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도주
아침 햇살이 눈을 찌르는 느낌에 리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또야?”
이렇게 잠이 드는 것이 몇 번째지. 잠이 든다기보다는 까무룩 정신을 잃는다는 말이 맞을 정도였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가 깨면 이상하게 몸이 가뿐했다. 하지만 기분이 개운치는 않았다.
이건 분명히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다.
저절로 잠이 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재워지는’ 느낌이 강했으니까. 그리고 그건.
“보리스…….”
그는 이 성에 자신을 데려온 뒤로, 빠짐없이 그녀의 방에서 잠들었다. 어느덧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첫날과는 달리 그는 강제로 그녀에게 몸을 접촉하거나 강제로 입을 맞춰 오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저 조심스레 그녀를 안고 잠드는 일만 반복했다. 그가 자는 동안 몰래 깨어서 성을 나가 볼까, 하는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리비를 끌어안은 채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리비 역시 그의 품에 안긴 채 잠이 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들곤 했다. 이제는 그것이 몹시 자연스럽게 여겨질 정도였다.
“계속 이럴 수는 없어.”
밤에 몰래 성을 나가겠다는 계획은 평생토록 이룰 수 없을 것 같으니 이왕이면 낮을 노리는 수밖에 없다. 낮에는 오히려 그의 경계가 덜한 것 같다.
어차피 내성을 이중 삼중으로 감싼 탓에 나가려 해봐야 나갈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내성과 외성을 분리하는 중문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딱 내성에 필요한 사람들만 그곳을 통과할 수 있다. 더불어 식재료를 나르는 마차도 함께.
리비는 그 마차를 며칠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마차는 외성에 들렀다가 내성으로 들어온 뒤 다시 외성을 거쳐 도개교를 지나 밖으로 나가는 것 같았다.
말이 끄는 짐수레에는 각종 식재료가 가득 실려 들어왔다가 텅텅 빈 채로 나갔다.
짐수레의 주인은 마차를 세워 놓고 하녀들과 잠시 잡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리비는 그 한편으로 숨어들어 짐수레 안을 살폈다.
사람 하나쯤은 얼마든지 들어앉아도 될 만한 자리가 보였다. 그녀는 주저 없이 안으로 기어들어 가 자리를 잡고 앉아 망토를 푹 뒤집어썼다. 이제 이 마차가 움직이기만 하면.
“어이, 잠깐 서봐.”
리비는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땀에 범벅이 된 기사들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몸을 잔뜩 웅크려 상자 더미 속에 더욱 깊숙이 몸을 숨겼다.
“뭐 좀 먹을 게 있나?”
훈련이 막 끝나 배고픈 기사들인 모양이다. 수레 안으로 쑥 들어온 손을 보며 리비는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집어삼켰다.
몇 번 휘적거리던 손은 바닥에 굴러다니던 사과를 집은 뒤 빠져나갔다.
“우리들이 넘치는 게 힘밖에 없다지만 이렇게 굴리는 건 너무하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던 기사는 우적우적 사과를 씹어 먹었다.
“다들 곤죽을 만들어 놨으면서 본인은 저리 힘이 넘쳐.”
또 다른 기사도 잔뜩 불만을 토했다. 불만이라기보다는 이제는 체념에 가까운 말투였지만.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리비는 열심히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누군지는 몰라도 훈련을 담당하는 자가 꽤나 악독하고 집요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가엾은 보리스…….”
본인이 기사단장이라고 했으니 아마 훈련을 받지는 않겠지만 저런 지독한 자가 부관으로 있다면 그 역시 피곤할 것만 같았다. 이름만 단장이지 이리저리 휘둘리는 건 아닌가.
그 무르고 착한 성격에 기사들을 제대로 굴리지도 못할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기사들 중 누군가 실권을 잡고 있다가 때를 봐서 그에게 반기를 들거나 한다면……? 별의별 가정들이 머릿속에 떠다녔다.
‘이럴 때가 아닌데.’
대체 누가 누구 걱정을 하는가. 그의 기사단 일이니 그가 알아서 할 테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드디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간 달리던 마차가 멈춰 섰고, 도르래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도개교가 땅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멈춰 섰던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왔다.’
드디어 나왔다.
한데 마음 한구석이 허물어진 성벽처럼 허전했다. 겨우 나왔는데, 그랬는데.
툭툭 떨궈지는 눈물방울이 옷자락에 짙은 무늬를 만들어 냈다.
“미안해, 보리스.”
리비는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숨죽여 울었다.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해. 살아 돌아온 널 반겨 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렇게 떠나 버려서 또 미안해. 그래도 네 아내가 될 수는 없어.
미안해, 미안해.
당근이며 배추, 감자 등이 굴러다니는 마차 안에서 그녀는 숨죽여 울었다.
마땅히 얼굴을 닦을 손수건도 없어서 눈물이 흐르는 대로 치마에 문질러 닦느라 얼굴은 금방 엉망이 되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달린 걸까.
마부의 흥얼거리는 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느릿느릿 마차를 몰던 남자는 성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어귀에서 잠시 마차를 세워 두고 볼일이 있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숲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빼꼼히 고개를 내민 리비는 두리번거리다가 밖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솨아아.
소용돌이치듯 불어온 바람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오른 나무들이 제멋대로 춤을 춰댔다. 그 풍경을 보며 리비는 꼴깍 침을 삼켰다.
‘나오긴 했는데.’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일단 나오는 것만 생각했지,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선 크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사실 성공할지 여부에 대해서도 자신하지 못했으므로.
생각보다 너무 수월한 탈출이었다. 며칠간 얌전히 지낸 것이 보리스의 경계를 완전히 풀어 버린 탓인지, 도망 시도는 너무 쉽게 성공하고 말았다.
“여기가 어디쯤일까.”
리비의 시선이 마차가 향해 가던 길을 따라갔다. 길은 갈수록 평평해지고 넓어졌다. 식재료를 싣고 온 마차이니 되돌아가는 행선지가 어디인지도 명확하다.
이대로 마차를 타고 가면 마을이 나오는 것 같다.
만약 보리스가 지금쯤 그녀의 부재를 눈치채고 뒤쫓아 온다면 즉각 따라잡을 길이다. 그녀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이 길은 안 된다’라고.
본인이 보리스라 하더라도 일단 사람들이 머무르기 좋은 마을부터 뒤질 것이다. 마을에 가게 되면 얼마 안 가 그에게 덜미를 잡힐 게 뻔하다.
리비의 눈은 그 반대편, 마부가 사라져 간 숲속을 훑었다.
다시 한번 바람이 불어와 불길하게 나무들을 흔들어 댔다. 나뭇가지가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에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가악, 가악.
멀리서 까마귀가 우는 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긁어 댔다. 대체 무슨 까마귀가 이렇게나 많은지, 주변에 진짜 시체라도 있는 것인지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름이 쭉 끼쳤다.
“에이, 설마.”
안 좋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법. 리비는 머리를 털어 재빨리 불길한 생각을 떨쳐 냈다.
‘침착하자.’
리비는 끌어안고 있던 꾸러미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래 봐야 대단할 것도 없다. 안에는 갈아입을 옷 두어 벌과 방금 전 마차에서 훔쳐 낸 비상식량이 전부다.
운반 중에 상처를 입어 상품성을 잃은 감자와 당근, 사과뿐.
사과는 그렇다 쳐도 익힌 것도 아닌 날 채소를 어떻게 먹을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돈도 한 푼 없다. 하지만 돈을 대신할 것은 있다.
“…….”
