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봉인된 기억(1)
“리비, 리비.”
뭉개진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눈꺼풀은 무거운 추를 얹어 놓은 듯 무겁기 짝이 없었다. 몇 번을 실패하고 나서야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뜰 수 있었다.
“…….”
흐려진 시야로 보이는 건 물기 가득한 보랏빛 눈동자였다.
“리비, 내 말 들려?”
소리는 좀 더 명확해졌다. 애가 타는 듯, 안타까운 듯, 그는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보리스.”
굳어 버린 혀를 겨우 움직여 그를 불렀다.
“응, 나 여기 있어.”
다정한 온기가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기이한 안도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점점 뚜렷해지는 그의 형체를 보며 리비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바싹 말라 버린 입술에 멈추고 말았다.
“물 마셔.”
리비의 상태를 알아차린 보리스가 재빨리 물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조금씩 흘려 넣어 주는 물을 달게 들이마시며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온몸을 태우던 갈증이 가라앉고 나자 리비의 숨결은 한층 편해졌다.
“어떻게…… 된 거야.”
보리스는 그녀의 곁에 앉아 축 늘어진 손을 붙들고 있었다. 그의 꼴은 엉망이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과 검게 팬 눈자위가 안쓰러워 리비는 문득 손을 올렸다. 그의 얼굴을 향해 가던 손은 허공에 그대로 멈췄다.
“꼬박 하루를 앓았어.”
“하……루?”
어지러운 와중에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그렇다면 또 하루를 잃어버린 셈이구나. 리비는 아득해지는 정신에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나 오래?”
리비는 온 힘을 쥐어짜 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다시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앞으로 넘어지는 몸을 보리스가 재빨리 받아 안았다. 그녀를 안고 등을 토닥이는 손길은 눈물겹게 다정했다. 정말 눈물겹게도.
“아직 움직이면 안 돼.”
왜냐고 물을 기운도 없었다. 지금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건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았다.
울렁거리는 속은 금방이라도 먹은 물을 게워 낼 것 같았고, 머리는 쪼개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팔과 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열이 많이 올랐었어.”
보리스는 그녀를 천천히 자리에 눕혀 주고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었다. 아직 미열이 남은 몸은 그녀가 느끼기에도 된통 앓은 티가 났다.
무겁고 축축 처지는 것은 물론이고 눈앞이 자꾸만 흐려지면서 눈이 감겼다. 몸이 덜 회복됐다는 소리였다. 사흘 밤낮은 죽은 듯 자고 일어나도 될 만큼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지난 며칠간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데다가 도망치면서 만났던 무뢰한들, 그리고 보리스의 날개까지, 정신적인 충격 또한 상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몸이 멀쩡하게 버텨 내는 게 더 용할 만큼.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어, 리비. 내가 옆에 있을게. 아무도 너를 다치지 못하게 할게. 널 위험하게 하는 그 무엇도 다가오지 못하게 할게.”
그의 말에는 한 톨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땀에 젖어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는 손길은 갓 태어난 병아리 대하듯 조심스러웠다.
그런 그를 보며 리비는 한층 더 의아해졌다. 정신없이 앓는 동안 꿈인 듯 환상인 듯 되살아난 기억은 분명히 그녀가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이었다. 그저 꿈을 꾸거나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 이전에 분명히 겪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제야.
“할 말이…….”
“뭐든 말해.”
보리스가 바짝 귀를 갖다 붙였다.
“나, 다 기억났어.”
미약한 소리를 그는 다 알아들은 듯 몸을 굳혔다.
“…….”
“네 날개에 대해.”
어두운 동굴 속, 크고 검은 날개에 파묻혀 울던 소년. 그건 보리스였다.
“나, 네 날개를 봤어. 어렸을 때.”
리비는 힘없는 손을 들어 보리스의 뺨에 얹었다.
“나, 봐. 보리스.”
리비는 외면하려는 눈길을 억지로 붙들어 자신에게 고정시켜 놓았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명백한 회피였다.
“왜 아무 말도 못 해? 내가 왜 기억 못 했지? 이게 너랑 상관있는 거야?”
피하려 하면 할수록 더 미심쩍었다. 분명히 어릴 때 보았던 그의 날개를, 왜 기억하지 못했던 걸까.
아직 몸에 남아 있는 미열 탓에 천장이 뱅뱅 도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뒤이어 들린 보리스의 대답에 다시 눈을 번쩍 떴다.
“내가 네 기억을 지웠으니까.”
“뭐라……고?”
담담히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없었다.
“지우다니. 도대체 언제, 아니 어떻게?”
“너와 헤어지던 날에.”
리비는 혼란해진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와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
그는 여느 날처럼 그녀의 방문 창틀에 걸터앉아 있었다. 잠을 자다 깬 그녀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는 마주 안아 오지 않았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대신 그렇게 말했다.
“리비, 나 멀리 떠날 거야.”
“무슨 말이야, 보리스? 어딜 가는데?”
“아주 멀리. 너와의 약속을 지키러.”
“나도 가면 안 돼?”
“안 돼.”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하는 보리스는 처음이었다. 그의 뒤로 커다란 날개가 솟자 리비는 꾸물꾸물 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따뜻한 깃털의 감촉에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럼 이것도 못 해주겠네?”
“……응.”
그의 눈이 달빛 아래 격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리비, 넌 이걸 기억하면 안 돼.”
“왜?”
리비는 그의 어깨에 기댔던 머리를 들어 올렸다. 평소의 보리스와는 아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아무튼 안 돼. 하지만 다음에 만날 땐 기억해 줘, 내 모든 것을.”
“보리스?”
보리스는 리비를 끌어당겨 이마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 역시도 늘 하던 인사였다. 하지만 그 역시도 평소와는 달랐다.
불이 붙는 듯 뜨거운 감촉에 리비는 그를 확 밀어냈다. 그의 얼굴이 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진 동시에, 그녀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그의 날개는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런 기억이 있었다.
왜 여태까지 잊고 있었던, 아니 어떻게 새카맣게 모르고 있었을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지금 멋대로 내 기억을 지웠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내가 떠난 후에 마을로 날 찾는 사람들이 왔을 거야.”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들은 날 잡으러 왔던 거야.”
“널…… 왜?”
머리부터 발까지 회색 망토를 뒤집어쓰고 온 마을을 뒤집던 남자들이 떠올랐다.
눈만 뻥 뚫린 복면을 쓴 채 마을 곳곳을 누볐다. 보리스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모두 잡혀가 광장에 무릎 꿇려졌다. 그 울음소리, 그 비명.
“당신들이 찾는 소년은 이 안에 없을 텐데?”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을 대신해 나선 건 하이든 백작이었다. 소년을 찾지 못하면 모두를 도륙할 기세로 눈을 번득이던 남자들은 백작의 말에 행동을 멈췄다.
“그 아이는 며칠 전에 마을을 떠났소. 연고도 없는 떠돌이 아이였지. 마을 사람들은 불쌍해서 그 아이를 먹이고 재워 준 것뿐이고. 그것에 대한 죄를 물을 거라면 나부터 죽이고, 왕실에 보고해야 할 거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리비는 그날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보리스, 그를 찾는 수상한 사람들.
리비는 이불을 더 꽉 그러쥐었다. 이불의 감촉이 이상하리만치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느낌에 슬쩍 이불을 들춰 보았다.
“……보리스.”
그녀는 이불 안을 들여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응?”
“나 왜 또 벗고 있는 거야?”
“내가 벗겼으니까.”
그게 뭐 어떠냐는 듯한 얼굴로 그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땀을 많이 흘려서 그대로 입고 있으면 안 좋을 것 같았어.”
“…….”
리비는 아무 말 없이 한껏 손을 뻗어 넓게 펼쳐진 이불을 온몸에 둘둘 말았다.
이불을 잔뜩 끌어안은 채 엉금엉금 몸을 뒤로 물리자 차가운 벽이 등에 닿았다. 더는 물러날 곳도 없었다.
“리비?”
애벌레처럼 꾸물거리는 그녀를 보리스는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리비는 홱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용을 써봤자 그에게서 이 거리 이상 멀어지기는 힘들다.
그것이 그녀를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의 품에 안겨 이 성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녀는 그에게 완벽히 가둬진 존재였다.
이불 밖으로 삐죽하니 나온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보리스의 눈이 귀신같이 그 움직임을 좇았다. 리비는 황급히 이불 안으로 발을 쏙 넣어 버렸다.
“내가 널 해칠까 봐?”
그는 슬픈 눈으로 물었다.
“네 입으로 말했잖아. 날, 가질 거라고.”
어둡게 내려앉던 그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한다. 그는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다. 그녀가 정신을 잃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내가 널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내가 숲에서 그, 그런 일을 당할 뻔한 것도, 애초에 네가 날 납치하지만 않았더라면…….”
격하게 터져 나오는 원망을 감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목소리를 높이고 나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 텅텅 빈 속이 메스꺼웠다. 그녀는 주먹을 꼭 쥔 채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랬다면, 넌 레제트 공작 부인이 되었겠지. 네가 말한 것처럼.”
음울하게 속삭이는 소리는 담담했으나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 아픈 티가 역력했다.
그리고 그 칼을 휘두른 건 다름 아닌 리비, 그녀였다. 그 순간 불쑥 솟아오른 미안함에 리비는 당황하고 말았다.
‘미안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보리스야.’
그녀는 고개를 치켜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가 커다란 몸을 일으켜 숙이기만 해도 자신이 벌려 놓은 거리를 단숨에 좁힐 수 있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까마귀에게 낚아채인 흰 장미 한 송이.
그것이 리비였다.
