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자매
삼촌이 그를 찾아온 건 한바탕 별장에 찾아왔던 소란이 산허리에 걸린 석양빛과 함께 언덕 아래로 사라졌을 무렵이었다. 의원을 태운 마차가 한참 전에 지나 이미 텅 비어 버린 시골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테오는 적막을 깨트리는 인기척에 몸을 틀었다.
“테오.”
어느 때보다 다정하게 저를 불러 주는 음성에 공자는 그제야 왜 제가 이리 유리창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까닭을 알게 되었다.
그저 잠시 골려 줄 생각이었다. 덤으로 공녀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대부인에 대한 공녀의 집착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지경에 놓인 후였다.
핏기 없이 질린 삼촌과 정원을 찢는 마리의 비명소리, 가빠 오는 공녀의 호흡.
소란과 달리 랑게르의 진단은 퍽 싱거웠던 게 그나마 다행이지. 자칫하면 큰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모두가 공녀를 주목하는 와중에. 순순히 그의 입에서 잘못을 인정하는 말이 흘러나온 건 그 탓이다.
“죄송해요.”
질책의 말 대신 삼촌은 되었다는 듯, 어깨를 토닥였다. 처음 거짓말을 했을 때도, 친분 있는 가문의 영식과 다투다 그의 이마를 찢게 만들었을 때도, 물건을 훔쳤을 때도 그저 삼촌은 그리했다.
어릴 적에는 그게 좋았다. 한없이 저를 아끼고 아끼는 것 같아. 헛된 말들에도 속지 않고 오롯이 그를 믿어 주는 것 같아서. 헌데 왜 이제는 그런 태도에 화가 치밀까. 왜 차라리 삼촌이 역정을 냈으면 할까.
늘, 삼촌은 그런 식이지.
그저 물 흐르는 듯. 다 중요치 않다는. 하긴, 그래서 매양 공녀의 그 작태도 토 다시지 않는 거겠지. 그러니 공녀의 오만방자함이 하늘을 찌르고.
온기가 흐르던 공기에는 미묘한 균열이 찾아오고 불쑥 생각지도 못한 말이 그 속으로 터져 나왔다.
“언제까지 공녀를 여기 머물게 하실 작정입니까.”
“그게 무슨 말이니.”
이를 느낀 듯 삼촌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내실에 차오르는 분연한 분노를 모르지는 않은 것 같은데, 도저히 그 까닭을 짐작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알아요. 제가 많이 잘못한 건 알아요. 하지만…….”
격양된 호흡을 감추려는 듯 테오는 눈을 내리감았다. 열이 차오. 지긋지긋해. 공녀와 엮어 끝이 좋았던 기억이 없다. 목숨을 구해 준 대가는 고작 이런 것이지.
“이 정도면 하실 만큼 했습니다. 이제 그만하신다 해도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올레나 그 여자라도요.”
“……알려 주는 사람이 없어 그래. 그래서 그저 보이는 것만이 중하다 믿는 거지. 제 식구들과 제 집안과. 세상엔 그것 말고도 다른 중한 게 있다는 걸, 사람과 사람의 마음은 피가 아닌 시간으로 이어진다는 걸 그걸 알려 줬던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런 게야, 테오.”
삼촌은 그렇게 차분히 설명을 이어 갔다. 입만 열면 베르니, 베르니. 가문의 명예와 광영을 입에 달고 사는 공작과 방만한 어미 사이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게 별다른 게 있었겠냐고. 그러니 공녀는 제가 배운 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고. 세상에는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게 많다는 걸 알기만 하면 공녀는 많은 게 바뀔 거라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바람으로 끝을 맺은 삼촌의 일장연설에 테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삼촌의 눈에 악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허나, 그렇다고 하여 공녀가 악동이라는 건 변치 않아요.”
“악동이라…….”
“그럼 그게 제정신 박힌 사람이 할 짓입니까.”
“……전대 공작이 죽고 대부인을 건사한 건 공녀야.”
세상에 그런 악동이 또 있니.
나직한 음성이 되묻자, 공자의 눈은 일순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
그러니까 그건 다 거짓말이었구나.
멍하니 정원 테이블에 앉아 깜빡깜빡 점멸하기를 반복하는 등불을 응시하던 공녀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그 사실을 되뇌어 본다.
그러니까 그건 다 거짓말이었어.
맵싸하게 불어오는 밤바람 사이로 공녀의 허무한 중얼거림이 흩어진다.
후작의 입을 통해 대략적인 내막을 전해 들은 공녀에게 처음 찾아온 감정은 부정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제 앞에 선 사내를 밀치고 때리고 할퀴었다. 공녀가 소원을 이루어 주는 꽃이라는 게 실은 말도 안 되는 것을 받아들인 것은 그런 공녀에게 공자가 다가와 진중한 사과를 내뱉은 후였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담담히 사과의 말을 전하는 음성이 그 여운마저 감춘 채 사그라들자, 이런 허무맹랑한 사실을 믿은 자신에 대한 자책과 노여움이 그녀를 잠식해 오기 시작했다. 기대한 것이 어그러진 자에게 찾아오는 실망감으로 그 남은 잔재들을 압도하면서.
다시금 저를 짓눌러 오는 무력함에 공녀는 고개를 젖혔다. 막막하게 펼쳐진 밤의 하늘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언제쯤 끝나는 걸까. 이 길고 긴 기다림은. 아버지, 언니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어머니를 잃고 마는 걸까. 그녀의 푸른 눈 위로 펼쳐진 하늘에 가없이 떠다니는 별빛들이 있다. 이 밤을 지배할 것처럼 찬란하게 빛나지만 결코 서로에게는 닿지 못하는.
우리는 결코 이 어둠 속에서 하나의 빛깔로 피어오르지 못하게되는 걸까.
어째서?
왜?
우리의 뼈와 살을 만든 시작은 같고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는 단 한 방울도 다르지 않는데. 어째서 우리는 함께하지 못할까?
허무하게 흩어지는 덧없는 물음에 시야는 습기를 머금고 부옇게 흐려진다. 맞지 않는 초점을 바로잡으려 공녀가 눈을 깜빡일 즈음, 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님.”
서둘러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고 자세를 바로잡자 흘러 내려온 등불에 인영의 정체가 또렷해진다. 채도 높은 금발과 단정한 낯. 잘게 흔들리는 앞머리 사이,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녹안에는 뜻을 알 수 없는 농도 짙은 감정이 담겨 있다.
“이제 들어가시지요. 날이 찹니다.”
처음 폭풍우에 휩쓸린 그녀가 별장에 왔을 때도 후작은 꼭 그렇게 저를 바라보았다.
고열과 뒤섞였던 그때, 희미해진 초점 사이로 보였던 지금처럼 한없이 가라앉은 눈이 아직도 선연하다. 차디찬 몸을 쓸어내리는 다정한 손길도.
공녀는 그래서 자신이 죽은 줄만 알았다. 그녀를 그리 따스히 안아 줄 사람은 세상에 딱 둘인데, 한 명은 사라진 엄마였고 다른 한 명은 세상을 뜬 할아버지. 그녀를 감싸 왔던 손은 아무래도 여리디여린 어린 어머니의 것이라 보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으니 논리적으로 후자일 확률이 높았고 그 말은 제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그게 후작이라는 걸 알고 나서는 분통을 터트렸지만.
다 제 환심을 사려는 수작질이야, 그리 되뇌면서.
그렇다고 보기엔 저를 담은 녹안이 지나치게 아연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또 한 번 그 눈을 마주한 뒤였다. 얼마 전, 그녀의 손이 라모니의 꽃잎을 쥐고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을 때 말이다.
그래, 그때.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하얗게 질렸던 후작의 표정이 맞은편 정원 위로 피어올랐다. 늘 호수같이 고요하고 성 한 번 내지 않던 사내라 다른 표정은 지어 보일 줄 모르는 것일 테다, 그리 여겼던 게 무색할 정도로 후작의 낯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화상이 입은 듯 불그스름해진 그녀의 손과 열이 오르는 이마를 번갈아 확인하며 그 눈은 더욱 짙어졌지. 누가 보면 제가 아프리라 그리 생각했을 거야.
거듭되는 기억들이 가리키는 하나의 방향을 부정하려 공녀는 입술을 꾹 짓누르고 치맛자락을 움켜쥔다. 아래로 떨어트린 시선은 눈에 떠오른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보였고 머릿속을 지배하는 망령된 생각에서 벗어나려 머리통은 좌우로 잘게 흔들린다.
다 제 환심을 사려는 수작질이야.
주문과도 같은 다짐을 계속해서 되뇌며.
***
“난 여기 있을 거야.”
고집스러운 음성이 깊어지는 밤의 공간을 가로지른다. 자연의 순리를 거부하며 타오르는 등불이 아니었다면 지척에 있는 사물마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둠은 짙은 것을 제 앞에 앉은 이는 아직 알지 못하나 보다. 지천에 깔린 암흑을 짧게 응시하던 후작은 다시 시선을 돌려 테이블에 자리한 공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날의 사건 이후, 이제 공녀는 꽃을 찾는 대신 줄곧 정원의 테이블을 지켰다.
누군가가 챙기지 않으면 끼니를 거르는 것과 한밤중에도 테이블을 지키는 등 공녀의 일상은 별반 달라지는 것은 없어 보였지만. 화환을 만드는 대신 저택의 입구가 잘 보이는 정원에 자리 잡고는 누군가가 돌아오길 바라고 또 바랐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너무도 분명했지만.
‘그날 대부인을 보았던 목격자가 나타났답니다. 멜번 항구에 있는 걸 똑똑히 보았답니다.’
‘멜번 항구?’
‘예, 그 이후의 동선은 파악되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이국으로 간 것 같습니다.’
어떤 게 더 받아들이기 쉬울까.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버렸다 여기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했다 자책하는 것일까. 하얀 입김 사이로 흩어지는 후작의 고민은 실상 무용하다.
어린아이라도 쉽게 그 답을 알 수 있는 탓이다.
전자는 오롯한 부정이요, 후자는 적어도 그러지 아니하지. 우리를 더욱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건 진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며 이번에도 같은 결론을 내린 후작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잠시 눈을 붙이시지요. 대부인이 나타나면 곧장 이르겠습니다.”
말없이 공녀는 눈가를 찌푸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지만.
그곳에서 묻어 나오는 불허의 기색을 잃은 후작은 짙어지는 어둠의 농도와 저택 입구를 지키는 각 잡힌 기사들을 느리게 바라보더니 한참 후에야 입술을 열었다.
“허면, 같이 기다리는 건 괜찮겠지요.”
예상보다 더욱 강렬한 시선이 그의 뺨에 와닿았으나, 짐짓 이를 알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았다. 밀어닥치는 어둠에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뜻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두운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거센 저항을 예상했는데 딱히 더 입을 떼지 않은 공녀의 눈은 맞은편 나뭇가지부터 시작해 저택의 입구까지 이어지는 등불을 배회하고 있었다.
아이를 기다리며 지새웠던 수많은 밤 속의 그와 같이.
‘아타할케가 나타났지요?’
‘아델리아 공작이 돌아오는 것일까요?’
어떤 게 더 받아들이기 쉬울까.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버렸다 여기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했다 자책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그에게 던지는 물음과도 같아.
그렇게 다른 빛깔의 두 사람이 한 곳을 바라본다. 깊어지는 물음과 함께 밤의 시간 역시 절정을 맞이하여 사위는 칠야의 암흑으로 물들었다. 그 어둠의 공간 속 자그마한 머리통이 후작에게 기운 것은 한참이 지났을 무렵이다.
***
깜빡 잠이 들었다.
잠기운이 남아 있는 눈가를 문지르며 공녀는 종줄을 잡아당기려 침대 헤드 옆으로 손을 움직였다. 이곳이 페라비 별장이고 공작가와 달리 저를 담당하는 시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두어 번 헛손질을 한 후였다.
그러니까 그건 다 꿈이었구나.
