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소리 없이 우는 새
“리비.”
“…….”
리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보리스?”
앞에는 정말로 보리스가 웃는 얼굴로 누워 있었다.
“보리스, 어디 갔다 온 거야?”
“내가 가긴 어딜 가?”
뻗어 온 손이 부드럽게 리비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따스한 온기에 리비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왜 울어?”
다정하게 달래는 목소리에 리비의 눈에는 더욱 크게 눈물이 맺혔다.
“보리스, 보고 싶었어.”
리비는 그에게 와락 안겼다. 그녀를 안고 있는 단단한 팔의 감촉과 온기에 리비는 안심하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다신, 다시는 아무 데도 가지 마, 응?”
“내가 가긴 어딜 가겠어.”
보리스의 대답에 리비는 더욱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모든 것이 그리웠다. 이 품, 이 체향, 이 온기까지.
지난 일들은 모두 꿈이었다. 그저 한여름 밤에 꾼 악몽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제 괜찮을 것이다, 전부 괜찮다. 보리스만 있으면,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없으니까.
“리비.”
다시 귓가에 들리는 음성에 리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자신을 응시하던 보랏빛 눈은 온데간데없었다. 손을 뻗어 봤지만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늘 달콤하게 속삭여 주던 보리스는 이미 없었다.
몇 번을 잠들고 다시 몇 번을 깨어나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주변은 온통 흰빛이었다. 사방에 장식된 꽃에서 풍기는 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더없이 맑고 고운 소리였으나, 리비에게는 그 어떤 소음보다 끔찍했다.
다시 현실이구나.
보리스의 품에서 마음을 놓고 있던 리비는 다시 눈을 뜸과 동시에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리비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별다를 것 없이 흰색의 옷이었다. 어제도, 또 그제도 매일 흰색 옷을 입은 채 눈을 뜨고는 했다.
이 성에 끌려온 이래로 매일, 그녀는 사육당하는 새처럼 키워졌다.
철그렁.
침대에서 내려가려 몸을 움직이자 발목에 걸린 쇠사슬이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선을 내리자 발목에 채워진 족쇄에 길게 연결된 쇠사슬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무겁게 출렁거렸다. 가느다란 리비의 발목에 비해서 지나치게 크고 무거운 족쇄였다.
족쇄가 채워진 발목에는 시커먼 피멍이 들어 족쇄가 스칠 때마다 통증이 밀려 올라왔다.
“…….”
사방에 둘러진 흰 천 너머,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리비는 손을 뻗어 보리스가 누워 있었던, 비록 그리움이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지만 보리스가 분명히 누워 있었던 그 자리를 하염없이 어루만졌다.
전해지는 온기 하나 없이 싸늘한 침구 위로 툭툭 눈물이 떨어졌다.
“흐으…….”
잇새로 흘러나온 울음이 이내 침상을 가득 채웠다.
“흐으, 흐으, 아아…….”
소리 내어 그의 이름이라도 부르고 싶었다. 비록 부른다 한들 그가 대답해 주진 않겠지만, 그저 허공에 대고라도 그의 이름을 불러 보고 싶었다.
리비가 울음을 터트리자 새들은 더욱 맑고 고운 소리로 울어 댔다. 흡사 숲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아름다운 소리였지만 그녀에겐 그저 지옥에서 울리는 사신의 노랫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째액, 짹.
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골이 울릴 만큼 커지는 소리에 리비는 양쪽 귀를 틀어막으며 침구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내 아름다운 새는 늘 우는 소리밖에 안 내는군.”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리비는 흠칫 몸을 떨었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은 불쾌한 감정이 엄습했다.
“걷어.”
떨어진 명령에 침상 주위를 감싸고 있던 흰 천이 휙 아래로 떨어졌다.
“…….”
밖과 안을 차단하고 있던 천이 떨어지고 나자 황금 창살이 더욱 도드라졌다. 리비는 거대한 황금 새장 속에 갇혀 있었다.
새장 문에는 창살과 마찬가지로 황금으로 만든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그 열쇠를 가지고 있는 이가 바로 레제트 공작이었다.
짹, 째짹.
침상을 둘러싼 여러 개의 새장 속에는 그녀가 입고 있는 옷만큼이나 하얀 깃털을 가진 새들이 울어 대고 있었다.
그 새들 가운데에 레제트 공작이 서 있었다. 숱이 얼마 남지 않은 머리를 전부 뒤로 넘겨 드러난 이마가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반짝거렸다.
요란한 빛깔의 비단옷과 보석을 칭칭 감은 채 걸어오는 레제트 공작을 보자 리비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여전히 우는 소리밖에 못 하는군.”
레제트 공작이 새장 밖을 빙글빙글 돌며 말했다. 리비가 그의 시선에서 놓여날 길은 없었다.
리비가 잠들고 깨어나는 침상은 새장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고, 사방은 창살로 둘러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좋아. 새는 원래 말을 하지 못하니까.”
레제트 공작이 창살을 잡고 얼굴을 바싹 붙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제트 공작이 입꼬리를 올려 웃자 금으로 칠해 놓은 이빨 하나가 번득이는 게 보였다. 그 소름 끼치는 웃음에 리비는 더욱 뒤로 물러났다.
“열어.”
레제트 공작이 열쇠를 건네주자 새장 앞을 지키고 있던 하녀가 새장의 문을 열어 주었다.
철그럭.
새장의 문을 감고 있던 쇠사슬과 거대한 자물쇠가 떨어져 나가는 소리에 리비는 다시 몸을 크게 떨었다.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레제트 공작을 리비는 두려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다시 봐도 똑같군.”
레제트 공작의 손이 리비의 금빛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모든 게 똑같아, 네 어미의 머리칼, 눈 색, 냄새, 피부…… 네 어미의 딸이 맞군.”
레제트 공작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정말 사랑스러워. 네 어미가 죽어 사라지는 바람에 대체품으로 사들인 거지만, 이만하면 훌륭하군.”
레제트 공작의 말 한마디마다 리비는 흠칫흠칫 몸을 떨어 댔다.
“흐으, 으…….”
“말은 못 하지만 울기는 잘하니까 됐어. 시끄럽게 떠들어 봐야 귀만 아프지.”
머리채를 휘감은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리비는 아픔에 더 이상 우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계속 울어, 나를 위해서.”
레제트 공작이 낄낄 웃으며 리비의 머리채를 침대 위로 내팽개쳤다.
“곧 다가올 연회에서 노래해야 할 테니 그 목 잘 간수하는 게 좋을 거야.”
“…….”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사 온 돈값은 해야지. 널 사 오느라 내가 왕에게 돈을 얼마나 썼는지 알아? 성도 여러 채 넘겼지.”
“…….”
리비는 레제트 공작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시트를 그러쥐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몸이 움찔거렸지만 그의 손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저 복종, 순종. 그것이 레제트 공작을 화나지 않게 하는 지름길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 착하군.”
