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메인 남주와 서브 남주의 등장 (3/24)

2. 메인 남주와 서브 남주의 등장

며칠 후 겨울 폭풍이 완전히 멎고 오래간만에 햇살이 들이치는 날이었다. 한동안 궁전 안에 갇혀 지내다시피 한 에일린은 수건과 설거짓거리를 챙겨 들고 방문을 나섰다. 주변에 있던 작은 정령 ‘제퓌’가 황급히 곁으로 날아왔다. 지난번 동행했던 정령인데 그게 인연이 돼 에일린의 임시 시종으로 정해진 터였다.

“또 온천에 가실 예정이세요?”

“예. 왕께선 궁전에 계시나요?”

“잠깐 출타하셨어요. ‘대자연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가셨으니까 저녁쯤에나 오실 거예요.”

“대자연 어머니라면…….”

“이 세상 모든 정령들을 낳고 지배하시는 분이에요.”

“알고 있어요. 이를테면 정령들의 황제 폐하인 거잖아요?”

정령들에게선 대자연 어머니라 일컬어지는 자. 인간들에겐 ‘대지모신(大地母神) 아벨라’라 불리고 있었다. 세상을 창조한 유일한 여신으로 모셔지는 존재였다. 이 소설 세계에선 모두가 그녀를 숭배하는 유일교를 믿고 있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겨울 정령인 제퓌는 이 인간 여자가 생각보다 정령들에 대해 많이 아는 것 같아 신기했다. 인간과는 대화가 전혀 안 될 거라 여겼는데 막상 말을 나눠보면 지식도 많은 것 같고 말도 잘 통했다.

“오늘은 나 혼자 갔다 올게요. 대신 왕께서 찾으시면 온천에 갔다고 전해줄래요?”

“그럴게요.”

궁전 출입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눈의 여왕이 다가왔다.

“이봐요. 인간 여인.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요.”

에일린은 조금 긴장이 됐다. 눈의 여왕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내 수하에 있는 정령을 보내 엘시아 황녀에 대해 좀 알아봤어요.”

“어머, 그래요? 언제쯤 여길 지나간대요?”

“며칠 전에 이미 아젤란 제국에 도착해서 그곳 황궁에서 지내는 중이라더군요.”

“예에? 벌써 당도했다고요?”

에일린은 진심 놀라고 당황스러워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니까 당신도 그리 알고 다른 방도를 찾아서 빨리 이곳을 나가도록 하세요. 여긴 인간이 오래 머물 곳이 못 되니까.”

“알…… 겠어요.”

낭패였다. 벌써 이 숲을 지나갔다니. 이제 어떡해야 하지? 에일린은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믿는 구석은 엘시아 황녀밖에 없는데. 강인하면서도 고결한 정의감과 자비심까지 지녔던 소설 속 여주인공. 그녀라면 틀림없이 자신을 구제해줄 거라 믿었는데 모든 기대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어떡해야 하지?”

온천으로 걸어가는 내내 걱정거리가 떠나지 않았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인간의 몸으로 여기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걸. 겨울의 왕이 아무리 잘해준다 해도 인간과 정령 사이 삶의 간극이 너무나 컸다. 게다가 그가 보이는 호의도 그저 마법약 중독에 따른 결과일 뿐이니 온전한 호의라 보기도 어려웠다. 언제 그의 마음이 바뀔지 알 수 없었다. 해독약 한 모금이면 금방 자신의 존재 같은 건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 전에 생활할 기반을 마련해야 할 텐데.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다시 살아난 건 좋지만 살아갈 기반 하나 없다니 어쩌란 말인가? 온천까지 다 와서 설거지와 빨래를 하면서도 내내 한숨을 내쉬었다.

***

겨울의 왕은 아침 일찍 그의 궁전을 나와 ‘대자연 어머니’의 궁전으로 향했다. 그녀의 궁전은 ‘안드로스’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산맥에 자리 잡고 있었다. 워낙 먼 거리인지라 정령왕의 이동력으로도 시간이 좀 걸렸다. 그냥 소환을 하면 순식간에 도착할 텐데 대자연 어머니는 그 방식을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어느덧 그녀가 거하는 산이 거대한 위용을 뽐내며 나타났다. 아찔한 산꼭대기에 왕관처럼 삐죽삐죽한 얼음을 두르고 땅에 닿은 산줄기는 수많은 나무 군락이 요새의 방책처럼 자라 버티고 서 있었다. 남북으로 긴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했으므로 이곳은 겨울이 아니었다. 습하고 무더운 날씨가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바삐 몸을 놀려 궁전 입구를 찾았다. 웅대한 바위벽에 금빛과 은빛의 나무줄기가 얽혀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벽이 존재했다. 그 중심에 내려서자 엉킨 나무줄기가 반으로 갈라졌다. 발을 내디뎌 안으로 들어서니 광활하게 느껴지는 공간이 나왔다. 끝을 모를 만큼 길게 자란 나무 기둥이 사방으로 쭉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오색으로 반짝이는 안개가 가득했다. 바닥엔 색색의 들꽃들이 양탄자처럼 자라났다. 그가 들어서자 공기 중에 나비처럼 부유하던 무수한 빛의 정령들이 다가와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세요. 겨울의 왕이시여.”

“어서 오세요.”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이리 오세요.”

그들이 알현실로 안내했다. 푸른 호수로 이뤄진 알현실 한가운데 거대한 뿌리가 드러난 채로 서 있는 은빛 나무가 한그루 보였다. 아래 둥치는 은빛이고 위쪽의 잎사귀들은 찬란한 금빛으로 빛났다. 나무 아래쪽에 있는 뿌리로 된 옥좌에서 자라난 황금빛 넝쿨이 나무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나무가 내뿜는 광휘가 모든 공간을 아우르는 모습이었다. 그 아래 ‘그녀’가 있었다. 거대한 은빛과 금빛 나무의 뿌리로 된 옥좌 위에 앉아있었다. 모든 정령들을 낳고 지배하는 자, 안드로스 대륙의 유일한 여신인 ‘아벨라’, ‘대자연 어머니’라 일컬어지는 존재가. 바닥이 호수였으므로 겨울의 왕은 날아올라 다가가야 했다.

“어서 오렴, 나의 아들아.”

그 드넓은 곳을 모두 채우는 신비로운 음악 같은 음성이었다. 물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 소리 같기도 한. 하얀 얼굴에 발끝까지 내려오는 구불구불한 금빛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초록빛 눈동자를 가진 조금 나이 든 여인의 자태였다. 머리에 초록빛 나뭇잎 관을 쓰고 가늘고 긴 금빛 나무 홀을 들고 자리한 모습이었다. 하늘하늘한 은빛 드레스를 걸쳤는데 치맛자락에 장미 넝쿨이 자라나 수를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뿜어내는 꽃내음과 나무 냄새와 신선한 물 향기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겨울의 왕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어머니시여.”

그는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가 왜 자기를 불렀는지 조금 짐작이 가기는 했다. 아마도 며칠 전 맘대로 겨울 폭풍을 멈춘 일을 문책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느냐?”

“예. 잘 지냈습니다.”

“몸은 괜찮은 거니?”

“괜찮습니다.”

대자연 어머니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괜찮은 거냐?”

“물론입니다.”

겨울의 왕은 설핏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혹 자신이 사랑의 묘약에 중독된 것을 눈치채고 하시는 말씀인 걸까?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가 선명한 호선을 그었다. 옥좌 위에 매달린 금빛 나뭇잎들이 종소리처럼 낮게 울리며 경쾌한 바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요즘 기분은 어떠니?”

“좋습니다.”

“좋으냐?”

“그렇습니다.”

정말 요즘 기분이 좋긴 했다. 불현듯 느껴지는 갈증이나 자신답지 않은 마음과 몸 상태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사랑의 묘약에 중독된 상태가 꽤 기분 좋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설렘과 긴장감이 참으로 마음에 들긴 했다.

“그렇구나. 그럼 되었다.”

“예?”

“그만 가 보거라.”

“…….”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을 여기까지 부른 게 그저 안부를 묻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허리 숙여 인사하고 그대로 나가려다가 한마디 꺼냈다. 자신이 먼저 말하길 기다린 것 아닐까?

“며칠 전 폭풍을 멈춘 일은…….”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하렴. 겨울의 왕이잖니?”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래, 또 보자꾸나. 나의 아들아.”

뒤돌아 나오는데 그녀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겨울에도 꽃이 피는가…….”

“……?”

금빛 나뭇잎들의 울림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곳의 모든 이파리가 찰랑찰랑 흔들렸다. 그 바람에 잔잔했던 호수 표면에 동그란 파문이 군데군데 생겨났다. 퐁당거리는 물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광대한 빛의 궁전 전체가 일제히 웃고 있는 것 같았다.

***

한편 그 무렵 에일린이 있는 정령의 숲 어귀에 말을 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검은색 준마에 올라탄 남자가 그들 중심에 있었다. 그 양쪽으로 백마를 탄 두 명의 남자가 에스코트하듯 주변을 경계하며 바짝 붙어서 갔다. 그 뒤를 십여 기의 기마대가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며 따르는 중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도로 잘 훈련된 기사들의 무리란 걸 짐작하게 했다. 특히 앞에 선 세 명의 남자들은 그 풍모는 물론이고 뿜어내는 분위기가 무척이나 특별해 보였다. 한가운데 흑마를 몰던 남자가 그의 오른쪽에 있는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있는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숲이 분명한가? 정령들이 사는 숲이란 게?”

중저음의 낮고 맑은 음색이었다. 그의 물음에 마법사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폐하. 이 숲이 정령들의 거주지로 알려진 ‘루쿨루스 숲’입니다.”

좀 더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왠지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그가 한껏 정중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정령들은 변덕이 심해 종잡을 수 없으니까요.”

그가 왼쪽에 있는 남자를 향해 엄숙한 어조로 한마디 덧붙였다.

“엘로드 공. 빈틈없는 호위 부탁드리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케일론님.”

엘로드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마법사 케일론에게 대답했다. 케일론이 품속을 뒤적이더니 작은 약병을 하나 꺼냈다.

“숲에 들어가시기 전에 이 약을 눈꺼풀에 발라주십시오. 서너 시간 정도 정령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약입니다.”

폐하라 불렸던 남자가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어 약병을 건네받았다. 다른 손으로 깊게 눌러썼던 후드를 뒤로 젖혔다. 윤기 나는 까만 고수머리가 사자 갈기처럼 쏟아졌다. 선명한 파란 눈동자에 선이 굵지만 날렵한 얼굴선과 섬세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뭇 여성들이 본다면 다시 돌아보고 싶게 만들 만큼 젊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가 눈꺼풀에 약을 바르며 물었다.

“이런 약이 있다면 정령사를 양성하기가 좀 더 쉽지 않겠나?”

“정령을 본다고 해서 그들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이 약은 만들기가 까다로워 대량생산도 불가능합니다. 저도 이 약 한 병밖에 없습니다. 다시 만들기도 어렵고요.”

“그런가…….”

그가 약병을 왼쪽에 있는 엘로드에게 넘겨주었다. 그도 후드를 벗고 장갑을 벗은 뒤 약을 조금 손가락에 덜어 눈꺼풀에 발랐다. 어깨에 살짝 닿는 밝은 금발 머리가 바람에 날려 살랑거렸다. 맑은 회청색 눈동자가 싱그러워 보였다. 20세 중반 정도의 성인인데도 얼굴엔 소년 같은 느낌이 아직 남아 있었다. 약병을 케일론에게 돌려주자 마지막으로 그가 후드를 벗고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유난히 흰 피부에 곧고 긴 은빛 머리를 늘어뜨렸는데 양옆에 몇 가닥 가늘게 땋아 내린 머리 모양이 특이해 보였다. 자수정을 닮은 보랏빛 눈동자가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인간이면서 왠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분위기를 지닌 남자였다. 젊은 것도 같고 또 어찌 보면 나이가 꽤 든 것도 같은 묘한 느낌. 그가 마저 약을 바르고 조금 망설이더니 뒤에 있는 십여 명의 기사들에게 약병을 건넸다.

“쏟지 않게 조심하고 아껴 바르도록.”

“예!”

