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각인
“저쪽으로 몰아! 절대 다치게 해선 안 돼.”
“다들 조심해!”
초목 위를 휘몰아치던 은빛 물결이 밤의 광망을 뚫고 푸르른 눈동자 위에까지 제 색을 덧칠한다. 달밤에 젖어 은백색 비늘로 갈아입은 바다에 맺힌 상은 비단, 대륙에서 가장 고귀하다 칭하는 명마만은 아니었다.
공녀는 이 소동과는 전혀 동떨어진 무심한 눈길을 한 여자를 내려다본다. 오로지 공녀만을 담고 일렁거리는 눈은 저택 앞마당을 뛰노는 아타할케보다 더 비현실적인 빛깔을 뿜어내고 있었다.
말고삐조차 쥐지 않는 손은 기사답지 않게 단정했다. 은파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갈기가 그 단정한 손안에서 흐트러지자, 공녀는 저도 모르게 그 손이 제게 닿았던 감각을 상기하고 말았다.
그녀가 누구인지, 기괴한 방문의 사유가 무엇이었을지, 끝없이 이어지던 물음들이 그 농도 짙은 감각 앞에 더욱 뚜렷해질 즘, 기사들과 마구간지기들의 탄성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터져 나온다.
안도한 기색이 다분한 그들 앞에는 반쯤 저택 밖으로 내몰린 아타할케가 있었다. 푸르르, 성을 내는 명마를 짧게 일별한 푸른 눈은 차츰 흐릿해지는 여자의 인영을 담고서 크기를 키웠다.
사라진다. 또다시.
시야를 흐트러트리는 은발은 금세라도 사라질 것처럼 밤의 적막에 긴 여운을 남겼다. 이를 바라보는 공녀의 눈길에는 까닭 모를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풀어내지 못할 질문에 대한 아쉬움이라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었다.
그럼, 무엇인가.
공녀는 혼란스러움이 지배한 시선을 위로 올렸다. 말간 얼굴 위로 희미한 달빛이 내려앉는다. 그 속에 떠오른 잔상이 단정한 속눈썹을 파릇, 떨리게 만든다. 보지 않으려, 부러 꺾어 올린 고개가 무색하게.
싫다.
떠올릴 때마다 곤죽이 될 정도로 저를 파고드는 둔통도. 끝내 알지 못한 물음의 답도. 그리고…….
저 여자의 뒷모습.
어머니처럼 여리지 않으매, 산들바람에도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운 어깨와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고집스러운 등. 모조리, 전부 다.
그러나, 더 싫은 건?
분명한 질문, 피할 수 없는 답 앞에 공녀는 두려운 듯 어깨를 움츠린다.
그녀 자신.
제 가족을, 가문을 삼키려던 여자 따위에게 맥도 못 추리는 유약한 자신. 뻔한 술수에 휘둘려 사생아 하나 처리하지 못하는 공녀.
‘앞으로 공작가를 네가 이끌게 되면 이보다 숱한 일들이 더 일어날 테다. 그때마다 이렇게 아이처럼 굴면 누가 널 믿고 따르겠어.’
‘넌 누구나 탐내는 힘을 갖고 태어났어, 세이. 헌데 이리…… 나약해서야.’
아버지 말이 맞아. 이런 마음가짐으로 어찌 공작가를 이끌어 갈 수 있겠는가.
입술을 짓이긴 공녀는 서늘한 돌벽 위에 몸을 곧추세웠다. 허벅다리에 느껴졌던 찬기가 발끝으로 이동하고 어둠이 묻어난 광활한 베르니가의 영지가 그녀의 발아래 펼쳐졌다. 결연한 기색이 물든 눈은 그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여자를 쫓는다.
감히 베르니가의 공녀를. 황제를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공작가의 후계자를, 이리 하찮게 만드는 여자를.
모든 것을 포용할 듯 관대한 바다 위로 세찬 물보라를 닮은 무자비한 색깔이 떠오른다.
저 여자가 있으매 자신이 온전치 못하다면, 그 자취마저 거두어 버리면 되지 않던가. 그렇다면 평온함만이 남을 테니.
송곳이라도 박은 듯 날 선 눈매는 어느새 다시 의연한 공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베어라.
공녀의 입술을 타고 드디어 합당한 명령이 떨어지려던 찰나, 투레질을 시작하는 아타할케의 모습 위로 여자가 돌아섰다.
흐드러지는 밤의 내음과 만공을 가득 채우는 은은한 비취색. 허공에서 제 것과 얽혀 들어가는 잿빛 눈동자.
세이.
아스라해 어딘가로 사라질 것만 같은 음성까지.
갑작스레 마주한 감각들은 공녀의 벽안 위로 걷잡을 수 없는 파문을 몰고 왔다. 주춤주춤 뒷걸음질하는 공녀의 몸짓을 따라 발코니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세이.
낮고 차분한, 밤에 홀로 뜬 그믐달을 닮아 서늘하기 그지없는 소리. 이미 한 번 그녀를 구했던 그 음성은 이번에는 공녀를 아득한 아래로 밀쳐 낸다.
“멈춰!”
날카로운 비명이 한밤의 깊은 고요를 찢었다.
깨진 유리의 파편처럼 어둠 속에 이리저리 내리꽂힌 소리들은 별다른 성과 없이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지만.
이 미친 말이.
짐승의 사나운 움직임에 맞추느라 욱신거리는 몸을 곧추세운 공녀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곳에서 더는 생명의 은인을 향한 다정한 어투도 감사한 마음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말허리를 걷어차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른 공녀는 정체 모를 작자에게 실컷 분풀이를 하는 것으로 이를 대신했다.
누가 이따위 말을 명물이라 칭했던 걸까. 제 손에 잡히기만 해 봐라. 아주 몸 성히 돌아가진 못할 테다.
다소 과격한 중얼거림을 곁들이며. 그렇게 한동안 씹어 먹을 기세로 터져 나오는 소리들이 밤의 공간 속으로 흩어졌다.
달빛을 밟아 내리는 아타할케의 움직임이 변화를 보인 것은 아릿한 잿불 냄새가 가득한 어느 이름 모를 장소에서였다. 제풀에 지친 그녀가 팔을 축 늘어트리고 거의 모든 것을 포기했을 즈음과도 비슷했다.
느려졌어.
말의 갑작스러운 작태에 느리게 눈만 깜빡이던 그녀는 혹여 그사이, 짐승의 마음이 바뀔세라 서둘러 아래를 살핀다. 어둠에 삼켜진 공간은 높이를 가늠하기 다소 어려웠으나 그것은 지금 상관할 바가 아니다. 공녀의 발이 무탈하게 땅을 디디자마자, 후득득 한번 말갈퀴를 흔들어 대던 아타할케는 유유자적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하며 엉망이 된 드레스, 성한 곳 없는 몸뚱어리까지.
무엇 하나 멀쩡한 것이 없는 상황 속에 치미는 분노로 이지러지던 공녀의 눈이 별안간 다른 빛깔로 바뀐 것은 흐르는 달빛을 따라 메마른 잡목들, 머리 위에 닿을 듯 허리를 꺾어 내려 둥근 아치를 그리는 잎을 떨군 가지들을 발견한 직후였다.
기묘하게 낯익은 광경.
“메이나 숲…….”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던 공녀는 그제야 뒤틀어지고 칙칙 늘어진 나무들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메이나 숲의 풍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대하던 것과 달리 처참한 모양들이었지만. 어쩐지 공녀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곳에 오길 꺼려 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노망 난 늙은이.
말년에 외할아버지 뒤를 심심찮게 뒤따르던 그 수식어 역시.
만공에서 내비치는 달빛이 호수 위를 어물거리며 탁해진 물결과 거무스름한 잿가루가 이끼처럼 수면 위로 내려앉았다. 공녀는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숲은 죽었다는 것을.
할아버지와 그 어린 시절의 추억도 함께.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구태여 이런 괴상망측한 숲 속에 오려 하지 않을 거라는 쪽으로 그녀의 판단이 기울어 갈 즈음, 불안하게 구르던 벽안이 일순 반짝인 것은 밑동이 훤히 다 드러난 것도 모자라 쩍쩍 갈라진 가지가 흔들리고 있는 고목을 발견한 직후였다.
‘여긴 아무도 모르는 내 비밀 장소란다.’
그곳으로 향하는 조급함이 묻어나는 발소리를 따라 귓가에 떠오르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비밀 장소요?’
‘그래, 사람이란 무릇 자신만의 장소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숨겨 둘 수 있는 곳 말이다.’
‘왜요?’
‘무언가 두려운 게 있을 때, 그래서 그걸 감당하기 힘들다면 버리지도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말고 이곳에 묻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단다.’
‘……왜요?’
‘그리하면 언젠가 네가 준비가 되었을 때 다시 열어 볼 수 있잖니.’
다정한 음성,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따스한 손길. 몇 번이고 되묻는 물음에도 성가신 기색 하나 없는 할아버지는 손수 그 흙을 파헤쳐 공간을 내보이며 말했지.
‘자, 이젠 여길 네게 물려주마.’
나직이 저를 다독이는 음성에 공녀는 가만히 할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제 얼굴을 파묻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걸 안다. 나이가 찼는데도 글을 읽고 쓰기는커녕 발음조차 분명하지 않은 공작가의 공녀. 아버지가 내어 쉬던 한숨을, 그곳에 묻어나던 한심한 기색을. 그리하여 다친 여린 마음을 아는 듯해.
‘……아버지껜 비밀이에요.’
‘그러마.’
작게 고개를 끄덕인 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인, 맞지 않은 철자들로 가득 찬 교습서를 그 안으로 집어 던졌다. 그렇게 수많은 가정교사들도 두 손 두 발 다 든 그녀에게 글자를 알려 주셨지. ‘예’와 ‘얘’가 어떻게 다른지, 받침이 두 개 있는 낱말들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그런 숱한 추억이 묻어 있는 장소. 무언가에 홀린 듯 한참이나 이를 바라보던 공녀는 가지에 긁히고 피가 맺혀 엉망이 된 손을 뻗어 흙을 파헤쳐 본다. 흑단으로 마감된 상자가 손끝에 걸리고 열린 그곳에 가득한, 익숙한 잔해들이 드러날 때까지. 엉망이 된 교습서, 일그러진 모양의 자수를 스치듯 지난 벽안은 다소 생경한 물건 앞에 가늘어진다. 정확히는 불에 그을린 서신을 발견하고서.
언제였더라.
저 서신을 이곳에 묻은 적이.
다른 물건들과 달리 뚜렷한 기억이 없는 서신은 잿불에 그을려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으나, 겉봉에 박힌 루트비아가의 인장만은 분명했다. 버리려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잊으려 했던 것 같기도 하던, 흐릿한 물건의 기억을 배회하던 공녀의 뇌리로 음성이 떠오른 건 막 그녀가 기억의 흔적을 찾길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즘이다.
‘지켜라.’
백지장같이 창백한 입술,
‘지켜라, 세이.’
미약한 숨을 타고 전해져 왔던,
‘무엇을요, 할아버지.’
외면하고 싶었으나 그럼에도 결코 버리지 못했던 마지막 기억의 한 조각과 함께.
‘네 언니를.’
새벽 여명이 희끄무레한 숲, 공녀는 그곳에서 잊고 있던 기억 하나를, 외면하고 있던 마지막 문장 하나를 되찾고야 말았다.
***
“샅샅이 뒤져라!”
드높은 음성에 스산한 숲을 뒤흔들던 군마들의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어둠에 묻힌 숲을 향해 돌진하는 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올레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녀님이 사라지셨답니다.’
