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 5권
14. 신혼(2)
“꺄악!”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건조한 공기와 바람을 타고서 불은 순식간에 번져 갔다.
“침착해요!”
리비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미친 듯 타오르는 불을 보며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작은 불씨가 튀자 오래된 목재로 세워졌던 건물에 금세 불이 옮겨붙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대피시켜요!”
기사들은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불이 난 장소에서 멀리 떨어뜨린 뒤 일사불란하게 진화 작업에 돌입했다.
“병사들을 동원해서 함께 불을 잡아요.”
리비의 침착한 명령에 당황했던 마을의 청년들도 손을 보탰다. 함께 모래와 물을 나르며 진화 작업에 나선 것이다. 막스는 마을 사람들을 통솔해 아이와 부녀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게 한 뒤 병사들을 돕기 시작했다.
미리 방비해 둔 덕인지 불은 예상보다 쉽게 잡혔다. 그렇다고 아예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짓다 만 건물들이 몇 채나 전소했다. 풍차의 날개도 일부분 타서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제 불찰입니다.”
모든 사태가 진정되고 나자, 막스가 리비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용서를 구했다.
“네 잘못이 아냐.”
리비는 고개를 저었다.
“공작 부인.”
보리스가 남겨 두고 간 기사단 중 한 명이 리비에게 다가와 말했다. 화재의 원인을 조사하러 갔다가 돌아온 참이었다.
“왜 갑자기 불이 난 거죠?”
기사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이 끌고 온 남자를 가리켰다.
“도망치려는 걸 붙잡았습니다.”
“네가 불을 지른 건가?”
붙잡혀 온 남자는 말 없이 고개만 숙였다.
“왜?”
리비는 기가 찬 목소리로 물었다.
“돈 때문이죠. 불을 지른 틈을 타서 훔치려 한 모양입니다.”
“어떻게 그런.”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도주민이었다. 정착할 곳을 찾던 이들에게는 에드라크 영지가 크나큰 구원의 밧줄이 되어 주었을 텐데. 리비는 그를 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방화는 큰 죄입니다. 까딱하면 마을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요.”
기사의 말에 리비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 살려 주십시오!”
남자는 바짝 엎드려 애원했다. 그러나 리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마을 전체가 불바다로, 애써 재건해 놓은 마을이 잿더미로 변하고 큰 인명 피해가 날 뻔했다.
“방화는 그 죄가 무거운데.”
리비는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계절에 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버지의 신신당부를 통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재산은 물론이고 주민들의 목숨이 위험했기에 니콜라스는 절대 불을 함부로 다루지 못하도록 했다.
“규정대로 해요. 에드라크 영지에서 추방하고, 다시는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세요.”
원래대로라면 화형까지도 가능한 범죄였지만 아직 도주민들이 완벽하게 정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나치게 잔인한 형벌을 내리는 것은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었다.
“공작 부인!”
남자는 질질 끌려가며 소리를 질렀다. 리비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잔불도 모두 정리되었고, 더 피해는 없습니다. 이만 귀환하시는 게 어떨까요? 여기는 기사들에게 맡기시고요. 오래 성을 비우시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러죠.”
마차를 타기 위해 걸어가던 리비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왜 그러십니까?”
“…….”
리비는 자리에 멈춰 선 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의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뭐지.’
에드라크 영지에 사람이 살기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근방의 영지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 게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다른 영지의 견제도 받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건 하나 더 있었다. 티소 마을과 에드라크 영지에 동시에 불이 난 것이 영 찜찜했다.
이건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마차에 오르십시오.”
기사가 문을 연 채 리비에게 말했고,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인 뒤 마차에 올라탔다.
***
성에 돌아온 뒤에도 리비는 쉴 수 없었다. 아직 보리스가 돌아오지 않았고, 성에는 보리스의 부재를 대신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었다.
보리스가 성을 잠시 비우는 동안 꼼꼼히 일을 지시해 놓기는 했지만 자잘한 것들은 리비가 모두 챙겨야만 했다. 새삼 그의 존재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보고 싶어.’
떨어진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았건만 벌써 수년은 흐른 기분이었다. 늘 꼭 붙어 있다가 뜻하지 않게 떨어져 있게 되니 불안한 마음만 차올랐다.
마을에 간 일은 어떻게 되었을까, 리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불길은 이제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도 불길이 보인 걸 보면 그 피해 규모가 상당했을 텐데, 다친 사람은 없는지 걱정이 되었다. 무엇보다 보리스에겐 아무 일도 없는 건지.
‘금방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혼자 돌아오려면 보리스는 쉽게 성을 오갈 수 있다.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서 단번에 날아오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자기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는 이상, 그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하지만.
리비는 그저 잠시라도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겨우 며칠 떨어져 있는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보리스가 없는 잠깐 동안이 이렇게 불안할 줄은 몰랐다.
꼬박 며칠이 지나갔다. 리비는 티소 마을에서 에드라크 영지에 오기까지 걸린 시간을 셈해 보며 초조하게 그들을 기다렸다.
그때는 리비만 붙잡아 이동하는 것이었기에 시간이 지체될 일이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다를 것이다. 무사한 사람들을 모두 데려와야 하니까.
마을 사람들의 호위는 칼리니 기사단이 맡았다. 까마귀들과 야생 동물이 득실거리는 헤센 숲을 지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리비의 갑갑한 마음과 달리 시간은 빨리 흐르지 않았다.
다시 두 번째의 새벽이 밝아 올 무렵, 첨탑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보리스!”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리비는 창가로 다가갔다. 먼 거리였지만 보리스와 칼리니 기사단이 티소 마을 사람들을 호위해 데리고 온 것이 보였다.
리비는 숨이 차도록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내성 안에서 얌전히 그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외성으로 통하는 문까지 나아가 그를 기다렸다.
도개교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보리스를 위시해 들어오는 기사단의 모습이 보였다.
“보리스, 보리스!”
리비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뛰쳐나갔다. 보리스가 리비를 발견하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모습이 보였다.
리비는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오로지 하나, 보리스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리비가 달려 나오자 보리스는 말을 몰아 더욱 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달리는 말에서 그대로 뛰어내려 리비 앞에 섰다.
“왜 여기까지 나와 있어?”
보리스는 리비의 팔을 붙든 채 말했다. 그는 놀란 얼굴이었다.
“성 밖은 위험해.”
이 안도 성이었다. 내성과 외성을 가르는 경계일 뿐, 어쨌든 성 안이다. 그런데도 그는 여기까지 나온 것만으로도 위험하다며 날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는 자신은 멀리 불이 난 마을에 갔다 오기까지 했으면서.
“네가 보고 싶어서.”
“…….”
