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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축복받은 동생아 (6/16)

6. 축복받은 동생아

방 안의 공기를 찢는 서슬 퍼런 문장, 형용할 수 없는 빛깔로 타오르는 잿빛 눈.

그저 후작은 그 모든 걸 받아들이고 아파 하려 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척. 보지 못한 척. 말도 안 되는 문장들을 입에 담으며 저리 기를 쓰는 아이를 보자,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아서.

그게 그 아이가 그토록 바라는, 소망하는 결론인 것 같아서.

그리 마음먹고 혹여 감추지 못한 제 심중의 기색이 드러날까 시선을 떨군 후작이 일순 호흡을 멈춘 건 어느새 제 멱살을 움켜쥐고 있는 아이의 손을 발견한 직후였다. 간신히 내리눌렀던 염려와 불안이 다시 그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차오르는 감정에 후작은 그만 눈을 내리감았다. 까맣게 드리운 어둠에도 가시지 않는 감정들이 그의 심중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 험한 전장을 겪고도 여전히 여리디 여린 아이를. 이리 기를 쓰고 모진 말로 저를 상하게 하려 결국 제가 더 망가지고 마는 이 아이를. 그러니 내가 너를 어떻게 놓을 수가 있겠니.

후작은 가만히 저를 그러쥔, 핏물이 밴 작은 손 위로 제 손을 포갠다.

“부러 그리 날 서게 말하지 마렴.”

벗어나려는 듯 달싹거리는 몸을 비트는 움직임을 외면하며.

“내겐 한없이 뭉툭한 말에 아파하는 것도…….”

이리 떠는 것도 네가 아니니.

맞닿은 살갗 위로 제게까지 오롯이 전해지는 간헐적인 떨림의 주인은 그가 아니다. 그제야 이를 알아차렸는지 짙게 가라앉던 아이의 은안이 물수제비를 맞은 호수처럼 파문을 일으켰다. 그 눈을 응시하며 후작은 조심스레 아이를 다독였다.

“세상 만물 중하지 않은 것 하나 없고 뭇 생명 하나 귀히 여겨야 하건만 천공에 달이 높게 뜬 밤, 기도했지.”

부디 네 앞에서는 모두 다 스러지게 해 달라고.

매일 밤, 혹여 입 밖으로 내면 그 죄가 배가 될까. 그리하여 그게 아이에게 해가 될까. 속으로 삭여야만 했던 소망이 둘 사이의 공간으로 비밀스럽게 흩어진다.

“허니 그 수천의 사람들은 다 내가 벤 것이다. 이 손도 너를 지키지 못해 잃은 것이야. 네 손은 여전히 깨끗하고 마음은 더없이 무결하니 아파하지도 그렇다고 후회하지도 마렴.”

부옇게 흐려진 시야, 말이 잦아든 공간. 그 안에서 떠오르는 아이는 전의를 상실한 모양이었다. 그저 가만히 제게 잡혀 들어온 손 역시 그랬다. 그럼에도 입술은 여전히 위악을 떨었지만.

“안타까우십니까. 가여우십니까. 하긴, 제가 생각해도 참 기구한 인생이니. 그럴 만도 하지요. 거기다 더 보태지 마세요.”

부러 서늘한 낯을 만들고서.

“절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마시란 말입니다.”

“아델…….”

“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아침의 바람처럼 나뭇잎을 살랑거리는 다정한 속삭임은 아이에겐 세상을 휘몰아칠 거센 북풍이었나 보다. 사라질 생각은 하지 않고 부풀어만 오르는 감정을 가리려는 듯 아이는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물어 뭘 하겠습니까. 저를 보러 오셨겠죠. 왜요! 도대체 왜요!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매번!”

“……널 아끼니까.”

동굴 속으로 흘러나온 문장, 그 안에서 떠오르는 전의를 상실한 모양이던 아이는 나직이 읊조렸다.

“……사람들 말이 맞아…… 후작님은 정말 미쳤어요.”

더는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듯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보폭을 넓히면서.

옅은 한숨을 내어 쉰 후작은 꺼지지 않고 되살아나려는 잿불을 마저 꺼트리고는 고개를 젖혔다. 삐죽삐죽 천정을 장식하는 종유석에 맺힌 물방울이 그의 뺨에 떨어졌다.

‘후작님은 정말 미쳤어요.’

미쳤다라.

피식, 후작은 웃음을 흘린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러지 않고서야, 미치지 않고서는 핏줄을 타고 흐르는 이 원죄를, 죄책감을 견뎌 낼 수 없었을 테니까.

그날 이후, 그 잊을 수 없는 밤 이후 후작은 리오를 다시 보지 못했다.

별거 아니라 여기려 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스러지는 이 땅에, 고작 여리디 여린 한 생명이었으니. 지워지지 않는 그 밤의 소리도 눈빛도 다 잊으려 했지. 그런데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그 애가 지내던 저택의 방과 함께 노닐던 정원과 그 애의 웃음소리가 끝내 사라지지 않아…….

밤이 되면 그를 놓아주지 않는 악몽이 되어.

그 한 줌의 숨결이, 순간이 그를 이리 망가트릴 줄, 그때는 알았을까. 마주한 눈을 외면한 채 시선을 떨굴 때에는 과연 짐작이나 했을까.

그걸 가늠하지 못한 죄로 그는 남은 생을 다만 미쳐야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때 널 만났지.

“후작님.”

동굴 안에 되울리는 소리는 틀림없는 아이의 것이다. 그 울림을 쫓아 고개를 들자, 분명 숲에서 찾아낸 듯한 과일을 들고 서 있는 아이가 보였어. 어느새 마음을 정리했는지 아까와같이 격양된 표정들은 찾을 수 없었다.

“일단, 이걸 좀 드세요. 곧 기사들이 올 것 같긴 하나 어찌 될지 모를 노릇이니.”

그래, 그때 널 만났어.

지금처럼 담담한 낯을 한. 이깟것 모두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럼에도 미처 감추지 못한 감정들을 오롯이 그 눈에 나비치면서. 후작은 말없이 그 눈을 마주 보았다. 입술이 열리고 정돈되지 못한 문장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내겐 동생이 있었어.”

그 눈에서 그는 무엇을 본 걸까.

“눈이 참 예쁜 아이였지.”

헛된 희망일까. 아니면 실낱같은 면죄부일까.

“허나 그 시절의 나는 어리석고 나약해 결국 그 애를 지켜주지 못했지.”

여전히 알 수는 없지만 하나 확실한 건 이번에는 이 아이를 지킬 수 있을까, 하는…….

“널 보면 자꾸 그 애가 떠올라.”

그런 기대 때문에.

“가여워서도, 불쌍해서도 아니야.”

세상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준다면 이번엔 이 아이 하나만큼은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그저 그랬던 것뿐이란다.”

그리하면 이 해갈되지 못하는 죄책감이, 마음이 나아질까 하여. 그래서였어. 이 손이 사라지고도 그저 담담했을 때, 저택과 영지를 잃고도 그저 웃을 수 있었던 이유를.

후작의 담담한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

숲의 중앙으로 내달리던 기사들의 행렬은 그 첫 기세가 무색하게 한참이나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사나운 울부짖음을 마지막으로 땅으로 쓰러진 멧돼지, 그 옆구리에 박힌 칼을 뽑은 하렌은 거기서 사방으로 솟구친 핏물을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 핏물은 이미 목덜미에 여기저기 엉켜 있는 핏덩어리에 제 살을 더했다.

벌써 몇 마리째인지 모른다.

지난 날 숲을 들쑤셨던 사냥 대회의 보복인지 무엇인지 짐승들은 아귀처럼 달려들었고 하렌과 기사들은 중앙에 가까워질수록 그 수를 불려 가는 이들을 상대하느라 영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나마, 그림자 늑대가 없어 다행입니다, 단장님.”

여기저기 널브러져 좁은 골짜기를 막고 있는 멧돼지들의 시체를 치워 말이 달릴 길을 내던 기사는 퍽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려 노력하고 있었다만.

그림자 늑대.

‘숲의 파괴자’, ‘마지막 그림자’, 등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그것은 지능이 높고 여간 사나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무리를 지어 움직인다는 것 역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다. 누구도 기사의 말에 답을 하지 않았지만, 거칠게 씨근거리는 숨소리 군데군데 안도감이 묻어 나왔다.

그러나 불안정한 호흡과 함께 건네진 위로의 말이 왜 이리 마음을 수런하게 할까. 하렌은 꽉 움켜쥔 말고삐에 더욱 힘을 싣고는 담담히 다시 행군의 시작을 알리는 지시를 내렸다.

곧, 핏물에 젖은 쇠붙이들이 풀잎과 수목을 스치는 소리가 고요한 숲에 울려 퍼졌다.

행군의 속도는 갑작스레 급물살을 탄 것은 그로부터 시각이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때였다.

사방에서 밀려오던 짐승들이 삽시간에 사라지며 절로 속도를 내게 된 것이다. 하렌은 말허리에 박차를 가하며 기묘한 현상을 곱씹어 보았다. 숲의 중앙에 들어온 직후, 몇 번 더 야생 멧돼지나 코요테를 마주치기는 했지만 현저히 짐승들이 나타나는 횟수가 줄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만약 불길을 쫓아 그들이 이동했더라면 이 부근에 더욱 짐승들이 몰려 있어야 할 터인데. 그들이 마치 무언가에 떠밀려 중앙 밖으로 도망쳐 나오기로 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원체 머리를 쓰는 자는 아닌지라 자꾸만 머릿속을 파고드는 헛된 생각이 버겁다. 옅은 한숨과 함께 복잡해진 상념을 환기시키려 떨어트렸던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시야에 닿는 풍경에 외려 더욱 마음이 수런해지고 말았다.

푸른 녹음과 무채색의 기사들, 그리고 은빛 생물.

‘단장님, 아타할케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믿을 수 없다는 음성으로 보고를 마치고는 기사가 눈짓으로 행군 끄트머리에 비쭉 모습을 드러낸 은빛 갈기를 가리킨 건 조금 전 일이었다.

다분히 그들의 시선 밖으로 벗어날 수 있는 명마는 그렇게 계속 행렬에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연신 반복되는 그 기괴한 행위가 저를 따라오라는 신호라는 걸 깨달은 건 두 갈래로 나뉘어진 길을 만난 직후였다.

왼쪽, 오른쪽.

고심 끝에 아타할케를 쫓아 택한 오른쪽에는 참나무가 총총총 박힌 평탄한 흙길이 드러났다. 그 덕에 단박에 생풀의 향기가 가득한 골짜기를 넘어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소 근처에 다다를 수 있었고.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여전히 혼란한 기색이 가득한 적안은 저 멀리 정찰을 마친 부하의 보고에 침착한 모양으로 돌아왔다.

“단장님, 아무래도 저쪽인 것 같습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기사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짙푸른 빛깔의 무성한 초목 아래 희끄무레하게 드러난 박암은 아무래도 동굴로 추측되어 보였다. 원체 가팔라 더는 말을 끌고 갈 수 없는지라 몸을 낮춰 바닥으로 내려온 그는 일순, 철벅거리는 물소리에 멈칫했다.

강물인가.

그저 대수롭지 않게 옮기려던 발걸음이 땅에 못 박힌 듯 굳은 것은 뒤이어 펼쳐지는 광경이었다. 발목까지 차오른 피 웅덩이와 군데군데 널려 있는 그림자 늑대의 사체. 동굴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짙어지는 흔적들은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충분히 가늠하고도 남게 만들었다.

