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흰 장미의 성(2)
그녀의 얼굴 옆에 고정돼 있던 팔이 툭 꺾이면서 두 사람은 조금 더 가까워졌다. 훅 끼치는 뜨거운 숨결과 동시에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닿은 살갗이 간지러웠다. 명치에서 슬금슬금 올라오는 간지러운 감각에 리비는 몸을 비틀었다.
“대답해 봐. 그게 아니었다면, 순순히 나의 신부가 될 거야?”
그의 물음에 리비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 그의 눈은 기대에 가득 차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눈을 보자 리비는 다시 심란해졌다. 뭐라고 답해야 할까. 보리스가 괜한 상처를 입는 건 싫지만 그에게 괜한 희망을 안겨 주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굳게 결심한 뒤 그를 보았다.
“……그래도 너랑은 안 해. 너는 그냥 친구일 뿐이야. 그것도 8년 가까이 본 적도 없는, 이름뿐인 친구. 갑자기 나타나서 결혼식 날 신부를 납치해 간 천하의 나쁜 놈, 불한당. 내게 너는 그래.”
말을 할 때마다 독 가시를 하나씩 뱉어 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가시들은 남자의 심장에 날아가 정중앙에 꽂혔다. 그럼에도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니 울어도 소용없어. 울지 마, 너는 어릴 때의 보리스가 아니야. 다 커버린 남자일 뿐이라고. 내 위로 따윈 필요 없잖아?”
“울지 마, 보리스.”
늘 그렇게 그를 달래던 소녀는 이제 없었다. 나이가 찼고, 가문을 위해, 가족을 위해, 왕의 명령대로 결혼을 해야 하는 다 큰 여자일 뿐이었다.
“리비, 나 아파.”
마찬가지로 그녀의 옆구리에 파고들며 옷자락을 온통 적셔 놓던 소년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리비 하이든이지만, 네가 알던 ‘리비’는 아니야.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 어릴 때 한 약속 따위 잊어버려. 너는 내 남편이 될 수 없어. 나도 네 아내가 될 수 없고.”
칼처럼 내리꽂는 그녀의 말에 보리스는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
“그러니까 이거 풀어 줘. 아파.”
그녀는 담담히, 돌에 한 자, 한 자 글자를 새기듯이 말했다. 이미 껍데기만 남은 듯 공허한 남자의 얼굴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피하면 또 거짓말이라고, 둘러대는 말일 뿐이라고 하겠지. 그렇기에 그녀는 똑바로 그를 쳐다보며 끝까지 말을 이었다.
“이거 안 풀면 정말로 미워할 거야. 내 성질 알지? 혀라도 깨물 거야. 내가 한다면…….”
툭.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순식간에 끈이 풀리고 아래로 떨어진 팔은 감각을 잃었나 싶을 정도로 얼얼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 잔뜩 얼굴을 찌푸리는데 뜨겁고 촉촉한 것이 손목에 닿았다.
“아팠지.”
두툼하고 붉은 혀가 둥그렇게 팬 자국을 따라 쉬지 않고 핥아 댔다. 덩치 큰 개가 주인을 핥아 주듯 그렇게.
“알긴 알아?”
“미안해.”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그는 어쩔 줄 모른다. 더 열심히, 더 정성스레 그녀의 손목을 핥아 주는 것 외에는.
“다신 이런 짓 해봐.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는.”
“이젠 안 묶어, 정말이야.”
그는 서둘러 약속했다. 뻣뻣하게 굳어 있는 손을 주무르기를 반복하며 그녀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혀, 안 깨물 거지?”
“……생각 좀 해보고.”
설마설마했는데 효과가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를 인질로 삼아야만 말을 들어먹다니. 그녀는 기가 차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러길 바라지 않으면 내게 함부로 손대지 마.”
“알았어.”
그의 눈꼬리가 다시 시무룩하게 내려앉았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리비는 어째서인지 그에게 손을 내밀고 싶어졌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그녀는 다시금 불안해졌다.
저런 극악무도한 놈에게 동정이라니.
그런 건 있을 수 없다, 절대로.
“리비, 피곤하지?”
“그게 걱정돼?”
날카로운 되물음에 보리스는 또다시 찔끔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도 부정할 수 없었다.
피곤했다, 정말로.
보리스의 물음에 잊고 있던 피로가 온몸을 잠식해 오는 게 느껴졌다. 한창 침대 위에서 의도치 않은 몸 씨름을 하느라 지쳐 버린 몸이 사방에서 비명을 질러 댔다.
“그만 자. 옆에서 지켜 줄게.”
“누굴 위해서 지키는데?”
입에 칼이라도 문 것처럼 고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을 ‘지킨다’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녀는 모르지 않으니까.
“도망 못 가도록 지키려는 거잖아.”
리비는 얄밉다는 듯 그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마음껏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더 이상 의미 없는 말싸움을 계속하느니 그의 말처럼 그냥 자버리는 게 낫다. 몸은 물 먹은 솜처럼 자꾸만 아래로 꺼져 갔다.
“잘 거야, 그만 가. 어차피 여기서는 도망칠 수 없잖아.”
창밖을 보니 이미 달은 높이 떠올라 밤이 상당히 깊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자마자 잠이 쏟아져 눈꺼풀이 사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던 보리스가 재빨리 몸 위에서 내려와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 옆에서 자도 돼?”
그녀는 몽롱해진 눈길로 보리스를 보았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어린 시절의 보리스와 지금의 보리스가 겹쳐 보였다.
순식간에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가, 다시 소년이 되기를 반복했다. 키가 크고 몸집이 우람해졌어도 변하지 않는 건 하나, 그의 눈물 젖은 눈이었다.
“잠만, 응? 아무 짓도 안 할게. 우리 종종 그렇게…….”
리비는 그의 웅얼거림에 답했다.
“잤었지, 나도 알아.”
보리스는 종종 밤에 그녀를 찾아왔다. 문득 열린 창문을 타고 들어온 바람에 그녀가 살풋 잠을 깨면 창문에 앉아 있던 새카만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흔들거리는 검은 그림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리비, 같이 자도 돼?”
그러면 그녀는 손을 뻗어 허락했다.
“응, 여기로 와. 내 옆에서 자. 하지만 아침이 되기 전에 나가야 돼.”
“응, 물론이지.”
확, 달려드는 그를 리비는 두 팔을 벌려 안아 주었다.
그때처럼, 그래, 그때처럼.
보리스는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허락해 주기를.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리비는 몇 번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다가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안 돼.”
***
뭔가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느낌에 리비는 몸을 뒤챘다. 그녀의 몸을 속박한 것은 무거울 뿐만 아니라 집요하기까지 했다.
몸을 틀어 빠져나가려 할수록 더 강하게 그녀의 몸을 옭아맸다. 단단히 감기는 힘에 남아 있던 잠이 점차 달아나 버렸다.
마침내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고이 감긴 두 눈이었다.
숱 많고 새카만 속눈썹이 얼굴에 우아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아래 우아하게 솟은 코와 살짝 벌어진 입술까지 차례차례 눈에 담는 동안, 리비는 점차 현실로 돌아왔다.
아, 맞다.
‘나 납치됐었지.’
푹신한 침대에 누워 그 생각을 하고 있자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이 모든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이지 않은 건 바로 옆에 누워 있는 남자의 존재였다. 잠든 그의 얼굴은 순하디순한 양처럼 보였다.
눈을 감은 모습은 영락없는 소년의 얼굴이었다. 얼굴선도 그린 듯 곱고, 섬세한 선을 그린 입술은 그녀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반면 알맞게 솟은 광대와 전에 비해 날렵해진 턱선은 강한 남성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리비는 손을 내밀어 제멋대로 흩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
앞머리를 쓸어 넘기자 또 다른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앞머리가 흩어져 내려와 이마를 가렸을 때와 젖혀졌을 때 그의 인상은 완벽하게 달랐다.
반듯한 이마가 드러나자 숱 많은 눈썹, 남자다운 얼굴선이 좀 더 또렷하게 드러났다.
그 상반된 모습에 리비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
아마도 그가 꽤나 여자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는 단순히 잘생겼다, 라고 말하기는 조금 아까운, 아니 심히 모자란 얼굴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예쁘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너무 약한 표현이다.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신비로움, 범접할 수 없으면서도 눈물 한 방울 떨구면 금세 마음이 약해지는 마법을 부리는 얼굴.
그것에 홀랑 넘어가 화도 제대로 못 내던 때가 절로 떠올랐다. 그건 어제 역시 마찬가지였고.
리비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떼어 냈다. 사르르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다시 그의 이마를 덮었다.
리비는 손을 옮겨 빽빽한 눈썹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다시 콧잔등을 쓸어내려 온 손이 입술 근처를 맴돌았다. 어제, 이 입술에…….
화륵 붉어지는 얼굴을 느끼며 그녀는 머리를 흔들어 잔상을 떨쳐 냈다. 그리고 말했다.
“보리스, 눈떠.”
파르르 떨리는 숱 많고 진한 검은 속눈썹이 그녀에게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는 척하는 거 다 알아.”
“…….”
떨림이 좀 더 심해지는가 싶더니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제비꽃 같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리비.”
문득 아련하게 부르는 소리에 리비는 그를 때리던 손을 멈췄다. 정확히는 그의 손에 양손이 모두 잡혀 버렸기에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깬 거, 어떻게 알았어?”
그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에도 그랬으니까.”
정말로 자는지 안 자는지, 알아내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다.
아침이 오기 전에 가야 한다고 누누이 일렀음에도 그는 종종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렇게 둘은 아침을 함께 맞이하고는 했다.
물론 아버지든 다른 자매든, 하녀들이 올 때 그를 숨기느라 진땀 뺀 건 리비였다.
“내가 그때 얼마나 곤란했는데.”
이불로 꼭꼭 싸매 뒀더니 하녀가 들어와 이불을 털겠다고 하지를 않나, 동생들이 들이닥쳐 한바탕 침대 위를 구르지 않나, 아찔한 순간들은 수도 없이 찾아왔다.
“미안해. 하지만 갈 수가 없었어.”
잔뜩 웅크린 몸이 이불 속으로 점점 기어 들어갔다. 어쩐지 같이 밤을 보낸 후 잔뜩 수줍은 여자 같았다.
이불 속에 감춰진 매끈한 나신하며 살짝 붉어진 얼굴…….
가만, 이건 뭔가 바뀌었는데.
리비는 그제서야 자기가 한쪽 손을 턱하니 괴고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지, 사귀는 것도,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바뀌고 말고 할 게 어디 있나.
그저 자기는 밤중에 커다란 개와 함께 잤을 뿐임을 상기했다. 그리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다.
“왜?”
“잠든 네가 너무 예뻐서.”
“…….”
“정말이야.”
그는 재빨리 덧붙였다. 살짝 굳은 그녀의 얼굴이 또 자기가 뭘 잘못 말했구나 지레 겁먹게 만들었다.
“누가 거짓말이래?”
사실 아침에 그를 깨우지 못한 건 그의 탓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탓에 가까웠다. 이유 역시 그와 같았다.
잠든 그는 너무 아름다웠으므로. 때때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리비 또한 그를 깨울 수 없었다.
잠든 모습을 한참이나 보고 있다 보면 어느새 날은 밝았다. 그리고 소녀의 시선을 의식한 보리스는 역시나 같이 눈을 뜨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 말은 나중에 결혼할 부인에게나 해.”
또, 또. 금세 젖어 드는 눈망울을 보며 그녀는 부러 잔인한 소리를 내뱉었다. 더 이상의 감상에 빠지는 걸 막기 위해서다.
“이제 깼지? 그만 내려가.”
리비는 순식간에 그의 몸을 덮고 있던 시트를 휙 벗겨 냈다.
“…….”
리비는 시트를 들춘 자세 그대로 멈춰 버리고 말았다. 새삼스럽게 그의 맨 가슴이 시야에 적나라하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근육들이 꽉 짜여 있는 몸은 조각상 같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어제 봤던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은데. 새삼 밝은 낮에 그의 벗은 상반신을 마주하고 있자니 또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내내 저 품에 안겨 있었으면서도 자각하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다.
망설이는 사이 시트를 들어 올린 손은 그대로 보리스에게 잡아채였다.
“……!”
보리스는 손을 쭉 뻗어 허공에 멈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제 머리 위로 올려놓았다.
“더 해줘.”
“……뭐?”
“더 해달라고.”
아침 이슬을 머금은 꽃잎처럼 청순하던 눈빛은 어느새 야한 빛을 듬뿍 머금고 있었다.
“방금 하던 거. 계속해 줘.”
그는 예쁘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리비는 아주 잠시 아찔해졌다. 아주 유해한 생명체가 제대로 유혹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응? 좀만 더 만져 줘.”
그는 아예 몸을 움직여 리비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아예 리비에게 파고들 듯 어깨와 목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얼굴을 비벼 댔다.
덩치 큰 짐승이 부리는 것 같은 애교에 리비는 적잖게 당황하고 말았다. 커다란 몸을 해가지고는 제게 파고드는 꼴이라니.
“얼른.”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목소리는 나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소리는 지나치게 귀에서 가까이 들렸고, 그가 내뿜는 숨마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니까, 너무 가깝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바짝 밀착된 그에게서 일단 떨어지고 봐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엉거주춤 엉덩이를 뒤로 뺀 순간, 굵은 팔이 뒤에서 단단하게 허리를 감아쥐었다.
“아……!”
어설프게나마 물려졌던 몸은 어느덧 다시 바짝 밀착되고 말았다.
따뜻하고, 단단한 몸이 부드럽게 자신의 몸을 압박해 왔다.
말랑한 자신의 몸에 비해 그는 지나치게 크고 단단했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랬다. 그의 몸에서 단단하지 않은 구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근육으로 뒤덮인 단단한 팔, 가슴, 너른 어깨와 말처럼 길고 탄탄한 다리, 그리고…….
“보리스.”
아주 건강하게 아침을 맞이한 그것.
‘그것’이 느껴졌다. 리비는 순간 혀를 깨물 뻔했다.
“…….”
“리비?”
몇 번인가 더 그가 이름을 불러 왔지만 리비는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저리, 저리 가, 힉.”
그래, 생, 생리적인 거야, 생리적인 거!
가까스로 도달한 결론에 말문이 트인 리비는 사색이 된 채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당연히 보리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리비는 몇 번이고 부질없는 행동을 반복했다.
내가 잠깐 피해 줄게, 같은 되도 않은 소리를 하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했다. 결국 그 광경을 귀엽다는 듯 지켜보던 보리스가 되레 홱 그녀를 잡아당길 때까지.
꼭 끌어안긴 채 리비는 발버둥을 쳐댔다.
“맞아, 리비, 생리적인 거야. 그러니까 가지 마.”
“이, 이 짐승, 너어……!”
리비는 마구 발버둥을 쳐댔다. 그럴수록 그의 것이 더욱 딱딱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리비. 그렇게 움직이면 안 돼…….”
그에게선 이제 정말로 고통스러운 음성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리비는 그 쥐어짜 내는 듯 괴로운 목소리에 경악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의 품에서 빨리 벗어나려 더더욱 몸부림을 쳤다.
“리비…… 잠시만.”
그는 정말로 고통스러운 듯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러는 바람에 두 사람의 몸은 좀 더 가까워졌고, 리비는 그 생경한 느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굵고, 단단한 것이 머리를 들이밀며 둔부에 거칠게 문질러졌다. 말랑한 엉덩이를 쿡쿡 찌르며 점점 그 크기를 키워 갔다. 둘 사이를 천이 가로막고 있었음에도 그 모양새는 선연히 느껴졌다.
