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잿빛 마을
몇 년 만이었다. 공작과의 재회는.
저택 내부의 집무실로 들어선 나는 촘촘하게 머리를 잡아 올리고 있는 실핀들을 풀어 헤쳤다. 흘러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따라 머릿속에 무겁게 짓눌려 있던 사념들이 흩어져 나왔다.
잡티 없이 매끈한 살결과 볼에서 턱으로 흘러내리는 이를 데 없이 날카로운 선.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 아래 심해보다 짙은 벽안. 무심한 세월도 그 앞에서는 관대하였나 보지.
헤모나 남작과의 파혼을 알리던 그날과 같이 여전한, 찰나에 맞부딪힌 모습들을 되새기며 내가 피식 웃음을 흘리는 사이, 뒤따라온 집사가 책상 위로 서류를 내밀었다.
“장례에 참석한 귀족들의 명단입니다.”
내실에 울려 퍼지는 음성은 딱딱했다. 내 약지에 루트비아가의 인장이 찍힌 반지가 걸리고 백작의 숨이 다하는 순간부터 줄곧 그래 왔던 것처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수년간 이 저턱에 머물면 들어 왔던 음성인데. 헌데 왜 이리 자꾸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그 물음이 미처 답을 찾기도 전에 집사는 미처 갈무리되지 못한 감정들을 정돈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백작님께서 친히 답신을 드려야 할 가문들은 따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냉담한 말투는 어쩌지 못한 것 같았지만.
경멸과 적의. 유구한 세월 앞에 마모되어 그 날카로움을 잃었다 여긴 집사의 눈빛이 뒤늦게 날 선 칼날처럼 나를 할퀴어 온다. 한참 동안 꼿꼿이 그 벼린 기세를 감내하던 나는 보고를 마친 그가 집무실을 나서자, 옅은 한숨을 내쉬며 습관처럼 브로치를 꾸욱 움켜쥐었다. 당연한 수순처럼 뇌리에 떠오르는 사람은 후작이었다.
우스운 일이지.
도망치듯 떠나온 루트비아저에서 그를 떠올리는 일이 더 잦다는 건.
장례에 찾아온 사람들은 수순처럼 에오르테가를 입에 올렸다. 가문의 쇠락과 망조에 대해서. 우리 둘을 둘러싼 불온한 소문에 대해서. 막 에오르테가의 마차가 도착하고 후작이 백작의 장례 행렬에 참석하자 그 수군거림은 더욱 커졌다.
담담히 대해야지, 그리 마음먹었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을 게 뻔하니까. 낮게 흘러 들어오는 그 소리가, 더없이 맑은 그 울림이 귓가를 간질인 건 그 순간이었다.
‘괜찮니, 아델?’
다정함과 염려가 반쯤 뒤섞인 녹안은 부신 햇살이 녹아내려 유달리 도드라졌다. 세상사 그 무엇도 중요치 않다는 듯, 오로지 나를 담은 채 일렁거리며.
나는 정녕 그에게서 도망치듯 이곳에 온 걸까.
아니면 그 문장을 방패 삼아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멀어지는 만큼, 물러서는 만큼 다가오는 그를.
‘안색이 좋지 않구나.’
혼란스러운 의식 속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사람들 말이 맞아. 나는 제멋대로고 분수도 몰라 그 끝이 분명한 일을 두고서도 결코 이 눈을 포기할 수 없구나. 햇살을 머금고 짙어진 풀빛처럼 더욱 환하게 빛나는 이 눈을.
‘장례가 마무리되면…… 라마타로 가요, 후작님.’
절대 나올 리 없다 생각했던 문장이 내 입술을 타고 흐른 건 그 탓이다.
***
“메이나 숲과 동남부의 광산을 제게 넘겨주세요.”
저택에 울려 퍼지는 아델의 목소리는 지극히 담담했다. 막 장례를 마주한 이답게 검은 의복을 갖추었지만, 서릿발처럼 냉담한 눈은 방금 누군가를 잃은 이 같아 보이지 않았다.
이어지는 문장 역시 그러했다.
“여기다 서명해 주시면 됩니다.”
테이블을 가로지르는 단정한 손끝에는, 메이나 숲과 동남부의 광산을 양도한다면 루트비아가의 먼 방계인 르네타가의 장남이 백작이 된다는 서류가 있었다.
공작은 다소 황당한 눈길로 정갈하게 정리된 서류와 그보다 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제 앞에 앉은, 제 자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뻔한 전개를 예상했다. 작위를 내놓을 수 없다 뭐 그런 얘기들. 한바탕 소란을 피울 것도 각오했다. 백작의 명이 다한 지 채 얼마되지 않은 시각에 나눌 법한 얘기가 아닌지라.
헌데 다음을 기약하고 있다라.
분수를 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한없이 낮추지 않은 자세를 가만히 살펴보던 공작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아인 제 핏줄이구나.
단 한 번도 깊이 고심하지 않았던 사실이 새삼스레 그의 심중에 들이찼다. 달빛에 물든 것 같은 은안과 은발을 스치듯 지난 공작의 시선은 그 아래 날렵한 눈매와 깎아 내린 듯한 턱선을 느릿하게 배회했다.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제 어밀 빼다 닮았다 생각했는데 이리 보니 그를 닮은 구석도 적지 않았다.
“손해 보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낮고 차분한 음성 역시.
일순, 공작은 지금 제가 해야 될 일도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벌어질 일도 모조리 까맣게 잊은 채 저도 모르게 깊이 상념에 잠겨 들어갔다.
만약에…….
만약에 그들에게 주어진 삶이 조금 더 순탄했더라면 어땠을까?
답지 않게 늘어놓는 의미 없는 가정의 끝에는 틀림없이 저 아이는 부족함 없는 공작가의 후계로 자랐을 거라는 분명한 사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당황함이 스민 공작의 입가에는 호방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웃음과 함께 제 앞에 놓인 서류에 날인을 찍은 공작은 어느덧 흥미로운 기색이 감도는 눈을 들어 올렸다.
저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아이다. 외양은 달라도 그것만큼은 자신을 닮았어. 나이답지 않은 침착함도 어그러짐 없는 사리 판단도 이 와중에 판을 읽고 제가 얻을 걸 취하는 것도 전부다. 세이가 태어나던 날 그는 꼭 지금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빼다 박은 그 아이를 보고 주저 없이 아델을 버릴 수 있었지. 외양을 닮은 만큼 성정 역시 그리하리라 기대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수년간의 세월로 깨달았지만.
잊고 있던 그날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공작은 푸른 눈으로 아델을 직시했다. 그 눈 위로 마치 태어나 처음 저와 같은 빛깔을 마주한 사람과 같은 희열이 오롯이 드러났다.
“이걸로 무얼 할 생각이냐.”
진실을 밝힐 준비를 하려나? 누구보다 고귀하게 태어난 자신의 혈통을.
그도 아니라면 복수라도 하려나? 저를 이리 비참하게 만든 혈육에 대한.
뻐근해 올 정도로 차오르는 충일감이 서늘하게 식은 것은 아델의 장신구, 에메랄드 빛깔의 보석이 그의 벽안에 스민 순간이었다.
에오르테.
그 단어가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사이, 질긴 시선이 닿는 것을 알아챘는지 단정한 손이 슬며시 브로치를 감싸 쥐었다.
“저 때문에 잃은 게 많으신 분입니다.”
그 안에서 내뿜어지는 녹음이 짙은 숲을 연상시키는 광채를 감추기엔 충분하지 못했지만.
그제야 맞지 않았던 조각들이 하나둘 이해가 갔다. 메이나 숲, 광산. 그 수많은 루트비아가의 유산들 중 구태여 그것이여만 하는 이유가. 그러니까 저를 그대로 빚어내는 듯한 저 아이는 고작 망해 가는 가문을 살리고자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운명의 장난인 것인가.
제 딸이 저 못지않은 공작가의 핏줄이라는 걸 깨달은 날, 이미 혼탁해져 버린 모습을 보게 된 건. 완벽한 피조물에게 드리운 후작의 흔적을, 그 흠결을 살피던 공작은 허탈한 웃음을 그리며 눈을 감았다.
라에갈 에오르테.
유순한 자라 여겼다. 그러니 한 번도 그의 앞길에 방해가 되리라 여긴 적 없지. 고려하지도 깊이 고심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사사건건 이리 그의 심사를 흐트러트리는구나.
‘아델리아 베르니.’
그날처럼.
신경을 긁는 기억에 불현듯 궁금증이 인 것은 그때였다.
어찌 후작이 그 이름을 알았을까. 감히 황제도 알지 못한 그 이름을.
이전이라면 그저 단순히 아델이 후작에게 다 털어놓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도저히 알 수 없는 비밀이었으니까.
허나, 지금은?
공작은 앞에 앉은 제 피붙이를 응시하며 조금 그 판단을 재고해 본다.
이리 저를 닮은 아이는 그런 치부를 들키고서도 후작을 소중히 여길 수 있을까?
아니, 절대.
썩어 문드러져 짓무를지언정 동정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후작이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던가. 에오르테가의 둘째로 태어나 제 어미와 형을 집어삼킨 화마로 가주가 되었던 그때처럼? 우연?
허탈한 웃음을 삼킨 공작은 서늘해진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항시 침착함을 유지하던 그의 마음에 휘몰아치는 온갖 감정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고작 그런 우연으로 저를 겁박한 사내에 대한 분노? 아니면 그에 넘어간 자신에 대한 실망감? 더럽혀진 제 핏줄에 대한 아쉬움?
글쎄, 뭐가 되었든 그리 중요치 않았다.
“나도 알고 있다. 허나, 어쩌겠니.”
무엇이었든 간에, 저 애를 더는 가만히 후작의 손안에 둘 수 없는 것 하나는 확실하니까.
“그자가 쥐고 있는 게 너무 많은 것을.”
아델리아 베르니.
감히, 황제도 알아내지 못했던 그 이름까지도.
***
“설마 몰랐던 거니.”
현실감이 없는 문장에 나는 대답 대신 그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사고가 정지한 듯 더 나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공작의 음성은 허공으로 흩어져 버리고 부유하는 잔재를 따라 의식은 길을 잃었다. 뒤죽박죽으로 엉클어진 머릿속에 소멸하지 않은 생각은 단 하나.
기회라고 여겼다.
백작의 죽음을 맞이한 순간, 내 손안에 쥐어진 반지를 잡게 된 순간, 나를 잠식한 건 슬픔도 무엇도 아닌 그 생각이었다.
