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청원 (11/16)

11. 청원

초록빛 물결로 가득한 별장의 내부. 곳곳에 인장처럼 새겨진 독수리의 문양들. 에오르테의 본가와 그리 다르지 않은, 그럼에도 묘하게 이질감이 드는 분위기를 찬찬히 살피던 페치오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청원을 준비한다고.”

소서와 다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지나치게 맑다.

“별로 남은 증거가 없을 터인데, 대단해.”

바로 눈앞의 사내, 라에갈 에오르테. 이자처럼.

“그래, 마땅한 증거는 없지, 허나 그렇다 하여 증인 역시 없는 것은 아니네.”

그래서일까. 파리한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문장은 그럼에도 무모하리만큼 당당하다. 페치오는 픽, 조소를 흘렸다.

어리석은 사내에 대한 연민이, 엉클어진 과거의 잔해 속에 파묻힌 무지한 사내에 대한 가엾음이 그곳에 가득 묻어 나왔다.

참으로 신기해.

“이번엔 결코 물러나지 않을 거네, 페치오. 도망치지 않을 거란 말일세.”

기억이란 건 말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앨 지킬 테니까.”

제멋대로 그 모양을 바꿔 가니.

사물의 형체를 따라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 제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상의 모양을 오롯이 본떠 낼 수 없는 그것이 결국 어느 순간엔 기괴하게 비틀어지고 마는 것처럼.

증인. 방금 제 귓가를 들쑤신 단어들을 혀끝에 굴려 보며 페치오는 궤변이나 다를 바 없는 낱말들을 스스럼없이 늘어놓는 결연한 빛깔의 녹안을 직시해 본다.

아무것도 알지 못해 도리어 가여워지고 만 눈을.

“그래, 그렇게 볼 수도 있겠어. 헌데 말이야, 후작.”

불운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이번 일은 신중히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후작, 저 자신은 그걸 알지 못한다는 걸.

“그댈 위해서라도.”

***

“마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위원님.”

후작과의 짧은 대화를 끝으로 마차로 돌아가는 길. 푸르름만이 가득한 페라비 별장의 정원, 이와 어울리지 않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약초 온실에 뜻 모를 시선을 주며 이내 걸음을 멈춘 페치오는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돌렸다. 채근이나 다를 바 없는 문장을 그럴 듯한 친절로 포장한 소리의 주인은 기울어진 몸을 무광의 지팡이에 의지한 채였다.

“오랜만이네, 엘몬트.”

공간을 흔드는 음성은 흡사 막역한 친우를 대하는 투와 닮았다.

빛바랜 막대기, 이에 의지한 비틀어진 사내의 왼다리를 지나 노년에 접어든 노쇠한 이의 낯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페치오는 무심코 제 손이 뺨에 닿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날의 밤이 남긴 상흔이 화인처럼 남은 이는 저뿐은 아니구나.

가끔은 저 자신도 믿어지지 않은.

그래서 더욱 분통한 그 긴 밤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마음은 그 지독한 시간을 만들어 낸 이에게로 향했다.

“유구한 에오르테가의 명성도, 나도, 자네도 다 세월 앞에 무색하건만…… 여전하구나, 저 아이는.”

여전해.

그리하여 기어코 딱해지고만 아이를 떠올린 새까만 눈은 깊은 여운을 남긴 단어를 가르고 마저 남은 말을 이어 갔다.

“그대라도 말려야 하는 게 아닌가.”

단조롭게 흘러나온 말에는 뼈가 있다. 손님을 배웅하려 자세를 낮춘 엘몬트의 등이 그 문장 앞에 움찔거린다. 그 몸짓이 전해 온 분명한 뜻을 페치오는 쉬이 알아차렸다.

“그래, 그대라도 말이 통해 다행이야.”

툭툭, 엘몬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보폭을 넓힌 페치오는 나직이 덧붙였다.

“두 다리로 걷길 포기하고서라도 지킨 아이라면, 끝까지 지켜 내야지.”

짙어지는 붉은 노을 속, 흐릿해지는 마차의 그림자가 끝내 사라지고 하늘에는 어둠이 어리었음에도 엘몬트는 못 박힌 듯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아직도 선연하다.

리오. 그 애를 처음 만났던 그날이.

‘누구세요?’

막 터질 것 같은 꽃망울처럼 부푼 눈동자와 오후의 햇살을 몰고 나타난 아이가.

그 부신 빛깔들이 빛을 잃고 사위고 사위다,

이내 기괴하게 이지러진 모양 역시,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지. 아니 사라질 수 없지.

그러하기에…….

한참이고 땅에 뿌리를 박은 듯 멈춰 있던 엘몬트는 별장 안으로 보폭을 넓혔다. 만천하던 별도 모습을 감추고 천공을 가로지르는 은하마저 가려진 시각. 곧, 다가올 밤은 깊다. 그 짙은 밤이 천지의 암흑을 몰고 오고 그 속에서 여명이 잉태되어 농도 짙은 어둠을 사르는 것이 응당 당연한 수순이건만, 엘몬트는 오늘 그 자연의 순리를 거슬러 보려 한다.

제 주인을 거쳐 간 수많은 밤들이 너무도 깊고 짙어서일 수도, 혹은 위태롭게 지나 왔던 그 시간을 이번에는 견디지 못할 거라는 불안이 자리 잡아서일 수도.

불규칙적인 발소리를 몰고 별장의 로비를 지나 후작의 집무실에 다다른 엘몬트는 그리하여 제 것이 아닌 책상 한편에 마련된 서랍을 열어젖히는 데 일말의 주저도 없다. 그 안에 가득한 수백 장의 서류들. 순백의 공간을 메꿔 낸 필체에는 보는 이에게도 간절하게 느껴질 정도의 절박함이 담겨진 종이들이 벽난로 안, 이글거리는 불길 속에서 잿더미가 되는 걸 지켜보는 것에도 주저는 없었다.

“엘몬트.”

서릿발처럼 냉랭한 목소리가 내실을 삼킬 듯 뜨거운 열기 위로 내려앉은 건 그때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지.”

목덜미에 닿는 스산한 칼날과 함께.

그 소리를 따라 엘몬트는 몸을 틀었다. 흐트러짐 없는 은발, 차분하게 가라앉은 은안. 시야에 차오른 것은 꼭 예상했던 이였다.

“……아가씨.”

“이상했어. 분명 그들이 가만있진 않을 터인데…….”

길게 말을 늘어트리던 검의 주인은 낮게 되물었다.

“공작인가? 아니면 페치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엘몬트, 그대가 저지른 일의 무게를 정녕 알지 못하는 것인가. 후작님이 무얼 걸었는지도.”

“죄송합니다, 아가씨. 허나, 청원은 불가합니다. 이미 자료는 다 소실되었고 남은 이는 오로지 저뿐이니까요.”

담담한 말에 그가 모시던 아가씨는 픽, 웃음을 그린다. 공기를 흔드는 뜻 모를 진동과 함께 내밀어진 가느다란 손에는 서류 몇 장이 들려 있다.

“난 바보가 아니야.”

방금 그가 불태웠던 것과 꼭 같은.

어룽대는 불길이 그려 낸 그림자가 내려앉은 종이와 벽난로 안 잿더미를 번갈아 바라보며 그 두 사이의 간극에서 배회하던 엘몬트의 눈이 허탈한 숨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청원은 결단코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아니, 리오 그 애의 일을 다시 꺼내는 것 역시.”

“어째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허면 그대의 입을 내가 찢으면 되는 것인가.”

벼린 칼날은 그 문장이 그저 우스운 농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그의 입가에 와 닿았다. 격양된 공기를 느끼며 엘몬트는 한층 묽어진 눈을 들어 올렸다. 날 선 쇠붙이를 넘어 그보다 더 예리하게 그어진 눈매가 그를 직시하고 있었다.

찬 기운이 선득한 얼음처럼 날카롭게 번뜩이는 눈은 자비를 알지 못한다. 제 주인을 기만하고 방만했던 문장들은 이 서슬 퍼런 아가씨에게 단연 통하지 않음은 분명했다. 그러니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선택뿐.

진실. 잔악한 진실.

“……버티시질 못하실 겝니다…….”

끊어질 듯한 음절들이,

“견디시질 못하실 거예요.”

수년간 그의 목구멍 속에서 곪아 왔던 단어들이,

“……페치오는 리오를 죽이지 않았어요.”

엘몬트의 입을 타고 토해져 나와 바닥을 수놓는다.

“문제를 내지요, 아가씨. 아주 쉬운 문제예요.”

잔뜩 떨리는 숨결을 타고서.

“페치오의 수작에 명을 달리한 이가 리오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아가씨.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요.”

“……그 아이?”

“아니, 누굴 흉내 내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를 삼킬 듯 바라보던 은안은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어렴풋이 떨렸다. 마주 보고 있던 엘몬트의 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위로 떠오른 것은 과거의 어느 날이다.

그는 에오르테가의 충복이었다. 그의 아비가 그러했듯. 그의 조부가 그러했듯. 그게 그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삶이었고 이를 거스르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카트린느 에오르테. 혹자는 광증이 도졌다고 수군거리던 에오르테가의 주인을 그는 그렇게 모셔 왔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공자님?’

모르스 일족으로 발현하기 위한 훈련이 진행되고 있던 수년 전 어느 날,

‘공자님!’

고막을 찢을 듯한 비명소리가 멎고 에오르테가의 둘째는 차디찬 한기와 함께 싸늘하게 식은 채 발견되었다. 바닥을 가득 적신 핏물의 끝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단검을 쥔 손이 있다. 그 여린 손마디에 스스로의 혈맥을 끊어 낼 잔혹함이 깃들려면 얼마나 큰 두려움이 있었어야 했을까.

아직도 알지 못하겠다만 그는 그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 아주 잘못되었다는 걸.

‘메로본가의 영애가 또 공자님을 찾아왔습니다, 후작님.’

‘적당히 둘러대.’

‘일단, 몸이 좋지 않다 둘러대긴 했지만, 쉬이 포기하실 것 같지 않습니다. 게다가 영애께서는 공자님의 약혼녀이기도 하니 계속 이렇게 대처할 수만은-’

‘그러기에 내 그렇게 레지나가의 차녀와 연을 맺자 했건만!’

라에갈 공자가 모습을 감춘 지 수일째. 저택의 주인은 이를 둘러싼 무성한 추측에도, 묘비에 묻히지 못한 채 바람결에 흩어진 제 아들의 뼛가루에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엘몬트. 무슨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오로지 그녀에게 중한 것은 모르스, 모르스 일족.

‘테오라면 가능할까.’

광기 어린 녹안이 그를 파고들었다. 섬뜩한 문장을 몰고서.

‘……공자님께서는 아직 갓난쟁이이지 않습니까.’

‘페치오가 그리 말했어. 어릴수록 더 가능성이 있다고 말이야. 조금이라도 빨리 훈련을 거치면 테오는 적어도 모르스 일족으로 발현할 수도 있겠지.’

저를 응시하는 눈은 이 세상 사람의 것 같지 않았다. 입술을 짓씹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당장이라도 종줄을 잡아당겨 요람에 뉘인 어린 공자를 데려오라 할 기세로 손을 뻗었다.

‘대신, 대신 그 애가 있지 않습니까, 후작님.’

해서는 안 되는 말이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그 애?’

멍하게 잠겨 있던 눈이 뒤늦게 그의 말을 알아듣고는 느리게 여닫혔다.

에오르테가의 본가 크세라스 저택에 한 마차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

아이가 이상하다.

슬쩍 굴린 눈으로 제 곁에 앉아 청원에 필요한 서류들을 작성해 나가는 아이를 보며 후작은 다시 한번 그 생각에 힘을 실어 보았다.

이상해.

며칠 전만 해도 그가 벌인 청원에 대해 깊은 반감을 드러내고 있던 아이가 아니던가. 그의 완강한 고집을 모르지 않는 듯 구태여 입을 대지는 않았다만 그 마음마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도와드릴 게 있나요.’