“이게 대체…….”
리비는 기겁해서 몸을 물렸다. 하지만 이내 강철같은 팔에 붙들려 도로 끌려오고 말았다. 두 사람의 몸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바싹 붙어 버렸다.
“잠시만, 리비.”
목덜미에 문질러지는 입술은 뜨거웠다. 동시에 거친 숨을 내뿜고 있었다.
“보……리스.”
뜨겁게 달군 쇠를 품에 안은 것처럼 리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잠시면 돼.”
그는 뜨거운 몸과는 반대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갈한 음성을 내뱉었다.
낮고 낮은, 차마 욕정을 모두 잘라 내지는 못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자극당한 리비는 발끝을 꾸욱 오므리며 숨을 훅 내쉬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그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얼핏 음울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가 옅은 신음을 냈다.
새빨간 숨이었다. 이제 막 용광로에서 끄집어낸, 새빨갛게 달군 쇠 같은 몸이 리비의 아랫도리를 마구 찔러 대고 있었다.
“잠깐만, 이대로.”
보리스는 몸을 바짝 붙인 채로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뱀처럼 꼿꼿하게 고개를 쳐든 것이 엉덩이를 마구 찔러 댔다.
“너, 너 뭐 하는 거야.”
처음에는 이상했다. 하지만 그가 몸을 마찰해 올수록 이상하고 야릇한 감각이 리비의 하체를 데우기 시작했다. 이내 리비의 입에서도 뜨겁게 데워진 숨이 뿜어나오기 시작했다.
“놔줘, 놔…….”
리비는 작살에 맞은 물고기처럼 몸을 뒤틀었다. 그러다가 슬쩍 벌어진 다리 사이로 뜨겁고 단단한 것이 쑥하고 밀려 들어왔다. 마치 미꾸라지처럼 매끄럽게 밀려 들어와 자리 잡은 그것은, 크기만큼은 결코 미꾸라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굵고 길었다.
“아……앗.”
리비는 다리 사이를 파고든 그것을 얼떨결에 허벅지로 꼭 조이고 말았다. 얇은 잠옷 사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그의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리비는 다리에 꽉 문 채로 몸을 비틀었다.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큿……리비.”
졸지에 큰 자극을 받은 보리스가 밭은 숨을 내쉬었다. 그는 더욱 바짝 몸을 붙여 왔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더…….”
보리스는 그녀의 움직임을 봉쇄하려는 듯 온몸을 꽉 안아 자신의 품 안에 고정시켰다.
리비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선을 내리자 새하얀 허벅지 사이로 툭 튀어나온 보리스의 두툼한 성기가 보였고, 그녀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옷에 덮여 있어 그 형태가 온전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불룩 솟아오른 것만으로 보통 크기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보리스, 보리스으…….”
다리를 풀어내려 했지만 이미 단단히 꼬여 버린 다리는 그의 것을 쥐어짜 낼 듯이 조이고 있었다. 그 자극에 보리스는 이미 완전히 미쳐 버린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에 이성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리비, 금방 끝낼게.”
“뭐, 뭘 끝낸다는 거야?”
리비는 울먹거렸다. 이 다음은 무엇일지 상상하기도 두려웠다. 다리 사이가 가렵다. 아니, 발끝에서부터 찌릿하게 올라온 자극이 온 전신을 장악하는가 싶더니 그의 몸 일부를 품은 곳은 금세라도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감각인지 헤아리기조차 무서웠다.
“보리스, 나 무서워, 무서워.”
“쉿, 괜찮아, 괜찮아, 리비.”
달래는 그의 목소리도 이미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그가 하기에 적합한 말인지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별안간 허리를 감싼 팔이 더욱 리비를 강하게 옥죄어 왔다. 남은 손은 엉덩이를 콱 쥐어 제게로 더욱 잡아 붙였다.
그 대담한 행동에 리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숨만 가쁘게 내쉬었다. 다리 사이를 마찰하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거칠어졌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리비, 네 얼굴을 보며 가고 싶어.”
가? 어딜 가? 그의 말뜻을 제대로 생각해 보기도 전에 보리스가 리비를 돌려 눕혀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내 목에 팔을 둘러.”
그의 명령에 리비는 침만 꼴깍 삼켰다. 어쩐지 목에 팔을 두른다는 건 이 모든 행위를 허락한다는 의미 같아서였다. 리비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서.”
그가 다시 재촉하며 하체를 부드럽게 문질러 오자 리비는 작게 소리를 내지르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희고 가느다란 팔이 굵은 목에 휘감기자 보리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입술로 리비의 목덜미를 문지른 그가 이내 자신의 볼을 리비의 어깨 끝에 천천히 파묻었다. 살결에 닿은 머리카락이 간지럽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하윽.”
다리 사이를 질척하게 오가는 감각이 선연했다. 문질문질, 위아래로 문지르며 맞닿는 살갗이 조금 꺼끌거렸다.
“이상, 이상해, 이거…… 보리스.”
그녀는 진심으로 울고 싶었다. 꼭 다물린 다리 새로 굵고 미끈한 것이 여러 차례 왕복할 때마다 예민한 살갗이 쓸려서 야릇한 느낌을 자아냈다.
“쉿, 괜찮아.”
이제는 그가 그녀를 달래고 있었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음성이었으나 그녀의 아래에 비벼 대는 몸짓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그는 곧장 안으로 치고 들어올 듯 거세게 아래에 문질러 대는 중이었다.
야하게 마찰하는 물소리가 울려 퍼질수록 리비는 그의 목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으응, 보리스, 나 좀 어떻게, 앙, 흐앙…….”
그의 움직임을 저지하려 다리를 꼭 조이면 조일수록 이상한 느낌은 더욱 찌릿하게 전신을 울리고 올라왔다. 극과 극을 달리는 감각이었다.
“……해줘, 어떻게든…… 흐읏, 앗.”
창피함이고 수치심이고 뭐고 뒷전이었다. 그저 이 이상한 몸 상태를 빨리 어떻게든 해주었으면 했다.
어떻게, 대체 어떤 방법으로?
자신은 알지 못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보리스는 잘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어디서 그런 믿음이 샘솟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흐……윽.”
희고 가느다란 팔이 굵은 목에 휘감기자 보리스의 입가에 다시 한번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입술로 리비의 목덜미를 문지른 그가 다시 한번 허리를 부딪쳐 왔다.
다리와 다리 사이, 예민한 부위를 찾아 그의 것이 정확히 파고들어 거칠게 문지르기를 반복했다. 속옷과 잠옷이 그의 침입을 막고 있긴 했지만 열기를 품은 기둥은 그것마저 뚫어 버릴 듯 더욱 단단하게 일어서 있었다.
“아읏, 으…… 보리스, 그만, 그마안.”
아래가 이상했다. 축축하고 뜨끈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애액이 이미 하체를 잔뜩 적신 후였다. 부정하려 해도,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미끈거리는 애액에 얇은 옷감이 들러붙어 그가 전해 주는 자극은 한층 더 배가 되었다.
“리비…… 안 돼. 그건…… 안 돼.”
뭐가 안 된다는 거야, 리비는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의 품 안에서 잔뜩 달아오른 신음을 뱉는 것이 전부였다.
“싫어, 리비?”
그의 질문에 리비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는 게, 싫어?”
당연하지, 이 바보야. 울먹이는 소리 사이로 원망의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싫어?”
마지막 질문에서는 기어코 엉엉 울어 버리고 말았다.
“보리스으…….”
옷을 사이에 두고 문질러지는 하체는 뜨거운 물 위에 놔둔 초콜릿처럼 흐물흐물해졌다. 오로지 얽혀 있는 살의 감촉만이 예리하게 타고 올라왔다.
찌익.
불길한 소리에 리비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귀를 깨무는 단단한 치아의 감촉에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뭐지?’
천을 사이에 두고 문질러지던 감촉이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그가 바지춤을 풀어 제 것을 완전히 해방시켰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아, 으응.”
생전 들은 적 없던 소리에 리비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손이 하얀 치맛자락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끝이 닿은 곳은 은밀한 부위를 가린 자그마한 천이었다.
커다란 손에 비해 거기에 쥐어진 속옷은 잠자리 날개처럼 연약하기만 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손쉽게 바스라져 버릴 것 같은…….
리비는 그가 그것을 정말로 찢어 버릴까 봐 무서웠다.
“보리스, 아, 안 돼.”
불현듯 밀어닥친 두려움에 리비는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흡, 들이켜진 숨과 함께 리비의 옷을 쥐고 있던 손의 힘도 약간은 풀리는 게 느껴졌다.
“제발, 응?”
리비는 그의 목을 한껏 끌어당기며 애원했다. 만약 그가 정말로 저 옷을 찢어 버린다면.
두 번 다시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부탁이야, 보리스.”
그는 잔뜩 움켜쥐고 있던 손의 힘을 풀어내었다. 스르르 풀린 손에 잠시 안도한 순간,
찌익.
속옷은 완전히 찢어지고 말았다.
“안 돼!”
얇디얇은 천은 이미 푹 젖어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것이 허무하게도 그의 손에 들려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며 리비는 숨을 삼켰다. 이제 아래를 가린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얇은 치맛자락이 덮여 있긴 했지만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보리스…… 흑!”
발갛게 달아오른 연약한 살점 사이로 남자의 굵직한 기둥이 자리 잡았다. 당황해서 뒤로 빼려는 엉덩이를 커다란 손이 잡아서 제게로 끌어당겼다. 또다시 바짝 밀착한 몸은 이제 아무런 방해물도 없이 서로의 열기를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아응, 아.”
겨우 천 조각이 사라졌을 뿐인데. 다리 사이를 채운 뜨끈한 온기는 이전과는 비할 바 없이 뜨거워졌다.
맨 살갗 위로 바로 닿은 보리스의 성기는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그녀의 안을 파고들 듯 다리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싫어, 싫…….”
그녀가 울며 애원했지만 하얗고 뽀얀 엉덩이를 꼭 그러쥔 남자의 손은 풀릴 줄 몰랐다.
“읏!”
그는 다시 한번 거세게 하체를 문질러 왔다. 굵직한 기둥에 돋아난 핏줄과 우둘투둘한 표면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좀 전보다 더 빠르고 거센 몸짓에 리비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져 갔다.
강철같은 팔이 넝쿨처럼 몸을 휘감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더 안쪽 깊숙이 문지르며 그는 쉼 없이 허리를 놀렸다. 리비는 그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죽어라 힘을 주며 매달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보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리비의 입술을 제 입술로 덮어 버렸다. 두툼한 혀가 치열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제멋대로 안을 누비기 시작하자, 리비는 숨이 모자라 할딱댔다. 츠읍, 츕, 듣기에 낯간지럽고 민망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보리스의 몸짓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보리……스으.”
리비는 뭉개진 발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 댔다.
“흐윽…….”
커다란 손이 엉덩이를 잡아끌어 몸을 밀착시키더니 이내 뜨뜻한 액체가 아래를 적시는 게 느껴졌다.
“하, 하아…….”
마침내 떨어진 입술 새로 리비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천천히 고개를 내리자 다리 사이를 온통 적셔 버리고도 남을 만큼의 희뿌연 액체가 음모 사이에 엉겨 있는 것이 보였다. 고여 있던 것이 천천히 움직여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야한 장면이었다. 이런 것은 이전에 본 적이 없다. 당연히 겪은 적도 없다.
“괜찮아?”
멍한 와중에 이마를 문지르는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이마를 지난 입술이 눈꺼풀에 맺힌 눈물을 머금더니 상기된 뺨과 입술에 차례로 닿았다.
“…….”
리비는 그가 핥고 빠는 대로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딱히 그러려는 의지는 없었다. 의지란 것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리비의 머릿속에는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의지대로 행동하는 인간이었던가, 하는 의문마저 생겨났다. 좀 전에 지나간 건 뭐였지, 내가 했던 건 뭐였지. 보리스가 내게 한 일들은?
생각나는 질문은 많지만 그중 어떤 것도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으니까.
“리비.”
그가 다시 한번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 버린 공기를 인지한 듯, 그는 리비를 바라보았다. 리비는 천천히 그와 눈을 마주쳤다.
뭔가 굉장한 짓을 해버린 느낌이었다. 이전에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행위.
리비 역시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니 당연히 남녀가 밤에 둘만 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겪는 것의 차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방금 겪은 일이, 언젠가는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 축소판이 아니라 정말, 정말 그것을 온전히 해야만 하는 때가 온다면?
그때 내 옆에 있는 게 보리스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라면?
덜컥 겁이 났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살짝 몸을 떨었다. 되새길수록 마음속에는 커다란 파문만 번져 갔다.
“리비.”
정체불명의 파문은 다정한 토닥거림에 차차 크기를 줄여 갔다. 하지만 원래 크기로 돌아가고 나서도 여전히 위협스러운 생각이라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리비는 울컥 차오른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속삭였다.
“너…… 너어.”
결국 울먹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리비…….”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애달프게 부르는 소리에 리비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둘 사이에서 피어오른 열기가 아직 공기 중에 또렷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태어나 처음 겪은 경험이고 느낌이었다. 리비는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쁜, 이, 짐승, 이 나쁜.”
퍽퍽, 리비는 되는 대로 손을 뻗어 그의 몸을 내리쳤다. 작은 주먹이 쿵쿵 그의 두껍고 단단한 가슴팍을 몇 번이나 내리치는 동안에도 그는 꿈쩍도 않고 그런 리비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매우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리고, 턱.
리비가 휘두르는 대로 맞아 주던 보리스가 갑작스레 손을 뻗어 가느다란 양 손목을 움켜쥐었다.
“놔.”
“그만, 리비. 손 아프잖아.”
보리스가 그녀를 달랬다. 리비의 씨익씨익 내쉬는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불규칙하게 내뱉는 숨소리 탓에 어딘가 크게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하게.”
“뭐?”
말의 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보리스가 제 뺨을 세게 후려갈겼다. 퍽, 소리가 나도록 세게 치는 손속에 리비는 기함하고 말았다.
“뭐 하는 거야! 그만해!”
리비는 반대편 뺨도 내려치려는 그의 손을 잡아 붙들고 늘어졌다.
“리비 손이 아프니까.”
“미쳤나 봐.”
리비는 그를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자기 얼굴을 때리는 바보가 어디 있어? 그나마 그 얼굴마저 없으면…….”
“없으면?”
“…….”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리비는 꼴깍 침을 삼켰다.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보랏빛 눈은 그녀를 무장해제 시키는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것일까.
“없으면, 싫어?”
“아니야, 그런 거.”
리비는 서둘러 머리를 저었다.
“그럼 좋은 거네?”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건데.”
“기뻐.”
그의 웃음 가득한 얼굴을 보며 리비는 반박하려다가 말았다.
“리비, 많이 놀랐어?”
그는 리비를 꽉 끌어안은 채 등을 토닥였다. 다시 몸이 찰싹 달라붙자 좀 전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떨어져.”
리비의 울먹거림에 보리스는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보지 마.”
리비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려 했지만 이미 보리스에게 양 손목이 잡힌 뒤라 쉽지 않았다.
한차례 폭풍이 휘몰아친 뒤, 정신이 돌아오자 리비는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축축하게 젖은 치마는 다 찢어졌고 반쯤은 산발이 된 머리카락이 아주 장관이었다.
게다가 다리 사이는 끈적거리고, 어쩐지 숨도 한껏 가쁘게 쉬고 있어 마치 전력으로 성 한 바퀴를 질주한 것처럼 느껴졌다. 혹은 거친 진흙길 위를 제멋대로 날뛰는 말과 함께 가까스로 횡단한 듯한 모습 같기도 했다.
