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설 속 인물들이잖아
그녀의 이름은 박운아. 그날 12월 1일은 운아의 50세 생일이었다. 50세가 되는 생일날 전세의 삶을 마감했다. 이름 때문인지 평생 운이 없었다. ‘박운’은 ‘박복’과 같은 말이니까. 물론 한자 뜻이야 다르겠지만.
‘만 나이니까 아직은 49세야. 50대가 아니라고.’
하긴 40대면 어떻고 50대면 또 뭐 어떻겠는가. 여자로서의 삶이 끝난 지는 이미 오래전 일인 걸. 20년 전 둘째를 낳을 때 잘못돼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었다. 그 이후로 남편은 그녀에게 더 이상 여자가 아니라고 했다. 줄곧 잠자리도 피하더니 당연하다는 듯 밖으로 나돌았다. 오늘도 방금 남편이 다른 여자와 호텔에서 나오는 광경을 목격하고 미친 듯이 뛰쳐나오던 길이었다.
“하아, 어쩐지 바보 같아.”
생일이라고 친구들이 특급 호텔 뷔페를 예약해 주었다. 특급 호텔 뷔페를 먹는 것도 그녀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 한껏 부풀고 설레는 기분을 안고 친구들을 따라갔었다. 그리고 호텔 입구에서 남편과 옆집 여자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같이 나오는 모습과 딱 마주쳤다.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와 정신없이 걸었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배가 고파왔다.
“아쉽다. 뷔페는 먹고 나오는 건데…….”
그에게 남아 있는 미련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아이들 때문에 살았다. 자식들이 결혼하면 바로 이혼할 생각이었다. 친구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들킨 게 창피하고 민망했을 뿐.
‘사실 처음부터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었지.’
대학 선배였던 남편은 일곱 살 많은 같은 과 복학생이었고, 그녀는 취업 준비에 힘을 쏟던 대학 4학년생이었다. 어쩌다 참석한 과모임에서 선배가 주는 술을 먹고 취해 쓰러졌다. 깨어나 보니 낯선 모텔 방에 그와 뒤엉켜 있었다. 그대로 임신을 하고 일사천리로 쫓기듯이 결혼을 진행했다.
“정말 바보 같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길가에 붕어빵 장사가 보였다. 급히 다가가 한 봉지 사들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뜨거운 봉투를 받아드니 얼어붙었던 몸이 조금 데워졌다.
‘호텔 뷔페 진짜 근사할 텐데…….’
달콤한 붕어빵을 한 입 베어 물며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덜 익었는지 밀가루 냄새가 살짝 올라왔다. 한 개 다 먹고 두 개째 베어 무는데 목이 메어왔다. 처음엔 덜 익은 붕어빵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묵혀둔 서러움 때문이란 걸 깨닫고 황급히 눈가를 훔쳤다. 찬 공기에 섞여 눈발이 조금 날리더니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겨울이 싫어.’
항상 겨울이 싫었다. 눈이 오는 것도 싫었고 추운 것도 싫었다. 겨울이 되면 왠지 마음이 더 허전하고 힘이 들었다. 그녀의 생일이 겨울이었기에. 그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과 함께 있어도 없는 것과 같은 남편의 부재가 더 사무치게 와닿았다.
[다들 그렇게 살아.]
언젠가 지금은 돌아가신 친정 엄마에게 외로움을 호소했더니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
[웬만하면 그냥 살아. 애들이 있으니까.]
식어가는 붕어빵을 봉투에 집어넣고 다시 길을 걸었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준비하는 상점들의 화려한 트리 장식과 색색의 문구들이 넘쳐났다. 삼삼오오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연인 사이인지 서로 손에 손을 붙들고 팔짱을 낀 채 상대의 눈을 응시하며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걸까······.”
길모퉁이에 제법 큰 서점이 하나 보였다. 어차피 따로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니 잠시 들르기로 했다. 자동문 버튼을 눌러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서 오세요.”
큰 서점답게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방대한 책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알싸한 잉크 냄새와 종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친절한 얼굴을 한 젊은 청년이 물어왔다. 이렇게 큰 서점이라면 있을 지도 모른다.
“저기,《장미의 기사 엘시아》라는 책 있어요?”
“잠깐만요. 확인해볼게요.”
점원이 익숙한 솜씨로 PC 키보드를 두드렸다.
“네. 있어요. 1권부터 3권까지 있는데 어떤 거 드릴까요?”
“세 권 다 주세요.”
한 권에 15,000원이나 하는 책이었다. 세 권 다 사면 45,000원. 오랜만에 자신을 위해 돈을 쓰기로 했다. 호텔 뷔페도 못 먹은 스스로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라 여기면 되겠지. 사실 진즉에 구입해 모두 읽은 책이지만 새로 사고 싶었다. 집에 있는 건 닳아서 표지도 다 떨어져 나갈 정도로 너덜너덜해졌으니까. 하도 많이 읽어 이제 거의 다 외우다시피한 소설이었다.
“자녀분 선물이세요?”
“예? 아, 예.”
이런 책을 중년의 운아가 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뭐, 젊은 애들만 읽으라는 법 있나?’
모르긴 몰라도 운아 같은 중년 아줌마들도 이 소설을 많이 읽을 것이다. 소국의 황녀 엘시아가 뛰어난 남자 넷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살다 여기사로 성장하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엘시아가 위기에 빠진 고국을 구하고 대제국의 황후가 되어 행복하게 산다는 걸로 끝나는 결말이었다. 이렇게 두근두근하고 황홀한 사랑 이야기를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외면한다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장미의 기사 엘시아》는 그동안 운아가 읽었던 소설 중 최고로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사실은…… 내가 읽으려고요.”
“그러세요?”
점원이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비밀 이야기라도 나눈 듯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반짝거리는 새 책 표지를 보니 그녀의 마음도 덩달아 밝아지는 것 같았다. 설레는 기분을 안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뭘 해야 하나…….”
이대로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남편도 늦게 오거나 아님 아예 외박을 하겠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대로 집에 들어가 일상에 묻히고 싶지 않았다. 길 건너편에 근사한 커피숍이 보였다. 알록달록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멋져 보였다.
‘저기 가서 새로 산 소설책이나 좀 읽고 갈까? 달콤한 캐러멜마키아토 한 잔 시켜놓고……. 그래, 치즈 케이크도 한 조각 사 먹자. 생일이니까 그 정도 사치는 괜찮지 않겠어?’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 앞으로 다가가 섰다. 신호등이 초록빛으로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옆에 바퀴가 달린 운동화를 신고 온 한 남자아이가 멈춰 섰다. 열두어 살쯤 됐을까. 귀에 이어폰까지 끼고 폰으로 게임을 하는 모양이었다. 운아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신발도 그렇고 거리에서 저러면 위험할 텐데…….’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운아는 길을 건너려다 멈칫했다. 길게 울리는 경적 소리와 함께 승합차 한 대가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남자아이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채 횡단보도 안으로 미끄러졌다.
“안 돼!”
끼이익!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튀듯이 달려 나가 그 남자아이의 몸을 밀쳐냈다. 순간 들이닥친 차에 치여 운아의 몸이 위로 높게 치솟다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죽는구나!’
그 일련의 상황이 일어나는 순간 생각했다.
‘이렇게 죽는구나, 나는…….’
제대로 된 사랑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이렇게 죽는구나. 극심한 고통과 함께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 염원을 내보냈다.
‘다시 살 수 있다면…… 소설같이 멋진 사랑을 한번 해 보고 싶어.’
그래.《장미의 기사 엘시아》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황홀하고 아름다운 그런 사랑을……. 그 생각을 끝으로 그녀의 전세에서의 삶이 끝났다.
전생 대신 전세라고 한 것은 운아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다른 누군가로 환생해 태어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뜻이겠지만 운아는 그 둘을 구분하기로 했다. 다른 누군가가 되긴 했지만 신생아로 태어나지 않고 다 자란 어떤 여자의 몸에 빙의돼 있었다. 그것도 열병에 걸려 죽을 때만 기다리는 가난하고 젊은 여자의 몸. 운아는 너무나 생소하고 낯선 상황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오랫동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거의 하루가 지나서야 겨우 이해하게 됐다. 책 속의 세상에 빙의한 거였다. 죽기 전 염원했던 《장미의 기사 엘시아》라는 소설 속에.
***
“여기 이 숲에 버리고……. 아니, 두고 가자.”
에일린의 숙부가 일행을 향해 말했다. 변국 ‘아칸 왕국’은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 대규모 난민이 발생한 상태였다. 그 난민 중에 에일린의 가족이 있었다. 처음에 에일린의 가족과 숙부네는 살길을 찾아 대국 ‘아젤란 제국’으로 함께 길을 떠났지만 도중에 에일린의 부모가 병에 걸려 죽고 에일린만 남았다. 그런데 아젤란 제국에 도착할 즈음 에일린마저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자신의 가족을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던 에일린의 숙부가 급기야 그녀를 숲에 버리고 떠나기로 한 거였다.
“여긴 요정인가, 정령인가 하는 족속들이 사는 숲이래. 혹시 모르잖아? 요정들이 불쌍히 여겨 치료라도 해 줄지. 여기 두고 가자고.”
“안 돼……. 버리고 가지 마요.”
에일린에 빙의한 운아가 힘겹게 간청했다. 진짜 에일린은 아마도 이미 죽었을 것이다. 비어있는 그녀의 몸에 운아가 들어온 것일 터였다. 어쨌든 이 추운 날씨에 혼자 남겨진다고 생각하니 흐릿한 정신에도 겁이 덜컹 났다.
“미안하구나. 에일린. 용서해라.”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숙부네 가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큰 나무 밑동에 눕히고 낡은 이불 한 장만을 덮어줬을 뿐 물 한 모금 챙겨주지 않고.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안 돼……. 이게 무슨 꼴이람. 다시 살게 됐나 했더니 이대로 또 죽는 건가?’
그때까지도 운아는 이게 소설 속 세계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소설 속에 ‘에일린’이라는 등장인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비슷한 상황이 등장하긴 했다. 아젤란 제국으로 흘러 들어간 아칸 왕국의 난민들 이야기. 그중 누군가가 병든 젊은 여자를 길에 버리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 정령의 숲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다니는 길거리에. 이후 그 길을 지나던 엘시아 황녀의 행렬이 버려진 여자를 발견하는 장면이 나왔었다. 운아는 이 상황이 낯익었으나 자신이 소설 속 세계에 들어왔다는 건 꿈에도 알지 못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빙의한 에일린의 몸이 열에 들떠 온전치 못했기에 더더욱 명료한 사고를 하기 힘들었다.
여기도 겨울인 것 같았다. 하긴, 그녀가 죽기 전에 살았던 곳도 겨울이었으니 당연한 것인지도. 혼자 깊은 숲속에 남겨지자 공포와 불안감이 엄습했다. 주위를 살펴보니 빽빽한 나무들로 우거진 숲의 모습이 더 춥고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병 때문이 아니라 추위와 공포로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아니면 들짐승에게 해를 당하거나. 자신의 신세가 너무 기막혀 절로 눈물이 나왔다.
[어라, 남풍님! 여기, 적당한 인간 여자가 있어요.]
숲이 어둑해질 때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찌 들으면 앵앵거리는 모깃소리 같기도 한 기이한 음성이었다.
[웬 떡이냐! 저 멀리 길 위를 지나는 행렬 중에 찾아볼까 했더니. 이 여자도 꽤 괜찮아 보이는데?]
[그렇죠? 남풍님. 더 둘러보기도 귀찮은데 그냥 이 여자로 하죠.]
[어디 보자. 음, 비쩍 마르고 핼쑥한 얼굴에 인간 특유의 지저분한 밤색 머리. 이만하면 충분히 혐오스러운 것 같군. 잘됐다. 그냥 이 여자로 하자. 빨리 여왕님께 보고하도록.]
[예!]
작은 목소리였지만 고요한 주변 환경 때문인지 의미를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근데…… 병이 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병든 거라면 더욱 좋지. 더 혐오스러울 것 아냐? 씻지 않아 더럽고 냄새까지 나니 정말 딱 좋군.]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운아의 영혼이 깃든 에일린이 힘겹게 눈을 떠 목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희미한 훈풍만 느껴질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환청인가…….’
다시 눈을 감고 추위에 떨고 있으려니 아까 느꼈던 훈풍이 몰아쳐 왔다. 전의 것보다 크고 강한 바람이었는데 포근한 느낌이 드는 게 겨울에 부는 바람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떠세요? 여왕님.]
