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죽음을 부르는 일족
“소식 들으셨어요?”
지루함만이 자리 잡은 어느 무도회. 하릴없는 수다들을 떨고도 한참이나 남은 시간에 질식해 가던 노부인들은 호들갑스러운 영애의 음성을 듣고 고개를 젖혔다.
“글쎄 에오르테 후작이…….”
“벌써 듣다마다. 에오르테 후작이 루트비아 사생아를 데리고 카리디 극장에 나타난 일 말이지?”
먼지 하나 묻지 않았을 것 같은 손으로 잔을 집어 든 노부인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영애의 말허리를 잘라먹었다. 저리 호들갑을 떨 화두라면 뻔하기 짝이 없었다. 루트비아가의 유일무이한 사생아. 지난 몇 년간 이 사교계에 꾸준히 거론되며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을 충격에 빠트렸던 그녀는 올해에도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카리디 극장이라…….
귀족들 중에서도 고위 가문들에게만 허락되는 그곳을 어떻게 사생아를 데리고 갈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난 전적들에 비하면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노부인은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지난날 계속되어 왔던 그녀의 파격적인 행보를 떠올려 보았다. 첫 시작은 에오르테 가문의 소유인 페라비 별장에 머문다는 소식이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그녀가 어찌나 놀랐던지. 이국에서 직접 공수해 온 진귀한 찻잔 하나가 그날 박살이 났더랬다. 뒤이어 다 자란 여자의 후견인을 자청한 후작과 자초지총을 따지기 위해 페라비 별장으로 향한 남작, 남작이 별장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며 끝내 파경에 이른 둘의 약혼까지. 저잣거리 촌극도 이보다 더 우습지는 않을 것이다.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논란이 될 이가 일으킨 파문은 헤아릴 수도 없이 크고 많았다. 곁에 있던 대부분의 이들이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사위는 곧 짧은 탄식과 침음으로 가득 차올랐다. 답답하다는 듯한 거센 외침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아니, 그 얘기가 아니에요!”
“그럼 무슨.”
“에오르테 후작이 저택을 처분한대요!”
요란스러움에 비하면 실속 없는 정보였다. 더욱 격한 무언가를 기대했던 노부인은 급격히 흥미를 잃은 얼굴로 목을 울렸다.
“그걸 모르는 이가 제국에 어디 있나. 황제께서 전쟁 준비로 각 가문에 요구한 충당금을 마련하지 못해 에오르테 후작이 동분서주하는 건 네 살배기 어린아이도 다 아는 일인데.”
“그 유서 깊던 가문이 이런 참담한 꼴이라니…… 대금을 마련하기 위해 별장까지 처분하기까지…….”
말을 받아치는 친우는 조금 다른 생각인 듯했지만. 이미 몇 번이고 우려먹은 소재는 그럼에도 의자 등받이에 깊이 묻혔던 몸뚱아리들을 하나둘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럼 어쩌겠나, 영지는 쇠락하는 마당에 정계에는 관심이 없으니.”
“이웃집 사생아를 데려다 후견인을 자처할 게 아니라 제 앞가림부터 해야지요.”
답답하다는 듯 어린 영애만이 눈썹 앞머리를 잔뜩 모았지만.
“아니요, 그게 아니라요……!”
극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려 했던지 영애는 모두가 이목을 집중할 때까지 말을 끌었다. 수십 쌍의 눈이 제가 향하자 드디어 벌어진 오밀조밀한 입술에서 튀어나온 문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만.
“글쎄, 에오르테 후작이 처분한다는 그 저택이 별장이 아니라 수도에 있는 에오르테의 본 저택이라니까요!”
쨍그랑, 누군가의 손에서 미끄러진 잔이 파열음을 일으키며 얼어붙은 적막 속에 스며들었다.
“……수도 인근에 있는 별장이 아니고?”
“아니요!”
에오르테가의 본가, 크세라스 저택.
또박또박 힘주어 울려 퍼진 단어 앞에 침음과도 같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오, 신이시여. 말세야, 말세. 여기저기서 퍼지는 중얼거림을 말할 것도 없었고.
***
“그럼, 상황을 보고하러 또 들르겠습니다, 후작님.”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군더더기 없는 인사를 건네고서 페라비 별장의 집무실을 빠져나가자, 후작은 지친 기색이 다분한 눈을 문지르며 의자 깊숙이 허리를 기댔다. 문살에 비켜 비스듬히 들이치는 유백색 햇살에 훤히 드러난 낯은 그럼에도 만족스러운 빛을 띠었지만.
홀가분했다.
드높은 가문의 명예와 긍지, 사방에서 쏟아지는 가시 돋친 말들. 그간 그의 마음을 주저케 하던 것을 밟고 넘어서자, 펼쳐진 세상은 그 이상으로 평화로웠다.
남들이야 한계에 치달은 영지 상황으로 말도 안 되는 결심을 했다 떠들어 대지만, 진실로 그의 마음은 그러했다. 풍요로움을 잃고 메말라 가는 영지, 황제가 제시한 막대한 충당금. 서서히 속에 감춘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공작가. 그 모든 것들이 기꺼워질 정도로.
원로들이 반기를 들 게 뻔하다만, 뭐 어떤가.
답지 않게 비틀어진 마음을 드러낸 후작의 머릿속으로 차례차례 잊으려야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좀먹은 저택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웅장한 대저택을 휘감은 화마와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해 버린 영광, 한낱 한시에 명을 달리한 어머니와 형님. 그 자체만으로도 버려야 할 이유들이 충분했으나, 비단 그뿐만은 아니었다.
소슬한 웃음을 흘린 후작은 어둠에 잠식된 기억에서 벗어나려는 듯 양광이 짙게 흘러 들어오는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품속에 있던 작은 향낭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그 겉을 풀어 헤쳐 안에 담은 은빛 물체를 나비친 것도 그쯤이다. 빛바랜 추억만큼 오래된 기억을 손안에 두어 번 굴려 보았을까. 차창 너머 정원을 가로지르며 나부끼는 은발이 그의 초점을 흐렸다.
또 숲에서 돌아오는 건가.
아득하고 무거운 과거의 어느 날로 침잠해 가던 그의 세계가 그런 생각과 함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이는 숲을 사랑한다.
그는 그 아이를 사랑하고.
단순한 두 문장 앞에 세상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한 걸음 더 차장 쪽으로 다가가, 들녘의 버드나무 가지처럼 흔들거리는 머리칼의 결을 감상하고 있자, 손님을 배웅하고 돌아온 엘몬트가 조용히 그의 시선을 따랐다.
“정말 훌쩍 자라셨지요.”
딱히 반박할 만한 말은 없었다.
아이의 품 안에 들린 서책의 종류를 가늠해 보던 녹안이 한층 갸름해진 아이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정원을 거니는 한층 넓어진 보폭과 딱 그만큼 자라 이제 그의 어깨에 와 닿을 것으로 추측되는 키 역시. 사람들은 이제 아이를 보면 앳된 소녀라기보다는 성숙한 아가씨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글쎄.
가느다란 웃음을 머금은 후작은 뜻 모를 눈빛을 집사에게 건네며 함께 내실을 가로질러 느릿느릿 방을 나섰다. 점점 높아지는 걸음은 막 로비에 들어선 아이와 마주치기 위함이리라. 지난날들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듯 언제나 그에게 아이로 남아 있을 그 아이와.
***
“이리 늦게까지 숲에 있다 오면 어찌합니까, 아가씨.”
양손으로 허리를 짚은 유모가 문께에 서서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성난 기색이 잔뜩 묻어나는 음성이 온갖 수목들이 가득 찬 내 방의 공기를 흔들었다. 본디 객을 맞는 용도로 쓰이던 이곳이 본래의 목적을 잃은 지는 제법 시간이 흘렀다. 개암나무씨앗, 제라늄 화분, 리베라. 곳곳에 자리한 화초들을 가로질러 내게 다가온 유모의 낯빛은 매서웠다.
“후작님은 생각이라는 게 있는 건지, 원.”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풀잎에 물든 치맛자락을 살핀 그녀는 불만스러운 여운으로 말했다.
“후작님 잘못이 아닌걸.”
숲의 평온과 고요를 자꾸 찾아 헤매는 이는 나이니.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흘러나온 항변에 유모, 마리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소년과 사내, 그 어디쯤을 배회하는 음성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누난 곧 죽어도 삼촌 편이잖아.”
언제 들어왔는지 협탁 위에 비슷이 걸터앉아 있던 소년의 낯에는 그 어린 날처럼 여전히 장난기가 가득했으나, 그렇다고 또 온전히 기억 속의 것과 같지는 않았다. 앳된 티를 벗어나 전체적으로 단단해진 골격이 그러했고 한층 날카로워진 눈매 역시. 시선을 아래로 주어야만 가능했던 대화는 이제 그런 수고 없이도 가능하기도 했고. 낮과 밤. 빛과 어둠. 그만큼이나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조각들이 온전히 하나의 빛깔을 이루는 날, 소년은 에오르테가의 주인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체구와 달리 마음은 아닌 듯했지만.
공간을 가로지르며 달랑거리는 테오의 양발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지 참다못한 마리는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공자님! 숙녀 방에 이리 불쑥 찾아오시면 어째요! 게다가 그런 자세라니!”
소란스럽고 또 소란스러운 하루들의 시작을 알리는 경쾌한 활극이 시작되었다.
기어코 테오를 잡아채 단정한 매무새로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유모. 그 손아귀를 피해 요리조리 내빼는 테오.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는 팽팽한 추격전에 테이블 한편에 놓여 있던 화병을 깨진 것은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두 사람의 대치는 겨우 끝을 보인 것은 맑은 노크소리가 소란을 파고들 즘이었다.
“아델, 테오. 어서 정리하고 내려오렴. 매튜가 간식을 준비했다는구나.”
느리게 여닫히는 동공 사이로 흘러 들어온, 쏟아져 내리는 오후의 햇살을 이고 다니는 것 같은 사내는…….
단연 후작이었다.
순백이라는 단어로 누군가를 빚어낸다면 이런 모양일까.
면경같이 맑은 눈동자, 복숭아 살갗처럼 보송보송한 볼과 둥근 턱선.
정말인지 익숙해지기 어려운 낯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그렇게 몇 년을 봐 왔는데도 말이다. 이미 짐작하고 있는 그 연유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보는 사이, 내실을 살펴 내리는 푸른 눈과 허공에서 얽혀들어 갔다.
“아델?”
상대의 속내마저 고스란히 되비칠 것 같은 투명한 눈은 여전한 채로 나를 직시해 왔다.
“왜 그러니?”
신기해.
몇 번이고 바뀐 계절 앞에서도 어째서 그는 이리 제자리인지.
“그냥요. 후작님은 참…….”
꼬마가 소년이 되고 어느덧 사내가 될 날을 목전에 둘 만큼 기나긴 시간은 유독 그에게만 더디 흘러가는지.
“여전하신 거 같아서요.”
“말이라도 고맙구나.”
후작은 정지한 시간 속에 머무르는 사람 같았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채 영원으로 흐르는 공간을 홀로 지키는 듯했다.
***
“하아, 날이 좋네.”
