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 8. 봉인된 기억(2) (9/20)

결혼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 3권

8. 봉인된 기억(2)

“쟤네들 다시 왔어.”

그는 리비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시커멓고 커다란 날짐승들이 창밖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개중 가장 앞에 있는 놈은 분명히 아까

창가에서 시끄럽게 울어 대던 놈이 확실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시커먼 색이라 비슷해 보였지만 이제는 제법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보아하니 저 까마귀는 저 무리의 대장격 같았다. 가장 덩치도 크고 울음소리도 우렁차다.

“구경하고 있나 봐.”

성에 있는 까마귀들은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영리하기도 했다.

보리스가 슥 눈빛을 보내자 까마귀들은 다시 까악, 소리를 내며 흩어져 갔다. 개중 리비와 눈이 마주친 까마귀들은 불만스러운 듯 몇 번이나 까악,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저것들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흰 장미의 성이 아니라 까마귀의 성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냐?”

리비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까만 털뭉치들을 노려보았다.

“그냥 여기 있고 싶은가 봐.”

말 돌리려는 보리스를 보며 리비는 뭔가를 떠올렸다.

숲에서 헤맬 때 도와준 것도 저 새들이었다. 순간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가는 사실에 리비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설마, 쟤들이 너를 따르기라도 하는 거야?”

“…….”

그녀의 시선을 정통으로 맞닥뜨린 보리스의 동공이 슬그머니 리비를 외면했다.

“외면하지 말라니까?”

리비는 보리스의 얼굴을 양손으로 움켜쥔 채 제 얼굴을 보도록 했다.

“…….”

졸지에 얼굴을 잡힌 보리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자 한바탕 쏘아붙이려던 리비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말았다.

예쁘다.

제비꽃이나 아이리스, 패랭이꽃, 그 어느 꽃을 갖다 붙여도 이 신비로운 보랏빛 눈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 눈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정면으로 주시하고 보니 어쩐지 마음이 몽글몽글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리비?”

“그게, 그러니까…….”

보리스의 얼굴을 붙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렸을 적, 그를 마족의 아이라며 놀려 대던 친구들이나 그를 불길해하던 마을 사람들의 말도 동시에 떠올랐다.

그때는 열심히 항변하고 다녔지만, 지금은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야 말았다.

누구든 첫눈에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저 시커먼 놈들……이 네 부하 같은 그런, 거냐고.”

보리스는 빤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그대로 입술을 포개 왔다.

눈 뜨고 코 베인, 아니 입술을 빼앗긴 리비는 주춤거리면서도 보리스가 밀어붙이는 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음, 으음…….”

촉촉한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안쪽을 부드럽게 휘젓자 리비의 몸 안쪽 깊은 곳이 진동했다.

하여간에, 너무 야한 입술이었다.

“흐으…….”

어느새 바짝 끌어당겨진 몸이 그의 품 안에 갇혀 있었다. 단단한 근육이 말캉한 가슴을 짓누르며 비벼 왔다. 그 선명한 의도에 리비는 별안간 머리에 번개를 맞은 듯 그의 가슴팍을 쳐냈다.

별다른 억압 없이 자연스레 몸을 물린 보리스가 좀 전과 같은 빤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새끼강아지인 줄 알고 품었더니 갑자기 커다란 늑대가 되어 덤빈 꼴이었다.

“너, 너 이런 걸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리비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색색거렸다.

“나, 잘한다고 했잖아.”

그는 리비를 만족시켰다는 사실이 뿌듯한 듯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네가 이러는 거, 예뻐.”

자신이 방금 핥고 빨아서 한층 붉어진 입술을 그는 가만히 쓸며 말했다.

“하, 하지 마.”

리비는 파드득거리며 물러났다. 그 단순한 손짓만으로 온몸에 열이 다시 확 이는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자 그는 또다시 순순히 손을 거두어들였다.

“리비, 배고프지? 식사를 해야지.”

그는 리비를 쾌락에 빠진 음탕한 여자로 만들어 놓고는 태연하게 끼니를 걱정했다. 리비는 그것이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다.

“안 배고파.”

꼬르륵.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배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 하필.’

확 달아오르는 볼을 느끼며 얼굴을 한쪽으로 돌렸을 때였다. 나를 비웃겠지 싶어 본 보리스의 얼굴에는 그저 걱정하는 기색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요란스레 배에서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여태껏 느끼지 못하던 식욕이 맹렬하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허기가 졌다. 그럴 만도 했다. 며칠간 제대로 먹은 것이라고는 없는 데다가…….

“어제 힘들었잖아. 뭐라도 먹어야 해.”

“지금은 생각이 없어.”

리비는 고개를 모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제발, 좀.

“나중에 먹을 테니까.”

단식 투쟁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안 먹는 자만 손해인 일이다. 하지만 차마 배고프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건 무슨 자존심인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식사하면 꺼져 줄게.”

갑자기 들린 말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보리스가 있었다.

“내가 꼴 보기 싫은 거 알아. 하지만 이젠 정말 뭐라도 먹어야 해. 며칠간 앓았고, 깨어나자마자 내가 너를…….”

“그마안.”

구체적인 묘사가 따라붙기 전에 그녀는 재빨리 말을 끊어 냈다.

“먹을게, 먹으면 되잖아.”

“진짜?”

그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어쩐지 낚인 느낌이 들었지만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정말로 배가 고프기도 했다.

지난밤, 리비는 무수히 많은 생각을 했다. 잠시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보리스의 얼굴을 보며, 자는 와중에도 풀 줄 모르는 팔에 갇힌 채로, 열심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 미친놈을 어떻게 하지.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하지.

머리털이 다 뽑히도록 고민해 봐야 뾰족한 수가 없었다. 달아나려고 하면 날아서 잡으러 올 테니 그조차도 시도해 볼 가치가 없는 일이다.

이제야 그가 자신을 납치까지 해 와놓고 자유롭게 성 안에 풀어놓은 자신감을 알 수 있었다.

미친놈을 달랠 때는 사탕이 약인 법이다. 일단 다음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그의 믿음이 필요하다. 도망이든 무엇이든. 그 어떤 것이든 간에.

꼬르륵.

……그러려면 우선 먹어야 한다. 내내 빈 속이 이제 쓰리다 못해 아릴 지경이었다.

보리스가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종을 집어 들어 흔들자, 기다렸다는 듯 하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리비는 그가 종을 흔들자마자 재빨리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눈만 빼꼼 내놓았다.

그런 그녀를 보리스는 이불을 덮은 그대로 꼭 끌어안아 그 위로 입을 맞추었다.

종소리가 들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들이 음식을 줄줄이 들고 들어왔다. 행여 그들이 침대에 가까이 올까 싶어 리비는 더욱 몸을 움츠렸다.

다행히 보리스의 손짓에 하녀들은 침대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음식을 놔둔 채 고개를 숙이고 총총 사라졌다.

쟁반에 담아 나르는 음식들을 보며 리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하나같이 그녀의 입맛에 맞춘 것들이었다.

“가져다줄게. 가만히 있어.”

보리스가 몸을 일으키자 눈을 둘 곳 없어진 리비의 시선이 허공을 헤맸다.

“오, 옷 입어. 옷.”

더듬거리며 던진 말에 보리스는 굳이 그럴 필요 있냐는 듯 쳐다봤지만 리비는 재차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입으라고, 좀! 이 변태 까마귀야!”

빽 내지르는 소리에 보리스는 그녀를 보다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바지를 집어 들어 꿰어 입었다.

그나마도 제대로 바지 끈을 묶지는 않은 품새라 골반쯤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흘러내리기 직전이었다. 보는 사람이 다 조마조마할 지경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듯싶었다.

옷 좀 제대로 입으라며 입을 열려다가 그녀는 꾹 다물었다. 아마 그 말을 하면 자신더러 입혀 달라며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방 입구 쪽에 놓인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어 올려 리비 쪽으로 걸어왔다.

쟁반 위에는 우유와 빵, 잘게 썬 고기들과 옥수수와 우유를 넣어 끓인 수프 등이 놓여 있었다. 매우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음식들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였다. 하지만 밖에서 오래 기다린 탓인지 식은 상태였다.

“다시 데워 오라 해야겠어.”

식은 빵과 수프를 보던 보리스가 하녀들을 부르는 종을 울리려 손을 뻗었을 때였다.

“안 돼, 하지 마!”

리비는 기겁하며 그를 제지했다. 보리스는 끈을 쥔 채로 리비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그냥 먹을게, 응?”

그녀는 허겁지겁 보리스의 다른 손에 들린 빵을 잡아채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식어서 딱딱한 빵이었지만 강력한 저작 활동으로 꾹꾹 씹어 삼켰다.

처음에는 놀라서 되는대로 쑤셔 넣은 것이었지만 먹다 보니 단물이 입에 고였다. 리비는 그제서야 자기가 꽤 배가 고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천천히 먹어, 체해.”

보리스는 안타까운 듯 리비를 바라보며 물을 따라 내밀었다. 문득 그 모습을 보니 뭔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리비의 뒤통수를 치고 지나갔다.

“천천히 먹어, 바보야.”

삐쩍 마른 소년은 며칠간 제대로 먹은 게 없어서인지 거의 그릇에 머리를 박다시피 하며 음식을 먹어 치웠었다. 리비는 그의 등을 두드려 주고, 물을 따라 주었었다.

그런데 지금 보리스가 자신에게 같은 짓을 하고 있다니. 음식을 천천히 먹으라 말하고, 열심히 빵을 뜯어 먹는 자신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기까지 하다니.