허탈한 웃음이 그의 입매를 타고 흐른다.

누군가를 지키려는 마음은 이토록 무자비한 것일까.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이토록 잔혹하고,

“아마 부근에 있는 그림자 늑대 무리가 죄다 여기서 죽은 듯합니다.”

서늘한 것일까.

깊은 밤, 박새 하나 베지 못했던 기사는 결국 그 밤을 건넜구나.

허울 좋은 살인귀가 되어.

“페치오 위원이 아주 좋아할 만한 소식이네.”

“예?”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배회하는 기사의 눈을 일별한 하렌은 지나치게 적막해 있는 공간을 가로지르며 보폭을 넓혔다.

***

“아마 몸이 좋지 않아 그런가 봅니다.”

아득히 점처럼 멀어지다 이내 사라지고 만 모르헤 기사단원의 자취를 쫓는 삼촌을 향해 테오는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제 것보다 조금 채도 높은 빛깔의 주인은 그 음성을 듣지 못한 듯 잠잠했지만.

옅은 한숨을 내쉬며 테오는 이마 위로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갑갑한 마음을 해갈하려는 듯.

조금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동굴에 있던 둘을 발견한 테오는 그리 생각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몰골인 삼촌과 누나를 보면서도 결과적으로 이번 일이 둘 사이에 어떤 변화구가 되리라 여겼다. 친밀함은 기대하지 않아도 적어도 전처럼 인사라도 나누는 사이이길.

허나, 잠시 멍하니 삼촌을 응시하던 누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들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지.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연유가 무엇인지 묻기라고 하고 싶다만…….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은 공자는 조금 뒤로 목을 젖혔다. 선연한 진홍색 빛줄기가 잔잔히 흐르는 구름 사이로 나비쳐, 고개턱이 노을 속으로 침식되어 가는 광경이 퍽 아름답다. 그 빛을 받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던 때를 기억한다. 이제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테오는 눈을 아래로 내려 삼촌을 바라보았다. 열꽃이 핀 안색하며 푸르죽죽한 광대와 잔가지에 긁혀 이리저리 몸에 난 생채기. 한바탕 난리에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고원의 임시 치료막사에서 긴급한 처치를 했다기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몰골이었다. 문득, 저라도 이 낯을 다시 볼 자신이 없다는 생각에 다다를 즈음, 저 아득한 어딘가를 향하고 있던 삼촌의 위태롭던 몸이 기어코 무너져 내렸다.

“엘몬트!”

전에 없이 급박한 음성이 페라비 별장의 고요를 깨트린다. 하루를 시작하기도 이른 새벽녘. 하나둘 로비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용인들은 저택의 주인을 등에 업은 공자의 모습에 잠기가 묻어난 눈가를 서둘러 비볐다.

“공자님?”

“엘몬트는?!”

“그게 집사님은-”

균형이 맞지 않는 걸음소리가 이에 답을 주듯 로비 바닥을 진동한 건 그때였다. 급히 로비 한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집사는 흐릿한 두 인영을 발견하고는 보폭을 넓혔다.

“엘몬트!”

금세 제 앞에 다가온 집사를 향해 테오는 가쁜 숨을 쏟아 냈다. 수도에서부터 의원을 구하려 했으나, 사냥 대회의 일로 제국의 내로라하는 치들은 다 아미타 숲에 몰려들었는지 의원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열이 심하셔, 마차에서부터.”

급히 나왔는지 정돈되지 못한 옷매무새와 흐트러진 머리칼. 그럼에도 맑은 눈동자만은 때 아닌 소란에 맞지 않게 침착함 빛이 어려 있었다.

“제게 맡기시죠, 공자님.”

***

약을 먹고 또 먹고 또 먹었다.

보고 있는 조카마저도 질렸다는 듯 질색하는 약물의 향연은 단연 후작의 몫이었다.

의식을 잃은 지 사흘, 그리고 그로부터 열흘. 어느 정도 회복된 몸은 온전하다기보다는 정확히는 아미타 숲의 사건을 겪기 전으로 돌아왔다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것만으로도 집사와 테오는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마주한 건 테오의 울음소리였다. 제가 본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깜빡이던 녹안은 완전히 초점을 잃고 풀어지더니 급속도로 물기가 차올랐다. 사냥 대회는 애초에 가는 게 아니었다고, 자기 잘못이라고 울먹거리는 조카는 다 장성한 줄 알았는데 여태 앳된 티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히 물기 어린 뺨을 닦아 주고 있자, 소리를 듣고 불편한 다리로 다급히 달려온 엘몬트가 허옇게 질린 낯으로 그 뒤를 이었다. 저택의 온 커튼이란 커튼들은 다 갈며 번다한 마음을 달래던 마리가 손에 들고 있던 천을 미처 정돈할 새도 없이 내실에 들이닥쳐 마지막 백미를 장식하며.

그러니까 어디에서도 아이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차디찬 돌벽에 울려 퍼지는 떨리는 음성, 밤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울음소리. 그 모든 것들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꿈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바탕 헛소동처럼, 아니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찰나의 덧없는 희망처럼 사그라든 기억만을 움켜쥔 후작은 가만히 눈을 감아 내렸다.

‘이름이 뭐죠.’

동굴 안에 울려 퍼지던 담담한 과거의 회상 앞에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한 사람처럼 초점이 흐릿해진 아이는 이를 맞추려는 듯 느리게 눈을 한참 깜빡이다 그리 물었다.

‘그 애 말이에요.’

정지한 시간 속을 부유하는 빛먼지들처럼 아이의 목소리는 아득했다.

‘리오 서머셋.’

빛에 명멸한 것처럼 하얗게 변한 눈으로 아이는 막 말을 뗀 이처럼 조심스레 혀끝에 그 단어를 굴려 보았다. 리오. 그리고 그 두 음절들이 공간을 가로질러 사라지지 않은 여운을 남길 즈음 후작의 심중에 별안간 돋아난 것은 기이한 감정이었다. 무언가가 잘못된 것 같은.

다시금 그 감정을 떠올린 그는 체증과도 같은 갑갑함을 느끼며 집무실 책상에서 일어났다. 심란한 그의 마음을 따라 발아래 드리워진 그림자가 불빛에 제 몸을 너울거렸다.

“후작님.”

균형이 맞지 않는 두 다리가 그 위를 가로지른 것은 그때였다.

“약은 이제 더는 못 먹겠어, 엘몬트.”

힘없이 입술을 벌린 후작은 질렸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제 뺨에 닿는 질긴 시선을 외면했다.

“약이 아닙니다. 이건…….”

말끝을 흐리며 엘몬트가 그에게 내민 것은 여러 가지 약초를 배합해 갈아 만든 주스였다. 병약했던 형님 덕에 늘 후작의 건강을 염려했던 집사가 아주 어릴 적부터 만들어 주었던. 컵에 새겨진 아네모네 문양과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푸르죽죽한 액체를 보는 후작의 눈은 수런하게 흔들린다. 한동안 사냥 대회며 동굴이며 온갖 일에 휘말린 통에 먹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걸까. 참으로 충직한 집사구나. 혀를 내두르며 후작은 그 잔을 받아 들었다.

“다 마셨네.”

알싸한 내음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맛은 정말인지 끔찍했다. 그의 말에도 미심쩍은 듯 엘몬트는 잔을 꼼꼼히 확인하고 있었지만. 그런 집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후작은 불쑥 맥락도 상황도 맞지 않은 문장을 뱉어 냈다.

“아델에게 그 얘기를 해 주었네.”

“무슨 얘기 말이십니까.”

잔이 깔끔하게 비워진 것을 전부 확인한 후에야 엘몬트는 느리게 고개를 젖히며 말을 받았다.

“리오 말이야.”

“……뭐라시던가요.”

“그냥, 딱히. 별말 하지 않았네. 다만 말을 해 주고 나면 뭔가 후련할 줄 알았는데…….”

리오. 예전과는 조금 다른 감각을 자아내기 시작하는 그 단어를 중얼거리던 후작은 지는 석양이 맺힌 눈동자를 천천히 여닫았다. 점멸을 반복하는 시야로 동굴에서의 풍경이 하나둘 흘러들어 왔다. 작게 리오의 이름을 읊조리던 아이의 단정한 입매와 어스름한 동굴의 내부보다 더 짙게 가라앉은 잿빛 눈. 눈에 띄게 얼어붙은 아이의 낯빛.

무엇일까.

그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엘몬트.”

후작은 읊조리는 듯한 음성으로 집사를 불러 보았다.

“무언가 아주 잘못된 기분이야.”

나무판자 안에 갇혀 숨죽인 채로 오로지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던 절박한 마음을 나비치던 유일한 창구, 어둠에도 사위지 않던 그 갈색 눈과 닮아 잊지 못했던 그 눈을…….

모양도 빛깔도 다르지만 그리 보였던 그 눈을 떠올리며 후작은 옅은 한숨을 내어 쉬었다.

지금 그 눈의 주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리오 서머셋.

아침 햇살과 함께 방 안에 들이친 부연 먼지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혀끝으로 그 단어를 굴려보았다. 기사단 훈련을 위해 매무새를 정돈할 때에도 협탁에 놓인 검을 닦아 내릴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리오 서머셋.

후작은 한참이고 늘어놓은 설명의 시작과 끝은 그 이름이었다. 찬란히 빛나는 가문의 긍지 아래 숨겨진 채 응달에 머물러야 했던 에오르테가의 사생아. 끝내 생을 다했던 가여운 동생에 대해서. 그제야 이해가 갔다. 집착과도 같은 그의 행동의 궤적이. 쇠락하는 가문과 잃어버린 손. 무수히 많은 것들을 버리고도 끝없이 내게 보이는 헌신을. 그 가여운 아이와 다를 바 없는 나를 이번에는 외면할 수 없었겠지.

이해가 갔다.

그런데 왜…….

하도 닦아 내려 이제는 면경처럼 뚜렷이 상을 나비치는 검에서 손을 뗀 나는 열감이 묻어나는 손으로 관골을 꾹꾹 내리눌렀다. 골을 파고드는 강한 자극에 짓눌려 있던 어두운 감정들이 하나둘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에 맞지 않게 돌연 치밀어 오는 짜증과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맥락을 앞에 두고 깊어만 가는 분노들이.

‘동생이 있었단다.’

그래.

‘널 보면 그 애가 떠올라.’

그 시답지 않은 말을 들었을 때부터 켜켜이 차올랐던.

의문이 잦아든 자리에 차오른 것은 그런 진창과도 같은 감정들이다. 빛이 닿지 않는 응달, 깊숙한 골짜기 아래서 자라고 있는 패역의 이끼들처럼. 안다. 나에겐 이런 감정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거. 그는 나 때문에 가문은 쇠락하고 손은 망가진 채 살아가는 사람인데 말이야.

헌데, 왜 이렇지.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울까.

아마 내가 못돼 처먹어서 그런가 봐요. 자조 섞인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중얼거림이 어둠에 먹힌 내실로 스며들었다.

깊은 밤, 때 아니게 불어오는 새벽의 한기를 맞아 온몸에 아스스 돋아나는 것 같은 소슬한 감각이 낯익다.

이를 느껴 본 게 언제였더라.