겨우 며칠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리비는 미칠 것만 같았다.
“보고 싶어서 그랬어.”
리비는 폴짝 뛰어올라 그의 입에 입술을 마주 댔다. 키가 한참이나 차이 났기 때문에 겨우 그 정도로 그치는 수밖에 없었다.
“올려 줘.”
리비가 툴툴거리자 보리스는 잠시 당황하다가 리비의 몸을 안아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맞춰진 눈높이에 흡족한 듯 리비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리비는 이마와 코끝, 볼과 입술까지 쪽쪽거리는 소리를 내며 연거푸 입을 맞추었다.
“리비…….”
더 말하기 전에 리비는 보리스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가 늘 그랬던 것처럼 깊이 입 맞추기 시작했다.
온갖 그리움이 차올랐었다. 불안했던 마음, 걱정,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게 닿자 한순간에 모조리 녹아내렸다.
찬바람을 맞아 차가웠던 피부를 모조리 데워 버릴 것처럼, 리비는 그에게 매달린 채 입술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정신이 돌아온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리비는 문득 고요해진 주변을 느끼고는 그에게서 얼굴을 떼어 냈다. 그제서야 방금 자신이 한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화륵 붉어졌다.
고작 며칠 떨어져 있었다고 열정적으로 재회의 순간을 만끽하는 부부를 지켜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내, 내려갈래.”
리비는 더듬거리며 보리스의 어깨를 콩콩 내리쳤다. 하지만 바위라도 치는 듯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감아 안은 팔에 들어가는 힘만 더욱 강해졌다.
“…….”
정염으로 짙어진 보리스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그러더니 곧 그녀를 잡아먹을 듯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리비가 소용돌이에 휘말린 나뭇잎처럼 그에게 거세게 끌려갔다.
“하…….”
또다시 격정의 순간이 지나가고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미안, 오래 걸렸지?”
그는 이마를 맞댄 채 중얼거렸다.
“아니야…….”
리비는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애초에 자기가 시작했으니 보리스를 탓할 수도 없었다.
덕분에 기사들이며 티소 마을 사람들까지 전부 영주 부부의 뜨거운 재회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만 했으니, 리비는 얼굴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리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비는 퍼뜩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하이든 백작이었다. 아버지가 왔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보리스에게 집중해 있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아버지!”
리비는 보리스의 품에서 내려와 아버지에게 단숨에 달려가 품에 안겼다.
하이든 백작은 리비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부녀의 재회였다.
“괜찮으신 거예요? 어디 다친 곳은…….”
리비는 정신없이 니콜라스의 모습을 살폈다.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지만 몸 전체에 시커먼 재를 뒤집어쓴 채였다.
얼굴은 시커먼 재로 얼룩덜룩했고, 옷에도 여기저기 그을린 자국들이 보였다. 머리카락의 일부분은 타서 곱슬곱슬 말려 있기까지 했다.
지난밤, 엄청난 화재를 견뎌 낸 티가 역력히 나는 모습이었다.
“나는 괜찮단다.”
하이든 백작은 웃으며 리비를 안심시켰다. 말과 달리 그는 지친 목소리였다.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에 리비는 마음이 아파 왔다.
“살아 있으니 된 거지. 사람들도 모두 무사해.”
니콜라스는 뒤에 선 사람들을 가리켰다. 모두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하나같이 재를 뒤집어써서 새카매진 얼굴에 그을린 옷들을 입고 있었다.
불에 데어 화상을 입은 이들이 몇몇 보이기는 했지만 크게 상태가 나빠 보이진 않았다. 리비를 알아본 티소 마을 주민들이 하나둘 감사의 인사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동생들은요?”
리비는 주민들 틈에서 동생들을 찾다가 물었다. 문득 등골이 싸늘해지는 느낌에 손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마차에 타고 있어. 자고 있을 거란다.”
니콜라스가 뒤편에 세워 둔 마차를 가리켰다. 마차는 한 대가 아닌 여러 대였다.
“노인들과 아이들을 태우고 왔지. 모두 보리스 덕분이란다. 그렇게 빠른 시간에 와준 덕분에.”
리비는 고개를 돌려 다시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자 다시 울음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어쩌다, 어쩌다가 그렇게 큰불이 난 거예요? 항상 조심하셨잖아요.”
“그게…….”
리비의 물음에 하이든 백작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아버지?”
그 반응을 이상스레 여긴 리비가 재차 물으며 아버지의 팔을 붙들었을 때였다.
“리비!”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자 친구들이 리비를 발견하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결혼식에 꽃을 들고서 들러리를 서준 친구들이었다.
“아리사.”
리비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아리사는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가 화들짝 놀라 놓으며 무릎을 굽혔다.
“아,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리비는 당황스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대영주의 부인을 만났으니 예를 갖추는 건 당연했지만 친구로부터 이런 예를 받는 게 영 익숙하지는 않았다.
“그만, 괜찮아.”
덩달아 다른 친구들도 무릎을 꿇으려 하자 리비는 서둘러 그들을 만류했다.
“너는 영주님의 부인이잖아. ”
다른 친구들이 말하자 리비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으니까 그만해.”
“그래도…….”
“하려면 그 검댕이나 좀 씻고 해. 지금 다들 꼴이 말이 아닌걸.”
아리사는 웃으며 손등으로 얼굴을 훔쳐 냈다. 쓱, 묻어 나온 검은 재를 본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리비는 마을 사람들을 차차 둘러본 뒤, 다시 뒤돌아 집사에게 말했다.
“사람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고 먹을 것도 준비해 줘. 씻을 물도…… 의사도 불러오고. 다친 사람들이 치료받을 수 있게.”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집사장의 지시로 하인과 하녀들은 즉시 흩어졌다. 물을 데우고 먹을 것을 가지러 가는 한편, 에드라크성에 마련된 손님용 숙소에 마을 주민들을 안내했다.
“안심하고 푹 쉬세요. 많이들 놀랐을 테니 씻고 먹고, 숨 좀 돌려요. 여기는 안전하니까.”
“이렇게 큰 성은 처음 봐.”
아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요새이기도 하니까. 그냥 예쁘기만 한 곳은 아니야.”
쌓아 올린 돌 하나하나가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지어진 것이었다. 석재로 지어진 것이기에 불에도 강했다. 반면 티소 마을은 대부분 목재로 지어진 건물들이 많아서 피해도 더 컸을 게 뻔했다.
“이만 쉬어. 먼 길을 왔을 테니까.”
“칼리니 기사단의 기사들이 호위해 줘서 오는 길도 편했어. 까마귀 숲도 아주 쉽게 통과하던걸?”
그야 그 까마귀들을 조종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으니까. 리비는 입술을 깨물어 말을 삼켰다.
