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괴물 같은 여자
“아델, 준비가 다 됐니?”
문틈으로 흘러들어 오는 공작 부인의 조급한 음성에 상념에 잡아먹힌 의식이 간신히 돌아왔다. 느리게 여닫히는 눈으로 들어온 풍경은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내 방이었다. 아, 그래 방에 도착했었지. 시녀가 드레스를 입혀 주었고. 조금은 흐릿한 기억이 사실이라는 걸 증빙하는 건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언제 벌써 시간이 이리 흘렀는지 해는 벌써 기울어 창틈으로 흘러들어 오는 빛살은 한층 붉어진 채였다. 피곤해서 그래. 그래, 그래서 그래. 답지 않게 붕 뜬 기억의 공백을 지워 내며 흐릿한 정신을 다잡은 내가 표정을 갈무리할 즘, 다시 높은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델?”
조금 있으면 아예 제 손으로 문고리를 열 기세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채도 높은 검붉은 공단이 움직임을 따라 바닥을 스쳤다. 그럼에도 물결처럼 흐르는 주름은 흐트러진 부분 하나 없어 가히 이것이 제국 최고의 마담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실감케 했다. 비껴 들어오는 햇살을 받아 곳곳에 새겨진 황금빛 백합 자수가 도드라졌다.
어지간히도 쓸모없이.
“어서, 출발하자꾸나. 잘못하면 늦겠어.”
성마른 어조로 나를 다그치며 공작 부인이 손을 잡아끌었다. 얼마 전부터 사람을 불러 내 치장에 신경을 쓰던 그녀는 간밤에 라푸나 백작의 무도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었는데.’
이 자리를 빌어 공식적으로 나를 공작가의 양녀로 소개한다는 울먹거리는 설명과 함께.
흩어지던 귀족들의 세력이 다시 공작의 발아래 집결하고 있는 지금은 적당히 그의 세를 과시하기 나쁘지 않은 시기였다. 반쪽짜리이긴 하나 모르스 일족이라는, 모르스의 현신으로 포장되어 있는 내 껍데기는 제법 그럴 듯한 수단이기도 했고.
적절한 때와 적당한 수단.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계산 앞에 그가 기실, 공작가의 부흥을 이끈 장본인임을 실감하는 순간, 오롯이 나를 담은 채 가늘어진 벽안이 막 로비에 다다른 나를 맞이했다.
“붉은 색감이 네게도 잘 어울리는구나.”
과연 그가 만들어 놓은 판 앞에 나는 어떤 수일까.
상황에 맞지 않는 물음을 떠올린 찰나, 공작의 푸른 눈이 일순 짙게 가라앉고 출발 준비로 소란하던 로비가 더 큰 소음 앞에 먹혀 들어갔다.
“나도 갈 거야!”
공기를 찢는 다급한 음성, 잔바람에 휘날리는 품이 넓은 드레스. 계단을 뛰다시피 내려오는 작은 발의 주인은 틀림없는 공녀였다.
변함없는 공작가의 악동.
다만, 그녀를 보는 내 시선은 이전과 같지 않다. 그제야 어째서 공녀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공녀의 머리카락은 델로스의 문턱을 곧 넘을 이들처럼 무성한 백발이었다. 사용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짧은 단말마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거짓이 아님임을 증명하는 듯했다.
소란은 잦아들고 마차는 출발했다.
단란한 세 식구를 태웠다기엔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공작 부인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마차 안에 울려 퍼지고 이를 다독이는 공작의 나긋한 음성이 공간을 메꾼다.
“다시…… 다시 돌아오겠죠? 갑자기 왜 저렇게 변했는지.”
“일시적인 충격으로 인한 현상이라잖아. 너무 걱정 마.”
공녀의 머리가 저리 변질된 것에 대해 그들은 딱히 정확한 연유를 찾지 못한 듯했다. 아니면 그럴 생각이 없었거나. 공작가의 주치의도 알아내지 못한 까닭은 다른 의원들이 알아낼 리 만무했고 그렇다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공녀의 증상을 황실에 알려 약점을 잡힐 까닭조차 없으니. 공간을 채워 가던 공작 부인의 흐느낌은 다른 모양으로 변질되었다.
“난…… 난 요즘 세이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가끔 보면 정말…….”
괴물 같아.
마차에 차오르는 물기 어린 문장을 나는 딱히 부정하지 못했다. 틀리지 않았으니까.
그래, 괴물 같아.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출발한 마차도 이렇게 울먹이는 당신들도 그리고…….
나도.
전부다. 괴물 같아.
풀벌레도 제법 울고 엉겅퀴의 꽃잎이 달빛에 젖었다. 선명한 녹색의 풍경이 펼쳐지다 다시 진보랏빛의 붓꽃이 부드러운 꽃잎으로 변모한다. 차창을 스치는 풍경은 이토록 수차례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 위를 맴도는 장면은 하나다.
눈을 감았다.
어둠이 잠식한 시야를 비웃듯 이지러지며 타오르는 벽안이 점점 선연해진다. 텅 빈 눈동자와 아득히 심연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숨소리. 나를 잠식해 오는 기억들에 벗어나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베르니, 이 고귀한 성을 우리가 나누어 가질 수 없다면.
그 지옥 같은 전장에서 살아남은 것이 너에게 스러지기 위함은 아니었을 것이니.
***
라푸나 백작의 무도회는 아주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서대륙에서 초청한 마술사도 바다 건너 공수한 희귀한 동물도 아닌 바로 공작 가문 덕분에. 시기적절하게 벌어진 공작저의 화제는 너도나도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공작 가문 이야기를 입에 올릴 수 있는 적절한 명분이 되었다. 뜻밖의 화재, 각인의 실패, 당연한 수순처럼 이어지던 이야기는 공작가의 양녀 이야기에 바야흐로 절정을 맞이했다.
“난 정말 공작님이 뭐에 씌인 줄 알았어요, 갑자기 양녀라니. 아무리 그 여자가 모르스의 현신이니 뭐니 하지만 그렇다고 출신 성분이 가려지는 건 아니잖아요.”
귀부인 하나는 눈을 치켜뜬 채 제 말에 동조할 것을 요구하며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루트비아가의 사생아. 그 미천한 신분으로 공작가의 양녀가 된 이야기를. 침을 튀기며 격분하고 또 격분해도 기이한 방향으로 흐르는 대화를 막을 수는 없었지만.
“모르스의 현신이 공작가의 양녀라니…….”
“그럼 이제 모르타 위원회에까지 공작가의 세가 뻗치겠구만.”
감히 이전과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고 있는 공작가의 위상에 대한 두려움과 동경에 대한. 공작은 과연 무슨 생각인지 또 그에게 연줄을 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작가의 후계가 공녀인지 아니면 양녀인지. 물이 오르던 대화에 하나둘 입을 대던 사람들은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 고개를 돌렸다.
“저기 오네요!”
무도회의 주인이 도착한 것이다.
***
“술이 과하십니다.”
무도회장에서 벗어나 테라스 난간 한구석에 기대어 있을 때였다. 귓가를 파고드는 푸근한 어조에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려던 손이 멈칫했다.
“아델리아 경.”
소리를 쫓아 돌린 시선 끝에는 예상했던 이가 있었다. 오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인, 온유한 분위기, 부채에 수놓아진 푸른 나비. 이미 한 번 만난 적 있는 그녀는 브린튼 가문의 올레나 위원이었다.
영문 모를 접근에 천천히 눈을 여닫던 나는 아, 짧게 탄식했다. 뇌리를 스치는 한 단어가 있었기에. 지금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두 음절의 단어.
공녀.
“내가 경에게 속은 걸까요.”
부드럽게 움직이는 갈색빛 눈 기저에는 미묘한 서늘함이 묻어났다.
“공작가의 양녀라…… 삶은 참 놀라운 일들의 연속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화재가 일었다지요? 공녀님은 좀 어떠신가요.”
“글쎄요.”
“공작이 내 출입을 모두 막았어요. 무슨 일이 벌어지겠거니 각오는 했다만…….”
잦아드는 음성 사이로 조금 전보다 탁해진 갈색빛 눈동자가 꿰뚫어 보듯 내게 닿았다.
“공녀를 버리고 경을 택한 모양이네요. 아니지. 이제는 그대 역시 베르니 공녀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공녀님이라. 피식, 허탈함이 스민 입술을 타고 조소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올레나 위원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경.”
어느새 내 쪽으로 한걸음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아까와는 궤가 다른 울림으로 나를 불렀다.
“그대가 공작과 작당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허나, 이를 묵고하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더는 선을 넘지 마세요.
낮게 덧붙인 문장에는 상대를 위압하는 힘이 들어 있었다. 몇십 년간 코르푸 위원회를 이끌었던 수장다운 무게감이었다.
“티케 일족의 힘을 얕보지 마시란 말입니다.”
“공녀가 걱정되시나 봅니다.”
“그렇다면요.”
후우, 얕게 숨을 뱉은 나는 손을 빗살 삼아 느른하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달빛을 받은 머리카락의 결이 흐트러지고 시야는 분명해진다.
“말은 늘 쉽지요. 헛되고 무용한 주제에 제법 힘이 있으니.”
작은 조소와 함께 흩어지는 문장이 밤의 하늘을 건너 마주한 이에게 가 닿았다. 그리고 그녀를 집어삼킬 듯 파고들었다.
“그럼 위원님께서 공녀가 저리 될 때까지 무얼 하셨습니까.”
브린트 위원의 단정하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나는 막 사냥감을 포획한 들짐승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런 주제에 나를 가르치려 들다니. 건방지구나, 브린트 후작.”
“아델리아 경!”
“왜, 이젠 버릇없다 책할 요량인가. 아주 높은 확률로 공작가의 주인이 될 사람인데?”
“이런 무도한 자가. 공녀님이 버젓이 계시거늘!”
