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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공작가의 양녀 (7/16)

7. 공작가의 양녀

“여긴 내 방이야!”

불퉁하게 입술을 내민 공녀가 발을 쿵쿵 굴렀다. 지난 몇 년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참 유아기적인 행태였다. 내가 열넷일 때도 저랬던가.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가던 머릿속은 또 한 번 째는 듯한 소음에 가로막혔다.

“귓구멍이 막혔어! 여긴 내 방이라고!”

“세이, 일단 나가서…….”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공작 부인, 성난 짐승처럼 발작하는 공녀. 그 와중에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용인들. 한바탕 촌극이 따로 없다. 예상은 했으나, 그 짐작보다 더 우스운 방 안의 풍경에 나는 공손한 인사까지 겻들이며 퍽 심상한 어조로 그녀를 맞이했다.

“공녀님.”

깊게 숙였던 고개를 들어 살짝 올리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까마득한 분노에 집어삼켜진 푸르른 눈동자였다. 공작가 특유의 청안은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했으나 지금 나를 직시하는 것은 거센 물보라를 일으키며 참을 수 없는 적개심으로 일렁거리는 파도였다.

“나가! 당장 나가라고!”

“첫날부터 사위가 소란스러우면 공작님께서 무어라 하겠습니까. 공녀님.”

“장하다 하시겠지. 제국의 질서를 내가 바로잡았으니. 사생아에게 이런 방이 어울릴 거나 같아!”

“그게 중요합니까. 어울리든 않든 어차피 제 몫으로 주어진 것인데요.”

“네 몫? 이 저택은 다 내 것이다. 나는 공작가의 공녀니까!”

“공녀님,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는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미천한 제게 아량을 베푸신답니다. 명석한 두뇌이시니…….”

아까부터 허공을 가를 준비를 하던 손이 벼락같이 달려든 건 그때였다. 뻔한 전개였고 전쟁터를 나뒹군 내게는 조금의 타격감도 주지 못했으나, 돌아간 고개를 바로하지 않았다. 대신 부풀어 오른 뺨을 매만지며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공작 부인은 나를 도울 기색이 없는 것만은 분명했다. 짐짓 모르는 체 그녀에게 팔을 뻗었다.

“저는 괜찮아요, 언니.”

얼떨결에 나를 부축한 그녀는 흔한 걱정 대신 마른침만 삼켰다. 예전과 달리 내 공식적인 신분이 루트비아가의 사생아만은 아니었으니 제가 취해야 할 태도를 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갈피를 잡지 못한 사이 나는 그녀의 품에 기대 잘게 어깨를 떨며 긴 숨을 내쉬었다.

“다만…….”

길게 끈 말에 공작 부인과 공녀를 뒤따랐던 사용인들의 시선이 몰렸다. 모르는 척 눈을 내리깔고 느릿느릿 입술을 마저 움직였다.

“보는 눈이 많아 그것이 심려됩니다. 여긴 루트비아저도 아니고 조사단들이 모여 있는 마당에…….”

사람들의 시선.

감히 공작 부인의 몸을 흠칫 굳히게 한 장본인은 그 두 단어였을 것이다. 그 시선이 불러올 추측과 무성한 소문들. 경직된 턱과 힘이 잔뜩 실린 손이 내 팔을 죄여 왔다. 이리저리 초점을 잃고 흔들리던 눈동자는 시녀들과 나를 빠르게 스쳐 공녀에게로 고정되었다. 판단이 끝난 단호한 입매에서 높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이…… 어찌 이러니. 이모에게 말이야.”

애처로운 눈빛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공녀였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는지, 공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어둠에 잠겨 흐릿해졌다. 새어 나오는 소리도 매가리가 없었다.

“누가 이모야! 나는…….”

“일단 이리 나와 보렴. 여기는 이모 방이니…….”

아마 공작 부인은 모르지 않을 테다. 그녀는 그리 아둔하지 않은 데다가 제 딸의 고고한 자긍심을 제일 잘 아는 어미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녀가 저리 행동하는 것은 그녀에게 중한 것이 따로 있기에. 그것은 공녀도 공작도 하물며 그녀 자신도 아닌, 성녀라 불리는 그 다정하고도 고아한 단어 하나이기에. 그 단어를 위해 제 딸 하나를 이미 버린 여자이기에.

“여긴 내 방이야! 전부!”

“세이!”

제 뜻대로 되지 않아 악다구니를 쓰던 공녀는 협탁 위에 놓여 있던 화병을 깨부수는 등 한바탕 난동을 부린 후에야 공작 부인의 손에 이끌려 끌려 나가다시피 방을 나섰다.

공작 부인은 잠시 후, 어질러진 내 방에 들어와 짧게 사과했다.

“아델, 미안하구나. 첫날부터.”

“괜찮습니다.”

그쯤 생각했을 테다. 조금 있다 공녀를 달래 주면 그만이라고. 허나 그녀의 딸은 베르니가의 유일한 후계자. 모르헤 기사단원마저 사생아 따위로 치부해 버리고 손을 올려붙이는 오만한 꼬마. 제가 업신여기는 천한 핏줄 앞에서, 사용인들이 모인 상황에서 고고한 자긍심이 얼마나 흠결 났는지 그녀는 짐작조차 못할 테다.

“괜찮기는. 어찌 방이 아직 이 모양이니. 사용인들을 불러 정돈하라 이르마.”

옅게 웃음까지 보이며 그녀는 손수 줄을 당겨 사용인을 부르는 친절까지 내보였다. 그녀 스스로 공녀에게 스멀스멀 번지고 있는 미묘한 균열에 시작을 알린 셈이었다.

***

“계속 이대로 두실 거예요.”

답지 않게 높은 공작 부인의 음성이 공작가의 맑은 아침을 파고들었다. 부부 침실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지난 밤, 미처 보지 못했던 서류를 확인하던 공작은 심상한 어조로 답했다.

“아델이 걱정된다, 보고 싶다 입버릇처럼 말한 건 당신이잖아.”

황실의 행사로 참석하지 못했던 아델과 조사단의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고 있던 부인은 이번엔 무엇이 염려되는지 그늘진 안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입술을 잘게 깨문 부인은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제 마음을 저도 알지 못하는 듯했다. 땋은 머리를 손 안에 굴리며 기다랗게 늘어진 속눈썹이 심란하게 흔들려 보였다.

“외양 때문에 그런 거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공작은 서류에 고정된 시선을 들어 올려 침대헤드에 깊이 몸을 기댄 부인을 응시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꼭 같은 모양을 띤 조각들은 한데 모아 놓고 나니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부드럽고 따스한 인상을 가진 부인과 달리 아델은 더 날카롭고 뾰족한 느낌이 다분했다. 어릴 때부터 미묘하던 차이는 해가 지나자 더욱 짙어진 모양이다.

하기사, 같을 수가 없지. 둘 사이에 흐른 시간은 같았지만, 깊이는 많이 달랐을 테니.

“쉬이 눈치채지는 못할 거야. 원체 그 애를 따르는 소문이 많아 이젠 아델이 루트비아가의 사생아라는 것도 잊은 이들도 적지 않으니.”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에요.”

붉어진 눈시울을 들어 올렸다. 그 어린 날의 자신이 아니라는 듯한 눈빛을 하고. 아델이 그 난리를 치며 사교계를 뒤흔드는 온갖 일을 벌여도 누구 하나 둘의 관계를 짐작하지 못한 것이 불어온 안일함 때문일까. 아니면 자꾸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찾아오는 첫 자식에 대한 미련일까,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지는 그들의 간격을 직감적으로 느낀 공작 부인은 불안했다.

“세이 말이에요.”

“세이가 왜, 이번엔 불이라도 질렀나.”

“여보.”

앙다문 부인이 저를 흘겼다.

“뭐랄까, 요즘 들어 투정이 더 심해졌어요.”

“놀랍지도 않아.”

“아무래도 아델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당신이 가서 한마디라도 해 주면 좋잖아요.”

차오르는 물기, 젖어 드는 음성.

이쯤 되면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 공작은 옅은 한숨과 함께 백기를 들었다. 습기 가득하던 낯 위로 번진 아이 같은 해맑은 미소가 찬란한 오전의 햇살을 받아 더욱 싱그럽게 빛났다.

절대 한숨 쉬지 말 것, 세이의 어깨를 잘 토닥여 줄 것.

주의해야 할 상황과 지켜야 될 사항들을 읊어대면서. 고귀하신 공작가의 공녀는 어찌나 까탈스럽기 그지없는지 그 수가 하도 많아 낱낱이 열거하다 보면 하루가 다 저물 기세인데 연방 종알거리는 입술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때마침 내실을 방문한 유모가 아니었다면 정말 그랬으리라.

“꼭이에요, 꼭.”

“알겠어.”

이마를 좁히며 거듭 약속을 되새기던 부인은 단단히 다짐을 받아 낸 뒤에야 그제야 마음이 좀 놓이는지 하늘거리는 연보라빛 실크자락을 휘날리며 방을 나섰다. 피식, 웃음을 흘린 공작 역시 제가 주어진 임무를 다하기 위해 느릿느릿 보폭을 넓혀 갔다.

예상치 못한 인영이 그의 앞에 나타난 건 그때였다.

“공작님.”

소리의 주인은 방금까지 그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던 빛깔과 닮은 그러나 꼭 같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은회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단정히 땋은 은발과 정갈하게 갖춰 입은 훈련복을 찬찬히 살피던 벽안은 차창 밖에 막 피어오르는 햇살을 담고서 가늘어졌다. 하루를 시작하기엔 퍽 이른 감이 있는 시간이 공작에게는 그러지 않 듯, 제 자식에게도 그런 듯하였다.

이런 것도 닮는 것일까.

심상한 생각과 함께 차창을 일별한 공작은 다시 흐르듯이 눈길을 앞에 선 이에게로 주었다.

“훈련을 가는 거니.”

“예.”

딱히 더 할 말은 없어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기려는데 길을 막아선 이는 비켜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둔탁한 소리가 귓가를 파고든 건 공작이 고개를 기울여 기묘한 공기의 기류를 가늠하려던 찰나였다.

“세이?”

이 시간에 모습을 나타낼 리 없는 금발이 복도 끄트머리의 계단에서 어둠에 먹힌 눈을 들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이하게 흘러가는 상황의 경위가 어렴풋이 얼개를 드러낼 즈음, 짙게 가라앉는 벽안을 먹잇감을 기다린 포식자처럼 강렬히 바라보던 아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싱긋 그려 보이는 웃음과 함께 보폭을 넓혔다.

“그럼 이따 뵙지요.”

소리마저 삼켜 버린 서분한 걸음걸이,삭이지 못한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푸른 눈. 어렵지 않게 추측되는 상황의 경위에 곧 복도 통로 위로 공작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가득 차올랐다.

그래, 어차피 공작가의 주인은 하나고 둘 중에 살아남는 이가 그 자리를 차지할 테지.

멀어져 가는 은발의 자취를 쫓던 공작은 고개를 또 한 번 큰 웃음을 터트리며 계단 위에 서 굳은 듯이 얼어 있는 세이에게로 다가갔다.

