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나의 걸작
청원은 끝났다.
재상은 자리를 떠났고.
뭇매를 맞으며 일어선 공작이 청원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나서도 나는 여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어. 이 감정을 무어라 해야 할까. 허탈함으로 차오르는 이 마음을. 가산을 탕진하고 패가망신한 이들의 절규와 일확천금을 손에 쥐게 된 이들의 탄성이 뒤엉킨 소란 속에서 그 정체 모를 감정을 곱씹어 보고 있는 사이,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길게 드리운다.
“아가씨.”
소리를 쫓아 들어 올린 시야 끝에는 그래, 그가 있다. 에단과 닮은 듯한, 짧다면 짧은 인연 속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이가.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덥수룩한 장발, 움푹 팬 눈,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이 끝나고 그 고요한 영원 속에 얼어붙어 있는 것 같은 사내를 가만히 응시하던 나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네루다.”
“제가 나타난 게 아가씨께서 정말 바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걸 준비하신 건 백작님이신데 유명을 달리하셨고 모르스의 현신이다, 공작가의 양녀다, 아가씨의 뜻을 가늠할 수가 없어……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덥수룩한 장발, 움푹 팬 눈,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이 끝나고 그 고요한 영원 속에 얼어붙어 있는 것 같은 사내는 그간의 상황을 내게 설명해 주었다.
마차 사고가 우연이 아님을 직감한 전대 루트비아 백작이 자결로 위장하여 네루다를 공작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했고 내 정체를 밝힐 때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헌데 그가 운명했으니, 도통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
메아리치는 소리들은 귓가에 닿지 못하고 흩어졌지만.
‘아델리아 경과 공녀가 친자매라는 것을 알게 된 건 공녀의 상극열을 통해서입니다.’
대신 그 위로 차오르는 것은 청원장을 혼돈의 도가니 속으로 밀어 넣은 문장들이다.
‘공작에게 이를 보고했습니다.’
청원장에 짙은 여운을 남겨 마치 먼 세상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루트비아 백작의 친필 서명이 담긴 서신입니다.’
증거도 증인도 없다 여겼지.
그리 얕은 실수를 할 공작은 아니니 말이야. 그래서 결코 밝힐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불가능하다 믿었어. 헌데…….
각인의 표식이 도드라지는, 유리창에 얼비친 내 모습을 일별한 나는 시선을 돌렸다. 청원장에 발을 디뎠을 때처럼 와닿는 눈길들은 여전했지만, 그곳에서 나비치는 감정들은 어느새 조금 다른 모양을 띠고 있었다. 깊은 연민과 동정. 그런 단어들과 비슷한 마음들. 픽,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헛웃음이 흘러나와.
티케의 축복이란 이런 걸까.
수년을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이리 단숨에 매듭지어지는 것을 보면 말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니면 또 그렇다고만은 하지 못할까.
……여전히 그는 나타나지 않았으니.
***
망조다. 망조야. 정녕 이 아올리스에 망조가 든 게야.
그러지 않고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서늘한 계절에도 빗물 내리듯 흐르는 땀을 닦아 내리며 재상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도 빠르게 움직이는 두 다리는 어느새 황제의 집무실 앞에 다다라 있었지만.
아, 근면성실하기만 한 제 몸뚱아리여.
그가 그리 자조하는 사이, 황가의 문양이 섬세하게 세공된 문은 활짝 열리고 그 너머로 흘러나오는 휘황한 불빛들이 그의 눈을 적셔 왔다. 이를 허망하게 바라보던 재상은 깊은 한숨과 함께 마저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인가.”
발밑에서 밟히는 금사 융단은 집무실이라는 호칭의 내부와는 어울리지 않게 화려했다. 그 끝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황제 역시 마찬가지. 그는 황제라기보다는 호방한 기사에 더 가까운 사내라는 게 대다수의 중론이었다. 그런 성격이 좋을 때도 있었으나, 확실한 건 오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찌 되었건 공작가에 벌어진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미리 파악하지 못했으니, 불호령이 떨어질 게 분명한 상황에 재상은 조금이라도 상황을 무마할 방도를 찾아본다. 청원장을 서슬 퍼런 기세로 압도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순한 양처럼 변모한 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연신 달싹였다. 차분한 음성이 들려온 건 그때다.
“오늘 있었던 청원의 일을 두고 아마 온 모양입니다, 폐하.”
휘장 아래 가려져 있던 인영은 황제가 총애해 마지않는 황태자였다. 유일하게 황제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아델리아 경이 공작가를 대상으로 내건 청원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공작가의 적장녀라 주장하는 게지요.”
구원과도 같은 도움에 재상의 낯에는 한결 안도가 깃드는 사이, 황태자는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 갔다.
“적장녀?”
“예, 그렇습니다. 다소 허무맹랑한 구석이 있는 주장이지요. 해서, 많은 이들이 오늘 청원의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합니다.”
“왜 내게 진즉 알리지 않았지!”
수차례 이어졌던 청원과 관련한 보고를 황제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 인광을 번뜩였다. 필부의 사내라면 오금이 저릴 듯한 호통 앞에 황태자는 그저 담담하기만 했지만.
“폐하께 심려가 될까 그러했을 겝니다. 그런 자잘한 일들이 감히 이 나라의 지존과 어울린다 누구도 여기지 못한 게지요.”
상상이나 했을까. 황제 앞에만 서면 사시나무 떨듯 떨던 소년이 저리 능글맞은 모습으로 변모하게 될 줄이야. 조금은 경외 어린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던 재상이 긴 설명을 끝내고 고개를 돌린 황태자와 시선이 맞부딪친 건 그때였다.
“재상?”
“예?”
“어서 청원의 결과를 황제께 말씀드리셔야지요.”
“아, 예…… 예.”
그제야 다소 엉뚱한, 상황에 맞지도 않은 상념을 거두어들인 그는 옅은 심호흡과 함께 입술을 움직였다.
“아델리아 경이 공작의 적장녀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증인이 나타났습니다.”
“그게 누군가.”
“네루디아 보이네르, 한때 공작가의 주치의로 있던 자입니다.”
***
불호령이 떨어졌다.
재상의 보고가 끝나자마자 대소 신료를 불러 세운 황제는 한바탕 그들을 뒤집어 놓고는 당장 이 상황을 낱낱이 조사하라는 엄중한 명을 내렸다.
엄중하다라…….
황태자는 제 아비와 어울리지 않는 그 단어를 입에 곱씹어 보며 웃음을 흘린다. 폐하가 집어 던진 유리잔에 피를 본 이까지 있었다지. 피에 혼절한 시녀들도 있고. 이제야 그리 놀랄 것도 없는 일이지만 한때 그도 그러했던 적이 있다. 폐하가 거처하는 서쪽 궁에 올 때면 가슴이 막히고 작은 소리에도 놀랐더라지. 어린 그에게 황제는 컸고 또 두려운 존재였으며,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아비였다. 자칫하면 틀어질 수도 있는 관계에 조언을 준 건 스승이다.
‘황제께서는 성미가 불같으시지요. 가끔 저도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스승님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걸요.’
‘짐승을 만나면 어찌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황자님. 절대 눈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압니다, 감히 폐하의 눈을 마주하기 두렵지요. 해서 말입니다. 저는 폐하의 인중을 바라보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제가 폐하의 눈을 직시한다 여기더이다.’
‘정말요.’
그러던 이가 말년에 여러 추문에 휩싸이며 자리를 내어놓고 시골로 떠났을 적에 그는 세상을 잃은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손가락질해도 그는 그러했어.
‘사람을 하나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그래서였다.
‘당분간만입니다.’
다소 기괴한 부탁에도 가타부타 자세히 묻지 않고 들어준 것은.
당분간이라던 시간이 몇 년이 되어 버릴 줄도, 백작이 부탁한 이가 공작가의 주치의라는 것 또한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공작가의 숨겨진 적장녀라니.
아직도 와닿지 않는 사실을 혀끝에 굴려 보며 황태자가 고개를 내젓는 사이, 둔중한 노크 소리와 함께 보좌관이 들어섰다.
“황제께서 공작가에 전령을 보내셨다 합니다.”
“내용은.”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공식적으로 작위를 박탈한다는 명이십니다.”
아무리 증인이 있다고는 하나, 공작가를 건드는 문제이다 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황태자는 이번에는 다른 이를 입에 올린다.
“아델리아 경의 동태는.”
“특이 사항이 없습니다. 청원이 끝난 후에는 니벨론 기사단들의 보호 아래 페라비 별장으로 이동했고요.”
“니벨론 기사단?”
“예, 아무래도 경이 티케의 각인자이다 보니-”
“허면, 모르타 위원회는.”
“……아직까지는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들은 청원의 소식을 듣지 못했나.”
“제론 위원장이 청원에 참석하였으니 그러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페치오 위원이 자리를 비워 지도부가 온전치 않은 데다, 위원이 경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다들 아는지라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듯합니다.”
“모르타 위원회에 전령을 보내라. 당장 아델리아 경을 호위할 기사들을 꾸려 페라비 별장으로 보내라고. 공작이 어찌 움직일지 가늠이 되지 않아. 지금은 아델리아 경의 안전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야.”
보좌관에게 지시를 내리는 황태자의 음성에는 답지 않게 초조함이 깃들어져 있다. 공작가의 사생아. 아니, 사생아라 칭하기에도 모호한 그녀의 정체가 이 아올리스에 불러올 파란에 마음이 수런수런한 탓이다.
기실, 따지고 보면 사교계에서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가정이 있는 이들이 벌이는 자잘한 외도와 추문들은. 허나, 이번 일은 그냥 단순한 공작가의 치부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게 문제였다.
이에타 가문.
공작 가문의 재기에 기반을 닦은 것은 신흥 세력의 수장인 이에타 가문의 재력임을 모르는 이는 없다. 이에타 가문 역시 공작가의 입지를 발판 삼아 사교계에 세력을 넓혔으니 손해 볼 것은 없었다만. 그 딸이 세상을 뜬 이후로도 둘의 관계는 굳건했던 것은 그 탓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허나, 그것이 지금도 유효할까.
제 딸을, 자신을 기만하고 농락한 공작을 자작이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까.
옅은 한숨을 내어 쉬며 황태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천운으로 자작이 그러한다 해도 그를 둘러싼 신흥 세력들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번 일을 자신들을 향한 멸시로 여길 테니.
균열이 찾아오고 있다.
동맹은 무너졌고 그 뒤에 남은 것은 다툼뿐.
