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번영과 전조
에드라크령이 주인을 되찾은 지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에드라크령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
수도로 가려면 숲을 지나 멀리 돌아가야 했던 길을 트고, 예전에 쓰던 도로를 복구하는 한편 보수하는 공사를 실시해 수도까지 가는 시간을 절반 가까이 줄일 수 있었다.
길이 한번 트이자 그다음은 교역과 물자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도로를 이용하는 통행세를 받는 것만으로도 영지에는 아주 훌륭한 수입원이 되어 주었다.
에드라크령으로 이주해 오는 이들은 점점 더 불어났다. 예상보다 빠른 발전이었다.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근방의 다른 영주들에게서도 연신 우방 요청이 들어올 정도였다.
이제는 완벽한 왕국 북부의 지배자로 자리매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 하나,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것이 있을 뿐이었다.
리비는 홀쭉한 배 위로 손을 올려 보았다. 지난달에도, 지지난달에도 올 것은 아주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보리스와 에드라크성으로 돌아올 때만 해도 아기를 만나기까지 기다림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뚝, 아이는 그렇게 찾아올 줄 알았는데.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마 내 피 때문일까?’
아기가 생기지 않는 이유로 그녀는 가장 먼저 그 이유를 떠올렸다. 왕실에는 딸이 귀하다고 했으니까, 그 피를 이은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아야.”
이런저런 생각 끝에 결국 리비는 들고 있던 바늘에 손끝을 찔리고 말았다.
“아파…….”
손가락 끝에 맺힌 핏방울을 입으로 쪽 빨아들이며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수틀을 내려놓았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이런 걸 손에 쥐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럼 뭐로 시간을 보내 볼까. 리비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보리스는 기사단 훈련을 가 있을 시간이고,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기에 적합한 곳이 있었다.
도서관이었다. 워낙 크게 만든 탓에 따로 건물을 분리했고, 그 때문에 본성에서 꽤 걸어가야 했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리비는 성의 도서관으로 통하는 아치형의 문 앞에 서서 벅찬 가슴을 내리눌렀다.
안으로 들어가자 더 굉장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책의 종류와 저자, 저술 연도에 따라 차례대로 분류된 서가를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전율까지 느껴졌다. 이렇게 갖추기까지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했다. 어떤 책은 황금보다 비쌌고, 구하기 어렵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국은 해냈다.
리비를 맞이한 사서는 공손히 머리를 숙여 보였다.
“공작 부인, 도와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리비는 손을 내저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쪽이 더 마음 편할 것 같아서였다.
양옆으로 빽빽이 들어찬 서가를 지나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중간중간 사서들이 책을 정리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란 드물었다.
말도 안 되게 큰 규모의 도서관을 보고 있자니 문득 티소 마을의 도서관이 떠올랐다.
마을에도 도서관 비슷한 것이 있기는 했다. 말은 도서관이었으나 책방에 가까웠으니, 그 규모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곳에 있는 책꽂이 하나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책방의 주인은 푼돈을 받고 서고에 있는 책들을 빌려 주곤 했다.
책은 낡았고, 종류도 많지 않았으나 책 자체가 귀한 마을에서는 그마저도 몹시 고마운 일이었다.
리비도 그곳에서 종종 책을 빌려 읽곤 했다.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책은 까마귀 ‘칼리니’에 대한 동화책이었다.
공주를 위해 붉은 용과 싸우다가 장렬히 죽음을 맞이하고야 말았던 까마귀에 대한 전설.
서가는 철자의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리비는 안쪽으로,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책을 찾기 시작했다.
티소 마을에서 보았던 ‘칼리니’에 관한 책은 조악하게 만든 이야기책이었다.
안에 그려진 그림이나 글자 모두 서툴게 적힌 것이었다. 책방 주인인 모리스 아저씨는 그래도 이건 원본을 본 후 만든 것이라며, 원본은 훨씬 더 정교하고 아름답더라는 말로 리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무튼 리비는 그 동화책을 좋아해서, 아버지를 졸라 몇 번이고 빌려 읽었다.
“칼리니, 칼리, 칼…….”
그녀는 서가를 쭉쭉 지나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찾았다.”
한참이나 서가를 이 잡듯 쳐다보던 눈이 반짝 빛났다. 빨간 가죽에 금박이 씌워진 책이 책들 사이에서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칼리니의 전설>
“음…….”
리비는 그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닿을 듯 말 듯, 책은 좀처럼 그녀의 손에 닿지 않았다.
“조금만…… 더.”
한껏 발꿈치를 들어 올려 손을 뻗어 보았지만 좀처럼 원하는 책에 닿기 어려웠다.
“읏.”
손톱이 겨우 걸쳐지는 정도로만 책에 닿았지만 리비는 계속 낑낑거리며 책에 닿고자 했다. 그 순간이었다.
커다란 손이 뒤에서 뻗어 와 리비가 잡으려던 책을 뽑아 들었다.
“어? 어.”
리비는 자신의 목표물을 누군가 아주 쉽게 뽑아 가버리자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뭐 해?”
“아…… 보리스.”
리비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를 보았다.
“언제 온 거야?”
“좀 전에.”
“부르지 그랬어.”
“네가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서.”
보리스는 손을 뻗어 리비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일은?”
“다 끝냈어.”
보리스는 하찮은 임무를 해치우고 온 것처럼 덤덤하게 말하더니 리비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혼자 있어서 심심했어?”
“그건…… 아니지만.”
리비가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보리스의 눈가가 예쁘게 휘었다.
“뭘 보고 있었던 거야?”
보리스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다보았다.
“칼리니…….”
책 표지에 찍힌 금박 글자를 소리 내어 읽자 리비는 잔뜩 들뜬 얼굴로 말했다.
“응, 칼리니 전설에 관한 이야기야.”
보리스는 리비가 보기 쉽도록 손을 낮춰 책을 들더니 같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역시 원본은 다르네. 몇 번을 봐도 감동적이야.”
“뭐가 달라?”
리비가 감탄하자 보리스가 물었다.
“책방 아저씨가 그랬거든, 원본은 훨씬 아름답다고. 이게 그 원본이야.”
책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칼리니가 그려진 삽화가 눈길을 끌었다.
크고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거대한 까마귀의 등 위로 하얀 드레스를 입은 공주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한 장, 그리고 또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리비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 잔뜩 신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가 리비는 책 대신 보리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왜?”
의아하게 묻는 얼굴을 유심히 바라본 리비가 은근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있지, 혹시 네가 칼리니인 건 아닐까?”
“…….”
보리스의 보라색 눈이 커다랗게 뜨인 채 리비를 바라보았다. 가볍게 던진 말일 뿐인데, 보리스의 눈빛은 굉장히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내가 잘못 말했나?’
갑자기 심각해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통에 리비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응?”
보리스의 질문에 리비는 순간 멍해졌다. 보리스는 아직도 화난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그, 그냥 해본 말이야, 보리스. 나는 그냥, 네 등에 솟아난 날개가 신기해서. 그래서 혹시나 네가 칼리니가 아닐까 싶었던 거지.”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니콜라스의 말도 단단히 한몫했다. 보리스가 칼리니일지도 모른다는 그 말. 하지만 칼리니는 새인 반면 그는 멀쩡한 사람……이다. 아무튼, 일단은.
자신을 동물로 비교한 것에 대해 기분이 나빴을까, 리비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를 유심히 살폈다. 보리스는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지그시 그녀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표정에 리비는 조금 용기를 내어 덧붙였다.
“‘칼리니’는 평생 한 주인만 섬긴다고 알고 있어.”
“…….”
“자신이 각인한 주인에게만 충성을 맹세하는 거지. 목숨이 다한다 하더라도 절대 바뀌지 않아. 봐.”
리비는 맨 마지막 삽화에서, 공주를 지키려다 끝내 목숨을 잃은 칼리니의 그림을 가리켰다.
“정말 불쌍해.”
리비의 말에 보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나라고?”
“너도 나만 보잖아.”
리비가 중얼거리자 보리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건 그래.”
“뭘 또 그건 그래야.”
리비는 먼저 말해 놓고 왠지 부끄러워져 얼굴을 물들였다. 왠지 모르게 진지해진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던진 말인데 보리스는 몹시 즐거워 보였다.
문득 보리스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이 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보리…… 으음.”
툭. 보리스가 들고 있던 책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입맞춤은 계속 이어졌다.
고요한 도서관 안에, 서로의 입술을 탐하는 적나라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서관의 구조상 더욱 크게 소리가 퍼질 수밖에 없어서, 리비는 더욱 자극받고 말았다.
“으음, 그만, 안 돼.”
그녀도, 보리스도, 너무 달아오르고 말았다. 이런 접촉을 하기에는 몹시 학구적인 공간이라는 사실이 더욱 둘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만, 그만 보리스.”
리비는 간신히 그를 떼어 냈다. 보리스의 눈빛은 촉촉하고 잔뜩 흐려져 있었고, 그 눈으로 자신을 보자 다시 한번 그를 탐할 것만 같아 리비는 급히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 댔다.
“안 돼, 나중에. 응?”
리비의 간청에 보리스는 아쉬운 듯 손을 물렸지만 여전히 눈에는 미련이 뚝뚝 흘러넘쳤다.
“밤에, 밤에 하면 되잖아.”
리비는 몸을 숙여 조심스레 속삭였다. 사실 정말로 곤란한 건 보리스가 아니라 자신이라고 생각하면서. 아직 달뜬 몸이 좁은 공간 안에서 바짝 붙어 있었다. 순식간에 달아오른 몸의 열기로 둘 다 뜨거운 숨을 내뿜는 중이었다.
“응.”
보리스는 유순하게 대답하며 물러났다. 리비가 손을 뻗자 보리스는 자그마한 손바닥 위로 제 뺨을 꾹꾹 눌러 댔다. 커다란 짐승을 조련하는 느낌에 리비는 저도 모르게 배시시 미소 지었다.
“웃지 마, 리비.”
“왜?”
“참기 힘들어.”
살짝 금이 간 미간을 리비가 꾹 누르며 그를 살짝 밀어냈다.
“바보.”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부부가 된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둘이 있다 보면 어릴 적 같이 마을에서 놀던 때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성을 꾸미는 일도, 마을을 다시 일으킨 일도 모두 소꿉놀이의 하나로 여겨질 정도였으니까.
“일은 다 끝난 거야?”
리비는 그의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보리스의 눈빛이 일순 깊어지더니 리비의 손을 가져와 입 맞추며 말했다.
“응. 잠깐 나갈까?”
“그래도 돼?”
리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리비는 보리스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가는 걸 좋아했다. 보리스와 함께 말을 타고 달릴 때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단둘이 나가도 하나도 위험하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였다.
“응.”
보리스는 리비의 손을 제 커다란 손에 깍지 끼우더니 책장 사이를 빠르게 걸어 나갔다.
***
보리스는 순식간에 마구간에서 끌고 나온 레널드의 등 위로 리비를 올려 앉혔다. 그런 뒤 훌쩍 그녀의 등 뒤로 올라 단단히 고삐를 움켜쥐었다. 리비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등에 닿은 단단한 그의 가슴 위로 편히 몸을 기댄 뒤 가만히만 있으면 되었다.
보리스가 승마를 가르쳐 주어서 함께 말을 타는 것도 좋았지만 역시 보리스에게 안겨 편안히 말을 타는 것이 훨씬 더 좋았다.
“나, 너무 게으른가?”
“더 게을러도 돼.”
보리스가 웃으며 리비의 머리 위로 로브의 후드를 덮어씌워 주었다.
눈까지 푹 내려앉은 후드를 조금 들어 올린 순간, 보리스는 힘차게 말의 옆구리를 찼다.
말은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허리를 감은 팔이 리비의 몸을 단단히 지탱해 주고 있었기에 무서워할 것은 조금도 없었다.
빠르게 옆으로 휙휙 지나쳐 가는 풍경들을 구경하며 리비는 그의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보리스의 심장 부근에서 쿵쿵거리는 박동을 듣고, 느끼는 것이 좋아서였다. 그건 지나친 행복감이었다.
성문들을 지나 마을을 통과하자 너른 들판이 펼쳐졌다. 황금빛으로 변한 들판에서 풀이 너울거리며 황금빛 파도가 몰아쳤다.
“와…….”
들판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자 에드라크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뭔가가 부족했다. 좀 더 높은 곳에서, 한눈에 살펴보고 싶었다.
“이전과는 달라, 확실히.”
“……올라가서 볼까?”
리비를 뒤에서 안은 채 가만히 풍경을 응시하던 보리스가 말했다.
“응?”
보리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그녀 역시 매우 좋아하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어쩐지 망설여졌다.
“누, 누가 보면 어쩌려고.”
펄럭.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커다란 날개가 펼쳐져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좀 전까지 내리쬐던 햇볕은 그의 날개 아래 가려지고 말았다.
완벽하게 그의 영역 안에 속한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
“아름다워.”
이미 수없이 봐온 날개였지만 볼 때마다 신기하고, 아름답고, 더불어 다른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리비는 검푸른 윤기가 흐르는 커다란 날개를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그가 반쯤 펼쳤던 날개를 마저 펼치자 그늘은 더욱 넓어졌다. 새카맣게 솟아난 날개가 주는 위압감에 리비는 그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무서워?”
보리스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아니, 아니야.”
리비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네가 어딘가로 가버릴 것 같아서 그랬어.”
그의 날개는 크고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거대한 족쇄이기도 했다. 만약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이 날개를 보게 된다면…….
“절대로, 절대로 들키면 안 돼.”
“물론이지.”
보리스는 리비를 부드럽게 감싸 안더니 훅 솟구쳐 올랐다. 레널드도 난데없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주인이 신기한 듯 눈을 끔벅이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리비는 보리스의 목에 감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람은 더욱 차가워졌지만 보리스의 체온으로 모두 녹아 버리는 것만 같았다.
“봐, 리비.”
“…….”
보리스의 말에 리비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광활하게 펼쳐진 에드라크령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전에 보리스와 함께 날아올라 내려다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텅 비어 있던 마을에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규모도 더욱 커졌다.
정착민에게는 일정 기간 동안의 세금 면제를 조건으로 내걸자 갈 곳을 잃고 헤매던 농민, 성직자, 대장장이 등이 잇따라 에드라크 영지를 찾았다.
쭉쭉 뻗은 도로도 한눈에 들어왔다. 마차가 달리기 적합하지 않은, 진흙으로 가득 찼던 길은 판판한 돌이 깔린 큰 도로로 바뀌었다.
언제든 마차와 수레를 이끌고 지나도 불편하지 않은 길로 바뀐 것이다. 에드라크 영지로 통하는 길이 늘어나자 사람들은 너나없이 모여들게 되었다.
소외된 세셔 왕국의 북부 지방은 에드라크령을 기점으로 그렇게 달라졌다.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가는 것 같아.”
드넓게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며 리비는 가슴이 벅차올라 말했다.
이전에 에드라크를 중점으로 발달했던 북부는 에드라크 공작의 사망 이후 급속도로 몰락했다. 자원이 부족하고 산세도 험한 북부에는 왕도 딱히 큰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땅을 다시 일구어 찬찬히 발전시켜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게, 그 발전에 자신도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리비는 더할 나위 없이 벅찬 감동이 밀려들었다.
“북부 쪽도 한창 발전하던 때가 있었다고 했으니까, 예전의 영광을 완전히 되찾는 것도 먼 일은 아니야.”
에드라크와 다른 영지를 잇는 도로를 건설하는 데에 든 시간은 예상보다 짧았다. 이유는 이전에 쓰다 망가진 도로의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지나 풍화되고 파손된 것들은 수리하고, 새로 채워 넣을 부분을 위주로 건설하다 보니 예상된 시간보다 줄어든 것이었다.
“정말 멋져.”
“…….”
“이곳에서 오래오래, 너와 함께 살고 싶어.”
리비는 언젠가부터 간절히 바라게 된 말을 꺼내 놓았다.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서 말이야.”
“왜 그런 말을 해?”
보리스가 이상하다는 듯 되묻자 리비는 콩,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박았다.
“모르겠어.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을 자주 하곤 해. 너는 날개가 있으니까, 어디든 멀리 날아가 버릴 수 있잖아.”
“그럴 리가.”
보리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지럽지 않아?”
리비의 다리를 받쳐 든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전혀.”
리비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너무 높이 올라와서 살짝 현기증이 일기는 했지만 아주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리비의 안색을 살피는 시선에 걱정이 어렸다. 리비는 문득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다.
“……조금은.”
리비가 수줍게 말하자 보리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깐 정신을 돌릴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리비는 그의 목에 감은 팔을 끌어 내려 보리스에게 입을 맞추었다. 잠시 당황하던 보리스는 이내 리비에게 이끌려 입술을 내주고 말았다.
“넌 가만히 있는 거야.”
잠시 떨어진 잇새로 속삭인 리비가 더욱 대담하게 입술을 맞댔다. 보리스의 두 손은 그녀의 몸을 지탱하느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기에 결국 리비는 원하는 바를 이루고 말았다.
보리스가 때때로 펄럭이는 날개가 일으키는 바람이 부드럽게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창 서로가 주는 달콤함에 빠져 있을 때였다.
툭, 투툭.
“비가 내려.”
톡, 제법 큰 빗방울 하나가 리비의 뺨을 적셨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어느덧 어둑해진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돌아가야겠어.”
리비의 뺨에 묻은 빗방울을 닦아 낸 보리스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사이 빗방울은 조금 더 굵어졌고, 땅에 안착했을 때는 머리와 어깨가 흠뻑 젖을 만큼 비가 퍼부었다.
쿠르릉.
곧이어 천둥과 번개가 연달아 치기 시작했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보리스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꽉 잡아, 리비.”
보리스는 자신의 망토로 리비를 꽁꽁 감싸 바싹 끌어당긴 뒤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히힝.
레널드가 앞발을 구르며 울어 댔다. 그 순간 다시 한번 번개가 쳤다. 뒤이어 콰르릉거리는 소리도 함께였다. 흥분한 말을 진정시킨 보리스가 재빨리 고삐를 추슬렀다.