레제트 공작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철그렁.
다시 문에 걸리는 자물쇠 소리에 리비는 흠칫거렸다. 잠시 후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자 리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만약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더라면 그녀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욕을 총동원해 그에게 쏟아부어 주었을 테니까.
그랬더라면 제아무리 비싸게 사 온 물건이라 해도 그가 어떻게 다루었을지 뻔하다.
변태.
레제트 공작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그랬다. 그는 오래전 아랫도리가 불능이 되었고, 제대로 된 남자구실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제 나체를 드러내며 리비가 보는 앞에서 실컷 제 욕구를 채우고는 했다. 그 구역질 나는 광경을 리비는 모두 지켜보아야만 했다.
죽는 게 차라리 나을 거야.
리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에서 보리스를 잃은 후, 레제트성에 억지로 끌려와 있는 동안, 그녀는 그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보리스를 만나야 하니까.
양 날개를 잘린 채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졌지만, 그녀는 보리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혼절을 하고 깨어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그 사실 만큼은 믿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만나야 한다. 설령 시체가 되었다 하더라도, 다시 만나서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다.
사랑한다고. 내겐 너밖에 없다고. 네가 없으면 이 삶을 지속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차라리 같이 죽을걸.
그렇게 가게 놔두는 게 아니었는데.
이 성에 갇힌 날로부터 끝없이 이어진 후회가 그녀를 휘감았다.
레제트 공작은 그녀를 새장에 가둔 채 학대하기는 했으나 그녀와는 어떤 접촉도 해 오지 않았다.
그저 살아 있는 장식품을 감상하듯, 그녀를 커다랗고 호화로운 새장 안에 넣어 둔 채 보고 즐길 뿐이었다.
그것은 경외하는 대상을 마침내 손에 움켜쥔 광기에 찬 신도 같은 행위였다.
매일 눈을 뜨고 공작과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리비는 격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목숨을 연명하는 것조차 치욕스러운 삶이었지만 그녀는 죽을 수 없었다.
리비의 눈에서 다시 투둑,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하루하루 생명을 연장해 가는 것뿐이라는 게 죽을 만치 괴로웠다.
“살아.”
마지막 순간, 보리스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만나러 갈게.”
그러니 살아야 한다. 살아야만 한다. 그가 만나러 온다고, 꼭 그녀에게 온다고 했으니까.
리비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하던 기도를 계속 이어 갔다.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살아서가 안 된다면 죽어서라도.
입술로 기도의 말을 읊었으나 제대로 소리가 되어 나오는 말은 없었다.
보리스의 추락 후, 리비는 그대로 정신을 잃은 채 레제트 공작의 성으로 끌려왔다. 그날 이후, 리비는 말을 잃었다.
***
며칠째 리비는 온몸으로 저항 중이었다.
“놔, 이거 놔!”
리비가 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말 안 듣는 짐승은 교육을 시켜야겠지.”
“짐승은 너야, 아니…… 넌 짐승도 되지 못해.”
퉤, 리비가 침을 뱉자 레제트 공작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그래, 그 괴물을 보면 좀 말을 듣게 되려나?”
레제트 공작의 입가가 쭉 찢어지며 소름 끼치는 미소가 맺혔다.
“‘그 방’으로 데리고 가.”
레제트 공작의 명령에 리비는 기사들의 손에 어딘가로 끌려갔고, 그대로 어떤 어두운 방 안으로 밀쳐 넣어졌다.
“악!”
바닥에 내던져진 리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실내는 어두웠다. 리비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사위를 분별하려 애썼다. 한쪽 벽면에 희미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는 틈이 보였다. 그녀는 벽을 짚어가며 빛이 조금씩 새어 나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손에 천이 걸리자마자 리비는 재빨리 그것을 잡아당겼다.
차륵.
갑자기 흘러들어오는 빛에 리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보았다.
넓은 벽면의 한편, 무언가가 십자 형태의 나무에 묶여 있었다.
“…….”
리비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임에도 그랬다.
“아, 아아…….”
마침내 그것의 형태를 제대로 확인한 리비가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천장 가까이 매달린 그것.
그것은 새카맣고 커다란 날개가 달린 사람이었다.
바싹 마른 얼굴과 손, 발은 모두 생명이 떠난 지 오래였으나 누군가의 지독한 집착으로 그 형태나마 붙들어둔 것이었다.
몸통 한가운데에는 작살이 뚫고 지나간 듯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선대 에드라크 공작.
보리스의 아버지.
“아아악!”
리비는 긴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동시에 말도 잃어버렸다.
***
“다들 식사하도록 하지.”
기다란 만찬용 테이블 앞에는 레제트 공작을 비롯해 가솔들이 앉아 있었다.
상석에는 레제트 공작이, 그 옆으로는 일곱 명의 부인들이 서열에 따라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만찬 테이블 중앙에는 꽃으로 장식된 커다란 황금 새장이 떠 있었다.
끼익, 끼익.
안에 있는 무언가가 움직일 때마다 천장에서는 불길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자, 울어 봐.”
레제트 공작이 포도주가 든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
새장 바닥에 구겨진 것처럼 앉아 있던 리비가 고개를 들고 만찬장의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녹색 눈이 만찬 테이블에 앉아 있는 얼굴을 하나둘, 스쳐 지나갈 때마다 그들은 시선을 회피했다.
일곱 명의 부인들은 리비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제각기 불편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어서 불러 보라니까, 노래를?”
목소리가 험악해지자 만찬장의 수많은 눈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며칠 뒤에 열릴 연회에서 완벽하게 노래를 부르려면 연습을 완벽하게 해야지.”
리비의 입에서 미미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사는 말할 수 없었으나 옅은 음으로 이어지는 노랫소리가 만찬장 가득 울려 퍼졌다.
“더, 더 큰 소리로 노래해, 그래 가지고 어디 들리겠어?”
레제트 공작의 윽박지름에 만찬장의 사람들이 일제히 놀랐다. 손에 든 식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만찬장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내 귀한 새님께서는 손님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봐.”
“…….”
레제트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옆에 앉은 부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꺄악!”
머리채를 휘어 잡힌 부인 하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리비보다 겨우 서너 살이나 많을까 싶은 여자는 리비를 보며 애처로운 울음을 뱉어 냈다.
쿵, 쿵.
레제트 공작은 어린 부인의 머리채를 잡아 테이블 위로 내려찍기 시작했다.
그에게 머리채를 잡힌 부인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 폭력을 견뎌 내고 있었다.
이마가 터지고 피가 맺히도록 부인은 테이블에 머리가 들이박혔다.
쿵, 쿵. 소리가 거세게 울릴수록 리비는 귀를 틀어막은 채 바닥에 틀어박혀 몸을 부들부들 떨어 댔다.
쿵.
묵직한 것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리비는 창살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내내 머리를 잡힌 채 틀어박히던 부인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마가 깨져 흐른 피로 바닥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이렇게 약해 빠져서야.”
