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공녀와 후작
“삼촌!”
다급한 테오의 음성이 물 먹은 듯 무겁게 내려앉은 나와 후작님 사이의 적막을 깨트린 건 저물어 가는 석양이 창틀을 비집고 들어올 즘이었다. 들어오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성큼성큼 보폭을 넓힌 그는 단숨에 내가 누워 있는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공작가에서 기사들을 보냈어요.”
낙조의 붉디붉은 빛에 침식되어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모양으로 가라앉은 녹안을 주지하던 나는 테오의 입에서 굴러떨어진 단어에 침음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공작.
그래, 그가 가만히 있을 리 없지. 심지어 얼마 전 친히 나를 불러 경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 와중에 내가 사라지기까지 했으니…….
용서와 자비를 모르는 무자비한 사내가 준 마지막 기회마저 저버렸다는 것을 상기한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답지 않게 성급해진 동작에 발이 엇갈렸지만 지체할 시각이 없었다.
모든 일을 그리 소리 소문 없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처리하는 사내가 예까지 나를 데리러 기사들까지 보낼 정도면 심기가 단단히 틀어진 것임이 분명했다. 창밖에서 밀려오는 예사롭지 않은 짙은 쇠붙이 냄새와 밀도 높은 공기를 느끼며 내가 바삐 몸을 움직이자, 옅은 한숨과 함께 테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야.”
가늠할 수 없는 문장의 뜻에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테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며 다시 목을 울렸다.
“누나를 데리러 온 게 아니라고.”
짧게 설명을 덧붙인 그는 이를 증명하듯 침대 위로 서류 한 장을 내밀어 보였다. 유리창에서부터 쏟아지는 붉은 빛이 하얀 종이 위에 새겨진 우아한 필체를 선연하게 나비쳤다.
“공작이 에오르테가를 상대로 재판을 한대.”
***
“요즘 바쁘신가 봅니다.”
넌지시 말을 붙이는 올레나의 말에 공작은 딱히 대꾸를 주지 않았다. 마주한 이가 돌려 묻는 바를 모르지 않았기에.
공작 가문이 에오르테가에 재판을 걸었다.
바로, 세이아린 베르니. 공작가의 공녀를 납치했다는 명분으로.
단 두 줄의 문장에 최근 제국에 차오른 혼돈이 얼마던가. 저잣거리의 필부들도 감히 그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여러 추측을 내놓는 마당에 코르푸의 위원장인 그녀가 돌아가는 판을 모를 리 없었다.
“에오르테가를 상대로 재판을 하신다지요. 공작님의 저의가 궁금합니다.”
그러니까 요지는 그것이겠지.
어지간히도 급하셨나. 어울리지 않게 올레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직설적인 화법에 옅은 조소를 머금은 공작은 대답 대신 느릿하게 손끝으로 탁탁, 팔걸이를 두드렸다. 아마 이번 일을 두고 유독 그의 뜻을 가늠하기 어렵다 하는 것은 여타 무성한 가설들과 달리 그에게 큰 계략이 있는 게 아니기에.
그저 아델.
넋이 나간 듯 구는 제 후계자의 정신줄을 바로잡기 위해서랄까. 공작이 후작 가문을 멸문시키려 한다, 이에 판돈을 올리는 치들에게 썩 달갑지 않은 말일 수는 있겠다만.
멸문.
조금은 그 단어가 우스워 공작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가 후작이라는 패를 왜 버릴 것인가. 이토록 유용하고 확실한데. 얼핏 봐도 풀어진 행색으로 술주정을 하다못해 세이의 방에 못질까지. 근래 들어 별 해괴한 짓을 하던 아델은 그가 후작을 건드리자마자 곧장 반쯤 나간 정신을 되찾은 듯 보였다. 오늘만 해도 새벽부터 그의 집무실 앞을 서성이지 않았던가.
물론 그렇다 하여 온전히 예전의 기세로 돌아온 것은 아니지.
제가 가진 약점을 오롯이 다 드러내는 품새며 여전히 진정시키지 못하고 요동치는 눈빛이며. 그의 흥미를 끌었던 처음과는 비견할 수 없이 어쭙잖은 행색이었다.
너무 기대가 컸던 걸까.
심상한 생각과 함께 공작은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다. 그를 이리 실망하게 하는 이는 비단 제 후계자만이 아니다. 코르푸의 늙은 여우. 온갖 수식어를 다 달고 살아 산전수전은 이미 겪을만치 겪었다 여긴 올레나 역시 희미하게 내비치는 불안의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였다.
뭐 하나 재미날 게 없구나.
짧게 혀를 찬 공작은 머릿속에 번지는 상념들을 거두어들이고는 담담한 어조로 긴 침묵을 깨트렸다.
“생각이랄 게 있나, 그저 딸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이 큰 게지요.”
***
딸의 안위라.
제 저택에 딸을 감금시킨 주제에. 기가 차 말도 나오지 않는 헛소리를 저리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내를 보며 올레나는 분노로 떨려 오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어찌나 열이 올랐는지 그 뒤로 이어진 공작과의 대화에 조금도 집중할 수 없었다.
알고 있었다.
이리 공작저로 걸음해도 결국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어차피 공작은 쉬이 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녀의 편에 설 연유도 없었으니. 허나, 그럼에도 어렵사리 공작과의 약속을 잡고 공녀의 안위를 두고 갑작스레 진행된 에오르테가와의 재판에 그녀가 기대를 건 것은 실낱같은 소망 때문에. 이제는 덧없어진 희망 때문이었다.
그래도 둘이 피를 나눈 부녀이니 하는. 혹 이번 일이 공녀와 공작의 관계에 변곡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픽, 올레나의 입술을 타고 흐른 웃음에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바람을 품은 자신에 대한 조소가 깃들어 있다. 어리석게도 제가 상대하는 이가 공작이라는 것을 잊었구나.
그가 바로 철혈의 베르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의 피는 붉지 않고 그 눈동자의 빛깔처럼 시퍼렇기만 할 것이라는. 혈관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은 기실, 뜨겁지 않고 심해의 바닷물처럼 서늘할 것이라. 호사가들이 입에 달고 살던 그런 문장들처럼.
그래, 그리고 지금 그녀가 마주한 이는 베르니가의 누구보다 그 문장에 걸맞은 사내였지. 공작이 보이는 조그마한 틈이라도 찾아내려 부지런히 움직이던 올레나의 갈색 눈이 멈춘 건 그때였다.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그제야 받아들인 올레나는 남은 대화를 적당히 마무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가에서 공녀를 감금시켰다니요!”
볕이 들지도 않을 정도로 이른 아침, 예고도 없이 삼삼오오 올레나의 집무실에 들이닥친 코르푸의 위원들이 내놓은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공작가의 동태를 파악한 서신을 각 위원들에게 보낸 지 채 반나절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올 것이 왔구나.
밤잠을 이루지 못해 피로로 물든 눈가를 짓누르며 올레나가 눈짓으로 그들을 왼편 소파로 이끄는 사이, 분통을 참지 못한 위원 하나가 울분을 터트렸다.
“그런 주제에 공녀의 몸이 회복되는 대로 다시 각인을 해 달라 요청하다니. 양녀를 들이며 제 딸을 저버린 주제에 티케의 힘을 버리지는 못하겠다, 그거겠지요. 뻔뻔하기 짝이 없는 인사 같으니라고!”
“진정하게.”
짐짓 침착하게 대꾸한 올레나이건만, 마주 잡은 그녀의 두 손 역시 분노로 떨려 오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공작이 공녀를 버렸다.
아델리아 경을 공작가의 양녀로 받아들인다는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부터 짐작할 수 있던 일은 예상보다 더 빨리 그리고 무자비하게 실체화되고 있던 것이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공작이 각인이 성공해, 제 목적을 달성한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올레나는 선뜻 답을 주지 못했다. 그저 제 손끝에 맴도는 푸른 나비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투명한 햇살 속에서 반짝거리는 푸르른 날개는 어느 때보다도 생동감이 넘쳐 보였다. 그녀의 시선을 쫓아 눈을 움직이던 위원이 입을 연 것도 그쯤이었다.
“아직도 아델리아 경을 놓지 못하신 겁니까.”
“나는 그저…….”
“무엇을 기다리시는지 압니다. 허나, 이제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조사단도 경과 공녀에게서 아무런 특이점도 찾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렇지…….”
그제야 릴리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인 올레나는 박명의 새벽빛을 가로질러 집무실에 들이닥친 수십 쌍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기와 분노 그리고 울분으로 점철되어 하늘에 드리운 짙은 먹구름보다 더 사납게 가라앉은 그들의 낯을.
믿고 싶었다.
아델리아 경을, 그리고 티케의 뜻을. 도무지 보이지 않는 길 속에서 늘 답을 가져다주었던 그녀 힘의 원천이었으니까.
그러나 위원들의 뜻을, 저 문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대를 이제 더는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미안하네. 내 티케의 뜻을 잘못 알아들었나 보군.”
나도 이제 늙었어.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올레나는 눈을 들어 올렸다.
“데이나에게 연락을 취하게.”
달이 사라진 밤, 시든 백합이 다시 피어오를 것이라고.
허공으로 흩어지는 문장에 삽시간에 빛을 잃은 나비의 날갯짓만이 적막한 내실의 공기를 흔들었다.
***
굳게 닫힌 공녀의 방. 흉물스럽게 막혀 버린 창문. 그리고 이조차도 안심할 수 없는지 공작은 친히 기사들을 배치해 어린 공녀의 방을 지키게 만들었다. 이 명령에는 실로 어떤 은유도 완곡한 어법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기사들의 임무는 정말로 공녀의 방을 지키는 것이었다. 공녀가 아닌.
“공녀님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열어 봐.”
오로지 문이 열리는 때는 식사 시간뿐이다. 기사들은 정확히 점심시간이 돼서야 은쟁반을 고이 든 채 시립해 있는 하녀에게 묻는다.
혹여 식을세라 덮어 둔 수프 그릇마저도 꼼꼼히 확인하는 작태가 기사라는 그 영예로운 작위를 하사받은 이들치고 참으로 하릴없다, 늘 그런 눈빛으로 저희를 쏘아보던 하녀가 오늘따라 얌전하다.
기이하긴 하지만 달갑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럴 때마다 쿡쿡 찔러 오는 양심의 가책이 버거웠던 참이었던 것이다.
“들어가.”
그리하여 방문을 허하는 음성이 평소보다 높았다.
“감사합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방을 들어서는 하녀를 보며 기사는 조금 고개를 기울인다. 뭐지.
“왜 그래.”
기민한 눈치로 그 행동을 눈치챘는지 함께 보초를 서던 동료가 묻는다.
