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부활
지금 여기는 어디일까.
적어도 지상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보리스의 망토 속에 푹 파묻혀 있었기에 주변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하늘을 날고 있다는 걸 느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곳이 땅이든 하늘이든, 그런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그녀가 기대어 있는 자리가 보리스의 품속이라는 것.
두근두근.
얼굴을 대고 있는 자리 너머로, 힘차게 맥동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그 기분 좋은 심박에 리비는 더욱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살아 있어.
보리스는 살아 있다.
쿵쿵쿵.
빠르게 뛰는 박동에 리비는 안심해 숨을 내쉬었다. 그는 무사하니까. 다른 누군가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든, 뭘 하든, 어쨌든 그녀의 보리스는 무사하니 그것으로 되었다.
잠시 흠칫거리던 보리스는 팔에 더욱 힘을 주어 리비를 꽉 끌어안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이대로 숨이 멎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그럴 순 없지. 리비는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제 눈 떠도 돼?”
리비가 조그맣게 속삭이자 보리스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응.”
그의 허락을 듣고서도 리비는 한참이나 얼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리비?”
갑자기 모든 것이 두려워지고야 말았다. 이게 꿈이면 어떡하지, 지금 죽어서 꿈을 꾸는 거라면, 그렇다면…….
“리비, 괜찮아.”
그녀의 불안을 눈치챈 건지 보리스는 고개를 숙여 리비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마에 닿은 따뜻한 감촉에 리비는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이 온기는 진짜야.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그녀만을 위한 온기.
“…….”
리비는 마침내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눈은 뜨지 못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보던 보리스가 얇은 눈꺼풀 위로 입술을 내리눌렀다.
마치 고약한 마법이 풀리듯이, 리비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보랏빛 눈은 다정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리비는 눈을 깜박이며 다시 천천히 그의 얼굴을 훑었다. 몇 번이고 만지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던 그의 얼굴을.
좀 마른 듯 한결 날카로워진 턱선 외에는 그다지 달라진 것 없는 모습이었다
“보리스?”
리비는 숨을 내쉬듯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응.”
“보리스 맞지, 정말로?”
아까도 했던 질문이었지만, 이미 몇 번이나 확언받은 것이지만 그녀는 한 번 더 확인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응, 맞아.”
보리스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보리스!”
리비는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보리스, 보리스…….”
리비는 왈칵 터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보리스는 제 목에 매달린 리비를 끌어안으며 고도를 낮추어 부드럽게 날갯짓했다.
그는 숲의 한가운데로 내려앉았다. 그가 앉은 곳은 수령이 수백 년은 된 듯한 느티나무의 굵직한 나뭇가지였다.
그곳에 앉아 보리스는 한참이나 우는 리비를 아기 다루듯 달래 주었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거야? 응?”
“천천히 말해 줄게.”
보리스는 간신히 목에서 얼굴을 떨어뜨린 리비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꿈이 아니지, 그렇지?”
“꼬집어 봐.”
그는 제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장난치지 마.”
리비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고였다. 온 얼굴이 눈물범벅일 정도로 울어 댔으면서도 그녀의 눈물은 도통 그칠 줄 몰랐다.
“나 맞아, 리비.”
보리스가 이마를 콩, 리비의 머리에 갖다 대며 말했다.
“보리스으…….”
리비는 다시 한번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갈급하게 그의 입술을 찾았다.
“리비, 음…….”
“아무 말도 하지 마.”
리비는 잠시 당황하는 보리스의 입을 틀어막으며 다시 그에게 매달렸다. 보리스는 그녀의 몸을 꼭 끌어안아 좀 더 편한 자세를 만들어 주었다.
몇 번이고 갈급한 키스가 이어졌다. 리비는 사막에서 물을 만난 조난자처럼 정신없이 보리스의 입술을 탐했다. 그를 마시고 또 마셔도 부족했다. 이렇게라도 꼭 그를 확인해야만 했다.
보리스가 돌아왔다는 것을. 자신의 곁에 숨 쉬고 있다는 걸.
“조금만 더…….”
잠시 떨어진 입술 새로 보리스가 더욱 밀착해 왔다. 시작은 리비가 했을지 몰라도 이제 집어삼켜지고 있는 건 그녀 쪽이었다.
“으읏, 응.”
리비는 안으로 사정없이 침입해 오는 혀의 감촉에 가쁘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입맞춤을 받아 내기는 버거웠지만 피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싶었다.
“하아…….”
한참 후 떨어진 입술 새로 뜨거운 숨이 오갔다. 서로가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한 두 사람의 얼굴에 이내 웃음이 번졌다.