이윽고 두 사람이 탄 말은 억수같이 쏟아붓는 비 사이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성으로 돌아오자 여기저기서 치는 번개와 천둥, 비 때문에 소란한 풍경이 보였다. 보리스는 품에 안은 그대로 리비를 데리고 성 안으로 통하는 계단을 단숨에 밟아 올라갔다.
“괜찮으세요?”
시녀장인 베스가 놀란 눈으로 다가왔다.
“난 괜찮아요. 별로 젖지도 않았는걸. 그보다 보리스가.”
그 말대로 내내 리비를 안고 걸어온 보리스는 흠뻑 젖어 있었다. 몸에 두른 검은색 망토에서 뚝뚝 물이 흘러 바닥을 적실 정도였다.
“이만 내려 줘.”
리비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보리스는 그대로 부부의 침실로 통하는 계단을 성큼성큼 밟아 올라갔다. 그가 움직이는 대로 기다란 물 자국이 생겨났다.
노련한 시녀장은 얼른 시녀들을 부려서 목욕물을 준비시키고 마른 수건을 가져왔다.
보리스는 방 안에 들어서고 나서야 리비를 온전히 내려놓았다. 상대적으로 뽀송한 리비에 비해 보리스는 그야말로 물에 젖은 까마귀 신세나 다름없었다. 젖어서 착 달라붙은 머리칼을 넘겨 주며 리비가 말했다.
“얼른 벗어, 보리스.”
“……지금?”
보리스의 보랏빛 눈이 크게 흔들렸다.
“어?”
순간 방 안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들을 따라 들어와 바쁘게 목욕물이며 수건을 준비하던 하녀들의 동작도 덩달아 멈췄다.
“아니, 아니이. 망토, 벗으라고. 무겁잖아. 춥기도 할 거고.”
보리스가 하는 오해가 무엇인지 리비는 알 것 같아서 얼른 말을 정정했다.
“별로.”
보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작은 물방울들이 튀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 아무튼 벗어. 안 그러면 감기 걸…… 에취.”
크게 터진 재채기에 리비는 서둘러 얼굴을 가렸다. 젖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요란하게 재채기를 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서였다.
“의사를 불러.”
“아니, 아니야!”
리비는 얼른 보리스의 명령을 막았다.
“따,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나면 괜찮을 거야. 내가 추위를 많이 타서 그래.”
이상하게 대답하는데 얼굴이 자꾸만 뜨거워졌다. 그걸 보는 보리스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너부터 벗어야 할 것 같은데.”
보리스는 리비의 로브를 벗겨 내며 말했다.
“아니, 나는 나중에…….”
“목욕 준비가 끝나서, 저희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공작 부부가 서로 옷을 벗으라며 권하는 동안 베스는 하녀들을 서둘러 내보낸 뒤 자신도 마지막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
“목욕하자, 리비.”
방 안에 둘만 남자 보리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여 왔다. 목소리는 마치 꿀을 바른 것만 같았다.
“응? 으응.”
리비는 저도 모르게 이상하고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철퍽.
보리스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물 먹은 망토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뒤이어 사슴 가죽으로 만든 바지와 윗옷까지 모두 벗어 내리는 동안 리비는 눈만 멀뚱하게 뜬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갑자기 방의 온도가 훅 높아진 것 같았다. 축축한 비의 냄새를 묻힌 보리스의 모습은 평소보다 더 야하게만 보였다.
“뭐 해?”
보리스가 지그시 바라보자 리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꺄……아.”
비에 젖은 바닥에 미끄러지기 직전, 보리스가 그녀를 받아 안았다.
“조심.”
평소보다 더 짙어진 보라색 눈이 리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응.”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과 맞닿아 있었다. 둘 사이를 막은 건 아직 벗지 않은 리비의 드레스뿐이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보리스가 지체 없이 리비의 드레스를 벗겨 내리기 시작했다.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나체가 된 리비가 손으로 여기저기 가릴 때였다.
“왜 가려?”
보리스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그게…….”
리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굴려 댔다.
그러다가 욕조에서 올라온 뿌연 수증기 속에 잠긴 보리스의 몸을 더욱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
저절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조각가가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깎아 낸 것 같은 아름다운 육체였다. 단단한 어깨, 드넓은 흉부와 탄탄하게 근육이 차오른 팔과 복부.
여기저기 흉터가 남아 있긴 했으나 그런 것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것들에 대비된 몸이 더욱 돋보였다.
그의 몸은 인간의 것이라기엔 기이할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로워 보였다.
리비의 눈이 한참 조각 같은 상체를 맴돌다가 아래로 내려왔다.
“…….”
이번에도 말문이 막혔다. 매번 봐도 매번 놀라운 그것 때문에.
어서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는 듯 이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친 것이 보이자 리비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뭘 그렇게 봐, 리비?”
그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깃들었다.
“내가 뭐, 뭘…….”
당황한 리비가 말꼬리를 흐리자 그가 한 걸음 다가섰다.
“마음껏 봐도 돼.”
“…….”
그가 훅 다가서는 바람에 리비는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수증기에 조금이나마 가려졌던 몸이 가까워지자 그의 육체가 뿜어내는 위압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물론 힘차게 융기한 그의 분신도 마찬가지였다.
“가자.”
보리스가 내민 손을 보며 리비는 침을 꼴깍 삼키다가 그 위로 손을 얹었다.
보리스는 리비의 손을 잡은 채로 가림막 뒤에 마련된 욕조 안으로 리비를 밀어 넣었다.
“……아.”
따뜻한 물에 몸이 잠기자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를 앞에 앉힌 뒤 뒤에 자리 잡은 보리스는 커다란 손으로 리비의 몸을 계속 문질러 주며 말했다.
“몸이 차가워.”
등이며 어깨, 목덜미를 훑는 손길이 뜨거웠다. 마치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은 온기에 리비는 몸을 움찔움찔 떨어 댔다.
“리비?”
보리스는 몸을 웅크린 채 바르르 떨어 대는 리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손길이 멎자 리비가 몸을 틀어 조심스레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
“모, 몰라. 나도.”
같이 목욕한 날도, 그 손길 아래 녹아내린 것도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건만 가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요상한 기운을 뿜어 대는 보리스, 아니 남편을 보고 있자면 매번 그 기운에 홀려 버리는 것만 같았다.
리비는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다시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저 물에 젖은 보랏빛 눈에는 사람을 미혹시키는 무언가가 있는 게 확실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이러는 게 싫어?”
뒤에서 뻗어 온 팔이 리비의 작은 몸을 감싸 안았다. 뻔히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하는 행동이었다. 싫었으면 애초에 같이 들어오지도 않았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면서 모든 걸 알고 있는 게 보리스였다. 그의 곁에서 사는 동안 리비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게 웬 부끄러움인가 싶어서, 리비는 겨우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너도, 너도 춥잖아.”
“……그럼 네가 따뜻하게 해줘.”
“…….”
잠시 그 말에 멍한 표정을 짓던 리비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야한 빛을 뿜어내는 보랏빛 눈이 그녀를 간절히 갈구하고 있었다.
욕조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이 보였다. 목욕하면서 몸을 데우라고 가져다 놓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맨 정신으로는 힘들 일이니 리비는 술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퐁, 코르크 마개를 열고 붉은 액체를 연거푸 들이켜는 모습을 보리스가 의아한 듯 바라보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거의 반절을 들이켜고 나서야 리비는 술병을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고 아예 몸을 틀어 그와 마주 보는 자세로 바꾸었다. 그 대담한 몸짓에 놀란 건 보리스 쪽이었다.
술병 속 액체처럼 붉게 물든 리비의 얼굴에 배시시 미소가 떠올렸다. 그러더니 천천히 몸을 숙여 보리스의 살갗을 문질러 댔다. 보리스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리비, 음…….”
“너도 막, 막 만졌잖아.”
리비는 복수를 다짐한 듯 더욱 대담하게 몸을 움직였다. 따뜻한 물 안에서 꿈틀거리며 한참을 뒤엉킨 끝에, 보리스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내가 졌어, 리비.”
리비의 입가에 희미가 미소가 맺혔다. 승리를 가진 자의 여유였다. 그러나 그건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니 봉사하게 해줘.”
“뭐……? 꺄악!”
물속에서 거칠게 덮쳐 온 남자의 몸짓에 리비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다가, 이내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흐……하.”
보리스는 짙은 애무로 흐물흐물해진 리비의 몸을 일으켜 세워 욕조를 짚도록 했다.
그 자세가 무엇을 뜻하는지 훤히 알고 있는 리비로서는 그저 긴장감으로 달달 몸을 떨어 댈 뿐이었다.
“떨지 마, 리비.”
그가 리비의 등허리에 입 맞추며 말했다. 뒤에서 뻗어 온 손이 출렁이는 가슴을 손 안 가득 움켜쥔 채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하자 의도하지 않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흡, 다, 다…… 흐응, 보이잖아…….”
아무리 수증기가 자욱하다 해도 이 정도 거리에선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리비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중간중간 섞여 들어간 신음 탓에 항의가 아닌 투정에 지나지 않았지만.
“응.”
그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며 이를 세워 리비의 엉덩이를 콰득, 깨물었다.
“아!”
통통하게 살이 오른 부위에 전해진 찌릿한 감각에 리비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사이 보리스의 손이 갈라진 틈새로 스르륵 스미듯 침투했다.
“흡…….”
음순을 가르며 천천히 쓰다듬는 손가락의 감촉에 리비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다 보여, 리비. 여기가 얼마나 빨간지…… 내 손가락을 오물오물 삼키는지. 그리고 벌름거리면서 빨리 넣어 달라고 재촉하는 것도…….”
“그만, 그만!”
보리스는 어디서 배운 건지 저런 야한 소리를 잘만 지껄이곤 했다.
“아주 예뻐.”
손가락이 빠져나갔나 싶은 자리에 뜨거운 숨이 불어넣어지자, 리비는 놀라 화드득 몸을 튕겼다. 그러나 꽉 움켜쥔 엉덩이 탓에 원하는 바를 이룰 수는 없었다.
한참이나 안을 지분거리던 손과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리비는 이미 모든 게 다 끝나 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엉덩이에 문질러지는 것의 위용은 이제 막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들어갈게, 리비.”
친절하게도 알려 주는 소리에 욕조를 움켜쥔 리비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질구에 비벼지던 것은 이미 흠뻑 젖은 안쪽으로 매끄럽게 삽입되었다.
“하, 아…….”
무너지려는 몸은 굵은 팔이 허리를 감싸 안아 올려 지탱했다. 안쪽까지 꾸역꾸역 밀려 들어간 걸 확인한 보리스는 허리를 감았던 손을 미끄러뜨려 리비의 양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마치 제 것이라도 된 양 제멋대로 주무르고 젖꼭지를 간지럽히는 통에 리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래는 꽉 물린 성기가, 위는 그의 손이 온통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아응, 아…… 보리스, 보리스으…….”
“응, 리비.”
마치 나 여기 있어, 하는 투로 대답한 보리스가 몸을 물렸다가 단번에 안쪽으로 치고 들어왔다.
퍼억.
몸이 앞으로 쏠릴 만큼 강한 삽입이었다. 자칫 욕조에 머리를 박을 뻔했으나 재빨리 손을 뻗어 온 보리스가 제 손바닥으로 리비의 이마를 감싸는 바람에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흑, 아흣, 응…….”
리비는 우는 듯한 비명을 터트렸다. 그녀의 몸을 단단히 고정한 채로 보리스는 다시 깊은 추삽질을 이어 갔다.
이런 자세에서는 그의 얼굴도, 표정도, 눈빛까지 그 어느 것도 볼 수 없었기에 육체의 감각이 더욱 살아 날뛰었다. 마치 짐승이 교미하듯 몸을 겹친 광경을 상상하자 안쪽이 더욱 바짝 죄어들었다. 그러자 보리스에게서 탄식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생각 해, 리비?”
“아, 아무것도…….”
“더 야한 걸 상상했어?”
그는 리비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흩뿌렸다. 그러면서도 야한 허리 짓은 멈출 줄 몰랐다.
“흑, 흐읍, 아!”
쿵쿵 치받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리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도 점점 짙어만 갔다.
그러는 동안 물은 점점 식어 갔다. 하지만 리비는 조금도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을 꼭 안은 채 몸을 맞대어 오는 남자의 체온이, 습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그녀를 잔뜩 달구어 놓았기 때문이다.
“보리스, 흑…….”
이제 정말 한계라는 듯, 리비가 슬쩍 돌아보며 애원하자 그는 그대로 리비를 일으켜 세워 입을 맞췄다.
“흐음…….”
뒤에서 깊이 맞물린 몸 탓에 리비는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혀를 받아 물었다. 이미 제 의지로 서 있는 게 아닌, 그의 든든한 팔에 의존한 상태였다.
찰랑.
보리스는 이미 곤죽이 되어 버린 리비를 안아 올려 침대로 걸어갔다. 그가 딛는 자리마다 물 자국이 어지럽게 졌다.
“예뻐…….”
침대에 그녀를 눕힌 보리스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리비는 이제 더 이상은 그를 받아들일 힘이 없음에도, 기꺼이 손을 뻗어 그녀의 까마귀를 품에 안았다.
잠시 고르던 숨소리는 어느덧 다시 거칠게 바뀌고 말았다.
***
두 사람이 길고 긴 목욕을 끝내고 나왔을 때였다. 리비는 몽롱해진 기분으로 어서 빨리 잠에 빠지고 싶었다. 하지만 문밖에서 노크를 하는 통에 그럴 수 없었다.
“말해.”
문밖에 선 집사장이 조용히 말했다.
“왕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무슨 일이지?”
“국왕께서 보낸 전령입니다. 직접 전할 서한을 들고 왔다고 합니다.”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가지.”
집사장이 물러나고 나자 리비는 그의 소맷깃을 잡아끌었다.
“왕이 왜?”
리비는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레제트 공작의 신부 요구 때 보았던 왕은 이상하게도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같은 피가 흐르는 가족일진대, 사람 좋게 웃는 얼굴 뒤에 뭔지 모를 꺼림칙함이 느껴졌다.
“설마 또?”
리비는 인상을 찌푸리며 보리스를 올려다보았다.
“또 수도로 오라는 거야?”
결혼식 후 에드라크령에 돌아온 이후에도 왕은 종종 에드라크 공작 부부를 초청해 왕궁으로 불러올리고 싶어했다.
전쟁 영웅을 왕궁에 두고서 보란 듯이 과시하고자 하는 게 왕의 의도임이 너무나 투명해서, 리비는 어떻게 해서든 그 제안을 거절해 왔다.
에드라크령에 재해가 닥쳐서 수습하느라, 혹은 도적 떼가 출몰하여 소탕해야 한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왔다. 그런데 또 전령을 보낸 거라면.
“이번에는 또 무슨 핑계로 불러서 너를 묶어 두려는 거야.”
유명한 기사와 그의 기사단을 왕궁에 묶어 두는 것만으로도 국왕은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다. 왕이 주기적으로 보리스를 불러들이려는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보리스를 이용하는 것이 리비는 탐탁지 않았다.
“내가 만나 보고 올게.”
리비는 보리스의 옷소매를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같이 가.”
***
왕의 전령은 접견실에 도착해 안을 오가고 있었다. 아마 꽤 오랫동안 기다린 듯 발걸음에는 제법 짜증이 묻어났다.
“오셨습니까.”
전령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리비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보아하니 꽤 익숙한 얼굴이었다.
“오랜만이군요. 콜램 백작.”
리비가 건넨 인사에 백작은 지극히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넸다.
“귀한 분을 보내 주셨네요.”
리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왕께서 직접 보내는 전언이니 마땅히 자격이 되는 사람을 보내야지요.”
콜램 백작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수염도…… 전보다 더 멋있어진 것 같고요.”
“칭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이 성이야말로 올 때마다 번쩍거리는군요.”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좋은 시간을 방해한 거 아닌지.”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보며 콜램 백작이 빙긋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징그러운 미소에 리비의 표정이 굳자 보리스가 그녀를 잡아끌어 뒤로 숨겼다. 리비는 보리스의 앞으로 다시 나섰다.
리비는 보리스의 곁으로 찰싹 붙어서며 그의 팔짱을 꼈다.
“역시, 보는 눈이 날카로우세요.”
리비는 손으로 그의 팔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보다시피. 급한 일이 아직 남아서요.”
“…….”
“아까부터 기다리셨다 하니 얼른 본론을 말해 줬으면 좋겠군요. 빨리 들어가 봐야 해서.”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콜램 백작은 콧수염을 몇 번 실룩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국왕 폐하의 부르심입니다.”
백작은 가지고 온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무슨 일로요?”
리비의 날카로운 말에 백작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왕자님의 탄신을 축하하는 자리입니다. 일주일간 열릴 축하연에 참석하라는 전언입니다.”
“……왕자?”
국왕이 세 번째 왕비를 새로 맞아들였다는 말이 들린 게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그 후 임신 소식을 들었던 것도 생각났다.
“벌써 그렇게 됐나?”
손가락을 접으며 지난 시간을 헤아려 보던 리비는 놀라고 말았다. 영지 관리로 바빴기에 왕자의 탄생 소식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상태라 시간이 그만큼 지났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축하할…… 일이네요. 드디어 원하시던 바를 이루셨으니.”
왕비를 셋이나 맞아들이며 마침내 얻어 낸 왕자였다. 아들을 낳지 못한 왕비 둘은 이혼 후 수도원으로 보내졌다고 들었다.
이전의 왕비들과의 이혼 사유는 영 석연치 않은 것들이라, 왕이 억지로 만들어 낸 사유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온 왕국이 기뻐할 일이지요. 정통 후계자가 탄생했으니까요.”
“그렇군요.”
“수도에서도 특별히 축제를 열고, 가벼운 죄를 지은 죄수들을 풀어 주고 술 창고를 개방할 겁니다.”
어렵게 얻은 아들이자 후계자인 만큼 대대적으로 왕자의 탄신을 공표하고 후계를 공고히 할 모양이었다.
“축하드릴 일이군.”
보리스가 무뚝뚝하게 던진 말에 콜램 백작은 다시 입가를 늘려 웃었다.
“그래서, 국왕 폐하께서는 왕자 전하의 탄신연을 대대적으로 열 계획이십니다.”
