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숨겨진 아이
고요한 물 위를 걷는 것 같은 조용한 걸음걸이가 저택의 복도를 가로지른다. 칠야의 흔적이 머물러 있는 공간 위로 내디디는 움직임은 자박거리는 소음조차 허용하지 않을 듯 절제되어 있다.
볕조차 잘 들지 않았던 공간을 밀어내고 앞으로 나아가던 걸음의 주인은 복도 왼편에 마련된 나선형 계단을 따라 움직임을 이어 간다. 여물지 않은 다리에 조금 버거울 법한 높이에도 단정한 동작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래로, 아래로.
계단의 쓰임이 정녕 편의를 위한 것인가 의심이 될 즈음, 어지러울 정도로 끝없이 이어지던 단이 비로소 수평을 이뤘다. 그 끝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식당이었다.
식사를 하기에 이른 시간이었다. 아직 몇 꺼풀 남은 어둠의 장막이 하늘 위에 제 색을 유리창 위로 뿜어내고 있었고 그곳에 밀려온 공기는 이슬에 젖어 제법 서늘했다. 그럼에도 식당은 물큰물큰한 내음으로 가득했다. 식기를 손에 쥔 이의 동작 역시 어색함이 없었다. 곧, 달그락거리며 식당의 적막을 하나둘 메꿔 나가기 시작하는 식기 소리는 희미하게 남아 있던 의아함마저 지워 내 버릴 정도로 규칙적이었다.
그저 그녀의 하루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시작되는구나, 그런 착각이 들게끔.
소리 없이 등장한 이는 떠나갈 때도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다시 계단을 올라 제 방으로 향할 때에도. 다소 너덜너덜한 서책을 무릎 위에 얹고 읽어 내릴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심성이 많은 이인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동작을 혹자는 그리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밀히 관찰한다면 그 기저에 있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이 남긴 궤적을 지워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려 내고 다시 지워 내고. 반복되는 행동에 균열이 찾아온 것은 달궈진 햇빛이 두꺼운 휘장 틈으로 가느다랗게 들이찰 때였다.
“잊으셨나 보군요, 아가씨.”
자신의 무례를 상기하지 못한 듯 엄격한 목소리에 나는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귀밑으로 흘러나올 법한 한 올의 머리카락도 허용하지 않는 듯 모조리 꽉 조여 올린 여자의 모습이 부연 햇살 아래서 더욱 도드라졌다. 송곳 하나 박힐 틈 없이 빡빡한 눈빛과 깐깐한 주름. 그녀를 지나쳐 온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난 흔적들을 짧게 일별한 내 시선은 그녀 어깨 너머, 활짝 열린 방문에서 멈췄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오늘은 공작 부인과 공녀님이 저택을 방문하시는 날-”
“댈런.”
나직이 흘러나온 음성이 그녀의 말을 잘라먹자, 안 그래도 뾰족하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자네야말로 잊었나 보군.”
그 눈가를 스쳐 지나는 밀도 높은 감정을 느끼며 비틀어진 입술을 움직인다.
“지켜야 할 것과 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이야.”
두꺼운 휘장을 비집고 들어온 빛줄기가 끝내 무거운 어둠을 이기지 못하고 파묻혔다. 그 암흑도 가리지 못할 번뜩이는 눈빛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댈런은 핏방울이 맺힐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물었지만, 고개를 아래로 내리고 사죄를 구했다. 나는 너그러운 주인인 양 덧씌운 낯으로 그녀의 고의와도 같은 실수를 용서해 주었다.
나의 관용은 내 관대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댈런의 행동이 그녀의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듯. 내가 그녀의, 아니 사용인들의 분수 넘는 행동을 크게 책잡지 않는 것은 그 까닭에 있었다. 그녀도 나도, 어차피 우리는 모두 짜인 판 위에서 나뒹굴어야 하는 인형들이므로. 우리는 우리의 적의가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지 못하거나 혹은 애써 외면하면서 서로와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댈런은 오만한 사용인이지만 동시에 출중하기도 했다. 그녀의 손에서 촘촘하게 빗겨 내려간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굴곡진 모양으로 변모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를 어색하게 흔들며 방을 나서 로비로 향하자, 이미 저택 바깥에 도열해 있던 사용인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내게 몰렸다.
분명한 적의와 경멸.
대리석으로 마감된 바닥과 내 구두 소리가 만들어 내는 마찰음이 숨 막힐 듯 팽팽하게 조여 오는 공기 위로 내려앉았다.
그리 유난스러울 것도 없었으나 오늘따라 왜인지 그 눈길들이 버거웠다. 격식을 갖추기 위해 신은 구두가 과하게 발을 죄여 오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다른 것들을 떠올린다. 푸른 호수와 울창한 수풀. 쾌청한 하늘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새. 그리고 이 모든 진실이 밝혀졌을 때 그들이 지을 법한 표정들. 조금 차분해질 즈음, 자갈길을 내리 달리는 마차 소리가 적막한 사위를 흔들기 시작했다.
마차의 몸체는 찬란한 금빛으로 도색되어 있었다. 공작가의 상징과도 같은 색상은 붉은 계열이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자위하기 위해서 황금과 같은 광택이 나는 색을 선호했다. 아니, 어쩌면 보는 이로 하여금 그 광휘로운 빛깔 앞에 고개를 조아리길 바라는지도.
눈이 부실 정도로 과한 번쩍거림에 흐려진 초점을 맞추는 사이, 공작 부인과 공녀가 마차에서 내릴 채비를 했다.
“세이, 조심해야지.”
혹 딸이 넘어질세라 노심초사하는 기색이 공작 부인의 부드러운 낯이 위로 선명했다. 잠투정을 하는지 공녀가 칭얼대기 시작해도 인장처럼 새겨진 그 흔적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빠짐없이 눈에 아로새겼다. 아름다운 음률 같은 음색과 혹한의 추위에서도 온기를 몰고 올 것같이 따스한 눈빛.
어쩌면 내 것이었을 수도 있을 모든 것들을…….
미련인가.
글쎄, 딱히.
손에 쥐어진 것들은 너무도 일찍 나를 떠나 버려 그게 진짜 내 것이었다는 감흥이 그리 들지는 않았다.
그럼?
스스로에게 건네는 물음이 뇌리를 맴도는 동안, 공작 부인이 거리를 좁혀 온다. 공녀는 결국 제 뜻을 관철했는지 부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러기엔 제법 큰 딸이었는데 누구 하나 입술을 떼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사용인들은 다정한 모녀를 향한 탄성을 흘려보냈다.
오로지 나만이 쉬이 찾아지지 않는 답을 쫓아 미간을 구길 뿐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아델.”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작 부인은 침착하게 맑은 미소를 건넸다. 조금 입꼬리가 떨리긴 했지만, 완벽하게 고아한 웃음이었다. 마치 이 모든 기괴한 짓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고 여길 수 없을 만큼. 그런 낭랑한 음성이 내게 닿고 나서야, 갑갑하게 머리를 죄이며 떠오르지 않던 단어가 순순히 내 앞에 굴러떨어졌다.
환멸.
나만이 알아챌 수 있는, 우리 중 누구 하나의 생이 마감되지 않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이 우스운 연극에 대한 지독한 회의감과 함께.
그래, 그게 더 적합하겠다.
“오랜만입니다, 공작 부인.”
베르니 공작 부부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딸.
부부에게 사생아가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일은 바로 내 어머니의 성이 ‘베르니’가 아니라 ‘루트비아’였던 시절 벌어졌다.
아버지는 쇠락하는 베르니 공작가의 주인이었다.
그가 한 선택은 부유한 어느 귀족 딸과의 결혼. 오로지 가문을 위해 한 선택이니 사랑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후, 어머니와 아버지는 금단의 사랑에 빠졌고 그 불륜의 결과물이 바로 나다. 두 남녀가 저지른 과오.
둘은 나를 외진 별장에 두고 키웠다.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출생을 밝힐 수 없는 어린 사생아 말이다. 따지고 보면 제국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흔하디흔한 그런 일에 더 가까웠다. 별장과 유모, 가끔 찾아오는 부모님. 단조로운 일상이 유지되기만 했다면 실로 그러했겠지. 변화는 어느 날 찾아왔다. 아버지의 부유한 부인이 병에 걸려 죽게 되면서. 부와 지위, 모두를 가지게 된 아버지가 다시 어머니를 찾았다는 건 다행일까, 아니면 불행일까. 확실한 건 아버지와 어머니 둘이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영원히 전과 같은 나날들이 이어졌더라면 모든 건 더 이해하기 쉬웠을 거라는 것이다.
그렇게 둘은 부부가 되었고 가정을 꾸렸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의 딸이 될 수 없었어. 갓 결혼한 부부에게 대여섯 된 딸이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아가, 아무 걱정하지 마렴.’
아직도 기억한다.
‘아버지가 방법을 찾으실 거야.’
찬란한 희망을 실은 달콤한 속삭임을.
‘세상에서 하나뿐인 우리 딸. 넌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니까.’
물기에 젖은 고아한 목소리를. 내게 주어질 그 모든 것에는 필연적인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시절의 어리석은 나를. 그들이 찾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끝내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곧, 둘에게 또 다른 후계자가 생겼으니.
공작가의 영광을 이어 갈 축복의 아이, 세이아린 베르니.
나를 향한 그들의 눈동자에 기이한 감정이 담긴 것은 그때부터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알아채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다. 그들에겐 훨씬 더 합리적이고 손쉬운 대안이 있었고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손이 귀하기로 자자한 베르니 가에 후계자가 탄생한 이듬해, 한 충격적인 소식이 제국의 사교계를 강타한다.
루트비아가에 사생아가 나타났다.
부정할 수도 없이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은발과 은회색 눈동자를 가진.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 충격으로 백작 부인이 앓아눕고 급기야 명을 달리했다는 부분이 특히, 비극에 정점을 찍었다.
***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잠이 들어 버린 공녀는 유모에게 맡기고 내 방에 공작 부인이 들어온 그 순간부터.
그녀는 참으로 이 침묵을, 적막을 미더워했다.
“……아델?”
공작 부인의 채근에 고개를 들어 보았다. 나와 꼭 같은 은회색 눈동자가 나를 마주했다. 같은 생각을 했을까? 그녀의 입술이 치아에 눌려 희게 질렸다.
“네, 베르니 부인.”
내 말에 그녀의 가느다란 속눈썹이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잠이 들어 유모에게 맡겨진 공녀가 그리워질 줄이야. 상처받은 양 파르르 떠는 것이 더는 보고 싶지 않아 시선을 창밖으로 주었다. 녹음이 짙게 드리운 푸르른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머릿속으로 아름드리나무가 펼친 이파리를 하나, 둘 세어 보려 노력했다. 그마저도 다시 들려오는 소음에 물거품이 돼 버렸지만.
“둘만 있을 때는…….”
보지 않아도 그녀가 눈을 굴려 말을 고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 이상한 관계에 균형을 유지할 가장 적합한 단어를.
