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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변수 (10/16)

10. 변수

“아델리아 공녀의 반응은 아직입니까.”

침잠하는 내실의 분위기를 가른 건 더없이 초조한 부하의 음성이었다. 입술에 걸린 잎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아들인 아몬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보니 시원시원하던데,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마땅한 수가 없을 텐데.”

허나, 담담한 문장과 달리 말을 뱉은 아몬 역시 긴가민가한 기색이 다분했다.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한 손마디. 본디 기사라 했으니 이상할 것 없는 상흔은 막 검을 잡은 이의 것처럼 선명하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그런 모양이라…….

그건 어디에 깨지고 부딪친 게 아니라, 마치 꼭 스스로…….

“차라리 저희끼리 일을 처리하는 게 어떨까요.”

불현듯 들려오는 소리가 잔가지들 사이를 유영하던 아몬의 의식을 잡아챘다. 우리끼리라. 원래 그들의 정체성을 생각하면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게 맞다. 게다가 총기를 잃은 눈빛, 잘게 떨리는 어깨. 당당히 그들에게 아올리스의 입성을 제안하던 때와는 다른 무르고 유약한 낯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곳은 아올리스. 올레나의 힘이 아직 건재한 마당에 섣불리 튀어 나가는 것은 여러모로 타격이 크고 변수가 많을 터. 게다가…….

‘아델리아 베르니.’

그 선연한 감각은 도무지 잊히지가 않아. 그래서였다.

“조금 더 기다려 보지.”

짧은 단답을 끝으로 근심이 가득한 부하의 얼굴을 그대로 스쳐 지나간 아몬이 보폭을 넓혀 내실을 나선 것은.

밤하늘의 별들도 모습을 감추고 풀벌레들도 사위어 간 적막한 시간, 밤을 거니는 걸음은 담담했다. 뭔가 오늘은 실마리가 보일 것 같기도 해. 입가에서 흩어지는 연기를 벗 삼아 움직이던 그의 귓가에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공녀님?”

누군지 모를, 아마 기사로 추정되는 사내의 음성은 낮지만 분명하게 공간에 울려 퍼졌다.

아델리아 공녀.

주저 없이 그의 몸이 방향을 바꾸고 넓어진 보폭이 소리를 쫓는다. 그 직감과도 같은 예감을 향해서. 퍽 황당한 광경이 그 끝에 있었다만.

붉은 카펫도 가리지 못한 선연한 핏자국을 일별한 아몬의 눈은 아연실색한 기사들의 낯과 공작가의 대저택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 문짝. 그리고 그 황동 문고리를 으스러져라 붙잡고 있는 아델리아 공녀에게로 흐르듯이 닿았다. 아마 핏물의 진원지는 아델리아 공녀의 팔, 손목, 아니 그 여린 마디가 분명하겠지.

이 깊은 밤,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인가. 정녕 저 여자가 미친 걸까.

“아델리아 공녀?”

그런 의구심이 다분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아몬은 공녀를 불렀다. 다행히 제 이름 정도는 아직 잊지 않은 모양인지 은발에 가려 있던 잿빛 눈이 천천히 드러나 그에게로 닿았다.

“그런 기분 아나.”

여전히 초점은 맞질 않고,

“세상이 온 힘을 다해 나를 한 곳으로 미는 기분.”

아득한 어딘가를 배회하는 것 같았다만.

그를 쳐다보고 있다기보단 다른 세상에 머무는 것 같은 은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아몬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끔.”

“……그럴 땐 어쩌지.”

“그 감각을 쫓아가지, 아델리아 공녀. 그곳에 늘 답이 있으니.”

“답이라…….”

“그래서 어쩔 건가.”

정신이 멀쩡해 보이진 않았다만 얼추 대화는 이어지는 것 같고 맥락 역시 쫓지 못하는 건 아닌지라 아몬은 지금이 이 말을 할 가장 적기라 느꼈다. 아몬은 혀끝에 한참을 굴리고 있던 문장을 밀어냈다.

“공녀 말이네.”

공녀.

느리게 그 단어를 읊조리는 것 같던 아델리아 공녀는 한참을 눈을 여닫았다. 유리창을 투과한 빛살의 기울기가 달라지고 그림자의 농도가 옅어질 때까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한 행동이었다.

“좋아.”

적막한 시각, 밤의 공기를 닮은 음성은 서늘하다. 얼음 조각보다 차가운 그 문장을 타고 더할 나위 없는 긍정의 답이 흘러나왔다.

“그대의 제안을 수락하지.”

***

공작의 집무실과 이어지는 서쪽의 통로에는 다급한 보좌관의 발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졌다.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인가.

공녀와 아몬.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공작가에 일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의 손을 떨리게 만들 만큼 충격적이었다. 진정되지 않은 손으로 집무실의 문고리를 잡아 내실에 들어선 그는 서류에만 고정되어 있는 상관의 모습에 한 박자 호흡을 골랐다.

“공작님, 아무래도 아델리아 공녀님의 동태가 수상쩍습니다.”

백지의 공간 위를 분주히 움직이던 손이 그 말에 느릿한 곡조로 바뀐 건 그 찰나였다. 들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은 공작은 더 말해 보라는 뜻을 보이며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근자에 들어 아몬 그자와 접촉이 잦았는데, 간밤에 둘이 나눈 대화의 내용이 참으로 기괴하다는 기사의 보고입니다.”

“어찌 이상하다지.”

애써 침착하게 대응하려 해도 미약하게 남아 있는 초조함과 다급함이 그대로 나비치는 그의 목소리와 달리 되돌아오는 어조는 평탄하기 짝이 없다. 그 차분함에 잠시 얼떨떨해 있던 보좌관은 어젯밤 손님용 객실, 그러니까 공녀가 갇혀 있는 방 앞에서 아몬과 아델리아 공녀가 나눈 의미심장한 내용들을 읊어 내렸다.

공작가의 양녀와 티케 사냥꾼.

두 조합만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대화는 은유의 화법으로 모호하게 가려져 있었으나, 그 뜻을 짐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말을 마친 보조관은 그런 확신이 담긴 낯을 들어 올렸다. 아무리 냉철한 이지를 격언 삼아 행동하는 제 상관이라도, 괴팍한 딸을 저리 방에 가둔 무자비한 아비라도 이번 일은 틀림없이 충격적일 것이다, 라는 근거 없는 판단과 함께.

“내버려 두게.”

그래서였다. 단조로이 흘러나온 음성에 보좌관이 아연한 낯을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낸 건.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달싹거리고 있자 공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덧붙인다.

“뭘 하려는지 아니까.”

자리에서 이만 일어난 공작은 공간을 가로질러 내실 밖으로 나섰다. 응접실로 향하는 통로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걸음은 당연하다는 수순처럼 가주들 초상화의 향연 앞에서 멎었다. 공간을 압도하는 그림들을 바라보며 공작은 답지 않게 심상한 질문을 떠올려 본다.

과연 그의 후계자는 이 짙은 밤을 건너 그가 원하는 빛깔로 피어오를까. 일말의 기대와 염려가 가득한 그 물음을. 그림자처럼 그를 뒤따르던 보좌관이 조심스레 그에게 말을 붙인 건 그쯤이다.

“공작님.”

연신 조바심이 역력한 낯을 감추지 못한 보좌관이 한 걸음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혹 제 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나 하여 다시 말씀드리자면-”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히 알아들었네, 릭.”

단박에 그의 말허리를 잘라먹은 공작은 여전히 눈은 초상화들의 가운데 위치한 그림 하나에 고정한 채였다.

데카리나 베르니.

그의 아비가 그리 말했다지. 넘어서라. 그리고 쓰러트려라. 자식이 아비와 어미를 밟고 일어섬으로써 우리 가문의 영예는 지속될 것이다. 그가 딸의 손에 무너진 대가로 그의 딸은 공작가의 가장 위대한 치세를 기록한 가주로 기억된다.

데카리나 베르니.

감히 나무판 따위가 가리지 못한 위압감을 풍기는 초상화에서 시선을 일별한 공작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낯을 보이는 보좌관에게 시선을 다시 주었다.

“허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중요한 건 그 애가 정녕 제 손에 피를 묻힐 각오가 되어 있는가지.”

무수히 많은 일이 이 자리 위에서 벌어질 것이다. 핏줄 따위에 연연해 그르칠 수 없을 막중하고 또 막중한 일들이. 그에게 중요한 건 아델이 그걸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나. 바로 이것이었다.

티케 사냥꾼이라.

가장 쉬운 길을 택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그의 딸은 여전히 나약한 겁을 벗어 내지 못한 듯 보였다. 여러모로 유약하고 어리석어.

허나…….

이만하면 무시하지 못할 장족의 발전인가.

공작은 그 속에서 제 후계자의 가능성을 찾는다.

베르니, 그 영예로운 이름의 무게를 견딜 가능성을.

불쑥 소리가 끼어 들어온 건 그때다.

“하지만, 공작님, 정녕 아델리아 공녀를 믿으십니까?”

믿음.

공작이 너무나도 무해하고 어리석은 단어를 혀에 굴리며 느릿하게 걸음을 움직이자, 이를 긍정의 뜻으로 해석했는지 보좌관은 계속해서 목을 울렸다.

“본디 아델리아 공녀는 명예도 재물도 관심이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만약 이 모든 게 계략이라면, 공작님께서는 두 명의 후계자를 모두 잃으시는 겝니다.”

계략.

그러니까 세이를 제거하고 제 숨통을 조여 공작가의 멸문을 바라는, 그 헛되고 푸른 꿈이 다른 이의 눈에는 그리 거창하게 보인단 말인가. 어리석게도. 세상만사 그리 순탄하고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에 악인은 왜 있고 비천한 자들은 왜 있겠는가.

알지 못하는 게지.

“릭.”

“예, 공작님.”

“기억나나.”

“무엇이 말입니까.”

“사용인들을 유지할 돈이 없어 이 저택에 자욱한 먼지와 찌든 때가 가득하던 이 저택의 모습이.”

멈칫하는 보좌관의 얼굴에 공작은 웃음을 흘린다.

“가물가물하지. 나도 그래. 사람이 다 그렇지. 많은 것들이 쉽게 변하고 우리는 거기에 쉬이 익숙해지니. 그래서 뭐든 그리 쉬울 거라 여기지. 쉽게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심상한 어조로 말을 이은 공작은 보좌관의 낯에서 거둔 시선을 다시 선대 가주들의 초상화로 옮긴다.

“헌데 말이야, 세상일이 다 그렇지만은 않다네.”

세상엔 절대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그 애는 알까. 손에 한번 피를 묻힌 자는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걸. 그 무섭도록 가혹한 진실을. 알 리가 없겠지. 한때는 그도 그리 여겼으니. 겪어 보지 못한 자들은 절대 알 수는 없는 진리를 떠올리며 공작은 제 후계자가 꾸는 허상을 읊조려 본다.

라마타라…….

혀끝에 걸리는 단어는 잊고 있던 무언가를 몰고 오는 듯 아릿하다.

어리석게도 그걸 모르고 그리 꿈을 꾸는구나.

***

잠들어 있었다.

공녀는.

휘장을 부풀리고 흘러 들어온 달빛이 곤히 꿈결 속을 헤매는 공녀의 낯에 어리었다. 말갛고 부드러워. 마치 때 묻지 않은 순백의 눈처럼. 악에 받친 표정도 고집스러운 눈빛도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그런 얼굴이었다. 그래서일까. 이리 가늘고 유약한 목덜미를 부러트리는 데 자꾸만 주저하게 되는 건. 험한 전장에서 이보다 더한 짓은 숱하게 해 봤으면서.

