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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마지막 전쟁 (19/20)

18. 마지막 전쟁

보리스가 떠난 지 꼬박 일주일이 흘렀다. 리비는 깊은 산 속에 위치한 여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산책을 했다.

가만히 있으면 속이 들끓고 온갖 불길한 생각들이 떠올라서 택한 방법이었다. 물론 아기에게는 무리가 가지 않도록 지나치게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걷곤 했다.

“식사할 시간입니다.”

“네, 금방 갈게요.”

여관의 주방이 있는 곳의 덧창이 열리고 여관 주인이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곳에 지내는 동안 리비는 여관 주인인 남자가 예사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자신을 반스라 소개한 그의 몸은 보리스 못지않게 여기저기 상흔으로 덮여 있었고, 다리 하나가 불편한 듯 보였지만 워낙 넘치는 기력 탓에 일을 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 보였다.

“보리스는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 번쩍번쩍, 그랬죠.”

허허, 웃으며 말한 그는 옥수수수프와 빵, 잘게 저민 고기와 익힌 야채 등을 리비 앞에 수북이 쌓아 주었다. 리비는 식사 시간마다 반스가 들려주는 보리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처음 봤을 때는 여자앤 줄 알았어요. 그래서 노리는 놈들도 여럿이었지.”

두 사람이 인연을 맺은 곳은 용병단이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자신을 노리는 다른 거친 용병들을 보리스가 흠씬 두들겨 패서 평정한 이야기를 들으며 리비는 몇 번이고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위로 올라가는 데에는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어요. 용병단의 모두가 그를 따랐지. 물론 여자들도…….”

리비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빵을 씹는 것을 멈추고 반스를 바라보았다.

“물론, 쳐다도 안 봤습니다. 그 녀석의 순결함은 내가 직접 증명…….”

“괘, 괜찮아요. 저는 보리스를 믿어요. 물론이에요.”

리비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반스가 자신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반스는 리비가 불안하지 않도록 연신 유쾌한 대화로 긴장을 풀어 주려는 것이었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리비는 그와의 대화 시간을 좋아했다.

보리스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성은 탈환했을까, 안드로스 왕은 잡았을까. 그리고.

‘어머니는…….’

얼굴 한 번 못 본 친모였다. 살아 있기만 하다면 꼭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건 보리스가 무사해야 가능한 일이다.

리비는 오로지 그가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까악.

창밖에서 들린 까마귀 울음소리에 리비가 고개를 돌렸다.

“연기가…… 나요.”

리비는 멍하니 하늘 저편을 바라보았다. 수도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리비는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창가의 까마귀를 향해 다가갔다.

“보리스는 괜찮은 거야?”

리비가 외친 소리에 높다란 가지 위에 앉아 발톱으로 목 언저리를 벅벅 긁고 있던 까마귀가 고개를 틀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됐어, 네가 뭘 알겠어.”

리비의 시무룩한 말에 까마귀는 다시 반대로 고개를 돌리며 리비를 흘겨보았다.

잠시 뒤 다른 까마귀들이 날아오더니 나뭇가지에 옹기종기 모여 앉기 시작했다. 하나, 둘…… 수는 점점 더 늘어났다.

문득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비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지붕에 내려앉은 커다랗고 새카만 날개를 지닌 이가 보였다.

리비는 자신을 데리러 온 보리스의 품에 안겨 영원의 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엘가 왕녀가 갇혀 있었다. 리비와 많이 닮아, 한눈에 어머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리비…… 아가.”

엘가는 믿어지지 않는 듯 다가와 리비를 끌어안고 말을 이었다.

“보낼 때는 한없이 작았는데…….”

엘가는 믿어지지 않는 듯 리비의 모습을 살폈다. 손을 들어 올리자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엘가의 팔목에 감긴 무거운 쇠사슬이 보였다.

“보리스.”

리비와 눈을 마주친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우득.

보리스의 손아귀에 들린 족쇄는 삽시간에 부스러지고 말았다.

“이걸 끊다니. 아무나 할 수 없는 건데.”

엘가는 눈을 크게 뜨더니 보리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등 뒤로 커다랗게 솟아난 날개를 본 엘가의 얼굴에 경외에 찬 웃음이 번졌다.

“아아, 그래. 칼리니의 아이였구나.”

“제 남편이에요.”

리비의 두서없는 소개에 엘가는 더욱 놀란 듯한 얼굴이 되었다.

“다시 성을 되찾았어요, 왕은 패배했어요. 엄마는 이제 밖으로 나가도 돼요.”

리비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정말 많이 컸구나.”

