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5. 다시 내게로 (5/16)

5. 다시 내게로

황궁으로 향하는 길목. 그중에서 가장 탁 트인 광장.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 황금빛 깃발을 품고 너 나 할 것 없이 광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얼마 전, 몇 년간의 이민족 토벌을 끝낸 제국의 군대가 승전보를 들고 황궁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들이 이 길목을 지날 터였다. 행렬이 시작되기 전의 부산한 즐거움에 싸여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가볍게 들떠 있었다.

“4년 만이라니. 세월이 징글징글하네.”

“연합군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는구먼. 그게 다 모르헤…….”

“저기, 저기 온다!”

우람한 군마가 말발굽 소리를 내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제국을 상징하는 황금빛 깃발을 흔들거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을 구경하기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간 어린 소년, 소녀들도 있었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어떤 이는 바구니 가득 담은 꽃잎들을 늠름한 자태를 뽐내는 기사들을 향해서 뿌리기도 했다.

“아올리스에 영광이 함께하기를!”

몇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기사들의 얼굴 역시 자부심으로 한껏 빛난 것은 당연했다. 생각보다 더 성대한 환호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신이시여 저들을 축복하소서!”

그렇게 축제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며 절정에 다다를 때, 궤가 다른 묵직한 울림이 사람들의 귓가를 위협하며 서늘한 공기를 몰고 오기 시작했다. 뼛속까지 시린 듯한 감각. 그것이 머금고 있는 위협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는지 떠들썩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수만 명의 인파로 떠들썩하던 광장에는 이제 적막만이 감돌았다.

“다들 뒤로 물러서. 모르헤 기사단이야!”

제일 앞줄에 있던 사내가 간신히 입을 뗐다.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마저 겁에 질려 있었다. 허나, 실상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미 일사분란하게 뒤로 바싹 물러난 사람들은 기사들을 위한 널찍한 공간을 마련해 준 채였다. 어느 철부지 꼬마 한 명을 제외하고. 예닐곱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는 말로만 듣던 모르헤 기사단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지 아니면 너무 놀라 그랬던지 뭔지 꼼짝도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깜빡거리는 연녹색 눈동자 안으로 위협적인 기사들의 모습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동공이 확장된 건, 그중에서도 유달리 남다른 어느 기사를 발견한 후이다.

와아.

옅은 탄식이 꼬마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얼마 전 상점에서 본 카트만의 인형보다 더 예쁜 사람. 꼬마의 눈길은 질겼고 자연스레 시선이 맞물렸다. 그 순간이었다. 잿빛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그러지.

꼬마가 갸웃거리며 고개를 기울이는 사이, 굉음과도 같은 폭발음이 가도에서 터져 나왔다.

***

“기사님, 정신이 드십니까?”

흐릿한 초점을 맞추려 눈을 느리게 여닫았다. 몇 번 반복하니 시야가 점차 분명해졌다. 그 사이로 파고든 것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눈을 굴려 주위를 빠르게 파악했다. 낡지만 깨끗하게 빨아서 풀을 먹인 이불, 딱딱한 간이침대, 침대 사면을 감싼 새하얀 휘장. 그리고…….

“기절하셨습니다.”

이마를 짚는 손에는 약초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의원이구나. 짧은 깨달음과 함께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왼쪽 허리, 어깨, 뒷목을 타고 찌르는 듯한 통증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유독 뻐근한 어깨를 문지르며 마저 몸을 곧추세우자 의원이 나이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말에서 떨어져 크게 부딪치셨습니다. 갑자기 그리 일어나시면…….”

길어지는 설명에 골이 얼얼했다. 말허리를 가볍게 잘라먹고는 물었다.

“여긴 어디지?”

“테비온 마을입니다.”

“물 좀 마실 수 있겠나?”

“예? 예, 그럼요.”

의원은 그 말을 끝으로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섰다. 종종걸음 치며 사라지는 그림자를 천 너머로 확인하고서야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어.

툭.

그에 맞춰 떨어진 것은 금이 간 파툼이었다.

제기랄.

사람들이 그리 많은 곳에서 폭주하다니. 그 빌어먹을…….

연녹색 눈동자.

죽었겠지.

재수도 지지리 없지. 흔한 색도 아닌데 어째서.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다시 손끝에서 타나스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서둘러 허리춤에 차고 있던 향낭을 꺼내 들었다. 브로치와 목걸이, 반지들이 침대 위로 쏟아져 나왔다. 각각 모양새는 다르지만, 용도만은 일치했다. 파툼. 반지부터 시작해서 팔찌까지 하나 둘 익숙하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모르는 이가 보면 과하다 여길 만한 개수는 실상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본래도 잘 제어되지 않던 힘은 전쟁터에서 더욱 심해졌다. 따지고 보면 당연했다. 그곳은 힘을 제어하는 게 아니라 폭주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니. 파툼을 부수고 힘이 깨져 나오는 일이 부지기수. 하나둘 늘어나던 것이 이리 많아졌지. 마지막 호박색 브로치까지 꼼꼼하게 차고 나서, 휘장을 걷었다. 어느덧 엷게 내린 어둠이 내리덮인 사위 속 때마침 물그릇을 가지고 오던 의원이 새된 비명을 지른 건 그때였다.

“기사님, 아무래도 조금 더 쉬셔야……!”

문밖으로 나설 때까지 뒤따르며 연신 초조하게 떠들어 댄 의원에 골 속을 파고드는 목소리가 머리통을 무겁게 조여 올 지경이었다. 의료인으로서의 사명감치고 조금 지나치다 싶었으나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좋을 것 없다.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내 말은 어딨지?”

흔들리는 의원의 눈동자는 내가 아닌 허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거라면 이쯤 하게. 내가 지금 기분이 그리 좋지 않거든.”

여전히 대답 없는 의원을 보며 나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새까만 동공이 더욱 크기를 키우고 나지막한 울림이 나를 때린 건 그때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등줄기를 두드리는 서늘함. 소리만으로도 쉬이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는 내 기억으로는 단 한 명뿐이었다. 눈을 살풋 감았다. 어쩐지. 따르는 견습 기사 하나 없이 병동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수상쩍긴 했다. 델로스의 현신이니 어쩌니 하며 어딜 가나 사람들이 따라붙는 형국이었는데.

“아델리아 경.”

옅은 한숨과 함께 눈을 돌렸다. 어느덧 거리를 내리덮은 어둠 속에서 그보다 더 짙게 가라앉은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팽팽하게 조여 오는 눈길에 눈꺼풀을 내리깔고 입을 열었다.

“단장님.”

공간을 가로지르며 코앞으로 다가온 다부진 손이 내 어깨와 뒷목을 꾹꾹 내리눌렀다. 온갖 훈련으로 단련된 사내였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메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미처 참아 내지 못한 신음이 잇새로 튀어나오자, 그제야 하렌은 손을 거두고는 기다란 다리로 공간을 가로질러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 몸으로 말을 타려한 주제에. 엄살은.”

말과 달리 손을 거둔 하렌은 한숨과도 같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경이 오늘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아?”

“……사람을 죽였죠. 뭐 특별할 게 있습니까. 늘 하던 일인데.”

“죽지 않았어.”

“그럼…….”

예상치 못한 대화의 방향이었는지 늘 무감하던 잿빛 눈에 파문이 일었다. 그 일렁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렌은 찰나의 침묵을 거두고는 입을 열었다.

“재수도 좋지. 그 꼬마. 보유자더군.”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웃음에는 황당함과 허탈함, 그 경계 어디쯤에 있는 감정이 배어 있었다.

보유자라니.

각오를 했었다. 하루하루 버티기도 위태로워 보이는 저 여자가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틀림없이 무슨 사고를 칠 거라고. 쉴 새 없이 폭주를 해 대는 여자가 며칠 만에 제정신을 차릴 리 만무하기도 했고. 물론, 그의 예상보다 사고는 더욱 빨리 벌어졌고 더욱 심각했지만.

광장을 뒤흔드는 비명소리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된 귀향길.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일족의 명예까지 실추될 것이 뻔한 불상사. 그래서였다.

‘보유자입니다, 단장님.’

상황을 수습하게 위해 임시방편으로 세워진 막사 안, 무겁게 내려앉은 적막을 가르고 견습 기사가 건넨 그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것은.

그런 확률은 얼마나 될까. 수만 명이 모인 광장에서 우연히 공격한 어린아이가 보유자인 확률은. 아마 다시 일어나기도 힘들 기적 같은 일에 황당한 듯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하렌은 여자를 직시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무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목격했다고. 광장은 아수라장이 됐어. 모르타 위원회가 의회를 소집할걸세.”

창백하게 핏기 없던 낯에는 희미하게 안도의 기색이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별안간,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 건 그 찰나였다.

“아델리아 경, 속히 말에 오르지. 바로 황궁으로 간다.”

오늘만큼은 저 여인이 모르스의 일족이 아닌 티케일지도 모른다는.

***

이미 형식적인 관례들을 끝낸 승전회는 여타 무도회와 다를 것 없는 분위기로 무르익고 있었다. 어느 집안 자식이 결혼을 한다더라. 누가 누구와 만난다더라. 그런 쓸모없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며.

그렇게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삽시간에 물이라도 끼얹은 듯 고요해지는 광경이란. 사방에서 내리꽂히는 날 선 시선들과 수군거림으로 가득 찬 적막을 가로질러 나와 하렌은 보폭을 넓혔다. 빳빳하게 든 고개로 오로지 한 곳만을 응시하며.

“이런, 드디어 보게 되는구먼. 아델리아 경!”

회장 안에 길게 늘어진 황금 융단 끝자락에는 이미 거나하게 취한 황제가 있었다.

“제 무례를 용서하소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예를 갖추자 황제는 입언저리를 아래로 늘어트리며 짐짓 화난 사람처럼 말했다.

“짐을 이토록 기다리게 한 여인은 없을 것이야!”

그가 움직일 때마다 잔에 샴페인 흘러넘쳐 옷자락을 적셨으나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다른 귀족들도 감히 황제의 이런 행적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비위를 맞추러 따라 웃음을 터트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이는 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들어 황제의 옷자락을 닦아 내는 사내였다.

“폐하. 시종을 불러 마저 도우라 하겠습니다.”

귀에 익은 단조로운 말투는 황제를 대하는 이답게 공손했지만, 그렇다고 한없이 저자세는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쉬이 짐작할 수 있던 사내의 정체는 살짝 굽혔던 허리가 반듯하게 펴지자 더욱 선명해졌다. 반쯤 드러난 그늘진 얼굴은 황금빛 햇살이 이랑지는 파도 위에 찬란히 부서지는 광경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래 고맙군, 공작.”

“별말씀을요.”