“언니라고 부르렴.”
꽉 다물린 입술 사이로 슬쩍 조소가 새어 나왔다. 그것인가. 그녀가 내놓은 타협점이. 평소 같으면 그저 따라 주었을 명령이었지만 오늘따라 그런 마음마저 바닥을 보였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부인.”
마주한 은회색 눈동자가 평정을 잃고 일렁거렸다. 그러자 갑갑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우리 모녀는 이마저도 참 닮았다. 서로의 마음을 후벼 파야 숨 쉴 수 있다면, 서슴지 않는 잔인한 성정까지.
짧은 대화를 끝으로 다시 적막은 시작되었다. 공작 부인은 그 공기의 기류가 주는 갑갑함에 연신 가만있질 못하고 분주히 손을 놀렸지. 테이블을 장식하는 화병을 한 번, 하도 매만져 더 갈무리할 데가 없는 제 치맛자락을 한 번. 그런 그녀를 구한 것은 다름 아닌 공녀다.
“엄마…….”
내실에 내려앉은 무거운 침묵을 깨트리고서 공녀는 방문을 두드렸어. 막 잠에서 깨어난 그 아이는 조금 부루퉁한 얼굴을 한 채 방 안에 들어섰다.
“자꾸 마님을 찾으셔서…….”
괜찮다는 듯 손짓을 한 공작 부인은 딸에게 제 무릎을 내어주고는 소녀같이 낭랑한 특유의 목소리로 말했다.
“세이, 기억하지? 이모 말이야.”
이모.
처음에는 벼린 칼날처럼 심장을 파고들었던 말은 어느 순간 익숙해져 작은 생채기도 내지 못했다. 다만 그 칼날은 이제 다른 이를 향했나 보다. 부인을 조금도 닮지 않은 백금발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꼬마. 아이는 얼굴을 구기며 불퉁한 소리를 냈다.
“난 이모가 없어!”
더 어린 시절에도 한 성깔 하던 공녀는 변한 것이 없었다. 외려 베르니 부인이 당황한 티를 냈다.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한 어설픈 연기였다. 이 만남이 평화롭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공녀를 달고 온 것은 그녀 자신이면서 말이다.
“이런 세이, 그게 무슨 말이니.”
훈계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따스한 어조. 내가 들어도 느껴질 정도인데 공녀가 모를 리가 없지. 저를 혼내지 않을 것을 아는 아이처럼 고개를 팩 돌렸다. 부인은 그런 딸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내게 말했다. 호선을 그리는 입매는 억지로 그러모은 것처럼 살짝 경련을 일으켰다.
“아델, 기억나지? 네 조카란다.”
혹 일이 커질까 두려운 눈치였는지 부인은 눈짓으로 유모와 시종들을 물리고는 말했다. 그럼에도 초조함이 서린 말투는 어쩔 수 없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나와 공녀. 누군가 먼저 인사를 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치였다.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며 입술을 움직였다.
“오랜만이야, 세이.”
어째서 사람들은 비극에 열광하는 것일까. 자신의 일도 아닌데.
어려운 질문이다.
그럼 어째서 사람들은 늘 잘못된 표적을 고르는 것일까.
그 또한 쉬이 답하지 못할 물음이다.
허나, 확실한 건 그 두 가지가 합쳐진다면 그리 썩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거라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공기를 찢는 소리는 매서웠다. 그만큼 아프지는 않았다만. 그런데도 반쯤 돌아간 고개가 여태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은 뭐랄까, 예상치 못했던 전개 덕분이랄까. 얼얼한 통증이 뺨을 잠식해 가는 것을 느끼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가늠해 보았다.
지체가 낮은 이는 보다 높은 이에게 먼저 말을 건넬 수 없다.
제국에서 통용되는 아주 기본적인 예법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 건 그 순간이다.
“넌 나한테 말을 걸 수 없어!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으니까!”
단, 가족을 제외하고.
“세이, 가족 간에는 그런 예법이 중요하지 않잖니.”
나긋나긋한 공작 부인의 음성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한 표정이 붉어진 공녀의 눈시울 위로 떠올랐다.
“가족? 저 애는 내 가족이 아니야!”
사실이었다. 사생아를 가문의 일원으로 여기는 온후한 귀족은 이 제국에 없었으므로.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공작 부인은 해결을 바라는 듯한 눈으로 슬며시 나를 응시했다.
무언의 뜻을 전하는 눈빛을 담고서.
말리는 이도 말하는 이도 같은 바람을 갖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점점 더 목청을 돋우는 공녀의 작태에 사위가 혼란스러워질 즈음, 그러니까 매번 새로운 방법으로 나를 농락하는 세상에 또 한 번 고개를 꺾으려던 찰나, 기척이 느껴졌다.
“내게 먼저 들르지 않고.”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내실에 일고 있던 혼란을 단숨에 잠재웠다. 병색이 완연한 기색이었지만 그럼에도 품위를 잃지 않은 노인이 그 소리 뒤로 모습을 드러냈다.
루트비아 백작이었다.
“아…… 아버지…….”
주무시고 계시다기에.
그가 만들어 낸 위압감에 짓눌렸는지 공작 부인은 작게 웅얼거렸다. 백작이 그녀를 스치듯 지나 공녀에게 다가서자, 몸을 움찔거리기도 했다.
이를 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백작은 오로지 공녀에게만 시선을 고정했지만.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빛과 함께. 그 눈빛으로 말미암아 공녀는 방금까지의 일을 모조리 잊은 듯 그저 사랑스러운 손녀로 피어올랐다. 종달새처럼 재잘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번지기 시작할 즈음,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백작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너는 이만 숲에 산책이나 다녀오거라…….”
여전히 공녀에게 시선을 박은 채였다.
***
바깥의 날씨는 선선하다기보다는 서늘하다에 더 가까웠다.
숲으로 산책을 떠나기엔 아직 적합지 않은 계절이었으나 나는 보폭을 좁히지 않았다. 백작이 내린 축객의 명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고 이 드넓은 영지에서 유일하게 백작의 것이 아닌, 어느 이름 모를 주인의 소유인 숲과 별장은 내 유일한 쉼터였으니. 저물어 가는 해를 받아 가도에 세워진 루트비아 가의 은빛 문장들이 붉은빛으로 물들어 시야를 흐렸다. 더욱 속도를 높인 것은 그래서인지도. 영지 지천에 깔린, 달빛처럼 차갑고 시린 이 색감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 빛깔들은 숨쉬기 버거울 만큼 숨통을 조여 온다. 후회의 눈길 한 번. 절절한 눈물 한 방울 없이.
꿈틀거리는 목울대와 시퍼렇게 도드라진 실핏줄. 간신히 무언가를 참아 내는 듯한 그 수많은 몸짓들을 이끌고.
공작 부인의 입을 통해 내 존재가 드러난 밤, 백작은 분노했다 들었다. 평생을 지켜 왔던 가문의 명예가 귀히 여긴 딸의 손에 산산조각 났으니 그러고도 남음이다. 손녀를 딸로 위장해야 한다는 기괴한 요청 역시 그의 노기에 불을 붙였다. 급속도로 악화된 부녀의 관계 속에서 속앓이를 한 것은 루트비아 백작 부인이었다. 깊은 마음의 병이 그녀를 집어삼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뒤늦게 백작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나를 저택에 데려온 날, 백작 부인은 명을 달리했다.
아직도 선연하다.
내 어깨를 움켜쥔 손의 떨림과 저택 로비에 번지는 끊어질 듯한 숨소리. 내가 기억하는 은빛 문장은, 그리고 백작은 그런 깊은 절망과 비통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아마 그도 나를 보며 비슷한 것을 떠올릴 수밖에.
은빛 물결에서 벗어나서야, 나는 호흡을 골랐다. 거친 숨결 사이로 흘러 들어온 차디찬 공기가 폐부 속에 스며들었다. 흐릿해지던 초점이 점점 분명해지고 시야 사이로 익숙한 풍광이 펼쳐진 것도 그쯤이다. 가도 한편에서 바삭하게 말라 가는 약초, 불어오는 바람을 가로지르는 박새와 싱그러운 푸른빛으로 피어오른 녹음의 정원, 고담하지만 사람의 손길이 오래도록 닿지 않아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별장…….
그리고 마차.
***
“무슨 일이지.”
갑작스레 급정거한 마차에, 안에 있던 사내가 차창 밖으로 몸을 내뺀다. 어둠을 사르고 드러난 머리카락은 햇살을 녹인 것 같은 백금발. 루트비아 가의 영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양은 그럼에도 귀족임은 분명했다. 바람결을 따라 흐트러진 휘날리는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단정한 낯은 더욱이 그랬다.
“그게 갑자기 누가 튀어나와서…….”
당황이 깃든 마부의 음성에 주저 없이 마차 밖으로 나서는 작태는 여타 귀족들과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만.
여전히 마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사내는 마차 앞으로 보폭을 넓혔다. 투명한 백금발과 어우러지는 청신한 녹안으로 짙은 암흑을 가로질러 소란의 진원지를 찾아 헤매면서. 선연한 어둠에 젖어 유달리 도드라지던 눈이 일순 짙게 가라앉은 건 공간에 흐트러트리는 자취의 정체를 발견한 직후였다.
바닥을 수놓는 은빛 물결, 그 안에서 이지러지는 인영은 작고 조그마했어.
“마틴…….”
그래서였다.
“어서 의원을 부르게.”
애써 침착을 가정해도 붉은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음성에는 떨림이 가득 묻어 나온 것은.
***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고요한 사위를 깨우는 급박한 소리에 랑게르 의원은 잠이 가시지 않은 눈가를 문지르며 침실에서 벗어났다. 루트비아 백작의 소유하에 있는, 이 시골 영지에서 의술로 먹고산 지 어언 스무 해. 이런 야심한 시각에 벌어지는 위급 상황쯤이야 놀랄 것도 아니었다.
발을 놀려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는 침착하게 머릿속으로 여러 경우의 수를 헤아렸다.
강물은 여태 얼어 있고 농작도 끝난 지 오래이니.
그럼, 화재인가.
하기야, 불이 붙기 좋은 계절이지.
제법, 심각한 일이 되겠군. 작게 이맛살을 찌푸리던 의원이 코끝을 간질이는 탄내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문이 열린 직후였다.
“큰일 났습니다.”
다급한 소리에 의원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문 너머에 나타난 이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이였기 때문이다.
“아이가 마차에 치였는데…….”
헐떡거리는 호흡 사이로 심각한 설명이 흘러나오고 나서야, 의원은 잡념에서 벗어났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사내의 설명을 하나하나 새기며 걸음을 옮겼다. 겨우 맥을 잡아 가던 정신에 다시 균열이 찾아온 것은 시야에 들이찬 마차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마차 끝에 장식된 머리 두 개 달린 독수리의 문양 때문에.