“아니, 뭐…….”
말끝을 흐리며 미간을 좁히던 기사는 짧게 덧붙였다.
“조금 달라서.”
그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동료가 반응한다.
“다르긴 뭐가 달라. 데이나구먼. 경비를 서는 자가 여태 하녀들 얼굴도 익히지도 못하다니.”
“누가 데이나를 몰라 그러나.”
사용인 하나 들이는 것도 조심 또 조심하는 공작이 7년 전에 들인, 공식적으로는 가장 공작저에서 짧게 근속한 사고뭉치 하녀, 데이나. 영 쓸데없는 일을 하는 통에 누구라도 모르기 어려운 어린 하녀 아니던가.
“어제 또 아래층 식당 열쇠를 잃어버려 한바탕 난리가 났다더군.”
그럼, 그렇지. 데이나가 말이야.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사는 머릿속에 흘러든 망령된 생각을 휘휘 쫓아내 버렸다.
***
방문에 들어선 하녀 데이나는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고수하며 쟁반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탁, 흔한 탁음조차 나지 않는 동작은 주변의 평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모두가 기피하는 공녀의 시중이라는 일을 막내라는 연유라 몇 년 전부터 떠맡은 이치곤 무던하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새까만 눈이 찬찬히 방을 살핀다. 시들어 버린 티케의 수목을 지나친 눈매는 축 늘어진 여린 소녀의 어깨에 닿고는 가늘어졌다.
여전히, 오늘도구나.
조급해진 마음이 공녀의 침상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7년 전, 처음 세작으로 공작가의, 공녀의 동태를 살피라 지시받았을 때 입가에 머금었던 조소는 이제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는 그저 코르푸 위원회의 편집증이 날로 심해지는구나, 그리 생각했다. 공작이 공녀를 애지중지하는 것을 이 아올리스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 게다가 골칫거리 이복동생에게마저 관용을 베푸는 공작 부인이며 또 그 공녀의 오만방자한 태도는 어떻고. 그녀의 주장에 올레나 위원장은 태연히 답해 주었다.
그럼 그저 시간이나 때우다 오려무나.
나른한 웃음을 곁들이며.
그리고 지금이다.
공작이 귀애하는 공녀도, 거만한 꼬마도 아닌 아이가 제 앞에 스러져 있다. 그 작은 손에 으스러져라 쥐인 시든 백합이 아마 이 무채색 방을 유일하게 빛내는 존재였으리라. 그마저도 미약하기 그지없었지만. 작게 고개를 흔든 데이나는 조심스레 그녀를 불러 본다.
“공녀님.”
7년 전 비웃음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과 분노가 뒤섞인 음성이 공간을 울렸다.
“사흘 뒤 달이 사라진 밤, 경비의 마지막 교대 시간에 방의 문을 열어 둘 것입니다.”
그러나 흘러나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초점 잃은 푸른 눈은 차창 밖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공작가와의 전면전까지 각오한 코르푸 위원회의 결정이 무색하게.
잘하는 일인가.
무리한 탈출 계획과 조그마한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공녀. 누가 봐도 위험천만한 계획이었다.
그럼에도.
어느새 결연한 빛깔을 띠는 눈동자는 일고의 물러섬도 없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는 왜, 7년 전 그날 올레나가 공녀를, 그리고 자신을 같은 공간 속으로 밀어 넣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티케 일족에 대한 학대는 빈번하게 일어난다. 사람을 사람이 아닌 도구로 보기 시작할 때, 비극은 시작되기 마련이니. 깊게 뿌리 박힌 이 문제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해갈되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 가족 간에 발생하는 특이점 때문이다. 손안에 쥔 자는 놓을 생각이 없고 잡힌 자는 잡힌 줄 알지 못하니. 촘촘하게 짜인 그물 안에 갇힌 날것과도 같지 않은가.
더는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다. 노기가 맺힌 올레나 위원의 필체 역시 떠올리며 데이나는 빳빳이 목에 힘을 준다.
“그러면 곧장 아래층 사용인들의 식당으로 내려오세요. 도울 이들이 공녀님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오래전, 제 어미가 발목에 채웠던 차가운 쇳덩이가 다시 선연하게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으며 데이나는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을 덧붙인다.
품에 쥐고 있던 작은 단도를 공녀에게 건넨 것이다.
“공녀님,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결코 주저하지 마세요. 그게 누구라도.
***
하녀가 나가자, 공녀는 차창에 고정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자연스레 방을 배회하던 시선이 닿은 곳은 침대맡에 놓인 단검. 빛을 잃었던 눈에 살짝 이채가 도는 것도 그 찰나였다.
올레나 브린트.
코르푸의 늙은 여우.
그딴 여자의 어설픈 모략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저와 아버지를 이간질해 영원히 코르푸의 여왕으로 군림하려는 속셈이겠지. 작게 코웃음 치려던 공녀는 순간적으로 눈썹을 팍 일그러트렸다. 뺨과 턱에 남은 고통의 감각이 여태 낫지 않은 탓이다.
퉁퉁 부어 제 것 같지 않은 살갗. 이물감이 느껴지는 피부. 차분하지만 분연한 노기를 내비치는 아비의 음성과 서늘한 눈빛. 그 모든 기억의 잔재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자, 공녀는 하도 되뇌어 이제 입에 붙은 그 문장을 중얼거렸다.
다 그 여자 때문이야.
모두가 다 속고 있어.
밤바람처럼 차고 단단한 음성이 자제력을 잃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 여잔 괴물이야.
성난 낱말들이 바닥 위에 차곡차곡 쌓여 갈 때쯤, 차츰 제 색을 되찾은 푸른 눈은 다시 창 너머로 향했다. 서편으로 비스듬히 저물어 가는 햇발 아래 공작가의 붉은 드레스, 그 위를 너울거리는 은발이 눈가를 어지럽혔다. 낙조에도 제 빛을 잃지 않는 은빛 머리카락을 잠시간 바라보던 공녀는 입술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나밖에, 나밖에 없어.
베르니를 구할 사람은.
그 순간, 시들었던 백합의 이파리 하나에 생기가 감돌고 유리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빛깔이 얽혀 들어간다.
***
내리쬐는 햇살을 타고 요동치는 벽안이 뿜는 살기가 내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시야를 사납게 긁어내리는 시선에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저 빛깔의 주인들은 어째 잠시도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까.
공작이 에오르테가에 재판을 신청한 지 벌써 사흘째.
갑작스러운 공작가의 선포에 세간은 뒤숭숭해지고 그의 행보를 두고 여러 의견들이 분분했지만, 그 기저에 내포된 진정한 뜻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경고.
그의 엄중한 조언에도 나약한 작태를 보이는 나에 대한, 길을 잃은 아이처럼 어리석게 구는 제 후계자에 대한 경고라는 걸 말이다.
‘나를 넘어서려면 먼저 그 마음을 이겨 내야 할 것이야.’
사시사철 눈으로 내리덮여 있다는 설산처럼 서늘한 공작의 음성이 골을 파고들자, 나는 열감이 묻어나는 손으로 이마 위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트인 시야로 이지러질 듯 타오르는 푸른 눈이 내 위로 제 그림자를 그린다. 선연한 분노와 울분. 숨기지 못한 그 모든 감정을 몰고. 공작의 것과 꼭 같으나 결코 같을 수 없는 눈. 그 빛깔은 한점 흐트러짐 없이 같은데 어찌 이리 다른 모양을 띨까. 어찌 이리 공녀의 눈은 나약하고 어쭙잖게, 하찮아 가끔은 가엽다는 생각까지 들까.
피식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온 건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질 즈음이었다. 저 눈을 연민한 대가를 벌써 잊은 것인가. 내가 지키고자 했던, 내게 유일한 사람에게 내려진 사망 선고를.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에오르테가의 멸문이 머지않았다는 대소신료들의 중론을.
머릿속을 휘젓는 망치질 소리와 아릿해 오는 명치께를 부정하려는 듯 나는 하늘 위로 목을 빳빳이 세웠다. 여전히 진정되지 못한 채 백모래밭을 위협하는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푸른 눈을, 잠시라도 틈을 보이면 나를 집어삼킬 듯 철썩이는 벽안을 연민할 여유가 내게 더는 남아 있지 않다.
공녀와 후작.
둘의 무게를 재어 보면 그 추가 어디로 기울지는 보지 않아도 분명했으니.
‘나를 넘어서려면 먼저 그 마음을 이겨 내야 할 것이야. 나약한 마음을.’
그래, 이 싸움에서 지면 나는 그를 잃고 말 거야. 느리게 여닫던 동공이 멈추고 혼돈으로 가득 찬 마음이 고요해진 것은 그때였다. 입가에 흘러나오는 탄식에는 때늦은 깨달음이 깃들어져 있다.
그래, 그런 거였구나.
하루가 멀다 하고 제 집무실 앞을 서성이는 나를 공작이 만나 주지 않은 까닭은 이거였어.
철혈의 베르니.
그 단어로 빚어낸 것 같은 공작의 눈엔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어리석게 보였을까. 얼마나 가소롭고 우습게 보였을까. 고작 한 번, 후작을 건드렸다고 진정하지 못한 마음을 오롯이 내비치며 속에 품은 패를 다 드러내는 작태가. 숨기지 못하는 숱한 감정들이. 그 작은 흠결이 못미더워 공녀라는 더없이 완벽해 보이는 패를 버린 그인데.
심중을 종횡하던 불안이 뒤늦은 자각 앞에 사위자, 낯은 어느 때보다 더 고요하고 평온해진다. 나는 이제 차분하다 못해 얼음 조각을 삼킨 것처럼 서늘해지는 눈을 들어 올렸다. 노을이 짙게 밴 하늘은 막막하게 느껴질 만큼 광활히 시야를 압도하며 펼쳐져 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한 줌의 온기도 묻어 있지 않은 물음이 시붉은 공간 위로 흩어진다.
***
노을이 짙게 밴 하늘을 머리에 이고 도착한 곳은 공작저의 대장간. 산허리 아래로 떨어지는 낙조는 이제 하루를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사방을 이지러트릴 듯 타오르는 대장간의 불꽃들을 그저 쉼 없이 솟아오르며 침식되어 가는 낙조와 어우러져 사방에 치솟았다.
치이익. 숯불에 불려 벌겋게 달구어진 쇠가 대장장이의 손에서 미끄러져 찬물 속으로 떨어진 건 막 그의 머리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즘이다.
“……공녀님!”
퉁탕퉁탕거리는 소음과 함께 열기를 두드리던 움직임이 일시에 멎었다. 호기심과 두려움이 번갈아 떠오른 수십 쌍의 눈동자는 소리를 쫓아 당연하다는 듯 한 곳에 고정되었다. 저택을 집어삼킬 만큼 뜨겁다 못해 다소 험악한 이 공간을 단박에 얼릴 만큼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 그 끝에 있었다.