제국에는 새로이 균형을 잡아 줄 이가 필요해. 신흥 세력의 분노를 잠재우면서도 구귀족의 선봉장이 될 수 있는 사람.
불안과 염려가 동시에 일렁이는 황태자의 눈 위로 떠오른 이는 단 한 사람이다.
아델리아 경.
아니, 아델리아 공녀.
그러니, 그녀를 위협하는 것은 그 무엇도 용납할 수 없어.
“……토리노 위원을 불러라.”
얼어붙은 공기를 찢은 목소리는 수차례 담금질한 쇠붙이처럼 단단했다.
***
소금기가 묻어나는 바다의 내음을 건너 아올리스의 멜번 항구에 도착한 페치오는 저를 마중 나온, 예상치 못한 인파에 멈칫했다. 곳곳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익숙한 인영들을 지나 우뚝 솟아 있는 제론 위원장을 보자, 곧 만족스러운 웃음을 걸고 걸음을 재개했지만.
“코르푸와의 전면전을 강행해도 된다는 세 제국의 동의를 얻어 냈습니다, 위원장님.”
칠 개국 모두의 동의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물론 하이가의 보검 덕을 제법 보았지. 대륙에도 널리 이름을 알린 그 이름 앞에, 그의 힘이 담긴 보검 앞에 보이던 휘둥그레진 눈과 탄식을 다시금 떠올려 보며 페치오는 마저 남은 말을 이었다.
“일이 잘 마무리되었으니 위원들을 소집해 남은 일을 논의하면 될 것입니다.”
물 흐르듯 유려하게 건넨 말에 돌아온 것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제론의 표정뿐이었지만. 다행이군요, 두어 번의 헛기침과 함께 낮게 중얼거린 대답. 마치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이처럼 초조하게 구르는 눈. 무언가 기이한 몸짓들을 유심히 바라보던 페치오는 일렁이던 동공에 안도의 빛이 스미자 더욱 미간을 좁혔다. 절대 다시 들을 거라 생각지 않았던 낯익은 음성이 그의 귓전을 때린 건 그때였다.
“오랜만입니다, 페치오.”
소리를 따라 돌린 고개 끝에는 예상과 꼭 같은 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토리노.
저자가 여기 무슨 일인가.
약간의 당혹스러움과 황당함이 뒤섞인 시선을 읽었는지 토리노는 붕 뜬 침묵을 자연스레 메꿨다.
“모르타 위원회의 동의로 어제부로 복권되었지요.”
“그게 무슨 소리지. 위원회는 분명 위원의 만장일치 하에 열리는 게 순리 아닌가.”
“그렇지요. 다행히 모든 위원들이 찬성하시어 위원회는 순조롭게 열리고 끝을 맺었습니다.”
저건 또 무슨 궤변인가. 위원 중 하나인 그가 버젓이 제국을 떠나 있었거늘. 미간을 찌푸리며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는 이를 향해 조소를 보내던 페치오의 낯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서서히 차게 식기 시작한다. 환영의 인파라 하기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는 모르헤 기사단원들과 마찬가지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제론.
“나를 파문한 것인가. 무슨 명목으로.”
상황을 파악한 이의 음성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들어 알고 계시겠지요, 공작가에 일어난 변고를.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황실에서는 이 일을 엄중히 파헤치길 바라셨지요. 공작가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관련된 자들은 모두 근신처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페치오 위원이 근래 공작과 잦은 만남을 가졌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나를 의심하는 겐가. 편파적인 결과요! 나는 이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어.”
“글쎄요, 그게 사실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요.”
“토리노, 내가 지금 무슨 일을 마무리 짓고 왔는지 잊었는가. 무려 모르스의 현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다른 제국들 역시 이에 동의했고. 이 일은 우리 일족의 위상을 높일 기회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고.”
“다들 그저 하이가의 보검 때문에 동의한 게 아니고요?”
정곡을 찔린 듯 말문이 막힌 페치오를 향해 토리노는 한껏 비아냥을 베어 문 입술을 움직였다.
“아델리아 경의 의식은 아마 불가할 겁니다. 여론이 아델리아 경을 향해 동정을 표하고 있으니.”
“그럴 순 없을 게야. 벌써 다들 일족들은 마음을 굳혔으니.”
“그 마음을 다시 돌리는 게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는데요.”
“뭐라?”
여 보라는 듯 허리춤에 차여진 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토리노는 그 어느 때보다 더없이 서늘한 음성을 흘려보낸다.
“고작 가짜 보검을 두고 위악을 떠는구나, 페치오.”
북풍이라도 몰고 올 것같이 매서운 눈빛 역시 그러했다.
“하렌이 보검을 얻고서도 왜 이제껏 침묵했겠나.”
“그게 무슨-”
“그대의 욕망이 그대의 눈을 멀게 만들었구나. 이리 하찮은 수에 빠져들 줄이야.”
“하렌 그자가 그럼 가짜 보검을 두고 후작을 도왔다? 그걸 믿으란 말인가. 지금.”
“……그대와 다른 이들이 같다 여기지 말게.”
“그럴 리가 없어. 분명 내가…….”
내가 확인을 했다고.
하이가의 보검은 모르스의 힘에 부서지지도 금이 가지도 않는다. 그래, 몇 번이고 직접 점검하지 않았던가. 확신이 깃든 눈을 들어 올린 페치오 앞으로 다시금 그의 심중을 혼란케 하는 문장이 던져진다.
“허나, 그 보석은.”
“뭐.”
“검의 중앙에 박힌 보석 말이네.”
낮게 흘러들어 오는 말에 자연스레 페치오의 시선은 처음 영롱한 자태가 무색하게 자잘한 금들이 그어진 보석에 닿는다.
“그저 장식일 뿐이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어둠에 먹힌 눈은 대답 대신 그날의 밤을 떠올려 본다. 그를 밀쳐낸 엄청난 힘과 리오의 손에서 번뜩이던 검. 그 가운데에서 광휘롭게 빛나던 보석을.
“……진짜는 어디 있지.”
지금 그의 손에 쥐어진 것과는 차원이 다른 빛깔의.
“진짜는 어디 있나.”
“……오로지 후작만이 알겠지. 그날, 그 화재에서 살아남아 모든 걸 가슴에 아로새긴 아이니.”
***
자매. 자매라니.
난데없이 들이닥친 황제의 기사들에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침착하게 행동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별의별 일들이 다 벌어지기도 했고 이 정도 상황은 예상 못 한 바는 아니었으니.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선언과도 같은 문장은 흐트러짐 없이 이어지던 공작저의 하루에 파장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황제께서는 공녀와 아델리아 경이 친자매일 수도 있다 여기시어-”
그 말도 안 되는 가설에 황제가 손을 들어 주었단 말인가.
이복 이모와 조카도 아니고 배다른 자매도 아니고, 무려 친자매.
삼류소설도 그것보단 낫겠다. 벼락과도 같은 황제의 전언을 전한 기사들 앞에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성난 낯을 올렸다. 네루다의 증언도 그들에게 효용이 없었는지 말이다. 이건 필시 공작가를 음해하려는 자들의 음모다, 항변하던 그들은 기사가 나직하게 던진 문장 앞에 둔기로 한 대 얻어맞은 듯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공작의 작위를 무기한 박탈한다.
“추후 조사가 더 진행될 때까지만 말입니다.”
짤막하게 덧붙인 기사의 문장에도 얼어붙은 그들의 동작은 변함없었다.
“공작님.”
여봐라는 듯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공작의 방을 지키고 있던 황실 소속 기사의 눈이 가늘어진다. 내실로 들어서는 사용인은 이를 본체만체할 뿐이었지만. 찻잔을 얹은 쟁반을 들고 제 주인이 서 있는 창가 옆 협탁으로 향하는 발칙한 사용인을 쫒으며 기사는 입술을 짓이겼다.
공작이라니. 그리 주의를 주었거늘.
엄연히 작위를 박탈당한 시각부터, 공작가의 사용인들과 기사들의 미묘한 대치는 분초를 다투며 계속되고 있었다. 대다수의 기사들은 공작가 사용인들의 거센 기세에 그저 이를 암묵적으로 방관하는 듯했으나 그는 조금 달랐다. 고지식한 기사는 제게 주어진 원칙을 고수하려는 듯 시종에게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그럼 더 찾으시는 게 있다면 다시 불러 주십시오, 공작님.”
내실의 공기를 갑갑하게 만들 정도로 거구의 기사가 뿜어내는 경고를 사뿐히 지르밟은 시종은 평소보다 기운찬 목소리를 공작에게 건넸다. 곧 진실은 다 밝혀지고 저 오만방자한 기사들은 모조리 혼쭐이 날 것이라는 기대가 그 음색에 실려 있었다. 그러자 다시 쏘는 듯한 눈길이 시종에게 닿는다.
시종과 기사. 소리 없는 결투가 날 선 공기를 흔드는 사이, 창문을 바라보며 서 있던 공작이 몸을 돌렸다. 무겁게 비껴드는 새벽의 햇살이 흩어진 고요가 도대체 무슨 사유인지 찾는 듯한 그의 표정을 역광으로 비추었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공식적으로 작위를 박탈한다는 점을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명령과 닮아 있는 문장이 발밑으로 떨어지자, 공작의 입술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또렷하게 내실 안에서 되울리는 웃음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허탈함이 그대로 배어 있다.
한 번 더 짧은 실소를 터트린 공작은 눈꺼풀을 들어 올려 간신히 이어 왔던 평정을 깨트린 기사를 직시해 본다. 빳빳하게 쳐든 고개와 자못 위압감을 풍기는 눈매가 미끄러지듯 그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황제의 명.
고작 기사다. 아무 뒷배 없이 저런 모습을 제게 보여 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저 오만방자한 눈은 황제가 보내는 무언의 선포인 셈이다.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공작이라 할지라도 그 뜻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빠져나갈 길은 없구나.
이번 판은 그의 완패야.
한 번 더 짧은 실소를 터트린 공작은 여전히 정갈한 자세로 앞에 선 각 잡힌 기사 쪽으로 보폭을 넓혔다. 바닥과 마찰하는 구둣발 울림을 따라 익숙한 단어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세이, 아델, 네루다.
베르니.
그 고귀한 가문을 지키기 위해 그가 버려야만 했던 숱한 세월들이.
