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내가 어떻게 해줄까요?”
에일린은 그녀 앞에 서 있는 고귀한 존재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저 마주 대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을 떨게 만드는 차가운 한기를 지닌 남자.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절로 느껴져 멀리하고 싶었다. 또 한편으론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모습 때문에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부디 내게 키스해 줘. 지금은…… 단지 그것뿐이야.”
겨울의 왕이 말했다. 키스해 달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한없이 차갑고 냉정하게 들렸다. 누군가를 경멸하거나 저주할 때나 내뱉을 것만 같은 어조였다. 목소리는 그 모습만큼이나 신비롭고 맑았지만. 하지만 그 말투와는 다르게 그의 은청색 눈동자에는 이글거리는 열정이 담겨 있는 게 느껴졌다. 운아, 아니 에일린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뭔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고개를 치켜들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좋아요, 그까짓 키스 한 번 한다고 입술이 닳는 것도 아니고. 뭐, 해 줄게요. 이리 와요. 청년.”
“청…… 년?”
“나는 그쪽 이름을 모르니까. 아, 참, 그러니까…… 왕이시여.”
그랬다. 에일린으로 빙의하기 전에 읽었던 그 소설책에서도 정령왕의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겨울의 왕’이었을 뿐. 그가 지금 왜 키스를 갈구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것 역시 소설책에 나오니까. 그가 조금 주저하는 몸짓으로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와서도 좀처럼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에일린은 보고 있자니 속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정말 갑갑하긴. 까짓것 그냥 하면 그만인데. 뭘 이렇게 뜸을 들여. 에잇!’
에일린은 성큼 다가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예상했지만 섬뜩할 만큼 차가운 입술 감촉에 잠시 놀라 움츠러들었지만 참고 그 입술을 살짝 눌렀다. 그의 은청색 눈이 흔들리며 크게 떠졌다가 곧 감겼다. 처음엔 분명 에일린의 주도로 시작된 입맞춤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더 적극적으로 임했다. 마치 오랫동안 타는 갈증에 시달려온 사람처럼 에일린의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에 취하듯 탐닉했다.
“으음…….”
에일린의 입에서 생소한 음이 새어 나왔다. 차갑기만 했던 그의 몸에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온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인간이 아닌 그의 몸엔 달콤하고 싱그러운 향기가 가득 맴돌았다. 접촉할수록 향긋한 청량감이 기분을 좋게 해주었다. 처음엔 무척 조심스럽고 굳은 듯 소심했던 정령왕의 몸짓이 갈수록 유연해졌다. 그녀의 입이 간절히 찾던 샘이라도 되는 양 오랫동안 비비고 지분거렸다. 이내 그녀의 숨결까지 삼킬 듯 기세를 더욱 올렸다.
얼음같이 투명한 보석으로 이뤄진 커다란 궁전 안, 두 사람이 자아내는 묘한 화음이 크게 울렸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아찔한 키스를 받으며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차갑지만 불처럼 뜨거워.’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모순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