보좌관의 입을 통해 전해 온 소식을 듣자마자 니벨론 기사단을 풀어 제국을 들쑤시다시피 한 그녀는 오랜만에 빛을 내는 릴리의 신호를 따라 루트비아가의 영지, 메이나 숲에 다다랐다. 보고를 받은 지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아 대처는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제아무리 광활한 숲이라 해도 훈련받은 수천의 기사들 앞에서는 우습지도 않은 것이었으니 불안이 가실 만도 하건만 달빛을 머금은 갈색 눈에는 여전히 가시지 않은 염려가 어려 있다.
티케 사냥꾼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 평소보다 더욱 위험천만한 상황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타할케가 나타났다 합니다.’
그래, 그것 때문이지.
아타할케는 교감한 자의 마음을, 안위를 위해 움직이는 생물.
그 영물이 아미타 숲에서 나온 까닭이 아델리아 경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지금 그녀의 목숨이 경각에 다다랐다는 것 역시. 그러니 명마가 향하는 방향이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하나는 확실할 수밖에.
공녀에게 결코 이롭지 않을 거라는 것.
다시 한번 그 사실을 떠올리자, 숲을 배회하던 갈색 눈에 더욱 짙은 초조함이 서린다.
정말 여기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다 타 버린 숲이 도대체 무에 그리 중하기에.
차라리 아타할케가 아몬의 거처로 갔다면, 그리하여 아타할케가, 아델리아 경이 공녀를 해하려 했다는 게 확실해졌다면 모든 것은 더 납득이 쉬웠을 텐데.
‘아몬의 거처에는 별다른 징후는 없습니다, 위원장님. 아타할케도 나타나지 않았고요.’
다행이긴 하나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그녀의 마음을 번다하게 만드는 보좌관의 보고를 떠올려 보며 올레나는 옅은 한숨을 내어 쉬었다. 사위를 압도하는 우렁찬 음성이 들려온 건 그때다.
“찾았습니다!”
다행히 공녀는 무사했다.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드레스, 마른 풀잎들과 잔가지로 엉클어진 금발. 매무새는 온전치 못했으나, 크게 상하거나 다친 곳은 없었다. 올레나는 경계를 낮췄다.
문제는…….
“공녀님?”
음성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벽안을 올레나는 걱정스러운 빛으로 바라보았다. 발견했을 때부터 줄곧 그러했다. 왜 이리 늦었냐, 다들 무엇 하는 것이냐, 숲이 떠나가라 한바탕 난리를 치는 대신 말없이 자신의 말 위에 올라탄 것부터 시작해 제대로 된 휴식 없이 이어지는 행군에 짜증 한 번 내지 않는 것까지.
공녀가 이상하다.
올레나는 더는 그 생각을 부정할 수 없었다.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찌하여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소상히 알아내고자 했던 그녀는 이만 말허리를 세게 걷어차 속력을 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한시라도 빨리 공작저에 돌아가는 게 급선무. 신흥 귀족과 손잡은 티케 사냥꾼이 제국에 들끓고 있는 지금, 공작저만큼 안전한 곳은 없었으므로. 그녀의 시야 가득히 붉은 벽돌로 지어진 대저택이 들어온 건 그로부터 잠시 후였다.
***
공작저.
그 단어를 읊조리는 푸른 눈 위로 얽혀 들어가는 빛깔은 지나치게 시붉다. 마치 선혈처럼. 그래서일까. 공녀는 무의식적으로 말고삐를 세게 움켜쥐었다. 저택으로 이어지는 가로수 길, 그 끝을 배회하고 있던 어머니와 시선이 맞물린 건 그때다.
“세이!”
섬세하게 격자 문양이 수놓아진 은사비단이 무성한 가로수들 사이를 휘날린다.
“이게 다 무슨 일이니.”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뺨을 매만지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물기 젖은 숨을 뱉어 내면서.
‘네 언니를.’
그러니까 그건 거짓말이야.
이렇게 다정하고, 따스한 손길이 그런 짓을 벌일 수는 없잖아.
망령이 단단히 든 루트비아 백작, 말년에 가문의 문장에 먹칠은 한 노쇠한 늙은이.
아버지의 말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떠올리며 공녀는 바닥에 떨궈져 있던 시선을 올렸다. 맑고 투명한 은안은 물기가 어려 한층 묽어진 채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망령이 단단히 든 루트비아 백작, 말년에 가문의 문장에 먹칠은 한 노쇠한 늙은이. 그러니까 그게 맞고 그래야만 하는데…….
제 시선을 파고드는 은빛 물결. 격양된 공기를 타고 흐르는 어머니의 탄식에 공녀의 눈시울이 미세하게 떨린다.
“아아, 내 딸.”
자꾸만 그 눈 위로 누군가가 겹쳐 보여…….
그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잔상을 떨치려 공녀는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맞지 않는 초점을 맞추려는 것처럼 연신 눈을 깜빡이면서. 그 덕에 여린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저택 로비에 꼿꼿이 자리한 아버지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져. 푸른 하늘을 박은 것 같은 채도 높은 벽안까지.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지. 항상 저와 같았다고 여겼던, 얼마 전에야 그 빛깔이 조금은 저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아비의 눈에서 느낀 익숙함의 정체를.
‘가끔은 궁금해. 이 모든 게 다 허상이라는 걸 알면, 넌 어떤 표정을 할까.’
그 여자를 볼 때마다 자꾸만 치밀던 낯익음의 진원지를.
‘나 못지않게 울게 될 이는 공녀 그대이니.’
그러니까 그건 거짓이 아니구나.
‘세이.’
아득한 밤, 허무하게 흩어지는 소리들. 부정하고 싶어 외면해 왔던 문장들을 공녀는 끝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가 제 언니라는 걸.
***
“그러니까, 세이…….”
길게 끌어 내린 공작의 말에 제 앞에 서 있던 딸아이는 흠칫, 어깨를 움츠린다. 기세 좋게 제 집무실에 들이닥쳐, 감당할 수 없는 말들을 뱉어 낸 이라는 게 무색하게.
‘……언니가 맞죠. 언니가 맞잖아요, 그렇죠.’
짙은 여운을 남기고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은 문장에 공작은 옅은 한숨을 내어 쉬며 꼬고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그와 동시에 공간으로 흘러들어 오는 문장에는 희미한 짜증의 기색이 묻어져 나온다.
“그래, 맞다.”
과연 세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일던 궁금증이 사라져 간 자리에 남은 것은 한심함이다. 패를 쥐고도 쓸 줄 모르는 어리석은 작태를 향한.
“네?”
“네 언니가 맞다고.”
마주한 푸른 눈이 충격으로 산대해지는 것을 보며 공작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인다.
“자, 그래서 이제 뭘 어떻게 할 거니.”
밀도 높은 적막만이 가득한 공간 위에 내려앉은 소리는 제 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으나. 역시나. 여전히 초점이 풀린 벽안을 내려다보며 공작은 혀를 찼다. 아무 대책도 없이 무작정 들이닥친 게 틀림없지. 그저 제가 깨달은 사실이 가져온 충격 속을 헤매며.
“넌 지금 네가 지녔던 유리한 패를 흙바닥에 내던진 게야. 그뿐이니. 내가 가진 패까지 다 들켰어.”
아델을 지키고 싶은 거겠지. 제 핏줄이라면 끔찍한 아이니까. 그래, 그럴 수 있어. 사람이라면 응당 그런 통속적인 감정들에 휩쓸리기 마련이고 아직 세이의 연배 또한 어리니.
다만, 저 애는 한낱 필부가 아니다.
“네 언닐 살리고 싶은 거겠지. 고작 아델이 네 언닌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 여기까지 들이닥친 건 아닐 테니 말이야.”
무려 제국에 단 하나뿐인 공작가의 공녀. 가까스로 만들어 놓은 대안마저 사라진 지금 유일무이한 가문의 후계자. 그런 이에게는 저런 유약함도 감상도 모두 사치일 뿐. 사방에 도사리는 정적들과 위협은 언제든 그들의 빈틈을 노리고 그리하여 찰나의 흔들림만으로도 유구한 세월 쌓아 왔던 가문의 긍지는 쉬이 무너지고 말 것이니.
그리하여 공작은 제 딸의 어리석음을 꾸짖는다.
“허나 그랬다면 나를 찾아오진 말았어야지. 잘 생각해 보렴. 아델이 만약 네 친언니고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몰랐겠니? 내가 다 알고 그저 침묵했다는 생각은 해 보지 못했니?”
여물지 않은 어깨를 움켜쥐고,
“……모르겠어요.”
풍랑 속을 방황하는 벽안에 제 눈을 맞추며.
“세이, 같은 피가 흐른다고 모두 가족이 되는 건 아니야. 그 애의 정체는 곧 우리 가문의 파멸을 불러올 테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이 통하질 않아.
공기를 찢는 고성, 혼란과 불안이 뒤섞인 눈빛을 보며 공작은 이제껏 늘어놓았던 긴긴 설명이 다 쓸모없다는 걸, 다른 궤도에서 울려 퍼지는 음성은 서로에게 닿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열이 오른 미간을 문지른다.
“하아, 그럼 그냥 이리 생각하렴. 선택하는 거라고.”
“……무엇을요.”
“나와 네 어민지, 몇 번 만나지도 않은 네 언니인지.”
누군가 목덜미를 움켜쥔 것처럼 세이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린다. 그의 뺨에 닿는 숨결은 거친 채로.
“다 같이…… 다 같이 잘 지내면 되잖아요…….”
그 사이로 낮게 흘러나오는 낱말들은 형편없다만.
“세이…… 날 보렴.”
가까스로 남은 인내심을 끌어모은 공작은 딸의 턱을 쥐어 올리며 눈을 맞춘다.
“어차피 모두가 함께할 길은 없어. 그러니 말해 주련.”
천치가 아닌 이상, 저 애는 둘 중 하나는 버려야 하고,
“나와 네 어미를, 이 가문을 버릴 수 있는지.”
그게 결코 자신은 아닐 것이다.
베일 것같이 날 선 공간, 확신에 찬 음성이 찰나의 불빛 아래 스미고 곧 공작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오른다.
“그래, 이 일은 절대 새어 나가면 안 될 것을 명심해라.”
***
기억이 흐릿해.
집무실을 나와 방까지는 어떻게 돌아왔는지,
해는 어느새 기울어 사위는 짙은 어둠만이 가득하게 되었는지,
귓가를 파고드는 고아한 음성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말이야.
“미안하구나, 세이. 미리 말해 주지 못해서.”
저를 끌어안는 여리디여린 품, 그 가느다란 등 뒤로 흩어진 은발을 매만지며 공녀는 느리게 눈을 여닫는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면 그건 어디서부터일까.
그녀와는 다른 그럼에도 제 언니와는 이리 꼭 같은 머리카락 때문일까. 그 같음을 알아보지 못한 아둔함 때문일까.
‘같은 피가 흐른다고 모두 가족이 되는 건 아니야.’
아버지의 말이 맞아.
나는 어리석고 또 단순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어째서 하나가 될 수 없는지, 혈관을 타고 흐르는 핏물의 농도가 같은데 어째서 가족이 되지 못하는 건지, 어째서 누굴 버리고 누굴 택해야만 하는 건지 모르겠어.
이전에 세상은 늘 쉽고도 또 분명했는데. 하늘과 땅. 흑과 백. 얼음과 불. 모든 것은 그렇게 뚜렷하기만 했는데.
공녀는 눈을 들어 내실에 가득한 어둠을 바라본다. 암흑에 물든 시야로 들이찬 물건들의 인영은 이것저것 뒤엉켜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어지럽다.