바람결에 부서지는 백발과 모양 좋게 볼록 튀어나온 이마, 단정한 눈썹 위를 차례로 스쳐 지나는 시선을 따라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오르고 목구멍에서부터 절로 울림이 터져 나왔다.

“세이.”

이 애가 잠든 걸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잠든 네가 뱉어 내는 숨결은 이리 고르고 또 평화로워. 늘 매섭게 나를 바라보던 눈 역시 유순하기 그지없고. 험한 말만 골라 담던 입술을 나와 꼭 닮은 채로.

그 모든 게 다 처음이었어.

밤이 주는 고요함 속에서 이렇게 더없이 안온한 모양으로 피어오른 공녀를 일별한 나는 느리게 동공을 여닫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의 잔재. 상황에 맞지도 않은 그것들 앞에 잠시 숨을 죽이던 나는 일순, 손 안에 든 검을 발견하고는 픽, 웃음을 흘렸다. 왜 이 밤중에 이곳까지 온 겐지 그제야 깨달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만공 가득 차오른 달빛과 그보다 더 벼린 칼날. 비현실적인 상념을 삼키고서 흩어진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거나 공작의 치세를 가장 확실히 막을 방법은 공녀를 온전히 제거하는 것뿐이잖나.”

에단의 말이 맞아. 공녀는 살아 있으매 득이 되는 것보다 실이 더 많으니.

‘공녀를 처단해야지.’

그러므로 공녀는 영원히 사라져야만 할 것이다. 이를 모르지 않는다. 막을 생각도 없다. 다만…….

‘그대의 제안을 수락하지. 달이 꽉 찬 밤, 공녀는 그대의 것이 될 것이네, 아몬.’

그래…….

어차피 스러질 것 구태여 내 손을 더럽힐 필요가 있나. 티케 사냥꾼에게 넘겨지는 건 죽은 것과 매한가지니 그리 큰 차이도 아니다. 큰 차이가 아니니 달라질 것도 없고 달라질 것이 없으니 문제 될 것 역시 없다. 비이성적인 결론을 내리며 깔끔하게 마무리 지은 변수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세이.

여전히 생경한 그 이름을 입에 담고 흐르는 웃음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일말의 위안이다.

다행이야.

오늘이라는 게.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호흡, 그 속에서 더없이 평안한 낯. 이 모든 걸 내가 처음 보게 된 게 오늘이라는 거 말이야.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러지 않았더라면 아마…….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문장, 미처 끝맺지 못한 낱말들을 앞에 시야가 일순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를 진정시키려 잠시 눈을 내리감은 나는 터져 나오려는 감정들을 꼭꼭 갈무리했다. 짙은 여운을 남기며 삼켜지는 비밀스러운 생각은 더없이 낯설다.

“공녀는 어찌 되었지?”

아래층에 기다리고 있던 에단이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방금까지 대화를 나눴던 사내와는 전혀 궤가 다른 느낌이었다. 공녀가 머무는 숙실 입구 밖을 지키고 있던 건 공작가의 기사들이 아닌 거구의 사내였다. 이 시간쯤이면 나른하게 흐물거리던 통로의 기류가 당장이라도 터질 듯 팽창했던 까닭은, 굳게 닫힌 그 방을 쉬이 들어설 수 있던 것 모두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아몬을 향해 까닥, 고갯짓을 하자 날 선 검처럼 예리한 보랏빛 눈동자가 강렬하게 내 시선을 파고들었다.

‘공녀는.’

거리를 좁혀 오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기다란 핏줄기가 카펫 위로 투투둑 떨어졌다. 좀 전까지 공녀가 머무는 방을 지키고 있었을 기사들의 피일 것이다. 이를 물끄러미 보던 나는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어둠의 그림자에 음영 져 한층 탁해진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깊게 잠들었을 거야. 유모가 먹인 차에 수면제가 들었을 테니.’

‘수면제라…….’

이제 제정신을 차렸나 보네.

낮게 중얼거린 아몬은 칼등을 따라 흐르는 핏물을 닦아 내리고는 심상한 어투로 물었다.

‘사례금은 받질 않는다니 바라는 게 따로 있나.’

말투와 달리 눈에는 어둠도 사윌 정도로 짙은 인광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내가 뭐라 답했더라. 곧바로 각인을 시키라 했던가, 아니면 아올리스와 되도록 먼 곳으로 그 앨 보내라 했던가. 몇 분 전 일어났던 일인데 기억은 가물가물해.

“아델리아 경?”

에단의 불안한 음색이 지척에서 들렸다. 느리게 여닫는 눈 사이로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휘청거리는 나를 받아 낸 그와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우리의 탈출구.

“……다 끝났어, 이젠…….”

낮게 울리는 음성이 공허하게 허공으로 흩어진다.

“공녀를 제거했구나!”

에단의 가쁜 웃음도 들이지 않은 채로.

“공작가는 이제 끝났어.”

***

멀어져 가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둔 아몬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시체를 지나치는 움직임은 지배자와 같은 몸짓이 담뿍 흘러나왔다.

수면제라.

나사 빠진 사람처럼 굴더니 완전히 감을 잃은 건 또 아닌가 보지.

피식, 웃음을 흘린 아몬은 살짝 열린 문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염려가 사라진 자리에 찾아온 것은 기대감이다. 실상, 공녀의 납치는 올레나를 향한 선전포고다. 오늘을 기점으로 아올리스에 티케 사냥꾼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파다하게 번질 테니. 당분간 제국에는 피가 마를 새가 없겠지. 티케의 축복을 받는 이들끼리 다툰다는 건 뭐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막아 낼 수 없는 것이 없는 방패의 대결이나 마찬가지이니. 한 번은 그들이 이기고 또 한 번은 저들이 이기는. 무한히 되풀이되는 굴레와 가늠할 수 없는 승패.

허나, 올레나의 나이는 쉰을 넘긴 지 오래. 쇠약해지는 그녀의 힘과 달리 마땅한 후계자는 나타나지 않은 상태다. 한 치의 틈 없이 완벽하게 방어되던 아올리스에 그들이 발을 디뎠다는 것만 봐도 그렇지. 올레나가 없는 코르푸, 지도자를 잃은 아올리스의 티케들이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코르푸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찬 생각과 함께 아몬은 공녀가 있는 방으로 마지막 한 발을 내디뎠다.

부연 달빛이 들이찬 방 안은 전체적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부푼 바람을 머금은 휘장과 그 결을 따라 침대 위로 흩어진 백발. 찬찬히 내실을 살펴보던 그의 눈이 가늘어진 것은 시선이 창틀에 놓인 백합에 닿았을 즘이었다.

시들었던 이파리가 생기롭게 피어올라 있다.

착각인가.

의문이 깃든 눈을 한 아몬은 보폭을 넓혔다. 범인은 바로 말라비틀어진 수목 위에 내려앉은 월광이라는 걸, 그 덕에 마치 백합의 이파리가 싱그럽게 피어오른 것 같은 착각을 자아낸다는 걸 깨달은 건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만.

피 묻은 아몬의 손이 백합의 이파리 하나를 움켜쥐었다. 미약하지만 제 빛을 되찾은 그것을. 살아남은 잎을 손안에 바스러트린 아몬은 몸을 돌렸다. 이불 속에 웅크린 작은 몸, 손으로 이를 걷어 내려 했다.

하얀 천 속에서 솟아오른 단검이 그의 시야를 점멸시킨 건 그다음 순간이었다.

***

백색의 머리카락이 공간을 가로지른다. 품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벼린 칼을 감추고서.

사내의 눈을 타고 흐르는 핏물들, 어지러운 시야에 앞을 가늠하지 못하는 헛손질을 피해 방을 빠져나온 공녀가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향하는 곳은 2층의 어딘가. 정확히는 그 미친 여자의 방으로.

우뚝. 보폭을 최대한 넓히며 잰걸음으로 움직이던 공녀의 작은 발이 멈춘 것은 예상치 못한 장소 앞에서였다.

아래층.

들창으로 들이친 부연 새벽빛에 백합 문양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손잡이가 유달리 도드라진다. 세상의 모든 것은 흐릿해지고 오로지 그 손잡이만 남아 반짝거리는 기분. 이런 허튼짓을 할 시간은 없는데. 기사들의 교대시간은 정해져 있고 심지어 짧았다. 허나, 마음과 달리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이 문제다.

공녀는 살며시 심중에 치솟는 충동에 손을 들어 본다. 매끈하고 서늘한 감각이 살갗을 지배한다. 문득 그대로 손에 힘을 실어 손잡이를 돌려 버리고픈 정체 모를 욕망과 싸우고 있을 때, 누군가가 속삭인다.

문을 열어.

화들짝 놀란 공녀는 손을 거둬들인다. 눈을 굴려 주위를 살피기도 했다. 어슴푸레한 어둠으로 넘실거리는 통로는 고요했다. 그녀 자신이 뱉고 있는 숨소리가 유일했다. 그럼 이건 뭐지.

문을 열어.

그제야 공녀는 그 울림을 기억해 냈다. 꽁꽁 포장되어 있는 수십 개의 선물 중 원하는 것을 고를 때나 길을 잃었을 때 옳은 방향을 알려 주던 마음속 깊은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그 소리를. 표표히 나부끼는 바람의 소리와도 닮아 있는 그 소리를. 아침식사 끝나고 내밀어진 차, 왜인지 죽기보다 더 먹기 싫은 그 차를 내버렸을 때 들려오던 소리를.

얼른.

공녀가 주춤거리는 사이, 정체 모를 울림이 다시 그녀를 채근했다.

몇 걸음 남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그 미친 여자의 방과 서재를 번갈아 배회하던 푸른 눈이 이내 결연한 모양으로 변하는 것도 그 순간이다.

잠깐인데 뭐.

기사들의 교대시간은 정해져 있고 심지어 그것이 짧다는 명백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공녀는 문을 열었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기대하는 아이처럼 약간의 희망에 부풀어. 무엇을 고대하는 것인지는 그녀 자신조차 모른 채로.

그러나 그 어떤 상상의 나래에서도 지금 공녀의 눈앞에 펼쳐진 일은 없었다.

그 여자다.

그 괴물 같은 여자.

***

“분명 제거했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지독한 악연이었다.

우리 자매는.

도저히 그렇게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적막한 공간 위로 관통하는 소음을 몰아내고, 오랫동안 뇌리에 맴돌던 생각들이 흩어져 나왔다.

우리의 행운에는 총량이 정해져 있을 거라는. 그래서 둘 다 살아남을 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돌고 돌아도 결국 이렇게 칼날을 마주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델리아 경! 젠장.”

공녀의 탄생을 알게 된 그날처럼. 내게 주어진 사형 선고를 받아들인 그 밤처럼. 변함없이 교교히 빛나는 달빛이 마치 정의로운 심판관인 것처럼 평등하게 우리 둘의 이마 위로 제 흔적을 덧그렸다.

이번엔 누구의 편을 들까.

***

빌어먹을.

에단은 아델리아 경을 향해 눈을 거두어들였다. 은안은 제가 본 것이 믿기지 않는지 초점을 잃은 채였다.

눈에 띄게 안색이 가라앉은 아델리아 경을 보며 에단은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이 계획이 문제점투성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내부인이라곤 하나 고작 둘이서 벌이는 탈출극에 그것도 공녀를 제거한 채로.

