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델리아 베르니
여느 때와 다른 날카로운 음성이 공작가의 아침을 흔들었다.
“여기 또 리베라가 시들었구나.”
2층 복도를 정돈하던 하녀는 그 음성을 쫓아 고개를 틀었다. 미묘하게 활력을 잃은 꽃과 그보다 더 생기가 없는 공작 부인이 그 끝에 있었다.
“죄송합니다, 마님. 신경 쓴다고 썼는데…….”
요즘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평소였으면 그저 친근하게 건넸을 그 말을 잘근 입술을 깨물어 삼킨 하녀는 재빠르게 자세를 낮추고 화병을 치웠다. 이 거대한 저택으로 들어온 지 어언 몇 년. 까다롭고 예민한 여타 안주인들에 비해 온화하기로 자자한 공작 부인과 넉넉한 봉급 아래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영위하던 그녀는 최근 들어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참이었다. 종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날뛰는 공작 부인의 기분이 바로 그 주된 원인이었다.
“새로 구해다 오렴. 헤모나 남작이 올 터인데 선물한 꽃이 시든 것을 안다면 기분이 좋지 않겠지.”
어떤 때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가벼워 보이다 또 어떤 때는 이리 심각했다가.
도대체 무슨 일인지.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가 정원에서 꺾어온 새 리베라를 정돈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때마침 모여 있던 사용인들이 하나둘 그녀 주위로 모여들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 여자 때문이라니까. 말해 봐야 입만 아프지.”
“하기사, 그 일로 백작 부인도 세상을 뜨시고 속이 오죽하시겠어.”
“어제는 공작 부인 베갯잇이 다 젖어 있더라니까!”
그녀가 리베라를 화병에 꽂는 사이, 얼마 전부터 저택에 머물고 있던 공작 부인의 이복동생에 대한 분노는 더욱 거세게 피어올랐다.
“공작 부인은 속도 없으시지. 그 처죽일 것이 뭐가 예쁘다고 그렇게 혼처를 알아봐 주시고.”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셔 그런 게 아니야.”
지나칠 것도 없다. 공작 부인의 평판이 어찌나 좋은 지 두말하면 입이 아프니.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마님의 분위기도 또 묘하잖아요.”
뭐랄까. 뭐 잘못한 사람처럼.
모양 좋게 자리 잡은 꽃들을 살피며 그녀가 툭 던진 말에 다들 아귀처럼 달려들 정도로.
어디가, 어떻게. 공작 부인은 원체 천성이 유해 그렇다부터 시작해서 공작 부인이 어디 뭐 실수할 사람이냐까지.
예상보다 격양된 반응이 여기저기서 들끓었다. 신관 앞에서 신을 모독한 이단자가 된 기분이라. 그렇게 꽤나 당혹스러워진 그녀를 구한 건 계단을 울리는 달음박질과 함께 나타난 어린 시종의 외침이었다.
“헤모나 남작이 도착했습니다!”
그 처죽일 여자의 약혼자였다.
***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헤모나 남작의 마차 소리에 공작 부인은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사교계에 명성이 자자한 예의 그 눈부신 미소를 지어 보려 했지만, 끝이 떨리는 입꼬리에 그리 자연스럽지는 못했다. 그사이 문이 열리고 남작이 저택으로 들어섰다.
“공작 부인, 오늘 날이 참 좋습니다. 연극을 보러 가기 좋은 날이군요.”
손에 들고 있던 리베라를 건넨 사내는 호탕하게 입을 열었다. 지독하리만큼 꽃과 어울리지 않는 그는 매번 저 꽃을 가지고 저택을 방문했다.
화사한 꽃과 대비되어 오늘따라 더욱 맑지 못한 눈빛과 번들거리는 낯을 차례로 살피던 공작 부인은 일그러지려는 낯을 간신히 갈무리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아델을 불러오겠습니다.”
계단 난간을 붙잡는 손이 간헐적으로 떨리는 것은 어쩌지 못했지만.
어쩌자고 저런 사내를.
고르고 고른 이들 중 가장 별 볼 일 없는 인물을.
완벽한 사윗감을 구할 수 없다는 것 알았다. 아델의 입지와 평판을 고려하면 말이다. 그래도 최고를 구해 주고 싶었다. 한평생 함께 지내야 하는 관계이니 모든 것을 다 따져 가며. 작위는 다소 한미하더라도 인품과 성정을 두루 고려해서. 뭐하나 편히 해 주지 못한 딸에 대한 여한을 풀기라도 하듯.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게 그런 것들뿐이니.
그러니 성품은 물론 여색을 밝히기까지 한다는 소문이 자자한 헤모나 남작은 단연 그녀의 계산에 있지도 않은 사내였다. 그저 제멋대로 굴러 들어온 그를 아델이 고른 것 또한.
‘헤모나 남작이요.’
그 말을 듣던 그날 어찌나 그녀가 놀랐던지. 평소처럼 차분한 낯과 담담한 음성이 아니었더라면 공작 부인은 제가 헛것을 들은 것인가 했을 것이다.
몇 번의 언쟁과 다툼 끝에 겨우 약혼까지는 성사되긴 했다만 지금 심정에서는 모든 걸 다 물리고 싶었다. 그저 없던 것으로 하고 지금처럼 지내고 싶다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는지 한참 전에 계단을 다 오른 그녀는 여전히 아델의 방문을 쉬이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번우한 마음 앞에 찾아온 것은 그들에게 닥친 현실이었다.
‘참, 에오르테 후작이 루트비아가의 영지 별장에 머문다던데…… 아델리아 양도 원래 그곳에 있지 않았나요.’
지난 번 티타임 때 불쑥 찾아온 헤이테 백작 부인의 물음에 어찌나 당황했던지. 그렇다, 하지만 그리 친분은 깊지 않다 둘러댔지만 여간 진땀을 뺀 게 아니었다.
에오르테 후작과 루트비아가의 사생아.
떼어 놓고 보아도 이목이 집중되는 두 인물을 한곳에 모아놓으면 여러 헛한 말들이 나오기는 시간문제였고 그러다 보면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몰랐다.
모순된 마음이 일으킨 감정의 혼화 속에서 불똥은 괜히 다른 곳으로 튀었다.
에오르테 후작.
그자만 아니었다면…….
모양 좋은 공작 부인의 입술이 그 생각과 함께 비틀어졌다.
그자만 아니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될 일도 없을 것이다.
갑작스레 그렇게 루트비아가의 영지만 찾지 않았더라면, 둘의 친분이 생길 일도, 그저 가만히 있어도 이목이 집중되는 사내의 반경 아래 자연스레 아델에게도 시선이 집중될 일도. 모두 다.
그리고 그랬더라면 모든 게 조금은 지금보다 더 나았을 텐데.
해 봤자 소용없는 가정들과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 앞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문고리를 잡았다.
이젠 정말 어쩔 도리가 없어. 그런 상념을 곁들이며.
***
연극은 지루했다.
감흥 역시 딱히 없었다. 내 옆에 앉은 이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만.
시작과 동시에 연극에 완전히 흥미를 잃은 나와 달리 남작의 입에서는 간간이 찬사가 터져 나왔다. 숨죽여 아름답게 치장한 여배우의 입술을 바라보며 곧 고운 입술이 읊게 될 그 유명한 문장을 기다리기도 했고.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아무리 천하고 천하여 멸시할 만한 것이라도 그들은 훌륭하고 품위 있는 것으로 바꾸어 주지. 차마 너무 고귀하여 내 미천한 입에 담기도 힘든…….”
배우의 대사가 끝을 맺기도 전에 옆에 앉은 남작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티케의 일족.”
그렇다.
내가 보고 있는 연극은 오케아디네스의 전설. 축복의 능력을 발현한, 티케의 일족인 그녀가 사랑하는 이를 죽음에서부터 건져 왔다는 아주 오래전 이야기를 극으로 만든 것이다. 백여 년도 더 넘게 사랑받은 이 극은 불후의 고전으로 불리며 아직도 제국의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주변 이들에게 온갖 부귀영화와 복을 가져다준다는 ‘축복의 능력’과 티케의 일족.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맹목적인 숭배에 이 연극이 더욱 불을 붙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아, 그래, 운명의 여신들이 승리했다!”
고양된 감정을 열기 띤 목소리로 표출하는 여배우를 나는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티케 일족. 그리 매혹적인 그들에게 날 적부터 흥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완전한 승리는 안겨 주지 않으리라.”
내게 찾아오지도 않은 그 축복에 열광하여 내가 얻게 될 것이 무엇인가.
“내 모든 신성과 축복을 델로스의 문턱을 넘은 당신에게 바치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극이 절정에 다할 무렵, 몸을 일으킨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객석을 빠져나오자 한결 산뜻한 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몇 걸음 옮기자 모습을 드러낸 로비에는 북적이던 인파는 사라지고 기념품을 파는 행상들 몇 명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객실 입구와 로비 사이에서 걸음을 멈춘 나는 짧은 고민을 끝으로 다시 보폭을 넓혔다. 극이 끝날 때쯤 돌아가도 어차피 남작은 알아채지 못할 듯하니.
그래서였다.
그를 고른 것은. 내게 깊이 적을 두지 않는 나이가 많은 사내. 거기다 아둔하기까지 하면 금상첨화였고. 두루 그 모든 기준에 부합한 자가 바로 헤모나 남작이었다. 주로 이국과 교류하는 신흥귀족인 터라 제국에 머무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점 또한 그러했고.
얼마 전 이루어진 약혼식에서도 그는 선이 고운 시녀를 힐끗거리며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 식이 진행되고 나면 모든 것은 안정을 찾을 것이다.
불쑥 커다란 손과 정체 모를 물체가 내 시야를 가린 것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무렵이었다.
“축복을 가져다주는 오케아네데스의 인형입니다.”
꽤나 열성적으로 보이는 어린 상인은 이 로비의 유일한 먹잇감인 나를 놓칠 생각은 없었나 보다. 내가 고개를 가로젓고 걸음을 옮기려 하자 그는 재빨리 설명을 이어 갔다.
“끝에 티케 일족으로 유서 깊은 루트비아가의 인장도 박혀 있답니다. 은빛 수사슴이지요.”
눈을 파고드는 은빛 문장에 내 낯이 딱딱하게 굳자, 눈치 빠른 사내는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티케 일족으로 유서 깊은 다른 가문의 문장들도 있다, 어떤 가문을 원하느냐, 그런 류의 설명을 덧붙이며.
내 움직임을 막기엔 역부족이었지만.
“그럼, 이건 어떠십니까.”
한껏 비장해진 표정으로 그가 내 앞에 내민 것은 또 다른 인형이었다.
“죽음을 부르는 일족, 모르스의 인형이지요.”
불빛 아래 천공을 높이 나는 듯한 독수리의 문장이 인형의 망토 자락에서 번쩍거렸다.