“으…… 으으!”
분노와 흥분이 차례대로 스치고 지나간 뒤 남는 건 말할 수 없는 허무함이었다. 그리고 수치심이었다.
내가 어떻게 자랐는데!
내가 얼마나 곱고 참하게 자랐는데!
리비는 그대로 몸을 홱 돌려 누웠다. 등 뒤로 어쩔 줄 모르는 보리스의 모습이 상상되었으나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러려고 날 데려왔어?”
“리비, 미안해, 난…….”
“네 맘대로 가지고 놀려고?”
리비가 쏘아붙이자 보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혼자 있고 싶어. 그만 나가 줘.”
그렇게 말하고서 리비는 다시 덧붙였다.
“아, 넌 성주랬지. 내가 건방지게 명령을 했네. ‘초야’를 바쳐야 하는 주제에.”
제멋대로 비비 꼬인 말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저리 가.”
리비는 베개를 잡아 보리스가 있는 쪽으로 내던졌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으면서 고스란히 맞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고서 자신의 꼴을 내려다보자 정말로 볼만했다. 땀과 자신과 보리스, 두 사람이 흘린 흔적들로 전신이 온통 얼룩덜룩했다.
“흐우…….”
울음 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부끄러웠다. 이런 모습을 하필이면 보리스가 보고 있다는 것도. 이런 행위를 나눈 게 그 누구도 아닌 보리스라는 사실도.
난생처음 겪는 일이라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였다.
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리비를 휙 안아 올렸다.
“뭐 하는 거야!”
“갈아입혀 줄게.”
“시, 싫어!”
리비는 그에게 안긴 채로 소리를 꽥꽥 내지르며 팔다리를 마구 휘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보리스는 리비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흡사 돌벽에 갇힌 기분이었다.
“놓으라니까!”
앙칼진 리비의 외침에 보리스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하녀들이 들어오면 다 보게 될 텐데.”
나야 상관없지만, 이라는 시선으로 그는 리비의 몸을 훑었다.
“……그건 싫어.”
리비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집에서 동생들을 돌봐 주는 하녀 겸 보모가 있긴 했지만 목욕 시중을 받는 사치는 누려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이런 몸을 보인다는 게…… 무척 부끄러웠다.
멀쩡한 몸이어도 부끄러울 마당에, 이렇게 흠뻑 젖어 볼썽사나운 꼴을 보여야 한다니. 절대 사양이다.
“알았어.”
대체 저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보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리비를 보고 그제야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으으.”
왠지 그에게 훌쩍 넘어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역시 이 꼴을 다른 사람들이 본다는 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얌전히 양손으로 주먹을 꾸욱 쥐고 가만히 서서 버티기로 했다.
보리스는 얌전해진 리비를 내려놓은 뒤 옷상자를 열어 옷을 꺼내 왔다. 어젯밤에도 저기서 옷을 꺼내 갈아입힌 모양이다.
“내, 내가 할게.”
리비는 서둘러 손을 내밀었지만 그가 잽싸게 치워 버리는 바람에 허무하게 허공만 갈랐다.
“매듭이 등 뒤에 있어서 힘들 거야.”
그의 말대로, 등 뒤에 달린 매듭은 혼자 손을 뻗어 풀기에는 많이 애매했다.
“그, 그래도…….”
어물쩍하는 사이 등 뒤로 뻗어 온 손이 매듭을 하나둘 끌러내기 시작했다.
리비는 손아귀에 잡힌 새처럼 꼼짝도 못 하고 그가 하는 대로 놔둘 수밖에 없었다.
“읏…….”
얇은 잠옷이 살짝 벗겨지고 뽀얀 어깨 한쪽이 드러났다. 열심히 몸을 웅크리고 손으로 가려 봤지만 일부가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리비의 몸집이 아무리 작다 한들 그 몸이 개미만큼 작은 것은 아니니까. 완전히 숨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직 옷이 다 벗겨진 것도 아닌데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불로 지지는 듯 뜨거웠다. 좀 전에 그런 일이 있었던 직후여서일까, 타다 만 불꽃의 잔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대로 옷이 훌렁 벗겨져 바닥에 내려앉을까 싶었던 리비는 보리스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에서 떨어지기 전, 가까스로 그의 손에 들린 옷을 잡아챘다.
그리고 즉시 새 옷을 머리부터 후다닥 뒤집어썼다. 그 후 마치 목숨 줄처럼 꼬옥 잡고 지키고 있던 잠옷을 옷 아래로 툭 떨어뜨리며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간신히 해냈다.
그리고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보리스는 별다른 말 없이 리비의 등 뒤로 늘어진 매듭을 꼼꼼히 묶어 주기 시작했다.
“다 됐어.”
보리스가 속삭였다.
“찝찝하지 않아? 씻겨 주고 싶은데…….”
“싫어, 절대로 싫어!”
리비는 두 다리를 마구 굴러 강력한 저항 의지를 내보였다.
“넌, 안 갈아입어?”
“……나?”
보리스는 그제서야 자신의 꼴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주름이 잘 지지 않는 옷감으로 만들어졌을 터인 바지가 엉망으로 구겨진 데다가, 땀에 흠뻑 젖어 온통 얼룩덜룩했다.
그는 주름이 유독 많이 져 있는 중심부를 쓱 자신의 손으로 훑어 주름을 팡팡 펴냈다. 그러곤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한 이러저러한 것들로 더러워진 게 분명한 옷감도 대충 툭툭 털어 냈다.
“난 괜찮아.”
그러고선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해맑은데, 한없이 순수해 보이는데, 이상하게 그 모습이 너무 퇴폐적이고 선정적으로 보였다. 그 바람에 리비는 잠시 현기증이 일었다.
“……안 돼.”
“응?”
“그러고 나가면 안 돼.”
“왜 안 돼?”
“아무튼 안 돼.”
“…….”
보리스는 멍하니 리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듯했다.
“리비 뜻이 그렇다면.”
“네 옷은 없어?”
“……있어.”
보리스의 말에 리비는 재빨리 다른 옷상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거기서 적당한 바지와 상의를 찾아내 들고 왔다.
“너도 갈아입어. 이 꼴로 나갈 셈이야?”
그녀는 던지듯 옷을 보리스의 가슴팍에 던졌다. 옷을 받은 보리스가 잠시 그것을 보더니 주저 없이 입고 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갑자기 벗으면 어떡해!”
리비는 그가 바지춤에 손을 대는 걸 보며 재빨리 돌아섰다. 순식간에 귓불까지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옷이 몸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얼마간 들리더니 절그럭 소리도 들렸다.
“……다 입었어?”
“응.”
리비는 다시 뒤를 돌아 그를 보았다. 훨씬 멀끔해진 모습의 그를 보며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보리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따가 올게, 리비.”
그는 가슴 앞섶의 끈을 묶으며 말했다.
“……오든가 말든가. 어차피 네 맘대로 할 거잖아?”
가시 돋친 답에 보리스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나, 이 방에 계속 있어야 해?”
“아니야. 성 안에서는 얼마든지 돌아다녀도 돼. 여긴 네 성이니까.”
“내 성?”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리비는 보리스를 휙 돌아보았다.
“응, 이건 네 거야, 리비.”
“난 이런 거 필요 없어.”
리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야멸차게 말했다. 그러다가 그가 하는 꼴을 보고는 이마를 찌푸렸다.
옷의 끈을 채우던 그는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다. 그녀의 잔뜩 날이 선 목소리에 긴장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간신히 묶었던 끈을 도로 풀어내고 있었다. 잔뜩 엉킨 여밈 끈을 하나씩 풀어내는 그의 이마에 살짝 땀이 맺혀 있었다.
“왜 이런 거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거야, 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리비가 보다 못해 다가오자 그는 부엉이처럼 눈을 둥그렇게 떴다.
바로 앞까지 다가선 리비는 구멍에 얼기설기 끼워져 있던 끈을 하나씩 풀어내었다.
그는 엉거주춤 몸을 숙인 채로 리비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잘생겨도 이런 게 단정치 못하면, 다들 무시하는 거야. 이제 기사단장이라며, 공작위도 받았다며. 그러면 위엄을 갖춰야지. 안 그러면 다른 기사들이 무시할 거야.”
리비는 가지런하게 풀어낸 끈을 잘 엇갈려 제자리에 집어넣은 뒤 깔끔하게 매듭을 지어 주었다.
“…….”
“다 됐어.”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을 외면한 채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혹여나 그가 또다시 ‘나를 걱정해 주는 것이냐’고 묻기 전에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런데 무슨 얘기야? 내 성이라니.”
“응, 이 성은 네게 바치는 거야.”
“이 성은 에드라크를 다스리는 영주님의 성이야. 나랑은 상관없어.”
“흰 장미의 성. 이 성의 이름이야. 네가 좋아하는 꽃.”
“…….”
“아직은 허름하지만, 수리가 끝나면 꽤 볼만해질 거야. 이런 성에서 살아 보고 싶다고 했잖아.”
“허름하지 않아. 비록 오래되어 낡은 곳이 있을지언정.”
“보리스, 나는 온통 흰 장미로 뒤덮인 새하얀 성에서 살아 보고 싶어.”
그 말도 자신이 한 말이 맞았다. 리비는 불쑥 고개를 들이민 기억에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문득문득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내는 재주가 있었다. 자신조차도 잊고 있었던, 아주 멀고 먼 옛 기억이었다.
“누구 맘대로 내 성이야. 나는 받겠다고 한 적 없어. 레제트 공작의 성은 더 클 거야. 내 성은 거기 있으니까, 이 성은 됐어.”
그리고 재차 덧붙였다.
“그러니 필요 없어.”
냉정하게 말하며 그녀는 몸을 돌려 앉았다.
리비는 풀어져서 제멋대로 뻗쳐 있던 머리를 한쪽으로 흘러내리게 해 대충 손으로 빗었다.
자는 동안 제멋대로 엉킨 머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짙은 크림빛을 띤 금발이 흡사 짚더미처럼 보여서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다녀도 된다고 했지? 난 산책을 할 거야.”
“성을 보고 싶어? 내가 안내를…….”
“됐어. 내가 네 손을 잡고 구경 다니고 싶겠어? 그냥 답답해. 혼자 돌아다니고 싶은 거니까 감시를 하거나 말거나 맘대로 해.”
“알았어. 하녀를 보내 줄게.”
그는 지치지도 않고 말했다.
“시중은 안 들어 줘도 돼. 그렇게 곱게 자라지 않았다는 거, 잘 알고 있잖아. 옷 입고 머리 매만지는 정도는 얼마든지 혼자서 할 수 있어.”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다다다 쏘아 댔다. 굳이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표정으로 보고 있을지 훤히 그려졌다.
“그러니 너도 네 볼일을 봐. 하루 종일 나만 들여다볼 거 아니잖아?”
“……응, 그럴게.”
뒤에서 그가 점점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뭇거리는 듯,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마치 자기를 돌아봐 주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긴 듯한 발소리였다.
끼익.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문이 열렸다 닫혔다.
문밖에서 들리는 발소리가 안 들린 지 한참이 되고 나서야 그녀는 스르르 몸의 힘을 풀었다. 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가락 마디가 다 쑤실 지경이었다.
‘잘한 거야.’
그 생각밖에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정확히 모르는 게 분명하다.
왕의 명령으로 거행되는 결혼을 훼방 놓다니. 수도까지 거리가 아무리 멀다 해도 이것이 왕궁에 전해지는 순간 그의 목이 온전히 붙어 있기란 어렵다.
자신의 가문 역시 무사하지 못할 건 더욱 분명하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어떻게든 달아나야 돼.’
하지만 그 어떤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물 많고 그녀가 뭐라 말만 하면 주눅이 드는 주제에 죽어도 보내 주진 못하겠다고 하는 놈에게서는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었다.
리비는 일어나서 방 안을 서성였다. 커다란 돔 형태의 지붕을 가진 방은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어젯밤에 정신없는 와중에 보았을 때도 느낀 거지만 날이 밝고 나자 그것은 더욱더 눈에 잘 들어왔다. 천장을 빼곡하게 메운 문양들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방 안에는 여자들이 몸치장을 하는 데 필요한 어지간한 물품들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제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눈이 휘둥그래져서 구경할 만한, 예쁘고 아기자기한 물건들도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지금 그녀의 시선을 잡아끌 수 있는 건 없었다.
햇살이 한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창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그 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녀가 생각한 것, 그 이상이었다.
“…….”
간밤에 물소리가 들린 것 같은 건 꿈이 아니었다. 성 주변은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있는 곳은 성의 최고층으로 보였고, 그만큼 해자와의 거리는 훨씬 더 까마득하기만 했다. 검푸른 물속에 처박히면 시체나 찾을 수 있을까 싶었다.
또다시 희망이 저만치 멀어져 갔다. 이 미친 납치극을 끝내기에 자신은 너무 나약한 존재였다.
똑똑.
별안간 들린 소리에 리비는 움찔 떨며 창문에서 멀어졌다. 문이 열리고 빼꼼히 고개를 들이민 이는 나이 지긋한 하녀였다. 다정한 갈색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여자는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시중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하녀는 안으로 들어오며 말을 이었다.
“아, 저, 시중은 필요 없다고 했는데요.”
리비는 주춤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식사는 하셔야 할 것 같아서…… 그리고 씻을 물도요.”
리비의 반응을 허락으로 여긴 하녀는 몸으로 문을 밀더니 들고 온 것들을 차례로 안으로 들여놓았다.
“배고프시죠? 우선 드세요.”
별생각이 없다고 말하려는 그녀의 앞에서 하녀는 냉큼 음식이 담긴 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식탁 위에 차려진 거한 음식이 리비를 향해 손짓했다.
최상급 소의 안심구이와 버터를 발라 구운 감자, 바삭하게 튀겨 낸 돼지고기과 고소한 롤빵, 색색의 과일과 채소들.
그 모든 것은 한 사람만을 위해 차려진 식사였다. 음식의 종류도 양도 어마어마했지만 그 앞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는 딱 한 벌뿐이었다.
음식 냄새가 강렬하게 리비를 감쌌다. 세포 하나하나가 일어나며 거기에 반응했다. 리비는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게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려 했다.
그리고 먹이를 발견한 상어처럼 음식이 놓인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절로 군침이 돌았다.
납치를 당한 상황에서도 배는 고픈 거구나.
리비는 조금 허탈해졌다. 정신적 긴장과는 별개로, 배는 시위를 벌이듯 심하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갓 만든 음식이 풍기는 맛있는 냄새와, 배에서 보내오는 열렬한 신호에 리비는 정신없이 그것들을 먹어 치웠다.
하녀는 옆에서 천천히 먹으라며 물을 따라 주더니 어미 새처럼 흐뭇한 미소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제 안에 이토록 맹렬한 식욕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눈 깜짝할 사이 식사는 끝났지만 하녀를 보기가 어쩐지 부끄러워 입가에 묻은 감자를 손으로 털어 내기 바빴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스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씻고 싶으시지요?”
물론이다. 곯았던 배를 채우고 나자 그다음은 온통 땀으로 얼룩진 몸을 씻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휩싸였다.
짝짝.
손뼉을 치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이 담긴 수통을 든 하녀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그러더니 방의 한쪽, 작게 달려 있는 문을 열어젖혔다.
“자, 욕실로 가세요. 꼼꼼히 씻겨 드릴게요.”
“아, 저는 혼자…….”
리비가 웅얼웅얼 답하는 동안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를 욕실로 이끌었다.