또 다시 앵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군. 보는 순간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지는 게 딱 좋구나. 좀 더 추한 얼굴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뭐, 이 정도도 나쁘지 않겠어. 잘했다, 너희들.]
[황송합니다!]
[남풍! 이 여자를 옮겨라.]
[예! 여왕님.]
에일린은 아마도 열 때문에 자신이 환청을 들은 거라 여겼다. 억지로 눈을 떠 살펴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아까부터 수군거리는 목소리만 들렸다.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려는데 갑자기 어떤 힘에 의해 그녀의 몸이 위로 쑥 들렸다.
“꺄악!”
저항할 수 없는 굉장한 위력의 바람에 감싸여 운아, 즉 에일린의 몸이 어디론가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제정신으로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우선 여기에 내려놔라.]
[예.]
단시간에 에일린을 옮겨온 바람이 어딘가에 도착해 멈췄다. 몸이 멈추자 에일린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주위가 어두워 어디인지 정확히 분간할 수 없었다. 나무가 듬성듬성 난 풀숲 같았다. 주변은 빽빽하게 자란 키 큰 수목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키프리스.]
또 다른 목소리가 더해졌다. ‘키프리스’라는 이름을 지닌 여자였다.
[좀 더 흉하면 좋겠지만 나쁘진 않군요. 버짐 핀 얼굴에 몸에 부스럼도 많고……. 병들고 땟국이 줄줄 흐르는 게 꽤 괜찮은 것 같아요.]
키프리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이제 슬슬 실행에 옮기자고요.]
[그러죠. 내가 몰래 그에게 접근해서 약을 먹일게요. 이런 건 내가 전문이니까.]
[그래요. 키프리스. 당신만 믿을게요.]
[맡겨줘요. 당신은 그 인간 여자에게 이 약을 좀 먹이도록 하세요.]
뭐야, 내게 무슨 약을 먹이려는 거야? 에일린은 혼미한 정신이었지만 경계심이 생겼다.
[이건 뭐죠?]
[정령의 모습이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약이에요. 인간이 이걸 한번 먹으면 효과가 평생 가죠.]
[그렇군요. 하긴, 모습이 보여야 키스라도 할 수 있을 테니.]
정령의 모습을 보이게 만드는 약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어디선가 분명……. 그래, 그건 소설 속에 나오는 약인데? ‘사랑의 여왕’이 엘시아 황녀에게 먹였던 마법의 약. 설마 그거인 거야? 황당해하는 사이 누군가 다가와 에일린의 입을 억지로 벌리게 했다. 이내 차가운 무엇인가가 입안에 흘러들어왔다.
‘어어……. 뭐, 뭐지?!’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그것을 꿀꺽 삼켰다. 사실 아까부터 타는 듯한 갈증에 시달려 온 터라 뭔가 상큼한 액체가 입안에 들어오자 본능처럼 삼키고 말았다. 그 순간 눈앞에 이상한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뭐야, 이건!’
기이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인간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신비롭고 아름다운 두 여자가 보였다. 그 옆에는 소용돌이치듯 내려오는 긴 은빛 머리에 가벼워 보이는 은빛 옷을 입은 미청년이 서 있었다. 그리고 투명한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작은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분명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있는 장면이었다. 그랬다. 《장미의 기사 엘시아》에 나오는 삽화에 묘사된 광경과 거의 비슷했다. 빛나는 금빛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각각 핑크빛 드레스와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두 여자는 봄의 여왕과 사랑의 여왕임이 분명했다. 은빛 머리 청년은 봄의 여왕의 신하인 ‘남풍’일 터였다.
“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저 사람들 모두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일 텐데……. 순간 에일린은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아니면 열에 들뜬 몸이 드디어 환상을 보는 것이거나. 황당한 표정으로 멍하게 있는 사이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랑의 여왕 키프리스가 바로 앞에 있는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몸놀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는 보이지 않던 커다란 건물이 거기 있었다. 얼음인지 수정인지, 아무튼 투명하고 차가운 재질로 만들어진 거대한 궁전 건물이 서 있었다.
“이건…….”
그곳도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소설 속 삽화에 나오던 ‘겨울의 왕’의 궁전과 비슷해 보였다. 그래, 맞아. 분명 소설 속에 이런 장면이 있었지. 봄의 여왕이 잘생긴 인간에게 반해 정령왕이 해서는 안 되는 금기를 저지르고 재판을 받게 됐지. 배심원으로 참석한 다른 정령왕들은 그녀를 동정해 벌을 주지 말자고 했는데 단 한 존재가 반대를 했다. 그가 바로 ‘겨울의 왕’. 정령들 중 가장 냉혹하고 차가운 자. 그자 때문에 봄의 여왕이 결국 벌을 받았다. 그런 그녀가 앙심을 품으며 한 사건을 저지르는데 바로······.
“자, 지금이에요! 그 인간 여자를 이리 데려와요.”
사랑의 여왕 키프리스가 급히 나오며 봄의 여왕에게 말했다. 아까 삼켰던 약 때문인지 모깃소리처럼 앵앵거렸던 목소리도 분명하게 들렸다. 봄의 여왕이 옆에 있던 남풍에게 명령했다.
“남풍, 옮겨라.”
“예! 여왕님.”
남풍이 즉시 에일린의 몸을 안아 들고 겨울의 궁전 입구로 다가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짧게 비명을 질렀다.
“으악!”
모든 정령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키프리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어서 문 안쪽에 그 여자를 던져두고 우린 빨리 사라져야 해요! 그가 곧 깰 거예요!”
남풍이 서둘러 에일린을 궁전 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조금 거친 취급에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아얏!”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뒤이어 궁전 문이 닫히는 육중한 마찰음이 울렸다. 그녀를 그렇게 남겨두고 그들은 황급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기운이 없고 몽롱한데 엉덩이에 통증까지 느껴져 에일린은 신음을 냈다.
“으으으……. 이게 뭐야.”
“누구냐!”
칼날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에일린은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여긴 겨울의 왕의 궁전이니 아마도 그일 것이다. 은빛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론 푸른빛으로 보이기도 하는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은청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자! 그 미남자는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큰 키에 갸름하고 날카로운 턱선, 넓고 탄탄한 어깨가 특징이었다. 하얀 튜닉을 입은 남자는 어깨 위에 한기가 서린 은빛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신비롭게 빛나는 하얀 빛의 입자가 그의 주위를 온통 둘러싼 모습. 그래, 그자가 맞다. 겨울을 지배하는 겨울의 정령왕! 그가 책 속의 삽화처럼 냉혹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둘의 눈빛이 부딪혔다. 순간 겨울의 왕의 얼음 같은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뭔가에 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소설에 적힌 설명대로라면 얼음 조각상처럼 무표정하고 차갑기만 해야 할 눈빛이 눈에 띄게 풀어졌다. 그가 왜 그런지 에일린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방금 사랑의 여왕 키프리스가 잠든 그에게 몰래 접근해 마법약을 먹였을 것이다. 약을 먹은 후 처음 보는 상대와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사랑의 묘약’을.
“그대는…….”
겨울의 왕의 목소리가 그 눈빛처럼 떨렸다.
“저어, 나는 그러니까…….”
소설 속 세계인데 소설과는 다른 전개인 건가? 소설에서는 이 장면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에일린이 아니라 주인공인 엘시아 황녀인데. 그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하더니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에일린을 향하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싸늘한 냉기가 훅 밀려왔다.
“그대는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할 것이다. 소설대로라면.
“아름답구나!”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정말 소설대로잖아? 하지만 내가 아니라 엘시아에게 해줘야 할 말인데!’
“그대는······.”
이번에는 ‘누구인가? 이름이 뭐지?’라고 할 차례.
“누구인가? 이름이 뭐지?”
그녀는 너무 기가 막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거 이렇게 돼도 되는 걸까? 주인공 대신 이렇게 돼도 괜찮은 건가?
“운아……. 아니, ‘에일린’이라고 해요.”
“에일린.”
딱딱한 그의 목소리가 한껏 긴장한 듯 쇳소리처럼 갈라져 나왔다. 스스로도 지금의 상황이 제대로 인지되지 않는 것일 터. 겨울의 왕은 한편으론 당혹스럽고 또 한편으론 홀린 듯 황홀한 표정으로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음은 키스 장면이었다. 겨울의 왕이 격정을 이기지 못해 달려드는 씬.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감촉에 살짝 놀랐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한껏 발열로 인해 힘들어하던 차라 상쾌하게 느껴졌다.
‘키스……. 좋지. 이런 그림 같은 미남하고 하는 키스라니. 꿈이라도 완전 좋지. 그런데…….’
한계였다. 몸의 기운이 다한 듯 힘이 빠졌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서늘하고도 아름다운 겨울의 왕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에 닿을 듯 가까이 왔을 때 그만 혼절해버렸다.
‘아, 여기서 또 죽는 건가? 아쉽다. 키스라도 하고 죽으면 좋을 텐데. 마지막으로 키스해 본 지가 얼마나 되었지? 둘째를 낳기 전이니까…… 20년도 더 됐네.’
그 생각을 끝으로 암흑이 찾아왔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는 무겁던 몸이 개운해지고 가벼워진 걸 느껴졌다. 죽은 후 육체의 무게를 덜어서 그런 건가 했지만 눈 떠보니 아직도 에일린의 몸이었다. 으리으리한, 마치 유럽 왕국의 왕족이 사용할 것 같은 호화로운 침대에 눕혀진 상태였다. 아니, 그보다는 좀 더 단아하고 정갈해 보였다. 진주 빛깔 기둥이 서 있고 캐노피가 달린 침대에 투명한 은빛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에일린은 잠자리 날개같이 얇고 하늘하늘한 이불을 덮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높은 천장, 수정 조각을 깎은 듯한 기둥 여러 개가 늘어선 널찍한 방이었다. 놀랍도록 신비롭고 아름다운 분위기와 함께 차가운 한기와 스산함이 가득 배어있었다.
“여긴…….”
이곳도 익숙하긴 했다. 소설 속에 묘사된 겨울의 왕의 침실이 딱 이런 모습이니까.
“정신이 드십니까?”
가장자리에 눈처럼 흰 모피를 덧댄 망토를 두르고 하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보였다.
“누구세요?”
그녀는 머리에 눈의 결정 모양을 한 투명한 보석이 달린 서클릿을 쓰고 있었다. 이 여자도 누군지 알 것 같긴 했다. 눈의 여왕이라 불리는 겨울의 왕의 신하가 분명할 터였다. 겨울의 궁전에서 2인자라고 할까. 아니나 다를까 여인이 대답했다.
“지금 상황이 놀랍겠지만 저는 정령입니다. 눈의 여왕이라 불리지만 겨울의 왕의 수족인 정령이지요. 이제 몸은 괜찮으시죠?”
“예에, 정말 아팠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 가뿐해졌어요.”
눈의 여왕이 겨울의 왕의 권속답게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께서 낫게 해 주셨습니다. 좀처럼 쓸 일이 없지만 모든 정령은 치유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아…….”
“하지만 당황해하고 계십니다. 인간에게 그런 자비를 베푼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은빛 눈이 더욱 차가운 빛을 내뿜었다. 의혹이 담긴 표정으로 에일린을 바라보았다.
“뭔가 알고 있다면 말해주세요. 인간 여인이여.”
“뭘 말인가요?”
“그대에게, 아니면 우리의 왕에게 다른 정령들이 뭔가 장난을 치지 않았나요? 이를테면 사랑의 여왕이나 봄의 여왕이?”
에일린은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하다 숨겨봐야 곧 밝혀질 내용인 것 같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정령 둘을 만나긴 했어요. 무슨 약을 쓰는 것 같기도 했고요.”
“역시 그랬군요.”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 여인이여.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대는 지금 인간이 오면 안 되는 곳에 와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또한 잘못된 현상이지요.”
에일린은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두 정령왕의 어이없는 장난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그대를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더 이상 머물면 안 됩니다. 날이 밝는 즉시 이곳을 떠나도록 하세요.”
에일린은 곤혹스러운 낯빛을 지었다. 자신이 여기 머물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았다. 단순히 인간인 이유 때문이기도 하고 소설 속 주인공인 엘시아 황녀가 아닌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길 나가서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 추운 겨울에 아무 대책 없이 어디로?
“저어, 죄송하지만 며칠만 좀 머물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갈 곳이 없어서요…….”
눈의 여왕이 무표정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대의 사정 따윈 알 바 아닙니다. 병을 낫게 해준 것으로 우리의 실수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됐을 터. 내일 해가 뜨는 즉시 이 궁전에서 나가도록 하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엘시아 황녀가 올 때까지 만이라도…….”