***
“검은 연기가 나타나자, 숲에 있던 나무들이 모조리 메말라 갔어요. 모르스 일족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내실에 울려 퍼지던 잔잔한 목소리가 일순 멎었다. 읽고 있던 책을 일별한 후작은 조심스레 조카의 만면을 살폈다. 밤의 어둠을 가로질러 휘장을 비껴 들어온 달빛에 곤히 잠든 조카의 낯이 도드라졌다. 어슴푸레한 사위 속 적막을 돋우는 고른 숨소리. 지나치게 안온하게 느껴져 가끔은 도리어 덜컥 겁이 나는 그 광경을 한참이나 지켜보고 나서야, 후작은 몸을 일으켰다.
“공자님을 이제 홀로 잠드시게 두는 것은 어떻습니까.
소리 죽여 방문을 닫고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입을 열었다. 고요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그 목소리는 다소 엄중하게 들리기도 했다.
“아직 어리잖나.”
조카보다 더 연배가 있는 아이들도 부모와 함께 잠이 든다는 얘기를 후작이 들먹이자, 집사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필부의 아이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장차 이 가문의 가주가 되실 분입니다.”
“테오는 잘할 거야.”
근거도 없는 팔푼이 같은 소리에 집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후작님이 자꾸 그러시니 문제입니다.”
따끔하게 던진 충고는 후작에게는 다른 방향으로 다가왔지만. 그 비슷한 류의 조언을 들었던 기억을 상기하던 후작은 자연스레 화두를 돌렸다.
“약혼을 했다더군, 알고 있었나.”
“누구 말입니까.”
“그 아이 말이야.”
그 아이. 근래 들어 자꾸 언급되는 그 명칭에 잠시 침묵하던 집사는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예, 한동안 시끄러웠지요.”
“헤모나 남작이라……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건지. 내가 미친 건지 알 수가 없군.”
“함부로 끼어들 사안이 아닙니다. 듣자 하니 공작부 인도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던데, 루트비아 영애가 직접 정한 이라 하더이다.”
“헤모나 남작을?”
어느새 우뚝 걸음을 멈춘 후작의 눈에는 근심 어린 기색이 다분했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집사는 담담히, 그러나 냉담하게 말을 이었다.
“영민해 보이는 아가씨이니 괜찮으실 겝니다.”
“……괜찮다라, 자넨 그때도 그리 말했지.”
후작의 입술을 타고 흐른 읊조림에는 날 선 기색이 묻어 나왔다.
급격하게 얼어붙은 복도의 공기 속, 규칙적으로 대리석을 울리던 지팡이 소리가 멎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기울어진 달빛을 따라 그림자의 모양이 변모했을 즈음이었다.
“미안하네, 엘몬트. 내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흐트러진 백발 사이로 드러난 집사의 눈빛에는 모진 세월을 견딘 자에게 볼 수 있는 강고함이 묻어났다. 그 눈을 향해 사과의 문장을 다시 한번 건넨 후작은 도망치듯 집무실로 들어섰다.
지팡이 소리가 멀어지자,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열감이 묻어나는 이마를 쓸어 올리던 손은 무언가 떠올린 듯 구석진 서랍을 뒤졌다.
불에 그을리고 빛바랜 그것은 연고통이었다.
리오 서머셋.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여진 그 이름은 요즘 들어 잦게 그를 찾아오는 기억의 주인이었다.
***
“난 싫어! 싫다고!”
또 시작이었다.
방이 떠나가라 내지르는 딸의 고성에 공작 부인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원체도 잦은 세이의 투정은 요즘 따라 더욱 심해졌는데 실상, 이제 더는 투정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매섭게 그어진 눈매 아래 거세게 요동치는 벽안을 잠시 응시하던 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며 마지막 인내심을 끌어 올렸다.
“그저 이모와 함께 식사를 하는 거야. 남작님께서 네가 좋아할 만한 인형도 사 들고 오신다는구나.”
그닥 효험은 없었지만.
“필요 없어!”
테이블 위를 손으로 쾅쾅 내려치고 고래 고래 악을 쓰고.
“가라고 해! 자기 집으로 가라고 하라고!”
그 요란함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자기들은 맥없이 하나둘 바닥으로 추락했고 그 틈 사이로 흘러나온 찻물이 붉은 융단 위로 탁한 얼룩을 그려 냈다. 가뜩이나 예민해진 그녀의 신경줄이 툭 끊어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너까지 왜 이러니 정말!”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처음인 그 날카로운 음성에 세이는 충격이 컸는지 별안간 딸국질을 시작했다. 상기된 낯빛은 더욱 불게 달아오르고 입술을 새파랗게 질린 채.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은 호흡이 방의 공기를 흔들기까지 하자, 그제야 공작 부인은 퍼특 정신을 차렸다.
“세이…… 미안해, 놀랐지, 난 그저…….”
읊조리듯 흘린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딸의 팔을 잡았다. 당연한 수순처럼 제 품 안에 딸을 끌어당기려는 그녀의 동작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더 이어지지 못하고 멈칫했다.
뜨거웠다. 잔뜩 달궈진 유리 위에 손을 올린 것처럼.
그게 정상이 아니라는 걸 막 그녀가 깨달았을 때, 자그마한 몸은 휘청거리듯 그녀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
공녀가 아프다.
뭇 의원들의 진단에도 공녀의 열은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공작 부인은 곧장 황실에 도움을 요청했다 들었다. 허나, 강성해지는 공작가를 경계하는 그들이 차일피일 답을 미루고 있는 실정에서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고 간혹 사용인들이 모여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수군거리는 것이 들려오기도 했다.
그 와중에 모두가 고대하는 것은 바로, 공작의 귀환.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데리고 있는 주치의의 귀환.
대를 거듭할수록 손이 귀해지는 공작 가문. 그 탓에 그들이 가장 중시하는 게 의원이었고 황제에 버금가는 의료진들을 영지 안에 배치해 두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의술을 갖춘 자는 공작가의 주치의. 그이가 바로 지금, 공작과 함께 이국에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날이 두 번 바뀌고 공작 부인이 거의 탈진할 무렵, 더는 저택의 무거운 공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나는 저택을 나섰다. 공작가로 이어지는 가로수길에는 사위가 밝아 오고 있었으나, 평소와 다른 밀도 높은 공기만이 흐를 뿐이었다.
쇠붙이가 부딪는 금속성이 적막한 공간을 뒤흔든 건 그때였다.
황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금발과 벽안.
흔들리는 공작가의 깃발을 너머 선두에 달리는 사내는 그래, 모두가 고대하던 바로 그 공작이었다.
그와 내 간격이 점점 좁혀지면서 나뭇가지 사이로 솟아난 햇볕을 받아 이 상황에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한 낯빛이 드러났다. 부녀지간이라는 걸 알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우리의 유일한 공통점은 바로 저 무미건조한 만면이라는 생각에 다다를 때쯤, 어느새 지척에 다가온 그가 말의 속도를 줄이며 비슷이 입술을 기울였다.
“세이는 저택 안에 있나.”
8년? 9년?
오래간만이라고 하는 단어도 미처 채우지 못할 그 시간의 공백을 메꾼 그의 첫마디였다.
***
“공녀님의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습니까?”
한참 동안 공녀의 몸을 살피던 공작가의 주치의, 네루다 의원은 이마를 짚던 도구를 천천히 내려놓으며 입매를 허물어트렸다. 공작이 눈짓하자, 옆에 대기하고 있던 집사는 재빨리 말을 받았다.
“이틀입니다.”
집사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의원은 무언가 고심하는 듯 눈썹을 내리깔았다. 다시 뜻 모를 침묵이 시작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목이 졸릴 듯한 적막이 계속 이어지자, 집사는 저도 모르게 타이를 살짝 매만졌다.
네루다 의원.
뛰어난 의술 실력 때문에 황실에서도 탐내던 저 의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손 쓸 도리가 없다는, 연유를 모르겠다는 여타 이들과 달리 그는 답을 내놓을 것이고 그 답이 해답에 가까울 것이라는 것 또한.
하지만, 정말인지.
버겁다 못해 저를 짓눌러 오는 공기의 밀도에 지친 집사는 슬쩍 시야 귀퉁이로 공작을 살폈다. 담담히 상황을 관망하는 눈은 집무를 볼 때와 다르지 않은 모양새였다. 그 기세에 그가 혀를 내두르고 있을 즈음, 의원이 입술을 열었다.
“공작님, 주위를 물려 주시겠습니까.”
문이 닫히는 탁음이 들려오고도 여전히 의원은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의 고요한 적막이 찾아오고 나서야 그는 다시 공작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이 정도 열이, 그리 오래 지속하였다면, 분명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겁니다.”
공간으로 흘러 들어오는 목소리는 낮지만 차분했다.
“허나, 공녀님은 다르시지요. 일시적으로 공녀님의 장기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 같으나, 그건 그저 모두 이 열 때문이고 다른 부분은 전혀 아무 이상이 없으십니다. 아무 곳도요.”
공작이 까딱 눈썹을 움직인 건 그쯤이었다. 긴 인고의 시간 끝에 처음으로 그가 보인 반응이었다.
“논리에 맞질 않지요. 공작님. 제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짐작 가십니까?”
“……티케.”
붉은 입술이 나직이 읊조린 단어에 의원은 눈을 키웠다.
“예, 그렇습니다. 티케 일족의 발현열이지요. 제 기억이 맞는다면 루트비아 백작 가문은 매우 유서 깊은 티케의 핏줄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확실한 건가? 내가 알기론 발현 시기는 좀 더 나이가 차야 한다 하던데. 이리 길지도 않고.”
“아마, 그래서 다른 이들도 쉬이 짐작지 못한 듯합니다. 조금 더 추이를 지켜봐야겠지요. 그 모든 걸 고려하고도 제 짐작은 그렇습니다. 매우 드물고 희귀한 경우이긴 하지만 전혀 가능성 없진 않습니다.”
“허면, 일단 함구하는 게 낫겠군.”
“지당한 명령이십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최근 성행하는 독감에 걸린 것으로 하지요. 열이 계속 오를 테니, 믿을 만한 자를 두시기도 하셔야 할 듯합니다.”
공작은 귓가에 흘러오는 문장 맞이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이가 태어날 때 손수 이 천장에 그려 두었던 베르니가의 백합 문양이 느릿하게 깜빡이는 그의 눈을 파고들었다.
꿈을 꾸었다.
그 애가 태어나는 날, 푸른 밤의 장막을 거두고 피어난 백합 한 송이가 천지에 제 향을 흩뿌리는 꿈을. 아직도 선연한 그 내음에 공작은 틀림없이 제 딸아이가 강인한 후계자로 자라날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그날 붓을 들었지. 그 소망과 기대를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우리가 해야 할 건 무엇이지?”
내리뜬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묻는 공작의 음성에는 얕은 떨림이 깃들어져 있었다.
“그저 기다리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바야흐로 도래하게 될 공작가의 시대를 목전에 둔 이답게.
***
소란이 다시 벌어진 건 사방이 어둠에 휩싸이고 암흑 속으로 빠져 갈 밤의 시각이었다. 공작가의 티케라. 곧, 제국을 뒤흔들 이 변화와 나날이 드높아질 공작가의 기세를 가늠해 보며 잠에 든 의원에게 찾아온 것은 뜻밖의 소식이었다.
공녀의 열이 더욱 올랐다.