아델리아 경과 함께 공녀를 제거한 후, 공작가의 마차를 타고 함께 사라진다. 마차는 늘 아델리아 경이 테비온 마을로 향하는 이른 새벽에 맞추어 대기하고 있었고 오늘 역시 그렇다 하여 수상쩍게 여길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공작가 양녀의 입술이 천근보다 더 무겁다는 걸 마부는 잘 알 테니 잘못된 이를 태웠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채진 못할 게고.

한 줄로 끝맺을 수 있는 단순명료한 계획에 얼마나 많은 위험이 뒤따를 수 있던가.

촘촘하다기엔 퍽 허술했고 신중하다기보단 무모함에 가까운. 그러기에 위험은 다분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변수는 없었지.

특히나 지금과 같은.

아델리아 경을 일별한 에단은 뻑뻑한 눈꺼풀을 들어 올려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사방에 내려앉은 짙은 어둠을 깨우는 박명의 새벽빛이 칠야에 익숙해진 눈동자에 들이치자, 미미하게 눈매를 좁혔다. 때 이른 아침. 모순적이게도 모든 것을 되돌리기에는 늦은 시각.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아는 입술은 느지막하게 벌어진다.

“어떻게 빠져나왔지.”

짙은 밤의 어둠 속으로 에단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대답해, 공녀.”

여린 목덜미에 검을 겨누고서.

“올레나라도 밖에 있는 건가?”

칼끝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공녀의 떨림을 애써 무시한 채.

“뭘……! 뭘 하려고. 또 뭘 훔치려고.”

설마 저 품에 단도라도 숨긴 건가. 발발 떨리는 손으로 저를 쏘는 듯이 바라보는 공녀에 에단은 이 황당한 상황도 잠시 잊고 픽, 웃음을 흘렸다. 지나친 용맹은 때 이른 죽음을 부른다던가. 오랜 격언은 바로 지금과 같은 때를 이르기 위함이리라. 심상한 상념을 끝으로 힘들이지 않게 제압한 공녀를 다시 한번 압박한다. 에단은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다시 검을 들이밀며 나직이 물었다.

“단도라…… 이런 하찮은 검 따위로 날 베기라도 할 작정이었나. 그래서 이 새벽에 쥐새끼처럼 숨어 들어온 거야?”

공간을 가로질러 공녀에게 향한 그의 손을 공녀가 물어뜯은 건 그 순간이다.

“아악!”

살점을 뜯어먹을 기세로 달려든 공녀는 아무리 그가 세게 머리를 내리쳐도 밀려나지 않았다. 한참을 뒤엉키다 결국 바닥에 나뒹굴기까지 한 후에야 에단은 공녀의 손목을 비틀어 쥐고는 그녀를 제압할 수 있었다. 에단은 살갗이 찢어진 것 같은 얼얼한 손으로 공녀의 뺨을 사납게 내리쳤다. 흩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나비친 눈은 푸르다.

“쥐새끼라니! 여긴 내 집이야!”

아주 익숙해.

“그래, 여긴 네 집이지.”

제 아비처럼 말이야.

형님이 의료 과실에 대한 책임으로 자결을 하고 가족 모두가 다 바닷물에 수장된 직후, 그러니까 모든 걸 다 잃고 그는 한 번 이 공작저에 걸음했다. 보초를 서던 기사들과 실랑이를 하던 그는 때마침 마차에 오르던 공작을 만나기 위해 발악을 했지.

‘세워라.’

괴성과 같은 소리에 공작이 마차를 세웠다.

‘그래서 이게 당신의 계획인가.’

한참 제 설명을 듣던 푸른 눈은 설명이 끝나자 무심한 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내 저택 앞에 쳐들어와 난동을 피우는 거? 본인이 스스로 더 잘 알 텐데 이런 걸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걸.’

마치 한심한 것을 보기라도 한 듯.

‘방도를 찾게. 어린애처럼 떼 부리지 말고.’

제 앞에 펼쳐진 빛깔은 뼈가 시리도록 서늘한 그 푸른 눈과는 조금 다른 빛깔이지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장막에 가려진 에단의 눈은 미처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였다. 그사이, 공녀의 사나운 음성이 다시 한번 공기를 찢는다.

“썩 꺼져!”

말도 안 되는 계획에 말도 안 될 만큼 큰 기대를 걸었던 건가.

핏방울이 맺히다 못해 피비린내를 풍기는 목덜미를 하고서도 낮아질 줄 모르는 공녀의 목청, 절망과 분노를 뚜렷하게 내비치는 푸른 눈이 조금은 가소로워 절로 에단의 입술이 비틀어지고 그 속에서 울분이 터져 나온다.

“억울하니? 하긴, 그럴 만도 해. 나도 그랬으니까.”

어둠이 삼켜 버린 눈은 그럼에도 여실히 푸른빛을 띠는 공녀의 눈동자를 흐트러짐 없이 직시했다.

“내게도 멋진 집이 있었어. 이곳만큼 넓고 크고 화려하진 않아도 그런대로 멋진 집이었지.”

에단은 심상한 어조와 함께 다시 검을 곧추세웠다. 번뜩이는 인광을 내비치는 날이 창백한 낯과 대비되어 유독 날 서게 느껴지지만,

“그걸 망친 게 누군 줄 아니?”

손에 쥔 검은 더없이 가볍고 바람은 적당히 선선하다.

“바로 네 애비야.”

이건 그러니까 인과응보야.

제 가족을 앗아갔으니 그 역시 가족을 잃어 봐야지. 그래야 세상만사 공평하고 또 정의롭지 않겠나.

사위가 어지럽고 그 속에서 날카로운 빛깔은 분명하다.

***

소리는 컸다.

모든 것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핏발 선 채 눈을 부릅뜬 에단, 그의 손끝에 들린 단검. 허공을 가르고 공녀를 향해 치닫는 날 선 칼날.

그 단도가 앞으로 행할 일들을 미리 떠올린 나는 공간을 가로지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 애가 네 눈앞에서 스러지게 된다면 너는 어떤 선택을 하려 했니, 아델?

글쎄, 잘 모르겠어.

팟. 쇳소리와 피비린내. 옷자락을 적신 핏물. 아물거리는 시야. 그 너머에 바다보다도 더 푸르른 벽안. 그때가 돼서야 나는 순순히 인정하고 만다.

하나 확실한 건,

다만 그뿐은 아니었다는 거겠지.

***

“괜찮으십니까, 위원장님?”

늦은 밤, 그럼에도 아직 꺼지지 않은 저택의 집무실에는 아직 미처 해결하지 못한 서류들이 널려 있었다. 며칠 전 멜번 항구에 도착한 의문스러운 선박들과 티케 사냥꾼의 동태. 막, 이에 대해 보고를 하려던 보좌관은 멈칫했다.

“위원장님?”

단말마와 함께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트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상관이었다. 서둘러 테이블을 건너 그녀에게로 향한 보좌관은 그 소란의 주인답지 않게 미동도 하지 않은 올레나를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날 선 공기, 예사롭지 않은 호흡,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갈빛 눈에 보좌관은 한 번 더 그의 상관을 불러 본다. 느리게 여닫히던 동공이 멎고 마치 다른 세상에서 헤엄치는 것 같던 초점이 맞춰진 건 그때였다.

“공작가로…….”

“예.”

“공작가로, 당장 공작가로 기사들을 보내라.”

“예?”

지금 제가 꿈을 꾸는 건가. 미심쩍은 듯 올레나를 살핀 보좌관은 갑작스러운 지시에 의아한 듯 되묻는다.

“허나, 저택에는 티케 사냥꾼들이 있는 데다 아직 공작가와 전면전을 하기엔-”

그닥 소용은 없었으나.

“당장!”

서릿발처럼 날카로운 명령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내실의 공기에 힘을 더했다.

***

한 무리의 인영들이 밤의 어둠을 가로지른다. 지평선을 따라 두 야트막한 언덕을 넘은 그들은 수도의 중심에서도 가장 중앙에 다다르고서도 지칠 줄 모르는 종마처럼 더욱 속력을 높였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수가 일으킨 소음 앞에 그들이 지나간 길목이 때아니게 이른 아침을 맞이한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졸린 눈을 비비고 침상에서 일어난 사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 시각에 무슨 난리람.

천지가 떠나갈 듯 요동치는 군마 소리와 선득한 기운에 당연한 수순처럼 그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다. 졸음이 묻어나는 시야로 들어온 건 믿을 수 없는 광경들이었다.

니베론 기사단이다.

황당함과 경외가 뒤섞인 문장이 아직 여물지 않은 새벽의 바람에 묻어 나왔다. 얼떨떨한 낯으로 낮게 중얼거리던 사내는 다시 한번 눈을 가늘게 떴다. 길가에 서 있는 익숙한 포플러 나무, 그 속에 강물이라도 범람한 듯 몰아치는 연푸른 물결은 틀림없이 티케 일족의 기사들이었다. 태어나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일족, 그중 가장 뛰어난 이들로 구성된 니벨론 기사단. 그들이 무슨 일이람. 또 어디로 가는 거람. 치솟는 의문을 쫓아 창밖에 반쯤 걸린 몸을 아예 내빼듯이 한 사내는 기사단이 지나온 궤적과 또 나아가는 가도를 가늠해 보다 그만 입을 떡 벌렸다.

완만한 평지로 이어지는 길의 끝에 자리 잡은 건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붉은 벽돌의 대저택. 아무리 천치라도 모를 수 없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공작저라는 걸.

***

스산한 기운이었다.

동료기사들이 공작가의 기사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틈을 타, 공녀의 방으로 간신히 들이닥친 니벨론 기사단의 단원 하나는 전신에 돋아나는 소름 앞에 입술을 짓이겼다.

당장 공작가로 출발하라.

이제야 그 말도 안 되는 명의 연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넘치다 못해 피웅덩이를 머금은 카펫과 붉게 젖은 이불보. 저택 안에 도사리고 있는 엄청난 위협이 뭣 모르는 그에게도 선연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침착하자. 침착해야 해.

기사는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혼돈으로 가득한 공간 속에서 눈을 내리감은 그는 여러 감정들이 혼재해 어지러운 마음을 가다듬었다. 부디 티케의 신호가 그를 바른길로 이끌기를 기도하며.

불현듯 뇌리를 관통하는 선연한 감각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그 신호를 쫓아 기사의 눈이 느리게 움직인다. 여명의 빛깔을 머금은 대리석을 지나 아래층, 그러니까 사용인들이 드나드는 저택의 계단으로.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아래층으로 향한 기사는 캄캄한 암흑 속 어렴풋이 드러나는 인영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고된 훈련을 받은 기사답게 민첩히 손을 검집에 옮기고 자세를 낮춘 그는 분간할 수 없는 인영의 주인을 확인하려 눈을 가늘게 떴다. 때마침 한쪽에 자리 잡은 창가로 들이찬 빛줄기가 그 어둠의 그림자 위로 내려앉았다. 허옇게 센 머리카락과 어울리지 않은 자그마한 몸집. 수수께끼 같은 단서들에 고심만 깊어 가던 기사의 눈에 이채가 감돈 것은 막 빛에 물든 푸른 눈을 발견한 직후였다.

“공녀님.”