모든 일행이 약을 바르고 준비가 끝나자 케일론이 앞장섰다. 그의 뒤를 따라 기사 무리가 천천히 말을 몰고 깊은 은빛 나무숲으로 발을 들였다. 숲 입구를 지키다 그들의 모습을 목격한 겨울의 정령들이 황급히 날아올랐다. 케일론이 예리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엘로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법사님. 잡지 않고 그냥 보내실 겁니까?”

“저건 하급 정령인데 저런 작은 것 한두 마리는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좀 더 크기가 큰 정령이 있을 겁니다. 그런 걸 찾아보십시오.”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 케일론이 어느새 그의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주변을 살피는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칼날처럼 예리하게 번득였다. 마치 먹잇감을 찾는 매의 눈빛 같았다.

***

“비상! 비상!”

은빛 정령의 숲 곳곳에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람과 나무의 정령들과 공기의 정령들이 외치는 소리였다.

“인간들이 들어왔어! 사악한 마법사까지 있어! 모두 피해!”

“어서 몸을 숨겨!”

겨울의 궁전에도 소식이 전해졌다. 왕은 아직 출타 중이었고 그가 부재중일 때 궁전의 살림을 맡는 것은 눈의 여왕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궁전 주위에 강력한 결계를 쳤다. 평소에도 일반 인간의 눈에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마법사들의 약을 쓰면 눈에 띌 수도 있었다. 결계를 치면 완벽한 차단이 가능했다. 식객인 인간 여자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녀를 기다려 줄 여유는 없었다. 저 고약한 마법사는 악명이 높았다. 가끔씩 나타나 중급 정령을 하나씩 잡아간다는 말이 돌았다. 더 강력한 마법을 구사하기 위해 정령을 잡아다 사역하는 자라고 했다. 결계를 쳤고 모든 겨울의 정령을 불러들였으니 당분간은 안심해도 될 것이다.

그즈음 에일린은 목욕을 마치고 젖은 머리를 말리는 중이었다.

“아, 개운하다. 비누나 샴푸 같은 게 있으면 더 좋을 텐데, 아쉽긴 하네.”

겨울의 왕이 선물해준 하늘색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가볍고 부드러운 감촉이 기분 좋았다. 거울이 있다면 한번 비춰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유감이었다. 대충 온천물에 비춰보니 나쁘지 않아 보였다. 설거지한 그릇을 챙겨 보자기에 싸서 밖으로 나왔다. 아직 햇살이 충분히 내리쬐는 걸 보니 시간이 오래 지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숲속이 조용했다. 바람의 정령도 보이지 않고 나무의 정령이나 물의 정령도, 심지어 공기의 정령까지 보이지 않았다.

‘모두 어디로 갔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서둘러 겨울의 궁전을 찾아갔지만 보이지 않았다. 에일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목욕을 하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정령을 보이게 해주는 약의 효과가 벌써 사라진 걸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평생 효과가 가는 약이라고 했어!’

당황해서 이리저리 헤매기 시작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생전 처음 와보는 낯선 장소에 와 있었다. 깊은 겨울 숲에 혼자 남게 되었다는 공포감이 음습했다. 큰일이었다.

“어, 어떡하지?”

날씨가 아무리 따뜻하다 하더라도 겨울이었다. 완전히 말리지 못한 젖은 머리가 얼어붙어 딱딱해지고 손도 꼽아 들었다. 몸이 떨려왔다. 그 순간 생각나는 이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와…… 왕이시여…….”

이가 딱딱 부딪히고 뺨이 얼어붙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번 힘을 짜내 외쳤다.

“와, 왕이시여!”

그가 와줄 것이다. 저번처럼 그가 찾아와줄 것이다. 다시 한번 더…….

“왕이시여!”

“누구냐?”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에일린은 급히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살짝 어두워지기 시작한 숲의 나무들이 햇빛을 등지고 서서 검은 레이스 같은 실루엣을 만들어냈다. 그 나무들 사이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처음엔 나무들처럼 검은 윤곽만 보여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눈이 익숙해지자 형태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흑마를 탄 까만 머리카락에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에일린은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아 무심코 이름을 불렀다.

“렉스?”

그의 파란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나를 알고 있는 거냐? 너는 누구지? 정령인가?”

“나는…….”

에일린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한 그는 소설 속의 메인 남주인 황제 레오나드 3세인 게 분명했다. 정식 이름은 ‘레오나드 렉스 아스틴 클라우스 데 레히나르’였다. 아젤란 제국의 25대 황제. 그의 부황 때부터 시작된 대륙 통일 전쟁을 완성하며 아젤란 제국을 지금의 대제국으로 건설한 장본인이었다. 숱한 정복 전쟁을 벌여 수많은 나라를 멸망시키며 그의 제국을 넓혔다. 그 과정에서 얻은 별명이 ‘사자왕 레오나드’였다. 황태자 시절에 얻은 별명이라 황제가 된 후에도 그 별명으로 회자되었다. 사자처럼 용맹스럽고 냉혹한 심장을 가진 자. 소드 마스터급의 능력을 갖춘 실력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 평가받는 사람. 삽화 속에 나오던 모습 그대로이니 분명할 터였다. 하지만 숲에서 그가 만나는 건 여주인공인 엘시아 황녀여야 했다. 그래야 책 내용이 무리 없이 진행될 텐데 지금 이 상황은 전혀 예기치 못한 광경이었다. 자꾸만 책 내용이 원작과 다르게 전개되는 것 같았다. 이름이 없던 난민 소녀가 이름을 갖고 등장해서일까? 에일린의 그 존재감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왠지 주인공인 엘시아의 역할을 에일린이 조금씩 대신하게 되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조금이니까 괜찮겠지. 그가 천천히 말을 몰아 가까이 다가왔다. 황급히 그를 제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폐하!”

뒤쪽에서 기마대를 거느린 두 명의 남자가 급히 말을 몰며 앞으로 나섰다. 그 둘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레오나드 3세의 오른팔과 왼팔로 불리는 두 남자, 대마법사 케일론과 기사단장 엘로드가 분명했다. 그 둘도 삽화 속 모습과 어이없을 정도로 똑같은 모습을 한 채 나타났다. 소설 속에서 서브 남주로 활약하는 이들이었다. 케일론이 그녀에게 접근해왔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에일린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더니 입을 열었다.

“흐음, 다시 보니 정령이 아니라 인간이군요. 그대는 누구죠?”

낮고 쉰 목소리. 그러면서도 듣기에 나쁘지 않아 신기했다.

“저는…….”

뭐라고 자신을 소개해야 할지 좀 난감했다. 속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메인 남주인 황제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인간이라고? 인간이 어째서 이런 숲에 혼자 와 있는 거지?”

에일린은 그를 올려다봤다. 이내 그의 파란 눈동자와 그녀의 연초록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혔다.

***

아직 앳된 얼굴의 여자는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짙고 풍성한 밤색 머리에 새싹처럼 크고 엷은 연초록 눈동자를 지녔다. 신분이 높지 않은 듯 햇볕에 탄 피부와 마른 몸매에 귀족 아가씨들이나 입을 것 같은 하늘색 드레스를 걸친 모습이었다. 옷 자체는 그녀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녀가 나타난 장소만큼 뭔가 기묘해 보였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블리오(bliaud-중세 중기 중류 계급 이상 남녀가 착용했던 겉옷)를 입고 있지만 함께 받쳐야 할 속옷을 착용하지 않았다. 눈에 띄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왠지 렉스는 한동안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수한 표정을 담은 듯한 연초록 눈동자와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이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저, 저는 에일린이라고 해요. 성(姓)은…… 없고요.”

에일린은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답했다. 평민이니까 성은 없을 것이다.

“아칸 제국에서 왔어요. 일행이 저를 이 숲에 버리고 가서 여기 숲속 동굴에서 지내던 중이었어요.”

“아칸 왕국은 이제 더 이상 ‘제국’이 아닙니다. 우리 아젤란 제국에 복속해서 속국이 되었으니까.”

케일론이 정정해주었다. 에일린은 그의 얼굴을 멀뚱히 응시했다.

“그런가요?”

“흠…… 그런 것치곤 이상하군요. 이런 비싸 보이는 드레스는 당신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데. 그리고 이 추위에 그런 얇은 옷만 걸치고 동굴에서 뭘 먹고 살았다는 거죠?”

케일론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뜯어보며 계속 추궁했다. 대마법사 케일론. 소설책을 읽을 때도 제일 마음에 들지 않던 캐릭터였는데, 역시나! 깐깐하고 속을 알 수 없는 데다 음산한 분위기에 구두쇠이기까지 했다.

“운 좋게 동굴에 온천이 있어서 따뜻했어요. 그리고 숙부님이 병든 절 버리고 갈 때 식량을 좀 남겨주고 떠나서 그걸 먹고 버텼어요. 이 옷은…….”

아, 옷은 뭐라고 변명하지? 괜히 옷을 갈아입었다. 평민이 이런 옷을 입고 있는 건 누가 봐도 의심스러울 것 같았다. 옷이 지나치게 고급스럽고 화려했다.

“이, 이 옷은 주웠어요. 여기…… 오는 도중 거쳐 온, 폐허가 된 귀족의 성에서요.”

머리를 쥐어짜내 급하게 지어냈다. 아젤란 제국이 한창 정복 사업을 벌이는 중이고 여기저기 난민들과 도적 떼가 창궐하는 곳이 많으니 전혀 일리 없는 설정은 아니었다.

“그렇군. 고생이 많았겠구나.”

드디어 납득했는지 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왕이시여’라고 부른 건 또 뭔가?”

“그건…….”

이런 젠장! 에일린, 아니 운아는 속으로 욕을 했다. 정말 집요하지 않은가? 이제 더 이상 변명할 거리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추위 때문인지 골이 띵하고 어지러운데 별별 설정까지 둘러대자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에, 에 에…… 에취!”

기어이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더불어 눈물과 함께 콧물까지 튀어나와 얼굴 절반을 뒤덮었다. 아아, 망했다! 이 세계에 와서 온갖 더러운, 아니 인간적인 행위는 에일린 혼자만 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슬만 먹고 사는 것처럼 깔끔하기 짝이 없는데 말이다. 닦을 데가 없어 할 수 없이 소매로 닦으려는데 누군가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렉스가 내민 것이었다. 냉혈한으로 소문난 자인데 이런 친절한 행동을 보이다니, 좀 의외였다.

“가, 감사합니다.”

하얀 비단 손수건으로 콧물을 훔치는데 케일론이 다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폐하! 불결합니다. 가까이 접근하지 마십시오.”

이어 에일린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 보냈다.

“뭡니까? 혹시 병이 아직 낫지 않은 겁니까? 전염병인 건 아니겠지요?”

저 마법사는 말을 해도 정말 얄미운 말만 하는구나.

“병은 다 나았어요. 이건 그냥 너무 추워서…….”

말을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의 포근한 망토가 어깨에 걸쳐졌다. 어느새 말에서 내려선 엘로드였다. 소년 같은 해맑은 얼굴로 자신의 망토를 벗어 덮어준 거였다.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미남이었다. 매력적인 회청색 눈동자에 반짝이는 금발 머리, 자신보다 두 뼘은 클 것 같은 커다란 키를 대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정말 고맙습니다.”

역시 엘로드였다. 운아가 제일 좋아했던 캐릭터. 남자답고 멋진 기사단장. 마나를 운용해 검기를 휘두르는 소드 마스터이며 자상한 성격에 귀여움까지 갖춘 남자. 엘시아 황녀에 대해서도 가장 지고지순한 마음을 보였던 순정파였다. 자신이 엘시아 황녀였다면 무뚝뚝하고 차가운 황제보다는 엘로드를 택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늘 했었다.

“천만에요.”

그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가지런한 치아가 아름다워 보였다. 둘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렉스는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사실 그도 망토를 벗어주려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망토 끈을 풀고 있는 사이 엘로드가 선수를 쳐버린 것이다. 에일린이 얼굴까지 붉혀가며 감사 인사를 하고 엘로드가 미소로 답하는 일련의 상황을 보니 왠지 화가 났다. 그 사이 에일린은 재채기를 몇 번 더 하고 콧물도 여러 번 닦아냈다. 렉스는 그녀를 추궁하던 걸 그만두고 일행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오늘은 이만 환궁하지.”