여물지 않은 아침의 햇살 속 평소와는 궤가 다른 아이의 목소리를 되새겨 보며 후작은 고개를 기울였다. 갑작스럽게 생긴 심경의 변화는 과연 어인 연유에서일까.

항시 방 안에 감도는 갓 배어 난 풀 냄새, 빳빳한 종이 냄새마저 이질적으로 만드는 존재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깊게 깃들어 있다. 그 눈길을 느끼기라도 한 듯 기다란 속눈썹이 올라가고 햇살이 옅게 번진 은안이 드러난 건 그때다.

“후작님.”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가 멎고 햇볕을 받는 모양에 따라 다채로운 색을 뿜어내는 눈동자는,

‘도와드릴 게 있나요.’

마치 그 말을 할 때처럼 생경한 빛깔로 그를 직시해 왔다. 예상치 못한 문장과 함께.

“오랜만에 숲에 가 보고 싶어요.”

***

“왜 바로 말해 주지 않으셨어요.”

앙상하게 흔들리는 가지 아래, 표표히 나부끼는 잿빛 그을음.

햇살이 기울고 그림자의 위치가 바뀔 때까지 스산한 풍광이 나비치는 숲만 바라보고 있던 아이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소리를 따라 눈을 돌리자, 메마른 가지를 타고 흘러내려온 노곤한 볕에 단정하게 빗어 내린 은발이 더욱 강렬히 제 색을 흩뿌리고 있었다.

“무엇을.”

“이 숲이 다 망가진 그때, 제가 모든 걸 망친 그날.”

후작은 대답 대신 가만히 그날을 떠올려 본다.

‘들어 본 적 있니, 아델? 여인의 몸으로 모르스 일족이 된 자의 이야기를.’

왜 그러했을까.

‘그런데 무엇을 걱정하는 거니.’

아이는 영민했고 그 힘은 강력해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다 하더라도 결코 끝까지 감출 수 없었을 텐데.

왜 그러했을까.

한동안 그 역시 깊게 고심하며 답을 찾지 못했던 물음은 의외로 이 기괴한 숲에서 쉬이 해답을 찾아간다.

“네 눈에 빛을 심어 주고 싶었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눈이 나를 담고 반짝거리는 걸 상상하며. 숲에서 너는 늘 그러해 그걸 알게 되면 네가 실망할까 어리석게도…….”

그래, 그래서였구나.

농밀한 어둠의 장막도 저 아이의 빛깔은 가리지 못하게 하리라. 그게 결코 이룰 수 없는 바람이라면 단 하루, 단 하루만이라도 더.

“네 하루가 그저 안온하기를 바랐다. 영원히가 아니라면 그저 하루만이라도 더…… 그것만을 바라…… 언제든 드러날 일이 너를 삼킬 걸 알면서도. 미안하구나.”

물살처럼 퍼지는 은빛 물결을 바라보며 후작이 마저 말을 맺자, 돌아온 것은 의외의 반응이었다.

짧은 웃음 한 번, 잇새 사이로 흘러나온 신바람.

그것을 끝으로 고개를 젖힌 아이는 한층 묽어진 눈으로 광활한 하늘을 담아 내렸다. 그래, 그래서였군요. 그 너른 공간으로 나직한 중얼거림을 흘려보내면서.

창공을 일별한 은안이 뜻 모를 말과 함께 그를 다시 응시한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우린 참 둘 다 아둔하고 또 어리석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니.”

대답 대신 아이는 엷은 웃음을 그리며 그의 뺨 위로 손을 갖다 댄다. 가느다란 손끝이 닿은 것은 그날 그의 눈 밑에 아로새겨진 깊은 상흔이다.

“항상 이해가 가질 않았죠.”

“무엇이.”

“그 애랑은…… 얼마나…… 얼마나 닮으셨어요.”

속삭이듯 들려오는 말은 아이답지 않게 맥락도 두서도 없다. 후작이 그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답이 없자, 아이가 채근하듯 덧붙였다.

리오 말이에요.

“우린 정말 똑같았지.”

“……그럼 저는 그 애랑 얼마나 닮았나요, 후작님.”

나직이 되돌아오는 음성은 이제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했고 뒤이어 이어지는 고요한 적막은 숨소리마저 멎게 할 듯 깊었다.

“하나도.”

그 찰나의 침묵을 메꾸는 후작의 음성은 단호했지만.

“헌데 이상하지, 널 보면 자꾸 그 애가 생각나.”

“그 애 다음이 그럼 저인 건가요.”

후작은 대답 대신 아이를 바라보았다. 삼킬 듯이 그를 바라보던 아이의 눈길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빛깔을 띠고는 농도 짙은 감정을 전해 온 건 그 순간이다.

“용서해 드릴게요.”

“무엇을?”

제가 두 번째인 걸요.

***

내리쬐는 볕을 가리는 메마른 가지들의 그늘이 준 안식 속에서 잠든 이의 낯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청원을 준비하려 밤낮을 가리지 않아 그런지 유백색 빛기둥에 드러난 만면은 피로로 짙게 물든 채였다. 어둠이 짙게 드리운 눈 밑과 메마른 입술. 곧 델로스의 문턱을 앞에 둔 이라고 해도 의심치 않을 몰골을 느리게 배회하던 시선을 따라 두서없는 생각들이 흩어져 나온다.

당신이 내게 바라는 것.

그게 뭐일지 항상 생각해 왔지. 내 소망과 같길 바랐던 때도 있었고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는 투정을 부렸어.

당신에겐 내가 항상 유일하기를 바랐으니까.

그러기를 바랐지.

헌데…….

헌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간신히 억눌러 왔던 감정이 치밀어 잠시 고개를 젖혔다. 시야를 가득 메운 푸른 하늘은 닿을 수 없을 만큼 아득히 멀다.

‘……내겐 동생이 있었어.’

닿지 못할 곳을 그는 얼마나 오래도록 바라봤던 것일까.

‘허나 그 시절의 나는 어리석고 나약해 결국 그 애를 지켜 주지 못했지.’

그 마음은 얼마나 깊고 짙었기에 기어코 눈을 멀게 하고 시간을 얼어붙게 만든 걸까.

‘널 보면 자꾸 그 애가 떠올라.

다시 떨군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아직도 잔인한 밤의 하늘 속을 헤매는 소년이다.

가여운 사람.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 잊을 수도 잊히지지도 않는 비틀어진 환상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당신을. 그리고 우리들을.

“아델?”

여전히 이를 알지 못한 채 맑기만 한 울림이 들려온 건 그때다.

“이런 내가 잠들었구나.”

후작은 짙어진 햇살의 농도를 눈치챘는지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맞지 않는 초점을 맞추려는 듯 깊게 팬 눈꺼풀을 두어 번 여닫았다. 그 속에서 나비치는 싱그러운 빛깔이 모두 다 허상이라는 걸 알아.

‘일시적으로 눈의 빛깔을 바꿔 주게 만드는 약초입니다. 리오을 위해 만들었지요. 이 저택에 온 후 줄곧 말입니다.’

이제는 알아.

“남은 서류를 마저 정리하려면…….”

“걱정 마세요. 저와 엘몬트가 마무리를 했습니다.”

당신이 진정 지키고자 한 것이 누구인지.

“그걸 전부 말이니?”

“절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제는 압니다. 그것을 지금에야 알게 된 까닭이 분명 있겠지요.

“네가 달가워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마음이란 쉬이 바뀌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설풋 눈을 가려 표정을 감춘 나는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은 궁금해졌거든요.”

섧은 꿈을 꾸웠습니다.

그곳은 해가 지지 않는 땅이라,

모두가 아파할 리가 없는 곳이였지요.

그곳에서 당신과 함께하는 꿈을 꾸었어요.

허나, 모두가 그곳에 머물 수 있는 건 아니겠지요.

“해가 지지 않는 땅은 어떤 빛깔일지…….”

짧다고만 할 수 없는 시간들. 당신의 품 안에 나는 그저 안온했으니 이번에는 내가 당신이 지키고자 한 그 아이를 지켜 보고자 합니다.

아무도 지켜 주지 못해 결국 가여워지고만 그 아이를.

“그늘진 곳이 없는 대지는 어떤 모양일지 말입니다.”

누군가 한 번은 지켜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

해는 지평선 끝자락으로 내몰리고 그 궤적을 따라 지천에는 핏빛 그을음이 깔린 시각, 페치오는 허락도 없이 제 집무실을 들이닥친 불청객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델리아 경.”

나직이 입술을 열며 이마 위로 흘러 내려온 머리칼을 쓸어 올리자 노을이 짙게 비낀 유리창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이찬다. 그 위로 되비치는 여자의 모습이, 역시.

판단을 끝낸 차분한 눈빛, 감정 한 올 담겨 있지 않은 고저 없는 음성. 그곳에 희미하게 묻어 나오는 분노.

알았구나.

에오르테가의 후작이 진정 누구인지 말이다.

하기사, 그게 아니고서야 저 여자가 여기까지 걸음한 이유가 없지. 그럼 무감하기로 정평 난 제 기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다소 흥미로운 고민과 함께 페치오는 입술을 열었다.

“내가 경고했잖나, 경. 그자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이야.”

“입 닥쳐, 페치오.”

“이런, 난 그저 조언을 해 주었을 뿐인데.”

문장에서 느껴지는 비아냥에 혈맥이 도드라질 정도로 세게 손을 움켜쥐던 기사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 고개를 외로 틀었다.

“청원은 없을 거야. 자료는 내가 다 소실시켰으니.”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그래, 그 앨 위해선 차라리 그게 낫겠지. 안 그래?”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만.

다시금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이의 시선을 보지 못한 척 페치오는 마저 말을 이었다.

“모르타 위원회 내부에서 아주 괜찮은 생각을 냈어. 그대로 인해 실추된 이미지를 복권하기 위한 아주 좋은 방법이지.”

“그게 뭐가 되었든 받아들이지. 다만, 후작님은 절대 진실을 몰라야 할 거야.”

“그래, 그래. 그러지. 너무 걱정 말게. 후작은 괜찮을 거야. 자네가 사라지면…….”

나직한 속삭임이 무겁게 가라앉은 내실 속으로 여운을 남기며 흩어진다. 이를 가로지르며 기사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선 그는 조금 흐트러진 은발을 정돈해 주며 낮게 흥얼거렸다.

“또 다른 가여운 아이를 내 하나 더 준비해 주기로 약조하지.”

얼추 일은 마무리되었다.

끝내 폭주한 아델리아 경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덕에 그리 어렵지 않게 모르스의 현신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살생을 빙자한 의식을 치르기 전까지 테비온에 묶어 둘 수 있었고 모르타 위원회도 그의 말에 딱히 반발을 하지 못했으니. 피식, 페치오의 입술을 타고 흐른 승리의 웃음이 스산한 밤의 기류와 뒤섞여 내실을 가로질렀다.

이번 아델리아 경의 일을 책임으로 토리노 위원장은 아마 파문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의 뒷배로 과부한 직책을 맡고 있던 하렌 역시.

위원장.

영원히 가질 수 없으리라 여겼던 그 자리가 이제는 머지않은 미래로 가까워지자 페치오는 답지 않게 감상에 젖어 들었다.

그동안 시달렸던 숱한 추문들이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카트린느 에오르테, 하이가의 보검. 그리고 어리숙한 꼬맹이와 겁도 없는 집사.

생각이 멎은 곳에서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오고 그곳에서 배어 나온 것은 짙은 허무함이다. 차라리 정적들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면 그보다 충격을 덜했을 텐데. 아직 여물지도 않은 소년과 노쇠한 늙은이가 제 앞길을 막았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서.

과거의 회고가 스친 눈은 그 황당무계한 날의 시작과도 다름없던 오래전 그날을 떠올린다.

리오 서머셋.

그 애를 처음 만났던 그날을.

온 세상을 쓸어 버릴 것 같은 폭우에도 조금의 물기도 묻지 않은 사내가 에오르테가의 저택에 발을 디뎠다.

