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신부 협상(1)
리비는 끝없이 펼쳐진 언덕에 홀로 서 있었다. 그곳이 어디인지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보리스와 어릴 적 뛰어놀던 들판이었다.
“보리스?”
그러나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어?”
주변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날은 맑고 풀은 푸르렀으나 보리스가 없으니 모든 것은 낯설고 두렵게만 느껴졌다.
“리비.”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리비는 휙 뒤를 돌았다.
“보리스?”
다정다감한 보라색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랐어?”
“응.”
리비는 아무 생각 없이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네가 없어서 무서웠어. 이제 어디에도 가지 마…….”
“응, 그럴게.”
대답하는 보리스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보리스이되 보리스가 아닌, 마치 성인 남자의…….
“보리스?”
리비는 자신을 끌어안은 팔이 소년의 가늘고 여린 팔뚝이 아닌,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은 남자의 팔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팔이 자신을 옥죄고 있다는 것도.
“다, 답답해. 이거 좀…….”
버둥거려 봤지만 그럴수록 자신을 끌어안은 팔의 힘만 더욱 세졌다. 고개를 들자 훌쩍 보리스의 얼굴이 보였다.
“약속해, 리비.”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가 속삭였다. 짙어진 보랏빛 눈도 마찬가지였다.
“내 신부가 되겠다고 했잖아.”
“그건…… 그건.”
“너는 내 신부가 될 거야, 리비.”
리비는 쇠사슬처럼 칭칭 감긴 그의 팔을 풀어 내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놔, 놔아……!”
몸이 비틀던 리비의 눈이 번쩍 떠졌다.
“…….”
리비는 눈을 깜빡거렸다. 방금 꾼 꿈이 이상스레 생생해서였다. 그도 그럴 만했다.
뒤에서 뻗어 온 굵고 단단한 팔이 제 몸을 넝쿨처럼 휘감고 있었으니까.
리비는 벌거벗은 제 몸을 끌어안은 팔의 주인이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챘다.
귓가에 옅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등 뒤로 바짝 붙은 남자의 체온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 거듭 자신을 안던 강인한 육체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건 모두 꿈이 아니었다.
리비는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꿈은 꿈이고, 이건 현실이다. 하지만 꿈속이나 현실에서나 그가 하는 말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리비는 제 몸을 감싼 팔을 풀어 내려 애썼다. 그러나 꿈속에서처럼 단단히 감긴 팔은 도무지 풀어질 줄을 몰았다. 그리고.
“…….”
허리 아래로 느껴지는 생생한 이물감에 그녀의 몸이 굳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이어진 상태였다. 밤새 몇 번을 받아 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하고, 또 하고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기절한 건데…….
‘왜 이게 아직도.’
몸 깊숙이 박힌 것은 마치 기다란 창처럼 그녀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밤새 이런 상태로 잤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떻게든 빼보려 엉덩이를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쿨쩍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도무지 빠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어느 지점이 찔리자 듣기 민망한 신음이 새어나오기까지 했다.
“으음…….”
리비는 몸을 부들거렸다. 이래서야 마치 보리스의 것으로 혼자 즐긴 것 같지 않은가.
몇 번 낑낑거리던 리비는 결국 포기한 채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보았다.
여명이 밝아 오는 시간이었다. 검푸른 하늘이 점차 보랏빛으로 변해 가는 것이 보였다.
정신을 잃고 얼마큼의 시간이 흐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온몸을 관통하는 둔통이 꽤나 괴롭다는 사실이었다.
허리를 비롯해 허벅지, 내내 소리 지르느라 혹사당한 목까지, 제 몸이 제 몸 같지 않아 리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만도 했다. 보리스와 이런저런…… 것들을 했으니까.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끝까지 가버리고 말았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얼굴에 열감이 확 돌면서 부끄럽기 이를 데 없었다. 리비는 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더욱 큰 한숨을 내쉬었다.
“깼어?”
귓가에 훅 불어넣어진 숨에 리비는 파드득 몸을 떨었다.
“혼자 즐기고 있었던 거야?”
그의 말에 리비의 볼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니야!”
리비의 외침과 동시에 보리스의 것이 안으로 강하게 짓쳐 들어왔다.
“하읏!”
그게 다 커진 게 아니었어?
리비는 놀란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젖어 있는 내부를 강하게 압박해오는 성기의 감촉에 리비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뒤에서 뻗어온 손이 젖가슴을 쥐고서 부드럽게 희롱하자 눈앞에 불꽃이 탁탁 터지는 것만 같았다.
“나 봐줘, 리비.”
속삭이는 소리에 리비는 그대로 얼음이 된 것만 같았다.
“…….”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응?”
보리스가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끌어당기더니 몸을 더욱 밀착해 왔다.
“너, 너…….”
빳빳한 것이 안을 드나드는 감각이 생경했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 정신없이 받아들이던 바로 그것이었다.
“보리스, 이거, 이거 좀…….”
“그럼 나 봐.”
그는 물러날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바짝 성이 난 것을 거세게 추삽질해 왔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아예 다리 사이로 젖가슴을 주무르던 손을 들이밀어 밤새 괴롭혔던 민감한 살점을 자극해 댔다.
“응, 으응.”
그가 드나들어 얼얼한 부위에 마찰이 계속되자 리비는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소리를 버럭 내지른 리비가 고개를 휙 돌렸다.
“…….”
그녀는 빙긋이 웃는 보리스의 얼굴과 정통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꿈속에서 보았던 것처럼 다정다감한 눈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 눈과 마주치자 좀 전까지 바짝 약이 올랐던 것이 스르르 녹아 사라지고 말았다.
“리비, 기뻐.”
“뭐가, 읍…….”
그녀를 돌려 안은 보리스가 그대로 벌어진 입술 새로 혀를 밀어 넣었다.
“음, 으음.”
깊이 꽂힌 채 혀를 문지르고 입천장과 볼 쪽의 여린 점막을 사정없이 건드리는 행위에 리비는 혼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제 몸을 들쑤시던 성기의 촉감도 이와 다르지 않았었다.
“하…….”
금세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몇 번이나 안을 느리고 오가던 것이 천천히 빠져나가자, 리비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허리를 강하게 감싸 쥔 팔의 힘에 리비는 불길함을 느꼈다.
“너, 너 설마…….”
또 할 거야? 그렇게 묻기도 전, 보리스가 그녀의 위로 타고 올랐다.
휙.
갑옷처럼 제 몸에 둘렀던 이불을 빼앗기자 리비는 자그맣게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돼.”
보리스는 자신이 한가득 남겨 놓은 흔적을 살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자신이 남겨 놓은 자국 위로 더욱 짙은 흔적을 뿌리기 시작했다.
“이 미친놈…….”
“너는 내 거야, 리비. 나도 네 거고. 그건 이제 변하지 않아. 우린 비로소 하나가 됐으니까.”
속삭일 때마다 내뿜는 숨으로 살갗이 다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흐으.”
젖가슴을 문 채 한참을 희롱하던 보리스가 별안간 그녀의 몸을 뒤집었다.
“보, 보리스?”
당황해 부르는 소리에 보리스가 그대로 리비의 뒤에서 덮쳐 눌렀다. 부드럽게 압박해 오는 몸에 리비는 팔을 뻗어 허우적댔고, 그 손은 곧 보리스의 양손에 붙들렸다.
“한 번만 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기기도 전에, 뒤에서부터 빠듯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하읏.”
“리비, 리비…….”
깊숙이 파고든 그의 분신이 안쪽을 긁어 대자 그가 밤새 부어 놓은 흔적들이 밖으로 넘쳐흘렀다. 그 덕분에 갑작스러운 삽입임에도 매끄럽게 결합할 수 있었다.
“응, 아, 아앙…….”
본인이 내고도 민망하기 짝이 없는 신음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뒤에서 그녀를 찍어 누른 몸은 바위처럼 굳건했다.
곧이어 몸을 완전히 파묻은 그가 천천히 촉촉이 젖은 안쪽을 왕복하기 시작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몸짓에 리비는 사로잡힌 작은 짐승처럼 울어 댔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리비…….”
젖가슴을 어루만지던 손이 그녀의 배 위로 내려와 꾹꾹 눌러 댔다. 그러자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응, 으응…… 그만, 그거, 그만…… 이상해애…….”
울부짖으며 애원하는 소리에도 그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되레 꾹꾹 눌러 대는 힘만 더욱 강해졌다.
“느껴져? 네 안에 있는 거? 네가 나를…… 씹어 삼키고 있잖아.”
“말도 안 되는…… 흐윽, 소리…….”
리비는 견딜 수 없는 쾌감에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기가 막혔다. 누가 누구를 삼키고 있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리비…….”
안쪽을 꾹꾹 눌러 대는 보리스의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그는 정말로 죽을 듯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 대면서 쉼 없이 허리를 놀리고 있었다. 제 것이 어디까지 밀려 들어갔다 나오는지 확인하려는 듯 손길도 분주하기만 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리비는 맥없이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었다.
곧이어 안쪽에서 번져 가는 감각에 살며시 몸을 떨자, 보리스가 천천히 몸을 빼냈다. 이미 한 번 뿜어냈음에도 젖은 길을 빠져나오는 감각은 지나치게 생생하게만 느껴졌다.
“읏…….”
나른한 피로가 덮쳐들었다. 그야말로 잡아먹히는 것 같았던 어젯밤과 달리, 보리스는 이번에는 마치 늪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괴물처럼 그녀를 소유했다. 천천히, 그러나 벗어날 수 없도록 완벽하게.
“괜찮아?”
등허리에 입 맞추며 속삭이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몰라.”
괜찮을 리가, 그럴 리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몸속에서 무언가가 세워졌다가 급격히 무너져 내린 기분이었다. 전장에서나 들릴 법한 나팔과 북소리가 심장 부근에 쿵쿵거렸다.
“모른다고, 바보야.”
리비는 얼굴을 감싸 쥔 채 대답을 회피했다. 보리스는 그런 그녀의 손을 붙잡아 끌어 내렸다.
“나 봐.”
“시, 싫어.”
미치도록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좀 전의 행위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제발 모른 척 좀 해주었으면 했다.
“괜찮아, 당연한 거야.”
아예 그녀를 달래기까지 하자, 리비는 지금 누운 곳이 그대로 푹 꺼져 사라져 버렸으면 했다.
“싫었어?”
그가 묻는 소리는 집요했다.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고서, 조금도 도망갈 틈 따윈 주지 않은 채 물었다. 그는 날개를 넓게 펼쳐 리비의 벗은 몸을 감싸 안았다.
식은 공기에 닿아 싸늘해졌던 몸에 순식간에 훈기가 돌아왔다. 여러모로 유용한 날개였다.
리비는 마치 새끼 새처럼 그의 날개 안에 꼼짝없이 갇힌 상태라는 게 웃겨서 이 상황에서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그래서, 싫었어?”
그는 다시 진지한 어조로 물어 왔고, 리비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싫……진 않았어.”
쥐어짜듯 나온 목소리에 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말했지? 나 잘한다고.”
“그런 말은 하지 마, 바보야.”
리비는 작은 주먹으로 투닥투닥 그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그는 그런 리비를 껴안은 채 침대 위를 한 바퀴 굴렀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스륵.
침대에서 빠져나간 보리스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갑자기 들어 올려진 몸에 당황할 새도 없이, 리비는 그에게 안겨 욕조로 옮겨졌다.
언제 받아 둔 건지 따끈한 물이 차오른 욕조 안으로 들어가자 저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보리스는 따뜻한 물을 끼얹고 비누로 거품을 내어 리비의 몸을 꼼꼼히 씻어 주었다.
리비는 나른하게 몸을 늘어뜨린 채 그의 목욕 시중을 받았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연달아 그에게 시달린 몸은 이제 강력한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더 자도록 해, 리비.”
“……응.”
“모든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으응…….”
작게 대답한 리비가 뒤에 버티고 앉은 보리스에게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그녀를 꽉 마주 안는 팔은,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감옥과도 같았다.
***
에드라크성 지하 감옥의 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그 안에 구금되어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몸은 자유로웠으나 팔에는 여전히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다. 그들은 대부분 눈이 부신 듯 눈을 몇 번이나 떴다 감으며 하늘을 응시했다.
그들에게는 꽤 오랜만에 보는 하늘이었다.
밖으로 나왔으나 그 옆에는 칼리니 기사단의 기사들이 바짝 붙어 있었다. 성 밖을 나서서 안전한 접경 지역으로 가기 전까지는 그들이 호위할 예정이었다.
“그대들을 방면한다.”
말을 듣고서도 기사들의 눈빛은 사나웠다. 하지만 동시에 지쳐 있었다. 구금되어 있는 동안 결코 편한 생활은 아니었던 탓이다.
왜 갑자기 풀려났는지 알 수 없는 눈빛이었지만 일단 그 끔찍한 곳에서 나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희망의 빛이 비치는 듯했다.
그들은 수갑을 찬 채로 하나둘 말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 양옆으로는 무장한 칼리니 기사단의 기사들이 나란히 자리했다. 잠시 후,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기사들이 차례로 성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리비는 탑에 서서, 그들이 사라지는 광경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높은 탑이 좋은 이유는 멀리서도 모든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기사들이 풀려났으니 신부가 사라졌다는 게 알려지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레제트 영지에 도착하는 시간보다 그들이 띄운 전령새가 가는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이다.
이제 되돌릴 수 없다.
***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이 떠난 후 얼마간, 리비는 바늘이 가득 돋아난 의자에 앉아 있는 듯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며칠 후, 왕궁에서 보낸 전령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전령이 가져온 것은 수도로의 소환장이었다.
소환장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레제트 공작이 에드라크 공작, 보리스를 신부 약탈을 이유로 국왕에게 소송을 제기하였으니, 피고의 의무로 재판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우리, 수도에 가야 하는 거지?”
“…….”
“왕이 부르는 거잖아, 맞지?”
보리스의 옷을 찢을 듯 붙잡고 늘어지던 리비가 잔뜩 울상을 지었다.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음에도 막상 현실이 되자 두려움이 와락 밀려들었다.
“왕이 이제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당장 처벌하려고 할 거라고. 어떻게 해…….”
울먹울먹한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듯했다. 속눈썹에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을 보던 보리스가 재빨리 입술을 가져갔다.
“걱정 마.”
눈물로 젖어 든 눈을 핥아 대자 리비는 그 와중에 간지러워서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하…… 흐읍!”
울음이 섞여 나오는 입을 보리스가 그대로 막아 버렸다.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받쳐 쥔 채로 보리스는 더욱더 깊이 혀를 밀어 넣었다.
“응, 웃!”