“좀 더 둘러보지 않으실 겁니까? 자주 올 수 있는 게 아닙니다만.”

케일론이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예정보다 일찍 돌아가게 되자 귀한 마법약을 낭비한 것 같아 마음이 상했다.

“정령들이 하나도 안 보이잖나. 이제 그들 사이에 소문이 퍼진 거지. 그들도 알고 경계하는 거야. 당연한 것일 테지. 그들도 바보는 아닐 테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케일론이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말끝을 흐렸다.

“그대는 어찌할 텐가? 우리와 함께 가겠느냐?”

예상하지도 못한 말에 에일린은 흠칫 놀랐다. 렉스가 에일린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을 따라가는 게 좋을 것이다. 아니, 에일린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엘시아 황녀가 아니라면 이 사람들에게 비비는 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제일 적당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지만.

‘겨울의 왕에게 작별 인사 정도는 하고 싶었는데…….’

이대로 말도 없이 사라지면 그가 얼마나 실망할까? 배은망덕한 인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가 없었다. 겨울의 왕은 지금 이곳에 없고 그의 궁전도 찾을 수 없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쳤다간 언제 다른 기회가 올지 모른다. 가야만 했다. 어차피 예정돼 있던 이별이었다.

“예. 저도 데려가 주세요.”

에일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렉스는 좀 의아했다. 자신의 호의에 에일린이 마냥 기뻐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혼자 지내던 이 숲에 무슨 미련이 남기에 저러는 걸까? 몸이 힘들어서 그런가?

“서둘러라. 케일론. 이만 환궁한다.”

“알겠습니다. 폐하.”

케일론이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많은 준비를 하고 왔는데 오늘 수확은 웬 이상한 여자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별 쓸모도 없을 것 같은 비쩍 마른 계집애 하나. 내키지 않았지만 황제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었다. 말 위에 탄 자세 그대로 지팡이를 휘두르며 마법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르게 빛나는 둥근 마법진이 일행의 발밑에 나타났다. 순간 에일린은 심한 멀미가 나는 것 같은 낯선 느낌에 사로잡혔다. 시야가 뭉개지더니 눈앞에 환한 빛이 쏟아졌다. 본능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 휘청거리는 그녀를 누군가가 꼭 붙잡아주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듯한 흔들림이 멈추자 에일린은 눈을 떴다. 눈앞에 커다란 성채의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역시 어딘지 바로 알아챘다. 소설 속 삽화에 나왔던 레오나드 3세 황제의 궁전 ‘팔라틴 황궁’이었다.

《장미의 기사 엘시아》 소설에는 다른 비슷한 종류의 소설에 비해 삽화가 많은 편이었다. 한국 굴지의 웹사이트에 연재된 소설은 함께 게재되던 일러스트도 큰 인기를 끌었다. 책으로 출간할 때 그 일러스트까지 실었는데, 덕분에 권당 15,000원이나 하는 책이 되어 버렸다. 그 삽화 덕분에 책을 보는 즐거움이 더 컸다고 운아는 생각했다. 게다가 지금은 이 세계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기까지 했다. 비싼 가격에 불만은 전혀 없었다. 소설 속 성채의 모습을 경이로운 눈으로 지켜봤다.

문득 그녀를 붙들어준 힘센 손길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틀림없이 자상한 엘로드일 거라 예상했는데 황제 렉스였다. 뜻밖이었다. 소설에서 묘사한 것과 달리 좀 더 친절하고 온화한 성격인 걸까?

“처음 보는 거라 놀랐느냐? 내 궁전인 팔라틴 황궁이다.”

그가 그녀의 양팔을 붙든 채 설명했다. 목소리에 조금 뽐내는 기색이 묻어났다.

“예에……. 참 웅장하고 멋지네요. 정말 굉장해요!”

성 자체의 위용보다도 소설 속 장소를 실제로 보는 느낌이 감격스러워 연신 감탄하며 찬사를 늘어놨다.

“이곳 ‘안드로스’ 대륙 내에서도 가장 견고하고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는 곳이지. 마음에 드는가?”

“예에, 좋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에일린의 속마음은 달랐다. 겨울의 왕의 궁전에 비하면 팔라틴 황궁은 그다지 아름답다고 말할 순 없었다. 겨울의 왕의 궁전은 크기는 여기보다 훨씬 작았지만 마치 전체가 투명한 보석으로 만들어진 듯 눈부신 모습이었다. 정령들의 솜씨로 지어진 곳과 인간의 손으로 건설된 곳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될 터였다. 팔라틴 황궁은 전형적인 중세 시대 양식으로 만들어진 돌로 쌓아 올린 육중한 성이었다. 하얀 벽에 뾰족하게 솟은 여러 개의 첨탑이 멋지긴 했다.

“그럼 그대는 어찌할 텐가? 내 황궁에서 지내겠느냐? 원한다면 지낼 곳과 일거리를 마련해주마.”

“정말요? 그래 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폐하.”

“안 됩니다.”

또 케일론이 반대하고 나섰다. 케일론은 여전히 그녀에 대한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못한 채 황제에게 조언했다.

“근본도, 신분도 확실하지 않은 자를 폐하 곁에 둘 수는 없습니다. 정체가 분명해질 때까진 황궁 밖에서 지내게 해야 할 것입니다.”

렉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는 케일론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옆에 기사단들의 눈이 있어 무시할 수도 없었다. 에일린도 마법사의 태도가 싫었지만 황궁에서 지내는 건 그녀 또한 별로 내키지 않았다. 황제가 있는 곳이면 왠지 딱딱하고 어려울 것 같았다. 차라리 엘로드의 집에 의탁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희망했다. 에일린은 엘로드의 얼굴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아, 우리 집이라도 괜찮다면…….”

엘로드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 말에 에일린의 표정도 확 밝아졌다. 하지만 렉스는 그녀를 엘로드에게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아까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웃던 장면이 떠오르자 다소 불쾌해졌다.

“아니, 그럴 수는 없지. 기사단장에게 쓸데없는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아. 차라리 그대가 맡도록 하게. 케일론.”

“예?”

“네?”

에일린과 케일론이 동시에 되물었다. 둘 다 황당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낯빛이었다. 저 여자를 집에 들이라고? 저 남자 집에 들어가라고? 하나 어쩌겠는가?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령인데.

“알…… 겠습니다. 제집에 두겠습니다.”

케일론이 귀찮은 표정을 숨기지 않고 억지로 대꾸했다. 에일린도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잘 부탁드릴게요.”

에일린이 시무룩한 기색을 띠자 렉스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곳에서 지내다가 신분이 확실하다고 판단되면 황궁으로 부를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말도록.”

“예? 아, 예.”

에일린은 그의 말에 조금 놀랐다. 책에 묘사된 황제의 성격으로 봤을 때 지금 행동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살가운 표현들은 오직 엘시아 황녀에게만 했던 것일 텐데. 왜 지금 자신에게?

‘혹시 나를 보고 반했나? 에이, 그럴 리가 없지.’

메인 남주든 서브 남주든 그들이 사랑했던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엘시아 황녀밖에는. 소설 속 내용이 조금 바뀌고 있다는 건 자각했지만 큰 줄기가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소설에서 겨울의 왕이 차지하는 비중은 별로 크지 않았었다. 그저 곁다리로 나오는 낭만적인 조연일 뿐. 그러니 이름조차도 없었겠지. 그가 자신을 좋아하게 된 게 별로 큰 영향은 없을 것이다. 자신 또한 이름만 겨우 가졌지 여전히 쥐뿔도 없는 평민이니 책 내용에 별 영향도 못 끼칠 것이다.

“그럼 이만 신은 물러가겠습니다.”

케일론이 정중한 몸짓으로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그러도록 하게.”

“그대는 나를 따라오세요. 폐하께 인사드리는 것 잊지 말고.”

케일론의 말에 그녀도 황제에게 절을 했다.

“오늘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폐하.”

렉스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린은 재촉하는 마법사를 따라나섰지만 내딛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문득 그들 주위로 한 줄기 겨울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허공을 바라보니 은빛 머리를 풀어헤치고 지나가는 북풍이 보였다. 에일린과 시선이 마주치자 북풍의 형형한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째서 여기에 이 사람들과 함께 있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에일린은 애써 못 본 체했다. 아무래도 정령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 숨겨야 할 것 같았다. 이 마법사는 위험했다. 그녀에게도 정령들에게도.

***

겨울의 왕이 그의 궁전에 도착한 것은 막 해가 지려고 할 때쯤이었다. 먼 거리를 마법을 써서 이동해오는 동안 줄곧 에일린을 떠올렸다. 한시라도 빨리 가서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품으면 품을수록 갈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입술만 바짝 마르는 것 같더니 시간이 갈수록 목 안과 가슴까지 타는 듯한 목마름이 느껴졌다. 쉬지 않고 순간이동 능력을 사용하며 황급히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한나절을 움직이니 멀리 그가 지배하는 익숙한 영역이 펼쳐졌다. 곧이어 은빛으로 물든 정령의 숲이 나타났다. 투명하게 빛나는 그의 궁전이 보였다. 묘한 조바심과 설렘으로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다급한 몸짓으로 하강해 서둘러 궁전 문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왕이시여.”

“오셨습니까?”

“고생하셨습니다, 왕이시여.”

“어서 오십시오, 왕이시여.”

수많은 권속이 쏟아져 나와 그를 반겼다. 그들을 본체만체하며 바삐 에일린의 방으로 찾아갔다.

“에일린!”

똑, 똑, 똑. 방문을 두드렸다. 그녀가 가르쳐준 인간 사회의 예절이었다.

“들어가도 되겠느냐?”

아무리 기다려도 전혀 응답이 없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또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에 없습니다. 왕이시여.”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눈의 여왕이 알렸다.

“어디 간 것이냐?”

“모릅니다. 오늘 이 숲에 일이 있었습니다.”

눈의 여왕이 겨울의 왕에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대강의 설명을 해주었다. 그의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아무런 조치 없이 결계를 펼쳤다고?”

“다른 정령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해야 했으니까요.”

그가 눈의 여왕을 노려보았다. 무시무시한 분노를 담은 냉기가 튀어나와 그녀를 덮쳤다. 순간 눈의 여왕은 그 폭풍 같은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바로 그 자리에서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새 머리 아래쪽 부분이 두꺼운 얼음 속에 갇혔다.

“제퓌! 제퓌는 어디 있느냐?”

작은 정령 제퓌가 냉큼 날아들었다.

“여, 여기 대령했습니다. 왕이시여.”

제퓌는 보기에도 애처로울 정도로 몸을 떨며 간신히 대답했다. 공중에 뜬 자세로 머리를 한껏 조아렸다.

“네게 에일린의 시중을 들라고 명령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냐?”

“그것이, 에일린님께서 오전에 온천에 가셨는데……. 오늘은 제가 따라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왕의 두 눈썹이 곧장 치켜 올라갔다. 그의 차갑고 날카로운 기척이 온 궁전을 휘감으며 모든 정령의 몸을 떨게 했다. 뒤이어 노여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담긴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모든 정령은 들어라! 어서 에일린을 찾아라!”

“이 숲에는 없습니다. 왕이시여!”

그때 막 귀가한 북풍이 재빨리 다가오더니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바짝 엎드렸다. 평소에 이 정도로 낮은 자세를 취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왕이 분노를 일으킬 때면 한껏 몸을 낮추는 게 상책이었다. 그를 화나게 하면 상급 정령이더라도 한동안 몸이 얼어붙는 벌을 받을 수 있었다. 겨울의 왕이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 냉정한 눈빛으로 쏘아봤다.

“그럼 어디 있다는 거냐?”

얼음 알갱이처럼 서걱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좀 전에 제가 봤습니다. 그 인간 여인이 사악한 마법사와 함께 있었습니다.”

“……!”

“그 마법사의 집으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압니다. 분부하시면 안내하겠습니다.”

“당장 앞장서라! 당장!”

“알겠습니다.”

바짝 긴장한 북풍이 황급히 날아올랐다. 겨울의 왕이 서늘한 바람을 일으키며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남겨진 겨울의 권속들을 단 한 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게 된 눈의 여왕이 그저 망연한 눈빛을 한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중증이구나.”

