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그날의 정원
이제 다 끝났다.
다그닥거리는 말굽소리가 잦아들고 암갈색 잣나무들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푸른 물결이 사라지자, 이윽고 숲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부취의 내음과 피비린내가 아스라이 뒤섞여 내 코끝을 간질였지만, 그 사실은 변함없었다.
아올리스의 마지막 기사가 수색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단 한 문장. 단 한 문장이 마침표를 찍었을 뿐인데 잎사귀들의 사이에서 부서져 내리는 햇볕 속에서, 산산하게 흔들거리며 머리결을 쓸어내리는 바람의 속삭임 속에서, 어디론가 망명했다 여긴 안온과 고요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만뢰가 죽은 듯한 그 온화하고 적막한 시간 속에 잠시 눈을 감고 몸을 맡기고 있자, 곁을 지키고 있던 아몬이 넌지시 말을 붙였다.
“다 마무리되었네. 그대의 머리색으로 위장한 사체 하나를 골짜기에 던져 놨으니, 아올리스의 기사들이 모두 눈먼 게 아니라면 모두 그대가 세상을 뜬 걸 알게 되겠지.”
그 소리에 굳게 내리감았던 눈꺼풀을 밀어 올린다. 어둠에 먹혀 흐릿해진 시야로 아까는 미처 보지 못한 광경들이 하나둘 피어올라. 푸른 풀잎들에 이슬 대신 맺혀 있는 핏방울과 산길에 무성하게 핀 들꽃 대신 곳곳에 자리한 시체의 파편들.
이곳은 더 이상 내가 머물 곳이 되지 못해. 아마 이제 나는 또 다른 숨구멍을 찾아 헤매야 할 것이다. 내 눈과 귀를 불투명한 장막으로 가리고 수면 아래 깊게 침잠할 수 있는 공간을. 그리하여 신기루 같은 세계가 나를 삼켜 맥동 치는 심장까지 평온을 되찾아 줄 장소를.
“이제 어디로 갈 건가? 내 생각엔 우리와 합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대의 정체를 들키지 않게는 내 보장하지.”
귓가를 파고드는 말이 퍽 우습다. 그저 농으로 치부하려 고개를 틀었는데 마주하는 눈빛이 꽤나 진중하다. 대답 대신 나는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둥근 호숫가를 따라 걸었다. 도래에 무성히 자라난 정체 모를 야생화들은 수면 아래에서도 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물빛이 하도 맑아 어느 쪽이 진짜인지 구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곳에는 내가 있다. 모든 색에 무채색을 섞어서 진하게 뭉개 놓은 명화처럼 메마르고 불투명한 내가 아닌 붉은 낙조에 곱게 씻겨 빛나는 여인이. 호수에 손을 더욱 깊이 담근 것은 그 어여쁜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닿고 싶은 마음인지도 몰랐다. 만물이 얼어붙는 계절, 유독 긴 그 계절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물은 얼음 조각을 쥐고 있는 것처럼 내 손을 얼얼하게 만들었지만, 그 무감함을 느긋하게 즐길 정도였다. 문득, 이대로 이곳에 침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즘,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그 호수 아래보다는 우리랑 같이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글쎄, 티케들은 이제 지긋지긋해서.”
피식, 흘린 웃음과 함께 긴 적막 끝에 답을 주자, 아몬의 낯 위에는 퍽 실망스러운 기색이 연연했다.
“아몬, 내가 사라짐으로 아올리스에 불어올 끝없는 파란에, 그 속에서 찾게 될 그대의 영광에 만족하게. 물론, 공녀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약조는 지키고.”
담담히 흘러나오는, 그러나 분명하게 다가올 영예로운 앞날을 기약하는 말에 아몬은 그제야 희미하게 드러난 아쉬운 표정을 거두어들인다. 이만 부하들에게 돌아간다, 손짓을 하고는 말 위에 올라타면서.
“좋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항구까지 갈 건가? 함께 이동해 주지.”
그의 손신호에 전열을 가다듬은 숲의 약탈자들을 무심히 배회하던 눈은 이내 어딘가로 흐르듯이 닿았다. 그 시선 끝에 나타난 곳은 이 숲에 머무는 동안, 내 하루를 책임져 주었던 나의 요새다.
“되었네. 잠시 들를 곳이 있어서.”
“그럼 이렇게 끝인 건가?”
심상한 눈빛으로 숲을 한번 느릿하게 살핀 아몬은 그 모든 것을 일별하고는 나를 직시해 왔다.
“티케의 가호가 그대와 함께하길, 아델리아 공작.”
***
정말 다 끝났어.
몇 가지 물건들을 가지러 동굴에 오자, 진정 끝이 실감 났다. 나는 허망한 눈으로 한때 나에게 끝없는 안온을 제공해 주었던 공간을 들여다보았다.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음암하기 짝이 없는 장소. 이제껏 내가 걸어온 길처럼 막막한 어둠만이 가득했던 공간. 천장을 가로지르는 기괴한 종유석들을 스치듯 지난 나는 그 암흑 속 어울리지 않게 자리하고 있던 내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후작이 준 보검과 파툼들. 앞으로 제국을 떠나 머물려면 지금과 같은 생활은 불가능할 것이니 응당 챙겨 마땅한 것이다. 어쩐지 조금은 아쉬운 마음까지 든다는 생각과 함께 간소한 짐들을 챙기던 내 손이 멈칫한 것은 이제는 조금 낯익어진 물건을 발견한 직후였다. 언제고 공녀가 만들어 주었던 화환이 그 끝에 있었다. 이제는 전부 시들어 버린.
그 메마른 꽃들의 묶음을 손에 쥐어 올리자, 당연한 수순처럼 내 손끝에서 바스라진다. 마치 우리의 끝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
다 끝이야.
어쩌면 그 문장을 되뇌일 때마다 들었던 그립고도 아릿한 마음 어딘가에 조금은 이 화환을 만들어 준 주인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불쑥 치닫자, 나는 기어코 손아귀에 힘을 더욱 준다.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궈진 시든 꽃잎들의 소리가 지나치게 고요해진 적막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위로 흘러 나오는 건 나를 들쑤시는 정체 모를 감각들을 짓눌러 줄 다짐들이다.
‘공작, 거래를 제안하지. 그대도 원하는 걸 얻고 나도 원하는 걸 얻을 완벽한 거래 말일세.’
그 애를 포기하게 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는.
‘그대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길 바란다는 걸 모르지 않네.’
얽히고설켜 이제는 도무지 어떻게 풀어야 할지 보이지 않는 이 엉킨 실타래를 끊어 낼 방법 역시. 그 애는 결코 멈추지 않을 거고, 그 끝이 가져올 파국 역시 분명하므로.
그래, 이 방법밖엔 없어.
처음에는 악을 쓰고 울부짖어도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공녀도 받아들이고 말 것이다.
한참이고 이제는 본디 무엇이었는지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꽃의 잔해를 바라보던 왜인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동굴 밖으로 내디뎠다.
저녁노을이 비껴 들어와 숲의 이파리와 나뭇가지들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시각, 바깥에는 그저 사람의 눈으로 멀리서 보자면 그게 핏물인지 낙조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는데, 숲의 온갖 들짐승들은 그 미묘한 차이도 어렵지 않게 구분하여 벌써부터 수풀이 우거진 공간에는 사방팔방에서 굶주린 짐승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런 자연의 순환과 이치를 멀리서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그 속에서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일순 호흡을 멈춘다. 온통 붉은 빛깔로 만연한 공간 속 사위지 않는 극채색의 금빛이 내 시야를 할퀴고 명치를 때려 와.
세이.
혀끝에 맴돌기만 하던 그 단어가 이번에도 차마 떨어지지 않고 입안을 머뭇거리고 있을 즘, 곧 검은 짐승의 무리들이 그 금발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어째서. 왜. 뒤따르던 물음에 채 마땅한 답을 찾아내기도 전에 나는 기어코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찢고 만다.
“세이!”
***
공녀의 수색은 예상보다 더 난항을 겪고 있었다.
“……단장님.”
석양에 제 긴 그림자를 던지는 짐승들. 사방에서 몰려오는 그것들을 피로에 물든 눈으로 바라보던 니벨론 기사단장은 부하의 말에 수런수런하게 요동치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마, 필시 돌아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올라오는 게 어떠냐는, 그런 제안일 터. 허나, 어찌 티케를 보호할 막중한 임무를 맡은 그가 그에 동의할 수 있겠나.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낯을 갈무리한 기사단장은 침착한 목소리로 부하를 다독였다.
“일단, 그래도 저 협곡까지라도 수색을 하지.”
뭐 이렇다 할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만. 그제야 미묘하게 번지고 있는 공기의 기류를 느낀 기사단장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가늘게 뜬 눈으로 한곳에 초점을 고정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기사는 그럼에도 어딘가 넋을 잃은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기사단장은 비현실적인 공간 어딘가를 유영하고 있는 기사의 어깨를 흔들어 본다.
“경? 무슨 일인가.”
몇 번의 채근에도 느리게 동공만 여닫던 기사는 한참 후에야 다시 한번 읊조리듯 그를 불러 세웠다.
“단장님.”
“왜 그러나.”
이제는 짜증의 기색이 역력한 말투 역시 느끼지 못한 것처럼 굴던 기사는 대답 대신 마디 굵은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닿은 곳, 아까부터 멍한 시선이 박혀 있는 그곳을 쫓아 기사단장은 뒤늦게 시선을 돌렸다. 불에 그을린 것처럼 버석 메마른 나무가 을씨년스럽게 앙상한 가지만을 남긴 채 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있는 광경이 그 끝에 있었다.
전투 중 화재라도 있었던가.
기사단장은 살짝 고개를 외로 기울이며 눈앞에 펼쳐진 다소 뜬금없는 풍경의 정체를 곱씹어 보았다.
아니야, 정말 화재가 일었다면 벌써 한바탕 난리가 났을 게 아닌가. 그럼 저건 뭔가.
그렇게 계속되던 무의미한 관찰이, 덧없는 물음이 그의 혀끝에서 소멸한 것은 그 뒤로, 그 뒤의 뒤로 펼쳐지는 끝없는 황폐함을 목격했을 무렵이었다. 하늘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밤의 시간보다 더 빠르게 어둠에 묻힌 풀잎들을 지난 그의 시선은 스산한 풍광이 나비치는 숲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아연함을 감추지 못했다.
맙소사.
숲이 죽어 가고 있다.
아미타 숲이!
***
모든 게 다 끝나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말이다.
끊어진 기억, 시리듯 저려 오는 온몸.
폭주 후에 찾아오는 익숙하고도 불쾌한 감각을 미처 지워 내리기도 전,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것이었다. 헐떡거리는 호흡과 소란해진 사위로 핏물로 뒤엉킨 네가 보인다. 그 사이로 나비치는 모르스의 흔적이 지는 석양의 빛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세이?”
주체하지 못할 떨림이 스며드는 공간 속, 내 채근에 간신히 벌어진 눈꺼풀 사이로 흐릿해진 벽안이 보여. 다가올 끝을 예감하여 사위어가고 있는 푸른 눈이. 거무스름한 멍들이 점점 번져가는 뺨, 이를 지워 내려 여린 볼을 매만지던 나는 불쑥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기억 하나에 다급히 손을 거두어들였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떨리는 손끝에서 나온 것은 긴 세월 속에서도 면경처럼 매끈한 자태를 잃지 않은 보검이다. 손때 하나 묻지 않는 손잡이를 꾹 움켜잡은 나는 그 가운데 텅 비어 버린 공간, 언제고 하이가의 보석이 자리했을 그 자리에 항시 가슴 위에 차고 있던 브로치를 끼워 넣는다.
제국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힘이 몰고 올 진동을 고대하며. 그리하여 파멸로 치닫는 이 끝을 되돌릴 수 있다는 기대를 걸고.
허나,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응이 없어.
아무리 흔들고 충격을 줘도 되돌아오는 건 공허한 헛손질뿐. 초조함이 깃든 눈이 미동 없는 보검을 깨울 방법을 찾아 여기저기 배회하다 발견한 건 선명한 금이 가져 있는 브로치, 그러니까 지금 보검에 박혀 있는 에메랄드빛 보석이었다. 느리게 여닫히는 눈으로 보석에 남겨진 균열의 흔적이 점차 선명해진다. 하이가의 힘이 깃든 보석은 모르스의 힘에 부서지지도 망가지지도 않는다는 사실 역시 함께.
……후작님이 틀렸어. 이것도 가짜야.
