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비상
“……아침이네.”
리비는 침대 천장에 매달린 캐노피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 가볍게 흔들리는 커튼을 보며 그녀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다.
손을 뻗어 봤지만 옆에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보리스는 오늘 아침 일찍 나간다며 그녀의 귀에 속살거리고 간 참이었다.
잠에 취해 가든지 말든지 알 바 아니라며 홱 고개를 돌렸지만 끈질기게 뺨에 입을 맞추고서야 그녀를 놓아준 보리스였다.
리비는 몸을 홱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거의 팔뚝만 한, 커다랗고 탐스러운 깃털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새카맣고 반들반들한 윤기를 뿜어내는 그것은 흡사 보리스의 머리카락 같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깃털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손에 닿자 정말로 보리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매몰차게 대해야 하는데, 그를 밀어내고, 미워하고, 발로 차도 모자란데 왜.
그가 울면 닦아 주고 싶고 마음이 점점 물러지다 못해 누가 밀가루 반죽을 치대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하는지. 사특한 주술이라도 부린 게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어쨌거나 시간은 충실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는 그와 잠들고 함께 일어나는 그 모든 시간들이 익숙해져서, 그가 없이 잠들고 일어나는 일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보리스는 그의 구애를 자신이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꿈쩍도 하지 않을 태세였다. 아무리 말해 봐야 벽에 대고 소리치는 게 나을 지경이다.
리비는 답답한 마음에 파드득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우선은 그가 들어줄 만한 것들을 머릿속에 정리해 보았다.
자신을 놓아주는 것 빼고는 다 된다고 했었으니까.
‘가족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자.’
아버지인 하이든 백작을 만나서 무슨 말이든 듣고 싶었다.
‘보리스를 데려온 건 아버지였으니까.’
***
리비는 밖으로 나와 터덜터덜 걸었다. 무작정 나오기는 했지만 그를 만나려면 밤이 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베스를 졸라 또 내성 밖으로 나가는 건 무리였다.
지난번 보리스의 싸늘한 눈길을 마주한 베스는 두 번 다시 안 된다며 못을 박았고, 리비는 순순히 응했다.
기다란 드레스 자락이 걸을 때마다 펄럭이는 걸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
어디선가 폴폴 날아온 깃털에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까마귀가 나뭇가지에 앉아 리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감시하는 거지?”
까악.
새에게 표정이 있을 리는 만무하지만 리비는 그 얼굴이 분명히 자신을 비웃는다고 느꼈다.
못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채 발톱으로 목덜미를 벅벅 긁어 대고는 있었으나 그 눈만큼은 분명히 그녀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를 보는 시선이 그 까마귀 한 마리만도 아니었다.
여기, 저기. 그리고 또 저기.
보이는 나무들마다 까마귀가 한 마리씩 앉아서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리비는 알 수 있었다. 그 검은 생물체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닌 척해 봐야 소용없어.”
보리스가 자신을 어떻게 추적해 올 수 있었을까. 아무리 등에 날개가 솟아났대도 자기를 찾으려면 용의주도하게 모든 숲을 뒤져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보리스는 처음부터 자신이 있던 위치를 알고 있던 것처럼 정확히 그 자리에 착지했다.
답은 하나였다.
감시자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모르는 사이 끈질기게 달라붙은 존재. 어디에 있든 그녀의 눈에 띄지 않고 리비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보고할 수 있는 존재.
바로 저 시커먼 놈들이었다.
이미 이전부터 저 새들이 심상치 않다고는 느끼고 있었지만 그저 기분 탓일 거라고만 여겼다.
까마귀가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를 관찰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보리스의 날개를 봐버린 지금은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마치 강아지처럼 보리스의 말을 귀신같이 알아듣던 까마귀들을 떠올리자 기분은 점점 더 나빠졌다.
보리스의 말 한 마디에는 끽 소리도 못하고 따르던 새들이 자기에게는 저토록이나 무례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니.
이건 기분 탓이 아니다. 저 새들은 나를 싫어한다. 리비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
리비는 발길을 돌려 가려다 말고 휙 뒤돌아보았다.
“가, 따라오지 마.”
당연히 그녀의 말을 들을 리가 없다. 또다시 무시당한 것이다. 겨우 새 따위가.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며 보리스에게 일러바치다니.
그녀는 발에 차인 돌을 하나 주워 들었다.
툭.
힘껏 던져 봤지만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까마귀는 비웃듯 크게 하품을 하더니 발톱으로 목덜미를 긁는 데에 더욱 집중했다.
그 꼴을 보자 리비는 순간 눈이 휙 도는 걸 느꼈다. 발에 차이는 작은 나뭇가지, 솔방울, 작은 돌멩이 따위를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툭, 툭, 툭.
당연히 던지는 것마다 까마귀의 꽁지깃 하나도 닿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태연한 까마귀의 표정이 더더욱 리비의 화를 돋울 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던졌을까.
열심히 뒷덜미를 긁어 대던 까마귀는 리비의 집요한 시선에 슬그머니 발을 내려놓더니 이젠 아예 대놓고 리비를 주시했다.
새카맣게 빛나는 눈이 똑바로 자신을 향하자 놀란 쪽은 리비였다. 걸음을 빨리 해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푸드덕.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리비를 향해 날아들었다. 까마귀들이 가까이 날아들자 리비는 와락 겁이 났다.
“가, 가버려.”
팔을 크게 휘둘러 봤지만 까마귀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무시해 버렸다. 오히려 약 올리듯 저공비행을 하며 끊임없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가라니까.”
도망칠 새도 없이 까마귀들이 계속 날아들어 리비의 시야를 가렸다. 그뿐만 아니라 머리를 땋아 내릴 때 쓴 리본과 머리핀을 잡아당기기까지 했다. 곱게 빗어 내린 머리칼은 순식간에 풀려서 산발이 되었다.
“아앗!”
새의 발톱이 머리칼에 걸려 길게 잡아당겨졌다. 구불거리는 금빛 머리칼이 날카로운 발톱에 휘감긴 걸 보자 공포감은 더욱 배가 되었다.
리비는 그 가운데서 어쩔 줄 몰라 꽥꽥 비명만 질러 댔다.
“히익!”
까마귀들의 발톱에 채진 드레스 자락이 위로 들어 올려져 희고 가느다란 종아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안 돼!”
까악까악, 리비가 곤란한 것을 더욱 즐기듯이 까마귀들의 장난질은 끊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들어 올려지면 더 부끄러운 곳까지 그대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이미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엔 너무 많은 수의 까마귀들이 몰려 있었다.
‘도와줘.’
리비는 막연히 생각했다.
“아얏!”
머리채를 잡아채는 까마귀의 짓이 한층 더 심해질 때였다.
“보리스!”
리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었다. 당연히 그가 들을 리 없겠지, 여기 올 리가 없겠지. 자기가 외쳐 놓고도 참 부질없다 싶은 순간이었다.
휙.
“…….”
정신없이 날갯짓하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
더 이상 거칠게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발톱도, 눈도 못 뜨게 바람을 일으키던 사나운 날갯짓도 모두 일시에 끊겼다. 마치 보호막에 휩싸이듯 순식간에 모든 것이 차단됐다.
“다들 꺼져.”
낮고 강렬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자신을 향한 말은 아니었다.
리비는 그제서야 자기가 보리스의 품 안에 안긴 상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야가 온통 새카만 것은 그의 날개 때문이었다.
리비는 보리스가 크게 펼쳐 놓은 날개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길에 보리스는 조금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그게 참 같잖았다.
얼굴을 붉히다니. 이미 이런 일, 저런 일을 다 해놓고선.
검은 날개를 펼친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보리스의 모습은 밤에 볼 때와 다르게 또 다른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날갯깃을 어루만졌다.
“…….”
보리스는 리비의 손이 닿자 움찔거리며 몸을 움츠렸다.
“어, 미안.”
그 바람에 퍼뜩 정신이 든 리비가 손을 떼어 냈다.
“괜찮아.”
보리스는 리비의 손을 냉큼 잡으며 만류했다. 보라색 눈에 떠오른 건 어떤 갈망이었다. 마치 손을 뗀 것이 아쉬워서 견딜 수 없는 듯, 그는 리비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리비는 용기를 얻었다.
“나, 만져 봐도 돼?”
보리스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읏…….”
“하늘을 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가 하는 말에 보리스는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었다. 그때는 이런 순간을 상상도 못 했었다.
“기억나? 네가 날개가 돋은 나를 처음 보았을 때…….”
“아.”
그 말에 봉인됐던 기억이 또 하나 돌아왔다. 보리스가 가둬 놨던 기억들은 마치 오래전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을 찾는 것처럼 하나씩 불현듯 생각나고는 했다.
처음에는 보리스의 날개를 처음 보았던 날이, 동굴에 숨어들어 울고 있던 보리스가, 그리고 그다음에는 어땠더라.
“네가 날 먹여 살렸잖아.”
***
보리스는 어느 날 갑자기 돋아난 날개를 다시 집어넣지 못했다. 이전에도 갑자기 튀어나온 날개를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 모습을 들켰고, 병사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다.
리비가 동굴에서 발견했을 때는 그때보다 더 날개가 커진 뒤였다고 했다. 하지만 날개를 제어하지 못하는 건 예전과 같았고, 결국 보리스는 당장은 마을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여기에 잘 숨어 있어, 보리스.”
어린 리비는 한참 울던 보리스를 달랜 뒤 곧 마을로 내려가 집에서 온갖 말린 과일이며 육포, 빵 등을 챙겨 다시 산을 올랐다. 동굴에 다다라서 먹을 것을 잔뜩 쏟아 놓자 굶주린 소년은 놀라움과 기쁨이 반반 섞인 얼굴로 웃었다.
“어서 먹어.”
며칠 동안 굶은 보리스는 리비가 쏟아 놓은 것들을 정신없이 먹어 치웠다. 입가와 코에 빵 부스러기들을 잔뜩 묻히고서 그녀를 보며 웃었다.
“바보. 다 묻었잖아.”
리비는 소매로 보리스의 입가를 꾹꾹 눌러 닦아 주었다. 그렇게 며칠이나 산을 내려와 음식을 쓸어 담고, 다시 오르기를 반복했다.
마을의 친구들은 대체 그녀가 어디를 혼자 그렇게 가는지 궁금해했지만 리비는 애매한 말로 둘러대며 친구들을 피했다. 집에서는 아버지가 그녀가 가방에 음식을 잔뜩 쑤셔 넣는 것을 보더니 물었다.
“새 먹이를 주러 가는가 보구나.”
그러더니 고이 말려 둔 육포와 갓 구운 빵 등을 더 챙겨 주었다. 누가 보아도 새가 먹기에는 크고, 많고, 지나치게 신선한 음식들이었다. 그럼에도 리비는 더 캐묻지 않는 아버지에게 감사하다 인사하고는 바로 산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산을 다시 내려오자니 아주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보리스를 위해 찢어진 옷 대신 입을 옷을 가져다주고, 어미 새가 아기 새를 키우듯 열심히 집에서 먹을 것을 털어 날랐지만 단 한 가지 그녀가 해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보리스의 등 뒤에 솟은 날개가 다시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거, 다시 못 집어넣어?”
“……모르겠어.”
“모른다고?”
리비는 멍하니 되물었고, 보리스는 잔뜩 풀이 죽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네 몸에 달린 거잖아.”
그 말에 보리스의 보랏빛 눈이 젖어 갔다. 분명히 소년의 몸에 비해 검은 날개는 커도 너무 컸다. 자리에 서면 날개 끝이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거대한 날개였다.
보기에만 큰 게 아니라 달고 다니려면 얼마나 귀찮고 무거울까. 새의 날개뼈는 비어 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에게 없는 것이 달려 있으니 그 귀찮음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했다.
그렇다고 날개 한쪽을 대신 달아 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리비는 정말로 난감했다.
“그럼…… 어떻게 하지?’
다시 사라지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자유자재로 날아다닐 수도, 반대로 걸어 다닐 수도 없었다. 땅에서 걸으려 할 때면 날개가 제멋대로 펴져서는 나는 것도, 걷는 것도 아닌 상태가 되어 지면 위를 엉기적엉기적 걸어 다녀야만 했다.
이대로라면 다시는 날개를 몸속에 집어넣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이대로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에 보리스는 침울해했다. 어지간해서는 눈치를 보지 않는 리비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보리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날개를 넣지 못하면 다시 예전처럼 마을에서 살아갈 수 없다.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오싹.
리비는 난생처음으로 무언가 무서워졌다. 여태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보리스에 대해 그렇게 배타적이지 않았다. 하이든 백작과 리비가 열심히 그를 싸고돌았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백작 행세를 제대로 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내심 아버지를 의지하고 따랐다. 마을의 유일한 기사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수도에서 왕궁에 근무했다는 호화찬란한 경력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랬던 사람들이 보리스의 날개를 보게 된다면.
정말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어서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자기 등에 달려 있어야 뾰족한 수라도 생각해 보지. 도무지 어떻게 해야 날개를 숨길 수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예전에는 어떻게 했어?”
“그냥…… 들어갔어.”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밑도 끝도, 원인과 결과도 알 수 없는 말이 그것이었다. 그냥. 본인이 직접 제어한 것이 아니니 다시 하기 힘든 법이었다.