“내 검을 좀 봐 줄 이가 필요한데…….”
고요해진 사위를 걷어 낸 음성에서 묻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뭇 장정들을 단박에 압도할 만큼 더없이 냉혹했다. 반쯤 내리깔린 공녀의 눈꺼풀이 찬찬히 올라갈 때는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도 긴장으로 목이 뻣뻣해질 지경이었다.
“자네.”
땀에 절은 대장장이와 인부들을 느리게 배회하던 냉랭한 시선이 멈춘 것은 그 말이 터져 나온 직후였다.
“이것과 같은 검을 만들 수 있겠나.”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붉은 머리의 사내는 에단, 공작가의 마차를 만들기 위해 잠시 부리기로 한 인부 중 하나였다.
썰물처럼 갈라지는 인파를 뚫고 에단은 천천히 공녀의 앞으로 향했다. 그녀가 내민 단검을 받아 든 그는 가늘어진 눈으로 칼등과 날을 세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던 노골적인 시선들이 하나둘 사위어 갈 무렵, 에단은 의아한 듯 나직이 물었다.
“이젠 여기까지 찾아오는 건가.”
느릿느릿하다 못해 굼뜬 동작과 달리 입술을 타고 흐르는 문장은 한 호흡도 멈추지 않았다. 얼핏 보기엔 말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달리 방법이 없어서. 그동안 내가 부주의해 판자촌의 위치는 발각되었을 수도 있음이니.”
담담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에단의 미간은 조금 전보다 더욱 깊게 팼다.
드디어 이 여자가 제정신을 차린 것인가. 공작가에서 들려오는 숱한 소문들. 공작가의 양녀가 신뢰를 잃었다, 미친 짓을 한다는 말들에 그가 밤잠을 설쳤던 지난날들이 우스워질 정도로 여자는 멀쩡해 보였다.
“왜 그리 보나.”
질긴 눈빛에 담긴 뜻을 느낀 것인지, 아델리아 경이 낮게 속삭였다.
“이제야 자네 같아서.”
“신소리는.”
짧게 혀를 찬 여자는 힐끗 주위를 살피더니 본론을 꺼냈다.
“공녀에 대한 이야기가 무성해. 공작이 공녀의 일로 에오르테가에 재판을 신청했으니 아마 지금쯤 코르푸 위원회도 모르지 않을 것이야.”
“곧 코르푸 위원회가 움직이겠군.”
“그래, 공작의 성정이 원체 세밀해 그들이 저택에 침투하게 쉬이 두었을 리 만무하지만, 그대가 저택에 동태를 세심히 살펴주게. 혹 수상쩍은 움직임이 있나 말이야. 그것만 막는다면 이 상태로 공녀가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허나, 티케 일족들이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면 우리가 무슨 수로 그들을 막나.”
걱정스럽게 닿은 눈길에 여자는 반쯤 눈매를 휘며 화답했다.
“염려 말게. 그들을 상대하는 건 우리가 아닐 테니.”
말도 안 되는 말이 이리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건, 그래 저 더할 나위 없이 고저 없는 완벽하게 예전의 것과 같은 음성 덕일 것이다.
***
“그래, 할 말이 있다고.”
미미하게 끝이 올라간 공작의 음성이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기분이 좋을 때 나오는 그의 습관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제 집무실 앞을 서성이는 딸을 공작이 만나 준 건 정확히 에오르테가에 재판을 청한 지 나흘째 되던 어느 날, 너울거리는 속눈썹 아래 설풋 드러난 은안은 더없이 차분해진 날이었다.
극점으로 치달으며 수많은 감정의 그림자들이 지나가던 잿빛 눈은 이제 돌팔매질에도 수면이 흔들리지 않을 것같이 고요한 빛깔로 변해 있었다. 이를 더없이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팔에 괸 턱을 비슷이 기울였다.
“말해 보렴.”
“코르푸 위원회가 움직일 것입니다.”
돌아온 답은 예상했던 것보다 퍽 실망스러웠지만.
아델이 내놓은 제안에 공작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코르푸 위원회가 움직일 것은 예상하고 있었으나 아직 마땅한 방비를 하지 못한 건 그들을 막아 세울 방법이 없다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이겠다. 세작을 골라내기 위해 엄격한 선별을 통해 사용인 하나도 허투루 들이는 법이 없었지만, 세이의 문제로 그 과정이 순탄치 않은 점도 있는 데다가 그들은 티케가 아닌가.
무엇하나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는.
“설마 그걸 내가 모르고 있을 거라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 올레나가 도끼눈을 뜨고 저택을 얼쩡거리는 마당에.”
언뜻 보면 평탄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입을 연 공작은 손가락으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의 끄트머리를 잡고 문질렀다. 최근 코르푸 위원회의 동태를 담은, 오타 하나 없는 보좌관의 완벽한 보고서가 그의 손짓에 볼품없이 구겨졌다.
“아, 얼마 전에는 위원들을 소환하기도 했다지.”
부드럽게 밀려 올라가 흠잡을 데 없는 미소를 그린 입술은 그럼에도 더없이 서늘하다.
“티케 사냥꾼을 부르시지요.”
“티케 사냥꾼?”
느리게 움직이는 혀를 따라 흘러나온 단어는 그조차도 섬뜩할 정도로 벼렸다.
티케의 각인자들로 구성된 그들은 일족의 힘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이점을 활용하여 어린 티케를 납치, 구금하여 비싼 값에 되파는 무뢰배들이다.
헌데, 그들을 부르자고.
“제국의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야.”
내실에 내려앉은 공작의 음성은 한없이 단호했다.
그들을 그리 쉬이 부를 수 있다면 진즉, 그는 올레나 위원장의 명줄부터 끊어 놨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까닭은 티케 사냥꾼이 그만큼 위험한 수라는 것이지. 공작가의 위상은 땅에 떨어지고 그는 부도덕한 짓을 일삼은 불한당과 다를 바 없다는 낙인이 찍힐 게 뻔했다. 달깍거리는 자기소리와 함께 아델이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진정으로 그들을 부르라는 게 아닙니다. 공작이 공작저에 침입할 코르푸를 경계해 티케 사냥꾼까지 불러들였다. 그저 제국 모두가 그 사실을 암암리에 알게끔만 하면 되니까요. 뭐, 연막을 치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올레나는 그리 얕은 자가 아니야. 바로 함정이라는 걸 눈치챌 게지.”
“허나, 다른 이들은 아니지요.”
내려놓은 찻잔의 둥근 표면을 따라 천천히 티스푼을 젓는 아델의 눈은 어느 때보다 진중했다.
“다른 이들?”
그 눈이 그를 직시했다.
“코르푸 내부의 분열이 일 겝니다. 당연히 변수가 생겨 튀어나오는 자들이 있을 거고요.”
막연한 기대와 가정이 아닌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걸고.
“뜻이 모아지지 않는 티케들은 힘없는 노파보다 더 다루기 쉽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공녀가 탈출을 하건 탈출을 하지 못하건, 코르푸 위원회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뜻이 모아지지 않는 티케라.
낮게 중얼거리던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그러니 올레나가 나타나기 전까지, 숱한 세월 엄청난 힘을 가진 그들이 세력을 규합하지 못한 게 아닌가. 수십의 일족들이 목표하는 바가 다르다면 그 대단한 티케라도 감히 그들의 뜻을 모두 이뤄 줄 수 없으니.
“알겠다.”
잠시 후 집무실에 떨어진 것은 완벽한 긍정의 답이었다.
***
무도회는 흡사 초상집과도 같았다. 공작 가문이 에오르테가를 상대로 제기한 재판의 결과를 두고 어마어마한 돈을 걸고 내기를 벌이던 이들 때문이었다. 대부분 에오르테가의 몰락을 예상했던 그들은 공작이 재판을 취하하며 벌어진 엄청난 변수 앞에 거진 저택 하나를 살 수 있는 돈을 잃은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술과 시가.
여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은 파티는 그런 마법의 단어들로도 살릴 수 없는 정도로 침울했다. 그 목을 짓누를 것 같은 우울한 분위기를 전환시킨 건 뒤늦게 무도회에 나타난 어느 남작 때문이었다.
랄프 오도만.
사내의 무리들을 향해 손짓한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우중충한 파티장과는 사뭇 다를 환한 미소를 품고 있었는데, 그건 순전히 그의 낙천적인 성정 때문이라고 하기보다는 어마어마한 판돈이 가져온 바람이었을 것이다.
행운의 사내.
누군가는 그리 부른다지.
모두가 공작가에 돈을 걸 때, 무모하게 에오르테가의 손을 든 그는 그 이유마저도 황당했는데 뭐 아미타 숲의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은 사내가 그리 쉬이 망할 것 같진 않다나 뭐라나. 그들에게 한바탕 큰 웃음을 준 그 문장이 이리 뼈아프게 다가올 줄 그때는 알았던가.
“이런 누추한 곳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남작님.”
암, 몰랐지.
하루아침에 제국의 내로라하는 자산가가 된 남작을 향해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친우는 씁쓸한 웃음을 짓고 모자를 벗으며 정중히 주인을 모시는 시종을 흉내 냈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유일하게 웃음이 터진 건 그때였다.
“소식 들었나.”
“예예, 듣다마다요. 얼마 전 새로 남쪽 별장을 구입하셨다는 것 말이지요.”
계속되는 비아냥거림에 키득거리는 웃음은 더욱 짙어진다. 그런 친우를 흘긴 남작은 마저 말을 이었다.
“공작 가문 얘기 말이야.”
“아, 그러고말고요. 공작이 에오르테가의 소송을 취하해 제가 저택 하나를 날린 일을 어찌 잊겠습니까.”
이번에는 아예 친우의 말을 듣지 못한 척 남작은 목을 울렸다.
“새 판이 열릴 모양이야.”
새 판.
내기판에 크게 자산을 거덜 낸 이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로 새로이 자리매김한 음절들 앞에 죽을상을 하고 있던 사내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샹들리에에서 떨어지는 불빛에 유독 찬란하게 빛나는 친우들의 반짝이는 눈에 조금 당혹스러운 듯 머뭇거리던 남작은 곧 의미심장한 어조로 운을 뗐다.
“공작이 자택으로 티케 사냥꾼을 불렀다는 소식이네.”
그 기세와 예상과 달리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뭐? 티케 사냥꾼?”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친우 중 하나는 빳빳하게 곧추세웠던 허리를 다시 의자에 깊게 기대었다. 밤하늘의 별을 박은 듯 광채를 내던 눈도 없어진 지 오래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누군가가 뱉은 그 말을 딱히 부정하려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티케 사냥꾼.