온 가족이 함께했던 지나치게 생생한 오후의 다정한 산책이. 푸른 호수의 물결과 향긋한 꽃의 내음, 그 모든 것들이.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공녀는 의식적으로 허상의 잔재를 지워 내듯 눈을 깜빡거린다. 간신히 꿈결 속에 머무는 의식을 다잡아 내렸을 때는 한층 햇살이 완연해졌을 무렵이었다. 푸른 눈에 맺히는 따스한 빛줄기는 암흑에 침적된 밤과는 또다른 두려움을 그녀에게 선사했다. 생기를 잃은 공녀의 입술을 타고 지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방 안으로 길게 흩어지는 숨결에는 또다시 시작되는 하루에 대한 버거움이 깃들어져 있다. 축 늘어진 몸을 침대 밖으로 꺼내는 것으로 끝없이 되돌아오는 페라비 별장의 아침으로 발을 내딛던 공녀는 발끝에 닿는 보드라운 감각에 한 번,
“일어나셨습니까, 공녀님.”
뒤따라 귓가를 간질이는 부드러운 음성에 한 번 더 움찔했다. 그러니까 여긴 정원이 아니고 아마 지쳐 잠든 그녀를 후작이 옮겨 둔 것이 분명하다는 걸 깨달은 공녀의 눈은 금세 형형한 빛깔로 변모했다.
이자가…….
복도를 밟아내리는 걸음에는 공녀의 성난 마음이 그대로 묻어난다. 함께 테이블에 기다리다 잠이 들면 그녀를 침소에 두는 것이 벌써 몇 번째야. 자신을 이리 재워 놓고 뭘 할 꿍꿍이인지, 어쩌면 어머니가 와도 그녀에게 알리지 않을 작정인 줄도 몰랐다. 금세 통로를 스쳐 지나간 공녀의 걸음은 계단을 지나 저택의 정원이 보이는 로비에 다다랐어.
불티가 튀는 푸른 눈으로 서서히 드러나는 정원의 풍경을 쏘는 듯이 응시하려던 공녀가 멈칫한 것은 그때였다.
투명한 유리창 사이로 정원 테이블에 다정히 앉아 있는 후작과 공자가 보인다. 웅웅거리는 소음 너머 그들의 대화가 들려오는 듯해. 서로를 바라보는 따스한 눈빛과 하나의 방향으로 향하는 눈길.
다정하고 다정해.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광경을 응시하는 벽안에는 미미한 파문이 인다. 그렇게 못이 박힌 듯 로비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던 공녀는 애초의 계획가 달리 몸을 돌려 다시 계단 위로 올라갔다. 계단이 부서져라 쿵쿵거리던 때와 달리 돌아가는 걸음은 힘이 잔뜩 빠진 채였다.
조금은 알 것도 같아.
‘어디 가!’
‘페라비 별장에.’
왜…… 왜 언니가 그랬는지 말이야.
이곳은 달라. 제가 알고 있던 곳과 말이지. 마치 다른 세상과 같아. 그것을 인정하기 싫다. 그래서 자꾸 후작을 괴롭혔던 것 같아. 이곳이 너무 싫어. 너무 따스하고 다정해서. 그럼 이제껏 제가 믿어 왔던 것들이 가짜라 말하는 것 같아서.
어느새 제 방에 도착한 공녀는 보폭을 넓혀 협탁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자그마한 베르니가의 초상화가 방금까지 자신의 시야를 지배했던 에오르테가 정원의 풍경과 그 초상화가 대비되며 공녀의 눈을 흐렸다.
저런 걸 거야.
진짜 가족이라는 건…….
그렇게 한 방향을 보고 살아가는 걸 거야.
반쯤 열린 문 틈으로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다.
“공녀님?”
언제고 자신을 쫓아왔는지 방금까지 정원에 있던 후작은 그녀의 방에 발을 딛고 있었어. 평소 그녀의 허락 없이는 한 번 문을 열지도 않는 때와 달라. 그래, 어쩌면 그도 이 방에 번지고 있는 물기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싫어서, 저 사내가 그걸 알아차린 것 같은 게 싫어서 공녀는 더욱 소리를 높였다. 손에 닿는 건 모조리 집어 던지면서.
“나가! 나가라고!”
던져지고 깨지고 부서진다.
단단하고 단단해 결코 흠집 나지 않을 거라 여긴 그녀의 믿음처럼. 소란에 사위가 시끄러워지고 후작님, 삼촌. 익숙한 낱말들이, 한없이 다정한 소리들이 귓가에 들려온다.
지긋지긋해.
성난 공녀의 움직임에 금발이 흐트러졌다. 그 사이로 내비치는 균열의 흔적이 낮의 햇살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바닥에 깔린 부서진 유리의 파편들을 가로질러 익숙한 감촉이 그녀를 감싸 안아온 건 그때였다.
“쉬이, 괜찮아.”
그녀를 그리 따스하게 안아 줄 사람은 세상에 딱 둘인데, 한 명은 이곳에 없는 엄마였고 다른 한 명은 세상을 뜬 할아버지라면, 지금 그녀를 다독이는 손은 누구의 것일까.
“괜찮아, 괜찮아 이젠.”
그 다정한 손길 때문일까. 아니면 달큰한 속삭임 때문일까. 이제 더는 그 손짓과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중요치 않아질 만큼 지친 공녀는 기어코 울음을 터트린다.
“……왜 다 날 떠나지. 왜 다 날 두고 떠나는 거야. 난 그냥 다 같이 지냈으면 좋겠단 말이야. 다 같이 노력하면 되잖아.”
둘 다 지키려 했는데.
결국, 둘 다 잃고 말았다.
내 마음은 닿지 않아.
아무리 깊고 깊어도 내 마음은 닿지 않고 흩어져 버린다. 이해가 가질 않아. 납득이 되질 않아. 다들 왜 그러지는지. 우리가 하나라는 그런 사실 따위 중하지 않은 듯 다들 왜 그리 무감하게 구는지. 도저히 모르겠어.
“사람의 마음은…… 참 어렵지요. 선택하고 선택받아야 하는 것이니까요.”
“…….”
“허나, 잊지 마세요, 공녀님. 그 애가 당신을 지켰다는 걸.”
공녀님이 그 애를 지킨 것처럼.
등을 다독이던 손이 흐르듯이 움직여 그녀의 뺨을 그러쥔다. 물기를 머금은 시야가 덩달아 올라가고 그 속에 들이차던 풍경이 바뀐다.
“세상에 버릴 용기도 지킬 용기도 없는 이들은 많지만, 무언가를 버리기 위해 지키는 어리석은 이들은 없는 법이지요. 그 아인 공녀님을 떠난 게 아닙니다. 그저 두려워 잠시 도망친 것뿐이에요. 그런 것이에요.”
제 시선을 가득 메꾼 생생한 초록빛의 향연, 그 싱그러움을 응시하던 공녀가 이내 고개를 떨군 것은 그 문장에서 느껴지는 모순을, 결코 변하지 않는 진실을 깨달았을 즘이다.
“……그럼 뭐 해, 지금 나한텐 아무도 없는데…….”
뭐가 되었든 그녀는 지금은 오롯이 홀로라는 걸. 낮게 흐르는 음성이 귓가를 간질인 건 막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우린 퍽 닮았군요, 공녀님”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니.
흐릿하던 푸른 눈에 초점이 맞춰지고 혼란이 잦아든 자리로 다채로운 빛깔의 감정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제가 결코 하지 못했던 것을 공녀님께서 해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공녀님. 그 앨 지켜 줘서.”
***
극적인 타협이었다.
정원 테이블에 나란히 자리한 삼촌과 공녀를 바라보며 테오는 이제 그 누구도 그 사실에 이견을 달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말도 안 되게 벌어진 극적인 타협이라는.
그날, 공녀가 머물던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공녀는 마치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물론, 그게 악을 쓰지 않고 성질을 죽였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는 것은 여전했지만, 적어도 삼촌에게는 더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러지 않았다, 라는 말로 포장하기에는 요즘 공녀가 삼촌에게 보이는 태도는 확연히 이전과 달랐다. 마치 어미를 쫓아다니는 아기새에 더 가깝달까.
아기새라…….
진짜 아기새가 들으면 천인공노할 표현을 곱씹어 보며 테오는 가늘게 뜬 눈으로 유리창 밖의 공녀를 바라보았다. 선선히 불어오는 미풍에 흩날리는 금발이 그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어떨 때보면 사자의 갈기 같기도 한 그것을 한층 깊어진 눈매로 관찰하던 공자는 한참 뒤에야 지금 공녀의 상태를 묘사할 마땅한 답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포악한 아기새.
그래, 그게 적당하겠다.
소슬바람에 무너지는 풀잎들 사이를 가리키며 삼촌에게 무어라 귀엣말을 하는 공녀를 바라보며 그리 결론을 내린 공자는 이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한편의 화폭 같은 공간 속으로 보폭을 넓혔다.
그날 이후, 페라비 별장에는 정원 테이블에 앉은 세 인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만개한 수목들과 반쯤 피어오른 공녀의 백합. 백작 부인이 별장에 도착한 건 그렇게 모든 것이 얼마쯤 제자리를 찾아가고 소란이 잦아든 자리에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
잘게 부서진 햇살의 파편들이 창문을 희뿌옇게 만들어 간다. 어둠이 다가오는 자리 위를 부지런히 메꾸어 가는 역동적인 볕을 가만히 지켜보던 후작은 눈을 들어 올렸다. 따스한 기운이 맺혀 있는 녹안은 아직 가시지 않은 밤의 기운 위에서 고요히 빛난다. 덕분에 그 위에 맺힌 상이 더욱 뚜렷했고.
문.
한 시진째 맞은편 그곳에 시선을 고정한 탓에 이제 문설주에 새겨진 돋을새김과 나무의 결을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을 지경이었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낫겠지. 이성적인 판단과 함께 가까스로 떼어 낸 시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가로 흐르듯이 닿았다. 다소 신경질적으로 변한 눈빛은 그 너머로 사라진 이들이 돌아오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공녀님이 다치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대부인께서 계시지 않은 마당에, 이 무슨 변고인지…….’
그 첫마디로 운을 뗀 루트비아 백작 부인은 그것은 피치 못할 사고였고 지금 공녀의 몸은 많이 회복되었다, 라는 후작의 설명을 깡그리 무시한 채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제가 직접 공녀님과 얘기를 나누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공녀와 백작 부인이 응접실에 들어간 게 벌써 한 시진. 어떻게 생각해 보면 길다고만 여길 수 없는 그 시간 속에서 후작의 목은 바싹바싹 타들어 가고 있던 것이다. 공녀와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가끔은 별장에 머무는 것을 제법 만족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공녀였으나, 백작 부인이 대부인을 내세워 공녀를 설득한다면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가늠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무겁게 가라앉은 숨을 흘리며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린 건 신경질적으로 또각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움직임에 맞춰 공간에 울려 퍼지려던 찰나였다.
그 틈 사이로 스며든 오전의 햇살에 차게 식은 백작 부인의 낯과 꼿꼿이 턱을 들어 올린 공녀의 낯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
“일이 단단히 틀어졌어요.”
오전의 햇살이 부챗살처럼 내실에 내려앉은 시각, 이른 새벽부터 저택을 나섰던 백작 부인은 옅은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가시지 않은 잠의 여운을 즐기며 침상에 누워 있던 남편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시야 귀퉁이로 스며들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묘책이 없는 것도 모자라, 그들의 계획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아 외려 방해만 될 것이 분명한 남편을 보자 백작 부인의 한숨은 더욱 깊어졌다.
공녀가 별장에 머물 때만 해도 후작이라는 인물이 큰 변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뜩잖았던 올레나의 결정에 그녀가 동의한 까닭은 기실, 그것이었다. 사납고 드세기로 명성이 자자한 공녀가 별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올레나와의 관계가 더욱 틀어진다면 그들로서도 득이 될 점들이 많았기에. 적당할 때를 보아 대부인을 핑계로 공녀를 다시 그들의 관할 내에 들여올 수 있다 여겼고, 때마침 들려온 공녀의 사고가 마땅한 시기라 여겨 백작 부인은 별장으로 향했다.
헌데 그런 반응이라니.
‘불편하신 부분들이 많지 않나요.’
‘뭐, 그건 그래. 여긴 너무 더럽고, 또 정신없고, 이상한 냄새도 나거든.’
곱씹으며 공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되었다. 그런 생각과 함께 백작 부인의 입술이 둥글게 말리고 낯 위로 선연한 미소가 피어오를 즘, 다시 들려온 소리는 전혀 뜻밖이었지만.