그러다가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못 걸으면 차라리 날아다니면 어때?”
문득 떠오른 생각을 바로 내뱉고서도 리비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가 있지도 않았다.
“날아다닌다고?”
리비의 제안에 보리스는 무릎 사이에 파묻었던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말이야. 한번 나는 법을 연습해 보면.”
말하다 보니 그럴듯했다. 저 날개가 대체 어쩌다가 솟아나게 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날개가 있으면 날 수도 있겠지.
설마 찢어서 삶아 먹으라고 돋은 건 아니지 않을까. 그냥 예쁜 장식으로 생겨 먹은 것 또한 아니겠지.
날개를 다루는 법을 알면 어떻게 숨기는지도 저절로 생각나지 않을까. 리비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생각으로 그를 설득했다.
“……못 날아.”
하지만 보리스는 또다시 침울하게 속삭였다. 그 큰 날개를 달고도 한 번도 하늘을 멋들어지게 날아 본 적 없다니. 리비는 다시 땅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 번도 안 해봤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 하려는 마음을 먹어 본 적이 없으니까. 낯설어서 그럴 거야. 조금만 연습하면…….”
“그럴까?”
리비의 계속된 설득에 보리스는 혹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엄. 이 날개, 제대로 쓸 수 있게 되면 속에 숨기는 법도 자연스레 알게 되지 않을까? 날아 보자. 응?”
결국 보리스는 리비에게 설득당해 동굴 밖으로 나섰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날개를 끌고서 나무가 없는 탁 트인 공간까지 걸어갔다.
“여기면 좀 날기에 좋지 않을까?”
한 번도 날아 본 적은 없지만. 날 때는 나무니 뭐니 하는 것들이 없는 곳에서 날아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자, 해봐. 하나, 둘.”
말하면서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테오와 리아에게 걸음마를 가르칠 때처럼 하나, 둘을 반복해 봤지만 그건 양다리를 번갈아 움직일 때나 어울리는 구호였다. 하지만 보리스가 움직여야 하는 건 다리가 아니라 날개였다.
“하나, 둘…….”
“…….”
리비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보리스, 너…… 이게 따로 움직여?”
“응? 으응.”
검은 날개가 위아래로 제멋대로 움직이며 꺼덕거렸다. 그도 그런 움직임에 당황한 듯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안 될 것 같아, 리비.”
보리스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야, 아주 잘하고 있어. 봐, 이렇게 말한 대로 움직인다는 건 자기 의지대로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다는 거잖아.”
“……그런가?”
리비의 말이라면 뭐든지 수긍하던 보리스인지라 리비의 말에 저도 모르게 설득당하고 말았다.
“양다리를 번갈아 말고, 동시에, 어? 동시에.”
리비는 양손을 옆구리에 대고 파닥파닥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마치 아기 새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는 어미 새 같은 모양새였다.
“백조를 가르치는 닭이 된 거 같아.”
그녀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방법으로 보리스가 비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먼저 양손을 펼쳐서 온갖 새의 흉내를 내며 날아오르는 시늉을 해보는 한편 보리스의 양 날개를 쥐고서 동시에 퍼덕이는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그런 노력이 완전히 부질없지는 않았던지, 며칠 지나지 않아 보리스는 걷는 것도 나는 것도 아닌 요상한 자세를 취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보리스.”
“리, 리비. 잘되고, 있는, 걸……까?”
보리스는 불안정한 걸음으로 조금씩 발을 내디뎠다. 그럴 때마다 커다란 날개가 펄럭여 몸의 균형을 깨뜨리고, 다시 발로 땅을 디뎌 균형을 잡고, 또다시 날개를 펄럭이기를 반복했다.
공중에 몸이 반쯤 떴다가 가라앉았다 하는 모습은 보기에 우스꽝스럽기에 앞서 매우 위험했다. 두 발짝만 걸어가면 절벽이 버티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보리스는 점점 더 절벽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발이 공중에 떠 있는 시간도 더 길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리비가 결국 보다못해 소리를 질렀다.
“안 돼, 보리스!”
리비는 사색이 되어 몸이 반쯤 뜬 보리스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안 돼, 내려와, 안 돼.”
눈을 꼭 감은 채로 죽어라 소리를 질렀다.
“제발 내려와, 제발…….”
“…….”
마구 소리치는 자신과 달리, 보리스에게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허리를 감싼 팔의 힘이 강해진 걸 느꼈다.
이상하다. 왜 답을 안 하지. 아니, 그에 앞서, 왜 발아래가 이렇게 허전…….
“더 가면 큰일 나. 제발 내려…… 아아아아아악!”
리비는 공중에서 흔들거리는 자신의 다리를 보더니 목청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러 댔다.
“보리스! 우리! 떠 있어! 미쳐! 죽어! 아아아악!”
리비는 보리스의 목을 조를 듯 죽어라 그에게 매달렸다. 보리스는 그런 그녀의 몸을 더욱 단단히 끌어안더니, 크게 날개를 한번 휘저었다.
날개가 일으킨 바람이 훅, 얼굴로 불어닥쳤고, 보리스는 유연하게 허공을 날아다녔다.
“이게…….”
어느덧 발은 땅과는 한참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보리스가 거의 끝까지 갔던 절벽도 저 멀리 멀어지고 있었다. 저기서 떨어졌더라면 둘 다 무사치 못했으리란 건 겪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어, 어, 어떻게 너…….”
보리스는 아예 리비의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다리를 끌어 올렸다. 좀 더 안정적인 자세가 되었지만 리비는 여전히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봐, 마을이야.”
두 사람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아래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다. 마을의 예배당, 크고 작은 집들, 농경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과 소…… 위에서 내려다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이런 것은, 이런 적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리비는 넋을 잃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을의 집들을, 지붕을, 늘상 뛰놀던 산과 들을 위에서 이렇게 내려다보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물론 상상은 한 적 있었지만.
“하, 하지만…….”
리비는 불안함에 보리스의 목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높아도 너무 높이 올라왔다. 주변의 공기는 차가웠고, 위로 올라갈수록 추워져서 턱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하늘을 나는 낭만도 좋고 발아래 세상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이제는 또 다른 공포가 밀려들었다.
“그만 내려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보리스에게선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
“보리스?”
뭔가 이상해서 순간 마주 본 보리스의 얼굴에는 혈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설마 너.”
아닐 거야, 아니겠지. 리비는 애써 스스로를 달랬다.
“……내려가는 법을 모르는 거 아니지?”
“응?”
더 하얗게 질린 얼굴이 리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려……가자고.”
내려가기는커녕 고도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리비는 정말로 울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의 목에 더욱 매달리고 말았다.
“리비, 숨 막혀.”
보리스가 컥, 소리를 내는 순간 중심이 크게 뒤흔들렸다. 그리고 리비는 죽어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악! 아악! 아아악! 이 나쁜 놈아!”
“리, 리비…… 큭…….”
보리스는 숨이 막힌 듯 연신 캑캑거렸고, 몸은 더욱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어느덧 고도는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주변에 보이던 풍경이 순식간에 슉슉 멀어져 가더니 발밑에 보이던 풍경들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다만 너무 빨랐다.
급강하하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리비는 보리스의 목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기도했다. 죽더라도 아픈 건 싫었다. 가급적 한 방에 가고 싶다고,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풀썩.
두 사람은 풀숲 위로 나동그라졌다. 몇 번이나 풀밭 위를 구른 뒤에야 천천히 멈췄고, 그러고 나서도 리비는 감은 눈을 뜰 줄 몰랐다.
“리비.”
보리스가 나지막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리비는 감은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보리……스.”
“응.”
“나…… 살아 있어?”
겁에 질린 연녹색 눈동자는 온통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콧물과 눈물과 침이 뒤섞여 얼굴이 엉망이었다.
“응.”
“정말? 정말이야? 여기 천국 아니지?”
“아니야.”
“허엉.”
리비는 다시 한번 그에게 매달려 눈물을 한바탕 쏟아 냈다. 머리며 등에 온통 풀을 묻힌 채로 그녀는 울고 또 울었다. 리비가 그렇게 운 건 처음이었고, 그런 그녀를 달랜 것 또한 보리스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는 걸 달래는 건 항상 리비의 몫이었으니까.
그는 가만히 손을 뒤로 뻗어 가늘게 떨리는 등을 가만가만 두드려 주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도록 울음을 쏟아 내고 나서야, 리비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보리스의 등짝을 후려치며 소리쳤다.
“나 다신 안 해!”
***
“…….”
“리비?”
보리스가 두어 번 더 부르는 소리에 리비는 천천히 과거의 기억 속에서 빠져나왔다.
“이제는 자유롭게 숨겼다 나왔다가, 할 수 있는 거야?”
“응.”
보리스는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빨리 집어넣어.”
“왜?”
“지금은 낮이잖아.”
“낮에는 안 돼?”
“그건…….”
왠지 모르지만 낮에는 보리스가 이런 날개를 달고 있는 걸 보여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누가 보게 되면, 그때처럼, 너를 잡아가려고 할지도 몰라.”
리비는 기겁하며 그의 날개를 가리려는 듯 발끝을 쫑긋 세워 팔을 뻗었다. 그래 봐야 아득한 키 차이 탓에 별로 손이 닿지도 못했다.
“어서, 숨겨. 어서.”
리비가 걱정스레 말했지만 보리스의 얼굴에는 되레 은은한 미소가 번져 갔다.
턱.
보리스는 그 손을 그대로 잡아챘다.
“내가 걱정돼? 좀 더 만져 봐.”
보리스는 마치 공작새가 암컷에게 구애하듯 날개를 리비 쪽으로 크게 뻗어 내어 흔들었다.
“그, 그렇게 움직여도 되는 거야?”
“네가 가르쳐 줬잖아.”
“내가 가르치긴 뭘…….”
왠지 민망해서 몸이 꼬였다.
“나 이제 아주 잘 날아.”
보리스는 리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이리 와봐.”
보리스가 팔을 벌리자 너른 품이 더욱 크게 눈에 들어왔다.
“무서워?”
“그게…….”
“처음도 아니잖아?”
그렇지, 아니지. 물론 아니었다.
리비는 보리스가 내민 손을 생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불과 며칠 전에 저 팔에 안겨 하늘을 날았다.
그뿐인가. 어릴 때는 시도 때도 없이 그에게 자신을 안고서 하늘을 날아 달라고 조르곤 했다. 위험하니까 당연히 밤에. 남들 눈에 뜨이지 않을 때.
그럼에도 가끔 숲에서 거대한 검은 새가 사람을 잡아가는 걸 목격했다는 소리가 흉흉하게 들리고는 했다.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열심히 문을 걸어 잠그고, 아이들이 밤늦게까지 놀지 않도록 단속하곤 했다.
들킬까 봐 겁났지만 도무지 그만둘 수는 없었다. 하늘을 난다는 것. 그 행위가 안겨다 준 짜릿함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으니까.
밤이니까 괜찮아, 아무도 우리를 못 보니까 괜찮아.
리비는 점점 더 대담해졌다. 오히려 그를 부추기는 건 리비였고,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기꺼이 그녀를 품에 안고서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 건 보리스였다.
그때의 일들이 떠오르자 리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녀가 웃자 보리스도 덩달아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세상 모두가 두 사람의 발아래에 있던 그때.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이 그저 하늘을 날아다니며 행복해하던 그때.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시절.
리비의 눈빛이 흐려졌다.
“싫어?”
리비에게 내밀었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제는 싫으냐고, 예전에는 좋아했으면서 이제는 아닌 거냐고 묻는 그 눈에 리비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확실한 건 저기서 눈물이 떨어지는 걸 보기는 싫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확실한 건.
“아니.”
“…….”
“날고 싶어.”
“정말?”
“너와 함께.”
다시 한번 날아보고 싶었다. 어릴 적 그 기억처럼, 그에게 안긴 채 처음 날았던 바로 그때처럼.
“데려가 줘.”
보리스는 팔을 더욱 크게 벌렸고, 리비는 주저 없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리비는 거의 그의 품 안에 푹 파묻히듯 안겼다. 그는 리비의 엉덩이 아래쪽을 잡아 들어 올리더니 옆구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몸이 공중으로 뜨는 느낌에 리비는 얼떨결에 그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낮게 웃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고, 리비는 어쩐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커다랗게 펼쳐진 날개를 한번 날갯짓하자 그대로 보리스의 발이 공중에서 떨어졌다. 그것을 본 리비의 눈이 평소보다 배는 커졌다.
“진짜 날고 있어.”
리비는 점점 멀어지는 지면을 보며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고도는 점점 더 높아졌다. 내성 가장 깊숙한 곳에 있던 두 사람은 어느덧 하얀 성을 발밑에 두고 있었다.
“성이…… 성이 보여.”
그 밤, 숲에서 그에게 잡혀 안긴 채로 하늘을 날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일단 오로지 머리 위에 달빛만 고고히 비추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찬란한 빛이 쏟아지는 대낮이었다.
발아래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장난감처럼 작아지는 게 훤히 보이는 대낮. 처음으로 그의 품에 안겨 하늘을 날았던 바로 그날처럼.
“보리스, 진짜, 진짜야? 응?”
“물론.”
보리스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아…….”
리비는 순간 그의 모습에 잠시 넋을 잃었다.