황금빛 태양을 담아 내린 듯 굼실거리는 금발 아래 깎아내린 듯한 이목구비는 여전했다. 다만, 한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만이 내 기억 속의 것과 조금 달랐을 뿐이다. 다소 질긴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공작의 단정한 눈썹이 꿈틀댔다. 적막이 짧게 내려앉은 공간. 한껏 술기운 오른 황제가 입을 열었다.

“참, 둘은 안면이 있는 사이지?”

안면이라. 그런 간단한 단어로 우리의 관계를 포장할 수 있을까. 공식적으로 나는 공작의 눈을 앗아갔고 비공식적으로 공작은 나를 죽이려 한 살인자인데. 안대 속에 가려진 그의 눈빛이 진정 어땠는지는 모르겠다만 공작은 의연하게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말을 되받아쳤다.

“그렇다마다요.”

샴페인 잔을 가볍게 굴리던 공작이 안대를 톡톡 가리킨다. 뜻을 알아차린 황제가 후우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공작. 그게 경이 부러 그랬겠나. 모르스 일족의 폭주는 어찌할 도리가 없잖나. 서로 허심탄회하게 회포를 풀라고. 경도 어린 나이에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하고 전쟁터를 떠돌지 않았나.”

“회포라니요. 그런 게 있을 리가요. 이리 훌륭한 인재를 위해서라면 한쪽 눈 정도야 아깝지 않지요.”

공작이 답지 않게 너그러운 미소를 입가에 그려 넣었다. 그가 저리 나오자면 나로서는 더 분명하고도 깔끔했으나.

“죄송합니다. 공작님. 여러모로 말입니다.”

“아닙니다. 무탈히 돌아오셨으니 다행이지요.”

무탈하다라. 우리 둘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고려해 보건대 참으로 뻔뻔한 어투가 아닌가.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간신히 머금었다.

4년 전, 내 거취 문제를 두고 모르타 위원회는 꽤 격렬한 회의를 지속했다. 혹시 모를 후환에 대비해 즉결 처분해야 한다는 쪽과 이례적인 특수성을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쪽이었다. 공작은 단연, 전자에 힘을 실었고. 대륙에 하나뿐인 모르스 일족의 여인을 제 집권하에 두고자 내린 황제의 명에야 겨우 그는 뜻을 꺾었다지. 물론 그 기저에는 내가 이민족 토벌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기대 역시 내포되었을 것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이리 무탈히 살아 돌아왔습니다.”

미묘하게 날이 선 문장에 공작은 입술을 비틀며 대화를 틀었다.

“곧 사냥제가 열린다죠? 경의 실력을 볼 수 있겠군요.”

“제가 공작님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걱정이 앞서는 군요. 모르스 일족의 능력 그 무엇도 사용할 수 없는 곳이니…….”

“하기사, 아미타 숲속. 혹자들이 그리 말한다지요. 모르헤 기사단의 진가를 알고 싶다면 그들을 아미타 숲속으로 불러라. 검은 안개는 한낱 습기에 지나지 않고 허리춤에 찬 검은 장식에 불과하니 가히 그곳이 모르스 일족의 무덤이 되리라.”

들어 올린 잔 너머로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공작의 얼굴을 응시했다.

“공작님, 죽음이 두려우십니까.”

나는 손에 든 잔을 무심히 한 번 돌렸다. 투명한 글라스에 묻어나는 검붉은 액체가 유독 핏물 같게 느껴졌다.

“저는 하도 많이 델로스 문턱을 넘을 뻔해 그런 건 딱히 두렵지 않습니다. 공작님께서는 어떠십니까?”

종잡을 수 없는 대화의 흐름을 파악하려 했는지 그의 대답은 조금 늦었다.

“글세. 죽는 게 가장 고통스러운 건 아니라는 걸 알지.”

“다행이네요. 저도 그리 생각했거든요.”

눈을 올렸다. 미미하게 좁혀진 공작의 미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빠르게 굴러가고 있을 그의 머릿속을 상상하니 조금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이때 아니면 언제 여유를 부려 보나. 눈으로는 삼삼오오 모여 있는 귀족들을 한가로이 살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녀님은 오지 않으셨나 봅니다. 하기사, 귀하신 몸이니. 아, 소문은 익히 들었죠. 공작 저를 아미타 숲의 자재로 마감하고 기사들까지 배치하셨다는. 엄청난 비용에 황제의 허락까지 용케 받아 내시고 말입니다. 헌데…….”

대리석의 잔무늬들과 화려한 색깔의 벽지를 느릿하게 배회하던 시선은 다시 심해보다 짙게 가라앉은 벽안에 가 닿았다.

“아미타 자재는 저 같은 모르스 일족을 막을지언정 다른 것들엔 취약하지 않나요?”

“그게 무슨 소리지.”

음, 고심하는 척 내리깐 눈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무구했다.

“가령 불이랄까요?”

“저택을 지키는 호위만 해도 수십인데 어느 미친놈이 그런 짓…….”

종잡을 수 없던 대화의 흐름을 그제야 알아챘는지 그는 말을 멈추고 눈을 올렸다.

“지금 날 겁박하는 겐가.”

“겁박이라니요, 공작님. 저같이 미천한 자가 어찌.”

샴페인을 한 모금 머금은 난 그린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헌데 말입니다. 불이란 게 말입니다. 언제 어디서 날지 모르기에 더욱 위험한 것이 아닙니까. 저택 밖이든…….”

실긋, 얼굴에 웃음을 그려 넣은 나는 잔을 기울였다.

“아니면 안이든. 아주 사소한 것들 때문에 말입니다.”

딱딱하게 굳은 공작의 낯빛 아래 맞부딪힌 유리의 면은 땡그랑 경쾌한 울림을 내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공녀님께 제 안부를 전해 주시오. 그럼, 모쪼록 안녕하시길.”

내 생을 그들이 거두려 했던 것에 딱히 별 감흥이 없다.

애초에 둘이 제멋대로 쥐어 준 삶이고 그닥 미련도 없었으니. 허나, 그들이 만들어 낸 나의 생이 죄 없는 이를 짓밟고 뭉갰으니 그것만은 대가를 치르게 만들 것이다.

나를 낳고 키워 결국 그를 바스러트리게 만든 대가를.

***

마차 한 대가 사납게 공기를 찢으며 황궁을 가로질렀다. 전쟁을 끝내고 4년 만에 열리는 파티를 끝맺는 시각치고는 조금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저리 엄청난 속력이라니. 보초를 서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황궁의 기사들을 또 하나 의문스러운 점을 발견했다.

붉은 계통의 바탕, 황금과 유리로 장식된 테두리. 섬세하게 세공된 백합 문양.

짙은 박명에도 가려지지 않는 베르니가의 마차였다.

“더 빨리.”

마차 안에 되울리는 소리는 침착했지만 그럼에도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벌써 몇 번째 계속되는 재촉에 마부는 말고삐를 고쳐 잡았다. 더욱 속력을 내었다간 말이며 마차며 모두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이 공작이었다. 좀체 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는 주인이 저리 굴 때는 필시 몸을 낮춰야 하는 법이라는 걸 오랜 세월, 공작가에 일한 그가 터득한 지혜였다. 이랴, 투레질하는 말을 채찍질하는 그의 힘찬 음성이 밤의 어둠이 배어 든 가도를 가로질렀다.

느렸다.

마차 차창 밖에 펼쳐진 숲의 풍광들은 모두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늘어진 눈으로 여전히 변함없는 바깥의 상황을 뚫어져라 지켜보던 공작은 다시 한번 마부를 향해 아까와 같은 지시를 내렸다. 말끝을 따라 흩어지는 기다란 한숨에는 지친 기색이 잔뜩 묻어 나왔다.

그저 객기라는 걸 안다.

새 한 마리 죽이지 못해 모르타 위원회의 골칫거리로 전락할 뻔했던 여자가 하루아침에 살인귀가 되어 돌아올 리 만무하다는 것도. 사람이 쉬이 변하지 않는 다는 것도. 그럼에도 가시지 않는, 왠지 모를 찜찜함에 공작은 무릎 위에 놓여진 보고서를 들어 올렸다.

이민족 토벌에서 세운 공적의 전말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벌어진 폭주였다는 간략한 요약이 첫 페이지에 적혀 있었다. 맨정신이 아니면 전투에 나가지 못한다는 얘기부터 다 잡은 적군을 놓아주었다는 사례까지. 뒷장으로 갈수록 더욱 가관으로 치닫는 내용에 그의 심중에 자리 잡고 있던 불안도 한결 누그러졌다.

그러니까 그가 방비해야 될 건 아델의 폭주뿐이었다.

제어하지 못하고 벌어진 모르스 일족의 폭발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몸소 경험했던 그였으니. 보유자로 구성된 용병들을 친히 고용해 저택의 경비를 강화한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습관적으로 안대를 고쳐 쓴 그는 서류를 짧게 일별하고는 시선을 다시 차창 밖으로 돌렸다. 왼눈으로 긴 인고의 시간 끝에 드러난 베르니가의 영지가 들이찼다.

창연한 새벽의 빛을 받아 훤히 드러난 장대한 들판에는 화염이나, 그을린 흔적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흙내음에는 조금의 탄내도 섞여 있지 않았고. 속도를 줄이라, 마부에게 지시를 한 그는 그저 안개에 무젖어 싱그럽기만 한 영지의 모습을 새삼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래, 공연한 객기를 부린 것이다.

다급한 마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건 그때였다.

“공작님! 마차가 멈추질 않습니다!”

예상치 못한 문장과 함께.

***

“나 원 참, 이게 다 무슨 일이란가.”

쇠냄새와 열기로 가득 찬 공작가의 대장간에 사내의 중얼거림이 울려 퍼졌다. 울뚝불뚝 핏줄이 튀어나온 팔로 풀무질에 연신 힘을 싣던 그는 푸우, 팔에 힘을 빼며 중얼거렸다.

“그러게나. 그 밤중에, 그리 빠른 속도로…… 공작님도 참,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망치로 잘 담금질 된 쇠를 살피며 옆에 있던 사내가 답했다.

“그래도 다행이지. 마차는 모조리 다 박살 나도 공작님 몸은 멀쩡하시지 않나.”

“그게 다 누구 덕이겠어.”

“공녀님?”

“그럼 누구겠어. 갑자기 묵혀 든 시골 영지에서 금맥이 나오질 않나, 손을 대시는 투자마다 속속들이 큰 이문을 남기고. 이번도 보게. 저리 멀쩡하시지 않는가.”

“티케 일족은 정말…… 그러니 다들 공녀님 한 번 보게 해 달다고 매양 저리 저택으로 선물을 보내는 거겠지.”

“그럼 뭐 해. 성질이 여간 보통이 아니신데. 난 티케 일족이라 뭐 하늘같이 유순하시고 그럴 줄 알았더만…….”

