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결합
안드로스 왕이 직접 조카인 리비의 결혼식을 선포하자, 내내 왕의 의중을 저울질하던 궁정 귀족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왕의 신임을 받아 눈부신 출세를 한 에드라크 공작과, 왕의 조카딸이 맺어지는 혼사였다. 축제의 이유도, 근거도 충분했다.
날짜가 정해지자 성안은 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왕궁 안 곳곳이 꽃과 리본으로 장식되었고, 술과 음식을 장만하느라 바빴다.
리비는 이것이 단순히 자신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으니 축제를 벌일 시간이었는데 때마침 왕실의 결혼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이 주어졌으니 너도나도 술에 취할 준비를 마친 것이었다.
그 소란함 속에서 리비는 드레스를 가봉하고, 새신부의 단장에 걸맞은 단장을 갖춰 갔다.
그녀의 치장을 도운 시녀장이 활짝 웃으며 리비에게 말을 건넸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에드라크 공작 부인.”
그 말과 동시에 방에 있던 모든 시녀들이 고개를 숙여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것은 꽤 낯선 광경이었고, 당황스러운 풍경이었다.
에드라크 공작 부인이라니.
내내 보리스가 주장해 온 그 이름이 이제 와서 새삼 이렇게 부담스럽게 여겨질 줄은 몰랐다.
“왜 그러세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는 리비를 보며 시녀들이 물음을 던졌다. 신부의 시중을 들 시녀들 역시 정갈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아, 아니에요.”
리비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잠시만요.”
시녀들이 구름같이 펼쳐진 베일을 들고 오더니 리비의 머리 위에 얹어 주었다. 아주 엷은 안개가 낀 듯 시야가 부드럽게 흐려졌다. 이와 같은 경험을 불과 얼마 전에 했었는데.
그때와는 전혀 다른 감상이 드는 걸 보니 역시 결혼은 누구와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았다.
“폐하께서 직접 보내신 거예요.”
보석으로 된 관이 머리에 씌워지고 나자 모든 준비가 끝났다.
“조심, 조심하세요.”
시녀들이 양옆에서 리비가 넘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손을 붙들어 주었다. 이번에 입은 결혼식 예복은 레제트 공작과의 결혼식을 위해 입었던 것보다 훨씬 길고, 풍성하며, 그만큼 무거웠다.
혼자서는 발 한 걸음 옮기는 것조차도 조금 버겁다 느낄 만큼. 그래서 몸을 지탱해 줄 시녀들이 필수적으로 따라붙어야만 했다.
뒤에서 시녀 두 명이 길게 늘어진 드레스 자락을 붙들었고, 양옆에는 선 시녀들이 그녀의 팔을 붙잡아 주었다. 또 언제든지 그녀의 명령에 따를 다른 시녀들도 양옆에서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행차도 이런 대행차가 없었다. 자신이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여섯 명, 여덟 명이 덩달아 움직이는 광경에 리비는 온몸의 근육이 바짝 긴장하는 것 같았다.
그냥 화관을 쓰고, 들꽃으로 만든 부케를 들고 서로 맹세를 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결혼식이 열릴 예배당까지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지만 걷는 내내 길이 자꾸만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멀리서 결혼식을 알리는 종탑의 웅장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
모든 절차는 빠르게 끝이 났다.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모든 의식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성스러운 의식도, 떠들썩한 피로연도 모두 마쳤다. 이제 남은 건 결혼식의 마지막 의식. 신랑과 신부의 결합.
결혼 첫날밤이 남아 있었다.
리비는 피로연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와 신방으로 왔다.
“곧 에드라크 공께서 오실 겁니다.”
시녀들은 그녀를 침대 한가운데에 앉혀 두고, 꽃잎을 뿌려 준 뒤, 잔에 술을 따라 건네주었다. 그것을 한 모금 마신 리비는 눈앞이 핑 도는 느낌에 급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좋은 밤 보내세요.”
그 말만 남긴 채 시녀들은 물러갔다.
“저, 저기.”
아직 결혼식 때 입은 드레스를 벗겨 주지도 않았는데, 시녀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시녀들이 가고 난 뒤 리비는 홀로 신방에 앉아 있었다. 좀 전에 받아 마신 술 탓인지 몸 전체에 알싸한 술의 기운이 퍼져 나갔다. 머리가 어지럽고, 어쩐지 숨이 가빠 오면서 몸이 뜨거운 기운이 돌았다.
에드라크 공작 부부가 결혼 첫날밤을 보낼 방에서 리비는 그저 가만히, 아까 결혼식 준비에 몸을 맡겼던 것처럼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방. 결혼식을 올린 남녀가 처음으로 한방에 드는 일. 즉, 두 사람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잠자리를 가지는 날이었다.
……물론 자신과 보리스는 이미 여러 번, 아니 매우 많이 같은 방에서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한 사이라는 점에서 다르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무작정 끌고 와 그러는 것과 정식으로 사람들 앞에서 결혼한 상태에서 한방에 드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오늘 밤이야말로 완전히 그의 것이 되고야 만다. 그게 이렇게 새삼스러울 일인가. 이미 보리스와 자신은 숱한, 숱한…….
지난 밤들의 낯뜨거운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라 머릿속을 지배하자 갑작스레 열이 올랐다.
리비는 닫힌 창문으로 걸어가 문을 크게 열어젖혔다.
“후, 하.”
얼굴을 내밀고 숨을 쉬고 들이마시기를 반복하자 조금씩 얼굴에 몰린 열기가 흩어져 갔다.
그나저나 시녀들은 그녀를 방 안에 던져 두고 왜 이리 빨리 사라진 걸까. 옷도 무겁고 이리저리 꼬고 땋아 놓은 머리카락도 아프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게 너무나도 많은데 어째서.
몸을 꽉 조인 드레스의 윗부분이 답답했다.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 워낙 바짝 조여 놔서 그것만으로도 숨쉬기가 살짝 힘들 정도였다.
“여기……를 풀면.”
손을 뒤로 뻗어 몸을 꽉 조인 리본을 잡아 풀려 해보았으나 손이 잘 닿지 않았다.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매듭의 끝이 손가락을 간질이고 있을 때였다.
“리비.”
리비는 파드득 놀라 손을 떼어 냈다. 돌아본 곳에는 너무나 당연히도, 보리스가 우뚝하니 서 있었다.
“여기서 뭐 해?”
보리스는 리비가 기이한 자세로 드레스 뒤를 풀어내려 한 광경을 모두 지켜본 모양이었다. 그 해괴한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니, 리비는 어딘가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마 하루 종일 무거운 드레스와 머리 장식을 얹고서 돌아다니느라 얼굴에는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을 게 뻔하다. 거울을 본 건 아침에 단장할 때가 전부였다.
반면에 그는 어떤가.
자신처럼 보리스 역시 결혼식 예장을 풀지 않은 상태였다. 머리는 말끔하게 넘겨진 채였고, 그녀를 바라보는 두 눈은 촉촉한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기, 그게…….”
말은 우물거리며 튀어나왔다. 리비는 스스로가 바보 같아 입술을 짓씹었다.
새삼스레 왜 긴장하지? 왜 말을 더듬지?
그게 다 어색해서였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 둘이 있는 게 처음도 아니건만 바짝 긴장한 자신이 우스웠다. 보리스는 저렇게나 여유로운데.
보리스는 리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척척 걸어서 리비에게 다가왔다. 그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리비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하지만 뒤편에는 활짝 열린 창문만 있을 뿐이었다. 발을 내디딜 공간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어? 어.”
순간 몸이 기우뚱 기우는가 싶더니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빨라졌다.
창문 턱에 걸려 뒤로 넘어갔던 몸은 순식간에 일으켜져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조심.”
일으켜 세워지자 마주한 건 보리스의 보랏빛 눈이었다. 별빛을 받아 촉촉하게 반짝이는 두 눈에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
한 번, 두 번. 리비는 연달아 침만 삼켰다. 아직 등 뒤를 감싼 손은 풀리지 않았고, 허리를 탄탄하게 휘감은 팔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까는 드레스에 몸이 옥죄었다면 이제는 보리스가, 이제는 공식적으로 자신의 남편이 된 남자가 숨을 콱 틀어막은 것만 같았다.
아니, 단순히 그 때문이 아닌가? 아까부터 이어진 어지럼증과 현기증, 속이 갑갑한 듯 울렁거리며 열이 오르는 이 기분은…….
“힘들지?”
“응? 으응.”
아닌 게 아니라 딱 죽을 것 같았다. 새벽부터 내내 몸을 씻고 치장하고, 무거운 드레스를 입고서 걸어 다녔다.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영원한 사랑을, 신성한 결혼의 의무를 다할 것을 맹세했다.
피로연에서는 보리스와 춤까지 췄다. 모든 게 꿈속에서 일어난 일인 것처럼 몽롱한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툭.
문득 등 뒤쪽이 시원해진 느낌에 리비는 휙 뒤를 돌아보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벗기는 건데.”
그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는데 뭐가 문제냐는 듯한 태도였다.
“이거 입고 잘 수는 없잖아?”
“잠……은 못 자지, 그렇지.”
리비는 서둘러 긍정했다. 침착하자, 침착해. 속으로 수없이 되뇌는 동안 뒤에 달린 리본과 단추들은 순식간에 툭툭 풀려 나갔다.
“다 됐어.”
그 말과 동시에 드레스가 툭,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
리비는 자신의 주변으로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내려앉은 드레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물론 드레스 하나를 벗었다고 해서 완벽하게 태초의 모습이 되는 건 아니었다. 예복 아래에 입은 여러 겹의 드레스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벗겨진 건 그저 드레스 한 겹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미 리비는 모든 옷을 벗어 버린 것 같은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건 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보리스의 시선 때문이었다.
보랏빛 눈이 거의 붉게 보일 정도로 끈적하고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게 보였다.
그의 시선이 느긋하게 리비의 목덜미에서 가슴께로, 그리고 다시 허리를 지나 다리까지 이어 내려왔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홧홧하게 불이 이는 것 같아서, 리비는 몸을 움찔거렸다.
“왜, 왜 그렇게 봐.”
“…….”
보리스는 말없이 손을 뻗어 왔다. 그의 손이 어깨에 닿으려 하자 리비는 더욱 몸을 움츠렸다.
“왜, 왜!”
크게 내지른 소리에 저지당한 보리스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저 벗어야 하잖아.”
“아, 아니야. 내가 할게. 내가.”
리비는 흩어진 옷을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 말은 가뿐히 무시당했다.
“보리스!”
순식간에 끌려간 몸이 그의 팔 안에 가둬지고 말았다.
툭, 툭.
꼼짝없이 끌어안긴 채 남은 드레스들이 모조리 벗겨졌다. 이제 남은 건…….
“아, 안 돼!”
허공에 떠오른 발을 열심히 버둥거려 봤지만 보리스는 굳건한 팔을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 안 되는데?”
“그야…….”
“이제 우리는 부부잖아.”
내려다보는 눈에는 짙은 웃음이 번져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리비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렇지, 우리는 부부였지.’
보리스가 일깨운 사실에 리비는 얇은 속옷을 움켜쥔 손만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발가락도 자꾸만 안으로 곱아들었다. 보리스의 목적지는 뻔해 보였다.
두 사람이 눕기에는 크디큰 침대. 저 침대에서 오늘…….
그 생각에 이르자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실은 아까부터 그랬다.
그렇게 더운 계절도 아니건만 얼굴이 계속해서 달아오르고,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고 있었다. 그게 보리스가 자신의 옷을 벗길 무렵이 되어서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왜 이러지?’
이렇게까지 긴장할 일이었던가. 리비는 스스로도 자신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아 의아하기만 했다.
풀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등에 부드러운 침구가 닿은 게 느껴졌다. 보리스는 리비를 눕혀 놓은 뒤 잠시 동안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얼굴을 훑어 내리는 동안 색색 내쉬는 숨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리비.”
보리스가 위로 타고 오르자 침대가 좀 더 크게 출렁였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욕정 대신 다른 의구심이 떠올라 있었다. 그게 뭔지 자세히 생각하기에는 온몸을 타고 도는 열기가 너무 컸다. 리비는 뜨뜻한 불 위에 지져지는 듯한 느낌에 눈을 감았다.
“괜찮아?”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이렌의 노래처럼 지나치게 감미롭고, 유혹적인 소리였다.
“응, 으응.”