꼭 쥐고 있던 손을 풀자 보석 몇 개가 손바닥 위를 굴러다니는 게 보였다. 드레스에서 뜯어낸 보석들이다.
이걸 팔면 과연 얼마가 나올지, 적당한 가격은 얼마쯤일지 예상하기도 어렵다. 당장에 이것을 팔려면 마을로 가야 하는데 또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마디로, 지금은 그저 예쁜 돌덩어리일 뿐이다.
새삼 자신이 얼마나 대책이 없었나 떠올리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저 그 성에서 빠져나올 것만 생각하느라 그 이후의 대책을 미처 세워 두지 않은 게 잘못이다.
그래도 일단 나왔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리비는 크게 심호흡했다. 고민해 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언제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살았던가. 보리스와 마을에서 살 때 항상 사고를 치고 나서야 대책이란 걸 고민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와 같았다.
길은 있으니 나아가면 된다. 어디로든 몸 하나 숨길 곳은 있을 테고, 보석을 팔아 레제트의 영지로 갈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리비?”
그는 어둑한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 왔어.”
굵직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
의도적인 침묵이라기엔 지나치게 조용했다. 사실 들어서면서부터 느끼고는 있었다.
이 안에는 아무도 없다, 라고.
“나 안 볼 거야?”
그럼에도 다시 물었다. 목소리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기가 착각한 것이기를, 잘못 안 것이기를, 사실은 침대 한구석에 그녀가 엎드려 새근새근 잠들어 있기를.
그 바람은 무참히 깨졌다.
촛불을 밝히자 방 안의 상황은 더욱더 눈에 잘 들어왔다.
어질러진 침구와 파헤쳐진 옷 상자. 그 안에서 간편한 복장으로 쓰일 법한 옷들만 쏙쏙 골라 간 상태였다. 촛대를 높이 들어 방 안을 구석구석 살핀 그의 눈빛이 짙어졌다.
휙.
방향을 틀자 어느새 창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까마귀 떼가 보였다.
가아아악.
주인을 발견한 까마귀 떼는 일제히 요란한 소리로 울었다.
“뭘 하고 온 거야.”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까마귀들은 움찔거리다가 너 나 할 것 없이 다시 시끄럽게 울어 댔다.
“……하나씩 말해.”
개중 대장격으로 보이는 덩치 큰 까마귀 하나가 가악가악 울어 젖혔다.
날개까지 퍼덕이며 울어 대는 통에 방 안은 까마귀의 그림자로 꽉 찼다. 촛불의 빛이 비친 바닥에 검고 커다란 날개가 드리워졌다. 까마귀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커 보였다.
보리스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촛대를 내려놓고, 무언가를 생각하듯 머리채를 그러잡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가악가악.
까마귀들은 눈치를 보며 서로를 흘깃거렸다. 마치 세상의 어둠을 전부 혼자 집어삼킨 듯 어둑한 얼굴이 촛불 아래 일렁였다. 그런 그에게 말을 걸듯 까마귀는 계속 시끄럽게 울어 댔다.
“어쩔 거냐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그에게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길쭉한 손가락이 고뇌하듯 까만 머리채를 한가득 부여잡고 있었다.
“……글쎄.”
얼굴의 반을 가린 손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것은 음습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였다.
“나도 모르겠어.”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이럴 땐 리비한테 물어봐야지.”
***
오싹.
왠지 모를 한기에 리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분 탓이겠지.’
애써 그렇게 믿으며 그녀는 발길을 재촉했다. 해가 지기 전에는 이 숲을 통과해야 하므로.
“여자 혼자 이 숲을 지난다고? 힘들 거야. 가다가 도적 떼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숲 근처에 세워진 표지판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붙들고 물어본 결과, 이 숲을 통과하면 다른 마을로 넘어갈 수 있다는 걸 알아냈다.
불길하게도 자꾸 머리 위에서 까마귀가 울어 댔다.
처음에는 기분 탓이겠거니 하며 애써 무시했지만 어째 자기가 지나는 곳마다 까마귀가 나뭇가지에 앉아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는 까마귀의 숲이거든.”
길을 알려 준 사람들마다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역시 그리 불릴 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기에 이르렀다. 숲에는 까마귀가 많아도 너무나 많았다.
‘날 쫓아오는 건 아니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새카만 새들이 자꾸만 자기가 가는 데로 따라오는 것 같다고. 개중 몇몇은 눈이 마주치자 휙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묘하게 감시받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다. 숲은 큰 경사진 곳 없이 평평하게 이어졌다. 이대로만 걷는다면 숲을 벗어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비릿한 냄새가…….’
익숙지 않은 냄새에 리비는 인상을 구기며 옷자락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그럼에도 쇠 냄새와 생선 비린내가 뒤섞인 듯한 묘한 냄새는 사라질 줄 몰랐다. 오히려 빨리 걸으면 걸을수록 냄새는 더욱 심해졌다. 속에서 자꾸만 욕지기가 일었다.
“숲에는 늑대도 살지. 자주 볼 수는 없지만 운이 나쁘다면.”
혹시 그 늑대가 뭐라도 잡아먹고 풍기는 피비린내가 아닐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온몸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악!”
뒤에서 소리 없이 다가온 기척에 그녀는 비명을 내질렀다.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데 뜻밖에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이 공격해 오지는 않았다.
“어이쿠, 놀래라. 아가씨, 숲을 혼자 지나려고?”
교차했던 팔을 내리고 살펴보니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신기하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오, 아주 예쁜 머리 색이야. 눈색도 그렇고…….”
남자의 눈이 징그럽게 리비의 얼굴을 훓고 지나갔다.
“숲에서 길을 잃었어? 내가 도와줄까?”
남자는 손을 내밀며 가까이 다가왔다.
“말씀은 고맙지만.”
리비는 뒷걸음쳤다. 어째서 이러는지는 모르겠으면서도 본능적으로 걸음을 물렸다.
“이런 곳을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하다고.”
남자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점점 더 거리를 좁혀 왔다.
둘 사이 간격이 좁아질수록 비릿한 냄새와 또 다른 악취가 뒤섞이면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냄새가 났다. 가까스로 구역질을 참아 낸 순간이었다.
“어이, 거기서 뭐 해?”
또 다른 남자가 나무 덤불 사이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보았다.
“……!”
슬쩍 들린 나무 덤불 사이로,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근처에는 물건을 실은 마차들을 뒤적이는 다른 남자들도 보였다. 생김새는 하나같이 험상궂을 뿐만 아니라 얼굴에선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리비는 문득 오래전 아버지가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리비, 숲에서 마주쳤을 때 가장 무서운 건 사나운 짐승도, 마물도, 추위나 배고픔도 아니란다.”
“그럼 뭔데요?”
“그건 바로 사람이란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저 숲이 위험하니 들어가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아버지의 과장된 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
“아가씨, 왜?”
얼굴이 하얗게 질린 리비가 점점 뒤로 물러나자 콧수염 난 남자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알 만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봤어?”
남자의 입가에 일순 비열한 미소가 번졌다.
“거참, 곤란하게 됐네. 목숨은 살려 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냥 성난 이놈만 좀 달래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남자는 노골적으로 손을 뻗어 자신의 것을 가리켰다. 그것을 본 순간 리비는 그대로 몸을 돌려 뛰었다. 하지만 우악스러운 손에 곧 잡히고 말았다.
털썩.
“이거 놔!”
남자의 힘은 뿌리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격렬한 공포가 밀려들었다.
‘보리스.’