지나치게 고요한 내실 위로 내려앉은 나직한 읊조림은 시종이 내온 찻물, 백합의 잔향과 뒤섞여 아스라이 내실에 흩어진다. 허망하게 사라지고 있는 그의 영광과 헛된 소망들처럼.
나의 베르니, 나의 고귀한 가문.
평생 일구었던…….
나의 베르니.
그러니 이게 끝이라면,
그가 갈 수 있는 길은 여기가 끝이라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해야지.
공작은 고개를 들어 마주 선 기사를 직시했다.
“황제께 마지막 청을 전해 주시오.”
내 딸을 보게 해 달라고.
***
“지원병을 요청할까요, 위원장님.”
다급한 기사의 목소리가 혼돈으로 뒤엉킨 항구로 스며들었다. 귀를 째는 비명 소리와 오싹한 전율이 일게 만드는 서늘한 공기의 기류가 그 문장 사이사이를 메꾸면서.
침묵이 길어지자 조급해진 기사는 염려가 담긴 눈빛으로 여기저기 속출하고 있는 부상자들과 잿빛으로 그을린 공간을 살펴 내렸다. 새파랗게 푸른 하늘 아래, 이와 어울리지 않게 펼쳐진 광경은 바로 페치오 위원의 폭주가 불러온 참극이었다.
실상, 페치오 위원의 근신과 토리노 위원장의 복권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긴 했다. 페치오 위원이 일족에, 모르타 위원회에 갖고 있는 야심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까. 허나, 그들이 간과한 것은 바로 그런 페치오 위원의 힘이었다.
한때 하이가의 재림이라 일컬어지던, 항구 하나를 박살 낼 정도의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진 힘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그가 사라진 자취를 따라 유독 짙은 그을음을 바라보며 기사가 옅은 한숨을 내어 쉬는 사이, 줄곧 침묵을 견지하고 있던 토리노 위원장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쫓아라.”
예상과는 매우 다른 낱말들을 입에 걸고.
“페치오가 가는 길 끝에 하렌 경과 후작이 있을 것이야.”
***
후작…….
낮은 중얼거림과 함께 사내 하나가 빠른 속도로 공간을 가른다. 물 흐르듯 유연한 몸짓이었기에 누구 하나 수상한 구석을 찾아내지 못했으나, 일순 번뜩거리는 눈빛을 보았다면 그가 자아내는 기이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뭇잎 사이를 파고든 빛줄기가 흐릿하게 나비치는 화상 자국 역시.
이 쥐새끼 같은 게. 감히 나를 가지고 놀아. 그것도 두 번씩이나.
가늘어진 눈으로 제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헤친 페치오의 눈에는 이제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깃들어져 있었다. 서슬 퍼런 기세가 묻어나는 걸음걸이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연신 위압감을 풍기며 이어지던 걸음이 향한 곳은 의외의 장소였다.
에오르테가의 본가, 크세라스 저택.
시야를 어지럽히는 청유리 색들과 몇 차례의 보수에도 사라지지 않는 짙은 탄내를 지나친 그가 주저 없이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모든 걸 다 집어삼킨 화마에도 굳건한 위용을 자랑하는 비밀스러운 지하실의 문이 드러난다. 아마 에오르테 가문의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사내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해 달려든 건 그가 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즘이었다.
“나도 반갑네, 하렌.”
이를 단숨에 제압한 페치오는 어둠 속에서도 유달리 도드라진 붉은 눈을 향해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뒤틀어진 팔이 불편한 듯 잔뜩 미간을 일그러트린 하렌은 토혈하듯 말했다.
“……의원만 부르게 해 줘.”
습습하게 풍겨 오는 바닥의 습기 속으로 흩어지는 사내의 음성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벌써 며칠째 의식이 오락가락한다고.”
모르헤 기사단장에 걸맞지 않은 간청에 픽, 웃음을 흘린 페치오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후작이다.
“그 애는 그리 쉽게 죽지 않아. 꽤 질긴 목숨이거든.”
그때도. 지금도.
“페치오!”
자조 섞인 덧붙임에 하렌의 눈에서 불티가 일었다. 어느 전장에서도 볼 수 없는 낯이었다. 그런 그의 생경한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페치오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세상일이란. 끝없이 놀라운 일들로 가득하구나. 심상한 감상을 곁들이며 페치오는 입술을 움직였다.
“뜻밖이야. 자네가 누굴 위해 그리 몸 바칠 이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말이야. 어쩌면 그래서였어. 경이 가지고 있는 하이가의 보검이 진짜라 쉬이 믿은 건.”
“그건-”
“날 속이고도 무사할 성싶었나, 하렌?”
고저 없는 음성과 달리 페치오의 낯에는 더는 온기 한 점 묻어나지 않았다. 팽팽하게 서린 노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검은 눈 또한.
목덜미를 간질이는 흐트러지는 호흡, 숨이 막힐 정도로 죄여 오는 밀도 높은 공기. 바닥 위에 자욱하게 깔린 것도 모자라 새까맣게 사방에 피어오른 검은 연기에 하렌의 동공 위로 두려움이 차오르기 시작할 즈음, 서늘한 시선으로 이를 일별한 페치오는 당연한 수순처럼 바닥에 쓰러진 후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라 작은 충격에도 곧 명을 달리할 것처럼 보이는 사내에게. 다급한 소리가 공기를 찢은 건 그때였다.
“후작은 알지 못하네! 그대도 알잖나. 누군가를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거친 호흡 사이로 흘러나온 음성은 끊어질 듯 조급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네, 페치오. 후작이 아주 진귀한 보석을 얻었다면, 그게 누군가를 지킬 힘이 있는 거라는 걸 알았다면 누구에게 주었을 것 같나.”
메아리치는 소리에 페치오의 움직임이 둔중해지자, 하렌은 다시 한번 쐐기를 박듯 입술을 움직인다.
“누구에게 주었을 것 같냔 말이야!”
아델리아 경.
깨달음을 얻은 붉은 입술 위로 익숙한 낱말이 떠오를 즈음, 굉음과도 같은 소음과 함께 높은 고성이 얼어붙은 적막을 찢어 내렸다.
“찾았습니다!”
***
“저를 부르셨다고요.”
공작의 내실에 내려앉은 아델의 음성은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원수의 몰락을 목전에 둔 이답지 않게, 혹은 곧 몰락할 아비를 코앞에 둔 이답지 않게.
생각을 읽을 수 없어. 그 마음이 향하는 방향 역시 가늠할 수 없지.
존경해 마지않았던, 그리하여 숱하게 보고 가슴에 새겨 왔던 조상들의 초상화가 딸의 인영 위로 겹쳐지자, 초췌하던 공작의 얼굴 위로 벅찬 충일감이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철혈의 베르니.
감히 그 칭호를 입에 담는 순간, 아까와는 조금 궤가 다른, 감추지 못한 감정으로 혼탁해진 음성이 공간을 흔든다.
“후작님은 어디 있습니까.”
찻잔을 움켜쥔 공작의 손에는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힘이 들어가고 낯은 차게 식는다. 그랬지. 저 애가 이 판을 만든 까닭은, 평소보다 더욱 움직이는 연유는 그자 때문이었지. 그제야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공작은 허탈한 웃음을 그렸다.
고작 사내 하나. 유약하기 짝이 없는 나약한 마음.
그게 아델의 발목을 잡고 말 거라는, 그리하여 그처럼 이리 스러지고 말 거라는 예감은 일순 더욱 강렬해진다.
단 한 번의 실수를 했다.
수십 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그를 이리 나락으로 떨어트린 것은. 그 단 한 번의 실수였다.
그것이 억울한가?
피식, 웃음을 흘린 공작은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 결단코.
그것은 그의 실책이었어. 언제고 대가를 치르리라 각오하고 있었다. 물론 생각보다 다소 허망하고 예상치 못한 방향이긴 했어도 말이야. 어리석은 자들처럼 제가 지은 잘못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하릴없는 시간을 소요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알려 주고 싶었지.
그 한 번의 실수가 저를 이리 만들었다는 것을. 이 자리는 그만큼 위태롭고 또 위험하다는 것을. 항시 공작가의 주인이 보일 작은 틈을 노리고 있는 자들이 사방에 깔려 있으니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걸 말해 주려 했지.
이런 허망한 실수는 그의 대에서 끝나야 하기에. 그의 후계자는, 장차 이 공작가를 이끌어 갈 저 아이는 그보다 더 나은 이가 되고 닿을 수 없는 천공까지 치솟아야 하기에.
방금까지 차오르던 기꺼운 마음이 지워진 자리에 남은 감정들을 약간의 실망과 질책이다. 이를 오롯이 드러내는 눈을 들어 올려 공작은 딸을 직시해 본다.
“감정을 숨겨. 모두에게 네 약점을 알릴 참이냐.”
“……헛소리 그만하고 대답해.”
“아델.”
“어디다 숨겼어요. 지금이라도 말해 준다면 청원이고 모두 없던 일로 하겠어요.”
여전히 듣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에오르테 후작.
아델에게 그 이름이 기어코 장애물이 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방관한 것은 그게 제 딸을 자극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자신했으니까. 앞으로 더 많은 시간들이 그와 아델에게 있으리라 여겼으니까.
허나, 이젠 다 끝이지.
앞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 속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셈해 보며 공작은 감았던 눈을 들어 올렸다.
그에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그리하여 그 세월 속에서 저 아이가 조금 더 단단해졌으면 좋았으련만. 그건 모두 이룰 수 없는 무망한 희망이니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일 수밖에.
“난 네게 기회를 줬다. 그걸 놓친 건 너야.”
길을 잃어라.
“그러니 대가를 치러야지, 아델.”
그 사내에게 향하는 나약한 마음 또한.
“그래, 내가 네 고귀한 후작을 망가트렸어.”
돌아갈 수도, 돌아가지도 못한 채로.
그 길을 잃음으로써 너는 네 길을 찾게 될 것이니.
***
“이 미친…….”
끝낼 수 있다.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이 비탄도 자괴감도 모조리.
다를 것 없어. 이미 피로 물든 손은 더럽힐 대로 더럽혀져 진창 같은 바닥 속을 뒹굴고 끝 모를 수렁 속을 헤매고 있으니.
허니, 두려울 것도 망설일 것도 없다. 그래야만 했고 그게 당연한데. 그런데…….
왜일까.
여전히 손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은.
“나약하고 또 어리석구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온갖 사념들로 머릿속이 엉켜드는 사이, 퍼런 혈맥이 도드라진 손에 무심한 시선이 와닿는다.