“…….”

마치 그가 거둬 키우는 불쌍한 짐승이라도 된 것 같았다.

“하지 마.”

“응?”

“그거, 하지 마.”

“뭘?”

그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하던 말이잖아.”

리비가 톡 쏘아붙이자, 그는 그제서야 알아들었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맞아, 리비가 늘 하던 말이야. 날 사람처럼 만들어 줬잖아.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모두 리비가 가르쳐 줬어.”

그의 말대로였다. 보리스는 리비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나는 리비가 만들어 낸 거야. 보통 사람처럼 살게 해줬으니까.”

“넌 사람 맞…….”

나? 아닌가? 등에 커다란 날개가 솟아났던 걸 본 일이 마치 꿈같았다. 그리고 환상 같기도 했다.

“내가 좀 다르지.”

그의 얼굴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다르다는 건 나쁜 게 아니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는 반색을 하며 물었고, 리비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궁금해.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

“옛날에, 응? 커다란 날개를 달고 사라졌다던 영주님과 관련이 있어?”

한번 터진 물음은 멈출 줄 몰랐다.

“응? 그런 거야? 보리스.”

답을 기다리는 눈은 더없이 진지했다. 보리스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묻었어.”

엄지로 느릿하게 입술을 쓸어내자 그의 손끝에는 빵가루가 묻어났다. 그리고 뭐라 할 새도 없이, 손가락이 그대로 보리스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할짝.

그는 손끝에 묻은 것을 꿀이라도 빨아 먹듯 열심히 빨아 먹었다.

충격에 휩싸여 빵을 쥔 채 꼼짝도 안 하고 있는데 보리스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더, 더러워.”

리비는 기함하며 말했다.

“리비 거는 안 더러워.”

이 무슨 논리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리비는 이제 그를 설득하는 것도 포기해 버렸다.

“여기저기 흘리고 먹는 것도 귀여워.”

“…….”

다시 손을 뻗어 온 그가 리비의 볼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끼곤 슬쩍 고개를 틀었다. 그러다가 그가 아주 솜씨 좋게 제 질문을 피해 갔음을 깨달았다.

“너…….”

다시 마주 본 보리스의 눈에 그녀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이번에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잔뜩 주눅 든 눈빛은 마치 비 맞은 강아지처럼 보였다. 애써 무언가를 회피하는 시선.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고스란히 읽히는 눈빛이었다.

“…….”

리비는 그 눈빛을 마주 보다 더 이상 캐물을 수가 없어졌다. 그를 다그쳐 답은 얻어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어쩐지 깊은 상처를 안겨 주게 될 것만 같아서였다.

“……배고파.”

“응?”

보리스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배고프다고.”

리비는 다시 한번 말했다. 보리스는 잠시 멈칫하다가 얼른 식사가 차려진 쟁반을 들고 왔다.

빵을 잘라 버터를 발라 주고, 고기도 잘게 뜯어 리비에게 먹여 주었다. 리비는 어쩐지 낯이 간지러웠으나 그가 거절했다가는 다시 또 그 눈을 보게 될 것 같아 열심히 받아먹었다.

“이제 배불러.”

“알았어.”

리비가 손을 내젓자 보리스는 남은 음식들을 치웠다.

“더 먹고 싶은 건?”

“없어.”

이미 배는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리비는 잠시 눈치를 보다 물었다.

“저, 안 나가 봐도 돼?”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자신이야 어차피 갇힌 몸이니 괜찮지만 보리스는 아닐 것이다.

그는 명색이 이 성의 주인이자 에드라크령을 다스리는 영주이다. 게다가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이기도 했고.

잘은 모르지만 아마 이것저것 할 일이 넘쳐나겠지. 그런데 자신과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어도 되나. 아니, 그런데.

‘내가 왜 이런 걸 걱정하고 있지?’

참으로 이해 안 가는 고민이었다.

‘갇힌 건 나잖아.’

성에서 나가지도 못하게 하면서. 그가 일을 하든지 말든지.

“날 걱정해 주는 거야?”

역시나 그의 눈에 별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또, 이놈의 주둥이가 또. 리비는 입술을 찰싹찰싹 때리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톡 쏘아붙였다.

“그냥, 네가 빨리 나갔으면 해서 하는 말이야.”

“나랑 있는 게 싫어?”

보리스는 대번에 발에 차인 강아지 같은 얼굴이 되어 리비를 보았다.

“좋을 리…… 없잖아.”

말하는데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시선을 일부러 다른 곳에 두었지만 보리스가 상처를 받은 눈을 하고 있을 게 뻔해서 리비는 그를 쳐다보기도 두려웠다.

“……알았어.”

대답은 한참 후에 흘러나왔다. 자기 쪽을 돌아보기를 바란 것처럼 느껴져서 리비는 순간 가슴 한쪽이 선뜻해졌다.

“밤에 올게.”

“…….”

“옆에서 자게 해줘, 전처럼.”

“…….”

“그건 괜찮지?”

부드럽게 달래는 목소리에 리비의 몸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하지만 돌아볼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지금 이 표정을 들키고 말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마음대로 할 거잖아. 묻지 마.”

“이따가 올게. 조금 더 자. 까마귀 때문에 잠을 깼잖아. 오지 못하게 할 테니까, 응?”

“…….”

리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륵, 옷자락이 침대 시트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고 있어도 쳐다보는 시선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역시나 돌아볼 수 없었다.

탁.

잠시 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리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털썩 드러누웠다.

침대 시트에 아직 그의 체향이 짙게 남아 있었다. 그와 여기서 어젯밤에 뭘 했는지 생생히 기억나게 하는 냄새였다.

“……바보.”

그와 이런저런 것들을 거침없이 했다. 마치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런 소리, 그런 신음, 그런 반응들.

리비는 새삼 모든 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야생동물이 잡혀 와 인간의 손에 길들여지듯이 자신 역시 그렇게 길들여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모든 것을 잊고 말았다. 자기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하는 그런 것들을 모두 다.

자꾸 이런 복잡한 생각이 들게 하는 보리스가 나빴다. 이건 그가 나쁜 거다, 무조건.

리비는 이런저런 생각 끝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리스는 자기더러 더 자라고 했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자란다고 가만히 이 방에 틀어박혀 있기만 하는 건 싫었다. 나가서 뭐라도 해야 할 시간이었다.

물론 이 탑은 높다. 내려가려면 나선형의 길고 긴 탑의 계단을 내려가야 하지만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그쯤이야 얼마든지 시간을 들일 수 있었다.

리비는 후다닥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우선 세수도 하고, 여기저기 뻗친 머리도 정돈하고, 옷을 갈아입어야만 했다.

“…….”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시중을 받는 건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똑똑.

난데없이 들린 소리에 리비는 제풀에 놀라 자리에서 풀썩 솟아올랐다.

“아가씨, 도와 드릴 건 없을까요?”

하녀장인 베스의 목소리였다.

“어, 음, 그게…….”

“괜찮으시면 들어가도 될까요?”

“네, 괘, 괜찮아요.”

당황한 나머지 말이 더듬더듬 흘러나왔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베스와 하녀 두 명이 들어왔다.

“필요한 게 있으실 것 같아 여쭤봤어요. 식사를 더 하시겠어요? 아니면 다른…….”

“좀 씻고, 옷도 갈아입고 싶어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베스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짓에 다른 하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 명은 잠시 밖으로 나가더니 잘 개켜진 새 드레스와 수건, 침구를 가져왔고, 다른 하나는 따뜻하게 데워진 물을 주전자에 채워 와 세면대에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베스는 물의 온도가 알맞은지 확인한 뒤 장미꽃잎을 뜯어 물 위에 띄웠다. 따뜻한 물에 띄워진 꽃잎에서 달콤한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리비는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베스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레 비누에 거품을 내 세안했다. 다 끝내자 베스가 들고 있던 뽀송한 수건을 건네주기까지 했다.

가만히 얼굴을 닦아 내는 사이, 침구를 가져온 하녀는 창문을 활짝 열고 침구를 갈아 끼웠다. 지난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침구를 보자 얼굴이 저절로 붉어졌다. 리비는 괜스레 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닦아 냈다.

“드레스는 어떤 게 좋으세요?”

다른 하녀가 머리를 빗질하는 동안 리비의 앞에 여러 벌의 드레스가 펼쳐졌다.

황금색 장미 자수가 놓인 흰 드레스, 마찬가지로 금실로 식물의 줄기 무늬를 수놓은 붉은색의 드레스와 은실로 제비꽃을 수놓은 푸른색 드레스까지.

……다 너무 화려했다.

“옷이 너무 화려한데…….”

“어쩌죠. 이런 것들밖에 없답니다. 다음에 상인이 오면 좀 더 간편한 것으로 사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이거 입을게요.”

문득 자기 앞에 놓이는 음식이며 깨끗이 빨아 햇빛 냄새가 나는 침구들, 잘 다려진 드레스 등의 존재가 의아해졌다.

하루 한 번 오르내리기도 벅찬 높이였다. 그런데 이것을 그들은 매일 할 뿐만 아니라 몇 번이나 하는 듯싶었다. 특별한 신체 능력을 가진 건가 싶기에 그들은 그저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보통의 여자들이었다.

왜 여태껏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걸까 싶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베스는 솜씨 좋게 머리를 땋아 올린 뒤 핀으로 고정시켜 주었다. 잘 빗어 내려 반들거리는 머리채가 허리 뒤에서 찰랑거렸다.