레제트 공작은 바닥에 널브러진 부인에게 퉤, 침을 뱉은 뒤 돌아섰다. 그 옆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부인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비명을 내질렀다.
“꺄악, 꺄아악.”
머리채를 잡힌 부인이 길게 울음을 뱉어 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돋아난 부인은 레제트 공작의 첫 번째 부인, 레제트 공작 부인이었다.
쿵, 쿵.
이번에는 레제트 공작 부인의 머리가 테이블 위로 사정없이 처박히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세…… 꺄아악.”
무자비한 손길에 머리를 부딪치고 기절한 공작 부인을 바닥으로 떨군 레제트 공작이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있을 때였다.
“뭐 해? 다들 식사해.”
레제트 공작이 살벌한 눈으로 바라보자 부인들은 다시 부지런히 식기를 놀리기 시작했다.
“우웁.”
입안으로 억지로 음식을 밀어 넣던 부인 중 하나가 연신 구역질을 해댔다.
“죄, 죄송합니다.”
서둘러 입가를 정리하는 사이 세 번째 부인의 머리채가 붙잡혔다.
“아아악!”
순식간에 머리가 뒤로 젖혀진 부인이 처절한 비명을 울렸다.
“사, 살려 줘, 살려 줘!”
부인은 머리가 처박힐 때마다 외쳤다. 레제트 공작이 아닌 새장 속 리비를 향한 외침이었다.
“흐, 아흐.”
리비는 창살을 그러잡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소리에 레제트 공작은 세 번째 부인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쿵.
바닥으로 허물어진 세 번째 부인이 흐느끼는 소리에 리비는 몸을 덜덜 떨어 댔다.
“아으…… 아아아.”
가사가 아닌 허밍으로 이어지는 소리는 명백한 노랫소리였다.
“그래, 그거지. 그거야.”
레제트 공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리비의 노랫소리를 감상했다.
“아주 예쁜 소리야, 생각했던 바로 그 소리야. 제 어미와 똑같은…….”
레제트 공작은 다시 포도주잔을 들어 올리고 눈을 감은 채 리비의 노랫소리를 즐겼다.
“크게, 더 크게 불러.”
레제트 공작의 주문에 따라 리비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허공에 울려 퍼지는 가사 없는 노랫소리에 레제트 공작은 더욱더 흡족한 얼굴이 되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공작이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자른 뒤 입으로 밀어 넣었다. 핏빛 육즙이 입가에 번지자 공작의 인상은 한층 더 기괴하게 돌변했다.
“고기 맛이 더욱 좋은 것 같군.”
입가를 훔쳐 내자 피는 더욱 크게 번졌다.
“뭐 해? 다들 안 먹고.”
만찬장에 울려 퍼진 소리에 다시 식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비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 갔고, 덩달아 식기도 바쁘게 그릇과 접시를 오갔다.
***
다시 새장에서 꺼내진 리비는 레제트 공작의 수하들에게 이끌려 방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더 크고 넓은 새장이 있을 뿐, 다를 건 없었다.
열린 창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가 유일하게 바깥공기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막 청소를 끝낸 뒤 열린 창문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닫힐 예정이었다.
리비는 창문이 보이는 창살로 걸어가 손을 뻗었다. 창살 사이로 내밀어진 손이 창문에 닿을 듯 가까웠다. 하지만 그 손은 창에 절대 닿지 않았다.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살아서 다시는 나갈 수 없는 곳. 그럼에도 그녀는 버텨야 했다.
아까 만찬장에서 머리가 깨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부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밝은 금빛의 머리칼과 녹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쌍둥이들처럼 닮은 외모였다. 나이가 다를 뿐, 외모는 하나같이 똑같았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다. 그중에 자신이 앉아 있어도 하나도 이질적이지 않을 것 같은.
레제트 공작은 오랜 기간 동안 정성을 들여 부인들을 끌어모았다. 아주 귀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을 수집하듯이 그렇게.
“살려 줘.”
피를 뱉으며 외치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했다. 자기도 언젠가 그 부인들처럼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며 꾸역꾸역 음식을 밀어 넣어야 할지 모른다.
그나마 새장 속에서 목숨을 연명해 가는 것이 행운이라고 할 정도였다.
레제트성에서 행복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때때로 식사 자리에서 마주치는 부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허연 밀랍처럼 굳어 있었다. 그저 남편인 레제트 공작이 시키는 대로 웃고, 울고, 먹는 것이 전부인 삶이었다.
“흑…….”
울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혼자 남아 보리스를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으…… 우으, 아…….”
차마 형태가 되어 나오지 못하는 목소리가 허무하게 허공에 울려 퍼졌다. 끅끅거리는 울음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메워 갈 때였다.
“아아, 아…….”
팔랑.
시트에 얼굴을 박은 채 울고 있는 그녀의 손에 포근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와 닿았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깃털이었다.
“…….”
리비는 그것을 서둘러 움켜쥐었다. 손등을 간질이던 것의 정체는 크고 검은 깃털이었다. 아주 거대한 새의 날개깃으로 보이는, 매우 크고 검은 깃털.
그녀는 이것과 같은 것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녀의 결혼식 날, 베개 위에 떨어져 있던 검은 깃털 하나를.
“…….”
리비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열린 창밖으로 새카맣게 물든 하늘이 보였다. 별들이 점점이 찍혀 있는 밤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했다.
언젠가 저 하늘을, 보리스와 함께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날들이 떠올랐다.
“…….”
맑던 하늘에 하나둘 검은 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리비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몇 번이나 눈을 비벼 봤지만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휙.
무언가 검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 셋…… 검은 그림자들이 점점 더 늘어 갔다.
까악.
창문 근처의 기다란 나뭇가지에 앉은 까마귀 한 마리가 길게 울음을 뽑아냈다. 덩달아 다른 까마귀들의 울음소리도 더해졌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들이 하나같이 리비를 향해 있었다.
“…….”
리비는 노랗게 빛나는 눈들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몇 번을 감았다 떠봐도 마찬가지였다. 까마귀들은 나뭇가지에 주르르 앉아서 관찰하듯 리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들, 어떻게.’
이전에는 무섭게만 보였던 까마귀들이 이제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갑게만 보였다. 리비는 몸을 일으켜 새장 창살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힘껏 뻗어 보았지만 창틀이 겨우 손에 닿을까 말까 할 뿐,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푸드덕.
그 소리와 동시에 까마귀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리비도 창살 밖으로 뻗은 손을 거둔 뒤 다시 누워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리비는 감시하는 시녀가 눈을 부라리며 방 안 곳곳을 둘러보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그녀를 응시한 시녀는 미심쩍은 눈으로 다시 실내를 둘러본 뒤 밖으로 나갔다.
“하…….”
리비는 다리에 힘이 풀려 스르르 주저앉았다.