이 정도면 그 보답이 되지 않을까. 나를 향해 반짝이는 후작의 눈에 말이다. 그러고 나면 심중을 짓누르는 죄책감도 조금은 잊고 당당히 그 눈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이 갈무리되고 나면 어느 날, 어렴풋이 이 뒤엉킨 감정의 이름을 알게 될지도 모를 거라고.
헌데…….
‘아델리아 베르니.’
여전히 믿기지 않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돈다. 아주 오래전부터 가슴 깊숙이 메아리치던 물음과 기대를 흐트러트리고서. 그 답이 내가 바라는 것이기를 하는 헛된 희망을 짓밟고.
알고 있었구나.
‘공작님께 이야기는 들으셨나요? 당분간 별장에 머문다는.’
전부.
‘영애의 뜻은 어떠신지요.’
전부 다 알고 있었어.
‘그럼 다행입니다. 모쪼록 당분간 부족함이 없도록 모시지요.’
그래서 그런 것뿐인데.
오로지 나만을 직시하던 눈, 그 눈에 담긴 농도 짙은 빛깔은 그래, 차라리 동정에 더 가까운 것이었는데.
어리석게도 그것을 알지 못해…….
소망하고 꿈꾸고 탐내다니.
결국, 돌아 돌아 이리될 일을.
그저 불쌍히 여긴 것인데.
제 부모에게 외면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목숨마저 잃을 뻔한 가여운 아이를.
그런 것이었는데.
웃음과 울음이 한데 엉긴 괴이한 소리가 튀어나와 응접실에 번졌다. 짐작 가지 않는 행동에 아델을 내려다보는 공작의 시선이 깊어졌다.
나 역시 알고 있었어.
마차 사고가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는 걸. 그렇다기에는 너무도 순차적으로 이루어졌고 심지어 황당하고 끔찍한 이 사건은 떠들썩하게 이목을 끌 여러 요소를 분명히 가지고 있음에도 크게 보도되지도 않았다.
힘 있는 자들이 막고 있음이라. 그뿐인가. 갑작스러운 헤모나 남작과의 파혼과 후작을 후견인으로 지목한 공작. 모든 것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죽이려 했다.
푸르른 녹안에 담긴 뜻 모를 감정, 한껏 내리깔린 눈꺼풀까지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후작은 어리숙하고 나는 어리석지 않았으므로.
그럼에도 그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여긴 까닭은…….
당연했어. 빈번한 후작의 이상 행동을 되짚어 보면서도 나는 확신하고 또 확신했다. 제 아무리 그라 해도 절대 알아차릴 수 없을 거라고. 이 모든 일을 이해하려면 저 밑바닥에서 수년간 썩고 있는 부패한 사실 하나를 알아차려야 했으니. 이제껏 누구도 들춰내지 못한, 아니 실상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아델리아 베르니. 결코 상상할 수도 없는 그 이름을.
들키지라도 말지.
그리 감추고 싶은 치부였거든 완벽히 숨기기라도 하지. 그랬다면, 지금처럼 참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누가 손가락을 넣어 마구 쑤시는 것처럼 머릿속이 어지러웠고 이를 파고드는 감정은 명확했다. 분노. 나는 분노가 집어삼킨 눈동자를 올려 공작을 바라보았다.
***
잉크가 번졌다.
라마타로 가기 위해 필요한 서류들에 서명을 하던 후작은 뒤번진 잉크에 알아볼 수 없게 비뚤어진 글씨를 잠시 멍하니 응시했다.
심란한 마음으로 백작의 장례에 참석했다. 백작의 병환은 깊어 머지않아 다가올 끝을 예감하고 있었으나, 그 시기가 너무 적절치 않았다. 여린 마음이 짓무르진 않을까. 가까스로 추스른 상처들이 다시 그 아이를 할퀴지 않을까. 조심스레 건넨 말에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지만.
‘장례가 마무리되면…… 라마타로 가요, 후작님.’
라마타 얘기만 나오면 무언가를 참으려는 듯 꽉 입술을 짓누르기만 하던 아이가, 텅 빈 것 같은 눈으로 허공을 부유하며 마치 길을 잃은 이처럼 굴기만 하던 아이가 뱉은 문장이라 더욱 그랬다.
내심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 염려하던 후작은 그 답을 들은 후 제국을 떠날 준비에 더욱 속도를 냈다. 한시라도 서두르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이니.
불현듯 기이한 감각이 그를 적신 건 그 찰나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후작님.”
언제인지 내실에 들어선 엘몬트는 그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심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장례도 마무리되었고…….”
다기에서 피어오르는 더운 김을 따라 엘몬트의 다독임이 이어졌다.
“공작저의 전령이 수도로 막 떠난 걸 보니 아마 영애의 작위 양도도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듯합니다.”
막 찻잔을 들어 올리던 후작의 손이 허공에서 멎은 건 그 순간이다.
정확히는, 공작.
그 단어에.
그와의 협상은 지난 몇 년간 순조롭게 이어져 왔다. 공작가의 비밀을 유지하는 대신 아델의 파혼과 거취 문제를 해결해 주며.
바보가 아닌 이상 공작 스스로 이 문제를 어그러트리지는 않겠으나, 그래도 자꾸 마음에 걸려. 그자와 아이가 다시 마주하는 게.
한 번 혈육을 저버리려 했던 자가 또 못 할 게 무엇인가.
혹은 그렇게까지 무자비한 자에게 두렵지 않을 건 또 무엇이고.
가늠할 수 없는 자라 들었다.
고귀하고 고귀한 혈통과 반대로 그 행보는 무섭도록 실리를 추구하여 허례와 허식을 등진 그에게 신흥 세력들은 기대를 걸고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그 걸음의 끝이 닿는 곳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없어 항시 날을 세울 정도로.
공작에게 중한 것은 오로지 제 가문뿐이고 그 가문의 영속만이 그가 관심을 두는 유일한 것을 모르는 이가 없으니.
순탄히 지나가려나.
깊은 수심이 드리운 눈을 올려 차창 밖에 번진 낙조를 바라보던 후작은 무언가 결심한 듯 재킷을 집어 들었다.
“후작님!”
집사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면서.
***
후작은 초조하게 저택 앞을 이리저리 배회하며 아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안 됩니다.’
단호한 어투로 그를 막아 세운 공작저와 백작저의 기사들과 실랑이를 벌인 끝에 간신이 저택 정원까지 들어설 수 있다 타협을 본 그는 여태 그곳을 배회하고 있던 참이다. 단연, 그 이상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수십 명의 기사들이 저택을 둘러싼 기이한 광경 탓일까. 저택에는 정체 모를 위화감이 감돌았고 딱 그만큼의 불안감이 후작의 마음에 차올랐다.
날카로운 소리가 귓전을 때린 건 그 순간이었다.
동시에 후작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천천히 올라간 눈이 저택 창문을 향하는 순간, 유리 깨지는 파열음이 적막을 흔들었다. 우두둑거리며 무언가 떨어져 박살이 나는 소음이 뒤를 이으며.
무슨…….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이 끝을 맺기도 전에 몸은 이미 저택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물 먹은 듯 흐려지는 시야와 헐떡이는 숨결. 비릿한 피비린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후작은 짓눌린 것처럼 무겁게 내리덮여 있던 눈꺼풀에 힘을 준다. 빛을 잃은 녹안을 드러내고 길게 까풀진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흐린 초점을 맞추면서.
공포에 질린 방 한쪽에는 그래, 그곳에는 생전 처음 보는 아이가 서 있었다. 바닥 위에 바스러진 다채로운 빛깔의 파편들. 그 위를 수놓는 선연한 핏방울. 비현실적이게 강렬한 색채들 속에서 아이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묽게 번진 채로.
여전히 혼돈과 심연 속을 표류하면서.
그 아이가 몰고 온 것은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감각들이다. 칙칙한 습기, 피부를 간질이는 서늘한 냉기, 짓눌린 듯 갑갑한 가슴과 가빠 오는 호흡. 그 모든 것들은 어디선가 느껴 보았던,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끈적한 진창 속에 발을 딛는 기분을 닮아 있다. 차라리 눈을 감길 택할 정도로 불쾌한 감각을 피해 깊은 심연 아래로 몸을 맡기던 그가 비척이는 발걸음을 옮긴 까닭은 오로지 하나였다.
잦아드는 의식 속 귓가로 흘러들어 오는 낮은 울림이 하나 있어.
물 위에 뜬 것 같이 고요한, 서늘한 바람결처럼 부드러운. 푸른 숲의 무성한 잎사귀 사이를 유영하는 시리도록 밝은 한줄기 달빛 같은.
그 아이의 것이 틀림없는.
그저 묵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저 아이가 조금만 더 나약했더라면. 선연한 살기와 광폭한 눈빛. 그 모든 것을.
제가 지은 죄를 두고 원망할 이를 찾아 헤맬, 그런 비겁한 이었더라면 그는 차라리 기꺼운 마음으로 아이를 안아 주었을 것이다.
허나, 그의 아이는 나약하지도 비겁하지도 않으매 그리하여 끝내 모든 걸 다 감내하고 말 것을 알기에 후작은 몸을 일으킬 수밖에.
“아델.”
칠이 바랜 것 같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끊어질 듯 잔약한 목소리가 어둠에 삼켜진 잿빛 눈을 두드린다.
“아델.”
천천히 그러나 아주 분명하게.
이목구비가 지워진 듯한 완벽한 무표정을 만든 아이는 부름을 듣지 못했는지,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을 뿐이지만.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우수 떨어지는 유리 조각들을 몰고 아이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 안, 아니 세상 그 무엇보다 강력한 최상위 포식자답게 아주 느릿하고 여유로운 걸음걸이였다. 후작은 그런 아이를 향해 소리를 높였다.
“아델!”
그제야 아이가 고개를 틀었다. 아이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후작이 몇 걸음 못가 발을 우뚝 멈출 정도로 무시무시한 압박감을 내뿜으며. 가슴이 조여 오는 느낌에 숨을 쉬기조차 힘든 상태는, 일전에 겪어 봤던 것이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었을까. 후작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아……. 데…….”
제대로 된 단어를 완성하지도 못한 채, 휘청거리다가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지만. 그 자세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불규칙한 숨을 토해 내고 있자, 마주 보던 은회색 눈동자에 어렴풋이 이채가 돌았다. 숨통을 죄이던 기이한 감각 역시 점차 사위어 갔다.
“괜찮아, 아델. 날 봐.”