‘누굴 선택할 거니, 세이.’
이게 과연 선택을 할 수 있는 문제일까. 누굴 버리고 누굴 취할지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일까. 그렇게 쉽다면 좋을 텐데. 그럴 텐데 말이야. 그저 그런 생각만 들어. 어떤 답을 택해도 나는 울게 될 거라는.
답을 줘, 내게.
내 가족을, 모두를 지킬 답을.
농도 짙은 어둠이 깔린 내실, 그 위로 비밀스럽게 번져 가는 소망이 시든 수목 위를 쓸어내린다. 볼품없이 시든 꽃망울을 다시 피우고 싱그러운 빛을 더하면서.
***
많다. 정말 많아.
테비온 마을의 입구로 밀려들어 오는 유례없이 많은 인파를 숙실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모르헤 기사단원 하나가 하는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검붉은 장미를 든 사람들이 평소 잘 이용하지 않는 작은 샛길부터 정문까지, 공간이란 공간은 모두 빼곡하게 메꾸는 광경이란. 늘 적막과 고요가 머무는 죽음의 땅과 터무니없이 이질적인 장면은 유달리 맑은 새벽의 햇살이 내려앉아 더욱 생경했다.
신에 대한 경외의 마음일는지, 그저 눈요깃거리를 찾는 음심일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대륙의 평화를 가져온 모르스의 현신이 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지 말라. 바야흐로 다시 아올리스에 혼돈이 찾아오는 날, 그녀가 눈을 뜰 것이다.’
다소 허무맹랑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신탁의 문구를 사람들은 정녕 믿는 것일까. 죽음의 땅이라, 불길하게 여겼던 이곳을 저리 격식을 차리면서 찾아올 정도로. 기사단원은 조금은 허탈해진 심정으로 마을을 바라본다. 놀람에서 불만스러움으로 변모하던 감정들은 이내 걱정스러움이 담뿍 담긴 물음으로 끝을 맺은 것은 막 인파에 치인 군중 하나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했을 즘이다.
“정말 이 의식이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 고쳐 잡을 정도로 심각해진 그는 짐짓 진중한 시선으로 동료를 바라보았다.
“에휴, 걱정도 팔자네. 만약 그렇다 해도 자네가 뭐 어쩔 텐가.”
돌아오는 답은 퍽 심드렁하긴 했다만.
“뭐가 어쩌다기보다는 그냥 위험하지 않냐 하는 얘기지…….”
말끝을 흐린 기사는 심란한 눈으로 점점 더 몸집을 불려 가는 구경꾼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많은 인파들이 정말 아무 일도 없이 무탈하게 제 목숨을 부지한 채 돌아갈 수 있을까, 다소 원초적이고 핵심적인 물음을 떠올리며. 세상사 관심 없다는 듯 테이블에 앉아 열심히 칼날만 손질하던 동료가 깊은 한숨을 내어 쉬며 발코니로 나온 건 그때였다.
“입조심하게, 자네. 이번 의식에 페치오 위원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잖나. 차기 위원장이 되실 분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게 뭐가 있어.”
“아직은 아니잖나. 임시로 제론 위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담담히 흘러나오는 문장에 동료는 황당한 듯 미간을 좁혔다.
“이 사람도 원, 그 소문 못 들었어?”
“무슨 소문?”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무지한 물음에 기가 찬 듯 잠시 혀를 차던 동료는 주위를 살피더니 조용히 대답해 주었다.
“페치오 위원이 보검을 차지했다는 소문 말이야.”
보검. 나직이 흘러들어 온 단어 앞에 기사는 느리게 눈을 여닫았다. 혀끝에 걸리는 단어가 생경해. 마치 처음 입에 담아 보는 낱말같이. 정말 페치오가 그 보검을 차지했단 말인가. 어떤 힘이 담겨 있는지 모를, 그래서 더욱 신비스러운 하이가 에오르테의 보검을.
“보검? 하이가 에오르테의 보검 말인가?”
“그럼 또 다른 보검이 있던가.”
***
탁탁, 원탁을 두드리는 보검의 움직임을 수십 쌍의 눈동자가 쫓는다. 검집에 장식된 에메랄드가 벽등의 불빛을 머금고 혼란스러운 시선을 파고들었다. 장구한 세월이 무색하게 당장 어제 만들었다고 해도 믿음직할 정도로 잘 세공된 자태였다. 게다가 흑단으로 마감돼 거대한 위용을 보였는데 탁자가 오늘따라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저게 말로만 듣던 에오르테 가문의 마지막 유산, 하이가의 보검인 건가. 도대체 저걸 어떻게. 미쳤다, 미쳤다 무성한 말들을 끌어모으던 에오르테 후작이 정녕 틀림없이 미친 것인가. 아니지, 아니야. 어쩌면 협박과 강압에 의한 탈취일 수도 있겠다. 이미 한 번 전적도 있지 않던가. 카트린느 에오르테를 구워삶은 페치오의 솜씨 말이다. 공작가와 척을 지며 벼랑 끝에 몰린 가문이니. 그래도 그렇지. 가문의 보배를.
위원들이 빠르게 눈빛을 교환하며 침묵의 대화들을 나누고 있는 사이, 임시로 위원장의 책을 맡게 된 제론은 간신히 남은 이성을 끌어모아 목청을 돋웠다.
“의식의 준비는 어찌 되어 가고 있소, 페치오.”
“문제없습니다.”
“아델리아 경의 상태는.”
“폭주의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델리아 경이 치르게 될 의식의 절차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이 사안을 직접 확인하고자 대양을 건너온 타 제국의 모르스 일족들. 뒤이어 이어지는 의식에 관한 설명들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언급하지 않은 채로.
‘위원장님, 예측했던 것보다 두세 배는 족히 더 되는 인파가 테비온에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대로 의식을 진행했다간 사상자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겝니다.’
보좌관의 지적은 틀린 부분이 없었다.
마을에 저리 수많은 인파가 몰린 적도 없거니와 그들은 죽음을 부르는 일족들. 힘을 자제한다 하더라도 이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치들이 분명 있을 터이니. 문제는…….
토리노 위원장이 파문당한 시점부터 발톱을 드러내는 걸 서슴지 않는 사내를 향해, 그 사내가 직접 진두지휘한 이 계획을 기탄없이 지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거겠지.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일이 닥쳤나 하는 심상한 감상을 곁들이며 제론은 슬쩍 눈을 올렸다.
“그렇다 하더라도 페치오. 군중들이 너무 많은 건 아니오. 자칫하다가 해를 입는 이들이 나올 수도 있어요.”
시야 귀퉁이로 얼비치는 페치오의 낯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것에 한껏 움츠러들었던 제론의 어깨가 곧아지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 역시 이에 동의할 수도 있겠다, 근거 없는 용기가 심중에 가득 차오르려는 즈음, 낮게 흘러나오는 음성에 제론은 흠칫 몸을 굳혔다.
“지금 중한 건 그런 게 아니라 사료됩니다, 위원장님.”
탁자에 팔을 올린 페치오는 비슷이 고개를 기울였다. 끝이 날카롭게 맺어진 눈매 안에 담긴 위인은 미풍에도 흔들거릴 것같이 유약한 사내였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이야기지요. 허황된 걸 알지만 그럼에도 결국 속게 되는, 오케아디네스 전설과 같은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 말입니다. 우리가 오늘 새 신화를 써 내려가는 겝니다. 그들에게 원하는 걸 주고 우리가 취할 것은 취하는 거지요.”
매끄럽게 이어지는 어조 기저에는 위압감이 담겨 있다.
“허니 자잘한 사고들은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하도록 하는 게 나을 듯한데.”
간헐적으로 떨리는 위원장의 어깨를 스쳐 지나 방 안의 위원들에게로 닿은 눈은 어둡게 일렁이는 촛불이 스미어 더욱 매서웠다.
“다른 분들의 생각은.”
그러니까 이건 물음이 아니었다.
페치오를 한 번, 그리고 그가 쥐고 있는 보검을 살피며 갖가지 상념들을 떠올리던 위원들은 모두 같은 결론에 다다랐다. 더는 부정할 수 없다. 이제 그들이 충성을 보여야 할 것은 페치오 하프만, 바로 저 사내라는 것을.
하나둘 위원들이 위원장의 간곡한 눈길을 외면하는 광경을 보며 페치오는 손에 쥐던 보검을 한 번 가볍게 굴렸다.
“그럼, 아델리아 경을 데려오지요.”
작은 조소가 묻어나는 입술로 서늘한 호선을 그려 내며.
모든 것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의 취향껏 꾸며 낸 가도와 더할 나위 없이 풍족한 인파까지.
햇살의 온기가 짙어져 가고 그림자가 짧아지는 동안, 의식의 준비는 별문제 없이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단상 위에 올라, 그 광경을 바라보는 페치오의 입가로 너른 미소가 번진다. 발아래 펼쳐진 풍경은 모든 것이 순조롭다. 엄숙한 고요도 경외 어린 눈빛들도. 죽은 고목 위에 자리를 잡은 이들을 바라보는 페치오의 심중에 형용할 수 없는 충일감이 차오를 즘, 익숙한 발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위원님.”
돌아선 페치오의 시야로 들어온 것은 짙게 가라앉은 보좌관의 낯이다.
“무슨 일이지.”
***
제 발밑에 떨어진 물음에도 보좌관의 입은 쉬이 열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은 이 일을 도대체 어찌 보고해야 할까, 하는 심란한 마음이 둔중하게 그의 입술을 내리누른 탓이다.
그저 의식이 처리되기 전, 마지막으로 아델리아 경의 상태를 확인하려 교육실로 향했을 때만 해도 일이 이리 틀어질 줄은 몰랐다. 사방에 기사들이 둘러싼, 심지어 일족의 힘도 통하지 않은 교육실을 그녀가 벗어날 수 있을 리 만무했고 지난 며칠간 반복되어 왔던 절차에는 단 한 번도 변수가 없어 이제는 형식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으니.
그래서 그리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허나, 불행은 고요한 한밤중에 찾아온다 했던가.
‘상태는 어떠하지.’
단조로운 그의 물음에 보초를 서던 기사들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하고 흘러나오는 문장 역시 끝이 흐려진 채였다.
‘별문제 없습니다, 헌데…….’
가슴이 선득하게 내려앉는 불길한 기분에 단숨에 안으로 보폭을 넓힌 그는 찬란히 뿜어져 나오는 빛깔 앞에 잠시 숨을 죽였다. 그사이, 칠야의 암흑만 가득하던 공간으로 퍼져 가던 유백색 빛기둥이 잦아들고 감춰졌던 인영이 드러났다. 아델리아 경. 그녀가 어디로 도망가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었음에 안도하던 그가 깊게 탄식한 건 시야 귀퉁이에 잡힌,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한 직후.
둔치라도 알 수 있었어. 그게 무엇인지 말이야. 가능한 것인지는 도저히 모르겠어도.
“어서 말해 보게, 무슨 일이냐니까.”
거친 상관의 음성이 어둠 속을 유영하던 그를 현실로 잡아끈 건 그때였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음을 직감한 보좌관은 자세를 낮춘 채 입술을 움직인다.
“위원님.”
아주 긴 하루가 될 것을 예감하며.
“아델리아 경에게 각인자의 표식이 나타났습니다.”
***
“위원장님, 황제께서 또 한 번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조급함이 가득한 음성, 뺨에 와닿는 질긴 시선, 해결을 바라는 몸짓.