리비는 그대로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리비를 보리스는 더욱 꼭 끌어안으며 재회의 순간을 만끽했다.
거센 감정의 파도가 휩쓸고 난 후, 리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 어디도 가지 마.”
“응.”
“내 곁에만 있어야 해, 알았지?”
“그래.”
“또다시 내 곁에서 사라지면, 그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물론이지.”
“뭘 물론이야야, 이 바보.”
리비는 무슨 말을 하든 넙죽넙죽 대답하는 보리스를 보며 그의 가슴을 콩, 소리 나게 때렸다.
“나 때문에 네가 위험해진 건데…….”
“아니야. 내가 나약해 빠져서…….”
보리스는 리비의 얼굴에 남아 있는 마른 핏자국을 닦아 주었다. 리비도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자신보다 더 많은 피를 뒤집어쓴 보리스였지만 그는 안중에도 없는 듯싶었다.
“……안 지워져.”
리비는 침울하게 말했다. 물론 핏자국 따위, 그의 잘생긴 얼굴을 조금도 가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런 더러운 자들의 피 따위는 그의 몸에 남지 않게 닦아 주고 싶었다.
“침 바르면 돼.”
“…….”
리비가 뜨악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해맑게 웃었다. 그 일들을 겪고도 여전히 이토록 순수한 얼굴의 그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동안 어디에, 어떻게 있었어? 몸은 괜찮은 거야?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리비가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보리스가 리비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차차 얘기해 줄게. 일단 쉬는 게 먼저야.”
“우리,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리비는 문득 든 의문에 물었다.
“아직 해결할 일들이 남았어.”
보리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뭔데?”
리비는 갑자기 스산해진 그의 표정을 보며 등골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꼭 해결해야 할 일이야.”
“…….”
굳이 묻지 않아도 그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리비는 알 것만 같았다. 그런 보리스를 보며 리비는 또 다른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더 이상 위험한 건 싫어.”
“…….”
보리스는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난, 난 너만 있으면 돼, 보리스. 우리, 어디든 가자. 어디든 숨어서 살면 돼. 너랑, 나, 그리고…….”
리비는 말을 하려다 말고 멈췄다. 혀끝에서 맴도는 그 말이 어째서인지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게, 그…….”
“피곤해 보여.”
빨개진 얼굴로 말을 더듬는 리비를 보며 그는 한층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 전에 좀 쉬는 게 좋을 거야.”
레제트 공작의 성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고, 영주를 잃었으니 새로운 영주를 추대할 때까지는 저들끼리 치열하게 싸울 것이다. 수도에 그 소식이 전해지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게 뻔하다.
습격 전에 모든 전서구를 날려 보냈기에 수도에 이 소식을 알릴 소식통은 완전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금 더 날아가야 해, 불편해도 조금만…….”
“하나도 안 불편해.”
리비는 그의 목에 힘을 주어 매달렸다
“너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좋아.”
보리스는 리비의 몸을 안아 들고서 커다란 날개를 펼쳤다.
“날개…… 더 커진 것 같아.”
착각이 아니었다. 마지막 기억 속 그의 모습보다 더, 보리스의 날개는 커져 있었다.
“만져 볼래?”
어쩐지 은밀하게 들리는 그의 제안에 리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등 뒤로 비죽 솟아 있는 거대한 날개깃을 어루만졌다.
그녀가 만지는 대로 움찔거리는 날개가 귀여웠다. 상황에 맞지 않게, 정말로 그랬다.
“다른 건 궁금하지 않아?”
“다른 거?”
한참이나 그의 날개를 어루만지던 리비가 물었다.
“다른 것도 더 커졌을지 모르잖아.”
보리스가 그녀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이자, 리비는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여기선 확인 못 해.”
“……어?”
보리스는 당황한 듯 리비보다 더 볼을 붉히고 말았다.
“어디든 가줘.”
“……알았어.”
그는 마침내 크게 날갯짓하여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리비는 점점 멀어져 가는 숲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생각난 듯 그를 보았다.
“참, 보리스.”
“응?”
갑자기 엄중해진 리비의 목소리에 보리스가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왜? 어디 아파? 날지 말까?”
“그게 아니라…….”
리비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리비가 닿기 수월하도록 제 고개를 숙여 준 보리스의 얼굴이 한껏 심각해졌다.
“있지, 나.”
“…….”
“아이를 가졌어.”
순간 보리스는 허공에서 크게 휘청거렸다.
“꺄악, 보리스!”