그런 무뢰배 같은 자들을. 그들이 대륙의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건 아주 아득한 어느 날이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티케의 각인을 받은 각인자가 되레 그 축복을 이용해 티케 일족을 사냥하려 했을 줄이야. 그렇게 납치한 티케들은 비싼 값에 팔던 그들은 급기야 티케들을 자신들에게 강제로 각인시키기 시작하며 더욱 세력을 불려 갔다. 한때는 모두가 그들의 발아래 무릎을 꿇을 정도로 말이다.
적어도 올레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지.
코르푸의 제안으로 아올리스는 현재 티케 사냥꾼의 입국을 법적으로 금하고 있는 상황. 이 와중에 공작이 그리 무리한 수를 둘까. 제국의 율법을 어기고서 어찌 코르푸와의 전면전을 치른단 말인가.
“누가 봐도 헛소문인 게 뻔하잖나. 공작이 미친 게 아니라면 왜 구태여 티케 사냥꾼을 들이겠나. 잃은 게 훨씬 많은데.”
논리적인 반박 앞에 남작은 지지 않고 말을 받았지만.
“제정신인 자가 제 친딸을 저버리고 양녀를 데려오는 짓을 하겠나. 내가 봤을 땐, 코르푸를 경계하느라 공작이 틀림없이 티케 사냥꾼을 들인 게 분명해.”
그래, 너 좋을 대로 생각해라. 지금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게만 보이겠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남작의 말을 그리 흘려듣던 친우의 눈이 다시 빛을 낸 건 남작이 던진 그 말에 장내에 스멀스멀 소란이 피어오르기 시작할 때였다.
“정말 공작이 티케 사냥꾼을 불렀을까?”
“예끼, 이 사람아. 그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저마다의 논리를 내세우며 너도나도 앞다투어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을 찬찬히 살피던 남작의 친우는 머릿속에 섬광처럼 한 생각이 스쳤다. 이건 될 판이다. 이채가 감도는 눈은 무도회장을 일별하고 다시 친우에게로 가 닿았다.
“그럼 거기에 자네가 새로 구입한 남쪽 별장을 거는 게 어떤가.”
“뭐?”
큰 내기가 끝난 지 채 하루가 되지 않았는데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는 뜻을 담은 남작의 문장에도 사그라들지 않는 결연한 눈빛을 내보이며.
“자네가 새 판을 여는 거지!”
새 판.
그 소리에 꺼져 가던 장내의 관심이 다시 몰린다. 지난번 공작의 소송 건으로 재산이 거덜난 이들이 어디 한둘이냐. 신속히 커다란 판이 열려야 이를 만회할 수 있으리라. 친우라는 겁을 쓰고 늑대들처럼 몰려드는 이들의 눈은 손쉬운 먹잇감을 보는 이처럼 번뜩거렸다.
“제발, 지금 이 판을 키울 이는 자네밖에 없어. 판이 다시 열려야 내가 살길을 도모할 게 아닌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한 기대가 깃든 음성에 남작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자 너 나 할 것 없이 제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가문의 자산을 홀랑 말아먹은 죄로 가문에서 퇴출될 위기다,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서글픈 사연에 잠시 머뭇거리던 남작은 호탕한 웃음과 함께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알았네! 내 남쪽 별장을 걸지.”
무도회에 스산하게 흐르던 장송곡의 선율이 아름다운 무곡으로 변주된 것도 그쯤이다.
***
“함정이야.”
공간을 가로지르는 올레나 위원장의 음성은 무척이나 단호했다. 일말의 고민도 주저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간밤부터 사교계를, 아니 제국을 뒤숭숭하게 하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답지 않게 말이다.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전개에 보좌관의 낯에는 일순 난색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함정이라 치부하기엔 소문들의 짜임새가 무척 정교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공작이 여태껏 공녀에게 행했던 짓이 어마무시하지 않은가.
“허나, 공작도 염려될 게 아닙니까. 만에 하나 저희가 공녀님의 탈출을 성공시킨다면 그는 필히 친딸에게 저지른 패륜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 할 텐데.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를 막으려 하지 않을까요?”
조심스레 덧붙인 보좌관의 사견에도 올레나의 꼿꼿한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지만.
“그걸 막으려 티케 사냥꾼을 들인다?”
희미한 조소를 담은 문장을 입에 걸고서.
“하나를 얻으려 둘을 잃는 셈 아닌가. 공작은 제 가문의 명예를 목숨같이 여기는 자야. 그리 아둔하지도 않지. 게다가 설령 진정 공작이 티케 사냥꾼을 불렀다면 일을 이리 크게 벌리겠나.”
“하지만-”
더 들을 것도 없단 듯 보좌관의 말허리를 잘라먹은 올레나는 사납게 그어진 눈매로 명했다.
“데이나에게 움직임을 자제하라 지시하게.”
무게가 실린 지시 앞에 보좌관이 더는 토 달지 못하고 화급히 자세를 낮춰 집무실을 나서자, 올레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움직임에 물살처럼 흐트러지는 드레스 자락을 따라 책상에 놓여 있는 잉크병이 쓰러지고 서류들이 그 검은 빛깔로 물들어 형태를 알 수 없이 뭉그러졌다.
엉망이 된 공간을 바라보는 올레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의 보좌관은 몇십 년간 저와 함께한 이였다. 그동안 단 한 번도 그녀 앞에서 저리 제 의견을 관철하려 한 적이 없었지. 그마저도 이리 흔들린다면…….
공작.
그가 바라는 것이 이것인가. 그들 일족에 불어오고 있는 심상치 않은 균열의 바람을 애써 부정하며 올레나는 불안한 마음을 내리눌렀다.
지난 세월 한뜻으로 그들 일족을 위해 헌신했던 위원들이다. 그 시간 동안 잡음 한 번 없었던 건 단연 아니지. 허나 그들이 끝내 길을 잃지 않았단 건 단 하나의 목표와 단 하나의 신념이 그들 가슴 깊숙이 뿌리내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괜찮을 게야.”
이지러지는 내실로 그녀의 소망이 흩어진다. 그 바람이 얼마나 덧없는지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그 주인이 건넨 문장에 의해 낱낱이 드러났지만.
“위원장님, 제이타 위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다른 위원님들도 지금…….”
바야흐로, 균열이었다.
“당장, 기사단을 보내 공녀를 구출해야 해요. 더 시간을 끌 수 없습니다.”
티케 사냥꾼.
그 단어 앞에 이성적일 수 있는 티케 일족이 과연 몇이나 될까.
올레나는 덧없는 물음의 답을 정돈되지 못한 제 집무실에 모여든 위원들의 낯에서 쉬이 찾을 수 있었다. 국경과 인종을 넘어 오로지 한뜻으로 움직이는 티케 사냥꾼. 일족의 세력이 규합되기 전 제국에도 횡횡했던 그들을 완전히 몰아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선 이 자리에 있는 이들치고 그들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했던 이들은 한 명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향이 짙을수록 벌레들이 짓끓는 법이니.
그녀 역시 그러했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한 과거의 잔상을 떠올리며 올레나는 무의식적으로 손목을 문질렀다. 매끄러운 살갗 대신 깊게 팬 화인 같은 자국이 선연하게 남은 그곳을 매만지며 잠시 아득한 어딘가에 머물러 있던 올레나의 의식이 돌아온 건 침착하게 들려오는 케일 위원의 문장 덕분이었다.
“허나 제이타, 이미 공작이 티케 사냥꾼을 불렀다면 모두가 몰살될 수 있어요.”
티케 일족으로 구성된 기사단들은 아무래도 일족의 힘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보니 육탄전에는 약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작이 진정 티케 사냥꾼을 불렀다면 필시 상당한 힘을 가진 티케의 가호를 받는 이들을 불렀을 법. 그런 사실을 넌지시 주지한 위원의 말에 제이타 위원은 발끈했다.
“지금 니벨론 기사단을 욕보이는 것입니까.”
“그리 감정에 앞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침착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다 공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요. 비단, 이 일은 공녀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이를 좌시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여타 가문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티케 사냥꾼을 들이기 시작할 겁니다. 설마, 다들 그걸 바라시는 겁니까.”
서릿발이 내리는 듯 싸늘해진 눈으로 위원들을 하나씩 훑어 내리던 제이타는 이윽고 시선을 돌려 올레나를 직시했다.
“그자들이 어떤 족속인지 모르시지 않질 않습니까. 올레나, 이건 어찌 보면 진정 공작이 티케 사냥꾼을 불렀다 아니다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자칫하면 대혼돈의 시대가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겁니다.”
뺨에 닿는 섬뜩한 시선은 줄곧 침묵을 유지하는 올레나에게 마땅한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슬며시 손목에서 손을 뗀 그녀는 침착한 눈빛으로 제이타를 응시했다. 릴리의 신호는 아델리아 경에게 등을 돌린 그 순간부터 빛을 잃었으니 더 이상 도움이 되질 않고 그녀 스스로 오로지 이 모든 과업을 헤쳐 가야 한다. 과거의 두려움에 얽매여 있기에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크고도 깊다. 허니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뿐.
“공작이 바라는 게 이것임을 모르겠습니까. 게다가 우리에겐 데이나가 있습니다. 자칫 일이 틀어질 수가 보이면 공녀를 빼돌릴 마지막 패가 있단 말이지요. 제 뜻은 그러합니다, 제이타 위원.”
“하아, 올레나.”
깊은 탄식을 흘린 제이타는 눈을 내리감았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다시 눈꺼풀을 밀어 올린 그는 짧은 문장을 남기고서 집무실을 나섰다.
“부디 그대가 그 말의 무게를 모르지 않길 바라오.”
***
“아무래도 코르푸 위원회가 기사들을 공작저로 보낼 것 같진 않아. 올레나 위원장의 뜻이 완고하다고 들었네. 물론 내부의 분열이 있긴 하지만.”
힘찬 망치질 소리와 후끈한 열기로 가득 찬 대장간, 완성된 검을 내게 건넨 에단은 속사포처럼 빠르게 그러나 나직이 속삭였다. 소음에 먹힌 문장들 속에서 그가 전하고자 하는 바와 흘러가는 상황의 맥을 짚어 낸 나는 짤막하게 답을 주었다.
“세작이야.”
“뭐?”
“분명 공작저 내부에 첩자를 심은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올레나가 이 상황에 저리 담담히 굴 리 없어. 달리 선택지가 없었을 테니. 자칫 공녀에게 더한 위해가 가해진다면 언제든지 탈출시킬 수 있는 세작이 공작저 내부에 있는 게지.”