“후작의 죽음을 감내할 용기도 없는 주제에 날 베지도 못하다니.”
그의 손아귀에 잡힌 팔을 비틀어 빼내는 것으로 방만하기 짝이 없는 중얼거림을 무시한 나는 부러 날 선 어투로 말을 이었다.
“입 닥치는 게 좋을 거야. 이번에는 제 명에 살아가지 못할 테니까.”
“글쎄,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말이야.”
고결한 성인도 마다하지 못할 속된 유혹,
“내가 보기엔 너는 또 허망하게 나를 놓아주고 차게 식은 후작의 몸뚱아리를 부여잡고 울게 될 것 같구나.”
입술을 타고 흐르는 달콤한 속살거림.
“네 의식이 진행된다는 걸 알고 그자는 내게 찾아왔지. 무릎을 꿇고 네 목숨을 애걸하며, 우습기 짝이 없더구나.”
“어딨는지나 말해.”
“어디 있을 것 같니, 아델.”
그 모든 것들을 가로지르는 공작의 음성은 다정했다.
“청원의 증인으로 에오르테 후작을 신청했다. 그래, 썩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 그게 내 심기를 건드린 게 문제지만.”
“……도대체…….”
“난 그저 살려 두려 했어. 그자에게 딱히 나쁜 마음은 없었다고. 헌데, 자꾸 이리 사사건건 내 앞길을 가로막으니 내가 어찌 더 자비를 베풀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
공작이 내뱉은 날 선 문장이 회색빛 눈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혼돈과 떨림. 그리고…….
분노.
그 눈동자에 일어난 파문을 바라보며 공작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띠었다.
“어리석구나, 아델. 나를 쓰러트릴 기회는 네게 수없이 많았어. 그걸 놓친 건 너야.”
분노로 가득 찼던 눈에는 이제 혼란스러움이 비낀다.
“이 저택에 머물던 그 나날 동안, 너는 몇 번이고 네 목에 칼을 들이밀 수 있었다고. 그런데도 날 살려 두었지.”
“……입 닥쳐.”
“나약하고 나약한 내 딸.”
부드러운 몸짓으로 딸의 손을 제 목덜미로 이끈 공작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여린 손마디에 가장 고귀한 검을 쥐여 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가올 여명을 맞이하여 어떤 고행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순교자의 것처럼. 밤의 어둠에 감싸인 눈은 빛을 잃고도 무구히 반짝거리며.
“내가 경고했잖니. 네 그 나약함이 소중한 것들을 모두 앗아가 버리고 말 거라는 걸.”
나직이 흘린 중얼거림에 끝내 잿빛 눈이 폭발하고 만다.
“입 닥쳐!”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과도 같은 파열음. 은안 위로 내려앉은 지척도 분간되지 않게 짙게 깔린 어둠. 아수라장인 상황 속에서 여린 손마디가 제 숨통을 죄여 온다. 그가 고대하고 또 고대한 대로.
역시.
어린 후계자의 번쩍거리는 검을 보며 공작은 흥분으로 차오르는 눈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널 날 닮았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그래서겠지.
결국 이리 검을 뽑게 되는 건. 우리는 바라는 것이 있으매, 결코 주저하지 않을 테니.
이제 저 애는 감히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위대한 공작가의 주인이 될 것이다.
깊고 짙은 밤을 건너 나와 같은 빛깔이 되리라.
나의 걸작.
***
“아직도 소식이 없는가.”
저물어 가는 태양이 언덕에 걸린 시각, 창 너머에서 기어들어 오는 어둠을 바라보며 토리노는 조급한 음성으로 집무실을 짓누르는 침묵을 깨트렸다. 페치오 위원을 뒤쫓아 기사들이 떠난 지 꼭 반나절째, 다섯 번째 되풀이되는 물음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뒤따르는 보좌관의 대답 역시 마찬가지로 다섯 번째 반복되고 있었다.
옅은 한숨을 내어 쉬며 토리노는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기 위해 내실을 거닐었다. 페치오가 향하는 길 끝에 분명 후작과 하렌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제아무리 냉철한 자들도 절박해진 이들은 실수를 하고 마니까. 그리 판단했기에 그를 자극했지. 그의 폭주로 인한 피해가 어마어마할 것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엉망진창이 된 항구와 테비온의 치료실을 가득 채운 부상자들을 떠올리자 토리노의 한숨은 더욱 깊어진다.
그러니 후작은 나타나야만 한다.
그 무고한 희생을 헛되게 만들지 않으려면. 그래야만 해.
아델리아 경.
아니지, 이제는 공작가의 공녀가 될 그녀를 위해서도.
다시 한번 힘주어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은 토리노는 반드시 후작을 찾아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를 되새겨 본다.
아델리아 경.
제국을 뒤흔든 공작가의 파렴치한 패륜. 평생을 속으로 삼켜 왔던 그 이야기를 구태여 지금 터트린 까닭을 모르지 않는다. 후작을 찾으려 하는 거겠지. 세간의 이목을 이용하여 말이다. 그 목적에 걸맞게 청원을 연 그녀는 지금껏 잘 견뎌 왔다.
허나, 언제까지 그 침착함을 견지할 수 있을까.
청원에 새로운 증인이 나타나고 뒤바뀐 판 속에 결과가 어느 정도 가늠될 지금까지 여전히 후작은 나타나고 있지 않아. 제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자라 하더라도 속이 타들어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모든 걸 잃은 그의 기사에게 유일한 세상이 된 사내마저 앗아갈 정도로 신이 잔악하지 않으리라고 그는 믿고 싶었다.
그러니 페치오, 이만 이 길고 긴 싸움을 끝내 주오.
아델리아 경이 그댈 직접 찾아 나서 돌이킬 수 없는 밤을 건너기 전에.
내실에 간절하게 흩어지는 바람이 끝내 이루어진 걸까. 고대하고 또 고대하던 소식이 보좌관의 가쁜 음색을 타고 집무실에 울려 퍼진 건 그 찰나였다.
“후작을 찾았습니다!”
믿기지 않는 소식에 토리노가 그저 멍하니 동공을 여닫고 있자, 보좌관은 마저 설명을 이어 갔다.
“에오르테 본가의 지하실이었습니다. 원체 크세라스 저택이 노후된 곳인 데다가 워낙 감춰진 곳에 자리한 장소라 아무도 찾지 못한 듯합니다.”
“후작과 하렌의 상태는.”
“다행히 페치오의 폭주 전에 후작과 하렌을 발견하긴 했습니다만, 후작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상태가 좋지 않다. 매사에 낙관적인 보좌관마저도 그리 말할 정도였으니,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인 듯했다. 허나, 그 정도는 예상했던 바. 원체도 몸이 좋지 않던 후작이었고 그가 두문불출한 지 시간이 꽤 소요되었으므로.
그러니 이 정도면 큰 성과야.
주체 못할 기쁨으로 보폭을 넓혀 내실을 벗어나는 토리노의 입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아델리아 경에게는 연락했나. 언제쯤 도착한다지?”
“예, 황제의 명으로 공작저에 향했다 하여 그쪽으로 전령을 보냈습니다. 헌데…….”
변수는 예기치 않은 부분에서 찾아왔다. 막힘 없이 이어가던 어조는 길게 늘어지고, 뒤따르던 걸음은 멎었다. 예사롭지 않은 기세에 토리노가 시선을 돌리자, 공간을 밝히는 휘황한 불빛 아래에서도 흐릿하기만 한 보좌관의 낯빛이 그 끝에 있었다.
수십 년 이 자리에 있다 보면 말이다. 생각도 하지 못했던 능력이 발달되곤 해. 가령, 보좌관의 표정 속에서 어떤 종류의 소식인지 가늠할 수 있는 그런.
그러니까 이건 예사롭지 않은 일이구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는 선득한 예감과 함께 토리노는 다시 한번 보좌관을 채근한다.
“말해 보게.”
결연한 눈빛과 함께 보좌관이 고개를 든 건 그로부터 한참을 망설인 뒤였다.
“……위원장님.”
공작이 죽었습니다.
역시나 이변은 없었다.
***
치료실에 누워 있는 후작을 내려다보는 토리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심란했다. 비단, 눈앞에 있는 이의 몰골이 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하기 그지없던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입술을 타고 흐른 옅은 한숨에 맞은편 유리창이 부옇게 흐릿해진다. 마치 그들에게 펼쳐진 앞날들처럼.
‘자결인가.’
하얗게 피었던 성에꽃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더욱 또렷해진 창 너머의 풍경이다. 바람에 흔들리며 가지를 떨구는 고목과 언덕 위로 조금씩 기어들어 오는 밤의 어둠. 그리고…….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허나…….’
그곳을 가로지르는 은빛 머리카락.
‘아델리아 경이 그곳에 있었답니다. 전령이 도착했을 때는 공작은 이미 숨이 멎은 뒤였고요.’
토리노는 그 은발의 주인이 말에서 내려 치료실을 향해 보폭을 넓히는 것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흐트러진 머리칼과 앙상한 팔목. 마치 이 테비온에서 태어난 것 같은, 어쩌면 평생 벗어나지 못했을 것 같은. 토리노는 눈 안으로 미끄러져 담기는 상에 지그시 눈꺼풀을 감아 내렸다.
공작을 죽게 만든 건 아델리아 경인가, 아닌가.
‘그럼 모르스의 힘에 의해 죽게 된 것인가.’
후자면 더없이 다행이요, 전자여도 저 아이를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 역시 확실치 않습니다. 공작의 몸에 검에 찔린 상흔이 남아 있다 합니다.’
누가 저 아이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다만…….
기어코, 기어코…….
그 긴 밤을 건너고야 말았구나.
***
“이곳이야, 아델리아 경.”
후작이 거취하는 치료실로 나를 안내하는 토리노의 낯은 어느 때보다 더 딱딱했다. 설핏 두려움이 묻어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혹여 있을 내 폭주를 염려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후작의 몸 상태가 심각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내 몸과 닿을세라 멀찍이 비켜선 그를 지나쳐 나는 치료실 안으로 들어섰다.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후작이 있는 그곳으로. 핏기 없이 창백한 살갗과 메마른 버들잎같이 앙상한 몸은 그간의 고통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었다. 청원을 신청하고 모두가 그 열기에 열광하고 있을 때, 그는 이리 사위어 갔겠지. 네루다가 나타나 제국을 뒤흔들었을 때, 그는 이렇게 죽어 가고 있었겠지.
궁금했어.