“공녀라…… 아까 공녀가 어떠냐고 물었던가. 아주 엉망이야. 머리는 다 하얗게 세 버린 지 오래고 하루 종일 고함만 질러 대지. 원래부터 그 애가 제정신이 아닌 건 알았지만 요즘 보면 정말 미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니까. 그런 아이가 내 상대가 될 수 있을 것 같나?”
“이자가 정말!”
“후작, 그 앨 지키려면 조금 더 분발해야겠어. 내가 이긴다면 나는 절대 공녀를 살려 둘 생각이 없거든.”
공녀라면 아주 지긋지긋해서 말이야.
뒤따른 문장에 올레나의 몸이 냉기를 실은 밤바람을 맞은 것처럼 떨려 온다. 자제력을 잃은 입술 사이로 성난 낱말들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 지키지 못했다 징징댈 시간에 방책이나 찾아봐. 나를 무너트릴 방법 같은 거 말이야.”
***
하얗게 질린 얼굴, 이와 대조적으로 흙빛으로 질린 입술은 우그러진 그녀의 낯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지만, 정곡을 찔린 올레나 위원은 제 할 말만 마치고 돌아선 기사를 막아 세울 수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어둠의 장막을 가로질러 점처럼 사라진 인영을 보며 올레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도통 감을 잡을 수 없구나…….”
걱정하는 건지. 경멸하는 건지. 나직이 읊조리던 그녀가 허공에 손을 뻗으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니, 릴리.”
어디선가 바람의 결을 따라 날개를 한들거리는 나비가 떨어지는 붓꽃처럼 살풋 그녀의 손끝에 나앉은 건 그때였다. 반짝, 짙은 칠야의 밤도 해칠 정도로 밝게 빛나는 푸른 날개에 위원이 다시 굵은 한숨을 토해 낸다.
릴리의 신호는 그녀에게 나침판과 같다. 티케 일족의 모호한 능력을 실체화하는. 당장 보기에 이로운 것들이 훗날 그렇지 않은 일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빈번하니. 그런 수들을 분별해 주는 게 릴리의 역할이다.
“저번이랑 똑같구나. 어째서 그러지?”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애교스럽게 부르르 날갯짓을 한 나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개를 너울대며 다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원망스럽게 보던 올레나 위원의 얼굴에는 이제 깊은 수심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말하지.
그저 주어진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남들 못지않은 부귀와 영화가 기다리니 매양 부러울 따름이라고.
그게 그리 말처럼 쉬우면 좋으련만.
이 길의 끝에 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그리하여 지금 저를 옭아매는 고통도 괴로움도 그저 찰나일 뿐이라는. 그 믿음이 어찌 단 한 번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처럼 말이다.
아델리아 경.
그 이름을 혀끝에 굴려 본 올레나는 적막한 공기를 찢을 수 있을 만큼 깊은 한숨을 토해 낸다. 영 정이 가지 않는 여자였다. 피를 머금은 눈동자며 살기 가득한 얼굴에는 이질적으로 언제든 깨질 것 같은 위태로움이 공존하고 있다. 두려움에 삼켜진 모르스 일족이라니. 세상에 그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그런 여자와 거래를 한 건 허울 좋은 말도 아닌 그저 릴리의 신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저버리려던 찰나, 티케는 그녀를 시험에 빠트리는구나.
공작가의 양녀라…….
이 판이 누구에게 가장 위협이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인데.
“나도 이제 힘이 다한 것인가…….”
쉰이 넘었으나, 여전히 보이지 않는 길을 믿고 따라가는 것은 이토록 두렵기만 한 것이다. 그 끝이 없는 두려움 속에 올레나는 정의는 요원한 밤의 창공 속으로 조심스레 티케의 주문을 입에 담아 본다.
‘모든 걸 쉬이 단언하지 말라.’
과연 이 이야기의 끝은 어디로 치달을 것인가.
‘그대가 티케의 가호 아래 있는 이상, 이제 세상은 늘 그대의 염원을 쫓을 테니.’
누구 하나는 기어코 피를 뿌리고 말리라는 선득한 예감을 애써 떨처 내며.
‘설령 어긋난 조각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
이만하면 되었다.
모였던 이들을 하나둘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고 있었다. 무도회의 끝을 알리는 저속하고 난잡한 행위들이 시작되자 공작은 한 무리의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부인에게로 다가갔다.
“부인.”
“여보?!”
말간 눈이 그를 담고 부드럽게 휘었다.
“세이가 기다릴 것 같은데.”
다정한 아비를 빙자한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공식적으로는 병색이 깊은 딸이니 적당한 명분이 될 터였다. 그러자 부인을 둘러싸고 있던 한 무리의 노부인들이 탄식을 터트린다. 참으로 살가운 아비가 아닌가, 들려오는 소리들은 주로 그런 류였다.
죄다 머저리들뿐이지.
부인을 무도회 바깥으로 이끌며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실상, 정말 정이 깊은 아비였다면 애초에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을 거라는 논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녕 아무도 없단 말인가. 오늘 같은 날이면 세상은 너무도 그에게 쉽고 우스워진다.
“아델, 어서오렴. 저택으로 돌아가자꾸나.”
멸시에 물든 벽안이 눅지근해진 것은 부인의 높은 음성과 함께 저 멀리 테라스 난간에 선 은발이 저를 직시할 즈음이었다.
한 명이 있긴 하지.
잔웃음이 떠오른 얼굴로 공작은 아델 쪽으로 보폭을 넓혔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술기운 탓일까. 몸을 지배하는 미열과도 같은 감각은 드세지고 상념은 꼬리를 물어. 자식이란 참으로 신기한 존재라는 그런 헛헛한 생각도. 세상 어디에 제게 이런 기꺼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줄 수 있는 존재가 또 있을 수 있던가. 그래서 숱한 고대의 신화들이 탄생한 거겠지. 저보다 더 뛰어난 자식에게 거세당하고 혹은 그런 두려움에 자식을 집어삼키고.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사슬로 엮인 수많은 숙명적 관계들이. 허나, 그는 그리 어리석지 않아. 제 딸이 그에게 선사한 파란을 기꺼이 마주할 준비가 되어있다. 공작은 싱거운 웃음을 흘리며 제 눈앞의 딸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아델.”
달빛이 비껴 일순 푸르게 무젖은 은안 위로 그와 꼭 같은 공작의 눈이 상을 맺었다.
“올레나 위원이 뭐라든.”
톡톡 손끝으로 마차 창턱을 건드려 보며 공작은 입술을 열었다. 밤의 바람을 가로지르는 문장은 더없이 부드러울 뿐이었다.
“공녀에 대해 물었습니다.”
공녀라. 담담히 흘러나오는 대답에 공작은 턱을 쓸었다.
올레나.
세이가 힘을 잃고 뒷전으로 밀리는 걸 모를 리 없는 코르푸 위원회는 여태 아무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의외의 행보였다. 올레나가 아델의 뜻에 따라 움직인 것 역시.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아니면, 아직도 그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걸까.
‘딱 맞춰 만개한 백합이라…… 그저 우연이라기엔 너무도 기이한 일들이긴 하지요.’
뭐가 어찌 되었든 조사단이 물러가고 둘의 관계에 대한 그녀의 의견은 허무맹랑한 것으로 치부되어 버렸으니 올레나 역시 어찌할 방도가 없겠지만. 그의 심중을 읽은 듯한 설명이 이어진 것은 그때다.
“아무래도 조사단 일도 마무리 지었고 세이의 병환을 핑계 삼아 올레나의 방문도 제한했으니 조급해 그런 것일 듯합니다.”
“그래, 그럴 게야. 당분간만 행동거지에 조심하거라.”
“알겠습니다.”
세이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 하루가 달리 성장하는 가문의 후계자. 공작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오르는 사이, 어느새 굵은 빗줄기를 가로질러 마차는 저택에 다다라 있었다. 한 무리의 기사들이 열을 맞춰 서고도 남을 만큼의 폭이 넓은 가로수 길, 바뀌는 계절을 맞이하여 몸을 늘어트린 가지들. 그리고 그 너머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저택. 이 늦은 시각에도 저택의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도열해 있는 사용인들이 차례로 보였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그의 왕국이었다.
“공작님.”
집사가 균열과도 같은 문장을 꺼내기 전까지는.
“공녀님이 사라지셨습니다.”
***
비슷한 시각.
에오르테가의 페라비 별장에서 출발한 마차는 어딘지도 모를 길목에 멈춰 섰다. 머리 두 개 달린 독수리로 세공된 새까만 마차가 공작저로 향하는 일은 이제 그리 특별할 것도 없었으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먼저, 제법 늦은 시각이었다는 점과 늘 눈이 휘둥그레질 속도로 내달리던 마차가 멈춰 섰다는 것에서.
“삼촌.”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하늘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테오는 눈길을 돌려 그보다 더 근심 어린 시선으로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나직한 음성에도 미동조차 없는 삼촌은 식은땀에 젖은 이마며 파리하게 질린 얼굴이며 여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으음, 앓는 듯한 신음 소리가 창백하게 죽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던 공자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삼촌,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말도 마부도 지치고 비도 이리 많이 오지 않습니까.”
그 순간이었다. 번쩍, 눈꺼풀을 밀어 올린 삼촌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반쯤 눕다시피 한 몸을 화급히 일으키며 헛손질까지 했다.
“아니야, 괜찮아.”
허공에 헛손질을 하며 후작은 반쯤 눕다시피한 몸을 일으켰다.
“마부는.”
“저쪽에서 말 상태를 확인해 보고 있습니다.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랍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수도에서 별장. 원체도 먼 길을 환자가, 그것도 이런 폭우 속에서. 멀쩡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리 숨기려 했건만. 누나가 공작가의 양녀가 되었다는 소식은 또 어찌 알아냈는지…….
불티가 일다 못해 화마에 휩싸인 푸른 눈을 차마 막을 도리가 없었다.