“괜찮으십니까?”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시종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내보인 그는 찬찬히 걸음을 옮겨 마차에 올라탔다. 그가 속으로 이 고즈넉한 영지에 곧 불어올 파란을 가늠하는 사이, 가도를 쏜살같이 내달리던 마차는 어느새 멈추고 익숙한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영지에 자리 잡아 머리칼을 휘감는 바람보다 익숙한, 그러나 그 숱한 세월 누구 하나 살지 않았던,
페라비 별장이.
***
의원을 부르고 진찰을 맡겼다.
신속하게 마무리된 응급상황에서 그저 아이가 깨어나길 기다릴 일만 남은 페라비 별장의 주인은 서재 의자에 깊숙이 노곤한 몸을 기대었다.
‘다리를 조금 다친 것 같군요. 그것 외에는 크게 상한 곳은 없어 보입니다.’
간단한 진맥을 마친 의원은 그리 말했다. 의식을 잃어 제법 심각할 줄 알았던 아이의 몸 상태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으니 한 시름을 덜은 셈이었다.
큰일 날 뻔했군.
아찔했던 마차사고를 되뇌며 그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밤의 어둠이 묻어나는 백금발이 흐트러지며 녹음이 짙은 정원을 떠올리게 하는 눈동자가 드러났다. 다만, 장난기가 그득 담겨 이십 대라고 하기에 믿기지 않는, 소년 같은 천진함이 깃든 눈이 평소와 달리 조금 짙게 가라앉았지만.
이 시각에. 그 외진 곳에. 저런 어린아이라니.
사고가 난 당시에는 당혹감에 제대로 상황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만, 여러모로 이상한 구석들이 다분하지 않은가. 분절된 단어들로 자연스레 이어지던 상념에 의문이 깊어진 건 어느새 방에 들어선 집사가 테이블 위로 주스를 내려놓은 직후였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달큰한 과실과 몸에 좋은 약초를 배합하여 끔찍하게 푸르죽죽해진 액체가 나비치는 투명한 잔을 바라보며 후작이 이맛살을 찌푸리는 사이, 집사는 차분히 제 할 일을 이어갔다. 다친 아이의 경과는 어떻하다부터 시작해 이를 담당할 시녀를 누구로 배정할 건지, 사고를 낸 마부의 처분으로 이어지던 긴 보고는 마침내 이것으로 끝을 맺었다.
“루트비아 가에 서신을 넣었습니다, 후작님.”
이것까지.
“루트비아 가?”
“예, 한눈에봐도 백작 가의 사람 아닙니까”
“그건 나도 안다만……백작가에 그만한 아이가 있었나.”
은발, 은회안. 너무나도 뚜렷한 가문의 상징은 그래서 도리어 이상했다. 공작가의 안주인이 된 루트비아가의 여식은 외동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사생아가 있잖습니까.”
그런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넌지시 집사가 말을 건넸다.
“사생아? 루트비아 가문에?”
“예, 그 바람에 백작 부인이 돌아가시고 한바탕 난리가 났었지요.”
“루트비아 가문에 사생아라니…….”
정의와 신망. 이를 목숨처럼 생각하는 가문이 아니었던가. 그 덕에 수 세기 동안 적통에서 적통으로 후계를 이어 왔고.
“세상일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지요.”
집사, 엘몬트의 말에 동조라도 하듯 그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후작님.”
노크 소리와 함께 조급한 음성이 밀려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그가 보낸 눈짓에 집사가 문을 열어 주었고 그 너머로 들어온 시종은 다소 비장한 어투로 목을 울렸다.
“깨어났습니다.”
자그마한 아이였다.
가도에 쓰러진 아이를 보았을 때에도, 안아 들어 침상에 눕혔을 때에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그 예상보다 더욱 어려 보인 탓에 후작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가 그리 문장을 고르고 있는 사이, 도저히 루트비아가의 핏줄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뚜렷한 은회안이 그를 직시해 왔다.
“의원 말로는 큰 이상은 없다 합니다.”
아이의 것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차분한 어조였다.
“괜히 놀라셨겠습니다.”
침착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묘한 반전에 얼떨떨해 있던 후작은 한참 후에야 목을 울렸다.
“그런 말 마세요, 영애. 아무래도 시간이 늦고 영애의 몸도 좋질 않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머무는 게 어떻겠습니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곰곰이 고심하던 후작은 짧은 문장을 덧붙였다.
“저택에는 이미 서신을 넣었습니다.”
유달리 어둠이 짙은 밤, 조금도 암흑에 물들지 않는 은발 아래 짙게 가라앉은 잿빛 눈동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순간, 아이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역시나.
도저히 아이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눈이었다.
***
서신을 받았다.
아델이 지금 페라비 별장에 있다.
말도 안 되는 시간에 전해져 온 말도 안 되는 소식이었다.
먼저, 내실에 잠들어 있을 아델이 마차에 치였다는 점이 그랬고 그 애가 머물고 있는 곳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비어 있던 페라비 별장이라는 것이 두 번째였다. 맥락이 어느 정도 맞아야 장단을 맞춰 주지. 놀라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침대 헤드에 기대며 공작 부인은 짧게 혀를 찼다. 페라비 별장의 주인이라니. 그가 누구이던가. 무려, 에오르테 후작 아닌가. 그것도 긴 시간 기괴하고 음산한 소문들로 점철되었던 가문의 이미지를 단박에 쇄신하고 사교계의 명사로 자리 잡은 사내.
불청객의 헛소리. 혹은 취객의 술주정.
그저 그리 여기고 다시 침대 맡에 몸을 누이려던 공작 부인은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방에 들어선 사용인의 모습에 동작을 멈추었다.
“부인.”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델의 방을 확인해 보라 지시를 내렸던 그 하녀였다. 조금 창백하게 질린 낯빛과 떨리는 입술. 좋지 않은 예감이 엄습한 순간, 하녀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침실이 비어 있습니다.”
마땅히 사람의 온기로 데워져야 할 침실에는 서늘한 공기만이 맴돌고 있었다. 이후, 아델을 보지 못했다는 증언들이 조심스레 하나둘 들려오자 공작 부인은 더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델이 페라비 별장에 있다.
말도 안 되는 시각에 전해 온 말도 안 되는 소식은 말도 안 되게 진실이었다. 그 진실이 가져온 충격에 공작 부인은 그저 느리게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혹여 그러다 보면 사라진 아이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그런 헛된 바람과 함께.
그저 방에 있는 줄 알았다.
늘 그랬고 그래 왔던 아이니까.
그런 줄만…….
“무탈하시다고 하니, 이만 쉬셔도 될 듯합니다.”
가만히 옆을 지키고 있던 하녀장, 댈런이 차분히 말을 건넸다.
“아니야, 이건…….”
무려, 에오르테 후작이다.
그가 흘리는 말 한마디, 손짓 하나면 오늘 벌어진 이 일은 수도에 파다하게 번지게 만들 수 있는 인물. 만에 하나 그가 조금이라도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더라면. 그러기라도 한다면…….
“부인?”
걱정스러운 듯 돌아오는 댈런의 음성에 간신히 가빠 오는 호흡을 정돈한 공작 부인은 입술을 움직였다.
“당장 별장으로 마차를 보내게.”
“예?”
“댈런, 당장 마차를 보내야 해.”
메아리처럼 되울리는 목소리, 그리고 평소답지 않게 흐릿하게 번지는 울림에 댈런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거두지 못했으나, 공작 부인의 완고한 몸짓에 다소 기이한 그 지시를 받아들였다. 그저 무시하고 외면해도 말 이복자매지간이다. 거기다가 출신 성분도 알 길 없는. 그런데도 공작 부인은 동생의 일이라면 끔찍하게 굴었다. 그저 속이 없으신 게지. 귀하디귀하게 자라 세상 물정 모르는 여린 공작 부인을 염려하느라 좁혀진 그녀의 눈이 크기를 키운 것은 막 방을 나서려던 때였다.
“부인.”
다시 한번 제가 본 것이 헛것이 아님임을 확인한 댈런은 천천히 목을 울렸다.
“그러실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뭐? 그게 무슨…….”
대답 대신 조용히 창밖을 가리키는 댈런의 손끝을 따라 혼란스러운 빛이 다분한 은안이 움직였다. 이른 아침의 맑은 햇살 아래 막 저택에 들어선 마차가 그 눈 위에 상을 맺었다. 그리고 그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또 하나의 잿빛 눈동자도 마찬가지로.
“눈치챈 건 아니겠지, 아델?”
두려움으로 가득 찬 공작 부인의 음성이 얼어붙은 공기 위로 내려앉았다. 나는 대답 대신 빈손으로 들창을 열어젖혔다. 선선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아직 가시지 않은 새벽녘의 내음이 묻어 있는 것 같기도 한 공기의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어쩐지 밤과 낮, 그 흐릿한 혼돈의 시간으로 자꾸 나를 끌어당겼다. 고개를 내저었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감상을 몰아내려는 듯 세차게.
마차 사고 직후 페라비 별장 주인의 대처는 응당 마땅했다.
루트비아저에 서신을 넣고 사고 소식을 알리고.
소요한 저택에 파란은 당연한 수순처럼 일어났다. 그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지점이었겠지만.
“아델, 뭐라 말 좀 해 보렴. 일이 잘못된다면 우린 모두…….”
창백하게 질린 낯빛. 떨리는 어깨. 그 너머로 희미하게 전해져 온 소리들. 참으로 익숙한 모습들이었다. 외딴 별장에 머물던 어린 시절, 길을 잃고 이름 모를 이의 손에 이끌려 돌아왔을 때도, 누군가 우리 둘의 지나치게 닮은 외양을 입에 올렸을 때에도.
공작 부인은 꼭 지금처럼 굴었다.
“후작이 대체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온 거니.”
천천히 뒤돌아선 그녀의 뺨 위로 젖은 물기가 쉼 없이 흘러내렸다. 그 수많은 날처럼.
기를 쓰고 빨리 돌아왔음에도 결국 보게 된 만면에 나는 눈을 내리감았다.
보고 싶지 않아서.
“그자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니?”
보게 되면 가엽게 여기게 되고,
“언젠간 다 들키고 말 거야, 그렇지? 다 들키고 말 거야…….”
가엽게 여기게 된다면 기어코 이해하고 말 테고 결국에 나는…….
“너무 무섭구나, 아델. 너무 무서워. 아아, 아델. 내 가여운 아이…… 내 불쌍한 아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녀가 나를 책임지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나를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끝내 풀지 못할 문제를 되뇌며, 입술을 열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나직하게 흘러나온 소리는 싸울 의지를 잃은 무딘 칼날처럼 둥글었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으나, 그리 큰 문제는 없었다. 사고는 그리 끝을 맺는 듯했다.
“아가씨.”
“…….”
“도착하셨습니다.”
거의 날마다 저택을 방문하는 저 사내를 제외한다면. 그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공작 부인이 눈에 띄게 날 선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들어오시라 전하게.”