조금 전까지 우느라 꺽꺽거렸던 소리는 이제 야릇한 신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처럼 느닷없는 전개가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매번 당황하는 건 리비 쪽이었다. 웃으면 예쁘다고 했고 울어도 사랑스럽다고 했다. 리비는 차라리 자기가 그 어느 쪽도 아니었으면, 하고 바랐다.
“보리……스!”
분명히 두 사람 다 서 있었는데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부드러운 침구가 등 뒤에 닿았다. 멀쩡히 두 다리로 서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눕게 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 걱정 하지 마, 리비.”
보리스는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비는 색색 숨을 내쉬며 그를 안간힘을 다해 막았다.
힘으로 치면야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다행히 그는 리비의 미약한 손에 밀려나 주었다. 대신 그 손을 잡아서 입술로 부드럽게 훑기는 했지만.
“저, 그…….”
그와 동시에 깜박거리는 눈이 그녀를 향했다. 저건 분명히 알고 하는 짓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응?”
보리스는 얼른 말하라는 듯 재촉했다. 그러면서도 입술로는 부지런히 그녀의 손가락을 쓸어내리기를 반복했다.
“보리스, 잠깐만.”
리비는 그의 눈에 홀릴 뻔한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은 채 그를 밀어냈다. 이번에는 손뿐만 아니라 아예 다리로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
보리스는 사력을 다해 자신의 어깨를 밀고 있는 리비의 발을 다소 황당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작은 발이 움찔거리며 그의 어깨에 턱 걸쳐져 있었다.
“저, 그게.”
이렇게 하려던 게 아닌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당히 괴이한 자세가 되었다. 어정쩡하게 구부러진 다리가 딱 보리스와 자신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스륵.
무릎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드레스 자락이 슬금슬금 내려오는가 싶더니 휙 아래로 내려갔다.
리비는 그 드레스 자락을 마치 구명줄이라도 되는 듯 붙들고 늘어졌다. 이 이상 내려가면 위험하다, 아니 이 자세도 물론 위험하고, 이러든 저러든 위험하다.
“…….”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의 흐름에 순간 열기가 섞여 들었다. 그 기묘한 기류를 눈치챈 리비가 서둘러 발을 빼려 했다.
그러자 그의 손이 단단히 리비의 발목을 붙잡아 끌어당기더니 아예 자신의 어깨에 붙여 버렸다. 가느다란 발목을 감아쥔 손이 섬세하게 그녀의 피부를 훑어 내리는 것이 보였다.
“놔, 놔아.”
리비는 발을 잡아 빼려 애쓰며 몸을 이리저리 뒤틀어 봤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괜한 힘만 빼버린 상황에서 리비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그를 쳐다보았다. 보리스는 그런 그녀조차도 황홀한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 미친놈이.’
속으로 속삭인 소리를 그가 들을 리가 없건만, 그녀는 왠지 찔끔하고 말았다.
“저, 보리스? 그만 놔주겠어?”
그러거나 말거나 보리스는 볼록 솟아난 복사뼈를 사랑스럽다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불길하다 생각될 무렵이었다. 새빨간 혀가 밀려 나오더니 복사뼈를 주저 없이 핥기 시작했다.
“아, 안 돼!”
할짝, 할짝. 리비의 만류에도 그의 혀는 마치 알사탕이라도 핥아 먹는 것처럼 부지런히 리비의 살갗 위를 배회했다. 행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설마, 하는 순간 리비의 복사뼈는 그의 입안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보리스!”
전혀 상상치도 못한 곳을 그에게 내주고서 그녀는 죽어라 비명을 질렀다. 한참 그에게 물리고 빨린 복사뼈가 놓여날 무렵, 그녀는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낼 보리스가 아니었다.
촙, 촙.
마치 새가 쪼듯이 간지러운 자극이 계속 이어졌다. 발목을 타고 올라온 입술이 종아리를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부드럽게 입술을 내리누르고, 샅샅이 맛을 보듯 살갗을 탐하는 그의 몸짓에 리비는 몸을 움찔거렸다.
어느 순간부터는 당황스러움보다는 이상야릇한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찌르르 그녀의 몸을 관통하며 올라오고 있었다. 마침내 무릎 뒤를 간질이던 입술이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왔을 때였다.
순간 번개가 내리치듯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고 말았다.
“그마안!”
벼락같이 내지른 소리에 보리스가 하던 걸 멈춘 채 고개를 들고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리비?”
그러고는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왜, 왜냐니…….”
그는 정말 모른다는 듯, 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손으로는 여전히 리비의 다리를 쥐고 있는 채였다. 그녀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킨 뒤 재빨리 할 말을 꺼냈다.
“전령이 뭐라고 한 거야? 널 죽이겠대? 그건 아니지? 너는 왕에게 꼭 필요한 존재니까, 그러니까…….”
“왕은 나 못 죽여, 리비.”
그는 리비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음산한 목소리에는 어떤 자부심과 힘이 깃들어 있었다. 대체 그 근원이 무엇인지 리비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왕에게는 아직 그가 필요하다. 무력한 왕이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무기. 그게 바로 보리스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자신감에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어떻게 확신해?”
그저 치기인 걸까, 아니면 정말로 확신할 만한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걸까.
“왕은 너 때문에…… 레제트 공작에게 아쉬운 소릴 하게 될 거야. 왕으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야.”
“그런가?”
보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
리비는 아무 걱정 없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제껏 지나온 시간 동안 겪었던 것의 몇 배쯤은 더 심란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내린 결정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잘한 건지 모르겠어.”
그 밤, 보리스에게 모든 것을 주기로 결심한 그날 밤에.
“있지, 보리스. 나는 우리가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어. 왕이든 레제트 공작이든 우리 목을 떼어 가는 건 원치 않는다고.”
“누구도 그런 짓 따위 못 해. 이번에 가서 확실히 하고 오자.”
그는 다시 웃으며 속삭였다. 보리스는 마치 옆집에 놀러 가는 것처럼 가벼운 말투였다. 하지만 리비는 긴장으로 온몸이 욱신거리는 것만 같았다.
왕이 자신과 보리스를 부른다.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숙부의 얼굴을 볼 기회다.
아니, 그런 건 별로 중요한 축에도 못 낀다. 태어나자마자 여동생의 아이를 버리게 할 만큼 비정한 왕이 아니던가. 그런 왕에게 과연 자신과 보리스를 향한 자비를 기대할 수 있을까.
“어, 언제 가는데?”
“곧.”
보리스는 곱게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그 얼굴에 리비는 다시 넋이 나가 버렸다.
휙.
방심하는 사이 그는 순식간에 리비의 몸을 타고 올랐다.
“네가 날 받아 줘서 기뻐, 리비.”
“어, 언제나 이러라고 한 건 아냐! 할 일이 있지 않아?”
리비는 그의 이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왕궁으로 갈 채비를…… 읏!”
얼굴을 목덜미에 파묻은 보리스가 내쉰 숨에 리비는 숨이 막혀 왔다. 그와 가까이 붙어 있을 때면 마치 작은 용광로를 끌어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모든 준비는 끝났어, 리비.”
귀에 속삭이는 소리는 설탕을 녹인 듯 달콤했다. 그 감각에 리비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걱정은 스르르 녹아내리고 말았다.
“나와 함께 가기만 하면 돼.”
더운 숨이 귓가에 훅 끼쳤다.
“와, 왕이 뭐라고 해? 우리를 부르는 이유가 설마…….”
도착하자마자 교수대로 보내려는 것은 아니겠지, 다음 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이건 재판이야.”
“재……판?”
리비는 간신히 입술을 떼어 물어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보리스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정말 잠시도 쉬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응. 신부 협상을 위한 재판이지.”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그다음 말이 이어질 때는 순식간에 음울한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누가 너를 가질 건지, 다 함께 왕궁에 모여서 결정하자고 말이야.”
“…….”
그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머릿속이 하얗게 비고 말았다. 덩달아 얼굴도 핏기라고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허옇게 변해 버린 입술로 리비가 달달 떨며 묻자, 보리스가 손으로 리비의 입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이겨야겠지.”
리비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뜨거운 입술이 그대로 리비를 집어삼켜 버렸다.
“우음…….”
그에게 떠밀리 몸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와 처음 몸을 섞은 이후로 그는 단 하루도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기사단 일과 영지를 가꾸는 일로 내내 바빴을 게 뻔한데도, 늦은 밤에라도 그녀를 깨워 신음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던 리비도 어느덧 사랑을 받고, 다시 그 사랑을 돌려주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침대에 걸린 몸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어느덧 익숙해진 무게감이 몸을 기분 좋게 짓눌러오자 리비가 작게 헐떡였다.
“불안해하지 마, 리비.”
잠시 떨어진 입술 새로 그가 속삭였다.
“어차피 내가 이길 거니까.”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의 근원이 궁금했지만 그녀는 더는 물을 수 없었다. 해일처럼 덮쳐 오는 남자 때문이었다.
***
왕궁으로 떠날 날이 시시각각 다가왔다. 모든 채비는 단 이틀 만에 이루어졌다. 함께 왕궁으로 갈 기사들과 성에 남을 기사들이 나뉘고, 보름 가까운 여정에 함께할 짐이 꾸려졌다.
그동안 리비가 할 것은 별로 없었다. 괜히 심란해진 기분에 바깥 산책도 하지 않은 채 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밤에는 어김없이 그가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자신을 찾아왔고, 그와 함께 잠들고 깨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세셔 왕국의 수도, 왕이 있는 왕궁으로 떠날 날이.
“…….”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건 보리스의 숱 많은 속눈썹이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다 큰 어른의 몸이지만 희한하게도 잠들어 있는 얼굴만큼은 소년티가 남아 있었다.
리비는 그 눈가를 가만히 손으로 쓸어 보았다. 그는 아직 잠에 취한 듯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
남자치고 기다란 속눈썹은 평소에는 눈 밑에 우아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고, 울 때는 그 끝에 눈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처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는 했다.
그의 보랏빛 눈과 어우러지면 그 효과는 더욱 배가되고는 했다. 여러모로 아주 쓸모가 많은 속눈썹이었다.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이 눈을 찌를 듯 말 듯 그의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리비는 그 머리카락을 가만히 걷어 주었다. 그제야 보리스의 미간이 펴지며 평온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리비는 조심스레 자신의 허리에 감긴 보리스의 팔을 떼어 내려 애썼다.
“잘 잤어?”
“응?”
위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제비꽃 같은 눈이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어…… 응.”
리비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쩐지 이런 순간마다 할 말을 잃는 쪽은 그녀였다.
“그만 일어나야 해.”
보리스가 말하자 리비는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보리스는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그런 친숙한 접촉마저도 자연스레 여겨질 정도가 되어 버렸다는 게 놀랍기만 했다.
‘하긴, 결혼을 인정받으러 가는 거니까.’
그를 자신의 남편으로 인정해 달라고, 레제트 공작과 혼인할 수 없음을 왕에게 요청하러 가는 것이니까. 알고 있었음에도 왕궁으로 출발하게 되자 그제야 현실감이 덮쳐 왔다.
“머리카락을 좀 자를까?”
리비는 보리스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어루만지다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머리를?”
보리스는 눈을 찌를 만큼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후, 불어 보았다.
“리비가 잘라 줘.”
“응?”
난데없는 요청에 리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녀의 의도는 이런 게 아니었다. 솜씨 좋은 이발사가 성안 어딘가에는 있겠지, 불러다가 머리를 잘라 달라고 하면 될 테지. 그렇게 생각하고 한 말이었다.
“잘라 줬었잖아, 전에는.”
보리스의 말에 리비는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하여간에 기억도 좋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야…… 전이니까. 그리고 알잖아, 그때 어땠는지.”
리비는 부끄러워서 어딘가로 숨고만 싶었다.
“응, 알아.”
보리스가 웃음을 터뜨리자 리비의 얼굴은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
“알면서 왜…….”
눈을 푹푹 찔러 대는 머리카락을 어찌할까 하다가 리비는 결국 직접 가위를 들었다. 그리고 죽어라 도망 다니는 보리스를 붙잡아다가 결국 머리를 잘라 주었다.
결과는 엉망이었다. 왼쪽과 오른쪽의 기이한 비대칭을 이룬 머리를 수습하고자 앞머리는 점점 더 짧아졌고, 그 결과 한동안 보리스가 마을 아이들에게 놀림 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도. 리비의 손길이 좋아.”
“왕을 만나러 갈 거잖아. 그런데 머리가 엉망이면…….”
“그래도 좋아.”
보리스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더니 느릿하게 문지르며 말했다. 그 가까운 온기에 리비는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꽉 붙들어 안고 말았다.
“그만, 그마안.”
길게 드리워진 머리카락이 목 언저리를 간질이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둘은 잠시 엉켜 있다가, 하녀들이 가져온 아침 식사를 한 뒤 가위를 가져오라 일렀다.
“정말…… 괜찮겠어?”
“물론이야.”
보리스는 눈을 꽉 내리감고 있었다. 리비는 한번 후, 한숨을 뱉은 뒤 조심스레 그의 앞 머리카락에 가위를 가져다 댔다.
서걱서걱.
날카로운 가위날이 머리카락을 잘라 내는 소리에 긴장감은 배가되었다. 어찌나 긴장되는지 땀이 맺힌 손 탓에 가위 손잡이가 미끈거릴 정도였다.
“……다 됐어.”
리비는 뒤로 물러나 그의 모습을 살폈다. 다행히 비대칭을 이루거나, 삐죽 튀어나온 부분도 없어 보였다.
“맘에 들어?”
보리스는 거울을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보더니,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리비를 보았다.
“응, 매우.”
리비는 그 모습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 이제 출발할 준비를 해야지?”
보리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리비가 선 자리까지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먼저 나가 있을게. 모든 준비가 끝나면, 너를 부를게.”
리비는 그 말에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왕궁으로 가기 위한 여정의 막이 올랐다.
***
수도로 가는 여정은 여러모로 순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악천후를 만나지 않는 이상 그 어느 것도 걸림돌이 될 수는 없었다.
외진 숲에 숨어 있다는 도적 떼들은 새카만 갑주로 무장한 칼리니 기사단의 등장에 겁을 집어먹었는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리비가 탄 마차는 기나긴 행렬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야말로 철통 수비가 가능한 곳이었다. 물론 그 어느 누가 그녀를 노리고 오더라도 마차까지 오기도 전에 기사단의 기사들에게 썰려 버릴 테지만.
짧은 기간 동안 준비한 것치고 행렬은 완벽했다. 마차는 넓고, 크고, 푹신한 의자를 갖춘 데다 승차감이 매우 훌륭한 편이었다.
제법 험한 길을 달려갈 때조차도 커다란 흔들림 없이 갈 수 있었다. 성에 있을 때에 비하면야 고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리비 자신이 자라 온 환경을 생각하면 수도로 가는 여정은 그다지 힘들게 여겨지지 않았다.