손에는 여전히 검은 날개깃이 쥐어져 있었다.
‘보리스.’
리비는 조용히 입 모양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이 크기, 촉감. 모두 그녀를 따스히 감싸 안고 날았던 날개의 감촉과 같았다.
그날 밤, 리비는 그것을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보리스와 헤어진 뒤로 처음으로 맞는 다디단 숙면이었다.
***
마을에 한바탕 비바람이 몰아친 다음 날이었다. 리비는 보리스를 끌고서 숲속 깊숙이 들어갔다. 밤새 울리던 바람 소리가 어쩐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보리스, 여기 봐. 새가 있어.”
리비의 말에 보리스가 냉큼 달려왔다.
“어디?”
“여기, 여기 있잖아.”
리비는 풀숲에서 자그마한 둥지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이제 막 부화하여 얼마 지나지 않은 아기 새 한 마리와, 알 두 개가 같이 들어 있었다.
“알은 이미 깨졌어.”
떨어질 때의 충격 탓인지 알은 이미 금이 가 있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기 새는 졸지에 어미 새로부터 떨어져서 놀라고 서러웠는지 연신 목청을 높여 어미를 불러 댔다.
“비바람에 둥지가 떨어진 모양이야.”
원래는 높은 나뭇가지에 얹혀 있어야 할 둥지가 풀숲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광경이 안타까웠다.
리비가 손을 내밀자 아기 새는 솜털 보송한 얼굴을 들이밀며 삐, 연약한 소리를 냈다.
“불쌍해라.”
리비는 새끼 새에게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둥지를 위로 올려 주자. 할 수 있지?”
리비의 제안에 보리스는 보라색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야 해?”
보리스가 둥지를 소중히 품어 안은 채 공중으로 날아오르자 리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보리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새 둥지를 놓기에 좋은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나뭇잎에 가려진 적당한 장소를 찾아낸 보리스는 환히 웃었지만 금세 그 웃음은 사라지고 말았다.
“리비, 여기에 둥지가 있었던 자국이 있어.”
“그래? 그럼 거기에 놔두면 되겠다!”
리비는 밝은 목소리로 답했지만 보리스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질 뿐이었다.
“그런데…….”
“왜 그래?”
보리스가 보이는 반응이 영 석연치 않자 리비가 물었다.
“여기, 죽은 어미 새가 있어.”
“뭐라고?”
리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어떻게 하지.”
리비는 발을 동동 구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사이 지상으로 내려온 보리스가 리비의 손에 들고 있던 둥지를 쥐여 주었다. 리비는 삐익, 구슬프게 소리 지르는 아기 새를 진정시켰고, 그사이 보리스는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가 죽은 어미 새의 사체를 가지고 내려왔다.
“불쌍해.”
리비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어미 새의 사체를 보았다. 호된 비바람으로부터 아기 새를 보호하느라 제 몸을 아끼지 않은 건지, 새의 몸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묻어 주자.”
보리스가 말하자 리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양지바른 곳의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곧이어 작은 구덩이를 만들어 그 안으로 어미 새의 시체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잠깐만.”
흙을 덮기 전, 리비는 둥지를 들고서 어미 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인사하게 해줘야지.”
리비가 둥지를 내밀자 안에 있던 아기 새가 삐삐, 하고 울어 댔다.
“엄마를 알아본 거야.”
리비는 그렇게 믿었다. 아기 새는 잠시 동안 죽은 어미 새의 시체에 부리를 파묻은 채 다가온 이별의 순간을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
“이제 묻어 주자.”
리비는 둥지에서 금이 간 알들을 꺼내 어미 새 곁에 같이 놓아 주었다.
“아, 잠시만.”
리비는 둥지를 보리스의 손에 들려준 채 어딘가로 가서 들꽃을 한 아름 꺾어서 돌아왔다. 어미 새의 작은 몸통 위로 꽃잎들을 흩뿌려 준 리비가 가만히 손을 모은 채 기도하자, 보리스도 얼떨결에 눈을 감고서 어미 새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얘들은 어쩌지.”
“어쩌긴, 우리가 데려가야지.”
“괜찮을까?”
보리스는 주저하며 말했다.
“물론이야.”
그렇게 말하는 리비도 정작 자신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대로 사방에 천적이 깔린 숲속에 둥지를 홀로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나마 그동안 잡아먹히거나 다치지 않은 건 다 죽은 어미 새의 가호 덕분이었을 테니까.
그러니 이제는 둥지를 발견한 자신과 보리스가 둥지 속 알과 아기 새를 지켜 줘야 할 때였다.
둥지를 통째로 들고 오자 아버지는 별말 없이 잘 돌보라는 말만 남겼다. 새어머니는 아기 새를 위해 따뜻한 솜으로 이불을 만들어 주었다.
그다음부터는 리비와 보리스의 몫이었다. 자라날수록 왕성한 식욕을 보이는 아기 새를 위해 둘은 번갈아 가며 먹이를 공수해 왔고, 아기 새는 다행히도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기 새는 유별날 정도로 보리스를 잘 따랐다.
“동족으로 여기는 걸까?”
리비는 보리스가 아기 새를 배불리 먹이고 손에 들어 재우기까지 하는 걸 보며 신기해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그런가?”
보리스는 볼을 붉히며 웃었다.
“널 엄마로 여기나 봐.”
“나를?”
보리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아기 새는 알에서 처음 나왔을 때 본 존재를 엄마로 여긴대.”
“하지만 이미 알에서 태어난 후였잖아.”
“너도 알에서 태어났을까?”
“…….”
“미안, 미안해. 내가 괜한 걸 물었지, 참.”
리비는 방금 한 말을 취소한다는 의미로 허공에 손을 휘휘 내저었다.
“괜찮아.”
보리스는 웃는 얼굴로 리비에게 말했다.
아기 새는 둘의 보살핌 속에 쑥쑥 자라났고, 어느덧 첫 비행을 할 시기가 되었다.
“이상해.”
“뭐가?”
“날지를 않잖아. 날개가 이렇게 커졌고, 솜털도 이제 다 빠졌는데.”
“흐음, 어쩌지?”
이제는 아기 새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어엿하게 자라난 새는 도무지 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간혹 날개를 파닥거리기는 했으나
“자, 잘 봐. 이렇게 하는 거야.”
보리스가 심호흡을 하더니 등 뒤에서 시커먼 날개가 치솟았다. 그리고 천천히 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아기 새가 지켜볼 수 있도록 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리스가 하는 양을 살피던 새는 저도 해보겠다는 듯 날개를 퍼덕거리기 시작했다.
“어? 어!”
날갯짓은 점점 더 거세졌다. 보리스가 몸을 위로 띄워 올리자 흥분한 새는 더욱 날개를 크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난다, 날아!”
몇 번인가 바닥으로 추락하던 새는 이내 보리스를 따라 힘차게 허공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나도, 나도 할래!”