유달리 하늘이 맑은 오후, 비탄스러운 어투로 테오는 운을 뗐다. 그가 흘린 나직한 중얼거림이 히아신스로 장식된 정원의 테이블 위로 스며들었다. 이제 곧 이리 날이 좋은 오후, 별장에 틀어박혀만 있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신세 한탄이 시작될 차례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누가 저 선생만 내 눈앞에서 치워 주면 좋을 텐데.”
에오르테 공자의 후계자 수업이 시작된 지 며칠째. 집사의 까다로운 엄선하에 선별된 여러 명의 가정교사들은 정해진 시간에 맞춰 별장을 드나들고 있었다. 테오는 모든 선생을 싫어했지만 유독 질색하는 건 정치를 담당하는 선생이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가 그 과목을 가장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황실이 알아서 잘 통치할 이 제국을 구태여 자신까지 관심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나 뭐라나.
“삼촌, 오늘 하루만 쉬면 안 될까?”
연신 제게 닥친 불행을 토로하던 테오는 마주 앉은 후작에게 슬쩍 본론을 꺼내 보였다.
“딱 오늘 하루만. 응?”
창연히 펼쳐진 하늘은 푸르고 코끝에 스미는 꽃내음은 짙다. 흐드러지게 날이 좋은 오후, 조카의 애처로운 문장과 눈빛에 후작의 눈이 수런수런하게 요동쳤다. 막 후작의 자비로운 입술이 달싹거리며 추측컨대 허락의 말을 내놓으려던 찰나, 둘 사이로 검은 인영이 비집고 들어왔다.
“공자님.”
엄격한 눈빛을 보내며 둘의 수신호를 가로막은 집사는 방금까지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의 전말을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헛기침을 하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 후작을 짧게 일별한 집사는 목을 울렸다.
“리테만 선생이 도착했습니다.”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사뭇 비장한 그의 말투에서 강렬하게 느껴졌다.
***
“정치학이라…….”
집사의 손에 이끌려 끌려가다시피 한 테오의 모습에 후작은 한동안 심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걸 꼭 배울 필요가 있을까.”
검은 인영이 저 멀리 점처럼 아득해지고 나서야 시선을 거둔 그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에오르테가의 원로들이 듣는다면 기함할 말이 그 붉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에오르테가의 후작이 조카의 작위를 찬탈하려 한다.
이제는 믿지 않는 그 소문이 실은 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건 그 순간이다. 말마따나 정말인지 그는 조카에게 작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른 이유이긴 했으나.
이 저택에 머물며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유순하게만 보이는 이 사내, 무슨 일이듯 물 흐르듯 넘어갈 것 같이 보이는 이 사내가 단 하나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는 문제가 있다는 걸.
바로 테오였다.
문학, 정치, 고대어, 경제. 살얼음판 같은 제국의 정계에 살아남기 위해 태어날 적부터 빠짐없이 두루 섭렵했어야 할 공자가 이제 막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되는 것도 다 어찌 보면 후작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조카가 건강히 성장하는 것뿐이었고 그 이외의 것들은 하등 개의치 않았으니. 지금 저리 선생들을 붙이기까지도 얼마나 많은 엘몬트의 노력이 있었나. 옆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집사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에오르테 가문은 진즉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고도 남음이다.
후작의 손에 의해.
“산전수전 다 겪은 귀족들을 상대하려면 그 정도는 준비해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천지처럼 당하고만 말 텐데.”
“나처럼 말이니?”
느릿느릿 돌아오는 답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지는 않는 듯했다.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은 나는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크세라스 저택을 내놓으신 건 옳지 못한 처사였어요.”
후작이 에오르테가의 본가를 처분한다.
딱히 효용이 없을 이번 일로 그가 얻을 수 있는 건 아마…….
“누구도 에오르테가의 본가를 취하지 않을 겝니다. 고위 귀족들이 다른 가문의 본 저택을 살 이유는 없고 남은 것은 하급 귀족들뿐인데 자칫하면 그들에겐 열등감을 허영으로 과시하려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요.”
에오르테가의 추락을 공공연히 알리는 정도랄까?
“자꾸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면 사람들은 에오르테를 더욱 하찮게 볼 거예요.”
자못 심각한 문장 앞에서도 그는 연신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지만.
“이리 총명한데 어찌 네 방에 있는 화초들은 항시 다 죽어 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또 리베라가 죽었더구나.”
“……후작님께서 친히 도전해 보신다면 식물을 키우는 것과 머리는 상관이 없다는 걸 아실 겝니다.”
“허, 네가 더 크면 그 말재간에 뼈도 못 추리겠다.”
상황에 맞지 않는 청량한 웃음소리가 울창한 잎사귀들 사이로 울려 퍼졌다.
항시 그랬다. 그는.
다른 이들은 안달 날 상황에서도 그저 미소 한 번, 웃음 한 번. 마치 그것들 전부 중요치 않다는 듯. 역시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자꾸만 기이한 방향으로 공기의 흐름을 바꾸려는 탓에 나는 대답 대신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제야 웃음이 잦아들고 침묵이 찾아왔다. 의자에 몸을 나른하게 기댄 후작의 눈이 정원을 스치듯 지나 내게 닿은 것은 그쯤이다. 좁혀진 거리 속, 예상과 달리 그의 눈은 조금 짙게 가라앉은 채였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다정한 음성이 내게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척 눈을 내리깔고 무릎 위에 놓인 책에 시선을 고정했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쉬이 짐작하고 있었다.
헤모나 남작.
지난달 별장을 찾아온 그가 부린 난동이 혹 내게 깊게 박혔을까 후작은 한동안 염려했다. 파혼 요청에도 순순히 응하며 의아함을 남긴 사내가 거나하게 취해 부린 작태가 여간 망측한 것이 아니라.
‘그래, 심경이 어떤가. 이제 다 끝장난 에오르테가를 마주한 기분이.’
‘전쟁 충당금을 마련하지 못해 크세라스 저택을 내놨다지?’
‘어찌 보면 일이 이리된 게 다행이야. 이 요망한 계집아. 루트비아를 그리 들쑤신 것도 모자라 후작가를 저리 파탄에 빠트리다니.’
좋지 않은 반응은 단연 예상했다. 허나 사교계는 내 생각보다 더 독한지라. 나와 후작을 두고 일어난 추문들이 더욱 난잡하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 에오르테가의 원로들이 별장을 방문해 한바탕 난동을 피웠다는 것도.
명예는 스러지고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한때 제국을 호령했던 그 에오르테가. 지탱할 재력도 충분치 않은 마당에 입지마저 흔들리자 이미 무너져 가던 가문에 타격은 실로 막대했다.
사람들은 에오르테에서, 후작에게서 등을 돌렸고 가끔 정말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별장을 기웃거리는 남작 같은 이들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자가 한 말을 너무 괘념치 말거라. 내게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니.”
부드러운 문장이 나를 다독였다. 그때도 후작은 이리 말했어. 마치 그자의 헛된 말들이 나를 상하게 할까 싶어.
“아델?”
차라리 다행인 걸까. 남작이 뱉은 고작 그런 말들은 내게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라는 걸 그가 알지 못하는 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는 거니까.
깊고 아득한 어둠의 공간 속 꾹꾹 눌러 담아 둔 감정들을 공연히 한 번 더 짓이기는 사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는지 그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고른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터질 것 같이 부풀어 올랐다.
속에서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감정이.
“괜찮아요.”
나는 살짝 몸을 비틀어 그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따스한 온기가 걷히자 갑갑하던 마음도 조금은 진정되었다. 남작이 토해낸 헛된 문장들. 나를 갉아먹고 있는 건 그런 것들이 아니다.
‘후견인이라…… 어린아이도 아니고 다 자란 여자를…… 그 말을 누가 믿겠나.’
의아한 시선들과 눈빛들. 그 말에 한 점 부끄럼 없는 그와 달라.
뭇 소문들이 실은 전부 허황된 것은 아닐 거라는 두려움이. 자꾸만 커져 가는 이 기이한 감각이.
의아한 듯 내 기색을 살피던 그는 다급하게 부르는 시종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후작님, 이튼 씨가 찾아왔습니다.”
“잠시 기다리라 하게.”
“저택 문제로 급한 사안이라…….”
“기다리라 전해.”
시종에게 건네는 말은 그답지 않게 단호했다.
유순하게만 보이는 이 사내, 무슨 일이듯 물 흐르듯 넘어갈 것 같아 보이는 이 사내가 단 하나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는 문제가 있다.
바로 나였다.
“아델?”
말을 고르며 목을 가다듬었을 때쯤, 기다란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웠다. 그가 허리를 낮춘 것이다. 당연한 수순처럼 커다란 손으로 내 뺨을 감싸 쥔 후작은 채도 높은 빛깔의 눈을 들어 나를 또렷이 직시해 왔다.
숨이 멎을 만큼 강렬한 시선은 그 어떤 벼린 말에도 아무렇지 않았던 나를 할퀴고 지나간다. 누구나 탐내는 명예도 권력도 전부 뒤로하고 마치 나 말고는 이 세상에 중한 것은 없다는 듯 보는 그 눈이.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의 것처럼 반짝이는 그 눈에 걸게 되는 헛된 희망이 두려워. 그래서 자꾸 그를 자꾸 몰아세우고, 질책하지. 그래, 무서워. 나를 담지 않길 바랐다가도 또 잿빛으로 꽉 찬 눈망울을 보면 기꺼워지는 이 마음이…….
섬뜩할 만큼 무서워…….
길어지는 침묵에 와닿는 시선이 날카로워진다. 서둘러 낯을 갈무리한 나는 입술을 위로 끌어 올렸다. 그래도 후작의 시선은 여전히 마뜩잖았지만.
“정말입니다.”
정말 괜찮아요. 그런 문장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시종의 채근과 반복되는 내 말에 그제야 후작은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리 점처럼 사라지는 인영, 그 위로 물들어 가는 붉은 낙조.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정리하려던 나는 뜻밖의 광경에 멈칫했다.
석양의 빛에 물든 히아신스는 누렇게 시들어버린 채였다.
***
저택으로 이어지는 정원의 길목에 초조한 엘몬트의 지팡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대체가. 급한 사안이라고 몇 번이고 언질을 주었는데.
저택의 주인에게 소식을 전하러 간 시종은 당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이튼 씨마저 저택을 떠나자 그는 바싹바싹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직접 정원 안으로 들어서야 하나. 비틀어진 다리를 보며 그가 고심하던 찰나, 밀밀하게 엉킨 관목들을 헤치고 어둠 속에서 고대하던 낯이 드러났다.
“미안하네.”
헝클어진 매무새를 가다듬는 주인의 모습을 보니 다급히 온 기색은 다분했다. 반쯤 내린 눈썹 아래 진중하게 건네는 사과의 말은 또 어떻고. 성을 낼 시기를 놓친 집사는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옷깃을 바로잡아 주었다.
“이튼 씨는 방금 막 마차로 떠났습니다.”
담담히 상황을 보고해 나가던 엘몬트의 목소리가 잦아든 건 내용이 막 본론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손끝에서 부스러지는 버쩍 마른 히아신스의 잎에 그는 말문이 막힌 듯 입술만 움죽거렸다.