절박한 상황에서 그녀는 보리스의 이름을 불렀다. 보리스가 그녀를 꼭 끌어안던 힘과는 완전히 달랐다. 뿌리칠 수 없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이런 폭압은 느껴지지 않았었다.
리비를 깔아뭉갠 남자가 리비가 입고 있던 상의를 잡아 뜯었다. 투툭, 소리를 내며 뜯긴 옷은 간신히 가슴 부근은 가렸으나 어깨를 훤히 드러냈다.
“안 돼!”
버둥거리는 다리를 간단히 잡아챈 남자는 징그러운 미소를 띠었다.
“어이, 살살 다뤄. 내 차례도 와야 할 거 아냐.”
망을 보던 남자는 입가를 실룩이며 리비의 몸을 훑어 내렸다.
“보리스…… 으.”
“응? 뭐라고? 애인 이름이야?”
남자는 더 말해 보라는 듯 가까이 얼굴을 들이댔다. 그리고, 그 순간 검은 물체가 휙 하니 날아와 인정사정없이 얼굴을 가격했다.
“으악!”
남자의 얼굴에 들러붙은 건 덩치 큰 까마귀였다. 뒤이어 하나둘, 숫자를 불려 가던 까마귀들은 일제히 두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이건 뭐야!”
소란을 틈타 리비는 재빨리 남자의 중심부를 걷어찼다.
“윽!”
위와 아래를 동시에 공격당한 남자는 비틀거리며 엎어졌고, 그사이 리비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깊이, 더 깊이. 방향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리비는 무작정 달려 나갔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주변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숲속은 다른 곳보다 빨리 해가 지곤 했기에 이제 좀 있으면 캄캄한 어둠 속에 덩그러니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
‘완전히 어두워지면 끝장이야.’
마음은 급하지만 여기가 어디쯤인지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헉헉, 숨이 목까지 차올라 도저히 더는 뛸 수 없을 즈음, 멀지 않은 곳에서 남자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리비는 더 생각할 새도 없이 나무뿌리가 반쯤 파여 드러난 공간 속에 몸을 쑤셔 넣었다. 부디, 그들이 그대로 지나쳐 주기를 바라면서.
“제길, 어디로 튄 거야.”
“잘 찾아봐. 그 새 같은 다리로 가봐야 코앞이지.”
음산하게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리비는 입을 틀어막은 채 몸을 더 잔뜩 낮췄다.
‘살려 줘.’
미친 듯이 기도했다. 누구를 향한 기도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먹힌 건지 나무뿌리 부근을 배회하던 발들은 이내 멀어져 갔다.
발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을 무렵에야 리비는 몸에 잔뜩 들어갔던 힘을 풀었다.
도망치면서 몇 번이나 구르고 넘어진 탓에 군데군데 찢기고 멍든 자국투성이였다. 찢어진 옷으로 가려 보려 해봐도 소용없었다. 너덜너덜해진 옷만큼이나 마음도 점점 울적해졌다.
이게 뭐야.
기껏 도망쳐 나와서는 죽을 고비나 넘기고 있다니. 심지어 완전히 넘긴 것도 아니다.
이 숲을 얼른 벗어나지 않으면 저 흉악범들에게 다시 덜미를 잡히고 말 것이다. 이대로 여기서 숨어 있는다 한들 들키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널 두고 온 벌을 받나 봐.”
눈물 젖은 보라색 눈이 떠오르자 가슴 한편이 뭉클했다. 예리한 칼끝으로 찌르듯 아팠다. 지금쯤 내가 없어진 걸 알았을까, 열심히 찾고 있을까.
리비는 재빨리 고개를 저어 생각을 끊어 냈다. 아무렴 어때. 보리스가 자신을 찾든 말든.
떠나온 건 그녀다. 그러니 그 뒷감당도 자신이 해야 할 몫이다.
어렸을 때 숲을 쏘다녔던 경험만 믿고서 숲길을 택한 자신을 마구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곳은 티소 마을이 아니다.
리비는 몸을 조금 일으켜 어둑어둑해진 주변을 살폈다. 숲이 순식간에 어두워진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막상 그 상황에 처하고 보니 발끝에서부터 두려움이 타고 올라왔다.
숲속에 산다는 맹수, 괴물들, 사람의 뼈와 살을 발라 먹는다는 마녀의 집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상상력은 되레 이런 상황을 더 극한으로 몰고 갔다.
비가 내리려는 걸까.
게다가 주변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어둑어둑해진 주변과 달리 저 앞의 하늘은 맑기만 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곧 귀를 틀어막아야 할 만큼이 되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사르락, 사르락. 무언가에 부딪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리비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새카만 어둠으로 뒤덮은 것은 구름이 아니었다.
잉크처럼 넓게 퍼진 군상은 자세히 들여다보자 무수히 많은 점들이 모여 만들어 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까마귀들의 집합체.
수백 마리의 까마귀들이 한 방향으로 날고 있었다. 새들이 내는 날갯짓 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그 광경을 리비는 도망 중인 것도 잊고서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중 새카만 점 하나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잠시 후의 일이었다.
커진다기보다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커다랗고 까만 날개가 달린, 그 무언가가…….
“……!”
자신과 눈을 맞추며, 정확히 그녀를 겨냥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마치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뚜렷이 구별될 만큼 야릇한 기운을 뿜어내는 보랏빛 눈동자가 그녀를 완전히 속박해 버렸다. 도망칠 수 없다.
보리스.
그는 보리스였다. 모든 것이 그녀가 알던 그대로였다. 다만 다른 것은, 등 뒤로 커다랗게 솟아난 검은 날개뿐이었다.
그는 커다란 바람을 일으키며 착지했다. 리비와 고작 두어 걸음 떨어진 곳이었다.
그 모든 광경을 그녀는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바위처럼 굳은 듯 보이던 몸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윽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숲속의 어둠, 은은한 달빛 아래서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리비.”
마침내 불린 이름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어디 가?”
잘못 본 걸 거야.
리비는 눈을 꾹 감았다. 속으로 마구 숫자를 센 뒤 다시 떠보았지만, 방금 전 보았던 풍경은 달라진 게 없었다.
어둠에 잠긴 숲, 희미한 달빛, 그 아래 새카만 날개가 돋아난 인영.
“응? 리비.”
낮고 어두운 목소리가 전신을 휘감았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새기기라도 하듯 선명한 부름이었다.
“어, 어…….”
힘껏 발을 밀어 보았지만 나무뿌리에 막힌 몸은 더 이상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바닥에 길고 깊은 자국만 덧없이 늘어날 뿐이었다.
그녀의 의미 없는 몸짓과는 반대로, 그는 천천히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혀 왔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등에 달린 날개도 그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흔들렸다. 의심할 것 없는, 그가 가진 신체의 일부였다.
“내가 무서워?”
그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눈물이 묻어났다. 분명히 그는 울고 있지 않음에도 그렇게 느껴졌다.
스륵.
그는 리비 앞에 한쪽 무릎을 세워 앉았다. 그리고 고요히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항상 물기에 젖어 있던 보랏빛 눈동자는 사막의 모래처럼 말라 있었다.
“너…… 너.”
부들거리며 겨우 튀어나온 말은 거의 뭉개져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응. 나 여기 있어, 리비.”
그저 자신을 불러 준 게 좋은 듯,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어딘지 모르게 안타까워 보이는 미소였다.
슥 올라온 손이 떨리는 뺨에 얹어졌다.
“춥지?”