이전에 보리스의 말에 올라타 에드라크성으로 갈 때는 심신이 지치는 바람에 금방 나가떨어졌으나 지금은 편한 마차에 앉아서 가다 보니 매우 여유롭기까지 했다.
그렇게 보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세셔 왕국의 수도인 레가노가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로 와버렸어…….”
리비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보고, 또 보았다. 마치 신기루를 본 것만 같아서였다.
수도에 가게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일단 수도는 멀기도 했고.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갈 일 없는 곳이었다.
같은 나라 땅에 붙어 있는 도시지만 그녀에게는 까마득히 먼 어딘가, 하늘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는 그 어딘가였다.
심지어 그 방문을 보리스와 함께 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 한 일이었다.
세셔 왕국의 수도, 레가노는 있는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성이었다. 정확히는 왕성으로 불릴 만했다. 왕궁은 그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왕국의 수도는 곧 그 나라의 심장부와 같으니, 그곳이 점령당하면 곧 나라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세셔 왕국을 세운 초대 왕은 오랜 세월에 걸쳐 완벽한 요새를 지었고, 그것이 지금의 성이 되었다.
그다음 왕, 또 그다음 왕으로 이어지는 동안 이 거대한 성채 도시는 증축과 확장을 반복했고, 그리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제아무리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레제트 공작이라도 저 성채만큼은 정복할 수 없을 만했다.
그것을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한 리비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정확히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수도에 왔다는 것까지는 그래, 그럴 수도 있었다. 세셔 왕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수도를 한 번쯤은 올 수도 있지.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왕궁에 가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내가 왕을 만난다니.’
그저 왕을 구경하러 가는 게 아니다. 아주 중요한 볼일이 있어 가는 참이다.
그 ‘볼일’을 위해 보리스 일행은 정말이지 말굽에 날개라도 단 것처럼 달려왔다. 아마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그보다 더 빨랐을 것 같았다.
보리스가 그렇게 서두른 이유는 하나였다.
레제트 공작보다 더 빨리 수도에 당도하기 위해서였다.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야?”
리비는 매 맞는 아이가 된 기분으로 물었다. 왕궁에 가면 대체 무슨 일이 생길지 예측조차 할 수 없어서였다. 왕과 대면하고 그간의 일을 설명한다고 생각하자 벌써부터 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되도록 왕궁에 도착하는 시간이 멀어졌으면 했다. 늦게 간다고 해서 왕의 화가 풀릴 리는 없지만, 그 두려운 순간이 되도록 늦춰졌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러나 리비의 물음에 보리스는 이렇게 답했다.
“싸움은 먼저 치는 놈이 유리해, 리비.”
그는 나라를 구한 전쟁 영웅이 아니던가. 칼리니 기사단의 단장 입에서 나오는 전략이란 게 저런 거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주 뜬금없는 소리 또한 아니었다.
모든 협상의 기초는 협상의 우선권을 누가 가져오느냐에 달려 있다. 서로가 평등한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둘 중 하나는 상대방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보리스가 말하는 ‘먼저 치는 놈’이란 여론을 자신 쪽으로 끌어들여 협상이 유리하도록 선수 치는 쪽을 말한다. 가만히 있어 봐야 결국 당하기만 할 뿐이니까.
그렇게 상대방보다 우위에 서서, 상대방이 자신이 내민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것. 그것이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보리스가 먼저 친다고 해서 무조건 승리하리란 보장은 없다.
왕은 자신과 맞먹는 세력의 공작과, 자신의 왕국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기사단장 사이에 끼어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위치에 있다. 생각만으로도 골 아프고 힘든 일일 것이다. 왕은 힘든 일을 남에게 미룰 힘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응당 자신이 내려야 할 결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고자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 왕궁에 모여든 다른 귀족들이라거나.
그들은 그저 관람객이 아니다. 이 협상에 중요한 여론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리비, 싸움에는 머릿수도 중요해.”
그 말에는 리비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마을에서 편을 갈라 눈 던지기 놀이를 하거나 땅따먹기 놀이를 할 때면 가위 바위 보로 누가 더 많은 친구들을 데려가는지를 먼저 겨루곤 했다.
전투력이 막강한 친구를 데려오는 것도 중요했지만, 일단 싸우는 사람의 머릿수가 많아야 그만큼 더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귀족들이 과연 우리의 편을 들어 줄까.’
리비는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결국 자신과 비슷한 축으로 기울게 마련이니까, 귀족들은 결국 귀족의 편을 들게 될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무훈을 세우고 하루아침에 공작이 된 보리스가 아니라, 남부의 세력자인 레제트 공작 편을.
게다가 레제트 공작은 왕조차도 두려워하는 인물이니, 귀족들도 그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왕궁에 도착하여 왕과 귀족들을 자신과 보리스의 편으로 돌아서게 할 수 있을까. 리비는 이토록 불안했지만 보리스는 지나치게 태평스러운 모습이었다.
‘설마.’
리비는 불현듯 떠오른 불길한 생각에 소스라쳤다.
‘아무 생각도 없는 게 아닐까.’
보리스는 자신이 이긴다며 장담했다. 지나친 자신감이었다. 그러니까…….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는 말처럼.
“모르겠다.”
리비는 머리에 쥐가 날 것만 같아 생각을 그만두었다. 마차 안에 앉아서 고민해 봐야 여행의 피로만 더해질 뿐이다. 이제 곧 귀족들과 왕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할 텐데 초췌하고 피곤한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왕녀의 딸이야.’
세상 쓸모없을 것 같던 명분이나마 붙들어야 했다. 귀족들 앞에서 목을 뻣뻣하게 세우려면 출생의 고귀함이 가장 크게 작용할 것이므로.
리비는 여유를 되찾고자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성채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커다란 도개교가 내려오며 길을 만드는 것이 보였다.
여기에 오기까지의 모든 일들이 눈앞을 휙휙 스쳐 지나갔다. 그저 시골 마을 소녀로 살던 자신에게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난 것이다.
자기 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지만, 이건 단순히 평온히 흘러가던 삶에 던져진 돌멩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
원래 정해져 있던 궤도에서 튕겨 나온 것만 같았다.
하루아침에 왕녀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동시에 얼굴도 못 본 공작에게 시집가라는 왕명을 받았다. 그리고 혼자 올리는 결혼식 날, 소꿉친구에게 납치당했다.
음유 시인이 길에서 부르는 노래들이 한없이 허무맹랑하다고 여겼지만 자신이 겪은 건 더한 일 같았다. 언제나 현실이 가장 꿈같다더니.
이다음에는 또 뭐가 있을까. 무엇보다 두려운 건, 이다음에 닥칠 일이었다. 리비는 그것을 조금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매달린 채, 목적지조차 모르고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굴러가는 것만 같았다.
그 끝에 뭐가 있을지는 가봐야만 알 것 같았다.
리비는 깊은 한숨을 쉬며 다시 마차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왕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까. 아니, 그 전에 인사말은? 아니, 내가 인사를 하는 게 맞나? 말을 걸어도 되나? 왕에게 해야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은 뭐가 있지?
걱정을 끝도 없이 이어졌다. 드레스 위로 한껏 모아 쥔 손에 땀이 맺혔다.
보리스는 괜찮을까.
문득 든 생각에 그녀는 다시 창문으로 다가갔다.
보리스는 대열의 가장 앞쪽에 있었기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반 무장을 한 몸은 그 어떤 철갑보다 강해 보였다.
그는 자신과 달랐다. 보리스는 왕을 만나는 일에 대해, 레제트 공작과 대립해야 하는 일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태평할 수 있을까 싶었다. 때로는 그가 두려우면서도 티를 내지 않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자신이 불안해할까 봐 일부러 표정과 감정을 감춘 채 행동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보리스는 애초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정말 사람이 아니지.’
가끔 잊어버리기는 했지만, 그의 등 뒤로 돋아나는 날개를 볼 때면 그가 확실히 자신과 다르다는 걸 인지하곤 했다.
그의 정체는 여전히 안개 속이었다. 안다 해도 뭐가 달라질까.
지금으로서는 한 가지 길밖에는 없다.
그를 믿는 것. 그 수밖에는 없다.
***
마차가 성채로 진입하자 그 안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왕국의 수도이자 요새. 그 오랜 시간 전쟁을 겪으면서도 함락되지 않았던 그곳.
바닥에는 판판하게 다듬은 돌들이 깔려 있어 마차는 한층 더 부드럽게 나아갔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얼굴들이 하나같이 칼리니 기사단의 기사들을, 정확히는 가장 선두에 서 있는 보리스를 향한 것이 보였다.
그들의 눈에 비친 건 선망이자 동경이고 경외심이었다. 그들은 명백한 호의로 가득 찬 눈으로 기사단 일행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대기 바빴다.
아이와 어른 가릴 것이 없었지만 여자들은 특히 더 환한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하나같이 얼굴을 붉힌 채 지나가는 행렬을 지켜보는 여자들에게서 꺄꺄, 하는 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
그 시선을 눈치챈 리비가 얼른 커튼을 쳐서 시야를 가렸다. 귀족들의 반응만 생각했었지 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미처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들은 당연히 보리스 일행에게 호감을 가지고도 남았다.
까딱하면 레제트 공작에게 이 수도가 먹힐 뻔했는데. 전쟁에 진 자들의 말로란 그야말로 서글픈 법이다.
안정적인 삶의 터전을 잃을까 봐 내내 가슴 졸여야 했을 그들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리비 역시 그러했으니까. 전쟁은 수도에 사는 사람들이나 그녀처럼 시골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공평하게 두려운 존재였다.
그러니 그 전쟁을 끝낸 칼리니 기사단이, 그들을 이끄는 보리스가 그들 눈에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존재일 것이다.
일단 사람들의 호의를 샀다. 이건 보리스에게 결코 나쁜 징조가 아니다. 리비는 수도에 들어선 이래 내내 졸였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만 같았다.
성채에 들어와서도 본성이 있는 곳까지는 한참을 가야만 했다. 드디어 중앙부에 도착한 순간, 보리스의 신분을 확인한 성문지기가 문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왕궁이라 불릴 만한 공간에 들어섰다.
왁자지껄했던 바깥과 달리 안으로 들어선 순간 엄중한 공기가 주변을 에워쌌다.
그제서야 리비는 드디어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을 했음을 깨달았다.
성에 초대된 귀족들이 쓰는 숙소는 왕궁 본궁의 서쪽에 있었다.
건물 하나하나의 규모마다 입을 떡 벌리고 보게 만들었고, 외벽의 화려함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 곳에 발을 들이자 리비는 점점 더 주눅이 드는 기분이었다.
반면 보리스는 매우 여유롭고 무덤덤한 태도였다. 설마 연기인 걸까. 하지만 그의 평소 성격을 보건대 결코 연기 같을 걸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게 익숙한, 결코 주눅 들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건 더 놀랍잖아.’
리비는 옆에 서 있는 보리스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훌쩍 큰 키 탓에 목이 아프도록 꺾어야 그의 얼굴이 보일까 말까 했다.
날카롭게 깎인 턱 선과 굵은 목줄기에 어울리지 않게 눈은 잔뜩 우수에 젖어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물기에 잔뜩 젖은 채 울먹거리던 눈빛은 지금 보이지 않았다. 한없이 건조하고, 뭔가를 캐려는 듯 예리하게 빛나는 눈이 리비는 낯설기만 했다.
숙소로 쓰일 건물에 다가서자 두 사람을 안내하던 시종이 휙 뒤를 돌더니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따로 숙소를 쓰셔야 합니다.”
“네?”
시종은 리비를 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전…….”
리비는 두려움에 보리스의 옷깃을 감아쥐었다. 이 넓고 낯선 성에 온 것만으로도 무서운데 홀로 있어야만 하다니. 와락 밀려드는 무서움에 리비는 잔뜩 몸을 굳힌 채 보리스에게 딱 붙어 섰다.
그는 바짝 붙어선 리비를 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다 시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눈빛이 휙 바뀌었다.
“어째서인가?”
그의 목소리는 낮고 굵직했다. 물론, 원래도 그렇기는 했으나 그 어조만큼은 확연히 달랐다. 금세 물을 뚝뚝 흘려 댈 것만 같은 그 목소리가, 저처럼 건조하게도 흘러나올 수 있는 거구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자신을 대할 때의 온도 차가 확연하다는 것을 리비는 새삼 깨달았다. 이럴 때면 그는 영 낯선 사람으로 보이곤 했다. 그 간극이 엿보일 때마다 리비는 어쩐지 두려워지곤 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무른 것처럼 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저처럼 돌변하는 그가.
“아가씨께서는 아직 기사단장의 부인이 아니십니다. 이 결혼은 폐하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으니 두 분이 같은 방을 쓰시는 건 혼인을 안 한 남녀가 같은 방에 있는 셈입니다.”
그 말에 리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었으나 그 말은 아직 결혼도 안 한 상태로 붙어먹은 두 사람을 비난하는 걸로 들렸다.
“알겠네.”
그는 딱딱하게 대꾸한 뒤 리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협상이 끝나면 같은 방으로 옮길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만 조금 참아.”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속삭이자 리비는 기이한 안도감이 돌았다.
“조금 떨어져 있어 불편하겠지만 참아.”
“그, 그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리비의 귓가는 더욱더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바로 옆에 시종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흠흠.”
옆에 서 있는 자신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채 속삭이는 보리스에게 일깨워 주려는 듯 시종이 얕은 기침을 반복했다.
“마저 안내해.”
“알겠습니다.”
시종은 나와 보리스를 각각의 처소 앞에 데려다주었다.
“머무시는 동안 하이든 백작 영애께서는 왕궁 호위병의 호위를 받을 겁니다.”
“우리 측에도 기사가 있는데.”
“아가씨는 왕궁의 소속이십니다. 아직은.”
시종은 재차 강조했다. 결코 낮은 신분이 아닌 듯 보이는 남자는 재차 리비의 소속이 아직 보리스 쪽이 아님을 누차 강조했다. 보리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뒤에 따라온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순식간에 칼리니 기사단의 정예 기사들인 하인즈와 디노, 크레이그가 문 옆을 지키고 섰다. 그러자 왕궁의 호위병들이 불편한 듯 그들을 슬쩍 노려보다가, 흉흉한 그들의 기세에 슬며시 다시 앞을 보고 섰다.
세 사람의 외모는 칼리니 기사단원들 중에서도 손꼽히게 험악한 편이었다.
얼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칼자국이라든가, 전투 중 날아온 화살을 맞고서 한쪽 눈을 잃는 바람에 차고 있는 안대가 그러했다.
“불편한 게 있으면 즉시 말해, 알았지?”
그 목소리에 리비는 긴장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 그가 있어 다행이다. 보리스가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렇게나 믿음직할 수 없었다.