“엘시아 황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의 여왕에게 간절한 눈빛으로 호소했다.
“황녀님이 곧 이 숲을 지나갈 거예요. 그럼 그때 나갈게요.”
에일린이 믿을 구석이라고는 소설 여주인공 엘시아 황녀밖에 없었다. 소설대로라면 머지않아 아젤란 제국에 공녀로 보내지는 엘시아 황녀의 행렬이 지나갈 터였다. 생각해 보니 에일린이라는 이름만 안 나왔을 뿐, 역시 에일린도 소설 속 등장인물이 맞는 것 같았다. 그저 ‘아칸 왕국 출신 난민 소녀’로만 나올 뿐이지만. 엘시아가 아젤란 제국의 공녀로 가던 중 길에서 구한 난민 소녀. 그게 아마 에일린일 것이다. 엘시아는 그녀의 병을 치료해주려고 마법사까지 동원해 노력하지만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녀가 직접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구해줄 생각으로 숲에 들어갔다가 정령들의 장난질에 동원되는 것이다. 겨울 숲에서 길을 잃어 헤매다 잠깐 더러워진 몰골 덕분에 말이다. 그러니 곧 이곳을 지나갈 그녀에게 사정하면 어떻게 의탁할 수 있을 듯했다. 날짜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난민 소녀가 버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시아 일행이 지나가니까 머지않았을 텐데……. 분명 그녀가 자신을 도와줄 것이다. 선하고 자비로운 그녀라면 분명······. 그때까지 만이라도 이곳에서 지내야만 했다. 이 겨울에 노숙을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어쨌든 안 됩니다.”
“아, 제발 부탁 좀 할게요!”
부탁 좀 하자! 이 아가씨야! 에일린은 속으로 외쳤다.
“안 됩니다!”
“안 될 게 뭐 있는가?”
위엄 서린 낮은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어느새 방에 들어온 겨울의 왕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몰고 온 한기가 훅 밀려왔다.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문을 부르르 떨었다. 침대 옆에 멈춰선 그가 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은청색 눈동자가 유난히 밝게 빛나 보였다. 겨울에 얼어붙은 깊은 샘물을 보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얼어붙은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은 듯 보였다. 아마도 사랑의 묘약 때문이겠지.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러도 좋아. 에…… 일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어머, 그래도 되나요? 정말 고마워요, 청년!”
“청년?”
“아, 아니……. 그러니까 젊은이. 아니, 그 뭐냐……. 폐하, 아니면 전하?”
“정령왕을 부를 때는 ‘전하’라는 존칭은 사용하지 않아.”
겨울의 왕이 여전히 얼어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기가 승낙하고도 스스로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자꾸 이 인간 여자에게 관대해지고 싶은 걸까?
“그럼 뭐라고 불러 드릴까요?”
“우린 ‘왕이시여’라고 부릅니다. 인간 여인.”
눈의 여왕이 눈살을 찌푸린 채 에일린에게 설명했다. 얌전하고 주눅 들어 보이던 인간 여자가 겨울의 왕에게는 묘하게 뻔뻔하고 호들갑스럽게 대하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왕이시여? 음, 좀 길고 입에 착 붙는 것 같진 않네. 왠지 시인이나 연극배우들이나 입에 담을 것 같은 말이야.”
에일린은 혼자 중얼거렸다. 예전에 운아의 몸으로 살아갔을 때부터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아이 둘을 혼자 키우다시피 하며 지낸 결혼 생활 동안 생긴 버릇이었다. 하루 종일 집안에서 아이를 돌보다 보면 어떤 날은 제대로 된 말 한마디도 안 하고 사는 날이 많았다. 아이가 어릴 때 말이 통하지 않아도 이런저런 말을 걸어주었는데 그게 그만 버릇이 돼 버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
겨울의 왕이 잠깐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존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 겨울의 왕은 어쩐지 초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뭐, 존칭이야 아무러면 어때요? 아무튼 고마워요. 청…… 아니, 왕…… 이시여.”
그 참, 어색하네. 왕이시여라는 말.
“곧 이 숲에 엘시아라는 이름의 황녀 일행이 지나갈 거예요. 그녀에게 부탁해서 지낼 곳을 마련해 볼게요. 그때까지만 신세를 질게요. 정말 고마워요.”
에일린은 그냥 존칭을 생략하기로 했다. 그래도 말은 통하고 별로 무례해 보이지도 않으니까. 원래 에일린의 뇌리에 새겨진 기억 때문인지 그나마 대화는 무리 없이 통해서 다행이었다. 겨울의 왕을 향해 땟국이 줄줄 흐르는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가지 근심이 해결되니 절로 나오는 표정이었다. 다시 겨울의 왕의 얼굴에 큰 동요가 일었다. 눈이 크게 떠지고 입술까지 살짝 벌어졌다. 저거…….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건데.’
누군가에게 깊이 빠져든 얼굴. 아아, 정말 굉장하구나. 사랑의 묘약이란 게. 저렇게 아름답고 신비로운 존재가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다니. 아직 에일린도 스스로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자신이 어떻게 생긴 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까 봄의 여왕이나 사랑의 여왕이 나누던 대화를 생각하면 그리 썩 미인은 아닌 것 같았다.
“미소가…… 정말 아름답구나.”
에일린은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그의 칭찬을 들으니 쑥스러우면서 온몸이 간질간질해졌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칭찬인 건가? 그것도 저렇게 아름다운 남자에게서. 겨울의 왕 역시 제가 던진 말에 흠칫 놀랐다. 자신이 이런 말을 인간 여자에게 하고 있다니.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건가? 아니, 하지만 정말 예쁘지 않은가?’
에일린이 미소를 지으니 주변이 온통 빛나는 것 같았다.
‘저 연녹색의 눈빛이 그 어떤 보석보다도 투명하게 반짝이는 것 같구나. 저 짙은 머리는 마치 비단결 같아. 쓰다듬으면 얼마나 부드럽고 매끄러울까.’
겨울의 왕은 에일린의 떡 진 머리 쪽으로 무심코 손을 뻗었다. 에일린은 본능적으로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피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이더라도 외간 남자였고 인간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의 몸에 감도는 차가운 한기가 절로 몸을 피하고 싶게 만들었다. 그 행동에 그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에일린보다도 더 놀란 그의 얼굴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왠지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아려왔다.
“내가…… 싫은 것이냐? 에일린.”
“아니, 싫기는요. 싫을 리가 있나요? 제게 이렇게 잘 대해 주시는데. 게다가 눈이 돌아갈 정도로 미남이기도 하고.”
싫을 리가 있겠냐? 이런 미남의 손길을? 정말 싫지는 않아. 굳이 따진다면 좋은 쪽이지.
“그러면 여기 있게 해주는 대가로 한 가지, 내가 원하는 일을 해주지 않겠느냐?”
겨울의 왕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침을 삼켜도 보고 심지어 인간들처럼 물을 마셔보기도 했지만 도무지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한데 에일린을 보는 순간 타는 목마름을 해결할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줄까요?”
“부디 내게 키스해줘. 지금은…… 단지 그것뿐이야.”
겨울의 왕은 이런 부탁을 하는 스스로가 경멸스럽게 느껴졌다.
“좋아요, 그까짓 키스 한 번 한다고 입술이 닳는 것도 아니고……. 뭐, 해줄게요. 이리 와요. 청년.”
“청…… 년?”
“아, 아니, 그러니까 와, 왕이시여.”
정말 입에 안 붙는다, 이 존칭. 이름이 있으면 좋을 텐데. 소설을 쓴 작가가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서 이름이 없는 걸까? 겨울의 왕은 자기가 먼저 원했으면서 선뜻 에일린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스스로도 혼란스럽고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란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지금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도. 키스를 해야만 그 갈증이 해소된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다.
‘아, 이 청년. 정말 갑갑하긴. 까짓것 그냥 하면 그만인데. 뭘 이렇게 뜸을 들여. 에잇!’
에일린이 먼저 그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겨울의 왕은 잠깐 동안 몸이 굳었다. 하지만 곧 적극적인 자세로 키스에 임했다. 그녀의 입에서 그의 갈증을 식혀줄 유일한 샘이 솟아났다. 그는 곧 그 샘물을 들이켜기 위해 그녀의 숨을 빨아들였다.
“으음······.”
에일린은 새된 신음을 흘렸다. 아아, 정말 멋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와 이렇게 정열적이고 달콤한 키스라니. 20년 만에 해보는 키스! 키스란 게 이렇게 황홀한 것이었나? 키스를 하는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에일린의 머리에 문득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차갑지만 불처럼 뜨거워.’
겨울의 왕이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내 그의 큰 손이 목덜미를 지나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등을 쓸고 허리까지 내려와 힘껏 감아쥐자 에일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이 남자! 키스만이라고 해놓고……. 점점 대담해지잖아? 단단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동시에 눈의 여왕의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왕이시여!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마침내 겨울의 왕이 입술을 뗐다. 은청색 눈동자가 허기진 듯 번들거렸다. 아직 한참 부족했지만 에일린이 밀어냈기에 오늘은 이만 단념하기로 했다. 그의 권속이 경고한 것 때문에 멈춘 건 아니었다. 에일린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키스가 너무나 길고 격정적이어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리고 한 가지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일이 몇 가지 있어 비교적 짧은 시간에 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미안하다. 혹, 불쾌했는가?”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제가 좀 문제가 있어서…….”
좋기는 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심장에 무리가 갈 만큼 두근거리기까지 하고. 하지만 해결해야 할 급선무가 있었다.
“뭔가 불편한 데가 있는 것인가? 혹 내가 실수라도?”
“그건 아니고……. 저기, 배가 너무 고픈데 여기 먹을 것 좀 없나요?”
병마에서 벗어나고 나니 아까부터 배가 고팠다. 여기 와서 먹은 거라곤 약간의 물과 정령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약 말고는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녀의 말에 겨울의 왕과 눈의 여왕이 동시에 곤혹스러운 눈을 했다.
“미안하구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곧 마련하도록 하마.”
정령들은 뭔가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몸이니 당연히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 터였다. 겨울의 왕은 즉시 권속을 불렀다.
“북풍!”
그의 말이 끝나자 따갑고 세찬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더니 한 미청년이 형체를 드러냈다. 얼마 전 봤던 남풍처럼 긴 은빛 머리에 은빛의 날개 같은 옷을 입은 모습이었다. 남풍보단 좀 더 남성적이고 선이 거친 느낌이 들었다.
“부르셨습니까? 왕이시여.”
“인간이 먹을 만한 음식을 좀 구해와라.”
“예?”
생각지도 못한 명령에 북풍은 의아한 낯빛으로 되물었다.
“음식…… 이라고요?”
“그래, 음식. 어서 가져오너라.”
“어디 가서 말입니까?”
겨울의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든 가서 마련해 와! 인간의 마을에 가면 있겠지. 영주의 식탁이나 뭐, 그런 곳을 찾아가 보거라.”
“왕이시여! 그냥 가져오면 도둑질이 아닙니까?”
눈의 여왕이 진중하고 냉랭한 어조로 지적했다. 겨울의 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 명령을 바꿔서 내렸다.
“멧돼지를 한 마리 잡아줄 테니 음식 대신 놓고 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럼, 나도 잠깐 자리를 비워야겠군. 곧 돌아오겠다. 에일린, 필요한 다른 건 없느냐?”
“그것이…….”
에일린은 말하는 걸 주저했다. 26년 아줌마 내공에도 말하기가 민망한 게 하나 있었다.
“기탄없이 말해 다오. 뭐든 힘닿는 데까지 마련해 볼 테니.”
계속 말하는 걸 망설이자 그가 재촉했다. 에일린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새빨개진 얼굴로 내뱉었다.
“화, 화장실도 필요해요!”
화장실. 음식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인간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그것. 음식을 먹지 않는 정령들의 궁전엔 당연히 없겠지.
“화…… 장실?”
으……. 정말로 민망했다. 너무너무 부끄럽고 쑥스러웠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곳에서 지내려면 그게 있어야 하는걸. 매번 화장실 갈 때마다 이 커다란 궁궐을 가로질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올 수는 없지 않겠는가? 정 방법이 없으면 할 수 없지만. 입 둬서 뭐하겠는가? 필요할 때 써먹고 얻을 수 있는 건 최대한 얻어내야지. 부끄러운 건 잠깐이지만 귀찮은 건 내내 이어지는 법이다. 어디 가든 그 건물의 편의시설, 특히 화장실부터 잘 파악해두는 게 순서다.