하아, 긴 숨과 함께 눈을 들어 올린 테오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혹여 또 조카가 돌아가자 채근할세라 삼촌은 아예 차창 밖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테오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제가 공작저에 도착하기 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 더 눈 붙이세요.”
좋아할 줄 알았는데. 항복과도 같은 문장에 돌아온 것은 작은 움직임조차 없는 몸짓뿐. 공자는 다시 의아함이 깃든 입술을 기울였다.
“삼촌?”
그제야 반응을 보인 삼촌은 대답 대신 가늘게 찌푸린 눈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길 봐 보렴, 테오.”
테오의 시선이 간결하게 움직였다. 삼촌의 손끝을 따라 차창 밖의 정체 모를 어느 검은 그림자에게로.
“뭔지 보이니?”
“들짐승이나 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계속 꼼짝도 않고 있던걸.”
“저 짐승도 비를 피하나 보지요.”
“저게 마치…… 내 눈엔…….”
사람같이 보여.
삼촌의 말에 테오는 잘게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도 팔자다. 이런 폭우 속에, 이런 정체 모를 길목에, 게다가 이런 늦은 시각에 누가.
멧돼지나 뭐 그런 거겠죠.
차창 밖으로 다시 짧게 시선을 주고는 그리 대답하려던 테오는 멈칫했다. 정확히는 삼촌이 가르킨 나무 우듬지 밑을 향해서 예상치 않은 물건을 발견하고서. 공자는 다시 한번 가늘어진 눈을 들어 굵은 빗줄기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쏟아지는 빗방울에 흐릿해진 시야에도 선연하게 제 빛깔을 내는 물체는 다름 아닌 신발이었다.
그러니까 저건 적어도 짐승은 아니었다.
마차 한 귀퉁이에 놓여 있는 약상자를 뒤적이는 공자는 답지 않게 헛손질을 했다. 지금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믿기지가 않은 탓이다.
사람이라니.
그것도…….
“약효가 돌지 모르겠구나. 열이 너무 많이 나.”
허탈함이 스민 눈동자가 삼촌과 삼촌의 품에 안겨 있는 소녀를 번갈아 담았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공단 하며 물 한 번 묻혀 보지 않은 것 같은 보드라운 손의 살결. 이를 스치듯 지난 공자의 눈길은 황금 자수로 수놓아진 백합이 장식된 신에 닿았다.
더 볼 것도 없었다.
공녀였다.
웃기지도 않는 상황에 그의 입가에는 황당함과 놀람이 뒤섞인 헛웃음이 터져 나왔고 그 뒤에 남은 건 골속에서부터 번져 가는 무지근한 감각이다. 테오는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흐릿하게 번져 가는 의식을 되잡기 위함이다. 생각을 해야 했다. 생각을. 제법 효험이 있었을까. 둔통이 가신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그 속에 떠오른 결론은 하나였다.
버려야 한다.
“공작가에는 제시간에 도착할 수 없을 텐데…… 인근 마을에라도.”
두서없이 흘러나와 마차 안을 요동치는 삼촌의 음성을 잘라 먹은 공자는 보다 서늘한 눈으로 삼촌을 응시했다.
“내버려 두고 가야 해요.”
소름 끼치도록 무자비한 문장을 듣지 못했는지 삼촌의 손은 연신 공녀의 상태를 살피며 움직일 뿐이었다. 재킷을 벗어 얼어붙은 여린 몸을 감싸고. 손수건으로 물기 젖은 뺨을 닦아 내리며. 공자는 짧은 심호흡과 함께 손바닥으로 느릿하게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사이로 드러난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다시 한번 크게 목을 울렸다.
“삼촌, 공녀를 내버려 두고 가야 해요.”
“……뭐?”
그제야 저와 꼭 같은 눈이 저를 응시한다. 제법 놀란 듯 푸르른 녹안이 다 보이도록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궂은 날에도 빛을 발하는 청신한 빛깔은 그의 것과 놀랍도록 비슷했지만 면밀히 관찰해 본다면 미묘하게 채도가 높고 더 밝은 색감이라고 마리는 늘 말했다. 문득, 그 사실을 뼛속 깊이 실감하는 지금 공자의 음성은 더없이 서늘하게 공간을 가로지른다.
“삼촌,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무려 티케 일족 아닙니까. 자칫하다 공작이 납치로 몰 수도 있음이에요.”
데려갈 수 없다. 아니, 건드려서도 안 된다.
“테오!”
“그자가 어떤 자입니까.”
테오는 이를 아득 물었다. 사냥 대회의 일이 그자의 짓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전이었다. 꽤 큰 사상자를 냈던 사건이 특별한 처분 없이 자취를 감추자, 심중에 내려앉는 선득한 예감에 자초지종을 살핀 그였다.
공작가의 서신을 에오르테 가문만 받았다는 것도 그림자 늑대가 유독 그들의 막사 근처에 맴돌았다는 것도 누나에게 삼촌의 위치를 알려 준 여인의 행방이 기묘하다는 것도. 의아한 구석이 다분한 상황은 꽤 논리적인 가정을 만들어 냈고 뒤따른 누나의 말도 안 되는 행보가 이에 더욱 힘을 실었다. 확신을 얻은 밤, 테오는 삼촌의 서재를 찾아갔다. 그의 열띤 설명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삼촌은 이미 무언가를 예감하고 있던 듯했다.
‘알고 계셨군요.’
허탈함을 담은 물음에 돌아온 건 담담한 문장이었다.
‘그저 짐작이었어.’
삼촌은 미쳤다.
사교계 귀족들이 매양 지껄이던 그 말을 실감한 날, 그럼에도 테오는 침묵했다. 왜 진작 알려 주지 않았냐,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 어리석은 물음들을 삼키고서. 어차피 매양 같은 결론이 찾아올 뿐이니까.
누나, 누나, 누나.
그저 받아들였다. 삼촌의 알 수 없는 집착도 염려도 불안도.
그저 누나라.
그 역시 아끼고 애정해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하지만, 이번은 달라.
아미타 숲에서의 일을, 그날의 일을 잊지 못한 공자의 눈은 어둠에 먹힌 듯 짙게 가라앉았다.
“그리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도 삼촌을 해하려 한 위인입니다. 이번 일을 빌미로…….”
후우, 점차 높아지는 소리를 억누르려는 듯 테오는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
공간을 흔드는 날 선 음성, 굵은 나뭇가지들을 부러트리는 빗줄기보다 맹렬한 문장,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삼촌은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이런, 테오.”
적당히 맑은 하늘에 부는 미풍처럼 부드럽게 굴러떨어진 단어가 공자의 눈에 잔뜩 서린 분노를 다독인다.
“내가 못난 삼촌이구나. 네 염려가 이리 깊은 줄도 모르고.”
“그걸 아시면 제발 좀…….”
마차 안에 차오른 음성은 어느덧 끝에 가서 물기로 젖어든다. 이를 감추려 고개를 외로 튼 조카를 감싸는 후작의 손은 다정하다. 송곳 같은 얼음을 녹일 듯한 따스한 햇기가 감도는 눈빛 역시.
“미안하구나, 자꾸 너를 심려케 해서. 허나…….”
붉어진 조카의 눈시울을 어루만지던 후작의 말은 끝에 가서 기다랗게 늘어진다. 이리 다 자랐건만 여전히 그의 앞에서는 한없이 아이 같기만 한 어린 조카를 어이하면 좋을까. 그 여린 아이가 보여 주는 깊은 애정을, 그리하여 무자비한 빛깔로 변모하는 감정을 후작은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지금 날씨를 생각해 보렴.”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휘몰아치는 폭우 위로 천둥소리가 번졌다. 들썩이며 어깻숨을 쉬던 공자에게도 들리지 않을 수 없는 소리였다. 짭조름한 피맛이 배어 나올 때까지 입술에 힘을 주고 있던 공자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마을은 절대 안 돼요.”
빌어먹을 베르니.
공녀를 당장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테오는 마저 말을 이었다.
“자칫하다 말이라도 새어 나가 공작이 먼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걷잡을 수 없어요. 삼촌은 곧장 별장으로 돌아가세요. 별장 근처에서 공녀를 발견한 거로 입을 맞추고요. 저는 공작저로 가 이 사실을 알릴 테니.”
***
지독한 밤이었다. 농도 짙은 어둠이 깔린 하늘에서는 우르르 천둥이 울리고 대지를 휩쓸어 버릴 듯한 비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쳤다. 달무리 진 흐릿한 달빛은 감히 이기지도 못할 깊은 암흑을 가만히 응시했다.
멍청하긴. 이리 대책 없이 굴다니.
공녀는 각인의 실패로 능력을 잃은 지 오래. 파릇한 생명마저도 무참히 꺾어 버릴 잔혹한 밤을 버틸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티케 일족의 능력을 상징하는 공녀의 백합. 우아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그 식물이 감히 그 이름 붙이기도 민망한 화초로 변모했다는 소식이 그 예측에 힘을 실었다. 공작가의 기사단, 사용인들이 모여 수색을 시작했음에도 누구 하나 섣불리 안도할 수 없는 이유는 그 탓이다.
공녀가 없는 공작가라.
창가에 둔 시선을 거두고는 눈을 감았다.
이 어둠이 지나면, 베르니가는 온전히 내 것이 될 것이다. 그럼 나는 이 거룩하고도 고귀한 가문을 무너트리고 속된 자들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리라. 이 날만을 고대하며 숱한 자들의 피를 뿌린 내가 아니던가.
헌데,
헌데 왜…….
불현듯 들려오는 노크 소리가 번다하던 상념들로 엉클어지고 뭉개진 머릿속을 환기시켰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벌써 몇 번째였던 것도 같다. 티테이블에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목을 울렸다.
“들어오렴.”
공녀의 추적 소식의 진행 상황을 알리는 어린 기사나 하녀라 여겼는데 소리의 주인은 의의로 집사 헤먼이었다.