요즘 들어 더욱 심해졌다. 정원의 수목들이 생기를 잃고 메말라 가는 일이. 단연, 저택은 말할 것도 없고. 리베라야 원체 키우기 쉬운 식물이 아니니 그렇다 넘기려 했지만 히아신스까지라…….
공연히 마음에 부는 번다한 상념을 지우려는 듯 그는 더욱 크게 목을 울렸다.
“저택 처분 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체레타 남작이 구매를 포기한다는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한 번 더 그를 설득하려 이튼 씨가 남작에게로 갔으나, 아마 마음을 돌리기는 어렵겠습니다.”
“갑자기 왜 그런 거지.”
“그저 현물이 부족하다는 답신이온데…… 아마 공작가에서 압박을 넣은 모양입니다.”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바닥에 울려 퍼지던 균일한 발소리를 멈춰 세웠다. 잠시간 허공을 응시하던 후작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다른 가문을 물색해 봐야겠군.”
“크세라스 저택에 관심을 가진 가문이 한 군데 남아 있긴 있습니다. 다만…….”
엘몬트는 말끝을 흐렸다.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는 실상, 보루라고 하기도 뭣한 자칫하면 위험천만한 모험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그게 누구지.”
허나, 지금 그들이 이를 가릴 땐가.
“메로본 백작입니다.”
그 이름을 마주한 이의 낯에 일어난 파문을 외면하려는 듯 엘몬트는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
자갈길을 구르며 달가닥거리던 마차가 자오록이 피어오른 아지랑이 사이를 지나간다. 윤기 흐르는 검은 곱슬 머리카락, 그와 꼭 같이 검은 눈썹 밑에 진중한 진갈색 눈동자가 부서져 내리는 햇빛을 받아 그 안에서 반뜩 빛났다.
“다 왔습니다, 백작님.”
제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바람에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여인은 그 소리에 천천히 눈을 돌렸다. 가도 부근에 펼쳐진 갖가지 관목들을 지나친 시선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보좌관에게로 흐르듯이 닿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백작님. 말씀만 하신다면 당장 마차를 돌리라 하겠습니다.”
덜컹거리는 마차에게도 꼿꼿함을 잃지 않은 보좌관은 서릿발처럼 날 선 어투로 말했다.
“어째서.”
심드렁한 대꾸만 돌아올 뿐이었지만.
“어째서라니요!”
기가 찬 듯한 음성이 마차에 흐르는 기묘한 공기를 파고들었다.
“에오르테 가문이라니! 핏줄도 아니고 친분도 깊지도 않으시면서!”
“친분이 없진 않지.”
“그게 친분입니까?! 사람들은 그런 걸 두고 악연이라고 말합니다, 백작님!”
“그런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지난번 무도회에 후작을 초대하셨을 때에도 얼마나 말이 많았는데. 게다가 지금처럼 에오르테의 평판이 땅에 떨어진 마당에.”
“평판은 원래도 좋지는 않았잖나.”
“지금은 차원이 다르잖습니까. 차라리 전대 후작이 나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적어도 그 여자의 미친 짓은 어느 정도 맥락이 있었으니까요. 지금 후작은 하루가 멀다 하고 예측도 안 되는 짓들을 일삼고 있으니.”
그럼에도 들은 척 만 척 하는 백작의 태도에 보좌관은 포기한 듯 자조 섞인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백작님 고집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다만, 갑자기 이리 백작님답지 않게 구시니 염려될 뿐입니다.”
“그냥…….”
궁금해서.
뜻 모를 말이 백작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사이, 마차는 어느덧 루트비아 영지로 이어지는 마지막 고원을 넘어서고 있었다.
모든 것은 변함없었다.
페라비 별장으로 이어지는 길목 군데군데 세워진 독수리의 석상과 진초록 깃발. 에오르테의 본가와 같이 기괴한 모양을 띠는 정원. 익숙한 사용인들의 얼굴 위로 깊게 팬 주름마저도 마치 어제 본 것같이 그대로였다.
“오랜만입니다, 백작님.”
라에갈 에오르테.
이 사내 역시.
귓가에 와닿는 목소리는 더는 앳된 소년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웠지만, 꼭 그녀가 예상했던 그대로의 소리였다. 적당히 나긋나긋하면서도 따스한.
내밀어진 손 역시 주인을 닮아 부드러울 테지.
이를 잠시 응시하던 그녀는 그 손을 맞잡았다. 두 손이 얽히자, 도열해 있던 사용인들 사이로 긴장과 흥분이 물결처럼 번졌다. 약간의 기대와 바람이 뒤섞인.
그 덧없는 반향의 여운을 조금은 더 느끼고 싶어 살짝 손에 힘을 더 주며 백작은 설풋 눈을 내리감았다. 모든 것은 변함없었다. 경직된 것 같은 사내의 떨림과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 코끝을 간질이는 익숙한 풀의 내음들까지.
단단한 어깨 너머 침잠하고 있는 은안을 빼면.
***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일전 무도회에서 만났을 때에도 느꼈던 그 감상은 이번에도 역시나 그대로였다. 우아하면서도 힘 있는 걸음걸이, 특유의 절제된 눈빛. 한층 물이 오른 미모가 그 여리면서도 단단한, 모호한 분위기에 힘을 더했다.
엘레나 메로본.
메로본가의 막내딸. 한 해 전, 두 이복 오라버니를 제치고 가문의 가주가 된 여인. 모두가 외면한 에오르테가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순조롭다던 별장 처분 건은 완전히 어그러졌고 모두가 후작과 연을 닿길 주저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손을 건넨 이가 바로 그녀라 들었다.
허니, 실수하면 안 돼.
작게 되뇐 그 소리는 지척에 비껴 들어온 그림자에 허공으로 흩어졌다.
“오랜만입니다, 아델리아 양.”
기품 있게 내밀어진 손이 빛살이 내려앉은 공간을 지나 그녀와 나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한참 후에야 입술을 움직였다.
“……오랜만입니다, 백작님.”
엘레나 메로본.
메로본가의 막내딸. 한 해 전, 두 이복 오라버니를 제치고 가문의 가주가 된 여인. 모두가 외면한 에오르테가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리고…….
“들어가시지요, 백작.”
후작의 약혼녀.
아니, 전 약혼녀.
메로본가의 막내딸과 에오르테가의 둘째 공자의 약혼은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적당한 친분, 비슷한 지위. 무게를 다는 추는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었을 테니. 그래서 당시 세간을 놀랍게 만든 건, 그들의 약혼이 아닌 파혼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
만찬은 더없이 완벽했다.
질 좋은 음식과 식욕을 자극하는 풍미. 다채로운 빛깔의 장식용 꽃. 간간이 백작이 던지는 말에 터져 나오는 테오의 웃음소리가 그 완벽함에 백미를 더하면서.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만찬장의 불빛이 단란한 가족이 될 수 있었을 뻔한 이들을 따스한 채도로 물들이는 광경을 보자, 자연스레 식기를 쥔 손에는 힘이 실렸다.
파혼을 했다.
알고 있던 사실은 새삼스레 생경하게 다가왔다. 후작의 나이 스물넷. 어린 조카를 책임지면서 그에게 해가 되지 않게 유의하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미 가정을 꾸리고도 남았을 나이라는 것도.
테오가 아닌 다른 이의 손을 잡은 그의 모습은 어떨까.
불쑥 찾아온 물음 위로 메로본 백작의 것과 얽혀 들어간 그의 손이 선명하게 떠오르자, 접시에 닿는 식기소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사용인들의 반짝거리는 눈빛. 기대감 어린 시선에 한층 더.
하지만 파혼을 했지.
가불거리는 촛불에 어룽거리는 그림자. 그 위로 피어오른 잔상들에 터질 것같이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킨 건 그 문장이었다.
어쩌면 그 약혼 역시 그저 형식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한때 물밀 듯 밀려오는 신흥 세력에 대응하여 구귀족 간의 약혼이 팽배했던 시절. 너도나도 앞다투어 신전으로 몰려가 가문 간의 결탁을 내비치던 그 시절이 그들의 약혼과 얼추 그 시기가 맞물리기도 하고.
그러니 파혼을 했겠지.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맥락에 후작 역시 그중 하나였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에 힘이 실렸다. 거칠게 움직이며 고기를 조각내던 손이 제 속도를 되찾은 건 그 무렵이었다.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흐물흐물해진 뒤였지만.
바보같이 굴었다.
그가 약혼을 했든 파혼을 했든. 결혼을 했든 아이를 낳았든. 그저 기꺼운 마음으로 바라봐야 하는데. 이리 조급하고 초조한 마음들이 아닌.
잘근잘근 썰려 나간 음식을 침착하게 수습하는 것처럼 내 마음도 다잡았다. 자세를 바로잡고, 물로 목을 축이고.
옆에서 소리가 들려온 건 차분하게 낯빛을 갈무리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불편하니?”
후작이었다. 촛대에서 흘러나온 불빛에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젖은 그의 낯이 선연히 묻어 나왔다.
“먼저 일어나도 된단다. 몸이 좋지 않다 둘러대마.”
말간 눈이 나를 가득 담고 속살거렸다. 마치 둘도 없이 귀중한 물건을 다루듯. 조금의 소루함도 없이 말이다. 알 수 없는 희열과 자책감, 절대 섞일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두 감각이 엉킨 묘한 감정이 심중을 할퀴고 지나간 건 그 순간이었다.
나는 화급히 그에게서 눈을 돌렸다. 식탁보에 수놓아진 잔무늬를 헤아리며 난마처럼 얽힌 감정을 억누른 나는 애써 담담히 목을 울렸다.
“괜찮아요.”
혼란스러운 심정을 대변하듯 떨림이 묻어 나오는 음성은 어쩌지 못했지만. 기민한 후작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다. 시야 귀퉁이로 보이는 그의 낯은 살짝 미간을 좁혀진 채였다.
“아델?”
“정말이에요.”
생각보다 날 선 목소리가 식탁을 가로질렀다. 백작이 말을 비집고 들어온 건 그 찰나였다.
***
“영애께서 몸이 좋질 않으신가 봅니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눈을 올리자 그녀와 시선이 맞물렸다. 조금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꽤 오래전부터 나와 후작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기이한 예감에 힘을 더했다.
“해서 좀체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은 겐가요.”
그러나 찰나였다. 어느새 부드럽게 눈매를 접고는 잔을 들어 올린 그녀는 방금까지 서늘한 눈빛을 주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메로본 백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리 무뚝뚝한 사내와 공자만 있는 별장에 있으면 쓰나요. 헛된 말들이 나오기 좋을 텐데요.”
투명한 잔에 담긴 불그스름한 액체를 머금은 입술은 그보다 더 짙었다. 그 진한 빛깔의 입술이 건네는 말에는 설풋 피비린내가 풍겼다.
“무엇하나 진실과 같진 않을 테지만, 그렇지 않나요 영애?”
“글쎄요.”
덤덤히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에 기울어진 잔 너머 잠잠하던 눈동자가 기묘하게 뒤틀어진다.
“제게 그리 날 서게 굴 필요 없답니다. 염려치 마세요. 두 분이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
심상치 않은 기류에 아까부터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던 후작은 백작의 말을 끝으로 가까스로 찾아온 침묵을 서둘러 잡아챘다.