아델리아 경에게 각인자의 표식이 발견되었다는 보고 직후, 사방에서 물밀 듯 쏟아지는 서신과 요청들을 모두 뒤로한 올레나는 그저 침묵을 택한 채, 물끄러미 제 앞으로 내밀어진 보고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급히 갈겨 쓴 서류들에는 그 필체와 달리 상세하게 티케들의 동태가 상세히 기재된 채였다. 하급 귀족들부터 시작해 내로라하는 가문의 소속 티케들까지. 대부분 이렇다 할 만한 특징은 없었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의 연속을 보냈기에 어렵지 않게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없었지.
공녀의 이름은.
세이아린 베르니.
수십 장의 서류들 속, 여전히 그 이름만은 찾을 수 없게 되자,
‘아델리아 경에게 각인자의 표식이 나타났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와 같은 허탈한 웃음이 올레나의 입술 사이로 흐른다.
그러니까 이거였구나.
수십 번 이해 가질 않는 곳을 향해 반짝이던 릴리의 신호. 그것이 말하고 있던 게 이것이었어. 결국 돌아돌아 이리될 일이었어.
그리 서로에게 날을 세우며 다투어, 도무지 말이 되지 않을 것 같이 보이던 일의 끝은.
구태여 확인해 볼 필요도, 더 알아볼 필요도 없는 일이건만, 올레나는 그저 가만히 서류의 끄트머리를 문지르기만 한다.
“위원장님, 어찌 보고할까요.”
다시 한번 더 저를 채근하는 음성에, 올레나는 느지막하게 입술을 벌린다.
세이아린 베르니.
바닥에 떨어진 낱말들에 사위는 무거운 침묵으로 내리덮이고 요동치는 감정의 물결들이 공간을 잠식하는 동안, 올레나는 반쯤 열린 차창 너머 천지를 물들인 낙조를 바라본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과연 앞으로 어찌 되는 것일까.
***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면 됩니다.”
브린튼가의 응접실까지 나를 안내한 이는 니벨론 기사단이었다.
모르헤 기사단이 아니라.
푸른 물결 속 우뚝 솟은 내 모습이, 그 생경함이 조금 우스워 설핏 웃음을 그리자 앞장서 저택의 로비를 지나던 기사가 나를 돌아본다. 투명한 햇살을 받아 내 것과 비슷한 각인의 표식이 그의 목덜미에서 도드라졌다.
그러니까 각인자구나.
나처럼.
각인자.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자, 조금은 일련의 황당무계한 일들이 실감이 났다.
곧,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점을 빼면 분명 하루의 시작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시작은 갑작스레 나를 찾아온 형용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 저릿한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번지고 심장이 뜯어질 것 같은 고통이 몸을 휘감아 왔어. 폭주와도 닮은 기분. 무언가 터질 것 같기도 하고 부서질 것 같기도 한 감각이 끝나고 혼미하던 정신이 간신히 되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르타 위원회에서, 아니 페치오가 거창하게 준비했던 의식들은 단숨에 철회되고 수천의 기사들을 이끈 올레나가 테비온에 도착한 뒤였다.
니벨론 기사단의 호위를 받은 티케 일족이 가도를 지나 광장으로, 언덕을 넘어 의식이 준비된 신전에 다다르고서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공간 속에 내려앉는 은은한 울림으로 사람들은 넋을 빼놓았다.
‘우리 일족 중 아델리아 경을 각인자로 삼은 자가 있소. 따라서 경의 처분은 코르푸 위원회와 함께 논의 후 결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전과는 궤가 다른,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린 어조로. 그렇게 그녀가 휘하 기사들과 함께 나를 데리고 이곳에 도착한 것이 조금 전이었다.
“혼란스러우실 수 있지요.”
막 응접실로 이어지는 통로에 다다랐을까. 상념에 잠긴 나를 끄집어내려는 듯 기사는 말을 붙여 온다.
“게다가 자연적인 각인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니.”
무슨 말이냐는 듯 좁힌 미간에 그는 차분히 설명을 이어 갔다.
“대상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강제적인 각인과는 차원이 다르답니다. 아주 강력한 염원이 쌓여 만들어 낸 것이지요.”
“……누구지.”
“무엇이 말입니까.”
“……내게 각인한 이 말이네.”
혀끝에 밀려 나오는 문장이 모래알을 씹은 것처럼 깔끄럽다. 그곳에 깃든 황당함과 어색함을 느낀 것인지 기사는 입꼬리를 올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안에 들어가신다면 이제 아시게 되겠지요.”
내실의 문을 열어젖히고 설명을 덧붙이며.
“다만, 잊지 마세요. 각인을 한 티케는 오로지 제 축복을 경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는 것을…….”
활짝 열린 문.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양광의 빛줄기를 따라 내부의 풍경이 선연하게 드러났다. 따스한 색감의 벽지와 오후의 볕이 온기를 더하고 있는 목재 가구들.
‘그게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인지를.’
이를 스치듯 지난 시선은 공간 한가운데 자리한 소파에 닿고는 멈칫한다.
‘이제 경을 노리는 자들은 경이 아닌 경에게 각인한 티케를 바스러트리고자 할 것입니다.’
정확히는 그곳에 앉아 있는 낯익은 인영에.
“……공녀님.”
느릿하게 새어 나오는 단어에 다시 볼 일 없다 여겼던 푸른 눈이 공간을 가득 채운 침묵을 가로질러 나를 직시해 온다.
“이제 끝났습니다. 잠시 여기서 대기하고 계신다면, 그동안 저희는 절차대로 두 분의 힘의 파동을 분석하고 진짜 각인인지 확인할 것입니다.”
짧은 설명과 함께 방을 가득 채웠던 인파들이 썰물처럼 사라지자, 공간에 남은 건 나와 공녀 단둘이었다. 물빛을 머금은 것 같은 벽안, 햇살을 머금고 찬연하게 빛나는 금발. 마지막으로 보았던 망가진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제 색을 되찾은 공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실소가 터져 나와 눈을 내리감았다.
각인자라.
과거의 어느 날, 이 사실을 알았다면 믿었을까. 공녀와 나. 우리의 관계에 몇 번이고 나타난 이상 징후에 이미 한 차례 조사단까지 파견되었음에도 크게 개의치 않았지. 그저 이용하기 좋은 패라 여겼어. 그랬어. 그랬는데…….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린 나는 다시 한번 이 믿기지 않은 광경을 아로새겨 본다. 테이블을 하나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우리 둘을.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풍경 속에서 불현듯 낯설음을 느낀 건 수차례의 헛웃음과 실소를 반복할 즈음이었다.
뭐랄까. 각인을 해서일까.
공녀는 내가 기억하던 모양과는 많이 달랐다. 나조차도 진정하기 힘든 상황에서 말없이 침묵하면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기세는 누그러지고 눈으로는 마치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물끄러미 나를 응시한 채로.
기묘하게 익숙한, 그 감각이 싫다.
벼린 문장들이 입술을 타고 흐른 건 그것 때문일 것이다.
“세상일은 참 알 수가 없어.”
날카롭고 드센 낱말들.
“누가 알았을까. 공작가의 고귀한 공녀가 한낱 미천한 반쪽짜리 사생아에게 각인하게 될 줄이야.”
그 기괴한 감각들을 몰아내려는 발악과 닮은.
“이번 일로 모르타 위원회는 더는 날 건들지 못한다지. 티케의 보호 아래 있을 모르스 일족을 함부로 다룰 수는 없을 테니.”
그래서, 그걸 알아서 더욱 혀는 벼려지고 쉬워진다.
“공작께선 뭐라 하시든? 그 표정을 내가 봤어야 했는데.”
계속해서 이어지던 비아냥이 멎은 건 여전히 공녀는 별 반응이 없다는 걸 깨달은 직후였다. 이목을 신경 쓰는 건 아닐 테다. 조사단과 사용인 수십 명이 들락날락하는 대저택에서조차 그런 것은 하등 주의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아이니까. 그날 밤, 실수와 닮은 내 몸짓으로 살아 낸 제 목숨 때문에? 고작 그것 때문에? 말도 안 되었다. 고마워하기보단 내 숨통을 다시 한번 끊어 내길 택할 게 내가 아는 공녀였으니.
그러니까 뭔가가 달라졌어.
각인을 하게 되면 그 성품마저 바뀌게 되는 걸까. 글쎄,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런데도 평소 같았으면 벌써 허공을 갈랐을 손은 그저 꾸욱 치맛자락을 붙잡고 눈시울은 엷게 떠는 채로 붉어져 있다.
무언가가 달라졌어. 무언가가…….
시야를 꽉 채우는 낯선 흔적들에 복잡해지는 머릿속이 싫어 차라리 어둠을 택한 나는 그럼에도 남아 있는 잔재들에 뒤죽박죽이 된 생각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너…….”
그리하여 나온 결론은 이것이다.
“알았구나.”
마찬가지로 말도 안 되는.
***
흐릿해지는 시야, 지나치게 적막해진 공간 속 공녀의 귓가를 파고드는 음성은 짧지만 담담하다. 그 소리 앞에 연신 치맛자락을 초조하게 매만지던 공녀의 손이 멎고 바닥을 배회하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가 앞에 앉은 이에게 가 닿는다. 나뭇가지에 걸려 수많은 가닥으로 갈라진 빛줄기가 그 평온한 눈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별일 아닌 것처럼. 그래서일까. 오늘 하늘이 참 푸르지 않나요, 호젓이 그런 날씨 얘기나 나누고 있다고 착각도 들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가 자매고 이젠 모든 게 달라졌다는 그 긴긴 설명을. 고작 할아버지가 남긴 유언과 다 타 버린 서신들. 마땅한 증거도 증인도 없는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언니가 납득하게 할 수 있을까.
마차를 타고 이곳에 오는 내내 몇 번이고 했던 고심들이 무색하게.
그러니까 알고 있었어.
조금 전까지의 고민이 덧없어진 지금, 허탈해진 심정으로 공녀는 결론 내렸다. 드레스를 타고 흐르는 붉은 선혈, 짙은 여운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 공허한 음성. 다시 만난 이곳에서 선득하게 뇌리에 남겨진 그 밤의 기억을 떠올리자 더욱 그러했다.
알고 있었어.
생각해 보면 말이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 모든 게 납득이 가질 않긴 했다.
‘세이.’
어딘가 애틋하던 그 소리도, 서릿발처럼 매서운 기세로 허공을 가르며 솟구친 날붙이, 그러나 끝내 무엇 하나 베지 못하고 바닥에 떨궈진 검도.
그래야 말이 되긴 했어.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공녀는 똑바로 마주한 은안을 직시해 본다.
‘같은 피가 흐른다고 모두 가족이 되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아버지는 틀렸다.
제 앞에 앉은 이는 저와 같아. 결국 그런 이유 하나로 자신을 구하고 말았는걸. 기꺼운 추억 하나, 깊은 대화 하나 없이. 그 험하디험한 전장에서 살아남은 명색의 기사가 결국 칼을 휘두르지 못한 것 역시 마찬가지지.
내가 아는 것처럼 이 여자는 알아.
우리가 자매라는 걸 말이야.
엇나가고 비틀어진, 지독한 사고들이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고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결국 돌고 돌아 하나가 될 거라는 거 말이야.
그리하여 공녀는 인사를 건넸다.
심중에 치솟는 불안을 내리누르고 마치 어제 만나고 헤어진 사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이 기괴하게 비틀어진 관계를 가로질러 왔던 숱한 사건들이 그 당당한 어투 앞에 흐릿해지리라 믿으며.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언니.”
그러네요, 오늘 하늘은 참 푸르러요.