구명줄이라도 되듯 움켜쥔 이불 따위,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힘으로든 무엇으로든, 그녀를 굴복시키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잔뜩 겁에 질린 눈동자를 처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커다랗고 위협적이지만 자신에게는 무해한 짐승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실상 보리스는 자신의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게 한다 하더라도 그 외의 상황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리고 그를 더 이상 설득할 수도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만든 건 다름 아닌 리비, 본인이었다. 야생의 새를 길들이듯이 그렇게 보리스를 길들이고 말았다.
도망칠 길 또한 사실상 모두 차단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걸어서든, 뛰어서든, 어딘가에 숨어서 나가든, 이제는 아무런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어차피 그는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검푸른 하늘을 가르며 검고 커다란 날개를 펼친 채 자신에게로 정확히 수직 낙하 하던 보리스의 모습이 기억에 생생했다.
‘어딜 가든 잡히고 말 거야.’
위에서 내려다보는 존재를 이길 수는 없다. 알고 보니 이 성의 철통 방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찌를 듯 높이 세워진 첨탑도, 단단하고 드높은 성벽과 깊이 파인 해자도 그의 등 뒤에 솟은 날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바보였어.”
그런 것도 모른 채 열심히 달아날 궁리를 하다니. 정말로 어리석었다.
“리비?”
미친 여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에 보리스가 가만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난 처음부터 네 손아귀에 있었던 거야, 그렇지?”
“…….”
“내가 달아날 방법 같은 건, 없는 거야, 안 그래?”
“…….”
“네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 넌 위에서 나를 내려다볼 수 있으니까.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너는 날 쫓아올 수 있어. 어디에 숨든 소용없을 거고. 맞지?”
보리스는 한참이나 리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아.”
그 대답에 리비는 발작하듯 웃음이 터졌다. 한참이나 웃던 웃음이 뚝 끊기자 방 안에는 소름 끼치는 정적만이 남았다.
“네가 날 겁탈해도, 난 저항할 수 없겠지.”
그 말에 보리스의 눈빛이 바뀌었다.
“맘대로 해.”
“……뭘?”
그가 의아한 시선으로 묻자 리비는 몸을 둘러싼 이불자락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스스로 꽁꽁 둘렀던 이불은 작은 손 아래 쉽사리 풀어헤쳐졌다. 열린 이불 사이로 뽀얀 가슴이 언뜻 보이자, 보리스는 미간을 구기며 리비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뭐 하는 거야?”
“할 거라며, 나랑.”
“…….”
“가질 거라며, 나를.”
크게 뜨인 보랏빛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니 가지면 되잖아.”
리비가 이불을 잡아 뜯자 크게 벌어진 이불 사이로 둥그렇게 솟은 둔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러지 마.”
그가 쥔 손을 매몰차게 뿌리친 리비가 바닥으로 내려선 뒤 몸에 둘러져 있던 이불을 거칠게 끌어 내렸다.
스륵.
부드러운 천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이불은 바닥으로 떨어져 리비의 발치에 꽃잎처럼 펼쳐져 있었고, 리비는 이제 막 꽃 속에서 태어난 요정처럼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엷은 크림빛 머리채가 엉덩이께에서 찰랑거렸다. 앞으로 쏟아진 머리카락 몇 올만이 그녀의 몸을 가리는 전부였다. 굴곡진 허리와 엉덩이, 그 아래 뻗은 가느다란 다리에 이르기까지, 리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낸 채 서 있었다.
차가운 공기에 닿은 팔과 다리에는 살짝 소름이 돋아 있었다. 하지만 추위 따윈 거의 느껴지지도 않았다.
보리스의 뜨거운 시선에 닿아 있었기 때문에.
그는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 같은 눈으로 리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안에 든 것이 욕정이라고 확신한 리비는 재차 입을 열었다.
“네가 원하던 거잖아. 뭘 망설여?”
“…….”
“네가 하려던 대로, 나를 가져. 네 것임을 표시해. 그러면 내가 도망 따위 쳐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을 테니까. 그걸 노리는 거잖아?”
리비는 싸늘한 냉기를 뿜으며 조소했다. 난생처음 다 큰 남자 앞에서 홀딱 벗은 채 서 있지만 어쩐지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의식을 잃고 있을 때 그가 몇 번을 봤든, 이렇게 맨 정신으로 스스로 몸을 드러내고 그의 앞에 선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맨 정신일 때 그에게 나신을 보여 준 게 처음은 또 아니었다.
무더운 여름철, 계곡에서 몸을 씻겠다며 보리스에게 망을 보게 한 적이 있으니까.
한참을 물속에서 놀다가 보리스 뒤편에 놓아둔 옷을 집으러 왔을 때, 이끼가 낀 바위에서 그대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내내 귓불을 붉힌 채 돌아앉아 있던 보리스는 찢어져라 내지르는 비명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다가와 리비를 받아 안았다. 그리고 둘이 같이 물에 빠지고야 말았다.
그때와 지금의 보리스와 자신은 너무도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제 그렇게 허물없이 깔깔거리며 놀 수도 없고, 맨몸을 내보이고도 아무렇지 않게 보리스의 입단속을 하던 날들은 지나 버렸다. 모든 게 끝났다. 이제 다가올 미래에는 온통 어둠만이 가득하다.
보리스는 아직 과거 속에 사는 것 같았다. 그때와 지금의 두 사람은 다르다는 걸, 리비는 깨우쳐 주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막상 보리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그녀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겨우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거리를 좁혀 오자 애써 외면하려 했던 두려움이 살갗을 뚫고 튀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설마, 진짜로.
도발한 것은 자신이니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대도 할 말은 없다. 좀 전까지 뾰족하게 쏘아붙이던 기색은 간데없이 연녹빛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크게 흔들렸다.
보리스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리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길에 놀란 리비가 눈을 꼭 내리감은 채 몸을 웅크렸다.
아마도 난폭하게 자신을 가지려 하겠지. 이제 허락까지 한 마당에 그가 망설일 이유 같은 건 없다. 차라리 짓밟히고 나면 그를 미워하는 게, 어릴 적 보리스에 대한 연민을 씻어 내는 게 편할지도 모른다.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였다.
펄럭.
부드러운 천이 몸 위로 내려앉았다.
“…….”
보리스는 침대 시트로 리비의 몸을 푹 감싸 안았다. 파르르 떨리는 어깨에 파묻은 입술을 열어 말했다.
“춥잖아, 리비.”
천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그의 몸은 뜨거웠다. 마치 용암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마치 깊은 낙인을 찍듯 입술을 어깨 위로 세게 문질렀다.
“이러지 마.”
커다랗고 단단한 몸에 갇힌 채로, 리비는 얕게 신음했다. 안도의 한숨인 동시에 야릇한 흥분감이 뒤섞인 것이기도 했다.
리비는 별안간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보리스는 하얀 침대 시트에 둘둘 말린 리비를 단숨에 안아 올려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두 사람분의 무게에 맞춰 침대는 아까보다 좀 더 깊이 꺼졌다.
리비를 내려놓고도 보리스는 다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대신 리비의 위에서 오래도록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아래에 누운 채로 그를 올려다보는 일은 이제 제법 익숙하다. 바로 이 구도가 그와 자신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만 같아서 리비는 더욱 기분이 이상했다.
그에게 반항할 수 없다. 자신은 꼼짝없이 사로잡혀 새장에 던져 넣어진 새나 다름없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이 어때?”
“…….”
“아주 끝내줄 거야, 그렇지?”
그는 하늘을 날고, 자신은 날지 못한다. 그 극명한 차이만으로 힘의 관계는 뚜렷해졌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알던 보리스가 아니다.
보리스가 어떻게 저 날개를 갖게 된 건지, 언제부터였는지, 온갖 물음들이 머릿속을 채워 갔지만 지금은 그것을 물어볼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다 듣는다 하더라도 과연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도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렇지 않아.”
보리스는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내가 정말 걱정된다면 납치 따윈 하지 말았어야지.”
몸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데 정말 입만 살았다. 입에서 가시가 돋아난 것만 같았다. 입을 열자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독한 말들은 자꾸만 약해지는 마음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크고 검은 날개.
그것을 숨기고서 살아온 시간들이 결코 쉽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에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된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울먹울먹한 저 보랏빛 눈을 보고 있자면. 게다가 저렇게 걱정스럽게 말하는 걸 듣고 있자면.
“내내 앓았어. 갑자기 움직이면 다시 쓰러지고 말 거야. 먹지도 않고,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보리스의 웅얼거리는 말에 리비는 한껏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상관이야.”
“리비.”
“나는 그렇게 약해 빠지지 않았어.”
리비는 그렇게 말하곤 홱 돌아누웠다. 그러기가 무섭게 입에서는 콜록, 밭은기침이 새어 나왔다. 손을 들어 입을 가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콜록, 콜록.”
기침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참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큰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넌 몸이 약하잖아.”
사실 리비는 자주 아팠다. 타고난 건강 체질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가만히 있기를 원체 싫어하는 성격이라 산이며 들로 쏘다니다가 보리스에게 종종 업혀 돌아오고는 했다.
비를 맞으면 며칠은 골골거리느라 앓아눕기 일쑤면서도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않아서 하이든 백작의 애를 태우고는 했다. 쓰다며 약도 잘 먹지 않으려 했다.
그럴 때마다 리비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약을 먹인 건 보리스였다. 어떤 날은 예쁜 돌멩이, 또 어떤 날은 알록달록한 새의 깃털을 가져와서 약을 먹어야만 주기로 했다.
“내 몸이 약하든 말든.”
보리스가 끄집어낸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둘 마음속에 밀려들 때마다 리비는 가슴속 어딘가가 간지러워졌다.
“내가 무서운 거 알아.”
시선을 회피하려 한껏 돌린 얼굴 위로 목소리가 나직하게 내려앉았다.
“…….”
“징그럽고, 해괴하고, 괴물로 여길 거라는 것도…….”