“이것들 다…… 어디서 가져오는 거예요? 아니, 어떻게 가져오는 거죠? 여기 너무 높잖아요.”

“아.”

잠시 곤란한 얼굴로 망설이던 베스가 입을 열었다.

“특별한 방법이 있답니다.”

“특별한…… 방법이요? 무슨, 도르래가 있다든가…….”

“아, 맞아요. 도르래. 도르래가 있거든요. 물은 해자에서 끌어 올려 데우면 되고요.”

리비의 말에 베스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도르래는 어디에 있는데요?”

“탑 북쪽의 창문에 있어요.”

“아…….”

탑의 구조를 잘 알지 못해서 못 본 거였나, 어쩐지 찜찜했지만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을 때였다.

“도르래보다 더 빠른 방법도 있어요.”

다른 하녀가 웃으며 던진 말에 베스가 쉿, 하는 소리를 냈다.

까악.

때마침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소음에 리비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까마귀가 창문에 앉아 또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부리에는 제법 큰 나무열매를 물고 있었는데, 그것을 창틀에 몇 번 반복해서 떨어뜨려 껍질을 쪼갠 뒤 알맹이를 야무지게 파먹기 시작했다.

까마귀는 영리한 동물이고, 그 지능으로 인간을 골려 먹을 때도 잦았다.

까마귀들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의 머리 위로 끊임없이 조약돌을 떨어뜨리곤 했다. 또한 마을의 개와 고양이들을 놀려 먹는 것도 바로 그 까마귀들이었다.

“도움을…… 받거든요.”

“도움?”

알 수 없는 소리에 리비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베스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그녀에게 말하면 매우 놀랄 그 무언가를 예상한 듯,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말해 봐요, 그게 뭔데요? 설마…….”

무심코 중얼거리며 창밖을 보던 리비의 머릿속에 기괴한 상상 하나가 떠올랐다.

“……쟤들 도움을 받는 건 아니죠?”

“…….”

순간 베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대충 찍은 것이건만 그게 맞아 들어갈 줄은 리비도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입을 딱 벌렸다. 손을 뻗어 까마귀를 가리키는 손이 거침없이 떨리고 있었다.

“저, 쟤가요? 이것들을 다 나른다고?”

까아아악.

리비의 삿대질에 기분이 나빠진 듯 까마귀가 목청 높여 울어 댔다.

“……한 마리가 아니거든요.”

“…….”

툭, 까마귀를 가리키던 손이 그대로 떨어졌다.

“아래쪽에서 물건을 싸서 보내면 그대로 들어 올려 날아오른답니다. 들고 오르기 무거운 것은 대부분 그렇게 나르고 있어요.”

이어지는 친절한 부연 설명에 리비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설마하니 그게 진짜일 줄이야.

“밥값을 톡톡히 하는 새들이네요.”

“그럼요. 아주 영리하답니다. 사람 말을 아주 잘 알아들어요. 신기하죠?”

그거보다 더 신기한 걸 알고 있노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등 뒤에 검고 커다란 날개가 나는 사람을 본 적 있냐고도 말할 수 없었다.

“……정말 신기하네요.”

“기특한 새들이랍니다.”

까악.

자기 칭찬을 다 알아듣기라도 한 듯, 까마귀는 목을 꺾더니 다시 우렁찬 목소리로 울어 댔다.

“저리 가.”

리비는 베개를 들어 올려 던졌다. 퉁, 창틀에 맞아 튕겨 나온 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까마귀는 얄밉게 제자리에서 한 번 통, 튀어 오르더니 멀리 가는 대신 제자리에 앉아 가만히 날갯깃을 골랐다.

가림막 뒤로 가서 새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자마자 리비는 대뜸 물었다.

“보리스는 지금 어디에 있죠?”

“영주님께서는 연무장에 계세요.”

베스의 답에 리비는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영주였지, 참.’

영주. 새삼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은 그의 지위가 낯설었다.

그는 단순히 이 성의 주인이기만 한 게 아니었다. 이 근방, 더 멀리 있는 마을들까지 지배하는 대영주다. 심지어 공작이다.

에드라크령은 수도에서 멀고,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지역이라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낙후되어 있었다. 수도로 가는 도로조차 매우 험악한 곳이었다.

“영주님께선 이제 이곳을 아름답게 꾸미실 거예요. 그러면 지내시기 더 편할 거랍니다.”

리비는 내가 여기서 계속 지낼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려다 관두었다.

“연무장…….”

내성이 아닌 외성에 위치한 곳이었다.

“가볼 수는 없을까요?”

그 말에 베스의 얼굴이 조금 난처한 기색을 띠었다.

“내성 안에서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돌아다니셔도 되지만 외성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요.”

그 말에 오기가 생겼다.

“하지만 보리스는, 영주님은 저에게 이 성의 어디든 가도 좋다고 했는걸요.”

“그게…….”

하녀장은 곤란한 듯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지금 당장 보리스를 만나고 싶어요.”

리비는 다시 한번 제 뜻을 주장했으나, 하녀장의 표정은 굳건했다.

“안 됩니다. 외성은 내성과 달리 사람들도 많고, 외부에서 들어와 일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서…… 위험할 수 있어요.”

“제가 바로 그 외부인인걸요.”

리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베스가 말하는 ‘외부인’이란 말 그대로 성 밖의 마을들, 즉 에드라크령 내에 있는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리비 역시 그 사람 중 하나였다.

“아가씨께서는 다르시죠. 공작님의 아내가 되실…….”

말하다 말고 톡 쏘아보는 눈빛에 베스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영주님의 허락이 있기 전에는 안 됩니다.”

“보리스는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고작 만나고 싶을 때 만나지 못하다니.”

“아가씨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베스는 바늘도 안 들어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알겠어요.”

리비는 돌아서다가 다시 말했다.

“어차피 저녁에 보게 될 텐데, 낮에는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노라고 말하죠, 뭐.”

리비의 침울한 중얼거림에 베스는 안타까운 표정을 짓다가, 무슨 생각이 난 듯 덧붙였다.

“저와 함께 가시면 괜찮을 거예요.”

“정말요?”

금세 밝아진 얼굴에 베스는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리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다란 로브를 뒤집어쓴 채 베스와 함께 걸었다. 내성과 외성을 잇는 문에 이르러서는 베스가 내민 통행증을 본 문지기가 쉽게 문을 열어 주었다.

리비는 베스의 뒤에 바짝 붙어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우와…….”

외성과 내성은 마치 다른 세계를 맞붙여 놓기라도 한 것처럼 전혀 다른 곳이었다.

저번에 식재료를 실은 마차를 타고 나갈 때는 겁에 질린 나머지 제대로 밖을 살펴보지도 못했었다.

내성이 온통 하얗고 적막한 기운을 띤, 비밀스러운 성의 느낌이라면 외성은 그야말로 생활의 공간이었다.

밀을 쌓아 두고 빻는 곳, 고기를 말리고 훈제하는 곳, 물을 길어 나르는 우물, 대장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인 거예요?”

“영주님께서 오신 지 얼마 안 돼서, 일하는 사람들도 전부 여기서 일한 지 오래되지 않았어요. 아직 사람도 별로 없죠.”

베스의 말마따나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였다.

“시설도 오래되고 고쳐야 할 것도 많지만, 기존에 쓰던 공간이 있으니 아예 새로 짓는 것까지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이곳도 곧 나아지겠죠.”

리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의 풍경을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티소 마을에는 이런 거대한 성이 없기에 이렇게 안에 직접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버지인 하이든 백작은 말만 그저 말만 백작이었지 사는 것은 마을 주민들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성’이라고 불렀던 집은 이제 보니 아주 아담한 수준이었음을 깨달았다.

“이쪽이 연무장으로 가는 길이에요.”

리비는 베스를 쫓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 베스. 혹시.”

“네?”

“지하 감옥은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지하 감옥은 왜요?”

베스의 낯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설마 그곳을 안내해 달라는 말을 들을까 겁이 났는지 몸을 사리는 게 분명했다.

“그런 곳은 가면 안 돼요. 아주 무서운 곳이랍니다. 햇빛 한 점 들지 않아요.”

“그곳에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이 갇혀 있다고 들었는데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보리스에게선 좀처럼 그들에 대해 들을 수 없었다. 왕과 맞먹는 권력을 가진 공작의 기사들을 구류하다니. 그것도 죄수나 들어갈 지하 감옥에.

“저는 모릅니다. 영주님을 뵈러 간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베스는 무서운 소릴 들은 듯 질색하며 말했다.

“바깥 구경을 했으니 그만 돌아갈까요?”

“아뇨, 아니에요. 보리스를…… 공작님께 데려다줘요.”

행여 베스가 마음을 바꿀까 더럭 겁이 난 리비가 말을 돌렸다. 베스는 잠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리비를 연무장으로 가는 길로 안내했다.

“오전에는 주로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신다고 알고 있어요.”

눈앞에 보이는 것은 나무로 만든 벽이 둘러쳐진 공간이었다.

“고마워요. 그만…… 가봐요.”

그러나 베스는 가지 않았다. 그 눈이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안 도망가요.”

하지만 눈에 드리워진 불신은 여전했다.

“그러시면 큰일 나요. 아가씨가 정신을 잃은 동안 영주님을 생각하면 정말…….”

“안 가요, 안 간다고.”

리비는 재차 말했다. 일단 베스를 돌려보내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정말 안 가?”