“자, 날이 좋으니 승마라도 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
“후작님이 승마를 즐기시는 줄 몰랐는데요.”
의외라는 듯 백작이 눈을 올렸다. 그러더니 이내 천천히 백작의 만면에 웃음기가 번졌다. 아까와는 궤가 다른, 마음속 깊은 곳에부터 건져 올린 미소였다.
“승마 수업을 하는 날이면 부러 저희 가문과 티타임을 잡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잘 기억나질 않아.”
거기까지였다.
“그래요, 그러시겠죠.”
훈풍이 불어오는 듯 따사로움이 맴돌던 방 안의 온도는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워낙 오래된 일이니. 낮게 중얼거린 그녀는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내게 눈길을 돌렸다.
“나쁘지 않습니다. 그럼 다 같이…….”
“아니, 둘이서만요.”
내실에 울려 퍼지는 맑은 울림의 주인은 믿을 수 없게도 후작이었다.
***
벌써 한 시진이 넘었다. 후작과 백작이 승마를 하러 나간 지. 그때부터 응접실 창틀에 죽은 듯 앉아 있던 나는 여태 책 한 장도 넘기지 못한 상태였다. 돌연 움직임을 멈춰 굳어 버린 석상처럼. 우두커니.
‘둘이서만요.’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는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내 두 귀로 듣지 못했다면 믿지 못했을 문장. 내가 아는 후작은 나를 앞에 두고 사라질 사람이 아니었다. 제 아무리 중한 인사라 할지라도. 왜. 어째서. 그런 물음 따위는 중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런 사람이었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열감 있는 눈두덩이를 손으로 덮어 내렸다. 어둠으로 가득 찬 시야 위로 자연스레 응접실 너머의 풍경이 덧그려졌다. 야트막한 언덕 위를 치달려 올라가는 두 마리의 백마, 푸른 초목을 가로지르며 휘날리는 백작의 진보라빛 승마복.
후작은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이리 보니 정말 잘 어울리시긴 해.”
막 응접실에 들어선 하녀 하나가 다소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러다 정말 다시 약혼이라도 하시는 거 아니야?”
뒤따라오던 하녀 역시 그 호들갑에 동참했다.
요즘 저택의 가장 큰 얘깃거리는 바로 메로본 백작과 후작이었다. 결혼 적령기를 넘긴 두 남녀이니 두말할 것도 없는 데다가, 그린 듯한 둘의 결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한창 달아오른 화제에 찬물을 끼얹은 건 마지막으로 응접실에 들어선 하인이었다.
“이미 파혼까지 한 분들이신데, 뭘.”
대수롭지 않다는 어투로 말을 뱉은 그의 말에 앞서 들어선 하녀 둘이 발끈했다.
“또 모르지, 뭘. 원래 약혼도 집안끼리 맺어 준 것도 아니고 두 분이서 원해서 하신 거잖아.”
“그래, 그것도 후작님이 무척이나 좋아하셨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런데 어쩌다 파혼까지 하셨대.”
그제야 하인도 제법 이 주제에 흥미가 가는지 끌고 왔던 트레이는 응접실 한편에 세워 두고는 귀를 기울였다. 그 덕에 하녀들의 대화에도 더욱 열기가 차오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창틀을 닦던 하녀는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도 잊고 목청을 크게 높였다.
“윗분들 마음을 어찌 알겠어. 하지만 정말 확실하다구. 전대 후작님이 메로본 백작을 별로 마음에 차지 않아 하셨거든.”
“왜? 가문이며 친분이며 빠질 것 없는데.”
“모르스 일족. 메로본 가문은 모르스 일족을 배출한 적이 한 번도 없잖아. 그래서 레지나 백작가의 차녀를 점찍어 두었다 했는데 그걸 후작님이 고집을 부려 성사한 약혼이었어.”
“세상에. 그런데-”
말을 이으려던 하인은 마저 문장을 잇는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저게 왜 저렇지?”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휘장에 가려진, 왼쪽 창턱. 정확히는 그 주위를 수놓은 한때는 만개했을 수목들에게서였다.
***
“고맙습니다.”
자주빛으로 물들어 가는 고원. 훈기 가득한 바람을 맞으며 그 한가운데 우두커니 말고삐를 잡고 서 있던 백작은 담담히 흘러 들어오는 음성에 설풋 눈을 내리감았다.
“백작님이 아니었다면 에오르테가의 존망은 장담할 수 없을 겝니다.”
고원에 울려 퍼지는 말발굽 소리, 흩어지는 웃음.
노을이 질 무렵 함께했던 승마가 그녀에게 선사해 준 찬란한 순간들은 덧없는 환상이 되어 아득한 어둠 속으로 소멸해 버렸다.
“이 말은 가시기 전에 꼭 해야 할 듯하여.”
둘의 만남은 그저 저택의 처분 때문에 성사된 것이다.
바람결에 잠시 잊고 있었던,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진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금 상기한 그녀는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마찬가지로 덤덤한 목소리가 고원 위의 공기를 흔들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니.”
날 버린 사내가 망가진 꼴이.
뼈 있는 문장을 덧붙인 그녀는 입술 끝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통쾌할 줄 알았지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헌데, 참 이상하지요. 왜 망가진 건 나인 것 같을까. 스러지는 가문 속에서도 그대는 기꺼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어서일까.”
“백작…….”
그저 농입니다. 그리 말을 흘린 그녀는 얼어붙은 공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눈을 돌렸다.
“예쁜 아가씨더이다.”
“……다 헛된 소문들입니다.”
차분히 흘러 들어오는 음성에 백작은 입가에 쓴웃음을 물었다.
알 수 없는 이채를 띤 잿빛 눈동자에는 경계하는 것도 같고 두려워하는 것도 같은 그런 감정이 미묘하지만 분명하게 나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헛된 소문들이라고?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백작은 하늘로 고개를 젖혔다. 다가올 어둠에 발악하듯 저물어 가는 해는 부연 불빛을 사방으로 던지고 있었다.
그래, 넌 그렇겠지.
자조 섞인 생각과 함께 극채색의 빛깔들이 소용돌이치는 하늘을 일별한 그녀의 시선은 흐르듯이 후작에게 닿았다.
백작이 되어 첫 무도회를 열던 날. 그녀는 수면 아래 일렁이고 있던 소문들을 확인해 보자 했다. 사람들은 그저 말도 안 되는 이라 치부하던 그 낭설들을. 그래서 그 여자를 불러 보았다.
루트비아 영애가 들어서는 순간, 유유자적 떠도는 구름 같은 후작의 낯은 평정을 잃었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나, 항시 그 여자를 쫓던 그의 눈도.
낭설이라 치부했던 말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 사교계를 뒤흔들었을 때 정작 그녀는 놀라지 않은 것은 그 탓이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 일어난 거라 여겼으니까. 별장을 찾아온 건 글쎄, 마지막 정리를 하기 위해서라는 게 적합하겠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세월의 질행 속에서도 끝을 맺지 못했던 마음이 마지막 종지부를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런 그녀의 시야를 파고든 건 다정한 눈빛, 따스한 음색. 귀중한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몸짓. 그러나 남녀 간 사랑의 열기로 충만한 마음은 아닌 것이 분명한 그런 감정들이다.
놀람과 당혹으로 뒤엉킨 깨달음이 지나간 자리를 메꾼 것은 허탈함이었다. 가까스로 다잡은 마음은 손에 쥔 모래알처럼 사라졌다. 다시 그녀는 단념하지 못할 마음을 이고 끝 모를 기다림 속에 허덕이겠지. 자꾸 헛된 생각에 희망을 걸고 그 가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로.
차라리 그가 저 영애를 마음에 두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모든 일이 더 쉬웠을까?
혼란스러워진 마음속에서 백작은 눈을 들었다.
여전히 기억 속의 것처럼 따스하고 다정한 사내는 그럼에도 그 옛날과 같지 않았다. 숲을 심은 듯한 짙푸른 녹안은 더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으니.
그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그녀의 저택을. 살갗을 타들어 가게 하는 뙤약볕 아래서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도 그 먼 거리를 날마다 찾아와 저를 만났던 소년이, 그녀 앞에 무릎 꿇고 평생 울지 않게 하겠노라고 맹세하던 그 소년의 눈이 더는 그녀를 담고 있지 않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
파혼을 말하는 밤, 내실에 울려 퍼지는 차분한 목소리. 그 잔혹한 말을 담담히 뱉는 너는 다정해 이 모든 게 꿈인가 싶다가도 그 눈은 더는 자신을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그녀는 또 스러지고.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 그래서 잊을 수가 없었어.
이 마음은 어떻게 해야 사라지는 걸까.
피비린내 나는 암투와 중상모략. 그 모든 것을 관통해 이제는 희미하게 옅어졌을 거라 여겼던 여린 소녀의 흔적 안에서 다시 피어오른 백작은 결국 무너지고야 말았다.
“이젠 정말 모르겠어.”
새까만 동공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이 끝이 나는 건지.”
물기 젖은 음성이 갈 길 잃은 아이처럼 허무하게 고원 위를 배회하면서.
“이리 담담히 나를 마주 보는 너는 도대체 누군지.”
잘게 떨리는 백작의 어깨를 보며 후작은 길게 한숨을 내어 쉬었다. 다독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결론을 맺지 못하고 한정 없이 길어지는 고심 속에서 후작은 지독히도 깊은 기시감을 느꼈다. 숨통을 조여 오는 밀도 높은 공기, 공간을 흔드는 떨리는 음성. 그리고 온몸을 휘감아 오는 무력감. 파혼을 말하던 밤, 그때처럼 그는 또 이 여자를 울리는 죄를 일삼는다.
형과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파혼은 당연한 수순처럼 이어졌다. 에오르테가의 가주에게 메로본가보다 더 나은 혼처를 쥐여 주려는 가문 원로들의 뜻과 조카가 성년이 되어 후계를 받기 전까지는 홀로 남으리라는 아무도 모르는 그의 결심이 맞물린 결과였다.
그러니 파혼을 해야만 했다.
그에겐 주어진 과제가 있었고 어찌 될지 모르는 앞날에 무작정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과연 그게 유일한 이유였을까.
가슴 한편에 묻어 두었던 물음이 떠오르는 순간, 고원의 공기를 찢는 세찬 외침이 그의 상념을 집어삼켰다.
“후작님!”
소리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에오르테가의 사용인이 저 멀리서 고원을 뛰다시피 올라오고 있었다.
“큰일 났습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다급한 외침으로 공기를 뒤흔들면서.
***
이거 참.
응접실 소파 위에 널브러지다시피 기절한 하인의 맥을 한참이나 짚던 랑게르 의원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에 질환도 딱히 없던 사내는 맥도 혈도 모두 지극히 정상인지라 무어라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정상이라…….
그러면 목이 졸린 것같이 파랗게 질린 사내의 안색은 어찌 설명할 것인가. 두어 번 헛기침을 하여 적잖이 놀란 마음을 갈무리한 그가 꺼낼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것이었다.
“급격한 호흡 곤란이 찾아온 것 같군요.”