정성스레 말아 올린 콧수염이 기쁜 듯 바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공작 부인께서도 꼭 참석해 달라는 전언이십니다.”
“수도까지는 먼 길이지. 부인은 몸이 약한데.”
“기꺼이 참석해야죠.”
리비는 보리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수 없는 초대야.”
리비가 낮게 속삭였다. 일반 전령도 아니고 귀족까지 보내 전한 초대였다. 리비는 잽싸게 백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곧 출발하죠. 폐하께도 그리 전해 드리세요. 벌써 왕궁을 방문할 날이 기다려지는군요.”
“국왕 폐하께서도 두 분을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왕자님을 보여 드리고픈 마음이시죠. 공작 부인께는 사사로이 사촌 동생이 되시는군요.”
분명히 왕자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그 구실로 보리스를 얼마나 오래 왕궁에 붙들어 둘까 생각하니 리비는 내심 걱정이 앞섰다.
“참, 백작께선 먼 길을 오셨는데 성에서 머물다 가셔도 좋습니다. 비도 오고 하니, 손님이 묵을 방을 준비하라 이르지요.”
“다시 출발할 예정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콜램 백작은 목례를 하며 말했다.
“그럼, 붙잡지 않을게요. 조심히 가세요.”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리비가 보리스와 팔짱을 낀 채 방을 나왔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내뺄 수 없겠어. 그토록 기다리던 왕자의 탄생이라니.”
오랜 시간 후계가 없던 세셔 왕국에 마침내 후계가 생겼다. 그간 왕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요인 중 하나가 제거된 셈이었다.
“그러니 가서 맘껏 축하해 주고 오자.”
“되도록 빨리 귀환하도록 하지.”
보리스가 덧붙이자 리비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물론. 가급적 축하연이 끝나고 바로 떠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왕국 곳곳의 귀족들이 아마 다 모여드는 행사인 만큼, 결코 귀환 길이 수월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내일부터 바쁘겠어. 성을 비워야 하니까.”
성의 주인인 공작 부부가 동시에 성을 비우게 되는 일이다. 미리 준비해 둘 것도, 당부해 둘 것도 많았다.
“불안해.”
리비가 투덜거리자 보리스가 그녀의 어깨를 가까이 당겨 끌어안았다.
“그럴 거 없어. 축하만 하고 오면 되는 거니까. 국왕이 붙잡거든 아직 영지 재건에 눈코 뜰 새 없다고 하면 돼.”
물론 왕이 붙잡을 핑계도 보통은 아닐 것이다.
“정말 왕자나 자랑하려고 부르는 걸까?”
리비는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찜찜함을 떨칠 수 없었다.
“만약 다른 목적이 있는 거라면…….”
“그럴 리 없어, 리비.”
그렇게 말하는 보리스조차도 국왕이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걸 의심하는 것 같았다. 다만 리비의 걱정이 지나칠까 얘기하지 않는 것뿐. 둘의 마음은 같았다.
“그리고 우린 하다 만 일이 있으니까.”
“꺄악.”
보리스는 리비를 안아 올렸고, 리비는 작은 비명을 내지르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보리스와 가까이 닿은 체온에 리비는 서서히 불안한 마음이 희석되는 것을 느꼈다.
걱정해 봐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그저 지금을 즐기기로 했다.
“……그럼 빨리 가.”
그녀가 조그맣게 속삭이자 침실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더욱 분주해졌다.
***
콜램 백작이 전령으로 와서 왕의 전언을 말하고 난 뒤 일주일이 지났을 때, 에드라크 공작 부부는 함께 에드라크성을 떠나 수도의 왕궁으로 향했다.
수도로 통하는 도로를 다져 놓았기에 시간은 훨씬 단축되었고, 잘 포장된 길 덕에 리비는 이전에 비해 훨씬 멀미를 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에드라크 공작 부부 일행이 수도의 관문을 통과해 왕궁으로 향하는 길목에 접어들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리비는 그 소리에 마차 덧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처음 왔을 때와 변함없이, 사람들로 빽빽한 거리는 활기로 가득했다.
수도 내에서도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건지, 여기저기 화환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콜램 백작의 말처럼 일주일 내내 축제를 할 예정인 것 같았다.
마차는 순조롭게 왕궁으로 향하는 대로를 달려갔고, 수도에 진입하는 내내 빠르게 달리던 말들은 차차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리비는 수도의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꽤 자세하게 엿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는 주로 번영한 에드라크령에 관한 것이었다. 익숙한 단어가 들릴 때마다 리비의 귀도 저절로 쫑긋거렸다.
“에드라크령이 완전히 달라졌다던데.”
“북부 전체가 활발한 교역의 장이 되었다고 했어.”
“사람들도 많이 모여들었다는데…….”
“세금을 줄여 주는 혜택 때문에 상인들도 많이 이주해 온 모양이야.”
“공작 부인도 직접 나섰다는데.”
리비는 뿌듯한 마음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저 험준한 지형에 척박한 땅으로 알려졌던 에드라크가 이처럼 번영하게 된 것이 자랑스러워서였다.
리비는 살짝 고개를 내밀어 대열의 앞쪽에 서 있는 보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에드라크령을 자치령으로 두어서 발전에 더 박차를 가했다죠.”
“그래도 공작 부부가 아니었으면 그만큼 발전하지 못했을 거야.”
수군거리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리비는 그 기분 좋은 소문들을 들으며 내내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수도에 와볼 기회가 없어 수도에 사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일이 없었는데, 이렇듯 이야기를 들어 보고 나니 한결 안심이 되었다. 그간 내내 노력하며 이룩해 온 것들을 검증받고 인정받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황폐한 땅을 저만큼이나 발전시켰다는 사실은 국왕조차도 부인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리비는 미소 지으며 마차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
왕궁 전체는 왕자의 탄신연으로 들뜬 분위기였다.
첫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모든 귀족 가문들이 초대되어 온 모양이었다.
“에드라크 공작 부부 드십니다.”
시종이 큰 목소리로 둘의 알현을 알리자 리비는 긴장한 얼굴로 보리스의 팔을 꼭 움켜쥐었다. 왕을 보는 건 그때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보리스는 리비의 잔뜩 긴장한 손을 움켜쥐더니 싱긋 웃어 보였다. 언제나 리비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미소였다.
“걱정 마.”
보리스의 그 한마디에 리비는 내내 굳어 있던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얼른 끝내고 돌아가 버리자. 응?”
리비의 말에 보리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리고 기나긴 붉은 융단 위를 걸어 안드로스 왕이 앉아 있는 자리까지 걸어가는 동안, 리비는 주변의 수많은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공작 부인은 엘가 왕녀님의 따님이시니까, 아마 국왕 폐하의 총애를 받는 게 아닐까?”
“그랬으면 진즉에 수도로 불러올리셨겠지. 자라는 내내 시골에 두셨을 리가…….”
이상하게 그 말은 리비의 귀에 콱 와 박혔다. 그중 리비와 눈이 마주친 이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리기까지 했다.
‘사실인걸, 뭐.’
그들이 뭐라 하든 리비는 기분이 상하지도, 그 말에 반박할 생각도 없었다. 정작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양옆에 늘어선, 수없이 많은 귀부인들의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여전히 호기심 가득한 귀부인들의 눈 속에서 보리스를 향한 선망의 시선을 읽을 때마다 그녀는 일부러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걸으려 애썼다.
마음 같아서는 귀부인들의 눈을 모두 가려 버리고 싶었지만.
궁정식 연애가 무엇인지는 리비도 잘 알고 있었다. 결혼한 귀부인이 몰래 기사와 사랑을 나누는 것을 낭만적으로 포장하여 보기 좋게 둘러대는 것이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그저 신 앞에서 맹세한 부부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에 불과하건만, 그들은 나름대로 낭만적인 사랑으로 포장하여 즐긴다고 생각하자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실제로 귀부인들은 누가 가장 멋지고 강한, 이름 높은 기사의 사랑을 쟁취하는가를 두고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다른 기사라면 모를까, 보리스는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반면 궁정의 꽃 같은 귀부인들이 하나같이 보리스를 탐내는 눈길을 보낸다는 것에 리비는 마음 한편으론 뭐라 말할 수 없는 뿌듯함에 휩싸여 있었다.
잘생기고 몸 좋고 능력까지 좋은 남편을 두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셋 중 하나만 가지기에도 모자란 법이다. 그런데 자신은 그 셋을 다 가졌으니, 이런 부러움과 시샘을 받는대도 어쩔 수 없다.
보리스를 가진 대가라면 기꺼이 치르고도 남으리란 생각이었다. 리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듯, 보리스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와 눈을 맞춘 리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볼 테면 마음껏 보라지. 어차피 먹을 수 없는 케이크일 뿐이니.
리비는 도전적으로 눈을 치켜뜬 채 지나가며 귀부인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을 하는 동안 어느덧 기나긴 융단의 끝에 도착해 있었다.
드높은 단상 위에는 국왕 부부가 앉아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중앙의 왕좌에는 안드로스 왕이, 그 곁에는 왕자를 안은 젊은 왕비가 앉아 있었다.
처음 보는 왕비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욱 앳되어서, 리비와 별로 나이 차이도 나 보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유심히 왕비를 보고 있던 리비는 왕이 말을 걸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 왔는가?”
국왕은 제법 인자해 보이는 눈으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보리스는 검은 망토를 휙 젖히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예를 갖췄다.
“에드라크 공작, 아내와 함께 축하 인사를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약소한 선물도 함께 준비하였습니다.”
왕의 앞에는 이미 산더미 같은 축하 선물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에드라크령에서부터 직접 공수해 온 선물들이 그 앞에 놓이는 걸 본 국왕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리비와 보리스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고맙군, 내 조카딸과 이처럼 행복하게 살다니, 아주 아름다운 한 쌍이야. 왕비도 보시오, 아주 잘 어울리는 부부이지 않소?”
왕비는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의 품 안에 안긴 아기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고, 왕비는 행여 아이가 깰까 싶어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왕자 전하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왕국에 영원한 번영이 깃들기를.”
보리스는 에드라크 영지에서부터 실어온 공물들을 국왕 부부에게 바쳤다.
“이쪽은 제 아내가 별도로 준비한 선물입니다.”
보리스가 리비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리비는 양손을 들어 올려 예를 취한 뒤, 직접 만든 아기 옷과 아기 모자, 손싸개 등이 담긴 함을 건넸다.
“어머나, 정말 정성이 깃든 선물이군요.”
뜻밖에도 왕비는 그 선물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그걸 본 국왕은 희끗희끗한 수염이 연신 들썩거릴 정도로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공작 부부를 만나서 기쁘다기보다는 그저 바로 옆에 있는 왕자의 탄생이 기뻐서 나오는 웃음 같았다.
“내 저물어 가는 인생에 이런 빛이 있을 줄 누가 알았나. 그저 기쁠 따름일세.”
왕은 잠투정을 부리는 왕자를 보며 함박웃음을 짓다가, 불현듯 다른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셋이 되어 있을 줄 알았더니.”
“…….”
리비는 난데없는 국왕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다 답했다.
“아이의 탄생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리비의 대답에 왕은 껄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대를 잇는 건 중요한 일이란다, 리비.”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신혼을 더 즐긴 후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그래, 젊을 때에 신혼을 즐기는 것도 좋은 일이지, 암암.”
왕이 희끗희끗한 수염을 어루만지며 기뻐하고 있을 때였다. 시종이 다가와 국왕에게 뭔가를 속삭이자 국왕은 눈썹을 치켜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뒤늦게 손님이 한 분 더 오셨다는군.”
왕이 웃으며 손바닥을 두어 번 부딪치자 굳게 닫혀 있던 접견실의 문이 열렸다.
“…….”
리비는 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레제트 공작?”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떠봐도 그대로였다. 문 앞에 서 있는 이는 레제트 공작이 확실했다.
“레제트 공작 도착입니다.”
레제트 공작은 접견실에 깔린 붉은 융단 위를 거침없이 걸어 왕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빗어넘긴 머리와 전에 봤을 때보다 더 훤히 드러난 이마가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몸은 왜소했으나 눈빛만큼은 병아리를 낚아채기 직전의 독수리처럼 집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과 마주치자마자 리비는 보리스의 뒤로 숨어 버리고 말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눈빛은 도무지 잊을 수 없었다.
“왕자님의 탄생을 축하드리며, 저희 레제트가에서도 약소하게나마 선물을 준비하였습니다.”
레제트 공작이 손뼉을 부딪치자 그의 등 뒤로 도열해 있던 시종들이 들고 있던 상자를 가져와 왕좌 앞에 내려 두었다.
척 보기에도 무겁고 든 것이 많아 보이는 상자로, 홀 안에 있던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몰렸다.
“저게 뭘까?”
같은 궁금증을 가진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뭔진 몰라도 굉장한 게 나올 것 같아요.”
그 말에 부응이라도 하듯, 왕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시종들이 상자를 하나씩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와…….”
상자를 하나씩 열 때마다 흘러나오는 탄성이 접견실 안을 가득 채웠다.
첫 번째 상자에서는 금괴가, 두 번째 상자에서는 온갖 보석이 쏟아져 나왔다. 세 번째 상자에서는 정교하게 세공한 검이며 방패, 화살 등 최고급 무기들이 나왔다.
상자 안에 담긴 보물들만으로도 접견실 안이 환하게 밝혀질 정도였다. 저마다 자라처럼 목을 길게 뺀 채 안에 든 보물들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호오, 그 검은 정말 귀한 검 같은데.”
레제트 공작이 눈짓하자 시종이 상자 안에서 검을 두 손으로 받쳐 올린 뒤 레제트 공작에게 내밀었다. 레제트 공작은 다시 그것을 받아 들어 왕 앞에 내밀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귀해 보이는데.”
왕의 얼굴이 번쩍거릴 정도로 검이 내뿜는 광채는 엄청났다. 더불어 접견실 안의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도 점점 더 커졌다.
“손잡이와 검대는 금으로 장식했고, 손잡이 장식의 정중앙에는 올해 산출한 루비 중 가장 크고 빛나는 것을 장식했습니다.”
레제트 공작의 말처럼, 온통 금으로 발라 놓다시피 한 검의 손잡이에는 용의 눈알만 한 루비가 떡하니 박혀 있었다. 그 무게만으로도 상당할 것 같은 크기였다.
“만드느라 꽤 공이 많이 들어갔겠군.”
“솜씨 좋은 장인들이 달라붙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왕자님의 탄신연회에 이 정도는 선물로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검이 좀 크군.”
안드로스 왕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껄껄거리며 말했다.
“물론 지금은 크지만, 조만간 훌륭히 장성하여 이 왕국을 물려받게 되시면 그때는 새끼손가락으로도 검을 드실 수 있게 될 겁니다. 제 무기고에 지시하여 특별히 만들었지요.”
“레제트 공의 무기고는 왕국을 통틀어 가장 품질 좋은 무기들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유명하지.”
왕은 흐뭇하게 웃다가 말을 덧붙였다.
“……한 곳은 빼고 말이야.”
“한 곳이요?”
한창 검 자랑을 늘어놓던 레제트 공작의 표정이 휙 바뀌었다.
“북부에도 한 곳 있지 않은가. 에드라크 공작령에서 생산하는 무기들이 꽤 쓸 만하지.”
“남부에서 도망친 대장장이들이 북부로 갔다더니, 그 덕을 보나 보군요.”
레제트 공작의 입가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남의 영지에서 빼낸 인력으로 만든 것이니 어련할까요.”
레제트 공작이 턱을 치켜들며 보리스 쪽을 돌아보았다. 그가 한껏 고개를 치켜들어도 보리스와 눈을 맞추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 모습에 여기저기서 억눌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원이 어디든, 지금은 에드라크령에 정착하여 훌륭한 무기들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북부의 영광이지. 게다가 이제는 북부 고유의 무기 제작 기술로 발전했다던데.”
왕의 눈짓에 보리스가 앞으로 나서 말했다.
“장식은 최대한 줄이고, 좀 더 가볍고 공격력을 높인 무기들입니다.”
“그 무기들을 시험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폐하.”
레제트 공작이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며 말하자 안드로스 왕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시험?”
“네, 마상 경기를 열어 남부와 북부의 무력을 겨루고, 무기의 우수성도 입증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으면 합니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군.”
왕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리비는 하마터면 앞으로 나서서 반대 의사를 밝힐 뻔했다. 그러지 못한 건 누군가 그녀를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
시선을 내리자 보리스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보리스.”
그는 리비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명백한 만류에 리비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마상 경기든 뭐든, 하게 되면 일찌감치 에드라크성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저 왕자의 탄신을 축하하는 선물만 전해 주고 적당한 때를 봐서 영지 관리를 이유로 빠른 귀환을 요청하려고 했는데.
게다가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과 칼리니 기사단의 기사들이 마상 시합을 한다고 생각하자 벌써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좋아, 새로운 여흥이 되겠군. 남부와 북부의 시합이라.”
왕이 손바닥을 짝, 소리가 나도록 부딪치자 여기저기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갓 태어난 왕자의 무운을 기원하는 의미이자, 세셔 왕국의 영원한 번영과 평화를 위해, 마상 시합을 개최하도록 한다.”
사방에서 울리는 소리는 더욱더 커졌다. 박수를 치지 않는 이들은 리비와 보리스, 단 두 사람뿐이었다.
으아앙.
갑자기 울려 퍼진 박수와 환호성에 왕비의 품에 안긴 왕자가 잠에서 깨어 길게 울음을 뽑아냈다.
“이런, 에드윈. 괜찮아, 괜찮단다.”
왕비가 품에 안고 어린 아들을 어르자 유모가 다가와 아기를 받아 안았다. 그러는 사이 울음은 더욱 커졌다. 왕비는 당황하여 유모와 함께 자리를 떴다.
“에드윈 왕자님의 울음소리가 아주 우렁차군요. 장차 이 나라를 지배할 왕의 자질이 엿보입니다.”
그 말에 더욱 큰 박수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건 다 왕국의 끝에서부터 끝까지,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주었기 때문이지. 그러고 보니 레제트 공이 이번에 새로이 흡수한 국경의 성들만 해도 세 개가 넘는다지?”
국왕이 그 말을 하며 눈을 빛내자 레제트 공작은 웃으며 대답했다.