“불편하실 리 없습니다. 이 방은 특별히 마련된 손님방으로…….”
“알았어, 보리스. 맘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즉시 얘기할게.”
리비는 시종의 말을 자르며 즉시 대답했다.
“이따 봐, 보리스.”
보리스는 엷은 눈웃음을 지으며 리비를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어쩐지 가슴께가 두근거렸다.
그러고 보니 에드라크성에서는 주로 보리스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일이 많았던 반면, 왕궁에서는 리비가 보리스를 올려다보는 빈도가 확실히 높아졌다.
그 사실이 리비는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자기보다 더 높이 있거나 말거나 보리스는 한결같이 그녀를 저런 눈빛으로 봐주었으니까. 그게 이 낯선 곳에서 얼마나 안정을 가져다주는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리비에게 배정된 방은 시종이 말한 대로 널찍하고 나름대로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방 안쪽 깊은 곳까지 햇빛이 들이쳐 실내는 환했고, 겹겹이 비단이불을 겹쳐 만든 침대는 보기만 해도 폭신해 보였다. 하지만 저 침대에서 결코 편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만으로도 긴장되는 왕궁이기에 그랬다. 리비가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방 안에 들어와 혼자 남겨져 사색에 잠길 새도 없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폐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저는 시녀장인 데리아라고 합니다. 치장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들어온 이들은 왕궁의 시녀들이었다.
“아…… 저, 고마워요.”
시녀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이가 손짓하자 다른 시녀들이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고 일을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는 화려한 색감의 드레스와 보석이 담긴 함 등이 들려 있었다.
“저도 옷을 가져왔는데요.”
리비는 한쪽 구석에 얌전히 놓여 있는 옷상자를 가리켰다.
워낙 급하게 왕궁으로 오느라 많이 꾸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격식을 갖출 만한 드레스 몇 벌은 들어 있었다. 시녀장은 그쪽을 흘긋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왕궁에서는 격식에 맞는 옷차림을 하셔야 합니다. 궁중 예법은 아주 까다롭지요. 옷소매 하나, 장신구 하나 모두 예법을 따라 착용하셔야 합니다. 자유로운 영지와는 다르지요.”
“…….”
그 말에 리비는 주눅이 들고 말았다. 자신이 엄숙한 궁중 예법 따위를 제대로 알 리 없다.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그런 걸 가르치겠는가. 급한 대로 베스에게 이것저것 물어서 인사법 정도나 익혔을 뿐이다.
사실 왕궁에 오기 전 가장 걱정한 것이야말로 그 문제였다.
행여 미숙한 궁중 예법 때문에 전쟁 영웅인 보리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건 아닐까, 모두 자신을 돌아가신 왕녀님의 딸로 알고 있을 텐데 돌아가신 어머니의 체면도 마구 깎아 버리는 건 아닌지.
“폐하께서 미숙하신 아가씨를 위해 모든 준비를 해놓으라 이르셨습니다. 준비는 완벽하니, 걱정하지 마시고 저를 따라 주세요.”
짝.
손뼉 소리와 함께 다시 문이 열리고 안으로 김이 펄펄 나는 욕조가 들어왔다.
“접견식까지는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 안에 단장을 마쳐야 합니다.”
겨우 두 시간? 그들이 들고 온 것을 보면 결코 그 안에 끝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감히 토를 달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시녀장은 마치 전장에 나아가는 전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그녀를 따르는 수밖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숨 가쁜 여정으로 피로는 쌓일 대로 쌓였지, 당연히 피로가 누적된 얼굴이 좋아 보일 리 없었다. 조금이라도 때 빼고 광을 낸 뒤 왕을 만나고 싶은 건 리비도 매한가지였다.
“알겠어요.”
어느덧 시녀 둘이 다가와 리비의 옷을 스르륵 벗겨 냈다. 리비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에드라크성에서도 시중들어 주는 하녀들이 있었지만 이곳의 시녀들은 매우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몇 번 몸을 스쳤을 뿐인데 옷은 매끄럽게 벗겨졌고, 어느덧 그녀는 욕조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적당히 데워진 물 온도에 리비는 모든 근육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으음, 신음을 흘리다가 화들짝 놀라 입을 가렸다. 그러나 시녀들은 조금도 신경 쓰는 기색 없이 묵묵히 그녀의 몸을 문질러 닦고, 머리를 감기고 옷을 입혔다.
“접견식이 끝나면 저녁에 열리는 왕궁 무도회에 참석하시게 됩니다.”
“무도회요?”
리비는 시녀가 내민 가운에 무심코 팔을 집어넣다가 멈칫했다.
“네, 환영 무도회가 있습니다.”
“환영?”
리비는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되물었다. 그러니까, ‘환영’ 무도회라는 건 즉 리비와 보리스를, ‘우리’를 환영한다는 의미인데.
‘왕명으로 정한 결혼을 파투 냈는데 우리를 환영한다고?’
심지어 이건 재판을 위한 과정일 뿐이다. 보리스와 자신은 피고가 되어 재판장으로 불린 것이다. 그런데 국왕은 환영 무도회를 마련해 놓았다고 했다.
리비는 선뜻 믿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들은 게 맞나 하는 시선으로 데리아를 보자 그녀는 재차 설명했다.
“온 귀족들에게 아가씨를 소개하실 겁니다, 정식으로요.”
“나를……요?”
“그렇습니다.”
시녀장의 말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 환영 무도회 이야기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너무 이상했다.
“어째서죠?”
자신과 보리스는 왕의 얼굴에 먹칠을 한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환영 무도회까지 열어서 그녀를 정식으로 소개한다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야 아가씨께서는 엘가 왕녀님의 하나뿐인 핏줄이시니까요.”
“하지만…… 난…….”
태어났을 때 친부의 품에 안겨 멀리 쫓겨난 신세였다. 태어날 때는 그렇게 박대해 놓고 새삼스레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머리가 복잡한 사이 시녀들은 부지런히 그녀의 몸의 물기를 닦아 냈고, 어느 정도 물기가 가시자 그녀가 밖으로 나오도록 도와주었다.
“조심하세요, 아가씨.”
가운을 걸친 채 욕조 밖으로 나오자 좀 더 빠른 손길이 이어졌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을 수건으로 잘 닦아 낸 뒤 시녀가 내민 손을 잡고서 거울 앞에 가서 앉았다.
왕실의 상징인 흰 장미꽃 무늬로 테두리를 상감한 거울 앞에 앉자 시녀 서넛이 달라붙어 리비의 머리칼을 말리기 시작했다.
두툼한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말리고, 한 가닥씩 곱게 빗어 내리기를 반복하자 어느덧 리비의 머리카락은 비단 같은 매끄러운 광택을 뽐냈다. 왕궁 시녀들의 솜씨란 정말 놀라웠다.
“엘가 왕녀님과 똑같은 색이네요.”
머리를 빗던 시녀 중 하나가 무심결에 소곤거리는 소리에 리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왕녀님과 똑같다고요?”
“아, 네.”
“엘가 왕녀님을 본 적 있는 거예요? 돌아가셨다고 하던데. 어떤 분이셨어요?”
리비는 저도 모르게 다다다 질문을 쏟아 냈다. 이런 질문은 아버지인 하이든 백작에게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기에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간 아버지에게 상처를 되새김질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저, 그게…….”
입을 열었던 시녀는 데리아의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다시 말없이 빗질에 몰두했다. 물어보면 안 될 것인가. 왕녀가 몰래 기사와 정을 통해 아이를 낳은 것이기에 쉬쉬하는 걸까.
“초상화를 통해 봤을 겁니다. 아직 남아 있거든요.”
“아…… 혹시 볼 수 있을까요?”
리비가 불쑥 꺼낸 말에 시녀장은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왕녀궁에 난 화재로 엘가 왕녀님의 초상화들이 전소됐습니다.”
“아, 네.”
리비는 순간 자신이 너무 흥분했나 싶어 금세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시녀들의 손은 다시금 빨라졌다. 머리를 땋고, 이리저리 꼬아서 동그랗게 만들어 옆머리에 붙인 뒤 진주를 드문드문 박아 장식한 뒤 작은 관까지 씌워 주었다.
크림빛 실크에 황금빛 자수가 놓인 드레스는 기다란 망토가 등 뒤까지 치렁치렁 이어져 있었다. 궁중 예복이라 그런지 결혼식 때 입었던 의상 못지않게 무겁고 긴 옷자락에 리비는 잠시 휘청거렸다.
예복까지 갖춰 입은 거울 속 모습은 그녀가 봐도 낯설어 보일 정도였다.
“오늘은 시간이 부족해 많이 신경 써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니에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거울 속 모습은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무언가였다. 많이 신경 쓰지 못한 게 이 정도라면 대체 맘먹고 꾸며 주면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접견실로 가실 시각입니다.”
그 말에 리비는 다시 바짝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 보리스는, 아니 칼리니 기사단장님은.”
그때 시녀 한 명이 들어와 데리아에게 속삭였다.
“이미 와 계시다는군요.”
데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리비를 문가로 이끌었다. 리비는 등 뒤까지 길게 늘어진 망토를 밟을까 걱정하며 조심스레 발길을 옮겼다.
“리비.”
문이 열리자 보리스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도 리비처럼 궁중 예복을 걸친 말끔한 차림새였다. 검은색 예장에 목깃과 소매 끝을 장식한 장신구들이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
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왜 그렇게 봐?”
리비는 잔뜩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워.”
순간 리비의 머릿속에 위험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여기선 안 돼.”
리비는 급격히 가까워진 보리스의 얼굴을 즉시 손으로 막아 냈다. 손바닥 아래 말캉한 입술의 감촉을 느낀 리비는 저도 모르는 새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알았어. 그럼 다른 데선 되는 거지?”
“응, 뭐? 응?”
무심코 대답하다가 리비는 기겁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보리스는 리비의 손바닥에 깊게 입술을 누른 뒤 떼어 냈다.
“접견실로 가야 돼, 리비.”
보리스는 당연한 듯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고, 리비는 조심스레 그 위에 팔을 얹어 놓았다.
***
접견실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자 리비는 떨리는 몸을 더욱 주체할 수 없어졌다. 앞에 버티고 선 문은 그저 단순한 문이 아닌 듯, 마치 여는 순간 이세계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차갑게 식으면서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이 문 너머에. 왕이 있다.
“겁먹지 마.”
“응? 으응…….”
리비는 보리스의 망토 자락을 꼭 붙든 채 그의 뒤로 숨었다. 보리스는 자기 옆에 매미처럼 매달린 리비를 내려다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에 리비의 마음에 안정이 찾아들었다.
낯선 성, 낯선 왕. 온통 낯선 것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그녀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보리스밖에 없었다. 리비는 보리스가 자신을 두고 어딘가로 가버릴까 봐, 그래서 혼자 남겨질까 봐 더럭 겁이 났다.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보리스가 자신을 두고 그러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리비는 불안했다. 어떻게 해야 이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반면 보리스는 매우 여유로워 보였다. 특별히 행동이 흐트러지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쓸데없이 긴장한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리비는 그의 그런 모습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내가 알던 보리스가 맞는가, 에드라크성에서 툭하면 자신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려 대던 그이가 맞는가. 리비는 혼란스러웠다.
“왜 그렇게 봐?”
“…….”
한참이나 자기를 뚫어져라 보는 시선에 결국 보리스가 먼저 물었다.
“리비?”
“응? 어, 아…….”
리비는 당황한 나머지 그의 팔을 꼭 붙들고 있던 손을 서둘러 풀어 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다시 단단히 손가락이 얽혔다.
“긴장돼?”
신비로운 빛을 띤 보랏빛 눈동자가 그녀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 마치 머릿속을 그대로 쪼개서 구경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긴장은, 무슨…….”
했다, 사실은. 당연히 긴장하지. 하고도 남지. 무엇 하나 긴장하지 않을 만한 게 없었다. 평생 구경 한번 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왕궁에 와본 것만으로도 그녀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큰 이변이었다.
물론 첫 번째는 보리스와 이렇게 엮인 것이다. 그것을 차마 ‘결혼’이라고 이름 붙이지 못한 건 아직 왕의 승인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왕의 승낙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지만 그것은 보리스의 생각일 뿐, 결코 왕의 의지라고는 할 수 없었다.
‘왕의 승인을 받아 내지 못하면 어쩌지.’
그 생각을 하자 리비는 손끝이 싸늘해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고 강행한 결혼. 혹여나 왕이 보복하게 된다면.
‘하지만 날 소개할 거라잖아.’
자그마치 ‘환영’ 무도회를 열고서 자신을 소개시킨다고까지 했다. 그렇다면 영 희망이 없는 건 아니지 않을까.
“칼리니 기사단장, 에드라크 공작이 입장합니다!”
시종장이 커다랗게 외치는 소리에 리비는 정신을 차렸다.
끼익.
거대한 문이 열리자, 온통 흰 빛에 리비는 눈을 잠시 감아야만 했다.
“…….”
리비는 흰 대리석으로 꾸며진 접견실에 들어선 순간, 이곳이 천국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휩싸였다. 흰색, 흰색.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흰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접견실은 신이 잠시 내려와 쉬는 공간으로 쓴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웅장한 공간이었다.
접견실은 수도 내외의 귀족뿐 아니라 외국의 사신들을 접견하는 자리이므로, 왕국의 힘과 부를 과시하는 첫 기회를 제공하는 곳인 만큼 그 규모와 아름다움이 특히 독보적이었다.
흰 장미 문양이 새겨진 금빛 휘장이 가득 걸린 천장과 벽면은 왕궁의 위엄을 드러내 주었고, 바닥에 깔린 융단도 화사한 크림빛이었다.
그제야 리비는 왕이 왜 이런 의상을 내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리비가 왕실의 소속임을 알리는 작은 장치였던 것이다.
접견실 문에서 왕이 앉아 있는 왕좌까지는 한참을 걸어야만 했다. 접견실 안에 사람이 가득했음에도, 옷자락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가장 크게 들릴 만큼 주변은 온통 고요했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잡고 있는 보리스의 손에 더욱 꽉 힘을 주었다. 마주 잡아 오는 손길에 리비는 조금이나마 진정할 수 있었다.
보리스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 걱정 할 필요 없다는 듯,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그 눈빛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리비도 그것을 믿고 싶었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왕뿐만 아니라 레제트 공작의 항의를 어떻게 이겨 낼 것인가.
실상 남부의 실세, 지배자, 왕국의 절반을 차지한 왕과도 같은 존재인데. 그렇기에 매번 전쟁 때마다 허덕였던 것이었고, 왕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걸음은 바삐 이어졌다.