리비가 번쩍 손을 치켜들자 보리스가 다가와서 단번에 리비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그가 높이 치솟자 덩달아 새도 두 사람을 따라왔다.
***
“…….”
리비는 아련한 기분 속에서 눈을 떴다.
지나치게 생생한 꿈, 아니 과거의 기억이었다. 종종 그와 보낸 어린 시절을 꿈속에서 보고는 했지만 이번 꿈은 처음 꾸는 것이었다.
삐이-.
귓가에 선명한 울음소리와 손을 내밀면 손바닥 위로 폴짝 올라오던 감촉까지.
모든 것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보리스를 마치 엄마처럼 따르던 새는 그로부터 얼마 후, 완전히 두 사람을 떠났다.
무엇이 되었든 보리스와의 기억을 하나둘 떠올리게 된 건 분명히 좋은 징조였다. 마치 잃어버린 모자이크 조각을 찾아 하나씩 완성해 가는 기분이었다.
검은 깃털을 품에 안은 채 리비가 꿈속의 여운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웁.”
갑자기 밀려온 토기에 리비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며칠 전부터 간혹 한 번씩 헛구역질이 몰려왔지만 이런 일로 의사를 불러 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우웁.”
그녀는 다시 한번 밀려온 구역질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럼에도 메슥거리는 속이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다.
증상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리비는 가만히 제 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여전히 평평했고, 잘 먹지 않아 홀쭉해진 배가 만져졌다.
“……웁.”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토기가 몰려왔다. 무언가를 잘못 먹어서 그런다기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쿵쿵,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또다시 구역질이 몰려오기 전, 리비는 입을 틀어막은 채 침대로 뛰어들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미안, 놀랐지?’
리비는 몸을 웅크린 채 입을 벌려 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으로 속삭였다. 양손으로는 배를 소중히 감싸 안은 채였다.
믿기지 않는 일에 리비는 몇 번이고 제 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리비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안에는 보리스의 아이가 살아 있다.
죽음을 결심한 순간 찾아온 아이였다. 아직은 그 누구도, 매일같이 그녀를 더러운 눈으로 탐하는 레제트 공작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아가, 꼭 무사해야 해.”
그러니 죽을 수 없다. 죽고 싶었으나 죽을 수 없었다. 아직 눈에 띌 만큼 큰 임신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기에 그녀는 어떻게든 이 아이에게 밝은 빛을 보여 주고 싶었다.
“조금만 참아 줘.”
아이의 존재를 들키지 않고 무사히 낳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이 질긴 목숨을 이어 갈 생각이었다.
***
연회의 날이 밝았다.
레제트 공작이 근방의 영주들을 모두 모아서 여는 연회이니만큼 그 규모도 화려함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치와 향락을 중시하는 영주의 성정에 맞춰 최대한 호화로운 연회가 될 예정이었다.
성문은 활짝 열렸고, 이른 나절부터 초대된 근방의 영주들과 귀족들, 그리고 연회의 흥을 돋우기 위한 곡예단과 음유시인들까지 레제트성을 찾으면서 성 안은 어느 때보다 분주하게 돌아갔다.
리비는 이른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온 분장사에게 몸을 맡긴 채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굳이 움직일 필요도 없이 알아서 옷을 갈아입히고 화장을 해주고, 손과 다리에는 혼자서는 걷지도 못할 만큼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무거운 금팔찌들이 채워졌다.
“아름다우십니다.”
단장을 마친 시녀들이 물러나자 리비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머리에는 얇은 금으로 만들어진 면사포에, 목과 귀에는 갖가지 빛깔의 보석들이 걸려 있었다.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커다란 황금 장신구들은 그 자체로 구속구나 다름없었다.
레제트 공작이 만들어 둔 황금 새장에 더없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아름답다느니 뭐니 하는 말은 아무런 필요도 없었다.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보리스가 볼 수 없으니까.
그가 볼 수 없는 마당에 아름답게 치장하는 일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
“곧 연회장으로 이동하실 겁니다.”
리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능적으로 손이 배로 가려 했지만 참았다. 지금은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
“잠시 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시녀들이 나가고 나자, 리비는 몸을 일으켜 침대 아래에 숨겨 둔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창가에 까마귀 떼가 나타난 이후로 내내 모아 온 검은 날개깃들이 있었다.
제법 비등비등한 크기의 날개깃들 속, 리비는 눈에 확연히 띌 정도로 크고 검은 날개를 집어 올렸다.
보리스.
그녀는 입 모양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까마귀 떼가 가져다준 이 날개깃은 대체 무엇일까.
어쩌면 그가 남긴 마지막 잔해일지도 모른다. 검붉은 피가 엉겨붙은 날개깃은 그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리비는 커다란 날개깃을 꼭 끌어안았다. 그가 커다란 몸으로 자신을 안아 주던 날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리비는 깃털을 갈무리해 가슴과 옷 사이로 집어넣었다. 맨살에 닿은 깃털의 감촉이 간지럽고 따스해 그녀는 또 눈물이 날 뻔했지만, 간신히 눌러 참았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얼른 남은 깃털들을 모아 상자에 넣은 뒤 돌아섰다.
***
레제트성의 대연회장은 초대한 손님들을 위해 새로운 단장을 끝마친 채였다.
연회장 곳곳을 장식한 생화들과 보석이 박힌 값비싼 조각품들, 만찬용 테이블에 마련된,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음식들까지.
주방에서는 각종 새구이며 돼지와 소를 이용한 요리들을 운반하느라 바빴다. 술과 안줏거리도 넘쳐났다.
“역시, 레제트 공작의 연회로군요.”
초대된 귀족들은 하나같이 레제트성의 호화로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연회장 정중앙에 걸린 황금 새장이었다. 정확히는 그 안에 앉아 있는 리비를 향한 눈길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야릇한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리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 왕의 조카이자 미쳐서 죽은 왕녀가 남긴 한 점뿐인 혈육. 눈부신 금발과 에메랄드를 연상시키는 초록색 눈은 훌륭한 눈요깃거리가 되어 주었다.
리비는 새하얀 옷과 화려한 장신구를 걸친 채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간간이 깜빡이는 눈이 아니었더라면 그저 조각상을 옮겨 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사방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쏟아졌지만 그녀는 숨을 곳도 없었다. 그저 노골적으로 주시하는 눈길을 온전히 받아 냈다.
그녀가 있는 새장의 위치는 그들의 눈이 닿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에게 손을 뻗을 수는 없었다. 그 새장의 주인은 다름 아닌, 오늘 그들을 초대한 이 성의 주인이기 때문이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잦아들고 잠시 후, 레제트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리비보다 더 화려한 차림새였다.
담비와 흰여우 등, 값비싼 모피로 테를 두른 연회복과 열 손가락을 장식한 반지 등이 단번에 귀족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왕의 조카까지 하사받았으니, 부러울 게 없겠군요.”
“이 땅의 영원한 평화지요.”