“그렇군. 그것도 마련해보마.”
화장실을 얻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마법의 요강이었다. 북풍이 어디선가 도자기로 된 뚜껑이 달린 항아리를 구해왔고 거기에 겨울의 왕이 마법을 걸어 주었다. 볼일을 보면 오물이 즉시 사라지게 만드는 마법. 에일린은 겨울의 궁전에 방 한 칸을 배정받았는데 한쪽 구석에 그 요강을 두었다. 그대로 드러난 채로 두기는 좀 민망해서 그 부분을 가릴 만한 것을 부탁했다. 겨울의 왕이 다이아몬드가 박힌 은으로 된 파티션을 가져다 설치해주었다. 원래 왕의 옥좌 뒤에 세워졌던 거였다. 참으로 호화로운 화장실이 됐다. 마침내 북풍이 어디선가 음식을 구해왔다. 에일린은 찬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먹었다. 워낙 배가 고팠던지라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데만 집중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겨울의 왕이 그의 방에 있던 수정으로 만들어진 듯한 탁자와 의자를 내주었다.
“이런 것까지 신경 써주시지 않아도 괜찮은데.”
“필요가 없는 것인가?”
“아뇨. 있으면 좋긴 하죠.”
“그럼 이대로 두고 쓰도록 해라.”
“고마워요.”
에일린은 정말 커다란 고마움을 느꼈다. 살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게 마법의 약 때문이란 걸 알았지만 너무나 행복하고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고마워요.”
그녀의 기쁜 표정과 감사 인사를 대하자 겨울의 왕도 왠지 기꺼운 기분이 들었다. 아까 키스를 나누고 난 후처럼 몸과 마음이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뭔가 더 필요한 건 없나?”
“그게…….”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어디 한두 가지밖에 없겠는가? 열거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염치가 있는 사람이기에 마지막으로 꼭 필요한 한 가지만 더 요청하기로 했다.
“천 조각이 필요한데……. 안 쓰는 자투리 천이나 뭐 비슷한 거 없을까요?”
이 소설의 배경이 가상의 중세 시대이므로 종이는 없을 것이라고 에일린은 생각했다. 그럼 자투리 천 같은 걸로 대신해야 할 것이다. 겨울이 아니라 다른 계절이었다면 나뭇잎을 활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왜 필요하지? 갈아입을 새 옷이 필요한 게 아니라 자투리 천 조각이 필요하다고?”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쓸 건지는 묻지 말고 구해줄 수 없나요? 정말 죄송하지만.”
필요한 것에 순위를 매긴다면 음식과 화장실, 그다음으로 중요한 물건이었다. 겨울의 왕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자신의 호기심을 억누르고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휴지도 확보했다. 겨울의 왕이 정령들이 입는 옷을 전문적으로 짓는 공방에 직접 찾아가 남는 천을 가져왔다. 아울러 편안해 보이는 새 드레스도 한 벌 내밀었다. 반짝이는 하늘색 바탕에 은빛 수가 놓인 넓은 소맷자락의, 귀족 아가씨나 입을 것 같은 고급스러운 드레스였다.
“이것은 정령이 호기심에 만들어본 인간의 옷이라고 하더군. 인간들이 쓰는 실로 천을 짜서 지었다고 하니 그대가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길 나가고 나서도 입을 수 있지.”
“고마워요. 이런 것까지 신경 써주시고. 잘 입을게요. 왕…… 이시여.”
억지로 존칭을 붙여 말했다. 정말로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속옷도 필요했지만 그건 자투리 천이 많으니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아니 그러자면 바늘과 실도 필요하군. 그것까지 구해달란 소리는 차마 할 수 없어 그냥 참기로 했다. 열심히 빨아서 입어야지, 별수 없었다. 에일린이 다시 감사 인사를 하자 겨울의 왕은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미소에 놀라 황급히 표정을 고쳤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미소 따위를 짓다니. 고작 저런 인간 여자 때문에!’
문득 자신의 마음을 점령한 낯선 감정에 놀라 재빨리 말했다.
“그럼 나는 이만 나가 보겠다. 쉬도록…….”
“예. 오늘 정말 고마워요. 왕이시여. 안녕히 주무세요.”
에일린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향해 밤 인사를 하자 그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부여안고 황급히 그녀의 방을 나왔다. 밖에 나오니 눈의 여왕이 기다리고 있었다.
“왕이시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당신의 현재 상태에 관해서입니다.”
“내 상태라니?”
“왕께서도 지금 몸 상태가 이상하다고 눈치채셨을 겁니다. 평소의 당신답지 않은 몸과 마음의 변화에 당황하셨을 터.”
“그래서?”
“그게 사랑의 묘약 때문이란 것 아십니까?”
“······!”
겨울의 왕은 눈의 여왕의 말에 큰 충격을 받고 한동안 멍한 상태로 서 있었다. 그제야 지금까지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납득되었다.
“제가 봄의 여왕의 하급 권속을 하나 붙잡아 확인했습니다.”
“봄의 여왕과 사랑의 여왕이 벌인 장난인가?”
얼음보다 서늘한 낮은 목소리였다. 눈의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앙심을 품었겠지요. 지난번 재판 결과 때문에 봄의 정령왕의 자격이 100년간 정지되었으니까요.”
그랬다. 봄의 여왕은 100년간 정령왕의 자격이 정지되고 그 역할을 그의 권속인 꽃의 여왕이 대신하게 됐다. 사랑의 여왕이 그녀를 도운 건 1차로 봄의 여왕과 오랜 친분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평소 사랑의 여왕이 맡은 일들을 경멸하듯 여기는 겨울의 왕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가담한 거였다. 오만한 겨울의 왕이 보잘것없는 인간 여자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겨울의 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달콤한 느낌과 황홀한 기분이 모두 사랑의 묘약, 고작 그것 때문이었단 말인가? 기껏 그런 묘약 때문에 인간 여자에게 푹 빠져 온종일 그러고 다녔단 말인가?’
순간 가슴 속에 시린 분노가 일었다.
“해독약이 있지 않은가?”
눈의 여왕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겨울의 왕의 권속임에도 가끔은 왕의 저 차가운 기운을 똑바로 마주하기 버거웠다. 그만큼 지금 그가 느끼는 분노가 크고 강하다는 걸 의미했다.
“있을 겁니다. 내일 제가 키프리스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내가 직접 가 볼 것이다. 감히 이 나를 능멸하다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그럼, 저 인간 여자도 내일 쫓아낼까요?”
“……!”
겨울의 왕은 자신이 처한 상황의 내막을 알게 됐음에도 에일린을 당장 내쫓고 싶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녀도 피해자가 아닌가?
“해독약을 구할 때까진 그냥 두도록.”
“알겠…… 습니다.”
눈의 여왕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갈증이 다시 나타났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 역시 냉혹한 겨울의 정령이었으므로 사랑의 감정이 어떤 건지 알지 못했다. 그저 어이없고 황당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성가신 감정이라고만 짐작할 뿐. 겨울의 왕의 심장 한쪽이 봄처럼 녹아있는 상태란 걸 읽지 못했다. 겨울의 왕은 그 녹은 부분이 자꾸만 신경 쓰이고 아파오는 것 같아 동이 트면 즉시 해독약을 구하러 가기로 했다. 이 말랑말랑한 기분을 어서 예전처럼 딱딱하게 얼어붙게 만들고 싶었다. 이건 겨울의 왕인 그에게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감각이니까. 빨리 떨쳐버려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에일린은 전날 밤 배도 채우고 적어도 춥지는 않은 쾌적한 침대에서 잠을 푹 자고 일어났다. 원래 겨울의 권속들이 활동을 하지 않는 다른 계절에 잠을 자두기 위한 침대라고 들었다. 바로 일어나지 않고 뒹굴뒹굴 여유를 부렸다.
“아, 정말 좋다. 일찍 일어나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고 출근도 안 해도 되고.”
전세에서 그녀는 작은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50세 생일을 앞두고 건강이 좋지 않아 그만두긴 했지만 꽤 오랫동안 그 일을 해왔다.
“남의 몸이긴 하지만 젊어서 아픈 데도 없고 가벼워서 좋구나. 생긴 거야 뭐 아무러면 어때? 건강하면 되지. 예쁘면 더 좋겠지만.”
한참 후 침대에서 벗어나 화장실도 가고 탁자에 앉아 어제 먹고 남겨둔 음식도 챙겨 먹었다. 식어서 좀 유감스러웠다.
“음식을 데울 수 있는 화덕과 냄비가 있으면 좋을 텐데.”
먹다 보니 목이 메었다. 당연하게도 물이나 다른 마실 음료가 없었다. 북풍은 그런 것까지 챙길 정도의 센스는 없었던 것이다.
“참, 사람 사는데 필요한 것도 많네. 하나하나 챙기려면 끝도 없겠어.”
에일린은 주섬주섬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다른 건 몰라도 물은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샘이나 강을 찾아보기로 했다. 물 없이 생활한다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저기, 이봐요!”
마침 그녀의 방을 지나치는 작은 정령을 하나 불러 세웠다. 어제의 소동으로 에일린의 존재를 모르는 겨울의 권속은 이제 없었다.
“무슨 일이죠?”
겨울의 정령들은 봄의 정령처럼 투명한 날개 같은 게 달려 있지는 않았다. 대신 그들의 길고 하얀 머리카락이 날개처럼 투명하게 휘날렸다. 차가운 한기가 깃든 몸으로 휙휙 날아다니는 모습이 아름다워 에일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미안하지만 예쁜 정령님. 이 주변에 사람이 마셔도 되는 샘이나 강이 있을까요?”
작은 정령은 겨울의 왕의 권속답게 냉정한 자였지만 에일린이 ‘예쁜 정령님’이라 불러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있죠. 샘물도 있고 강도 있어요.”
“아, 그럼 나 좀 안내해주면 안 될까요?”
작은 정령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왕이 이 인간 여자를 특별하게 대접하는 걸 봤던 터라 무시할 수 없었다.
“따라오세요.”
“아유, 고마워라.”
에일린은 수건으로 쓸만한 천 조각과 탁자 위에 있는 빈 그릇들을 챙겨 들고 작은 정령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 시간 겨울의 왕은 사랑의 여왕 키프리스의 궁전에 와 있었다. 눈의 여왕과 함께 아까부터 와서 기다리는 중인데 계속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겨울의 왕이시여. 여왕님께선 아직 기침하지 않으셨습니다.”
시종이 나와 공손한 태도로 알렸다.
“해가 중천에 뜬 지가 언젠데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다니, 그럴 리가 있겠는가?”
“원래 사랑의 여왕께선 낮보다 밤에 더 바쁘시니까요.”
“밤에 더 바쁜 이유가 뭐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핑계로군.”
눈의 여왕이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그렇긴 하겠군.”
겨울의 왕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예전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지금은 너무나 쉽게 수긍했다. 눈의 여왕은 여전히 의아한 낯빛으로 왕과 시종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저물녘에 다시 오시지요. 그때쯤 기침하시니까.”
“알았다. 나중에 다시 오지.”
겨울의 왕이 돌아서려 하자 눈의 여왕이 막아섰다.
“한시라도 빨리 해독약을 드셔야 하잖습니까? 이대로 그냥 가시면…….”
“나중에 다시 오라지 않느냐? 일단은 돌아갈 수밖에.”
그는 눈의 여왕이 뭐라 하기 전에 겨울 칼바람을 남기며 그 자리를 떴다. 한 번 얼굴에 열이 오르니 다시 갈증이 이는 것 같았다. 불현듯 에일린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멍한 얼굴로 서 있던 눈의 여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따랐다.
***
에일린이 밖에 나오자 세찬 겨울바람이 살을 에는 듯 몰아쳤다. 하늘을 살피니 무수한 겨울의 정령들과 북풍의 모습이 보였다. 일을 하러 가는 중인 것 같았다. 그들을 잠깐 지켜보다 작은 정령을 앞세워 길을 다시 걸었다. 꽤 걸으니 커다란 강이 보였다. 수면이 살짝 언 상태였지만 돌멩이를 집어 던져 깨뜨렸다. 드러난 물을 손으로 떠서 마시는데 웬 여자 하나가 강에서 툭 튀어나왔다.
“으악!”
“뭐야, 내 모습이 보이는 건가? 이 인간 여자는 누구지?”
여자는 물의 정령인 듯했다. 푸른빛이 도는 긴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가졌는데 머리에 수초로 만든 화관을 쓰고 있었다. 지느러미를 닮은 귀에 옷도 푸르스름하고 미끈거렸다.