시트를 말아 쥔 리비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가 말할 때마다 자신도 모를 어떤 마음이 자꾸만 불쑥 솟아나려 했다. 시트라도 말아 쥐지 않으면 그 손을 뻗어 금방이라도 그를 와락 끌어안을 것만 같았다.
그가 몸을 숙여 그 안에 리비를 가뒀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감옥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둘의 몸이 꼭 맞춘 듯 맞물렸고, 리비는 묵직한 압력에 숨이 막히면서도 한편으로 기이한 안정감에 휩싸였다.
“그래도 나는 어쩔 수가 없어.”
얼굴에 닿은 보리스의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리비는 시트를 감아쥔 손을 풀어 까마귀 날개 같은 머리칼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검은색 머리칼은 비단실처럼 부드러웠고, 좋은 향기가 풍겼다.
“리비. 나는 너를 놓을 수가 없어.”
물기에 젖은 목소리에 리비는 푹 젖어 드는 것 같았다.
“제발…….”
간절한 목소리에 그녀는 결국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또다시 마주친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울지 말랬지.”
“미안.”
“사과도 하지 마. 받지 않을 거니까.”
독하게 쏟아 낸 말에도 보리스는 물러나지 않았다. 대체 어디까지, 얼마나 더 독하게 해야만 그가 자신에게 질릴까.
“날 용서하지 않아도 돼.”
“…….”
“내 곁에만 있어.”
“싫어.”
리비는 고집스레 대답했다.
“네가 아무리 이래 봐야 달라지는 건 없어. 날 보내 주는 게 우리 모두가 살길이란 뜻이야.”
또박또박 내뱉는 말에도 그는 얼굴에 아무런 변화 없이 리비를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보리스의 입가에 물이 번져 가는 듯 달콤한 미소가 퍼졌다.
왜, 왜 그러는데 또.
그 기이한 표정 변화에 리비는 또다시 불길해졌다.
“왜…… 웃어?”
그가 그렇게 웃는 건 불길함의 신호였다. 왜 저러지, 어째서 저러지. 뭐 때문에 저러는 건데?
그녀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렸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조심조심, 그와 눈을 맞춘 채 뒤로 물러났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째 또 점점 더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슬쩍 초점이 나간 것도 같았다.
왜 저래, 왜.
이제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의 어딘가가 핑, 하고 도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그러나 대체 그게 어느 지점인지, 무엇이 그를 자극하는 건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위험하다, 위험해.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경고로 가득 차 있었다.
그를 만난 이후 지금까지 자신은 매번 거절의 말을 뱉어 왔다. 조금의 희망도 키울 수 없을 만큼 냉정하고 매몰차게 그를 거절해 왔는데.
‘왜 또 눈이 빛나는 거야.’
그 빛나는 눈이라는 게 별과 달처럼 반짝인다면 모를까. 그의 눈에는 좀 다른 구석이 있었다.
보리스의 눈은 마치 산속 짐승의 눈처럼 형형한 빛을 품고 있었다. 오랫동안 굶주렸다가 발견한 먹잇감에 눈이 살짝 돈 상태. 온몸의 털이 빳빳하게 곧추섬과 동시에 모든 신경이 오직 눈앞의 상대에게만 집중된 그런 상태.
보리스는 지금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는 그런 짐승의 눈에 띈 토끼, 아니 사슴, 아니 그도 아닌 다람쥐나 뭐 그런 것. 아무튼 그에게는 도무지 저항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열심히 몸을 물리고 또 물렸다. 애벌레처럼 꾸물꾸물, 엉덩이를 실룩이며 뒤로 피하고 또 피했다.
하지만 침대에서 열심히 몸을 물려 봤자였다.
턱.
날렵한 뱀처럼 뻗어 온 손이 단번에 가느다란 허리를 휘감아 자신이 누운 쪽으로 쑥 잡아당겼다.
단단한 팔에 갇힌 몸은 순식간에 보리스와 가까이 붙어 버렸다. 마치 몸 전체가 무기와도 같은, 도저히 저항할 생각 따위는 들지 않게 하는 그런 몸.
하지만 뜨거웠다.
부드럽고 말캉한 몸과 달리, 남자의 몸은 절절 끓어오르는 솥처럼 뜨거웠다. 리비는 마치 거대한 거푸집 안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녹아내려서 그가 만들어 내는 대로, 만지고 쓸리고, 움켜쥐는 대로 모양이 만들어지는 그런 찰흙 덩어리처럼.
리비는 제대로 숨도 못 쉬고서 그의 품 안에 그렇게 갇혀 있었다. 아까보다는 조금 부드럽게 풀린 눈동자가 리비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그의 입가가 조금 더 벌어지더니 마침내 소리가 흘러나왔다.
“날 걱정해 주는 거야?”
“……뭐?”
“넌 언제나 날 걱정했잖아. 지금처럼.”
“지금처럼?”
“응, 지금처럼.”
“내가 언제?”
“가지 마, 보리스. 거긴 뱀이 있어. 남자애들이랑 싸우지 마, 보리스. 걔들은 너보다 덩치가 크단 말이야. 나무에 올라가지 마, 보리스. 거기서 떨어지면…….”
“아악! 그만, 그만해! 그마안!”
리비가 만류해도 보리스의 흉내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가 한두 마디씩 꺼낼 때마다 잊고 있던 예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고, 리비는 그만큼 더 죽고 싶었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리비는 그의 품 안에서 몸부림쳤다. 퉁퉁, 그의 가슴을 내리쳐 봐야 자기 손만 아플 뿐이었다. 마치 무쇠로 형태를 잡아 만든 동상처럼 그는 단단하고 또 단단했다.
“나는 다 기억하고 있어, 리비.”
그는 또 맛 간 미소를 짓더니 리비의 목덜미에 대고서 부드럽게 코를 문질렀다. 잘 뻗은 콧대가 목 언저리의 여린 살을 문지르자 이상한 감각이 샘솟았다. 리비는 그 감각에서 벗어나고자 몸을 뒤틀었다.
“아무튼 그만해!”
보리스의 말을 듣자마자 소름이 돋은 건 모두 자신이 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어제 일처럼 모두 하나하나 기억이 났다.
보리스를 만난 이래로 그녀는 끊임없이 그에게 잔소리를 퍼부어 대곤 했다.
그는 또래의 아이들과는 달리 몰라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그동안 목숨을 잃지 않은 게 이상할 만큼, 온갖 위험한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시도하고는 했다.
이를테면 풀밭을 가로질러 가는 뱀을 맨손으로 움켜쥐려 한다거나, 높은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내리려 했다. 그의 곱상한 생김새를 싫어하는 마을 남자아이들이 리비와 자기에게 시비를 걸자 주저 없이 덤벼들었다.
“잠깐만.”
또다시 떠오른 과거의 기억에 리비는 그를 마구 내리치던 손을 멈췄다.
보리스를 데리고 다니며 마을 생활을 하나하나 일러 주던 리비를 마을 남자아이들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얼굴은 허여멀건 데다가 눈까지 마족의 색이라는 보랏빛을 띤 곱상한 남자아이이니 그럴 만도 했다.
저들이 보기엔 비실거리고 영 힘도 없어 보이는 남자애를 마을의 소녀들은 매우 좋아했으니까. 그걸 보던 마을 남자아이들은 내내 고깝게 여기다가 어느 날 리비의 손을 움켜쥐었다.
“저런 놈하고 어울리면 안 돼, 리비. 불길한 놈이야.”
“이거 놔!”
거칠게 팔을 잡아끄는 남자애들과 몸싸움을 하고 있을 때였다.
퍽.
개중 가장 덩치가 큰 남자아이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주먹을 날린 이는 보리스였다. 그 후에 몇 명이 그에게 덤볐으나 모두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때의 그 눈빛. 보리스는 그때 잠시 어딘가 심히 초점이 나간 눈이었다.
“이 괴물!”
얻어맞은 남자아이 중 하나가 외쳤다. 그렇게 외치며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정확히 며칠 후에 모두 기절한 채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는 했다. 하나같이 바지에 오줌을 싸서 바지는 질척질척 젖어 있었다.
깨어난 그들은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울어 댔다. 다 숲속에 사는 괴물 까마귀의 짓이라며 다들 그 일을 두고 두려워했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마을 사람들은 자경단을 구성하여 밤마다 보초를 서고 마을의 경비를 강화했다.
그렇게 긴장 속에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마을 사람들의 관심은 시들해졌고, 자경단도 다시 해이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남자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고 거짓말을 둘러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당시 리비도 그 일이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보리스를 괴롭혔고 자신을 윽박질렀으니 마을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것쯤이야 고소하다고 여겼다.
그랬는데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너, 그, 그 남자애들을 혼내 주고 기억을 지웠지, 그렇지?”
리비는 보리스를 붙들고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억이 안 나.”
그의 목소리가 웅얼웅얼 흩어졌다.
“안 나긴 뭐가 안 나!”
꽥 내지른 소리에도 보리스는 눈가를 곱게 접으며 웃을 뿐이었다. 길고 굵직한 손가락이 리비의 머리칼을 한 움큼 집더니 코를 박았다.
“여기서 좋은 냄새가 나.”
“…….”
“여기도, 여기도.”
그의 입술이 스치는 자리마다 열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간지럽고, 뜨거웠다.
“넌 언제나 날 걱정해, 리비.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머리카락에 코를 박은 채 냄새를 맡던 그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런 적…… 없어, 나는.”
“있어, 지금도. 내가 다칠까 봐 걱정하잖아.”
“난 우리 가족을 걱정할 뿐이야.”
“모두 안전하게 있으니 걱정 마.”
그 어떤 독한 말을 해도 그는 마음을 바꿔 먹을 것 같지 않았다. 놀라운 회복력이자 재생력이었다.
“지금은 안전해도 레제트 공작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다 죽은 목숨이라고. 왕이 가만두지 않을 거라니까?”
리비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쿵쿵 내리찧으며 말했다.