오래간만이군.

아마 산 채로 박제되어 공포감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독수리들. 코끝을 간질이는 기이한 약초 냄새. 그리고. 발밑을 장식하는 흑단을 보며 페치오는 어울리지 않게 감상에 젖어 들었다. 원체 다른 가문들과의 교류를 꺼려 하기로 자자한 이들이긴 하나, 근래 들어 그 정도가 극심해져 사교계는 물론 에오르테가의 소식을 제대로 아는 이들조차 없다 들었다.

하기사, 충격이 컸겠지.

백으로 짜인 대리석의 바닥, 그곳에 고인 라에갈 공자의 핏물은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말이다. 아무리 그가 잘못한 것은 없고 온전치 않은 정신의 여자라 해도 자식의 자결 시도를 겪은 어미가 아니던가.

보통 일은 아니었으니. 그래서 더욱 자신을 부른 까닭이 의아해진 페치오였다. 다시는 자신을 찾지 않는 것은 물론 보검도 영영 물 건너간 일이라 여겼는데. 그가 그런 상념에 빠져들고 있는 사이, 익숙한 음성이 귓가를 건드렸다.

‘페치오.’

그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느리게 눈을 여닫는 사이, 계단 아래로 내려온 후작이 그를 불렀다.

‘후작님.’

카트린느 에오르테.

전체적으로 흐릿해진 인상이 지난 세월 그녀가 스쳐 왔던 나날들을 말해 주는 듯했다. 아이를 잃을 뻔했던 어미의 모습들은 저럴까. 제아무리 모르스 일족에 미친 여자라 할지라도 어미는 어미인가 보지.

‘상심이 크셨을 줄 압니다. 기대하신 바가 있으셨으니.’

무슨 말이냐는 듯 고운 눈썹이 한 뼘 내려간다. 잠시간 후에야 아, 작은 탄식을 흘린 카트린느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젠 다 괜찮아졌네.’

‘예?’

‘교육을 다시 시작해도 된다는 말일세.’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가는 대화의 흐름에 페치오는 간신히 맥을 잡았다.

‘공자님께서 요양을 마치고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래, 그랬지. 아주 건강해. 충격이 컸는지 예전과 조금 달라진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말끝을 흐리던 여자는 덧붙였다.

‘이번엔 가능할까.’

여러 상념들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페치오는 몇 번이고 느리게 눈을 여닫고 나서야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어. 그러니까 그거였구나. 다시 실험을 시작하는 게야.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간신히 삼킨 그는 여전히 푸른 꿈속을 헤매는 여자를 응시했다. 석고상으로 빚어 내린 것 같은 흠잡을 데 없는 아름다운 외양 속에는 무쇠보다 단단한 의지가 숨어 있다. 광증과도 닮은 그것이. 그런 여자를 한낱 어미로 치부한 제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페치오는 붕 뜬 적막을 차분히 메꿔 갔다.

‘모르스 일족의 힘의 근원에 대해 밝혀진 것들은 없지요.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신중하고 은근하게. 혹여 그의 탐욕이 쉬이 내비치지 않도록.

‘하이가의 피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가문. 모르스 일족에 그 누구보다 어울리는 집안은 바로 에오르테지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것뿐입니다.’

‘자네만 믿네. 라에갈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건강해졌다라.

집사에게 안내를 맡기도 돌아선 카트린느를 바라보며 페치오는 심상하게 중얼거렸다. 그게 가능한가. 분명 공자는 마지막 만남에서 이미 망가진 상태였는데. 자결을 시도할 정도로 말이야. 꽤 심한 상처인 듯 보였는데 회복이 가능했던 것인가. 델로스의 문턱을 밟을 날만 기다릴 줄 알았거늘. 아니면…….

카트린느 에오르테. 이 미친 여자가 또 무슨 일을 벌인 것인가.

두꺼운 철판들로 뒤덮인 문에 다다르자 멈춰 선 집사를 지나친 그는 보폭을 넓혔다.

이 문 너머에 그 답이 있겠지.

‘오래간만입니다, 공자님.’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아이가 그의 말에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지체 높은 이들에게서 쉬이 볼 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이 미미한 동작 속에서 분연히 묻어 나왔다. 곧, 자세를 반듯하게 만들긴 했으나 그 찰나의 변화를 모를 정도로 아둔한 이는 아니었다.

기이함에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던 페치오는 곧 뒤따른 문장에 팍,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오래간만이네, 페치오.’

오래간만이라.

의례적인 안부를 묻는 눈은 다정했다. 악에 받친 눈과 부서진 몸을 가지고도 꺾이지 않는 의기를 보이던 지난날들을 모조리 잊은 듯.

‘충격이 컸는지 예전과 조금 달라진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달라진 부분이 있다고?

이건 완전히 다른 사람인걸.

등불을 들어 올린 페치오는 공자와의 간극을 좁혔다. 기억 속의 것과 같은 눈이 희미한 불빛을 받아 모습을 드러냈다. 망가지지 않은, 아직 상처를 모르는 말간 영혼이 그 속에서 투명하게 반짝거린다. 이제 더는 결코 라에갈 공자의 것일 수 없는 그 눈이.

넌, 누구냐. 꼬마야.

‘무엄하구나!’

등불을 밀어낸 소년의 외침이 지하실에 울려 퍼진다. 기개를 덧씌웠지만 그 떨림은 감추지 못한 채로.

목 끝까지 치닫는 물음을 누른 페치오는 몸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물을 이유도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욕망에 눈이 먼 이들이 저지르는 헛된 일들을.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뿐이고 그로서는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이니 말이다. 보검. 하이가의 보검.

‘이제 일전에 끝마치지 못한 교육을 다시 시작하지요. 자, 먼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공자님.’

무엇이 가장 두려우시죠.

초조하게 눈을 굴리며 손을 꼼지락대던 공자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너무 커…….’

‘무엇이 말입니까.’

여기. 이 지하실 말이야.

진짜 라에갈보다는 조금 더 어리숙하고 아이 같은 대답에 페치오는 실긋, 웃음을 그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훨씬 다루기는 쉽겠구나, 그런 심상한 상념과 함께.

‘잘 알겠습니다.’

그 문장을 끝으로 그의 손끝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짙고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다시 덧없는 실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

“아몬은 당분간 이곳에 얼씬도 하지 못할 겝니다. 허니 염려치 마세요.”

벌써 몇 번째고 듣는 위원장의 걱정 어린 소리에 공녀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티케 사냥꾼, 아몬.

올레나는 코르푸 위원회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 사내를 제압한 게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지. 아올리스뿐 아니라 대륙에서도 떠들썩하게 퍼진 그 일을. 그뿐인가. 하루가 멀다 하고 공작저에 드나들며 항시 근심 어린 낯으로 자신을 바라보기까지. 그 꼴이 꼭 무슨 일이 벌어지길 기다리는 이의 낯 같아 공녀는 더욱 불쾌했다. 마치 무언가 잘못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 이곳은 그녀의 왕국, 더할 나위 없는 그녀의 안온한 저택인데.

코르푸의 늙은 여우.

속으로 작게 이를 뇌까린 공녀는 치미는 분노를 억눌렀다. 끝까지 그러하지는 못했다만.

“어디 편찮으신 곳은 없습니까. 혹 공작님께서 지난번처럼…….”

흐려진 말끝에 담겨 있는 분명한 뜻이 담겼다. 연신 찻잔만 딸각거리며 듣고 싶지 않은 소음의 잔재를 지워 내려 가던 공녀는 날카롭게 그어진 눈으로 소리의 주인을 잠시 노려보았다. 평소보다 세게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놓고, 쨍한 울림과 함께 다기와 맞부딪친 소서가 박살 난 것은 그 직후다.

“내가 말했잖아, 올레나. 그건 다 헛된 소문들이라고 말이야! 아버지는 그저 그 여자의 꼬임에 넘어간 것뿐이라고!”

쩌렁하게 방에 되울리는 소음, 완고한 저의를 내비치는 행동. 그제야 옅은 한숨과 함께 질긴 시선을 거둔 올레나는 조각 난 찻잔의 파편들을 치우려 시종을 부르는 종줄을 잡아당겼다. 부름을 받고 내실에 들어선 하녀와 함께 올레나의 보좌관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죄송합니다, 위원장님 그리고 공녀님. 워낙 다급한 건이라…….”

“무슨 일이지.”

잠시 공녀의 눈치를 보던 보좌관은 괜찮다는 듯 눈짓을 하는 올레나에 마저 말을 이었다.

“에오르테가의 청원이 취소되었답니다, 위원장님.”

“온 제국을 들쑤신 걸로 모자라 대소신료를 다 모아 놓고 무슨 작태인지…….”

“그리고 아델리아 경의 행보 또한 이상하다 합니다.”

쓸데없는 대화에 그저 하릴없이 카펫 위로 부서져 내린 유리의 파편들을 구둣발로 짓이기던 공녀의 동작이 멎은 것은 그때다.

아델리아 경.

“모르타 위원회에서 아델리아 경이 테비온 마을에 있다 공식적으로 발표를 했습니다.”

고작 그 단어 하나에.

이상한 일이었다.

귓가를 파고드는 단어는 다른 낱말들과 달리 그저 소리로만 흩어지지 않는다. 밤의 시간 속에서 빛나는 은발과 옅은 은안.

‘세이.’

머릿속에 쟁쟁대는 그 목소리 역시.

당연하다는 듯 선연한 잔상을 뇌리에 몰고 오면서.

이상한 일이야.

그 미친 여자만 떠올리면 끝 모를 진창 속을 빠지고 있는 기분이 드는 것 역시. 무언가 아주 잘못된 것 같은 기분. 몸이 회복될수록 배가 되는 감각에서 벗어나려는 듯 공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루트비아 저택.

추억이 가득한, 그 마법 같은 단어를 떠올리며.

***

“길이 제법 혼잡하군.”

푹신한 쿠션에 등을 받치고 있던 공작 부인은 차창 너머 끝없이 밀려오는 인파에 콧잔등이를 찡그린다. 얼마 걸리지도 않을 길을 벌써 몇 시진째인지. 불쾌한 감상을 드러내듯 탁탁 부채를 내리치자마차 벽 너머로 마부가 안절부절못한 음성으로 변명해 온다.

“원래는 이렇지 않은데…… 얼마 전에 내렸다는 신탁 때문에 참, 죄송합니다, 마님.”

아, 그거. 볼썽사나운 꼴에 눈살 찌푸리기 바빠 크게 주목하지 않았더니…….

힐끗 살핀 바깥 사람들의 손에는 저마다 검붉은 장미가 쥐어져 있다.

모르스의 신을 상징하는.

하아. 짧은 깨달음이 심중에 떠오르자 고생이라곤 모를 고아한 입술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한숨이 차오른다. 그녀는 차마 더는 창밖을 보지 못한 채 시선을 두 손 위로 떨궜다.

뜬금없이 신탁이라니.

일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저택에 페치오 위원이 드나들던 게 며칠 반복되더니 얼마 전에는 불쑥 대신전에서 신탁이 내렸다. 아주 수상한 내용의.

‘대륙의 평화를 가져온 모르스의 현신이 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지 말라. 바야흐로 다시 아올리스에 혼돈이 찾아오는 날, 그녀가 눈을 뜰 것이다.’

모르스의 현신.

아델의 이름을 항상 뒤따르던 그 수식어는 신탁에 언급된 후로 공식적인 지칭으로 변모했다. 대륙의 다른 제국들은 허튼수작이라며 분개했으나, 여러모로 이목이 집중되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황제의 재위 이래 내려진 손에 꼽히는 신탁이기도 하고 원체 내용이 기괴하지 않던가.

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과연 그게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호기심은 켜켜이 쌓이고 쌓여 뭇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발자국 하나 새겨지는 일이 드문 테비온 마을까지 사람들이 몰려들 즈음, 모르타 위원회는 답을 내놓았다.

모르스의 현신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의식을 치르겠다고.