무언가 얹힌 듯 체증이 일고 명치끝이 아려 오는 이 감각을 느껴 본 게 언제였을까. 범람하는 기억의 강물 속에서 뇌리를 스치는 기시감의 흔적을 찾아 헤맬 즈음, 마을이 떠나가러 우렁찬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또 사라졌습니다, 아델리아 경.”

걱정스러운 음성과 마찬가지로 불안한 기색이 가득한 낯이 막 숙실에서 나서는 나를 맞이했다. 무슨 말이냐는 듯 미간을 좁히자, 이안은 더욱 울상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아타할케 말입니다!”

아타할케.

여태 익숙해지지 않은 그 단어는 요즘 들어 자주 내 일상을 방해하고 있는 원흉이었다. 나를 따라 아타할케가 아미타 숲을 나왔다, 하렌이 모르타 위원회에 보고한 게 화근이었다. 영물이 뿜어내는 찬란한 빛깔은 잿빛 테비온과 너무도 이질적이라 눈 먼 자가 아니었다면 모르지 않을 수밖에 없긴 했다만. 이후로 테비온에 머물기 시작한 명마는 또 제멋대로 사라지기를 일삼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내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으니까. 내가 신경 쓰지 말라, 손을 내젓자 이안은 주저하며 입술을 열었다.

“이번엔 절대 사라지게 하면 안 된다 하셨는데…….”

흐려지는 말끝이 뜻하는 인물은 분명했다.

페치오.

***

“또 아타할케가 사라졌다면서.”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에 눈을 고정한 사내는 심상한 어조로 물었다. 좁다랗게 이어지는 복도를 따라가면 드러나는 내실은 비가 오기 직전처럼 어둠침침하고 스산했다. 그 기괴한 기류의 끝은 단연 이 사내였다.

페치오 위원.

“예.”

짤막한 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흐릿한 불빛 아래 그의 미간이 좁혀지는 게 보였다.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번 일이 제국에 파다하게 번졌다네.”

잘 갈아진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어슴푸레한 사위 속 선연하게 드러났다.

“아무래도 이목을 끄는 행사에서 이목을 끄는 인물에게 벌어진 일이니 더욱 그러하지. 기적이다. 누군가는 그리 말한다지”

뺨에 화인처럼 새겨진 기다란 흉터 역시.

모르스의 현신과 아타할케.

근자에 모르타 위원회가 밀고 있는 선전 문구이기도 했다. 티케, 모르스 일족. 가늠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자들에 대한 박해는 과거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일족들이 뭉치고 힘을 합치며 세력을 규합하여 이에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모르스 일족에 대한 두려움의 시선은 사람들 마음에 뿌리 깊게 박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낫다, 말하는 페치오였지만 일족의 장기적인 번영을 위해서는 인식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모르타 위원회의 통념에 딱히 반발하지 않는 걸 보니 그 역시 이에 공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활용되고 있는 게 바로 나라는 게 문제였지만.

아타할케의 사건으로 더욱 극심해졌고.

오케아데네스처럼 극이라도 만들 기세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아래로 떨군 시선을 들어 차창 밖으로 던졌다. 침침한 회색빛으로 깔린 마을은 그 어디에서도 살아 숨 쉬는 생명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져 온 어둠의 그림자가 사시사철 근방을 맴돈다.

이런 곳을 누군들 멀리하고 싶지 않을까.

“찾아내. 그리고 길들이게.”

적막한 공간을 울리는 페치오의 음성에 난 다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그의 낯은 뒤따른 문장에 연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곧 다가올 칠대륙의 회담에 황제께서 경과 아타할케가 함께 하길 원하시니.”

칠대륙의 회담.

이민족을 북쪽 고원 위로 몰아내며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남은 건 이 대륙의 주인이 누가 될 것인가.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는 심리전이 아마 그 서막을 열 것이다.

황실까지 연류된 일이라 그저 넘어갈 수는 없으리라 짐작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해야 될 일이 산적해 있는 마당에 신출귀몰하는 명마를 무슨 수로 찾아낸단 말인가.

“어찌 말입니까.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모르는데.”

“……아타할케는 한낱 짐승이 아니야. 교감을 한 이의 마음을 따라 움직이지.”

페치오는 한심스럽다는 기색이 다분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무슨 뜻입니까.”

“경이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딘지 떠올려 보게. 아마 그곳이 아타할케가 향하는 곳일 테니.”

“아마 델로스의 문턱일 것 같은데요.”

비아냥거림이 가득한 문장에도 딱히 대꾸하지 않은 그는 대신 뜻 모를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후작을 만났다면서.”

나를 직시해 오는 새까만 눈은 사라진 아타할케의 행방을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

“아타할케는 새벽의 이슬을 먹고 자란다 하지 않았나요?”

심각한 눈으로 묻는 조카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했다.

“그래, 나도 그리 들었던 것 같긴 하구나…….”

정원 한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던 리베라의 뿌리와 버찌들을 남김없이 먹어 치운 아타할케는 말그스름한 눈망울을 들어 후작의 품을 파고들었다. 마치 그의 품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먹잇감을 찾는 모양새였다.

아타할케는 새벽의 이슬을 먹고 자란다.

말도 안 되는 속설을 과연 누가 퍼트린 것인지 의심스러워질 즈음, 어느새 또 다른 먹을거리를 저택에서 가져온 테오는 불현듯 현실을 깨달은 듯 낮게 물었다.

“이리 계속 두어도 되는 걸까요?”

“달리 도리가 없잖니.”

아타할케가 리베라의 뿌리를 먹어 치우는 속도를 가늠해 보며 후작은 조금 자신 없는 말투로 답했다. 토양이나 습도가 중요해 재배하기가 쉽지 않기로 자자한 리베라가 아닌가. 그러나 조카가 근심하는 방향은 그와 조금 다른 듯했다.

“혹, 모르타 위원회에서 이 일을 문제 삼기라도 하면…….”

그제야 후작은 연신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던 조카의 행동의 진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모르스의 현신과 아타할케.

최근 저잣거리에 떠도는 그 소문들을 후작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러진 못할 게야. 이번 일을 가지고 일족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려 하는 것 같으니.”

“하지만 이 일을 모르타 위원회에게 알리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후작은 대답 대신 그저 가만히 아타할케의 갈기를 쓸어내릴 뿐이었다. 제법 그의 손길이 익숙한지 아타할케는 피하지도 않았다. 매끄러운 빛깔이며 우아한 몸짓과 서푼한 움직임.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정원을 드나드는 생물은 가히, 명물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다. 별장의 고담한 풍취를 단박에 압도할 만큼 기품 있는 말이었다. 동굴에서 봤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는 듯 테오가 자리를 뜨자, 후작은 조심스레 구 영물의 눈을 마주 보았다. 동굴 안에서도 매양 아이의 주위를 맴도는 말이 무얼 하고자 하는 것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길을 인도해 주었다는 조카의 얘기와, 아이를 따라 테비온에 드나든다는 은빛 말에 대한 얘기가 그 생각에 힘을 더했다. 아마 아이를 따라다니는 모양이지. 그런 주제에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다만…….

그 앤 여기 없어.

그 분명한 사실을 영민한 말은 미처 모르는 듯하여 알려 줄까 며칠째 고심하던 후작은 오늘도 끝내 입을 꾹 다물었다. 혹여 그 문장이 입 밖으로 나오면 아타할케가 홀연히 자취를 감출까 하여.

“삼촌!”

조카의 외침이 정원을 흔든 건 그때였다.

***

정말이었다.

허탈함이 가득 밴 웃음을 터트리며 나는 고개를 젖혔다. 테비온의 것과는 비견할 수 없는 쾌청한 하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코를 간질이는 향긋한 풀꽃들과 대지에 깊게 뿌리내린 우듬지. 한적하고 평안한 정취가 함축되어 있는 풍경들.

그러니까 정말 아타할케는 페라비 별장에 있었다.

우스운 말이라고 여겼다.

‘……아타할케는 한낱 짐승이 아니야. 교감을 한 이의 마음을 따라 움직이지.’

삼류소설에나 어울릴 법한 문장을 말이다. 그럼에도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혹 또 폭주라도 하시면.’

페라비 별장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는 어린 견습 기사의 염려와,

‘페라비 별장? 페치오 위원이 바라는 게 뭔지 몰라? 그자는 경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는 게 목표라고.’

진심 어린 단장의 경고를 뒤로하고.

페라비 별장이라는, 페치오가 친히 지시한 마뜩잖은 목적지에도 걸음을 옮겼다. 대충 별장 부근을 맴돌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돌아오면 머지않아 마무리될 일이라고. 후작의 눈에 띄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말도 안 되는 변명들로 위악을 떨며.

알고 싶은 게 있어서.

물음이 사라진 자리에 찾아온 또 다른 물음의 답을 이곳에서는 찾을 수 있을까 하여.

‘내게 동생이 있었어. 널 보면 자꾸 그 애가 생각나.’

그 말이 몰고 온 알 수 없는 감각의 정체를. 짧은 순간, 씨앗을 내려 단숨에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 이제는 나를 삼킬 듯 몸집을 부풀리는 기이한 감정의 정체를.

어디선가 오래전, 느껴 봤던 감각의 진원지가 이곳인 듯하여.

그래, 아무리 곱씹어 봐도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건 이곳뿐인 것 같아서.

가도를 장식하는 독수리의 석상, 여전히 변치 않는 기괴한 정원의 풍경. 내리쬐는 빛기둥 가도 위에 흩어진 은빛 갈기들이 찬란하게 부서지는 광경을 보며 나는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구름이 낀 것처럼 흐린 기억 속을 나는 천천히 헤쳐 갔다.

맑은 후작의 웃음소리와 아침을 깨우는 마리의 다정한 속삭임, 저택이 떠나가라 내딛는 테오의 발걸음. 이제는 아득해진 추억들을 헤집던 내가 멈칫한 것은 잊고 있던 단어를 떠올렸을 즘이었다.

메로본 백작.

***

아이가 나타났다.

부신 은발이 느리게 여닫히는 그의 눈을 파고들었다.

멍하니 있는 그와 마찬가지로 마주한 은안은 초점이 맞질 않은 채였다.

“아델?”

조심스러운 그의 부름에 아이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떴다. 망막한 밤하늘을 부유하는 것 같던 낯은 그 몇 번의 깜빡임에 사라지고 수십 년의 세월이 퇴적되어 만들어진 바윗덩어리 같은 만면이 한층 깊어진 눈으로 그의 옆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영물이 그 시선의 끝에 있었다. 그제야 어째서 아이가 걸음한지 깨달은 후작은 멋쩍은지 목덜미를 쓸었다.

“모르타 위원회에 알리려 했는데…….”

잦아드는 말 속에는 그저 서신 한 번 전달했으면 처리되었을 일은 굳이 굳이 미뤄 둔 까닭이 담겨 있었다.

올까 해서.

이 말이 그 아이의 것이라, 적어도 모르타 위원회는 그리 만들고 있는 것 같으니. 그럼 찾으러 한 번은 오지 않을까 해서.

넘실대는 침묵을 가르고 아이는 그에게로 다가왔다. 정확히는, 그의 등 뒤에 있는 아타할케에게.

살갗을 아리게 할 정도로 서늘한 눈빛을 한 아이는 결연한 결심이라도 한 장수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그 주저 없는 걸음이 무색하게 그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했다. 언뜻 난감한 기색이 다분한 빛깔은 아마 어떻게 해야 이 영물을 데려갈 수 있는지 깊이 고심하는 듯했다. 후작이 조심스럽게 손에 들고 있던 리베라의 뿌리를 들어 보인 건 그때였다.