밤새 혹 모를 사태를 대비해 공녀의 침상을 지키던 시녀가 건넨 그 말에 한달음에 처소로 달려간 의원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불깃을 적시는 식은땀, 새하얗게 질린 낯빛.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봐도 티케의 발현열이라기엔 무리가 있는 몰골로 공녀는 간신히 밭은 숨을 뱉고 있었다. 이미 초상이라도 난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먼저 공녀의 방에 도착해 있던 공작이 나직이 그를 불렀다.
“네루다.”
오열과 통곡.
흔해 빠진, 실상 무의미한 그것들을 대신하고서 가만히 차창 밖을 응시하며 자리를 지키던 공작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내 딸은 이리 허망하게 가지 않아.”
서늘한 기색이 묻어나는 푸른 눈이 그의 시야에 내리꽂혔다.
“그러니 설명해 보게, 왜 이런 것인지.”
그 날카로운 위압감에 눌린 의원은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보통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두서없이 이리저리 말을 쏟아내며.
간신히 혼몽한 정신을 다잡은 건 제가 들어도 믿음직하지 못한 음성이 방 안에 울린다는 걸 인식할 때였다. 차차 초점 잃은 그의 동공은 공작과 시체처럼 침상을 지키는 공녀에 닿아 점차 분명해졌다. 버쩍버쩍 말라 가는 입술을 축이며 네루다는 잰걸음으로 공녀에게 다가갔다. 목 부근부터 시작해서 온몸에 발긋발긋 피어난 열꽃이 도드라졌다.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공녀는 죽어 가고 있었다.
본디 금세 멎어야 할 발현열의 기세가 치솟고 있다는 것 또한. 말이 되지 않아. 이리 오래 발현열이 지속되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다.
이게 발현열이 아니라는 것인가?
그것 역시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공녀는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으리라. 침잠하는 상황 속에서 네루다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la vite Tyche[티케에 관하여]
수백 번도 더 읽어 보았던 그 티케의 고서가 엉클어진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상극.
일순 뇌를 스쳐 지나가는 실낱같은 기억의 끄트머리를 잡아채자, 짓눌렸던 생각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끝에 여실히 드러나는 기억은 바로,
모르스 일족.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의 얼개에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모르스 일족입니다.”
내실에 또렷이 울려 퍼지는 음성은 방금과는 궤가 달랐다. 막 견습을 마친 얼뜨기처럼 굴던 네루다는 확신에 찬 논조로 조목조목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그 문장들이 지나치게 터무니없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모르스 일족이라니.
평정을 잃으면, 그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의 생을 앗아가는 그들은 흔히, 죽음을 부르는 이들이라 일컬어지며 대륙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이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 찾지 못할 이들도 아니었다. 다만…….
“그랬다면, 그치들이 내 저택 안에, 하물며 영지 안에라도 있었다면 모르타 위원회에서 내게 보고를 해 주었겠지.”
그랬다. 그 일족이 가진 파괴력과 위험성 때문에 모르타 위원회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아직 힘이 미미할 수도 있습니다. 모르타 위원회가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발현자가 아닌 보유자 정도이면 더욱 그렇지요.”
“허나, 네루다.”
습관적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공작은 나름 일리 있는 가정을 펼치는 의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뚜렷하게 내비치는 변수를 잊은 듯한.
“그래도 그럴 수는 없어. 혹 있을 사고를 대비해,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모두 해마다 이를 검사하니 말이야.”
“……루트비아 영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한낱 의원이 미처 그조차도 생각지 못한 부분을 가늠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그래, 그렇지.
루트비아 영지에서 온 이들은 논외일 것이다. 의원이 조심스레 건넨 그 문장에 미묘한 변화가 인 공작은 그 낯을 들어 올려 제 눈앞에 의원을 마주 본다.
과연 황실이 탐낼 만한 인재로구나.
제 얼굴에 뚜렷하게 나비치는 생각을 읽었는지 의원은 더욱 목에 힘을 실어 남은 말을 마저 이어 갔다.
“일단, 루트비아 영지에서 올라온 이들을 저택 밖으로 물리고 조사를 진행하면 될 듯합니다. 혹 최근에 저택에 식물들이 마르거나 시든 일이 있는지도 알아보면 좋고요.”
“알겠네.”
“그전까지 이 일은 함구하는 것으로 하지요. 사용인들에게는 그저 전염병에 걸렸다 둘러대겠습니다.”
“그리하게.”
공작가의 하루는 어느 때보다 바삐 움직였다.
공녀의 열이 이국에서 종종 보이는 전염성이 강한 질병으로 판명 났기 때문이다. 공작의 지시 하에 루트비아가의 사람들이 수도 인근 별장으로 이동했고 공작가에 상주하는 인원은 최소한으로 정해졌다. 그마저도 코와 입을 천으로 감싼 채. 수십 년 전 제국을 휩쓸었던 역병도 이 정도 난리는 아니었다는, 늙은 하녀의 말에도 모두가 묵묵히 그 지시를 따른 결과일까. 얼마 후 그들에게 들려온 건 공녀의 열이 멎었다는 희소식이었다.
***
거칠던 숨소리는 어느덧 고른 호흡으로 돌아왔다. 비정상적으로 치닫던 공녀의 체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료를 마친 의원은 의료도구를 내려놓고는 한참 동안 자리를 보전하고 있던 공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저 시선이 맞물렸을 뿐인데 기색이 오롯이 전해졌는지 무감하기만 하던 공작의 낯 위에도 안도의 빛이 떠돌았다.
며칠 동안 팽팽하게 당겨진 내실의 공기가 가벼워지자 의원은 뻐근한 목덜미를 문질렀다.
“수고했네.”
“별말씀을요. 공작님께서 더욱 고생하신 게지요.”
며칠 밤낮을 새느라 초췌해진 몰골이었지만, 가벼운 목례와 함께 네루다는 입꼬리를 올렸다. 끝없는 절벽에 다다랐다 다시 길을 찾은 기분이란. 다소 허탈하기도 한 그 감정이 지나가자, 그에게 남은 건 꺼림칙한 기분이었다.
이 완벽한 가정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흠결이 만들어 낸.
“그래, 그대의 이론이 틀리지 않은 것 같으니 이제 모르타 위원회에 연락해 누가 모르스 일족인지 찾는 일만 남았군. 루트비아 저택에 모르스 일족이라니 한동안 떠들썩하겠어. 그러니…….”
필시 낯 위로 그대로 떠올랐을 그 기색을 기민한 공작이 눈치채지 못할 리 만무했다. 하던 말을 멈춘 그는 눈썹을 반쯤 모으고는 물었다.
“왜 그러지. 뭐 할 말이 남아 있나.”
능수능란하게 감정을 숨기는 이는 되지 못하는 자신을 책하며 네루다는 말끝을 흐렸다.
“아닙니다. 그저…… 기이해서요.”
“뭐가 말인가.”
“보통 상극이라 함은 같은 핏줄 간에 일어나기 마련이지요.”
“……같은 핏줄?”
생각보다 과한 공작의 관심에 네루다는 얼떨떨해진 기분으로 설명을 이어 갔다.
“예, 형제나 남매지간에 말입니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나?”
“예, 이제껏 발견된 사례들은 전부 다 그러했지요. 물론, 한 핏줄에 두 일족이 발현하는 일 자체가 원체 드문 일이어서 단언할 수는 없긴 하지만…….”
말이 잦아든 자리로 침묵이 찾아왔다. 목구멍 속에 모래알이 맴도는 것 같이 껄끄러운 적막에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한 그는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괜한 말을 한 것인가. 남은 일들은 모르타 위원회에서 수순대로 처리할 터인데.
길어지는 날 선 고요에 그의 초조함이 한계에 다다를 때쯤, 공작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온유한 어투로 침묵을 거두어들였다.
“그래, 알겠네. 이만 돌아가 보게.”
“예, 알겠습니다.”
서둘러 이곳을 뜨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는 판단 하에, 예를 갖춘 인사와 함께 빠르게 몸을 돌리려는 그를 공작이 나직이 불러 세웠다.
“대신 말이네, 네루다.”
느릿느릿, 언뜻 들으면 그저 고저 없이 무감하게 들리는 그 어조에는 까닭 모를 위암갑이 실려 있었다.
“그전까지 이 일을 함구하는 쪽으로 하지. 혹 입 떼기 좋아하는 자들의 귀에까지 들어가면 무슨 헛헛한 말들이 나올지 모르니 말이야.”
“유념하겠습니다.”
경고와도 닮은 문장을 맞이하며 네루다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시야를 파고드는 푸른 눈은 섬칫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불현듯 깨달았다. 제가 모시는 이가 감히 황제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내려다볼 수 없는 베르니가의 주인이라는 것을.
***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공작가에 잠시 찾아왔던 휴식을 깨트렸다. 공녀의 병환으로 한동안 미뤄 두었던 일들을 처리하러 나섰던 저택의 주인이 돌아왔다는 신호였다. 잰걸음으로 공작을 맞이한 집사는 공작의 외투를 받아 들며 특이사항을 보고했다.
“방금 의원이 다녀갔습니다. 공녀님의 상태가 이제 회복세에 들어섰다 합니다.”
피로에 물든 눈가를 문지른 공작은 이제는 당연한 그 소식에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보폭을 넓혔다. 그를 뒤따르며 집사는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말입니다, 공작님. 이제 사용인들을 다시 불러오는 것이 어떨는지요.”
최소한의 인원으로 이런 대저택을 꾸려 가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요지는 그것이었다.
“그래, 그러도록 하지.”
군더더기 없는 허락에 집사의 낯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그를 스치듯 지난 공작의 눈은 한 번도 깊게 관심 두지 않았던 저택의 내부를 살펴 내렸다. 티끌 하나 묻어나지 않는 대리석 바닥과 반질거리는 샹들리에. 절반가량의 인원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저택은 변함없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동안 다들 고생했을 터이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주도록 하고.”
아랫사람을 가혹히 다뤄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기쁜 기색을 잔뜩 내비치는 집사의 낯을 일별한 그는 멈췄던 걸음을 떼며 몸을 돌렸다. 로비의 왼쪽 벽면을 장식하는 화병과 꽃이 푸른 눈에 걸린 것은 그때였다.
리베라.
샛노란 색감에 햇솜처럼 부드러운 모양. 헤모나 남작이 날마다 저택에 날랐다던 그 꽃은 아델이 가장 아끼는 종류라 들었다. 저택 곳곳에 장식되어 있는 꽃이 유독 그 애가 머물던 2층 복도 끝에 많은 까닭도 그 탓.
‘예, 형제나 남매지간에 말입니다.’
시야를 흐리는 강렬한 색채 위로 피어오른 확신에 찬 네루다의 음성에 공작은 물음을 곱씹어 보았다.
정말, 아델이 모르스 일족인 걸까.
공작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깊게 깔린 융단을 밟아 내리는 그의 걸음을 따라 황당무계한 의원의 주장이 흩어졌다.
애초에 말이 되질 않았다. 여인의 몸으로 발현한 모르스 일족이라니. 그런 들어 본 적도 없는 이야기는 그저 학문에 대한 열의가 불러온 촌극으로 끝내면 될 일이었다.
