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악동
“라마타에도 공작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해가 제 모습을 감춘 아침, 보좌관의 보고가 피로에 물든 황태자의 골을 파고들었다. 이전의 보고와 그닥 다르지 않은, 쓸모없는 문장들이었다.
이번에는 제법 기대를 했건만.
제법 무리를 해서 라마타에 아올리스의 기사들을 출병시킨 것은 과거 아델리아 공작이 후작과 라마타로 떠나려 했다는 전적이 있음을 알게 된 직후였다. 그 정황을 뚜렷하게 보이는 세세한 증거들까지 나타나자, 황태자는 직접 라마타를 두어 차례 방문하며 도움을 구했던 것이다. 지난날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깊은 한숨뿐이다. 황태자는 묵지근하게 조여 오는 관골을 문지르며 순백의 서신을 꺼내 들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번 추적의 결과를 주시하고 있던 이들에게 이 소식을 알릴 참이었다.
빛이 사라진 공간은 평소보다 어두워 이른 시각에도 심지에는 불빛들이 타올랐지만, 내실은 여전히 흐려 눈앞의 사물들도 흐릿하다.
마치 제국의 앞날처럼.
아델리아 공작이 실종된 이후, 찾아온 혼란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가 명을 다한 것은 아니라는 특이점 때문이지. 새 공작을 추대해야 한다, 대리인을 세워야 한다로 신흥 귀족과 구귀족의 토론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달이 바뀌고 나서야 사안은 겨우 매듭지어졌다.
공작의 자리는 유효하되 그의 생사가 파악되기 전까지는 방계 가문의 대리인이 가문을 관리한다.
물론, 그 대리인이 신흥 세력 쪽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제레미 이드왈치. 첫째와 둘째를 제치고 신흥 세력인 이드왈치가의 막내 아들이 공작가의 대리인이 된 경위는 그러했다. 그렇게 간신히 마무리 지어진 상황으로 정계는 안정을 되찾았다. 허나, 그 모든 평화의 전제는 단 하나. 아델리아 공작이 돌아온다는 가정하에 유지되는 거겠지.
아델리아 공작.
그 이름을 떠올리자 황태자의 금안은 창밖에 펼쳐진 하늘보다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혹자는 진실로 그녀가 명을 달리한 게 아니냐 수군댔지만, 글쎄. 황태자는 차라리 이 갑작스러운 실종 사태가 모두 아델리아 공작의 자작극이라는 가설을 더욱 믿는 편이었다. 그녀를 돌아오게 하려 후작의 치료를 돕던 서대륙의 치료술사를 돌려보냈다는 초강수를 둔 것 역시 그 선상이지. 허나, 마지막 보루라 여겼던 그 결정에도 공작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 애비에 그 딸이라더니…….
제 속을 뒤집어 놓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부녀를 떠올리며 황태자는 종이 위로 날카로운 펜촉을 드리웠다.
이제 변함없는 추적의 실패 사실을 모두에게 전달할 차례였다.
***
이변은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공작을 찾지 못했다는 황실의 전령에 공작가의 대리인, 제레미는 입꼬리를 올렸다. 괜스레 기분마저 가라앉게 만드는 흐린 날도 그의 낯에 드리운 반색의 기색을 가리지 못했다.
공작이 실종된 지 한 해. 파악되지 않던 공작의 생사에 걸던 헛된 기대가 사라진 것은 그의 실종이 기실, 자작극이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할 즘이었다. 티케의 가호를 받는 각인자에게 닥친 비극이라는 석연치 않던 구석은 그제야 맞아떨어졌고 구귀족은 구귀족대로, 신흥 귀족은 그들 나름대로 새롭게 다가올 변혁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신흥 세력이 내세운 대안은 바로 그였고.
차기 공작, 제레미 이드왈치.
약간의 문제점이 있긴 했지만.
“나가!”
제 생각을 하고 있단 걸 안 모양일까. 집무실을 박차고 들어선 이는 완연히 반짝이는 햇살과 같은 금발을 공간에 휘날리며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여긴 네까짓 게 있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공작가의 적합한 주인으로서 모든 조건이 완벽하다만, 단 하나의 약점. 성년이 되지 못했다는 연유로 작위를 잇지 못한 공녀였다.
제레미는 제 앞에서 성난 파도처럼 철썩이는 벽안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공작의 자결 이후 한동안 충격에 얼어 있던 공녀는 그가 저택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어디서 기운이 솟았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공작저를 들쑤시고 있는 것이다.
하기사, 아비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친자매는 실종 상태이니 제정신을 붙들어 매려면 독기라도 품어야 하지 않겠는가. 티케로 발현되며 제국의 주목을 받던 공작가의 공녀가 어찌 이런 가여운 처지가 되었을꼬. 저 철부지 공녀 앞에 그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는 제 처지도 참 안타깝기 그지없다만.
“공녀님.”
격식을 차린 인사와 함께 바닥을 향해 낮춘 자세를 곧추세우려던 그는, 깔끔하게 빗어 내린 그의 머리 위를 타고 목덜미까지 흘러내리는 끈적한 액체에 낯을 딱딱하게 굳혔다.
“마지막 경고야! 한 번만 더 여길 드나들었다간 네 놈 다리를 부러트려 줄 테다!”
이번엔 잉크인가.
어느새 제 발목까지 흘러내린 검은 액체를 매만지며 제레미는 실소를 머금었다. 연민이 남아 있던 눈에는 이제 분노만이 가득한 채로. 그 눈을 들어 올린 그는 제 할 만만 내뱉고 내실을 벗어나는 공녀의 뒷모습을 쏘는 듯이 응시한다.
공녀가 저리 기세등등할 수 있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홧홧한 마음을 달래며.
***
복도를 가로지르는 붉은 공단의 끝자락에는 사나운 기세가 분연히 묻어났다.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조급한 공녀의 걸음걸이는 공작저의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다. 매서운 눈빛으로 마주치는 사용인들 하나하나에게 희번덕한 시선을 보낸 그녀가 다다른 곳은 다름 아닌 대부인의 처소. 그 앞에서 공녀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제법 먼 거리를 걸어오느라 홍조가 띤 뺨과 매무새를 단정히 하던 그녀는 불현듯 심중에 치솟는 분노에 입술을 짓씹었다. 몇 걸음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깝던 어머니와 그녀의 처소가 이리 호흡이 가쁠 정도로 멀어진 까닭이 떠오른 탓이다.
제레미가 대리인으로 와 저택에 분 변화는 다양했다. 먼저, 평생을 저를 돌보았던 유모가 바뀌었고 시녀들 역시 반 이상이 새로운 이들로 물갈이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감시자처럼 따르는 기사들은 어떻고.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이것이다. 공녀와 어머니의 처소가 동쪽과 서쪽, 아주 끝과 끝으로 배치된 것. 제레미가 대리인으로 온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결정된 사안이었다.
‘공녀님을 염려해 그런 것입니다.’
다시 원래대로 방을 배치하라 고래고래 지른 소리에 제레미가 내놓은 대답은 그러했지. 마치 어머니가 제게 위해라도 가할 것처럼. 묵묵히 이에 긍정하던 올레나 역시 눈에 선연해.
내가 공작이 된다면 전부 다 싹 갈아 치울 거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더 되뇌는 그 문장이 이번에도 공녀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유모를 다시 부르고, 시녀들도 내 맘대로 고를 거지. 방은 저택에서 가장 큰 방으로 쓸 거고. 온종일 밖을 쏘다닐 거야. 시간이 흘러, 그녀가 성인이 되고 공작의 작위를 받게 된다면 할 일들을 하나 하나 나열해 보던 공녀의 낯은 어느새 평정을 되찾았다.
물론, 가장 먼저 할 일은 제레미와 올레나의 팔을 분질러 놓는 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그녀는 다소 산뜻해진 마음으로 보폭을 넓혀 어머니의 방으로 들어섰다. 조금은 평온해진 낯에 다시 열기가 오른 것은 서늘하다 못해 차디차게까지 느껴지는 내실의 공기를 감지한 직후였다. 불같은 기세로 종줄을 잡아당긴 그녀는 모습을 드러낸 하녀를 향해 거친 낱말들을 쏟아 냈다.
“이렇게 방이 차가워질 때까지 넌 뭐 했어! 불을 피웠어야지!”
차디찬 내실의 공기를 가르고 공녀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하녀들은 쭈뼛쭈뼛 움직이기 시작한다. 도끼눈을 뜬 공녀의 진두지휘하에 방의 공기는 젖은 이파리도 바삭하게 마를 정도로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있으면 모조리 잘라 버릴 테야, 서슬 퍼런 엄포를 놓으며 물러가는 하녀들을 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공녀는 모두가 내실을 떠나고 나서야 눈길을 돌렸다. 장작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를 스쳐 지난 푸른 눈은 이 소란에도 죽은 듯이 침상을 지키고 있는 어머니에게 닿는다.
“엄마?”
따뜻한 온기를 타고 조심스러운 공녀의 음성이 내실에 울려 퍼진다. 역시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지만. 처음에는 제 부름에도 미동 없는 어머니를 흔들고 더욱 소리 높여 부르곤 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그 공허한 반응도 꽤나 익숙한 일이 되었는지 공녀는 그저 바닥으로 흘러 내려온 이불보를 어머니의 목 끝까지 끌어당기고 흐트러진 베갯잇을 정돈할 뿐이다.
이 긴 적막은 언제쯤 끝나는 걸까.
가만히 어머니의 생기 잃은 은발을 쓸어내리던 그녀는 털썩 침대 밑에 주저앉았다. 둔중하게 울려 퍼지는 소음을 따라 상념들이 흩어진다.
언니가 사라졌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제국을 들쑤신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황제의 기사들도 모르타 위원회의 추적대도, 니벨론 기사단도 누구도 언니를 찾아내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정말 언니가 모르스의 현신이라 제 세상으로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고들 수군거렸고 또 어떤 이들은 이 모든 게 언니가 꾸민 자작극이라고 입방아를 찧었다.
무엇이든 공녀에겐 중요치 않았지만.
둘 다 지키려 했는데, 결국 둘 다 잃어버리고 말았어.
그녀가 알고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기다림이 원망으로 변모할 수 있을 만큼 긴 시간 속 공녀의 마음은 그렇게 짓물러졌다.
하지만…….
아직 그녀에게 남아 있는 사람이 있어. 그녀가 지켜야 할 단 한 사람이 아직 있다.
공녀는 눈을 돌려 여전히 제게 등을 보이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본다. 아버지가 그리된 충격으로 한없는 무기력 속을 헤매는. 앙상해진 어머니의 팔목과 얼핏 보아도 품이 넓어진 드레스 자락을 보던 공녀는 굳세게 의지를 다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밖에 없어.
어머니를 지킬 사람은.
곧 있으면, 어머니의 상태를 돌보러 의원이 저택에 올 시각, 저택에 모두가 어머니에게 소흘해진 지금, 그녀 말고는 누구도 어머니를 돌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뿐인가. 이리 제 손이 닿지 않으면 내실이 서늘할 때까지 방치하기까지 하지.
절대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결연해진 빛깔의 눈을 들어 올린 공녀는 주저 없이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불호령 아래 저택의 사용인들은 모자람 없이 의원을 맞이할 채비를 해야 할 때였다.
***
“몸이 많이 쇠약해지셨습니다, 대부인. 약을 처방할 것이니 꼭 식사를 거르지 마십시오.”
쟁반에 담긴 약봉지를 내미는 의원의 음성은 냉담했다.
그가 내민 것이 약이 아니라 독이라 여겨질 정도로.
