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신혼(1)
멀찌감치 흰 성채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리비는 마차 밖으로 몸을 내밀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제는 지켜야 할 체통이 생긴 탓이다.
‘에드라크 공작 부인.’
리비는 속으로 가만히 그 이름을 되새겨 보았다. 이제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은 에드라크 공작 부인이 되었지만 거기에 익숙해지려면 한참은 걸릴 것 같았다.
‘돌아가면 뭐부터 해야 할까.’
그저 보리스가 납치해 온 신부의 입장일 때와 지금은 그야말로 땅과 하늘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왕의 정식 승인하에 결혼식까지 올렸고, 영지의 주인이자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이의 부인이 되었으니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아질 것이다.
‘잘할 수 있을까.’
리비는 모아 쥔 손을 꼼지락거렸다. 예고된 불안감과 긴장이 일시에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에드라크 성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왔어.”
리비는 자그맣게 중얼거리며 에드라크성을 바라보았다. 저곳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마치 태어나고 자란 곳처럼 애틋한 마음이 샘솟았다.
저 성을 떠날 때만 해도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과연 왕이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해 줄 것인지, 다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정말 그 어느 것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진 위풍당당한 성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벅찬 감정이 솟아올랐다.
이제 저곳은 그저 아름다운 성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남은 생을 보리스와 함께 보낼 공간이 된 것이다.
‘보리스와.’
이미 왕이 승인한 결혼식에서 보리스를 남편으로 맞았고, 성에서 뜨거운 밤도 보냈다. 이미 온 세상이 두 사람이 부부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신기했다.
리비는 마차 창문 너머로 말을 타고 가는 보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반무장을 한 채 말을 몰고 있는 그의 모습이 그렇게 믿음직하게 보일 수 없었다.
그 뒷모습을 어찌나 뚫어져라 바라봤던지, 앞서가던 보리스가 슥 뒤를 돌아보았다.
“…….”
눈이 마주친 리비는 재빨리 마차 안으로 숨어 버렸지만 이미 다 들킨 뒤였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이 들리더니 어느덧 보리스가 바로 마차 옆까지 말을 몰고 와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통수를 뚫어 버릴 듯 노골적이고 집요한 시선은 계속 이어졌다.
모른 척하려 해도 끈질기게 쳐다보는 시선에 결국 그녀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봤어?”
“응.”
단출하게 떨어지는 대답에 리비는 어딘가로 숨고 싶어졌다. 빤히 쳐다보는 보라색 눈이 필요 이상으로 너무 자극적이었다.
“그, 그렇게 보지 마.”
보고 있으면 뭐든 다 들어주고 싶어지는 묘한 마력을 지닌 눈이었다. 아마 그도 그 눈의 힘을 잘 알고 있기에 종종 그녀에게 잘 써먹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언뜻 보기에 어수룩하고 순진한 얼굴로 위장하고 있었으나 그 속은 실로 여우 같은 보리스였으니까.
“자.”
보리스는 마차 창문 쪽으로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며 말했다.
“응?”
“볼 거면 대놓고 봐.”
“뭐……?”
보리스의 뻔뻔한 말에 리비는 입을 딱 벌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보고 싶으면 숨어서 보지 말고…….”
“그만, 그만해.”
리비는 새빨개진 볼을 감싼 채 외쳤다.
“왜, 보라니까?”
보리스는 다시 뻔뻔한 얼굴로 외쳤다. 리비는 결국 얼굴을 감싼 채 무릎 위로 얼굴을 푹 파묻고 말았다.
“창피하잖아!”
그 말에 보리스는 푸스스 웃으며 리비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앞으로 실컷 볼 얼굴이잖아. 질릴 때까지 봐도 괜찮아.”
“…….”
“그렇다고 정말 질리지는 말고.”
“너!”
리비는 등을 받치고 있던 쿠션을 집어 들어 던지는 시늉을 해 보였다. 큰 소리로 웃은 보리스가 손을 들어 성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거의 다 왔어, 리비.”
그의 말대로 멀찍이서 보였던 성이 훌쩍 다가와 있었다.
“응…….”
가까이 갈수록 성의 웅장한 모습에 가슴이 절로 벅차올랐다. 이제 저곳이 나의 집이구나, 저곳에서 보리스와 함께 살아가는 거구나. 우리는…….
‘정말 부부가 되었어.’
리비는 다시 보리스를 보며 감회에 젖었다. 이제는 정말, 정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완벽한 부부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문을 열어라! 영주님께서 귀환하셨다!”
보리스 일행이 에드라크 성문 앞에 도착하자, 행렬의 가장 앞에 있던 기사가 외쳤다. 그러자 거대한 도개교가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쿵.
해자와 성 사이에 놓인 도개교 위를 건너자 성안 마을의 풍경이 펼쳐졌다.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을씨년스럽고, 버려진 지 오래된 티가 물씬 나는 곳이었다.
성안으로 들어가는 내내 리비는 황량한 풍경을 돌아보았다. 원래는 마을이 번성하고 사람들로 붐벼야 할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이라곤 다 쓰러져 가는 집들과 멈춘 지 오래된 풍차뿐이었다. 사람들로 붐벼야 할 시장, 광장도 텅텅 빈 것이나 다름없었다.
개중에도 간간이 사람들이 살고 있기는 했지만 오래도록 버려졌던 곳답게 매우 낙후된 모습이었다.
‘그래도 잘만 하면 쓸 만하지 않을까.’
어쨌든 마을의 기초가 되는 건물들이 남아 있다는 건 다시 사람들이 몰려와 살 때 크나큰 이점이 되어 줄 것이다.
어차피 새로이 보수를 하고 먹고살 것이 풍족히 주어지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모이게 되어 있다.
성안의 마을을 지나친 뒤에야 에드라크성 앞에 당도했다. 두 번째 도개교가 내려지자 칼리니 기사들을 포함한 일행이 일제히 성 안으로 들어섰다.
영주의 전용 공간인 본성까지는 조금 더 가야 했다. 리비는 전에 베스와 함께 나와서 구경했던 외성의 풍경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외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공작 부부 일행을 발견하자 하나둘 일손을 내려놓은 채 예를 갖추는 모습이 보였다. 리비는 그것을 조금은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덜컹.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내성에 도착한 마차가 드디어 멈췄다.
마차 문이 열리고, 리비는 보리스가 내민 손을 잡고 훌쩍 뛰어내렸다. 뜻밖에 본성의 입구로 들어가는 문 앞에 사용인들이 나와 부부를 반기고 있었다.
“주인님과 마님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그들의 깍듯한 인사 앞에 리비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마님이라니. 당연히 자신을 지칭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낯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보리스는 리비의 손을 잡아 자신의 옆에 세웠다. 리비는 그의 손을 잡은 채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결혼식날 보리스에게 납치당해 끌려왔을 때 보았던 성과, 이제 어엿한 에드라크성의 안주인이 되어 바라보는 성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어디서 머물게 되는 거지. 새삼스러운 호기심이 솟아올랐다.
그간 리비가 머물렀던 탑은 보리스가 직접 안아서 올려다 주지 않으면 드나들기 지극히 어려웠다. 설마하니 그곳을 또 써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던 찰나였다.
“공작 부부께서 머무실 침실의 단장이 끝났습니다.”
자신을 집사로 소개한 남자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리비는 보리스의 손을 잡은 채로 이끌려 계단을 하나둘씩 밟아 올라갔다.
“우리의 침실?”
왠지 부끄럽지만 동시에 호기심도 솟아올랐다. 여태껏 머물던 탑의 방은 두 사람의 공간이라기보다는 호화롭게 꾸며진 감옥 같은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제대로 된 부부 침실을 쓰게 됐으니 새삼 그 공간에 대한 궁금증이 몽글몽글 솟아오를 만도 했다.
“이미 준비되어 있었어, 리비.”
“그런데 왜…….”
나를 그렇게 높고, 한번 걸어 올라가려면 무릎이 다 닳아 없어질 것 같은 공간에 배정했는지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리비가 도망갈까 봐.”
“…….”
대답은 쉽고 간결했다. 그리고 솔직했다. 너무나 솔직해서 더 이상 뭘 캐물을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 답변이었다.
“그럼 갈까.”
보리스는 아름다운 귀부인을 대하듯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 역시 귀부인이기는 했으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낯간지러운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응? 으응…….”
리비는 조심스레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 놓았다. 그리고 본성의 입구로 오르는 중앙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리비는 보리스를 따라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사실 마음은 금방이라도 훌쩍 뛰어올라 침실까지 닿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는 조금 힘들었다.
공작 부인으로서 첫 입성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평소 입는 것보다 한층 치렁치렁하고 장식이 많이 붙은 드레스를 입었더니 발걸음이 영 빨라지지 않았다.
어깨 너머로 길게 들린 망토 역시 한몫 단단히 했다. 드레스가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던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몸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보리스!”
리비는 들어 올려진 자세 그대로 꽥 소리를 내질렀다. 뒤돌아보자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그러나 딱히 그들은 별로 신경 쓰는 기색도 아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용인들은 집사가 보낸 신호에 맞춰 모두 각자의 일을 하러 뿔뿔이 흩어졌다.
리비는 그게 더 창피했다.
“내려 줘, 응?”
보는 눈은 줄었어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마음에 리비가 애원했다.
“뭐 어때.”
역시나 보리스는 간단히 리비의 요청을 묵살했다.
“너는 내 아내잖아.”
“아……내?”
당연한 말인데도 보리스의 입으로 직접 그 말을 듣는 건 또 다른 기분이었다.
“그리고 우리, 신혼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가 다시 한번 상기시킨 사실에 리비는 우물쭈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부부간에 애정이 깊은 건 기뻐할 일이야.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서먹하게 지내는 건 결코 좋은 게 아니라고.”
사실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렇게 지내지 않을까. 리비는 그 속사정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왕궁에 있는 동안 대충 주워들은 이야기로는 그랬다.
어지간한 귀부인들은 다 따로 정을 통하는 기사 한둘쯤은 있다고.
결혼 축하 무도회 내내 부부가 정답게 붙어서 지내는 것을 보지 못한 것도, 귀부인들이 하나같이 남편이 아닌 다른 준수한 미남들에게 눈길을 주는 것도 보았다.
물론 그건 귀부인의 남편들도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에게 부부 관계란 그저 주고받을 게 확실한 거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후계자 생산을 위해 의무적으로 몸을 섞는 일마저 곤혹스럽다며 한숨을 푹 내쉬던 귀부인도 있었다.
‘만약 보리스가 날 데리러 오지 않았다면…….’
자신도 아마 그 귀부인들 틈에 섞여 젊고 잘생긴 기사들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면에서 자신과 보리스는 매우 특이한 경우가 맞았다. 일단 보리스는 매우 손해 보는 결혼을 했다.
안드로스 왕이 원래 주려고 했던 기름지고 풍요로운, 수도와 가깝기까지 한 영지를 모두 고사하고 이런 촌구석에 왔으니까.
‘그렇다면 난 보리스에게 뭘 줄 수 있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갖기 위해 내버린 모든 것들을 어떻게 갚아 줄 수 있을까. 물론 보리스는 자신만 있으면 된다며 의아해할 테지만, 리비의 마음은 영 가볍지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는 걸 보리스가 눈치챈 듯, 리비의 얼굴을 깊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무슨 생각 해, 리비?”
“아니야, 그……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부부끼리는 애정 넘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타의 모범이 되는 법이지, 아무렴.”
리비는 퍼뜩 정신이 들어 말했다.
“역시 그렇지?”
엷게 번져 간 미소에 리비는 그만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아내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수시로 그것을 써먹을 계획인 것 같았다.
결국 리비는 아무 말도 못 하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뺨이 발그레하게 물든 것을 본 보리스가 그 위로 입술을 깊이 눌러 왔다.
리비가 놀란 여우처럼 머리를 들어 올리자, 그는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에드라크 공작 부부가 거처하는 곳은 층 전체가 부부만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중 가장 가운데에 위치한 방이 침실이었다. 묵직한 나무 위로 넝쿨무늬가 화려하게 양각된 문을 밀자 마침내 부부의 침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야.”
보리스의 말에 리비는 수그렸던 고개를 들고서 방 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모든 것이 근사하고, 우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탑에 있을 때 머물렀던 방보다 족히 세 배는 될 크기에, 네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침대도 탑에 있는 것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바닥에는 금실로 무늬를 새겨 넣은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앉아서 담소를 나누기 좋은 자그마한 테이블과 의자도 놓여 있었다.
장인이 손수 조각해 만든 집기와 가구들, 빛을 가려 줄 크림색 커튼과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까지, 모두 세심하게 준비된 상태였다.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으로 방 안은 더욱 아늑해 보였다. 그 앞에는 잠시 낮잠을 잘 용도로 놔둔 것 같은 푹신하고 기다란 의자가 보였다.
“……예뻐.”
리비는 보리스의 품에 안긴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왕궁에서 지내던 방이 더 좋지 않아?”
“아니, 전혀.”
리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물론 왕궁의 것이니 더 화려할 수는 있었지만 이처럼 아늑한 느낌은 주지 못했다. 오롯이 내 공간이라는 마음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가 더 좋아, 보리스”
리비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서 가볍게 볼에 입 맞췄다. 그러자 보리스가 즉시 거칠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이만 내려 줘.”
자신이 한 행동이 어떤 영향을 끼친지도 모르고, 리비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방 안을 돌아다니며 하나하나 구경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안 되겠어, 리비.”
낮고 음습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리비는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응?”
되물으며 돌아본 곳에는 어둡게 빛나는 보라색 눈이 보였다.
리비를 안은 그대로 침대까지 척척 걸어간 보리스가 리비를 침대 위로 그대로 내려놓았다. 리비는 깜짝 놀라 아직 방어구를 풀지도 않은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보리스!”
“응.”
왜 부르냐는 듯, 보리스는 바삐 행동을 개시했다. 리비가 아침나절부터 정성껏 차려입은 드레스를 단번에 벗겨 내리고,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춰 오기 시작한 것이다.
“보리스, 우, 우리…… 지금 막…….”
“그래, 지금 막.”
눈빛은 한층 어두워져 있었다. 입으로는 대꾸하면서 그는 잠시도 손을 쉬지 않았다.
툭.
그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토를 찢듯이 벗자 묵직한 망토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거리는 쇠붙이가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도 들렸다.
착용하고 있던 견갑이며 건틀릿 등도 하나둘 벗어 던지는 모습에 리비는 그만 아찔해지고 말았다.
“지금 막, 왔다고, 지금!”
꽥 내지른 리비가 옷을 추스르며 뒤로 물러나자 보리스가 단번에 침대를 무릎으로 지탱하며 올라왔다.
“어디 가.”
그는 재빨리 리비를 붙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직, 아직 밝아, 밝다고!”
리비는 햇볕이 자신의 구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강조했다.
“밝으니까 좋잖아.”
보리스는 다시 가볍게 그녀의 말을 쳐냈다. 저 하늘에 있는 게 달이든 태양이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였다.
“더 자세히 볼 수 있어, 리비.”
그렇게 말하며 그는 다시 한번 반대편 볼에 입술을 눌렀다. 리비는 어느덧 그의 아래에 깔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불편할 정도로 치렁치렁 늘어졌던 옷가지가 절반쯤 벗겨져 새하얀 살갗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리스가 그 위로 주저 없이 자국을 남기고 있을 때였다.
꼬르륵.
“…….”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두 사람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꼬르르륵.
그리고 다시 한번 더. 이번에는 좀 더 크게 울려 퍼졌다. 도무지 아닌 척할 수 없는 그 소리에 보리스는 하던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척해.”
리비가 새빨개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웅얼거렸다. 그 소리는 확실히 리비의 배 속에서 나고 있었다. 짧게, 길게 여러 번 반복되는 소리에 리비는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쳤다.
“알았어, 못 들었어.”
보리스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무것도 못 들은 거야, 리비.”
“이 바보야!”
리비는 옆에 있던 쿠션을 들어 그에게 던졌고, 보리스는 크게 웃으며 리비를 한 품에 끌어안았다.
***
“보리스, 나 졸려.”
리비는 커다란 수건에 감싸인 채 보리스의 품에 안겨 중얼거렸다. 막 목욕을 끝낸 뒤라 졸음이 밀려오는데도 어쩐지 쉽게 자고 싶지 않아 투정을 부리는 중이었다.
리비의 뺨과 목덜미에 달라붙은,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보리스가 조심스레 떼어 주었다. 그리고 이제 막 물에서 나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살결 위로 입술을 내리눌렀다.
리비의 배가 요란하게 공복을 알리자 보리스가 종을 울려 음식을 내오도록 시켰고, 침대에서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그런 뒤엔 뜨끈한 물이 담긴 욕조를 들여 한참 동안 그 안에서 살을 맞댄 채 몸을 씻었다. 나중에는 깔깔거리며 물을 튕겨 대느라 바닥은 온통 물로 젖었다.
몸을 다 씻은 뒤에는 보리스가 직접 리비의 몸을 비롯해 머리까지 말려 주었다. 그러는 동안 체력이 점차 떨어진 리비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두 사람에게 부드럽게 드리워져 있었다. 사방이 고요했고, 들리는 소리라고는 서로의 숨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뿐이었다.
규칙적으로 쿵쿵 울려 대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서, 리비는 금방이라도 잠 속으로 끌려들어 갈 것만 같았다.
“그만 자.”
보리스가 리비를 끌어안은 채 가만히 다독거렸다.
“으응…….”
리비는 대답하면서도 감기는 눈을 몇 번이나 다시 뜨기를 반복했다. 왠지 쉽게 잠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크고 푹신한 수건 한 장만 달랑 걸친 채 보리스에게 안겨 몰려오는 잠을 이겨 내는 지금이, 그녀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왕궁에서 내내 긴장했던 몸은 바다 속 해초처럼 풀려 하늘거렸고, 완벽한 둘만의 공간에 놓여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온몸과 마음이 충만해지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그러니 그와 조금 더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금세 잠의 나락으로 떨어져 아침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보리스, 안아 줘.”
