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 11화 (12/20)

결혼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 4권

11. 신부 협상(2)

“그러니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하지 마.”

리비는 양 손바닥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쥐며 말했다.

자신을 지키는 일이 곧 보리스를 지키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리비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왕의 결혼 승낙도 얻어 내고, 너를 명예롭게 만들 거야. 너는 나, 리비 하이든의 남편이니까.”

“…….”

졸지에 얼굴을 붙들린 보리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얼굴만 붙들고 있자니 새삼 그의 얼굴이 얼마나 소년 같은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바로 선 자세에서는 아무리 손을 들어 올려도 닿지 않는 것이 그의 얼굴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에 그가 자기보다 작은 키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보리스의 눈이 바람을 맞은 호수의 물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우리’ 함께 헤쳐 나가는 거야, 알겠지?”

손바닥에 볼이 짓눌린 보리스의 얼굴이 웃기고도 귀여웠다. 그 얼굴을 밀가루 반죽처럼 주무르는 동안 이상한 쾌감이 리비의 내부를 잠식해 갔다.

말랑말랑, 손에 닿은 감각이 황홀했다. 그의 얼굴을 만진 적은 많았지만 이런 장소에서는 처음이니까, 그러니까. 하얗고 부드럽고 매끄러운 피부의 감촉에 리비는 넋이 나가고 말았다.

내내 휘장 뒤에 숨어서 가슴 졸이며 신부 협상을 하는 원로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불안에 떨던 것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보리스의 얼굴을 주물럭거리고 있을 때였다.

“……리비.”

“응?”

“뭐 해?”

보리스가 얼굴을 잡힌 채로 중얼거렸다.

“아…….”

리비는 그의 얼굴을 흡사 폭신한 빵 주무르듯 만지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얼른 손을 떼어 내려 했다.

“괜찮아.”

떨어지던 손 위로 크고 단단한 손이 겹쳐졌다.

“더, 만져도 돼, 리비.”

올려다보는 눈이 숲에서 만난 마물처럼 수상쩍게 보였다. 아마 어두운 밤, 숲길에서 그를 만났더라면 대번에 홀려서 뼈째 씹어 삼켜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

그는 다시 한번 요구했다.

“응, 으응?”

리비의 초록색 눈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계속 만져 줘.”

그는 아예 리비의 손을 제 뺨 위로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살결,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시합장으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휘장 밖에서 들린 소리에 리비는 꿈에서 깨어나듯 몸을 푸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에게 잡힌 손은 아직 그대로였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보리스.”

“왜 떨어?”

보리스의 눈가에는 웃음이 맺혀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지금 목숨을 건 결투를 하러 가는 마당에, 웃음을 짓다니.

“너는……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

“걱정 마, 리비.”

“…….”

“내가 이길 테니까.”

그의 눈에는 한점 불안도 보이지 않았다.

“가자, 리비.”

그는 잠시 그녀를 응시하더니 리비가 내민 손을 움켜쥐었다.

차륵.

두 사람을 가려 주고 있던 휘장이 걷히고,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

결투장은 왕궁 전용 마상 시합장으로 결정되었다.

좌우로 긴 사각형의 경기장은 유흥을 위해 종종 마상시합이 열리는 곳이었다.

그런 곳이 이제는 감옥이 되었다. 그냥 갇히기만 하는 것이 아닌, 둘 중 하나가 죽기 전까지는 살아 나올 수 없는 그런 곳이 되어 버렸다.

드높은 관람대 위에는 안드로스 왕이 호화로운 모피를 씌운 의자에 앉아 시합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리비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자주 했던 놀이가 떠올랐다.

리비와 친구들은 풀과 나무를 엮어 만든 장난감 미로에 새앙쥐들을 풀어놓은 뒤, 누구의 새앙쥐가 가장 먼저 미로를 빠져나가는지를 두고 보곤 했다.

각자 리본으로 표시해 둔 새앙쥐 중 가장 먼저 결승 지점을 통과하는 쥐의 주인이 그날 모은 나무 열매를 모조리 갖는 식이었다.