티케가 나를 축복한다면, 그리하여 그 축복이 네루다를 불러 말도 안 되게 상황을 급변시켰다면 어째서 그는 나타나지 않았을까.
내가 바라고 바란 것은 그고 이 모든 것은 그를 위해 만들어진 판이었는데.
어째서 그보다 네루다가 먼저 나타난 걸까.
궁금했어.
그저 우연이었던 걸까.
‘티케는 이제 그대의 염원을 따를 테니.’
아니면 나도 몰랐던 내 깊은 소망이었던 걸까.
헛웃음을 흘린 나는 시선을 떨궜다. 후작의 쇠잔해진 손을 맞잡은 내 것에는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채였다.
공작의 피가.
‘후작님을 찾았습니다, 아델리아 경……!’
그 또한 운명의 장난이라기엔 지나치게 절묘했지.
공작가에 전령이 도착했을 때, 이미 모든 게 다 끝난 뒤라는 게. 공작의 숨결이 차갑게 식은 채로.
그래, 그것 또한 참으로 이상해.
운명의 장난일까. 티케의 축복일까.
죽어도 그 답을 찾지 못하겠지만, 중한 것은…….
평생 그 물음이 내 뇌리를 떠돌 거라는 거야.
길을 가다 문득, 잠에 들다 문득, 그렇게.
공작의 숨통을 끊은 검,
‘그래, 널 날 닮았어.’
그 검에 힘을 실은 건 나일까. 공작일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머릿속에 떠도는 그 물음과 마찬가지로.
“후작님.”
티케의 각인은 저주요,
“……저요.”
결코 축복이 될 수 없으리라.
“아무래도 괴물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허공으로 흩어지는 소리는 그래서 더욱 허망하다.
***
“사고사로 마무리 짓게.”
단호한 결론이 황태자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공작의 죽음과 아델리아 경. 막 토리노 위원장이 그간의 사태에 대해 보고를 한 직후였다. 일각의 지체도 없이 터져 나온 판단에 그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사이, 황태자는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 아까보다 더욱 높은 소리로 사안을 매듭지었다.
“어차피 확실하지도 않다 하지 않았나. 그러니 그럴 수 있잖아, 충분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유일한 목격자인, 전령이 목격한 현장은 아델리아 경이 검으로 공작을 벤 그런 결정적인 장면은 아니었다. 고작 바닥에 쓰러진 공작과 검을 든 아델리아 경. 물론, 전후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사건의 얼개였지만, 황태자는 구태여 그 수를 택할 생각은 없었다. 중요치 않아. 그녀가 패륜을 저질렀건 아니건.
아델리아.
그 이름은 이제 제국에 단 하나뿐인 공작의 주인을 칭하는 단어가 될 것이고, 구귀족과 신흥 귀족들의 분열과 충동, 걷잡을 수 없이 치닫는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묘책으로 자리할 것이니.
“책임지고 이 일을 정리하게, 토리노.”
절대 아델리아 경이 엮이지 않게.
힘주어 덧붙인 황태자의 말에는 상대를 압도하는 위압감이 서려 있다. 그리하여 곧, 토리노와 황태자. 은밀한 내실에서 둘이 주고받은 결론은 온 제국에 퍼지게 된다.
베르니가의 공작이 명을 달리했다.
스스로 제 목숨을 끊으며.
***
공작이 자결했다.
단순명료한 한 문장으로 끝날 말을, 제국에 파다하게 번진 그 말을 엘몬트는 몇 시간째 질질 끌고 있었다. 그리 수다스러운 성정은 아니었다만, 어쩐지 오늘따라 적막이 주는 정체 모를 불길함이 그의 목을 죄여 오는 탓이다.
그럼에도 공허하게 어딘가를 배회하는 은안은 변함이 없어 저도 모르게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속으로 흐트러진 호흡이 스며들었다.
페치오는 모르타 위원회에서 파문당하고 재판을 받을 것이다, 이 일을 마저 논의하러 황태자께서 황궁으로 아가씨를 부르셨다, 그곳에서 공작가의 후계 계승 절차를 마무리 짓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그가 긴 설명을 늘어놓는 동안에도 시종이 내온 찻잔을 들어 올리는 사이에도, 침구를 정비하라 명을 내리는 와중에도 아가씨는 어떤 동요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럼, 그건 그저 마지막 발악이었던 게지.
공작저를 뒤흔들었던 폭주가.
코 밑에 손을 들이밀어 정녕 숨을 쉬고는 있는 건가 살피려던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 엘몬트는 대신 머릿속으로 지난번 만남, 칼날이라도 박힌 것처럼 매섭던 눈매를 덧그려 본다.
그랬던 눈이.
다시 내리뜬 시야로 들이찬 잿빛 눈은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듯 허물어져 있을 뿐. 불쑥 맥락을 잃은 문장이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것은 바로 그 눈 탓이리라.
“사람은…….”
저 공허한 눈에 뭐라도 피어올랐으면 하는 생각에.
“아가씨,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무슨 일이 날 것만 같아서.
“아가씨는 그저 지독한 실수를 하신 것뿐이에요. 그걸 누구도 탓하지 않을 겝니다.”
공작의 자결로 끝난 사안에 보다 복잡한 상황이 감춰져 있다는 것을 엘몬트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잘 알아. 저 때문에 어그러진 일을 두고 사람들이 얼마나 깊은 자괴에 빠지는지.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안다. 그리하여 그는 더욱 목을 높였다.
“누구라도 그리 생각했을 거예요. 후작님을 납치한 게 공작일 수 있다고. 우린 소중한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하면, 분별력을 잃게 되니.”
돌아온 것은 새벽녘의 바람을 닮아 스산한 소리뿐이었지만.
“……실수…… 실수라.”
만약 실수가 아니었다면 어찌 되는 거지, 엘몬트.
석양이 비껴든 내실을 가로질러 토해 낸 문장의 파편들이 바닥 위로 부서져 내렸다. 무어라 할 말을 잃은 엘몬트를 침묵하게 만들고, 숨소리조차 소음처럼 느껴지는 고요함으로 공간을 채우며.
“농이네.”
전혀 우스개처럼 느껴지지 않은 문장이 그 기괴한 분위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
“경?”
먹먹한 귓가를 두드리는 음성은 세찼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나.”
사념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다시 한번 또렷하게 울려 퍼지는 음성에 흐릿한 의식을 다잡았다. 시선을 들어 올리자, 안개를 머금은 듯 짙게 가라앉은 금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그대는 공작가의 공녀요, 절차대로 공작가의 주인은 이제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
공작의 죽음에 대한 심상한 조의를 표하던 황태자가 막 작위 계승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참인 듯했다. 헛웃음이 절로 흘러. 그와의 첫 만남이 루트비아 백작의 장례, 작위를 계승하던 날이라는 게 떠오른 탓이다. 그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작위를 막으려던 이는 이제는 한시라도 빨리 나를 공작으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구나.
사람 일이란 정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어.
“원로들 역시 그대가 이제껏 공작가의 양녀로서 행해 왔던 일들을 모르지 않아 쉬이 동의했다네. 게다가…….”
공작의 유서가 발견되었어.
그래, 지금처럼.
눈을 깜빡이자, 황태자는 친히 내 앞으로 서신 하나를 내밀었다. 공작가의 인장이 박힌 종이에는 수려한 필체가 새겨져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공작의 글씨체였다.
“그댈 후계자로 지목했더군, 자결 직전 원로들에게 서신을 보낸 모양이야. 잘되었네. 이걸로 세간에 떠도는 헛헛한 말들을 잠재울 수도 있고 이제 그 누구도 그대의 정당성을 책잡지 못할 테니.”
순백의 공간 위를 떠도는 글자들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칼날처럼 내 눈을 할퀴는 서체들을.
[-후계자로 아델리아 베르니, 공작가의 적장녀를 지목하는 바이다.]
그 낱말들이 품고 있는 숨겨진 뜻을.
‘나의 걸작.’
그날의 밤을 떠올리자 절로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와.
끝까지.
끝까지…….
나를 이리 옭아매는구나.
그래, 나는 졌다. 나는 졌어.
내 어찌 당신을 이길 수 있으리.
가문의 앞날을 위해, 더없는 찬란한 영광을 위해 제 목을 거는 데 주저하지 않는 당신을. 내 어찌 이길 수 있으랴.
그러니까 이건 당신이 만든 마지막 판이었고 나는 이제 그 위에서 멈추지 않을 춤을 춰야만 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그리해야만 한다면, 돌아갈 길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지독한 죄악 속을 헤맬 시간뿐이라면,
“서대륙의 치료술사들. 황제나 황실의 후계자가 상흔을 입었을 때만 오로지 나타난다던 이들을 들어 본 적이 있지요.”
그래, 좋다. 기꺼이 그 길을 가리라.
“그들을 불러 줄 것을 요청합니다.”
당신이 생을 걸고 지키려고 한 게 있듯이, 내게도 그런 것이 있으니.
공간에 내려앉은 문장에 황태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후작 때문인가. 허나, 서대륙의 치들은 그리 쉬이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런 사내를 향해 나는 살얼음이 낀 호수처럼 서늘하고 위태로운 낯을 들어 올려.
“제 조건은 그게 유일합니다. 타협도 조율도 없을 겝니다.”
“경! 내가 그대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걸 잊지 말게. 공작의 죽음을 두고 이는 수런수런한 소문들을 그저 내버려 두었을 수도 있었어.”
“자비…… 자비라. 저 말고는 대안이 없으셔서 그런 게 아니고요?”
그저 위악을 떨려던 황태자는 급소를 찔리고는 침묵했다. 그런 그를 직시하며 마저 목을 울렸다.
“성인도 되지 않은 공녀가 공작가의 뒤를 이을 수는 없고 공작 부인이 이를 대신 관리하는 것 역시 불가합니다. 신흥 세력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요. 선택하시지요, 전하. 저를 취함으로서 제국의 평안을 찾을지 아니면 정계를 휩쓸 끝없는 분란을 그저 지켜만 보시만 하실 건지.”
내실에 울려 퍼지는 음성은 한 톨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아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타협도 조율도 없다. 그 말이 그저 허풍은 아니었음을 그제야 직감한 황태자는 묵지근한 둔통을 몰고 오는 관골을 문지르며 말했다.
“……알겠네, 폐하께 청해 보지.”