보랏빛 눈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지나 옷이 찢겨 고스란히 드러난 어깨 위에 머무르다가, 찢어져 너덜거리는 옷가지를 부여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응시했다.
“흑…….”
그의 손이 하얗게 드러난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리비의 입에서 흐느낌이 뒤섞인 신음 새어 나왔다.
그의 등 뒤로 얌전히 접혀 있던 날개가 순식간에 좍 펼쳐졌다.
그 위용에 놀라 흠칫거리는 그녀를 달래 주듯,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식간에 주변은 더 깊은 어둠 속에 잠겼다.
커다랗고 검은 날개가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가 만들어 낸 어둠 아래, 오롯이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
“지금은 괜찮아?”
날개가 바람을 막아 준 덕에 확실히 그 안은 금세 따뜻해졌다. 바싹 붙어 앉은 그에게서 전해진 온기도 한몫했다. 두려움과 숲속의 추위로 달달 떨리던 몸은 차차 평온을 찾아 갔다.
“보리스…….”
그는 리비에게로 더 바짝 몸을 밀어붙였다.
망설일 것 없이 리비도 그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뜨겁고 단단한 몸이 주는 위안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웠다. 다만 본능적인 끌림에 의해 더욱더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에 응하듯 보리스도 작고 여린 몸을 바스라질 정도로 세게 끌어안았다. 살짝 숨이 막힐 만큼 굉장한 힘이었으나 그조차도 어마어마한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흐, 으.”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추웠다. 추운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할 정도로 극한의 공포에 놓여 있었기에 급작스럽게 닿은 열기에 추위가 더 크게 느껴졌다.
“나, 추워, 보리스. 추워.”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정신없이 비벼 댔다. 보리스는 커다란 손으로 연신 그녀의 등과 어깨를 문질러 주었다.
창백해졌던 뺨과 얼음장 같은 손에 차차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검은 날개는 더욱 단단히 두 사람을 에워쌌다.
“괜찮아, 리비.”
그는 거듭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말이 반복될 때마다 그에게 파고드는 힘도 더욱 강해졌다.
뚜둑.
나뭇가지가 밟혀 부러지는 소리에 리비는 모든 행동을 멈췄다.
“여기 있었…… 힉.”
“뭐야, 저건?”
일순 주변이 밝아졌다. 견고한 성벽처럼 그녀를 감싸고 있던 날개가 벌어지면서 남자들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좀 전까지 자신이 피해 죽어라 달아났던 남자들이었다.
“보리스, 보리스.”
확 밀려든 두려움에 리비는 그의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보리스는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잔뜩 눈물이 맺혀 올려다보는 눈에 도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깐만.”
그는 자신의 손을 부여잡은 채 놓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어 대는 리비를 부드럽게 달래 떼어 냈다.
“잠시만 있어, 알았지?”
“…….”
주문을 거는 듯한 눈동자를 보며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랗게 떠진 눈 위로 그는 손바닥을 겹쳐 눌렀다.
“눈은 감고 있어.”
끄덕끄덕.
“아무것도 보지 마, 알았지?”
눈이 가려진 채로 리비는 몇 번이고 반복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해석조차 할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무의식중에 그가 하라는 대로 이끌려 가고 있었다.
손을 치우자 얌전히 감긴 채 파들거리는 눈꺼풀이 보였다. 보리스는 그 위로 입술을 내리누른 뒤 속삭였다.
“귀, 막고 있어.”
이번에도 그녀는 충실히 따랐다. 그녀를 둔 채 보리스는 남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뭐, 뭐야. 저거 진짜야?”
꽉 틀어막아 웅얼거리긴 했어도 남자들의 당황한 목소리는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괴물이다!”
공포로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쳐!”
남자들이 지르는 비명이 숲 전체를 울렸다. 리비는 잔뜩 몸을 웅크렸다. 귀를 막았음에도 새어들어 오는 소리를 온전히 막기는 어려웠다.
뒤이어 뭔가 찢어지는 소리, 부딪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소리들이 뒤섞여 공포는 배가 되었다. 리비는 눈을 꽉 감은 채 그 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리비.”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움찔 몸을 떨었다.
“이제 다 끝났어.”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좀 전과 별다를 바 없는 얼굴로, 그는 웃고 있었다.
“돌아가자.”
무의식중에 손을 내밀던 리비는 그의 손에 묻은 핏기를 보며 얼어붙고 말았다. 그 시선을 의식한 듯 그는 다시 손을 가져가 바지에 벅벅 문질러 닦았다.
“이제 됐어.”
안 됐다고, 그게 대체 뭐냐고 따져 물을 용기 따윈 없었다. 재차 내밀어진 손을 거부하기란 어려웠다. 마침내 포개진 손을 꽉 그러쥔 그가 싱긋 웃어 보였다. 더없이 천진한 미소였다.
휙.
순식간에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어깨와 무릎 뒤에 단단히 고정된 손이 느껴진 찰나였다.
“어? 잠깐만!”
길게 내지르는 비명과 함께 보리스는 힘차게 발을 굴렀다. 동시에 몸이 부웅, 떠오르더니 눈 깜짝할 새 숲의 빽빽한 나무들이 발아래 보이기 시작했다.
“꺄악.”
그녀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의 품에 더 찰싹 달라붙었다. 웃음을 머금은 그는 더 꽉 그녀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주변을 수백 마리의 까마귀들이 호위하듯 에워쌌다.
점점 멀어지는 숲, 넓고 든든한 등 뒤에서 힘차게 움직이는 검은 날개…….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아서, 리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건 명백히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뭐부터 물어야 할지, 떠다니는 생각들은 많은데 좀처럼 정리가 되질 않았다.
그 날개는 뭐야? 이상하다.
언제부터 그런 게 있었어? 이것도 이상하다.
지금 날고 있는 거야?
……제일 이상하다.
리비는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조합했다가 다시 부수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보리스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눈을 피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눈을 피했음에도 뚫어져라 보는 시선이 그대로 느껴졌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하얗게 솟은 성의 지붕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흰 장미의 성.
왜 저 성이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됐는지, 그녀는 이제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성은 활짝 피어난 흰 장미처럼 눈부셨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은 이런 거구나, 리비는 자신의 몸이 공중, 그것도 하늘에 가깝게 떠 있다는 것조차 잊고서 넋을 놓은 채 성을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워.”
그녀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보리스는 그녀를 안은 채 천천히 성을 한 바퀴 돌았다.
하얀 돌로 지어진 성벽과 높이 솟은 지붕 사이를 지날 때 리비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해자를 지날 때는 그를 더 꼭 부둥켜안기도 했다.
보리스는 성의 가장 높이 솟은 탑에 들어섰다. 당연히, 문이 아닌 창문을 통해서였다. 리비는 그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커다란 몸을 구겨 넣어 창문을 넘어서는 걸 멍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뚜벅뚜벅.
보리스는 달빛이 비추고 있는 방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침대로 다가갔다.
그녀는 보리스의 품을 벗어나 몸을 틀어 침대로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좀처럼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보리스?”
꽉 끌어안은 몸은 떨어질 줄 몰랐다. 정체 모를 열기에 휩싸인 몸은 아까와는 확연히 달랐다. 아까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준비된 따스함이었다면 지금은…….
“나 지금부터.”
어둡고 음습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널 가질 거야.”
“…….”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리비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잘못 들은 걸 거야. 극한의 공포는 없는 소리도 지어낸다지.
“뭐?”
리비는 석상처럼 굳은 채 입만 뻐끔거렸다.
“널 가질 거라고, 리비.”