그의 커다란 몸집은 리비의 자그마한 몸을 모두 감싸 안고도 남았다. 자신을 단단히 안아 주는 그 너른 품이 좋아서, 리비는 더욱 몸을 동그랗게 만 채 그에게 파고들었다.
리비의 몸은 마치 요람 속에 들어 있는 아기처럼 보리스에게 꼭 들어맞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음 짓던 보리스가 뭔가 생각난 듯한 얼굴로 말했다.
“리비는 다람쥐 같아.”
“으응?”
갑자기 들려온 뜻 모를 소리에 리비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다람쥐라니?”
“우리가 예전에 숲속에서 봤던 다람쥐 기억나?”
“다람쥐……?”
무슨 말인가 잠시 생각해 보다가 짧게 아, 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때 그 다람쥐 가족!”
“맞아.”
보리스는 웃으며 리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귀여웠는데.”
보리스와 숲에 놀러 간 날, 두 사람은 나무 옹이 속에 몸을 둥그렇게 만 다람쥐들이 이리저리 몽켜서 자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때를 떠올리자 살며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건 마치 숲속에서 발견한 보물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처음에는 다람쥐 한 마리가 낮잠을 자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서자 그 안에 보인 건 세 마리의 다람쥐 가족이었다. 아마도 부모일 것으로 추정되는 어른 다람쥐 두 마리와 새끼였다.
“보리스, 여기 봐. 한 가족이야.”
“꼭 끌어안고 있네.”
“누가 새끼를 훔쳐 갈까 봐 걱정돼서 그런가 봐.”
“어느 쪽이 아빠일까?”
“음…… 아마도 이쪽 아닐까?”
리비가 가리킨 건 머리에 그어진 줄무늬가 넓고고 진한 다람쥐였다. 덩치도 더 크고 우람했다. 그래 봐야 작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럼에도 아내와 새끼를 지키기 위해 팔을 뻗어 꽉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사람의 손처럼 새끼를 품에 안은 모습이 신기해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 품 안에서 아내와 새끼 다람쥐는 맘 편히 잠을 청하고 있었다.
“정말 보기 좋았어.”
리비는 그때를 떠올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맞아, 엄마와 아빠, 그리고 새끼까지. 완벽했지.”
그때를 떠올리는 듯 보리스의 입가도 부드럽게 늘어졌다.
세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잠에 취해 있던 모습. 부모 다람쥐들은 서로 끌어안은 품속에 새끼를 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새끼는 부모의 넘치는 사랑이 버거웠던지 보송보송한 털 사이로 얼굴을 삐죽 내민 채 자고 있었다. 벌름거리는 콧방울이 귀여워 쓰다듬고 싶은 걸 참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행여 잠을 깨울까 싶어 리비는 보리스와 조심스레 뒷걸음질로 다람쥐 가족의 보금자리에서 멀어졌다.
“아주 귀한 걸 보았지.”
대개 다람쥐들은 천적을 피해 도망 다니느라 재빨리 움직이곤 했기에 제대로 살펴볼 틈조차 없었다. 가족끼리 함께 있는 걸 보기란 더더욱 어려웠다.
보리스가 리비와 공유한 건 그저 같은 기억만이 아니었다. 그는 두 사람은 그때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같은 것을 보았고, 같은 감정을 나누었다.
그때 나눠 가진 마음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새끼들을 꼭 끌어안고 있었어.”
리비는 그때 보았던 새끼 다람쥐처럼 보리스의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맞아, 아주 귀여웠어.”
보리스는 리비의 젖은 머리칼을 손끝에 감았다 푸는 장난을 하며 말했다.
젖어 있는 건 리비뿐만은 아니었다. 보리스 역시 물기가 촉촉한 머리칼이 눈을 찌를 듯 늘어져 있었다. 원래도 새카만 머리칼이 물에 젖어 더욱 짙은 빛을 띠었다.
리비는 손을 뻗어 그 머리칼을 가만가만 건드려 보았다. 보리스는 그녀의 손길을 음미하듯 눈을 감은 채 온전히 제 몸을 맡겼다.
자신의 손길에 유순하게 자기 얼굴을 맡기는 보리스를 보고 있자니 무언가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무 구멍 속에 사이좋게 뒤엉켜 있던 다람쥐들. 그걸 보았던 경이로운 순간을 잊지 못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이들. 소중하게 끌어안긴 존재.
생각해 보니 자신도, 보리스도 그런 건 겪어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네 부모님은 어디에 계셔?”
“몰라.”
처음 보리스를 만났을 때 리비는 그런 질문을 던졌었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보리스의 눈은 마치 엄마와 아빠가 무엇인지 아예 모르는 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까마귀들의 숲속에서 살아왔다는 걸 기억하는 게 전부였다.
리비는 엄마가 없었지만 보리스는 아예 부모님을 만난 적조차 없는 셈이었다. 엄마와 아빠에게 그렇듯 꽉 안겨 본 기억 따위 있을 리 없었다.
리비는 그의 머리를 가만히 어루만지며 아마도 수컷일 것 같았던 다람쥐의 굵은 줄무늬를 떠올렸다.
사람이 보기엔 한없이 작고 연약한 존재였지만 그 다람쥐는 분명히 적이 나타나면 아내와 새끼를 위해 털을 세우며 달려들 게 분명했다. 그리고 자기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맹렬히 싸우겠지.
그 팔에 감싸인 아내와 새끼는 그 품 안에서 정말로 마음 놓고 자고 있었다. 반드시 아빠가, 남편이 지켜 줄 거라는 믿음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 보리스에게 안겨 있는 자신도 그 다람쥐들과 다를 바 없었다.
모든 것이 평온했고, 믿음직스러웠다. 그 어떤 위험도 닥치지 않게 지켜 주리란 믿음이 샘물처럼 퐁퐁 샘솟았다.
리비는 그의 까만 머리칼을 만지고, 또 어루만졌다. 눈을 감은 채 그 손길에 머리를 내맡긴 보리스의 얼굴은 한없이 평화롭기만 했다.
“…….”
리비의 눈이 위에서 아래로, 보리스의 얼굴을 훑어 내려갔다. 물에 젖어 늘어진 머리카락 아래 반듯하게 솟은 이마, 그 아래 자리한 짙은 눈썹과 얇은 눈꺼풀. 촘촘히 돋아난, 남자치고는 꽤나 긴 속눈썹, 정중앙에 우뚝 솟은 코와 보기 좋은 입술까지 전부 다. 그의 얼굴을 세세히 살피는 동안 리비는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쩜 이리 아름다울 수 있지.
잘생겼다거나 남자답다는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보리스의 얼굴을 비롯한 전신에 흐르고 있었다.
그에게 남아 있는 소년 시절의 모습을 문득문득 떠올릴 때마다 리비는 기이한 감정에 휩싸이고는 했다. 그러다가 그의 등 뒤에 돋아났던 시커먼 날개를 떠올리면 그가 까마득히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는 자신과는 다른 존재다.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만약에 그가 자신보다 더 오래 사는 수명을 가졌거나,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이라거나. 언젠가는 자신을 두고서 두 날개로 훨훨 하늘을 날아가 버린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마다 리비는 애써 외면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와 남은 생을 함께하기로 맹세한 순간부터, 도무지 그런 망상에서 놓여날 수가 없었다.
보리스는 이렇게나 강한데, 자신은 너무나 미약한 존재였다. 그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가져다주었는데. 자신은 해줄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왕의 조카이자 왕녀의 딸이면 뭘 하나. 정략결혼에 이용당할 뻔했는데. 그걸 구해 오느라 보리스는 좋은 영지를 하사받을 기회도 날려 버렸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럼에도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단 하나 있다면.
리비의 머릿속에 서로 부둥켜안고 낮잠을 자던 다람쥐 가족들이 자꾸만 맴돈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보리스.”
평소와 다른 울림에 보리스는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기울여 리비와 눈을 맞춰 왔다. 촉촉이 젖은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더욱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리비를 응시했다. 리비는 그의 눈을 보며 한참이나 다음 말을 골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보리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기에.
“나, 네 아이를 낳고 싶어.”
“…….”
커다랗게 뜨인 눈이 리비에게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낯빛이 창백한 것이 마치 밀랍 인형처럼 보였다.
리비는 잠시 그의 답을 기다렸으나 그는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굳어 있었다.
하도 움직이지 않기에 리비는 그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은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다시 말했다.
“네 아이를 낳고 싶어.”
이번에는 들었을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결국 리비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보리스의 가슴팍에 내려놓았다.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손을 통해 여실히 느껴졌다. 그 반응만으로는 보리스의 생각을 온전히 읽을 수가 없었다.
좋다는 걸까, 아니면 싫다는 걸까. 아니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던 걸까.
만약에, 설마, 혹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다.
‘아이를 싫어하나?’
불쑥 떠오른 생각에 리비는 그제야 불안해졌다. 그러고 보니 보리스가 아이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그토록 그녀를 갈구하며 몸을 붙여 올 때에도 아이 이야기는 입도 벙긋한 적이 없었다. 리비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만 같았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그가 자신을 원한다고 해서, 반드시 둘 사이에 생길 아이까지 사랑하란 법은 없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 아버지나 어머니도 분명히 있을 수 있다. 게다가 마을에서도 종종 원치 않는 임신으로 괴로워하는 여자들을 본 적이 있었다.
개중에는 아비를 밝힐 수 없어 전전긍긍하는 여자들도 섞여 있었다. 여자를 임신시켜 놓고도 나 몰라라 하는 남자들도 많았다.
결국 아기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약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는 건 여자들이었다. 남자들은 혼인하지도 않은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가지면 무시하거나, 마지못해 책임을 지거나 하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그렇기에 보리스의 이런 반응은 리비에게 그런 일들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게 되면 당연히 아이를 갖는 것이 아니었나?
아이를 낳아 함께 키우며 살아가는 게 평범한 삶이 아니던가? 만약 그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원해도 ‘아이’는 갖고 싶지 않다면.
리비는 불안함을 가득 담은 눈으로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리비는 그의 몸에 손을 짚은 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손바닥 아래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조금 전과는 다르게 불규칙적으로 뛰는 게 느껴졌다.
그뿐만 아니라,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터져 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세차게 뛰는 중이었다.
리비는 그 박동하는 느낌에 자신의 몸까지 덩달아 쿵쿵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가슴에 올려 둔 손을 막 떼어 내려는 참이었다.
“아이?”
보리스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슬며시 들어 올려진 손은 그의 커다란 손 아래 눌려서 다시 가슴팍 위로 내려앉았다.
가벼운 움직임이었지만 돌로 내리누른 듯 강한 힘이었다. 리비는 꼼짝없이 그에게 손을 붙들릴 수밖에 없었다.
“보, 보리스…….”
“내 아이를…… 아니, 우리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한 거야, 리비?”
눈을 크게 뜬 채 되묻는 보리스의 얼굴은 어딘지 무시무시했다. 그 기세에 저도 모르게 리비가 찔끔할 정도로.
“응? 으응.”
리비는 웅얼거리며 답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을 넘어서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반응에 대체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말로?”
“어…… 응.”
리비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내 답했다.
그가 대체 어떤 답을 바라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차피 뱉은 말이 있으니 주워 담기는 글렀다.
그러면서도 내심 그가 싫다고 하면 어쩌지, 나는 너를 원하지만 아이는 원하지 않아,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온갖 망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녔다.
그렇다면 보리스에게 자신에게 원하는 건 그저 숱한 밤을 같이 보낼 여자일 뿐인 걸까. 온갖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배해 갈 무렵이었다.
“정말, 정말이지. 리비?”
그는 리비의 어깨를 움켜쥐며 말했다.
“…….”
이번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가 무섭게 다그치듯 물어보는 말에 리비는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너무해.”
제대로 된 답을 듣지도 않았건만 그가 보이는 반응만으로 이미 모든 것을 다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그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가 아이를 귀여워한다거나, 좋아한다거나, 아이를 낳자는 말을 한 적 없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리비?”
보리스는 당황한 눈으로 리비를 바라보았다.
“너야말로 싫으면…… 말로 해. 자꾸 그렇게 무섭게 묻지만 말고.”
“뭘?”
“싫은 거면 싫다고 해. 아이는 싫다고. 그러면 되잖아.”
“내가? 아이가 싫다고?”
“이거 놔.”
리비는 그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려 애쓰며 말했다. 그래 봐야 날개 잡힌 참새처럼 의미 없는 파닥거림일 뿐이라는 건 알았지만.
“놓으래도?”
리비는 사납게 외쳤다. 서러움으로 물든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눈에 보이고 말았다.
“리비…….”
보리스는 깊은 한숨과 뒤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리비를 단숨에 끌어당겨 안았다.
“……뭐, 뭐야.”
졸지에 그에게 바싹 당겨 안긴 자세가 되어 버렸다.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더더욱 갑갑했다.
“놔줘, 놓으란 말이야. 놔…….”
리비는 주먹을 들어 그를 마구 내리쳤다. 있는 힘껏 치고는 있지만 그 충격은 하나도 전달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보리스는 리비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바싹 죄듯 끌어안았다.
“흣…….”
순간 호흡 곤란이 올 정도로 거세게 안긴 탓에 리비는 크게 숨을 들이켜야만 했다.
그는 리비를 대할 때면 늘 세심하게 자신의 힘을 조절하고는 했다. 너무 세게 당기거나 아프게 안는 게 아닐까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자신을 아주 세게 후려치고 싶었다.
“보, 보리스…… 잠시……만…….”
꽈악.
보리스는 감정이 격해진 듯 더욱 거세게 리비를 끌어안았고, 리비는 갈비뼈가 축소되는 듯한 느낌에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러야만 했다.
“내가 우리의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니,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리비.”
“…….”
“사실은 기뻤어, 너무 기뻐서 표현을…….”
“…….”
“용서해 줘, 나는 네가 우리의 아이를 갖는다는 상상만으로도 벅차서…….”
“…….”
“……리비?”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보리스가 팔에 힘을 풀며 리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리비!”
얼굴이 하얗게 질린 리비가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정신 차려!”
보리스가 그녀를 끌어안은 채 외쳤다. 그 소리에 리비는 천천히 눈을 떠서 그를 마주 보았다. 물론 가늘게 뜬 눈으로 보리스를 흘겨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보리스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숨도 못 쉬고 죽을 뻔했잖아, 바보야.”
숨을 몰아쉬며 하는 말에 보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그는 다시 리비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격한 포옹에 또다시 막혀 올 숨이 걱정되어 바짝 긴장한 리비가 몸을 굳혔지만 이번에는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그녀의 몸을 감싸 안는 게 전부였다. 완벽한 힘 조절이었다.
“나는 괜찮아, 보리스.”
리비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손을 뻗어 너른 등을 토닥여 주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그러고 있었다. 그러느라 좀 전에 나누던 대화가 어디까지였는지를 떠올리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보리스.”
“응?”
“우리 그러면…….”
리비의 목소리는 다소 심각해져 있었다. 그 목소리에 놀란 보리스가 리비를 품에서 떼어 내 얼굴을 살폈다.
“왜, 어디 아파? 숨을 못 쉬겠어? 의사를 부를까? 리비, 내 얼굴이 제대로 보여? 토할 것 같지는 않아? 이거 몇 개야?”
보리스는 다다다 말을 쏟아 내더니 리비의 눈앞에 대고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리비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그의 손가락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그 몸짓에 보리스의 시선이 덩달아 기울어졌다가, 다시 리비에게로 올라왔다.
“그게 아니라…….”
리비는 수줍은 듯 말꼬리를 끌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손을 척 뻗어 그의 목에 둘러 놓았다.
“그러면 우리, 지금 아기 가질까?”
요망한 목소리가 보리스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뜨거워진 입김도 훅 불어왔다. 보리스는 그 자극에 몸을 흠칫 떨었다가, 자기 목에 팔을 두른 리비를 빤히 쳐다보았다.
“…….”
커다랗게 뜨인 눈은 이것이 현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듯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리비는 점점 이 순간이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한 유혹인데.
‘이것도 별로인가?’
최대한 요염해 보이기를 바랐다. 보리스의 눈에 더없이 유혹적인 한 마리의 세이렌처럼 보이고 싶었다. 달콤한 노래와 아름다운 자태로 뱃사공들을 홀려 버리는 그 요물들처럼.
그런데 그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이건 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뭐지, 뭐가 잘못됐을까. 리비는 자신의 유혹의 치명적인 허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아기를 가질까, 라니.’
사랑을 나눌까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보통 저런 말은 신랑이 신부에게 하는 말 아니었나.
‘그걸 내 입으로 뱉다니.’
리비는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아마 지금쯤 보리스는 확 식어 버려서 자신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리비는 호기롭게 그의 목에 감았던 팔을 슬그머니 풀어 내었다. 하지만 미처 그 손을 숨기기도 전에, 그녀를 꽉 끌어안은 손아귀에 잡혀 버리고 말았다.
“보리…… 응!”
갑자기 덮쳐든 입술에 그만 그대로 입술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방심한 사이 안으로 깊숙이 파고든 혀가 망설임 없이 안쪽을 지배해 나갔다.
리비는 숨이 벅찰 만큼 몰린 채 보리스의 저돌적인 입맞춤을 받아 내야만 했다.
갑자기 덮쳐든 맹수처럼 그녀를 발라먹던 보리스가 자비를 베풀듯 잠시 떨어져 나갔다. 숨 쉴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보리스, 보리…… 하……아.”
리비는 색색거리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좀 전에 거세게 안길 때만큼이나 숨쉬기가 곤란했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탓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들숨과 날숨을 내쉬며 바라본 보리스의 얼굴은.
“…….”
미쳐 있었다.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 아닌 그 무언가가 버티고 있었다.