리비는 화답하며 그를 향해 팔을 활짝 벌렸다. 이상했다. 스스로도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인지했지만 그 생각은 곧 성냥불처럼 금방 꺼져 버리고 말았다.
“보리스, 나 좀…….”
어떻게 해줘. 거기에 생각이 미쳤을 때 리비는 텁, 자신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보리스의 눈에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긴장했어?”
귓가에서 웃음소리가 들리자 리비는 심장 부근 어딘가가 간지러워졌다. 보이지 않는 깃털 하나가 심장을 건드리는 것만 같았다.
“아니. 아니야.”
리비는 재빨리 부정했다. 새삼 그와의 접촉이 부끄러울 건 뭐고, 민망할 건 또 뭐란 말이지.
오늘 밤, 우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리비는 그 생각을 하고 또 했다. 그렇게 자신을 달래려 했다.
그런데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다.
가만히 있어도 쿵쿵거리며 옷을 뚫고 나올 듯 뛰어 대는 심장이, 리비의 정신을 잔뜩 흐려 놓고 있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여기가 에드라크성이 아닌 왕궁이라서? 그래서 이리 심하게 긴장이 되는 것일까? 단지 그 때문에?
“보리스, 보리스으…….”
리비는 보리스의 품에 얼굴을 문지르며 더욱 달라붙었다. 이상했다. 진정하려 해도 점점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 소리가 북처럼 둥둥 울리고…….
‘첫날밤이라 그런 거겠지.’
이상스러울 정도로 뜨거워진 몸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이미 남녀 사이에 나눌 온갖 것들을 함께한 사이라지만, 그렇지만…….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도, 이렇듯 공식적인 첫날밤을 맞는 것도 처음이니까. 그러니 긴장이 되는 거겠지. 왕궁이라서 낯설고 긴장한 마음도 들 테고. 그러니 단지 그뿐이다, 그러니까.
그 의지와는 달리 숨은 점점 가빠 왔다. 대체 몸이 왜 이러는 것일까.
“흐읍…….”
리비는 더욱 그에게 밀착해 숨을 내쉬었다.
“리비.”
반길 줄 알았던 보리스는 영 기대한 반응과는 달랐다. 커다랗게 뜨인 눈이 리비를 샅샅이 관찰하고 있었다.
“왜?”
리비는 그렇게 말하며 보리스의 목에 팔을 둘러 자신에게로 끌어 내렸다. 확 가까워진 얼굴에서 내뿜는 숨의 열기가 평소보다 더욱 뜨거워져 있었다.
“보리스…….”
리비는 칭얼거리며 보리스에게 자신의 입술을 밀어붙였다. 막 입술에 닿으려는 순간, 보리스가 심각한 얼굴로 속삭였다.
“……뭘 마신 거야, 리비?”
이렇게 매달리면 금세 입술을 겹치며 뜨겁게 반응해 올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보리스는 오늘따라 꽁무니를 빼는 강아지처럼 굴고 있었다. 리비는 그것이 못내 서운했다.
“응? 나 먹은 거 없어…….”
칭얼거리는 음성에 보리스가 픽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그 말에 그가 웃으며 몸을 숙이더니 리비의 앞에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마치 강아지가 어미의 품으로 파고들며 젖 냄새를 맡는 모양새였다.
“간지러워.”
키득거리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쩐지 웃음이 자꾸만 헤프게 흘러나왔다.
피로연 내내 긴장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온몸을 조인 드레스 때문에 허기를 제대로 느낄 틈도 없었다. 먹은 거라고는 고작…….
아까 시녀들이 내민 술.
긴장한 나머지 목이 탔고, 그들이 내민 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꼴깍꼴깍 마셔 버렸다. 그것도 단숨에.
“뭔가를 먹은 거지, 그렇지?”
목덜미께에 닿은 숨이 뜨거웠다. 그 강렬한 자극에 리비는 몸을 비틀며 애원했다.
“으응, 보리스, 나 좀…….”
결국 먼저 행동을 시작한 건 리비였다. 평소에는 손만 빠르더니, 아예 대놓고 신방을 차려 줬는데도 그의 손길은 미적지근, 느리기만 했다.
거침없이 들어 올려진 손이 보리스의 얼굴을 쓰다듬고, 그의 옷을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툭, 툭. 그가 자신의 옷을 풀어 내렸듯이, 리비도 거침없이 그의 옷을 벗겨 냈다. 대담하게 옷의 여밈 부분을 끌러 내는 리비의 손짓에 보리스의 눈이 크게 열렸다.
“리비?”
다소 충격을 먹은 듯 커진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의 눈이 리비의 손길을 따라 정신없이 움직였다.
“보리스으…….”
리비는 이제 한계점에 닿아 있었다. 잔뜩 물 먹은 연녹색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어서 해주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보리스는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탁.
꼼짝도 하지 않을뿐더러 아예 제 몸을 배회하는 리비의 손을 잡아 고정시켰다.
“이상해, 리비. 그만해. 뭔가 이상한 걸…….”
먹은 것 같아, 라고 말하려던 입술은 그대로 리비에게 집어삼켜져 버렸다.
“읏…….”
갑자기 덮쳐든 입술에 당황한 나머지 보리스는 얼떨결에 그녀의 등을 끌어안아 단단히 고정시켰다. 속절없이 매달리는 부드러운 몸이 그의 단단한 몸에 와닿자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리비…….”
보리스는 간신히 리비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 달려드는 리비에게 도로 입술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털썩.
자꾸만 들이대는 리비의 입술을 피하려다 보니 이번에는 아예 자세가 뒤바뀌고 말았다.
“…….”
보리스는 그대로 침대에 눕혀진 채, 커다란 몸을 타고 오른 작은 포식자를 바라보았다.
“리비,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아?”
그의 괴로운 속삭임 따윈 들리지도 않는 듯, 리비가 다시 그를 향해 몸을 숙여 왔다.
“보리스…….”
리비는 무언가에 홀린 듯 중얼거렸다.
“너 정말 예뻐.”
리비는 보리스의 위에 올라타 바짝 엎드린 채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아래 깔린 채 보리스는 깊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다시 뒤집으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럴 의지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리비가 자신의 몸을 타고 오른 순간, 그의 안에 남아 있던 엷은 의식의 끈이 뚝 하고 끊기는 것을 느꼈다.
뿌리치기에는 너무 부드럽고, 달콤하고, 유혹적이었다.
그에게 리비는 언제나 그랬다.
그녀가 환하게 웃기만 해도 그는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빠르게 뛰곤 했다. 이러다가는 심장이 망가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위에서 거침없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작고 여린 야수에게 그는 속절없이 붙잡혀 버렸다.
“위에서 보니 더 예쁘다.”
리비는 마치 높은 산 정상을 정복한 사람처럼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두꺼운 몸통 위에 올라앉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짜릿한 일이었다.
일단 눈높이가 높아졌으며, 언제나 자신을 내려다보던 보리스를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샅샅이 훑어볼 수 있게 되니 그 만족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가득 차올랐다.
“넌 모든 게 다 예뻐. 머리카락, 눈 색깔…… 입술까지도.”
입술에 닿은 손가락은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불에 달군 부지깽이 같았다. 그 작은 접촉만으로도 보리스는 몸을 퍼덕거리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리비의 입가에 더욱 찬란한 웃음이 번져 나갔다.
극상의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 리비와 달리, 보리스는 마치 고문당하는 것 같은 시선으로 자신의 커다란 몸 위에 올라탄 리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를 뒤집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 위에 올라앉아 해맑게 웃고 있는 리비를 보고 있자니 그럴 의지가 살에 닿은 눈처럼 스르륵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보리스.”
위에서 야릇한 얼굴로 속삭이는 리비의 눈빛이 몽롱했다.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음에도 보리스는 간신히 속에서 날뛰는 마음을 눌러 참았다. 지금 리비는 온전한 정신 상태가 아닌 게 확실했으니까.
“리비, 몸이 뜨거워. 대체 뭘 마신 거야?”
보리스는 눕혀진 상반신을 일으켜 리비의 팔을 움켜쥐었다.
“아무것도 안 먹었대도…….”
리비는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보리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까마귀 날개 같아.”
“…….”
눈을 찌를 듯 내려온 앞머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새를 쓰다듬듯 섬세했다. 행여 손에 쥔 것이 다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듯, 리비는 조심스레 그의 머리칼을 손에 감았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반곱슬머리인 자신과 달리 쭉쭉 뻗은 보리스의 머리칼이 신기한지 그녀는 연신 같은 손장난을 반복하고 있었다.
“까맣고, 매끄럽고…… 정말 기분 좋아.”
그와 입을 맞출 때면 이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내려와 그녀의 얼굴을 간질이고는 했다. 그때의 기분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보리스에게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를 해준 적은 없지만…….
“정말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보리스는 그제야 테이블에 놓인 작은 술병을 발견하곤 미간을 찌푸렸다. 손을 쭉 뻗어 술병을 가져와 냄새를 맡는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진지해서 리비는 또 장난기가 발동해 버렸다.
“나만 마셔서 화났어?”
“리비, 이건…….”
잠시 술병의 입구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던 보리스의 얼굴이 차츰 굳어 갔다. 이상할 정도로 열이 오른 리비의 몸과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이 대범한 이 모든 행동들이 단번에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신혼부부를 위해 특별히 제조된 술이었다. 첫날밤의 긴장을 풀기 위해 사용되는, 기분을 좋게 만들고 이제 막 부부가 된 남녀의 원활한 첫날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리비는 뭣도 모르고 꿀꺽꿀꺽 마셔 버린 것이다.
“진정해.”
보리스는 리비를 붙든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파.”
리비는 일부러 과장되게 소리를 내질렀고, 그의 손은 금세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그러자 그때를 놓치지 않고 희고 가느다란 팔이 그의 목을 감싸 안아 왔다.
“보리스, 키스해 줘.”
“…….”
바짝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그는 목울대가 크게 울리도록 마른침만 삼켜 댔다.
“응?”
그녀는 다시 요구해 왔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다분히 유혹의 의미를 담아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은 보리스조차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다름 아닌, 상대가 바로 리비였으니까.
“리비, 일단 이 술이 깨면…….”
보리스는 다시 끈질긴 설득을 시작했다. 그게 진저리가 난다는 듯, 리비가 세차게 머리를 내저으며 반항했다.
“싫어, 싫어.”
리비는 투정을 부리며 그에게 안겨 들었다. 작고 말캉한 몸이 단단한 육체에 밀착되자 그는 흡, 크게 숨을 들이마셔야만 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숨이 그의 쇄골 언저리에 마구 흩뿌려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도 점차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니, 이미 이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미 그는 잔뜩 달구어진 상태였다.
결혼식 내내, 피로연에서,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그 복잡하고 귀찮은 예식을 치러 내는 내내 그는 모든 신경이 리비에게 쏠려 있었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리비와 처음 만난 그날부터, 그녀는 언제나 그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으니까.
“리비, 나 참을 자신이 없어.”
그가 작은 얼굴을 부여잡은 채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그것을 알아들은 듯 리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올려 그와 눈을 마주했다.
촉촉한 연녹색 눈동자에 어린 건 강렬한 열망이었다. 그리고 입가에는 사악하다 싶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른 영혼이 리비의 몸속에 들어온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참지 마, 그럼.”
왜 참아야 하지? 우리는 왕이 공인한 부부인데.
그다음은 리비의 얼굴이 쏜살같이 덮쳐 들었다. 졸지에 입술을 내준 채 보리스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무방비 상태였던지라 입술은 순식간에 열렸고, 작은 침입자를 맞이해 격정적으로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리비는 마구 혀를 얽고 그를 집어삼킬 듯 열심히 탐했다. 그러는 동안 그가 느슨히 풀어 놓은 옷의 끈과 매듭이 모두 풀어져 내려 거의 절반쯤은 나체가 되어 있었다.
거침없이 뻗어 온 손이 그의 옷도 마저 끌어 내렸고, 탄탄한 근육 위로 작은 손이 쉼 없이 오가며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보리스는 가까스로 이성을 끌어 올리려 애썼다. 지금 자신에게 리비가 이러는 건 완전히 그녀의 의지만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였다. 그러니 멈춰야 한다, 그러니까…….
“이러면 안 돼, 리비.”
그는 마지막 남은 이성을 쥐어짜 리비를 떼어 냈다. 순간 그녀가 보인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보리스, 내가 싫어?”