지켜보며 응원하는 건 재미있었지만 쥐들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건 탈출이었다. 결코 즐길 수 없는 일이었다.

안드로스 왕의 눈빛은 그때 새앙쥐가 돌아다니는 미로를 보던 친구들의 눈빛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이건 고작 간식이 아니라 목숨을 내건 결투였다.

“말도 안 돼…….”

리비는 가시나무로 둘러쳐진 시합장 주변의 살벌한 풍경과, 근엄한 얼굴로 보초를 선 왕궁의 위병들, 그리고 이 시합 소식에 몰려든 관중들의 함성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들은 모두 미쳐 있었다. 귀족이든 아니든,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들 눈에는 광기가 흘렀다. 곧 보게 될 결투의 주인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피가 튀고 살이 튈 이 결투에 피 냄새를 맡은 독사들처럼 몰려들어서 잔뜩 흥분한 모습에 리비는 금방이라도 안에 든 것을 게워 낼 것만 같았다.

‘정신 차려.’

금방이라도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공포로 죽어 버릴 것 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일 사람은 자신이 아닌 보리스다.

그는 제 목숨을 걸고서 이 결투장에 서게 되었다.

다름 아닌 자신 때문에.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로 못 하게 하는 건데.

“…….”

리비는 관람대 난간에 바짝 붙어선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합장 바닥까지의 거리는 까마득하게 멀었기에, 계속 보다 보면 절로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

사방이 막혀 있고, 뚫려 있는 곳이라고는 양쪽의 입구뿐이었다. 그마저도 결투가 시작되고 나면 철제문이 내려져 단단히 문을 봉쇄하게 된다고 했다.

“야만적이야…….”

리비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사람을 이런 우리에 가둬 두고서 싸우게 하다니.

더구나 불공평하기도 했다. 보리스는 직접 이 목숨을 내건 결투에 나서는 반면, 레제트 공작 측에서는 자신을 대신한 기사를 내세워 결투를 치르게 할 예정이었다.

기사의 이름은 마그노로, 얼굴에 크게 십자로 그어진 흉터를 가진 이였다. 그는 전쟁 때마다 적군의 목을 벤 뒤 꿰어 끌고 다니는 것으로 악명 높은 자였다. 그 잔인무도함에 전쟁에 참가하는 기사들은 적어도 그의 손에 죽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었다.

보리스는 그런 자와 싸워야만 했다.

“이건 비겁해요.”

리비가 벌떡 일어나더니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신부를 내건 결투잖아요. 그런데 왜 레제트 공작 측에서는 본인이 결투에 나서지 않는 거죠?”

리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말을 듣는 이들이 제각각 다른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결투 재판은 당사자 둘이서 싸워야 한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쪽에서는 에드라크 공작이 직접 나서는데, 왜 그쪽에서는 레제트 공작이 직접 나서지 않는 건가요?”

리비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실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이미 시합 전에 고지되었을 때 줄기차게 불공평함을 알렸지만 아무도 들어 주지 않았다.

‘비겁해.’

레제트 공작이 그녀를 건너다보는 것이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저 감옥 같은 시합장에 있어야 할 사람은 레제트 공작이었다.

그가 창을 잡고 시합에 나서는 대신, 그가 총애하는 기사가 보리스의 상대가 되었다.

“공녀께서는 내 기사의 실력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리비, 귀족들의 결투 재판에는 대리인이 참가할 수 있다. 그런 경우는 수두룩해. 에드라크 공작 역시 대리인을 내세워 결투할 수 있지만, 그가 거절했다.”

“…….”

리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안드로스 왕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귀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자신을 대신한 실력 좋은 기사를 시합장에 내보내고는 했다.

하지만 보리스는 자신이 직접 나섰다. 칼리니 기사단 중에서 그를 이길 자는 없었으니까.

리비를 걸고 싸우는 결투에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내세우는 모습 역시 상상하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저 결투장 안으로 들어서게 될 운명이었다.