호화로운 욕조 안에는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수면에는 흰 장미꽃잎들이 둥둥 떠다녔다.
더운 기운에 향긋하게 퍼지는 향기에 잔뜩 날이 섰던 기분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아…….”
하녀가 등 뒤의 리본을 풀어 내리자 스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얇은 옷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나체가 되어서 부끄러웠지만 하녀들은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문제는 나신이 된 것만이 아니었다. 옷이 사라지고 나자 보리스가 몸에 남겨둔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다리 사이에 하얗게 말라붙은 게 무엇인지 그들이 모를 리 없었다. 리비는 조용히 신음을 삼키며 다리를 오므렸다.
“자, 이쪽으로요.”
베스는 가슴을 가린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욕조 안으로 안내했다.
드넓은 욕조 안에 무릎을 굽힌 채 앉자 여기저기서 부드러운 손이 뻗어 왔다. 수통의 물로 몸을 씻어 내리고, 부드럽게 문지르는 손길에 긴장이 차츰 풀려 갔다.
이런 호사스러운 경험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몸을 자기 손이 아닌 남의 손에 맡기다니. 수도의 귀족 아가씨들은 이런 것이 일상이겠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으니 당연히 모르는 일이었다.
‘기분 좋아…….’
씻겨 주는 손길에 심취한 나머지 리비는 잔뜩 힘주었던 몸을 욕조 벽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보리스와 하루 내내 함께 있으면서 바짝 굳어 있던 몸이 풀리자 좀 살 것 같았다.
“자, 다 됐습니다.”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일은 순식간에 끝났다. 리비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을 커다란 수건으로 감싼 채 욕실에서 나왔다.
하얗게 드러난 나신을 하녀 셋이 둘러싸고 꼼꼼하게 머리카락의 물기를 제거하는 동안, 리비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머리를 빗겨 드릴게요.”
거울 앞에 앉자, 멍할 틈도 없이 베스가 빗을 가져와 그녀의 머리를 빗어 주기 시작했다.
엉망진창 엉켰던 머리가 몇 번의 빗질 끝에 다시 매끄러운 윤기를 되찾았다.
한 갈래로 굵게 땋아 내려 한쪽 어깨에 늘어뜨려 준 뒤 이번에는 옷이 가득 담긴 함을 끌고 왔다.
“어느 것으로 하시겠어요?”
그것을 열어젖히자 여러 벌의 드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척 보기에도 호화로운 의상들이었다.
“……여자 옷이네요?”
“그럼요.”
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를 위해 준비된 드레스들이죠.”
부드러운 비단과 새틴, 벨벳을 이용해 만든 드레스는 이 방을 꾸민 것들만큼이나 값비싼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소매 끝단과 가슴 장식, 드레스 끝자락까지 섬세하게 수놓은 장식이 시선을 끌었다. 그것을 보자 문득 자신의 결혼 예복이 떠올랐다.
“저, 제가 입고 온 옷은…….”
“아.”
베스는 막 생각난 듯 말했다.
“그건 버렸습니다.”
“네?”
“정확히는, 소각했습니다.”
“어째서요?”
“여기저기 찢긴 곳도 많고, 더럽혀진 데다가…….”
베스는 리비의 날카로운 되물음에 당황한 듯 더듬더듬 말했다.
“보리스가 버리라고 했겠죠.”
길게 내쉰 한숨과 함께 나온 말에 베스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선이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매우 값비싼 드레스였지만요, 그런 것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입으실 수 있답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보통 드레스보다 치렁치렁한 옷자락과 길게 끌리는 드레스 끝단이 숲속의 흙바닥에 이리저리 쓸리면서 잔뜩 더러워졌던 걸 그녀도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보리스가 찢어 버린 옷자락은 이미 충분히 너덜거렸기에 바닥을 닦는 걸레짝만도 못해 보였을 것이 뻔하다.
“재단사와 재봉사에게 최대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만들라 지시하지요.”
“…….”
주절주절 이어지는 말에도 리비는 그 어떤 답도 하지 않았다.
“급하게 준비시키느라 지금은 이것뿐이지만, 조만간 가짓수가 더 늘어날 거랍니다. 최고의 재단사와 재봉사를 불러 옷을 짓게 하겠어요.”
“뭐 하러요?”
리비의 질문에 베스는 당황한 듯 눈을 굴리다가 답했다.
“그야 당연히 아가씨께선 이 성의 안주인…….”
“아니에요.”
리비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머리를 푸드덕 털어 냈다. 깊은 한숨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내가 이 성의 안주인이 될 일은 없을 거예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은.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줘요.”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이제 겨우 하루 지났을 뿐인데 돌아갈 날은 막막하다.
“옷을 고르시겠어요?”
잠시 곤란한 듯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베스가 화제를 돌렸다. 리비는 손을 떼어 낸 뒤 수심 어린 눈길로 옷이 든 상자 안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벌거벗고 있을 수 없으니 아무 옷이라도 골라 입기는 해야 한다.
“이것으로 할게요.”
그녀는 옷상자 안에서 최대한 장식이 배제된 면직물 드레스를 골랐다.
가장 가볍고 활동적인 옷이지만 옷에 놓인 수나 장식은 다른 옷들에 비해 ‘덜’ 화려할 뿐, 충분히 호화로운 것이었다.
베스는 옷의 여밈 끈을 풀어 리비가 옷을 입는 것을 도왔다. 허리에 감긴 리본을 여며 주고, 치맛자락을 정돈해 주는 것으로 모든 단장은 끝났다.
“저, 성을 좀 둘러보고픈데.”
리비는 마침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그 어떤 의심도 사지 않게.
“안내를 해드릴까요?”
“아니, 혼자 다니고 싶어요. 그러니까 내 말은, 나가도 되는 거…… 맞죠?”
리비는 조심스레 하녀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 이 사람들이 자신을 감시하라고 보낸 인력이 아닌가, 염려하면서.
“그럼요. 성 안 어디든 가실 수 있답니다.”
걱정과 달리 답은 의외로 쉽게 떨어졌다.
“사용인들도 모두 여기서 지내는 건가요?”
“아뇨, 이 성은 이중 구조로 되어 있어요. 기사들이 머무는 곳과 하녀, 하인들이 머무는 곳은 전부 분리가 되어 있죠. 아가씨가 계신 곳은 성의 가장 안쪽이에요. 주인님의 허락을 받아야만 들어올 수 있고요.”
“……그렇군요.”
한마디로 혼자서 탈출하기에 매우 불리한 구조라는 뜻이다.
“여긴 비워 둔 지 오래돼서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도 있었던 곳인데, 생각보다는 괜찮네요.”
“음, 이 성을 소유하신 건 아마 한 달쯤 전일 거예요. 왕궁에서 정식 작위를 하사받은 건 얼마 안 됐지만 그 전부터도 사실상 이 성과 에드라크령을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을 국왕 폐하께서 주셨으니까요.”
“제가 살던 마을에서는 전혀 그런 이야기를 못 들었어요.”
대영주가 생겼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다. 마치 채근하듯 묻는 리비의 눈이 고요히 빛났다.
“수도와 에드라크령과의 거리가 있으니 소문이 워낙 느려요. 더구나 이 지역은 산세도 험하고 길도 좋지 않아서 왕래가 힘들잖아요. 그러니 말이 퍼지는 속도가 늦은 거죠.”
리비는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에게 이렇게 날카롭게 굴 필요는 없지만, 자꾸만 말에 날이 서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의심을 하게 됐다.
이게 전부 보리스가 꾸며낸 일이었으면 좋겠다. 전부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계속 꼬투리를 잡아 되묻고 있었다.
리비는 마음을 다잡고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를 냈다.
“외성은 어떤가요?”
기절해 있느라 외성을 통과해 내성까지 들어오는 길은 기억에 전혀 없었다.
“내성에 비해 아직 손볼 곳이 많아요. 버려진 지 오래된 데다가, 이 성을 받으신 뒤 급히 내성만 수리하셨거든요. 물론 내성 역시 손 볼 곳은 많아요. 이 방과, 정원 정도를 빼고는 아직 완벽히 수리되려면 갈 길이 멀죠.”
“그 돈이 다 어디서…….”
“어머나, 기사단이 벌어들이는 수입이 얼마인데요. 아가씨는 횡재하신 거예요.”
“네?”
횡재라니. 납치당해서 얻는 횡재라니. 그것도 결혼식 당일에.
리비는 순간 이 하녀가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모르는가 보다 생각했다.
“신랑감으로 우리 주인님만 한 분이 없으신걸요.”
“아, 네.”
마치 꿈꾸는 듯한 그녀의 표정을 굳이 깨뜨리고 싶지 않아 리비는 입을 다물었다.
“그럼 아가씨, 더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고마워요. 하지만 일단 혼자 성을 둘러볼게요.”
그래야 빠져나갈 구멍이 있나 살펴볼 수 있으니까.
물론 그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
예상한 대로 리비가 있던 곳은 탑 꼭대기 층이었다.
“대체…… 이렇게…… 높은…… 데에.”
끝도 없이 이어진 계단을 걸어 내려오며 리비는 연신 투덜거렸다. 나선형으로 이어진 계단은 발 한번 잘못 디뎠다가는 그대로 목뼈가 부러지기 딱 좋겠다 생각한 찰나였다.
까악.
시근덕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누군가 비웃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돌아본 곳에는 덩치 큰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분명히 자신을 보고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를 낸 것은 저 까마귀였다.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 까마귀가 웃음소리를 낸단 말인가. 그런데 그 울음소리는 아무리 떠올려 봐도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저리 가.”
내쫓듯 휘 손을 내젓자 불만스러운 듯 몇 번 깍깍거리던 새가 공중으로 휙 날아올랐다.
푸드덕.
새가 날아간 자리에 남은 검은 깃털 하나가 너울너울 떨어져 내렸다.
리비는 그것을 손으로 잡아챘다. 새카만 날개깃은 결혼식을 올리던 날, 침대 베갯잇에 떨어져 있던 것과 모양새가 같았다. 다만 그 크기가 현저히 작을 뿐이었다.
대체 그 깃털의 주인은 무슨 새이기에.
워낙 정신이 없던 날이었기에 그 깃털은 금세 잊혀지고 말았었다. 깃털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 봤지만 자신이 아는 한 까마귀의 깃털과 가장 흡사했다. 하지만 그런 크기의 까마귀는 들어 본 일이 없다.
마침내 밖으로 나오자 탁 트인 전망과 함께 성 전체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성벽이 모두 흰 돌로 마감되어 있어 지붕을 빼고는 전체가 흰색이었다.
중앙의 성 좌우에는 뾰족한 첨탑이 서 있어 성을 단단히 감싸 보호하는 느낌을 주었다. 흡사 장미 줄기에 돋아난 가시를 연상시켰다. 왜 ‘흰 장미의 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지 알 것만 같았다.
커다란 장미꽃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 하지만 그것은 단지 짐작일 뿐이다. 위에서 내려다볼 수 없으니 확인할 길은 요원하다.
정말 장미 송이를 닮은 성을 짓고자 했다면 이보다 더 부질없는 짓은 없을 것 같았다.
위에서 이 성을 내려다보려면 새가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테니까.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을 위해 이처럼 심혈을 기울여 성을 지었다는 것이 리비는 의아했다.
대개 성이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요새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한 용도로 지어진다. 제아무리 호화롭다 하여도 어디까지나 적으로부터의 방어가 우선이다. 성 자체의 아름다움은 그다음의 문제다.
그런데 이 성은 그 모든 본래의 역할과 더불어 극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치 지극히 아끼는 연인을 위해 공들여 만든 선물 같았다.
“이건 네 성이야, 리비.”
그가 속삭이던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를 위해 준비된 선물 같다는 건 괜한 느낌이 아니었다.
“……아니야.”
이 성은 결코 자신의 성이 될 수 없다. 그러려면 성의 안주인이, 즉 영주의 부인이 되어야 하므로.
하지만 이미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은 이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다. 자신이 살아야 할 곳은 바로 그곳이다.
활짝 피어난 장미처럼 어여쁜 성인 건 그녀도 반박할 수 없었다.
‘흰 장미의 성’은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움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것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잡념을 떨쳐 내려 머리를 흔들었다.
성 안은 먼지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릴까 염려될 정도로 고요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발이 바닥에 닿을 때 나는 가벼운 마찰음뿐이었다.
혹시, 그렇다면.
리비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성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내성이다.
내성은 성주의 내밀한 생활공간이기에 아무나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곳이었다. 바깥에서 보초는 살벌하게 설지언정 내성을 휘젓고 다니는 이는 없었다.
보는 눈이 없다는 건 또 다른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멍청하긴.
또렷하게 들린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헛것을 들은 게 아니라는 강한 확신에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언가 너울너울 날아 들어와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얼결에 그것을 잡아챈 리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까만 깃털. 손에 잡힌 것은 크고 새카만 깃털이었다. 날아온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린 리비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눈처럼 흰 성벽에 주르륵 앉아 새카만 띠를 이룬 것은 다름 아닌 까마귀 떼였다.
처음엔 한 마리였던 것이 하나둘 그 수를 불려 가더니 이제는 성벽 하나를 빼곡히 채울 만큼 늘어나 있었다. 아마 이 깃털은 그중 한 마리의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앉아서 쳐다보는 쪽이 자신이 서 있는 자리라는 걸 깨달은 리비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좀 전에 들려온 목소리도 이쪽이었던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 보던 리비가 오싹 끼치는 소름에 몸을 떨었다.
설마, 그럴 리가.
리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깃털과 까마귀 떼를 번갈아 보는 동안, 까마귀들은 점점 그 수를 늘려 갔다. 성벽에 새까만 담쟁이넝쿨처럼 들러붙은 까마귀들을 보던 리비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뒷걸음질을 쳤다.
“나가는…… 곳이.”
성을 육지와 연결하는 유일한 길은 높은 망루가 버티고 선 성문이었다. 그 성문은 어떤 적이라도 막을 수 있을 만큼 견고해 보였다. 일단 한번 성문이 닫히고 나면, 성은 완벽한 요새가 될 것이 분명했다.
성문이 닿는 그 외의 부분은 모두 깊이 파인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가려면 성문으로 당당히 나가든가, 아니면 해자를 헤엄쳐 건너는 수밖엔 없다.
수영을 못 하는 건 아니나 성을 둘러싼 해자가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검푸른 물 아래에는 위로 향해 세워진, 뾰족이 깎은 나무들이 버티고 있었다.
햇살을 받은 수면 아래 비치는 그것을 본 리비의 등에 자잘한 소름이 돋았다. 물에 빠지는 순간 사지가 관통당해 죽는 건 시간문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엄청 예쁜 감옥인 거네.”
자력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차라리 그가 좀 더 미쳐서 스스로 성문을 열어 주고 얼른 가라고 등 떠밀기를 바라는 게 빠를 수도 있다.
그 생각을 하자 순간 힘이 풀린 다리로 그녀는 털썩 돌계단에 주저앉았다.
어떡해야 하지, 뭘 어째야 하는 거지. 끝도 없이 고민을 하는데 문득 풍기는 꽃향기에 고개를 들었다.
“…….”
아까부터 정신을 빼앗길 만큼 달콤한 향기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그 향기는 점점 짙어졌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그 향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 앞뜰로 내려가자 온통 흰색 장미로 가득 찬 정원이 나왔다.
“와아…….”
리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처럼 많은 장미를 본 건 처음이었다.
온통 순백의 장미들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산책로를 비롯하여 벽을 타고 올라간 장미들도 모두 순백의 색이었다.