녹색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굵은 눈물방울이 그의 가슴 위로 후드득 떨어지자 그는 어쩔 줄 몰라 그녀만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하지만 지금은 이러면 안 되는 상태…….”
“내가 싫은 거지, 그렇지…….”
리비는 아예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엉엉, 어린 날 마구 떼를 쓰며 울어 대던 그때 그 모습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야, 리비. 그런 게…….”
부지런히 리비의 눈물을 닦아 내던 손은 어느덧 입술로 변해 있었다.
“울지 마, 괜찮아.”
툭하면 울었던 보리스를 달랜 게 리비였듯이, 울며 떼쓰는 리비를 진정시키는 것 또한 보리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축축한 혀가 쉼 없이 볼을 핥고, 흘러내린 눈물을 입술이 받아 마시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대체 뭐가 그리 서러운지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건 마치 사탕을 빼앗긴 것 같은 모양새였다.
결국 그는 항복하고 말았다.
“흐읍!”
두툼한 혀가 대번에 리비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철벽을 치며 방어하던 모습은 간데없이 깊고 야릇한 움직임이 입안에서 느껴졌다.
“응, 으…….”
리비는 울던 것을 멈추고 보리스와의 입맞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목에 팔을 감고서 더욱 매달리며 졸라 댔다.
서로를 탐하던 입술이 떨어진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이미 더 벗길 것도 없이 서로의 옷은 충분히 벗겨진 상태였다.
스륵.
몸에 남아 있던 마지막 속옷의 끈을 푸는 소리에 리비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몸은 침대에 눕혀진 상태였고, 위에서는 보리스가 욕망에 충만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리스…….”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아까와는 달라졌음을 느낀 보리스가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물어보는 소리에는 깊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
“응, 그런데…….”
몽롱하고 작은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리비가 하는 모든 행동과 말이 그에게는 유혹이었다. 그것을 뿌리치기란 항해 중에 세이렌을 만난 선원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말해, 리비.”
보리스가 더욱 귀를 가까이 가져다대며 말했다. 그의 목에 팔을 감은 리비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왜 멈춰?”
“응?”
보리스는 순간 자신이 무언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멈추냐고.”
리비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목을 감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걸로도 모자란지 아예 다리를 들어 허리에 넝쿨처럼 감아 버리고 말았다.
“그야, 네가 저걸 먹고…….”
보리스가 웅얼거리자 리비의 입가에 귀엽다는 듯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뭐 어때.”
살포시 웃는 얼굴이 보리스를 향했다.
“우린 결혼했는걸. 왕 앞에서 맹세도 했잖아.”
“…….”
“이젠 돌이킬 수 없는걸.”
어서 대답하라는 듯, 연녹색 눈이 그에게 재촉해 왔다. 눈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허리에 야무지게 감아 놓은 다리가 슬금슬금 움직이더니 그의 몸을 가볍게 죄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그 아찔한 자극에 보리스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앓는 소리를 했다.
목울대가 크게 출렁거리며 자신이 가한 자극을 이겨 내려 애쓰는 걸 보자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도 가학심이 샘솟았다.
왜 이제 와서 빼는 건데?
술을 마신 이후로 자신이 어딘가 이상해졌다는 건 리비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어쩐지 자신 같지 않았다. 기분이 자꾸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처럼 붕붕 뜨는 데다가 온몸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게 영 심상치 않았다.
자신이 웃을 때마다 보리스의 걱정 어린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리비의 손이 대담하게 보리스의 가슴팍을 훑고 올라갔다. 아직 소년티가 남은 얼굴과 달리 몸은 돌로 쳐도 튕겨 낼 만큼 단단했다.
이 몸과 매일 밤 탑에서…… 이런저런 일을 했었다.
그가 새겨 놓은 기억들이 지나치게 생생해서,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몸도 자연스레 반응하고 있었고.
그런데 보리스는 정작 때 아닌 자기 걱정을 하느라 차려 놓은 식탁에 손도 대지 않았다.
이건 명백한 굴욕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결혼 첫날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며 엉엉 울던 누군가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첫날밤이란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신의 허락하에, 모두의 인정을 받으며 합방하는 날. 그런데 갑자기 성직자라도 된 듯이 자신을 말리려는 남자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멀쩡한데.”
리비가 중얼거리자 보리스가 한숨 터지듯 웃음을 지었다.
“원래 술 취한 사람들은 다 자기가 멀쩡하다고 해.”
“정말이래도?”
리비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보리스를 향했다.
“리비, 그건 보통 술이 아니야.”
그는 달래듯 말하며 리비의 양팔을 붙잡아 푹신한 시트 위로 내리눌렀다. 그녀는 아래서 열심히 낑낑거렸지만 그의 힘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아래서 바르작거리는 리비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한층 짙어졌다. 보리스는 리비를 꽉 끌어안은 채 몸을 겹쳤다. 붙들어서 리비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허튼 손짓이나 발짓을 하지 못하도록.
“정신…… 차리고 나면…….”
보리스는 죽을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만하라 해도 안 멈출 테니까…….”
“…….”
“제발 얌전히 있어 줘.”
마지막 말은 거의 애원 조로 변해 있었다. 리비는 양팔에 힘을 푼 채 멍하니 그런 보리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안타깝거나 멈춰야 한다는 생각 대신, 괜한 오기가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어쩐지 자존심이 상한다. 화가 난다. 이미 몸에 옷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마지막 속옷의 끈마저도 그가 풀어 버렸지 않은가.
그런데도 어떻게 여기서 멈출 수 있지? 어떻게, 어떻게.
“너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거야?”
그의 허리를 조이던 다리를 풀어 낸 리비가 심술궂게 외쳤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안 넘어가는 건 자신에게 매력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반응이 오지 않는 게 아닐까.
‘……확인해 봐야겠다.’
순간 리비의 머릿속을 강력히 지배한 건 단 하나의 생각이었다.
“보리스, 너 정말.”
리비는 늘씬한 다리를 틀어 보리스의 다리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슬쩍, 그의 하체를 건드렸다. 순간 그의 얼굴이 험악할 정도로 확 굳는 것이 보였다.
살짝 스쳤을 뿐인데 그 선명한 존재감은 뚜렷하게 느껴졌다. 일부러 한 행동이지만 되레 놀란 건 리비 쪽이었다.
“엄마야.”
그녀는 작게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이건, 이건 너무하잖아.’
방금 건드린 게 뭐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리비는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저게, 보리스의 그것이…… 충격에 어지러운 와중에 위에서 어둡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놀라.”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은 온통 새카맸다.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리비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 바닥이 어디까지인지, 그 끝은 또 어디까지인지, 알 길은 없었다.
뻣뻣하게 굳은 리비를 눈치챈 듯, 그가 고개를 기울여 물어 왔다.
“이제야 겁이 나?”
그는 목을 울리며 웃어 댔다.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웃음소리였다. 꼼짝없이 덫에 걸려 버린 토끼 같은 꼴이었다. 앞발로 덫을 가지고 놀다가 호되게 당한 기분이었다.
“보리스, 그거, 그거 설마…….”
그럴 리 없어, 그렇게 큰 게. 크고 무식해서, 당장이라도 온몸을 갈라 버릴 것 같은 그게…….
그동안 충분히 몸에 닿아 왔던 것이었다. 그가 잔뜩 흥분해 옷 너머로 문지른다든가, 기진맥진한 그녀를 끌어다가 함께 목욕을 할 때…… 그리고 자신의 안에 들어올 때.
그때마다 종종 보아 왔다. 그때에도 충분히 위용을 발휘한 것이었지만, 오늘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오늘따라 유독 그것은 크고, 무서운 무기처럼 보였다. 그사이에 자라기라도 한 것일까. 성인이 되어도 계속 굵어지고 길어지는, 뭐 그런 마법이 있나?
하긴 보리스는 보통의 사람과는 다르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과는 어딘가 다른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라.
속으로 부지런히 생각을 이어 가는 동안 보리스의 입가에 더욱 큰 웃음이 번졌다.
“그래, 그거.”
그는 불길한 얼굴로 씩 웃더니 리비의 손을 가져다가 그곳에 턱 갖다 대었다.
그녀의 손에 거의 끌어 내려진 바지 위로 선명한 형태를 드러낸 그것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 나…….”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아니 실제로 살아 있는 게 맞았지만, 하여튼 그런 것이 손에 닿았고, 평소보다 열이 잔뜩 오른 몸은 한층 그의 것을 더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네 거야, 리비.”
그는 자신의 아래에 그녀의 손을 마찰시키며 눈을 감았다. 난생처음 겪는 일에 리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무슨, 너, 보리스!”
당황한 나머지 어눌한 말이 흘러나왔지만 보리스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술에 취해 정신이 나갔어도 이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만큼 더 놀라고 말았다.
그가 직접 이런 행위를 요구한 적은 없었다. 언제나 행동의 주체는 그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가 직접 그녀의 손을 잡아 가서 자신의 몸에 문지르는 이 상황이 견딜 수 없이 야하게만 느껴졌다.
“아, 으…….”
손을 뿌리치지도, 그렇다고 대담하게 움직이지도 못한 채 리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는 동안 그의 움직임은 점점 더 빨라졌다. 눈을 살짝 내리뜬 채 리비를 바라보는 시선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맘에 들어?”
당연히 들겠지, 그의 질문에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다. 그 뿌리 깊은 자신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리비는 여실히 느끼고 말았다.
손바닥에 축축한 것이 번져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것은 조금도 그 기세가 꺾일 줄 몰랐다.
“보리스, 보리스.”
리비가 울듯이 불러 대는 소리에 그의 눈이 떨렸다. 이성의 그림자라고는 말끔히 날아가 버린 날것 그대로의 눈빛이었다. 뒤이어 입술이 갈급하게 덮쳐 왔다.
그사이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던, 끈이 다 풀린 속옷이 마침내 그의 손에 잡혀 끌어 내려졌다. 리비는 그 광경을 그저 멍하니, 그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바라보았다.
완벽한 그의 통제 아래 놓인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보리스는 천천히 몸을 맞물려 왔다. 그 생생한 감촉에 리비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기를 반복했다.
다리를 벌려 잡은 그가 폭군처럼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감았다. 그 눈꺼풀 위로 보리스의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
“리비.”
부르는 소리에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모든 걸 각오했으니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오늘이 지나면, 지나고 나면.
마침내 그의 완벽한 신부가 된다. 왕이 인정한 부부. 에드라크 공작과 그의 아내인 공작 부인이 되어서. 그러니 무서울 건 아무것도 없다.
“나, 난 괜찮으니까…….”
불쌍할 정도로 덜덜 떠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까 먼저 덮치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이제는 한없이 연약한 그녀만이 남았을 따름이었다.
“리비.”
그는 다시 한번 달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어쩐지 위험하게만 들렸다.
리비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더욱 눈을 꼭 내리감았다. 이렇게 눈을 감고 시간이 지나면, 다 끝나 있을 것이다.
“나 봐줘.”
“…….”
“응? 리비. 오늘은 우리의…… 공식적인 첫날밤이잖아.”
그의 요구에 리비는 더욱 눈을 꼭 감아버렸다. 그러자 축축한 것이 눈꺼풀에 와 닿았다. 마치 강아지처럼 보리스가 그녀의 눈을 핥아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뭐, 뭐해.”
리비는 당황한 듯 그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보리스는 그제서야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
안으로 단번에 짓쳐 들어온 것에 리비가 새된 교성을 내질렀다. 그렇게 단번에 꿰뚫린 채로 리비는 다리를 바르르 떨어댔다.
보리스는 얼마간 그 자세로 있었다. 마치 제 것의 크기를 적응시키려는 것처럼. 그러나 아무리 이걸 받아 내도 적응이 될 것 같진 않았다.
“하아…….”
리비가 떨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였다.
“하읏!”
안에 깊숙이 닿아 있던 보리스의 성기가 크게 물러났다가 안으로 다시 박혀 들었다.
“아, 아아!”
쿵쿵, 안쪽으로 치받는 힘과 속도가 점점 강해졌다.
“으응, 응! 보리스, 아!”
리비는 어느덧 그에게 매달려 가쁜 숨만 토해냈다. 이를 세워 그의 어깨를 물어봤지만 그는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제발 그만!”
빽 소리쳤지만 보리스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게다가.
“어어?”
순간 위로 들어올려진 몸에 리비가 크게 눈을 떴을 때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보리스와 마주 본 자세로 앉아 있었다. 물론 둘의 몸은 여전히 이어진 채였다.
