어 있잖습니까?”

“임시라고 해도 미들네임을 황제 이름에서 따왔잖아요. 그게 뭘 의미하겠어요?”

“…….”

그랬다. 황제의 정식 이름이 ‘레오나드 렉스 아스틴 클라우스 데 레히나르’. ‘클라우디아’는 ‘클라우스’에서 따온 이름이 분명할 터였다.

“얼굴에 칼자국만 하나 내주면 황제도, 이 여자도 서로를 포기하겠죠.”

“공주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마법을 걸겠습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만드는 마법이라든가…….”

“싫어요. 나는 내 방식이 더 마음에 들어요.”

“안 돼, 그러지 마…….”

에일린이 가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눈물 때문인지, 충격 때문인지 목이 메여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단검을 치켜든 엘시아가 점점 다가왔다. 여전히 매혹적인 얼굴에 엷은 미소까지 담은 채로. 물기로 흐릿해진 시야에 안드라의 구겨진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금빛 눈에 안타까움을 가득 담았지만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행동을 저지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제퓌…….”

간신히 작은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도와줘요! 제퓌!”

파파팟!

그 순간 어디선가 무수한 얼음 조각이 생겨나 칼날처럼 엘시아 왕녀 일행을 향해 날아들었다. 에일린의 팔을 잡고 있던 두 시녀가 방어 자세를 취하며 나가떨어졌다.

“악!”

“공주님!”

엘시아도 단검을 뿌리치며 급히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숙였다. 거의 동시에 안드라가 온몸으로 공주의 몸을 감쌌다. 에일린이 소리쳤다.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듯 외쳤다.

“제퓌! 아두스! 프리기! 날 데려가 줘요, 어디든!”

“예! 에일린님!”

세 명의 겨울의 정령이 에일린의 몸 주위를 재빠르게 회전하며 주문을 외웠다. 이내 눈을 뜨기 어려울 만큼 강렬한 푸른빛이 그들을 에워쌌다. 엘시아와 그녀의 수행인들은 그 눈부심 때문에 잠시 동안 그 자리에서 모든 감각을 잃었다. 빛이 사라지고 겨우 눈을 떴을 때 이미 에일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왕녀 일행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믿기 힘든 현상에 왕녀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안드라 역시 주변을 둘러보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바닥에 자잘한 얼음 조각만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조각 하나가 스쳤는지 안드라의 뺨에 가는 상처가 나서 피가 살짝 배어 나왔다.

“아마도…….”

고양이 같은 금빛 눈매를 가늘게 뜨며 안드라가 중얼거렸다.

“정령의 가호를 받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겨울의 정령의 가호를…….”

정령의 호감을 사게 되어 수호를 받는 사람은 가끔 있었다. 사실 그 자신도 그런 자들 중의 하나였고. 하지만 그가 아는 한 겨울 정령의 비호를 받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빰빠라 빰-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렸다. 원래 큰 소리겠지만 결계에 막혀 희미하게 들렸다. 엘시아는 안드라의 몸을 밀어내고 흐트러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시녀 비안나가 즉시 바닥에 떨어진 단검과 칼집을 주워 그녀에게 바쳤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보검 ‘루눌라’를 칼집 속에 넣은 뒤 다시 안드라에게 맡겼다. 원래 자신이 늘 지니고 다녔지만 황제 앞에서 착용하는 게 금지된 탓에 할 수 없이 안드라에게 보관하도록 한 거였다.

“나는 이만 무도회에 가볼 테니까 당신은 그 여자를 추격하세요. 입을 봉하기도 전에 사라졌으니 신경 쓰이는군요. 할 수 있겠죠?”

“…… 아마도요.”

엘시아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손을 들어 안드라의 턱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그런 자신감 없는 말투는 뭐죠? 반드시 붙잡아서 처리해요. 정 죽이기 싫으면 혀를 자르든가 아니면 바보가 되게 하는 마법이라도 걸든가!”

안드라의 얼굴에 한 차례 경련이 일었다. 왕녀의 손을 잡아 내리며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꼭 잡아서 마무리 짓지요. 공주님께서 걱정할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엘시아가 고혹적인 미소를 흘렸다. 이제야 마음에 꼭 드는 답변이 나온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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