아삭, 순식간에 아타할케의 입으로 자취를 감춘 주홍빛 뿌리는 아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제 몸을 희생하며 적막을 메꿔 갔다.

***

창연하게 푸른 페라비 별장의 정원에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정원의 한 구석에서 건장한 기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리베라의 뿌리를 캐고 있었고 그 주위를 유유자적 배회하는 아타할케는 토양 밖으로 주홍빛 물체가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먹어 치우고 있었다.

아타할케를 테비온으로 데려가는 일은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될 듯하다.

그 명확한 사실에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던 후작은 동시에 아타할케를 꼬여낼 방법을 못내 모르는 척하지 못했던 제 아둔함을 질책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한두 마디 말을 나눌 여유는 있을 터였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적당한 주제를 모색하며 그가 대화의 주제를 한참 고르는 사이, 기사들이 아타할케로부터 리베라의 뿌리를 지키는 방안을 모색했는지 정원 한편에 차곡차곡 리베라의 뿌리가 쌓여 가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가늠해 보며 후작은 천천히 아이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드리운 그림자를 느꼈는지 단정한 어깨가 움찔거렸다.

“잠시 앉아 있는 게 어떻니.”

기울어진 해를 따라 발밑에 늘어진 그림자가 모양을 바꿀 즈음, 아이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인도한 자리가 오래전 자주 함께했던 정원의 테이블이라는 걸 알고는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았지만, 손가락에 낀 반지를 다시 한번 정돈한 아이는 자리에 착석했다.

의수는 보이지 않게.

아직 회복되지 않은 낯은 잘 드러나지 않게.

그리 매무새를 정돈한 후작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다 되었습니다!”

적막을 깨트리는 음성은 때를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맑았다. 휘적휘적,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견습 기사의 낯에 환히 번지는 웃음 역시 그랬다.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니까 그렇게 끝이 났다.

리베라의 뿌리와 엄청난 식욕을 자랑하는 명마. 외딴 시골에서 벌어진 말도 안 되는 헛소동은. 단 한 번이라고 여겼던 기회가 허망하게 사라지자, 후작은 어지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삼촌,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혹시 또 압니까. 아타할케에 다시 여기까지 올지?”

침울하게 가라앉은 식탁의 분위기에 테오는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럴 리가 있겠니.”

“그럴지도 모르잖아요.”

후작은 우울한 눈을 들어 식당에 넓게 짜인 차창 너머의 정원을 응시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가 짙은 녹안 위로 뚜렷하게 나비쳤다.

명마다.

달빛처럼 고운 갈기를 휘날린 아타할케.

조카의 비명과도 같은 음성이 귓가를 때린 건 남은 식욕마저도 잃은 후작이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을 때였다.

“삼촌, 저기 보세요!”

조카의 손끝을 따라간 시선 끝에는 달빛처럼 고운 갈기를 휘날리며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먹을거리를 찾아 가도를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 오는 준마는 사람들이 그 명석함을 칭송해 마지않았던 아타할케였다.

***

“여기 최근 아델리아 경의 동태입니다.”

자로 잰 것같이 딱 부러지는 음성이 공작가의 집무실을 흔들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내민 두툼한 서류를 받아 든 공작은 얼어붙은 성에가 낀 것 같은 푸른 눈으로 이를 살펴 내렸다.

아델이 후작과 왕래한다.

장황한 보고서의 핵심은 그 한 줄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퍽 실망스러운 결말은 벌써 몇 번째 그를 찾아오고 있었다.

독한 기세를 자처하기에 저를 물고 뜯을 준비가 된 줄 알았더니. 허점이 다분한 사냥 대회의 참극을 모조리 잊은 채 저리 맹하게 군다라…….

다소 실망스러운 빛이 역력한 낯을 들어 올린 공작은 곧 있을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귀빈을 맞는 내실로 이어지는 통로에는 두터운 테 속에서도 감추지 못하는 냉철한 기운을 자랑하는 역대 가주들의 초상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분별없는 정열보다는 냉철한 이지를.

감정의 장막에서 벗어난 날카로운 판단을.

얼음으로 빚어낸 꽃이 있다면 그게 바로, 베르니 공작가의 백합일 것이다. 호사가들은 그리 말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자부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조상 하나하나를 응시하던 벽안은 일렬로 늘어선 그림 끄트머리에 간 순간 짙게 가라앉았다. 냉엄한 기백이 느껴지는 앞의 초상화와 확연한 차이가 있는 그림은 혼탁한 기색이 다분했다. 가문을 쇠잔의 길로 이끈 장본인이나 다름없는 이들은 그의 바로 윗대 조상들이다.

색에 미쳐 방종을 일삼은 증조모나 주야장천 노름판에 빠졌던 조부. 그리고 그중 제일 심각했던 건 아비였다. 애초에 정사엔 적을 두지 않은 증조모와 조부와 달리 가문의 부흥을 되살리겠다는 기개 하나로 궁중 암투에 덤벼 든 그의 부친은 대찬 소망과 달리 제 감정 하나 감추지 못하는 작은 그릇으로 황권 다툼에 휘말리며 가문의 몰락을 자처했다.

그러니까 진정 틀린 것 없는 조상들의 격언이었다.

분별없는 정열보다는 냉철한 이지를.

감정의 장막에서 벗어난 날카로운 판단을.

더없이 서늘한 눈으로 부친을 응시하던 공작은 다음 순간 드러난 거울 속에 비친 제 낯에 잠시 멈칫했다. 제게도 그들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욕망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일을 그르칠 뻔했던 21년 전이었지.

가문의 긍지를 버리고 근본도 알지 못하는 신흥세력의 여식과 연을 맺어 사방에서 던지는 모멸감과 수치스러움을 관통하며 지칠 대로 지쳤을 때 불어온 바람이었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였다면 적당했을 여자를 싣고.

적절치 못한 순간이었다는 게 큰 흠결이었지만.

제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이에게 바랄 것은 없다.

조상들을, 그리고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보며 몸소 깨우친 진리를 다시금 되새기며 공작은 마저 남은 걸음을 옮겼다.

***

이미 종류별로 다과가 차려진 테이블에 오십대 중후반은 되어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올레나 브린트.

브린트 후작가의 주인이자 티케 일족으로 구성된 코르푸 위원회의 위원장.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진 여자답지 않게 전체적으로 푸근한 인상이었다. 둥글둥글한 외양도 한몫하긴 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눈가에 깊게 잡힌 주름들이라고 판단했다. 공작은 그저 이를 긴 세월을 보낸 흔적이라고 여겼지만, 혹자들은 삶에 대한 그녀 특유의 유쾌함이 주름 하나하나에 잡혀 있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했다.

뭣 모르는 소리지.

티케 일족의 유달리 짧은 수명을 비웃듯 곧 노년에 접어들 그녀는 코르푸 위원회의 늙은 여우, 공작은 그리 여기며 자리에 착석했다.

“공작님.”

“올레나 위원님.”

“낯이 좋지 않으시네요, 무슨 염려가 있으십니까.”

원체도 국사를 의논하기 위해 가졌던 잦은 만남은 세이가 발현한 이후로는 그 횟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서로의 성향은 진즉 파악한 지 오래다. 그녀가 넌지시 던진 것들에는 놀라운 통찰력이 담겨 있다는 것도. 해서 허투루 답을 해선 안 된다는 것도. 실상, 그녀의 문장은 안부 인사로 포장한 탐색 정도일 것이다.

“요즘 선박 투자로 정신이 없어서요.”

적당히 내비친 변명은 거짓은 아니었다. 세이가 발현한 후, 거름값만 축내던 땅이 노다지가 되고 나뒹굴던 산에 광물이 발굴되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경험하며 공작은 최근 선박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니. 그 뒤로 날씨와 다과, 근자에 떠도는 풍문들로 적막을 채워 가던 올레나 위원은 손에 든 찻잔을 달깍거리며 본론에 들어갔다.

“공녀님의 능력에는 딱히 이상이 없습니다.”

공작이 마뜩잖은 표정을 내비치자, 올레나 위원이 운을 뗐다.

“이번 사냥 대회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판돈을 건 타나예 기사단이 우승을 해 엄청난 재물을 끌어모은 공작이 들을 법한 말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준비한 사냥 대회에서 소동이 벌어지며 공녀의 능력에 문제가 생겼나 수군거리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는 실상, 점점 불려 가는 공작가의 세를 경계하는 황제의 눈을 피하고 그 김에 아델에 대한 판단을 재고해 보려는 그의 뜻이 합쳐진 산물임을 단연, 사람들이 그리고 올레나가 알 턱이 없었다.

“공녀님께서 아직 성년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까지 이리 순조롭게 공작가의 세를 불려 나간 것이 놀랍지요.”

올레나 위원이 포크를 들어 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곧, 잘 익은 과실이 그녀의 입안에서 톡톡 터지고 그녀의 날숨에 실려 새콤한 향이 방 안에 사르르 퍼졌다. 머릿속을 번다하게 만들던 공작의 고심도 그 속으로 흘러나왔다.

“사냥 대회 전날, 세이의 백합이 만개했어요.”

치유력. 티케 일족의 능력을 가늠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방법. 허나, 이는 번거롭고 심지어 치유력이 없는 일족들도 번다해 일족들은 대부분 관목이나 생물들을 하나씩 키운다. 축복의 능력을 담은 식물들은 계절도 토양도 수분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오롯이 주인의 능력에 따라 잎을 지고 피운다. 세이의 경우에는 가문의 상징인 백합.

“처소에는 향이 짙고 푸르렀습니다. 백합이 그 정도로 활짝 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해서…….”

위원은 더 설명해 보라는 듯 눈썹을 부드럽게 밀어 올렸다. 분주히 제 할 일을 하던 그녀의 아래턱 근육 움직임도 어느덧 느려졌다.

그러나 끝내 뒷말을 삼킨 공작은 대신 헛웃음을 흘렸다. 그제야 왜 몇 번이고 아델에 관한 보고를 반복해서 받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기대했어.

그 아이가 더없는 공작가의 후계자의 자질을 가지리라. 그리 푸르게 핀 백합을 보니 그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타나예 기사단도, 그리 무리하게 판을 벌린 사냥 대회의 일도 모두 다 그의 뜻대로 되었으니 그마저도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일이 이리 틀어지리라 기대하지 못했지.”

나직이 흘러나오는 문장은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과도 같았다.

이윽고 상념을 거두어들인 공작은 눈을 들어 올렸다. 올레나 위원이 말끔한 해결책을 내어놓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만 접실에는 꽤나 오랫동안 침묵만이 넘실거릴 뿐이었다. 간혹, 올레나 위원이 포크에서 미련 없이 떼어 낸 손으로 툭툭 소파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공기를 흔들었다. 하늘을 주홍빛으로 물들인 석양이 스물스물 응접실로 기어들어 오기 시작하던 무렵, 가벼운 한숨과 함께 얇다란 입술이 벌어졌다.

***

“백합이라…… 아미타 숲에 있던 아타할케가 아델리아 경을 따라 숲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지요.”

“그렇다 들었습니다.”

“뭇 사람들은 태어나 한 번 보기도 힘든 영물인데.”