“…….”

베스의 믿음을 사기 위해 열심히 말하던 리비의 말이 뚝 끊겼다. 앞에서는 베스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저 멀리 총총 멀어져 갔다. 리비가 잡을 겨를도 없었다.

“정말 안 갈 거야?”

좀 전보다 뒤에서 성큼 가까워진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볼 엄두가 도무지 나지 않아서 리비는 굳은 듯 제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등 뒤에서부터 커다란 그림자가 지더니 작은 몸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어느덧 리비는 그가 만들어 낸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딱 두어 걸음. 그 정도 거리를 두고서 보리스는 멈춰 섰다.

리비는 천천히, 공기의 흐름이 오롯이 느껴질 만큼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려세웠다.

눈을 가릴 정도로 푹 눌러쓴 로브의 모자 따위는 처음부터 그에게 의미 없는 듯싶었다. 뒤에서도 단번에 알아챌 정도였으니까.

“보리스.”

뒤돌아 마주한 그의 모습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건틀릿과 어깨 보호대 등 방어구를 갖춘 보리스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보였다. 완전 무장까지는 아니어도 저처럼 방어구를 두르고 있으니 그의 존재가 왠지 위협적으로 여겨졌다.

“리비?”

그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져 있었다. 이미 뒤에서 그녀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음에도 새삼 앞에서 확인하고 또 놀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건 리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리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매를 마주한 병아리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그가 거리를 더욱 좁혀 왔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새카만 투구를 쓴 채 자신을 향해 걸어오던 보리스의 모습이 완벽하게 겹쳐졌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너무 놀라서 정신이 반쯤은 나가 있었다면 지금은 그보다는 정신이 온전히 붙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마주한 그의 모습은 더욱더 위압적이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만큼.

“답답해서 산책 좀 나왔어. 베스를 졸라서. 그러니 베스 잘못 아니야.”

리비는 웅얼웅얼 대답하며 뒤로 물러났다.

“왜 피해?”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물었잖아.”

“뭐, 뭘.”

리비는 조금 더 물러섰다.

“안 간다고 했잖아.”

성큼 다가선 그가 리비의 팔을 붙들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강한 악력이었다.

“아니면, 거짓말이야?”

그는 다그치고 있었다. 아침에 침대에서 부드럽게 그녀를 리드하던 모습은 간데없이, 이제는 무섭도록 표정을 굳히며 몰아붙이고 있었다.

“저, 나는…….”

“언제고 날 떠날 생각뿐인 거야?”

보랏빛 눈이 형형하게 번득였다. 마치 숲속에서 마주한 마물이 내뿜는 빛처럼 위험하고 또 위험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는 여러 가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신기한 능력들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이미 기억을 지우는 힘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고. 또 어떤 힘이 있을까. 그녀는 새삼 커다랗게 다가온 남자의 존재가 버거워졌다.

“응? 리비.”

리비는 겁에 질린 나머지 눈을 꼭 내리감았다.

“단장님, 그러시면 여자들은 싫어한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어디선가 들린 소리에 그녀는 살며시 눈을 떴다.

“…….”

보리스에게 온통 신경이 쏠려 있느라 그들 곁에 있는 다른 이들은 미처 보지 못했다. 하나둘 나타난 얼굴들은 그날 밤, 그러니까 보리스가 극악무도하게 그녀를 납치했던 그날 보았던 기사들이었다.

투구 아래 감추고 있던 얼굴들이 의외로 순하게 보여서 놀랐던 그 얼굴들.

물론 제법 우락부락하고 거친 자들도 있었지만 지금 말을 건 이는 휘날리는 금발에, 다정한 기운을 품은 갈색 눈이 돋보이는 미남자였다.

그 옆에는 좀 더 앳된 얼굴의 기사가 수줍은 듯 리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좀 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자신과 보리스를 주시하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이 제각각 뭐라 말하는 소리로 웅성대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잘 알아듣지는 못해도 필시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란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의 눈에 맺힌 짙은 호기심을 알아챈 리비는 당황스러움에 얼굴을 푹 숙였다. 주의 깊게 자신을 살피는 시선에 리비는 저도 모르게 보리스의 뒤로 숨어들었다.

“훈련하다 어디 가셨나 했더니…….”

목소리가 들린 곳에 서 있는 기사는 말을 잇다가 리비를 보고 말을 멈췄다.

“아, 공작 부인이시군요.”

기사가 리비를 보며 예를 갖췄다.

“공작 부인……?”

기사가 저를 호칭하는 소리에 리비는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에요.”

강하게 부정하는 소리에 말을 건 기사는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는 사이 호기심이 동했는지 기사들이 하나둘씩 더 모여들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훈련생, 혹은 견습 기사로 보이는 앳된 얼굴들도 있었다.

보리스는 잠시 리비를 본 뒤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신경 쓰지 마라.”

차분하고 낮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놀란 건 리비 쪽이었다. 그가 이런 목소리와 어조를 낼 수 있었나? 전혀 다른 사람이 내는 것만 같은 그런 목소리에 리비는 벌써 여러 번 놀라고 있었다.

그와 이곳으로 오는 동안 몇 번이나 들은 적 있음에도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기사들이 수군거리던 소리는 슥 돌아본 보리스의 눈빛 한 번에 제압당했다. 다른 기사들 역시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흠흠,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견습 기사들이야?”

그러자 그의 얼굴이 조금 더 구겨지는 게 보였다. 뭔가 매우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모두 위치로.”

싸늘한 명령에 기사들은 다시 제자리로 흩어져 갔다.

“왜 그렇게 차갑게 대해?”

“딱히 그런 건 아냐.”

보리스는 딱딱한 말투로 대꾸했다.

“……내가 네 부인이 아니라고 해서?”

리비가 한 말에 보리스는 잠시 움찔했다. 맞는 말을 한 모양이었다. 짐작 가는 이유는 더 있었다.

“그리고 기사들이 날 보는 게 싫어서?”

또다시 움찔.

리비는 간신히 웃음을 삼켰다.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구는 그가 낯선 한편, 재미있기도 했다.

자신이 모르는, 다른 사람들과 있는 보리스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다. 아마 저들과 친해진다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소개해 주면 안 돼?”

“안 돼.”

보리스의 칼 같은 거절에 리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곳을 나가는 것 말고 보리스가 저처럼 강경하게 거절 의사를 표현한 건 처음이었다.

반은 장난처럼 던진 말에 매우 진지하게 받아치는 그를 보자 리비도 더는 말을 붙이기가 민망해졌다.

“바쁜 것 같은데 가봐.”

리비가 뾰로통하게 말하자 보리스는 다시 당황한 듯한 얼굴이 되었다. 이때다 싶어 리비는 휙 몸을 돌려세웠다.

“데려다줄게.”

보리스는 나풀거리는 드레스 옷소매 위로 팔을 움켜쥐었다. 그가 잡아채는 바람에 휙 딸려 온 리비는 그와 가깝게 붙어 서 있게 되었다.

“나, 혼자 갈 수 있어. 봐. 걸어왔어, 여기까지.”

리비는 그의 귀에 거의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귓가에 바람이 훅 불어지자 보리스의 표정이 다시 유순하게 돌변했다. 하지만 어쩐지 서늘한 기운을 품은 눈빛마저 사그라든 건 아니었다.

“위험해. 여긴 외성이야. 안전한 내성과는 다르다고, 리비.”

타이르는 듯, 하지만 혼내는 듯한 음성에 리비는 어쩐지 낯선 느낌이 들었다.

이제껏 알던 그와 다르다. 물론 그의 눈빛이, 목소리가, 이전과 달리 말로 설명 못 할 위압감을 품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또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어느 쪽이 진짜 보리스인 걸까. 보리스가 자신에게 보이는 수줍고 어딘지 모자란 듯한 모습은 다 자신에게만 보여 주는 걸까?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리비는 왠지 모르게 뿌듯해지고 말았다.

새삼 혼란스러운 마음에 그를 빤히 올려다보는데 보리스가 그녀의 손을 잡더니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저…… 그럼 이만.”

돌아본 곳에 서 있던 기사 무리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저들끼리 휘파람을 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보리스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만 갔다.

외성과 내성을 잇는 문까지 다가서자 위병은 보리스를 알아보고 즉각 물러섰다.

그 안으로 들어서자 또다시 외성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고작 문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왜 여기까지 나온 거야?”

내성 안으로 한참을 들어가고, 인적이 전혀 없는 곳에 이르러서야 보리스는 다시 말을 꺼냈다. 리비는 그런 그를 보다가 손을 휙 빼냈다.

“……할 말이 있어서. 밤까지 기다릴 수 없었어. 나는 뭐, 네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강아지야?”

이렇듯 딱딱하게 구는 것이 화가 뻗쳐서 리비는 빽 소리를 질렀다.

“……미안해.”

보리스는 순식간에 꼬리를 내렸다. 그녀가 방금 말한 ‘강아지’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자 리비의 마음은 또 금세 진흙처럼 뭉개지고 말았다. 하여간에, 이렇게 물러 터진 자신도 문제였다.

“뭐, 말없이…… 베스를 졸라서 나오긴 했지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뭔데?”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을 정말로 어쩔 셈이야?”

“…….”

“죽일 건 아니지, 그렇지?”

리비의 다급한 물음에도 그는 답이 없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당연하지! 그들은 전쟁의 빌미야. 다른 포로들도 아니고 기사들을 구류하는 건……. 이 일대가 모두 불바다가 될지도 몰라, 보리스.”