마치 그런 인사를 건네는 음색처럼 침착하고도 차분한 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가로지른다.
헛웃음이 들려온 건 그때다.
***
‘언니.’
언니. 언니라. 생경한 그 단어를 혀끝에 굴리며 허탈한 웃음을 그려.
참 쉬워, 너는.
이리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며 같은 피가 흐르면 하루아침에 가족이 될 수 있다 믿는 네 마음은 이렇게 쉬워.
상상해 본 적이 있어. 모든 걸 다 알고 나면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말이야. 어떻게 알았는지, 누구에게 들었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할 거라 여겼지. 하지만, 막상 겪어 보니 말이야. 그런 건 하등 중요치 않네. 하나도 중요치 않아.
중요한 건…….
“그래, 그래서였구나.”
어둠에 잠긴 음성이 공간을 가른다. 목덜미에 아로새겨진 각인을 어루만진 나는 웃음을 흘린다. 그 웃음을 따라 흩어지는 물음들은 의외의 것들이다. 너는 모든 걸 알았고 그리하여 이리 담담히 내게 인사를 건네기까지 하면서 어째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나, 하는 그런 것들. 공작가에 숨겨진 딸이 있다는 소식이 파다했다면 내 귀에도 벌써 들려왔을 텐데 하는, 하등 쓸모없다 여겼던 그런 것들이 도리어 중해진다.
그러니까 넌 결국 침묵하기로 했구나.
네 부모처럼 말이야.
고작 웃기지도 않은 이 각인 따위로 나를 살린 채로. 그것에 기꺼워하며.
언니.
다시 한번 선명해지는 그 소리가 역겹다.
그래, 너는 과연 그들의 자식이야.
지키지지도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꿈을 꾸면서.
‘아가, 아무 걱정하지 마렴. 아버지가 방법을 찾으실 거야.’
기대한 적 없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우리 딸.’
바란 적도 없다.
‘넌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야.’
내가 살아온 세상은 그러했고 그럴 것을 알기에.
비겁하고 또 비겁한 자들의 세상.
흐트러진 움직임을 따라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던 창틀의 장식품들이 연달아 아래로 추락했는지, 내실은 부서진 파편들과 그 조각들이 만들어 낸 꺼림칙한 소음들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덕에 나는 어둠의 잔상 속으로 유영하던 의식을 간신히 되잡았다.
“둘 다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니.”
끝 모를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눈을 들어 올린 나는 마주한 벽안을 직시한다.
“어리석구나, 세이.”
공작 부인의 무해한 기색을 닮은,
“이건 인형놀이가 아니야. 네가 원한다면 다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공작의 무자비한 빛깔이 깃들어진 그 눈을.
“……노력하면 되잖아. 다 같이.”
“노력이라고? 네가?”
피식, 스산한 웃음을 터트리며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뜀박질이라도 한 듯 가쁜 호흡 틈으로 미처 가다듬지 못한 음성이 잔약하게 흘러나왔다. 흔들리는 흔적을 지우려 더욱 크게 목을 울린다.
“그저 말 한마디를 붙였다고 내 뺨을 올려붙이는 네게 그게 가당키나 하니.”
“그건…….”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짙게 가라앉은 공녀의 낯이 보였다. 가늘어진 입술은 예상치 못한 전개를 맞이하여 그녀의 치아에 눌려 짓이겨지고 있었다.
“난 몰랐어. 난 아무것도 몰랐다고.”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만.
공간을 가로지르는 당당한 어투, 한낮의 태양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햇살을 내리붓는 금발. 그 모든 걸 응시하며 나는 한 번 더 절감한다.
저 애는 나와 달라.
뼛속까지.
그러니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빛깔은 같다 할지라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을 테다. 이미 숱한 세월 지겹게 깨달아 왔던 것처럼. 자조 섞인 한숨과 함께 고개를 기울여 창 너머를 응시해 본다. 깊게 팬 마차 자국이 저택의 정문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방금 막 새겨졌는지 진흙 위에 찍힌 선명한 자국이 눈 위로 상을 그린다. 그 위로 떠오른 것은 이제는 기억도 흐릿한 어느 어린 시절.
하염없이 그 궤적만을 응시하던 때가 있었다.
해가 기울어 가고 밤의 어둠이 지천에 깔려도 고집을 피우는 통에 나를 어르고 달래던 유모의 음성이 아스라이 들려오는 것 같다. 마차 바퀴 자국에 대한 이유 있는 집착이 사그라든 것은, 이 기괴한 관계의 진실을 알게 된 후였던 것 같다. 나는 베르니가 아니고 그러니까 우리는 결코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다를 건 또 뭐니.”
네가 죽어도 베르니고 내가 결코 베르니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같은 피가 흐른다고…….”
나는 그 이름을 단 한 번 바란 적도, 원한 적도 없던 것처럼.
“모두 가족이 되는 건 아니야, 세이.”
영원 속에 얼어붙어 있던 것 같던 공녀의 입술이 움직인 건 그때다. 느리게 여닫히는 동공 사이로 보이는 눈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래서 언니도 날 살렸잖아.”
그럼에도 사위지 않는 믿음이 역시.
“내가 동생이라서 그런 거 아니야?”
그 강건한 빛깔이 그날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당장이라도 그 밤의 내음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잔상은 선연하지만 여전히 그 까닭은 흐릿한 밤을.
아직도 모르겠어.
왜 그랬는지 말이야.
생각은 멎고 발이 먼저 움직인 건 어떤 연유였는지. 완벽했던 계획을 망치고 스스로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되어 버린 건 어떤 까닭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시야는 흐리고 손에 든 검은 무거워 그래서 움직일 수가 없다는 변명은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야.
천천히 내리감았던 눈을 들어 올리자, 끝을 알 수 없는 창해와 같은 푸른 눈이 시야를 압도해 온다. 언제고 그 속에서 길을 잃었던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이건 분명해.
‘내가 동생이라서 그런 거 아니야?’
그저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라는 거 말이야. 우리의 혈관에 같은 핏방울이 흐르고 있어서라는 그런 하잘것없는 이유 때문은 아니라는 거.
“아니.”
그것만은 확실해.
“그런 적 없어.”
입술 끝으로 흘러나오는 한없이 벼린 단어들이 승기를 잡았다 여긴 그 아이의 낯을 할퀸다.
***
“……뭐?”
이해가 가질 않아.
“다시 말해 줘? 그런 게 아니라고.”
납득이 되질 않아.
“그럼…… 그럼 그땐 왜 그랬어.”
다들 왜 그러는지.
“누굴 살려 주는 까닭이 꼭 같은 핏줄이어서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우리가 하나라는 그런 사실 따위 중하지 않은 듯 다들 왜 그리 무감하게 구는지. 도저히 모르겠어.
“다들 왜 신경 쓰지 않지.”
나직이 읊조리듯 흘러나온 소리에 돌아오는 답은 딱딱하다.
“그럼 너는.”
“난 아무것도 몰랐잖아!”
“……지금은 아니잖아.”
공녀의 심중을 긁어내리면서.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지 않는데 어째서 침묵하는 거니 너는.”
잔인하고 또 집요하게.
“난……!”
“각인? 고작 그거? 만약에 각인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넌 어쩌려 했어. 그저 발 동동 굴리면서 안타까워하려 했니, 네 어미처럼? 아니면 가문을 위해서다 담담하려 했니, 네 아비처럼?”
숨겨진 진실을 끄집어내려는 듯.
“솔직히 말해. 자신 없다고. 둘 다 지키고 싶은 게 아니라 둘 다 잃고 싶지 않은 거라고. 그냥 네 욕심이라고 말해. 그럼 그 부모에 그 딸이다, 피는 못 속이는구나 적어도 그렇게 이해는 해 줄 테니까.”
“그게 뭐가 달라…… 뭐가 다른 거야!”
몰라, 난 그런 거.
“난 그냥 다 같이 지내고 싶은 거란 말이야.”
옅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어딘가로 떠나려는 사람처럼.
“……어디 가?”
흩어지는 소리도 붙잡지 못하고.
“어디 가는 거야!”
보폭을 넓히던 걸음이 그 조급한 음성에 멈춘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아주 찰나였지만.
“가지 마!”
주저하지 않고 성큼 문밖으로 사라지는 은빛 물결에 공녀는 다급히 성대를 긁어내린다. 보초를 서는 기사들의 눈도 점점 멀어져 가는 인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지 말라고!”
악을 쓰듯 질러 내는 공녀의 음성이 고요하던 저택을 뒤흔들었다.
“널 구한 건 나야! 후작이 아니라! 내가 널 살렸다고! 돌아오란 말이야!”
***
저택을 뒤흔들어 대는 소리에 막 보좌관으로부터 공녀와 아델리아 경, 둘의 파동을 보고받던 올레나는 서둘러 내실을 빠져나왔다. 공간을 찢는 음성에 어렵지 않게 소란의 진원지를 향해 걸음한 그녀가 마주친 이는 예상과는 조금 다른 이였다.
“아델리아 경?”
모르스의 의식을 지나 각인까지.
그 황당무계한 일들을 겪었을 때조차 침착하던 낯이 어딘지 모르게 흐트러진 것 같다면 제 착각일까. 그녀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사이, 착각인가 여길 정도로 평소의 냉한 모습으로 돌아온 기사는 얼음 조각을 입에 문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더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조사는 분명 아까 끝났다 들었는데.”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격양된 기색은 감추지 못했지만.
“예, 허나…….”
“티케의 각인자가 되면 평생 이 저택 안에서 썩어야 되는 것 또한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닙니다만…… 경!”
여전히 심란한 눈빛을 갈무리한 올레나가 그 물음에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기다렸다는 듯 기사는 몸을 돌려 저택의 로비를 가로질렀다. 눈을 아리게 만들 정도로 부신 은발이 언덕 아래로 사라질 즘, 뒤따라왔던 보좌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위원장님, 저리 두어도 괜찮을까요. 아무래도 페라비 별장으로 가는 듯싶은데.”
페라비 별장.
부연 먼지만 자욱한 자리 위로 떠오른 단어에 올레나의 낯은 더욱 짙게 가라앉는다.
“혹 그러다가 폭주라도 하게 된다면 그래서 사상자라도 나오게 된다면 일이 복잡해지지 않겠습니까.”
잠시 침묵하던 올레나는 보좌관을 향해 짧게 명령했다.
“기사들이 아델리아 경을 뒤따르도록 하게.”
그 소식을 들은 건 얼마 전이다.
최근 들어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묻혀 그리 큰 파문을 일으키지 못하는, 그러나 필시 저 여인에게는 어마어마한 균열을 가져올.
그러니까 에오르테가의 후작이 사라졌다는.
***
“정신이 드십니까, 아델리아 경?”
모든 게 다 끝나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말이다.
끊어진 기억, 시리듯 저려 오는 온몸.
폭주 후에 찾아오는 익숙하고도 불쾌한 감각을 미처 지워 내리기도 전,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이안은 덤덤한 목소리로 어렴풋이 예견하고 있던 그 끝을 설명해 주었다.
“여기는 테비온의 치료실입니다. 다행히 기사들이 제때 도착해 사상자는 없습니다.”
천지를 진동하던 폭주. 이를 쫓아 에오르테가의 별장에 도착한 모르헤 기사단원들과 니벨론 기사단원들. 폐허나 다름없이 변한 페라비 별장의 정원. 그리고…….
다시 한번 나를 할퀴는 사실들.