“이리 방해드려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길게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혼란스러운 낯빛을 갈무리하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에오르테 공자가 기사님을 찾으십니다. 평소처럼 그저 돌려보내려 했는데 워낙 난동을 피우셔서…….”
끄트머리에 가 흐려지긴 했으나. 나는 잠잠한 시선으로 단정한 만면 위 미처 가리우지 못하고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마음을 고스란히 내비치는 그의 눈을 직시했다. 공작은 자리를 비우고 공작 부인은 앓아누운 상태니 어쩔 수 없이 내게 왔다만 내가 이런 일을 처리할 위치가 되는 건가 하는 분위기였다.
“안내하게.”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짧은 문장에 집사의 어깨가 흠칫한다. 이 저택의 후계자가 이제 진정 누구인지 보여 줄 때였다.
보폭을 넓혀 복도를 지나자 계단 아래 로비는 이미 소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샹들리에서 흩어지는 불빛이 로비의 중앙에 벌어지는 소란을 선연하게 드러내 주었다. 난동, 가히 그 단어에 걸맞는 작태를 보여 주는 에오르테 공자의 모습을.
“테오.”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낮지만 분명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로비 안까지 말머리를 세우고 들어온 공자는 해괴망측한 일을 벌린 이답지 않게 덤덤한 낯으로 나를 응시했다.
“저희가 말리려 했사온데…….”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리던 사용인들이 다급히 내게 다가와 입술을 열었으나, 손을 들어 이를 제지했다. 구태여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어찌 일이 지경이 되었는지 무슨 연유로 공자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말이다. 보초를 서던 기사들 몇만 남기고 몽땅 공녀를 찾으러 갔으니 어렵지 않게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천연 대리석 바닥에 남겨진 잘팍거리는 진흙들을 무심히 지나친 시선은 그 흔적의 주인에게로 흐르듯 닿았다.
얘기를 좀 더 하자, 삼촌이 기다리고 있다, 아마 비슷한 말을 꺼낼 입술을 응시했다. 벼락이 치고 선홍빛 입술이 움직인다.
“공녀가 별장에 있어.”
전혀 예상치 못한 문장을 걸고서.
“페라비 별장에.”
푸른 빛줄기가 지나가면서 다시 한번 내리치는 천둥이 그 믿을 수 없는 말이 가져온 적막을 깨트렸다.
참 이상한 일이지.
내 앞길을 막은 이가 그라는 게.
얄궂은 우연일까. 피할 수 없는 필연일까.
좁혀지지 않는 두 단어의 간극을 헤아려 보는 사이, 단정한 손이 내 앞으로 찻잔을 내밀었다.
“이리 날도 좋지 않은데 오는 데 고생했겠어.”
흠결 없는 모양은 여전했지만, 잎을 다 떨구고 얼어붙은 계절을 준비하는 앙상한 나뭇가지와도 같은 손이 테이블 위를 가로질렀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 손을 하고선. 본인 몸이나 간수 잘할 것이지.
구태여 공녀는 왜…….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억누르고는 소리를 냈다.
“고생은 후작님께서 하셨지요, 몸도 불편하신 분이 애먼 이까지 챙기셨으니.”
터져 나온 소리는 의도한 것보다 뾰족했다.
“애먼 이라니…… 네 동생인데.”
일순, 날카로운 검이 폐부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나를 엄습해 온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기어코 짚어 낸 그는 근래 기이하게 흘러가는 상황을 모르지 않는 듯했다.
진창 같은 늪지를 헤매고 있는 나를, 부취와 함께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나를.
뒤따라온 감각은 썩 유쾌하지 않아 답지 않게 뾰족한 말이 터져 나온다.
“저한텐 동생이 없어요. 후작님. 그 애가 능력을 조절 못 하건 망가지건 상관없단 말입니다.”
“아델, 공녀가 아무리 오만하고 거기다 제멋대로여도. 그 앤 아직 아이야. 그리고…….”
아이, 낯익은 그 두 음절의 단어가 한 차례 더 심중을 뒤흔든다.
달칵, 부러 세게 테이블 위로 내려놓은 찻잔은 잔을 비워 그렇다기보다는 후작의 말을 잘라먹을 심산이 더 컸다.
“그저 아이라……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립니다. 저를 구슬릴 작정이었다면 적어도 제 앞에서 그 애를 그리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말았어야죠, 후작님.”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조사단이며 페치오며 거기다 양녀라니. 나는 도무지…….”
“늦게라도 단란한 가족이 되어 보려고요. 왜 그러십니까. 뭐가 그리 이상합니까. 제가 제 저택에 들어가 사는 것이.”
의도와 달리 비아냥거림이 담긴 어투가 목을 타고 흐르자, 후작은 들고 있던 찻잔을 달막거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델…….”
“걱정하지 마세요, 저택으로 공녀를 데려갈 테니.”
“후회할 짓을 하지 마렴.”
기울인 찻잔 너머 염려로 가득한 눈동자를 일별한 나는 그의 낯에 선연한 상흔들을 살피다 이내 동공을 아래로 떨궜다.
“그래요, 그래서 이러는 겁니다, 후작님.”
금빛 의수에 조응된 눈이 다기에 차오른 물빛 위로 번졌다.
“이번엔 후회하지 않으려고요.”
***
아이가 떠났다.
찰나의 머뭇거림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유리창 밖, 자오록한 흙먼지 속으로 사라진 아이를 보며 후작은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날 선 대화가 오간 자리에 남은 것은 상처뿐이다.
그 애가 무엇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 지난 나날, 후작은 끝없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선득한 감각 기저에 깔린 건 무엇일까.
일말의 자책감?
피식, 후작은 헛웃음을 흘린다. 글쎄, 그는 성자가 아니다.
그저 알기에. 그 애가 강하다는 걸 알기에.
강한 사람들은 결국 제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니까.
후작은 깊다란 한숨을 토해 내며 고개를 젖혔다. 피로가 다분히 묻어나는 눈꺼풀을 느리게 여닫자 천정에서 흘러 내려온 불빛이 어둠에 깊게 묻힌 그의 눈을 파고들었다.
그 애가 조금만 나약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그도 그저 이 모든 걸 묵고하고 그 아이를 기꺼이 안아 주었을 텐데. 눈에 선해. 이 길 끝에 결국 무너지고 말 아이가. 스러진 마음을 오롯이 마주할 아이가.
시야를 잠식해 오는 칠야의 밤, 그럼에도 끝내 그 길을 가는 아이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달은 후작은 대신 간절한 염원을 담아 밤의 공간으로 비밀스럽게 그의 소망을 흘려 내 본다.
아이의 마음도 무엇도 되돌릴 수 없다면 차라리 그 애가 나약해지길.
그와 달리 말이야.
그러니까 리오가 사라진 걸 알게 된 건 만물이 풍요로운 계절이 찾아올 무렵이었다. 그 아이의 윤기 나던 금발이 푸석푸석해지고 입술이 메마르며 나날이 수척해 가던 어느 날, 아예 자취를 감춰 버렸다. 저택에서 더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인 라에갈은 어쩌면 아이는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어린 하녀가 그의 침대맡에서 리오가 그린 오두막의 지도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언제고 그 아이가 열심히 설명해 주었던.
‘이 집은 너무 커. 빨리 우리 집으로 가고 싶어.’
‘……그럼, 나도 놀러 가도 돼, 리오?’
‘우리 집에? 거긴 너한텐 너무 좁을걸.’
‘난 좁은 게 좋아. 여긴 너무 커.’
‘우리 집은 아주 아주 좁아. 아빠랑 난 한 침대에서 자는 걸.’
‘한 침대?’
‘그래, 침대는 여기 있고…….’
모두가 깊이 잠든 고요한 시각, 라에갈은 저택의 적막을 깨트리고 걸음을 옮긴다. 끝없는 길을 걷고 마차를 얻어 타면서. 그 끝에 나타난 곳은 어느 시골 마을에 위치한 에오르테가의 별장과 그 옆에 작게 붙은 오두막이었다. 종이에 그려진, 그가 들은 그대로.
문이 열리고 병색이 짙은 사내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얼핏 봐도 짙어 보이는 병색은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정도였다. 그 사내가 말했다.
‘리오? 리오니! 오, 신이시여.’
‘후작님께서 어떻게 허락해 주셨니?’
‘그래, 형은 만났니? 어떠니? 정말 너와 닮았든?’
저를 끌어안는 다정한 품, 코끝에 번지는 리베라의 내음.
그중에 확실한 건 그 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제야 라에갈은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그 애는 제 동생이고 이제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진 거라고. 이후 그에게 남은 건 끝없는 자책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아이의 눈뿐이었다.
***
“그리 심각하시진 않습니다. 원체 응급조치가 잘 되어 아마 며칠 푹 쉬시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의원의 말에 공작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보고를 마친 그는 집사의 안내를 따라 내실을 나섰다. 그제야 한결 여유를 되찾은 공작은 긴 숨을 내쉬며 집무실 의자 깊이 허리를 기댔다. 공간으로 흩어지는 숨결에는 고된 하루를 겪은 자의 노고가 깊이 배어 있었다.
하다 하다 이젠 가출이라.
능력을 잃었다는 소문이 파다한 실정에 백발의 머리까지 덧대어지면 소문은 수습하지 못할 지경에 치달을 거라는 걸 그 애는 정녕 모른단 말인가.
게다가 에오르테 후작이라니.
처음 보고를 받았을 때 공작은 하도 기가 차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우연히 공작저로 향하다 세이를 발견했다는 믿을 수 없는 말에 더욱 그랬다. 딱히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여태껏 그자가 벌인 작태들을 보면 또 그렇지만도 않지.
도대체 무슨 악연이길래.
이리 사사건건 그를 훼방 놓는단 말인가.