‘그래도 뭐, 나쁘진 않아.’
예상치 못한 문장에 백작 부인이 느리게 동공을 여닫자, 공녀는 한 손으로 찻잔의 매끄러운 표면을 문지르며 입술을 열었다. 그간 별장에서 머무르며 벌어졌던 일상이 그 작은 입매에서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약간은 멋쩍은 기세로 시작된 이야기에 미미하게 묻어나던 온기는 점점 더 높아지는 음성과 함께 분명해졌다. 후작, 후작, 후작. 거의 모든 문장에 맺힘말로 끝나는 단어 역시.
더 이상 공녀를 설득하는 것은 무용하다. 다른 승부수가 필요해.
내실에 흘러 들어온 볕을 받아 다채로운 빛깔로 빛나던 벽안을 떠올리며 단호하게 결론을 내린 백작 부인의 눈은 이제 풀리지 않는 문제를 찾아 긴 상념 속을 헤맸다.
허나, 어떻게?
깊은 한숨을 내어 쉬며 백작 부인은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창을 열어젖힌 그녀의 손짓에는 해갈되지 못한 갑갑함과 선선한 바람이나 쏘이면 머리가 조금 맑아질까 하는 기대가 오롯이 묻어났다. 짙은 녹음이 진 정원과 막 새로 심어진 수목들. 얼마 전 재정비된 저택을 스치듯 지난 그녀의 시선은 이제 저택의 문 앞에 서성이는 영지민들에게 가 닿았다. 더는 저택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폭동의 흔적은 대부인이 언제쯤 돌아오나 기웃거리는 저들에게서야 간신히 그 잊지 못할 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잎담배를 입에 물며 저택의 기사들과 실랑이하는 영지민을 바라보던 백작 부인의 눈매가 서서히 가늘어지고 급기야 그 위에 이채가 감돈 것은 그때였다.
그로부터 이튿날, 루트비아 영지에 때아닌 소문이 하나 번지기 시작했다.
대부인이 다시 루트비아 영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의 사돈의 팔촌에 조카가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더라는 다소 진정성은 떨어지지만, 흥밋거리는 다분한 소문이.
***
“그러니까, 대부인이 영지에 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 말이야.”
대부인이 다시 루트비아 영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진정성과 별개로 급속도로 빠르게 영지에 번지기 시작한 소문을 곱씹어 보며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오늘도 어김없이 선술집으로 걸음한 사내 하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디에 있느냔 말이지.”
그 소문에 최근 며칠 루트비아 저택을 알짱거렸으나, 아무 소득 없이 빈손으로 돌아왔던 그는 빈 맥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공간에 흩어지는 그의 음성에는 짙은 취기가 다분히 묻어져 나왔다.
“당연히 루트비아 저택 아닐까.”
“내가 요며칠 거길 기웃거렸는데도 한 번 본 적이 없다니까 글쎄.”
“그럼 루트비아저의 별장인가? 왜 그 메이나 숲에서 더 뒤로 가면 나오는 별장 말이네.”
“거기엔 개미새끼 한 마리 없다던데.”
루트비아 저택, 루트비아저의 별장, 수많은 경우의 수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으나 이렇다할 답은 나오지 않고 시간만 늘어지고 있을 즈음, 누군가가 뱉은 낯익은 단어가 선술집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페라비 별장.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수런수런해진 것은 그때다.
“가만, 공녀도 거기에 머물지 않나.”
“그렇지. 그럼 대부인도 페라비 별장에 있는 게 앞뒤가 맞겠네.”
길고 긴 토론 끝에서야 찾아낸, 어쩌면 가장 정답과 근접한 답에 먹잇감을 찾은 맹수처럼 사내들의 눈빛이 형형하게 변모했다.
***
“당장 피신하셔야 합니다.”
유리창 너머 점차 또렷해지는 성난 영지민들의 낯을 바라보며 페라비 별장의 호위를 총괄하던 기사는 침착하게 입술을 열었다. 한 번의 경험으로 제법 담담히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탓인지 내실에 흘러 들어온 문장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아마 당분간은 위원장님의 저택에서 머물게 되실 겁니다.”
마주한 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만.
그의 단조로운 음성에 페라비 별장의 가정부는 두 손을 모아 이름 모를 어느 신께 기도를 올리는 것 같았고 그나마 냉철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여겼던 집사마저 성치 않은 발을 지탱하고 있던 지팡이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흑단으로 마감된 막대기가 바닥과 맞부딪치며 만들어 내는 탁음이 지나치게 고요한 별장의 응접실로 스며들었다. 기사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깊어지는 정적 속 아연실색한 얼굴의 사용인들을 지나 이 모든 전권을 책임지고 있는 사내를 직시했다.
“후작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알겠네.”
제 품에 안긴 공녀의 등을 다독이는 금빛 의수의 주인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긍정의 뜻에 기사는 차분히 별장을 빠져나갈 순서와 이후 이동해야 할 길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창밖의 아우성은 점점 기세를 높여 왔지만 신중한 말씨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런 그의 유려한 말씨가 흐트러진 건 막 설명이 끝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괜찮나?”
급소를 맞은 짐승처럼 기사의 허리가 아래로 고꾸라지자, 곁에 서 있던 공자가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겁에 질린 저택의 식구들 앞에서 기사된 자로서 보이지 말아야 했을 추태에 애써 낯을 갈무리하려 했지만, 파리하게 질린 표정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고통을 감추려 창틀을 움켜쥔 기사의 손은 이미 뼈마디가 불룩 튀어나올 정도로 허옇게 질리고 심중을 무서운 기세로 짓누르는 불길한 감각이 그를 할퀴어 왔다.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기사 하나가 반쯤 열린 틈 사이로 소리를 높인 건 그때였다.
“느꼈나?!”
들어선 동료의 낯 역시 마찬가지로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 음성에 기사의 심장은 더욱 고동치고 귀는 물을 먹은 듯 웅웅거렸다. 그만 느낀 것이 아니라면, 착각이 아니다. 기사는 재빨리 눈을 창가 쪽으로 돌려 기어코 별장의 문을 부수고 물밀 듯 밀려 들어오는 성난 군중들을 확인해 보았다. 끝없이 밀려오는 인파에 그가 쫓는 자를 쉬이 확인할 수는 없다만 확실해. 저 수많은 사람들 속에 분명 그들이 있는 것이다.
“공녀님을…… 공녀님을 보호해라!”
창틀을 움켜쥔 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고 목에는 핏대가 선다.
“티케 사냥꾼들이다!”
***
가관이군.
티케사냥꾼들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사내가 바지춤에는 보석을 욱여넣고는 제 몸집만 한 협탁을 휘청이며 나르는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곧이어, 달려든 또 다른 사내가 그 협탁을 제가 차지하려 낫을 휘두르는 모습도. 그 속에서 묻어나는 술 내음과 취기를 그들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토록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인 폭동이었기에, 그리고 기실 그 밑바닥에 깔린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자위였기에 대부인이 별장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자 단숨에 폭동이 약탈로 변할 수 있었으리라. 그 약탈의 현장 속에 자신들이 쉬이 잠입할 수 있었던 까닭 역시 같은 선상이었고.
“이리 내, 자넨 보석도 가졌잖아!”
“그런 게 어딨나! 내가 먼저 발견한…… 잠깐 밀지 말라고!”
기어코 실랑이하던 이들은 난간 아래로 추락하고 그들과 함께 로비로 떨어진 다채로운 빛깔의 보석들이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선연해지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흥건한 선혈이 로비의 대리석을 물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 것처럼. 그 아수라장을 짧게 일별한 그는 천천히 보폭을 넓혔다. 한 걸음, 한 걸음 뗄수록 전쟁을 떠오르게 하는, 조금은 익숙한 광경들이 펼쳐졌다. 보석을 챙기고, 명화를 떼어 가고. 모두가 더욱 진귀한 걸 얻으려 뛰어다니는 광기와도 같은 현장이.
티케 사냥꾼.
멸시와 오욕으로 그들을 보던 영광스러운 아올리스의 추악한 낯이 드러나는 순간, 그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올리스도 이제 머지않아 그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그런 예감이 불현듯 들기도 하였고. 사람들 가슴 깊이 뿌리내린 욕망. 아무리 숨기려고 애써도 변하지 않는 그것들이 그들을 지탱하고 지탱하지.
이걸 올레나가 봤어야 하는 건데.
그 고고한 여자의 낯짝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티케 사냥꾼들은 별장에 흩어져 마저 걸음을 이었고 늘 그렇듯 어렵지 않게 제가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공녀.
아마 그녀의 방으로 추측되는 공간에는 기괴하게 뒤틀어진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먼저 도착한 그의 수하와 공녀를 보호하고 있던 기사단의 격렬한 사투를 보여 주는 듯했다. 마지막 남은 기사가 싱겁게 그의 손에 쓰러지자, 그의 뒤에 감춰져 있던 인영이 햇살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에게 닥친 갑작스러운 참극에 넋을 잃었는지 공녀의 벽안에는 초점이 없었다.
찾았다.
의식을 잃고 혼절한 와중에도 공녀를 꾹 움켜쥔 금빛 의수를 가볍게 제압한 사내는 그린 듯한 미소를 낯 위에 올렸다. 중한 일은 거진 다 끝났으니 이제 남은 일은 하나. 북부를 지나 아미타 숲 위, 아올리스의 경계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대장과 합류하는 것뿐이었다.
***
환영이다.
아미타 숲으로 들어서고 있는 익숙한 인영을 보며 처음 내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요즘 잠을 설쳐 헛것을 보는 거라고. 어쩌면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거라고. 막 숲의 골짜기에 발을 디디고 있는 무리들은 최근 계속되고 있는 악몽들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과 퍽 닮았으니. 허나, 무르익어 가는 햇살 사이로 부신 금발은 더욱 또렷해지기만 한다.
세이.
더는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된 건, 우습게도 그 애의 음성 때문이었다.
“무사할 줄 알고!”
다른 이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당찬 문장들까지. 그제야 정말 실감이 났다. 시야를 흐리는 금빛 물결과 공기를 찢는 외침의 주인이 바로 그 애라는 걸. 어떤 이유에서인지 티케 사냥꾼에게 붙잡혀 곧 생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는 것도.
실소가 흘렀다.
공녀를 보호하기 위해 올레나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일지 모르지 않았다. 물론 정세가 극박하게 돌아갈 거라 예상되긴 했다만, 그저 가만히 올레나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공녀는 머지않아 공작가의 주인이 될 예정이라는 것도. 저렇게 티케 사냥꾼들에게 질질 끌려다닐 게 아니라 말이다. 얼마나 멍청하기에 제 앞에 다 차려진 밥상도 먹질 못하는 건가. 입가에서 흘러나온 옅은 한숨이 녹음진 풍경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이어지던 상념이 멎은 것은 허공으로 치솟은 커다란 사내의 손이 그 애의 뺨을 내리치기 시작했을 때였다.
“재갈을 물려.”
그 뒤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 동굴이었고 내가 잠을 청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공간 위에 공녀는 고른 호흡으로 뉘여 있었다.
느리게 눈을 여닫았다. 무사해 보였다. 잠시 의식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안도감이 차오르던 마음에 분노가 깃든 것은 부은 뺨에 시선이 닿았을 무렵이었다. 무슨 생각이었던 건가. 제가 제때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그 애는 그대로 티케 사냥꾼의 밥이 되었으리라. 올레나도 대부인도 모두, 뭘 하고 있던 것인가. 아니, 그리 세상 사납게 굴면서 어째서 저 애는 늘 저 모양으로 돌아다니는 걸까. 복잡하게 엉켜들어 가 머릿속이 엉망이 될 즈음, 공녀가 눈을 들어 올렸다.
“언니……?”
지겹고도 진부한 그 단어와 함께.
***
믿기지 않았다.
정말 언니였다.
폭동이 일어나고 물 밀려오듯 별장에 들이닥친 인파 틈으로 나타난 티케 사냥꾼. 분명, 그들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향하고 있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느리게 여닫히는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벽안에는 당황스러움과 얼떨떨함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그 눈으로 저와 꼭 같은 입매와 단정한 눈매를 재차 확인한 공녀는 그제야 이를 실감했다.
그럼 그건 꿈이 아니었구나.