“아, 저는 운아…… 아니 에일린이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사정이 생겨서 이 숲에 있는 겨울의 왕의 궁전에 머무는 중이에요.”
“겨울의 왕의 궁전에? 무슨 사정으로?”
그녀는 에일린의 옆을 지키는 작은 정령에게 눈길을 보내더니 되물었다. 에일린은 어떻게 말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그냥 얼버무렸다.
“그냥 좀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요.”
기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자 물의 정령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강물을 이용하러 왔으면서 강의 주인인 내게 그러면 안 되지. 말해주지 않으면 물을 못 쓰게 할 거야.”
“그런…….”
에일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원래 이런 강물은 누구든 마음대로 이용하는 거 아닌가? 제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겨울의 왕에게 폐가 될지도 몰랐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일일이 댁에게 허락 맡고 강물을 이용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그들은 내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놔둔 거지. 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어? 사정을 말해줄 때까지 절대로 물을 주지 않을 거야.”
“뭐라고요?”
“대신 이야기해주면 좋은 걸 알려줄게.”
“좋은 거라뇨?”
“보아하니 못해도 한 달은 목욕을 안 한 것 같은 몰골이잖아?”
그녀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진짜 에일린은 원래 살던 곳을 떠난 후부터는 몸을 씻지 못한 것 같았다. 집도 절도 없는 신세에 날씨까지 추웠으니 어쩔 수 없었으리라.
“그래서요?”
“온천이 있는 곳을 알려줄게. 목욕하기 딱 좋은 온천이 하나 있거든.”
“정말요?”
정말 귀가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조금 망설였다. 뜨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씻으면 얼마나 개운하고 상쾌할까? 몇 초 동안 갈등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요…….”
사랑의 묘약 이야기는 빼고 그간 있었던 일을 대충 엮어서 말해줬다. 어쩌겠는가? 물 없이 살 수가 없는 몸인걸. 그리고 사랑의 묘약 이야기는 뺏으니까 그의 명예는 지켜질 터였다. 아니, 그 이야기를 빼면 그게 더 곤란한 걸까? 에라, 모르겠다. 일단 목욕이나 하고 보자. 그녀도 몸이 찜찜하고 가려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냄새까지 나고.
물의 정령의 뒤를 따라 가보니 숲속 한가운데 커다란 동굴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맑은 온천이 샘솟는 게 보였다. 크기도 야외수영장 만하고 그리 깊지도 않아 목욕하기 딱 좋았다. 에일린은 허겁지겁 옷을 벗고 물속에 몸을 담갔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노글노글해지는 기분이었다.
“아…… 정말 좋다.”
“이것 봐, 인간.”
온천까지 안내하고도 자리를 뜨지 않은 물의 정령이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겨울의 왕이 이유도 없이 네게 그런 친절을 베풀 리 없을 텐데? 뭔가 더 깊은 사정이 있는 것 아냐?”
“글쎄요.”
“내가 아는 그는 절대 그런 행동을 할 작자가 아니라고. 우리 정령들 사이에서도 유명해. 겨울의 왕답게 얼마나 냉혹하고 차가운지 옆에 있기만 해도 그 서늘함에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라고. 게다가…….”
그녀가 에일린의 벗은 몸을 쭉 훑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간을 혐오하는, 아니 아예 아무런 관심조차 없던 그자가 너처럼 미인도 아닌 여자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 리가 없지 않겠어?”
에일린은 좀 기분이 나빴다. 이 몸이 어때서 그래? 약간 야위긴 했지만 젊고 날씬하고 건강하고 또……, 그것밖엔 없나? 그거면 됐지. 건강이 최고니까.
“난들 아나요? 정령들만 아는 사정이나 내막이 있을 테죠.”
“흠, 그래?”
물의 요정은 눈을 굴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뭔가 이 지루한 정령의 숲에 재미난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이야기의 결정적인 부분이 깨진 조각처럼 빠진 듯해 답답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만으로도 참 획기적인 일이어서 오래간만에 의욕이 생겼다.
***
겨울의 왕은 궁전에 돌아오자마자 에일린의 방 앞으로 찾아갔다. 바로 문을 열지 못하고 한참 서성였다.
‘내가 왜 이러는 건가? 저 인간 여자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고작 묘약 때문이지 않은가? 그런 것 따위에 굴복하다니……. 이런 행동, 정말 역겹고 한심하지 않은가?’
스스로의 행동이 혼란스럽고 혐오스러워 계속 자책하고 망설였다. 갈등을 거듭하는데 때마침 시종이 다가와 알렸다.
“왕이시여. 정오가 다가옵니다. 오늘은 폭풍을 일으키셔야 합니다. 서두르소서.”
“알았다.”
참고 만나지 않기로 하고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샛별 같은 연초록 눈동자와 촉촉한 붉은 입술이 그리웠지만 억지로 그런 마음을 꾹 눌러 담았다. 중앙홀로 가보니 여러 겨울의 권속들이 대기 중이었다.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옥좌에 앉아 각 정령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눈의 여왕은 오늘 정오를 기해서 겨울에 접어든 안드로스 대륙 북부 전역에 48시간 동안 함박눈을 내리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북풍은 눈의 여왕을 힘껏 돕도록 하고.”
“예.”
“그리고 ‘서리’와 ‘얼음’은…….”
각자의 일을 맡은 정령들에게 임무를 배정하고 힘을 나눠주는 바쁜 일과를 마침내 끝냈다. 겨울의 권속들은 임무를 행하기 전 정령왕에게서 능력을 넘겨받아야 했다. 정령 모두 기본적인 권능을 가졌지만 큰 임무를 앞두고는 왕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때문에 그가 그들의 왕이며 주인인 거였다. 하급 정령들에게까지 힘을 나눠주는 일을 하고 보니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지났다. 겨울의 왕은 에일린의 방을 다시 찾아갔다. 도저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일을 하는 중에도 내내 에일린의 얼굴만 떠올라 조바심이 났다. 갈증도 더 심해져 괴로웠다.
‘그래, 목이 타니까 그 증상을 달랠 필요가 있어. 그래서일 뿐이야.’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주며 애써 행동을 정당화했다. 불쑥 안으로 들어섰다. 심장이 또다시 두근거리고 목소리까지 떨려오는 듯했다.
“에일린!”
아무도 없었다. 침대 위 이불도 들춰보고 화장실도 둘러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방 밖에 있는 정령들에게 물어도 행방을 아는 이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 간 거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큰일이었다. 지금 밖에는 거센 겨울 폭풍이 몰아쳤다. 대책 없이 폭풍 속에 길을 나섰다면 자칫 잘못하다간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겨울의 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지닌 냉기 때문에 굳은 게 아니라 공포 때문에.
에일린이 잘못되면 어떡하지?
순간 떠오른 생각에 그의 머리털이 곤두섰다. 즉시 남아 있는 정령들을 모아 명령했다. 체면이나 망설임 따윈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모두 밖에 나가 흩어져 에일린을 찾아라! 어서!”
“알겠습니다!”
그도 즉시 궁전 밖으로 나갔다. 세찬 눈과 바람 때문에 시야가 어두울 지경이었다. 하늘 위로 몸을 날려 그녀의 행적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은빛과 푸른빛이 섞인 머리털이 날개처럼 사방으로 휘날렸다. 무수한 얼음 조각들이 서걱대며 부서졌다. 수많은 작은 겨울의 정령들이 옆을 수행하듯 날아다녔다. 숲에 사는 다른 정령들은 좀처럼 보기 힘든 겨울의 왕의 등장에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겨울 폭풍 탓에 추웠던 정령의 숲이 그의 등장으로 인해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호기심에 나와 봤던 정령들이 하나둘씩 그들의 거처 안으로 숨어들었다. 찢어질 듯한 바람 소리만 텅 빈 숲을 울렸다.
“캬, 개운해.”
에일린은 오랜 시간 온천에 몸을 담갔다가 몸을 일으켰다. 가져온 천으로 물기를 닦고 벗어뒀던 옷을 주워들었다. 겨울의 왕이 준 하늘색 드레스를 가져왔더라면 좋았을걸. 냄새나는 옷을 다시 입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옷을 다 입고 나니 작은 정령이 동굴 밖을 살피고 와서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밖에 폭풍이 몰아치고 있어요. 지금 당장은 돌아가기 힘들 것 같아요. 폭풍이 멎을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
“어머, 그래요? 폭풍이 언제쯤 멎을까요?”
에일린의 물음에 정령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쎄요. 저는 말단이라 잘 몰라요.”
“그냥 여기 피해 있는 게 나을 거야. 인간 여인. 이런 폭풍에 무작정 나섰다간 얼어 죽고 말걸?”
물의 정령의 말에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동굴 바닥 한쪽에 누워 낮잠이나 자기로 했다. 바닥도 따뜻해서 온돌이나 찜질방에 누워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의 정령도 하품을 하더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겨울의 정령도 높다란 바위 위에 자리 잡더니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따뜻한 공기에 몸이 나른해진 것이다.
겨울의 왕은 하늘 위를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에일린을 찾았다. 하나 어디에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펑펑 쏟아지는 눈과 세차게 몰아치는 겨울바람에 더욱 시야가 좁아졌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함이 밀려왔다. 혹 어딘가 쓰러져 있는 게 아닐까? 눈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거라면? 인간에 대해 잘 모르지만 분명 이런 혹독한 날씨에 노출된다면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낯선 공포심이 밀려들었다. 영원의 존재인 그가 결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심장이 깨져버릴 듯 강하게 요동쳤다. 그를 감싸던 두꺼운 뭔가가 파사삭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놀랍도록 생소한, 간절하고 다급한 목소리가 자신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왔다.
“북풍과 한기! 눈의 여왕! 얼음과 서리! 모든 겨울의 권속들이여! 지금 당장 내 앞에 모습을 보여라!”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온 천지 대기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눈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고 얼음 조각들이 잘게 부서지며 주위에 몰려들었다. 부름을 받은 정령들이 하나둘 그 모습을 나타냈다. 작은 하급 정령들까지 모여든 터라 숲의 하늘이 가득 찼다. 그들이 일제히 뿜어낸 냉기로 인해 아래에 있던 나무들이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였다.
“부르셨습니까! 왕이시여!”
모여든 정령들이 그들의 왕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눈의 여왕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즉시 모든 하급과 중급 정령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궁전으로 복귀하라. 상급 정령들은 남아 내 명령을 듣도록 하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두 지금 당장 환궁하라고! 어서 시행해.”
눈의 여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틀 동안 눈 폭풍을 일으켜야 하지 않습니까? ‘대자연 어머니’께서 내리신 명령일 텐데요?”
그가 날카로운 은청색 눈으로 쏘아보았다.
“내 수하답게 그냥 명령대로 행하면 그만이야. 불복종하는 건가?”
“아닙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눈의 여왕은 여전히 의혹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그녀가 거느린 하급과 중급 정령들을 귀환시켰다. 북풍과 다른 상급 정령들도 같은 행동을 취했다. 남아 있는 상급 정령들을 향해 겨울의 왕이 다음 명령을 내렸다.
“그대들은 어서 흩어져서 에일린을 찾아라.”
“예?”
눈의 여왕은 처음에 자기 귀를 의심했다.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에일린, 그녀를 빨리 찾아야 해. 이 숲 어딘가에 있을 거야.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왕이시여!”
너무 기가 막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의 주군이 약에 중독돼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 이상한 ‘사랑의 묘약’에!
“빨리, 어서 서둘러라. 냉기를 흘리지 않도록 주의하고.”
하급과 중급 정령들은 냉기를 조절하는 능력이 약하므로 상급 정령들만 남긴 거였다. 에일린에게 더 큰 해를 줄까 걱정스러웠기에.
“알겠습니다!”
명령을 수행하러 상급 정령들이 자리를 떴다. 눈의 여왕은 급히 어딘가로 날아가려는 왕을 붙잡았다.
“왕이시여!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당신은 사랑의 묘약에 중독된 것뿐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겨울의 왕이 잠깐 멈칫하더니 곧장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날아가 버렸다. 이제 그녀의 조언 따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의 여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대로 뒀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았다. 더 큰 말썽이 생기기 전에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
“어? 폭풍이 벌써 멎었나 봐.”
물의 정령이 나른해진 목소리로 기지개를 켰다. 에일린도 오래간만에 따뜻한 바닥에서 잠들었다 깨어났다. 따뜻하니 좋긴 한데 딱딱해서 오래 누워있긴 힘들었다.