***
서대륙의 치료술사들이 페라비 별장에 나타났다. 일곱 개 제국의 황제와 그 후계자가 상흔을 입었을 때만 오로지 나타난다던. 에오르테가에 닥친 비극을 위로하기 위해 황제가 하사한 선물이었다. 한 조각 걸린 서편 하늘도 붉게 물들어 갈 시각, 금빛으로 치장한 이들의 손에 후작의 생을 갉아먹던 상흔들이 멎었다.
원체 깊은 상처라 환부를 도려낼 수 없으니, 온전하지는 못할 거라는 경고도 페라비 별장에 찾아온 기쁨을 지워 낼 수 없었다더라.
후작이 의식을 차리자 더욱 그러했지.
그렇게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해가 사라진 시각에도 페라비 별장의 밤은 찾아오지 않았다. 저택 입구에 걸려 있는 등불들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사위를 이지러트릴 듯 밝히고 있었다. 어둠을 사르며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는 저택. 들창을 열어젖힌 채로 차창 밖을 응시하고 있는 저택의 주인에게로 다가선 것은 그와 꼭 같은 눈을 한 인영이다.
“삼촌.”
짙게 가라앉은 그 눈에는 염려가 깃들어져 있다. 그 소리에 그제야 누군가의 기척을 알아차린 후작이 몸을 곧추세우는 사이, 테오는 활짝 열린 창을 닫으며 후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잠시 눈 좀 붙이세요, 제가 누나가 오면 곧장 알릴 터이니.”
후작은 대답 대신 굳게 닫힌 창턱을 매만진다.
“조금 더 있다가. 오늘은 어쩐지 그 애가 올 것 같구나”.
바람의 결을 타고 흘러오는 내음이 그러해…….
간기가 엷게 배어 있는 공기에는 차마 터트리지 못하고 삭이다 함몰되어 가는 아픔이 묻어났다. 테오의 깊은 한숨이 내실에 차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후작의 시선은 선선한 기류를 타고 전해 오는 그 농도 짙은 내음을 따라 느리게 가도를 배회한다. 짙게 가라앉아 있던 눈이 싱그럽게 피고 그 위에 익숙한 상이 맺힌 건 그때였다.
그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아이였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내실에 들어선 아이는 기억 속의 것보다 더 수척해진 채였다. 말씨 역시 어딘가 모르게 딱딱해.
“한결 낫단다.”
그가 의식을 차린 후 이어진 두어 번의 짧은 만남, 그 속에서 아이는 줄곧 그런 태도를 견지했다.
“……얼마 후에 공작저에서 즉위식이 있을 겁니다.”
“수도에서 말이니.”
“예, 소소하게 진행할 테니, 오지 않으셔도 돼요.”
“……알았다.”
어딘가 모르게 위태로워 보이는 낯을 물끄러미 보던 후작은 차마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떨군다. 보드라운 바닥의 카펫 위에 흐드러지는 아이의 붉은 드레스 자락와 그 위를 수놓아진 공작가의 백합이 차례로 그의 시야를 흐렸다.
아델이 공작이 된다.
정신을 차린 그에게 엘몬트가 차분히 건네는 설명 중 하나는 그것이었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믿을 수 없는 그 말을. 그리하여 그 저의를 심히 의심케 하는 그 말을.
황제가 자비를 베풀어 에오르테가의 가주에게 서대륙의 치료술사를 보냈다, 그 문장과 마찬가지로.
과연 아이가 치른 대가는 무엇인가. 무얼 두고 어떤 대가를 감내하고 있는 것인가.
후작은 감히 묻지 못했다.
이토록 메마르고 형형하게 변모한 아이에게. 곧 스러질 듯 위태로운 아이에게.
차마 그 물음을 입에 올리면 이 아이는 영원히 멀어질 것만 같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날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리하여 그의 입술을 타고 흘렀던 건 늘 과거의 어느 날들이었지.
“기억하니, 아델.”
목덜미를 스치는 불길한 감각을 외면하듯 눈을 감은 후작은 반짝거리는 나날들의 추억을 떠올려 본다.
“그날 말이야. 숲에서 내가 잠들고 넌 책을 읽고 있었지. 내가 네 생일날 사 준 책을.”
눈부시게 흐드러지는 은발과 선연한 웃음소리. 모든 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던 그 시절의 날들을.
“기억나니, 아델? 무슨 책이었는지 기억나?”
카드마의 약초학.
“그래, 그 책이었어.”
후작은 반짝거리는 그 날의 추억을 떠올려 본다. 눈부시게 흐드러지는 은발과 선연한 웃음소리. 모든 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던 그 시절의 날들을. 그 날만을 기다렸다. 모든 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던 그 시절의 날들을.
허나, 다시 눈꺼풀을 밀어 올린 그 앞에 펼쳐진 건 메마르고 건조한, 도저히 살아있는 생물처럼 느껴지는 아이의 모습이다. 저 눈을 알아. 흐릿하게 번지는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뚜렷한. 그 눈이 싫었다. 아이 같지 않은 눈이. 그 눈에 빛을 심어주고 싶었지. 달빛보다 더 찬란하게 부서지는 은안이, 터질 듯 부풀어 올라 그를 담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런데…….
여전히 저런 눈이구나.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고 그게 어디서부터인지 후작은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것들뿐이야. 지금 저 아이를 할퀴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고 그리하여 저 애를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제가 아니기에. 후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다시 되돌아온 손에 걸려 있는 것은 유구한 세월 속에도 그 기세가 닳지 않은 날카롭게 제련된 검이다.
“이건 아무래도 네 것인 것 같구나.”
이불보 위로 내밀어지는 진귀한 검에 아이의 눈이 파릇 떨린다.
“이건…….”
“하렌을 속일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몰랐어. 그 보석이 모조품이었단 걸…….”
옅게 헛웃음을 흘린 후작은 눈을 들어 여전히 뜻을 알 수 없는 낯을 보이는 아이를, 그 아이의 옷깃에 달린 에메랄드빛 브로치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진짜 하이가의 보석은 다른 사람에게 가 있던 것 같아.”
“전…… 전 필요 없어요. 이런 거.”
되돌아오는 소리는 예상했던 문장과 같았다. 이미 아이 앞에 주어진 가문의 유구한 유산들은 그 여린 어깨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음이니. 그래서, 그래서다. 이 검을 기어코 저 작은 손에 쥐여 주는 건.
혹 그 버거운 무게에 기어코 저 애가 지치는 날이 온다면,
“받아 주련? 이 검이 항시 널 지켜 주는 걸 알아야…….”
그가 가진 것 중 가장 고귀한 것을 쥐여 주어 제가 얼마나 그에게 소중한 사람인지 상기시키리라고.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게야.”
***
“이제 시작인가.”
복도에 울려 퍼지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공작의 집무실에 대기하고 있던 가문의 관리인 중 하나는 앓는 듯한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내실에 번져 가는 여운 깊은 음성에는 희미한 두려움이 깃들어 있다. 그것을 신호로 여기저기서 토해져 나오는 땅이 꺼질 듯한 긴 한숨소리 역시 그랬다.
“제발 오늘은 좀 순탄하게 마무리되었으면 좋으련만.”
공작가의 주인이 뒤바뀐 지 어언 몇 개월.
소란과 동요 속에 멈춰 있던 저택은 어느 순간 익숙한 리듬 속에서 다시 맥동 치고 예상치도 못한 순간 갑작스레 찾아온 변화는 어제와 같은 하루로 그들의 삶에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거친 격류에도 세상은 다시 이어진다.
엄청난 이들을 몸소 체험한 관리인들의 격언이었다. 그럼에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것들 말이다.
“이에타 자작과 케이타 제국에 루트비아 광산의 광물들을 공급하기로 한 건 어떻게 되었지.”
사건은 공작이 던진 단조로운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잘,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공작은 모호한 답을 가장 싫어한다. 그 단순한 사실을 여태 깨닫지 못하는, 어쩌면 머리는 그저 장식용으로 들고 다니는 게 분명한 멍청한 치가 뱉은 대답에 삽시간에 사위는 고요해졌다. 탁탁, 사람 목을 수천 번은 더 땄을 가느다란 손이 무겁게 집무실 테이블을 두드리며 곧 다가올 전투에 서막을 열었다.
광물의 양은 얼마냐, 그렇다면 그 시기는, 부리게 될 인부의 수는.
흡사 심문을 하는 것과 같은 질문 세례에 루트비아 광산의 관리를 도맡던 이가 거의 졸도 직전에 다다르자, 공작의 서릿발 같은 눈은 이제 다음 타자를 향해 느릿하게 움직인다. 공작가 소유의 서쪽 숲과 영지민들의 토지세.
본디 기사라 그럴까.
그저 입 밖으로 내뱉은 낱말들조차 벼리디벼린 검과 같게 느껴지는 것은. 그렇게 그녀는 모두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고 나서야 내실을 벗어났다. 점차 시야에서 멀어지는 공작의 뒷모습 위로 관리인은 최근 세간에 자자한 그 문장을 혀끝에 굴려 본다.
백합이 만개한다.
그녀의 관할하에 공작가는 번영하리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또한.
***
“공작님, 잠시 후에-”
집무실을 나서자, 보좌관이 나를 뒤따르며 오늘 있을 일정을 짧게 보고했다. 오찬이 끝나고는 신흥 세력과의 회담, 오후에는 황태자와의 대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끝없는 회의와 회담. 계속해서 쌓여만 가는 일거리.
그 시간 속에 짓눌려 있던 내게 적막이 찾아온 것은 하늘에 무성하던 별빛들도 힘을 잃은 시각이다. 잠시간 그 고요 속에 몸을 맡기던 나는 무언가에 쫓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실을 벗어나 농도 짙은 어둠과 침묵이 넘실거리는 통로를 지나서. 그렇게 걸음이 멈춘 곳은 집무실. 햇살이 사윌 때까지 온종일 자리하고 있었던. 깊은 밤, 나는 잠을 청하는 대신 낯익은 내실에서 내일 있을 회담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자료들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그제야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아.
서류 위를 거니는 펜촉 소리, 차곡차곡 쌓여 가는 종이들이 맞닿아 만들어 내는 화음, 열린 창 너머로 간간이 불어오는 소란한 바람의 결. 그 소음의 세계로 망명하자, 뇌리에 살아 움직이는 생각들을 간신히 떨쳐 낼 수 있었다.
어째서 그보다 네루다가 먼저 나타난 걸까.
공작의 숨통을 끊은 검, 그 검에 힘을 실은 건 나일까. 공작일까.