자신이 해온 최악의 가정을 중얼중얼 늘어놓는데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보리스?”

기이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

“설마.”

“…….”

“설마 너, 보리스. 아니지? 아닐 거지? 응?”

리비는 그의 팔을 붙잡고 미친 듯이 흔들어 댔다. 까짓것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음에도 보리스는 그녀가 흔드는 대로 붙들려 있어 주었다. 성에 찰 때까지 흔들어 댄 뒤에야 리비는 손을 다시 내려놓았다.

“뭘?”

내가 뭘, 어디까지 할 것 같은데?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에 리비는 또다시 두려워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외성에서 보았던 것들 중에는 무기도 가득했다.

무기를 만드는 대장간은 규모도 컸고, 내내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단 한시도 쉬어 본 적 없는 것처럼.

“전쟁을…… 일으킬 거야?”

차마 입에 담기도 무서운 말이었다.

“……봐서.”

“안 돼!”

답이 끝남과 동시에 리비는 꽥 소리를 내질렀다.

“안 돼, 그건 안 돼. 보리스. 다시 생각해, 제발. 응?”

하얗게 질린 채 그의 팔을 붙들며 리비는 애원했다.

“전쟁이라니. 또다시 전쟁…… 안 돼, 어, 어떻게 끝낸 전쟁인데. 이대로 또 전쟁의 구렁텅이 속에 빠질 순 없어.”

이 말은 진심이었다. 너무 오래 전쟁을 치러 내야만 했다. 결국 현 왕가와 레제트 공작가가 차지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였다.

바로 왕관. 앉고자 하는 것은 왕좌.

그것을 위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이어 가는 것이다. 같은 왕국 안에서. 각자의 핏줄을 왕위에 올리고자.

“날 보내는 게 맞아, 보리스.”

리비는 절박하게 외쳤다. 그의 귀에 들리는지는 의문이었다.

“잠은 좀 잤어?”

“…….”

말갛게 뜬 초록색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리비의 애원에 답하는 대신 다정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내내 괴롭혔잖아, 어제.”

“지금이 더 괴로워.”

그녀는 손을 툭 치며 물러났다.

“기사들이 귀환하지 않으면 결국 공작이 알게 될 거고, 전쟁이 터질 거야. 그건 다…… 내 책임이고. 다 나 때문이야.”

어느새 리비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 나쁜…….”

“그건 리비의 잘못이 아니야. 그건 내 탓이지.”

보리스는 다급하게 뽀얀 살결 위로 흐르는 눈물에 입술을 대고 빨아들였다. 짤 텐데, 분명히 짤 텐데도 그는 망설임 없이 눈물을 집어삼켰다. 마치 다디단 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맞아, 네 탓이야.”

리비는 분한 듯 중얼거리며 사정없이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보호구를 착용하고 있어 자신의 손만 아팠다.

결국 보리스가 리비의 손을 떼어 낸 뒤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얼굴을 때려.”

“이…… 이.”

보리스는 떡하니 자기 얼굴에 리비의 손을 가져다 놓았다.

찰싹.

“때리라면 못 때릴 줄 알고?”

“잘했어.”

보리스는 설핏 웃었다. 그러더니 아예 나머지 뺨도 가져다 대었다.

“더해, 더. 나는 나쁜 놈이잖아.”

“너…….”

손바닥에 얼굴을 맞는 게 마치 커다란 행복이라도 되는 양, 그의 입가는 길게 늘어져 있었다. 리비는 그의 얼굴을 붙든 채로 어쩔 줄 몰라 서 있었다.

뺨에 닿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얼마간 그러고 서 있었다. 보리스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엷어졌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 리비. 물론 벌어진다면 피할 생각은 없지만.”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무슨 수로 전쟁이 일어나는 걸 막는단 말이지. 설마 레제트 공작이 순순히 자신의 신부를 포기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리비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왕궁에 갈 거야.”

“……뭐?”

그가 하는 말의 뜻을 선뜻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왕에게 가서, 너를 내 신부로 선언해 달라고 할 거야.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끔.”

“그게, 무슨…… 너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왕을 협박한다는 거야.”

“맞아. 그러려면 세 보여야 하니까, 이것저것 많이 가지고 갈 거야.”

그는 태평스레 말했다. 마치 어린 시절 마을에서 남자아이들과 하던 전쟁놀이를 말하듯, 아주 쉽고 간단하게.

“많이…… 뭘?”

아까 외성에서 열심히 나르고 있던 무기들. 설마 그것들을 가지고 수도로 갈 셈인가.

“반란이라도 일으킬 셈이야?”

리비는 충격에 사로잡혀 꽥 소리를 내질렀다.

“……어쩌면.”

서늘하게 이어진 목소리에 리비는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안 돼, 안 된다고! 전쟁은 안 돼! 그리고 왕국군을 무시하지 마! 아무리 그들이…….”

레제트 공작의 군사들에게 박살 나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일단은 세셔 왕국의 제1병력들이다.

“칼리니 기사단이 아니었으면 진즉에 이 나라는 없어졌어, 리비.”

그는 달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하는 내용과는 매우 몹시 맞지 않는 어조였다.

“걱정 마, 내가 이겨.”

“뭘 이겨, 뭘! 뭘 이기는데!”

그는 말없이 리비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내리눌렀다.

“우…… 으읍!”

버둥거리는 몸을 바짝 죄어 안으며 그는 혀를 더욱 깊숙이 밀어 넣었다. 왜 갑자기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는지 리비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헉…… 헉.”

한참 후 떨어진 입술 새로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물론 보리스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런 괴물 같으니.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그러는 순간 저 보랏빛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뚝뚝 흘러넘치는 꼴을 봐야만 할 테니까. 그건 별로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그러니 걱정 말고 이만 가서 쉬어.”

보리스는 그렇게 말하고선 그녀를 안아 올렸다.

“어? 아…….”

그러고선 리비의 방이 있는 탑의 꼭대기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너, 그, 어, 아으…….”

뛰어 올라가는 보리스는 멀쩡하건만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리비는 머리가 정신없이 흔들려 괴로웠다.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왜 그는 날개를 쓰지 않는 것일까.

이렇게 힘을 뺄 바엔 날갯짓 몇 번이면 간편하게 자신을 원하는 곳에 감금시켜 둘 수 있지 않나. 그런데도 왜.

리비는 그의 목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살결이 맞닿자 그가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무서워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보리스는 리비를 안은 채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탑의 꼭대기까지 순식간에 다다른 뒤, 침실 문을 열고 그녀를 내려 두었다.

“아.”

순간 핑글 도는 하늘에 리비는 다시 그의 품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기꺼이 받아 안았다.

“괜찮아? 좀 천천히 오를 걸 그랬나.”

그에게 소중히 안겨 침대 위에 몸을 누이는 동안, 리비는 울렁거림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좀 쉬면 나아질 거야.”

“…….”

“그때까지 곁에 있어 줄게.”

그럴 필요 없다고, 얼른 네 볼일을 보러 꺼져 버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리비는 괴로운 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어쩐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것도 그가 가진 능력 중 하나인 걸까.

가만히 눈꺼풀 위로 내려앉는 말캉한 살의 촉감을 느끼며 그녀는 눈을 내리감았다. 잠시 후, 그녀는 어느덧 죽음 같은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

달이 방 안을 비춰서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그녀가 있는 탑은 높이 솟은 만큼 달과 더 가까웠다.

리비는 양손으로 턱을 괴고서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평소보다 더 크고 환하게 보였다. 이 시간 즈음이면 보리스가 올 때였다.

문득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게 느껴졌다. 리비는 후다닥 침대로 뛰어 들어갔다.

펄럭.

무언가 부드럽게 접히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그의 날개가 일으킨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불을 덮어쓰고 있어서 볼 수는 없었지만.

단 한 번 본 그의 날개를 잊을 수가 없었다.

“리비.”

“…….”

몸을 살짝 흔들어도 리비는 일어날 줄 몰랐다.

“삐졌어?”

그 말에 리비는 파드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삐지긴!”

“아니야?”

보리스가 살그머니 웃으며 물었다. 순간 리비는 입을 헤 벌린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달빛에 비친 얼굴 탓에 그는 요사스러운 마물처럼 보였다.

마물이 맞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맞다. 등 뒤에 커다랗게 솟은 날개하며, 사람의 마음을 시도 때도 없이 약해지게 만드는 눈웃음. 눈. 그래, 저 눈.

리비는 손을 뻗어 그의 눈을 잽싸게 가려 버렸다. 더 이상 넘어가서는 곤란하니까.

그의 품에 안겨 탑에 다시 올려진 뒤, 그녀는 정신없이 자다가 이제야 눈을 떴다. 밤이 깊었으니 그가 오리라는 것을 알았고, 어쩐지 그에게 또 휘말릴까 보리스의 얼굴을 아예 안 보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런데 또 넘어가 버린 것 같다. 진지하고 심각하게 화를 내려다가도 저 얼굴, 저 눈,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면.

“왜 안 자? 다시 재워 줘?”

“그런 능력도 있는 거야?”

리비는 내내 궁금해했던 걸 물어보았다. 그 질문에 보리스는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잠을 재울 수도 있다고?”

“……나쁜 건 아냐.”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주눅 들어 있었다.

“죽이진 않거든. 잠만 재울 뿐이야.”

“……제발 그런 눈으로 살벌한 소리 좀 하지 마.”