한숨 섞인 사내의 말에 대장간에 낄낄거리는 웃음이 가득 찼다. 일터에서 이리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가 유일한 안식인지라. 자연스럽게 벌어진 대화판에 너도나도 하나둘 입을 대기 시작하자, 어느새 대부분의 사내들이 풀무질을 멈추고 입을 놀리고 있었다. 참다못한 반장이 쩌렁쩌렁 목을 올리기 전까진.

“뭐 하나 다들! 얼른 일하고 빨리 끝내자고!”

불호령과도 같은 그 소리에 사내들은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가 연장을 들어 올렸다. 막 제 이야기를 풀어내려던 찰나, 말이 끊긴 사내 하나를 빼고는. 제 순서에 파장이 난 게 아쉬웠는지 그는 괜스레 멀쩡한 마차까지 다 부수고 새로이 만들라 한 공작을 향해 볼멘소리를 내다가 이내 수북이 산적해 있는 일감을 보며 푹, 한숨을 흘려보냈다.

“반장은 이 많은 마차들을 어떻게 두 달 안에 만들라는 건지.”

쏘는 듯한 눈빛으로 반장을 보는 것도 잊지 않으며.

“이 사람아, 그게 반장 마음이겠나. 다 저 윗분들 뜻인 게지. 그래도 반장이 사정사정을 해 인부 몇을 더 고용했다던데.”

“인부는 무슨.”

코웃음을 친 사내는 대장간 귀퉁이 쪽에 모여 있는 이들을 향해 날 선 시선을 던졌다.

“말이야 좋지. 다들 뭘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던데. 아니, 그저 일 잘하는 치로 몇 명 구해다 주면 좀 좋아.”

“반장도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다고. 공작가에 들어오는 게 어디 쉽나.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고르고 고르다 보니 정작, 기술 좋은 이들은 다 밀려나는 게지.”

말을 마친 동료는 슬쩍 눈을 굴려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래도 저치는 제법 솜씨가 좋아.”

유독 붉은 머리를 한 사내가 그의 시선 끝에 있었다. 신세한탄을 늘어놓는 동료에게는 그닥 위안은 되지 못한 것 같았지만.

허나, 불평과 불만 앓는 소리를 연이어 내던 그도 다시금 울리는 반장의 고함에 결국 항복하듯 연장을 꺼내 들었다. 곧, 대화가 잦아들고 그 자리를 퉁탕거리는 쇠철음과 푸푸, 불티 이는 소리가 차례로 메꿔 들어갔다.

지천에 석양이 내리깔릴 무렵까지. 쉬지 않고.

둔탁거림이 멎은 것은 저물어 가는 태양이 그들 위로 긴 그림자를 그려 낼 즈음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연장을 내려놓은 사내들은 하나둘 공작저를 빠져나갔다. 몇몇 이들은 선술집으로 또 다른 아늑한 침상이 기다리는 집으로. 저마다 향하는 곳은 달랐지만 고단한 하루의 회포를 풀려는 소기의 목적은 같았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사위에 내려앉은 어둠을 가로질러 붉은 머리를 한 사내의 걸음은 조금 다른 뜻을 품고서 의외의 장소로 향했다.

판자촌의 낡은 여관에 도착한 붉은 머리의 사내는 익숙한 듯 열쇠를 받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삐걱대는 나무계단을 지나 촘촘하게 여러 방들이 박혀 있는 기다란 통로로. 익숙한 듯 그중 가장 가운데 방에서 멈춰 선 사내는 주위를 두어 번 살핀 후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방의 절반 이상 차지하고 있는 낡은 침대, 색 바랜 테이블보로 가리려고 해도 가려지지 않는 썩어 빠진 테이블, 다리 하나 없는 의자가 어둠에 먹힌 시야로 차례로 들어왔다.

“미행은.”

불 하나 밝히지 않은 박모 속에서 있는 부유스름하게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 또한.

“없었어.”

짤막한 대답에 의자에 앉아 있던 여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마차 작업은 어찌되고 있나.”

“두 달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족히 서너 달을 걸릴 것으로 보이네.”

“시간은 넉넉하겠어. 파악할 수 있는 최대로 보고 들은 것 모두를 보고하게. 허튼 것 하나라도 말이야.”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사내는 기울인 찻잔 너머 서늘하게 저를 직시하는 은안에 멈칫했다. 칠야 같은 암흑에 익숙해진 눈은 그제야 앞에 있는 여자를 제대로 담아 내렸다. 날카롭게 그어진 눈매 아래 거뭇하게 드리워진 그림자. 한 눈에 봐도 야위어 보이는 가느다란 손목은 그의 기억 속의 것보다 더욱 수척해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기에.

꽤 오랜 시간 함께했지만, 들어 본 적 없는 여자의 이 이야기는 필시 그 못지않게 지독할 거라는 것만 어림짐작했을 뿐이었다.

어쩌면 저보다 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사내는 헛웃음을 물었다. 하기사, 세상에 저보다 더 지독한 인간이 있으려고. 그는 평범한 사내였다.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자라 왔고 평범하게 생을 마감하리라 여겼다. 단란하지만 행복하던 그의 일상이 무너진 것은 아주 작은 사건 때문이었다.

루트비아 백작가의 의료사고.

형님은 주장했다. 자신의 실수가 아니라고. 탄원까지 했지만, 분명한 증거 앞에 더 큰 역풍을 맞았다. 시름시름 앓던 형님은 그로부터 며칠 뒤 스스로 목을 맸다. 의문을 품게 된 것은 화재로 어린 조카들과 형수까지 잃고 난 직후였다. 그 배후에 공작가가 있다는 것 또한. 이후, 형님의 복수를 할 방법을 찾던 그는 여자가 전대 루트비아 백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미행을 시작했고 우리의 인연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대 살아생전 공작가의 몰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해 주지, 에단.”

오랜만에 들어 보는 자신의 이름 앞에 일순 에단의 눈이 일렁였다. 그 이름을 부르던 형님과 어린 조카들의 목소리가 차례로 떠올랐다.

“알겠네.”

내실에 스며든 음성은 그래서인지 더욱 결연했다.

***

같은 시각, 테비온 마을은 분주했다. 모르타 위원회가 소집되는 일로 이른 시각부터 위원들이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모를 일에 평소보다 검문은 철저했다. 정체 모를, 다소 허름한 검은 마차에 기사들은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검문을 위해 여기서부터는 마차를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엄중한 그 문장에 문이 열리고 말끔하게 생긴 청년 하나가 마차에서 내렸다. 소년과 사내, 그 미묘한 경계에선 얼굴은 단연, 위원은 아닐 터였다.

“아델리아 경을 만나러 왔습니다.”

뜻밖의 이름에 말을 건넨 기사는 눈을 끔뻑거렸다. 아델리아 경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지대하다는 것은 안다. 경이 처음 테비온 마을에 들어오고 나서 부러 마을을 기웃거리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물론, 얼마 안 가 그런 놈들은 다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원체 잦은 폭주가 암암리에 사람들의 입을 타고 퍼진 탓이다.

게다가 얼마 전 일까지.

저 미친놈은 얼마 전 소문도 듣지 못했나.

새삼스레 기사는 청년의 정신 상태를 가늠해 보려는 듯 가자미눈을 떴다. 깔끔하게 빗어 내린 머리칼 하며 수려한 이목구비. 멀쩡해 보이는데.

“만나 볼 수 있을까요?”

막 제 본분을 깨달았는지 기사는 입을 열었다.

“모르스 일족이 아닌 자들은 친족을 제외하고는 방문 허가증이 없으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예상 외로 담담히 패배를 인정하는 문장에 기사는 숨을 돌렸다. 오늘 같은 날,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난동이라도 피운다면 낭패가 아니던가. 그럼, 어서 돌아가시라. 그런 기색을 내비치며 눈을 들어 올린 기사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문장을 맞이하게 되었다.

“허면 약혼자는요.”

청년이 뱉은 단어가 물밀처럼 스며들어 마을 입구에 파장을 일으켰다. 아델리아 경이 약혼을 했었나? 그런 말을 들어 본 것도 같은데, 그럼 귀족인가. 아니지, 원래 사생아였잖나. 쓸데없는 말들을 뒤로하고 공자가 내민 서류를 받아 든 견습 기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테오로드 에오르테.”

“에오르테 가문?”

“비공식적이긴 하나, 엄연한 증거가 있지요.”

테오는 무심히 제가 불러온 파장을 바라보았다. 빈곤한 신전들은 많고 서류 하나쯤 조작해 줄 부패한 신관 또한 지천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키긴 하겠지만, 테비온 마을 한 번 들어가기 위한 시도로는 제법 괜찮았다. 그는 나른하게 고개를 젖혔다. 과열되는 기사들의 입씨름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느긋한 표정이었다.

날이 좋네.

유달리 쾌청한 하늘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이 잿빛 마을과 너무나도 이질적이긴 했지만. 여기 있을, 그가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으려나.

4년. 제법 긴 시간임에도 그의 기억 속을 맴도는 얼굴은 점점 또렷해져만 갔다. 공자는 표표히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 위에 그 기억들을 덧그려 보았다.

끝이 조금 올라간 눈꼬리, 그리고…….

“아, 저기 아델리아 경이 도착했습니다! 본인에게 확인해 보면-”

그 말에 천천히 높다란 하늘을 배회하던 공자의 시선이 방향을 틀었다. 언뜻 보면 유려하기 짝이 없는 동작 기저에 미세한 조급함이 담겨 있음을 눈치가 빠른 이라면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나뭇가지가 드리운 그림자 아래, 우두커니 선 인영은 굳어 버린 석고상처럼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누나.

오랫동안 뱉지 못했던 그 단어가 공자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

“이게 말이 됩니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모르타 위원들이 모인 신전 내부에 울려 퍼졌다. 단연, 소리의 주인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의 섹토 위원이었다. 그 거센 손길에 흑단으로 마감된 원탁이 공명음을 만드는 광경은 퍽 놀라울 것도 없었지만, 이번에는 위원장도 쉽사리 그를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델리아 경이 나타나지 않았다.

무려 열한 명의 위원들이 모이게 만들어 놓고. 그것도 제가 벌일 일에 대한 처분을 논하는 자리에. 하릴없이 흐르는 시간 속 위원들이 하나둘 불쾌한 기색을 내비칠 무렵, 상황을 파악하러 나섰던 보좌관이 돌아와 상황이 대략 어떻게 된 것인지 보고했다. 그게 더욱 위원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게 문제였지만.

“사라지다니요! 그것도 징계 위원회가 열린 날! 이는 엄연히 위원회에 대한 농락이에요!”

아픈 것도 아니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사라졌다. 테비온 마을 입구까지 와서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끼리 처분을 내리지요! 파면! 난 파면에 한 표 던지겠소!”

격양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섹토 위원이 계속 언성을 높이자, 그러자 보다 못한 제론 위원이 말했다.

“발언의 수위를 조절하시오, 섹토 위원. 이리 감정적으로 처분할 일이 아니지 않소.”