“약초를 좀 가져와 봤습니다. 델로라의 뿌리이지요. 원기를 회복하는 데 좋을 듯하여 말입니다”
수려한 외모, 다정다감한 성격. 에오르테 가문의 후작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도 이목을 끄는 부분은 많았으니, 하루가 멀다 하고 회자되는 사용인들의 대화들로 그에 대해서 제법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화재로 어머니와 형을 잃고 에오르테가의 주인이 된 내력부터 시작해서 조카가 있다더라. 잔병치레가 잦아 부러 이 시골까지 왔다더라.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들까지.
말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헛되고 제멋대로인 주제에 제법 힘이 있다.
그런데…….
투명한 눈동자 안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감정들이 넘쳐 나왔다. 걱정과 염려 그 모든 것들이 뒤엉킨.
그러니까 진실로 다정하고 다정한 사람.
“감사합니다, 허나…….”
그래서 더욱 위험하고 위험한 사람.
잠시, 그 빛에 숨을 죽이고 있던 나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이젠 정말 괜찮습니다.”
***
분명한 축객의 명이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후작은 한참 후에야 그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을 나섰다. 내밀어진 찻물에는 여전히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그런 찰나의 시간이었다. 당연히 별장으로 돌아오는 데는 한나절이 걸리지 않았다.
“아, 오늘은 생각보다 일찍 돌아오셨습니다.”
그의 겉옷을 받아 들며 집사는 의아함이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이를 애써 외면하며 후작은 목을 울렸다.
“영애 몸이 이제 괜찮은 듯하여. 별장 내부는 어떻게 되었지?”
“어느 정도 이제 정돈이 되었습니다.”
말을 마친 집사는 후작에게 저택 내부를 안내했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별장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아 그럭저럭 볼만하게 단장되고 있었다. 어느 경박스러운 걸음걸이도 묵직한 울림으로 변모시키는 희귀한 흰색 마호가니 바닥재가 로비에 깔려 있었고 벽면에는 고가의 예술품이 가득 채워졌다. 순백금으로 칠해진 응접실의 천정과 그 중앙에 매달린 샹들리에. 이전에 머물던 수도 인근 별장과 거의 흡사한 모양들이었다.
만족스러운들 저택 구석구석을 살피던 후작의 걸음이 멎은 곳은 의외의 장소였다.
손님용 객실.
그 사고가 일어나던 날, 그리고 기어코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던 밤. 루트비아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아이는 침묵했다. 말 한마디,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그러기라도 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떼쓰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나이의 아이가 지닌 표정이 밀랍 인형 같아서일 수도. 생명이 깃들지 않은, 무기질적인 석고상 같은 낯에 균열이 찾아온 것은 막 마차가 루트비아저에 도달할 즈음이었다.
‘이만 멈춰 주세요.’
후작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아이는 잘게 입술을 깨물다 덧붙였다.
‘……더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
‘그런 걱정은 마십시오.’
무어라 더 말을 할 것처럼 달싹거리던 입술을 이내 체념한 듯 움직임을 멈췄다. 유달리 어둠이 짙은 밤, 조금도 암흑에 물들지 않는 은발 아래 짙게 가라앉은 잿빛 눈동자.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닌 것 같은 예감이 들었을 때는 스치듯 이를 지나친 시선이 조금 부은 뺨에 닿은 후였다.
이미 때는 늦었지만.
마차는 섰고 아이는 내렸다.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이리라.
“의원 말로는 걷는 것에도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합니다.”
비슷한 사람을 떠올렸는지 엘몬트가 입을 열었다.
“……다행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온 지 얼마도 안 되어 큰 사고가 나는 줄 알았습니다.”
“엘몬트.”
“예.”
“아니야. 그저…….”
그가 말끝을 흐리자, 의문의 깃든 집사의 눈이 한층 깊어졌다. 무언가를 곰곰이 되짚어 보는 것 같던 그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일전에 물어보셨던 것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왜 아델리아 양이 다리 말고 다른 상흔이 있었냐는.”
돌아오는 답이 없자, 이를 긍정으로 여겼는지 집사는 좌우로 주변을 살피더니 조금 소리를 죽이며 입술을 움직였다.
“의원 말로는-”
“되었네.”
한 손으로 그를 제지한 후작은 혼란스러움이 선연한 낯을 갈무리하고는 객실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지난 며칠간 루트비아저를 드나들며 느낀 바는 루트비아 백작은 그리 경우가 없는 이는 아니라는 점이다. 정의와 신망. 그 두 단어로 빚어낸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런 모양을 하고 있으리라. 하물며 손찌검이라니.
“내가 잘못 생각한 듯싶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는 듯 빙긋 입꼬리를 올리며 화제를 전환했다.
“테오는 일어났나.”
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로.
갑작스레 변화된 대화의 흐름에 잠시 얼떨떨하던 집사는 마찬가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그 역시 마찬가지로 가장 좋아하는 주제였다.
“아, 예. 공자님께서 후작님을 찾으시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크라바트를 마저 풀어 헤친 후작은 서둘러 보폭을 넓혀 방을 나섰다. 로비를 지나 계단을 오를 때쯤, 귀신같이 소리를 알아챈 조카가 졸린 눈가를 비비며 그를 찾아 눈을 굴리고 있었다.
“삼촌!”
“테오.”
제 이름을 부르자, 당연하다는 듯 품에 안겨 오는 조카에 후작은 입매를 풀어 헤쳤다.
“잘 잤니.”
“무서운 꿈 꿨어요.”
대답 대신 돌아오는 칭얼거림에도 가늘게 웃음이 떠오른 표정은 변할 생각이 없었다. 어린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자, 찜찜하던 기억들은 모두 사라졌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사그라들었던 것 같은 물음이 다시 떠오른 것은 그로부터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그때.
다시 그곳에서.
붉었던 뺨은 조금 푸른빛을 띠었고 아이는 여전히 자그마했다.
“아델리아 양이군요.”
같은 곳에 시선이 닿았는지 엘몬트가 입을 열었다.
“그렇네.”
“아직 다리가 불편해 보이시는 데 마차를 세울까요?”
잠시 고민하던 후작은 차창 밖을 찬찬히 살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여린 어깨와 보폭을 넓히기 시작하는 작은 발. 잘게 떨리는 서책을 쥔 작은 손. 분명한 의중을 내비치는 흔적들. 그 모든 것들을.
그저 지나쳐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더는 저택을 방문하지 말아 달라는 그 무언의 뜻을 내비쳤던 그 날처럼.
“후작님?”
그래서 아직 이리 먼 거리를 걷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는 불안도 왜 늘 이리 외진 곳만 돌아다니는 건지 하는 걱정도 집어삼키며 후작은 그저 지나치려 했다.
속도를 내는 마차의 움직임에 나부끼는 드레스. 그와 함께 균형을 잃은 작은 몸. 그 찰나의 순간에 맞부딪힌 은안이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
눈이 마주쳤다.
속도를 낮춘 마차 차창 밖으로 흐트러진 굼실거리는 금발과 그 아래 청신한 빛깔의 푸른 눈. 짙은 오후의 햇살 아래 도드라진 흔적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고즈넉한 이 영지에 식지 않는 열기를 몰고 온 사내.
에오르테가의 후작. 라에갈 에오르테.
왜 자꾸만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것인지.
깊은 한숨과 함께 그를 보지 못한 채 보폭을 넓히려다 중심을 잃고 무너졌다. 막 속력을 높이려던 마차가 아예 멈춘 것도 그쯤이다.
“괜찮으십니까?”
부리는 마부보다도 함께 있는 집사보다도 빨리 그는 날랜 몸집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를 부축하고 마차로 인도하기까지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동작에 균열이 찾아온 것은 모든 것이 정리되고 다시 마차가 속력을 낼 무렵이었다.
후작은 그제야 자신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친근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조금 무안한 듯 뒷목을 쓸었다.
“또 숲에 다녀오시나 봅니다, 아델리아 양.”
막 물가에 피어난 수초들같이 싱그러운 음성이 마차의 적막을 흔들었다. 기억했던 것과 같이 다정하고 따스한. 여전히 한결같은 그 목소리 위로 떠오른 것은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역시 그때도 이 부근이었지.
“다리는 좀 괜찮으십니까.”
다시 만날 일이 없다 생각했다.
“의원 말로는 이제 제법 회복이 되었다 듣긴 했다만.”
아니,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이전과 같을 수는 없다 생각했다.
“아직 이리 먼 거리를 걷는 것은 조금 무리가 아닐지요. 혹…….”
출신 성분도 미천한 사생아. 엮여 좋을 것도 없는 그 관계에 냉랭한 반응들만 내비쳤으니.
헌데, 이리 다시 말을 붙이고 얼굴을 마주 보다니.
영문 모를 행동들을 읽어 내려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시선이 끝난 곳은 의외의 지점이었다.
정확히는 조금 수상한 구성이 다분한, 친히 공녀께서 하사하신 멍자국이 남아 있는 내 뺨.
가늘어진 시야로 달싹거리는 그의 입술이 보였다. 어떤 말을 삼키는 것 같기도 한 그 움직임에 다소 허탈해진 나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복잡해진 상념이 그 거친 손길에 흩어졌다.
“저택에서 마차를 내주지 않아서 말입니다.”
뜻밖의 대답에 후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백작께서 저를 하도 박대하시니 사용인들도 그 뜻을 따를 수밖에요.”
마주한 푸른 눈은 어느새 혼란으로 가득 차올라 있었다.
“이런 흔하고 뻔한 답을 기대하셨습니까. 백작저에 사는 사생아는 매일 눈물로 날을 지새운다, 뭐 그런 동화 속 이야기처럼?”
벼린 말들이 내려앉은 공기 위로 비아냥거림을 흘려보내며 나는 그 눈을 직시했다.
“후작님, 저는 종종 이리 숲을 거닐고 서책을 읽는답니다. 후작님께서 자주 마차로 영지를 누비듯 말입니다.”
혹여 흔들린 눈빛 하나에, 떨리는 초점 하나에 어떤 흔적을 들킬세라,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후작님께서 그리 가엽게 여기실 정도로 가엾게 살지는 않으니.”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이제 다시는 이 숲을, 이 가도를 찾는 일을 없을 것이라는 결심을 곁들이며.
그 굳건하던 각오가 무너지게 된 시점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지만.
***
“식사는 따로 준비해 놨습니다.”
어느덧 따스한 기운이 완연한 계절로 바뀐 어느 날, 하녀장이 말했다. 무슨 뜻이냐는 듯 내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그녀는 말을 멈추고는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냐는, 모멸과 분노가 얽힌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그 눈 안에서 뒤채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가까스로 화를 내리누르며 눈을 내리깐 댈런은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곧 백작 부인의 기일이잖습니까.”
엄연한 축객의 명이었다.
백작 부인의 기일이 다가오면 평소에도 내게 관대하지 않았던 이 저택은 더욱 팍팍해진다. 살얼음판을 딛는 것처럼 날 선 공기가 숨통을 조여 오고 벼린 눈빛들이 살갗을 파고든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다. 다시 기어코 숲으로 향하는 내 걸음을.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 반드시 지나쳐야만 하는 페라비 별장이라는 걱정도, 후작과 다시 마주치게 되면 벌어질 추문도, 저택을 휘감고 있는 무언의 압박보다는 덜 위협적이었으니.