내실에 차오르는 서늘한 공기, 뼛속이 시릴 정도로 냉랭한 시선. 의원이 나가서도 여태 방 안에 남아 그녀를 할퀴는 잔재들을 애써 무시하며 대부인은 쟁반에 놓인 약을 입가에 털어 넣는다. 물 한 모금 없이 목구멍을 스치는 가루들은 마치 유리 조각의 파편을 삼킨 것처럼 쓰디써. 눈물이 날 정도로.
모든 일은 하루아침에 벌어졌다. 그저 눈을 떴을 뿐인데, 그녀를 맞이하는 세상은 달라져 있었어.
‘공작 부인, 공작님께서……,’
‘세상에나, 그럼 제 친자식인데도 그런 거야. 저리 뻔뻔할 수가.’
그간 그녀가 겪었던 고통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 위를 메꿔 가는 것은 그런 힐난한 비난들이다. 어째서 제 자식을 모른 체했냐는. 그래도 남편은 죄책감에 세상을 떴는데 저리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뻔뻔하다는.
알아. 잘못했다는 걸 말이야. 어머니로서 해선 안 될 일이었던 거라는 걸.
하지만…….
비어 버린 약봉지를 쥔 그녀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아델이 태어나고 그녀의 삶은 지옥과 같았다. 찬란했던 불빛과 다정했던 바람의 내음. 한순간에 모든 건 악몽이 되고 말았어. 너무 무섭고 또 무서웠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잘 키울 수 있을 거라고, 그리 숱하게 되뇌었던 고민들이 무색하게.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어.
한 아이를 책임지는 게 그리 어려운 거라는 걸. 아이라는 건, 아이를 키운다는 건 이야기 속 설명처럼 그리 쉽지 않다는 걸 그때 알았지. 그렇게 지쳐 갔을 때, 남편의 전부인이었던 이에타 가문의 장녀가 세상을 떠나고 그가 그녀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은 게 죄일까. 아델의 일을 그리 만들 때에도 남편이 버린 게 그녀가 아니라 아델이라는 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했던 게 죄가 될까. 그게 죄가 될까.
차곡차곡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물음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메마른 손등 위로 한 서린 눈물방울들이 떨어진다.
많은 걸 바랐던 건 아니야.
그저 다시 돌아가고 싶었어. 찬란했던 불빛과 다정했던 바람의 내음. 찰나의 순간이라도 다시 그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끽해 보고 싶었어.
그게 죄인가. 그걸 바란 게 그리 큰 죄야.
눈가에 맺히고 떨어지던 방울들이 하천을 범람하는 물줄기가 되어 바닥을 적실 즘이었을까. 울다 지친 그녀의 몸이 기울고 맞부딪친 쟁반의 요란한 울림이 뒤이어 내실에 울려 퍼졌다.
“……부인.”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대부인.”
골을 파고드는 높은 음성, 제 어깨를 흔드는 손의 감촉. 어둠의 심연 속을 헤매던 그녀는 그 소리를 쫓아 혼미하던 의식을 바로잡았다. 가늘게 뜬 눈에 잡힌 것은 걱정스러운 낯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는 시녀다.
그나마 이 집안에서 그녀를 손가락질하지 않는 유일한.
반쯤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를 제지한 시녀는 물기 묻은 수건으로 제 이마를 닦아 내리며 입술을 열었다.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으신데 빈속에 그리 약을 드셨으니 몸에 무리가 간 게지요.”
안도의 기색이 완연한 문장이었다. 마치 제 걱정을 하는 것처럼. 아직도 이 저택에 저를 염려하는 이가 남았던가. 왈칵 다시 터져 나오려는 눈물샘을 애써 내리누르고 있자, 물끄러미 이를 바라보던 시녀가 마저 말을 이었다.
“압니다. 이곳이 견디기 힘드시다는 거. 그렇다고 이리 몸을 험히 다루시면 쓰겠습니까. 마음을 굳건히 먹으셔야지요. 공녀님도 계시지 않으십니까.”
“나도 모르지 않아. 그런데…….”
기어코 참았던 물기가 다시 흐른다. 젖어드는 공간 속 다정한 속삭임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정 이곳에서 버티기 힘드시다면, 잠시 다른 곳이라도 다녀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다른 곳이라…… 이 제국에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던가.”
“……제가 듣기로 공작 부인은 본디 루트비아 영지 분이시라고. 그곳의 사람들은 백작과 그 딸은 어여삐 여긴다 들었습니다.”
루트비아 영지.
그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공작 부인의 눈에 이채가 감돌기 시작했다.
***
뻔뻔하기는.
조심스레 방문을 닫으며 나선 시녀의 낯에는 더는 온후한 기운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뿐인가 그녀는 침이라도 뱉을 기세로 문 너머의 여인에 있을 노려보기까지 한다. 대부인의 작태가 아주 우스운 것이다. 예상은 했다만, 어찌 인두겁을 두르고 저럴 수가 있던가. 제가 저지른 일은 하등 기억하지 못하는 게지. 친딸을 사생아로 만들고 심지어 그것이 들킬세라 사고를 위장하여 숨기려 한 부부. 그것도 모르고 그저 단아하고 우아한 부인이라 칭송을 했던 과거의 날들이 개탄스럽다. 저잣거리 촌극보다 더 황당무계한 일이 그녀가 적을 둔 저택에서 벌어졌다니.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시녀는 종종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했다.
“그래 어찌되었느냐.”
사내의 말에 시녀는 자세를 한껏 낮추고 오늘 있었던 일을 소상히 보고했다. 대부인이 기절한 것부터 시작하여 기어코 언급한 루트비아 영지까지.
“대부인의 반응은 어떠했지.”
조금은 충격을 받은 듯한 눈빛, 아연한 과거의 잔상에 머무른 것 같던 표정. 이를 찬찬히 되짚어 보던 시녀는 단호한 입매로 말했다.
“제법 반응이 좋았습니다.”
돌아오는 대가는 퍽 만족스럽다.
사내가 그녀를 향해 필히, 금화가 잔뜩 들었을 주머니를 내민 것이다. 시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공간을 가로지르는 손에 둘 사이에 놓여 있던 촛불이 가불거렸다. 동시에 공기의 변화를 따라 흔들리던 불빛이 음영 졌던 사내의 낯을 얼비춘다.
공작가의 대리인, 제레미였다.
***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잰걸음으로 사라지는 시녀의 인영을 물끄러미 보던 제레미는 두 팔을 하늘로 치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 사소한 동작에서 묻어 나온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흡족함이다.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 내실을 벗어나는 걸음걸이 역시 그러했다. 이번 일은 그들의 세력이 제법 공을 들인 사안이었다. 결코 틀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 별다른 탈 없이 성공적으로 시작된 계획에 제레미는 이에타 자작의 엄중한 음성을 떠올려 본다.
‘대부인을 루트비아 영지로 오게 만들어야 하네. 공녀는 제 가족에겐 끔찍한 법, 자연스레 뒤따를 터이니.’
제아무리 공작의 실종이 무기한으로 길어지고 끝내 사고사로 마무리된다 하더라도 공녀가 존재하는 한, 공작가는 온전히 그가 적을 두고 있는 신흥 세력의 것이라 볼 수 없다. 몇 년후, 그녀가 성년이 된다면 누구도 나무랄 수 없는 적법한 공작가의 후계자가 될 테니까. 혈통과 가문에 맹목적인 그녀는 뼛속 깊이 구귀족의 사람.
그러니 그 전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게 응당 마땅하지 않겠는가.
물론 가장 유용한 패가 대부인이라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었고. 문제는 그런 그녀를 적당히 유인할 대상을 찾는 것이었는데, 이는 보기보다 쉽지 않았다. 사교계는 물론 제국 전체가 대부인에게서 등을 돌린 상황이고 대부인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루트비아 백작 부부, 아니 한때는 르네타 남작 부부였던 이들이다.
‘무릇 고향이란 사람의 마음을 수런수런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장소 아닙니까. 게다가 루트비아 영지의 충성심은 여타 가문의 영지와는 비견할 수 없이 깊으니 대부인 역시 가문에 대한 기억이 나쁘지 않을 겁니다.’
당돌하게 눈빛과 함께 내보이던 백작 부인의 기세를 떠올리자, 제레미의 입술 사이로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참으로 천운 아닌가. 루트비아가의 직계가 사라지며 이를 물려받게 된 이가 그들과 같은 신흥 세력이라는 것도 그런 자가 제법 쓸 만한 머리를 가졌다는 것도 모두 말이야.
심상한 중얼거림과 함께 어느새 마차에 올라탄 제레미는 나직이 명을 내렸다.
“공작저로 간다.”
***
만찬이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저택에서 이루어지는 손님맞이인 데다가 좀체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대부인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소란하던 장내는 어느덧 규칙적인 식기소리와 함께 안정을 되찾았다.
제레미는 물잔을 들어 올리는 체하며 시야 귀퉁이로 오른편에 앉아 있는 대부인의 안색을 살폈다. 병자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핼쑥해진 얼굴이며 파리한 낯빛. 얼마 전, 혼절을 한 탓에 더욱 위태로워 보이는 분위기에는 그럼에도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미묘한 변화가 있다. 연신 맞은편에 마주 앉은 루트비아 백작 부부를 힐끔거린다는 것이다. 제레미는 그녀의 시선을 쫓아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식기를 쥔 그의 손이 허옇게 질린 것은 막 그의 눈이 루트비아 백작에게 닿았을 때였다. 백작은 불만스러움을 오롯이 내비치는 눈과 제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한껏 위로 올린 입꼬리가 모여 기괴한 표정을 지어내고 있었다.
저저, 한심한 치를 보라. 판을 다 깔아 주어도 저 모양이지.
깊은 한숨을 내어 쉰 그는 백작의 옆으로 조금 시선을 이동했다. 성녀도 버금갈 유순한 낯을 덧씌운 백작 부인이 그의 시선 끝에 있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자태로. 그뿐인가. 그녀는 자신의 눈길이 보내는 뜻을 알아채고는 제 남편의 안색을 고쳐 잡기까지 하지 않던가.
그나마 백작 부인이 있어 다행이지.
안도의 숨과 함께 제레미는 물잔을 들어 올려 목을 축였다. 그렇다. 대부인과 공녀를 루트비아 영지로 걸음하게끔 만드는 그들의 계획에 가장 큰 변수는 다름 아닌 백작이었는데, 문제는 그는 골수까지 신흥 귀족인지라 대부인이 과거에 벌인 해괴한 짓들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물론, 표정 하나 제대로 감추지 못하는 것은, 아니 감출 생각이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니, 그 여자가 자작 여식의 명예를 더럽힌 것을 정녕 잊으신 겝니까.’
이에타 자작도 두 손 두 발 들게 만들 정도로 괄괄한 성정의 사내인지라 그들이 희망을 걸어야 할 것은 백작 부인뿐이다.
제발 백작이 그저 판을 어그러트리지 않기를 바라며 잔을 내려놓은 제레미는 다시 한번 백작 부부를 바라본다. 백작 부인의 손길 안에 어느 정도 백작의 얼굴은 정돈된 상태였고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들을 맞은편에 앉은 대부인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자, 그럼 모든 준비는 끝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였다.
제레미가 백작 부인에게 짧은 눈신호를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식기 소리만이 가득한 만찬장에 다정한 음성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
모든 것은 완벽했다.
정말이지 아주 오랜만에 만찬에 참석한 대부인의 감성은 그것이었다. 풍미 가득한 음식들과 벽에 어룽거리는 따스한 조도의 불빛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위로해 주었던 건.
‘소문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과장되는 법이 많지요.’
‘언제 한번 저택을 방문해 주셔요. 가문의 사용인들은 전부 이전과 같답니다.’
온화한 백작 부인의 미소, 제 마음을 다독이는 다정한 속삭임.