“감정적으로? 어찌 이를 그리 판단한단 말이오. 수천 명이 모인 광장에서 작위까지 받은 자가 아이 하나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는데! 그 꼬마가 보유자가 아니었다면 이 일을 대체 어찌 수습할 생각이었단 말입니까!”

“전쟁터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점을 고려해 주셔야지요. 아델리아 경이 전장에서 세운 공적은 또 어떻고요.”

“좋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지요. 전장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폭주를 해 댔다는 보고를 다들 보셨지요?”

보지 못했다고 하면 멱살을 잡고 끌고 가 그 눈앞에 들이밀어 줄 기세로 섹토 위원은 위원들 하나하나를 쏘아보았다.

“폭주가 너무 잦아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허나, 그 덕에 이민족을…….”

“능력이 불안정하다는 말입니다. 능력이! 불확실한 것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다들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제껏 일족의 번영을 위해 쌓아올린 것들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어요!”

기세 좋은 불길처럼 타오르는 그의 언성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하자, 가만히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페치오가 고개를 기울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섹토 위원님. 대륙 어느 학자들도 아델리아 경의 특수성에 대해 입증하지 못했지요.”

“하, 페치오! 이제 말이 좀 통하는군.”

두꺼운 손으로 무릎을 두드리며 반색을 드러내는 섹토 위원을 스치듯 지난 페치오는 느릿느릿 내실을 훑어 내렸다.

“허나, 아델리아 경은 특별해요. 문자 그대로 말입니다. 모두가 경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고 있지요.”

아직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패입니다.

예상과는 조금 다른 문장이 내실에 흘러 들어오자, 모두가 의아한 듯 눈을 키웠다. 오로지 줄곧 아델리아 경의 편에 섰던 제론만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을 뿐이었다. 부릅뜬 섹토 위원의 시선을 태연히 받아넘기면서.

“그렇습니다. 게다가 황제께서 경을 아끼지 않습니까. 이번 사냥 대회에서도 활약을 기대를 하고 있으시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섹토 위원이 그에 대한 반박을 시작했다. 페치오를 등에 업고 맞받아치는 제론 역시 지지 않는 기세였다. 다시금, 소란스러워지는 사위 속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위원장이 손으로 주위를 제지시켰다.

“자, 위원들의 뜻을 알겠소. 경의 행실은 지적받아 마땅합니다. 허나, 그 특수성을 고려해 조금 더 추이를 지켜보지요. 대신 당분간 아델리아 경은 근신 처분토록 하겠소.”

나직이 흘러나오는 그 소리가 긴 토론의 마침표를 찍었다.

***

처분이 내려왔다.

아델리아 경은 당분간 훈련을 중지하고 근신에 처한다는.

예상보다 그리고 벌인 일보다는 훨씬 미약한 처분이었다.

견습 기사가 전한 그 명에 하렌의 입술을 타고 기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행인지 뭔지 모르겠다. 근신이든 파면이든 저 여자에겐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방문을 열었다.

“어떤가.”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아델리아 경을 발견한 건 인근 숲에서였다. 정신을 잃은 여자는 그래서 더 방대한 힘을 내뿜었고 이 테비온에서 이 여자를 감당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으니.

하렌은 물러나라는 손짓을 보였다.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부단장은 결심한 듯 눈을 올렸다.

“단장님, 이래 가지고서 괜찮겠습니까.”

“무엇이.”

“광장에서 그 난리를 벌인 지 고작 며칠입니다.”

하렌이 침묵하자, 답답하다는 듯 부단장이 목을 울렸다.

“이 상태로는 사냥 대회고 뭐고 잘못했다간…….”

말을 잘라먹은 그는 걱정 어린 낯빛의 기사 향해 물었다.

“폭주 전에 무슨 일이 있었지.”

“잠시, 자리를 비웠답니다. 어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르고요. 그리고…….”

기사가 삼킨 말이 무엇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에오르테.

지난 몇 년간 지켜본 결과, 여자의 폭주는 아주 일관적인 현상을 띠었다. 그러니까 전부 다 에오르테였다. 에오르테를 떠올리는 그녀의 범위가 너무 방대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옅은 한숨과 함께 하렌은 낮게 명령했다.

“말을 준비해라.”

“예?”

페라비 별장으로 간다.

말고삐를 잡아 속력을 늦춘 하렌은 고개를 들었다. 싱그럽고도 무해한. 수도의 정원은 감히 비견할 수도 없이 푸르른 공기의 내음이 그를 맞이했다.

또 에오르테 공자가 테비온 마을을 찾아왔다.

넌지시 언질을 주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을 오만한 귀족이었다. 단연, 이는 아델리아 경의 폭주로 이어졌고. 이렇게 두면 곧 테비온 마을도 박살 날 것 같은 기세에 직접 페라비 별장으로 걸음한 그였다.

이 시골 별장의 풍광은 여전하구나.

스치듯 지난 그의 시선은 익숙한 듯 별장 입구에 닿았다. 낯익은 독수리의 조형물과 알싸한 약초 냄새가 그의 코끝을 파고들었다. 그 너머에 얼비치는 사내역시.

“그래서 웬일인가.”

소년같이 앳된 목소리가 고요한 정원에 내려앉았다. 하렌은 대답 대신 비슷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뭇잎 사이로 흔들거리는 햇살이 제 앞에 앉은 사내의 낯 위로 제 그림자를 덧그렸다. 거뭇거뭇한 눈 밑, 파리한 입술. 맑은 음성과는 조금 다른, 그를 집어삼킨 죽음의 기운이 그 위로 선연하게 도드라졌다.

볼 때마다 깊어 가던 병색은 이제 더 깊어질 수도 없을 지경에 놓인 모양이다. 에오르테 애송이가 왜 기를 쓰고 테비온 마을을 드나드는지 알 것도 같았다. 필시, 사내의 온몸에 퍼진 모르스 일족의 궤적을 살피며 하렌은 결코 달갑지만은 않을 결론에 다다랐다.

저 사내는 죽어 가고 있다.

“미치겠군.”

“왜?”

누가 봐도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묻고 싶어 입술만 달싹거리던 후작은 그의 나지막한 읊조림에 눈을 올렸다.

“……보검이 말을 안 듣나?”

“웬 고물을 가지고 거래를 한 건 아닌가 모르겠어. 계속 이러면 협상 결렬이야.”

이에 항변하듯 다시 입술을 움직이려던 후작이 이내 팍 콧잔등이를 찡그렸다.

“보검이 문제가 아니라 그대가 문제일 수도 있지.”

저. 저. 입만 살아 가지고.

다 죽어 가는 이를 두고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내를 흘긴 하렌이 길게 한숨만 늘어놓는 사이,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후작이 찻잔을 달막거리더니 나직이 물었다.

“테오 때문인가?”

“알고 있었나?”

“전쟁이 끝나고 여기저기 바쁠 사내가 예까지 귀한 걸음할 리가 그것밖에 더 있겠나. 미안하네. 내 그러지 말라 몇 번 타일렀는데도.”

“탓하려는 게 아니네. 단지…….”

부드럽게 이어지던 대화의 맥에 하렌의 입술이 멈칫했다. 생각과는 다른 대화의 방향을 그제야 감지한 것이다. 분명 그가 전하려던 말은 하나였다. 그걸 위해 이 먼 시골까지 찾아왔고.

그만하라고. 그 여자 주변을 맴도는 걸. 허나, 제 앞에 앉은 사내의 몰골을 본 그는 결국 말머리를 틀고 말았다.

“곧 사냥 대회가 열려.”

후작이 의아한 듯 눈을 키운 것은 그 순간이다.

“아미타 숲속에서 말이지. 전쟁 동안 멈췄던 연례행사라 올해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일 게야. 누가 누군지 분간도 가지 않겠지.”

“알고 있네.”

“아미타 숲속에서는 모르스 일족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어.”

그 눈을 직시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제아무리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어린 일족이라도 결코 그곳에서는 폭주할 수 없다는 말이지.”

“…….”

“한번 보러 오든가.”

“……누굴?”

더 커질 수 없을 거라 여겼던 후작의 눈이 동그래졌다. 훤히 나비치는 눈동자가 호수처럼 투명했다. 아무리 짙은 병색도 저 싱그러운 눈만은 어쩌지 못했나 보지. 그 빛나는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하렌은 고개를 젖힌다. 청명한 구름들 사이로 내리꽂히는 빛기둥이 지나치게 맑다. 그래서일까. 답지 않게 헛헛한 상념들이 그의 뇌리를 흔들었다.

좋아하겠지.

태는 나지 않아도. 이미 수없이 엇나갔더라도. 충분히 서로에게 미쳐 있는 두 사람이 아니던가. 어둠에 먹힌 시야로 미미하게 파문을 일으킬 그 얼굴을 덧그려 본다. 말간 얼굴에 떠오를 숱한 감정들을.

픽, 입술을 타고 흐르는 웃음소리에 허탈함이 묻어난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낯짝 때문인 것이다.

“아델리아 경 말이네.”

어쩌면 미쳐있는 건 그 자신인지도.

***

공작이 이상하다.

갑작스러운 마차 사고 이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의 다친 다리를 살피던 의원은 오늘도 어김없이 그 생각을 지워 내릴 수가 없었다. 네루다 의원이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그 끔찍한 결정을 하게 된 이후, 이 공작저에 들어서게 된 의원은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다. 대대로 내려오는 공작가의 질환부터 시작해서 어떤 약초 배합이 공작에게 알맞은지, 공작에게 특히 효험을 보이는 약재는 무엇인지까지. 그 결과 그는 공작의 낯빛만 보아도 그의 몸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 모두가 전대 공작가의 주치의, 한때 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명민한 사내의 빛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하는 피나는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에 최근 공작은 참으로 이상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처음 그걸 느낀 건, 제 다친 다리를 물끄러미 보다 헛웃음을 한 번씩 터트리질 않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 옛말이 하나 틀릴 게 없어.’

실없는 소리를 하질 않나.

아무래도 마차 사고의 후유증이 제법 큰 모양이었다. 하기사, 하루가 멀다 하고 온 제국을 돌아다니며 수백 가지의 일을 처리하던 사내가 이리 작은 방에 갇혀 있으려니 답답하기도 하겠지. 무언가 결심한 듯 의원이 눈을 들어 올린 건 그 때문이다.

조금 이른 감이 있기는 하나, 어느 정도 부기도 가라앉았고 무엇보다 공작의 빠른 쾌유를 위해선 평소와 같은 생활로 돌아가는 게 급선무일 터.

“이젠 일상생활을 해도 괜찮겠습니다, 공작님.”