장미로 만든 천국, 혹은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일까. 장미의 달콤한 향기가 사방을 부유해 다녔다. 리비는 한참 동안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스르르 힘이 빠져 주저앉고 말았다.
온통 꽃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성.
그러나 리비에게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보리스는 그녀를 위해 아주 완벽하고 아름다운 새장을 만들어 놓은 셈이다.
달아날 길은 요원해 보였다. 그는 진심이다. 만약 레제트 공작이 알기 전에 이 성을 나가서 돌아간다면. 그러면 끔찍한 복수는 안 하지 않을까.
리비의 머릿속에서 니콜라스의 목숨을 쥐고 위협하던 기사의 모습이 사라지질 않았다.
푹 수그린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은 채 한참 앉아 있을 때였다.
그녀의 앞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리비.”
무릎 사이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고 그림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보리스가 몸을 수그린 채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걱정의 근원이 본인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것처럼.
“뭘 좀 먹었어?”
“…….”
리비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그는 다시 초조해진 듯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리비.”
“그만 불러. 이름 닳겠어.”
“나한테 많이 화났어?”
그는 조심스레 물으며 리비의 볼에 손을 얹었다. 쇠로 된 장갑을 끼고 있어서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 때문에 움찔거리자 보리스는 그제야 깨달은 듯 서둘러 장갑을 벗어 던졌다.
“미안.”
“뭐 하다가 온 거야?”
그가 벗어 던진 장갑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궈지자 리비는 그것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두 손으로 들기에도 무겁게 생긴 저런 장갑을 끼고 다닌다고 생각하니 새삼 예전 모습과의 격차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훈련.”
“훈련? 기사들이 하는 그런 거?”
“응, 기사단에는 아직 수련을 거쳐야 하는 견습 기사들이 많거든.”
“견습 기사? 어디에서 훈련하는데?”
“외성에 훈련장이 있어.”
“외성…….”
리비는 그의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보다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외성으로 나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가 가깝지 않을까. 어쩌면 나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순간 리비는 고개를 쳐드는 맹렬한 호기심에 그에게 묻고 말았다.
“나도 가보면 안 돼? 훈련하는 거 보고 싶어.”
“안 돼.”
그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왜?”
리비는 너무도 강력하게 제재하는 목소리에 의아해졌다. 그저 훈련을 보고 싶다고 했을 뿐인데 저 반응은 뭐란 말인가. 설마 속마음을 들킨 건가. 리비는 쿵쿵 뛰는 심장을 느끼며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위험해. 무기도 많고, 다칠 수 있어. 내내 대련을 하기 때문에 시끄럽고 재미도 없을…….”
주절주절 이어지는 변명을 듣다 보니 리비는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다.
“남자들도 많고?”
리비는 가만히 말을 끊어 냈다. 웅얼웅얼 이어지던 핑계는 뚝 끊기고 말았다. 그는 정곡을 찔린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를 노려 리비는 재빨리 말했다.
“네가 칼 쓰는 것, 보고 싶어.”
그 말에 보리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과 마주친 리비는 저도 모르게 뜨끔한 티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사리물었다.
스스로도 충동적으로 뱉은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외성으로 나갈 핑계만은 아니었다. 그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칼을 쓰는 보리스라니.
그가 정말로 7년 전쟁을 끝낸 영웅이란 말인가.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리비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거라면 얼마든지 보여 줄게.”
“그럼 약속한 거다?”
리비는 행여 기회를 놓칠세라 그에게 다짐을 받았다. 보리스의 순간 환해진 얼굴을 보자 리비는 가슴이 덜컥거렸다. 하마터면 마주 웃어 버릴 뻔하기도 했다. 이 모든 상황을 잊고서, 그럴 뻔했다.
아주 조그만 칭찬 하나에 웃고 울던 보리스였다.
저 커다란 남자의 몸을 하고서도 그 여린 소년의 표정이 언뜻언뜻 나타나는 걸 볼 때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동시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반가웠다.
그 부조리한 감정이 들킬까 리비는 대뜸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 장미들은 다 뭐야? 원래 있던 꽃들이야?”
리비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원래 있던 것과 옮겨 심은 것, 반반이야.”
“일부러?”
“응. 맘에 들어?”
“왜 내 맘에 들어야 하는데?”
톡 쏘는 말투에 보리스는 잠시 침묵했다.
“널 위한 선물이니까. 널 위해 심어진 거야.”
“그럼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모두 뽑아 버리라 할까?”
리비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말만 해. 원하는 꽃을 심어 줄게.”
“됐어.”
리비는 황급히 덧붙였다.
“아니야, 말하라니까?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돼, 됐다고.”
순간 눈을 번득이며 그녀의 말에 집중하는 보리스를 보며 리비는 뒤로 물러섰다.
“나, 성을 둘러보고 싶어.”
보리스는 아직 꿇어앉은 채라 리비를 올려다보며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안내해도 돼?”
“네가 주인이라며. 그럼 가장 잘 알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날 맡길 생각이었어?”
날카로운 물음에 보리스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이내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걸 보자니 어쩐지 죄책감이 느껴지는 자신이 또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건 다 덩치는 커다래 가지고 쓸데없이 예쁘게 생긴 저놈의 얼굴 탓이다. 자신이 이상한 게 결코 아니다.
“그러니 안내해. 흰 장미 성인지 까마귀 성인지. 앞으로 계속…… 있으려면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나도 알아야 하잖아.”
‘됐어, 훌륭했어.’
리비는 행여 속내가 들킬까 저 먼 곳 어딘가를 보는 척했다.
아무래도 혼자 돌아다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뭔가 빠져나갈 구멍이나마 알아 놓으려면 누군가의 안내가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여기 있을 거야?”
감동에 젖은 눈이 흔들리는 걸 보며 리비는 또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납치까지 한 주제에 저렇게 순수한 얼굴로 쳐다보지 좀 말았으면.
“네가 보내 주진 않을 거잖아. 내가 별수 있어?”
“내가 잘할게. 너는 이 성의 주인이야.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어.”
그의 눈은 결연한 의지로 빛났다.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아주 단단한 빛으로 감싸여 있는 눈빛이었다.
“여길 나가는 건 빼고 말이지.”
“우리가 혼인식을 치르면, 그땐 함께 나가서 돌아다니자.”
진심이다, 진심. 리비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이리 와.”
보리스는 리비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손바닥에 딱딱하게 박인 굳은살의 감촉은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라 리비는 다시 또 놀랐다.
기억 속 보리스의 손은 고양이 털처럼 부드러웠다. 길고 쭉 뻗은 손가락과 매끄러운 피부.
남자인 주제에 여자인 자신보다도 예쁜 손을 보며 리비는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부드럽던 손이 이렇게 변하기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
리비가 손을 잡힌 채로 움직이지 않자 보리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잡아끌면 그대로 끌려갈 수도 있었으나 그는 그대로 리비를 관찰했다.
또 무언가 중대한 실수를 한 게 아닐까, 걱정하는 시선이 리비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녀의 눈이 고정된 곳이 자신의 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보리스가 조용히 리비를 바라보았다.
“리비, 왜?”
“검을 잡아서 이렇게 된 거야?”
“……아마도.”
그의 대답은 짧았다. 생략된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은 공백이 남아 있었으나 리비는 더 이상 캐묻지 못했다. 그의 손에는 굳은살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상처들도 가득했기에.
‘용병으로 지냈다고 했지.’
용병이 어떤 일을 하는지는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그다지 대우가 좋지 않다는 것은 잘 안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그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소속되지 않은 처지다 보니 사람들의 대우도, 인식도 좋지 않다고 들었다.
가끔 일감을 찾아 떠돌던 용병들이 마을에 들어온 걸 본 적이 있다.
그들은 험악한 인상에 온몸에는 상처 자국이 그득했다. 마을 주점에서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술에 절여져서 살았다. 그러다가 일이 생기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곤 했다.
사람들이 용병에 대해 가지는 감정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사나운 짐승을 잡거나 외부의 적을 막는 것, 그 외에 온갖 험한 일에 그들의 힘을 빌리면서도 그들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바닥을 쳤다. 용병들 역시 딱히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어딜 가든 용병에 대한 대우는 그런 것이었으니까. 돈으로 맺어진 일시적인 계약일 뿐, 돈을 주고받고 나면 더 이상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반면 기사들은 퇴역 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존경을 받곤 했다. 이를테면 리비의 아버지처럼.
그런데 보리스가 그렇게 대우도 평판도 좋지 않은 용병의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밑바닥에서부터 여기까지 기어 올라온 시간들을 생각하자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이 성은 비워진 지 오래라던데.”
리비는 애써 그 감정을 무시하려 화두를 던졌다.
에드라크는 왕이 임명한 정식 영주가 자리를 비운 지 꽤 오래된 상태였다. 에드라크에 속한 크고 작은 마을마다 임시로 대표를 정해 관리를 맡고 있었다.
리비가 살던 티소 마을의 경우 유일하게 귀족 작위를 가진 하이든 백작이 마을의 총관리를 맡고 있었을 뿐, 영주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원래는 아주 오래된 성이야. 에드라크를 처음 다스린 영주가 만들었으니까.”
에드라크는 원체 험준한 지형 탓에 외부와의 교류도 쉽지 않은 데다가 국경과도 멀고 외진 곳이다.
그런 이유로 굳이 공격 대상으로 삼거나 정복지로서의 매력이 없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영주가 살던 성 자체가 낯설게 다가왔다.
“……처음 다스리던 사람?”
에드라크의 초대 영주에 대해서는 묘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는 했다.
스스로 에드라크의 영주가 되어 이곳을 다스리던 남자는, 어느 날 등에 검은 날개가 돋친 채 날아갔다고 한다.
“검은 날개의 주인을 말하는 거야?”
“리비도 알아?”
누군가는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만약 거짓이라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봤을 리 없다고, 그것이 전설로 이어져 내려올 리 없다고 했다. 리비는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었다. 실제로 검은 날개를 달고 날아갔든 말든, 자신이 알 바는 아니므로.
“우리, 그 이야기 같이 들었으니까.”
대개의 전설이나 옛날이야기가 그렇듯이, 들려주는 이는 주로 노인들이었다.
낮에 산이며 들을 쏘다니던 아이들은 밤만 되면 얌전히 할아버지, 할머니의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끌었던 것이 바로 에드라크성의 영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커다란 까마귀 ‘칼리니’ 전설도 함께.
“에드라크의 영주가 ‘칼리니’라는 전설 말이야.”
“리비는 그 전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냐니?”
갑작스레 던져진 질문에 리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해?”
그의 말투는 여태껏 들은 어떤 말보다도 진지하게 들렸다.
“보리스?”
“…….”
답을 기다리는 그의 표정 역시 더없이 진지해 보였다.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야.”
“상관이 없어?”
“누가 지어낸 허무맹랑한 이야기이든, 아니면 정말 있었던 일이든, 나에겐 중요하지 않다고. 아무래도 상관없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의 말끝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묘한 기색이 묻어났다.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건데?”
“그냥, 궁금했어.”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감돌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표정에 리비는 서둘러 덧붙였다.
“그 에드라크…… 초대 영주라는 사람이 이 성을 만들었다며? 그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아름다운 성이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의 얼굴이 일시에 환하게 밝아졌다.
“물론.”
보리스가 밉살스럽다고 해서 당장 이 훌륭한 성의 아름다움마저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그래. 이 성이야말로 리비가 꿈꾸던 이상향에 가깝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하얀 돌에 이끼가 끼고 흙먼지가 붙어서 어두침침하게 바뀌어 있었지.”
“…….”
“이 성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흰 장미가 활짝 피어난 것처럼 보이도록 지어졌어.”
“위에서 어떻게 내려다봐?”
“다 보는 방법이 있어.”
“보는 방법?”
리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개라도 달고서 날아가지 않는 한 대체 무슨 수로 성을 내려다본단 말인가.
픽 웃어 버리는 그녀를 보며 보리스는 손을 뻗어 흩어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나중에 꼭 보여 줄게.”
그는 수상쩍은 미소를 짓더니 리비를 데리고 중앙 정원을 지나 가장 크게 솟아 있는 건물의 내부로 들어갔다.
“여기는 메인 홀이야. 나중에 무도회든 연회든, 하고 싶은 건 다 열어 줄게.”
새하얀 벽과 천장, 이쯤 되면 흰색에 미친 놈이 여기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하얗고 또 하얗기만 했다. 정작 자기 몸에 걸친 것들은 온통 새카만 주제에.
온통 하얀 홀이라 벽화로 장식된 벽면은 유독 눈에 잘 들어왔다. 신화와 전설, 온갖 무용담의 주인공들이 벽면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이 그림은…….”
리비는 문득 익숙한 그림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그림은 한 장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동화책처럼 각 구역마다 이야기를 갖고 이어져 있었다.
불을 내뿜는 붉은 용이 마을을 짓밟고, 사람들을 집어삼키며, 커다란 꼬리를 흔들어 대항하는 기사들을 단번에 쓸어버리는 장면이었다.
그 옆의 그림은 용이 공주를 납치해 가는 장면이었고, 그다음에는 용사가 등장해서 공주를 구하러 가는 그림이 이어졌다. 그다음 그림에는.
“칼리니 전설이네.”
어릴 적 가장 좋아했던 동화책은 왕국의 오래된 전설 중 하나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사악하고 힘센 용이 공주를 납치해 가자 그녀를 구하러 한 용사가 나타났고, 그는 ‘칼리니’라는 이름을 가진 까마귀의 도움으로 공주를 구출해 냈다. 하지만 모든 기력을 소진해 버린 까마귀는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벽화의 마지막 역시 날개를 떨군 채 죽어 가는 까마귀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어루만지며 리비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기억나? 이 까마귀가 죽을 때, 펑펑 울었던 거.”
“응.”
리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이었지만 그 그림책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솟고는 했다.
“용사는 그냥 얻어걸린 거잖아. 싸움은 까마귀 혼자 다 하고. 그런데 공주는 용사밖에 모르고. 정말 나빴어. 까마귀는 바보야.”
“그래, 바보야.”
보리스는 맞장구치며 웃었다.
“너도 바보고.”
“응, 맞아.”
무슨 말을 하든 그는 동의할 게 뻔하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확 돌게 만들어서 그 끝을 보고 싶은데 도무지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의 공격은 거두려고 했다.
“만약 그 전설이 그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 영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글쎄.”
보리스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다.
다시 밖으로 나와 다음 건물로 이동하는데 문득 도개교가 내려진 곳에서 따각따각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마차를 보았다.
“저 마차는.”
천을 뒤집어씌운 짐수레를 끄는 마차가 멀리 주방으로 쓰이는 건물의 문 앞에 선 게 보였다. 짐수레에서 채소며 말린 고기 같은 각종 식재료를 꺼내 주방으로 실어 나르는 중이었다.
“식재료를 운반하는 마차야. 이틀에 한 번씩 성에 들어와.”
“이틀에 한 번…….”
리비는 되뇌듯 한 번 더 중얼거렸다.
“먹고 싶은 건 없어? 뭐든 구해다 줄게.”
그런 건 없다고 대답하려다가 문득 커다란 까마귀 하나가 뒤에 앉아 이쪽을 건너다보는 게 보였다.
“글쎄…… 까마귀 고기?”
까악.
불만에 가득 찬 듯한 소리를 내지르며 리비를 한껏 노려보았다. 그리고 리비 역시 까마귀를 정면으로 노려보며 요리 목록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까마귀 통구이, 까마귀 육포, 까마귀 날개찜, 까마귀 다리 구이…….”