리비는 기겁하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잠시 중심을 잃은 몸이 공중에 휘청거렸으나 곧 안정적으로 중심을 되찾았다. 그런 와중에도 리비를 끌어안은 보리스의 팔 힘만큼은 굳셌다.
“떨어질 뻔했잖아.”
리비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 미안.”
보리스는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리비는 행여 그가 자신을 놓칠까 싶어 그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럴 것도 없이 보리스의 팔은 강철처럼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보리스?”
리비는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
보리스는 여전히 크게 열린 눈으로 리비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 좀 해봐.”
“…….”
리비의 말에도 보리스는 입을 열기는커녕 더욱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또 흘렀다. 두 사람은 허공에 뜬 채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들리는 거라고는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차분히 반복되는 보리스의 날갯짓 소리뿐,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말하는 법을 잠시 잊은 듯했다. 리비는 이대로 있다가는 보리스가 나는 법마저 잊고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보리스, 잠깐만 내려가, 응?”
리비는 그를 열심히 설득했다.
“보리스으.”
리비가 다시 옷깃을 잡아당기자 보리스는 그 말대로 천천히 고도를 낮추어 가까운 나뭇가지 위로 안착했다.
“…….”
그러나 내려와서도 여전히 그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답답해진 리비가 한쪽 손을 풀어 그의 손을 끌어다가 제 배 위에 턱 올려놓았다.
“여기, 있다고. 우리의 아이.”
“아이?”
리비의 말을 들은 보리스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우리 아이가?”
보리스는 다시 반복했다. 리비는 끈기 있게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다 결국 못 참고 보리스의 얼굴을 잡아 자신이 있는 쪽으로 돌려놓았다.
“바보야, 너와 내 아이라고.”
“…….”
“여기에 있다고, 바로 이 안에. 내 배 속에. 네가…… 준 아이가.”
리비는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안 믿겨?”
리비에게 얼굴이 잡힌 채 보리스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보라색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별은 모두 갖다 쏟아부은 듯이 아름다운 빛이었다.
“하, 하하.”
보리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곧 그 웃음은 숲 전체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커졌다. 그 바람에 그를 따라서 인근 숲에 내려앉은 까마귀들이 푸드덕 날아올라 허공을 맴맴 돌기도 했다.
“우리의 아이.”
리비의 배 위로 손을 얹은 그의 얼굴에 이내 환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언제나 그랬지만 그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우리의 아기가…… 여기에 있다고.”
“응.”
배를 가만히 어루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러웠고,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아직은 평평한 배 아래에 자리 잡은 생명을 느끼듯, 보리스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뭐가 느껴져?”
리비는 조심스레 물었다. 아이의 존재를 뚜렷이 느끼려면 적어도 배가 볼록하게 나올 만큼은 되어야 한다고 알고 있다. 리비의 새어머니가 에드나와 리오를 가졌을 때도 그랬다.
처음엔 동생이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데 그 안에 아이가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점차 배가 불러올수록 리비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새어머니의 권유에 그 위로 손을 올려놓은 순간, 툭, 차는 느낌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응? 보리스.”
그러니 보리스도 그럴 것이다. 아니면 혹시…… 리비는 왠지 모를 기대감으로 보리스의 얼굴을 살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보리스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으니, 아직 평평한 배 아래에서도 아이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힘이 있을지도.
“정말 뭐가 느껴지는 거야? 그래?”
리비는 다시 초조하게 물었다.
“아주 건강하대.”
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
“잘 있대, 곧 만나게 될 거래. 엄마를 빨리 만나고 싶댔어.”
“정말, 정말이야?”
리비의 놀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잔뜩 흥분한 듯 목소리도 떨려 나오기 시작했다.
“아기의 목소리가 들려? 나더러 엄마라고 해?”
보리스는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설마 너…… 나를 놀린 거야?”
“아니야.”
“거짓말.”
리비는 손을 들어 그의 가슴팍을 콩, 내리쳤다.
“아니래도.”
“난 얼마나 놀랐는데…… 나더러 엄마라고…… 엄마…… 흑.”
리비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울먹거렸다. 덩달아 당황한 보리스는 한참이나 그녀를 끌어안고 달래었다.
“엄마…….”
리비의 목소리가 갑자기 서럽게 돌변하더니 이내 긴 울음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엉엉, 숲을 다 울릴 만큼 울어 대는 리비를 달래느라 보리스는 한참 진을 빼야만 했다.
“쉿, 이제 괜찮아, 리비.”
“흑, 흐윽.”
“이제 곧 만나게 될 테니까.”
“……뭐?”