“세이.”

거칠게 들썩거리는 딸의 어깨를 토닥이는 손은 그 어느 때보다 살가웠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렴.”

다정한 조언을 건네는 아침, 부인이 건네준 충고들을 모두 수렴한 사내는 박명을 뚫고 쏟아져 내리는 빛줄기를 지켜보며 곧 다가올 전쟁의 서막에 기꺼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후작이 눈을 뜬 건, 하늘을 뒤덮은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 유백색 빛살 하나가 그의 얼굴에 내려앉을 즘이었다. 평소보다 빠른 기상에 푹 꺼진 눈우물, 앙상하게 드러난 광대뼈. 유난히 볕이 좋아 더욱 두드러진 병색을 가리려는 듯 금빛 의수가 쉴 새 없이 얼굴을 문질러 댔다. 조금 열이 오르자 볼은 불긋한 빛깔로 상기되었다. 이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이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슬리퍼에 발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고리를 잡는 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반오십 먹은 노인과 다를 바 없는 몸뚱이는 어쩌면 엘몬트보다 더 쇠약해졌을 것이다.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 평소보다 힘이 더 들어간 손목이 달칵 문을 열었다. 오늘 식사는 기필코 방이 아닌 식당에서 할 것이다. 그런 다짐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다.

“일어나셨어요? 후작님.”

식당은 어수선했다. 식기와 음식을 준비하던 마리가 당황한 듯 눈을 키웠다. 아침 식사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어야 할 시간인데.

“조금 이따 식사를 방에 들여보내려 했는데.”

그는 괜찮다는 듯 손을 저어 보이고서 자리에 앉아 있던 조카와 엉거주춤 서 있는 엘몬트에게 눈을 돌렸다. 무언가를 재빨리 감춘 엘몬트는 어색하게 그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잘 주무셨나요, 후작님. 부자연스러운 어조 역시. 아까부터 느껴졌던 어수선한 기류가 착각은 아닌 모양이다.

“무슨 일 있니.”

“일은 무슨 일이요. 그저 식사를 준비하기에 그렇지요.”

조카의 입에서 흘러나온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테오는 평온한 미소를 덧씌운 얼굴로 짓궂게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걱정도 많으십니다. 간밤에 비가 왔더니 또 흉한 꿈이라도 꾸신 모양이지요?”

가늘게 뜬 눈이 조카를 한 번 흘겼다. 꿈은 무슨. 여상히 중얼거린 후작은 제 몫의 의자를 잡아당겼다. 곧이어 마리가 식사를 내오기 시작했다. 투명한 잔을 채우는 경쾌한 물소리가 은 식기 소리와 뒤섞여 만들어낸 기분 좋은 울림이 하나둘 빈 공간을 메꿔 나갔다.

오랜만에 식당에서 함께하는 식사였다. 이리 쾌차하신 걸 보니 조만간 날아다니시겠습니다. 희망 섞인 바람을 곁들이며 테오가 웃었다. 구김살 없이 퍼지는 미소에 후작 역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엘몬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고 마리는 옷자락으로 눈가를 훔쳤다. 모든 것이 거의 완벽에 가까운 평화로움이었다. 이를 가만히 응시하던 후작은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았다.

“아델 일이구나.”

테오의 낯이 사늘하게 식고 부지런히 적막을 메꾸던 소음들이 사그라든다.

그의 세상은 그 아이 없이는 안온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자의, 무서우리만큼 강렬한 직감이었다.

“누나가…… 공작저에 있다네요.”

낮게 흘러나오는 음성이 후작의 목을 죄여 왔다. 최악의 경우를 고려했다. 아이가 다시 전쟁터로 끌려가거나 하는 뭐 그런 일들. 허나 그 어떤 수도 지금 들은 사실과 닮지 못했다.

공작저.

가문을 뜻하는 흔하디흔한 수식어 하나 달지 않는 단어는 그 자체로 대명사였다. 감히 누구라도 그러했으리라. 아올리스 제국에 공작가는 단 한 곳뿐이었으니.

“공녀와 누나. 그리 가까운 인척간에 모르스와 티케 일족이 발현했으니 무언갈 조사하려는 심산인가 봅니다.”

“그럴 리가. 분명 아델은 견습 기사들의 교육을 담당한다 했어.”

세상은 둥글다. 재고할 가치도 없는, 만고의 진리를 입에 담는 사람처럼 단호하기만 하던 후작의 음성은 일순간 무겁게 가라앉았다.

달포가 넘었어.

아이가 오지 않은 지.

견습 기사들 교육이야 매양 할 것도 없어 남아도는 게 시간이라 떠들어 대던 하렌의 말이 머릿속에 되울리기까지 하자, 후작은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 시선을 외로 틀었다. 넓게 짜인 왼편 창. 희미한 박명마저 사라진 잿빛 하늘이 푸른 눈을 어지럽히며 스며들었다.

“삼촌, 너무 심려치 마세요. 조사단이 파견되었으니 공작도 허튼짓은 하지 못할 거예요.”

무거운 공기를 다독이는 테오의 음성도 귀 언저리를 맴돌기만 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여전히 어둠 속을 표류하던 눈이 조카에게 닿은 것은 익숙한 단어 하나가 박힌 후였다.

“모르타 위원회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무려 모르스의 현신이라 불리우는-”

“모르타 위원회?!”

날카롭게 터져 나온 소리와 함께 후작은 의자팔걸이를 세게 움켜잡았다. 울연히 핏줄 속에 일어난 두려움이 하얀 살결을 타고 제 색을 드러냈다. 외려 당황한 건 테오였다. 침착하게 눈을 깜빡인 그는 격양된 공기를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누나 몸에 생채기라도 나면 모르타 위원회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모르스의 현신이라 칭하는 마당에.”

“누가…… 또 누가 이 일을 알고 있지?”

그리 소용은 없었으나.

“위원들은 거진 다 알고 있습니다. 모르타 위원회의 페치오 위원이 제안했다더군요. 아무래도 그자가 실질적인 권력자이다 보니.”

후작이 천천히 눈을 여닫았다. 어둠과 짙은 녹색이 뒤섞여 빚어낸, 빛깔은 무척이나 비현실적인 색을 그려 내길 반복했다. 잠시간 그 기이한 행동을 이어 가던 그는 이윽고 아예 눈을 내리감고는 마치 처음 들어 본 단어를 입에 담은 사람처럼 느리게 이를 혀로 굴려 보았다.

페치오.

***

“오랜만이야, 후작.”

긴 침묵을 깬 페치오의 눈은 저녁나절 햇빛을 가로질러 문가에서 어깻숨을 내쉬는 사내에게 닿았다. 허락도 없이 집무실까지 쳐들어온 불청객을 향했다기엔 퍽 친근한 눈빛이었다.

“그 애는 위원님께서 두시는 장기 말이 아닙니다.”

마주한 이는 그렇지 않은 듯했지만.

피식, 웃음을 흘린 페치오는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아델리아 경이 공작가에 머물게 되었다는, 최근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내용이 매끄러운 종이 위를 수놓고 있었다.

“누굴 말하시는 건지 도통 알 길이 없습니다. 원체 그대가 지키는 아이들이 많아서. 조카를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아델리아 경을. 그것도 아니면…….”

“위원님.”

그의 말허리를 잘라먹은 후작은 짙은 노을도 가리지 못한 선연한 분노를 내비치는 눈을 들어 그를 직시했다. 부드럽다 못해 유약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눈매와는 어울리지 않는 빛깔이었다.

여전하구나.

여전히 아이들 일이면 저리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구나.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다시 한번 조소를 터트린 페치오는 어둠에 먹힌 낯을 스쳐 석양을 받아 더욱 도드라지는 금빛 의수를 짧게 일별하고는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를 흔들었다.

“그래. 그래. 말귀 어두운 노인네 흉내는 이쯤하지. 허나 말씀이 지나치시군. 장기 말이라니. 제 어찌 모르스의 현신을 그리 다루겠습니까.”

“그 아일 공작저로 들여보낸 게 당신 짓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이런, 후작님. 먼저 절 직접 찾아온 건 아델리아 경입니다.”

“아델에게 뭐라고 지껄였지.”

내실을 찢는 격양된 음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 밀도 높은 공기가 보다 팽팽하게 공간을 조여 오는 것을 느끼며 페치오는 엇갈리게 맞잡은 손을 받침 삼아 턱을 괴였다.

“제법 영민해졌구나. 하기사, 너도 이제 철이 들 때도 되었지. 이 바닥에 살아남으려면.”

냉소에 가까운 웃음을 입에 걸고서.

“그간 제법 재미있었는데. 네 나사 풀린 작태를 보며 말이야. 가끔은 궁금하기도 했어. 모든 게 끝났을 때, 과연 너는 울게 되려나. 아니면 웃게 되려나.”

지는 석양이 맺힌 페치오의 눈동자 위로 차오른 것은 세상사 희로애락이 모조리 엉킨 것 같은 감정이었다.

“허나, 명심하렴. 내 지난 14년간 모든 걸 묵고한 것은 그저 아량이 넓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한번 터트려 보지 그래? 나도 가만있진 않을 거야. 어차피 내겐 남은 게 없는데. 모르타 위원회가 발칵 뒤집히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발현자도 보유자도 아닌 이에게 힘을 사용하고 끝내 죽음까지 이르게 한 모르스 일족이라.”

리오 서머셋. 에오르테가의 숨겨진 사생아.

그 단어를 입에 올리자, 방의 공기는 밤의 바람처럼 서늘하게 변했다. 양날의 검. 그게 그 사생아를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미친 전대 후작, 카트린느가 그 사생아에게 한 짓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에오르테가는 파문을 면치 못할 것이고 그 일에 동조한 자신, 그리고 그들 일족 역시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조금은 달라진 줄 알았는데. 여전하구나, 여전히 어리석어.”

득실을 따져 무게의 추를 재 본다면 실로 잃은 게 더 많은 이는 그가 아니야.

페치오는 기울인 고개 너머 이 당연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내를 응시해 본다. 모든 빛깔을 다 삼켜 버리는 광폭한 밤하늘처럼 새까만 눈에는 답지 않게 깊은 동정이 서렸다.

“무엇이 그리 두려운 게니. 무엇이 그리 두려워 이리 망가진 게야. 어그러진 시간 속에 머물러 아직도 자라지 못하고 있구나.”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아이야.

깊은 밤, 선연해지는 과거의 잔상 속을 흔드는 음성은 담담하기만 하다.

“그거 아나? 넌 생각보다 네 어미를 많이 닮았어. 외양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에 미쳐 사리분간 못하는 것까지 말이야.”

“페치오!”

“기억하렴, 네 가문이 어찌 몰락하기 시작했는지. 그 여자가 모르스 일족에 미쳐 어찌 망가졌는지 말이야.”

***

“세이!”

아연실색한 낯을 감추지 못한 조사단원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를 맞이했다. 카펫에 쓰러진 아델을 부축하려 막 자리에서 일어선 모양이었다. 바닥에 번진 핏자국과 핏물로 물든 아델의 드레스 소맷자락을 지나친 공작 부인의 시선은 제 팔보다 굵은 은촛대를 든 딸아이를 발견하고는 멎었다.