마지막 남은 희망이 헛되었다는 것을, 그 바람이 덧없었다는 것을 깨닫자 남은 의지마저 잃은 손 틈 사이로 빠져나온 검이 거친 숨소리가 내려앉은 메마른 풀잎 사이로 스며들었다.
어쩌면 에오르테가의 유구한 보석은 그날 화재로 사라져 누구도 찾지 못할 유산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 수도 있다. 절망만이 가득한 공간 속, 더는 감출 수 없는 울분과 자책이 그 위로 내려앉았다.
“……왜 돌아온 거야, 세이. 왜. 왜 돌아왔어.”
메아리치는 그 물음을 들은 걸까. 잿빛으로 물든 입술이 그제야 간신히 벌어진다.
“……물어볼 게 있어서.”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성은 끊어질 듯 위태로워.
“같이 갈 건지…… 한 번 더 물어보려고…… 왜 날 구한 건지도…….”
함께 실려 나온 문장은 그렇지 못했지만.
왜 널 구했냐고.
목숨이 경각에 다다른 이 심각한 상황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은 물음에 마찬가지로 내 잇새 사이로도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니 이제는 정말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나.
왜.
생각은 멎고 발이 먼저 움직인 건 어떤 연유였는지. 완벽했던 계획을 망치고 스스로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되어 버린 건 어떤 까닭인지.
숱하게 떠돌던 그 물음들의 답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리며 애써 괜찮은 척 위악을 떨며 나는 아물거리는 시야 너머 물기 젖은 눈동자에 대고 속삭인다.
그래, 네가 이겼어.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순순한 인정도 곁들이며.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일이 이렇게 돌아가니 이제는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귓가를 두드리던 소리들은 하나둘 아득해지고 시야는 부옇게 흐려진다. 그 빈 공간을 메꾸는 건 아물거리는 감각 너머 수면 아래 잠들어 있던 오래전 기억 하나.
희게 만개한 클로버 꽃밭과 햇솜같이 부드러운 햇살, 그리고…….
그 위를 수놓는 네 웃음소리까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파도보다도 거세고 푸르른 네 벽안이 결국 다시 내게로 밀려올 것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나를 집어삼키고 말리라는 것을.
그 오래전, 그날처럼.
그래, 세이.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나는 네게 지고야 말 거라는 걸.
짙게 번진 구름 사이로 내리꽂히는 빛기둥은 세상 구석구석을 밝히기엔 부족하다. 늘 그렇듯이. 그날은 루트비아 백작 부인의 기일. 백작저에 발길을 끊다시피 했던 공작 부부 내외 역시 걸음할 수밖에 없게 무척이나 엄숙한 자리였다.
그러기에 내게 주어질 자리는 더욱더 가당치도 않았다.
창틀에 붙어 하릴없이 저택으로 밀려오는 마차를 헤아리던 나는 합당한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집사의 나직한 경고에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루트비아 가문이 가진 영향력과 무서운 속도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베르니가의 입지 탓일까. 저택 밖을 메운 인파들은 드글드글했다. 지나갈 공간은 있을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나를 발견한 사람들은 절로 길을 터 준다. 엄밀히 말하면 내게 조금이라도 닿을세라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긴 했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 대부분 서늘한 낯을 하고서 나를 힐끗거리는 눈길들. 그 시선에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리 되뇌듯 턱을 빳빳이 쳐들었다.
그러다 그 순간, 조금 큰 드레스 자락을 밟고 나는 넘어졌다. 잔웃음소리가 푸른 잔디 위로 물결처럼 번진다. 그들 너머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건 그쯤이다. 이내 내게서 꼿꼿이 등을 돌린 그들의 모습을.
나는 길을 잃고야 말았다. 어느 외딴섬에 떨어진 채로.
저 애인가 봐요, 왜 그 사생아 있잖아요. 어머나 뻔뻔해라, 여기에 얼굴을 들이밀다니. 노골적인 수군거림도 질릴 무렵,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서 있던 탓인지 온몸의 근육이 경련한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걸까.
누구도 알려 주지 않기에 그저 아름드리나무가 만들어 낸 그늘 아래 몸을 숨기고 있는 게 벌써 몇 시진째. 그리고 내가 자리를 비우든 말든 아무도 개의치 않을 거라는 걸 깨달은 건 방금이다. 조심조심 다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다. 이번에도 또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으며. 한 발짝 내딛는 순간, 다른 곳으로 튄 화제에 멈칫한다.
‘말이 느리다며?’
‘공작 부인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래. 의원들까지 불러들인다는데.’
‘그렇게 심해?’
‘글쎄, 가끔 뭐라고 하시는지 못 알아듣는 정도랄까. 발음이 좀 이상하긴 하지. 공작 부인은 아니라고 잡아떼긴 하는데, 입만 열면 바로 들통나는 걸 뭐.’
‘어렵게 얻은 고명딸이라 그렇게 좋아라 하시더니, 자식 일은 마음대로 안 돼. 그런데 오늘 공녀님은 보이지 않네. 분명 함께 온 것 같더니.’
‘정원에서 길을 잃었나 봐. 아까 보니 사용인들이며 공작 부부며 찾으러 다니던데.’
나는 그대로 빙그르르 정원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러니까 그건 조금 못된 마음이었다.
그 앤 다 가지고 있으니, 내가 살짝 할퀴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가지고 있는 하나쯤은 내가 앗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과 닮은.
내가 그날 네게서 빼앗으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결코 알 수 없겠지.
나는 어렵지 않게 우거진 관목 사이에서 너를 발견했다. 볕이 잘 들지 않은 깊숙한 정원 안에 잔뜩 앞으로 모은 무릎과 꽉 움켜쥔 치맛자락. 그 위를 너울거리는 금빛보다 찬연한 금발. 너는 누가 봐도 베르니였어.
바스락. 발밑에 바스러진 나뭇가지가 고요를 깨트린다. 양팔에 묻고 있던 네 자그마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쯤이다. 조금 붉어진 눈시울. 그것은 나를 발견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색을 감춘다.
‘누구냐.’
그리하여 남은 건 오만하고도 고고한 공녀님.
‘누구냐니까!’
나와는 다른.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난 내 고귀한 동생. 너는 그리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나는 네 작은 연극에 속아 넘어가 주기로 했다. 왜일까. 어쩐지 그날은 그런 물음들이 자주 올라왔어. 피식,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오자 네가 발끈한다.
‘우서? 감이 내가 누구지 알고!’
박자를 이탈한 불안정한 음정이 공기 속으로 스며들자, 너는 입술을 짓이긴다. 둥그런 이마에 미간은 깊게 패고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이 허옇게 질린다. 다시 불그스름하게 번지는 눈가를 나는 가만히 응시해 본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본다.
세이아린 베르니.
푸른 초목 위로 스며든 소리는 단조로웠다. 공작 부인의 음색처럼 감미롭지도 물 흐르는 것처럼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래서일까. 너는 조금 얼떨떨한 낯을 했어. 다시 입술을 기울였다.
‘아니야?’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살짝 이맛살을 찌푸린 너는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한 번, 두 번. 횟수가 늘어날수록 고갯짓은 힘차고 네 표정이 역시 환해지기 시작한다.
‘마자.’
선홍빛 오밀조밀한 입술이 움직인다. 조금은 뿌듯한 표정을 덧그리고서. 네가 뿜어내는 빛에 나는 잠시 숨을 죽이는 순간,
세이.
네가 말했다.
그 후로 너는 조금 들떠 보였어. 무더기로 피어난 야생화 틈으로 나를 이끌고 가더니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아이리스야. 저건 메리고드. 누구도 말해 주지 않는 꽃의 이름을 찬찬히 일러 주는 다정한 음성에 귀 기울인다.
‘이것도 보여 주까.’
고개를 기울이자 네가 입꼬리를 올린다. 특벼리. 특별리. 조금 힘주어 발음한 단어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자그마한 손이 바삐 움직인다. 클로버 꽃을 얼기설기 엮고 비틀고. 온 신경을 집중하는지 입매를 모으고서. 제 맘대로 모양이 나오지 않았는지 한껏 볼을 부풀린다. 잘 익은 복숭아처럼 토실토실한 뺨을 건드리고 싶은 충동에 손을 뻗다가 이내 멈칫한다.
그 몸짓을 느낀 건지 네가 얼굴을 들어.
대신 네 머리카락에 붙은 잎을 하나 하나 떼 준다.
작게 웃음을 흘리고서 매듭을 고쳐 잡는다. 해 본 적도 누군가 알려 준 적도 없지만, 네가 하는 대로 줄기를 덧대고. 잎을 장식한다.
‘예쁘다.’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모양새에 너는 입을 둥글게 모은다. 진짜 예뻐. 신이 나 벌떡 일어난 너는 제 머리 위에 화관을 얹는다. 톡톡. 꼬물거리는 손이 비슷이 올린 화관을 건드리자, 뭐가 좋은지 까르륵대며 정원을 쏘다닌다. 작은 속삭임을 흘리며.
예뻐, 언니.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스며 짙은 여운을 남기며 귀 언저리를 맴도는 문장에 나는 숨을 죽였다.
언니.
조용히 네가 남긴 단어를 감히 입에 담아 본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휩쓸릴세라. 혹여 누구에게 들킬세라.
조심스럽게.
그리고 그 순간 맞은편 관목까지 달려갔던 네가 돌아선다. 구름 사이로 나비친 햇살이 네 위로 쏟아져 푸른 벽안을 찬연하게 적신다. 이에 젖어 찬연하게 빛나는 벽안이 내게까지 밀려온다. 솨아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파도의 소리가 꿈결같이 들려오는 것 같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아무도 닿지 못한 막막한 섬으로 너는 그렇게 밀려왔어. 온몸을 눅지근하게 만드는 늦은 오후의 햇살을 몰고. 거칠고도 무자비하게.
기억하니, 세이.
나는 아직도 그 정원에 있어.
아무리 꾹꾹 내리눌러도 불태워도 사라지지 않는,
그날의 정원에.
티케가 축복한 이를 한낱 필부에 불과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더없이 엄청난 행운을 받은 이를 이리 진창으로 이끈 것은. 티케 사냥꾼를 물리친 실로 놀라운 그 감각으로 어째서 제 앞에 바로 닥칠 비극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나. 생각은 멎고 발이 먼저 움직인 건 어떤 연유인가. 완벽했던 계획을 망치고 스스로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되어 버린 건 어떤 까닭인지.
너를, 나를 이곳으로 이끈 건 무엇이었을까.
그러니까 그 물음의 답들을…….
‘물어볼 게 있어서.’
‘같이 갈 건지…… 한 번 더 물어보려고…… 왜 날 구한 건지도…….’
왜 널 구했냐는, 왜, 숱하게 떠돌던 그 물음들의 답은 이것인지도 몰라.
우리를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그래, 항상 두려움이니까.
“무서워서 그랬어.”
두려워서. 누구보다 잘 알기에.
상처 입은 사람들이 얼마나 쉬이 나약하게 무너지고 마는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마는지.
“네가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걸 아니까. 그래서 어느 날 네가 나를 원망하게 될까 봐. 결국 그렇게 될까 봐. 그래서…….”
알아. 강인한 사람도 쉬이 부서질 수 있다는 걸. 모래알보다 더 쉽게, 더 가엾게. 쉬이 망가질 수 있다는 걸 알아.
“그걸 기어코 내 눈으로 확인하게 될까 봐.”
지금이 아니면 언젠가, 어느 순간 결국 그렇게 되고 말리라는 걸 알아.
“그래서 내가 정말 괴물이 된 걸 알게 될까 봐.”
그래서 그랬어.
무서워서.
언제고 그 눈이 나를 보고 다른 빛깔로 변모하게 된다면, 그 찬란했던 기억이 그래서 진창 같은 악몽으로 변해 버린다면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서. 정말 괴물이 되어 버릴 것 같아서.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내가 너무 가여워, 세이.
너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어.
후작님 말에 떠밀리듯 아미타 숲으로 들어온 것도 기어이 다시 너를 몰아세운 것도. 다 그래서였어.
수천 명의 사람의 피를 묻힌, 제 가족도 핏줄도 삼켜 버린 이 손이 너무 애달파. 근데 그럼 안 되는 거잖아. 그렇지? 그래서 미워하려 했지. 보지 않으려 했어. 밑바닥까지 다 들킬까 봐 항상 조마조마하면서.
그런데도 여전히 싫어할 수가 없어. 자꾸만 지키고 싶어져. 후작님에게서, 테비온에서, 너에게서 도망치면서까지. 못 이기는 척, 어쩔 수 없는 척. 그렇게 위악을 떨고 한없이 비겁해지면서도 나는 아직도 나를 버리지 못했어.