눈먼 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내릴 수 있는 진단이라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따끔따끔 찔려 왔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니 면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몸이 허해진 것 같은데 근자에 힘든 일이 있었습니까?”
만물이 깨어나는 계절. 파종을 맞이하여 정신없을 영지민들을 페라비 별장의 사용인들이 도와 바삐 움직인다는 것을 모르는 척 덧붙인 말도 그래서였다.
“어머, 그래요. 파종을 해야 할 시기라 최근 영지민들을 도우러 자주 농지에 다녔거든요.”
마치 의원이 아니라 점쟁이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자괴감이 심중을 짓눌러 왔지만 입술은 이미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기력을 보할 약초 몇 가지를 일러두겠습니다.”
절뚝거리는 걸음걸이와 함께 지팡이 소리가 들려온 건 그가 막 원론적인 약재들을 하녀장에게 일러 주고 있을 때였다.
“엘몬트.”
페라비 별장의 집사를 발견한 랑게르 의원의 낯은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었다.
“랑게르 의원님.”
고갯짓으로 그에 답한 집사는 방금까지 그가 읊고 있던 약초들을 내밀어 보였다.
“아무래도 찾으실 듯하여.”
랑게르 의원의 얼굴에 희미한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그러던 차입니다.”
엘몬트가 약초에 관해 능통하다는 걸 모르는 이는 이 근방에 없었다. 대대로 약초학에 대해 깊이 탐구하던 에오르테가의 집사라 그런지 식견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치료 경험도 적지 않아 랑게르 의원은 내심 저보다 그의 실력을 더 높게 평가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저와 같은 진단을 내렸다니. 이 하인의 몸 상태가 정말 이상하긴 한가 보다. 제 판단보다 집사의 의견을 더욱 깊게 의지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일이 잘 마무리된 게 어딘가. 그런 심상한 생각을 곁들이며 랑게르는 목을 울렸다.
“그럼, 남은 일은 그대에게 맡기지.”
“무슨 일이지.”
가쁜 숨소리가 로비에 울려진 건 엘몬트가 방을 나서는 의원을 마차까지 안내하고 소란한 저택을 수습한 직후였다. 뛰어왔는지 거칠게 어깻숨을 내쉬는 모습이 다급히 걸음한 듯했다.
그저 몸이 불편한 이가 있어 의원을 불렀다고만 전하라니까.
상황을 전하라 보냈던 시종의 입이 방정맞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엘몬트는 부러 더욱 차분하게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하인 하나가 몸이 좋지 않은 듯합니다. 좀체 없던 일이라 일이 크게 부풀려진 모양입니다.”
수심으로 그늘져 있던 후작의 낯이 그제야 희미하게 밝아졌다.
“다행이군. 참, 랑게르 의원은 뭐라던가? 마뜩잖으면 내 수도에서 주치의를 부르겠네.”
“그럴 필요까진 없는 것 같습니다. 추이를 더 지켜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후작님. 잠시 기절한 이가 몸을 회복할 때까지 응접실을 써도 괜찮겠습니까.”
당연한 말을. 응접실을 써도 된다.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 반짝이는 눈을 간신히 진정시킨 엘몬트는 한참 후에야 다시 기절한 하인이 누워 있는 응접실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침착하기 그지없던 그의 낯에 근심이 짙게 차오른 것은 막 그가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한 하인의 상태를 확인한 직후였다.
도대체가…….
애초에 말이 되질 않았다. 어디 하나 상한 구석이 없는 이가 갑작스레 저런 발작을 일으킨다는 게. 그래도 그 가정을 믿고 싶었던 것은 그러지 않으면 더욱 이치에 맞지 않는 가설을 따라야 하기에.
엘몬트는 심란하게 요동치는 눈을 들어 올렸다. 누구도 깊이 고려하지 않은 내실의 시든 화초들이 그의 초점 잃은 동공 위로 하나둘 내려앉았다.
최근 들어 잦았지.
간간이 눈에 띄었던 죽은 식물들이. 리베라, 히아신스. 그 이름을 되뇔수록 기억은 더욱 선명해졌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온몸에 스멀스멀 기어 오는 불안감에 엘몬트는 여러 번 호흡을 짧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생각. 모르스 일족이라니.
허나…….
엘몬트의 눈길은 말과 달리 차창 밖으로 향했다. 날은 이미 저물어 밤이 이슥히 깊어 가고 있었다. 뭇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도 적당한 시간. 어둠에 잠겨 있던 까만 눈동자는 어느덧 결연한 빛깔로 차올랐다.
무엇이 되었든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지.
사방이 암흑으로 괴괴히 잠들자, 엘몬트는 희미하게 어둠을 사르는 등불을 하나를 들었다. 불편한 다리는 앞을 나아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지금 이 일 앞에서는 딱히 장애가 되지 않는다. 수 년 전 밥 먹듯이 해 왔던 짓이니.
에오르테가에는 뿌리 깊은 염원이 하나 있다.
바로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하이가 에오르테.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모르스 일족인 조상처럼 뛰어난 모르스 일족을 배출하고자 하는 염원이. 그것이 바야흐로 다시 가문의 부흥을 이끌어 낼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그들 혈족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던 탓이다.
유독 그 일에 매진했던 것은 전대 후작이었다. 두 아들이 그저 평범한 소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는 부정했다. 마치 후천적인 어떤 성질을 통해 능력이 발현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같았다. 그리하여 제국에서, 아니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학자들부터 시작해서 입 발린 요설을 늘어놓는 시정잡배들까지 모두 에오르테가의 문을 두드렸다.
모르스 일족.
이 마법 같은 단어 하나면 언제든 활짝 열린 문을.
에오르테가에서 약초학이 유달리 발달된 까닭도, 한낱 집사에 불과한 엘몬트가 의원들보다 모르스 일족에 관해선 더 세밀한 눈을 가질 수 있던 것도 같은 선상이다. 날마다 그들 일족에 관련된 서책을 읽고 실험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만약 저 상흔의 원인이 모르스 일족의 힘이라면. 숲 깊숙이 위치해 달빛에 젖은 야생 리베라가 유일한 답이다.
기어코 숲 입구에 다다른 엘몬트는 비 오듯 쏟아지는 이마의 땀을 닦아 내렸다.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다리가 마비되어 아무래도 더 걷기는 무리가 있었다. 지팡이와 등불을 내려놓고 잠시 나무 밑동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밭은 숨을 내뱉던 그가 별안간 호흡을 멈춘 것은 뻣뻣해진 다리가 조금 풀어졌을 즘이었다.
착각인가.
그는 가늘어진 눈으로 숲을 세밀히 살피며 숲에 감도는 기이함에 귀 기울였다. 그가 느낀 묘한 기류가 착각이 아니라는 걸 깨닫자마자 엘몬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숲은 지나치게 적막하고 또 고요했다.
새소리도 풀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 마치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버슬버슬한 흙과 메마른 잡초를 지나는 엘몬트의 걸음이 조급해졌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기 시작하자 더욱 그러했다. 이윽고 숲의 중심인 호수에 다다른 엘몬트는 잠시 숨을 멈췄다.
처참했다. 끔찍하다.
이 광경을 표현할 수 있는 낱말을 과연 세상에서 찾을 수 있을까.
잔자누룩한 호수에 스며든 핏물을 보자 그는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숲이 죽어 가고 있었다.
무섭도록 위험하고 잔혹한 능력에 의해.
평정을 잃으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생을 앗아가고 마는…….
곳곳에 가득한 잿빛 그을음과 흔들리는 앙상한 나뭇가지, 짐승들의 사체로 뒤덮인 풀밭을 지나친 그의 눈이 크기를 키운 것은 호수 도래에 닿았을 무렵이었다.
그곳에 자리 잡은 칠야의 밤을 밝히는 은발에.
“……아델리아 양?”
사람들은 그들을 모르스, 죽음을 부르는 일족이라고 말한다.
***
“당장 알려야 합니다.”
단호한 엘몬트의 목소리가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책상에 앉아 있던 후작은 멍하니 풀어진 초점을 맞추려는 듯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땀에 젖은 채로 저택에 들어선 집사의 품에 들린 것은 기절한 아이였다. 한바탕 소동에 사라진 아이를 깨닫고는 이를 찾으러 막 가문의 기사를 풀려고 하던 찰나였다.
아이의 몸은 서늘했고 의식은 없었다. 다시 한번 랑게르 의원을 부르려 한 후작을 엘몬트가 막아 세웠다.
‘안 됩니다.’
추이를 지켜보자는 말도,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말도 아니었다. 일의 심각성을 짐작한 순간, 엘몬트가 내놓은 말은,
모르스 일족.
절대 그의 입에서 다시 들을 리 없다 생각한 그 단어였다.
“후작님, 이건 아델리아 양을 별장에 머물게 하고 후견인이 되는 문제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저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가 넋을 잃고 있는 사이, 엘몬트는 말을 이어 갔다.
“모르스 일족을 숨긴 대가가 무엇인지 정녕 모르신단 말입니다. 당장 모르타 위원회에게 연락해야 해요.”
멍하게 넋을 놓고 있던 그의 정신이 돌아온 것은 그 단어가 귓가를 파고든 직후였다.
모르스 일족의 열한 명의 위원들로 구성된 단체, 모르타 위원회.
고작 여섯 음절의 단어 앞에 의자 팔걸이를 쥔 후작의 손 위로 시퍼런 핏줄이 꿈틀거렸다.
“후작님, 저도 아델리아 양을 아끼지만, 지금도 에오르테가는 헛한 말이 나오기 충분한 상황입니다. 게다가 공작 가문까지 등을 지지 않았습니까.”
지금 그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자칫했다간 멸문을 면치 못할 거예요.”
이 지독한 상황이 정녕 현실이란 말인가. 시야에 가득 찬 농밀한 어둠의 장막, 그보다 더 짙게 가라앉은 암갈색 눈동자, 저택을 떠나가라 울리는 비명소리…….
그 모든 것들을 차례로 떠올리던 후작은 눈을 내리감았다.
“그들은 절대 그 애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렇지?”
그때처럼. 속삭이듯 후작의 입술을 타고 흐른 음성은 이전까지와는 궤가 달랐다.
온갖 실험들을 할 것이다. 그들이 에오르테가로부터 하이가의 보검을 앗아가기 위해 벌였던 일들이 얼마나 잔혹했던가. 거기에 속아 넘어간 어머니의 어리석음 못지않게 후작은 그들의 잔인함을 똑똑히 기억한다. 하물며 모르스 일족의 여인이라니. 제국 역사상, 아니 이 대륙 어디에서 들어 본 적도 없는 이야기였다.
앞으로 펼쳐질 선명한 상황들을 그려 본 후작은 어둠에 묻힌 눈을 들어 올렸다. 결연한 눈을 한 엘몬트가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애를 넘기라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리 눈에 선한데.
그의 뇌리에도 이리 깊게 박혀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는데.
그런데도 또 그 애를 넘기라고?
그때처럼?
“……흔적을 지워야 해.
“……예?”
“말을 준비해 주게, 엘몬트.”
광활히 펼쳐진 밤의 시간. 다시 들을 수 없을 거라 여겼던 그 단어를 마주하고 후작이 내릴 수 있는 선택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
불이 났다. 메이나 숲에서.