다시금 떠올려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짙은 여운을 만끽하며 대부인은 베개맡에 파묻혔던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었다. 평소와 달리 그녀의 몸을 잠식하던 피로와 두통이 가신 탓이자. 두꺼운 휘장 틈으로 보이는 맑고 푸른 하늘과 정원 위로 고르게 내려앉은 볕을 느리게 배회하던 은안은 뒤늦게 제법 식욕도 돋아난다는 사실 역시 깨달았다.
하얗게 밤을 새우던 다른 날들과 달리 간밤에는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이 숙면을 취한 덕일까? 아니면 양광의 햇살처럼 따사롭기만 한 그 말씨 때문일까?
‘모두가 대부인을 염려한답니다. 헛된 말들이 여린 아가씨의 마음에 생채기를 낼까.’
만찬이 선사해 준 아름다운 기억들 속에서 대부인은 지난날 그녀의 왕국과도 다름없던 그곳을 지키며 저를 돌봐 주었던 가문의 사용인들을 떠올려 본다. 무정한 아버지와 달리 항시 따스하게 그녀를 감싸 주었던 헤센, 엄격한 가정부였지만 제게만은 관대했던 댈런, 늘 동생처럼 저를 따랐던 하녀장 이리나. 지나간 시절을 떠올리는 부인의 뺨은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입가에는 수줍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지난날의 과오를 모조리 잊은 그녀의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은 두 단어였다.
루트비아 영지.
어째서 진즉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신에 대한 책망과 함께.
항시 끝없는 안온으로 차오를 수 있는 그 공간 속을 헤매던 그녀를 끄집어낸 것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엄마?”
반쯤 열린 문 사이, 느리게 여닫히는 벽안에는 놀람과 불안이 혼재해 있었다. 우두커니 문을 지키고 있던 딸이 그제야 보여. 대부인은 눈매를 휘고는 딸에게 팔을 벌린다. 아주 오랫동안 입에 담지 않아 조금은 어색한 단어를 혀끝에 걸고.
세이.
무언가 이상한 듯 연신 쭈뼛쭈뼛 문가만 지키고 있던 딸아이는 그제야, 물기 젖은 목소리로 저를 부르며 달려 들어와 품에 안긴다.
“……이제 안 아파?”
“그래, 엄만 이제 안 아픈 것 같아.”
***
“바쁠실 텐데…… 죄송합니다.”
제레미는 괜찮다는 듯 까닥 고갯짓을 하며 벌써 몇 번이고 되풀이된 그녀의 변명과도 같은 인사에 화답해 주었다. 연신 찻잔만 들먹거리는 대부인이 입술을 열자, 이제야 본론이 나오겠구나 했던 생각이 무색하게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흐른 문장들은 예의 또 그 말이었다.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그리 제 바쁜 일정이 걱정되었으면, 그저 본론부터 꺼내면 될 것을. 이 짧고 간단한 대화에마저도 이리 허례허식을 따지니. 구귀족들이란. 그렇게 대부인이 길고 긴 뜸을 끝내고 본론을 꺼낸 것은 찻물이 식고 시종이 세 번째 다시 차를 내올 즘, 제레미가 그들의 겉치레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을 때였다.
“당분간…… 당분간 루트비아 저택에 머물 생각입니다.”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온 기회의 순간에 제레미의 눈에 일순 번뜩였다. 기대감으로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간신히 내리누른 그는 침착하게 입술을 열었다. 부러, 날카로운 어투를 흉내 내며.
“……연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대부인의 눈시울이 파르르 떨린다. 제 입지가 이런 말을 꺼낼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한 듯했다.
기실, 그가 대리인으로 지명받았을 때 가문의 원로들 내부에서 대부인을 축출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는 것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공녀의 연배를 고려해 자비를 베풀었다는 것 역시, 물론, 그것에는 다른 속내가 있긴 했지만 대외적으로 그러했지.
“여기선 도저히…… 숨 쉴 수가 없어요.”
잘게 떨리는 입술 사이로 토해져 나오는 여린 낱말들은 정녕 눈앞의 여인이 자식을 방패 삼아 삶을 영위한 이가 맞는가, 의심케 할 정도로 순하디순하다.
“자꾸만 떠올라.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이…….”
과연 아올리스의 모두를 속인 여인답구나. 제레미는 그런 심상한 상념과 함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무심히 말했다.
“……허면, 공녀는요.”
“내가…… 내가 많이 부족한 엄마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흐려진 말끝에는 긍정의 뜻이 담겨 있다.
소서 위로 세게 찻잔을 내려놓은 제레미는 단칼에 그녀의 말허리를 잘라먹었다.
“불가합니다.”
찻잔과 소서가 맞부딪치며 일으키는 맑은 울림 사이로 단호한 부정의 문장이 흘러 들어가자, 대부인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터져 나온다. 이를 무심히 지켜보며 그는 시종에게 눈짓한다. 대부인을 돌려보내라는 뜻이 그 작은 몸짓에 담겨 있었다.
‘당분간…… 당분간 루트비아 저택에 머물 생각입니다.’
고대하고 고대한 문장이었다.
몸이 달을 만큼 말이다. 허나, 그리 쉬이 허락할 수 없지. 아니 어차피 그가 허한다 해도 결국 물러질 일이다. 그 여자의 손에.
올레나.
코르푸의 위원장이자, 브린튼가의 가주인 그녀는 최근 공녀의 보모까지 자처하고 있었다. 뭐, 티케 사냥꾼이 지천에 깔린 지금, 또 그들의 우두머리인 아몬과 단단히 척을 진 공녀의 상황을 감안하면 당연한 행보이긴 했다만. 항시 도끼눈을 뜨고 공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그녀 덕에 여간 골머리를 앓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제레미가 할 수 있는 건 이 대답뿐이었다.
“공녀를 노리는 이들이 아직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부인.”
숨이 넘어갈 듯 꺽꺽대는 여자를 향해 제레미는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문장을 내놓는다. 아무래도 더 몸이 달게 만드는 게 좋겠지. 그래야 그 애가 움직일 테니까.
***
완성됐다.
하얗게 부서지는 오전의 햇살이 시야를 흐르게 하는 시각, 평소와 달리 침상이 아닌 꽃이 만발한 정원에 자리한 공녀는 제 손으로 만든 화환을 이리저리 살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여물어 가는 빛줄기를 따라 더욱 뚜렷해지는 꽃들의 조합은 한눈에 봐도 엉성한 손길이 얼기설기 엮어 내렸다는 것을 여실히 내비치고 있었고 그 백미는 단연 조화롭지 못한 색감이었다. 공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턱을 괴였다. 미풍에 팔랑거리는 꽃잎들이 잔뜩 찌푸려진 공녀의 콧잔등이를 간질거렸다.
좋아하실까?
깜빡거리는 속눈썹 사이로 드러난 벽안은 자신 없는 기색이 다분했다. 한층 짙어진 꽃향기가 각기 다 저마다의 내음을 뿜어내 골이 지끈거릴 정도가 되자 더욱 그러했고. 그렇게 가라앉던 기분이 금세 회복된 것은 기억 속의 소리가 선명해질 즘이었다.
‘그래, 엄만 이제 안 아픈 것 같아.’
다정하고 다정한 울림. 이토록 이른 아침 그녀를 깨우고 풍요로운 하루의 시작을 만들어 주었던 어머니의 음성 앞에 처진 공녀의 어깨가 조금 솟아오른다.
요즘 들어 어머니가 변했다. 아니, 예전처럼 돌아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파리했던 입술에는 혈색이 돌고 두 뺨은 생기롭게 피어올랐다. 이불 속에 파묻혔던 몸을 일으키고 캄캄했던 내실을 가리던 휘장을 거두어들이며. 환하게 쏟아져 내리는 볕을 받은 어머니의 낯은 공녀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얼굴이었다.
그것을 상기하자, 가슴 한편을 짓눌렀던 물음은 서서히 확신으로 변모한다.
좋아하실 거야.
그래, 좋아하실 거야.
치솟는 문장과 함께 공녀는 저택으로 보폭을 넓혔다. 종종걸음 치는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 그림자가 기다랗게 늘어졌다.
“엄마?”
놓칠 뻔한 화환을 가까스로 움켜쥔 공녀의 입술을 타고 내실에 스며든 건 아연한 음성이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간의 적막을 흔든 높은 목소리는 방의 주인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 없고 메아리처럼 되울리는 제 목소리가 고요한 사위 속 유일하다는 걸 알아차린 공녀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몇 번 동공을 여닫아도 미동도 없이 침상을 지키는 어머니의 등으로 가득 찬 풍경은 변함이 없다. 피어오른 웃음 대신 저를 맞이하는 여린 등을 응시하며 입술을 짓누르던 공녀는 공간을 가로질러 어머니에게로 가까이 다가간다. 발걸음에는 묻어 나는 초조함은 그리하면 뭐가 달라질 거는 한 가닥 희망을 놓지 못한 이의 것과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빛을 잃은 어머니의 모습만이 선명해지자, 허망해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공녀는 기어코 손끝에 걸려 있던 화환을 떨어트리고야 말았다.
다 괜찮아진 줄 알았다.
밝고 따스한 한 줄기 햇살처럼 온기 가득한 음성,
‘세이.’
제 귓가를 간질이는 다정한 말씨.
‘그래, 엄만 이제 안 아픈 것 같아.’
그날의 따스함, 그날의 다정함. 모든 게 다시 돌아왔다고 여겼어.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신기루였던 것처럼 사라지고 남은 것은 숨을 턱 막히게 하는 적막과 그 세계에 홀로 된 자신.
도대체 왜. 뭐 때문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깊고 깊은 심연에 어머니가 잠긴 것을 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그러해. 심장이 찢겨 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화인 같은 상처고 그곳에서 배어 난 아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테다.
하지만,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 있잖아. 그녀와 어머니. 모두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고 아직 끝난 것 또한 아니잖아. 헌데 왜 다들 그냥 포기해 버리고 마는 거야. 아무 노력도 없이 더는 함께할 수 없는 것처럼 구는 거야.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듯 행동하는 거야.
‘같은 피가 흐른다고 모두 가족이 되는 건 아니야, 세이.’
끝을 선언하는 문장들. 사방에서 쏟아지는 무력감. 공녀는 그것들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격양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굳어 있는 어머니를 흔든다. 세차게 움직이는 손길에 발밑에 떨어진 화환이 짓뭉개지고 찢긴 꽃잎들이 바닥 위로 나부껴. 여전히 앞에 누운 이에게 닿지 않는 그 소리가 농도 짙은 내실의 공간 속으로 흩어지면서.
***
“마차를 내와. 나와 어머니는 루트비아저로 갈 거다.”
저택이 떠나갈 정도로 쩌렁한 음성이 제레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는 대답 대신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 채 제 방에 들이닥친 불청객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실에 들어서자마자 본론을 꺼내는 공녀의 모습에서 도저히 얼마 전 이곳에서 눈물을 쏟아 내던 그 여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탓이다.
누가 둘을 모녀로 여길까.
매섭게 치켜뜬 눈매며 깊은 심해처럼 푸르디푸른 눈, 무르익은 벼 이삭처럼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금발까지. 어디 하나 모자람 없이 완벽하게 베르니가의 흔적들로 가득한 외양뿐 아니라 그 성정까지도. 얼마 전 이곳을 찾은 대부인이 본론을 꺼내기까지 걸렸던 그 길고 긴 시간들을 떠올리자 그 생각은 더욱 배가 되었다. 그러니 이번 대화는 여러모로 한결 수월하게 끝나겠구나 하는 생각 역시.
“불가합니다, 공녀님. 공녀님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자들이 아직 도처에 깔려 있다는 것을 잊으신 겐가요.”
“내가 내 발로 간다고 하는데 감히 누가 막는다는 게지!”