양심도 없지.
그 벌을 받는 걸까.
어떻게 해야 하니, 세이?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고 지우려 해도 지워 낼 수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니, 이제.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니, 세이?
“……언닌 정말 바보야…….”
막막한 어둠, 끝없는 심연 속을 부유하고 있는 내게 속삭이듯 답이 들려온 건 그때다.
“그런 것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하는 게 어딨어. 그렇다면 이 세상에 멀쩡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후작도 나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우린 다 싸우고 있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가빠 오는 호흡과 불분명한 음성 사이로.
“그러니까…… 언니도 싸워…… 그래서 지켜 내.”
비틀어지고 망가진 방법을 쓰더라도. 지켜 내기만 한다면, 후회를 하건 반성을 하건 그건 그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잖아.
시들어 버린 풀잎들 위로 내려앉은 소리는 거칠고 무자비하다. 언제고 내 몸을 눅지근하게 만들었던 늦은 오후의 햇살처럼.
나는 그 말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내게 건네는 위로와도 같은 속삭임을.
잔혹해지지도 그렇다고 온후해지지도 못하는 나를 향한 무자비한 조언을.
***
“모두 퇴각한다! 숲에서 벗어나!”
다급한 기사단장의 외침에 공녀를 수색하기 위해 숲으로 들어갔던 기사들을 간신히 숲의 경계까지 후퇴시킬 수 있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까닭에 다행히 모두가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거칠게 숨을 내어 쉬며 호흡을 골랐다. 그 덕에 가까스로 제 속도를 되찾은 그의 숨결과 달리 날숨에 실려 있는 온갖 의문들을 진정시키진 못했지만.
“어찌 된 겁니까, 위원장님. 저건 분명 모르스 일족의 힘이었어요.”
기사단장을 시선을 돌려 지금 이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해 줄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그들과 마찬가지로 죽어 가는 숲을 바라보며 아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건 그렇게 한 바퀴 눈을 굴렸을 즘이다.
그중 단연 독보적인 인물은 토리노 위원장이라는 것 역시.
역시나 딱히 마땅한 답을 알지 못한 듯 보이는 그는 엄밀히 말하면, 그들보다 더 당혹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토리노 위원장의 새까만 동공이 또 한 번 확장되고 그 위로 방금보다 더한 충격의 물결이 스미기 시작한 것을 목격한 것은 그때였다. 위원장의 시선이 닿은 곳은, 정확히는 조금 전 기사단장이 빠져나왔던 아미타 숲. 그의 눈길을 쫓아 다시 그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공간으로 시선을 던진 기사단장은 그제야 토리노를 강타한 혼란의 연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맙소사.”
깊디깊은 탄식이 기사단장의 잇새로 또 한 번 터져 나왔다. 그가 헛것을 보는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지금…….
“……숲이 되살아나고 있어요.”
누군가의 중얼거림은 극심한 충격으로 번진 적막 속으로 스며들었다.
***
등불이 흔들린다.
별장을 휘황하게 수놓는 수많은 불빛들이 흔들리고 떨어지며 어둠 속에 삼켜지는 것을 보며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소한 동작에도 욱씬거리는 일이 잦다. 서대륙의 치료술사들이 떠나간 곳에 다시금 피어오르는 깊고 깊은 상처들을 문지르며 후작은 자조했다. 그것은 어쩌면 곧 다가올 소멸의 예감인지도 모르겠다고.
가운을 걸친 그는 밑창이 푹신한 슬리퍼를 신고 내실을 벗어났다. 자박거리는 걸음을 따라 익숙한 기억들이 흩어진다. 정원 테이블에 걸터앉은 아이와 그 손끝에서 넘어가는 책장 소리. 온실을 정돈하는 그를 도우러 다가오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발걸음, 곧잘 약초를 맞히곤 했던 맑은 음성이 귓가에 선연하다. 넓어진 보폭이 별장을 벗어나 항시 아이가 걸음했던 숲에 닿자 추억들은 더욱 선명해진다. 곱게 땋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늘 이 숲을 지나 그에게로 왔지. 이제는 더는 볼 수 없고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신기루 같은 환상을 부여잡으며 후작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지킨 것일까.
결국 지킨 것일까. 이번에는?
앙상한 가지만이 가득한 숲으로 뚜렷한 답 없는 물음들이 되풀이된다. 그 덧없는 질문들이 흩어지는, 여전히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을 후작은 우두커니 바라보다 이내 스산한 풍광이 나비치는 숲을 짧게 일별하고는 농밀한 어둠의 장막도 사르지 못한 하늘 위의 만월을 올려다본다. 가느다랗게 흘러 들어오는 월광이 그의 뺨에 닿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대지를 내리비추는 은파와 어우러진 공기의 기류가 낯익다는 것을 느낀 것은 그 무렵이었다.
왜인지 아이가 올 것 같은 공기야.
간기가 배어 있지도, 소금기가 잔뜩 묻어 나오는 해풍 같지도 않은데…… 그래, 왜인지. 그러해.
헛웃음을 흘린 그는 이만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곧, 여명이 밝아 올 터.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사라진 그를 찾아 한바탕 저택을 뒤집어 놓을 집사와 눈에 불을 켜고 저를 찾아 헤맬 조카를 떠올리자 그는 옅은 한숨을 내어 쉬며 떨어지지 않는 발을 별장 쪽으로 틀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에 균열이 찾아온 건 그가 막 몸을 돌렸을 찰나였다.
귓가에 들려오는 소슬한 바람 소리 때문도, 풀잎을 스치고 지나는 정체 모를 소음 때문도 아니야.
어둠이 물러간다. 푸릇한 생명이 그 위로 움트고서. 메마른 가지는 물을 머금은 듯 생기롭고 그 위에는 싱그러운 이파리들이 피어오른다.
제가 꿈을 꾸는 것일까? 아니면 떠오르는 여명이 불러낸 환상일까?
영원을 찰나로 옮겨 놓은 듯, 공간은 순식간에 풍요로워진다. 그 속으로 흩어지는 후작의 물음은 어느덧 울밀해진 관목을 헤치고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인영에 더욱 깊어지고. 차분하게 흘러나오는 음성,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소리가 공기를 흔들자 더욱 더.
“……후작님.”
그래, 정말 꿈을 꾸는 것인가 보다. 비현실적인 공기의 기류 속 그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아이를 보며 후작은 느리게 눈꺼풀을 여닫았다.
“저예요.”
마치 해를 이고 있는 사람처럼 부신 눈을 한 아이가 그를 마주 본다. 달빛보다 더 찬란하게 부서지는 은안이, 터질 듯 부풀어 올라 그를 담으며. 이제는 언젠지도 기억나지 않는 오래전, 그럼에도 그 모습만은 선연한 그 날처럼.
“아델?”
“……이제 다룰 수 있어요.”
어느새 지척에 다가온 아이는 한 손으로 그의 뺨을 올려 쥐며 나직이 속삭여.
“무엇을?”
얼떨떨한 낯으로 되묻자, 아이는 설풋 입꼬리를 올린다. 파툼이 없어도, 도망치지 않아도 전부 다. 반듯한 입매에서 떨어진 문장은 그것이다. 당혹스러움만 가득한 그의 표정을 되돌리기에는 한참 부족한 설명에 후작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지러지는 눈을 들어 올린다. 아이의 어깨 너머 자리 잡은 울창한 산림과 오전의 햇살이 맺힌 맑은 이슬들을 스치듯 지난 후작의 눈은 다시 아이에게로 닿는다.
“……아델,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아연한 어조에 아이가 잔웃음을 터트린다.
“걱정 마세요, 후작님. 이게 만약 꿈이라면…….”
아주 좋은 꿈일 테니까요.
그 말과 함께 아이가 눈매를 반으로 접어. 곱게 휘어진 매끄러운 선 안에 그가 천천히 담긴다.
후작님.
방금까지만 해도 또렷하기만 했던 그 소리가 어느새 아득하게 들려오고 후작은 심연 아래로 떨어지는 감각에 눈매를 좁힌다. 끝없는,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에.
***
테비온 마을의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 잡은 신전의 회의실. 위원장의 주재하에 늘 고성과 함께 긴 토론의 서막을 열던 섹토 위원은 오늘따라 조용했다. 어디 그뿐이랴. 다른 위원들 역시 그저 새까만 흑단으로 마감되어 있는 천정만을 바라보며 간혹 뜻 모를 탄식을 길게 내뱉을 뿐이었다.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해 무거운 침묵들만이 켜켜이 쌓여 가는 공간에는 분명한 연유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델리아 공작.
그녀의 손에 아미타 숲이 죽었다, 놀랍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한 이야기가 들려왔을 때만 해도 그들의 분위기는 이렇게까지 가라앉지는 않았다. 정말 그녀가 모르스의 현신일 줄도 모른다, 이제 다른 대륙에서 어찌 그들을 얕보겠냐, 맹렬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와 함께 파툼의 근원인 숲을 망가트린 여인을 향한 자부심을 내비쳤지.
더는 그들의 낯에 웃음이 떠오르지 못한 것은 그녀가 제 힘에 폐허가 되었던 아미타 숲을 되살렸다는 보고를 받았을 즘이다. 뒤따라 에오르테 후작이 몸을 회복했다는 소식이 테비온을 강타하자, 그 충격으로 위원 하나는 말 위에서 떨어졌다지.
에오르테 후작. 그가 누구인가. 간신히 서대륙의 치료술사로 목숨을 부지하며 오늘내일하던 이가 아니던가. 여전히 믿기지 않는 보고에 제 손바닥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섹토 위원은 낙마의 후유증이 여태 가시지 않는 왼팔을 문지르며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이 모든 일을 직접 목격한 위원장을 향해 입술을 열었다.
“혹 말이야.”
추리에 불과한 가설을 입에 담는 이치고는 사뭇 비장했다만.
“숲이 죽은 게 아니라 다른 연유가 있었던 게 아닌가. 뭐, 화재가 났다거나. 아니면 안개에 휩싸였다든가 하는 뭐 그런 거 말일세. 그럴 수도 있잖나.”
“……위원님.”
이미 수차례 반복되어 왔던 문답을 또 입에 올리는 섹토 위원을 향해 토리노는 지친 기색이 다분한 눈을 들어 올렸다. 그 눈빛에 전해 오는 무언의 대꾸에 섹토 위원은 온전치 못한 팔을 휘휘 내저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았네. 알았어. 미안하네, 난 그냥 혹시나 해서 말이야.”
“설령 아미타 숲은 그렇다 해도 위원님, 에오르테 후작의 일은 어찌 설명할 것입니까.”
“그래, 에오르테 후작!”
그만 포기하라 말한 질문에 섹토 위원은 오른손으로 탁자를 내려치기까지 하며 반색을 표했다.
“내 그 부분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혹 서대륙의 치료술사들 덕분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잖나. 그들의 치료 덕에 마침 후작이 몸을 회복하고 있던 찰나였지 않나. 내 생각엔 말이야. 그때 아델리아 공작이-”
“위원님.”
포기할 기미 없이 계속되는 섹토 위원의 가설들이, 그런 가정을 만들어 내는 마음이 어떤 연유에서 기인되었는지는 모르는 바가 아니다. 허나, 더 이상 그 망상들을 묵고할 수만 없던 토리노는 단호하게 그의 말허리를 잘라먹었다.
“서대륙의 치료술사들이 보낸 마지막 치료 당시, 후작의 몸 상태를 기록한 보고서를 전령을 통해 각 위원님들께 보내드린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래, 뭐, 받긴 받았네. 난 그냥 혹시나 해서 말이야.”
깊은 어둠에 싸인 것처럼 계속되는 적막, 간혹 되풀이되는 섹토 위원의 헛소리.
이제 더는 그들 앞에 닥친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판단한 위원 중 하나가 오랜 침묵 끝에 처음으로 입을 연 건 그때였다. 파문을 당하고 제국 밖으로 쫓겨난, 페치오 위원의 자리를 메꾼 데인 위원이었다.
“그럼 앞으로는 어찌할 참입니까, 위원장님.”
“그걸 의논코자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장내에 회의장의 위원들을 스치듯 지난 토리노는 제 손에 들린 보고서를 짧게 응시했다. 테비온의 치료술사들과 코르푸의 조사단이 지난 몇 주 동안 밤낮없이 파악하고 분석한 끝에 내린 가장 가능성 있는 결론이 그 서류 안에 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아델리아 공작이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어떤 방법 말입니까?”
“우리 일족의 힘을 통제할 방법 말이지요.”