왕의 앞까지 가는 길은 길고도 넓었다. 양옆으로 도열해 있는 왕의 기사들을 흘금거리며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양옆에서 꽂히는 시선에 정신이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제대로 걸어가고 있기는 한 걸까.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양옆에는 기사들뿐만 아니라 궁정 출입이 가능한 귀족들도 함께 서 있었다. 남자들이고 여자들이고 할 것 없이 화려하게 치장하고서 모여 있는 모습이 꼭 더운 지방의 강에 산다는 알록달록한 비늘을 가진 물고기들 같았다.
특히 귀족 여자들의 차림새는 보기만 해도 확 눈길을 끌 만큼 화려했다. 자신도 한껏 차려입기는 했지만 그들에 비하면 한없이 모자라게 느껴질 만큼. 일단 아무리 비싼 보석과 드레스로 휘감아도 자라 온 환경 속에서 몸에 밴 품위는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는 없는 바로 그것이었다.
몰려든 여자들은 저마다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이다가 리비와 눈이 마주치자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들의 시선은 아주 잠시 리비를 향했을 뿐, 곧이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곁에 서 있는 보리스에게로.
삼삼오오 모여 있는 그들의 눈에 담긴 건 절반은 호기심, 또 절반은…….
“…….”
젊은 여자들, 아니 젊고 늙고에 관계없이 양옆에 늘어선 모든 귀족 여자들의 눈은 마치 못이라도 박힌 듯 소문 속의 기사단장에게 꽂혀 있었다.
“짐승이라더니.”
누군가 속삭인 소리가 유독 또렷하게 귓가에 와 꽂혔다.
“맞네요, 아름다운 짐승.”
감탄해 마지않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밤에도 짐승이려나?”
노골적인 평가까지.
이렇듯 말이 잘 들리는 건 한두 명이 보리스에 대해 얘기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보리스를 보고, 보리스를 향해 진득한 흠모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기나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칼리니 기사단장을 직접 본다는 호기심이었다면, 이제는 완연한 호감에 가까웠다. 사람의 생김새란 이토록 인간의 마음을 뒤흔드는 법이다.
리비는 그들의 시선을 따라 보리스를 슬며시 올려다보았다. 높은 굽이 달린 구두를 신었어도 그와는 한참이나 키 차이가 났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한참이나 젖혀야 했다. 그렇게 해도 보이는 거라곤 깎아지른 듯한 턱 선뿐이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길게 뻗은 속눈썹이 유독 돋보였다.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기사라기엔 지나치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생김새였다.
물론 기사들 중에도 귀족가의 자제가 있기에 곱상하게 생긴 이들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보리스의 외모는 그것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였다. 그 생각이 들자 리비는 갑자기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잘났다. 꿀릴 것 없는 남편감이다. 손에 쥔 검 하나만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배경도, 재력도, 그 무엇도 없이. 가문이 빵빵한 귀족 출신 기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인함이었기에 그의 외모는 더더욱 빛이 났다.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보아도 모두 보리스를 향해 홀린 듯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리비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시선을 피했다가도 이내 다시 노골적으로 보리스를 훔쳐보았다.
개중 누군가는 리비와 유치한 눈싸움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에게 자석처럼 달라붙는 시선을 떼어 낼 수는 없었다.
보리스는 어떻게 이 시선에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걸까. 리비는 내심 그것이 더 놀라웠다.
늘 얼굴을 붉힐 만큼 수줍음이 많던 보리스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그는 전혀 딴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리비는 그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비라고 해서 그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 역시 어릴 때부터, 그리고 다시 그를 만난 후부터 넋 놓고 그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으니까.
그의 외모는 어디에 있든 사람의 시선을 끌게 마련이었다.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신비롭고, 애틋하고, 묘한 모성애를 자극하는 동시에 야성미도 흘러넘쳤다.
……그리고 그 보리스가 좋아하는 건 바로 리비였다.
자신만을 원한다고, 그리고 어릴 때의 약속을 지키라며 협박하지만 않았어도 그에 대한 평가는 훨씬 후했을지도 모른다.
궁정용 예복은 또 왜 이렇게 길고 무겁고 치렁치렁한 것인지, 걸을 때마다 자꾸만 다리를 휘감아 왔다.
까딱 잘못했다간 그대로 드레스에 몸이 휘감겨 자빠지기 딱 좋았다. 아마 그렇게 되면 입궁 첫날부터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리라.
다름 아닌 보리스를 보며 얼굴을 붉히는 저 여자들에게.
“…….”
그 생각을 하자 더더욱 넘어질 수 없었다. 리비는 턱을 잔뜩 치켜올렸다. 곁에 선 보리스가 자신의 손을 꽉 붙든 채 마치 거대한 나무처럼 자신을 지지해 주고 있었기에 무사히 걸어갈 수 있었다.
적어도 저 여자들에게 기죽는 모양새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비록 궁정을 드나들며 쌓아 올린 기품 같은 건 따라잡을 수 없을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고 살아온 세월이, 당당함이 있다.
리비는 허리를 더욱 곧게 펴고 턱을 끌어 올렸다. 어느덧 왕의 코앞까지 와 있었다. 그녀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리비, 괜찮아? 많이 긴장한 것 같아.”
그가 옆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에 리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의도치 않게 목소리는 둘로 갈라져 나왔다. 리비는 당황해서 흠흠, 헛기침을 한 뒤 재빨리 대답했다.
“당연하지. 안 괜찮을 리가 있어? 난 내 숙부님을 뵈러 온 것뿐이라고. 어머니의 오빠.”
그래, 옆집으로 놀러 가듯이 그렇게. 왕과 자신은 엄연히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닌가. 비록 얼굴 한번 못 본 채 정략결혼의 희생물로 쓰이기는 했지만.
“하나도 긴장 안 돼.”
리비는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보리스는 그녀를 따라 웃는 듯하다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리비, 입술 떨려.”
리비는 입술을 단단히 감아 문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쩐지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지 않는 것 같은 건 다 기분 탓일 거라고 여기면서.
“칼리니 기사단장, 보리스 세티아니 에드라크가 안드로스 왕께 안부 여쭙니다.”
보리스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인사를 청했다. 그의 등 뒤로 늘어진 검은색 망토가 그 움직임에 따라 크게 펄럭였다. 그 아주 작은 동작에도 귀부인들 사이에서 어머, 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오는 걸, 리비는 놓치지 않고 들었다.
거기에 신경 쓰느라 리비는 그만 인사할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원래는 보리스와 동시에 예를 올렸어야 하지만 리비는 멀뚱히 선 채 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드로스 왕.
세셔 왕국의 왕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리비는 저절로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흠흠.”
리비가 멀뚱히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시종장이 작게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리비는 드레스를 넓게 펼쳐 들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속으로 무수히 외우고 외운 자세가 부디 틀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엘가 왕녀와 하이든 백작의 장녀, 리비 하이든이 인사를 올립니다.”
소개가 끝나자 크고 작은 웅성거림이 들렸다. 왕녀의 딸임을 강조한 의도는 바로 그것이었다.
다행히 목소리는 그다지 떨리지 않았다. 옆에는 보리스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어서 오너라.”
왕은 리비를 향해 팔을 활짝 펼쳐 보였다. 입꼬리를 한껏 치켜올려 웃는 그 모습에 리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벌써 이렇게 컸구나.”
그가 말하는 소리에 리비는 슬쩍 기가 차려고 했다. 안드로스 왕은 마치 어릴 때부터 그녀를 봐온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저 난데없는 친숙한 태도라니. 리비는 잠시 얼떨떨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
“왜 그러지? 나는 네 숙부란다.”
왕의 동글동글한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난생처음 본 자신에게 조카딸이 쪼르르 달려가 안길 거라고 생각이라도 한 것일까.
문득 밀려온 본능적인 거부감에 리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기다란 옷자락을 밟고 넘어지려는 걸 보리스가 잽싸게 받아 안았다.
순간 접견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호기심 어린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던 이들이 일제히 높은 왕좌에 앉아 있는 안드로스 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최고급 담비를 둘러 만든 붉은 벨벳 천으로 된 의상과 금으로 된 왕관을 걸친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호화롭게 꾸며진 접견실처럼, 그는 언제나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는 힘을 과시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조카딸로부터 외면당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그녀를 향해 팔을 벌리고 있던 왕은 민망했던지 팔을 슬그머니 내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허허, 다 큰 숙녀를 안아 보자고 하다니, 내가 결례를 범했군.”
껄껄, 웃는 소리가 드넓은 접견실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기운차던지 리비는 더욱 몸을 움츠리며 생각했다.
매일 연습이라도 하는 걸까.
자고로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것도 권력이라고 했다. 아무도 쉬이 웃지 못하는 접견실에서 왕만큼은 큰 소리로 웃어젖힐 수 있었으니까.
호탕하게 웃는 소리였지만 듣는 사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웃음소리이기도 했다. 절대 자연스러운 웃음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보리스.”
리비는 작게 속삭이며 저도 모르게 보리스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그러자 보리스는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희한하게도, 그 힘이 리비에게는 크나큰 위안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리비는 보리스의 손길에 그나마 평정을 되찾고 서 있을 수 있었다.
차차 머릿속이 정리되자 지금 자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에 생각이 미쳤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왕을 무시한 처사가 되었으니까.
“보리스, 괜찮아.”
그녀는 보리스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허리에 감겨 있던 손이 천천히 풀려나자 리비는 앞으로 걸어가 다시 왕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갑작스러운 은혜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내내 왕궁 밖에서 자라서 예를 잘 모르오니,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폐하.”
드레스 자락을 펼치며 사뿐히 앉았다가 일어나는 동작에 왕은 흡족한 듯 미소를 흘렸다.
“그래, 조카딸을 보니 죽은 엘가가 생각나는도다. 참 아름다운 누이였는데. 이리 다시 보니 반갑기 그지없어. 하이든 백작만 아니었다면 내가 딸처럼 키웠을 것을.”
“…….”
왕이 하는 헛소리에 리비는 표정 관리를 하려 생긋 웃어 보였다.
“왕궁에 눌러살라 했는데도 고집을 꺾지 않고 기어이 왕궁을 나갔지.”
쯧쯧, 그는 혀를 차며 과거를 회상하는 듯 가늘게 눈을 떴다.
“그런데 이런 일로 다시 만날 줄이야, 응?”
왕은 리비와 보리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리비는 또다시 속이 배배 꼬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차마 내색할 수는 없었다.
왕이 말하는 ‘이런 일’이란 실상 좋은 일은 아니었다. 신부 하나를 두고서 양측이 대립각을 세울 일에 왕이 끼어 있으니까. 왕으로서는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자칫하면 겨우 평화를 찾은 왕국에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폐하를 뵐 수 있음에 무한한 영광입니다.”
리비는 겨우 대답했다. 왕이 눙치며 말하면 말할수록 더더욱 바짝 몸이 긴장되었다.
어쨌든 그는 왕이다. 사사로운 잘못 따위는 티끌만큼의 흠도 되지 않는 왕. 누군가 그 잘못을 들추려 한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에 생각이 미치자 리비는 목이 말라 왔다. 마른침을 몇 번 삼키며 왕의 의중을 헤아리려 애썼다.
자신과 보리스를 어쩔 것인지, 이대로 결혼을 승낙해 줄 것인지, 아니면 레제트 공작과의 약속을 우선으로 여길 것인지.
하지만 좀처럼 왕은 그 속내를 비치지 않았다. 두 사람을 환영해 주기는 했으나 그것이 곧 결혼 승인을 뜻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여기에 온 목적도 ‘신부 협상’ 테이블에 앉기 위해서였으니까.
리비는 긴장된 시선을 돌려 보리스 쪽을 바라보았다.
“…….”
그는 지나치게 평온해 보였다. 왕을 대하면서 딱히 숙이는 듯한 태도도 아니었다. 자신은 바닥을 딛고 서 있는 자체만으로도 버거운데, 그는 그저 가까운 정원에 산책이라도 나온 듯 가뿐한 모습이었다.
“긴 이야기는 나중에 차차 하기로 하지. 또 손님이 올 것 같아서 말이야.”
그 순간 접견실의 육중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리비는 그 소리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 사이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오는 남자는 처음 보는 이였지만 보자마자 대번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레제트 공작.’
붉은 융단 위를 척척 걸어오는 발걸음마다 오만함이 뚝뚝 떨어지는 중년의 남자였다.
보리스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남편이 되었을 남자. 리비는 공작이 서 있는 곳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왕을 배출해 낸 가문의 수장으로 살아왔기에 타고난 거만함이 얼굴 전체에 뚝뚝 흐르고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뒤로 빗어 넘겨 고정시킨 머리는 번쩍거리는 윤기가 흘렀고, 바싹 마른 얼굴에서는 어떤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늘게 뜬 눈은 흐린 하늘색이었다.
금실로 수놓은 옷에는 보석이 빼곡이 박혀 있어서, 그가 걸을 때마다 번쩍번쩍 빛을 쏘아 댔다. 열 손가락에도 모두 알 굵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가 입고 걸친 것들만 가져다 팔아도 작은 성 하나 정도는 사들이고 남을 것 같았다.
공작은 서 있는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눈동자의 움직임만으로 주변을 훑었다. 흡사 먹이를 찾는 사마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던 그의 눈길이 정확히 한곳에 머물렀다.
리비를 발견한 레제트 공작의 눈에 순간 광채가 돌았다.
“…….”
본능적인 두려움에 쿵쿵 뛰기 시작한 심장에 안정하기가 어려웠다.
리비는 공작과 눈을 마주치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보리스에게 더욱 찰싹 달라붙었다. 보리스는 걸치고 있던 망토를 길게 펼쳐 어미 새가 아기 새를 감싸듯 그 안으로 리비를 집어넣었다.
리비는 보리스에게 꼼짝없이 안긴 채로 숨만 내쉬었다. 강하게 끌어당겨져 안긴 탓에 숨을 제대로 쉬기도 힘들었지만 더없이 아늑한 품이었다. 그 시선을 피하고 나자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었다.
“칼리니 기사단장?”
레제트 공작이 걸어오다 말고 멈춘 그 자리에서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물론 진실한 웃음은 아니었다.
“보리스, 괜찮아.”
언제까지고 그의 품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리비는 가만히 그의 몸을 두드렸다. 보리스가 망토를 젖히고 안에 숨은 리비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괜찮다니까, 보리스.”
리비는 재차 그를 안심시켰다. 리비를 향해 있던 시선은 이내 날카롭게 바뀌어 눈앞의 남자를 향했다.
리비는 살그머니 그의 망토를 젖히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바로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레제트 공작과 눈을 마주쳤다. 레제트 공작은 보리스보다 한참 작았고, 리비보다는 조금 큰 정도였다.
흉흉한 눈빛과 달리 몸집은 아담한 편이었다. 보석을 가득 붙여 만든 예복을 입고 있어서인지 옷 속에 사람이 푹 파묻힌 듯한 모양새였다. 멀리서 보면 걸어 다니는 보석 더미처럼 보일 것 같았다.