그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어지며 나른한 미소가 걸렸다. 달빛을 받은 그의 얼굴이 희게 빛나고 있었다.
“농담……이지?”
“아닌데.”
그는 무감한 얼굴로 답했다. 굳이 말로 듣지 않더라도 이미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저 농담이 아니라는 걸.
그럼에도 한 번 더 확인해야 했다. 이번에는 부디 ‘아니’라는 답이 돌아오길 바라면서.
“노, 놀리지 마.”
“내가 놀리는 걸로 보여?”
그의 눈빛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보랏빛을 머금었으나 해가 진 후의 하늘처럼 새카만 어둠만이 가득한 빛이었다.
별안간 보리스가 몸을 깊숙이 숙여 오는 바람에 리비는 기겁했다. 하지만 어찌해 볼 새도 없이 그의 커다란 몸이 리비의 몸에 닿을 듯 말 듯 겹쳐졌다.
귀 가까이 다가온 그의 입술에서 습하고 뜨거운 김이 훅 뿜어져 나왔다. 매우 위험한 신호였다.
“지금, 나는 널 가질 거라고.”
흡사 사형집행인처럼 통보하는 목소리에 리비는 바짝 얼어붙고 말았다.
그의 체온이며 숨결 모두 마그마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뜨거웠으나 정작 마주하고 있는 리비는 가슴속 어딘가가 싸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가, 가지긴 뭘 가져?”
“너.”
또다시 짧은 대답이 돌아오자 리비의 얼굴은 허연 달처럼 변해 버렸다. 그의 옷깃을 꽉 붙들었던 손이 느슨히 풀렸다.
돌았니?
순간 리비는 그렇게 물을 뻔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멈췄다. 정말 돌아 버린 자에게 그 질문은 의미 없다.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돌고 있는 머리에 더 속도를 붙이는 꼴이었다. 그래서 입을 벌린 채 어버버,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기만 했다. 그런 그녀를 대신해 보리스가 물었다.
“어디로 가려고 했어?”
“그, 그야 당연히…….”
“레제트 공작에게?”
충격으로 물든 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리비는 일순 약해질 뻔한 마음을 다잡았다. 고개를 쳐들고 그 눈빛에 맞섰다.
“당연하지. 내 남편인데.”
“…….”
남편, 이라는 단어에 그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니까 우리…….”
리비는 웅얼거리며 미약하게나마 그를 밀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해초처럼 휘감긴 몸은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이런 자세로 그녀를 안고 있은 지 꽤 된 것 같은데, 그녀를 들고 날아온 시간까지 합하면 이제 슬슬 힘이 달릴 만도 할 텐데.
강철 같은 몸은 그녀를 속박한 채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욱 센 힘으로 옭아맬 뿐이었다. 그래도 계속 꼼질거리며 벗어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귀에 대고 보리스가 속삭였다.
“이러지 말자?”
귓가에 훅 불어온 입김에 리비는 몸서리쳤다.
“놔, 놔줘.”
공중에 들린 발을 버둥거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작은 주먹으로 투닥여도 봤다. 강철을 손으로 내리치는 기분이 이런 건가, 하는 생각만 들었다.
“힉.”
보리스는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깨지기 쉬운 유리를 다루듯 세심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그 눈만큼은 그다지 안전하지 않았다.
“보, 보리스?”
얌전히 내려놓기만 하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순식간에 그녀의 위로 타고 올랐다. 리비는 거대한 그림자 아래, 이제 막 잡혀 와 무력하게 갇힌 어린 짐승 같았다.
“뭘 하지 말자는 건데?”
작고 하얀 손을 잡아 올려 손끝에서부터 입을 맞춰 나갔다. 그 기묘한 접촉에 리비는 흠칫 몸을 떨며 몸을 뒤로 물렸다.
“이런 거, 이상해. 하지 마.”
애벌레처럼 몸을 틀어 벗어나려 해봤지만 딱 그만큼, 그에게 차단당했다. 어느새 손목을 지나 팔 안쪽, 여린 살결을 지분거리는 입술의 감촉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야릇하고도 낯선 감각.
이제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기운이었다. 그동안 그의 덮침이 그만, 이라고 말하면 제어 가능한 것이었다면 이번은 달랐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그 너머에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말 따윈 들리지 않는 듯 초점이 나간 눈이, 지그시 내리누르는 입술과 다리의 감촉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어서, 빨리, 깨워야 돼.
“우리, 대화를 좀 하자, 응?”
안 그래도 물어볼 게 많다. 그의 날개라든가, 날개라든가, 날개 같은 것. 지금은 다시 감쪽같이 감춰진 바로 그것.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손을 붙들고 맛보기 바쁜 보리스의 뺨에 손을 얹었다. 잠시 멈칫하던 그는 이내 깊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대화.”
뭔지 모를 기시감에 리비는 살짝 몸을 떨었다. 설마.
“몸의 대화. 지금부터 그걸 할 거야.”
그러더니 나머지 손 한쪽마저 길게 핥아 내렸다. 기이하게 번뜩이는 보랏빛 눈과 마주친 순간, 양쪽 손은 그대로 위로 올려 고정되었다.
“보리스!”
정신없이 몸을 뒤틀어 봤지만 한 손에 그러잡힌 손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대체 왜…….”
정신없이 그를 올려다본 순간, 리비는 모든 저항을 멈췄다.
“그래야 네가 날 떠나지 않을 테니까.”
눈물 젖은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떨굴 듯한 눈물을 가득 담은 채, 그는 조용히 그녀를 주시했다.
“보낼 수 없어…….”
툭툭, 떨궈진 눈물이 그녀의 눈을 적셔 갔다.
움푹한 눈가를 따라 흐르는 눈물이 보리스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것과 합쳐진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공작과의 결혼은, 처녀인 게 조건이라 했지?”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했다. 부드러웠다. 세상 그 어떤 귀한 물건도 이렇게 다루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어, 어어…… 혼인 서약서에 분명히…….”
맹세를 했다.
“그 조건이 사라지면, 더는 그곳에 가지 않아도 되는 거지.”
그는 음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모두 안전할 거야. 걱정하지 말고…….”
숨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를 받아 줘.”
사람을 밑에 깔아 놓고 협박하는 주제에, 더할 나위 없이 간절한 구애였다.
“싫어, 싫…….”
뒷말은 채 나오지도 못하고 그의 입술에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입술을 가르며 들어온 두툼한 혀가 순식간에 안을 장악해 버렸다.
“흣…….”
숨을 모두 빨아 마시기라도 할 것처럼 그는 거칠게 입안을 탐했다.
그러는 동안 리비의 몸에서 차츰 힘이 빠져나갔다. 저항할 모든 기운을 그는 입맞춤 한 번으로 간단하게 앗아 가버린 것이다.
이미 몇 번이나 겹친 입술이었지만 지금은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 강도도, 집요함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에 비하면.
“흐…… 아…….”
숨이 막혀 몸을 뒤틀었으나 그에게 자비란 없어 보였다.
“그러니 나를 믿어, 리비.”
어둠 같은 목소리가 깊게 내려앉았다.
“나는 너를 해치지 않아.”
애달픈 음성이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널 지키기 위해 돌아왔으니까.”
“날 지키다니?”
순간 보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커다랗게 그림자가 지자 리비는 이불 속으로 몸을 말아 넣었다.
그것이 마지막 보호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끈질기게 이불만 틀어쥐었다.
두려운 듯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보리스는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터벅.