“기사들을 언제까지 구금할 거야?”
“궁금해?”
그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리비는 순간 불길한 마음에 보리스에게 물었다.
“설마…… 죽이려는 건 아니지?”
아닐 거다, 아닐 테지. 설마하니. 그럴 리가 없을 거다. 아무리 그래도 왕과 맞먹는 권력을 가진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을. 겁도 없이.
“응? 아니지? 그들을 죽이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끔찍한 일이다. 에드라크령에 병사들을 보내 단숨에 모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귀찮기는 해.”
그는 날파리가 날아드는 걸 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죽, 죽이면 안 돼, 응? 평화로운 방법으로…….”
“평화롭게, 뭘?”
그의 입가가 다시 부드럽게 늘어졌다.
‘그러게.’
“응, 리비?”
‘평화롭게 뭘 해야 하지?’
“평화롭게 목을 따줄까? 그러면 공작한테 아무 말도 전하지 못할 텐데.”
“뭘 따? 뭔 말을 해?”
“잘린 목은 말 못 해.”
보리스는 태연하게 그녀의 말에 담긴 오류를 잡아 주었다. 리비는 입을 딱 다문 채 보리스의 얼굴만 살폈다.
“그들을…… 죽일 거야?”
“싫어?”
“싫다기보다는…… 안 돼, 안 돼, 보리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기사들, 기사들은 죽이지 마, 응? 부탁이야.”
“부탁……?”
그의 눈에 희번덕 광채가 돌았다.
“응, 부탁해. 죽이지 마. 불쌍…… 불쌍하잖아, 응?”
그의 반쯤은 맛 간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그저 해본 말이 아닌 듯싶었다. 애초에 끌고 올 때도 기사로서의 예우 따위는 없었다.
저들을 죽여도 문제고, 살려 두었을 때도 문제다. 기사들을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감옥에 가두어 두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레제트 공작이 알게 된다면……. 그 후환이 두려웠다.
“저들이 불쌍해, 리비?”
그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이 섞여 있었다. 리비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을 살려 둬야 한다는 건 사실 후환이 두려워서지 그들이 불쌍해서는 아니니까.
특히 아버지에게 한 짓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조금은 그래.”
하지만 불쌍하다고 해야 그들을 살려 줄 기세였다. 리비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대답했다.
“네가 원한다면 살려는 둘게.”
보리스의 입가가 부드러이 풀어졌다.
“정말?”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 거야.”
“그럼 날 보내 줘.”
리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
당연히 그에게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거짓말쟁이. 뭐든 다 들어준다며.”
“그건 빼고.”
“됐어, 그럼.”
“리비.”
“왜.”
“나도 부탁해도 돼?”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는 리비가 제 눈에 약하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뭘?”
“안아 줘.”
그는 몸을 바싹 붙여 오며 말했다.
“…….”
“응?”
그는 다시 한번 졸랐고, 리비는 자기 몸을 뱀처럼 휘감은 그의 팔을 보면서 어이없어했다.
이미 자기를 가두듯이 안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또 안아 달라니.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저 눈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싫다는 말이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이것도 병이다.
대체 왜 저 얼굴에 약한 것인가.
결혼식에서 납치한 것으로 모자라 도망친 자신을 잡아 왔고,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감금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또…… 그가 자신에게 저지른 잘못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왜.
보리스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간은 매우 느릿하게 흘러만 갔다.
리비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보리스의 목에 팔을 둘렀다.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몸이 바짝 달라붙었다.
자신의 품에 한 번에 안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보리스는 몸을 숙여 그녀의 품에 안겨들었다. 리비는 가만히 그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더 깊이 그녀에게로 파고들었다.
“리비, 리비…….”
보리스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러 댔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그 한 단어밖에 배우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온 세상에 존재하는 단어라고는 딱 그녀 하나뿐인 것처럼 그렇게.
리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붙여 오는 보리스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보리스가 몸을 일으켜 위쪽에서 그녀를 압박했다.
묵직한 무게에 짓눌렸으나 그녀는 보리스를 뿌리칠 수 없었다. 오히려 깊이 끌어안은 뒤 그의 머리칼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쓸어 넘기기를 반복했다.
이상하게도 그 행위는 리비에게도 기이한 안도감을 안겨 주었다.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칼을 쓸어 넘길 때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머리칼의 감촉을 느낄 때마다 그녀의 마음도 같이 보듬어지는 것 같았다.
가슴 위에 얹어진 그의 얼굴 탓에 심장 부근이 뜨거웠다. 보리스가 내쉬는 숨에 온몸이 덥혀지고, 좀 전까지 온몸에 차올랐던 한기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 자리를 메운 건 아늑한 열기였다.
“보리스.”
“…….”
“네가 이런 건…… 그래, 이해할 수 있어. 어릴 때, 너에게 잘해 준 건 나뿐이었으니까. 기대고, 의지하고. 그걸…… 사……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어.”
리비는 침착하게 그를 타이르려 애썼다. 유순한 양처럼 안겨 있으니 어쩌면 자신의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
“하지만 이건 옳지 못한 짓이야.”
그에게선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긍정일까, 부정일까. 대신 몸을 그러안은 팔에 힘만 더해졌다.
“그러니까 우리, 이러지 말자.”
리비는 가까스로 마지막 말을 뱉었다. 그러고도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문득 축축한 것이 손끝에 만져졌다. 손가락을 따라 흐르는 건 분명히 눈물이었다.
“보리스?”
리비는 손가락으로 보리스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손끝에 방울져 흐르는 눈물이 손바닥까지 흘러 내려와 맺혔다.
보리스는 몸을 일으켜 다시 리비를 내려다보았다. 툭툭 방울져 떨어지는 눈물이 리비의 눈가에 맺혔다.
그녀는 보리스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맺힌 건 불안감, 두려움, 그리고 환희였다. 리비는 그것을 올곧이 읽어 낼 수 있었다.
자신을 뿌리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에 그는 그토록 기뻐하고 있었다. 묻지 않아도, 굳이 말로 떠들지 않아도 리비는 알 것만 같았다.
한참 동안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길을 음미하던 보리스가 자신의 눈가에 닿은 리비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깊숙이 입술을 내리눌렀다.
뜨거운 숨과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지자 리비는 흠칫거리며 몸을 떨었다.
처음에 살결을 가볍게 훑던 접촉은 어느새 짙은 애무로 돌변해 있었다. 뜨겁고 축축한 혀가 손바닥 안쪽을 핥기 시작하다가 살짝살짝 깨물기를 반복했다.
그저 손일 뿐인데.
리비는 마치 달콤한 사탕이라도 빨아 먹듯 손을 핥아 대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보리스는 열심히 손바닥에 입술을 문지르면서도 시선은 줄곧 리비를 향해 있었다.
아마 산 채로 잡아먹히는 순간 마주한 맹수의 눈빛 같아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벗어날 수 없다.
어쩐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보리스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손목 안쪽을 입술로 훑어 내렸다. 그 자리마다 불이 굴러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읏…….”
손에서 전해진 야릇한 감각은 점점 더 농도가 짙어졌다. 손목 안쪽까지 내려온 입술이 팔을 따라 점점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옷은 하나도 걸치지 않았고, 몸에 걸친 거라고는 하얀 침대 시트가 전부였다.
“보리스?”
보리스의 눈꼬리를 따라 흘러내린 눈물이 리비의 가슴골 사이에 투둑, 떨어졌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보리스와 잠시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안 돼, 흣!”
보리스는 순식간에 입술을 내려 리비의 가슴 사이를 핥아 대기 시작했다. 침대 시트를 꼭 쥐고 있던 손의 힘은 어느새 풀린 지 오래였다. 헐거워진 틈을 파고든 입술이 집요할 정도로 하얀 살결을 물고 빨아 댔다.
어느덧 여린 살결 위에는 붉은 꽃잎이 하나둘 자리를 잡아 갔고, 자기가 만들어 낸 흔적을 본 보리스의 눈이 짙은 애욕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서둘러 헐거워진 시트를 잡아당겨 봤지만 이내 손은 커다란 손아귀에 잡히고 말았다.
“보리스!”
양손을 모두 잡힌 채로 리비는 비명을 질렀다.
“예뻐, 리비.”
시트가 벗겨진 탓에 벗은 상체가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하얗게 솟은 둔덕 위, 분홍빛으로 물든 정점을 향해 움직이는 시선을 따라 리비의 눈도 덩달아 움직였다.
“무, 무슨…….”
가쁘게 숨을 내쉴 때마다 그의 눈빛도 점점 더 짙어졌다. 이미 자신의 말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내게 허락해, 리비.”
그는 리비를 똑바로 바라본 채 속삭였다. 그것은 가장 강압적인 애원이었고, 가장 순종적인 명령이었다.
“보, 보리스.”
리비는 다른 의미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응? 허락해 줘.”
가슴 새로 내려앉은 숨결이 뜨거웠다. 아마 자신이 버터였다면 그대로 흐물흐물 녹아내려 지금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터다.
그러나 선뜻 답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를 막아야 하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찰나의 망설임 사이, 보리스의 입술이 완연히 드러난 둔덕 위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하얗고 말캉한 살을 핥고 빨다가 뾰족하게 솟은 정점에 이르러 강하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리비…….”
“보리스으…… 안…….”
츱, 야하게 빨아들이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그 소리만으로도 리비는 통째로 삼켜지는 것만 같았다.
보리스는 그녀를 다 녹여 먹기라도 할 것처럼 부드럽게 핥다가, 강하게 빨아들이기를 반복하며 리비의 몸을 녹진녹진하게 만들었다.
멈춰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머릿속에선 온통 그 생각뿐이었지만 몸짓은 달랐다. 어느새 자유로워진 손으로 그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자신이 누워 있는 쪽으로 한껏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보리스, 보리스…….”