한눈에도 잔떨림이 느껴지는 다리에 힘을 줘 몸을 일으키고는, 다시 천천히 아이에게로 다가간 후작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아이의 두 팔을 꼭 붙잡고 시선을 맞추며. 파들파들 경련하는 손끝으로 아이의 뺨을 쓸어 올리며 그는 입술을 움직여.
“아델.”
조그마한 틈도 허용하지 않는 딱딱한 모양새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 같지 않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약속했잖니.”
후작은 그에 숨결을 불어넣듯 속살거렸다.
“우리 라마타로 가기로.”
삼킬 듯이 후작을 바라보던 눈길은, 그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빛깔을 띠고는 농도 짙은 감정을 전해 왔다. 조금 누그러진 분위기가 후작에게도 느껴졌다. 그는 조금 더 바싹 아이에게 다가갔다.
“다 같이 말이야.”
고운 눈매를 반쯤 휘고는 말했다. 문장을 꽉 채운 따스함이 아이에게도 전해지길 바라며 후작은 아이의 뺨을 매만졌다. 무미건조한 그 낯이 서서히 숨긴 것을 드러내고 그 안에 감춰진, 한층 묽어진 눈동자가 품었던 것을 내놓기 시작한다. 파르르 가느다란 속눈썹이 떨린 건 그때다. 저를 담고 크기를 키운 잿빛 눈동자는 그의 어깨너머 어딘가를 응시하고는 파문을 일으켰다. 아이가 무엇을 본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번에 쓰러진 이는 공작이 아니라는 점이 조금 다를 뿐.
***
저택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은 웅성거렸다. 다들 비슷한 소리를 포착한 것이다.
“방금 비명이 들린 것 같은데…….”
기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말과 달리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지만. 엄중한 명령이었다. 공작과 백작. 게다가 방금은 후작까지. 셋이 가진 권위를 합친다면 조금 과장해 황실과 버금간다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명을 어기려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쯤은 있어야 할 터. 확신을 갖기 위해 수십 명의 기사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적막이 내려앉은 길목에 공기를 찢는 소음이 또 한 번 울려 퍼졌다. 모두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갑작스레 서늘하게 변한 공기의 기류를 가르고 칼집을 철거덕거리는 쇳소리와 성난 말발굽 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모르헤…… 모르헤 기사단이…….”
기사 하나가 말을 끝맺기도 전, 언덕 아래에서 흐릿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이들이 속출했다. 죽음을 부르는 모르스 일족. 그들 중 최강의 능력을 갖춘 이들로 구성된 모르헤 기사단. 전쟁터도 아닌 하물며 수도도 아닌 이 외딴 영지에서 그들이 힘을 사용할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개중 다행인 것은 내달리는 말이 한 마리라는 사실이었다. 안도감도 오래가진 못했다.
“맙소사, 하렌 경……! 모르헤 기사단장이야!”
정교하게 세공된 얼굴 위로 부셔져 내린 햇살에 붉은빛으로 젖은 눈동자가 유독 도드라졌다. 제국에서는 다소 흔한 적안은 특유의 살기 어린 분위기가 더해져 그 자체로 특별하고도 위협적이었다.
그 눈동자의 주인이 말했다.
“비켜.”
날카롭게 제련된 검보다 더 서슬 퍼런 목소리로 뼛속 깊이 파고드는 한기까지 몰고 오면서.
“모르스 일족을 추적하러 왔다.”
간결한 문장이었지만, 비켜서지 않는 이는 없었다. 모르스 일족은 살아 있는 병기이자 제국의 전투력을 좌지우지하는 존재. 그들을 숨기거나, 추적을 방해하는 자들은 엄중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어느새 저 멀리 점처럼 사라진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느 기사 하나가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저택엔 세 분밖에 없는데…… 어떻게 모르스 일족이 있을 수 있지?”
***
모르헤 기사단장, 하렌은 서둘러 말에서 내려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음습한 냉기에 어렵지 않게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흔적을 따라 어둠이 짙게 깔린 응접실로 향한 그는 눈을 굴렸다.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두 사내와 기절한 듯 한 여자 하나. 하나는 베르니 공작이고 다른 하나는 에오르테 후작일 터. 말이 되질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아니면 또 누군가가 이곳에 있단 말인가.
누구냐. 누가…….
빠르게 방을 훑어 내리던 그의 눈은 은빛 머리카락 근처에서 멈췄다. 부서진 브로치. 무언가를 깨달은 그는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그의 눈가가 매섭게 치켜 올라갈 즘, 누군가가 그의 발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하…… ㄹ…….”
후작이었다.
“날 속였군, 후작.”
하렌은 이를 아득 물었다. 당장이라도 저 사내의 가슴께에 검을 쑤셔 넣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런 미친 일에 저를 휘말리게 만들다니.
“계집이란 얘기는 없었잖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다시 몸에 힘을 뺀 후작은 그대로 추욱 늘어졌다. 이대로 모조리 모르타 위원회 앞에 잡아끌고 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그는 머리를 세게 헝클였다.
“빌어먹을, 보검.”
낮은 으르렁거림을 끝으로 그는 여자를 둘러멨다.
***
며칠 뒤, 테비온 마을. 모르스 일족들이 모여 사는 그곳의 높은 언덕은 평소와 달리 북적거렸다. 상아로 조각한 죽음의 신 델로스를 지나면 아래로 내려올수록 점차 완만하게 두꺼워지는 수십 개의 기둥들이 바닥과 지붕을 연결하여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예술 작품과 다름없는 건축물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내부에 마련된 가장 커다란 방에는 어마어마한 둥근 원탁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위압감을 내뿜는 11명의 모르타 위원들이 이를 뱅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어느 때보다도 엄숙한 분위기는 조금 전 전해 들은 추적 실패 소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달리 턱이 각진 사내, 토리노 위원장은 적막을 가르고 보좌관에게 물었다.
“공작과 후작의 상태가 어떻지?”
“공작은 의식이 없고 후작은 의식을 찾았으나 아직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보좌관의 보고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붉은 머리를 한, 위원 하나가 세게 탁자를 내리쳤다.
“실패! 실패라뇨!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근 100년간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래서 천출 따위를 기사단장으로…….”
위원장은 서늘하게 그를 제지했다.
“섹토 의원님, 논점에서 벗어난 얘기는 삼가도록 하지요. 그리고 애당초 추적은 하렌 경의 임무가 아닙니다. 중한 것은 지금 우리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직면했다는 것입니다. 사건을 되짚어 보자면, 저택 안에 단 세 사람만 있었어요. 공작과 에오르테 후작 그리고 루트비아 백작. 그리고 현재 백작은 사라졌습니다.”
“백작은 여인이니 논외지.”
위원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해서 현재 가정할 수 있는 사실은 단 두 가지예요. 공작이나 후작이 뒤늦게 발현했거나 아니면 다른 사내가 별장 안에 있었거나. 허나, 후자일 확률은 희박합니다. 수십 명이 가까이 되는 기사들이 저택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으니까요.”
“전자가 더 설득력 있겠군요. 드물긴 해도 뒤늦게 발현하는 경우도 있으니.”
“예, 그래서 일단 전자에 힘을 싣고 있습니다만, 아직 공작과 후작의 몸이 회복이 되질 않았으니 그 부분은 파악이 어렵습니다. 게다가 혹여 있을 두 번째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해서…….”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르려는 위원장에게 보좌관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위원장님.”
위원장이 눈을 들어 올리자, 보좌관이 차분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하렌 경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라 하게.”
살짝 미간을 좁힌 위원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육중한 문이 열리고 무장조차 풀지 않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위원장은 더욱 미간을 좁혔다. 저 저 건방진. 보는 눈이 몇인데. 목 끝까지 치미는 말을 삼키고 까딱 고갯짓을 했다.
“하렌 경.”
“위원장님.”
“어찌 된 일인지 상황을 소상히 설명해야겠군. 기사들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후작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지?”
“기운이 느껴져서요.”
“헌데, 놓쳤군.”
“뒤늦게 달려온 멍청한 치들보다는 나은 듯싶은데 말입니다.”
“저! 무례한!”
섹토 의원이 붉으락푸르락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부분의 집단들이 그러하듯 지도부와 행동단체의 충돌은 이곳에서도 존재했다. 다만, 조금 더 빈번하고 강렬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추적대는 엄밀히 따지면 모르타 위원회의 관할이다. 헌데, 잘 훈련된 추적대보다 모르헤 기사단장이 먼저 일족의 발현을 알아챘고 하렌은 이를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닌가. 위원장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서늘한 눈빛을 하렌에게 보냈다. 안 그래도 출신 성분 때문에 그를 고깝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많은데…….
“경, 말을 삼가게.”
“느끼셨다시피 보통 힘은 아니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게.”
“제가 들어서자마자, 공작과 후작은 쓰러져 있었습니다.”
“다른 이는.”
“보지도 찾지도 못했습니다.”
“경, 사안이 심각해. 그대가 알다시피 근 100년간 추적을 피해 도망친 모르스 일족은 없지. 게다가 공작과 후작은 부상당했고 백작은 사라졌지. 해서…….”
“전열을 가다듬고 그대가 추격대를 이끌었으면 하는데.”
비스듬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사내가 대화에 끼어든 건 그 순간이었다.
“과연 좋은 생각인지 모르겠군요. 본디 자신의 임무가 아닌 일을 하렌 경이 그리 나서 하는 위인인 줄을 꿈에도 몰랐는데.”
가히 하이가 에오르테의 재림이라 불리었던, 그 불미스러운 사건만 아니었다면 모르타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을 사내는 다름 아닌 페치오 위원. 토리노 위원장은 가불거리는 불빛에 더욱 도드라지는, 살구색과 회색빛 염료를 짓뭉개 펴 바른 것 같은 페치오의 왼뺨 화상 자국을 응시하며 목을 울렸다.
“하렌 경은 이미 몇 차례 추적에 성공한 전례가 있지 않습니까? 페치오 위원님.”
“그저 제 짧은 소견으로는 추적대가 지휘권을 갖되, 모르헤 기사단이 이를 돕는 것은 어떨까 하는데.”
“나이가 드셔 귓구멍이 막히셨나 본데 저는 아직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경이야말로 잊었나 본데 우리는 경의 의사를 묻는 사람들이 아니야. 경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람들이지. 그리고 어찌 장담하지? 경이 정말 그 모르스 일족을 놓쳤다고 말이야. 부러 놓아준 건 아니고?”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위해 그리 아량을 베푸는 사람은 아닌데…… 그리 봐 주셨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대가 후작과 몇 번 만남을 가졌다는 보고가 있었네.”