적막한 공간 속에 흩어지는 울림은 적당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아, 마주한 이에게만 들릴 정도로. 허나, 여전히 푸른 눈의 주인은 영원 속에 얼어붙은 듯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이다. 무슨 문제가 있다. 더욱 경계를 곤두세우며 화급히 보폭을 넓혀 공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간 기사는 눈앞에 펼쳐진 뜻밖의 광경 앞에 잠시 멈칫했다.

***

“위원장님!”

초조하게 집무실에 울려 퍼지던 구둣발소리가 저택의 로비를 가로지른 선명한 외침에 일순 멎었다. 그 소리의 주인이 제 집무실까지 올 찰나를 기다릴 여유조차 남아 있지 않던 올레나는 서둘러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어찌 되었나.”

거두절미하고 흘러나온 본론에 막, 계단을 오른 보좌관의 낯이 기묘하게 변했다.

실패.

자연스레 올레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그것이다.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구나. 늦고야 말았어. 간밤에 이 공간에서 그녀를 잠식했던 감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불길했다. 수십 년 코르푸를 이끌며 산전수전을 두루 겪은 그녀조차 이제껏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니벨론 기사단을 움직이게 하려면 당연히 필요한 위원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미처 릴리의 신호를 가늠할 생각도 하지 않고 서둘러 움직인 건 그 때문이다. 깨진 찻잔의 파편, 압도하는 공포. 잊을 수 없는 선득한 조짐을 다시금 떠올리자, 아득해지는 의식을 따라 시야는 불투명한 장막을 덧씌운 듯 부옇게 변했다. 예상치 못한 보좌관의 답이 돌아온 건, 그녀가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하려 간신히 벽을 짚을 즘이었다.

“아닙니다, 위원장님. 공녀님께선 무탈하십니다. 곧 공녀님을 모시고 기사들이 저택에 도착할 겝니다, 다만…….”

보고를 마친 보좌관이 떠난 자리. 홀로 남은 공간을 채우고 있는 올레나는 창밖의 소란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그가 남긴 문장의 짙은 여운 속을 헤매고 있었다.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 말인가.’

‘기사들 말에 따르면 공녀님의 방으로 가니 이미 자리에 계시지 않아 아래층 사용인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내려갔다 합니다. 거기에서 공녀님을 만났고요. 피를 흘리고 계셨답니다.’

‘공녀님이?’

물음에 보좌관은 가만히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델리아 경 말입니다.’

아델리아 경. 예상치 못한 순간 급소를 때리는 단어 앞에 올레나가 잠시 숨을 죽이는 사이, 보좌관의 담담한 음성이 불현듯 찾아온 적막을 메꿔 갔다.

‘피가 워낙 많이 흘러 위중해 보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의식이 없는 상태는 아니었답니다. 기사의 추측으로는 아마 공녀님이 경을 직접 찌른 것으로 파악된다 합니다. 공녀님께서 어찌 훈련받은 기사를 공격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스럽지만, 제 생각에도 그게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허나…….’

잠시 머뭇거리던 보좌관은 가리지 못한 의문을 오롯이 드러내고서 결국 말을 끝맺었다.

‘어째서 아델리아 경이 소리 한 번 내지 않았을까요.’

좁혀진 미간, 의아함이 다분히 깃든 음성.

이를 천천히 되새겨 보던 갈빛 눈은 그제야 흐르듯이 창 너머 소란의 진원지로 향했다. 저택의 입구를 가득 채운 기사들과 분주히 그들의 시중을 드는 견습 기사들. 천천히 이를 훑어 내리던 올레나의 시선이 내려앉은 것은 그 무리와 전혀 어울리지 소녀에 닿은 직후였다.

‘그랬다면 바로 티케 사냥꾼에게 위치가 발각되고 탈출이 수포로 돌아갔을 텐데 말입니다.’

아델리아 경.

오전의 햇살을 받아 유달리 도드라지는 백발 위로 떠오른 것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깔끄럽기 그지없는 단어였다.

보좌관의 의문은 응당 당연했다.

아델리아 경의 처사는 그럴듯한 맥락이 없었으므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이 일을 그저 티케의 축복이라 보아야 할까. 옅은 한숨을 내쉬며 올레나는 막 기사들의 부축을 받아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공녀를 응시한다.

아타할케, 만개한 백합, 기이한 둘의 관계가 차례로 뇌리에 떠올랐다.

그저 우연일까.

조사단 역시 아무것도 찾아내지도 파악하지도 못했으니 그리 여기는 게 마땅했으나, 올레나는 왜인지 자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아델리아 경.

이를 혀끝에 굴려 보던 올레나는 이내 창에서 눈을 돌렸다. 오래전, 그 이름의 주인을 따라 빛을 내며 맴돌던 릴리의 신호를 애써 외면하려는 듯.

***

쨍그랑, 이른 계절의 스산한 날씨를 뚫고 방에 내려앉은 소리는 분명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였다. 쉬이 잠들지 못하는 나날들이 이어 가던 와중에 간신히 수마에 빠져든 공녀가 그 소리를 놓칠 리 만무했다.

방패처럼 두른 이불을 살며시 풀어내고 초조하게 입술을 짓이기며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푸른 눈이 방을 배회하기 시작한다. 고급스러운 원목 안에 자리 잡은 창과 잔무늬가 새겨진 휘장, 푸른 나비가 양각된 협탁까지. 익숙하려야 익숙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찬찬히 담아내던 눈길에는 어느덧 어울리지 않게 두려움과 공포가 배어 나왔다. 때마침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 소리에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공녀는 다시 후다닥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자라처럼 빼꼼 내밀어진 목 위로 불안하게 구르는 눈만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새벽의 빛이 방 안에 들이차고 선선한 미풍에 아침의 기운이 묻어날 때까지.

“또 잠을 설치셨나 봅니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올레나의 목소리에 공녀는 대답 대신 제 침상 위에 놓인 음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적당히 묽은 스튜는 아직 회복하지 못한 그녀의 몸을 배려함이리라. 마찬가지로 제 시선을 쫓아온 올레나는 직접 한 수저 떠서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당분간은 이곳에서 머무시며 회복에 집중하시면 되세요.”

식기 위에 자리 잡은 음식의 빛깔이 흘러온 빛살에 붉게 비친 건 그때였다.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간에 스며든 올레나의 음성은 귓가에 닿지 않고,

“코르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녀님을 보호할 테니.”

푸른 눈에 깃든 시붉은 색감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도 떨쳐지지 않는다. 잊을 수 없는 잔상을 몰고 아득히 멀리 그날의 밤으로 공녀를 데려가며.

‘죽여 버리겠어, 내가 죽여 버리겠어. 공작.’

한바탕의 몸싸움으로 자유로워진 시야 너머 공녀는 저를 부서져라 흔들어 대는 사내를 마주 보았다. 흉측하게 자리 잡은 화상 자국 위, 이지러지는 흉포와 인종이 뒤섞인 처음 보는 형형한 눈빛에서 그녀는 단 한 가지만을 읽어 내릴 수 있었다. 이 광폭한 사내는 저를 죽이고 말 것이다. 그러고 말 것이야. 부정할 수 없이 강렬할 살기를 싣고 벼린 칼날이 허공에 치솟는다. 공간을 떠도는 부유스름한 햇살을 마지막으로 공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세이.

점멸한 시야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스며든 건 그때였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가 떠난 지금, 그 애칭을 부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둘뿐이었다. 그럼 둘 중 누구인가. 누가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인가. 희미한 기대가 깃든 눈꺼풀을 들어 올린 공녀의 시야에 가득 찬 것은 칠야의 암흑 같은 어둠과 그래, 핏물이었다.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경련하는 푸른 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복부와 제 얼굴, 팔다리를 만지작거렸다. 점차 가빠 오는 호흡과 혼미해지는 의식을 따라 바삐 움직이던 손이 멎은 것은 그렇게 한참을 제 몸을 확인한 후였다.

아픈 곳이 없다. 그러니까 제 피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럼, 누구의 것인가.

느리게 눈을 여닫으며 여전히 어두컴컴한 시야 위로 공녀는 그 물음을 흘려보냈다. 몇 번 그렇게 깜빡였을까. 눈을 가리던 검은 장막이 무너지고 흐트러진 은발이 공간을 수놓는다.

그 여자였다.

그 괴물 같은 여자.

***

“저택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공녀님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공작님. 아마 니벨론 기사단이 데려간 것으로 추측됩니다.”

창밖에 펼쳐진 여러 구의 시체들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보좌관의 보고를 듣고 있던 공작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음성은 간밤에 저택에 들이닥친 니벨론 기사단, 사라진 공녀라는 엄청난 일을 겪은 이답지 않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아몬은.”

이에 잠시 얼떨떨해 있던 보좌관은 화급히 낯을 갈무리하고는 답했다.

“지금 부상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조심스레 마땅한 의문을 덧붙이며.

“……허나,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어린 공녀님께서 그리 훈련된 사내를 어떻게 공격할 수 있었을까요?”

공작은 대답 대신 창가에서 일별한 시선을 제 앞에 놓인 화초에 가져갔다. 전체적으로 누렇게 시든 백합과 이질적으로 빛을 잃지 않는 이파리 하나가 푸른 눈 위로 상을 맺었다.

처음 아몬의 부상 소식을 들었을 때, 공작 역시 그리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아몬이 누구이던가. 특출난 티케 사냥꾼을 배출하는 네르만족의 직계손으로 그 실력을 범접할 자가 그리 많지 않다 자자한 인물이다. 확신에 깃든 판단이 흐트러진 건 직접 한쪽 눈을 다친 아몬을 확인한 직후였다. 회복이 불가능할 지경에 놓인 안구와 극심한 출혈. 그제야 그는 받아들였지. 자신의 질문은 어리석었다는 걸. 티케의 축복에는 논리가 쓸모없다는 걸. 심상한 상념과 함께 공작은 가만히 싱싱한 이파리 끝을 매만졌다. 그 위로 떠오른 생각은 분명했다.

세이가 힘을 되찾아 간다.

그러지 않고선 일련의 사건들은 도저히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세이가 힘을 되찾는다라…….

낮게 자조한 공작은 눈을 들어 올렸다. 금빛 자수로 천정에 새겨진 백합의 문양, 영광스러운 가문의 표식을 응시하는 공작의 눈에는 뜻을 알 수 없는 빛깔이 차올랐다. 한참 후에야 젖힌 고개를 바로 한 그는 짧은 지시와 함께 보좌관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걸 페치오에게 전달하게.”

투명한 햇살을 받아 뚜렷하게 도드라진 것은 서신에 찍힌 공작가의 붉은 인장이었다.

세이가 힘을 되찾았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이제 닳고 닳은 문장을 다시 한번 혀 속에 굴려 보며 공작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복도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하다. 이 사단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걸음걸이는 마치 모든 일을 예견하고 있던 자의 것 같기도 했다. 규칙적으로 공간에 번지던 소리가 멎은 것은 그의 발이 회갈색으로 바랜 돌 벽과 굽이진 암벽으로 둘러싸인 깎아 내린 듯한 계단을 지나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으로 변모한 지하실 입구에 부근에 다다랐을 즘이었다.

“공작님.”

깊숙이 허리를 숙여 저택의 주인을 맞이한 기사들을 물린 그는 벽 등에 걸려 있던 횃불을 손수 들었다. 까맣게 시야를 잠식한 어둠을 가르고 옅은 불빛이 솟구쳤다. 움직이는 불빛을 따라 쇠창살 너머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는 인영이 점차 뚜렷해진다. 가불거리는 붉은빛과 뒤엉킨 그림자가 푸른 눈 위로 내려앉아, 늘 잠잠하기만 하던 벽안에는 뜻밖의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허무함과 실망감.