심중에 돋아나던 희미한 짜증이 옅어진 건 그래도 어느 정도 일단락된 상황을 되새긴 직후였다.
이만한 게 다행이지.
세이를 발견했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도착한 저택은 이미 아델의 손길 아래 상황이 완전히 정리되어 있었다. 의원을 부르고 세이를 목격한 이들의 입단속까지 마무리된 채였다.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치 않은지 아는 이가 일을 처리한 결과였다.
아찔했을 뻔한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델의 자질에 확신을 갖는 계기로 변모했다. 동시에 버려야 할 패가 무엇인지도. 어느새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을 한 공작은 종줄을 잡아당겼다.
“저택의 내부 수리는 어느 정도 되었나.”
곧바로 모습을 드러낸 보좌관을 향해 공작은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조금 맥락이 없는 물음에 의아한 기색을 보일 만하건만, 보좌관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답을 내놓는다.
“사흘 뒤면 끝날 예정입니다, 공작님.”
깔끔한 문장과 함께 간단명료한 설명을 덧붙이자,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인 공작의 입술은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어 오른다.
“아델을 데려오게.”
***
“나쁘지 않군.”
가늘게 뜬 눈으로 한참 서류를 살피던 공작은 쭉 뻗은 손가락으로 찻잔의 매끄러운 표면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담담하기 그지없는 음성과 달리 청안은 만족스러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
공작을 도와 가문의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한 건 얼마 전이었다. 극심한 폭우로 농작물의 피해를 입은 영지민과 적절히 토지세를 조율하는 것부터 심상치 않은 기류가 도는 서대륙의 정세를 살피는 것까지. 보좌관이 내놓은 여러 서류를 참고해 작성하는 보고서는 그리 어려울 것 없었고 제법 공작의 마음에 들었는지 꽤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곧 황궁에서 정기적인 회담이 열리지.”
찻잔을 들어 올린 공작은 여상한 어조로 운을 뗐다. 정기회담. 정기적으로 제국의 귀족 가문들이 황궁에 모여 정세를 논의하는 자리는 가문의 가주들이 참석하는 게 통상적인 관례였다.
“함께 가자꾸나.”
가문의 후계자와 함께.
“제가 말입니까.”
“그래.”
빙긋 입꼬리를 올린 낯은 표리가 같지 않은 이의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보좌관이 오고 내실을 나선 나는 기껏 갈무리한 낯을 풀어 헤쳤다. 폭풍을 뚫고 돌아온 공녀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아난 것 또한 아니다. 정기회담, 그곳에서 공작이 양녀인 나를 공식적인 후계자로 선포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번이 그 애를 쓰러트릴 마지막 수가 되려나.
심상한 상념과 함께 내딛는 걸음은 왜인지 무겁기만 하다. 그 무게를 애써 감내하며 움직이던 나는 귓가로 희미하게 잡히는 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무슨…….
못질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벽을 부수는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물음이 깊어지는 사이, 울림은 배가 되었고 세찬 진동 사이로 간간이 흘러 들어오는 건 거친 사내들의 음성이다.
“저쪽 창문 위도 합판을 대어 못질해야 해요.”
“아니지, 그럼 길이가 맞지 않지.”
“그래도 공작님께서 필히 양쪽 다 막으라 하셨는데.”
“그러자면-”
열띤 토론을 벌이던 사내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키웠다. 막 숯불에 벌겋게 달구어진 것 같은 연장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두꺼운 융단 위로 떨어졌다.
“……공녀님!”
열기를 두드리던 말소리는 그 외침 앞에 일순 멎었다. 호기심과 두려움이 번갈아 떠오른 수십 쌍의 눈동자가 시야를 파고들었다. 손님용 객실 옆에 가득한 연장과 합판들. 의아하기 짝이 없는 물건들을 짧게 응시한 나는 고요해진 사위를 걷어 내려 입을 열었다.
“지금 뭘 하는 거지.”
“손님용 객실을 폐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 모를 정도로 천치는 아닌데.”
얼음 조각을 입에 문 것처럼 서늘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인부들의 어깨 위로 바싹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누구의 지시인가.”
그 물음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자의 것이었다.
“공작님의 지시입니다.”
공녀의 방이 굳게 닫힌 지 며칠째.
공작가는 평화로웠다.
나의 오전은 공작과의 산책으로 시작한다. 정원 두어 바퀴를 돌며 제국에 벌어지고 있는 정세와 흐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는 대부분 공작의 집무실에서 정무를 본다. 아직은 그의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지만, 공작이 처리하는 업무 전반에 대해 익힐 수 있다.
더할 나위 없이 말끔한 정신으로.
순탄하게 흐르던 하루의 일과가 무너지는 것은 창문으로 들이치는 햇살의 농도가 깊어지기 시작할 즈음이다. 양광과 함께 저택 안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내들이 일으킨 날카로운 균열은 내게까지 전해져 온다.
소리가 들린다.
철물들이 철거덕거리고 웅웅 울리는 낙종의 소리가. 쇠붙이 특유의 진한 녹 냄새와 지표를 뜨겁게 달구는 더운 열기, 저물어 가는 낙조를 부정하듯 사방을 울리는 망치질 소리가 오감을 들쑤셨다. 지나치게 역동적인 울림 속에서 쥐고 있던 서류가 내 손끝에서 부스러졌다. 내실을 진동하는 벼락같은 소리에도 반응 않던 공작의 눈이 가늘어진 것은 그때였다.
“아델?”
숨을 쉬기가 어려워. 숨이 쉬어지지가 않아…….
아득한 심연 어딘가로 떨어지는 느낌이 온몸을 지배하고 아릿하게 저려 오는 명치께에 나는 입술을 짓이겼다.
“아델?”
점점 높아지는 소리에 그제야 머릿속을 잠식해 오는 안개가 걷어진다. 혈맥이 부풀어 오른손에 의해 서류는 이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우그러진 채였다. 그 위로 닿는 공작의 시선은 어느 때보다 깊다.
“안색이 좋지 않구나.”
채도 낮게 가라앉은 벽안, 주름진 미간.
새로 산 상품에 흠집이라도 날세라 염려하는 마음과 닮은 몸짓들. 공작은 판단이 끝났음을 알리는 문장과 함께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하기사, 오후에는 기사단 일정도 있으니 몸이 고단하겠지. 내 그 부분을 미처 생각 못 했어. 아직도 기사단 훈련은 계속 하는 거니.”
“예.”
“내 페치오 위원에게 말을 넣어 보지. 안 그래도 오늘 저택에 방문한다는 참인데. 감히 베르니가의 공녀를 일개 기사단원 따위로 취급해서는 쓰나.”
“그럴 필요까진-”
공작이 휘휘 손을 저어 내 말허리를 잘랐다.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야. 모르스의 현신이다. 입에 발린 소리를 해 대지만, 그자가 어떤 자이니. 내 네 입장을 분명히 밝히마. 더는 허튼 생각을 못 하게.”
“알겠습니다.”
단조롭게 흘러나오는 소리가 깊게 팬 공작의 미간을 부드럽게 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그는 차창에 반쯤 몸을 기댔다. 날이 좋구나, 답지 않게 감상적인 말을 쏟아 내며.
“그렇지 않니, 아델.”
푸른 눈이 나를 담고 가늘게 접혔다.
***
“내일이면 이것도 다 끝이구나.”
소맷자락으로 땀을 훔친 인부는 흐뭇한 얼굴로 완성에 다다른 작품을 바라보았다.
잎망울을 잔뜩 부풀린 백합이 정교하게 자리 잡은 고풍스러운 문. 이를 최대한 해치지 않고 덧댄 합판은 그럭저럭 미관을 살린 채였다.
공작가의 손님용 객실을 폐쇄하라는 말을 들은 건 열흘 전이었다. 크게 의구심을 갖지는 않았다. 귀족 가문에는 별의별 주문들이 많았고 그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 그것이 오판이었다는 생각이 든 건, 그 손님용 객실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을 보게 된 직후였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지. 부리는 이들이 일을 제대로 하나 하지 않나 주의 깊게 살피는 일은 잦아도 기사들이 직접 나서 한낱 인부에 불과한 그들을 감시한다라…….
그뿐인가.
불안한 기색으로 이곳을 힐끗거리는 사용인들이며 가끔 안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 여간 이상한 기분에 정점을 찍은 건 그 여자였다.
공작가의 양녀.
혹은 모르스의 현신이라 불리는 여자. 무어라 칭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무성한 수식어를 가진 무시무시한 여자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들의 작업을 감독하는 행렬에 합류하곤 했다. 망치질이 거세질수록 잿빛 눈은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워졌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무섭던지 수십 년간 연장을 손에 들고 살았던 인부 하나는 그만 망치로 제 손을 찧는 우습지도 않은 실수를 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일도 어찌어찌 결국 마무리가 되는구나. 내일이면 곧 완벽하게 마무리될 객실을 흐뭇한 미소로 응시하며 인부들은 하나둘 사용인들의 용으로 만들어진 보조 계단 아래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꿈에라도 다시 보고 싶지 않던 그 매서운 눈이 계단 복도 통로 끝에서 나타난 건 그때였다.
***
“하하하하, 공녀가 방에 갇혔다며. 이거 아주 물건이야.”
판자촌이 떠나가라 울려 퍼지는 사내의 웃음이 먼지로 뒤덮인 테이블 위를 흔들었다. 풀썩이는 설진을 헤친 그는 이번에는 술기운이 퍼진 손을 들어 테이블을 쾅쾅 내리치기까지 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공작을 속여 넘긴 거지. 양녀라니. 공작가의 양녀라니!”
녹슨 부지깽이와 희끄무레한 식탁보. 바닥에 자리 잡은 깨진 타일들마저 눈을 감고도 그려 낼 수 있는 이곳에서 나는 다른 곳에 온 것처럼 헤매고 있다. 붉은 테라피스트로 장식된 통로와 섬세하게 세공된 육중한 문, 이를 가리는 여러 개의 합판으로 가득 찬 복도를, 그 방을. 끝이 어딘지 모를 수심 깊은 어딘가에 잠긴 것처럼, 그곳을 배회하며.