토리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회의장은 소란하게 변모했다. 힘을 통제한다니, 맙소사, 같은 낮은 탄성들이 그 수런수런해진 공간을 돋우면서. 흔들리는 촛불을 따라 당혹과 두려움, 불안이 뒤섞인 수십 쌍의 눈을 바라보던 토리노는 이윽고 그들의 혼돈이 조금 진정이 되었을 즘, 다시 한번 입술을 열었다.
“테비온의 치료술사과 조사단을 페라비 별장에 파견할 생각입니다. 아델리아 공작과 후작과 공녀에 대해서 면밀히 알아보기 위해서지요, 다들 어찌 생각하십니까.”
한결 차분해진 공기 위로 내려앉은 위원장의 말에 위원들은 하나둘 찬성의 뜻을 보냈다. 기실, 그것은 온전한 허락이기보다는 딱히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한 이들이 흔히 내보이는 군중의 휩쓸림 같은 것에 더 가까웠지만. 어쨌든 그렇게 모든 위원의 만장일치를 이끌어 낸 회의 덕에 다음날, 테비온은 이른 시각부터 부산스럽게 새로운 하루를 맞이했다. 테비온의 치료술사들이 페라비 별장으로 떠날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물론, 한때 공녀와 공작과의 관계를 분석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조사단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
조사단이 페라비 별장에 파견된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제 심정이 어떠했는지 표현해 줄 낱말을 조사단장은 감히 찾지 못했다. 물론 일전에 두어 차례 공작가에 파견되었던 전적이 있거니와 사람들은 그에게 이제 공작과 공녀에 대해 모르는 게 없겠다 우스갯소리로 말하지만, 어찌 이번 조사를 그것들과 비견할 수 있으랴.
아델리아 공작.
다소 섬뜩한 소문들이 가득하고, 높은 횟수로 그 소문이 그저 낭설이 아님을 확인한 그가 그녀를 다시 마주할 각오를 한 까닭은 그것이다. 그녀에 대한 두려움이 학문적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탓이다.
되살아난 자와 되살린 자라니!
물론, 그의 마음에 빼곡하게 차올랐던 희열은 그리 오래가진 못했지만.
조사단장의 불안한 눈이 응접실을 이리저리 배회했다. 왼편 협탁 위에 놓인 독수리의 석상들과 정체 모를 약초학들이 걸려 있는 희귀한 테라피스트를 스치듯 지난 그의 눈은 당연한 수순처럼 공간을 압도하고 있는 여인에게로 가 닿았다. 그가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 완벽한 웃음을 걸고 그를 이 응접실로 부른 공작은 티스푼으로 가만히 찻잔을 휘저으며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것이다.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소용돌이를 바라보는 조사단장의 낯은 초조하기 그지없다. 하기사, 누굴 원망할쏘냐. 분수도 모르고 움직인 제 혓바닥을 저주할 수밖에.
‘차나 한잔 하시겠습니까.’
얼떨결에 긍정의 대답을 해 버린 게 실수였지. 옅은 한숨과 함께 시야 귀퉁이로 공작을 살핀 그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찻잔을 손에 쥐었다. 굳게 다물려 한번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던 공작의 입술이 벌어진 건 그때였다.
“이번 조사의 목적은 정확히 무엇이죠.”
모르타 위원회에서 이번에 새 조사단을 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보게 되어 반갑다 그런 인사치레의 말을 모조리 건너뛴 공작은 역시나 아주 직설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연신 달막거리기만 하던 찻잔에 처음 입을 댄 조사단장은 당혹스러움에 혓바닥을 델 정도로 예상치 못한 화법이었다.
“어…… 그것이…… 되살린 자와 되살아난 자에 대한…….”
문장을 다 맺기도 전에 서늘하게 가라앉은 은안은 말할 것도 없고.
“일전에도 나와 세이의 조사를 담당했던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 맞나요?”
“예, 예. 그렇지요.”
어찌 그걸 잊을 수 있겠나.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공녀와 공작의 우격다짐 덕에 성한 곳 없었던 제 몸뚱아리를. 등을 강타하는 통증, 팔에 남겨진 손톱자국. 잊고 싶은 과거의 험난한 기억들이 그의 뇌리에 차례로 떠올랐다. 그 고생을 인정받아 조사단을 이끌 직책까지 맡게 되었다지만, 차라리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이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즘, 소서 위에 찻잔을 내려놓은 공작은 언제 낯을 굳혔냐는 듯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는 그를 응시했다.
“그럼, 그대는 나에 대해 잘 아시겠군요.”
상대를 꾀어낼 달콤한 음성이 귓가에 흘러 들어오자, 조사단장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 부정하기엔 그들이 나누었던 시간이 제법 길었던 것이다. 공녀와 그녀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했던 일은 비단, 채혈과 힘의 파동을 분석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관심사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자주 폭주를 일으키는 상황까지. 대부분 공작의 관심사는 에오르테 후작인지라 공녀에 비해 가졌던 면담이 짧았으나, 그럼에도 횟수로 치면 제법 되었다. 물론,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대화의 맥락을 상대하기 위해선 그저 진실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고.
역시나.
제법 만족스러운 답이었는지 심상한 표정과 함께 공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히아신스의 매끄러운 표면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러시니 이해하실 거라 믿어요. 내가 무엇을 가장 좋아하고…….”
그 찰나의 순간에 그녀 손끝에서 싱싱하던 이파리가 시들고 다시 푸르게 변한다. 마치 꿈을 꾸는 것인가, 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이를 넋 놓고 보던 조사단장은 뒤늦게 뺨에 닿는 서늘한 기세를 느끼고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다분한 얼굴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마주한 은안은 그저 고요한 호수처럼 평온했으나, 왜일까. 정체 모를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그를 할퀴는 것은?
“또 무엇을 가장 싫어하는지. 나와 면담을 그리 많이 했으니.”
아주 험난한 조사가 될 것 같은 그런 예감이.
그리고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건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루 말할 것 없이 완벽한 상태다.
아델리아 공작과 공녀의 몸은 넘칠 것도 모자랄 것도 없이 정확히 그 표현대로였다. 두 차례 거듭되었던 조사에 비해 아주 월등히 안정적인 기세로 접어든 그들의 건강은 기실, 더 이상의 조사가 불필요할 정도였다. 만개한 공녀의 수목은 둘째치고 사위를 압도할 것 같은 힘을 어렵지 않게 다루는 공작은 이제 그와 같은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야. 제법 여러 차례 진행된 조사 덕에 그 까닭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었다만.
정말 그게 맞는 걸까?
이전에는 자신의 힘에 대한 강한 혐오를 내비치던 공작이 더는 그렇지 않다는 게 유일한 차이인지라 조사단은 이에 무게를 싣고 가설을 세우고 있었다지만, 너무 단순하고 또 허무맹랑하지 않은가. 깃펜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조사단장은 이만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는 망령된 생각들은 거두어들이고 그의 눈앞에 닥친 문제를 직시했다.
승마를 즐기시나요, 후작님?
이 물음 하나에 되돌아오고 있는 답변을 듣고 있자니 조사단장, 세드릭은 골이 아파 올 지경이었다. 채혈이나, 건강 상태 확인까지는 별 탈 없이 지나왔던 후작은 면담에서 엄청난 난항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니, 난항이라는 말로 부족하지.
“음, 승마라…… 즐기는 편이지요. 결을 타고 흐르는 바람…….”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문장은 곱씹어 볼수록 더욱 황당하기까지 했다. 오죽했으면 아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세드릭은 종이 위에 쓰인 제 글씨를 몇 번이고 확인하지 않았던가.
[승마를 싫어함, 어릴 때 낙마한 기억이 있음.]
분명 그의 글씨체가 맞고 그가 누군가에게 머리를 세게 맞은 게 아니라면, 며칠 전 이 자리에서 후작과 나눈 대화를 분명 똑똑히 기억한다.
집사의 채근으로 하기 싫은 승마를 억지로 했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겪은 적이 있다고. 그래서 아직도 승마라면 질색을 한다고.
이게 무슨 일인가.
세드릭은 얼떨떨한 눈을 들어 올려 여전히 승마 얘기에 열중하고 있는 후작을 응시했다. 등줄기가 서늘해질 정도로 강렬한 눈빛이 저를 훑어내리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그 시선을 쫓아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예상했던 인물이 그를 삼킬 듯한 기세로 바라보고 있었다. 때마침 다과를 준비한 시종과 함께 응접실에 들어선 아델리아 공작이었다. 이대로 당황한 기색을 내비친다면 아마, 저 손에 산 채로 찢겨 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무언의 압박을 느낀 세드릭은 한 번 마른침을 삼키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 그러시군요.”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다만.
미묘하게 변한 공기의 기류를 알아챘는지 후작이 눈썹을 꿈틀거리자, 화급히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세드릭은 이런저런 질문들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가장 무서웠던 기억은, 어릴 적에 기억에 남는 사건.
물론, 뒤따른 질문들도 비슷한 궤를 보였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후작의 이야기는 기이한 일관성을 띠며 뒤죽박죽인 모습을 보였는데 뭐랄까. 마치…….
두 사람이 얘기하는 거라고나 할까?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후작이 버거워하기 시작하자 잠시, 대화를 중단시킨 아델리아 공작은 제 맞은편으로 가까이 다가온 건 그때였다.
“제 생각엔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심상한 어조와 함께 흘러나온 문장에는 상대의 숨통을 죄이는 위압감이 서려 있다. 맞다, 이 여자는 제국의 공작이었지. 저 사내의 옆에서는 그저 온순한 양처럼 굴어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되새기며 세드릭은 떨려 오는 음성을 가다듬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해 두고 싶은 건 후작님은 괜찮으시다는 거예요. 아주 사소한 혼란이 있긴 하지만요.”
사소한. 그 단어에 힘을 준 그녀는 눈꺼풀을 들었다. 차분하다 못해 조금 서늘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은안이 그 안에서 나타나 그를 직시했다.
“저는 이 얘기가 누구에게도 새어 나가지 않길 바랍니다. 아시겠죠?”
섬뜩할 정도로 부드러운 음성에 실려 나오는 협박과도 같은 문장에 세드릭은 절로 빳빳해지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주제 모르는 혓바닥이 제멋대로 나불거린 건 그때였다.
“그래도, 제 생각엔 치료가…….”
쏘는 듯한 시선이 제게 닿고서야, 실수했다는 것을 직감한 세드릭은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낱말들을 주워 담았다.
“그러니까 일종의 상담이랄까요?”
조금은 부드러워진 그의 단어 선택에 공작은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제 숨통을 어떻게 끊어 놔야 할지 고심하는 것 같기도 한 동작에 세드릭이 경직되어 있는 동안, 긴 침묵이 끝을 맺고 공작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전한 허락.
간신히 이를 얻어 낸 그는 공작과 후작이 응접실을 나서자, 참았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호흡을 골랐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날숨에는 과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도 않는 일에 대한 번민이 담겨 있었다.
***
“말을 탈 때 기분이 어떠시죠?”
후작은 눈썹을 반쯤 모았다. 그리 어렵지 않은 질문인데 말문이 턱 막힌 것이다.
왜…….
요즘 들어 그런 날들이 잦았다. 아이의 도움으로 몸을 회복하던 날도 그러했지. 그날, 부서진 햇살을 받아 빛을 내는 은발과 뺨을 타고 흐르는 아이의 낯을 보며 후작은 느리게 눈을 여닫았다. 아이의 색감이 이렇게 찬란했던가 생각할 즈음, 테오의 울음소리와 집사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내실에 번갈아 터져 나왔다. 그 대조되는 빛깔의 감정들 때문일까. 시야에 잡히는 모든 게 생경해.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리고 어느 때보다도 맑아진 정신에 물 밀려오듯 흘러 들어오는 건 이상한 기억들이다. 악몽처럼 느껴지는 섬뜩하고 두려운 기억들부터 온몸을 눅지근하게 만드는 기억들까지. 후작은 종종 혼란스러웠고 마치 두 세계에 묶여 있는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음식은 뭐죠.’
‘가장 무서웠던 기억은요.’
‘어릴 적에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나요.’
그런 질문들을 들을 때마다 혼란은 더욱 커져.
지금처럼 말이다.
“승마를 하실 때 말입니다. 그때 기분이 어떠했는지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는데, 후작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떻게 말문을 터야 할지 모른다는 게 더 적합하겠다. 고원에 울려 퍼지는 말발굽소리, 흩어지는 웃음. 그때 기분이 어땠더라. 두려움? 흥미? 아니, 그가 말을 탄 적이 있기는 했나? 답을 찾아내려 더욱 깊이 스스로를 돌아볼수록 생각은 더욱 복잡하게 엉켜들어 가고 신기루같이 아스라해진다. 마치 속수무책으로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을 움켜쥐려고 하는 것 같아.