“도대체 여기서…….”

조사단원과 아델. 저택에 머물게 된 손님들의 응대에 부족함은 없는지 가정부와 면밀히 살피고 있던 그녀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건 허옇게 질린 얼굴로 방에 들어선 시녀 때문이었다.

‘마님, 공녀님이, 공녀님이.’

구태여 더 듣지 않아도 심상치 않은 상황을 감지한 공작 부인은 체면도 잊고 잰걸음으로 발을 놀렸다. 그 노력이 무색하게 아델의 방에서 마주하게 된 상황은 처참했지만.

크면 클수록 우악스럽게 변질되는 세이의 행실은 그래도 저택의 사용인들 앞에서만 벌어지니 관망하기만 했다만, 지금은 차원이 다르다. 코르푸와 모르타. 각각의 위원회에서 차출한 조사단원들이 모여 저택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고 있는 마당에.

‘아델리아 경에 대한 조사가 쉽지 않습니다. 워낙 공녀님이 방해를 하시니…….’

지난 밤, 조사단장이 조용히 그녀를 불러 건넨 문장이 어수선한 내실 위로 떠올랐다. 그가 담담한 음성으로 보고한 그간 세이가 벌인 일들은 미처 그녀조차 알지 못했던 사건들도 있었다.

‘공작 부인, 이 일은 그냥 좌시해서 될 게 아닙니다. 자칫하면 두 일족의 불란이 될 수도 있음이에요.’

자못 심각한 그의 눈빛을 떠올리며 공작 부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점심엔 다 같이 정찬을 갖는 게 어때요.”

막, 외출 준비를 하는 남편에게 조심스레 운을 띄워 본 건 그래서였다. 한참, 선박 투자문제로 바쁠 걸 알지만, 도저히 이것 말고는 상황을 무마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필견, 부루퉁할 세이 탓에 다정한 분위기는 내지 못할지라도 다 함께 한 끼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그런대로 구색을 맞추리라 판단한 것이다.

“안 그래도 나도 생각하고 있던 차였어.”

그녀가 건넨 외투를 받아 들며 예상외로 흔쾌히 수락의 뜻을 보인 남편도 아마 같은 판단을 한 듯했다.

“어제 일은 새어 나가지 않을 거야. 책임자와 내가 긴히 얘기를 나눴으니.”

커프스 단추를 단정히 잠그는 남편의 손짓은 평소와 다름없이 정갈했지만, 거기에 미묘하게 묻어 나오는 짜증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감수는 하려 했는데, 생각보다 더 심각하군.”

늘 아직 어리다, 딸을 두둔하던 그녀도 이번만큼은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요즘 들어 저 역시 딸이 야만적인 짐승처럼 느껴져 소름이 돋곤 했던 것이다.

“누굴 닮았는지…… 원.”

나직한 읊조림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혹 화살이 제게 돌아올까 고운 미간을 찌푸린 공작 부인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난 아니에요!”

“그래, 그건 알지.”

싱긋, 웃음을 끌어 올린 공작은 공작 부인의 뺨에 입을 맞추며 나직이 속살거렸다.

***

‘내일 점심에는 다 같이 정찬을 갖는 게 어떠니.’

지난 밤이었다. 공녀가 휘두른 은촛대에 긁힌 팔의 치료를 막 끝냈을 무렵, 방에 들어선 그녀가 뱉은 말이었다. 온화한 기운을 품은 은회안은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와 알싸한 연고의 냄새를 맡지 못한 듯했다.

여전히 한결같았다.

쓴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린 나는 자연스레 차창 밖의 풍경을 확인했다. 어느 때보다 빨리 솟구치는 것 같은 해는 이미 산 중턱에 걸려 사방에 제 색을 흩뿌리고 있었다. 이제 방을 나설 시각.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점검한 나는 흉터는 물론 얼룩덜룩한 멍까지 고스란히 나비치게 해 줄 반투명 실크로 감싸진 팔을 잠시 응시했다.

그리 아프진 않았다.

몇 년간 그 험한 이민족 토벌까지 나간 별의별 일을 다 겪은 기사인데. 고작 열댓 먹은 소녀의 힘에 눌리기엔 그간 나를 스쳐 갔던 세월의 풍파는 깊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조금 다르겠지.

‘평소에도 이런 일이 잦습니까.’

시종일관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며 조사에 임하던 담당자는 공작 부인의 손에 이끌려 겨우 공녀가 자취를 감추자 혼란스러운 기색이 묻어나는 음성으로 물었다. 공녀의 훼방으로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는 조사에만 신경 쓰던 그가 뱉은 말이니 이미 조사단 내부에서도 심심찮은 기운을 감지했다는 거겠지.

공작 부부가 이리 만찬을 고집하는 이유 역시 그 선상에 맞닿아 있을 테고.

공녀와 나. 둘의 힘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려 이루어졌던 이 조사는 미묘하게 틀어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델!”

만찬장으로 이동하자, 기억 속의 것보다 맑은 공작 부인의 음성이 나를 맞이한 것 역시 그 탓이려나.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서 뿜어지는 불빛이 그린 듯하게 펼쳐진 그녀의 웃음을 더욱 선연하게 나비쳤다. 격식을 차린 예복까지.

사교계 행사도 아닌데 저리 차려입은 걸 보면 오늘 만찬이 나름 중요하긴 한가 보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상석에 자리를 잡은 공작과 터질 것같이 부풀어 오른 볼을 한 공녀를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기사단 훈련이 새벽이라 했지?”

식탁 위에 내 몫의 식사가 마련되는 것을 지켜보며 공작은 심상한 어조로 물었다. 달그락 거리는 식기 소리만이 만찬장의 긴 침묵을 깨며 연극의 막을 여는 것이다. 새어 나오려는 조소를 냅킨으로 가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예.”

“부인, 때를 맞춰 주방장에게 식사를 준비하라 해야겠군.”

“필에게 제가 잘 이를게요.”

적당한 가식과 웃음. 이들로 점철된 대화가 순탄한 항해를 멈춘 것은 쇠붙이가 유리와 맞부딪히는 요란한 소리가 내실을 찢뜨린 직후였다.

접시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식기, 대리석 바닥으로 추락한 유리잔. 어김없이 예상을 깨지 않는 공녀는 이번에도 내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세이.”

“전 사생아 따위와 정찬을 같이 할 수 없어요!”

나직하게 흘러 들어오는 저택 주인의 삼엄한 경고를 가뿐히 지르밟으며.

어쩐지 순순히 이 식당에 들어왔다 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을 고대했다는 듯 공녀는 몸을 일으켜 주저 없이 문을 나섰다. 둔탁한 탁음이 진한 여운을 남긴 만찬장에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공작의 얼굴과 나이프를 쥔 손이 희게 질린 공작 부인이 남았을 뿐이었다.

참으로 별 볼 일 없는 평화. 고작 이 정도 진동으로 균열을 보이는 게 그들의 왕국이었던가. 내 피와 살을 거름 삼아 피어올랐던 안온이 고작 이런 모래성과 같은 허상들이었던가.

참으로 우습구나.

“저 때문인 거 같으니 제가 한번 얘기를 해 볼게요.”

머릿속을 치고 들어오는 자조 섞인 생각에서 벗어난 나는 의자를 세게 뒤로 밀며 천천히 내가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공녀의 흔적을 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애는 조심성이 없었으니까.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더욱 적합하겠다. 나처럼 이름도, 존재도, 능력도 무엇 하나 들키지 말아야 할 사람과 본질적으로 달랐으니.

개암나무 씨앗에 서린 푸릇한 흙 내음, 짙은 백합의 향기. 느려진 걸음을 따라 펼쳐지는 풍경은 가히 티케의 일족에 보호 아래 자라난 수목들은 풍성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명성에 걸맞다. 다채로운 빛깔들 속에서 푸른 눈이 나를 직시한 건 그때였다.

“뭐야!”

강렬한 오후의 햇살과 이를 따라 펼쳐지는 날카로운 음성. 불현듯 나를 파고드는 낯선 기시감이 우습다. 스스로에게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린 난 시야에 걸린 클로버를 무심히 응시했다.

“내가 여기 왜 오게 된 줄 아니.”

네 갈래로 나뉜 잎이 내 손안에서 부스라졌다.

“너 때문이야. 네 능력이 불안정하다며.”

흥얼거림과도 같은 음성이 입술을 타고 흐를 즘, 나와 공녀의 간격은 주먹 하나 들이치지 않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사냥 대회에서 공작님은 날 없애려 하셨지. 헌데, 왜 살았는지 아니?”

네가 날 지킨다고 하는구나.

짤막하게 덧붙인 말에 푸른 눈은 크게 일렁거렸다.

“이런, 아무도 말을 안 해 준 모양이네.”

급소를 맞고 절명한 짐승처럼 파르르 떨리는 눈시울을 보며 나는 무심히 말을 이었다.

“하긴, 네가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니. 네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난 더 안전해질 거고 네 힘이 약해진다면 나한테 잡아먹히고 말 테니.”

“……입 닥쳐.”

“궁금하지 않니? 끝에 가서 웃게 될 사람은 과연 누가 될까?”

“……입 닥치라니까!”

매섭게 그어진 눈매 안 거센 물보라가 몰아친다. 이에 쐐기를 박듯 낮게 속삭였다.

“만약에 내가 이긴다면…… 난 이 클로버부터 불태워 버릴 거야. 나름 상징적이지 않니, 세이. 행운을 상징하는 꽃과 함께 스러진 공녀라.”

“뭐? 이 배은망덕한!”

여물지 않은 여린 손이 하늘로 치솟는다. 구름을 꿰뚫을 듯 높이 솟구친 손은 양광을 머금고 추락하다 길을 잃고 말았지만.

“……참 예상하기가 쉬워.”

내게 손목을 부여잡힌 공녀는 수치심으로 붉어진 뺨을 당장이라도 터트릴 듯 팽팽하게 부풀렸다.

“너무 뻔해서 우습지도 않을 정도로 말이야.”

이제 허공을 가르는 손은 공녀의 것이 아니다.

비틀어진 고개와 충격에 물든 푸른 벽안, 벌겋게 부풀었다 다시 하얀 제 색을 되찾은 뺨을 덤덤히 스친 나는 얼얼한 손을 쥐었다 폈다.

치유력이라는 게 대단하긴 하네.

제법 힘을 세게 실었는데도 공녀의 뺨은 백설처럼 하얗고 보드라우니. 얼마나 맞으면 색이 변할까, 사위를 가르고 공작이 나타난 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얘기가 길어지는 듯하여.”

혹여 있을 분란에 대한 염려가 낙조에 물든 공작의 눈 위로 가시적인 흔적을 드러냈다. 빙글, 몸을 돌린 나는 나른한 어투로 말을 받았다.

“방금 막 끝났습니다, 공작님. 공녀님께서 제게 정원을 소개해 주고 있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빙긋, 입꼬리를 올린 나는 공녀에게로 비슷이 고개를 기울였다.