성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바닥을 때리는 발, 내실에 가득 차오르는 격양된 호흡. 공작가의 공녀라는 작위와 어울리지 않는 동작들은 찰나의 희망을 한 번 맛본 이들이 손에 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작태와 닮았다. 그녀가 놓치고 싶어 하지 않은 게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대부인.
루트비아 백작 부부를 만나고 나서 대부인의 상태가 꽤나 호전되었다는 것을 안다. 뭣 모르는 그에게까지 느껴지는 변화였지. 삶의 의기를 모조리 잃은 채 산송장처럼 있던 여자가 식사를 하고 산책을 했다. 공녀의 기대가 컸을 거야.
‘불가합니다.’
끝내 그 문장 앞에 짓밟히고 말았지만.
안개를 머금은 듯 묽어진 은안, 공간에 차오르던 얕은 울음소리. 기어코 다시 절망에 빠지고 만 여인.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은 지금을 위한 것이다. 제레미는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오늘 이 순간만을 위해 삭이고 삭였던 문장이 그의 잇새에서 흘러나왔다.
“제가 마차를 내어 준다 해도 다른 이들은 결단코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누가! 도대체 누가 그런단 말인가!”
올레나.
나직한 제레미의 목소리가 공녀의 일렁거리는 벽안 위로 고요히 내려앉았다.
***
“공녀님!”
반쯤 열린 응접실 문틈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소리는 높았다. 예상치 못한 소음에 내실에 자리 잡고 있던 공녀가 당황한 낯을 갈무리하는 사이,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정돈되지 못한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올레나가 안으로 들어섰다. 단정하고 맵시 좋던 평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차림새였다.
“무슨 일이 있으신 겝니까.”
마치 저를 염려하는 듯한 가증스러운 작태에 혼란은 사라지고 공녀의 푸른 눈에는 불티가 인다. 공녀가 시종에게 명령을 내려 올레나를 부른 건 반나절 전이었다. 정확히는 제레미의 입술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온 직후.
올레나.
공녀는 제 발아래로 떨어진, 지나치게 친숙한 낱말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언니가 사라지고 난 뒤 사사건건 그녀의 행보를 방해하는, 코르푸의 늙은 여우.
‘저도 자세히 내막을 알지는 못하나…….’
루트비아 백작 부부와의 교류로 안정을 되찾았던 어머니는 그곳으로 향하고 싶다는 바람이 꺾이자 큰 실의에 빠졌다, 말끝을 흐리는 시녀를 한참이고 닦달해 내 알게 된 사실 앞에 공녀는 이 모든 게 다 제레미의 계략인 줄 알았다. 그는 언제라도 저와 어머니를 떼어 내고 싶어 했고 그 눈은 항시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으니까. 그래서 곧바로 제레미를 찾아갔지.
‘올레나 위원장입니다.’
헌데, 이 여자 때문이었구나.
올레나. 올레나.
이번에도 그녀를 가로막았던 것은 그래, 또 그 이름이었던 것이다.
‘위험합니다, 공녀님. 아직 아올리스에 아몬이 머물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소서.’
‘안 됩니다, 공녀님. 아직 티케 사냥꾼들이 항시 공작저를 주시하고 있다 합니다.’
어째서 제 어미도, 아비도 아닌 자가 저를 제 맘대로 부리려 드는 것인가. 이제는 지긋지긋해지고 만 낱말 앞에 공녀의 푸른 눈에는 불티가 일었고 호흡은 거칠어졌다.
“나와 어머니는 루트비아저로 갈 거야.”
“예?”
돌아가는 상황이 어찌 되는 건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는 것처럼 올레나는 느리게 동공을 여닫는다. 그 모습을 보자, 심중에 돋아나던 분노가 더욱 곱절이 된다. 공녀는 광폭해진 눈을 들어 올려 위악을 떠는 여자를 향해 성난 낱말들을 토해 냈다.
“그렇게 알아 둬! 이번에도 날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허나, 공녀님을 노리는 이들이 아직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티케 사냥꾼들 역시. 게다가 루트비아 백작은 신흥 세력, 그자들이 공녀님을 몰아내기 위한 틈을 노리고 있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레미 역시 마찬가지잖아요!”
“……루트비아 저택은 수도와 너무 떨어져 있어요.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저희가 손을 쓰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영지는 광활하여 공녀님을 보호하는 것도 쉽지 않고요. 공녀님, 티케 사냥꾼이, 아몬이 아직 이 땅에 있습니다. 그자는 절대 공녀님을, 저를 배신한 공작님께 각인한 티케를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
“난 그자를 무찔렀어. 또 아몬이 나타난다면 그자의 남은 눈 한쪽도 앗아갈 것이야.”
말이 통하지 않아.
시종일관 벽창호같이 고집스러운 자세로 일관하는 공녀의 태도에 올레나는 말문이 막혔다. 더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벌써 수를 쓴 것인가.
불안불안하기 시작했던 것은 공작저에서 루트비아 백작 부부를 초청하여 만찬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부터였다. 공작가의 대리인과 루트비아 백작 부부. 이름만 들어도 왜인지 심중에 섬뜩하게 돋아나던 불길함은 그 자리에 대부인까지 합세했다는 얘기를 듣자 더욱 거세졌다. 단 한 번도 저를 만나고자 하는 뜻을 내비친 적 없는 공녀가, 매사 그녀의 말이면 시큰둥한 표정만 지어 보이던 그녀가 갑작스레 그녀에게 전령을 보내자 매무새를 가다듬을 새도 없이 한달음에 저택으로 향한 것은 그 탓이다.
그런데 역시나 예감은 틀리지 않았구나. 기어코 그들이 움직인 것이야.
신흥 귀족과 구 귀족, 둘 사이의 견고한 중심이 되어 줄 아델리아 공작이 사라지고 그 시기가 길어지고 공작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사그라든 자리에 찾아온 것은 베르니 가문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두 세력의 줄다리기. 신흥 세력이 내놓은 인물은 단연, 베르니가의 방계이자 저택의 대리인인 제레미 이드왈치였고 구귀족이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은 공녀다. 순리와 적법성을 제외하고도 여러모로 유리한 쪽은 단연 공녀였지만, 그들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시간과 티케 사냥꾼.
성년이 되지 못한 공녀. 그리고 그런 공녀에 대한 깊숙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아몬. 그렇지 않아도 티케 사냥꾼에 대해 우호적인 신흥 세력이 그들과의 결탁에 더욱 속도를 낸 것은 아마 그것 때문이겠지. 올레나는 정계에는 깊은 뜻도 관심도 없었으나, 이번 싸움의 승리가 신흥 세력에게로 돌아간다면 티케 사냥꾼이 아올리스에 활보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다. 해서 공작저의 수비를 강화하고 이를 대비하고 대비하는 데 만전을 기하고 있다 여겼으나, 물밑 속에서 이루어지던 신흥 세력의 반란은 조용하고도 신속하게 공녀를 잠식한 듯했다.
옅은 한숨을 내어 쉰 올레나는 여전히 노기가 가득 서린 벽안을 바라본다.
높은 확률로 공작이 될 공녀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깊은 근심이 어리어 있다. 비단, 이런 얕은수에 넘어간 공녀에 대한 질책은 아니었다. 공녀는 다망한 일을 겪었고 아직 연배 역시 어리니 이런 일쯤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도 기대했던 것보다 강인하게 상황을 헤쳐 나가고 있어. 자기주장이 강하고 확고한 성정 역시 세월이 잘 다듬어진다면 훌륭한 장점이 될 것이다. 허나, 진짜 문제는…….
공녀는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아.
제 핏줄에 한없이 관대한 그녀는 반대로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한 자락의 마음도 쉬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녀를 염려하는 그 어떤 마음도 믿지 않으면서. 그 마음이 진실하면 진실할수록 더더욱 그러하지. 제레미의 이간질에 쉬이 넘어간 까닭도 아마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그녀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것일 테다. 아마 원체 어릴 때부터 고립된 생활을 이어 왔던 것과 본래의 기질이 만들어 낸 결핍일 테지만, 큰일이구나. 이같이 위태로운 정국에…….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앞날은 가늠할 수 없어.
수런수런해진 마음을 갈무리하지 못한 올레나는 이 난국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을 떠올려 본다. 올레나 자신이 공녀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조금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그 방책을. 생각보다 빠르게 공녀에게 백기를 들고 만 것은 어쩌면 그 선상에 있겠지. 이미 상황을 돌이키기엔 늦었고 단단하게 닫힌 공녀의 마음의 빗장을 푸는 것이 우선 급선무이니.
“알겠습니다, 마차를 준비하지요.”
그녀의 잇새 사이로 흘러나온 문장이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 사이로 스며들었다.
여명의 빛살이 가도를 물들이는 새벽, 끝없이 이어지는 푸른 행렬이 수도 중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엄청난 수의 니벨론 기사단이 호위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공작저의 마차. 원체 진귀한 광경인지라 꽤 이른 시간임에도 길가에 나와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치들은 적지 않았다. 그런 구경꾼들의 시선이 하나둘 딱딱하게 굳은 것은 너울거리는 마차 커튼 사이로 또렷하게 보이는, 충만함이 가득한 은안을 발견한 직후였다.
***
산책을 하고. 조찬을 갖고.
오늘도 변함없이 이어지는 오전의 일정을 간략히 마무리한 루트비아 백작은 당연한 수순처럼 보폭을 넓혀 집무실로 향했다. 잠시 후, 영지 일을 논의하기 위해 관리인들이 오기로 했고 그 이후에는 최근 아올리스의 정세를 담은 보좌관의 보고서를 확인해야 할 터였다.
또 보자 뭐가 있을까…….
그렇게 중얼거리던 백작의 걸음이 멈춘 것은 그가 막 집무실로 발을 디뎠을 때였다.
오늘도 글렀구나.
신랄한 중얼거림과 함께 잔뜩 찌푸린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수북이 신들이 쌓인 테이블 위였다. 백작이 타계하고 방계 가문이었던 그가 가문을 잇게 된 지 어연 몇 년.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 잡아 소요할 일 없는 그의 나날들에 얼마 전부터 찾아온 변수를 바라보는 낯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수북이 쌓인 서신들 통에 업무를 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 원인은 너무나도 분명했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이루어졌던 그들의 계획 때문이겠지.
공작가의 대부인과 공녀가 루트비아저로 향한다.
이목을 끌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엄청난 수의 니벨론 기사단을 몰고서. 장안을 휩쓴 그 소식 덕에 그들과 친분이 있는 여러 가문들에서 진위를 알기 위해 서신들을 보내오고 있었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백작은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탑처럼 쌓여 있는 서신들 옆에 널브러져 있는 서신 하나에 손을 가져갔다. 차창으로 스며드는 빛줄기에 서신 겉봉에 찍혀 있는 공작가의 인장이 도드라졌다.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대부인은 저택을 방문하다는 서신을 보낸 직후, 곧장 마차에 올라탔다지.
생각이 아무리 짧다기로서니와, 하기사 그러니 그런 짓을 벌였겠지.
여전히 믿기지 않는, 아직도 그에게 짙은 여운을 남긴 채 사라지지 않은 파란 때문에. 백작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 일을 회상해 보자 손에 쥔 서신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의 손아귀에 바스라지는 종이소리가 적막한 공간 속으로 스며들었다.
공작가의 적장녀.
당시에 그들의 저택에 쏟아졌던 서신이 얼마던가. 그때와 비견해 본다면 지금 서신의 양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온종일 시종들이 그의 집무실로 서신을 나르기 바빴지.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준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인두겁을 두르고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던가.
정의와 신망.