사람들이 몰래 속삭이는 소리에 레제트 공작의 입은 찢어질 듯 벌어졌다.
상석에 모여 앉은 공작의 부인들은 애써 웃고는 있으나 저마다 공중에 내걸린 리비를 보며 공포에 싸인 얼굴이었다.
“이런 소박한 연회에 참석해 주시다니, 영주로서 기쁜 마음을 감추기 어렵군요.”
그는 제법 공손한 척 몸을 숙여 보였다. 그가 하는 말을 믿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내 아름다운 새도 여러분들을 환영하는군요.”
레제트 공작은 포도주가 담긴 잔을 높이 치켜든 채 리비가 있는 새장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가 다가올수록 리비는 구역질이 밀려와 간신히 눌러 참아야만 했다.
“자, 마셔.”
황금 창살 사이로 그는 포도주가 가득 담긴 은잔을 내밀었다.
“…….”
리비는 그가 내민 잔을 그저 멍하니 볼 뿐, 받아 마시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의 살벌한 시선이 리비에게 와서 꽂혔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독이 오른 눈빛으로 레제트 공작을 쏘아보기까지 했다.
그 눈빛을 읽어 낸 레제트 공작이 허공에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내 새는 길들이는 재미가 있어, 그렇지?”
“흣!”
창살 안으로 뻗어 온 손이 리비의 머리채를 단번에 움켜쥐었다.
“꼭 직접 먹여 줘야 한다니까, 나의 아름다운 새.”
공작은 리비의 입 가까이에 은잔을 갖다 대고서 조금씩 안에 든 술을 붓기 시작했다.
“으윽…….”
리비가 입을 꼭 다문 채 사력을 다해 버틸수록, 레제트 공작의 손속도 더욱 자비 없어졌다.
사정없이 부어지는 포도주가 리비의 하얀 드레스를 붉게 적셔 갈 무렵이었다.
“웁.”
리비는 별안간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우으, 웁.”
리비는 간헐적으로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으려 애썼으나 그 모습에 되레 레제트 공작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심상치 않은 광채가 어려 있었다.
“네년, 설마.”
공작의 얼굴이 꽤나 볼만하게 구겨졌다. 리비는 두려우면서도 뭔지 모를 쾌감에 휩싸였다.
“설마, 그 괴물의 씨를 잉태한 것이냐?”
경악으로 물든 레제트 공작의 눈을 보며 리비는 저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 미소를 본 레제트 공작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년, 너.”
쨍그랑.
“꺄아.”
레제트 공작은 테이블을 밟으며 그 위로 올라섰다. 술이 담긴 그릇이 깨지며 파편이 튀자 근처에 앉아 있던 귀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피했다.
새장의 문을 열어젖힌 레제트 공작이 리비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리비는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키며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리비의 머리채를 잡은 그대로 새장 밖으로 끌어냈다. 술이 엎질러진 테이블 위로 그녀를 끌어낸 공작은 사정없이 리비의 머리를 잡고 흔들어 댔다.
“더러워! 더러워!”
그는 마치 오물이라도 묻은 것처럼 기겁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리비의 머리채를 잡은 손은 굳건했다.
“당장 배 속의 것을 끄집어내 네 앞에 던져 주마. 감히 그 더러운 씨를 배고도 여태 살아 있었다니. 음탕한 계집.”
레제트 공작은 아예 다른 손까지 동원해 리비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죽어, 더러운 것. 내가 은혜를 베풀어 살려 주고 온갖 사치를 누리게 해주었더니, 그 괴물의 새끼를 배?”
털썩.
그렇게 흔들어 대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공작은 리비를 다시 일으켜 새장 안에 처넣은 뒤 자신 역시 그 안으로 들어왔다.
끼익.
새장을 천장에 고정한 쇠사슬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리비는 새장에 다시 갇히자마자 구석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다시 뻗어 온 손이 이번에는 리비의 가녀린 목을 움켜쥐었다.
“이년…… 이미 괴물에게 더럽힌 몸을 거둬서 귀히 여겨 주었더니, 그 새끼를 가졌다고?”
“…….”
리비는 금방이라도 숨통을 끊을 듯 조여 오는 악력에 고통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그래, 죽여 주마.”
“으, 아윽.”
레제트 공작의 손아귀에 더욱 힘이 들어가자 리비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숨을 내쉬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목숨줄을 레제트 공작에게 내준 상황에서도 리비의 눈에는 극렬한 저항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리비는 한쪽 손끝을 세워 제 목을 틀어쥔 레제트 공작의 팔 위로 손톱을 박아 넣었다. 그간 자르지 않아 길게 자라난 손톱은 그녀에게 훌륭한 무기가 되어 주었다.
“이게 감히.”
리비는 레제트 공작의 팔에 손톱을 박아 넣은 채 그를 노려보았다. 흰자위에 핏줄이 터진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레제트 공작의 얼굴이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리비는 숨이 턱턱 막히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공작을 바라보았다.
푹.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살점을 뚫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
레제트 공작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이, 이…….”
공작은 제 배에 꽂힌 술병의 깨진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목이 졸린 터라 제대로 조준하지 못해 급소는 피해 갔지만 공작은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피를 보는 레제트 공작의 표정이 기이하게 돌변했다. 이내 그녀의 목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신체에 가해지는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보리스.’
리비는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그의 이름만 부르고, 또 불렀다. 그 순간이었다.
쾅!
대연회장의 문이 부서질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동시에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착석해 있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나부끼는 옷자락을 부여잡아야만 했다.
“뭐 하는 거야, 문을 닫아!”
누군가 꽥 내지른 소리에 경비병들이 서둘러 연회장의 문을 닫으러 달려갔다.
“으악!”
그러나 문은 더욱 큰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거세게 들이치는 바람에 연회장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잠시나마 바람이 잦아든 것 같은 순간이었다.
“꺄아아악!”
열린 문 틈새로 새카만 물결이 흘러 들어왔다.
푸드덕.
“…….”
리비는 제 귀에 들린 것이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새들의 날갯짓, 그것은…….
그것은 거대한 까마귀 떼였다.
“아아악!”
대연회장으로 날아 들어온 까마귀들은 순식간에 실내를 점령했다.
“저리 가!”
“으악!”
갑자기 달려든 까마귀 떼는 초대된 손님들의 머리칼, 옷, 장신구 등 할 것 없이 쪼아 대고 물어뜯기 시작했다. 값비싼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있을수록 까마귀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것들을 뜯어내기 바빴다.
“이게, 이게 뭐야!”
수많은 까마귀들에게 공격당한 귀족들이 손과 발을 동원해 새들을 떼어 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럴수록 집요한 공격이 이어졌다.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은 황급히 도망가려다 바닥에 나자빠지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아악!”
까마귀들이 노리는 건 그들의 값비싼 장신구였기에,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에 공격당한 사람들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다.