섬뜩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이 그녀를 금방이라도 삼킬 듯 바라보고 있었고,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내밀어진 혀가 방금 전의 행위로 축축이 젖은 입술을 핥아 내렸다.
지극히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모습이었다. 마치 이제껏 봉인해 놓았던 진짜 모습이 모두 풀려 드러난 듯, 그는 한 마리의 야수가 되어 있었다.
“보리스, 저기, 보리…….”
그에게서 사라져 버린, 인간적인 모습을 되찾아 오기 위해 리비는 부지런히 그의 이름을 불러 댔다. 손을 뻗어 그의 눈앞에서 휘휘 내젓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맛 간 듯한 표정은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미 고삐 풀린 야생마나 다름없었다.
턱.
위로 올라온 손이 리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커다란 손에 짓눌린 볼 탓에 상당히 우스워 보이는 모양새가 되었을 얼굴이 걱정되어 파닥거리는데 그가 조용히 말했다.
“미치겠어.”
그가 중얼거린 말에 리비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응?”
“뭐, 뭘, 내가 무슨…….”
내가 뭘 어쨌다고. 그저 유혹이랍시고 던진 말에 별 반응이 없어 민망하던 차였는데 대체 어떤 지점에서 그가 이렇게 돌아 버렸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눈빛은 하늘의 별을 모조리 끌어다 박은 것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목격한 이처럼.
“이, 이것 좀 놔…….”
리비는 짓눌린 볼 탓에 어눌해진 발음으로 웅얼웅얼 말을 쏟아 냈다. 그러자 그의 눈에 담긴 별들이 더욱 강렬한 빛을 뿜었다.
“귀여워, 리비.”
또 알 수 없는 소리였다. 나름대로 유혹하겠다고 던진 말이었는데 귀엽다는 말을 듣다니. 자신에겐 성숙한 매력은 없는 건가 깊은 고뇌에 빠지려는 찰나였다.
스르륵.
문득 가슴이 시원해진 느낌에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헐벗은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거센 입맞춤을 받아 내는 동안 거칠게 몸을 움직이느라 가슴께까지 덮여 있던 수건이 아래로 흘러내린 것이었다.
달빛을 받아 뽀얗게 빛나는 탄력적인 살덩어리가 조금의 가림막도 없이 굶주린 야수의 눈앞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
리비는 그제야 자신이 수건 아래 아무것도 입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보리스가 몸을 말려 준다는 핑계로 알몸 그대로를 커다란 수건에 감싸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어, 저…….”
흘러내린 수건을 집어 올리려 했지만 보리스의 손이 더 빠르게 리비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움직이지 마.”
리비는 양팔을 붙들린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홀린 듯 자신의 나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부끄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대체 왜?’
이미 숱하게 불같은 밤들을 보낸 두 사람이었다. 장작은 태울 만큼 태웠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리비의 대단한 착각이었다.
보리스는 잿더미 속에서 다시 태어난 불새…… 아니 까마귀였으니까.
“괜찮아, 괜찮아. 리비.”
그는 뜨거운 숨을 내뿜으며 속삭이더니 천천히 몸을 숙여 왔다.
리비는 그가 팔을 붙잡은 자세 그대로 눕혀졌다. 천장이 빙글 돌고 어느덧 그녀의 위에서는 보리스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보리스는 얇은 바지만 걸치고 있는 상태라 탈의하기가 매우 쉽다는 걸.
“가만히 있어, 리비.”
그가 눈으로 주문을 걸 듯 리비를 바라보며 손을 놓고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왜 팔이 두 개밖에 안 되는지 몹시 원망하는 눈빛이었다.
스륵.
손짓 몇 번에 바지 끈이 풀어지고 그는 금세 태고의 모습이 되어 리비 앞에 섰다.
양 무릎 사이에 그녀를 가둔 채 몸을 세운 보리스의 우람한 자태에 리비는 숨죽인 채 그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이미 알고 있던 거지만. 도대체.
‘왜 볼 때마다 커지는 것 같지?’
이제 그녀는 정말로 두려웠다. 게다가 그가 뿜어내는 기운은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대체 뭐가 달라진 거지, 대체 뭘 어쨌기에 그가 이렇게나 이성을 잃게 된 거지. 리비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아이를 갖자고 해서? 겨우 그걸로? 어차피 이제 와서 그 이유 따위 찾아봐야 눈을 벌겋게 뜬 보리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 보였다.
“보리스, 진정하고…… 응?”
그러나 그의 상태는 결코 진정될 수 없는 듯싶었다. 아니, 오히려 그 말을 한 순간 더욱 흥분된 게 눈으로도 보일 지경이었다.
‘저게 대체 왜.’
리비는 무시무시하기까지 한 그의 모습에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아, 안 돼. 저걸 그대로 받아들이면…….
“꺅!”
그러나 피해 봐야 침대 위였다. 턱, 보리스에게 가느다란 발목을 잡힌 리비는 순식간에 그대로 끌어 내려져 다시 그의 앞에 놓인 제물이 되었다.
“어딜 가, 리비.”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이 음산하게 속삭였다. 이미 그의 눈에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
“…….”
“갖자며.”
“…….”
“그럼 가져야지, 네가 원하는데.”
“…….”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이뤄 줄 거야. 반드시 그럴 거야.”
그는 웅얼거리며 리비의 목덜미로 입술을 내렸다. 그간 같이 보냈던 밤의 경험으로, 그는 자신의 아내가 특히 예민한 곳이 어디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목과 쇄골 언저리의 약하디약한 피부가 특히 민감한 부위임을 이미 깨우친 그는 집중적인 공략을 퍼붓기 시작했다.
“간지러워, 아!”
리비는 쉼 없이 전해 오는 자극에 몸을 뒤틀며 소리를 내질렀다.
“그대로 있어.”
리비는 여전히 양손이 들어 올려진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보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왔다.
“앗!”
게걸스럽게 제 가슴을 빨아들이는 입술에 리비는 눈을 크게 떴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보리스의 혀와 입술이 맛있는 열매를 핥듯 부지런히 그녀의 가슴을 희롱하고 있었다.
쪽, 쪽.
젖가슴을 빨아들이는 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렸다.
“보리스, 보리스으…….”
리비가 죽어라 그의 이름을 불러 댈 때였다. 양껏 빨았는지 얼굴을 떨어뜨린 그가 리비를 올려다보았다.
놀랍게도 그 얼굴은 지나치게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마치 아기를 끌어안은 듯한 기묘한 감정이 솟아올라 리비는 극도로 혼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가슴을 빤다는 건 아기가 젖을 빨기 위해 엄마에게 하는 행동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그와 같은 걸 보리스가 했다. 그는 아기가 아닌데, 그런데…….
“리비?”
그가 혀끝을 내밀어 뾰족한 젖꼭지를 핥으며 그녀를 불렀다. 따뜻한 입김이 예민한 지점에 닿아 자극은 배가 되었다.
“으…… 하지, 마.”
“뭘?”
그는 더없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다시금 리비의 젖꼭지를 빨아 당겼다.
“흣, 그거…… 그러는 거. 아무튼 그거…….”
몸을 배배 꼬며 저항해 봤지만 그를 완전히 떨어뜨리기는 어려웠다. 그는 배고픈 아기처럼 리비의 젖가슴을 집착적으로 빨아들였고, 리비는 할딱이는 숨을 주체 못 하고 그의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아플 법도 한데 그는 포기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되레 젖을 빠는 혀의 움직임만 더욱 깊고 집요해졌다.
“보리스, 그, 그렇게 해도…….”
리비는 덮쳐드는 쾌락에 헐떡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는 혀와 입술을 오물거리는 걸 조금도 멈추지 않은 채 촉촉한 보랏빛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뭐?”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숨이 턱 막혔다.
“아, 아무것도 안 나와.”
겨우 맺은 말에 보리스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머잖아 나올지도 몰라.”
“……응?”
“아이가 생기면, 여기에 젖이 돈댔어. 한 손으로 쥐지도 못할 만큼 가슴이 잔뜩 부풀어서는…….”
“마,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되는데?”
씨익, 웃는 얼굴은 마치 아름다운 악마 같았다.
“우리가 하는 거, 아이가 생길 수도 있어. 당연한 일이야.”
보리스가 지나치게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리비는 깊게 숨을 들이마셔야만 했다.
“그, 그건.”
당연히 남자와 여자가 몸으로 사랑을 나누면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사랑의 결실은 아이, 결혼의 숭고한 의무 중 하나는 수태라는 걸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걸 다른 누구도 아닌 보리스와 한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리의 아이를 가지자며. 아니면 이제 와서 싫어진 거야……?”
보리스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가득 번져 갔다.
“그게 아니라…….”
아까 말했듯이 싫은 게 아니다. 오히려 원한다. 하지만 보리스의 이런 적극적인 태도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니면, 기쁜 거야?”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의 방향이 극단적으로 흐르는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싫어진 게 아니면, 기쁜 거지? 그렇지?”
보랏빛 눈에 위험한 광채가 맴돌았다.
“우리의 아이, 너도 원한다고 했잖아?”
“그, 그게.”
보리스가 이처럼 아이에게 진심이었나?
“널 닮았으면 분명히 예쁘고, 사랑스러울 거야. 리비.”
그는 황홀한 듯 그 광경을 그려 보는 듯했다. 제 가슴을 게걸스레 빨면서 아이 이야기를 하는 보리스 때문에 리비의 얼굴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응, 우리는.”
별안간 그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그가 단숨에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입속으로 더욱 깊게 가슴을 빨아들인 보리스가 게걸스러운 입질을 이어 갔다.
그의 공격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혀와 입술로 행해지는 애무에 그녀는 정신이 그대로 끊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보리스, 그만, 흑…….”
실컷 약한 부위를 가지고 놀던 보리스가 몸을 떨어뜨렸다. 리비는 눈물이 맺혀 흐릿한 시야 너머로 그를 응시했다.
가깝게 몸이 밀착됐다고 느낀 순간.
“아!”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의 팔에 손톱을 세워 넣었다. 갑작스러운 침입은 곧 짙은 쾌락으로 변질되어 갔다.
그가 빠르게, 그리고 느리게 안으로 침입해 들어올 때마다 리비는 그저 그의 목을 죽어라 끌어안은 채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리비, 리비…….”
그는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몇 번이고 이름을 불러 댔다. 그리고 코와 이마, 귓불, 턱 할 것 없이 모두 입술을 내리눌렀다.
“아이, 갖게 해줄게. 리비.”
부끄러운 소리를 잘도 중얼거렸다. 리비는 당황한 얼굴로 그의 어깨를 퍽퍽, 소리가 나도록 때려 댔다.
“아주 예쁘고…… 건강한…….”
그가 귓가에 속삭인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는 사이 몸짓은 점점 더 빨라졌다. 그는 더 이상 맞춰 갈 수 없을 만큼 강한 힘과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내 아이를, 우리의 아이를 만드는 거야.”
퍽, 퍼억.
다 받아들였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굵은 이물감이 안쪽을 가득 메웠다.
“응, 아…… 하앙.”
보리스는 형식 없이 박아 대다가 어느 순간 속도를 늦추더니 안쪽을 꾹꾹 눌러 자극해 왔다.
“하지…… 하지 마아!”
리비가 내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그녀가 느끼는 지점만을 찾아 집요하게 공략했다.
“하읏, 아, 흐응.”
안쪽 깊숙한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열감, 사방이 흔들리는 시야…… 그 안에서 뚜렷하게 느껴지는 건 자신을 보는 보리스의 시선뿐이었다.
“날 봐, 리비.”
보리스는 리비의 진저리치는 얼굴을 붙잡아 깊이 입을 맞추더니, 다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점막을 빠져나간 것이 다시 안으로 퍽퍽 치받아 올 때마다 리비는 미칠 것만 같았다.
머리끝까지 쾌감에 집어삼켜질 무렵, 보리스는 모든 행동을 멈추더니 그대로 안쪽 깊숙이 사정했다.
리비가 나른하게 몸 안으로 퍼져 가는 기운을 느끼며 눈을 깜박이자, 보리스는 리비의 몸 위로 길게 몸을 늘어뜨렸다.
리비는 완전히 지친 채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까는 잠을 깨려 노력했다면 지금은 그럴 의지조차 들지 않았다. 눈꺼풀을 내리누르는 힘에 굴복한 채 어서 빨리 잠의 나락으로 떨어지고만 싶었다.
완벽하게 기진맥진한 리비와 달리, 보리스는 관계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리비의 허리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어깨와 쇄골에 연달아 입맞춤을 흩뿌려 댔다.
그 간신히 제어한 듯한 관능적이고 부드러운 접촉에 리비는 쉬이 잠에 빠져들 수 없었다.
“리비, 어서 자.”
“네가 못 자게 하잖아.”
리비는 졸음이 가득 묻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몇 번쯤 했더라. 세어 보는 건 더 이상 무의미했다.
“안 괴롭힐게.”
그가 조금은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리비, 이젠 정말 자.”
그녀는 졸음이 쏟아지는 눈을 뜨고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정말이냐는 무언의 뜻을 담은 눈빛이었다.
“정말이야, 안 괴롭힐게.”
보리스는 웃으며 답했고, 리비는 그 웃음에 또 지고 말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어쩐지 저 눈웃음만 보면 스르르 화가 풀리는 걸 어쩌란 말인가.
이런 나도 참 나다, 라고 생각하며 리비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푹 자.”
보리스는 리비의 이마에 가만히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것이 마치 주문이라도 된 듯, 리비는 그때부터 죽을 듯한 잠에 빠지고야 말았다.
***
“으응…….”
리비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렸다.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여 잠시 의아했으나,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에드라크성으로 돌아왔지, 참.’
여기는 에드라크 공작 부부의 거처인 침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은 제대로 된 에드라크 공작 부인으로서의 첫날인 셈이다.
‘가만, 지금 몇 시지?’
두텁게 쳐진 커튼 사이로 쨍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적어도 정오는 지난 시각인 것 같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리비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뒤이어 비명을 질렀다.
“아악!”
어젯밤 있었던 일을 상기시키듯 온몸이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몸 마디마디가 극심한 피로를 호소해 왔다.
리비는 일어나려던 노력을 거둔 채 도로 뒤로 벌렁 드러누워 버리고 말았다.
“마님! 무슨 일이신가요?”
문밖에서 들린 목소리는 익숙한 이의 것이었다. 에드라크성에 끌려온 그녀를 내내 돌봐 준 하녀 베스였다.
“들어가겠습니다.”
뭐라 답할 새도 없이 다급하게 문이 열리고 베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침대에 꼴사납게 드러누워 있는 공작 부인을 발견하고선 잠시 당황한 듯 보였으나, 이내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와 리비를 부축해 앉혀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네에…….”
“편히 말씀하십시오. 이제 이 성의 진정한 안주인이 되셨지 않습니까.”
베스가 펄쩍 뛰며 하는 말에 리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차…… 할게요. 그런데…….”
리비의 시선이 텅 빈 옆자리를 향했다. 눈을 떴을 때 그가 사라졌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텅 빈 침대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텅 비어 버린 것만 같았다.
왕궁에서는 내내 같이 잠들고 같이 일어나는 생활을 해온지라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새벽부터 기사단 일로 나가셨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는 굉장히 바쁜 사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큰 성을 꾸려 나가고 그 큰 기사단을 이끌어 나가려면 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갈 것이다.
같이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운해하기엔 그의 어깨에 짊어진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일어나시면 식사와 목욕을 준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외의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분부하세요. 식사를 먼저 하시겠어요? 아니면…….”
“먼저 씻을게요.”
리비는 얼른 대답했다. 당장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지 않으면 이 온몸이 조각날 것 같은 통증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분명히 어제 오랜 시간 보리스와 노닥거리며 발가락이 퉁퉁 불 정도로 씻었으나 그때 씻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질 만한 밤을 보낸 뒤였다. 그 사실이 떠오르자 리비의 얼굴은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머나, 더우신가요?”
“아뇨.”
리비는 고개를 내저으며 손으로 부채질을 계속했다.
“그럼 당장 준비시키죠.”
짝짝, 손뼉을 마주치자 문이 열리고 하녀들 몇 명이 더 들어왔다. 벽난로 앞쪽에 커다란 욕조가 놓이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빨리……?”
“여기는 물을 데우는 곳과 가까워서 언제든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실 수 있답니다.”
베스가 웃으며 리비가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리비는 조심스레 바닥으로 발을 디뎠다.
찰랑.
물 안에 몸을 담그자 저도 모르게 깊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녀들이 즉각 해면에 비누를 문질러 거품을 낸 뒤 몸을 문지르자 상쾌한 향이 금세 퍼져 나갔다.
따끈한 물에 씻고 나오자 침대 앞 테이블에는 따끈한 빵과 수프, 잘게 썬 고기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 여태 잊고 있던 맹렬한 식욕이 단번에 솟아올랐다.
포크와 나이프로 음식을 콕콕 찍어 먹는 동안 베스는 물과 우유를 따라 주며 옆에서 세심히 그녀를 시중들었다.
겨우 배를 채우고 나자 오늘 하루 일과에 대해 고민할 여유가 드디어 생겨났다.
‘뭘 해야 하지?’
보리스는 기사단 업무로 하루 종일 바쁠 테니, 그를 귀찮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성을 비웠던 시간만큼 그가 신경 써야 할 일들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때였다.
“베스.”
“네?”
“성을 구경시켜 줘요. 곳곳을 둘러보고 싶어요.”
전에 몰래 외성으로 나갔을 때는 이리저리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살필 겨를이 없었다. 또한 본성의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성의 안주인의 첫 번째 역할은 당연히 성 구석구석에 뭐가 있는지 파악하고 살림을 알뜰히 꾸려 나가는 데에 있으니, 마땅히 안내해 줄 사람도 필요했다.