일상생활이라. 여전히 믿기지 않는 상황에 공작의 입술을 타고 실없는 웃음을 흐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통 믿기지가 않았다. 제가 이런 꼴로 이리 누워 있다는 게. 석고에 덧대어 고정된 오른발과 협탁에 놓인 약재들을 스치듯 지난 푸른 눈은 다시 차창 밖으로 흐르듯이 닿았다. 부서진 마차를 처분하고 새것을 만드느라 공작저 내부에 위치한 대장간은 쉴 새 없이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마차 사고라…….

아주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어.

아주 참신하고 또 나름 상징적인 그 일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던 공작은 또 한 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의원의 당황스러운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말이다.

누군가 이리 저를 놀라게 한 일이 몇 년 만이던가.

늘 뻔하고 뻔한 수만 쓰는 얕은 이들만 상대해 온 공작의 앞에 나타난 딸은 그 등장부터 아주 충격적인 반전을 선사해 주었다.

아델리아 베르니.

그 이름에 걸맞게 말이다.

바야흐로 이제 진짜 싸움이 시작되는 건가.

심상한 상념을 끝낸 공작은 시종을 부르는 종줄을 잡아당기고는 의원의 부축을 받아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몇 주 만에 자유로워진 발을 천천히 내디뎌 보는 사이, 어느새 부름을 받은 시종 하나가 그의 지시를 기다리며 내실에 시립했다. 간밤에 써 내려갔던 서신을 그에게 건네며 공작은 더없이 서늘한 음성으로 명했다.

“서신을 보내라.”

“……어디로 말입니까, 공작님.”

페라비 별장.

***

“삼촌.”

정원에 앉아 바뀐 계절의 바람을 느끼던 후작은 굵은 저음에 고개를 틀었다. 어느덧 장성해진 조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들어가실 시간이에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아직 날이 차지 않습니까.”

말과 함께 테오가 그를 부축했다. 밖에 있던 시간이 길었던지 몸에 무리가 간 듯하다.

“내일은 나가지 않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걱정이 묻어나는 어투로 테오가 물었다. 조카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허나…….

후작은 대답 대신 눈을 올렸다. 잠이 오질 않았다. 가끔은 심장이 죄여 오는 것 같기도 했다. 하렌이 별장에 머물다 간 시간은 짧았으나, 그가 남기고 간 문장은 여태 흩어지지 않고 그의 심중에 내려앉았다.

사냥 대회.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는 그 단어 앞에서 그의 고심은 깊어진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보다 그가 더 잘 알았다. 구태여 늘릴 마음도 없었다. 테오가 성년이 될 날도 머지않았으니 자연의 순리를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리라.

허나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이가…….

스스로 책하고 있을 그 아이가 자꾸 밟혀.

이 손 하나쯤. 그 애에 비하면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그걸 알지 못하는…….

침잠하는 상념 속에서 그를 건져 올리는 건 테오였다.

“공작저에서 사냥 대회에 참석 유무를 알려 달라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내밀어진 서류에는 형식적인 공문이 들려 있었다.

대회 장소와 일시, 참석하는 기사단, 귀족들의 자리 배치도. 예상했던 그대로의 내용을 그저 무감하게 훑어 내려가던 그의 눈이 크기를 키운 건 뜻밖의 문장에서였다.

***

“이야 장관이구만.”

온갖 초목과 산꽃들이 내어 뿜은 향기로 가득한 아미타 숲을 바라보며 사내 하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무려 몇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 대회 티켓을 구한 보람이 있게 숲의 광경은 과연 절경이었다. 황실 소유로 황제의 허가 없이는 함부로 사냥이 불가하며 밀렵꾼, 사냥꾼 그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장소는 자연 그대로의 경관을 오래도록 유지하고 있었다.

오랜 소원이었다.

화폭에 담은 아미타 숲의 비경을 처음 본 어린 날부터. 한 해에 한 번 열리는 사냥 대회에 참석할 수 있는 건 귀족이나 기사들뿐이라는 걸 알게 된 후 검을 잡게 될 정도로. 저 같은 천출이 기사가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시간이 지나야 했지만. 아득했던 소망이 이리 갑작스레 이루어진 건 근자에 공작이 추진한 사냥 대회의 새 방안 때문이라지.

누군지 몰라도 참 고맙수다.

호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사내가 막 대회가 시작될 고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위풍당당하던 그의 걸음이 우스꽝스러운 박자로 변모한 건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갑작스러운 충격 때문이었다. 곧, 엉켜 버린 발에 길가에 내동댕이쳐진 꼴이 된 사내는 그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품속에 넣어 두었던 티켓을 꾹 움켜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암표 시장에서 대략 말 서너 필보다 더한 값에 판매되고 있는 티켓이다. 이를 노리는 무뢰배 같은 자들이 대회 입구에 서성거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근자에 파다하다더니 이런 얕은 수작을 부리는 것인가.

순식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는 험상궂은 기세로 저를 넘어트려 제 것을 탐하려 한 사기꾼으로 추측되는 이를 노려보았다. 눈 밑에 짙게 드리운 그늘하며, 축 늘어진 몸뚱아리며. 막 사나운 소리를 내지르려던 그는 뒤이어 나타난 무리에 잠시 주춤했다.

“삼촌!”

희멀건 낯에 청년과 제법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 몇이 쓰러진 이를 부축하러 달려온 것이다. 그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매무새를 바로잡은 이는 제 몸도 추스르지 못한 모양으로 그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좋질 않아.”

챙이 넓은 모자며, 온몸을 꽁꽁 싸맨 후드며 낯이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사기꾼처럼 보이지 않는 모양새였다. 뭐랄까. 멋쩍은 듯 퉁명스러운 말 한두 마디를 던지고서는 슬쩍 자리를 옮겼다.

“삼촌, 괜찮으세요?”

후작의 가쁜 호흡을 진정시키려 테오가 나직이 속살거렸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간헐적인 떨림은 쉬이 멎지 않았다. 숲 인근까지는 어찌어찌 허름한 마차를 구해 이동했다지만, 숲에 들어가서부터는 오로지 두 발로 고원까지 걸음해야 했다. 눈에 띄지 않으려면 그 도리밖에 없었으니. 그랬다. 공작저에서 통보한 사냥 대회의 참석유무를 알리는 공문으로 이번 행사에 평민들 역시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을 안 후작은 에오르테가의 후작의 신분이 아닌 일개 제국민으로서 이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던 것이다. 에오르테가의 후작이 사냥 대회에 불참을 알린 상황, 지천에 깔린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아이가 그를 발견할 일은 기적에 더 가까운 일이겠지. 한 번, 그저 한 번 보고 갈 참이었다. 마주앉아 다 괜찮다 그리 말해 주고 싶어도 그것이 도리어 그 애를 할퀼 것을 알기에. 그러니 이 방법이 가장 적당하겠지. 고려하지 못한 것은 한없이 쇠약해진 자신의 체력이었지만.

푹 숙인 고개에 깍지 낀 여윈 손이 파들거리기까지 하자 참다못한 테오가 입을 열었다.

“삼촌, 아무래도 돌아가는 게 나을-”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걱정스럽게 울리자 휘휘 후작이 손을 내저었다.

“이제 괜찮아. 어서 가자꾸나.”

머리꼭지에 내려 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고 고개를 들며 몸을 일으키자 테오가 옅게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테오가 거짓을 말했을 리는 없겠지만 멀지 않다는 말은 잘 믿겨지지 않았다. 아미타 숲 근처 고원까지 가는 데만 시간이 꽤 소요되었고 넓게 드리운 백색 차양 아래 앉을 때쯤 후작의 몸은 녹초가 되었다. 옅은 한숨과 함께 후작은 고개를 뒤로 젖혀 의자에 몸을 기댔다.

“몸이 안 좋으세요?”

“아니, 조금 피곤해 그러지.”

말과 달리 절로 표정이 찌푸려졌다. 이마를 짚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체하며 슬쩍 챙이 넓은 모자를 내리눌러 얼굴을 가렸다.

그 사이로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슬쩍 곁눈질했다. 똑같이 걸어왔건만 호흡 하나 흐트러짐 없는 조카를 보니 거리가 문제가 아니라 오늘따라 유독 극심한 통증이 문제인 듯했다. 차츰 초점 없이 흐려져 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기다리던 문장이 귓가에 스며들자, 빛을 잃고 공허하게 떠돌던 눈동자가 반짝 생기를 되찾았다.

“삼촌, 보이세요? 저기 누나예요.”

한껏 뒤로 젖혔던 몸이 곧추세워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단정한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단정한 눈썹 아래 깊게 팬 눈우물. 이를 따라 내려오는 얼굴선은 더할 수 없이 반듯하고 이에 알맞게 조화를 이루는 탐스러운 은발을 예상했던 후작은 저도 모르게 잠시 숨을 죽였다.

아이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여러 기사단 중 모르헤 기사단은 원체 눈에 띄는 족속들이었고 그중에서도 긴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아이는 가히 독보적이었으니.

“안색이 좋질 않네…… 몸이 안 좋은가.”

실상 그런 말로도 부족한 모습이었지만.

눈 밑을 뒤덮은 어두운 그늘과 메마른 입술 때문에 원체 핏기 없는 얼굴이 한층 창백해 보였다. 생기 잃은 눈빛 안에는 송곳 하나 박을 틈도 없이 무거운 어둠만이 괴여 있어 전체적으로 어느 순간 돌연 움직임을 멈춘 정물과도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고. 열기로 가득 차 역동적인 광장과 대조되어 유달리 그런 분위기가 더욱 또렷했다.

“토벌이 끝난 지 고작 몇 달이나 되었다고요. 이제 차차 괜찮아지겠죠.”

“나중에 테오 네가…….”

후작은 하던 말을 잠시 멈췄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 살짝 드러난 은회색 눈동자가 아주 잠깐이나마 그를 담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후작은 자라처럼 목을 깊이 움츠렸다. 잠깐이나마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이 든 것이다.

“걱정 마세요, 여기 사람이 몇입니까.”

불안하게 구르던 눈이 차양 아래 빼곡하게 자리 잡은 사람들을 훑으며 평정을 되찾았다. 그런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후작은 다시 한번 확인하듯 모자를 꾹꾹 눌렀다. 그런 행동은 계속 반복되었다. 대회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황제가 단상에 나서고 모두의 이목이 그곳에 집중되고 나서야 후작은 웅크린 몸을 살짝 폈다.

***

황제의 선포가 끝나자 사냥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기사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말허리를 찼다. 자욱한 흙먼지와 함께 너 나 할 것 없이 숲속으로 내달리는 기사들의 표정은 전쟁터를 방불케할 만큼 비장했다. 원래도 기사에게 더없이 영예로운 행사인 사냥 대회. 이번 대회는 더욱 특별했다. 이민족 토벌로 잠정적으로 중단했다가 무려, 4년 만에 열리는 것이니만큼 말이다. 타나예, 아킬라, 모르헤, 라메르, 멕톤, 케페라, 바리키, 세네타오, 솔라메, 제나드, 폴타 등 제국을 수호하는 21개의 기사단은 다들 어마어마한 각오를 다지고 대회에 임했다. 그러나 감히 모르헤 기사단만큼은 아니었으리라. 거기에는 아주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제국의 기나긴 역사상 단 한 번도 모르헤 기사단은 사냥 대회에서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지 못했다.