까악, 가아악.
까마귀는 시커먼 날개를 퍼덕이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저리 가.”
보리스의 냉정한 명령에 까마귀는 크게 한번 울더니 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보리스가 자신을 데려다 놓았던 탑의 꼭대기였다.
“나 있는 곳, 너무 높아. 내려오는 데 힘들었단 말이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리비는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내, 내려 줘.”
“힘들다며. 이대로 갈 거야.”
보리스는 그녀를 더 바짝 끌어안아 힘을 주었다. 그녀를 안고서도 그의 발걸음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힘들게 내려왔던 나선형 계단도 훅훅 뛰어오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탑의 꼭대기에 당도했다.
든든하게 안고 있는 팔에 의지해 그녀는 행여 떨어질까 싶어 내내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채였다.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갈수록 눈앞이 빙빙 돌았다.
그렇게 방에 당도했을 때에도 보리스는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서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오히려 가만히 안겨 있기만 했던 그녀의 숨만 거칠게 날뛰었다.
목에 감고 있던 팔이 쉬이 풀리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자신을 내려놓는 보리스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문득 오래전의 기억이 불쑥 떠올라서,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물었다.
“그런데 보리스.”
“응.”
“밤마다 내 방에 잘 찾아오곤 했잖아.”
“응.”
“문 열리는 소리도 나지 않고, 서늘한 바람이 분다 싶어 문득 눈을 뜨면, 네가 창문에 걸터앉아 있곤 했어.”
“……응.”
“그때 내 방에 어떻게 올라온 거야?”
리비의 방은 3층이었다.
“…….”
순간 보리스의 모든 행동이 멎었다. 팔을 감고 있던 목도 빳빳하게 긴장해 나무토막처럼 느껴졌다. 리비는 그의 목 언저리에 푸르게 돋아난 핏줄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에 보리스는 흠칫 몸을 떨더니 슥, 몸을 물리려 했다. 하지만 목에 야무지게 감긴 팔에 의해 다시 끌려오고 말았다.
투명한 녹색 눈동자가 뚫어져라 쳐다보자 그의 광대뼈 부근이 붉게 물들었다.
“응?”
리비는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재차 물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언가 숨기는 듯한 기색에 리비는 점점 더 의구심이 솟았다. 왜 그때는 그걸 물어보지 않았을까.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인데.
“나무.”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나무?”
“리비의 방 앞에, 커다란 떡갈나무가 있었잖아. 그 나무를 타고 올라서 간 거야.”
“…….”
분명히 자신이 쓰던 방의 창밖에는 꽤 수령이 오래된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높이가 꽤 되었으므로 그의 답은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정말이야?”
“당연하지.”
질문과 동시에 답이 튀어나왔다.
“높은 곳 무서워했잖아.”
“널 만나러 가는 거였으니까…….”
그의 눈꼬리가 다시 축 처지는 게 보였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얼굴 양쪽에 돋아난 귀도 축 처져 있을 것만 같았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귓가를 어루만졌다. 가슴이며 어깨며 허벅지까지 온통 돌덩이처럼 단단한 몸 중에 아마 유일하게 부드러운 부분인 것 같았다.
“…….”
순간 둥그렇게 떠진 보리스의 눈과 마주치자 리비는 그제야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서둘러 귀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팔을 풀려다가 저도 모르게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보리스는 그대로 그녀의 위로 엎어졌다. 졸지에 그의 목을 끌어당겨 자빠뜨린 것같이 된 모양새에 리비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흔들리는 두 눈동자가 마주쳤다.
좀 전의 당황함은 어디로 갔는지 그의 눈에서 위험한 불길이 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리비가 서둘러 팔을 풀어내려 했지만 그가 더 빨랐다.
“으…… 응!”
보리스는 그대로 리비를 덮쳐 누르고 입술을 포갰다.
“이, 잇!”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술 새로 항의의 신음을 내지르며 리비는 되는 대로 그의 어깨를 마구 내리쳤다. 그래 봐야 돌덩이 같은 어깨에 되레 자신의 손만 더 아파 왔다.
‘무슨 기승전결도 없이!’
자기 말 한마디에 바들바들 떨다가 이렇게 허점을 보이는 순간에 영락없이 달려드는 걸 볼 때마다 촉 좋은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리해도 너무 영리하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만 빼면. 게다가, 갑작스러운 덮침이었지만 그는 솜씨 좋게 그녀의 입속을 헤집었다.
자기 혀를 가지고도 이렇게 입안 곳곳을 핥아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는 그보다 더 샅샅이,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이 키스를 해 왔다.
“보리……스……으.”
숨이 모자라 버둥대는 것을 느꼈는지 그가 찰나의 여유를 주었다. 그래 봐야 코끝이 문질러질 정도로 짧은 거리인 건 여전했지만.
“그만, 그만.”
색색 숨을 내쉬며 리비가 애원하듯 말했다.
그렇게 말해 놓고 놀라서 다시 입을 틀어막을 뻔했다. 그만하라는 소리가 자기가 듣기에도 정말 그만두라는 것처럼 들리지 않아서였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더 해달라고 조르는 것 같잖아.’
이와 비슷한 소리를 리비는 마을 마구간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다.
어쩐지 마구간에 있어야 할 말이 그 앞에서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며 이상하다 느낀 참이었다.
이러다가 비싼 말이 도망가면 어쩌려고, 그녀는 그리 생각하며 말의 고삐를 잡아끌고 들어갔다.
아직 훤한 낮이었지만 덧창이 내려진 마구간 안은 어두컴컴했고, 어디선가 말이 낑낑거리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때 리비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말이 새끼를 낳나……?”
그렇다면 더욱 큰일이지. 주인의 보살핌 없이 해산한 어미 말이나, 그렇게 태어난 망아지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건 주지의 사실이었다.
서둘러 소리가 나는 곳으로 들어간 리비는 그곳에서 생애 최초로, 생명의 탄생을 위한 인간의 존엄한 행위를 목격했다.
바로 앞에 자신이 서 있는데도 두 사람은 하던 일을 멈출 줄 몰랐다. 원래 그 마방의 주인이었을 것이 분명한 말의 울음소리만이 밖에서 애처롭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리비.”
“…….”
“리비? 무슨 생각 해?”
넋나간 얼굴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보리스가 붉어진 뺨을 쓸어내렸다. 단지 그것뿐인데 등 뒤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서 리비는 진저리를 쳤다.
“그만……하란 말이야.”
맙소사. 이조차도 앙앙거리던 그 여자의 목소리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리비는 머리채를 통째로 휘어잡고 흔들고 싶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낫다. 낫고야 말고. 자신은 이런 사특한 욕망에 휘둘릴 리가 없다.
“놀랐어……? 미안, 갑자기 덤볐지, 입속에 상처가 난 건 아니야? 혀는 아프지 않아? 내가 너무 빨…….”
“그마아아안!”
리비는 기겁하며 그의 입을 막았다. 손바닥에 닿은 입술이 질척했다. 누구의 타액인지 알 수도 없었다. 분명 좀 전에 마구 뒤섞였을 게 분명하므로.
“너, 자꾸 이렇게 훅 들어오면.”
리비는 최대한 정색하는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거울이 없으니 대체 어떤 몰골로 따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네가 날 만졌잖아.”
저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그건, 그건…….”
왜 만졌지, 왜 만졌더라? 속에서 마구 뒤엉킨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해 그녀는 허둥지둥할 수밖에 없었다.
“나, 귀 약해. 알잖아?”
“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것뿐이었다. 그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지더니 정말 모르냐는 얼굴로 물었다.
“나 괴롭힐 때 귀에 바람 불었었잖아.”
“……어?”
“또 기억 안 나?”
리비는 그가 소환한 기억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아니라고,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외치고 싶어도 너무 또렷하게 남아 있는 그 기억들 속에서.
“후, 후우! 보리스! 간지럽지? 간지럽지?”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소녀는 곱상한 소년의 등 뒤에 딱 달라붙어서 쉴 새 없이 바람을 불어 댔다.
“하…… 하지…… 마아…….”
행여 다칠까 싶어 뒤에 매달린 리비를 떨궈 내지도 못한 채 보리스는 잔뜩 몸을 오그렸다. 허리를 휘고 이리저리 몸을 꼬아서 피해 보려 했지만 어림도 없는 짓이었다.
“후! 후우!”
그의 반응이 극적이면 극적일수록 바람을 불어 젖히는 소리 역시 드높아졌다.
목에 휘감긴 팔을 바짝 옥죄어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 리비는 당황한 소년의 얼굴을 감상하느라 바빴다. 새빨개진 목덜미와 귓가, 금방이라도 울 듯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망울이 어쩜 그리 예쁜지.
“보리스, 예쁘다.”
소년의 얼굴을 감싸 쥔 리비는 잔뜩 붉어진 이마 위에 촉, 자신의 입술을 댔다가 떼어 냈다.
그걸 잊다니, 잊을 수 있을 리가, 그럴 리가.
또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기억이 떠올라서 리비는 온 장기가 꼬이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어린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니까 어떻게 그런 미친 짓이 가능했느냐면, 때마침 그날은 마을에서 포도주를 담근 날이었고, 어른과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잔뜩 술을 퍼마실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그 옆에서 홀짝홀짝 술을 얻어 마신 두 사람은, 아니 정확히 리비는 술기운이 머리꼭지까지 올라서 보리스의 등에 업힌 채 내려올 생각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보리스는 그 가느다란 팔다리로 리비를 업고서 내내 마을을 돌아다녀 주었다.
그러다가 리비가 그의 귀에 대고서 후우, 내쉰 숨에 움찔거리는 걸 들키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것이 재미난 놀이임을 깨달은 리비는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계속 바람을 불어 댔고, 그걸 피하면서도 받아 주는 보리스가 너무 예뻐 보이는 나머지 그의 귀를 붙들고서 이마에 키스를 날린 것이다.
“귀에 바람을 불다니, 보리스. 내가 그럴 리가.”
리비는 최대한 우아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했다니까.”
그의 표정은 금세 우울해졌다. 둘이 나눈 기억의 한 조각을 서슴없이 잘라 낸 말에 상처를 입었음이 분명하다.
가슴 한구석이 콕콕 찔려 와서 리비는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살폈다. 문득 마주친 그의 눈에 생경한 빛이 어린 순간이었다.
“이렇게.”
그는 리비의 몸을 꼭 끌어안은 채로 말했다.
“뭐 하는 짓이……!”
반항은 이어진 뜨끈한 숨결에 묻히고 말았다. 후우, 내쉬는 숨이 귓바퀴를 따라 흘렀고, 이어 전신을 간지럽혔다.
“하지 마!”
있는 힘껏 밀어 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귓가에 와 닿는 숨결만 더욱 자극적으로 변모했을 뿐. 예민해진 건 귀뿐만은 아니었다.
바짝 밀착된 단단한 몸이 잔뜩 열기를 품고서 자신을 감싸고 있는 통에 온몸이 달궈진 쇠처럼 뜨거워졌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옥죄는 힘만 더욱 강해져서, 마침내 모든 걸 포기한 채 길게 늘어지고야 말았다.
“흐으…… 그만해에.”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리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미안. 자꾸 기억 안 난다고 하고…… 모른다고 하고. 왜 자꾸 거짓말해.”
“거짓말…… 안 했어.”
“또 하잖아.”
예리한 지적에 리비는 히끅거리며 딸꾹질을 했다.
“정말 기억 안 나? 이 모든 게 다?”
진지한 빛을 띤 눈을 보고 있자니 또 모른다고 하면 어떻게 휙 돌변할지 몰라 리비는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말을 찾아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가 적당한 단어를 떠올렸다.
“조금은…….”
겨우 그 말 한마디에 보리스의 얼굴은 활짝 피었다. 그야말로 해바라기처럼 아주 활짝. 그리고 이내 순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래, 이 눈이야.
이럴 때 뭐든 알아내야 한다. 리비는 가시처럼 걸려 있던 질문을 꺼냈다.
“있지, 보리스.”
“응?”
더없이 유순한 얼굴로 그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난 정말로 두려워. 내 가족은…….”
어떻게 됐어, 묻기도 전에 그가 답했다.
“아버님이 걱정되는 거야?”
“당연하지. 그리고 동생들도.”
마을 사람들이 공작 부인이 되니 뭐니 아무리 사탕발림을 했어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혼사가 결코 자신에게 좋은 것이 아님을. 그저 허울 좋은 자리에 얹혀 가는 것뿐임을.
“걱정할 일은 없어.”
“걱정할 일은 없다니?”
“기사들이 하이든 백작저를 지키고 있어.”
“하, 하지만 곧 왕실에서도 알게 될 거고. 아니, 어쩌면 알았을지도 모르고…….”
“그건 불가능해.”
“어째서?”
“왕궁에 찌를 만한 사람들은 이미 모두 가둬 놨거든.”
그의 말이 리비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둬…… 놓다니?”
대체 누구를?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가 마침내 깨달았다. 홀로 치르는 결혼식을 마치고 나오면 자신을 데려갈 예정이던 레제트 가문의 기사들. 그러고 보니 그들은 어떻게 됐지?
“모두 지하 감옥에 있어.”
리비의 머릿속을 빤히 들여다본 듯 그가 대답했다. ‘모두’가 굳이 누구인지를 지칭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하 감옥?”
리비는 멍하니 되풀이했다.
“그러니까, 레제트 공작의 직속 기사들을 모두 가뒀다고? 이 성에?”
“걱정 마. 전부 외성에 딸린 감옥에 붙들어 뒀으니까. 무서워할 거 없어. 철저히 감시 중이니까.”
“아니, 아니야. 무섭다는 게 아니라…… 지금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어. 공작이 이 사실을 알면…… 국왕에게도 마찬가지야.”
“나도 알아.”
모른다. 모르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평온한 얼굴로 말할 리 없다.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거.”
온몸의 피가 빨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전쟁? 지난 7년간 지긋지긋하게 이어져 온 바로 그 전쟁?
그것이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데, 다른 것도 아닌 신부와 자기 기사들을 빼앗긴 공작이 어떻게 나올지는 뻔하다.
다른 모든 상황은 제쳐 두고라도 왕실 다음가는 가문의 수장에게 이런 망신을 주고서도 무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명분도 충분해.”
그런 것쯤은 동네 개싸움보다 못하게 여기는 듯한 태도에 리비는 속으로 한탄했다. 돌았어, 미쳤어. 제대로 돌아 버렸어.
“내가 원하는 여자가 누구든, 왕은 내게 그 여자와 혼인할 수 있다고 약속했어.”
대체 왜 왕은 그딴 약속을 한 걸까. 자기가 허락한 일이 이처럼 일을 꼬아 놓을 줄 알았더라면 아마 왕도 그런 입방정은 떨지 않았을 텐데. 하여간에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왕이었다.
왕은 그래도 왕이니까, 공작의 분노를 피해 갈 수 있을지 몰라도 리비는 아니다. 티소 마을 전체가 위험하다.
아무리 칼리니 기사단이 막강한 전투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다.
게다가 결혼을 전제로 성사된 이 평화는 언제든 깨져 버릴 약하디약한 유리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너는 내 신부야, 리비.”
나직한 속삭임에 리비는 몸을 굳혔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더없이 다정하게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남자는 어딘가 어긋나도 단단히 어긋나서, 자신의 말 따위는 그저 듣기 좋은 꽃 노래로 미화시켜 들을 뿐이라는 걸. 그러니 기대 같은 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너는 내 신부라고 울어 대는 미친 까마귀를 보고 있자니 한층 더 심란해질 뿐이었다.