그때마다 후작은 곁에 있는 아이의 손을 꾹 움켜쥔다.
“……아델, 뭐가 진짜지?”
뭐가 진짜야. 두려움이 잔뜩 배인 물음을 또 한 번 공간으로 흘려보내며.
잔잔한 호수를 가르는 바람 같은 음성이 되돌아온 건 그때였다. 여느 때처럼 가느다란 웃음을 입에 건 아이는 차분히 그를 다독여.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여기 있고 당신이 여기 있는 거,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건 거짓이 아니에요. 제가 진짜고 당신이 진짜인 것처럼.”
그제야 갑갑하던 숨이 골라지고, 혈맥 위를 뚫고 나올 것처럼 맥동 치던 맥박이 진정된다. 낯에 가득하던 혼란스러움이 어느 정도 가신 후작은 천천히 입술을 움직일 여유를 되찾았다. 그는 기실, 승마는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는. 아주 오래전 있었던 낙마 사고부터 시작하여 그날의 상황을 세세히 설명하던 그에게 벌써 이 답변을 몇 번째 되풀이하고 있다는 기시감이 든 건 막 말을 마쳤을 즘이었다.
***
자잘한 조각들은 맞춰지기 시작했다.
리오는 별장 관리인인 아버지와 함께 시골에서 살았고 승마를 좋아하며 가장 싫어하는 간식은 초코쿠키이고 하는 그런 것들.
에오르테가에 닥친 대화재와 카트린느 에오르테의 죽음 같은, 어쩌면 그의 세계가 붕괴되기 시작했던 사건에 가까운 기억들은 여전히 마찬가지였지만. 그럴 때면, 그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기도 했고 또 정정하기도 했다.
나른히 창가에 고개를 기대어 창 너머로 보이는, 오전의 햇살을 받아 더욱 부시게 빛나는 백금발의 주인에 관한 사념 속에 잡혀 있는 나를 끄집어낸 것은 언제고 손님을 배웅하고 돌아온 엘몬트였다.
“제 생각엔 리오에게 치료가 필요합니다.”
조용히 내 시선을 따르며 그는 말을 이어 갔다.
“지금도 많이 늦었지만, 시기를 놓치면 걷잡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딱히 반박할 만한 말은 없었다.
허나…….
평화롭게 책장을 넘기는 후작이 시야 귀퉁이에 걸린다. 주인을 닮아 단정한 손끝이 종이 위에서 바지런히 움직이는 모습도. 무엇이 그를 위한 것일까. 무엇이 가장 바른 선택일까. 조잡하게 나를 잡아먹던 사념들이 사라지고 굳은 입가가 느슨하게 풀리는 것도 그쯤이었다.
그다지 상관없어.
그가 웃을 수만 있다면, 상관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가 안온하길 바라니까. 다가올 내일, 앞으로의 나날들이 아닌 바로 지금.
‘들어 본 적 있니? 여인의 몸으로 모르스 일족이 된 자의 이야기를.’
‘그런데 무엇을 걱정하는 거니.’
아주 오래전, 내게 진실을 말해 주지 않아 기어코 위험을 감수했던 그가 이제야 조금씩 이해가 가기도 했다.
우리는 참으로 어리석은지도.
“글쎄, 난 이대로도 나쁘지 않은데.”
가느다란 웃음을 머금은 나는 옅은 한숨을 내어 쉬는 엘몬트를 지나쳐 천천히 방을 나섰다. 점점 높아지는 걸음은 정원에 자리한 사내와 마주치기 위함이리라. 후작인지, 아니면 리오인지, 여전히 뚜렷한 것은 없고 모호하기만 하지만 지난날들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렇듯 나와 함께 있을 그와.
땅을 진동하는 감각이 정원에 찾아온 건 내가 막 로비를 지나 후작에게 다다랐을 때였다. 책장에 눈을 고정하고 있던 후작 역시 이를 느꼈는지 눈을 들어 올려. 저 멀리 부옇게 일어난 흙먼지를 가로질러 내달리는 마차가 보인다. 마찬가지로 이를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는 후작이 나직이 읊조렸다.
“오늘은 빨리 도착하셨구나.”
어쩐지 거북함이 깃든 음성이었다. 어지러운 기억 탓인지 그는 주마다 이루어지는 세드릭과의 만남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흠, 짧게 고심한 나는 좁혀진 그의 미간과 미미하게 균열이 인 눈썹을 응시했다. 반색의 기색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그곳에 자리한 것은 불편함이다.
한 번쯤 건너뛴다 해도 별 탈이 있을까.
언제고 그토록 질색하기만 했던, 후작과 같은 한없이 낙관적인 생각이 뇌리에 든 건 그런 그의 표정들 때문인지도 몰랐다. 약간의 협박을 동반한다면 조사단에 보낼 기록은 대강 둘러댈 수 있을 것이고.
“제가 잘 말씀드려 돌려보낼게요.”
그 단조로운 한 문장에, 한마디에 후작의 안색이 비 갠 뒤 하늘처럼 청명하게 밝아진다. 이럴 때면 영락없이 테오와 같아. 피식, 웃음을 흘린 나는 마차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짓으로 시종을 불렀다. 그 유려한 동작에 균열이 인 건 그 마차의 주인이 우리가 예상했던 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즘이다.
세드릭이 아니다.
공작가의 마차였다.
“그러니까 새로운 곳을 가야 해.”
후작의 건강, 후작의 몸 상태. 마차의 문이 열렸을 때부터 쉬지 않고 입술을 움직이던 세이가 내놓은 결론은 그것이다.
기억과 여행.
다소 황당한 제목의 서책을 내 앞으로 내밀며. 그 두께며 제목이며, 정말 세이가 보았을 것 같지는 않다는 미심쩍은 기색이 내 얼굴 위로 나비치자, 혹여 내가 책장을 넘겨보기라도 할세라 화급히 다시 책을 제 품에 안아 든 세이는 아까보다 훨씬 더 결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게 도움이 된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기색이 거짓 같지는 않다만, 그럼 더욱 문제지. 저 설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공작저의 사용인들이 얼마나 많은 서책들을 뒤졌을까. 내가 저택을 비울 때마다 수척해지기만 하는 그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사이, 응접실은 다시 세이의 종알거림으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응? 언니?”
후작의 몸 상태가 불안하자, 내가 별장으로 걸음하는 횟수가 늘자 세이 역시 자주 별장을 번갈아 드나들기 시작했다. 딱히 주기가 있는 건 아니다. 제가 내키는 대로 오가는 것이지. 그 종잡을 수 없음이 오히려 세이의 안전에 이점이 될 수도 있다는 올레나의 충고와 몸을 사리는 분위기를 고려하여 낸 결정이긴 하다만…….
“너무 위험해.”
아직 제국에는 아몬이 있다. 완벽했던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고 제국에 찾아온 평화에 그가 얼마나 이를 갈고 있을지는 불 보듯 뻔했고. 길어지는 침묵이 가리키는 방향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을 기민한 내 동생이 기어코 그 단어를 입에 올린 건 그때였다.
“하지만, 후작도 가고 싶어 했는걸?”
후작. 어쩌면 그 애는 그 단어가 나를 홀릴 마법의 단어라 여겼는지도.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나는 초조한 기색이 다분한 채로 일렁이는 벽안을 바라본다. 조금은 엄하게 느껴지는 음성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이.”
“저번에! 저번에 분명 나한테 그랬어.”
언제 들어왔는지 문가에 비슷이 기대어 있던 테오가 불쑥 대화에 끼어든 건 그때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결국 바닥에 떨어지고 만 낱말에 세이는 얼굴을 붉혔다. 정처 없이 이리저리 구르는 눈동자, 내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쥔 작은 손. 어쩌면 내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난 거짓말은 안 해!”
그 득달같은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만.
조금 과장했을 뿐이지.
불퉁 앞으로 튀어나온 통통한 입술 사이로 짧은 말이 흘러나오자, 테오는 결국 참았던 실소를 터트리며 세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 과장. 조금은 아니고 아주 많이.”
“뭐? 너도 날 속인 주제에! 내가 언니한테 다-!”
아무래도 세이에게 단단히 적수가 생긴 듯했다.
방에 끝없이 차오르는 고성과 흩어지는 격양된 낱말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으니, 당연히 이 소란을 들었을 후작이 놀라 문 앞의 통로를 서성였다. 무슨 일이니, 입 모양으로 묻는 말이 그리 말하는 듯해. 작게 어깨를 으쓱한 나는 눈을 들어 올려 여전히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둘을 응시한다. 그 너머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화창한 풍경도.
지독히도 푸른 하늘이 나쁘지 않네.
덤덤한 상념과 함께 그 비경을 짧게 일별한 나는 시선을 내려 둘에게 물었다.
“숲에 가는 건 어때?”
끝없는 다툼을 종결시킬 묘책을 입에 걸고.
신이 났다.
메이나 숲에 도착하자마자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세이를 보며 나는 그리 생각했다. 다른 말로는 저 모습을 표현할 수 없으리라는 것 역시. 들기도 버거워 보이는 다과바구니를 직접 제가 든다고 고집을 부린 세이는 나무 우듬지 밑에 수십 개의 화환을 만들어 놓고는 이제 온갖 정체 모를 씨앗들을 주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등을 땅에 대고 한가로이 누워 있는 테오 역시 빽빽하게 흘러가는 후계자 수업에서 벗어나 여유를 만끽하는 듯 보였고. 못마땅해할 엘몬트가 눈에 선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을 느리게 배회하던 나는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서신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곧 다가올 영지 시찰에 관련된 서신이었다.
별장에 머무는 기간이 잦아지자 중한 일이 아니면 대부분 서면으로 처리하는 일이 다반사였던 것이다. 시찰 기간과 경로. 빠르게 서신을 읽어 내려가고 답신을 쓰자, 어느새 햇살이 기울어진 채였다. 피로에 물든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눈꺼풀을 여닫았다.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 저택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도, 그 성을 하사받는 일도. 이리 열중해야 될 까닭도 없다. 다만…….
시간을 벌어 줘야지.
투명한 햇살에 젖은 눈이 숲을 싱그럽게 만드는 수목을 매만지는 세이에게 닿는다. 티케 일족의 손에 자라는 수목은 이토록 싱그러운 것일까. 바람의 결을 따라 흘러온 향기가 코끝을 기분 좋게 간질인다.
네가 자라, 공작가의 주인이 될 때까지.
은파처럼 찰랑이며 부서지는 오후의 햇살 속을 노니는 너를 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곁에 다가온 후작이 나직이 물었다.
“무슨 서신이니.”
“저번에 말씀드렸던 일이요. 열흘 뒤면, 영지 시찰이 있을 거라.”
아, 작게 후작이 고개를 끄덕인다. 뒤따른 문장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어지는 적막에 눈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서신에서 눈길을 거둔 후작은 내 옆에 만개한 리베라의 꽃에 시선을 고정된 채였다.
“리베라의 꽃이구나…….”
“네, 세이 때문인 것 같아요. 숲 깊숙이 있어야 할 리베라가 여기까지 피었네요. 다행히 세이가…….”
원체 토양과 볕의 영향을 잘 받아 수도에서는 보기 힘든 리베라가 신기한지 유독 세이가 좋아하는 꽃이었다. 이를 떠올리며 설명을 이어 가던 내가 말을 멈칫한 것은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빛살에 유독 희게 질려 있는 후작의 얼굴을 발견했을 때였다.
“후작님?”
“나는…….”
“괜찮으세요?”
“……향이 너무 짙구나.”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후작은 그렇게 말을 얼버무리고는 애써 표정을 감추려는 듯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후작이 두통을 호소하는 일이 잦아진 건 그날부터다.
“꼭 가야 하니.”
영지 시찰이 다가올 하루 전, 어느새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녹음 진 눈동자는 쏟아져 나오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일렁거렸다. 예상치 못한 격한 반응.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물론, 가야 하겠지. 내 말은, 그러니까.”
불안정하게 떨리며 진동하는 음성이 풀잎들의 허리를 꺾으며 요란하게 정원을 배회하는 바람 소리 위로 스며들었다. 무슨 연유일까. 나는 내 손을 꼭 맞잡은 금빛 의수를 내려다본다. 두통을 호소하는 일이 잦은 만큼 내가 없으면 진정하지 못해. 세드릭과의 만남에도 꼭 같이 해야 할 정도였다.