치솟는 불길에 인광처럼 번뜩이는 검의 날 위로 손을 대어 보며 나는 심상히 덧붙였다.
“우리는 그자를 찾아내야 해. 코르푸 위원회에서 심은 첩자니 꽤 오랫동안 공작저에 머물렀겠지. 가문에 대한 코르푸의 간섭은 법도에 어긋나는 법. 그들이 설사 공녀의 탈출에 성공한다 해도 결코 재판에서는 이길 수 없어.”
“코르푸는 당분간 공녀에게, 공작 가문에 관여하지 못하겠군. 공녀의 마지막 보루인 올레나도 잡고 공작의 신뢰도 얻는다라. 하지만…….”
무언가 마뜩잖은 듯 에단은 미간을 좁히고 말을 끌었다.
“세작을 어찌 잡지. 코르푸 위원회에서 심었을 정도면 고도의 훈련을 받은 이일 거야. 그 능력도 보통은 아니겠지. 티케의 가호를 등에 업은 자를 우리가 잡을 수 있겠나? 제아무리 코르푸 위원회의 뜻이 나뉘어 끝이 어떻게 된다 할지 몰라도 너무 변수가 많아. 가늠이 되지 않는 판이 되어 버린다고.”
“에단.”
싱긋, 입꼬리를 올린 나는 어느 때보다도 완벽한 웃음을 입가에 그려 넣었다.
“걱정 말게. 나는 절대 읽을 수 없는 판에 발을 내딛지 않으니.”
이민족 전투.
그 험한 전장을 4년간 함께했으니 나는 알려 하지 않아도 니벨론 기사단원들에 대해 절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누가 입이 가장 가벼운지 누구의 검이 가장 날카로운지 어떤 이가 가장 충동적인지. 그리고 그 모두에게 뿌리 깊게 박힌 두려움과 분노는 무엇인지.
티케 일족과 그 각인자로 구성된 니벨론 기사단은 혹여 있을 티케 사냥꾼의 첩자를 골라내기 위해 철저한 검별을 통해 선별한다 들었다. 어찌 보면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으로.
티케 사냥꾼. 그러니까 그들에게 해를 입은 과거가 있는 자들로. 그리하여 빠르게 뜻을 모은 그들이 예상보다 이른 시기에 티케 사냥꾼을 제국에서 몰아내고 안정을 취할 수 있었으나…….
나는 깊어지는 상념과 함께 고개를 젖혀 올려 밤하늘을 무심히 응시했다. 적막한 시각, 반뜻거리던 조각달마저 자취를 감춘 늦은 밤.
과연 이번엔 그게 득이 되려나.
***
깜깜하다 못해 먹칠을 한 것 같은 하늘을 바라보던 데이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궜다.
‘달이 사라진 밤, 시든 백합이 피어오른다.’
서신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올레나 위원장은 새로운 서신을 보내왔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순백의 백지를.
계획의 철회를 뜻하는 그 신호를 데이나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마땅한 그녀의 뜻을 전해 듣고 나서도 데이나는 갑갑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했다. 광막한 밤의 하늘 위로 위태로운 공녀의 모습이 생생하게 피어오른다. 티케 사냥꾼. 저잣거리에 떠드는 숱한 말들도.
정말 이 일이 전부 공작의 함정일까.
무의식적으로 발목을 문지르며 데이나는 그 물음을 떠올려 본다. 위원장은 단연 그가 그리 위험한 수를 쓸 리 없다 단언했으나, 데이나는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그녀의 말을 이전처럼 맹목적으로 믿을 수만은 없는 건 저택에 길게 머물며 데이나가 몸소 느낀 바 때문이다. 공작은 냉철하고 이성적이지만 절대 가문의 명성과 지위에 위해가 될 일은 하지 않으니 코르푸의 뜻이 맞을 수도 있겠지.
허나, 과연 그 여자도 그럴까.
가끔 보면 공작의 것과 꼭 같아 보인다 착각이 들 만큼 서늘한 은안이 복잡하게 엉킨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어떤 때 보면 공작보다 더 합리적이라 가끔은 감정이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행보는 공작과 달리 그 판단의 잣대를 종잡을 수 없다는 점에서 더 무자비해 보이기도 했다.
가끔은 아예 납득이 가지 않기도 했지. 공녀의 방에 못질을 한 거며, 공작의 후계자 선포를 앞두고 술에 절어 일을 망친 것 하며 말이다. 에오르테 후작이 그녀의 유일한 약점이자, 가치의 척도라 여겼는데 최근 들어 보면 그도 아닌 것 같고…….
만약 이 판이 공작이 아닌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어떨까.
공작의 신뢰를 잃은 마당에 그럴 것 같지는 않다만, 깊어지는 상념이 향하는 곳은 자꾸만 하나의 방향이다.
티케 사냥꾼.
작은 단어가 주는 파장은 크다. 정말 그들을 불렀을까부터 시작해 진정 이 땅에 다시 그들이 나타난다면 벌어질 위협까지.
이에 헤어 나오려는 듯 침대에서 일어난 데이나는 불현듯 발목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에 미간을 좁힌다. 조심스레 살핀 발의 상흔은 당연히 이미 오래전 치료가 되고도 남은 흉만이 있을 뿐이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데이나는 이만 침실에서 나와 복도로 보폭을 넓혔다. 평소라면 기척에 유의해야 하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늦은 시각까지 아래층에서 분분히 일어난 티케 사냥꾼에 대한 토론을 빙자한 내기 덕에 모두가 지금쯤 곯아떨어졌을 테니. 누군가에게처럼 그녀에게도 이 일이 그저 우스운 내깃거리가 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득히 눈앞에 펼쳐진 어둠이 마치 그녀의 마음 같다.
나도 참, 오늘따라 왜 이런담.
답지 않게 자꾸만 침잠해 가는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데이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어차피 오늘 밤은 잠을 자긴 글렀으니 통로를 조금 거닐며 머릿속이나 환기시키자, 그런 각오를 다지며.
여리게 흐물거리던 마음이 단단해지고 의식이 맑아질 즘, 별안간 데이나의 낯이 딱딱하게 굳는다.
피 냄새였다.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올레나의 명을 목숨처럼 받드는 그녀였으니. 허나 그 말에도 그녀의 발이 움직이는 이유를 자신도 몰랐다. 티케 사냥꾼. 제 어미가 저를 그들에게 팔아넘긴 그 기억 때문일까. 아니면 갑작스레 심중에 솟구치는 기이한 감각 때문일까. 위험하다는. 지금 엄청난 위협이 이 저택 위에 드리워져 있다는.
의식은 비에 젖은 듯 혼미해지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생각에 어느새 그녀의 발은 저도 모르게 위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택의 로비가 나타나자, 비릿한 피비린내가 짙어진다. 사방에 널린 시체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그 시체 더미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 걸음을 옮긴다.
니벨론 기사단의 견장.
전혀 예상치 못한 물건을 발견한 데이나는 저도 모르게 거친 숨을 토해 냈다.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소리가 지척에 가까워지고 미처 계단 아래로 걸음을 옮길 시기를 놓친 그녀는 로비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는 흉곽은 전혀 진정되지 않았지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분명 올레나의 뜻은 자중을 말하고 있으니 기사단을 보낼 리는 없었다. 누군가 독자적으로 움직인 것인가. 아니면 이것 또한 함정인가. 돌아가는 상황이 가늠되지 않을 즈음, 시체들 앞에서도 담담한 목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졌다.
“무슨 소리지.”
그 음성에, 목소리에 데이나의 머리털이 곤두선다. 위험을 무릅쓰고 시선을 움직여 칠야의 암흑 속을 헤친 것도 그 탓이다. 어둠에 먹힌 시야가 점차 또렷해지고 초조하게 구르던 데이나의 눈이 서서히 커다래진다.
가짜가 아니야.
데이나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막으려 입술을 짓이겼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도 선연한 표식이 그녀의 시선 끝에 있었다. 각인자의 표식과도 같은 그것이.
다 속았어.
죽음의 사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떨려 오는 몸은 더 이상 그녀의 뜻대로 통제되지 않고 마구 날뛴다.
진짜…….
진짜 티케 사냥꾼을 부른 거야.
휑뎅그렁하게 비어 버린 머릿속, 끝없는 심연 아래로 떨어지는 아득한 시야. 귓가에 쟁쟁대는 이명. 그 모든 것을 가로질러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은 무섭도록 서늘하게 가라앉은 은안이었다.
“너였구나.”
코르푸의 첩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문장이 칠야의 밤하늘 속으로 고저 없이 흘러들어 갔다.
***
“이 아이입니다.”
단조로운 음성과 함께 아델이 데려온 하녀는 정확히 7년 전, 그러니까 세이의 발현 사실을 알리기 달포 전쯤에 들인 이였다. 물론 그때도 저택에 사람 하나 들이는 것은 까다롭기 그지없었으나, 세이가 티케 일족이라는 사실을 공표하고 나서보다야 훨씬 간소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그때부터 올레나는 짐작하고 있었단 말인가.
티케 일족이란. 새삼스레 놀람과 분노가 반반 섞인 눈으로 공작은 제 앞에 끌려온 하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과 총기를 잃은 눈빛. 전체적으로 넋이 나간 것 같은 옅은 인상은 도무지 코르푸의 기사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티케가 확실합니다.’
이런 일을 두고 거짓을 말한 자들은 아니지. 티케 사냥꾼들의 단호한 검증을 떠올리자, 공작의 낯은 서서히 흡족한 빛깔로 변모했다.
세작을 잡았다.
한밤중에 제 방문을 두드린 아델이 건넨 뜻밖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 아니, 어쩌면 이 명석한 제안을 들었던 이후부터 줄곧 심중에 드리웠던 희미한 의구심이 사라지자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모양을 띠었다.
곧, 이 소식을 듣고 허탈해할 올레나의 표정을 떠올리자 더욱 그러했다.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진짜로 티케 사냥꾼을 불렀을 줄. 아니, 코르푸와 티케 일족들. 그리고 온 제국의 시선이 과연 그가 정말 티케 사냥꾼을 불렀는가에 쏠려 있을 때, 분열되는 코르푸의 틈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저택 내부의 첩자를 잡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는 걸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공작은 충일감이 깃든 눈으로 그 덫에 그대로 걸려든 이를 내려다본다.
‘허나, 변수가 너무 많아.’
‘코르푸는 분명 가장 강한 자를 보냈을 것입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공작저의 잠입이니. 그 말은 티케 사냥꾼에 대한 분노, 집착 역시 누구보다 큰 자라는 뜻일 겝니다. 한번 이에 휩쓸리면 올레나같이 지혜로운 이가 아니고서야 쉬이 사리 분별을 하기 힘들지요.’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은 어리석은 하녀를, 기사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멸시의 기색이 다분했다.