그저 우연이었던 걸까. 아니면 나도 몰랐던 내 깊은 소망이었던 걸까.
사라지지 않고 남아 숨을 내쉬고 들이마실 때마다 폐부를 잠식하는, 그리하여 차오르고 차오르는 망령된 물음들을.
이 깊고 깊은 밤의 시간이 싫다. 그 속에서 잉태되는 적막이 싫어.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정적은 화인과 같이 새겨진 기억들을 쉬이 되살아나게 만드니까. 지금도 나를 집어삼키고 있는 이 생각들이, 기어코 꾹꾹 갈무리했던 물음들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니까. 외면하려고 해도 잊으려 해도 나를 잠식하는 질문들은 자꾸만 몸집을 불려 간 채로.
간신히 내가 뻐근해진 손을 내려놓은 건, 부유스레하게 밝아 오는 여명이 조금씩 창틈으로 스며들 즘이다. 그 신호로 말미암아 사용인들이 하나둘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저택은 긴 적막에서 깨어나. 그제야 내가 내어 쉰 안도의 숨이 그 부산스러움 속으로 스며들었다.
티케의 각인은 저주요, 결코 축복이 될 수 없으리라.
***
“점점 더 심해지시는 것 같군.”
공작저에서 돌아온 네루다는 옅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내실로 아스라이 흩어지는 문장에는 그의 깊은 고심이 묻어 나왔다. 때마침 식사 준비를 마친 에단은 테이블 위로 식사를 나르며 말을 받았다.
“공작 말이에요?”
“에단.”
엄중한 경고에 에단은 마지막 식사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말을 고쳤다.
“아, 뭐 그래. 공작님 말입디다.”
눈으로 한 번 동생을 흘긴 네루다는 물잔을 들어 올렸다. 공작가의 주치의로 다시 일하게 된 지 어언 몇 달. 정기적으로 공작의 건강을 확인하게 위해 공작저로 향한 네루다는 오늘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파리하게 질린 창백한 낯과 거무스름한 눈 밑. 한눈에 봐도 며칠간 잠을 청하지 못한 모습은 분명했다. 게다가 그뿐인가. 그사이 몸 역시 수척해졌는지 앙상하게 메마른 팔목이 오후의 햇살 아래 선연하게 도드라졌다. 지난번보다 확연히 심각해진 상태였다.
그가 다시 공작저의 주치의로 일하게 된 몇 달 사이 알아차린 사실은 하나다.
공작은 정상이 아니야.
더할 나위 없이 반듯한 생활을 이어 가며 공작가를 모자람 없이 운영하는 그녀였지만, 그것만은 확실했다. 요즘 공작은, 그래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은 무생물과 같달까. 총체적으로 난국이라 도저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를 공작의 몸 상태를 곱씹어 보던 네루다는 그저 짤막하게 문장을 마무리 지었다.
“아무래도 잠을 통 주무시지 못하는 것 같아.”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을 모르는 듯 마주 앉은 이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지만.
“원래 그래, 그 여자는. 잠도 자지 않는 것 같고 뭘 먹는 걸 본 적도 없다구.”
“에단.”
“아, 술. 술은 좀 좋아하는 것 같더라. 지난번에 한 번은-”
모락모락 음식에서 피어오르는 더운 김 때문일까. 아니면 산만 한 덩치에 여전히 아이같이 재잘대는 제 동생 덕일까.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이치던 근심들은 간단없이 계속되는 동생의 말에 씻은 듯이 사라지고 기어코 그 자리에 웃음이 찾아오고 말았지만. 그때처럼 말이다.
‘전부 다, 전부 다 세상을 떠났네, 형님. 형수님이고 아이들까지 전부 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지. 그때의 기분을 과연 세상 어떤 낱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시야는 부옇게 흐려지고 다가올 나날들은 암흑으로 짙어진 채였어. 다시는 이리 이야기를 나눌 수도 무언가를 먹을 수도 없으리라 여겼지.
허나, 삶이란 참으로 신기하지.
지금처럼, 음식 앞에 찰나의 순간 잊어버렸던 걱정처럼, 영원하리라 여겼던 감정들은 어느 순간 옅어지고 옅어져. 무한히 계속될 것만 같았던 고통 또한. 그에게 닥친 고난은 영겁의 세월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남을 것이고 문득, 문득 떠올라 그를 수런수런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하지.
그 말의 뜻을 네루다는 이제야 절감한다. 어쩌면 그것이 티케의 축복일 수도 있다는 생각 역시. 그 모든 기억을 아로새긴다면 우린 결코 남은 날들을 이어 가지 못할 테니까. 또 다른 기억을 덧칠한 자리를 내어 주는 빈 공간을 네루다는 그렇게 동생과 함께 다채로운 빛깔로 차곡차곡 채워 가고 있었다.
그리고 알아. 이런 낙관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다 마주 앉은 이 때문이라는 걸. 그러니 또한 알지. 오롯이 홀로된 자가 얼마나 쉬이 부서지기 쉬운지 말이지.
“공작님께는 아무도 없잖아. 그나마 있는 후작마저 몸이 성치 않고, 그것 역시 자신의 잘못이라 책하고 있으니. 그게 근심되는구나.”
에단이 눈매를 좁히고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낸 건 그때다.
“공녀가 있잖아.”
공녀. 공녀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부리는 치기와도 같은 단어에 네루다가 헛웃음을 치자, 에단은 단박에 반박을 시작했다.
“지금 저잣거리에 둘의 이야기가 얼마나 열풍인지 형님은 모르지. 사람들이 그 얘길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비의 학대 속에서도 빛나는 우애.”
마치 선전 문구 같은 문장에 네루다의 조소가 더욱 짙어진다.
티케의 각인자, 모르스 일족. 모르스의 현신.
그래, 분절된 낱말들을 이어 보면 극으로 만들기 꽤 재미난 얘깃거리긴 하겠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도 당연하지. 원체 공작을 뒤따르던 수식어가 많기도 하고 본디 군중들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가. 가슴 절절한 사랑의 노래와 극단을 오가는 감정들.
허나, 사람의 마음이 어찌 그리 간단하랴.
세상의 모든 것이 흑과 백. 어둠과 빛. 그리 쉬이 나뉘면 좋으련만.
제 마음도 모르고 열심히 열변을 토하는 동생을 바라보며, 깊어지기만 하는 네루다의 한숨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다.
그가 다시 공작저의 주치의로 일하게 된 몇 달 사이 알아차린 것이 또 하나 있어.
공녀.
공작의 병증과도 같은 상태가 유달리 심한 날은 바로, 공녀를 만나는 날이라는 거.
***
“먼저 혈액을 채취하겠습니다.”
익숙한 문장으로 사내는 운을 뗐다. 뒤이어 바늘이 푸른 혈맥을 제자리인 것처럼 파고들었다. 이제는 그 고통도 느끼지 못할 만큼 친숙해진 행위였다.
조사단이 공작저에 오기 시작한 것은 내가 작위를 계승하고 공작가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궤도에 돌입했을 때였다. 일전에 한 번 이곳에 방문한 적이 있던 이들은 이번에도 그때와 같은,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 다르기도 한 목적을 가지고 다시 공작가의 저택에 들어섰다.
‘공작님과 공녀의 분석.’
드문 일이리라. 한 핏줄을 타고난 두 자매가 다른 성질의 힘을 가지게 된 것은. 그러니 황실, 코르푸와 모르타, 너나 할 것 없이 공녀와 나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들에게 협조해야 하는 것 역시 제국의 신민이라면 응당 해야 할 도리고.
‘알겠습니다.’
허나, 그 말이 지금은 죽도록 후회스러워.
일렁이는 불빛, 혈관에서 벗어난 붉은 피. 짤깍대는 주삿바늘소리. 일각이 영원처럼 느리게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내실에는 감도는 건 무거운 침묵뿐이다.
“다 되었습니다, 공작님.”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조사단원이 몸을 비키자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는 이의 인영이 저무는 낙조 아래 선연해진다.
“다 되었습니다, 공녀님. 결과는 평소처럼 이틀 정도 걸릴 겝니다. 만약 이변이 있다면 그보다 더 빨리 연통드리지요. 또-”
채취한 혈액을 조심스레 상자 안에 담으며 조사단원은 몇 번은 더 했을 설명을 또다시 시작했다. 다음 혈액 채취까지 주의해야 할 점들, 음식과 수면. 하도 들어 이제 거진 다 외울 지경인 말을.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들이어서일까. 귓가에 닿는 건 조사단원의 길고 긴 설명들이 아니다. 옅은 숨소리, 휘장을 부풀리고 들이찬 바람의 결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조심스레 맞잡은 두 손이 치맛자락 위를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런 것들. 시야 귀퉁이에 자리한 인영의 정체는 점점 더 또렷해져. 금사처럼 하늘거리는 머리카락과 조금 탁해진 푸른 눈. 그리고…….
상복.
“불편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지-”
“알겠네.”
쉼 없이 이어지는 말허리를 잘라먹는다. 시선에 빼곡히 차오르는 새까만 상복을 보자 숨쉬기가 불편해져. 밤하늘과 같이 새까만 저 색이 내 목을 조이는 밧줄처럼 느껴진다.
처음 저 상복을 보게 된 건 당연히 공작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엄청난 추문과 제국에서 극도로 불결하게 여기는 자결. 장례에 참석한 이들은 극히 드물었고 그마저도 그저 차기 공작가의 후계자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한 이들뿐이었다.
침묵 속 사위가 소란해진 것은 그 애가 나타났을 때였어. 곧, 스러질 듯 위태로운 대부인과 함께. 발을 내디뎌. 제게 닿는 시선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꼿꼿이. 막힘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은 바닥에 깔린 검은 천을 융단으로 만들었고 그 애는 몰락한 왕국을 바라보는 망국의 황족과 같았다. 푸른 눈이 내 것과 얽힌 건 그때였다.
악을 쓰고 울고불고할 줄 알았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어. 공녀가 얼마나 공작을 아끼는지, 얼마나 이 불완전한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지 않았으니까. 헌데 그 애는 택한 것은 믿음이었다. 한때 수런수런하게 퍼졌던, 지금은 황실의 손 아래 자취를 감추었던 그 소문을 모르지 않았으면서도 내게 다가와 내 손을 붙잡으며.
‘……미안해. 사람들한테 언니가 내 언니라고 말하지 못한 거. 무서워서 그랬어. 다 잃게 될까 봐.’