엘가는 자유로워진 손을 들어 리비의 뺨을 감쌌다.

“저번에 보았을 때도 많이 컸다고 생각은 했지만 직접 보니까…….”

리비는 연회의 밤에 홀연히 나타나 제게 길을 알려 주던 여인을 떠올리자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그때 알았더라면. 마치 환영처럼 보이던 여자가 엄마였다는 걸, 알았더라면.

“엄마.”

“내 아가,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

리비는 엘가의 품으로 파고들며 눈물을 쏟아 냈다.

***

“윽, 으윽.”

안드로스 왕은 의자에 묶인 채 연신 성난 숨을 내쉬었다. 몸을 묶은 쇠사슬이 살을 파고들 때마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이어졌지만 그는 바르작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왕비와 왕자께서는 별궁으로 가셨습니다. 아마 그곳에서 편히 여생을 보낼 테니,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리스의 차분한 설명에 안드로스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네놈, 괴물 따위가 내 성을, 내 왕국을…….”

안드로스가 말을 할 때마다 눈에는 핏줄이 툭툭 터졌다. 온통 시뻘겋게 물든 눈을 하고서도 그는 연달아 저주의 말을 퍼붓는 걸 멈추지 않았다.

“괴물, 이 괴물, 반드시 죽일 것이다, 네 자식들도 모두 괴물로 태어날 테니…….”

“보리스를 닮아서 귀여운 날개를 타고난다면, 그처럼 좋은 일이 없죠.”

옆에서 지켜보던 리비가 나섰다.

“뭐라고?”

“괴물은 당신이야. 누이를 감금하고,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마저 팔아넘겼지.”

“그게 어때서. 이 왕국에 있는 것은 모두 내 것이다. 내 것을 내 맘대로 했을 뿐이야.”

안드로스는 몸을 크게 비틀며 외쳤다.

“어쩌죠, 이제 왕이 아닌데.”

리비가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자신보다 잘난 누이가 왕위를 이을 것이 겁나서 핍박하고, 탑에 가두고…… 참, 어리석군요.”

리비는 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왕의 자리에 오라버니가 앉는 것에는 별다른 이의가 없었어요. 나를 그냥…… 니콜라스와 살도록 두지 그랬어요.”

옆에 있던 엘가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더니 천사 같은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돌변했다.

“내 것들은 건드리지 말지.”

“네년, 널 죽였어야 해.”

“그랬다면 차라리 나았죠. 탑에 가둬 둔 건 언젠가 내가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다 괴물들이야, 감히 나를 이 꼴로 만들고…….”

“잘됐네요, 괴물들과 함께 있기 싫으실 테니, 적합한 처소를 마련해 드리죠.”

“뭐?”

엘가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안드로스는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곧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이건 주인에게 돌려 드리도록 할게요.”

리비는 안드로스의 머리에서 왕관을 들어 올리며 방긋, 웃었다.

***

죽은 줄 알았던 엘가 왕녀가 돌아왔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왕궁으로, 그리고 수도로, 마침내 세셔 왕국 전체에 퍼져 나갔다.

그것도 안드로스 왕에 의해 오랜 기간 탑에 유폐되었다가 돌아온 참이었다.

안드로스 왕은 누이가 마법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두려워했다. 그 결과 직접 외진 탑에 왕녀를 구금했고, 왕위를 제 것으로 만들었다. 왕녀가 미쳐서 죽었다는 소문은 덤이었다. 그녀가 살던 가시나무 탑은 이제 텅 비어 버렸다.

그리고 이제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놔라!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나를 감히!”

왕관이 벗겨진 머리는 흰 백발로 뒤덮여 있었다. 겨우 며칠 사이에 일어난 변화였다. 왕의 복식이 벗겨진 안드로스는 그저 늙고 초라한 모습일 뿐이었다.

“엘가! 그년을 죽였어야 해! 그 딸년도…… 아악!”

허공에 대고 내지르는 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누이를 저주하는 목소리가 어두운 탑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쿵.

안드로스는 얼마 전까지 누이를 가둬 두었던 감금실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그는 여전히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지만, 문이 닫히고 나자 그 소리는 아주 멀고 먼 메아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

엘가가 여왕으로 공표되자, 왕궁의 귀족들은 일제히 그녀의 생환 소식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죽은 줄 알았던 왕녀가 살아 돌아온 것도 놀라운데 유폐된 국왕을 대신해 여왕이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안드로스 왕을 지지하던 귀족들의 반발이 잠시 있었으나, 그것 역시 곧 잠잠해졌다. 엘가 여왕 뒤에는 새로이 북부의 지배자로 거듭난 에드라크 공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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