딱히 다른 갈 곳이 없는 내 선택지는 그래서 다시 이곳, 메이나 숲이었다.
짙어진 햇살을 받아 푸르러진 이파리, 바람의 결을 따라 흩날리는 꽃씨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 이곳에 오게 된 까닭도, 오지 말아야 될 이유도 점차 흐릿해졌다. 딱딱하게 긴장된 몸의 서서히 이완되고 마음이 눅지근해질 때쯤, 날카롭게 반짝이는 물체가 눈을 찔렀다.
부신 눈을 비비자, 시야로 파고든 것은 자그마한 회색 통이었다.
이 근방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익숙한 질감과 모양은 랑게르 의원이 직접 만든 작은 생채기나 상처에 바르는 유백색 연고 통과 흡사했다.
그런 것이 여기 왜.
다소 이질적인 광경에 의문을 곱씹는 사이, 방금까지는 미처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풍경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나무 둥지에 놓인 정체불명의 서책과 에오르테가의 문장이 찍힌 서신.
[아델리아 양에게]
홀린 듯 펼쳐 본 서신은 그런 문구로 시작하고 있었다. 진지한 구어체와 거듭되는 사과가 곁들어진 따분한 내용이었다. 혹여 더 불편할까 직접 찾아뵙지 못했다는 맺음말 역시.
그다웠다.
한 자 한 자 한껏 고심해서 썼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한 뼘 내려온 눈썹 아래 눈빛은 한층 진중해졌을 테지.
나는 짧게 헛웃음을 차며 눈을 들어 올렸다. 새파란 하늘 위로 한층 짙어진 녹음의 이파리들이 몸을 흔들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춤을 추듯이.
별거 아니었다.
철 지난 연고와 주제 모를 사과의 편지는.
이제는 희미하게 남은 뺨의 멍울을 지워 내지도, 보이지 않는 이 문제를 해갈할 답도 되지 못했다. 그러니 그저 우습게 여기며 지나치거나 혹은 어쭙잖은 동정에 비소를 보내었을 수도 있었다.
허나, 왜 주저하는 것일까.
그 물음이 부드러운 바람의 결 위로 흩어진다.
바뀐 계절의 빛을 닮아 포근하고 따스한, 그런 바람 위로.
***
루트비아 백작의 하루하루는 단조로웠다. 식사와 진료, 약초와 또 다른 약초들. 인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더 좋을 것이 없는 나날들이 반복되는 와중에 그에게 생기를 불어 주는 것은 딱 하나였다.
“오늘따라 기운이 좋으십니다.”
지루하고도 긴 진찰을 마친 랑게르가 진찰 도구를 내려놓고는 말을 건넸다.
“공작 부인과 공녀가 오랜만에 저택을 방문한다더니.”
백작은 대답 대신 읽고 있던 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몇 년 만에 저택을 방문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서신은 다소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의 것처럼.
평소 정갈하고 단정한 것을 추구하는 백작이건만, 들쑥날쑥한 문체를 보는 눈빛만은 온화했다. 한참이나 그리 서신을 바라보던 백작은 랑게르가 나가고 나서야 조심스레 협탁 위로 서신을 올려 두었다. 겉봉에 박힌 베르니가의 인장이 밝아 오는 새벽빛에 도드라졌다.
가끔은 신기했다. 냉한 제 아비도, 유약한 제 어미도 닮지 않은 그 아이가. 영락없는 베르니가의 외양을 가지고도 그 기세만은 그러지 않은 듯하여.
단순하고 단순한.
어쩌면 차라리 루트비아를 더 닮은.
그래서 좋았다.
그 아이와 함께 있으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오롯이 숨 쉴 수 있었으므로.
평소와 달리 기대감으로 부푼 은안을 들어 올려 백작은 차창을 응시했다. 할아버지, 경쾌한 목소리가 저택의 입구에서부터 들려오는 듯했다. 그런 그의 눈빛에 파문이 인 것은 너머로 그와 꼭 같은 은발이 나부낄 즈음이었다.
“어딜 가는 게지.”
막 달인 약초를 제 앞에 내려놓은 하녀를 향해 백작은 나직이 물었다.
“그게…….”
말끝을 흐리는 것이 아마 어디 갔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되었다, 손을 내저은 백작은 시선을 다시 창가로 틀었다. 가끔 바람을 쐬러 가던 숲이 요 몇 년 사이 아주 잦았다. 누군가가 차디찬 땅에 묻힌 대가로 살아남게 된 아이가 당연하다는 듯 제게 주어진 삶의 풍요를 즐기는 그 모습에 백작은 심기가 뒤틀렸다.
그는 그의 생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을, 어쩔 땐 저주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악몽과도 같은 그 날 속에 여전히 머물며 살아가고 있는데.
호흡이 가빠지고 숨결이 거칠어지자, 백작은 서둘러 눈을 내리감았다. 암흑으로 뒤덮인 시야에도 여전히 잊히지 않는 그 날만이 그를 잠식할 뿐이었다.
***
오늘도였다.
막 숲의 어귀에 다다른 나는 습관적으로 커다란 물푸레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 둔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몇 권의 서책이 놓여 있었다. 소설과 수필, 구하기 힘든 진귀한 도서들까지. 종류는 매번 달랐지만 지난 몇 년간 이어져 온, 그래서 이제는 제법 익숙한 풍경 속으로 다가가고 책을 들여다보는 내 행동 역시 자연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이올리스 역사서.
제국의 역사를 다룬 제법 오래된 고대의 서책이었다. 책장 사이로 번지는 쿰쿰한 냄새 잎사귀에서 배어 나오는 풀내음.
가끔은 헷갈리기도 했다.
내가 날마다 고대하는 것이 이 숲인지 이 책인지.
“아가씨, 주인어른께서 찾으십니다.”
저택으로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눈을 키우는 어린 하녀의 말에 서둘러 걸음을 옮겨 백작의 처소로 향했다. 별안간 무슨 바람이 분 것인가. 늘 서로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는데. 뜻 모를 부름 앞에 잠시간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방문을 열었다.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가만히 모은 두 손 위로 시선은 아래를 향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이미 숱한 경험을 통해 깨달은 진리였다.
“어딜 다녀오는 게냐.”
“잠시 산책을 했습니다.”
높지도 낮지도 않게 귀에 거슬리지 않는 적당한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래릴과 세이가 곧 도착한다는구나.”
래릴과 세이.
오늘따라 더욱 다정하게 들리는 그 애칭에 내 대답은 한 박자 느리게 흘러나왔다.
“알고 있습니다.”
“……괜한 분란거리를 만들지 말거라.”
짧은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나를 잠시간 스쳐 지나간 백작의 시선이 물살처럼 흐르듯이 차창에 닿으면서. 묵례를 마친 나는 보폭을 넓혀 방을 나섰다.
래릴과 세이.
백작은 늘 둘을 그리 불렀다. 한 음절, 한 음절 호흡을 고르는 여타 발성과 달리 조금은 다정하게 조금은 따스하게. 어떤 고심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는 곡조처럼. 그 단어를 입에 담는 그의 표정 역시 평소와는 다른 빛깔을 내곤 했다. 단 한 번 불러 보지도 않아 준 내 이름과 달리.
딱히 그것들을 바라는 건 아니다.
결코 그가 내게 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아주 오래전 깨달았으니. 내 잘못이 아님에도 끝내 내 잘못이어야만 하는 수많은 일들처럼. 그런데도 자꾸 머릿속을 되울리는 소리가 의아한 것은 왜인지 어디선가 그런 울림을 들어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상념으로 느려진 걸음이 내 방에 닿았을 때도, 하녀에게 단장을 맡길 때도, 로비를 지나 올 때도 떠오르지 않던 기억의 잔재는 상황에 맞지도 않게, 예기치 않는 시점에서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델리아 양.
가도를 가로지르는 황금빛 마차 너머 시리도록 푸른 녹음의 물결이 내 눈을 적신 그 순간에.
뭐라고 해야 할까.
그저 다정하다고만 표현할 수 없는 그 소리를. 고고하기 짝이 없는 제국의 사교계 인사들이 찬사를 보내 마지않는다는 공작 부인의 음성 앞에서도 늘 무감하기만 했던 나인데.
“아델.”
바로 지금처럼.
“요즘은 어떠니.”
사람들은 어째서 저 목소리를 그리 높게 평가하는 걸까. 형용할 수 없이 눅진한 감정들로 혼탁하게 뒤섞인 울림들을. 하긴,
“공작 부인.”
말하는 이의 심정을 오롯이 담아내는 그릇이 바로 소리이니 그럴 수밖에.
“먼저 일어나 봐도 될까요.”
내 앞에서 그녀는 늘 불안과 염려에 뒤덮여 있으니.
***
“엄마!”
작은 발이 미처 내실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 높은 목소리로 방의 적막을 깨운 공녀는 푸른 눈을 들어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어렵지 않게 창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엄마를 찾아낸 그녀는 이번에는 다른 의미를 싣고서 힘껏 목을 울렸다.
“엄마!!”
차창에 새겨진 무늬를 따라 안으로 완연히 쏟아져 내리는 달빛에 젖은 눈이 그제야 그녀를 응시했다.
“할아버지 말이-”
단숨에 그 품속으로 뛰어든 공녀는 입술을 놀려 온종일 있었던 일을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막 할아버지가 해 주신 숲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될 즈음, 피곤이 진득 배어 있는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세이, 엄마가 조금 피곤하구나.”
다채로운 빛깔들의 유리구슬들이 맞부딪히며 만들어 낸 것 같은 맑은 소리가 아닌. 미간을 좁히며 익숙하지 않은 그 이질감에 불만을 표출하려던 공녀는 불현듯 이곳이 루트비아 저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곳에 올 때마다 엄마에게 찾아오는 이상한 변화 역시. 그 조짐은 공작저에서 출발하는 마차에서부터 시작된다. 엄마는 초조한 듯 손을 모았다 폈다 반복했고 그러지 않을 때에는 공녀의 머리카락을 쉼 없이 매만지곤 했다. 마차 안을 가득 채우는 옅은 한숨 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트비아 백작 부인 때문에 그러실 겁니다.’
제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연신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것 같은 엄마의 행동에 공녀가 불퉁 입술을 내밀자, 유모는 낮은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그 잃은 사람을 다시 떠올려야할 때 사람들은 종종 그런다고.
‘옳지 못한 이유였을 때는 더더욱 그렇지요.’
‘사연?’
잠시 머뭇거리던 유모는 마차 차창에 기대어 잠든 엄마를 설핏 곁눈질하더니 나직이 입술을 벌렸다.
루트비아저에는 괴물이 산다.
동화책에서 봐 왔던 그런 괴물이.
할머니를 잡아먹고 할아버지를 병들게 하고 이제는 엄마까지 탐내는.
푸른 눈이 밤의 장막 속에서 요동쳤다.