위원은 상념에 잠긴 얼굴로 느릿느릿 입을 움직였다. 공작에게 말을 건넨다기보다는 스스로 생각을 차분히 정리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게다가 그 험한 이민족 토벌에서 살아 돌아오기도 하였고. 여인의 몸으로 말입니다.”

굵게 팬 올레나 위원의 콧잔등이를 바라보며 공작은 주인 잃은 말처럼 뜬금없는 곳으로 흐르는 대화의 방향을 가늠해 보았다.

“견습 기간도 고작 해 봐야 두어 달 남짓 된 몸으로 그 험한 토벌에서. 반대하던 위원들이 암암리에 살수들도 제법 보낸 모양인데요.”

“페치오 위원과 모르헤 기사단장이 아주 철통같이 지켜 냈다더이다.”

그렇습니까. 작게 중얼거린 올레나 위원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사냥 대회에서는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무사했다죠. 강가에 암초들이 즐비해 익사하기도 전에 머리가 깨져 죽을 확률이 더 높다던데 말입니다. 영물이라던 아타할케에…… 루트비아 백작 자리도 본디 그의 것. 반쪽짜리 사생아치고는 참으로 놀라운 일들의 연속 아닙니까.”

그저 우연일까요. 유려한 곡선을 그린 입매가 그리 묻는 것 같았다. 공작이 무어라 답을 주기도 전에 위원이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엄연히 따지면 공녀님과 경이 피가 섞이긴 했지요. 공녀님의 이모가 아닙니까.”

“둘의 사이가 그리 좋은 건 아니요. 사생아 따위 몇 번 만나지도 않았고.”

“공녀님께서 제국의 질서를 중히 여기는 것은 알고 있지요. 허나, 티케의 능력은 어찌 보면 영적인 부분, 그 밑바닥에는 늘 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답니다. 그게 무엇인지가 능력을 발휘할 대상을 결정하지요. 특정한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추상적인 관념일 수도 있지요. 부귀나 명예 혹은 정의 따위 말입니다.”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이요.”

“공녀님과 제가 깊이 있는 대화를 많이 나눈 것은 아니나 공녀님께서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은 몇 가지 압니다. 핏줄과 가문의 긍지. 특히 핏줄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시지요. 외조부 되시는 루트비아 백작님의 죽음 이후 충격이 크셨는지 더욱 뚜렷해지셨어요. 그게 공작가의 빠른 성장을 이끌어 낸 원동력이기도 하고요.”

그제야 그녀가 늘어놓은 문장들이 향하는 목적지를 알아챈 공작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지금 세이가 아델리아 경의 축복을 빌고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추측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공작이 그 황당한 주장에 외로 꼰 다리를 푸르며 자세를 바로하는 사이, 올레나 위원이 마저 말을 이었다.

“축복의 힘은 한 대상에게 집중되는 각인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 능력이 분산되기 십상이지요. 공작가는 대대로 손이 귀해 수십 대째 독녀와 독자로 이어지니 그나마 가까운 친인척은 아델리아 경이 아닙니까.”

“하지만, 세이는 아델리아 경을 싫어한다오. 몹시. 고매하신 위원님께서 이 사실을 잊으신 듯하군요.”

대충 들어도 신랄한 문장은 공작 특유의 건조한 어조에 실려 더욱 비아냥거림이 가득했으나, 그 모든 노력이 무색하게 위원은 여유롭게 되받아쳤다.

“이런, 들켰습니다. 슬쩍 넘어가려 했는데 가장 석연치 않은 구석을 짚어 주셨네요. 티케의 축복은 강력한 의지가 깃들어야 하는 법. 단연,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대상에게 능력이 발휘될 수야 없지요. 해서 제가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저 추측이라고요.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너무 심각히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녀님께서 연배가 어리시니 아직 능력이 온전하지 않다는 게 더 설득력 있지요. 성년은 돼야 아마 가늠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로서는 명색이 위원장이니 뭐 하나 내놓아야 한다는 마음에 드린 말씀이지요. 허나…….”

위원이 말을 길게 늘어트렸다. 그러곤 소파 팔걸이 위에 팔꿈치를 얹어 턱을 괴고는 여상히 중얼거렸다.

“딱 맞춰 만개한 백합이라…… 그저 우연이라기엔 너무도 기이한 일들이긴 하지요.”

수십 개의 단어들이 그녀의 입안에서 구르며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다. 허공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긴 위원이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아델리아 경을 저택으로 잠시 들이는 것은 어떠십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차라리 곁에 두고 살피심이 공녀님을 위해서도 공작가를 위해서도 이롭지 않겠습니까. 이미 저택은 모르스 일족의 힘을 막아 주는 아미타 숲의 자재로 방비되어 있지 않습니까.”

공작이 대답 대신 미간을 좁히자, 그녀는 얼굴 위로 호사가들이 입 발린 소리를 하기 자청하는, 예의 그 푸근한 미소를 그려 보이고는 툭툭 구겨진 치맛자락을 바로잡았다.

“신중해야 할 사안이니 한번 고려해 보시지요.”

저택으로 들이라…….

상아빛 모슬린 드레스가 펄럭이며 공작저를 빠져나는 것을 배웅한 공작은 집무실 의자에 깊게 등을 기대며 다시 깊은 상념에 빠졌다.

세이의 발현이 끝나고 아델과의 상극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니 딱히 걱정될 건 없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둘이 엮이는 위험을 감수할 까닭이 그에게는 없었다. 명확한 판단이 서기 전이니.

그 애가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객관적으로 보면 지금으로써는 영 쓸모가 없어 보이는 형색이었다. 능력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할뿐더러, 악에 받힌 듯 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여리디여린 모습만 보여 주니. 저에 대한 분노가 그 애의 숨겨진 무자비함을 보여 줄 수단이 되리라 여겼건만 그마저도 흐지부지.

심해를 가둔 것 같이 짙게 가라앉은 벽안은 어느덧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스치듯 지나가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 위로 내려앉았다.

푸른 벽안에 이채가 감돈 건, 아까는 미처 보지 못한 한 문장을 발견한 직후였다.

***

“공작가의 저택 지도를 만들어 보았어.”

투박한 손으로 준비해 둔 서신을 꺼낸 에단은 다소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맞은편 여자를 직시했다.

“여길 보게. 기사들의 교대시간이야. 이 시간이 되면 기사들이 공녀의 방을.”

이 지도를 만들라 그가 했던 고생이 얼마던가.

그간의 고생이 빛을 발하는 것을 보며 격양된 어조로 말을 이어 가던 그는 멍하게 풀어진 잿빛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멈칫했다. 희한한 일이지. 늘 칼날이라도 박은 듯 서늘한 눈이 요 며칠간 저 모양이다. 사냥 대회에서 크게 죽을 고비를 넘겼다더니 회복이 아직 되지 않은 것일까. 큼큼, 주의를 환기시키려 헛기침을 두어 번 한 에단은 이젠 미미하게 눈가를 좁혔다.

“내 말 듣고 있나, 아델리아 경.”

“……미안하군.”

예상치 못한 대답에 에단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미안하군이라니. 꽤 자주 가졌던 만남에서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단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저 여자는 사과할 상황을 만들지 않기에. 제가 잘못들은 것일까. 뒤따른 문장을 듣자 하니 그도 아닌지 싶었다.

“무어라 했지?”

이제 에단의 눈은 심각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무래도 저 여자가 어디를 단단히 다친 게 틀림없다는 생각과 함께.

***

‘얼른 좀 쉬라고.’

득달같은 기세로 제 등을 떠미는 에단의 행동에 테비온에 도착한 건 박명의 새벽이 마을 곳곳에 스며들 무렵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이제 눈 감고도 훤한 아침 인사와 함께.

“아타할케가 사라졌습니다, 경!”

아무래도 베어 버렸어야 했나.

아타할케의 자취를 알리는 이안의 보고, 익숙한 가도를 지나 푸르름이 무성한 외딴 시골 별장, 코에 스미는 흙냄새와 햇살에 젖은 하늘. 단조로이 반복되는 어제와 같은 하루에는 여전히 해갈되지 못하는 물음이 남아 있다.

그저 미움이라기엔 지나치고 그렇다고 분노라기엔 또 부족한.

이 감정의 이름은 무엇일까.

이름밖에 알지 못하는 이미 죽은 아이를 이토록 미워하게 만드는 이 감정의 이름은.

옅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올렸다. 트인 시야 귀퉁이로 정원 테이블에 반드시 놓인 서신이 훤히 들어왔다. 잠시 후작이 자리를 비운 사이 시종이 두고 간 서신은 아까부터 심중에 차오르는 물음과 함께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물건이었다. 나뭇잎의 무늬를 따라 흘러내려온 빛살에 겉봉 찍힌 메로본가의 인장이 도드라졌다.

아마 안부의 인사일 것이다. 사냥 대회의 일이 파다한 와중에 그나마 후작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가문이니. 그럴 것인데. 그게 분명한데…….

혼미해지는 의식을 따라 주변의 풍경은 흐릿해지고 그 속에 유일하게 뚜렷한 서신으로 손이 움직인다.

이 감정의 이름은 무엇일까.

무례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행위를 하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게 하는 이 지독한 감정의 이름은. 이 비틀어진 마음의 정체는. 슬며시 거두어들인 손에 내 것이 아닌 물건이 들렸을 즈음, 익숙한 음성이 고요한 적막을 흔들었다.

“뭐 해.”

햇살이 반짝이는 빛줄기를 가르고 시야를 장악한 이는 다름 아닌 테오였다. 눈에 띄게 불거진 울대와 옷감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다부진 체구를 한 그에게서 이제 더는 개구진 소년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후작에게 닥친 비극이, 후작의 몸을 잠식하고 있는 죽음의 기운들이 그를 한층 성숙하게 만들었으리라. 나로 인해 그가 잃게 될 것이 어디 후작뿐이랴. 쇠락을 코앞에 둔 가문은 또 어떻고.

“……넌 내가 안 밉니. 아무것도 아닌 나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되었는데.”

불쑥 그 말이 튀어나온 건 그 때문이었다. 예상과 달리 돌아온 건 옅은 한숨과도 같은 말투였지만.

“누나는 참…… 혼자 똑똑한 척은 다하다가도 한 번씩 이리 맹하게 굴 때가 있어. 그건 사고였어. 이번 일처럼 말이야. 그땐 삼촌이 누날 지키려고 한 거고. 이번엔 누나가 삼촌을 지키려고 한 거지.”

여전히 변함없이 나를 바라보는 눈에서는 어떤 원망도 힐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그때 내가 조금 더 컸더라면, 그래서 나한테도 기회가 있었다면 나였어도 그렇게 했을 거야.”

너무도 당당한 대답에 맥이 빠져.

“누난 아니야? 이번에 절벽에서 떨어진 게 삼촌이 아니라 나였다면 구하지 않았을 거야?”

그였어도 그랬겠냐고. 상상해 본다. 그였어도. 그래, 그랬을 거야. 분명 그러했겠지. 둔기에 맞은 것과 같은 깨달음이 나를 찾아온다. 잠시 얼떨떨해 있는 사이, 테오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대답을 못 하네?”

어쩐지 조금 격양된 것 같은 말투였다. 화급히 설명하려 고개를 들자, 시야 끝에 잡힌 건 입꼬리를 한껏 올린 테오였다.

“이제야 좀 사람 같네. 요즘은 맨날 뚱한 표정만 짓고 있어서는 정말 사람 같지 않았다고.”