“아델리아 경!”

해서, 나는 지금 하렌이 무척이나 사나운 표정을 내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저런 무시무시한 낯은 전쟁터에서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정신 좀 차리지 그래.”

내 쪽으로 달려든 사냥감을 그대로 놓쳐 버린 것이 벌써 세 번째였다. 그리 둔감한 몸은 아닌데, 자꾸 잦아드는 상념 탓인지 동작이 느려졌다.

착각이겠지.

거기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인데. 귀족이 아니던가. 그런 자리에 있을 리가. 난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 올렸다. 이곳이 아미타 숲속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벌써 몇 번이고 폭주했을지도 모를 몸이니.

네 번째쯤 되었을 때, 보다 못한 하렌은 내게 돌아섰다. 이름 모를 풀을 짓밟으며 다가오는 발이 위협적이었다.

“경, 이번 사냥 대회는 기사단의 명예가 걸린 일이다.”

“죄송합니다.”

얼차려라도 시킬 줄 알았는데 돌아온 것은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정찰이나 하면서 정신이나 차려.”

까닥. 고갯짓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한눈에 봐도 가파른 돌투성이 비탈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래도 말을 타고 가긴 힘들겠지.”

“…….”

“저 너머에 호수로 이어지는 개울이 있는 거 같아. 아타할케가 있나 찾아봐. 그놈도 목은 축여야 하니.”

“예.”

땅바닥에 바싹 붙어 기다시피 올라간 꼭대기에서야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위에서보니 하렌이 말한 대로 꾸불꾸불 이어지는 길은 개울까지 연결되었는데 아마 그는 저쯤에 아타할케가 있나 추측한 모양이다. 아타할케는 제국에서 신성시하는 영물. 단연, 보기 힘든 동물이나, 아마 이번 사냥 대회를 위해서 한두 마리 정도는 풀어 놨을 터였다. 짧게 휴식을 끝내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몸은 내려오는 길에 더 적합했고 아까보다 수월했다. 그만큼 헛헛한 생각이 쉬이 비집고 들어올 수 있다는 걸 뜻하기도 했다. 지천에 깔린 초록빛 들판, 온갖 초목과 산꽃이 퍼트리는 내음, 여기저기서 들리는 새소리. 숲은 여러모로 내게 위험했다. 이곳에는 너무나도 그를 떠올릴 것들이 많았다.

“하아…….”

아물거리는 정신을 붙잡고 살핀 개울은 수천 개의 자갈돌을 품고 수초가 울창한 깊은 수풀에 모습을 감췄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그 너머에는 분명 여러 개울들이 모인 호수가 있을 테니 탐색은 여기서 멈춰야 한다. 아타할케는 영민한 동물. 숲에서 가장 위험한 호숫가에서 목을 축일 정도로 어리석진 않을 것이다 하는 순간, 나는 동작을 멈췄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건만, 미묘하게 바람의 세기가 달라진 것이 내 눈꺼풀을 들어 올리게 했다. 전쟁터를 누비던 그 버릇은 어디 가지 않는지, 실로 놀라운 감각이었다. 그리고 내 시야를 채운 것은 푸르른 숲이 아닌 은빛 갈기를 휘날리는 짐승이었다.

아타할케.

원체 민첩한 동물인 데다가 편자를 박지 않은 야생말이라 더욱 가볍게 숲을 헤집고 다니나 보다. 혹 내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놀라 달아날까 숨 쉬는 것조차 조심하며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내게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목을 축이려는지 나뭇잎에 맺힌 이슬을 쓸어 담고 있었다. 풀발 위에 발자국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발을 놀려 가까이 다가갔다. 생포해야 좋긴 하나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도 시체라도 건질 수 있는 게 어딘가 무려 아타할케인데. 이걸로 오늘 하루 종일 보였던 추태는 잊혀지겠다 하며 가볍게 손을 굴려 검을 바로잡았다. 얼추 적당한 거리에서 급소를 가늠해 보려 고개를 올리다 새까만 눈동자와 허공에서 시선이 맞부딪혔다. 심해보다 깊은 동공은 왜 색감도 크기도 전혀 다른 이의 것을 떠오르게 했을까. 다음 순간 스르륵. 팔에서 힘이 절로 빠짐과 동시에 챙그랑. 쇠붙이 소리가 요란스레 돌바닥에 떨어지며 흔적도 없이 아타할케는 사라지고 말았다.

동시에 대회의 종료를 알리는 뿔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그사이 제법 많은 짐승들을 포획한 모르헤 기사단 그 누구의 표정도 밝지 않았는데, 타나예 기사단이 아타할케를 포획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타나예 기사단이 목줄을 단단히 매고 아타할케를 끌고 가는 모습이 저 멀리서 얼핏 보였다. 찬란한 은빛 갈기를 자랑하는 그 생물은 알아채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맙소사, 심지어 생포했군.”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아타할케를 생포했다는 건 더 볼 것도 없다는 뜻이다. 곧 넓은 고원 곳곳에 드리운 차양 옆에는 타나예 기사단의 푸른 불꽃문양의 깃발이 휘날렸다.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하렌의 시선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

“타나예 기사단이라니…….”

고원에 흩날리는 푸른 깃발과 제 손에 들린 아킬라 기사단의 가문패를 번갈아 보며 체레타 남작은 허망한 듯 읊조렸다. 아킬라 기사단에게 걸었던 별장 한 채가 허공으로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내 뭐랬나, 이번엔 무조건 타나예 기사단이랬지.”

넋이 반쯤 나간 그에게 르레타 남작이 쓴소리를 했다.

“공작님도 거길 찍었대잖아.”

막 판돈을 현물로 바꾸었는지 무거워진 두 손에 싱글벙글한 웃음을 걸고서.

“티케 일족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거기다 그 어린 나이에 발현한 공녀가 아니야.”

무슨 대단한 비밀인 양 르레타 남작이 나직이 속삭인 말은 제국에 있는 치들 중 모르는 이가 없는 사실이었다. 대 공작가의 공녀가 축복의 능력을 발현했다. 그곳도 기록에 남을 만한 어린 나이에.

“그걸 누가 몰라 그런가.”

체레타 남작은 작게 웅얼거렸다. 공작이 타나예 기사단에 돈을 걸었다는 소식은 막 대회준비로 고원이 무르익을 무렵 암암리에 여기저기 들불처럼 번졌다. 단연, 그에 따라 움직여야겠지만 사람들이 쉬이 그러지 못한 까닭은 전쟁에서 아킬라 기사단이 보여 준 엄청난 공적 때문이었다. 모르헤 기사단 다음으로 뛰어난 활약을 보인 그들은 최근 제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보이고 있던 것이다. 그 분명한 사실을 외면하지 못한 남작은 결국 고심에 고심 끝에 티케 일족을 외면하는 참극을 벌인 것이다.

“내가 뭐에 씌인 게지.”

부인에게는 또 뭐라 변명을 해야 할 것인가. 우울한 음성으로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쉰 체레타 남작은 급기야 아킬라 기사단의 가문패를 집어 던지고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막 중개인이 건넨 판돈을 건네받는 공작이 그의 시야에 걸린 건 그 찰나였다.

“허허, 이번 사냥 대회의 진정한 승자는 공작님이십니다.”

벌판을 가로지는 부러움과 찬양이 뒤섞인 문장은 판돈을 건네는 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공작은 그저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이며 겸양의 말로 이에 화답했다.

“그저 운이지.”

보좌관이 세는 화폐의 종이 소리가 담담한 목소리가 만들어 낸 빈 공간을 채워 나갔다.

“100만 르타가 맞습니다.”

저택을 하나 짓고도 남을 액수가 보좌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이에 수고했다 짧은 인사를 건넨 공작은 현물을 정리하러 멀어지는 보좌관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그 액수를 입에 올려 보았다.

100만 르타라.

누군가에겐 눈이 휘둥그레질 그 돈은 이제 그에게는 그리 큰 감흥을 불러오지 않았다. 그 정도 돈이 없어 근본도 없는 이의 여식과 혼약을 맺은 적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물 밀려오듯 밀려오는 재물에 익숙해진 그였으니까.

그의 실리에 입각한 판단과 냉철함도 한몫했겠지만, 딸아이의 힘이 가장 컸겠지.

세이아린 베르니.

‘공녀님의 발현은 누구보다 빠릅니다.’

공녀의 발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기 전날 밤, 티케 일족의 수장이 그에게 그리 말했다.

‘아마 그 힘 역시 범상치 않으리라 사료됩니다.’

앞으로 공작가의 번영을 뜻하는 선포와도 같은 문장 역시.

잊을 수 없던 날, 그 밤의 기억을 떠올리자 공작의 안색은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빛을 띠었다.

‘나도 갈 거야!’

사냥 대회를 따라 간다 떼를 쓰던 딸의 음성만 아니었으면 더욱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빛깔이었다. 원래도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아이는 최근 들어 그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본래 제 기질과 모두가 탐낼 능력을 가진 일족에게는 존재하는 중대한 맹점이 뒤섞인 결과물이었다.

정작 제 몸을 방어할 수단이 하나 없어 항시 혹시 모를 피습과 납치에 대비해 가급적 외출을 자제해야 한다는.

그래도 그렇지.

세이의 처세는 베르니의 기상과 걸맞지 않았다. 아니, 실상 그런 말로 부족할 정도로. 제 낯 하나 갈무리하지 못해 오롯이 속을 다 내비치는 건 물론, 절대 내보여서는 안 될 패를 먼저 까 보이는 것도.

그 아이에게 공작가를 맡기는 게 정녕 마땅한 일인가.

공작은 심상한 눈빛으로 붉게 물든 광활한 고원을 내려다보았다.

그 애를 뒤따르는 축복이 그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가 되겠으나, 이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세이에게 너무 과분한 힘인 듯했다. 은빛 머리카락이 그의 눈을 파고든 건 그런 합리적인 의심이 그의 심중에 돋아날 즈음이었다.

아델리아 베르니.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단어는 그럼에도 항시 혀끝으로 굴린 것처럼 익숙했다. 마치 제자리를 되찾은 것처럼.

과연 너는 이번에도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인가.

대회의 준비며 기획까지 모두 그의 총괄하에 이루어진 숲을 내려다보는 공작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흥미로운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저 멀리 고원 아래까지 갔던 보좌관이 돌아온 건 그때였다.