리비는 울음을 뚝 그친 채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 안에 맺힌 제 모습이 더없이 웃겼지만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누굴 만나? 어떻게?”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보리스는 답하지 않고서 그저 리비만 웃으며 내려다보았다.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듯 지은 미소에 리비는 조갈증이 난 듯 그의 손을 잡아 흔들어 댔다.
“뭔데, 응?”
“사랑해, 리비.”
그의 난데없는 사랑 고백에 리비가 당황할 새도 없이, 다시 격렬한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배를 감싼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더니 자신의 몸에 더욱 꼭 붙여 놓는 손길에는 짙은 갈망이 묻어났다.
“으음.”
리비는 그의 목에 한껏 매달려 그가 퍼붓는 키스를 받아 냈다.
두 사람이 다시 날아오른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
“보리스, 여기가 어디야?”
보리스는 그녀를 안고서 한참 동안 날아 어느 마을 위로 내려앉았다. 내내 하늘을 날아왔기에 방향도, 목적지도 그녀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셔 왕국의 수도에 가까워졌다는 사실뿐이었다.
보리스의 품에 안겨 내려다본 마을들은 가면 갈수록 그 수도 늘어났고, 사는 집의 개수도 늘어났다.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의미였다.
보리스는 그중 한 마을에 착지했고, 그를 따라오던 까마귀 떼는 근처 숲속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보리스는 마을에 내려앉아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말쑥한 외관의 여행자 숙소였다. 꽤 큰 규모의 여관답게 모든 편의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여관의 주인은 보리스와도 익히 아는 사이인 듯 보였다.
리비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고,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듯 보리스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1층에는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리비를 보자마자 예를 갖추었고, 그들의 얼굴을 알아본 리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칼리니 기사단……?”
리비는 제가 본 것을 믿을 수 없어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다들 왕궁에 갇혀 있을 텐데…….”
“외부에 남겨 두었던 기사들이야.”
보리스는 짧게 대답한 뒤 2층으로 올라갔다. 그중 한 방으로 들어간 보리스가 침대 위로 리비를 내려 두자, 그녀는 불안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
“여기에 있어, 리비.”
“너는 어디에 갈 건데?”
리비는 불안한 얼굴로 보리스의 소매를 바투 쥐었다.
“난 할 일이 있어. 끝나면 돌아올게.”
“그게 무슨…… 안 돼, 이제야 만났는걸.”
절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떨어져 있던 시간은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아기가 아니었다면, 보리스를 반드시 만나야 한다는 의지가 없었더라면 사는 의미가 없었다.
“또 위험한 일을 하러 가는 거야? 그런 거야?”
“안 위험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번엔 그럴 일 없어.”
“…….”
“꼭 마무리해야 할 일이야.”
보리스의 설득에 리비는 스륵, 손을 떨어뜨렸다. 아무리 만류해도 그는 결국 갈 것이다. 그리고 그건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지막 전투였으니까.
“그러니 여기서 날 기다려 줘.”
“…….”
“우리의 아이와 함께.”
보리스의 눈에 결연한 의지가 넘쳤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아이를 위해서…… 꼭 해야 할 일이야.”
리비는 순간 보리스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나는 걸 보았다. 그것은 둥지를 지키려는 어미 새와도 같은 것이었다. 제 영역 안의 것을 지키려는 본능이 자아낸 잔혹함.
그러므로 리비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말한 것은 무엇이든 지키는 남자였으니까.
돌아온다는 말,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주겠다는 말.
그는 모든 약속을 지켰다. 함부로 했던 결혼 약속까지도.
그러니 남은 것은 그를 믿어 주는 일뿐이었다. 리비는 단단한 빛을 뿜는 보라색 눈을 보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그런 뒤에 보리스의 얼굴을 움켜쥐고서 물었다.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해? 아니, 돌아올 거야, 그렇지?”
리비는 다시 한번 다짐을 받아 냈다.
“물론이야.”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정말이지?”
리비는 다급하고 간절한 어조로 물었다.
“날 못 믿는 거야?”
그는 웃음 띤 어조로 물었고, 리비는 격하게 머리를 흔들어 댔다.
“그럴 리가. 난 널 믿어. 그렇지만…….”
그를 믿는 것과 그를 떼어 놓는 두려움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사랑하니 걱정되고 사랑하니 무섭고 아픈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날개가 찢기고 절벽으로 추락해서도 살아서 그녀에게 돌아온 보리스였다. 그런데 지금은 더욱 크고 아름다운 날개를 달고 있다.