발밑으로 옅은 구름이 깔리는 게 보였다. 어느덧 땅의 건물들이 까마득히 보일 만큼 멀어졌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두렵기도 했다.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만약 보리스를 놓치게 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에게는 날개가 없으니까.
이처럼 높이 날아올라서 의지할 곳이라고는 보리스, 그 하나뿐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리비는 반사적으로 보리스의 목에 감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보리스는 품에 안은 리비를 내려다보았고, 그녀는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렇게 꽉 잡지 않아도 돼.”
“그…… 그래도 무서워.”
리비는 달달 떨며 말했다. 구름이 깔리는 곳까지 올라올 줄이야. 하지만 올라가자고 한 건 자기니까 섣불리 겁먹은 모습을 보이기가 창피했다. 하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니까.
“널 떨어뜨릴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보리스는 맹세하듯 말했다. 리비는 그 말에 가만히 그와 눈을 마주쳤다. 신비로운 보라색 눈 속에 자기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 눈이 어쩜 저리 맑을까.
“날 못 믿는 거야?”
시무룩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리비는 얼른 말을 꺼냈다.
“아니, 아니야. 믿지. 물론 믿어.”
“……기뻐.”
보리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을 비행 중에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언제나 자기보다 약하다고 생각했던 보리스였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는 하나도 약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 많은 소년이었을 뿐. 싸움에서 지는 법도, 그녀를 안고 있는 팔의 힘이 풀린 적도 없었다. 풀숲 위를 함께 구를 때에도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였다.
“그러니 안심해.”
그 말은 기묘한 위안을 함께 가져다주었다. 세상 다시없을 불한당인데, 자꾸만 믿고 싶어지고 위안을 얻게 되는 건 대체 무슨 마음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바보.”
리비는 작게 속삭이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의 품에 얼굴을 폭 파묻은 채로 둥실 떠 있는 감각을 즐겼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날개가 부드럽게 펄럭일 때마다 보리스의 머리칼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리비는 손을 뻗어 눈을 찌를 것 같은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보리스는 잠시 놀란 듯 멈칫하더니 이내 리비의 손짓에 얌전히 얼굴을 맡겼다.
“정말 하늘을 날 수 있구나, 보리스.”
분명히 날고 있음에도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이걸 그동안 잊고 있을 수 있었을까. 그걸 잊게 만들었다던 보리스의 능력도 대단했다.
“내 기억은 어떻게 지운 거야?”
“…….”
“응?”
리비는 보리스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그냥.”
“그으냐앙?”
리비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보리스는 열심히 시선을 돌려 리비의 추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무리 가르쳐 봐야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조차도 그것을 정확히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이론은 없고 실전만 있는 능력이라는 뜻이었다.
리비는 다시 시선을 돌려 발아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리스의 품에 안긴 채,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녔다.
그것을 바라보던 리비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얼굴에 머금고 있던 웃음기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리비?”
“…….”
“왜 그래?”
보리스는 의아한 듯 그녀를 보며 물었다.
“이제 그만 내려가.”
리비가 그의 가슴을 콩콩 두드리며 말했다. 확연하게 서늘해진 낯빛을 보며 보리스는 조금씩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리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잔뜩 주었다.
탁.
땅에 착지하자 리비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보리스, 설마.”
“응?”
리비의 눈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굴 듯 울먹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날아다니는 걸…… 레제트 공작이 봤던 걸까?”
“리비…….”
“나 때문에. 내가 졸라서. 시도 때도 없이 너에게 그랬었잖아. 맞지? 레제트 공작이 널 봤다는 게 그때 중 하나인 거지?”
보리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보리스가 떠난 게 나 때문이었어.’
깨달은 사실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나를 안고서 날아 달라고 해서, 그래서…….’
그때는 전쟁의 시작 무렵이었다. 레제트 공작의 정찰병들이 사방에 깔려서 염탐하던 시절.
물론 그들이 티소 마을 같은 깡시골을 정찰하러 왔을 리 없다. 이곳은 수도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고, 여러모로 교통도 불편한 곳이었으니까.
딱히 그들이 탐낼 만한 물자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비싸고 강한 무기를 만드는 철광석이나, 값진 보석을 캐내는 광산도 없었다. 누가 말하지 않으면 지도에조차 제대로 표기되지 않을 그런 후진 시골 마을.
하지만 그런 시골이라도 때로는 눈여겨볼 무언가가 있게 마련이었다. 레제트 공작이 그것을 본 게 모든 일의 시초가 된 모양이다.
그곳에 붉은 장미가 수놓인 깃발이 펄럭이게 된 그 모든 이유는 단 하나였다.
리비와 보리스.
그들이 자신들을 봤기 때문에.
정확히는 보리스의 등 뒤에 커다랗게 솟아난 날개 때문이었다. 문제는 보리스가 그녀를 안은 채로 멀리, 높이 날아올랐다는 데에 있었다.
근교에서 정찰을 하던 이들 중 누구라도 새카만 날개가 달린 보리스를 보았더라면. 그를 찾으려고 온 마을을 뒤집어엎을 만했다.
레제트 공작에 관한 소문이 다시금 떠올랐다.
“레제트 공작은 세상의 온갖 귀하고 특이한 것을 모으는 버릇이 있대.”
“보석? 무기?”
“그런 거야 차고 넘치지. 하지만 정말로 귀한 건 ‘살아 있는 것’이랬어.”
앙느는 으스스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었다.
“살아 있는 것? 그게 뭔데?”
“말 그대로 무엇이든. 살아 있는 곤충의 단단하고 예쁜 껍질, 나비의 날개…… 특히 새를 좋아한대.”
“왜 하필 새야?”
“그건 모르지. 아무튼 특별히 아름답고 귀한 새를 볼 때마다 미친 듯이 잡아다가 가둬 버린대. 닥치는 대로 수집해서 개인 전용 새장에 넣어 두고 감상한댔어. 그러다가…….”
“그러다가?”
앙느는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무언가 듣기에 무섭거나 껄끄러운 이야기를 할 때의 버릇이었다.
“가장 아름다울 때에 죽여서 박제를 한다지 뭐야.”
그 말을 하는 앙느의 표정은 무시무시했다.
“아무튼 보물창고에는 온갖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다 숨겨져 있대. 공작의 수집품인 거지.”
그러더니 한 번 더 덧붙였다.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고 만다는 거야. 변태처럼.”
당시 리비는 앙느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었다. 친구들이 무슨 말을 하든, 그때는 그러려니 했었다.
앙느가 무슨 말을 전해 주어도 ‘응, 그래’라며 한쪽 귀로 들어 넘기기 일쑤였다. 공작이 그 어떤 취미와 취향을 가지고 있든 말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그에게 시집가게 될 텐데.
그런 걸 알아서 무엇 하며 안다 한들 달라질 것이 있을까. 그보다 더 한숨 나오는 일들이 산재해 있는데 말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자식이 있으며, 애첩들을 주렁주렁 거느리고 있다고 들었다.
이미 그것을 알아 버렸는데, 그가 어떤 악질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다지 큰 충격이 아니었다. 당장 자기보다 나이 많은 아들에게 어머니 소리를 들어야 할지도 모를 판국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지극히 심미적인 취향이 어린 날의 보리스를 보고 제대로 자극받은 것이었다니.
“레제트 공작이…… 그때 널 본 거야, 보리스.”
리비의 충격에 빠진 얼굴이 그를 향했다.
“그렇게 널 노렸던 거야. 크고…… 아름다운 새를 특히 좋아한다고 했잖아. 네가 이 마을에 사는 줄 알고서…… 넌 널 잡으러 온 사람들을 피해 미리 도망간 거고, 그렇지?”
이어지는 리비의 말에도 그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어차피 아니라고 해봐야 그가 하는 거짓말이 리비에게 통할 리 없었다. 금방 들통 나고 말 테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걸 택한 것이었다.
바보, 이 바보.
리비는 손을 뻗어 그의 양 볼을 꽉 움켜쥐었다.
“보리스. 내 말, 맞아, 틀려?”
보리스가 떠나가게 된 데에는 자신도 한몫 단단히 한 셈이었다. 그가 리비에게 작별 인사조차 제대로 못 하고, 아니 잠시 다녀갔다는 기억조차 지우고 떠날 만큼, 그는 다급했다.
레제트 공작이 그를 봤더라면, 그리고 그가 그 마을에 정말로 있었더라면 마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고도 남았을 테니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마침내 흘러나온 보리스의 말에 리비는 기가 막혔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니? 널…… 널 노렸어. 널…….”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내내 너를 찾고 있었을 거야.”
레제트 공작은 갖고픈 게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넣는 인물이라고 했다. 그 집요함으로는 따를 자가 없다고.
보통 사람에게 그 집요함만 있다면 기껏해야 좀도둑 정도가 되었겠지만 그것이 공작씩이나 되는, 그것도 왕국의 남부를 지배하는 권력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지고 싶은 것은 무슨 수를 동원해서든 갖고 말 것이다. 기어코 왕가의 핏줄을 이은 정신 멀쩡한 여자를 이 시골구석에서 찾아낸 것처럼.
“너…… 네 정체, 그러니까…….”
보리스의 정체가 뭐지? 그러고 보니 아직도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저 날개 달린 인간일까, 아니면 사람들 모두가 입 모아 말하는 괴물인 걸까.
후자로 부르기는 싫었으나 딱히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콕 짚어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넌, 정말로 뭐야? 보리스?”
그래서 리비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심지어 어렸을 때에도 꺼내지 못한 말이었다.
혹시나 그가 상처를 받을까 봐서. 하지만 지금은 알아야 했다. 꼭 알아야만 그를 보호할 수 있었다.
아니, 납치범을 보호한다는 말이 매우 이상하고 모순적이긴 했지만 정말로 그랬다.
“정말로 몰라, 리비.”
“…….”
각오하고 물었건만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답에 리비는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아버지가 널 어떻게 마을에 데려오게 된 거야? 응?”
“……숲에서 네 아버지를 만났어.”
그의 목소리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날 일을 회상하는 듯했다.
“날 사냥감인 줄 알고 쫓으셨지.”
“너를?”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개는 나왔지만 날지는 못하는 상황이었어.”
그때 상황을 상상하자 어쩐지 웃음이 나오려 했다. 아버지는 날아가는 것은 무엇이든 잘 잡는 재주를 타고났다. 그저 돌 하나로도 참새나 비둘기쯤은 가뿐히 잡을 수 있는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런 아버지가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란 새의 몸짓에 활을 겨눴을 텐데, 그 정체를 알고 어지간히 놀랐겠다 싶었다.
“……그때 어깨에 작은 상처가 있었어.”
“맞아. 네 아버지가 그러신 거야.”
“아.”
보리스의 왼쪽 어깨를 스치고 가듯 나 있던 상처.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잊고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화살이 스쳐 간 자국이었다.
“날 보며 활을 쏘려고 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라서 화살이 빗나갔어, 아쉽게도.”
“……아쉬운 게 아니야, 그건.”
리비는 순간 오싹 소름이 끼쳤다. 만약 그때 화살을 정통으로 맞았더라면 지금쯤 보리스는 없을 수도 있었다. 지금이야 왕국을 호령하는 기사라지만 그때는 그저 제 날개도 제대로 간수 못 하는 남자아이일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피를 흘리는 날 보고 놀라셨고, 그다음엔 어디 사냐고 물었고…… 그다음엔 마을로 데려가셨어.”
그저 숲에서 길을 잃고 우는 아이를 마을로 데려왔다던 아버지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이었다.
“아버지는 다 알고 계셨던 거구나.”
“그때 날개를 집어넣긴 했는데…… 어떻게 집어넣었는지는 잘 모르겠어.”
다행히 집어넣은 덕분에 무사히 집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레제트 공작이 보리스의 정체를 알게 되면 자신보다 더 그를 탐낼지도 모른다. 리비는 그 생각을 하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공작이 자신과 결혼하려는 이유는 순전히 자신의 몸에 흐르는 반쪽짜리 왕실의 피 때문이었다. 왕좌에 앉기 위한 물밑작업인 셈이었다.
하지만 보리스는 아예 그의 취향과 너무 밀접하게 닿아 있었다.
그 변태 공작이 보리스를 잡아 새장에 가둘지도 모른다는 기괴한 상상을 하자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원흉은 겁도 없이 그의 날개를 꺼내 놓고 날아다니게 한 자신이었다.
“……그러면 안 되었는데.”
그녀는 머리채를 움켜쥔 채 억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리비?”
보리스가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리비가 머리를 감싸 쥔 채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에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괜찮아, 리비.”
보리스는 리비를 감싸 안았다. 작게 웅크린 몸은 그의 품 안에 훅 잠기듯 안겨 왔다. 몸집 아래 모두 가려져서 리비의 존재라고는 아래로 삐져나온 발뿐이었다.
“뭐가…… 괜찮은데. 그 공작은 나뿐만 아니라 너도 노릴 거야. 세상에 다시없을 커다란 새. 심지어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데. 공작은 분명히 혹할 거라고.”
“말했잖아, 내가 이긴다고.”
그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속이 편한 건데!”
리비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팡팡 쳐댔다.
“아무튼, 다시는 날면 안 돼, 알았지? 꼭꼭 잘 숨기고 다녀야 한단 말이야, 응?”
그녀는 손을 뻗어 보리스의 등 뒤를 어루만졌다.