“그야 물론입니다만, 괜찮으시겠어요?”
베스는 조심스레 리비의 몸을 살폈다.
“물론, 괜찮아요.”
어젯밤의 기억이 너무 강렬하게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동안 단련되어 온 덕분인지 아예 운신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매번 그랬다가는 침대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그런 것에 익숙해진다는 사실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없는 방에서 내내 멍하니 환자처럼 누워 있고만 싶지는 않았다.
그가 일을 하고 있다면 나도 일을 하리라.
리비는 야무진 계획을 세웠다.
“단장을 도와주세요.”
리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베스는 하녀들을 시켜 옷이 담긴 함과 장신구가 들어 있는 함, 빗과 거울 등을 넣어 둔 상자 등을 가져오도록 했다.
“전부…… 새거네요?”
리비는 앞에 놓인 것들을 황홀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금으로 넝쿨무늬를 아로새긴 빗과 거울은 그저 단장에 쓰이는 것이라기엔 아까울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장신구 함을 열자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호화스러운 보석 장신구들이 가득 담긴 것이 보였다.
“그때 아가씨를 모셔 왔을 때는 미처 준비되지 못한 것들이 많았는데, 성을 비우신 동안 상인이 와서 몇 가지 구비해 두었습니다. 급하게 마련하느라 눈에 차지 않으실 수 있어요. 원하시는 물건이 있다면 장인을 불러다가 만들도록 하지요. 상인들을 불러서 수도의 물건들을 사 오도록 하셔도 되고요.”
“이것도 충분히 좋은걸요.”
리비는 쳐다보기에도 눈부신 장신구들을 보며 말했다. 대체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네, 공작님께서 그리 지시하셨어요. 성안의 모든 금화를 다 쓰셔도 된다고…….”
“아.”
리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대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금액임은 확실했다.
“폐하께서 주신 선물들도 많으니까요.”
리비는 수도를 떠나올 때 안드로스 왕이 바리바리 싸서 보낸 온갖 선물들이 떠올랐다. 짐마차에 가득 이고 지고 싣고 오느라 에드라크로 돌아오는 시간이 갈 때보다 배는 더 소요됐다.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다 살펴볼 엄두조차 안 나는 규모였다. 그 선물을 실려 보낼 때 왕궁의 귀족들은 모두 부러워하는 눈빛을 보냈으나 리비는 영 탐탁지 않았다.
이건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다.
그녀의 머릿속을 온통 차지한 생각은 단 하나였다. 왕은 절대 신뢰할 수 없는 자였고, 조카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실어 보냈다기엔 지나치게 많은 물건들이었다.
선물을 받는 사람을 고려했다기보다는 외부에 과시할 용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것들도 정리할 예정입니다. 재미있는 물건이 많더군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 밖에 무엇이든 필요하신 게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마님께선 뭐든 하실 수 있답니다.”
“뭐든……?”
베스의 말은 설탕을 바른 것처럼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리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어제 성에 돌아온 이후로 너무 잠만 잤네요. 밖에 나가 보고 싶어요.”
“어제요……?”
베스는 선뜻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 웃으며 말했다.
“마님께선 꼬박 하루를 주무셨습니다. 공작님께서는 내내 옆에서 지켜보시다가 더 이상 공무를 미룰 수 없어 제게 마님을 부탁하신 뒤 자리를 비우신 거고요.”
그 말에 리비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루를, 꼬박 하루를.
‘잤단 말이야?’
리비는 멍한 얼굴로 베스를 바라보았다. 보리스와 뜨거운 밤을 보낸 여파로 무려 하루 내내 잠에 빠져 있었다니. 잠자는 마법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자버렸으니.
도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있는데 베스가 그 생각을 알아챈 듯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무리하셨으니 그럴 수도 있지요.”
매우 잘 이해한다는 듯, 사려 깊은 말에 리비의 얼굴은 더욱 붉게 타오르고 말았다.
“신혼의 부부란 원래 그런 거예요.”
“그게, 그래도…….”
성으로 돌아온 첫날을 그렇게 침대에서 날려 버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 밤이 그렇게 격했다지만!
“괜찮습니다. 마님이 원하신다면 일주일, 아니 한 달 동안 침실에서 꼼짝하지 않으신다 해도요.”
베스는 리비를 안심시키려는 듯 몇 번이고 반복해 말했다.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이 성의 안주인으로서의 의무란 게 있지 않은가. 안주인이 내내 침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 성의 꼴은 뭐가 되겠는가.
아무리 집사와 하녀장이 있다 해도 세세한 곳까지 신경 쓰려면 안주인의 역할이 절실하다.
“저, 에드라크성에 대해 좀 더 잘 알고 싶은데요.”
“깨어나시면 성안을 자세히 안내해 드리고 1년 치 예산 등 여러 가지 일을 알려 드리려고 집사가 준비하고 있었답니다.”
“성을 좀 더…… 포근하고 아늑한 곳으로 꾸미고 싶어요. 이곳은 우리 두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기도 하니까요.”
보리스가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그런 곳을 원했다.
‘보리스는 기사니까.’
당장은 아니더라도 전쟁에 나갈 일이 생기고야 말 것이다. 기사들의 아내는 전쟁에 나간 남편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동안 그가 쉴 곳을 아늑하게 꾸미는 일에 집중한다고 했다.
아버지인 하이든 백작은 어린 딸을 안고 티소 마을로 돌아온 뒤 큰 전쟁에 나가는 일은 없었으나 도적떼 같은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경계했으며, 마을 치안에 정성을 기울였다.
간혹 큰 늑대 무리가 내려온 날에는 비장한 얼굴로 마을 자경단원들과 함께 늑대를 잡으러 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리비의 계모였던 여자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아버지의 무사 귀환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지친 얼굴로 돌아온 니콜라스를 보며 계모는 울음을 터뜨렸다.
기사와 결혼한다는 건 이렇듯 불안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설령 기사직을 내려놓는다 해도, 사람들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 몸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곳은 오래도록 비워져 있어서 아직 손볼 곳이 많습니다. 마님께서 직접 성을 꾸미도록 지시하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상인들과 공예가, 업자들을 불러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리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베스, 저, 성 밖 마을에도 가보고 싶어요.”
“성 밖 마을이요?”
베스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어리더니 이내 불안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곳은 위험해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곳이라.”
“이렇게 훌륭한 성이 있는데, 마을은 그렇게 황폐한 게 마음에 걸려요.”
에드라크성에 인접해 있는 마을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건가요?”
척 보기에도 마을은 텅텅 비어 있었다. 길에는 흙먼지가 흩날렸고 건물들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그런 모양새였는지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마을은 언제부터 그렇게 비어 있었던 거예요?”
아마도 초대 에드라크 공작이 이 근방을 지배하던 시절에는 저렇지 않았겠지. 영주가 죽고, 그의 대를 이을 자식마저 없자 이렇듯 황폐한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꽤 오래전 일입니다. 전염병이 돌았다고 하더군요.”
“전염병……?”
그러고 보니 티소 마을의 어른들에게 그런 말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어느 해엔가 살이 썩어들어 가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에드라크에 돌았고,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그 병에 걸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고.
시체 썩은 내를 맡고 몰려든 헤센숲의 까마귀들로 하늘이 새카맣게 뒤덮였었다는 이야기를, 리비는 끔뻑끔뻑 조는 눈으로 들었다.
티소 마을은 헤센숲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병의 전염에서 무사할 수 있었고, 다행히 주민들에게 큰 피해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번성했던 에드라크 일대의 마을은 그 전염병으로 일시에 몰살되고 말았다. 겨우겨우 살아남은 사람들마저 가족을 잃은 곳에 남기에는 슬픔이 너무나 컸고, 노동력이 급격히 감소해 농사며 상업 활동을 하기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전대 공작님께서는 이곳을 부흥시키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하셨다고 해요.”
에드라크 영지는 자연 조건은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다행히 땅은 기름졌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외부와의 왕래가 쉽지 않았다.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막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지만 그만큼 고립되어 발전이 뒤처질 가능성도 컸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돈이 흐르고 영지가 더욱 번성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아무리 강한 기사단이 주둔하는 곳이어도,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는다면 공허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성 밖의 마을은 그렇게 오래도록 내버려져 있었다.
“음…….”
리비는 눈을 감은 채 그 황폐한 마을을 떠올려 보았다.
그곳이 좀 더 사람들로 북적이고, 아름다운 곳이 되면 좋겠다. 상인들도 활발히 오가고. 전염병이 돌았다는 과거의 일 하나로 묻히기에는 천혜의 자연을 가진 아름다운 곳이었으니까.
“사람들을 모을 방법이 없을까요?”
“그것이…… 지금도 아예 사람이 안 사는 건 아닙니다.”
리비는 마차 안에서 언뜻언뜻 눈이 마주쳤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칼리니 기사단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고, 눈이 마주치면 건물 뒤로 숨거나 창문을 닫는 등 다분히 경계하는 행동을 보였다. 절대 영주 일행을 반기는 태도라고는 볼 수 없었다.
‘하긴, 무장한 기사들이니까.’
단단한 보호구와 무기를 지닌 기사들은 같은 편일 때는 누구보다 든든한 이들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한없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언제 그들의 검이 자신들의 목을 자르고 창으로 살을 찢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리비는 레제트 공작과의 정략결혼을 명하러 온 백작 일행을 본 마을 사람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일평생 밭을 일구며 농사를 해온 이들이었기에 들어 본 무기라고는 농기구가 전부인 사람들이었다.
그런 마을 주민들이 갑자기 마을을 점거한 왕궁 기사들을 봤을 때 느꼈을 감정은 단순한 공포를 넘어선 것이었다.
문득 그때 일이 아주 까마득히 먼 옛날 일처럼 여겨졌다. 만약에 그때 보리스가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에드라크와 까마득히 떨어진 곳에서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겠지. 늙은 공작의 아내가 되어서, 그의 첩들과 다 큰 자식들 틈바구니에서.
“어느 곳에나 떠돌이들은 있죠. 다만 정착할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살면 좋을 텐데요.”
영지는 결코 영주만의 의지로 부흥할 수 없다. 영지에 사는 영지민들이 내는 세금과 노동력이 영지를 유지하는 힘이 되는 법이다.
“오래도록 버려져 있었으니까요. 아마 선뜻 이주해 오려 하지 않을 겁니다.”
“일단 둘러보는 건 괜찮을까요?”
좀 더 그 마을을 자세히 둘러보고 싶다. 아마 그러면 마을을 발전시킬 다른 수가 생각나지 않을까.
리비의 말에 베스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마을에는 부랑자들도 많습니다. 그때그때 하루치의 식량만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을 자들이죠. 그런 곳에 가는 건 위험합니다.”
“그렇군요.”
리비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아직 폐허나 다름없는 마을을 돌아보는 건 위험한 일이 맞으니까. 그때였다.
“나가고 싶어?”
뒤에서 들린 소리에 리비와 베스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문가에는 언제 왔는지 보리스가 우뚝하니 서 있었다. 베스는 재빨리 인사 후 방을 나갔다.
“어……떻게 왔어?”
“날아서.”
아무렇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을 제법 진지한 얼굴로 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순간 현실 감각이 상당히 떨어지려 했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을 한 것이었지만.
“내 말은…….”
“죽은 듯 자고 있길래.”
그의 표정에는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꼬박 하루를 잠들어 있었다고 했으니 그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척척 방을 가로질러 다가온 보리스가 리비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몸을 휙 숙여 왔다. 입을 맞추려는 건가 싶어 눈을 꼭 내리감는데 문득 이마에 따스한 것이 와닿는 게 느껴졌다. 따스한 숨결도 느껴졌다.
살며시 눈을 뜨자 골똘히 생각에 잠긴 보리스의 얼굴이 보였다. 이마에 닿은 건 그의 손이 아니라 이마였다.
“눈은 왜 감아?”
보리스가 묻자 리비의 얼굴이 즉각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언제.”
“뭘 기대했어?”
보리스의 말투가 장난스럽게 돌변했다. 그가 놀려 먹는다는 생각이 들자 리비는 몸을 휙 뒤로 물리며 새침을 떨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보리스가 속삭인 말에 리비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아. 그렇게 약해 빠지지 않았다고.”
그러자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 안 볼 거야?”
다정하게 구는 목소리에 귀가 녹는 것만 같았다. 저렇게 부르는데 어떻게 안 돌아보나. 슬그머니 머리를 다시 그에게 돌리자 아름답게 빛나는 눈과 마주쳤다.
“어떻게 온 거야? 기사단 일은? 훈련은?”
“농땡이.”
“……응?”
또 태연하게 튀어나온 말에 리비는 급히 눈을 깜박였다.
“부인 얼굴 좀 보러 가야겠다고 했더니 다들 군소리 않고 꺼지라고 하던데.”
“설마.”
아무리 자신에게 느슨하게 구는 보리스라 해도 다른 기사단원들이 그를 쉽게 대하는 건 아니라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기사들과 있을 때와 자신과 있을 때 확연히 달라지는 모습에 놀랐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다른 곳은? 아픈 데 없어?”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그녀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사실 완전히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지만 차마 티 낼 수는 없었다.
“괜찮아.”
리비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보리스의 얼굴이 조금은 짓궂게 돌변했다.
“여기도, 여기도?”
“음…….”
그가 살며시 어루만지는 손길에 리비는 옅은 신음을 흘렸다. 자기가 뱉은 소리에 놀란 리비가 얼른 입을 막자 그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자제할게.”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굳은 의지가 가득 담긴 결심이라는 걸, 리비는 알 수 있었다. 허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상당히 조심스러워서, 그녀는 그만 엄살을 부리고 싶어졌다.
“아파.”
“…….”
놀라서 커지는 눈에 리비는 사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서 재빨리 입을 맞췄다.
쪽.
순식간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에 보리스는 잠시 굳은 듯 서 있다가 단숨에 리비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음, 으읏.”
새의 입맞춤처럼 잔잔한 키스였는데 보리스에 의해 순식간에 후끈 달아올라 버리고 말았다. 안으로 들어온 혀가 안쪽을 헤집는 동안 리비는 저도 모르게 그 입맞춤에 응하고 있었다.
서로의 열기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덧 몸이 번쩍 위로 들어 올려졌다.
리비가 눈을 반짝 뜨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여전히 맞닿은 입술을 떨어뜨리지 않은 보리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눈을 감고서도 척척 걸어서 목적지를 향해 갔다.
털썩.
빠져나온 지 얼마 안 된 침대에 졸지에 다시 누워 있게 되었다. 멍해 있는 사이 그는 리비의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몸을 달구어 놓았다. 참으로 빠르기 이를 데 없었다.
“보리스.”
아직 해가 밝다. 걷어 둔 커튼에서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부끄러워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바, 밤에.”
미약하게나마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잠시만…….”
그는 열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허리며 등을 지분거리는 손길은 끈끈이가 묻어나는 것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안 돼애…….”
안 될 것도, 싫은 것도 아니지만 당장은 보리스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좀 전에 겨우 일어났는데, 하루 내내 잠에 빠져 있었는데 이대로 다시 누워 버릴 수는 없다. 주인 부부의 사이가 좋은 것은 결코 흠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부끄러웠다.
“나, 밖에 나가고 싶어.”
리비는 불현듯 소리쳤다.
“…….”
보리스는 리비의 목덜미에 열심히 흔적을 남기다가 고개를 쳐들었다.
“밖에?”
그녀가 한 말을 되풀이하던 그는 리비의 말을 곱씹어 보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마을에 가고 싶다는 거야?”
“응.”
리비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긴 폐허나 다름없어.”
“그래서 가보고 싶은 거야.”
리비는 굳은 의지를 담아 속삭였다.
“너와 함께 가보고 싶어.”
아무리 위험한 곳이어도 보리스와 함께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었다.
“거긴 왜?”
“이제…… 이곳에서 살아야 하잖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자세히?”
“응, 여긴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잖아. 전염병으로……. 주인이 생겼으니까, 다시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 되면 좋을 텐데.”
한번 떠나간 사람들을 다시 돌아오게 할 방법이 있을까 싶었지만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른 영지에서도 전염병이나 화재, 전쟁 등의 이유로 사람들이 떠났다가 성을 재건한 후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곤 했으니까.
이곳은 원래 사람들이 붐비던 곳이었으니 어쩌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 몰랐다.
“있지, 보리스. 영지에는 기사들만 있어서는 안 되잖아. 농사도 짓고, 상인들도 오고…… 그러면 더욱 발전할 거야.”
에드라크 영지는 광활하다. 지금은 텅 비어 있지만. 사람이든 땅이든 가꾸기 나름이라고 했다. 조만간 사람들이 몰리고 깨끗이 정비를 해서 더욱더 번창해 나갔으면 했다.
“나는 여기가 더 좋은 곳으로 바뀌었으면 해.”
리비는 손을 들어 보리스의 얼굴을 감쌌다.
“우리가 살아갈 보금자리니까.”
***
보리스가 모는 말이 성을 빠져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건 드넓은 마을, 그러나 사람이 살지 않는, 다소 살벌하고 적막한 풍경이었다. 드넓은 농지는 새파란 잡초로 뒤덮여 들판처럼 보였다.
리비는 후드가 달린 망토를 뒤집어쓴 채 보리스가 모는 말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행여 리비가 떨어질까 염려가 되었던지 한 팔로 가느다란 허리를 꽉 움켜쥐었다.
“나도 말 타는 거 알려 줘.”
리비는 까마득하게 멀어 보이는 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렇게나 멋지고 근사한 말이라니. 새카만 털에는 윤기가 흐르고, 엉덩이며 허벅지가 모두 단단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명마였다.
“나도 이런 말을 몰아 보고 싶어.”
리비가 심취한 듯 중얼거리자, 말은 자신에게 하는 칭찬을 알아들은 것처럼 푸르르,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그조차 근사했다.