“정확히는 다섯 개입니다, 폐하. 그사이에 더 늘었지요.”
“그거, 축하할 일이로군.”
국왕은 흐뭇한 듯 미소를 흘렸다.
리비는 문득 자신을 사이에 두고 보리스와 레제트 공작이 신부 협상을 벌였던 때의 일이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접견실에 찾아든 레제트 공작이 뿜어내는 기운은 상당히 흉흉했고, 금방이라도 전쟁이 다시 터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리비는 이 조작된 듯한 화기애애함이 어쩐지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작스레 마상 시합을 하게 된 것도 어이없는데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흥분해서 환호성을 질러 대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자기들이 하는 거 아니라 이거지.’
피가 나고 살이 터지는 광경은 본인만 그 안에 없다면 더할 나위 없는 유흥거리가 될 수 있음을, 리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오늘은 왕자의 탄신 축하연회 겸…… 남부와 북부를 대표하는 두 가문의 마상 시합 전야제가 되겠군.”
여기저기서 울리는 환호성에 리비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이 일의 원흉이 된, 레제트 공작 쪽을 쏘아보았다.
“…….”
레제트 공작의 번들거리는 이마와, 그 못지않게 기분 나쁘도록 번득이는 눈이 동시에 그녀를 향했다.
레제튼 공작은 그녀를 보며 천천히 혀로 입술을 핥았다. 마치 뱀이 먹이를 노리듯, 소름 끼치는 표정이었다.
리비는 보리스의 팔을 잡아당겨 그의 뒤로 재빨리 숨어 버렸다. 보리스의 커다란 몸이 시야를 가리자, 비로소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괜찮아, 겁먹을 것 없어.’
이미 자신은 보리스와 결혼을 했다. 에드라크 공작 부인으로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을 노릴 수는 없다.
망토 안으로 작은 몸이 쏙 빨려 들어갔다. 그녀를 잡아당겨 제 품 속에 감춘 보리스가 힘을 주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후.”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품만 있으면, 보리스만 제 곁에 있으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은 없었다. 리비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
연회는 늘 그렇듯 비슷한 풍경이었다.
처음에는 적당한 품격을 갖추고 있던 귀족들이 술을 입으로 넘기자마자 이내 이성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리비와 보리스가 왕궁에서 결혼식을 올린 그날처럼, 여기저기서 술을 마신 귀족들이 픽픽 쓰러져 자거나 옮겨지거나, 음란하고 방탕한 농담들도 아무렇지 않게 오갔다.
보리스는 왕 옆에 불려가 그가 따라 주는 술을 아무 말 없이 마시고 있었다. 리비는 그 모습에 속이 뒤집혔지만 차마 왕의 뜻을 거스르고 그를 그 자리에서 빼내 올 수는 없었다.
갑작스레 에드라크령을 포함한 북부의 세력이 커진 것은 그저 좋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그 말인즉슨, 언제든 트집잡히기 좋은 상대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까.
사람이 갑작스레 잘나가게 되면 여러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견제를 동시에 받게 되는 법이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몸을 사려야 하는 이유였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보리스 역시 두말하지 않고 왕의 상대를 해주는 것이고.
리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날 며칠 동안 이어졌던 결혼식 연회처럼, 오늘 밤의 연회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긴긴 시간을 버티려면 그녀에게도 휴식 시간은 필요했다. 이 무료한 시간을 버틸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다.
“…….”
리비는 문득 전에 만났던, 자신과 흡사한 외모의 여자를 떠올렸다. 마치 꿈과 같았던, 정말 실재하는 사람인가 의심하게 되었던 그날의 여자를.
“기억해요, 이 왕궁에서 만나는 그 누구도,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아직도 그 여자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에드라크성에 돌아가고 나서도 가끔씩 그 여자의 꿈을 꾸었다.
어쩌면 밤중에 잠시 보았던 신기루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기분이 이상해.’
그때 그렇게 여자를 보내 버린 일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그 여자는 누구일까. 일반 궁정 시녀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혹시 만날 수 있을까.’
그 밤처럼, 연회장 근처를 벗어나 배회하다 보면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리비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레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발은 알아서 그날 걸었던 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더 인적이 드문 곳으로, 연회장의 시끌벅적한 소음에서는 멀리, 점점 더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리비는 우거진 나뭇가지로 인해 언뜻 보면 숲처럼 보이는 길을 찾아냈다.
바스락.
숲길로 들어서자 안쪽까지 길게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리비는 그 길을 향해 계속 걸어 들어갔다.
얼마쯤 걸어왔을까.
“…….”
홀린 듯 걷던 리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앞에는 삐죽이 솟은 첨탑 하나가 보였다.
탑은 마치 땅에서 스스로 자라서 불쑥 솟아오른 것처럼 기괴한 모양이었다. 온통 반짝거리고 아름답게 꾸며진 왕궁에서, 이처럼 기괴한 탑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리비는 탑 가까이 한 발 더 다가갔다. 회색 벽돌로 지어진 벽에는 말라붙은 넝쿨이 감겨 있어 분위기는 한층 으스스했다. 벽에 감긴 넝쿨에 막 손을 갖다 댔을 때였다.
“멈추십시오.”
딱딱한 목소리에 리비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풀숲에서 검을 찬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날카로운 눈매의 궁정 기사가 리비를 위아래로 훑었다.
“누구십니까?”
척 보기에도 고귀한 귀부인의 차림새인지라 그들은 낯선 사람임에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산책하던 중이었어요. 길을 잘못 든 것 같은데.”
“여기는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아, 몰랐어요.”
딱딱한 목소리로 말하자 리비는 서둘러 답했다. 기사들은 조금만 수틀리면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을 날려 버릴 것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귀부인의 차림새였기에 무사했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쯤 몸과 분리된 머리가 바닥 어딘가에서 굴러다니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 밤중에 홀로 돌아다니다니, 충분히 수상합니다.”
옆에서 기사가 말하자 리비의 목에 칼을 겨눈 기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리비는 다급해져 말을 이었다.
“저기,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냥 길을 잃었을 뿐인데……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요.”
“여기는 영원의 탑입니다. 국왕 폐하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출입이 불가하다.”
“……영원의 탑?”
“씻을 수 없는 중죄를 저지른 자를 수감하는 곳이지.”
기사가 딱딱하게 대답하며 다시 리비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고 있을 때였다.
“그 칼을 거둬.”
바람에 서늘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그림자가 기사의 목에 정확히 검을 겨누고 있었다.
차갑게 빛나는 칼날을 보며 리비는 몸을 떨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칼날을 따라 움직인 눈이 칼 손잡이를 쥔 주인에게 가 닿았다.
“보리스.”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이 기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냐, 넌…….”
목에 바짝 닿은 칼을 보며 기사는 두려움에 떨었다. 다른 기사의 목덜미는 보리스에게 콱 잡힌 상태였다.
“그 칼을 치워.”
싸늘한 명령에 기사는 칼을 쥔 손을 내려놓았다. 목에서 칼이 치워지자 리비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보리스는 손을 뻗어 리비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런 후에야 기사의 목에 겨눠진 칼이 치워질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보리스를 알아본 기사가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보리스에게 뒷덜미가 놓여난 기사 역시 그 옆에 무릎을 꿇고서 사죄를 청했다. 두 사람은 그들을 내버려 둔 채 왔던 길을 되짚어 천천히 걸었다.
“혼자 뭐 하고 있었어?”
보리스가 리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응? 그냥…….”
리비는 뒤를 돌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탑을 올려다보았다. 창문마다 창살이 쳐진 탑은 어둠 속에서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
“만나고 싶은 사람?”
“응, 저번에…… 왕궁에 왔을 때 길을 잃었을 때 도와준 사람이야. 아주 예쁜 사람이었는데.”
“그랬는데?”
“어쩐지…… 사람 같지가 않았어.”
“응?”
보리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리비를 바라보았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어. 그런데 설마…….”
리비는 높이 솟은 탑을 다시 돌아보았다.
“아니겠지?”
“저기는 악독한 죄수를 수감하는 곳이라고 알고 있어.”
“응, 영원의 탑이라고 부르던데.”
“영원의 시간 동안 고통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지은 곳이야.”
그 말을 듣자 리비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죽이지도 않고, 영원히 고통받을 정도로 큰 죄를 지은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누구기에 이곳에 갇혀서 일생을 보내야 하는 것일까?
여러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 중 어느 것도 해소되지 않았다.
“아마 이름 모를 어느 귀부인이 아닐까.”
보리스의 말에 리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 거야.”
“찾아보면 알게 될 테지.”
“꼭 만나고 싶어.”
부디 그날 밤의 기억이 환상이나 신기루가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다시 만나서 반갑게 인사하고, 그날 밤 일이 고마웠다는 말도 꼭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왔어? 폐하가 붙잡고 놔주지 않는 것 같던데.”
“네가 나가는 걸 보고 바로 따라 나왔지.”
“연회는? 아직도야?”
“다들 취해서 정신이 없어 보이던데. 폐하께서도 자리를 뜨셨을 거야.”
“그럼 이제 안 돌아가도 되는 걸까?”
리비는 은근한 기대감을 품으며 물었다.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비는 팔을 뻗어 날름 그의 품에 안겼다. 허리를 감아 오는 팔의 힘에 리비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럼 우리도 그만 우리 처소로 돌아가자.”
리비의 말에 보리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단번에 그녀를 안아 올린 보리스가 척척 걸어가자 리비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 걸음이 더 빠르잖아.”
그 말에 리비는 볼우물이 패도록 미소 지었다.
“날면 더 빠를 텐데.”
지금은 안 되니까, 그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 보리스가 활짝 웃었다.
“내일은 마상 시합이니까 일찍 자야 되지 않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 보리스의 목을 끌어안아 당기는 손은 강하기만 했다.
보리스는 걸음을 좀 더 빨리했고, 리비는 그의 품 안에서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
***
“더 자라니까.”
“어떻게 그래.”
리비는 졸린 눈을 부릅뜨며 손수 보리스의 방어구들을 챙겼다.
“밤새 못 자게 했잖아.”
“알면 됐어.”
리비는 뾰로통하게 입을 내민 뒤 그의 옷시중을 들었다. 전쟁도 아니고, 고작 유흥거리로 기사들을 내세워 싸움을 붙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이딴 시합을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
리비는 보리스가 방어구를 착용하는 것을 도우며 말했다.
“걱정돼?”
보리스가 리비를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안 되겠어?”
리비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 내가 이겨.”
“이기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 읍!”
속상한 얼굴로 투덜거리던 리비는 순식간에 보리스에게 끌려가 입술을 뺏겼다.
“으음…….”
그녀를 안아 올린 채 욕심껏 입술을 맛본 보리스가 천천히 얼굴을 떨어뜨렸다.
“바보.”
눈이 마주치자 리비는 그의 가슴팍을 퍽퍽,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그러다가 다시 붙잡혀 가 게걸스레 입술을 빨리고 말았다.
한참 뒤에야 겹쳐진 입술이 떨어졌다. 리비는 가쁜 숨을 내쉬며 갑주를 걸친 그의 가슴에 가만히 뺨을 대고 숨을 골랐다.
“이기고 올게.”
보리스의 맹세에 리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마상 시합이 치러질 장소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간만에 왕궁에서 열린 마상 시합에 너나 할 것 없이 좋은 자리를 잡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시합장은 벌써부터 들뜬 분위기였다.
리비는 안드로스 왕과 왕비 가까이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시합장에 당장이라도 뛰어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다시 여기서 치르는 창 시합을 보게 되다니.’
예전의 기억이 떠오르자 리비는 몸서리를 쳤다. 물론 이건 단지 유흥을 위한 시합일 뿐이고,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결판이 나는 결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의 끔찍한 기억이 남아있는 장소에 다시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리비는 두려움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진정하거라, 리비. 그저 경기일 뿐이야. 그때와는 다르지.”
“네.”
대답을 하면서도 리비는 내내 시합장에 눈을 둔 상태였다. 신식 무기들을 시험한다는 핑계로 치러진 마상 시합은 꽤나 치열한 분위기였다.
점수판이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응원 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리비는 칼리니 기사단이 우세한 상황에서도 조금도 웃지 못했다. 오로지 보리스가 다치지 않기를,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칼리니 기사단과 레제트 공작가의 기사들 모두 사력을 다해 임했다. 그럼에도 칼리니 기사단의 우세가 점쳐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리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합장 한가운데에서 레제트 공작가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보리스가 보였다. 칼리니 기사단의 기사들이 대기하는 장소의 입구는 굳게 문이 내려진 상태였다.
“보리스!”
보리스를 둘러싼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안 돼!”
시합장에 리비의 비명이 높게 울려 퍼졌다.
“비겁해! 이런 게 어디 있어, 당장 멈추게 해요!”
리비가 비명을 질렀지만 움직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높은 단상에 올라앉은 안드로스 왕은 그저 손에 턱을 받친 채 무심한 눈으로 보리스와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앉거라, 리비. 이건 그저 여흥일 뿐이야.”
“아니야, 아니잖아요! 한 명을 저렇게 여러 명이 상대하는 게 어디 있어!”
리비는 단상에 매달려 소리 질렀다.
“네 남편이라면 얼마든지 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거다.”
“무슨 말이에요!”
보리스는 무장한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방이 모두 막혔고, 보리스가 빠져나갈 길은 어디도 없었다.
“소란 그만 피우고 자리에 앉거라. 공작 부인이 되어서 이리 품위를 지키지 못해서야.”
“그런 품위 따위는 지키고 싶지 않아요. 어느 아내가 남편이 위험에 처한 걸 지켜만 보나요?”
리비는 분노를 숨기지 않은 채 외쳤다.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소리치는 리비를 돌아보았다. 리비의 언사가 불경하다 할 수도 있었으나 왕은 그저 껄껄 웃기만 했다.
“여흥이라니까. 기사들에게는 흔한 일이야.”
“한 사람을 저렇게 여럿이 상대하는 게 여흥이라고요?”
리비는 기가 막혀 어이없는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사나운 눈과 마주하고서도 국왕은 그저 여유롭기만 했다. 그의 눈은 보리스에게 고정된 채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
상당히 의아한 모습에, 리비는 온몸이 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왕의 눈은 심상찮게 빛나고 있었다.
“폐하!”
리비가 외치자 즉시 왕 옆에 서 있던 호위 기사들이 리비를 막아섰다. 목 앞까지 들이밀어진 검을 보면서도 리비는 물러나지 않았다.
“멈춰, 멈추라고요!”
호위 기사를 몸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무장한 기사들을 밀어내기란 쉽지가 않았다.
“악!”
한참을 기사들에게 매달려 앞으로 나아가려던 리비는 기사들에 의해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멈추랬잖아!”
리비는 상대가 왕이라는 것도 잊고서 소리를 질러 댔다. 왕은 리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는 사이 보리스를 둘러싼 기사들이 점점 그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했다.
“비겁해!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에드라크 공은 전쟁 영웅 아닙니까. 저런 기사들쯤은 얼마든지 잡을 수 있을 테니, 공작 부인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밉살스럽게 말하는 이는 다름 아닌 레제트 공작이었다.
“저들은 전부 무장한 기사들이고, 공작의 최정예잖아요! 그걸 보리스 혼자 상대하라는 게 말이 돼요?”
리비가 외치자 레제트 공작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려 보였다.
“내가 아끼는 기사를 단칼에 쓰러뜨리지 않았습니까? 기사 마그노는 혼자서 백명의 목을 치는 이였는데. 그때 참으로 아까웠지요.”
“그럼 레제트 공께서 직접 싸우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총애하는 기사의 목도 온전했을텐데.”
빈정거리는 리비의 말에 레제트 공작은 잠시 표정이 굳었으나 이내 다시 웃어보였다.
“에드라크 공에겐 다 극복할 힘이 있을 겁니다. 내가 장담하지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끌끌거린 레제트 공작이 스치듯 덧붙였다.
“날아서라도…… 말이지.”
“뭐……?”
리비와 눈이 마주친 레제트 공작이 헤죽 웃었다.
와아아!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리비는 결투가 진행 중인 결투장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검을 뽑아 든 보리스가 가장 먼저 달려든 기사 하나를 단숨에 쳐낸 듯, 바닥으로 떨어진 기사가 몸을 비틀어 대고 있었다.
“보리스!”
리비는 몸을 벌떡 일으켜 단상 앞으로 다가가 애타게 보리스를 불렀다.
보리스는 검을 다시 들어 올리더니 두 번째로 덤벼드는 기사를 향해 휘둘렀다.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두 번째 기사도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러자 관중석의 함성은 더욱 커졌다.
보리스가 나뭇잎을 쳐내듯이 손쉽게 기사들을 쓰러뜨리는 모습에 관중석에서는 연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지켜보는 리비의 가슴은 그대로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두 명의 기사가 연달아 보리스의 단칼에 무너져 내린 것을 본 다른 기사들은 이번에는 여러 명이 동시에 공격을 시작했다.
보리스는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일으켜 세우더니 자신에게로 덤벼드는 기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왼편의 기사가 든 검을 막아 냄과 동시에 오른편에서 덤벼드는 기사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갔다. 조금만 더 방향이 틀어졌다면 그대로 보리스에게 꽂혔을 만한 거리였다.
리비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다행히 보리스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퍽.
보리스에게 정통으로 공격을 받은 기사가 말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모든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레제트 공작의 최정예 기사들을 순식간에 몇 명이나 해치운 보리스를 향한 응원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리비는 귀가 찢어질 것 같은 함성에 머리가 다 띵했다.
“저런.”
이를 부득 갈며 말하는 레제트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와, 와아아.
함성이 커질 때마다 보리스의 검이 기사들을 하나씩 쓰러트렸다. 리비는 단상을 붙든 채 그 광경을 놓치지 않고 모두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 남은 기사 하나마저 보리스의 손에 스러지고 나자 관중석에서는 더욱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
리비는 단상을 붙든 채 힘이 빠져 매달려 있었다. 저 멀리서 말을 돌려세운 보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리비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보리스는 그대로 말을 달려 리비가 매달려 있는 단상 쪽으로 다가왔다.
“……흑, 흐윽.”