매우 간극이 큰 표정과 말투였다. 사람 죽인다는 소리를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정말 사람을 홀려 먹는 뭔가가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그런데 왜…… 다른 능력은 안 써?”

“무슨?”

“그거…… 있잖아.”

“그거?”

보리스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그거 말이야. 그거.”

“……아아.”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금세 환한 얼굴로 웃었다.

“응. 그거 왜?”

“좀 보여 줄 수 있어?”

“……여기서?”

“안 돼?”

무리한 부탁을 한 걸까. 보리스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저, 어려우면 안 보여 줘도 돼. 나, 그거 안 봐도 돼.”

“리비가 원한다면.”

그렇게 말하고서 보리스는 비장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바지춤에 손을 가져가 풀어내기 시작했다.

“미친! 아니야! 그게 아니야!”

리비는 미친 듯이 손을 내저으며 질색했다. 그녀는 양팔을 교차해 눈을 가린 뒤 도리질을 해댔다.

“리비, 나를 봐.”

“시, 싫어. 이 변태 자식…….”

“어서.”

그가 부드럽게 채근했다.

“만져 보래도.”

“싫어, 싫어! 아악!”

리비는 손을 잡힌 채로 죽어라 비명을 질러 댔다. 하지만 그의 손에 속절없이 끌려가고 말았다. 이대로, 설마 이대로 만지게 되는 건가, 보기는 했지만 만지는 건 처음인데, 안 되는데…….

“…….”

“어때?”

손끝에 닿은 건 부드러운 깃털의 감촉이었다.

“…….”

리비는 손가락을 조심스레 움직여 보았다. 크고 부드러운 깃털의 감촉. 이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보여 달라며.”

보리스의 등 뒤로 크고 검은 날개가 양쪽으로 펼쳐져 있었다.

한 번, 두 번. 리비는 연달아 눈을 깜빡였다. 분명히 보았던 것인데도 다시 보니 그 느낌은 전혀 새로웠다.

세상에, 날개가 맞았다. 리비는 아직도 그날 일이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고, 엄청난 환상을 보고서 정신이 어떻게 되어 버린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광경은 환상도, 상상도, 착각도 아니었다.

모든 게 현실이었다. 눈앞의 보리스도, 보리스의 등 뒤로 커다랗게 솟아난 검은 날개도.

“…….”

리비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의 모습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활짝 펼친 날개를 보며 그녀는 심란해졌다.

‘진짜다, 진짜로 있어. 날개가.’

혼란한 마음에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았지만 눈앞의 형체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난 뭘 확인하려 한 거야?’

이미 하늘을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이 성으로 되돌아, 아니 잡혀 왔다. 그런데 왜 새삼 날개를 보니 이리 심란한 걸까.

“하얀색이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더 예뻤을 거야. 천사처럼. 리비도 좋아했을지 모르는데…….”

보리스는 침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리비의 심각한 표정의 이유가 시커먼 날개 색 때문인 줄 아는 것 같았다.

“아니야.”

리비는 얼른 대답했다.

“…….”

빠른 대답에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자 리비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어, 내 말은, 그러니까…….”

왠지 모르게 당황해 말을 마구 더듬고만 있었다.

“검은……색도 괜찮다고.”

리비의 대답에 보리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전혀 의외의 답을 들은 듯, 깜짝 놀란 얼굴에 이내 부드러운 미소가 맺히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큰 칭찬을 들은 듯 우쭐해 보였다. 그 기분을 반영이라도 하듯, 검게 솟은 날개가 마치 춤을 추듯 그의 뒤에서 펄럭이는 게 보였다. 그 비슷한 걸 리비는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구애의 춤이야?”

“응?”

“새들이 짝짓기할 때 그런 춤을 추던걸.”

짝짓기 계절의 새들은 평소와는 다른 날갯짓으로 암컷에게 마음껏 제 매력을 뽐낸다. 꽁지깃을 바짝 세우고 날개를 널찍하게 펴서 암컷에게 최대한 몸집을 크게 보이도록 만든다.

보리스가 하는 행동이 지금 딱 그 꼴이었다.

“아.”

그는 자신의 나긋나긋한 날갯짓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 반응이 새삼스러워서 리비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런 짓, 저런 짓, 잘만 하는 주제에. 겨우 저런 걸로 부끄러워하다니.

“보리스.”

“…….”

“도대체 네 정체가 뭐야?”

리비는 숨겨 왔던 말을 꺼냈다. 물어본다 한들 그가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까도 답을 피하려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꼭 알아야 했다.

“나는, 나는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어렸을 때부터 너의 날개를 봐왔고, 최근에야 다시 알게 됐지만…… 말해 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나와 결혼할 거야?”

“…….”

갑자기 치고 들어온 질문에 리비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는 어수룩해 보이면서도 빈틈을 귀신같이 알고서 파고들어 오곤 했다.

“그건…… 아니지만.”

리비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래도 알려 줘. 나도…… 알 자격은 있다고 생각해. 날 이렇게 잡아 왔잖아.”

보리스의 눈빛이 차차 깊고 어두운 빛을 띠었다. 필시 그에게는 가장 곤란하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일 터였다. 애초에 그것을 안다면 어린 시절, 그토록 혼란해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나도 몰라.”

한참이 지난 후에야 대답이 떨어졌다. 리비는 저도 잔뜩 힘을 주고 그의 답을 기다리다가, 그만 힘이 탁 풀리고 말았다.

“네 그 신기한 능력은? 어디서 온 건데? 그것도 몰라?”

“응.”

보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에도 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었다. 뭘 기대하고 물어본 걸까, 리비는 허무한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버……지?”

리비는 그의 말에 놀라고 말았다.

아버지. 아버지라니.

그에게도 당연히 아버지가 있겠지. 하지만 한 번도 그의 입으로 들어 본 적 없는 단어였다.

보리스의 아버지, 보리스의 혈육. 보리스의……뿌리.

“그들은 아버지를 생포하려다가 실패했어.”

“실패……? 그들……?”

연달아 튀어나온 말에 리비는 혼란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무엇을 먼저 물어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결심하고 처음에 물어보려 한 질문을 던졌다.

“네 아버지를 왜 생포해? 무엇 때문에?”

“아버지도 나와 같거든.”

“…….”

‘같다’라는 말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리비는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그걸 다 알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야, 보리스?”

“아버지도 나처럼 날개가 있었어. 어디든 자유로이 날아다니실 수 있었고. 그들은 그런 아버지를 두려워했지. 나는 거기까지만 알고 있어.”

“그럼 어머니는?”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태어날 때부터 안 계셨어. 아버지 말로는 날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했고.”

“…….”

“내 정체가 뭔지, 왜 이런 걸 달고 태어났는지, 그리고 아버지에겐 왜 같은 게 달려 있었는지, 나는 하나도 몰라.”

“…….”

“아버지는 날 보호하려다가 돌아가셨으니까.”

“……그들이 누군데?”

“붉은 깃을 단 기사들이었어.”

“붉은 깃……?”

리비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어느 날 마을에 들이닥쳤던 이들의 복장을 떠올려 보려 애썼다.

그들은 그저 마을을 약탈하기 위해 마을을 급습한 이들이 아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서 온 이들이었다. 정식 무장을 갖춘 기사들이었다.

저 멀리 사라졌던 기억이 선명하게 수면 위로 떠올랐다.

“붉은 장미.”

그들의 망토를 장식하고 있던 건 새빨간 장미 형상의 문장이었다. 왕가의 하얀 문장과는 대조되는 형태와 색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레제트 공작?”

리비는 보리스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네가 날개가 달린 걸 알아?”

“응.”

“네 얼굴도?”

“그건 정확히 모를 거야. 날개가 솟은 뒷모습만 봤으니까.”

심장 속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다.

“그들이 널 쫓았다는 건…… 네 정체를 알기 때문이잖아. 널 죽이려고 그러는 거잖아.”

잠잠하던 그의 눈이 요동쳤다.

“레제트 공작이 너를 쫓았었어, 보리스. 널…… 잡아가려고 했어.”

기사들은 맹목적으로 보리스만을 찾았다. 마을을 온통 뒤집어 놓고 나서야 자신들이 찾던 소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을을 떠났었다.

“왜? 어째서? 너를?”

“그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지배하고 싶어했어.”

“지배한다고?”

그 말에 소름이 쭉 끼쳤다.

“정확히는 소유하고 싶어했지.”

“……소유라니.”

더 무서운 말이 나오자 리비는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레제트 공작이 수집벽이 있다는 거, 들어 본 적 있어?”

“응, 마을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어. 그래서 레제트 성에는 온갖 보석과 황금들이 가득하대.”

“그자가 집착하는 건 그런 것뿐만이 아니야.”

“……그러면?”

“레제트성에는 아름다운 새들이 많이 산다는 얘길, 들어 본 적 있지?”

“……으응.”

세상에 한 마리밖에 없다던 진귀한 새도 레제트 공작성에서 살다가 죽었다고 했다. 죽은 뒤에는 박제를 해서 공작의 방에 전시해 놓았다고.

“설마.”

리비는 그가 한 말에 흠칫하며 몸을 웅크렸다.

보리스는 사람이다. 아무리 그의 등에 날개가 돋쳐 있다 한들, 그것은 보리스 육체의 일부일 뿐이지 결코 날짐승이 아니다.

만약에 그때 레제트 공작에게 잡혔었더라면…….

“추워?”