‘조금만 참아, 세이. 다 왔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오던 따뜻한 팔, 다정한 속삭임. 흐릿했던 의식을 지배했던 기억들은 그저 그녀가 만들어 낸 허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백합이 반쯤 피어올랐고 오랜 시간을 돌아 둘은 마주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건 언니의 바람이었던 걸까? 그녀와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걸까? 방금까지 제게 닥친 위기를 잊은 채 몸을 일으킨 공녀는 한 걸음 언니 쪽으로 다가갔다. 좁혀진 거리를 따라 후작이 했던 말들이 떠올라.
‘허나, 잊지 마세요, 공녀님. 그 애가 당신을 지켰다는 걸.’
‘세상에 버릴 용기도 지킬 용기도 없는 이들은 많지만, 무언가를 버리기 위해 지키는 어리석은 이들은 없는 법이지요. 그 아인 공녀님을 떠난 게 아닙니다. 그저 두려워 잠시 도망친 것뿐이에요. 그런 것이에요.’
많이 미워했다. 끝없는 기다림을 선사한 언니를. 작위를 받자마자, 서쪽 처소로 그녀를 옮기고 매번 자신을 볼 때마다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짓이기곤 했으니까. 그뿐인가. 조사를 위해 채혈을 할 때면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지곤 했지. 많이 미워했어. 그래서 사라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척했어. 그러나 그날 밤, 후작과의 대화에서 공녀는 인정하고야 말았다. 기다림이 원망으로 변모하고도 남을 그 긴 시간 동안에도, 미워하려 미워하려 노력했던 그 수많은 나날 속에서도 단 한 번 제대로 그리하지 못했다는 걸.
그래서일 거야.
왜 떠나갔냐고.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냐고. 보자마자 화를 내려던 생각은 사라지고 이토록 기쁘기만 한 것은. 그게 혹 언니도 바란 거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미치자 더욱 그러했어. 공녀의 입에 힘이 들어가고 다시금 그 낱말을 혀끝에 올린 건 그 기억이 준 용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언니.”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완벽한 단어를.
“언니, 언니, 제발 그 소리 좀 그만해!”
축축한 습기로 가득한 동굴 속으로 가쁜 호흡과 뒤엉킨 음성이 스며들었다.
“아직도 왜 모르는 거니, 세이. 이제 전부 다 끝났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어?!”
짙게 가라앉은 은안이 그녀를 내려다본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혼재해 도저히 무슨 뜻이 담겼는지 헤아리기 힘들지만 그리 좋은 감정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어. 그렇게 그녀가 그 마음을 읽으려 느리게 눈을 여닫는 사이, 어느새 마음을 가라앉힌 언니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일단 이걸 좀 발라. 뺨이 너무 부었어.”
잎사귀에 쌓여진 약초를 내밀면서. 마치 방금의 소리는 듣지 못한 것처럼 언니는 붕 뜬 적막을 차분히 이어 갔다.
“내 폭주를 느꼈으니, 곧 기사들이 올 거야. 그때까지만 참아.”
냉랭하고도 담담한 어투로. 그럼에도 모순적이게 따스한 행동들로.
“그리고 돌아가서는 그냥 올레나의 말을 믿어. 그 여자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럼-”
멍하니 언니를 바라보던 공녀는 잎사귀에 쌓인 약초로 시선을 내렸다. 가늠할 수 없는 언니의 마음을 헤아리려 손안에 든 약초를 두어 번 굴리는 사이, 짐승의 울부짖음이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짐승은 언제 부상당했는지 다친 모습을 한 아타할케였고 약초는 그 명마의 말허리에도 발라져 있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허나, 잊지 마세요, 공녀님. 그 애가 당신을 지켰다는 걸.’
후작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그날 언니가 자신의 생을 구한 것은 맞지만, 그 까닭은 케케묵은 천륜 따위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다. 그제야 공녀는 한사코 외면했던 또 다른 사실을 받아들여 본다.
그저 인의로서. 사람된 도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의를 다하기 위하여.
위악과도 같았던 문장들은 분명한 진실이었다.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은 어쩌면 그녀도 관습에 얽매인 한낱 우매한 자에 불과한지라.
그래, 이제는 알아.
가족이라는 건 말이야 서로가 선택하고 또 선택받아야 한다는 거. 둘이 함께하기엔 너무 늦었고, 이미 언니에게는 다른 가족이 있다는 것을.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것은 혈관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이 아니라 함께 나눈 시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시간 속에 그녀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하지만…….
“싫어!”
공녀는 소리를 빽 내지른다. 알싸한 내음만이 차오르던 공간은 그 소음으로 혼탁해지고 사위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아. 그 속을 가로질러 제게 닿는 은안은 서늘했지만, 그럼에도 공녀는 다시 입술을 움직이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 여잔 싫단 말이야!”
“내 말대로 해. 올레나 위원장은 널 아껴. 그 누구보다도 말이지.”
“그 여잔 아빠도 언니도 엄마도 싫어해. 난 그런 여자 필요 없다고. 언니가 와 주면 되잖아.”
“널 아껴서 그래. 널 아끼니까 널 아프게 하는 사람들은 다 싫어하는 거라고.”
“아무도 날 아프게 하지 않아!”
부릅뜬 눈으로 악을 쓰자, 공간에 스며드는 한숨소리는 더욱 깊어진다. 습관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던 언니는 더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듯 몸을 틀어. 익숙한 뒷모습이 공녀의 시야로 들이차자, 푸른 벽안이 풍랑에 휩쓸린 선박처럼 정처 없이 흔들린다.
“또…… 또 어딜 가는 거야.”
동굴에 되울리는 음성 역시 미미하게 떨린 채로. 그럼에도 등을 돌려 동굴 밖으로 나가는 인영은 걸음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라진다. 또다시.
낯익은 상황이 주는 기시감이 공녀에게 선사하는 것은 숨 막히는 불안과 공포다.
사라져. 또다시.
기어코 동굴 안으로 기다랗게 늘어졌던 그림자마저 모습을 감추자, 그 감각은 더욱 선연해진다. 무언가에 홀린 듯 공녀는 언니가 사라진 자취를 뒤쫓아. 물기로 흐려진 시야 덕인지 얼마 가지 못해 발이 뒤엉켜 넘어지고 말았지만.
그림자가 그녀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건 그때였다.
세이. 조금은 분노를 억누르는 듯한 그럼에도 얼마간의 염려가 깃들어 있는 음성이 그녀를 불러. 그게 누구의 것인지 알아맞히는 건 너무나도 쉬웠다. 그 소리의 주인이 넘어진 그녀를 조심스레 일으키고 엉망이 된 매무새를 바로잡아 준다. 서늘한 손의 감촉과 달리 따스하고 다정해. 항상 그랬다. 언니는. 행동과 말은 늘 달라. 그 모순이 주는 묘한 분위기가 공녀를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알아. 나한테 화난 거.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둘 다 가지려 해서 날 미워하는 거 알아.”
물기 섞인 목소리가 둘 사이로 차오른다.
“그래서 기다렸어. 내가 많이 잘못한 거니까.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공녀는 눈을 올려 제 옷자락을 털어 주는 메마른 손과 역광에 반쯤 가려진 언니의 낯을 천천히 살펴본다.
“날 두고 가지 마. 미워해도 좋아. 그러지만 마.”
“……일단, 좀 쉬어”
“……안 갈 거야?”
조심스레 번지는 공녀의 물음에 짙게 가라앉은 은안이 흔들린다. 길어지는 적막 속 공녀는 끈질기게 그 눈을 바라보았다. 찰나의 파문과 일렁임에 혹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여. 고대하고 또 고대하던 낱말이 떨어진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래.”
***
호흡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혹여 내가 사라질세라 내 옷자락을 꽉 움켜쥔 공녀는 다망한 일을 겪은 덕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곤히 잠들었고 곧 공간은 단정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새근거리는 숨소리로 가득 차올랐다. 나는 그 평온한 호흡의 주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몸을 휘감은 경계와 방어의 태세를 풀어 헤친 공녀는 부드럽고 따스한 빛깔이었다. 햇살에 젖어 보송보송 핀 햇솜처럼. 평소와 다른 모습이 주는 괴리감에 그렇게 하염없이 공녀의 낯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무르익은 햇살에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이 올라가고 감춰졌던 벽안이 드러날 때까지.
“……언니?”
흐릿한 초점을 맞추려 깜빡이던 눈은 나를 발견하고는 안도의 기색이 번졌다. 그렇게 찬찬히 나를 훑어 내리던 동공이 빛을 머금은 듯 확장된 것은 내 허리춤에 찬 검집과 당장 밖을 나가도 손색없을 정도로 갈무리된 매무새를 발견한 직후였다.
“어디 가?”
“아타할케를 찾으러.”
숲의 경계를 휩쓴 폭주를 모르타 위원회에서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는 없을 터, 우릴 구할 병력이 머지않아 숲에 도착할 것이다. 이를 확인해 보라 보낸 아타할케가 여태 동굴에 돌아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을 명마라 불리는 그 말이 모르지는 않을 터이고 종종 늦을 때가 있으니 문제될 것은 없지만, 상처가 염려돼. 온전히 제 능력을 발휘하기 힘든 상황에서 숲에 도사린 위협은 크다.
“금방 돌아올 테니 일단, 넌 여기…….”
여기 있어. 뒤이어질 말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문장을 끝맺기도 전에 불쑥 그 애는 말허리를 잘라먹었다.
“같이 가!”
빠르게 몸을 일으켜 팡팡 치맛자락을 털어 내고 매무새를 가다듬고. 신속하게 정돈을 끝낸 공녀의 눈에는 혹여 저를 두고 갈세라 불안과 염려가 뒤섞여 있었다.
“응?”
말간 기대로 부풀어 오르는 그 눈이 여명이 스며드는 동굴 속에서 반짝거렸다.
두고 왔어야 했다.
바람결에 그대로 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발소리, 조심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거친 움직임. 어쩌면 저 멀리 숲의 경계까지도 울려 퍼질 듯한 소음을 몰고 내 뒤를 쫓아오는 공녀 덕에 여린 짐승들은 이미 벌써 모습을 감추고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숲의 포식자들은 하나둘 얼굴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뿐인가. 숲을 깨울 듯이 쿵쾅거리며 움직이는 건 둘째치고, 쓸데없는 말들을 종알거리는가 하면,
“그럼 아타할케가 오기 전까지는 여기 더 있어도 되는 거야?”
“일단은.”
집중력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지 한눈을 파는 일도 다분했다.
“와아, 여긴 꽃이 엄청 많네.”
한참을 가도 따라오는 발소리가 없어 고개를 돌리자 갖가지 꽃들이 무성하게 군락을 이룬 나무 우듬지에 옆에서 기웃대고 있는 그 애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와.”
“잠깐, 잠깐만.”
그 잠깐이 벌써 몇 번째인지, 그 잠깐들이 모여 벌써 해는 기울다 기울다 서편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라는 걸 상기시켜 주려던 나는 만개한 수목 사이에서 그보다 더 싱그럽게 피어오른 공녀를 보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희게 만개한 클로버 꽃밭과 햇솜같이 부드러운 햇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에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젖혔다. 저물어 가는 저녁 하늘이 맺힌 눈은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 같기도 했고 잊으려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두고 왔어야 했어.
그런 날들의 반복이었다.
여전히 변함없이 소란스러운 공녀와 그 애가 만드는 자잘한 일상의 일탈들. 아타할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티케 사냥꾼과 어린 공녀라는 위험한 변수를 가지고 있는 상황치고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하루들이기도 했다. 아마 그것은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는 상황 속에서도 연신 방긋거리는 저 애 때문이리라.
“봐봐, 내가 찾았어!”
투명한 햇살을 머금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 애가 달려온다. 손에는 식용 버섯으로 추측되는 것들을 들고서. 여물지 않은 손 덕에 그 모양이 으깨지고 짓무른 버섯을 들고서도 환하게 웃어 보여.
저택 안에서만 오래도록 지낸 탓인지 공녀는 온종일 신나게 숲을 쏘다녔다. 가끔은 어디선가 찾아낸 기다란 나뭇가지를 들고 다니며 숲의 지배자차럼 굴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적응을 잘했다. 매양 까탈스럽기만 해 채 하루도 버티지 못할 거라 여겼는데 말이다. 발소리는 감추지 못했지만, 나무는 잘 탔다. 별자리를 읽을 수 없었지만, 길은 잘 찾았다. 상쇄할 수 있는 장점들이 있으니 적어도 잡아먹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생각할 즘, 공녀는 허리 뒤로 숨기고 있던 다른 손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자.”