전장에서 미친 까마귀로 불리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저 머리카락이 까매서, 입고 있는 갑주가 검은색이라, 등 쪽에 날개 형태의 보호구를 달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한 번 찍으면 끝장을 보는 그 성격.
“있지, 리비. ‘미친 까마귀’는 절대로 적을 놓치는 법이 없대.”
전쟁 중에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들 중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은 건 다름 아닌 ‘미친 까마귀’였다.
어릴 때의 경험으로 까마귀가 얼마나 똑똑하고 집요한 동물인지 알고 있었던 리비로서는 그 별명이 백전무패의 칼리니 기사단장에게 꽤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옆집 친구가 까마귀에게 무심코 돌을 던졌다가 그 후로 길을 지날 때마다 까마귀가 던진 조약들에 맞는 일이 있었다.
그때 리비는 그 일이 정말 신기하다며 보리스에게 말해준 적도 있었다.
“있지, 보리스. 까마귀는 한 번 원한을 가진 상대는 기억해뒀다가 꼭 복수한대. 정말 영리하지?”
“응? 으응…….”
“그런데 길을 지날 때마다 돌에 얻어맞는 건 너무 하잖아.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까마귀에게 선물을 하는 건 어때?”
“선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보리스의 조언대로 친구는 큼지막한 고깃덩어리를 뇌물로 주고 나서야 그 집요한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다 돌아오고 나자 그런 것까지도 모두 생각나 버렸다.
까마귀 같은 보리스.
어차피 그와 말싸움을 해봐야 저 논리에는 당해 낼 수 없고, 그의 불안만 더욱 가중시키는 꼴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가짜로나마 안정을 줄 필요가 있었다.
“……알았어.”
보랏빛 눈이 놀라움으로 가득 차 커지는 걸 보면서, 리비는 죄책감인지 뭔지 모를 감정에 휩싸였다.
“정말이지, 리비?”
“알았다니까.”
재차 답해 주며 그녀는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자신조차 그 정체를 모르는 감정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아니, 보리스. 우리는 안 돼.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겨우 집어삼키면서.
“……나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리비는 조심스레 속삭였다.
“안 가도 돼.”
보리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거짓말하지 마.”
리비의 추궁에 보리스는 몸을 조금 움츠렸다.
“너는 이 성의 주인이고, 한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이라며. 농땡이 피우지 마.”
그는 날 때부터 귀족이 아니다. 이제 겨우 왕에게 인정받아 작위를 받은 기사일 뿐이다. 수틀리면 언제든 왕이 작위를 회수하겠다고 길길이 날뛸지도 모른다.
“언제든 긴장을 바짝 해야지. 그러다가 왕한테 미움 사면 어떻게 해? 넌 이미 충분히 미움 살 짓을 했는데! 여기서 더 나태해지면 넌 공작도 뭣도 아니게 될 수 있어.”
“날 걱정해 주는 거야?”
“……뭐?”
그의 말에 리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내가 그랬나?’
보리스가 오해할 만한 말을 한 건가.
“하지만 네가 보이지 않으면 난 불안해.”
“이렇게 높은 탑에 꽁꽁 가두어 두고서 뭐가 불안한데? 내가 물에 뛰어들기라도 할까 봐?”
“…….”
보리스는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보랏빛 눈에는 뭔지 모를 불안이 가득했다. 마치 개가 자기를 두고 주인이 집을 나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가득 담은 듯한 빛이었다.
그 눈을 보다가 리비는 충동적으로 말해 버리고 말았다.
“이따가 오면 되잖아.”
그래서 이렇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정말?”
그의 눈에 일순 광채가 돌았다.
“허락해 주는 거야?”
“……뭘?”
왠지 그가 생각하는 ‘허락’이 리비가 짐작한 ‘허락’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을 것 같단 생각에 물어보았다.
“너를.”
그는 그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을 혀로 살짝 핥았다. 새빨간 혀가 닿는 감촉에 순간 리비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아니.”
“리비…….”
“너, 이러면 방에도 못 오게 할 거야.”
“아니야, 그러지 마.”
보리스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따가, 꼭 이따가, 올게. 리비.”
“그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거기 문 아니야.”
보리스는 문이 아니라 창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아아, 미안. 버릇이 되어서.”
“……뭐가 버릇이 돼?”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싱긋 웃었고, 리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내가 뭘 잘못 들은 거지, 라고 생각하면서.
***
보리스가 없는 리비의 시간은 매우 느리게 흘러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할 일이란 게 별로 없었다. 애초에 바느질은 취미도 없었고,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라리 그와 입씨름이나 하는 게 시간은 빨리 가는 것 같았다.
‘보리스를 기다리는 건가?’
문득 깨달은 사실에 리비는 흠칫 몸을 떨었다.
‘에이, 그럴 리가.’
리비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리스를 기다릴 리 없다고 몇 번이나 되뇌면서.
“잠이나 자자.”
리비는 결국 모든 근심과 상념을 끊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을 택했다. 베개를 팡팡 두드린 뒤 벌렁 드러누웠고, 그렇게 바로 잠이 들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창밖으로 달이 보였다. 그리고 방 안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왔어, 보리스?”
리비는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순간 리비는 문득 기이한 것을 본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키가 사람만 한, 아주 커다란 새 같은 형상을. 그 형상이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
커다란 날개가 좌우로 뻗어 있는 게 보였다. 순간 확 밀려드는 두려움에 리비는 이것이 꿈속이라고 생각했다.
깜빡깜빡.
그녀는 즉시 눈을 다시 감았다 떴다. 그러면 괜찮아질 거야, 를 반복하면서.
그러자 환영은 사라졌다. 시커먼 그림자처럼 보이던 날개는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다.
“리비, 깼어?”
다정스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리비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리스.”
리비는 저도 모르게 일어나서 팔을 활짝 벌렸다. 보리스는 날듯이 다가와서 그녀를 단번에 끌어안았다.
“무서운 꿈을 꾼 거야?”
“몰라, 모르겠어.”
갑자기 아까 보았던 광경이 스쳐 지나가면서 울음이 와락 터졌다.
“괜찮아, 리비. 괜찮아.”
자신을 안고 있는 더운 체온만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한참을 훌쩍거리다 진정이 되었을 무렵, 그녀는 보리스의 가슴팍에 처박다시피 했던 얼굴을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다 울었어?”
그는 다시 다정한 어조로 물었고, 리비는 밀려드는 기이한 안도감에 더럭 겁이 나 그를 밀쳤다.
“울기는, 내가 언제.”
리비가 집요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구었을 때였다.
“……이게 뭐지?”
리비는 하얀 침대 시트에 새카맣고 길쭉한 무언가가 떨어진 걸 발견했다.
“깃털?”
푸른 기가 도는 새카만 깃털은 결혼 전날 밤 보았던 그것처럼 커다란 것이었다.
“이게 왜…….”
“새가 들어왔었나 봐.”
보리스는 리비의 손을 부드럽게 감아쥐었다.
“말도 안 돼, 무슨 새가 이렇게 커?”
“리비는 못 본 새일 거야.”
보리스는 리비의 손에서 깃털을 빼내며 말했다.
“그 새의 큰 날개깃이야.”
보리스는 수상한 얼굴로 웃더니 깃털을 창밖으로 날려 보냈다.
“나, 새…… 커다란 새를 봤는데, 마치 사람이…….”
“쉿. 다 꿈일 뿐이야.”
보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끼익.
육중한 체중이 실리며 침대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니 괜찮아.”
낮고 음울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마치 최면을 걸듯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다 잊어버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그의 잔상이 뿌옇게 흐려졌다. 보리스의 얼굴이 둘로, 셋으로 나뉘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나 믿지, 리비?”
“응…….”
리비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어깨 위로 툭 고개를 떨구었다.
“머리 아파, 어지러워.”
“졸려서 그래.”
보리스는 리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며 뉘었다. 리비는 별 저항도 없이 그의 품에 안겨 그대로 몸을 눕혔다.
마치 물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내가 있으니 괜찮을 거야.”
이마에 닿았다 떨어진 건 그의 입술 같았다.
“그동안은 없었잖아.”
리비는 칭얼거리듯 말하며 그의 품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보리스, 나는…… 네가 전쟁에서…… 죽은 줄 알았어.”
“…….”
“너는…… 내게 말 한마디만 남긴 채 떠나 버렸잖아.”
“미안.”
“나는 네가 날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했어.”
“내가 어떻게 그러겠어.”
“전쟁에선 힘들었어?”
“별로.”
“웬 허세야.”
그는 별로 그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리비는 정신이 어지러운 와중에도 그런 기운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전쟁은 다 그래, 리비.”
세셔 왕국에는 수없이 많은 전쟁이 있었다. 그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은 공훈을 세웠고, 누군가는 죽어서 잊혀졌다. 보리스는 전자였다. 그 점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전쟁에선 검을 들고 쉼 없이 싸운다며.”
“응.”
“그럼 상처도 많겠네?”
“아니.”
답은 지나치게 빨리 떨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리비는 몽롱하던 정신이 확 깨어나는 걸 느꼈다.
“보자.”
“뭘?”
이번에는 보리스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보자고, 네 상처.”
리비는 갑작스레 전투적인 표정을 띠며 말했다.
“리비, 난…….”
“너는 내 몸을 마구 만지고 더듬고 그러는데,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성마른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숨기려는 품새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리비가 보리스의 상의를 잡아당겼다. 대충 그의 옷에 묶인 매듭을 풀어 버린 뒤 옷을 벗겨 냈다.
잔뜩 웅크린, 커다란 몸집의 남자는 움찔 몸을 떨었지만 그녀는 가차 없었다.
우람한 어깨와 팔, 넓은 가슴팍이 보였다. 그리고.
“너 이거 뭐야?”
리비는 손을 뻗어 그의 드러난 살갗을 더듬었다. 정확히는 가슴팍과 팔, 배 언저리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상처들을.
“여기도, 여기도.”
꾹꾹 눌러 짚는 자국마다 자잘한 상흔이 자리 잡고 있었다. 찢기거나 찔리거나, 무언가에 으스러졌던 자국도 보였고 엷은 화상 흉터까지 있었다.
상처의 상태로 보건대 아주 오래전 생긴 것에서 최근에 생겨서 회복 중인 것까지 다양했다. 하얗게 비치는 달빛에 드러난 상처가 아프게 눈에 박혀 왔다.
어젯밤에는 그와 좀처럼 접점이 생기지 않는 대화를 하느라, 그리고 새까맣게 내려앉은 어둠 때문에 정확히 분별할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낮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환한 낮에 한창 뒤엉켜 이런저런 짓을 할 때에도 정신이 나가 있는 바람에 제대로 보지 못했다. 게다가 그가 앞모습만 보여 주기도 했다.
그 광경에 그녀는 잠시 숨을 삼켰다. 다시 내뱉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손길과 눈을 피해 그는 잔뜩 몸을 움츠렸다.
커다란 덩치를 아무리 솜씨 좋게 구겨 봐야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그는 필사적이었다. 목 언저리까지 달아오른 얼굴은 정말로 창피한 듯 보였다.
“미안해, 나, 안 예쁘지.”
“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리비는 기가 막혀 헛웃음이 터졌다.
“예쁘다고 해줬는데, 이젠 아닌 거지.”
그는 리비의 손을 붙든 채로 애절하게 올려다보았다. 흩어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눈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돌아봐.”
리비는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어…….”
그녀는 어쩐지 머뭇거리는 보리스의 몸을 휙 뒤집었다. 마치 힘이라곤 조금도 줄 수 없는 사람처럼, 그는 그녀가 미는 대로 그렇게 휙 떠밀려 주었다. 몸이 돌아가자 맨 등이 그녀의 시선 아래 고스란히 노출됐다.
등 쪽은 더 심각했다. 오른쪽 어깨에서 허리 부근까지 길게 이어진 자상은 여태껏 그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양 날개뼈 부근에 세로로 길게 그어진 자국은 오랫동안 나았다가 덧나기를 반복한 듯 피부가 붉게 부풀어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대체?”
리비는 손을 펼쳐 그의 등을 더듬어 내려갔다. 단단히 자리 잡은 근육과 피부에 난 상처들은 그가 어떤 시간을 보내 왔는지 눈에 선연히 그려지게 했다.
“미안해…… 리비, 저…….”
충격으로 굳어진 얼굴을 보며 보리스는 어쩔 줄 몰랐다.
“내가, 내가 잘못했어.”
그는 다급하게 사과했다.
“네가 뭘?”
리비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몸을 해가지고는 그녀에게 사과라니. 뭔가 어긋나도 한참 많이 어긋나 있었다.
“이런 상처를 낸 거.”
보리스는 부끄러운 듯 몸을 웅크렸다. 리비는 다시 한번 그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이런 상흔이 생기도록 대체 그는 무엇을 한 걸까.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러 냈던 걸까.
“왜, 이렇게까지 한 거야?”
“그래야만 공작이 될 수 있으니까…….”
리비는 속으로 쓴소리를 삼켰다. 비록 변두리 땅의 귀족일지언정 그녀는 백작의 딸이니 욕 같은 건 입으로 뱉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 별의별 욕이 다 떠올라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미친 왕은 작위만 주면 다야? 사람은 걸레짝이 되어도 아무렇지도 않대?”
머리에서 김이 뿜어져 나올 것처럼 그녀는 식식거렸다.
“공작이 되기 전에 네 목이 안 잘린 게 더 다행이네, 안 그래? 이러고 살았단 말이야?”
기가 차서 중간에 몇 번이나 말이 끊겼다.
“너는 대체, 그 말이, 뭐라고. 왜 혼자 진지해서는.”
리비는 옆에 있던 베개를 들어 냅다 그를 후려쳤다. 깃털이 가득 든 베개라 솜뭉치보다 가벼웠기에 아무런 타격감은 없었다.
다만 베갯잇 사이로 비죽 나온 검은 깃털이 공중에서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것을 보며 소스라쳤을 뿐이다.
침구에 쓰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검은 깃털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궁금해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보고 났더니 이젠 익숙해진 모양이다.
“꼴도 보기 싫어, 나가.”
퍽.
다시 한번 베개에 정통으로 맞은 보리스는 멍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리비…….”
쩍 벌어진 어깨가 시무룩하게 처진 모습은 더욱더 보기 싫었다. 공작이라며, 공작님이시라면서.
그래서 사람을 뻔뻔하게 납치해 놨으면서 왜 자기의 몇 마디 말에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느냔 말이다.
“나가라고! 안 나가면 여기서 당장 뛰어내릴 거야! 묶으면 혀를 깨물 거고! 당장 안 나가면…….”
베개를 높이 쳐든 팔이 그대로 억센 손에 붙들렸다. 그녀의 몸은 그대로 뒤로 휙 넘어갔다. 풀썩, 침대가 꺼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위에서 내리누르는 힘에 온전히 갇혀 있었다.
“울지 마.”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흘린 눈물을 말캉하고 부드러운 것이 핥고 지나갔다.
“응? 울지 마. 상처 내서 미안해. 안 그럴게. 이젠 그럴 일 없어, 응? 이렇게 한 놈들, 다 죽였단 말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소리는 꽥 지르는데 눈물은 더 솟구쳐 올랐다.
“상처가 징그럽지? 안 보이게 할게. 꽁꽁 싸매고 다닐게. 흉터에 좋다는 약도 바를게…… 울지 마, 화내지 마, 응?”
꼭 끌어안고 속삭이는 소리는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질 만큼 부드러웠다.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 나, 언제나 그랬잖아.”