보리스는 하얗게 질린 리비를 보다가 제 품에 끌어안고 몸을 문질러 주었다. 그의 손길에 따뜻한 열기가 번져 갔음에도 여전히 오한은 계속됐다.

“설마, 그 미친놈이 너를…….”

“그들 눈에는 나도, 내 아버지도 모두 커다란 새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말도 안 돼.”

리비의 몸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내 힘도…… 이용하고 싶어했으니까.”

“……힘?”

“리비, 나와 내 기사단이 무슨 수로 나가는 전투마다 승리를 거뒀다고 생각해?”

그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내리깔렸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어. 적들의 수와 진영, 그들의 움직임, 보유 중인 식량까지…… 모든 걸 다.”

툭.

보리스의 옷깃을 잡고 있던 손이 아래로 툭 떨궈졌다.

칼리니 기사단의 위력을 두고서, 사람들은 그런 우스갯소리를 했다. 땅에서 싸우는 까마귀들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그런데 지금 보니 그 말은 진짜였다.

“잠깐만, 우리?”

보리스는 리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라면.”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리비는 흠칫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노란 눈을 빛내는 커다란 까마귀가 앉아 약 올리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내 훌륭한 정찰병들이지.”

순간 리비는 멍해졌다. 저 못된 얼굴을 한 까마귀들이 보리스의 말을 알아듣는 것으로도 모자라 전투를 승리로 이끈 역할을 했단 말인가.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른 이가 아닌 보리스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대체 언제쯤이 되어야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괴물이라서 싫어? 예전엔 나를 아름답다고 했잖아.”

리비는 아무 말도 못 하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이어진 말에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리비, 이거, 잘라 낼까? 네가 싫다면…….”

“그러지 마!”

리비는 놀라서 꽥 소리를 질렀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할 기세였다. 말리지 않는다면 진짜 자신의 날개를 찢어 버리고도 남을 것 같았다.

“네가 싫다면 그렇게 할게.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리비. 네가 날 받아 준다면…….”

“아냐, 아니라고!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냐!”

리비는 벌떡 일어나며 다시 소리쳤다. 멀뚱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과 마주하자 어쩐지 미칠 것만 같았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그러니까, 왜?

어째서 그렇게 화가 나고, 미칠 것 같은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 꼴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보리스의 눈은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언제든, 자신이 원한다면 미련 없이 저 큰 날개를 잘라 버릴 거라고.

리비의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그와 함께 있었던 시간 동안, 단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단, 레제트 공작에게 자신을 보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것만 빼면 그는 맹목적으로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사람이었다. 그것이 무서웠다. 보리스는 자신이 그 보랏빛 눈을 빼달라고 하면 주저 않고 빼서 건넬 사람이었다.

뭘 어떻게 해야 저런 무서운 생각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네 몸, 조금도 다치게 해선 안 돼. 그랬다가는…….”

“리비.”

“그랬……다가는.”

리비는 몇 번이나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날 다시는…… 못 볼 줄 알아.”

그 말을 들은 보리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럴게.”

그의 눈이 기이할 정도로 반짝였다. 이렇게 보니 정말로 사람을 꾀어내는 마력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가 가진 능력 중에는 그런 것도 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리비는 아무 대책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꼬여도 제대로 꼬여 버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 말도 안 통하는 까마귀를 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지, 그녀는 앞이 막막했다.

땅으로는 어딜 가든 도망칠 수 없다. 모두 그의 눈 아래 있을 테니까.

“약속할게, 리비.”

그는 다시 절박하게 속삭였다.

“네 말, 다 들을게. 그러니까 제발.”

“…….”

“……우리 이러지 말자는 말만 하지 말아 줘.”

풀썩, 그가 달려들어 리비의 몸을 뒤로 쓰러뜨렸다. 리비는 누운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부서지는 그의 얼굴이 더욱 잘 보였다.

“너는 날 보내 줄 생각이 없는 거지.”

보리스는 말없이 눈만 깜빡거렸다. 투명하게 빛나는 액체가 금방이라도 또르르 떨어져 그녀의 얼굴을 적실 것만 같았다.

“절대로 그럴 리 없는 거지, 꿈도 꾸지 말라는 거지, 그렇지?”

“…….”

굳게 다물린 입은 그녀가 말한 게 맞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아.”

리비는 얼굴을 감싸 쥐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결혼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어.”

어린 날,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약속 때문에 이렇게 코를 꿰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모두, 자신의 입으로 불러들인 재앙이었다.

“리비…….”

그는 간절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화났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려 했다. 화났냐니. 이런 상황에서 듣자니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난, 너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야.”

“날 위해 이런다는 말은 하지 마.”

“아니, ‘우리’를 위한 거야.”

냉큼 말을 받는 보리스의 행태에 리비는 다시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떤 말을 하든 보리스를 설득할 방법 따위는 없는 듯싶었다.

“날 다시 만난 게 싫어?”

“…….”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어?”

말끝에 울음이 묻어났다. 그 얼굴에, 목소리에, 그녀는 다시 흔들리고 말았다.

“네 옆에서 자고 싶어.”

어느덧 그녀의 옆구리로 파고든 보리스를 떨칠 힘 같은 건 리비에게는 없었다.

어느덧 그가 밀치는 대로 침대에 자리 잡은 리비의 눈이 별안간 커졌다.

“이거 뭐야?”

허벅지 즈음에 확연히 느껴지는 묵직한 존재감에 리비는 기겁한 얼굴로 물었다.

“네가 너무 귀여워서…….”

보리스는 쑥스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다리에 닿은 그것의 존재감은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잠깐만…….”

말릴 새도 없이 보리스는 그녀의 몸을 꽉 그러안은 채 제 몸을 문질러 왔다.

“보리, 음…… 스으.”

분명히 화를 내고 있었는데, 어느덧 그와 닿은 몸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단단하게 문질러지는 감촉은 지나치게 뜨겁고 야했다.

뒤에서 뻗어 온 손이 리비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흑!”

얇은 옷감 위로 천천히 가슴을 쥐고 문지르는 손짓에 리비는 몸을 꼬며 신음을 흘려 댔다.

“하지 마, 하지…….”

여우 같은 놈이었다. 까마귀가 아니라 여우였다. 그가 주는 쾌락에 그녀가 지극히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저지르는 행위였다.

“하아, 하…….”

“괜찮아, 느껴도 돼. 그렇게 해줄게, 응?”

목덜미를 빨아들이며 속삭이는 소리가 엉큼했다.

“가도 돼, 리비. 얼마든지.”

“무슨…… 흑, 소리야!”

리비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앙탈처럼 흘러나오는 말을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은 점점 더 대담해졌다.

터트릴 듯 콱 움켜쥐다가도 다시 부드럽게 풀어 살살 달래는가 싶더니 바짝 곤두선 정점을 살짝 꼬집고 잡아당기기를 반복했다.

“이, 이것 좀…….”

지나치게 예민해진 몸에서 야릇한 반응이 치고 올라왔다. 보리스의 손에서 전달되는 욕망은 리비를 계속해서 울리고 또 울렸다.

그러는 사이 엉덩이에 닿은 것이 더욱 크게 부푸는 것이 느껴졌다. 바늘 하나 꽂을 틈도 없이 바짝 붙은 몸 사이로 열기가 피어올랐다.

“하읏, 음.”

단단하고 뜨거운 몸이 여리고 말캉한 몸에 닿아 비벼지는 감촉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그의 행동이 멎었다.

“…….”

리비는 행동이 뚝 끊긴 상황이 의아한 한편, 몸에 남아 있는 흥분의 잔재에 낮게 숨을 허덕였다.

“부족하지, 리비?”

귓가에 속삭인 말에 리비가 파득 몸을 떨었다.

“응?”

“기분 좋게 해줄게.”

“뭐, 뭘?”

당황해서 되묻는 말에 보리스는 순식간에 리비의 다리를 벌리며 그 사이로 자리 잡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보리스는 리비의 양다리를 잡아챈 뒤 그 가운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보리스?”

두려움에 가득 찬 리비는 제 다리 사이에서 눈을 형형하게 빛나는 그를 바라다보았다.

“여기, 직접 본 적 있어?”

“뭐라고?”

그의 입에서 상상도 하지 못한 질문이 튀어나오자 리비가 경악했다.

“아주 예쁘거든. 이렇게 부드럽고, 약하고…….”

“아아, 아읏…….”

그는 리비의 다리를 단단히 움켜쥐어 더욱 벌리더니 한 손으로 갈라진 부분을 따라 스르륵 손가락을 움직여 희롱해댔다. 그의 손길에 몸이 민감하게 반응하며 움찔거렸다. 어느새 음부는 축축이 젖어 있었다. 어딘가 간지럽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욕구가 스멀거리며 온몸을 지배해갔다.

푹.

깃털을 어루만지듯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손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흡!”

손가락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아, 안 돼. 보리스 안…….”

“걱정 마, 기분 좋게 해줄게.”

그는 한 번 더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리비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처박았다.

“아, 하지…아!”

보리스는 좀 전에 자신이 손가락을 집어넣었던 질구 주변을 혀를 내밀어 핥아대기 시작했다.

보리스가 내쉬는 숨결이 뜨겁게 음부를 데웠다. 제대로 본 적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부위에 얼굴을 박아대고선 샘물 빨아먹듯 하는 보리스의 행동에 기겁한 리비가 밭은 숨을 내뱉었다.

입구에 고여 있는 애액을 사탕을 빨아먹듯 게걸스럽게 핥아댄 보리스가 그대로 혀를 안으로 밀어넣었다.