결투의 시작과 끝을 알릴 의전관이 검은색과 붉은색의 깃발을 각각 손에 쥔 채 단상에 올라섰다.

이젠 피할 수 없는 결투의 시작이었다. 리비는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간신히 눈꺼풀을 도로 떴다.

하나도 놓치지 않으리라. 그가 자신을 위해 나선 이상, 그녀 역시 보리스가 싸우는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을 계획이었다.

의전관이 깃발들을 높이 들어 올리자, 좌중이 순간이나마 조용해졌다.

깃발은 공중에서 서로 교차되었다. 그것을 신호로 시합장 끝의 입구가 열리기 시작했다.

드르륵.

쇠문이 석재 벽을 긁으며 올라가는 소리에 리비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갑주 차림의 기사 둘이 말을 탄 채 양 끝의 문을 통해 나왔다.

각각의 투구에는 깃털을 표식 삼아 구분을 했다. 붉은색의 깃털은 레제트 공작 쪽, 검은색의 깃털은 보리스 쪽이었다.

“보리스.”

리비는 검은 갑주를 입고 검은 말 위에 올라앉은 보리스를 보며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말들은 벌써 사납게 투레질을 해대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문득 들어 올려진 고개가 리비를 향했다.

“보리스.”

리비는 다시 한번 보리스의 이름을 불렀다. 검은 투구에 가려져 있었으나 리비는 그의 시선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마주친 것도 잠시, 의전관이 깃발들을 곧게 앞으로 들어 올리자 곧 결투를 펼칠 두 기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섰다.

뒤이어 깃발을 교차하자 두 기사는 장창을 높게 들어 올렸다.

모두가 숨죽인 침묵이 이어진 순간. 의전관은 깃발을 교차시킨 상태에서 힘껏 내젓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과 더불어 기사들은 말을 타고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쿵.

장창에 얻어맞은 충격을 느낄 새도 없이 결투는 다시 시작되었다.

쿵, 쿵.

그대로 말머리를 되돌려 달려온 기사들이 창을 치받는 소리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하.”

리비는 귀를 막은 채 주저앉았다. 서로의 갑주를 찌르는 둔탁한 소리가 심장을 갈기갈기 찢는 것만 같았다.

“…….”

리비는 가까스로 귀를 막은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다시 몸을 일으킨 뒤 난간을 콱 움켜쥐었다. 긴장으로 온몸이 떨려 왔다.

결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더 빠르게, 더 공격적으로.

장창으로 빠르게 서로의 급소를 향해 내지르는 움직임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마상 시합은 종종 유희 거리로 자주 개최되는 놀이였으나, 그때에도 그리 안전한 놀이는 아니었다. 장창을 잘못 맞은 이는 그대로 추락사하거나, 목숨이 위태로운 치명상을 입기도 했다.

단 한 번의 합만으로도 그런 결과가 나올진대, 보리스와 레제트 공작의 기사는 지금 아예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 결투 중이었다.

쾅!

또 한 번의 충돌이 일어났다. 그 순간 레제트 공작 쪽의 기사, 마그노가 장창을 바닥에 떨구었다.

리비는 고개를 쭉 빼고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저만치 나가떨어진 장창을 다시 줍기에는 이미 거리가 너무 벌어져 있었다. 보리스는 말을 돌려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한쪽이 무기를 잃었으니 원래대로라면 시합이 종료되었을 테지만, 창을 잃었어도 사람이 죽지는 않았기에 시합은 계속되었다.

창을 잃은 기사는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허리에 찬 검을 꺼내 들었다. 그걸 본 보리스도 창을 땅에 떨구었다.

이제부터는 진짜 무기를 사용하는 싸움이다.

“보리스, 보리스.”

리비는 양손을 모아쥔 채 기도했다.

“제발…….”

챙!

사납게 맞붙은 검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기사 마그노가 말 위에서 휘청거리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말 위에서 검을 휘두르는 보리스의 모습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날아다니는 새에 가까웠다.