“절대 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불이 빨리 잡혔어. 신기하게도 까마귀들이 날아왔지 뭐야.”
“까마귀들이?”
“응, 몸이며 날개에 물을 잔뜩 묻혀 와서는 날갯짓을 하더라. 불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됐어. 까마귀는 영리하다던데, 알고서 그런 걸까?”
“…….”
아리사가 신나서 떠드는 소리에 리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슬쩍 고개를 돌려 보리스가 선 곳을 바라보았다.
숲 너머로 보일 정도로 큰불을 일찌감치 잡은 데에는 그런 이유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까마귀는 영리하니까.”
리비는 가까스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사람은 안 다쳤어. 하지만 전부, 전부…….”
아리사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괜찮을 거야, 방법을 찾아보자. 주민들이 모두 무사하니까 뭐든 할 수 있을 거야. 일단 쉬어.”
“고마워, 리비. 네가 아니었으면…… 공작님도.”
아리사는 울먹울먹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떨구더니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리비의 얼굴에도 착잡함이 묻어났다.
불이 난 마을의 이재민들을 일시적으로 보호하고 살 곳을 제공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니다. 다만 그 이후가 문제다.
그들이 살 곳이 모두 불에 타버렸고, 농사를 지어야 할 씨종과 비축해 둔 곡식들이 모두 일시에 사라졌으니 앞으로 살길이 막막할 것이다.
하이든 백작이 양팔에 쌍둥이를 들어 올려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이들은 먼 길을 오느라 지쳤는지 깊게 잠들어 있었다.
“이리 주세요.”
리비가 서둘러 달려가 손을 내밀었으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예전에 네가 알던 무게가 아니야. 팔이 빠져 버릴 거란다.”
하이든 백작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일단 가서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마. 리비, 나중에 보자꾸나.”
리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불에 타버린 마을 걱정보다는 당장 사람들의 휴식이 먼저였다. 그 후의 일은 차차 생각해도 늦지 않다.
“리비, 올라가서 쉬어. 너도 잘 쉬지 못했다고 들었어.”
어느새 다가온 보리스가 말했다. 에드라크 영지에 났던 화재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난 괜찮아.”
리비는 고개를 저었다. 드레스를 움켜쥔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가 성을 비운 며칠간, 내내 가슴을 졸이느라 피로가 쌓일 대로 쌓여 있었지만 쉬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저 보리스의 옆에 있는 것이 좋았다. 멀리 떨어져 편히 지내는 것보다는 그의 옆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숨결을 느끼며 잠드는 것이 행복했다.
그걸 깨닫고 나자 리비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고야 말았다.
또 보리스가 떠나게 된다면.
그는 기사니까, 전쟁이 나면 언제든 성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는 내내 자신은 이 불안과 맞서 싸워야 하고.
그러니 되도록 전쟁 없는 평화로운 시기가 아주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랐다.
“이만 쉬어. 나도 곧 정리하고 올라갈게, 응?”
보리스의 손이 리비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검을 잡은 손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어 거칠거칠했지만 리비는 그 손이 비단보다도 더 부드럽게 느껴졌다.
“응?”
그는 다시 한번 리비를 달랬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 나와 있는다고 해도 딱히 그녀가 할 일은 없었다.
에드라크성의 사람들은 알아서 척척 움직이고 있었고, 티소 마을 사람들은 안전한 공간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할 것이다.
보리스가 사람이 부쩍 늘어난 외성에 나와 있는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고집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알았어. 돌아가 있을게. 금방…… 와야 해?”
리비는 자신의 얼굴을 감싼 보리스의 손을 붙든 채 말했다.
“물론.”
보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러다가 이어진 그녀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날 혼자 잠들게 하지 마.”
“…….”
“혼자서 그 방에 남아 널 기다리게 하지 마.”
“리비.”
“먼저 가 있을게.”
리비는 얼굴을 붉힌 채 후다닥 멀어졌다. 그리고 곁에 있던 베스, 그리고 다른 하녀들과 함께 내성으로 돌아갔다.
금방 온다던 보리스의 말과 달리, 그는 빨리 돌아오지 못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는 이 큰 영지와 성을 지닌 대영주로서 해야 할 일들이 차고 넘쳤다. 고작 며칠 성을 비웠을 뿐이지만 그의 손을 거쳐야 하는 일들이 고스란히 쌓여 남아 있었다.
영지의 규모를 키우고 교역을 편히 하기 위해 진행 중인 일들을 살피고, 기사단의 일도 봐야 했으며, 불이 난 마을의 후속 처리도 시급했다.
결국 대강의 일을 마무리한 뒤 그가 돌아온 시간은 깊은 밤중이었다.
“리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리비, 화났어?”
보리스의 목소리가 조급하게 돌변했다. 앵돌아져 누워 있는 리비의 모습을 보자 그 마음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달래야 한다는 일념으로 리비의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였다.
“…….”
가늘게 떨리는 진동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놀란 보리스가 이불을 홱 젖혔다.
“리비?”
리비는 작고 여린 어깨를 떨며 비 맞은 새처럼 울고 있었다.
“보, 보지 마.”
리비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그의 손에서 다시 이불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보리스가 당연히 멀리 치워 버리는 바람에 뜻대로 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얼굴은 보이기 싫어 가린 채로 계속 더듬거리며 이불을 찾았다.
“도, 돌려줘.”
“……싫은데.”
보리스의 목소리가 다소 삐딱하게 흘러나왔다.
“그것만은 들어줄 수 없어, 리비.”
다정하게 어르는 목소리에 리비는 어깨를 더욱 크게 들썩이며 울었다.
“리비, 날 봐.”
그가 잡고 흔들어도 소용이 없었다.
“놀란 거야?”
“…….”
“내가 늦게 와서 화났고?”
“…….”
“다신 안 그럴게.”
무슨 말을 던져도 리비는 답이 없었다. 흐느낌의 정도만 더욱 커질 뿐이었다. 결국 보리스는 리비를 강제로 돌아보게 만들었다.
“시, 싫어. 보여 주기 싫단 말이야.”
리비는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려 애썼다.
“괜찮아, 괜찮아 리비.”
그는 손을 뻗어 리비의 얼굴을 가로지른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하는 수 없이 얼굴에서 손을 치우게 된 리비가 원망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본 순간이었다.
“보지 마, 못생겼어.”
눈은 퉁퉁 부었고, 눈물자국이 여기저기 번져 얼룩져 있었다. 새빨개진 눈까지 더해지자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하필 이런 걸 보리스에게 보였단 사실에 리비는 극도로 창피해졌다.
“아이참, 보지 말라니까.”
리비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예뻐, 리비.”
“예, 예쁘긴.”