의식이 어찌 행해질지에 대해 여러 추측들이 번졌지만,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 하나는 그러므로 이미 합의가 된 사안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멋들어지게 꾸며진 문장이 내포하는 뜻 역시.

그들이 아델을 버린 것이다.

다시금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공작 부인은 여린 입술을 짓이긴다. 이제 어찌하면 좋은가. 제 가여운 딸아이는. 다분히 어떤 의도가 느껴지는 신탁에 필시 여럿 이들이 손을 댔음은 눈 감고도 알 수 있었다. 남편과 사이가 틀어진 마당에 그 애를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후작?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간 익숙한 단어에 공작 부인은 잠시 주춤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잘 빗어 내린 은빛 머리카락이 그녀의 움직임에 맞추어 너울거린다.

그자는 너무 위험해.

자칫하다 감추고 있던 것마저 모두 들키고 말 테니. 어쩐다. 이를 어쩐다. 그러게 왜 그리 사고를 쳐서는 아무도 돕지 못하게 만드는지. 수십 일 동안 반복되는 고민은 여전히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머릿속을 배회하기만 한다. 자기만족적인 고뇌가 끝을 모르고 되풀이되고 있을 즘, 상념을 자른 것은 뜬금없는 세이의 물음이다.

***

“닮았어요.”

공작 부인이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마차 창턱에 턱을 괴고 있는 딸아이는 햇살이 스며들어 유독 푸르른 벽안을 창 너머에 고정한 채였다.

“세이, 그게 무슨 소리니?”

그날 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날 남은 상처를 가리려 맨 스카프를 한참 만지작거리던 세이는 이내 다시 입술을 움직인다.

“그 여자 말이에요.”

누구. 그리 물으려다 공작 부인은 뇌리를 때린 단어에 입술을 말아 문다.

아델.

세이가 요즘따라 기묘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사람이 또 있겠는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세이는 한두 번씩 아델 얘기를 꺼냈다. 지금처럼.

“엄마랑 닮았다고요.”

그리 심각한 질문들은 아니었다만, 그 자체만으로 기이한 변화에 공작 부인은 가끔씩 철렁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곤 했다. 공작 부인은 꼭 맞잡은 두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막아 보려 세게 힘을 준다. 마차 안에 스민 음성은 눈에 띄게 흐려진 채였다.

“난 또. 닮았긴. 그저…….”

***

짧은 대화 끝으로 마차 안은 적막했다. 간혹 그 무거운 침묵 속으로 어머니의 옅은 한숨이나 침음이 수놓아 더욱 공기를 가라앉게 만들 뿐이었다. 극채색의 노을이 저물녘 하늘을 붉게 수놓기 시작할 때까지 그런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마차 안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 오는 낙조는 제 부신 금발을 흐트러트리듯 어머니의 머리칼에 스민다. 미풍에 가볍게 흔들리는 은발이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광경은 퍽 아름답다. 예전에 저걸 좋아했는데. 냉랭했던 모녀간의 관계에 어릴 적 추억이 깃들어지자 공녀의 얼굴이 조금 풀린다. 하나둘 떠오르는 기억에 그녀의 낯이 감상으로 젖어 들 무렵, 문득 떠오른 것은 그날 밤, 그 여자의 머리칼이다. 달빛에도 물들지 않은 찬연한 은빛 머리카락.

어쩌면 어머니와 꼭 같은, 루트비아가의 은발이서일지도 혹은 제 앞에 있는 어머니와 꼭 닮아서일지도. 이유는 많았지만 그중 이렇다 할 무언가는 또 없었다.

또 그 여자 생각을 하다니. 제게 수면제까지 먹여 그에 중독되게 만든 여자인데.

자조 섞인 반성으로 저를 혼낼 즘, 공녀는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찬 머리를 두어 번 내젓는다. 그 혼란스러움에 말미암아 하루하루를 그저 흘려보내던 그녀는 차라리 모르타 위원회가 의식이니 뭔지를 당장 치러 그 여자의 생을 빼앗아 버렸으면 좋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리 잔혹할 것도 없는 생각이었다. 심지어 그 여자는 저를 티케 사냥꾼에게 넘기려 했으니. 그리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그날 그 여자가 칼에 찔린 건 정말 우연한 사고였음에 더 알맞고 공녀는 조금도 빚진 게 없는 셈이었다.

그 여자가 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숨을 앗아갔듯 자비로운 신이 그녀의 숨을 거두어 가길. 그래야 세상만사 공평한 건 아닌가. 그런 생각과 함께.

다시 평온해진 마음으로 차창 너머의 풍광을 관찰하려는 데, 소름 끼치는,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급정거했다.

“무슨 소리지.”

어머니의 나직한 물음은 바깥의 소란 속에 파묻혀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성난 외침과 칼끝이 부딪히는 소리. 이윽고 벌컥 문이 열리고 드러난 이는 다름 아닌,

후작.

에오르테 후작.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은 저자를 막지 않고 다 무엇 하는지. 저와 마찬가지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 어머니는 그럼에도 공작가의 안주인이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낯을 갈무리하고는 주인의 허락도 없이 마차 문을 반쯤 열어젖힌 사내를 향해 목을 울렸다.

“후작, 이 무슨 무뢰배 같은 짓인가.”

물론, 그리 효험이 있진 않았지만.

그녀가 선택한 단어가 더더욱 그를 자극했는지 짙은 어둠이 번졌던 후작의 녹안에 섬뜩한 빛깔이 맺혔다.

“무뢰배라…….”

낮은 곡조로 흐르던 중얼거림이 끝에 가서 픽, 바람 빠진 듯한 허탈한 웃음으로 끝난다. 더없이 날카로워진 눈매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모습에 공녀는 흠칫 몸을 굳혔다. 에오르테 후작. 그에 대해 모르지 않는다. 유순하고도 유약한 사내. 권세에도 재물에도 흥미를 두지 않아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사내. 그런 이가 저리 깨진 유리 조각 같은 낯을 보이자면 보는 이로서는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마차 문을 짚은 거친 손이 탁탁, 문가를 두드린다. 그 소리가 무례하다 싶을 즈음, 한쪽 끝만 올린 후작의 입술이 소리를 냈다.

“내가 무뢰배면 그대들은 무어라 불러야 할까.”

응?

짧게 덧붙인 말은 물음이 아닌 경고였다. 그 문장의 뜻을 제대로 읽어 내리긴 한 것인가. 마주한 회색빛 눈동자가 혼란스러움으로 뒤엉키기 시작한다. 그가 아는 색감과 지나치게 닮은 그것에. 간신히 끌어모았던 인내심이 바닥난 것도 그쯤이다. 문틀을 쥔 후작의 손마디가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다.

아이가 사라졌다.

모든 것이 완벽해 그래서 미심쩍었던 하루만을 그에게 남긴 채. 청원에 필요한 자료들은 몽땅 소실된 상태였고. 그리고 얼마 후 그에게 들려온 건 테비온에서부터 흘러나온 말도 안 되는 신탁이었다.

‘모르스의 현신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의식을 치르겠다.’

어떤 변수가 생겼고 그게 다시 판을 뒤집은 건 분명했으나, 도무지 그는 그게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조금은 궁금해졌거든요.’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왔던 신기루 같은 하루 속,

‘해가 지지 않는 땅은 어떤 빛깔일지 그늘진 곳이 없는 대지는 어떤 모양일지 말입니다.’

영원 같던 그 찰나의 순간을 헤매던 그는 삭여도 삭여지지 않는 마음을 갖고 저택을 나섰다. 갑자기 왜, 도대체 어떻게. 따위의 물음의 답을 찾을 길이 없었다만 하나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게 있었으니.

누가.

“공작에게 전해. 당장 이 짓을 멈추지 않으면 내가 그놈의 사지를 찢어 버리는 것으로 끝내진 않을 거라고.”

누가 이 짓을 벌였나.

“어찌 그런!”

붉어진 눈시울,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그의 거친 문장에 공작 부인이 나비치는 몸짓들은 마치 죄 없는 이가 봉변을 당한 것 같은 모양들이었다. 그것에 후작은 헛웃음을 흘린다. 한계였다. 더는 이 진절머리 나는 연극도 두고 볼 수가 없다. 그는 이제 미친 듯이 날뛰는 입술을 그저 놓아 버린다.

“그리 무구한 척 지껄이지 마. 혼자 모든 걸 희생한 성인처럼 굴지도 말고. 그대는 그런 자격조차 없으니.”

“나는…….”

“그대가 그 유약함을 내세워 망설인 까닭에 아델은 결국 저 지경까지 가 버리지 않았나.”

지은 죄가 있는 여인은 입술만 달싹거릴 뿐이었다. 기묘한 분위기. 창틈으로 실려 들어온 산뜻한 바람도 무겁게 가라앉을 공기. 쉬이 건드릴 수 없는 밀도 높은 분위기를 가르는 당당한 음성의 주인은 오직 무지한 이일 뿐일 것이다.

“후작! 감히 지금 누구 앞에서 그런 막말을 일삼는 거지!”

그제야 공녀의 존재를 인지했다는 듯 후작은 천천히 시선을 돌린다. 아니, 실은 애써 외면하려 했던 걸지도. 그의 과오이자 끝내 아이가 제 생과 맞바꾼 소녀를.

“내 이 일을 결단코-”

성난 벽안은 모조리 다 삼킬 기세로 부풀어 오른다. 허옇게 물머리를 세우는 파도 같은 모양을 보며 후작은 자조했다.

안다. 그에게 어떠한 자격도 없다는 것을. 제 폐부를 찌르는 쇠붙이를, 바닥에 고이는 피 웅덩이를 알면서도 아이가 끝까지 침묵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 침묵이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

지키고 싶었던 거지, 그렇지?

완벽하게. 작은 흠집도 남기지 않은 채로.

허나, 나는 너처럼 강하질 못하나 보다. 이번에도 너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네가 없는 세상에 남을 것이 또 아득해 누군가를 할퀴고 싶다는 잔혹한 마음만이 이리 들이차니. 제가 지금 느끼는 이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누군가도 알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부수고 싶은 충동에 휩쓸려 후작은 오랜 시간 비밀을 견뎌 왔던 입술이 그 버거운 무게에 손을 드는 것을 구태여 막지 않았다.

“넌 이리 행동해선 안 돼.”

대신 뼈마디가 잘리는 것처럼 한 음절, 한 음절에 힘을 준다. 무엇 하나 허투루 버릴 수 없는 단어들이기에.

“네가 지금 이리 두 발 뻗고 살아갈 수 있는 건 그 애가 직접 네 목숨값을 치렀기 때문이니. 적어도 넌 아델이 누구인지-”

“후작!”

다급하게 말머리를 자르고 들어오는 공작 부인에 후작은 말을 멈췄다. 제발. 간절함을 호소하는 여인은 제가 가진 지위가 무색하게 자세를 낮춘다. 그 빠른 태세 변화에 후작은 픽, 실소를 흘린다. 자식 하나는 산 채로 땅에 파묻을 작정이었으면서. 남은 자식에게 그걸 들키는 건, 그건 또 싫나 보지.

마지막 보루라 그거인가. 후작의 입술은 더는 비밀을 흘려보내기보다는 건조한 웃음을 만드는 편을 택한다. 애끓는 그 눈망울을 가엽게 여겨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끝까지 자식의 생보다 쥐고 있는 비밀의 무게에 후한 값을 치는 저들이 어찌 공녀는 잘 간수했을까, 하는 허무한 생각들이 그에게 들이친 탓이다.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해 보지 않았던가. 폭풍우가 내리치던 그날 밤, 길을 잃고 버려진 공녀를.

게다가 누군가를 아프게 할 자격도 그 무엇도 없지. 따지고 보면 그의 죄도 많음이니. 애초에 공작을 쳐 내리지 않은 그의 우유부단함이 혹여 그래도 친부모이니 뭐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가. 그 모든 순간들이 후회의 낙인을 아로새겨 후작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사그라든 분노를 메꾼 것은 야트막한 동정.