겨우 움직일 수 있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중증이야…….”

***

“내 이름은 ‘케일론 아리스타 데 아스카니아’입니다. 백작 작위가 있지만 그냥 ‘케일론님’이라 부르세요. 그대는 ‘에일린’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예.”

에일린은 궁전 앞뜰까지 말을 탄 채 이동하는 케일론의 뒤를 따라 걸으며 응답했다.

“말을 탈 줄 압니까?”

에일린이 고개를 젓자 그가 대놓고 입술을 실룩거렸다.

“곤란하군요. 꽤 먼 거린데 걸어갈 수도 없고. 할 수 없군요. 마나를 낭비하긴 싫지만 한 번 더 마법을 쓰도록 하지요.”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순간이동 마법을 쓸 때의 느낌이 고역이라 다시 쓴다니 절로 표정이 구겨졌다. 책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케일론은 구두쇠라서 마차를 타지 않았다. 유지비가 많이 든다는 게 이유였다. 그가 한 손을 들어 지팡이를 휘둘렀다.

“시작합니다. 힘들면 말고삐라도 잡으세요.”

어쩔 수 없이 말고삐를 꽉 쥐고 눈을 꼭 감는 순간 푸른빛의 마법진이 다시 나타나 그들을 어디론가 데려갔다. 속이 울렁거리며 토할 것 같은 느낌을 간신히 참았다. 눈을 떠보니 좀 규모가 작은 성 앞에 당도해 있었다. 팔라틴 황궁보다 좀 더 오래된 양식으로 지어진 검은 돌로 된 성이었다. 마법사의 집답게 칙칙하고 어두운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청년이 케일론에게 인사를 꾸벅했다.

“오셨습니까? 케일론님.”

케일론이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로 묶은 붉은 머리에 적갈색 눈동자를 가진 건장한 청년이었는데 스무 살 쯤 되어 보였다. 그가 능숙한 몸놀림으로 말을 성 뒤쪽으로 끌고 갔다. 마구간지기인 모양이다.

“들어오세요.”

케일론이 앞장섰다. 안으로 들어가니 휑하게 넓기만 한 홀이 나타났다. 높은 천정에 여러 개의 촛대로 이루어진 커다란 샹들리에가 보였지만 별다른 장식 없이 소박한 공간이었다. 그 흔한 초상화나 태피스트리 한 장 걸려있지 않았다. 단지 주석으로 된 반사판을 댄 촛대 몇 개가 벽 사이 군데군데 설치돼 있었다. 케일론이 그녀를 훑어보더니 한마디 했다.

“그 망토. 엘로드 공의 것이지요? 털가죽을 덧댄 망토는 무척 비싼 옷이니 잊지 말고 주인에게 꼭 돌려주도록 하세요.”

“알겠어요.”

굳이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다.

“뭔가 특기 같은 게 있습니까?”

“예? 그냥 요리랑 청소, 빨래 정도…….”

“흠, 별다른 장기는 없군요.”

“예…….”

케일론이 벽 한쪽에 아치형으로 뚫려 있는 공간에 대고 외쳤다.

“브레이!”

“예! 케일론님!”

그의 부름에 아까 봤던 마구간지기 청년이 재빨리 달려왔다. 그제야 케일론이 소개를 해주었다.

“이자는 집사 겸 하인인 ‘브레이’입니다. 내 집엔 사용인이 거의 없습니다. 브레이 한 사람밖에 없지요.”

“예? 이 넓은 성에 일하는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다고요?”

소설에서는 케일론의 성이 등장해도 그의 사용인이 나온 적은 없었다. 황제나 엘로드에 비하면 비중이 좀 적은 서브 남주라 그런지 항상 마법사로 활약하는 모습만 부각돼 있을 뿐 일상생활에 대한 묘사는 별로 없었다.

“청소나 빨래 같은 건 모두 마법으로 해결합니다. 브레이가 마구간 일과 부엌일을 담당하죠.”

“마법으로 그런 일까지 하려면 마나 소모가 크지 않나요?”

“사용인을 고용해서 급료를 지불하는 것보단 훨씬 경제적이죠. 그리고 나는 원래 사람들과 부딪히며 지내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대도 여기 있으려면 그 점을 명심하도록 하세요.”

“알겠어요.”

좀 황당했지만 케일론의 입장이 그렇다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브레이. 이쪽은 ‘에일린’이라고 해. 오늘부터 당분간 하녀로 일할 거야. 주방 보조나 허드렛일을 맡기면 되겠지. 방을 안내해 주고 할 일을 알려주게.”

“예.”

브레이가 에일린을 힐끔 쳐다보더니 두 손을 맞잡은 채 대답했다. 케일론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갸름한 얼굴에 자수정 같은 보랏빛 눈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훤칠한 키와 단단해 보이는 몸에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은빛 실타래 같은 긴 머리카락이 눈부셨다. 늘 가까이하는 마법약 때문인지 몸에서 상큼한 허브 향이 풍겼다. 어찌 보면 인간보다는 신비로운 정령의 모습 같았다. 그런 그가 매력적인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숙식과 옷을 한 벌 제공할 테니까 따로 급료는 주지 않아도 되겠죠? 나는 필요 없는 인력인데 그대를 맡은 거니까.”

“그러세요.”

에일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미모가 진심 아까워지는 순간이었다.

브레이가 방을 안내해줬다. 4층 동쪽 끝에 위치한 방이었다. 커다란 창이 하나 있는 방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깔끔하고 아늑해 보였다. 침대와 작은 탁자 하나와 의자 하나가 비치돼 있고 돌바닥에 두툼한 카펫이 깔려있었다.

“2층은 주인님의 침실과 손님방이 있고 3층은 주인님의 작업 공간입니다. 거긴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꼭 유의하십시오. 물론 결계가 쳐져 있어 아예 접근할 수 없는 곳이지만 그래도 알아두는 게 좋을 겁니다. 마법사 주인님을 모시려면 주의할 게 많습니다.”

“알겠어요. 유의할게요.”

“저는 1층 부엌 옆에 있는 방을 쓰고 있으니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러 오세요. 식사는 부엌에 와서 하도록 하고요.”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이는 나이에 비해 딱딱하고 무뚝뚝해 보였지만 무척 성실한 타입 같았다.

“그럼 내일부터 일하는 걸로 하고 오늘은 그냥 쉬세요. 갈아입을 옷은 여기 있습니다. 원래 예전에 고용했던 하녀에게 제공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입을 사람이 없으니 당신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심심하면 2, 3층을 제외하고 집 구경을 해도 좋습니다.”

그가 거친 천으로 만들어진 두툼한 갈색 드레스 한 벌과 앞치마를 건넸다.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즉시 받아들었다.

“예. 고맙습니다.”

그와 헤어지고 4층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중간에 위치한 욕실을 찾아냈다. 실제 중세 시대 성에는 없을 공간이지만 소설 속 세계여서인지 수세식 화장실까지 구비돼 있었다. 상하수도와 최소한의 위생 공간은 갖춰진 세계로 설정된 것 같았다. 소설 속 묘사에서는 이런 설명이 없었지만 실제로 생활하려고 보니 무엇보다도 중요한 공간이었다. 에일린은 안도했다. 드디어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있는 장소에 오게 된 것이다.

어느새 해가 졌다. 성의 주인인 케일론은 따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방도 다른 층에 있어 그다지 마주칠 기회는 없었다. 에일린은 부엌에서 혼자 식사를 챙겨 먹고 양치질을 하기 위해 소금을 좀 얻어 방으로 돌아왔다. 거추장스러운 하늘색 드레스는 벗어서 잘 개어 두고 브레이가 준 갈색 옷으로 갈아입었다. 조금 헐렁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몸에 맞았다. 소매통과 치마폭이 좁아서 일할 때 입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두툼해서 따뜻하기도 했고. 다만 속옷이 좀 부족했다. 빨아서 말려 입더라도 한 벌 정도는 더 필요한데 말이다. 급료도 없는데 어떻게 마련해야 하나 고민했다. 궁리 끝에 하늘색 드레스를 장에 내다 팔기로 했다. 제법 좋은 옷이니 팔면 속옷 몇 벌과 신발 한 켤레랑 평민들이 입는 옷 한두 벌 정도는 살 수 있을 것이다.

등잔 하나를 켜둔 어두운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무료하고 적적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잠을 자기도 어중간했다. 창가로 다가가 양쪽으로 덧대어진 나무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훅 밀려 들어왔다. 겨울의 왕이 그녀의 곁에 다가올 때의 서늘한 느낌이 떠올랐다. 까만 밤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보석처럼 박혀 황홀하게 반짝였다. 그의 주위를 감싸던 신비로운 빛 무리들처럼.

“보고 싶다…….”

보고 싶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 정령왕이 보고 싶었다. 전세에서의 가족들과 친구들보다도 지금 이 순간은 그가 더 보고 싶었다. 전세의 그들은 이제 영영 볼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이곳에서는 오히려 정령왕이 더 현실적인 존재였다.

“뭘 하고 있을까? 내가 말도 없이 가 버려서 화가 난건 아닐까?”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불러 보았다.

“왕이시여.”

사랑의 묘약에 중독돼서이긴 해도 아낌없이 사랑해준 그가 그리웠다.

“왕…… 이시여.”

왠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곳에서 다시 주어진 삶을 살게 되면 언젠가는 만나게 될까? 그런 아낌없는 사랑을 주는 이를……. 전세의 만 49년 세월 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을 이곳에서는 과연 만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려면 몇 년의 세월을 더 살면 되는 것일까. 얼마나 기다리면 되는 걸까.

“에일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보니 겨울의 왕이 하늘 위에 뜬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에일린은 잠깐 동안 숨이 막혔다. 빛으로 감싸인 그의 몸이 서서히 다가와 그녀의 곁에 멈춰 섰다. 언제나처럼 그의 냉기가 전해졌다. 갑작스러운 한기에, 그 눈부심 때문에 에일린은 순간 눈을 꼭 감았다.

“에일린.”

눈을 떠 떨리는 음성으로 그를 마주했다.

“왕…… 이시여.”

그가 팔을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미친 듯이 널 찾아다녔다.”

얼어붙은 호수를 닮은 그의 눈에 살짝 물기가 어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죄송해요. 저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그의 서늘한 얼굴이 그녀에게 맞닿았다. 이내 무척이나 부드럽지만 또 그만큼 차가운 입술이 따뜻한 에일린의 것을 짓눌렀다. 말도 없이 사라진 걸 응징이라도 하려는 듯 다급하고 거친 몸짓이었다. 그녀의 존재를 확인이라도 하듯 다급하게 입술을 비비고 매만지고 더듬었다. 허공에 떠 있던 그의 몸이었지만 어느새 치대는 저항감을 이기지 못하고 두 사람은 돌로 된 방바닥 위로 뒤엉켜 쓰러졌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은 데다 정령이 가진 부양력 때문에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하지만 카펫 위로 조금 둔중하게 털썩거리는 충격이 전해졌다.

“읏!”

그는 지금 지독한 갈증을 느꼈다. 사랑의 묘약에 중독되면 해독약을 먹기 전엔 목이 타는 듯한 조갈증에 시달렸다. 반한 상대와 키스하지 않으면 절대 해소되지 않는 기이하고 성가신 목마름. 에일린의 부재를 알게 되자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그의 목이 타들어 갔다. 목에서 시작된 증상이 점점 커지더니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으로 번진 상태였다. 지금 그 어이없는 통증을 해소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입술을 짓씹을 듯 핥고 지분거렸다. 그녀의 숨소리와 그녀의 떨림, 따뜻한 체온까지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을 듯 심취했다. 에일린은 숨이 막히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키스만으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열정을 넘어 폭력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의 커다란 몸에 깔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더욱 갑갑하고 견디기 힘들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의 단단한 가슴을 팡팡 두들기며 쳐냈다. 그제야 그가 입술을 뗐다. 촉촉하게 젖어 새파랗게 변한 두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욕망에 물든 남자의 눈이었다. 에일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황홀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눈빛이었으므로. 그가 극도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벌…… 이야.”

“네?”

“내게 말도 없이 사라진 벌.”