“하지 마, 하지……흣!”

뜨겁고 축축한 혀가 예민한 살을 가르며 들어왔다. 움직이는 혀의 감초에 리비가 이리저리 몸을 틀어댔지만 소용없었다. 버둥거리는 다리는 그에게 꽉 붙들려 움직일 수 없었다.

“보리스, 보리스……!”

리비는 지나친 자극에 저항하며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로 물렸다. 하지만 이내 덮쳐온 커다란 손이 재빨리 엉덩이를 잡아쥐더니 더욱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아……응, 흐읏, 아…….”

높이 솟은 콧대가 여린 살을 툭툭 두들겨 댔다. 그는 얼굴을 더욱 깊숙이 들이밀며 비벼대기를 반복했다. 도도록하니 돋아난 살점을 찾아낸 보리스가 그것을 게걸스레 빨아대기 시작했다.

츱, 츠읍.

그 소리를 내는 이가 보리스라는 게, 그게 다름 아닌 자신의 아래에 얼굴을 박은 채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제발 그만…….”

리비가 보리스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 울먹거렸다. 제 하체를 꽉 붙들고 있어서 도망칠 여력도 없었다.

“하……으음, 앙…….”

뱃속에 고여든 희열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그녀는 위로도, 아래로도 울었다. 제 아랫도리에 질척하게 엉겨붙은 보리스의 입술과 혓바닥이 그녀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그만. 지나친 쾌락이 몸을 잠식해갈수록 리비는 헐떡이기 바빴다.

“보리스 그만해…….”

몸 안 어딘가가 지독히도 간지러웠다. 마치 수천 개의 깃털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발가락이 오므라들고 허리가 낭창하게 휘어졌다.

더, 더.

뭔지도 모르고 리비는 강력하게 갈구했다.

“아, 앙, 으응…… 하읏, 흑!”

이러다가는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흠뻑 젖은 아래를 활짝 드러내놓은 자세도 부끄러웠고, 보리스가 아래에서 하는 짓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수치심은 보리스의 요망한 혓바닥이 일으킨 몸의 반응 아래 철저하게 뭉개져 버렸다.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미칠 듯이 간질거리는 몸을 어서 해소해주었으면 하는 것.

그 방법은…….

리비는 눈을 번쩍 떴다.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깨닫고 나자 와락 두려움이 몰려와서였다.

푹, 깊숙이 파고든 혀가 더욱 집착적으로 안을 유린하자 리비는 새카만 머리칼을 붙든 채 죽어라 비명을 질러댔다.

“아아, 아! 아앙!”

아플 법도 하건만 그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에게 파고들 뿐이었다.

“흐읏!”

그가 주는 쾌락은 좋았다. 좋았지만…….

공중으로 튀어오른 몸이 괴롭게 비틀렸다. 혀가 주는 자극으로는 원하는 곳에 다다를 수 없다는 확신이 들자 리비는 엉엉 울기만 했다.

별안간 요동치던 몸이 그대로 멈췄다.

“…….”

침대 천장을 올려다보는 시선이 멍해지는가 싶더니 리비는 도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하…….”

물속에 늘어진 수초처럼 리비는 몸에 아무런 힘도 줄 수 없었다. 흥건한 애액을 흘려대는 아래를 보리스는 정성껏 빨아주는 것으로 행위를 마무리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잠시 눌러두었던 부끄러움이 다시 치고 올라왔다.

‘대체…….’

어쩌다 보니 먼저 절정에 다다라 버린 건 그녀 쪽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랬다. 순식간에 고조된 성감에 버둥거리다가 그에게 결국 집어 삼켜지고 말았다.

그녀는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리스의 새카만 머리채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맞춰왔다. 마물의 것처럼 위험스레 빛나는 눈이 그녀를 삼킬 듯 바라보고 있었다.

보리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리비는 보고야 말았다.

“…….”

기운이 빠져 축 늘어진 자신과 달리, 보리스의 부푼 하체는 좀처럼 꺼질 줄 몰랐다. 잔뜩 위로 치솟아 꺼덕이는 것이 위협적으로 그녀를 향해 있었다. 당장이라도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쑤셔대고도 남을 만큼 그 기세가 흉흉했다.

그걸 보자 다시 겁이 와락 몰려왔다. 그의 손 아래, 입술과 혀에 굴복하여 쾌락의 극치까지 갔던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저건 무서웠다.

결혼한 마을 여자들이 툭하면 당근이며 무를 집어들고선 자기 남편보다 낫다며 농담하던 것이 기억났다. 큰 게 뭐가 그리 좋단 말인가. 자신은 무서워 죽겠는데.

“싫어, 싫…….”

리비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보리스를 보며 기겁했다. 당장이라도 저것을 제 안에 쑤셔넣고 기절할 때까지 흔들 것만 같았다. 지금의 보리스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몸이 둘로 쪼개지는 게 아닐까.

몸을 잔뜩 웅크린 리비가 두려움 섞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였다.

“싫었어?”

뜻밖에도 보리스는 그렇게 물었다.

“……응?”

“내가 그러는 거, 싫었어?”

그가 침대에 엉덩이를 걸쳐 앉아 끼익, 하며 침대가 한쪽으로 꺼졌다.

“그건, 그건…….”

리비는 할 말을 고르느라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싫었나? 그걸 묻는다면, 당연히 싫지 않았다. 너무 싫지 않아서 문제였다.

하지만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바로 싫다는 답을 하기엔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바로 보리스의 침울한 얼굴과 마주해야 할 테니까.

“내가 싫어, 리비?”

“…….”

리비는 답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기세 좋게 솟아오른 보리스의 그것을 정통으로 내려다보고 말았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다시 보리스의 눈과 마주쳤다. 절대로 거짓을 말할 수 없는, 한없이 마음이 약해지고야 마는 그 눈을.

“이건…… 이상해.”

겨우 적당한 답을 찾아낸 리비가 말했다.

“응?”

“이상……해. 모든 게 다 이상해. 내가……내가 너무 이상해. 네, 네……입술과 혀가 내 거기를…… 난 상상도 못 했는데…….”

횡설수설 이어지는 말에 보리스는 지그시 미소지었다. 적어도 싫지는 않다는 그 말에 안도한 모양이었다.

“그럼 됐어.”

“뭐, 뭐가 돼?”

“더 이상 안 괴롭힐게.”

보리스는 리비를 끌어당겨 이마에 입 맞췄다. 그러다가 리비는 다시 흉흉한 그것을 보고 말았다.

“이건, 이건 어떻게 해?”

리비는 달뜬 숨을 삼키며 물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흥분해 버렸다. 아직도 그와 나눈 행위의 여운이 온몸에 남아 있었다. 자신이 이런 상태인데, 보리스는 오죽할까.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의 것이 보리스의 상태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가만히…….”

보리스가 스륵 몸을 일으켜 세웠다. 리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나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릎을 세워 그녀를 바라보았다.

“…….”

하체 가운데에 우람하게 솟아난 것을 보는 리비의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마주 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리비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보리스는 그것을 제 손으로 움켜쥔 채 리비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 해?”

“그대로 있어.”

“응?”

슥, 슥.

핏줄이 불거진 굵은 기둥을 문지르는 손길이 점점 빨라졌다. 맹세컨대 여태까지 본 중에 가장 음란하고 퇴폐적인 광경이었다.

리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가 하는 일을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제 물건을 훑어내리는 손은 점점 더 빨라졌다.

탁탁.

꼿꼿이 머리를 쳐든 것이 그의 손짓 아래서 더더욱 빳빳하게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것임에도 범해지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입안이 마르고 다리 안쪽이 바짝 조여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탁, 탁.

보리스가 내뿜는 숨이 좀 더 거칠어졌다. 리비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리비처럼 그 역시 그녀에게서 눈을 떼어 내지 않았다. 리비는 그의 눈 속에서,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범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처리하는 과정을 리비는 다 보고야 말았다. 맹세컨대 이제껏 봐온 와중에 가장 퇴폐적인 광경이었다.

별안간 선단 끝에서 희뿌연 액체가 길게 뿜어져 나왔다. 공중으로 쏘아 올려진 정액은 그대로 리비의 얼굴과 가슴에 흩뿌려졌다.

“…….”

리비는 그의 흔적을 온통 뒤집어쓴 채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뺨을 지나 입술까지 흘러내린 그의 흔적에 멍하니 정신을 놓은 사이, 보리스는 제 손안의 것을 갈무리한 뒤 그녀에게 다가왔다.

“괜찮아?”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길고 굵은 손가락 새로 우윳빛 액체가 주욱 늘어졌다.

“리비?”

“…….”

리비는 거듭된 그의 부름에도 답할 수 없었다.

“미안해, 찝찝하지.”

그는 리비가 화가 났다고 생각한 듯 서둘러 사과했다. 하지만 리비는 보리스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어쩜 이럴 수 있지?’

그녀는 이토록 쉽게 그가 준 쾌락에 휩쓸린 자신에 대한 짙은 회한으로 물들어 있었다.

“씻겨 줄게.”

보리스가 온통 제 흔적을 뒤집어쓴 리비를 안아 올렸다. 말릴 의지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은 몸이 축 처졌다.

리비는 그렇게 욕조로 옮겨져서는 씻겨지는 내내 다시 그의 손 아래 신음하고야 말았다. 새벽이 밝아 올 때까지, 밤새 그의 손 아래 사랑받고서야 리비는 편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