“정말이야. 세상에서 제일 예뻐.”
보리스가 정말로 그렇다는 듯, 황홀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굵고 긴 손가락으로 리비의 얼굴을 문질러 닦아 주었다.
“세상 모든 여자를 만나 본 것도 아니면서.”
괜한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이 민망함을 감추고 싶었다. 그런데 말하고 보니 문득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리스, 어쩌면 말이야.”
“응?”
“네가 나한테 이러는 게, 여자를 많이 안 만나 봐서 그럴 수도 있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마을에 살 적에는 리비만 졸졸 따라다녔고, 다른 여자애들과는 말도 거의 섞지 않았다. 그러다가 용병으로 전쟁터에서 구르고 기사단을 꾸리게 되었어도 여자들을 제대로 만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다 그 빌어먹을 전쟁 때문에.
마을 어른들의 말로는 전쟁을 하는 동안 내내 집에 있는 부인, 혹은 자신을 기다려 줄 연인만 생각했다고 한다.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돌아가면 자신의 손을 따스히 잡아 줄 그런 사람을.
아마 자신은 보리스에게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 힘든 곳에서 유일하게 버텨야 할 이유가 필요해서, 그런데 그게 자신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여자애였을 수도 있다.
그의 맹목적인 집착은 다 그런 경험 부족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을 젖혀 둘 수 없었다.
“…….”
리비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이 뚝 멈췄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네가 다른 여자 경험이 없어서 내게만 집착…… 꺅!”
말하다 말고 리비는 그대로 몸이 뒤로 넘어갔다.
“다시 말해 봐.”
위에서 몸을 덮쳐 누른 보리스가 위험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뭐 때문에 너에게 이런다고?”
그의 얼굴은 충격으로 덮여 있었다. 상처를 입은 것도 같았다. 아니, 맞았다. 리비는 그가 풍겨 대는 흉흉한 기운에 그제서야 크나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미, 미안. 내 뜻은…….”
“네 뜻은, 뭔데?”
보리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무서워, 왜 그래…….”
“너는 항상 그러잖아. 내가 네게 하는 모든 것들을 내가 몰라서, 어디 모자라서 그런 줄로만 알고 있지.”
“…….”
“어쩌면 내가 하는 말은 하나도 믿지 않으면서.”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보리스, 응?”
“아니면?”
“그건…….”
“왜 그런 말을 해? 다른 여자를 만나 보지 않아서 네게 집착한다고? 내가 지난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너는 알아?”
“보, 보리스.”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과 말투에 리비는 겁을 집어먹었다.
“나는, 나는 그냥…….”
위에서 내려다보는 남자의 존재가 숨 막혔다. 이미 부부가 되었는데, 이미 수없이 같이 밤도 보냈는데,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가 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무서워서…… 그랬어.”
리비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네, 네가 없으니까…… 돌아온다고 했지만…… 불이 저렇게 크게 났는데, 걱정도 되고.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게 무서워서, 그래서.”
그때처럼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진 순간이 없었다. 남편은 마을에 난 불 때문에 나가 있는데 자기만 홀로 안전한 성 안에 틀어박혀 그저 그의 무사 귀환을 기다리는 수밖엔 없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무서웠어, 이 바보야.”
겨우 며칠 떨어져 있는 것으로도 이렇게 되었는데, 보리스는 그 긴 시간을 홀로 버텼다. 그동안 그는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래서 그가 그동안 느낀 감정이 자신 같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나 공허하고, 심장이 툭툭 떨어지는 것 같은 불안감 속에 살아왔을 거라고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다른 여자를 알았더라면, 자신 말고도 다른 여자와 많이 놀아나서, 차라리 그런 그리움 따위 느끼지 못하고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내내 침실에서 눈물을 흘리는 동안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리비, 미안해.”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던 얼굴이 금세 풀어지고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울지 마, 울지 마, 리비. 응?”
그가 다정히 속삭이며 입을 맞춰 오자 리비는 두 팔을 뻗어 그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맞닿은 입술을 더 강한 힘으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보리스는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응하지도 못한 채 눈만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다음 순간, 눈을 번쩍 뜬 리비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하는 대로 따라서 몸을 일으킨 보리스가 당황할 틈도 없이, 리비가 그대로 그를 뒤로 밀어 넘어뜨렸다. 자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걸터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넘어간지라 보리스의 하체는 침대에, 다리는 바닥을 딛고 있는 어정쩡한 자세였다.
리비는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그의 옷가지를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잠깐, 리비.”
리비는 당연히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가 없는 시간 동안 불안했던 마음을 이렇게라도 채워야만 했다.
“여태 네 맘대로 해왔잖아? 만지고 싶을 때 만지고, 입 맞추고, 또, 또…….”
하나씩 손을 접으며 떠올리기도 벅찬 수많은 순간들이 훅훅 떠올랐다가 사라져갔다.
보리스는 리비가 상의로도 부족해 바지 끈에까지 손을 뻗자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럼에도 말리지는 않았다.
“내 맘대로 할 거야.”
리비의 목소리가 수상하게 갈라졌다.
툭, 툭.
보리스가 어찌해 볼 새도 없이, 그의 옷들은 말끔히 벗겨졌다. 그는 태어났을 때 그대로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몸에 걸쳤던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가자 리비는 잠시 홀린 듯 그의 나신을 감상했다. 어느덧 바지가 끌어 내려지고, 리비는 튕겨 나온 성기를 마주하게 되었다.
“…….”
곱상한 얼굴과 달리 이처럼 무시무시한 것이 아래쪽에 있다는 것은 쉬이 납득하기 힘들었다. 매번 보는 것임에도 그랬다.
거대하게 융기한 것을 바라보는 초록빛 눈에 반짝 광채가 돌았다. 동시에 짙은 갈증이 일었다.
몸속에서 빨간 불꽃이 날름거리며 크기를 키워 갔다.
보리스의 몸이 야해 빠진 건 진즉 알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봐서일까.
그녀는 잠시 고기를 끊었던 사자처럼 눈이 돌아 있었다. 남편의 체향, 따스한 살결, 자신의 살과 맞댈 때 느껴지는 진동…….
그 모든 것들이 지나치리만큼 선명하게 느껴졌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릴 만큼, 주변은 고요했다.
“리비…….”
보리스는 결국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손등을 얻어맞은 게 전부였다.
“가만히 있어.”
그 명령에 따라 보리스는 얌전히 손을 거두어들인 채 무방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양손으로 기둥을 움켜쥔 리비가 천천히 그것을 위아래로 쓸어올리기 시작했다. 바짝 솟아오른 핏줄 탓에 우툴두툴한 표면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벌써 귀두 끝에는 멀건 액이 스멀거리며 배어났다.