***
“아아아악!”
저택을 찢어 오는 고함소리에 공작 부인은 잠에서 깨어났다. 지천을 뒤덮은 밤의 그림자 속에서 옆에 잠들어 있어야 할 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곧장 매무새를 가다듬고 소리를 쫓아 걸음을 움직인 곳은 다름 아닌 아델의 방.
깨진 화병의 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진 카펫, 쓰러진 의자. 흡사 전쟁이라도 방불케하는 방 안의 풍경에 잠시 넋을 잃고 있던 공작 부인은 다시 한번 벼락같이 귓가에 내리꽂히는 소리에 퍼특 정신을 차렸다. 스쳐 지나가던 공작 부인의 눈은 산발이 된 세이의 모습에 크기를 키웠다
“나를 밀쳤어! 나를 밀쳤다고!”
엉망으로 산발이 된 금발 아래 형형한 푸른 눈이 악을 쓰듯 소리를 뱉어 냈다.
“먼저 제 방에 들어오신 건 공녀님이세요.”
그보다 침착하지만 아델 역시 마찬가지로 흐트러진 채였다.
소란스럽다 못해 이 시골 영지의 사람들을 모두 깨울 기세로 세이가 목을 돋우자, 공작 부인은 당장이라도 아델에게 달려들 기세인 세이를 서둘러 안아 들었다. 일단, 둘을 떼어 놓고 적당히 상황을 마무리하는 게 급선무라는 판단이 든 것이다. 이미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는 사용인들을 가로질러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공작 부인은 유모에게 이만 나가 보라는 눈짓을 건네고는 딸의 두 팔을 꼭 잡았다.
“어떻게 된 일이니, 세이.”
그러자 분노로 바르르 떨리던 작은 입술 사이로 와다다, 두서없는 설명이 쏟아져 나왔다. 그 여자가 자기를 밀쳤다, 뭐 그런 종류의. 흥분한 딸의 등을 쓸어내리며 간신히 진정시킨 공작 부인은 이번에는 훨씬 더 벼린 질문을 던졌다.
“아델의 방엔 왜 들어간 거니.”
역시나. 방금까지 봇물 터지던 입술이 그 물음 앞에 침묵했다. 짐작하고 남는 다툼의 경위였다. 대대로 손이 귀하다고 정평이 난 베르니 가문. 그 가문의 독녀로 자란 딸의 성정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음은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딸이 아델에게 가지는 반감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축첩으로 태어나 불분명한 출신성분을 가진 이들은 혈통을 중시하는 사교계에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니.
결코 말할 수 없는 진실과 비틀어진 천륜 속에서 갈등하던 그녀는 옅은 한숨과 함께 결국 고개를 떨궜다.
“세이, 그 애는 네 가족이라고 말했잖아.”
심중에 몰아치는 죄책감과 그럼에도 버릴 수 없는 명예. 둘 다 적당히 지킬 수 있는 절반의 진실이 담긴 그 문장을 입에 걸고서.
“그 여잔 내 가족이 아니라니까!”
예상보다 더 깊고 진득한 분노가 괴여 있는 투명한 눈동자를 차마 더는 보지 못한 공작 인은 딸을 꼭 껴안고는 주문이라도 외우듯 그 문장만을 반복했다.
우리는 가족이야.
혹 그러다 보면 어린 딸에게 이 진실 아닌 진실이 언젠가는 진실이 될 수 있을까 하여.
“제가 하겠습니다.
오늘 벌인 일로 책을 물까 안절부절못하는 유모에게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뜻을 전한 공작 부인은 지쳐 잠든 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길길이 악을 쓰고 발을 굴렀다. 한바탕 야단법석을 부린 후라, 딸의 눈언저리는 퉁퉁 붓고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가득했다. 손수 젖은 물수건을 가져와 이를 조심스레 닦아 내리던 공작 부인은 왈칵 터져 나오려는 울음 앞에 입술을 깨물었다.
영영 자매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세이가 크면 클수록 더더욱 그렇겠지.
모든 일을 바로잡을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어쩌면 지금이 그 마지막 기로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그녀는 예감하고 있었다.
이게 옳지 않다는 것 또한.
하지만…….
끝장나고 말 것이다.
바닥으로 떨어질 명예와 숱한 추문들. 부인이 있는 남자를 꾀어냈다는 꼬리표. 밤마다 악몽이 되어 그녀를 끌어내리는 그 꿈이 현실이 되어 그녀를 잠식해 올 나날들을.
그걸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으매 큰 의미 없는 고민임이 분명한 그것에 깊이 잠겨 자위하던 공작 부인은 여태 방을 나서지 않은 유모의 말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럼, 공작 부인. 이 책은 루트비아 영애님 처소에 가져다주겠습니다.”
“책?”
흐트러진 매무새를 서둘러 정리한 그녀가 애써 담담하게 묻자, 유모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조심스레 내밀어 보였다.
“예, 공녀님이 꼭 쥐고 계셔서 여태 영애에게 돌려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마 난리통에 챙긴 책인가 보지. 그저 그리하라,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짧게 준 시선을 거두어들이려던 찰나, 부지런히 움직이는 유모를 따라 협탁 위에 놓인 불빛이 흔들리며 책의 귀퉁이를 비추어 내렸다.
머리 두 개 달린 독수리.
희미한 불빛에도 선연한 가문의 문장이 그녀의 잿빛 눈동자 안에 제 그림자를 덧그렸다.
“전 그저 아버지의 건강 때문에 종종 후작과 왕래하는 줄 알았어요.”
백작은 정신없이 방 안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딸의 모습에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한밤중에 벌어진 소동은 기어이 참극을 선사하고 말았다.
저택을 부술 듯한 소란이 가라앉자마자, 딸은 백작의 방으로 들이닥쳤다. 제법 오래되어 보이는 여러 권의 서책을 내밀고서. 아무리 그의 병환이 깊다하더라도 서책 귀퉁이에 새겨진 문장이 에오르테가의 것이라는 걸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만에 하나 후작 그자가 다 알았다면요.”
간신히 되찾았던 평화롭던 그의 세상이 다시 진창 속으로 끌려간다는 것 역시.
“그럴 리는 없을 게야. 그런 성정이 되지 못하는 이니.”
그 수렁 속에서 허덕일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춰 보려는 듯 백작은 목을 울렸다.
“허나, 아버지-”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방을 미친 듯이 거닐던 래릴의 걸음이 멎었다.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울리는 구두소리와 함께 잔뜩 날이 음성이 잦아들자, 그제야 둔통이 좀 가신 백작은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동시에 어슴푸레한 사위를 밝히는 촛불 아래 저를 내려다보고 있던 잿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알고 계셨군요.”
막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은 그 눈과.
“왜 제게 말해 주지 않으셨죠.”
선뜻 답을 주지 못한 백작은 이를 회피하듯 시선을 차창으로 돌렸다. 가끔 바람을 쏘이러 가던 아델의 외출이 근래 들어 아주 잦아졌다. 그 시기가 분명 에오르테 후작의 등장과 맞물린다는 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에오르테 후작.
어느 순간 불쑥 그들의 삶에 끼어든 변수는 오로지 그 이름뿐이었으니.
허나, 왜. 왜 래릴에게 말해 주지 않았을까.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잔무늬 위로 떠오른 그 의문을 한참 되뇌이던 백작은 후에야 무겁게 깔린 침묵을 깨트렸다.
“유순한 자다. 이 나이쯤 먹다 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그런 게 보이지.”
“하지만-”
“문제를 일으킬 만한 사내는 아니야.”
문제.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는 그 두 음절로 쐐기를 박았다. 그 단어가 딸에게 미칠 파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알아요.”
아니나 다를까.
“다 제 잘못인거. 하지만…… 하지만…….”
물기 섞인 목소리가 방에 흐릿하게 번졌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요. 대체 언제까지 절…….”
순한 아이였다. 제 딸은.
“더는 못 하겠어요.”
날 때부터 그랬지. 살쾡이에 물려 핏물을 흘리는 어린 박새 앞에 제 살이 뜯긴 것처럼 눈물이 괴이던 어린 날의 딸을 기억한다. 세상 만물 그 아이에게 가엾지 않은 것은 없고 또 애정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다만…….
나약해.
나약하기 그지없어.
이미 살릴 방법이 없는 그 새를 그저 울며 지켜만 보는, 끝내 고통을 끊어 줄 용기도 없는 그런 나약한.
“너무 불안하고, 무서워서…….”
백작은 여전히 그 어린 날 속에 머물러 있는 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위로 그의 딸이 자책과 후회, 번민. 그 모든 것들이 뒤엉켜 버린 혼돈 속에서 주저하는 사이, 끝내 썩어 문들어지고 말 또 다른 그의 핏줄이 떠올랐다.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이 지긋지긋한 연극을 끝낼 수 있는 이는 아마 그뿐일 테니.
“적당한 혼처를 알아보거라.”
그의 딸아이는 결코 뱉지 못할 문장과 함께.
“되도록 제국에서 먼 이국으로. 그게 너와 그 애에게도 이로울 테니.”
예상치 못한 문장에 딸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밝아 오는 여명의 빛살이 내려앉아, 그 투명하고 맑은 눈에 담긴 빛깔들이 미처 감추지 못한 감정들을 훤히 내비쳤다. 놀람과 당혹 그리고 일말의 안도와 비슷한 그것들을.
***
“싫습니다.”
낮지만 분명한 내 목소리가 팽팽하게 당겨진 내실의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함께 수도로 가는 게 어떠니. 막 그 문장이 공작 부인의 입술을 타고 흐른 다음 순간이었다.
“……왜…… 아델…….”
예상치 못한 전개였는지 공작 부인은 말을 더듬거렸다. 저무는 노을빛을 받아 그녀의 당황스러운 낯이 더욱 도드라졌다. 상처받은 것처럼 무너진 그 얼굴에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너무 갑작스러웠지. 곧바로 식을 올리지는 않을 거란다. 네 나이도 있고 하니. 적당한 기간을 둘 거야. 그렇다고 너무 길지는 않게 말이지. 아버지 건강도 좋지 않으시고 또 여러모로-”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
“후작님 말입니다. 그저 책 몇 권 빌려줬을 뿐.”
“아델…….”
“그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
“에오르테가는 흉흉한 소문이 무성한 집안이지. 지금이야 후작 때문에 사그라들었다 하나.”
“……그저 소문 아닙니까.”
“한낱 한시 제 어미와 형을 삼킨 화재에서 살아남은 이야. 갓난쟁이인 조카를 제외하면 유일한 목격자이기도 하지.”
“그럴 분이 아닙니다.”
“…….”
“그만한 그릇이 못 돼요.”
“넌 몰라. 에오르테가 어떤 가문인지. 그 가문이 벌인 온갖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가문과 엮어 끝이 좋았던 집안이 없단 말이야. 후작이 제아무리 성품이 곧다 해도 그 사실은 변치 않는단다. 당분간만…… 당분간만 수도에서-”
“그렇군요. 제가 루트비아가의 사생아인 것처럼요.”