그런 감정들이.

예상치 못했던 일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아델이 세이의 방에 못질을 하며 한바탕 난리를 벌였던 그때부터, 아니 어쩌면 에오르테 후작. 그자의 이름 하나에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그때부터. 벌어질 수도 있을 거라 여겼던 일이다. 그랬어. 그랬는데도…….

걸었던 기대가 너무 큰 탓일까.

지하실에 고여 있는 특유의 서늘한 냉기를 가로지른 음성은 더없이 차디찼다.

“내 너에게 기대가 컸거늘.”

흑암 속에서도 부유스름한 빛을 내는 은발이 흐트러지고 가려져 있던 은안이 드러난 건 그때다.

“네 그 대단한 능력만 아니었다면 넌 벌써 델로스의 문턱에 있었을 것이야.”

“그것 참 퍽 다정한 말씀이시네요, 아버지.”

픽, 상황에 맞지 않게 터져 나온 아델의 실소에 공작은 눈매를 좁혔다.

“그리 혓바닥을 놀릴 수 있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야.”

“마지막, 마지막이라…….”

혀끝에 굴리는 소리에는 농도 짙은 감정이 담겨 있다. 의지를 잃은 나약한 자의, 혹은 삶의 마지막을 앞에 둔 노부인의 회한 같기도 한 중얼거림, 그 속에 묻어나는 후회를 읽은 공작은 희미하게 치미는 짜증과 함께 푸른 눈을 들어 올린다.

천정에 자리 잡은 곰팡이와 피부에 달라붙는 습한 공기. 무소불위의 영예를 버리고 택한 것은 고작 이런 것인가. 게다가 그 결정마저도 저리 확신이 없다니. 깊은 한숨과 함께 공작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어둠에 먹힌 푸른 눈에는 어떤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는 볼 것도 없다.

“어리석구나, 아델. 그 애는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할 텐데.”

왜 살려 준 거니.

***

살려 줬다라…….

미약한 빛이지만 지금만큼은 오후의 작열하는 태양보다도 더 날카롭게 눈을 괴롭히는 불길. 갑작스러운 빛을 감당하지 못한 듯 부옇게 흐려진 시야를 맞추려 한 번, 두 번. 동공을 여닫던 나는 끝내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공간에 흩어지는 여운을 따라 흐릿한 그날이 떠올라.

쇳소리와 피비린내. 옷자락을 적신 핏물. 아물거리는 시야. 그 너머에 바다보다도 더 푸르른 벽안.

아직도 모르겠어.

왜 그랬는지 말이야.

생각은 멎고 발이 먼저 움직인 건 어떤 연유였는지. 완벽했던 계획을 망치고 스스로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되어 버린 건 어떤 까닭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왜 살려 준 거니, 아델.’

살려 줬다라…….

글쎄. 차츰 또렷해진 초점 너머로 제 모양을 갖춘 인영의 주인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여전히 그가 남긴 문장 속을 헤매던 나는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 그 위로 떠오른 건 싱그러운 녹안과 풀잎을 쓸어내리는 맑은 웃음소리. 지워 내려도 지워지지 않은 추억의 잔상은 벼린 칼날처럼 그대로 날아 들어와 내게 꽂힌다.

심장이 아릿해 와.

심중에 빼곡히 차오른 감각은 부정할 수도 없는 짙은 후회다. 공작의 말이 정말 맞다면 이런 감정이 남을 수 있을까. 후작을 버리고 택한 게 고작 이거라니, 하는 생각도. 다시 돌아간다면 이번에는 기필코 그 애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이다, 라는 다짐도.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공작의 말은 말이 되질 않아.

나는 그저…….

시야는 흐리고 손에 든 검은 무거워.

그래서 움직일 수가 없었어.

그랬을 뿐이야.

***

티케 사냥꾼이 나타났다.

경쾌한 무도회의 곡조 속을 파고드는 수런거림은 곧, 한 무리의 사내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 위에도 내려앉았다.

“에이, 설마.”

장황하게 이어지는 친우의 설명에 자작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베르니가의 양녀가 기어코 공녀를 몰아내고 공작가를 차지하려 했다. 모르스의 현신이라 추앙받는 기사가 갑작스레 공작가의 양녀가 되는 까닭이 영 미심쩍긴 했으니 뭐 거기까지는 그런대로 설득력 있었다. 하지만 공녀를 제거하려 티케 사냥꾼을 불렀다?

“아올리스에 티케 사냥꾼이라니. 누가 보면 지금이 대혼돈의 시대인 줄 알겠어.”

와인을 머금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냉소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로지 웃지 못한 친우 하나만이 한 뼘 내리깐 눈썹 아래 잔뜩 묽어진 동공을 하고는 목을 울렸다.

“허나, 코르푸 위원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고. 요즘 들어 회담이 잦은 거 하며 지난번에는 니벨론 기사단이 수도 중심에 나타났다네.”

“그들이야 원체 티케 사냥꾼 하면 치를 떠는 족속 아닌가.”

걱정스러운 문장을 받아치는 자작의 말은 단호하기 그지없었지만. 애초에 너무도 허무맹랑하기도 했고 제가 거기에 건 돈이 얼만가. 지난번 내기에 잃은 거금을 만회하기 위해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 둔 마지막 베팅이다. 이게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버지의 벼락같은 호통이 들려오는 아찔한 기분에 자작은 손안에 있던 잔을 다시 한번 들어 올렸다. 자고로 내기란 판에 들이차는 소소한 파문 하나도 빠르게 걷어 내야 하는 법. 어쩌면 그토록 칼 같았던 대답은 스스로에게 건네는 다짐이었을 수도.

“만약에 말이야. 진짜 티케 사냥꾼이 나타났다면 이번에도 랄프가의 남작께서 모조리 다 돈을 따는 거겠지.”

막 테이블 위로 잔을 내려놓는 자작의 손이 미세하게 떨린 건 그때였다.

랄프 오도만.

행운의 사내.

왜인지 불길한 그 이름 앞에 자작은 다시 한번 위악을 떨어 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그게 말이 되나.”

그 선득한 예감이 현실이 되어 돌아온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베르니가의 양녀가 기어코 공녀를 몰아내고 공작가를 차지하려 했다. 다행히 목숨을 부지한 공녀는 코르푸 위원회에 머물지만, 모르스의 현신이라 추앙받는 기사는 그런 공녀를 제거하기 위해 티케 사냥꾼을 불러들이기까지 했다더라.

모르스 일족의 유일무이한 여인이 갑작스레 공작가의 양녀가 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의아하게 여기던 사람들에게는 꽤나 재미난 얘깃거리가 된 소문은 들불처럼 제국에 번졌다. 올레나의 집무실에까지도.

“아델리아 경이 공녀를 제거하기 위해 티케 사냥꾼을 불러들였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위원장님.”

아델리아 경과 공녀, 티케 사냥꾼.

세 단어들로 조합된 문장은 하나하나 뜯어 보면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한데 모여 어느덧 진실과 멀어져 가는 소문을, 그래서 더욱 무근한 낭설처럼 느껴지는 유언비어에 올레나는 헛웃음을 그렸다.

판을 흔들고 있구나, 공작.

제아무리 아델리아 경이라 할지라도 어찌 티케 사냥꾼을 제국에 불러들일 수 있었겠는가. 공작의 용단이 아니었다면.

그사이, 그녀가 뱉어 낸 웃음의 저의를 눈치챈 보좌관은 조심스레 제 사견을 덧붙였다.

“그래도 저희에겐 나쁘지 않은 일 아닙니까. 코르푸가 공작저에 침입했다는 이야기는 누구도 하지 않으니.”

그렇다고 봐야 할까.

공작이 버린 패가 코르푸, 공녀가 아니라 아델리아 경이라는 건 응당 다행이라고 해야 마땅했다. 그게 당연하고.

헌데 왜일까.

자꾸만 이리 불길한 연유는.

뇌리에 들끓는 근거 없는 불안, 뒤죽박죽이 된 사건의 얼개에 올레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집무실 한쪽 벽면에 자리한 들창을 열어젖혔다. 정원을 배회하던 릴리가 창의 틈 사이로 날아와 그녀의 손등에 사뿐히 내려앉은 건 그쯤이다. 공간에 너불거리는 투명한 날개는 여전히 푸른빛을 잃은 채였다. 제가 가는 길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신호 앞에 올레나는 더욱 어지러워진 머릿속을 진정시키려는 듯 눈을 내리감았다.

알고 있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하지만…….

아델리아 경.

어찌 그 여자를 믿을 수 있을까. 이리 분명한 증거들이 있는 마당에 말이다. 실은 그 여자도 공작이 짠 판 안에 나뒹군 희생양이었다는, 혹은 그 여자가 공녀를 살려 준 거라는 그런 터무니없는 상념을 어찌 믿을 수 있을까. 그 여자를 믿는다는 건 눈을 감고 낭떠러지 앞을 거니는 것과 다를 바 없는데.

‘어째서 아델리아 경이 소리 한 번 내지 않았을까요. 그랬다면 바로 티케 사냥꾼에게 위치가 발각되고 탈출이 수포로 돌아갔을 텐데 말입니다.’

어둠으로 가려진 시야. 헛된 생각들은 더욱 쉬이 그녀를 파고든다. 귓가에 쟁쟁대는 보좌관의 의문에서 벗어나려는 듯 올레나는 깊게 내리감았던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창공에서 쏟아져 내리는 오후의 햇살 사이로 익숙한 문양의 마차가 갈색빛 눈을 파고든 건 그때였다.

***

다과를 내온 시종이 내실을 벗어나고 나서야 올레나는 입을 열었다. 적막한 공간에 퍼져 나가는 문장에는 서늘한 냉소가 어려 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하룻밤 사이에 제 딸을 버린 아비는 요물의 꼬임에 넘어간 가여운 사내가 되어 있으니.”

공기도 얼려 버릴 듯한 냉랭한 태도에 마주한 이는 일말의 영향도 받지 않는 듯했으나.

올레나가 담담히 말을 건네는 동안, 그저 비스듬히 소파에만 몸을 기대고 있던 공작은 고개를 위로 젖혀 창밖에 광활히 펼쳐진 무한대의 공간을 바라본다. 공작의 벽안 위로 얽혀 들어간 빛깔은 마찬가지로 푸르다. 수평선 끝에 맞닿은 하늘과 바다처럼 그 구획을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처음부터 그의 것이었던 것처럼.

“세상이 참 우습지.”

나른한 숨결을 타고 흘러나온 것은 지배자의 권태로움이다.

“가끔은 그래서 너무 시시해. 너무 훤히 보여 말이야.”

그 앤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무료한 시간을 달래듯 그저 손에 쥐어진 찻잔만을 달막거리던 공작은 그 문장을 끝으로 창을 일별하고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지난 일은 이리 묻어 두지. 피차 서로에게 흠잡힐 거리를 하나씩 둔 마당에 척을 져 좋을 게 무엇인가.”

테이블 너머 그녀를 직시하는 푸른 눈은 단조로운 생활에 진력이 난 듯했다. 제 자식을 내버린 무자비한 짓을 벌이려 했던 이답지 않게 말이다. 그 모순에 기가 찬 올레나가 침묵하자, 작게 내쉰 공작의 숨이 짜증스러움과 뒤섞여 공간에 흩어진다.