“그건…….”

그는 아직 메마름을 해소하기에 부족했다. 그의 몸이 다시 내려와 이번에는 입술로 이마를 찍어 누르고 두 뺨을 훑어 내렸다. 그리고 그대로 목덜미를 타고 훑으며 인을 새기듯 이를 세워 살짝 깨물었다.

“앗!”

에일린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그때 별안간 방문이 활짝 열렸다.

“뭡니까! 이건?”

언제 왔는지 지팡이를 든 케일론이 보랏빛 눈을 크게 뜬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겨울의 왕은 갑작스러운 침입자를 쏘아봤다. 혐오하는 벌레를 대하는 것처럼 냉혹한 눈빛이었다. 둘의 시선이 잠깐 충돌하다 곧 케일론의 눈빛이 다른 곳을 향했다. 열린 상태의 창을 바라보더니 매서운 눈으로 방 구석구석을 살폈다. 분명히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었다. 집 전체에 쳐둔 결계가 깨지는 느낌을 받았었다.

‘뭔가가 침입한 게 틀림없어.’

너무 급히 뛰어오느라 정령을 보는 마법약을 잊은 게 아쉬웠다. 방 안에 어떤 커다란 힘의 존재가 감지됐다. 볼 수는 없지만 저절로 그 위력이 느껴질 정도니 강력한 존재임이 명백했다. 적어도 상급정령 이상일 것이다. 케일론은 애써 태연한 모습을 가장하고 바닥에 누워있는 에일린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 거기 누워 뭐 하는 겁니까? 날씨도 추운데 창문은 있는 대로 다 열어놓고.”

“예? 저는 그냥…….”

여전히 겨울의 왕이 몸 위에 겹쳐있는 상태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케일론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제야 겨울의 왕이 급히 몸을 일으켜 날아올라 창밖으로 나갔다. 그 바람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한기가 온 방 안을 한차례 휩쓸었다. 케일론은 미간을 찌푸리며 창밖을 주시했다. 이 느낌은 분명히 겨울의 정령이었다. 그토록 붙잡고 싶었던 강력한 겨울의 정령!

“그대 혹시…….”

“네?”

이 여자가 뭔가 비밀을 갖고 있는 것 아닐까? 정령의 숲에서 지내는 동안 정령들과 무슨 연대를 맺은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냉담했다. 적대시하는 족속들도 있을 정도로. 특히 겨울의 정령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겁니까? 바닥에서 자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닐 테고요.”

에일린은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몸이 꽁꽁 얼어서 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겨울의 왕이 급하게 들이대는 바람에 냉기를 전혀 줄이지 않고 접근한 탓이었다. 몸이 굳고 안색도 새파랗게 질린 채 턱까지 덜덜 떨렸다.

“참, 나.”

케일론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가와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어엇!”

에일린은 깜짝 놀랐다. 케일론 답지 않은 행동에 일단 한번 놀라고 그의 품이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져 다시 한번 놀랐다. 사람의 품이란 게 이리도 포근한 것이었나? 새삼스럽게 겨울의 왕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자신도 모르게 케일론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

케일론 또한 놀랐다. 그녀의 몸이 너무나 부드럽고 가뿐하게 느껴져 일단 놀라웠고 그다음엔 그의 품을 파고드는 그녀의 행동이 꽤나 기분 좋게 여겨져 당황스러웠다. 생각해보니 이런 식으로 여자를 안아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아예 지금까지 여자 자체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잠깐이라도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낯설게 여겨졌다. 천천히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이내 조금 망설이다가 마법 주문을 읊어 침대와 방 안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내일 아침까지는 방이 따뜻하도록 해놨으니 고맙게 생각하도록 하세요.”

“예에, 정말 감사합니다.”

“어쩌다 이리된 거죠? 혹시 그대는 정령을 볼 수 있는 몸인가요?”

케일론은 돌직구를 던져보았다. 에일린은 순간 몸을 움찔거렸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그럴 일이 있겠어요? 정령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정령사밖에 없지 않나요? 보시다시피 전 그냥 평범한 일반 사람인데요?”

케일론은 예리한 눈으로 그녀를 다시 훑었다. 그녀 말대로 몸에서 마나의 흐름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정령사일 리가 없었다. 케일론은 마침내 포기한 듯 창문 쪽으로 걸어가 덧문을 닫았다. 잠금 장치까지 걸어 채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창문을 열지 마십시오. 그대는 정령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체질인 것 같으니.”

“알겠어요.”

그는 더 이상 별다른 말 없이 방을 나갔다. 케일론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에일린은 즉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겨울의 왕이 여전히 하늘 위에 떠 있었다. 그가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집에 쳐진 결계를 의식했는지 안으로 들어오진 않았다.

“에일린. 괜찮은 거냐? 저 사악한 마법사가 해를 끼치진 않은 거냐?”

“아니에요. 숲에서 운 좋게 저 마법사 일행과 마주치게 돼서 여기서 지내기로 한 거예요. 좀 깐깐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가…….”

겨울의 왕은 여전히 의혹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잠시 마법사의 동태를 살폈다.

“저 마법사는 조심하는 게 좋아. 우리 정령들 사이에선 악명이 높은 자니까. 정령을 잡아다 사역하는 자라는 말이 있다.”

“예.”

그녀도 아는 이야기였다. 책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지금 이 나라에는 제대로 된 정령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대신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얻은 위대한 마법사 케일론이 그 공백을 메우고 있었다. 그의 뛰어난 마법으로 사역한 정령을 앞세워 수많은 정복 전쟁에서 아젤란 제국이 우위를 점하게 만들었다. 이번에 정령의 숲에 들어온 것도 힘이 다한 기존 정령을 대신할 새로운 정령을 잡기 위해서였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북풍이 말해 줬다. 그대가 사악한 마법사를 따라가는 걸 봤다고 하더구나.”

“아, 그랬었구나.”

비로소 옆에 자리한 북풍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여기저기 가지 않는 곳이 없으니 마법사의 집도 알고 있던 모양이다.

“그럼, 그대는 어떡할 거지? 이곳에 계속 머무를 생각이냐?”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차피 겨울의 궁전에서 나가야 했잖아요. 차라리 잘된 거지요.”

겨울의 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말이 맞지만 왠지 서운하게 들렸다.

“내 궁전에서 지내는 동안 많이 불편했던 모양이구나.”

“아, 아뇨. 정말 친절히 대해주셔서 잘 지냈어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어서요.”

“그렇군.”

그녀의 입장이 이해됐으나 여전히 아쉽고 섭섭했다.

“잘된 거예요. 왕께서도 저 때문에 생긴 귀찮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잖아요? 이제 그 부담에서 벗어나셨으니까 저 같은 건 잊고······.”

“그러고 싶지 않아!”

“예?”

에일린은 너무나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 그대를 이대로 잊고 싶지 않단 말이다!”

그의 눈이 이글거리는 정염에 휩싸이듯 촉촉하게 빛났다. 저 눈을 보고 누가 겨울의 왕이라고 생각할까?

“그대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 나와 다시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아무 느낌이 없는 것이냐?”

“저는…….”

에일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강렬한 갈망을 담은 눈을 대하자니 호흡이 가빠오는 것 같았다. 손끝 하나 대지 않았는데도 온몸이 닿아 있는 듯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도 아까 그가 그리웠었다. 그를 떠올릴 때 눈물이 고일 정도로. 하지만 그는 인간이 아니고 그의 사랑조차 진짜가 아니었다. 이쯤에서 인연을 끊는 게 좋을 것이다. 그와의 만남은 그저 짧게 꾼 한순간의 꿈이라고 생각하면서.

“저는 괜찮았어요. 정말 왕께 감사드리지만 어차피 함께할 수 없는 사이잖아요? 저는 인간이고 왕께선 정령이니까…….”

그냥 해독약을 드시고 잊어버리세요. 마지막 말은 삼켰지만 그의 눈을 똑바로 보지 않은 채 말을 마쳤다.

“내 눈을 봐, 에일린.”

그가 속삭이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청했다. 되레 에일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손을 뻗어 얼굴을 들게 했다.

“내 눈을 봐.”

사랑에 빠진 남자의 두 눈이 거기 있었다. 은빛 같기도 하고 푸른빛 같기도 한 아름다운 두 눈동자. 신비로운 그 눈동자가 그녀 하나만 비추고 있었다. 에일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사랑의 묘약을 먹던 그 현장에 있지 않았다면 전혀 의심하지 못했으리라. 정말 진실한 사랑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저 눈빛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길게 관계를 끌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왕이시여…….”

이번 생에선 반드시 행복해질 거라 결심했다. 멋진 사랑을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대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어쨌거나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저는 인간이에요. 저 같은 건 그만 잊으세요.”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 건 상관없어. 그대가 인간이건 아니건 상관없다고! 나는 그대가 좋아, 그대가 좋단 말이다!”

아아, 얼마 만에 듣는 달콤한 말들인가? 2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에일린은 왠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런 말들을 듣기 위해 다시 살아난 것만 같았다.

“그대는 내가 싫은 거냐? 인간이 아니라서?”

“싫은 건 아니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싫을 리가 없었다. 다만 그녀에겐 감당하기 힘든 존재였다.

“그거면 됐다.”

정령왕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지금은 그거면 됐어.”

“왕이시여…….”

“히에무스다.”

“예?”

“안 됩니다! 왕이시여!”

북풍이 다급하게 외쳤다. 에일린은 멍한 얼굴로 정령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한 표정이 어렸다. 서로가 바짝 붙어선 자세였기에 다른 이가 알아듣기는 힘든 위치였다. 하지만 정령인 북풍의 귀엔 들렸는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내 이름은 ‘히에무스 글라키에스’다. 에일린.”

“왕이시여!”

소리치는 북풍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

에일린은 순간 당황스러웠다. 이름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정령왕이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가 한없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 정식 이름을 세 번 부르면 언제든 네 곁에 나타날 수가 있다. 하나의 이름만으로는 효력이 없으니 반드시 두 개의 이름을 모두 불러줘야 한다. 잘 기억했다가 내가 필요해질 때, 예전처럼 위험할 때 꼭 불러다오.”

“예에……. 알겠어요.”

에일린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북풍의 태도로 봤을 때 뭔가 굉장한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정령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은 인간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른 모양이었다. 소설을 지은 작가도 밝히지 않았던 걸 알게 되다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그도 이름이 있었다. ‘히에무스 글라키에스’라는 이름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해다오. 정령은 정식 이름을 알고 있는 자의 지배를 받게 되니까. 부탁한다, 에일린.”

“아……, 그랬군요. 알겠어요. 다른 사람에겐 절대 말하지 않을게요.”

그런 중요한 걸 가르쳐주다니. 에일린은 가슴이 뭉클해졌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다. 해독약을 먹고 나서는 어쩔 셈이기에 막 가르쳐주는 것인가. 어쨌든 비밀을 지키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북풍이 찡그린 표정에 근심을 가득 담은 채 다가왔다.

“절대 발설하면 안 돼요. 명심하세요. 당신이 조금이라도 배신할 기미가 보이면 우린 당신을 처리할 수밖에 없어요.”

“처리…… 라면?”

“기억을 지우거나 죽이는 거죠.”

“윽!”

에일린은 신음 소리를 냈다.

“닥쳐라! 북풍!”

히에무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북풍을 나무랐다. 북풍이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짓더니 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 볼 터이니 잘 지내거라. 또 찾아오마, 에일린.”

“예, 안녕히 가세요.”

그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곧 환한 빛과 함께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에일린은 한동안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그가 사라진 하늘을 응시했다.

한편 케일론은 그녀의 방문 밖에서 문에 바짝 귀를 갖다 대고 서 있었다. 아까 돌아간 게 아니라 ‘돌아간 척’했던 거였다. 마법으로 스스로의 기척을 지웠기에 정령왕도 눈치채지 못했다. 여전히 마법약을 바르지 않은 상태라 에일린의 음성 말고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그녀가 정령, 그것도 무려 정령왕과 통하는 사이란 것을! 케일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별 볼 일 없는 계집애를 하나 주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굉장히 쓸모 있을 것 같군.’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흐뭇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

다음 날 에일린은 아침 일찍 일어나 몸을 움직였다. 세수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브레이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를 도와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했다. 주로 감자나 양파껍질을 깎고 설거지를 하거나 부엌 정리와 심부름을 담당했다. 브레이는 나이에 비해 일하는 품새가 꽤 야무져 보였다. 꼼꼼하고 재빠른 데다 요리 솜씨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물론 에일린도 26년 아줌마 내공으로 다져진 운아의 영혼이 깃든 몸인지라 브레이를 흡족하게 해주었다.