그만큼 민첩했고, 날카로웠으며, 우아하고 정확했다.

채앵!

또다시 검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번에는 치고 지나가는 대신 서로 검을 겨눈 채 합을 겨뤘다.

기이이잉.

날붙이끼리 마찰하며 나는 소리가 허공을 마구 갈랐다. 그 힘에 뒤로 밀려난 마그노가 재빨리 말머리를 돌리려 한 순간이었다.

보리스는 말에서 몸을 날려 그대로 마그노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쿵.

바닥에 떨어진 두 기사의 몸이 눅눅해진 흙바닥을 굴렀다.

“와아아아아!”

극적인 장면에 여기저기서 흥분으로 가득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보리스는 그대로 마그노의 몸을 타고 올라 무릎으로 기사의 목을 내리눌렀다.

동시에 번쩍 치켜든 검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모든 건 순식간에 끝났다. 보리스가 들어 올린 건 투구에 달린 붉은 깃털이었고, 그 아래에는 완벽하게 잘린 마그노의 머리가 붙어 있었다.

시합장에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공기의 흐름도 완전히 멎은 것만 같은 때였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와아아아!”

귀를 찢을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에드라크!”

크게 외치는 소리에 보리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남자는 그대로 손을 들어 사방에 막 베어 낸 기사의 목을 보여 주었다. 함성은 점점 더 커졌고, 그는 반대편 손으로 제 투구를 벗어 쥐었다.

피를 뒤집어쓴 검은 투구를 벗자 그와는 몹시 어울리지 않는, 소년티가 아직 남은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함성은 더욱더 커졌다. 여기저기서 그를 향해 장미꽃을 던져 댔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오직 한 군데, 높은 단상 위 한 여자만을 향해 있었다.

“보리스…….”

리비는 보리스의 모습을 보며 마침내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보리스, 보리스.”

리비의 울음이 더욱더 커졌다.

“보리스에게 갈래.”

그녀는 몸을 돌려 시합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리자, 그 앞에는 이미 보리스가 와 있었다. 보기에도 징그러운, 잘린 머리 따위는 이미 저 멀리 던져 버린 뒤였다.

“봐, 내가 이긴다고 했지?”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그를 보며, 리비는 그대로 몸을 던졌다.

“리비, 피가…….”

“바보, 이 바보야.”

리비는 갑주의 딱딱함도, 범벅된 피가 제 드레스에 묻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펑펑 울고 말았다.

“괜찮아, 이제.”

보리스는 우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 주었다. 늘 우는 것은 그였는데, 그런 그의 달램을 받고 있자니 몹시 이상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많이 놀란 거야? 안심해도 된다고…… 읍.”

보리스가 걱정스레 말하는 목소리는 그대로 리비에게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뒤이어 열정적으로 맞비벼 오는 리비의 입술을 그는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공중으로 떠오른 리비의 몸이 그에게 바짝 밀착되었다. 그렇게 두 연인의, 아니 이제 공식 부부가 된 에드라크 공작 부부의 뜨거운 재회의 입맞춤이 이어지는 동안 결투장을 가득 메운 함성과 박수 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한참 후에야 겨우 장내의 소란이 잦아들자, 안드로스 왕이 관람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럼 결론이 났군.”

왕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엘가 왕녀의 딸, 리비는 공식적으로 에드라크 공작의 신부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대로 꼴사납게 주저앉나 싶은 순간이었다.

턱.

강하게 잡아 올리는 힘에 고개를 들자 보리스의 깊은 자색 눈동자가 보였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감정이 꾹꾹 눌러 담긴, 그런 눈이었다.

“보리스…….”

리비의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그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아주 찰나의 순간, 리비는 이 공간에 오로지 두 사람만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원하던 대로 왕의 결혼 승낙을 받았고, 레제트 공작은 실패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모든 것이.

그런데 심장은 왜 이리 불길하게 뛰는 것일까.

마침내 원하는 것을 이루고 나니 밀려오는 증상인 걸까, 아니면…….

쿵.