“그럼 이제 슬슬 가봐도 될까요?”
“그러도록 해. 별일이군. 겨울 폭풍이 이렇게 빨리 멈추다니. 한번 시작되면 2~3일은 기본인데 말이야.”
“으, 하마터면 그동안 여기 갇혀 있을 뻔했겠네요?”
에일린이 얼굴을 찡그리자 물의 정령이 미소를 지었다.
“무슨 걱정이야? 여긴 따뜻하고 물도 있으니 그 정도는 괜찮잖아.”
“그렇긴 하지만…….”
에일린은 말끝을 흐리며 작은 겨울의 정령을 깨웠다. 공기가 따뜻해지니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겨우 깨어나 눈을 비비더니 일어났다.
“음, 어서 나가도록 해요. 이런 곳은 제가 오래 못 있겠어요.”
동굴 밖으로 나오니 날이 완전히 개서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바람도 잦아들어 청량한 겨울 공기가 폐 속 깊이 들어와 기분이 상쾌해졌다. 동굴 안의 열기에 달아올라 있던 뺨이 식으며 온몸이 보송보송해졌다.
“아, 정말 좋은 날씨네!”
“에일린!”
다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먼 하늘 쪽에 익숙한 모습의 겨울의 왕이 접근해왔다.
“어? 이곳까지 웬일이세요? 왕이시여.”
입에 붙지 않는 존칭을 붙여 물었다. 지나가던 길이었나? 하늘을 날던 그가 그대로 낮게 날아와 팔을 내밀었다.
“에일린!”
에일린은 순식간에 그의 서늘한 품에 안겼다. 겨울의 왕이 안는 것과 동시에 땅에 내려앉는 바람에 균형이 흔들려 에일린은 그의 품에 안긴 채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다. 그들 주위에 정령왕이 만들어내는 반짝이는 빛의 궤적이 커다랗게 그려졌다.
“엇!”
“도대체 어디 갔었던 거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이런 혹독한 날씨에 그대가 혹 잘못됐을까 봐…….”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온몸을 죄듯이 안아 들었다. 에일린은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며 숨이 막혔다.
“아니, 저 그냥 온천에서 목욕 좀 하고 가는 길인데요?”
“뭐라고?”
뒤이어 다가온 눈의 여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 봐요! 인간 여인. 고작 그런 이유로 말도 없이 사라져서 왕께서 얼마나 황당한 일을 저질렀는지 아세요?”
“예? 무슨 일을 하셨기에?”
“당신 때문에 왕께서!”
“그만 됐다. 눈의 여왕. 에일린이 무사하니 괜찮다.”
자신 때문에 뭔가 큰 소동이 일어났다고 하니 에일린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죄송해요. 저한테 그렇게 신경 쓰실 줄은 몰랐어요. 저는 그냥 거기 세든 세입자 정도로 생각했어요. 일일이 어디 간다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서.”
물론 집세는 내지 않지만.
“걱정했다.”
겨울의 왕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햇빛 때문일까? 오늘따라 은청색 눈동자가 긴 속눈썹 아래 유난히 선명한 파란빛으로 반짝였다. 에일린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걱정했다, 에일린.”
“왕…… 이시여.”
에일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얼굴은 너무 치명적이야! 이 조각 같은 얼굴에 가슴이 떨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거야.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어.’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리도 아름다운 사람이 자신을 품에 안고 걱정했노라 말하다니.
‘아, 정말 감동적이다. 이 여자 몸에 빙의하길 잘했네. 아마도 신이 나를 불쌍히 여겨 꿈이라도 실컷 꾸라고 이런 세계에 보낸 게 틀림없어.’
새삼 몸의 주인인 에일린에게 고마움이 느껴졌다. 그녀를 이 세계에 보낸 이름 모를 신에게도. 상념에 잠겨있는데 겨울의 왕이 속삭였다.
“키스…… 해도 되겠느냐?”
조금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럼, 당연히 되지. 이런 미남자가 키스해준다는데 완전 환영할 일이지. 에일린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결점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와 날렵한 턱선, 곧은 콧날에 섬세한 속눈썹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부드럽지만 차가운 입술이 그녀의 따뜻한 입술과 맞물렸다. 익숙해지기 힘든 냉기 때문에 에일린은 흠칫 놀라 입술을 뗐다. 순간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싫은 거냐?”
“아, 아뇨! 싫진 않은데 너무 차가워서 그만…….”
정말이었다. 좋은데 너무 차가웠다. 아, 그냥 참고 할 걸 그랬나? 이 남자, 키스도 정말 잘하는데. 에일린의 말에 겨울의 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냉정함과는 달랐다. 말 그대로 어두워진 표정이었다. 햇살처럼 빛났다가 그 빛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미안해요.”
그의 품에 계속 안겨 있자니 몸이 덜덜 떨려왔다. 물론 그는 지금 에일린을 위해 냉기를 뿜지 않으려 주의하고 있었지만 본래 속성을 완전히 억제하긴 힘들었다.
“아니, 내가 미안하구나. 이런 몸이라.”
“아니에요. 그런 말씀은…….”
그의 말이 왠지 아프게 들려 에일린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런 말은 정말 슬픈 말이었다. 전세의 그녀와는 다른 입장이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육체의 한계 때문에 좌절하는 그 기분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촉!”
에일린은 수 초간 망설이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겨울의 왕은 조금 놀란 눈으로 품에 안긴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깃털처럼 가벼운 입맞춤인데도 마치 폭풍처럼 그의 심장을 흔들어대는 것만 같았다. 줄곧 느꼈던 타는 듯한 갈증이나 이유도 없이 밀려드는 조바심과는 또 다른 느낌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며 저절로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 느낌은 뭐지?’
그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 처음 느껴보는 낯선 기분이었다. 아아, 알 수 없는 기분. 이름 붙일 수 없는 낯선 감정의 편린들이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신비한 마법처럼 그에게 몰아닥쳤다. 더 알고 싶었다. 좀 더 겪어보고 싶었다. 그녀의 모습이 순간 너무나 어여쁘게 보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그 키스를 되돌려주며 꼭 끌어안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엷게 남아 있던 겨울의 왕으로서의 자존심과 망설임과 의구심 따위는 이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오직 그녀를 향한 간절함만 남았다. 자꾸만 뜨거운 갈증이 일었다.
“어머나! 정말 놀라운 장면이군.”
물의 정령이 조금 소리 높여 말했다. 여태 그들의 곁에 머물러 있던 참이었다. 이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겨울의 왕이 여자, 그것도 인간 여자를 품에 안고 키스하는 장면이라니. 그녀의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진풍경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눈의 여왕은 미간을 구겼다. 몇백 년 동안 어떤 표정 변화도 없이 살아왔던 그녀였는데 요 며칠 얼굴을 찡그리는 일들이 잦아졌다. 서둘러 주군에게 충고했다.
“왕이시여. 보는 눈들이 많습니다. 이만 환궁하시지요.”
겨울의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에일린을 안은 자세를 바꿨다. 그 모습에 눈의 여왕과 에일린, 그리고 물의 정령이 동시에 놀란 낯빛을 지었다. 그가 에일린의 몸을 위로 안아 든 것이다.
‘우와아, 이건 그거잖아! 공주님 안기!’
에일린은 얼굴이 붉어졌다. 남자에게 이런 식으로 안겨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결혼식 때 웨딩사진 연출을 위해 잠깐 안겨볼 기회가 있었지만 그땐 첫애를 임신 중이라 포기해야만 했었다. 물론 전날 봄의 여왕의 권속인 남풍에게 두 번 안기긴 했다. 그건 단순한 ‘운반’의 개념이었으니 안겼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건 ‘안긴 것’이었다. 인간이 아니긴 하지만 정말 아름다운 남자의 품에.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네!
‘아쉽다. 인간이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이었다면. 그랬다면 정신없이 이 남자에게 빠져들었을 것 같았다.
“날아오를 테니 놀라지 말거라.”
겨울의 왕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에일린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몸이 순식간에 위로 치솟았다. 순간 에일린은 살짝 어지러웠지만 곧 그 느낌에 적응했다. 바람 한 점 없는 겨울 공기가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가 에일린을 위해 최대한 냉기를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의 묘약 때문이든 뭐든지 간에 에일린, 아니 운아는 지금 이 순간이 마치 기적처럼 느껴졌다. 전세의 그 수십 년 삶보다 지금 이 짧은 동안이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자각이 강하게 들었다. 차가운 겨울의 왕의 품속이 그 순간만큼은 그 어느 것보다도 더 포근하게 느껴졌다. 소설에서 봤던 장면들이 지나갔다. 엘시아 황녀가 겨울의 왕의 품에 안겨 하늘을 나는 장면이 있었다. 거기에 묘사된 풍경이 펼쳐졌다.
[모든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린 은빛 나무 군락이 발밑에서 춤을 췄다. 겨울의 정령왕이 뿌리는 얼음과 빛의 알갱이들이 수줍은 그들 위를 엷은 무지개 장막으로 뒤덮었다. 눈이 시리도록 황홀한 그 모습에 엘시아는 벅찬 현기증을 느끼며 설핏 눈을 감았다.]
에일린도 눈을 감았다. 그러지 않으면 감당 못 할 것 같았다. 엘시아 황녀에게서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한 경험을 뺏은 것 같은 묘한 죄책감이 일었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주인공만 이런 행복을 누려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빼앗으면 좀 어때. 많이는 말고, 조금은 괜찮을 거야. 이번 생에서는 기필코 행복해지고 말 거야. 못다 한 사랑도 실컷 하고 이룰 수 있는 모든 꿈을 이루고 말테야.’
피해를 끼친다 한들 뭐 어떻겠는가. 그래봤자 소설 속 인물들일 뿐인데.
‘무슨 수를 쓰든지 반드시 행복해질 것이다! 이건 내게 주어진 두 번째 삶이니까 전세처럼 바보같이 살지 않을 거야. 내 것이 아니면 뺏어서라도 행복해질 테야. 나도 남들처럼 그럴 거라고!’
이번 생에선 그녀가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반드시 그러고 싶었다. 에일린, 아니 운아는 그녀답지 않은 다짐을 굳게 하며 이를 악물었다. 행복해지고 싶었다. 이번 생에서는 정말 행복해지고 싶었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아니 그들보다도 더 행복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할 작정이었다. 어느새 겨울의 궁전에 당도했다. 꿈결 같은 비행이 끝날 시간이었다.
그들을 뒤따르던 눈의 여왕은 궁전 앞뜰에 내려섰다. 얼굴에서 근심이 떠나지 않았다. 사랑의 여왕에게서 해독약도 빨리 구해야 하겠지만 그전에 저 인간 여자를 내쫓아야 할 것 같았다. 그들의 주군이 뭔가 더 큰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군더더기 일을 하기 싫었지만 인간 여자가 말했던 엘시아 황녀 일행에 대해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얼른 자신이 부리는 하급 정령을 서너 명 불렀다.
“너희 둘은 숲 입구를 지키다가 낯선 인간 일행이 지나가면 즉시 알리도록 해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칸 제국 황궁에 가서 엘시아 황녀에 대해 조사해 와라.”
“알겠습니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 후 서둘러 왕을 찾아갔다.
“왕이시여. 다시 폭풍을 일으켜야 하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키프리스에게서 해독약도 받아오셔야 하고요. 잊지 않으셨겠지요?”
겨울의 왕이 무심한 눈빛으로 맞받았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전에 가을의 왕의 궁전에 좀 다녀와야 해.”
“거긴 왜요?”
“에일린이 먹을 음식을 구해와야지. 그의 궁전엔 각종 과일이며 곡식들이 넘쳐날 테니 에일린이 먹을 만한 것도 있겠지.”
눈의 여왕은 순간 너무나 어이가 없어 말을 잃었다. 사랑의 묘약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이자가 여태껏 알던 겨울의 왕이 맞나 하는 의심이 생길 정도였다.
‘이렇게 바뀔 수도 있단 말인가? 정말 무서운 약이지 않은가?’
키프리스와 봄의 여왕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주군을 향해 뭔가 따끔한 말을 퍼부으려다 그만두었다. 약에 중독돼 있는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테니까. 빨리 해독약을 구해 먹이는 수밖에 없었다. 겨울의 왕이 사라지자 그녀도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키프리스의 궁전에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사랑의 여왕 키프리스의 궁전은 커다란 절벽 아래 뚫린 바위굴이었다. 사계절 내내 지지 않는 붉은 장미 넝쿨로 절벽 전체가 뒤덮인 모습이 장관이었다. 진한 장미 향기가 코를 찔러왔다. 가까이 다가가 검은색 하트 문양이 섬세하게 새겨진 나무문을 두드렸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아치형 문이 양쪽으로 열리며 낯익은 시종이 나왔다.