“……똑같이 생겼군.”
레제트 공작이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소리에 리비의 연녹색 눈에 의문이 어렸다. 누구와 닮았다는 것일까. 레제트 공작이 알 만한 사람이…….
“제 어미를 꼭 닮았어.”
레제트 공작이 뱉은 말에 리비의 눈이 커졌다.
“제 어머니를 아시나요?”
리비는 대뜸 질문을 던졌다.
“물론 잘 알지.”
레제트 공작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뱀 같은 미소에 소름이 쭉 끼쳤다.
“아주 아름다운 왕녀였거든.”
그렇게 말한 남자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훑었다. 새빨간 혀가 창백한 얼굴과 대비되어 유독 붉은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나간 자리에는 번들거리는 자국이 생겼다.
“금발에…… 반짝이는 연녹색 눈,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까지, 아주 꼭 닮았어.”
이목구비를 하나씩 이름에 올릴 때마다 남자의 뱀 같은 눈이 리비의 얼굴을 하나씩 훑고 지나갔다.
“……정말 똑같아.”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동시에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빛나는 눈이 불길했다.
아주 맛있는 먹잇감을 발견한 듯 공작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 시선에 리비는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쭉 돋는 걸 느꼈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지만 자신이 겁을 집어먹었다는 걸 상대방이 아는 걸 원하지는 않았다. 리비는 허리를 곧게 펴고 바른 자세로 레제트 공작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모습에 레제트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꽤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한 듯 입가에도 뒤틀린 미소가 어렸다.
“마치 살아 돌아온 것 같군. 기대했던 대로…… 아니, 그 이상이군. 고집스럽게 빛나는 눈이 한층 매력적인걸?”
레제트 공작은 기이하게 눈을 빛내며 리비에게로 한 발 더 다가섰다. 리비는 그가 자신을 통해 누군가를 보고 있음을 알아챘다. 레제트 공작이 보는 건 자신이 아닌 엘가 왕녀의 환상이었다.
‘설마 나를 원한 게……?’
엘가 왕녀와 닮아서일까.
마치 자신의 골수까지 파먹을 것 같은 시선에 리비는 모아 쥔 손을 더욱 움켜쥐었다.
자신이 엘가 왕녀와 그렇게나 닮은 것일까. 레제트 공작은 어머니인 엘가 왕녀에 대해 알고 있다. 그저 한 번 봤다거나, 말을 몇 번 나눠 본 느낌이 아니었다. 저 지독한 눈빛은…….
“에드라크 공작 부인이오.”
위압감 있는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보리스였다. 리비는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지, 리비?”
“어? 아, 응…….”
리비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의 시선이 닿았던 곳마다 보리스의 눈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눈빛이 마치 불이 붙은 듯해서, 리비는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공작 부인이라…… 남의 신부를 가로채 놓고는 아주 뻔뻔하군그래.”
“리비는 공의 신부였던 적이 없는데.”
보리스가 딱딱하고 느릿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자 레제트 공작의 눈에 기이한 광채가 맴돌았다.
“나와 결혼식까지 올린 사이지. 고향에서 결혼식을 올리도록 내가 예물까지 보내서…….”
“내 아내는 그 혼인 선언문에 서명한 적 없는데.”
보리스는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래, 누군가 강탈해 가서 말이지.”
뿌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살벌하게 빛나는 눈이 보리스를 향했다. 뱀이 고개를 쳐들고 공격하는 것처럼 위협이 느껴졌다. 금세 독니를 드러낸 채 덮쳐 올 것 같은 위기감에 리비는 한 발 물러섰다.
“당연한 내 권리를 행사한 것뿐인데.”
보리스의 목소리에는 조금도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 마치 떼를 쓰는 아이를 상대하듯 하찮게 여기는 느낌마저 풍겼다.
“에드라크령의 모든 것은 내 소유입니다, 레제트 공작.”
리비의 어깨를 감싸 안은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숨 막힐 듯 끌어안는 힘이었지만 리비는 그 힘에 안도하고 있었다.
적어도 보리스와 있는 한 저자는 자신을 해칠 수 없다. 그런 믿음이 솟아났기 때문이다.
“아아, 첫날밤에 대한 권리?”
레제트 공작은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그런 야만적인 관습을 행하려 하다니, 역시 천한 태생은 어쩔 수 없군. 그깟 권리가 왕명보다 우선한다는 건가?”
레제트 공작은 날이 선 목소리로 되받았다. 이 왕궁에 온 목적을 바로 끄집어낸 공작의 언사에 접견실의 모든 귀족들이 숨을 죽였다. 아직 ‘협상’은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은 상태였지만 두 공작의 만남만으로도 실내에는 팽팽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을 때였다.
“어서 오게, 레제트 공작. 인사는 빼먹은 건가? 먼저 인사를 나눈 뒤에 담소를 나눠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별안간 팽팽한 공기를 뚫고 안드로스 왕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돌아보자 왕좌의 팔걸이에 팔을 걸친 채 느긋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는 왕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마치 재미난 광경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사뭇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신부를 두고 다투는 두 공작의 사정 따윈 알 바 아니라는 듯 여유작작한 모습에 리비는 의아하기만 했다. 그러나 곧 그 의중을 알아차렸다.
레제트 공작과는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호각을 이루며 싸우던 사이였다. 왕가의 정통성 문제를 두고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을 일으키던 사이. 어쨌든 승기를 잡은 건 안드로스 왕이었다.
레제트 공작이 아무리 왕권에 필적하는 세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왕 앞에 무릎 꿇어야 하는 존재임을 확인시킨 것이다.
그 뜻을 알아차린 레제트 공작의 입가에 픽 웃음이 서렸다. 그는 저벅저벅 걸어 보리스와 리비를 지나친 뒤 왕의 앞에 섰다.
“데르멜 아르기아 레제트 공작이 인사드립니다, 폐하, 평안한 세셔를 기원합니다.”
레제트 공작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몸을 숙이며 인사를 해 보였다. 그 동작이 어쩐지 부자연스럽다 느껴졌다.
“그래, 그대와 나의 평화 협정으로 이 나라에는 평안한 날들만 지속될걸세.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나?”
“……물론, 그 협정의 대가가 제대로 지급된다면 말입니다.”
레제트 공작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왕께서 신부를 찬탈당한 제 입장을 헤아려 주시고, 그와 더불어 왕명을 어긴 자에 대해 엄격한 처벌을 내려 주실 것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명령인지 요청인지 모를 말에도 안드로스 왕은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다.
“그래, 잊지 않았지. 그러니 환영 무도회 전에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생각이네. 춤추면서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없어야 하니 말이야.”
순간 리비는 아찔해졌다. 지금 환영 무도회를 언급할 때가 아니지 않나. 왕은 마치 사이 나쁜 이웃들을 그러모아 ‘함께 식사나 하지.’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유쾌한 모습이었다.
뭐가 뭔지 판단이 서질 않아 보리스를 올려다보자, 그는 태연스러운 얼굴로 리비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당당해 보였다. 자신이 질 수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듯했다.
“협상 장소는 이미 중앙탑으로 정했네. 정오에 만나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고서 왕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접견실의 귀족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볼일 다 봤으니 이만 물러가라는 태도에 황당한 건 레제트 공작 쪽이었다.
“폐하!”
레제트 공작이 고함을 치듯 왕을 부르자 그는 몸을 천천히 돌렸다.
“……레제트 공, 잊었나 본데 이 왕좌는 나의 것일세. 인정하기 싫어도 말이지.”
“…….”
“천천히 중앙탑에서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지. 급할 것 없잖나.”
왕은 손을 들어 보였다. 그 손짓에 꿇어앉았던 귀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일사불란한 동작에 리비도 덩달아 따라 앉았다가 몸을 일으키기를 반복했다.
왕이 휘장 너머로 퇴장하고 나자, 접견실은 또 다른 혼란스러움에 휩싸였다. 여태껏 몰래몰래 그와 보리스를 흘깃거리던 귀족들이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신부 협상’의 결말이 어찌 될지 다들 궁금해 미치겠다는 눈치였다.
‘왕궁은 소문에 약하다더니.’
그제야 아버지가 해줬던 말이 무엇인지, 그녀는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하이든 백작은 왕궁의 사람들은 누구보다 시류에 휩쓸리기 쉽고, 소문에 빠르며, 정보를 얻으려 애쓴다는 말을 해주었던 것이다.
귀족들은 지금 줄기차게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보리스와 레제트 공작을 두고서.
하지만 방금 왕이 보인 태도로 인해 보리스 쪽으로 기울어진 귀족들의 잣대가 리비의 눈에도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왕은 대놓고 표현하진 않았어도 레제트 공작을 은근히 압박하는 동시에 보리스에게 유리하도록 행동한 것이다.
왕이 보리스의 편을 들 거라던 하이든 백작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로…….’
왕이 우리의 편을 들어 주려는 걸까, 리비는 왕의 뜻을 가늠해 보려 애썼다. 좀 전에 보여 준 행동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귀족들이 하나둘 접견실을 떠나는 와중에, 레제트 공작은 리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선은 곧 보리스의 너른 몸에 의해 가려지고 말았다.
“추워?”
보리스는 리비를 잡아당기며 팔뚝을 문질러 주었다. 그 바람에 리비는 자기가 떨고 있음을 알았다. 이건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리비는 그 두려움을 떨쳐 내려 보리스에게로 더 바짝 붙어 섰다.
“응? 아, 아니야. 어서 가자.”
리비의 말에 보리스는 그녀를 망토로 휘감은 채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가 걸어가는 자리마다 귀족들이 심해를 가르듯 양옆으로 갈라지는 광경은 꽤 볼만한 것이었다.
“진짜 어쩔 셈이야?”
리비는 보리스와 자신을 위해 마련된 휴게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리비, 내가 질까 봐 걱정돼?”
걱정이 되어서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갈 것 같은 리비와는 달리 그는 전혀 긴장하지도, 불안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환장할 것 같았다.
막상 닥치면 어떻게든 되겠지, 잘 설득해 보면 될 거야,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레제트 공작을 마주한 순간 호수 위에 낀 얇은 얼음처럼 쩌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왕 앞에서도 저토록 당당하고 오만한 사람. 왕국의 일부를 지배하는 패권자답게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뚝뚝 묻어났다.
저런 사람을 이길 수 있을까. 설령 왕이 보리스의 편을 들어 준다 하더라도, 레제트 공작이 전쟁이 일으키고자 하면 어쩌지.
그렇게 리비는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무럭무럭 자라난 두려움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배고프지? 긴장했을 텐데, 뭐라도 먹어.”
보리스가 간식이 담긴 쟁반을 내밀었다. 그러나 리비는 하나도 배고프지 않았다.
“너나 먹어.”
리비는 도로 간식을 밀어 놓으며 돌아앉았다. 보기만 해도 울렁거리고 속이 안 좋아질 것 같았으니까.
“리비…….”
다정하게 어깨를 붙잡으며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그가 앉은 쪽을 휙 돌아보았다. 잔뜩 인상을 쓴 채 그를 노려보려 애썼다. 하지만.
“…….”
그의 웃음기 어린 보랏빛 눈과 마주한 순간, 그런 결심은 산산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리비, 걱정할 것 없어.”
보리스는 의자에 앉아 있는 리비를 단박에 들어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마치 인형 다루듯 쉽게 그의 다리에 올라앉은 리비가 당황스러운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눈을 맞춰 오며 생긋 웃음을 머금었다. 혼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내가 뭘 걱정하는데?”
“그 늙은 공작과 결혼하는 거.”
망설임 없는 답이 떨어졌다. 그 말을 듣자 리비는 다시 기분이 묘해졌다.
아버지뻘인 레제트 공작과 결혼해 첩과 자식들이 주렁주렁 딸린 성에 갇혀 살게 되는 건, 물론 두려운 일이다.
저런 남자와 매일 밤 같은 침대서 자고 일어난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질 일이 분명하다. 하지만.
정말로 두려운 건 따로 있었다.
“아니야, 보리스. 그게 아니야.”
리비는 저도 모르게 보리스의 얼굴을 턱 붙잡았다. 졸지에 작은 양손에 얼굴을 붙들린 보리스가 조금 놀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비?”
“나는, 나는…….”
리비는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보리스에 비해 한없이 작은 몸을 웅크리기까지 하자 그녀의 체구는 더더욱 작아 보였다. 동그랗게 말린 등을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했고, 따스했지만 그녀는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네가 걱정돼, 보리스.”
“…….”
간신히 새어 나온 목소리에 등을 쓰다듬던 손이 멎었다.
“네가 어떻게 될까 봐, 너무 걱정돼. 레제트 공작은 너무 무서운 사람이야. 보기만 해도 알겠는걸.”
그 소름 끼치는 눈동자. 인간미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 자신을 훑던 기억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고 보니 그가 적군을 대할 때 어떤 짓을 했는지 마을 어른들에게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레제트 공작은 말이지, 적군을 사로잡으면 죽이는 게 아니라 꼬챙이에 꿰서 걸어 둔다고. 그러면 까마귀들이 냄새를 맡고 달려와서…….”
그 잔인무도함으로 레제트 공작의 악명은 더욱 높아져 갔고, 그것은 반대로 국왕 쪽 군사들의 사기를 꺾어 놓는 데 일조했다.
새빨간 깃발을 휘날리며 아군을 잔인하게 죽이도록 지시하는 공작의 모습은 그 자체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사람을, 꼬챙이에 꿰서, 까마귀가 뜯어 먹도록 했대.”
“알고 있어.”
리비가 바들바들 떠는 목소리에 보리스가 리비의 몸을 문질러 주며 체온을 높여 주었다.
“무섭지 않아? 너는 그런 사람을 상대로 싸우러 가는 거야.”
“걱정 말래도, 리비.”
보리스는 얼굴을 감싼 손을 살며시 감싸 쥐더니 손바닥에 깊숙이 입술을 눌러 왔다.
뜨끈하고 부드러운 감각에 리비가 슬쩍 몸을 떨고 있을 때였다.
“너는 여기서 쉬고 있어. 내가 가서…….”
“아니, 나도 갈 거야.”
“지루할 텐데.”
“나 때문에, 나를 두고서 벌이는 재판이잖아.”
그렇게 말하고 나니 리비는 흡사 자기가 시장에 내놓은 돼지나 사슴, 염소 같다고 여겨졌다.
푸줏간에 가면 고기를 부위별로 썰어 놓고서 각자 원하는 부위를 돈을 내고 가져가곤 하는데, 지금 자신이 처한 꼴이 딱 그짝이었다.
협상을 하다 하다 안 되면 자신을 갈가리 찢어서 사이좋게 나눠 갖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까지 할 정도로.