흐드러지게 핀 꽃잎들이 그 애의 작은 손안에서 흘러넘치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꽃물결을 이루는 화환을 나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가령, 여전히 엉성하기 그지없는 손재주 같은 거. 그래서일까. 모든 것은 엉망이었는데 그게 그닥 나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뒤틀어지고 짓이겨진 화환을 스치듯 지난 나는 눈을 들어 올렸다. 기대감으로 가득 찬 푸른 눈이 보여.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아마 오늘과 같은 나날들 속에서 살아갔을 거라는. 너는 이리 꽃을 내밀고 나는 웃으며 그걸 받아 들고.
“……늦었어. 빨리 돌아가야 해.”
그래, 지금처럼.
머릿속을 혼미하게 만드는 짙은 꽃내음 때문일까. 아니면 시야를 흐리는 부신 웃음 때문일까. 나라도 정신을 제대로 차려야 하는데 자꾸 같이 물드는 기분이야.
***
“오늘도인가.”
풍요로운 계절의 빛깔이 묻어나는 숲에 스미는 토리노의 음성은 메마른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처럼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초조하게 사위어 가는 눈을 들어 올리며 말끝을 흐리는 보좌관의 낯빛 역시 그러했다.
“예…….”
“이상하군. 분명 이쯤에서 힘을 느꼈는데.”
옅은 한숨과 함께 토리노는 하늘 위로 고래를 젖혔다. 어느덧 날은 저물기 시작해 해는 서편으로 사라지고 주위는 깊은 어둠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고로, 오늘도 허탕이라는 뜻이었다. 아델리아 공작의 힘을 느낀 건 며칠 전이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것 같은 기운에 그뿐만 아니라 어린 기사들마저 그 힘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아미타 숲의 경계.
이국이 아니었어. 제국 내에서는 경의 힘을 누구도 느낄 수 없어 제국을 벗어났다 여겼던 판단이 무색하게 폭주가 가리키는 방향은 그곳이었다.
모르스의 흔적이 다분한 시체더미를 발견하자 그 확신은 배가 되었지. 그 길로 토리노는 기사들을 소집해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문제라면…….
그들의 일족은 숲 안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지. 어렵사리 위원회를 설득해 숲의 경계에 막사를 세우고 정찰을 시도하는 것까지는 동의를 받아 냈지만, 선뜻 숲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는 것은 그 탓이다. 아타할케까지 나타나 아델리아 공작이 이곳에 머문다는 게 확실해진 상황에서 선뜻 수색 작업에 박차를 가할 수 없던 것 역시.
‘아델리아 공작의 힘에 당한 자들은 티케 사냥꾼입니다.’
확신에 찬 음성과 함께 흘러나왔던 보좌관의 보고를 떠올리며 토리노는 깊은 한숨을 내어 쉬었다. 그의 입술을 타고 새어 나온 더운 숨이 숲의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모르헤 기사단의 진가를 알고 싶다면 그들을 아미타 숲속으로 불러라. 검은 안개는 한낱 습기에 지나지 않고 허리춤에 찬 검은 장식에 불과하니 가히 그곳이 모르스 일족의 무덤이 되리라.’
모르스 일족의 힘이 통하지 않는 장소. 그 수식어 덕에 수많은 음유시인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던 비밀스러운 공간을 바라보는 위원장의 눈은 심란하게 흔들렸다. 만에 하나라도 티케 사냥꾼들이 아델리아 공작과 마찬가지로 이 안에 있다면, 그들은 몰살되고 말 테지. 저 멀리서 보좌관이 보폭을 넓혀 그에게 다가온 것은 그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위원장님, 아타할케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가로질러 코앞으로 다가온 그는 고대하고 고대하던 문장을 내놓았다.
“신호는.”
“답신은 없었습니다.”
완벽하진 않았다만.
“도대체 이게 무슨…….”
기대감으로 차올랐던 토리노의 낯은 반쯤 맥이 풀린 듯한 모양으로 삽시간에 바뀌었다. 거듭 반복되는 헛된 희망과 절망에 지칠 대로 지친 것이다. 아타할케가 그들의 앞에 나타난 건 벌써 몇 번째였다. 그때마다 그들은 모르헤 기사단의 표식이 새겨진 견장을 물려 돌려보냈는데 기이하게도 번번이 돌아오는 답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혹, 아델리아 공작의 신변에 변고가 생긴 것일까요.”
보좌관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위원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에는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어. 허나, 말이 되질 않는다. 아타할케가 따르는 이는 아델리아 공작. 가끔 공녀와 후작에게도 걸음하긴 했다만, 그마저도 다 공작의 뜻에 움직이는 거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만약 공작에게 큰 문제가 생겼다면 저 명마가 예 있을 까닭이 없지. 차분히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 지은 토리노는 그리하여 이번에도 다시 한번 헛된 희망에 손을 들어 본다.
“한 번 더 기다려 보시지. 수색 범위를 조금 더 넓히고, 최대한 가능한 대로 아타할케를 뒤쫓아 보게.”
흔들림 없는 그의 지시에 막사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역동적인 공간이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은 것은 저 멀리서 푸른 물결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즘이었다.
“올레나?”
토리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아연한 문장이 지나치게 고요해진 공기를 흔들었다.
***
“공녀님의 백합이 안정적입니다. 만개하지는 않았으나, 제법 회복세에 들었습니다.”
아미타 숲의 경계에 마련된 막사를 나서자마자 저를 향해 다가온 니벨론 기사단장의 말에 올레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걸음을 뒤따르며 기사단장은 막힘없이 다음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아미타 숲의 산세와 지형, 그 과정에서 티케 사냥꾼이 나타날 수 있는 요주의 길목들. 그들이 토리노의 지휘 아래 전투를 준비하는 모르헤 기사단과 합류한 것은 벌써 며칠째였다.
아델리아 공작의 위치가 파악되고 높은 확률로 그곳에 공녀가 있다는 판단하에 수도에서 이곳까지 오기 전, 올레나는 공녀를 호위할 호위대를 빠르게 꾸리고 전력을 가다듬었던 것이다. 페라비 별장에서 일어났던 일은 한 치도 예측하지 못했던 변고였고 그로 인해 자칫했으면 공녀의 안위에 큰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는 위험성, 그리고 대낮에 그들의 영토에서 티케 사냥꾼들이 벌인 참극이라는 여러 가지 상황이 빚어낸 결과였다.
티케 사냥꾼을 몰아내려면 언제고 한 번은 전투를 각오해야 하는 법. 최대한 평화로운 방법을 찾으려 했건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겠지.
올레나는 그런 말로 그녀의 심중을 뒤흔드는 염려와 불안을 다독여 보며 숲의 경계를 압도하는 이열종대의 기사들을 찬찬히 살펴 내렸다. 막 반대편 막사에서 모습을 드러낸 토리노 위원장과 눈이 마주친 건 그때였다.
“올레나.”
그녀와 마찬가지로 고즈넉한 숲과 어울리지 않는 쇠붙이들을 응시하던 토리노의 시선은 한층 가늘어진 채로 다시 올레나에게로 와닿았다.
“생각보다 병력이 많지 않군요.”
“……다들 몸을 사리는 탓이지요.”
애써 담담히 말을 하려 했지만 올레나는 어투에서 묻어나는 실망감을 온전히 지워 내지는 못했다.
병력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었다.
구귀족 가문들을 설득했지만, 공작이라는 절대적인 지도부를 잃은 그들 내부에 균열이 일어 뜻을 모으기 쉽지 않았기도 했고 전쟁이라는 큰 변수 앞에 재정적인 측면에서 여유롭지 않은 구귀족들이 몸을 사린 탓도 있었다. 신흥 세력과 티케 사냥꾼이라는 동맹을 무너트리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는 기사들을 염려스럽게 살피던 올레나의 눈에 희미한 기대가 떠오른 건 막 그녀의 뇌리로 굼실거리는 금발이 떠올랐을 무렵이었다.
‘공녀님의 백합이 안정적입니다. 만개하지는 않았으나, 제법 회복세에 들었습니다.’
공녀의 힘이 회복되고 있다.
그것이 아델리아 공작에게, 곧 다가올 전란의 가장 큰 변곡점이 될 것이야. 사위를 압도하는 수려한 산세를, 그곳에 있을 둘을 응시하는 올레나의 눈은 이제 감출 수 없는 기대감으로 차올라 있었다.
***
언니가 동굴 밖으로 나갔다.
물 위를 부유하는 듯한 조용한 움직임. 미미하게 변한 공기의 기류와 함께 공녀는 가늘게 뜬 실눈으로 조심스레 동굴 내부를 살폈다. 그녀가 잠들었을 때, 언니가 조용히 밖을 나선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건 얼마 전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함께이면 행동 반경에 제한이 있기도 하고 위험이 배가 되어 그런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했던 일이 이제는 기다리던 시간이 된 건 그녀에게도 언니 몰래 해야 할 일이 생겼을 즘부터였다. 언니의 자취가 완전히 근방에서 사라진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공녀는 동굴의 돌벽에 기대 논 굵은 나뭇가지를 챙겨 들었다. 리베라의 뿌리를 그 끝에 매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딨니?”
싱싱한 식물 뿌리의 잔향이 배어 있는 공기 속, 공녀의 달콤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이리 와 봐.”
쉬지 않고 울려 퍼지는 다정한 목소리, 이에 맞추어 흔들리는 리베라의 뿌리. 잎이 우거진 푸른 숲에서 은빛 갈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태양의 여광이 남아 있는 투명한 눈 속에 소용돌이치는 갈망과 주저함을 오롯이 드러내면서. 그런 아타할케에게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한 공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상냥한 미소를 입가에 올리며 천천히 말갈기를 쓸어내렸다. 매번 멍청한 말이라 구박하던 이전의 모습은 공녀의 온화한 낯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 의도가 순수하지만은 않았지만.
“자, 그걸 주면 이걸 먹게 해 줄게.”
모양 좋게 휘어진 공녀의 눈이 닿은 곳은 낯익은 견장을 물고 있는 아타할케의 입이었다. 처음 이 영물을 발견했던 건, 얼마 전이었다. 잠을 깨우는 인기척에 피로에 물든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 시야에 가득 찬 것은 은파처럼 부드러운 물결이었다. 그게 언니의 머리카락이 아닌 아타할케의 갈기라는 건 한참을 눈을 여닫고야 깨달았다. 짐승의 입에 물린 특이한 견장과 분명 언니가 있어야 할 자리에 가득한 어둠을 번갈아 살피던 공녀에게 뜻밖의 깨달음이 찾아온 건 그쯤이었다.
‘그럼 아타할케가 오기 전까지는 여기 더 있어도 되는 거야?’
‘일단은.’
그것은 고로 이와 같은 말이기도 했다. 아타할케가 나타나면 언니를 영영 볼 수 없을 거라는. 영물이라 불리는 명마를 꾀어내 견장을 앗아간다는 무척이나 충동적인 행동을 한 건 아마 그 때문이리라. 처음과 달리 점점 더 아타할케를 꼬드기는 게 어려워지긴 했지만.
지금처럼.
평소였으면 벌써 게걸스레 리베라의 뿌리를 먹어 치우며 항복을 선언했을 영물이었는데 오늘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의지가 굳건하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좀체 꾹 물고 있는 견장을 놓지 않으려는 게 그러했다. 주변에 내리깔리는 농도 짙은 어둠을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던 공녀는 결국 유순함으로 덧씌웠던 표정을 벗겨 내고는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리 내!”
급기야 두 손에 힘을 주어 견장을 잡아당기까지 했다. 단연 힘겨루기에서 그녀가 짐승의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만, 그녀에게도 나름 우위에 있는 지점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녀가 무기를 쓸 수 있다는 것과 그녀는 원하는 걸 얻을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멍청한 말이 진짜!”
어느새 회초리가 된 나뭇가지가 고요하던 숲의 적막을 깨운다. 공기를 찢는 찰싹거림과 갑작스러운 매질에 앞발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린 아타할케의 울부짖음. 소리를 쫓아 누군가가 나타난 것은 어찌 보면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뭐 하는 거야.”