오늘도 그곳에 갔다.
보초를 서는 기사들도 당황한 기색만을 연신 내비치던 처음과 달리 익숙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작업을 도맡은 인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눈을 타 공작에게 낱낱이 보고됨을 모르지 않지만, 어느새 하루의 일과나 다름없이 자리 잡은 행위를 막을 길이 도저히 없었다. 정신을 차리면 다시 그곳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걸음은 자꾸 그 애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마치 거스를 수 없는 파도처럼. 환청처럼 나를 지배하는 망치질 소리와 깔끄러운 합판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이 머릿속을 맴돌이치며.
지금처럼.
귓가에 웅웅대는 소리를 지워 내려 잔을 비우는 사이, 벌써 술 한 궤짝을 동낸 에단은 불그스름해진 낯을 들어 올렸다.
“그래, 내게도 말해 주지 않을 심산인가.”
잔뜩 취기가 올랐는지 게슴츠레해진 눈이 나를 직시해 왔다.
“무엇을.”
“어떻게 공작을 꼬여 냈는지 말이야. 그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작자를.”
꼬부라진 혀를 탄 것치고는 퍽 예리한 문장이다.
“글쎄.”
어떻게 말을 골라야 할까. 나를 버린 부친이 나 대신 다른 핏줄을 버리게 만들었다, 그리 설명해야 할까. 그럼 에단도 조금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이해가 가려나. 아니면 더 진저리를 치려나.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말없이 비어 있는 잔을 채우자,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의 기류가 미덥지 못했는지 에단은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하긴, 그게 뭐가 중한가. 어차피 공작가는 끝장인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걱정 말게. 힘을 잃은 공녀는 티케도 뭣도 아니라고. 며칠 뒤면 이 지긋지긋한 아올리스 제국을 떠나 라마타의 백야 아래 있을 거라고.”
라마타.
예상치 못한 단어 앞에 머릿속이 휑해졌다. 맥주 잔을 들어 올리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칫하고 시야는 일순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라마타.
혀끝에 맴도는 그 단어가 이제는 낯설다.
후작을 안전하게 지키고 함께 라마타로 떠난다. 분명 이 모든 일의 시작과도 같은 낱말이 말이다. 초점을 잃은 동공을 맞추려 느리게 눈을 여닫자, 점차 선명해지는 것은 사위어 가는 불빛으로도 밝힐 수 없을 만큼 짙은 어둠이다.
너무 멀리 와 버린 걸까. 이제는 돌아갈 길을 잊은 것처럼 그 처음이 흐릿해.
라마타.
잊지 않으려는 듯 단어를 읊조리고 있자, 연거푸 술잔을 들이키던 에단이 별안간 눈살을 찌푸리고는 소리를 낮췄다.
“헌데 말이야, 무언가 좀 이상하지 않나.”
어떤 의문에 빠진 건지 아니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건지 가늘어진 눈으로 빈 잔만 골똘히 바라보던 그는 히끅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을 연다.
“어째서 공작에게 아무런 일이 없는 거지.”
두서없는 문장은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이의 것과 닮았다.
“아무리 각인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공녀가 저리 망가졌는데 말이야.”
“……글쎄.”
잔을 들어 올린 나는 마찬가지로 술기운이 묻어나는 입술을 움직인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들어.”
“어떤 생각.”
“공녀와 함께 스러지는 건 공작이 아닌 나인 것 같다는.”
담담히 흘러오는 말에 에단은 와하하, 웃음을 터트린다. 취했군, 자네. 흐릿해지는 의식 사이로 들려오는 말은 그것이었다.
잔이 비고 다시 차오른다. 라마타. 그 단어가 뇌리에 들이친 이후부터 다시 시작되는 골을 쪼개는 듯한 불규칙한 소음이 그제야 조금 잦아드는 것 같았다.
그런 줄 알았어.
가볍고 모든 게 다 우습다.
어지러운 의식을 따라 걸음은 정처 없이 떠돌고 또 어디론가 향한다.
“나쁘지 않네.”
나를 부축한 시녀에게 나직이 읊조렸다.
“술이라는 거 말이야.”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흘러나오는 숨결에는 짙은 취기가 서렸다.
침대에 몸을 누이고 이제는 익숙해진 백합의 내음이 코끝을 잠식해 올 즈음, 소리가 울리는 건 그때였다. 뇌성과도 같은 소리가 골을 울리고 또 때린다.
“……시끄러워.”
“…….”
“시끄럽다고!”
나를 붙잡는 팔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친 움직임에 무언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을 장소를 향해.
백합과 합판, 한편에 쌓여 있는 연장을 보며 느릿하게 배회한 나는 문고리를 잡았다.
생각보다 문은 쉽게 열렸어.
마치 처음부터 잠기지 않은 것처럼.
그게 우스워 피식, 웃음을 흘리자 검은 인영이 흔들거린다. 눈을 여닫기를 반복하는 사이, 희미한 불빛이 피어오르고 어둠이 감추고 있던 모습을 토해 낸다.
거뭇거뭇하게 변한 백합, 흐트러진 이불보, 그 위를 수놓는 허연 백발 꽃잎보다 더 축 몸을 늘어트린 인영. 빛바랜 머리카락 아래, 가려진 모양이 천천히 드러나고 울혈 진 왼뺨, 초점 흐린 눈이 내게 고정되었다.
입술은 더는 웃지 못했다.
상상해 봤어.
문밖에서.
너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대단한 기세니 이 방 안에서도 그러지 않을까.
아니면, 그러길 바랐던 걸까.
어지러운 머릿속이 정리되기도 전에 입술이 먼저 움직인다.
***
공작가의 경첩은 하루가 멀다 하고 기름을 발라 문을 여닫았다. 물론 그것이 그리 큰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그조차도 알아챌 정도로 공녀의 감각은 기민해진 채였다. 오로지 유모만이 손님용 객실과 이어져 있는 옆 방을 통해 드나들며 그녀를 마주한 지가 어언 며칠째. 고대하던 공녀는 반뜩 몸을 일으켜 심지에 불을 붙였다.
어머니이려나. 아니면 아버지이려나.
반뜻거리던 조각달마저 자취를 감춘 늦은 밤, 어둠에 젖어 깊고 그윽한 내실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그 여자다.
그 괴물 같은 여자.
간헐적으로 흔들리는 호흡, 혼란스러움으로 잔뜩 묽어진 눈동자.
지금 헛것을 보는 걸까.
부연 운무에 젖은 듯 흐릿해진 시야로 흘러들어 오는 도저히 믿어질 수 없는 광경에 공녀는 느리게 눈을 여닫는다. 그 사이, 공녀를 담은 잿빛 눈동자가 까마득히 가라앉았다.
“……왜.”
공기를 흔드는 소리에는 어렴풋이 떨림이 묻어나고,
“왜…… 그러고 있어.”
애써 이를 감추려 치켜올린 턱은 부자연스럽게 날 선 채였다.
“그리 잘난 척은 다 하더니. 왜 맞고만…… 당하고만 있니, 그래.”
이건 또 무슨 수작질인가.
분명 저를 비아냥거리려 걸음했다 여긴 여자는 그 말과 함께 비에 젖은 갈대처럼 허리를 접고 무너진다. 견디기 힘들다는 듯 떨리는 손이 간신히 협탁을 짚어 쓰러지는 그 몸을 지탱했다. 여자의 흐트러진 숨결이 공녀에게까지 전해진 듯했다.
기이한 공기의 기류.
짙은 벽안이 무어라 표현할 길 없는 그 분위기 속에서 맥없이 풀어지려 하던 찰나, 마주한 여자의 겁을 둘러싸고 있는 붉은 공단을 발견하고는 섬뜩한 빛깔을 맺는다.
공작가의 혈통을 상징하는 금색 백합 자수로 덧댄 드레스를.
“누가 맞았다고 그래!”
성난 외침에 눅지근해지는 공기를 찢었다.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알고. 난 너만 없으면 돼!”
서슬 퍼런 기세를 시작으로 공녀는 가슴 한편에서 솟구치는 멍울진 무언가를 몰아내고 광폭한 빛깔을 터트린다.
***
이 괴물아.
얼어붙은 적막을 깨며 분명한 뜻을 전해 오는 음성에 나는 허탈함이 잠식한 눈을 느리게 여닫았다. 한 번, 두 번. 점차 뚜렷해지는 시야로 곧 뇌성이라도 내려칠 것같이 험악한 푸른 하늘이 보인다.
“그럼 그 뺨은 저절로 부은 모양이지.”
“나는…….”
“이젠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니.”
이 집에서 널 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소슬하게 뒤따른 문장에 공녀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는지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런 미친 여자가!”
“네가 맞을 때 누가 한 번이라도 나서든?”
그제야 기세 좋게 타오르던 노기가 움찔한다. 요동치는 동공을 가리려는 듯 파르르 떨리는 공녀의 속눈썹을 내려다보며 성대를 긁었다.
“거봐, 너도 알고 있잖아. 공작도. 코르푸 위원회도. 올레나 위원장도. 아무도. 아무도 널 구하지 않아.”
켜켜이 쌓인 응어리가 거친 숨결을 타고 토해져 나왔다.
“네 몸은 네가 지키는 거야, 세이.”
세이.
그 단어가 우리 둘 사이에 굴러떨어지자마자 귀를 도려낼 듯 매서운 바람과 함께 공녀의 메마른 손마디가 공간을 가른다.
“……감히 네까짓 게 그 이름을 입에 담아! 썩 꺼져!”
씨근덕거리는 거친 호흡, 맵싸한 바람이 때리고 간 듯 얼얼한 뺨.