어리석긴. 아무도 네가 몇 대 맞았는지, 얼마나 다쳤는지 모르잖니. 네 그 잘난 능력 때문에 말이야.

***

근무를 서던 조사원은 허탈한 웃음과 함께 공작저 인근에 마련된 막사로 들어섰다. 녹초가 된 몰골이 둘의 힘을 분석했다기보단 진흙탕을 뒹군 모양새였다.

“꼴이 왜 그래.”

막사에 남아 근자에 공녀와 경을 조사했던 자료들을 분석하고 있던 동료들은 해괴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대답 대신 조사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찬.

그저 넷이 모여 갖는 식사자리에 무슨 큰 일이 있을까 하여 평소와 달리 홀로 조사에 임한다 자처했던 게 화근이었다. 식사는 퍽 순탄하게 흘러갔다. 당연히 공녀와 아델리아 경. 둘의 힘의 파동 역시 관찰하기 좋은, 안정적인 모양을 띄기 시작했다. 근래 보기 드문 일이었다. 문제는 공녀가 갑작스레 자리를 뜨기 시작하며 생겼지만. 둘의 힘을 측정하는 도구가 급격하게 요동치며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던 불길한 기운이 절정에 달했다.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공작을 따라 걸음한 장소에는 상상 이상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정원의 수목이 짓뭉개지고 두 인영이 그 위로 뒤엉켜 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어질러진 둘의 정체가 공녀와 아델리아 경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건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고성과 형형한 눈빛. 이를 만류하던 저까지 정원 바닥에 뒹구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을 종결시킨 것은 공작이었다.

‘세이!’

이제껏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높은 음성으로 딸아이를 잡아 세운 그 덕에 극한으로 치닫던 싸움은 그제야 끝을 맺었다.

등을 강타하는 통증, 팔에 남겨진 손톱자국. 엷은 낙조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조사원은 직감했다.

“아무래도 조사단이 곧 철수하지 싶어.”

“그게 무슨 소리야.”

말이 되질 않지. 티케의 축복은 강력한 의지가 깃들어야 하는 법. 부정적인 감정의 대상에게 티케가 반응할 리 없었다. 제아무리 올레나 위원장이라도 이번만큼은 틀린 것이 확실했다.

“이봐, 그게 무슨 말이냐고.”

온몸을 불사른 고된 하루의 끝, 그간의 노고가 다 허투루 돌아갔음을 예감하며 그는 동료의 말을 무시한 채 깊은 한숨을 내어 쉰다.

***

공녀는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가 제 편을 들지 않았다는 게.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찬 눈이 마호가니 탁자 너머의 아비를 바라보았다. 저물어 가는 석양을 비껴 받아 생경한 색깔을 띠는 아비의 머리카락은 그럼에도 황금빛이었다. 이마를 짚은 두 손 아래 가려진 눈은 짙푸를 테지. 그녀가 그러하듯. 그리고 모든 베르니가의 핏줄이 그러했듯.

조금 평정을 되찾은 동공은 미끄러지듯 아래로 떨어졌다. 붉은 색감을 덧댄 카펫, 올올이 수놓아진 백합 문양. 더할 나위 없이 푹신한 융단은 가히 공작가의 위상에 걸맞았다. 모든 게 조화롭고 그리하여 완벽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그래, 어쩌면 아까 모든 게 다 연극이었을 수도 있다. 보는 눈도 많았으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주변 시선을 늘 과하게 신경 쓰지 않던가. 나름 논리적인 이유들을 몇 가지 더 떠올리자, 공녀는 확신으로 가득 찬 입술을 움직였다. 아버지. 그 익숙한 단어를 만들려. 그 순간이었다.

“도대체 넌 생각이 있는 거니.”

고저 없는 음성이 날아 들어와 귓가에 꽂혔다. 느리게 여닫히는 눈동자 사이로 파고든 얼굴이 냉랭했다. 잘못 들은 것인가. 그렇다기엔 제법 명확했던 소리는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이어졌다.

“하아…… 경을 건드리지 말라 내 몇 번을…….”

“제가 먼저 시작한 게 아니에요!”

엄밀히 따지면 시작은 그녀 자신이었지만, 또 어떻게 보면 그렇지만도 않으니 온전히 거짓은 아닌 셈이었다. 한 발 앞으로 나아간 공녀는 항변하듯 눈썹 앞머리를 모았다. 허나, 더 걸음을 옮기진 못했다.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공작에게 달려들거나 서재를 박차고 나가지 못한 이유와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공녀는 본능적으로 일이 기이하게 돌아감을 감지했다. 질렸다는 듯 공작의 고개가 가로로 허공을 가르기 시작하자, 더는 그저 예감에 불과하지 않았다. 공녀의 입에서 다급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여자가 날 때렸어요!”

“또 경 탓으로 돌릴 게야?”

“공작가를 집어삼킨다고 그랬어요.”

“그런 헛된 말에 일일이 신경 쓰다니. 그 앤 운이 좋아 모르헤 기사단에 들어간 반쪽짜리 사생아야. 너랑은 근본부터가 다르지. 고작 그런 것에 휘둘려 일을 이리 그르칠 셈이니?”

“그 여자가 공작가를 집어삼킨다고 그랬다고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니.”

공녀와 공작. 너무나도 닮은 두 부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는 다른 음역대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공작가를 네가 이끌게 되면 이보다 숱한 일들이 더 일어날 테다. 그때마다 이렇게 아이처럼 굴면 누가 널 믿고 따르겠어.”

“내가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요 몇 년 사이 잘 단련된 팔은 공녀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움켜쥐며 낮게 속삭였다.

“넌 누구나 탐내는 힘을 갖고 태어났어, 세이. 헌데 이리…… 나약해서야. 그리 그 여자가 못마땅하다면 네 힘으로 증명해. 경을 막아 세우든 하란 말이야. 어리광 피우지 말고.”

샹들리에에서 부서져 떨어지는 불빛들에 서늘하게 가라앉은 아버지의 푸른 눈이 도드라졌다. 공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늘 저와 같다 여겼던 그 색감이 제 것보다 조금 더 짙다는 걸.

균열이었다.

***

“조사를 중단해야 합니다.”

말아 쥔 손으로 툭툭 테이블을 내려치던 티케 일족의 코르푸 위원은 자못 심각한 어조로 눈을 들어 올렸다. 결연한 의자가 엿보이는 눈빛은 테이블 너머, 황당무계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그를 응시하는 모르타 위원들은 차례로 훑어 내렸다. 모르스 일족. 그들이 주는 특유의 서늘함이 맞닿은 시선에 그의 몸을 휘감아 오자, 살짝 목을 움츠리려던 그는 이내 제 역할을 상기하고는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티케 일족의 능력은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대상에게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이미 그 부분이 증명된 터 더 시간을 끌어 봐야 좋을 게 없다고 사료됩니다. 게다가…….”

예상치 못한 흐름에 모르타 위원들이 미미하게 미간을 좁힌 사이 그는 담담히 남은 설명을 이어 갔다.

“공녀님의 능력이 흔들리고 있어요. 어제 새벽, 공작저에서 투자한 상단의 선박이 모조리 침몰했다는 소식이에요.”

마치 이 모든 게 모르타 위원회의 책임이라는 듯한 어투에 모르타 위원 중 하나가 눈썹을 꺾었다.

“먼저 제안을 한 건 코르푸 위원회 아닙니까.”

“그리 말씀하시면 서운하지요! 모르타 위원회 역시 반색을 표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코르푸 위원들이 소리를 높였다.

“공녀님이 경에게 좋지 않는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이것으로 자칫 능력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어찌 책임지시겠습니까.”

“그래요, 알다마다. 말이 나와 하는 얘기지만, 정도가 너무 지나치지 않소! 나이가 어려 묵고하려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하는 말입니다. 공녀가 아델리아 경에게 손찌검을 한다는 얘기가 저택 안에 파다해요!”

“그건…….”

“아델리아 경은 그냥 모르스 일족이 아닙니다. 황제께서도 귀히 여기는 인물을 어찌 그리 박대한단 말입니까. 이건 비단 경의 문제에 국한할 게 아니라, 모르타 위원회에, 우리 일족에 대한 기만이에요!”

“기만이라니! 고작 열네 살짜리가 제 분을 못 이겨 하는 행동을 가지고 지나친 언사요. 게다가 경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는 말이 있던데. 기사된 자가 어찌…….”

“오죽하면 그랬겠습니까. 오죽하면! 공작저 사용인들을 다 불러 놓고 물어보세요! 공녀가 경의 방에 찾아와 난동을 부린 횟수만 해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둔 양쪽 위원들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위원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소란스러움이 점점 높아지는 공간에서 오로지 중재를 맡은 황실의 재상만이 두꺼운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문지를 뿐이었다.

벌써 몇 번째인가.

뚜렷한 답은 없고 따라갈 흔적은 보이지 않는 와중에 매양 다툼만 벌어지는 실정이니. 이러다 결국 두 일족간의 골만 깊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 헛헛한 생각들만 하는 와중에 저를 부르는 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재상님.”

헐레벌떡 막사의 장막을 걷고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그의 보좌관이었다. 그가 고갯짓으로 무슨 일이냐는 물음을 건네자, 보좌관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다급히 내밀었다.

“방금 입수한 정보입니다.”

후우, 작게 숨을 내쉰 재상은 이마를 짚은 손을 내려 서류로 가져갔다.

또 무슨 일인가.

공녀의 능력 이상, 공작가의 선박 충돌. 그것보다 더한 일은 이제 없지 싶은데. 한 글자, 한 글자 흘려보내듯 읽어 내려가던 그의 눈이 까마득히 어두워진 건 결코 흘려보낼 수 없는 어떤 단어를 발견한 직후였다.

에쉬탄의 눈물.

그것은 값어치만 해도 상당한 보석은 제국 내에서 쉬이 발굴되지 않아 늘 수입원으로만 쓰여야 하는 실정이었으나, 그럼에도 영롱한 빛깔을 찾는 이들이 끊이질 않고 있는 광물이었다.

헌데, 이것이 어째서…….

심중에 돋아나는 의문에 미간을 좁히던 재상의 눈은 서서히 맞춰져 가는 흐릿한 사건의 얼개에 점차 크기를 키웠고 그 와중에 분명해지는 판단은 하나였다.

공녀와 아델리아 경. 둘의 조사는 결코 중단할 수 없다.

다음날, 루트비아가의 타이튼 광산에 한 무리의 보석 감정사가 파견되었다. 광맥이 유독 풍후한 위치에 자리 잡은 그들은 오래도록 세밀하게 광물을 살피기 시작했다. 해가 기울고 다시 솟아날 때까지. 이윽고 도구를 다시 챙겨 든 그들이 수도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루트비아가의 백작을 향해 축하를 건넸다. 에쉬탄의 보석. 대대손손 재물 걱정은 없겠다는 부러움을 곁들이며. 그 광산의 주인이 백작이 아닌 아델리아 경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된 건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

“광산에 대한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담담한 올레나의 목소리가 물속에 잠긴 것처럼 고요한 응접실의 적막을 깨트렸다. 그제야 창가에 고정하고 있던 공작의 벽안이 그녀에게 와 닿았다. 사람이 발길이 닿지 못한 저 깊은 심해처럼 모호한 빛깔을 내비치며.