티소 마을에 있는 말들은 군마가 아니었기에 당연히 체구도 작았고, 대체로 온순한 성격이었다. 타고 다니기보다는 주로 농사 일을 할 때 무거운 짐을 실어나르는 용도로 쓰이곤 했다.
그렇기에 리비는 소는 몰아 봤어도 승마술은 배워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나귀를 타는 정도가 전부였다. 혹은 짐마차를 끌도록 말을 부리거나.
그런데 보리스의 말은 거침없이 바람을 맞으며 시원스레 달려 나갔고, 멀어 보이던 마을이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가르쳐 줄게.”
보리스는 리비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정말? 나도 이런 말을 탈 수 있어?”
“군마는 너무 거칠어. 전쟁에 동원되어야 하니까. 순한 놈으로 골라 보도록 할게.”
“응.”
리비는 그의 대답이 기쁜 나머지 활짝 웃으며 그의 품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보리스와 함께 말을 타고 들판을 가로지른다는 상상을 하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시 후, 마을의 입구로 접어들자 금세 으스스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에드라크 영지민들이 살았던 마을은 그야말로 유령 마을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저 마차에서 지나가듯 휙휙 보았던 것과 달리 말에 앉아 하나하나 자세히 보는 것은 확연히 달랐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간판은 부서져서 반쪽이 사라진 상태였으며, 바람이 불 때마다 끼익끼익 불길한 소리를 내곤 했다.
포장된 지 오래되어 이리저리 깨지고 부서진 돌 때문에 바닥은 울퉁불퉁했고, 돌이 벗겨진 자리는 말이 지나갈 때마다 푹푹 파이며 자국을 만들어 냈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손봐야 할 것이 바로 사람과 말, 수레가 지나다니는 대로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보리스는 말이 편하게 디딜 수 있는 자리를 골라 조심스레 말을 몰며 앞으로 나아갔다.
예전에 시장이 있었던 자리는 텅텅 비어 있었고, 돌아가지 않는 풍차의 날개에는 흙먼지만 뽀얗게 쌓여 있었다.
무기 제작소와 병원, 사람들이 사는 집……. 모두 이전에는 사람들이 내뿜는 생기로 북적였을 공간이었다.
그랬던 곳들이 이제는 모두 텅텅 빈 채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광장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마을의 중심이었지만 쥐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보리스는 리비가 구경할 수 있도록 천천히 말을 몰았다. 리비는 하나씩 눈에 담으며 이전에 에드라크가 번성했을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네.”
마을을 자세히 살펴본 리비의 소감이었다.
“그렇지? 생각보다 많이 망가지지 않았어.”
마을을 구성하고 있던 건물들은 낡기는 했어도 여전히 처음 지어진 형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로도 바닥에 깔린 돌들이 깨져 나가긴 했지만 보수만 충분히 한다면 새로 깔지 않아도 될 만큼 단단했다.
“처음부터 아주 공들여 만든 마을이야.”
리비는 이 을씨년스러운 풍경 속에서도 감탄을 하는 자신이 이상했지만, 확실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에드라크 마을은 초대 에드라크 공작이 처음 이 마을을 세울 무렵, 바닥재와 건물의 자재까지 모두 오랜 세월을 견뎌도 끄떡없을 정도로 지어졌다.
“방치된 시간이 오래되었는데도 이 정도면 꽤 상태가 좋아.”
리비의 감탄에 보리스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받은 게 아니니까.”
“전염병이 돌았다며?”
“…….”
리비의 물음에 보리스는 선뜻 답을 하지 않았다. 그 잠시 동안의 간극 동안 리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보리스?”
“……그래서 크게 부서지거나 망가지는 것 없이 보존될 수 있었지.”
보리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을에 세워진 건물들은 크게 파손된 곳 없이 멀쩡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래 버려져 있어서 낡긴 했지만.
그나마도 보수하고 먼지를 털어 내면 이전과 비슷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
말은 천천히 마을을 둘러싼 성벽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성벽 역시 군데군데 허물어지거나 보수해야 할 곳이 보였다.
깨진 돌 틈새로 무성한 잡초가 비집고 나온 게 보였다. 길게 자란 잡초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세월만큼 길게 자라난 것처럼 보였다. 전부 걷어 내고 무너진 부분을 메우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이곳에 사람들이 가득했을 때가 궁금해.”
대체적으로 큰 성을 낀 마을은 그만큼 부유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한 곳이 많았다.
티소 마을이야 에드라크령에 속해 있는 작은 마을일 뿐이었지만 이곳은 성과 바로 이어진 마을이기에 척 보기에도 규모며 시설이 사뭇 달랐다. 이대로 버려두는 것이 아까울 만큼.
“네가 원하면 사람들을 불러 모을게.”
보리스가 속삭이는 소리에 리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응.”
보리스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모으는 일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는 상당히 간단하고 수월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어떻게?”
“성이 세워지면 그 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여들게 되어 있지.”
“…….”
“나는 이곳을 수도 못지않은 성채 도시로 만들 거야.”
리비는 에드라크의 도시 계획을 이야기하는 보리스를 보며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보리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으니까.
“이제 막 에드라크의 주인이 성을 차지했으니, 차츰 이곳을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어 볼게.”
“…….”
“너는 사람 많은 걸 좋아했잖아, 리비.”
“그거야…….”
시끌벅적, 사람 많고 시끄럽고 노는 것이 좋았다. 아무도 그녀가 백작의 딸이라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그녀는 거침없이 마을을 헤집고 다녔다. 혼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뭐든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일들을 좋아했다.
“마을이 다시 살아나면 많은 사람들이 모이니까 북적북적할 거야. 여기서 축제도 열 수 있지.”
축제. 그 말에 리비는 주책 맞게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그러면 정말 좋겠다.”
모든 유희거리는 사람을 따라 움직이게 마련이니까, 음유시인이나 무희들, 공연단들도 머물게 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흐뭇한 광경에 리비의 얼굴에 화색이 돌자 보리스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사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잠시 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보리스?”
순식간에 딱딱하게 변해 버린 얼굴을 마주한 리비가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가만히.”
보리스는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센 힘이었지만 리비는 섣불리 그 팔을 풀어 낼 수 없었다. 그만큼 보리스의 얼굴이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왜, 왜 그래?”
리비는 그에게 바짝 몸을 붙이며 물었다. 긴장된 숨소리가 퍼지고, 온몸의 근육이 반짝 죄어든 것이 느껴졌다.
스릉.
그가 검집에서 뽑아낸 칼이 서늘한 빛을 발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리비는 두려운 마음에 더욱 그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그릉.
어디선가 들린 짐승의 울음소리에 솜털이 바짝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사나운 짐승의 노란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늑대?”
리비는 공포에 질려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보리스, 늑대야.”
리비는 기겁하며 그를 붙들었다. 늑대의 몸체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어린놈이네.”
그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하지만 리비의 몸을 더욱 바싹 그러안는 손길은 더욱 강해졌다.
“어리다고?”
리비는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늑대를 보았다.
“저렇게 큰데?”
회색 털을 가진 늑대는 마을에서 키우는 가장 큰 개의 범주를 훨씬 벗어날 정도였다. 살아 있는 늑대를 마주하는 건 그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 늑대의 크기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만 했다.
“부서진 성벽 틈으로 들어왔나 봐. 돌아가자마자 보수를 지시해야겠어.”
그는 쯧, 혀를 차더니 늑대를 노려보았다.
“아아.”
그는 뭔가를 깨달은 듯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사람 키만큼 자란 수풀 사이에서 다른 늑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놈이 아니네.”
이번에는 좀 더 큰 놈이었다.
“무리 지어 다니는 습성이 있어서.”
“여긴 먹을 것도 없을 텐데…….”
리비는 두려운 눈으로 늑대들을 쳐다보았다. 저렇게나 큰 늑대가 둘씩이나. 두려움에 입안이 바싹 말라 왔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간단한 방법? 늑대들을 상대로 ‘간단히’ 이기는 방법이란 게 정말 있기는 하단 말인가.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는 리비를 보던 보리스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널 안고서 날아오르는 거야.”
그녀는 보리스의 말을 멍하니 곱씹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레너드는…….”
리비는 푸르륵, 하며 머리를 털어 대는 짐승의 갈기를 가만히 움켜쥐었다.
“늑대들이 달려들면 어떻게 해?”
“레너드는 쉽게 당하진 않아.”
“하지만 여러 마리가 달려들면 위험할 거야.”
말은 예민한 동물이었다. 아무리 군마로 숱한 전쟁을 치러 냈다지만 이런 야생 동물의 공격은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리비, 고삐를 잡아.”
“응?”
그의 말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 리비는 멍하니 되물었다.
“어쩌려고?”
“다 치우고 가야지.”
그는 어질러진 방 안을 치우는 사람처럼 말했다. 보리스는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더니 리비의 허리를 감싼 손을 풀었다.
“괜찮아. 내리지 말고 여기에 있어.”
“보, 보리스. 위험해. 그냥 빨리 말을 달려서…….”
“아마 쫓아올 거야. 말을 물어뜯으면 골치 아파져.”
크르릉, 늑대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어느덧 머릿수는 세 마리로 늘어나 있었다. 리비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보리스의 망토 자락을 부여잡았다.
“무서워할 거 없어. 이것만 꼭 붙잡고 있어, 알았지?”
“너, 다치면…….”
“걱정 마, 리비.”
그는 픽 웃더니 후드를 뒤집어쓴 리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이겨.”
그 말만 남기고서 그는 말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리비는 그가 쥐여 준 고삐를 세차게 움켜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보리스가 말에서 내려서자 쿵, 하며 땅이 울렸다. 순간 가장 가까이에 있던 늑대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악!”
리비는 말 위로 납작 몸을 엎드렸다. 푹, 칼이 두꺼운 가죽을 뚫고 들어가는 소리와 더불어 짐승이 내지르는 단말마의 울음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후드득.
뭔가 뜨끈하고 질척이는 액체가 망토 위에 흩뿌려졌다. 눈을 뜨자 뒤집어쓴 후드 위에서 툭툭 떨어지는 검붉은 피가 보였다.
리비는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아 비명을 삼켰다. 고개를 돌리자 가슴 정중앙을 관통당한 늑대가 세로로 길게 찢어진 채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짐승의 눈은 크게 뜨여 있어서, 마치 자기를 죽인 이를 원망하듯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끝났다. 연이어 달려들 줄 알았던 늑대들은 눈앞에서 동족이 조각난 것을 본 뒤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동족이 흘린 피에 자극받은 듯 사납게 빛나는 노란색 눈 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누가 맹수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보리스가 뿜어내는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보리스가 남은 늑대에게 다가섰다. 벽이 세워진 곳까지 몰려간 늑대는 몸을 움츠리는가 싶더니 별안간 보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늑대는 또다시 보리스의 검과 맞닥뜨렸다.
푸욱.
검은 늑대의 목을 정통으로 뚫고 들어갔다. 마치 꼬챙이에 꿰이듯 검에 매달린 형국이 된 늑대를 보며 리비는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좀 전에 두 동강이 난 늑대처럼, 칼에 꿰어 버린 늑대 역시 죽음 당시의 표정 그대로 굳어 있었다.
검을 타고 흘러내린 선혈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다가, 불어온 바람에 어지러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보리스는 칼끝에 걸린 늑대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고, 동시에 남아 있던 늑대 한 마리는 꽁무니를 빼며 부서진 성벽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꼬리를 내린 채 황급히 달아나는 늑대를 눈으로 좇던 보리스가 리비를 향해 돌아섰다. 말의 갈기를 잔뜩 움켜쥔 채 공포에 질린 리비의 얼굴을 본 보리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보리스의 얼굴에는 핏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어깨에 두른 망토 위에도, 바짓단에도 늑대에서 튄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멀리서 보면 큰 부상을 입은 것만 같았다.
리비는 그런 그의 모습을 꼼꼼히 훑었다. 다행히 그는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다. 조금의 상흔도 남지 않은 모습에 리비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치지 않았다. 그러니 괜찮다. 알면서도 순간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는 느낌과, 그대로 땅이 꺼질 것 같던 불안에서 완벽하게 헤어 나올 수는 없었다.
순간 정신이 멍하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고작 짐승 두 마리를 베어 낸 피 냄새였다. 고작 이 정도에, 이 정도에.
말의 갈기를 움켜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보리스의 목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리비.”
보리스는 놀란 눈을 한 채 그녀를 향해 척척 다가왔다. 한 발, 두 발.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그건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마을 도축장에서 가축을 잡을 때마다 그 근방에는 짙은 피비린내가 풍기고는 했는데, 비위가 약한 그녀는 그럴 때마다 일부러 먼 길을 돌아 도축장을 지나쳐 가고는 했다.
“웁…….”
리비는 메슥거리는 속을 달래려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다가 아차 싶어 보리스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
리비를 향해 걸어오던 보리스는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리비는 얼른 손을 내린 채 머리를 저어 보였다.
“아니야, 보리스.”
피비린내가 역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뒤집어쓴 건 다름 아닌 보리스였다.
그에게서 피비린내가 아니라 그 어떤 오물의 냄새가 풍긴다 하더라도 기꺼이 그를 끌어안아 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보리스니까.
“…….”
순간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두려워한 것이 짐승의 피가 아니라, 피칠갑을 한 보리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은 비록 들짐승의 피를 묻혔을 뿐이지만 순간 그녀는 상상해 버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창과 칼에 찔려 피를 뒤집어쓴 보리스를. 그가 한 발짝씩 다가올 때마다 리비는 그런 환상을 겹쳐 보았다. 새빨갛게 물든 하늘과, 그 아래 피범벅이 된 채 서 있는 남자를.
“미안, 리비. 냄새나지?”
그는 팔을 들어 자신의 냄새를 맡아 보더니 망토를 벗어 저 먼 구석으로 던져 놓았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얼굴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아 냈다. 하지만 그럴수록 핏자국은 점점 더 크게 번져만 갔다.
뜻대로 되지 않자 보리스는 인상을 쓰며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아니야, 보리스. 그러지 마. 나는 괜찮아.”
“안 괜찮잖아. 이런 피…….”
“성에 가서 씻으면 되지. 나는 그런 게 아니라…….”
문득 리비는 울음이 왈칵 터져 나왔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리비? 왜 그래? 어디 아파? 다친 거야?”
보리스는 성큼성큼 다가와 리비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 안 아파. 네가 지켜 줬잖아. 저놈들로부터.”
리비는 바닥에 흉하게 펼쳐진 늑대의 주검을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그냥…….”
그녀는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피를 뒤집어쓴 그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어서였다.
“그게…… 아니라.”
리비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연녹색 눈과 새벽하늘처럼 깊이 내려앉은 보랏빛 눈동자가 서로를 응시했다.
“이 피가…… 네 피 같아서.”
그는 기사로서 숱한 전투를 치러 왔으니 피를 뒤집어쓰는 일쯤이야 수도 없이 겪어 왔을 것이다.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고, 또 기사를 그만두지 않는 한 얼마든지 또 겪을 일이기도 했다.
새삼 그가 기사라는 것이, 언제든 전투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온몸으로 깨달아 버린 것이었다.
그동안은 그가 전쟁에 나간다거나, 적과 싸우며 칼을 휘두른다는 사실이 그저 어렴풋한 환상으로만 느껴졌다면 조금 전의 상황은 얼마든지 닥칠 수 있는 전투의 위험성을 눈으로 목격한 기분이었다.
실제 전투에서는 이보다 더 위험한 일이 닥칠 텐데.
두려움에 잠식당한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괜찮아.”
보리스는 리비를 끌어안아 가만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피를 보고 놀라서 그래? 나는 안 다쳤어, 봐.”
보리스는 자신의 무사함을 확인시키려는 듯 팔을 뻗어 내보여 주었다.
“이렇게 멀쩡하잖아. 그리고…….”
보리스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나는 특별해. 알잖아? 전쟁에서 누가 날 노리면…….”
“응?”
“날아서 도망갈게.”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자신을 달래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웃어 주고 싶은데도 그게 잘되지 않았다. 좀 전에 보았던 환상은 지나치게 생생하기만 했으니까.
리비는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보다가 말했다.
“보리스, 약속해 줘.”
“뭘?”
“절대, 절대 죽지 않기로.”
“알았어.”
그는 사탕을 사달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할게.”
“꼭, 꼭이야?”
리비는 보리스의 팔에 얹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응, 약속할게.”
그는 진지하게 답했고, 그제서야 리비는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었다.
“어기면 넌 지옥에 가게 될 거야, 보리스.”
리비는 그의 품에 날름 안긴 채 웅얼거렸다.
“응.”
보리스는 손을 들어 리비의 등을 토닥여 주며 떨리는 리비의 몸을 진정시켰다. 그렇게 떨림이 조금씩 멎어 갈 무렵이었다.
“잠깐.”
서늘해진 목소리에 리비는 그의 품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보리스? 왜…….”
보리스의 손은 다시 검집에 가 있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이 주변을 훑는 것을 리비는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바람만 스산하게 부는 가운데, 뭐가 있나 싶어 고개를 돌리던 순간이었다.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 위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늑대가 또 있나 봐.”
리비가 작게 비명을 지르자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람이야.”
“사람?”
그의 말처럼 잡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잔뜩 몸을 숙인 청년이었다. 얼굴은 앳되었고, 몸은 깡말랐으며 눈에는 두려움의 빛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누구냐.”
보리스가 묻는 말에 청년은 우물거리며 선뜻 말을 하지 못했다. 순간 청년의 손에 들린 것을 본 리비가 재빨리 보리스를 잡아끌었다.
“보리스, 손에 칼.”
알고 있다는 듯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위협도 되지 않는 듯 그는 청년을 향해 휙 몸을 돌렸다.
“으, 아. 살려 주세요.”