“…….”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리비는 꿀꺽 침을 삼켰다. 야하게 결합한 접합부가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볼록 튀어나온 배는 무식하게 큰 그의 것이 제 안에 들어온 것을 더욱 실감 나게 해주었다. 마치 커다란 뱀을 삼킨 것 같았다.
그는 그 자세로 리비의 허리를 감싼 채 제 허리를 휘돌려 리비의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아앙, 음…… 아앗.”
연달아 신음을 흘려 대는 그녀의 입술 위로 보리스가 입술을 맞대었다. 쪽쪽 빨다가 부드럽게 맞비비는 동안 아래쪽은 거칠게 쳐올리기를 반복했다.
쾌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가 몸을 밀어올릴 때마다 튀어오르는 하얀 가슴이 그의 몸에 맞비벼졌고, 그건 더욱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응, 으응…….”
문득 움직이 멎더니 안쪽 깊숙이 익숙한 감각이 퍼져갔다.
보리스는 힘이 빠져 축 늘어진 채 자신의 어깨에 늘어져 있는 리비는 허리며 엉덩이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드디어 공식적인 초야가 끝난 거구나. 리비가 긴 한숨을 내쉬며 안심하고 있을 때였다.
“리비.”
“응.”
“졸려?”
“좀…….”
칭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응?”
어쩐지 목소리는 불길하게만 들렸다.
“미안해.”
“뭐가?”
“아직 안 끝났거든.”
다시 갈증에 찬 목소리가 리비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잠깐, 잠…….”
이 욕망 왕성한 그녀의 까마귀는 끝이라는 단어를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못 기다려.”
“꺅!”
적어도 그녀의 상식으로는, 마을에서 대충 귀동냥으로 들어온 바로는 그랬다.
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일을 하는 지루함을 지난 밤 이야기를 풀어 놓는 것으로 때울 때마다 리비는 태연한 얼굴로 그것들을 들어 주었다.
자기 볼일만 본 뒤 코를 골며 자버렸다는 누군가의 한탄이 유독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보리스는 결혼식을 위해 하루 종일 시달렸건만 오늘마저도 한 번으로는 끝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마음껏 원망해.”
그는 순식간에 그녀의 몸 위로 타고 올라 입술을 겹쳤다. 이미 잔뜩 달아올랐던 몸은 그를 다시 반기고 있었다.
“너, 너어…….”
리비가 눈을 감은 채 가쁜 숨을 색색 내뱉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귓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펄럭.
무언가 부드럽고 커다란 것이 허공에 펼쳐지는 느낌. 동시에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간지럽혔다.
‘바람……?’
리비는 이상한 기시감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역시나.
“저게 왜 또…….”
눈 앞에 펼쳐진 건 또다시 활짝 펼쳐진 날개였다.
새카만 날개는 평소에 보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무서워 보였다. 절대 작지 않은 방이 가득 차 보일 만큼 위력적인 모습에 리비는 선뜻 말을 잇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미안해.”
날개가 펄럭이자 또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왜, 어째서…….”
리비는 멍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와락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어둠 속에서 날개를 펼친 채 그녀를 고고히 내려다보는 시선은 명백히 인간의 것과는 달랐다.
나와 다른 존재. 리비는 새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과는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이었지, 그랬었지.
“내가 무서워?”
말하는 목소리에는 처량한 마음이 묻어났다.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사실은 무서웠고, 사실은 무섭지 않았다.
그런 양가의 감정이 동시에 들 수 있다는 사실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느 한쪽도 거짓은 아니었다.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마주한 검은 날개의 정체에 그만 숨이 막혀 왔다. 이건 본능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그에게서 달아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크고 검은 날개가 달렸더라도 보리스는 보리스니까.
“누가 보면.”
리비는 간신히 첫말을 꺼냈다. 그래, 일단 저 날개를 집어넣게 하자. 온통 그 생각만이 가득했다.
왜 갑자기 저게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집어넣고 나면 이 알 수 없는 공포도 사그라들겠지, 그녀는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무던히 노력했다.
“누가 보겠어.”
그는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그의 말처럼 첫날밤을 보내는 부부의 방을 엿볼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럼에도 두려웠다. 누가 이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어서 집어넣어.”
“그게 뜻대로 안 돼.”
“뭐?”
리비는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지만 곧바로 그의 손에 제지당했다. 그가 밀어 눕히는 대로 다시 얌전히 침대 위로 몸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넣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그는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조차도 혼란스러운 듯, 그는 자신의 머리칼을 잡아 쥐어뜯었다. 까맣고 결 좋은 머리카락이 그의 손 아래에서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왜, 그게 어째서? 우리 해봤잖아. 할 수 있잖아. 잘 알고 있잖아.”
리비는 쏜살같이 말을 쏟아 냈다. 그가 돋아난 날개를 도로 숨기지 못해 동굴에 숨어 지낼 때는 이미 지났다. 그는 완벽하게 자신의 날개를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순간에 날개가 튀어나온단 말인가.
“그…… 지난번에도 이랬다가…… 깨 보니까 들어가고 없었잖아.”
리비는 둘의 첫날밤을 떠올렸다. 그때, 분명히 위압적인 크기의 날개를 보다가 정신을 잃었었다. 다음 날 깨어보니 날개는 얌전히 사라진 뒤였다.
“그랬는데…… 모르겠어.”
그는 곤란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순간 리비는 혈관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미쳤어.’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벗은 탄탄한 몸에, 커다랗고 검은 날개가 솟아 있는 광경은 보는 그 자체로 죄악이었다. 대단히 불경스러운 장면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간 숱하게 그가 날개를 펼친 모습을 봐왔지만 침실에서, 그것도 완벽한 나체 상태일 때를 마주하니 더더욱 미칠 것 같았다. 지난번 관계 중에 보았을 때는 바로 정신을 잃는 바람에 이 같은 감정을 느낄 새도 없었다.
“네가 좀 도와줘야 해.”
“응?”
되묻고, 다시 답을 들을 틈도 없었다.
“흣!”
외마디 비명과 함께 몸이 꿰뚫렸다.
“하…… 아…… 아아…….”
거대한 몸에 깔린 채 버둥거렸다. 손을 뻗어 그를 할퀴어 댔지만 그는 물러나 주지 않았다. 등이며 어깨를 마구 쥐어뜯는데 손에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잡혔다. 그의 날개 깃털이었다. 한 움큼 뽑힌 깃털이 허공을 날아 주변에 이리저리 내려앉았다.
그래도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단단히 다리를 틀어쥐고, 빈틈없이 몸을 겹쳐 리비를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보리스, 흑…….”
기어이 눈물이 터졌다. 멈추지 않는 눈물이 흘러내려 시트를 적시자 기다렸다는 듯 그의 입술이 따라붙었다.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건 모두 자신의 것임을 확인시키듯 남김없이 핥아 먹었다. 더없이 다정한 입맞춤이었지만 그의 아래는 그렇지 못했다.
얕게, 그리고 깊게. 빠르고 느리게를 반복하며 점점 리비의 안쪽으로 파고들기를 반복했다. 리비는 고통과 쾌락의 어느 지점에서 울부짖었다.
닥치는 대로 그의 날개를 잡아 뜯었고, 한 움큼씩 뽑혀 나오는 깃털을 움켜쥔 채 가늘게 흐느꼈다. 그야말로 산 채로 와작 씹혀 나가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절정에 다다른 그가 리비를 끌어안은 채 모든 걸 쏟아붓더니 그대로 길게 몸을 늘어뜨렸다. 리비는 그 숨 막힐 듯한 무게를 받아 내면서도 기이한 안도감을 느꼈다.
“리비?”
조심스레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그의 등에 솟은 날개가 여전한 것을 보았다.
“왜 아직도…….”
그대로인데? 묻기도 전에 보리스가 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네가 모르면 어떡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내뿜는 숨의 단위마다 산산이 흩어지는 것 같았으니까.
“괜찮아?”
리비는 힘겹게 신음하며 그를 보았다. 아직까지도 날개는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오히려 위로 높게 솟아오른 채 한껏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제야 리비는 깨달았다. 저 날개가 그의 쾌락과 더불어 반응한다는 사실을.
“보리스, 날개, 날개는…….”
그가 몸을 덮쳐 오자 커다란 날개가 리비의 몸을 감쌌다. 새카만 어둠이 리비의 눈을 가렸다. 마치 누에고치 속에 들어온 것처럼 따뜻하고 안락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흐윽…….”
리비는 울고 또 울었다. 언제나 보리스가 잘 운다고 타박했는데 그 말들을 모조리 물려도 될 만큼 눈물을 흘려 댔다.
그의 품에 안겨서, 커다란 날개에 감싸인 채로, 리비는 그가 퍼부어 주는 감각에 길들여져 갈 뿐이었다.
그다음부터는 제대로 기억 속에 남은 게 없었다.
***
해는 이미 높이 솟아올랐지만 이제 막 신혼 첫날을 맞이한 부부의 침실에는 짙은 어둠만 드리워져 있었다.
“우…….”
어둠 속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울려 퍼졌다.
“하아…….”
다시 한번 울려 퍼진 소리는 좀 더 컸다. 소리의 주인은 푹신한 침구 속에 파묻힌 채 몇 번이나 숨을 내쉬었다.
리비는 몸을 반으로 접은 채 머리칼을 부여잡고서 침대에 웅크리고 있었다.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신혼 첫날의 아침은 산산이 흩어진 기억의 조각을 찾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기억들이 유리 파편처럼 산산조각 나서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방에 와서, 그리고 그다음에 창문을 열고, 보리스가 왔는데, 그랬는데.
‘그다음은 뭐지?’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뒤죽박죽이었다. 마치 색과 형태가 제각각인 천을 마구 뒤섞어 바느질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기억의 대부분이 살색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낯뜨거운 숨소리와 마찰음,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감각까지…….
무엇보다 몸에 뚜렷이 새겨진 통증 탓에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었다.
“으윽…….”
조금만 움직여도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치 모든 뼈를 뺐다가 다시 끼워 맞춘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리비는 딱 그런 상황이었다. 게다가 머리는 누군가 꽉 움켜쥐기라도 한 것 같았다. 도무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서 간신히 지난날의 조각을 맞춰 보려 끙끙대는데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비, 괜찮아?”
다정하고 낮은 목소리.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건 보리스였다. 자신에 비해 지나치게 멀쩡한 목소리였다.
“안 괜찮아.”
리비는 퉁퉁거리는 소리로 쏘아붙이고는 다시 베개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도무지 머리를 들어 올릴 수가 없어서였다.
“많이 아파?”
다정히 물으며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손길에 리비는 몸을 더욱 웅크렸다. 자기가 뭐라고 성질을 부려도 보리스는 언제나 이 모양이었다.
“아파…….”
리비는 저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고 말았다. 머리는 아프고 목도 마르고. 딱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옆에 누군가 없었더라면 꽤나 곤란했을 것 같았다.
“어디 봐.”
문득 심각해진 목소리가 들리더니 휙, 이불이 젖혀졌다. 리비는 작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꺄악.”
서둘러 다시 이불을 잡아끄는데 보리스의 행동이 더 빨랐다.
“어디가 아픈 거야?”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응? 리비.”
내장을 파먹는 까마귀의 눈이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모조리, 홀랑 다 파먹혀 순식간에 뼈만 남을 것 같은 그런 눈빛에 리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리비는 부끄러운 마음에 점점 더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그런데 시선을 내리면 내릴수록 눈을 둘 곳은 점점 더 없어졌다.
남성적인 선을 가진 목덜미, 탄탄하게 근육이 올라붙은 가슴, 복근으로 꽉 짜인 군살 없는 허리…….
“…….”
마침내 그 아래까지 시선이 닿자 불에라도 닿은 것처럼 그녀는 펄쩍 뛰어올랐다.
“그렇게 많이 아픈 거야?”
“모, 몰라.”
커튼으로 햇빛을 가려서 사방이 어두운데도 뚜렷하게 드러난 존재감이라니. 리비는 그만 기함하고 말았다.
“말을 해야 알지. 정 싫으면…….”
나가 준다는 의미일까. 희미하게 깜박이는 희망의 불빛에 리비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뒤에 이어진 그의 행동은 그녀의 모든 희망을 싹 불사르는 일이었다.