“무를 수는 없어요.”
“그래, 그렇지…….”
끊어질 듯한 호흡에 실려 흘러나오는 소리를 가만히 귀에 담으며 나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같이 가시는 건 어떠세요?”
기억과 여행.
아마도 이 말을 들으면 그 책을 신나게 들고 뛰어다닐 금발의 주인을 떠올리고서.
***
기억과 여행.
오후의 온기를 머금은 푸른 눈동자는 막 마차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영지 시찰의 출발 신호에 다시 한번 그 책을 뿌듯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기어코 굴러가기 시작하는 마차의 움직임을 느끼자 천천히 책장을 넘기기까지도 했다. 책등을 쓸어내리는 어색한 손짓과 곧바로 눈꺼풀 위로 쏟아지기 시작하는 졸음을 보아하니 아마 처음 그 책을 읽는 것 같긴 했다만.
그러니까 역시나 직접 읽은 건 아니었구나.
공작저 사용인들의 고충이 더욱더 확실해진 상황 속, 돌아가면 적당한 포상을 해 주어야겠다 생각한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이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마차가 출발하기 전부터 피로해 보이던 후작은 벌써 창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울인 채 잠들어 있었다. 쏟아지는 볕에 수척해진 그의 낯이 도드라졌다. 해쓱하게 가라앉아 파리한 낯빛과 바싹바싹 메말라 가는 입술. 이제는 가물가물해졌다 여긴 병색 짙은 그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게 되자 한숨은 절로 깊어진다.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가끔 한밤중에 정원을 배회하는 모습도 종종 보았다는 엘몬트의 말도 덩달아 떠오르자 더욱 그러했고.
무엇이 문제일까.
세드릭과의 만남을 후작이 불편하게 여긴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리 상황이 악화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 힘에 어떤 부작용이 있었다는 가설이 더 맞는 걸까? 그나마 가능성 있는 가정을 곱씹어 보며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기를 두어 번 반복한다. 시야 귀퉁이로 몇 장 넘기다 못한 책을 손끝에 든 채 쏟아지는 졸음과 싸우며 고개를 꾸벅거리는 세이가 보인 건 그때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세이는 멀쩡하잖아.
무용해진 예측에 옅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마차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숨결에는 해갈되지 못하는 물음에 대한 당혹스러움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곧 세이의 발치로 떨어질 것 같은 책을 조심스레 드는 것으로 번다한 마음을 달랜 나는 기억과 여행, 조금은 의미심장해 보이는 책의 제목을 짧게 일별하고는 창밖을 응시했다.
창가의 풍경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마을의 어귀로 이어지는 헐거운 개울과 울창한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둥근 천장처럼 아치를 이룬 채 쭉 뻗은 길목. 차례로 이를 느리게 배회하던 내 시선은 영지 지천에 깔린 익숙한 식물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리베라의 꽃.
‘……향이 너무 짙구나.’
불현듯 떠오른 지나치게 선명한 기억과 함께.
창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에 굳게 닫혀 있던 후작의 눈꺼풀이 올라가고 투명한 눈동자 위로 내가 보는 것과 같은 상이 내려앉은 건 그때다.
***
무슨, 마가 낀 게야.
에오르테 후작이 의식을 잃었다.
아델리아 공작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미루고 미루던 영지 시찰이 막 그 시작을 알리자마자 벌어진 변고였다. 다시금 되새겨 봐도 믿기지 않는 황당함에 보좌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수통 안에 들린 독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지난해 있었던 공작의 실종 역시 이 영지 시찰에서 일어났던 일이라는 끔찍한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그때 그가 상황을 수습하느라 어찌나 진땀을 뺐던지. 원로들의 서슬 퍼런 기세를 떠올리자, 보좌관은 급기야 부르르 몸을 떨기까지 했다.
함께 동행했던 에오르테 후작의 상태가 좋지 않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이 정도로 끝난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걸까?
심중에 돋아나는 물음에 보좌관은 심상한 눈빛으로 공작가의 가장 외진 영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매끈한 가도와 외딴섬이라도 되는 것같이 온갖 수목들이 만발한 이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어느덧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그곳에 엉켜 있는 것은 그래, 염려와 불안이다.
공작도 공녀도 무사하니 그저 괜찮다라고 여기기에는 공작령에서,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며칠째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준 충격이 큰 탓이다. 지난 몇 주간 꼬박 밤새워 만든 영지 시찰 일정이 어그러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칫하면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 지역 아닌가.
그러게 그렇게 반대했건만.
영지 시찰이 무슨 어린아이 소풍도 아니고. 공녀에 공자에 후작에. 바리바리 사람을 다 달고 떠난다던 말에 그가 어찌나 황당했던지. 연신 홧홧하게 타들어 가는 그의 마음에 기름을 부은 건 막 그의 주인이 머무는 별장에서 저와 마찬가지로 번민으로 가득해 보이는 낯이 나타났을 즘이다.
“의원님, 후작님의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은근한 기대가 묻어난 말투가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돌아오는 공작가의 주치의, 네루다의 반응은 여전했다만. 미지의 시계에 대한 호기심과 평화로운 안온에 대한 갈망이 섞인 네루다의 표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저보다 더욱 지친 기색이 다분해 보이기도 했다. 이번 일로 죽어 나가는 사람은 저 하나만은 아니구나, 자신에게 건네는 씁쓸한 위로와 함께 그는 반쯤 남아 있는 수통을 저보다 더 피로해 보이는 의원에게 건네주었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이를 단숨에 들이켜는 네루다의 입술, 그 사이로 흩어지는 알싸한 향을 맡으며 보좌관은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아래 완만한 언덕, 저마다의 향기를 자랑하며 피어 있는 꽃들을 무심히 바라본다. 이름 모를, 그러하기에 그닥 관심도 없는 들꽃들은 지나친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가장 독보적으로 만개한 리베라의 꽃에서였다.
그러니까 이번 일이 다 저 빌어먹을 꽃 때문이지.
오늘도 이곳을 떠나긴 글렀고 자칫하면 이 시골에 박혀 생을 마감하게 생겼지 뭔가 하는 불안이 한껏 가늘어진 그의 눈초리에 그대로 깃들어 있었다. 오늘은 정말 공작에게 이 상황의 심각성을 말씀드려야겠다, 하는 어쩌면 무모해 보이는 용기도.
“공작님, 더는 이리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별장에 머물게 된 지 며칠째, 이른 아침의 시작을 알리는 보좌관의 채근이 내실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어제와 같은 리듬으로 오늘이 반복되리라, 그리 예견하게 하는 불길한 신호와도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밖에서부터 곧게 뻗어 내리기 시작하는 빛줄기를 따라 창가로 걸음을 옮기자, 익숙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부서지는 햇살을 받은 백금발과 푸르른 녹안을 삼킨 까마득한 심연.
후작은 오늘도 별장 밖으로 나가 시골 영지를 수놓고 있는 리베라의 향연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후작님의 상태가 좋지 않다만, 본디 이곳은 에오르테가의 별장 아닙니까. 그걸 선대 공작님께서 구입하신 거고요. 제 생각엔 별다른 문제가-”
보좌관의 잇새로 흘러나오는 참된 조언들은 귓가에 닿지 못하고 소멸해 버린다. 내실의 공기를 격양되게 만들 정도로 간절한 그의 호소를 이번에도 외면한 나는 빠르게 보폭을 넓혀 이제는 불안하게까지 보이는 바깥의 풍경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후작님?”
몇 번을 불렀을까. 적막 속에 얼어붙어 있던 그가 그제야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린다.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 녹안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햇볕에 달궈져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지표처럼. 서둘러 대화를 이어 가야 했지만, 적이 당황한 나머지 침묵만 길어진 건 그 탓이다. 그사이, 후작이 먼저 적막을 거두어들였다.
“리베라의 꽃은 가꾸기가 힘들지. 토양도 볕도 다 중하니. 아주 어려운 일이야.”
“……한번 꽃을 피우면 다음은 쉽게 자라잖아요.”
“……그렇지, 그래.”
“날이 차요. 들어가셔야죠.”
“알았다.”
말과 달리 땅에 뿌리를 박은 듯 고정된 다리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테오와 합심해 간신히 그를 설득해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었지만 여전히 별장 안으로 들어와서도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후작은 오로지 그곳을 바라보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식사를 하는 것도 잊고, 우리의 존재도, 여기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도 모조리 잊은 채로.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건 아마 이것이리라.
“후작님?”
오늘도였다.
몇 번이고 방문을 두드려도 돌아오는 답이 없어 조심스레 문을 열자, 방 한가운데 서 있는 그가 문 너머로 보였다. 마찬가지로 시선은 창밖의 풍경에 고정된 채였고.
“잠이 안 오세요?”
아마 내가 방에 들어와 확인하지 않았다면 밤새 그러고 있을 게 분명한 그는 지금처럼 누군가가 침대맡으로 이끌어야 간신히 잠을 청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방의 온기가 적당한지, 불빛이 그의 심사를 어지럽히지 않는지. 마지막으로 네루다가 준비해 준 숙면에 좋은 차를 그에게 건네며 나는 가만가만 목을 울렸다.
“이걸 좀 드셔 보세요.”
그래도 곧잘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다행인 걸까.
딱히 토를 달지 않고 잔을 비우는 후작은 아마 그럴 여유도 없이 온전히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게 더 적합할 수도 있다. 네루다도 무어라 딱히 답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에서 후작의 그런 증세는 점점 더 심각하게 치닫고 있었다. 눈 밑 드리워진 그늘과 메마른 입술이 어룽대는 불빛에 선연하게 도드라질 정도로.
그리 걱정스러운 사념을 조금 희미하게 희석시킨 건 곧 내실에 차오르기 시작한 고른 호흡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약효는 잘 들어. 잠을 자지 못한 후작을 위해 네루다가 고심한 끝에 만든 수면초에 끝 모를 기세로 타오르는 영문 모를 그의 집념을 간신히 사위자, 그제야 나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제는 흐릿하게 남은 어린 시절,
“꿈을 꾸실 거예요. 아주 좋은 꿈을. 기억이 나지 않아도 기분 좋은 느낌만은 가득한.”
내 밤을 다독였던 다정한 문장들을 입가에 올릴 여유를 되찾을 정도로.
“그렇다고 깨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짙은 어둠.
“그곳에도 이곳에도 제가 있을 테니.”
그 암흑의 시간을 가로질러 울려 퍼지는 음성은 부드럽다.
“아무 걱정 마세요.”
그의 속 안에서 곪고 있는 상처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데 이를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기어코 문제가 터진 건 그날 밤이었다. 별장을 찢을 기세로 울려 퍼지는 비명과 함께.
***
이것은 꿈인가.
몸을 잠식하는 생경한 감각, 비현실적인 환상의 경계 어딘가에 부유하는 것 같은 그 기분에 리오는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본다. 열 손가락을 아무리 꼼지락거려 봐도 무엇 하나 이상할 것 없다. 하기사, 꿈을 꾼다면 이렇게 지나치게 평범한 꿈을 꿀 리가 없지.
창연한 햇살이 내리쬐는 낯익은 언덕, 그 위에 자리 잡은 온갖 들풀들을 스치듯 지나간 그의 눈은 그것을 정돈하고 있는 아버지에게로 흐르듯이 닿는다.
지금 그의 앞에 펼쳐진 게 어제와 다를 것 없는 그의 일상이라는 걸 반증하는 지독히도 익숙한 인영이었어. 자칭, 서머셋가의 주인.
헌데, 왜일까.
그제도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봐 왔던 얼굴이고 봐 왔던 모습들인데, 그리하여 전혀 특별할 것도 없는데, 자꾸 눈가가 부옇게 흐려지는 건. 리오가 습기로 차 맞지 않는 초점을 맞추려 동공을 여닫는 사이, 그를 부르는 맑은 목소리가 들녘 위로 울려 퍼진다.
“리오!”
붉어지는 눈시울, 떨리는 입술. 차마 답을 주지 못하자 소리는 점차 또렷해져. 어느새 제 앞으로 다가온 인영이 그의 위로 긴 그림자를 그린 건 그때다.
“무슨 일 있니?”
“……저도 잘 모르겠어요.”
원, 녀석도. 작게 웃음을 흘리며 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 거친 손은 이제 드넓게 펼쳐진 언덕을 가리킨다.
“자 봐라, 이제 저게 우리 서머셋가를 먹여 살릴 거다.”
잡초만이 무성한 들판과 군데군데 심어진 리베라의 묘목을 향해 놓는 엄포는 일개 별장 관리인치고는 제법 장대했다.