긴 잠에서 깨어나자, 집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리 설명해 주었다. 급격한 과로로 쓰러진 시종과 건조한 계절이 만들어 낸 숲의 화재.
간밤에 있었던 일은 모두 꿈인 것처럼.
흐릿한 의식 속에 또렷한 비명소리. 내 손끝에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 그 연기에 닿자마자 쓰러지던 시종까지. 그 모든 게. 꿈결처럼.
짤막한 설명과 함께 어수선한 바깥 상황을 돕기 위해 집사는 방을 나섰다.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지팡이 소리가 멀어지자, 나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려 보았다.
그럼 그건 전부 다 환상이었던 걸까?
쇠냄새가 옅게 밴 피비린내와 추락하는 박새, 시들어 버린 풀잎들. 그게 전부 다? 그랬던 걸까?
문이 열린 건 그렇게 안개에 젖어 가늠할 수 없는 사위에 휩싸인 것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념 속을 헤매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델.”
후작이었다.
“몸은 좀 어떠니.”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사내의 진초록 눈은 여전히 나를 담고 가늘게 웃어 보였다. 만약 그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더라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랬더라면 저 눈은 조금 짙게 가라앉고 귓가에 들려오는 음성은 상냥한 물음이 아닌 딱딱한 통보였을 테니. 모르타 위원회를 불렀다는. 혹은 불러야 한다는.
그 절대적인 가치 아래 제국은 가늠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자들을 통제해 왔고 그런 통제에 대한 무언의 합의가 모르타 위원회의 근간이었다.
모르스 일족.
혀끝에 심각하게 굴려 보던 단어는 이제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대륙이 생겨난 이래 죽음을 부르는 힘을 발현한 여인은 그 누구도 없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 아들이 또 그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그런 힘인데 말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눈을 들어 올리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녹안과 얽혀들어 갔다.
“의원 말이 많이 놀란 것 같다구나, 이젠 괜찮니?”
작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설풋 웃음을 짓고 혀끝으로 그 문장을 밀어냈다.
“……이상한 꿈을 꿨어요.”
“무슨 꿈?”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그가 나직이 물었다.
“모르스 일족이 되는 꿈이요.”
“정말 이상한 꿈이구나.”
“너무 생생해서…….”
마치 진짜 같아.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나는 꾹꾹 힘주어 손마디를 눌러 보았다. 혹 그곳에서 또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올세라. 뜻 모를 행동에 후작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왜 그러니, 아델?”
연기가, 모르스 일족의 검은 연기가 나올까 봐서. 차마 뱉지 못한 문장을 담고 입술을 옴죽거리자, 후작이 천천히 말했다.
“들어 본 적 있니? 여인의 몸으로 모르스 일족이 된 자의 이야기를.”
“……아니요.”
후작은 내 뺨을 어루만졌다. 다시금 떠오르는 알 수 없는 기억 앞에 요동치는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직접 눈을 맞추며.
“그런데 무엇을 걱정하는 거니.”
가늘게 웃음을 거는 모습에 초점을 잃고 배회하던 동공이 차즘 제자리를 찾아갔다. 일렁거리는 마음 역시 평정을 되찾았을 무렵 달칵, 맑은 울림이 후작의 손끝에서 울려 퍼졌다.
“그게 뭐죠?”
결이 엇갈려서 독특한 무늬와 분위기를 자아내는 나무 상자 안에는 고요한 광채를 풍기는 녹색 브로치가 담겨 있었다. 한눈에 봐도 깊은 세월을 지나 왔을 것 같은 보석은 후작의 손을 지나 내 앞으로 굴러떨어졌다.
“형님이 내게 준 것이란다. 겪은 일이 많아 마음이 번다할 땐 이걸 꼭 쥐고 있었지. 그럼 헛헛한 생각은 들지 않았어.”
이젠 너에게 주마.
나지막이 덧붙인 말과 함께. 조심스레 손바닥 위에 놓인 브로치를 굴려 보고 있자, 후작은 희미한 미소를 띠며 이를 달아 주었다.
“예쁘구나.”
은은한 불빛에 부딪친 브로치의 빛깔은 입고 있던 드레스와 잘 어우러졌다. 괜스레 매무새를 가다듬으려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곱게 휘어진 눈매가 가늘어진 것은 그 찰나였다. 타오르는 불빛에 잠식되어 가는 것처럼 드레스는 점점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후작님?”
의아함이 깃든 눈을 들어 올리자 시야에는 반듯한 눈매와 그 밑에 방금 막 종이에 베인 것처럼 보기만 해도 아릿해 보이는 상처에서 떨어지는 굵은 핏방울이 차례로 잡혔다. 내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까지.
‘모르스 일족이 되는 꿈이요.’
그러니까 그건, 그 악몽은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지.
***
“조금만 더 위를 다치셨다면, 실명하실 뻔하셨어요.”
엘몬트의 담담한 말소리가 후작의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유백색 연고에서 흘러나온 알싸한 잔향이 그 음성을 따라 풍겨 왔다.
“곧바로 브로치를 채우셨어야죠. 도대체 무슨 생각이셨습니까. 원체도 위험한 일족인데 성년을 앞두고는 더욱 능력이 통제가 되질 않는다 들었어요. 그런데 그리 아무 방비도 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꼼꼼히 후작 눈 밑의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로 덧바르는 와중에도 그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가씨께 그 브로치가 무엇인지 설명은 드렸습니까?”
말해 주려 했다. 미룬다 하여 달라질 건 없으니까.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아무래도 너는 모르스 일족인 듯하고 네게 채워 준 그 브로치는 잠시 네 힘을 제어하는 장치라고.
그리 말해 주려 했어.
헌데, 그 눈이 그를 담고 투명하게 부풀어 근심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안온이 기꺼워. 차마 입술은 떨어지지 않고 조금만 더 있다가. 조금만 더…….
그게 결국 사단을 만들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후작님.”
엄중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해가 지지 않아 온종일 그늘진 곳이 없는 나라가 있다 들었어.”
“라마타를 말씀하시는 겝니까.”
뜬금없는 주인의 말에 엘몬트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사시사철 얼어붙은 강과 몽환적인 색상으로 뒤덮인 하늘. 그리고…….
“그래, 라마타.”
모르스 일족에 대한 감시가 적은 극지방이다. 그 뜻을 알아차린 엘몬트의 낯이 일순 어두워졌다.
“후작님,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제국을 빠져나가는 것도, 그동안 아가씨의 상태를 감추는 것도 그 모든 순간에 목숨을 거셔야 합니다.”
“모두가 그리 여긴다면…….”
“…….”
“누구 하나쯤은 이렇게까지 해야 되지 않겠나, 엘몬트.”
그때와 달리 말이야.
나직이 덧붙인 말에 엘몬트는 제 손에 쥐고 있던 연고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같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그 눈은 깊고 아득한 심연 속을 헤매는 것처럼 탁하게 물들어 있었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자신처럼.
모두가 외면해 버려진 아이를 기억한다. 어쩔 수 없었다, 그 단어 뒤에 숨어 지키지 못했던 아이를 기억해.
“이 짓을 다시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참담한 중얼거림이 유백색 연고 위로 내려앉았다. 이미 오래전 후작이 알고 있던 빛깔을 한. 여전히 불쾌하고 끈적한 감각을 주는. 이걸 처음 보던 순간을 그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날은 리오가 저택에 머물게 된 지 꽤 시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그 애의 방에 놀러 가려는 라에갈을 막아 세운 건 집사였다.
‘공자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미간을 팍 찌푸리자 엘몬트는 달래듯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잠시면 됩니다.’
그 손끝을 따라 퍼지는 코가 얼얼한 내음에 그가 더욱 눈매를 좁히자, 엘몬트는 손을 숨겼다. 조금 어색한 미소를 걸고.
잠시라던 시간은 꽤 길었다. 마리가 내온 간식을 먹고 홀로 정원을 쏘다니고 해가 저물 즘에야, 그는 그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아이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재잘대며 제가 살던 집과 아버지 얘기를 해 주던 평소와는 달랐다.
‘울었어?’
‘아니.’
대답과 함께 아이는 입술을 짓깨물었다. 하도 꾹 다물려 숨조차 쉬기 어려울 것 같은 입술을 물끄러미 보다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형이 심하게 아플 때 꼭 저러는데 꺼억꺼억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곤 했다. 분위기를 풀려 두어 번 친 장난도 통하지 않자 라에갈은 괜스레 무안한 마음에 애꿎은 옷깃만 만지작거리고 방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별 볼 것도 없는 방 구석구석을.
‘이게 뭐야?’
협탁 끄트머리에 놓인 은빛 물체를 집어 들자,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던 아이의 눈이 크기를 키웠다. 비밀이라도 되듯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제 손에 든 걸 앗아가려던 아이는 그만 비틀거리며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의 옷가지 사이로 나비치는 이상한 흔적이 눈에 잡힌 건 그때였다.
‘여긴 왜 이래.’
거무스름하면서도 살짝 붉은기가 도는. 그 아이의 보드라운 살결에 말이다.
‘……나가’
‘뭐?’
‘나가란 말이야!’
아이는 악을 쓰기 시작했다. 소란에 하녀가 뛰쳐 들어왔고 곧이어 집사까지 방에 들어섰다. 서둘러 그를 방에서 데려 나온 집사는 이만 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그를 방으로 인도했다.
아주 재밌게 놀 거라 기대했는데. 갑자기 화만 내고.
‘이상한 애야.’
터져 나온 볼멘소리에 앞서가던 엘몬트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그는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렸다. 역광 속에 가려진 그의 표정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뺨에 닿는 격양된 공기를 감안하건대 그리 좋은 신호는 아니라는 것을 라에갈은 직감했다.
‘……친절하게 대해 주세요, 공자님.’
‘친절하고 말고 할 게 어딨어. 맨날 방에 없는데.’
치이, 또 그 애 편만 들고. 퉁명스레 대꾸하고는 쾅쾅 발을 굴리며 집사를 다시 보지 않을 기세로 앞질러가던 그가 몸을 뒤로 돌린 것은 문득 솟아난 물음 때문이었다.
“근데 엘몬트, 리오는 매번 어딜 가는 거야?”
***
“백작님, 영지 관리인이 도착했습니다.”
시종의 안내에 따라 루트비아 백작의 침실로 들어서던 관리인은 멈칫했다. 백작의 병환이 깊어진 후로 자잘한 일들을 그의 선에서 해결한 탓에 이리 직접 대면한 일을 아주 오래간만이었는데 이를 실감이라도 하듯 백작의 만면은 기억 속의 것과는 아주 많이 달라 있었던 것이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도 그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는 선연했다. 수도에서 공작 부부가 내려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게 영 헛소문은 아닌 듯했다. 이를 의식이라도 한 듯 백작은 주름진 손으로 낯을 쓸어내렸다.
“간밤에 잠을 설쳐.”
화재. 그제야 관리인은 어지럽던 낯을 갈무리했다. 갑작스레 일어난 화재가 메이나 숲을 삼켰다. 이는 그가 여기까지 걸음한 이유기도 했다.
“불길은 이제 어느 정도 잡혔다 합니다.”