리비는 그것을 손에 바르고서 기둥을 훑는 속도를 더욱 높여 갔다.
“후…… 리비.”
보리스가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구기며 리비를 바라보았다. 시트를 잔뜩 틀어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리비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보리스가, 남편이,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까마귀가 제 손안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을 비틀어 대는 이 광경이.
매우 흡족했다.
마찰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녀의 몸 내부에 지펴진 불도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침이 고이고, 몸 안쪽이 바짝 수축하며 이 거대한 성기를 몸 안에 받아들인 것 같은 반응이 일어났다.
“그만, 리비.”
그는 잔뜩 쉰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리비는 멈출 수 없었다. 그의 몸이 튀어 오르며 갑자기 가해진 자극에 격렬히 반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일로 바쁜 리비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리비!”
그가 놀라 소리쳤을 땐 이미 리비가 성기를 빨아 삼킨 뒤였다. 그래 봐야 앞 끄트머리를 문 게 고작이었지만, 그 단순한 행위가 끌고 온 폭풍은 엄청났다.
“하…….”
시트를 움켜쥔 손과 팔에 핏줄이 불거졌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불끈거리는 근육은 리비가 안겨 준 희열 탓이었다.
“음, 으음…….”
리비는 생전 처음 보리스의 것을 입에 문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물긴 했는데, 그다음을 어찌해야 할지는 작정하고 한 것은 아닌지라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었다. 그다음은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한 혀가 알아서 해주었으므로.
할짝, 할짝.
고양이처럼 조심스레 내밀어진 혀가 굵직한 성기를 맛있게 핥아 먹기 시작했다. 마치 사탕을 빨 듯 혀로 굴려도 보고 입술을 이용해 오물오물 빨아 먹기도 했다. 그러자 보리스가 몸을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쳤다. 그 반응에 리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조금만 더.
리비는 입술을 움직여 조금 더 보리스의 것을 집어삼켰다. 반절도 다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성기 끄트머리가 목구멍을 쿡쿡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뱉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자신의 손 아래 저항할 의지를 잃고 누운 아름다운 남자를 보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흐릿해진 보랏빛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아마 그의 시야에도 자신이 부옇게 흐려 보일 것이다. 그는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리비는 더욱 용기가 샘솟아 올랐다. 선액과 타액으로 범벅이 된 성기를 천천히 입안에서 앞뒤로 왕복하기 시작했다.
“하아…….”
견디기 힘들다는 듯 밀려 나온 한숨이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정말 싫으면 뿌리치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저렇게 온 힘을 다해 참는 걸 보니 그도 이 행위가 몹시 마음에 든 게 분명하다.
볼이 불룩하게 부풀어 오르도록 그의 것을 빨고, 또 핥고, 그러면서 다른 손으로는 두툼한 기둥의 아래쪽을 잡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안 뜨거운 곳이 없었다.
이미 부풀 대로 부푼 성기가 입안에서 꺼덕이자 리비는 잠시 숨을 삼켰다. 마치 살아 있는 뱀이 입안으로 기어 들어온 것만 같았다.
리비는 그 이상하고도 야릇한 기분을 만끽하면서 마음껏 그를 빨아 먹었다. 입안이, 입술이, 손이 온통 그의 냄새로 절여지는 동안 리비는 꿈결 속을 헤매는 것만 같았다.
좋아, 너무 좋아.
남편을 이렇게 물고 빨고 느낄 수 있다니. 그가 무사히 돌아와 제 곁에 있다니. 이런 충만감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만, 리비.”
어둡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설마…… 화난 건가? 그답지 않은 목소리에 리비는 살짝 기가 죽었다. 너무 장난을 쳤나? 싶은 순간이었다.
입안 가득 물려 있던 성기가 단숨에 뽑혀 나갔다. 그 상실감에 리비가 울상을 짓자 희뿌연 액체가 그대로 리비의 얼굴과 가슴에 튀었다.
“…….”
그가 뿌린 흔적을 온통 뒤집어쓴 채 리비는 눈만 깜박거렸다. 그녀의 앞에는 벌게진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는 야수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더 이상은 안 돼.”
괴로운 어조로 경고한 그가 단번에 자세를 반전시켰다.
“보리스?”
리비는 그를 올려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언제 이렇게 바뀐 거지, 그녀는 급히 눈을 깜박거렸다. 워낙 행동이 빨라서 보리스가 어떻게 제 위로 올라온 건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내 걸 잔뜩 묻히고.”
커다란 손이 리비의 눈꺼풀에 닿더니 속눈썹 위로 엉겨붙은 하얀 점액을 떼어 냈다. 입술 위에 늘어진 것들도 그의 손 아래 말끔히 지워졌다.
“얼마나 자극할 셈이야?”
짙은 빛의 보라색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마치 마법이라도 부리는 듯한 그 눈앞에서 리비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난 그저…… 널 맛보고 싶었을 뿐이야.”
리비가 콩닥거리는 심장을 누르려 애쓰며 말했다. 새삼 그의 기세에 놀랐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금세 발칙한 본능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아직 안 끝났어.”
리비는 그의 목을 끌어안아 재빨리 입 맞췄다. 얼떨결에 그녀를 감싸 안은 보리스의 어정쩡한 자세를 틈타 다시 상위를 선점했다.
보리스는 그녀의 몸 아래 무방비하게 깔린 상태가 되었다. 탐욕스럽게 빛나는 두 눈이 남편의 탄탄한 나신을 훑고 지나갔다.
정말이지 몇 번을 보아도, 남은 생 동안 내내 바라보기만 해도 절대 질리지 않을 몸이었다. 그 몸 위로 살며시 손을 내린 리비가 조각 같은 근육들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깊게 팬 쇄골에서부터
“아름다워.”
리비가 홀린 듯 중얼거리자, 그는 리비가 자신의 모습을 쉽게 감상하도록 팔을 들어 주기까지 했다. 그것이 부끄러우면서도 좋았다.
입가를 슥 닦아 낸 리비가 보리스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의 옷을 벗어 내기 시작했다. 잠옷 한 장만 걸치고 있던 터라 탈의는 금방 끝났다.
보리스의 몸 위로 올라탄 리비의 몸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보리스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그 모습을 감상했다.
“그래, 네 맘대로 해. 리비.”
그는 순교자처럼 리비에게 모든 걸 맡겨 버렸다. 그 말에 리비의 눈에 힐긋 광채가 돌았다.
리비는 손을 뻗어 보리스의 입술을 천천히 더듬다가 깎아 지른 듯 날카로운 턱선을 지나 굵고 선이 살아 있는 목덜미를 훑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녀가 종종 엎어져 자곤 하는 드넓은 가슴을 지나 근육으로 꽉 짜인 복부와 등허리를 차례로 건드렸다.