“아, 그럼 그것도 들으셨겠군요. 그때마다 후작이 제 손에 박살났다는.”
“무슨 연유로 그댈 찾아온 거지.”
“에오르테 가문이 모르스 일족을 찾는 것이 뭐 이상합디까. 그 어미에 그 아들이지요.”
“허면, 파툼은 왜 두 개나 보급 받았나.”
“부숴 버려서요.”
창과 방패. 팽팽하게 조여 오는 심상치 않은 공기의 기류에 토리노는 손을 들어 둘을 제지했다.
“허면 추적대가 지휘권을 갖고 기사단이 이를 돕는 걸로 하지요.”
페치오를 물어뜯을 듯 붉게 타오르던 적안이 그제야 시선을 돌려 토리노 위원장에게로 닿았다.
“포상만 확실히 해 주신다면요.”
“약속하네.”
원로 회의실을 빠져나와 언덕으로 내려온 하렌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험악했다. 대기하고 있던 부기사단장은 현명하게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뒤를 따랐다. 단장이 원로들과 만남을 가진 후에는 기분이 유독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기사단 전원 추적에 합류한다. 포상은 보다 확실히 해 주신다니 걱정할 것 없고 몸이라도 한 번 푸는 셈 치지. 전열을 가다듬고 모두 1시간 후, 집합해. 찾을 때까지 두 발 뻗고 잘 일은 없을 테니. 각오하라고 전달하고.”
단연, 그가 툭 이 말만 뱉고는 마을 밖으로 나갈 때에도 부기사단장은 조금의 의구심도 품지 않고는 단장의 말을 기사단에게 전달했다.
“……한 시진 후 여기서 집합하도록.”
곧,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간혹 맙소사, 어느 미친놈이지, 하는 호기심 어린 문장도 묻어 나오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마지막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을 청하러 숙소에 들어가는 이들도 있었고 맥주를 병째 들이켜는 이들도 간혹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 여자를 부르거나 이를 찾기 위해 이웃마을까지 갈 준비를 했다. 테비온 마을은 사내들만 득실거리는 곳이었고 사내들은 욕망에 꽤 충실한 법이니까. 해서 아무도 기사단장이 마을로 다시 돌아왔을 때 여인 하나를 데려온 것을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기사단장이 성질머리가 아주 더럽다는 것과 그가 오늘 추적에 실패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여색을 꽤나 즐긴다는 것.
***
꽤나 지루한 시간이었다. 기절한 여자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제 침대를 빼앗긴 하렌은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멀거니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낯과 핏기 없는 입술이 마치 딱딱하게 굳어 버린 정물 같기도 했다. 기절한 게 맞나. 순간 하렌은 제가 저 여자의 숨을 제대로 확인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여자가 무사하지 않는다면 후작 그 성정에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뻔했다. 이런 기본적인 실수를. 몇 발짝 다가가 코끝에 손을 대 보았다. 가느다란 숨결이 희미하게 새어 나와 제 손끝을 간질였다. 살아는 있네. 그러면 되었지. 보검과 그간의 개고생이 허공으로 흩어져 버릴 아찔한 순간이 사라진 자리, 차오른 고루한 기다림에 하릴없이 하나, 둘. 여자의 눈 밑에 드리운 기다란 속눈썹을 세던 그는 어느 순간 저를 마주 보고 있는 은회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깼나.”
여자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기억이 잘 나지 않을 거야. 본래 폭주가 일어난 뒤 대부분 그러하니 당황하지 말고.”
침착한 말과 달리, 하렌은 몸의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언제라도 여자를 다시 기절시킬 수 있게. 폭주는 모르스 일족에게 잦은 일이나 기분이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다. 기억의 공백이 주는 두려움은 곧잘 발작이나 공황 상태로 이어지곤 한다. 특히나, 처음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여자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당황한 것은 외려 그 쪽이었다. 깊은 호수 같아 평생 파문이 일지 않으리 싶게 고요한 낯은 이 소동의 주인공답지도 않았다. 사람을 잘못 데려온 것인가. 따지고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여인인 모르스 일족이라니. 그렇기에 그의 의구심은 배가 되었다.
“하나 확인을 해 봐야겠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말이지.”
말을 끝맺자마자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허공을 가르고 목표물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하얀 목은 그의 한 손에 들어올 만큼 가느다랬고 손끝에서 느껴지는 살결은 매끄럽다 못해 보드랍기 그지없었다. 일단, 계집은 확실하고. 엄지를 들어 자그마한 턱을 밀어 올렸다. 일말의 동요도 없는 은회색 눈동자가 그를 마주 보았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맥박은 불쾌할 정도로 평온했다. 작은 흐트러짐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으나 무엇 하나 걸리는 게 없었다.
“반응이 없군.”
낮은 소리가 공허하게 방에 울려 퍼졌다.
“기운을 다 써서 그런 건가. 아니면…….”
심각하게 고심하던 하렌은 다시 느지막하게 입을 벌렸다.
“몇 살이지?”
저를 쳐다보지도 않는 얼굴은 역시나 대답조차 없었다.
“사람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후작이 너무 오냐오냐 키웠군.
섬뜩한 시선이 올라와 그에게 고정된 건 낮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온 찰나였다. 잔잔한 공기를 밀어낸 힘의 파동이 보다 강렬하게 하렌을 휘감았다.
“정말이네. 진짜 모르스 일족이야.”
홍염처럼 붉은 적안에 일순 이채가 감돌았다. 그제야 여자의 목을 죄이던 손에 힘을 풀어준 하렌은 나직이 물었다.
“마지막 기억은.”
“……공작. 공작은 어떻게 됐죠.”
“죽진 않았어.”
안도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희멀건 낯을 직시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기분은 한결 났지? 그 정도 힘에 파툼으로 매양 막고만 다녔으니. 언제 터질래도 터질 일이었지.”
파툼이 그들 일족의 힘을 제어해 주긴 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하지는 못하다. 임시방편이라는 설명이 적합할 것이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능력을 영원히 억누를 수 있는 것이 어디 있으랴. 그들의 힘은 마치 간단없이 밀려드는 물살과 같아 적절한 시기에 그 물줄기를 틀어 균형을 유지해 주어야 한다. 그런 것을 어린 모르스 일족이나 그 후작이 알 리가 없지.
하렌은 옅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 갔다. 모르스 일족과 테비온 마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지나 막 그의 입술이 폭주가 한 번 일어나고 나면 한동안은 능력이 요동칠 리 없다는 내용을 입에 담을 즘, 차창 밖에서 추적 준비를 마쳤다는 나팔 소리의 신호가 들려왔다.
이미 각 잡힌 기사들이 도열해 있는 차창 밖의 상황을 확인한 하렌은 협탁 위에 놓인 검을 들어 올리며 마주 앉은 여자를 응시했다.
“오늘부터 수색을 시작할 거야. 아마 열흘 정도 걸리겠지. 내가 돌아오면 넌 라마타 제국으로 넘어간다.”
의심스러운 얼굴이 저를 올려다본 건 그때였다.
“모르타 위원회에게 끌고 가지 않고요?”
“그랬다면 진즉 내 숙실이 아니라 위원회에게 널 데리고 갔겠지”
“……후작님인가요?”
“그래, 후작과 거래를 했어. 널 안전하게 지키기로 말이지.”
“뭘 받기로 했죠.”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입술을 꽉 짓이기던 여자는 잿빛 눈으로 저를 쏘는 듯이 바라보았다.
가관이군.
이 자리에서 제 목을 딸 기세가 이대로 전쟁터에 내놓아도 손색없어 보이는 여자다.
‘겁이 많은 아이야.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 잘 달래 주게, 하렌.’
혹여 있을 지금과 같은 상황에 대해 논의하던 후작이 심각한 어투로 뱉었던 그 말이 무색하게 말이다.
겁이 많다라.
과연 후작이 그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고 한 말인지에 대해 그가 깊이 고심하고 있을 즈음, 여자가 입매를 풀었다.
“후작님은 뭐라시죠?”
“뭐라고 했을 것 같아.”
비아냥을 한입 그득 빼 물은 하렌은 예의 그 나긋나긋한 후작의 어투를 흉내 내며 입술을 비뚜름하게 그었다.
“걱정 마렴, 아델. 곧 라마타에서 만나자꾸나.”
돌아오는 반응은 예상 밖이었지만.
서늘하게 굳어 저를 노려볼 줄 알았던 여자의 눈에 일순 파문이 일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거센 풍랑 위에 올랑거리는 미풍이 불 듯.
뜻밖의 반응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 있던 그는 여자에게 찾아온 변화의 연유를 깨닫고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무슨 사인인가.
후작 얘기만 나오면 설산처럼 온기 한 점 묻어나지 않은 낯을 흐트러트리는 여자나. 저 여자 일이면 천치처럼 행동하는 사지 멀쩡한 사내나. 별반 다를 게 없이 미쳐 보이는 두 사람의 사이가 궁금한 것은 이쯤 되면 마땅했다. 막 문 쪽으로 걸음하던 하렌이 돌연 걸음을 멈춘 건 그 이유에서였다.
“후작과는 무슨 사이지?”
“……그건 그쪽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그닥 소득은 없었으나.
딱딱하게 흘러나오는 소리에 입술 끝만 끌어당겨 미소 지은 하렌은 어느새 다시 서늘해진 여자를 바라보고는 문을 밀었다.
“아무튼 열흘 후에 보지.”
***
둔중한 문소리가 내실에 울려 퍼지고 나서야,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불보를 쥔 손은 언제부터인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제라도 막 검은 연기가 다시 피어오를 것처럼.
끊긴 기억 속 드문드문 흘러나오는 잔상은 그 연기로 가득했다.
조각조각 찢긴 싸늘한 주변, 흐르던 핏물과 거무스름한 세상, 그리고 비명소리.
아무렇지 않은 척 강작한 표정도 겁을 둘러싸고 있던 평온의 연극도 모조리 끝난 시간, 비탄과 자괴감. 끝 모를 수렁 속으로 헤매는 그 감각들만이 나를 잠식해 왔다.
사람을 죽일 뻔했어. 그래, 그럴 뻔했어.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과 귀가에 맴돌이치는 비명소리가 아직도 선연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런 무자비한 감각을. 믿기지 않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떠오른 건 익숙한 낯이다.