“에오르테 후작의 동태는 살피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에오르테가의 사병들만으로는 터무니없는 데다가 지금 세간의 이목이 경과 공녀에게 쏠리는 마당에 쉽지 않을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테비온으로 파악되는데, 아무래도 페치오 위원인 듯합니다. 허나, 경께서도 아시다시피 페치오 위원은 지금 이번 일을 수습하기 위해 대륙의 회담에 참석한 관계로…….”
귓가에 쟁쟁대는 소리들은 허무하게 흩어지고 그 위로 메아리치는 건 차분한 어투다.
‘막을 수 없었습니다.’
사방에 깔린 짙은 안개, 심상치 않은 힘의 기운에 누구 하나 쉬이 내 곁에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와중에 엘몬트는 담담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사지가 멀쩡한 채 되돌아간다 장담할 수 없는, 그런 위태로운 장소에 발을 내디딘 이답지 않은 말씨였다.
‘가지 못하게 하려면, 그 아일 막으려면, 그러자면 방법은 하나뿐인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요. 아가씨, 저는 차마…….”
잠시간 숨을 고르는 듯 엘몬트는 말을 멈췄다. 어조와 달리 가늘게 떨리는 눈시울이 저물어 가는 노을 아래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멈추시질 않으실 겁니다.’
지나치게 회의적인 결론을 내리는 이의 눈에는 수십 년간 인고해 왔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끝내 아무도 저를 지켜 주지 않은 비정한 세상에 대한 두려움. 저와 같은 이를 향한 집착. 무엇이 그 아이를 이렇게 만드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만은 확실합니다.
‘……허니,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아가씨. 설사, 목숨을 부지한다 한들 생이 끝날 때까지 부서진 몸으로 아가씨를 지키고자 하실 텐데. 그걸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게 그 애가 택한 것이라면 그편이 두 분 모두에게 더 이로울 수 있을 겝니다.’
“놓아달라…….”
빛바랜 입술을 타고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얼어붙은 공기 위에 제 살을 덧댄 그것은 미처 깨닫지 못한 어떤 사실을 일깨워 주려는 듯 생경하게 울려 퍼졌다.
당신이 내게 바라는 것.
그게 뭐일지 항상 생각해 왔어.
무엇이든 기꺼이 줄 수 있다 여겼는데…….
고작 이런 것이구나.
결코 구해 내지 못했던 어린 날의 자신을 위해, 내 방패가 되어 생을 마감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상했던 것보다 깊고 짙은 그의 상처 앞에 나는 자조했다.
그는 불나방이다. 타오를 것을 알면서도 뛰어들길 주저하지 않는. 타오르는 불길을 멎게 할 용기도 그렇다고 그의 날개를 찢을 자비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끝없이 서로의 주위를 맴돌며 그가 파멸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내 손에 의해 부스러진 잊힐 수 없는 수천의 생과 마찬가지로. 나로 인해 망가질 또 다른 생을 지켜보면서…….
사위어 가는 낙조의 빛에 물들어 한층 깊어진 눈이 결연함으로 모양을 바꾼 것은 그때다.
그럴 수는 없지.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광기와도 닮은 중얼거림과 함께.
“아델리아 경?”
소리를 들은 걸까. 얼떨떨한 낯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안을 스치듯 지나친 나는 치료실에서 벗어나며 입술을 움직였다.
“페치오를 대신할 사람이 하나 있지.”
“예?”
그래, 하나 있어.
‘……아델, 사사로운 감정들은 쉬이 일을 그르치는 법이야.’
기울인 고개 너머 염려를 담은 푸른 눈.
‘나를 넘어서려면 먼저 그 마음을 이겨 내야 할 것이야.’
공작.
‘나약한 마음을.’
***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공작님, 공작 부인.”
예복을 갖춰 입은 공작이 막 옷소매를 정리하고 있을 즈음, 내실에 들어선 집사는 자세를 낮추고는 바깥의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준비된 만찬과 공작의 요구에 맞추어 평소보다 더욱 화려하게 장식된 저택의 내부. 차례차례 저택의 입구에 도착하고 있는 마차들.
집사의 보고가 오늘 무도회에 참석할 예정인 귀빈들을 읊기 시작하자, 연신 방 한구석에서 울려 퍼지던 초조한 구둣발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퍼진다. 허리까지 굼실거리는 은발을 따라 바닥으로 흘러 내려온 붉은 공단의 주인은 옷자락마저 감당하기 버거워 보이는 여린 어깨와 어울리지 않게 카펫을 짓이길 기세로 바닥을 밟아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옅은 한숨과 함께 눈짓으로 집사를 물린 공작은 그 소리의 주인에게로 다가갔다.
“진정해.”
자연스레 감싸 쥔 어깨에는 잔떨림이 가득하다.
“여보, 난…… 난 오늘은 그냥 여기 있을래요. 도저히…….”
불안정한 음색 역시 마찬가지였다.
“래릴, 이럴 때일수록 몸을 사리면 안 돼.”
잠시 후 시작될 무도회는 본디 세이의 부활을 알리기로 계획되어 있던 무대였다. 아델에게 각인한 그 애가 코르푸의 보호 아래 있는 지금은 모든 게 그저 우스운 무대로 전락해 버렸지만. 하릴없이 무료한 나날들을 보내는 한심한 작자들부터 시작해 앞으로 제국의 정세가 어떨지 가늠하는 책략가까지. 나름 절묘한 시기처럼 보이는 오늘, 공작가의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을 천치는 없을 것이다. 아직 코르푸와 모르타 위원회가 아델과 세이, 둘에 대해 뚜렷한 설명을 내놓지 않은 마당이라는 것 또한 한몫했지. 허나, 그렇다고 하여 물러선다면 추측들은 더욱 무성해지기만 하는 법.
공작은 아이를 다루는 듯한 차분한 어투로 말을 이어 갔다.
“더욱 이목을 끌기만 할 거야.”
“하지만 사람들이 각인에 대해 물으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내 옆에서 떨어지지만 마.”
크고 단단한 손으로 보드라운 살결을 맞잡자 그제야 불안하게 구르던 은안이 조금 진정된다.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만.
아델리아 경.
또 한 번 들려오는 단어에 공작 부인의 어깨가 움찔한다. 이제 몇 번째인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무도회의 잦은 주제가 된 이름은 아무리 전환하려고 해도 다시 돌고 돌아 그들의 발 앞에 굴러떨어졌다.
침착해.
부인의 가냘픈 손마디를 살짝 움켜쥔 공작의 손은 그리 말하는 듯했다. 공간 위로 정처 없이 배회하던 공작 부인의 시선을 제게 맞춘 그는 잔뜩 묽어진 동공을 향해 부드럽게 눈매를 휘었다.
다 잘될 거야.
불쑥 그를 향해 치고 들어온 물음이 들려온 건 그때다.
***
“공녀와 아델리아 경이라. 소문이 파다하지요.”
거침없이 말을 이어 가는 일은 이미 거나하게 취한 듯 보이는 자작이었다.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말을 붙이던 아까의 기세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날것의 문장.
“진짜가 맞습니까, 공작님.”
실례를 너머 다소 무례하기까지 한 질문을 제지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아마 공작의 반응이 어찌 나올지 기대라도 하듯 무언의 합의를 본 것 같았다. 더는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을 직감한 공작은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둘의 우애가 돈독하니 다행이지요.”
공간을 가로지르는 문장은 긍정이었다.
“티케 사냥꾼들이 아올리스를 어지럽히는 마당에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코르푸도 모르타 위원회도 어느 쪽에서 이렇다 할 성명이 나오지 않은 마당에 처음으로 나온 확언이었다.
마치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던 공녀의 납치 사건과 티케 사냥꾼의 일을 모조리 잊은 사람처럼. 그 변덕스러운 기세에 테이블 위로는 침묵이 내려앉고 사방은 얼떨떨한 낯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저 위악을 떠는 것일까, 아니면 이게 정말 다 공작이 짠 판일까. 공작의 심중을 짐작하느라 누구 하나 쉬이 운을 떼지 못하는 사이, 적막을 깨트린 건 유일하게 제정신이 아닌 사내다.
“그럼, 정말입니까. 공녀가 아델리아 경에게 각인했다는 사실도…….”
찌푸려진 미간, 흐리멍덩한 초점.
침묵할 때와 말할 때를 가리지 못하는 아둔한 사내를 조금은 안타깝게 바라보며 공작은 테이블 위로 잔을 내려놓는다. 맑은 울림과 함께 내실에 번지는 공작의 음성은 섬뜩하다.
“공작가의 축복이지요. 둘이 힘을 합쳐 다가올 고난들을 극복할 수 있으니.”
입꼬리 끝만 당겨 올린 웃음마저 그러했다.
“허나, 일전엔 아델리아 경이 공녀를-”
“자작께선 간사한 자들의 속된 말을 그리 쉬이 믿으시나 봅니다.”
매끄러운 솜씨로 공작은 그의 말을 갈랐다. 낮지만 분명한 음성은 익숙한 곡의 변주를 알리는 신호와도 닮아 있었다. 경고를 닮은 물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제야 자작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아몬은 영악한 자지요. 특히, 그가 아올리스에, 올레나 위원장에게 가지고 있는 적의를 고려하면 제국에 파다한 헛된 소문들은 놀랄 것도 없는 일. 모두가 뜻을 모아 그들의 처단에 힘써 제국의 기틀을 다져야 할 것입니다.”
며칠 전만 해도 신흥 세력들과 함께 제국을 들쑤시기 시작한 티케 사냥꾼들을 그저 방관하던 공작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참으로 놀라웠다.
하루아침에 뒤바뀐 공작의 태도가 과연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엎질러진 사안을 수습하는 것인지 쉬이 감을 잡을 수 없어 한숨만 내어 쉬던 치들은 하나둘 시가를 핑계로 테이블을 벗어나 테라스로 나섰다.
경쾌한 악단의 선율과 달리 대리석에 맞부딪치는 발소리는 한없이 무거운 채로. 그에 따라 흩어지는 상념들은 대부분 엇비슷했지만.
도저히 저 사내의 속은 알 수가 없구나.
***
“뭐가 맞을까.”
시가에 불을 붙이며 중얼거리는 이는 펠렌가의 자작. 어둠을 사위는 불빛이 반짝이며 심란한 기색이 가득한 그의 낯이 선연해진다.
공녀와 아델리아 경이라니.
공작가의 공녀와 양녀. 둘이 앙숙이라는 사실을 세상천치 모르는 사람이 없는 와중에 각인이라. 게다가 그런 소문을 낸 장본인이나 다를 바 없는 공작의 저런 태도는 또 뭐고.
제국의 앞날이 정녕 어찌 되는 것인가.
모르는 이가 보면 마치 그런 번다한 마음을 달래는 것처럼 그가 길게 시가 한 모금 빨고 있는 사이, 테라스 난간에 기대고 있던 친우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각인 말이야. 그것도 전부 다 공작이 꾸민 짓이겠지.”
“미친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딱 보면 몰라. 공작도 그저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 거잖아.”
“공작이 그럴 위인인가.”
저마다의 생각으로 소리는 점점 더 높아지고 사위는 소란하게 변모했다. 그렇다, 아니다. 한참 동안 켜켜이 쌓여 가던 입씨름이 가라앉은 건 뜻밖의 문장이 들려온 직후였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자연적인 각인이었다면 어떨까.”
음성을 따라 움직인 여러 쌍의 눈동자 끝에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제국 제일가는 재력가로 성장하고 있는 랄프 오도만. 어둠을 뚫고 흘러 들어온 달빛을 인 모습이 가히 그 명성에 걸맞다. 그래, 행운의 사내. 두 번째 내기의 판마저 그의 승리로 돌아가자 더욱 확고해진 그 별명은 이제 어느 티케가 그에게 각인한 게 아니냐는 말까지 심심찮게 돌 정도라지.