미약하게 남아 있던 독주의 흔적을 몰아낸 자리 위로 서서히 의식이 또렷해지고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또 하려 했는지 깨달았어.
나약한 감정들로 희미하게 옅어진 낯 위로 다시 어둠의 흔적이 차오른다. 기괴하게 돌아간 고개 역시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게 그리 소원이시라면요, 공녀님. 뜻대로 하지요.”
불에 달군 쇳덩이를 삼킨 것처럼 화끈거리던 울대가 진정된 자리에는 이제 서늘한 음성만이 남았다.
북풍이 한바탕 지나간 것처럼 세찬 소리와 함께 문을 닫고 나오자, 그 앞에 모여 있던 사용인들과 기사들이 서둘러 자세를 낮추고 눈을 내리깔았다. 떠나갈 듯 드높은 고성을 그들도 모르지 않은 듯했다. 빌어먹을. 흐트러진 정신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독한 술이 빚어낸 참극 앞에서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아마, 공작에게도 곧 보고되겠지. 가늘어진 눈으로 차창 밖의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일을 수습할 정도의 여유가 있음을 확인한 나는 빠르게 보폭을 넓혀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니 그러려 했다.
미미하게 남아 있던 술기운이 그 날카로운 쇠붙이들 앞에서 다시 몸을 불린 것일까. 복도 한편에 모여 있는 연장들이 주저 없이 움직이던 걸음을 막아 세웠다. 몸의 방향이 틀어지고 자연스레 연장을 들어 올린 건 그다음이었다.
“……공녀님?”
뜻 모를 행위에 아연하게 떠오르던 누군가의 물음은 곧 뒤이어지는 행위에 높은 탄식으로 변모했다.
거센 망치질 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부술 듯 사납게 통로를 울린다. 넘쳐 흘러오는 파도를 막으려고 발악하는 것처럼. 하늘 위로 솟구친 물머리를 거스를 것처럼. 하얗게 질린 사용인들의 낯빛도 이 일이 가져올 파란도 알고 있지만, 손은 멈추지 않아.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알고.’
그게 그리 소원이라면…….
‘난 너만 없으면 돼!’
이 방에 갇혀 저 백합처럼 말라비틀어지는 것이 그리 소원이라면.
‘썩 꺼져!’
그것 하나 못 들어줄 정도로 비정한 언니는 아니지, 내가.
손에 연장이 떨궈진 것은 안에서도 밖에서도 열 수 없을 정도로 문이 완전히 망가진 직후였다. 고급스러운 융단도 막지 못한 스산한 고철의 울림이 무겁게 가라앉은 통로를 가로질렀다.
나오지 마. 한 발자국도, 한 걸음도.
차라리 거기서 죽든 뭐 하든 홀로 비틀어져 생을 다해라.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허튼짓을 하는 자가 있다면…….”
살갗을 에는 듯한 서늘한 음성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한 공간 위로 내려앉았다.
“먼저 그 목을 내놔야 할 게야.”
***
집무실은 평소보다 서늘한 온도가 맴돌고 있었다. 그 주인이나 다를 바 없는 공작은 앞에 앉은 이를 직시했다. 여전히 온전치 못한 정신인지, 멍하게 풀어진 초점이 샹들리에에서 떨어진 불빛에 잔뜩 묻어 나왔다.
이게 또 무슨 일인가.
말도 안 되는 보고를 받았던 건 천정에서 느껴지는 어렴풋한 진동에 피로로 물든 눈꺼풀을 깜빡이고 있던 찰나였다. 그의 귓가에 울리던 소음이 그저 찰나에 흩어질 무언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음과 동시에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님, 공녀님이…….’
흐려지는 말끝이 미처 문장을 다 맺기도 전에 공작은 가운을 걸치고 보폭을 넓혔다. 또 세이가 무슨 짓을 벌인 것인가.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불을 지르고 검을 쥐고 거기다 가출이라. 현실감이 없던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섰다.
이번엔 무슨 일이려나.
심상한 상념과 함께 3층 복도에 다다른 그는 시야에 잡힌 예상치 못한 인물에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잿빛 머리카락과 그 주인이 들고 있는 흉기와도 같은 연장이 차례로 그의 눈을 파고들었다.
‘아델리아 공녀님이 많이 취하신 듯합니다.’
그제야 적당한 때를 찾아낸 집사가 내놓은 말이 황당한 상황의 얼개를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잔뜩 취해 저택으로 돌아온 아델과 갑작스레 세이의 방으로 향한 기이한 행보, 한참 이어지던 고성과 연장…….
내리감았던 눈을 들어 올린 공작은 더없이 서늘한 눈으로 여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를 직시했다.
‘당장 집무실로 오너라.’
그리고 지금이다.
짙은 술의 향, 거친 숨결.
아델의 몸에 깊게 박혀 있던 취기의 흔적들이 적막한 공간 위로 흘러나와 그 기세를 걷고 나서야 잿빛 눈은 제 색을 되찾았다. 그제야 관골을 꾹꾹 내리누르던 공작은 길게 이어지던 침묵을 거두어들였다.
“왜 그런 것이냐.”
방 안에 내려앉은 소리에는 희미한 분노와 짙은 실망감이 묻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딱히 변명을 늘어놓지 않은 모양새에 더욱 그러했다.
난경을 모면할 의지도 없는 건가. 극한의 상황에서도 항시 처세할 방향을 가늠하고 있던 자식이라 여겼는데…….
심중을 차지하던 미약한 노기가 몸집을 부풀려 감과 반대로 공작의 음성은 낮고 차분했다.
“마지막에 와서 이리 나약하게 구는 게냐.”
***
나약하다라……
그래, 그에겐 그렇게 보이겠다. 이 소란 앞에서도 저리 당황한 낯빛 한 번 내비치지 않는 이는 철혈의 베르니, 그 수식어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기상을 두르고 있었으니.
오래전, 루트비아저로 향하는 마차를 모조리 박살 내라 명을 내렸을 때에도 그는 이러했겠지. 공녀가 머무는 방을 폐쇄하라 지시한 그때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가 내게 바라는 게 이런 것인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이 핏줄에 온기 한 점 서리지 않게 변모하기를. 피식, 흘러나오는 헛웃음에는 사라진 거라 여겼던 독주의 기운이 다시 묻어 나왔다.
“제가 그 애를 베기라도 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쏘는 듯한 시선에도 공작의 벽안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세이를 너머 나를 쓰러트리고 싶은 게 아니었니.”
해괴망측한 문장을 담는 입술 역시 담담하기만 했다.
“헌데 무얼 망설이는 게야.”
냉혹한 사실만을 읊는 음성에 흔들리는 건 도리어 나였다.
그랬지. 이건 다 내 계획이었지.
그 애를 무너트리고 가문의 유구한 명예가 스러지는 걸 공작의 눈앞에 똑똑히 보여 주는 게. 다 내가 짠 판이었는데 말이야. 그랬지. 그랬었지…….
어렴풋이 떨리고 있는 눈가를 눈치챘는지, 공작은 딱딱하게 굳었던 낯을 부드럽게 펴며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델, 사사로운 감정들은 쉬이 일을 그르치는 법이야.”
고개를 기울인 채 나를 내려다보는 눈은 진정 깊은 염려를 담고 있었다.
“나를 넘어서려면 먼저 그 마음을 이겨 내야 할 것이야.”
네 나약한 마음을.
***
아델리아 경의 정기회담 참석은 보류되었고 공작의 신뢰를 잃었다.
간략히 한 줄로 요약된 상황을 전해 들으며 에단은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렇다 저렇다 토 달지 않고 참을성 있게 상황을 지켜보리라 마음먹은 건 분명 아델리아 경이 무슨 방책을 찾아낼 것이라는 굳센 믿음 덕이었다.
그런 여자니까.
어떤 일이 벌어져도 늘 답을 찾아내는 여자이니까. 그 굳건한 생각에 의구심이 돋아나기 시작한 건 며칠 전부터였다. 다 온 걸음이 끝에 와서 지지부진을 면하지 못하게 된 것이 벌써 며칠째.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수도 의지도 내비치지 않은 여자는 대신 하루가 멀다 하고 판자촌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이전과는 영 딴판인 모습이다. 그뿐인가. 그렇게 자주 걸음한 이곳에서는 매양 술잔만 들이켤 뿐이니…….
지금처럼 말이다.
아델리아 경이 비워낸 잔들로 가득 찬 낡은 테이블을 바라보는 에단의 눈은 어느 때보다 심란한 기색이 가득했다. 도대체 저게 다 몇 잔인가. 하나, 둘 빈 잔을 헤아리던 그는 그 수가 열을 넘기자 이만 혀를 내두르고는 눈을 돌려 마주 앉은 이를 응시해 보았다. 막 새 잔을 들이켜는 여자는 과연 그가 알던 아델리아 경이 맞는 것일까.
에단은 빈 잔의 무게만으로도 곧 쓰러질 것같이 위태로운 테이블과 그보다 더 아슬아슬한 경계에 머무르는 것 같은 아델리아 경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끝내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입을 열었다.
“경, 이젠 정말 시간이 없어. 조금 있으면 에쉬탄의 눈물이 자작극이었다는 사실이 온 제국에 퍼질 게야.”
한껏 진지한 문장에도 여자는 그저 차디찬 술잔 위로 응결된 습기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기실, 무언가를 응시한다기보다는 텅 비어 버린 눈에 무언가 차오르길 고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무용하고 또 무용하기만 한 동작에 에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게야.”
갑자기.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음성은 차라리 애원조에 더 가까웠다.
피식, 실없는 웃음을 흘린 나는 손끝을 지나 테이블 위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미 죽은 나무 위로 고여 웅덩이를 만들고 있는 방울들은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흘러만 간다.
나도 그 물줄기에 휩쓸리고 싶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이 이리 고된 일이었던가. 흐릿해지는 의식을 부여잡을라치면 명치께가 저려 와 숨을 쉬기가 힘들어서…….