옅은 미소를 걸고 보폭을 넓혀 가던 공작의 걸음이 멈춘 것은 다시금 그의 시야를 흐리는 리베라 앞에서였다.
영민한 자다. 원체도 알고 있었지만. 루트비아가의 사람들이 저택을 떠나자, 화병에 꽂혀 있던 리베라가 시드는 일은 더는 생기지 않았다. 여타 의원들이 손을 놓은 세이의 위중한 상태도 그의 손끝에서 단박에 해결되었고.
이미 몇 차례 제 가설이 진실임을 입증한 자가 내세운 가정이었다.
확신에 찬 네루다의 눈을 떠올리자, 간신히 몰아냈던 망령된 생각들이 하나둘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의 말이 정녕 사실이라면, 그리하여 모든 게 다 밝혀진다면…….
공작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더는 미루기만 할 수 없는 일들이 어둠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공작님? 괜찮습니까.”
뒤를 따르던 집사가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그제야 공작은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괜찮네. 그보다 헤먼…….”
깊게 침잠하는 벽안에는 더는 온기라고 할 만한 것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델리아 양을 공작저로 불러 주게.”
***
공작이 다시 나를 저택으로 부른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당연히 헤모나 남작과의 약혼 이후 산적해 있는 일들을 의논하기 위함일 것이라 생각이 틀어진 것은 내실에 감도는 기묘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공녀님은 괜찮다 들었습니다.”
침묵을 깨고 던진 말이 일으킨 파문 역시 그랬다.
공녀가 아팠다. 그리고 나았다. 당연한 두 사실에 의례적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기울인 찻잔 너머 나를 직시하는 푸른 눈은 묘한 빛깔이었다. 어릴 적, 하염없이 내 넋을 잃게 만들었던 심해처럼 깊고 아득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모양이 아닌, 뭐랄까…….
내게 미끄러지듯 닿는 평소와는 다른 저 색감의 미묘한 차이를 곱씹는 사이,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갈무리한 공작은 찻잔을 머금었다.
“그래, 그렇구나. 그래도 당분간은 안정이 필요할 것 같구나. 그래서 말인데, 아델…….”
길게 말을 늘어트린 그는 찻잔을 소서 위에 내려놓았다. 자기가 맞부딪치며 내는 맑은 울림은 최근 들어 아주 잦게 내 귀를 쟁쟁대는 그 소리였다. 깨진 화병, 산산조각 난 접시들. 저택에 머무는 내 존재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공녀 덕에 말이다.
“잠시 루트비아저로 돌아가 있는 게 어떠니. 헤모나 남작에게는 내가 설명하마.”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던 기억의 잔재가 꼬리를 올린 것은 그 찰나였다.
“이미 약혼식은 치러졌고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으니 말이야.”
나는 대답 대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공작의 눈을 응시했다. 일말의 부채감도 죄책감도 남아 있지 않는 그 모양은 공녀와 같은 빛깔이었다.
공작의 말은 권유가 아닌 명령이었다.
별장에 돌아오자, 루트비아저로 떠날 모든 준비가 마쳐 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무언가가 그들의 심경을 변화시킨 것은 틀림없었는데 도통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방향이 내게 이로울 리 만무하다는 것 하나는 확실했다만.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내 물건들의 자취가 사라진 방을 바라보던 나는 그 재촉에 보폭을 넓혔다. 이미 별장 밖에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은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기다렸다는 듯 출발할 준비를 시작했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마차는 다시 돌아갈 일 없다 여길 만큼 가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에 스쳐 지나가는 익숙하고도 낯선 풍경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되돌아가지 않을 각오로 수도에 왔다.
약혼 기간을 최대한 길게 잡자는 공작 부인의 말 역시 따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나날이 숨통을 조이는 공간 속으로, 다시 그들의 손아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그런 사내를 받아들이리라는 결심까지 굳히며.
그런데 다시 돌아가라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저 다시 그렇게?
그들의 변덕에 장단을 맞춰야 하는 인형처럼, 내 삶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그 무력함 속을 끝없이 허우적대면서?
입가에 맺힌 웃음은 어느새 조소로 모양을 바꾸었다.
그들은 결코 알지 못할 테지. 그런 결단을 내리기까지 어떤 마음이 필요했는지. 내가 무얼 버리고 무얼 포기하며 먹은 마음이었는지.
창밖에 번지던 풍경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런 상념이 깊어질 때쯤이었다.
“날이 궂어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업무적인 딱딱한 어투, 그 어투에 깔려 있을 수십 가지의 비난의 감정들이 굳게 쳐진 커튼 너머까지 깊숙이 전해져 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반대편 마차 문을 그러잡았다.
더는 이렇게 있고 싶지 않다는 마음 깊이 메아리치는 충동을 더는 외면할 자신이 없었다.
***
맑은 아침의 햇살이 또다시 하루의 시작을 막 알릴 때, 수도에 위치한 에오르테가의 별장은 이미 부산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르고. 옮기고. 싣고.
쉴 틈 없이 로비, 응접실, 아래층. 저택을 분주히 누비는 사용인들의 발소리가 곳곳에 울려 퍼졌다. 어젯밤, 갑작스레 다시 페라비 별장으로 돌아간다고 말한 저택 주인의 결정 때문이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에오르테가의 사용인이었다. 제국에 단 셋뿐인 후작가. 그중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부흥하고 있는 신흥 귀족들에 밀려 그 명성이 옛만 못한다고 하여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유능한 사용인들 덕에 페라비 별장으로 돌아갈 채비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은 시각 마무리되자, 옷을 갖춰 입은 저택의 주인이 로비로 모습을 드러냈다. 저택 내부를 스치듯 지나간 그의 시선은 준비를 총괄한 집사에게로 내려앉았다.
“더 머물다 가려 했건만…… 먼저 출발하겠네.”
로비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그의 것 같지 않고 어색했다.
“조심히 들어가시지요, 후작님. 곧 뵙겠습니다.”
분명 그 기색을 모르지 않았을 집사는 외려 담담한 낯을 보였지만. 그 탓에 다시 한번 어제 일을 사과하려던 후작은 막상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늘 이리 급히 떠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라는 말도.
“마무리를 부탁하네, 엘몬트.”
살짝 틀어진 집사의 왼발과 그를 지탱하는 지팡이를 잠시 일별한 후작은 결국, 다시 도망치듯 마차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덧없는 문장만이 떠나간 마차의 자리를 메꿀 뿐이었다.
엘몬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모든 건 이미 다 지나간 일이고 그 어디에도 집사의 잘못은 없다는 걸 아는데도. 그는 그저 명에 따르는 사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많지 않은 상황 속에서 엘몬트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 또한.
옅은 한숨과 함께 후작은 마차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큼지막하게 짜인 유리창 위로는 언제부터였는지 하나둘 빗줄기가 들이치고 있었고 흐르는 빗물을 머금어 더욱 짙은 색을 발하는 녹안과 흐트러진 백금발이 그의 시야를 흐렸다.
엘몬트의 잘못이 아니다. 설령 그에게 어떤 책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망가진 다리로 그 대가를 치뤘으니. 그러니까 이 부끄러움은, 이 자책은 실은 다른 이를 향한 것이다. 집사를 방패 삼아 도망치고자 하는.
물줄기의 흔적이 고인 창 위로 그 감정들의 진짜 주인이 또렷이 나비치고 있었다. 후작은 쓴웃음을 물고 고개를 젖혔다. 마차 천장 벽에 새겨진 가문의 문양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날도 비가 왔다.
리오 서머셋.
그 애의 소리 없는 외침을 외면한 그날도.
아직도 선연하다. 저택을 떠나가라 울리는 비명소리. 시야에 가득 찬 농밀한 어둠의 장막, 그보다 더 짙게 가라앉은 암갈색 눈동자…….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눈을, 그 눈의 주인을 떠올리던 후작의 머릿속으로 겹쳐지는 것은 뜻밖의 잔상이다.
눈부시게 흐드러진 은발과 발이 닿지 않는 수면 아래로 침잠하는 은안.
요즘 따라 리오를 회상하는 날이 잦아지는 까닭이 거기에 있을까.
왜인지 모르게 둘이 닮은 것 같아…….
그래서구나. 그 아이가 자꾸만 눈에 밟히는 연유가.
작고 조그마한 아이는 어딘지 모르게 그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은 그 아이와 닮아서.
공간을 찢을 듯한 비명이 마주 앉은 유모의 입에서 터져 나온 건 막, 그가 그렇게 밤의 기억 속을 헤매고 있을 찰나였다. 소리를 쫓아 눈을 옮긴 후작은 저도 모르게 마차 창틀을 한 손으로 세게 움켜잡았다. 다른 손을 뻗어 조카의 눈을 가린 건 어찌 보면 본능적인 처사였다.
***
마차가 전복되었다.
몇 번을 다시 보아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마차 차창에 커튼을 깊게 내린 후작은 유모에게 조카의 안전을 단단히 주지시키고는 서둘러 사고 현장으로 보폭을 넓혔다. 나뒹구는 마차의 파편들에 가까워질수록 역한 피비린내가 코끝에 진동했다.
“생존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먼저 나와 사태를 파악하고 있던 시종 중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참담함 어투로 이어지는 문장은 절벽을 가로지르는 좁은 비탈길이 폭우 덕에 더욱 위험스러워져 사고가 벌어진 것 같다는, 뭐 그런 종류의 내용이었다.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그 끔찍한 내용들을 맞이하던 후작의 낯에 균열이 찾아온 것은 시종이 막 부서진 마차의 조각을 꺼내 보인 직후였다.
“루트비아가의 마차인 듯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그 문장이 소란스러운 사위로 스며들었다.
짙은 밤의 어둠에서 너울거리던 은발, 얼음 조각을 머금은 것처럼 서늘한 음성. 차례로 그것들을 떠올리던 후작은 잠시 내리감았던 눈을 다시 들어 올렸다. 여전히 그의 시야에 잡히는 것은 한때 은빛으로 반짝였을 수사슴이 제 빛깔을 잃은 채 조각된 피 묻은 파편뿐이었다.
“후작님?”
부르는 목소리에 후작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무렵, 처참한 사고는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있었다. 마차의 조각들이 널브러져 혼란스럽던 가도가 정돈되고 그 자리를 이리저리 뒤틀어진 시체들이 채워 가면서. 후작의 푸른 눈이 가늘어진 것은 문득, 그 아이로 추정되는 사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직후였다. 동시에 누군가의 다급한 음성이 질서를 되찾아 가는 사위를 찢었다.
“여기 누가 있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그 소리의 주인은 다시 한번 크게 목을 울렸다.
“루트비아 영애입니다!”
그 순간 후작은 가슴 깊이 찾아온 전혀 예상치 못한 감정 앞에 숨을 죽였다. 수십 명의 죽음보다 한 아이의 생에 기꺼워하게 되는 잔혹한 마음에.
아이는 마차에서 조금 떨어진 길가에서 발견되었다. 작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채로. 아마 사고가 나기 전 마차에서 내린 듯싶은데, 사건을 목격한 충격이 컸는지 잿빛 눈에 초점이 흐렸다. 모두가 침묵하는 상황 속에서 후작은 조심스레 적막을 건드렸다.