애달픈 음성에 잠시 멈칫하던 보리스의 혀와 입술이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허리까지 내려간 시트는 하얀 나신을 절반쯤 다 드러내 놓고 있었고, 벗겨진 곳마다 보리스의 숨결이 차례대로 닿았다.
“흣.”
가슴골을 지나 명치, 배꼽 아래까지 내려간 입술이 뜨거운 숨을 뿜어내자 리비는 작살에 맞은 것처럼 파드닥거렸다. 녹여 버릴 것 같은 시선 속에서 리비는 어쩐지 망설였다.
더 이상은 안 돼.
머릿속에서는 강한 경고가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서도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전신이 고스란히 보였다.
“조금만, 조금만…….”
그 ‘조금만’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굉장히 위험한 선을 넘나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 안 돼.”
골반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시트가 마저 벗겨지려 했다. 리비는 그의 팔을 붙든 채로 울먹이며 말했다.
“안 돼, 보리스.”
“……좋아하잖아.”
그는 그답지 않게 예리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좀 전의 울며 애원하던 것과는 또 다른, 명백한 정복자의 눈빛이었다.
“리비, 기분 좋게 해줄게.”
“아니야, 그런 게…….”
리비는 울고 싶었다. 배 속이 자꾸만 간질거리고, 거품이 피어오르듯 부글거리며 안쪽을 죄어 왔다.
뭔가 지독하게 필요한 순간이었다. 며칠간을 앓아서 힘이 없는 몸뚱이임에도 지금 이 순간 말로 표현 못 할 무언가를 강력하게 원하고 있었다.
“고개만 끄덕여.”
“안 돼, 안…….”
머릿속이 천둥이 치듯 쿵쿵 울려 댔다. 어르고 달래는 목소리 너머 강렬하게 깔린 위압감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보리스, 보리스.”
리비는 애타게 그를 불렀다. 그래 봤자 들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뭔가에 제대로 홀린 사람처럼 리비에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걸친 게 기껏해야 얇은 시트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이제야 후회되기 시작했다. 기세 좋게 이불을 내던지고 그에게 자신을 가지라 허세 떨던 게 우습게 느껴졌다.
“아, 안 돼.”
리비는 마지막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트를 죽어라 틀어쥐었다. 꽉 움켜쥔 손등 위로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나자 보리스는 그것을 손끝으로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정말 안 돼?”
습하고 끈끈한 목소리였다. 한번 잡히면 빠져나갈 곳 없을 것 같은 그런 눈빛, 손길.
그리고 리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손등 위를 지분거리던 손가락이 툭, 툭, 손가락을 벌려 냈다.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야무지게 움켜쥐고 있던 손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헐거워진 천을 그가 천천히 잡아당겼다. 시트가 스륵, 점점 아래로 내려가며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시트는 가슴 끝에 걸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바짝 곤두선 살점이 얇은 천 끝에 걸린 탓이었다. 가슴이 가쁘게 위아래로 오르내릴 때마다 천도 조금씩 더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에 잡아채인 천이 소리 없이 밀려 내려가 버렸다.
처음에는 가슴이, 그리고 다음은 매끈한 두 다리와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엉덩이, 그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은 비밀스러운 곳까지. 순식간에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하얗게 드러난 살갗 위로 촛불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어룽거렸다. 그 불빛과 그림자를 따라 보랏빛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리비는 손을 뻗어 드러난 몸을 가리려 애썼다. 하지만 저지하는 손이 더 빨랐다.
“보리스!”
양 손목이 단단한 손아귀에 붙들렸다. 결국 온전히 모든 것을 그의 시선 아래 내주어야만 했다.
하나하나 인을 새기듯 천천히 몸을 훑어내리는 눈길에 리비는 꼼짝도 못 한 채 그의 시선을 받아 내야만 했다.
“시, 싫어…….”
리비는 천의 끄트머리만 간신히 움켜쥔 채로 울먹거렸다. 그에게 모든 것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것을 자각하자 온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저 위험스러운 눈 아래, 모든 것을 온전히 드러내 놓은 채로 리비는 떨고 또 떨었다.
“리비, 아름다워.”
그는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끝으로 훔쳐 내며 그는 다시 속삭였다.
그는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몸을 찬찬히 훑어내렸다. 알맞게 솟아오른 둔덕과 갈라진 다리 사이까지.
그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 낸 리비가 몸을 이리저리 꼬아 댔다. 손을 붙잡혀서 가릴 수도 없고, 그 시선을 외면할 수도 없어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그는 꽉 움켜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풀어 놓았다. 손은 다시 자유로워졌지만 어쩐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보, 보리스.”
무서웠다. 갑자기 돌변해서 자신을 내리누른 그가. 그리고 저항할 의지조차 사라진 자신이.
“조금만, 리비.”
뭘 조금만 한다는 걸까. 생각할 틈 없이 그가 몸을 숙여 왔다.
게걸스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한참이나 안쪽을 유린하던 혀가 빠져나갔다. 이젠 끝난 것이겠지, 한 순간 그의 입술이 목선을 타고 내려갔다.
쇄골 부근까지 내려간 입술이 살갗 위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슬쩍 벌린 입술 새로 새빨간 혀가 날름거렸다. 날름거리는 혀가 붉고 도톰한 살점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리비는 새카만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기도 아니고, 아니 아기를 낳은 적도 없는데. 그곳을 다 큰 남자가, 그것도 보리스가 빨고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떼어 내려 하면 할수록.
“끝까지 가진 않을게.”
그가 다시 한번 명령, 아니 애원했다.
“괴롭잖아.”
그는 마치 리비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나간 사람처럼 말했다.
“응?”
그는 재차 물었고, 리비는 혼란한 머리로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해 보려 애썼다. 이 기묘한 감각을,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괴롭고도 아찔한 그 무언가를. 그녀가 알지 못했던,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격정적인 순간을.
“조금만, 조금만…….”
그녀는 확언받듯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남자의 입가가 씨익, 늘어졌다. 소년 같기도, 그녀보다 한참 어른인 것 같기도 한 그 얼굴에 리비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아!”
보리스는 순식간에 그녀의 희고 가는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아, 응, 읏…….”
깊숙이 파고든 혀가 집요하게 안쪽의 여린 살점을 찾아내어 빨기 시작하자 리비는 반쯤 미치광이가 되어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강인한 두 팔에 움쭉달싹 못 하게 몸이 묶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츱츱, 아까 가슴을 빨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적나라하게 빨아들이는 소리에 흥분감이 한층 더 고조되었다.
“보리스. 으으…….”
리비는 침대 시트를 잡아 비틀며 신음을 내질렀다. 그럼에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더 집요하게 민감한 살점을 빨아들이고 핥기를 반복했다.
리비는 한계까지 몸을 뒤틀다가 결국 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말았다.
“…….”
보리스는 잠시 놀란 듯 하던 짓을 멈춘 채 리비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하던 일을 멈추게 한 건 다행이었다. 다만 다리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한층 더 자극적이란 게 문제였다.
어둠 속에서 보랏빛 눈이 위험스레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머리채를 잡히고도 웃다니,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 게다가 그의 코끝에 묻어난 체액이 무엇인지 그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만, 그만해, 그만…….”
“왜?”
그는 리비를 보며 웃었다.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사특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럼에도 정말 모른다는 듯 물어 오는 시선에 어이가 없었다. 어이가 없으니 말도 더 나오지 않았다.
“여기, 움찔움찔해. 아주 예쁘게 부풀어 올랐다고.”
보리스는 입을 대는 대신 이번엔 엄지로 꾹, 민감한 살점을 눌렀다. 당연히 리비의 몸은 자동적으로 낚인 물고기처럼 파닥거렸다.
그 반응이 기꺼운 듯 보리스의 손짓이 더욱 집요해졌다. 아예 입술을 붙여 꾹꾹 빨아 대기까지 했다.
“하지 마, 하지 마아…….”
울먹이며 흘러나온 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쾌감에 가득 차 있었다. 감당 못 할 쾌락에 휩싸여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런 소리.
“리비가 원하지 않으니까 하지 않을 거야.”
어이가 없다. 원하는 대로 다 해놓고는 이제 와서 안 한다니.
“…….”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해맑았다. 하지만 하는 행동은 영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다시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더니 바지 끈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뭐 해?”
“벗는 건데.”
“안 한다며!”
리비는 바락 소리를 질렀다.
“응, 안 할 거야.”
그는 씩 웃었다. 그조차도 해맑고 순수해 보이는 미소였다.
“끝까지는.”
마침내 형태를 드러낸 것에 리비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커!”
“…….”
대뜸 내지른 소리에 그의 눈이 부엉이처럼 커졌다.
“아니, 내 말은…….”
크다. 너무 크다. 상상했던 것보다, 그가 얼마 전 자기 몸에 자신의 몸을 문질러 댔을 때 가늠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크니까 좋지?”
그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좋긴 뭐가 좋아.”
리비는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만큼 빨개진 얼굴을 도리도리 저어 댔다.
“나도 잘 몰라. 그런데 크면 좋대.”
보리스는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실은 리비도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있다. 친구들끼리 야한 이야기를 할 때나 이미 결혼한 마을 여자들에게서 들은 것이다. 왜 좋다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클수록 좋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아니, 절대적이었다.
“크면 뭐가 좋은데요?”
결국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서 리비가 물었을 때, 결혼한 마을 여자들은 서로를 보며 웃기에 바빴다.
“너도 알게 될 거야. 무조건 클수록 좋다는 걸.”
대체 큰 게 뭐가 좋다는 걸까. 리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렇게 무섭기만 한데. 여자들은 저걸 어떻게 안에 넣는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리고 그 직후, 그것이 두 다리 사이로 쑥 밀려 들어갔다.
“아…… 으응.”
순식간에 부피를 키운 것이 다리 사이에 끼워진 채 은밀한 부위를 자극해 왔다.