잘게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시원하게 바람의 결. 함께 테오는 말을 이어 갔다.

“누나가 있어서 너무 좋았어. 쉰내 나는 삼촌이랑 둘이서 이 별장에 살았다고 생각해 봐. 끔찍하지.”

안 그래.

나직한 물음과 함께 그는 짧게 덧붙인다.

“가끔 누난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나도 너처럼 그렇게 명쾌하면 좋을 텐데. 한 치의 구김 없이 그저 똑바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하기사, 그런 애정을 받고 자랐는데 어찌 구겨질 수 있을까. 네 눈에 세상은 그저 풍요롭기만 하겠지.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어느새 기사들의 무리에 합류해 리베라를 정돈하는 테오와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후작의 모습이 보여.

우스워.

‘아델.’

그리 애달피 나를 부르지 않길 바랐다가도…….

‘너를 아끼니까.’

그 음성이 오직 나만을 담길 바라니…….

날 잊길 바랐다가도,

‘기다렸지. 네가 돌아오는 날만을.’

영원히 아껴 주길 바라니.

‘그날이 오면 널 내 품에 안아 이제 다 괜찮다 말해 주리라 생각하면서.’

그저 스쳐 지나가듯 지나치길 바랐다가도, 내게서 보는 다른 이의 작은 파편도 용납하지 못해.

예전엔 모든 게 다 쉬웠는데.

그저 곧고 똑발라 혼란스러울 것도 없고.

예전엔 모든 게 참 쉬웠지.

이 순간에야 나는 버리지도 책임지지도 못했던 어미의 마음을 헤아렸다. 무언가 지킬 게 생긴 사람은 그리 망설이게 되는 것이야.

***

테비온의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은 박명을 가르고 내달리는 마차에 졸린 눈을 비볐다. 이 시각에 여기까지 오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철모르는 치들이나 간혹 지나다니는 이 스산한 길목은 사실 딱히 보초를 서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공간이었다.

뻐근한 다리를 주무르고 찌뿌둥한 어깨를 두드리고 나자, 마차는 어느새 어느 가문의 것인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백합?”

기사의 입술에서 예상치 못한 단어가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백합과 베르니 공작가.

실상, 처음 알게 된 이에게는 고개를 갸우뚱할 이질감이 있는 두 단어는 마차에서 내려선 공작을 보는 순간 씻은 듯이 사라진다.

고귀하고 우아한 지배자.

어둠을 젖히고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제국에 단 하나뿐인 고결한 핏줄의 주인이 틀림없었다.

“이쪽입니다, 공작님.”

기사들의 안내에 따라 마을 깊숙이 위치한 페치오 위원의 집무실로 향하는 공작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

요청한 일을 거절당한 이답지 않게 말이다.

아델리아 경과 세이.

둘의 조사를 위해 코르푸 위원회가 구한 협조를 단박에 모르타 위원회가 거절했다는 소식은 지난 밤 올레나를 통해 그에게 전달되었다.

그 배후에 모르타 위원회의 실질적인 권력자인 페치오 위원이 있다는 것도.

페치오 하프만.

고작 자작 따위의 신분으로 그리 지도부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건 바로 범접할 수 없는 능력과 빠른 처세 때문이라지. 한때는 하이가 에오르테의 재림이라 불리었던. 뭐, 결국은 입에 담기도 어려운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며 그 기세가 꺾였지만.

그래도 명실상부 모르타 위원회의 실세. 만만치 않은 상대임은 분명했다. 그런 이를 마주하려면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실긋, 웃음을 그려 넣은 공작은 어느새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코르푸 위원회에서 보낸 협조 요청을 모르타 위원회에서 거절했다 들었습니다.”

보좌관이 내놓은 차도 거절한 공작은 가타부타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거절한 건 아델리아 경이지요. 저희가 어찌 그런 것까지 강제할 수 있겠습니까.”

“강제할 수 없다라.”

짧게 조소를 흘린 공작은 눈을 들어 올려 헛소리를 나불대는 이를 직시했다.

“그럼 내가 경을 설득하면 된단 소리요.”

“글쎄요, 아마 그때가 되면 모르타 위원회에서 진정 그 요청을 거절하지 않을까요.”

“페치오.”

나른한 음성을 뱉으며 공작은 이마 위에 흘러 내려온 잔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실을 채우는 불빛에 공작의 채도 높은 금발이 더욱 도드라졌다. 원체도 돌려 말하는 성정은 아닌 데다가 사교계와 엮여 있는 귀족들을 상대하는 것도 아니니 더욱 직설적인 화법으로 상대를 응수했다.

“후작과 경을 붙여 놓아 이로울 건 아무것도 없어요.”

공작은 미리 가지고 온 서류를 테이블 너머로 건네며.

“경의 폭주가 줄었다는 보고요.”

“원래 큰 폭주 뒤에는 한동안 능력을 쓰지 못하기 마련이지요. 게다가 아델리아 경의 폭주의 원동력은 후작입니다. 아미타 숲에서의 일을 알지 못하시나 보군요.”

호언장담하는 사내를 보며 공작은 피식, 웃음을 흘린다. 아미타 숲에서의 일을 모른다라. 다 제가 짠 판 안에서 뒹군 것을. 후작에게 사냥대회에 평민으로 참석할 수 있다는 정보를 흘리고, 사람을 풀어 그들이 머무는 막사에 그림자 늑대들을 자극할 약초를 뿌리며 말이다.

“경이 스스로 검을 든 건 그게 처음이지요. 후작은 좋은 자극제가 될 거예요.”

“그대야말로 후작을 잘 알지 못하나 보군. 과연 그 사내가 위원의 뜻대로 움직이리라 장담하나?”

준비해 둔 서류에도 자극적인 말에도 반응 않던 페치오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유순한 사내라…… 사람들은 헛된 말을 쉬이 믿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

라에갈 에오르테. 그자가 막아선 제 앞길을 회상하며 공작은 마저 말을 이었다.

“내게 한 달을 주게. 그럼 위원이 바라는 모양으로 그 애를 만들어 주지.”

“……제가 바라는 모양이라. 그게 무엇일 줄 알고.”

“모르타 위원회에서 모르스의 현신에게 바랄 게 또 무엇일까.”

“왜 이리 적극적이신지 물어도 답하지 않으시겠지요.”

나직이 흘러오는 음성은 어느 정도 긍정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 들을 것도 없지. 이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공작은 유려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글쎄, 인척으로서의 도리랄까.”

진한 백합의 향이 사라진 자리를 채워 가는 건 깊어지는 밤의 그림자다. 이를 무심히 응시하던 페치오는 기가 찬지 헛웃음을 터트렸다. 공작의 마차가 테비온을 떠난 지는 꽤 시간이 흘렀으나 페치오의 머릿속은 여태 그가 남긴 잡다한 사념들로 엉클어져 있었다.

‘그대야말로 후작을 잘 알지 못하나 보군.’

그 와중에 하나 분명한 건 아무리 되새겨 봐도 우습기 짝이 없는 오만한 문장이라는 거지.

후작을 모른다라…….

다른 누구도 아닌 페치오가?

어쩌면 후작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일 텐데?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한 문장에 자조 섞인 웃음을 머금은 페치오의 눈은 이제 테이블 위에 놓인 보고서로 가 닿았다. 순백의 공간 위, 단정하게 새겨진 필체에는 아델리아 경의 손에 그림자늑대의 사체가 숲을 뒤덮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엷은 낙조가 물들인 단정한 필체에서 눈길을 거두어들인 페치오는 내실을 가로질러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어스레해진 석양은 자주빛으로 마을의 길목을 적시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힘의 원동력이 된 사내가 언제고 그 능력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도…….

라에갈 에오르테.

한번 제 앞길을 막아선 이가 또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도.

깊어지는 상념을 따라 페치오의 몸이 비스듬히 기울고 차창으로 들이치는 달빛이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의 흔적 위로 내려앉았다.

시야에 가득 찬 농밀한 어둠의 장막, 그보다 더 짙게 가라앉은 암갈색 눈동자, 저택을 떠나가라 울리는 비명소리…….

흐릿한 초점에 또렷이 남은 그 밤의 기억을 되새긴 페치오는 끝내 종줄을 당겼다. 보좌관을 부른다.

“아델리아 경에게 전해.”

과거의 뼈아픈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단호함이 서린 입매를 타고 더할 나위 없이 말끔한 결론이 떨어졌다.

“코르푸 위원회의 조사에 응하라 말이야.”

***

말발굽 소리가 고즈넉한 시골의 별장을 떠나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 가지.”

명에 따라 견습 기사들이 말에서 내리고 수선스러워지자, 보폭을 넓힌 나는 커다란 물푸레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품에 쥐고 있던 서신을 꺼내 들었다.

리에에게.

익숙하지 않은 후작의 애칭으로 시작하는 서신의 내용은 진부했다. 팔 할은 몸은 괜찮냐는 내용이었고 그 나머지도 거진 사냥 대회의 일을 언급하고 있었다.

혹시 모를 염려와 불안이 가신 자리에 찾아온 것은 허탈함이다.

답지 않게 구질구질한 짓을 했어.

목을 죄여 오는 갑갑함에 단추를 풀어 헤쳐도 가슴을 짓누르는 체증 같은 감각은 사라지질 않는다. 점차 선연하게 윤곽을 드러내는 감정의 빛깔이 나를 잠식해 오는 듯했다. 잠시 숨을 죽인 나는 뜻밖의 문장을 발견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

“마음이 통했군.”

공작은 미명을 헤치고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낸 자식을 바라보며 심상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안 그래도 경에게 연통을 하려 했는데…….”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은 그는 막무가내로 저택으로 들이찬 손님을 쫓아 한발 늦게 나타난 기사들을 향해 물러가라 손짓을 보냈다. 손수 불청객을 향해 찻물을 따라 주고 자리를 인도하는 아량을 베풀면서.

“그래, 후작과 다시 왕래한다지. 그자가 또 무슨 말로 너를 꾀어내더냐. 라마타로 가자 뭐 그런 얘기들?”

비슷이 기울인 고개 너머 흘러나오는 문장들은 시종일관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다분했지만.

“손 하나를 잃고도 여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내로구나.”

예상했던 문장이 자식의 입에서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당신 짓이었어.”

공간을 가로지르는 음성은 뾰족하고 감추지 못한 감정은 선연하다. 분노를 감추지 못해 떨림이 느껴지는 손 역시 그러했다. 쯧, 짧게 혀를 찬 공작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아델의 손에 들린 서신을 응시했다. 사냥대회 전 그가 페라비 별장에 전달한 그 서신이었다. 사냥대회가 평민들에게까지 개방되는 사안은 이를 두고 귀족들의 반발이 커, 마지막까지도 크게 논의되었던 사안이다. 단연, 귀족들에게 대회를 알리는 서신에 그 내용이 담길 수는 없었다. 수도에서, 사교계에서 배척당하던 후작은 이를 알 턱이 없었지만.

“……여전히 나약하구나. 후작의 일이면 물불 가리지 않는 게.”

저리 흉흉한 분위기로 자신을 찾아온 게 그자의 일이 아니면 그게 아니면 또 무얼까. 속이 빈 나무토막 같은 낯에 희미한 적의가 도는 까닭 역시. 너무 뻔히 보여 우습기 짝이 없었다. 공작은 실망스러운 기색을 분연히 드러내는 음성으로 엄준히 잘못을 꾸짖었다.