“그 대단한 능력을 이리 하잘것없이 쓰다니. 차라리 세이의 탈출을, 네 안위를 소망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나은 결과였을 것을. 고작 티케 사냥꾼의 여부를 고심하다니.”
티케 사냥꾼. 초점 없는 공허한 눈동자가 섬뜩한 빛깔로 변모한 것은 그때였다.
“공작, 감히 티케 사냥꾼을 제국에 불러들이다니. 그대 역시 무사치 못할 것이야!”
“그럼 말해 보게. 그걸 어찌 증명할 게지.”
“내가……!”
“직접 가서 폐하께 고하기라도 할 것인가. 지난 7년간 내 저택에 잠입했다는 것까지 전부?”
한층 가라앉은 음성으로 되묻자, 기사의 동공이 닻을 잃은 선박처럼 요동쳤다.
“어리석구나. 너로 인해 코르푸는 가장 큰 패를 잃었다. 이제 그들은 나를 상대로 감히 청원을 하지도 재판을 걸지도 못해. 설령 내가 티케 사냥꾼을 불렀다는 물증이 있어도 말이야. 그러자면, 스스로 제국의 법도를 어겼음을 입증해야 하니.”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가장 중요한 것을 말이다.
“바로 너를 내 저택에 몰래 들인 것 말이다.”
태초에 이 제국이 세워진 이래 만들어진 가장 기본적이고 윤리적인 원칙을. 누구도 지키지 않아 실상 그저 잊힌 조항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만약 들킨다면 그 어떤 범죄도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 그것을.
“위원회가 가문에 간섭할 수 없음은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
각 가문은 결코 다른 가문에 간섭할 수 없다.
초대황제가 세운 엄중한 법을 입에 담는 공작의 입은 무지한 아이를 가르치는 듯 상냥했다. 코르푸는 그들을 대상으로 청원을 하지도 재판을 열지도 못할 것이다. 그저 가문 간의 문제여도 큰 분쟁이 되는 이 일에 하물며 그들은 한 일족의 위원회였으니. 부정할 수도 없는 명백한 세작이 잡혔으니 기껏해야 서로의 과오를 덮자는 협상이 그들이 내걸 수 있는 전부. 승리의 미소를 머금은 공작은 이만 아델을 향해 눈을 돌렸다.
“이 아이를 지하실로 데려가라.”
***
아무래도 무슨 일을 벌일 것 같지는 않았다.
코르푸의 첩자는 그저 묵묵히 공작가의 기사를 따라 걸음할 뿐이었다. 어찌 보면 넋이 나간 것에 더 가까운 것 같은 그녀를 일별한 나는 시선을 기사에게로 옮겼다. 혹여 있을 그녀의 돌발행위와 자결을 미연에 방지하라는, 공작이 넌지시 내게 주지한 일을 그대로 일러 주고는 이만 돌아갈 참이었다.
조금은 기이할 정도로 완벽하고 꼿꼿하던 그녀의 몸이 휘청거린 건 그때였다. 발을 헛디딘 건가. 재빨리 받아 내린 몸은 보이는 것과 달랐다. 시체의 것처럼 차갑게 경직되어 있었다.
“데이나.”
기사 중 하나가 나직이 부른 이름에 여자는 그제야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 한참이고 호흡을 멈추고 있었던 것 같았다. 초점이 조금 맞춰진 눈을 들어 올려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신을 위원회에 돌려줘.”
불투명한 장막으로 눈을 가린 사람처럼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판별하지 못하는 이를 나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축복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니벨론 기사단원이라는 칭호가 무색하게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눈을.
“그 정도 자비는 베풀 수 있지 않나.”
답을 주지 않자,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음성이 계속해서 내게 속삭였다.
“기사단원들 말이네.”
여린 마디와 달리 무지막지한 힘으로 내 팔을 꾹 움켜쥐면서.
“……그래, 그러지.”
짤막한 긍정의 답이 떨어지고 나서야, 여자는 긴장과 불안으로 뻣뻣해진 몸을 푼다. 다시 몸을 일으키고 매무새를 바로 한 그녀는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보폭을 넓혔다.
“아마 제이타 위원이겠지.”
기사들을 보낸 이 말이야.
나직한 음성이 돌계단 위에 울려 퍼진 건 막 내가 몸을 돌려 저택 로비로 향할 즈음이었다. 잠시 걸음을 멈춘 나는 그저 침묵한 채 마저 걸음을 옮겼다.
“기사의 상태는 어떠니.”
불쑥 들려오는 공작의 물음에 지하실로 가는 계단에 머물러 있던 의식이 제자리를 찾았다. 느리게 깜빡이는 동공 사이로 내실의 풍경이 하나둘 흘러들어 왔다. 오전의 햇살이 들이치는 집무실. 다행히 서류에만 시선을 고정한 공작은 찰나의 붕 뜬 적막을 알지 못한 듯했다.
“나쁘지 않습니다. 헛생각을 할 것 같진 않습니다.”
“의외로군.”
내가 계속해서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양 자연스럽게 침묵을 메꾸자 돌아온 것은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 줄 알았는데.”
유리창을 투과한 빛기둥에 의아한 듯 깊게 팬 그의 미간이 선연하게 도드라졌다. 의식적으로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을 꺼려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제이타 위원이 올레나의 명을 어기고 기사들을 보냈다, 그리 여기는 것 같습니다.”
잠시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여닫던 공작이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올레나가 들으면 아주 기절할 소식이구먼.”
어찌나 크게 웃었던지 눈가에 맺힌 물기가 내게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래, 그럼 그리 알게 내버려 둬. 그래야 죄책감이 덜어진다면, 해서 허튼짓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로서도 나쁠 게 없으니.”
“알겠습니다.”
다행이라 해야 할까. 불행이라 해야 할까.
집무실을 나서 내 방으로 이어지는 계단 아래, 간밤의 일이 벌어진 로비를 무심히 내려다보며 나는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이치는 상념을 다시 들춰 보았다.
그 여자는 전날 밤, 위원들도 기사단원들도 그 누구도 올레나의 명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저를 빼고 모두 자리를 지키고 인내했다는. 로비에 널린 시체들과 피비린내는 그저 내가 그녀를 혼돈에 빠트리기 위해 만든 아주 얕은 수였다는 걸.
데이나.
코르푸가 선택한 용맹한 기사를 한낱 필부에 불과하게 만든 건 무엇일까. 더없이 엄청난 축복을 받은 이를 이리 진창으로 이끈 것은. 티케 사냥꾼를 기민하게 발견한 실로 놀라운 그 감각으로 어째서 시들어 버린 제 수목도 거짓 사체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나.
그녀를 이 위로 이끈 건 무엇이었을까.
헛헛한 물음이 공간으로 흩어지고 시선의 끝에는 그저 재물에 눈이 먼, 불한당들로 보이는 이들만이 로비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우리를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그래, 항상 두려움이다.
***
올레나 위원장의 집무실에는 오늘도 위원들로 북적였다. 공작가에서 첩자 노릇을 하던 데이나와 연락이 두절된 지 꼭 이틀 만이었다.
“몸을 사리는 게 아닐까요.”
누군가가 조심스레 건넨 문장에 올레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디 그 신분이 노출될세라 자주 연통을 갖는 건 아니었지만, 근래 들어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며 자주 신호를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나가 자신의 수목인 아이리스의 수술을 떼어 올레나가 보낸 릴리를 통해 그녀에게 전달하는 형식으로.
허나, 이틀 전부터 빈손으로 돌아오는 릴리가 급기야 오늘은 시든 수술을 물고 오자, 결국 올레나는 위원들을 호출할 수밖에 없었다.
“발각된 것이 분명합니다.”
릴리의 투명한 날개를 찬찬히 어루만지던 손을 거두어들이고 올레나는 차분한 눈으로 위원들을 직시했다.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집무실을 서성이던 위원 하나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음성으로 목을 울린 건 그때였다.
“허나, 어떻게. 모두가 자중하기로 하지 않았소. 이리 우리가 뜻을 같이하는데 그런 변고가 생기는 게 가능한가.”
“누구도 배반한 자가 없다, 헌데 세작이 잡혔다라…….”
그 말을 올레나가 세 번쯤 반복했을까. 참다못한 누군가가 날 선 어투로 침잠하는 공기를 찢었다.
“지금 우리 중 누군가를 의심하는 게요!”
“그게 아닙니다, 위원님.”
격양되어 가는 공간을 다독이는 올레나의 음성은 더없이 차분했다. 그럼에도 미미하게 끝이 떨리는 건 어찌하지 못했다만.
“정녕 이게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까.”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말. 길어지는 침묵 속 올레나의 갈빛 눈에 깊이 깔린 어둠의 그림자를 알아챈 위원 하나가 단말마를 터트렸다.
“설마……!”
“그래요, 그들이 나타난 겁니다.”
티케 사냥꾼들이.
***
“아올리스에 다시 오게 될 줄이야.”
태양이 작열하는 정오의 시각,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미소를 그리며 사내 하나가 공작저의 로비에 발을 디딘다. 먼저 제국에 보낸 선발대들이 도착한 지 사흘 만에 나타난 그는 한때 아올리스의 티케 사냥에 선봉장이었던 아몬.
“올레나, 그 여자가 이 소식을 듣고 어떤 표정이었을지…….”
다시 아올리스에 들어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는 그들은 엄청난 병력을 몰고 나타난 것이다.
“보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군.”
공작가의 고담한 저택을 담고 가늘어지는 눈은 제비꽃을 연상시키는 짙은 보라색이다. 얇은 옷감으로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다부진 구릿빛 피부와 나른한 억양. 이국적인 내음이 물씬 풍기는 모양을 감출 생각이 없어 보이는 사내는 제게 진득하게 달라붙는 시선들을 헤치고 누군가를 찾는다.
“또 보는군.”
달빛을 머금은 듯 짙은 은안을.
“아델리아 공녀.”
아올리스 제국의 공작 가문, 그곳의 후계자를.
그 주인이 제 친딸을 버리고 양녀를 들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진정 공작이 미친 줄 알았다. 이 광활한 대륙에 티케를 갖고 싶어 하는 자들은 차고 넘치게 보았어도 손수 굴러 들어온 복을 내치는 위인은 또 처음이라. 그것도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발현한 티케, 각인도 하지 않은 때 묻지 않은 보석이라 칭해지는 이를. 아올리스 제국의 공녀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대륙에 파다하게 퍼졌다. 놀랍게도 이른 발현 시기에 대해서 또한 그런 이가 버려졌다는 점에서. 그날 그가 얼마나 통탄스러웠던지. 아올리스가 그들이 쉬이 드나들 수 있는 땅이었다면, 올레나 그 여자만 아니었다면, 공녀는 벌써 제 먹잇감이 되었을 텐데.