리비는 눈물을 뚝뚝 흘려 대다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자신을 올려다보는 보리스를 보며 서서히 울음을 멈췄다. 보리스가 팔을 뻗어 내밀자 리비는 그대로 단상에서 뛰어내렸다.
단번에 리비를 받아 안은 보리스가 그대로 그녀를 꽉 끌어안자 리비는 다시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죽는 줄 알았어?”
다정하게 등을 두드리며 건네는 말에 리비가 흐느끼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무사하지? 다치지 않은 거지?”
리비가 연거푸 묻는 소리에 보리스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걸 보는 리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왜 그렇게 봐? 리…….”
보리스가 리비의 눈물 그렁한 눈을 보며 당황한 순간이었다.
“무사히 돌아왔잖…….”
리비는 그대로 달려들어 보리스를 끌어안은 뒤 입술을 포갰다.
와아아.
두 사람의 입맞춤이 더욱 깊어질수록 관중석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보리스의 목을 끌어안은 리비의 팔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녀를 마주 안은 보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국왕과 레제트 공작, 그리고 다수의 귀족들과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었다.
***
마상 대회 후 열린 축하연은 그 어느 때보다 들뜬 분위기였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축하 세례에 리비는 정신이 쏙 빠질 정도였다. 표정이 영 좋지 않은 건 레제트 공작 하나 정도였다.
안드로스 왕은 결투가 끝나자마자 역시 에드라크 공이 이길 줄 알았다면서 자애로운 웃음을 지어 보이기 바빴다. 리비는 그것이 역겨웠지만 그는 왕이기에, 하는 수 없이 겉으로는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춤출까, 리비?”
보리스가 속삭여 오자 리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찌 됐든 지금은 보리스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명목으로 마련된 자리였으니, 그들이 보는 앞에서 마음껏 즐겨 줄 요량이었다.
음악이 시작되자 거대한 홀 안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적당한 취기에 물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리비는 홀 한가운데서 보리스와 함께 춤을 추었다. 결혼식 축하연 때처럼, 아름다운 샹들리에 아래 두 사람을 향한 부러움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만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왜 그래, 리비?”
보리스는 리비가 품에 얼굴을 푹 파묻자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춤을 멈췄다.
“아무것도 아니야. 좀 어지러워서.”
순간 머리가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증상이 밀려와서, 리비는 그에게 기댄 채 숨을 골라야만 했다. 술은 별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마치 취한 사람처럼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난 괜찮아.”
그녀를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보리스에게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리비는 눈을 깜박여 어지러운 시야를 되돌리려 애썼다.
“침실로 돌아갈까?”
리비는 머리를 내저었다.
“아니, 오늘의 주인공은 너잖아. 레제트 공작의 최정예 기사들을 열 명이나 해치웠으니 네 곁에 꼭 있고 싶어.”
보리스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기에 그냥 넘어갔지, 만에 하나 어딘가 다친 구석이 있었더라면 절대 넘어가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그런 것뿐이야. 봐, 멀쩡하잖…….”
가볍게 발을 내디딘 순간, 리비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현기증에 그대로 휘청거렸다. 보리스는 서둘러 리비를 안아 올렸고, 주변에서 공작 부부를 보며 다들 놀란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보리스? 나 괜찮아, 내려 줘.”
리비는 당황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홀에서 춤추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떨어지자 그녀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보리스, 보리스?”
리비가 재차 불렀지만 보리스는 끄떡도 하지 않은 채 척척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나아갔다.
“괜찮대도…….”
리비는 얼굴을 붉히며 보리스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보는 건 부끄러웠지만 어쩐지 기분은 나쁘지 않아서였다.
특히나 틈만 나면 보리스를 접시 위 고기처럼 바라보는 귀부인들의 시선은 더더욱 그랬다.
리비는 내친김에 아예 보리스의 목에 팔을 감고서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자 자신을 안은 보리스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얼른 가.”
리비의 요청에 보리스는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보리스는 나는 듯이 걸어서 두 사람의 침실 앞에 당도했다.
그는 침대 위에 리비를 내려놓고, 손수 물을 따라 그녀의 입에 대주었다.
“궁정의를 부를게.”
“아냐, 됐어. 그냥 긴장했을 뿐인걸.”
리비는 몸을 일으키려는 보리스의 손을 잡아 끌어당기며 말했다.
“…….”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보라색 눈에 리비는 생긋 웃어 보였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까.”
리비는 제 옆자리를 눈으로 가리켰다.
“얌전히 여기나 지키고 있어.”
리비의 완강한 고집에 보리스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그럴게.”
커다란 손이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자, 리비는 눈을 감은 채 그 온기를 느꼈다. 좀 전에 어지러웠던 것이 다 꿈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졸려, 보리스.”
“이만 자.”
다정하게 이르는 소리에 리비의 눈이 스르륵 감겼고, 뒤이어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보리스도 안심한 듯 설핏 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렇게 리비가 완전히 잠들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
“음…….”
리비는 자던 도중에 목이 타는 것 같은 갈증을 느끼고선 잠에서 깨어났다.
기운은 조금 없었지만 머리는 맑아졌고, 어지럼증과 메슥거리는 증상도 눈에 띄게 나아져 있었다. 게다가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리비는 손을 모아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좀 전에 꾸었던 꿈이 떠올라서였다.
리비의 손에 내려와 한참을 노닐다 간 새하얀 까마귀.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던 그 꿈을, 보리스에게 꼭 알려 주고 싶었다.
‘분명히 좋은 꿈일 거야.’
리비는 그렇게 확신했다.
“깨셨어요?”
커튼 너머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녀가 다가와 리비에게 얼른 물을 내밀었다. 리비는 깨자마자 들린 목소리가 보리스가 아닌 시녀라는 것이 의아했다. 그는 어디로 간 걸까.
“보리스는?”
리비는 멍한 정신을 추스르며 말했다.
“에드라크 공께서는 국왕 폐하와 함께 잔을 기울이고 계세요.”
“이미 많이 마셨는데, 또?”
리비는 멍한 머릿속이 단번에 깨는 것 같았다.
“연회가 끝나고 아쉽다며 부르셨어요. 공작 부인께서 깨시면 이야기를 전해 달라 하셨고요.”
“알았어.”
리비는 대답하면서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짜증이 일었다.
안 그래도 왕이 보리스를 사지로 몰아넣는 데에 일조해 놓고서는 단순히 여흥이라느니 하는 말로 넘어가려는 꼴에 화가 나 있던 참이었다.
그럼에도 일단 그는 왕이기에 이런 불만들을 겉으로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것 역시 리비는 불만이었다.
갓난아기인 자신을 아버지의 손에 들려 내쫓고, 내내 찾지 않다가 정략혼이 필요한 순간이 되어서야 그 시골구석까지 쫓아와 그녀를 찾아낸 사람.
그렇기에 그녀는 왕이 어떤 사탕발림을 한다 해도 믿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저 자신이 이용하기 좋으니 잘해 주는 것뿐, 필요 없으면 당장이라도 내팽개칠 위인이었으니까.
보리스가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에게 승리하면서 왕은 더더욱 의기양양해했다. 보리스가 이긴 건 좋았지만 그 때문에 이득을 보는 게 왕이라는 사실은 미치도록 싫었다. 피를 나눈 가족임에도 그랬다.
“공작 부인, 국왕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폐하의 시녀장입니다.”
리비가 눈짓을 하자 시녀가 밖으로 나갔다.
“저, 국왕 폐하께서 에드라크 공작 부인을 찾으신답니다.”
“……나를?”
보리스를 돌려보내면 될 것이지 야심한 시각에 자신을 부르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지금 에드라크 공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시는데, 공작 부인께서도 함께하신다면 즐거울 것 같다고 하시는군요.”
침대 커튼 너머로 국왕이 보낸 시녀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죄송하지만 합석하는 건 안 되겠는데.”
이미 옷도 갈아입었고, 머리 장식이며 화장도 모두 지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미 연회장에서 몸이 좋지 않아 보리스가 안고 나온 것까지 다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기어이 사람을 불러내려는 왕의 태도는 지나치게 이기적이었다.
“꼭 참석하시라는 전언이십니다.”
“…….”
시녀장의 말투에는 묘한 압박이 실려 있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리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 시녀장 따위가 흡사 명령이라도 내리는 듯 고압적인 모습이 거슬렸다.
왕의 수족이니까 응당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래봐도 마음에 안 차는 건 마찬가지였다.
“왕께서 내게 이토록 무례하게 말하라고 하셨나?”
리비는 날카로운 눈으로 시녀장을 쏘아보았다. 그 기세에 눌린 시녀장이 슬며시 눈을 내리깔더니 덧붙였다.
“실은…… 공작 부인께 꼭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꼭 보여주고 싶은 것? 그게 뭐지?”
“돌아가신 엘가 왕녀님의 초상화입니다.”
“어머니의?”
리비의 목소리가 커졌다.
“전부 불에 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떻게.”
“네, 그런데 얼마 전 왕궁 창고에서 반쯤 불에 탄 초상화를 발견했고, 그걸 궁정 화가에게 맡긴 결과 원본에 가깝도록 복원했다는군요.”
“…….”
“그래서 국왕 폐하께서 꼭 함께 초상화를 감상하고 싶다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리비는 잠시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리비는 다시 단장을 지시하며 거울 앞에 앉아야 했다.
“피곤하실 텐데요.”
옆에서 리비의 시녀가 속삭였다.
“괜찮아. 초상화를 볼 수 있다잖아. 간 김에 빨리 자리를 끝내고 보리스를 데리고 오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
리비는 보석함을 열어 귓불에 귀고리를 걸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된 김에 차라리 그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니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그저 제 얼굴만으로 어머니의 생김새를 짐작해 왔지만 이제는 확실한 어머니의 생전 모습을 볼 수 있다. 리비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거울을 보았다.
“단장은 최소로 할게. 어차피 공식적인 자리도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단장을 돕는 시녀의 손길이 더욱 바빠졌다. 리비는 입고 있던 잠옷을 벗어 버린 뒤 시녀들이 가져온 드레스에 몸을 끼워 넣었다.
***
왕을 찾은 리비는 내실로 안내되었다. 왕의 내실답게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는 왠지 모를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안드로스 왕은 탁자 앞에 앉아 리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으로 보리스가 있을 만한 자리를 훑었지만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늦은 시간에 뵙습니다.”
리비는 왕을 향해 예를 올리면서도 시선은 연신 보리스를 찾고 있었다.
“……제 남편은 어디에 있나요, 폐하?”
“아, 잠시 자리를 비웠다. 곧 돌아올 것이니, 앉아서 기다리거라.”
“…….”
리비는 안드로스 왕이 권한 의자를 잠시 지켜보다가 천천히 그 자리로 가서 앉았다. 푹신하고 좋은 의자임에도 이상하게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했다.
“저, 어머니의 초상화는…….”
“급하기는. 네 남편이 오면 같이 보자꾸나.”
안드로스는 벽 한 편에 쳐진 커튼을 가리켰다. 그 너머에 초상화가 있는 모양이었다.
“모두 불에 타서 남지 않은 줄 알았는데, 다행히 상태가 좋은 것을 발견했지. 솜씨 좋은 궁정 화가에게 맡겼더니 거의 완벽하게 복원되었다. 잘된 일이지.”
“……다행이네요.”
초상화가 발견된 것도, 완벽에 가깝도록 복원된 것도 모두 더없는 행운처럼 여겨졌다.
“원한다면 주도록 하마.”
“네?”
리비는 깜짝 놀라 왕을 바라보았다. 왕녀의 초상화이니 엄연히 왕실의 것인데, 게다가 한 점밖에 남지 않은 것을 제게 준다하니 놀랄 만도 했다.
“네 어머니가 아니냐. 꿈에서라도 보고 싶을 테지. 그림으로나마 위안을 삼으려무나.”
“……감사합니다.”
리비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로스가 이처럼 인심이 후한 이였나. 괜히 자신의 선입견으로 그간 안 좋게만 보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찰나였다.
“한잔하거라.”
왕이 술병을 집어 들자 리비는 고개를 저었다.
“마시렴. 왕실에서 빚은 특제 포도주지.”
“술은 안 마셔요.”
“어째서?”
“몸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
국왕의 눈이 날카롭게 리비를 주시했다.
“그래서 아까 연회장에서 쓰러질 뻔한 것을 보리스가 부축해서 데리고 나온 거예요.”
“아아, 그래, 그랬었지.”
안드로스는 그제야 생각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차를 준비시키마.”
왕이 손뼉을 짝, 소리 나게 부딪치자 시녀가 찻잔을 들고 와 리비의 앞에 놓았다.
“…….”
리비는 진하게 우려낸 차를 보았다.
“마시렴.”
안드로스 왕의 웃는 얼굴을 보며 리비는 하는 수 없이 찻잔을 집어 들어 한 모금 삼킨 뒤 내려놓았다. 그 짧은 동작에도 왕의 시선이 끝없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져 리비는 그저 불쾌하기만 했다. 대체 왜 저렇게 지켜보는 것일까.
“왕자를 보니 어떠하냐, 리비?”
왕은 별안간 화제를 전환했다.
“귀엽더라고요. 특히 왕비님을 닮아서 눈이 아주 예쁘던걸요.”
리비는 적당한 칭찬을 끄집어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법이지.”
“…….”
“너는 아직 부모가 아니라서 그 마음을 모를 거야.”
리비는 말없이 손을 모아쥐었다.
“제가 낳아 본 건 아니지만, 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 말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아요.”
“무슨 뜻이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절 맡긴 것도, 저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왕녀의 딸로서 아무런 대접도 못 받았는데도?”
“저는 아버지와 마을에서 지내는 게 행복했어요.”
레제트 공작과 결혼하라는 명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리비는 다음 말을 삼켰다. 사실은 궁금한 것이 차고 넘쳤다.
‘어머니는 정말 돌아가신 게 맞나요?’
‘어머니는 저를 낳고 어떠셨어요?’
그러나 그중 어느 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어머니는 제가 행복하기를 바랐을 거예요. 아버님에게 저를 맡기면서 바라신 건 오직 하나였을 거예요.”
리비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말했다.
“아마…… 저도 아이를 낳는다면 알 수 있겠죠.”
리비와 눈이 마주친 왕이 웃음을 머금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엘가도 무덤에서 기뻐할 거다.”
왕은 끌끌거리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네 말이 맞다, 리비.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법이야. 나도 마찬가지란다.”
“…….”
“마땅히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주고 싶지 않겠니?”
안드로스의 눈이 기분 나쁘게 빛났다.
“그렇……겠죠.”
리비의 안드로스의 눈빛에 어쩐지 깊은 불쾌감이 밀려 올라왔다.
“그래, 그것이 부성이고, 모성이라는 거겠지. 너도 아이를 낳아 보면 알게 될 거야. 소식이 있을 법도 한데, 아직 소식은 없는 것이냐?”
리비는 안드로스의 눈을 피해 자신의 배를 감싸 안았다.
“조카가 생기면 알려 주렴.”
리비는 기이하게 빛나는 왕의 눈을 보며 왠지 모르게 찜찜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저와 보리스의 아이에게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군요.”
리비는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기분이 한층 더 묘해졌다.
“당연하지, 내 조카 아니냐. 엘가가 그렇게 간 이후로 마음이 아팠다. 너 역시 왕궁에서 멀리 떨어트려 살게 한 것이 미안했고. 그러니 네가 아이를 낳으면 그동안의 시간을 모두 보상해 주고 싶단다.”
“…….”
“왜 그렇게 보느냐?”
리비는 테이블 밑으로 손을 감싸 쥐었다. 안드로스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어쩐지 깊은 불쾌감이 차올랐다.
“제 아이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져 주셔서…… 너무 감동해서요.”
“내 질손이 될 아이니,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왕은 흰 이가 드러나 보이도록 웃었다. 그리고 리비는 그만큼 더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내 아이에게 딱 하나를 주고 싶단다.”
“그게 뭘까요?”
사실은 궁금하지 않았다. 왕이 자기 자식에게 무엇을 주고 싶든, 그건 그저 그의 일일 뿐,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리비의 질문에 국왕은 만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것, 대대손손 물려주고 싶은 것.”
“…….”
“마침내 이룩해 낸…… 가장 아름다운…… 내 왕국.”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말하는 소리에 리비는 얼떨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원을 이루게 되셨으니 축하드려요.”
“아직은 완벽하지 않단다.”
안드로스 왕의 번득이는 눈에 리비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완벽하지 않다니요?”
“이것으로는 아직 부족해.”
“네?”
“나는 남부까지의 완벽한 지배권을 원한다. 통일된 세셔 왕국을 원해.”
“…….”
“이 나라가 완전히 통일되지 않은 상태인 것은 알지 않느냐?”
“…….”
“조각조각 나뉘어 있지. 특히, 남부 쪽은 여전히 지방 귀족의 세력이 강해.”
“레제트 공작이요?”
아까 자신을 위아래로 훑던 시선이 떠오르자 리비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레제트 공작은 이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한 것 같던데요.”
“이 모든 게 다 네 남편 덕분이지, 리비.”
안드로스의 말대로, 레제트 공작은 세셔 왕국의 북부를 지키고 있는 보리스 때문에 함부로 왕에게 반기를 들 수 없었다. 그 증거로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공물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에드라크 공작에게 더욱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고 싶구나. 더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거라.”
“지금까지 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에드라크령을 자치령으로 만들어서 자유로운 교역도, 법령 제정도 가능했다. 물론 그건 왕국을 지켜 낸 것에 대한 보답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왕도 보리스도 모두 원하는 것을 가진 것이다.
“그러니 더 원하는 것은 없어요. 보리스와 함께 북부를 더욱더 부강하게 만들 예정이에요.”
“…….”
“그것이 왕국의 발전에 더욱 보탬이 되는 일일 거고요.”
리비의 말에 안드로스는 깊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더욱 강해진 왕국을 내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니, 기쁘기 그지없어.”
왕은 진심으로 기쁜 얼굴이었다. 손에 든 술잔 속 포도주가 더욱 붉은색으로 빛났다.
“네게도 고맙구나, 리비.”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이기도 하니까요. 어머니의…… 나라이기도 하고요.”
“그래, 그렇지. 엘가가 아직 살아 있었더라면 그 아이는 여왕이 되었을지도 몰라.”