“…….”
날개가 튀어나왔던 자리의 옷이 찢겨 나가 너덜거리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수상한 옷차림이었다.
“안 돼.”
“뭐가?”
“이대로는 안 돼.”
“리비?”
“옷을 전부…… 가져와. 다시 꿰매야겠어.”
“옷을?”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개가 튀어나올 때마다 이렇게 찢어지면 누구라도 의심하지 않겠어? 나중에라도 의심 사지 않으려면 미리미리 옷을 고쳐 놔야 해.”
리비는 다급하게 속삭였다.
“네게 날개가 있다는 걸 누구도, 그 어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돼. 알겠어?”
리비는 거의 협박조로 말했고, 보리스는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유순하게 웃는 얼굴로 끄덕였다.
“리비의 말이라면 뭐든지.”
그 말을 듣고서야 그녀는 겨우 웃을 수 있었다. 일단 다짐이라도 받아 두었으니 되었다 싶었다.
‘그럼 그다음은…….’
지금이 기회였다. 보리스가 저토록 유순하게 자신의 말을 잘 들어 먹을 때.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고개를 끄덕이겠다 싶은 순간에.
“그럼 아버지와 동생들을 만나게 해줘.”
“…….”
그 요청에는 선뜻 그러겠다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리비의 얼굴만 뚫어져라 응시할 뿐이었다.
“그건 싫어?”
“나중에 만나게 해줄게.”
“나도 싫어.”
이번에는 리비도 물러서지 않았다.
“너는 결국 네 맘대로 할 거잖아. 눈물 그렁그렁한 얼굴을 해서는 내게 애원하고, 빌고, 그……런 짓들을 하고.”
“그런 짓?”
보리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마!”
리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확 붉어져서는 꽥 소리를 질러 댔다.
“그렇게 해서 내 입을 막았잖아! 다 나를 위하는 척하면서, 내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굴면서. 결국 네 멋대로 했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야.”
“……리비.”
또다시 보리스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물먹은 자수정처럼 맑고 은은하게 빛나는 그 눈빛에 이번에야말로 넘어가지 않을 심산이었다.
“못 만나게 하는 이유가 뭐야?”
리비는 눈을 사납게 뜨려 애썼다. 그래 봐야 동그랗고 커다란 눈 탓에 그저 화난 토끼로나 보일 뿐이었다.
“난 많이 혼란스러워, 보리스.”
“…….”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너에 대해서도.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적어도 아버지라면, 자신보다 아는 게 더 많을 거라고 그녀는 믿었다. 아니, 필히 그럴 것이다.
자신과 보리스, 두 사람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하이든 백작이었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보리스가 알지 못하는 부분들까지 모두 다.
포대기에 싼 채 데려온 아이를 홀로 키우고, 그러다가 계모를 만나 동생들을 낳고 키우면서 그는 한 번도 자신에게 생모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난데없이 왕궁에서 사자가 와서 자신의 핏줄에 대해 까발릴 때까지 어쩌면 단 한 번도.
그래서 리비는 그저 어머니를 아버지가 오며 가며 만난 사람 정도로만 생각해 왔다. 결혼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그는 더 이상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왕녀를 호위하는 기사로 있었다는 것, 그러는 사이 왕녀와 정을 통했다는 것이 유추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니 더 알아내야 한다. 하이든 백작은 분명히 더 숨기고 있는 게 있었다.
특히 보리스의 정체에 대해서.
“……아버지를 만나면.”
보리스가 마침내 느릿하게 입을 뗐다.
“만나면?”
리비는 홱 눈을 치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왜 안 되는데? 뭐가 두려운 건데?”
보리스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그녀가 포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마침내 입술을 떨어뜨렸다.
“알았어, 만나게 해줄게.”
그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정말?”
“응.”
“정말…… 정말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는 거야? 동생들도?”
“그래.”
보리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흡사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리비는 이번만큼은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약속…… 꼭 지켜 줘.”
“응.”
보리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이던 리비의 발걸음이 뚝 멈춰 섰다.
“아버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리비는 소리 지르며 달려갔다.
“리비?”
안으로 들어선 하이든 백작이 마치 귀신을 본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리비냐? 응? 살아 있는 거였어?”
“물론이죠.”
리비는 저도 모르게 어이없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에드나와 리오는…….”
리비는 두리번거리며 쌍둥이를 찾았다. 같이 왔어야 할 동생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리비의 눈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차올랐다.
“두 분이서 이야기하시도록 밖에서 놀고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베스가 웃으며 리비를 안심시켰다.
“아, 고마워요.”
리비는 그제서야 안심한 뒤 하이든 백작의 상태를 살폈다.
“아버지는 괜찮으세요?”
“리비, 리비…….”
하이든 백작은 초췌한 얼굴이었다. 눈 밑에 시커멓게 그늘이 져 있었지만 딱히 아픈 곳은 없어 보였다. 팔과 뺨 한쪽에 시퍼렇게 든 멍을 제외하고.
“이건 그때…….”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이 아버지를 제압할 때 생긴 멍이 확실하다. 새삼 그때 일을 떠올리자 욱하고 속에서 무언가 치받는 느낌에 리비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괜찮아.”
니콜라스는 무뚝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버지다웠다. 리비가 아는 한, 그는 아프다고 바닥을 구르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기사 시절 기른 체력 덕에 잘 아프지도 않았다. 어쩌다 한번 감기에 걸려도 하루 이틀 지나면 거뜬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곤 했다.
그런 아버지를 곤죽으로 만들어 놓은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을 생각하자 눈앞에 휙 불이 일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작자들을 모두 보리스의 기사들이 늘씬하게 두들겨 패줬다는 사실이다.
갑옷과 붉은 장미 장식으로 무장한 레제트 공작의 위엄 넘치는 기사들이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그들에게 당해서 포박된 모습을 떠올리자 끓어올랐던 속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야기 나누십시오.”
리비의 방까지 하이든 백작을 호위한 기사는 예를 갖춘 뒤 물러갔다. 베스가 간단한 다과를 들여놓은 뒤 문을 닫아 주자 방 안은 결혼식 이후 오랜만에 상봉한 부녀만이 남게 되었다.
“리비. 몸은 괜찮은 거냐? 어디 아픈 데는 정말 없어?”
니콜라스는 다시 한번 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디 상한 곳이 있지는 않은지, 아니 일단 정말 리비가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꼼꼼히 훑어보았다.
“저 맞아요. 결혼식 날 납치당한 리비 하이든, 아버지의 딸이요.”
리비의 똑 부러진 대답에 니콜라스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침내 딸이 무사함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남자는 그대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리비는 얼른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아버지가 이처럼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는 일은 흔치 않았다. 언제나 바위처럼 단단하고 산처럼 커다랗던 남자였다.
전직 기사 출신답게 니콜라스의 몸집은 상당히 컸고, 리비는 물론이고 쌍둥이들이 대롱대롱 매달려도 너끈할 만큼 힘도 셌다.
자신과 레제트 공작의 결혼이 내정되었을 때만 해도 그는 무뚝뚝한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기에 당일 자신을 데리고 도주할 계획을 세웠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런 아버지가 무너져 내린 모습에 리비가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니콜라스는 딸의 얼굴을 보고, 또 바라보았다.
“무사했구나…….”
그는 그 말만을 반복했다. 리비는 아버지의 손을 잡아 꼭 움켜쥐었다.
“그럼요, 아버지의 딸이잖아요. 쉽게 죽을 리 없어요.”
물론 죽을 고비를 넘기긴 했다. 모순적이지만, 자신을 납치한 놈에게서 달아나려다가 산적 놈들을 만나 겁탈당하고 죽음을 당할 뻔했다. 그리고 그놈들을 보리스가…….
“아무튼, 저는 멀쩡히 살아 있어요. 그러니 그렇게 유령 보듯 하지 않으셔도 돼요.”
똑 부러지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리비를 보며 니콜라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안도의 한숨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말…… 다행이야.”
“네?”
그의 말은 어딘가 이상했다. 딸이 살아 있으니 당연히 다행이겠지. 하지만 그는 딸의 안위를 확인한 지금, 다른 것에 더 안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를 그런 미친 공작과 결혼시키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야.”
순간 리비는 헷갈렸다. 그가 말하는 ‘미친 공작’이란 게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보리스인가, 아니면 자신과 결혼하기로 했던 그 레제트 공작인가.
“그 늙은 놈에게 널…….”
아, 레제트 공작이구나. 리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첩과 자식들이 주렁주렁 달린 변태 놈에게 너를 보내지 않게 되어서…….”
“아, 아버지…….”
니콜라스의 입에서 구구절절 튀어나오는 레제트 공작에 대한 욕에 리비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가 저렇게 누군가를 대놓고 욕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자신의 결혼이 결정되었을 때조차도 그는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였을 뿐, 레제트 공작을 욕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미친놈의 손아귀에서 보리스가 널 채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리고 저는 또 다른 미친놈에게 걸렸어요, 리비는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수 없었다. 니콜라스가 저런 말을 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으니까.
“일어나세요, 앉아서 얘기해요, 우리.”
리비는 니콜라스의 팔을 부축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원탁을 마주 보고 앉은 니콜라스는 조금 정신이 돌아왔는지 방 안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마을은 괜찮은 거죠?”
리비는 그것부터 물었다. 마을의 안위는 곧 아버지와 동생들의 안전과 맞닿아 있으니까. 마을이 평온해야 가족들도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다.
마을 주민들과의 정이라든가 하는 건 나중 일이었다. 그녀의 결혼식 날 보석을 차지하려고 너나없이 뒤엉켜 몸싸움을 하던 광경이 아직도 눈에 훤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아무리 나이 많은 공작이라 하더라도 그의 부인이 될 리비가 한없이 높아 보였을 테니까. 딱히 눈물짓거나, 불행한 일이라고 깊게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도 다친 사람 없죠?”
리비는 거듭 물었다. 다행히 리오와 에드나, 아버지 모두 무사한 걸 보니 마을 사람들도 큰 해는 입지 않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입으로 확언을 받고 싶었다.
“모두…… 무사한 거죠?”
그 말에 니콜라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아주 무사해. 모두 이전처럼, 잘 먹고 잘살고 있단다. 달라진 거라고는 마을을 순찰하는 칼리니 기사단의 기사들뿐이야.”
“……전보다 치안은 더 좋아졌겠군요.”
“그래, 닭을 잡아먹으러 오는 여우나 가끔 산에서 내려오는 늑대들도 그들이 잡아 준단다. 사람들 모두 아주 고마워하고 있어.”
“그것 참 다행이네요.”
마을 사람들의 적응력이란 실로 무시무시했다. 그들은 자신에게 해만 되지 않으면, 그리고 도움이 된다면 그 어느 누가 마을에 들어온다 해도 환영할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유일하게 거북스러워한 건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이었다. 그 기사들은 리비의 집 근처에 진을 치고서는 삼엄한 경비를 했고, 마을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 일쑤였다.
남부의 왕으로 여겨지는 레제트 공작을 모시는 기사들이라는 자부심도 그것에 한몫 단단히 했다.
그들은 교대로 돌아가며 리비의 집을 감시했고, 마을 주민들은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가야 했다. 참으로 웃긴 일이었다. 이방인은 그들인데, 단지 공작의 수하라는 이유만으로 모두 설설 기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이 머무는 숙소인 여관에서는 손님을 받지 못했고, 마을 주점에서도 그들이 술을 마실 때는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은 자신과 같은 소속이 아닌 이들과 같이 식탁에 앉거나 말소리가 섞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을 단칼에 쳐낸 게 바로 칼리니 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좀 당해도 된다.
이성적으로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그들 때문에 레제트 공작이 분노하여 전쟁을 일으킬까 두려워해야 했지만, 다른 한편의 생각으로는 그랬다.
그들은 당해도 싸다.
그렇게나 오만하고 자기들밖에 모르는 인간들이니 한 번쯤 자신들보다 우월한 힘을 가진 이들에게 눌려 봐도 좋을 것이다. 그게 바로 인생이지, 그럼.
“처음에는 무서워하던 사람들도 기사들이 주는 도움에 차츰 익숙해졌단다.”
“그럴 테죠.”
리비의 입가에서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티소 마을은 규모가 작고, 산과 숲이 인접해 있어 수시로 야생동물들의 공격을 받고는 했다. 그것 때문에 자체적으로 자경단을 조직해 동물들의 공격을 막아 내고자 했다.
문제는 마을에 자경단원으로 활동할 만한 젊은 남자가 지극히 적다는 데에 있었다. 늑대나 여우가 나타나도 쫓아내기는커녕 되레 쫓기거나 동물들의 공격에 다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랬는데 졸지에 마을에 젊고, 강하며, 전투력 최강인 기사들이 무장인 채로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놓이겠는가.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처럼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는 게 아니니 그들의 존재는 마을 사람들에게 크나큰 도움이 될 터였다.
“정말 다행이에요. 다들 발 뻗고 자겠네요.”
언제 짐승들이 내려와 밭을 헤집고, 쌓아 둔 식량을 훔쳐 먹을까 걱정하던 사람들은 이제 발 뻗고 잘 것이다.
그제서야 보리스가 걱정하지 말라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전에 누려 보지 못한 안전함 속에서 살고 있었다.
“여기서 지내는 게냐?”