“아델리아 양?”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해가 기울고 빗줄기가 거칠어지자, 더는 지체할 수 없다 판단한 후작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싫다 고집을 부리면 어쩌나 했는데 예상외로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딱딱하게 굳은 몸이 석상같이 변한 직후라 그런지도.
자그마한 몸이 움직인 것은 막 마차가 금빛 낙조를 가로질러 페라비 별장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급히 정리된 손님용 객실에 후작이 아이를 막 눕히려고 할 때쯤, 제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잿빛 눈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
“일단, 오늘은 여기 머무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백작가도 사고 소식에 정신이 없을 테니.”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다독임 앞에는 여린 눈시울은 파릇 떨렸다.
“가야 해요.”
“아델리아 양?”
“백작저로 가야 해요.”
위태롭기 그지없는 자그마한 몸이 침상에서 벗어나려 바르작거리며. 우묵하게 괴인 늪 속에서 발버둥치는 듯한 모습에 후작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처참한 사고였다.
그조차도 감당하기 버거운.
그러니 이를 목격한 아이는, 아니 부서진 마차의 파편들 속에서 마찬가지로 생을 끝냈을 뻔한 이 아이는 울거나, 떼를 쓰는 게 당연했다. 헌데, 어째서…….
이 순간 또한…….
내리누른 입술에서 어느새 옅은 피 맛이 배어 나왔다. 그 짙은 향을 따라 지난날 그의 마음에 걸렸던 일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쫓기듯 아이를 데려간 루트비아가, 갑작스러운 헤모나 남작과의 약혼식.
짐작이 가고도 남는 상황이었다.
저 아이가 어떤 마음인지. 그 마음을 끌어안고도 저리 이곳을 벗어나려는 까닭 또한.
그래서일까. 더욱 이 아이를 놓아줄 수 없는 건…….
그도 알 수 없는 어딘가를 맴도는 마음속에서 후작은 아이를 끌어안았다. 마른 수초처럼 가느다란 몸이 그의 품 안에서 부서져 내렸다.
“괜찮아. 다 괜찮단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 순간 파르르 가느다란 속눈썹이 떨려오고 속을 단단히 감춘 불투명한 얼굴 위로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숱한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가 잠이 든 것은 달도 제 모습을 감춘 칠야의 밤이었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간신히 옮겨 서재로 향하자 예상치 못한 이가 그를 맞이했다.
“괜찮으십니까.”
집사였다.
필시, 사고 소식에 한달음 달려왔음이 분명한 그는 허옇게 센 머리를 이고 절룩거리는 다리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흐트러진 백발 아래, 주름진 만면에는 근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가늘어진 눈으로 마치 어린아이라도 다루듯 연신 그의 매무새를 살피고 또 살피고. 그 움직임이 멎은 것은 조금 멋쩍은 듯한 후작의 음성이 울려 퍼진 직후였다.
“사고가 난 쪽은 루트비아 가문이니 단연 나는 괜찮지.”
그제야 굳었던 낯을 풀어 헤친 집사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어찌 그런 참혹한 현장에서 시간을 지체했느냐, 기사들에게 맡기고 돌아오지 않고, 그런 류의 잔소리를 입에 걸고서.
어색함이 잦아든 자리 위로 다시 궂은 세월을 함께 지나온 두 사람이 피어올랐다. 집사와 그의 눈에 여전히 한없이 어리기만 한 소년이.
“안 그래도 심약하신 분이-”
길어지는 설교에 날이 다 저물겠다 싶을 때쯤, 후작은 재빨리 말머리를 돌렸다.
“그보다 어찌 이리 빨리 도착했나. 우리가 적당히 길을 수습하긴 했으나, 사고로 길이 어지러웠을 텐데.”
그 분명한 저의를 알아차린 집사는 잠시 후작을 못마땅한 듯 흘기더니 말을 받았다.
“다 공작가 덕이지요.”
“공작가?”
“사고 소식을 듣고 공작님의 염려가 크셨던지 아델리아 양을 다시 안전하게 수도로 모셔가기 위해 기사들을 보냈답니다. 운 좋게 저도 그 무리와 같이 움직였고요. 다들 지금 별장 앞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집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작은 몸을 돌려 창밖을 가리던 커튼을 젖혔다. 어슴푸레 드러나는 사위 속 현란한 빛깔의 갑옷으로 몸을 두른 거구의 사내들이 그의 녹안에 미끄러져 내렸다.
부정할 수도 없는 공작가의 기사들이었다.
“후작님? 아델리아 양을 모셔올까요?”
엘몬트가 침묵을 가른 건 그 무렵이었다. 얼어붙은 듯 자리를 지키던 후작은 저를 부르는 부름에 의식을 환기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부드럽게 물결치던 커튼의 모양이 그의 손안에서 흐트러진 채였다. 이를 말없이 바로잡으며 후작은 담담히 목을 울렸다.
“공작님의 뜻은 알겠으나…… 지금으로서는 무리로 보이네. 의원 말이 아델리아 양에게 휴식이 필요한 것 같다 하더군.”
“예?”
“당분간 긴 여정은 어려울 듯하니 자네가 대신 말을 전하게.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을 터이니 응대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고.”
사고가 일어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각. 의원 대신 기사들을 부른 사내.
그가 정녕 염려하는 건 무엇인가.
그래서일 것이다. 더욱 이 아이를 놓아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든 건.
***
“그러니까 저 사람들이 다 공작가의 기사들인 거죠?”
무성히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피어오른 묵직한 갑주와 벼린 칼날을 가리키며 창틀을 닦던 어린 하녀는 입술을 열었다. 신경 쓰지 말고 할 일을 해라, 집사의 말에 얼룩진 유리창을 닦는 데 집중하려 했지만, 그 창 위로 나비치는 광경은 몇 번이나 봐도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니까. 그 수가 여기 옆 여관을 통째로 다 빌릴 정도래잖아.”
옆에서 힐끗힐끗 주위를 살피던 중년의 하녀가 한참 후에야 나직이 답을 주었다. 몸서리칠 만큼 소름이 끼치는 답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인 걸까요.”
한숨과도 같은 어린 하녀의 읊조림에는 짙은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사흘째였다.
공작가의 기사들이 별장을 에워싼 지. 처음에는 그저 얼마 전 백작가에 닥친 우환의 수습을 돕고자 먼 수도에서 사람들이 왔다 여기지만, 하루가 달리 급속도록 서늘해지는 저택의 공기에 비단, 그 이유가 전부만은 아닐 거라는 걸 이제 모두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서서히 침잠하는 어린 하녀의 낯에 중년의 하녀는 한 번 더 주위를 둘러보고는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했다. 주먹 하나도 들이차지 않을 만큼 좁혀진 두 사람의 거리 속으로 흘러나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였다.
루트비아 영애.
“예? 정말 그래서 이 난리가 난 거라고요.”
사건의 전말에 어린 하녀의 눈을 키웠다. 이 난리 법석이 고작 그것 때문이라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다니까.”
중년의 하녀 역시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자신도 꼭 그런 반응이었다. 고요한 영지에 불러온 사단이 그저 루트비아 영애를 데려가려는 공작가와 내놓지 않으려는 주인어른의 대치로 말미암아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게 이리 소란을 피울 일인가. 닳고 닳은 그녀도 제법 황당하게 느껴지는 싸움의 원인이었으니 어린 하녀는 오죽할까.
아니나 다를까.
황당함을 지나 이제는 배신감에 가까운 표정을 낯에 내보이며 어린 하녀는 조금 억울한 듯 목을 돋웠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그 질문이 어린 하녀의 입술에 걸고서.
“후작님은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심상치 않은 집사의 음성에 집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작성하고 있던 후작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마 오늘은 담판을 지을 작정인지 사뭇 결연한 빛깔의 눈을 한 집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델리아 양은 본디 백작가의 사람. 백작이 위중할 시에는 그의 가까운 인척인 공작가에서 그 거취를 결정함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후작이 괜시리 서류 귀퉁이를 매만지며 딴청을 피우자, 엘몬트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드리운 그림자에 순백의 종이 위로 짙은 얼룩이 만들어졌다.
“뭔가 마음에 걸리시는 게 있으십니까.”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
한두 가지가 아닌 그것들을 어찌 다 설명해야 할까.
아이의 눈빛, 몸짓. 그 주위에 흐르는 공기의 기류. 뭐 하나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는 근거 없는 예감들을.
적막이 길어지자, 엘몬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결심한 듯 손 안에 쥐고 있던 천을 조심스레 집무실 책상 위로 내려놓은 건 다음 수순이었다. 유리창을 투과해 들이찬 빛줄기가 연푸른 천 위에 담긴 물체 위로 뚜렷한 흔적을 그렸다.
“게울의 뿌리군.”
붓꽃같이 기다란 이파리를 보며 후작은 나직이 말했다.
게울의 뿌리.
광택을 낼 때 주로 사용하는 그 풀은 쇳덩이를 더욱 미끄럽게 만들 때 사용한다. 잘 모르는 이들에겐 그저 잡초와 다를 바 없는 모양이지만, 물에 젖은 채 말라 색이 조금 갈색 빛을 띤 잎모양을 약초에 훤한 후작이 모를 리 없었다.
“헌데 이게 왜.”
“사고 현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집사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소리는 담담했다. 조급하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았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백지의 공간을 메꿔 나가던 펜촉이 허리를 꺾은 건 그 순간이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인가. 게울의 뿌리는 그리 길가에 나 있을 만큼 흔한 풀이 아니거늘. 반사적으로 눈매를 좁힌 후작은 눈가를 문지르며 제 앞에 내밀어진 물체를 면밀히 살펴내렸다. 혼란으로 가득한 푸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집사가 잠잠한 적막을 다시 깨트린 건 그때다.
“아무래도 그냥 일어난 사고는 아닌 듯합니다.”
집사의 추측은 합당해. 느리게 여닫히는 녹안은 이를 깨닫자마자, 크기를 키운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폭을 넓히면서.
“당장 이를 백작가에 알려야겠어.”
황급히 자리에 일어나 서재를 가로지르는 후작의 발목을 잡은 것은 느릿느릿하게 흘러나온 문장이었다.
“소용없습니다, 후작님.”
그 소리를 쫓아 몸을 돌리자, 초연하기 그지없는 주름진 만면이 그의 시야에 가득 찼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미 공작가에서 사고 현장에 있던 모든 것들을 처리했습니다.”
“뭐? 공작가에서 왜…….”
무언가 깨달은 듯 잦아드는 후작의 음성 위로 여느 때와 다른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후작님, 아무래도 이건 저희가 낄 판이 아닌 듯합니다.”
조금은 냉담하고 서늘한, 그리하여 더욱 무자비하게 느껴지는.
집사의 추측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음 날, 한 사내가 페라비 별장에 도착했다.
백작가에 닥친 변고에 그들이 보인 호의에 심히 감사를 표한다는 허울 좋은 명분과 함께.
토지세, 이민족 토벌.