투명하게 부푸는 맑은 녹안과 싱그러운 웃음소리.
후작. 그 두 음절 안에 이전처럼 여전히 평온함만이 담길 수 없다 여겼어. 그를 다시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심할 줄 알았지. 들키고 싶지 않는 밑바닥마저 다 드러낸 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도망가고 외면하고 싶었질 줄 알았어. 차라리 그의 앞에서 루트비아 가의 사생아이고만 싶었으니까.
그런 줄 알았어.
헌데, 결국 떠오르는 건 후작이구나.
허탈한 웃음과 함께 나는 순순히 인정하고 만다.
아무래도 좋다는 걸. 나를 동정하든 연민하든. 까닭 없는 애정이 깔려 있는 것이 그저 그런 감정들뿐이라도 좋다는 걸. 그냥 나는 그가 필요하다는 걸 말이야.
아델.
지금은 그 다정한 울림이 필요해. 나를 달래고 다독일 그 나른한 음성이.
잠 못 이루는 나날, 악몽처럼 변한 하루는 그런 읊조림과 함께 흘러갔다.
“팔자 좋군. 누군 내 방에 있는 여잘 찾아서 열흘간 잠도 자지 못했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머리끝까지 꽉 올린 두터운 이불 사이로 고저 없는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쇠철음 소리와 흙냄새가 가득 메운 방 안으로 그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차를 타고 이동할 거야.”
“……마차는 싫어요.”
“가지가지하는군. 네가 지금 무슨 휴양이라도 온 것 같나.”
“마차는 싫다니까!”
생각보다 높게 터져 나온 음성에 내실에 번지던 발소리가 불현듯 멎었다. 생명줄처럼 쥐고 있던 이불이 내 손 안에서 모래알처럼 빠져나간 건 그 직후였다.
문틈으로 들이치는 가느다란 햇빛. 방금 벌어진 일도 잊고 오랜만에 마주한 부신 빛깔에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하렌의 눈썹을 꿈틀거렸다.
“뭘 먹긴 했나.”
진득한 시선이 뺨을 지나 목덜미로 와닿는 게 느껴졌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그에게 빼앗긴 이불을 다시 가지려 안간힘을 쓰자 단숨에 이를 제압한 사내는 내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게다가 넌 곧 라마타로 가잖아.”
그가 드리운 그림자에 눈을 찌르는 볕을 가리자, 명멸하던 초점이 맑아지고 시야는 또렷해졌다.
“여기서 있었던 일은 다 잊어버려. 다 잊고 아무 일 없었단 듯이 그렇게 사는 거야.”
저녁노을과 같은 빛깔의 시붉은 눈동자가 그 너머로 분명히 보였다.
“아델.”
그 눈의 주인이 말했다.
“라마타로 가야지.”
기억 속의 누군가의 것과 닮은 어투를 흉내 내며.
참 이상한 일이지.
모양도 빛깔도 다른, 심지어 송곳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사내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그 음성이 나를 다독일 수 있다는 게.
***
마차 대신 하렌의 말에 함께 올라타 이동했다. 그다지 마뜩잖았지만 딱히 도리가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여기는 휴양지가 아니니까.
게다가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은 옳기도 했다. 하렌이 탄 말은 누구도 검문할 엄두를 내지 않았다. 심지어 뒤에 내가 있는데도. 사람들은 아마 내가 하렌이 부른 여자로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무사히 테비온 마을을 빠져나오자, 울창한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둥근 천장처럼 아치를 이룬 채 쭉 뻗은 가로수 길이 시작되었다. 바람의 결에 맞춰 움직이는 이파리를 따라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는 하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곧장, 선박을 타고-”
허공에 흩어지는 소리들을 그저 귀에 담는 체하며 하늘 위로 고개를 젖혔다. 부서지는 햇살이 부챗살처럼 퍼지며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았고 온기가 스며든 가지 위에는 푸른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뒤바뀐 계절을 준비하는 자연의 모습에 눈을 여닫았다.
잿빛 테비온 마을과는 아주 다른 정경이었다. 이 길의 끝에는 그보다 더 푸르른 기운을 뿜는 사내가 있을 터였다. 후작. 그 이름을 혀끝에 굴리자니, 충일감이 가슴을 뻐근하게 메꿔 와. 모든 게 다 해결될 것만 같았다. 그를 만나 나를 다독이는 그 음성을 듣게 된다면.
‘아델.’
찬찬히 내게 몸을 기울이고 팔을 들어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겠지. 별거 아니야, 이젠 다 괜찮아, 그런 다정한 문장과 함께. 바람이 나뭇잎을 부산스럽게 흔들어 대는 소리와 지저귀는 새의 울음 사이로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을 싱그러운 녹안과 이를 감싸는 가느다란 눈매가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그래, 모든 게 다 해결될 것이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부산스러운 소음이 귓가를 때린 건 그때다. 맞은편 길 끝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마차에 하렌은 깊은 탄식을 내뱉더니 내 후드자락을 머리끝까지 잡아당겼다.
“고개 숙여.”
제국에서 나는 아직 실종 상태고 마차가 나다니는 길이니 당연한 처사였다. 헌데, 왜였을까. 그저 무심히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마차에 불현듯 시선을 주게 된 것은. 어쩌면 아주 익숙한 마차 바퀴의 소리였을 수도 있고 눈에 익은 마차의 문양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유는 불분명하고 딱히 중요하지도 않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것이 에오르테가의 마차였다는 것이다.
“앞만 봐.”
내 눈길이 향하는 방향을 알아챘는지 하렌은 낮게 명령했다.
“에오르테가의 마차가 여기 왜 왔죠.”
“도착해서 설명해 주지.”
불길한 예감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 공간에 울리는 마차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말을 세워요.”
“내 말대로 해.”
“말을 세워요!”
“어리광 피우지 마. 난 후작이 아니야. 네-”
끝맺지 못한 문장, 급작스럽게 말에서 뛰어내린 나, 하늘 높이 앞발을 들어 올린 말. 소란스러워진 사위를 따라 내달리던 마차는 자연스럽게 속도를 낮췄다. 부신 햇볕에 도드라지는 건 머리 두 개 달린 독수리가 양각되어 있는 문고리. 부유하고 있는 기억 저편 수면 아래 가라앉은 흔적이 잠시 위로 솟구치고 넋을 잃은 듯 풀어진 초점만 느리게 깜박이는 사이, 문이 열렸다.
“……누나?”
익숙한 음성을 몰고서.
“분명 누나가 실종됐다고…….”
시야를 찌르는 녹안, 누군가의 것과 같은 눈이 잊고 있던 무언가를 끄집어 당겨. 흐릿해지는 의식을 간신히 잡아 세운 나는 원근을 잃고 기이하게 뒤틀어진 세상 속으로 입술을 열었다.
“……너야말로 여긴 왜 온 거야.”
“못 들었어?”
“뭐를.”
여전히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얼떨떨한 대답에, 반쯤 눈썹을 아래로 내린 테오는 습관처럼 입술을 비틀었다.
“……삼촌이 습격당했어.”
모르스 일족에게 말이야.
***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지요, 공자님.”
또다. 또.
테비온의 치료실을 지키는 기사는 또 한 번 이곳을 찾아온 에오르테가의 공자에 혀를 내둘렀다. 후작이 치료실에 머문다는 것을 알린 지 채 이틀이 되지 않은 시각. 벌써 몇 번째 되풀이되는 실랑이였다. 끝없이 제게 도전장을 내미는 소년을 조금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던 기사의 눈에는 이제 희미한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아까 설명했다시피, 에오르테 후작님의 면회는 당분간 허용되지 않습니다.”
수십 번이고 읊어 내려 이제는 외우다시피 한 문장을 기사는 혀끝으로 밀어냈다. 하도 같은 말을 반복해 그의 음성에는 고저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일단, 지금은 저택을 습격한 모르스 일족의 정체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이니까요.”
가족들에게는 가혹하긴 하다만, 당연한 처사였다.
지금 테비온에, 그들의 일족에게 닥친 일은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으니까. 후작을 상하게 한 그 힘을 기사도 느꼈다. 정제되지 않았지만, 기실 엄청난 힘이었어.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진 이를 이제껏 모르타 위원회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것 역시 엄청난 실책인데, 누구인지, 어디로 갔는지조차 모른다니.
그자가 제국을 휘젓고 다니면 그 피해가 얼마랴. 그러지 않아도 죽음을 부르는 자들에 대한 제국민들의 두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말이다. 테비온 전체의 분위기 삼엄하게 돌변한 것은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자가 상하게 한 인물들이 어디 보통 위인들인가. 에오르테가의 후작과 베르니가의 공작. 제국에 손꼽히는 두 가문의 주인.
그래서일까. 타 제국에서 보낸 세작이다, 이민족들의 수작이다. 별의별 말들이 다 나오고 있다지.
그러니 결단코…….
덧없는 상념 속을 헤매던 기사가 생각을 멈추고 눈을 키운 것은 그때였다. 그의 시야에 들이찬 풍경이 무언가 기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뭐지. 여전히 공자는 그의 시선 안에 있었고 그를 뒤따른 시종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뭐가, 뭐가 달라진 거지. 깨달음은 빨랐어.
“아까, 아까 여기 있던 여자는 어디로 갔습니까.”
아니, 늦었다고 해야 할까. 공자를 제지하느라 미처 신경 쓰지 않았던, 그러나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이곳을 지키고 있던 시녀가 사라진 것을 눈치재자 기사는 놀라 말까지 더듬으며 주위를 살폈다.
“무슨 여자.”
돌아오는 대답은 뻔뻔하기 짝이 없었지만.
***
대리석을 소리 죽여 밟아 내던 구두는 어둠에 싸인 로비를 지나 수십 개의 치료실이 있는 복도에서 일순 멈췄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가늠하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에 맴도는 죽음의 냄새와도 가까운 스산한 기운이 낯설지 않아서.
‘……삼촌이 습격당했어. 모르스 일족에게 말이야.’
무언가를…….
‘일단, 지금은 저택을 습격한 모르스 일족의 정체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이니까요.’
무언가를 잊고 있는 것 같아.
한 뼘 더 낮아진 하늘을 투과하는 빛기둥이 대리석 바닥 위로 그려내는 이지러진 무늬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 그 위로 조각조각 부서진 기억들이 점점 더 선연해졌다. 싸늘한 주변, 흐르던 핏물과 거무스름한 세상, 비명소리. 그리고…….
후작.
그가 왔어.