“네.”
“좋은…… 곳이로구나.”
“네, 제 방보다 몇 배는 더 넓죠.”
“너는 원래 이런 곳에 살았어야 해. 네 몸에 흐르는 피를 생각한다면…….”
“아버지, 저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리비는 머리를 내저었다.
“그간 별말씀이 없으셔서, 저도 더 물어볼 수 없었어요. 곧 낯선 땅으로 가서 결혼을 한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기도 했고. 하지만 이제는…….”
리비는 말하다 말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제는, 이제는 괜찮은 건가? 예정된 결혼식 대신 다른 남자의 성에 잡혀 와 이렇듯 아버지를 마주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야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캐물으려는 용기가 솟아올랐다.
리비로서는 그 변화가 기이하기만 했다. 내내 보지 않으려 했던 진실을 마주할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그렇게나 큰 비밀을 여태껏 숨기며 살아온 아버지에 대한 원망일까, 아니면 또 다른 감정인 걸까.
“엘가 왕녀님과 사랑하는 사이였나요?”
“……그래.”
“왕녀님이 낳은 아이인데, 왜 왕실에서는 버렸을까요?”
아이의 아비가 아무리 귀족도 아닌 그저 일개 기사일 뿐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왕가의 피가 흐르는데 어떻게 성 밖에서 키울 생각을 했을까.
“……네가 곧 미칠 거라 여겼기 때문이지.”
“…….”
“왕실의 여자들에게만 내려오는 병 같은 게 있단다. 모두들 미치거나, 죽거나.”
리비의 입안이 바싹 말랐다. 왕가에서 여자들에게만 전해 내려온다는 병. 그럼 자신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럼 저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거예요?”
“아니다, 너는 아니야.”
니콜라스는 강한 어조로 부정했다. 하지만 확언이라기보다는 현실을 부정하는 어투가 강했다.
“그럼 왕녀님은요?”
“너를 낳다가…….”
니콜라스의 눈이 크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왕녀님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도 무사하셨네요.”
일국의 왕녀를 건드렸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는 하나 일개 호위 기사와 왕녀가 마음을 통하고 아이까지 낳는 일은 쉽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식으로 결혼도 안 한 왕녀가 아이를 낳았으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이나 아버지 모두 죽었을지도 모른다.
“왕녀님의 유언이었다. ‘하얀 장미의 언약’을 했거든.”
“……‘하얀 장미의 언약’요?”
왕실의 관습 중 하나인 하얀 장미의 언약’은 왕에게 부여되는 의무였다. 왕은 그 맹세로 묶인 관계에서 발현되는 약속을 깨뜨릴 수 없는 게 관례였다. 당연히 그 요구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이도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안드로스 왕의 선왕의 정부에게서 본 아들이었지만 엘가 왕녀님은 적통 왕녀였다. 정부가 낳은 아이가 아니라 왕비의 몸에서 난 딸이니까. 적통 왕녀에게는 왕에게 단 한 번, 왕조차도 깨뜨릴 수 없는 ‘하얀 장미의 언약’을 요구할 자격이 있단다. 그걸 받은 왕은 절대로 그 약속을 어길 수 없으니, 말을 들어줘야만 했지.”
“아주 소중한 기회였을 텐데요.”
“너는 왕녀님의 유일한 핏줄이니까.”
“…….”
일생에 단 한 번. 게다가 왕국의 지배자인 왕이 거절할 수 없는 요구. 그것을 딸과 연인을 살리기 위해 썼다. 생전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리비는 가만히 무릎 위의 손을 움켜쥐었다.
“몰랐어요, 그런 건.”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어째서.”
진작 말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어째서 이렇듯 갑작스레 모든 걸 알게 한 걸까. 그동안의 시간이 리비에게는 너무 가혹했다.
“네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기를 바랐으니까. 왕가의 핏줄이든 뭐든, 그저 네가 행복한 것이 가장 중요했다. 왕도 너를 잊은 듯했고…… 그런데 이렇게 너를 이용해 먹을 줄 몰랐구나.”
“그는 왕이니까요.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도 남죠.”
오래전에 버린, 왕녀의 딸을 다시 찾아내 결혼을 강요할 만큼. 그리고 자신과 아버지에게는 그것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아버지, 사실 제가 정말로 궁금한 건…….”
리비는 말을 끝맺지 않은 채 니콜라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는 걸 보자 자신의 예감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뭔가를 숨기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보리스는 대체…… 정체가 뭐예요? 그, 아시죠? 그 날개.”
리비는 양손으로 파닥파닥 날개를 펴 보이는 시늉을 했다.
“……봤니?”
니콜라스는 놀란 눈으로 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닥칠 게 닥쳤다는 듯 비장한 얼굴이었다.
“물론이죠.”
보기만 했는가. 그 날개의 힘을 빌려 훨훨 날아 보기도 했다. 물론 그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언제? 보리스가 자기 날개를 보여 준 것이냐?”
“지금은 아니고요.”
리비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덧붙였다.
“……어릴 때부터요.”
“어릴 때?”
니콜라스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보리스가 잠깐 사라진 적이 있었잖아요.”
“그래, 그때…….”
니콜라스는 뭔가를 생각하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집에 있던 먹을 것들을 제가 조금씩 훔쳐다가 날랐고요. 그때 눈치채셨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네가 날개를 봤을 줄이야.”
“보리스는 그때만 해도 날개를 숨길 줄 몰랐거든요. 그리고 당연히, 그 날개는 마을 사람들에게 숨겨야 할 존재였고요.”
“…….”
“그러니 아버지도 제게 아무 얘기도 안 하셨던 거겠죠? 아버진 처음부터 다 알고…… 제게 보리스를 데려오신 거잖아요. 보리스가 말해 줬어요. 숲에서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 등에 날개가 솟아 있었다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이냐?”
“그게 전부예요.”
리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날개가 난 채 숲을 헤매고 있었던 보리스와, 그런 그를 커다란 새인 줄 알고 쫓았던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는 뭔가 더 아실 것 같아서요.”
“내가 아는 것도 그게 전부란다.”
니콜라스의 말에 리비는 맥이 탁 풀렸다. 아버지라면 뭐든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혹시, 마물…… 같은 걸까요?”
리비는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보라색 눈을 떠올렸다. 그 눈을 마주할 때면, 그가 그 눈빛으로 뭔가를 애원할 때면 그녀는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하는 어떤 부탁이든 다 들어주고만 싶어졌다. 그러니 필시 그 눈에는 어떤 마력이, 그녀가 통제하지 못할 그 어떤 힘이 깃들어 있는 게 분명했다.
“보리스의 눈은 보라색이잖아요. 흔치 않아요, 그런 색은.”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보리스의 눈 색은 도통 볼 수 없는 빛깔이기는 했다. 생전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만나 보지 못했으니까.
물론 어릴 때는 보리스를 마물이라고 놀려 대는 친구들에게 돌팔매질을 해서 입을 막았지만, 이제는 정말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졌다. 아니, 등에 날개가 솟아 있고, 까마귀를 제 시종 부리듯 부리는 남자가 대체 어떻게 보통 사람일 수 있을까.
“게다가 까마귀를 부린다고요.”
까악.
리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열려 있는 창문 너머로 까마귀 울음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자 덩치 큰 까마귀가 잔뜩 불만을 품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리 가! 보리스에게 일러 버리기 전에.”
리비가 외치자 까마귀는 다시 한번 길게 까악, 소리를 내더니 휙 날아가 버렸다.
“……보셨죠?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고요.”
“까마귀는 원래…….”
“영리한 새죠. 하지만 저 정도는 아닐 거예요.”
처음 본 광경에 니콜라스도 할 말을 잃은 듯 입만 벌리고 있었다.
“보리스의 명령대로 적진을 정찰하고…… 정보를 알려 주고…… 그리고 또 나를…….”
추격하기도 했었지.
“너를?”
“아니에요, 아무것도.”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묻는 아버지를 보며 리비는 얼른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튼, 보리스에게 날개가 있고,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아버지는 보리스를 숨겨 주셨어요, 그렇죠?”
보통 사람이라면 보리스의 생김새에 기겁하며 도망쳤을 것이다. 혹은 죽이려 들거나.
그런데 니콜라스는 오히려 그를 데리고 와서 먹이고 입히고 재워 주며 마을에 정착하도록 도와주었다.
도대체 왜?
단순히 정 많은 성격이라서 그렇다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그 숲에 두고 올 수 없었다.”
니콜라스는 리비의 시선을 회피하듯 얼굴을 돌렸다.
“어린 소년이었어. 등에는 날개가 솟아 있었지만. 펑펑 우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물어도 답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했고.”
“그럼 아버지도 아무것도 모르신단 말이에요?”
“…….”
니콜라스는 말없이 손만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네? 아버지. 정말 보리스에 대해 아는 게 없으세요?”
“나는 어쩌면 그 아이가.”
니콜라스는 말을 멈췄다. 쉽사리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칼리니의 후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칼리니……요?”
갑자기 나온 단어에 리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칼리니. 전설의 까마귀. 용에게 잡혀간 공주를 구하느라 제 목숨 바쳐 달려들었던 용감한 까마귀. 그러나 결국 까마귀는 죽고 말았다.
“까마귀가 인간을 낳았다고요?”
“아마 전설 속에 묘사된 ‘까마귀’는 진짜 새라기보다는…… 보리스와 같은 형상이었을 것 같구나.”
“……그럼 보리스가 전설 속 그…… 까마귀와 같은 존재라는 거예요?”
“내 추측일 뿐이야.”
“에드라크의 영주님과도 관련이 있나요?”
보리스의 아버지도 커다란 날개를 갖고 있다고 했으니까…….
“아마 그 피가 에드라크 영주님의 가문을 통해 내려온 거라면,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아니, 나는 맞다고 생각한다.”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열어 두려 했던 하이든 백작은 확신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마물이 아닌 거죠? 그렇죠?”
리비는 확답을 받기 위해 아버지를 다그쳤다. 남들이 무서워하고 꺼리는 존재, 한없이 불길한 아이. 그런 취급을 받았던 보리스가 정말 마물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하지만.
“보리스…… 보리스는…….”
설령 보리스가 ‘칼리니’가 맞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마물이나, 전설 속 까마귀나 별 차이 없는 존재니까. 더구나 보리스의 등 뒤에 솟아난 날개를 본다면 더더욱.
“레제트 공작이, 옛날에 저와 보리스가 하늘을 날던 걸 본 것만 같아요.”
“뭐?”
내내 굳은 바위 같던 얼굴의 니콜라스가 드물게 놀라며 외쳤다.
“아마 그래서…… 마을에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이 왔던 걸 거예요. 보리스를 찾으러. 찾아서…….”
산 채로 잡아가서 키우든, 아니면 아름다운 그 모습 그대로 박제를 하려는 목적이든.
이제 보리스는 나라를 구한 전쟁 영웅이고, 존경받는 기사단장이니 그 위험에서 벗어난 걸까?
“정체를 들키면 보리스가 위험할 거예요. 게다가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도 여기 갇혀 있고요. 자기 신부를 약탈당한 걸 공작이 아는 건 시간문제죠.”
가장 두려운 순간. 언제고 오고 말 바로 그 순간. 리비는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시시각각 목을 죄어 올 밧줄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네가 다시 레제트 공작의 신부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 너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
“…….”
리비는 눈을 크게 뜬 채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미 되돌릴 수 없게 되었어. 네가 설령 얌전히 레제트 공작의 신부가 된다 해도 네가 보리스에게 납치당했던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는 너를 데려가면서 동시에 보리스의 죗값을 물으려 할 거야.”
“…….”
“그리고 너를 결코 편히 살도록 두지도 않을 테지. 그가 목숨처럼 여기는 순결성을 의심할 테니까.”
“저는, 저는 아직…….”
리비는 말하다 말고 얼굴이 빨개졌다. 아직이라니. 아직이라는 건 언제고 벌어질 일이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자신은 그 일을 각오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그 사실에 더럭 두려워졌다.
“그런 건 공작에게 중요하지 않다, 리비. 네가 다른 남자의 품 안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발작하고도 남을 테니까.”
결국, 레제트 공작은 이러든 저러든 보리스를 죽이려 할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럼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리비는 간절한 시선으로 니콜라스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죠?”
***
리비는 아버지와 함께 쌍둥이가 있는 정원으로 나갔다.
에드나와 리오는 흰 장미가 피어난 드넓은 정원을 마구 뛰어다니고 있었다.
“에드나, 리오.”
정원에서 뛰어놀던 쌍둥이가 리비를 보자마자 달리기 시합하듯 뛰어왔다.
“누나!”
“언니!”
쌍둥이는 제각각 리비의 드레스 자락에 매달린 채 그녀를 불러 댔다.
“잘 있었어?”
동생들을 보는 리비의 얼굴에 웃음이 확 퍼졌다. 한창 복잡했던 머릿속이 두 동생들을 보자 잠시나마 풀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동생들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언니, 왕녀님 같아.”
에드나는 리비의 옷에 수놓아진 황금색 깃털 문양을 황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린 동생의 눈에도 리비가 입은 황금빛 수가 놓인 하얀 드레스는 좋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
에드나의 말에 리오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리비를 올려다보았다.
“맞아, 왕녀님이야.”
“응?”