“…….”
“왜, 처음 듣는 이야기인가?”
“저는…….”
리비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곤란한 미소만 지었다.
“그 아이는 꽤나 영민했단다. 내 동생이지만 정말 대단했어. 부왕과 모친의 사랑을 듬뿍 받았었지. 그 애가 미치지만 않았더라면, 아니 부왕이 좀 더 오래 사셨다면 아마 그 아이를 차기 후계자로 삼았을 거다.”
안드로스는 죽은 여동생을 떠올리는 듯 아련해졌다.
“어떠냐, 어머니를 보고 싶지 않으냐?”
“보고…… 싶죠.”
리비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얼굴조차 못 본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하지만, 안드로스의 질문은 왠지 그런 뜻으로 던진 말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만약에 살아 있다면?”
“당연히 뵙고 싶어요.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니까…….”
“글쎄, 과연 그럴까?”
“…….”
안드로스의 기분 나쁜 시선이 리비의 얼굴을 훑었다. 마치 그 눈빛은 푸줏간에서 고기의 등급을 매길 때 살펴보는 것 같았다. 그 노골적인 눈빛에 리비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너는 정말로 네 어미를 닮았어. 엘가 말이다.”
“그런가요?”
“특히 그 녹색 눈과 금발…… 아주 아름답지. 사람을 혹하게 만들 만큼 말이야.”
리비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정확히는 왕의 시선으로부터 얼굴을 가리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왕의 눈길은 끈덕지게 리비의 얼굴을 훑어 댔다.
“정말로…… 많이 닮았다. 그래서 널 처음에 봤을 때 많이 놀랐지.”
“…….”
“마치 엘가가 탑 밖으로…… 아니, 살아 돌아온 것 같았거든.”
안드로스는 누이의 얼굴을 떠올리듯 지그시 눈을 감고서 생각에 잠겼다.
“엘가는 언제나 왕국을 1순위로 생각했지. 네 아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네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계속 그랬을 것이다.”
“그랬나요?”
리비는 처음 듣는 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가 아닌 왕으로부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일었다.
어느 누구도 어머니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던 탓에, 리비의 머릿속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그저 희뿌옇게 바랜 형상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저 상상으로만 그릴 수 있는 사람.
초상화 한 점조차 본 적이 없었다. 미친 왕녀의 초상화는 남기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건지, 희한할 정도로 이 왕궁 내에서 어머니의 흔적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네가 엘가를 닮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네?”
왕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뜻은 무슨. 죽은 여동생을 쏙 빼닮은 너를 볼 때마다 엘가 생각이 나서, 그 아이가 그나마 이 세상에 제 핏줄을 남기고 간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지.”
왕은 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말했다.
“에드라크 공작은 늦는 모양이니, 우리끼리 먼저 그림을 보도록 하지.”
왕이 시종을 향해 딱, 손가락을 울리자 시종이 벽 한편에 처져 있던 커튼을 걷기 시작했다. 리비는 긴장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림은 벽의 한 면을 모두 채울 만큼의 크기였다. 커튼이 조금씩 치워지자 가려졌던 그림이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머리카락이, 그리고 눈과 코에 이어 얼굴 반쪽이 드러났다. 그리고 마침내 얼굴이 모두 드러난 순간.
“…….”
리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사람이 제 어머니라고요?”
리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림을 응시했다.
“그래, 미인이지 않느냐? 너를 쏙 빼닮았지. 아니…… 그 반대겠구나. 네가 엘가를 닮은 거겠지.”
엘가 왕녀는 화려한 모피와 벨벳으로 장식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고요한 눈빛과 생기 넘치는 표정.
그림만으로도 가지고 있는 기품과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리비가 놀란 건 단지 엘가 왕녀의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어떻게.”
결혼 축하연 때 길을 잃었을 때 만났던 여인이었다. 자신과 같은 밝은 금빛 머리칼과 연녹색 눈. 미소가 어린 입술까지. 모두 그녀가 기억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죽었다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엘가가 왜 죽었는지 아느냐?”
뒤에서 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가는 마법을 부릴 수 있었지. 아주 무서운 힘이었어. 그 피는 엘가뿐만 아니라 세셔 왕실의 직계혈통인 여자들에게도 흘렀지. 모두가 저주받은 이들이었다.”
“그럼, 미쳤거나 몹쓸 병에 걸렸다는 건…….”
“병이지. 당연히 아주 몹쓸 병이란다, 그건. 그 아이는 자신과 똑같은 분신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나도 여러 번 당했지. 그런 아이가 여왕이 되었다면 아마 이 나라는 망했을 거야. 다행히 내가 있었으니 이 왕국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거다.”
뒤에서 들려오는 말들에 리비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차마 돌아서 왕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밤도 늦었고, 보리스는 제 처소에서 기다리도록 할게요.”
“원한다면 그렇게 하려무나.”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왕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고, 리비는 서둘러 예를 표한 뒤 왕의 내실을 벗어났다. 시종이 열어 주는 문밖으로 막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
순간 주변이 빙글 도는 감각에 리비는 벽을 짚고 섰다.
“괜찮으십니까?”
시종이 묻는 말에 리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서둘러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고픈 마음뿐이었다. 전신을 휘감는 불쾌한 기운으로부터 달아나려는 의지 하나로, 리비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 두 발. 복도 양옆을 밝히는 촛불이 번져 한 개가 두 개로, 두 개가 또 셋으로 나뉘어 보이기 시작했다. 무거운 진흙 속에 빠진 것처럼 발을 떼기가 점점 버거워졌다.
“아…….”
몸이 왜 이럴까. 리비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간신히 초점을 잡으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더욱 깜박이는 속도는 현저히 느려져만 갔다.
“보리……스.”
리비는 비틀거리며 걸어 나가다 보리스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이제는 벽에 기대는 것이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몸을 가눌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하……아.”
가쁜 숨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털썩.
리비는 맥없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풀썩 옆으로 몸이 넘어가고 말았다.
***
“…….”
리비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 눈을 떴다. 그녀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여 주변을 살펴보려 애썼다.
시야에 잡힌 건 하얀색, 하얀색, 또 하얀색.
온통 하얀색으로 꾸며진 방 안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리비는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려 애썼지만 극심한 두통만 몰려올 뿐이었다.
몸을 일으키려 해봤지만 전신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제 맘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하아.”
겨우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인 것으로 온몸의 기운을 모조리 써버린 것만 같았다. 리비는 가까스로 몸을 뒤척인 끝에 겨우 상반신만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여기는…….”
리비는 일어나서 바라본 방 안의 풍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온통 흰 빛인 방에 눈이 다 시릴 정도였다.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를 비롯해 모든 집기들은 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꿈인가 싶어 그녀는 급히 볼을 꼬집어 보았다. 생생하게 전해지는 아픔이 현실임을 일러 주었다. 볼을 꼬집던 손을 툭 내려놓은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이게 뭐지?”
손 아래 펄럭거리고 있는 새하얀 소맷자락이 낯설었다.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리비는 자기가 입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소맷자락만 달라진 게 아니라 옷 자체가 다른 것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금사로 수를 놓은 그 옷은 어쩐지 낯이 익었다.
“이건…….”
자신의 결혼식……날이 될 뻔한 날, 그러니까 레제트 공작 부인이 되기 위해 정성껏 치장하던 날 입었던 바로 그 결혼식 예복이었다.
“이게 대체.”
그 옷은 분명히 보리스의 손 아래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제 목에 감겨 있는, 두 줄짜리 기다란 진주 목걸이는 레제트 공작이 보내온 예물이었다.
줄이 뜯어져 이 목걸이에 달린 진주가 사방으로 흩어지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짤랑.
귓불에서 찰랑거리는 느낌에 리비는 재빨리 손을 귓가로 가져갔다. 귀고리를 떼어 낸 리비는 다시 놀라고 말았다.
그뿐인가. 머리에 얹어진 것은 그날 쓰고 있던 보석관이었다. 리비가 머리에서 그것을 끌어 내려 살펴보았다. 몇 번을 다시 봐도 그 장신구들은 결혼식 당일에 리비가 걸치고 입었던 것들이었다.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다. 보리스가 벗겨 내어 사방으로 튕겨 나가던 보석들과, 그것을 줍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마을 사람들의 모습도.
“어떻게…… 이것들이?”
마치 시간을 그때로 되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날과 같은 차림새가 되었다. 리비가 혼란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역시, 기대한 대로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리비는 휙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레제트 공작이었다.
“어, 어떻게.”
“상상한 그대로 아름다워.”
레제트 공작은 입이 찢어져라 웃는 얼굴로 리비를 향해 한 발씩 다가왔다.
“마치…… 엘가 왕녀가 살아 돌아온 것 같군.”
“어머니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
리비가 쏘아붙이자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만족스러운 듯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그래, 이렇게 반항적이어야 길들이는 맛이 있지. 안 그래?”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아니, 내가 왜 여기에.”
리비는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머릿속이 마구 뒤엉켜 버렸다. 게다가 아직도 머릿속은 멍하고, 어지럽기까지 했다. 격하게 몸을 움직일수록 그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저런, 저런. 그렇게 갑자기 움직이면 더 어지러울 텐데.”
“…….”
레제트 공작이 그녀의 몸 상태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자, 리비는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라고?”
“놀란 얼굴도 사랑스러워. 어쩜 이렇게 어미를 빼닮은 거지?”
끼익.
레제트 공작이 침대의 귀퉁이에 걸터앉자 귓가를 긁어내리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소음이 뒤따랐다.
“저리 가.”
리비는 저 기분 나쁜 얼굴로 웃고 있는 남자가 자신과 같은 침대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기겁하며 몸을 물렸다. 여차하면 발로 그를 차버릴 작정이었다.
철컹.
리비는 레제트 공작을 향해 내뻗는 발이 묵직하게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깨닫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기분 나쁜 이물감이 발목 언저리에서 느껴졌다.
“…….”
리비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제 발에 굳건히 채워진 족쇄를 내려다보았다. 가느다란 발목에 채워진 묵직한 쇠고랑과 연결된 커다란 쇠뭉치까지.
경악에 찬 그녀의 얼굴을 보며 레제트 공작은 한층 더 깊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때, 마음에 드나?”
“이, 이게 뭐야. 당장 풀어. 보리스, 보리스…….”
리비는 미친 듯이 손을 뻗어 제 발에 묶인 쇠고랑을 풀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그녀의 힘으로 발목에 단단히 채워진 것을 풀어낼 도리란 없었다.
“아아, 그렇게 움직이면 예쁜 피부가 상하잖나. 넌 귀중한 거래품인데 말이야. 난 내 것이 다치는 건 원하지 않아. 내 소장품은 언제나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야 하거든.”
“뭐라고?”
리비는 알 수 없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레제트 공작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넌 내 소유물이라고.”
레제트 공작은 누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내게 팔렸단 말이지. 너의 소유권을 온전히 양도해 주는 대가로 나는 내 성 몇 채를 넘겼다. 그러니 너는 그 값을 해야지?”
“누구 맘대로…… 날 사고팔아?”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리비는 웃음이 나오려 했다.
“지엄한 국왕의 명이지. 여기, 왕의 인장이 보이지?”
레제트 공작은 품에서 웬 종이를 꺼내 리비의 앞에 대고 흔들어 댔다. 의심할 바 없는, 국왕의 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믿기나? 내가 네 주인임을 왕이 인정했단 말이다.”
“……거짓말.”
리비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다가, 문득 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가 엘가를 닮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
리비의 충격으로 굳은 얼굴을 보던 레제트 공작이 비열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왜, 뭐가 생각난 건가? 이제야 이 거래가 이해되나 보군.”
즐거운 듯 말하는 레제트 공작을 보던 리비의 눈이 번쩍 돌아왔다.
“보리스…… 보리스.”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보리스의 얼굴과 이름이었다.
“네 남편을 찾나? 아마 지금쯤 지하 감옥 깊숙이 처박혀 있을 텐데.”
“뭐라고?”
손톱이 다 까이도록 쇠고랑을 쥐어뜯던 리비의 손짓이 그대로 멎었다.
“괴물이라 그런가, 웬만한 양으로는 잠들지 않던 모양인데. 사랑스러운 아내를 위해서라면 독이라도 삼키겠던데. 쯧, 참으로 지극한 사랑이야.”
“보리스에게…… 무슨 짓을 했어?”
“아아, 그렇게 화낼 필요 없어. 네 남편은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게 고이 모셔 놨으니까. 그게 거래의 조건이거든.”
“거래의 조건?”
“나는 이 하얀 새를 갖고, 국왕은 그놈을 갖기로 말이지. 아, 물론 이번에 점령한 성 몇 개도 넘기기로 했지. 넌 내게 팔린 거야.”
“뭐……?”
리비는 제 귀를 의심했다. 방금 들은 소리를 선뜻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가 뭘 해?”
“국왕이 오래전부터 탐하던 것. 칼리니 말이지. 그 전설 속 까마귀.”
리비는 전신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아니야, 보리스, 보리스는.”
“이번에 그 날개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건 어려운 모양이야. 어떻게 하면 그 날개를 뽑을 수 있지, 응?”
레제트 공작이 혀로 입술 주변을 핥으며 리비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얼굴을 움켜잡아 들어 올렸다.
“말해 봐, 그 날개를 구경하려면…… 윽!”
손을 깨물린 레제트 공작이 단번에 리비를 내동댕이쳤다. 침대에 내던져진 리비가 입가에 묻은 피를 닦는 사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든 레제트 공작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것.”
레제트 공작의 눈빛이 휙 돌변했다. 좀 전까지는 끈적하게 그녀를 훑던 눈빛이 기괴한 광기를 품고 있었다.
“이 앙큼한 년. 어미 대신 귀여워해 주려고 했더니 감히 주인을 물어?”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리비의 얼굴이 돌아갔다. 리비는 눈앞이 번쩍거리는 고통이 일었지만 입술을 사리문 채 견뎌 냈다.
“호오, 이래도 소리를 참을 테냐?”
레제트 공작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리비의 목을 움켜쥐었다.
“넌 내…… 주인이 아냐. 이거 놔. 이것…….”
더 해보라는 듯, 리비의 목을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큭, 크윽.”
양손에 목이 졸린 리비가 애처로운 숨을 토해 냈다.
“그래, 이편이 훨씬 낫구나, 넌 말보다는 이렇게 우는 편이 낫겠어.”
레제트 공작의 눈이 희번덕거린 순간이었다.
“아악!”
리비의 손에 고간을 쥐어뜯긴 레제트 공작이 제 다리 사이를 붙든 채 침대 위를 나뒹굴었다.
퍽.
리비는 쇠고랑을 차지 않은 발을 뻗어 다시 한번 공작의 고간을 후려쳤다. 레제트 공작의 숨넘어가는 비명이 이어졌고, 그사이 리비는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쿵.
발목에 감긴 쇠뭉치가 바닥을 울렸다.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들었으나 리비는 다리를 질질 끌며 문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도망은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문이 활짝 열리며 무장한 기사들이 리비를 붙잡아 바닥으로 꿇어앉힌 것이다.
“놔, 이 변태 새끼…… 보리스의 털끝 하나라도 다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리비는 여전히 아픔에 몸부림치는 레제트 공작을 보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 계집의…… 입을 닥치게 해. 으윽.”
레제트 공작의 말에 기사가 고개를 숙이더니 잠시 후, 리비의 눈앞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후두부에 가해진 충격에 리비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는 어려웠다.
“보리스…….”
리비는 눈을 감으면서도 그를 떠올렸다. 보리스, 보리스. 끝없이 이름을 되뇌며, 그의 안위만을 바랐다.
똑, 똑.
물방울이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에 보리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
물인 줄 알았던 것은 물이 아니라 제 몸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터진 머리 사이로 피가 흘러내려 까마귀 깃 같은 머리칼을 더욱 짙은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끼익.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 발, 한 발, 제게로 다가오는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신경도 한층 예민해졌다.
이보다 더 먼 소리여도 그는 누구보다 잘 들을 수 있었다. 아니, 들리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더 멀리 볼 수 있고 남들보다 더 멀리 있는 것을 냄새 맡는 것도 가능했다.
그건 보리스에게 있어 지나치게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하지 않은 건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들어 제 팔과 다리를 쳐다보았다. 두 팔과 다리 모두 족쇄에 묶여 있었다.
족쇄에 연결된 기다란 쇠사슬이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는 데다가, 발에는 아이 머리통만 한 크기의 쇠공도 연결되어 있었다.
도망이라고는 칠 수 없는 완벽한 포박 상태였다.
“…….”
보리스는 고개를 더 들어 올려 드높이 걸려 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쇠창살 너머로 하얀 달이 걸린 밤하늘이 보였다.
꾸덕꾸덕하게 굳은 피가 눈가에 고여 달은 마치 피에 물든 것 같았다. 원래는 흰색인데, 리비의 머리에 씌워 준 장미 화관처럼 그렇게…….
처음 이곳에 묶인 채 보았을 때보다 상당히 서쪽으로 기운 것을 보니 시간도 꽤나 흘렀음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뚜벅뚜벅.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는 그를 이곳에 가둔 사람임이 분명했다.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발소리의 주인은 정확히 그의 앞에 와서야 멈추었다. 보리스는 제 앞에 서 있는 신발을 내려다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괴물이어도 피는 붉은색이군.”
한참이 지나서야 발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뭐, 네놈 머리 색처럼 거무죽죽한 빛을 띨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남자는 바닥에 고인 핏자국이 발에 닿자 꽤나 불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봐야 괴물은 괴물이지. 피가 붉다고 네놈이 사람인 척하는 건 역겹거든.”
신랄하게 이어지는 말에도 보리스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괴물이면 어떻고, 사람이면 어떤가. 그에게 처음부터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리비는?”
짧게 흘러나온 질문에 발의 주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괴물이라도 제 부인을 챙기려는 마음 하나는 가상하군그래.”
남자의 껄껄 울려 퍼지던 웃음이 멎었다.
“아무렴, 잘 챙겼고말고. 내 조카인데 말이지, 내가 해칠까 봐 그러나?”
보리스는 그 말에 천천히 축 처진 고개를 들어 올렸다. 피가 칠갑된 시야에 잡힌 건 안드로스 왕이었다.