묵직한 소리의 정체는 목제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낸 소리였다. 그 의자의 주인은 다름 아닌 레제트 공작이었다.

“저는 이만 물러가지요, 예상보다 빠르게 귀환할 것 같습니다.”

품위 있는 인사를 건넸으나 그의 얼굴은 원래 창백했던 낯빛이 시뻘겋게 보일 정도로 달아올라 있었다.

“그럼, 나중에 뵙도록 하지요.”

휙, 그는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성큼성큼 탑을 빠져나갔다. 마치 불을 뿜는 사악한 용 같은 모습이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리비의 귓가에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협상이 타결되었으니, 이제 남은 건 축제인가?”

돌아보니 왕이 매우 흐뭇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축제? 무슨 축제? 리비의 머릿속에 왕이 한 말만이 어지럽게 맴돌고 있을 때였다.

“이왕 수도까지 온 김에 결혼식까지 치렀으면 하는데.”

그가 리비와 보리스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했다.

“결혼식……?”

리비는 멍하니 왕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 너는 소중한 왕실의 자손이란다. 그리고 네 남편은 전쟁에서 빛나는 공을 세운 칼리니 기사단장이지. 당연히 왕궁에서 결혼식을 치러도 되지 않겠느냐?”

왕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인자했다. 하지만 리비는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좀 전까지 살벌한 협상이 진행되던 곳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왕궁에서 결혼식을 올리라는 왕의 말은 매우 현실감이 없었다.

“결혼……식을요?”

“그래, 고향에서의 결혼식은 에드라크 공작이 망쳐 버렸으니 이제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려야지. 그래야 네가 약탈을 당했느니 뭐니 하는 헛소문을 잠재울 수 있겠지.”

그건 사실인데요. 리비는 속에 담아 둔 말을 굳이 꺼내지는 않았다.

따지자면 그랬다. 결혼식 날 예복을 차려입은 채로 저 시커먼 놈에게 안겨 말에 올랐는데 그게 약탈이 아니라면 대체 뭐란 말이지.

결과적으로 늙은 공작과 결혼해 다 큰 자식들의 어머니가 되지 않아도 되니 좋은 일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납치해 간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갑작스레 흰 장미의 성에 잡혀가 마음을 졸였던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생각하니 갑자기 억울해져서 리비는 슬쩍 고개를 들어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눈을 맞춰 온 그에게서는 그 어떤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히 자신의 것을 찾아온 것처럼 당당하고도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 있던 눈빛이 어느덧 부드럽게 풀어진 채, 다시 그녀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앞에 선 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눈빛에 리비는 더럭 겁이 났다.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는 건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기 때문에.

“폐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리비는 얼른 안드로스 왕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것도 아주 크게.

왕에게 무릎을 굽혀 예를 표하면서 그녀는 재빨리 보리스의 옷깃도 잡아끌었다.

처음에는 ‘뭐?’ 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보리스도 얼떨결에 리비가 하는 대로 고개를 숙여 왕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왕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 건 그 순간이었다.

“조금 길을 돌긴 했지만 내가 맺어 준 부부를 보고 있자니 아주 흐뭇하군.”

“…….”

리비는 다시 한번 표정을 관리하려 애썼다. 애초에 늙은 공작에게 조카딸을 보내려 한 게 누구더라, 그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완벽하게 입장을 바꿔 버린 왕이었다.

“이리 보니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군. 원로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는 자신의 생각에 동의를 구하려는 듯 귀족들에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던졌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엘가 왕녀님의 따님과 전쟁영웅인 칼리니 기사단장의 결혼이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요.”

“폐하의 안목이 뛰어나십니다.”

여기저기서 급조된 칭찬이 물밀듯이 밀려오자 리비는 다시 얼떨떨해졌다. 시종일관 유지해 오던 태도를 바꾸는 건 왕뿐만이 아니었다.

“이건 왕국의 경사이지요.”