나뭇가지로 아타할케를 사납게 몰아치는 광경을 그대로 들켜 버리고 공녀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채 손에 힘을 풀고 말았다. 바닥으로 떨어진 나뭇가지 소리와 그 틈을 타 뿌리를 집어삼킨 아타할케가 만들어 낸 아삭거리는 소리가 일순 적막해진 공간 속으로 스며들었다.
***
그러니까 아타할케를 몰아낸 건 결국 공녀였다.
기가 차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저 애는 지금 제게 닥친 위협을 알지 못하는 건가. 제 목숨이 경각에 있다는 것도, 아마 지금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몬이 병력을 결집할 시간을 스스로 벌어 주었다는 것도.
“……아니, 나는…….”
이제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가늠했는지 공녀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열었다. 들어 봤자 쓸모없는 변명들일 테지만. 단박에 이를 막아 세운 나는 서늘함이 내려앉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얼마나 됐어.”
뜻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푸른 눈이 어둠 속에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얼뜨기 같은 꼴에 목구멍까지 분노가 치민다. 남아 있는 인내심을 모아 간신히 이를 누른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타할케가 나타난 건 언제였나고.”
“……오늘이 처음이었어. 정말이야.”
한참을 제 발끝만 보며 머뭇거리던 공녀가 내뱉은 대답은 그것이었다. 물론 티끌만큼도 통하지 않을 거짓말이었지만. 내가 없는 때를 고려한 치밀한 상황, 아타할케를 대하는 공녀의 익숙한 태도. 결코 오늘이 처음일 수 없는 기만적인 상황을 떠올리며 또다시 되물었다.
“솔직하게 말해.”
“……어제.”
“세이.”
“……사흘, 진짜야. 이게.”
사흘? 사흘이라고?
제 결백을 주장하듯 눈썹 앞머리를 모은 공녀도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몸을 사린 아타할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릿해진 시야에 차오른 것은 도저히 내리누를 수 없는 분노뿐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끝내 폭발하고 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공녀는 어깨를 움츠리고 덩달아 아타할케 역시 몸을 웅크렸지만, 그 모든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나는 목울대에 치미는 울분을 터트린다.
“사흘이면 아몬이 전열을 가다듬고 병력을 추가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야! 시간을 끌면 끌수록 우리가 불리하다고! 게다가 신호가 왔는데 답을 주지 않으면 기사들이 돌아갈 수도 있단 생각을 왜 못 해!”
“난…….”
동굴 속으로 울려 퍼지는 격양된 음성에 기세가 눌린 듯 입술만 달싹거리던 공녀가 입술을 연 건 그때였다.
“난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랬어!”
잇새로 흘러나오는 문장은 이 상황을 납득시킬 만큼 충분한 변명은 아니었지만.
“도대체 너는…….”
말문이 막힐 정도로 황당한 설명에 나는 아연한 눈으로 공녀를 바라보았다. 공작이 그토록 이 애를 염려했던 까닭을 이제야 알겠어. 기어코 나라는 자충수를 두어 스스로의 몰락을 자처한 연유도.
이 애는 아무것도 몰라. 뭐가 중요하고 뭐가 중요하지 않은지.
“정신 차려, 세이. 넌 죽을 뻔했어. 그런 천운이 또 따를 줄 아니.”
“언니가 또 도와주면 되잖아.”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너는 돌아가는 거야.”
“싫어! 싫다고!”
“세이!”
아집으로 똘똘 뭉친 눈을 부릅뜨며 허공만을 응시하던 공녀는 기어코 터져 나온 큰 소리에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백작부인 말이 곧 있으면 엄마가 돌아온대. 나랑 같이 이국에 머물 별장도 알아두셨대. 다 같이 거기서 새로 시작하는 거야. 언니도 가자, 응?”
“…….”
“내가 잘할게. 이젠 떼도 안 쓰고 말도 잘 들을게. 시키는 대로 다 할게, 응?”
조율도 타협도 모르는 이를 직시하는 눈에는 허탈함이 깃들어 있다. 이 애를 어쩌면 좋을까. 그저 거센 파도같이. 제게 주어진, 단 하나의 소명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그게 제 무덤이 될 줄은 알지 못하면서.
“……나는 네가 사라지길 바랐어.”
읊조림과 같은 목소리가 잇새에서 흘러나왔다. 조곤조곤한 음성에는 더는 분노도 노여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도 그랬어.”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어.”
그저 이 애가 알길 바라.
“피차 마찬가지야.”
“세상에 그런 언니는 없어.”
이 길 끝에 펼쳐질, 이 이야기의 끝이 무엇인지.
“그럼…… 그럼 그때 왜 날 구했어.”
“이미 대답했잖아, 세이. 누군가를 돕는 게 꼭 가족이여서만은 아니야. 같은 피가 흐른다고 다 가족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내가 살아온 세상은 그렇지 않아.”
그래서 헛된 노력도 그 속에서 알게 될 아픔도 모두 알지 못하기를.
그러나 그 모든 염려는 닿지 않고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나직한 덧붙임에 기어코 푸른 눈이 분노로 일렁인다.
“거짓말!”
서늘한 공기를 맹렬히 긁으며 지나가는 외침은 제 마음을 거부당한 자의 몸부림과 같다.
“그냥 솔직히 말해. 그런 거 때문이 아니잖아. 필요 없지? 나 같은 건. 그렇게 말해. 필요 없다고. 내가 없이도 언니 세상은 이미 다 완전하다고. 나같이 제멋대로인 동생은 없어도 그만이라고. 그냥 불쌍해서 살려 준 거라고. 말해! 그럼, 더는 기다리지 않을 테니까!”
“……세이, 그만해.”
“말하라니까. 난 필요 없다고 말해! 말하라고!”
때리고 할퀴고 악을 쓴다.
그러면 무언가가 바뀔 거라 믿는 것처럼. 아무리 설명해도 이 애는 몰라. 아직도 포기를 모르는 공녀를 피로한 눈으로 짧게 일별한 나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돌아와! 돌아와! 당장! 내 말 들었어? 언닌 겁쟁이야! 언닌 겁쟁이라고!”
밤의 공기를 가르는 벼린 외침에는 어울리지 않게 잔뜩 물기가 어려 있다.
***
박고 박고 또 박았다.
말뚝을 보강해 울타리의 경계를 견고히 했다. 아타할케를 통해 토리노의 서신이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착수한 일이었다. 숲의 경계에 대기하고 있는 그들과 연락이 되자, 모든 일은 신속하게 처리되고 있었다. 게다가 코르푸 위원회에서도 추가 병력을 보냈으니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처리될 것 같았다.
단 하나만 빼면.
잔잔히 이어지던 상념 위로 불쑥 솟구친 변수에 말뚝을 내려치던 어설픈 망치의 손잡이는 부러지고 말았다. 멍하게 눈을 여닫던 나는 그제야 어둠 속으로 소멸하기 전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해를 알아채. 가라앉은 눈은 그 붉은 기운이 묻어난,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더욱 생경한 아미타 숲의 전경을 담았다. 새의 깃털에는 여유로움이 묻어나고 향긋한 계절의 내음이 풍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내게 안온을 주던 풍경들은 이제 더는 그렇지 못했다. 그 까닭은 분명하지.
세이.
그 이름 하나에 이 숲은 다시 지옥이 된다.
그날의 다툼 이후, 공녀와는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까마득한 어둠이 사방을 잠식하고 나서야 동굴로 들어갔고 박명의 새벽빛이 낯을 물들기 시작할 즘 동굴을 나섰다. 제법 저도 마음이 상해 내 장단에 맞춰 주는 것 같았지만, 이것도 얼마나 갈지 모른다.
공녀는 결코 멈추지 않을 거다.
그게 이번 일로 내가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네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행복한 결말만이 펼쳐지기엔 우리를 지나쳐 온 상처들이 너무도 깊은데. 나는 고개를 젖혀 어느덧 캄캄해진 밤하늘을 짧게 응시해 본다. 그 위로 자연스레 흩어지는 건 이곳까지 나를 오게 만든 물음들이야.
어째서 그보다 네루다가 먼저 나타난 걸까.
공작의 숨통을 끊은 검, 그 검에 힘을 실은 건 나일까. 공작일까.
그저 우연이었던 걸까. 아니면 나도 몰랐던 내 깊은 소망이었던 걸까.
언제고 그 애가 이 번민을 알게 된다면, 어떤 답을 택할까, 하는 질문들.
피식, 입술을 타고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린 나는 이만 시선을 아래로 떨군다. 공녀가 입고 있는 것은 상복이라는 걸 깨달은 탓이다.
딸을 죽이려 한 아비와 그런 아비를 없애려 한 딸. 그 둘 모두를 포기하지 못하는 너.
조금은 과장되어 보이는 문장은 아마 진실일 테지.
너는 그런 사람이니까. 네 가문과 네 혈족을 위해선 무엇이든 할 아이니까. 그리고 우리 둘이 한 핏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것들이 아니야.
이 혈관에 흐르는 핏방울들을 모조리 씻어 내 버린다면 돌아서고 말 그리 속되고 가벼운 것들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만하렴, 세이.
핏줄과 가문 위에 네가 세운 의기는 그토록 하찮은 것들이니.
언제든 손쉽게 뒤집어질…….
그래, 우리 부모가 내세운 그런 허망한 약속들처럼.
***
“아델리아 공작에게서 답신이 왔소.”
탁한 공기를 가르는 토리노의 음성은 높다. 그 소란한 소음에 부유하던 의식을 간신히 다잡은 올레나는 제 앞으로 내밀어진 서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슴푸레 깜박거리는 등불 사이로 생경한 문양과 부호들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아마 모르헤 기사단원들 간의 수신호일 것이라 짐작하는 순간,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토리노가 낮은 탄식과 함께 설명을 덧붙인다.
“이런, 미안하군. 올레나. 아델리아 공작도 우리의 계획에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대로 추진하면…….”
막힘없이 이어지던 말소리가 죽은 것은 질긴 시선이 그녀의 뺨에 와닿았을 즘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군요, 올레나.”
그녀가 마주한 이는 한 일족의 수장. 미묘하게 변한 공기의 흐름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어리숙한 사내는 아니었다. 어쭙잖은 변명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던 올레나는 그 사실을 되새겨 보며 입술의 모양을 바꾸었다.
“……공녀님의 수목이 시들었었다는 전갈입니다.”
보고를 받은 건 두 시진 전쯤이었다.
내일 다가올 전투는 제국의 근간을 뒤흔들 만큼 중요한 상황. 본래도 일정한 주기로 백합의 상태를 전해 듣던 올레나가 최근 들어 그 횟수를 늘릴 것을 제안한 것은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들의 일족에게 그보다 더 중한 것은 없었으니까. 다행히 최근 공녀의 수목은 꽤나 일정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별장에 머물던 이후, 눈에 띄게 회복되고 있던 추세였다. 그리하여 지난 밤, 공녀의 수목이 전부 시들었다는 보좌관의 보고는 더욱 충격적이었지.
“허면…… 공녀의 치유력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는 토리노 역시 적잖이 당황한 낯을 숨기지 못했다.
“예, 치유력은 아마 회복되지 못했을 겁니다.”
“공녀가 무너지면 아델리아 공작 역시 앞을 가늠할 수 없을 터. 큰일이군. 그렇다 하여 일을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군.”
자조하는 토리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올레나는 이내 거두어들인 시선으로 짙은 어둠을 응시한다. 사위를 압도할 만큼 웅장한 비경은 그 안에 있을 테다.
도대체 저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둘 사이에 무슨 균열이 찾아오는 것인가?
자꾸만 끝없이 이어지는 망령된 사념들에 올레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대신 그 위로 다른 기억들을 차곡차곡 채워 넣는다.
그날, 제 언니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공녀의 눈 속에서 보았던 진정한 베르니의 위엄을. 한때 황실과 버금갔던 가문의 기세를.
공녀는 강해. 어쩌면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러니 견뎌 낼 것이다. 어둠이 물러나고 늘 다시 여명이 밝아 오듯.
이겨 낼 것이다. 태고의 가장 오래된 서약 앞에 얽매인 둘이니까.
하나가 아닌 둘일 때, 사람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를 지난 세월 그녀가 깨달았으니.