“아주 안전히,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는 곳에 데려다주었다. 아마 그곳에서 마음껏 이쁨받고 사랑받으며 살 거야. 내 장담하지.”
“……어디 있어.”
보리스의 목소리가 살벌하게 가라앉았다.
“부인이 행복하길 바라나? 그렇다면 잊어. 그러는 게 좋을 거야. ……짐승 주제에 말을 듣지 않는군.”
안드로스가 손뼉을 딱, 맞부딪치자 간수가 다가와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채찍의 끝에는 뾰족하게 철로 만든 가시가 돋아난 장식이 달려 있었다.
한 번만 휘둘러도 생살이 찢어지게끔 만들어진, 고문 기구라기보다는 거의 무기에 가까운 생김새였다.
안드로스는 채찍을 잡아 손에 감아 그 질김을 시험해 보는 듯 팽팽하게 당겨 보았다. 그리고 채찍 끝에 달린 가시 달린 공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려 보며 얼마나 날카로운지, 제대로 살은 찢을 수 있는지 살피는 눈빛이 예리했다. 그가 그것을 휘둘러 무엇을 할지 알면서도, 보리스는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갇힌 시간 동안, 그가 바란 것은 오로지 하나.
리비의 안전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진다 해도 견뎌 낼 수 있었다. 저런 채찍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촥.
점검을 끝낸 안드로스 왕이 재빨리 채찍을 휘둘렀다.
짜악.
정확히 보리스의 몸 한가운데를 가격한 채찍의 자국을 따라, 뱀이 기어가는 듯한 자국이 만들어졌다. 채찍의 끝에 달린 쇠공이 몸을 긁어내리면서 찢어 낸 살점 사이로 붉은 선혈이 뚝뚝 흘러내렸다.
“아주 아름다운 광경이야.”
안드로스는 자신이 만들어 낸 상처가 흡족한 듯 연신 미소 지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채찍을 휘둘렀다.
짜악.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기다란 자국이 생겼다. 마찬가지로 피가 철철 흘러내려 바닥에 후드득 떨어지자 왕의 얼굴에는 희열 섞인 미소가 맺혔다.
“이 정도로는 꿈쩍도 안 하는군.”
짝, 짜악, 짝.
왕은 연달아 채찍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보리스의 몸에는 뱀이 기어간 것 같은 징그러운 자국이 하나둘 늘어만 갔다. 휙, 휙 허공을 가르는 채찍의 소리 뒤에 따르는 것은 살이 찢어지는 소리였다.
보리스는 입술 한번 씹지 않고 그 모든 걸 견뎌 냈다.
“……역시 괴물이라 독하군.”
툭.
왕이 바닥으로 채찍을 떨구었다. 모진 채찍질을 당한 건 보리스이건만 되레 숨이 차 헐떡거리는 건 안드로스였다.
“……리비는.”
왕이 채찍을 떨구는 것을 본 보리스가 무감한 얼굴로 말했다.
“네놈이 아내를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어디 있어.”
“하, 괴물이라 그런지 이런 것쯤에는 고통도 느끼지 않는 모양이야. 내가 너를 찾느라 그간 밤을 지새우며 불안에 떤 걸 생각하면…….”
보리스에게 바짝 다가선 왕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설 속 까마귀니 뭐니, 다 지어낸 얘기고 허무맹랑한 잡소리일 뿐이지. 왕국의 안위에 훼방이 되는 건 다 없애고 봐야 해.”
“…….”
“내 누이처럼 말이지.”
입을 길게 찢으며 웃은 안드로스가 낄낄거렸다.
“그래도 나는 참 인자한 왕이야. 안 그런가? 내 누이도, 너도, 죽이지 않을 거거든.”
왕이 시끄럽게 말을 이어 갔지만 보리스의 입에서는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왕은 그저 홀로 앞으로 맞이할 세셔 왕국의 밝은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떠들어 댔다.
“네가 그 척박한 땅을 부지런히 되살려 준 덕분에, 나는 한층 기름진 땅을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되었지. 그 점에서는 네 공을 치하하고 싶군.”
안드로스는 즐거운 듯 말을 이어 갔다.
“북부에서 네가 세력을 키운 뒤로 내가 얼마나 불안에 떨었는지 아나? 너는 언제든 북부에서부터 밀고 내려올 심산이었겠지. 난 다 알고 있었어.”
안드로스는 험악하게 구긴 얼굴을 도로 펴며 말했다.
“네 부인은 새로운 남편, 아니 원래 남편에게로 돌아갈 거야.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가고, 네가 발전시킨 북부는 고맙게도 내가 잘 다스려 주마.”
안드로스는 한없이 인자한 목소리로 보리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랑 종종 즐거운 시간을 갖자고, 에드라크 공.”
“…….”
“이곳은 자네만을 위한 공간이야. 언제든 나를 즐겁게 해주어야지. 봐, 특별히 제작한 기구들을.”
안드로스가 가리킨 곳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을 저리게 할 만한 고문 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안쪽에 빼곡한 가시가 돋아난 철의 여인이라든가, 온몸을 잡아 늘여 고통을 가하는 것 등 온갖 고문 기구들이 살벌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회복도 빠르고 고통에도 강한 몸이니 여러 가지를 해볼 수 있겠어.”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듯, 안드로스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지금쯤 네 아내는 더없이 안전하고 행복한 꿈의 나라로 가고 있을 거야. 레제트 공작이 아마 평생 끼고 예뻐해 줄 테지.”
철컹. 내내 반응 없던 보리스가 쇠사슬이 팽팽히 당겨지도록 몸을 뒤틀자 왕은 찔끔 놀라 뒤로 물러섰다.
“소용없어. 열 배는 더 강하게 만들어진 철로 만든 것이거든.”
보리스가 팽팽히 쇠사슬을 당긴 채 사나운 눈길로 쳐다보자 안드로스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그러니 푹 쉬도록 해. 내일부터는 이 장난감 채찍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왕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흩뿌리며 감금실을 나섰다.
쿵.
거대한 철문이 닫히고 나자, 방 안은 다시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끼익.
보리스의 팔과 다리에 달린 쇠사슬이 내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보리스는 피에 범벅이 된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쇠창살 사이로 보이는 하얀 달은 위치가 조금 더 기울었다.
보리스는 한 번 깊은숨을 내쉬더니 양손을 결박한 족쇄를 잡아당겼다.
끼긱. 끼기긱.
괴상한 소리와 함께 굵은 쇠사슬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더니 이내 툭, 하며 끊어졌다.
“…….”
양다리에 매달려 있던 쇠사슬도 마저 끊어 낸 보리스가 주저 없이 쇠창살이 쳐진 창문으로 다가섰다.
끼익.
굵은 쇠창살을 쥐자, 잠시 후 쇠창살도 엿가락처럼 구부러졌다. 그것들을 모두 떼어 내 바닥으로 던진 보리스가 뒤로 물러섰다.
펄럭.
잠시 후, 그의 등 뒤로 크고 검은 날개가 우뚝 솟아났다. 하얀 달빛 아래, 보리스는 날개를 펼쳐 날기 시작했다.
***
덜컹.
“아…….”
마차가 크게 흔들리자 리비는 번쩍 눈을 뜨며 정신을 차렸다.
“이제야 정신이 드나 보군.”
내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듯,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리비는 그대로 뻣뻣하게 몸이 굳었다.
여기는 어디지. 그리고 저 목소리는…….
“안심하도록. 죽은 건 아니니까 말이야.”
신경줄을 긁어 먹는 쇳소리 같은 목소리의 주인은 레제트 공작이었다.
“내가 왜…….”
리비는 몸을 벌떡 일으키다 말고 낮은 신음을 흘리며 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으…….”
잇새로 흘러나온 신음에는 고통이 묻어 있었다.
“저런, 갑자기 움직이니 그렇지.”
레제트 공작이 혀를 쯧, 차며 발을 까닥거렸다.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몹시 괴로울걸.”
“무슨, 무슨 짓을 한 거야.”
리비는 사나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목소리와 달리 몸에는 거의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커다란 돌에 눌린 느낌이었다.
리비는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려 애썼다. 그런 그녀를 레제트 공작은 마치 장난감을 바라보듯 즐겁기 그지없는 얼굴로 지켜보았다.
“으, 윽.”
리비가 소름 끼치는 미소를 띠고 그녀를 바라보는 레제트 공작을 보며 다시 몸을 뒤척였을 때였다.
“악!”
리비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마차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마차 내부를 울렸다.
“으…….”
리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레제트 공작의 얼굴은 한층 더 괴기스러웠다. 그는 리비의 고통을 더욱 즐기는 사람처럼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리비가 괴로워하면 할수록 더욱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대체 무슨…… 무슨 짓을.”
리비는 바닥에 형편없이 구겨진 채로 레제트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쯧쯧, 혀를 차더니 입을 열었다.
“별거 없어. 그저 마시면 편해지는 약을 좀 먹이라 했지. 아마 온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을 거야.”
레제트 공작의 말마따나 전신이 물에 풀어진 종이처럼 흐물거렸다. 팔다리의 감각도 둔했다. 아마 가시나무 밭에 굴린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얌전히만 있으면 다칠 일 없어. 그저 푹 자도록 해. 그리고 눈을 뜨면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을 테니까.”
“…….”
리비는 충격에 휩싸인 채 자기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려 애썼다.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아서 제대로 상황을 인지하기까진 한참이 걸렸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최악이라는 것은 그녀도 알 수 있었다.
“날,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리비는 다시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그녀가 발버둥 치는 광경을 레제트 공작은 귀엽다는 듯 지켜보았다. 마치 뱀처럼 소름 끼치는 눈동자였다.
“걱정 마. 내가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게 곱게 내 영지로 데려갈 테니까.”
“영지……?”
레제트 공작의 말에 리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지금…… 레제트 영지로 가고 있다는 뜻이야?”
놀라는 리비를 보며 레제트 공작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래, 내 영지에 가면 잔뜩 귀여워해 주도록 하지. 그곳에는 모든 게 다 갖춰져 있으니까. 수도보다, 그 빌어먹을 에드라크 영지보다 더 좋을 거야. 내 장담하지.”
“헛소리하지 마. 누가 그런 역겨운 곳에 간다는 거야? 꿈도 꾸지 마. 당장 세워, 당장…… 아악!”
리비는 말하다 말고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부츠를 신은 레제트 공작의 발이 사정없이 리비의 가슴 언저리를 밟아 대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약을 먹여 놨어도 이건 아플 테지. 아직 교육이 덜 되어서 그런가 본데…… 이제 레제트로 가면 주인의 말을 잘 듣는 법을 알게 될 거야. 내가 확실히 교육시켜 줄 테니까.”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 남자의 얼굴에는 깊은 희열이 묻어났다. 무자비하게 놀리는 발 아래서, 리비는 가까스로 입술을 깨문 채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버텼다.
“호오, 제법 강단이 있군. 길들이는 재미가 있겠어.”
퍽, 퍽.
리비를 짓밟는 발의 힘은 점점 더 세졌다. 그녀는 고통에 몸을 뒤틀었지만 여전히 입술이 터지도록 깨문 채 소리를 참았다.
‘감각이 돌아오고 있어.’
레제트 공작의 말처럼 처음에 비해 확연히 고통이 느껴졌다. 차라리 이것이 낫다. 어떻게든 약에서 깨어날 수만 있다면…….
쾅.
매끄럽게 내달리던 마차가 무언가에 부딪힌 듯 큰 충격과 함께 별안간 멈춰 섰다.
“…….”
벼락에라도 얻어맞은 듯 크게 흔들리는 마차에 리비는 겁을 집어먹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서는 바람에 앉아 있던 레제트 공작이 중심을 잃고 반대편 좌석에 처박히고 말았다.
“뭐야!”
꼴사납게 좌석 위에 구겨져 있던 레제트 공작이 몸을 홱 일으키며 외쳤다. 말끔하게 빗어넘겼던 머리가 흐트러지고 비록 쿠션 좋은 의자였지만 얼굴을 갖다 박는 바람에 코도 시뻘겋게 된 것이 보였다.
“말 하나 제대로 못 몬단 말이냐! 돌아가면 다 목을 쳐버릴…….”
마부석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순간이었다.
쿵.
마차는 아까보다 조금 더 크게 울렸다. 뒤이어 쿵, 쿵, 연이어 들려오는 소리와 진동의 근원지는 의심할 것도 없이 마차의 천장 쪽이었다.
“이게 무슨…….”
레제트 공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위를 바라보았다.
“으악!”
밖도 동시에 소란스러워졌다. 레제트 공작은 벌떡 일어나 덧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마차를 향해 활을 겨눈 광경에 레제트 공작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이것들이 미쳤…….”
“공작님! 지붕, 지붕 위에!”
활을 겨눈 이들의 시선은 레제트 공작의 위쪽, 마차의 지붕을 향해 있었다.
“괴, 괴물이!”
기사들의 얼굴은 너나 할 것 없이 하얗게 질린 경악스러운 표정이었다.
“지붕이 왜…… 아아악!”
마차는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마차의 몸체와 연결된 지붕이 귀퉁이에서부터 쩌적, 소리를 내며 분리되자 레제트 공작은 기겁하고 말았다. 반대로 리비의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보리스.”
의심할 것도 없이 그가 보리스라는 걸, 리비는 알 수 있었다.
마차 밖에서는 공작이 탄 마차 위에 내려앉은 형체를 목격한 이들의 비명이 이어졌다.
마차 위에 둥지를 틀 듯 내려앉은 형체는 엄연한 사람의 몸체에 시커먼 날개를 단 괴물, 그 자체였다.
마차 지붕 위로 바짝 몸을 낮춘 보리스는 주변의 비명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를 뒤흔들어 지붕을 뜯어내고 있었다.
“저, 저놈이.”
레제트 공작의 마차는 몸통 전체가 강철로 둘러진 것이었다. 웬만한 외부의 공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만큼 강하게 만들어졌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마치 작은 요새가 움직이는 것 같은 위용을 자랑했다.
그럼에도 마차는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다름 아닌 지붕 위로 내려앉은 괴물의 가공할 만한 힘 때문이었다.
날개가 달린 인간의 등장 자체도 놀라웠지만 그 괴물의 위력을 눈으로 직접 본 기사와 병사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도 우왕좌왕하기 바빴다.
드득.
강철을 몇 겹이나 쌓아 만든 두꺼운 천장이 종이 구겨지듯 찌그러졌다.
“보리스!”
벌어진 틈새로 보리스와 눈이 마주친 리비가 환희에 찬 비명을 질렀다.
리비는 물이 동난 호숫가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물고기처럼 몸을 뒤챘다. 레제트 공작에게 짓밟힌 몸은 통증과 더불어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뭐 하는 거야! 저놈을 쏴! 떨어뜨려!”
레제트 공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가 일제히 놓였다.
휘잉.
동시에 쏘아 올린 화살이 허공을 가르자 푸드덕,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 지붕을 내리누르고 있던 힘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이런 괴물!”
레제트 공작은 혼비백산이 되어 마차의 덧창을 닫았다.
“출발해! 놈이 못 앉을 정도로 빨리 달려!”
레제트 공작이 소리를 지르자 멈춰 섰던 마차가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리비는 한쪽으로 몸이 쏠리면서 좌석 아래에 머리를 쿵, 내리박았다.
“더 빨리, 더!”
레제트 공작은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손잡이를 잡은 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때였다.
쾅!
아까보다 더 큰 소리와 함께 지붕 위로 무언가 내려앉았다.
리비와 레제트 공작의 고개가 동시에 들어 올려졌다.
“히익.”
레제트 공작은 벌어진 틈새로 보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틈 너머로 리비를 발견한 보리스가 눈을 크게 치떴다.
“보리스…….”
마차 바닥에 구겨진 채 힘겹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 본 보리스의 눈에 광기 어린 빛이 어렸다.
두드득.
지붕을 고정한 강철판이 그가 크게 몸을 흔들자 접합부가 다시금 뜯겨 나가기 시작했다.
쿵, 쿠웅.
보리스는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가 다시 주저앉으며 마차를 크게 뒤흔들었다.
“보리스, 위험해!”
리비는 죽어라고 소리를 내질렀다. 벌어진 접합부 너머로, 화살이 휙휙 지나쳐 가는 것이 보였다. 이미 몇 개는 그의 날개에 꽂혀 있었으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마차를 부수는 데에만 집중했다.
“저 괴물! 꿈쩍도 안 해!”
화살비를 퍼붓고 있던 기사들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온몸에 화살을 맞고도 악착같이 공작의 마차에 붙어 있는 모습에 공격을 하는 쪽이 되레 질리는 판이었다.
“으우, 으아아아!”
두꺼운 강철로 만든 지붕이 그의 손아래 결국 완전히 뜯겨 나가자, 레제트 공작은 당장이라도 실신할 것처럼 비명을 질러 댔다.
쿵.
“으아아악!”
보리스가 뜯어낸 강철 지붕이 굉음을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자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미처 강철 더미를 피하지 못한 이들이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대열이 더욱 흐트러졌다.
리비는 보리스를 보자 죽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까까지 꼼짝도 할 수 없던 팔은 겨우 제 몸을 지탱할 정도까지는 회복이 되었다.
“보리스!”
리비는 두 팔을 벌려 보리스를 향해 내밀었다. 안으로 훌쩍 뛰어든 보리스가 리비를 안아 들었다.
“보리스, 보리스으…….”
리비는 그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등을 두드려 진정시킨 보리스가 레제트 공작 쪽을 한번 노려본 뒤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공중으로 솟구쳐 오른 보리스의 품에 안겨 리비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꼭 잡아.”
보리스는 리비를 보며 웃어 보였다. 리비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다가 보리스의 날개 너머 비죽이 솟아오른 것들을 보고는 말문을 잃고 말았다.
“보리스…… 괜찮아?”
보리스의 날개에 꽂힌 수많은 화살들을 보는 눈이 가늘게 떨렸다.
“나, 고슴도치 같지?”
그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리비는 기가 막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날아도 되는 거야?”
화살이 꽂힌 자리에서는 연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꾸덕꾸덕하게 흘러내린 피가 고여 굳은 자리, 새로운 피가 흘러내린 자리가 검은 날개깃에 뒤엉킨 것을 본 리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난 괜찮아.”