한참이 지나고서야 그는 리비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너는 그놈에게 몸을 ‘빌려’ 주러 가는 거잖아.”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심장은 배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리비는 터질 것같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이불을 더 꼭 그러쥐었다. 그는 어느덧 리비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후계자를 낳을 몸을.”
턱, 잡아채인 손 사이로 힘없이 이불이 흘러내렸다.
“아……!”
반대편 손으로 다시 이불을 끌어 올리려 했으나 그 손마저 잡아채이고 말았다.
“그렇잖아, 리비?”
보리스는 손바닥에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화인을 찍듯 뜨거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네가 목매는 결혼,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란 거, 알고 있어.”
“이러지 마, 싫어……. 아파, 이거 놔줘.”
뚝뚝 흐르는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손목을 결박한 힘이 느슨히 풀렸다. 하지만 완전히 자유로워진 건 아니었다.
“아팠어?”
목소리에는 달콤한 걱정이 묻어났다. 그가 세게 쥐었던 탓에 손목에는 빨갛게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촉, 촉.
보리스는 손목 안쪽 여린 살로 입술을 가져가 살결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치 사탕을 빨아 먹듯 행동하는 보리스를 리비는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뜨겁고 끈적한 접촉은 이전과 같았으나 다른 것이 있었다.
보리스의 눈.
“…….”
리비는 보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는 진심이다.
“왜?”
보리스가 고개를 기울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빨려들 듯 깊고 짙은 눈 속에, 두려움으로 가득찬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안 돼, 하지 마.”
리비는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
입이 가로막힌 보리스가 리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말을 알아듣는 걸까? 그런 거겠지. 그런 걸 거야.
리비는 애써 스스로를 달랬다. 보리스가 그럴 리 없다. 그저 자신의 품에서 달아난 리비를 향한 원망에 그처럼 무서운 말을 뱉은 것이다. 그저 겁을 주려는 것일 뿐이다.
“장난치지 마, 보리스.”
“…….”
보리스는 말없이 눈만 깜박거렸다. 알아들은 건지, 긍정의 의미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다.
“미, 미안해. 무작정 달아나려 한 건. 내가 무모했어. 널 걱정시켜서…… 정말로 미안해.”
허둥지둥 덧붙인 사과에 보리스의 눈이 반짝 빛났다. 리비는 그것을 희망의 신호로 보았다. 적어도 그가 이성을 잃은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 그러니까, 우리 이러지 말…… 흐윽!”
보리스는 잘근, 손끝을 깨물었다. 사탕을 깨물어 먹듯 그녀의 여린 손가락과 손목 안쪽을 핥아 대던 보리스의 입술이 다시 위쪽으로 올라왔다.
죽 타고 오른 입술이 가슴 언저리를 지분거렸다. 두툼하고 긴 혓바닥이 거침없이 하얀 살결을 탐하는 걸, 리비는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았다.
먹잇감에 표시를 하듯 게걸스러운 입놀림이었다. 리비는 긴장된 손으로 그를 다시 밀어냈다.
“보리스, 보리스…….”
연이은 부름에 그의 눈이 다시 반짝 떠졌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급습한 순간, 그는 다른 손을 뻗어 리비의 옷을 잡아챘다.
찌익.
서늘한 공기 중에 천이 찢기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려 퍼졌다.
“…….”
리비는 눈을 내려 그가 찢어 낸 옷을 바라보았다. 속옷까지 한 번에 찢어진 옷은 공중에 리비의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턱.
서둘러 가리려는 순간, 억센 손이 리비의 팔을 잡았다.
“…….”
리비는 숨도 못 쉰 채 그에게 손을 잡힌 상태가 되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리비의 가슴 한가운데를 훑었다.
찢어진 옷 사이로 가슴골이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였고, 조금만 몸을 틀어도 탐스럽게 부푼 형태와 젖꼭지가 온전히 드러날 게 뻔하다.
빤히 젖가슴을 들여다보던 보리스가 별안간 고개를 숙여 왔다.
“안 돼!”
한 번도 남에게 보인 적 없는 뽀얀 살갗 위로 보리스의 입술이 대범하게 침투했다.
하얀 앙가슴에 입 맞추는 보리스를 피해 리비는 한껏 몸을 틀었다. 그것은 되레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옷조각을 열어젖히는 꼴밖에는 되지 않았다.
“보리스!”
완전히 젖혀진 옷 너머 드러난 젖꼭지가 덥석 물렸다.
“흑!”
보리스는 하얀 살덩어리를 욕심껏 머금은 채 혀를 놀리기 시작했다. 예민하게 일어선 가슴 끝이 그의 혀 아래 굴려지자 찌릿한 감각이 치고 올라왔다.
“보리스, 보리…… 흐읏.”
정점을 집요하게 혀로 감아 빨아 대는 행위에 리비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의 입질은 집요했고, 다디단 과실을 입에 문 것처럼 잘근거리다가 빨아들이기를 반복했다.
그가 리비의 양손을 움켜쥔 채 젖가슴을 빠는 동안 리비는 그저 그에게 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발버둥을 치고, 몸을 틀어 보려 해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체력이 먼저 떨어진 건 리비 쪽이었다.
쪽, 쪽.
음란하게 빨아 대는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으응, 음…….”
아이를 낳은 적도 없는 그녀로서는 가슴을 빨리는 행위 자체가 낯설고 버거웠다.
갓 태어난 아이도 아니면서, 보리스가 그녀의 가슴을 집착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게 기이하기만 했다. 하지만 더욱 이상한 건 가슴을 물고 빨리는 동안 몸 안쪽 어딘가도 점점 젖어 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아.”
마침내 보리스의 얼굴이 떨어져 나가자, 리비는 벅찬 숨을 내쉬었다.
시선을 내리자 타액으로 흠뻑 적셔진 몽우리가 보였다. 혀와 입술, 치아로 골고루 짓이겨 놓은 탓에 하얀 살갗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것이 한층 더 야해 보인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욱 야한 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는 보리스였다.
“이, 나쁜, 이…… 너어.”
“아름다워, 리비.”
“뭐, 뭐?”
“리비 가슴, 아주 예뻐. 이걸 물고 빠니까 단내가 나…….”
“거짓말하지 마!”
리비는 당황한 마음에 소리를 바락 내질렀다. 그 바람에 젖가슴이 출렁거리며 그의 얼굴에 부드럽게 짓뭉개졌다.
“하얗고…… 말랑해. 그리고 따뜻해. 기분 좋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바보야. 이런 건 아기들이나 하는…… 흑!”
말을 맺기도 전에 그가 나머지 가슴도 앙 물어 왔다. 그러더니 다른 쪽 가슴을 빨아들일 때보다 더 강한 힘으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까칠한 혀가 가슴 끝 돌기를 거침없이 핥아 올릴 때마다 리비는 온몸을 부르르 떨어 댔다. 그녀는 어느덧 자유로워진 손으로 그의 까만 머리채를 움켜쥐고 잡아 뜯었다. 하지만 그는 아예 아픔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하던 일에 몰두했다.
그는 리비를 놓아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뒤 더욱 강하게 빨아들였다. 나오지도 않는 젖을 쥐어짜기라도 할 것 같은 자세였다.
“하지 마, 하지, 으응…… 아!”
리비는 정신없이 그의 어깨와 등을 할퀴고 머리를 잡아 뜯었다.
“하아, 하.”
또다시 떨어져 나간 그의 얼굴에는 배부른 듯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마치 어미젖을 한껏 빨아 먹은 뒤의 아기처럼 천진한 얼굴이라 리비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맛있어, 리비.”
“그럴 리가.”