그의 말에 백작은 몸을 일으켰다. 시중을 들던 하인이 재빨리 백작의 등 뒤로 기댈 만한 것을 가져다주었으나, 이를 손짓으로 물린 그는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피해는 얼마지.”
“다른 쪽은 어느 정도 회복이 가능해 보이나, 숲의 중심부가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호숫가 말인가.”
“예.”
단호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백작은 가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 밤중에 거기서 무얼 하러.”
“약초를 찾으러 갔다 합니다.”
좀체 믿기 힘든 대답이었다. 만약 그 사내가 에오르테 후작이 아니었더라면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 치부했을 테다.
허나 에오르테 후작이라면 말이 다르지.
한밤중에 저택을 찾아와 사생아의 후견인이 되겠다고 담담히 말한 사내를 기억한다. 몹시도 단정했지만 그 눈빛만은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메이나 숲에, 모르스 일족의 힘을 갖게 해 주는 약초가 있으니 숲을 들어가길 허락해 달라 청하던 그 애미가 되살아난 줄 알았지.
에오르테가에는 무슨 광기라도 흐르는 것인가…….
여기나 저기나 다 미친놈들 천지구나, 덧없이 몰려오는 자조적인 상념에 백작이 쓴웃음을 입가에 그리는 사이, 관리인은 차근차근 보고를 이어 나갔다.
“이 일을 논의하러 페라비 별장에 다녀왔사온데, 후작이 이에 대해 크게 사과하며 변상한다 약조했습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는지 관리인은 말끝을 흐렸다. 묻지 않아도 무엇을 염려하는지 훤했다.
변상.
황제가 요구한 전쟁의 충당금도 간신히 마련한 치에겐 불가능해 가까워 보이는 약조 아니던가. 에오르테가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 제국에 파다한 사실을 백작 역시 모를 리 없었다. 주 수입원이던 모직 산업이 전쟁을 목전에 두고 위축된 데다가 원체 괴상한 행동들이 잦아 사교계에서도 배척당한다고. 손을 타지 않아 진귀한 약초들이 즐비하고 특히나 전란을 앞둔 지금 같은 상황에 더더욱 가치가 치솟은 메이나 숲이니 더더욱.
보지 않아도 훤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쯤에서 후작 가문이 가진 적당한 담보를 받고 깔끔히 일을 매듭짓는 것이 여러모로 적당할 터. 관리인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차라리 페라비 별장을 담보로 잡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해결책 앞에서 백작의 심중은 다른 생각으로 차올라 있었다.
위태롭구나.
세찬 바람 앞에 등잔처럼 에오르테가에게 드리운 우환들은 끊이질 않는다. 그 쇠잔의 징조는 뚜렷하여 몰락이 머지않았음이 불 보듯 뻔했다. 아마 이 기세라면 전쟁이 끝날 때쯤이겠지.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상념이 결국 에오르테가에 대한 염려로 끝을 맺자, 백작은 기가 막힌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상념이 지나치게 우스운 탓이다. 살다 살다 에오르테가를 걱정하는 날이 올 줄이야…….
세상일이란 참으로 놀라운 일들의 연속이구나, 그런 생각과 함께 후작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메이나 숲에서 피어오르고 있을 거뭇한 연기가 그의 시야를 덮었다.
애초에 그 변상을 받을 생각 따윈 없었다.
루트비아가에 대대로 내려오던 유산이긴 했으나, 가문 소유의 광산이 전쟁 대비로 높은 값에 임대되고 있기도 하고 모자랄 것 하나 없는 사위 덕에 루트비아저를 찾는 이들이 천지로 널렸으니. 게다가 삶의 마지막 여행을 목전에 둔 이가 그런 것을 구태여 신경 쓸 일이 무에인가.
백작은 냉소 섞인 자조와 함께 눈을 가늘게 떴다. 차츰 설핏해진 연기를 따라 처음 숲의 화재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의 심상을 어지럽힌 상념이 흩어진다.
결국 이리 끝나는 건가.
한 번을 같이 가 보질 못한 채로. 그제야 백작은 짐작할 수 없는 의식의 맥을 짚어 내릴 수 있었다. 어둠에 가로막힌 눈 위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래, 그가 진정 염려하는 것은…….
“페라비 별장으로 사람을 보내게.”
긴 침묵 끝에 흘러나온 명에 관리인의 낯이 밝아졌다. 여러모로 그게 적당한 해답이었다. 어떤 뜻인지는 진정 모른 채로.
그 시각, 또 한 번의 파란을 몰고 올 소식이 도착할 것을 알지 못하는 페라비 별장은 이미 다른 소식으로 들끓고 있었다.
“뭐? 라마타로?”
오찬 준비로 분주한 아래층 식당에 울리던 경쾌한 박자의 칼 소리는 놀란 기색이 역력한 외침과 함께 일순 멎었다. 말을 건넨 하녀는 예상보다 격렬한 반응에 혹 누가 들었을세라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곧, 수도 별장도 처분하신대.”
수도에 있는 본가를 처분한 지가 며칠이나 되셨다고. 멍하게 눈만 깜빡이고 있자, 말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멋지지 않아. 온종일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니. 신기하지. 어찌 밤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래도 그치들도 없다는 건가.”
왜 모르스 일족 말이야.
대륙 곳곳에 자라는 모르스 일족은 각 제국들이 엄격하게 관리한다. 위험하기도 하고 곧 내부의 전투력이 될 수도 있는 이들이니. 제국마다 그 일족의 수는 상이했는데 라마타는 적은 인구수 탓인지 세력이 적었고 이들에 대한 통제가 적은 실정이었다.
비교적 모르스 일족의 세력이 강성한 제국과 사뭇 다른 분위기에 한때 사교계에서 손꼽히는 휴양지라 듣기도 했다. 모르스 일족, 해가 지지 않는 나날들, 태양의 여광이 남은 길가, 얼어붙은 강과 푸르른 성에도. 하지만 그 누구도 저택까지 처분하며 일을 벌이진 않았지.
다시 칼질을 시작한 하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러다 페라비 별장마저 파시겠어.”
***
라마타.
긴 설명 끝에 후작의 입에서 나온 결론은 그것이었다. 모르타 위원회도, 루트비아 저택도 아닌 라마타.
“준비할 게 많겠지만, 일단 간소하게 챙기는 게 좋을 듯해.”
난 느리게 눈을 들어 올려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제가 하고 있는 말의 무게를 모르는 건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전자라면 더없이 어리석은 자요. 후자라면 제정신이 아닌 자인데, 무엇이 더 나쁜 상황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내가 해갈할 수 없는 문제로 고심하는 사이, 테이블 위에 펼쳐진 서류 더미를 차근차근 가리키던 후작이 고개를 젖혔다.
“여러모로 긴 여정이 될 테니 말이야.”
동시에 유리창으로 들이친 맑은 햇살이 그의 낯 위로 뚜렷한 빛줄기를 냈다. 이마 위에 흘러내린 투명한 백금발과 짙푸른 녹안을 스쳐 지나 그 밑에 자리 잡은 붉은 생채기까지.
예리한 종이에 베인 것 같이 날카롭게 그어진 상처는 제법 아물어 그 위로 생살을 돋아 내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흐르던 핏방울이 어제 본 것처럼 선연하게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는다.
차마 더 시선을 주지 못하고 슬며시 눈을 거두어 아래로 떨어트리자, 이번에는 떨리는 내 손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 손끝에서 피어 나오는 검은 연기와 파랗게 질린 사용인의 낯이 하얗게 점멸한 머릿속을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어느 곳 하나 마음 편히 시선 두기 어려울 정도로 믿기지 않는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중 제일은 단연 후작의 행동이었지만.
“아델?”
오후의 햇살 깃들어 더욱 다정한 눈동자는 나를 담은 채 한없이 부드러운 빛깔을 만들었다. 제 눈가의 흠집도 그 상흔을 만든 내 힘도 모조리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 농도 짙은 눈빛에 절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미쳤다.
그 문장 말고는 달리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뭘 모르는 나에게조차도 확실하게 보이는 예사롭지 않은 징조들이 가리키는 끝은 하나였다. 모르스 일족. 마땅히 제국의 신민이라면 모르타 위원회를 부르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허나, 그러지 않으면 그 대가가 무엇인지 모를 리 없을 사내는 전령을 보내는 대신 흔적을 지웠다. 그뿐인가. 아무 방비도 없이 나를 다독이고 달래고.
‘괜찮아.’
뺨 언저리를 타고 바닥을 적시는 핏방울에도 그는 그렇게 가만히 속삭였다.
‘괜찮단다, 아델.’
자칫하면 한쪽 눈을 잃을 뻔한 사람답지 않게.
다시금 되새긴 그날의 잔상에 아득해진 정신이 온갖 망령된 생각들로 점철되기 시작하자, 나는 재빨리 브로치를 움켜쥐었다. 후작의 시선이 닿은 건 그 무렵이었다.
“불편하니?”
좁혀진 미간에는 염려의 기색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답답할 수 있어. 모르스 일족의 힘을 억누르는 파툼이니.”
파툼.
모르스 일족의 발현자로 판정이 되면 제국에서 보급해 주는 그것은 반지, 팔찌, 목걸이, 브로치 등 휴대하기 좋고 쉬이 낙인이 찍히지 않게 눈에 띄지 않는 물건들로 변형되어 제공된다. 나처럼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어린 모르스 일족에게 필수적이기도 하고. 후작이 내게 준 브로치 역시 같은 선상에 있었다.
파툼.
여태 익숙해지지 않는 단어를 가만히 혀끝에 굴려 보는 사이, 후작은 테이블을 건너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너무 갑갑하면 풀고 있어도 될 듯해.”
높이 솟아올라 쉬이 볼 수 없는 태양처럼 부신 녹안은 제 눈 밑의 상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무구하게 깜빡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자칫 속아 넘어갈 만한 헛소리를 외면하고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풀고 있으라…….
하기사, 저택 내부에 가치가 있는 것들은 모조리 처분하고 감히 황제와 모르타 위원회를 속이고 제국을 벗어나려 하는 판국에 그가 하지 못할 말이 무엇인가. 아마 그는 내가 당장 이 자리에서 제 손 하나를 앗아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허탈한 웃음과 함께 기다란 한숨이 흩어진다.
이해가 가질 않아.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아니 처음부터 내게 보여 주었던 따스함, 조카에게 보여 주는 다정함과 비견될 만큼 너른 품.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고작 그저 외면해도 될 사생아에게 보이는 깊은 호의가, 누가 보면 꽤 사연 있을 법한 그의 관심 밑바닥에는 실상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러니 자꾸 다른 바람을 걸게 되지.
“아델?”
혹 그게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닐까 두려워하면서.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왜 당신의 눈은 나를 이렇게 가득 담고 세상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중하지 않는 듯 구는 겁니까,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던 그 물음이 오늘은 기어코 흘러나오려던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을 건드렸다.
“후작님, 루트비아저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잠시 기다리라 하게.”
낮은 후작의 목소리는 문가에 서 있던 시종은 주춤하게 만들 정도로 단호했다. 그러나 꽤 중한 사안인지 시종은 머뭇거리면서도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그게…… 백작님의 상태가 위중해 아가씨를 모시러 왔답니다.”