끼익.
굳게 닫혀 있던 휴게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드라크 공작, 그리고 리비 아가씨.”
고개를 돌린 곳에는 왕의 시종이 서 있었다. 보리스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리비를 슬쩍 바라본 시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
리비는 보리스와 함께 재판장이 마련된 중앙탑으로 이동했다.
왕궁의 가장 중앙부에 위치한 뾰족한 첨탑은 왕궁의 건물들 중 가장 오래되고, 의미가 깊은 건물이었다.
대개 중요한 협상이나 회의는 이 중앙탑을 이용하곤 했는데, 그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정의롭고 공평한 결정을 위한다는 취지에서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아치형으로 지어진 거대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총 여섯 개의 구간으로 나뉜 천장은 궁정 화가들이 직접 그려 넣은 정교한 모자이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까마귀 ‘칼리니’의 전설을 형상화한 그림이었다.
불을 뿜는 붉은 용과 이에 맞서는 까마귀. 최후의 결전 후 용에게 승리했으나 치명상을 입은 까마귀는 결국 자신이 구해 낸 왕녀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둔다.
세셔 왕국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릴 때부터 들어 온, 매우 친숙한 전설이었다.
협상 장소에는 왕과 보리스, 그리고 레제트 공작과 고위 귀족들이 참석했다. 리비는 구석진 곳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신부 협상이 진행될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의 엄숙한 표정을 보자 리비는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목이 졸리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높게 깃을 세운 옷을 입은 귀족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인상을 풍겼다.
차례대로 호명되는 귀족들의 이름을 듣고 있자니 자신이 느꼈던 위압감이 그저 기분 탓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모두 공후작가 이상의 고위 귀족들로 구성된 귀족들이었던 것이다.
왕국 내의 입김 좀 부는 권력자들은 모두 모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들이 모인 이유가 다름 아닌 자신 때문이라는 것에 리비는 또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지막으로 원탁에 나타난 이는 왕이었다. 일제히 기립한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으로 약식 인사를 대신한 왕은 원탁을 둘러싼 이들을 쭉 훑어보며 말했다.
“협상을 시작하지. 나와 귀족 원로단은 이 협상의 증인이 되어 줄걸세.”
엄숙한 선고와 함께 어디선가 탕,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제트 공작의 아내 반환 요청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뾰족한 턱과 콧수염을 기른 이가 외쳤다. 레토 공작이었다.
“엄연히 리비 하이든 공녀는 레제트 공작의 부인이 되어야 합니다. 왕명이니까요.”
“그러나…… 에드라크 공작의 주장도 일리가 있지요. 왕명이 허한 대로 했을 뿐이니까요.”
반론을 펼친 것은 반대편에 앉은 이드만 후작이었다.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양옆에 앉은 귀족들이 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짐짓 못 들은 척 흠흠, 헛기침을 하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요점은 ‘왕명’이었다. 보리스와 레제트 공작, 두 사람은 모두 왕의 명으로 리비와 결혼할 명분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양쪽의 주장은 모두 일리가 있었다.
이에 따라 귀족들의 의견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왕명이 내려진 시점을 우선해야 하는지, 아니면 왕명이 실행된 시점을 우선시해야 하는지.
왕명을 내린 시점으로 보자면 레제트 공작의 손을 들어 주어야만 했다.
엘가 왕녀의 딸인 리비를 레제트 공작의 신부로 주기로 하였으니 이미 그때부터 리비는 레제트 공작의 아내라는 것이 요지였다.
반면 왕명이 실행된 시점으로 보자면 보리스 쪽이 빨랐다. 에드라크 영지를 보리스에게 귀속시키는 시점이 ‘칼리니 기사단장이 에드라크령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라고 못 박아 놨기 때문이었다.
다만 보리스가 그토록 빨리 에드라크령에 도착할 줄은 몰랐던 게 변수였다. 밤새 말을 달렸다고 해도 도저히 불가능한 속도였다.
“하늘을 날기라도 한 겁니까? 에드라크 공작이 영지에 당도하기에 지나치게 빠르다, 이 말입니다.”
누군가 높여 말한 소리에 리비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굴려 보리스 쪽을 쳐다보았다. 보리스는 하나도 찔리지 않은 듯 태평스러운 얼굴이었다.
‘알아채면 어쩌지.’
가슴이 두근두근 맥박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사람의 등에 크고 검은 날개가 솟아 있을 거라고 감히 누가 생각이나 한단 말인가.
“칼리니 기사단에 진짜로 날개가 달려 있긴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일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지금 농담할 때입니까?”
“전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요.”
말을 던진 이는 은빛 수염을 거의 가슴팍에 닿도록 기른 남자였다. 눈썹이며 머리 색도 하얗게 바래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청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마치 수백 년을 살아온 현자를 보는 듯했다.
‘누구지?’
리비는 휘장의 틈새 너머로 원로의 얼굴을 엿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귀족들과는 영 다른 외모는 단번에 그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접견실에서 왕이 앉아 있는 자리 뒤편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저분은 누구예요?”
리비는 옆에 서 있던 궁정 시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르비오 경이십니다.”
대답은 단출했으나 완벽하게 궁금증을 해결할 법한 답은 아니었다. 그녀가 궁금한 건 저토록 신비롭게 생긴 사람이 그저 보통 귀족인가 하는 것이었다.
잘 기른 은빛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은 의외로 주름이 거의 보이지 않는 얼굴이라서 나이를 선뜻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평범한…… 귀족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시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역시나 리비가 원하던 답은 아니었다.
“정말 그뿐인가요?”
“아, 별의 움직임을 읽고 예언을 전달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습니다. 점성술에 탁월한 능력을 지니셨죠.”
“점성술……?”
“왕실에는 대대로 별자리를 읽는 점성술사가 존재한답니다. 폐하의 측근이시죠.”
“그렇군요.”
“이번 전쟁의 승리를 예언한 분이기도 합니다.”
“승리를요? 예언했다고요?”
리비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번 전쟁에 까마귀들이 함께한다면 폐하께 승리를 가져다주리라는 예언을 했었죠.”
그런 일이 있었구나.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리비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보리스가 전쟁에 참여하게 된 건가요?”
“폐하께서 상으로 정식 기사단으로의 승격과 공작위를 약속하셨죠,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면요.”
“아.”
칼리니 기사단의 기사들은 출신 성분이 제각각이었다. 순전히 검술 실력만 보고 뽑은 자들이기에 그랬다. 아무리 전쟁에서 싸움만 잘하면 된다지만 정식 기사단이 되려면 왕의 승인이 필수였다.
레제트 공작과 벌인 이번 전쟁에 보리스는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건 셈이었다. 기사단을 인정받는 것과, 리비를 아내로 맞을 수 있는 공작이 되는 것.
대강의 사정을 듣는 동안, 재판장에서는 여전히 원로들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칼리니 기사단에 날개가 달린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에드라크 공?”
르비오 경이 보리스 쪽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말대로였다. 칼리니 기사단의 상징 중 하나는 검은색 깃털이 달린 갑옷 장식이었다. 깃털 사이사이에는 뾰족한 촉을 달아 놓아 뒤에서 덤벼드는 적을 상대하기에도 좋았다.
그런 효용성을 제외하고라도, 기사들의 날개 장식은 보는 이들에게 상당한 위압감을 자랑했다.
또한 강력한 기사단의 상징이 되어 기사단의 이름을 왕국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에 떨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런 조악한 장식이 무슨…….”
화려한 비단으로 몸을 휘감은 후작이 툴툴거리는 목소리를 내자 보리스는 그쪽을 슥 돌아보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투덜거리던 목소리는 쑥 들어가고 말았다.
“조악한 장식치고는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이들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지요.”
르비오 경의 경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사들이 흉내 내려고 했다가 여럿 피를 보지 않았습니까? 아무나 다룰 수 있는 무기는 아닙니다.”
가볍게 면박을 주는 그 목소리에 원로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리비의 눈에도 똑똑히 보일 지경이었다.
원로원 열 명 가운데 보리스에게 우호적인 자들은 확실히 적었다. 나머지는 모두 레제트 공작의 편이었다.
리비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 원탁의 최상석에 앉은 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양손을 모은 채 앉아 그저 양쪽의 의견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간혹 고개를 끄덕이거나 귀족들의 발언이 충돌할 때 중재하는 역할 정도만 할 뿐, 크게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리비는 그게 답답해 발을 동동 굴렀다. 어째서 왕은 보리스의 편을 들어 주지 않는가.
원로원은 열 명이었고, 최종 결정에서 의견이 절반으로 나뉠 경우 그 결정권을 왕이 지니게 되어 있었다.
다만 원로 귀족들은 모두 왕의 눈치를 살폈으니, 토론 중 왕의 의견이 기우는 쪽으로 찬성 패를 던지는 경우가 많았다.
한 발 물러선 채 귀족들의 열띤 토론을 보고 있는 모양새에 리비는 점점 더 조급해졌다.
그와 반대로, 보리스와 정 반대편에 앉은 레제트 공작의 얼굴은 거만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반드시 자신이 이기리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레제트 공작은 왕실의 한 축을 이루는 가문의 소속이었고, 왕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으니 그것만 보자면 보리스를 가뿐히 이기고도 남았다.
만약 레제트 공작이 이기게 된다면. 이대로 그쪽 영지로 끌려가 꼼짝없이 그의 아내가 되어야 하나.
‘그건 싫어.’
상상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양팔로 자신을 보호하듯 몸을 꽉 끌어안았다.
휘장 너머에서 리비가 초조하든 말든 재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문득 그 상황이 너무 불합리하게 여겨져, 리비는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이건 자신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마치 푸줏간의 고기를 나누듯 하고 있었다.
누가 자신의 주인이 될지를 정하는 자리에 자신은 정작 낄 수가 없다니.
‘불공평해.’
리비는 초조하게 걸어 다녔다.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시녀가 묻는 말에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저어 보였다. 지금 당장 저 휘장을 뚫고 나간다 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그런 게 있기는 한 건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제발 생각 좀 나라며 머리를 한 움큼 쥐어뜯고 있을 때였다.
‘가만.’
레제트 공작은 신부의 순결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던 사람이 아니었나.
보리스의 손을 잡고 보리스의 영지에서 돌아온 여자를 다시 갖고 싶어할 이유가 있나? 굳이? 나는 그에게 상품성이 떨어진 물건일 텐데.
문득 머릿속을 차지한 의문에 머리를 갸웃거리는 사이, 레제트 공작의 고성이 휘장을 뚫고 들어왔다.
“에드라크 공작이 폐하께서 모르는 결혼을 행한 것은 반역심이라 할 수 있지요.”
발언 차례가 돌아온 레제트 공작이 거만한 목소리와 눈빛으로 보리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왕국의 평화를 위해 군대를 물렸습니다. 충분히 승산이 있는 전쟁임에도 말입니다. 폐하의 평화 협정을 받아들인 것이지요. 다시 말해 저의 희생이 뒤따른 일이란 말입니다.”
“…….”
왕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대가로 제가 요구한 건 왕위 계승권을 지닌 아이를 낳을 왕실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졸지에 신부를 도난당했지요. 에드라크 공은 이 모든 걸 알면서도 제 신부를 훔쳐 간 것이니, 그 죄가 큽니다. 마땅히 작위를 회수하고, 신부 역시 제 품으로 돌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레제트 공작은 일부러 말을 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간 긴장된 공기가 흘렀다.
“멈췄던 전쟁을 다시 이어 가야 할지도 모르지요.”
순간 짧고 굵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전쟁, 그 짧은 단어가 지닌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원로원을 구성하는 열 명의 귀족 원로들은 보수적인 측면이 강했기에 대부분 레제트 공작의 편에 선 자들이 많았다.
“에드라크 공의 작위는 폐하께서 손수 내려 주신 것이지요. 이어받은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정통성은 폐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요.”
한꺼번에 쏟아지는 목소리에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왕은 인상을 썼으나 이미 레제트 공작의 협박을 들어 버린 원로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보리스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런 자가 함부로 레제트 공의 신부를 납치해 아내로 삼았으니…….”
“그 이야기는 틀렸습니다.”
쏟아지는 비난 가운데서도 묵묵히 있던 보리스가 입을 열었다.
내내 원로들이 떠드는 걸 지켜만 보던 보리스가 입을 열자 장내에 묵직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순간 리비도 잔뜩 긴장한 채 보리스의 얼굴을 살폈다. 이제까지와는 너무도 다른, 어떤 것이 보리스의 얼굴 위로 선연히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기분 탓인가?’
건드리면 물기가 톡 터질 것 같은 보리스, 제멋대로 구는 보리스. 과연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도 자신에게 한 것처럼 영 딴소리를 하면 어떡하지. 그렇게 되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지 모른다. 걱정과 긴장으로 리비는 바싹바싹 말라 오는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며 귀를 기울였다.
그때였다. 굉장히 낯선, 묵직하고 청량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파고든 것은.
“리비 하이든은 처음부터 제 아내였습니다. 왕께서 명하신 대로 그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말입니다. 제가 예상보다 빨리 에드라크 영지에 도착한 것은 모든 것이 이리될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자식 봐라?
저게 제가 알던 보리스가 맞나. 그의 말투는 지나치게 또박또박했으며, 심히 논리적이었다.
언제나 리비의 말을 듣는 듯 마는 듯 하던 그 보리스가 아니었다.
‘설마 그동안 연기한 건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원로들께서 말씀하시는 왕명이란, 제게 영지와 작위를 하사하신 것도 포함이지요. 저는 그 명대로 제 아내를 맞아들였을 따름입니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귓전에 울려 퍼졌다. 분명히 보리스의 목소리가 맞는데, 그러한데, 어째서 이렇게 낯설게 들리는 것일까.
아까 접견실에서는 워낙 긴장한 나머지 그 간극을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뚜렷하게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신부가 레제트 공작의 아내가 될 여성임을 알고서도 납치한 거잖소! 고의가 다분합니다!”
“저는 그저 오래된 관례를 따랐을 뿐입니다.”
“설마 납치혼?”
“초야권도 있지요.”
태연하게 대꾸하는 소리에는 전혀 흔들림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 부끄러움은 자연히 리비의 몫이었다.
‘하지 마, 하지 마!’
아무렇지도 않게 초야권이니 뭐니 입에 올리는 소리에 리비는 이대로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에드라크 성에서였다면 보리스의 입을 냉큼 막아 버렸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런 케케묵은 법을 누가…….”
“그곳은 수도가 아닙니다.”
살벌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방에는 나름의 법이 있지요. 납치혼도, 초야권도 모두 엄연히 행해지는 것들입니다.”
아니야, 자랑 아니라고.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이성적이었다.