리비의 목을 조르고 있던 레제트 공작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졌다. 그는 여전히 리비의 목을 쥐고 있었지만 힘이 풀린 줄도 모른 채 주변의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뭣들 하는 거야! 저것들을 쫓아내! 죽여 버려!”
공작이 내지르는 소리에 경비병들이 달려왔지만 그들 역시 까마귀의 먹잇감이 되어 버렸다. 여러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어 사정없이 쪼아 대는 데에는 날카로운 무기들도 소용이 없었다.
리비는 공작의 손힘이 풀린 틈을 타 정신을 차리고 그의 팔을 냅다 물어 버렸다.
“으아아악!”
예상치 못한 공격에 비명을 내지르던 레제트 공작이 리비를 향해 눈을 번득였다.
“이년이!”
리비는 지지 않고 그에게 침을 뱉어 주었다.
“그래, 네가 명줄을 재촉하고 싶은 거지.”
레제트 공작은 다시 리비에게 손을 뻗쳤다. 황금 사슬에 결박되어 있던 리비는 결국 그의 손에 붙잡혔지만 이번에도 지지 않고 손가락을 물고 그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우수수 그의 머리통에서 분리되는 것을 본 리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혼자는 안 죽어, 이 역겨운 새끼.”
“너…….”
멀쩡하게 말하는 리비를 본 공작이 눈을 홉뜬 순간, 리비는 발로 그의 고간을 냅다 차버렸다. 그 바람에 공중에 매달린 새장이 기우뚱, 기울면서 큰 포물선을 그렸다.
오로지 리비 하나의 무게를 고려하여 설계된 탓에 공작의 무게까지 더해지자 지지대는 둘의 무게를 지지하는 일이 상당히 힘겨워 보였다.
끼익.
천장에 매달린 고리가 위태롭게 흔들린 순간이었다.
“아, 안 돼.”
레제트 공작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외쳤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리비는 그대로 레제트 공작의 얼굴에 주먹을 메다꽂았다. 공작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지자 새장은 더욱 큰 포물선을 그렸고, 천장에 고정된 쇠사슬이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불길한 소리를 냈다.
“널 지옥에 떨어뜨릴 거야.”
리비는 발을 뻗어 그의 목 언저리를 콱, 발로 뭉갰다. 큭, 하는 소리와 함께 레제트 공작이 사지를 허우적거리자 쇠사슬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새장이 크게 흔들렸다. 그때였다.
주변의 공기가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모두가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 안으로 들어선 이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보…….”
숨소리처럼 희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보리스!”
그녀의 부름에 화답하듯, 보리스의 입가가 부드럽게 늘어졌다.
그의 등 뒤에 솟은 날개는 이전보다 더욱 커진 상태였다. 기사들의 공격에 갈기갈기 찢어졌던 때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날개는 더욱 크고, 굳건하게 되돌아와 있었다.
펄럭.
그는 그대로 날개를 펼쳐 대연회장의 중앙까지 단숨에 날아왔다. 그 모습을 지켜본 병사며 기사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달아나는 사이였다.
끼익.
천장에 매달린 고리가 더는 버틸 수 없었는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아가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꺄악!”
고리가 분리되는 것을 봤건만 뜻밖에도 새장이 바닥에 처박히는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사뿐히 바닥에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만 전해졌을 뿐이었다. 마치 깃털 베개 위에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리비는 한참 후에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자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커다란 황금 새장은 연회장 바닥 위에 고이 내려져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사슬이 끊어져 덜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마를 스치는 새카만 머리카락, 항상 물 먹은 듯 빛났던 보랏빛 눈. 언제나 그녀를 향하던 환한 웃음. 보리스가 새장의 문을 열었다.
“미안.”
“…….”
“너무 늦게 왔지.”
보리스가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보리스?”
리비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떠도, 보리스는 사라지지 않은 채 그 자리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저, 정말 너야? 그래?”
리비는 손을 뻗어 보리스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
보리스는 리비가 코와 입술, 볼과 눈가를 미친 듯이 만져도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정말 너야?”
리비는 정신없이 그의 얼굴을 만지고, 훑었다. 손에 뻔히 만져지는데도 믿을 수 없었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그저 꿈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꿈이면 어떡하지. 여기서 깨어나면.
이 모든 게 꿈이라면, 그렇다면. 깨고 나면 모든 것이 허무해질 아주 달콤한 환상일 뿐이라면.
나는 감당할 수 없을 거야.
리비는 깊은 절망에 빠져들었다.
“아, 아니야. 나는 죽을래. 그냥 죽고 말 거야…….”
“너, 이 괴물, 으윽.”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억눌린 목소리가 들린 순간이었다.
뒤에서 휘둘러지는 검을 그는 가볍게 쳐냈다.
“으아아악!”
보리스의 뒤에서 덤벼들던 레제트 공작의 기사는 그대로 한쪽 팔이 날아갔다.
피가 사방에 분수처럼 흩뿌려지는 가운데 보리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 팔로는 리비를 끌어안은 채였다.
“보리스, 위험해.”
리비는 자신이 방해가 된다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했다. 그가 싸우는 데 방해가 되고, 또다시 그의 약점이 된다면…….
“나, 나 내려놔, 보리스.”
그러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내가 방해가 되잖아, 응?”
리비는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지만 보리스는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줄 뿐, 그녀를 떨어뜨려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이 망할! 저놈을 죽여!”
레제트 공작이 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여기저기서 까마귀 떼와 싸움을 벌이고 있던 기사들이 달려왔다.
“리비, 꽉 잡아.”
보리스의 말에 리비는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어차피 그가 자신을 놔줄 생각은 없어 보이니 최대한 거슬리지 않게 그에게 딱 붙어 있을 심산이었다.
보리스는 말 그대로 날아다녔다. 리비를 한쪽 팔에 안은 채 덤벼드는 이들을 하나씩 베어 나갔다.
“죽어라!”
뒤에서 검을 든 채 돌진해 오는 상대를 피해 보리스는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커다란 날개가 펴지자 연회장 안에는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리비는 공중으로 떠올라 까마득히 멀어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위에서 내려다본 연회장은 더더욱 아비규환이었다.
까마귀들의 공격으로 장신구를 빼앗기고 옷이 찢긴 채 달아나는 사람들, 여기저기 공격당해 피를 흘리는 기사들…….
그리고 연회장의 중앙에는 좀 전까지 자신이 감금되어 있던 황금 새장이 종잇장처럼 구겨진 채 바닥에 놓여 있었다.
보리스에게 달려들던 기사는 허공에 검을 내지른 꼴이 되었다. 기사의 경악한 눈이 보리스를 향한 순간, 보리스는 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푹.
리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커억, 컥.”
울컥 피를 쏟아 낸 기사가 비틀거리자, 보리스는 그대로 기사의 상체 한가운데에 꽂힌 검을 뽑아 냈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보리스는 품에 안긴 리비를 내려다보았다.