그들의 손에 길러진 또 하나의 무구한 희생양을 향한, 운명의 장난이 아니었다면 아이와 뒤바뀌었을지도 모르는. 그는 기울인 고개 너머 이 혼돈의 시간이 끝나 어쩌면 저와 비슷한 처지가 될 유일한 사람을 응시해 본다.

조금은 가여운 마음을 담고서. 처연한 음색으로.

“후회할 겁니다.”

여전히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공녀는 저를 파고드는 물기 젖은 눈동자에 눈매를 좁힌다. 그러자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빗물 같은 음성이 다시금 귓가를 적신다.

“공녀님, 후회하실 거예요.”

흔히 자주 쓰이는 어법이다. 상대에게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할 때. 적당히 자극적이고 모호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니. 그걸 모를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으나 미약할 만큼 가느다란 빗줄기는 그녀의 마음까지 그대로 흘러와 공녀는 저도 모르게 어쭙잖은 술수에 휩쓸린다.

“……무엇을.”

“나를 이리 막아서고 그 애를 외면한 것. 전부, 전부 다.”

“후작!”

평소보다 고조된 어머니의 억양도 쏟아져 들이치는 빗소리를 막지는 못했다.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나 못지않게 울게 될 이는…….”

소리는 아득한 고요와 어둠 속에 홀로 있는 공녀에게 그렇게 가 닿았다.

“공녀, 바로 그대이니.”

사라지지 않을 짙은 자국을 남기고서.

***

뒤늦게 상황을 정리하러 공작가의 기사들이 나섰고 후작은 그들의 처분에 순순히 따랐다. 마지막 저를 일별하는 녹안에서 공녀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멍울을 느꼈으나, 끝내 외면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고요가 찾아온 마차 안에서 안온함 대신 정체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그것은 유달리 큰 광망으로 저를 비추던 밤하늘의 별빛이 실은 이미 소멸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저를 휘감아 오는 그 기이한 통증을 등불 삼아 공녀는 방금 대화를 찬찬히 곱씹어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짐작 가는 것은 없다. 명확한 결론을 내린 눈은 마주 앉은 여인을 담아 내린다. 제게 진실을 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왜 그러셨어요.”

“무엇이.”

아스라한 어딘가로 흘러가던 잿빛 눈동자에 떠오른 파문이 저무는 햇살을 받아 도드라졌다. 지나치게 생경하게 느껴지는 낯은 짧은 찰나에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양 때문만은 아닌가 보지.

제가 아는 어머니는 누군가에게 그리 간절히 애원할 사람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런 상황에 놓여 본 적이 없거니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낮은 자세를 보일 필요 없었다. 그녀는 존귀한 공작 부인이자, 유구한 역사를 가진 백작가의 장녀였으므로.

그런 어머니가 저런 태도라니. 더 묻지도 구태여 따질 필요도 없었다. 공녀는 답을 주는 대신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후작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 없어. 그저 되는대로 입을 놀리는 거지, 오늘은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자꾸나.”

뒤늦게 그녀의 저의를 알아챈 어머니가 다급한 음성으로 말한다. 그 핏줄이 어디 가겠니, 에오르테 가문이란, 순한 얼굴을 하고서는 꾀만 늘어 가지고는, 비슷한 궤의 변명들에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차창 밖으로 눈길을 던진다. 저녁노을에 젖어 미풍에 흔들리는 풀꽃과 청명한 하늘을 가로지르는 물총새를 스친 벽안은 여전히 마차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후작을 비추고서 잠시간 멈칫한다.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는 들은 게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마무리 지으면 모든 것은 평안할 테니 공녀는 그리 사안을 매듭짓고 싶었다. 찰나의 적막을 뒤로하고 창틀에 턱을 괴고 제 할 일을 시작한다. 그 모습에 안도한 공작 부인 역시 천천히 상념 속에 몸을 맡겼다. 숱한 산수 경치들이 푸른 눈에 담겼지만 무엇 하나 맺히는 것이 없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공작가에 기이한 일이 시작된 건 그날 밤부터였다.

꿈결 같은 바람이 공녀의 방에 나부낀다. 반투명의 휘장을 불룩 부풀리고 침대 위, 베개맡에 흩어진 공녀의 머리카락을 스쳐 꾹 다물린 눈꺼풀을 간질거린다.

깜빡 잠에 취해 움직임이 둔중해진 눈꺼풀은 제법 결이 굵어진 밤바람에 끝내 항복하고 만다. 부어오른 눈가를 문지르며 시종을 부르는 종줄을 당기려 허리를 세운 공녀는 문득 제 방의 창이 열릴 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날이 차니, 저택의 창을 꼭 닫으라는 사용인들에게 신신당부한 어머니의 지시도 함께 떠올랐다.

그럼, 저 바람은.

다시 한번 제 존재감을 뽐내듯 쌀쌀하고 찬 기운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친다. 원인 모를 침입에 공녀는 잔뜩 경계의 태세를 갖추고서는 부풀어 오른 푸른 벽안으로 방 안의 풍경을 담아 내린다. 천정 위로 솟아오르던 휘장이 가라앉고 감춰졌던 것이 드러난 것은 그 순간이다.

그 여자다.

꽉 말아 쥔 손으로 이불보를 끌어당긴 공녀는 머릿속으로 과연 침대 협탁 밑에 놓인 단도를 소리 없이 꺼낼 수 있을까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나 상대가 기사라는 점과 이전에 비슷하게 진행되었던 행위의 결과를 떠올린 그녀는 달빛에 얼비친 인영을 숨죽여 바라보는 편을 택했다. 제 기척이 들켰다는 걸 모르는 듯 여자는 가만가만 발을 놀린다. 바람의 결을 따라 나부끼는 꽃잎처럼 잔잔하던 움직임이 멈춘 것은 침대 맞은편, 그린 듯이 평화로운 화폭 앞에서였다.

천천히 올라가는 여자의 시선에 맞추어 공녀 역시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숲속 나무들의 푸른 굴곡이 주는 아늑함 아래 세 사람이 자리 잡은 그림은 언제 봐도 다정하기 그지없다.

뭘 하려는 거지.

저 그림을 망치기라도 할 작정인가. 공작가에 몰래 침입해 그런 짓을 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일인가. 나름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을 즘, 그윽한 운치 속 은은한 달빛처럼 퍼지는 어머니의 뒷모습과 여자의 모습이 본떠 만든 모양처럼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가녀리기만 한 어머니의 것과는 달리 단단한 힘이 느껴지는 어깨선과 조금 더 맑은 빛깔의 머리카락.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한껏 가늘어졌던 눈이 정체 모를 두려움으로 물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경고 어린 후작의 말과 수상한 구석이 다분한 부모의 작태들. 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 적막한 공간에 스며드는 공녀의 숨결은 미세하게 떨린다.

“……넌 누구지.”

이를 지우려는 듯 공녀는 크게 한 번 성대를 긁어내려 고요를 깨트린다.

“대답해, 넌 누구야!”

점점 방 안으로 비껴드는 달빛이 휘장을 적시며 깨진 적막을 돋울 즘, 달무리 진 머리카락이 기울어지며 창백한 얼굴이 드러난다. 고요히 가라앉은 낯 위로 떠오를 미세한 변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공녀의 시선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저와 꼭 닮은 입술이 벌어지기 시작할 때까지.

세이.

창밖의 달무리와 어우러져 공간 속으로 흩어지는 음성은 절벽 위에 아슬아슬 매달린 수목처럼 처연하다. 모순적이게도 그날 밤,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생생한 서재의 공간으로 그녀를 끌어당길 만큼 강렬하기도 했다.

선연한 핏자국과 저를 담고 아득해지는 잿빛 눈동자. 잊을 수 없는 감각이 주는, 메꿀 길 없이 큰 간극에 공녀가 얼어붙어 있던 사이, 또 한 번 사그락거리는 어조가 고막을 파고든다. 이번에는 다정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역시 동반한 채.

알고 있잖아, 세이. 내가 누군지.

하얗게 부서지는 소리가 내실의 한가운데로 흩어지자 왜인지 공녀는 덜컥 겁이 났다. 궁금하지만 듣고 싶지 않은 답. 뒤틀어진 감각이 주는 기이함을 외면하려는 듯, 전신을 휘감는 기이한 감각을 외면하려는 듯 공녀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 조각 난 파편들을 맞추다 보면 왜인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을 기어코 보게 될까 봐.

몰라, 난 모른다고.

주문과도 같은 문장을 되뇌며.

혀끝에만 맴돌던 그 문장이 끝내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순간, 머리에 닿았던 온기는 삽시간에 사라졌다. 바싹 당긴 무릎, 그 위를 감싼 두 팔. 바람 샐 틈도 허용하지 않던 공녀의 방어막이 허물어진 것도 비슷한 찰나이다.

홱. 고개를 들어 올린 공녀는 공허한 적막만이 남은 공간에 눈을 깜빡거린다.

푸른 벽안에 스미는 것은 오로지 암흑뿐.

한 번 더 눈을 내리감아 뜬 그녀는 본능적으로 침대 위를 스치듯 내려와 둥근 모양의 아치를 둘러친 발코니로 향했다. 밤의 달이 던진 빛줄기를 쫓아 움직이던 눈이 어둠의 장막 속으로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가늘어진다.

대체 기사들은 뭘 하기에 저 미친 여자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것인가. 모르타 위원회는 얼마나 허술하기에. 심중에 그득한 불만들이 터져 나오기도 전, 차츰 흐릿해져 가는 여자의 인영에 왜인지 공녀는 초조해진다. 그것은 저택을 침입한 괴한에 대한 두려움과는 조금 달랐으나 공녀는 냅다 소리부터 질렀다.

“어딜 가는 거야!”

나뭇가지를 들락거리는 바람에 실린 소리가 저 너머 아득한 곳까지 되울렸다. 그러나 여자의 걸음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감히. 감히.

스산하게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걸려 소리는 흩어져 버렸다. 밤의 장막 역시 어딘가로 숨어든 여자를 돕듯 공녀의 시야를 어지럽힌다. 공녀는 어둠에 삼켜진 공간을 찢으며 다시 소리쳤다.

“돌아와!”

당장.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는 소리들은 저택에 서서히 내려앉던 어둠을 하나둘 거두어 내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워진 사위의 진원지를 쫓아 기사들이며 저택의 사용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미처 여미지 못한 가운을 휘날리며 2층 복도를 가로지른 하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공녀의 방 근처를 어물쩍거리는 사용인들을 눈으로 흘기며 방문 고리를 잡았다.

“공녀님?”

우우, 소슬하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 세차게 들이차는 바람에 맞추어 사방으로 나부끼는 휘장, 그 틈으로 흘러 들어온 교교한 달빛이 테라스에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하녀장이 눈만 깜빡거리는 동안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귀 언저리에 닿는다.

“잡아와…….”

“예?”

“저 여자가 정원에 있잖아! 내 눈앞에 데려오라고!”

괴한이라도 침입한 것인가.

창백해진 얼굴 위로 그 물음이 떠오르자, 하녀장은 무례를 무릅쓰고 발코니의 난간까지 보폭을 넓혔다. 티케 사냥꾼. 지난번 소동을 감안하자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침착한 눈으로 바깥을 훑어 내리는 그녀는 어리둥절한 낯을 보이는 기사들과 풀잎들, 미세한 구석구석까지 꼼꼼히 살핀다.

몇 번이나.

네 번째 그 행위가 반복되자, 고요하기만 한 창밖의 풍경이 맺혀 있던 눈동자 위로 당혹스러운 빛깔이 떠올랐다. 하녀장은 철조 난간의 돋을새김을 꽈악 움켜쥔 공녀와 그 벽안이 향한 바깥의 어딘가를 번갈아 보다 이내 탄식과도 같은 단말마가 터져 나오지 않도록 제 입을 틀어막는다.

***

“좀 더 추이를 지켜보심이 좋으실 듯합니다, 공작님.”