그는 신이 하나하나 고심해서 만든 피조물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었다. 이렇게 완벽할 수는.
“꼼짝 말고 있어야 돼, 보리스.”
리비는 정복감에 취해 중얼거렸고, 보리스는 나른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비는 보리스의 위에 올라탄 채 한참을 끙끙거렸다. 애초에 혼자서 뭘 한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너무나 큰 반면, 그녀는 한없이 작았으니까.
그래도 오늘은.
“가만히 있으래도.”
홀로 분투를 벌이는 리비의 허리를 타고서 슬금슬금 손이 올라오자 리비는 그것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쳐냈다.
“하지만 리비, 너무 힘들어 보이는데.”
“안 힘들어.”
호기롭게 말하는 소리에 잔뜩 힘준 신음이 이어졌다.
“그러지 말고.”
혼자 애쓰는 리비가 안타까운 듯, 보리스가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다시 매섭게 쳐내는 손에 그는 하는 수 없이 도로 물러나고 말았다.
리비는 그를 삼킬 듯 쳐다보다가 그대로 몸을 내려 그를 머금었다.
“……리……비.”
보리스는 힘겨운 듯 내뱉으며 리비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정말로 힘든 건 바로 리비였다. 덜덜 떨리는 몸을 지탱하기 어려웠다. 그녀를 붙든 보리스의 손에도 그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흣.”
리비는 늘 보리스가 자신을 잡아먹는 것 같다고 생각해 왔다. 어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커다란 몸이 자신을 짓눌러 올 때면 왠지 모를 아늑함 속에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보리스를 가장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그를 뼈째 씹어 삼키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 기이한 불안감.
그건 보리스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전에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짙은 두려움이었다.
“…….”
리비는 행동을 멈춘 채 보리스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리비?”
보리스의 눈에 의아한 빛이 가득 들어찼다. 리비는 그 눈빛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아무 데도 안 갈 거지?”
“응?”
“아무 데도, 그 어디도 안 갈 거지, 그렇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리비는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건 그저 맹목적인 불안감에서 튀어나오는 말이었으니까.
“대답해, 보리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보리스의 입에 닿았다. 조심조심 어루만지는 손길에 보리스는 파드득 몸을 떨었다.
“이제 어디도 안 갈 거지, 그렇지?”
이전처럼, 어렸을 때처럼 자신을 놔두고서 어디로 날아가 버리면 어쩌지, 막연한 두려움에 눈앞이 하얘졌다.
“물론이야.”
보리스는 리비의 손을 잡아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네 허락 없인, 어디도 안 가.”
“…….”
“아무 데도, 그 어느 곳도…… 나는 너와 영원히 함께할 거니까.”
툭.
구슬 같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보리스는 제 얼굴 위로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느끼고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리비의 녹색 눈에 맺힌 눈물은 점점 더 많아졌고, 그에 따라 얼굴 위로 떨어져 내리는 눈물의 양도 늘어났다.
“네가…… 책임져야 해, 이 모든 걸.”
흐윽, 울음 섞인 목소리에 보리스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날 이렇게, 이렇게 만들었어. 널 기다리며 눈물이나 흘리는 바보 멍청이로…….”
보리스는 손을 들어 리비의 눈가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울보가 다 됐네, 리비.”
놀리는 듯, 달래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에 리비는 순간 울컥해 주룩 눈물을 쏟고 말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보리스에게 저런 놀림을 받는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인 것도 아니었다.
이제 자신은 울보가 되어 버렸다. 다른 것도 아닌 보리스가 사라질까 봐. 그것이 두려워서. 상상만으로도 미치도록 괴롭고 외로워서.
어린 시절, 보리스가 사라진 이후의 자신을 떠올려 보았다. 그가 송두리째 봉인해 놓은 기억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을 믿을 수 없어서 괴로워했던 날들을.
또다시 그 일이 반복된다면 견딜 수 없다. 이번에야말로 미쳐서 실성해 버릴지도 모른다. 어느덧 그의 존재가 이렇게나 커져 버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두고 어디 안 갈 거지?”
리비는 미간에 잔뜩 힘을 준 채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해?”
보리스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대답이나 해, 바보야.”
리비가 보리스의 가슴팍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리며 말했다.
“물론이지.”
보리스는 리비의 벗은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내가 널 떠나다니,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어.”
“…….”
“널 혼자 두는 일은 없을 거야.”
반쯤 몸을 일으킨 보리스가 리비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겹치며 말했다. 말캉하게 맞닿은 입술의 감촉에 리비가 파득, 몸을 떨자 보리스는 그대로 리비를 품에 안고서 풀썩 넘어뜨렸다.
순식간에 뒤집힌 자세에 리비가 버둥거렸으나 이내 이어진 깊은 입맞춤에 서서히 몸의 모든 힘을 풀어 버렸다.
***
다음 날, 해가 뜨기도 전에 리비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가 몸을 일으킨 곳은 푹신한 침대 위가 아니라 보리스의 몸 위였다.
한참 침대에서 보리스와 부대끼느라 꼴은 엉망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얼룩덜룩 서로가 경쟁하듯 몸에 남겨 놓은 자국들 때문에 꽤나 볼만했다.
“잘 잤어?”
“……응.”
사실은 아니었다. 잘 잘 수가 없었다. 밤새 서로를 탐하느라 그랬다. 그러다 리비가 지쳐 잠들자 마침내 그도 리비를 제 몸 위로 올린 채로 잠시나마 눈을 붙인 참이었다.
그렇게 뒹군 건 함께였으나 회복력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으…….”
온몸이 비명을 질러 대는 듯한 뻐근함에 리비는 일어나다 말고 끙끙거리며 시트를 말아 쥐었다. 보리스는 옆에서 리비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더 자.”
보리스가 리비를 다시 침대로 눕혔으나 리비는 도로 발딱 일어났다.
“나도 나갈 거야.”
“리비?”
“마을 사람들을 보러 가야 해. 아버지, 에드나와 리오도…….”
마을을 떠나 레제트 공작과 결혼하기로 결심했을 때, 리비는 적어도 자신만 희생하면 아버지도, 쌍둥이 동생들도,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모두 안전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이런 뜻하지 않은 사고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다니.
“가서 사태를 수습해야지.”
눈을 빛내는 리비를 보고 보리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두 사람의 머리가 동시에 돌아갔다.
“마을로 시찰을 갔던 기사들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밖에서 들린 목소리에 리비는 눈을 크게 떴다. 늦은 시간이라도 기사들이 돌아오는 즉시 보고하도록 했기에 바로 연락이 온 것이었다.