“그 냉철함은 다 어디 갔니. 나를 쓰러트리려 델로스의 문턱까지 밟고 세웠던 그 의기는.”

의기. 의기라고.

나는 분노로 요동치는 눈을 들어 부딪치고 스러져 멍울진 마음이 곪아 터지는 걸 외면하며 버티는 걸 의기라 부르는 사내를, 제 자식의 명줄을 이리 쥐락펴락하는 것도 모자라 마지막 남은 것마저 앗아가는 그 잔혹함을 의기라 부르는 작자를 노려보았다.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언제든지 나를 망가트릴 준비를 한 저 사내는 제 목적을 위해 감히 후작의 명줄을 쥐고 흔들기를 주저하지 않을 이라는 걸.

어째서 몰랐을까. 메로본 백작조차 벌써 알아차린 그 기이한 사건들의 얼개를.

‘그런데, 리에. 네가 어째서 이번 대회에 평민들이 참석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지 궁금해. 행사가 진행되기 하루 전에야 공표된 그 사실을 말이야. 만약, 그저 우연이라면 다행이지만, 자꾸 좋지 않은 생각이 들어. 이 일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을 것 같다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살수들,

‘여기까지 온 놈들치곤 허술한 걸.’

고원까지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늑대.

‘무슨 약이라도 취한 것처럼…….’

되짚어 보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자취들이 지척에 고개를 내밀고 어긋난 조각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고작 웃기지도 않는 소일거리에 정신이 팔려…….

허탈한 웃음이 나를 집어삼킨다. 그러니까 이건 스스로에 대한 분노에 더 가까웠다.

저 때문에 사지를 넘나든 이를 알지 못하고 그저 허상을 쫓아 쓸모없는 물음들만 찾아 헤매던 어리석은 자신에 대해.

“난 네게 기회를 주고 있어. 그 사내를 지킬 기회를.”

낯에 더는 웃음이 남지 않자, 공작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게 네가 바라는 것 아니니.”

적막한 밤, 팽팽히 당겨진 화살처럼 밀도 높은 공기만 맴도는 내실.

“왜 새삼 놀랍니. 네가 에오르테 후작에게 미쳐 있는 건 온 제국이 다 아는 사실인데.”

이 낯선 공간에서, 결코 예상치 못했던 이의 입에서 나는 기어코 찾아낼 수 없었던 감정의 정체를 깨닫고야 말았다.

이리 변덕스럽고 무자비한 마음의 궤적을.

“계획을 전부 수정해.”

깊고 적막한 밤, 난데없는 호출에 판자촌 마을에 다다른 에단은 돌연 제 앞에 굴러떨어진 황당한 문장에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리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인 그간의 계획과 그 계획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계획들이 적힌 서류들을 벽난로에 던져 버린 아델리아 경은 다스리지 못한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한쪽 벽을 짚고 섰다. 한참이 지나서야 거칠게 들먹거리던 어깨가 가라앉고 기사가 몸을 틀었다.

“공작이 전부 알았을 거야.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 돼.”

보다 충격적인 소식을 입에 걸고.

그 말에 말문이 막힌 듯 에단이 입술만 옴죽거린 건 놀랄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공작이라고 해도-”

“나도 몰라, 허나 그에겐 티케가 있잖나.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축복이 내려오는 티케가.”

돌연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 역시 적잖이 예상치 못한 상황인 것은 분명했다. 물론 그 행동 기저에 광기와도 같은 무언가가 느껴져 오싹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아 오긴 했지만. 이를 간신히 내리누른 에단은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그럼 앞으론 어찌 할 작정이지.”

그제야 웃음을 집어삼킨 아델리아 경은 나직이 입술을 움직였다.

“공작저로 들어간다.”

짧은 문장을 덧붙인 눈은 어느새 광폭한 빛깔로 번져 있었다.

내가 직접.

***

공작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서재에 울려 퍼졌다. 한 손에는 곧, 공작가로 들어간다는 짤막한 서신이 들려 있었다.

당분간은 후작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라는 협박과도 같은 덧붙임과 함께.

그 집착의 방향이 가문으로 변질되면 과연 어떤 모양을 띨까. 상상만으로도 흥미로운 가정을 들고 서재를 나선 공작의 낯에는 제법 흡족한 기색이 번져 있었다. 적어도 익숙한 인영이 제 앞을 가로막기 전까지.

“그 사생아를 저택으로 들이다뇨!”

저를 꼭 떼다 박아 놓은 것 같은 세이는 저 성질머리만큼은 누굴 닮았나 싶을 정도로 드세고 충동적이었다. 아마 제 부친이 아닐까. 핏줄은 한 대를 건너 닮는다는 속설을 상기해 보며 공작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세이.”

“절대 안 돼요! 절대! 절대!”

“제국을 위해 공을 세운 기사야. 이모라 여기기 힘들면 그리-”

“누가 이모야! 난 이모가 없어! 없다고!”

“세이!”

묵직한 울림을 목 끝에서부터 끓어오르자, 그제야 딸아이는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내 뭐라 했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 감정을 쉬이 드러내면 안 된다 누누이 말하지 않았어. 하물며 여긴 사용인들의 귀가 열린 저택의 통로야.”

“하지만!”

한껏 눈을 치켜세우던 딸은 파르르 턱을 떨더니 홱 돌아섰다. 여봐라는 듯 부러 쿵쾅거리는 소음으로 계단을 짓밟으면서. 저택이 떠나갈 듯한 고성을 듣고 부인이 모습을 드러낸 건 그때였다. 날듯이 걸음을 옮겨 제 옆에 선 그녀는 어쩔 줄 모르는 기색으로 그에게 말했다.

“아직 어리잖아요. 제가 잘 말해 볼게요.”

“벌써 열넷이야. 수가 틀리면 저리 어린 애처럼 구니. 고집도 원.”

“여보.”

“……하아, 당신이 가서 잘 토닥여 봐. 내가 가 봐야 말이 통하지 않을 테니.”

조금 가라앉은 공작의 얼굴을 살핀 후에야 공작 부인은 딸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깨진 찻잔, 찢어진 휘장, 방 안에 여기저기 널브러진 책들.

이미 한바탕 방을 엉망으로 만든 세이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공작 부인은 몇 장으로 덧덮어진 천 위로 딸의 어깨를 토닥이며 속살거렸다.

“세이…….”

“저리 가!”

“아버지가 좋아 이러시겠니. 이번 사냥 대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많았잖니. 헛된 말을 하는 자들이 있어. 이럴수록 관용과 아량을 보여 줘야 공작가의 위세가 서는 법이란다.”

“어머니는 분하지도 않으세요. 그깟 사생아 때문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문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는데.”

“……그건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잖니.”

“할아버지는 왜 그러셨을까요. 그리 싫어하셨는데.”

생략된 문장들은 루트비아 가주의 자리를 아델에게 넘긴 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 달갑지 않은 주제라 우물쭈물하던 공작 부인은 딸의 반응을 살피다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니?”

“네…… 나중에 몸이 다 나으시면 낚시를 가자 하셨는데…….”

“다음에 엄마랑 같이 가면 되잖니.”

그 말에 공녀가 빼꼼 이불 밖으로 눈을 내보였다.

“정말요?”

어린 티케의 일족은 외출이 엄격히 제한되기 마련이다. 축복을 불러오는 존재. 이에 뒤따른 수많은 전설들에 워낙, 탐내는 자들이 많다 보니 원체도 당연한 일인 데다가 하물며 공작가의 유일한 공녀였다. 이미 암암리에 붙은 호위만 해도 수십 명이고 코르푸 위원회에서도 위원장인 올레나 위원장까지 친히 보내며 항시 공녀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단연, 여행은커녕 공식적인 행사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가 벌써 수 년째. 반짝거리는 눈을 한 딸을 보며 공작 부인은 주저하듯 덧붙였다.

“……이번 조사가 끝나면 그러자꾸나.”

그게 그저 빈 껍데기뿐인 약속이라는 걸 아는 딸은 입술을 불퉁 내밀고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거짓말! 저번에도 그래 놓고 결국 안 갔잖아!”

“그땐 워낙 정세가 험해서…….”

“나가! 나가! 전부 다 나가란 말이야!”

고성이 끊일 날이 없는 공작가의 하루였다.

***

“어휴, 오늘도 한바탕 하신 모양이네.”

오늘도 하루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나운 울부짖음에 공작저의 아래층 사용인들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대대로 깊은 유서에 높은 봉급, 긍지와 명예까지 두루 갖출 수 있어 황실 다음으로 제일가는 일자리로 꼽혔던 이곳의 명성이 바닥까지 추락한 건 바로 저 공녀 때문이다. 뭐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지만.

“정말, 도저히 못 참겠어요.”

거친 손짓으로 깨진 찻잔과 접시를 담은 쟁반을 식탁 테이블 위에 올려놓던 어린 하녀는 울긋불긋 물든 뺨을 매만지며 울먹거렸다. 이에 정찬 준비로 바삐 몸을 움직이던 이들이 그 주위로 하나, 둘 몰려들었다.

산산조각 난 다기와 울음기 섞인 음성.

대충 보아도 짐작 가는 모양새였다.

꽤 오래 이곳에서 근속한 중년의 하녀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다독였다. 다정한 성미라기보다는 워낙 까다롭고 철두철미한 성정의 주인은 사용인들 하나 바뀌는 것까지 무척 예민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누구 하나 새로 뽑을라치면 어찌나 복잡한 일들이 많은지.

다시 또 그 일을 반복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긴 손이 여린 어깨를 토닥거리는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이번엔 유독 기시네. 벌써 며칠째인지.”

적당한 추임새를 곁들이며.

날 때부터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난 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공녀는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 참을성을 잃었다. 며칠 전에는 새로 들어올 아델리아 경을 위해 완벽히 정돈을 마친 2층 방에 잉크를 통째로 부어 버려 벽지며 카펫이며 다시 준비하느라 다들 뜬눈으로 지새웠고 어제는 치장을 돕는 하녀 하나가 제 몸을 바늘로 찔렀다며 온 저택 식구를 들들 볶았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 데 말이야.”

“조사단도요.”

어느새 울먹거리는 어린 하녀 주위로 삼삼오오 모인 사용인들은 한 마디, 두 마디 입을 거들기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저택에 머물게 된 수십 명의 사람들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공녀까지 보태니 바람 잘 날이 없는 것이다.

“그 모르헤 기사인가. 뭔가 하는 분이 오시면 더 난리가 나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어깨를 축 늘어트린 하인 하나가 덧붙인 우울한 말에 연신 눈물을 닦아 내리던 어린 하녀는 발딱 고개를 쳐들었다.

“전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공녀님도 세상만사 제 뜻대로 되는 게 없다는 걸 좀 깨닫게요!”

최대한 빨리!

어린 하녀의 바람이 이루어진 건 진홍빛 석양이 사방에 내리깔린 어느 날이었다.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저택 입구에 도열해 모르헤 기사단원이자 공작 부인의 이복 여동생이 도착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꽤 지체되는 시간에 정갈한 자세는 흐트러진 지 오래였지만.

도대체 오긴 오는 거야.