최근 제국에 주된 관심사인 그것들로 간간이 적막을 흔들던 공작은 곧 그 주제마저 바닥이 나자, 찻잔을 내려놓았다. 유독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소서와 맞부딪치는 자기의 울림을 뒤로하고 공간을 가로질러 드러난 것은 그가 이 먼 영지까지 방문한 목적이기도 했다.
“그래, 후작. 아델은 어디에 있나.”
외로 꼰 다리의 끝이 느릿느릿 흘러나오는 그의 음성에 맞춰 까딱거렸다.
“잠시 숲에 산책을 하러 갔습니다.”
“산책이라…….”
나직이 후작의 말을 읊조리던 공작은 픽, 비소를 머금었다. 어쭙잖은 변명들을 내놓는 어설프게 짝이 없는 모습을 보자,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내에 대한 짜증스러움이 배가 되었다.
라에갈 에오르테.
유순하고도 어리석은 자.
제 앞길을 방해하는 자가 고작 저런 사내란 말인가. 에오르테가의 후작이 아델을 내놓지 않는다, 처음 기사들의 보고를 받았을 때 그의 심중에 돋아난 경계심이 조금 허탈할 정도로 사내는 무해해 보였다. 이 모든 소란을 불러온 이답지 않기도 했고. 어쩌면 진정 깊이 고심하지 않고 벌인 일일 수도 있겠구나. 이십대 중반을 목전에 둔 사내의 낯에 여전히 가득한 앳된 소년의 흔적을 보며 공작은 그린 듯한 웃음을 걸었다.
적당히 겁을 주면 알아듣겠지, 그런 상념과 함께.
“내 자네에게 내 큰 빚을 졌어.”
“빚이라니요.”
“마차 사고를 수습한 것도 자네라 하던데. 이리 처제를 신경 써 주고 걱정하니 고마울 다름이지. 헌데 말이야-”
어느새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을 들어 공작은 앞에 있는 이를 직시했다. 허공에서 얽힌 녹안이 그 찰나에 일렁였다.
“이젠 충분할 듯한데.”
곧, 녹음 진 짙은 정원으로 커다란 파문이 몰려왔다. 곧 항복 선언을 할 패배자의 것과 닮은 그 모양새를 보며 공작은 승기를 잡은 자처럼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다음 순간 곧바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지만.
“의원 말이 달포는 더 휴식을 취해야 한다더이다. 공작가에도 공녀님께서 몸이 편치 않으시니 당분간 아델리아 양께서 예 머무는 게 어떠실는지요.”
말간 얼굴로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 사내의 음성에 깃든 것은 경계심이었다. 그러니까 뭔가를 짐작하고 있는 자의. 공작은 느슨하게 크라바트를 풀어 헤쳤다. 그 움직임을 따라 며칠 전 기사들의 보고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에오르테 가문이 가장 먼저 사고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조사를 진행했다던데…….’
어리석다 하여 무해한 것은 아니지.
이자가 몇 년 더 가주 자리에 있다간 그 유구하던 에오르테 가문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구나, 에오르테가의 무구한 영광을 이룩했던 전대 가주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하며 공작은 목을 울렸다.
“사고 현장을 조사했다고.”
적당히 말하면 알아들을 줄 알았다. 제국의 공작이 직접 움직인 마당에 드러내고 반감을 표할 이는 없으니까. 그런 말들이 통하지 않는 자가, 손에 쥐고 있는 게 많다면 공작으로서 선택지는 오로지 하나였다.
“내 자네를 많이 아껴. 그리 소박하고 소탈하게 살아가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대단하게 느껴지고 한다네.”
비스듬히 기울인 공작의 입술은 서늘한 공기를 불러왔다.
“그러니 더 선을 넘진 말게.”
협박과 닮은 문장들이 그 밀도 높은 공기 위로 차올랐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이리 시골에서 한가로이 조카와 함께 노니며 그대가 감당할 수 있을 일들만 저지르란 말이네.”
만약, 이마저도 통하지 않는다면?
글쎄, 공작의 입술을 타고 조소가 흘러나왔다. 그럴 수가 없지. 아무리 제 주제도 분수도 모르는 자라 해도 말이다. 그토록 어리석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자, 후작. 이제 그 애를 내 앞에 데려와.”
거부할 리 없다는 걸 아는 자의, 오만한 명령이 후작의 발 앞에 떨어졌다.
***
후작은 위압적인 문장에 눈을 들었다. 스스로 제 패를 내보이는 위험한 작태를 무릅쓴 이 치고는 덤덤한 낯이 그의 시야를 흐렸다.
백합이 다시 피어오른다.
한 호사가는 그를 두고 그리 말했다지.
냉철한 이지와 흐트러짐 없는 분별력. 공작가 특유의 기질로 빚어낸 듯한 사내를 응시하고 있자 그 말이 헛된 문장이 아니었음이 실감이 났다. 만만하지 않은 사내다. 그러니 황실조차 그를 경계하려 들겠지.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후작은 눈을 내리감았다. 시야에 물든 어둠 위로 떠오른 건 전혀 뜬금없는 이였다. 어느 순간에서도 침착함이 흐트러지지 않는, 도저히 아이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는 그 얼굴이.
백합이 다시 피어오른다.
그래서였다. 그토록 위협적인 문장 앞에서도 근거 없는 예감에 손을 든 것은.
“……왜.”
후작은 나직한 음성으로 잠잠해진 공간을 다시 흔들어본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글쎄, 나야말로 궁금하군. 그대야말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흔하디흔한 사생아. 사라진들 그대가 무슨 상관인가.”
“무슨 상관이냐고…….”
공작의 말에 후작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나는 자격이 없지. 핏줄도, 그렇다고 깊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니.”
기다랗게 말을 늘어트린 그는 고개를 젖혀 여전히 냉담한 사내의 만면을 살피었다.
가끔은 궁금했다.
“하지만…….”
아델리아 루트비아. 어찌 사람들은 그 말도 안 되는 이름을 그리 쉽게 믿는 건지.
“당신은 다르잖아.”
아니면 그저 믿는 척하는 건지.
“기억은 나나.”
그토록 다르고…….
“그 애의 진짜 이름 말이야.”
이토록 닮았는데.
마주한 시선, 공간을 울리는 음성. 그 모든 것들이. 고작 은발과 은회안으로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보지 않으려 해도 그의 시야를 흐리며 훤히 보이는데.
“아델리아 베르니.”
후작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낮은 목소리가 내실의 무거운 적막을 불러왔다. 제가 만들어낸 영겁같이 무한한 침묵 속에서 후작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걸 알아차린 건?
아마 처음부터.
모든 게 기이했으니까. 그 애를 둘러싼 것들은.
무언가 어긋난 것 같은…….
그래, 그때처럼.
***
오래전 그날은 유달리 선연했다.
검은 바탕에 금색 테두리를 한 가문의 마차가 왜인지 생경하게 느껴지던 볕 좋은 오후. 머리 두 개 달린 독수리로 양각된 마차 문이 열리고 낡은 감색 구두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뒤이어 빳빳하게 풀 먹인 회갈색 바지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큼지막한 진녹색 코트가 순서대로 나타났다. 어울리지 않는 옷들을 이것저것 껴입은 아이는 단연 귀족은 아닐 터였다. 라에갈은 창틀에 걸터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쭈뼛거리는 아이를 이모저모 뜯어보았다. 아이는 여러 가지로 이상한 점이 많았지만 무어라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기시감을 풍기고 있었다. 한참 동안 관찰한 후에야 그 정체 모를 감각의 진위 여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자신과 매우 닮았다.
곱슬거리는 백금발과 둥근 턱선, 도톰한 선홍빛 입술까지. 저 아이에게도 보조개가 있을까. 창문에 바싹 붙어 이를 찾아보려던 그는 둘 사이 뜻밖의 차이점을 하나 발견했다. 아이의 부채살 같은 눈꺼풀 안에 살포시 담겨 있는 눈동자는 아름드리나무의 껍질과도 같은 암갈색이었다.
‘오늘부터 이 아이도 저택에서 함께 생활하기로 했단다. 라에갈 인사하렴. 형은 어디 있니?’
‘의원 말이 형은 자꾸 열이 난대요.’
입술을 살짝 깨문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윽고 그녀가 2층으로 사라지자, 아이는 내게 엉거주춤 고갯짓을 하고는 엘몬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이가 2층 통로 끄트머리로 사라지는 걸 보다 라에갈은 불쑥 물었다.
‘넌 이름이 뭐야?’
‘……오’
‘뭐라고?’
리오.
꾀죄죄하던 아이는 다음 날부터 제법 말끔해졌다. 잘 갖춰진 의복을 입으니 귀족 같아 보이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 애는 식기를 잘 다룰 줄도 몰랐으며 시종을 부를 때는 방 안에 있는 줄을 당겨야 하는 것도 몰랐던 것 같았다. 게다가 말을 할 때는 늘 목을 움츠리고 웅얼거렸는데 그마저도 가끔은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단어를 썼다. 종종 제 방을 찾지 못하고 응접실이나 서재를 헤매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거긴 내 방인데.’
아마도 제 방을 찾으러 기웃거리던 아이는 문고리를 쥐고 있던 손을 황급히 내리며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어머니가 몇 번이고 지적해 주었지만, 아이는 매번 말을 높였다. 마치 사용인들처럼 말이다. 라에갈은 이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려다 말았다. 누가 같은 걸 계속 알려 준다는 건 그걸 몰랐다는 사실에 민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눈을 두어 번 굴리고는 조금 다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내 방 구경할래?’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아이는 미세하게 머리통을 움직였다. 그게 긍정의 신호인지 아니면 그저 몸을 앞뒤로 움직인 건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어 아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질긴 시선을 느꼈는지 하얀 볼이 살짝 붉어졌고 창틈 사이로 들어온 햇빛에 암갈색 눈동자가 찬연하게 빛났다. 문득 라에갈은 그 아이의 눈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이렇게 잡아당기는 거야.’
라에갈이 줄을 당겨 시종을 부르는 걸 시범 삼아 보여 주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줄을 바라보던 아이는 잠시 후 마리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똑똑.
허락이 떨어지자, 마리가 방으로 들어섰다.
‘공자님, 찾으시는 게 있나요?’
라에갈은 잠시 고민했다. 딸기 타르트? 아니면 말린 자두? 음…….
‘리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이가 우물쭈물했다.
‘난 쿠키가 좋아. 초코 쿠키.’
‘나도…….’
제가 뱉은 말에 놀랐는지 리오는 사색이 된 얼굴로 ‘아니, 저는…….’라고 하며 중얼거렸다.
‘맛있지?’
‘저번엔 이걸 몰래 먹다가 너무 급하게 먹어서 코로 뿜어져 나왔지 뭐야.’
아이는 뭐가 웃긴지 낄낄댔다.
‘너도 보조개가 있네.’
‘나도 한쪽에만 있어. 왼쪽에.’
라에갈은 리오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는 너무 바빴고 형은 매일 아파 앓아누웠으며 조카인 테오는 항상 울기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거 알아, 리오?’
라에갈은 바싹 아이의 앞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밤톨 같은 눈동자 안에 꼭 같은 제 모습이 거울처럼 비췄다.