“공작님,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바야흐로, 진짜 사냥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

높게 뜬 만월이 승리의 축배를 들며 환호작약하며 쓰러진 이들을 환히 비추는 밤. 이를 소리 없이 지나친 한 무리의 검은 인영들은 기다란 착검을 허리에 차고 보폭을 넓혔다. 야영지도 고원도 아닌, 바로 아미타 숲을 향해서.

“다 끝났나?”

나무 우듬지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와 발밑을 스치는 젖은 풀잎들 소리를 가르고 낮은 사내의 음성이 나직이 울려 퍼졌다. 울밀한 수목 옆, 크게 우거진 굼깊은 골짜기 곳곳에 허리를 깊이 숙이고 있던 치들이 그 문장에 하나둘 고개를 젖혔다. 이를 긍정의 뜻으로 여긴 사내는 손에 남은 마른 약초를 마저 털어 내고는 신호를 보냈다. 이에 질서정연하게 열을 맞춰 움직이는 무리가 숲에 들어왔던 때처럼 흔적 없이 자취를 감추었을 즈음, 짐승들의 흉포한 울부짖음이 적막하던 숲의 공기를 찢기 시작했다.

***

“그림자 늑대다!”

“불을 가져와!”

막사 안을 비집고 들어오는 거센 소리는 적막한 공기를 뒤흔들 정도로 요란했다. 눈꺼풀을 밀어 초점이 맞지 않은 동공을 느리게 깜빡이자, 높게 뜬 만월 아래 눈앞에 서 있는 시크무레한 인영들이 선명해졌다.

공작이 보낸 것인가.

어쩐지 마차 사고 이후 조용하다 했다. 그리 자조하는 사이, 벼린 단검이 어깨를 스치듯 내리꽂혔다. 동시에 던져진 단검을 피해 바닥으로 굴렀다. 아슬아슬했다. 부상을 치료하느라 마신 진정제가 화근인가. 나는 뻐근한 어깨를 문질렀다. 허나 그렇다 해도 본디 기사. 적의 동향을 파악하는 기민한 감각은 부차적인 능력이 아닌 필수였다. 재빨리 오른쪽 탁자에 놓여 있던 검을 낚아챘고 나를 향해 내리 꽃히는 창검을 간신히 막아 세웠을 즈음, 깔끔하게 떨어진 손이 휘장을 걷고는 제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어둠이 깔린 공간에 붉은기가 번진 눈동자가 광폭하게 빛났다.

곧 사위가 시크무레한 땀냄새와 역한 피비린내로 진동하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까지 온 놈들치곤 허술한 걸.”

핏물이 울컥거리는 시체를 칼끝으로 이리저리 헤집으며 하렌은 여상히 말했다. 그의 이마 위로 가느다랗게 내려앉은 머리카락은 땀 한 방울도 맺히지 않은 채 부드러워 보였다. 무언가 이상한 듯 미간을 좁히며 사념에 잠겨 있던 하렌이 의문을 거두어들인 것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이 짙어질 즈음이었다.

“그림자 늑대들이 출몰했어.”

검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을 소맷자락으로 닦아 낸 그는 심란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불을 피우면 되지 않습니까.”

틀어진 어깨를 문지르며 내가 되물었다.

“그래도 도망가지 않는 게 문제야. 무슨 약이라도 취한 것처럼…… 아무튼 경은 견습 기사들과 함께 흩어진 귀족들을 챙겨 폐하의 막사 뒤로 이동해. 나는 숲 경계에서 1차 방어선을 구축할 테니.”

잘게 고개를 흔들며 그는 핏물이 잔뜩 밴 휘장을 걷어 들였다.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나부낀 하얀 천의 뒤로 펼쳐진 광경은 가히 처참했다.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술에 취해 갑옷은커녕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기사들은 그림자 늑대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었고 날름대는 불이 천막을 휘감았다.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광경. 이리저리 뒤엉킨 비명의 틈에서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아델리아 경!”

어린 견습 기사, 이안이었다.

그 음성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는 하렌의 지시를 그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귀족들이 머무는 야영지는 숲의 경계를 따라 둥글게 반원으로 자리 잡은 기사들의 막사 안에 위치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안전한 황제의 막사 뒤로 이동해야 한다고. 혼란스러운 사위 속 하나둘 모여든 견습 기사들은 내 설명에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후 일은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었다.

한 겹 둘러싸 방어진을 친 기사들 덕분인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평화로웠고 혼잡한 상황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는 귀족들을 챙기기만 하면 됐다. 그림자 늑대 한 마리를 만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이미 큰 상처를 입은 상태여서 어렵지 않게 숨통을 끊어 낼 수 있었다. 생각지 못한 복병이 있긴 했지만.

“저쪽에 뭐가 갑자기 꿈틀거렸어.”

별것도 아닌 걸로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러 대는 귀족들이었다.

막사까지 두 번은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각에 여태 반밖에 오지 못한 것에 뭐 특별한 이유가 있었겠는가. 또 한 번 난동을 피우는 어린 영애에 나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나뭇잎일 뿐입니다, 영애.”

별로 통한 것 같지는 않았으나. 내 팔을 꼭 붙잡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영애는 그렇게 또 몇 발자국 떼지 못하고 다급히 외쳤다.

“저기! 저기 누가 있어요!”

“저건 나뭇가…….”

분노가 희미하게 섞인 신경질적인 투로 말을 이어 가려던 나는 어둠 속에서 휘청이며 걸어 나온 인영에 잠시 입술을 멈췄다. 거동조차 불편해 보이는 여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 창백하게 질려 있는 채였다.

“저쪽에 늑대가…… 늑대가 있어요!”

재빨리 부축한 이안에게 몸을 기댄 그녀는 파리해진 입술로 두서없는 말을 내뱉었다.

늑대, 고원.

분절된 단어들로 추측해 가던 상황은 가히 심상치 않았다. 우르르 울리는 포효가 바람결에 실려 와닿자 더욱 그런 생각에 힘이 실렸다. 보통 짐승들과 궤가 다른 울림.

분명 그림자 늑대다.

달라진 내 눈빛을 읽었는지 견습 기사들이 검을 곧추세웠지만 그마저도 고작 여섯이었다. 개중에 다섯은 견습 기사에 불과하고. 모르스의 힘이 없다면 모조리 다 데리고 가도 멀쩡한 그림자 늑대 두 마리나 막을 수 있을까 한 전력이었다. 허나, 황제의 막사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고 별반 위험할 것도 없으니…….

“경, 설마 견습 기사 한둘과 움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생각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언제 짐승들이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귀부인 하나가 상념을 갈랐다. 차분한 말씨였지만 무언의 힘이 실려 있는 어조였다. 뒤따라 여기저기서 진득한 시선이 내리꽂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이 전하는 바는 분명했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차선책을 택했다. 빠르게 돌아가는 머릿속은 다섯 견습 기사의 검술 실력을, 눈은 덩치를 가늠하며 적당한 한 명을 골라냈다.

“이안, 그대는 나와 함께 움직인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 것 같은 키에 널찍한 어깨를 지닌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나머지 기사들이 여러분들을 폐하의 막사까지 인도할 겁니다.”

정식 기사가 따르지 않아 불만스러운 눈길은 여전했지만, 어느 정도 그들도 수긍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짧게 고갯짓을 하고는 몸을 틀었다. 바람결에 실려 되울리던 소리는 아까부터 끊겼던 것이다.

이안과 함께 허리를 굽혀 바닥에 남은 발자국을 살피며 움직였다. 지천에 깔린 풀이 점점 짧아지고 땅은 단단해져 흔적이 희미해질 때쯤 나타난 장소는 평민들의 야영지에 가까운 절벽이었다. 날카로운 눈매로 울퉁불퉁 솟아난 바위틈을 꼼꼼히 살피던 나는 왼쪽 가장 커다란 바위 옆에 쓰러져 있는 인영들을 발견하고 잠깐 멈췄다.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혹여 숨죽이고 있을 그림자 늑대를 찾으려는 아주 기본적인 행동이었다. 신속한 탐색을 끝내고 나직이 명령했다.

“이안, 왼편 바위 옆에 부상자들이 있어. 그들을 확인해. 나는 그림자 늑대를 살필 테니.”

“예, 아델리아 경.”

자세를 낮추고 좁은 보폭으로 빠르게 움직여 도착한 곳은 절벽 끄트머리였다. 날 선 검을 반듯하게 쥔 보람도 없이 이미 죽은 그림자 늑대의 사체만이 회색빛 지면 위에 피를 흩뿌리고 널브러져 있었다. 그 흔적을 따라 절벽 아래를 바라보자 천연한 호수가 펼쳐졌고 잔잔하던 수면 위에는 동그라미가 퍼져 나가면서 옅은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한 마리는 떨어진 건가. 그렇다기엔 파동이 제법 커 보이는데. 허리를 깊이 숙여 더욱 면밀히 살피려던 찰나, 적막을 깨우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아델리아 경! 생존자입니다.”

검에 묻은 핏방울을 털어 내며 이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쓰러진 흐릿한 인영이 서서히 분명해졌다. 예닐곱쯤 보이는 어린아이 하나와 망토를 두른 기사 둘. 마지막으로…….

짙은 만월을 받아 투명하게 되비치는 녹안.

여기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에오르테가의 그 누구도 대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몇 번이나 확인하지 않았던가.

내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사이, 흑단같이 새까만 머리카락과 반쯤 감긴 눈 사이로 선연하게 보이는 색감의 주인이 천천히 소리를 냈다.

“……누나?”

소년과 사내. 그 어딘가를 배회하던 기억 속의 음성과 다른, 저 깊숙한 아래에서 끌어 올린 듯한 굵은 저음이 귓바퀴를 타고 흘렀다. 벗어날 수 없는 늪처럼 나를 옭아매고 숨통을 죄여 오면서.

“……테오.”

그 이름에 눈동자는 더욱 짙게 가라앉았다.

더는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 나는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

테오가 있다면, 분명 그도 있을 것이다.

허나, 어디에.

느리게 움직이는 시선을 재촉하듯 벽에 되울리는 소리가 하나 있어…… 몸은 자연스럽게 그 소리를 쫓아 움직였다. 다시 내달려 도착한 절벽 끝에는 핏자국이 선연했어.

“경, 안 됩니다! 바위가……!”

마지막으로 들려왔던 건 그 소리였던 것 같다.

***

물속은 깊었다.

뼛속까지 스며든 찬기에 눈꺼풀이 떨려 올 정도로.

달빛이 호수 안으로 연연히 쏟아져 들어왔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 몸에 부딪혀 흰 물거품을 뿜고 깨어지는 물살들과 이에 허리를 꺾은 채 허옇게 팔을 내미는 수초들…….

그 속으로 침잠하는 은빛 머리카락…….

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세찬 물살이 휘몰아치며 시야가 점멸했다.

뺨을 간질이는 눅눅한 흙의 감촉, 비릿한 이끼 냄새. 그리고 환청처럼 들려오는 건…….

그래, 말 울음소리였다.