“저물녘에 오시라고 했잖아요.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시종이 불만이 담긴 목소리를 툭 내뱉었다.
“당장 너희 여왕님께 내가 왔다고 전해.”
“아직 주무시는데요?”
“그럼 어서 깨워.”
“그럴 수 없어요. 여왕님은 누군가가 깨워서 일어나는 걸 가장 싫어하시니까. 당신이 그 뒷감당을 하실 건가요?”
단호한 목소리였다. 사랑의 여왕이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눈의 여왕은 한숨을 내쉬며 발길을 돌렸다.
***
짧은 겨울 해가 넘어가고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에일린은 겨울의 궁전 안에 있는 그녀의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까 그랬던 것처럼 뒹굴뒹굴 여유를 부렸다. 그것도 잠시, 또다시 배가 고파왔다. 생각해 보니 오늘은 아침에 먹은 식사가 다였다.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분분하게 울려 퍼졌다.
“으……, 식 때는 왜 이렇게 자주 찾아오는 걸까? 하루에 한 번만 먹어도 온종일 든든하면 얼마나 좋아?”
혼잣말로 푸념을 되뇌었다. 낮에 그렇게 소동을 벌였는데 또 뭔가 요구하기는 좀 그랬다. 참고 일찍 잠이나 자려고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배가 고프니 잠도 오지 않았다. 요란하게 꼬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한동안 몸을 뒤척였다. 이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쩔 수 없다. 사람이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잖아?! 좀 염치없지만 다시 음식을 구해달라고 부탁해 보기로 했다. 문 쪽으로 걸어가 방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끼익
“에일린.”
“깜짝이야!”
자신이 손대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겨울의 왕이었다.
“아, 놀랐잖아요!”
그의 은푸른 눈썹이 살짝 쳐졌다.
“어, 미안하다…….”
“그렇게 마구 문을 여는 거 실례잖아요. 노크 같은 걸 해주셨어야죠.”
“노……크?”
아, 정령이니 모르는 것일까? 에일린은 직접 문밖으로 데리고 나가 시범을 보였다.
“이렇게 닫힌 문을 똑똑하고 몇 번 두드리는 거예요. 안에 있는 사람이 들어오라고 응답하면 그때 문을 열어야 해요. 우리 인간들이 지키는 예절이에요.”
“그렇구나. 알겠다. 앞으론 나도 지키도록 하겠다.”
그럼, 꼭 지켜주셔야지. 그래야 자신도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온갖 흉한 꼴은 다 보인 것 같아 민망하기 짝이 없는데 말이다. 비록 마법약 때문이긴 하지만 자신에게 푹 빠져있는 이 아름다운 존재에게 조금은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근데, 무슨 일이세요? 저도 용무가 있긴 했는데 왕께선…….”
“배고프지 않느냐? 인간들은 하루 두세 번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들었는데.”
먹을 걸 갖다 주려고 온 거야? 너무나 반가워 활짝 웃어주었다. 자신을 챙겨주는 건 역시 이 잘생긴 정령왕밖에 없구나!
“예. 그렇지 않아도 부탁드리려던 참이었어요.”
겨울의 왕은 조금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미소 띤 얼굴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기에. 어제보다 오늘이 더 예뻐 보였다. 인간이니 정령처럼 몸에서 빛이 날 리도 없을 텐데 자꾸만 눈이 부셨다.
“그, 그랬구나. 내가 직접 가을의 궁전에 가서 뭔가 얻어왔다. 가을의 왕이 인간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며 잔뜩 챙겨주더구나.”
“그래요? 어디 봐요!”
겨울의 왕이 마법 공간을 열어 입구가 묶인 커다란 자루를 하나 꺼내주었다. 풀어보니 사과와 포도 같은 과일 몇 개와 올리브처럼 보이는 열매, 알이 굵은 감자와 콩, 당근 따위가 상당량 들어있었다. 정말 반가웠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보는 과일과 채소였다. 그대로 그 앞에 주저앉아 사과 하나를 베어 물었다. 사각거리며 상큼한 즙이 흘러나오는 게 정말 달고 맛이 좋았다. 겨울의 왕은 기쁜 얼굴로 먹고 있는 에일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두 손으로 과일을 잡고 오물오물 열심히 씹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꾸만 엷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상했다. 에일린이 하는 건 뭐든 그에게 기이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를 만나고부터 얼어붙어 있던 그의 심장이 녹았는지, 심장 고동이 자꾸만 제 존재감을 과시했다. 순간순간의 고동이 달랐다. 어떨 땐 저런 느낌, 저럴 땐 또 그런 느낌. 지금은 바로 이런 느낌······. 심장은 마치 저 혼자 살아있는 듯 매 순간 다른 파동으로 요동치며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그녀가 연이어 과일만 먹자 지켜보던 그가 물었다.
“어째서 그런 것만 먹고 여기 있는 건 안 먹는 거지? 이건 못 먹는 것인가?”
그가 에일린이 손대지 않고 놔둔 채소를 가리켰다.
“아, 그건 진짜 먹고 싶지만 이곳에선 먹을 수가 없어서요.”
“어째서?”
“익혀 먹어야 해서요. 여긴 화덕이랑 냄비 같은 게 없어서 요리를 못 하잖아요. 소금 같은 조미료도 없고 불을 쓸 수도 없고.”
에일린이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채소 더미를 주시했다.
“먹고 싶은가?”
“당연하죠. 따뜻한 국물 요리, 정말 그리워요.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죠.”
“구해 오겠다.”
“예?”
“필요한 걸 말해라. 뭐든 마련해 올 테니.”
“감사하지만 죄송해서…….”
“부담감 가질 필요 없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니까.”
에일린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의욕에 찬 듯 짐짓 간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눈빛과 마주쳤다. 저 눈빛. 본 적이 있는 익숙한 눈빛이었다. 전세에서 학원 수업을 할 때 학생들이 앞다퉈서 문제를 풀겠다고 나설 때의 눈빛과 꼭 닮아 보였다. 물론 늘 그랬던 건 아니고 작은 경품이나 아니면 과할 정도의 칭찬이 걸려 있을 경우의 얘기지만.
“저, 그럼 부탁드릴게요. 철 재질로 된 냄비랑 식칼이랑 소금 같은 조미료가 필요한데 구할 수 있을까요?”
“문제없다. 내게 맡겨라.”
경품은 없으니 과할 정도의 칭찬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
겨울의 왕이 어딘가에서 손잡이가 달린 바구니 모양의 검은 주물 냄비 하나와 부엌칼을 구해왔다. 수프나 스튜를 끓일 때 쓰는 용도 같았다. 어느 주방에 가서 가져왔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저번처럼 산짐승을 잡아다 대신 놔두고 왔다는 말을 해줘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급히 사라지더니 소금까지 마련해왔다. 바다의 정령이 사는 곳까지 다녀온 모양이었다. 화덕은 없었지만 모닥불로 조리하면 될 것 같아 에일린은 궁전 밖으로 나왔다. 겨울의 왕과 몇몇 호기심 많은 하급 정령들이 따라나섰다. 그가 잠시 겨울바람을 궁전 안으로 불러들인 상태라 날씨는 바람 한 점 없이 온화했다. 에일린은 서둘러 마른 나뭇가지와 돌덩이를 여러 개 모아 모닥불을 지필 준비를 했다. 하급 정령들 몇이 나뭇가지 모으는 일을 자진해서 도왔다. 조금 큰 돌덩이는 겨울의 왕이 강가에 가서 주워왔다. 냄비도 씻어 물을 담고 재료도 다듬어 한꺼번에 썰어 넣었다. 이제 불을 지필 차례였다.
“저기, 마법으로 불을 지펴주실 수 있을까요?”
겨울의 왕에게 물으니 그가 난처한 듯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음……, 나는 겨울의 정령이라 불 속성 마법은 쓰지 못한다.”
“예? 그래요?”
유감이었다. 그럼 어떡하지? 애써 이렇게 준비했는데 무용지물이 되는 걸까.
“하지만 불을 일으킬 수 있는 정령을 부르는 건 가능해.”
“어, 그러세요?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아유, 놀래라. 진작 말해주지. 바싹 다가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청했다. 그가 다시 조금 얼굴을 붉혔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수줍어하는 듯 보였다. 그는 잠시 누구를 부를지 고민했다. 불을 일으킬 수 있는 정령은 의외로 많았다. 불의 정령은 두말할 것도 없고 대지의 정령이나 여름의 정령도 불 속성 마법을 쓸 수 있었다. 불의 정령은 그와 너무 상반된 기운이라 다소 버거웠다. 대지의 정령은 별로 친한 자가 없고……. 그나마 여름의 정령이 적당할 것 같았다. 마음이 정해지자 곧 입술을 달싹거리며 누군가를 소환하는 주문을 읊었다.
“δΣΫΨΩϊΝξΏΰπΐβδΚΓΔΐΠΟίφΘ”
정령들이 쓰는 언어였기에 에일린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의 귀로 듣기에는 말이라기보다는 바람 소리나 물소리에 더 가깝게 들렸다. 나지막이 울리는 신비로운 그의 영창이 끝나자 숨이 턱 막히는 뜨거운 열기와 함께 타원형의 황금빛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눈을 뜨기 어려울 만큼 반짝이던 빛 무리가 한순간에 잦아들더니 그 속에서 한 여인의 형상이 나타났다. 한 갈래로 묶어 늘어뜨린 긴 금빛 머리에 루비처럼 투명한 붉은 눈빛을 빛내며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 형태의 노란 드레스를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봄의 여왕보다 좀 더 육감적인 몸매에 활동적이고 성숙해 보이는 이미지였다. 그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마를 찡그렸다. 겨울의 왕이 말문을 열었다.
“부탁이 있어 불렀다. 여름의 여왕. 부디 들어주길 바란다.”
“무슨 일이지? 당신이 나를 부르다니 정말 별일이군.”
살짝 졸음에 겨운 듯 느리고 나른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에일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넌 인간 같은데 누구지? 어째서 여기 있는 거냐?”
“저는…….”
겨울의 왕이 냉큼 에일린을 대신해 내뱉듯이 말했다. 딴에는 그녀를 지켜주려는 의도 같았다.
“그런 건 알 것 없고 그냥 내 부탁만 들어주면 돼.”
그의 냉정한 말에 여름의 여왕이 재차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하, 여전하군. 당신의 그 오만한 태도는.”
불만스러운 한마디를 던진 후 다시 한번 에일린을 쏘아보다 체념한 듯 투덜거렸다.
“부탁이 뭔지 말해 봐. 도대체 얼마나 급한 용무이기에 일찍이 잠에 빠져든 나를 깨운 거지?”
그녀는 여름이 끝난 후 봄의 여왕의 재판 때 잠깐 깨어난 걸 제외하곤 줄곧 잠들어있던 상태였다. 해서 겨울의 왕에게 일어난 일들을 알지 못했다. 그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을 좀 붙여다오.”
“뭐라고?”
그가 에일린이 만들어놓은 간이 화덕을 가리키며 명령하듯 말했다.
“여기 불을 좀 지펴달라고.”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화덕을 노려보다 다시 겨울의 왕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두 팔을 허리춤에 올린 자세였다. 화가 단단히 난 듯 보였다.
“뭐야! 깊이 잠들어 있던 나를 깨워서 한다는 말이 고작 불이나 지펴달라는 건가? 하아, 당신 정말······.”
“부탁한다고 했잖은가?”
“참, 나. 부탁한다는 말만 붙인다고 부탁하는 게 되는 거야?”
“그럼 됐지 뭘 더하라는 건가?”
“하! 진짜 기가 막혀서.”
두 정령왕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부탁하는 자나 부탁받는 자나 자존심이 대단한 듯 사납게 째려보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지켜보던 에일린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자신 때문에 잠을 깨게 된 여름의 여왕에게도 미안하고 애꿎은 역성을 듣게 된 겨울의 왕에게는 좀 더 미안해졌다. 조심스럽게 여름의 여왕에게 말을 걸었다.
“저, 죄송해요.”
여름의 여왕이 매섭게 치뜬 눈으로 그녀를 향했다.
“뭐라고?”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
겨울의 정령왕이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말렸다.
“에일린, 그대가 사과할 필요 없다.”
“왜 없어요? 저 때문에 곤란해하시는데 제가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죠.”
“…….”