“그 관습법에 따라 리비는 내 아내가 되었고,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돌이킬 수 없는’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들은 원로들이 내뱉는 헛기침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그런 야만적인 관습을 따르다니, 에드라크 공작, 그대는 왕께서 친히 작위를 내린 귀족이오.”
누군가 불편한 기색을 가득 담아 말하는 것이 들렸다.
“다 같은 귀족은 아니지요.”
그러자 다른 쪽에서 넌지시 그의 출신 성분을 건드렸다. 그 말은 곧 보리스가 대대로 이어져 온 유서 깊은 가문의 공작이 아니라 그저 전쟁에서 세운 공로로 귀족이 되었음을 비꼬는 태도였다.
그것이 기가 막혔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인 하이든 백작 역시 보리스와 같은 공훈으로 귀족이 된 경우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도 그를 그다지 어렵게 여기지 않았고, 백작 역시 마을 사람들을 스스럼없이 대해 왔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보리스가 저 기름기 번들거리는 얼굴을 가진 원로들의 혓바닥 아래 놓여 있는 것 자체가 불쾌한 일이었다.
공작이면 다 같은 공작이지, 왕이 직접 임명했든 선대로부터 작위를 물려받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히려 더 자랑스러워해도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혈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공으로 쟁취한 자리이니까.
‘멋져.’
여기에 생각이 이르자 리비는 어쩐지 가슴이 뿌듯해졌다. 왠지 자신의 어깨가 으쓱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보리스는 누가 뭐래도 세상 잘난 까마귀, 아니 남자였다. 저 배불뚝이 원로들과는 차원이 다른.
“혹시 압니까.”
카랑카랑한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니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몸집이 땅딸막한 원로 하나가 침을 튀겨 가며 말했다.
“리비 하이든 공녀가 왕의 명을 어기고 에드라크 공작과 눈이 맞아 벌인 일일지.”
그는 마치 자기 딸이 혼인 전날 옆집 남자와 눈이 맞아 달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분노한 상태였다.
‘대체 자기가 왜?’
리비는 어이가 없어 휘장 너머로 원로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에드라크 공작과 다 짜고 한 일이다, 이것이지요. 그러니 처음 보는 남자의 품에 덥석 안겨서 말에 올라탄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침은 끊임없이 튀고 있었다. 과장을 좀 보태 리비가 있는 곳까지 침이 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찌나 사방팔방 침이 튀는지 왕조차도 인상을 찌푸린 채 몸을 뒤로 젖힐 정도였다.
덥석 안겨? 말에 올라타? 심히 왜곡된 정보였다.
“게다가 이건 반역에도 해당하는 중죄입니다.”
좀 전의 왜곡된 정보 따위는 귀엽게 여겨질 정도로 충격적인 단어가 리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왕께서 이미 엘가 왕녀님의 딸을 레제트 공과 혼인시키기로 한 걸 에드라크 공작도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아는 상태에서 영지로 내려가 바로 신부를 납치했다는 건 곧 반역이지요. 왕명을 따른다는 자가 한 짓이라기엔…….”
리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앞을 가리고 있던 휘장을 걷어 내며 밖으로 나섰다.
“아니에요!”
휘장 뒤에 인형처럼 얌전히 앉아 있다가 난데없이 재판장에 난입하자 모두의 시선이 리비에게로 쏠렸다.
일단 의지에 불타올라 뛰어나오기는 했으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갑작스레 많은 이들의 눈길을 받게 되자 긴장감에 딸꾹질이 나오려는 걸 리비는 간신히 내리눌렀다.
그러곤 가만히 손만 움켜쥔 채 원로원들과, 흥미롭다는 듯 눈을 치켜뜬 국왕 등의 얼굴을 차례대로 훑었다.
그리고 마침내 보리스의 시선과 마주했다. 조금 놀란 듯 크게 뜨인 눈은 자신과 있을 때와는 아주 많이 달랐다.
마치 거칠고, 메말랐으며, 아무 감정 없는 생물체처럼 여겨졌다.
자신을 보는 시선이 평소와 달리 무섭게 굳어 있다는 걸 알 만큼.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리비도 눈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럼 안 나오고 배기니?’
얌전히 협상이 끝날 때까지 앉아 있으려 했건만 저 안에서 원로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속이 절로 뒤집혔다.
참고 듣고 있으려니 대체 사람을 뭐로 아는 거야. 리비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원로원을 흘겨보았다.
“공녀님?”
원로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국왕도 갑작스레 튀어나온 리비를 보고 있었다.
‘침착하자.’
이왕 튀어나온 것, 쏟아 버린 물을 다시 담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할 말은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폐하, 제게도 발언권을 주세요.”
왕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까닥였다.
“무슨 일인지 말을 해보라.”
왕은 제법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리비는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저는 억지로 납치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저는 보리스가 말한 상황을 납득했고, 그것이 옳은 것이라 생각해 그를 따른 거예요. 보리스는 저를 원할 자격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리비는 재판장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것은 왕명이니까요.”
순간 실내에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모두 정지된 상태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그녀는 보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짙은 보랏빛의 눈이 그녀를 뚫을 듯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해.’
리비는 속으로 외쳤다. 한 번도 깜박임 없이 자신을 주시하는 눈길에 어쩐지 주눅이 드는 기분이었다.
이것은 약속을 어기는 것이었으니까.
그녀는 이 재판장에 들어오기 전, 보리스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절대로 나서지 않는 거야, 알았지?”
그는 거듭 강조했고, 그녀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리스가 그러는 이유를 모르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가 궁지에 몰리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상대방이 왕명을 들고 나온다면 이쪽도 왕명을 따랐다는 것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동률이 될 것이고, 이런 경우 한쪽의 저울에 무게를 더하는 방법은…….
리비, 자신에게 있었다.
“보리스는 왕명에 따라 저와 결혼하기 위해 저를 성으로 데려간 거예요. 저는 억지로 납치된 게 아니고요.”
“마을 사람들의 증언이 있다 해도?”
레제트 공작의 사나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내가 아니니, 내 생각을 모두 알 수는 없죠. 그들의 눈에는 내가 강제로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지만, 그건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른 거니까요.”
리비는 호소하듯 주변을 다시 둘러보며 말했다.
“중요한 건 에드라크 공작이 왕명을 어긴 게 아니라는 것. 아니, 오히려 왕명을 따르기 위해 저를 데려간 것이라는 걸 이 재판장의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만 합니다.”
리비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엄연히 그 땅에 먼저 도착한 것은 에드라크 공작이고, 그는 왕명에 따라 저를 취했습니다.”
“…….”
“저희 부부는 제 숙부이자 존엄하신 왕국의 지배자이신 폐하의 승인 아래, 정식 부부로 인정받고자 합니다.”
그 말에 왕의 표정이 좀 더 유해졌다. 리비의 대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먹혀야 할 텐데.’
이 신부 협상의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국왕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심기를 얼마나 거스르지 않을지가 핵심이다.
그렇게 해서 그의 결혼 승낙을 얻어 낼 수만 있다면. 이 말도 안 되는 협상을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올 수 있다.
재판장 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모든 결정권을 쥔 국왕은 리비의 요청에 고민하는 기색이 그득했다. 마침내 안드로스 국왕이 입을 열었다.
“……이것 참, 난감한 일이로군.”
그는 수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국왕의 머릿속은 지금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팽팽 돌아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원고와 피고, 모두는 왕명을 이해하려 했지. 그 의도에 티끌만큼의 불손함은 없었다고 믿고 있노라.”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자신에게 돌아올 손해는 조금도 없기를 바라는 게 국왕의 바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제발.’
리비는 속으로 기도했다. 분명히 국왕은 에드라크 공작 부부를 위한 환영 무도회를 마련해 놓았다고 했다. 국왕이 육촌인 레제트 공작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에는 보리스의 공훈이 절대적으로 컸다.
그러니 국왕에게는 보리스가 필요했다. 레제트 공작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었다 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모를 국왕이 절대 아니다. 그만큼 힘겨운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또다시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을 때였다.
“……이럴 때 우리는 신의 심판을 기대해 볼 수밖에는 없네.”
그 말에 재판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신의 심판?’
왕의 말을 되새겨 보던 리비의 눈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순간 마주친 그의 눈에는 어떤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그는 마치 오래도록 이 순간을 기다려 온 사람 같았다. 리비는 그것이 미치도록 불안했다.
도대체 왜. 뭘 기다려 온 거지?
“어차피 내가 이겨.”
머릿속에는 그가 주문처럼 외우던 말이 떠올랐다.
‘설마.’
불현듯 스쳐 지나간 생각에 리비가 서둘러 입을 뗐을 때였다. 그러나 보리스가 더 빨랐다.
앞으로 나선 보리스가 장갑을 벗어 쥐었다.
“안 돼, 보리스.”
리비가 외쳤지만 그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녀를 본 뒤, 레제트 공작을 향해 돌아섰다.
“저는 레제트 공작에게 결투 재판을 신청하는 바입니다.”
툭.
장갑이 바닥에 내던져졌다. 순간 술렁거리는 소리가 재판장을 휩쓸었다.
“보리스!”
리비의 외침이 재판장에 울려 퍼졌다.
자신을 향해 내던져진 장갑을 본 레제트 공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해 갔다.
보리스는 국왕의 앞으로 걸어가 정중히 무릎을 꿇고 청했다.
“폐하, 결투를 허락해 주십시오. 이번 재판의 시비를 가릴 수 있는 건 신의 의지이고, 그것은 칼로써 판가름 날 것입니다. 승부에서 진 자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두 번 다시 제 아내를 넘볼 수 없습니다.”
경건한 요청에 재판장은 다시 고요해졌다. 이제 남은 건 국왕의 결정뿐이었다. 리비는 넋이 나간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국왕은 매우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라크 공작의 말이 일리가 있군. 이런 애매모호한 상황을 결정짓는 건 칼이야. 결국 강한 자가 내 조카딸을 데려갈 테지. 그게 곧 신의 뜻이고.”
국왕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이 결투를 허락한다.”
재판장은 삽시간에 열광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폐하! 안 됩니다!”
리비가 외치자 국왕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네 남편은 이 결투로 결정될 것이다, 리비. 누가 되든 너는 그 결정에 따라야만 해.”
“…….”
왕의 냉정한 선언에 리비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의가 있나, 리비 하이든?”
국왕이 바라보는 시선에 리비는 마른침을 삼켰다. 보리스가 청했고, 국왕이 승인한 일을 두고서 감히 반대의견을 낼 수는 없었다.
“……아니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폐하의 말씀대로, 제 남편은 오늘 결정될 거예요. 폐하가 보는 앞에서, 모든 사람들의 승인을 얻어서요. 이기는 자가 곧 제 남편이 될 거고, 저는 그 사람을 평생 따를 겁니다.”
그 말에 장내에 무거운 공기가 맴돌았다.
신부를 쟁탈하기 위한 대결.
그것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것은 이미 피할 수 없는 싸움이 되어 있었다.
“좋아, 곧 결투를 치르도록 하지. 미룰 게 뭐가 있나.”
국왕이 외치자마자 시종들이 달려와 냉큼 의자를 빼주었다.
“각자 쉰 뒤 다시 시합장에서 모이도록 하지.”
왕은 원탁에서 등을 돌린 채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귀족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뿔뿔이 흩어져 갔다.
다만 그 자리에 꼿꼿이 남아 있는 이가 둘 있었다. 하나는 보리스였고, 다른 하나는 레제트 공작이었다.
두 사람은 정 반대되는, 정확히 마주 보는 위치에 앉아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리비는 재빨리 보리스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붙들고 일으키려 애썼다.
“우리도 이만 가, 보리스. 시종이 돌아올 때까지 좀 쉬어 둬.”
꿈쩍 않던 그의 몸이 드륵, 하는 소리와 함께 반쯤 일으켜졌을 때였다.
“공녀.”
뒤에서 신경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레제트 공작이 그녀를 보며 흰 이가 다 드러나도록 웃고 있었다.
“순결을 잃은 대가는 내 성에 데려가서 치르도록 해주지. 아주 귀여워해 줄 준비가 되었거든.”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무엇을 상상했는지 빤히 말해 주고 있었다. 순간 보리스의 팔뚝에 힘이 팍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 마, 보리스.”
그녀의 제지에 보리스는 겨우 멈춰 섰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튕겨 나갈 듯 팽팽한 긴장감이 그들 사이에 흘렀다.
보리스의 눈이 레제트 공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건 리비뿐이었다.
그녀는 레제트 공작을 향해 형형한 눈빛을 쏘며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그 목이 멀쩡히 붙어 있길 기도해야 할 거야.”
그 말을 들은 레제트 공작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레제트 공작의 턱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육안으로도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보리스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워 넣었다.
“이만 가자.”
***
리비는 재빨리 그와 자신에게 배정된 휴게 공간에 그를 밀어 넣은 뒤 문을 닫았다.
쿵, 소리와 함께 어쩐지 자신의 심장도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보리스의 입이 열렸다.
“……왜 그랬어?”
리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울지 마, 리비.”
검게 가라앉은 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이런 무서운 결투를 하겠다고 한 거야? 만약에, 만약에 네가…….”
순식간에 다가서 보리스가 그녀를 품에 안고서 입을 맞췄다. 눈물에 젖은 입술이 닿자 짭짤한 맛이 혀끝에 번졌다. 리비는 그의 목에 매달려 한껏 키스를 받아 냈다. 타액과 눈물이 뒤섞인 맛은 씁쓸하면서도 달콤했다.
“너야말로, 나서지 않겠다고 했는데.”
잠시 후 얼굴을 떨어뜨린 보리스가 말했다.
“왜냐니. 레제트 공작 때문에 이대로 가다가는 재판에 질 수도…….”
말하다 말고 리비는 순식간에 끌려가 그의 무릎 위에 앉게 되었다. 가까이 붙은 얼굴에서 뜨거운 숨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두 사람의 사이는 가까워져 있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었잖아. 레제트 공작과 그의 편인 원로들이 너를 반역으로 몰고 가려 했는걸. 나는 그걸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이야.”
“…….”
빠르게 말을 쏟아 내는 와중에도 그의 표정을 풀리지 않았다.
“네가 괜한 누명을 쓰게 되잖아. 왕명을 무시했다느니, 고의로 신부를 약탈해 휴전을 망쳤다느니……. 그런 소리를 듣게 둘 수 없었어.”
자신 있게 시작했던 말이었지만 점점 작아지는 걸 어찌할 수는 없었다.
“보리스, 나는 너를 지킬 거야.”
“…….”
보리스는 눈을 크게 떠 리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도 지킬 거야. 그렇게 결심했어. 그런데, 그런데…….”
리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의 가슴께를 더듬거렸다.
“이 결투는, 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거잖아.”
그녀는 그대로 보리스의 품으로 무너져 내렸다.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