청년은 보리스를 향해 납작 몸을 엎드렸다. 손에 들고 있던 칼은 저 멀리로 던지며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내보였다. 무슨 상황인가 싶어 리비가 청년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옆 잡초 속에서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보다 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여자 둘과 남자 하나도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는 많았으나 그들의 행색은 하나도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공격을 해 오기에는 잔뜩 겁먹은 눈을 하고 있는 데다가 그럴 힘이 남아도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은 보리스와 리비를 보자마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살려 달라며 빌기 바빴다. 여기저기 떨어진 낡은 옷가지에 야윈 얼굴은 꽤나 고생한 얼굴이었다.
“너희들은 뭐지?”
“저, 저희는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던 청년이 덜덜 떨며 말했다. 그는 답을 하면서도 보리스의 칼을 흘금흘금 바라보았다.
“보리스, 칼.”
리비가 말하자 보리스는 칼을 도로 검집에 밀어 넣었다. 그럼에도 경계는 조금도 늦추지 않은 눈으로 말했다.
“이곳에 산다고? 아직 이곳에는 영지민이 없을 텐데.”
“비, 비어 있는 마을이라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남자는 말하면서 몇 번이나 바닥에 머리를 찧어 댔다.
“그만해요.”
리비가 말리자 남자는 가까스로 하던 걸 멈추었다.
“왜 숨어 있던 거지?”
“그게…….”
남자는 고개를 들더니 흘깃 바닥에 죽어 있는 늑대를 바라보았다.
“가죽이…… 탐나서요.”
남자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가죽?”
보리스가 미간을 구기자 리비는 퍼뜩 떠오른 생각에 보리스에게 속삭였다.
“늑대 가죽을 벗겨서 팔 건가 봐. 맹수 가죽은 꽤 비싸게 팔리거든. 아마 돈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그, 그렇습니다. 늑대 가죽은 비싸지만 도무지 잡을 방법이 없었는데…… 호, 혹시 늑대를 가져가시려던 거라면 죄송합니다.”
그는 다시 연거푸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너희들은 누구지?”
“저, 저희는…….”
남자는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신분을 밝히는 것에 거리낌이 있는 자들이 확실했다.
남자가 머뭇거리는 사이, 뒤에 있던 여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패드록 영지에서 도망쳐 왔습니다. 부디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저희는 갈 곳이 없습니다.”
“패드록 영지?”
리비는 땅에 납작 엎드린 남자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패드록 이라면 에드라크 근방에 있는 영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말이 근방이었지 말을 타고 가도 족히 사흘은 걸리는 곳이다. 물론 걷는다면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소요될 테고.
그런데 이 부랑자들의 행색을 보건대 말을 타고 왔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입은 옷은 낡았고, 신은 신발 역시 해져서 발가락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마도 내내 걸어서 에드라크에 당도한 게 분명하다.
“패드록 영지민들이 왜 여기 온 거지?”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저희는 패드록 영주에게서 벗어나고자 이곳으로 왔습니다.”
도망민이라는 소리였다. 티소 마을에도 종종 이런 도망민들이 들어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마을사람들의 의견을 거쳐 그들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고는 했다.
그들이 도망치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대개 영주의 폭정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지만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 영지에서는 노예 신분일지라도 일단 도망에만 성공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으니 어떻게든 태어난 영지를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패드록 자작의 영지에서 달아난 이유가 뭐지?”
보리스가 묻자 남자는 또다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올해는 흉작이라 곡식의 수확량이 적었고, 더불어 짐승들도 잡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패드록 자작이 거두는 세율이 높아져서…… 그리고 소작료도 모두 올랐습니다.”
영주의 말은 영지 내에서는 법과 같았다. 영주가 한번 결정한 것을 뒤집을 수 있는 건 영주의 말밖에는 없었다.
“패드록 자작이 하도 집요하게 저희를 쫓는 바람에 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이곳은 텅 비어 있어서 살아가기 마땅치 않은 곳인데.”
보리스가 황량한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남들의 눈을 피해 숨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패드록 자작이 다른 영지의 영주와 우호 관계에 있으면 도망친 영지민을 반환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어서…….”
그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영지민이 영주의 속박을 벗어나는 방법은 야반도주밖에는 없었다.
영지민의 수는 곧 그 영지에서 거둬들일 세금과 마찬가지였기에 영주들은 영지민들의 도망을 필사적으로 막고는 했다.
잡힐 경우 운이 좋으면 매질을 당하거나, 좀 더 운이 나쁘거나 영주의 기분이 나쁘면 손발이 잘리거나, 가장 운이 나쁘면 머리가 잘려 효수되는 일까지 감내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도망민들은 여전히 생길 수밖에 없었다.
세셔 왕국을 비롯한 대륙의 각 나라들은 영지를 가진 귀족들이 전권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영지 안에 사는 이들은 모두 영주의 소유다. 그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이들처럼 목숨을 걸고 도망쳐야 한다.
만약 도망에 성공해 다른 영지에 도착한다면, 그들은 그 영지에서 살아갈 기회를 얻게 된다.
그곳 역시 똑같은 귀족의 소유이기는 했으나 대개 도망치기 전에 어느 곳에 정착할지를 미리 염두에 두는 만큼, 영주의 폭정이 심한 곳은 피하게 마련이었다.
영주들 역시 외부에서 유입되는 영지민들이 내는 세금에 혹해 최대한 평판을 좋게 유지하려 애쓰기도 했다.
물론 그 경우에도 원래 그들의 영주가 찾아와 도망민들을 반환할 것을 요구하면 일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이미 자신의 땅 안에 들어온 것을 달라고 하는 건 상당히 무례한 요구일 뿐만 아니라 전쟁의 빌미로 삼을 수도 있는 이유였다. 이를테면 자존심 싸움인 셈이었다.
어느 영주는 돈을 받은 뒤 도망민들을 강제로 떠넘기기도 했다. 율법상 어긋난 일이었지만 영주의 말이 곧 법이니 딱히 제어할 수단도 마땅치가 않았다.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여기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습니다. 이곳에서 조용히 살아갈 테니 부디…….”
일행은 일제히 다시 몸을 숙였다. 땅을 짚은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지켜보던 리비의 마음도 무겁게 내려앉았다.
자유를 찾아왔든 영주의 폭정을 피했든, 그 어떤 이유든 더 나은 삶을 위해 도망친 자들이었다.
오로지 살기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겐 이 황량한 마을이 곧 천국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싸해졌다.
“저 늑대들은.”
남자의 이야기를 다 들은 보리스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
“가져가도 좋다. 하지만 이곳에서 도적질을 하거나 다른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때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
“무, 물론입니다.”
말을 마친 뒤 보리스는 리비의 말에 훌쩍 올라탔다. 등 뒤에서 뻗어 온 팔이 고삐를 쥐자 리비는 그제서야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늑대에 이어 부랑민들의 등장까지. 갑작스러운 일들을 겪고 나자 놀랐던 심장이 등 뒤에 닿은 그의 따스한 체온에 모두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슬쩍 올려다보는 리비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보리스가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춰 왔다. 그러더니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제든 리비의 정신을 흐려 버리는 바로 그 미소를.
리비는 후, 한숨을 내쉬며 그의 너른 품에 기댔다. 꽉 마주 안아 오는 팔의 힘에 그토록 안심이 될 수가 없었다.
보리스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은 푸르르, 한번 투레질을 하더니 에드라크 성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말은 빠르게 마을을 벗어나 다시 에드라크 성문까지 달려갔다. 그러는 동안 리비는 아까 마을에서 보았던 이들의 얼굴을 하나둘 떠올려 보았다.
개중에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다들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주민들이 떠난 지 오래된 마을이었기에 불편한 점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일단 먹고살려면 곡식이 있어야 하는데 파종할 씨앗도, 땅을 고를 농기구며 밭을 갈아엎을 말과 소도 없었다. 그렇다고 사냥을 나가기에는 적당한 무기도 없었다.
그들이 보리스가 잡은 늑대를 보고 눈을 빛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늑대 가죽은 꽤 비싼 값에 팔 수 있으니까.
“보리스.”
리비는 그의 옷자락을 가만히 잡아당겼다. 피가 묻은 망토를 벗어 버린 탓에 그는 얇은 겉옷과 최소한의 방어구 정도만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부름에 보리스가 리비를 보자 그녀는 내내 생각했던 것을 말했다.
“성 밖 마을 말인데.”
“왜?”
“그 사람들이 마을에 안착해 살면 그 마을도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영주의 폭정 때문에 도망치는 농민들은 한둘이 아니니까, 그들이 이 마을에 와서 살게 되면 좋을 것 같아.”
“…….”
“티소 마을에도 이웃 영지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 있었어. 농사를 지으려면 사람들이 많을수록 좋으니까, 아버지는 그들을 모두 받아들였지.”
낯선 사람들을 경계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결국은 하이든 백작의 설득에 모두 그들을 받아들였다. 비어 있는 집을 내주고 농기구를 빌려 주며 땅을 경작하도록 도왔다.
사람 보는 눈은 틀리지 않았는지, 하이든 백작이 받아들인 도망민들은 하나같이 성실했다. 젊은 일손이 필요했던 마을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인 셈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잘 정착해 살았으면 좋겠어.”
아무리 거친 땅이어도 씨앗을 심으면 언젠가 싹이 나게 되어 있다. 그들이 저 마을의 씨앗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리비는 부지런히 머릿속으로 재건된 마을을 그려 보았다.
말은 더욱 빠르게 달렸다. 도개교를 건너고 빠르게 외성을 지나 내성까지 가는 동안 리비는 마을의 재건 계획을 보리스에게 속닥거렸다.
우선 마을을 예전에 사람들이 몰려 살던 시절처럼 바꾸어 놓으면 자연스레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러려면 일단 돈을 들여야 한다.
말은 쉽고 생각은 자유였지만 그것을 실현시키는 건 결국 돈이고 인력이다.
아직 에드라크 영지의 영지 수입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 칼리니 기사단이 벌어 온 금화로 모든 것을 충당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돈이 많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보리스가 공작이라 해도 이제 막 작위와 영지를 하사받았으니 자금이 넉넉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보리스는 처음부터 부유한 영지가 아닌, 순전히 자신을 위해 이 척박한 곳을 선택했으니까.
“뭘 하고 싶은데?”
마치 모두 다 들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보리스가 말했다.
“예배당도 짓고, 시장도 만들고…… 그러면 종교인들이나 상인들도 자연스레 이곳에 오게 될 거야.”
사람이 많이 오갈수록 영지는 발전하게 된다. 영지민들이 내는 세금뿐만 아니라 이곳을 지나다닐 사람들이 내는 통행세,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 낼 숙박료 등 체류비도 어마어마하다.
“제대로 영지를 꾸며 보자, 응?”
리비가 눈을 빛내며 말하자 보리스는 사르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리비. 네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게.”
내성 깊숙한 곳에 도착하자 보리스가 먼저 말에서 뛰어내린 뒤 리비를 향해 팔을 벌렸다. 리비는 자연스레 그의 품에 안겨 말에서 내려왔다.
“이제부터 매우 바빠질 거야.”
보리스를 바라보는 눈이 새벽별처럼 반짝였다. 해가 지면서 길게 늘어진 노을빛이 두 사람을 물들이고 있었다.
***
보리스와 함께 마을에 다녀온 이후로, 리비는 밤잠까지 아껴 가며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마을에 필요한 시설을 위해 건축가들도 성을 방문했다. 보리스는 그들과 함께 직접 마을에 나가 여기저기 부서진 마을의 시설들을 점검하고 보수할 곳과 새로 지을 시설들을 파악했다.
마을을 재건하는 일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는 리비의 의욕 넘치는 말을 보리스는 쉽게 수락해 주었다.
밖에 나가는 일이 자유롭지는 않았다. 리비는 영주의 부인으로, 성의 안주인으로서 할 일도 넘쳐났기에 그녀를 대신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마을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살며 마을 전반의 생활을 돌볼 사람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관리자였다.
“마을을 지속적으로 돌보고 사람들을 모을 관리인이 있으면 좋을 텐데.”
깃펜에 잉크를 묻혀 톡톡 두드리던 리비가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때 그 청년.”
앳된 얼굴이었지만 하는 말과 행동은 차분하며 심지가 곧은 모습이었다. 보리스가 무서워 벌벌 떨면서도 자신과 함께 도망쳐 온 가족들을 위해 말하는 모습이 꽤나 믿음직스러웠다.
“그 청년을 마을 관리인으로 임명하는 건 어때?”
리비의 말에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오후, 막스는 성을 방문했다.
“마, 막스라고 합니다. 공작 부인.”
“해치지 않으니까 염려 마.”
막스는 난데없이 기사들이 찾아와 자신을 찾자 상당히 놀랐던지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주변을 살피는 시선이 겁에 질려 있었으나 자신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가까스로 안정을 찾고 있었다.
“패드록 영지에서는 주로 무슨 일을 했지?”
“농사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냥도 할 줄 알고, 대장간에서 일한 적도 있지요.”
막스는 또박또박 말했다.
“호밀과 밀, 보리 등을 모두 키울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파종할 종자만 있다면…… 땅은 충분하니 개간하여 곡식을 심도록 하겠습니다.”
보리는 북부에서 매우 중요한 곡식이다. 일단 추위를 잘 견디기 때문에 농사짓기에 어렵지 않고, 북부의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보리는 보리빵을 만들고 맥주를 만드는 등 여러모로 효용성이 큰 작물이었다.
“종자는 성에 보관된 것이 있으니 그것을 가져가면 되고…… 패드록 영지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 수가 몇이나 되지?”
“스무 명 가까이 됩니다.”
“좋아, 그러면…….”
리비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막스, 마을의 임시 관리인이 되어 줘. 사람들을 모아 농사를 짓고, 함께 일을 배분해서 하는 거야.”
“제가요?”
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웃는 리비의 얼굴과 마주치고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에드라크는 비록 방치된 지 오래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살던 곳이야. 그러니 마을에는 행정 집행관도 필요하고…….”
리비는 말하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마을의 집정관은 모두의 선망을 사는 동시에 글자를 알고 법률과 기타 지식에도 해박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대부분 도시나 마을의 집정관은 귀족 출신이 맡고는 했다. 집정관 아래에는 막스 같은 관리인이 여럿 있어서, 마을 전반의 농업과 축산업 등을 관리하고는 했던 것이다.
“아직은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관리인만으로 충분할 것 같아. 할 수 있을까?”
“무, 물론입니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막스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
마을을 재건하는 데에 가장 필요한 것은 영지 전체를 둘러싸는 성벽을 복구하는 일이었다.
튼튼한 석재로 지어졌지만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여기저기 허물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허물어진 틈으로 늑대 같은 사나운 들짐승들이 들어오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보리스는 성벽을 수리하기 위해서 일꾼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내건 급료가 워낙 좋았기에 솜씨 좋은 일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몰려들었다.
성벽을 수리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자 미장이를 비롯해 사람들이 몰려들고 에드라크의 영지가 재건 중이라는 소문은 즉시 빠르게 번져 나갔다.
***
왕으로부터 칙령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왕의 전령이 가져온 소식은 에드라크 영지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서문이었다.
“왕에게 요청했거든.”
“뭘?”
“에드라크를 자치령으로 허가해 달라고.”
“자치령?”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영지는 그만큼 왕의 입김이 닿기 어렵기 때문에 실질적인 자치법이 필요했다.
게다가 에드라크가 위치한 북부 지역은 중앙의 수도보다는 북부 특유의 문화를 가지고 있기에 기존에 정착해서 살던 북부의 법률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도 많았다.
자치령이 된 귀족의 영지는 지방의 도시로 더욱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자체적으로 법률을 제정하고 재판을 할 수 있으니 하나의 작은 나라나 다름없다.
자치권이 강해지기 때문에 해당 영지의 영주의 힘이 강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안드로스 왕이 그런 일을 허락했다고 하자 리비는 어쩐지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자치령은 아무에게나 주는 권한이 아니다. 그만큼 국왕의 신임을 얻은 귀족인 동시에 자치령으로 발전할 만한 충분한 재정 능력과 인구수를 갖추어야만 했다.
이 중 후자의 조건은 아직 한참 미달인 상태였다. 그러나 보리스가 세운 공훈 때문인지 왕은 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보리스, 계획한 것을 다 하려면 돈이 꽤 들 텐데…….”
리비는 조심스레 보리스에게 말했다. 실은 꽤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돈을 필요로 할 것이다.
칼리니 기사단이 얼마만큼의 돈을 버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과연 성의 수리와 마을의 재건에 필요한 모든 돈을 충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무엇보다 에드라크 영지는 이제 막 주인을 맞아들인 상태였으니 재정이 풍족할 리 없었다.
“…….”
보리스는 그런 말을 하는 리비를 빤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역시 아픈 곳을 찌른 건가, 그만한 돈이 없는데 자신이 고집을 부려서 보리스가 곤란한 건지도 모른다.
“괜찮아, 보리스. 마을의 재건은 천천히 하면 되고, 성의 수리도 차차…….”
“그걸 걱정했어?”
보리스는 픽 웃으며 물었다.
“응?”
보리스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리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리비의 손목을 턱 하니 잡았다.
“보리스, 어디 가는 건데? 응?”
척척 걸어가는 보리스에게 종종걸음으로 발을 맞추면서도 리비는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는 지하로, 또 지하로 내려갔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리비가 어지럼증에 살짝 비틀거리자 보리스가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감아 지탱했다.
“보리스?”
그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몸을 숙여 단번에 리비를 안아 올렸다.
“보리스!”
그녀의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보리스는 순식간에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허겁지겁 그를 따라갈 때에 비할 수 없는 속도였다. 리비는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그의 목에 팔을 감은 채 멍하니 그가 향하는 곳을 지켜보았다.
“여기가…… 어디야?”
보리스는 마침내 지하의 깊숙한 곳에 도착해서야 리비를 내려놓았다. 리비는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문은.”