의원이 내놓은 진단은 더없이 무책임했다. 한나절 응접실에서 그를 기다리던 공작의 시간을 보상해 주지 못할 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공작은 서늘함이 깃든 손으로 이마를 짚어 내리며 분명 짙게 가라앉아있을 눈을 가렸다.

순순히 테비온에 들어간 아델, 청원을 거두어들인 후작.

모든 것이 그의 뜻 아래 순리대로 흘러가는 마당에 찾아온 변고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공작님, 잠시 이쪽으로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지.’

‘그게 공녀님께서…….’

한참 전부터 저택이 조금 소란하더니 세이가 또 한바탕 난동을 부리는 것인가. 그동안은 잠잠해 철이 들었다 기특히 여겼건만. 짧게 혀를 찬 공작은 그저 그런 생각과 함께 하녀장을 따라 집무실을 나서 걸음을 옮겼다. 곧,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광경들이었다만.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아무도 없는 정원을 향해 고성을 질러 대는 딸아이의 모습이란.

가문의 선조들 중 광증이 도졌다는 분이 계셨던가, 하는 물음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드는 세이의 작태 앞에 공작은 서둘러 의원을 불러들였다.

그것마저도 그리 소용없는 일인 것 같았다만.

당장이라도 저 쓸모없는 자의 멱살을 쥐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그는 몇십 년간 공작 가를 이끌었고 또 이끌어 가야 할 수장. 평정을 덧씌운 얼굴을 들어 올려 맞은편에 앉은 사내에게 차를 권한 공작은 깍지 낀 손을 꼬아 올린 다리 위로 얹었다.

“알겠네.”

빙긋, 입꼬리를 끌어당긴 웃음까지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하다.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직면한 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

열은 가까스로 내렸다.

성치 않은 몸으로 공작가의 마차를 한바탕 들쑤신 후작이 별장에 돌아와 혼절한 것은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메마른 후작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숨결이 어느 정도 고른 박자를 띠자 집사의 얼굴에도 안도의 기색이 희미하게 엿보인다.

“후작님?”

엘몬트는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무겁게 내리감긴 주인의 눈꺼풀을 건드려 본다.

“정신이 드십니까.”

“……토…… 리노.”

“예?”

“……토리노 위원장은…….”

불분명하게 성대 끝을 긁어내리던 음성이 점차 선명해지자, 집사는 당혹스러운 낯으로 주인을 바라본다. 제대로 뜨지도 못한 눈이며 아직 남은 열감의 흔적으로 붉게 상기된 뺨까지. 무엇하나 온전한 곳은 없건만 정신을 차리자마자 한다는 말이 고작…….

엘몬트는 잘근 입술을 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통증은 어떠십니까.”

통증. 그제야 몸을 관통하는 둔통을 느꼈는지 침대 옆 협탁을 짚어 내리던 후작의 팔이 반쯤 꺾어진다. 후작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집사가 서둘러 이를 부축하려 하자 그는 휘휘 손을 내젓는다.

“토리노 위원장의 파문 건은 어찌 되었지.”

“모르타 위원회에서 토리노 위원장의 파문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합니다.”

최대한 덤덤한 어투로 말했으나, 충격은 꽤 컸는지 이마를 가리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잘게 흔들리며 초점을 잃은 녹안이 훤히 드러났다.

“……동의했다고?”

“후작님, 지금은 쉬셔야 합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으셨어요.”

제 채근이 먹힌 것일까.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분주하던 주인이 불현듯 움직임을 멈춘다. 그의 말이 통했다기보다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긴 듯했으나 엘몬트는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재빨리 솜이 두툼한 베개를 찾아내 후작의 등 밑에 밀어 넣고 주인의 입 속으로 숙면을 돕는 약초를 밀어 넣는 등 수선을 떤다. 또 뭐가, 뭐가 필요하더라. 바삐 돌아가던 머릿속이 휑해진 건 귀에 익은 단어가 내리꽂힌 후였다.

“……테비온으로 가야겠어.”

어느새 찻물을 다 비운 주인은 쥐고 있는 찻잔 자기의 매끄러운 표면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페치오. 불길한 징조와 다를 바 없는 그 단어를 입에 머금고서.

집사는 떨리는 숨을 뱉으며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맑게 빛나는 눈동자를 바라본다. 과거의 일을 송두리째 잊고 싶은 듯 지나치게 무고한 그것이 그의 시야를 흐트러트렸다. 막막한 심정으로 이를 보던 엘몬트는 이내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감았다. 잠시간이라도,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저를 죄여 오는 죄악의 사슬에서 벗어나고픈 탓이다.

“내 말을 준비해 주게.”

아까보다 더욱 결연한 의지가 담긴 음성이 들려오자, 집사는 암흑 속을 방황하는 의식의 끝자락을 간신히 끄집어 당겨 대화의 맥을 잇는다.

“후작님.”

엘몬트는 부드러운 낯을 올리고는 능숙한 솜씨로 주인의 헛된 계획을 제지한다.

“밤이 너무 깊었습니다. 남은 일은 내일 다시 생각하심이 어떠십니까.”

초조하게 방을 배회하던 눈동자는 조금의 틈도 내비치지 않는 충직한 사용인 앞에서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온전한 허락. 기어이 이를 얻어낸 집사는 주인의 취침을 돕기 위해 움직였다. 협탁에 놓인 물은 모자람이 없는지, 방의 훈기는 적당한지. 그 일련의 과정을 멍하니 지켜보던 후작의 혀끝으로 툭 정체 모를 문장이 굴러떨어진다.

“……그 애가 날 원망할까.”

엘몬트가 움찔한다. 이에 반응하듯 적당한 공기를 만들려 불 속을 뒤지던 부지깽이가 그의 손끝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댕그랑, 맑은 울림이 공간 속으로 스미자, 집사는 아득해지던 정신을 붙잡는다. 떨리는 입술을 내리누르며 놀란 숨을 삼킨 그는 제법 여상한 어투를 그려 내며 물었다.

“어느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후작님.”

아가씨 아니면 리오. 둘 중 하나겠지만 그의 주인은 자주 둘을 구분 짓지 않는 어법으로 그에게 혼란과 당혹을 선사하곤 했다. 거기에 짐작이 갈 만한 어떤 사유가 있었으나, 엘몬트는 그때마다 이를 알지 못하는 체하며 조심스레 그 점을 지적해 왔다. 야트막하게 남아 있는 양심 때문일지도. 혹은 그저 면피하고 싶은 마음일지도.

그닥 효험은 없었지만.

“……그럴 거야, 그러겠지…….”

이번에도 모호한 문장으로 질문을 비껴 나가는 주인이다. 그는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린 후작을 물끄러미 보다 떨어진 부지깽이를 집어 든다. 번다한 마음을 달래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타닥타닥. 작은 불덩이들이 제 몸을 불살라 타오르는 모습이 마치 제 주인과 같아 그가 멈칫거리는 사이, 이윽고 약효가 도는지 고른 숨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진다.

그제야 엘몬트는 지친 몸을 이끌고 문을 나섰다. 아주 긴 하루의 끄트머리, 다가올 내일이 두렵기만 한 그의 걸음은 아래층 사용인들의 숙실이 아닌 저택 밖으로 향했지만. 적막과 고요로 뒤덮인 고즈넉한 별장 위에 짙게 깔린 밤하늘이 헤아릴 수 없는 별무리들을 떨어트리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위로 흩어지는 건 더없이 담담한 자의 음성이다.

‘후작님을 부탁해, 엘몬트.’

과거의 사슬 속에 메인다는 게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 알지 못하는,

‘그래도 테오가 있으니 괜찮으실 게야.’

자신을 향한 그 애끓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알지 못하는 자의 어리석은 문장들이.

리오. 저 아이를 멈추게 할 방법을 알고 있다.

진실. 잔악한 진실.

허나, 그게 과연 가장 올바른 선택일까. 그 진실이 두려워 서슴지 않고 델로스의 문턱을 택하는 아이에게 그게 과연 마땅한 답일까.

리오, 후작, 페치오. 시야를 뒤덮은 어둠의 장막 속으로 지나간 나날들의 회고가, 그 속에서 했던 그의 선택들이 켜켜이 쌓여 갔다.

그 모든 선택들은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그는 단언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늘 되돌아보게 되었고 뚜렷한 결론 없이 상념은 끝없이 반복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있어.

그에겐 선택권은 없다는 것 말이야.

그것은 그 애를 이곳에 부르고, 기어코 그 험한 일들을 겪게 한 그에게 주어진 자격도 권한도 그 무엇도 아니니. 제 주인이 이대로 타올라 소멸하는 길을 택할지언정. 부서진 마음을 갖고서 이토록 힘차게 타오르는, 암흑 속에서도 반뜩거리는 별들의 빛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제는 안다.

그럼에도.

엘몬트는 사방에 괴인 어둠 속에서 꽃 한 송이로 달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주인을 그리워해 본다.

‘엘몬트!’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그 빛나는 눈동자와 터질 듯 부푼 맑은 웃음소리도.

‘보셨어요? 여기도 리베라가 있네요! 저희 아버지도 이걸 키우시거든요.’

받을 자격이 없는 이에게 주어진,

‘마음에 드신다면 내실에 두셔도 된답니다, 공자님.’

‘고마워요.’

수많은 과분한 감사의 인사들도.

그렇게 그는 순식간에 저를 스치듯 지나간 세월을 곱씹으며 잠들지 못한 채로 여명이 밝아 오는 것을 지켜본다. 그 속에 스며든 검은 인영과 울음소리도 내지 않은 말이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것까지.

***

동쪽 하늘에 새벽빛이 조금 올라온 시각. 불퉁하게 입을 내민 견습 기사는 들고 있던 등불을 꺼트릴 준비를 한다. 아직 햇살이 완연한 제 빛깔을 내려면 시간이 더 소요될 것이나, 일찍 일을 마무리한다 하여 문제될 것 없다 판단한 것이다.

벌써 며칠째인지.

테비온 마을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길목에 오지도 않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말이다. 마을의 정문과 맞닿은 큰길가에도 발자국 하나 쉬이 남지 않는 것이 그들의, 모르스 일족의 터전 아니던가. 뭐, 최근 들어 모르스 현신이니 뭐다 하는 일로 심심찮게 기웃대는 사람들의 몰골을 볼 수 있다만. 그런 치들도 외진 샛길까지는 알지 못할뿐더러 이리 빛무리만 어른거리는 이른 시간에 마을을 찾아올 리 역시 만무했다.

도대체 단장님은 뭘 하라는 건지.

그는 나직이 뇌까리며 훅, 등잔을 꺼트린다. 여린 불의 온기가 사라지자, 찬기가 몸을 휘감는다. 으스스한 기운에 꾸욱 팔짱을 낀 그에게 말발굽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

기사는 다소 비밀스러운 동작으로 후작을 단장의 숙실로 안내했다. 조금은 과장된 듯한 태도와 문을 두드리는 절제된 동작 하며 바싹 긴장한 듯한 낯빛까지. 얼마 되지 않은 견습 기사임은 틀림없구나. 어쩌면 아이가 직접 훈육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어린 기사의 세밀한 동작 하나하나 놓치지 않던 후작의 얼굴 위로 옅은 웃음이 번진다. 그때 방문을 허하는 나른한 어조가 안에서 새어 나온다.

“찾아올 줄 알았지.”

소리가 흐르는 곳은 창가 근처에서였다. 넓게 짜인 내실의 창을 모조리 다 막을 정도로 큼지막한 사내. 유리창을 투과되어 들이찬 햇볕이 어깨 위로 내려앉아 가히 기사단장이라는 작위에 걸맞은 위압감에 힘을 더하고 있었다.

“하렌.”

“후작.”

고갯짓으로 객을 위해 마련된 테이블을 가리킨 하렌은 검 말고 다른 것이라곤 쥐어 본 적도 없는 것 같은 손으로 손수 찻물을 따랐다.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며.”