팟, 정신이 든 건 그때였다.

물에 잠긴 듯 올리기 버거운 눈꺼풀을 들자, 찬란한 은빛 물결이 시야를 파고들었다. 아타할케. 문득 떠오른 그 단어가 너무도 현실감이 없어 막연한 착각인가 하며 다시 한번 천천히 눈을 내리감자, 물결치던 은빛 파도는 흔적조차 남지 않고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메꾼 것은…….

“……후작님.”

간신히 혼몽한 의식을 부여잡은 나는 휘청거리는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다가갔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에 드러난 꼭 다물린 눈과 파랗다 못해 보랏빛으로 변해 버린 입술. 가슴께에 미약하게 뛰는 맥박이 아니었다면 그가 델로스의 문턱을 밟았다 느껴질 정도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였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허옇게 질린 낯빛, 쌉싸래한 약초 냄새가 밴 서늘한 공기, 꽉 짓누른 잇새 사이로 튀어나오는 비명. 소슬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아득한 과거의 잔상을 불러온다. 희고 보드라운 천으로 싸매진 뭉툭한 그것까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폐부 안으로 밀려 들어와 흉곽을 크게 부풀렸다.

지키려고 떠난 것이다.

그의 오른손은 지키지 못했으나, 남은 한 손은 잃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칼을 들었다. 그 칼에 피를 묻힐 각오와 함께.

수천의 삶이 내 손 앞에 망가진 대도 그의 숨은 평온하다는 걸 위안 삼으며.

그 바람 하나로 그 희망 하나로 더렵혀진 몸뚱아리를 끝내 버리지 못하고 내일을 기약했는데…….

고작 남은 게 이거란 말인가.

끊어질 듯한 숨소리와 차디찬 체온. 고작 이런 걸 위해서 나는 그 숱한 시간, 끝 모를 어둠 속을 헤맸던 건가.

허탈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젖혔다. 이미 날은 저물어 달은 산허리 넘어 기울고 주위는 어스레하게 어두웠다. 그 밤을 직시하는 내 눈빛에는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괴인다.

***

아미타 숲에 불길이 피어올랐다.

파삭, 마른 잎을 밟으며 숲의 골짜기를 질주하던 모르헤 기사단원은 숲의 중앙에서 피어오른 연기에 잠시 말고삐를 그러잡았다. 엉망으로 된 고원을 수습하고 사라진 아델리아 경과 에오르테 후작을 찾아 막 정찰을 시작하던 찰나였다.

어느 미친놈인가. 이 밤중에 저 위험한 곳에서 불을 피우는 천치가.

필히 아델리아 경은 아닐 테다. 그리 아둔한 머리는 아닌 데다가 몇 해를 전장터에서 구른 몸이 그 간단한 이치를 깨우치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럼, 누군가.

그들이 그 가여운 영혼에게 조의를 표하는 사이, 기사단장의 명이 숲을 흔들었다.

“연기가 피어오른 곳으로 간다.”

“예?”

기사단원들은 문장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물론 저치도 구하면 좋겠지만, 그들이 도착할 때가 버티리라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우선 급선무는 기사와 후작을 찾는 게 아니었던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에오르테가의 기사들을 이끌고 뒤를 따르던 공자 역시 격양된 음성으로 말했다.

“먼저 삼촌과 누나를 찾는 게 우선입니다, 경.”

“그래서 가려는 겝니다, 공자.”

“기사가 아니라 하여 우습게 보지 마시지요. 그리 아무것도 모르시는 분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이들만이 숲에 불을 피우지요. 그게 제 위치를 만천하에 알리는 줄도 모르면서. 어쩌면 제가 무슨 짓을 하는 줄도 모르는 걸 수도.”

“경!”

“허면, 공자.”

하렌은 느긋이 시선을 돌려 공자를 바라보았다. 피로에 한껏 물든 이의 낯에는 그럼에도 사위지 않는 절박함이 깃들어있다. 하렌은 그 얼굴에 대고 입술을 움직였다.

“어리석지 않은 이들이 불을 피우는 건 왜인지 아십니까.”

뭔가 지킬 게 있기 때문이지요.

“그게 무슨……!”

말장난과 같은 문장에 공자의 입술에서 깊은 분노가 터져 나온다.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온 것인지 끝에 가 사위고 말았다만. 서서히 눈을 키우는 녹안을 일별하며 하렌은 하늘로 고개를 젖혔다.

깊은 밤, 박새 하나 베지 못했던 기사는 과연 이 밤을 건널 수 있을까.

***

……스물 마리.

끊어질 것같이 당겨 오는 팔을 들어 마지막 짐승의 숨통을 끊어 낸 나는 쓰러지듯 동굴 벽에 몸을 기댔다. 산같이 쌓인 시체와 강물 같은 굵은 핏물이 발밑에 흐르는 참경이 나뭇가지 사이로 스미는 엷은 새벽빛에 선연해진다.

불을 피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

숲에선 가장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응당 지켜야 할 불문율이었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후작의 체온이 너무 낮아 아마 모닥불의 온기가 아니었다면 지난 밤을 건널 수 없었을 게 뻔하니.

잿더미만 남은 참담한 전장에 시선을 돌리고 그리 스스로를 변명해 본다. 손에서 떨어져 나간 쇠붙이의 여운이 그 해명에 힘을 더하며.

사냥 대회에서도 이 기세였다면 좋았을 것을.

불그스름한 태양의 여광에 명멸하듯 섬뜩한 빛깔을 그리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보다 나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하렌이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은 단박에 승리의 영예를 모르헤 기사단의 것으로 넘겨줄 만큼 처참했으니. 피식, 다시 한번 실없는 웃음을 터트린 나는 살육의 광기와 피로에 취한 듯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규칙적으로 점멸하는 시야에 의식은 점차 허물어져 갔다. 핏빛으로 물든 머리카락 사이로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ㅇ…… 델?”

숨 쉬는 걸 잊어버린 것처럼 한참 팽창만 하던 가슴팍은 일순간 부드러운 속살거림에 정지하고 초점을 잃었던 눈은 선명해진다. 장작을 다 태우고 남은 미약한 잔불 아래 그의 모습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싱그러움을 잊은 풀빛 같은 녹안과 그 밑에 짙게 깔린 어두운 그늘이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더욱 도드라졌고 다채로운 색이 섞인 멍들은 그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내 기억과 다분히 이질적인 모습.

“아델……?”

힘겹게 젖힌 눈꺼풀이 열리며 두려움과 의구심으로 가득한 푸른 눈이 내게 미끄러져 닿았다.

후작님.

여전히 혀끝에서 맴돌기만 하는 그 단어를 끄집어내려는 듯.

집요하게.

“아델, 정말 너니?”

꾹 다물려 열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 입매를 끈질기게 추궁하던 그는 손으로 땅을 짚어 반쯤 허리를 세우려 했다. 의도와 달리 작게 앓는 신음 소리와 함께 몸이 무너져 내렸지만. 깊은 심해에 잠겨 있던 단어가 터져 나온 건 그쯤이었다.

“후작님!”

고대했던 단어였던 걸까. 급히 부축한 그의 몸이 그 음절 앞에 잘게 경련했다. 가까스로 상황을 파악하고 팔을 떼려 하자, 한껏 추켜 올라간 입꼬리가 다시 나를 붙잡았다.

“……너구나.”

눅진한 습도를 몰아내는 청량한 소리였다.

달도 없는 캄캄한 칠야, 끝 모를 길을 헤맬 적. 차마 양지에는 되새기지 못해 꿈결에서만 몰래 들추어 보았던, 그 변함없는 음성처럼 후작은 여전했다.

다정하고 따스한, 오롯이 나를 담고 있는 시선까지 모조리. 그 탓에 제 손 하나를 잃었다는 걸 모조리 잊어버린 것처럼.

어째서 이 사내는 이리 한결같을까.

조금은 기가 막히고 그래서 더 믿기지 않는 상황에 그저 허탈한 웃음밖에 지을 수 없었다.

멀쩡하지 못한 사지에 가문은 멸문을 코앞에 둔 채로.

어째서 이 사내는 이토록 어리석을까 하여.

아침의 투명한 햇살은 우리 둘 사이를 환히 내비칠 정도로 완연했으나, 여태 깊은 어둠에서 발을 떼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다.

언젠가 한 번 지나쳐 왔던 이 물음이, 그 낯익은 기시감이 나를 다시 주저케 하기에.

마주한 이는 내 머뭇거림의 연유를 모르지 않는 듯했다.

“기다렸지.”

금빛 의수를 들어 올려 내 뺨을 그러잡으며,

“네가 돌아오는 날만을.”

우직하고도 굳건한 눈동자가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그날이 오면 널 내 품에 안아 이제 다 괜찮다 말해 주리라 생각하면서.”

어린아이를 꾀어낼 만큼 달콤하고,

“제 몸보다 무거운 견갑을 걸치고 제 팔만 한 검을 들고 전쟁터로 떠나는 너를 보면서도 그리 생각했어. 상관없다고. 백 명이든 천 명이든 죽여도 상관없다고. 나는 너만 살아 있으면 된다고. 그러니까 살라고. 살아서 돌아오라고.”

다정한 음성을 속살거리며.

“다시 내게로 말이다.”

나는 가만히 뺨에 닿은 금빛 의수 위로 내 손을 포개어 보았다. 보드랍고 따스한 살갗 대신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이 서늘하기만 한 차가운 쇠붙이의 촉감만이 손끝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 감각이 그리 말했다.

넘어가면 안 된다고.

이리 또 휩쓸려 버리면 이번엔 그저 손 하나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우리 사이에 놓인, 풀어야 할 수 없이 많은 해묵은 문제들이 다시 소용돌이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부디 그 손을 놓으라고. 미열처럼 번져 오는 햇살이 동굴 안에까지 잠식해 오는 시각. 이에 반사되어 채도 높은 빛깔의 눈동자가 시야를 시리도록 파고들고, 또렷한 색조 위로 핏물로 번진 내 모습이 점점 더 선연해진다.

그래서였다.

내게 닿은 후작의 의수를 떨쳐 내고 애써 외면하려 했던 그에게로 시선을 옮긴 것은.

“4년간 전쟁터를 떠돌았어요. 이민족들은 어찌나 지독한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지요. 펄떡거리는 심장에 칼을 박고 그 뒤로 어느 누구도 제 앞에서 목숨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벼린 칼을 입에 물고.

“왜 이리 떨고 계십니까.”

이 칼날이 부디 포기를 모르고 내게 다가오는 그에게 효험이 있기를 바라며.

“살아 돌아오길 바란다 하셨다면서요. 설마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요. 그래서 그리 저를 모르타 위원회로부터 지키고자 하심이 아닙니까. 명예도 영광도 사라진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저처럼 사람 되길 포기한 자들뿐이라는 걸 잘 아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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