껄껄, 저마다 웃는 소리로 회의장의 드높은 천장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리비는 급변한 분위기에 적응 못 해 얼떨떨했고, 보리스는 무감한 시선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열심히 칭찬거리를 찾던 귀족 하나가 드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한 떨기 장미와 까마귀처럼 잘 어울립니다.”

“…….”

이후 급작스레 정적이 찾아들었다.

어떻게든 독특한 칭찬을 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굴린 결과로 튀어나온 칭찬이었다.

갑작스러운 침묵의 중심에는 안드로스 왕이 있었다.

“장미와 까마귀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긴 그의 얼굴은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니면 나쁜 건지 선뜻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래, 엘가의 딸이니 아름답기도 하고, 전설의 까마귀 같은 용맹함을 지닌 에드라크 공작과 어울리기도 하고…….”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던 왕은 이내 크게 웃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러고 보니 칼리니 기사단의 상징도 흰 장미와 까마귀였지, 아마?”

“그렇습니다.”

왕의 질문에 보리스는 침착하게 답했다.

“결국 까마귀가 용을 이기고 장미를 차지했군. 진짜 칼리니가 따로 없어.”

왕은 흐뭇하게 웃으며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에드라크 공 같은 사람이 내 검으로 있어 준다니, 이보다 더 든든할 순 없지. 더구나 이제는 한 가족이로군.”

가늘게 눈을 뜬 왕의 시선을 보던 리비는 뭔가 싸한 기운이 온몸을 스쳐 가는 것을 느꼈다.

왕은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보리스가 필요할 테니, 이 결혼을 통해 자신에게 묶어 둘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장사일 것이다.

본래 왕과 기사단의 관계란 언제든지 틀어지면 순식간에 적이 되어 버리는, 그런 상황이었다.

절대적 충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 주고받을 것이 없으면 언제든 져버릴 수 있는 관계가 바로 둘의 사이였다.

그런데 왕녀의 딸인 리비가 보리스와 혼인하게 된다면.

안드로스 왕은 완벽하게 보리스를 자신의 편에 둘 수 있게 된다.

‘보리스는 그래서…….’

자신이 반드시 리비를 얻게 된다고 자부한 것이다. 결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또한 왕이 이 결혼을 승낙한 것 역시 치밀한 계산 속임을, 이제 리비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칼리니 기사단이 이곳저곳 떠돌아 다니는 용병이 아니라 왕의 인정을 받고, 더불어 보리스에게 공작위까지 준 것은 다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이게 과연 잘된 일일까.

리비는 웃으며 결혼을 축복하는 사람들 틈에 선 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 보리스는 공작이 되어 돌아와 자신에게 청혼했다. 그사이 자신이 다른 이와 결혼할 뻔하긴 했지만, 어찌 됐든 어릴 적 했던 약속 그대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 하지만.

보리스가 어쩐지 새장 속에 갇힌 야생 까마귀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리비?”

의문으로 가득 찬 보랏빛 눈이 그녀를 향했다. 다 같이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왜 그런 우울한 표정인지 묻는 얼굴이었다.

“왜 그래?”

하지만 그 이유를 리비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모르겠어.”

왠지 모르게 눈물이 솟았다.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고, 이제 두 사람은 영지로 돌아가 행복할 일만 남은 것 같은데 왜, 어째서.

이토록 불안할까.

“나도 잘 모르겠어, 보리스…….”

리비는 얼굴을 감싸 쥐며 그대로 그의 품으로 돌진했다. 갑자기 달려들어 안기는 힘에도 보리스는 꿈쩍하지 않은 채 두 팔 벌려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괜찮아, 리비.”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는 열심히 리비를 위로했다. 리비는 그 너른 품에 안긴 채 흐느끼며 차차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결혼을 앞둔 새신부는 생각이 많아지는 법이지.”

안드로스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울어 대는 리비를 보며 말했다.

“결혼 준비를 하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 우울하거나 슬픈 걸 느낄 새도 없을 거란다, 리비.”

그 다정하게 타이르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듣기 싫었다. 리비는 더욱 몸을 옹송그려 보리스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그를 반기듯 보리스는 더욱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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