리비의 발목을 잡아끈 보리스가 다리를 한쪽씩 어깨에 걸치더니 그 사이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 하지 마. 안 돼…….”
지나치게 노골적인 시선이 은밀한 부위에 와닿자 정신이 어떻게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차라리 그러기를 기도했다.
“보지 말라고, 이 바보야…….”
“봐야 알지. 아…… 좀 부었어.”
걱정스러운 말투가 귓가를 울렸다. 그리고 그녀는 울고 싶어졌다.
“그만 보라니까.”
“여기도, 여기도…….”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아래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그녀는 이리저리 몸을 꼬아 댔다. 그러나 비틀어 대는 허리를 단단히 그러쥔 채 그는 세심한 관찰을 계속했다.
“보리스, 제발 좀.”
그녀가 울고 애원해도 그는 귓등으로도 들을 태세가 아니었다.
“미안해, 내가 어제 너무 해대서…….”
“하지 마,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리비는 얼굴을 가린 채 꽥꽥 소리를 질러 댔다.
“그만 좀 봐!”
리비는 손을 뻗어 쿠션을 집어 든 뒤 보리스의 얼굴에 내던졌다.
퍽.
보리스의 얼굴을 정통으로 가격한 쿠션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예상보다 큰 소리에 리비는 놀라서 얼른 그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 보는 거야?”
“너, 너 이…….”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겠지만 고스란히 맞은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부끄러워할 것 없어, 리비. 이제 우리는 부부인걸?”
“그래도! 그래도! 부부 사이에도 보이고 싶지 않은 게 있는 거라고!”
“그리고 리비, 이미 많이 봤잖아. 어제도 그렇고.”
태연하게 말하는 소리에 리비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어제, 그가 말하는 어제. 우리의 어제. 그 살색의 기억들이 새삼 머릿속을 장악해 왔다.
“그러니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말이 통하지 않는 건 여전했다. 의아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보리스를 보다가 리비는 다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차, 창피하단 말이야.”
소신껏 얼굴을 가린 손을 보리스가 부드럽게 떼어 냈다.
“나 봐.”
“싫어.”
“기억 안 나, 리비?”
“뭐가?”
“네가 어제 날 잡아먹었잖아.”
“…….”
보리스의 입에서 태연하게 어젯밤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리비의 몸이 발작이라도 하듯 튀어 올랐다. 그런데 한편으론 억울했다.
“잡아먹어……?”
그의 말은 어딘가 이상했다. 아주 커다란 오류가 있었다. 리비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가, 내가? 너를?”
“응.”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 내가 그럴 리 없어. 절대로 그럴 리가…… 모르는 일이야, 난.”
“……정말 기억 안 나?”
어쩐지 스산해진 목소리에도 리비는 열심히 현실을 부정하려 애썼다. 그저 몸으로 나누는 것과 이렇게 멀쩡한 정신으로 그 이야기를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왜 보리스는 굳이 입을 열어 그 일을 확인하려고 드는 것일까. 리비는 제발 그가 이제 좀 닥쳐 주었으면 했다.
“내가 하지 말자고 했는데, 네가 이렇게 내 허리를 다리로 감고서는…….”
그는 친절하게도 어깨에 걸쳤던 다리를 풀어 내어 제 허리에 척 감아 놓았다. 그러더니 어젯밤 있었던 일을 그대로 반복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허리를 바짝 붙여 왔다.
“아니야아!”
“했어, 분명히.”
그는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녀가 아무리 부정해도 봐줄 기세가 아니었다.
리비가 중요한 사실을 부정하려 할 때마다 그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게 떠올랐다. 이번에도 그는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리비는 지고 말았다.
“맞아.”
“…….”
“했……어, 내가.”
왕이 신방까지 차려 줬건만, 이리 빼고 저리 빼는 그가 얄미워서, 그리고 정체 모를 열기에 지배당한 몸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그를 뜯어먹었다.
“더, 조금 더…… 보리스.”
“그러면 다칠지도 몰라, 리비.”
“으응, 싫어. 더 해줘.”
“리비…….”
하나씩 돌아오는 기억에 그녀는 정말로 죽고 싶었다. 보리스는 이성을 잃고 폭주하면서도 순간순간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간신히 자제하려는 그의 행동을 끊어 낸 건 다름 아닌 리비였다. 보채고, 조르고, 귀여운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대체 몇 번이었는지는 세려다가 관두었다.
“얼마나 예뻤는지 알아? 날 조르는 네 모습, 목소리…… 나는 미치는 줄 알았어.”
“…….”
리비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나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더없이 관능적이었다. 그가 불러일으킨 지난밤의 기억은 단순히 머릿속으로 떠다니는 조각들이 아니었다.
그가 새겨 둔 몸의 흔적들마다 불이 붙어 자신을 태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제 그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다시 안기고 싶다.
비록 온몸이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지만. 어제의 그 달콤한 아픔과 쾌락을 다시 한번 이 몸에 담고 싶었다.
그 생각은 그저 단순히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보리스 역시 자신에게 닿은 일부분이 단단해져 가고 있었으니까.
“……보리스.”
“응?”
“안아 줘.”
“응…… 뭐?”
그는 몽롱한 시선으로 답하다 화들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어젯밤처럼, 응?”
“그건 안 돼.”
예상외로 강한 거절에 리비는 충격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과 마주한 보리스가 금세 표정을 풀었다.
“아직, 회복되지 않았잖아. 너, 그러다가 더 아프게 될 수도…….”
“이미 아픈걸.”
리비는 벌떡 몸을 일으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파, 그러니까 아프지 않게 해줘, 보리스.”
그의 얼굴에 커다란 파장이 일었다. 상체와 하체 모두 바짝 붙은 자세에 그는 참기 어려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리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몸 쪽으로 잔뜩 체중을 실었다.
잠시 중심을 잃은 몸이 순식간에 침대로 무너져 내렸고, 행여 그녀가 다칠까 싶어 보리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틈을 타 리비는 그의 몸을 타고 올랐다. 오늘은 이상하게 기운이 넘쳐흘렀다. 어젯밤에 마신 술의 힘인가. 뭐가 됐든 좋았다.
자기 위로 올라앉은 리비를 자포자기한 눈길로 보던 보리스가 천천히 그녀의 허리를 쓸어내렸다. 그 관능적인 손길에 저절로 몸이 떨렸다.
“읏…….”
작게 흘러나온 신음에 그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안 피곤해?”
“하나도.”
리비는 잔뜩 독이 올라 말했다. 어쩐지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지만 정신은 지나치리만치 맑았다. 더, 좀 더, 한 번 더, 아니 여러 번…….
그를 갖고 싶었다.
마음대로 하라는 듯, 그는 두 손을 털썩 침대에 내려놓았다.
“넌 내 거야, 보리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 그동안 충분히 그가 자신을 맛봤으니, 이제는 그녀를 잡아먹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니 근육질의 까마귀가 식탁에 오를 시간이었다.
“으음…….”
리비는 자신이 깔고 앉은 단단한 몸 위로 상체를 숙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듯, 양손을 모두 위로 올린 채 꾹 입술을 다문 보리스를 보자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 샘솟아 올랐다.
이렇게나 강한 남자가 자신의 손길에 움찔거리며 반응한다. 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는 듯 순종적인 태도로 지금 누워 있는 것이다.
리비의 안에서 뒤틀린 정복욕이 물씬물씬 솟아올랐다. 지금도 그랬지만 이 남자를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리비.”
“응?”
열심히 그의 몸을 탐색하고 있는데 문득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보랏빛 눈에 즐거운 듯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좋아?”
“뭐가?”
그녀가 되묻자 보리스는 수줍은 듯 웃으며 말했다.
“내 몸.”
“…….”
리비는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해 끙끙거렸다. 왜 갑자기 저런 걸 물어본담. 민망하게.
“싫……지는 않아.”
리비는 몇 번인가 헛기침을 한 끝에 말했다.
“다른 남자의 몸은, 본 적 없어?”
보리스는 다시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가 확인받고 싶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은 느낌에 리비는 그만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있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답하는 리비를 본 보리스의 얼굴에 순간 핏기가 싹 가셨다.
“아주 많아.”
“아주…… 많이?”
보리스의 아름다운 눈이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는 건 꽤 즐거운 광경이었다. 그래서 조금 더 그 순간을 즐기기로 리비는 마음먹었다.
“물론. 한두 번이 아니야.”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다. 분명히 남자들이 훌훌 벗는 모습을 본 건 사실이니까.
마을에서 남자들의 벗은 몸을 볼 기회가 종종 있었다. 그들은 여름이 오면 마을의 강가에서 주저 않고 탈의한 채 물에 풍덩 빠지곤 했다.
주변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벌거벗은 채 열심히 목욕을 즐겼다. 졸지에 빨래를 하러 오거나 물을 길러 온 마을 여자들은 눈을 가린 채 달아나기 바빴다. 그리고 그중에는 리비도 섞여 있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목격하는 일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눈이 썩을 뻔했지.”
“눈이?”
보리스가 해괴한 비유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마을 남자들 중에는 노인부터 시작하여 결혼한 아저씨, 꼬마들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연령대의 남자들이 분포하고 있었다. 원치 않게 그들의 나체를 목격하게 되는 건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름다워.”
리비는 자신의 손으로 쓰다듬고 있는 몸을 황홀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조심스레 입술을 내려 그 위에 자신의 흔적을 찍어 가기 시작했다.
“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보리스의 신음이 더욱 짙어졌다.
“가만히 있어.”
리비는 슬금슬금 허리로 올라오는 손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순식간에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 같은 얼굴이 된 보리스가 괴로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휙.
자세는 다시 뒤집히고야 말았다.
“미안.”
“…….”
리비는 눈을 끔뻑거리며 자신의 위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 위압적이어서 혀가 그대로 천장에 붙어 버린 것만 같았다.
“벌은 나중에 받을게.”
갈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리비가 단단히 잘못 생각한 게 있었다. 그녀가 포식하려는 까마귀는 그냥 까마귀가 아니었다. 괴물 까마귀였다. 그리고 그를 잘못 건드린 대가를 그녀는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그의 등 뒤로 다시 커다란 날개가 솟아났다.
그가 날개로 만들어낸 안락한 공간 속에서 두 사람은 한참이나 엎치락뒤치락했다. 맨몸을 맞대고 문지르며, 입술과 혀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 그의 등 뒤에 시커먼 날개가 솟아 있든 말든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늑하고 따스하기만 했다.
***
결국 에드라크 공작 부부가 왕을 알현한 것은 오후가 한참 지나서였다. 정해진 시간을 한참 지났음에도 왕은 노하기는커녕 다 알 만하다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 시선에 리비는 어쩐지 부끄러워져 고개를 푹 숙였다. 보리스는 자신과 달리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알현이 늦었습니다.”
어쩐지 밀려오는 민망함에 얼굴을 들지 못하는 리비와 달리 보리스는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왕에게 인사했다.
“늦을 만도 하지.”
왕은 다 안다는 듯 껄껄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나는 다 이해하네, 에드라크 공.”
왕은 어서 앉으라는 듯 리비와 보리스에게 의자를 권했다.
두 사람은 왕의 알현실이 아닌, 왕의 내실에 들어와 있었다. 왕이 특별히 허락한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왕은 공식 알현 자리에서 입는 무거운 예장용 망토나 장식들을 벗어 놓은 채 이제 막 부부가 된 두 사람을 맞았다. 그 자연스러운 모습을 리비는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서.”
왕은 다시 한번 의자를 권했다. 내실에는 최소한의 시중을 들 수 있는 인원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리비는 자신들의 몫으로 놓인 의자에 조심스레 다가갔다.
“리비, 이쪽으로.”
보리스는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리비를 부축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아서 리비는 다시 한번 얼굴이 달아올랐다.
보리스는 리비가 의자에 앉는 것을 보고 나서야 자신도 앉았다. 그의 시선이 집요할 정도로 리비의 행동을 훑고 있었다.
조금만 비틀거려도 바로 그녀를 안아 올려 쉬어야 한다며 침대로 데려갈 것만 같았다.
분명히 침대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건만 리비는 훨씬 더 지쳐 있었다. 이게 바로 기사의 체력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은 순간이었다.
“난 괜찮아.”
리비는 얼굴을 살짝 돌려 옆에 앉은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가족이 아닌가. 편하게 하게.”
왕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는 리비에게도 따스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 눈빛이 불편한 나머지 리비는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간신히 애를 써야만 했다.
가족.