하렌과 찻잔이라. 이질감이 다분한 광경에서 눈을 뗀 후작은 내밀어진 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한 어투로 답했다.

“난리랄 것까지야.”

“공작가의 마차를 뒤엎은 게 그럼 소꿉장난이라도 된단 말인가.”

“실수였네.”

“잘 아니 다행이군.”

“그래, 이제 어찌할 셈이지.”

후작은 대답 대신 눈썹을 까딱인다. 그 분명한 저의를 알아챈 하렌은 날 선 얼굴로 선을 긋는다.

“아델리아 경의 일은 내 손을 떠난 일이야.”

“그러면서도 잘도 견습 기사를 시켜 날 기다리게 했군.”

“기다린 게 아니라 쫓아내려던 걸세.”

잘도 능청은. 가늘게 뜬 눈으로 제 앞의 사내를 흘긴 후작은 달카닥, 소서 위로 찻잔을 내려놓는다.

“그대는 나와 거래를 했지.”

“또 그 소리인가.”

“지난 4년간 이를 충분히 이행했음을 내 모르지 않네.”

이젠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하렌을 후작은 똑바로 응시한다. 빛살에 젖어 짙어진 붉은 눈 위로 결연한 낯을 한 인영이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다.

“그러니 이제 경에게 간청을 하려 하오.”

갑작스러운 존칭에 하렌이 얼떨떨해하는 사이, 후작은 테이블 건너 마지막 구원자를 향해 자세를 낮춘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손에 입을 맞추며.

“단 한 번, 미천한 자의 청을 외면치 않는다면 진실로 나는 경의 종이 될 것이니 부디 자비를 베풀기를.”

이 사내는 정말.

끝까지 한결같은 이의 모습에 하렌은 허탈한 웃음을 그린다.

“……어차피 실패할 거야.”

“때론 그래도 멈출 수 없는 일들이 있지 않나.”

“……그래, 그런 일들이 있지.”

끝을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일들. 하렌은 제 눈앞에 있는 사내를 본다. 고귀한 자로 태어나 가장 비천한 자의 발에 머리를 숙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사내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하염없이 공평한 빛깔로 저를 올려다본다. 그 메마른 여자가 정신을 못 차리는 것도 당연하지.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누군들…….

피식.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린 그는 생각을 멈춘다. 무의식적으로 손등을 매만지던 손 역시 거두고서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아론 신전일 거야. 그 밑에 교육생들을 위해 마련된 지하실이 있거든.”

“다른 교육실들도 있지 않나.”

“무려 이만 에이타가 넘지. 아델리아 경의 힘은. 그걸 제어하려면 다른 곳으로는 부족해.”

“허나 이아론 신전은 고대의 계약에 묶여 있지 않나? 하이가 에오르테가 직접 계약한. 오로지 모르타 위원회에 종속된 자만이 그 문을 열 수가 있다 들었어. 그럼, 토리노 위원장을 설득하는-”

“하이가 에오르테의 순결한 피가 흐르는 자손도.”

“뭐?”

“테비온을 구축한 건 하이가 에오르테. 모르타 위원회가 보검을 갖기 위해 에오르테가를 섣불리 건드리지 못한 건 그저 하이가와 그의 가문에 대한 경외심 때문만은 아니야. 이 테비온 전체가 에오르테가와의 계약에 묶여 있는 셈이지. 아주 오래된 고대의 계약에.”

“자네가 있어 다행이야.”

“……나쁘지 않네.”

“뭐가.”

“글세, 한날한시에 델로스의 문턱을 밟는 것 말일세.”

“난 그럴 생각이 없는데. 되도록 오래 살아남을 생각이라. 그댈 방패 삼아 도망칠 수도 있어.”

잘게 웃음 짓던 하렌은 이내 이마를 쓸어 올린다.

“그래도 제법 낭만적이지 않은가.”

“낭만은 무슨.”

비스듬히 기울어진 하렌의 입술이 이어질 적당한 단어를 고른다. 저 순진무구한 사내가 기절하지 않을 정도로 무난하면서도 제 욕심을 채울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인. 그런 단어가 있기나 할까. 그래도 세상에 존재하는 낱말들이 모조리 쓸모없기만 한 것들은 아닌지 그는 이내 나름 마음에 차는 것을 골라내긴 하였다.

깊다란 감정을 토해 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느지막하게 벌어지는 입매 안에서 하렌의 혀끝이 영원 속을 맴도는 것처럼 느릿하게 움직인다. 고작 그 네 음절을 가지고서. 이리 무겁고도 아릿하다니. 스스로가 조금 경멸스러워질 즘, 입술이 벌어진다.

친애하는.

유달리 맑은 하늘과 시리도록 투명한 햇살. 그리고 내려앉은 볕을 받아 눈부시게 부풀어 오른 짓궂은 녹안까지. 그 순간을 간직하려는 듯 하렌은 천천히 눈을 내리감는다.

조금 억울해도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저같이 비루한 자에게 주어진 것치고 과분하게 완벽한 결말 아니던가.

“벗과 함께이니.”

***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위원님. 에오르테 후작이 하렌과 접촉을 시도했어요.”

터질 듯한 서류들을 옆구리에 낀 보좌관은 사뭇 심각한 어투로 테이블 너머 상관을 바라본다. 평소 덤덤하기만 하던 그의 어투에 조급함이 묻어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으나, 되돌아오는 반응은 뭐 그리 놀랄 것 있냐는, 조금 단조로운 음성이었다.

“에오르테 후작이라.”

급박한 문제를 마주한 이답지 않게 여유로운 미소만을 드리운 낯에 제가 더 조바심이 날 즘, 보좌관은 또 한 번 입술을 움직인다.

“어찌할까요, 위원님. 아무래도 정찰을 늘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페치오는 대답 대신 앞에 놓인 서류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문지른다. 하렌의 동선, 근래에 만나던 인물 등이 담긴 담백한 필체가 그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바스라진다.

보다 확실해졌군. 보검의 행방이.

토리노 위원장이 파문당할 위기에 놓인 지금, 몸을 사려도 모자랄 하렌이 저토록 위험천만하게 행동하는 연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밖에 없었다.

보검.

그걸 넘겨받았거나 아니면 받을 예정이거나.

“되었네.”

평상시 것보다 부드러운 음성을 공간에 던지며 페치오는 느른하게 기지개를 켠다. 허공 위로 쭉 뻗어진 팔과 젖혀진 고개에서 승리를 예감한 자의 느긋함이 다분히 묻어 나왔다. 여전히 불안한 빛을 보이는 보좌관의 어깨를 툭툭 스치듯 두드린 그는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덧 날은 저물어 잿빛 마을에서 유일하게 다채로운 색깔을 내뿜던 하늘 역시 까맣게 물들어져 있었다. 고급스러운 장미 목으로 마감된 창틀 안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 오는 어둠이 그의 손 위를 배회하는 사이, 보좌관이 초조하게 목을 울린다.

“그럼, 감시는 이대로 유지할까요, 위원님?”

감시라. 픽, 가라앉은 내실의 공기로 작은 실소가 터져 나온다.

구태여?

어리석은 자와 무모한 자. 두 사내가 모여 할 만한 짓은 이리 빤한데 말이다.

“그럴 필요 없어.”

“예?”

뭘 하려는지 아니까. 짤막하게 말을 덧붙인 그는 잔뜩 짙어진 밤하늘이 그린 듯이 투영돼 검게 물든 눈으로 밖을 훑어 내린다. 이파리 하나 남지 않아 곧 스러질 듯한 고목들과 음산한 바람결에 맞추어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이 테비온은 이제 모두 그의 것이다.

그래, 보검도, 위원장 자리도 전부.

참으로 한참을 돌고 돌아 도착했구나.

무려 14년을.

벼린 칼날처럼 날카롭게 그어진 눈 위로 떠오른 건 여물지 않은 소년과 노쇠한 집사에 의해 망쳐졌던 그날이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에오르테 본가의 지하실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그는 평소보다 거친 숨결이 내실의 공기를 흔들자, 멈칫했다. 빠르게 힘을 거두어들이자 걷힌 검은 안개 사이로 드러난 것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소년이다.

얼마 남지 않았군.

라에갈 공자가 이쯤 자결을 시도했던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며 페치오는 굳게 닫힌 지하실의 문을 열어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집사를 불러들였다.

‘오늘 훈련을 여기까지 할 테니 치료에 집중하게.’

쓰러진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들어선 집사의 손을 타고 리베라의 향이 지하실에 가득 차자, 페치오는 보폭을 넓혀 후작이 머무는 집무실로 향했다.

당분간은 훈련의 횟수를 자제하는 게 낫겠다, 후작에게 그리 제안할 참이었다.

카트린느의 애간장을 적당히 태워 제 가치를 높일 시기이기도 하고 자칫하다 아이가 그냥 죽어 버리면 한동안 이곳에 드나들 명분이 없어지지 않겠는가.

자연스레 반쯤 열린 집무실로 발을 디디려던 그는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광휘로운 빛깔에 잠시 숨을 멈췄다. 채도 높은 색감의 에메랄드. 하이가의 보검, 가장자리에 박혔을 것이 틀림없는. 홀린 듯 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탁, 맑은 소리와 함께 보석함을 닫은 카트린느가 몸을 돌린 건 그때였다.

‘무슨 일이지.’

탐욕에 가득 찬 낯을 서둘러 갈무리한 페치오는 입을 열었다.

‘확실히 또래들보다 체격이 좋으셔서 그런지 훨씬 가능성이 보입니다. 다만, 당분간은 휴식을 취하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어째서.’

‘발현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 추이를 보는 게 훈련보다 우선일 테니까요.’

‘……지하실로 안내하게. 내가 한 번 살펴보지.’

완벽하게 감추지는 못한 것 같았다만.

짧은 대답과 함께 내실을 나서며 카트린느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심중에 들끓는 욕망을 모르지 않은 모양이다.

‘어리석은 생각 말게, 페치오. 저택에 널린 게 보석을 본떠 만든 가품들이니까.’

하이가의 보검.

모르스 일족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에오르테가에서 수많은 모조품을 만들어 저택에 비치했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원로들조차 무엇이 진품인지 모르는 보석과 보검의 위치는 오직 가문의 가주와 그 후계자에게만 전해져 온다고.

그리 철저하게 베일에 싸인 하이가의 보검을, 보석을 저 여자가 그리 함부로 다룰 리 없다. 제정신이 아니긴 했다만 그 일에 관해서만큼은 철저하게 영악한 여자이니. 불현듯 이를 깨달은 페치오는 입술을 짓씹었다. 여 보라는 듯 반쯤 열린 문은 필시, 저를 시험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리 얕은 술수에 휘말린 자신의 과오를 책하며 페치오는 빠르게 지하실로 향하는 그녀를 뒤따라 걸음을 움직였다.

‘엘몬트, 그 애는 어딨어.’

아까와는 궤가 다른 음산한 목소리가 지하실에 울려 퍼진 건 막, 그가 당분간 행동거지를 조심해야겠다 생각할 즈음이었다.

아이가 사라졌다.

에오르테가의 첫째 아들의 몸이 저리 망가지고 둘째 아들이 명을 다할 때도 그저 인형처럼 말을 따르던 집사, 엘몬트가 벌인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어찌 이런 허망한 일을 벌였던가.

저택 밖을 지키는 수십, 게다가 몸도 성치 않은 어린아이가 도망쳐 봤자 얼마나 멀리 갔으려고.

그의 생각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저택 내부를 수색한 그는 채 한 시진도 걸리지 않고 죽은 라에갈 공자의 방, 거울에 비친 옷장 안의 녹안을, 두려움에 떠는 눈의 주인을 찾아냈다. 그게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만.

에오르테가의 본가가 화마에 휩쓸렸다는 소식은 그로부터 며칠 후에 들려왔다. 유구한 대저택은 삽시간에 불길에 잡아먹혀, 마치 기름이라도 칠해 놓은 것처럼. 아수라장이 된 공간 속으로 단숨에 들어간 페치오는 어렵지 않게 흩날리는 백금발을 찾을 수 있었다.