우린 정말 닮았어.
***
언제쯤 끝나려나.
페라비 별장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공작의 보좌관은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하늘 위로 젖혔던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제 발끝에서부터 시작한 그림자는 기울어진 해를 따라 또 한 번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예정되어 있던 영지 시찰은 아무래도 미뤄야 할 듯했다. 이런 사태가 닥치면 무릇 어리숙한 자들은 우왕좌왕하기 마련이나, 그의 낯에 걸린 것은 한결 여유로운 미소였다. 항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여러 경우의 수를 고려하는 성정 덕이다. 물론 결코 일정에 어긋남이 없게 하는 공작 덕에 단 한 번도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돌연 심각해진 낯으로 보좌관은 저택의 로비를 응시했다.
필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틀림없는데…….
하기사, 요즘 공작님은 조금 이상하긴 했다. 구태여 정예기사들까지 보내 루트비아 영애를 보호하는 것도 그러했고 그 때문에 이 시골까지 걸음한 것도. 그가 가늠할 수 없는 것을 가늠해 보려 노력하는 사이, 정갈한 구둣발 소리가 저택 로비에서부터 울려 퍼져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 단정한 소리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그의 주인이었다.
“공작님.”
흐트러짐 없는 매무새로 그의 뒤를 따른 보좌관은 마차 안에 올라서자마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보고서를 앞으로 내밀었다. 최근 제국 내 가문들의 동향을 요약한 내용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영지 시찰 일정은 사흘 뒤로 미루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언질을 주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모양새가 나쁘지 않다. 그에게 눈짓으로 그 뜻을 전한 공작은 앞에 놓인 서류를 찬찬히 살펴 내렸다. 이모탄 가문, 메로본 가문. 철자의 순서대로 이어지는 가문의 이름을 따라 규칙적으로 번지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멎은 것은 보고 싶지 않는 단어가 눈에 걸린 직후였다.
에오르테.
애써 갈무리했던 마음이 그 단어 앞에 다시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제대로 당했다.
닳고 닳은 늙은이들에게도 한 번 지지 않던 그가 고작 스물 중반의 애송이에게. 그런 저급한 표현 말고는 달리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살얼음판 같은 정계에서 언젠가 한 번 누군가 제 뒤통수를 칠 줄 알았다만, 그게 에오르테 후작이라니. 생각해 본 적도 믿기지도 않는 일에 공작의 입술에는 절로 헛웃음이 차오른다.
속에 든 것이 그대로 내비치는 투명한 눈동자,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간 얼굴.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더욱 뇌리에 잊혀지지 않는 온기 없는 음성.
‘그 애를 내버려 두세요.’
내실에 울려 퍼지던 그 목소리를 떠올리자 공작의 입술 끝에 맺혀 있던 자조마저 이내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것만 지켜 준다면 공작가의 안온은 보장토록 하겠습니다.’
건방진 애송이.
끝내 삼킨 그 말이 그의 목 안에서 울려 퍼졌다.
***
마차가 떠나갔다. 공작가의 기사들을 모두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가자, 뭐 비슷한 류의 말을 남길 거라 여겼던 공작은 잠시 방에 들러 당분간 이곳에 머물라는 짤막한 말을 남긴 게 고작이었다. 짙은 바퀴 자국만 남기고 사라진 마차에 그제야 나는 이게 현실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열이 오른 이마를 쓸어 올리며 베개맡에 등을 깊숙이 기댔다. 생각보다 싱겁게 끝난 일에 허탈함이 찾아왔다. 크게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그걸 알면서도 내린 결정이었다. 이곳에 머물고자 한 것은. 그 결정이 큰 파란을 불러올 거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잠시 마음을 추스릴 시간이 필요해…….
기이하게 틀어진 팔다리와 그 사이로 번지는 피비린내. 그 모든 게 방금까지 함께 숨 쉬던 이의 것이라는 것과 찰나의 선택으로 건진 목숨이 도무지 내 것같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짧은 회상만으로도 속은 울렁거리고 시야는 부옇게 흐려질 정도로.
그래서였다.
뺨을 적시는 빗방울과 축축한 습기, 신을 물들이는 핏물. 점멸한 시야로 물밀 듯이 흘러 들어오는 기억에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천천히 고르며 생각했다.
그래서라고. 곧장 루트비아저로 향해야 할 본분을 응당 알지만, 그저 후작이 손을 내밀었다는 명분에 숨은 것은.
그저 잠시 이곳에서는 마음을 추스르며 뇌리에 박힌 기억들을 지워 내고자. 그뿐이었는데…….
“괜찮으십니까.”
불현듯 들려오는 나긋나긋한 음성에 흠칫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언제부터인지 문가에 서 있던 후작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번이고 문을 두드렸는데 기척이 없어…….”
부드러운 낯 위에는 짙은 염려를 내비치고서.
“혹 무슨 일이 있나 해서.”
그날 그때처럼.
스치듯 지난 시선이 그의 어깨에 닿자 문득 그 품에 기대어 무너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풀잎을 쓸어내리는 미풍 같은 음성과 규칙적으로 등을 토닥거리는 따스한 손. 걱정을 담은 다정한 빛깔의 눈동자도 차례로.
핏물로 얼룩진 그날의 장면을 몰아내고 또 다른 기억들에 심중에 차오른 것은 다름 아닌 당혹감이었다.
“아델리아 양?”
그가 보폭을 넓혀 가까이 다가올수록 부유스름하던 기억의 파편들은 점차 선연해졌고 당혹스러운 마음은 이내 다른 모습으로 모양을 바꾸었다. 무어라 형용할 길 없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 같기도 했고 발가벗겨진 것 같기도 한 그런 마음들로.
“영애?”
침묵이 길어지자, 후작의 낯은 심각해졌다. 무어라 해명을 해야 했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누군가 앞에서 약한 마음을 다 내비친 것은.
순간의 감정에 휩쓸린 처사라 그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대처하자 그렇게 먹은 마음도, 아무렇지 않은 척 마주 보자 그렇게 내린 결심도 이리 쉬이 흐물어질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마주 보면 될 줄 알았는데…….
고작 그 음성 한 번에, 눈짓 한 번에 다시 그날로 돌아간 듯 굴게 되니…….
그저 이대로 루트비아저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라는 생각까지 돋아났을 즈음, 그가 내 이마를 짚어 내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 나는 물결치듯 큰 반응을 내비쳤지만.
“……괜찮습니다.”
“그렇군요.”
애써 담담한 척 대답하고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자, 그가 다시 물어왔다.
“공작님께 이야기는 들으셨나요? 당분간 별장에 머문다는.”
“예.”
“영애의 뜻은 어떠신지요.”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혹 불편하신가 하여. 낯이 그리 좋지 않아 보여서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다행입니다. 모쪼록 당분간 부족함이 없도록 모시지요.”
가도에 즐비한 피투성이가 된 시체 더미,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부취. 아무리 애써도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던 기억의 파편들은 가느다란 웃음을 따라 흩어지는 소리에 사라지고 그 웃음만이 지나치게 맑게 울려 내게 스며들었다.
***
“조금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염려가 담긴 엘몬트의 음성이 서재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공작이 별장을 방문하고 나서 줄곧 쉼 없이 이곳에 박혀있던 주인을 향한 걱정 어린 조언이었다. 아들을 후계하는 듯한 집사의 말에 후작은 서재 책상을 가볍게 타닥 내려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오르테가의 문장이 박힌 서신을 그에게 내밀면서.
“다 끝났네. 이 서신을 공작가로 보내 주게.”
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엘몬트의 눈에는 여러 가지 빛깔의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찰나의 정적이 서재에 흐른 건 그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붕 뜬 적막을 메꾸는 소리는 자연스러웠지만, 집사의 낯에 서린 근심은 더욱 짙어진 채였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기어코 제 주인은 저 어린 아가씨를 자신의 보호 아래 두려는 것인가. 그간 주인이 보여 왔던 행보를 감안하면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과연 이 일의 무게를 후작은 짐작하고나 있을까. 그리하여 엘몬트는 조금은 주제넘게 입술을 움직인다.
“정말 아델리아 양을 이리 계속 별장에 머물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미 저택의 주인을 둘러싼 헛헛한 소문 몇 가지가 수도에 퍼지던 차였다. 미혼에 유서 깊은 가문의 가주와 반쪽짜리 영애는 입 대기 좋아하는 이들에게 좋은 얘깃거리였고. 나날이 쇠퇴해가는 에오르테 가문이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성장하고 있는 공작 가와 척을 지어 좋을 것 역시 없었다. 하지만 그가 걱정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야.
“아델리아 양께서 원하신다면.”
창가에는 무해한 낯을 한 사내가 저를 돌아보며 가느다란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사용인 한 명에게도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한 그의 주인은 필시 한 소녀의 세계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으리라.
“헌데, 후작님…….”
순식간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소녀가 숙녀가 되는 일은. 지금처럼. 흔한 일이기도 하다. 가지지 못한 것을 품고 부서져 버리는 숱한 마음들은. 저택의 주인을 담고 있는 어린 아가씨의 눈은 여인의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보다 더 깊고 강하게 뿌리 내린 어떤 마음이 깃들어져 있었다. 메마른 아가씨의 세상을 적신 빗줄기가 둘 모두에게 적당하기만을 바라기에는 집사의 뇌리를 스친 불길한 예감은 너무도 강렬했다.
“훗날 아가씨께서 혼란스러워하실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이 모든 일들을.
후작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으나 미묘한 간극이 있어. 타인을 대할 때와 아가씨를 대할 때 그의 눈은. 그 까닭이 무엇인지 엘몬트는 모르지 않았다. 뜨겁고 강렬한 사내의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역시 쉬이 짐작할 수 있지. 허나, 만약 어린 아가씨가 이에 헛된 기대라도 하는 날에는? 집사는 목 끝까지 치미는 말을 누르고 평범한 문장을 내밀었다.
“핏줄이 아닌 이들과 함께 머무는 것은 흔치 않은 일 아닙니까?”
둘에게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엘몬트의 조언에 후작은 한껏 고심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아래턱을 매만졌다.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졌음을 안 집사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예상과는 조금 다른 방향임을 알지 못한 채.
***
당분간.
이는 참으로 모호한 단어다. 먼저 말하는 이가 뜻을 정한다는 점에서 그러했고 그치조차도 그 기간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했다.
공작이 뜻하는 당분간은 과연 얼마쯤인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모호해지는 단어의 뜻을 짐작해 보는 사이, 마차 사고 희생자들의 장례가 치러지고 또 그를 기리는 긴 의식이 끝났다. 시골 영지를 떠들썩하게 한 사고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서서히 잊혀 갔고 모두 점차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시간들 속에서 내가 별장에서의 나날들에 익숙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화초들 대신 정원 군데군데 자리 잡은 약초들과 미관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위치한 온실. 치료실인지 저택인지 다소 모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별장의 풍광. 그 모든 것들에.
놀랍게도 후작의 작품인 이 스산한 분위기를 두고 그는 어릴 때 겪은 화재로 병약해진 조카 때문이라고 얼버무렸으나 그닥 설득력 있지는 않았다.