“가보자.”
리비의 말에 보리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보리스와 함께 티소 마을로 시찰을 나갔던 기사들을 만난 리비는 즉시 니콜라스를 찾아갔다.
“아버지.”
리비는 니콜라스와 마주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마을을 재건해야지.”
니콜라스의 답은 간단했다. 그러나 그 방법은 간단하지 않았다. 간단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티소 마을은 완전히 불타 버렸다. 그나마 마을 주민들을 무사히 대피시킨 것으로 위로를 삼아야 할 상황이었다.
그 마을을 다시 복구하기까지 걸릴 시간과 그에 들어갈 돈, 그리고 인력까지. 해결해야 할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이 해결된다 하더라도…….
“그때까지 어디에 계실 거예요?”
“그건.”
니콜라스조차도 그 말에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긴 채 그는 한동안 말을 아꼈다. 그 모습을 보며 리비는 내내 생각해 온 것을 말했다.
전소한 마을, 아직 비어 있다시피 한 에드라크 직할령. 답은 하나였다.
“티소 마을 사람들을 여기에 살게 하면 어때요?”
“그건…….”
“어차피 티소 마을도 에드라크령의 일부잖아요. 대영주가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되어서 그렇지, 이제는 어엿한 공작령이 되었고.”
“하지만 그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
“왜 안 되는데요? 여기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요. 아마 기사들의 숫자가 이주민들보다 많을걸요?”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들긴 했어도 제대로 된 마을의 역할을 하려면 턱없이 부족한 머릿수였다.
일단은 사람들로 북적거려야만 제대로 된 마을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만큼, 주민의 수를 확보하는 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옆에서 리비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보리스가 나섰다.
“정확히는, 백작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각하.”
“편히 부르십시오.”
계급으로 따지면 엄연히 니콜라스의 위였으나 그는 그 이전에 리비의 남편이다.
“……보리스.”
“네, 아저씨.”
“둘이 있을 때만 편히 부르지.”
“좋을 대로 하십시오.”
니콜라스의 얼굴에 언뜻 미소가 번져 나갔다.
“이건 에드라크의 주인으로서 드리는 청입니다.”
“…….”
“마을은 아직 황폐하고, 굉장히 넓으니 마을이 재건될 때까지 이곳에 정착해서 살면 서로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보리스는 그 어느 때보다 또박또박 말했다. 그 모습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져서, 리비는 그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둘만 있을 때의 보리스와 남들 앞에서의 보리스가 보이는 모습에는 지나친 격차가 있었다.
“……왜?”
멀뚱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보리스가 리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야, 아무것도.”
리비는 손을 살랑살랑 저으며 말했다. 보리스가 저렇게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게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었던지라 그녀도 어느 정도는 익숙해진 상태였다.
자신의 앞에서만 모자란 모습을 보이는 걸까, 그게 의도된 걸까, 아니면……. 예전부터 해온 생각이었지만 답을 내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당장 해결해야 될 일들이 너무 많았다.
“보리스의 말대로, 이곳에 정착해서 마을이 재건될 때까지 지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리비는 얼른 니콜라스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해서 그래요.”
니콜라스가 행여 딸에게 피해를 끼칠까 걱정돼 고민한다는 걸 리비는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가 있을 곳도 없는 데다가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도 부족했다. 저장된 식량으로 살아야 하는 겨울에 닥친 화재는 그래서 더욱 위험했다.
“저장해 둔 식량 창고도 모두 타버려서 안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들었어요. 내년에 파종할 씨앗마저 모조리 타버린 상태였다고요.”
대부분 농민들로 이뤄진 티소 마을인 만큼 화재로 인한 피해는 더욱 극심했다.
“식량도 타버렸으니 아이들과 노인들이 위험해요. 게다가 외부에서 침입자라도 오면.”
리비는 니콜라스의 흔들리는 눈을 보며 덧붙였다.
“이번 불이 어떻게 났는지 원인도 모르잖아요?”
보리스가 파견한 기사들의 말에 따르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쓰는 식량 창고에서 고의적으로 던져 넣은 듯한 불쏘시개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명백한 방화의 흔적이었다.
“누군가에게 노려지고 있는 거라고요.”
그간 티소 마을을 위협하는 존재라고는 산에서 내려오는 늑대와 몇몇 맹수들이 전부였다.
산짐승을 막기 위해 자경단을 꾸려 마을 근처를 순찰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 그만큼 외진 곳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산짐승의 습격 외에는 별다른 위험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평온한 삶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이제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건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게 누구인지 알 수도 없다는 사실만큼 두려운 건 없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저일 가능성이 커요.”
리비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건 그저 화재일 뿐이야. 너와는 아무런…….”
“있어요, 상관이.”
리비가 재빨리 답했다.
“제가 에드라크령을 다스리는 대영주의 부인이 되었잖아요.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알고……. 지금은 방화로 끝났어도 언제든지 다시 노려질 수 있다고요.”
시골 마을에서 살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되었다. 대영주이자 공작인 보리스의 아내를, 그의 아비를 노리는 이들이 충분히 늘어날 수 있다.
“공작성과 근접한, 영향력 아래 있는 마을에서 지낸다면 감히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거예요, 네? 여기는 기사들이 지키는 곳이고, 튼튼한 성벽도 둘러쳐져 있다고요.”
거듭된 설득에도 니콜라스는 리비에게 신세를 지는 것이 영 마땅치 않은 눈빛이었다.
결국 리비는 간절한 눈으로 니콜라스를 보며 다시 부탁했다.
“신세를 지는 게 아니에요, 저를 도와주는 거지. 저는 아버지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하다고요. 저를 도와주세요, 아버지.”
“리비.”
니콜라스는 당황한 듯 눈을 끔뻑거렸다. 그새를 놓칠세라 리비는 얼른 다음 말을 꺼냈다.
“에드라크령을 다시, 이전의 번성했던 모습으로 되돌리고 싶어요. 아버지의 힘이 필요하다고요. 티소 마을을 잘 지켜 왔던 것처럼, 에드라크령 전체를 되살려 보자고요.”
“…….”
리비는 내내 해왔던 생각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내 놓았다.
“에드라크 마을의 집정관이 되어 주세요.”
집정관은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위엄 있는 자여야만 한다. 주로 말단 귀족들이 집정관을 맡는 이유다.
“아버지는 여러 경험을 하셨잖아요. 기사가 되기 전에는 농부로, 벌목과 사냥, 건축도요.”
잠시 생각에 잠긴 듯싶던 니콜라스의 고개가 마침내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래, 받아들이마.”
“아버지!”
리비는 활짝 웃으며 니콜라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깊이 숨을 내쉬며 리비의 등을 토닥였다.