“그래.”

“놀라지 않으십니다.”

“글쎄.”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뜻 모를 미소만을 지은 채 공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뜻 모를 표정만 짓고 있었다.

에쉬탄의 눈물.

루트비아가의 광산에서, 아니 정확히는 아델리아 경이 백작가의 작위를 내놓은 대가로 받은 그 광산에서 발견된 광물로 공녀와 경의 조사에 대해 여러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공녀의 힘이 공작이 아닌 아델리아 경에게로 흐르고 있다는 나름 합당한 추측 역시 힘을 싣고서.

그런데도 이 사내는 이리 유유자적 흐르는 구름처럼 구는구나. 그저 부러 덧씌운 가면이라기엔 지나치게 여유로웠다.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은 가늘어진 눈으로 눈앞의 사내를 찬찬히 살폈다. 느슨하게 비껴 들어오는 오전의 햇살을 받은 금발은 여전히 찬란하고 그 아래 청안은 짙푸르기 그지없어 그가 여실히 베르니가의 주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헌데, 어째서 이번 일에 이리 관대하게 구는 겐가. 자칫하면 공녀의 힘이 아델리아 경에게로 향할 수 있을 위험이 다분한 상황인데.

짐작이 가지 않아. 공작의 심중이 향하는 방향을.

그게 무에 그리 걱정할 일이냐는 듯한 무심한 어조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 해도 각인을 진행하면 되잖나.”

감정 하나 실려 있지 않은 냉정한 문장에 올레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이 와중에 하나 확실한 게 있긴 하구나. 이 사내는 그저 그들 일족을 상점에 가 쉬이 구매할 수 있는,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버리는 장신구로만 여긴다는 것을.

“공녀님의 수목이 아직은 만개합니다만…… 만약 각인을 하실 거면 더 늦기 전에 빨리 진행하셔야 할 겁니다.”

“알았네.”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올레나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단정한 매무새로 저택을 빠져나갔다. 살얼음이 떨어질 것 같은 눈빛은 미처 가리지 못했지만. 로비를 가로지르는 그녀의 발은 평소보다 밀도 높은 힘으로 대리석을 밟아 내리고 있었다.

티케 일족의 수명은 유달리 짧다.

서른을 넘기는 이들도 극소수.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닌가. 너무나도 매혹적인 일족의 능력은 그들이 감당하기엔 벅찬 것이었다. 발현된 아이들은 그날로 제국 모두의 먹잇감이 되기 일쑤. 코르푸 위원회가 안정화되며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가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들은 위원회의 개입을 간섭이라 여겼고 살아 있는 보물을 절대 놓을 생각이 없었으니. 특정한 대상을 지정한 강제적인 각인이 성행하는 까닭도 거기 있고.

버틸 수 있으려나.

마차에 오르기 직전, 올레나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붉은 벽돌의 웅장한 저택이 하늘에 닿을 듯 우뚝 치솟아 있었다.

칠 년. 벌써 칠 년이다. 저 저택에 갇힌 지. 본래도 만만치 않던 외골수적인 공녀의 성정은 점점 더 병적으로 변하고 있었으나 공작가의 그 누구도 깊게 고심하지 않는 듯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강한 힘이 아니던가.

그것은 한번 그 길을 걸어 본 자만이 할 수 있는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깊은 염려였다.

검은 인영이 앞에 드리운 건 그녀가 차마 덜어 내지 못한 연민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있을 즘이었다.

***

“하하하, 에쉬탄의 눈물이라니.”

루트비아가의 타이튼 광산에서 광물이 발견되었다는 얘기로 조사단이 파견을 철회하려한다는 이야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금, 에단은 그 누구보다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공녀와의 관계가 틀어지며 혹 조사단이 그 임무를 중단할까 하던 염려가 근래 그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기 때문이다.

“에단, 광산은 얼마 정도 시간을 벌어 주지.”

쾌할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사내의 낯이 판자촌의 낡은 테이블 위를 환히 밝혔다. 처음 이 계획을 언급했을 때에 보였던 불안한 빛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한 달 정도야. 타이튼 광산으로 향하는 길이 워낙 외지고 험하니, 장비를 나르고 인부를 부리는 데 그 정도 시간은 걸리겠지.”

“한 달이라…….”

“명심해, 경. 그 이후면 틀림없이 에쉬탄의 눈물이 타이튼 광산에서 발견된 게 아니라는 게 밝혀질 테니까.”

보석을 공수하고 타이튼 광산에 박아 두고.

이목을 피하느라 꽤 심혈을 기울인 이 계획은 그만한 값어치는 톡톡히 하는 듯했다. 물론, 좀체 허술한 구석이 많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해.”

어차피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짤막한 대답과 함께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넓게 짜인 창문 밖에 넘치게 펼쳐진 아득한 어둠에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기꺼운 마음으로 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사단과 공녀의 각인 문제. 모든 것은 계획대로 흘러가고 그 끝이 내 바람과 맞닿아 있을 거라는 생각이 점차 힘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들의 주장대로 공녀가 내게 티케의 축복이라도 선사하는 건가.

평생 나를 돌아보지 않았던 축복의 향연에 답지 않게 어울리지 않는 상념을 곁들이며 문가로 보폭을 넓히려던 찰나, 대수롭지 않게 툭 던져진 문장이 나를 붙잡았다.

“아, 그리고 경, 에오르테 후작을 좀 어떻게 해 보게. 매양 공작저 앞을 맴도는 통에 공작 저의 감시가 더 삼엄해졌어. 몸을 사리기 힘들다고.”

후작.

짙은 여운을 남기는 단어가 갑작스레 찾아온 내실의 적막 위로 내려앉았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후작, 그만 빼면.

나와 공녀의 이야기는 에쉬탄의 눈물로 급물살을 타며 제국에 파다하게 번졌다. 어린 모르스 일족의 교육. 시답지 않은 변명으로 오래 비밀로 유지할 수 없다는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그 시기는 빨리 찾아왔다. 후작이 빛바랜 검은 마차를 타고 공작저 앞을 서성거리기 시작한 것은 얼마 전쯤이다. 기다리다 보면 지치고 말리라는, 오래된 격언도 후작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문자 그대로 매일, 그는 공작저를 찾았다.

바로 지금처럼.

저택의 정문 앞에 있는 커다란 물푸레나무는 제법 멀리서도 존재감을 여실히 뽐낸다. 그리고 조금 시선을 떨구면 빛바랜 검은 마차와 사내는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어렴풋이 내려앉는 어둠 속 크기를 키우는 인영은 밤의 기운도 스미지 못할 만큼 꼿꼿했다.

이리 꼿꼿하고 단정한 사내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

바닥 모를 심연에 엉켜 있는 이 진창 같은 감정과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이 불안을, 분노를.

옅은 한숨과 함께 나는 말고삐를 틀었다.

***

유달리 햇볕이 밝게 빛나는 어느 날, 올레나 위원은 공작저를 방문했다. 그간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만남이 썩 유쾌하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으나 상황은 보다 심각했다. 안내를 받아 들어선 응접실 내부의 공기는 잔뼈 굵은 그녀조차 긴장할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공작님.”

그제야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사내가 눈을 들어 올렸다. 어느 때보다 짙게 가라앉은 벽안이 그녀를 맞이했다. 손 사이에는 낀 시가가 내뿜는 장막이 벽처럼 둘 사이를 흐르며 느릿한 단어를 토해 냈다.

“위원님.”

딱딱한 분위기를 풀려고 느슨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공녀님의 각인 실패로 상심이 크시지요.”

작게 실소를 터트린 공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잔으로 손을 뻗었다. 부서져 내리는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불그스레한 색깔을 내던 액체는 곧 모양 좋은 입술을 타고 흘렀다. 다시 젖은 입술이 열렸을 때는 더운 숨결과 함께 서늘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무슨 개수작입니까.”

생각보다 직설적인 말이었다.

냉철하다는 명성과는 이질적이게. 눈매를 구기며 올레나 위원이 어디까지 알려 주고 감춰야 하나 고심하는 사이, 베일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 와닿았다.

“조사는 이제껏 하등 진척이 없고 그대의 추측도 판단도 무엇도 이리 맞아떨어지지 않으니. 내 그대의 저의를 의심해야 하는 게 응당 마땅하지 않나.”

심연 아래 침잠해 있던 푸른 눈동자에는 섬뜩한 열기만이 피어올라 있었다. 경고를 닮은 문장은 엄연한 엄포나 다름없었다. 이를 불안하게 응시하던 올레나 위원에게 공작은 나직한 물음을 덧붙였다.

“아델의 짓인가.”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는 내실, 얼음처럼 차가운 음성이 스미고 불쑥 이 사내의 낯 위로 아델리아 경이 겹쳐진다.

‘한 달만 시간을 주시죠.’

공작이 각인을 제안한 밤, 그녀는 오늘과 마찬가지로 무감하고 냉랭한 어조를 들었다. 그 내용만으로 황당해 어안이 벙벙하던 올레나는 말을 뱉은 이가 아델리아 경이라는 사실에 기가 찰 지경이었다. 적당히 낯을 갈무리했어도 고저 없는 음성이 흐트러질 정도로.

‘허면 제가 얻는 건 무엇입니까.’

제가 뱉은 말에 비해 밤의 공기를 가르는 기사의 음성은 서늘하기만 했지.

‘공녀가 공작에게 각인한다면 그가 코르푸 위원회에 행사할 영향력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핵심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

‘한 달만 시간을 주신다면 공녀가 공작에게 각인하는 것을 영원히 막아 드리죠.’

판을 흔드는 결단력,

‘어떻게 말입니까.’

무모하게 보일 만큼 매서운 결단력.

‘공작이 스스로 생을 끝내게 만들 테니까요.’

문득 둘이 미묘하게 닮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답을 주지 않아도 그 뜻이 전해졌는지 내실에는 공작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번졌다.

***

짧게 타들어 간 시가를 꺼트린 공작은 소파에 깊숙이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집무실 안을 맴돌던 자욱한 연기가 가라앉고 한쪽 벽면에 크게 나 있는 유리창 너머로 공작가를 막 빠져 나가고 있는 올레나의 마차가 흐릿하게 보이자, 허탈함과 기대감이 뒤섞인 웃음이 다시 한번 그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꿈에도 몰랐다.

올레나 위원을 꼬드길 줄을. 두 일족 사이에 간극이 큰 건 아니나, 까다롭기로 자자한 여자이기도 하고…….

그런 수를 쓸 줄 몰랐어.

총명한 머리인 건 알고 있었으나, 글쎄. 그 고고하기 짝이 없는 후작과 친분이 두터워서 일까. 딱히 진지한 기대를 한 것 아니었는데. 행동력과 영악함마저 갖춘 줄은 미처 몰랐다.

속된 것으로 사람을 현혹하는 일 따위와 거리가 있을 거라던 판단 역시. 그저 흥밋거리로 여겼던 관심이 진지한 기대로 변모하는 순간, 적막한 내실을 깨우는 소리와 함께 보좌관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공작님.”