“질질 끌며 구태여 성인군자 노릇 하지 말게, 올레나. 다른 방책은 없잖나. 왜 청원이라도 하려고? 과연 그대가 승산이 있을까. 공작저에 쥐새끼까지 끌어들인 코르푸 위원장의 청렴결백을 쉬이 믿어 줄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하다 여기는 건 아니겠지.”

“공작! 코르푸 위원회는 결단코-”

“그런 고결한 얘기보다는 이런 걸 더 좋아하지 않을까. 코르푸의 늙은 여우가 제 자리를 지키고 싶어 공작가의 공녀를 제거하려 안달 났다고. 그래서 공작가에 세작까지 심고 부녀간을 음해한다고.”

매끄러운 솜씨로 그녀의 말을 가른 공작은 노기를 감추지 못하는 올레나를 향해 짧게 덧붙였다. 낮지만 분명한 음성은 익숙한 곡의 변주를 알리는 신호와도 닮아 있었다.

“그러니 빨리 그 애를 데려와.”

***

“티케 사냥꾼을 부르다니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답니까!”

보기만 해도 장중한 품격이 느껴지는 모르스의 신전. 그 내부에 위치한 모르타 위원회의 회담실에는 그와 어울리지 않는 날 선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바로, 한바탕 제국을 소란하게 만든 그 소문이 사실임이 드러난 직후였다.

“확실한 건 아니잖소. 일단, 공작의 증언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래요, 앞뒤가 맞지 않아요. 결국 칼에 찔린 건 아델리아 경이지 않소?”

티케 사냥꾼.

이 두 단어로 충분히 일족의 균열과 몰락을 가져올 수 있는 일은 비단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주름진 손으로 며칠 새 지나치게 수척해진 눈가를 문지르던 토리노 위원장은 이내 크게 한 번 숨을 몰아쉬었다.

도대체 이 일을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자신과 아델리아 경은 물론 모르타 위원회, 더 나아가 모르스 일족의 끝장을 알리는 이 엄청난 사건을. 그가 망설이는 사이, 누군가가 영원과도 같은 찰나의 적막에 손을 댄다.

“아델리아 경의 방에서 수면제가 발견되었습니다.”

특유의 나른한 몸짓과 고저 없는 목소리. 어둠에 삼켜진 눈꺼풀을 굳이 들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페치오 위원.

뭐라, 그게 무슨.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침음, 혼돈과도 같은 탄식에도 위원장은 제게 지워진 짐을 덜어낸 것에 안도하다,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는 어깨를 굳힌다.

그가 어찌 알았지.

분명 공작이 올레나와 그에게만 보고된 사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순간 원탁 모퉁이에 앉아 있던 페치오가 질긴 시선을 느끼고 그를 돌아 본다. 빙긋. 입꼬리 끝에 떠오른 미소는 누구보다 진실했다.

한패구나.

둘 다. 아니 어쩌면 셋 다. 이미 전부 짜인 판이다. 무엇을 얻기 위해. 누구를 버리기 위해. 그가 끝없이 솟아나는 질문들 속에 파묻히고 있을 때, 이미 회의는 위원장의 주재를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속적으로 복용하면 문제가 있을 약물에 문제가 될 만한 양이랍디다.”

“이런 미친 여자가 정말!”

“검사 결과, 공녀가 이미 약에 중독된 상황이기도 했고요. 성분을 조사하려면 수일이 소요되겠으나, 정황이 너무 확실한지라 코르푸 위원회는 결코 이 사실을 좌시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코르푸 위원회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의아한 듯 눈썹을 꺾던 이모튼 위원장은 다음 순간 곧바로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을 벌렸다.

“공녀의 능력에 문제가 생긴 게 그럼.”

“맞습니다, 근래 공녀가 보여 줬던 능력 이상의 원인을 약물 때문이라 이미 짐작하고들 있어요.”

망할 계집. 밭은 욕설이 터져 나온 입술은 놀랍게도 섹토 위원은 아니었다. 순박한 얼굴로 회의 중 가타부타 입 여는 법이 없던 자이드 의원.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원탁을 탁탁 두드리기에 이르렀다.

“죽으려면 저 혼자 죽든가. 건드려도 하필 티케 일족을!”

티케 일족. 힘으로 따져도 가늠할 수 없는 두 종족의 충돌에는 그 자체만으로도 문제이지만 문제는 민심이다. 티케. 대륙의 여러 신 중 사람들이 가장 애정하는 축복의 신. 게다가 아올리스의 제국민이 얼마나 오케아디네스의 전설에 열광하는지는 그들 역시 모르지 않았다. 민심이 누구 편에 설지는 불 보듯 뻔한 일. 거기다 엄연히 피해자인 공녀가 있는 마당에. 여러모로 불리한 싸움. 단 한 번도 승리하지 않은 적이 없는 종족이 아닌가. 비슷한 생각들로 의원들의 머리가 복잡할 때 페치오 위원은 또 한 번의 말로 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선사한다.

“그리 호들갑 떨 문제는 아닙니다.”

평온을 덧씌운 낯과 퍽 어울리는 유유한 어투였다. 그는 서둘러 뒷말을 잇는 대신 말아 쥔 손에 위에 비슷이 턱을 괸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부터 멍청히 눈만 끔뻑거리는 이들까지. 제가 일으킨 파도에 휘청거리기 바쁜,

“페치오! 그 무슨 말이요. 자칫하면 코르푸 위원회와 전면전이 될 수도 있을 사안인데.”

모조리 병신들.

뭐, 그들 덕분에 곧 제 손아귀에 모르헤의 보검이 떨어지게 생겼으니 그로서는 손해 볼 것은 없다. 이번 사건의 책임으로 말미암아 토리노 위원장이 물러나면 자연스레 하렌은 끈 떨어진 신세. 안 그래도 천출이라 여러 말이 많은데 몇 가지 이유를 붙여 제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가 가진 보검 또한.

후작.

하렌이 그자를 도울 연유는 딱 하나밖에 없지.

라에갈 에오르테.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사내.

짧은 조소를 끝으로 그는 여상히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우리는 수 세기간 평화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것이 정녕 아무 노력 없이 이뤄졌다 생각하십니까.”

“허나 이건 문제가 다르잖소. 그 여자가 얼마나 제 일족에 끔찍한데. 올레나 위원장이 가만있을 성싶나.”

“올레나 위원장은 잘 알고 있어요. 두 일족의 대립만큼 무의미한 싸움도 없다는 것을. 그 성정상 전면전 역시 피하려 할 테고요.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페치오는 나른한 시선으로 회의장을 훑는다. 모두의 이목이 제게 집중되어 있음을 확인한 그는 천천히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아델리아 경이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지요.”

“그걸 지금 모르는 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까.

작게 웃음을 흘리며 페치오는 입술 끝을 매만진다. 그 사소한 손짓에도 어리석은 이들의 시선은 초조하게 구른다.

“비단 이번 일뿐만이 아닙니다. 승전회 일이며, 사냥 대회 일까지. 자칫 모르스의 현신이 허망하게 목숨이 다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면 그 뒷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모르스의 현신에게 죽음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에 수십 쌍의 눈동자들이 아득한 어둠 속을 배회한다. 처음부터 모르타 위원회가 가장 염려하는 부분이긴 했다. 허나 아델리아 경의 연배가 어리다 보니 그저 막막하게 느껴졌던 사안이라 치부했던 것이다.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코르푸 위원회보다 먼저 선수를 쳐야 해요.”

“어떤 대책.”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위원장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했다. 이미 늦었지만. 페치오는 이제 한 생각에 집중하기 바쁜 아둔한 머리들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손으로 일을 매듭짓는 것 말입니다.”

둥근 원탁을 문지르며 그는 여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모르스의 현신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의식을 치르는 건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설마 위원님 뜻은…….”

“모든 상징은 살아 있을 때보다 죽었을 때 더 가치가 있는 법 아닙니까.”

빙긋, 그가 그린 듯한 웃음에 위원장은 끝내 노기를 터트렸다.

“지금 아델리아 경을 신전의 제물로 바치자는 뜻입니까?”

아델리아 경을 신전의 제물로 바친다니. 그럴듯한 신탁으로 신들의 눈과 귀를 현혹해 가리고 마땅한 이들을 신전의 제물로 바친 행위는 과거 그들 일족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제법 횡횡했던 일이긴 했으나, 이제는 악습으로 여겨져 사라진 지 오래되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의 말이 효험이 있었는지 다시 회의장은 수런수런해지고 아델리아 경의 가치에 대해 논하는 이들이 하나둘 말문을 열었다.

“허나, 그녀는 대륙 유일무이한 모르스 일족의 여인이에요. 우리로서는 분명 손실입니다.”

페치오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런 자가, 그리 희귀하고도 강력한 자가 우리 편에 서지 않는다면, 우리 뜻에 따르지 않는다면…….”

한 음절, 한 음절이 분명하게 내실에 울려 퍼졌다.

“그보다 더 위험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위원장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것은 사실이나 진배없는 문장이었고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일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었으니.

아델리아 경.

그가 그녀를 방만하다시피 대한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였으니. 모르스 일족으로 태어났으나 결코 그들의 일족이 되지 않을 여인.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새 한 마리 죽이지 못해 달포가 넘도록 교육실에 갇혀 있던 아이가.

그런 아이가 공녀를 해하려 했다라.

웃기지도 않는 소리에 토리노는 한 번 혀를 차다가 이내 허탈함이 스민 입술을 내리누른다. 어쩌겠는가. 그게 사실이라 한들. 이미 그의 손을 떠나 버렸는데.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건조한 음성이 그의 혀끝에서 버석하게 새어 나온다.

“대신관에게 연락하겠습니다. 곧…….”

위원장은 잠시 말을 멈췄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한 낯과 가라앉다 못해 이내 제 색을 잃은 잿빛 눈동자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위원장은 고뇌로 흐려진 생각을 감추려 지그시 눈을 내리감는다. 감긴 눈꺼풀 아래 길을 잃고 휘청거리는 아이의 모습은 선연하다.

가여운 아이야. 너의 불운을 탓해라.

네게 주어진 그 감당할 수 없는 힘의 무게를.

“신탁이 하나 내려야 할 것 같다고.”

***

공녀는 부산스러운 소음에 눈을 떴다. 창문으로 흘러 들어온 바람결에 푸른빛 휘장이 한껏 제 몸을 부풀리는 게 보인다.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이른 아침의 햇살이 얼굴을 간질이자 공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커튼을 꼼꼼히 치라니까.

창을 막고 있던 나무판들이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투명한 유리창과 부신 햇살은 아직 어색하기만 하다. 한참이나 눈두덩이를 문지르던 공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손수 창문을 활짝 연다.

시원하게 밀려오는 맑은 공기와 지저귀는 풀벌레 소리, 정원이 뿜고 있는 은은한 꽃내음. 익숙했던 그 모든 것들이 새삼스러워지는 요즘, 그럼에도 다들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 미친 여자가 꾸미던 일은 만천하에 드러났고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제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그녀에게 용서를 구했다.

이번 싸움의 승자는 올레나도 그 여자도 아닌 공녀, 그녀 자신이었다.

더없이 완벽했던 그 시절로 공작가는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런 줄 알았지.

“공녀님?”

완벽했던 기분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식사를 위해 방을 나선 직후부터였다. 눈치를 보던 시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도, 딱딱하게 굳어 버린 두 다리는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공녀님?”

불편하냐고.