어쩌면 그 애는 그저 헛된 말이라 여기는 줄도 몰랐다.
‘그래도 같이 더 노력하면 안 돼? 이제 우리 셋뿐이잖아.’
다행이었어야 했다.
밤마다 내 시간을 지배하는 물음을 그 애가 알았더라면, 그래서 그 애가 내린 답이 바뀌었더라면, 일은 더욱 복잡해졌을 테니까.
헌데 이상하게도 말이지. 귀찮은 일이 하나 사라졌고 그러니 복잡할 것도 없는데, 엉킨 시선이 풀리고 시야가 자유로워지자 더욱 그 물음이 나를 옥죄어 오기 시작했다.
공작의 숨통을 끊은 검, 그 검에 힘을 실은 건 나일까. 공작일까. 그저 우연이었던 걸까. 아니면 나도 몰랐던 내 깊은 소망이었던 걸까, 하는.
***
“채혈이 끝나자마자 나서셨다 들었습니다.”
담담한 올레나의 목소리가 물속에 잠긴 것처럼 고요한 집무실의 적막을 깨트렸다. 읽고 있던 서신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나는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검은 글자들이 사라진 시야 위로 그보다 더 밝은 갈색빛 눈동자가 들이찼다.
올레나와는 꽤 오래간만의 조우였다. 그간 그녀는 되도록 내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했다. 말을 아끼고 저택의 출입 역시 자제했다. 공녀의 일을 의논하고자 할 때만 종종 나를 찾을 뿐이었고 그마저도 깍듯이 예를 갖춘 채였다.
“이에타 자작과 논의할 부분이 있었네.”
“공녀님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수목은 시들었고 전대 공작님이 돌아가신 이후, 치유력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부인이 계시잖나.”
오늘은 예외인 듯하였지만.
일어나 집무실을 벗어나려는 나를 가로막은 그녀는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기세로 말을 이었다.
“본디 천성이 유약해 제 마음 하나 가누기 바쁜 여자라는 걸 설마 잊으신 건 아니시겠지요.”
“……시간이 필요하겠지.”
“공작님과 공녀님, 두 분 간의 대화가 필요한 게 아니고 말입니까.”
“무슨 대화 말인가.”
“대부인의 처소를 서쪽으로 옮긴 까닭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허나, 어째서 공녀님의 처소 역시 그리하셨는지요. 게다가 그것마저 대부인과 멀리 떨어트려 놓으셨다지요?”
“고작 처소 하나 때문에 이리 방만하게 구는 겐가.”
“두 분의 사이가 요원하시어 득이 될 것은 없습니다. 아직 제국에 티케 사냥꾼들이 머물러 있는 것은 모르지 않으시겠지요. 그들이 공작저의 잡음 하나, 미세한 움직임 하나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요.”
“서쪽 처소의 경계는 철저히 하라 이미 지시했네. 그게 염려된다면 추가로 더 기사들을 배치하도록 하지.”
“그 뜻이 아니잖습니까!”
점점 높아지던 올레나의 격양된 음성이 기어코 내실의 공기를 찢은 건 그때였다. 마지막 남은 인내심이 임계치에 다다랐는지 낯 역시 조금 붉어진 채였다.
“공녀님은 공작님과 달라요. 아비를 잃었습니다. 설령, 그자가 제대로 된 부모는 아니었어도 공녀님께서 그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공작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건 간신히 유지한 내 평온을 짓뭉갠 방만한 자에게 내가 베푸는 자비의 끝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는 겐가, 올레나.”
살갗을 도려낼 것같이 변한 공기의 기류를 느꼈는지 올레나의 눈이 수런수런해졌다.
“제가 학대당한 줄도 모르고 얼뜨기처럼 구는 애를 달래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어둠에 먹힌 음성이 유구한 세월 동안 명맥을 유지해 왔던 고풍스러운 가구를 스치듯 지나 올레나의 뺨에 가 닿았다. 수치심으로 붉어진 뺨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고 낯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엉킨 흔적들로 가득했다.
“점점 전대 공작님을 닮아 가시는 거 아십니까.”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듯 올레나가 옅은 한숨과 함께 말하는 사이, 그녀를 지나쳐 반쯤 내실을 벗어난 나는 짧게 명령했다.
“……모셔라, 위원장님께서 돌아가신다.”
아비?
아비라고?
사나운 발걸음소리가 통로를 가로지른다. 평소보다 높은 울림을 따라 흩어지는 건 쓸데없는 사념들이다.
나를, 공녀를.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길 바랐던 자를 어찌 그리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제 부모가 저를 버린 줄도 모르는 천치를 구태여 내가 달래야 하는 까닭은 또 뭐고.
‘공녀님은 공작님과 달라요. 아비를 잃었습니다. 설령, 그자가 제대로 된 부모는 아니었어도 공녀님께서 그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공작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멍청한.
그러니까 나 같은 이에게 각인을 하지. 내가 제 소망을 앗아갈 줄도 모르면서. 또 내가…….
“언니?”
사나운 기세로 열린 방문 틈 사이로 들려온 것은 얼떨떨한 그 애의 음성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공녀는 내 방 한편에 마련된 간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공녀의 당혹스러운 낯이 협탁 위에 놓인 불빛을 받아 도드라졌다.
“난…… 얘길 좀 하려고.”
우물쭈물 열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문장은 그것이다.
대화.
대화. 대화. 무슨 대화.
또 한 번 나를 들쑤시는 단어에 유리 조각의 파편들이 목구멍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우리가 나눌 말이 무엇이 남아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말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피눈물이 맺혀 있는데.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처들과 함께 말이야.
“나가…….”
“나가라는 말 안 들려?!”
공기를 찢는 거친 소리에 푸른 눈이 흔들린다. 그 눈동자 위로 맺힌 인영은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것과 같아. 재빨리 눈치 빠른 집사가 들어서 공녀를 데리고 나가고 혼돈으로 가득했던 내실의 공기는 제자리를 되찾았지만, 공녀의 벽안 위에 내려앉았던 상의 주인은 여전히 또렷해. 나는 지워 내려 지워 내려 해도 사라지지 않은 잔재에 느리게 눈을 여닫으며 자조했다.
올레나, 그래. 그대의 말 중 하나는 맞는 게 있구나.
‘점점 전대 공작님을 닮아 가시는 거 아십니까.’
내가 괴물이라는 거 말이야.
***
“아델?”
그제야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어떤 두꺼운 벽이라도 둘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반응을 주지 않던 이가 돌아본 것은 다섯 번째 제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짙은 술기운도 나지 않은 아이가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기이한 빛깔을 내뿜은 것은 별장에 들어섰을 때부터였다. 곧 폭발할 듯 차오르는 힘의 기운이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감정에 함몰되어 가는 아이다. 어릴 적에도 원체 제 마음을 내비치지 않던 아이는 공작이 되고 난 후부터 나날이 심해져 이제 썩어 문드러질 정도가 되었다. 부취의 냄새가 이리 진동하건만 저 자신은 깨닫지 못하는구나. 허나, 저는 외려 짐만 될 뿐이고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내실을 압도하는 공기를 다독이는 것뿐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은 후작은 다시 한번 입술을 움직였다.
“아델.”
미약한 소리를 들었는지, 그제야 잿빛 눈이 움직인다. 텅 비어 버린, 어딘가 공허한. 끝 모를 심연 아래로 가라앉은 잿빛 눈이 오늘 처음으로 그에게 와닿았다. 후작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흘러나온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는다. 그의 번다한 마음을 다시 뒤흔들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다.
“……후작님.”
고작 이름 한 번 불렀을 뿐인데, 고작 그것뿐인데 애써 외면하고 있던 고민들이 들쑤셔지고 있었다. 몸을 전율케 하는 기이한 기류에 후작이 파릇 눈시울을 떨자, 아이는 천천히 입술을 다시 움직였다.
“죄송해요…….”
“…….”
“후작님, 죄송해요.”
더는 못 하겠어요.
기어이 올 것이 왔구나. 낮게 흘러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후작은 눈을 내리감았다.
결국 이리되고야 말았어.
아무리 외면하고 부정하려 해도 결국 이리되고야 말았어.
네가 조금만 더 나약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공작이 자결했답니다. 헌데, 석연찮은 구석들이 있긴 합니다.’
그리하여 제게 주어진 티끌만 한 죄악을 그저 제 탓이 아니라 여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황실이 나서 이를 덮긴 했으나…….’
그럼 그는 그 아이를 품에 안아 다 괜찮아질 거라 그리 말해 줄 텐데.
‘현장에 아가씨가 함께 있었답니다.’
허나, 그의 아이는 강하매 이 길 끝에 결국 무너지고 스러진 마음을 오롯이 마주하게 되겠지. 그래, 그럴 것이야.
왜인지 늘 쉬웠지.
저 아이의 생각을 읽어 내리는 것은. 그 아이가 지쳤다고 말한다. 더는 못하겠다고.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별장을 찾아오던 매 순간은 기실 이별을 말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그는 이제야 받아들인다. 찬란하던 그 날은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부옇게 흐려진 시야를 들어 올리자, 맞지 않는 초점을 맞추려는 듯 속눈썹을 너울거리는 아이가 보인다. 죄송해요, 후작님.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젖은 입술과 떨리는 눈시울도.
끝을 직감한 순간, 절망은 깊다. 그 끝 모를 심연 속으로 후작은 입술을 열었다
“잊어버렸어. 너 없이 살아가는 법을 말이지.”
시리고 시린 문장들이 그의 입술을 타고 흐르고 바닥으로 떨궈진 소리들에는 참을 수 없는 아픔이 묻어져 나왔다.
“무섭고 또 두렵구나. 네가 없는 세상에 남겨지는 것이.”
그럼에도 후작은 아이의 젖은 뺨을 들어 올린다. 다시 한번 마주친 시선에는 물기로 가득 찬 눈이 보였다. 그 눈에 빛을 심어 주고 싶었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눈이 그를 담고 반짝거리는 걸 상상하며.
그러니 널 놓아주마. 네가 더 이상 이곳에서 살아갈 수 없으니.
“……떠나렴, 아델.”
뒤도 돌아보지 말고.
물기 젖은 숨소리가 공간에 차오르고 후작은 가만히 그 여린 어깨를 다독인다.
그로부터 며칠 뒤, 영지 시찰을 떠난 공작을 기다리던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다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왔다.
마차 사고와 함께 공작이 실종되었다.
새 공작이 즉위한 지 세 달 만에 일어난, 참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