두 사람 앞에 버티고 있는 건 거대한 잠금 장식이 달린 거대한 문이었다. 단단한 철목 소재에, 귀퉁이에 쇠가 박혀 있어 어지간한 힘으로는 열릴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문을 봉쇄하고 있는 거대한 잠금쇠는 어찌어찌 푼다 쳐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들어 올릴 수조차 없어 보였다.
차랑.
보리스는 목에서 무언가를 끌러 냈다. 자세히 보니 은빛 줄에 달린 열쇠였다.
“네 거야, 리비.”
“응?”
“진작 주려고 했는데.”
“이게 뭔데?”
리비는 얼떨결에 그가 내민 열쇠를 받아 들고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설마 저 문에 달린…….”
“맞아. 열어 봐.”
“…….”
어쩐지 겁이 났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서 받은 열쇠로 저 거대한 문을 열 엄두가 나질 않았다.
대체 저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걸까. 이렇게 커다란 잠금장치까지 달려 있는 걸 보면…….
“보리스, 안에서 괴물이라도 키우는 거야?”
리비는 더럭 겁이 나서 물었다. 그러자 보리스는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괴물은 나잖아, 리비.”
“아니야!”
리비는 바락 소리를 지르며 그의 가슴팍을 쿵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꽤 세게 내리쳤음에도 그의 표정은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어서 열어 봐.”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위험스럽게 들렸다. 아주 사악하고 위험한 악마의 속삭임 같기도 했다. 리비는 뭔지 모를 긴장감에 입안이 바싹 말라 왔다.
“…….”
리비는 손에 쥔 열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묵직하고 차가운 열쇠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리비는 그 열쇠를 든 채로 천천히 거대한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서자 그 위용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같이 해, 무서워.”
리비는 몸을 돌려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리비의 바로 옆에 섰다. 열쇠를 쥐고 있는 작은 손을 보리스의 커다란 손이 감싸 쥐었다.
철컥.
잠금장치에 뚫린 열쇠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고 돌리자, 묵직한 금속의 마찰음이 지하실에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보리스는 잠금장치를 들어 올려 옆으로 밀어 놓은 뒤,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리비는 그 광경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마침내 열린 문 사이로 보리스와 함께 발을 들여놓았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리비는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이, 이게 다 뭐야?”
앞에 펼쳐진 광경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동화책에서나 보던, 혹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들려주던 이야기 속 풍경? 혹은 떠돌이 모험가의 과장된 환상? 그만큼 현실성이 없었다. 그러나 모두 실재하는, 결코 신기루가 아닌 것들이었다.
거대한 문이 달린 방 안은 굳이 횃불로 밝히지 않아도 환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 찬 금화와, 보물들 때문에.
“보리스, 이것들은…….”
리비는 꿈속에 있는 듯 멍한 얼굴로 안을 둘러보았다. 보리스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더니 안으로 쑥 들어갔다.
“들어와서 봐.”
보리스는 한발 앞장서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이 문을 기준으로 경계가 나뉘는 기분이었다.
이걸 넘어가면 전혀 다른 세상에 들어가게 되는 게 아닐까.
“조심해.”
보리스가 조심하라고 한 건 문가에 쌓인 금화였다. 리비는 폴짝 금화들을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세상에 조심해야 할 게 돌이 아니라 금이라니. 리비는 황당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조심해야 할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여기도, 저기도, 온통 조심해야 할 것들투성이였다. 건드리면 우르르 쏟아질 것처럼 높다랗게 쌓아 올려진 금화와 보물들에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로 조심해야겠어.’
저것들이 다 무너져 내리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리비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밟는 것마다 금이요, 은이요, 그리고 보석이었다.
어린아이 하나쯤 족히 들어가고도 남을 것 같은 커다란 황금 항아리 안에는 생전 처음 보는 보석들이 그득 담겨 있었다. 너무 많아서, 너무 휘황찬란해서 모두 가짜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세상에.”
대체 이 많은 보물들이 어디서 난 걸까. 에드라크 성의 주된 수입원은 칼리니 기사단이 벌어오는 돈일 테니 아마 보리스가 여기저기 구르며 모아 온 것이겠지.
그걸 생각하자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고 조금 침울해졌다. 보리스가 힘들게 번 돈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서였다.
“보리스, 이거 전부…….”
리비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훔친 거야.”
“……응?”
가만, 뭘 잘못 들었나 싶어서 리비는 눈만 깜박거렸다.
“뭐라고?”
“훔친 거라고.”
“……어디서?”
“여기저기서.”
참으로 간단한 대답이었다.
“이걸…… 다?”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떻게? 안 들키고?”
그 말을 들은 보리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리비. 내가 어떻게 들키겠어?”
“아.”
리비는 단번에 이해했다. 그렇지. 그는 보통 사람과는 다르지.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존재일지도 모르지.
하늘을 날 수 있는데, 안 될 게 뭐가 있을까. 무엇이든 맘에 드는 건 집어 들고 날아오르면 그뿐일 텐데.
“그래도…… 이걸 다?”
“아아, 나보다는 다른 애들이.”
“그러면? 설마…….”
성벽을 까맣게 덮을 정도로 몰려들던 까마귀 떼를 떠올렸다. 까마귀들은 하나같이 리비를 흘깃거리는 눈치였으나 보리스의 엄포 때문인지 딱히 공격해 오지는 않았다.
까마귀는 원래 지나치게 영특한 새였다. 거기에 보리스가 데리고 다니는 까마귀들이니 더욱 특별한 능력을 지닌 건 말할 것도 없겠지.
“합작품이야.”
그는 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새가 훔친 거지, 사람이 훔친 건 아니니까.’
새들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을 좇는 건 까마귀의 본능이다. 그저 본능대로 행동한 까마귀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이건…… 보리스.”
리비는 쌓여 있는 보석 더미에서 금장식이 된 단검을 뽑아 올렸다. 손잡이를 금으로 세공하고 갖가지 보석들을 박아 만든 검은 아무리 봐도 호신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검은 순전히 부와 권력의 과시를 위해 만들어지는 물건이었다. 게다가.
“붉은 용?”
손잡이에 루비와 금으로 만든 장식은 다름 아닌 붉은 용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붉은 용이면…… 잠깐만.”
리비는 순간 아찔해서 그를 보았다.
“레제트 가문의 물건이야?”
“그럴 거야.”
보리스는 위아래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가 문제냐는 말투에 리비는 황당해졌다.
“레제트 가문의 물건이면…… 누군가 널 보지 않았을까?”
“아마 큰 새가 날아들었구나 했을 테지.”
“아니야, 그게. 레제트 공작은 널 찾는 눈치였어.”
“절대로 알지 못할 거야.”
“하지만…….”
“날 믿어.”
보리스는 리비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여기 있는 것들로 네가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어. 성의 수리도, 마을의 부활도. 영지의 발전도. 모두 다.”
듣기만 해도 달콤한 말이었다. 결국 모든 건 돈의 문제였으니, 이처럼 충분한 돈이 있다는 걸 안 이상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남의 것을 훔치는 건 나쁜 거야.”
엄연한 장물이었다. 이걸 가져다가 영지 발전을 위해 써도 되는 것일까.
“저런 게 사라져도 모를 만큼 부자들의 금고를 털었지. 왕족도, 귀족도. 대부호와 상인들의 것까지.”
“…….”
“그럼 전부 돌려줄까?”
보리스는 진심을 담아 물었다. 리비가 그러라고 하면 정말로 그럴 태세였다.
“아이, 잠깐만.”
리비는 얼른 그의 팔을 붙잡았다. 생각. 그래, 생각, 생각을 하자. 남의 것을 훔친 건 나쁘지만 결국 그 보물들은 대부분 영지민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것들을 차곡차곡 모아서 배를 불리거나 다른 곳에 쓰이거나. 어느 쪽이어도 나쁠 건 없다.
게다가 저 보물 중에는 레제트 공작의 것들도 섞여 있었다. 그 기분 나쁘게 번들거리던 시선을 떠올리자 리비는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고 보니 레제트 공작이 영지로 돌아간 직후 아무런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다.
약속된 신부를 빼앗겼으니 이를 갈 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정말 안드로스 왕이 내민 협정을 받아들이고 이대로 지내기로 한 걸까.
“리비, 무슨 생각 해?”
“응? 아무것도 아니야.”
이미 정해진 일, 레제트 공작이라 해도 별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남부의 왕이라고 불리는 자라지만 어쨌든 왕보다는 아래에 있는 이니까.
그래, 그런 자의 돈이라면 얼마든지 써줄 수 있다. 리비는 즉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이 방에 있는 것들,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냐니?”
“전부…… 장물이잖아.”
따지고 보면 그랬다. 훔친 건 새였으나 그걸 쓰는 게 인간이라는 건 아주 큰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척 보기에도 고귀한 신분을 가진 이들이 소유할 법한 물건들이었다. 이것들을 행상인을 통해 내다 팔았다가는 단번에 들키고 말 것이다.
“아아.”
그는 리비의 말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장물에는 형태가 있으니까, 그 형태를 없애면 돼.”
“형태를 없애?”
“이 성에는 솜씨 좋은 대장장이들이 많지.”
“아.”
리비는 보리스가 하려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
보리스의 비밀 금고에서 나온 금붙이들은 차례로 대장간에서 녹여져 쇳물로 변했다가, 다시 단단한 덩어리의 형태로 굳혀졌다. 완벽한 정방형의 금덩이로 변한 보물들을 보며 리비는 침을 꼴깍 삼켰다.
비싼 세공을 넣은 보물들이 한순간에 녹아 흐물흐물한 쇳물이 되는 건 마음 아팠지만 완벽하게 위장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녹여져 금덩이로 바뀐 것들은 차례차례 팔려 나갔고, 곧 에드라크 영지는 거대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산처럼 쌓여 있던 금화들도 제 몫을 하기 시작했다. 성의 수리와 마을의 재건에 필요한 석재와 목재, 일꾼들을 불러들이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아도 되었다.
급료가 넉넉하게 주어진다는 말에 사방에서 일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이 몰려와 잘 곳, 먹을 곳, 쉴 곳들이 필요해지자 자연스레 그 일을 할 사람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더불어 몰려든 음유시인과 상인들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동안 에드라크가 새로이 단장 중이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그 소문은 삽시간에 왕국 전체로 퍼져 갔다.
***
에드라크 영지에 겨울의 기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수도보다 북쪽에 위치한 덕에 이곳에는 아래 지방보다 빠르게 겨울이 찾아들고는 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았다. 폭설이 내리지도, 땅이 온통 얼어 물자의 운반에 제약이 걸리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리비는 되도록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마을을 원 상태로 되돌리고 싶었기에 재건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마을의 재건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부서지고 낡았던 건물들은 모두 새로 수리하여 튼튼한 외관을 갖추었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과 근처 영지에서 도망쳐 온 이들로 마을은 금세 북적이기 시작했다.
마을에 정착하기 위한 조건은 마을의 재건을 돕는 일이었기에 너나 할 것 없이 그 일에 매달렸다.
보리스의 까마귀들이 모아 놓은 보물들은 모두 훌륭한 자금줄이 되어 주었다.
돈과 사람. 영지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채워져 가고 있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터전을 잡았지만 아직 마을 인구수는 턱없이 모자랐다. 무엇보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들다 보니 조직적으로 농사를 짓거나 마을 공동체를 운영할 이들이 부족했다.
대장장이, 푸줏간, 세공사, 재봉사…… 전문 기술직들도 턱없이 부족했다. 또한 아이들을 가르칠 학교와, 교사들도 필요했다.
자신이 살던 영지에서 도망쳐 온 이들은 대부분 최하층에 해당하는 이들이었기에 고급 기술을 익히지 못한 자들이 많았다.
마을 관리인으로 임명한 막스가 바쁘게 뛰어다니고는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명확히 한계가 있었다.
좀 더 전문적인 인력, 그리고 마을 공동체를 이룰 만큼의 많은 사람들.
곧 겨울이 닥치면 사람들의 이동이 제한되고, 그러다 보면 애써 재건해 놓은 마을이 소수의 인원 외에 텅텅 비어 버릴 수도 있다.
또한 제대로 농작기를 보내지 못한 탓에 그들을 겨울 동안 먹여 살릴 곡식과 식료품들을 나눠 주기도 해야 했다.
“흐음…….”
리비는 책상에 앉아 깃펜을 톡톡 두드렸다. 두꺼운 양피지 위에 마을 재건과 성의 수리, 필요한 물자의 확보를 위한 계획을 적다 보니 어느덧 밤이 깊어 있었다.
“사람이 더 필요해.”
영지의 번영은 곧 인구수와 비례한다. 타 영지에서 그토록 도주민들을 단속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도망가다 잡히면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도 다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영지에 충성하다 죽으라는.
티소 마을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하이든 백작은 말만 백작일 뿐이지 마을의 최고 관리자나 다름없었다.
니콜라스는 기사 출신이었으나 그 전에는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고, 뒤늦게 기사가 되어 왕궁에 들어갔으니 본래 영혼도 농민에 더 가까웠다.
게다가 가난한 기사로서 돈을 벌기 위해 무두질이나 망치질, 벌목 등 못 하는 일이 없었다. 그 경험들은 모두 그가 마을에 돌아와 살림을 꾸리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되어 주었다.
“……아버지가 있으면 좋겠다.”
리비는 문득 그런 생각에 빠졌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아버지를 믿고 따랐다.
니콜라스는 마을의 어른들을 존중했고, 생각지 못한 재난이 닥치거나 해결 안 되는 문제들이 생길 때마다 그들의 오래된 지혜를 활용할 줄도 알았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자상한 촌장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누구도 그를 무서워하거나 어려워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우습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저 믿고 의지할 마을의 지도자. 티소 마을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여겼다.
막스가 관리인의 역할을 훌륭히 해주고는 있었으나 연륜이 부족한 탓인지 노련함까지 갖추지는 못했다. 어릴 거면 신분이 높든가, 신분이 낮다면 돈이 많거나 나이가 많거나, 특출한 능력이 있든가 해야만 사람들을 통솔할 수 있는 법이다.
막스는 젊고 유능했으나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을 하나로 규합하는 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그 역시도 곤란한 점을 종종 호소하며 연륜 있고 더 사람들이 선망할 만한 이를 마을의 총책임자로 두기를 원했다.
그러나 마을에 들어온 이들 중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출신지가 제각각인 이들을 규합할 수 있는 방법. 그들을 완벽한 에드라크 영지인으로 자리 잡게 만들 수 있는 사람.
몇 시간 동안 머리가 아프도록 고민했다. 리비는 순간 기다란 하품이 새어 나왔다. 늘어지도록 기지개를 펴며 몸을 돌리자 아직 텅 비어 있는 거대한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혼자 눕기에는 지나치게 큰 침대가.
아직 보리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보리스는 리비보다 더 바빴으므로 들어오는 시간이 항상 늦었다.
그를 기다리다가 먼저 잠에 들면 보리스가 깊은 밤중에 침실로 들어왔고,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채 둘은 같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리비는 하는 수 없이 침대로 기어들었다. 새털이 들어간 이불을 목까지 끌어 덮은 채 침대의 천장 장식을 바라보다가 설핏 잠이 들었다.
“…….”
리비는 문득 서늘한 기운에 잠이 깼다. 원래 잠을 잘 때는 서늘한 틈도 없이 보리스의 커다란 몸이 자신을 꼭꼭 그러안고 있었기에 그녀는 추위를 느낄 일이 없었다.
자신보다 체온이 높은 보리스의 몸의 꼭 끌어안은 채 잠이 드는 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일과 중 하나였다.
그런데 보리스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다시 잠이 들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리비는 몇 번 뒤척이다가 결국 눈을 뜨고야 말았다.
리비는 반쯤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눈에 벽난로가 잡혔다.
타탁.
벽난로에서 튀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리비는 벽난로 앞으로 다가가 볕을 쬐었다. 그래도 썰렁한 방 안의 기운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보리스가 없는 방은 항상 이렇게 너무 크고 쓸쓸했다.
“나도 참.”
리비는 힘 빠진 웃음을 지었다. 보리스가 어디 멀리 떠난 것도 아닌데, 영영 안 올 것도 아닌데. 그저 귀환이 늦어지는 것뿐인데 이렇듯 애를 태우는 자신이 우스웠다.
대체 보리스가 없는 동안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나를…… 몰라?”
레제트 공작과의 결혼식 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리비를 보며 보리스가 눈물을 툭툭 떨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황당하고, 어이없고, 난데없이 나타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며 울어 대던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의 기억을 지운 건 다름 아닌 그였으면서.
“그래도 서운했겠지.”
자기 손으로 기억을 지울 때 얼마나 괴로웠을까. 이토록이나 자신을 그리워했으면서. 보자마자 납치해서 성에 꼼짝없이 가두고 이런저런…….
“…….”
벽난로 탓일 거야.
난데없이 뜨거워진 얼굴을 그녀는 벽난로의 열기 탓으로 돌렸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봤지만 그가 자신을 성으로 데려와 했던 이런저런 일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머릿속에 덧그려졌다.
“그만, 그만.”
리비는 찰싹찰싹 소리가 나도록 뺨을 쳤다. 남편이 없는 방에서 그런 음란한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리비는 마을에 곧 지어질 예배당을 떠올리며 최대한 머릿속을 신성하게 정화하려 노력했다. 노력은 했다. 그러다가 생각했다.
……안 될 것도 없잖아?
자신은 결혼한 몸이다. 보리스는 어엿한 남편이고. 밤마다 행해지는 의무는 결혼의 아주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마음껏 사랑하고, 그 열매를 맺어 숭고한 결혼의 의무를 이행하라.
결혼 서약서에 적혀 있던 말 중 하나였다.
“언제 오려나.”
리비는 문가를 흘금거리며 그의 귀환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쩐지 음탕한 아내가 된 것 같았지만 아무려면 어때. 나는 그의 아내인걸.