그녀가 다시 여름의 여왕을 향해 조곤조곤 설명했다.
“정령님. 사실은 제가 음식을 해 먹으려고 겨울의 왕께 불을 좀 피워달라고 부탁드렸던 거예요. 본의 아니게 곤히 잠드신 걸 방해한 것 같은데 정말 죄송해요.”
여름의 여왕의 두 눈이 한층 더 커다래졌다. 에일린은 두 손을 다소곳이 맞잡은 채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왕 이리되신 거니 불을 좀 지펴주시면 안 될까요? 그럼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대는…… 누구인가?”
“저는 우연히 겨울의 궁전에서 살게 된 식객이에요. 인간이다 보니 음식을 먹어야 해서 부득이 이런 폐를 끼치게 됐네요.”
정령의 여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에일린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 내렸다. 자신이 잠든 사이 이 정령의 숲, 아니 겨울의 왕에게 뭔가 기이한 일이 발생한 게 분명했다. 좀 더 자세히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지만 고드름처럼 날카롭게 꽂히는 겨울의 왕의 시선이 신경 쓰여 단념했다. 따로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다시 한번 에일린의 모습을 살폈다. 마른 몸매에 평범한 얼굴 생김새, 딱히 특이할 것 없는 용모였다. 하지만 정령왕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행동과 약간 당돌하게 느껴지는 선명한 연초록 눈만은 눈길이 갔다. 조금 흥미가 생겼는지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좋아. 그대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아울러 불도 지펴주겠다.”
“와, 감사합니다!”
에일린이 활짝 웃으며 다시 한번 꾸벅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여름의 여왕은 왠지 조금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곧장 손가락을 까딱 움직여 어설픈 간이 화덕에 불을 붙여주었다.
“와아아! 멋지다, 정말 불이 붙었어!”
에일린이 손뼉까지 치며 환호성을 지르더니 모닥불 가까이 다가가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정말 기뻤는지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본 겨울의 왕과 여름의 여왕은 동시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둘 다 어쩐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여름의 여왕은 슬쩍 겨울의 왕을 곁눈질하곤 그 어느 때보다도 놀라고 말았다.
저 치가 저런 미소를 짓다니. 그것도 여자의 모습을 보고.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진한 호기심이 일었지만 애써 그 마음을 억눌렀다. 본인에게 물어본다 한들 대답해줄 작자가 아니었다. 에일린은 준비해둔 냄비를 불 위에 올리고 깨끗한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와 휘휘 젓기 시작했다. 겨울의 왕이 홀린 듯 지켜보다 문득 생각난 듯 여름의 여왕을 돌아봤다.
“그대는 그만 가 보도록 해.”
그녀가 코끝을 실룩거렸다.
“쳇, 알았어. 이제 쓸모없다 이건가?”
에일린이 급히 불러 세웠다.
“아, 정령님! 괜찮으시다면 한 그릇 드시고 가실래요?”
말을 마치자마자 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내 난처한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아, 정령이시니까 음식 같은 건 안 드시겠죠? 드시고 가면 좋을 텐데······.”
여름의 여왕의 두 눈이 한껏 둥글게 휘었다.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정령이 이런 표정을 지으며 웃는 것은. 그녀는 이 인간 여인이 마음에 들었다.
“말이라도 고맙군. 인간 여인. 그대의 이름은 뭐지?”
“에일린이라고 해요.”
“에일린, 기억해 두지. 나는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라고 한다.”
“아, 에스타스님이셨군요. 이름도 모습처럼 정말 멋지시네요. 발음이 참 근사하게 들려요.”
그녀가 몇 번 중얼거리며 에스타스의 이름을 되뇌었다. 흔한 아부가 아니라 정말 그렇게 느껴서 하는 칭찬 같았다. 에스타스의 눈이 다시 한번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기분 좋게 들리는 말을 하는구나, 난 이만 가 볼 테니 또 기회가 된다면 만났으면 좋겠다. 음……, 다시 불을 지펴야 할 일이 생길 때 불러다오. 화내지 않고 와줄 테니.”
“와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러다 겨울의 왕이 강렬하게 흘기는 눈빛과 마주쳤다. 누가 보면 질투하는 거라 착각할 것 같은 시선이었다. 에스타스는 코끝을 찡그리며 인사했다.
“저자를 자주 보고 싶진 않지만 어쨌든 다시 만나도록 하자. 에일린. 난 이만 가보겠어.”
“예, 안녕히 가세요.”
에일린이 머리를 꾸벅하고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몸을 감싸던 반짝이는 빛의 흔적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우여곡절 많은 스튜가 어느새 다 익었다. 에일린은 전날 북풍이 가져왔던 음식을 담았던 그릇 중에서 작은 걸 골라 국자 대신 사용해 스튜를 덜었다. 소금만으로 간을 한 음식이라 다소 밋밋했지만 정말 오래간만에 먹는 국물 요리라 그런지 맛있게 느껴졌다. 두 접시 정도 비우고 나니 만족스러운 포만감이 들었다. 에일린은 즉시 냄비를 불 위에서 내리고 한쪽으로 잘 치웠다. 뒀다가 다음 날 먹으면 될 것 같았다. 꽤 양이 많으니 하루 정도는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니, 아직 재료가 많이 남았으니 한 며칠은 괜찮을 것이다. 따스한 온기를 내며 타오르는 모닥불이 아까워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뭇가지를 좀 더 밀어 넣어 불 크기를 키웠다. 오랜만에 접하는 훈훈한 열기가 기분 좋게 다가왔다.
타닥타닥
숯덩이가 된 나뭇가지가 부딪히며 타는 소리가 무척 따스하게 느껴졌다. 계속 지켜보고 있으려니 이런저런 생각이 밀려들었다. 오늘 에스타스를 만난 것도 정령들과 친분을 넓히는 일에 속할 터였다. 사실 이런 것도 소설 속에서는 엘시아 황녀가 겪어야 하는 일들이었다.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원래대로라면 겨울의 왕의 사랑을 받는 것도, 그로 인해 정령들과 친분을 쌓고 그들의 힘을 얻는 것도 모두 엘시아 황녀가 경험해야 할 일들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친 그녀가 이후 훌륭한 정령사로 성장했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아젤란을 위기에서 구하고 자신의 운명까지 바로 세우는 일을 해냈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이 이런 일들을 겪는 걸까?
‘죽을 때 소설 속 여주인공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바란 덕분에?’
어떤 이름 모를 신이 그 간절한 마지막 소원을 이뤄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엘시아 황녀가 해야 하는 일들을 자신이 대신해내야 하는지도.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 세계를 책임져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큰 부담감이 느껴졌다.
“하아…….”
아니야.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소설에서 겨울의 왕은 조연에 불과하니 바뀐 내용이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때 작은 하급 정령 몇이 호기심에 모닥불 가까이 접근했다.
“으악!”
뜨거운 열기에 화들짝 놀라더니 튀는 공처럼 저만치 물러났다. 그 광경을 보고 에일린은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아하하…….”
아까부터 겨울의 왕이 그녀의 뒤에 버티고 서 있는 게 의식돼 넌지시 권했다.
“저기, 왕이시여. 괜찮으시다면 여기 와서 앉으시겠어요?”
뭐, 불의 기운이 꺼려진다면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녀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옆에 자리를 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서늘한 한기와 함께 푸릇한 향기가 훅 끼쳐왔다. 에일린이 되레 걱정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불 옆에 앉으셔도.”
“조금 불쾌하긴 하지만 어찌 되는 건 아냐. 정령왕의 몸이니 불 가까이 있는 정도로는 아무 지장 없다.”
“그렇구나.”
한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한쪽 팔을 올린 자세였다. 조금의 빈틈없이 반듯한 자세로 앉아있는 그를 찬찬히 응시했다. 적당히 높게 솟은 콧방울과 기다란 속눈썹, 섬세한 얼굴선이 모닥불 빛과 그 자신이 내뿜는 찬란한 빛 속에서 단정한 선을 그려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매혹적인 자태가 절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가 오늘 그녀를 위해 한 일들을 생각하니 왠지 감격스러워졌다.
“저, 왕이시여.”
“뭔가?”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미안했고요, 여러모로.”
“미안해할 필요 없어. 모두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니까.”
아유, 모습만큼 말도 참 예쁘게 해.
“당신이 좋을 게 뭐 있어요? 제가 하루 종일 폐만 끼쳤는데.”
사실 에일린도 염치는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만큼 빚지기 싫어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지금 상황이 이러니 원치 않게 계속 피해만 끼치고 있지만.
“저 원래 이런 사람 아니거든요? 이렇게 다른 사람한테 빌붙어서 신세만 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녀도 사실은 이런 멋진 존재에게 가능하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당연히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이런 대책 없는 민폐 덩어리가 아니라 당당한 한 인간으로, 더 나아가 어여쁜 한 여인의 모습으로 있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형편이 이러니 어쩔 수가 없었다. 모르긴 해도 겨울의 왕이 사랑의 묘약을 먹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을 정말 혐오스럽고 역겨운 시선으로 봤을 것이다. 그 생각에 미치자 수치심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까보다도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겨울의 왕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부끄러워졌다.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
정령왕이 여전히 굳은 듯 보이는 얼굴에 정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가 서늘하고 그윽한 은청색 눈을 부딪쳐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단언하듯 분명하게 얘기했다.
“그대가 내게 와줘서 잘 됐다고 생각해. 또 이렇게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아까 그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때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내가 일으킨 겨울 폭풍에 희생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심장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언제나 냉정한 그의 두 눈이,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가운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발갛게 빛나는 모닥불 때문일까?
“처음이었다.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
“그리고 고마웠다. 아무 일 없이 이렇게 다시 와줘서.”
에일린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겨울의 왕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내 곁에 있어 다오.”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난 뭔가가 에일린의 심장을 찌르르 자극하는 것 같았다. 불에 덴 듯 얼굴이 홧홧해졌다. 에일린은 그의 눈을 애써 외면하며 모닥불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하하, 고마운 말씀이지만 계속 이렇게 지낼 순 없잖아요. 그래서도 안 되고. 당신에게 계속 폐를 끼치고 짐 덩어리가 되는 건 제가 싫어요.”
“짐 덩어리라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
“예?”
그가 느리게 몸을 돌려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운 채 다가앉았다. 여전히 살얼음이 낀 듯 차갑고 경직된 눈빛이었지만 저 안쪽 어딘가에서 피어오른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더없이 부드러운 정령왕의 중저음이 노래하듯 새어 나왔다.
“오히려 그대는 내게 항상 기쁨만을 주는 존재다.”
“아…….”
에일린, 아니 운아는 모닥불에서 시선을 거둬 천천히 그를 응시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저런 말을 누군가에게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만 49년 평생에 처음이었다.
“한 번만…… 더 이야기해줄래요?”
조금 목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대는 내게 항상 기쁨만을 주는 존재라고 했다.”
“정…… 말요?”
“그래. 정말이다. 정령은 거짓말 따윈 하지 않아.”
“정말…… 이죠?”
“그렇다.”
주르륵
에일린의 두 눈에서 한줄기 물줄기가 흘러 내렸다. 마주 보던 겨울의 왕의 두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한 것일까? 인간이 눈물을 흘린다는 건 뭔가 슬프기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왜 그러느냐? 내가 또 잘못을 저질렀느냐?”
에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전세에서 들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어느 늦은 밤, 술에 취한 채 들어온 남편이 그녀에게 저주처럼 퍼붓던 말들이.
-너 같은 여자, 존재 자체가 짐이라고. 차라리 그때 죽어버리지. 그럼 정말 좋은 아내였다고 추억해줬을 텐데.
목이 메어 말하기 힘들었지만 다시 속삭이듯 부탁했다.
“한 번만…… 더 말해주세요.”
“……?”
“한 번만 더요.”
“그대는 항상 내게 기쁨만을 주는 존재야.”
“감사해요.”
“뭐가?”
“그렇게 말해줘서요. 그런 말을 듣게 해줘서 감사해요.”
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그저 헛된 찰나의 망상일 뿐일지라도.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지금 이 순간 세상의 그 어떤 말보다도 기쁘고 감사하게 들렸다.
“…….”
고마운 그에게 웃어주고 싶었는데 자꾸만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계속 어깨가 들썩였다. 겨울의 왕은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라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흔들리는 가냘픈 어깨를 끌어당겼다. 순순히 안겨 온 그녀의 몸이 넓은 품속에 소리 없이 감겨들었다. 왠지 그의 손도 떨려오는 듯했다. 천천히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의 심장이 그렇게 하라고 두근두근 일러 주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