유일한 약점이 될 수 있는 아내와 아이는 안전한 곳에 있다. 이제 그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렇지만 그녀는 그와 떨어졌던 시간 동안의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네가 무사하기를 바라.”
“…….”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돌아오기를 원해.”
리비의 목소리에 어느덧 촉촉하게 물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보리스는 그런 그녀를 아무 말 없이 지켜보았다.
“네가 없을 때…… 죽고 싶었어.”
리비는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고, 보리스는 그런 그녀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당장 떠나야 해?”
리비는 너른 품에 얼굴을 콕 처박고서 물었다. 손으로는 그의 옷깃을 단단히 붙든 채였다. 그 손짓을 본 보리스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맴돌았다.
“잠들 때까진 옆에 있을게.”
“……아무것도 안 하고?”
“…….”
놀란 듯 커진 보리스의 눈을 마주 보며 리비는 조금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인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보리스의 무릎 위를 타고 올랐다. 갑작스레 제 다리 위에 올라앉아 빈틈없이 몸을 밀착시키는 리비를 보리스는 놀란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넝쿨처럼 뻗어 온 팔이 보리스의 목을 감싸 안고 하얗고 가는 다리가 보리스의 허리에 감겼다. 그야말로 보리스를 온통 칭칭 감고 매달린 꼴이었다.
갑작스레 가까워지다 못해 착 붙어 버린 몸의 감촉에 보리스의 광대 부근이 붉어졌다.
오랜만에 보는 보리스의 수줍은 얼굴에 리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이잖아, 우리.”
리비가 칭얼거리며 더욱 그에게 안겨 들었다. 미치도록 그리웠다, 이 온기가. 그에게 내내 안겨 왔고, 체온을 나누었지만 그럼에도 부족했다. 더 강하고, 아찔한, 그리고 농도 깊은 무언가가 간절히 필요했다. 바로 지금.
“잠들게 해줘.”
“리비.”
보리스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커진 눈은 이내 리비의 복부에 닿았다. 조금씩 흔들리는 눈이 이러면 안 된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
“…….”
그럴 리가 있겠냐는 듯 크게 떠지는 눈에 보리스의 당황한 기색이 고스란히 읽혔다.
“날이 밝으면 너는 다시 나를 떠나야 하잖아.”
“…….”
“그러니까…… 모두 새겨 두고 싶어. 어디 가지 말라고. 꼭 돌아오라고.”
“하지만.”
보리스의 손이 리비의 배를 짚었다. 이 안에 자라고 있을 두 사람의 피를 이어받은 생명을 걱정하듯, 그의 눈빛이 심란해졌다.
“상관없댔어.”
리비는 얼른 대답했다.
“이대로는 잠들 수 없어. 날 재우고 떠나. 그래야만 할 거야. 안 그러면 놔주지 않을 거니까.”
“리비…….”
보리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마음이 약해졌다는 신호였다. 리비는 그대로 얼굴을 들어 올려 보리스의 입술에 뭉갰다.
보리스는 리비의 어깨를 잡아 제지하려다가 멈췄다. 간절한 열망으로 흐려진 눈이 그를 향해 있었다.
보리스는 리비는 밀치는 대로 그대로 밀려나 주었다. 두 사람은 옷을 다 벗을 새도 없이 몸을 맞대었다. 밤은 깊었고, 시간은 없었다.
“하아…….”
리비는 상체를 바짝 붙인 뒤 몸의 속도를 더욱 높여 갔다. 힘을 조절할 자신이 없다는 보리스의 말에 택한 방법이었다. 보리스의 팔뚝에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강인한 팔이 그녀의 허리와 등을 차례로 쓸어내리며 흥분한 리비의 상태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지만 오랜만에 그를 품는 리비로서는 몸의 불꽃을 꺼트리기가 어려웠다. 그건 보리스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리비.”
그는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간신히 참고 있는 모습은 퇴폐적이고 음란한 욕구를 더욱 자극했고, 리비의 몸짓은 더욱 격렬해졌다.
마침내 절정을 맞이한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합쳐졌다. 조금의 빈틈도 없이 맞닿은 몸에서 흘러나온 온기를 느끼며, 리비는 그대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녀올게.”
새벽빛이 어슴푸레하게 방 안을 물들이는 시간, 보리스는 그녀에게서 빠져나와 몸을 바로 세웠다. 온 기력을 다해 탈진한 리비는 그저 감각으로 그가 곁에 서 있다는 것을 느꼈다.
“기다리고 있어. 곧 데리러 올 테니.”
보리스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지는 걸 느끼며, 리비는 웃음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