날이 저물어 그림자마저 제 모양을 뒤틀고 있는 시각, 그다지 달가운 소식이 아닐 거라는 상념이 심중에 돋아날 즈음, 보좌관은 그의 추측과 엇비슷한 문장을 꺼냈다.

“이에타 자작이 선박에 투자했던 현물을 회수했습니다.”

“얼마를.”

“…… 전부입니다.”

급격히 서늘해진 낯을 한 공작은 습관처럼 관자놀이를 눌렀다 떼기를 반복했다. 신흥 세력들이 세이의 힘을 경외하며 또 경계하시는 시기에 벌어진 참극은 예상보다 타격이 컸다.

세력의 규합이 필요할 때이거늘.

옅은 한숨과 함께 공작은 창밖을 응시했다. 어둠을 가르고 남창을 밝히는 달빛은 그의 푸른 눈 위로도 제 빛줄기를 그려 낼 만큼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에 젖어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공작은 한참 후에야 느리게 입매를 허물어트렸다.

“아델을 데려오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문장을 입에 걸고.

시녀가 차를 준비하고 다과를 내온 후에도 공작의 집무실에는 한참이나 침묵이 감돌았다. 간혹 찻잔을 달깍거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적막 속에 스며들 뿐이었다. 공작은 그 침묵 너머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제 자식을 응시했다.

“네 짓이구나.”

허를 찌르는 직설적인 문장에도 평온한 낯은 흐트러짐 없었다. 잔자누룩한 호수처럼 고요하기만 한 은안. 달빛을 삼킨 것 같은 은발. 어찌 이리 다른데 이토록 닮았을까. 찻잔을 내려놓는 걸로 덧없는 잡념을 끝낸 공작은 심상한 어조로 적막을 채웠다.

“너를 양녀로 맞이할 생각이야.”

양녀.

입안에만 맴돌던 단어는 스스로도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모순적이었다. 한바탕 소란이 일기도 하겠지. 공식적으로 반쪽짜리 사생아이니.

아무래 생각해 봐도 지금 이 사태를 타파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공작가의 위상을 세우고 또한 저 아이가 후계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 면밀히 살필 수 있는 분이 되는 방법은.

공작가의 양녀.

송곳을 박아 넣어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잿빛 눈이 그를 파고든 건 그때였다.

“절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티케의 가호도 없이.”

티케의 가호라.

꽤 좋은 패이긴 하나 그렇다고 절절한 미련이 있는 것은 또 아닌 그 단어를 혀끝에 굴린 공작은 헛웃음을 흘린다.

“날 너무 작게 보는구나. 아무것도 없이 여기까지 온 나야.”

마땅한 재력도, 믿을 만한 인척도 하나 없이 오로지 저 자신 하나로 공작가의 부흥을 열었던 그인데?

고작 티케의 가호가 그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을까.

뭔가를 노력해 얻어 본 적 없는 종족. 그저 기분만 좋으면 남들은 평생을 손에 쥐지도 못할 온갖 행운들이 발 앞에 저절로 나뒹구니 인생의 고단함도 치열함도 모른 채 귀히 사는 일족의 힘 따위가?

“너야말로 자신이 없나 보구나? 여러모로 네게 이로운 싸움일 텐데. 그저 나를 무너트리고 싶다면 내가 잠들었을 때 목에 칼을 들이밀면 그만일 것을…… 구태여 어려운 길을 가다니.”

“……공작님이 두려워하는 게 그런 게 아닌 줄 압니다.”

“정말 그것 때문이니? 그게 정말 유일한 이유야?”

푸른 눈은 그저 눈빛만으로도 상대의 급소를 꿰뚫을 듯 예리하게 가늘어지며 마주 앉은 이를 들쑤셨다. 적막한 호수는 누가 돌이라도 던진 듯 미미한 파동이 일고 그 찰나의 일렁임을 놓치지 않은 공작은 짧게 혀를 찼다.

여전히 나약해.

아직 덜 단련된 구석이 다분한 자식은 아미타 숲에서 수십의 짐승의 명줄을 끊은 게 무색하게 여리디여린 모습을 보인다. 그 한 번의 주저함이, 한 번의 망설임이 생을 좌지우지하는 걸 모른 채로.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가 알고 있다는 거겠지. 어떤 말을 해야 저 눈에 벼린 날이 서고 성난 불길이 솟아오르는지. 공작은 곧 광휘로운 눈에 벌어진 균열의 궤적을 상상해 보며 이를 건드렸다.

“근자에 후작이 공작저를 맴돈다지.

에오르테 후작.

아니나 다를까. 그제야 눈매는 매섭게 그어지고 그 안에 잿빛 눈이 형형한 빛깔로 모양을 바꾼다. 이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공작은 비슷이 고개를 모로 기울여 부드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모르는 이가 들으면 진정 상대를 염려한다, 착각할 정도로 다정한 음성을 그 끝에 걸고서.

“지키고 싶은 게 있거든, 온 전력을 다해라, 아델. 다 잃고 나서 후회하지 않게 말이다.

***

복도를 내리밟는 내 발소리는 평소와는 궤가 달랐다. 건공에 뜬 것처럼 가볍지도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서분하지도 않은, 두터운 나무의 결이 진동할 만큼 거친 발걸음이었다.

구역질이 나.

마치 다 안다는 듯한 태도가. 제가 신이라도 된 듯한 말투가. 무엇보다…….

조사단이 파견된 지금, 공작가에 이목이 쏠리는 마당에 공작은 섣불리 후작에게 손을 대지 못할 것이다. 아미타 숲에서 후작에게 벌어진 일이 제국에 파다한 것도 있으니.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은 시점에 두 번이나 후작가를 몰아세우는 건 복잡할 것이다.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으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흘러나온 앞머리를 쓸어 올리자, 흐릿한 시야가 분명해지고 유리창 밖에 번진 풍경 또한 선연해진다. 나뭇가지 사이를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미명의 햇살에 여실히 빛나는 백금발 역시.

구역질이 나.

마치 다 안다는 듯한 태도가. 제가 신이라도 된 듯한 말투가. 무엇보다…….

거기에 휘둘리는 내가.

***

또 아델리아 경이었다.

부서진 파툼, 치료실 로비에서부터 느껴지는 스산한 기운. 목덜미를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외면하며 치료실로 걸음을 옮긴 치료술사가 마주한 인물은 제 직감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기사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치료실을 방문하던 그녀의 걸음이 멎은 건 아미타 숲에서 벌어진 사냥 대회 직후쯤이었다. 제어하지 못한 힘을 가진 기사 덕에 매일 과로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그에게 찾아온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녀의 발길이 멎고 그는 안온을 되찾았다.

풍요로운 계절의 빛깔이 묻어나는 따스한 바람과 피부를 쓸어내리는 찬연한 오후의 햇살, 눈부시게 흐드러지는 희붉은 꽃잎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음을 절감했던 지난날들을 회상하자, 자연스레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젠 끝이지.

그 생각과 함께 만면에 번지던 웃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영원과도 같이 평화로웠던 일상에 심심찮은 작별의 인사를 고한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상에 앉아 있는 기사에게로 보폭을 넓혔다.

“아델리아 경.”

가늠할 수 없는 힘에 위태롭기 짝이 없어 보이는 기사에게로.

“잠시 상태를 살피겠습니다.”

***

파툼이 부서졌다.

아미타 숲의 자재로 마감된 공작저에서 오래 머물러서일까. 억눌렀던 힘은 기어이 터지고 파툼 역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끊어진 기억, 시리듯 저려 오는 온몸.

폭주 후에 찾아오는 익숙하고도 불쾌한 감각을 미처 지워 내기도 전,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치료술사가 덤덤한 목소리로 어렴풋이 예견하고 있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기력이 쇠했을 것이니 챙겨 먹어야 할 약초들과 당분간 조심해야 할 사안들. 하도 들어 외울 지경이었던 당부들이 낯설어질 만큼 실로 오랜만에 겪는 폭주였다. 한참 동안 파툼을 유심히 살피던 테비온의 치료술사가 침묵 속에 잠긴 공기의 기류를 환기시키려는 듯 목을 울린 건 그때였다.

“새 파툼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한 음성에는 두려움이 깃들어져 있다. 그가 내민 것은 얼핏 봐도 제법 많아 보이는 파툼이었다.

“파툼의 수급이 부족해 개수가 제한되었다 하지 않았나.”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옴죽거리던 그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공작저에 도착한 건 천지를 물들인 어둠이 땅과 하늘의 경계를 흐트러트리기 시작할 즘이었다. 영지 부근에서 시작된 불꽃놀이 축제를 구경하러 일과를 마무리한 사용인들이 저택을 떠난 지금, 저택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제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기 시작한 저택 로비의 벽등들을 지나친 걸음은 결이 부드러운 나무로 마감된 계단을 지나 방으로 향했다.

길을 잃을 만큼 광활하던 내부는 이제 제법 익숙한 빛깔로 내게 다가왔다.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극채색의 붉은 벽지, 천정을 수놓는 화려한 샹들리에, 부드럽게 발끝에 감도는 두꺼운 융단. 그 모든 것들이. 그리고…….

이것까지도.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미묘한 변화는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성급한 발걸음을 고스란히 담아내기라도 한 듯 올이 흐트러진 카펫은 마치 누군가가 들어선 흔적이 다분했다.

공녀가 내 방에 손을 대기 시작한 건 내가 공작가의 양녀가 된 직후였다. 아마 무언가를 훔친다는 자각도 없을 것이다. 제 딴엔 천박한 사생아에게 빼앗긴 물건을 되찾는 행위였으리라.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녀의 세계를 부서트린 무뢰한이자 제 핏줄의 것을 탐한 불한당이니. 그리 섬뜩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유 또한 그와 같겠지.

심드렁한 생각과 함께 나는 공녀의 자취를 쫓았다. 그 끝에 있는 화장대를 살피자 어렵지 않게 어질러진 흔적이 다분한 보석함이 나왔다.

낯이 서늘하게 식은 건 그때였다.

***

소파에 걸터앉아 유유히 책장을 넘기고 있던 공녀는 복도를 진동하는 거센 발걸음에 입꼬리를 올렸다. 항해의 순조로운 시작을 알리는 뱃고동 같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공녀는 여유롭게 오늘 하루를 되새겨 보았다.

시작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유달리 묵지근한 기분으로 맞이한 아침은 그 미친 여자가 공작가의 양녀가 된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이후부터 계속되는 현상이었으나, 오늘은 더욱 심각하다는 점에서 달랐다. 불현듯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푸른 눈이 창가로 흐르듯이 닿고 전날보다 더 시들해진 백합이 꽃잎을 길게 늘어트린 채 또 다른 잎을 추락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 여자 편을 들던 날, 백합은 처음으로 제 잎을 바닥으로 떨궜다.