‘아몬 헤파트.’
그때 그 여자가 나타났지.
‘당신이 맞나.’
얼음의 결정으로 빚어낸 것 같은 여자가.
가끔은 말이다. 세상일이 이다지도 쉽게 느껴질 때가 있어. 태양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모두가 그의 발아래 허리를 굽히는 기분. 제게 축복을 주는 이름은 모를 아량 깊은 티케를 찬양하며 아몬은 그날 대양을 건너 이곳에 도착했다.
아올리스.
그가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광명의 땅에.
“세이의 안위를 그들이 해하려 들어 이를 막고자 당신들을 부른 것으로 입을 맞추지.”
붉은 계열로 장식된 응접실, 그 한편에 걸린 공작가의 가족 초상화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아몬은 달깍거리는 찻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음성에 눈을 돌렸다. 뒤바뀐 풍경 속 시야를 가득 메꾼 이는 방금까지 그림 속에 갇혀 있던 미중년의 사내다. 고작 염료 따위로는 담을 수 없는 우아함과 서늘함을 품은.
철혈의 베르니.
“당분간 코르푸는 제가 여길 온 걸 알고도 쉬이 나서지 못할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바랐더라면 저런 병력을 끌고 오질 말았어야지.”
되돌아온 문장에는 뼈가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만,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야 없었지. 올레나의 지도하에 흔들림 없는 단 하나의 뜻을 고수해 온 아올리스의 코르푸 위원회. 그들은 쉬운 상대가 아닐뿐더러 조금의 틈도 나비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몬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아올리스에서 분란이 꽤 클까 염려되는군요.”
“그렇겠지. 허나, 모두가 코르푸와 뜻이 같은 건 아니야. 누구도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어느 가문이건 티케를 원하지 않겠나. 지금껏 올레나가 애써 왔다만, 그건 막을 수 없는 흐름이야.”
당연한 말이었다.
어느 누가 살아 있는 여신을 갖고 싶어 하지 않을까. 또 어느 누가 살아 있는 보물을 갖기 위해 주저할까. 그게 티케 사냥꾼, 그들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이 대륙에 뿌리 깊게 내려 사라지지 않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항상 티케를 원하고 또 원하고 원하니. 게다가 아올리스는 지금 변혁의 시기. 새 물결이 들이닥치고 있지. 구귀족들과 달리 명예와 윤리에 얽매여 있지 않은 신흥 세력들은 그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이다. 푸른 미래를 꿈꾸는 이처럼 아몬의 입가에는 짙은 웃음이 걸렸다.
“아올리스의 베르니 공작님께서 제게 이런 말을 하실 줄이야. 십 년 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 했습니다.”
“상황이 많이 바뀌었잖나.”
아, 공작가의 양녀.
나직이 중얼거린 아몬은 지금 생각해도 황당한 그날을, 그러니까 공작가의 양녀라는 소식을 들었던 때를 회상해 보았다.
“솔직히, 그때 그 소식을 듣고 공작님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여겼지요.”
“지금은.”
물음에 피식, 웃음을 흘린 그는 눈을 올려 공작의 어깨 너머에 펼쳐진 초상화에 다시 한번 시선을 준다. 전체적으로 옅은 인상을 풍기는 공작 부인 앞에 선 공녀는 모녀지간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직 공작만을 빼다 박은 듯했다. 누가 봐도 베르니의 공녀라는 걸 모를 수 없도록.
‘아올리스로 들어올 기회를 그대에게 주지, 아몬.’
헌데 왜일까. 저 앳된 소녀보다는 차라리 그 여자가 공작을 더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글쎄요, 지금 마음 같아선 아델리아 공녀의 발에 입을 맞추고 싶은 심정이지요.”
느지막하게 벌려진 아몬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건 그 여자를 향한 군더더기 없는 찬사의 말이다.
“첫 타깃은 누구입니까.”
아올리스의 입성과 올레나에 대한 분노로 한껏 무르익은 대화 주제는 술이 당연하다는 듯 다음 수순으로 이어졌다.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글쎄.”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은 아몬은 부하의 물음에 대답 대신 잎담배를 입에 물었다.
“물론 마음 같아서야 당장 올레나 그 여자의 저택으로 쳐들어가고 싶지만.”
하얀 입김 같은 연기와 함께 흘러나오는 문장에 곧, 응접실 안에는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물살처럼 번졌다. 그 소음들의 리듬에 맞춰 아몬은 길게 연기를 들이마셨다.
올레나.
하나의 대륙이 일곱 제국으로 나뉘고 찾아온 대혼돈의 시대. 저마다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다투는 제국의 주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그들의 발 앞에 머리를 숙였다. 혼란한 시국에 제 입지를 확실히 다지기 위해 필요한 건 마르지 않는 축복이었지.
그때 세상은 아름다운 노래였고 그들은 그 곡조 앞에 자유로웠다 들었다.
올레나.
적어도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제국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 가며 피의 시기가 끝을 맺자, 여러 제국에 나뉜 티케들은 하나둘 뜻을 모으기 시작하고 그들을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낸다. 그중 단연 돋보였던 건 아올리스의 올레나. 그녀가 이끄는 코르푸 위원회가 티케 사냥꾼을 자신들의 땅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자 다른 제국들 역시 너도나도 이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모든 제국이 성공하진 못했으나, 그렇다고 그들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은 절반으로 줄고 세 제국이 그들의 입국을 금했다. 그러니 그들이 그 이름 앞에 그리 이를 갈 수밖에.
“올레나라…….”
낮은 읊조림이 공허하게 내실에 번지자, 술에 취해 흐릿하던 수십 쌍의 눈들에 하나둘 광폭한 빛깔이 스친다. 명만 내려 달라, 그럼 오늘 당장이라도 그 여자의 숨통을 끊어 놓겠다. 점점 격양되어 가는 내실의 공기를 내리누른 건 비스듬히 기울인 아몬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단조로운 문장이었다.
“그럼 너무 싱겁지 않나.”
뜻을 알 듯 모를 듯 한 문장 덕에 삽시간에 고요해진 공간 속, 두런두런 눈치를 보던 부하 중 하나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허면, 아올리스에 있는 적당한 티케들의 목록을 추려 볼까요.”
대답 대신 잎담배의 재를 잔에 털어 넣은 아몬은 뻐근한 목을 뒤로 젖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
“그럴 필요 없어.”
짧게 말을 덧붙이며.
“이미 정했으니까.”
공녀.
아올리스의 첫 등장을 화려하게 장식할 타깃으로 가장 적당한 건 그 소녀였다. 접근하기도 이목을 끌기도 좋았으니.
황금을 녹인 것 같은 금발과 심해보다 짙푸른 눈. 섬세하게 한 올 한 올 그려진 초상화의 그림을 떠올리며 아몬은 응접실 밖으로 보폭을 넓혔다. 마치 짐승이라도 보는 듯 눈길조차 부딪치기 꺼려 하는 저택의 사용인들을 지난 그의 움직임이 멎은 곳은 저택 한편에 마련된 정원의 테이블이었다. 정확히는 무성하게 군락을 이룬 수목들을 응시하고 있는 공작가의 또 다른 공녀.
햇빛 한 점 들이차지 않게 얼어붙은 낯을 한 여자와 싱그러운 수목이라.
너무나도 이질감이 드는 풍경 속 왜 그 어린 공녀가 첫 번째 타깃이 되어야 하는지의 이유를 떠올려 본다.
‘아올리스에 들어갈 기회라…… 나쁘지 않다만, 먼저 본인을 소개하는 게 예의가 아닌가.’
‘……나는 아올리스 제국의 공녀.’
깊게 내려진 베일,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이라곤 실려 있지 않은 높낮이 없는 음성.
‘아델리아…….’
그 음성을 타고 흐르는 단어를 듣는 순간,
‘베르니.’
섬광같이 강렬한 직감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지.
공작가의 양녀. 위태로운 그녀의 신분과 흐름을 읽을 수 없는 아올리스의 정세. 거기다 불분명한 티케들의 신호, 가늠할 수 없는 앞길에 부하들의 마뜩잖은 눈길이 거셌지만 이를 제치고 단박에 그녀의 제안을 수락한 건 그 까닭이다. 그 잊을 수 없는 감각 때문에.
이 여자는 분명 공작이 될 거다.
핏물로 뒤덮인 땅을 밟고 부취를 넘어 기어코 공작이 되고야 말 거다.
철혈의 베르니가.
다시 한번 그 감각을 떠올린 보랏빛 눈동자는 저물어 가는 낙조도 깃들지 않은 은발을 담고 더욱 섬뜩하게 빛났다.
아올리스의 베르니 공작가와 연을 맺는다면 올레나의 명줄은 이미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셈. 아몬은 주저 없이 남은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굳이 함대까지 끌고 올 필요가 있었나.”
이미 기척을 느꼈는지 아델리아 공녀는 어린 묘목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히 목을 울렸다.
“너무 감정이 앞서 그런 것이니 넘어가 주지.”
“말이라는 건 참 헛되고 무용해. 나는 차라리 혈맥을 끊어 제 결백을 증명하는 쪽을 선호하지.”
“이런, 허나 내 목숨은 제법 귀해…… 대신 다른 걸 바치지요.”
무엇을. 한층 깊어진 눈매는 그리 말하는 듯해 아몬은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공녀.”
짤막한 단어에 은안 위에 길게 드리워진 눈시울이 일순 미세하게 떨렸다. 착각인가. 그가 이를 확인하려 눈을 가늘게 뜨는 사이, 아델리아 공녀는 무언가를 가리려는 듯 고개를 반대쪽으로 틀었다.
“……그 아인 이미 산송장이나 다를 바 없는데.”
부자연스러운 동작과 달리 찰나의 적막을 메꾼 문장은 유려하다. 아몬은 불현듯 치솟은 물음은 뒤로하고 제게 주어진 문장에 충실히 답했다.
“그렇다고 해도 공녀는 엄연히 공작가의 적녀. 양녀가 공작가의 후계가 되려면 마땅히 적법한 후계자가 있어 득이 될 것은 없지 않을까 싶은데. 그대의 뜻은 어떻소, 아델리아 공녀. 공작이야 제 핏줄이니 이런 방법밖에 없다지만, 그대는 조금 다를 듯한데.”
“공작가에 관심이 깊은가 보오.”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발현한 티케. 아올리스 제국의 공녀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어디 티케 사냥꾼이라 하겠나. 이 광활한 대륙에 티케를 갖고 싶어 하는 자들은 차고 넘치고 공녀는 그들에게 때 묻지 않은 보석이니. 각인도 하지 못했으니 그 관심이 오죽할까.”