“일을 잘하는군요. 요리도 할 줄 아나요?”

이곳의 요리는 알지 못했지만 요리의 기본이야 어디든 비슷할 것이다.

“그럭저럭해요.”

브레이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케일론을 위해 식탁 차리는 걸 도우며 물었다.

“브레이씨. 혹시 장을 보러 가실 때 저를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그냥 ‘브레이’라 부르세요. 저도 ‘에일린’이라 부를 테니.”

“그럴게요.”

“마침 오늘 시장에 갈 예정이긴 한데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어제 제가 입었던 드레스 기억나시죠? 그걸 좀 팔아서 돈을 마련하고 싶은데 괜찮은 데가 있을까요?”

브레이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어제 에일린이 걸쳤던 드레스가 고급스러워 처음 봤을 때 신분이 꽤 높은 귀족 아가씨인 줄 알았다. 그녀에게 썩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그런 걸 팔아야 한다니 사정이 급한 모양이다.

“옷가게에 가면 금방 팔 수 있을 겁니다. 전당포에 맡겨 돈을 빌릴 수도 있을 테고요.”

급료가 없으니 전당포에 맡겨봤자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냥 파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저 좀 옷가게에 소개해줄래요?”

“그러죠.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함께 나가요.”

“예. 고마워요.”

“그런 거라면 내가 데려가 주지요.”

어느새 환한 표정을 머금은 케일론이 곁에 와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은빛 머리가 푸른 겉옷과 어우러져 무척 근사해 보였다. 푸른 옷을 입으니 눈동자가 청보라 빛으로 반짝여 무척 매력적이었다.

“여기서 시장까지 꽤 떨어졌는데 말을 타지 못하잖습니까? 순간이동 마법을 시행해주겠습니다. 그리고 흥정 같은 건 내가 좀 일가견이 있지요.”

케일론은 어젯밤 일을 목격한 후 가능하면 그녀에게 호의를 베풀기로 했다. 마음의 빚을 잔뜩 지게 하면 이후 그녀에게 뭔가 다른 부탁을 하거나 이용해 먹을 때 유리할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예? 그렇게 먼 거린가요?”

에일린은 그가 동행하는 것도, 순간이동 마법을 쓰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았다.

“말을 타고 가면 구보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지요. 걸어가면 서너 시간은 걸리겠죠. 저도 순간이동 마법을 쓸 수 있긴 하지만 다른 사람을 이동시키진 못해요.”

브레이가 친절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당신도 마법사인가요?”

“주인님의 집사 겸 하인 겸 제자입니다.”

생각보다 그의 역할이 아주 많은 듯했다. 빨래나 청소 같은 마법을 쓰는 것도 브레이인 것 같았다. 마법을 가르쳐주는 대가로 급료도 없이 부려먹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그…… 래요?”

케일론은 황궁에서 일하는 마법사인데도 수도 변두리에서 살고 있는 듯했다. 할 수 없이 그와 동행하기로 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케일론님.”

“공짜로 해줄 테니까 고맙게 생각하도록 하세요.”

“예, 감사드려요.”

***

시장은 생각보다 크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소설책에서 한 묘사랑 삽화와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대제국의 황도에 있는 저잣거리답게 상업지구가 분야별로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행인들의 차림새나 모습도 매우 다양했다. 떠돌이 하급 기사나 마법사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날품팔이와 소규모 행상이나 좌판들이 거리에 가득했다. 모여든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길거리 도박장이나 광대나 음유시인, 매춘부로 보이는 여자들까지 쉽게 눈에 띄었다. 직업이나 출신 지역이 다른 사람들도 자유롭게 드나드는 듯했다. 에일린은 비록 책에서 접했다고는 하지만 생소하고 복잡한 거리에 오래간만에 와있는 거라 좀 어리둥절했다. 속이 울렁거리고 갑갑해졌다. 곳곳에 자리한 먹거리 상점에서 나는 냄새와 시궁창에서 올라온 악취, 시끄러운 소음 때문일 터였다. 순간이동 마법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저 케일론님.”

“뭡니까?”

“속이 좋지 않아 그러는데 근처에 화장실이 있나요?”

아아, 또 더러운, 아니 인간적인 행위는 에일린 혼자 몫이었다.

“순간이동 마법 때문인가요? 정말 체력이 약하군요. 그 정도도 견디지 못하고.”

“…….”

케일론은 잠시 망설이다 그녀의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에일린은 기겁을 하며 뿌리쳤다.

“꺅! 무슨 짓이에요!”

“치유 마법을 행하려던 것뿐입니다.”

케일론은 당황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딴에는 선심을 쓰고자 한 행동이었다.

“그런 거라고 미리 말을 하셨어야죠! 성추행하려는 줄 알았잖아요!”

“무, 무슨 추행?"

케일론은 에일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에일린의 태도에 자신이 크게 잘못한 것 같아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어지간한 일로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숱한 세월을 살아왔는데 지금 이 순간은 참으로 난감했다. 평소 여자를 대할 일이 별로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행한 일이었다.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꽂혔다.

“미, 미안합니다.”

그가 얼른 사과를 했다. 에일린은 화끈거리는 얼굴로 쏘아보다 그냥 사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소설책대로라면 그는 여자에게 어떤 사심도, 관심도 없었다. 엘시아 황녀를 향한 사랑을 깨닫는 것도 거의 책 끝부분에 나오는 일이었다. 그가 관심 있는 건 오로지 더 강한 마법의 힘과 명성을 얻는 일, 그리고 돈을 불리는 일뿐이었다.

“다음부턴 주의해주세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라고요.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에일린이 잠시 50세 아줌마인 운아가 되어 잔소리를 했다. 케일론은 벌게진 얼굴로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린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하려던 계획이 이상하게 빗나가 도리어 자신이 빚진 기분이 들었다.

“옷가게는 어느 방향인가요?”

“저기…… 오른쪽 골목.”

에일린은 민망한 상황이 어색해서 서둘러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다행히 속도 진정이 된 것 같았다. 케일론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 자신의 손을 천천히 들어 바라봤다. 아까 느꼈던 말랑했던 감촉이 떠올라 다시 한번 얼굴을 붉혔다. 스스로의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금세 멀어진 그녀를 허겁지겁 뒤쫓았다.

“4골드 쳐서 주겠수.”

도착한 옷가게는 길모퉁이에 위치했는데 상당히 규모가 컸다. 여자 옷을 주로 취급하는 가게였는데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종업원을 몇 명 두고 운영했다. 새 옷은 물론 중고 옷, 평민들의 옷과 귀족들의 옷까지 폭넓게 취급하는 상점처럼 보였다. 중세 시대이므로 이용하는 계층이 그렇게 세분된 것 같지 않았다. 하긴, 대부분의 귀족들은 기성복이 아니라 전문가에게 의뢰해 맞춤 형식으로 옷을 짓거나 저택 내에서 직접 제작한 옷을 입을 것이다. 수완 좋아 보이는 옷가게 주인이 금액을 제시했다. 소설에서 읽은 대로라면 1골드는 한국 돈으로 대략 40만 원 정도의 값어치가 있는 금화라고 되어 있었다. 그럼 약 160만 원 정도의 금액을 쳐준다는 말이니 크게 나쁘지 않은 듯했다.

“그럼, 그렇게…….”

“터무니없는 가격이군.”

어느새 다가온 케일론이 짐짓 비아냥거리는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이 정도 질이라면 못해도 20골드 정도는 줘야 살 수 있는 드레스일걸. 중고라는 걸 감안해도 10골드 이상은 줘야 할 텐데?”

“엑! 그런 거예요?”

모든 게 수공업으로 생산되는 곳의 물가는 잘 체감되지 않았다. 하마터면 큰 손해를 입을 뻔했다. 가게 주인 부부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푸념이 섞인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했다.

“8골드 줄게요. 더 이상은 안 돼요. 중고인 데다 세탁도 해야 하잖수.”

아깝긴 했다. 정령의 솜씨로 지은 옷이니 인간이 만든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자금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었다.

“9골드 주시면 팔게요. 그러면 여기서 다른 옷들도 사 갈게요.”

“좋아요. 그렇게 하시우.”

흥정이 끝났다. 옷을 넘기고 돈을 받아 쥐는데 케일론이 낮게 한마디 건넸다.

“나와 함께 오길 잘했지요? 내 덕분에 배 이상 받게 되었잖습니까?”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하게 생각하도록 하세요.”

“예, 고마워요.”

고마운 건 맞지만 케일론은 저런 생색내기만 안 해도 배 이상은 멋져 보일 것 같았다. 속옷 몇 개와 양말, 갈아입을 평상복이랑 양모로 된 망토, 신발, 숄 등을 거기서 구입했다. 비교적 싼 것들을 골랐는데도 3골드 5실버가 들었다. 물품 값이 비싸서 아껴 써야 할 것 같았다. 산 것들을 갈무리하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케일론님?”

뒤돌아보니 엘로드와 황제 렉스가 서 있었다.

“폐…….”

렉스가 재빨리 주의를 주었다.

“미복 중이니 그 존칭은 생략하게.”

“알겠습니다.”

케일론이 급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에일린도 얼떨떨한 얼굴로 덩달아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렉스가 에일린을 흘깃 쳐다봤다.

“엘로드 경이 새 망토가 필요하다기에 따라 나왔네. 시장에 와 본 지도 오래되고 해서.”

“아!”

에일린은 짧은 감탄사를 흘리며 얼른 엘로드의 모습을 살폈다. 좀 얇아 보이는 양모로 된 망토를 걸친 상태였다. 그의 털가죽을 덧댄 두툼한 겨울용 망토는 지금 에일린의 어깨에 둘러져 있었다. 시장에 나올 때 너무 추워서 다시 착용한 거였다. 황급히 벗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돌려드리려고 했는데…….”

엘로드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돌려주지 않으셔도.”

“그럴 순 없어요. 저도 방금 제 걸 샀으니까 이건 당연히 돌려드려야지요.”

“그러시다면…….”

엘로드가 수줍은 낯빛을 지으며 받아들었다. 소년 같은 회청색 눈동자가 싱그러워 보였다. 햇빛 아래 반짝반짝 빛나는 금발 머리를 보고 있자니 절로 기분이 설렜다. 아, 정말 멋진 사람이다. 매너도 좋고. 이런 사람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면 참 좋을 텐데.

“감사했어요. 엘로드님.”

에일린도 환하게 웃어주었다.

“아닙니다.”

두 사람이 망토를 주고받으며 나누는 표정과 눈웃음을 지켜보고 있자니 두 남자는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묘하게 껄끄럽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렉스뿐만 아니라 케일론도 왠지 심술이 나는 듯했다. 뭔가 그들을 향해 한마디 하려는데 황제 렉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하늘색 드레스를 판 건가?”

옷가게 주인이 드레스를 점검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진 거라곤 저것밖에 없어서요.”

“유감이군. 그대에게 참 잘 어울렸는데.”

그가 그윽한 푸른 눈빛을 빛내며 한마디 던지자 에일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곳 세계에 와서 보니 황제 렉스는 소설책과 가장 많이 달라 보였다. 저런 낯간지러운 소리는 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물론 엘시아 황녀에게는 예외였지만.

“주인장!”

“예. 나리. 무슨 일이신지요?”

옷가게 주인이 즉시 고개를 조아리며 다가왔다.

“저 드레스를 사겠다. 얼마를 주면 되지?”

에일린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자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다시 사주마.”

“예? 왜요?”

“그야……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에일린이 딱 잘라 말하자 렉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덩달아 엘로드와 케일론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분위기가 냉랭하게 굳었다. 렉스가 에일린을 보며 말했다.

“내 호의를 거절하는 건가?”

싸늘한 눈빛만큼 시린 목소리였다.

‘아차! 실수한 건가?’