하얗게 부서지고 상처 입어 끝내 바다에 다다랐다 여겼는데 여태 좁은 강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도. 벗어날 수 없는 궤도 안에서 평생 맴돌고 있다는 것도. 마주하기가 어려워…….
그래서 훈련에만 임했어. 그곳에서는 그나마 머릿속에 들이차는 망령된 상념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피할 수 없는 물음을 앞에 두고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왜 이러는 거냐고.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고.
“……모르겠어.”
그 한참을 돌아 찾아낸 답은 기껏 이것이다. 되묻는 에단의 낯에 가득한 황당한 빛을 보았음에도 다른 마땅한 문장을 골라낼 수 없었다.
“뭐라고?”
“나도 모르겠어.”
그래, 나도 모르겠어.
세차게 타올랐던 마음이 어째서 이렇게 약해지고 옅어지는지. 발치에서 식어 가는 무성한 계절의 잎사귀처럼 몸을 떨구고 마는지.
“에단, 그대가 좀 알려 주련.”
흐릿하게 번지는 음성에 에단의 눈에 허탈함이 스미는 것이 보인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 공녀와 함께 스러지는 이는 공작이 아닌…….
나인 것만 같다는.
내리감은 눈꺼풀 아래 검은 장막이 겹겹이 시야를 가리고 깊은 어둠이 번진 자리에 다시 그 소리가 맴돌이친다.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굉음과도 같은 망치질 소리가.
***
어스름한 사위를 뚫고 소리조차 내지 않는 말이 풀잎을 가볍게 스친다.
바람 소리인가.
모르는 이들은 착각할 만큼 깃털 같은 울림이 왜인지 자꾸 귓가에 울려 후작은 평소보다 더욱 잠이 들기 어려웠다. 묵지근한 몸을 일으켜 들창을 열어젖힌 건 그 탓이다. 아직 가시지 않은 찬 기운이 묻어나는 밤의 공기에는 오늘따라 염도 높은 해수의 내음이 묻어난다. 그의 몸을 한 번 휘감고서 다시 창밖으로 방향을 돌리는 바람의 결을 따라 정원 수목들 위로 눈물을 머금는 것처럼 이슬들이 맺히고 또 떨어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후작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좁혀진 눈망울 위로 그린 듯이 투영된 것은 은파로 반뜩이는 녹음 짙은 정원이었다.
아델.
그 단어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마자, 후작은 사방을 가린 어둠을 더듬어서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왔다. 이미 저택의 로비는 마찬가지로 소란을 눈치챈 조카와 기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너머에 있는 이는 그래, 직감과도 같은 아이였어.
“삼촌, 위험해요. 누난 지금 전혀 제어가 되지 않아요. 당장 모르타 위원회를-”
격양된 소리로 제 앞을 막아선 조카를 스치듯 지나친 그는 아이에게로 보폭을 넓혔다. 거리가 좁혀지자, 짙게 밴 술 냄새가 더욱 깊숙이 코를 파고들고 느리게 여닫히는 눈꺼풀 아래 술기운에 깊이 잠식된 것 같은 눈이 선명해진다. 시든 이파리를 쓸어내리는 바람처럼 낮은 음성 역시.
“……후작님.”
그의 품에 휘청거리며 쓰러진 아이의 뺨에는 물기가 서려 있다. 아마 어렴풋이 바람에서 느꼈던 짙은 소금기는 이 아이의 것이었나 보다, 생각할 즈음 아이가 입을 열었다.
“……공작가는 이제 끝장났어요. 공녀가 무너졌거든요.”
“아델.”
“공녀는 저택에 갇혔어요. 아마 꼼짝도 하지 못할 거예요. 공작가의 기사들이 방을 감시하고 있으니…….”
혹한의 칼바람처럼 날 선 문장 속 진득하게 배어 있는 두려움을 골라낸 후작은 단정한 미간을 좁혔다. 그리 바라고 바랐건만 어찌 아이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그가 예감한 그 길을 가는 것일까. 도대체 이 아이에게 펼쳐진 날들을 얼마나 푸르기에 이리 고되고 아픈 길들만 펼쳐지는 것일까.
“공녀의 방에 못질을 한 건 저예요. 제가 망치로, 직접.”
후작은 대답 대신 가만히 부르트고 물집이 잡힌 그 손을 어루만졌다. 이를 쫓아 잿빛 눈이 천천히 움직인다.
“절 책하시는 건가요?”
그의 손길을 따라 구르던 눈은 잔물결 같은 떨림을 가득 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차피 누구도 그 앨 구할 수 없어요. 공녀는 제 핏줄을 너무도 깊이 애정해 그게 제 숨통을 죄일 줄 알더라고 함께 스러지고자 할 테니.”
후작은 조심스레 그 눈을 다독여 본다.
“네가 친언니라는 걸 공녀도 알게 된다면 아델, 그땐 많은 게 달라질 거야.”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후작님.”
“……아델.”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스스로에게 건네는 다짐과도 같은 문장이 그의 마음을 수런수런하게 하는 사이, 아이는 몸을 지탱하던 마지막 힘마저 잃었는지 허물어지고 말았다. 후작은 쓰러지듯 무너진 아이의 젖은 뺨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달빛조차 제 모습을 감춘 깊은 밤, 어둠은 짙다. 그 짙은 암흑 속으로 후작의 기다란 한숨을 흘러 들어갔다.
***
천정에 새겨진 잔무늬와 침실을 감싸는 엷은 휘장. 낯익은 듯 생경한 풍경에 동공을 여닫고 있자,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날의 청명한 울림이 귓가를 간질였다.
“일어났니.”
소리를 따라 움직인 시야 끝에는 그가 있었다. 한 손에는 둥근 쟁반을 들고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속이 좋지 않을 듯해서.”
내밀어진 찻물 위로 토막 난 기억의 조각조각들이 흘러나온다. 한들거리는 노란 꽃잎처럼 부드러운 목소리, 머리카락을 휘감는 따스한 손의 감각. 남은 파편들을 이어 붙이자, 흐릿했던 시간의 얼개가 뚜렷해지고 낯은 도리어 딱딱하게 굳는다.
“괜찮습니다.”
시야를 가득 메꾸는 자기를 밀어내는 손짓은 매정했다. 그걸 마시기라도 하면 무언가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심중에 차오른 탓이다. 급속도로 냉랭해진 분위기에 후작은 조용히 찻잔을 협탁 위로 치우고는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무언가 말을 고르는 듯한 모양새가 다분했다. 이를 보지 못한 척 꼿꼿이 정면만 바라보고 있던 내가 고개를 돌린 것은 막 내 뺨에 닿는 질긴 시선이 사라짐을 느꼈을 즘이다.
“한동안 보이지 않아 염려했는데 말이야.”
빛살이 가득 어린 유리창을 보며 그가 말문을 열었다.
“아타할케는 맑은 영혼을 기꺼이 한다더구나.”
평온한 어조로 흩어지는 문장 끝에는 지난날 나를 태웠던 명마가 있었다. 그제야 사건의 마지막 조각을 주워 든 나는 하늘 높이 닿은 설산에 부는 바람처럼 서늘한 눈으로 아타할케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베어 버렸어야 했어.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다시 저를 이끈 명마를 단칼에 쓰러트리며 결연한 의지를 다졌던 고대의 기사를 떠올리며 내가 입술을 짓이기는 사이, 아타할케를 일별한 후작은 눈길을 내게로 옮겼다.
“알고 있었니?”
“……멍청한 말인 건 압니다.”
“아타할케를 그리 부르는 이는 너밖에 없을 거다.”
잔웃음을 터트린 후작은 이마 위에서 가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찬란한 오후의 양광 위로 부드럽게 휘어진 그의 눈매가 도드라졌다. 그 눈에 시야가 아물거리고 정신이 흐릿해져 다음 화제로 말을 끌어가는 그에게 속절없이 이끌려 갔다. 옷을 갈아입을 준비를 하는 정원의 수목들과 달라지기 시작하는 바람의 내음. 지나치게 평온하고 안온한 일상들을 입에 올리던 그는 서편으로 저물어 가기 시작하는 해가 눈을 적시자, 입술을 짓이겼다.
“최근엔 이 방에 한 번도 오지 못했어.”
치아에 눌려 뭉개진 소리가 끊어질 듯한 호흡에 실려 흘러나왔다.
“이상하지? 지난 사 년간은 그리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을 들여다보았는데.”
자주빛으로 물든 어스레해진 석양이 내려앉은 어깨는 지는 낙조조차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한없이 위태로워 보였다.
“……당장이라도 네가 저 너머에서 나타날 것만 같아서.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나면 라마타의 태양 아래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어느새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녹음 진 눈동자는 쏟아져 나오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일렁거렸다. 난 차마 그 눈을 더는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아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늦지 않았다고.
한껏 가라앉은 음성은 농이 아닌 듯 진중했다. 헛웃음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황당무계한 말을 하는 이답지 않게.
“한마디만 해 주렴. 그게 힘들다면 작은 신호라도 보내 주렴. 그럼 나는 곧장 너를 데리고 배에 올라타…….”
후작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생채기로 가득한 내 손이 그 끝에 있었다. 이를 가만히 어루만지며 응시하던 그는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다.
“지지 않는 태양이 가득한 땅으로 걸음할 테니.”
오로지 나만을 담고 가득 부풀어 오르면서.
“상상이 가니, 아델. 온종일 내리쬐는 양광을 품은 대지는 과연 어떤 빛깔일지.”
순백의 눈망울이 내게 흐르듯이 닿았다. 오래전,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처럼. 그러나 그때처럼 내게 찾아온 건 가슴을 빼곡히 채우는 충일감 대신 낯익은 두려움이다.
공녀를 쓰러트리지 않으면, 그리하여 공작을 무너트리지 못하면 나는 그를 잃게 되리라.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