믿을 수 없이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날 이후 백합은 나날이 생기를 잃어 갔다. 각인에 실패하던 날, 그 여자가 양녀가 되던 날. 심중을 뒤흔드는 분노가 절정에 다하던 어제, 공녀는 난간을 부여잡고 헛구역질을 하는 여자를 보았다. 떨리는 몸은 위태롭기 그지없고 갈 길을 잃은 채 허공을 부유하는 손 또한 초라하고 나약해 보였다.

그제야 공녀는 따사로운 햇살에 젖은 것처럼, 손끝을 간질이는 클로버를 발견한 것처럼 날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루의 일과처럼 그 여자 방에 가 그녀가 소중히 여길 마땅한 물건을 찾을 때에 그 기분은 절정을 달했다. 마치 하늘에 붕붕 뜨는 기분이었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보석함을 발견하고 그중 유달리 광택을 내는 브로치가 그녀를 반긴 건 그때였다.

그리고 지금이다.

공녀는 손안에 든 브로치를 가볍게 굴려 보았다. 그 광택이 영롱한 게 제법 진귀한 보석처럼 보였으나, 문양이나 장식은 영 구시대의 유물같이 촌스럽기 짝이 없었다. 짐승의 목에 건 진주 목걸이 같달까.

마치 그 여자처럼.

공작가의 양녀.

여전히 믿어지지 않은 단어를 상기한 공녀는 이를 아득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보던 그녀는 가장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모두가 다 속고 있어.

그 괴물 같은 여자한테.

마치 그의 할아버지가 그러했듯.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날 밤, 미약한 숨을 타고 전해졌던 유언과도 같은 문장들을 공녀는 떠올려 본다.

‘지켜라.’

애끓는 듯한 눈빛을 타고 흘러왔던 그 감정들을.

‘지켜라, 세이.’

응달 연안의 바다처럼 창흑빛으로 변모한 공녀의 눈은 극점에 달하는 감정들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늘 감히, 제 것이 될 이 공작가에 손을 댄 미천한 여자에게 분수를 알려 줄 작정이었다. 통로를 울리던 세찬 발걸음이 멎고 루트비아저에 살던 괴물이 그녀를 찾아온 건 그 찰나였다.

***

“이리 내시지요.”

나직한 음성에 느긋하게 책장을 넘기는 여유로운 겁을 덧씌운 공녀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무해한 듯 눈을 깜빡인다.

“무엇을.”

심중에 홧홧한 이는 불길을 애써 억누르고 서늘함이 어린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그건 공녀님께서 함부로 다루실 물건이 아닙니다.”

그러자 공녀는 손에 쥐고 있던 브로치를 천정 높이 올렸다. 칠이 바랜 보석이 불빛에 반사되어 사방에 제 색을 흩뿌렸다. 가늘어진 눈으로 한참 동안 브로치를 살피던 공녀가 입을 열었다.

“에오르테 후작, 그자의 것이지.”

너 때문에 손을 잃은 사내.

섬뜩하기 그지없는 단어를 덧붙이고서.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후작가의 물건을 가지다니.”

말을 뱉은 이는 이를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하긴 그 피가 어디 가겠어.”

작게 뇌까린 공녀는 뭐가 우스운지 낄낄거렸다.

“입 닥쳐, 세이.”

방 안을 적시던 공녀의 웃음소리가 멎은 건 내 입에서 분노가 흘러나온 때였다.

“뭐? 세이?”

사납게 그어진 눈매가 육지에 닿지 못해 성난 파도처럼 굽이굽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네가 루트비아도 에오르테도 망쳤을진 몰라도 공작가의 그 무엇도 앗아갈 수 없을 것이야.”

그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나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협탁에 놓인 은촛대를 들고 창가를 향해서.

“그래? 그럼 한번 지켜봐.”

비슷이 팔을 기울이자, 심지에서 피어오르던 불길이 촛농과 함께 흘러 공녀의 백합 위로 떨어졌다.

“뭐 하는 거야! 이 미친 여자가!”

기세 좋게 타오르는 불길은 끝내 저 수목을 삼키지 못한다. 그게 티케의 수목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시간은 벌 수 있지.

불길을 꺼트리려는 공녀가 다가오고 그 손에 들린 브로치를 빼앗으려 나는 팔을 뻗고. 옆에 있던 협탁이 쓰러지고 그 위에 놓인 은촛대가 기운다. 둔탁한 울림과 날카로운 파열음, 중간 중간 터져 나오는 고성과 커튼을 집어삼키는 불길 속에서 우리는 엎치락뒤치락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내실에 차오르는 뜨거운 열기로 숨쉬기가 불편해질 정도가 돼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더운 김을 머금고 부옇게 흐려진 시야로 스멀스멀 퍼지는 피비린내, 카펫 위에 흩어진 핏방울, 피로 범벅된 브로치가 차례로 들어왔다. 제정신을 차린 푸른 눈이 느리게 깜빡이더니 잿더미가 되어 버린 백합을 스쳐 지나 내게 닿은 것도 비슷한 시각이었다.

“미쳤어…… 넌 미쳤어…….”

내 시선은 오직 기어코 차지해 낸 브로치에만 고정되어 있었지만. 짙은 녹음을 머금은 것 같은 에메랄드 빛. 핏물에 젖어도 여전히 변함없는 빛깔이었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 위로 흘러 내려온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타오르는 불길 속, 분연한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벽안이 그제야 느껴졌다.

“무려 공작가를 박살 내려는데 제정신으로 되겠니?”

문장에 담긴 비아냥을 느꼈는지 푸른 눈에 날이 서고 바닥을 짚고 있던 공녀가 내게 달려들었다.

“이 미친 여자가!”

미처 거리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는지 공녀는 내가 비스듬히 몸을 돌릴 찰나,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헛손질한 손이 고꾸라진 몸을 일으키려는지 달싹거렸다. 그 손을 무심히 바라보던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럼 한번 막아 보시든가요, 공녀님.”

창검은 아닐지라도 혈맥 정도는 단숨에 끊을 수 있을 정도는 되는 정교하게 연단된 검이 공녀의 손에 쥐어졌다. 날 선 쇠붙이가 전해 준 생경한 촉감 때문일까. 검을 든 공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고작 이것 가지고.

두려움과 불안함의 빛깔이 위태롭게 떠오른 벽안에 나는 찬웃음을 입가에 물었다.

“떨고 있구나. 어리석게도.”

“나는…….”

“이리 주저하는 나약한 손으로 어찌 날 이긴단 말이니.”

“입 닥쳐!”

“제 능력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고작 각인 하나 따위 실패해 이리 버려진 주제에. 공작이 네게 실망한 것도 당연하지. 이 두려움 가득한 손으로 공작가를 이끌어 갈 수나 있겠니.”

고귀하고도 고귀하신 공녀님.

엉망이 된 카펫 위로 내려앉은 조소를 가득 머금은 문장을 가로질러 더욱 공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주먹 하나도 들이차지 않을 만큼 좁혀진 거리에 참지 못한 노기로 붉어진 벽안이 보인다.

“넌 날 못 이겨 절대.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내 손에 죽어 나갔지. 거기에 너 하나 더 보탠다 하여 달라질 것도 없어. 허니 조그마한 틈이라도 보이지 마렴. 네가 약해진 순간 난 절대로 머뭇거리지 않을 것이야.”

발딱, 공녀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죽여 버릴 거야! 내가 죽여 버릴 거야!”

허공을 가르는 날붙이의 울림이 스산하게 밤하늘로 흩어지며 다시 전쟁의 서막을 알렸다.

***

‘이에타 자작이 선박 투자를 다시 진행한답니다.’

침대 헤드에 깊이 머리를 기대어 앉아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공작은 불현듯 떠오르는 보좌관의 음성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막 보고서의 내용이 세이의 각인 실패로 흩어졌던 귀족들이 다시 베르니 가문의 문장 아래 결집하고 있다는 부분에 다다랐을 때였다.

겁 많은 노친네들.

신흥 세력의 수장 격인 이에타 자작이 움직였으니 남은 이들은 더 볼 필요도 없었다. 이만 서류를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은 그는 몸을 돌렸다. 막 절정에 다다른 불꽃놀이의 굉음 사이로 스며든 것은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빗질하는 소리였다. 공작은 물끄러미 화장대에 앉아 연신 작은 손을 위아래로 부지린히 움직이기 바쁜 부인을 응시했다. 슈미즈 자락 위로 흘러내리는 머릿결은 충분히 부드러워 보였지만, 작은 손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오랜만에 열리는 무도회라 단정한 매무새를 보여 주고 싶다는 수줍은 속삭임이 어렴풋이 그 위로 떠올랐다.

“라푸나 백작저의 무도회가 언제라 그랬더라.”

빗질이 멈췄다.

“당신도 가게요?”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와 함께 눈을 동그랗게 뜬 부인은 얼핏 보아도 제법 들떠 보였다. 매번 바쁜 일정으로 꼭 참석해야만 하는 행사가 아니면 생략해 왔던 남편을 둔 여자답게. 그 소녀 같은 모습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침 햇살 같은 환한 미소가 말간 낯 위로 떠올랐다.

“안 그래도 같이 갈 수 없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당신이 워낙 바빠서. 이번 무도회에 글쎄, 서대륙의 마술사들도 온대요.”

아아, 그 사기꾼들.

나직이 흘러나온 그의 추임새에 부인은 그의 가슴팍을 세게 내리쳤다. 연신 입을 쉬지 않고 종알거렸다. 어린아이들만 좋아하는 줄 알았던 이야기에 이리 진지하게 관심을 두는 이는 제 부인밖에 없을 텐데. 수년 전, 그들이 처음 제국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뭇 가문들도 깊이 관심을 두었지만, 그 호기심은 서대륙의 마술사들이 여러 가문들을 예상보다 빠른 쇠락의 길로 이끌며 사그라들고 말았다.

에오르테.

유서 깊은 후작 가문이 가장 대표적이었지.

문득 그 단어를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생각은 다른 곳으로 이어졌다.

“아델도 같이 가는 게 어때.”

라푸나 백작의 무도회에 초청된 희귀한 손님들을 차례로 열거하던 부인이 예상치 못한 문장 앞에 눈을 키웠다. 투명하게 맑은 은안 안에 담긴 제 모습까지 비칠 정도로.

“아델이요?!”

라푸나 백작. 원체 방탕하게 놀길 좋아하는 인물이니 그의 무도회는 격식 있는 자리는 아닐 것이다. 서대륙의 마술사까지 초청하는 마당에 더 말할 게 무엇인가. 그저 한바탕의 소동, 지금 밤하늘에 번지는 불꽃놀이처럼 번쩍대고 알록달록한 것들로 가득하겠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부인이 눈썹 앞머리를 모았다.

“하지만 나중에 제대로 자리를 만들어 소개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허나,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그런 것들이다. 가볍고 난잡한, 쉬이 눈을 가려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할 간교한 속임수와 같은 것들.

“너무 격식을 차리면 되레 부자연스럽지.”

“하지만…….”

요동치는 눈빛은 그럼에도 쉬이 가라앉질 않는다. 그 눈이 조금 다른 걱정을 담고 있다는 걸 알아챈 공작은 부인의 뺨을 살짝 그러쥐었다. 아니라고 하더니. 염려가 되지 않는 건 아닌가 보지.