“……아델.”
내실 안에는 느닷없는 침묵이 내려앉고 공작 부인은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곧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괴였다.
“어찌 그런 식으로……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니…… 내가 너를 얼마나…… 너를 위해서 내가 뭘 포기했는데…….”
“무엇을, 무엇을 포기하셨습니까? 부인?”
“나는…….”
“제가 보기엔 부인께서는 더없이 고아하시고 여전히 만인에게 칭송받고 계신데 말입니다.”
“아델…….”
“성녀라고 한다지요. 제 친어미를 잡아먹은 요물을 가엾게 여기는. 공작 부인, 부인께서 조금만 더 현명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이는 오로지 부인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나는…… 나는…….”
손수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공작 부인의 눈에서 별안간 왈칵 울음을 쏟아져 나온 것은 그 직후였다.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지. 춤과 노래처럼.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여윈 뺨 위를 타고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처럼 그녀는 회환에 잠긴 목소리로 목을 울렸다.
“처음이었어. 나도 처음이었다.”
중얼거리며 그녀는 나를 제 품 안에 끌어안았다.
“아, 가여운 내 딸…… 가여운 내 아이…….”
그녀는 알까.
그녀가 그 처음 가는 길을 헤매고 또 헤매는 기나긴 시간 동안, 오롯이 내가 모든 걸 끌어안고 감내하고 있다는 걸.
책임지길 기대하지도 않는다. 부디 나를 버려 주기를. 나를 버려 끝나지 않는 긴긴 악몽에 마침표를 찍어 주기를. 그것만을 나는 이제 바란다.
“……그만 우세요. 수도로 갈 테니.”
***
“부쩍 마르셨습니다, 백작님.”
진찰도구를 내려놓은 랑게르는 반쯤 눈썹을 모은 채 짐짓 심각하게 목을 울렸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일은 무슨. 다 죽을 날만 받아 놓는 노인네가.”
냉소가 섞인 그 말에 의원은 깊은 한숨과 함께 형식적인 주의사항을 안내하고는 방을 나섰다. 그런 그를 짧게 일별한 백작의 눈은 당연한 수순처럼 차창 밖을 향했다. 푸른 정원이 쏟아지는 햇볕이 그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어느덧 짙어진 그 빛살 앞에 문득, 녹음을 가로지르던 순백의 은발이 떠오른 건 그 순간이다. 벌써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분명 겨우 며칠 전,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인데.
나도 늙었군.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백작은 피로에 물든 눈을 쓸며 다가온 변화를 떠올려 보았다. 더는 그 눈을 피하려 차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죽은 부인의 것과 비슷한 그 음성을 듣지 않으려 귀를 틀어막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젠 애써 지워 내려 하지 않아도 그 아이의 흔적이 이곳에 묻어나는 일이 없다는 사실 또한.
그러니까 이제 영영 그 아이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가면을 덧씌웠던 백작의 낯이 일순 무너져 내렸다. 부러 표정을 갈무리하려 만면을 쓸어내려도 마찬가지였다.
아델을 태운 공작가의 마차가 순식간에 저택을 빠져나간 건 열흘 전이었다. 공작가에 서신을 넣고 옷가지를 챙기고. 신속하게 처리된 일련의 과정은 마치 그 애가 이곳에서 오게 된 그때와 비슷했다.
그래서일까. 그리 고대하던 이별을 맞이한 순간, 자꾸만 그를 헤집어 놓는 건 잊혀지지 않은 그날의, 외면하고 있던 잔상들이다.
‘할아버지인가요.’
아이를 데리고 오기 위해 어딘지도 모를 외딴 시골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지간히 꽁꽁 숨겨 두기도 했다. 도통 찾을 수 없는 길을 몇 날 며칠 헤매던 그가 낮게 읊조리자, 어디선가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물어 왔다.
‘제 아버지가 되실 분 말이에요.’
수수께끼와도 같은 그 우스운 말에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잠시 딸이 불륜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만들었다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눈 녹듯 잊고 백작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너구나.
새까맣게 물든 머리카락, 부신 햇살에 비춰 금빛으로 물든 눈이었음에도 그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네가 내 손녀구나.
적당히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 말간 아이의 눈동자. 그 위로 번지는 시원한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연하다.
그토록 후회할 순간이라는 걸 알지 못한 채로.
침상에 앓아누운 그의 반려는 끊어질 듯한 숨을 그 가쁜 호흡으로 버티고 있었을 시각. 그는 그리 숲을 울릴 듯 웃음을 터트려, 그 작은 아이를 안아 들고 그보다 더 작은 손을 꼭 잡고서.
평생 함께하자던, 그렇지 못하면 마지막 순간은 끝까지 지켜 주리라 맹세했지만, 정작 그 손은 잡아 주지 못했으면서.
백작은 감았던 눈을 올렸다. 은발은 자취를 감추고 마치 꿈결인 듯 차창 밖에는 따사롭게 내리쬐는 양광 아래 아지랑이가 덧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 번 제대로 봐 주지 못했다. 따스한 말 한마디 건네주지 못했다.
단 한 번의 순간, 그 손을 오롯이 잡은 죄로.
그 긴긴 시간을.
아델.
결국 불러 주지 못한 그 이름이 모든 게 끝난 지금에서야 그의 입술 사이에 맴돌았다.
***
“아델, 오늘은 특히 행실에 주의해야 한단다. 사교계에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다 모일 게야.”
공작 부인의 조급한 목소리가 마차 안을 흔들었다. 수도에 도착한 지 어언 한 달.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와 함께 각종 행사와 모임을 드나들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늘 초조와 염려만이 담겨져 있던 내 이름에는 이제 희미한 기대 같은 것이 곁들어졌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긴 했지만.
“알겠니, 아델?
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거라는 그런 바람 같은 것들이.
형용할 수 없는 빛깔들로 가득 차오른 은안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 이를 긍정으로 여겼는지 공작 부인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분초를 다투어 행사의 주최자와 경위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이어 가면서.
“메로본 백작가의 막내가 가주가 되어 처음 주최한 파티란다. 그 두문불출하던 레티나 백작도 벌써 도착했다하니 말은 다했지.”
오늘 내 첫 춤의 상대, 그 다음 춤의 상대. 마차의 안을 꽉꽉 채워 가는 의미 없는 문장들에 지쳐 갈쯤에서야 마차는 백작가의 출입문을 지나 줄지어 있는 마차의 행렬에 합류했다. 수십 대의 마차 앞기둥에서 휘날리는 가문의 문장이 푸른 백작가의 하늘을 수놓는 광경에 잠시 시선을 주고 있자, 나를 쫓아 고개를 기울인 공작 부인이 입술을 열었다.
“헤모나 남작이 벌써 도착했구나. 부지런도 하시지. 사내란 자고로-”
이미 몇 명으로 추려진 신랑감들이 살짝 올라간 그녀의 붉은 입술 속에서 하나둘씩 터져 나왔다.
헤모나 남작, 제로나 자작. 그리고…….
결코 그녀의 입에서 다시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 이름 또한.
에오르테 후작.
***
“그렇지 않니, 아델?”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공작 부인이 드레스 밑자락으로 내 발을 꾸욱 밟으며 물었다. 혼돈 속에 맥을 잃고 배회하던 정신을 붙잡은 나는 그제야 눈을 올렸다. 이미 몇 차례 흐름을 놓쳤는지 여러 쌍의 눈이 의아한 기색을 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둘러 적당한 추임새를 건네자 곧 사라져 버린 감정들이었다만.
“아직 숫기가 없어 그렇지요.”
공작 부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내 말을 받고는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승마와 연극. 그런 주제들로. 잔물결처럼 번지는 웃음들이 회장에 번지는 선율을 타고 리듬을 만들어 가자,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잔을 들어 올렸다. 유리잔에 고인 백금발을, 시야를 흐트러트릴 정도로 눈부신 그것을 발견한 건 그 찰나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툭, 예상치 못한 문장이 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일그러진 공작 부인의 낯이 선연했지만 테라스로 향하는 걸음의 속도는 줄어들 생각이 없었다. 열기로 가득 차오른 피부를 쓸어내리는 밤의 바람이 가까워지자 더욱 그랬다. 왁자지껄한 소음, 눈을 피로하게 만들 정도로 화려한 색감들. 그 모든 것을 건너 다다른 정원은 고요했다. 마치 다른 세계인 듯.
가끔 생각해 봤다.
만약 다시 만나게 된다면.
덧없는 가정들은 그래, 정말 가끔 나를 찾아왔어. 가도를 거닐다, 숲을 지나다. 그렇게 문득 문득. 내 생각 속에 만남은 더 떳떳했다. 당당하고. 그러니까 더는 아무런 염려와 불안을 담지 않고 그가 나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제물이 되어 바쳐진 지금 같은 이런 모습이 아니라.
한 번쯤은.
몇 번 되지 않은 그 만남에서 한 번쯤은 그런 모습이고 싶었지.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를 가르고 무도회 바깥으로 보폭을 넓힌 것은 그래서였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에 휩싸인 사내가, 쇠락했다고는 하나, 깊은 유서를 지닌 무려 에오르테의 후작이 내게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도 말이다.
그러나 맑은 공기를 쐬고 있는 지금, 그 모든 걱정들이 지나친 기우라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자, 조금 허탈한 마음이 나를 잠식해 왔다.
그래, 그는 후작이다.
너무도 위화감이 들어 그리 깊게 고심하지 않았던, 한 번도 그와 어울린다 여겨 본 적 없는 에오르테가의 문장이 실은 태어날 때부터 그의 어깨 위에 빛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후작이 이 무도회에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들었던 고민들. 혹, 또 그 천진한 눈을 들어 내게 말을 건넬까. 그래서 내 치부를 또 들킬까. 그런 상념들이 실은 아주 우스울 것들이라는 것 또한.
구태여 나를 찾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키가 큰 사내였고 그러니 그의 시야에 걸리는 것 하나 없어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을지언정.
허탈한 웃음과 함께 걸음을 멈추고 눈을 들어 올렸다. 망막한 어둠이 번진 하늘 위에 불어오는 밤의 바람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아델리아 양.
맑고 다정한, 그래서 자꾸 나를 염려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밤의 시간을 건너 여전히 또렷한 목소리는 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몇 번 되뇌자, 절로 몸은 방향을 돌렸다.
“누구야.”
앳된 목소리가 적막을 흔든 것은 무도회장을 향해 막 몇 걸음 떼었을 무렵이었다. 잘못 들었을 수 없었을 그 음성을 쫓아 주위를 살피자, 빽빽한 관목 덤불 속에서 불쑥 통통한 손이 튀어나왔다.
“넌 누구냐니까.”
까마귀처럼 새까만 머리카락, 미묘하게 찌푸려진 눈썹이 차례로 보였다.
“날 데리러 왔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오만방자한 음성과 함께.
“아니.”