보리스가 웃으며 정면을 가리켰다.
“……!”
리비는 저 멀리, 하늘을 새카맣게 덮은 까마귀 떼를 발견했다.
까마귀 떼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지상에 있는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을 향해 낙하하기 시작했다.
“으악!”
“이건 또 뭐야!”
면갑 사이로 파고든 까마귀들이 기사들의 눈을 공격했다.
“악! 아악!”
검을 휘둘러 쫓으려 했으나 까마귀들은 유연하게 그들의 공격을 피하며 다시 열심히 눈을 쪼아 냈다. 솜씨 좋게 기사들의 눈을 파낸 까마귀들은 까악, 크게 울며 다른 사냥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러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어 공격하는 통해 제아무리 날고뛰는 기사들이라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리비는 새카맣게 뒤덮인 지상을 내려다보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리 가! 저리 가아!”
레제트 공작은 마구 팔을 내저어 제게 달려드는 까마귀들을 쫓으려 했다. 마차 위로 옹기종기 모여앉은 까마귀들이 곧 먹어 치울 사냥감을 호시탐탐 내려다보다가 막 날개깃을 펼쳤을 때였다.
콰앙.
포탄이 발포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기세에 놀란 까마귀들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보리스…… 저기 봐.”
리비가 떨리는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왕국의 깃발을 기수로 달려오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보였다.
“왕이…… 왕이 보낸 거야. 그렇지?”
“단단히 잡아.”
보리스는 더 말하지 않고 날개를 크게 휘저어 고도를 높였다. 하지만 날개와 몸통에 수십 개의 화살을 맞고도 이전과 똑같이 날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확연히 느려진 속도를 체감한 리비가 그의 몸을 더욱 꼭 끌어안았을 때였다.
푹.
“…….”
불길한 소리와 함께 보리스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리비의 눈에 큰 날개를 단번에 통과한 작살이 눈에 들어왔다.
“보리……스. 보리…….”
시선을 내리자 두 번째 작살을 앉히는 왕국군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 마, 하지 마!”
리비는 기겁하며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날개에 커다란 작살이 꽂힌 채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면서도 리비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보리스의 날개를 관통한 작살이 위태롭게 덜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보리스는 손을 내려 작살의 촉 바로 아래를 손으로 쥐더니 그대로 쑥 뽑아냈다.
작살이 뽑힌 자리는 뻥 뚫려 있었고, 그 새로 붉은 피가 툭툭 떨어져 허공으로 흩어지는 광경을 리비는 멍한 눈으로 응시했다.
사실 저 날개 상태로 공중에 떠 있는 것이 더 신기할 지경이었다. 무리하는 것을 넘어 한계에 다다라 있다는 것을, 리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그에게 짐 덩어리일 뿐이라는 것을.
“보리스, 나를 보내.”
“…….”
리비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보리스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보내라고.”
현저히 무거워진 날개였다. 고도를 더 높이기는커녕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느리게 나는 새는 그만큼 표적이 되기도 좋다.
지상에서는 여전히 까마귀 떼와 기사들의 혈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레제트 공작을 둘러싼 기사들이 사방으로 검을 휘두르며 그를 비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레제트 공작은 안 그래도 작은 몸을 더욱 바싹 웅크린 채 제 몸을 보호하느라 여념 없었다.
문제는 왕국군이었다. 무장을 한 채 달려온 이들은 날아드는 까마귀들을 쳐내며 질주해 오더니 성에서부터 끌고 온 원거리 무기들을 이용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휙.
보리스는 허공으로 날아드는 포탄과 작살을 차례로 피했다. 그러느라 점점 더 힘을 소모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리비를 안은 채로는 그 어떤 공격도 불가했다.
“날 보내, 응? 그리고 얼른 도망가. 저들이 노리는 건 너야. 나는 어떻게든 살릴 테지만 너는…….”
리비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다시 한번 날개를 크게 퍼덕였다. 그래 봐야 잘 올라가지도 않는 고도 탓에 자신을 겨누는 투석기로부터 멀어지기란 힘든 일이었다.
“보리스…….”
리비는 다시 한번 울며 애원했다. 온몸에 화살을 꽂은 채 피를 흘려 대는 그를 더 이상은 보기 힘들었다. 차라리 자신이 잡혀가고, 보리스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것이 낫다. 이대로는, 이대로는 도저히…….
“저들은 널 죽일 거야. 네게 짐이 되는 건 싫어. 차라리 나를 보내고…….”
“나더러, 널 보내라고?”
“…….”
보리스가 살벌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늘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보랏빛 눈에는 붉은 기가 돌고 있었다.
지상은 까마귀 떼가 흘린 피와, 까마귀 떼에게 공격받은 기사들이 흘린 피로 아비규환이었다.
“그럴 순 없어, 리비.”
그는 턱에 바짝 힘을 준 채로 날아올랐다. 전이라면 가볍게 날아올랐을 거리를 지금은 그 반에 이르지 못했음에도 힘겨운 기색이 가득했다.
날갯짓은 점점 둔해지고, 무거워졌다. 그보다 더 무거운 건 아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자신일 것이라는 생각에 리비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퍽.
다시 날아든 작살이 보리스의 날개 정중앙을 관통하며 몸이 크게 흔들렸다. 보리스가 작살을 뽑으려 손을 뻗었을 때였다.
작살에 길게 달린 줄이 휙 감겨 돌아가기 시작했다.
“안 돼!”
작살에 걸린 물고기를 끌어당기듯, 보리스는 하염없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드득.
“보리스, 그러지 마!”
보리스가 간신히 버티는 와중에 작살에 걸린 날개가 불쾌한 소리를 내며 찢기기 시작했다.
퍼억.
때를 기다렸다는 듯, 나머지 날개에도 작살이 날아와 박혔다. 보리스의 몸은 더욱 크게 흔들렸고, 그는 리비의 몸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아 고정시켜 놓았다.
“보리스, 날 놔.”
리비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무겁게 아래로 가라앉는 보리스의 몸이 사력을 다해 위로 솟구치려던 순간이었다.
퍽.
다시 한번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작살이 날아와 꽂혔다.
아래에서 끌어당기는 것만 총 셋이었다. 세 군데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보리스의 몸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지 마, 하지 마!”
도로 솟구치려는 보리스의 몸을 잡으며 리비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날개로 이만큼 떠 있을 수 있는 자체가 기적이었다.
지상에서는 보리스에게 꿰어 놓은 작살에 달린 줄을 잡아당기는 일이 한창이었다. 바닥에는 학살당한 까마귀 떼의 사체와, 마찬가지로 눈을 공격받은 기사들이 한데 뒤엉켜 신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보리스는 찢어져서 너덜거리는 날개로 리비의 몸을 감싸 안아 떨어질 때의 충격을 막아 주었다.
리비는 온통 새카만 어둠 속에서, 이 밖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들을 떠올리며 벌벌 떨었다.
“보리스, 괜찮아?”
“…….”
“이만 항복하거라. 그러면 네가 그토록 아끼는 반려의 목숨만은 살려 주지.”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레제트 공작이 아닌, 안드로스 왕의 것이었다.
검은 날개가 거둬지고 나자, 리비는 자신과 보리스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선 기사와 병사들을 보았다.
빼곡히 둘러선 이들은 검과 창을 두 사람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도무지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고작 보리스 하나를 상대하기 위한 인원이라기엔 지나치게 거창했다. 그야말로 만반의 준비를 한 셈이다.
리비는 그들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말 위에 올라탄 채 리비와 보리스를 내려다보는 왕과 공작을 보며 그녀는 이를 갈았다.
둘 다 뻔뻔하기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이들이었다. 전쟁 때는 보리스의 덕을 봐놓고 이제 와서 팽하려는 왕이나, 제 어미를 탐하다가 이제는 그 딸을 제 것으로 만들려는 공작이나.
전부 추악하기 이를 데 없다. 처음부터 믿어서는 안 되는 자들이었다. 물론 털끝만큼도 그들을 믿었던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래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결국 덫에 걸려 버렸다. 두 사람은 꼼짝없이 잡혀 버린 상태였다. 리비는 그 허망함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보리스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감당 못 할 고통일 것이다. 생살이 찢겨 나가는데 어느 누군들 아프지 않을까. 설령 그가 ‘괴물’이라 불릴 만큼의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그를 구할 수 있는 자신뿐이었다. 리비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보리스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야만 했다.
“레제트 공작을 견제하지 않았나요?”
리비는 안드로스를 향해 물었다.
“내 확실한 우방을 핍박하면 쓰나.”
안드로스는 끌끌 혀를 차며 웃었다.
“레제트 따위보다야 보리스가 훨씬 전하에겐 위협이 되는 모양이군요.”
리비의 말에 안드로스 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 동생의 딸을 시집보내게 되었으니, 나와 레제트 공작은 이제 한 몸이나 다름없지 않으냐. 그런데 너는 왜 신랑을 놔두고서 거기 있지? 이리 오거라.”
레제트 공작은 입꼬리를 찢어 징그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리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마치 손이 닿기라도 한 것처럼 뒤로 물러났고, 보리스는 그녀를 안아 제 뒤로 감추었다.
“보리스를 보내 줘요.”
리비는 보리스의 팔을 단단히 움켜쥔 채 말했다. 그 말에 보리스는 단단히 몸을 굳히며 리비를 바라보았다.
“보리스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 줘요.”
리비의 침착한 요구에 레제트 공작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안드로스 왕 쪽을 바라보았다.
“그건 네가 하기에 달렸지, 리비.”
왕은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누가 누굴 협박해? 지금 그럴 처지가 못 될 텐데. 그 괴물을 살리고 싶거든 이리 오는 게 좋을 거다.”
레제트 공작은 까마귀 떼에게 습격당해 여기저기 찢어져 꼴이 볼만했다. 그럼에도 거들먹거리는 모양새는 여전했다.
공작이 손짓하자 더 많은 화살이 보리스를 향했다. 창을 들고 있는 이들도 그 거리를 점점 더 좁혀 왔다.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보리스를 먼저 보내 줘요.”
“아직도 정신을 덜 차렸군. 그렇다면 좋아.”
레제트 공작이 이를 부득 갈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피융.
허공에서 날아든 화살이 보리스의 날개에 꽂혔다. 이미 고슴도치처럼 변한 보리스였지만 그는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뭐 하는 짓이야!”
리비가 보리스를 감싸 안으며 바락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레제트 공작이 비열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선택을 잘해야 할 거야. 곱게 이쪽으로 온다면 그놈의 목숨을 살려 준다니까? 나도 험하게 다루고 싶지는 않다고.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언제부터 우방 놀이를 한 것인지, 레제트 공작의 말을 들은 안드로스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나는 왕이고, 네 부군은 남부를 책임지는 공작이지. 약속은 믿어도 될 거다. 내가 세셔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테니까.”
안드로스는 손을 들어 제법 경건한 태도로 맹세의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그러나 리비는 여전히 그들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병사들을 물려 줘요. 보리스가 나갈 수 있게.”
“고집이 세군.”
리비의 말에 레제트 공작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아니면 같이 죽여. 그러면 되잖아?”
리비는 허공에 웃음을 터트렸다. 오기로 한 말이지만 그것도 딱히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둘 중 하나가 죽는다면…….
보리스는 어떻게 살아갈까. 아니면 그가 죽고 내가 산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런 삶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길을 터라.”
결국 왕이 먼저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두 사람을 둘러쌌던 이들이 하나둘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주변은 휑하게 변했다.
“보리스, 일어날 수 있겠어?”
리비가 속삭이자 보리스가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내가 저쪽으로 가는 동안 시간을 벌게. 꼭, 꼭 달아나야 해. 알았지?”
리비가 스르르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탁.
보리스의 손이 리비의 팔을 붙들었다. 피가 흘러내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보리스가 리비를 붙들고 있는 힘은 상당했다. 이마저도 공격을 당해 줄어든 것이라는 사실에 리비는 왈칵 울음이 터지려 했다.
하지만 애써 눈물을 삼킨 채 보리스의 손을 떼어 냈다.
“놔, 보리스. 먼저…… 달아나. 그다음에 네가 날 데리러 오면 되잖아, 응?”
리비는 그에게 간절히 애원했다.
“안 돼.”
보리스는 리비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울컥, 흘러나온 피가 리비의 몸을 다 적실 정도였음에도 그는 리비를 끌어안은 팔을 놓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리비는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날 어떻게 지켜 준다는 거야? 이 꼴을 하고서.”
“…….”
“너는 날 지켜 주지 못해, 절대로. 이대로 버티는 건 우리 둘 다 위험한 짓이 될 거야.”
“리비.”
“그러니 날 보내. 더 이상 위험해지는 건 봐줄 수 없어.”
“…….”
“그래야만 내가 안전해, 보리스.”
리비가 힘주어 말하자 보랏빛 눈이 크게 흔들렸다.
“너와 있으면 내가 위험해. 그러니 나를 놔. 그래야만 나도 살고 너도 살 수 있어.”
리비는 부러 매몰차게 말했다. 보리스의 눈에 슬픔이 가득 깃드는 것도 외면한 채 모진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어디에 있든, 너는 날 찾아올 수 있잖아, 그렇지?”
“…….”
“병사들을 물러나게 해요.”
리비가 크게 외치자 레제트 공작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두 사람을 빙 에워쌌던 인원들이 양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열을 세도록 하지. 그 안에 이쪽으로 리비를 보내지 않는다면, 둘 모두 사이좋게 저 하늘로 보내 주지.”
“보리스를 보내 줘요. 그게 먼저야.”
리비는 보리스를 막아서며 말했다.
“……좋아. 길을 터라.”
병사들이 하나둘 물러나자, 어느덧 리비는 보리스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이걸로 할 수 있는 모든 배려를 다 했다고 보는데. 만약 이러고도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레제트 공작의 눈이 불길하게 빛났다.
“둘 다 사이좋게 지옥 동무로 삼아 주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야? 죽어서도 함께라니.”
레제트 공작의 말에 리비는 몸을 일으켰다. 제 손을 잡는 보리스를 애잔한 눈빛은 그대로였다. 순간, 그의 눈에 어떤 굳은 의지가 빛나는 것이 보였다.
“보리스?”
리비는 문득 든 이상한 예감에 그와 눈을 마주쳤다.
“리비, 내 말 들어.”
그의 목소리가 낮고 또렷해졌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이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
“살아.”
“뭐?”
귓가에 닿은 숨이 이지러졌다.
“반드시 살아.”
“…….”
“만나러 갈게.”
“보리스, 무슨…….”
“반드시 만나러 갈 테니까, 그러니까.”
보리스의 목소리가 둘로 갈라져 들렸다. 리비는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무슨 소리야? 너 지금…….”
“약속, 해줘.”
보리스는 웃었다. 그의 얼굴에 번진 찬연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리비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설마, 너 설마.”
보리스가 그녀를 놔둔 채 스르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안 돼. 안 돼.”
리비는 서둘러 그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그녀를 내려다본 보리스는 몸을 굽혀 리비의 팔을 하나씩 제게서 떼어 냈다. 아무리 다시 매달리려 해봐도 소용없었다.
“안 돼, 보리스. 어딜 가려고.”
사색이 된 그녀를 내려다보며 보리스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가, 리비.”
툭, 보리스는 리비를 밀어냈다. 눈물이 날 만큼 매몰찬 몸짓이었다.
바닥을 벅벅 기어 오는 리비를 또다시 단호하게 떨쳐 낸 보리스가 절벽 끝으로 가서 섰다.
“안 돼, 안…….”
왕국군과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이 다가와 리비를 일으켜 세웠다.
“이거 놔!”
소리 지르며 발버둥 치는 리비를 자신들의 진영으로 끌고 가자, 한번 물러났던 기사들이 다시 보리스를 향해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예요?”
리비가 앞으로 나서자 기다란 창이 그녀의 앞을 막았다.
“보내 준다고 했잖아! 보리스를 놔둬!”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을 이끄는 단장이 앞으로 나섰다. 오래전, 보리스에게 붙들려 가는 치욕을 몸소 겪었던 자였다.
설욕의 기회를 맞이한 기사는 혀를 날름거리며 칼을 뽑아 들었다.
“하지 마!”
보리스는 점점 더 절벽으로 내몰렸다. 아무런 무기도 없이, 그는 오로지 맨몸으로 기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스윽.
바짝 날을 세운 칼이 그의 목에 겨눠졌다. 리비는 굳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보리스! 안 돼, 보리스!”
리비는 미친 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레제트 공작이 손을 까닥이자 기사들 무리들 중 가장 앞에 있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스릉.
척척 걸어서 보리스의 앞까지 다가간 기사는 망설임 없이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높이 치켜든 검의 끝이 밝아 오는 새벽하늘 저 멀리 떠오르는 태양 빛을 받아 날카로운 섬광을 빛냈다.
문득 리비와 눈이 마주친 보리스가 싱긋 웃어 보였다.
‘살아.’
그 순간은 아주 느릿하게 지나갔다.
“안 돼애애애!”
리비는 강한 힘에 포박된 채 온몸을 비틀며 소리 질렀다.
슥.
검이 빛을 뿜어냄과 동시에 보리스의 오른쪽 날개가 잘려 나갔다.
“하지 마! 보리스! 아아악!”
리비를 붙들고 있는 기사가 몸부림치는 리비를 더욱 세게 옥죄었다. 리비는 거의 공중에 매달린 채 양팔과 다리를 휘저어 댔다.
잘린 날개가 절벽 너머로 피를 흩뿌리며 떨어져 내렸다. 시야에서 검은색 날개가 사라지기도 전, 기사가 들어 올린 검이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스윽.
자비 없이 내리쳐진 검이 보리스의 남은 날개 한쪽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아아아아아악!”
깔끔하게 분리된 날개가 마저 절벽 밖으로 떨어진 순간, 리비는 보리스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고 있었다.
마치 방금 잘려 나간 날개가 제 몸의 일부가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보리스, 보리스!”
양 날개를 모두 잘라 낸 기사는 발을 들어 보리스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 어떤 저항도 없이 뒤로 밀린 몸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남은 것은 허공에 흩날리는 검은색 깃털들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