***
고원 위로 솟아나던 해는 벌써 서편으로 저물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침묵하던 백작은 낙조가 그려 낸 잔광이 유리창을 투과해 희끗희끗한 잔털이 섞인 은발과 단정하게 늘어트린 속눈썹 위를 차례차례 물들일 즘에야,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친히 전령을 보내고 기사들을 불러 나를 데려온 지 반나절 만이었다.
“라마타로 떠난다고.”
노쇠한 입매를 타고 흘러나온 쇳소리 같은 음성은 기억 속의 것보다 힘을 잃었다.
“해가 지지 않는 백야라…….”
아득한 어딘가를 보는 것 같은 시선 역시 그랬다.
무엇하나 내게 와닿지 않았지만. 두 다리는 이곳에 있지만, 여전히 나는 별장에 머물고 있어.
‘꼭 가야겠니.’
도망치듯 이곳으로 왔다.
침묵마저 녹일 듯한 부드러운 어조와 불안하게 구르는 녹안을 다 외면하며. 이젠 정말 한계라. 조금만 더 함께 있다간 저 심연 아래 꼭꼭 갈무리해 놓았던 마음들을 다 들켜 버릴 것 같았다. 결국 그 물음들을 다 뱉고야 말 것 같아서.
그렇게 도망치듯 온 게 고작 이곳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돌아보지도 않으리라 여겼던. 허탈한 웃음이 입가에서 배어 나왔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어리석은 과거의 나를 향한 냉소였다. 자신 있었어. 그들이 나를 버려 주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돌아오지 않을 자신이. 버리지도 책임지지도 못하는 그들의 나약함을, 무지를 쉬이 비웃을 수 있을 정도로 내게 세상은 단순하고 또 명확했으니. 그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에게만 주어진 축복이라는 것을 모르고서.
자조 섞인 한숨과 함께 시선을 떨어트렸다. 혈조를 가라앉히고 그무러진 마음을 다잡고자.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이 흐릿해진 마음을 가득 메웠다. 누군가를 진정 마음에 담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세상을 마주할 수 있는 걸까. 끝에 도달했다고 여겼을 때 다시 아득히 멀어져 가는 미궁 같고도 모순적인 세계를.
백작의 음성이 공간에 울려 퍼진 건 그때였다.
“오지 않을 줄 알았다.”
줄곧 차창 밖에만 향해 있던 시선은 어느새 내게 와닿아 있었다.
너는 절대 다시 오지 않을 줄 알았어.
자조 섞인 중얼거림이 어쩐지 후작의 것과 닮았다는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져 있는 사이, 차분한 음성은 계속되었다.
“그래도 만약 네가 온다면 온전히 네 것 하나쯤은 주어, 오지 않아도 오고 싶을 때에도, 영원히 변치 않을 네 것을 하나쯤은 주어…….”
늘 기탄없이 말을 이어 가던 그는 거기서 말을 멈추었다. 지그시 감긴 눈꺼풀은 모진 시련을 견디는 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 내리덮은 눈꺼풀 올라가고 나와 꼭 같은 잿빛 눈이 또렷하게 나를 직시해 왔다. 뭇 사람들의 단호한 평에도 단 한 번 같다 여겼던 적 없던 눈에는 거친 세월의 풍파를 이겨 낸 자의 기상이 깃들어져 있었다.
“라마타로 가거라.”
그 눈이 말했다.
“돌아보지도 말고 주저하지도 말고. 그저 날듯이 그렇게.”
유구한 세월 속 갖은 풍상을 다 겪고도 마멸되지 않았던, 주름진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내게 내밀면서.
“제법 값어치가 될 것이야.”
낮은 목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흔들었다.
***
이튿날, 수도에 소식이 번졌다. 루트비아 백작이 끝내 깊은 병환으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었다. 항시 세상을 뜰 날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니 안타까우나 그리 놀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그 뒷부분이었다.
새 백작의 탄생.
***
노망난 늙은이.
차창 밖으로 빠르게 펼쳐지는 자연의 풍광을 느리게 감상하던 공작은 낮은 조소와 함께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단정한 손안에는 지난밤, 평온했던 그의 하루를 뒤흔든 서신이 들려있었다. 아델리아 루트비아가 새 백작이 되었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소식이 담긴. 다시 한번 서신을 읽어 내리던 공작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젖혔다.
여전히 현실감 없는 내용이었다.
아델에게 작위를 물려준다니. 그것도 공식적으로 반쪽짜리 사생아에게. 저택에서 키울 적에는 늘 그리 본체만체하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아무래도 제 장인이 말년에 망령이 든 것 같았다. 차라리 그 오락가락하는 정신으로 동남부의 광산을 제게 넘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그도 기꺼운 마음으로 백작의 장례를 준비하고 백작 역시 가벼이 세상을 떠날 수 있으니 모두에게 이로운 결말이었을 텐데.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이제 어떡해요.”
전통적 습속에 따라 섬세한 자수가 새겨진 검은 예복을 갖춰 입은 부인은 젖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물었다.
“모두가 다 그 얘길 할 거에요. 왜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된 거냐고.”
유일하게 적법한 후계자가 공작 부인이 되며 마땅한 권리를 포기했으니 루트비아가의 백작 자리는 기실, 먼 방계인 르네타가의 장남이 잇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 모두가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고. 그런 일이 틀어졌으니 응당 장례에 초청된 이들의 주된 화두는 그것이 될 것이다.
“그러다 혹시 누군가가 수상쩍은 낌새라도 눈치챈다면.”
말을 이어 가던 부인은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나 너무 못됐죠.”
작은 손으로 괜스레 드레스 자락을 잡고는 꼼지락거렸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마당에 이런 걱정이라니. 하지만…….”
공작은 불안으로 차오른 물음에 답을 주는 대신 제 앞에 앉은 여자를 직시했다. 기다랗게 늘어진 속눈썹에는 물기가 괴였고 그 아래 눈시울은 붉었다.
속이 훤히 다 보이는 여자다.
아마 백작의 장례를 준비하는 내내 그러겠지. 필경, 그 수상쩍은 기색에 소문을 둘러싼 추측들은 더욱 무성해질 것이고.
중한 일들은 대부분 그의 선에서 처리하는 까닭 역시 거기에 있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원체 겪은 일들이 다망하니.”
“아무래도 전 저택 안에만 있어야 할까 봐요. 혹 무슨 실수라도 해 이목이라도 끌면.”
“글쎄, 그게 더 이목을 끌지 않을까.”
허나, 지금은 다르지. 그 손 위로 제 것을 포갠 공작은 비스듬히 입술을 기울였다.
“나가. 나가서 당신이 젤 잘하는 걸 해.”
뒤엉킨 후계 구도, 그 전날 저택을 방문한 사생아, 눈물이 마를 새 없는 이복언니. 어떻게 보일지는 만들기 나름이니.
모든 것은 곧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
장례는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전쟁을 앞둔 시국에 여러 격식들을 생략하고 간소하게 치러질 식에는 그럼에도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말년에 다망한 일들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한 루트비아 백작이었지만, 한때 황제의 우직한 충신으로 자리하며 제국의 반석을 닦은 명성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나 보다. 어린 시절, 그의 제자로 지내었던 황태자마저 잠시 모습을 드러낼 정도였으니.
“공작.”
저 멀리 가도 밖까지 뻗쳐져 있는 엄숙한 장례 행렬을 지켜보고 있던 황태자는 가늘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가르고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청원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어느새 황태자의 시선은 인파를 스치듯 지나 격양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공작 부인에게로 닿아 있었다. 아비에 대한 죄책감, 혹여 들킬 수도 있는 비밀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뒤엉켜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으나, 사람들에게는 응당 조금 다르게 비춰질 것이다.
“글쎄요,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고인의 뜻이 그러한데 어찌 제 사적인 감정을 내세우겠습니까.”
심각한 문장은 다소 심상한 어투로 흘러나왔다. 상념에 잡아먹힌 이는 이를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비단 사사로운 일이 아니네. 벌써 이를 두고 잡음이 일고 있어.”
제국의 황족을 상징하는 금빛 눈동자. 황금을 떠올리게 하는 짙은 색감에는 깊은 수심이 드리워 있었다.
루트비아가의 뒤를 잇기로 예정되어 있던 르네타 남작가는 실상, 신흥 세력이었다. 무역의 발달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나 마땅한 작위를 갖추지 못한 그들은 무너져 가는 귀족 가문의 신분을 취하는 방식으로 사교계에 발을 내딛고 있었다. 그러나 응당 곱지 않은 시선이 따르는 것은 당연지사. 그런 신흥 세력 중 하나인 남작이 오랜 세월 제국의 근간을 이루었던 루트비아 백작이 된다는 사실에 암암리에 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일이 이리 틀어졌으니 실망은 또 오죽할까.
“신흥 세력의 불만이 클 게야. 저들을 우습게 만들려 부러 일을 그르쳤다 말하겠지. 가뜩이나 전쟁을 앞두고 예민한 시기에.”
옅은 한숨과 함께 황태자는 고개를 젖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해 가는 세상에 제국의 존망을 짊어진 사내의 어깨는 무거워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큰 전란을 앞두고 황실은 여러 귀족들에게 충당금을 걷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신흥 세력의 바지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이 제국에 아무도 없다. 그런 와중에 그들의 심기를 거슬러 좋을 게 무엇인가. 오로지 혈통으로만 영위하던 시대는 끝났다. 다가오는 나날들은 그보다 더 복잡한 빛깔이라는 것을 공작은 누구보다 깊이 실감하고 있었다.
그게 공작이 신흥 세력의 수장 격인 이에타 자작의 여식과 연을 맺었던 이유이기도 했고. 신흥 세력의 수장 격인 이에타 자작과 구귀족의 선봉장인 그의 결합은 제국의 앞날에 여러모로 변곡점을 시사하는 사건이었다. 반목과 대립, 경계와 충돌 말고 다른 새로운 방향이 그들에게 있음을 제시하면서. 비록 그 딸이 병약해 이른 나이에 요절했음에도 둘의 관계가 크게 소원해지지 않은 까닭은 거기에 있었다.
“공작, 세상은 변하고 있어.”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사내, 머지않아 광활한 땅을 통치하게 될 황태자 역시 이를 저 못지않게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제국엔 균형이 필요해. 난 그 중심을 공작 가문이 잡아 주리라 기대하고 있네.”
“제가 다른 치들과 달리 구식은 아니라는 것만은 유념해 주십시오.”
그러니 이토록 간신히 일궈 낸 균형을 이번 루트비아 백작의 작위 계승으로 물거품이 되게 하지 않을 터. 그저 그는 흐르는 강물 앞에 몸을 맡긴 돛단배처럼 굴면 될 것이다.
“그대만 믿겠네.”
짧은 인사와 함께 저택을 떠나는 황태자를 배웅하고 나서야 공작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루트비아저를 살펴 내렸다. 죽은 장인이 바란 뜻이 무엇이든 간에 결국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순리대로 돌아온 흐름을 응시하던 그의 푸른 눈이 짙게 가라앉은 은안과 맞부딪친 건 그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