그 저택에, 한바탕의 소란으로 엉망이 된 그 장소에 그가 왔었어. 잊고 있던 기억의 파편을 주어 든 순간,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통로에 울려 퍼졌다. 다급한 발소리를 몰고 복도 끝에서 나타난 여러 명의 치료술사들과 함께.
뇌리를 스치고 지나는 건 선득한 예감이다. 그 직감과도 같은 감각이 부디 틀리기를 바라며 나는 나를 보지 못한 같기도 하고 보았으나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 같기도 한 그들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좁혀지는 거리를 따라 반쯤 열린 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격양된 음성들이 분명해진다.
후작님.
메아리치듯 되울리는 단어는 익숙한 낱말이다. 시야에 들이차는 풍경 역시. 전체적으로 흐릿해진 후작의 인상은 그간 그를 스쳐 왔던 고통을 말해 주는 듯했다. 빛을 잃은 백금발에 생기를 잃은 창백한 피부. 숲을 머금은 듯 짙푸르렀던 녹안은 시들어 버린 초목들 같았다.
“후작님! 후작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약효가 떨어졌어. 제루나의 약초를 다시 먹여야 해.”
“이대로라면-”
이대로라면. 그 뒷말은 무엇이었을까. 끝내 알 수는 없겠지. 내 모든 감각은 오로지 한 곳에만 집중되어 있으니. 흰 천으로 둘러싸인 뭉툭하고 둥근 그것은 한때 자주 내 뺨을 간질였던 그의 것이었다. 그 촉감을 아직도 기억해. 내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나를 다독이던 다정한 감각이 아직도 선연해.
다시 느끼지 못할, 내가 망쳐 버린 순간들이 물 밀려오듯 나를 잠식했다.
‘괜찮아, 아델. 날 봐.’
눈을 감아도,
‘약속했잖니.’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잔상이 여전히 내 머릿속을 맴돌면서.
‘우리 라마타로 가기로.’
아마 지금 이 순간 또한 돌이켜 보면 그러하겠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서 나를 집어삼킬 거야.
그랬다.
후작은 오른손을 잃었다.
바로 나 때문에.
이튿날 아침, 테비온 마을을 수비하던 기사들은 인근 숲에서 기괴한 광경을 목격한다. 실상, 목격이라는 단어에도 어폐가 있었다. 눈이 제대로 달린 사람이라면 하루아침에 을씨년스럽고 황량하게 변해 버린 숲을 보고 기이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들은 조심스레 숲으로 정찰을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들이 발견한 건 뜻밖의 인영이었다.
소녀라기엔 성숙하고 아가씨라 하기엔 어려 보이는, 그 중간 어딘가를 맴도는 이에게 기사는 다정히 속삭인다.
“괜찮니?”
아무래도 많이 놀란 것 같아. 돌아오는 답은 없는 걸 보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다시 한번 바로 잡으며 기사는 마저 말을 이었다.
“지금 여긴 위험하단다. 일단 빠져나가는 게 좋을…….”
말끝이 흐려지고 기사의 눈 위로 놀람과 당혹감이 번갈아 떠오른 건 그때다.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는 이의 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건 틀림없는 검은 안개였기에. 그들, 죽음을 부르는 일족의 상징과도 같은. 눈앞에 이가 여인이라는 것도 그 순간 그에게 중요치 않았다.
“찾았…… 찾았습니다!”
곧, 숲을 뒤흔드는 뇌성 같은 외침이 기사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런데도 놀라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 없다는 것이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반증했다.
***
“당장 제거해야 해요.”
테비온 마을 내부 델로스 신전. 짙게 깔린 어둠 속, 탁자 위를 어른거리는 시붉은 촛불이 사내의 거센 입김에 꺼질 듯 말 듯 가불거린다. 울컥울컥 그을음을 내뿜는 불꽃을 바라보던 토리노 위원장은 이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불완전한 것은, 불확실한 것은 우리 일족에게 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숱한 세월 뼈저리게 경험한 것으로도 부족하십니까!”
격심한 흥분을 가누지 못한 섹토 위원이 시퍼런 낯으로 말한다. 이에 동조하듯 다른 위원들 역시 저를 쏘는 듯이 직시한다. 그 안에 떠오른 분명한 적의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그를 짓눌러 왔다. 하아, 눈썹께를 꾹꾹 누르던 위원장은 짐짓 여상한 어조로 말문을 연다.
“허나, 그 여자도 우리 일족입니다.”
이제 그를 직시해오는 섹토 위원의 얼굴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그렇다고 위협을 무릅쓸 수는 없어요! 어떻게 우리가 지금과 같은 안정화를 이룩했습니까. 그간 우리 일족에게 자행되어 왔던 억압과 편견을…….”
한참 열변을 토하는 섹토 위원의 말을 가르고 내실에 스며든 것은 둔중한 노크소리다.
중한 회의이니만큼 사람들을 다 물리라 했거늘. 짧게 혀를 찬 토리노 위원장이 보좌관에게 눈짓했다. 무언의 명에 보좌관이 상황을 정리하러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이, 목을 가다듬은 섹토 위원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억압과 편견을……!”
“위원장님.”
돌려보내라 지시했던 보좌관이 심각한 얼굴로 돌아서며 섹토 의원의 말을 잘라먹은 건 그 순간이었다. 매사 진중한 치가 저리 행동할 정도면 보통 사안은 아닌가 보다, 토리노 위원장은 짙은 음영이 드리운 눈을 들어 보좌관을 응시했다.
“무슨 일이지.”
“루트비아 백작의 에이타 수치가 나왔습니다.”
에이타 수치. 모르스 일족의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그것은 보유자와 발현자, 일족으로 이루어진 모르헤 기사단의 입단 기준을 나누는 자료이기도 하다.
토리노 위원장은 그 에이타 수치를 입에 담는 보좌관의 낯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 누구에게 좋은 신호인지 고심했다. 그러나 경우의 수는 너무 많았고 그 수가 불러올 변수들 역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옅은 한숨과 함께 입술을 여는 것뿐. 어차피 루트비아 백작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의 인생은 이제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심상한 상념을 곁들이면서.
“얼마지.”
보좌관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대답 대신 제 손에 들린 수치를 다시 한번 눈으로 확인했다. 혹여 제가 실수로 숫자를 하나 더 읽어 내리지 않았나 하는 기대와 함께.
이변은 없었다.
그런 실수를 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은 제 머리를 책망하며 보좌관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이만이 넘습니다.”
이만. 이만이라고.
말문이 막힌 토리노 위원장의 심경을 대변하듯 누군가가 낮게 읊조렸다.
“그 정도 수치를 가진 이가 제국에 누가 있던가…….”
길게 늘어진 문장은 정녕 그 답을 몰라 그렇다기보다는 차마 입에 담기 두렵다는 것에 더 가까웠다. 오직 담담한 이는 미리 벌어질 상황을 예견하고 있던 보좌관 뿐. 그는 침착하게 거센 파란이 일고 있는 소용돌이 속으로 말을 던졌다.
“이만이 넘는 수치는 제국의 모르스 일족 역사상 단 한 명뿐이지요.”
하이가 에오르테.
팟, 토리노 위원장이 크게 내신 숨에 너울거리던 촛불이 점멸했다. 까맣게 물든 시야로 침음 같은 탄식이 스며들었다. 밀도 높은 공기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내실. 무거운 적막 속에 한정 없이 가라앉는 분위기를 환기시키 것은 줄곧 탁자 귀퉁이에서 침묵을 견지하고 있던 사내다.
“일곱 제국을 지배했던 카렌 왕조 시대, 고대의 신들은 전부 다 여성을 지칭하지요. 행운의 신 티케, 용맹의 신 나르히, 물의 신 네튠, 불의 신 화이란, 죽음의 신 모르스 역시.”
심상한 어투로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사내에게 섹토 위원이 낯을 붉혔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나, 페치오! 한낱 미신 따위 아니오.”
“제가 고작 오래전 내려오는 케케묵은 이야기를 믿을 위인으로 보이십니까, 섹토 위원.”
불같이 성을 내는 섹토 위원을 제압하는 사내. 페치오라 불리는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단어들은 그리 높지도 않았지만, 사위를 압도하는 힘이 서려 있었다. 천둥 같은 노기를 터트리던 섹토 위원의 기세가 수그러든 것은 바로 그 탓이다. 어느덧 고요해진 내실을 찬찬히 훑어보던 사내는 제게 집중된 이목을 확인하고서는 마저 문장을 이었다.
“뭐가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지요. 우리에게 생각해야할 건 이걸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황제께서는 이번 이민족 토벌에서 제국의 위신을 세우길 원하십니다. 여섯 제국에게 아올리스의 위상을 드높이고자 말입니다.”
곧 다가올 전쟁은 그저 단순한 전투가 아니었다. 일곱 제국이 모여 형성한 연합군은 단연 제 세를 과시하는 힘겨루기의 장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저 여인은 상징이 될 것입니다. 아올리스에서 되살아난 죽음의 신 모르스를.”
장황히 펼쳐지는 연설 앞에 침묵하고 있던 위원들이 그 마지막 문장에 더는 참을 수 없는지 조심스레 페치오의 눈치를 보며 하나둘 입을 열었다.
“허나, 제 힘 하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여자를 어찌…….”
“훈련이 진전이 없다는 소식을 들었소. 개미새끼 하나도 처리하지 못한다던데.”
제법 논리적인 반박이었다. 날렵한 턱선을 쓸어내리며 설풋 미간을 좁힌 페치오는 보좌관을 향해 눈을 돌렸다.
“훈련은 누가 담당하고 있지.”
“하렌 경입니다.”
“지금 어디 있나.”
***
여느 때와 달리 하렌이 있는 곳은 테비온 마을의 치료실이었다. 정확히는 수많은 치료실중 에오르테 후작이 기거하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델이 모르헤 기사단에 들어간다니!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데. 하물며 여자아이가!”
“그 애가 결정한 일이야.”
“하렌,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약속했잖아. 그 앨 안전하게 지켜 준다고!”
“안전하게 돌보지. 기사단 안에서 말이야. 이 정도는 이해해 줘야지. 그대도 날 속였는걸. 계집인 걸 알려 주지 않았잖아.”