리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누나, 이거 누나 주려고 만들었어.”
리오가 등 뒤로 감추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이건.”
리비는 리오가 내민 것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작은 손에 쥐어진 것은 하얀 장미를 엮어 만든 화관이었다. 흰 장미 줄기를 이리저리 엮여서 만든 품새가 제법 그럴듯했다.
“이걸 직접 만들었다고?”
“응.”
리오와 에드나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인 니콜라스에게서 짙은 밤색 머리칼과 눈 색을 그대로 물려받은 쌍둥이였다.
반면 리비의 눈 색과 머리 색은 이복동생들과는 전혀 달랐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는 걸, 그녀는 커가는 내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니 머리 색에 어울릴 거야.”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있었다. 순수한 믿음과 애정이었다.
리비는 장미 화관을 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탐스러운 흰색 꽃송이가 엮인 화관은 아름다웠다. 그 어떤 보석으로 치장된 왕관보다도 값지고 귀한 것처럼 보였다.
“씌워 줄래?”
리비는 화관을 다시 쌍둥이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살짝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내밀었다. 에드나와 리오는 화관의 왼쪽과 오른쪽을 잡고서 리비의 머리 위로 조심스레 화관을 올려놓았다.
“고마워.”
리비는 숙였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구불거리는 크림색 머리칼 위로 하얀색 장미꽃이 어우러져 그녀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와, 정말 예뻐, 언니.”
에드나가 짝짝, 박수를 쳤다.
“누나, 왕녀님보다 예뻐.”
리오가 덩달아 박수를 치며 웃었다.
“바보. 왕녀님을 본 적도 없잖아.”
“그래도 더 예뻐.”
“왕녀님은 언니의 어머니라는데, 누가 더 예쁠까?”
“돌아가셨으니까 모르지.”
“그래도 언니가 더 예쁠 거야.”
사소한 호기심으로 시작된 대화는 한참이나 옥신각신 이어졌다. 리비는 무릎을 꿇고 앉아 쌍둥이 동생들에게 손을 뻗었다.
쌍둥이는 즉시 리비에게 안겨 들었고, 그녀는 동생들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자그마한 손과 팔이 리비의 목에 휘감기며 매달렸다. 세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있었다.
에드나와 리오.
배다른 동생들이지만 그동안 살뜰히 보살펴 왔다. 몸이 약한 계모 대신 아이들을 돌볼 때가 잦았으며, 아이들도 리비를 잘 따랐다. 계모가 죽고 난 뒤로 아이들은 더더욱 리비를 따랐다.
이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대단한 것을 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전쟁이 일어날 위험 속에서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내내 그렇게 자라 왔기 때문에.
보리스 역시 전장에 나가면서 그녀의 기억을 지우지 않았던가. 죽을지도 모를 곳에 간다는 건 본인에게도, 그 사람을 기다리는 다른 누군가에게도 괴로운 일이었다.
아마 보리스가 자신의 기억을 지우지 않았더라면 그녀 역시 내내 그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말라 갔을 것이다.
자신이 무사히 레제트 공작과 혼인했더라면 이 전쟁은 완벽하게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을 막기 위한 결혼의 희생양이 되었는데 되레 전쟁을 일으킬 빌미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다.
만약 또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쩌면 다음번엔 리오가 전장에 끌려갈지도 모르고, 에드나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지 모른다. 한번 전쟁이 터지면 언제 끝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왕좌를 놓고 벌이는 내전은 더더욱. 그리고 내전을 틈타 다른 나라에서도 호시탐탐 왕국을 노릴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전쟁의 규모는 지금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 있다.
그 생각을 하자 동생들을 끌어안은 리비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언니, 숨 막혀.”
에드나가 팔을 버둥거리며 리비에게 말했다.
“응? 으응, 미안해.”
리비는 당황하며 얼른 팔을 풀어 냈다.
“누나, 왜 그래?”
자신들을 바라보는 리비의 시선이 평소와는, 이전에 알던 누나와는 많이 다른 걸 느낀 탓인지 리오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리비는 고개를 가만히 내저으며 얼굴을 숙였다. 어쩐지 눈물이 솟을 것 같아서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두 동생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우린 이만 돌아가 보마.”
“아버지?”
리비는 놀라서 니콜라스의 소매를 붙들었다.
“벌써요?”
“해가 지기 전에 마을에 돌아가야 한단다.”
“여기에 머무르시는 건 안 돼요?”
리비는 다시 다급하게 말했다.
“보리스에게 말해서 머무르실 수 있도록 할게요.”
아버지와의 만남을 내키지 않아했던 그였지만 결국 들어주지 않았던가. 리비가 그를 떠나는 것 외에는 뭐든 허락해 줄 것 같은 그였다.
“그러니까 같이 여기서…….”
살아요, 네? 다음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근엄한 얼굴의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언제나 리비가 보던 그 얼굴 그대로였다. 무섭진 않지만 단단하고, 상록수처럼 변하지 않는 표정.
“나는 마을을 돌볼 의무가 있단다.”
“하지만…….”
“그건 내 의무야. 너도 네 의무를 다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리스도 마찬가지고. 나는 내 역할을 끝까지 할 거란다.”
그는 딸을 안심시키듯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은 내가 마을을 버렸다고 생각할 거야. 사람들은 많이 불안해해. 어쨌거나 왕명으로 거행한 결혼이 깨졌으니, 왕궁에서 보복을 하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지.”
“…….”
“그들은 평생을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소와 양을 키우는 게 삶의 전부인 사람들이야. 살면서 가장 큰 위협이라고는 늑대가 내려와 양을 잡아먹거나 멧돼지가 밭을 헤집어 놓는 정도지.”
리비는 니콜라스의 소매를 잡았던 손을 툭 떨어뜨렸다. 모든 건 결혼식이 제대로 치러지지 않아서 생긴 결과 아닌가.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확 밀려들었다.
“네가 미안해하거나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리비.”
니콜라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다.
“마을 사람들에게 마을의 수장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는 건 나지, 네가 아니야.”
“…….”
“그러니 너는 네 행복만 생각하렴. 네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택하면 돼.”
커다란 손이 리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너는 내 딸이자 왕녀님의 딸이다. 너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단다, 리비.”
흔들림 없이 단단한 시선과 마주한 채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백작님은 잘 배웅하고 왔어?”
성문으로 나가는 하이든 백작과 쌍둥이 동생들을 보내고 내성으로 돌아오자 보리스가 리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넓은 정원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에 리비는 선뜻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어느덧 해는 지기 시작해서, 깊은 석양빛을 등진 그의 모습이 낯설어 보였다.
저건 개인가, 늑대인가.
새카만 머리칼, 온몸을 감싼 검은 옷과 어깨를 감싼 방어구까지. 그는 너무 크고,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그 와중에 툭 치면 울 것 같은 보랏빛 눈이 기이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지러지는 석양 속에 그를 보고 있자니 더욱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네가 행복할 길을 찾으라는 아버지의 말이 자꾸만 귓속을 맴맴 돌았다.
그 말대로라면 자신의 행복은 보리스인 것일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죠?”
“네가 납치당한 걸 레제트 공작도 언젠가는 알게 될 테지.”
“그럼 전쟁이 일어나잖아요.”
“그보다 빨리 왕에게 이 결혼을 인정받으면 된단다.”
실로 명확하고도 경쾌한 대답이었지만, 그 말을 듣자 리비는 더욱 막막해지고 말았다.
덩그러니 보물만 표시된 지도를 보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 주지 않는 불친절한 지도.
결국 길을 찾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왕이 이 결혼을 인정해 줄까요?”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만들면 되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요?”
리비는 멍하니 되물었다. 그러다가 그의 말뜻을 알아채고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말았다.
“아버지!”
“리비, 나는 너를 굳이 누군가와 짝지어야 한다면, 그게 레제트 공작은 아니길 바란다. 일개 촌부여도 상관없지만…… 보리스가 너를 찾아왔으니까.”
“…….”
“보리스가 싫은 거냐?”
“그건…….”
리비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보리스에 대한 건 여태 속으로 생각만 해왔지, 누군가 자신에게 직접 질문을 던진 적은 없어서였다. 그런데 그 질문을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의 입을 통해 듣게 되다니.
니콜라스는 죽어라 고민하는 리비의 얼굴을 보더니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는 리비에게 다른 사실을 일러 주었다.
“왕에겐 보리스가 필요하단다, 리비. 레제트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그게 네가 가진 무기란다.”
그렇게 말하는 니콜라스의 얼굴에는 확신이 넘쳤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서 살아온지라 왕궁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왕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왕위를 레제트 공작에게 내주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실제로 거의 그럴 뻔했다.
보리스가 없었더라면. 그가 이끄는 칼리니 기사단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쯤 세셔 왕국의 왕은 레제트 공작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보리스가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왕에게는 보리스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어야만 한다. 무엇보다 에드라크 영지를 하사받은 것은 사실이니까.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공작에게 시집가지 않아도 되는 길, 그리고 전쟁을 막는 길. 모두가 무사한 길.
리비는 그 길을 찾아야만 한다. 눈앞의 이 까마귀를 설득해서. 하지만 그가 과연 그 말을 들어줄까. 당장이라도 전쟁을 일으키면 자신이 이긴다고 장담하는 이 미친 까마귀가.
“왜 그래?”
보리스가 리비가 서 있는 곳으로 성큼 다가섰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것을 보는 보리스의 눈빛이 상처받은 짐승처럼 변하는 것을 보자 리비는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리비?”
그는 조금 더 다가섰고, 리비는 또다시 그만큼 물러섰다. 그게 몇 번 반복되자 보리스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은 채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백작님이 뭐라고 하셨어?”
“별말씀…… 안 하셨어.”
그리고 또다시 침묵. 그사이 해는 더욱 뉘엿뉘엿 져갔다.
“아, 아버지는 마을로 돌아가셨어. 동생들도. 만나게 해줘서 고마워.”
고마워? 고맙다니. 이게 납치범에게 할 법한 소리인가. 리비는 순간 혼란해졌다.
“무슨 말씀을 하신 거야? 리비, 이상해.”
보리스는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다. 짐승의 촉이란 이런 것인가.
“이상하긴, 내가 뭘. 이상하긴 네가 더 이상하지.”
무슨 잘못을 짓기라도 한 사람처럼, 리비는 자꾸만 속이 불편했다. 대체 왜 그러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버지의 말이 자꾸만 귀에 맴돌 뿐.
니콜라스는 보리스의 이 납치극을 두고 ‘잘됐다’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결혼이 깨진 일로 말미암아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히 상상하기도 두려웠으므로.
“리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보리스는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이 리비의 머리에 얹어진 하얀 장미 화관을 더듬었다.
“응? 아, 동생들이…….”
리비는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하얀 장미 화관을 벗으려 했다. 그러자 그의 손이 다시 부드럽게 손등을 눌러 왔다.
“예뻐, 리비.”
“…….”
그놈의 예쁘다는 소리. 보리스를 만난 후 그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바로 예쁘다는 것이었다. 리비는 예뻐, 뭘 해도 예뻐, 정말로 예뻐. 대체 자신이 뭐가 그리 예쁘다는 것일까.
“보리스, 나 안아 줘.”
리비는 보리스를 향해 팔을 벌렸고, 그는 주저할 것 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위로…… 데려다줘.”
리비가 속삭이자 그는 즉각 날아올랐다. 부드럽게 펼쳐진 날개가 허공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는 아주 부드럽게 날아올라 탑에 착지했다.
창문으로 먼저 그녀를 내려 준 보리스가 날개를 접은 뒤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날개는 그의 등 뒤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리비는 그 광경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여러 번 보았음에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긴, 날개가 있는 것 자체에 익숙해지는 일이 결코 쉬울 리는 없었다.
“리비, 오늘 이상해.”
보리스는 자신이 리비를 내려놓았음에도 그녀의 팔이 자신의 목을 칭칭 휘감고 있는 걸 이상하게 여기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어지럽게 흔들렸고, 그런 그에게 바짝 붙어 선 리비의 눈빛은 오히려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단단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는 초조하게 물었다. 커다란 손이 가냘픈 등허리를 쓸어내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동안, 리비는 그에게서 서서히 몸을 떼어 냈다.
“아무 일도 없었어.”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신비로운 빛을 품은 보랏빛 눈동자와, 새싹 같은 연초록빛 눈동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서로를 향해 빛나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당황한 건 보리스 쪽이었다. 반면 리비의 손은 대담하게 그의 팔을 훑어 올라갔다. 팔과 어깨, 목을 지나 얼굴에 다다른 손이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자신을 보라는 듯 아래로 끌어 내렸다.
보리스는 조금도 힘을 주지 않은 채로 리비의 작은 손에 이끌려 몸을 숙여 주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입술이 닿을 수도 있는 바로 그 거리에서, 리비는 입술을 떨어뜨렸다.
“보리스.”
“…….”
보리스의 의아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은 순간, 리비는 결심한 듯 말했다.
“우리, 이 결혼을 인정받자.”
순간 보리스의 얼굴이 햇살이 쏟아지듯 빛을 발했다. 정작 밖은 이제 완연한 어둠으로 바뀌어 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럴 거야.”
보리스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걸 본 리비가 재빨리 그의 입에 손가락을 얹었다.
“하지만 전쟁은 안 돼.”
“…….”