왕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올 때마다 그녀는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그 말만큼은 아무리 귀에 쑤셔박는다 해도 곧이곧대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런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녀 역시 가족에 대한 정의를 막연히 피를 나눈 사람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그런데 왕은 왕실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얼굴 한 번 못 본 조카딸을 정략결혼에 써먹으려 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을 그대로 읊는 듯한 음성으로 보리스는 감사를 표했다. 그것을 리비는 신기한 시선으로 훔쳐보았다.
보리스는 왕에게 예의를 갖추기는 했으나 그 앞에서 전혀 긴장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처음 왕과 대면했을 적에도, 그 후 원탁에 앉아 신부 협상을 벌일 때에도 그랬다.
‘왕이 어렵지도 않은가?’
리비는 새삼 깨달은 사실에 의아하기만 했다. 왕이 자신과는 피가 섞인 관계임에도 가족보다는 왕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결코 편할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이인 데다가 혈육인 줄도 몰랐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런데 보리스는 처음부터 왕과 군신 관계로 엮인 사이였다.
그럼에도 보리스는 왕을 어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저 의례적으로 갖춰야 할 예를 표할 뿐, 과하게 아첨하거나 굽신거리는 일은 없었다. 당연히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용병으로 활약하던 그가 만든 ‘칼리니 기사단’을 정식 기사단으로 승급시켜 주고 전쟁에서 공을 세운 그에게 영지와 작위까지 하사했다.
왕은 누가 보더라도 보리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신부 협상 때도 대놓고 편을 들진 않았어도 보리스에게 유리한 판이 되도록 내버려 둔 건 그였다.
물론 그건 결코 보리스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내가 둘을 맺어 준 셈이 되다니, 아주 기쁘기 그지없어.”
맺어 줬다, 라는 표현이 적합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리비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왕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지 않은가, 내가 신임하고 아껴 마지않는 기사단장과 조카의 결합이라니. 어쩐지 에드라크 공에게 내가 계속 마음이 기우는 이유가 있었어. 언젠가는 가족이 될 거라고 짐작해 왔던 것이겠지.”
말이 너무 길어지는 것에 리비는 살짝 불안함을 느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이참에…… 아예 이곳에서 사는 건 어떤가?”
“네?”
리비는 순간 멍해져서 되물었다.
“이곳에…… 살다니요?”
뭔가 잘못 들은 것이겠지. 리비는 급히 눈을 깜박거렸다.
“말 그대로. 나와 함께 수도에서, 이 왕궁에서 지내는 게 어떠냐는 말이지.”
아주 큰 시혜를 베푸는 듯, 왕의 얼굴에는 인자한 미소가 넘쳐났다. 왕궁에 함께 살자니.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왕의 제안에 리비는 순간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드넓은 내실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왕의 귀에 붙일 듯 크게 끌어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마 자신이 권하면 바로 ‘네.’라는 답이 나올 줄 알았던 게 틀림없다.
“……그게.”
리비는 옆에 앉은 보리스를 돌아보았다. 옆얼굴만 보아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보리스가 슥 리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잠깐,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가 떨어진 순간이었다.
‘보리스는 무슨 생각이지?’
차마 왕이 있는 앞에서 보리스의 의중을 물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지금 이 순간에 결정을 내려야 할 문제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그렇지. 갑작스럽기야 하겠지. 충분히 생각해 볼 시간을 줄 것이야.”
답이 없는 리비를 보며 왕은 좀 더 설득해야겠다 마음을 먹었는지 다른 미끼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그 시골구석보다 지내기에 훨씬, 아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을 것이다. 왕국의 중심이자 온 대륙의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곳이니까. 원하는 건 무엇이든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지.”
왕이 하는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또한 그가 말한 대로 수도에서, 그것도 왕궁에 사는 일은 커다란 특혜임이 확실했다.
어떻게든 왕의 곁에 붙어서 알랑거리려는 인간들에게는 그랬다. 왕 곁에 살면서 왕이 주는 모든 시혜를 받는 것.
그러나 리비에게는 왕의 제안이 그다지 달콤하게 들리지 않았다.
보리스를 수도에 묶어 두려는 이유. 심지어 왕궁을 내주고 함께 살도록 하려는 저의가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달콤한 설탕 옷을 입힌 독약 같았다.
세력이 강한 영주를 마신의 지배 아래 두고 싶어하는 건 모든 왕들의 강렬한 열망이다.
현재 세셔 왕국에서 가장 큰 힘을 지닌 건 레제트 공작이었지만 그를 당연히 자신의 통제 아래 둘 수 없을뿐더러 행여 수도에 머물게 했다가 전쟁이라도 일으키면 당해 낼 도리가 없다.
반면에 보리스는. 그가 직접 공작위를 주고 조카딸과 혼인시킨 에드라크 공작은.
아주 손쉽게 주무를 수 있는 패였다. 위급 시에 자신이 휘두를 검으로써 두려는 것이겠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리비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일시적인 평화조약을 맺은 레제트 공작보다 보리스의 손을 잡는 게 자신에게 더 큰 이득을 준다는 계산을 전부 끝낸 것 같았다.
언뜻 듣기에 왕궁으로 와서 살라는 말은 매우 그럴싸하게 들렸다. 왕의 총애를 증명하고, 수도의 요직을 차지할 수 있으니. 자연스레 궁정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하고 찬양할 것이다.
그러나 그 속내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거절해야 해.’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하지. 대놓고 거절하면 왕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을까.
대체 보리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왕궁에 머무는 걸 선호할 수도 있다.
왕의 말마따나 에드라크 영지는 시골이 맞으니까.
수도와의 거리도 멀고 길도 험했다. 그래서 물자를 보급하거나 다른 지역과의 교역도 쉽지 않았다.
에드라크 영지는 그저 노는 땅, 그냥 줘버려도 딱히 손해 볼 것 없는, 그러면서도 영지라는 명목으로 보리스를 잡아채기에 아주 적합한 땅이었다. 그리고 그런 땅을 굳이 그가 원한 이유는.
‘나 때문이잖아.’
까딱하면 왕좌의 주인이 바뀔 뻔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면서도 그런 후진 영지를 하사받은 건 다 그가 원했기 때문이었고, 그가 그런 이유는 자신 때문이었다.
‘안 그랬으면 더 좋은 곳을 받았을 거야.’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고작 버려둔 땅을 영지로 가져가다니. 그로서는 꽤 큰 손해였음이 분명하다.
짧은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때였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와 제 아내는 영지로 돌아가겠습니다.”
“…….”
왕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불에 탄 종이처럼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리비는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왕궁에서 지내면 더 편할 텐데? 영지는 따로 관리인을 둬도 될 테고…….”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곳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발달이 느린 곳이지만 나름의 장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지를 발전시키려면 영주가 상주하면서 모든 것을 진행시켜야 합니다. 비워 둘 수 없는 자리입니다.”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언변에 리비는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언제나 왕의 앞에서는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 말하는 보리스의 재능이 신기하기만 했다.
“아내와 함께 새롭게 영지를 단장해 보겠습니다.”
“…….”
왕은 순식간에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해 조금은 당황한 눈치였지만, 이내 다시 씨익 웃어 보였다.
“에드라크 공이 그런 깊은 생각을 하는 줄은 내 몰랐군. 그럼 어떠하냐, 리비, 네 생각은…….”
“당연히 남편의 생각이 곧 제 생각입니다. 남편의 뜻을 따라야지요.”
그 말에 보리스가 리비를 돌아보았다. 그 애정 어린 시선에 리비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는 남편과 함께 에드라크 영지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
알현 시간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리비는 보리스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저기, 보리스.”
“응?”
“왜 거절한 거야? 수도에 머무는 건 좋은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네가 원하지 않으니까.”
“…….”
“아니야?”
보리스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냐는 듯, 리비를 내려다보았다.
“네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 원하지 않는다고.”
“정말? 그걸 알았어?”
리비가 놀라 묻는 소리에 보리스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숙여 그녀와 이마를 콩, 찍었다.
“당연히 알지.”
“…….”
“실은 나야말로 걱정했어.”
“뭘?”
리비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왕궁에 머물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내가 왜?”
리비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에 당황하여 물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나 싶었다.
“여기는…… 모든 것이 에드라크보다 발전된 곳이니까. 원하는 뭐든 구할 수 있고, 화려한 궁정생활을 즐길 수도 있지. 그리고 너는 왕녀의 딸이야. 현 왕의 조카이기도 하고…….”
보리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리비는 급박하게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만, 아니야, 보리스.”
“…….”
보리스는 입을 가린 손을 떼어 내지 않은 채 뚫어져라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여기가 싫어.”
싫어, 라는 말소리는 극도로 작아졌다. 주변에 누가 있나 살핀 리비가 재빨리 그의 손을 잡고 더욱 인적이 드문 곳으로 보리스를 잡아끌었다.
“싫어?”
보리스의 물음에 리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어떻게 여기가 좋을 수 있어? 내가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여기는 넓고, 화려하고, 사람들도 많고…….”
“난 사람 많은 거 싫어. 여기저기 신경 써야 하는 궁정 예법도 싫고…….”
리비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귀를 경계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여긴 왕의 공간이잖아. 아무리 편하고 화려해도 언제나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고.”
“…….”
“화려한 새장이나 다를 게 뭐가 있어. 그리고…….”
“그리고?”
“왕이 너를 쥐고 흔들 게 뻔하잖아. 수도에 머물러도 된다는 건, 왕궁에서 아예 같이 살자는 건 너를 감시하는 동시에 언제든 편리할 대로 써먹겠다는 의미야. 나는 싫어.”
목소리를 낮춘 채 다다다 말한 리비를 보는 그의 눈빛이 차츰 웃음으로 물들어 갔다.
“왜 또 그런 눈빛이야?”
보리스의 눈빛은 이제 익숙하다 못해 질리도록 봐온, ‘네가 사랑스러워 미쳐 버리겠다.’라는 눈빛이었다. 보통 이런 눈빛이 나온 후에 나올 행동까지도 모두 예상이 될 정도였다.
“읍!”
벽으로 밀쳐진 몸을 단단한 몸이 감싸 안더니 순식간에 입을 가르고 두툼한 혀가 침입해 왔다.
리비는 미처 피할 틈도 없이 그가 주는 달콤한 숨을 받아 내야만 했다. 처음만 당황했다 뿐이지 아예 그의 목에 팔을 감은 채 더욱 열렬하게 반응했다.
몸에는 아직 신혼 첫날밤의 꺼뜨리지 못한 불이 남아 있었다.
겨우 떨어진 입술 새로 거친 숨이 오갔다. 뜨겁게 내려보는 시선에 리비의 얼굴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녀의 얼굴은 대장장이가 갓 만들어 낸 말발굽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 그만 봐.”
리비의 만류에 그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더 이상 이성을 잃어서는 곤란한데 그의 눈빛은 맛있는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 다음은…….”
“응?”
다음? 다음이 어디 있지? 몽롱한 정신 속에서 리비가 헐떡거리며 그의 말을 들었다.
“무도회가 시작하려면 아직 멀었어.”
“응……?”
그의 말을 되새김질할 틈도 없이 몸이 그대로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성큼성큼 자신들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보리스!”
“응?”
왜 부르냐는 듯, 천진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시선에 리비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의 목을 꼭 감싸 안으며 중얼거렸다.
“……빨리 가.”
그 말과 동시에 보리스는 신발에 날개라도 돋친 듯 걸음을 빨리했다.
***
에드라크 공작 부부의 결혼 축하 무도회는 일주일이나 이어졌다. 귀환을 요청하는 보리스를 솜씨 좋게 며칠 더 눌러앉힌 안드로스 왕 때문이었다.
아예 살라고 하는 것도 아니니 며칠 더 머무르는 것까지는 거절하지 말라며 건넨 청을 차마 거절할 수는 없어서, 보리스와 리비는 며칠간 더 머무르기로 했다.
그리고 그 후부터 내내 왕이 주최하는 공식적인 행사에 빠짐없이 불려 다니며 얼굴을 내비쳐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조카인 리비와 전쟁영웅의 결혼을 사방에 알리고 싶어했다. 부지런히 둘을 자랑하고 다니는 모양새에 귀족들은 왕의 총애를 듬뿍 받는 두 사람에게 더욱 큰 호감을 갖게 되었다.
“에드라크 공작 부인, 폐하께서 왕궁에 머무르시도록 권하셨다던데…….”