“…….”
리비는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맨다리 사이에 끼워진 남자의 그것. 그걸 대놓고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보리스가 슬쩍 허리를 밀어 자신의 것으로 다리 사이를 마찰해 왔다. 크고 묵직하고, 단단한 것이 젖은 살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스르륵 미끄러졌다.
“아, 으응, 아.”
처음에 느릿하게 오가던 그것의 속도가 점차 더 빨라졌다.
“으응, 으으응.”
그가 몸을 치댈수록 야릇한 감각이 샘솟아 올랐다. 민감한 살점끼리 맞닿은 곳에서 끝없는 열기가 피어올랐고, 마찰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불꽃의 세기도 점점 거세져만 갔다.
“그만, 그마안…….”
그의 것이 안을 찌를 듯 살점을 파고들어 왔다가, 바로 직전에서 빠지기를 반복했다. 그럴수록 몸 안쪽 어딘가가 매우 가려워졌다.
리비는 보리스의 성기를 다리 사이에 끼운 채로 몸을 꼬아 댔다. 마치 음탕한 뱀 한 마리가 들어와 온통 정신을 흐트러뜨려 놓는 것만 같았다.
“하아, 아아…….”
보리스의 것이 다시 한번 아래쪽을 크게 찌르며 문질러 대자 리비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울음과 신음이 뒤섞여 매우 음탕하고 퇴폐적인 목소리였다.
마주 닿은 곳에서 미끈거리는 애액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미끈거리는 감촉이 그의 것을 감싸고 흘러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 언제까지 할 거야아…….”
그녀는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극한까지 끌어 올려졌으나 아직 남은 하나.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리비…… 리비…….”
그는 곧 죽을 것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참이나 치대던 몸이 멎은 건 그 순간이었다. 보리스는 한 치의 틈도 없이 하체를 맞붙인 채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리비는 아랫배에 미지근하게 퍼지는 감각에 시선을 내려 그것을 보았다. 하얗게 뿜어진 체액이 배꼽 부근에 가득 고여 있었다.
절정을 맞이한 보리스의 얼굴은 지나치게 퇴폐적인 색으로 가득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 살짝 맺힌 땀, 흩어진 머리카락…….
리비는 반쯤 뜬 눈으로 멍하니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주체 못 할 절정을 쏟은 남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한 쾌감이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자가 절정에 이른 모습을 보며 흥분한댔어.”
친구가 해준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 친구를 만난다면 그때의 말이 틀렸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절정에 이른 남자의 모습을 보고 미친 듯이 날뛸 것 같은 자신 때문이다.
낯 뜨거운 행위로도 채 꺼뜨리지 못한 불꽃이 잔불로 남아 몸을 아직 데우고 있었다.
“하아, 리비.”
보리스는 툭, 리비의 위로 몸을 덮쳐 왔다. 뜨겁고 단단한 몸이 내리누르는 묵직한 감각에 온몸에 나른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보리스.”
보리스는 리비의 몸에 자신의 몸을 겹친 채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그녀를 끌어안은 자세로 몸을 뒤집었다.
“미안, 무거웠지?”
“…….”
리비는 말없이 그를 쏘아보았다. 무거운 게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그가 어떤 행위를 했는지 아직 다리 사이에 고인 열기가, 끈적하게 늘어 붙은 체액이 말해 주고 있다. 그건 순전히 보리스의 것만은 아니었다. 그 사실이 미치도록 부끄러워서, 리비는 차마 쏘아붙이지 못하고 고개를 그의 가슴팍에 푹 파묻었다.
“리비?”
시선을 피해 얼굴을 파묻은 리비를 부르는 목소리가 초조하게 울려 퍼졌다. 이제껏 자신만만하더니 새삼 초조해진 목소리가 낯설었다.
“혹시…… 아팠어?”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응.”
아팠다, 끔찍하게. 해갈되지 않은 쾌락이란 게 이런 거구나, 리비는 난생처음 마주한 감각에 굴복하고 말았다.
“어디?”
그는 몸을 일으켜 리비의 몸을 다시 살피려 했다.
“그만.”
리비는 재빨리 그를 제지했다.
“움직이지 마.”
“…….”
그 말대로, 보리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리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렇게나 말을 잘 듣는 게 어이가 없어서였다.
“그냥 이대로 있어. 내 얼굴 보려고 하지 마.”
“왜?”
“왜는 왜야. 묻지 마. 질문 금지.”
좀 전에 그런 짓을 해놓고 어떻게 그와 얼굴을 마주한단 말인가. 리비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냥, 좀 있어. 보려고 하지 말고.”
리비는 고집스레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내리눌렀다.
막지 못했다, 그를.
끝까지 밀어내고, 거부하지 못했다. 아니, 더한 것을 갈구하기까지 했다.
모든 걸 보리스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자기가 보인 반응이 너무나 적나라했기 때문에, 그녀는 짙은 회한 속에 헤엄쳐야만 했다.
“리비.”
“…….”
부른다 한들 답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은 그도 포기한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 자기 품 안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만족한 것 같았다.
토닥토닥.
등을 주기적으로 두드리는 손길은 투박했지만 섬세했다.
방금 이런 짓, 저런 짓을 함께한 남자에게 이런 위안을 받아도 되는 걸까. 머릿속은 계속 혼란하기만 했다. 잔뜩 휘저어져 흐릿해진 흙탕물이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자신을 뒤흔들어 놓고선 그는 정작 태평해 보였다.
자신을 달래는 손길이 마치…….
‘마치?’
지나치게 능숙하다. 이렇게 능숙해도 되나? 리비는 또 다른 혼란에 휩싸였다.
‘누구랑 해봤거나, 해봤거나, 해본 게 아닐까?’
생각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몸은 이미 모든 힘을 다 쓴 터라 착착 늘어지고 있는데 정신만 말똥말똥해지니 이상할 노릇이다.
‘했으면 뭘 어쩌려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기가 막혔다. 보리스가 누군가와 이런 짓이든 저런 짓이든 했든 말든 대체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자신의 남편이 아니다. 연인도 아니며, 하다못해 집안에서 짝지어 준 남자조차 아니다.
그냥 납치범일 뿐이다. 그런데 왜 그런 게 궁금하지.
“리비, 왜 그래?”
그녀가 혼자서 혼란의 늪에 빠져 있을 때, 보리스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어디 많이 아픈 거야?”
그가 금방이라도 아픈 부위를 찾아 온몸을 헤집을 것만 같았다.
“아니야! 하나도 안 아파.”
리비는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마구 내젓는 통에 보리스의 얼굴이 뭉개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알았어, 진정해.”
보리스는 그녀를 달래며 뺨을 쓸어 주었다. 가만히 그의 쓰다듬을 받고 있으려니 기분이 몹시 묘해졌다.
“흐음…….”
저도 모르게 내쉰 한숨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작은 소리였지만 방 안에는 보리스와 리비, 단둘뿐이다.
서로의 숨소리는 물론이고 눈을 깜박이는 소리까지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고요하고 또 고요했다.
기다란 손가락이 눈물로 얼룩진 눈가를 닦아 냈다. 흐트러진 머리칼도 귀 뒤로 넘겨 정돈해 주었다. 이 역시도 익숙한 일이었다.
그녀가 언제나 보리스에게 해주던 일이었으니까.
보리스는 그때의 자신을 흉내라도 내듯 똑같이 따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 때.
발긋하게 달아오른 뺨이 차차 원래의 피부색으로 되돌아왔고, 전신을 달구었던 열기도 차차 가라앉았다. 한창 침대에서 뒤엉키느라 발산했던 땀이 식자 이번에는 금세 추위가 몰려왔다.
그런 상태에서 가까운 온기는 하나.
촉촉한 보랏빛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뿐이었다.
“춥지?”
“아니.”
대답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춥다고 하면 또 따뜻하게 해줄게, 어쩌고 하면서 또 덥게 만들어 놓을 게 분명하다. 붙어 지낸 지 얼마나 됐다고 보리스의 행동쯤은 이제 다 훤히 꿰뚫을 만큼이 되었다.
“춥잖아. 덜덜 떨면서.”
떡하니 몸에 얹어진 손이 따뜻하게 느껴질 만큼, 몸은 이미 많이 식어 있었다.
“추운 거 싫어하면서.”
커다란 손바닥이 훤히 드러난 어깨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추운 걸 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얼음 호수에 빠져서 죽을 뻔한 이후로 특히 더 그랬잖아.”
“별걸 다…….”
기억하네.
“얼음 아래 보이는 물고기가 예쁘다고, 잡으러 간다고 했잖아. 내가 잡아다 준다니까 그건 싫다고 해놓고. 겁 없이 걸어 들어갔지.”
‘내가 그랬나? 그랬었나?’
리비는 또다시 떠오른 과거의 기억에 몸서리쳤다. 왜 이리 부끄러운 기억들만 가득한 건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때도 보리스가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때도 날아서 날 구해 줬지?”
얼음물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그녀의 몸을 잡아 끌어 올린 건 커다란 날개를 펼친 보리스였다.
다행히 그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그녀를 안아 올린 채, 얼음 호수를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날아가던 기억.
“내 등에 날개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
그는 자신의 등에 솟아난 날개를 싫어했다. 당연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날개가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우리 모두 빠져 죽었을 테니까.”
“엣취.”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보리스는 눈을 크게 뜨더니 그녀의 몸을 끌어안아 자신의 몸에 바짝 붙여 문질러 왔다.
“뭐, 뭐 하는 거야.”
마주 닿은 살결에서 또다시 야릇한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토록 빠른 변화에 리비는 기함하고 말았다. 어째서, 어째서!
“하, 하지 마.”
“왜? 춥잖아.”
“아무튼 하지 마.”
이상해진단 말이야. 리비는 그다음 말을 삼켰다.