“저게 뭐예요.”
“글쎄, 정원이라고나 할까.”
“세상에 저런 정원이 어딨어요. 게다가 리베라의 꽃은 가꾸기가 힘들잖아요.”
그러자 언덕을 둘러보던 아버지의 시선이 뜻 모를 눈빛과 함께 그에게 닿는다.
“한번 꽃을 피우면 다음은 쉽게 자라잖니.”
그 속에 담긴 농도 짙은 감정의 정체를 가늠하려 그가 눈을 가늘게 뜨자, 어느새 다시 평소와 같은 낯으로 되돌아온 아버지는 커다란 손을 맞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자, 자, 꾀부릴 생각 말고 빨리 움직여 시간이 없어! 보기 좋은 꽃이 팔기도 좋다고.”
아버지의 진두지휘 아래 리오는 몸을 움직였다. 군데군데 돋아난 잡초들을 정리하고 수목들이 잘 자랄 수 있게 토양을 정돈하고. 제대로 한번 펴지도 못했던 허리를 젖힌 건 시붉은 석양이 언덕 위를 붉게 물들일 즘이었어.
“해가 지는구나.”
“……이제 돌아가요.”
머리까지 다 뒤집어쓴 흙먼지와 욱신거리는 팔다리를 매만지며 리오는 낮게 중얼거렸다. 어제도 분명했던 일인 것 같은데. 오늘따라 왜 이리 피로할까. 당장이라도 잠이 들 것처럼 졸음이 쏟아져. 그가 그렇게 눈을 비비고 있자, 커다란 손이 언덕에 자리한 플라타너스를 가리키며 말한다.
“너는 여기서 눈 좀 붙이고 쉬고 있으렴.”
“왜요.”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서 그래.”
“어디요?”
“비밀이다.”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아버지는 그를 번쩍 들어 올려 그대로 나무 우듬지 위에 올려놓을 듯 장난을 치더니 조심스레 부드러운 풀들이 자리한 위로 내려놓는다. 생각해 보니 이런 시간들이 종종 있었다는 게 떠오른 건 다시 한번 제 머리를 헝클이는 손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고 있을 즘이다. 잠시 그가 이리 기다리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맞은편 이웃집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빌리고 빌려주곤 하는 시간들. 헌데 왜일까. 오늘따라 홀로 있기 싫은 건.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리오는 조금은 나이답지 않은 어리광을 부려 본다.
“글쎄.”
짧은 중얼거림을 끝으로 아버지는 눈을 들어 잠시 어딘가를 응시해. 한참이 지나 그에게로 되돌아온 시선, 그와 꼭 같은 암갈색 눈동자 위로 맺힌 것은 아까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다.
“하지만 그 애가 널 기다리고 있잖니.”
“누구요.”
“그 자그마한 아이 말이다.”
“……누구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떠오를 것 같기도 하고 영영 그러지 않을 것 같기도 한 기억 속을 그렇게 헤매고 있는 사이, 어느새 그에게 등을 돌린 아버지는 점점 멀어져 갔다. 오늘은 가지 마세요, 언덕을 뒤흔드는 세찬 그의 외침, 목이 쉬어라 질러 대는 소리들을 듣지 못한 것처럼. 이제는 언덕 아래 흐릿하게 번져 가는 아버지의 인영에 초조하게 눈을 굴리던 리오는 급기야 뜀박질을 시작해. 공허하게 흩어져 버리는 소리들을 가르고 제 두 배나 되는 아버지의 보폭을 따라잡은 건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가지 마시라고…….”
간신히 붙잡은 아버지의 옷자락에 헐떡이는 호흡과 함께 흘러 나오던 안도의 문장은 그쯤에서 멎었다. 그가 꾹 말아 쥐고 있던 옷깃에는 일순 불길이 피어오르고 어느새 아버지의 낯은 두려운 이의 얼굴로 바뀌어.
……페치오!
공포로 딱 달라붙은 입술 사이에 맴도는 단어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도 두려운 이름이야. 그 이름의 주인은 말했다.
넌, 누구냐, 꼬마야.
일말의 자비도 깃들지 않는 걸음, 무겁게 변한 공기의 기류. 지천에 깔린 풀잎들을 짓밟으며 그가 움직이자 언덕 위의 푸른 녹음들은 이내 누렇게 변하고 메마른 채로 바스라진다.
숨쉬기가 버거워. 숨이 쉬어지지가 않아.
발걸음을 주춤대며 뒷걸음질 치던 리오가 끝내 바닥으로 허리를 꺾어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 언덕 어귀로 흐르던 개울이 그를 삼켜 와. 끝없는 아래로, 아래로 그를 잡아당기며. 아버지의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들바람처럼 맑은 웃음소리, 그 울림이 주는 평화로움은 이내 사라지고 리오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아래로. 끝없는 아래로.
시야는 점멸하고 폐부에는 끝없이 물이 차오르는 시간, 깊어지는 공간 속 빛줄기마저 사위어가기 시작할 즈음, 흐릿해진 눈으로 아이가 보였다. 물빛 너머로 보이는 풍경 속 리베라가 만개한 들판에 앉아 있는 아이는 곱게 땋은 은발을 가지런히 정돈하며 그를 내려다봐.
누구인가. 저 아이는.
그의 물음이 포말과 함께 물속에서 하얗게 부서진다. 그들 사이에 놓인 간극을 이기지 못하고 닿지 못한 채로. 닿지 않아. 닿지 못하고 흩어져. 끝없는 아래로 가라앉는다. 리오는 부유하는 물결 속으로 자신의 몸을 맡긴다. 간혹 들이치는 유백색 빛기둥에 모든 것을 체념한 자의 표정이 떠올라.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다.
‘꿈을 꾸실 거예요. 아주 좋은 꿈을.’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그런데도 기이하게 낯설지 않은, 고저 없는 음성을 타고 언제고 그의 밤을 다독였던 아버지의 다정한 문장들이.
‘기억이 나지 않아도 기분 좋은 느낌만은 가득한.’
슬금슬금 그를 잠식하던 어둠의 기운이 미약해지고 깜빡거리던 초점이 조금씩 맞춰져.
‘그렇다고 깨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곳에도 이곳에도 제가 있을 테니, 걱정 마세요, 후작님.’
아델.
흩어지는 포말들 사이로 그 단어가 터져 나오는 순간,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흘러 들어온다. 들녘의 버드나무 가지처럼 흔들거리는 머리칼, 고요한 호수 위를 걷는 듯 조용한 걸음걸이.
아델. 그래, 아델.
이제는 선명해지는 추억의 파편들과 함께 초점은 분명해진다. 물살을 가르고 제게 뻗어진 손이 훤히 보일 정도로. 잠시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오는 그 여린 손을 맞잡았다.
“괜찮으세요?”
부연 운무에 휩싸인 듯 세상은 낯설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를 마주하는 여러 쌍의 물기 가득한 눈빛들도. 모두 생경해. 저를 감싸 오고 있는 지나치게 매끄러운 이부자리를 꾹 움켜쥔 리오는 혼란스러운 눈을 들어 올렸다. 바람에 부풀려진 보드라운 휘장과 벽지를 수놓고 있는 섬세한 잔무늬들을 지나친 눈은 흐르듯이 제 손을 꼭 움켜쥔 인영에게로 가 닿는다.
투명하게 부풀어 오른 달빛을 머금은 듯한 은안. 점점 좁혀 오는 거리에 그 눈의 주인이 또렷해져. 가늘고 옅은 얼굴선 안에 날카롭게 그어진 눈매가 그를 담고는 가득 차오른다.
아델…… 아델.
그래, 아델이었다.
***
그와 눈이 마주치고 시선이 얽혔다.
그 농도 깊은 감정들이 오롯이 나에게 전해질 즈음, 그가 다시 한번 입술을 열었다.
아델.
그는 무언가 되새기는 듯한, 잊고 있던 것을 꼭꼭 아로새기는 듯한 말투였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그 수없이 되풀이되는 단어의 뜻에 나는 입술을 짓이겼다.
포기했던 이름이었다.
한때는 그 이름을 갖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그 바람이 그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게 된 후에는 그러했어. 언제고 소망했던 이름은 어느 순간 더 바라는 것도 사치인 단어가 되어 버렸지. 그 이름을 그저 한없이 바라기에는 그가 그리 나를 볼 수 없는 연유가 너무 아파서. 너무 서글퍼서. 그래서 버리고 지웠다.
나쁘지 않다 여겼어.
그 이름을 갖지 않아, 내게 가장 소중한 이의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게. 더는 원하지 않는다 여기기도 했다. 두 음절의 낱말 따위 없어도 우리의 세상은 안온하기에.
그런데, 그리 여겼는데…….
“……다시.”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문장은 왜 이리 떨릴까.
“……다시 불러 주실래요?”
공간을 흔드는 음성은 왜 이리 애달프게 들릴까.
그의 뺨을 쥐고 눈을 맞춘다. 늘 쉬웠지. 그의 생각을 읽어 내리는 건. 그래서, 그러했기에 늘 오롯이 마주 보기 두려웠던 투명한 눈동자를 오늘, 처음으로 가감 없이 바라보았다.
아델.
고작 없어도 그만이라 여겼던 낱말이 내 발 위로 떨어지고 견고하게 쌓아 왔던 위악의 세계가 무너진다. 그 눈 위에 맺히는 상을 볼 때마다 심중에 희미하게 자리하던 아릿함이 가시는 걸 확인하려는 듯 나는 어린아이처럼 그를 채근해.
“다시요, 다시 한 번 더요.”
또 한 번의 단어가 내게 흘러오고 세상은 빛으로 물들고 뺨은 물기로 쉼 없이 젖어. 나는 그 순간 오롯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나로 피어난다.
아이도, 리오도 아닌 오로지 나로.
아델로.
그 뒤로는 이제 희미해.
아마 나는 연신 그를 종용하고 그는 내 채근을 수용하며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긴 밤이 끝나고 여명이 찾아와 아이는 어른이 되고, 소년은 사내가 되는 그 순간을 내비치는 빛줄기가 우리 둘을 감싸 올 때까지.
***
놀랍도다.
공작가의 영지 시찰이 갑작스레 무산되고 긴 여행에서 돌아온 후작을, 제 눈앞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며 세드릭은 그보다 더 적합하게 이를 표현할 낱말을 찾지 못했다. 실로, 놀라워. 먼저, 제법 오랜만에 보게 된 이의 낯이 이제는 사람다워 보인다는 점에서 그러했고 이전보다는 그래도 안정적인 궤도를 찾아가는 그의 답변들이 또 그러했다.
“그러니까 승마는 좋아하신다는 거죠?”
여전히 미미한 불확신이 깃들었지만, 그럼에도 위아래 세차게 고갯짓을 하는 후작의 반응에 세드릭의 낯에는 안도의 기색이 흘렀다. 벌써 몇 번째 질문이었지만, 한 번도 답이 흐트러진 적은 없었다.
기억의 조각들은 여전히 맞질 않고 깨지고 부서진 파편들이 많아. 하지만 이런 간단한 물음들은 그래도 일관성을 띠기 시작했다. 무엇을 좋아하냐, 무엇을 싫어하냐. 간단한 것 같지만 중심이 잡히지 않으면 쉬이 답하기 어려운 어쩌면 가장 본질적인 물음들.
그러니까 상황은 나쁘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 실상, 꽤나 순조롭게 풀려 간다는 것에 가깝지. 모든 게 순풍을 타고 나아가는 돛단배와 같은 지금, 일필휘지로 보고서를 써 내려가는 세드릭의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걸렸다. 이 사실을, 제 뼈를 깎아 만든 공적을 그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떠오른 건 그가 거침없이 빈 백지의 공간을 빼곡하게 채워 내렸을 즘이다.
이런.
작은 탄식과 함께 그의 손끝에서 떨어진 깃펜의 소리가 막 완성된 보고서로 스며들었다. 손이 곱아들 정도로 유려하게 새겨진 필체, 그 필체에 담길 업적을 완수하기 위해 보내야 했던 수많은 시간들을 허망하게 흘려보내야 한다니.
어떻게 안 될까?
혹시나 하는 일말의 가능성을 담은 시선으로 창 너머 정원에 막 자리를 잡은 후작을 살피던 그는 의도와는 다르게 도리어 확신하고 말았다.
어떻게 안 돼.