“영지를 다스리는 일도 중요하니까요.”
리비는 며칠간 앵무새처럼 외워 온 말을 반복했다.
에드라크 부부에 대한 사람들의, 정확히는 궁정 귀족들의 관심은 아주 지극했다.
정신없이 술이 부어지고 음식이 차려지고 춤을 추기를 반복했다. 저녁나절부터 시작된 연회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끝났고, 리비와 보리스는 나중에 가서는 사람들이 건네는 축하 인사를 전부 외울 정도가 되었다.
처음엔 그저 신기하기만 했던 왕궁의 무도회였다. 가끔 마을에 들르는 음유 시인들이 노래하던 화려한 궁정의 생활은 마을 아이들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지금 그것을 눈앞에 보고 있는 와중에도 리비는 영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지루하기까지 했다. 그런 자신의 반응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체 언제 에드라크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그 길이 까마득하기만 했다. 이미 왕궁에서 함께 살자는 요청을 거절한 상태이기에 귀환까지 재촉하기가 어려웠다.
‘설마 이대로 눌러앉히려는 걸까?’
리비의 머릿속에는 그런 의구심이 내내 떠나질 않았다. 오늘의 연회도 그러했다.
왕궁의 요리장이 야심차게 내놓은 칠면조 통구이 요리와 고기파이 등, 기름진 음식을 보기만 해도 이제 속이 느끼하게 울렁거리는 반응이 돌아왔다. 은잔 가득 부어지는 술과 사람들의 웃음소리, 축하 인사…….
연회장에 들어서면 부부는 함께 다니기보다 주로 찢어지게 마련이었다.
리비는 귀부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보리스는 작위를 가진 귀족들 사이로. 부부임에도 연회장 내에서 말을 나눌 기회가 드물다 못해 힘들 지경이었다.
그게 다 보리스를 데리고 다니며 여기저기 소개하기 바쁜 왕 때문이었다.
“좋으시겠어요, 저런 대단한 분을 남편으로 두셔서.”
은근하게 속삭여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허머스 후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보리스가 가는 곳마다 시선을 두기를 멈추지 않았다.
“후작께서도 정말 굉장한 분이시죠. 허머스 후작가의 기사단이 전쟁에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다고 들었어요.”
리비는 재빨리 허머스 후작을 찾아 부인의 시선을 돌리려 애썼다.
“……그렇긴 해요.”
툭 튀어나온 배와 반쯤 벗겨진 머리를 보며 후작 부인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매우 훌륭하긴 해요.”
귀부인의 웃는 얼굴에 다시금 쓴웃음이 어렸다.
왕의 자랑거리가 되어 모두의 축하를 받고 방긋방긋 웃는 것도 슬슬 질려 갈 무렵이었다.
리비는 연거푸 마신 술 탓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손등을 갖다대자 뜨거운 열이 고스란히 피부 위로 느껴졌다. 어딘가로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다.
슬며시 건너다본 곳에는 보리스가 여전히 귀족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게 보였다.
그중에는 젊은 나이대의 기사들도 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선망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전쟁에서 숱한 공훈을 세워 왔으니까.
대개 귀족들이 소유한 기사단에서 주인인 귀족이 나서서 직접 전투에 나서는 일은 드물었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대부분은 허머스 후작처럼 자신의 가문 휘장을 내건 기사단을 전쟁터로 내보내어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에 집중했다.
물론 가문 소속의 기사단인 만큼 기사들을 위한 후원과 물자 조달을 아끼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공을 세우기보다는 자신의 가신인 기사단장이, 혹은 그에 소속된 누군가가 공훈을 세워 기사단의 이름을 널리 널리 알리기를 원했다.
하지만 칼리니 기사단은 출발부터가 달랐다. 왕국에서, 심지어는 대륙 전체에서 몰려든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어 초기에는 사실상 ‘기사단’이라고 부를 근거도 없었다.
전쟁에 자주 나가고 그때마다 크나큰 공훈을 세우다 보니 자연스레 기사라는 호칭이 붙었고, 결국 레제트 공작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정식 기사단으로 인정받았다. 보리스의 영광은 곧 기사단의 영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것이 피와 땀으로 일구어 낸 결과였다. 누군가의 후원 하나 없이 이 자리까지 온 건 전부 보리스의 힘이었다.
“대단한 남편이긴 하죠.”
리비가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그걸 이제야 알았냐는 듯 귀부인들이 부러움 섞인 시선을 보내왔다.
“얼굴은 미청년인데, 몸을 보면 그렇지가 않네요. 공작 부인은 정말 좋으시겠어요.”
“검술도 따를 자가 없죠.”
“아마 밤에도 그렇겠지요?”
“네?”
“밤에 하는 검술이요.”
누군가 은근하게 속삭인 말에 귀부인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 며칠간 귀부인들의 음담패설은 이미 질릴 대로 들어온 리비였지만 들을 때마다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침실에서 일어나는 남녀 간의 일을 이제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도 얼굴 두껍게 농담을 치기에는 아직 병아리나 마찬가지였다.
“공작 부인의 얼굴이 빨개졌잖아요, 그만 좀 해요.”
누군가 웃으며 만류했지만 리비의 얼굴은 더더욱 빨개지고 말았다.
“농담들이 지나치군요. 이제 막 신혼을 맞이한 부인인데.”
“곧 후계자 소식이 들리겠군요. 에드라크 공작이나 공작 부인, 둘 중 누구를 닮아도 예쁠 거예요.”
그 말에 리비는 생경한 시선으로 귀부인들을 보았다.
“후계자……요?”
리비는 무심코 배 위에 손을 얹어 보았다.
후계자라니. 그건 곧 자신과 보리스의 아이를 뜻하는 말이다.
결혼을 했으니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미 밤의 의무를 두 사람은 충실히 이행하고 있으니까. 정말 곧 아이가 생길지도 모른다.
왜 그 생각을 여태 못 하고 있었을까.
“그럼요, 후계자요. 공녀여도 좋을 것 같고요. 왕께서도 좋아하실걸요? 엘가 왕녀님의 후손이 늘어나는 거니까.”
“왕실에 딸들이 늘어나는 건 축복이지요.”
“그 요상한 저주만 아니었다면 엘가 왕녀님도 지금쯤…….”
허머스 후작 부인의 말이 이어지다 툭 끊겼다. 옆에 있던 귀부인이 옆구리를 찔렀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회피하고자 하는 그 이야기. 리비가 내내 궁금해하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저주라는 것 말인데요. 엘가 왕녀님…… 어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신 거죠?”
얼굴 한번 못 봤기에 어머니라는 말이 쉬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자신에게 피와 살을 나눠 준 어머니가 맞았다.
“어머나, 술을 너무 마셨나 봐요.”
“저도요. 좀 어지럽네요.”
“그러고 보니 저도…… 이만 실례할게요. 좀 쉬어야겠어요.”
귀부인들은 친근하게 다가와 미소 짓던 것과 반대로 순식간에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 미처 붙잡을 틈도 없었다.
“…….”
리비는 그들이 사라진 곳을 허망하게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엘가 왕녀에 대한 이야기는 왕궁의 그 어느 누구도 쉽사리 이야기하지 않았기에 제대로 들을 기회가 없었다.
순식간에 혼자가 된 김에 리비는 자신도 산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보리스 쪽을 돌아보자 이제 그를 둘러싼 인원은 두 배가 되어서, 불쑥 솟아오른 그의 검은 머리통만 겨우 보일 지경이었다. 리비는 뒷걸음쳐서 조심스레 연회장 문 쪽으로 걸어갔다.
***
리비는 혼자 있을 만한 곳을 찾아 걷고 또 걸었다.
“후하.”
연회 중에 빠져나와 바깥 공기를 마시는 게 얼마 만의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연회장 내부의 달뜬 공기 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청량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 오는 게 느껴졌다.
잠시 머리를 식힌 뒤 들어가면 조금 나아지겠지, 또다시 연회가 끝날 때까지 붙잡혀 있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신이 이럴 정도인데 보리스는 오죽할까. 내심 혼자 놔두고 빠져나온 게 미안하게 느껴졌다.
“……여기가 어디지.”
왕궁의 내부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늘 오가던 길만 다녔기에 이런 사람이 없는 곳에 나와 있는 게 불쑥 무섭게만 느껴졌다.
아무리 일정 시간을 두고 순찰을 도는 경비병들이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어둠이 내린 왕궁은 그만큼 더 위압적인 기운을 품고 있었다.
“돌아갈까.”
뒤를 돌자 길은 세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어딘데.”
세 갈래 길 중 대체 어디서부터 걸어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시나요?”
당황한 리비의 귓가에 부드럽고 포근한,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리비는 기묘한 느낌에 휩싸여 멈춰 섰다.
‘누가 있었나?’
목소리는 꽤 가까이서 들려왔다. 마치 바로 옆에 서서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이렇게 가까이?’
조금 전까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은 이 소리는 뭘까. 주변에서는 어떤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쩐지 머리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리비는 몇 번이나 침을 삼킨 뒤에야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뒤를 돌자마자 리비는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여자를 발견하고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가까이 있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 아주 가까이,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초록색 눈을 반짝이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아.”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친 리비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놀라서였고, 다른 이유는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여자의 아름다움이 어찌나 압도적이었던지 리비는 고백을 앞둔 사춘기 소년처럼 당황하고 말았다.
‘사람인가?’
저절로 그런 의문이 떠오를 만큼, 여자는 아름다웠다.
여자의 부드러운 연녹색 눈이 빽빽한 속눈썹 아래서 반짝이며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호기심과 친절을 모두 담은 눈빛이었다.
달빛을 녹여 낸 듯 아름다운 상앗빛 머리채는 엉덩이께에서 부드럽게 흐트러져 찰랑거렸고, 하얗고 하늘거리는 소재의 드레스는 때맞춰 불어온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게다가 여자의 주변에는 은은한 빛이 감돌아서, 마치 달빛이 만들어 낸 환영 같기도 했다.
그래, 환영. 방금 들은 것도 모두 환청일지 모른다.
술에 취해 지금 헛것을 보는 게 아닌가 싶어서 리비는 손을 휘휘 저어 보았다.
턱.
손끝에 걸린 건 부드럽고 말캉한 여자의 살이었다.
“어…….”
“어머나.”
졸지에 가슴이 잡힌 여자는 당황한 기색 대신 재미있다는 듯 웃어 보였다. 여자는 환영이 아니었다.
벌어진 입술 새로 흘러나온 목소리가 그녀가 엄연히 사람임을 알려 주었다. 손에 잡히는 이 생생한 감촉마저도.
“죄송해요, 죄송해요!”
리비는 소스라치며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사과를 했다.
“괜찮아요. 내가 놀라게 했나 봐요. 미안해요.”
오히려 사과를 해 오는 여자를 보며 리비는 더욱 수치스러웠다. 정말이지 땅이라도 파고들어 가고 싶어졌다.
“차림새를 보니 신분 높은 귀부인이신 것 같은데, 이런 데서 혼자서 돌아다니면 위험해요.”
정말 위험한 건 자기가 아니라 이 여자인 것 같은데. 혼자 다니면 위험한 건 마찬가지 아닌가? 리비가 속으로 생각했을 때였다.
“난 혼자 다녀도 괜찮아요. 익숙한 곳이라.”
여자가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보다…… 길을 헤매는 것 같던데.”
아까는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면 형체를 마주한 지금, 여자의 목소리는 어쩐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리비는 어딘지 몽환적인 기운을 풍기는 여자를 보며 급히 눈을 깜박거렸다.
“네, 술기운을 깨려고 잠시 산책 중이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헷갈려서요.”
“왕궁에는 워낙 건물도 많고, 비슷비슷한 외형을 가진 건물들도 많아서 자칫하면 길을 잃기에 딱 좋죠. 워낙 넓으니까요. 미궁을 헤매듯이 헤매게 되는 거예요.”
“네, 길을 잃게 될 줄 몰랐어요. 혹시 대연회장으로 가는 길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여자는 사르르 웃으며 리비에게 손짓했다.
“물론, 날 따라와요.”
그러더니 여자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리비는 뭔가에 홀린 듯 여자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두어 걸음 떨어진 거리는 아무리 빨리 걸어도 좀처럼 따라잡기 어려웠다. 결국 리비는 포기한 채 발걸음을 늦췄다. 신기하게도, 여전히 거리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여자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매우 익숙한 길인 듯싶었다.