보리스에게 더 이상 자기 몸이 일으키는 반응에 대해 알려 주기 싫었다. 그가 그것을 알게 되는 것도 싫지만 일단 말을 꺼내고 나면 그때부턴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가 될 것 같았다.
“춥다면서.”
당연히 보리스는 쉽게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끈질긴 인간, 아니 새, 아니 아무튼 그 무언가였다.
“같이 씻을까?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 괜찮아질 거야.”
“싫어!”
리비는 화들짝 놀라 외쳤다. 욕조에 물을 길으려면 하녀들이 와야 할 거고, 그러면 이 광경을 볼 수밖에 없고, 그러면 아마 부끄러워 죽고 말 거야.
“따끈한 물에 몸 담그고 싶잖아.”
그건 또 사실이기는 했다. 며칠간 앓았던 데다가, 그와 침대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하느라 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프다.
게다가 뒤엉키는 바람에 서로의 체액이 묻어서 끈적거리기도 했다. 당장 얽혀 있는 다리만 하더라도…….
“보리스.”
“응?”
“이거…….”
리비는 굳은 채 중얼거렸다. 차마 무엇인지는 말로 못 하고 그저 이거, 라고만 가리켰다.
“이거 뭐?”
그는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는 듯 그녀를 보며 되물었다.
“그거, 말이야. 그거.”
순식간에 귀까지 발갛게 물들고 말았다.
“아.”
슬쩍 닿은 것만으로도 그 흉흉한 크기를 짐작할 만했다. 보리스는 그제서야 리비가 말한 바를 깨닫고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많이 거슬려? 줄이는 건 내 맘대로 안 되는데…….”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에 기겁한 리비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그럼 그, 그대로 있기나 해. 아무튼 씻는 건 싫어.”
“나한테는 잘 씻어야 한다고 했었잖아.”
“그랬지만…….”
“내 귀 뒤며 목덜미까지 씻겨 줬잖아.”
“…….”
또 기억이 나버렸다. 보리스가 과거의 편린들을 저처럼 끄집어내 푹푹 들쑤실 때마다 리비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대부분 그의 기억이 맞았다.
“아, 아무튼 안 씻고 싶어, 난. 하녀들이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걸 보는 것도 싫단 말이야…….”
리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대자 보리스는 곱게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자기 얼굴이 내뿜는 영향력을 충분히 알고 있는 듯한 행동이었다.
“물은 이미 데워졌어.”
“싫어…… 뭐, 응?”
보리스의 말에 리비는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퍼덕거렸다.
“물이 어떻게?”
“저기.”
보리스가 턱 끝으로 리비의 뒤편, 어딘가를 가리켰다. 리비는 그 방향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그곳에는 나무 뚜껑이 덮인 욕조가 놓여 있었다.
“저, 저게 왜…….”
“깨어나면 씻고 싶을 것 같아서 준비해 놓으라 했어.”
잘했지? 왠지 그런 말이 들린 것만 같았다.
“물이 쉽게 식으면 안 되니까 일부러 뜨겁게 데워 왔어. 서서히 식었으니까 아마 적당해졌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보리스는 몸을 일으켰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신에 리비는 눈을 꼭 감아 버렸다.
“뭐…… 무슨.”
그래도 목욕은 싫다고 하려는데 별안간 몸이 번쩍 들렸다.
“어……?”
눈을 뜨자 공중에 달랑 들린 채 흔들거리는 다리가 보였다. 보리스는 리비를 들어 올린 채 조심스레 욕조로 다가갔다.
욕조 위에 덮어 놓은 나무판자의 틈새로 모락모락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보리스는 그것을 열어젖힌 뒤, 한 발씩 안으로 들여놓았다.
그가 단단하게 붙들고 있었지만 리비는 행여 추락할까 무서운 나머지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 몸짓이 귀여운 듯 보리스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더욱 그녀를 단단히 고쳐 안았다.
스륵.
몸을 감싼 천이 몸을 스쳐 떨어져 내렸지만 리비는 그것을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불안한 듯 눈이 마주친 사이, 보리스는 리비를 그 안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찰랑.
리비가 앉은 중심으로 잔잔한 물결이 번졌다. 욕조에 들어가 앉자마자 리비는 몸을 웅크려 무방비하게 드러난 몸을 가렸다.
따뜻한 물 안에 잠기자 뻣뻣하게 굳었던 몸이 서서히 풀리는 게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보리스는 리비의 등 뒤에 자리 잡더니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아, 안…….”
“아무 짓도 안 해.”
보리스가 리비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손으로는 물을 떠올려 리비의 몸에 부지런히 끼얹었다.
몸이 물에 충분히 적셔졌을 즈음, 커다란 손이 벗은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흐응.”
목 뒤부터 어깨까지 꾹꾹, 적당히 힘을 주어 누르는 손길에 저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참을 그 손길에 홀린 듯 기대어 있을 때였다.
“나, 잘하지?”
잔뜩 기대에 부푼 목소리가 들려왔다.
“……솜씨가 좋네.”
외면하고 싶지만 사실이었다. 리비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기사단에 있을 때 배운 거야?”
“뭐든 스스로 해야 하니까.”
아무래도 무기를 드는 기사들은 근육이 뻣뻣하게 뭉칠 일도 많겠지. 몽롱해진 정신 속에 희미한 풍경이 펼쳐졌다. 아마 전투가 끝나고 나면 천막 안에서 서로의 손에 몸을 맡긴 채…….
스르륵 감기던 눈이 번쩍 떠졌다.
“보리스, 이런 거 누구한테 해줬어?”
“응?”
보리스는 그녀의 근육들을 꾹꾹 눌러 대느라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싶었다.
“손! 안 닿는 곳은 자기 손으로 못했을 거 아냐. 그러면 남의 손을 빌렸을 텐데…….”
“당연히 서로 해줬지.”
그의 해맑은 대답에 리비의 흐리멍덩한 상상이 좀 더 구체화됐다.
“다, 다 벗고?”
“……옷을 입고 할 수는 없잖아.”
그렇겠지. 당연히 그럴 거였다. 그런데도 리비는 그만 정신이 아찔해졌다. 자기가 이상한 상상을 하는 줄은 안다. 하지만 어쩐지 멈출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마을에서 할아버지들이 이상한 소리를 해댔기 때문이다. 한창 피가 끓는 나이의 남자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다 보니 넘치는 정력을 풀 곳이 없어서 서로서로 달래 줬다는 뭐 그런 것.
“기사들은 예쁘장한 종자와 붙어먹곤 하지. 아니면 맘 맞는 기사들끼리…….”
제아무리 술 취해 하는 소리라지만 그 말들은 귀에 쏙쏙 박혀 들어왔다.
‘아니지, 아닐 거야.’
설마하니 보리스가 그랬을 리가 없다. 리비는 머리를 푸르르 떨어 애먼 잔상들을 떨쳐 내려 애썼다.
그 모습을 의아한 듯 바라보던 보리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리비, 질투하는 거야?”
그는 리비의 허리를 붙잡아 자기가 앉은 쪽으로 휙 돌렸다.
“…….”
난데없이 몸이 돌려져 마주한 그의 얼굴에 리비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얼굴과 머리카락, 촉촉하게 젖은 눈까지.
게다가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응? 리비.”
턱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대답을 재촉하는 듯 농밀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면서도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뭐…… 뭘.”
“신경 썼잖아.”
“내가 뭘.”
집요하게 캐묻는 시선에 고개가 점점 아래로 숙여졌다. 그러다가 물속에서 흐릿하게 보인 형체에 다시 놀라서 파드득 고개를 들고 말았다.
아, 깜짝이야.
엄청난 것을 본 탓에 가슴이 두근두근 널을 뛰었다. 남자들은 다 저런 엄청난 걸 가지고 있는 걸까.
하여간에 시선을 둘 곳이라곤 없었다.
“아, 아무튼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차라리 그의 맨가슴을 보는 게 가장 건전했다. 위도 아래도 다 너무 야하니까.
“내가 다른 기사들과 뭘 했을까 봐 걱정하는 거야?”
“아니래도.”
리비는 물속에서 펄쩍 뛰었다. 그러느라 그만 엉덩이로 그의 것을 툭 치고 말았다.
‘엄마야.’
분명히 다리도, 팔도 아니었다. 그 선명한 존재감에 리비는 어쩔 줄 몰라 그를 보았다.
그녀가 얼마나 당황했는지와는 별개로, 보리스는 제법 엄숙한 얼굴이었다.
“말했잖아, 나는 순결한 몸이라고.”
그가 리비의 손을 휙 잡아채 제 심장 부근에 갖다 누른 채로 말했다.
“외로움을 달랠 때도…… 나는 네 생각만 하면서 그랬어.”
그런 말을 저렇게 세상 근엄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들으니 더더욱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만, 그만해.”
리비는 양손으로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귓불이 후끈후끈한 것이 언제 추웠냐는 듯 다시 더워지기 시작했다.
“이건 네 거야.”
“그게 왜 내 거야?”
리비는 기겁하며 그의 아래를 보다가 놀라서 고개를 쳐들었다. 그건 아까 봤을 때와 상태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치 물고기처럼 빳빳이 고개를 든 채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 저게 왜.”
저러고 있는 거야? 놀라움에 굳어 버린 입으로 리비는 더듬더듬 말했다.
“……난 이거 말한 건데.”
“…….”
그는 입을 막고 있던 리비의 손을 잡아가서 심장 부근에 턱 고정시켜 놓으며 말했다.
펄떡펄떡.
손바닥 아래서 강렬하게 뛰는 심장박동에 리비의 온몸도 같이 쿵쿵 울리는 것만 같았다.
“봐, 좋아 죽잖아.”
그는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그녀의 손이 닿자 심장은 더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네 손길이 닿으면 난 이렇게 된단 말이야. 여기도, 다른 곳도.”