올레나는 진실로 그러기를 바랬다. 진실로.
“그저 내일이 오면 모든 게 달라졌길 바라는 수밖에요.”
밤의 공간으로 흩어지는 소리에는 깊은 바람이 깃들어 있었다.
***
동굴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공녀와 마주쳐 좋을 것이 없다, 그 명료한 사실이 만들어 준 계획이었다. 빼곡히 동굴 입구를 둘러싸고 있는 말뚝들 역시 그 사실이 만들어 준 풍경이었다. 아타할케를 찾고 정찰을 하기 위해 잠깐씩 동굴을 비운 적은 있어도 같이 지새우지 않은 밤은 없었다는 생각이 그 판단에 힘을 실었다. 내일이 되면 공녀는 떠나고 다시 돌아올 일이 없으니 저리 견고한 요새는 지나치다는 것을 깨달은 건 이미 절반 이상의 말뚝을 박았을 무렵이었다.
그렇게 계산상의 착오가 빚어낸, 조금 과장해 군사 시설에 버금간다 말할 수 있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동굴과 이를 둘러싼 여러 겹의 울타리를 살피는 눈에는 얼마간의 미련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간신히 이를 떨쳐 내고는 나무 우듬지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동굴로 달려갈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가깝고 공녀의 원망에 찬 눈을 보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먼 거리였다.
계획은 완벽했고 변수는 없었다.
약간의 계산상 착오는 몸은 고되게 만들었지만, 숙면을 취하게 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또 하나의 착오가 생겨난 건 그렇게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할 즈음이었다.
비명은 동굴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티케 사냥꾼들이라도 몰려온 것인가, 그들이 어떻게 이리 소리 없이 움직였나. 끝없이 이어지던 갖가지 상념들이 무색하게 그 안에 펼쳐진 광경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그와 대조적으로 흙빛같이 변한 입술. 물기 어린 뺨과 땀으로 흠뻑 젖은 드레스 자락을 아연한 표정으로 확인한 나는 다시 한번 시선을 올려 공녀의 낯을 살폈다. 비에 젖은 생쥐꼴 같은 모양새를 한 이는 공녀가 틀림없었다. 악몽을 꾸는지 제대로 뜨지도 못한 눈으로 허공에 헛손질을 하는 손을 붙잡자, 헐떡거리는 숨 사이로 끊어질 듯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사라져…… 언니도 날 떠날 거야?”
두서없이 흘러나온 문장은 아연한 물음으로 끝을 맺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야……?”
푸른 눈이 나를 보며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푸른 눈은 아득한 심연을 배회하는 것 같았다. 막막한 심정으로 닿을 수 없는 밑바닥까지 치닫는 세이를 내려다보던 나는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되뇌듯 혀끝에 맴도는 그 문장이 아스라이 공간 속으로 흩어진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메아리치듯 동굴 속을 되울리는 낱말들 덕일까. 팽팽하게 달아올랐던 공기의 기류는 가라앉고 이를 가로지르는 세이의 호흡은 한결 골라지기 시작했다. 땀에 젖은 반듯한 이마를 닦아 주며 나는 몽마가 사라진 자리에, 이내 평화롭게 변모한, 잠든 그 애의 낯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무엇이었을까. 속삭임과 같은 문장이 절로 입가에 흘러나온 연유는.
“누구의,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 우린 평생 누구의 잘못인지 찾아 헤맬 텐데.”
아직도 잘 모르겠어.
“언젠가 불쑥 날 보며 아버지를 떠올리는 순간들이 찾아오겠지. 진창처럼 추악하고 끈적한 감정들로 네 마음을 적시면서.”
왜 그랬는지 말이야.
“죽은 이가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면, 세이…….”
생각은 멎고 발이 먼저 움직인 건 어떤 연유였는지. 완벽했던 계획을 망치고 스스로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되어 버린 건 어떤 까닭인지.
“살아남은 이들이 대신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라고 하더라.”
내게 하는 말인지 네게 하는 말인지 모를 중얼거림이 쉬지 않고 동굴 위로 차올랐다.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암흑의 공간, 이끼와 함께 어우러져 더욱 기기묘묘한 공간을 스쳐 지난 내 시선은 다시 너에게로 닿아.
“우리 아버지는 참 잔인해…….그래도 넌 절대 그를 놓지 못하겠지? 내가 절대 베르니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니 별수 있겠니?”
미워하지도 미워하지 않지도 못하는 가여운…….
“난 네 언니가 아니야. 그걸 명심해. 그걸 명심해, 세이.”
그래야 네가 살 수 있을 테니까.
***
눈은 짓무르고 퉁퉁 부어 있었다.
새벽빛이 부옇게 밝아 오는 시간부터 움직여 먼동이 붉은 이른 아침에는 이미 아델리아 공작이 머무는 동굴에 도착한 올레나가 목격한 것은 그것이었다.
누가 봐도 밤새 울었을 것이 분명한 공녀.
뜻밖의 상황에 얼떨떨함에 젖어 있던 올레나가 정신을 차린 건 고저 없는 음성이 귓가에 내리꽂힌 직후였다.
“쫓는 자는 없었나.”
소리를 쫓아 시선을 돌린 곳에는 이른 새벽의 공기처럼 냉랭하기 그지없는 공작의 낯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단정하다는 단어로 빚어 만든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른 자매의 외양만큼이나 공녀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예, 아마 돌아가는 길이 결전의 장이 될 것 같습니다.”
“별다른 문제는 없고.”
군더더기 없는 말투 역시 그러했다.
“예.”
모르헤 기사단 역시 도착했다, 올레나가 그리 보고를 이어 가는 사이, 공녀는 벌써 말에 올랐고 기사들은 전열을 가다듬어 다가올 전투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런 기사들의 모습을 차분히 담아내던 은안은 잠시간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이내 빠르게 눈을 거두어들이고는 말 위에 올라탔다.
“출발하지.”
숲의 경계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협곡을 지나야 했다.
산세가 험한 위치로 공격하기가 좋아 기사단장이 꼽았던 가장 유력한 전투 장소였다. 협곡에 들어서서부터는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베일 듯한 적막이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기형적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풍기는 위험스러운 자태를 바라보며 올레나는 옅은 한숨을 내어 쉬었다.
과연 이 방법이 통할 것인가.
만들어 내는 갑주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공간 위로 구르는 말발굽 소리가 그 소음을 덧대자, 올레나의 낯에 떠올랐던 근심은 더욱 짙어진다.
그들의 계획은 단순했다.
전열을 둘로 나눠서 움직인다. 한쪽은 아델리아 공작을, 다른 한쪽은 공녀를. 다가올 제국의 미래를 결정지을, 모르타 위원회와 코르푸 위원회라는 역사에 다시 없을 동맹이라는 여러 사안을 고려하건대 지나치게 간결한 전략이긴 했다. 물론 아델리아 공작은 니벨론 기사단과 함께 공녀는 모르헤 기사단과 함께 움직인다, 라는 점을 감안하고서라도 말이다.
“통할지 모르겠습니다.”
염려를 가득 실은 문장이 올레나의 잇새에서 흘러나왔다. 이번 일의 전권은 단연 두 위원회를 부합시킬 수 있는 공작에게 있었고 올레나 역시 릴리의 신호를 믿으매 그녀를 따랐지만, 너무나도 위험한 자충수를 두는 꼴이 될 수 있다.
그런 그녀와 달리 아델리아 공작의 반응은 퍽 싱거웠다만.
“어차피 이런 얕은수는 당락을 결정짓지 못하잖나. 모든 건 어차피 다 그대들의 신에 의해 결정할 것이니.”
그것 역시 틀린 말은 아니고 엄밀히 따지고 보면 우문에 대한 현답이기도 했다. 딱히 올레나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의 강렬한 감각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짧은 단말마와 함께 그녀가 말고삐를 잡아 세우자, 꼬리에 꼬리가 맞물려 끝없이 이어지던 행렬이 그녀를 따라 멈춰 섰다. 니벨론 기사단의 단장이 재빨리 말을 몰아 그녀에게로 다가온 건 그때다.
“위원장님.”
“……그래, 나도 느꼈네.”
체념 어린 탄식과 함께 올레나는 고개를 젖혔다. 날카로운 모양으로 볼록 솟은 봉우리들, 서로 휘감겨 있는 거대한 등나무. 흐릿한 운무로 가려져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분명 저 안에 그들이 있을 테지.
티케 사냥꾼들이.
***
“움직이기 시작하는군.”
단조로이 흘러나오는 그 문장에 거칠게 깎아지른 절벽 위에 대기하고 있던 티케 사냥꾼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들의 시선은 이제 아몬의 눈을 쫓아 협곡을 가로지르는 기사들에게로 가 닿았다. 올레나를 속이기 위해 불필요한 전투마저 감내했던 일의 결과가 때아니게 등장한 공작 덕에 실패로 끝이 났을 때부터 고대하던 움직임이었다.
“어느 쪽부터 공격할까요.”
어느새 아몬의 곁으로 다가온 부하는 험악한 눈으로 막 전열을 두 갈래로 나누기 시작한 아올리스의 기사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왼쪽은 니벨론, 오른쪽은 모르헤.
분명 한쪽은 공작, 한쪽은 공녀일 테지. 꽤나 진부하고 싱거운, 그럼에도 행운이라는 그들의 축복을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진중하게 가라앉은 보랏빛 눈이 두 갈래로 나뉜 병력을 내려다본다.
“우리는 전열을 한 곳에 집중한다.”
조금은 무모한 답을 걸고서.
***
“올레나 위원장님!”
모르헤 기사단원의 날 선 음성이 고요를 흔들었다. 푸른 물결로 이어지는 행렬 속 단박에 이질감을 자아내는 사내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올레나가 발견했을 즘, 어느새 기사는 그녀의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꽤나 다급한 모습을 보아하니 뭔가 일이 틀어진 게 틀림없다. 그 불길한 징조를 읽어 낸 올레나는 저 어린 기사가 저토록 당혹스러워할 만큼 그들에게 닥칠 수 있는 몇 가지 위기를 그럴듯하게 가정해 보았다. 그리고 그중 가장 유력한 것은 이것이었다.
“아몬이 모르헤 기사단 쪽으로 이동했나.”
어느 정도 일어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일이다. 이런 수를 두었을 때 필히 따르는 위험이기도 했고. 올레나는 침착함을 견지한 얼굴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방비책을 꺼내 들었다. 그들 기사 몇에게, 모르헤 기사단의 복장을 입히고 추가 병력을 투입한다. 초조하게 눈을 굴리던 그때였다.
“아몬의 전력이 모두 저희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뭐?”
“아몬의 전력이 모두 공녀님을 향하고 있단 말입니다. 토리노 위원장께서 당장 병력을 추가로 요청하셨습니다. 이 숲은 저희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할뿐더러…….”
소리는 물에 잠긴 듯 들려오지 않았다. 기어코 최악의 수가 터지고 말았다. 염려했으나, 아몬답지 않았고 아무리 제멋대로인 자라 해도 이리 무모한 수를 둘 정도로 어리석진 않다 여겨 외면했던. 예상치 못했고 그리하여 대비치 못한 상황 속에서 올레나는 느리게 눈을 여닫았다. 모조리 시들어 버린 공녀의 백합과 푸르디푸른 릴리의 신호가 대비되며 어둠에 먹힌 그녀의 시야를 흐렸다.
아델리아 공작.
두어 번 혀끝에 그 낱말을 굴리던 올레나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모두 방향을 돌려라, 공녀님을 보호한다!”
***
“올레나가 오고 있습니다. 아마 여기에 공녀가 있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글쎄.
사방에서 치솟는 피비린내와 쇠붙이가 맞부딪치며 만들어 내는 소음 속 흘러 들어온 들뜬 부하의 말에 아몬은 고개를 외로 기울였다. 그 너머로 보이는 건 시야를 압도하는 푸른 물결과 그 선봉에 선 올레나였다. 그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던 모르헤 기사단이 올레나의 지원 아래 다시 그무러진 힘을 다잡는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며 아몬은 생각했다.
두 번. 두 번이나 그가 졌다.