“코르푸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강제적인 각인이 아니라 말이야. 그러면 앞뒤가 맞지 않나.”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그 명성과 마찬가지로 그의 주장은 항상 터무니없다는 게 문제지만.
자연적인 각인.
언제, 누구에게 각인될 줄 모른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 그것은 뜻대로만 이루어진다면, 기실 엄청난 파급력을 지니고 있다. 드물긴 하지만 종종 각인이 깨지는 경우가 있는 불안전한 강제적인 각인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한 결속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도 그러했고.
문제는…….
“랄프,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공녀는 코르푸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강제적인 각인도 실패했다고.”
티케 일족이라 하여 누구나 각인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능력이 강한 티케들에게만 나타나는 치유력처럼 각인 또한 그러하지. 강하고 강한 티케들만이 각인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출 수 있고 자연적인 각인은 더욱 까다롭다.
“그런 공녀가 어찌 자연적으로 각인을 할 수 있겠나. 게다가 요즘 같은 세상에 자연적인 각인이라니…… 차라리 공작이 강제로 각인시켰다는 게 더 설득력 있지.”
제 아무리 랄프의 고견일지라도 쉽사리 수긍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건 그래서였다.
“아니, 그러고 보니 말이야. 애초에 그럴 거였으면 티케 사냥꾼이니, 아몬이니 하는 그런 소문들을 공작이 왜 만들었겠나. 공작도 몰랐다고 봐야지. 그래야 앞뒤가 맞지 않나. 그럴 수도 있잖나. 누가 누구에게 각인될지 알지 못하니.”
물론 그의 맹목적인 추종자들도 여럿 있었다만. 그리하여 다시 테라스에는 불꽃 튀는 논쟁이 시작된다. 피와 쇠붙이가 없는 소리가 물결처럼 번진다. 사위는 돌팔매질이라도 당한 호면처럼 수런수런하고 허공으로 흩어지는 하얀 연기가 사라진 자리 위로 떠오른 사내들의 낯은 사뭇 진지하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펠렌 자작이 조용히 입술을 연 건 그때다.
“그래서 말이야, 랄프.”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이번엔 얼마를 걸 거야.”
그들의 낮을 앗아가고 그들의 밤을 지배할 또 다른 내기가.
쌓여 가는 판돈을 상상하는 자작의 낯에는 앞날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기쁨이 번갈아 피어오른다. 기쁨으로 충만하게 차오른 새까만 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위를 비집고 들어오는 은빛 물결이 아니었다면 계속해서 그랬으리라.
아델리아 경.
제 동공에 맺힌 상의 주인을 낮게 읊조리는 자작의 음성은 한없이 경직되어 있었다.
***
“아델리아 경?”
시야를 가득 채우는 풍경에 나는 느리게 눈을 여닫았다.
무도회의 여흥이 깃들어진 불빛이 내려앉은 테라스에는 어수선한 사내들과 그 앞을 채우는 지폐들로 가득했다. 뭣 모르는 내가 보아도 막 내기판이 벌어졌다는 것을 모를 수는 없었다. 단연 그 화두는 나와 공녀라는 것도.
이곳은 마치 다른 세상과 같아.
썩어 문드러져 가는 여린 자들의 마음을 팔아 그저 판을 벌이고 그 위로 유흥을 쌓으며. 그저 무엇이 사실인지에 찾아내기 급급해 아무도 진실을 쫓지 않지. 아무도 관심이 없어. 이 문 밖 어딘가에서 스러져 있을 후작에게도 역시.
“저희는 그저…….”
시선이 맞부딪치자 사내 하나가 초조하게 입술을 굴리는 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그래서 다행이야.
아무도. 아무도 깊이 고심하지 않아서 말이야.
이게 당신들에겐 그저 내기고 판돈이라 말이야.
실긋, 입가에 웃음을 걸고 그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간 것 그때다.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는지 좁혀진 거리 속 아연한 사내들의 낯이 선명해진다. 당황한 기색이 분명한 그들을 향해 손을 뻗어.
“내기는 말입니다…….”
다시 거두어들인 손끝에는 지폐가 한 장 걸린다.
“잠시 접어 두시지요.”
더 흥미로운 판이 벌어질 테니.
얼떨떨한 만면을 지나친 나는 보폭을 넓혔다. 테라스를 지나 드러난 무도회는 휘황한 불빛들로 가득하다. 눈을 멀게 할 광휘로운 빛깔을 잠시 머금고 있자, 그 점멸할 듯한 공간 속 나를 발견한 사람들은 하나둘 입을 모은다.
아델리아 경.
당연한 수순같이 사위는 물살처럼 갈라지고 그 끝으로 드러난 것은 고대하던 이의 모습이다. 공작. 그곳을 향해 천천히 내딛는 걸음을 따라.
루트비아가의 사생아.
사람들이 어찌 그 말을 그리 쉬이 믿었을까. 고매하던 백작의 명성과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일이었는데. 고작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은발과 은안? 정말 그것 때문에?
아니.
티케 사냥꾼을 제국에 불러들인 괴물, 공작가의 후계자를 몰아내려 한 무뢰배.
사람들은 어찌 그 말에 쉬이 속아 넘어갈까. 따지고 보면 여러모로 이치에 맞지 않는 점이 다분한 소문을. 티케에 대한 제국민들의 깊은 애정? 단지 그것 때문에?
아니.
어느새 걸음은 멎고 시야를 흐리는 것은 뜻을 알 수 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벽안이다.
아무도…….
아무도 관심이 없어. 깊게 고심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말이야. 그저 원하는 것은 자극적인 쾌락과 향락뿐이고 안에 든 게 무엇인지는 사실 중하지 않아.
그러니 얼마나 다행이야.
고요해진 사위 속 나는 이를 깨닫게 만들어 준 창조주를 향해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청원을…….”
증언도, 증거도, 증인도 분명 없겠지만…….
“청원을 신청한다!”
당신들이 열광할 것이 분명할.
“펠리프 베르니와 레리아나 루트비아의 적장녀!”
보아라.
내 손안에 펼쳐질 아올리스의 가장 성대한 판을.
“나 아델리아 베르니!”
그리하여 열광하라.
가진 모든 것을 걸어 그 뜨거운 열기가 아올리스를 삼키고 모두를 미쳐 버리게 만들 정도로.
“……내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
어차피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이니 말이야.
쥐 죽은 듯 적막한 공간을, 그곳을 가득 메우는 충격에 빠진 사람들을 훑어 내린 나는 다시 한번 목을 울렸다.
“라에갈 에오르테. 에오르테가의 후작을 그 증인으로 신청하는 바요.”
***
무도회는 끝났다.
이를 증명하듯 공작가의 로비 앞은 수십 대의 마차들로 가득했다. 막 저택을 빠져나가거나 빠져나갈 준비를 하는 마차들이었다. 파장에 다다른 무도회에서 볼 수 있는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거나하게 취해 비틀거리고 한껏 오른 술기운에 붉어진 낯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조금 달랐지만. 마치 무도회가 아닌 회담이라도 끝내고 온 것 같은 엄숙한 분위기 속, 그 기이한 분위기를 가른 건 어느 귀부인의 음성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믿기지 않은 소식을 접한 그녀의 낯에는 마찬가지로 떨림으로 가득 차올라 있었다.
“그럼, 래릴이-”
점점 높아지는 음성을 가른 건 그녀의 손을 꼭 잡아챈 남편이다. 챙이 넓은 모자로 표정을 가린 그는 눈짓으로 부인에게도 경고와도 같은 신호를 보낸다. 그제야 제 음성이 생각보다 높았다는 걸 깨달은 귀부인은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며 마저 말을 이었다.
“저 여자 말대로라면 래릴과 필립이, 아니 공작과 공작 부인이 결혼 전부터 만남을 가졌다는 뜻이겠죠?”
“불행히도 그런 것 같아.”
맙소사. 그럼에도 단말마와 함께 터져 나오는 비명은 막을 수 없었다만.
“하지만, 부인. 아직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다오. 그러니 너무 쉬이 단정 짓지 맙시다. 게다가, 그 여자는 이런저런 논란이 많았던 이 아니오.”
남편의 말에 부인은 연신 부채질을 했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 부채의 장식이 위아래로 정신 사납게 펄럭였다. 그 기다란 깃털의 장식이 뒤따라오던 시종의 얼굴을 두어 차례 때렸을 때였을까. 부인은 무언가 깨달은 듯 동작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지요, 여보.”
공기를 내리누르는 음성은 중대한 이야기를 앞둔 이의 것과 같았다.
“어쩐지 아델리아 경이 공작과 닮았던 것도 같아요.”
잔뜩 좁혀진 미간 아래, 동의를 구하듯 남편을 바라보는 눈 역시 그러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델리아 경의 외양이 죽은 루트비아 백작과 꼭 같다는 말을 했던 이답지 않게. 허나, 그녀의 남편은 퍽 다정한 사람인지라 구태여 그 사실을 지적하진 않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후작이 빨리 나타나야 할 텐데 말이에요.”
부인이 덧붙인 그 말에도 역시.
***
“후작을 찾지 못했답니다, 공작님.”
안도의 숨을 길게 내뿜으며 보좌관이 건넨 보고가 공작의 집무실에 가득 차올랐다. 혹여 모를 사안을 대비하기 위해 모여 있던 가문의 원로들 역시 마음이 놓였는지 입가에 옅은 웃음을 그렸다.
“다행입니다, 공작님.”
아델리아 경이 공작의 친자식이다. 황당무계하고 말도 안 되는 그 주장을 그저 무시해도 되긴 했다만, 원체 아델리아 경이 영악한 인물이기도 했고 신흥 세력이 제국 전역을 이쪽저쪽 들쑤시고 다니는 통에 좀체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던 것이다.
“청원까지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는데 청원이 실패로 끝나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겠습니까. 아델리아 경이 바라는 게 무엇이든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겝니다.”
시종일관 뜻 모를 표정을 고수하던 공작의 낯에 웃음이 피어오른 건 그때다.
“공작님?”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공작은 그저 손에 쥔 찻잔만 달막거렸다. 맑은 울림을 따라 공간에 흩어지는 것은 그들의 것과는 조금 다른 상념이다.
청원이라.
그 애가 원하는 게 정녕 그것일까. 증인을 내세워 제 자리를 되찾는 것?
피식, 웃음을 흘린 공작은 그저 무대 위의 꼭두각시 인형처럼 짜인 판 위를 구르기 급급한 원로들을 일별하고서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유리창 저편 괴여 있는 정원은 한없이 푸르기만 하다. 마치 그자처럼.
후작. 에오르테 후작.
‘라에갈 에오르테. 에오르테가의 후작을 그 증인으로 신청하는 바요.’
그 말 한마디에 이제껏 관심을 두지 않았던 후작의 행방을 모두가 쫓는다지. 에오르테가의 사병으로는 몇 달이 되어도 불과했을 추적을 단 며칠 사이에 이뤄 내며. 판돈에 미친 이들이 테비온까지 들이닥쳐 수색을 하기까지 했다니 말 다했지. 누군가 만들어 놓은 무대 위를 뒹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헛웃음을 다시 한번 터트리며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얼떨떨한 표정을 내비치는 이들을 지나친 그의 걸음은 흐르듯이 내실을 벗어나 응접실로 이어지는 통로에 가 닿았다. 정확히는 역대 가주들의 초상화가 걸린 그곳에.