어서 그의 따뜻한 품 안에 갇히게 되면 이 알 수 없는 서늘함도, 왠지 그가 없어서 느껴지는 텅 비어 버린 방도 꽉 차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복도를 울리며 저벅저벅 걸어오는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리비는 후다닥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두근두근.
마구 뛰기 시작한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심호흡을 해봤지만 속도만 더욱 빨라졌다. 한편으로는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장난을 멈출 수는 없었다.
끼익.
문의 경첩이 닿는 소리가 들리고, 안으로 보리스가 걸어 들어왔다.
발소리만 듣고도 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륵.
이불이 벗겨지는 느낌이 나더니 뒤이어 서늘한 손이 얼굴에 와 닿았다. 밖에 오래 있었던 건지 그의 손은 이상하리만치 차가웠다. 왜지?
그 한기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지만 그녀는 간신히 참아 냈다. 그가 침대 안으로 들어오면 놀라게 해줘야지. 마음먹었을 때였다.
“불덩이 같아.”
응? 보리스가 한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아 그녀는 자는 척한다는 것도 까먹고 미간을 좁혔다.
불덩이, 불덩이라니?
“리비, 의사를 부를게.”
다급하게 말하는 소리에 그녀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 아니야. 보리스.”
리비는 서둘러 보리스의 옷깃을 붙들었다.
“무슨 소리야, 열이 이렇게 끓는데.”
보리스는 진지한 눈으로 말하며 하인을 부르는 종을 집어 들려 했다.
“아, 아니야!”
리비는 몸을 날려 종을 품에 안은 채로 침대 위에 뒹굴었다.
“리비?”
아내의 괴이한 모습에 보리스는 미간을 좁혔다.
“아프잖아, 그러면 안 돼.”
“아픈 거 아니라니까?”
리비는 종을 숨긴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벽난로에 서 있어서 그래.”
“자던 게 아니었어?”
“응.”
리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 있을 시간이잖아.”
“그게…….”
리비는 어쩐지 그 말을 하기가 민망해 입술을 오므렸다가, 아무려면 어떤가 싶어 날름 말을 쏟아 냈다.
“네가 없으니까 잠이 안 와서.”
“…….”
보리스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중간에 깨서, 널 기다렸어.”
“리비.”
그의 음성이 야릇하게 돌변했다. 목울대가 크게 출렁거리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바람에 리비는 얼굴이 더 빨개지고 말았다. 그래서 냅다 팔을 벌려 그에게 안겼다.
딱딱한 방어구가 몸에 닿아 아팠지만 좀 전에 그가 없는 빈방을 서성거리던 때를 떠올리자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안정적인 신호로 여겨졌다.
“보리스, 왜 이제 온 거야?”
잠에서 깼을 때 그가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무서울 줄 몰랐다. 늘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고 있던 온기의 부재는 리비의 마음에 꽤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미안.”
뒤로 뻗어 온 손이 부드럽게 리비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한층 부드럽고 눅진해진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흐르자 리비는 즉시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가 있다, 지금 여기에. 그러니 두려울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날 기다렸어?”
들뜬 목소리로 재차 묻는 질문에 리비는 마지못해 다시 시인했다.
평소 같으면 부끄러워서라도 긍정하지 못했을 이야기지만 어쩐지 오늘 밤은 그에게 맘껏 어리광도 부리고, 애교도 부리고, 마음껏 칭얼거리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불안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보리스, 나 잠이 안 와.”
리비의 칭얼거림에 보리스는 웃으며 그녀를 품 안에 끌어당겼다.
“재워 줄까?”
“아니, 아니야.”
그 말의 뜻을 알아들은 리비가 그의 가슴을 콩콩 내리쳤다.
“그나저나, 오늘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북풍이 불기 시작해서, 화재를 감시하느라. 이것저것 방비할 것이 많거든.”
“그랬구나.”
안락한 성의 생활에 익숙해진 탓인지 지금이 얼마나 불에 취약한 시기인지를 잊고 있었다.
겨울은 특히 불이 나기 쉬운 계절이다. 특히 에드라크 영지처럼 빨리 겨울이 찾아오고 북풍이 거세게 부는 지역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더구나 헤센숲처럼 빽빽한 나무로 가득 찬 숲을 옆에 두고 있으면 그 위험은 더욱 커지는 법이다.
만약 에드라크 영지 근처에서 불이라도 난다면 금세 큰불로 퍼지기에 딱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티소 마을에서도 겨울이 닥치기 전 화재를 막기 위해 니콜라스 역시 마을 곳곳에 방비를 해두고는 했다. 소방수를 집집마다 비치하고 장작 관리에도 더욱 신경을 썼다. 불은 어디에서나 옮겨붙을 수 있었기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밖에 오래 있었나 봐. 손이 차가워.”
“아, 미안해. 리비.”
보리스는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리비의 야무진 손길에 도로 얌전히 손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따뜻하게 해주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리비는 보리스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그가 오기 전에 벽난로 가까이에서 몸을 데운 게 이토록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말이 들려왔다.
“……추워. 리비.”
“응?”
“이 정도로는 안 돼.”
보리스가 축축한 눈빛으로 말했다.
“뭐라고?”
“더 따뜻한 곳에 닿고 싶어.”
“…….”
못 알아듣고 싶었지만 너무 명확하게 들어 버린 말에 리비는 입만 벌린 채 그대로 얼어 버렸다.
침실에서 온갖 짓을 해댔기에 어지간한 일에는 면역이 생겼다고 생각했었지만, 가끔 예고도 없이 쳐들어오는 그의 언행은 리비를 상당히 당황시키곤 했다.
하지만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보리스가 그녀의 얼굴을 돌려 잡고 깊이 입 맞추기 시작했다. 깊숙이 파고든 혀가 천천히 몸의 열기를 끌어 올리고 삽시간에 침실의 공기를 데웠다.
순식간에 입고 있던 것들을 벗어 던진 보리스가 리비의 얇은 잠옷을 찢듯이 벗겨 냈다. 아끼는 것이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리비는 그의 몸에 다리를 감은 채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낮에는 주로 그녀가 보리스를 끌고 다녔다면 밤에는 완벽하게 그 주체가 바뀌고는 했다. 리비는 그저 보리스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이윽고 에드라크 공작 부부의 침실에 은밀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막 밖에서 돌아와 싸늘했던 남자의 몸은 아내의 온기를 받아 점점 뜨겁게 달구어졌다. 그리고 다시 그 뜨거워진 열기가 아내에게 닿아 두 사람은 작은 용광로 속에서 뒹구는 셈이 되었다.
“하…… 보리스.”
몇 번인가의 절정 끝에 기력이 다해 버린 리비가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리비, 괜찮아?”
보리스는 리비를 제 아래 둔 채 그녀의 손을 잡아 올려 손가락마다 하나씩 입을 맞추었다. 그 관능적인 행동을 리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음미했다.
정말 사람이 아니구나, 너.
괴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저렇듯 아름다운 생명체를 두고서 어떻게 사람이라 칭할 수 있을까.
보리스는 까마귀 날갯깃 같은 머리칼이 부드럽게 흩어진 데다 보랏빛 눈이 축축이 젖어 퇴폐적인 기운이 줄줄 흘러넘쳤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땀에 젖은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잠시 흠칫거리던 보리스는 기꺼이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더니 그대로 몸을 포개었다. 다시 나긋하게 둘의 몸이 섞이려는 순간.
뎅뎅뎅.
별안간 밖이 시끄러워졌다. 어지간해서는 밤에 울리는 법이 없는 종탑의 종이 울리고 있었다.
“종이 왜.”
종이 울리는 소리는 성안 사람들 모두를 깨울 정도로 컸다. 한밤중이어서 그 소리가 가진 위력은 더욱 컸다.
그러는 사이 종이 울리는 간격이 점점 더 짧아졌다. 재빨리 몸을 일으킨 보리스가 날랜 몸짓으로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무슨 일이야?”
리비도 몸을 일으켜 앉았다. 뭔가 불길한 것이 엄습해 온 기분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보리스?”
창밖을 보는 보리스의 얼굴에 언뜻언뜻 붉은 기운이 서렸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보리스가 다시 커튼을 쳤으나 좀 전에 보았던 붉은 잔상을 리비는 똑똑히 보고야 말았다.
붉은 기운.
리비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보리스가 즉각 다가와 시트로 벗은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진정시켰다.
“놀라지 마, 리비.”
보리스는 그녀를 다시 주저앉히려 했으나 그녀는 몸을 마저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차륵.
리비는 보리스가 닫아 둔 커튼을 단번에 걷어 냈다. 눈앞에 펼쳐진 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불길이었다.
“저게…… 뭐야?”
먼발치에서도 치솟아 오르는 불길이 보일 만큼 큰 불이었다. 방향은 헤센숲 너머였다.
리비는 거의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 듯한 자세로 밖을 보았다. 보리스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쥐어 중심을 잃지 않도록 했다.
“불이, 불이…….”
불길을 보고 놀란 까마귀들이 밤하늘에 새카맣게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는 얘기는…….
“보, 보리스. 마을, 마을이…….”
티소 마을 쪽 방향이었다. 이렇게나 큰 불이라니.
리비의 얼굴은 불과 반대로 하얗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마을, 티소 마을이…….”
이렇게 멀리서까지 불이 보일 정도면 지금 저곳에 멀쩡한 것이 있기는 할까. 마을은 형체도 없이 사라진 게 아닐까. 어쩌면 사람들도…….
“안 돼!”
리비는 숨이 넘어갈 듯 비명을 질러 댔다.
“안 돼, 보리스, 불이, 불이…….”
목소리가 덜덜 떨려 나왔다. 창틀을 잡은 손도 덩달아 마구 떨렸다.
“리비, 진정해.”
창문에 매달린 채 비명을 질러 대는 리비를 보리스가 끌어안아 진정시켰다.
“아, 안 돼…… 아버지가…… 동생들이, 친구들도.”
리비는 정신없이 보리스를 돌아보았다. 보리스의 얼굴이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만큼 불길은 높게 치솟아 있었다.
“내가 나가 볼게.”
보리스는 벗어 두었던 옷과 방어구를 빠르게 걸치기 시작했다.
“나, 나도 갈래.”
리비는 서둘러 그를 따라나섰다. 하지만 보리스의 팔에 의해 제지되고 말았다.
“안 돼.”
보리스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길은 평소와 달리 지극히 엄하게 변해 있었다. 언제나 리비를 바라보는 눈빛은 부드럽게 젖어 있곤 했기에 그 대비는 더욱 명확히 드러났다.
“…….”
리비는 이처럼 정색하는 보리스의 목소리를 처음 들어서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위험해. 여기에 있어.”
보리스는 표정을 조금 풀더니 리비를 달래기 시작했다. 리비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매달렸다.
“보리스. 나도 걱정이 돼, 그래서.”
리비는 그의 팔을 붙들며 애원했다.
“나도 데려가 줘, 응?”
“리비, 꼼짝 말고 여기에 있어. 네가 안전해야 마음 놓고 마을 사람들을 구할 수 있으니까.”
보리스는 리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직접 가서 상황도 알아보고, 사람들을 구하고, 불도 잡을 테니까 너는 안심하고 여기에 있어.”
“사람들을 구하고?”
“응.”
“직접 거길 간다는 소리야?”
“물론이지. 백작님이 거기 계시잖아.”
“…….”
“그러니 얌전히 있어 줘. 안전한 곳에, 내가 걱정하지 않도록.”
리비는 보리스의 만류에 혼난 강아지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리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걱정은 되지만 그의 말이 옳다. 자기가 따라가 봐야 뭘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심지어 방해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럼…… 보리스, 꼭 안전하게…….”
“물론이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보리스는 다시금 리비를 안심시켰다. 리비는 그가 옷을 입도록 도와주면서 말했다.
“너도, 조심해.”
“…….”
팔에 건틀릿을 끼워 넣던 보리스가 행동을 멈추고 리비를 바라보았다.
“나를 걱정하는 거야?”
리비는 순간 그의 질문에 멍해졌다.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너무도 당연한 말인데.
“당연하지! 너는 내 남편인데.”
리비가 황당하다는 듯 그를 보며 외치자 보리스의 입가에 잠시 웃음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걱정이 가득한 아내 앞에서 차마 웃을 수 없어 참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해. 너도, 아빠도 마을 사람들도 모두 다…….”
창밖에서 들이치는 불길로 보리스의 얼굴은 점점 더 주홍빛으로 물들어 갔다. 깊은 밤임에도 부부의 침실은 굳이 촛불을 밝힐 필요조차 없었다. 보통 큰불이 아니었다.
그 사실에 갑자기 리비는 더욱 겁이 났다. 보리스는 지금 저 무시무시한 불길이 치솟는 곳으로 작정하고 가려는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그녀가 나고 자란 마을로.
이토록 든든한 그가 사람들을 구해 주러 간다니 안심이 될 법했지만, 리비는 그보다는 눈물이 치솟았다.
“울지 마.”
보리스가 장갑을 낀 손으로 리비의 뺨을 훔쳐 냈다.
“네가 다치면 어떡해. 불이 저렇게 심하게 났는데…….”
그런데 자신은 이 아늑한 방 안에서 기다려야만 한다. 같이 간다 한들 짐이 될 뿐이니 가지 않는 게 맞지만, 보리스 홀로 저 위험한 곳에 보낸다고 생각하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안 죽어, 리비.”
보리스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덧붙였다.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에 리비는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얼굴을 감싸오자 리비는 즉각 눈을 감고서 팔을 뻗어 그에게 매달렸다.
“으응…….”
이런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이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더더욱 열정적으로 매달리며 그에게 깊이 키스를 퍼부었다.
겨우 입술이 떼어지고 나자 리비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꼭이야, 꼭?”
리비는 거듭 약속을 받아 냈다. 듣고 또 들어도 모자랐다. 아까 방 안을 홀로 서성이는 동안 그를 멀리 보내는 상상을 했었는데,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니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멀리 원정을 나가는 것도 아니고 마을에 가서 아버지와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것뿐인데도 그랬다.
“그래.”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목에 넝쿨처럼 감긴 리비의 팔을 겨우 풀어 냈다. 그 역시 풀어 내기 싫은 건 마찬가지인 얼굴이었다.
“무사히 돌아올게.”
“응.”
이마에 입술을 깊이 눌렀다 뗀 뒤 그는 돌아서서 나갔다. 그를 보내고 난 뒤 리비는 그대로 침대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린 뒤 창가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말에 올라탄 보리스의 모습이 보였고, 보초병들과 칼리니 기사단의 기사들도 몇몇 보였다. 불길을 잡을 인원을 모으는 모양이었다. 무언가를 바삐 지시하는 보리스의 말에 따라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잠시 뒤, 보리스를 필두로 꾸려진 인원은 순식간에 성을 빠져나갔다. 리비는 어둠 속에서 보리스의 흩날리는 망토 자락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님.”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리비가 외쳤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베스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놀라셨지요? 공작님께서 마님을 부탁하고 가셨습니다.”
“난 괜찮아. 안전한 곳에 있는걸. 그보다…….”
“말씀하십시오.”
“내가 할 일은 없을까?”
얌전히 방에 있으라고 했지만 절대로 마음 편히 드러누워 쉴 수는 없었다. 그를 불길이 치솟는 위험한 곳으로 보내 놓고 그럴 수는 없었다. 리비는 성에 남은 이상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찾아야만 했다.
“공작님께선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지만 내가 그럴 수 있겠어?”
리비는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불이 이곳까지 옮겨붙지 않을까?”
“거리가 멉니다. 다만 바람이 세서…….”
“멀리서 불이 붙은 재가 날아오면 위험할 수도 있잖아. 겨울이니까.”
모든 것이 메마른 계절이다. 물이 마르고 바싹 마른 나무와 풀들이 불쏘시개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아주 작은 불로도 큰불로 번질 수 있다.
“공작님께서 성의 방비도 빈틈없이 하라 하셨습니다. 소방수도 넉넉히 준비해 놓았고요.”
“그래, 성 주변에 물을 뿌리고…… 아! 마을은?”
“마을에도 사람을 보냈습니다.”
“지금 공사가 한창이잖아. 목재도 많고…… 사람도 있는데. 까딱 잘못하면 불이 날 거야.”
“기사단 중 일부를 보내 이미 단속하신 상황입니다.”
“내가 직접 가봐야겠어.”
“네?”
베스는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마을은 에드라크 영지의 핵심이 될 거야. 영지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만든 곳이라고. 불이 나면 다시 복구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거야. 그때는 지금보다 더.”
마을이 비교적 빨리 재건될 수 있었던 건 기존에 남아 있던 건물들의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기 때문이었다. 개중에는 돌로 튼튼히 지어서 개보수만 하면 당장 쓸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 풍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진다면.
“당장 갈 거야.”
보리스가 자신의 마을을 지켜 주러 갔으니, 리비는 보리스의 마을을 지켜 주고 싶었다.
***
호위병들과 말을 타고 성 밖 마을에 도착하자 여기저기 불이 환하게 밝혀진 것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막스는 공사의 책임 감독을 맡아 밤낮없이 일하는 중이었다. 그는 리비를 보자마자 달려와 머리를 숙였다.
“숲 너머 마을에 불이 났다고 해서, 밤새도록 지키는 중입니다.”
리비는 천천히 마을을 돌아보았다. 공사는 중단되었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모닥불 빛을 쬐고 있었다.
“아이들은? 부녀자와 노인들은?”
마을로 이주해 온 사람들 중에는 몸이 성치 않은 이들도 많았다. 만약 큰불이 나면 그들 모두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모두 안전한 곳에 대피시켰습니다.”
“불이 나지 않는 게 중요해. 사람들에게 불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리비는 말하다 말고 미간을 좁혔다.
“저건 뭐야?”
어둠 속, 헛간에서 시뻘건 불길이 날름거리고 있었다.
<5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