“사는 동안 잘 부탁하마.”
***
티소 마을의 주민들이 에드라크성 밖 마을에 정착할 것이 알려지자, 마을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공작 부인의 부친이 직접 마을을 이끌 것이라는 소식은 안도보다는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영주의 명령 아래 행동하는 집정관들 중에는 권력을 등에 업고 악독한 짓을 서슴지 않는 이들도 다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그런 걱정과는 달리 마을이 제 기능을 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티소 마을 주민들에게 각자의 집을 배정하고 필요한 식량을 배급하는 한편, 기존의 정착민들과 조화롭게 지낼 방안을 여럿 연구했다.
에드라크성 밖 마을은 늘어난 인구로 순식간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단순히 사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일 뿐인데 그 변화는 엄청났다.
니콜라스는 리비의 명을 받아 마을을 관리하는 막스와 함께 마을 안팎의 일을 담당했다.
니콜라스는 빠른 속도로 마을에 필요한 것들을 파악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사람을 효율적으로 부릴 수 있는지, 재화를 아끼고 빠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공작 부인의 부친이 집정관이 되었다는 소식에 잔뜩 긴장했던 막스는 이제 니콜라스를 찬양하며 수첩을 끼고서 그의 말을 받아 적고는 했다.
“집정관님께서는 정말 대단하세요!”
막스는 마을을 살펴보러 온 리비에게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르는 게 없으세요. 배울 게 정말 많습니다.”
“잘 배우면 좋지.”
리비는 한시름 놓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니콜라스의 지휘하에 마을은 좀 더 빠른 속도로 제 모습을 갖춰 갔다.
티소 마을에서 온 주민들도 제 몫을 담당했다. 대장간, 푸줏간 등 필수적인 시설도 늘어 갔다.
티소 마을의 치안을 담당했던 경험으로, 니콜라스는 에드라크령에 들어오려는 이들 중 위험한 이들을 골라내기도 했다.
전직이 의심스러운 자들은 받지 않았고, 도망쳐 오기 전의 영지에서 범죄 전과가 있는지도 꼼꼼히 살폈다.
“이주민을 잘못 받으면 순식간에 무법천지가 되는 법이란다.”
니콜라스의 말에 리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티소 마을에 불이 난 날, 식량을 훔치러 창고에 불을 질렀던 남자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영지민들이 많아지는 건 좋은 일이지만 무작정 머릿수만 는다고 다 좋은 일은 아니다.
개중에 옥석을 골라내는 것 역시 신중해야 할 문제였다.
“막스는 유능한 관리인이 될 자질이 있어. 잘 가르쳐 두면 마을을 일구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란다.”
“이주민에 대한 문제는 전적으로 아버지께 맡길게요.”
마을 경영에 리비와 니콜라스가 온 신경을 쏟는 동안 보리스는 에드라크 영지와 외부를 잇는 일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새로운 대로가 들어설 거야.”
리비는 보리스가 펼쳐 놓은 지도를 흥미로운 얼굴로 살펴보았다. 세셔 왕국의 전체 영토와 에드라크령이 위치한 북부 쪽을 상세히 묘사한 지도였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리비는 보리스의 손이 닿은 곳을 따라 손가락으로 덧그려 보았다. 지금은 길이 없고, 길이 있다 해도 몹시 험준한 산길이 전부인 곳이었다. 그랬던 곳에 길이 뚫리게 된다면 에드라크령은 그야말로 왕국 북부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아직 완공되려면 멀었지만 상상만으로도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여기에 대로가 생기면 다른 나라에서도 에드라크령에 오기 더 쉬워지겠네?”
“물론이지.”
보리스는 잔뜩 들떠 조잘거리는 리비를 보며 깊은 웃음을 머금었다.
“벌써 여기저기에 소문이 다 났어. 에드라크 공작이 하는 일들이. 이전의 영광을 되찾을 거라는 소문도 한창이야.”
계획한 일들이 하나둘 성과를 거두는 것을 보며 리비는 가슴이 뿌듯했다. 머지않아 에드라크령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할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절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리비는 반짝이는 눈으로 보리스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그 시선을 마주한 보리스가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지켜볼 때였다. 리비는 살그머니 웃으며 그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보리스는 아주 쉽게 그녀가 있는 쪽으로 끌려왔다. 이처럼 큰 남자를 손가락 하나로 제 곁으로 끌어올 수 있다니, 마치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았다.
언제나 제게는 한없이 무르고 약한 남자였다. 자신을 위해 이 세상의 온갖 금은보화를 끌어다 주고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는 사람.
리비는 자신이 그를 지배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사실에 벅찬 감동을 느끼며 더욱 대담한 손길을 뻗었다.
“리비?”
보랏빛 눈에 조금 당황한 기색이 얽혔다. 리비는 자못 유혹적인 몸짓으로 그에게 좀 더 가까이 붙어 앉았다.
그녀는 손끝으로 그의 가슴 근처에 작게 동그라미를 그렸다가, 느슨하게 묶여 있던 옷의 매듭 끈을 잡아 풀기 시작했다.
“…….”
당황한 빛이 더욱 짙어진 보랏빛 눈이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비는 그 시선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하는 짓은 좀 더 대담해졌다.
마침내 옷의 매듭을 말끔하게 풀어낸 리비가 그의 몸을 툭, 밀어냈다.
이번에도 보리스는 힘없이 그 손에 허물어져 내렸다. 그는 똑바로 누운 채 홀린 듯한 시선으로 리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냉큼 그의 위에 올라탄 채 말했다.
“그 모습을, 우리의 아기가 함께 볼 수 있으면 좋겠어.”
“…….”
“아이가 생기면 하고 싶은 게 있어.”
“그게 뭔데?”
“아주 큰 도서관을 짓는 거야.”
리비는 팔을 한껏 벌려 보이며 말했다.
“아이에게 매일 밤 책을 읽어 줄 거야. 내 꿈이었거든.”
니콜라스는 밤에 딸에게 동화책을 읽어 줄 만큼 낭만적인 성격은 못 되었다.
무엇보다 그 투박스러운 말투로 책을 읽어 주는 건 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도 못할 때가 있었다.
“도서관에 책을 꽉꽉 채워 넣고, 자유롭게 책을 빌려 갈 수 있게 할 거야, 모든 사람들에게. 어때?”
“좋은 생각이야.”
보리스는 손을 뻗어 리비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며 말했다.
창으로 흘러들어 온 달빛과, 벽난로의 불빛을 받은 얼굴이 하얗게 빛났다. 스륵, 미끄러져 내린 자리옷 사이로 뽀얀 살결이 내비쳤다. 보리스는 기꺼이 그 손에 자신을 내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