예상치 못한 단호한 대답이었는지, 도톰한 선홍빛 아랫입술이 비틀어지는 모습이 어둠 속에서도 선연했다. 그럼에도 내 걸음을 막기는 부족했지만.
아이들은 제멋대로이고 피곤하고 또 귀찮다.
그 지론을 격언 삼아, 언제부터인지 내 치마 아랫단을 꾸욱 붙잡고 있던 자그마한 손을 치워 내고 보폭을 넓히려던 나는 멈칫했다.
조금 붉어진 눈시울,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앙다물린 입술.
이제는 희미하게 지워져 버린 어느 날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그 모습들이 아니었다면 실로 그러했으리라.
“싫어.”
영 성가신 꼬마였다. 사람을 불러올 테니 이름을 알려 달라는 물음에도, 같이 무도회장으로 돌아가는 말에도 오로지 저 대답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이건 뭔지 알아.”
왜 여기 혼자 있냐, 누구랑 같이 왔냐는 물음에는 저렇게 말을 돌리면서.
꼼짝없이 붙들렸네.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나는 모양 좋은 고사리가 같은 손끝에 걸린 풀잎에 시선을 주었다.
“토끼풀.”
“와아, 너도 아네.”
“누나라고 해야지.”
이건 별개의 문제고.
너. 너. 말끝마다 저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걸 보니 제법 지체가 있는 신분인 듯했다. 시종이나 시녀들이 달고 온 아이였으면 차라리 다행이었으련만. 그렇다면 일은 더욱 복잡해졌다. 웬만한 가문에서는 나와 함께 있었다는 걸 알면 그리 곱게 보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한시라도 빨리 일을 마무리 지으려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저만한 나이대에 아이가 있는 집안을 떠올려 보았다.
레트만 남작가, 헤이테 백작가.
아니지, 그쪽은 여자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얽혀 들어가는 기억에 머리가 아파 올 즈음, 꼬마는 다시 불쑥 손을 내밀었다.
“봐봐, 누나 이거는 뭔지 알아.”
달랑거리는 또 다른 이파리를 손에 들고서.
나는 대답 대신 기울인 고개 너머 때마침 들이찬 월광을 등불 삼아 꼬마의 낯을 살피었다. 혹 그 말간 얼굴에 어느 가문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하여.
티 없이 맑은 만면과 토실토실한 뺨이 희부옇게 번지는 달빛 아래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리고…….
반쯤 내리깔린 눈꺼풀 아래 채도 높은 녹안까지.
“테오!”
맑고 다정한, 실은 존재하지도 않을 거라 되뇌었던 그 목소리가 짙은 밤의 어둠을 건너 다시 나를 찾아왔다.
***
자박거리는 발걸음 소리만이 정원에 울려 퍼졌다. 가끔 후작의 품에 안겨 잠든 꼬마가 내쉬는 얕은 숨소리가 지나치게 적막한 공간에 숨통을 불어넣을 뿐이었다. 손이 곱아들 정도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까, 고심은 더욱 깊어졌다.
지난 시간 그가 건네준 서책들은 잘 받았다. 고마웠다.
그저 그 한마디면 충분할 텐데, 그 문장은 혀끝에 걸려 나올 생각을 하질 않았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작아 고작 그런 자그마한 친절에 크게 기꺼워하는 것처럼 보일까, 그런 고민들 때문에.
답을 찾지 못한 채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이번에도 역시 그가 먼저 운을 뗐다.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여간 고집이 센 게 아닌데…….”
다행히 대화의 주제는 어린 조카였다. 한결 가벼워진 공기를 타고 덕분에 나도 쉬이 목을 울릴 수 있었다.
“괜찮았습니다.”
“요즘 자꾸 이리저리 숨어 있는 것에 재미가 들려 하루가 멀다 하고 저를 이리 놀라게 만듭니다.”
여린 꼬마의 등을 쓸어내리며 그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형과 어머니의 기일이라 수도에 온 참에 하도 조카가 고집을 부려 무도회에 참석했다부터 시작해, 또래들과 함께 놀다 갑작스레 사라진 조카에 기함한 이야기까지.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는 옅은 웃음을 걸고서.
심상한 생각들로 복잡한 내게까지 전해질 정도로 깊은 애정이 곳곳에서 묻어 나왔다.
진정 아끼는구나.
여러 헛헛한 말들과 달리 말이다. 한낱 한시에 화마에 비명횡사한 형을 대신하여 어린 조카를 돌보고 그 조카에게 가주 자리를 오롯이 넘기고자 혼사도 차일피일 미룬다 들었으나, 산전수전 다 겪은 사교계의 위인들은 늘 그를 예의주시한다 들었다. 조카와 삼촌. 극에도 자주 사용되는 이 관계에는 여러 위험한 요소들이 작용될 소지가 다분하니. 허나,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드는 생각은 그 모든 게 다 기우라는 것뿐.
어느덧 다시 잠잠해진 공간 속으로 툭 말을 던진 건 그 순간이었다.
“후작님께서 찾아 주실 걸 아니 그러시겠지요.”
“예?”
“본디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 찾아 줄 것을 알면, 숨길 주저하지 않는 게지요.”
찰나의 침묵이 흐른 끝에 그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영애께선 영민하십니다.”
부드러운 기색이 번진 채도 높은 녹안은 나를 스치듯 지나 제 품에 잠든 공자에게 천천히 가 닿았다.
“다들 그리 말하더이다. 허나, 저는 어리석어 그러질 못해, 자꾸만 다시 찾고 또 찾아…… 언젠가 제가 찾지 못하는 날이 올 수도 있지만, 그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곤 하죠.”
그 시선을 쫓아 움직이던 나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고개를 들어 올린 그와 시선이 얽혔다. 방금까지 그가 조카에게 보내던 눈길이 그 잠깐의 맞물림에 오롯이 내게 전해졌다.
“그래도 그게 이 아이에게 힘이 될까 해서. 늘 찾아 주는 누군가가 한 명쯤은 있다면 조금은 든든하지 않을까, 그런 위안을 삼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생 저런 눈길을 받으며 자라는 아이는 어쩔 수 없이 오만방자해지지 않을까 하는.
“먼저 들어가 보시지요. 원체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시기라.”
무도회장의 테라스로 이어지는 복도가 가까워지자,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평소보다 냉랭한 음성은 차라리 스스로에게 하는 경고와 더 닮았다. 여기까지. 이웃지간에 나눌 법한 소소한 담소도, 산책도 이젠 끝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돌아온 건 긍정의 대답 대신 찰나의 머뭇거림이었다. 이 시각에 나 같은 신분의 사람이 그와 함께 있다 눈에 띄면 일어날 파장 정도는 그도 모르지 않을 텐데.
“아델리아 양.”
무언가 고심하는 듯 비스듬히 눈썹을 기울이던 그는 한참 후에야 입술을 움직였다.
“죄송했습니다, 지난번 일은. 제가 주제가 넘었지요.”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일은 다정한 사내에게 여전히 신경 쓰이는 일인가 보다. 나는 부러 입꼬리를 더욱 끌어당기며 이에 괜찮다, 답해 주었다. 저 역시 예민했던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제야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하늘로 피어오른 그는 몸을 돌려 보폭을 넓혔다.
옅은 한숨이 입가에서 흘러나온 것은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도 시간이 조금 흐른 뒤였다. 긴장으로 뻣뻣해진 근육과 아까 공작 부인에게 짓눌린 발등의 통증이 뒤섞여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이만하면 잘된 것이다. 잘 넘겼어.
아연실색이 되어 나를 찾고 있을 공작 부인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그 생각에는 변함없었다.
언젠가 한 번쯤 마주쳤을 인연, 남은 얼룩들은 지워 내고 이리 깔끔하게 매듭짓는 것이 더 나을 터였다. 그리 가여운 행색도 무엇도 아니었고 대화도 나쁘지 않았으니 더욱 그렇지.
그래, 나쁘지 않았어.
나무 기둥에 기대어 잠시 발을 식히던 나는 그 문장을 읊조리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제 모든 게 다 마무리 지어졌고 남은 것은 내 세상으로 돌아가는 일뿐.
저 멀리, 대리석이 울림이 느껴진 것은 막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아, 아델리아 양.”
서서히 크기를 키우는 인영의 주인은 다름 아닌 후작. 아까 사라진, 정확히 그곳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그는 바삐 걸음을 놀렸는지 거친 들숨을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
“다행입니다. 벌써 가신 줄 알고 걱정했는데.”
뜻 모를 문장과 함께 뜻밖의 물건을 내밀어 보이면서.
“발이 불편하신 듯하여.”
얼음주머니였다.
“무도회가 원체 그렇지요.”
살짝 반달로 접힌 눈매, 무저갱 같은 애정이 담긴 녹안. 듣기 좋은 고른 울림. 그것들이 차례로 내 시야를 흐리자, 나도 모르게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구두며 장신구며.”
그 찰나의 순간, 그 속에서 나도 잠시 앞뒤 잴 필요 없는 어린아이로 피어오른 듯하여.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고 무도회장에 들어서자, 나를 맞이한 것은 익숙한 낯이었다. 창백하다 못해 파리해진 낯빛, 곧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작은 입술, 간헐적으로 떨리는 손.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니.”
다소 거친 손길로 나를 테라스의 외진 구석으로 잡아끈 공작 부인은 찻잔이 소서와 부딪치며 만들어 내는 날카로운 소음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갑자기 그렇게 자리를 비우다니…… 작은 추문 하나도 네게 치명적일 수 있다고 내 누누이 말했잖니.”
내 귓가를 그저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지만.
내밀어진 얼음주머니, 부드러운 음성과 따스하게 불어오는 밤의 바람. 여전히 그 시간에 멈춰 있는 나는 쏟아지는 깨달음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왜 지난 날 내가 그저 넘겨도 될 그의 말들을, 시선을, 기어코 악을 쓰고 위악을 떨며 뿌리치려 했는지. 그 까닭들을.
“내가 잘 둘러댔기에 망정이지…….”
그래, 들키게 될 것 같아서.
“누가 알아채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했어.”
아니, 들키길 바라게 될 것 같아서.
언젠가 날이 궂은 어느 날.
고작 서너 번. 많지도 않은 그 만남 속. 아무도 아닌 그에게, 어리석고도 유약한 후작에게.
전부 다.
정말이지…….
묵지근하게 심중을 짓누르는 감각에 나는 쓴웃음을 물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약해졌구나, 아델.
그저 작은 바람 한 번에 누군가를 믿고 기대는 어리석은 일을 반복할 뻔할 정도로.
“아델! 내 말 듣고 있니?!”
상념을 갈무리한 나는 눈을 들어 올렸다.
“죄송해요.”
빠른 수긍에 조금 당혹한 빛깔의 은안이 나를 파고들었다.
“알아요. 정말 위험했다는 거.”
“……그래, 그렇다니 다행이지만-”
“그래서 말입니다, 공작 부인.”
바람이 불어온다.
얼어붙은 강을 녹일 따스하고 포근한, 그래서 더욱 위험한 계절의 바람이.
“약혼을 서둘렀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