후작의 일이라면 끔찍하게 생각하는 공작이 그의 목 하나쯤은 눈 감고도 날려 버릴 수 있는 섬뜩한 여자라는 걸, 그녀를 뒤따랐던 무수히 많은 무시무시한 수식어들이 그저 헛된 것들은 아니라는 걸 상기한 세드릭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도리질을 했다. 만에 하나 일이 틀어졌다가는 그는 아마 제 명에 살아남지 못할 테야, 라는 다소 비관적인 생각과 함께. 깊은 한숨을 내어 쉰 세드릭은 아쉬움이 다분한 눈으로 한결 평화로워진 후작의 모습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
리오 서머셋.
여명 아래 도드라지는 그 이름 새겨진 연고통을 리오는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손짓에는 진짜 물건의 주인을 반평생이 지나 알게 된 자의 허탈함이 공존해 있었다.
그저 악몽이라 여겨 외면했던, 이 물건을 갖게 된 날의 기억이 점차 선명해진다. 페치오와 처음 만난 날이었어. 대저택이 주는 위압감에 짓눌려 어쩌면 자신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육체를 휘감아 오는 고통과 맞물려 폭발하게 된 날이었지. 한참을 성치 못한 그의 몸을 치료해 주던 엘몬트가 협탁 위에 연고통을 두고 나서자, 리오는 그곳에 제 이름을 새겼다. 얼른 이 모든 일이 끝나 집으로 가리라 다짐하며. 언제고 그에게 닥칠 일들을, 그리하여 한 번은 이 이름을 잃을 것 같다는 불길함을 어쩌면 그때 한 번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버지께 에오르테가로 가고 싶다고 한 거 알아요?”
허공으로 흩어지는 아연한 물음에 곁을 지키고 있던 엘몬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는 너무 눈부셨고 거기서 내리는 어머니는 더욱 그랬지. 모든 게 완벽해 보였고 그 완벽한 세상이 궁금했어.”
그 한 번의 호기심이 모든 걸 망치게 할 줄도 모르고.
바닥으로 떨어진 문장에는 어린 날의 자신에 대한 원망이 묻어났다. 깊은 불안을 숨기지 못한 아버지의 눈을 외면한 천연덕스러웠던 자신을. 그리하여 기어코 몰고 왔던 파국을.
“왜…… 왜 돌아왔니, 리오. 그렇게 돌아오라고 널 보낸 것은 아니었는데.”
그러니 엘몬트의 물음은 무의미해.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 돌아갈 곳이 없었으니까.
그날, 저택을 휩쓸었던 화재가 모든 걸 집어삼키고 기어이 자유를 되찾았던 날, 그가 돌아가 보게 된 것은 황폐해진 집과 온기를 잃은 공간들뿐이었으니까. 어쩌면 그가 돌아오지 못한 나날, 아버지는 그 속에서 사위어 갔을 거라는 것도. 그 모든 일의 시작은 그로부터 말미암아 벌어졌다는 것도. 그러니 그는 그곳에서 도망치기 위해 그가 도망쳐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
단 한 번. 비극은 그렇게 단 한 번의 호기심으로 시작돼.
그랬기에 스스로를 부정하고 부정해 마침내 그의 세상에 벽을 쌓아 올릴 정도로. 그 견고한 고립의 성에 오는 균열은 언제였던 걸까. 분명한 그 시작을 떠올리자, 그의 낯을 잠식하고 있던 울분과 자책이 가신 자리 위로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 또한 단 한 번. 단 한 번의 호기심. 이 별장에 올 동안 벌어졌던.
궁금했어.
어째서 그 어린아이가 그렇게 늦은 시각 그리 도망치듯 어딘가를 배회하는지. 그 자그마한 아이가 마차에 치였는데도 어째서 아무도 깊이 고심하지 않는지. 그 아이를 알아 가는 여정이 실은 저를 되찾는 긴긴 과정이라는 걸 그때는 알았을까.
그렇게 단 한 번의 호기심으로 시작된 구원.
우스운 말장난과도 같은, 양면의 동전과 같은 수식어들을 혼란스럽게 곱씹어 보던 리오의 얼굴은 결연한 빛깔로 물들었다. 어차피 이를 포장해야 할 낱말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그리하여 그 잣대로 자신의 지난날들을 평가해야 한다면 리오는 후자를 택해 보기로 했다.
보기 좋은 꽃이 팔기도 좋으니까.
언제고 아버지가 했던 괴상망측한 말들을 떠올리며.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해.”
그리하여 어느새 울부짖음으로 변한 엘몬트의 물기 섞인 사죄에 대한 자신의 답은 진정 우러나오는 진실이었다.
괜찮아요, 이젠 괜찮아.
꽃을 심고 가꿨다.
붉은 석양이 별장 위로 내려앉을 무렵, 리베라의 묘목을 가꾸느라 깊숙이 내렸던 허리를 리오는 처음으로 젖혀 올렸다. 서녘을 물들인 붉은 빛깔을 잠시 감상하던 그는 이를 스치듯 지나 붉은기에 젖어 더욱 아름다운 유경을 만들어 내는 꽃가지들을 담아냈다. 푸른 잎이 나기 시작하는 리베라의 꽃을 품은 그의 시선은 한없이 다정했다.
리베라를 심게 된 건 며칠 전이었다.
그를 염려하며 아델이 정원에서 리베라를 치워 버린 지 꼭 한 달째기도 했고.
얼어붙은 계절이 끝나자마자 했어야 할 일은 시기가 맞지 않아 불안하긴 하였으나, 그 걱정들이 무색하게 제법 잘 자라 주었다. 리오는 그 공적을 제가 아닌 다른 이에게로 돌렸다. 봉우리를 막 터트리려는 꽃망울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고 있는,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공녀에게로. 아무래도 티케의 손에 수목은 풍요로워지는 법이니까. 물론 그런 공녀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아주 귀한 것을 다루는 듯한 손짓으로 묘목의 뿌리가 될 토양을 매만지는 조카의 공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소리의 주인도.
소리가 들려온다. 아델이 다가오는 소리가.
리오는 들고 있던 삽에 가만히 몸을 기대고는 그 소리에 귀 기울여. 풀잎을 가만가만 스치듯 드레스 자락과. 울림 하나 남기지 않는 조용한 발걸음 소리에.
곧 그의 앞에 나타날 걸음의 주인을 떠올리자,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정원의 풍경들이 선연해졌다. 반쯤 들쑤셔진 정원 안에 듬성듬성 심어진 묘목과 파헤쳐진 토양. 마치 그의 세상처럼 어수선하고 어수선한 광경들.
여전히 그의 세상은 혼란스러워. 어느 날은 선명했다가 다음날은 흐릿해.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릴 때는 잦다.
하지만 신기한 일이지. 아델과 관련된 기억들은 항시 또렷하기만 하니. 그 기억들은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등불이다. 깊은 수면 아래에서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를 건져 냈듯.
“벌써 거의 다 마무리하셨네요?”
지금처럼.
귓가를 간질이는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크기를 조금 키운 은안이 흙더미 속을 뒹군 것 같은 공녀와 테오를 스치듯 지나가 그에게로 와닿았다. 영지 시찰이 무산되며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로 수도로 향했던 아델이 이곳에 돌아온 것은 지난밤이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아델은 계속 그의 곁을 따라다녔어. 눈을 맞추고 제 손을 맞잡으며.
‘뭐가 진짜야.’
이젠 그런 물음들을 하는 법도 그리 많지 않았는데…….
아델은 항시 그랬어.
아델. 소리 죽인 그 낱말을 혀끝에 굴려 보자, 코끝이 알싸하고 마음을 간질이는 기이한 감각이 그를 찾아온다. 미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해. 그래, 고작 그 단어 하나에. 얕은 헛기침으로 그 감각을 지워 낸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았던 듯 입을 열었다.
“그래, 아마 내일이면 끝날 듯해.”
“죄송해요, 제가 더 빨리 와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괜찮아, 많이 도와주었잖니.”
고개를 위아래로 세차게 끄덕이며 뱉은 리오의 말에는 한 치의 과장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의아한 시선을 주는 아델의 눈에도 그러했지. 리베라의 꽃을 가꾸는 데 가장 열성적이었던 그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은 아델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가장 큰 공헌은 아델이었다. 물 한 번 묻혀 보지 않았을 공녀의 손이 흙범벅으로 변해 버린 것과 일분일초가 소중한 가문의 후계자를 온종일 정원에 기웃거리게 했던 것을 잊은 양 리오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아델이 제일.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논리적으로 이어 가며 벅찬 마음으로 아델을 바라보던 리오가 당황해하며 눈을 떨군 것은 막 그 찰나였다.
“괜찮으세요?”
미미하게 눈매를 좁힌 아델은 그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린다. 시선을 아래로 주었는데도 시야 귀퉁이를 가득 메운 은안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는 괜스레 발밑에 허리를 굽히고 있는 잡초들을 짓이겨 본다.
이전과 달리 안정을 찾아가는 기억들.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마음. 그를 찾아오는 변화는 그런 것들뿐만이 아니야.
종종 아델의 눈을 마주치기 어려울 때가 온다. 그것이 어떤 까닭인지는 잘 모르겠어. 어쩌면 그것은 거대한 혼돈만 가득하던 그의 세계의 중심이 된 이를 향해 바치는 마땅한 예우인지도.
그렇게 포장하기엔 여러 모순된 점들이 많았으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이를 애써 포장해 보며 리오는 슬며시 떨궜던 눈을 들어 올린다.
아득하구나.
해도 지지도 않았는데 이미 세상은 달빛으로 물들어 있어.
***
“다행이네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원을 바라보고 있던 두 인영 중 먼저 입을 뗀 것은 마리였다. 우두커니 로비에 서서 유리창으로 나비치는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지 아마 한 시진이 좀 넘었을 시각이었다. 고요한 아침, 정원에 내려앉은 안개는 묽어 들이친 볕을 위해 충분한 공간을 내어 주고 그 사이로 스며드는 따사로운 볕에 리오를, 어느 때보다도 평온해 보이는 그 애를 바라던 엘몬트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여전히 불완전한 세계 속을 살아가고 있는 듯했지만 그 애는 안온해 보였어. 그래서일까. 너무나도 부신 광경을 꽉 채우고 있는 평화로움 때문일까. 침잠하는 마음과 함께 상념은 깊어진다.
리오, 후작, 페치오. 시야를 뒤덮은 어둠의 장막 속으로 지나간 나날들의 회고가, 그 속에서 했던 그의 선택들이 켜켜이 쌓여 갔다. 아직도 단언할 수 없는 그 물음과 함께.
그 모든 선택들은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잠시 눈을 내리감았던 엘몬트는 다시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린다. 무수한 이파리들 사이로 내리비치는 햇살에 리오와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여러 인영들이 도드라졌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그에겐 선택권은 없었다는. 허나, 그런 변명 말고 또 확실한 건…….
그건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라는 거야.
이제 남은 일은 또 다른 이들이 채워 갈 거라는 것도. 리오의 손에 자라 이제는 그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 해사한 웃음과 함께 정원을 노니는 공녀와 이를 삐뚜름한 자세로 바라보는 공자를 스치듯 지난 엘몬트의 눈은 이제 찬란하게 빛을 내는 은안 위로 내려앉았다.
조금은 울음기가 섞여 있는 마리의 음성이 귓가에 들려온 건 그 무렵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으니 조사단도 조만간 철수하겠군요. 그럼 정말 다 끝나는 거겠죠.”
끝이라…….
엘몬트는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는 그 단어를 혀끝에 굴려 봐. 결코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순간이었을까. 아니면, 그 순간이 이토록 찬란하리라 여기지 못한 탓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문득 드는 물음 탓일까.
만물이 깨어나는 계절, 영원 속에 얼어붙었던 시간은 다시 흐르고 그 속에서 아이는 어른이, 소년은 사내가 되었는데 정말 이게 끝일까, 하는.
“글쎄.”
엘몬트는 시야를 흐리는 부신 은발에 고정되었던 눈을 틀어 이제는 그 눈에 가득 담겨 있는 사내를 바라본다. 언제고 진짜 라에갈 공자에서 보았던, 분명한 감정으로 충만한 빛깔이 리오의 눈에 들어 있어.
“이제 시작이지 않을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의아함이 깃든 마리의 물음이 귓가를 파고들자, 한 번 더 제 앞에 펼쳐진 광경을 되새기듯 바라본 엘몬트의 눈은 이제 기대감으로 차오른다. 이토록 아름다운 결말이 그들에게 찾아왔다면, 다음 이야기 또한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겠지. 모진 풍파를 겪은 이답지 않은 낙관적인 생각과 함께 엘몬트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야기가 이제 시작될 차례라는 말이야.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