공녀를 갖기 위해 줄을 선 늙은이들이 제법 많다고.
낮게 덧붙인 말, 아델리아 공녀의 바로 앞에 가지런히 심어져 있던 어린 묘목이 때아닌 가뭄을 만난 것처럼 바싹 메말라 땅으로 허리를 굽힌 건 그 순간이다.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질 것 같다.
잡초와 흙으로 뒤엉킨 바닥에서 타들어 가는 잎담배의 수가 하나에서 둘로 또 둘에서 셋으로 바뀔 때까지 아몬의 판단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아.
제법 단호한 결론을 내린 아몬은 이제는 몇 개째인지도 모를 잎담배를 입에 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까지 그가 앉아 있던 공작저 정원의 티테이블이 그런 그의 움직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휘청였다. 아몬은 아이들 소꿉장난처럼 자그마한 테이블을, 얼마 전 그곳에 자리하고 있던 아델리아 공녀를 떠올려 본다.
그날 이후 아델리아 공녀의 모습은 저택에서 쉬이 볼 수 없었다. 마치 어딘가로 사라진 것처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그의 제안에 반색을 표할 줄 알았는데.
옅은 한숨과 함께 저택의 로비로 보폭을 넓히자, 바싹 뒤따라온 부하는 가라앉은 그의 기분을 모르지 않는지 열심히 종알댔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형님. 아델리아 공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제안을 거절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그 마음은 가상하나 그닥 도움은 되지 않는 문장들을 귓가에서 흘려보내며 아몬은 머릿속에 부유하는 상념들을 하나둘 꺼내어 본다.
선박을 타고 아올리스에 도착할 때만 해도 그 역시 부하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공작가의 양녀. 그녀가 공녀와 사이가 좋을 리 만무하니, 곧장 그와 손을 잡으리라. 이번 판에 그를 끌어들이는 무리한 수를 둔 것 역시 그 일환이라.
하지만 뭔가가…….
아몬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며칠 전만 해도 튼튼하게 여물던 어린 묘묙은
세월에 질린 노쇠한 고목처럼 새까맣게 변모한 채 땅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뭔가 조금 이상하지.
모르스 일족. 그들이 기분이 상하거나 좋지 않을 때는 그 지나간 자리에 살아남은 생물이 없다지. 어디선가 들어 보았던 말을 떠올리며 아몬은 마저 걸음을 옮겼다. 아몬이 여자를 마주친 건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난, 어느 새벽녘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때 그 정원에서.
“아델리아 공녀.”
저 멀리서 움직이던 제 기척도 눈치챈 여자가 공기를 흔드는 부름에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였다. 그가 두어 번 더 목을 울렸을까, 잿빛 눈이 그제야 반응했다. 흐르듯이 그에게로 닿은 눈에는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당황한 기색이 깃들어져 있었다.
부유스름한 여명의 빛살 아래 드러난 여자의 낯은 어둠에 갇힌 것처럼 그늘져 있었다. 이번 일로 공작이 직접 회담에 데려가 그녀를 적법한 후계자로 인정했다는 엄청난 소식이 무색하게. 한숨도 자지 못했나. 눈 밑에 드리운 거뭇거뭇한 빛깔과 창백한 얼굴을 차례로 살피던 순간, 아델리아 공녀가 고개를 외로 틀었다.
“무슨 일인가.”
“이리 날이 좋은 날 밖으로 걸음하는 건 무슨 까닭이 있던가.”
푸른 벽지를 발라 놓은 것처럼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아몬이 심상히 던진 말에 그에게서 등을 돌린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괜찮나.”
잔떨림이 느껴지는 그 어깨 위로 손을 뻗은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괘념치 말게.”
허나, 무겁게 가라앉은 공간 속 맞닿은 살갗을 뿌리치는 소리는 크다. 유난은. 작게 헛웃음을 지은 그는 알았다는 듯 한걸음 물러섰다. 공녀의 일은 어찌할 셈인가 물으려 했더니 오늘은 아무래도 때가 아닌 듯했다. 하늘은 쾌청하고 공기는 맑아, 자꾸만 밖으로 걸음하고 싶었던 까닭 모를 기분이 티케의 신호라 여긴 게 무색하게.
어딘지 모르게 망가진 것 같은 아델리아 공녀를 살피던 아몬은 실망의 빛이 역력한 눈을 거두고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 아몬의 시선이 아델에게 다시 닿은 건 그때였다. 알 수 없는 생채기와 울혈이 가득한 메마른 손에.
***
“마땅한 수가 없겠나.”
고저 없는 내 명령에 시녀는 입술을 짓이겼다. 엉망이 된 손을 보는 눈길 역시 착잡함이 가득했다.
아득한 밤, 수면 아래 잠겨 있던 울림들이 다시 나를 찾아온 건 얼마 전부터였다. 소란한 쇳소리와 함께 소리를 키우면서. 골이 터져라 번져 오는 소음들은 자꾸만 나를 미치게 해 밤잠을 이루지 못한 것도.
자꾸만 술잔으로 향하는 손을, 손님용 객실로 향하려는 발을 막아 세우려 그때마다 후작의 녹색 브로치를 꾹 움켜쥐었다. 여기서 흔들린다면, 내가 잃게 될 게 무엇일지 떠올리려는 듯.
정신 차려. 이번에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공작은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 게야.
그런 유치한 문장을 되뇌며.
으스러져라 움켜쥔 브로치의 뾰족한 장식에 손이 아려 와도, 핏물이 번져도 멈추지 않은 채.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어둠이 가라앉으면 더욱 또렷해지는 잔상들을 가리려. 그래서일까. 이성이 돌아왔을 땐 이미 손은 너덜너덜해진 채였다.
예리한 자다.
이리 엉망이 된 손을 그저 지나칠 리가 없다. 손에 닿던 진득한 시선, 알 수 없는 서늘한 보랏빛 눈을 떠올리며 나는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게다가 그자가 일개 범인인가.
티케의 축복이 항시 그의 등 뒤에 함께하는 사내인데. 조심해야 할 마당에 스스로 책잡힐 거리를 주다니.
“면장갑은 어떨까요.”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머릿속으로 시녀의 맑은 음성이 들이찬다. 눈이 휘둥그레질 묘안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 감색의 불투명한 장갑을 껴 보자 그런대로 손의 상처는 가릴 수 있었다.
간신히 다잡은 마음을 불쑥 나타난 변수 앞에 속수무책으로 어그러트릴 순 없지. 알고 있었으나, 별로 되새기고 싶지 않은 사실을 자꾸만 들이미는 사내를 떠올리며 위태롭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에단이 찾아온 건 그날 저녁이었다.
***
“문제가 생겼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던 하루의 시작과 달리 아델리아 경을 찾아온 에단의 낯에는 심각한 기색이 분명했다. 오전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그는 그저 서늘한 아침의 공기를 마시며 축복받은 하루에 경외를 표하고 있었지. 아델리아 경이 공작과 함께 회담에 참석한다는,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공작가의 후계자가 된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줄곧 그러했다. 회담까지 남은 일수를 곱씹으며 그는 그린 듯한 웃음을 걸고 아침을 맞이했다. 라마타의 지지 않는 태양과 풍요로운 땅. 이 일이 끝나고 갖게 될 밝은 앞날을 꿈꾸는 그에게 들려온 건 뜻밖의 소식이었다.
“에쉬탄의 눈물이 생각보다 빠르게 들통날 거야.”
여전히 믿기지 않은 소식은 입 밖으로 뱉고 나자 더욱 배로 이질감이 들었다. 루트비아 광산 부근에 심어 두었던 이의 말로는 간밤부터 보석 감정단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보석들과는 다른, 어떤 특이점을 발견한 것이 틀림없었다.
“자칫하면 회담 전이 될 수도 있어.”
내실에 번지는 낮은 음성에 여자는 대답 대신 느리게 동공을 여닫았다. 불빛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은안은 짙은 기시감이 드는 빛깔이었다.
“경. 물론 회담 후, 공작이 공식적으로 그대를 후계자로 선포해 공녀의 힘이 완전히 잃기를 기다린 다음 그를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 우리가 직접 움직여야 해.”
언제고 한 번 보았던 그 잿빛 눈에 에단의 목덜미에는 스멀스멀 불길한 예감이 번졌으나, 애써 지워 내고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공녀를 처단해야지.”
“……어떻게.”
느릿느릿 흘러나오는 단어는 물음이라기보단 다가올 무언가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것에 더 가깝게 들렸다.
“일이 틀어지면 그러기로 했잖나 처음부터. 어쨌거나 공작의 치세를 가장 확실히 막을 방법은 공녀를 온전히 제거하는 것뿐이니.”
“……제거라…….”
“자네도 동의한 일이야. 공작이 공녀를 학대했다는 서류들은 내가 일이 마무리되고 코르푸에 전달하겠어.”
돌아오는 답은 어둠에 먹혀 적막해진 공간 속, 아델리아 경은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아까부터 손에 쥐고 있던 브로치를 꾹 움켜쥐고서.
***
에단의 말은 어디 한 군데 틀린 곳이 없었다.
그러니 그저 웃어야지. 이리 틀어지기도 전에 이리 알맞게 방책을 가져왔으니. 내게 위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고 저들의 성질을 건드려 좋을 것도 없으니 적당히 분위기를 맞추면 그뿐이다. 헌데…….
헌데, 오늘은.
새파랗게 청명했던 하늘 때문일까.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부신 금빛의 햇살 때문일까. 아니면 유달리 푸르렀던 정원의 초목들 덕일까. 지난 며칠간 밤낮없이 움직여도 멀쩡하던 의식은 흐릿해지고, 그저 무시해도 될 수위의 문장들이 기어코 신경을 긁고 인내심을 갉아먹는 것은.
정신 차려. 이번에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공작은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 게야.
그런 유치한 주문도 힘을 잃어.
어느새 발은 저절로 움직이고 멈춘 걸음은 다시 거기였다.
공녀가 머무는 손님용 객실.
“공녀님?”
의아한 걸음에 기사들의 눈이 커지고 공기의 기류가 달라진다.
이를 외면한 채 난 가만히 그 문 위에 손을 대어 보았다.
잘해 왔어.
이제껏 잘해 왔어.
실수도 몇 번 했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무너지지 않고 잘 털어 일어났지.
공녀와 후작.
두 단어를 저울에 놓아 보면 그 추가 어디로 기울지는 분명하니.
명확하고 선명해.
구태여 그려 보지 않아도.
그래, 너무나 확실해.
……그런데 아델.
넌 왜 또 여기에 있는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