“더 맛보고 싶어.”
그 말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그가 이번에는 치마를 걷어 올렸다. 미처 막을 새도 없이 단번에 아래에 입은 속옷이 끌어 내려지고, 벌어진 다리 새로 그가 얼굴을 처박아 왔다.
“안 돼, 안 돼애!”
서둘러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질척하게 젖은 아래에 보리스의 입술이 맞닿은 상태였다.
“젖었어, 리비.”
그가 기쁜 듯 중얼거리는 소리에 리비는 죽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가 갈라진 틈새로 혀를 밀어 넣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읏!”
리비는 허리를 휘며 교성을 내질렀다. 안으로 들이밀어진 두툼한 혀가 거침없이 미끈거리는 체액으로 덮인 안쪽을 누비기 시작했다.
츱, 츠읍.
얼굴을 바싹 붙인 채 빨아들이는 혀의 놀림에 리비는 그만 기절할 것만 같았다.
“괜찮아, 나도 젖었으니까.”
그가 뭐라 하는지 리비는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건 크니까…… 충분히 젖지 않으면 안 돼.”
엉덩이를 뒤로 슬금슬금 빼는 리비를 눈치챘는지 그가 아예 양다리에 고리를 걸듯 제 팔로 고정시킨 뒤 바삐 혀를 놀렸다.
리비는 그저 힘없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애썼다. 그럴수록 늪에 빠진 동물처럼 온몸이 옭아매지는 것 같았다.
“흐, 하아, 음…….”
보리스는 아래를 푹 적시고서야 제 할 일을 끝낸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리비는 몸부림친 끝에 모든 힘이 빠져나간 듯 축 늘어진 채 보리스를 올려다보았다.
“…….”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보리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뭘 하려는 거지? 이어지던 의문은 그가 몸에 걸친 모든 것을 떨궈 내는 걸 보며 말끔히 사라졌다. 온몸을 빼곡히 채운 날렵한 근육과 두툼한 가슴, 조각한 듯한 복부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리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를 정조준하듯 높이 치켜세워진 성기는 이미 잔뜩 흥분하여 잘금잘금 액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어딘가를 들쑤시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보였다.
리비는 흐릿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보리스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찌익.
리비의 옷이 마저 찢겨 나갔다. 실밥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매끄럽게 찢겨 나간 얇은 옷자락이 바닥으로 하늘거리며 떨어졌다. 그 모습을 황망하게 보던 리비의 눈에 보리스가 자신을 향해 몸을 숙여 오는 게 보였다.
“후…… 리비.”
잔뜩 낮아진 목소리에는 짙은 열기가 묻어났다. 리비는 곧 닥칠 일을 예감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안 돼!”
스윽, 뜨겁게 달궈진 쇠가 닿은 듯 아래쪽이 간지럽고 뜨거워졌다. 바짝 밀착된 부위가 벌름거리며 곧 들어올 침입을 반기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아래에 디밀어진 게 무엇인지, 그녀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혀나 손가락 따위가 아니다. 좀 전에 보았던 무시무시한 크기의 성기다. 저걸 대체 어찌 달고 말을 탈까 싶은 의문이 드는.
뭉툭한 앞쪽이 리비의 밀지에 닿았다. 그것은 안으로 들어올 틈을 넓히려는 듯 찔러 대고 있었다.
“보리, 스으, 흐윽.”
리비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댔다. 그 광경을 본 보리스의 얼굴에도 파문이 일었다.
“괜찮아, 리비. 응? 다 지나갈 거야.”
같잖게 해대는 위로에 리비는 머릿속이 팍 터져 버린 것 같았다. 그사이 묵직한 성기가 아래쪽을 비벼 대며 제가 들어갈 자리를 더욱 넓혀 가고 있었다.
“다 괜찮을 거니까…….”
“아아…….”
보리스는 귀두 끝을 얕게 파묻었다 빼기를 반복하며 리비를 달랬다. 낯선 감각이 차츰 몸에 퍼져 쾌락으로 바뀌려는 신호. 그것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진심이다. 정말로 자신을 가지려고, 그렇게 소유하려고 작정하고서…….
“흑…….”
기어이 울음이 터졌다. 모든 건 결국 보리스가 원한 대로 될 것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실이 서러워서 리비는 꺽꺽거리는 울음을 토해 냈다.
“…….”
그 울음에 당황한 건 보리스였다.
“왜 울어? 내가 그렇게…… 싫어?”
보랏빛 눈이 생기를 잃고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리비는 고개를 저었다. 침울하던 그의 눈에 반짝 빛이 어린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흐윽. 넌 아무것도 몰라, 보리스. 예나 지금이나.”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의 일부를 몸에 품은 채, 지금 당장 잡아먹혀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에서, 리비는 계속 싸웠다.
그의 품에 안겨 위로받고 싶은 마음과. 네가 조금 더 일찍 와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내게 아버지도 동생들도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죄책감과 싸웠다.
그 모든 것들과 싸웠다.
“너는 내 옆에 없었어.”
자유로워진 손으로 리비는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내가 가장 필요로 할 때, 너는 내 옆에 없었어. 그러니까 우린 이러면 안 돼.”
뜨거운 숨결로 속삭였다. 무언가 이상하다 느낀 보리스가 재빨리 그녀를 떼어 냈다.
“리비, 몸이 불덩어리 같아.”
보리스는 발갛게 달뜬 얼굴을 움켜쥐었다. 힘겹게 내쉬는 숨은 열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보리스, 나…….”
걱정스레 쳐다보는 눈이, 그 예쁜 보랏빛 눈동자가, 네 개가 되었다가 두 개가 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 안이 빙글빙글 돌았다.
“리비-!”
리비는 그의 품 안으로 무너져 내렸다.
***
보리스는 이상한 소년이었다.
아버지가 어린 그의 손을 잡고 딸에게 인사시켰던 그날부터, 단 하루도 이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리비, 보리스란다. 친구로 잘 지낼 수 있지?”
보리스는 하이든 백작의 뒤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리비는 목을 쭉 빼고 그와 눈을 마주치려 노력했다.
삐죽삐죽 뻗은 검은 머리칼이 눈 위를 덮고 있어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며칠 동안 먹이도 먹지 못하고 비에 쫄딱 젖은 까마귀처럼 새카맣고, 깡말라서는 키도 그녀보다 한 뼘은 더 작았다.
“보리스, 안녕?”
리비가 다가갈수록 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하이든 백작의 바지를 꼭 움켜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소녀는 야릇한 호기심이 돋았다. 바들바들 떨며 커다란 아버지의 몸 뒤로 숨기만 하는 소년의 얼굴을 꼭 봐야겠다, 반드시 인사를 받아 내고야 말겠다, 그런 오기가 샘솟았다.
“인사할 땐 눈을 봐야지.”
하지만 그는 되레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야.”
속삭이듯 부른 소리에 움칠 떨리는 어깨가 보였다. 뭐가 그렇게 무섭고 꺼려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이든 백작이 보리스의 손을 푼 뒤 머리를 몇 번 토닥여 주고 방을 나가자 그는 극도로 불안해 보였다. 백작이 사라진 문만 어미 잃은 강아지처럼 쳐다보았다. 이제 완벽하게 두 사람만 남은 상태였다.
“내가 무서워?”
“…….”
“안 갈게.”
리비는 손을 들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자 그제서야 소년의 어깨는 안정을 찾아 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리비는 손을 뻗어 소년의 팔을 잡아 홱 끌어당겼다. 불식간에 잡아채인 보리스가 휘청이며 끌려 나와 그녀 앞에 섰다.