그들 사이 감도는 무거운 공기와 경직된 얼굴을 보니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이런 전제군주 앞에서 그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무척 불경스러운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벌써 말을 내뱉고 난 후였다.

“대답해라. 내 호의를 거절한다는 뜻인지.”

섬뜩하게 느껴질 만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파란 눈동자가 얼음처럼 서늘한 빛을 발했다. 겨울의 왕이 뿜어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차가움이었다. 인간의 군주가 내뿜는 냉기가 왠지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사실 에일린은 황제가 좀 두려웠다. 사자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냉혹하고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책에 묘사된 몇 가지 설정만 봐도 무시무시했다. 저 매혹적인 생김새를 한 남자가 사람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정복한 나라에 대해 때로는 잔인하고 무자비한 정책을 취할 때도 많았다. 실제 마주친 그가 소설 속 이미지와 좀 달라 보인다고 해도 선입견을 품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엘시아 황녀와 맺어질 사람이었다.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었다.

“그런 게 아니라 저는 그저…….”

“그저, 뭔가?”

“빚지고 살고 싶지 않아서요.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요? 나중엔 다 갚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랬다. 운아로 살아온 그 세월 동안 뼈저리게 느낀 인생의 법칙이었다. 세상엔 공짜나 이유 없는 호의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가능하면 빚질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했다.

“내 호의가 빚이란 말인가?”

“그게 말이 되지 않잖아요? 왜 제게 호의를 베푸시려는 건데요? 전 이해가 안 되는데…….”

그래,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왜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려는 것인가? 불쌍해 보이기 때문에? 아니, 불쌍해서 드레스를 사주는 건 더 이상했다. 불쌍하면 그냥 돈을 주든가 먹을 거나 생필품을 사주든가 해야지 사치품을 사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멀뚱한 표정을 짓는 에일린을 바라보며 렉스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여자는 둔감했다. 어이없을 정도로 둔한 모양이었다. 뻔한 사실도 눈치 못 채다니.

‘여우과인 줄 알았는데 곰탱이였단 말인가? 남자가 호의를 품었다면 당연히 이성으로서 관심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곰탱이에겐 직설적으로 말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알아듣질 못한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옆에 있는 엘로드도 알아들을 것이다.

“네게…… 흥미를 좀 갖고 있다.”

“예?”

에일린은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 남자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건가? 아직 자기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지만 흉한 모습 때문에 정령들의 장난질에 동원될 정도였지 않은가? 결코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뭣 때문에 흥미를 가진다는 것인가? 황제의 취향이 정말 별난 게 아니라면 반쯤은 자신을 놀리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꾹!”

별안간 케일론이 옆에서 딸꾹질을 했다. 소설책에 나오는 케일론의 버릇 가운데 하나였다. 몹시 놀랐을 때 나오는 버릇. 책에서 딱 한 번 나왔었다. 그가 뒤늦게 엘시아 황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딱 한 번.

‘케일론은 또 왜 저래?’

멍한 얼굴로 세 남자를 둘러봤다. 렉스는 의미심장한 눈빛에 엷은 미소를 짓고 있고 엘로드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수줍어하는 기색이었다. 케일론은 당황한 얼굴로 딸꾹질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경은 왜 그러는 건가? 정신 사납게.”

렉스가 케일론을 나무라듯 바라보았다.

“화, 황공합니다.”

케일론이 얼굴을 붉히며 마법 주문을 외워 스스로에게 치유 마법을 걸었다. 에일린은 혼란스럽고 지금 황제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됐다. 주변에 빼어난 미인들만 상대하다 보니 평범하거나 못생긴 자신이 매력적으로 느껴진 걸까? 독특한 걸 좋아하는 특이한 취향인 걸까?

‘아냐, 여자로서 관심 있다는 말이 아닐 거야. 흥미 있다는 건 호감보다는 재미있다는 말에 가깝지 않겠어? 무료하던 차에 숲에서 혼자 살던 여자를 보니 좀 별나게 느껴졌던 거겠지. 무료함을 덜어준 보상이라고 이해하면 되는 건가?’

“그대는 왜 아무 말도 없는가? 이제 내 말이 좀 이해가 되겠지?”

“조금…… 요.”

“다행이군. 그럼 내 호의를 받아주겠나? 그대를 황궁에 부를 때 입고 올 만한 드레스 한 벌 쯤은 사주고 싶으니까.”

가끔 불러서 재미난 이야기라도 시켜보려고 그러는 걸까? 앞으로 황제 앞에서 만담을 하거나 재롱을 떨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이곳에서 살려면 황제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가, 감사히 받겠습니다.”

황제가 그제야 만족스러운 낯빛을 했다.

“주인장, 드레스값이 얼마지?”

“예! 15골드만 주십시오. 나리.”

에일린과 케일론이 동시에 옷가게 주인을 째려봤다.

“흐흠, 13골드만 주십시오.”

“이것 봐요! 바로 좀 전에 9골드에 샀으면서 어째서…….”

“됐다. 여기 있다. 13골드.”

렉스가 눈짓을 하자 어딘가 숨어있던 시종이 나타나 값을 치렀다. 에일린은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어 좀 더 흥정을 해보려고 했다. 엘로드가 그녀를 제지하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얼떨떨하고 황당했지만 잘 포장된 드레스를 받아들었다. 9골드에 판 드레스를 그 자리에서 13골드에 다시 사서 선물로 받게 되다니 기분이 묘했다.

“보름 후 황궁에서 큰 무도회가 열릴 예정이다. 그때 그대도 참석하도록 해라.”

“무도회라고요?”

“그래. 이번에 각국에서 보내진 공녀들을 위해 열기로 했다. 제국에 온 것을 환영하는 의미지. 그리고 아젤란 제국 귀족들에게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하고.”

“그럼 엘시아 황녀님도 거기 참석하시겠네요?”

에일린은 크게 반색하며 물었다.

“엘시아 황녀…… 라면?”

“아칸 제국의 황녀님이요!”

렉스는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에일린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기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살던 나라의 왕녀를 만나는 게 기쁜 걸까?

“알다시피 이제 ‘아칸 왕국’이다. 황녀가 아니라 왕녀지.”

“예…….”

황녀든 왕녀든 에일린한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어쨌든 한 번은 만나보고 싶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주요 남자 등장인물들은 거의 다 만났는데 가장 중요한 여자 주인공을 아직 보지 못했다. 왠지 그녀를 꼭 만나봐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소설 속 세계에 들어온 이상 그녀와의 만남이 반드시 맞닥뜨려야 하는 운명인 것처럼 느껴졌다. 렉스의 초대가 반가웠다. 아니, 어쩌면 이건 그의 의지가 아닌 지도 모른다. 그녀를 이 세계에 환생시킨 이름 모를 어떤 신이 미리 안배해둔 것인지도.

“한 가지, 그대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었다.”

렉스가 푸른 눈을 예리하게 빛내며 말을 건넸다.

“예? 무슨 질문인데요?”

“어제 숲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내 이름을 불렀었지? 왕이라 부르기도 하고. 그건 어떻게 된 일이지? 설명을 제대로 들어야겠어.”

호감은 호감이고 수상한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제국의 황제답게 그는 빈틈이 없었다.

“그건…….”

에일린은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소설을 읽어서 알고 있다고 답할 수는 없었다. 말해도 믿지 못할 것이다. 당황스러움에 입안이 바짝 마르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뭐라고 말하나? 젠장, 뭐라고 해야 하냐고!

“답해라. 대답 여하에 따라 그대의 처분이 달라질 수 있으니 제대로 답해.”

렉스의 목소리가 다시 차갑게 얼어붙었다.

“제, 제가 예지몽을 가끔 꿔요.”

이런, 맙소사! 더 그럴듯한 설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예지몽?”

세 남자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예! 예지몽이요. 앞날을 보여주는 꿈같은 걸 종종 꾸거든요. 그 꿈에 폐하께서 나오셨어요. 꿈에서 그러시더라고요. 폐하의 모습을 한 사람이 나와서 이름을 가르쳐주셨어요. 그래서 그만 부르게 된 거예요.”

이제 이 설정을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렉스의 눈빛에 흐르던 냉기가 사라지고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그것참 흥미롭군. 그런 능력까지 있다니. 그런데 황제가 아니라 왜 왕이라고 부른 것이냐?”

“꿈…… 이니까요. 예지몽이긴 한데 항상 정확하진 않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시골 처자라서 황제와 왕의 차이를 잘 몰라서요. 엘시아 왕녀님도 자꾸 황녀님이라고 하잖아요?”

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케일론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가려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아주 작은 단서라도 놓치지 않고 잡아내 말의 진위를 판단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에일린의 태도나 표정이 애매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완전한 진실은 아니더라도 완전한 거짓도 아닌 듯했다. 그런 건 구분하기 힘들었다. 따로 자백을 시키는 마법 능력이라도 쓰지 않는 한. 마침내 렉스가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 그의 의혹을 해소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했다.

“정말 특별한 능력을 지녔구나.”

그가 부드럽게 속삭이며 에일린의 뺨에 손을 갖다 댔다. 그녀는 움찔거렸지만 물러나거나 뿌리치진 않았다. 차가운 뺨에 닿는 따뜻한 손의 감촉이 나쁘진 않았다. 그가 뺨을 한동안 쓰다듬었다. 황제답게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는 거침없는 행동이었다.

렉스는 에일린의 이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별로 눈길 갈만한 미모가 아닌데 이 여린 새싹 같은 연초록 눈빛을 보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두 눈에 아주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듯했다. 수많은 이야기들과 사연들과 고통과 갈망 같은 그런 것들을. 이 정도 또래의 여인 중에 이런 눈빛을 가진 이를 찾아보긴 힘들었다. 그리운 누군가의 눈을 닮은 것도 같았다.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아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보잘것없는 이 평민 여인이, 자꾸만…….

에일린은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황제의 잘생긴 얼굴과 강렬한 푸른 눈빛과 따스한 손길에 잠시 마음을 뺏겼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지켜보던 케일론은 뭔가 발끈하는 기분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저것도 추행이지 않은가? 아까와 달리 왜 가만히 당하고 있지? 황제 폐하가 하는 행동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황제란 게 좋긴 좋은 거군. 저런 행동도 마음껏 하고.’

그는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이 너무나 황당해 스스로에게 놀라고 말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제부터 내가 왜 이러는 것인가? 이런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다니. 미친 것도 아니고.’

“윽!”

갑자기 렉스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뱉었다. 모두가 놀라 그를 쳐다봤다. 에일린을 쓰다듬던 그의 손등에 뭔가에 긁힌 상처가 길게 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확인해 보니 옷가게 건물 처마에 매달렸던 고드름이 떨어지며 스친 상처였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에일린은 물론 엘로드와 케일론, 숨어 있던 시종과 호위 기사들까지 나타나 렉스를 둘러싸며 소리쳤다. 그가 태연한 얼굴로 둘러보며 말했다.

“별일 아니니 호들갑 떨 것 없다. 살짝 긁힌 것뿐이야. 모두 물러나도록.”

“예!”

호위 인력들이 흩어졌다. 케일론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향해 말했다.

“손을 이리 주십시오. 폐하. 치유 마법을 쓰겠습니다.”

렉스는 조금 망설이다 손을 내밀었다. 케일론이 즉시 긴 마법 주문을 외웠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빛이 나오더니 상처 부위를 감쌌다. 금세 피가 멎고 아물어 불그스름한 상처 자국만 남았다.

“아, 아이고 정말 송구합니다. 정말 황공합니다. 황제 폐하이신 줄도 모르고. 아이고, 어떡하지.”

그제야 황제인 걸 눈치챈 옷가게 주인 부부가 허둥대며 뛰어와서 무릎을 꿇었다. 오금이 저린 듯 흙빛으로 변한 얼굴이었다.

“별 상처가 아니니 문책하지 않겠다. 대신 소란 피우지 말라.”

“예, 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에일린은 잠시 그 소동을 지켜보다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메마르고 스산한 겨울 하늘에 그가 떠 있었다. 만물을 얼려버릴 것처럼 서늘한 눈빛을 품은 그가, 광대한 안드로스 대륙의 겨울을 지배하는 정령들의 왕이.