기반도 처지도 다르지만, 그는 루트비아 백작으로서 제게 주어진 신념을 받들고 있었다. 나름 자긍심도 있고. 모든 일이 한결 손쉽게 처리되었으니 대부인의 행보에 반색을 표해야 하건만, 백작은 구겨진 낯은 펴질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빌어먹을, 그런 파렴치한 여자가 한때 이 가문의 영애였다는 것도 분통이 터질 지경인데 그것도 모자라 당분간 제 집에서 생활해야 한다니. 다시 한번 악에 받친 욕설을 내뱉은 그는 서신들로 가득해 도무지 집무실이라고 보이지 않는 내실 그만 일별하고는 복도로 나섰다. 아침부터 그 여자와 그 여자가 벌인 말도 안 되는 일을 떠올려 심사가 뒤틀렸으니 술이라도 한잔 해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스산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온 건 그때다.
“곧 있으면 도착하겠군요.”
소리를 쫓아 시선을 돌리자, 내실을 압도하는 거구의 사내가 서슬 퍼런 눈으로 그의 손에 들린 서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한배를 탔다고 해도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족속들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구릿빛 피부와 안대를 무심히 바라보던 백작이 일순 얼어붙은 것은 서슬 퍼런 기세의 자안과 시선이 얽혔을 즘이었다.
숨 막히는 밀도를 전해 오는 눈길에 하마터면 떨어트릴 뻔한 서신을 꾹 움켜쥔 그는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렇네, 큰 이변이 없다면 아마 내일쯤 도착할 걸세.”
평소보다 높은 음색은 애써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전 잠시 이곳을 떠나 있지요. 무슨 일이 있으면 필히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알겠네.”
한 바퀴 방의 전경을 느릿하게 훑어 내린 아몬은 다시 한번 그의 손에 들린 서신을 굶주린 맹수처럼 형형한 눈빛으로 응시하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무게감이 잔뜩 실린 걸음걸이가 복도를 지나 이내 사그라들자, 백작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 냈었다.
역시나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살기였다.
***
대부인이 도망치듯 수도를 떠났다.
푸릇하게 피어오르는 고원과 빼곡한 수목으로 가득한 가도. 마차 차창 밖으로 펼쳐진 익숙한 고향의 풍경을 바라보며 한껏 기대감으로 부풀어 오르던 대부인의 눈은 내일이면 또 한 번 사교계를 뒤흔들 가십을 떠올리자, 심란하게 흔들렸다. 지금껏 그녀에게 달린 수많은 꼬리표를 감안하건대 그리 우호적인 반응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더더욱.
세상은 왜 이리 그녀에게 가혹한 것일까.
깊은 한숨과 함께 대부인의 혀끝에 맴도는 물음은 그것이다. 왜 그는 하필 가정이 있는 사람을 마음에 품고 살얼음판 가는 길을 택한 것일까. 빗발치는 서신들과 죽은 남편을 대신해 오로지 자신에게 쏟아지는 칼날 같은 말들, 아무것도 몰랐다는 외침은 통하지도 않는 서늘한 눈빛들. 그 모든 것들은 어째서 저 혼자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을 따라 자신을 향한 연민이 깊어지고 딱 그만큼 루트비아 저택을 향한 갈망은 짙어진다.
풍미 가득한 음식들과 벽에 어룽거리는 따스한 조도의 불빛들. 그녀를 위로해 주던 온화한 백작 부인의 미소, 제 마음을 다독이는 다정한 속삭임.
‘소문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과장되는 법이 많지요.’
‘언제 한 번 저택을 방문해 주셔요. 가문의 사용인들은 전부 이전과 같답니다.’
잊고 있던 기억을 상기시켜 준 그날의 만찬은 사방에서 떨어지는 비난에도 여전히 저를 믿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되새겨 주었다. 집사 헤센과 가정부 댈런, 그리고 하녀장 이리나. 어린 시절부터 늘 변함없는 채로 제게 향했던 그 따스한 눈빛들을 상기시키자, 움츠러든 대부인의 어깨가 조금 펴진다. 희미하게 그녀를 감싸 오던 불안을 사그라트리고 근거 없는 확신으로 그 자리를 메꾸면서.
다 이해해 줄 거야.
이미 루트비아 백작에게는 서신을 써 둔 상태였고 그 역시 흔쾌히 저택에 머무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래, 그러니 모든 게 다 괜찮을 거야.
저 멀리 지는 낙조가 어리어 빛무리 진 저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대부인이 그 안온함 속에서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을 때였다. 서서히 벅차오르는 감정이 떠오르는 은안 위로 낯익은 저택의 모습이 상을 맺었다. 그녀의 왕국이나 다름없었던 루트비아가의 저택이.
변했다.
그렇게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기묘하게 달라진 저택의 공기가 스산한 밤바람처럼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대부인은 자꾸만 손안에서 미끄러지려는 식기를 바로잡았다.
우아하고 침착하게.
첫 사교계 데뷔, 미뉴에트에 발이 엉켜 그만 파트너의 발을 밟을 뻔했던 그 순간처럼 주문과도 같은 문장을 되뇐 대부인은 타들어 가는 목을 물로 채우며 매무새를 바로 했다. 사교계를 주름잡는 대부인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갓 예절을 익힌 소녀 같은 모습은 죽어도 보일 수 없다.
우아하고 침착하게.
그녀의 손 밖으로 미끄러지려던 나이프를 이번에도 간신히 붙잡은 그녀는 다시 한번 물잔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잔이 이미 비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잔웃음소리가 얼핏 귓가에 스쳤을 즘이다. 뺨이 후끈거리고 귓가는 붉게 달아올라. 은촛대 위에서 흘러나온 불빛에 텅 비어 버린 잔이 훤히 드러났지만, 누구 하나 다가와 잔을 채워 주는 이는 없자 대부인의 마음은 더욱 홧홧해졌다. 그럼에도 꽤 질기게 침착함을 유지하던 그녀가 일순 얼어붙은 것은 맞은편 벽에 식사를 돕기 위해 서 있던 시종 하나와 눈이 마주친 직후였다. 경멸과 멸시가 혼재한 서늘한 눈과. 기어코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 나이프가 숨 막히는 정적 속으로 스며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부인?”
유려한 동작으로 시종에게 새 식기를 가져오라 지시한 백작 부인은 다정한 음성을 그녀에게 건넸다. 식당이 떠나가라 울려 퍼지던 식기와 쇠붙이가 맞부딪치는 소리에도 꿈쩍 않던 사용인들이 그제야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는 광경을 보며 대부인은 잔떨림이 남아 있는 두 손을 맞잡았다.
“……난…… 난 괜찮아요.”
애써 갈무리한 낯을 들어 보인 대부인은 가늘게 떨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뇌리에 떠나지 않는 시종의 표정을 지워 내렸다.
신경 쓰지 마, 고작 시종 하나일 뿐이잖아.
그런 생각과 달리 얼마 지나지 않아, 슬며시 눈은 올라가고 저도 모르게 다시금 그 잊히지 않는 눈빛을 보낸 이를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식당을 한 바퀴 구르던 눈이 허망하게 아래로 굴러떨어진 건 그 눈의 주인을 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즘이다. 모두가 그녀를 그렇게 보고 있었으니까. 그제야 그녀는 받아들였다.
그날은 사라졌고 이 제국에서 그녀가 발 디딜 곳은 남아 있지 않다는 걸.
***
루트비아 백작 부인은 넋이 나가 있는 듯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희고 말간 얼굴. 그동안 모두가 깜빡 속았다는 게 조금은 이해가 갈 정도로 순하디순한 낯이었다.
그래도 천치는 아닌가 보지.
처음 대부인이 제 저택을 방문해도 되겠냐는, 넌지시 도움을 청한 서신을 받고 백작은 그만 공작 부인이 실성을 했나 싶었다. 아무렴 지금 저 여자가 제국 내에 발붙일 곳 하나 없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만, 이리 쉽게, 그저 만찬 한 번으로 루트비아 영지에 발을 디딜 생각을 하다니…….
이곳 분위기가 어떤지 전혀 짐작도 못 하는 겐가.
그 아둔함을 뻔뻔하다 해야 할지 아니면 순진하다 해야 할지.
루트비아 영지민들은 그녀를 사랑했다.
자신들을 모자람 없이 대하던 백작을, 그의 아름답고 또 고귀한 여식을. 세상 물정 모르는 귀여운 아가씨라 그리 여기며.
몇십 년 전, 루트비아가에 나타난 사생아를 딱 그만큼 박대했겠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그 어린아이에게 돌을 던질 정도로. 그렇게 뜨겁게 타올랐던 루트비아가에 대한 영지민들의 마음이 기실, 무자비할 정도로 깊은 애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저 어리석은 대부인은 알까. 그 마음이 이젠 그녀에게 어마어마한 파도가 되어 되돌아올 거라는 건?
심상한 상념과 함께 턱을 괸 백작 부인은 천천히 눈을 돌려 한쪽 벽면에 자리 잡은 유리 창문을 응시했다. 곧, 폭풍이라도 몰아칠 것 같은 먹구름이 자욱하게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마치 이곳, 루트비아의 영지민들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보겠어요.”
하긴.
그게 무엇이 중하던가. 어차피 그녀에게 중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
백작 부인은 그저 이 판에서 적당한 관심과 다정함을 빙자해 제가 얻을 것을 얻으면 그뿐일 텐데. 백작 부인의 눈은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초점 풀린 눈으로 대부인의 손에 이끌려 자리를 나서는 공녀를 응시해 본다. 여전히 심해처럼 짙푸른 벽안은 부정할 수도 없는 공작가의 핏줄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살피던 그녀는 한참 후에야 시선을 대부인에게 돌려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그러시죠, 부인.”
그린 듯한 웃음과 함께 흘러나온 문장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다.
***
“더는 꼴도 보기 싫어. 기필코 쫓아내고야 말겠어!”
남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며칠째 되풀이되는 아침의 시작이었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소일거리 삼아 코를 뜨고 있던 백작 부인은 그 기세 좋은 외침에 흔들리는 남편의 콧수염을 바라보다 이내 눈을 들어 올렸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남편은 산 등허리에 걸린 해보다 더욱 붉어진 채였다.
“저 여자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잖아. 온갖 가문들에게서 서신이 쏟아져서 영지 일을 보기도 힘들 지경이라고.”
대부인을 입에 올린 남편은 끔찍한 기억이라도 떠오른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지.”
저 여자와 말 한 번 섞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얼마 전과는 아주 딴판인 모양새에 그녀가 혀를 끌끌 차고 있자, 어깻숨을 들썩이며 백작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하루아침에 성녀에서 요물이 된 여자에 대한 온갖 비난이 그 입술에서 터져 나왔다. 신흥 세력을 이끌며 수장으로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에타 자작도 제 남편에게 두 손 두 발 다 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백작, 만약 대부인이 이 저택에 머문다면 최대한 사용인들의 동요를 자제시켜야 할걸세. 그녀가 이곳에서 안정을 취하고 틈을 보일 때가 우리가 쫓는 가장 절호의 기회일 테니까.’
뭐 하나 틀린 구석 없는 자작의 말을 단박에 무시한 남편은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까지 했지. 남작이 그저 그런 그의 무례를 진솔함으로 봐주는 아량을 베푼 게 천만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큰 곤욕을 치를 뻔하지 않았던가. 거기다 덕분에 그녀가 해야 될 일이 배로 늘기도 했고. 온 저택 식구들이 대부인을 달래 준다면 그녀가 이곳에 머무는 기간은 길어지고 계획을 이행할 수 있을 시간이 넉넉했을 게 아닌가.