어디, 다른 곳 어디. 리비는 물어보려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답을 듣기가 두려워져서였다.
“나, 나갈래.”
첨벙거리며 일어서려는 리비를 그가 다시 잡아 눌렀다.
“아직 덜 풀렸어.”
“안 풀어도 되니까 그만…… 흐응.”
또다시 이어진 마법 같은 손길에 몸이 아주 솔직한 반응을 보였다. 그가 꾹꾹 누르는 자리마다 어찌나 시원한지.
“몸은 솔직한데?”
아니라고,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신음은 다시 주워 담을 도리가 없었다.
“더해 달라고 하고 있어.”
“아니야아…….”
미약하게 웅얼거려 봤지만 스스로도 그게 얼마나 신빙성 없이 들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 모르겠다.’
결국 그녀는 보리스의 손길에 굴복하고 말았다.
“더해 줘.”
그리고 아예 그에게 몸을 맡겨 버렸다. 웃음을 터뜨린 보리스가 다시 부지런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신음이 연이어 터지면서 얼굴은 한층 더 붉게 물들어 갔다.
굳어 있던 근육들이 그의 손길 아래 나른하게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을 단단한 가슴에 기대자마자 연체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흐물흐물하게 풀어졌다.
벗은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은 분하게도 따스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맞닿는 살의 감촉에 저절로 졸음이 밀려왔다.
“졸리면 자.”
자면 무슨 짓을 하려고. 톡 쏘아붙이려는데 이미 그럴 힘도 의지도 없었다. 일시에 풀린 긴장 탓에 몸은 불이 닿은 양초처럼 거침없이 녹아내렸다.
가뜩이나 기운 없는 몸으로 이런저런 짓을 했더니 체력은 이미 다 고갈되고 말았다. 뜻하지 않게 졸음이 슬그머니 밀려와서 리비는 어느덧 잠이 들고 말았다.
***
까악.
걸걸한 울음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으음…….”
리비는 무의식중에 베개를 끌어당겨 귀를 막았다.
까아악.
그래도 소용없었다. 더욱 집착적으로 변한 울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리비는 얼굴을 찡그리며 베개에 더욱 깊숙이 얼굴을 파묻었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소리는 더욱 커지고, 빨라졌다.
깍, 까악, 깍, 깍.
짧게 내지르던 소리는 어느덧 일정한 음률을 타고 이어졌다. 마치 노래를 부르는 듯 신나게 지저귀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마 보통의 새라면 그 소리가 그렇게 거슬리지 않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저 새는 그런 새가 아니다.
리비는 결국 그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몸을 뒤척이다가 고개를 돌리자 창틀에 앉아 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시커먼 날짐승이 보였다.
“…….”
까마귀는 창밖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몇 번 더 울어 댔다. 그리고 부리로 창문을 콕콕 쪼아 대기를 반복했다.
보통 아침잠을 깨우는 건 꾀꼬리라든가, 카나리아라든가, 아니면 다른 산새라든가. 여러 종류의 새가 있을 터다. 그런데 저렇게 시커멓고 커다란 까마귀라니.
까아악.
그녀와 눈이 마주친 까마귀는 크게 날갯짓을 하더니 다시 한번 우렁차게 울어 댔다. 명백한 소음이었다. 이제 막 깨서 몽롱한 정신으로 듣기에는 매우 거슬리고 거친 울음소리였다.
“저리 가.”
리비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내저었지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비웃듯이 폴짝 뛰어 자리를 옮기더니 더욱 큰 소리로 울어 젖혔다.
“가라니까!”
성질이 난 리비가 손을 뻗어 베개를 집어 들었다.
“저리 가.”
옆에서 들린 낮게 깔린 음성에 리비는 흠칫했다. 어이가 없는 건 겨우 그 작은 소리 한 번에 까마귀가 푸드덕거리며 날아갔다는 사실이다.
그 능력에 새삼스럽게 놀라 리비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주치고야 말았다.
아침이라 잠결이 스며든 나른한 보랏빛 눈동자를.
“…….”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보리스는 사르르 녹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다음에 이어질 말이 설마, 설마…….
“잘 잤어?”
리비는 내적 비명을 내지르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잠시나마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한 행동이었으나 이내 리비는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꺄아아아!”
햇빛이 들이쳐 환해진 침실에서는 이불 속에 뭐가 있는지가 다 보였다. 부드러운 시트 속의 두 사람의 몸은 한데 뒤엉켜 있는 데다가, 둘 다 갓 태어난 모습 그대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아, 으악.”
리비는 스스로 뒤집어쓴 이불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갑자기 맞닥뜨린 광경에 당황스러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가만히, 리비. 꺼내 줄게.”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이불이 더욱 뒤엉키는 바람에 오히려 천을 둘둘 만 상태가 되었다. 다리 사이에 천이 휘감기고, 바짝 죄어진 천 때문에 두 사람의 몸은 더욱 바싹 붙고 말았다.
그 촉감에 놀라 몸을 뒤트는데 보리스가 휙 이불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쉿, 괜찮아.”
“보, 보리스.”
이불 속에서 마주한 보리스의 시선은 한층 유혹적인 빛을 띠었다.
“괜찮다니까.”
리비의 입이 그대로 꾹 다물렸다. 온몸을 구속한 이불 속에서 단둘이 나란히, 그것도 홀딱 벗은 채로 마주하고 있다니.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 샘물처럼 퐁퐁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그와 이것저것을 열심히 해버렸다. 정말로 그래 버렸다.
그 일들을 잊기엔 너무 맨 정신이었다. 뜨겁게 뒤엉키던 숨, 단단히 얽힌 그와 자신의 다리, 착 달라붙은 피부의 감촉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리비는 차라리 정신이라도 잃고 싶었다.
“부끄러워할 거 없어.”
“내, 내가 언제.”
달래는 듯한 그의 말에 이상하게 오기가 샘솟았다. 왠지 그에게는 지고 싶지 않다. 뭔가 이런 상황에 더 어른스럽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대하고 싶었는데. 그런데 왜.
보리스가 더 여유로워 보이냐, 이 말이다.
“귀여워, 리비.”
그는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리비의 콧잔등을 꽉 깨물어 버렸다.
“뭐, 뭐 하는 거야.”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보리스가 다시 한번 입술을 가져왔다. 이번에는 이마와 뺨을 지나 턱 끝까지 꼼꼼하게도 입술을 내리눌렀다.
촉, 촉. 빠르게 살갗을 스쳐 지나가는 말랑한 살의 감촉에 리비는 몸 안 어딘가에 불이 이는 것 같았다.
“그만해애…….”
“싫어?”
“간지러워. 그리고…….”
“그리고?”
“강아지가 핥는 것 같단 말이야.”
맹목적인 애정을 표현하는 강아지가 주인에게 달려들어 끊임없이 핥아 대듯이, 보리스는 리비의 얼굴을 좀처럼 놔주지 않았다.
“그래?”
리비의 말에 보리스의 얼굴에 침울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개에 비유했으니 싫었겠지. 리비는 얼른 사과의 말을 꺼내려 입을 벌렸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데 좀 이상했다. 보리스의 얼굴은 어느덧 짓궂은 기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휙.
이불 안에서 그대로 리비의 몸을 타고 오른 그가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새카매진 시선이 자신을 주시하자 리비는 옴짝달싹도 못 한 채 굳어 버렸다.
그가 저런 시선으로 내려다보면 어쩐지 견딜 수가 없어졌다. 마치 못에라도 박힌 것처럼 움직일 의지를 상실하게 된달까.
“강아지를 좋아하잖아, 리비는.”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저리 좀…… 비키…… 흐읏.”
웅얼거리는 소리가 보리스의 입술 새로 사라졌다.
“으응…….”
순식간에 삼켜진 입술이 부드럽게 뭉개졌다. 할짝거리며 입술을 핥다가, 다시 안으로 파고들어 오기를 반복했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꼬며 그의 키스를 받아 냈다.
뒤엉킨 입술이 떨어진 건 한참 후였다. 숨이 가빠질 대로 가빠진 리비가 보리스의 가슴을 두드리면서였다.
“헉…… 허억.”
바로 코앞에 보리스의 얼굴이 있었다. 눈을 깜박이면 속눈썹이 그대로 맞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서 리비는 꼼짝도 못 하고 보리스의 기다란 속눈썹만 바라보았다.
길고 빽빽하게 난 속눈썹 아래 자리한 보랏빛 눈이 자신을 기민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 굶주리면서도 애잔한 시선이었다.
리비가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바로 그 시선.
아침부터 너무 달아올라 버렸다. 어젯밤에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안고 뒹굴었는데. 정말 온갖 짓을 다 했는데. 그 하나만 빼고는.
“리비, 무슨 생각 해?”
이렇게 햇빛이 찬란한 아래서 그와 또 붙어먹기 직전까지 가다니. 대체 어떻게 되어 버린 게 아닐까. 리비는 깊은 고뇌에 휩싸였다. 명색이 자신은 신랑이 있는 신부다.
그런데 외간 남자와 한 침대에서 자고, 눈을 뜨고……. 리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왜 그래, 응?”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사실은 사실이다. 그의 품에 안겨서 내지른 비명으로 목이 다 쉴 지경이었으니까. 지금 목구멍이 이토록 따끔거리지 않는가.
리비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린 뒤 푹 한숨을 내쉬었다.
“보리스, 답답해.”
둘은 아직도 누에고치 속 애벌레처럼 뒤엉켜 있었다. 하얗게 드리워진 이불 안에 갇힌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리비가 말하고 나서야 보리스는 두 사람을 둘둘 감고 있던 이불을 치워 냈다.
리비는 서둘러 몸을 일으킨 뒤 구겨져 있는 이불을 끌어다가 가슴께를 가렸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꼴이 엉망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마구 엉킨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고 있는데 보리스 외에 다른 눈들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