“왕궁의 지리를 잘 알고 계시네요.”
“오래 살았거든요.”
여자는 단출하게 답하며 거침없이 길을 걸어갔다. 마치 물이 흐르듯 유연한 움직임이었다.
사뿐사뿐 내딛는 발걸음은 더없이 우아했고, 전신에 흐르는 기품이 범상치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비의 마음속에 한 가지 의구심이 솟구쳐 올랐다.
이 여자는 누구일까.
이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절대 연회장에서 못 봤을 리 없다. 옷차림이나, 부드러운 손과 햇빛이 닿지 않은 듯 흰 눈 같은 피부는 그녀가 고귀한 신분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게다가 왕궁에서 오래 살았다고 했는데.
‘살았다고……?’
리비는 여자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왕궁에서 오래 살았다는 건 그녀가 그럴 만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대개 어린 시절부터 왕궁에서 자라날 특혜를 입는 건 왕의 자손들, 왕의 형제들 같은 왕족들뿐이었다. 혹은 특별히 왕의 허락을 받은 귀족이라거나.
자신에게 길을 안내하는 여자가 그중 하나에 해당한다는 의미다.
‘왕족인 걸까?’
그러나 왕실의 여자들은 모두 미쳤거나, 요절했다고 했다.
여자의 나이 또한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자신보다 서너 살 많을까. 특유의 분위기 탓에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기이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리비는 여자를 따라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자의 주변에서는 희미한 빛이 맴돌고 있었다.
처음에는 달빛을 과하게 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달빛이 구름에 가려지고 빛이 들지 않는 나무 그늘 아래를 지날 때조차도 여자의 몸에서는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사람의 몸에서 저런 빛이 날 수 있나. 정말 요정이라든가, 요정이라든가, 요정인 게 아닐까. 여자의 정체를 내내 의심하면서도 리비는 여자를 따라가는 발을 멈출 수 없었다.
‘누구세요?’
리비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렇게 묻는다는 게 영 어색했다. 말하자면 정확히 통성명을 할 기회를 날려 버린 상태였다. 지금 자신에게 길을 안내하느라 여념 없는 여자에게 새삼 그 정체를 묻는다니.
“내게 할 말이 있어요?”
“네?”
툭 던진 질문에 리비는 화들짝 놀라 서 있던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궁금한 게 있어 보여서요.”
돌아보는 여자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저는, 그러니까…….”
횡설수설 변명 거리를 찾다가 리비는 무언가를 퍼뜩 떠올리고 놀라고 말았다.
“……제가 궁금한 게 많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머리 뒤에도 눈이 달렸거든요.”
순간 돌아본 여자의 얼굴은 싸늘하게 얼어붙었고, 리비의 얼굴은 더 하얗게 질려 버렸다.
“날 뭘 믿고 따라온 거예요?”
“길을 안내해 준다고 하셔서.”
리비는 누군가 뒤에서 뒷덜미를 잡아챈 것 같은 느낌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여자의 말이 맞았다. 대체 처음 보는 여자를 뭘 믿고서 이렇게 따라온 걸까. 마치 홀린 것처럼 따라오고야 말았다.
“상상 이상으로 순진하군요. 내가 당신을 꾀어 내어 나쁜 사람들에게 던져 주면 어쩌려고요?”
여자는 리비의 바로 앞까지 훅 다가왔다. 리비는 계속 뒷걸음치다가 나무 둥치에 걸려 턱 멈춰 서고 말았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여자의 얼굴에 리비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기억해요, 이 왕궁에서 만나는 그 누구도,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걸.”
“…….”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살아……남아요?”
“쉬잇, 목소리가 커요. 이 근처엔 경비병들이 많죠. 그들 중 누군가가 들을지도 몰라요.”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이 서 있는 덤불 뒤로 검은 그림자가 휙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조심해요.”
낮아진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믿지 말아요, 절대.”
여자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혀 헛소리 같지 않다는 게 신기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대체 누구길래.
“이름이 뭐예요?”
“내 이름?”
새삼스러운 질문을 받은 듯,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왜 묻죠? 이제 와서 내가 의심스러운가?”
“왕궁에서 오래 지냈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알기로…… 왕실의 여자들은 모두 일찍 죽거나 미쳤다고 했어요.”
말을 하면서도 조금씩 몸이 떨리는 걸 숨길 수 없었다.
“그럼 당신은 대체 누구인 거죠?’
“내가 왕족이라고 누가 그러죠?”
“그야 척 보면…….”
연녹색 눈, 흐드러진 금발.
순간 리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히 비교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자신을 기이할 정도로 닮았다. 마치 거울을 보듯 닮은 구석이 분명히 존재했다.
“똑같이 생겼군.”
레제트 공작이 자신의 얼굴을 기분 나쁠 정도로 집요하게 훑어 내리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누굴 닮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레제트 공작이 말한 이는 분명히 엘가 왕녀였다.
그는 분명히 젊은 시절의 엘가 왕녀를 아는 눈치였고, 리비에게서 엘가 왕녀의 그림자를 발견한 것이었다.
’잠깐만, 엘가 왕녀라고?‘
리비는 다시 여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당연히도. 눈앞의 여자는 자신과 또래이거나, 많아 봐야 겨우 서너 살 정도 위일 것이다.
게다가 엘가 왕녀는 이미 죽었다고 했다. 그 죽음에 대해서는 어쩐지 다 쉬쉬하는 모양이지만.
“척 보면?”
“……아니에요.”
리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아는 누군가와 잠깐 착각했나 봐요.”
“누구와?”
여자는 궁금한 듯 계속 물어 왔다.
말간 눈으로 물어보는 시선에 리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어머니?’
문득 떠오른 단어가 너무 낯설었다. 엘가 왕녀가 자신을 낳았다는 걸 안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얼굴조차 본 적 없는데. 어떻게 어머니라고 쉽게 말할 수가 있을까.
그렇다면 왕녀님?
왠지 그렇게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인데. 얼굴 한번 못 봤어도 자신을 낳아 준 사람인데.
그 어느 쪽도 입 밖으로 쉽게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복동생들을 낳은 계모에게도 별로 불러 본 적 없는 호칭이었다.
“왜 그러죠?”
“아…… 그냥요.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결국 가장 이상한 답을 내놓고 말았다. 그냥 아는 사람이라니. 물론 따지고 보면 맞는 소리이기는 했다.
“그렇군요.”
“알긴 하지만, 본 적 없는 분이에요. 그러니까…….”
리비는 다음 말을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말했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저런.”
“그분은 나를 몰라요. 워낙 어릴 때 헤어져서……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셨거든요. 마지막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래도 한 번쯤은 뵙고 싶었어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건, 절대로 만날 일이 없다는 건 이런 거구나. 내내 잊고 있던 왕녀의 존재가 떠오른 순간, 리비는 걷잡을 수 없는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계모는 쌍둥이를 낳고 얼마 안 가 죽고 말았다. 원래도 약한 몸이었던 데다가 쌍둥이를 임신하고서 건강이 더욱 나빠진 게 크게 작용했다.
하이든 백작과 결혼해 백작 부인이 되었지만 그게 그저 호칭일 뿐이라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문득, 기억 속에 그녀가 내내 힘들어했던 게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을 가졌을 때 엄마도 저랬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의식적으로 엄마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기에 그 생각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앞에 서 있는 여자를 엘가 왕녀로 착각하다니. 게다가.
‘나를 닮았다니.’
잠깐이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리비는 매우 창피해졌다. 이런 미인과 닮았다고 어디 가서 말했다가는 그대로 비웃음을 살 게 뻔하다.
아무래도 보리스에게 과한 찬양을 너무 자주 받는 바람에 거기에 동화된 게 아닌가 싶었다.
“사랑스러워.”
“귀여워.”
“예뻐.”
저 세 마디 말만 재회 후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니 세뇌가 될 만도 했다.
“흠흠.”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민망함의 기운을 담은 헛기침이 새어 나왔다. 아직도 답을 기다리는 듯 맑은 눈으로 웃는 여자를 보며 리비는 결국 털어놓고 말았다.
“……보고 싶은 사람이에요.”
엄마가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 감정을 계모에게 느끼기에 이미 그녀는 동생들과 나이 차도 컸고, 일찌감치 혼자 먹고 자고 노는 법을 깨우친 상태였다.
어른들의 손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굳센 아이였다. 마을 아이들과 모여 놀다가 하나둘 엄마의 부름에 귀가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아빠, 날 낳아 준 엄마는 어떤 분이야?”
어느 날 그렇게 물어봤던 날, 니콜라스는 술을 퍼마시고 사흘간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로 리비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엄마에 대해 묻는 것을 포기했다.
그렇게 잊고 지내왔는데. 난데없이 왕녀의 딸이라면 팔려 가는 결혼의 희생양이 되고, 그러다가 보리스를 만나고, 결혼식을 파투 내고…….
여기까지 왔다.
“엄마요.”
“…….”
“절 낳아 주신 분이요. 그런데 돌아가셔서 저는 만날 수 없어요. 저와 많이 닮았다고 하는데, 저는 본 적 없으니까…… 설령 살아 계셔서 만난다고 해도 알아볼 수 없겠지만요.”
“그렇군요.”
여자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주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나저나 아가씨는 운이 좋군요. 혹시라도 나쁜 맘을 먹은 이가 이곳을 지났더라면…….”
괜한 협박이 아니었다. 이 드넓은 왕궁에서 멋대로 돌아다닌 것 자체가 몹시 위험한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 중이었다.
“이름…… 이름을 알려 주세요.”
리비는 간곡하게 청했다. 어쩐지 이 여자를 붙잡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저는 곧 떠날 거예요. 다시 볼 수 없을 텐데. 이름이라도 알면 나중에라도 감사의 표시를 할 수 있을 거예요.”
간절하게 말하는 리비를 보던 여자는 뜻 모를 미소만 지었다.
“걱정 말아요, 우린 또 만나게 될 테니까.”
“네?”
“자, 고개를 들어 봐요.”
“아, 네…….”
리비는 여자의 말을 따라 시선을 높이 들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대연회장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였다. 여자는 결국 자신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준 셈이었다.
“감사해…….”
기쁜 얼굴로 뒤를 돌았을 때였다.
좀 전까지 여자가 서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있다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아무도 없었던 것만 같았다.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그녀와 있을 때 내내 느꼈던 것처럼, 무언가에 아주 제대로 홀려 버린 것만 같았다.
뭐에 홀린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등 뒤로 시커먼 그림자가 졌다.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르려는 순간, 시커먼 그림자가 말을 했다.
“리비.”
“엄마야.”
리비는 놀라움 반, 안도감 반에 휩싸여 작게 비명을 질렀다.
“어디 갔었어?”
놀란 나머지 몸이 휘청거리는 리비를 받아 안으며 보리스가 물었다.
“그냥.”
“그냥?”
“산책 좀.”
보리스의 표정이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왜 그런가 싶어 그를 보자 보리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내 찾았어. 혼자 다니는 건 아무리 왕궁이라도 위험하단 말이야, 리비.”
“응, 그런 것 같았어.”
차마 길을 잃었었다는 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왔잖아.”
리비는 활짝 웃으며 보리스의 너른 품으로 뛰어들었다. 폭 안기는 감촉이 좋았다. 보리스는 무작정 안겨드는 리비를 보며 당황해하다가 이내 굳센 팔로 그녀를 안아 주었다.
“아, 좋다.”
리비는 그의 품에 폭 안겨서 얼굴을 비벼 댔다. 이제야 제자리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응?”
가감 없이 말하는 리비의 표현에 보리스는 당황해 얼굴을 붉혔다.
“우리, 얼른 집에 가자.”
“…….”
보리스의 커다랗게 뜨인 보라색 눈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우리의 집으로.”
좀 전에 보았던 신비로운 기운을 가득 품은 여자의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어쩐지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좀 전의 일은 혼자만의 기억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
***
요란했던 결혼 행사를 모두 끝마치고 마침내 에드라크 영지로 돌아갈 날이 다가왔다.
물론, 두 사람이 떠나기 직전까지 안드로스 왕이 꾸준히 설득해 온 것은 물론이었다.
회유와 설득. 협박만 안 했을 뿐 거의 진력이 날 때까지 두 사람을 붙잡는 왕에게 보리스와 리비 모두 단단히 질려 버렸다.
그래서 왕을 두고 마침내 성문을 나섰을 때에는 마차 안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