뭐, 최근 사용인들의 눈빛들을 보니 대부인에게 친절히 대하라는 명을 따랐을 위인은 아무도 없어 보이긴 했다만.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외려 놀란 것은 백작 부인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몇십 년이 되도 죽질 않는 남편의 성질머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을 그녀가 며칠간 그저 묵묵히 그 말을 받아 내 주었던 것도 어쩌면 그 탓이다. 대부인이 저택에 머물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가정부 댈런이 저를 찾아와 정중히 말을 할 정도였으니.
‘마님, 대부인이 더 이곳에 머무는 게 과연 마님께 이로운 것인지 염려가 됩니다.’
이 저택에 온 뒤로 항시 전대 백작, 그 여식인 대부인과 저희들을 비교하며 무언의 업신여김을 보내던 가정부가 내놓은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어찌나 백작 부인이 당혹스러웠는지 눈앞에 있는 이가 댈런이 맞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공작가의 적장녀. 세간을 놀라게 한 추문이 사실임을 밝혀졌을 때도 침착하기만 했던 그녀 아니던가.
루트비아 영지민들은 그녀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백작 부인은 비로소 절대 진리라 여겼던 그 사실을 정정했다.
루트비아 영지민들은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자 백작 부인의 낯에 떠올랐던 근심이 점차 희미해진다. 어쩌면 그들의 계획이 조금 더 일찍 실체화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 것이다.
“여보,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노크소리가 내실을 흔든 건 잔잔한 그녀의 음성에 백작의 노기가 더욱 돋아날 무렵이었다.
“그 여자를 잡아!”
다급히 방으로 들이닥친 시종의 보고에 따라 복도의 창가로 향한 백작 부부는 창밖에 펼쳐진 광경에 그저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의 이슬을 맞으며 그들의 저택으로 행진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그들의 영지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타 자작이 말한 계획이라는 게 이런 거요, 부인.”
당시, 격분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자작의 응접실을 박차고 나온 그는 미처 그가 계획하던 일들의 전말을 듣지 못했다. 물론, 그 이후 부인에게 그 임무가 무엇인지 물어 알 수도 있었으나, 구태여 그러고 싶지 않은 까닭이 그가 여태껏 자신들의 계획이 무엇인지 모르는 데 한몫하기도 했고. 알아보았자 마음만 심란할 뿐이지, 그런 상념과 함께.
돌아오는 답이 없자 백작은 눈을 돌렸다. 낫과 죽창, 저마다 벼린 농작기구를 하나씩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서는 저택의 문을 부술 듯이 솟구치는 영지민들을 바라보는 부인의 낯에는 저와 마찬가지로 당혹감이 깃들어 있었다.
“부인?”
백작이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부인을 다시 한번 부르자, 그제야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부인이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건 자작의 계획이 아니에요.”
공간으로 흘러 들어가는 음성은 침착했으나, 그 끝에는 미미한 떨림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그랬다. 그들의 계획은 지금 저택 앞에 들이닥친 성난 영지민들이라는 변수보다는 조금 더 순하고 평화로운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럼, 일단 대부인과 공녀를 빨리 피신시키겠소.”
쳐죽여도 모자랄 여자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정말 쳐죽일 정도로 잔혹한 성정은 되지 못한 백작은 그 말과 함께 시종을 불렀다. 긴 적막을 깨고 백작 부인이 입술을 연 건 그의 부름을 받고 막 시종이 가까이 다가왔을 즘이었다.
“대부인만…… 대부인만 일단 피신시켜야 합니다.”
계획과 달리 일이 틀어지긴 했지만, 이것은 그들에게 유리한 변수다. 어쩌면 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성난 군중들의 모습. 투명한 햇살을 받아 더욱 도드라지는 분노로 가득 차오른 그들의 눈빛에 백작 부인의 눈에는 희미한 기대가 떠오른다. 누군가가 던진 돌에 유리창들이 하나둘 쨍강대며 깨지자 더욱 그러했다.
“그래야 해요.”
“뭐? 하지만…….”
사용인들의 비명소리, 깨진 창틈으로 들려오는 분노한 자들의 고함소리. 백작 부인은 공기를 찢는 소음들 속에 여전히 얼떨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남편의 팔에 손을 얹으며 침착히 상황을 지휘했다.
“꼭 그리해 주세요, 대부인만입니다.”
대부인.
백작 부인의 잇새로 새어 나온 그 이름이 또 한 번 유리창이 깨지며 터져 나오는 파열음과 뒤섞여 융단 위로 굴러떨어졌다.
***
또 잠을 설쳤다.
벌써 며칠째 반복되는 기이한 악몽의 잔상 속을 헤매던 나는 이만 잠을 청하질 포기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피로에 물든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동공을 여닫자, 익숙한 풍경들이 선연해진다. 별보라가 수놓아진 밤의 하늘, 나뭇가지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 잎사귀 사이로 서서히 들이치기 시작하는 여명의 빛깔. 그리고 수만 년 동안 석회암이 비바람에 씻겨 만들어 낸 기암괴석들이 자아낸 비경.
아미타 숲.
즉위식과 마차 사고. 사라질 준비를 끝마친 나를 아타할케가 데려온 곳은 여기였다. 그냥 나를 잠식해 오는 망령된 물음이 희미해질 곳으로. 그냥 내 무자비한 힘이 더는 발휘되지 않는 곳으로. 그냥 그런 주문을 외웠을 뿐인데 말이다. 어쩌면 그저 제가 집으로 가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그랬던 거지?”
은빛 갈기를 쓸어내리며 나는 이 적막한 공간 속 유일한 동반자에게 묻는다. 돌아오는 건 푸르르 세찬 투레질뿐이었지만. 그 모습에 잔웃음을 터트리는 것으로 나는 조금 이른 하루의 시작을 맞이하였다.
먹을 만한 과일을 찾고. 구황 작물들을 캐고.
내 일과는 이 낯익은 공간처럼 규칙적으로 이루어졌다. 숲은 풍요로웠기에 먹을거리를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거처할 장소였는데 그마저도 지금은 안정되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거의 몇 날 며칠을 적합한 거처를 물색하며 이곳저곳을 쏘다닌 덕이다. 맹수의 야간 공격으로부터의 안전을 확보할 장소, 긴 탐색 끝에 내가 찾은 곳은 예전 후작과 잠시 몸을 피했던 동굴이었다. 이중 말뚝으로 울타리를 치고 말뚝 안에 밧줄을 둘러 더욱 보강한 장소는 어느새 작은 요새가 되었지. 남들이 보기엔 황당한 장소로 보일 게 분명한 거처를 떠올리자, 심중에 차오르는 것은 뻐근한 충일감이다. 땅을 파는 호미질에 더욱 속도가 붙은 것은 아마 그 때문이리라. 규칙적으로 숲에 울려 퍼지는 호미질 소리가 멈춘 것은 내 시야에 익숙한 뿌리가 잡혔을 즘이다.
리베라의 뿌리.
이슬을 먹고 산다는 명마의 주식원이다. 아타할케 역시 이를 눈치챘는지 코에서 더운 김을 뿜어내며 발을 굴렸다. 곧이어 이파리를 쓸어내리는 선바람을 타고 아삭거리는 소리가 지천에 울려 퍼졌다.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 아삭거리는 울림이 듣기가 좋다. 내가 그런 소리와 식감을 좋아한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 알았어.
이 속에서 평생 쫓았던 안온을 찾았다면 우스울까.
이곳은 아무도 머물지 않아. 내 손에 다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음은 희미해지고 불안과 염려가 사위어 간 자리에 남은 것은 오롯이 나 자신이다. 숲을 가로지르며 지저귀는 개똥지빠귀와 계절의 변화에 따라 겨우내 꽁꽁 얼었던 그 얼음판을 걷어 내는 호수들. 불쑥불쑥 무성한 이파리 속에서 후작이, 아름답게 푸른 하늘 속에서 공작과 공녀가 떠오를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점차 희미해져. 바쁜 일과 속을 헤매고 타닥이며 제 살을 불사르는 모닥불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지금이 아득한 태초의 어느 시절처럼 느껴지곤 한다. 이제는 그의 얼굴도 흐릿해. 또 다른 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나는 나를 버림으로써 나를 되찾아 간다.
어느 고대의 위인이 말했던 그 모순된 격언을 절감하며 조악하지 않는 자연의 산물 속 풍경을 배회하던 나는 이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겨우내 삭았을 말뚝을 정돈하고 또…….
이번 계절 안에 해야 될 일들을 곱씹으며 부유하는 구름을 응시하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진 건 어렴풋이 꿈의 잔상이 떠올랐을 때였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심중을 무자비하게 할퀴는 불안과 공포만은 선연한 그 악몽을.
***
폭동의 시작은 아주 작은 선술집에서 시작되었다.
‘이러다 대부인이 루트비아저에 눌러사는 게 아닌가 몰라.’
탁, 테이블 위에 맥주잔을 세차게 내려놓은 사내는 거나하게 취한 낯으로 술집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이에 선술집에 앉은 다른 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들의 입술을 타고 하나둘 입에 담기 잔혹한 말들이 터져 나오자, 선술집의 분위기는 금세 달아올랐다. 격양된 공기가 정점에 다다른 것은 급기야 분통을 터트리던 선술집의 주인은 돈도 받지 않고 맥주를 퍼다 날라 주기 시작했을 즘이었다.
공작가의 적장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그 사실을 처음에는 다들 부정했다. 증인이 나오고 재판의 결과가 만천하에 알려져도 그러했어. 이를 결국 받아들이고 말게 된 것은 그들이 박대하던 사생아가 대공작가의 주인으로 즉위하자마자 마차 사고로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마차 사고.
이전에도 아델리아 공작을 한 번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 사건과 무척이나 기시감이 드는 일에 기어코 그간 일어났던 일들을 부정하고 또 외면하던 영지민들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다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거구나, 새삼 그때 절감했다. 대부인이 다시 꾸민 짓이다, 전대 공작이 아직 살아 있는 거 아니냐, 그런 근거 없는 소문들이 루트비아 영지에서 시작된 까닭도 그러했다. 그들은 어쩌면 그럼으로서 자신들의 죄가 사해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 방법이 한 사람의 유년기를 망가트린 이전과 조금 비슷한 방식이란 것을 망각한 채로. 자신들의 죄를 정의로 포장하기까지 하면서. 그렇게 밤이 지나고 여명의 빛살이 공간으로 스며들 즘이었을까? 누군가가 내뱉은 취중 어린 문장이 술 내음이 가득한 공간을 찢었다.
‘이렇게 가만두고 볼 순 없다고 무슨 방법을 찾아내야지!’
온몸을 지배한 취기에 고주망태가 된 이들의 몸을 일으키게 만들며.
‘그 여자를 몰아내야 해!’
‘백작저로 가자!’
그렇게 광기에 휩쓸린 듯 그들은 시골길을 가로질러 루트비아저로 향했고 저택 앞에서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대부인을 내어놓으라 소리를 높였다. 시위가 급기야 무력으로, 폭동으로 번지게 된 것은 누군가의 새된 음성이 불길처럼 타오르던 그들의 마음을 할퀸 직후였다.
‘대부인이 도망쳤다!’
***
브린튼가의 마차가 어수선한 시골 가도를 가로질렀다. 스치는 풀잎들 사이에서 전해져 오는 간밤의 혼란 앞에 올레나는 깊은 한숨을 내어 쉰다. 소식을 전해 들은 건 지난밤이었다. 대부인과 공녀가 루트비아저로 향했을 때부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던 그녀는 항시 공작 부인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어코 사달이 났지. 조금 이른 감이 있었으나, 제국에 들끓고 있는 이 파렴치한 어미에 대한 분노를 감안하면 또 그렇다고만 볼 수 없었다.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그녀가 대부인에게 마차를 내어주고 기사들을 붙여 주었던 건 순전히 공녀 때문이다.
헌데, 그걸 알지 못하고…….