왼쪽 벽을 장식한 역대 공작들의 모습에서 그는 제 딸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은발과 은안. 고작 그런 것들로는 가릴 수 없는 베르니가의 피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군중의 심리를 꿰뚫는 통찰력과 명민함으로 구하고자 하는 것이 한낱 불필요한 사내라는 게. 더없는 영예와 지위를 가질 수 있음에도 이를 주저하는 나약함이.
그럼에도…….
공작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심중에 자꾸만 차오른 이 감정의 정체는 다른 무엇도 아닌 뿌듯함이라는 걸.
그래, 아델의 낯은 이들과 닮았어.
얼음으로 깎아 만든 것 같은 철혈의 베르니를.
게다가 티케의 가호를 받는 모르스 일족이라…….
‘공녀님이 각인한 자가 아델리아 경이라 합니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 그 소식을 떠올리며 웃음을 흘린 공작은 확신했다.
만약 이 아이가 가문의 주인이 된다면 누구도 감히 베르니를 위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한번 보여 보렴, 아델.
네게 주어진 그 대단한 티케의 축복을 말이야.
***
“어찌하실 작정입니까, 위원장님.”
어둠이 짙게 드리운 공간을 흔드는 소리에 올레나는 읽고 있던 서신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들어 올린 눈에는 깊은 수심이 깃든 보좌관의 낯이 가득 차올랐다.
“마지막 수색대가 방금 도착했습니다. 후작을 찾지 못했다 합니다.”
귓가에 들이차는 소리에 올레나 위원은 허탈한 숨을 길게 내뱉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워 에오르테가의 후작을 찾아 헤매던 니벨론 기사단은 피로에 지친 몸을 이끌고 저택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무 소득 없이.
“……청원이 실패로 돌아가면 아델리아 경을 둘러싼 부정적인 여론이 더욱 거세지겠지.”
“티케의 각인자라는 명칭으로 그나마 회복된 이미지마저 실추될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아마 공작이 그리 만들겠지요.”
“그래, 그럴 것이야.”
진짜일 테니까.
짧게 말을 덧붙인 그녀는 곧, 다가올 파란을 예감한 듯 뻐근하게 조여 오는 관골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애써 덧씌운 희망마저 사라진 눈을 가리려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뜨기도 했다. 잠시간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보좌관의 얼빠진 표정은 눈동자의 깜빡임에 맞추어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진다.
증언도, 증인도, 증거도 없지만, 그냥 그래. 그런 생각이 들어. 릴리의 신호를 구태여 확인해 보지 않아도 되었다.
공작가의 적장녀.
마지막 퍼즐을 집어 든 순간, 아델리아 경과 공녀를 휘감아 왔던 일들의 정체가 비로소 납득이 갔으니까.
그러니 단연, 증언도 증거도 증인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공작이 그런 얕은 실수를 할 위인은 아니니까. 청원이 실패로 끝난 후 공작이 이 일을, 그 여자를 그저 가만히 지켜보지 않을 거라는 것 또한.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지.
그저 이런 황당한 일을 벌인 것만으로도 아델리아 경에게 엄중한 죄를 물을 것이 분명한 공작이 하물며 그 낭설이 진실이까지 한 마당에 가만히 있겠나. 옅은 한숨을 내어 쉰 올레나는 숨 막히는 정적을 가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모르타 위원회의 동태는 어떠하지.”
“심상치 않습니다. 페치오의 독단 아래 이루어진 의식이었다고나 하나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며 그들이 입은 타격은 제법 큰 모양입니다. 모르스의 현신이다, 신으로 추앙하려 했던 인물이 티케의 각인자가 되어 버렸으니 하루아침에 우스운 꼴이 되어 버리기도 했고요. 아델리아 경이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걸 모를 이는 이제 없는 것 같습니다.”
“페치오는?”
“위원장님의 짐작이 맞았습니다. 그가 코르푸와 벌어질 수도 있을 전면전을 대비하여 타 제국의 모르스 일족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다 합니다. 지금이야 모르타 위원회가 수백 년간 평화를 이뤄 온 티케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몸을 사리고 있으나, 페치오가 대륙에서 돌아오면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페치오가 공작과 힘을 합친다면…….”
만약, 그런 페치오가 공작과 힘을 합친다면?
그들은 티케의 각인자를 잃게 되겠지.
아올리스의 모두가, 아니 대륙이 주목하고 있는 티케의 각인자를.
그것이 언제든 코르푸를 집어삼킬 준비를 하는 티케 사냥꾼들에게는 기회가, 위원회에게는 더없는 균열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는 것도.
보좌관의 설명을 따라 자연스레 이어진 가정 앞에 올레나는 목이 콱 막힌 듯 차오르는 갑갑함을 누르려 찻물은 한 모금 머금었다.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후작이라 여겼다. 그를 찾아, 아델리아 경의 청원이 진실함을 알릴 수 있으리라.
허나, 그마저도 끝이구나.
나도 이제 힘이 다한 것일까. 낮게 자조하는 그녀의 근심 어린 낯을 적시는 건 벽등에서 흘러나오는 어룽진 불빛이다. 잠시 그 따스한 온도에 올레나가 얼굴을 맡기는 사이, 창밖을 배회하던 릴리가 다정히 그녀의 손 위로 내려앉았다.
어찌해야 하니.
어둠만 가득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길을.
어찌 나아가야 할까.
부드러운 숨결과 어우러진 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을 두드리자, 낮달처럼 흐릿한 릴리의 빛깔이 미미하게 일렁이기 시작한다.
“위원장님!”
밤공기를 찢고 쩌렁한 음성이 공간을 흔든 것도 그때였다.
***
그러니까 후작은 나타나지 않았다.
북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더라, 이미 찾았는데 혹여 모를 일을 대비해 잠적한 거더라. 혹여 마지막까지 청원장에 후작이 모습을 드러낼까 고대하던 이들의 바람은 닫혀 버린 문 뒤로 사위어 가고 청원은 점점 더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주재를 맡은 황제의 대리인, 아올리스의 재상이 둥근 청원장의 중앙에 위치한 단상에서 일어나 공작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질 준비를 하는 것이 이를 반증했다. 동시에 후작이 나타난다에 적지 않은 돈을 걸었던 이들의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 건 말할 것도 없고.
“조용.”
매서운 눈으로 술렁이는 군중들을 제지한 그는 제법 큰 돈을 잃게 된 분통함을 참지 못하고 미쳐 날뛰는 청중 몇을 쫓아내고 나서야 시선을 내렸다. 그 끝에는 청원장에 좌석해 있는 공작이 있었다. 이 소란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듯한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마지막으로 베르니가의 공작에게 묻겠소. 그대는 엄숙한 청원장 앞에서 오로지 진실만을 말할 것은 맹세합니까.”
“예.”
“펠리프 베르니, 일레인 이에타와의 결혼 생활 시절 레리아나 루트비아와의 관계에서 한 치의 흠결도 없음을 주장합니까.”
“존경하는 재상님, 제 입은 더는 대답하기를 부정합니다. 주어진 비난이 너무도 터무니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며칠간 제국을 끝없는 열기로 내몰았던 청원이 끝났음을 알리는 허망한 문장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번 일은 공작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헛헛한 낭설이 공작가에 고결함에 흠집을 내긴 했거니와 그리 오래가진 못하겠지. 사람들은 곧 또 다른 이야깃거리를 찾아 헤맬 테고 공작은 그에 대해선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까.
재상은 어떤 일에 대해서 쉬이 단언하는 이는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꽤나 확신이 있었다. 아니 애초부터 너무 터무니없긴 했지.
아델리아 경과 공녀가 자매라니. 차라리 사생아 따위의 문제로 공작의 도덕성에 흠결을 내려 했다면 무난하다 해 주었을 텐데. 이복자매도 아니고 친자매. 이미 전대 루트비아 백작이 가문에 입적을 시키고 작위까지 주려 했던 여인을. 공녀의 각인이 제법 놀랍긴 했지만, 그것은 공작의 주장처럼 올레나 위원장의 강압에 의한 각인이라는 점이 더 설득력 있었다. 논리적으로.
모르스 일족에게 각인한 티케라니. 그것도 자연적으로 말이야. 들어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이야기 아닌가. 그 모르스 일족이 대륙의 유일무이한 여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열감이 잔뜩 오른 눈두덩이를 문지르던 재상은 눈을 들어 올렸다.
모든 결정은 오직 사실과 증거로서 결정된다.
자신의 철칙을 다시금 되뇌어 보며 그는 목을 빳빳하게 쳐들었다. 엄숙한 청원장이 갑작스레 술렁거리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서늘한 눈빛으로 균열이 가는 고요를 제지하려던 재상은 그 진원지를 발견하고는 멈칫한다.
코르푸 위원회의 위원장이자 브린튼 가문의 가주.
올레나.
단연 그녀가 청원장에 나타날 거라 여겼다. 아델리아 경이 티케의 각인자인 이상 따지고 보면 그녀에게도, 코르푸에게 중한 재판이니 말이다. 허나,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정작 소동의 주인은 이를 알지 못한 것 같았지만.
“이리 늦게 걸음하여 정갈한 청원장을 어지럽힌 것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퍽 싱그럽게까지 느껴지는 음성과 마찬가지로 산뜻해 보이는 표정은 황당하다 해야 할까, 아니면 기가 막히다 해야 할까. 실로 청원장이 아니라 산책을 하러 나온 이의 것 같은 낯빛에 재상이 얼떨떨해 있는 사이, 싱긋 웃음을 그린 올레나는 더욱 황당무계한 문장을 내놓았다.
“존경하는 재상님, 괜찮으시다면 증인 회부를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증인. 증인이라고.
가늠할 수 없는 맥락에 재상은 미간을 좁혔다. 다 끝난 청원 앞에 긴장을 풀고 있던 군중들 역시 그러했다. 증인, 증인이 나타난대. 후작인가. 곧 나타날 증인을 고대하는 듯 여기저기서 목을 길게 뺀 인영들로 청원장이 소란해지자, 몇 번이고 이를 제지하려던 재상은 이내 포기하고서는 모두가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허한다.”
긴장한 기색이 다분한 사내 하나가 청원장으로 걸어 들어온다. 수많은 인파를 처음 보는 듯 이리저리 초조한 눈을 하고서.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그러나 좀체 짐작이 가지 않은 낯익은 얼굴에 재상은 탁탁, 깃펜의 뾰족한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조금 이른 질문을 던졌다.
“이름을 밝히시오.”
침착하던 까만 눈동자가 그 물음 앞에 동요하기 시작한다. 청원장을 밝히는 불빛들과 깍지 낀 제 손을 지나 어딘가로 흐르듯이 닿은 그의 시선은 무언가를 가늠해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증인은 이름을 밝히시오.”
넓은 공간에서 길을 잃고 배회하던 눈이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소리에 그제야 그를 직시해 온다.
“……네루…… 디아…….”
“더 크게 말씀해 주시오.”
재상은 작지만 분명한 소리로 잔뜩 뜸 들이고 있는 그를 채근했다. 이윽고 몇 번 숨을 고른 증인이 입을 열었다.
“……네루디아 보이네르.”
네루다.
곳곳에서 간간이 터져 나오는 탄식 소리, 얼빠진 표정들. 그 위로 떠오른 건 그래, 그 이름이었다. 몇 년 전, 의료 사고로 루트비아 백작의 건강을 악화시킨 의원. 촉망받던 공작가의 주치의. 그 괴로움으로 끝내 스스로 자결을 택했던…….
네루디아 보이네르.
예상치 못한 변수 앞에, 청원장에는 베일 듯한 적막만이 감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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