두 사람은 너무 가까웠다. 보리스의 제멋대로 뻗은 머리카락이 리비의 눈을 찌를 만큼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드디어 볼 수 있었다.
“뭐야, 완전 예쁘네.”
검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건 물에 젖은 눈동자였다.
해가 뜨기 직전에 찰나의 시간 동안 마주할 수 있는 짙고 축축한 보랏빛. 어두운 것도 밝은 것도 아닌 아주 찰나의 시간에만 볼 수 있는 색깔.
“예뻐.”
순수한 감탄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예쁜 것은 처음 보았다고 맹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리비는 홀린 듯 그 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탁.
별안간 밀쳐진 몸에 리비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지금, 밀친 거야, 나를?
어이가 없어 올려다보는데 그는 다시 몸을 깊게 수그린 채 떨고 있었다.
“난…… 싫어.”
“뭐가?”
리비는 냉큼 일어나 치마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냈다.
“내 눈이.”
“왜?”
저렇게 예쁜데. 왜 싫다는 걸까.
“다들 불길하다고 싫어해. 이건 사람의 색이 아니래.”
“아, 그거.”
보라색 눈은 마족의 증거. 어디선가 흘려들은 이야기를 리비는 기억해 냈다. 그리고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리비는 보리스를 향해 척척 걸어갔다.
“그건 다, 네 눈이 너무 예쁘니까 질투하는 거야.”
리비는 그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아아, 이렇게 예쁜 것을.
“질투?”
소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급하게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수정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붉은 입술 위에 맺혔던 물방울이 후드득, 흩뿌려지며 바닥에 원을 그려 놓았다. 그러더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
그래, 이러니까 그러는 거야.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동경하지만 동시에 배척한다. 그것에 홀려 버릴 자신들의 모습이 두려워서. 빠지고 난 뒤 감당 못 할 스스로의 감정이 버거워서.
“그러니까 이렇게 가리지 마.”
리비는 손가락으로 이마에 드리워진 머리칼을 살짝 걷어 냈다.
커튼이 걷히듯 일순간에 이마와 눈, 곧게 뻗은 콧날까지 한 번에 드러났다. 처음으로 말갛게 드러낸 얼굴이 어색한 듯 그는 휙 고개를 돌리려 했다.
“피하지 마, 괜찮아.”
리비는 재빨리 그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어디서 살았어?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아빠는 너랑 어떻게 아는 사이셔?”
“…….”
많은 질문 속에 제대로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도 없었다.
“뭐, 그건 내가 여쭤보면 되니까.”
이 느림보에게서 대답을 듣기란 글러 먹었다는 것을 리비는 빠르게 파악했다.
“내일 친구들을 소개해 줄게. 어때? 같이 놀자.”
리비는 재촉하듯 그의 얼굴 가까이 자신을 들이밀었다. 놀란 거북이처럼 목을 뒤로 쑥 뺀 보리스가 피할 곳을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드디어 나오는 대답에 그녀는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왜?”
어째 넋 나간 듯 쳐다보는 시선에 리비가 묻자 그는 다시 고개를 툭 떨궜다.
어쩐지 귓가가 붉게 물든 것 같은 건 착각인가, 싶은 순간 그가 귀를 바짝 붙여 듣지 않으면 안 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싫어할 텐데.”
“너를, 왜?”
“눈이…….”
“말했잖아, 예쁘다고. 그리고 나랑 가니까 아무도 못살게 굴지 못해. 넌 나보다 키도 작으니까 내가 보호해 줄게. 그러니까 이렇게 수그리고 있지 마.”
리비는 굽은 그의 등을 탁탁 쳤다. 몇 번 두드리자 밀가루 반죽처럼 그의 등이 쭉쭉 펴지는 게 뿌듯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언덕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 무리에게 보리스를 데려간 리비는 한 명씩 아이들을 소개시켰다.
처음에 그의 보랏빛 눈을 보고서 ‘마귀의 자식이다!’ 소리를 내지른 폴은 리비에게 호되게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그가 한쪽 다리를 짚고서 뛰어다니는 걸 본 다른 아이들은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여기는 보리스야. 아버지께서 데려오셨어.”
리비는 일부러 ‘아버지’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아무리 호구 취급당하는 이름뿐일 백작이라도 귀족은 귀족. 가끔 그 이름은 그녀가 상상도 못 할 힘을 발휘하고는 했다.
“보리스? 성은 뭐야?”
“난 성이 없어.”
아이들의 질문에 보리스는 음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성이 없으면 얼마나 좋은데. 이름 말할 때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되잖아.”
리비는 옆에서 얼른 덧붙였고, 아이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자, 그럼 놀자.”
그녀는 보리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잠시 주춤거리던 보리스는 리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처음에 보리스를 슬슬 피하던 아이들은 그 옆에 찰싹 붙어 있는 리비를 따라 점점 그와 친해졌고, 끝내는 그의 기이하게 아름다운 미모를 찬양할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여자아이들은 특히 더 심했다.
“리비, 보리스 못 봤어? 오늘 하루 종일 안 보여.”
에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네가 괴롭히니까 그런 거잖아. 좀 따라다녀야지.”
“별로 안 따라다녔어. 걔가 널 따라다니는 게 더 심했지.”
에나는 작은 소리로 툴툴거렸다. 리비가 딱히 반박할 수도 없는 것이, 정말로 그랬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연하게 말한 것과는 달리 정말로 보리스의 행방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응, 하루 종일.”
고개를 끄덕이는 에나를 보면서 리비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디 간 거지.”
그날, 리비는 땅거미가 지도록 하루 종일 그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같이 뛰놀던 숲속이나 비밀 장소 같은 곳을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곳은 여우굴로 쓰이는 작은 동굴이었다.
에이, 설마, 하고 지나치려는 순간 리비는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짐승의 소리겠거니, 하기에는 너무도 익숙한 울음소리였다.
“보리스?”
몸을 잔뜩 굽혀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곳에 몸을 처박은 리비는 낑낑대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일단 몸이 들어가고 나자 동굴 내부는 훨씬 넓었다.
무릎걸음으로 앞을 향해 가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보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보리스임이 분명했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처박은 채였다.
“보리스, 왜 여기 있는 거야? 한참 찾았어.”
리비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까이 오지 마.”
보리스는 홱 몸을 빼내며 중얼거렸다. 그 기세에 놀라 손을 뗀 리비는 그제서야 그가 평소와는 다른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리……스.”
그의 등 뒤에 커다랗게 돋아난 새카만 날개. 그것은 그의 몸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이거…… 너.”
“흐…… 흐윽, 흑.”
뭐라 말할 수 없는 소리를 내며 그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보리스, 나 봐.”
몇 번의 설득 끝에 그는 겨우 얼굴을 돌렸다. 처음 만날 날의 눈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잔뜩 젖은 눈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보리스.”
그녀는 무작정 중얼거렸다.
“나, 안 예쁘지.”
리비는 그저 고개만 내저었다.
“무섭지? 이런 거, 이런 말도 안 되는 거. 이런 거나 달고 다니고…….”
흐윽흐윽, 들이켜는 울음이 더욱 커졌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리비는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뜨겁고 축축한 존재가 그녀의 품 안에 기를 쓰고 파고들었다.
그런 그를 리비는 피하지 않았다. 손에 감긴 것은 명백한 검은 깃털. 하지만 뿌리치지 않았다.
“아름다워.”
그녀는 다시 한번 그의 머리를 꽉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보리스는 아름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