흐트러진 대열 속 누군가가 낮게 속삭였다. 주인어른이 보낸 마차가 간단한 짐 가방만 실은 채 터덜터덜 돌아온 게 한참 전이었고 오기로 했던 시각은 이미 제법 지났다. 이미 조사단들은 저택에 자리를 잡기도 했고. 다들 하나둘 당겨 오는 종아리와 찌뿌드드한 어깨를 조금이라도 쉬게 하려 요리조리 자세를 고쳐 잡고 있을 즘, 땅의 진동이 미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이끌고 한 무리의 기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긴 은발을 휘날리며 선두에서 달리는 여인이었다. 겉으로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고정한 사용인들이었지만 대부분 눈을 가늘게 뜨거나 발을 들어 모르스의 현신이라 불리는, 여인의 몸으로 모르헤 기사가 된 여자를 한 번 보려 애썼다. 몇몇은 경외 어린 표정으로 몇몇은 골치 아픈 시선으로. 집사가 매서운 눈을 부라리며 경고하자 간신히 수선스러움이 멎을 정도로. 사용인들의 이런 모습을 공작 부인이 미처 보지 못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조금 다른 것에 정신을 빼앗긴 그녀를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

“아델,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니?”

말에서 내리는 나를 공작 부인은 조금 두려운 눈길로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나와 같이 적당히 도톰한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문장은 만물이 얼어붙은 계절도 녹일 만큼 다정했지만, 마차 사고를 겪은 이에게 마차를 보내지 않는 것을 생각지 못할 정도로 세심하지는 못했다.

“어째 마차를 타고 오지 않고.”

“조금 불편해서요.”

“그래도 그렇지…….”

끝에 가서 흐릿해진 문장이 짙은 노을이 배인 공간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물건만 가득 실린 채 도착한 마차와 방금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것 같은 내 행색을 심란한 기색으로 번갈아 보던 그녀는 뒤늦게 길어지는 침묵을 알아챘는지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방은 준비해 두었단다. 편히 쓰면 돼. 예전에 썼던 곳이지. 짐도 다 정리해 놓았어.”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움직였다.

공작 부인의 안내를 받아 향한 방에는 짐이라 하기엔 우스울 정도로 단출한 서책과 옷가지 몇 개만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마저도 화려하게 수놓아진 비단 휘장과 값비싼 가구들 옆에서는 더욱 초라했다지만. 마치 절대 섞일 수 없는 두 세계를 한 방에 밀어 놓은 모양새랄까. 감상이라도 하듯 문가에 멈춰 서서 한때 내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겼던 고풍스러운 방을 찬찬히 살폈다. 이제 좁힐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간극만이 존재하는 그곳을.

“아델?”

구르는 듯 낭랑한 음성이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뒤섞여 나를 불렀다. 그제야 천천히 방 안으로 걸음을 개재했다. 뒤따른 공작 부인은 여느 때처럼 제 손으로 직접 방문을 꼭 닫은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지 않니.”

“그럴 리가요, 공작 부인.”

시선을 무시한 채 적당히 대꾸했다. 비아냥거림을 죽이고 말을 뱉자, 조금 용기를 얻었는지 그녀는 내 쪽으로 더욱 몸을 기울였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은은하게 코끝에 퍼지는 살 내음이 불쾌할 정도로 익숙했다. 어린 시절, 평생 함께할 수 있다 달래던 수많은 날들처럼. 머릿속에 번지는 추억의 잔상들을 밀어내며 몸을 외로 틀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너도 잘 알잖…….”

자연스럽게 어깨 위로 손을 얹으며 말을 이으려던 공작 부인은 괜히 허공에 헛손질만 하고 말았다. 미세하게 일그러진 미간이 시야 귀퉁이로 보였다. 허나, 무려 그녀는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는 공작 부인. 이내 침착하게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붕 떠 있던 손을 올려 내 뺨에 갖다 대었다.

“아델…….”

그녀의 손바닥에는 힘이 한껏 실렸다. 제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의도가 짙었다. 무시하려야 무시하기 어려운 감각에 고개가 돌아가고 뿌연 눈동자가 시야에 박혔다. 애잔함과 두려움의 경계에 선 빛이 떠오른 얼굴을 무심히 응시했다.

“……넌 모를 거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말이야.”

귓가를 적신 읊조림은 예상대로였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그 험한 전투에서, 테비온에서…… ”

진부하고도 지루했다.

“내 가여운 아이…….”

여운 짙은 한숨까지 뒤따르자 차라리 어둠을 택하고 싶었다. 허나, 이모저모 따져 보자면 아쉬운 쪽은 그녀가 아닌 나. 저택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러야 할 사람도, 조사가 무산된다면 더 아쉬운 쪽도 말이다. 외려 손수 판을 깔아 준 그녀에게 감사해야 할 상황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판단은 진즉 끝난 지 오래였지만, 입술은 이제야 느리게 열렸다.

“한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아주 평범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고저 없는 음성을 타고 미끄러져 흘러나오는 문장에 공작 부인은 눈을 깜빡였다. 길 잃은 나비처럼 너울거리는 속눈썹이 의아함과 당혹스러움을 감추려 길게 늘어졌다. 자연스레 뺨에 닿은 온기도 떨어질 때쯤, 그대로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깊숙이 묻었다. 길지도 않은 문장을 실수할 이유는 없었지만, 수백 번의 연습을 통해 문제는 표정이라는 걸 깨달은 내가 택한 방책이었다.

“호수가 보이는 이 방을 제가 썼겠죠. 아침엔 같이 산책을 하며 최근에 읽은 책이나, 전날 춤을 춘 영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요. 두세 바퀴 돌고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가면 그제야 세이가 일어났다고 시종이 말을 전해요. 그 앤 아침잠이 많지 않습니까.”

얼굴 근육들이 자유를 얻자, 음색은 나무랄 데 없이 유려하게 흘러나왔다. 이런 뻔한 수작질에 속아 넘어갈 만큼 공작 부인은 허술하지 않았으나, 구색만 맞춰진다면 적어도 공작 부인은 믿는 시늉은 해 줄 테다.

그녀가 꿈꾸는,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화목하고 단란한 가족을 위해.

“식사를 하면서 둘만 속닥거리기도 하고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냉랭하게 굴겠죠. 침묵이 조금 길어지면 아마 세이가 먼저 말을 붙일 겁니다. 그 앤 제 사람에게 끔찍하니까요. 그런 날들이 반복되었을 거예요. 별거 아니고 아주 소소한 하루들 말입니다.”

“아델…….”

한결 누그러진 어조가 숨결을 타고 목덜미에 닿았다. 그녀는 느슨하게 풀어진 손으로 다독이듯 등을 감싸 안았다.

“너무 늦었지만 말입니다.”

“늦다니. 그런 소리 하지 마렴. 그저 소망 아니란다. 이제 우린 함께 사는 거야. 이렇게 말이지. 누가 감히 이제 공작가를 파헤치려 하겠니. 너와 세이가 버젓이 있는데.”

싸구려 연극같이 식상한 흐름에 그녀는 잘도 장단을 맞추었다.

“공녀님이 이해하시겠습니까.”

“사이가 조금 틀어진 건 들어 알고 있단다.”

“……조금이라 하기엔 너무 부족한데요.”

“아직 어리잖니, 중요한 건 우리가 하나라는 거지. 네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와 난 눈도 뜨지 못하는 갓난쟁이인 널 두고 약속했단다. 네 두 손에 공작가의 영광을 쥐여 주겠노라고. 너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이야.”

그것이 내가 아닌 손이 귀한 공작가의 유일한 핏줄을 향한 선언이며 공녀가 태어나자 손바닥 뒤집듯 쉬이 번복될 맹세였다는 것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붉어지는 눈시울을 참는 것처럼 더욱 깊게 고개를 박았다.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미끄러지듯 팔에 닿아 나를 조금 제 품에서 떼어 냈다. 당연한 수순처럼 시선이 맞물리고 붉어진 눈시울 아래 물기 어린 눈동자가 농도 짙은 감정을 내보였다. 흐트러진 숨결과 이에 박자를 맞춰 파르르 경련하는 입술까지. 피치 못한 사정으로 자식과 생이별한 가여운 여인. 어쭙잖은 내 연기실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그녀의 모양새는 완벽했다.

“너무 늦지 않았을까 염려됩니다, 부인.”

실소조차 일지 않는 물음에 여운이 감도는 비감한 어조로 답했다. 그녀를 따라하듯 속눈썹을 늘어트리고 두어 번 깜빡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공작 부인은 한껏 끌어 올린 입꼬리에 웃음을 걸고 화답했다.

“그런 말 마렴, 아델…… 그리고 그런 호칭은 둘만 있을 때는 말라지 않았니.”

기대를 담은 잿빛 눈동자가 구르듯이 내게 닿았다. 유달리 짙은 감정의 빛깔이 아델, 어서 말해 보렴. 그리하면 네 뜻대로 해 주마. 마치 그렇게 채근하는 것 같아 입매를 허물어트리려다 재빨리 소리를 삼켰다. 어머니. 하마터면 그리 실수할 뻔했다. 이내 모양을 고쳐 잡은 단어가 적막 속으로 스며들었다.

“……언니.”

“아아, 아델…….”

정답이었다.

그녀는 방 안을 짓누르던 둔중한 공기를 찢으며 낮게 흐느꼈다.

기나긴 시간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녀가 원하지 않을 때 내가 토해 낸 어머니란 단어는 외려 죄책감만 가중시켜 간극을 키울 뿐이라는 사실. 그녀의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뀔 정도로 변덕스럽기 짝이 없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는 변덕스러운 마음을 맞추는 것은 이제 그리 어렵지 않다. 그 와중에 절대로 변치 않는 진실은 하나라는 것 역시. 숱한 세월 나를 버리지 않았던 저 손은 결국 나를 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늘 그래 왔듯.

해서, 다시금 두 뺨을 어루만지는 그녀에게 몸을 맡긴 나는 복받치는 설움을 삼키지도 실망으로 파르르 떨지도 않았다. 오로지 내가 해야 할 일을 상기하며 청각만 곤두세웠다.

이쯤 되면 올 때가 되었는데.

생각보다 길어지는 기다림에 인내심이 다다르던 찰나 부르르 바닥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복도에 깔린 융단은 발소리를 모조리 삼켜 버릴 정도로 두터웠지만, 나무자재를 관통해 방 안까지 전해지는 미미한 진동은 어쩔 수 없다. 이를 증명하듯 곧, 외부 소음이 문틈으로 흘러들어 왔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던 공작 부인은 등을 두드리는 소리에 몸을 틀려 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더욱 꽉 움켜쥐고 속삭였다.

“공녀님과 곡해를 풀고 싶어요. 제가 가문을 해칠 뜻이 없음을 그저 모든 게 실수였음을 전해 주세요.”

“아델, 그건 걱정하지 마렴. 내가…….”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그녀가 말을 멈췄다. 고아한 얼굴에 스치는 두려움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세이!”

굼실대는 금발이 그리 밝지 않은 불빛에도 강렬하게 시야를 파고들자, 공작 부인은 당황스러운 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저 여자가 왜 여기 있어! 왜 여기 있냐고!”

“방에만 있으라니까. 어째서…….”

내가 속이고자 하는 건 공작도 공작 부인도 아니다.

“나가, 나가란 말이야! 내 말 안 들려? 여긴 내 방이라고!”

다정한 가족 놀음을 과연 저 성질머리 더러운 꼬마가 견딜 수 있을까.

축복받은 동생아. 나는 너를 밟고 더없이 고귀한 가문의 영광과 함께 스러지고자 한다.

“오랜만입니다, 공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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