“걱정 마, 아무도 모를 테니까.”

여전히 때 묻지 않은 소녀 같은 풍취를 풍기는 부인을 내려다보는 공작의 시선은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분위기라는 게 참 신기해. 제아무리 닮았다 하더라도 이토록 다른 빛깔로 만들어 버리니까. 입술에 입을 맞추고 목덜미를 쓸어내리던 그는 별안간 흐릿하게 들려오는 고성에 미간을 좁혔다.

“이게 무슨 소리지.”

“폭죽 소리잖아요.”

들뜬 숨 사이로 흘러나오는 문장은 그닥 신빙성이 없었으나, 부인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저 멀리서 한차례의 폭음과 함께 밤하늘은 다채로운 빛깔로 물들었다.

폭죽 소리라.

짧게 고심하던 공작은 다시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아니, 그러려 했다. 요란한 폭죽소리에 감춰진 희미한 비명을 잡아내지 않았다면.

“폭죽 소리가 아니야.”

***

“도대체 무슨…….”

화염에 휩싸인 내실, 자욱한 연기. 이를 가로지르고 나타난 이는 공작이었다. 좀체 평정을 잃는 법이 없는 그의 낯에 인 파문이 가불거리는 불길 너머 도드라졌다. 연기에 가리워져 푸른 눈에 번진 감정이 무엇인지 읽을 수 없었지만, 그의 깊은 시선이 바닥을 적신 핏물과 검을 든 공녀에게서 멈췄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세이…….”

침음 섞인 어조가 덧그리는 입술은 서늘하기 그지없다는 것 역시.

“여보, 이게 무슨…… 어머나, 세이!”

어느새 뒤따라온 공작 부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새된 비명이 매캐한 연기 위로 겹쳐졌다. 그녀는 어찌나 놀랐는지 슈미즈 위로 흘러 내려오는 숄을 붙잡을 정신도 없어 보였다.

그 소리들이 제게 불리한 판단임을 직감한 것일까?

공녀는 억울함을 호소하듯 눈을 내리떴다.

“저 여자가 불을 질렀어요!”

공작은 무어라 답을 주는 대신, 뜻 모를 시선으로 가만히 공녀를 응시했다.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불길만이 공간에 흐르는 유일한 소리일 때, 나는 적막을 가로지르고 허리를 낮췄다.

“죄송해요, 앞으론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는 그 단어에 나는 힘껏 힘을 실었다. 온몸을 나른하게 만드는 오후의 햇살과도 같이 다정한 기운을 담뿍 담으며. 공작의 시선이 느릿하게 내게 흘러들어 오고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천천히 동공을 여닫았다. 그 눈이 어떤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귀를 째는 듯한 공녀의 음성이 내실의 공기를 찢었다.

“아버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천치였다기보다는 기가 막힘이 더 큰 듯했다.

“누가 네 아버지야!”

불에 닿은 종이처럼 우그러진 공녀의 얼굴 너머 심해보다 더 짙게 가라앉은 푸른 벽안에 시선을 고정했다. 곧, 방을 느리게 배회하던 벽안이 허공에서 내 것과 얽혀 들었다. 설산보다 더 서늘한 눈동자는 이미 내린 결론을 내게 내비쳐 주고 있었다.

됐다.

공작이 보폭을 넓혔다. 움직임은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한. 아마 공녀에게 책을 물을 테다. 이미 가치를 잃었으니까. 과연 어떤 말을 하려나. 뻐근하게 차오르는 충일감과 함께 내가 곧 다가올 문장을 고대하고 있을 찰나, 공기를 가로지르는 마찰음이 귓전을 때렸다.

기이하게 돌아간 공녀의 고개, 휘둥그레진 공작 부인의 눈. 그리고…….

“어리광 피우지 말라 했잖니, 세이.”

고저 없이 흘러나오는 문장, 무감한 만면. 방금 제 손으로 딸의 뺨을 내려친 이답지 않은 분위기를 뿜으며 공작은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렸다. 범상치 않은 남편의 기세를 감지한 공작 부인이 공녀와 공작, 둘 사이로 끼어든 건 그때였다.

“여보!”

온몸으로 딸의 앞을 막아선 그녀의 눈은 묽고 눈시울은 붉었다. 허옇게 질린 그 입술이 열려며 남은 말을 마저 이으려고 하던 찰나, 잠깐이나마 나는 이를 타고 흐를 문장을 가늠할 수 있다고 여겼다. 누구나 쉬이 예측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경우를 떠올리며. 그러나 뒤이어 귓전을 때린 문장은 참으로 그녀다웠다.

“치유력이 사라진 걸 잊었어요?”

별빛마저 삼킨 아득한 어둠만이 드리운 밤, 공간을 파고드는 문장은 그 무엇보다 벼리다. 절로 헛웃음이 흘렀다.

정말이지. 당신이라는 여자는.

***

세상만사 모두 불과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앙상해진 잔해만 남겨 그 흔적조차 무엇의 원형이었는지 알 길이 없게 하니. 자취가 감춰진 곳에 버려진 것은 잿더미뿐이고 그 속을 들쑤셔 얻을 수 있는 건 그저 찰나의 덧없음.

세상만사 모두 불과 같다면 그 남겨진 것을 끌어안고 고심하지 않을 텐데.

지금처럼.

들뜬 재잘거림이 유백색 햇살을 타고 스며드는 어느 아침, 나는 저택의 벽을 타고 흐르는 사용인들의 수근거림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글쎄 정신이 어떻게 되신 거 아니야. 불을 지르실 생각을 하시지.”

저열하기 그지없는 문장이 적막하던 통로에 불을 지폈다.

“불이 대수야. 아델리아 경의 손을 보라고. 아주 엉망진창이던데. 칼은 또 어디서 나셨대. 티케 일족, 티케 일족 온통 떠받드니 뵈는 게 없으시지.”

뒤따르는 문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 이러다 큰일이 나는 거 아니야.”

요즘 공작저의 화두는 저것이다. 모였다 하면 저 얘기뿐이니 들으려야 듣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다. 불을 지른 공녀. 사람을 찌른 공녀.

공녀. 공녀. 공녀.

그 밤의 진실을 아는 이는 오로지 넷뿐이고 모든 행위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공녀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공녀의 추락 안에 공작가는 다시 평화를 되찾으며.

헌데, 어째서일까.

점멸한 시야를 구태여 헤집어 자꾸만 수면 위로 떠오르려 하는 그날의 잔상은. 경직된 얼굴, 텅 빈 듯 공허한 눈, 산발이 된 머리카락.

“기사님? 식당에서 공작 부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올렸다. 한참이고 문 앞에 서 있던 어린 하녀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화장대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 상념에 빠졌나 보다. 낯을 정돈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비스듬히 비껴 선 하녀를 지나쳐 보폭을 넓혔다. 망설임없는 걸음이 멈춘 것은 복도를 지나 계단 난간에 다다를 즈음이었다. 밖을 나서기 전에 항시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라는 뜻에서 벽 쪽에 마련된 거울 위로 잘 관리된 눈썹과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차례로 보였다. 고작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내 모습은 놀랍게 변해 있었다. 이런 대접을 받으며 평생을 살았던 아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다 쥐고 난 아이. 그러니까 이건 다 그 애의 잘못이다. 평소 처신이 바르기만 했더라면, 모두가 이토록 공녀에게서 뒤돌아설 일은 없었을 것을. 명백한 사실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책해 본다. 그런 아이를 걱정하다니.

실로 쓸데없는 생각이 아니던가.

거울에 비친 잿빛 눈동자가 뚜렷한 사실을 부정하듯 짙게 번진다.

“그럼, 이따 무도회에서는-”

식탁에 내려앉은 공기의 궤는 평소와 달랐다. 그 다름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으나 가슴께를 누르는 통증의 원인을 알 길은 딱히 없다.

거짓말, 실은 알고 있으면서.

하하하, 공작 부인의 웃음소리가 심중의 번민을 조롱하듯 맑게 울린다.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 그러니, 아델?”

불현듯 목소리를 낮춘 공작 부인이 물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니?”

헝클어진 현을 조율하는 손길처럼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 다정함이 향할 곳은 내가 아니다. 나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해 보기로 했다. 왜. 떠오르는 물음을 한 구석에 치워 버리고서는.

“공녀님은 먼저 식사를 하셨나 봅니다.”

심상한 어조에 식당의 분위기는 급속도록 차게 식었다. 음식을 나르던 사용인들은 뻣뻣하게 굳은 얼굴을 가리려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공작 부인의 입가는 눈에 띄게 경련했다.

“……그게…… 세이는…….”

화재가 수습되고 의원이 다녀가고 공녀는 갑작스레 두문불출한 지 벌써 며칠째. 응당 마땅히 가져야 할 의문 앞에, 그리고 마땅히 터져 나와야 할 답 앞에 그녀는 왜 저리 심란한 기색을 보이는 것일까.

내 시선이 깊어지자, 공작 부인은 이제 냅킨으로 입술을 짓누르듯 꾹꾹 내리눌렀다. 그 서투른 동작 위로 당황한 기색이 선연히 나비친다. 공작이 비스듬히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건 그때였다.

“그게 왜 궁금한 거지, 아델.”

이마 위를 너울거리는 황금을 녹인 것 같은 금발 아래, 나를 파고드는 예리한 벽안은 내 심중에 이는 번민을 모르지 않는 듯했다.

“세이는 당분간 손님용 객실에 머물 거야. 내실의 수리가 마무리될 때까지 말이야. 식사는 하지 않는다 하더구나. 몸이 좋지 않아서.”

“……그렇군요.”

느리게 답이 흘러나오자 공작은 가늘게 눈매를 휘었다.

“너는 괘념치 말고, 이따 있을 무도회 준비에 집중하거라. 널 처음으로 선보이는 자리니.”

팽팽하게 공간을 조여 오던 공기가 느슨해지자, 공작 부인이 침잠하던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낭랑하게 목을 울리기 시작한다. 최근 유행하는 서책과 새 연극. 끝내 주제가 다과회에 다다랐을 무렵, 나는 심중에 치미는 정체 모를 감정에 의자를 밀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공작 부인의 의아한 시선이 깊게 닿았다.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드레스를 확인해 보려고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무해한 눈길이었다.

어째서 단정 지었던 것일까. 제 친딸을 저버린 부부가 남은 딸은 귀이 간수할 것이라는, 그 덧없는 생각에 말이다. 염려로 포장된 감시, 인내를 빙자한 방만. 그것들로 점철된 애정은 결코 다정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면서. 박차오르듯 식당을 빠져나온 후, 정처 없이 움직이는 걸음 위로 두서없이 떠오르던 물음들은 끝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점멸했다.

손님용 객실.

‘세이는 당분간 손님용 객실에 머물 거야. 내실의 수리가 마무리될 때까지 말이야. 식사는 하지 않는다 하더구나. 몸이 좋지 않아서.’

담담하게 흘러나오던 문장을 떠올리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로비를 가로지르며 깊은 여운을 남기던 웃음은 길을 잃은 아이처럼 허공을 맴돌다 길게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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