그 간절한 목소리를 들으며 리비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감싸고 있는 남자의 넓은 등 뒤에 가만히 얹었다.
움찔, 단단한 근육이 그녀의 손짓에 수축하는 것을 보며 리비는 저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놔줘. 나를 보내 줘. 내가 무사히 결혼식을 치를 수 있게 보내 줘.”
“그건 안 돼.”
그는 다급하게 속삭이며 그녀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보낼 수 없어, 리비. 너는 여기 있어야 돼. 내 곁에. 이 성에.”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며? 거짓말쟁이.”
톡 쏘아붙이자 보리스가 지그시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그건…… 우리 약속이 먼저니까. 리비도 약속을 지켜 줘.”
지킬 수 없는 약속과 들어줄 수 없는 부탁 사이에서 두 사람은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확히는 한껏 뾰족해진 리비의 눈길을 피해 보리스가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는 식이었다.
“너 정말…….”
잠시 동안 색색 내쉬는 숨만 둘 사이를 오갔다. 리비의 잔뜩 성난 숨결이 그의 달래는 애달픈 숨과 합쳐졌다.
커다란 몸에 완벽히 파묻힌 몸은 힘겹다기보다는 이상한 편안함을 안겨 주었다. 그 사실이 더럭 겁이 난 나머지 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
“무거워.”
보리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얼른 몸을 떼어 냈다. 몸을 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진 자리에 묘한 상실감이 덮쳤다.
그의 몸에 새겨진 자국들이 더욱 아프게 눈에 박혀서 리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 시선을 의식한 듯 보리스는 서둘러 바닥에 던져 두었던 옷을 꿰어 입기 시작했다. 잔뜩 풀 죽은 모습이었으나 어떤 위로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안해, 리비.”
“뭐가.”
“이런 모습으로 돌아와서.”
“나한테 미안할 거 없어. 네 몸인걸.”
여상하게 답했지만, 사실 리비는 지금 다른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자신과 결혼하겠다고, 그 약속 하나만 믿고서 보리스는 전장에서 굴렀다.
맹목적인 믿음, 순종.
그런 것들이 리비는 진정으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그 어떤 상상을 초월할 행동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무서웠다.
계속, 계속 뭔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그의 모습이 예전의 보리스와 겹치는 탓에 외면했다.
그가 자신에게 너무나 다정다감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물러났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라’라고 생각했다. ‘그’ 여린 보리스가 자신을 해칠 리 없다고, 이것 보라고, 해치지 않는다고.
하지만 역시 이 남자는 ‘그’ 보리스가 아니었다.
그는, 보리스는. 리비의 기억 속 보리스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그가 애절하게 빌고 사과하던 모습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 온데간데없어져 버렸다. 그의 눈빛은 이제 숲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짐승의 것 같았다.
‘설마.’
이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그 빠른 변화에 리비의 몸의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그와 갑작스럽게 불이 붙었던 아침의 일이 떠올랐다. 이렇게 계속 붙어 있다가는 또다시 그 이상한 일을 하게 될지 모른다.
후다닥, 리비는 순식간에 창으로 달려가 섰다. 이미 한번 해본 적 있는 행동이었기에 뭐 하나 막히는 것 없이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창틀 위로 올라서는 것은 더욱 쉬웠다. 까마득한 공포를 마주한 탓에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두려움조차 사그라들게 만드는 원초적 공포였다.
“그만두는 게 좋아, 리비.”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하지만 리비의 손은 이미 잠금쇠를 풀어 버린 후였다.
“꺄악!”
어떻게 저지할 새도 없이, 벌어진 틈 사이로 매서운 바람이 들이닥쳤다.
휘이잉, 휘잉.
작은 틈새로 들이닥친 바람은 살갗을 찢을 듯 매서웠다. 바람에 휩쓸린 몸이 금방이라도 저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뿐이었다.
자신을 짓누르는 저 절대적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을 외면하기 위해.
“……?”
휘잉- 턱.
어느새 자신을 정신없이 휘두르던 바람이 멎은 것을 느낀 리비는 고개를 들었다. 바람을 한바탕 맞고 나니 정신이 조금 들었다. 그리고 곧 바람이 스스로 멎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춥다니까, 리비.”
창틀이 무언가로 콱 틀어 막혀 있었다. 주변이 어두웠다. 그리고 정체 모를 온기도 함께였다.
“리비?”
창문을 등지고 서서 그녀를 감싸 안은 채로, 보리스는 중얼거렸다.
한 손은 그녀의 어깨에 두르고, 다른 한 손은 그의 망토 자락을 들어 그녀를 완벽히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창문을 닫은 뒤 잠금쇠를 걸었다.
“가끔은 내 말도 좀 들어.”
대체, 어느새.
바람이 완벽하게 차단되자 리비는 다시금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는 남자의 존재가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밀착된 두 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리비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박은 채로 꼼짝없이 안겨 있었다. 분명히 바람은 차단되었으나 보리스의 손은 그녀를 놓아줄 줄 몰랐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아무리 세어도 그는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살짝 몸을 틀어 보았으나 오히려 그녀를 감싼 팔에 힘만 더해졌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일 듯싶었다.
쿵쿵.
귀를 파고드는 건 그의 심장 소리일까, 아니면 자신의 것일까. 제각기 다른 속도로 뛰던 두 심장은 이내 마치 하나처럼 같은 박동으로 뛰기 시작했다.
‘무서워.’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리비. 날 봐.”
리비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홀린 듯,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귓가에는 여전히 두근거리는 심박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기분 좋게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
그녀는 곧 거짓말처럼 스르르 눈이 감겼다. 바짝 얼었던 몸도 풀리기 시작했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 것만 같은데. 이 온기를, 심장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이런 품에 안겨서, 잠을.
‘언제?’
불쑥 솟아오른 의문에 리비는 눈을 깜박거렸다. 머릿속에는 없으나 몸은 선명하게 그 온도를, 단단하고도 부드럽게 감싸 오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다.
“네 옆에서 자면 안 돼?”
보리스의 간절한 애원에 리비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안심시켜야 해.’
자신이 도망칠까 경계하는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게 급선무다. 결국 리비는 간절히 제 옆자리를 원하는 그에게 지고 말았다.
“알았어, 이리 와.”
순간 그의 얼굴은 강림한 천사를 본 듯 변했다. 캄캄한 방 어디에서 그런 빛이 새어 들어왔는지 일순간에 환한 빛이 감돌았다.
침대 한쪽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더니 까마귀처럼 검은 머리채가 그녀의 어깨 언저리를 파고들었다.
까맣다 못해 푸른 기가 도는 머리채는 그가 파고들 때마다 찰랑거리며 흩어졌다. 놀랍도록 결이 좋은 머리칼이었다.
“간지러워.”
리비는 드러난 살 위로 흩어진 머리채를 가만가만 쓸어 넘겨 주었다. 귓가에 손가락이 스치자 그는 움찔 몸을 떨다 그녀를 보았다. 자색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교교한 빛을 뿜어냈다.
“더.”
손을 떼어 내자 보리스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 눌렀다. 그녀의 손을 덮을 만큼 커다란 손이었다.
“더 만져 줘.”
말랑한 손바닥에 얼굴을 부비며 그가 속삭였다. 그러면서 빠져나가려는 손을 더 강하게 내리눌렀다. 감촉이 기분 좋은 듯 눈을 감고 몇 번이나 얼굴을 부벼 댔다.
그러느라 단정히 넘겨 준 머리카락이 다시 흩어져 내렸다. 리비는 자신의 손 아래 단단하고 결 좋은 피부와 까슬까슬한 속눈썹이 스치는 것을 느끼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강아지도 아니고.”
“리비가 원하면, 강아지도 될게.”
“이렇게 큰 개는 필요 없어. 난 작은 개가 좋아. 하얗고, 보드라운.”
크기를 가늠하듯 리비는 손으로 작은 공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그것을 본 보리스의 눈이 또다시 시무룩해졌다.
“……내가 너무 커서 이제는 싫어?”
그는 확실히 이전과는 달랐다. 옆에 눕자 훅 꺼지는 침대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전에는 그녀의 옆을 파고들 정도로 비등했던 몸집이 이제는 그녀를 온전히 다 감싸 안고도 남을 만큼이 되었다.
이제는 그녀가 알던 소년이 아닌, 단단하고 거대해진 남자의 몸임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몸으로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면 그때는 정말 막을 수 없으리라는 것도.
달라진 건 몸뿐만은 아니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체취 역시 어릴 적의 보리스와는 달랐다. 뭐라 형언할 수는 없는, 강렬한 남자의 향기. 산과 들, 거친 모래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싫다기보단, 그냥 다른 거야.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너는 더 이상 내 침실에 숨어들던 보리스가 아니야.”
“나는 보리스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그건 네 생각이지.”
“이렇게 커다란 나는 정말 싫은 거야?”
그는 재차 묻더니 진지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커져서 좋은 것도 있을 거야.”
“커져서 좋은 거?”
“응.”
리비는 눈을 깜박이며 그의 말을 되새겼다.
“네 맘에도 들 거야.”
“……뭔지 모르지만 아마 안 그럴 거야.”
“네가 원한다면…….”
“그만.”
리비는 더없이 진지한 보랏빛 눈과 마주치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귀 끝까지 빨개진 얼굴을 들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그만 자.”
리비는 손을 뻗어 그의 눈꺼풀을 쓸어내려 눈을 감겼다. 당연히, 그는 쉽게 잠들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 리비.”
잠시 후 흘러나온 목소리에 리비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을 가리고 있다는 게 천만다행으로 여겨졌다.
“많이, 아주 많이 보고 싶었어.”
그는 주저하다가 덧붙였다.
“그래서 죽도록 싸웠어. 너한테 돌아갈 날만 기다리면서.”
그의 보랏빛 눈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리비는 그 눈과 마주하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의 눈에 담긴 것은 진심이었다.
조금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일념. 그것이 향한 곳은 바로 자신이었다.
“싸우고…… 또 싸우고…… 너를 만나러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텼어. 눈을 떠도 전쟁, 감아도 전쟁. 사방에서 피가 튀고 살이 튀었지. 전투가 끝나고 나면 피에 젖은 투구를 씻는 게 일이었어.”
그 말에 무섭기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솟아올랐다. 분명히 무서워야 하는데, 투구에 튄 피는 그가 칼로 베어 낸 적들의 것이 아닌가. 어찌 됐든 더 불쌍한 것은 그가 휘두르는 칼에 목숨을 잃은 자들이지 앗아 간 자들이 아니었다.
“나, 나는 그게 너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
통칭 까마귀 기사단으로 불리는 칼리니 기사단.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기사단장.
이름 하나 제대로 알려진 바 없이 사람들은 그를 ‘칼리니’라고 불렀다.
그들의 등 뒤에는 거대한 날개 장식이 솟아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까마귀 떼처럼 보이는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그 날개는 그저 장식인 것이 아니라 특수하게 만들어진 쇠붙이라, 뒤에서 덤벼드는 적을 섬멸하기에도 적합하다고 했다. 그런 기사단을 이끄는 기사단장에 대한 소문은 한층 더 무시무시했다.
“지나가는 자리에 풀 한 포기도 남지 않는대. 죽은 시체들을 산처럼 쌓아 두고 먹는댔어.”
전해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무용담들이 줄을 이었다. 티소 마을 같은 산간 오지에서조차 그의 명성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칼리니 기사단장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신화, 전설, 혹은 기담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마치 전설처럼 전해지던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일 줄은. 지지부진 이어지던 전쟁의 끝을 낸 사람이 그일 줄은 차마, 그래, 차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깨어 보니 너는 없었어.”
어느 날 밤에 보리스는 그녀를 또 찾아왔다. 그 밤의 소년은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다음 날, 마을에는 그가 사라졌다는 말이 무성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사람들은 그를 잊었다. 울음 많던 보리스는 그렇게 잊혀졌다.
“나는 공작이 되고 싶었어. 네가 그랬잖아, 내가 공작이 되면…….”
“또 그 소리.”
리비는 나머지 손으로 그의 입마저 막았다. 그는 손을 들어 입을 막은 손바닥 위로 입술을 꾹 눌렀다. 축축하고 뜨거운 기운에 확 빼려던 손은 더욱 강하게 잡혀 버렸다.
“어릴 때 한 약속이야. 그만 잊어.”
“……리비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잖아.”
“어릴 때나 그랬지, 지금은 안 그래.”
“그럼 레제트 공작과의 결혼도 취소할 수 있겠네.”
이야기가 왜 그렇게 튀느냐고 물으려다가 자꾸 굴을 파는 느낌이 들어 도로 입을 다물었다.
“내가 결혼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왕에게 작위를 받으러 갔다가 들었어.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잖아, 너는 내 신부잖아, 리비. 네가 그랬어, 분명히.”
“…….”
또다시 말이 막혔다. 리비는 마침내 길고 긴 포기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가렸던 손을 떼어 내자 그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싸우던 때의 얘기나 해줘. 너, 굉장했다며.”
“재미없을 거야. 싸우는 건…… 그래.”
“그래도 해줘. 아까 우리랑 같이 왔던 남자들, 전부 네 기사들이야?”
“우리……?”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이상한 데에 집중하지 말고.”
입꼬리는 다시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기사단에 어떻게 들어가게 된 거야?”
“처음엔 입단 시험을 치고 들어갔어.”
몸집도 큰 편이 아니고 생긴 건 딱 여자애 같았으니 어지간히 무시당했을 게 뻔하다. 마을에서도 종종 남자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던 그였다.
“내 또래의 수습 기사들도 많았거든.”
목소리는 조곤조곤 이어졌다. 칼리니 기사단의 전신인 용병단은 오갈 데 없는 전쟁고아나 빈민, 다른 천민들까지 모조리 끌어모은 집단이었다. 리비는 어렴풋한 기억 속 칼리니 기사단에 관한 이야기들을 기억해 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은 규모도 아니었고 기사단의 이름도 달랐다. 칼리니 기사단의 상징인 검은 날개도 없었다. 세련된 무기도 없고 낡은 방어구로 몸을 감싼 채 싸워 왔다고 들었다.
“어떻게 기사단장까지 된 거야?”
“이겼거든.”
대답은 간단했다. 하긴. 싸워서 이겼으니 그 무시무시한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았겠지. 그리고 단장까지 된 거겠지.
걸핏하면 눈물짓던 소년이, 울음 많던 보리스가.
“오로지…… 너만 생각했어. 그러면서…….”
목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를 반복했다. 눈도 감겼다가 다시 뜨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응…….”
눈을 감았다 뜨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응, 응…….”
나직하게 이어 가는 말소리에 리비는 몇 번인가 대답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따뜻하고 묵직한 것이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드넓고 든든한 품에 머리를 댔다.
쿵, 쿵.
규칙적으로 들리는 심장 소리가 기분 좋은 울림을 만들어 냈다.
“보리스…….”
응, 나 여기 있어.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졸려?”
그의 말은 마치 마법을 부리는 주문과도 같았다. 졸리냐고 묻는 그 순간 바로 걷잡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으니까.
좀 전의 졸림과는 차원이 다른, 마치 압도적으로 퍼붓는 무력과도 같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잠이었다.
내리감은 눈꺼풀 위에 그의 숨이 닿았다. 몽롱한 눈을 뜨자 그의 보랏빛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만 자자.”
누가 귀에 꿀이라도 흘려 넣은 듯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 어느 자장가가 이렇게 잠을 쏟아지게 할 수 있을까. 이러면 안 되는데, 저항할 틈도 없이 리비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응.”
그리고 깊은 잠의 나락으로 떨어졌다.