리비는 그를 꼭 끌어안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녹색 눈에는 걱정과 우려가 모두 담겨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보리스는 느슨히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보리스…….”
울먹이는 리비의 목소리가 귓가에 감미롭게 울려 퍼지자, 보리스는 더욱 깊은 미소를 머금었다.
“리비, 눈 감아.”
보리스가 리비의 눈꺼풀 위로 커다란 손을 덮었다.
“보리스?”
리비는 영문을 몰라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내 그의 손짓에 따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잘 감고 있어야 해.”
보리스가 다시 한번 강조하자 리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뭣들 하는 거야! 전부 까마귀밥이 되고 싶은 게냐?”
뒤에서 레제트 공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레제트 공작은 제게 달려드는 까마귀들을 주먹으로 쳐내며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 댔다.
“죽여! 어서! 저 괴물의 목을 가져와! 보상은 두둑이 할 테니!”
레제트 공작의 외침에 망설이던 기사들이 다시 검을 들고 보리스를 향해 돌진해 왔다. 순간 다시 공중으로 날아오른 보리스가 급격하게 하강하며 기사 두 명의 목을 동시에 날려 버렸다.
“꺄아아아악!”
통, 통 바닥에서 튀어 오른 머리가 굴러간 곳에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비명을 내지르며 흩어졌다.
머리가 잘려 나간 몸이 옆으로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지자 더욱 큰 비명이 울려 퍼졌다.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를 뒤집어쓴 이들은 밖으로 나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문은 모두 굳게 잠긴 채였다.
그사이 보리스는 레제트 공작의 남은 기사들을 하나둘 처리했다. 운이 좋은 누군가는 검을 쥔 손이, 또 누군가는 다리가 잘려 나갔다. 운이 나쁜 이들은 그대로 목이 잘려 떨어졌다.
보리스는 그렇게 한 발, 한 발 레제트 공작을 향해 걸어갔다.
기사들이 에워싸고 있던 곳에 레제트 공작은 없었다.
“…….”
보리스는 여기저기 몸이 뜯겨 널브러진 귀족들 사이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공작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보리스는 다시 한번 예리한 시선으로 연회장 안을 훑었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하는 공작의 기사들을 넘어 거대한 만찬용 식탁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쿵.
그가 크게 발을 굴렀을 때였다.
“악!”
겁에 질린 비명이 테이블 아래에서부터 울렸다.
“…….”
테이블 아래에서 소리가 울리는 것을 감지한 그가 발로 식탁 위의 음식들을 차례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갓 구운 칠면조 요리와 고기파이 등이 주르륵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계속 걸어가던 보리스는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 섰다.
쿵.
바닥으로 내려선 보리스가 테이블에 씌워진 천을 걷어 올렸다.
그 안에는 테이블 아래로 숨어든 레제트 공작이 네 발로 몸을 지탱한 채 기겁한 눈으로 보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 자세로 기어 문을 향해 가던 참인 듯, 보리스를 보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끼익.
만찬용 테이블이 보리스의 손아귀에 들려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오지 마, 오지…… 마!”
레제트 공작은 발악하며 발길질을 했다. 그러나 닭 다리 비틀 듯 한쪽 다리가 보리스의 손아귀에 잡혀 끌려 나오고 말았다.
“으악, 으아악!”
보리스에게 발목이 잡혀 거꾸로 들린 레제트 공작의 비명이 연회장 안에 울려 퍼졌다.
“놔, 놔라! 이 괴물, 으악!”
그가 발버둥 쳤지만 공작의 몸은 허공에 들린 채 내려오지 않았다.
쿵.
그러다가 한쪽 구석으로 내던져진 공작의 입에서 끅끅거리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리비는 그 소리를 들은 듯 몸을 웅크리며 더욱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으악, 악!”
고통에 찬 레제트 공작의 신음과 비명이 들릴 때마다 리비는 더욱 몸을 웅크려야만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저 소리만 듣는데도 뿌리 깊은 공포가 밀려왔다.
퍽.
보리스의 발길에 나가떨어진 레제트 공작의 입에서 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다.
퍽, 퍼억.
보리스의 발이 무자비하게 공작의 얼굴을 짓밟았다. 바닥에 밀가루 반죽처럼 눌어붙은 공작이 꺽꺽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그의 손속은 가차 없었다.
“사, 살려…….”
공작은 어눌한 발음으로 애원했다. 그가 입을 열자 이빨들이 피와 뒤섞여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커억, 컥.”
피거품을 뱉어 낸 공작이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보리스를 올려다보았다.
“사…… 살.”
퍽.
공작의 반질반질한 머리통이 다시 한번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무너져내린 코뼈를 잡고 나뒹구는 사이, 코와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으윽, 윽, 으.”
저벅.
정신없이 피를 토하고 있는 레제트 공작의 앞으로 보리스가 와서 섰다.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안은 여자는 남자의 품에 매달려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로 보이는 보리스의 싸늘한 시선에 레제트 공작은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 안 돼, 안…….”
그는 어눌해진 발음으로 끝없이 애원했다. 여기저기 부러져 덜그럭거리는 몸을 끌고서 기를 쓰고 그에게서 멀어지려 애썼다. 그럼에도 그는 한 발씩 공작에게 다가서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막다른 구석까지 몰리고 나서야 레제트 공작은 진정한 절망과 마주했다. 차갑게 식은 보랏빛 눈동자가 그를 곧 도륙할 짐승 바라보듯 하고 있었다.
“제발, 살려…… 주……어.”
레제트 공작은 행동을 바꾸어 아예 보리스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다, 줄, 게, 어? 다아.”
쉭쉭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애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스릉.
한 손으로 추켜 올린 검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악, 아악!”
레제트 공작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사이, 보리스의 팔이 레제트 공작의 한 팔을 갈랐다.
“악!”
몸에서 분리된 팔을 보는 공작의 눈에는 고통과 짙은 공포가 동시에 넘실거렸다.
얼굴 한쪽에 레제트 공작이 뿜어낸 피가 여기저기 튀어 있었다. 보리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나머지 팔도 내리그었다.
“으악! 아악!”
허벅다리로 파고든 검이 뼈와 근육을 사정없이 베어 냈다.
“이 괴물! 괴…… 으악!”
몇 번의 비명이 더 지나갔다. 그러는 동안 리비는 그를 꽉 끌어안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사정없이 검을 내리그을 때마다 휙휙,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 뒤로 이어 들리는 공작의 비명이 점점 커지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주변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리비는 보리스가 검을 꽂아 넣은 채 자신을 안고서 어딘가로 걸어가는 것을 느꼈다. 연회장의 사람들은 모두 도망쳤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그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더 이상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연회장 한가운데, 리비가 갇혀 있던 황금 새장 안에는 사지가 모두 잘려 나간 레제트 공작이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었다.
툭, 툭.
새장 안에 고여 있던 피가 연회장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소리만이 을씨년스럽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