병약하다라…….
저 멀리서부터 바닥을 진동시키는 우렁찬 발소리를 느끼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병약하다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힘찬 발소리가 아닌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그 소리에 창밖의 풍경을 스치듯 지나간 내 시선은 흑단으로 넓게 짜인 문에서 멈췄다. 하나…… 둘…….
“누나!”
셋.
발소리와 마찬가지로 힘찬 음성이 내실에 울려 퍼졌다. 뒤이어 차례로 등장하는 이들은 이 별장만큼 익숙해진 사람들이었다. 흑단같이 새까만 머리카락 아래 햇살을 받아 도드라진 녹음의 눈동자, 눈썹 앞머리를 잔뜩 모은 채 산만하기 그지없는 어린 공자를 다독이는 유모.
“공자님, 소리를 낮추셔야죠.”
그리고…….
“테오.”
후작.
세 사람이 들어선 방은 순식간에 소란으로 가득 차올랐다. 더하지도 모자르지도 않은 어제와 같은 친숙한 나날들은 이 또한 마찬가지로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딱 하나를 빼면은.
“아가씨,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까 약속했지, 테오? 누나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모두가 내게 친절하다는 사실이었다.
따스한 온기를 담은 눈빛, 오후의 나른한 햇살 같은 음성.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 없는 그것들을 가슴에 새기며 나는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 떴다. 여명이 찾아오고 나면 사그라들고 말 찬란한 꿈이 아니라는 걸 되새기듯.
***
“싫어.”
소란이 찾아온 건 노을의 빛이 가신 자리에 어둠이 찾아올 무렵이었다. 졸음이 묻어나는 눈을 비비면서도 테오는 좀체 서재의 소파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테오, 이제 잘 시간이야.”
나긋나긋한 후작의 음성에도 말이다. 보통 저쯤 되면 못 이기는 척 말을 듣는 공자였는데…….
녹안은 사뭇 결연해 보여 후작도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가만히 그 옆을 지킬 뿐이었다. 기이한 균형을 이루는 대치가 무너진 것은 막 유모가 무언가를 찾아 문 쪽으로 몸을 일으켰을 즘이었다.
“책 읽어 줘, 삼촌.”
고집스러워 보이던 공자의 입술에서 비밀스럽게 흘러나온 건 뜻밖의 말이었다. 그 문장 앞에 심란한 듯 흔들리는 후작의 눈빛 또한 이상하긴 마찬가지였고. 맥락을 잡기 힘든 두 사람의 수신호는 몇 번 더 이어지더니 내가 그 뜻을 헤아리기도 전 끝이 났다. 정확히는 다시 몸을 돌린 유모가 소파에 착석했을 때에.
딱 한 권만이야.
소리 없이 벙긋거리는 후작의 입 모양에 잔뜩 입꼬리를 올리는 공자를 보고 나서야, 어렴풋이 협상이 평화롭게 끝났음을 짐작했을 뿐이었다.
문제는 왜 나까지 여기, 공자의 방에 오게 되었냐는 거겠지만.
그러니까 결국 전말은 이런 거였다.
원체 겁이 많아 홀로 쉬이 잠들지 못하는 공자는 유달리 무서울 때마다 책을 읽어 달라 청하는데, 그게 결국은 제가 잠들 때까지 후작이 자리를 지켜 달라는 암묵적인 요구라는 것이었다. 한두 번 일어난 일은 아닌지 서둘러 유모를 돌려보내고 이부자리를 준비하는 두 사람의 모양새가 능숙해 보였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팡팡 이불을 쳐 내 몫의 자리를 만드는 공자를 지나친 눈은 자연스레 여분의 침구거리를 준비하는 후작에게 닿았다. 제법 진중한 모양새가 조금 전 뱉은 그 말이 그저 농은 아니라는 걸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아델리아 양도 책을 읽어 드릴까요.’
말도 안 되게 엉뚱한 문장을 입에 담은 이의 눈은 자못 진지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 괴리감에 머릿속이 혼란으로 엉클어지는 동안, 후작과 공자는 상세하게 그들의 계획을 털어놓기까지 했다. 갑작스레 황당한 일을 겪은 이들이 응당 그러하듯 헛웃음을 흘린 시기도, 마땅한 거절의 말을 내놓을 시기도 놓친 나는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영애, 이리 오시면 됩니다.”
어느새 준비를 마쳤는지, 후작은 내게 손짓하며 말했다. 다른 손에는 이 사단의 원흉이나 다를 바 없는 그 책을 들고서. 어둠도 사르지 못한 화려한 문양으로 짐작하건대 아마 열 살 남짓한 아이가 읽기 적당한 동화책인 듯했다. 나는 입가에 자꾸 배어 나오려는 헛웃음을 삼키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그에게 나는 공자와 별반 다르지 않는 연배로 보이는지도.
***
아무래도 책을 잘못 고른 듯싶었다.
모르스 일족. 심상치 않은 기세로 시작하는 첫 단어에 어렴풋이 느꼈던 그 예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화려한 겉표지에 깊이 고심하지 않고 고른 책은 하필, 조카가 가장 무서워하는 죽음을 부르는 일족을 다루고 있었고 채 몇 장 넘기기도 전에 조카의 눈시울은 붉게 달아올랐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파르르 떨리는 여린 속눈썹을 눈치챈 후작이 화급히 내실에 울려 퍼지던 소리를 거두어들였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잔뜩 뒤집어쓴 테오는 연신 그의 품을 파고들며 웅얼거렸다.
“만약에 모르스 일족을 만나게 되면 어떡하지.”
이불 사이로 유일하게 삐쭉 튀어나온 통통한 손은 그 주인의 심경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후작의 소맷자락을 꾹 움켜쥐고 있었다.
“글쎄, 모르스 일족은 이 별장에서 아주 먼 저 수도에 있어. 절대 그럴 리 없을 거란다.”
후작은 그 손을 가만히 토닥이며 나직이 목을 울렸다.
“……그래도.”
“걱정 마렴, 테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네가 누구인지 말하면 돼.”
이불 밖으로 물기 젖은 녹안이 빼꼼 드러난 건 그 순간이다. 제법 긍정적인 반응에 후작은 더욱 부드럽게 붕 뜬 적막을 메꿨다.
“그들은 결코 섣불리 에오르테 집안을 건드릴 수 없을 테니까. 삼촌이 말했잖니. 모르스 일족이 가장 탐내는 걸 우리가 가지고 있잖니. 그게 뭐라고 했지?”
하이가의 보검.
꼭 다물린 입술이 벌어지고 주저하듯 흘러나온 단어는 바로 그것이었다.
하이가 에오르테.
에오르테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그들의 조상은 그 아성을 뛰어넘는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모르스 일족이라 전해진다. 그가 남긴, 그의 힘이 봉인된 보검은 단연 모르스 일족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물건. 에오르테가가 이른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도, 그럼에도 모순적이게 누구 하나 에오르테가를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는 것도 다 그 보검 때문이다.
백여 년도 전에 존재했던 조상의 이력을 몇 번이고 읊었을까. 간신히 진정된 조카는 이제 하이가의 책을 읽어 달라 졸라 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함께 책을 고르고 읽고. 조카가 지쳐 잠드는 것으로 한밤중에 소동이 끝났을 즈음에는 이미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둠이 깊어진 후였다.
꽤나 진땀을 뺐다.
모래알이라도 머금은 것처럼 까슬거리는 목을 물로 축인 후작은 한꺼번에 몰려든 피로를 지워 내려는 듯 눈을 감았다 떴다. 흐린 초점 사이로 부유스름히 떠오른 달빛 같은 머리카락이 파고든 것은 그때였다.
잠이 들었네.
월광이 어린 녹안은 평화롭게 흘러나오는 아이의 숨결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결코 이 방에서 잠들지 않을 거라는 굳건한 의기를 내비치던 아이라 쉬이 잠들지 못할 거라 여겼는데. 후작은 어색한 동작으로 침상에 오르던 모습과 동화책을 살피는 미심쩍은 눈과 기어코 그의 입에서 옛날 옛적에, 라는 그 예사롭지 않은 문장이 흘러나오자 저택에 진열된 석고상들보다 더 딱딱하게 굳은 낯을 차례로 떠올려 보았다.
그 괴리감에 또 한 번 후작의 입가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는 밤의 공기처럼 맑고 시원했다.
‘공작가에서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엘몬트에게 그 말을 전해 들은 직후, 계속해서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왔던 고민을 사그라트릴 정도로.
공작가의 서신은 간략했다. 후작의 조건을 수락하겠다는 것이다. 지난번 엘몬트와의 대화 직후 후작은 공작가로 전령을 보냈던 것이다. 대략 더는 그 애의 일에 간섭치 않고 모든 일을 에오르테가에 위임하고, 합당한 명분이 필요하니 그 아이의 후견인이 되겠다는 그런 요지를 담은.
그리고 오늘 오전 아이를 불러 이 일을 의논하려던 그의 심중에 돋아난 것은 자신이 과연 후견인으로서의 합당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먼저 일을 저지른 자가 하는 생각치고는 마땅하지 않았으나 말이다. 깊이 고심해 봐도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아. 그는 아이에 대해 잘 알고 있지도 못하지 않던가. 곱게 반으로 접은 서류를 주저 없이 서랍 안에 넣어 둔 그가 온종일 후견인의 자질을 곱씹고 있자, 보다못한 엘몬트가 말을 건넸다.
‘공자님께 하듯 하시면 되실 게 아닙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니, 기실 정확한 해답이었다.
‘아델리아 양도 책을 읽어 드릴까요.’
뜻밖의 말이 나온 까닭도 그 선상에 있었다.
일순 흐려진 아이의 낯빛에 방향이 잘못된 것인가 염려가 되었다만, 생각보다 결과물이 나쁘지 않다. 한껏 자신감이 깃든 눈으로 잠든 두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는 무언가 깊이 고심하는 듯 미간을 좁히더니 이내 조심스레 입술을 기울였다.
이제는 흐릿하게 남은 어린 시절,
“꿈을 꿀 거야. 기억나진 않지만 좋은 기분만은 가득한.”
그의 밤을 다독였던 다정한 문장들과 함께.
“그렇다고 깨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단다.”
짙은 어둠.
“그곳에서도 이곳에서도 내가 있을 테니.”
그 암흑의 시간을 가로질러 울려 퍼지는 음성은 부드럽다.
“잘자렴, 테오, 아델.”
아델.
곤히 잠든 조카를 지나 칠흑같이 세상을 뒤덮은 어둠에도 유달리 빛나는 은발을 눈으로 쓸어내리던 후작은 저도 모르게 방 안으로 흘러 들어간 그 소리에 잠시 숨을 죽였다. 그 단어가 왜인지 혀끝에 쉬이 감겨서. 문득, 기이한 예감이 든 것은 그 찰나였다.
사위는 푸르러지고 바뀐 계절을 맞이하여 다시 그 푸르름을 잃고, 혹한의 추위를 견디고서 또 한 번 꽃을 피우는 그 모든 날들 속에서 그는 이 이름을 부르게 되리라는 그런 예감.
아델.
그래, 그런 예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