그럼 어떻게 하느냐는 눈빛으로, 보리스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기사들도 전부 풀어 줘. 레제트 공작에게 빌미를 주어서는 안 돼.”
보리스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리비는 그조차도 막아 버렸다.
“그리고…….”
리비는 슬쩍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뒤에 이어진 행동에 보리스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리비는 제 손으로 드레스를 끌어 내렸다.
“나를 가져.”
급하게 끌어 내린 드레스가 가슴께에 걸쳐졌다. 그러나 그 밑으로 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보리스의 손에 제지됐기 때문이었다.
“리비.”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우리의 결혼을 인정받으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어.”
“이러지 마.”
그는 반절은 끌어 내린 드레스를 다시 끌어 올려 리비의 몸을 덮어 준 뒤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부서져라 끌어안는 힘에 리비는 크게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전쟁을 원하지 않아.”
“…….”
“반드시 왕을 설득해서, 이 결혼을 인정하게 만들 거야. 그러려면.”
리비는 그의 팔을 두드렸다. 조금 풀린 팔 틈으로 빠져나온 리비가 그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레제트 공작이 내게서 원하는 것을…… 없애야 돼.”
보리스의 답은 들을 수 없었다. 한껏 뒤꿈치를 들어 올린 리비가,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보리스의 입술을 덮친 리비가 대담하게 그의 숨결을 앗아 갔다. 갑작스러운 덮침에 당황한 건 보리스 쪽이었다.
“…….”
그는 리비의 양어깨를 움켜쥔 채로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리비는 더욱 대담하게 그의 입술을 열고, 혀를 감아 왔다.
“으…… 음.”
리비의 입술 새로 야릇한 숨소리가 흘러나오자 그의 얼굴은 금세 달군 쇠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늘 본인이 해오던 짓이었음에도 그 상황이 역전되자 보리스는 적잖게 당황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랬다.
그는 마치 난생처음 여자와 입을 맞춰 본 풋내기 소년처럼 리비의 키스를 받아 내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한없이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리비를 붙잡고 있을 따름이었다.
살며시 뜬 눈으로 그 모습을 관찰한 리비는 왠지 모를 쾌감에 휩싸였다.
모든 건 자신이 이끌어낸 반응이었다.
처음 그에게 입술을 들이댈 때는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오히려 생각을 하면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였다.
하지만 막상 입술을 마주 대고 나자 그런 걱정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보리스의 입술. 이미 익숙해질 만도 했건만 그녀 자신이 먼저 다가가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리비는 그의 목 뒤에 두른 팔을 한껏 잡아당겨 그를 더욱더 자신 쪽으로 가깝게 이끌었다.
보리스는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숙여 리비에게 더욱 가까이 몸을 붙여 주었다. 비록 울보이긴 해도 그 커다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몸을 숙여 오니 새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너는 이렇게 커다란 남자인데.’
그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부스러질 과자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정말 자신이 부서지기라도 할 듯, 그녀를 붙들고 있는 손은 한없이 부드럽기만 했다.
리비는 더욱 대담하게 그의 몸에 밀착했다. 입술뿐만 아니라 전신을 그와 가깝도록, 조금의 틈바구니도 안 보이게끔 바짝 몸을 붙여 왔다.
단단한 가슴팍에 눌린 가슴에 보리스는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그런 반응조차도 신선했다. 이미 그가 수없이 해온 짓이건만.
리비는 어쩐지 신이 났다. 그를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 두고서 노는 기분이었다. 결코 나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를 유혹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어느덧 그런 목적 따위는 머릿속에서 깨끗이 날아가고 말았다. 지금은 그저.
그를 원한다. 누가 시작했든, 무엇이 우리 앞에 놓여 있든 간에. 일단 오늘 밤은 그를 원했다.
리비가 일방적으로 짓뭉개던 입술이 잠시나마 떨어졌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건 그녀였다.
보리스는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러나 얼굴은 매우 붉게 물들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랏빛 눈이 혼란함으로 물들어 한층 짙은 빛을 띠고 있었다.
입술은 떨어졌지만 서로의 숨이 뜨겁게 뒤엉킬 만한 거리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보리스는 손을 들어 리비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더니, 힘겨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러지 마, 리비.”
그의 반응에 리비는 넋을 잃고 말았다.
“…….”
지금 뭘 잘못 들은 건가? 기껏 기회를 줬더니.
“널 억지로 갖는 일 따윈, 하지 않을 거야. 우리의 결혼을 인정받은 다음에…….”
그의 목소리는 웁, 하는 소리와 함께 사그라들었다. 리비가 제 입술을 거칠게 마주 대며 혀를 밀어 넣은 탓이었다.
순식간에 밀려 들어온 혀가 보리스의 입안 곳곳을 휘저었다. 그가 한 것처럼, 내내 그래 온 것처럼, 제 것인 양 샅샅이 누비고 핥아 댔다.
두 손으로는 보리스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행여 그가 뿌리칠까 양손으로 야무지게도 움켜쥐었다. 보리스는 다행히 밀어내는 대신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저돌적인 키스에 응했다.
“하아…….”
한참 만에야 떨어진 입술 새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리비는 볼이 잔뜩 붉어진 채 그를 보며 색색 숨을 내쉬었다. 보리스는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는데 본인만 이러니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입고 있던 드레스를 허리까지 끄집어 내렸다.
그는 하얀 젖가슴이 제 앞에서 부드럽게 출렁이자, 다소 충격을 받은 듯싶었다.
이제 와서?
리비는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굳은 결심은 한 뒤 그의 손을 들어 제 한쪽 가슴에 척하니 올려 두었다.
“만져 봐.”
“…….”
커다란 손 아래 갇힌 가슴의 정점은 곤두서 있었고, 그것이 굳은살이 밴 남자의 손바닥을 자극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이래도 싫어?”
그가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채 멍하니 있자, 리비는 그의 손등 위로 제 손을 올린 채 제 가슴을 마구 주무르게 했다.
“리비…….”
그 대담한 행동에 놀란 보리스의 눈이 더욱 커졌다.
“뭐 하는…….”
“뭐 하긴, 네가 맨날 하던 짓이지.”
리비는 부끄러운 생각보다는 그를 더 자극하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 차올랐다.
“보리스, 안아 줘.”
리비는 다시 한번 속삭였다. 순간 그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더니 손을 떼어 내고 단번에 제 입속으로 가슴을 빨아들였다.
“흣!”
만지라고 했지, 이러라고는 안 했지만.
진도가 매우 훌륭하니 그녀는 봐주기로 했다.
두툼한 혀가 가슴의 정점을 쓸고 쪽쪽, 외설스러운 소리를 내며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놀란 리비가 그의 머리통을 움켜쥐자 보리스는 아예 그녀의 양손을 각각 붙잡아 제 손으로 결박해 버렸다.
“하읏…….”
양손을 붙들린 채 어찌할 새도 없이, 계속해서 가슴이 빨렸다. 혀끝으로 톡톡, 유두를 쳐대다가 한입에 삼킬 듯 깊숙이 빨아 대고, 다시 핥아 올리기를 반복하는 동안 리비는 죽을 것만 같았다.
“응, 으응, 아아…….”
빨리는 건 가슴인데 어쩐지 다리 사이가 축축하게 젖어 왔다. 불이라도 닿은 듯 뜨끈해지기까지 했다.
허리춤을 지나 골반에 걸쳐진 드레스가 하늘거리며 늘어진 것이 보였다.
반면에 상체는 인어처럼 모조리 탈의한 상태였다. 왠지 그것이 더욱 야하게만 느껴졌다.
가슴에서 입을 떼어 낸 보리스가 잔뜩 흥분한 리비의 입술 새로 제 혀를 밀어넣으며 깊이 입 맞춰 왔다.
“으…… 응, 읏.”
리비는 다리를 그의 탄탄한 허리에 휘감은 채로 깊이 신음했다. 그의 혀가 깊이 찔러 올 때마다 발가락이 저절로 곱아들었다.
키스에 정신이 나가 있느라 몰랐는데, 그동안 보리스는 걸어서 침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 앞에서 한참이나 입술을 맛보던 그가 리비를 천천히 침대 위로 내려놓더니 그 위로 올라탔다.
“하아…….”
잠시 얼굴이 떨어진 사이, 리비는 자신에게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남자를 보며 한숨지었다.
보리스는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대로 삼켜질 것만 같은 느낌에 리비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의 눈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리비가 떨고 있는 광경이 담겼다. 그는 차마 리비에게 바로 손을 뻗지 못했다. 대신 머리 위에 얹어진 하얀 장미 화관을 가만히 어루만질 뿐이었다.
“리비.”
“…….”
“괜찮은 거야?”
한없이 부드럽고 애잔한 목소리에 리비는 어쩐지 몸이 녹아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입에서는 톡 쏘는 말이 흘러나왔다.
“너는 나를 안 놔줄 거라며.”
“…….”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이것뿐이야. 날 네 것으로 만들어. 그리고 레제트 공작에게 보낼 수 없다고 해. 그러면 레제트 공작이 나를 신부로 맞을 이유가 사라지니까.”
“그런 이유 때문이야?”
보리스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상처를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웃긴 일이었다.
“그럼, 그 이유 말고 뭐가 더 있겠어?”
말은 부드럽게 나오지 않았다. 리비는 아까 스스로 그의 입술을 탐하고, 그에 뜨겁게 안겼을 때와는 전혀 딴판인 사람처럼 굴었다.
“너는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네가 원하는 건 그거잖아?”
“내가 원하는 게 뭔데?”
보리스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순간 리비는 찔끔하고 말았다.
“나랑…… 나랑…….”
말은 쉽게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너랑, 뭐?”
보리스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걸렸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웃음이었다.
“말해 봐, 리비.”
그의 손끝이 리비의 뺨을 훑어 내려오더니 목덜미에 닿았다. 그리고 쇄골을 지난 손이 가슴 위로 스쳐 지나갔다. 마치 육식 짐승이 먹이를 먹기 전 그 맛을 가늠해 보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리비는 몸을 흠칫흠칫 떨어 댔다. 냉기가 풀풀 흘러내리는 목소리가 귀에 감겨 들 때마다 그녀의 몸의 떨림은 한층 더해 갔다.
“내가 이 드레스를 갈가리 찢고, 너를 안기를 바라?”
“…….”
허리 부근을 부유하던 손이 단번에 옷깃을 감아쥐었다. 옷은 너무나도 쉽게 풀어헤쳐졌다.
이제 그녀는 온전히 알몸만 남게 되었다.
순식간에 드러난 하얀 살갗에 달빛이 내리쬐어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것이 리비의 눈에도 고스란히 보였다.
“보리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원했으면서, 그러기를 바라고 작정한 채 그를 유혹한 거면서 당황하고야 말았다.
“왜, 리비?”
그의 눈이 위험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눈앞에 놓인 광경을 홀린 듯한 시선으로 관찰했다. 리비는 손을 들어 앞을 가렸으나 즉각 그 손은 보리스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안 돼, 리비.”
가슴 앞에 교차되어 있던 손은 순식간에 벌어져 양옆으로 고정되었다. 저항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이라 리비는 그저 무력하게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보리스, 보리스…….”
“응, 리비.”
그는 대답하자마자 바로 리비의 살결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으읏!”
희디흰 살결을 훑어내는 혀의 촉감이 차가웠다. 하지만 이내 불을 굴리는 듯 열기를 품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몸을 배배 꼬아 댔다.
그는 아예 리비의 양손을 붙잡아 위로 고정시키고는 자유로운 손으로 마음껏 그녀를 탐하기 시작했다.
“잠깐만, 보리스 잠깐만…….”
리비는 속절없이 그의 이름만 불러 댔다. 미칠 것만 같았다. 각오한 일이었음에도 두려웠다. 무서웠다. 이렇게나, 이렇게나 덮쳐 오는 그는…….
한창 보리스가 몰고 온 열락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그의 손이 대담하게 아래로 향했다.
“안 돼!”
대범하게 살결을 훑는 손바닥의 감촉에 리비는 진저리를 쳤다.
“안 돼, 바보야, 안 돼!”
그녀는 결국 엉엉 울고 말았다.
“흐윽, 안…… 너어…….”
그와 동시에 보리스의 모든 행동이 멎었다. 그는 세상 가장 못난이처럼 울고 있는 리비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그녀의 가슴 위로 머리를 기대었다.
“거봐.”
“…….”
“무서울 거면서.”
코를 훌쩍이며 그의 말을 듣고 있는데 따뜻한 숨결이 가슴께에 와 닿는 게 느껴졌다. 기이한 안도감이었다.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겁도 없이 그를 유혹했다. 그래 놓고는 무섭다며 그를 거부했다. 결국 그에게 두 번 상처를 준 셈이다.
리비의 곁으로 다가온 보리스가 그녀를 끌어안고서 부드럽게 얼렀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는 입술이, 혀가 전해 주는 위로가 달콤했다. 시간이 지나자 차차 떨리는 몸이 잦아들 무렵이었다.
“내 아내가 되기로 했으니까, 리비. 그걸로 지금은 충분해.”
리비는 그의 머리를 콱 끌어안았다. 이제는 반대로 그녀가 보리스를 가득 끌어안은 꼴이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보리스……?”
리비는 무언가 축축한 감촉에 보리스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그녀의 가슴 중앙부를 적시고 있었다.