시녀의 물음에 느리게 눈을 깜빡이기만 하던 공녀는 그제야 제 몸을 휘감아 오는 감각의 정체를 자각했다.

그래, 불편했다.

이 모든 것들이.

어째서 그럴 수 있을까. 바닥에서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융단의 감촉, 복도를 장식하고 있는 백합의 잔향들. 모두 방 안에 갇혔던 날들 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것들이었는데. 이곳은 그녀가 날 때부터 나다니던 저택이었는데. 눈을 감고도 구석구석 훤히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익숙한 그녀의 왕국, 그녀의 저택이었는데.

“공녀님?”

초조한 기색이 다분히 묻어나는 시녀의 어투가 다시금 그녀를 채근하자, 공녀는 간신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몇 걸음 걸었을까. 감히 융단과 백합들과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고대하던 음성이 저 멀리서 그녀를 불렀다.

“세이.”

고아한 음률 같은 울림을 몰고 온 어머니는 복도 맞은편에서 공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세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용서를 구하던 그날처럼.

‘내가 정말 어리석었어.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하마. 약속해, 세이.’

긴긴 시간 켜켜이 쌓였던 원망도 분노도 모조리 씻어 낸 그 밤처럼.

어머니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세이?”

헌데 이상한 일이지.

그런 어머니의 음성을 두고 왜 자꾸 다른 이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것일까. 투명한 햇살이 내려앉은 은발, 선이 고운 눈매와 저와 꼭 같은 입가. 왜 이리 고아한 어머니의 낯에 그 여자가 비쳐 보이나.

‘세이.’

해 질 무렵의 바람 소리같이 떨리던 음성 위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날의 밤이 떠오른다. 핏물로 붉게 얼룩진 옷자락과 달빛보다 더 창백하게 질린 낯빛. 그 안에서 저를 담고 아득해지는 잿빛 눈동자.

참 이상한 일이지.

모든 것은 이토록 완벽하기만 한데, 무언가 크게 어긋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까닭은.

“세이, 괜찮니?”

몇 번이고 저를 부르던 음성은 어느새 더욱 가까워지고 거리를 좁혀 다가온 어머니는 얼어붙어 있는 그녀의 이마와 뺨 위로 손을 대어 봐. 미미하게 떨리는 어머니의 속눈썹이 선연하게 보인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공녀는 이를 일별하고서 느리게 시선을 움직인다. 선이 고운 눈매와 저와 꼭 같은 입가, 투명한 햇살이 내려앉은 은발. 불현듯 그 위로 떠오르는 그 여자의 잔상이 시야를 할퀴자 공녀는 이를 벗어나려는 듯 어머니의 품을 파고들었다.

“……엄마.”

“참, 어린애도 아니고.”

등을 다독거리는 어머니의 손길이 사라질세라 공녀는 더욱 부서져라 팔에 힘을 준다. 아야, 세이. 엄마 아프잖니. 그런 소리를 모조리 듣지 못한 체하며.

‘공작 부인은 절대 널 구하지 않아.’

공녀는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다. 저를 둘러싼 완벽한 세계가 실은 기괴한 모순덩어리라는 것을. 온화한 음성과 다정한 속삭임. 그 모든 것들이 다.

“넌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 세이.”

그녀는 이제 문 앞에 서 있다. 진실을 감추고 있는 선택의 문 앞에.

문을 열어.

언제고 저를 들쑤셨던 나지막한 속삭임을 외면한 채 어미의 품으로 도망친 공녀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문을 열든 열지 않든, 어떤 답을 골라도 자신은 울게 될 것이라는.

그러니 적어도 오늘 하루쯤은 의심치 않기를. 공녀는 모든 것이 완벽했던 나날들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헛된 환상에 조금 더 기대어 본다.

***

“세이가 조금 이상해요.”

손도 대지 않고 남아 있는 딸아이의 디저트를 보며 공작 부인은 우울하게 입을 열었다. 가뜩이나 날 선 집안의 분위기를 생각해 최대한 말을 아끼려 했지만, 절인 과일로 만든 타르트. 세이가 가장 좋아하는 그 음식이 쫒기듯 식당을 벗어난 주인에 의해 테이블 위를 장식하는 조화처럼 식탁 위에 멋을 더하고만 있는 풍경을 보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여전히 보좌관이 건넨 서류에만 시선을 고정하며 공작이 물었다.

“예전 같지 않다고나 할까요.”

예전과 같지 않다.

아무리 노력하고 포장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엄청났고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그러나 막상 입 밖으로 그 사실을 꺼내자, 공작 부인은 왈칵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자제할 수 없었다.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감지한 공작은 눈짓으로 주위를 물리고는 아내의 젖은 뺨을 그러잡았다.

“전과 같을 순 없지.”

“평소와 같았으면 온종일 있었던 일을 종알거리며 내 옆에 있었을 텐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 앤 단순하잖아.”

식당에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가 간신히 잦아들 즘, 공작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 루트비아 저택으로 다녀오는 건 어때.”

“루트비아 저택이요?”

젖은 속눈썹 아래 붉어진 은안이 제가 들은 단어가 믿기지 않는 듯 깜빡거렸다. 허공을 잠시 응시하던 공작은 그 눈에 제 시선을 맞추며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 세이가 그곳을 좋아하니 말이야. 기분 전환도 하고. 조금 위험하긴 하겠지만, 지금은 세이의 안정이 더 우선이니.”

“분명 좋아할 거예요.”

루트비아 저택. 세이가 늘 가고 싶어 하던 곳이 아니었던가. 그제야 환해진 공작 부인의 얼굴이 낯은 물가에 핀 수선화처럼 청아했다.

베르니가의 양녀가 기어코 공녀를 몰아내고 공작가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어쩌면 그 말도 안 되는 문장을 사람들이 쉬이 믿는 연유가 여기에 있을까.

공작이 심상한 상념과 함께 그린 듯한 웃음을 만면에 내보이는 사이, 보좌관 하나가 다급하게 식당에 들어섰다.

“공작님!”

“무슨 일이지.”

“그게…….”

말끝을 흐리는 보좌관을 따라 걸음하자, 나타난 이는 생각대로 아델을 데려가기 위해 걸음한 이었다. 모르타 위원회가 아니라는 점이 조금 예상과 달랐으나.

언제쯤 나타나려나 했지.

자주빛으로 물들어 가는 석양이 저택의 길목을 적시는 시각. 모르타 위원회 쪽에서 사람을 보내 아델을 데려가기로 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불청객은 쫓아내야 마땅했다. 허나, 공작은 초대받지 못한 객을 물리는 대신 그를 막아 세운 기사들에게 그만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쇠락하는 에오르테가의 명성을 고려하면 공작에게 그리 위협이 될 인물은 아니었으나, 구태여 성질을 건드려 좋을 것 없지. 그가 가지고 있는 비밀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겁기도 했고. 그의 신호를 따라 기사들이 이만 후작을 제지하던 손을 거두자, 곧 저택의 로비는 대리석을 가로지르는 세찬 발걸음소리와 거친 호흡으로 가득 차올랐다.

“내가 경고했지.”

빛줄기를 받아 명멸할 듯 투명하게 빛나는 백금발, 그 아래 모양 좋게 자리한 녹안. 어느새 주먹 하나도 들이차지 않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 속 분명해지는 인영의 정체는 말그스름하던 평소와는 다른 빛깔로 그를 직시해 왔다.

“그 앨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라에갈 에오르테.

“아델은 내가 데려가. 내 앞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그 애의 친부가 누군지 똑똑히 알게 될 것이야.”

한때 제국의 근간을 이루던 유서 깊은 가문의 가주이자 여전히 어리석은 사내는 그가 예견하지 못한 변수는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고대하고 있다에 더 가깝지. 일전에 그가 준 반전은 꽤나 흥미로워 이번엔 어떤 해괴한 짓으로 그를 놀라게 하려나 하는 기대감을 주기도 했고.

하지만, 이번엔 글쎄.

너무도 뻔하고 단조로운 수구나.

이 사내는 고작 이리 얕은수로 저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긴 건가. 무채색으로 짙게 가라앉은 벽안은 제 목덜미를 움켜쥐는 금빛 쇠붙이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기세 좋은 문장들과 달리 온전치 못한 손이 가하는 위협은 실상 협박이라기보다는 우스운 장난에 더 가까웠다. 이에 피식, 웃음을 흘린 공작은 시야를 매섭게 할퀴는 사나운 녹안을 응시했다.

‘만에 하나 후작이 이 판에 끼어든다면 그건 염려치 마십시오. 하이가의 보검을 걸고 제가 처리할 것을 약조드립니다.’

며칠 전 밤, 집무실에 되울리던 페치오의 음성을 떠올리며,

‘에오르테가의 주인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할 테니.’

일고의 틈도 허락지 않는 확신에 찬 문장을 되새기며.

“지하실로 안내해라.”

박명의 어둠이 차오르는 공간, 붉은 입술을 타고 떨어진 건 더없이 완전한 허락이었다.

***

“괜찮으십니까.”

염려가 가득 담긴 기사의 시선이 미처 닦아 내지 못한 땀방울이 맺힌 후작의 뺨에 닿았다. 휘청거리는 그의 몸을 막 세 번째 부축했을 즘이었다.

괜찮다, 신호를 보낸 후작은 마저 보폭을 넓혔다.

지하실까지 이어지는 회갈색 바랜 돌벽의 가파른 계단은 끝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퀴퀴하고 축축한 공기는 불쾌한 것은 물론 숨을 쉬기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이 깊은 지하 어딘가에 아이가 있단 말인가. 그 생각에 후작은 심장을 부여잡고 걸음을 옮겼다.

어리석었어.

그 난리가 나자마자 곧장, 공작저에 왔었어야 했는데. 그날, 바람에 깃든 간기를 몰고 저택에 나타난 아이는 그 이후, 빛살의 농도가 짙어지고 그림자의 길이가 길어질 동안 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무언가가 틀어졌다고 느꼈을 즈음, 허무맹랑한 소문이 그의 귓가에도 들려왔다.

공작가의 양녀가 공녀를 몰아내려 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하필 몸이 더욱 쇠약해진 터라 걸음하지 못하는 사이, 수그러들 거라 여겼던 풍문이 점점 몸집을 불려 심상치 않은 기세로 타오르기 시작했고 급기야 모르타 위원회의 동태마저 심심치않게 변모하지 후작은 공작가로 발을 디뎠다.

그리고 이곳에서 마주한 건 북풍 설산처럼 냉엄하기 그지없는 벽안이다.

어리석었어.

애초에 그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혹여 친부모니 다를 거라는 기대도, 바람도 걸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작은 잔기침을 토해 내며 벽에 기대었다.

“이제 다 왔습니다.”

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지하실로 걸음하던 후작은 굵게 박힌 쇠창살 안, 흐릿하게 번져 있는 아이의 인영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보폭을 넓혔다. 달카닥, 딱 맞아떨어지는 쇠철음이 공간에 울려 퍼지기까지 억겁같이 이어지던 시간을 지나 아이에게 다가선 그는 영원 속에 얼어붙어 있는 것 같은 아이의 모습에 입술을 짓이겼다.

***

서슬 퍼런 기세로 가도를 질주하는 마차의 내부는 그와 달리 고요했다.

내 낯을 몇 번 살피던 후작은 차창 밖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창틀을 쥔 그의 손목 위로 도드라진 푸른 혈맥만이 가려진 심중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었다.

분연한 노기를.