절대 놓칠 수 없다.

이 애를 잃으면, 곧 보검을 잃는 것과 진배없으니. 흔들리는 그 옷깃을 잡아챈 순간, 압도하는 힘이 그를 밀었다. 그 충격에 벽에 부딪히고 부서지는 나무 기둥에 깔려 흐릿해지는 의식 사이로 분명한 것은…….

보석이었다.

불길 속에서도 영롱한 빛깔의.

그러니까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닐 테다.

‘세상에, 그 화재에 후작과 그 후계자가 모조리 명을 달리했다니. 둘째 공자라도 살아남은 걸 천운이라 해야 할지…….’

‘그럼, 그 보검은 어찌 되었을까요?’

‘무슨 보검.’

‘하이가의 보검 말이에요! 후계자에게서 후계자에게로 무엇이 진품인지 전해져 온다는데 후작과 첫째 공자 모두 비명횡사했으니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 주었을 시간이 없지 않았을까요?’

‘하긴 그렇지. 그토록 오랜 세월 지켜 왔는데…… 이리 허망하게 가문의 유산이 행방불명 되는 건가…….’

불의의 사고로 급작스레 후계 자리가 양도되며 가문의 가주가 된 에오르테가의 둘째 공자가 실은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의 유산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할 수도 있다는.

에오르테 후작.

아니, 리오 서머셋.

너는 알고 있을 테지. 뭐가 진짜인지 말이야.

***

“후작, 거의 다 왔어. 이쪽으로.”

눅눅한 습기가 밀도 있게 죄여 오는 이아론 신전의 지하 통로. 이와 사투를 벌이는 음성은 그래서인지 더욱 끊어질 듯 미약하기만 하다. 하렌은 후작의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하여 나아가던 걸음을 잠시 멈춰 선다. 규격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은, 엄밀히 따지면 비밀스러운 길이기에 제대로 닦이지도 않은 통로에서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성인 사내를 부축하는 것은 제아무리 기사단장이라 할지라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다 왔군.

신전의 위치가 평소보다 배로 멀게 느껴지는 지금, 기이한 문양으로 우뚝 세워진 쇠철문을 보며 그는 소낙비라도 맞은 것처럼 땀에 젖은 이마를 훔쳐 낸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도 버거울 뿐만 아니라 그 전에 산송장을 하나 치워야 될 줄 알았더니. 하렌은 어깨에 걸쳐진 후작의 팔을 풀어내고는 그나마 툭 불거진 데 없이 판판한 바닥 위로 그를 뉘였다.

시체처럼 창백한 혈색이며 살아 있는 미약한 숨결까지. 지하 통로로 내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별 탈 없던 모습은 지금 당장이라도 델로스 문턱을 넘을 듯 위태롭게 보였다.

“후작?”

몇 번이고 물음이 되풀이되고서야 열에 들뜬 눈이 희미하게 깜빡거린다.

“후작, 다 왔네. 잠깐…….”

그것에 안심한 하렌은 다시 한번 목을 울리려다 움찔거리는 후작의 입술을 보고 멈칫했다. 그 무거운 정적 속으로 거친 날숨이 스민다.

숨어야 돼.

“뭐?”

때아닌 문장에 날 선 음성이 적막을 흔들자, 이제 후작은 하렌의 옷깃을 꾹 움켜쥔다.

그 사람이 오고 있어.

“그게 무슨…….”

얼떨떨한 낯으로 닿지 않는 맥락을 읽어 내리던 하렌은 초점을 잃고 제 색을 잃어 가는 녹안에 퍼득 정신을 차린다.

심각하다.

생사를 오가는 이들이 간혹 지껄이는 헛소리와 닮은 읊조림에 하렌은 빠르게 몸을 움직인다. 품속에 단도를 꺼내 들고 후작의 생기 잃은 손가락 중 그나마 적당한 놈을 고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찰나의 고통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후작의 정신이 아득한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다는 것. 팟. 날이 제법 벼렸는지 멈추지 않은 핏물에 특유의 비린내가 코끝을 적셨다.

“이제 다 끝났어.”

계속해서 같은 말만 중얼거리는 후작을 금모래같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독였다. 하렌은 조심스레 그의 손을 제자리에 돌려놓고는 눈을 들어 올린다. 에오르테가의 순결한 피로서만 열리는 비밀스러운 이아론 신전 지하실의 입구라. 곧, 다가올 변화를 고대하는 듯 그의 적안은 어둠에서도 요요히 제 빛깔을 뿜어낸다.

뭐지.

꽤 오랫동안의 기다림에도 우뚝 솟은 벽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만 있다.

왜.

그 어둠 너머로 아주 익숙한 음성만이 들려올 뿐.

“아주 멋지게 실패했어.”

서서히 드러나는 낯의 주인은 다름 아닌 페치오였다.

***

오늘도였다.

추이를 지켜보자는 말만 내어놓는 의원.

그 후로 쓸모없는 없는 낱말들만 뱉어 내는 의원을 돌려보낸 공작은 시종을 부르는 종줄을 당겼다. 열감이 묻어나는 눈두덩이를 내리누르고 있자, 시종은 책상 위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공녀님은 의원이 다녀간 뒤로 여태 깊이 잠들어 계십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찻잔을 들어 올린다. 그리 짙지도 않은 은은한 내음이 번지자 어지럽던 머릿속도 맑아지는 느낌이다. 믿었던 자식의 배신, 제 비밀을 쥔 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모습을 감춘 사내, 갑작스러운 딸의 이상행동. 불투명한 장막처럼 한꺼번에 마주한 그 모든 사실들이 흐물거릴 즈음, 그는 그리 수완이 있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오늘 밤 세이의 깊은 잠으로 공작가는 안온할 테니 나쁘지만도 않다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시종에게 차를 한 잔 더 내오라는 눈짓을 한 공작은 남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집무실 책상에 앉았다.

방금까지의 혼란은 찾아볼 수 없다는 듯, 곧 사각거리는 깃펜 소리가 그의 손끝에서 퍼져 나간다. 서산 끝자락을 붙잡고 있던 낙조가 기어코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던 단조로운 공명이 불현듯 폭을 좁힌 것은 뜻밖의 불청객이 나타난 후였다.

돌팔이였나.

볕에 모조리 색이 바랜 희부연 천처럼 질린 가정부의 얼굴을 보며 공작은 오늘 내렸던 의원에 대한 판단을 재고해 본다.

“공녀님께서 또…….”

급기야 가늘게 떨리는 가정부의 손을 보자, 후우 공작은 길게 숨을 내쉬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 돌팔이는 또 아닌가 보지.

복도의 붉은 융단을 내리누르는 그의 발끝에 의아함이 묻어나온다. 집무실 밖을 나서면 곧장 저택이 떠나갈 듯 요란한 사위가 저를 맞이할 줄 알았더니. 한바탕 공작저가 떠나가라 난리를 치던 세이의 소란이 오늘은 그리 오래지 않아 끝을 낸 것인가. 고요한 어둠을 가르며 새로 고용한 의원을 새삼스레 재평가해 보는 사이, 어느덧 2층 오른쪽 복도에 다다른 공작의 고막으로 불규칙하게 뒤섞인 소리들이 파고든다.

그럼 그렇지.

예상한 결과였다는 듯, 그럼에도 조금 내비쳐진 실망감을 빠르게 갈무리하며 공작은 보폭을 넓혔다. 세심하게 자수가 놓인 푸른 코트의 끝자락이 소리 없이 물살을 가르는 수초처럼 기품 있다. 그 유려한 움직임에 균열이 찾아온 것은 때아닌 소동의 흐름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을 즈음이었다.

“무슨 일이지?”

저걸 어째, 애고머니나. 단말마와도 같은 탄식을 찢어 낸 그의 어조는 미미하게 흔들린 심중의 평정심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공…… 공작님!”

놀라 눈을 키운 사용인들은 눈을 내리깔며 대답을 회피한다. 대신 주춤주춤 제게 길을 터 주기 시작했는데, 사용인들이 만들어 낸 공백의 공간은 자연스럽게 그를 딸아이의 방으로 인도했다.

내실로 들어선 공작은 찬찬히 안을 훑어 내린다. 달빛이 드리워 낸 어른어른한 그림자를 따라 탁 트여진 발코니까지 이어지던 벽안은 산대해진다.

먼저 시야에 들이찬 것은 발이었다. 희멀건 맨발. 석조 난간 위에서 세이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득한 위태함의 끝자락으로 몰아세웠다. 어찌 거기까지 올라갔는지, 도대체 생각은 있는 건지. 분노에 찬 물음들을 목구멍 속으로 밀어낸 그는 부드럽게 목을 울린다.

“세이?”

소리는 낮지만 분명했다. 막막한 어둠 어딘가를 구르는 딸아이의 시선을 빼앗기는 역부족인 듯했지만. 언뜻 보면 난간 위에 세워진 동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세이는 미동조차 없었다. 바람의 결을 따라 나부끼는 슈미즈 자락이 아니었다면 실로 그리 여겼으리라.

공작은 깊게 팬 미간 주름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난간 쪽으로 조금 더 몸을 기울였다. 공작은 옅은 한숨과 함께 다시 입술을 벌렸다.

“세이, 거긴 위험해. 이리 내려오렴.”

“……안 돼요.”

단연 돌아오는 대답이 없을 거라 여겼건만. 꽤나 단호한 음성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그가 얼떨떨해 있는 사이, 나지막한 음성이 뒤따라 붙는다.

또 올 거예요.

미세한 떨림이 깃든 음성이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로 길게 흩어졌다. 희미하게 남은 소리의 여운 속에 깃들어 있는 감정은 다소 생경했다. 두려움인지 기다림인지, 딱히 구분이 가지 않는 점에서 군데군데 의아함을 자아내기도 했고.

“그 여잔 안 와. 그러니 걱정 마렴.”

다정한 다독임에 긴장이라도 풀린 것인가. 밤의 지배자처럼 꼿꼿하게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던 몸이 일순 허물어진다.

“안 와?”

누군가 재빨리 무너지는 몸을 받아 내 주지 않았더라면 제게 닥쳤을 위험천만한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녀는 잔뜩 묽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공작가의 공녀가 광증에 걸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적어도 그런 추문은 면피할 수 있겠구나, 누그러지던 노기의 불씨는 그 어쭙잖은 질문에 다시 되살아난다. 공작은 대답 대신 난간 위에 걸터앉아 있다시피 한 딸의 등을 거칠게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델에 대한 세이의 과민한 집착도 또 이런 하잘것없는 일에 무너져 시간을 소요하는 까닭도. 누구나 마땅히 갖고 싶어 할 힘을 가지고 태어난 자식들이 아니던가. 삶의 모든 것들이 운명의 실 아래 이미 짜여 있다면 공작은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보다 관대하다 여겼다. 그것이 원한다 하여 가져질 것이었다면 그는 어떠한 짓도 서슴지 않았을 터인데.

“왜?”

침묵이 길어지자, 가슴께에 닿은 날갯죽지가 날갯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들썩거린다. 공작은 상기되려는 어조를 간신히 누그러뜨리며 조용조용 말을 이어 나갔다.

“아델리아 경은 테비온 마을에 있잖니. 의식 준비를 위해서 말이야.”

“……의식?”

혼란스러움이 군데군데 묻어나는 어투는 두려움과 기다림, 그 분명한 경계선을 모호하게 흩트린다. 다소 의아한 기색으로 문장을 곱씹어 보던 공작은 이내 젖어 든 감상을 지워 내고는 목을 울렸다.

“세이, 그만-”

순순히 응하던 몸에 돌연 잔뜩 힘이 들어간다.

“세이?”

왔어.

또 시작인가. 탁하게 번진 벽안은 굳이 바깥을 확인해 보지도 않는다. 그럴 인내심이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 그대로 딸을 안아 들고 돌아서려던 공작은 불현듯 들려오는 말 울음소리에 멈칫했다.

아타할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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