그러자 후작이 순식간에 하렌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순하디 순한 눈에 불티가 이는 광경이 퍽 이질감 있었다. 감정이 너무 격해서 말도 잘 나오지 않는 듯 그는 메마른 입술이 달싹거린다. 언뜻 보면 별 문제 없어 보이는 그 동작은 미묘한 어색함이 존재했는데, 그랬다. 후작의 오른손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손 모양을 본떠 만든 금빛 의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이질감을 하렌이 놓칠 리 없었다. 후작 역시 그런 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몸을 움찔했다. 그리하여 말을 먼저 뱉은 이는 하렌이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어. 모르타 위원회가 그 앨 데려갔으니까.”
낮은 탄식과 함께 그의 옷깃을 잡던 후작의 손힘은 조금 느슨해졌다.
“자네도 언젠간 이해할 걸세. 이게 저 애를 위한 최선이라는 걸. 이건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진 길이야.”
“모르타 위원회를 만나야겠어. 아델을 빼 올 방도가 있어. 내가 그들과 협상을-”
“이쯤하게. 후작. 만약 그 애가 자유를 얻는다고 해도 뭐가 달라지나? 점점 제어가 안 될 거야. 그대 손 하나로 끝난 게 다행이라고. 자칫했다간…….”
옅은 한숨으로 삼킨 말을 대신한 하렌은 눈앞의 사내를 직시했다. 이만. 이만 에이타가 넘는다 들었다. 그 애의 힘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아무리 설명해 봐야 후작은 알지 못하겠지. 모르스 일족의 힘을 측정할 수 단위는 오직 이만 에이타까지다. 그러니까 결국 따지고 보면 그 여자의 힘은 가늠할 수 없다는 것에 더 가까워. 그러니 그 보수적이기 그지없는 모르타 위원회도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두고 보자 결론 내렸겠지. 그런 힘을 가진 이를 빼돌려 무엇 한담. 어쩌면 일이 이렇게 마무리 된 것은 다행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체되었다간 저 사내의 명이 끝장났을 테니까.
“그 애에게는 대안은 없어. 아니면 평생 그대가 끼고 살기라도 할 건가?”
“선택은 그 애 몫이야.”
“그래, 그러니 후작. 이제 그만 빠져. 그대 말대로, 오로지 그 애의 몫이니. 같잖은 보모놀이는 집어치우라고.”
여전히 포기를 모른 채로 저를 직시해오는 녹안에 뜸을 들이던 하렌은 짧게 덧붙였다.
“그 여자가 이리 전해 달라 했네.”
“……그게 무슨…… 그럴 리가 없어.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 아이인데, 내가 다시 만나서…….”
“후작, 자네가 더 잘 알잖나. 절대 허튼말을 뱉지 않는 여자라는 걸.”
줄곧 한 치의 흔들림 없던 후작의 눈동자에 그제야 일렁인다.
결국, 이 방법밖엔 없는 것인가.
둘 사이에 끼어 매양 나쁜 소식들만 나르게 되는 꼴이 그리 달갑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를 이해시키려면 이 말을 할 수밖에.
“……그 여자가 봤어.”
“무엇을.”
하렌은 턱 끝으로 후작의 손을 가리켰다. 그 시선을 쫒던 녹안은 살짝 가늘어지더니 이내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곧 잠잠해졌다.
“……난 전혀 상관없어, 그 애에게 그리 전해 주게.”
모르스 일족에게 손을 잃고도 저리 낯빛 한 번 변하지 않는 인사라. 짐작한 대로 흘러가는 광경을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은 또 새삼스럽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상을 빗겨 나가지 않는 태도에 그는 조금 허탈해진 마음으로 불쑥 묻는다.
“두렵지 않나.”
“무엇이.”
글쎄, 나직이 중얼거린 하렌은 대답 대신 제 손을 두어 번 쥐었다 핀다.
“많은 것들이.”
“두렵네. 언제고 나를 할퀸 그 힘이 또다시 내 목을 죄여 올까 봐. 허나…….”
뜻밖의 대답에 하렌은 비슷이 고개를 기울인다.
“더 두려운 것들이 있어. 내겐.”
그 아이를 잃는 거. 나직이 새어 나오는 소리는 그리 말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을 저리 논리적으로 하다니. 기가 찬지 한 번 혀를 내두른 하렌은 아까보다 짙어진 시선으로 어리석은 사내를 본다. 날카로운 생각과 달리 붉게 물든 눈에는 파문이 일어 시야가 흐릿하다.
하렌은 젖은 눈가를 두어 번 여닫는다. 흐려진 초점은 점점 명확해지지만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라에갈 에오르테.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사내.
저런 이를 곁에 둔 여자를 복이 많은 것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이제 곧 잃게 될 테니 가엾이 여겨야 할까.
뭐, 알 바는 아니지만.
“몇 번이고 설명했어. 그댄 분명 괜찮다고 할 거라고. 하지만……. 라에갈, 때론 그것이 위안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네.”
“그래도……!”
“테비온 마을이 왜 ‘죽음의 땅’이라 불리는지 아나? 물론 모르스의 일족이 머무는 곳이니 그렇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지. 한 해에 하나는 꼭 있어. 능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해 제가 아끼는 이들을 다치게 한 어린 모르스 일족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일 말이야. 모르타 위원회는 쉬쉬하지만…… 그렇다고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
하렌은 안개에 젖은 숲처럼 혼탁해진 녹안을 응시했다. 그 말이 제법 큰 충격을 주었는지 후작은 머리를 둔기로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마저 이었다. 이제 어찌 저 무구한 사내를 다루어야 할지 알 것도 같았다. 그가 모든 것을 감내할 만큼 강인하다면 그렇지 않은 이 또한 있다는 것을 알려 주면 되지 않는가.
“그 여자가 제정신으로 살아가길 바란다면, 더는 몰아붙이지 말게. 아마 자넬 보는 게 힘들 거야.”
“…….”
“너무 자책하진 말게. 모르타 위원회의 눈을 피해 이 정도 버틴 것도 대단한 것이니.”
하렌은 손쉽게 후작의 손을 쳐 냈다. 그것이 모르헤 기사단장의 범접할 수 없는 악력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말에 힘이 빠져 버린 후작 탓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몇 번 후작의 어깨를 토닥거리던 그는 걸음을 옮겼다.
***
하렌이 떠나가고, 그의 뒤로 이어지던 기다란 그림자마저 이제 자취를 감추었지만, 후작은 여전히 내실에 우두커니 선 채로 그가 남긴 문장의 여운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 건 엘몬트였다.
“후작님.”
물에 적신 수건으로 망가진 주인의 몸을 닦아 내리던 그는 생사의 기로에 놓인 주인을 모시는 이답지 않은 담담한 눈으로 후작을 직시해 왔다. 수십 년간 인고해 왔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듯한 눈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후작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어요.”
“최선? 어디가 그렇지. 아델은 결국…….”
후작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으나. 엘몬트의 다독임에도 내실은 곧, 자책감으로 뒤엉킨 사내의 음성으로 차올랐다.
“두려워. 엘몬트, 너무 무섭네.”
이 아이마저 잃게 될까 봐.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건가.
이렇게 잃고 마는 거야?
또다시?
그때처럼?
저택을 떠나가라 울리는 비명소리시야에 가득 찬 농밀한 어둠의 장막, 그보다 더 짙게 가라앉은 암갈색 눈동자…….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과거의 잔재, 후작은 저를 옥죄여 오는 그 억겁의 사슬 속에서 또다시 길을 잃고 만다. 어둠에 먹힌 녹안 위로 잊을 수 없는 그날의 밤이 뚜렷하게 떠올리며.
‘내일 봐, 리오!’
그날은 라에갈의 머릿속을 꽉 채우던 궁금증이 기어코 폭발하던 날이었다. 힘껏 손을 내젓던 그는 엘몬트를 따라 사라지는 아이를 보며 저택에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일을 어렴풋이 추측해 보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간혹 사라진 아이는 며칠이 지나서야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이 그가 발견한 첫 번째 단서였다.
그러면 아이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꽤 집요하게 관찰한 끝에 그는 저택의 지하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렵사리 발견한 두 번째 단서 앞에 도리어 김은 빠졌지만. 그곳은 라에갈이 함부로 갈 수 없는, 에오르테가의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한껏 시무룩해진 몸을 이불 속으로 욱여넣으며 라에갈은 그 안의 풍경을 짐작해 보았다. 내실을 꽉 채운 성대한 만찬들, 언제고 한 번 가 보았던 황궁처럼 금빛으로 도색된 벽지들. 휘황찬란한 불빛과 눈이 멀 정도로 화려한 색감들.
뭔지 몰라도 엄청난 곳은 틀림없어.
그런 곳을 왜 자신은 가지 못하게 하는 걸까. 제가 리오보다 못한 게 뭔가. 입술은 조금 불퉁하게 내민 채로 라에갈은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과 함께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렇게 깊은 수마에 빠진 그를 끄집어낸 건 찢어질 듯한 비명과 고함소리,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였어. 그럼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던 무거운 눈꺼풀이 깜빡거리기 시작한 건,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우당탕한 울림이 귓전을 때렸을 즈음이다. 저 바닥 아래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소리가.
지하실.
직감적으로 그 진원지가 그곳이라는 걸 느낀 그는 좀 전과 달리 번쩍 눈을 떴다. 조심스레 침실에서 빠져나와 실내화를 신고 소리 나지 않게 문고리를 돌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
밑창이 푹신푹신한 실내화 덕에 소음 하나 내지 않고 지하실로 내려가던 그가 멈칫한 것은 마지막 계단을 하나 남겨 두었을 즘이었다.
계단 끝에 나타난 건 아주 커다란 문이었다. 저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흰참나무로 마감된 문이 아닌, 기사들의 갑옷을 연상시키는 쇳덩이를 다듬질해 만든 것 같은 문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두려움을 자아냈다. 세차게 벽을 때리는 빗소리가 공포감을 배로 조성하면서. 벌컥 문이 열리고 동시에 누군가가 그 안에서 뛰쳐나온 건 그렇게 라에갈이 주춤주춤하고 있을 즘이었다.
‘……리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지하실 안에는 그 아이가 있었어. 허나, 미처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이의 몰골이었다. 짓물러 터진 입술 아래 자리 잡은 턱은 푸르스름한 멍이 물들여 놓았고 옷소매가 가리지 못한 팔목에는 일전에 보았던 거무스레한 자국이 선연했다. 어둠을 담아 평소보다 짙은 암갈색 눈동자만이 홀연히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저와 마찬가지로 얼떨떨해있던 그 눈의 주인은 퍼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움직였다.
‘여길 빨리 나가야 돼.’
아이는 급히 라에갈의 손을 끌어 잡고는 계단 위를 빠르게 올라갔어. 막 계단을 다 올랐을까.