기사들의 대화를 종종 들었다.

티케 사냥꾼들이 제국 내에서 제 세를 불리고 싶어 하는 신흥 귀족과 결탁해 아올리스에 머물 명분을 찾고 있다고. 황태자면 몰라도 황제는 그리 영민한 자가 아니다. 얼마든지 구워삶을 수 있어. 만약 황실이 티케 사냥꾼의 존재를 방관한다면, 천치가 아닌 이상 신흥 귀족들은 제안을 수락할 테고 제국은 한동안 혼돈에 빠지겠지. 수천의 축복을 받은 일족이 그들의 손에 비명할 것이다.

후작 역시 이를 모르지 않겠지.

제아무리 그라 해도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테다. 과오를 범한 이들이 으레 그러듯 나는 부러 먼저 소리를 높였다.

“책하시려면 책하셔도 됩니다. 그저 소문이 아니니까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가 역정을 내는 모습을.

“제가 티케 사냥꾼을 불러들였습니다. 아올리스에 계속 머물기 위해 신흥 귀족들과 결탁하고 있다지요. 제국엔 곧 피바람이 불 거예요.”

그걸 오늘에야 보게 되는 걸까.

다른 것 무엇도 중하지 않아 타락한 마음으로 그를 지키고자 한 대가를 이제야 치르게 되는 걸까. 담담히 말을 마친 나는 주어진 겁을 받드는 이처럼 눈을 올렸다. 한참이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것 같은 녹안과 맞부딪친 건 그때다.

“네가 정말 공녀를 몰아낼 작정이었다면…….”

여운이 짙게 남는 문장 속 나를 담은 녹안은 짙게 가라앉는다. 길게 늘어트린 문장을 가로지른 그의 손은 내 뺨을 감싸쥐면서.

“진즉 하고도 남았겠지.”

그곳에 남겨진, 그날 밤이 새겨 낸 상처를 그는 아는 듯했다. 잠잠하던 낯 위로 한줄기 허탈한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후작님은 정말…….”

차라리 나를 혼내 주길 바랐어. 내게 역정을 내길.

그랬다면 어깨를 짓누르는 이 죄책감도 조금 덜 수 있었을 텐데. 이런 당신을 두고 말도 안 되는 이를 선택한 나를, 그 알지 못한 연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지키려 했으나, 끝내 지키지 못한 이는 이번에도 나를 지키고자 또 제 몸을 사르는구나.

아니지.

피식, 바람 빠지는 헛웃음과 함께 익숙해지려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사실이 떠오른다.

내가 아니었지.

나는 느리게 눈을 여닫았다. 분명해지는 초점 사이로 트여진 시야는 아까보다는 더 밝다.

항시 궁금했지.

왜 당신은 나를, 그 아이를 이토록 놓지 못하는지 말이야.

그깟 아이 하나. 잊어도 그만인 생 하나. 그게 그리 중한 듯 사는 당신은 알려 해도 알 수 없었어. 헌데 이제 이 끝에 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는구나.

어쩌면, 그래. 당신도 알지 못하는 수도. 내가 공녀를 놓아준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야. 내가 구태여 쉬운 길을 두고 돌아 돌아 이리 망가진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비슷한 겁의 굴레 속을 헤매고 있구나.

그 같음이, 그 속에서 느껴진 동질감에 죄업이 씻긴 듯 말을 건다.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이건 후작님이 끼실 판이 아니다, 돌아가라. 예상했던 말과는 조금 다른 문장들이 흘러나오자, 후작은 얼떨떨해 보이는 낯을 보였다. 이를 알지 못하는 체하며 시선을 외로 틀고 흩어진 적막을 메꿔 갔다.

“오늘은 이리 공작이 물러난다 하나 결코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페치오도 그자와 손을 잡은 듯하니.”

“내가 아무 방책도 없이 무작정 공작저로 뛰어든 듯싶니.”

“무슨 말이십니까.”

지척도 분간할 수 없는 암흑의 시각, 적막한 공간에 흘러 들어온 문장에는 어딘지 어두운 여운이 짙게 배어 있다.

“……아주 오래전에 했어야 할 일을 할 것이야.”

리오. 그 애의 일을.

***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른 새벽의 고요를 가르며 느리면서도 장중하게.

황궁의 입구에는 오랫동안 비워졌던, 제국민의 서러움을 달랬던 깃대 위로 녹음 짙은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보려 모여든 사람들로 붐볐다.

“누가 청원을 신청한 거야?”

누군가의 외침이 여명의 빛살을 가로질러 소란한 공간 속으로 스며들었다. 군주의 돌봄이 떠나간 자리, 정의는 위태롭고 질서는 무너졌던 대혼돈의 시대가 끝을 내리자, 초대 황제는 신민들에게 제 억울함을 호소하는 창구로서 이 제도를 설립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며 가문과 가문의 암투의 장으로 사용되어 유명무실하게 변모했지만.

그런 청원이 수십 년 만에 다시 시작된 것이다. 하늘을 가르는 독수리의 문양을 담아낸 수십 쌍의 눈동자가 저마다 추측한 바를 꺼내 들었다.

“에오르테 가문이잖아.”

잘게 쪼개어진 볕의 파편을 피해 이리저리 눈을 굴려 보며 깃에 새겨진 문장을 살피던 사내가 간신히 확인한 모양에 목청을 높이자, 바람의 결을 따라 그 소리가 번져 간다.

에오르테 가문이 모르타 위원회에게 청원을 한다.

에오르테와 모르타 위원회라. 몇십 년 만에 일어난 청원치고는 다소 접점을 찾기 힘든 관계에 미간을 좁히던 사람들의 뇌리로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건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온 직후였다.

“화재!”

대략 십여 년 전,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대화재. 에오르테가의 유구한 본저택이 불길에 소실되고 전대 후작과 첫째 공자가 화마에 휩쓸려 명을 다한 일을 상기한 사내는 뒤이어 그곳에 있었던 페치오, 지금은 모르타 위원회의 워원인 된 그를 기억해 냈다.

당시 뒤따랐던 헛헛한 소문들 역시.

“왜 그래서 그때 여러 말들이 많았잖나. 페치오가 보검을 노리고 에오르테가에 불을 질렀다는!”

그제야 사건의 얼개를 이해한 사람들의 입술을 타고 에오르테가의 청원 사실은 제국 전역에 번졌다.

***

“청원이라니요, 후작님!”

노년에 접어든 페라비 별장 집사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고성은 크다. 집무실 밖, 통로를 정돈하던 하녀가 그 소리에 어깨를 움찔거릴 정도였으니. 정작 마주한 이는 그저 담담히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읽어 내기 바빴다만. 그 모습에 엘몬트는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어 쉬었다.

청원.

사용인들의 숙덕거림 속 기어코 현실이 되고 만 단어가 엘몬트의 귓가에 흘러들어 온 건 한 시진 전이다.

‘황궁 앞, 청원의 깃대에서 머리 두 개 달린 독수리의 문양을 보았대요!’

이제는 허울뿐인 그 청원이 에오르테 가문의 손에 의해 되살아났다고. 제 주인이 택한 것은 고작 그런 것인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야 좋겠지만 그뿐인, 끝내 누구도 도움을 주지 않고 그저 관망할 것이 분명한 방도를.

결국 이 일은 모르타 위원회가 에오르테가를 뿌리 뽑을 기회만 주는 것일 텐데. 게다가 그냥 일이 아니지. 서류 위로 사각거리는 깃펜 촉 소리만이 유일한 공간 속, 엘몬트는 주름진 손으로 열감이 잔뜩 밴 관골을 문질렀다.

어찌 모르시는가.

모르타 위원회를, 페치오 그자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뿌리 깊게 썩어 있는 가문의 치부 역시 세상 밖으로 내놔야 한다는 것을. 그게 몰락하고 있는 에오르테가를 완전히 추락시키고 말리라는 것을. 옅은 한숨을 내어 쉰 그는 조금 더 보폭을 넓혀 후작의 책상 가까이 다가갔다.

“청원이 제국에서 유명무실해진 지가 어연 수십 년이 넘었다는 것을 잊으신 겝니까.”

그제야 비어 있는 무의 공간 위를 바삐 움직이던 손이 멎고,

“나도 모르지 않아, 엘몬트. 허나, 적어도 아델에 대한 추문은 덮을 수 있겠지. 저잣거리에 번진 낭설들은 시작에 불과해. 이를 발판 삼아 공작이 무슨 짓을 꾸밀 게 틀림없어. 페치오도 연관되어 있겠지.”

수면 아래 깊이 침잠하는 녹안이 저를 올려다본다.

“모르타 위원회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페치오와 공작이 손을 잡았다는 정황들도 보이고. 아무래도 공작저에서 벌어진 일이니 공작이 전면으로 나서지는 못할 터. 페치오가 일을 진두지휘할 텐데 그를 막을 방법은 이것뿐이야. 이 일이 터지면 아델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 기억 속에서 까맣게 사라질 테니.”

“허나, 이 일이 알려지면 에오르테 역시 멸문을 면키 힘들 겁니다. 모르스 일족을 발현하기 위한 실험이라니. 엄연한 범법 행위잖습니까!”

“그렇다고 언제까지 묵고할 수만은 없잖나. 어쨌든 대가를 치렀어야 하는 일이야.”

일말의 타협도 허하지 않을 문장과 완고한 눈빛. 침음 같은 탄식을 내뱉은 엘몬트는 머릿속을 헤집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단어 하나를 내민다.

“원로들이 가만있질 않을 겝니다. 벌써부터 후작님의 파문을 두고 논의를 하고 있다 들었어요.”

“괘념치 말게. 어차피 테오도 곧 성년이 얼마 남지 않았잖나.”

역시나. 그리 효험은 없었으나.

“그리 서 있지 말고 자료를 찾는 거나 도와주게. 어머니가 페치오와 나눈 서신이나 뭐 그런 것들.”

전례 없는 완강한 모습을 보이는 주인의 모습에 엘몬트는 아득해 가는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는다. 어둠을 사르던 유일한 불빛마저 명멸하는 공간 속, 그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아니, 어쩌면 하나겠지.

진실.

더없이 잔악한 진실.

옅은 한숨을 내어 쉰 엘몬트는 느리게 동공을 여닫았다. 그 사이로 보이는 이는 이미 한 번 그 버거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고 만 아이다. 그런 아이에게 어찌 추한 실상을 오롯이 보일 수 있을까. 어찌 그 일을 다시 한번 감당해 보라 들춰낼 수 있을까. 끝내 부서지고 말 것이 이토록 분명한데.

어릿해 오는 명치께에 엘몬트는 입술을 짓이긴다.

‘방법을 찾아내라고, 엘몬트!’

그 밤을 후회한다.

‘그 애가 있지 않습니까.’

제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그 소리를 저주해.

‘리오, 그 애 말입니다.’

진창 같은 어둠에 벗어나려 발버둥 친, 그것이 끝내 더욱 깊은 수렁으로 저를 이끌 것을 몰랐던 과거의 어리석은 자신을 원망해.

벗어날 수 없는 억겁의 굴레가 되어 저를 죄여 오는 사슬들을 만들어 낸 순간들을, 가슴 깊게 새겨진 순간들을 되새기며 엘몬트는 눈을 내리감았다.

그렇게 깊게 침잠해 가는 상념과 함께 끝없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그를 끌어 올린 건 집무실에 들어선 시종이 내뱉은 다급한 음성이었다.

“모르타, 모르타 위원회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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