“리비.”
또 우냐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니 가슴 깊은 곳이 찌르르 아파 왔다. 결국 그녀는 손을 뻗어 다시 그를 한껏 끌어안았다. 어차피 그녀의 몸으로 완전히 가둘 수도 없는 사람임에도 그랬다.
“미안, 미안해. 보리스.”
순전히 목적을 가지고서 그를 유혹했다.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리비는 그의 몸을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툭툭, 떨어진 눈물들이 마음을 같이 적시고 있었다.
“보리스, 울지 마…….”
어느덧 리비는 애원하고 있었다. 그를 끌어안은 채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달래고 또 달랬다.
하지만 그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가슴께가 온통 축축하게 젖어 버릴 정도로 그는 울고 또 울어 댔다.
“보리스, 보리스?”
리비는 마치 자신의 가슴에 강이라도 만들려는 듯 눈물을 쏟아 내는 그를 보며 당황했다. 실제로 가슴골 새로 조그만 개울이 만들어지려는 참이었다.
울려 버렸다, 아주 제대로.
어렸을 때도 보리스는 늘 눈물 가득한 아이였다. 하지만 이렇듯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 대는 건 또 흔한 일은 아니었다. 리비는 이제 정말로 당황하고 말았다.
“착하지, 응?”
강아지처럼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을 어루만져 주기를 반복했지만 터진 눈물은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이러다가 그의 눈물에 빠져 죽을지도 몰라.
리비는 순간 황당하지만 매우 일리 있는 생각을 했다. 이대로 그의 눈물이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리비는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축축하게 젖은 보라색 눈동자는 이 와중에도 몹시 퇴폐적인 빛을 품고 있었다.
‘왜지?’
뭔지 모르지만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쩐지 덫에 걸려 버린 것 같은 느낌에 전신이 떨려 왔다. 하지만 일단 그의 눈물을 말리는 게 급선무였다.
“보리스, 그만 울어? 응? 내가 다 잘못…… 으읍!”
축축한 입술이 리비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짭짤하고 차가운 맛이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눈물만 들어온 건 아니었다. 두꺼운 혀가 가감 없이 입속을 드나들며 그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키스해 왔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웠을까. 아까 자신이 어설프게 그의 입술을 핥던 기억이 떠오르자 그냥 콱 어디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에 리비는 눈을 감고 빠져들었다. 그러는 동안 점점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천들이 빠른 속도로 걷어지고 있다는 건 알아채지 못했다.
툭, 툭.
그의 어깨에 달려 있던 방어구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라는 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투둑,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보리스의 몸을 감싸고 있던 천 조각이 미련 없이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드러난 살갗 위로 대번에 크고 단단한 몸이 겹쳐져 왔다.
그가 내리누르는 힘으로 인해 침대 깊숙이 몸이 파고들었다. 그에게 힘껏 짓눌린 몸 위로 그가 더욱 무게를 더해 왔다.
리비는 그 아래 깔린 채 신음했다. 이제는 한계였다. 그가 자신이 쉴 숨을 모두 앗아 간 탓에 리비는 급격한 호흡 곤란이 올 것만 같았다.
리비는 안간힘을 다해 그의 가슴을 쿵쿵 내리쳤다. 그러자 기적적으로 그의 모든 행동이 멎었다. 녹여 먹을 것처럼 빨아들이던 입술도 떨어져 나갔다.
“하…… 하아.”
숨 쉬는 법을 잊은 기분이었다. 그의 입술에서는 간신히 풀려났지만 전신이 그에게 눌린 자세는 그대로였다. 바로 코앞에서 마주 본 그의 얼굴은 짙은 애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눈물로 온통 젖어 버린 얼굴 탓에 엉망이었지만 그 아름다운 얼굴에서 자아내는 오묘한 분위기는 한층 더 깊어졌다.
리비가 그동안 부족했던 공기를 잔뜩 끌어모아 숨 쉬고 있는 데 반해 그는 상대적으로 매우 평온해 보였다. 이건 매우 불공평하다고 리비는 생각했다. 자신은 온통 흐트러져 있는데 그는 너무…….
커다란 손이 리비의 뺨에 닿았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흠칫거렸다. 그러나 그의 손은 아주 조심스레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리비는 숨을 죽인 채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원하는 대로 할게, 리비.”
속삭이는 목소리는 한없이 뜨거웠다.
“…….”
“네가 원하는 대로, 전부 할게.”
“보리스?”
리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말, 정말이야?”
리비는 몇 번이고 확인했다.
“정말 기사들을 풀어 주고…… 전쟁을 하지 않을 거야?”
리비는 보리스와 마찬가지로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그래.”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내 곁에 있어. 여기, 이대로.”
“…….”
“너는 날 원해, 그렇지?”
나직하게 내려앉는 목소리는 평소의 그의 것과는 매우 달랐다.
“보리스…….”
“대답해.”
좀 전에 울던 것이 거짓인 것처럼 여겨졌다. 이렇게 강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건 매우 낯설게 여겨졌다.
“내가 이러는 게, 싫어?”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가 물었다. 회피 따윈 용납하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이 내뿜는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리비는 도망갈 수 없는 상황속에서, 결국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싫지 않아.”
“…….”
“너와 그러는 거……싫지 않아.”
아니, 오히려 기꺼이 갈구하고 있었다. 그와 몸이 닿으면, 숨이 섞이면, 꿀 같은 음성이 부드러이 귓가에 울려 퍼지면.
리비는 견딜 수가 없어졌다.
“내 것이 될 거야?”
목소리는 위험스러운 동시에 환희가 넘쳐났다. 그 기묘한 반전에 리비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마주한 것은 깊은 어둠 속에 잠긴 보리스의 보랏빛 눈이었다.
그의 눈은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지독한 무언가에 잠식되어 있었다.
“내게 말했어, 리비. 내 것이 되겠다고.”
“자, 잠깐만…….”
“네가 원한 거야, 그렇지?”
아니라고 말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그의 질문에 할 수 있는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의 시선은 리비의 입술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입에서 나올 한 단어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영원 같은 시간이 흘렀다. 달싹거리던 입술이 마침내 벌어졌다.
“……응.”
순간 그의 눈빛이 휙 바뀌는가 싶었다. 기이한 빛 한 줄기가 그의 눈을 관통했다.
“흐윽!”
그는 거칠게 입을 맞추며 자신의 몸에 남아 있던 옷들을 모두 벗고 리비를 품 안에 가두었다. 리비는 이리저리 몸부림쳤고, 리오가 머리에 씌워 주었던 하얀 장미 화관이 떨어져 내렸다.
보리스는 몸으로 완벽히 그녀를 구속한 채 몸을 맞물렸다. 가슴과 배, 등과 허리……. 그의 손길과 입술이 닿지 않은 부위는 아무 데도 없을 때까지, 끝없이 탐하고 또 탐했다.
“리비, 리비…….”
그는 아까 리비에게 뚝뚝 흘려 댔던 눈물을 남김없이 핥아 먹었다. 리비는 그가 전해 주는 감각에 그저 속절없이 이리저리 흔들릴 따름이었다.
그의 머리칼을 가득 쥔 손이 덜덜 떨려 왔다. 그는 어느덧 리비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 하아.”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선연한 보랏빛 눈이 마물처럼 번득였다. 그녀 자신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무해한 마물.
축축하게 젖은 아래로 단단히 융기한 것이 와 닿았다. 번들거리는 액이 흘러나오는 선단이 문질러지는 감각이 선연했다. 그것은 지나치게 뜨거웠다.
“아니, 아…….”
리비는 왈칵 몰려온 두려움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온통 어둠이 내려앉은 보리스의 눈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는 내 신부야.”
마지막 순간, 그가 속삭인 말만 리비의 귓가에 아련히 남았다.
“흣!”
서서히 밀고 들어오기 시작하자 리비는 한껏 허리를 휘었다.
“아, 싫어, 아…….”
꾹꾹 안으로 들이밀어진 것에 리비는 몸을 덜덜 떨었다.
“괜찮아, 괜찮아. 리비.”
그가 버둥대는 다리를 잡아 입을 맞추더니 제 어깨에 얹어 놓기까지 했다. 그러는 바람에 하체가 들어 올려졌다.
그를 집어삼키고 있는 은밀한 부위가 그의 눈 아래 훤히 보일 거라 생각하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싫어, 싫…… 놔줘, 으응.”
리비가 몸을 비틀며 빠져나가려 하자 그가 다리를 부여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건 안 돼.”
좀 전까지 달려드는 리비를 밀어내려 했다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러면서 그는 더욱 허리를 바짝 밀착해 왔다.
“하읏, 아…… 읏.”
안으로 더 밀려드는 감각에 리비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를 지탱한 몸은 마치 철벽처럼 강하게 그녀를 제압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빠듯하게 죄어드는 감각은 더욱 심해졌다.
그가 밀어붙이던 몸을 멈추자 리비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되, 된 거야?”
이제 다 들어간 거겠지. 이렇게 적응하면 되는 걸 거야.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아직 멀었어.”
음산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리비는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는 것 같았다.
“뭐, 뭐?”
“아직 반절도 안 들어갔는걸. 조금만, 더…… 리비.”
그는 이를 악문 채 조금씩 더 밀어 넣었다.
“안 돼, 아, 안 돼.”
이미 한계까지 벌어졌다 생각한 곳의 길을 더 넓히는 보리스의 행위에 리비는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반절이라니.
이미 온몸이 반 토막 나는 것 같은데. 여기서 더 들어올 게 남았다고?
물론 그의 것은 컸다.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보는 것과 몸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심각한 차이가 있었다.
“힘을 빼, 응?”
그가 허리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달래 보았지만 맘대로 될 리가 없었다.
“흐윽, 윽…….”
그의 것을 가득 문 아래가 더욱 빡빡하게 조여들기 시작하자, 보리스의 얼굴에 무시무시한 표정이 떠올랐다.
“……리비.”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심각해졌다.
“그렇게 조이지 마.”
“내, 내가 언제…….”
리비는 울먹거리며 항변했다. 조이긴 누가! 자기가 무식하게 큰 거면서!
그러나 소리 지를 힘조차 없었다. 그런 리비의 촉촉이 젖은 눈가를 보리스가 쓸어 주며 말했다.
“미안.”
“응?”
갑작스러운 사과는 왠지 불길하게만 들렸다. 무엇 때문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퍽.
갑자기 깊은 곳까지 한 번에 짓쳐든 것에 리비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아, 아아…… 아.”
맹수의 날카로운 이빨에 한 번에 관통당한 것처럼 리비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흐으…… 흐.”
지나치게 큰 것을 몸 안에 받아들인 충격에 리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만 비틀었다. 숨 쉬는 법도 잊어버린 듯했다.
“숨 쉬어, 리비.”
그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숨을 쉴 수 없게끔 만든 게 누구인데.
리비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던 보리스가 무언가를 생각한 듯 리비의 들썩거리는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숨 쉬어야 해. 리비.”
“아으…… 몰라, 모른다고…….”
기다란 손가락이 가슴의 중앙부를 배회했다. 그러다가 우묵하게 파인 곳을 꾹 누르자 리비의 몸이 튕겨 올랐다.
“하윽!”
“그래, 그렇게.”
색색 숨을 몰아쉬는 리비를 확인한 그가 웃음 지었다.
“잘 쉬네.”
웃음 섞인 눈과 마주친 순간이었다. 그는 리비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 단단히 파묻은 것을 물려 내 안쪽에 깊이 박혀 든 것을 반쯤 빼냈다. 이제 끝난 건가, 끝내 주려는가 보다, 싶을 때였다.
반절쯤 빠져나갔던 성기가 다시금 안으로 세차게 박혀 들었다.
더욱 강하게 전해진 충격에 리비는 저를 꽉 끌어안은 보리스의 어깨를 정신없이 깨물고 할퀴어 댔다.
퍽, 퍼억.
또다시 물러났다가 안으로 박혀 들기를 반복하는 동안 리비의 몸은 정신없이 흔들렸다.
“미쳤어, 놔, 빼…… 빼달라고.”
리비는 보리스의 어깨를 쳐댔지만 강철같은 몸은 떨어질 줄 몰랐다.
“안 돼, 리비……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아니야, 아니, 악!”
깊숙한 곳에 다다른 것이 제 흔적을 새기려는 듯 꾹꾹 안쪽을 짓눌러 댔다.
“하아…….”
그의 입에서 탄식 같은 한숨이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별안간 주변이 더욱 어두워졌다.
휘잉.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창문은 분명히 닫았는데 부드러운 무언가가 허공을 가르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다. 마치 거대한 새의 날갯짓 같은…….
“…….”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리비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새카만 어둠이 덮쳐 왔다.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등 뒤로 새카만 그림자가 번져 있었다.
자신을 집어삼키는 남자의 등 뒤로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하얗게 부서지는 달빛을 받아 날개는 검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게 왜.’
그의 등 뒤로 시커멓게 솟은 날개. 처음 본 것도 아니건만, 새삼스레 그녀는 숨이 막혀 왔다.
짙은 보랏빛의 눈이 그녀를 응시하는 것이 흐릿한 시선 너머로 보였다. 뒤이어 커다란 날개는 두 사람을 완전히 감쌌고, 그를 보던 리비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