‘공작 부인이 사라졌습니다. 백작 부부도 저택의 탈출을 도운 이후 경로를 알지 못하는 듯합니다.’
‘당장 기사들을 풀게, 한시라도 빨리 공녀를-’
‘그게…….’
‘공녀님은 대부인과 함께 계시지 않는답니다.’
‘그게 무슨…….’
찰나의 머뭇거림과 함께 깨달음은 빨랐지. 올레나는 헛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아직도 그 말을 들었던 때를 생각하면 목덜미가 선득해져 와.
‘그럼 공녀님은 어디 계시지.’
여전히 믿기지 않은 문장을 혀끝에 굴리는 사이, 마차는 길모퉁이를 돌아 그 끝에 보이는 저택을 향해 마지막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당장 공녀님을 모시고 수도로 가야 합니다, 이곳은 너무 위험해요.”
니벨론 기사단장의 단호한 음성이 가까스로 정돈된 루트비아저의 로비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지휘 아래 모든 상황은 정돈되었으나, 상황을 온전히 마무리하지 못한 자신들에 대한 무력감과 회의가 그곳에 희미하게 묻어 나왔다. 올레나는 대답 대신 눈앞에 펼쳐진 참담한 광경을 가만히 응시했다. 구멍이 송송한 양탄자들과 찢긴 명화, 바닥으로 추락한 샹들리에를 스쳐 지나간 그녀의 시선은 난간에 걸터앉은 소녀에게로 닿았다. 그 주위에는 수북이 쌓여 있었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용서 못 해……!’
의식을 차리고 망가진 저택을 발견하고 나서 분노하던 공녀가 뒤이어 한 행동은 전대 루트비아 백작의 초상화를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장식용품. 그 결과 계단 위에는 이제는 쓰임이 다해 보이는 부서진 루트비아가의 유산들이 잔뜩 올라왔다.
“위원장님, 날이 저물고 있습니다. 아몬의 세력이 근방에 있을 수도 있어요.”
기사단장의 말에 올레나는 천천히 눈을 돌려 깨진 유리창 사이로 훤히 비치는 바깥을 응시했다. 제법 짙어진 어둠의 농도가 마을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티케 샤냥꾼들이 주위에 매복해 있는 건 둘째치고 머물 곳조차 마땅하지 않은 이곳에서는 단연 더 지체할 시각이 없다. 그러니 공녀를 서둘러 이 저택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당연한 처사다.
허나…….
공녀를 수도에 데려간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가능할까?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문장을 혀 안에 굴리며 올레나는 공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녀님.”
험악스러운 시선으로 제 발끝만 응시하고 있던 벽안이 저를 응시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기사들과 함께 공작저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어머니는.”
대부인이 루트비아 백작 부부와 탈출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목격한 이들은 멜번 항구. 그래도 같은 핏줄이니. 적어도 공녀는 지키지 않을까. 그런 하찮은 변명 따위로 대부인이 달라질 거라 기대했던, 다소 허망한 백일몽에서 깨어난 올레나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어둠에 먹힌 시야 위로 공녀의 푸른 눈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할까.
단념과 물러서는 법을 배우지 못한 공녀에게.
아마 이국으로 떠났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높은 확률로 아몬과 신흥 세력이 꾸민 소행일 거라는 것 역시. 허나 확실하지도 않은 일이기도 하고 차마 그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올레나는 대부인은 북부의 경계를 너머 라마타로 향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올레나는 어쭙잖은 변명을 해 본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겠어.”
“공녀님, 허나…….”
떨림이 느껴져. 올레나는 가만히 손을 여린 어깨에 올리고는 입술을 열었다. 매서운 소리와 함께 제 손을 쳐 낸 공녀가 분노가 차오른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본 건 그때다. 섬뜩한 눈빛에 올레나는 마저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했다. 대부인이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공녀는 급기야 발작까지 일으켰다. 숨이 넘어가는 줄만 알았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수많은 일을 겪었음에도 어찌 저리 집착할까. 그것은 마치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 것이다. 대부인은 공녀에게 남은 유일한 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길어지는 실랑이를 가르고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별장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나, 당분간 공녀님과 기사들이 머물기에는 나쁘지 않을 겝니다.”
“……백작 부인?”
“이런, 제 소개가 늦었군요. 루트비아가의 안주인 헤르베입니다.”
뒤늦게 입꼬리를 올려 제가 누구인지 알리는 여인을, 단단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롭게 갖춰져 있는 여인을 올레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부인만 탈출시킨 것도 이 여자의 판단이었겠지. 성미가 괄괄하긴 하나, 그렇다고 그리 모질지는 못한 백작의 머리에서 나올 법한 결정은 아니었을 테니. 공작저에는 제레미가 있다면 이곳은 저 여자가 지키고 있구나. 허니, 어찌 공녀를 여기 머물게 할 수 있을까.
“뜻은 감사합니다만, 백작 부인. 다른 마땅한 장소가 있을 듯합니다.”
짤막한 문장으로 내실에 가득 찬 적막을 거두어들인 올레나는 딱딱하게 굳어 버린 백작 부인의 낯을 스치듯 지나 기시단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일단 공녀님께서 잠시 머물 곳을 찾아보게. 최대한 정계 파벌에 휩싸이지 않고 중립을 취하는 곳으로. 하다못해 여관이라도 좋아.”
로비에 감도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눌려 여태 침묵만 유지하고 있던 기사단장이 조심스레 새 의견을 내놓은 건 그때였다.
“페라비 별장은 어떻습니까, 위원장님?”
***
“이리 자리를 내어 주어 고맙습니다, 후작.”
병색이 완연한 사내를 바라보며 올레나는 입술을 움직였다. 극적으로 타협을 본 그녀는 공녀와 후작의 동의하에 공녀를 이곳에 묵게 한 것이다.
“괜찮습니다, 공작저와 비견해 그리 크지 않아 공녀님의 마음에 차실지 모르겠습니다.”
딱히 부정하지 못했다. 로비 한편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리한 공녀가 있었기에. 발악하던 공녀를 설득하느라 꽤나 진땀을 뺐지. 허나, 그녀 역시 이곳을 선택하지 않으면 대부인을 기다릴 방법은 없다는 걸 알았는지 결국 동의한 것이다. 짧게 공녀를 일별한 올레나는 눈을 돌려 다시 제 앞의 사내를 본다.
병색이 완연해.
서대륙의 치료술사들이 도착해 간신히 도움을 주었으나, 그마저도 공작이 실종되고 지원이 끊겼지. 풍전등화. 하루하루 간신히 버텨 가는 자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는 게 아닌가 싶다. 올레나는 근심이 깃든 눈으로 핏기 없는 사내의 낯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허나, 어쩌겠는가. 그밖에는 대안이 없는 걸. 티케 사냥꾼과의 강력한 동맹으로 더욱 단단한 결속을 맺어 가는 신흥 세력과 달리, 수장 격인 공작을 잃고 내부의 균열마저 빈번하게 일어나는 구귀족 세력이면서도 뚜렷한 정계 활동이 없어 신흥 세력의 합의마저 이끌어 낼 수 있는 자. 한때 아델리아 공작이 머물렀을 별장을 바라보며 올레나는 차분히 설명을 이어 갔다.
“기사들이 배치될 겁니다, 모르헤 기사단 역시 메이나 숲에 머물며 이곳을 방비하기로 했어요.”
“알겠습니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부담 가지실 것 없습니다, 그저…….”
“아델리아 공작 때문이지요?”
그녀의 말에 후작의 투명한 눈이 잘게 흔들렸다. 그 긍정의 뜻을 읽어 낸 올레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눈을 들어 올렸다. 깊은 밤하늘 위에는 시커먼 어둠이 토혈처럼 번지고 있었다. 아델리아 공작이 실종되었을 무렵, 모두가 그녀를 찾아 헤맬 무렵,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후작을 찾아왔지. 진실을 알고 있을 유일한 사람을. 계절이 몇 번 바뀌고 별장에 몰려왔던 사람들이 하나둘 나가떨어지기 시작할 때에도 올레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항시 이곳을 찾아왔지. 자신도 그 까닭을 모를 집념의 진위를 알게 된 건 어느 날,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던 후작이 툭 뱉은 그 말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단 한 번, 진실로 그 애를 헤아린다면 부디 그리 해 주세요.’
귓가를 파고드는 짧은 문장. 벼리디벼린 칼날처럼 저를 쑤시는 낱말들.
그제야 알았다. 계절이 바뀔 때까지 줄곧 이곳을 찾아왔던 연유는 기실, 무겁게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죄책감 때문이었다는 걸. 공작은 담담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함몰되고 있었다는 것을, 제 뼈와 살을 깎아 버티는 그런 사람인 걸 어쩌면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가 버텨 주고 버텨 주니 자꾸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되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그리하여 올레나는 속으로만 삭인다.
언제쯤 공작이 돌아오는 건가, 하는 물음도. 그 속으로 흩어지는 낱말들에는 깃든 미미한 기대도, 그녀가 돌아온다면 이 무의미한 싸움도 분란도 다 끝이 날 터인데, 하는 바람도.
어쩌면 전대 공작에게, 두 딸을 저버린 부부에게 분통할 자격은 그녀에게 없을 수도. 한 아이가 겪은 수없는 고난에 자신 역시 보탠 것 하나 없지는 않을 텐데. 그러므로 그녀도, 아니 하늘 아래 숨 쉬는 모든 치들도,
모조리 유죄다.
***
접시는 더럽다. 음식은 맛이 없고. 시종인지 뭔지 정체 모를 이들은 거칠고 흉포해. 페라비 별장에 대한 공녀의 평은 대체로 그러했다.
다시는 절대 되돌아오고 싶지 않은 곳.
그러한 평가에 무엇보다 일조한 이는 바로 이자다.
식기를 요란스럽게 내려놓자, 맞은편에 자리 잡던 에오르테가의 공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또 시작이네, 그런 비슷한 표정이 그 얼굴 위로 떠올라. 눈을 굴렸다. 후작은 그저 제 식사에 집중하고 있던 채였다. 소리를 지르거나, 발을 구르고, 물건을 부숴도 그랬어. 그게 더 제 속을 긁어 놓는다는 걸 아는 걸까. 불현듯 그 생각이 들자 공녀의 눈에 불티가 인다.
“맛이 없어! 맛이 없다고!”
쾅쾅 식기로 접시를 내리치자, 사용인들의 낯에는 당황스러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미묘한 기류를 가른 건 후작의 맑은 목소리였다.
“마리, 미안하지만 매튜에게 간단한 새 요리를 부탁해 줄 수 있나. 수도는 이곳과 달라 그러신 듯하네. 지난번에 브루스게타는 잘 드셨던 것 같은…….”
마리라 불리는 시녀에게 그렇게 말하던 그는 급기야 수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요리 몇 가지를 알려 준다며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젓던 공자마저 이를 돕는다 자리를 비우자, 식당은 곧 적막해진다. 휘황찬란한 은촛대 아래, 진귀한 음식들이 가득 찬 테이블은 어느새 텅 비어 버린 채로. 그 위로 하나둘 피어오르는 건 익숙한 얼굴이다. 지쳤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아버지와, 새 식사를 내놓으라 시종에게 지시하는 어머니.
두 기억이 주는 대비 속에서 묻어 나오는 것은 정체 모를 불쾌감이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기이한 감각이었어. 그사이, 식당의 문이 다시 열리고 그녀 앞에 새 음식이 내밀어진다. 수도에서 자주 사용하는 향신료 냄새가 더운 김과 뒤섞이며 공녀의 코끝을 간질였다. 각양각색의 토핑들로 완성된 음식을 짧게 일별한 공녀의 눈은 후작과 공자를, 그리고 뒤따라 올라온 주방장을 차례로 응시했다. 느리게 여닫히는 눈꺼풀 사이 드러나는 벽안에는 혼란이 묻어났다.