공작저에서도, 이 아미타 숲에서도. 코르푸의 힘이 훨씬 더 우세하다는 게 자명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에 공녀가 있다고? 올레나 그 여자가 죽어도 포기하지 않을, 꽤나 높은 확률로 아올리스의 코르푸를 이끌게 될 그녀의 후계자가?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다만 하나는 확실해.
그럼, 여기에 있는 건…….
공작이 맞구나.
티케가 올레나를 저버렸을 리 없으니까.
벼린 쇠붙이가 그의 목덜미에 와 닿은 건 막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였다.
“아몬.”
익숙한 음성과 함께.
천천히 몸을 돌리자, 역시나 소리의 주인은 예상했던 이였다. 깊게 둘렀던 후드가 벗겨지고 시야를 흐트러트리는 부신 은발과 이와 마찬가지로 달빛을 머금은 것 같은 은안이 아몬의 눈을 파고들었다.
“아델리아 공작.”
오랜 친우와 해후한 것처럼 다정한 음성이 아몬의 혀끝에서 흘러나왔다. 짙게 가라앉았으나 일말의 동요도 없는 자안 역시. 이에 아델리아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놀라지 않는군. 곧 그대의 명줄이 날아갈 참인 것 같은데.”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듯 아델리아 공작은 목 끝에 닿은 칼날에 조금 더 힘이 실었다. 한 주먹도 안돼 보이는 여린 여인이 한 손에 들기도 버거워 보이는 검으로 저를 위협하는, 기실 티케의 축복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상황에 피식,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린 아몬은 제 뒤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놀란 건 올레나인 것 같은데. 올레나마저도 속인 것인가.”
“우리를 어리석게 만드는 건, 늘 두려움이지. 올레나가 저렇게 움직여 줘야 자네가 믿을까 했는데…….”
말끝을 길게 늘어트린 공작은 그의 어깨 너머 돌진해 오는, 쉰을 넘긴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단단한 체구로 전장을 지휘하는 여인을 응시하는 듯했다.
공작이 올레나마저 속였다라.
코르푸의 늙은 여우라 불리는, 그들과의 숱한 전투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여인이 저도 알아차린 이리 얕은수에 넘어간 것도 다 티케의 뜻일까. 그럼, 그가 진 것은 올레나가 아니라 저 여인과 공녀였던 걸까. 아올리스에 부상하는 새 물결과 그 각인자를 바라보는 아몬의 눈은 심상하기 짝이 없다. 하기사, 범상치 않긴 했지.
아델리아 베르니.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말이야. 올레나를 짧게 일별한 은안이 그녀를 스치듯 지나 다시 그를 응시한 건 그때였다.
“헛수고였군.”
“나를 믿는 건 보다 상대를 믿을 때 더 쉽게 원하는 걸 가질 수 있지.”
“……그게 나라는 건가.”
“이미 난 두 번 자네에게 졌어. 티케 일족에게 그게 뜻하는 게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지. 다른 치들이야, 글쎄. 다음을 기약하며 반성을 한다지만, 우리에게는 딱 두 가지 뜻이야. 잔혹한 우리의 여신이 더 많은 축복을 베푼 이 앞에 무릎을 꿇거나, 아니면 더 뛰어난 티케를 앗아오거나.”
티케를 앗아가다. 아마 그 문장이 심기를 거슬렀는지, 공작의 눈매가 가늘어지고 그의 목덜미를 짓누르던 칼끝이 살갗을 파고든다. 제 손으로 이 땅에 그들을 부른 주제에 참 우습구나. 그의 키득거림이 가라앉은 공기를 흔들자 아델리아 공작이 눈매를 더욱 좁혔다.
“헛소리 지껄일 시간이 있나 보군.”
“워워, 진정하게. 공녀를 말하는 건 아니니까. 공녀는 그대에게 자연적인 각인을 하지 않았나. 그럴 경우는 꽤나 복잡하다고. 대신 공작, 거래를 제안하지. 그대도 원하는 걸 얻고 나도 원하는 걸 얻을 완벽한 거래 말일세.”
예상치 못한 전개였는지, 아델리아 공작의 동공이 흔들린다. 그러나 이내 침착하게 낯을 갈무리한 그녀는 소리를 높였다.
“무슨 소리지.”
빙긋, 입꼬리를 올린 아몬은 그녀에게로 보폭을 넓혀 거리를 좁혔다.
“그대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길 바란다는 걸 모르지 않네.”
***
공녀가 아니었다.
모르헤 기사단과 함께 움직인 이는 공작이라는 걸, 전투가 끝나고서야 이제야 알아차린 올레나는 허망한 눈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숲을 바라보았다. 세기에 길이 남을 전투가 그 명성과 달리 허무하게 끝나 버린 지 꽤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모르헤 기사단과의 전면전에선 꽤나 열의에 차 전투에 임했던 티케 사냥꾼들은 그들이 나타나고 유혈 사태가 깊어지자, 신속히 퇴각의 명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이상한 점이 다분한.
무엇 하나 기이하지 않을 구석이 없는.
발밑에 밟히는 누렇게 시든 풀잎들과 핏물을 머금은 무성한 삼림들. 엉망이 된 전쟁터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예감은 더욱 깊어져. 끝없이 이어지는 망령된 사념 속에서 그녀를 끄집어낸 건 기사단장이었다.
“위원장님, 아몬이 퇴각 명령을 내린 게 확실한 듯합니다.”
“탈출 경로는.”
“아마 북부의 국경선을 넘어 멜번 항구를 통해 이동할 계획인 듯합니다. 마저 추격할까요?”
멜번 항구라. 뛰어난 항해술로 대양과 대양을 건너 무자비한 침입과 약탈을 일삼는 그들과의 항해전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그러니 전투를 끝낼 작정이라면 지금 이 아미타 숲에서 마무리 짓는 것이 마땅하지만…….
길게 늘어지는 생각과 침잠하는 갈색빛 눈 위로 떠오른 건 이 전란 속을 겪기엔 아직 어리기만 한 공녀다. 이미 그녀가 겪은 일들은 그 연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다망해. 옅은 한숨과 함께 그녀는 고개를 내젓고는 대신 더욱 중한 물음을 뱉는다.
“공녀님은?”
“무사합니다, 지금 숲의 경계에 마련된 막사에 머물고 계십니다.”
일각의 지체 없이 돌아오는 답에 올레나는 다시 한번 실감했다. 아델리아 공작, 정말 저를 속인 것이구나. 그 문장에 깃든 미묘한 감정의 정체는 그녀가 제게 보인 기만에 대한 노여움은 아니다. 약간의 회한과 씁쓸함. 착잡하게 가라앉는 마음을 달래려는 듯 올레나는 고개를 젖혔다. 피비린내와 사체가 가득한 대지와 달리 그녀의 머리 위로 펼쳐진 광경은 푸르디푸르러. 아마 그들의 신도 저 위에 머물고 있겠지?
아델리아 공작이 그녀를 속였다. 그리고 이를 전란이 끝날 때까지 알지 못했어. 그리 어려운 수도, 따지고 보면 짐작하지 못할 만한 묘책도 아니었는데.
티케 일족에게 그게 뜻하는 게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올레나는 어리석지 않다. 다른 치들이야, 다음을 기약하며 반성을 한다지만, 그들에게는 단 한 가지 뜻이다. 잔혹한 우리의 여신이 더 많은 축복을 베푼 이가 나타났다는 것.
정말 힘이 다하고 있구나.
옅은 중얼거림과 함께 손을 쥐었다 펴 보인 그녀는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끈, 티케를, 그 티케의 각인자를 곱씹어 본다.
아델리아 공작.
머지않아, 이 아올리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될. 그녀의 입술을 타고 그 낱말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여태껏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기사단장이, 그의 낯에 머뭇거림과 함께 입을 벌린 것은 그때였다.
“위원장님…….”
귓가를 파고드는 낮은 울림에 올레나는 청청한 계절의 하늘을 배회하고 있던 시선을 내려 곁에 서 있던 기사단장에게 주었다. 중한 보고를 다 마친 것 같은 그가 왜 자리를 뜨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할 즘, 그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어둡기 짝이 없다는 걸 발견했을 즈음, 기사단장이 한참의 머뭇거림 끝에 소리를 높였다.
“공작님이 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입니다.”
메마른 풀잎들 위로 스며든 문장, 미미한 떨림이 묻어나는 음성.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낱말에 느리게 여닫히는 갈색빛 눈동자 속으로 시든 백합이 떠오른 건 그 순간이었다.
***
먼저, 다시 언니를 만나면 공녀는 사과를 하려 했다. 제가 며칠 난동을 피운 덕에 언니는 동굴 밖에서 머물렀으니. 그 다음은 설득을 하려 했다. 혹 그 시간 동안 언니의 마음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니. 유례없는 전란이 벌어지고 위태로운 길을 향해 말을 몰았을 때에도 공녀의 머릿속에 들이찬 생각들은 그것이었다.
다시 만나면 해야 할 수많은 것들에 대해서.
그래서 더욱 올레나가 하는 말은 믿을 수가 없어.
‘공작님이 사망하셨습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공녀님.”
공녀는 제게 담담히 말을 건네는 여자를 노려본다. 코르푸의 늙은 여우.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소리를 이번에도 입에 담으며. 믿지 않아. 그녀가 하는 헛헛한 말들. 하나도, 단 하나도 믿지 않아. 마지막 모르헤 기사단원이 숲에서 빠져나왔을 때도, 아몬이 아델리아 공작을 공격하는 걸 봤다는 목격자가 나올 때도, 기어코 은발의 사체를 발견했을 때에도 공녀는 그러했다. 대신 단 하나의 믿음을 견지하며 푸른 눈을 일렁거릴 뿐.
“빨리 언니를 찾아오란 말이야!”
막 수색을 마치고 온 기사 하나를 붙잡고는 공녀는 그리 외쳤다. 그가 난색을 표하자, 그 옆의 기사를, 또 그 옆의 기사를. 그렇게 몇 명의 기사들의 낯에서 짙은 패색을 읽어 낸 공녀는 급기야 다른 결론에 달했다.
모두가 한통속이야. 그래서 다 저를 속이려 하는 거야.
공녀의 벽안은 그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티끌만 한 음심도 찾아낼 기세로 사납게 표류하기 시작했다. 올레나가 다시 말을 붙인 건 그때였다.
“공녀님, 저희 모든 인원을 동원해 공작님을 찾아보겠습니다. 허니, 일단 지금은 들어가 쉬시지요. 날이 궂고 어둠은 깊습니다. 우선 공녀님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셔야 해요.”
기사들을 한껏 노려보던 공녀의 시선이 온화한 낯을 한 여인에게로 스치듯 움직인다. 이 난국에도 저리 뻔뻔스러운 말을 하는 여자에게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공녀는 불쑥 그 위로 떠오른 문장에 멈칫했다.
‘그냥 올레나의 말을 믿어. 그 여자가 시키는 대로 해.’
언제고 언니가 했던 말이, 한번 뇌리를 뚫고 들어온 기억은 이제 물밀 듯이 범람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내 말대로 해. 올레나 위원장은 널 아껴. 그 누구보다도 말이지.’
‘널 아껴서 그래. 널 아끼니까 널 아프게 하는 사람들은 다 싫어하는 거라고.’
그제야 공녀는 제 앞에 선 여인을 똑바로 올려다본다. 코르푸의 늙은 여우. 아버지가 한 말을 믿기에는 지나치게 따스한 빛깔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인정해 보기도 했다. 어쩌면 언니의 말이 틀리지 않았을 거라는 걸.
하지만.
하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그런 것들이 아니야.
세이.
지금은 그 다정한 울림이 필요해. 그녀를 달래고 다독일 그 나른한 음성이. 내 잘못은 아니라고. 수십 번 더 되뇌여 줄 그 목소리가. 내 손을 맞잡고 절대 놓치지 않을 것처럼 안아 줄 너른 품이. 지금은 그게 필요해. 내게 필요한 건 그거야.
그리하여 공녀는 꼭 그날처럼 같은 대답을 입가에 올린다.
“……싫어.”
“공녀님…….”
“싫다고!”
악에 받친 손이 쥐고 있던 말고삐를 잡아당기고 포기를 모르는 발은 말허리에 박차를 가한다. 간신히 평온을 되찾았던 숲을 뒤흔든 말발굽 소리와 말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외침과 고성을 끊어 내고는 핏빛으로 불타고 있는 황혼 속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