갑옷이 맞부딪치며 내는 특유의 쇠붙이 소리가 빗방울을 타고 귓가를 파고들었다.
기사들이다.
어슴푸레한 달빛에 비쳐 허옇게 질린 아이의 얼굴이 훤히 보였다. 이대로 밖을 나서면 저들과 마주칠 게 뻔해. 그리하여 라에갈이 아이를 이끌고 향한 곳은 제 방이다. 방 한편에 협탁을 밀고 그 뒤에 감춰진 나무 판자를 치우면 아이 하나 숨을 정도의 공간이 나온다. 그의 비밀 장소인.
‘여기 숨어.’
라에갈이 막 아이를 장롱 속으로 욱여넣고 이불 속으로 서둘러 몸을 숨겼을 즘, 저택의 고성은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고 발걸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웠다. 괜찮아. 다 괜찮아. 그런 주문과 함께 그는 눈을 꼭 감았다. 그닥 소용은 없었으나.
‘라에갈.’
벌컥 문이 열리는 소음과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것이다. 이제 막 잠에서 깬 것처럼 살포시 뜬 그의 시야에는 우악스럽게 슬리퍼 한쪽을 들고 있는 어머니가 가득 차 있었다.
‘어딨니. 그 애는.’
천천히 그가 고개를 가로젓자, 차디찬 손이 뺨을 사정없이 올려붙였다.
‘라에갈, 어딨어.’
서슬 퍼런 어머니의 기세에 결심은 손에 쥔 모래알보다 쉬이 빠져나갔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어. 마주한 장롱 안, 반짝거리던 동공에 두려움과 불안이 풍랑처럼 떠오르는 것이 보이자, 라에갈은 차라리 어둠을 택했다. 기사들이 몰려오는 소리와 그 애의 비명소리가 뒤이어진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 그에게 남은 건 기나긴 적막이었다.
그 아이의 눈을 잊히지가 않는다.
아마 평생 그 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
미친 사내다.
비릿한 피비린내, 메마른 약초 냄새가 가득한 치료실에서 벗어나 부옇게 흐려진 정신이 조금 맑아지자, 하렌은 더욱 분명해진 그 생각에 힘을 실었다.
미친 사내야.
그 허무맹랑한 말을 할 때부터 짐작했어야 하는데.
‘부탁이 있네, 하렌 경.’
에오르테가의 후작이 긴밀히 그를 만나길 청한다는 서신을 받고 약속된 장소에 나갔을 땐 그저 시간이나 때우다 올 심산이었다. 유달리 그날은 날이 맑고 지긋지긋한 테비온은 꼴도 보기 싫었고 때마침 적당한 명분도 있고 하니. 설마 진짜로 후작이 나타날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아이 하나를 지켜 줘야겠어.’
더욱이 그자가 모르스 일족이라면 질겁하는 에오르테가의 후작이라면.
‘난 그저-’
‘……하이가의 보검을 주지.’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올 단어를 사내는 마치 저잣거리의 물건을 사고파들 담담하게 입에 올렸다. 하이가의 보검. 하렌이 비슷이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 고쳐 잡은 건 그 유혹적인 물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사내 때문이었을까. 맞은편 테이블 너머의 사내를 바라보는 하렌의 눈에는 흥미로움이 뚜렷하게 나비쳤다. 다소 위험천만한 제안이긴 하나 그 대가는 퍽 만족스러웠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린 듯한 웃음과 함께 제안을 수락한 건 그래서였다.
‘나중에 다른 말 말게.’
그게 결국 제 발목을 잡을 줄도 모르고.
맹하게 생겨서는 제법이야.
그런 말간 눈으로 사람을 이리 속여 넘길 줄 누가 알았겠나. 하기사, 사내건 여자건 딱히 말을 하진 않았으니 속인 거라고 하기도 뭣한가.
자조 섞인 상념과 함께 어느덧 걸음은 후작이 미쳐있는 그 여자의 교육실에 다다라 있었다. 보초를 서는 기사가 바싹 긴장한 자세로 그를 맞이했다.
“하렌 경.”
그저 형식적인 인사거니 걸음을 옮기려는데 기사는 주춤거리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뭣 하는 짓인가. 서슬 퍼런 기세를 뿜었음에도 벌벌 떨기만 할 뿐 끝내 비켜서지 않으면서.
“뭐 하는 거지.”
“아델리아 양은 지금 교육 중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그가 눈썹을 추켜올리자, 기사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다시 한번 울렸다.
“오늘부터 페치오 위원이 특별 교육을 담당하신답니다.”
***
문도 막지 못할 사내의 성난 음성이 점차 사그라든다.
이에 흡족해진 마음으로 페치오는 문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다시 돌렸다. 정확히는 초점 잃은 눈으로 힘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저 여자에게로. 느긋하게 그려 있던 미소가 서늘하게 식은 것은 여자 주위에 여전히 생동감 넘치는 날갯짓을 하는 박새를 본 직후였다.
옅은 한숨을 쉬며 페치오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런, 아델리아 양…… 고작 이런 시시한 놀이나 하자고 그댈 여기 둔 게 아니거늘.”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수록 사위에 깔린 안개가 짙어지고 분주히 날아다니던 박새는 그 속에서 기괴하게 깃털이 꺾인 채 추락했다.
“모르타 위원회 내부에서 의견이 분분하다네. 그대 처분을 두고 말이야.”
이를 가로질러 여자에게 다가간 페치오는 여자의 턱을 그러쥐어 올렸다.
“그대가 뭔가 보여 줘야, 나도 도울 수 있지 않겠나.”
여전히 떨림이 짙게 배인 눈은 어딘지 모를 깊숙한 아래로 침잠하며 요동칠 뿐이었다. 하아, 침음과도 같은 탄식과 함께 페치오는 이만 몸을 돌렸다. 몇 시간째 제자리걸음인 여자의 상태에 그도 지칠 대로 지친 참이다. 뻐근한 목덜미를 문지르며 울컥 핏물을 토해 내며 발버둥치는 박새를 구둣발로 짓이긴 그는 천천히 내실에서 벗어났다.
“위원님.”
그가 까닥 고갯짓하자 밖에 보초를 서던 기사가 방금까지 있었던 일을 소상히 보고했다.
“하렌 경이 돌아갔습니다.”
그저 그의 귓가를 스치고 나갈 뿐이었지만.
이만 가 보라, 손을 내저은 페치오는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젖혔다. 지천에 깔린 잿빛 어둠이 마치 그 여자의 텅 빈 눈동자의 빛깔과 같았다.
어렵군.
찰나의 시간에 응접실을 모조리 박살 낸 파괴력을 보였던 여자가 지금은 날아든 박새 하나조차 죽이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뭘까…….
저 여자의 폭주를 이끌어 낼 원동력은.
저 여자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건.
저 멀리 옷자락을 휘날리며 그의 보좌관이 도착한 건 그때였다.
“에오르테 후작이 깨어났습니다, 위원님.”
에오르테 후작.
문득, 그 단어가 부유하던 그의 머릿속을 맑게 개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저 멍하니 눈만 깜빡거리고, 내 움직임에 빛이 점멸하고 다시 밝아진다.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다.
“아델리아 양.”
매일같이 반복되는 정체 모를 일의 시작을 알리는. 페치오라 불리는 저 사내가 나를 찾아온 건 얼마 전이었다. 하렌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진 자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공간을 압도하는 힘의 기운과 어둠 속을 유영하는 검은 눈동자. 그곳에는 어떤 희미한 기대가 묻어나와. 마치 뭔가를 고대하는 사람처럼. 항상 결말은 똑같았지만.
작은 자극에도 쉬이 팽창하던 힘은 몇 번의 폭주로 다 사그라들었는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를 실망케 하는 것은 그런 것이리라. 그럼에도 늘 그의 눈에 버리지 못한 미련이 남아 있는 건 과연 누구에게 불행일까.
“오늘은 대화를 나눠 보려고 하는데 말이야.”
어슴푸레한 사위 속에서도 분명하게 남은 미련을, 그 가시적인 흔적이 뚜렷한 눈을 들어 올린 페치오는 긴 침묵을 깨트렸다.
“최근에 치료실로 상흔이 꽤 깊은 이가 들어왔다지. 무척 고통스러워했어. 진정제를 먹어도 그닥 효과가 없더군. 얼마나 비명소리가 크던지 누가 보면 다 큰 성인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더군. 하긴, 귀하게 자라신 분이니.”
에오르테 후작 말이네.
비슷이 고개를 모로 기울인 그는 부드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모르는 이가 들으면 진정 상대를 염려한다, 착각할 정도로 다정한 음성이 그 끝에서 굴러 나왔다.
“참으로 불쌍한 사내야. 한결같이. 반평생 그토록 모르스 일족을 피해 온 제국을 떠돌더니 어찌 그대를 만나 인생이 이리 다시 꼬여 버렸담.”
싸늘한 주변, 흐르던 핏물과 거무스름한 세상, 비명소리.
귓가에 들이차는 소리를 따라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떠오르고 내 손끝에서는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너무 죄책감 갖지 말게. 그댄 모르스 일족이야. 사슴이 풀을 뜯어먹고 늑대가 사슴을 잡아먹고 하듯. 모르스 일족이 살아 있는 생을 모조리 마감시키는 것 또한 자연의 섭리, 만물의 이치지. 그대와 후작은 결코 함께할 수 없어.”
삽시간에 내실을 집어삼킬 정도로 빠르게.
“아델리아 양, 이게 누구의 것인지 알겠나.”
그 균열의 궤적을 알아챈 걸까. 여유로운 음성과 함께 페치오가 띄어 올린 마지막 승부수에 나는 폐부에 물이 찬 듯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잘 봐 두게. 잘못하면 다음엔 손 하나로 끝나지 않을 테니.”
시야에 들이찬 것은 도저히 살아 있는 사람의 것같이 보이지 않는 흉측하게 망가진 손이다.
허공을 부유하는 것같이 몽롱해진 의식, 흐릿해지는 초점. 아득한 절망 어딘가로 떨어지는 것 같은 감각을 끝으로 그런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
죄수들을 들여라.
그날 나는 처음으로 사람을 스러트렸다. 그러나 그것이 처음은 아닐 거야. 아마 내가 가장 먼저 벤 사람은 바로 나일 것이니.
아니지, 아델. 셈을 제대로 해야지.
그 애가 정말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 앤 괴물이야.
죽음을 불러오는 모르스의 망령.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