“……이게 아니야.”
나직이 흘러나오는 중얼거림에도 역시. 이를 지워 내려는 듯 공녀는 눈을 부릅뜨고 목에 힘을 준다.
“이게 아니야!”
공기를 찢을 정도로 격양된 소리에도 여기저기서 사용인들의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공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기까지 했고. 그러나 사내는 여전히 고요하기만 하다. 천천히 모양 좋은 미간이 좁혀지고 입술이 열린 것은 공녀의 외침이 만들어 낸 여운마저 사그라들 즘이었다.
“……그럼 무엇이지요?”
그마저도 기이하기 짝이 없는 문장이었지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기어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 공녀는 쿵쿵 발에 힘을 주며 제 방으로 달려갔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 아니 빨리 엄마가 나타났으면 좋겠어.
그녀의 걸음걸이를 따라 흩어지는 상념들은 그러했다.
***
베르니가의 딸이 떠난 자리에 또 다른 베르니가의 딸이 찾아왔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문장으로 이 복잡하고도 미묘한 상황을 정리한 테오는 테이블 위로 턱을 괴고는 맞은편 정원에 앉아 있는 공녀를 무심히 응시했다. 공녀는 제 주변에 있는 꽃들을 꺾어 짐작하건대 화환을 만드는 중인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기엔 지나치게 해괴망측한 모양으로 변모해 가는 꽃들의 묶음이었지만.
공녀의 손안에 짓눌리고 바스러지는 꽃잎들을 바라보며 테오는 짧게 혀를 찼다. 문득 누나가 페라비 별장에 온 것도 이맘때쯤이었다는 사실이 떠오른 건 그 순간이다. 선선히 불어오는 미풍에 아직 가시지 않은 혹한의 추위가 묻어 나오는.
그래, 이맘때였어.
이제는 어렴풋해진 기억을 떠올리고 가슴을 빼곡히 메꿨던 희열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곧 그 자리를 메꾼 것은 허탈함이다. 그 집안은 자신들과 무슨 지독한 인연이라도 있는 걸까,하는. 옅은 한숨을 내어 쉰 테오가 때마침 고개를 뒤로 젖힌 공녀와 눈이 마주친 건 그때다. 기실, 마주쳤다기에는 공녀가 저를 일방적으로 노려보는 것에 더 가까웠지만.
저, 저 성질머리 하고는.
누나와 공녀가 친자매라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그렇다기엔 공녀는 지나치게 고집불통에다가, 엉망진창에, 예의와 예법도 모르는…….
악동.
그래, 악동이다.
테오는 그런 총평을 내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녀가 별장에 들어서고 사용인들의 낯이 하루가 다르기에 수척해진다지. 부수고 깨트리고 던지고. 툭하면 불만을 터트리고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소리를 질러 대기까지. 뭣 모르는 이들만 그저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라고 가엾다 가엾다 하지만 그로서는 아주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다. 게다가 최근 들어 삼촌을 향한 공녀의 행동은 심각해진 수준으로 치닫고 있지 않던가. 종줄을 잡아당겨 시종 대신 삼촌을 불러 대질 않나, 툭하면 삼촌의 면전에 거친 말들을 뱉어 대는 것은 물론 어제저녁에는 식사 중 수프를 삼촌 머리에 부어 버렸지.
그나마 식었기에 망정이지.
어느새 동정과 연민이 사라진 공자의 눈에는 분노가 차오른다. 정원에 앉아 화환을 만드는 공녀에게 다가간 것은 그 선상이었다.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올린 공자는 공녀의 주위에 만개한 다채로운 꽃들을 한가로이 바라보다 이내 푸른 벽안 위에 시선을 던졌다.
“공녀님.”
빳빳한 고개는 저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제 손에 든 화환에만 고정된 채였고 푸른 풀잎들 위로 내려앉은 건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뿐이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공자는 계속해서 입술을 움직였다.
“공녀님이 이곳에 오신 뒤로 정원이 더 풍요로워졌습니다. 티케의 손 아래 수목은 늘 푸르다지요.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가 생각이 나는 군요, 백설같이 핀 꽃을 꺾으면 꺾은 자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예리하게 그려진 눈매 아래 서늘함이 잔뜩 깃든 눈이 저를 올려다본 것은 그때였다.
“마치 티케와 같지 않습니까?”
공자는 그 헛된 희망이 차오르는 눈을 향해 실긋 웃음을 그렸다.
***
페라비 별장의 집사 엘몬트는 집무실 테이블 위로 낯익은 주스를 내려놓은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흘러가는 시간을 알아채지 못한 채 차창 바깥의 풍경 속을 유영하고 있는 주인의 의식을 잡아 세우는 것 역시 그의 몫이었다.
“요즘 공녀님께서 잠잠하십니다.”
“아, 엘몬트.”
그제야 누군가가 내실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아챈 후작은 비스듬히 창틀에 기댔던 자세를 바로 했다. 만개한 꽃들이 가득한 정원, 그 속에 자리한 공녀에게서는 여전히 시선을 떼지 못한 채였지만.
“그러게 말이네, 그래서 더욱 불안하네. 정원에서 뭘 하시는 겐지…….”
원체도 공녀가 정원을 좋아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출입이 제한된 어린 시절, 제게 주어진 유일한 공간이었으니 그럴 테지. 허나, 그저 소일거리로 치부되었던 그 일에 대한 공녀의 관심은 최근 들어 도를 지나칠 정도였다. 뭐랄까, 아주 정원에서 살다시피 했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누군가가 챙기지 않으면 끼니를 거르는 것은 예사요, 한밤중에도 그녀가 그곳을 배회하는 모습을 후작 역시 종종 보았다. 기사들이 있으니 공녀의 안전이 걱정될 건 없다만…….
뭔가, 이상하군.
집사가 내민 잔을 받아 들며 후작이 수면 아래 감춰진 사건의 얼개를 가늠해 보는 동안, 엘몬트는 후작이 알고 있어야 할 사안들을 추려 하나둘 보고하기 시작했다. 루트비아 저택의 보수가 얼추 마무리되고 있다는 것과 구귀족들과 신흥 세력의 균열이 더욱 극심해졌다는 것. 그리고…….
“올레나 위원장님께서 대부인과 관련된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뭐?”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던 후작의 미간이 일그러지고 눈빛에는 왜 진즉 얘기하지 않았느냐 하는 뜻이 가득했다. 엘몬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그것부터 얘기했으면 다른 것들은 신경도 쓰지 않으셨을 게 아닙니까.”
저, 저 갈수록 꾀만 늘지. 가늘어진 눈초리로 그를 흘긴 후작이 어서 설명해 보라는 눈짓을 보내자, 엘몬트는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그날 대부인을 보았던 목격자가 나타났답니다. 멜번 항구에 있는 걸 똑똑히 보았답니다.”
“멜번 항구?”
“예, 그 이후의 동선은 파악되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이국으로 간 것 같습니다.”
이국이라. 엘몬트의 끝말을 앵무새처럼 읊조리던 후작은 옅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공녀님께는 당분간 비밀로 하지, 그리고…….”
막힘없이 말을 이어 가던 후작이 멈칫한 건 그때였다.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미미하게 남아 있는 소음의 잔재를 따라 후작의 눈이 주위를 배회하는 사이, 다급한 노크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지.”
“후작님, 큰일 났습니다. 공녀님께서 온실에 들어가셨는데…….”
***
페라비 별장.
그 한 단어를 듣자마자 랑게르 의원은 식기를 내려놓고 왕진가방을 챙겨 말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근래 들어 제 평화를 앗아간 저 고담한 저택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환자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맹수라도 키우는 걸까.
차창 밖으로 변해 가는 풍경에 무심히 시선을 주며 턱을 괴고 있던 의원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은 그것이다.
그래, 아무래도 그럴 수 있겠다.
물고 뜯기고 할켜지고.
별장의 사용인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상처들과 그가 갈 적마다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는 저택의 내부로 짐작해 보건대 높은 확률로 그럴 가능성이 다분했다.
페라비 별장에 공녀가 머문다.
루트비아저에 일어난 폭동으로 별장을 지키는 니벨론 기사단의 기세가 더욱 삼엄해진 것 같더니 그들뿐 아니라 공녀를 지키기 위해 아주 사나운 맹수를 들인 게 틀림없다. 모퉁이를 돌아선 마차 차창 너머로 우아한 저택과 그 안을 바삐 동분서주하는 사용인들을 보며 랑게르 의원은 그 근거 없는 확신에 더욱 힘을 실어 보았다.
맹수가 아니라 맹독류 식물인가.
오늘 제가 진료를 보아야 할 이가 별장의 사용인이 아니라 공녀라는 사실에 낯에 보였던 얼떨떨한 표정이 다시 한번 랑게르 의원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그가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햇볕에 오래 노출된 것처럼 빨갛게 변해 버린 공녀의 손이 이제는 본래의 크기보다 막 두 배로 부풀었던 것이다.
최근 들어 이 영지의 어린아이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는 증상이었다. 이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진 탓인지, 아니면 변하는 기후의 탓인지. 언젠가부터 루트비아 영지에는 맹독성 식물류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사람의 피부에 닿았을 때 치명적인 독을 자아내 잎을 살짝만 만지거나 스치기만 해도 쓰리고 아픈 건 예사고 물집이 잡히고 화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허나, 그 자태가 설산 위에 쌓인 서리같이 매혹적인지라 이리 변고를 당하기 십상있었던 것이다. 그 종류가 몇 가지 있긴 한데 공녀의 상태를 가늠해 보건대 아마 악마의 식물이라 불리기도 하는…….
“라모니의 꽃잎이군요.”
내실 위로 흘러 들어온 그 단어에 후작은 짧은 탄식을 흘렸다. 라모니의 꽃잎은 맹독성 식물류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종류라 보통 가정에 잘 두지 않는다 일컬어졌다. 물론, 후작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으나 그 열매가 약재로 사용될 수 있어 엘몬트가 고집하는 덕에 둔 것인데…….
내 불찰이구나.
그가 그리 끝없는 자책에 빠져 있을 즘, 얼추 진단을 끝낸 랑게르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쾌활한 음성으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응급처치가 빨라 물집이 잡히거나 화상으로 이어지진 않은 듯합니다. 악마의 식물을 잡고도 이리 쾌차하셨으니 이것도 다 티케의 축복이겠지요?”
딱히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지만.
민망함에 헛기침을 연달아 하던 랑게르가 집사의 안내를 받아 재빨리 저택 밖으로 사라지고, 눈치를 보던 사용인들도 또 공녀가 한바탕 난동을 부릴까 슬금슬금 사라진 내실에는 이내 후작과 공녀만이 남았다. 쌕쌕거거리는 공녀의 불안정한 호흡만이 적막하게 가라앉은 공간 속 흘러 들어오는 유일한 소리였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미리 정원을 정돈했어햐 했는데…….”
투명한 햇살을 받아 수심이 잔뜩 깃든 녹안이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그 눈으로 서서히 제 혈색을 되찾아 가는 공녀의 낯과 약 기운이 돌아 무겁게 내리감기는 공녀의 눈꺼풀을 찬찬히 살피던 후작은 입술을 짓누르며 말을 덧붙였다.
“오늘은 일단 쉬시지요.”
제 목 끝까지 당겨 준 이불을 박차고 공녀가 몸을 반쯤 일으킨 건 그때다.
“안 돼.”
찾아야 해, 소원을 들어주는 꽃. 열에 들뜬 음성이 뱉어 내는 낱말들은 두서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후작이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각난 단어의 파면들을 주워 모은 후작은 그제야 며칠 전부터 수상하던 행동들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그게 누구의 짓인지도.
“테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