***

“궁금한 게 많은 것 같군.”

렉스와 엘로드는 팔라틴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천천히 말을 몰았다. 렉스가 엘로드를 곁눈질하며 말을 꺼냈다.

“뭐든 물어봐도 좋아. 웬만하면 대답해줄 테니.”

엘로드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나이와 지위와 실력에 어울리지 않게 엘로드는 어딘가 순수해 보이는 면이 있었다. 소년 같아 보이는 인상 때문에 더 그랬다.

“아, 아닙니다. 폐하.”

“그런가. 그럼 별수 없군. 모처럼 답할 마음이 생겼는데.”

렉스의 기분이 어느 때보다도 좋아 보였다. 계속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짓고 있고 그의 애마 ‘페가수스’를 다루는 손길도 무척이나 경쾌했다.

“저, 폐하. 아까 그 평민 여인에게 하셨던 말씀이 진심이신지요?”

“어떤 말?”

“흥미를 가지고 계시다는 말씀.”

“왜? 사실이 아닌 것처럼 보였나?”

“아, 아닙니다. 지금껏 폐하께서 여인에게 관심을 보이셨던 적이 없었기에…….”

렉스가 천연덕스러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엘로드는 신하이긴 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전우이자 벗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이런 허물없는 대화도 가능할 터였다.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폐하께 어울리지 않는 신분입니다.”

“물론 황후 감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야. 황후는 이번에 제국에 온 공녀들 중에서 골라야 하겠지.”

“예…….”

“이제 제국의 영토도 어느 정도 안정됐으니 황후도 정하고, 그럼 후궁 한두 명 정도는 둬도 괜찮지 않겠는가.”

“황공합니다만 후궁으로 두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신분입니다만.”

렉스가 코웃음을 쳤다.

“신분 따위야 만들어주면 그만이지. 황제인 내게 불가능한 일이던가?”

“당연히…… 가능하십니다.”

하지만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렉스 자신도 황태자 시절에 모후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얼마나 핍박을 당하고 편견 가득한 시선을 받았던가! 그의 모후는 하급 귀족이었음에도.

“뭔가 대화가 너무 앞서간 것 같군. 겨우 어제 처음 만난 여자일 뿐인데. 그러는 그대는 어떻지?”

“예?”

엘로드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대도 슬슬 결혼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약혼녀가 따로 있었던가?”

“약혼녀였던 후작가의 영애는 몇 년 전 병에 걸려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은 따로 혼처를 정한 곳은 없습니다만.”

“그런가? 그럼 그대도 이번에 온 공녀 중에서 한 사람 정하는 건 어떻겠나?”

“예?”

엘로드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귀까지 붉게 물든 걸 보니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걸 놓치지 않은 렉스가 캐물었다.

“흠, 뭔가? 그대의 태도를 보니 마음에 둔 누군가가 벌써 생긴 모양이군. 누구인가?”

“그게…….”

“빨리 말해보게.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이에게 넘길지도 모르니 기회가 있을 때 내게 말하는 게 좋을 것이야.”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려는 듯 엘로드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렉스의 말대로 이건 기회였다. 줄곧 마음에 품었던 그 여인을 가질 수 있는 기회.

“저는…… 아칸 왕국의 왕녀님을…….”

호오, 또 아칸 왕국의 왕녀 이야기인가? 이름이 뭐였더라.

“엘시아 왕녀 말인가?”

더욱더 붉어진 얼굴로 엘로드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너무나 아름다우셔서 넋이 나갈 정도였습니다. 정령들의 여왕처럼 신비롭고 당당한 자태였지요. 한 번 뵙고 나니…… 그분 모습이 제 머릿속을 떠나질 않습니다.”

그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갓 사랑을 시작한 소년처럼 상기된 낯빛이었다. 별일이군. 지금까지 별로 여색을 밝히지 않던 자가 이리도 동요하는 모습이라니. 렉스는 기억을 더듬어 엘시아 왕녀에 대해 떠올렸다. 그녀가 황궁에 당도한 날 다른 공녀들처럼 그에게 인사를 하러 왔었다. 좀 눈에 띄는 미인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엘로드만큼 큰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그도 아마 그 자리에서 처음 대면했을 텐데.

“그랬군. 그럼 내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오랜 친구의 염원을 외면할 수는 없지. 그 공녀는 가능하면 그대와 맺어주겠네.”

“황, 황송합니다. 폐하.”

엘로드의 풋풋한 회청색 눈동자가 환희로 반짝였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 양쪽 귀에 걸렸다. 렉스도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바라보다 말고삐를 고쳐 쥐며 제안했다.

“간만에 황궁 문까지 달려보지 않겠나?”

“좋습니다, 폐하!”

“이럇!”

두 남자가 모는 흑마와 백마가 얼어붙은 땅 표면을 두드리며 사이좋게 내달렸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말발굽 소리가 흥겨운 북소리처럼 사방에 울려 퍼졌다.

***

황제 일행과 헤어진 후 에일린은 여러 상점을 돌며 필요한 물품을 몇 가지 더 구입했다. 겨울의 왕이 하늘에 뜬 채 줄곧 그녀를 따라다녔다. 옆에 여전히 마법사 케일론이 함께했기에 서로 눈을 마주치거나 말을 걸지는 않았다. 하지만 에일린은 히에무스가 은근히 신경 쓰였다. 왠지 화난 것처럼 보여 마음이 불편했다.

“마법사님은 황궁에 가보지 않아도 괜찮으신가요?”

그러고 보니 그는 오늘 하루 종일 에일린과 붙어있고 출근을 하지 않는 것 같아 물었다.

“오늘은 쉬는 날입니다. 4일 일하면 그다음 하루는 휴일이지요.”

“그래요? 음, 하지만 궁정 마법사도 따로 휴일이 있는 건가요? 쉬는 날 갑자기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요?”

“나 외에 다른 궁정 마법사가 한 명 더 있으니 별문제 없어요. 그리고 내가 꼭 나서야 하는 일이라면 그가 연락을 취해올 거니까.”

“어? 그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책에서 궁정 마법사는 당신 하나 밖에 나오지 않았…….”

에일린은 무심코 말하려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케일론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책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아무것도 아니에요.”

“글을 읽을 줄 압니까?”

“물론이죠. 요즘 글자 못 읽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망했다! 생각 없이 또 말을 뱉고 말았다. 케일론의 눈이 싸늘한 청보라 빛으로 변했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호오, 의외로군요. 평민 아가씨가 글을 읽을 수 있다니.”

“아, 아니에요! 저 글 못 읽어요.”

뒤늦게 고개를 도리질하며 부정했다.

“좀 전에 읽을 수 있다고 했잖습니까?”

“그건, 그러니까…….”

그가 입을 꾹 다문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서 변명거리를 또 생각해 내야 했다. 에일린은 머리를 쥐어짰다.

“꾸, 꿈에 나오는 글자만 읽을 수 있어요. 꿈에서 이상한 책을 읽거든요. 거기 있는 글만 읽을 수 있어요.”

한글이랑 영어 정도요. 한자도 조금……. 이 소설 세계에서 쓰는 문자는 ‘룬 문자(Runic alphabet)’였다. 당연히 읽을 수 없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현실의 글은 읽을 수 없는데 꿈속에 나오는 글자만 읽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예.”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전세에서의 기억 같은 건 모두 꿈속에서 겪은 거라고 우기는 수밖에.

“그 말 진실이겠죠?”

“그…… 럼요. 진실이죠.”

케일론이 그의 얼굴을 에일린의 얼굴 앞에 바짝 들이밀었다.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하기 위해 눈빛과 표정을 살피려는 거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순간 에일린은 깜짝 놀랐다.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이 다가오니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케일론도 좀 당황스러웠다. 그저 진위여부를 캐고자 마주한 얼굴인데 왠지 쑥스러웠다. 그녀의 밝은 연초록 눈동자를 마치 처음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깊고 신비로워 보였다. 신록의 빛을 품은 잔잔한 호수처럼, 마력을 담은 투명한 녹색의 돌처럼……. 그 둘은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그러자 별안간 세찬 칼바람이 그들 사이에 몰아쳤다. 흙먼지와 함께 그들의 긴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사정없이 흩날렸다.

“으악!”

둘은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은 채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케일론은 눈에 티끌까지 들어갔는지 괴로운 표정이었다.

“괜찮으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따가운지 연신 두 눈을 비비며 깜박거렸다. 에일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겨울의 왕이 한 손을 휘두르며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꾹 다문 입술에 두 눈썹이 치켜 올라간 굳은 표정이었다. 은청색의 두 눈동자만 불이 붙은 듯 이글거렸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질투에 휩싸인 남자의 얼굴이란 걸.

***

“오늘 도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케일론의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해 그의 성에 도착해보니 어느새 겨울의 왕도 거기 있었다. 인간 마법사의 마법보다도 더 강력한 마법을 구사한 때문인지 훨씬 전에 도착한 것처럼 보였다. 케일론과 브레이를 따돌리고 성 뒤쪽에 있는 마당에서 그를 만났다.

“마음에 들지 않아.”

“예?”

“그 인간 남자들과 그대가 가까이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다.”

“…….”

“그대는 그자들의 행동이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

“그게…….”

에일린은 말문이 막혔다.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사실 좀 기분이 좋았다. 잘생긴 남자들과 요즘 젊은 애들이 말하는 “썸”을 타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게 그녀 자신만의 착각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런 설렘이 좋았다. 물론 신경 쓰이는 점이 없지는 않았다. 황제에게 대쉬한다거나 엘로드나 마법사와 어찌해본다거나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직은 그들에게 크게 관심도 없었고 그녀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넘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집도 절도 성씨조차 없는 미천한 신분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령왕보다는 가능성 있는 상대이지 않겠는가? 그들은 최소한 ‘인간’이었다.

“저기, 왕이시여.”

“둘만 있을 땐 ‘히에무스’라고 불러라.”

“그럼, 히에무스. 이런 말씀 드리기는 죄송하지만…….”

“뭐든 편하게 말해라. 에일린.”

낮게 울리는 물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 소리 같기도 한 정령왕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렸다. 잘생긴 걸로 따지면 세계 최고일 것 같은 비현실적인 이목구비가 보였다. 늘 그의 곁에 머무는 청량한 겨울 숲의 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황홀해졌다. 에일린은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왜 여태 해독약을 먹지 않은 거냐고 물으려던 말을.

‘해독약이야 알아서 먹겠지.’

재촉하지 않아도 해독약을 먹을 때가 머지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자신에게 빠져들어 있는 기간은 그리 오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지금은 좀 더 이런 기분을 만끽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마치 진짜 사랑받고 있는 듯한 이런 기분을. 그래, 조금만 더 이기적으로 굴자.

“저, 히에무스. 저는 인간이니까 이제 여기 사람들과 친해져야 해요.”

“…….”

“그러니까 제가 다른 사람들과 좀 가깝게 지낸다고 해서 일일이 그렇게 반응하시면 곤란해요. 당신과의 사이가 들킬 수도 있고요.”

히에무스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굳은 표정이었다.

“저는 인간이니까요.”

“…….”

그는 한동안 더 침묵했다. 마음 같아선 그녀를 다른 인간 남자들 속에 놔두고 싶지 않았다. 그 자신만 그녀를 만지고 함께 이야기하고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될 터였다. 그녀가 그와 같은 걸 원하지 않는 한. 아직은 그의 일방적인 사랑이니 강요할 수 없었다.

“알겠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지금은 그 뜻을 존중해주겠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사랑이란 걸 처음 해보는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법이었다.

“정말 그래 줄 거죠?”

“그래. 그대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앞으로 주의하겠다.”

에일린이 활짝 웃었다. 봄날의 햇살처럼 눈이 부셨다. 이내 그녀의 촉촉한 입술이 그의 뺨에 와닿았다.

“고마워요. 히에무스.”

가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봄날의 나른한 느낌이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얼음덩이가 깨지는 소리처럼 쿵쿵 울리는 소리가 그의 온 마음을 가득 채웠다. 아아, 이 느낌. 이 신비로운 기분. 이 감각을 뭐라고 이르는 것일까? 히에무스도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고 따스한 입맞춤이었다. 마치 생애 처음으로 맞이하는 어느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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